"흥!" "허어~! 참! 이보게 미안하네. 그저 더위 먹은 미친놈의 헛소리라 생각하고 자네가 참게……." 모석은 자신의 가슴 한겻에 묻어놓았던 일에 대한 복수를 하며 살기등등한 청년을 만류했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참을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너는 내 아내를 모욕했다. 그것은 앞으로 태어날 나의 아이들을 모욕한 것 이며 나의 부족전체를 모욕한 것이다." -탁! 사내가 다시 한 번 들고 있는 봉으로 바닥을 찍자 어디선가 끝이 뭉툭하고 짧은 박도(朴刀)를 든 사내들이 쏟아져 나와 잔폭광마와 모석을 포위했다. "이런 개노무……." "……?" 모석에 만류에도 불구하고 발작하려던 잔폭광마는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음 을 느끼고 기겁했다. 이것은 단순히 더위를 먹어 기력이 없는 것이 아니었 다. 모석도 일단의 인물들이 나온 것을 보고 뭔가 이상하다 느끼면서 그대 로 혼절했다. "흥! 이거야 병든 닭보다 못한 놈들이 아닌가?" "이렇게 노닥거릴 시간이 없다. 어서 이들을 데리고 마을로 돌아가자!" "예, 소야(小爺)!" 미약(媚藥)을 사용해 손쉽게 제압한 무리들은 잔폭광마와 모석을 커다란 바 구니에 담아 상인인냥 행세하며 자연스럽게 봉수성을 벗어났다. 라혼은 백호영들이 이곳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하자 모든 일을 보류할 수밖 에 없었다. 그래서 봉수태수의 도움을 받아 반란을 일으킨 주체가 누구인지 무엇 때문에 반란을 일으킨 것인지 왜 남상의 반란과 동시에 봉기했으면서 남상의 대수영과 연계가 없는지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봉수성의 관리들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라혼은 장상의 가문이 구축해놓은 인맥을 통해 단편적인 전후사정을 파악할 수 있었을 뿐이다. 반란의 주체 는 다름 아닌 진토인(塵土人)이라 불리는 자들로 고래(古來)로 남예에서 살 던 피부가 검은 사람들이란 것이다. 과거 수인(獸人)이 도래하기이전에도 그들은 야만인이라 하여 알게 모르게 멸시를 당했었다. 사실 대밀림(大密林 ) 안에서 바깥세상과 단절된 체 살아가는 그들은 야만 그 자체였다. 그리고 남예와 남상의 반란은 후선의 강무세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흔적 을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었지만 남예성의 진토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 는 현재로써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봉수성이 그렇게 안전하다고 볼 수 없 다는 것도 파악할 수 있었다. 주민의 8할이 진토인인 상태에서 언제 어떤 세력이 봉수성을 뒤엎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쁘게 움직여도 시원찮을 백호영이 모조리 환자인 상태였기 때문이 었다. 그래서 서해대수영의 흑선과 해전에서 뜨거운 맛을 본 라혼은 해노 인치, 장상과 더불어 함대의 전력강화를 논의 했다. "장군, 수군을 꾸민다는 생각은 좋으나 그러자면 막대한 자금이 소요하며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 성사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해노의 말이 옳습니다. 그리고 자금이 있다고 해도 사람을 모으고 전통을 세우려면 아무래도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됩니다. 지금 당장은 아무런 효과 가가 없습니다." 라혼은 이번에 위력이 증명된 천보노가 장착된 대선(大船)을 중심으로 돌격 선과 쾌속선을 더불어 운영한다는 의견을 물으나 해노와 장상 모두 부정적 인 대답을 할 뿐이었다. "그러나 새로 장착한 천보노의 위력은 주목할 만했습니다. 그러니 전문적인 사수를 키우는 것만으로 전력이 강화 될 겁니다. 천보노 만으로도 최소한 봉수성 주변해역정도는 충분히 장악할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지금당장 효과가 있는 그런 것이 아니요.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세력을 꾸미려는 것이오." 수군을 만드는 일은 오랜 시간동안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일이었다. 그런 데 라혼이 고집을 꺾지 않고 일을 추진하자 손익계산이 빠른 장상이 말했다 . "사실 저는 지금 이정도의 함대를 꾸리는데 겨우 사나흘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말에 놀랐으나 내용을 보면 사실 급조한 흔적이 여기저기 보입니 다. 그러나 그 시간에 이정도 함대를 만든 것은 기적입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수군을 키우려면 최소한 5년에서 10년의 시간동안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우리에겐 배가 11척이나 있고 봉수성의 수군과 각 섬에 흩어져있는 수군의 지휘권을 확보하고 복수성이나 주변에서 경험 많은 선원을 모집해 훈련을 시키면 시간과 자금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오." "……." 서해대수영에 비해 떨어지기는 하지만 남예성 연안요새엔 수군들이 있었다. 그리고 주군은 그들을 지휘할 권리가 있는 하남천원군이었다. 즉 그들을 통합해 훈련을 시키면 되는 일이었다. 처음부터 수군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 라 기존에 있는 것을 재편성하는 것은 그리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지 않을 것은 분명했다. 해노 인치와 장상은 여기까지 생각하고는 새삼스런 눈으로 라혼을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너무 급하게 할 필요는 없소.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수군을 키우 는 방향으로 일을 추진하시오. 모처럼 수군을 키울 수 있는 인재가 둘이나 있는데 가만히 놀려둘 내가 아니오." 라혼의 말에 해노 인치와 장상은 감동했다. 남아(男兒)는 자신을 알아주는 자를 위해 목숨을 건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참장 라혼은 목숨 걸고, 따 르기에 차고 넘쳤다. 서해대수영(西海大水營) -탁탁탁탁……. "주군! 큰일 났습니다." 수군을 만드는 계획에 대한논의가 마무리될 무렵 군무관인 모원이 봉수태수 부(峰水太守府)에 마련한 라혼의 집무실로 뛰어 들어와 다급한 어조로 말했 다. "모정령님과 잔폭광마 육정위님이 반적들에게 납치되셨답니다." "납치?" 라혼은 모원의 말에 의식을 개방해 모석의 행방을 찾았다. 모석은 전환을 가지고 있었음으로 전환(傳環)에 기본적으로 걸려있는 [디텍트Detect:탐지] 마법을 이용해 간단하게 모석의 위치를 찾아낼 수 있었다. 모석은 봉수성 밖 밀림 한가운데 땅속에 잡혀있었다. 라혼은 일단 모석과 잔폭광마가 무사 한 것을 확인하고 전후 사정부터 알아보기로 했다. 물론 그전에 살인적인 더위에 전투력을 잃은 백호영들부터 움직일 수 있게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 "모원, 백호영을 연무장에 집합시켜라!" "존명!" "장상 봉수성의 관리들은 믿을 수 없다. 그러니……." "알겠습니다. 모정령님의 행적을 알아보겠습니다." "해노는 배를 부탁드립니다." "알았소이다. 장군!" 집무실을 나와 태수부의 연무장으로 먼저 간 라혼은 거대한 마법진을 그리 기 시작했다. 마법진이 완성되고 얼마 후 찜통 같은 더위 속에서 두터운 갑 주를 착용한 초췌하지만 눈빛은 살아있는 백호영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하 더니 순식간에 1216명의 백호영 전원이 말과 함께 연무장에 집결했다. 전부 모인것을 확인한 라혼은 준비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인보케이션 배리어Invocation barrier!" [인보케이션 배리어Invocation barrier : 주문결계] 마법진의 활성 시키는 주문. "레스터레이션Restoration" 체력회복. "프로텍션 프롬 버그즈Protection from bugs!" 잡 벌레로부터 보호. "프로텍션 프롬 포이즌Protection from poison!" 독물로부터 보호. "프로텍션 프롬 더 히트Protection from The Heat!" 더위로 부터 보호. "블레스Bless!" 축복. "포겟Forget!" [포겟Forget : 망각]주문을 마지막으로 단번에 7개의 마법주문을 쏟아놓은 라혼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결계를 사용해 집중도를 높였지만 1216 명의 마나와 반발성을 지닌 내공을 쌓은 고수들과 1217 마리의 말에게 한꺼 번에 마법주문을 시전한 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마나와 내가공 력은 서로 잘 맞지 않는 경향이 있다. 비유하자면 마나가 타오르는 불의 ' 열'이라면 내가공력은 끓는 물의 '열'에 비유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같은 '열'이라는 힘을 이용하기는 하지만 성질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반발하는 것이다. 즉, 아무리 뜨거운 끓는 물이지만 타오르는 불을 끌 수 있기에 서 로 잘 맞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궁극적으로 가면 어차피 같은 것이기는 했 다. 라혼이 백호영들에게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귀찮기도 하거니와 마 법을 남발하면 그들의 수련에 방해되기 때문이었다. 물론 마법 아이템을 사 용하는 것은 별문제 없지만 그것을 만들 재료가 없었다. 백호영들은 모석과 잔폭광마 누군가에게 납치되었다는 말에 살인적이 더위 에 지친 몸을 이끌고 봉수태수부의 연무장에 집결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 확!'하는 느낌과 함께 무덥고 눅눅하게 만 느껴지던 날씨가 견딜만해짐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이 마법주문이란 것을 알 수는 없었다. 다만 비상사태 를 맞아 마음가짐이 달라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주군! 모정령님이 납치되셨다는 것이 사실 입니까?" "사실이다." "그럼 이럴 것이 아니라 당장 찾아 나섭시다!" 백호영의 수장격인 백호십일걸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서며 라혼에게 그들을 찾아 나설 것을 간했다. 그러나 라혼은 그들에게 일갈 했다. "군문(軍門)에 있는 자가 어찌 사사로이 움직이려 하는가?" "……." "어찌된 일이 전후사정을 알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는다!" 백호영들은 주군의 뜻밖에 일갈에 움찔했다. 그리고 삽시간에 싸늘히 식어 버린 침묵 속에서 라혼은 나즈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피에는 피로, 죽음엔 죽음으로 되갚아 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나 의 뜻으로 이루어 져야 한다." "……." "명(命), 받드오이다." -명 받드오이다! 봉수태수 돈석(豚席)은 돈제가 출신이었다. 그러나 그는 돈제와 정적관계에 있었다. 돈화린이 돈제의 위(位)에 오르기 전 그와 제위(帝位) 놓고 겨루 는 반대파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푸짐한 몸매의 가는눈을 가진 메 기수염의 노인 돈석은 진토인 반적에게 조정에서 보내온 하남천원군의 장교 가 납치됐다는 소식에 연신 '홍홍'댔다. "홍홍, 내 그럴 줄 알았지 배에서 내리자마자 병자 꼴이라니. 홍홍……." 봉수태수 돈석은 계주에서 권력투쟁에서 밀려 원주조정에 뇌물을 써서 도망 치듯 이곳에 처음 발 들여 놨을 때 일은 모두 잊은 듯이 말했다. 아직도 익 숙지 않은 혹서에 때문에 근육질의 하인들이 웃통을 벗고 양쪽에서 커다란 부채를 붙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곱상한 시녀들이 부채질을 했지만 곧 체력 과 지구력이 좋은 남자하인으로 바뀌었다. "태수님, 이일은 봉수성 내에서 발생한 일입니다. 그 참장이 그것을 문제 삼아 따지고 들어온다면 책임을 면하기 힘듭니다." "홍홍, 그것도 그렇군. 그럼 자네가 가서 적당히 돕는 시늉이라도 하게! 그 리고 시원한 과일화채라도 마셔야 갰어." 태수에게 간하던 진학사(進學士) 오조(吾調)는 그의 심드렁한 반응 내심 혀 끝을 찼다. 태수란 자가 아무런 일을 하지 않고 시원한 곳만 찾아 틀어박혀 도통 일할생각을 하지 않으니 봉수성의 태수부가 제대로 굴러갈리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성내 제반사항을 위병(衛兵)들을 책임지는 위장(衛將)이 결정하고 있었다. 하나 그 위병들은 봉수성의 성민이나 봉수부 백성들을 위 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어디 까지나 봉수성을 잠시 들리는 뱃 사람들과 항구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위병들이 월권 하여 봉수성의 치안을 확립한 것은 좋지만 안하무인적 태도는 봉수부 성민 들에게 적지 않은 원성을 들었다. 그러나 원주조정에서 직접 임명한 위장은 이곳 원주민인 진토인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그럼 만큼 그 다루는 방식 이 혹독해 봉수부내 진토인들은 관부 전체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 다. "태수님, 이일은 군부의 일입니다. 문관인 제가 나서봐야 아무런 소용없습 니다." "홍홍, 그래서 어쩌자는 겐가? 홍홍." "홍위장을 불러서 몇 마디 당부라도 해두십시오." "홍위장에게 말인가? 홍홍 그럼 자네가 홍위장에게 내가 하남천원군 참장을 도우라 했다고 전하게. 홍홍 일끝 났으면 가봐!" "……!" 위병대장(衛兵隊將) 홍대보(紅大普)와 오조는 사이가 별로 좋지 못했다. 그 래서 태수의 위세를 빌려 그를 움직일까 했는데 태수는 그것마저 귀찮아하 고 있었다. 오조는 하남천원군의 참장이란 자가 부하들이 납치되었다는 소 식을 듣고는 남예성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한 군사들을 연무장에 모은다는 보고를 받고 부랴부랴 태수를 찾았다. 가뜩이나 성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진토인들이 관부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데 이일로 그 참장이란 자가 휘하군 사들을 풀어 성민들을 괴롭힌다면 큰 사단이 벌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를 일단 진정시키기 위해서라도 위병들을 이끄는 홍대보의 도움을 얻어야 했다. 진학사 오조는 지하수에 차갑게 한 과일화채에 온정신이 쏠 려있는 태수를 보며 당장이라도 출진할 기세인 참장을 말려야 할지 아니면 위장 홍대보를 먼저 만나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러나 오조의 고민은 곧 필 요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태수님, 하남천원군 라혼참장님이 뵙기를 청합니다." "홍홍, 더워죽겠는데 오늘따라 뭔 손님이 이리 많은지 들여보내라!" 오조는 밖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방안으로 들어서는 장수를 보았다. 그야말로 헌헌장부에 훤칠한 사내가 검은 바탕에 하얀 테를 둘러 장식한 경 갑주를 입고 당당한 걸음으로 침상을 겸용한 등나무 의자에 반쯤 드러누워 있는 봉수태수 앞에 섰다. "홍홍, 내가 몸이 편치 않아 장군께 실례를 했소이다." "……." 라혼은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는 태수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은섬충을 사 용할까하는 고민을 했다. 그러나 라혼은 봉수태수 돈석을 나중에 감당하기 귀찮은 존재 이상의 평가를 내릴 수 없었다. "지금 부터 봉수성은 하남천원군이 통제하겠소." "……." 라혼의 말에 봉수태수 돈석은 가는 눈을 더욱 가늘게 뜨며 불쾌한 어투로 말했다. "홍홍, 봉수성은 안전하니 장군께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오. 그러니 장군 은 어서 위급지경에 빠진 다른 곳으로 가서 공을 세우는 것이 났지 않겠소? " 라혼은 아직도 침상에 반쯤 누운 봉수태수는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나는 '통보'를 한 것이지 '허락'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다." "감히……!" -탁! 돈석은 가는눈을 최대한 부릅뜨며 등나무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며 과 일화채가 놓인 탁자를 쳤지만 상대는 이미 등을 돌리고 있었다. 라혼은 봉 수태수를 무시하며 진학사 오조에게 명령했다. "지금 즉시 봉수성의 모든 관리를 소집해라! 응하지 않는 자는 군법에 따라 벨 것이다!" "아, 아니……." "네놈이……." -땅~! "……." "……." 봉수태수 돈석은 자신의 목젖 부위 살에 살짝 파묻혀있는 검끝을 보고 창백 하게 질린체 푸들푸들 떨었다. 라혼은 달려드는 봉수태수의 머리를 검면으 로 때리고 동시에 그의 목젖부위에 검을 들이밀면서 시선은 여전히 전형적 인 학사의 모습을 하고 있는 오조를 보며 다시 한 번 말했다. "가라!" "……." 진학사 오조는 갑작스런 사태에 멍해 있다가 재차 종용하는 라혼의 말에 정 신을 차리고 상황을 파악을 시도했다. 그리고 결론은 그의 요구대로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찌 되었던 그는 남상과 남예성의 임의로 통 제할 권한을 가진 하남천원군의 장군이었고 지금은 봉수태수의 목에 검을 들이 댄 상태에서 요구를 하고 있었다. "알았소이다. 장군의 뜻대로 하겠으니 태수님 목에서 검을 치워주시오." "……." 진학사 오조의 말에 라혼은 검을 거두었고 봉수태수는 목에 붉은 상흔을 잡 고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한시진(2시간)을 주겠다. 그 시간 안에 모이지 않은 관리는 군법에 따라 벨 것이다." "아, 알겠소이다." 진학사 오조는 그의 말이 그저 허풍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마음 이 조급해 짐을 느끼며 태수의 관저를 나섰다. 라혼은 진학사 오조가 움직 이자 몸을 돌려 주저앉아 눈알 굴리기 바쁜 봉수태수에게 경고했다. "네가 무공고수라는 것을 안다. 무엇 때문에 조용히 숨어 지내는지 내 알바 없지만 앞으로도 지금까지처럼 가만히 있어주면 된다." "흑……!" 봉수태수 돈석은 백호나한의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유령처럼 자신의 미간에 닿아있는 검을 보고 숨을 멈췄다. 처음 돈 석이 발작하려 했을 때 무슨 수법으로 머리를 때리고 목젖에 검을 두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아무런 기척도 없이 그의 검이 눈썹사이에 놓여있는 것이다. '백호나한이 고수라는 소릴 들었지만 이정도 수준일 줄이야! 홍홍홍, 오늘 홍대보가 큰 낭패를 당하겠구나.' 라혼은 봉수태수의 체념한 기색을 읽고 검을 거두었다. 무슨 다른 꿍꿍이가 있는 듯 했지만 그것은 두고 볼 일이었다. 라혼은 움직여주지 않으려는 봉 수태수를 태도를 보고 즉흥적으로 일을 벌였다. 어차피 남예성에 하남천원 군의 거점을 가질 필요가 있었기에 거점의 지배권 장악해 든든한 배후가 필 요했다. 남예성의 반란은 그 형체가 없었다. 후선이나 남상의 서해대수영 같은 뚜렷한 적이 없는 남예성의 반란을 해결하기 위해선 확실한 배후가 무 엇보다 중요했다. 라혼은 출동명령만을 기다리는 백호영들이 모여 있는 봉수태수부 연무장으 로 와서 봉수성의 접수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말했다. "봉수성을 내 통제아래 둘 것이며 반(反)하는 자는 전부 참(斬)할 것이다!" -존명! "오차, 하늘에서 위병들의 동태를 살펴라!" "옛!" -펄럭~! 휘익! 명(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미 더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오차는 검은 날 개를 힘차게 퍼덕이며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고우, 구만혁, 표상치, 웅장모, 초강남은 지금 즉시 항구를 제외한 봉수성 의 주요 거점을 확보한다! 반항하는 자는 참해도 좋다!" "옛!" -두구구구구구…………. 봉수성의 주요거점이란 성채의 각 문(門)과 태수의 관저 그리고 봉수태수부 를 말했다. 고우 등은 각 1백명씩 백호영을 데리고 연무장을 벗어났다. 라 혼이 달리 언급은 없었지만 그들은 알아서 자신이 맡을 거점으로 말을 달렸 다. "나머지는 예비로 만약에 사태에 대비한다." 라혼은 장상의 도움으로 성내 백성들 특히 진토인들의 관부에 대한 반감을 너무나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석과 잔폭광마를 납치한 세력이 최소 한 진토인들인 것만은 확실했다. 물론 이대로 모석과 잔폭광마를 구해올 수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뿐이었다. 라혼은 일단 봉수성의 관부를 족치는 모습을 백성들에게 보이고 그물을 쳐놓고 시냇물을 뒤집을 생각이었다. 서해대수영(西海大水營) "비켜라!" -두구두구두구두구두구두구………………. 대로에서 좌상을 펴고 이것저것 팔던 봉수성의 백성들은 척 보기에도 위압 적인 검은 갑주의 군사들이 떼를 지어 말을 달리자 호기심 반, 두려움 반의 심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런 그들과는 다른 눈으로 그들을 보는 사내들이 있었다. "흐음……. 더위에 지쳤다더니 그런 기색은 없네?" "됐어! 저들의 기세를 보아 일이 쉽게 진행될 것 같군." "그래, 어서 소야에게 일이 성공했음을 알리자!" 기세 좋게 많은 사람이 걷는 대로에서 말을 달리는 조정의 군사들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던 두 사내는 군사들이 모두 지나가자 봉수성 건물 사이의 골 목 안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런 그들과 상관없는 노상들은 더운 날씨에 흙먼지를 뒤집어쓰는 것이 짜증이 나는 듯 상품에 흙먼지가 내려앉지 않도 록 하며 투덜거렸다. "뭔 일이래?" "어디서 언뜻 들었는데 누가 원주조정의 군교를 잡아갔다던데." "그게 뭔 말이여?" "그러니까 조정에 반하는 자들이 조정의 군사를 이끄는 장수를 납치했단 말 일세." "그런 일이 있었어?" "그래, 그래서 중원에서 온 중상(中商)들이 그것에 대해 여기저기 알아보고 다니는 모양이야!" 두 중년상인의 대화에 늙으수레한 노인이 끼어들며 말했다. "그러니 앞으로가 걱정일세." "예?" "무슨 말씀입니까?" "관리라는 놈들이 이일을 기화로 또 얼마나 들볶을지 걱정이 되어서하는 소 릴세." "……." 표홀도(飄忽刀) 표상치(豹常治)는 남예성 주도(主都)인 호도(好都)와 이어 진 관도와 연결되는 동문을 향해 말을 몰았다. 그러나 아직도 주군이 무엇 을 원하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그저 과격한 수단을 써서라도 동문을 장악하 라는 명에 따를 뿐이었다. 이윽고, 표상치는 봉수성 동문 앞에 멈춰 섰고 성문을 수비하던 관군의 그냥 지나가지 않고 자신들 앞에 멈춰 서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오?" "당신이 이곳 책임자인가?" "아니오이다. 대장님이 태수부에 부름을 받아 그곳으로 가셨고, 나는 최선 임자일 뿐이오." "그런가? 그럼 동문을 수비하는 군병들을 모아라! 지금부터 이곳은 본 하남 천원군이 맡겠다!" "……." 최선임자라고 앞으로 나선 군교는 표상치의 요구에 움찔하며 눈치를 살폈다 . 듣기로 남예성의 혹서에 맥을 추지 못한다는 군사들치고 사뭇 그 기세가 대단했지만 상대의 수는 고작 1백, 그러나 동문을 수비하는 관군은 3백명이 넘었다. 꿀릴 이유가 없었다. "나는 그러한 결정을 내릴 위치에 있지 못하오. 아무리 조정에서 직접 보낸 군사들이지만 이곳은 봉수성이오. 대장님이 오시면 대장님에게 말하시오." "이것은 군령이다. 군령을 거역하면 군법에 따라 밸 것이다." 군교는 표상치의 추상같은 일갈에 움찔했지만 사내의 오기라는 것이 있었다 . "난 모르겠소. 내 상관은 대장님이지 당신이 아니오." 표상치는 건방진 그의 답변을 무시하고 자신의 애도(愛刀)인 표홀도(飄忽刀 )를 뽑아 명령했다. "백호영은 동문을 장악해라! 그러나 앞으로 같이 싸울 전우들이니 손속에 사정을 두어라!" -옛! "어!" 군교는 1백명의 군사들이 하늘을 나는 장관에 눈을 크게 부릅떴다. 표상치 의 명이 떨이지기가 무섭게 백호영들은 허리를 튕겨 말등을 박차고 상승의 경공신법을 전개했기 때문이었다. 한번에 3장(약9m)을 뛴 백호영들은 손에 들린 창(槍)을 봉(棒)처럼 휘두르며 동문을 지키는 관군들을 내쳐갔다. 관 군들은 마치 검은 흙더미가 쏟아지는 듯한 기세에 꼼작도 하지 못하고 그들 이 휘두르는 창대에 맞아 땅을 뒹굴었다. 날씨가 더워 갑주도 착용하지 않 은 관군들을 무지막지한 경력(經力)이 실린 창대에 얻어맞고 그야말로 한여 름 땅바닥에 패대기쳐져 쭉 뻗은 개구리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렇게 표상 치가 관군들과 드잡이 질을 벌일 때 북문을 맡은 웅장모는 앞으로 나선 대 장이란 자를 무지막지하게 두들겨 패므로 써 기세를 꺾어 비교적 수월하게 지휘권을 장악했고, 남문의 초강남과 태수관저를 맡은 구만혁은 아무런 불 상사 없이 거점장악에 성공했다. 물론 봉수태수부는 라혼이 있어 장악이라 할 것도 없이 백호영들을 배치하는 것으로 일이 마무리 되었다. -쾅! "뭐야? 위병대장 홍대보는 조정에서 보낸 하남천원군이 일을 벌였다는 소식에 불같 은 성정이 폭발했다. "위장님, 이미 수백기의 군사들로 인해 봉수성의 북, 동, 남과 태수님의 관 저 그리고 태수부까지 장악했다고 합니다." "한줌도 안 돼는 것들이 꼴에 군사를 나누다니 그것도 더위 먹은 닭 같은 놈들을……. 그런데 돈태수는 지금 무얼 하고 있나?" "돈태수는 지금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세작의 말로는 백 호나한이 봉수성을 접수하겠다는 말에 잠시 반발을 했지만 백호나한이 검을 겨누고 협박하자 얌전해 졌다고 합니다." "그러냐? 알았다. 그리고 병사들 모아라! 내 이일을 단단히 따져 물을 것이 다." "옛!" 홍대보는 부관이 나가는 모습을 보며 조용히 뇌까렸다. "이 늙은 너구리가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백수회와 연이 닿았나? 아니면 소문대로 백호나한이 백수회와 관련이 있는 것인가?" 가만히 생각을 하던 홍대보는 자신의 감각에 걸린 존재를 인지하며 홀로 중 얼거렸다. "1호인가?" "옛, 기주!" 그러자 놀랍게도 홍대보의 중얼거림에 대답을 하는 존재가 있었다. "일을 벌인 놈들은 누구인지 알아보았나?" "예, 역시 남예일족의 수족인 우르하 부족이 벌인 일이었습니다." "죽었나?" "그것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밀림 어딘가에 숨겨둔 모양이데, 제 판단으 로는 우르하가 조정의 군사를 살려둘 이유가 없다 생각합니다." "아니 살아 있을 것이다. 제사에 쓸 제물을 지금 죽일 리 없지. 그러나 그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 수고 했다." 홍대보는 기척이 사라짐을 느끼고 등나무로 만든 남예성 특유의 갑주를 챙 겨 입었다. 봉수태수 돈석이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나 자신의 무력만을 믿고 일을 벌인 방자한 백호나한의 기를 꺾어놓을 필요가 있었다. 한식경(밥 한 끼 먹을 시간, 약30분)이 지나자 거점을 확보하는 일은 마무 리 되었고, 문제는 봉수성을 실질적으로 관리하는 위장 홍대보의 반응을 기 다리는 것만 남았다. 라혼은 함대를 이끌고 처음 그를 보았을 때 상당한 고 수임을 알았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미 만력만 해도 그보다는 반수정도 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백호영이 익힌 여의금강공(如意 金剛功)은 여의조화신공(如意造化神功)의 특징인 조화의 묘리 때문에 내가 고수의 흔적을 찾기 힘들었다. 그래서 봉수태수 돈석은 물론 고수인 위장 홍대보도 백호영의 역량을 오판한 것이었다. 사실 더위 때문에 고생하는 내 가고수가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외부의 대자연의 기운과 조화를 이루려는 여의조화신공의 기본묘리 때문에 몸을 이곳 기후와 맞게 적응하는 적응기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렇듯 더위에 고생을 한 것이 었다. 그래서 여의금강공을 익히지 않은 잔폭광마는 자신의 내력 때문에 혹 서에 영향을 덜 받은 것이었다. "움직이는 가?" 봉수태수부의 연무장에서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라혼은 서쪽 항구 쪽에서 대군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눈을 떴다. 그리고 하늘에서 항구 쪽을 감시하던 오차가 땅으로 내려서며 보고했다. "주군, 수천의 군사들이 이곳을 목표로 세 갈래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대략 2천 5백입니다." "이미 검을 거꾸로 든 이상 손속에 사정을 둘 것 없겠지……. 역공을 할 것 이다. 오차는 적의 위병대장이 있는 곳을 찾아보고, 백호영은 항구로 통하 는 대로로 나간다." "옛!" 라혼의 명령이 떨어지자 대기 중이던 백호영 전원이 말을 몰아여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대로로 쏟아져 나온 검은 갑주의 기병들이 맹렬한 기세로 돌진 하는 위용은 참으로 대단했다. 봉수성의 성민들은 갑작스런 사태에 두려워 하면서도 그런 백호영의 모습에 절로 감탄했다. -두두두두두두두두……………………. "헉~!" 8백명의 위병들을 이끌고 대로를 따라 달리던 위참(衛參) 말숙보(末淑保)는 전면에 나타난 검은 갑주의 기마(騎馬)가 쇄도해오자 기겁하여 명했다. "마, 막아라!" 그러나 위병들은 본격적인 전투를 하는 경험은커녕 훈련도 하지 않은 자들 이었다. 다만 엄정한 위병의 군기 때문에 도망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 나 이런 상황에선 주변 건물이나 골목으로 들어가는 것이 옳을 지도 몰랐다 . 그러나 위병들은 등나무로 만든 등패(?牌)를 앞으로 내세우며 그 자리에 얼어붙듯 서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들을 가장 앞에서 말을 달리던 라혼은 플라잉 오러 블레이드, 검환(劍丸)을 시전했다. 검환이란 검 전체의 기운을 구슬만한 한 점에 집중시킨 것을 말하는 데 라혼의 플라잉 오러 블레이드 는 그것과 궤를 같이 하면서도 검환과 다른 형태를 띠고 있었다. -두두두두두두…………. -와창~! 라혼의 플라잉 오러 블레이드에 위병들이 세운 창끝이 모조리 잘려나갔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위병들의 대열이 깨져 나갔다. 그렇게 백호영들 앞을 막아선 위병들을 짓밟고, 오차의 신호에 따라 위병대장이 있을 만한 곳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봉수성에서 수백기의 기병이 운용할 수 있는 곳은 십(十 )로 닦여진 십자대로 뿐이었다. 이에 봉수성의 성민들은 바로 눈앞에서 단 한순간에 결판이 나버린 보병과 기병의 접전과 수백 명의 군사들이 봉수성 내의 가옥의 지붕 위를 마치 평지인 냥 날듯이 달리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 었다. 그 광경은 참으로 대대손손 이야기꺼리로 남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기주! 백호나한의 군사들이 서대로(西大路)에서 말숙보의 군사를 대파하고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군사들 전원이 고수입니다. "뭐야!" 홍대보는 멀리서 전음으로 보고하는 1호의 말에 기겁하며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 폭우 같은 화살이 쏟아져 내렸다. -크악~! -컥~! 바로 오차의 비공탄전 상의 벽력전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남쪽 건물 너머로 검은 갑주의 군사들이 떨어져 내리며 홍대보 주위에 병사들을 제압 하기 시작했다. "감히! 천마구품(天魔九品) 혈기난비(血氣亂飛)!" 혈기난비(血氣亂飛), 핏빛기운이 어지러이 흩날린다. 홍대보는 잠력(潛力) 을 격발시켜 한 순간 밀린 기세를 되돌리려 했다. 붉은 기운이 요동치며 장 내를 덮어 버리자 백호영은 물론 위병들도 기겁했다. "마공(魔功)이다." "만력, 저놈을 제압해라!" "옛!" 라혼은 다급한 나머지 제살을 파먹는 마공을 시전한 위병대장 홍대보를 만 력에게 맡기고 기이한 기척을 추적했다. "캭악! 금강일권(金剛一拳)" -펑, 퍼벙~! "자전마강(紫電魔剛)!" 만력은 주군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의금강공(如意金剛功)공력을 이용 해 만든 독문초식인 금강일권으로 층층이 덮여있는 혈기(血氣)를 뚫고 그 여세를 몰아 혈기의 중심에 있는 홍대보를 공격했다. 그러자 필생의 공력으 로 만든 혈기를 너무 쉽게 깨어지자 기겁한 홍대보는 무리한 공력응용으로 들끓는 기혈(氣血)을 어지로 내리 누르고 자전마강을 시전했다. 그런나 홍 대보가 여의금강공(如意金剛功)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면 무리하게 강기(剛 氣) 무공은 시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의금강공의 금강결의 오의는 바로 강기를 전문적으로 파해하는 심결이기 때문이었다. -파직! 팍! -큭~! 만력의 손에 단 3초(招) 만에 홍대보가 제압당하자 싸움을 끝났다. 그러자 라혼은 주저 없이 명했다. "조정에 반하는 자는 참형으로 다스린다. 반적 홍대보의 목을 베라!" "존명!" -팍! 라혼의 명이 떨어짐과 동시에 만력은 이제까지 뽑아들지 않은 군도를 뽑아 그대로 홍대보의 목을 잘랐다. 홍대보의 목이 떨어지자 석은이 나서서 그의 머리를 창대에 꼽아 두려움에 떠는 위병들에게 들려주며 '반적 홍대보의 목을 잘랐다!'라는 구호를 외치게 했다. 위병들은 그 우회적인 협박에 지금 까지 상관으로 모시던 홍대보의 목이 꼽힌 창을 높이 들며 목이 터져라 구 호를 외쳤다. 그들에게 검은 갑주를 입은 백호영들은 지옥의 사신으로 비쳐 지기에 충분했다. -반적 홍대보의 목을 잘랐다! -하남천원군 만세! 그 구호를 외치는 것만이 죽음을 면할 수 있는 길인 것처럼 목이 터져라 외 치는 고함 소리에 봉수성 전체가 숨을 죽였다. 그러나 결국 숨어서 움직이 는 암자(暗者)를 찾아낼 수 없었다. 라혼은 암자를 찾아내는 일을 일단 접 고 뒤처리를 석은에게 맡기고는 모석과 잔폭광마가 갇혀있는 곳으로 [텔레 포트 워프Teleport warp]했다. 귀매지림(鬼魅之林) "기주의 목이 떨어졌다." "그럼 어쩌지? 원주로 귀환해야하나?" 귀일호(鬼一號)는 갑작스런 비상사태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 했다. 봉수성 위병대장 홍대보는 호황가의 비밀결사 귀호기(鬼虎旗)의 기주 (旗主)라는 또 하나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참으로 어이없는 일로 그가 목이 잘리고만 것이다. "아니 남는다. 그럼 새로운 기주나 아니면 다른 연락이 있겠지……." "임무는?" 1호는 2호의 물음에 뭐라 결론을 내려야만 했지만 뭐라 확실한 답변을 하기 힘들었다. 이미 원주 호황가와 연락이 끝긴지 오래였다. 사실상 기주인 홍 대보의 독자적으로 운영되던 귀호기였기에 자칫 잊혀져서 버려질 수도 있었 다. 그러나 결론은 하나였다. "나름대로 그들의 동태를 살피며 중경에서 연락을 기다린다." *** "뭐야? 백호나한이 홍대보의 목을 잘랐어?" "그렇습니다. 주군!" 봉수태수 돈석은 가느다란 눈을 번뜩이며 그 소식을 가져온 심복수하에게 물었다. "홍홍홍, 잡귀들의 동태는 어떠한가?" "그들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그들도 적잖이 당황하 고 있을 겁니다." "홍홍, 일이 아주 재미있게 되었군, 재미있게 되었어. 홍홍홍……." 입은 웃고 있었으나 눈이 더욱 가늘어지는 태수 돈석에게 태수관저의 하인 복장을 한 수하의 보고는 계속 되었다. "그리고……." "홍홍, 말해보아라." "그들 스스로 백호영이란 하는 백호나한의 수하들의 역량이 상상을 초월했 습니다." "……?" 돈석은 수하의 위병대장 홍대보의 목이 잘림으로써 마무리된 소요에 전반적 인 전황을 전해 듣고 통통한 볼 살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 을 떠올랐다. '군사들 전원이 절정경공술을 펼쳤다면 각자 최소한 2~30년 내공을 지녔을 것, 그럼 더위에 지쳐 나가떨어지는 모습을 보인 것은 기만을 위한 책략이 었단 말인가? 오늘 그 경고는 그저 그냥 한소리가 아니었었군.' 태수 돈석은 오늘 백호나한의 경고가 그저 경고만이 아니란 것을 깨닫고는 가슴에 천근바위가 올려진 듯 했다. "또한 앞뒤 정황을 보건데 이제 그들을 암암리 감시하는 것은 무리라고 보 입니다." "가까이 접근해 감시하는 것은 그만 두어라 하지만 다른 방도를 강구하도록 해!" "존명!" "아니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오? 홍위장의 목이 잘리다니?" "그래요. 이게 무슨 변입니까? 뭐라 말씀을 해보세요! 오진학사" 진학사 오조의 호출을 받고 태수부로 모인 봉수성의 관리들은 아직까지 들 려오는 위병들의 반적 홍대보를 처단했다는 구호와 하남천원군을 칭송하는 소릴 들으면서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오조에게 물었다. 그러나 진학사 오 조도 설마 라혼참장이 불문곡직(不問曲直) 홍대보의 목을 자를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나도 아는 바가 없소. 다만 이번에 조정에서 반란토벌을 위해 보낸 하남천 원군의 라혼참장이 태수어른에게 봉수성을 직접 통제할 것을 말했소." "그런데 왜 홍위장의 목이 잘리냔 말이오?" "자세한 것은 모르나 아마도 괄괄한 성정의 홍위장이 반발했을 것이고 어떤 실랑이가 있었을 것이오." "아니 막무가내의 요구에 반발 좀했다고 어찌 원주조정에서 직접 임명한 관 리의 목을 벨 수 있단 말이오?" "후우~! 나라고 아는 것이 뭐가 있겠소? 경들을 기다리기 위해 계속 이곳에 만 있었고 백호나한의 수하들이 반각 전에 봉수태수부를 떠나는 것밖에 알 지 못하거늘……." 봉수성에서는 위병대장 홍대보의 죽음으로 성(城) 전체가 술렁이고 있을 때 라혼은 봉수성 밖 밀림(密林) 한가운데에 있었다. "번화한 성시(城市)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런 밀림이라니?" 라혼은 모석과 잔폭광마의 기운을 따라 더울 깊숙한 밀림 안으로 걸어 들어 가며 참으로 기이함을 느꼈다. 비록 밀림이지만 수풀을 제외하고 그 흔한 풀 벌레하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라혼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가지가 뻗어 나오지 않고 이파리도 없는 기이한 나무기둥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개미?" 그것은 거대한 개미집이었다. 높이가 거의 10장(30m)에 달하는 개미집뿐만 아니라 작게는 한자에서 크게는 수십 장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의 개미집이 수백 개가 널려 있었다. 침입자의 냄새를 감지한 개미들은 자신들의 도시가 공격받았다 생각했는지 라혼을 순식간에 비처럼 쏟아내려 라혼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붉은 빛이 감도는 개미들은 라혼의 호신강기를 뚫지 못 했다. 삽시간에 10장 높이에서 쏟아지는 개미들 때문에 사방 3장이 붉은 안 개에 깔리는 형상이 되고 라혼의 보이지 않는 호신강기를 타오르는 신기를 보이는 개미들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반응한 개미집뿐만 아니라 주변의 다른 개미집도 같이 반응함으로 써 밀림은 죽음의 붉은 안개로 뒤덮여 갔다 . "장관이로군." 라혼은 호신강기에 막혀 3척 이상 접근하지 못하는 이제 아예 벽을 쌓고 있 는 검붉은 개미들을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개미들 이 접근하지 않는 곳에 들어섰다. 그러자 침입자를 몰아낸 개미들은 그 기 세가 잠잠해 졌다. 라혼이 들어선 곳은 작은 폭포가 떨어지는 작은 못이었 다. -촤아아아아…………. 그리고 라혼은 작은 폭포너머에서 기척을 죽인 존재들을 느낄 수 있었다. "나와라!" "……." -쾅! -촤아아아아……. 라혼은 그들이 반응을 하지 않자 못을 향해 허공을 격하고 어마어마한 경력 이 깃든 벽공장력(劈空掌力)을 퍼부었다. 그러자 못의 물이 3장 가까이 솟 구쳐 올라 마치 거꾸로 올라가는 폭포처럼 보였다. 그렇게 신위를 보인 라 혼은 숨어있는 상대를 위협했다. "다음은 너희 다섯 놈들이다." "……." 라혼의 마지막 위협이 먹혔는지 다섯 개의 인영이 땅속에서 솟아오르듯 기 어 나왔다. 땅딸막한 키에 크고 단단하게 뭉친 근육과 키에 비해 큰 얼굴과 퉁방울 같은 눈과 뾰족한 귀, 그리고 두툼한 입. 몸집과 어울리는 짧은 다 리와 짧은 발 그리고 솥뚜껑만한 손에는 도끼나 철퇴 따위의 중병기를 꼬나 쥐고 있었다. 상대가 되지 않음을 알면서도 결코 전의를 잃지 않는 그들은 바로……. "드워프?" 드워프(Dwarf)였다. 라혼은 말도 안 되는 곳에서 상상치 못한 존재를 만나 자 크게 놀랐다. 그러나 놀란 것은 라혼뿐만 아니었다. 라혼이 '드워프'라 중얼거린 소릴 듣고 눈을 크게 뜨며 자기들끼리 두런거렸다. 그것은 라혼도 알고 있는 언어인 드워프어였다. "드워프? 방금 저 인간이 우릴 보고 드워프라고 했지?" "드워프가 뭔데?" "바보야! 우리가 드워프 족이잖아?" "우린, 드베르그잖아? 보통 인간들은 우릴 토지신(土地神)이라고 하지 않나 ?" "아니면 산신(山神)이라고 하거나……." 강적을 앞에 두고 배짱 좋게 자기들끼리 잡담을 하던 다섯 드워프 전사들은 그건 그거고 일단 침입자를 막아야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는지 다시금 투지( 鬪志)를 불태웠다. 그러나 라혼의 한마디에 그 투지는 곧 사그라졌다. "헤파이토스의 위대한 아들 드베르그의 후예여, 불과 망치의 수호자여, 신 들이 흠모하는 손재주를 가진 그대들에게 인사드리오." "……." "!" 드워프들은 라혼의 입에서 흘러나온 유창한 드워프어에 기겁하며 한걸음 물 러섰다. "몰, 인간이 우리말을 한다!" "어쩌지?" "좀 조용히 해! 이 주책없는 것들아! 인간이 우리말을 하니까 알아들을 수 도 있잖아!" "정말 그러네?" "벨드, 네가 말을 시켜봐!" "내가?" 드워프어로 그들에게 말을 걸었던 라혼은 그들에게서 원하는 반응이 나오지 않자 내심 의아했다. 시드그람 대륙에 있었을 때 자신과 동업했던 드워프 에게 드워프어를 배우면서 드워프는 자신들과 대화할 가치가 없는 자에겐 자신들의 말을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에 드워프족을 만나 면 처음 '헤파이토스의 위대한 아들 드베르그의 후예여, 불과 망치의 수호 자여, 신들이 흠모하는 손재주를 가진 그대들에게 인사드리오.'라고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럼 세상의 어떤 드워프 족이라 할지라도 최소한 적대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저들은 분명히 드워프어로 대화했고 자신이 한 인 사말을 알아듣는 듯 했으나 기대한 반응이 나오지 않은 것이다. '이런 내가 속았군.' 라혼은 자신에게 드워프어를 가르쳐준 드워프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 다. 그 인사말을 가르쳐 줄때 묘하게 웃던 것이 무엇을 뜻했는지 이제야 깨 달은 것이었다. "인간, 도깨비 숲엔 무엇 때문에 들어온 것이냐?" "도깨비 숲?" 라혼은 알지 못했으나 봉수성과 아주 지척에 있는 울울창창(鬱鬱蒼蒼)한 밀 림의 이름은 바로 귀매지림(鬼魅之林), 도깨비 숲이었다. 이곳의 진토인들 이 신성시하며 또 가까이 접근하기를 꺼려하고 또 신성시 여기는 금지(禁地 )였다. "나는 이곳에 있는 두 사람을 찾고 있다. 혹시 아는 바가 없나?" 이곳 말로 물어오는 드워프에게 라혼은 드워프어로 모석과 잔폭광마의 행방 을 물었다. 라혼이 계속해서 드워프어로 질문을 해대자 다섯 명의 드워프 전서들은 당황하며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란드, 드워프어를 쓰는 인간은 적대하지 말라고 그러지 않았냐?" "맞아! 그거 나도 언젠가 들은 기억이 있는데?" "뭐야? 그런 율법 같은 것이 있었어?"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그냥 덤벼? 말어? 누가 좀 결정해봐!" "야! 그런데 저 인간이 누굴 찾는다고 하지 않았냐?" 라혼은 상당한 소외감을 느끼게 하는 드워프들에게 다시 물었다. "싸울 텐가? 도움을 줄 텐가?" "……." "기다려라 인간!" 아무래도 이 다섯 드워프들은 리더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무슨 특별한 상황이 되면 서로 의견을 나누느라 정신없어 보였다. 그러나 나름대로 정 리를 했는지 한 드워프가 나서서 드워프어로 말했다. "장로님들에게 물어봐야 갰다. 잠시만 기다려라!" "기다리지." 그리고는 그 드워프는 폭포 뒤로 들어가 버렸다. 그의 말대로 마을의 나이 많은 어른들에게 지금 이 상황을 물으러 간 모양이었다. 그리고 드워프 족 을 찬양하는 말은 장난인 것 같지만 드워프 말을 할 줄 아는 자에게 적대하 지 않는다는 시드그람 대륙의 드워프의 말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남아있는 네명의 드워프들은 경계를 늦추지는 않았지만 적의(敵意)는 가지고 있지 않 았다. 다만 자신들의 말을 하는 인간이 신기한지 여기저기 호기심 어린 눈 빛을 감추지 않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폭포 뒤에서 나이 많은 드 워프 셋을 나왔다. "우리 종족의 말을 할 줄 아는 인간이라……. 당신은 누구요? 우릴 드워프 라고 부르는 것을 보니 로유 대륙에서 오신 분이시오?" "그렇습니다. 츠베르그." 로유 대륙은 시드그람 대륙이 시드그람 대륙이라 불리기 전 명칭이었다. 츠 베르그란 드베르그나 드워프처럼 단순히 종족을 부르는 이름일 뿐이지만 인 간의 입장에서 츠베르그라 부르는 것은 드워프 족을 존중할 때 쓰는 말이었 다. 물론 드워프들 입장에서는 모두 종족을 상징하는 같은 말이었다. "츠베르그라 인간에게서는 처음 듣는 말이로군. 그래 누굴 찾는다고?" "그렇습니다. 제 부하들을 찾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보호하고 있소. 이곳 밀림엔 트롤(Troll)이 사는데 인간들 이 그것들을 도깨비라고 하며 숭배하고 있소. 그들의 먹이가 바로 저 개미 들이라 인간들이 그 개미들에게 그들을 먹이로 주는 것을 우리 젊은 카쿤이 구했소. 지금 그들은 개미들에게 물어뜯긴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치료하는 흙에 묻어두었소." "그들을 구해 주신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라혼은 드워프 장로의 설명을 듣고 이일을 벌인 자들의 처우를 결정했다. 아까 개미집의 숲을 빠져나오면서 그곳에 자신이 아닌 다른 생명이 던져지 면 어떤 꼴을 당할지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죄송하지만 그들을 볼 수 있겠습니까?" "치료하는 흙이 있는 곳은 아무나 들여보낼 수 있는 곳이 아니오. 그대의 부하들은 사흘정도 있으면 치료가 끝날 테니 그때 데리러 오시오." 라혼은 그들이 그렇게 까지 말하자 순순히 물러섰다. 드워프들의 고집부리 면 상상을 초월하는 짓을 벌인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그러나 라혼은 드워프들과 관계를 여기서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 은 손재주가 뛰어나 그들의 손길이 미친 물건은 가히 예술품의 결지를 넘어 신기(神器)였기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당신들에게 동업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거절하오. 우리는 인간과 관계를 맺고 싶지 않소. 그만 돌아가 주시오." 라혼의 동업이란 언급에 이제까지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단숨에 얼어붙으며 잠시 보이지 않던 적의까지 다시 내비치며 단호한 거절과 축객령이 떨어지 자 라혼은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나 라혼에게 그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 들이 만든 마법무구들은 포기하더라도 드워프들의 지식은 반드시 필요했다. 마법무구를 만들려면 마법을 담을 수 있는 마나메탈과 여러 가지 마법재료 에 대한지식은 필수적이었다. 라혼은 시드그람 대륙을 떠나 이곳에서 최소 한 8백여년을 살았다면 이곳의 사람들이 오리하르콘(Oriharcone), 아다만타 이트(Adamantite), 미스릴(Mithril), 등이 뭐라 불리는지 또 이곳에서만 나 는 광물에 대한 지식도 알고 싶었다. 또 필요하다면 그 생소한 광물들이 어 떤 식으로 마나에 반응하는지 이곳 특유의 수련법에 의한 내가공력에 대한 마나메탈의 반응에 관한 지식도 있을 것이다. 단칼에 베듯이 차가운 거절을 한 장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작은 폭포 뒤 의 동굴로 들어갔고, 다섯 드워프 전사들은 적의를 품은체 라혼을 경계했다 . 그러나 라혼에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창조신의 실패작들이 감히……." 드워프들의 최대 천적인 드래곤 흉내는 것이었다. 이른바 사기를 치는 방법 이었다. 드래곤 피어와 비스 무리한 피어(fear)를 내뿜으며 라혼을 가르친 스승인 최고룡(最古龍) 골드 드래곤 지슈인드의 기운을 흉내 냈다. "헉~!" "크흑!" 그리고 효과는 확실했다. 다섯 명의 드워프 전사는 창백하게 탈색이 되었고 , 동굴 안으로 들어서려던 드워프 장로는 부랴부랴 다시나와 바닥에 몸을 던졌다. "죄, 죄송합니다. 위대하신 분을 몰라보고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용서를… …." 그렇게 드래곤 행세를 하며 칸 대륙에서 근 천오백년 머문 드워프들의 지식 을 모조리 갈취하는 라혼이었다. 귀매지림(鬼魅之林) 위병대장 홍대보의 목을 벤 직후 아무런 말없이 사라진 주군이 해가 저물도 록 나타나지 않자 백호영들은 백호십일걸들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강력한 존재감으로 백호영이라는 사상초유의 고수집단을 이끄는 백호나한의 빈자리 는 너무도 컸다. 백호영은 백호나한에 의해 만들어지고 키워진 조직이었다. 라혼의 라혼에 의한 라혼의 조직인 백호영에서 라혼의 부재는 백호영의 존 립 아니 존재자체를 위협하고 있었다. "후우~! 단 2시진이다. 단지 그 시간동안 무적의 백호영이 이토록 좌불안석 이라니……." 좌불안석(坐不安席) 참령(參領) 고우(膏雨)의 한숨 섞인 이 한마디가 현 백 호영의 상황을 말해주었다. 1천 2백의 백호영 무사 중에서 백호십일걸이라 불리는 고수들이 백호영을 이끌었다. 그리고 암묵적 서열은 주군을 제외하 고 정령 모석, 참령 고우, 그리고 백호영의 제일고수인 만력 순이었다. 그 리고 만력과 맞수인 웅장모가 포함되어 사인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것은 백호영의 주인인 백호나한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모석과 고우는 군문(軍門)에서 평생을 잔뼈가 굵은 천상군인이다. 그러나 백호영의 대부분의 인물들은 본래 자유분방한 강호무림인들 이었다. 만력만 해도 백 호나한 라혼이 없는 백호영에 남아 있어줄리 없었고, 그것은 다른 강호무림 인 출신 백호영들도 대동소이했다. 나머지 한축을 이루는 쪽은 백호영이 처 음 만들어지고 고학(高壑)이 뜻을 품고 암암리 모은 소년들이 장성한 젊은 이들이었다. 그들 중 반은 자신들에게 직접 무공을 가르친 백호영 선배의 영향을 받아 어찌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거야! 정말 답답한 노릇이군.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조정에서 임명 한 위장의 목까지 쳤는데……." 순병(順兵) 원복(願馥)은 답답한 나머지 일을 내팽개치고 사라진 주군을 원 망했다. 그의 투덜거림대로 일은 벌인 일을 어찌 대처해야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만큼 주군이 벌이는 일은 상상을 초월 했고, 일의 처리방식 도 독보적, 아니 독단적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본시 병가(兵家)의 일은 장 군을 정점으로 철저한 상관의 명이 곧 죽음을 뜻할 지라도 따르는 상명하복 (上命下服)이 원칙이었다. 개인의 생각을 접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것이 병가의 도리다. 그것은 백호영도 마찬가지였다. 주군이 시키는 대로 별 생각 없이 모석과 잔폭광마를 반적들의 손에서 구하기 위해 움직인 것이 다. 백호영들이 생각하기에 이번일은 모석과 잔폭광마가 반적들에게 납치된 일이 발단이 되어 봉수성의 위병대장에 목까지 벤 것이었다. 즉, 백호영의 어느 누구도 정확한 전후 사정을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무엇 때문에 그 렇게까지 해야 했는지 조차 몰랐다. "하필 이럴 때 모정령이 없다니……. 고학이라도 있었다면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인데……." "그렇지! 모원 모원이 있잖아!" 석은의 중얼거리는 소리에 구만혁이 뭔가 생각이 난듯 무릎을 치며 큰 소리 로 말했다. "군무관으로 따라온 그 젊은 친구 말인가?" "그래! 바로 그 모원, 고학이 평소 그 친구를 무척 아끼지 않았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군이 돌아오는 것만 기다리는 것보다 낫겠지." 주군과 모석의 부재로 백호영을 이끄는 입장이 된 고우의 동조가 있자 누군 가 나서서 모원을 데려왔다. 안 그래도 근처에 있다 불려나온 모원은 고우 등이 묻는 질문에 가만히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이윽고 자신의 생각을 말 하기 시작했다. "다른 것은 저도 알 수가 없지만 한가지만은 확실합니다." "말해보게 모군무." "주군이 이 봉수성을 원했다는 겁니다. 그간 주군께서 봉수성의 돌아가는 사정을 봉수성의 관리들에게 알아보려했으나 협조가 되지 않고, 또 그들이 도움을 준다고 하는 것도 별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언뜻 듣기에 주군께서 남례성 전체의 군권을 확보를 말씀하신 적이 계십니다." "그러니까, 위장 홍대보의 참수한 이유가 위병들의 지휘권 때문이란 말인가 ?" "예, 좀 더 깊은 뜻이 있겠으나 아니 혹여 그럴 의도가 없더라도 봉수성을 확실히 장악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과연!" 모원이 한 이야기는 고우 등도 본능적으로 인지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봉수성은 사실상 백호영의 수중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군사적인 거점만 을 장악하고 있는 상태일 뿐이었다. 모원의 말은 백호영과 충돌했던 위병들 과 봉수성의 관군들의 병권을 확보하고 현재 태수부에 보여 있는 봉수성의 관리들을 다독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봉수성의 관리들을 다독이는 일은 최고책임자인 주군이 해야 하지만 봉수성에 있는 1만 군사들의 지휘권을 명 확히 하는 것은 백호영만으로도 충분했다. "좋아! 모군무의 말이 옮다. 이렇게 사냥나간 어미를 기다리는 늑대새끼처 럼 있는 것보다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는 것이 낫다." 고우가 말에 모두 동조의 뜻을 비치며 갑작스런 사태에 어쩔 줄을 모르고 아침까지는 상관으로 모셨던 홍대보의 잘린 목을 장창에 꼽고 반적을 죽였 다고 외치는 위병들과 아직 자리를 지키는 위병들의 지휘권을 확보하는 작 업을 시작했다. 백호영식으로……. 라혼은 어떠한 존재든 그 특유의 기운을 구별 할 수 있었다. 이 능력으로 라혼은 상대의 기분을 짐작하거나 지금 하고 있는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확 신을 가지고 하는 말인지, 어떤 의도를 품고하는 말인지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매우 까다롭고 귀찮은 작업이지만 이공간 에텔 스페이스의 영향을 받는 공간에서 원하는 존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 모든 것이 기( 氣)인 우주에서 어떤 특정한 기를 찾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 했지만 대략 상 대가 어디쯤 위치해 있다는 것을 알면 의외로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 고 어디에 있다 하더라도 전환(傳環)같이 [디텍트Detect : 탐지]주문이 걸 려있는 물건을 가진 경우는 라혼의 손바닥위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라혼은 모석과 잔폭광마를 단번에 찾아낼 수 없었다. 바로 알 수 없 는 힘이 모석과 잔폭광마의 기운을 감지하는 것을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라혼은 [체인지 셀프Change Self : 변신]주문으로 몸을 작게 만들어 두려움 에 움츠러든 드워프 장로를 따라 모석과 잔폭광마가 있다는 '치료하는 흙' 이 있는 끝없는 지하로 내려갔다. [체인지 셀프Change Self] 1서클의 간단 한 변신 마법으로 몸을 크던 작던 1자 정도의 작은 범위 이내에서 자신의 모습-옷과 장비 포함-를 변하도록 해 준다. 살찌던, 마르던, 인간이건 유사 인간이건 아니면 다른 인간 형태의 직립 생물이건. 단, 술자는 한 특정한 개인을 복제할 수는 없다. 변화시킨 몸이 갖는 능력이나 행동방식까지 부여 해 주지는 못 한다. 그러나 드워프들이 생활하는 지하 동굴에서 활동하기 편하게 하기위해 드워프들의 키에 맞춰 몸집을 줄이는 데에 더없이 좋은 알 맞은 주문이었다. "위대한 분이시여, 이곳 입니다." "……." 드워프 장로가 안내한 곳은 작은 방으로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검은 흙에 파묻혀 얼굴만 내놓은 모석과 잔폭광마가 잠들어 있었다. 라혼은 가만히 그들에게 다가가 이마에 손을 얹고는 내공을 주입하는 방법으로 진찰을 했 다. 다행히 내상은 없었고 개미들에게 뜯긴 피부만이 문제 일뿐이었다. 그 러나 드워프 장로가 장담하기를 따뜻하다 못해 뜨겁기까지 한 '치료하는 흙 '을 사흘정도 덮고 있으면 완치가 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라혼은 그 검은 흙의 정체가 매우 궁금했다. 그러나 조급하게 굴 이유는 없었다. 일단 본 래의 목적인 모석과 잔폭광마의 신변을 확인한 라혼은 봉수성으로 돌아가기 로 했다. "좋아! 사흘 후 다시 오겠다." -확! 두려운 존재가 빛과 함께 푹 꺼져 사라지자 그제야 한숨을 내쉬는 드워프 장로는 서둘러 장로회의를 소집했다. "이, 이것이 어찌된 일이오? 란드에게 전반적인 것은 대략 들었지만 드래곤 이라니?" "아무래도 유희중인 드래곤인 것 같소." "하지만 칸 대륙에 사는 드래곤은 신룡 굉(宏)과 우(于), 앙(殃), 조(祚), 신(伸)의 다섯뿐인데 그중 누구인 것 같소?" "아니 그전에 서룡들과 달리 신성(神性)을 가진 동룡들이 유희를 한다는 것 은……." "아니오. 그 드래곤은 말 그대로 드래곤인 것 같소. 용(龍)이 아닐 것이오. " 용(龍)과 드래곤(Dragon), 둘은 같은 것이지만 또한 틀린 존재들이었다. 최 소한 드워프들이 생각할 때는 그랬다. 드래곤은 드워프들을 노예나 아니면 그보다 못한 존재로 생각한다. 그러나 칸 대륙으로 온 후 용(龍)은 드워프 들을 한 종족으로 생각했다. 용(龍) 자체가 신성(神性)을 가지고 있고, 사 람들에게 숭배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황룡대산(黃龍大山) 너머에서 온 드래곤이란 말이오?" "아마도 그런 것 같소!" 이 드워프들의 선조는 황룡대산(黃龍大山) 그러니까 지슈인드 고원에서 살 던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드래곤들의 개체가 늘고 황룡대산 전체가 드래곤 들의 서식지가 되자 그곳에서 살지 못하고 이곳까지 밀려 내려온 것이었다. 아니 지슈인드 고원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갓 성룡(成龍)이 된 그린 드래곤 이 드워프 마을을 통째로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 그린 드래 곤은 이곳에 둥지를 튼 지 꼭 1백년 만에 한 영웅에 의해서 사냥당하고 귀 매지림(鬼魅之林)은 그린 드래곤이 잡아 풀어놓은 트롤과 오우거 그리고 드 워프만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그린 드래곤을 사냥한 존재가 바로 사람의 형상을 한 신룡 굉(宏)이었다. 드워프들은 굉(宏)을 통해서 여러 가지를 알 게 되었는데 신성(神性)을 가지게 된 다섯 용(龍)은 칸 대륙에 살면서 자신 에게 신성(神性)을 부여한 존재들을 지킨다고 했는데 그것은 사람을 재앙으 로 부터 지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인간에겐 재앙(災殃) 그 자체인 드래곤은 다섯 신룡(神龍)때문에 이 칸 대륙에서 살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드래곤이 '치료하는 흙'에 아주 큰 관심을 보였소." "저런……." "크흠……." "이럴 줄 알았다면 그 인간들 개미집이 되게 놔두었을 것을……." '치료하는 흙'은 드워프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뜻밖의 수확을 얻은 라혼은 해가 지고 완전히 어두워진 봉수태수부에 나타 났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시간을 많이 낼 것인가를 궁리하기 시작했다. '일단, 봉수성은 장악했고, 백호영들로 하여금 남례성의 각 거점의 병력을 흡수하게 해서 적당히 무력시위를 하며 본군을 기다리면……. 본군이 이곳 에 도착하려면 두세 달 정도 거릴 테니까…….' 지금 라혼에게 남례성의 반란문제가 어찌되던 간에 도깨비 숲의 드워프들의 기술과 지식을 배우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이었다. 잘하면 그동안 기회가 없어 배우지 못했던 선술(仙術)이나 법술(法術)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몰랐다 . 그때 난데없는 비명소리가 라혼의 사색을(?) 방해했다. -크악! -엄살피지 마! 비명소리와 서슬 퍼런 고함소리가 울리는 곳은 다름 아닌 봉수태수부의 드 넓은 연무장이었다. 입추의 여지가 없이 연무장을 꽉 채운 군사들이 입에 게거품을 물고 연무장 바닥을 기고 있었다. "지금 뭐하는 것인가?" "헉! 주군!" 연무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단(壇)위에서 백호영식(?) 지휘권 확보작업 을 총 지휘하던 고우는 바로 뒤에서 울려오는 주군의 목소리에 크게 놀랐다 . 그러나 곧 신색을 회복하고 나름대로 보고했다. "흐음 그럼 계속수고하게……. 그리고 모석과 잔폭광마는 무사하니까 백호 영들에게 그렇게 전하게 그러나 그것을 외부에는 알리지 말도록. 앞으로 사 흘간 인수한 병사들의 교육(?)에 힘쓰고 다음은 모석을 납치한 놈들을 잡는 작업을 시작할 거다." "그렇습니까? 모정령이 무사한 겁니까?" "그렇다." 고우는 주군의 확언과 자신들이 임의로 벌인 일에 대한 치하를 듣자 사기가 충천했다. "주군, 태수부 정청에서 봉수성의 관리들이 아직 모여 있습니다." "그런가? 그 일은 내가 알아서 하지……." 교육(?)에 열중하던 백호영들은 주군이 라혼의 모습을 멀리서나마 보고 사 기가 충천하여 봉수성의 군사들을 더욱 몰아붙였다. 신이 난 백호영들 덕분 에 병사들은 더욱 달달볶아져 그날 까무러쳐 죽은 자만 수명은 족히 되었다 . "나는 인정 할 수 없소이다. 아무리 봐도 아무런 이유 없이 조정이 직접 임 명한 관리의 목을 친 것은 대죄요." "허어~! 그래도 그는 조정에서 남례성과 남상의 군사들을 부릴 권리를 가진 하남천원군의 장수요. 이일은 군부(軍府)의 일이니 우리가 왈가왈부할 사 항이 못된단 말이오." "그러나 이곳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자가 통치권을 행사하겠다는 것은 반 대요. 군부의 일과 백성을 다스리는 일은 구별되어야 하오." "그러니 그를 인정하느니 마느니 하는 이야기는 필요가 없어요." -끼이익~! -……. 교육이 한참인 연무장을 벗어나 관리들이 아직까지 격론을 벌이고 있는 태 수부 정청에 라혼이 들어선 순간 사위는 삼시간에 조용해지고 모든 눈동자 가 라혼에게 집중 되었다. "하남천원군 참장 라혼이오." -웅성웅성웅성웅성……. "여는 봉수성 이랑(吏瑯) 단방(亶芳)이오." 라혼이 스스로 신분을 밝히며 나서자 쥐죽은 듯 조용하던 장내의 관인(官人 )들이 웅성대기 시작했고 이랑의 관직을 가진 단방이란 자가 앞으로 나서자 다시 조용해졌다. "내 장군께 묻겠는데 어찌하여 조정에서 직접 임명한 위병대장 홍대보를 참 한 것이오!" 이랑 단방의 라혼에게 어두절미(語頭絶微)하고 단도직입(單刀直入)적인 물 음은 장내를 싸늘하게 얼어붙게 하기에 충분했다. 단 반나절도 안된 시간에 봉수성부의 군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아직도 멀지 않은 곳에서 1만 군사가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단번에 최대 실권자에게 잘잘못을 따져 물은 것이 기 때문이었다. "병가에서 군령을 어긴 자를 참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 본인은 조정의 명(命)에 따라 하남의 모든 지역에 군수품과 병력을 요구할 수 있고, 남례 성과 남상의 모든 군병은 본인의 명에 따르게 되어 있소. 그러나 반적 홍대 보는 나의 명을 거역했을 뿐만 아니 불측을 도모했소." 분명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익히 잘 아는 홍대보의 성정상 내놓란다고 순 순히 내놓을 인물이 아니었고 그것을 빌미로 목을 베었다면 이치상으론 맞 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를 굳이 죽일 필요는 없었잖소이까?" "그것은 군부의 일이니 따로 해명하지 않겠소!" "호랑(戶瑯) 안혁승(案奕承)이오. 그럼 어찌하여 태수님을 영어하고 우리를 이곳에 모아 겁박하는 것입니까?" 라혼은 빤한 것을 가지고 말싸움 하는 것이 매우 짜증이 났다. "본인의 공(公)과 과(課)는 원주조정에서 판단할 일이오. 나는 남례성과 남 상의 반란을 해경하기 위해 온 하남천원군의 장수요. 여러분은 그저 여러분 의 일을 하면 되는 것이오. 내 사사로이 여러분을 모이라 한 것은 사과드리 오. 하지만 분명히 밝혀두는 바 반란이 끝나기 전까지 봉수성은 조정에서 반란을 토벌하라는 명을 받은 하남천원군에 속하여 움직인다는 것이오." "그런……." "고로! 여러분 또한 군문의 법에 따르게 될 것이오." 봉수성의 관리들은 아주 노골적이 협박에 분기탱천하며 따지려 했다. 그러 나 영혼을 옥죄는 공포감에 식은땀을 흘리며 하남천원군의 장수가 정청을 벗어날 때까지 숨쉬기도 힘들었다. 라혼이 그들의 시끄러운 입을 막기 위해 피어(fear)를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아직까지 교육(?)이 한참인 백호영을 두고 해노 인치 와 장상에게 각기 흩어져 따로 운영되는 수군을 들에게 하남천원군 참장 라 혼의 이름으로 봉수성에 집결하라는 격문(檄文)을 띄우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사흘 후 봉수성 군사들의 모든 교육이 끝나고 일사불란한 조직체계 를 만든 백호영의 무력시위 겸 남례성의 병권을 확보하는 작업이 시작되었 다. 물론 멀리 떨어진 곳과 교통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봉수성 주변의 병권 을 확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발 없는 말(言)이 천리 간다는 말이 있었다. 귀매지림(鬼魅之林) "내 이노무 개잡놈을 잡히기만 하면 아작을 내주리라!" "……." 사흘간 인사불성이 되어 있던 잔폭광마 육삼이 깨어나며 외침은 처절하기까 지 했다. 라혼은 약속한 바대로 사흘 후 드워프 마을에 가서 아직 깨어나지 않은 모석과 잔폭광마를 봉수태수부로 데려왔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나 드 워프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밝히길 굉장히 꺼려했다. "깨어났으면 놈들을 잡으러 가자!" "대장!" 잔폭광마는 대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누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살기가 번들거리며 병가(兵架)에 귀두대도(鬼頭大刀)를 집어 들며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기세로 재촉했다. "어서 갑시다! 내 이놈들을 잘근잘근 씹어서 한 오백년 먹어버릴라니까!" -퍽~! 모석이 보기에도 위태위태하던 잔폭광마의 발작은 라혼의 발차기를 불러오 고 말았다. "이런 니기미~!" 가슴을 맞고 쓰러진 잔폭광마는 흉성이 폭발하여 떨어트린 귀두대도를 집어 들고 휘둘러왔다. -퍽! 퍼버버버버버버버버버……. 빡! 그리고 잔폭광마는 진정한 백호영이 되었다. "소야!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으음." 검은 피부에 크고 둥근 인상적인 눈동자를 가진 사내는 예상치 못했던 결과 에 무거운 침음성을 내뱉었다. "그것을 빌미로 봉수성을 완전히 장악하다니……." "소야(小爺)." "일단 봉수성을 장악하는 일은 일단 여기서 접는다. 그러나 사태추이를 좀 더 살피는 일은 게을리 하지는 마라!" "옛! 우르하 족에게 이일에 대해서 함구하도록 전하겠습니다." "음!" 봉수성의 8할의 인구를 차지하는 진토인들의 관리들에 대한 원성이 높아 묘 하게 거슬리는 위장 홍대보를 견제하기 위해 벌인 조정에서 직접 보낸 군관 납치해 혼란을 유도하려던 계략은 일단 성공했다. 바로 견제하려는 대상이 너무도 어이없게 목이 잘렸기 때문이었다. 중년의 깡마른 강퍅한 인상의 사내는 날카로운 눈빛은 번뜩이며 다음 사항을 보고했다. "소야. 그보다 우르하들이 말하길 귀림(鬼林)에 누군가 침입한 흔적이 있다 합니다." "뭐야? 자세히 말해봐라!" "홍칩의(訌蟄蟻)가 있는 곳에 조정군관들의 뼈가 보이지 않고 얼마 떨어지 지 않은 곳에 누군가 침입한 듯 흉성이 폭발한 홍칩의(訌蟄蟻)들이 개미가 싫어하는 기름을 바른 우르하들을 무작정 공격했답니다." 홍칩의(訌蟄蟻)는 말 그대로 무너져 내리는 개미들을 말했다. "그럼 누군가 그들을 구해갔다는 건가?" "그럴 가능성을 배제하진 않고 있습니다만 홍칩의(訌蟄蟻)가 가장 집중적으 로 모여 있는 곳까지 들어와 그들을 구할 존재는 없습니다. 아마도 귀매(鬼 魅) 일겁니다." "아무튼 뜻하지 않게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사라진 이상 이제는 거칠 것이 없는 이상 좀더 적극적으로 차레 족을 좀 더 흔들어야 한다." "소야! 홍대보의 목이 달았났지만 그 수족들은 계속 활동을 할 가능성이 있 습니다. 차레 족을 건드는 일은 시간을 가지고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군.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사건이 일어 난지 이레가 지났다. 라혼은 자신의 행사에 반감을 품고 직무 를 태만히 하는 관리 몇몇을 임의로 파직시키고 새로운 인재를 그 자리에 메우는데 시간을 허비했다. 다행히도 남상에 반란으로 뱃길이 끊기자 항만 업무 중심으로 돌아가던 봉수태수부에는 비교적 한가한 인력이 많았다. 그 러나 그런 그들을 중심으로 불복종 하려는 기운이 감지되자 이미 마음이 귀 림의 드워프 마을에 가있는 라혼은 그들 몇몇을 태형(笞刑)으로 다스렸다. 태생이 그런지 몰라도 백호영에는 사람을 가장 고통스럽게 패면서 상처가 거의 남지 않는 수법이 많이 발달되어 있어 우악스런 무인들의 매운 손속은 문관들이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군자의 기개를 보이는 한다 하는 인사도 몇몇이 라혼참장에게 그것을 따져 물었지만 관리가 일을 태만 히 하면 태형으로 다스리라는 관규(官規)가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근거로 피어(fear)를 남발하며 그들을 설득 반, 협박 반이 섞인 해명을 했다. 그것 으로 라혼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이 봉수성 관부를 완벽하게 장악하는 데 성 공했다. 그러나 현 상태는 모든 일이 라혼을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 즉, 당 분간 아니 최소한 두어 달 동안 라혼이 계속 자리를 지켜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라혼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주군, 세출결산 입니다." 라혼은 모원이 한 아름 안고 들어오는 서류들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 고 앞에 놓인 서류를 집어 들었다. "모원, 이것은 작년세출이잖은가?" "아! 그거요 태수의 결재가 필요한 서류인데 아직 결재를 받지 못했다고 이 번기회에 처리해서 마무리 짓는 것이 좋겠다면서 떠넘긴 겁니다." 라혼은 잠도 자지 않고 엄청난 속도로 그동안 밀린 서류작업을 했다. 그동 안 봉수태수 돈석이 일을 게을리 하는 바람에 밀린 일들이 모조리 엄청난 서류처리능력을 자랑하는 라혼에게 집중 되었다. 한심한 것은 그동안 최고 책임자가 일을 소홀히 하는 틈을 틈타 여기저기 봉수태수부의 눈먼 황금이 여기저기 누수된 것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류를 꾸민다고 꾸몄지만 멀게는 3년 전까지의 모든 서류를 한 번에 훑은 라혼의 눈을 속일 수는 없 었다. '호오 이것 봐라! 공금을 횡령한 내용이 담기 서류를 보란 듯이 올려 보내? 그리고 이것은 녹봉를 올려달라는 서류잖아?' 라혼이 임의로 봉수성을 장악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봉수성의 관인들 은 없었다. 그런 그가 일을 처리함에 있어 잘못된 것이 있으며 그 죄는 더 한층 무거웠다. 그런 그에게 일을 태만히 한다고 임의로 파직당하고 또 몰 매를 맞는 것을 가만히 참고 넘길 그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바 로 그가 바라는 대로 열심히(?) 일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 지 못했던 것이 바로 라혼의 무시무시한 서류처리 능력이었다. 그래서 누군 가 라혼을 골탕 먹이기 위해 생각해낸 쉴 새 없이 일감을 밀어붙이는 그것 으로 인해 오히려 그동안 공금을 횡령한 자들이 줄줄이 걸려들어 경미할 때 는 라혼에게 코가 꿰이고 중할때는 아예 파직(罷職)과 함께 모든 재산을 봉 수태수부에 몰수당해야 했다. 그렇게 라혼은 누군가의 잔머리 때문에 봉수 태수부에 마련된 집무실에서 근 보름간 서류에 파묻혀 지내야 했다. 그리고 오히려 봉수태수부의 관리들을 역으로 혹사시킨 일들이 마무리될 때쯤 자 신들을 납치한 자들의 정체를 쫓던 모석 일행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주군, 알아냈습니다." 라혼은 장상과 모석 그리고 완전한 백호영이 된(?) 잔폭광마가 집무실로 들 어서자 마지막 서류에 수결을 해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서서 집무실을 나섰 다. "뭘 알아냈는지는 나중에 듣고 일단 이 일부터 마무리하지 따라오게." "……." 라혼은 집무실 근처에 항상 있는 모원도 함께 봉수태수부 나서서 그리 멀지 않은 태수관저로 천천히 걸었다. 라혼이 태수 돈석의 관저에 들어서자 가 장 먼저 라혼을 반기는 자는 다름 아닌 이곳에서 태수의 신병을 확보하고 지키는 원복이었다. "주군, 이곳엔 어인 일이십니까?" "돈태수는?" "특별한 사항을 없고 항상 그 자리에 있습니다." -주군의 말씀대로 그의 주변에 내력이 심상치 않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겉으로 하는 말과 전혀 다른 내용의 보고 전음입밀(傳音入密) 수법을 통해 라혼의 귓가에 걸렸다. 라혼은 원복의 전음(傳音)으로 세세한 보고를 들으 면서 주위에서 음밀한 움직임을 보이는 존재들을 감지했지만 일단 무시하고 봉수태수 돈석이 머물고 있는 후원으로 들어섰다. 태수 돈석은 침상인지 의자인지 모를 등나무 가구에 육중한 몸을 얹은체 근육질의 하인에게 부채 질을 받으며 라혼을 맞이했다. "홍홍, 어서 오시오. 라혼참장!" "돈태수, 그대가 일을 태수부의 일을 맡아주었으면 하오." "……!" 돈석은 겉으로는 말없이 웃고 있었지만 이 괴물 같은 놈이 인사도 없이 바 로 본론을 꺼내자 내심 크게 당황했다. 그리고 그가 요구한 내용에 또 한 번 놀랐다. '뭐야? 기껏 봉수성의 통치권을 완전히 장악하고는 한 달도 못되어 나보고 태수부를 맡아달라고?' 라혼은 그가 아무런 표정을 짓고 있지 않지만 내심 무척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본인은 그대가 다시 봉수성을 맡았으면 하오. 나는 봉수성을 통치하는 일 을 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요." "……." 라혼의 재촉에 봉수태수 돈석은 잠시 침묵하더니 조용히 말을 꺼냈다. "장군 나와 독대를 해주시오!" "알겠소." 태수의 독대요청을 라혼이 수락하자 라혼을 따라 들어왔던 모석 등이 말없 이 물러섰고 돈석에게 부채질을 하던 하인들이 창(窓)의 발을 내려 외부에 서 안을 볼 수 없게 차단하고 역시 자리를 벗어났다. "홍홍, 내 장군에게 물을 것이 있소. 장군의 내자라 소문난 천하제일미 천 상천화가 수인이란 것이 사실이오?" "사실이오." 라혼은 돈석이 보기에 부담스러울 정도로 땀을 흘리며 묻는 첫 질문이 설화 에 대한 것이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겉보기에 눈웃음을 지은 체 '홍홍' 거리며 가볍게 묻는 것처럼 보였지만 라혼이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그 것이 그저 힌소리로 질문한 것이 아니라고 말해 주었다. "홍홍, 그럼 천상천화가 묘(猫)가라는 소문은 사실이었구려!" "겨우 그런 것 때문에 독대를 청한 것이오?" 넌지시 넘겨짚은 질문에 그가 부정하지 않자 돈석의 가는눈을 번뜩이며 입 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홍홍홍, 그것은 아주 중요하게 될 수도 또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홍 홍홍……." "……." 뭐가 그렇게 좋은지 한참을 웃던 돈석이 다시 물었다. "홍홍, 장군은 백수회를 아시오?" "모르오!" "홍홍, 그럼 좀 전까지 장군과 함께 있던 장상이란 자가 백수회의 일원이란 것을 모르시겠구려!" 눈가에 웃음을 머금고 여기까지 말하던 돈석은 상대의 기색을 살폈으나 별 반 놀라는 눈치나 그는 어떤 반응도 없었다. 돈석은 그런 반응에 유의하며 말을 이었다. "홍홍, 백수회는 수인가(獸人家)들 중 십이진가에 벗어난 세력이 하나로 뭉 친 회(會)요. 그리고 장상이란 자의 조부 장모는 그 백수회에서 상당한 위 치에 있소. 홍홍!" "장상이 나에게 어떤 목적을 가지고 접근했다는 것은 서로 잘 알고 있소. 그러나 그것을 알리고자 독대를 청하지 않았을 테니 속 시원히 털어놔 보시 오. 나는 말을 질질 끄는 것을 좋아하지 않소." "홍홍, 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리다. 장상의 조부가 천하 각처에 있는 백수 회의 수뇌부들에게 친서를 보냈소. 거기에 바로 장군과 장군의 아내에 관한 내용이 들어있으니 나는 그 친서의 내용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을 뿐이오. 홍홍!" 라혼은 그의 말 속에서 십이진가의 일원인 돈석 자신이 백수회에서 그리 낮 은 위치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돈석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나와 합작을 제안하는 바이오." "좋소! 그 제안을 받아들이오. 그러니 일단 봉수부(峰水府)의 태수로써 일 부터 하시오." "아니……?" 너무도 간단하게 즉답을 얻은 돈석은 되레 그의 진의가 무엇인지 알 수 없 었다. "나의 대답을 얻었으니 이제 그쪽의 속내를 털어놔보시오. 도대체 뭘 합작 하자는 것인지?" 라혼은 봉수태수가 꾸미는 꿍꿍이보다 귀림(鬼林)의 드워프들에게 가서 그 들의 지식을 얻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수백 년 후 있을 '대변혁의 시기'가 되면 지금 칸 대륙의 일은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대변혁의 시기'란 신(神), 마(魔), 그리고 중간계(中間界)의 삼계(三界)의 경계가 모호해 지며 마계(魔界)의 존재와 신계(神界)의 존재가 중간계로 쏟아지는 시기였다. 그럼 중간계에서 그 존재들과 그나마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드래곤 족뿐이었다. 그리고 인간들 중에서 극소수 신선( 神仙)의 반열에 든 존재들뿐이었다. 그러니 '대변혁의 시기'를 대비하며 기 다리는 라혼의 입장에선 고작 칸 대륙의 패권(覇權)을 두고 쟁패(爭覇)하는 아니 그저 다투는 수준에 사바세계의 세(勢) 싸움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 "홍홍홍, 역시 성정이 호호탕탕(浩浩蕩蕩)한 것을 보니 장군은 영웅이 틀림 없구려. 이란 장군이 나와 같은 길을 가기로 하였으니 자그마한 선물의 의 미로 장군의 수하를 납치했던 자들이 누구인지 가르쳐 주겠소. 장군의 수하 를 납치한 자들은 남례일족의 사주를 받은 우르하 족이오." "남례성의 반란의 원흉이 남례일족이란 말이오?" "홍홍홍,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이오. 남례성의 반란은 그 주체가 명확하 지 않소. 그래서 내가 보기에 진토인들의 봉기를 하자 남례일족도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지 위해 그저 부화내동 했을 뿐이오. 그 증거로 그들은 스스로 반란의 주체임을 주장하지 않소이다. 홍홍홍, 그리고 백수회 쪽에서도 수 를 쓴 것이 있고……." 라혼은 봉수태수 돈석의 고백 아닌 고백에 쓴 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반란을 토벌하기 위해 온 조정의 장수인 라혼이 그 반란의 당 사자와 합작을 논의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인지 말끝을 흐리며 라 혼의 눈치를 살피는 돈석이었다. "아직 본론을 꺼내지도 않은 듯한데 벌써부터 자신의 약점을 내보이다니 상 당히 재미있는 화술법이군!" "!" "이제 당신을 지금 이 자리에서 포박하여 원주로 압송해도 문제가 없겠군, 그런 이제 본론을 말해보시오." 자기가 똑똑하다고 믿는 사람의 특징 중 하나는 자기가 예상했던 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을 경우 동요가 심하다는 것이다. 그런 그는 화를 내거나 또는 어이없는 실수를 하는데 상대가 아래라고 느껴질 경우는 화를 내는 것이고 상대가 감당할 수 없는 존재일 때는 종종 어이없는 실수를 한다. 지금 봉 수태수 돈석의 경우는 후자라 하겠다. 좀처럼 내심을 표현하지 않던 안색이 혼란스런 내심을 반영한 듯 항상 여유롭게 웃던 미소가 겉이고 이내 굳은 표정을 한 봉수태수 돈석이무거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봉수부에 귀매림(鬼魅林)이란 곳이 있는데 그곳에 토지신이 살고 있소." "……." "……." "그것은 나도 알고 있소. 그래서 뭐 어쨌다는 것이오?" "!?" 봉수태수 돈석은 상대가 또다시 예상이 빗나간 반응을 보이자 두 손 두 발 모두 들고 말았다. 남례일족이 노리는 것도, 그의 손에 참수된 홍대보가 노 리는 것도 다름 아닌 '도깨비 숲'의 토지신들 이었다. 작금의 상황은 다름 아닌 난세(亂世) 그것도 근 400년만의 전란(戰亂)의 시대였다. 전란의 시대 인 만큼 가장 잘 팔리고 또 그 물건을 취급하는 것 자체가 힘이 되는 무기( 武器) 또 그중에서도 철기(鐵器)는 향후 대륙의 패권(覇權)을 좌우할 물건 이었다. 그런 점에서 단지 손길이 닿는 것만으로도 신병이기(神兵異器)를 만들어내는 토지신의 존재는 천하를 두고 패권을 다투는 모든 세력이 운명 을 걸고 얻으려는 귀한 존재였다. 한 한명의 토지신에게 도움을 얻어낼 수 있다면 철방(鐵幇)의 규모를 단숨에 키울 수도 있었다. 그리고 가끔 신병이 기를 얻어 그것을 미끼로 강호의 고수를 포섭할 수 있을 것이다. 봉수태수 돈석의 장황한 설명을 들은 라혼은 헛웃음이 나왔다. 토지신이라 불리는 드 워프들이 자신의 동업제안을 하자 돌연태도를 바꾼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 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돈태수, 당신의 말은 잘 들었소. 그러나 귀림의 토지신들은 이미 날 돕기 로 되어 있소. 하지만 백수회가 나와 함께한다면 언제든 환영이오. 그리고 당신에게는 반역에 대한 혐의가 있으니 앞으로 자중하는 모습을 보이길 바 라오." "끄응!" 라혼은 봉수태수 돈석과 독대를 끝내고 장상의 보고를 받았다. 장상이 알아 낸 바로도 그 일은 우르하 부족과 관련돼 있음을 또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장상은 남례일족에 대한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을 보고 최소한 봉수성 에서 봉수태수 돈석의 눈과 귀가 얼마나 밝은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출정한다. 백호영은 물론 그간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이끌고 우르하 부족마을을 치겠다! 준비하라!" "존명!" 귀매지림(鬼魅之林) 총병력 1만 8천의 대군이 봉수성을 출정하는 모습은 참으로 보기 드문 장관 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봉수성의 위병들과 봉수부 근처에서 모은 자들 이었다. "주군, 겨우 2백명에 불과한 우르하 부족을 치는 데 이렇게 많은 병력을 동 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대장! 그놈들은 제가 단기필마(單騎匹馬)로 모조리 도륙 낼 수 있습니다." "글쎄? 이렇게 소란을 떨며 대군이 움직이는데 그들이 마을에 그대로 있을 까?" "……?" 라혼이 전체병력을 이끌고 그리 멀지도 않은 우르하 부족의 마을로 가는 것 은 무력시위였다. 그것과 더불어 이번에 새로 재편성된 군사들의 실전을 겸 한 훈련 상태를 확인하려는 의도 또한 있었고 가장 중요한 것은……. "진토인인 우르하 부족은 밀림에 기대어 살아가는 자들이다. 그들에게 밀림 은 생활의 터전이자 부족을 지켜주는 성벽과도 같다. 그것은 밀림에 익숙한 진토인들과 싸우려면 드넓은 초원이나 들판이 아닌 밀림으로 들어가 싸워 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봉수성에서 출병하여 행군한지 반나절만에 예상대로 텅 비어있는 우르하 마 을에 도착했다. 진토인 마을이 그렇듯이 우르하 마을의 집들은 나뭇가지로 뼈대를 세우고 넓은 나뭇잎으로 그 뼈대사이를 막아서 만든 형태였다. 엉성 해 보이는 집이었지만 이곳 특유의 무섭게 쏟아지는 호우에도 집안으로 비 한방울 새지 않는다. 라혼은 일단 마을을 접수하고 수색을 명하여 혹시 있 을지 모를 위험을 대비게 했다. "구만혁!" "옛, 주군!" "추적이 가능 하겠는가?" "옛! 이미 그들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반나절 먼저 움직였 을 뿐입니다." "반나절?" "옛, 반나절 입니다." 라혼은 양엽구(良獵狗) 구만혁(狗巒赫) 참위의 말에서 묘한 것을 발견했다. 라혼이 우르하 토벌을 목적으로 출정했지만 그것은 일부 수뇌들만 알고 지 금 이끌고 온 대부분의 군사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기위해 출병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봉수성에서 막 행군을 시작할 무렵 이곳에선 피난을 마쳤다는 것은 생각해 볼일이다. 라혼은 일단 진토인 출신의 병졸에게 물었 다. "네게 물을 것이 있다." "예, 옛 장군님." 특유의 검은 피부와 작아 보이는 얼굴에 이목구비가 크고 뚜렷한 나이어린 진토인 병졸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휘하자수조차 목을 벤다는 중주에서 왔 다는 장군 앞에 불려나가자 불안에 떨며 두려워했다. "우르하 부족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우르하 말씀이십니까?" 진토인 병졸은 의외로 부드러운 어조로 질문을 하는 희멀건 하지만 그런대 로 봐줄만한(?) 장군의 태도에 일단 안심하며 주위를 둘러보고 이곳이 우르 하의 영토임을 깨달았다. "원래 밀림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은 사냥감이나 먹을 수 있는 과실이 풍부 한 곳을 찾아 부족전체가 떠돌기도 합니다만……." "……." "우르하 부족은 자신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이 숲을 좀처럼 떠나지 않습니다 . 하지만 자신들이 영역으로 삼은 숲의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기도 합니다. " "그럼 지금이 그때인가?" "아닙니다. 우르하는 무녀(巫女)를 중심으로 무녀의 뜻에 그러니까 신의 뜻 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러니까 무녀가 마을을 옮길 때가 되었다 말하면 그 때 마을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하라!" "저렇게 질 좋은 집나무를 버려두었다는 것이……." 라혼은 진토인 병졸에게 그에 대한 것은 물었다. 진토인들의 움막 비슷한 잎새집의 뼈대를 이루는 나무는 그 굵기와 무게 등이 적당한 나름대로 재산 이란 것이었다. 그래서 마을을 이동할 때 번거롭기는 하지만 그 뼈대 나무 는 항상 가지고 다닌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마을을 옮긴 것이 아니라 피 난임을 다시 한 번 증명하는 것이다. "구만혁, 오차 놈들의 흔적을 쫓는다." "옛!" 라혼은 우르하 마을에 병력을 남겨두고 추적을 시작했다. "족장님, 중주의 군사들이 움직였습니다." "역시 우리를 노리고 온 것인가?" 얼굴에 붉고, 푸른 염료로 족장의 표식을 한 진토인이 굳은 안색으로 우르 하의 전사들을 둘러보았다. 마을에서 싸울 수 있는 자들을 모두 모은 것이 82명이었다. 그러나 적은 2만명 가까이 된다고 했다. 한자 길이의 도신(刀身)을 가진 중도와 사냥할 때 독침을 날릴 때 쓰는 대 롱으로 무장한 전사들은 이미 죽을 각오가 되었는지 전의를 잃지 않았다. "주모(朱母)께서는 아직도 아무런 말씀이 없으신가?" "예, 주모님은 여전히 기도중이십니다. 다만 이것이 필요하다 하시면서…… ." 우르하의 전사가 족장에게 내민 것은 다름 아닌 주사(朱砂)였다. 우르하 족 장은 주사를 건네받아 그릇에 담고 손잡이가 화려한 보석으로 장식된 단도( 短刀) 뽑아 팔뚝을 그었다. 팔뚝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는 주사가 담긴 그 릇에 떨어지고 그 피로 주사를 게웠다. 그리고 그것으로 우르하 부족의 조 용한 출정식이 시작되었다. 우르하 전사 한사람, 한사람 앞으로 나와 족장 의 피로 게어진 주사를 찍어 미간(眉間)에 발랐다. 이것은 죽은 전사를 위 하는 우르하만의 풍습이었다. 족장이 자신의 피로 게운 주사를 가장 용감하 게 싸운 전사의 이마에 점을 찍어 명왕(冥王)에게 그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전사였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의식이었다. 그러나 적은 강대하고 주점( 朱點)을 찍어줄 족장 또한 옥쇄해야하는 상황에서 지금의 이 의식은 우르하 의 멸망을 각오하는 의식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족장이 스스로 자신의 이마에 주점을 찍으며 명령했다. "우르하의 전사들이여, 우리가 마지막 한명까지 죽음으로 고대로 이어진 의 무를 완수 한다면 '불새'는 우리의 자손을 보호할 것이다. 만약 죽음이 무 서운 자가 있다면 여자와 아이들이 있는 주모(朱母)에게 가라!" "……." 그러나 아무도 움직이는 자가 없었다. "가자! 숲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 우르하의 전사들은 족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자신들의 놀이터이자 생활의 터 전이었던 밀림으로 스며들었다. 마지막 사냥을 위하여……. *** 잔폭광마는 이곳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말을 타고 벌판을 질주하던 그에게 수풀이 우거져 바로 앞도 보이지 않는 이런 밀림은 정말 체질에 맞 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비 오듯 하는 더위 속에서 소매라도 걷고 이동할라치면 억센 수풀이 피부를 긁어대니 그것 또한 기분이 나빴다. "이런 빌어먹을 이따위 숲 따위는 그냥 태워버리면 간단하잖아!" "뭘로?" 잔폭광마는 자신의 투덜거림에 딴죽을 거는 백호십일걸의 하명인 달성모(獺 珹毛)에게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네눈에는 이것들이 바위로 보이냐? 이것들이 다 나무라고 나무, 불에 타는 나무!" "나무도 나무 나름이지 젖은 나무를 무슨 수로 태워? 게다가 사흘이 멀다 하고 폭우가 쏟아지는 데 제대로 타기나 하겠나?" "어? 그런가? 근데 참위가 정위에게 꼬박꼬박 말대꾸하는 것은 무슨 경우야 ? 달성모의 논리 정연한 말에 말문이 막힌 잔폭광마는 계급을 가지고 밀어붙 였다. "음?" -팅! 어디선가 나아온 뭔가를 쳐낸 잔폭광마는 이제까지 짜증스런 표정을 지우고 전신을 긴장시켰다. "백호영은 공간을 확보하고 등패병은 앞으로 나서 방진(防陣)을 구축하라!" 잔폭광마와 가까운 곳에 있던 모석은 잔폭광마가 쳐낸 것이 독침임을 확인 하고 그 즉시 진을 짤 것을 명 했다. 백호영은 명이 떨어지자 저마다 장도( 長刀)를 휘둘러 아름드리나무를 베어 순식간에 밀림한가운데에 수천 명이 진형을 구축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냈다. '82명이라…….' 라혼은 이미 오래전에 그들의 인기척을 감지했다. 그러나 아직 그들이 먼 곳에 있어 좀 더 접근해서 척후를 내보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진토인들이 사냥할 때 쓴다는 독침을 발사하는 대롱의 위력이 이렇게 먼 곳에까지 사정 거리가 미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들과 거리는 150보는 족히 되었기 때문이었다. "고우, 원복 여기서 대기하라! 나머지는 돌격한다." 라혼은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군도(軍刀)를 뽑아 우르하들이 매복한 곳에 날렸다. 바로 이기어도술(以氣馭刀術)이었다. -콰광~! 라혼의 군도는 울창한 숲을 뚫고 하늘로 솟아올라 긴 곡선을 그리며 우르하 부족전사들이 매복한 지역 한가운데 있는 나무를 반을 쪼개놓는 신위를 보 였다. "헉! 벼락신이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우르하 전사들이었지만 아름드리나무를 쪼개는 힘에 기 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수해(樹海)위를 마치 평지와 같이 내달 리는 군사들의 모습에 전의를 상실했다. 그들의 능력은 죽음을 각오한 우르 하 전사들에 그 각오를 잊게 하기에 충분한 놀라운 모습이었다. 풀잎을 밟고도 풀이 휘어지지 않는 절정의 고수가 아니면 시전할 수 없는 극상승의 초상비신법(草上飛身法)을 전개하여 오백여 군사들이 밀림의 나무 위를 내달리자 150보의 거리는 지척이나 다름없었다. "모석, 이들을 제압해라! 구만혁, 표상치는 나를 따른다." "존명!" 라혼은 매복한 우르하들을 제압하는 것은 모석과 3백 백호영에게 맡기고 2 백 백호영을 데리고 그대로 그곳을 지나쳤다. "우왁!" -우직끈~! 퍽! 파바바팍! 우르하 전사들에게는 밀림의 나무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검은 갑주의 군사들 이 사람으로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들은 놀람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반항 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우르하 전사들을 제압했다. 귀매지림(鬼魅之林) 모석과 잔폭광마가 이끄는 백호영들이 우르하 전사들을 제압하는 것은 마무 리 할 무렵 라혼은 밀림 안에 자리한 계곡 입구로 들어섰다. "모두 기습에 유의하라!" 보통의 군사들이라면 얼기설기 엉킨 덩굴들 때문에 발걸음이 지체되었을 것 이나 이미 전원이 초상비신법을 구사 할 줄 아는 백호영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백호영에서 무예를 익힌 무사들은 크게 백호나한과 비무연(比武宴 )의 인연으로 얼떨결에 팔자에도 없는 군문(軍門)에 출사한 자들이고 나머 지는 고학이 상경은 물론 중경과 원주에서 소년들을 모은 것이다. 처음 1~2 년간은 이 백호영들이 백호수문금군들이었다. 백호영이 하나같이 절정고수 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백호나한의 끌어주기 비무수업 때문이다 . 무예를 읶힐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기혈(氣穴)이다. 인간이 태어날 때 갖고 있는 기운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선천지기(先天之氣)다. 사람이 태어 나서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질병에 시달리다 죽게 되는 이유는 세속(世俗) 의 탁기(濁氣)에 선천지기가 더럽혀지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 탁기가 바로 기의 통로인 기혈(氣穴)을 막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무공(武功)은 세속의 탁기에 영향을 받기 전에 시작되어야 했다. 뼈가 굳지 않고, 근육이 부드러 울 때부터 수련을 시작해야 나이가 들어서도 유연하게 움직이게 되는 것이 다. 그러나 무도(武道)란 한계를 시험하고 극복하는 길이다. 그러니 당형하게 수련하다 무리를 하여 다치거나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러므로 무도자는 언제나 수련(修鍊)과 정양(靜養) 반복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백호영은 라혼과 함께 있음으로 정양의 시간이 없이 극한의 수련만 을 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막히게 되는 기 혈(氣穴)을 계속 타통(打通)시켜주니 단기간에 고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 그러나 백호영은 인간이 발견한 무도의 궁극적인 경지인 깨달음의 경지, 바로 깨달음의 무공을 얻기엔 요원(遼遠)했다. 무도자(武道者)는 정양의 시 간이란 그저 버리는 시간만은 아니었기에……. 라혼과 백호영은 계곡에 들어서 한참을 달리다 문득 제자리에 멈춰 섰다. "주군, 이상합니다. 여자와 아이들뿐일 텐데……." "……." 추적전문가인 양엽구 구만혁의 말을 듣고 라혼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라혼 의 이목(耳目)에도 그들의 적확한 위치가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석과 잔폭광마를 찾을 그때와 같다. 가까이 갈수록 위치가 모호해지는 이것은 도대체 뭐지? 그때는 뜻밖에도 드워프들 만나 그대로 덮어두었는데 이건 뭐지?' 라혼은 가만히 의식을 개방해 주위의 모든 생명들에 귀를 기우렸다. 그리고 하나하나 모든 것을 짚어나갔다. 그리고……. '찾았다. 쉴 새 없이 격동하는 기운들 속에 극히 정적(靜的)인 공간이 있다 . 넌 뭐냐?' 라혼이 뭔가 포착한 그때 구만혁이 자기 나름대로 정보를 분석하고 추측해 뭔가를 발견해 보고했다. "주군, 아래입니다. 덩굴아래에 숨겨진 암도(暗道)가 있습니다." "내려간다!" -촥! 백호영들은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계곡아래를 덮고 있던 덩굴들을 잘라내 고 그 구멍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기운을 더듬어 그곳을 찾아냈다. 그러나 구만혁은 직감이 아닌 분석 으로 원하는 것을 얻어냈다.' 라혼은 자기지신의 경험과 여러 가지 정보와 흔적을 기초해 분석하여 원하 는 것을 얻는 구만혁을 보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라혼은 좀 더 강해졌다. 기분이 좋아진 라혼은 구만혁이 발견한 암도를 따라 정적인 공간을 향해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으악!" "악, 뜨거!"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드디어 라혼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그 공간에 도착 했다. 라혼은 앞으로 나서며 손을 결계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자 허공에 뻗은 손이 '확!'하는 불꽃과 동시에 타오르기 시작했다. "결계로군." "주군?" 밝은 빛과 함께 타오르는 손을 보고 백호영들은 기겁하며 만류하자 라혼은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결계 밖으로 나온 손은 아까 본 것이 환상인 냥 깨 끗했다. "재미있군! 백호영은 이곳에서 대기한다." "주군, 위험합니다." 표상치가 나서며 만류를 했지만 라혼은 결계 너머에 있는 존재가 무엇인지 꼭 확인 하고 싶었다. 그래서 미지에 세계로 들어가는 묘한 설렘을 느끼며 결계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화르르르르르르…………. 그리고 새하얀 불꽃이 라혼의 전신을 태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 로 그렇게 보일뿐이었다. 라혼은 에텔 스페이스로 초공간결계(超空間結界) 를 몸 주위에 쳐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 결계의 열은 라혼의 초공간결계(超 空間結界) 비웃기라도 하듯이 라혼에게 참을 수 없는 뜨거움을 안겨주었다. 그렇게 백보가까이 걸음을 옮긴 후에야 라혼은 우르하 부족이 숨어있는 곳 에 다다를 수 있었다. "……." 눈부신 하얀빛과 함께 타오르며 걸어오는 모습에 여자와 아이 그리고 힘없 는 노인들은 두려움에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라혼의 관심 은 이미 정갈한 제단 위에서 타오르는 붉은 머리와 진토인들과 전혀 다른 창백한 하얀 피부의 여인이었다. 라혼은 불꽃의 그것과 같은 붉은 옷을 입 고 쉴 새 없이 주문을 외우는 그녀에게 조용하고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주문을 멈추지 않으며 대항하겠다." "……." 라혼은 그러자 뜨겁게 달구던 절대 꺼지지 않을 것 같은 불꽃은 이내 사그 라졌다. "욱!" 그리고 창백한 여인은 제단위에다 한 덩어리 핏덩어리를 쏟아냈다. 그리고 주위에 있던 여인들이 붉은 머리를 한 여인을 겹겹이 감싸며 라혼에게 적의 를 들어내며 경계했다. "주모(朱母)님!" "괜찮아요. 이젠 됐습니다." "……!" 라혼은 고개를 든 그녀의 얼굴을 보고 깜작 놀랐다. 곱실거리는 불꽃같은 머리와 붉은 기운이 서린 눈동자의 그녀는 설화와 너무도 닮아있었기 때문 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운명이 없는 분이시여," "나와 가줬으면 한다." "……." 라혼의 요구에 잠시 침묵하던 불꽃의 여인은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리고 희디흰 발을 내디뎌 걸음을 옮기려 했다. "주모님!" "주모님!" 그러자 우르하의 여인들이 눈물을 흘리며 땅바닥에 엎드려 길을 만들었다. 바로 주모로 하여금 땅에 발이 닿기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길은 이내 끝나고 말았다. 불꽃의 여인이 라혼의 바로 앞까지 접근하자 그 투명 하도록 하얀 발을 검은 흙이 깔린 땅에 내려놓았기 때문이었다. "주모님! 흑흑흑……." "흑흑흑흑……." 그러자 우르하 부족 사람들은 흐느끼기 시작했다. 라혼은 그런 그들을 무심 한 눈으로 바라보며 천리전성(千里傳聲)의 수법으로 백보밖에 있을 백호영 들에게 이들의 신병을 확보하라는 명을 내렸다. "음!?" "왜 그러시나요? 소궁주님?" "몰라! 굉장히 불길한 느낌이 들어서……." 장동 북지무림맹의 내원정자에서 차를 마시던 설화는 갑자기 드는 불길한 느낌에 어리둥절했다. 정립천하를 외치는 반란군이 대군을 이끌고 현재 남 하중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모두 예의주시하는 일이었다. 힘들다는 것은 알 지만 모두 투지를 불태우는 상태인지라 특별히 걱정해야하는 일이 아니었다 . 그리고 설화는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실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장 동의 일로 그런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묘연언니, 서방님 괜찮을까?" "설화 소궁주님, 상공은 정말 '인간' 같지 않게 강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에 게 위해는커녕 위협이 될 만한 일도 있을지 궁금할 지경인데?" "그렇지? 그렇데 인간 같지 않다는 건 뭐야? 우리 서방님이 요괴라도 된다 는 거야?" 오랜만에 따지고 드는 설화였지만 아직까지는 말로써 주묘연을 당해낼 수 없었다. "어머 그럼요. 이렇게 고우신 아가씨를 한 방에 같이 지내면서 이때까지 ' 독수공방(獨守空房)'하게 한분이니 요괴보다 더 희한한 분 아니실까요?" "웅! 이번일이 마무리되면 진짜 부부가 된다고 했어!" "어머나 진짜요? 그때가 되면 꼭 엿봐야지. 궁주님과 장로들에게 알려드려 야……." "으앙악! 그만 그것은 참아줘!" "어머머머, 그것은 고래(古來)로 전해 내려오는 풍습이라고요. 첫날밤은 원 래 그렇게 하는 거예요." "난 싫어! 그런 걸 어떻게……." "그런 게 어떤 건데요?" "그, 그게……. 몰라!" 말싸움에서 진 설화는 팽 돌아섰지만 주묘연은 오히려 더 느물거리며 말했 다. "정말, 너무하네. 시집도 가지 않는 생 처녀를 앞에 누고, 헌헌장부인신 남 편 자랑하는 건 무슨 심보람?" "……." 귀매지림(鬼魅之林) 우르하 부족으로부터 절대적인 보호와 숭배의 대상이었던 주모(朱母)가 자 의에 의해 라혼에게 몸을 의탁하는 것으로 우르하 마을의 토벌은 마무리 되 어버렸다. 백호영의 압도적인 전력에 모든 우르하의 부족민들이 생포되었고 , 별다른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망할! 이렇게 잡아놓을 것이라면 뭐 하러 2만 대군을 움직인 거야? 그리고 그 녀석은 왜 보이지 않는 거야?" "이들은 그냥 하수인일 뿐이네, 당시 우릴 납치한 주범은 따로 있다네." "뭐요? 그놈들이 누구요?" "남례일족!" "그럼 당장 그놈들을 잡으러 갑시다." 일단 겉으로 밝혀진 우르하 부족은 일망타진(一網打盡)했으나 주군인 라혼 이 별다른 사후지시가 없어 그저 한곳에 잡아두고만 있는 형국이었다. 그러 나 성질 급한 잔폭광마는 자기를 사흘간이나 인사불성인 상태로 머물게 했 던 그들을 손보고 싶어 안달했다. "자네가 알아서 하게 나는 말릴 생각이 없으니……." "아니 정말 이럴 거유? 고작 진토인 수백을 잡기위해 2만 대군을 움직인 것 이 아닐 것인데 나는 저것들 잡을 때 칼 한번 휘두르지 못했단 말이오!" "그러니까 자네가 주군에게 그것을 주청하란 말일세. 나와 고참령을 제외하 고 직급이 가장 높은 자네 아닌가?" "에? 하, 하지만……." 모석은 그날 주군에게 칼을 휘두르며 대들다 주군의 손에 잘근잘근 다져지 던 잔폭광마 육삼이 떠올라 고소(苦笑)를 머금었다. 사실 주군과 항상 함께 있어 눈치를 체지는 못했지만 주군은 물론 백호영 모두 그 실력을 가늠하 기 힘들었다. 잔폭광마가 조정에 귀순-사실 라혼의 백호영에-한 이후 다른 백호십일걸과는 간혹 손을 섞어보기도 했지만 그들의 주군인 백호나한의 실 력에는 의문을 품고 있었던 것인 사실이었다. 잔폭광마가 스스로 판단하기 를 다소 우위거나 평수를 이룰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날 잔 폭광마는 자신의 넘어설 수없는 거대한 하늘을 본 것이었다. "에잇! 젠장, 대장은 전리품을 얻어놓고 부하에게 일언반구 수고했다는 말 이 없다니……." "주군이 무슨 전리품을 따로 챙겼다고 그러나? 이들에게 무슨 보물이라도 있었단 말인가?" "아! 그 천고의 미녀를 사흘이 넘도록 옆구리에 끼고 사는데……." 모석은 그제야 잔폭광마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우르하 부족에게 주모(朱母)라 불리던 무녀(巫女)를 주군이 항상 곁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라혼은 불꽃의 여인을 사흘간 곁에 두고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았다. 그녀도 그의 그것에 호응이라도 하듯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호기심 가득한 눈길 로 라혼의 찬찬히 뜯어보았다. 서로 침묵한 체 대화하는 기이한 대화는 그 렇게 사흘이나 이어졌다. "……." 그리고 다시 날이 어두워지며 하루가 끝날 무렵 그녀의 입이 열렸다. "오늘밤 침입자가 있을 겁니다. 무리한 부탁인줄은 알지만 그를 해하지 마 십시오." 여인의 고혹적인 입술을 비지고 나온 그윽한 미성(美聲)에 라혼은 그녀의 붉은 보석과 같은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그를 해칠 것이라 생각하는가?" "……." 여인은 내력을 알 수 없는 장수가 자신의 말을 믿는다는 전제로 질문을 하 자 조금 당황했다. "모르겠습니다." "뭘 말인가?" "……." 그녀가 침묵하며 대답할 말을 찾으려 할 때 라혼이 말했다. "그대는 무녀(巫女)다." "……." "나는 그대가 그대 스스로를 내에게 설명해 주길 원한다!" "……." 라혼의 질문에 불꽃의 여인은 다시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드디어 라혼이 그토록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저는 불새의 무녀, 가니아입니다. 죽지 않는 새, 마지막 순간 화려한 불꽃 내며 사그라지어 재속에서 부활하는 새의 무녀입니다." "부족하다." "피닉스, 주작, 가루다, 봉황, 그리고 태양의 까마귀……." "부족하다." "……." 최강최고의 환수(幻獸) 불사조(不死鳥) 피닉스(Phoenix) 그 신성한 불꽃으 로 세상의 모든 것을 정화(淨化)하고 저 위대한 드래곤들조차 감당할 수 없 는 불꽃 속에서 살아가는 새. 전설에 다르면 불새의 깃털을 얻은 자는 불새 를 찾을 수 있다고 전해진다. "저의 선조는 우연히 불새의 깃털을 얻어 불새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갖은 고생 끝에 불새를 찾아낸 불새의 무녀 '가니아'의 선조는 불새에게 한 방울의 피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후손들은 대대로 젊음을 유지 한 체 오래 사는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그 후로 그의 후손은 단 한명씩의 자손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은 미래를 엿볼 수 있는 능력과 불새의 정화의 불꽃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선조들은 위험을 미리피 하고 세상을 관조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대는 내가 두려운가?" 라혼은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중간 불쑥 질문을 던졌다. "두렵습니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런가? 자손이 있는가?" "있습니다." "그 아이는 언제 태어났는가?" "80년 전." "그대의 나이는?" "127세!" "80년전 태어난 아이의 아비가 누구인지 물어도 되겠는가?" "강무인!" 푸른 달빛을 찾을 수 없는 그믐. 호리호리한 체구의 검은 그림자가 화톳불 이 일렁이는 불 그림자를 타고 군사들의 막사사이로 스며들었다. 검은 복면 을 쓴 침입자는 순찰하는 병사들이 접근하자 막사의 어두운 그림자에 몸을 숨겼다. -퍽! "헉!" 그러나 검은 복면을 쓴 침입자는 자신 몸을 숨기 천으로 만들어진 막사가 불룩해지면 등을 때리자 몸이 화톳불이 비치는 밝은 곳으로 넘어지는 형상 이 되었다. 그리고 막사에서 휴식을 취하던 병사의 짜증스런 목소리가 그 침입자의 귀속에 파고들었다. "뭐야, 이건?" "얼씨구……." 검은 복면을 쓴 침입자는 두개의 예리하게 날이 선 비수를 꺼내들고는 날렵 하기 그지없는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앞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병사들을 향해 휘둘렀다. 그러나 상대는 백호영에 소속되어있는 무사였다. 맨손으로 칼날을 잡는 공수탈백인(空手奪魄刃)의 수법으로 너무도 자연스럽게 빠르고 민첩하기만 했지 검기(劍氣)나 검경(劍勁)이 깃들지 않은 검은 복면을 쓴 침입자의 비수를 낚아채고 동시에 금나수법(擒拿手法)으로 그의 완맥을 잡 았다. "헉! 큭!" 완맥을 잡힌 검은 복면을 쓴 침입자는 짧은 심음성과 함께 입술을 깨물었다 . "어라? 아직 어린애잖아?" "어쩌지?" "어쩌긴 일단 보고해야지." 너무도 간단하게 수습된 침입자 생포였다. 두 백호영 무사는 침입자의 복면 을 벗겨내고 마혈(痲穴)을 점혈(點穴)해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는 그대로 야 영지 중앙에 있는 주군의 막사로 끌고 갔다. 백호영의 야영지를 침입했던 소년은 자신의 실력이 부족함을 한탄하며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뭔가?" "침입자입니다." "침입자?" 오늘 당직을 서는 초강남은 침입자라는 말에 호기심을 느끼며 백호영의 손 에 들린(?) 검은 옷을 입은 진토인 소년을 보고 고개를 들어 물었다. "그 애는 아직 소년이 아니가?" "예, 그러나 꼬마치곤 손속이 참으로 매서웠습니다." 그는 사정을 설명하며 아까 빼앗은 비수를 꺼내 보여줬다. 초강남의 그 비 수를 건네받고 찬찬히 살핀 다음 주군에게 침입자를 데려갔다. "주군, 본영에 침입자가 있어 데려왔습니다." "들어와라!" 주군의 막사엔 여전히 배경처럼 같은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자리를 잡은 불 꽃의 무녀와 맞은편 자리를 잡은 주군의 모습이 보였다. 어찌 보면 다정한 부부처럼 보이기도 하는 아름답기 그 없는 미녀와 헌헌미장부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초강남, 그 아이를 두고 나가서 침입자를 잡은 백호영에게 치하의 말을 대 신해라. 그리고 내일 오전 중 백호십일걸을 모이라 전하라!" "옛 알겠습니다." 라혼은 초강남이 밖으로 나가자 지풍(指風)을 튕겨 소년의 막힌 혈도(血途) 를 풀었다. 그러자 마혈이 풀린 소년을 뒤로 물러서며 경계심을 버리지 않 았다. "가니아, 저 아이는 누구지?" "다키, 무공을 익히기 위해 남례일족의 성지에 있던 아이예요." "주모님?" 라혼은 가니아의 태도에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의 소년을 격공흡인(隔空吸 引)으로 빨아들여 완맥을 잡았다. 순간 소년은 입속에 숨겨둔 암기를 뱉어 냈다. -퉷! 라혼은 오른 눈을 노리고 쏘아져오는 강침(鋼針)을 왼쪽으로 고개를 접히는 것으로 피함과 동시에 다키란 소년의 몸에 금강진기(金剛眞氣)를 흘려보냈 다. -끄아아악! "라혼!" 그러자 소년을 고통에 겨운 비명을 내질렀고, 주작(朱雀)의 무녀 가니아는 라혼의 이름을 불렀다. "살예로군, 너는 살수로 키워진 존재구나!" "크윽!" 살예(殺藝)란 사람의 목숨을 가장 효과적으로 빼앗는 무예를 말했다. 라혼 은 소년의 몸에서 금강진기(金剛眞氣)를 거두고 가장 순수한 마나(Mana)를 주입했다. 역시 소년의 몸엔 배신에 대비한 고충(蠱蟲)이 존재했다. 고충은 고독(蠱毒) 또는 고(蠱)라 불리는데 인간의 몸속에 기생할 수 있는 맹독성 벌레로 시전자의 피로 사육되어 영적인 교감으로 고(蠱)는 상대방의 몸에 투입되어 몸속에 잠복, 기생해 있다가 시전자의 명이 있을 경우 숙주를 공 격해 심한 고통을 주거나 죽이게 된다. "역시 그랬었군요. 불쌍하게도……." 주작의 무녀 가니아는 라혼의 설명에 납득하며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가이아의 손이 하얗게 빛나며 소년 다키의 머리로 스며들었다. 그리 고 다시 빠져나온 가니아의 손엔 꿈틀거리는 시뻘건 핏덩이가 잡혀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불꽃이 일며 소멸되었다. 라혼은 '정화의 불꽃'으로 소년의 뇌 속에 박힌 고충을 제거하는 가니아의 능력에 호기심어린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역시 불새의 무녀답군. 어떻게 한 거지?" "저도 모릅니다. 어느 순간 할 수 있게 됐을 뿐이에요." 라혼은 가니아라는 존재가 너무도 신선했다. 하는 일마다 호기심을 자극하 면서도 명확하게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라혼은 전설과 신화 속에서 만 일컬어지던 불새, 불사조, 가루다, 금시조, 봉황, 주작, 피닉스 등 셀 수도 없는 이름을 가진 환수가 있다는 증거를 발견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 그러나 그러한 것은 불새의 무녀 가니아도 마찬가지였다. 가니아에게는 선견(先見)의 권능이 있었다. 그래서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능력 덕분에 위험을 미리미리 피해왔었다. 특히 어떤 인물을 만나며 그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사람인지 그의 과거와 근 미래의 모습을 미리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라혼이란 존재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물론 그 와 인연이 닿아있는 모든 존재의 미래는 알 수 없었다. 나이를 먹어 각성( 覺性)한 이후 그러한 경험을 최초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하는 요구를 거 절 할 수 없었다. 아니 누구가가 그의 요구를 거절하지 말라고 속삭이는 듯 했다. 그래서 가니아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그의 요구대로 그의 곁에 머물렀 다. 그는 자신의 두려움을 읽었는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가니아는 두려운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를 찬찬히 뜯어보며 선견을 시 도했다. 그러나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두려움이 적응 될 무렵 그에게 말을 걸었고, 그에 요구에 따라 자신의 모든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가니아는 참으로 오랜만에 선견의 권능이 아닌 인간으로써 의 느낌으로 라혼이란 존재를 믿고 질문을 던졌다. "제게는 미래를 읽는 능력이 있어요. 그런데 라혼 당신과 당신이 관계된 모 든 것들에게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나도 모른다. 이유가 짐작되기는 하지만 그대에게 말할 수 있는 것 이 아니다." 라혼은 그렇게 대답하고 기절한 소년을 안아 침상에 누이며 물었다. "가니아, 어떻게 해서 우르하 부족과 살게 되었는지 궁금한데 말해줄 수 있 겠나?" "그것은 제 선조가 불새의 깃털을 잊어버렸기 때문이에요. 불새는 자신의 피한방울을 나누어주었을 뿐 깃털을 거두어가진 않았어요. 불새의 깃털은 어디든 자유롭게 여행을 가능하게 하는 권능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곳에 와 서 초록색 용(龍)에게 그것을 빼앗겨 오도 가도 못할 때 우르하 부족민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해요." "그래서 대대로 그들의 무당(巫堂)이 되었군." "그래요. 그리고 저희 아버지의 마지막 예언에 이르기를 제가 땅을 밟을 때 우르하와 인연이 끝난다고 했는데……." 다음날 아침이 되자 라혼은 회의를 소집하여 군사를 나누어 봉수부를 중심 으로 주변지역을 행군하여 무력시위를 지시했다. 그리고 우르하 부족은 이 곳 진토인들의 방식에 따라 모두 라혼개인의 노예로 삼았다. 진토인들의 전 쟁이란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기 때문이었다. 다만 진토인들의 방식과 다 른 것은 남자를 죽이거나 또는 거세를 하는 것인데 라혼의 입장에선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기에 그대로 두고 물론 아내도 빼앗지 않았다. 우르하 족 도 이미 전쟁에서 졌기 때문에 승자의 요구에 순순히 응했다. 그것으로 라 혼은 이 첫 번째 토벌로 진토인들이 주축이 된 반란을 제압하는 방식을 알 아냈다. 그리고 라혼은 드디어 드워프마을에 가서 차분하게 지낼 여유를 확 보했다. 라혼은 가니아와 함께 도깨비 숲으로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 ]했다. "노, 놀랍군요. 다, 당신은 신선(神仙)인가요?" "확실히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신선은 속세에 관여하지 못하게 되어있지 않나요?" "내가 신선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신선들의 규칙을 지킬 이유는 없다오. 나는 신선이지만 신선이 아니거든." 라혼이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한 곳은 귀림(鬼林)의 중앙부에 해당 하는 곳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여전히 드워프 마을로는 직접 [텔레 포트 워프Teleport warp]가 되지 않았다. 다만 홍칩의(訌蟄蟻)란 이름에 개 미들의 개미집이 우글거리는 개미지옥만 피했을 뿐이었다. "음? 이상하군요. 저쪽에서 저와 불새의 기운이 느껴지는데 초록용이 사는 곳인가요?" "아니, 이곳에 살던 초록용은 신룡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하오. 그리고 그곳 은 드워프 그러니까 토지신들이 사는 마을이 있는 방향이오." "……." 라혼의 설명을 들은 가니아는 마치소녀가 된 듯 좋아했다. "음?" "왜? 아!" 라혼의 감각에 어디선가 싸우는 기운이 감지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라혼에 게 매우 익숙한 기운이었다. 그리고 갑작스런 라혼의 반응에 의아한 표정을 짓던 가니아는 비로서 뭔가 떠올랐는지 탄성을 토해냈다. "누군가 근처에서 죽임을 당하는 군요." "……." "가서 도와요." 가니아는 라혼이 지금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로 한 번에 갈까 아니 면 신법으로 뛰어갈까 고민하는 것을 도울까 상관하지 말까하는 것으로 오 해해 그들을 도울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그것이 라혼의 고민을 끝내게 했 다. "어머!" 라혼이 가니아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 안으며 그대로 몸을 날렸기 때문이 었다. 바로 백호영의 독문신법(獨門身法)인 풍운조화신법(風雲造化身法)이 었다. 풍운조화신법은 여의금강공(如意金剛功)의 공력의 바탕이 된 여의조 화신공(如意造化神功)의 이치를 담은 절세경공으로 한줌 진기로 주변 대자 연의 기(氣)를 이용 달리는 신법이었다. 가니아는 허공을 나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밀림의 위를 달리는 라혼의 몸을 붙잡았다. 그리고 아주 빠른 속도 로 달리는 듯했지만 살갗으로 느껴지는 바람은 별로 없었다. 그것은 라혼이 결계를 쳐서 엄청난 풍압으로 붙어 그녀를 보호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밀림을 이루는 나무 위, 수해(樹海)를 2십리(二十里)쯤 달리자 두 무리가 서로 살육전이 한참인 전장 바로 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일단 도착 하고 보니 참으로 난감했다. 누구를 어떻게 도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 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유운검법(流雲劍法)?" 바로 라혼을 이곳으로 오게끔한 익숙한 기운을 사용하는 묘령(妙齡)의 미녀 (美女)가 다름 아닌 라혼이 만든 유운심법(流雲心法)을 기초한 유운검법으 로 여인으로만 이루어진 진토인들을 주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토인인 여인들은 무장을 한 모습으로 침입자들과 맞싸우고 있었고, 한쪽 에서는 역시 무장을 한 트롤(Troll)이 그런 진토인 여전사의 부림을 받아 이곳 사람들이 아닌 사람들과 연합한 진토인들 찢어발기고 있었다. 차레족 의 여전사들는 무공은 모르는 듯 했으나 그녀들이 부리는 트롤(Troll)은 웬 만한 고수이상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뭐하세요! 어서 저들을 도와요!" "누구를 말이오?" "저들은 여인부족인 차레족이에요. 저들은 이곳에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선 량한 부족이에요." "그러나 그 차레족을 공격하는 측은 나와 인연이 있는 듯한데……." "아니오, 저들이 바로 남례일족의 고수들이에요." 앳돼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127년을 허투루 산 것이 아닌 가니아는 그동안 지내오며 라혼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빚을 지고 살지 못하는 라혼에게 사정이 있어-드워프들의 지식을 갈취하는 일 때문에- 미뤄두었던 빚의 일부(?)를 갚을 기회가 왔음을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라혼은 허리춤에서 그동안 쓰지 않았던 설화의 나비를 뜻하는 호접검(蝴蝶 劍)과 쌍을 이루는 말벌을 뜻하는 호봉검(胡蜂劍)을 뽑아들고 그대로 살육 전이 한참인 전장 한가운데로 떨어져 내렸다. "헉!" 라혼은 백호영의 독문보법인 군림천하보(君臨天下步)를 밟으며 보법에 맞춰 약간 초식을 바꾼 유운검법으로 전장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군림천하보는 만력의 창안하고 라혼이 보완한 것으로 매우 공격적인 보법이었다. 어찌 보 면 보법임과 동시에 독립된 하나의 권법이었다. 거기에 라혼은 피어(fear) 를 가미해 더욱 위력적으로 만들었다. -쿵! 쿵쿵쿵쿵쿵쿵쿵쿵………………. -퍽! -쿠워엑~! 군림천하보(君臨天下步)를 밟는 특유의 지축이 울리는 육중한 소리와 그런 보법과 어울리지 않는 듯한 가볍기 그지없는 검법은 어찌 보면 상호보완이 잘되는 듯했다. 라혼은 되도록 사람이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특유의 검경( 劍勁)으로 상대를 쳐갔다. 라혼의 특유의 예리함을 죽인 검경에 맞은 상대 는 만근바위에 맞은 듯 사방으로 흩어져 나무 등걸에 처박혔다. 그것은 맷 집좋고 웬만한 상처는 순식간에 회복해버리는 트롤이라고 해도 별수 없었다 . 흉성을 드러내며 이빨을 드러낸 트롤들은 라혼이 휘두른 호봉검(胡蜂劍) 에 맞는 순간 괴성과 함께 허공을 날아 땅바닥에 처박혀 혀를 길게 내민 체 기절했다. "누구? 서, 설마 유운검법?" 하늘에서 '뚝!' 떨어진(?) 초극절세고수가 장내에 난입하자 그 위세에 밀려 한순간에 전투가 멈춰졌다. 그리고 그가 구사한 검법이 누군가와 꼭 닮은 꼴이자 차레 족을 핍박하던 무리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미녀에게 집중되었 다. 그러나 정작 미치고 팔짝뛰고 싶은 것은 다름 아닌 바로 그녀였다. 피와 살이 난무하는 싸움을 힘으로 중단시킨 초극절세고수는 오연(傲然)한 자세로 좁은 검면을 가고 있는 협봉검(陜蜂劍)을 늘어트리고 있었다. "……." 약간의 침묵이 흐르고 그의 시선이 한곳에 계속 머물러 있자 그 시선이 머 문 자리 옆에 있던 검은 피부에 큰 눈 그리고 하얀 치아가 인상적인 청년이 앞으로 나서며 읍(揖)하며 물었다. "고인의 청수를 방해된 것에 사과드립니다. 혹 고인의 존성대명을 알 수 있 으련 지요?" "나는 라혼이다." "잠깜만요. 당신은 해노 할아버지와 무슨 관계죠? 당신이 사용한 검법은 함 관검부의 조사께서 만든 원류 유운검법이 분명해요?" 라혼은 검부의 한포포가 분명한 그녀에게 자기가 바로 해노(海老)라고 밝히 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신분을 대충 꾸며서 대기로 했 다. "당신이 유운검법을 쓰는 것을 보니 당신은 한포포가 분명하구려." "맞아요! 제가 동인성 함관부에 있는 검부의 한포포에요!" 흑의경장차림을 한 한포포는 상대가 자신을 아는 듯하자 기쁜 듯이 눈빛을 반짝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는 대무도경의 전인이오!" "헉!" "음!" 대무자(大武子) 해노야(海老爺)의 위명은 과거 18년 전 천하를 진동시켰다. 지금은 웬만한 세력을 가진 문파라면 대무자의 대무도경(大武道經)을 가지 고 있었으나 그 내용의 현묘함에 아직까지 많은 고인들이 머리를 싸매게 했 다. 그리고 대무자 해노야의 무공우위를 능히 짐작하게 하는 몇 가지가 있 었으니 과거 검부의 혈사(血史)의 원인된 검부를 둘러싼 돌로 된 성벽전체 에 대무도경의 구문을 새겨 넣은 것이나 그의 사사 받은 좌우무공(左右武公 ) 한씨형제의 무공은 가히 독보적이었다. 그러나 한씨형제는 대무자의 독문 무공은 전해 받지 못했다고 했다. 그런데 대무자의 전인이라면……. "할아버지는 안녕하신가요?" "안녕하오." 라혼이 한포포와 대화하는 사이 남례일족의 소야(少爺)는 수하에게 라혼이 바로 백호나한임을 보고받고 있었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하하하, 천하의 백호나한이 대무자의 전인이었을 줄이야! 소생은 남례일족 의 예하(藝河)라 하오. 이렇게 만나서 매우 반갑소이다." 라혼은 자신을 아는척 접근하는 예하라는 사내를 무시하고 한포포에게 물었 다. "한소저는 남례일족과 무슨 관계요?" "어머? 당신이 백호나한? 그렇다면 당신은 우리와 남이 아니에요. 저는 백 수회의 남례총타주의 신분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남례일족은 잠정적으로 우리 백수회와 손을 잡고 있는 관계구요!" 라혼은 일주일쯤 전에 봉수태수 돈석을 통해 백수회에 손을 잡자는 뜻을 밝 힌 적이 있었다. 아마 그 이야기가 스스로 남례총타주라 밝힌 한포포가 알 고 있는 것은 어쩌면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 "남이 아니라니 묻겠소! 이들을 무엇 때문에 핍박하는 것이오?" "그, 그건……." "이곳 귀림에 산다는 토지신은 이미 나와 관계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을 터 이곳을 공격할 이유가 없을 텐데?" "……." 라혼은 자신을 예하라고 밝힌 사내가 흠칫 놀라는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아마도 그러한 사실은 숨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라혼은 한 걸은 더 나아가 슬쩍 떠 보았다. "혹, 장생불로의 묘약이라도 찾고 있는 것이오?" "……." 라혼은 그들의 겉모습은 별동요의 기색이 없었지만 그들의 기운은 그들이 드워프, 토지신들이 가지고 있을 불새의 깃털을 노리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 다. "역시 그렇군. 그러나 그것은 주인이 따로 있으니 포기하시는 것이 좋을 것 이오." -쿵! 마지막 말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는지 라혼은 그들에게 고르지 않은 기 운을 느꼈다. "가니아, 이젠 내려오시오." 라혼은 그런 그들을 그대로 두고 나무위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가니아를 허 공섭물(虛空攝物)의 수법으로 땅으로 내려오게 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홍 발천녀(紅髮天女)의 모습은 너무나 신비로웠다.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자 차 레 족 여전사들은 저마다 오체투지(五體投地)하며 바닥에 엎드렸다. 벌써 천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알고 지내던 관계였다. 과거 한때는 우르하 족과 전쟁을 하기도 했지만 우르하 족의 주모(朱母)는 차레 족에게도 신성한 존 재였다. "주, 주작의 무녀? 주작의 무녀가 어찌 백호나한과……?" 가니아가 상처 입은 차레 족을 치료하는 모습을 경악을 금치 못하며 쳐다보 던 예하는 백호나한이 한 주인이 따로 있다는 말의 뜻을 사무치도록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하얀 빛으로 가슴과 복부에 이어진 생명이 위중한 상처 를 감쪽같이 치료하는 모습을 보자 그동안 들인 공과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 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남례일족의 소야(少爺) 예하는 치명적인 결정을 하 고야 말았다. "보물의 주인은 언제나 하늘이 정하는 법! 귀인대(鬼人隊)는 주작의 무녀의 신병을 확보하라!" "흥! 감히 우리 백수회를 무시하는 겁니까? 예하공자?" "한줌도 안 되는 백수회 따위는 무섭지 않다." "네놈이……?!" 한포포는 남례일족의 소야 예하의 앞을 검을 세우며 막아서다 정신이 핑! 도는 느낌과 함께 몸에 힘이 풀리며 그대로 쓰러졌다. "크크크, 혼미산(魂迷散)이란 것이다. 색도 냄새도 없는 아주 요긴한 물건 이지! 그리고 해독제까지 따로 있어서 써먹기도 편하다는 것이지. 음!?" -퍽! -쿵! 쓰러진 한포포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한순간 한눈을 팔던 예하는 눈앞에 발바닥을 본 순간 번쩍하는 느낌과 함께 허공을 날아 나뭇등걸에 처박혔다. 그것을 시작으로 라혼의 인정사정없는 살풀이가 시작되었다. 우습게도 소 야 예하의 혼미산(魂迷散)은 라혼에게 확실한 적아를 구분 하게하는 역할을 한 셈이었다. 그러나 설화와 꼭 닮은 가니아 앞에서 참아 살상을 저지를 수 없어 무공을 폐하는 수준에서 쓰러지지 않은 모든 인물들의 무공의 폐해 버렸다. 무인에게 무공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은 죽음과 다를 바 없 는 형벌이었다. 얼마 후 정신을 차리고 있는 존재는 오직 라혼과 불새의 무 녀인 가니아만 남게 되었을 때 가니아는 주변을 돌면서 차레 족 여전사와 라혼과 관계있는 자들을 깨웠다. "감사드려요." -포아, 오랜만이구나! 내가 그때 괜한 짓을 해서 네 아비를 죽였구나! "?!" 라혼의 전음성에 한포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가만히 미소 짓는 그의 모습 에 한포포는 앞에 있는 이 헌헌미장부가 해노야, 라혼 할아버지임을 알고 크게 놀랐다.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맞나요? -겉모습이 바뀌긴 했지만 네가 할아버지라 부르던 해노가 바로 나다. 네 오 빠들의 이야기는 소문으로 잘 알고 있었지만 네 안부가 궁금했는데 강무가 의 그 사람이 나의 의도를 제대로 알았구나. 한포포는 앞의 젊은 사내가 양부인 낙왕 강무산이 들려준 이야기를 알자 의 심을 떨쳐버렸다. -그렇군요. 해노야 할아버지는 당신이 신분을 감추기 위해 위장했던 것이군 요. -……? 라혼은 한포포의 전음을 받고 그녀가 일을 이상한 방향으로 간다고 느꼈다. -아무리 무공이 극한에 이르러 반로환동한 고수라지만 치아가 그렇게 깨끗 할 순 없어요. 더 이상 절 속이려 들지 말아요. 전 더 이상 그때의 조금만 계집아이가 아니에요! 라혼은 그 건에 대해선 그대로 덮어두기로 했다. 지금 이 모습으로 말만한 처자에게 할아버지 대접받는 것도 우스웠기 때문이었다. 라혼이 대꾸나 반 박을 하지 않자 한포포는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을 굳혔다. 그리고 괜스레 어릴 적 기억이 떠오르며 가슴이 뛰고 얼굴이 확끈거렸다. 그리고 보니 옷을 홀딱 벗고 그의 손에 씻기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인간 이라면 유아기 때 기억이 희미할 것이나 수인(獸人)들은 유아기 때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한포포는 수인(獸人)이었다. 한포포는 귀가 머리에 튀어나와 쫑긋거리며 라혼을 외면한 체 부하들에게 기절한 남례일족을 포박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1대는 저것들을 포박하고, 2대는 부상자와 시신을 수습해라!" "존명!" 백수회의 무사들은 남례총타주인 한포포가 고양이 귀를 드러내고 쫑긋대며 지시를 하자 무척 화가 난모양이라고 수근 대며 빠른 몸놀림으로 장내를 수 습하기 시작했다. "은공(恩公)!" 차레 족의 족장인 쿠차레는 어려운 지경에 처한 자신들을 도와준것에 대힌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녀는 삼단 같은 고운 머리를 양갈레로 땋아내려 화 려한 색상의 새 깃털로 장식하고 검고 탄력 있어 보이는 피부와 싸우는 전 사임을 증명하듯 굴곡이 선명한 허벅지와 팔의 근육이 인상적인 여인이었다 . 탄력있는 몸매를 봐서는 나이를 짐작 할 수 없었으나 얼굴은 세월의 흔적 을 지울 수 없었는지 눈가에 중년이상의 나이를 먹은 듯 잔주름이 눈에 띄 었다. "저희들의 어려움을 도와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은혜를 갚는 것은 당연한 법. 은혜를 갚도록 도와주십시오." "어떻게 말이오?" 은혜를 갚겠다고 하니 거절할 라혼이 아니었다. 뭔가를 얻어서 손해날일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저희들이 오늘 밤 잠자리를 뫼시겠습니다." "……." "무슨 소리야!" 라혼이 할 말을 잠시 잊은 옆에서 라혼과 차레족 족장 쿠차레의 대화을 엿 듣고 있던 한포포가 먼저 반응했다. 한포포가 끼어들자 차레 족 여전사들이 무기를 언제라도 꺼낼 듯이 경계하며 족장인 쿠차레가 일침을 가했다. "흥! 너는 아직 우리의 적이다! 다만 은공과 관계가 있고 동료에게 배신을 당한 것 같아 은원을 잠시 접어두었을 뿐이다. 그러니 우리의 일에 끼어들 지 마라!" "아니 뭐냐?" "포아! 그만 해라!" "대가!" 얼떨결에 손녀였던 한포포가 호칭을 할아버지에서 대가(大哥:오라버니)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라혼의 신경은 그런 소소한 것에 신경 쓸 만큼 예민하지 못했다. 그리고 차레 족의 요구에 응할 라혼이 아니었다. 그러나 가니아의 말이 일언지하에 거절하려는 라혼의 말문을 막았다. "라혼, 그들의 호의를 거절하면 그들을 모욕하는 겁니다." "……." 딴에는 맞는 말이었다. 여인이 먼저 잠자리를 하자 청했는데 남자가 거절하 면 확실히 모욕감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었다. 차레 족의 이러한 은혜 갚는 전통은 그들이 여인들로만 이루어진 여인부족이기 때문이었다. 부족을 번성 시키고 부족을 이어가려면 남자가 필요했고,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주변부족의 전사를 약탈해 관계를 가진 후 죽였다. 물론 그 전사는 종 마(種馬)가 되어 마을의 임신이 가능한 모든 여인과 동침하고 죽어갔지만 사랑이 없는 관계는 여인들에게 고역이었다. 다만 피를 이어가야 한다는 의 무 때문에 고통스런 일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은혜를 입어 은 혜를 갚기 위해 관계를 갖는 것은 비록 사랑은 아닐지라도 단순히 부족의 미래를 책임질 아이를 낳기 위해서 관계를 갖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기 때문 이었다. 그러한 그들의 사정을 알게 된 라혼은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냈다. "좋소." "대가!" 라혼의 수락하는 말에 한포포는 발작했지만 차레 족의 여전사들은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라혼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은 안 되오! 한 달 후 봉수성으로 오시오!" "그러나 저희는 귀림을 떠날 수 없습니다." 백호영의 홀아비들을 이용할 생각이었던 라혼은 이 밀림을 떠날 수 없다는 말에 그 수가 무산되자 다시 골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득 차레 족 여전 사들 사이에서 특이한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줄줄이 엮어서 묶은 남례일족 의 사내들을 슬쩍 바라보았다. "나는 몸을 함부로 굴리는 사람이 아니오. 그럼으로 그대들의 요구는 거절 하오. 단, 여인을 내가 거둘 수 있다면 생각해 보겠소." "……." 약간의 침묵에 시간이 흐르고 더 이상 강요할 수 없다는 듯이 구차레가 한 발 물러섰다. "은공께서 정 그러시다면 전사 한명을 드리겠습니다. 그가 은공과 죽을 때 까지 같이하며 은혜를 갚을(?) 겁니다." "그럼 내가 이중에서 골라도 되겠소?" "은공의 뜻대로 하십시오." 라혼은 족장의 허락이 떨어지자 가장 아름다운 한명의 차레족 전사를 골랐 다. 그러자 차레 족의 족장 쿠사레는 당황하며 말을 잊지 못했다. "어? 그, 그는……." "이 아이가 아니라면 다른 누구도 필요 없소!" 그러나 라혼의 강경한 어조에 족장 쿠사레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저들은 이제 무공이 폐지되었소. 그리고 저들로 인해 그대들의 영 역이 더럽혀 졌으니 저들은 그대들이 알아서 하시오. 포아, 너는 그 예하라 는 놈만 데리고 밀림을 떠나라 나는 이곳 토지신(土地神) 마을에 볼일이 있 으니까 다음을 기약하자 그리고 이 차레 족 아이도 네가 좀 돌봐 주거라!" "알았어요." 한포포는 대가의 일이 무엇인지 나름대로 생각하고는 아름답게 타오르는 불 꽃을 연상되는 주작의 무녀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그러나 불새의 깃털을 확보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한포포의 머릿속에선 라혼이 차지하는 것은 바로 백수회가 차지하는 것이란 도식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었다. 무공이 폐지된 남례일족의 무사들은 차레 족이 차지했고 아직까지 인사불성 인 남례일족의 소야 예하는 한포포가 이끄는 백수회 무사들에게 맡겨졌다. 그리고 라혼을 따르게 된 차레 족 전사도 일단 라혼의 첫 번째 명에 따라 한포포의 백수회 일행을 귀림 밖으로 무사하게 안내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 리고 라혼은 드디어 불새의 무녀 가니아와 함께 귀매지림(鬼魅之林)의 드워 프 마을로 들어갔다. 드워프 마을! 드워프 마을은 땅속에 있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불편했다. 라혼이야 [체인지 셀프Change Self : 변신] 주문으로 몸을 작게 만들면 되지만 가니아는 그 러지 못했기에 항상 꾸부정한 자세로 동굴통로를 걸어야했다. 웬일인지 가 니아에게는 마법주문이 통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그것은 정화의 불꽃을 다루 는 불새의 무녀가 가진 권능 때문이었을 것이다. "헤헤헤, 조금만 가면 곧 넓은 공간이 나옵니다." "……." 가니아는 살갑게 구는 토지신의 말에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드래곤(?)을 안내하게 된 카쿤은 힘들어하는 붉은 머리 여자에게 말하면 서 도 라혼의 눈치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카쿤이 드래곤의 안내역을 맡게 된 이유는 바로 그가 불개미 숲에서 두 인간을 구한 것이 드래곤을 불러들 였기(?) 때문에 카쿤은 전설로만 전해지는 무시무시한 드래곤 바로 앞을 걸 으며 뒤통수가 서늘한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가니아, 앉으시오!" "예?" 라혼은 꾸부정한 자세로 걷는 가니아를 보다 못해 허공섭물(虛空攝物)의 수 법으로 그녀의 몸을 들어 올렸다. "어마!" "우아!" 가니아는 몸이 번쩍 들리는 느낌에 낮은 비명을 질렀고 카쿤은 허공에 동동 떠있는 빨간 머리여자를 입이 헤 벌어진 체 구경 했다. "몸을 내게 맡기고 앉으시오." 가니아가 가부좌를 튼 상태로 허공에 한자 반 정도 뜻 상태가 되자 가니아 는 라혼의 능력에 새삼스럽게 놀랐고, 드워프 카쿤 역시 드래곤(?)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윽고 카쿤은 드래곤이 앞으로 머물게 될 장서고(藏書庫)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라혼이 가니아를 이곳에 데려온 이유는 따로 있 었다. "촌장을 만나고 싶다." "촌장님을요?" 라혼은 자신을 안내한 드워프에게 그렇게 한마디 던져놓고 드워프어와 시드 그람 공용어, 인시드어, 그리고 칸대륙의 언어로 적혀진 나무 조각을 역어 만든 책(冊)들 사이에서 하나를 골라 뽑아들었다. 그러한 드래곤(?)의 안하 무인 적 태도에 역시 할아버지에게 듣던 대로라고 생각하며 장서고를 나섰 다. 가니아 이곳까지 안내한 토지신이 라혼의 요구에 따라 토지신 촌장을 데려오기 위해 어디론가 가자 가니아는 라혼에게 물었다. "토지신들이 당신을 무척 어려워하는 군요." "그들은 나를 용(龍)이라고 알고 있소." "예? 용이요?" "그렇게 알고 있으면 되오. 그보다 나는 이곳에서 당신이 펼친 결계와 비슷 한 기운을 느꼈소. 그리고 당신이 이야기 해준 초록용의 이야기도 있고 해 서……." "불새의 깃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소." 라혼의 말에 가니아는 잠시 말문을 닫고 생각에 잠겼다. 가니아의 일족이 귀림근처에서 거의 천여 년간 살아왔으니 불새의 깃털이 귀림의 토지신들에 게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불새의 깃털은 인간이 지니기에 너무 위험한 물건이기에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불새의 깃털의 본래 주인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불새의 깃털을 얻어 불새를 찾으시려는 겁니까?" "그럴 생각이오. 하지만 지금은 아니오." 불새의 깃털을 가진 자는 불새와 만날 수 있다는 전설이 있었다. 불새의 고 기를 먹는 자 영원히 죽지 않으며 그 피를 얻은 자 천지를 태울 수 있는 불 꽃은 부릴 수 있다고 했다. 라혼은 자신의 대답에 침묵하는 가니아를 보고 목편으로 엮어 만든 책을 말며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에겐 아내가 있소." "……." "그 아이의 어미가 바로 강무(姜武)라는 성을 쓰고 있소. 강무라는 성을 쓰 는 자들은 오직 후려(後慮)의 강무세가 뿐이오." "!" 가니아는 라혼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깜짝 놀랐다. 주작의 무녀라며 신성시 되던 그녀였지만 한때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사랑하는 이의 아이를 낳고, 장성한 아이를 그에게 보냈다. 그런데 라혼의 입에서 정인(情人)의 가문의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당신의 아이는 아들인가? 딸인가?" "아들, 아들이예요!" "이름은?" "온, 온이에요. 우리 온을 아시나요?" 라혼은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평정이 무너진 가니아의 물음에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라혼은 후선(後鮮)의 황가(皇家)인 강무세가에 아는 바가 얼마 없었다. 앙신성으로 달려갈 때 토금전장의 토귀에게 강무세가에 대해 서 조사해보라는 지시를 했지만 결과가 라혼의 손에 오기 전에 남례성으로 달려오는 바람에 주요 인사를 제외하고는 강무세가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 었다. 그리고 라혼이 알고 있는 강무세가의 주요 인물에 강무인이나 강무온 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미안하지만 아는바 없다. 하지만 나의 아내는 그대와 꼭 닮아있다." "예?" "그녀의 모친은 바로 강무세가의 강무혜라는 여인이었다." "……!" "그리고 그 강무혜는 분명히 강무세가의 여인이 분명하다." 라혼은 불새의 무녀 가니아에게 설화에 대한 모든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설화의 부친 호사천(虎獅天)과 서제가(鼠帝家)와 강무세가의 가신(家臣)인 호가(護家)의 죽고 죽이는 살육, 그리고 설화가 신수(神獸) 백호(白虎)라는 것까지 거의 모든 사실을 알려주었다. 가니아는 라혼의 설명이 끝났지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아들 '온'의 소식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온'의 자손일지도 모르는 설화의 이야기도 관심이 가기는 했지만 '온'만큼은 아니었다. 라혼도 가니아에게 뭔가를 얻어낼 것 은 아니었기에 다소 실망스런 반응이었지만 그녀에 대한 것은 일단 접어두 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젊은 드워프 카쿤이 마을의 촌장을 데려 왔 다. "찾으셨습니까? 위대한 분이시여……." "……." "저는 마을의 촌장 일을 하고 있는 블로입니다." 극히 조심스런 태도의 하얀 수염이 얼굴에 가득한 드워프가 두 명의 드워 프 장로와 함께 라혼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라혼은 그들의 인사를 자연스럽 게 받고 위압적인 기운을 내뿜으며 그들에게 물었다. "불새의 깃털은 어디 있나?" "……!" "……!" 귀림(鬼林) 드워프 마을 촌장 블로와 장로들은 드래곤이 직접적인 질문에 무척 당황했다. 불새의 깃털은 드워프에게 있어 보물 중 보물이었다. 그것 은 모든 물체에 영향을 끼쳐 특별한 속성을 가지게 했으며 거기서 나는 고 열(高熱)은 광물의 불순물을 제거하고 제련하는데 긴요하게 사용되었기 때 문이었다. 다른 무엇보다 그러한 기능이 드워프들에겐 가장 필요한 것이다. "위대한 분이시여……. 그것을 원하십니까?" "원한다!" "……." 촌장 블로는 단호한 드래곤(?)의 요구에 말없이 몸을 돌리며 손을 뻗어 불 새의 깃털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라혼은 가니아와 함께 블로의 안내를 받아 움직이지 않으며 묘하게 정적인 기운이 흐르는 곳 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 촌장 블로는 드래곤과 같이 온 붉은 머리 여자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서로 내왕은 없었지만 근 천여 년 간 이웃에 살던 존재를 모르진 않았다. 블로 는 어째서 불새의 일족인 그녀가 드래곤과 함께 있을 수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이유야 어찌 되었던 초록용이 그녀의 선조에게 불새의 깃털을 빼앗 았으니 그녀는 불새의 깃털의 정당한 주인이나 다름없었다는 것이 블로는 물론 드워프들의 안타까움이었다. 아무리 천적관계라고 할 수 있는 드래곤이라도 드워프들의 보물을 함부로 갈취할 수는 없었다. 고집 센 드워프족은 비록 드래곤족이 횡포에 휘둘리기 는 하지만 때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드래곤을 사냥하는 경우까지 있었 다. 다만 드래곤이 드워프에게 원하는 것은 그들의 보물이 아니라 그들의 손재주였다. 드워프들 또한 드래곤이 가져다주는 진귀한 재료와 드래곤 특 유의 시간개념에 의한 긴 시간을 이용해 필생의 작품을 만드는 것을 나름대 로 즐겼다. 그리고 드래곤의 레어(lair) 근처는 특이한 광물이 나오는 경우 가 많아 드워프 입장에선 땅주인에게 세금을 바치는 셈치며 드래곤의 요구 를 들어주고 보호를 받는 경우도 많았다. "촌장! 이대로 불새의 깃털을 도마뱀에게 넘길거야?" "그럼 어떻게 보란 듯이 본래 주인의 상속자까지 데려왔는데…." "장장 천년이나 불새의 깃털의 깃털은 우리 것이었다고 그런데…." 무식한 릭트의 말에 현명한 헤지드는 타이르듯 말했다. "불새의 깃털은 원래 그린 드래곤 드라오디프가 불새 일족에게 강제로 강탈 해온 것인데 주인이 따로 있는 물건이었는걸." "그걸 누가 모르냐? 헤지드, 내 말은 오랫동안 우리가 보관하고 있었으니 보관료 정도는 요구할 수도 있잖아! 게다가 그 망할 도마뱀이 도대체 뭔 상 관이냐고!" 원래 릭트의 존칭어는 용맹한 릭트였지만 하는 행동거지나 새로 뭔가를 배 우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 때문이 무식한 릭트로 통했다. 촌장인 블로 또한 신중한 블로였다. 촌장 블로와 드워프 장로들은 이일의 대처를 위해 모여 회의에 회의를 거듭했지만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드래곤이 그 간 축적해온 드워프들의 지식만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비록 그가 아 무런 말은 하지 않았지만 불새의 깃털을 불새 일족과 함께 구경한 행동은 귀림 드워프 마을 전체를 들썩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자자자자, 아직 드래곤이 뭐라 요구한 것도 없으니까 쓸데없이 떠들어봐야 입만 아프다고 카쿤이 그러는데 그 드래곤은 물론 불새의 무녀 가니아도 장서고에 얌전히 있다고 했으니 미리부터 왈가왈부하는 것도 우습다고……. " 그렇게 결론도 나지 않는 회의를 마무리하려는 블로 촌장이었다. 그러나 그 날 회의는 더욱 더 길어지고 열기를 띄게 만들기에 충분한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촌장님, 어르신들……." "어? 카쿤 아니냐?" "드래곤은 어쩌고 네가 여길 왜 온 거냐?" 드워프 장로들은 항상 드래곤 곁에 머물며 그를 감시(?)하는 카쿤이 회의가 한참인 이곳에 얼굴을 내밀자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을 했지만 겉으 론 내색하지 않고 최종선고를 기다렸다. "그게 라혼님이 이걸 주면서 만들 수 있냐고 하던데요?" "뭐냐 그게?" 카쿤이 내민 것은 설계도였다. <力石. 역석> "뭐야? 뭔데 그래?" 평소에 공부하고 담을 쌓은 릭트가 동료들이 설계도에 눈을 떼지 못하자 설 명을 요구하는 따가운 눈빛을 어릴 때부터 가장 만만했던 헤지드에게 보냈 다. "에휴~! 그러게 공부 좀 하지 그랬어? 애들 보기에 창피하지도 않냐?" "창피~이! 그럼 옛날에 네가 트롤을 처음보고 실례한 거……읍!" "제발 그런 건 좀 잊으란 말이야. 다른 건 다 까먹으면서 왜 그거 잊지도 않고 두고두고 괴롭히는 거야?" 사실 릭트가 하려는 이야기는 이미 드워프 마을에서 모르는 자가 없었다. 그것은 헤지드도 잘 알고 있었지만 릭트에겐 똑같은 일이라도 과장하고 부 풀리는 재주가 뛰어났다. 이야기를 듣는 자는 즐거울지 모르지만 그 얘기 속의 주인공은 과연 그때 내가 그렇게 까지 멍청했나하는 착각까지 들게 했 다. "얘기해 줄 테니까. 조용히 있어!" 릭트는 알았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헤지드는 릭트의 저주받을 능력을 지닌 입을 막고 있는 손에 힘을 풀고 설명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동력원이야!" "뭐?" "마법진, 또는 기환진, 그리고 부적이나 신선들이 사용하는 보패에 사용되 는 기운을 모아주는 역할을 하는 부분을 따로 분리해낸 거야!" 헤지드의 설명이 있었지만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의 릭트였다. "쉬운 말로……." "으이그~! 그러니까 이건 기운을 모아주는 보패(寶貝)란 말이다." "기운을 모아 뭐에 쓰는 건데……." "몰라." "뭐?" "만들어 봐야 알겠지만 내가 보기에 이건 그저 기운을 축적시키는 기능 밖 에 없어. 그리고……." "그리고?" "드워프어로 따로 기록된 부분을 보면 하나같이 구하기 힘든 재료야. 그리 고 몇까지는 칸대륙에서 아예 찾아볼 수 없는 재료이기도 해. 드래곤이 우 리에게 칸 대륙의 정보를 요구한 이유가 여기 있었군." 북지성(北智省) 종도에서 4만 정립천하군이 집결하여 관도를 따라 중원십일 주(中原十一州)로 나가는 최후의 관문인 장동(藏洞)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원주(元州) 중경(中京) 청인성(靑寅城) 조정은 더 이상 여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수인천하에서 동인성(東仁省)과 후려는 이미 떨어져 나가고 있었 고, 총 10만에 가까운 대군은 앙신성(央信省)에서 발이 묶여 오도 가도 못 하는 상태였다. 거기다 막대한 이권이 걸려있는 인시드 남주무역항로가 막 힌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막대한 자금이 투입된 새로운 서해수군 창설하는 데 심력을 쏟아 붓고 있었다. “적도들이 군세가 4만이라 하나 장동을 지키는 군사는 1만 이옵니다. 예로 부터 장동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지키는 병사가 천이 있으며 100만으로도 뚫 지 못하는 곳입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옵소서!” “그렇습니다. 폐하! 일단 남상과 남례성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 병력을 북 지성으로 돌린다면 북지성의 적도들는 모래알처럼 흩어질 것이 뻔합니다.” 수인천하(獸人天下)를 이룩해낸 수인들이 모여 천하를 경영하는 곳. 바로 원주 청인성의 호황궁(虎皇宮)에서 천자(天子)인 호황(虎皇)과 백관(百官) 이 모연 천하각처의 반란에 대한 대처를 논의했다. “경들의 뜻이 그렇다면 짐도 경들의 뜻에 따르겠소. 그렇다면 서해수군은 지금 어디까지 진척되었소?” “신(臣), 무주사마(戊州司馬) 양초지(羊草地) 아뢰나이다. 서해수군 창설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으며 지금 황미성의 선거(船渠)에서 대형전함 들이 속속 건조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라면 중추절 이전에는 새로운 수군 창설이 마무리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니 짐도 안심이 되오. 이제 경들도 물러가 도록하오.” 원주 조정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실권자 상국(相國) 서제(鼠帝) 서포틈(鼠暴 闖)이 참석하지 않은 회의였다. 그러다보니 실질적인 논의보다 천자인 호황(虎皇)에게 ‘안심하라, 우리들 이 알아서 잘하고 있다.’라는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외치다 끝이 난 회 의였다. 즉, 실질적인 해결방안에 대한 논의는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제 막 자리를 털고 일어선 호황이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용황(龍皇)의 양위(讓位)로 천자 위(位)를 받은 호제가는 이제 호황가가 되 었으나 시기가 좋지 못했다. 천자(天子)가 용황이었을 때도 호제가는 사실상의 황가(皇家)나 다름없었다 . 용황가(龍皇家)는 용황과 용황을 따르는 십삼인가(十三人家)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래서 용황은 호제가를 지지기반으로 천하를 지배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호제(虎帝)의 권위는 천자나 다름없었고 또한 실질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용황이 앙신성의 ‘거정의 난’에 대한 책임으로 호제에게 천자 위(位)를 전격적으로 양위하고 잠적했 어도 천하는 놀라지 않았다. 그저 당연한 오히려 늦은 감이 있는 조치로 생 각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호제가가 천자 위를 양위 받고 일어난 일련의 사 태는 이제 막 천자가 된 호황의 입지를 약화시키기에 충분했다. 용황은 고 작(?) 앙신성의 반란으로 천자 위를 내놓았는데 호황은 앙신성은 물론이고 사방도처에서 반란이 일어났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비난이 일었기 때 문이었다. 그리고 다른 진골십가(眞骨十家)에게 성골이가(聖骨二家)중 용황 은 범접할 수 없는 그런 존재였지만 호제가는 자기들과 다를 바 없다는 인 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문제였다. 그것이 서제가 호황가의 안방인 중경 에서 막대한 권한을 가진 상국의 위치에 있을 수 있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 다. 이미 명목상의 신하가 되어버린 신하들이 물러나고 호항은 대전(大殿)에 홀 로 앉아 작금의 사태를 생각했다. 호면(虎面)을 그대로 드러낸 백색 능라비 단과 검은색 띠와 금실로 장식한 황포(皇布)를 입은 호황은 허공에서 들려 온 소리에 사색에서 깨어났다. “폐하!” “호영(虎影)인가?” “그렇습니다. 폐하!” “말하라!” “예, 폐하! 귀호기의 기주 홍대보가 참수되었습니다.” “뭐라!” 어찌나 놀라는지 용좌에서 벌떡이어서는 호황이었다. “호영은 자세히 보고해보라!” “하남천원군의 본대에서 떨어져 나와 남례성 봉수성에 먼저 도착한 별동군 라혼참장이 조정의 군사에게 대항 했다는 책임을 물어 목을 베었다고 합니 다.” “뭣이라! 감히 참장 따위가 귀호기의 기주를 사사로이 베어?” -크앙~! 호황은 분노에 찬 고함을 울부짖었다. 호랑이 특유의 적을 위압하는 울부짖 음이 대전을 흔들자 호영(虎影)은 호황의 분노성이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 “호영기(虎影旗)는 들으라!” “옛!” “지금 즉시 봉수성으로 가서 귀호기를 수습하고 귀호기의 일을 맡아 임무 를 완수하라!” “귀호기주를 참수한 장수는 어찌할까요?” 호황은 호영의 질문에 잠시 침묵하더니 나지막한 어조로 말했다. “그놈의 주변을 살펴 그 배후를 파악해라. 그놈을 손보는 일은 나중에 해 도 된다.” “존명!” “뭐라고? 적이 코앞에 있거늘 지금 이 문제를 제기하는 이유가 뭐야?” “이일은 강호의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곳은 장동입니다. 장동으로 몰려 오는 적도를 토벌하는데 당연히 장동태수가 군사를 지휘하는 것이 옳지 않 겠소?” “무슨 소릴 하는 것이오? 본맹에서 자금을 대고, 맹의 무사들을 풀어 힘들 게 군사를 모았거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때까지 손가락만 빨고 있던 태수 부가 무슨 낯짝으로 지휘권을 갖네 마네 하는 것이오?” “뭣이라? 감히 강호의 야적주제에 조정의 관리를 모욕하는 것인가!” 조정의 입장에서 북지무림맹은 장동을 지키겠다고 나선 의병(義兵)일 뿐이 었다. 그러니 장동태수부의 관리들의 주장은 일견 타당했다. 그러나 5천의 관병을 가지고도 8천 정립천하군의 남하에 우왕좌왕했던 그들이었다. 다행 히 북지무림맹이 장동에 적을 두고 일천의 고수가 모여들자 상황은 바뀌었 다. 막연한 두려움에서 종도가 어찌 떨어졌고, 적의 허와 실을 파악하자 두 려움이 가시니 드디어 자신들의 의무(?)를 깨달은 것이었다. 사실상 지금까 지 무림맹의 고수들이 이제 1만 관군을 운용하고 있는데 그것을 적이 바로 하루거리에 진을 치고 있는 때 지휘권을 문제 삼고 나온 것이었다. “강호의 야적이라…….” 지금껏 작전회의 중 거론된 지휘권문제에 대한 설전을 침묵으로 일관하던 맹주가 한 관리가 언급한 강호의 야적이란 말을 나지막한 어조로 중얼거렸 다. 내공이 실린 맹주의 말은 장내의 모든 인사들의 귀가에 울렸고, 시끄럽 기까지 한 장내는 바늘하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침묵 속에 빠져들 었다. “강호의 일과 관의 일은 다른데 우리가 주제넘게 관의 일에 나선 것을 사 과하겠소. 관이 자신의 본분을 다하겠다니 ‘강호의 야적’인 우리는 이일 에서 손을 떼겠소이다. 그러나 심려는 하지 마시오. 인세는 천하무림의 공 적이니 그들은 견제해 줄 테니까.” “맹주!” “…….” 날카로운 기세를 숨기지 않는 청문수사(淸文秀士) 박소(朴紹)는 윤기 있는 검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출객령을 내렸다. “그러니 어서 태수부로 돌아가 그대들끼리 앞으로의 일을 상의하도록 하시 오!” “…….” 맹주의 출객령에 장동태수부의 관리들은 무거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북 지무림맹을 떠났다. 그들이 자리를 떠나자 무림맹의 수뇌들은 무거운 표정 를 한 맹주의 얼굴만 쳐다보며 뭐라 할 말을 찾았다. 그리고 부맹주인 상승 도객(常勝刀客) 초구명(超具明)이 무거운 어조로 맹주에게 물었다. “꼭 그럴 필요가 있었소?” “초가주님!” 초구명의 물음에 반응한 것은 맹주의 오른쪽에 자리한 총관 철필일획(鐵筆 一劃) 박오(朴旿)였다. “외람된 말이지만 저희가 나서서 저희에게 유리한 것이 무엇입니까?” “……?” “수인조정에 벼슬이라도 한자리 바라는 것도 아니요. 지금 우리의 세력을 뻗힐 이유도 없습니다.” 박오는 잠시 침묵으로 무림맹의 수뇌들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고는 다시 말 을 시작했다. “우리가 정립천하를 외치는 무리들과 싸우는 이유는 그들이 인세와 결탁했 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순망치한(脣亡齒寒)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기 때 문에 장동에 엉덩이를 붙이고 장동을 도와 온 것뿐입니다. 만약 조정의 벼 슬이 탐이 나시거든 지금이라도 태수부로 가서 자리를 청하십시오. 우리가 그것까지 막을 이유는 없습니다.” “조정이 던져주는 감투 때문인가? 저 무능한 놈들을 믿지 못하겠기에 그러 는 것이지…….” “후후…. 그 점은 우리도 저들과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무가의 싸 움과 병가의 싸움이 다를 진데?” “총관의 말이 맞소! 지금까지 장동을 지켜낸 것만으로도 협사(俠士)로써 충분하오. 그러나 그것은 북지성 백성들 때문이지 수인조정이 좋아서 한 것 은 아니요. 나는 나의 가문의 정영들의 피를 흘려가면서 까지 조정을 도울 생각은 추호도 없소. 우리의 상대는 어디까지나 인세의 마두(魔頭)들이지 반군들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시오.” “맹주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맹주의 설명이 있자 무림맹의 수뇌들은 굳이 장동의 군사들을 지휘하는데 집착할 이유가 없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일은 참으로 엉뚱하게 흘러갔다. 북지무림맹과 장동태수부 사이에서 일어난 다툼은 태수부에서 요청했고 무 림맹 받아들인 단순한 일이었다. 1만의 장동 병력 중 1천의 무림맹 고수들 이 예비대로 빠지자 관병들은 불안해했고 어디서 흘러나왔는지 태수부의 관 리의 폭언이 알려지면서 그 때문에 무림맹이 전쟁에서 손을 뗐다고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장동성내의 민심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백성들이 생 각하기에 자신들을 지켜주는 것은 북지무림맹이지 태수부의 관리들이 아니 었다. 그런데 그 소문은 백성들로 하여금 무능한 관리들이 공(公)을 탐하여 무림맹에게 지휘권을 빼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게 했다. 그러한 소문은 세작들에게 흘러들어 정립천하군의 수뇌가 알게 되었고, 그 들의 공작으로 장동성내 민심과 사기는 더욱 떨어졌다. 그리고 장동성 앞에 4만 대군이 집결했다. -하! 하! 하! 하! -쿵! 쿵! 쿵! 쿵! 적군의 전의를 꺾고, 아군의 사기를 높이는 4만 정립천하군의 발구르기와 기합성이 천지를 가득 메웠다. -징~! 5개의 징이 일제히 울리자 4만대군의 기세를 드높이는 기합성이 잦아들었다 . 그리고 한 말을 탄 장수가 굳게 닫힌 장동성 성문 앞으로 나와 고함쳤다. “본장은 정립천하군 대장군 우모치(優模治)다! 장동성의 북지무림맹주는 속히 성문을 열고 짐승주제에 천하제일미를 자처하는 천상천화를 본장에게 받혀라!” -우와아아아아아아~! 호호탕탕(浩浩蕩蕩)한 장군의 놀림에 또 한 번 기세를 드높이는 정립천하군 이었다. 이것은 정립천하군이 장동성의 내부사정을 마치 자기 손바닥 보듯 이 잘 알고 있다는 뜻이 되었고, 그것이 단 하루 전에 있었던 지휘권 문제 까지 알고 있을 정도라는 것을 그 한마디 놀림을 통해 들어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동태수부의 장수는 그것에 대응을 하지 않음으로써 아군의 사기를 또 한 번 꺾는 오류를 범했다. 단지 주둥아리로 장수의 반열에 오른 적장 에게 화살을 날려 그를 쫓아버렸을 뿐이었다. 그것으로 전투는 시작되었다. 놀리는 우모치를 쫓기 위해 장동에서 화살을 날아오자 그것을 보고 정립천하군의 대원수(大元帥) 운덕(雲德)은 전군에 궁수들로 하여금 장동성에 화살을 퍼부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피비핑~! 촤아~! 하늘을 가득 메우고 폭우처럼 쏟아지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에서 화살에 맞아 비명성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탁! 타다닥! -크악! -컥! -탁! 타다닥! “뭐하는 거냐! 어서 일어나 화살 쏴라! 반격하란 말이다.” 정립천하군의 일세 사격이 끝나자 장동성의 성벽위에서 반격하라는 고함소 리가 터져 나왔고, 성벽위에 배치된 쇠뇌와 궁병들이 화살을 쏘며 저항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하늘을 가득 메울 정도의 기세를 본 장동성의 수비 병들에게 자신들이 반격을 미미해 보일 뿐이었다. 그것이 수천 개의 화살이 한꺼번에 날아오는 일제사격과 반격을 위해 간간히 날리는 화살의 기세(氣 勢)의 차이였다. 그리고 정립천하군의 일제사격이 3차례나 실행되고 그 기 세를 몰아 사다리를 떠멘 군사들이 앞으로 달려 나오기 시작했다. -와아~! 수백 개의 사다리들이 성벽이 달라붙었고 그 와중에도 화살은 계속 성벽을 넘어왔다. 그러나 이미 기세에서 밀린 장동성의 병사들은 민첩한 대응을 하 지 못했다. “뭐하는 거냐! 장대로 사다리를 밀어라!” -영차! 영차! 수명의 장정이 두툼한 장대로 성벽위에 걸쳐진 사다리를 밀어 넘어트렸지만 사다리는 쉴 새 없이 달라붙었다. 그리고……. “성문이다! 적군이 공성추를 사용하려 한다!” 거대한 바퀴를 단 수레에 머리 부분을 철갑으로 감싼 아름드리의 두꺼운 나 무가 올려져 있는 형태의 공성추였다. 오랜 기간 전란이 없었고, 장동의 성 문 앞은 단단한 땅위에 평평한 돌로 포장까지 되어 있었다, 그러니 이러한 형태의 바퀴달린 공성추를 써먹기에 충분했다. 두툼한 방패로 몸을 가린 병 사들이 잘 발달된 관도를 따라 공성추를 힘껏 밀었다. -쿠르르르르르……. 쿵! -촤아아아…………. 그러자 장동의 병사들이 뜨거운 물을 부우며 저항했지만 수레위의 공성추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돌, 돌을 던져 길을 막아라!” -쿠르르르르르……. 쿵! 그러나 이미 두 번째 충돌을 했고, 돌이 떨어져 길이 거칠어지자 공성추를 운용하는 임무를 맡은 장수는 피해를 감수하고 성문에 바짝 붙어 성문을 부 수기 시작했다. 그러자 장동의 군사들이 끓인 물을 부우며 대항했지만 역부 족이었다. 그리고 성문은 너무도 어이없게 깨져 버렸다. “무림맹의 고수들에게 도움을 청해라!” 성문이 깨진 것을 보고 받은 장동태수는 무림맹의 고수들에게 도움을 청할 것을 지시했다. 장동의 성문은 2중 구조로 되어있어 바깥쪽 문이 깨어졌어 도 안쪽 문이 있어 약간이나마 시간을 벌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흥! 이제 와서 뻔뻔스럽게 도움을 청하다니 수치를 모르는 놈들 같으니… ….” “포대협, 장동성이 떨어지면 인세의 세상입니다. 어서 관병을 도웁시다.” “체!” 출격명령을 받은 대부분의 무림맹의 무사들은 그렇게 투덜거리며 성문을 수 비하기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했다. -쿵! 콰작~! 5백 북지무림맹 무인들이 성문 앞에 도착하고 나서 곧 내문(內門)이 깨져나 갔다. -우와~! -정립천하! 깨어진 성문으로 환호성과 함께 정립천하를 연호하며 대군이 물밀듯이 밀려 나왔다. 그런 그들을 맞아 무림맹의 무인들이 각자의 독문무기를 휘둘렀다. “차압! 창룡비격세(蒼龍飛擊勢)!” “월하난마(月下亂魔)!” “팔방비창(八方匕槍)!” “…….” 저마다 자신의 무공을 뽐내듯이 절기를 사용했으나 적은 대군이었다. -크악~! -펑~! -정립천하! 정립천하! “적은 소수다 쉴 새 없이 밀어붙여라!” 광기(狂氣)에 젖어 죽자고 밀려드는 군사들과 싸움은 곧 난전이 되어 서로 엉겨들었고, 고수는 고수대로 위력적인 검기(劍氣)가 포함된 초식을 사용할 수 없었고 일반 무사들은 바닥에 쓰러진 병사들 때문에 보법(步法)을 헝클 어지며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더욱 그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적군이 쉴 새 없이 밀려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두구두구두구두구두구…………. “웃! 기병이다!” “이런 간악한 자기편을 아무렇지 않게 희생시키다니…….” -히히이힝~! 일단의 말을 탄 기병(騎兵)들이 쇄도하며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짓밟았 다. 그리고 적과 엉켜 오도 가도 못하는 북지무림맹 무인들을 그들의 돌격 에 휩쓸려 비명을 지르며 죽어갔다. 전신을 갑옷으로 감싸고 바람처럼 스쳐 가는 그들의 위력은 정말 위력적이었다. 기병의 돌격으로 무림인들의 방어 망은 순식간에 깨어지고 기병의 뒤를 수만 대군이 뒤따랐다. “이럴 수가!” “크음! 이것이 전쟁이로구나!” 멀리서 사태를 예의 주시하던 맹주 청문수사 박소는 적군이 쓰는 병법에 혀 를 내둘렀다. 특히나 아군까지 희생시키는 과감한 기병투입은 피를 차갑게 얼어붙게 할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무림의 다툼에서 저런 수를 쓰면 당장 휘하제자들이나 무사들이 등을 돌릴 것이고 공적으로 지목되어 무림에서 살 아갈 수 없게 될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존망지도(存亡之道), 살고 또 죽 는 전쟁이었다. “안되겠습니다. 맹주 어서 장동을 떠나야 합니다.” -크악~! “적이다! 인세의 마두들이다!” 검은 복면의 사내들이 북지무림맹 담을 넘어 침입하여 무자비한 살수를 쓰 자 무림맹 내에 남아있던 무사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다 피를 뿌리 며 쓰러져갔다. 인세의 속셈은 명백했다. 이 기회에 북지무림맹을 제거함으 로써 북지무림을 완전히 장악하려는 것이었다. 이미 전세는 완전히 기울어 진 상황에서 무림맹이 장동에 남아있을 이유는 없었다. “총관, 초가주, 맹도들에게 장동을 탈출하라 하시오!” “존명!” 북지무림맹의 무인들이 퇴각을 개시하자 근근이 반격을 준비하던 장동의 관 군들의 전의가 결정적으로 꺾여 버렸다. 비록 일단의 군사들이 성내로 난입 하였으나 장동엔 1만 군사들이 있었다. 성벽위에 약 6천의 군사들이 있었고 나머지 4천의 군사들이 후군으로 편성되어 있어 아직 버틸 수 있는 여력이 남아 있었으나 군사들의 전의가 꺾인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혼란에도 불구하고 정립천하군의 장동성 진입을 멈춰졌다. 장동의 가옥들이 불타오르며 장동성 전체가 염화지옥(炎火地獄)처럼 변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무능한 관리들 같으니…….” 정립천하군 대원수 운덕은 승리하고서도 성안으로 진입하지 못하자 멍청하 기 그지없는 장동태수부의 관리들을 욕했다. 전투가 벌어지면 불화살 같은 화공을 있다는 것은 어쩌면 상식이었다. 그러나 저 무능한 장동의 관리들은 성벽과 가까운 곳에 불에 잘 타는 목조건물을 그대로 방치하고 싸움을 시 작한 것이다. 게다가 그런 목조 가옥의 나무들이 바싹 마른 그대로 방치했 으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이미 장동성이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 지인 상태인데 불 때문에 성내로 진입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어처구 니없는 일이었다. “장군, 성내의 불이 너무 거셉니다.” “징을 쳐 군사를 물리라!” “존명!” -징~! 징~! “후퇴! 후퇴하라!” 징소리와 적군이 물러갔지만 장동성은 넘실거리는 화마(火魔)에 관병들은 물론 백성들이 모두 타죽을 지경이었다. “이런 타죽는다!” “뜨거워! 뜨겁단 말야!” 그때 주위 공기가 서늘해지며 선녀(仙女) 나타나 그들을 구명의 손길을 뻗 었다. 바로 여인천궁의 소궁주 천상천화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나선 것이 다. “천상천화주위로 모여라!” 옥녀심공(玉女心功)의 옥녀진기(玉女眞氣)는 극음지기(極陰之氣)였다. 거기 에 설화는 라혼이 아기였을 때 몸속에 심어둔 인조 드래곤 하트인 ‘드라시 안 하트’ 때문에 무한에 가까운 공력이 있었다. 설화는 그 옥녀진기를 일 정 공간에 흘리면서 동시에 라혼에게 배운 흡성대법(吸性大法)의 흡인결(吸 引訣)로 공력을 도인(導引)하는 방법으로 사람들을 화마의 뜨거운 화기에서 부터 보호했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소리치게 하여 되도록 많은 사람 들을 모을 수 있도록 했다. “천상천화주위로 모여라!” “모여라!” 그러나 사람들이 몰려들수록 공력의 운용은 어려워졌고 외곽에 있는 사람들 이 뜨거움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소궁주님, 더 이상은 무리에요. 어서 불길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나가야 해요 이러다간 모두 타죽겠어요!” “…….” 하얀 피부가 무리한 공력운용으로 퍼렇게 질려가던 설화는 응소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서서히 넘실대는 불꽃을 토해내며 타오르는 대로를 빠져나 갔다. 설화에게는 호수와 같은 마르지 않는 공력이 있었지만 그 막대한 공 력을 운용은 라혼이 드라시안 하트를 봉인함으로써 끌어다 쓰기에는 문제가 많았다. 그것은 마르지 않는 호수가 있으면서 그 물을 끌어오지 못해 가뭄 이 드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비교적 안전한 지역까지 사람들을 끌고 나온 설화는 공력을 풀고 다시 화마 속으로 뛰어들었다. 사람들은 몸속을 맴돌던 서늘한 기운이 사라지자 가마 솥 속 같은 열기에 소스라치데 놀라며 불꽃과 멀어지려 애썼다. “여러분 어서 피하세요! 이곳도 곳 불이 번질 거예요!” 여인천궁의 여인들은 미리 생각해놓은 계획대로 사람들을 설화 소궁주의 명 에 따라 미리 부숴 놓은 성벽 넘어 밖으로 피신 시켰다. 설화는 맹렬한 기세로 타오르는 불꽃 속으로 넘나들며 참으로 기이한 느낌 을 받았다. 그것은 그 불꽃 속이 어머니의 배 속처럼 편안하다는 생각이 들 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수십 명의 사람들과 함께 불속에서 나온 설화가 불 속에서 나오자 불은 설화가 마련해놓은 출구까지 번져가고 있었다. “설화 소궁주, 이제 그만 하시고, 가야 합니다.” “하지만…….” “이제 장동 전체가 타오를 것인데 그럼 갖갖으로 성을 탈출한 사람들도 위 험해져요.” 설화는 검선자 주묘연의 재촉에 안타까운 마음과 아쉬운 마음이 반반인 심 정으로 성벽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장동은 삼일 낮과 삼일 밤동안 시뻘건 화마에 시달리다 최초로 화재가 발생 되었던 성문 근처가 완전히 소각되어 불이 사그라지자 정립천하군이 달려들 어 화재를 진화를 시작했다. 이미 전투는 끝나있었고 장동성은 이제 정립천 하군의 것이기에 더 이상의 피해는 막아야 했다. 그리고 이레가 지나 불길 이 잡히자 정립천하군은 잿더미의 장동성을 얻었다. 적도 의도하지 않은 자 연스런 공성지계(空城之計)에 당한 운덕은 헛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다 만 이제 중원십일주로 통하는 길을 얻었다는 것에만 만족할 뿐이었다. 그러 나 이제 승기를 잡은 정립천하군에게 장동의 막대한 재화와 징집을 통한 병 력을 늘리는 일은 할 수 없다는 것은 치명적이었다. “장군, 세작으로 부터 보고입니다. 장동의 화마를 피해 살아남은 병사들이 마두산성(馬頭山城)에 모여 있고, 남문으로 빠져나간 백성들은 수십리 밖 에 모여 있답니다. 그리고 천상천화가 이끄는 무리들이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답니다.” “…….” 아무런 말없이 보고를 듣던 운덕은 어떤 결정도 내리기 힘들었다. 맨몸뚱아 리로 불을 피해 탈출했을 그들을 거두면 가득이나 부족한 군량으로 그들을 먹여 살려야 했고 마두산성에 있다는 패잔병들도 영 거슬렸다. 지금은 움직 이지 않는 것이 가장 나은 선택이었으나 잿더미위에서 있어봐야 사기만 떨 어질 것이 뻔 했다. 즉 무엇인가 일을 만들어서라도 해야만 했다. “천상천화가 서쪽으로 가고 있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장동의 전리품은 없으니 천하의 우물(尤物)이라는 천상천화를 잡는 것도 좋겠지. 마군 5백으로 천상천화를 추적해라!” “옛!” 마군 5백기(騎)가 천상천화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해 장동성을 떠났고, 운덕 은 장동성의 복구를 위해 남문 수십리 밖에 있다는 유민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종도에 군량과 각종 보급품지원을 부탁하는 친서(親書)를 띄웠다. 천상천화(天上天花) “쿨럭, 쿨럭, 쿨럭, 쿨럭…….” “커억~ 퉷! 열기(熱氣)를 머금은 뜨거운 공기에 노출되어 폐부에 화상은 입은 사람들은 연신 기침을 토해내며 가래침을 뱉었다. 그리고 대부분 크고 작은 화상과 전투 중 입은 부상으로 멀쩡한 사람 찾아보기 힘들었다. 몇몇은 신열이 있 어 도저히 걸을 상태가 아닌 자도 있었다. 여인천궁의 여인들이 설화 소궁 주의 지시에 따라 미리 준비한 약재로 응급처방은 하였으나 화상환자들이 환부에서는 끊임없이 진물이 흘러나왔다. “이럴 줄 알았다면 의원도 준비해 두는 건데……. 생각이 너무 짧았어!” 설화는 신음하는 사람들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금치 못했다. 철저하게 준 비를 한다고 하였으나 부족한 구석이 너무 많았다. 이것은 경험이 없는 설 화의 한계였다. “소궁주, 너무 걱정 마세요. 의원이야 다음 마을에서 구하면 됩니다.” 검선자 주묘연은 모든 것이 설화가 예언한대로 이루어지자 경악하는 마음을 금치 못했다. 처음 큰 불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을 것이란 이 야기를 듣고 전투 중 일어난 화재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약재들을 확보하면서 화상(火傷)을 치료하는 약재를 특별히 많이 준 비해두었었다. 그리고 독단적으로 성벽이 한 귀퉁이를 일부러 부수라는 말 을 들었을 땐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 했지만 일단 설화 소궁주의 뜻에 따랐 다. 만약이란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나고 보니 그 위치가 마치 미리 본 것처럼 너무도 절묘했고 모든 행위가 너무도 시기적절했다. 그러나 이젠 그것보다 다른 것을 생각해야했다. “이 사람들을 어디까지 데리고 갈 요량인가요? 소궁주.” “바다까지요.” “예?” “아직은 아무것도 알 수는 없지만 이 사람들을 바다까지 데려가야 해요.” 주묘연은 설화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곳은 내륙이다. 이곳에서 바다로 나가려면 일단 장동성에서 남하하여 을주(乙州)나 정주(丁州)를 거 처야만 했다. 그것이 유일한 ‘길’이었다. 그러나 장동반면을 지나쳐야 하 는 동쪽 길로는 갈 수 없으니 서쪽으로 가야했다. 하지만 그것은 길이 아니 다. 북지성은 대부분 산지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북지성의 제대로 된길은 흑막과 중원을 잇는 대종도(大縱道)뿐이었다. 나머지 길은 산등성이와 산등 성이를 잇는 샛길 수준이고 그나마 제대로 알지 못하면 몇 달을 같은 산에 서 헤매는 곳이었다. “하지만 소궁주, 이들을 이끌고 어찌 그 험난한 산행을 하겠습니까?” “서방님이 도와주신다고 했으니 어떻게든 되겠죠. 뭐!” “상공께서요?” “그보다 어서 움직이도록 해요! 현치대협과 약속한 장소로 어서 이동해야 해요. 안 그러면 낭패를 면치 못할 일이 생길 거예요.” “주인님, 백호나한이 그것을 얻은 모양입니다.” “뭐야?” “남례일족의 소야(少爺)가 귀림에서 백호나한과 조우하여 그의 손에 무공 을 잃었답니다.” 봉수태수 돈석은 봉수태수부의 일을 인계받아 모처럼 바쁜 나날을 보내다. 그런 바쁜 와중 수하의 보고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뭐냐 어서 말해보아라!” “회주님의 친서입니다. 이것을 가져온 자가 소야가 백호나한과 다툰 사정 을 전해주었습니다.” 봉수태수 돈석은 수하가 건네준 대나무 통에서 밀봉을 제거하고 돌돌 말려 진 기름종이를 폈다. 사흘이 멀다 하고 억수같은 비를 만나는 이곳에선 이 렇게 해야만 편지가 물에 젖지 않는다. <我來. 百獸會 會主 猫娘 書.>―내가 간다. 백수회 회주 묘낭 씀. “백수회주가 직접 온다는 말인가?” 너무도 간단한 짤막한 글귀는 그 뜻하는 바가 간단치 않았다. 백수회의 신 임회주인 묘낭은 아직까지 백수회의 주요인사만 알고 있는 존재였다. 즉 백 수회의 일반 회도(會徒)들은 그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그런 존재였다. 그런 데 그런 존재가 노출될 위험을 무릅쓰고 움직인다는 것은 참으로 앞으로 백 수회의 행보가 전혀 달라진다는 뜻이 되었다. “홍대보가 죽었지만 그는 분명 원주 조정의 유력자를 배후로 두고 있는 자 였다. 그런데 이곳에 직접 온다는 것은 백수회가 세상으로 나선단 뜻으로 해석해도 되는가? 홍홍홍홍……. 이거야, 나는 내 머리가 그래도 잘 돌아간 다고 생각했거늘 누구를 만나고서 부터는 도무지 모를 일만 벌어지는 군. 홍홍홍홍…….” 봉수태수 돈석은 수년간의 기다림과 노력이 허사로 돌아갔다는 것을 느끼고 헛웃음만 흘렸다. 북지성 홀인부(惚引府) 누연촌(累烟村)는 5백여 가호(家戶)가 모여 이루어 진 비교적 규모 있는 마을로 사냥꾼과 약초꾼들이 장동으로 갈 때 잠시 머 물거나 또는 이곳에서 물건의 거래가 이루어지기도 히는 곳이다. 그래서 마 을 규모에 비해 무척 큰 객잔이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그냥 되는대로 살면 되지 천자가 용이면 어떻고, 호랑이면 또 어때? 수인들도 사람인데…….” 항상 손님으로 북적대던 2백년 전통을 자랑하는 만인객잔(滿人客棧)의 주인 장 오분(吳分)은 그 흔한 술주정뱅이 하나 없는 텅 빈 식당을 보며 계속 궁 시렁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오늘이 만인객잔의 간판을 내건지 2백년 만에 하루 종일 손님 한 명 없는 날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주인어른, 오늘은 정말 공치는 거 아니에요?” “시끄럽다. 손님 없다고 놀지 말고 김에 청소나 해!” “청소는 벌써 끝냈다고요. 그러지 말고 이레 전에 사다놓은 요리재료들 상 하기 전에 우리들이 먹어치우는 것이…….” -딱! “아얏!” “이게 가뜩이나 장사 안 돼 죽겠는데 염장지르냐?” “어차피 손님들에게도 내놓지 못할 것들 인데 뭘 그래요. 아니면 말지…… .” “아니 이놈이?” 만인객작의 점소이들 중 가장 고참인 금동보(金銅寶)는 주인장의 손에 단단 한 박달나무로 만든 주판이 들려지자 그대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심심한 객잔주인은 합법적인 화풀이 대상을 순순히 놔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너 거기 안서!” “주인어른! 소, 손님이에요. 손님!” 그러나 객잔 밖으로 도망치던 금동보가 다급한 외침에 객잔주인은 고개를 밖으로 쭈욱 빼고 금동보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에휴~! 저게 어딜 봐서 손님이냐? 영락없는 패잔병들인데…….” “장동에서 싸움이 벌써 끝난 건가? 구치 영감님이 말하길 성을 공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고 하던데?” -빡! “어이쿠!” 방심하고 있다가 주인장이 회심의 일격을 맞은 금동보는 머리를 감싸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요놈아! 그것 날 놀린 벌이다. 적당히 엄살 피우고 안에다 손님 받을 준 비나 하라고 해!” “엄살이라니요. 그걸로 맞으면 얼마나 아픈데…….” “그래서? 너도 애들 군기 잡을 때 종종 이용하잖아! 어서 준비해 보아하니 다행히 오늘도 공치는 일은 없겠다.” “우씨~!” 만인객잔은 그 이름대로 사람들로 꽉 차 북적였다. 대부분 관병으로 이루어 진 수백 명의 무리가 식당을 채우고 사방에서 기침과 신음소리가 흘러나왔 다. “쿨럭, 쿨럭, 쿨럭…….” “으아~!” “끄응!” 금동보는 갑자기 들이 닥친 손님들 덕분에 몸이 열개라고 부족할 지경이었 다. 태반이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데다 무리하게 움직였는지 땀이 범벅이 되고 상처를 감싼 부분에서 누런 진물을 흘리는 자도 많았다. 그래서 그들 을 치료하는 선녀(?)들의 부탁으로 그들의 상처를 씻는 물을 퍼 나르느라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였다. 그러나……. “고마워요! 죄송하지만 이것도 부탁해요!” “아닙니다. 서로 돕고 사는 거지요. 에헤헤헤헤헤…….” 왕선녀(?)가 말 한마디 하면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체 좋아라 피 고름 씻은 물이 담긴 대야를 받아드는 금동보였다. 그런 금동보를 보는 계 산대에 앉아있는 객잔주인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저걸 진즉에 장가보냈어야 하는데 쯧쯧쯧쯧, 하긴 모두 보기 드문 미인들 이니 저놈이 정신 못 차리며 헬렐레하는 것도 이해가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 그러나 과연 천하제일미라 불리는 천상천화로군.” 만인객잔의 주인 오분은 천상천화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창밖을 내다보 았다. 그리고 먼 산봉우리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원래는 식당이었지만 현재는 커다란 병실(病室)에 신음하는 환자들을 면면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객잔의 구석구석 을 조용히 쓸어보았다. “동보야, 주방에다가 뿔 좀 태우라고 해라!” “저 바쁜 거 안 보여요? 직접 하세요!” “이놈이 끝까지! 에효, 관두자 관둬!” 오분은 계산대에서 일어서서 주방으로 들어가 요리가 뭔가를 끓이며 밑 준 비가 한참인 터질 듯한 근육과 머리카락이 한 올도 없는 대머리 주방장 허 관군(墟關君)에게 말했다. “뿔 좀 태우게!” “무슨 뿔?” “붉은 걸로!” 앉아있을 때는 몰랐으나 몸을 일으켜 세우자 금강철인같은 주방장은 주방대 들보에 걸려있는 숯을 집어 아궁이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숯은 ‘파삭!’ 하는 소리와 함께 깨지며 붉은 연기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네도 준비해주게.” “…….” 주인장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다시 자리를 잡고 능숙한 손 놀림으로 야채를 다듬는 주방장이었다. 그러나 주인장 오분 또한 서둘러 주 방을 나서서 식당을 지나 계산대에 앉아 밖을 바라보았다. 멀리보이는 봉우 리에서 피어오르는 연가가 끊겼다, 이어졌다를 반복했다. 그것을 본 오분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마군, 오백기에 반시진(1시간)이라…….” “뭐래요?” 오분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금동보의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 돌리며 물었다. “애들은?” “말해뒀어요. 그런데 얼마나 되는데 그래요?” “못 들었냐?” “…….” 오분은 자신의 등을 잡을 정도로 성장한 금동보를 보고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마군, 5백 반시진이면 도착한다는 구나.” “마군이면 최소한 고수들은 아니란 뜻이겠네요?” “감당할 자신은 있냐?” “뭐 정당히 시간 끌다보면 본산형제들이 오지 않을 까요?” “아서라! 아무리 현치가 입에 게거품을 물며 설득 한다 해도 자기 코가 석 잔데 본산의 늙은 아제들일 퍽이나 나서겠다!” “설마요! 우리가 있는데?” “퍽이나! 하지만 여인천궁의 고수들 중 천상천화와 저기 큰 언니가 쓸 만 하겠더구나!” “무슨! 어디 저 고운 손에 험한 싸움 같은 것을……. 그냥 우리끼리 처리 하자고요.” “네 놈이 여기 왔을 때 장가부터 보내는 건데 에잉~!” 2백년 전통의 만인객잔은 백록파와 관련 있는 곳이었다. 백록파의 분파이기 도, 또 외부의 거점이기도 한 만인객잔은 내부적으로 백록파의 장로회와 쌍 벽을 이루는 입김이 강한 곳이기도 했다. 만인객잔이 서고 3대째 이어질 무 렵 한 재산 모은 당시 만인객잔의 주인은 자신의 아들을 만금을 들여 백록 파로 보내 무공을 익히게 했다. 그러나 속가제자(俗家弟子)에 시골부자의 아들을 특별하게 대할 백록파가 아니었다. 그러나 객잔 아들에게는 한 가지 재주가 있었으니 바로 요리솜씨가 좋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백록파는 맛 있는 요리보다 피를 맑게 한다하여 생식을 했고, 차를 제외하곤 화기(火氣) 를 피했다. 하지만 어느 곳이나 괴짜가 있기 마련이고 당시 백록파에도 그 러한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천방노사(天方老師) 호열자(好列子)였다. 어떤 사람이던 맛있는 것을 주는 존재에게 호감을 갖기 마련이고, 천방노사는 우 연치 않게 찾아낸 객잔 아들을 억만복(億萬福)을 그야말로 애지중지 했다. 그렇게 당대의 숨은 고인이었던 천방노사는 순후하고 순박한 억만복에게 자 신의 깨달음을 하나둘 전수했고 죽음의 순간 자신의 필생의 공력까지 주입 시켜주었다. 바로 억만복이 절세기공인 천방지축신공(天方地軸神功)의 전인 (傳人)이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백록파의 장문인과 장로들은 알 수가 없었고, 억만복 은 천방노사의 장례가 끝나자 집인 만인객잔으로 돌아오게 된다. 천성이 순 후하고 순박한 억만복은 절세신공의 소유자이면서도 그것을 내색치 않고 부 친에게 가업인 만인객잔을 이어받아 꾸려나간다. 그 후로 상당한 시간이 흐 르고 백록파에서 천방지축신공(天方地軸神功)의 존재를 알게 되는 일이 생 겼는데 배분 상 억만복의 사질(師姪) 뻘되는 백록파의 제자가 억만복에게 무례를 저지르자 억만복이 존장의 도를 세우기 위해 그들 일 수에 제압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백록파를 발칵 뒤집어 버렸다. 억만복이 제압한 그 제자들 중 한명은 백록제일고수였고 백록파의 최강자가 패배했다는 것은 백 록파 전체가 졌다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백록제일 고수를 꺾은 무 공이 다름 아닌 백록파 무공이었다는 것이 알게 되면서 그제야 억만복의 존 재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배분 상 억만복을 함부로 할 수 있는 자는 백록파에 없었다. 그래서 백록파의 수뇌들은 억만복을 본산으로 끌어들이려 했으나 억만복은 끝까지 만인객잔의 주인장으로 남길 원했다. 그러나 백록 파는 자파의 비기가 외인에게 흘러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그에게 자파의 준재들을 보내 가르침을 받으려 했다. 그러나 억만복은 아무에게나 함부로 천방지축신공(天方地軸神功)을 전수하지 않았다. 그리고 억만복이 전인으로 결정한 사람은 스승과 같은 그리고 자신과 같은 은자(隱者)의 삶 은 살아가는 자에게 무공을 전수했다. 그리고 그 전통은 벌써 3대째 이어지 고 있었다. “동보야!” “왜요?” “네가 익히는 천방지축신공(天方地軸神功)이 왜 천방지축(天方地軸)인 줄 아느냐?” “글쎄요? 심오한 뜻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물론 심오한 뜻은 없다. 단지 천방노사 사조(師祖)께서는 평생 백록산을 벗어나 보신 적이 없으셨단다. 그래서 천방지축(天方地軸) 세상을 휘젓고 싶으신 아쉬움을 자신의 깨달음에 담으신 게지…….” “하지만…….” “그래 천방지축신공(天方地軸神功)은 일상의 생활습관처럼 수련해야하는 무공이다. 그래서 조용히 늘 같은 일상을 견디는 사람만이 대성할 수 있는 무공이다. 계속 수련을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고수에 반열에 드는 그리고 일상을 벗어나는 시간에 오히려 퇴보하는 무공이다. 그러나 나나 나의 사 부는 이미 아니 보통사람의 삶을 살아가는 데 불만이 없었지만 내가 보기에 너는 아니다.” “…….” 금동보는 주인어른 아니 사부의 말을 부인하지 못했다. 지난 수년가 따분하 기까지 한 일상이 너무나 권태로웠던 그였다. 그런데 오늘과 같은 활기가 넘치고 흥분되는 기분을 정말 짜릿하기까지 했다. “그런 표정 지을 필요는 없다. 이제 우리의 천방지축신공(天方地軸神功)도 세상을 한번 거나하게 울려 볼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 사실 그것이 위력이 야 강하지만 초식의 운용은 젬병이니 그것도 보완할 필요도 있고…….” 초식의 운용에서 실전경험이란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만인객잔에서 싸 울 일이 많지 않다는 것은 불문가지였다. “저들을 따라 가거라!” “주인어른…….” 그리고 아련하게 먼 곳에서 말발굽 밟는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두두두……………………. “주인어른, 군사들이에요.” 만인객잔의 꼬마 점소이 동동(動動)이 소리치며 식당으로 뛰어 들어왔다. 식당 안에 사람들은 꼬마 점소이의 말에 술렁였지만 환자들의 피고름을 닦 아내던 아름답기 그지없는 한 소녀가 조용히 일어서서 여인들과 밖으로 나 서자 이내 소요는 진정되었다. “천상천화에게 뭔가 있군. 단순히 그녀가 나섰다는 것만으로 사람들의 마 음이 안정되는 듯하니…….” “그거야 당연하죠. 연약한 아녀자가 나서는 데 사내라는 것들이 호들갑 떨 면 거시기 떼도 할 말 없지!” “대형, 거시기가 뭐예요?” “에? 그것 말이다…….” -딱~! 볼이 통통한 꼬마 점소이 동동의 순진한 물음에 친절하게(?) 가르쳐 주려던 금동보의 머리에 오분의 손에 들린 주판이 또다시 작렬했다. “애한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안 나갈래?” “나가요, 나가! 말로할것이지 꼭…….” 금동보는 주인자의 손에 들린 박달나무 주판이 또다시 들려지려하자 얼른 밖으로 나섰다. *** “전에는 이런 느낌이 없는 평범한 객잔이었는지 알았는데 백록파의 말코들 이 참을 용의주도하군요.” “예? 뭐가요?” 검선자 주묘연이 객잔 밖으로 나서며 중얼거리자 설화가 그 소릴 듣고는 되 물었다. “이곳은 보통객잔이 아니에요. 그냥 봐서는 알 수 없지만 객잔주인과 점소 이들 모두 상당한 무공실력을 감추고 있는 듯해요.” “아아! 그 이야기였어요?” “소궁주는 뭔가 아는 바가 있으신가요?” “잘은 모르겠지만 저들이 엄청난 힘을 다루는 고수라는 것은 알아요.” “그게 무슨?” 그러나 대화는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 세 정립천하군이 객잔을 포위하기 시 작했기 때문이었다. 군사들이 순식간에 누런 먼지를 일으키며 포위를 완료 하자 한 장수가 앞으로 나오며 설화를 보며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지껄였다. “짐승 주제에 감히 천하제일미를 자처하는 천상천화가 얼마나 아름다운 가 했더니 역시 이름값 정도는 하는 군. 그러나 아무리 아름다워야 겉껍데기 일 뿐…….” “감히!” -챙! 그 장수의 비아냥거림에 참지 못할 모욕감을 느낀 것은 설화보다 오히려 여 인천궁의 여인들이었다. 지난 보름간 소궁주님이 환자를 손에 피고름을 묻 혀가며 지극정성으로 돌봐온 것을 지켜본 그들이었다. 저런 무례한 한마디 말로 폄하될 소궁주님이 아니었다. “호오! 저 고양이 계집이 그렇게 소중한 존재인가?” “닥쳐라! 네놈의 구린내 나는 입에 함부로 오를 내릴 분이 아니시다.” “크크크, 짐승이 부리는 가축 따위가 입이 험하구나…….” “네 놈이……?” 짐승이 부리는 가축. 바로 수인(獸人)인 주인을 모시는 사람들을 칭하는 말 이었다. 정립천하군이 정립천하를 외치며 종도를 점령하여 수인들과 관계가 있는 자들을 싸잡아 그렇게 불렀다. “이봐요! 방 없어요. 그리구 댁 같은 손님은 장사 망한데도 싫으니까 딴데 가서 알아봐요!” “네 놈은 뭐냐?” 정립천하군의 장수는 여인들과 대화에 끼어든 존재를 날카롭게 쏘아보며 물 었다. 그러나 상대는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느물느물 따가운 시선을 받아 넘겼다. “나 여기서 일하는 점소이인데 우리 객잔 앞에서 소란 피우지 말고 곱게 말할 때 가쇼.” “허, 지금 그 말 내게 한 것이냐?” “여기서 소란피우는 것이 네놈이시지 여기 이분이시겠소?” “킥!” “풋!” 상대를 시원스레 깔아뭉개는 점소이의 화술에 여인천궁의 여인들은 아까 들 었던 모욕을 잊은 듯 웃음을 참지 못했다. “황자조(黃字組)는 저 짐승계집을 잡고, 나머지는 마을을 불살라라!” “옛!” -크악! “헉! 뭐냐?” 우렁찬 복창과 함께 명을 수행하려던 군사 중 한명의 목이 장난처럼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거기에 터질 듯한 근육을 가진 대머리 거인이 피를 머금은 박도를 쥐고 서있었다. “아이고, 저 아저씨 또 사고 쳤네. 누가 전직살수 아니랄까봐…….” “이이이, 이놈들이 전원공격! 정립천하군에 반하는 자들은 죽음뿐이다.” -와아~! “웃기지 마라! 종횡천하(縱橫天下)!” 군사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자 금동보는 천방지축신공의 공력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세상이 정지되어버린 듯 모든 것이 멈춰졌고 그 부동(不動)의 공간 에서 움직이는 것은 오직 금동보 뿐이었다. -퍼버버버버벅! “크헉~! 요술이다!” 천방지축신공은 다름 아닌 공간을 지배하는 공력(功力)이었다. 이것은 심검 (心劍)의 경지로 비유되는 깨달음의 무공과 필적하는 공간을 지배하는 공검 (空劍)의 경지에 무공이었다. “용행만리(龍行萬里)!” “욱! 또?” 다시 한 번 일정 공간의 모든 것이 정지되고 그 속에서 용이 꿈틀거리는 형 상을 모태로 한, 한초식의 권법이 시연 되었다. 초식자체는 평범하기 이를 떼 없었으나 모든 것이 정지된 공간에서 홀로 움직이니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리고 그 공간 밖 살기 넘치는 간결한 도법으로 나무토막 자르 듯 군사들을 베가는 대머리 주방장 허관군은 착실하게 적의 숫자를 줄여갔 다. 그를 중심으로 상당한 공간이 제어되는 듯 군사들은 피를 머금은 혈도 가 자신들의 목을 쳐 와도 움직이지 못했다. 공간을 제어하는 공검(空劍)은 기(氣)로 또 다른 기(氣)를 제어하는 것이었 다. 그 기(氣)를 운용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심력(心力)이 소모되는 일이었 다. 육체보다 정신적인 피로가 극대화되기에 정신이 쉽게 지치는 무공이었 다. 연이은 공력운용으로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금동보는 천방지축신공의 공력을 풀었다. 그러나 금동보가 맡은 적은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금동보 가 손속에 사정 둔 것이었다. “죽여라!” 악에 받힌 장수의 명령에 정립천하군의 정예병들은 우르르 달려들었고, 초 식운용엔 평범한 금동보의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예휴~! 저놈은 장가를 보냈더라도 저럴 것이 뻔해! 정신 못 차리고 공력 을 남발하니 지가 안지치고 배겨?” “주인어른 저러다 우리 대형 죽겠어요.” “아서라 너희들 실력으로 나서면 개죽음이다. 관군이가 알아서 잘 해줄 거 다. 그리고 저쪽도 움직일 모양이데…….” 오분의 말처럼 점소이의 뜻하지 않는 신위에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하던 여 인천궁의 여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아! 멋있다. 근데 우리는 저렇게 멋진 무공이 없지?” 옥녀무(玉女舞)를 추는 여인천궁의 여고수들의 멋진 동작에 만인객잔의 점 소이들은 부럽다는 눈으로 미인들의 춤을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리 고 천방지축신공으로 암암리 그녀들을 도왔다. 그들의 실력으로 대형인 금 동보처럼 공간을 지배하는 것은 아직 무리지만 일정거리에 있는 적의 움직 임을 방해하는 것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정예군사라 말할 수 있는 정립천하군이 대열을 정비하여 조직적이 움직임을 보이자 전세는 서로 힘겨루기 상태가 되어버렸다. “옥녀백운(玉女白雲)!” 설화가 군사들에게 옥녀백운의 초식을 운용하여 그들을 휩쓸어갔다. -촤아~! -파삭! 그러나 아직 설화는 사람을 죽여 본 경험이 없었다. 그래서 설화의 공력은 진형을 형성한 군사들은 조금 차갑고 만 그 경력(勁力)을 무시하고 압박을 계속했다. “흥! 떨 거 없다. 그저 눈을 속이는 요사한 사술일 뿐이다. 전군 돌격!” “돌격!” -와아~! 그리고 진형을 유지한 체 우격다짐으로 돌격이 시작되었다. 그때! “백록파의 제자들은 간악한 무리들에게 혈채(血債)를 갚아라!” -우와~! 사방에서 하얀 무복차림의 무사들이 검을 들고 쏟아져 나와 천상천화를 추 적해온 군사들을 쓸어갔다. -와창! -크악! 사위는 순식간에 흉신야차가 난무하는 듯 변했다. 본산이 변을 당했다는 소 식을 듣고 부랴부랴 백록산으로 돌아온 백록파의 제자들은 싸늘하게 식어 썩어가는 사형제들의 시신과 반파되어 잿더미가 된 본당을 보고 오열했다. 그런 그들에게 피 값을 조금이라도 받아낼 기회가 생긴 것이다. 공략삼관(攻略三關) 우기가 끝나고 건기가 시작될 무렵 봉수성에 5만 하남천원군이 도착했다. 상경 청인성의 2만5천과 계주(癸州)와 경주(慶州)에서 각각 1만, 그리고 남 례성에 들어서며 각 성(城)에 주둔한 관군을 모은 병력이었다. “이거 생각했던 보다 더 심하군.” “그나마 한풀 꺾인 겁니다. 저희가 도착했을 땐 정말 찜 솥에 들어 앉아있 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남천원군 대장군 금영월(禽英越)은 라혼의 얘기에 혀를 내둘렀다. “그런데, 듣자하니 조정에서 직접파견한 관리를 참수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어찌된 일인가?” “남례성의 모든 병권은 하남천원군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자가 우리 군 의 명령을 거부하고 오히려 창검을 들이댄 것은 하극상의 죄를 범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참한 것인가?” “그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봉수성에서 아니 남례성에서 가장 정예라 할 수 있는 1만 위병들을 다스릴 수 없다면 외지에서 온 군사들만 가지고 반란을 토벌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 운 일이다. 그러나 라혼이 그를 벰으로써 그 본을 보여 하남천원군은 손쉽 게 남례성의 모든 병권을 장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정에서 이일을 그냥 넘기진 않을 것인데 괜찮겠나?” “후후후, 만약 그 일을 금대장군이 했다면 문제가 될 것이지만 제가 했으 니 조정에서 죄를 묻는다면 저만으로 그칠 겁니다.” 모든 책임을 홀로 안고 가겠다는 라혼의 말에 금영월은 더 이상 아무런 말 도 할 수 없었다. 아무런 사심(?) 없는 라혼의 태도에 은은히 감동했다. 금 영월이 보기에 라혼은 스스로 희생하면서도 어떠한 이득도 마라지 않는 그 의 모습은 다소 과격하게 움직였어도 모든 일을 하남천원군을 위한 일이었 다. “알았네, 그 일은 더 이상 거론하지 않기로 하지. 그보다 내 자네에게 마 군대장을 맡기려 했는데 수군을 편성했더군. 그래서 말인데…….” “혹시, 뱃길로 보급품 수송을 하시려는 것입니까?” “그럴까 하네.” “알겠습니다. 금대장군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고맙네.” 라혼은 그간 자신이 부리고 있었던 봉수성의 위병들과 부근 관군들을 하남 천원군에게 넘기고 본격적으로 수군창설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장수들이 모이게 되자 첫 작전회의가 열렸다. 작전회의의 시작은 라혼 이 그간 수집한 정보를 설명하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반란의 배후가 묘연하 다는 것부터, 일단 표면에 들어난 진토인들의 전투습성과 토벌방법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하고 작전제안을 했다. “봉수성과 부근 지역은 이미 저희 하남천원군이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습니 다. 일단 반란군이 차지한 주도(主都)인 호도(好都)를 탈환하는 것이 옮을 듯싶습니다. 봉수성에서 호도로 가려면 삼관(三關)를 지나야 합니다. 삼관(三關)이란, 입구인 족정관(足丁關), 오수관(吳須關) 그리고 천수교(川 水橋)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 세 관문 모두 소수군사로 대군을 막을 수 있 는 천험의 요지였다. “라혼참장, 굳이 어려운 길부터 갈 필요가 있겠소? 일단 서해연안의 거점 부터 확보한 연후 호도로 가는 것이 좋을 듯싶은데?” “상정령의 말도 일리는 있지만 사실상 바닷길이 막힌 상태에서 서해연안을 차지해보아야 별 소용이 없소.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호도를 탈환하여 반적들에게 하남천원군의 위엄을 보이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오.” “그러나 조정이 원하는 것은 막힌 길을 뚫는 것이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반란세력의 주체가 진토인들이고, 얼마나 많은 진토 인들이 모여들고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는 것이오. 겉으로 드러난 반란군은 고작 수천이나 실제로 병마를 몰아 성 앞에 섰을 때 그수가 얼마로 늘어날 지 모른다는 것이다. 성민의 대부분이 바로 그들 진토인들이기 때문이오.” 갑론을박(甲論乙駁), 일의 선후를 결정하는데 주작대의 상초와 라혼의 언쟁 이 계속 되도 다른 장수들은 그저 라혼과 상초의 언쟁을 지켜볼 뿐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리고 비로소 회의의 주재자인 금영월이 중재에 나섰다. “그만 하시오. 상정령이 걱정하는 것은 호도로가는 삼관을 뚫기 난해하여 그러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대장군, 제가 하고자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일단 서해안의 거점들을 확보한 연후 마지막으로 여유를 가지고 호도를 공략하자는 겁니다 .” “라혼참장의 뜻은……?” “일단 겉으로 보기에 호도를 점령한 무리들과 다른 곳에 무리들은 서로 다 른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되어집니다. 그러나 상정령에 말대로 서해연안의 거점을 점령한 그들을 핍박하면 그들이 기댈 곳은 오로지 호도에 웅거한 세 력이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례성의 주도인 호도를 탈환하고, 일군 으로 서해연안의 거점들을 확보해 나가는 겁니다. 이것은 그냥 거점을 공략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략이랄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후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사용하여 진토인들을 회유하는 것이 반란토벌의 중요한 요점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보급입니다. 서해연안의 거점은 인시드와 남주무역로 에 전적으로 의존한 면이 너무 높습니다. 사실상 빛 좋은 개살구나 다름없 는 그곳을 미리 확보해보아야 얻는 것은 굶주린 백성뿐입니다. 그러나 호도 는 남례성의 내륙상권에 중심지 아직 반란의 기운이 있겠으나 우리는 호도 를 얻으므로 그들에게 나누어줄 당근을 확보할 수 있는 겁니다.” “과연! 금대장군, 라혼참장 말이 참으로 옮소. 그러나 라혼참장, 그대가 말하는 것에 한 가지 맹점이 있는데 그것은 어찌하려하오?” 숭무공(崇武公) 원공반(猿孔磻), 원제가의 보배라 일컬어지는 젊은 사내가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치기까지 느껴지는 표정으로 회의에 끼어들었다. 일단 제후(諸侯)의 관작을 가진 원공반이 이 자리에서 가장 높은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그 원공반이 지적한 것은 다름 아닌 삼관(三關)을 공략하는 난해함을 말하고 있었다. “그렇군! 종도로 가려면 세 관문을 지나야 한다고 아는데 그 세 관문모두 적도들이 버티고 있네! 그것에 대한 대책은 있는가?” “그것은 제가 책임지고 뚫겠습니다. 지금당장 제가 일군을 이끌고 우선 족 정관으로 가겠습니다.” “자네가 말인가?” “예!” 금영월은 라혼이 이렇게까지 호도공략을 주장하자 뭔가 생각이 있겠거니 짐 작했다. 금영월의 생각에도 삼관만 극복된다면 호도를 먼저 탈환하는 것이 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좋다! 제장들은 들으라. 호도로 가건 길을 따라 남진을 하던 다시금 병을 움직여야 하는 일이다. 병사들의 사기를 점검하고 출진을 준비하라!” -존명! 라혼은 금영월의 허락을 받고, 모원이 짜놓은 전략을 검토했다. 사실 라혼 은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상태였다. 금영월이 봉수성에 도착하기 사흘 전까지 귀림의 드워프 마을에서 지내고 있었고 백호십일걸이 빈둥거리는 주군을 위해 열심히 움직여 준덕에 별문제 없이 봉수부를 중심으로 까지 지배력을 확실히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현재 봉수부에서 모은 병력에 반인 8천의 군사들로 하여금 그곳을 지키고 있었 다. “지금 출진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말인가?” “본대는 며칠 더 쉬어야 하겠지만 봉수성의 위병 8천이 족정관 입구를 틀 어막고 있습니다.” “으음, 알았네. 그렇게 하게…….” 라혼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삼관(三關)을 깨는 공(公)을 미리 세워 시간이 걸릴 종도공략에서 빠지려는 것이다. 라혼이 오늘 회의에서 느끼기에 주작대의 상초나 현무문, 청룡문 출신의 장 수들이 자신을 같은 급으로 생각하며 견제를 하는 모습이 역력했기 때문이 었다. 지금 라혼에게 중요한 것은 이 형체가 없는 적과 싸우는 전쟁이 아니 라 드워프들의 지식을 마저 배워두는 것이었다. “주군!” “고학 오랜만이군.” 출진주비에 바쁜 라혼에게 현재 하남천원군의 군무(軍務)를 맡고 있는 고학 이 찾아왔다. “오늘 주작대장 상초가 주군을 견제하는 것을 느끼셨을 겁니다.” “여전히 자네 딱딱하군, 수개월 만에 만났는데 얼굴보자마자 그 이야기라 니…….” 라혼의 투덜거림에 고학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예! 이번에 계주와 경주에서 병졸들을 모아 주었는데 그들 태반이 창을 처음 잡아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금영월 대장군이 백호문의 군사들 을 중용하여 대부분 최하 오장(伍長)에서 십장(什長), 부장(部長), 대장(隊 長)에까지 임명했습니다.” 사실 라혼이 백호수문금군을 기병으로 만들었을 때 1백명의 군사를 통괄하 는 대장(隊長)급 지휘관으로써 교육도 같이 병행했었다. 그것은 앞으로 지 속적인 모병이 이루어져 그들을 이끌 중간급 지휘관이 많이 필요할 것이라 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것을 간파하고 제대로 된 인재운용을 하 는 금영월의 능력도 상당하다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학이 말하려 하는 것 은 겉으로 보이는 인사의 편중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 “그러나 그들은 주군에 대한 충성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금영월과는 항상 같이 있었고 또, 암묵적으로 후계자가 있다면 자신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사이였다. 그것은 금영월도 인정하는 것이었지만 다른 장수들은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 겉으로 들어난 모습은 라혼아 금영월을 꼭두각시로 만들어 조종하려 하는 것처럼 비쳐질 여지가 너무 많 았다. 즉 상초 등이 라혼을 견제하는 것은 금영월 대장군에 대한 일종의 충 성인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라혼이 마음만 먹으면 당장 중간 간부들이 반 란을 일으키는 것은 여반장(如反掌),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일이기도 했 다. “고학.” “예, 주군!” “나는 바다를 내 영토로 삼을 생각이네.” “예?” “자세한 것은 모원에게 물어보게 그리고 자네도 바다에 대해서 공부를 해 두어야 할 것이다.” 고학은 주군인 라혼의 말을 어렴풋이 밖에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간 백호문 출신 부장들과 준비한 것이 헛수고처럼 느껴져 약간 허탈한 생각도 들었다. 고학은 검은 갑주를 입고 백호영들과 함께 성을 나서는 그 모습을 보며 홀로 나지막한 음성을 토했다. “바다라…….” 백호나한 라혼이 폭풍 같은 움직임은 참으로 여러 사람을 허탈하게 만들었 다. “이거야 애인에게 바람맞은 기분이로군.” “어인 말씀이십니까? 저하.” 아직까지(?) 수인제일고수인 숭무공 원공반은 백호나한의 갑작스런 출전을 전해 듣고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그와 다시 손속을 겨뤄보려 기회를 엿보았건만 계속 이리도 힘들 줄이야. ” 사실 그랬다. 처음 원제에게 부탁하여 하남천원군에 종군한 이유도 백호나 한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원공반이 하남천원군을 찾았을 땐 그는 이 미 먼저 남례성으로 떠난 후였다. 그리고 드디어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건 만 도착과 동시에 또 다른 임무를 가지고 출진한 것이었다. “그보다, 여기 봉수성은 참으로 희한한 곳이로군.” 원공반의 감각에 걸린 봉수태수부의 하인들 중 상당한 실력의 고수가 간혹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봉수태수 돈석이란 자도 상당한 무공을 가 진 고수였다. 게다가 태수관저와 그 주변에서 뭔가 일어나고 있었다. 봉수태수 돈석의 관저는 본의 아니게 봉수성의 암류의 중심에 있었다. 그것 은 다름 아닌 관저 후원을 통째로 차지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손님 때문이었 다. “회주님 뵈옵니다!” “어서 오세요.” 홍의궁장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중년의 미부에게 장상이 길게 읍(揖)했다. “장장로의 손자분이라 들었습니다. 장소협이라 불러도 되겠지요?” “소협이라니 제겐 과분한 칭호입니다.” “그런 되었군요. 장소협 백호나한과 안지는 얼마나 되었나요?” “주군… 아!” 장상은 백호나한을 주군이라 칭한 것에 스스로 놀라 탄성을 터트렸다. 이미 백수회에 적을 두고 있으니 주군이라 칭할 수 있는 자는 오직 홍의미부 백 수회주인 묘랑뿐이었다. 그러나 홍의미부는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고 오 히려 장상을 안심시켰다. “괜찮습니다. 백호나한은 이미 남이 아니니…….” “예, 주군과 알게 된지는 이제 두어 달이 지났을 뿐입니다.” “그렇군요.” 잠시 침묵하던 백수회주 묘랑은 다시 입술을 떼었다. “장소협.” “예, 회주!” “장소협이 보기에 백호나한은 어떤 인물인가요?” “풍운(風雲)같은 분이십니다.” “바람과 구름?” “예, 그가 행한 모든 일은 대부분 졸속(拙速)이 무엇인지 설면하듯 폭풍처 럼 모든 일을 처리합니다. 그러나 크게 보면 그 모든 일은 바람에 흘러가는 구름처럼 일정한 방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졸속(拙速)?” “그렇습니다. 그 예로 수군을 만드는 일은 상당한 시간과 노력, 그리고 자 금이 소요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그는 단 사흘 만에 이루어 냈다 들었습니다. 그러나 빠르게 급조한 것은 여기저기 허점이 많은 법. 하지만 이미 수군은 만들어졌습니다.” 묘랑이 놀란 것은 수군을 만들거나 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단 두어 달 밖 에 지내지 않았다고 하는 장상이 그에 대해 말하면서 스스로 자랑스러워한 다는 것이었다. “그렇군요. 그보다 장소협은 백호나한이 그동안 어디에 있었는지 아시는 것이 있나요?” “제가 듣기로 봉수부에 있는 귀림(鬼林)에서 우르하 부족의 성녀(聖女)와 같이 지냈다 알고 있습니다.” “예, 알았습니다. 어째든 그대의 소임은 매우 막중합니다. 백호나한과 본 회주는 약간의 인연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나 그가 어찌 생각할지는 의문 입니다. 그러니 장소협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명심 봉행하겠습니다.” 장상은 회주와 주군의 인연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일단 오늘은 상견례를 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그 건은 일단 접어두었다. “뭐야? 그것을 백호나한이 이미 차지했을 거라고?” 호화의 밀명을 받고 오지인 남례성으로 온 호영은 귀호기의 1호에 보고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예! 그렀습니다. 호영! 그리고 그는 이미 봉수성을 한손에 장악한지 오래 입니다.”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것의 행방이다.” “그것은 아직 귀림의 토지신 마을에 있을 겁니다. 한 달 보름 전 귀림에서 귀림을 지키는 차레족이 침입자와 싸움을 한 흔적이 있었는데 그들이 다름 아닌 남례일족과 그간 꼬리만 슬쩍슬쩍 보이던 백수회였습니다.” “남례일족의 소야가 무공이 전폐된 일과 관련이 있는 것인가?” “그렇다고 생각되어집니다.” “으음~!” 잠시간 침묵이 흐르고, 뭔가 생각하던 호영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우리에겐 시간이 없다. 다소간에 피해를 감안하고서라도 반드시 그것을 확보해야 한다. 귀호기는 길을 안내해라! 귀림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우린 아직 길을 알지 못합니다.” “일은 과감하게 할 때와 신중하게 할 때가 따로 있다. 그리고 지금은 과감 할 때다.” 호영이 생각하기에 호영기가 호황가를 너무 오랫동안 비우는 것은 좋지 않 았다. 본디 귀호기는 외부의 일을 호영기는 호황의 주변의 일을 처리해 왔 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귀호기주가 어이없는 일로 참수되어 호황이 다급하 게 호영기의 호영을 남례성으로 보낸 것이다. 귀호기주는 공식적인 신분과 이름을 가지지만 호영기의 호영은 이름도 신분도 잊은 체 오로지 호황을 위 해서만 살아야 했다. 그래서 그를 호영(虎影), 호랑이의 그림자라 부르는 것이다. 봉수성에서 출진한지 만 하루 만에 족정관과 반나절 거리에 진을 친 군진에 도착했다. 족정관은 거대한 협곡지대로 <亞>형 계곡이었다. 입구와 출구는 좁고 내부의 공간이 있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요새였다. 라혼은 일단 만 하루 동안 쉬지 않고 달려온 백호영들을 본진에서 쉬게 하 고 본진에 주둔해있는 관변들의 출진을 명했다. “모석, 이곳에서 잠시 쉬고 족정관으로 와라!” “예, 하지만 주군께서도 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걱정 말고 너무 늦지는 말도록.” “…….” 라혼은 백호영들이 충분히 쉴 수 있도록 약 오백가량의 병력을 남겨두고 본 진을 족정관을 틀어막은 통나무와 진흙, 덩굴로 만든 판축들 다양한 공법으 로 만든 성벽 앞으로 옮겼다. 과거에 존재 했던 진토인들의 왕국이 만들어 놓은 성채를 최근 그들 나름대로 보수한 성벽은 얼핏 엉성해 보이지만 사실 을 매우 견고함을 알 수 있었다. “주군, 족정관을 지키는 진토인들은 그 수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지금 당 장 사다리 부대만으로도 공격하면 해가 지기 전에 함락시킬 수 있습니다.” 족정관을 견제하는 임무를 맡아 8천 위병들의 훈련과 지휘를 맡았던 웅장모 의 의견에 라혼은 흥쾌히 수락했다. “좋다. 준비가 끝나는 대로 공략을 시작한다. 총지휘는 웅참위가 맡는다. ” “존명!” 웅장모는 라혼의 명이 떨어지자 겉모습을 반인반웅의 모습으로 바꾸고 포효 했다. -쿠워~! 수인이 그것도 맹수과의 수인이 반인반수의 모습으로 바꾼다는 것은 전투가 임박했을 뜻하는 것이었다. 특히나 곰은 신성시되는 짐승으로 힘을 상징했 다. 그러한 곰의 포효는 단숨에 전군의 사기를 충천 시켰다. “크릉~! 사다리 부대는 준비하고 발석차를 앞으로 대라! 노(弩)를 준비하 라! 오늘 해가 지기 전에 끝내야 한다. 크앙~!” 계곡인 족정관 전체가 웅장모의 포효로 가득차 아군의 사기는 충천함과 반 대로 나름대로 준비는 했으나 뜻밖의 기습을 당한 심정인 족정곡(足丁谷)의 수천의 반적들은 사기가 꺾였다. 그리고 사기가 충만한 위병들이 조립한 발석차에서 돌이 날아 족정관의 성벽을 때리기 시작했다. -덜껑! -쿵! -와아~! 발석차(發石車)에서 쏘아진 돌은 성벽을 넘지 못하고 성벽에 부딪쳤으나 위 병들은 호기를 참지 못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이것이 웅가(熊家)의 포효에 효과인가?” 과거 수인들이 천하를 제패할 때 수인들의 특수한 능력을 사용했다. 특히 맹수과의 수인들은 포효로 병사들의 사기를 단숨에 극대화 하여 두려움을 잃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신비스럽다기보다 인간이 원래 가지고 있던 전투 직전에 맹수를 숭배하는 풍습 때문이었다. 일반 병사들이 지니고 다니는 부적 중, 토끼 귀는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 호라이 이빨이 나 발톱은 용기와 의지를 상징했다. 특히 병가(兵家)에서 만이 지니고 다니 는 것이 늑대, 곰, 호랑이, 표범 등의 이빨이나 발톱이었다. 그런데 그럼 숭배의 대상이 같이 싸워준다는 것만으로도 사기가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 러나 저마다 수인들은 자기 가문의 특성에 맞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 은 사실이었다. -텅~! 덩, 텅! -쾅! 쿵궁! 세대의 발석차에서 날아간 돌중 하나가 우연찮게 성문에 맞았고 그 크게 흔 들리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것을 발견한 웅장모는 다시 한 번 크게 포효 하며 돌격을 명했다. -크왕~! 돌격하라~! -돌격하라! 병사들은 본능적으로 반응하며 굵은 대나무로 만든 사다리를 어깨에 걸친체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쏴라!” -투두둥~! -피이익~! 픽! 피이이이익! 사다리 병의 돌격과 동시에 노병(弩兵)들이 일제히 소리 나는 화살인 효시( 嚆矢)를 날려 성벽 위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노(弩)란 두발로 활대를 받히 고 몸 전체를 이용해서 쏘는 강궁으로 백보 밖까지 날아가 돌에 박힐 정도 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노(弩)를 다루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었다. 위병들은 본래 연안을 지키던 임무이다 보니 노(弩)를 다루는 자들이 많았다. 한두 번 일제사격을 하자 적도들이 얼굴을 들지 못했다. 역시 진 토인들은 수성전(守城戰)에 익숙지 않은 것 같았다. 단지 소리 나는 화살 고작 수백 개가 날아오는 정도로 머리를 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크렁! 사다리 부대의 선두가 성벽에 사다리를 걸자 웅장모는 또, 한번 포효하며 거대한 도끼를 들고 성문 쪽으로 쇄도했다. 그러나 진토인들의 반격도 만만 치만은 않았다. 초반 기세에 눌려 효시(嚆矢)에서 나는 괴음에 고개를 들지 못하던 진토인들이 화살을 날리며 저항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족정관의 반적들이 성벽위에서 돌덩어리를 떨어트리고 성벽위에 거치된 사다리를 밀 어 떨어트리자 아군의 피해가 속출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2시진(4시간)이 지 나자 전투는 답보상태를 면치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저항은 이내 끝나고 말았다. 옛말에 이르기를 ‘잔을 넘치게 하는 것은 많은 술이 아니라 한 방울의 술 이다’라는 말이 있었다. 그리고 그 한 방울의 술이 전투의 승패를 갈라놓 았다. -주군, 오차입니다. -오차는 웅장모를 도와라! -존명! 오차가 까마득한 하늘에서 검은 날개를 퍼덕이며 거대한 도끼로 성문을 부 수는 웅장모를 괴롭히는 반적 진토인들을 쏘아갔다. 그리고 얼마 후 후위에 서 1천 백호영이 그 모습을 보였다. 검은 갑주의 위압적인 모습은 아군의 사기를 높여주었고, 적군의 사기는 다시 한 번 꺾어 놓았다. -만세! 만세! -와아~! 와아~! 답보상태이던 전투는 아군이 되자 그렇게 믿음직스럽기 그지없는 백호영의 출현으로 사기가 충천한 위병들이 마지막 힘을 짜내며 밀어붙이기 시작하자 성벽의 여러 군데 거점을 줄줄이 화보하기 시작했다. 거기다……. -쾅쾅쾅쾅쾅……. 쾅창! -성문이 깨어졌다! 오차의 도움으로 화살이 날아오거나 뜨거운 물이 부어지고, 또 바위가 떨어 지는 방해를 받지 않게 되자 웅장모는 전력을 다해 성문을 부수었고, 두꺼 운 통나무를 통째로 엮어 만든 성문은 절정고수의 공력이 실린 도끼질에 견 디지 못하고 깨어져 나갔다. 그리고 웅장모의 맹수 특유의 흉성을 유감없이 폭발시키며 내부로 쇄도해 들어갔다. 그때 라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1천 백호영의 돌격이 시작한 것이다. “백호돌격!” -백호돌격~! -와아아~! 백호영의 돌격이 시작되자 위병들은 분분히 길을 내어주며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장모, 성문을 치워라! 귀가에 들린 주군의 전음성에 진토인들을 쪼개던 웅장모는 서둘러 백호영이 지나갈 길을 만들었다. -두구두구두구두구두구두구……………………. 그러나 백호영은 말을 멈추지 않고 곧바로 족정관을 관통해 반대편으로 쇄 도했다. -장모, 이곳은 완전히 장악하고 오수관으로 와라! -존명! 따로 상의한 바는 없었지만 웅장모는 주군이 백호영들과 더불어 무방비 산 태인 오수관으로 갈 것임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족정관의 반대편 입구의 성문 또한 굳게 잠겨있는 것을 확인한 라혼은 말을 세우고 만력에게 명했다. “만력 성문을 열어라!” “옛! 나를 따르라!” 만력을 비롯한 1백 백호영이 성문에 쇄도하며 허리를 퉁겨 몸을 세워 말 등 을 박차고 올라 순간적으로 몸을 높이 뽑아 올리는 데는 가장 탁월한 어기 충소(馭氣沖宵)의 수법으로 성벽위에 올라 당황한 거의 벗고 앞만 나무막대 인지 뼈인지를 역어서 만든 보호구를 착용하고 얼굴에 붉고 검은 화장을 한 진토인들을 베어갔다. 그리고 반에 반각도 안 되는 시간이 지나자 성문이 들려올라가며 활짝 열렸다. “주군, 성문이 열렸습니다.” “좋아! 오수관은 이곳에서 하루거리다. 그러나 말을 타면 반나절이면 갈 수 있는 곳이다. 각오는 되어 있겠지?” “명만 내려 주십시오!” “좋아, 간다!” -두두두두두두두……………………. 1천기(騎)나 되는 기마가 족정관을 빠져나가고 순식간에 성문을 지키던 소 수의 진토인들을 주살한 만력일행도 후위에 따라 붙었다. 그렇게 3시진(6시 간) 가량 말을 달린 백호영은 해가 완전히 떨어지고 자정이 가까워올 무렵 오수관에 도착했다. 오수관은 3개의 산성이 지키는 구불구불한 길을 말했다 . 그럼으로 따로따로 떨어진 난공불락(難攻不落)을 자랑하는 산성(山城) 3 개를 완전히 장악해야 하는 것이다. 라혼은 말에서 내려 백호영을 넷으로 나누어 산성을 습격하게 했다. “고우는 이곳을, 만력은 여기, 모석을 여기를 친다. 그리고 원복과 잔폭광 마는 나와 함께 만약에 사태를 대비한다.” “옛!” “…….” “그리고 겨우 여기에서 죽으며 우스개 소리도 못 듣는다.” “여기서 죽으며 망신인 것은 백호영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큭큭큭!” 라혼이 잘 하지 않던 농담에 맞장구치며 긴장을 푸는 만력이었다. “그리고 여기 받아라!” “이것은?” “오차에게 들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전환이다.” -오오오~! “오차의 것보다 더욱 성능이 향상된 것이다. 임무완수 보고는 이것으로 해 라! 사용 방법은…….” 라혼은 이제 완전한 팔찌형태의 전환(傳環)을 백호십일걸들에게 나누어주며 사용방법을 설명했다. “참으로 요긴한 물건이군요!” “이제 가라!” “존명!” 백호영은 장시간 말을 달린 피곤함을 무릅쓰고 소리를 최대한 죽이며 앞으 로 나갔다. 초승달의 달빛은 백호영의 검은 갑주가 보이게 하기에 너무도 미약했다. -키요오옥~! 밤하늘을 찢는 섬뜩한 비명성에 라혼은 고개를 저었다. “역시 살수의 역할을 바라기엔 무리였나?” -누구야? 실수한 것이? -음? 뭐야? 아! 이것이군. -미안하우다. -만력인가? 라혼은 전환을 통해 수다(?)를 떠는 그들을 보고 고개를 절래, 절래 저었다 . -도움이 필요한가? -전 괜찮습니다. -저도 괜찮습니다. -도움은 필요 없지만 주군이 보셔야 할 것이 있는데요? -앞으로 전환으로 대화할 때는 자신이 누군지 밝히는 버릇을 들여라! -존명! 라혼은 1백 백호영을 이끌고 모석이 공략중인 산성으로 달려갔다. -크악, 키요! 이제 대놓고 성을 지키던 반적 진토인들 주살하는 백호영이었다. “주군! 이곳입니다.” 모석이 안내한 곳은 다름 아닌 토굴이었다. 그곳에는 옷을 입지 않은 많은 진토인 여인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이 여인들은 뭔가?” “우리들은 호도의 성민입니다. 장군!” 라혼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초췌한 몰골에 심하게 폭행당한 흔적이 역력한 피부가 흰 여인이었다. 조그마한 천으로 국부와 풍만한 가슴만 겨우 가린 그녀는 진토인이 아닌 중주의 여인임이 분명했다. 상당히 험하게 다루어 졌 는지 몸 여기저기에 피멍이 들고 산발한 머리와 퍼렇게 부은 얼굴을 하고 있어 참을 보기에 민망했다. “그대는 누구인가?” “천첩은 남례성 절도사(節度使) 영양공(營養公)의 딸입니다. 그리고 다른 여인들은 성노예로 호도에서 끌려왔습니다.” 라혼은 스스로 남례절도사(南禮節度使) 영양공(營養公) 용사운(龍事運)의 딸이라는 용정란(龍精蘭)을 일단 토굴에서 꺼내 망토를 벗어 몸을 가려 주 었다. 그리고 라혼은 그녀에게 호도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현재 호도는 무 법천지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과 대부분의 외성 출신 비(非) 진토인들이 어 려움을 당하고 있다는 하소연이었다. 제 목: 수인기(獸人記) [23 회] 공략삼관(攻略三關) “흑흑흑흑, 그놈들이 저를 이곳으로 끌고 오려 아버지를…….” 용정란은 그 지옥 같았던 토굴에서 빠져나오자 설움에 북 받혀 오르는지 흐 느끼기 시작했다. 용(龍)이라는 성(姓)을 지닌 지체 높은 가문의 영애인 그 녀에게 이곳은 지옥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용황(龍皇)은 재능 있는 몇몇 십삼인가(十三人家)에게 용씨 성을 하사하여 용황가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 그럼으로 용정란은 군주(君主)의 신분을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그런 고 귀한 여인이 한낮 야만인들로 치부되는 진토인들의 노리개가 되었으니……. “흑흑흑흑흑흑……………….” “…….” 용정란은 지금 삶과 죽음의 갈래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수치를 당한 여인으 로 세상을 살아가기에 그녀의 신분은 너무나 고귀했다. 그 지옥 같던 토굴 에 있었을 때는 살아남는 것 외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아니 었다. 그러한 처지를 인지한 용정란은 더욱 서럽게 흐느꼈다. 라혼은 흐느 끼는 그녀 곁에 말없이 서서 그녀를 지켜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라혼에 게 모석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오수관 공략이 완료했음을 보고 했다. “주군, 오수관의 세 산성 모두 완전히 확보했습니다.” “음, 각 거점에 1백씩 남겨 그곳을 지키게 하고, 나머지는 병력은 사로잡 은 포로들과 함께 이곳으로 모으도록! 그리고 백호영의 피해상황을 확인해. ” “옛!” “이곳에서 밤을 보내고 내일 새벽 천수교(川水橋)로 갈 것이다. 그러니 식 사는 각자 지닌 육포로 해결한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오차에게 전환을 주어 웅장모에게 보내도록!” “옛!” 누군가 접근한 것을 느끼고 울음을 멈춘 용정란은 천상의 장군 같은 헌헌미 장부가 수하에게 거침없는 명을 내리는 모습을 멍하니 훔쳐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용정란을 더욱 수치스럽게 했다. 또다시 자신의 처지가 상기된 것이 다. 그리고 이내 그녀는 결심을 굳혔다. 혀를 이 사이로 밀어 넣고 마지막 으로 자신을 지옥에서 구한 백마공자의 헌앙한 모습을 훔쳐보며 질끈 힘을 주었다. 그러나 턱이 얼얼해지면서 도무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너는 용정란이 아니다. 너는 초초(草草)다. 용정란은 방금 죽었다.” 라혼은 그녀가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미예상하고 있었다. 그리 고 그녀가 죽음을 결심한 각오를 느껴 차마 눈앞에서 쓸데없는 수치감으로 목숨을 끓는 모습을 지켜보기가 너무도 안타까워 지풍(指風)으로 그녀의 아 혈(啞穴)을 점혈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를 말릴 수 있었지만 굳이 죽고자 고집한다면 그녀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라혼은 그녀에게 자신을 버리라는 했다. 만약 이 충고도 듣지 않는다면 더 이상 그녀가 스스로 목숨 을 끓으려는 것을 막을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녀는 스스로 자 진하려는 생각은 버린 듯했다. 그러나…. “절 거두어 주세요!” “…….” “아버님과 어머님, 그리고 가족 전부가 이미 비명에 갔습니다. 무리한 부 탁인 줄 아오나……. 흑!” 비감어린 어조의 용정란에 말은 라혼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이런 또 야? 어떻게 된 것이 도와주면 혹으로 달라붙는 거지? 마가 낀 건 가?’ 사실 설화도 그렇고, 백호영도 그렇고 최근에 차레 족의 경우를 봐도 사심 없이 도움을 주면 꼭 혹이 달라붙는 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지만 라혼은 그녀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시비(侍婢)라도 좋다면 거두어주겠다.” “천녀(賤女) 초초가 주인님 뵙습니다.” 억겁 같이 느껴지는 침묵을 깨고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용정란 아니, 초초 는 그 즉시 몸을 바닥에 던져 절을 했다. 그녀의 입장에선 지금 이순간이 새로 태어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용정란은 죽고 초초가 탄생되는 순간인 것이다. 의지할 곳이 생긴 여인은 다소 안심이 되는지 표정이 편안하게 바 뀌었다. -꼬로록~! “……!” “…….” 절을 하고 일어서는 초초의 배에서 울린 소리에 초초는 얼굴을 붉어졌다. “하하하하, 참으로 우렁찬 요곡음(要穀音)이로군.” “…….” 생과 사의 문제가 해결되어 살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 순간 몸은 곧바로 음 식을 찾는 것이다. 라혼은 그러한 것이 너무도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라혼 은 새로 태어난 초초에게 지니고 있던 음식을 주고 쉴 곳도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전환을 직접 손목에 채워주었다. 그러나 전환의 용도는 가르쳐 주지 않았다. 앞으로 하남천원군에게 호도가 탈환되면 그녀 가문의 남아있는 재 산이 그녀에게 귀속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지금의 결정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초초가 잠들 때까지 자리를 지키던 라혼은 그녀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산 성에 마련된 본영에 백호십일걸들과 함께 회의를 가졌다. “주군, 대승입니다!” “쳇! 이거야 원. 싱거워서 몸 좀 풀어보려고 했더니만 금세 마무리 되다니 …….” “백호영의 피해는?” “없습니다. 경미한 부상자조차 없습니다. 성을 수비하는 병력이 거의 없었 고, 우리의 기습을 생각지도 못했는지 초병도 얼마 없었습니다.” 라혼은 모석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모정령이 전했겠지만 내일 새벽 동이 트면 천수교로 갈 것이다. 말 을 달려 꼬박 하루를 가야하니 되도록 백호영을 편히 쉬도록 해라. 그리고 고우, 원복, 석은 각 1백 병력으로 족정관의 웅장모가 위병들을 끌고 올 때 까지 이곳을 지켜라.” “옛, 주군!” “오늘 보초는 셋에게 맡기고 나머지는 푹 쉬도록!” “저어 대장!” “……?” 라혼이 모든 지시를 사항을 말하고 회의를 마무리할 무렵 잔폭광마가 은근 한 어투로 말을 걸어왔다. 그러자 라혼은 물론 다른 백호십일걸들도 잔폭광 마에게 눈을 주었다. “대승을 거두었는데 이대로 그냥 밤을 보낸다는 것은 너무 섭섭하지 않습 니까?” “…….” 그렇게 운을 뗀 잔폭광마는 슬쩍 대장의 눈치를 살피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아까 창고를 보니까 술도 있고, 또 거시기도 있고……. 대장도 하나 건졌 으니……. 허험, 잠이야 하루쯤 자지 않아도 크게 지장이 있지도 않고……. ” 횡설수설(橫說竪說)하는 잔폭광마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언제 주변을 산성(山城) 내부를 훑었는지 술 창고와 여 자를 발견한 잔폭광마였다. “술은 허락하겠지만 여자는 안 돼!” “하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면 강제로 재워줄 용의도 있다.” “아닙니다. 술이나 마시죠 뭐!” 라혼의 ‘강제로 잠재우기’가 뭘 뜻하는지 눈치 챈 잔폭광마는 바로 꼬리 내렸다. 잔폭광마의 요구를 묵살한 라혼은 회의를 마무리하고 본영 건물을 나와 포로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수관의 세 산성을 지키던 반란 진토인들의 수가 많지 않았고, 대부분 주살(誅殺)된 덕에 포로는 수십 명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 포로들이 있는 곳으로 가까이 가자 매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퍽퍽퍽퍽퍽! -큭! 라혼은 누군가 맞는 소리에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무슨 일인가?” “주군! 별일 아닙니다. 반항하는 놈이 있어서…….” “그를 이리 데려와라!” 라혼은 백호영의 손에 이끌려 나오는 피떡이 된 나이어린 소년을 보고 눈살 을 찌푸렸다. “너는 누구냐?” “캬악~ 퉤! 네놈이 알 것 없다. 어서 날 죽여라!” 라혼은 강단 있어 보이는 이제 막 13~14세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소년의 정 체가 궁금했다. 그 나이 또래에서 적에게 침을 뱉으며 폭언하여 죽기를 소 망하는 것은 웬만한 영웅호걸도 하기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라혼은 소 년에게 더 이상 묻지 않고 다른 반란 진토인 포로를 따로 불러 심문했다. “저 아이는 누구냐?” “…….” “누구냐?” 라혼은 슬금슬금 소년의 눈치를 보는 그의 턱을 한손으로 힘껏 움켜쥐고 재 차 물었다. 그러자 라혼의 기세에 눌린 그는 더듬더듬 자신이 아는 바를 말 하기 시작했다. “저분은 추장의 아들입니다.” “추장의 아들?” 라혼은 그의 말을 듣고 깨달아 지는 부분이 있어 한명씩 따로 불러 심문한 결과 호도를 점령한 반란 진토인들의 세력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호도를 점령한 부족은 한때 남례성 전역 명성이 높던 ‘열지 족’이었다. 열지 족 은 수십 년 전 세(勢)가 남례성과 동쪽에 면한 후려(後慮)까지 미쳐 후려 곳곳을 습격하여 약탈을 자행하다 원주조정이 보낸 토벌대에 의해 토벌되 자취를 감춘 부족이었다. 당시 조정이 보낸 토벌대는 다름 아닌 강무세가였 는데 수십 년 후 열지 족은 원수인 강무세가의 지원을 받아 호도를 차지하 여 세를 과시하는 기염(氣焰)을 토한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것은 열지 족 의 추장 소노리의 세 아들이 각각 삼관을 지키고 있었고, 족정관이 위험하 다는 추장의 셋째 아들을 돕기 위해 다섯째 아들인 소년이 오수관을 지키던 대부분의 병력이 그쪽으로 보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는데 바로 족정관을 지키는 추장의 셋째 아들이 하루 전 호도 에 있는 추장에게 좀 더 많은 전사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는 사자가 지나갔 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호도의 추장이 자신의 아들을 돕기 위해 바 로 지원 병력을 족정관으로 보낸다고 결정 한다면 닷새나 빠르면 사흘 후 천수교에 지원 병력이 지난다는 뜻이 되었다. 천수교는 삼관(三關) 중 가장 공략하기 조심스러운 곳이었다. 천수교는 하 수라 강에 놓아진 다리로 족정관이나 오수관 같은 천험에 요새는 아니었다. 다만 그 다리가 끓어질 경우 서쪽에서 호도로 가는 길 요원해진다. 하수라 강은 강폭이 넓거나 격랑이 거친 곳이 많고 도강(渡江) 적합한 지점은 거 의 없었다. 거기다 지금 백호영이 천수교를 확보 하더라도 다리 자체를 지 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반란 진토인인 열지 족은 다리를 어떻게는 끓으려 할 것이고, 라혼은 다리가 끓어져야만 난공불락의 난관(難關)이 되 는 천수교를 반드시 온전한 상태로 두고 오히려 다리를 지키면서 싸워하는 꼴이 됐기 때문이다. “열지 족 전사만 5천에, 그간 열지 족과 함께하기로 한 부족의 병력이 2만 이라……. 그럼 최소한 5천에서 2만의 전사들과 밀림에서 드잡이 질 벌여야 한다는 뜻인가?” 어차피 무장으로 볼 때 경보병에 불과한 진토인들과 회전(會戰)은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이 유리한 밀림을 버리고 회전에 응할 가능성 은 희박했다. 그렇다고 절대 유리하지 않은 천수교 근처에서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처음 전략은 천수교까지 단숨에 길을 뚫고 호도성 앞에 진을 쳐서 반란 진토인들을 성안에 가두어 놓고 성의 공략을 하남천원군 본군에 맡길 생각이었다. 그러나 시간 상 이미 성 밖으로 반란 진토인들이 나온다면 그 전략은 대폭 수정되어야 했다. 족정관의 지원병력을 요청하는 사자가 바로 하루 전에 이곳을 지났다면 아직 호도에 사자가 도착하지 않았 을 것이지만 아무리 라혼이라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존재를 찾아낼 수는 없었다. 공략삼관(攻略三關) 시간은 흘러 먼동이 터올 무렵 라혼은 8백 백호영과 함께 오수관을 떠났다. 식사를 말위에서 해결해 가며 쉬지 않고 말을 몰아 해질 무렵이 되자 천수 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보통 보군(步軍)이라면 사흘이나 걸을 거리를 단 7 시진(14시간)만에 주파 한 것이다. "주군, 적들이 이미 우리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방비를 하고 있습니다." "병력은?" "대략 2~3천은 되어 보였습니다. 천수교는 일반적인 수레 2대가 나란히 지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다리였다. 봉수성에 모인 서경과 인시드 대륙 남주의 물산이 왕래하는 곳인 천수교는 다리 자체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천수교는 강에 놓여진 다리라기보다 계 곡에 놓인 다리였다. 길이 15장(丈 약45m), 강의 수면과 높이가 13장(丈 약 39m)나 되었다. 이곳에 다리를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이 남례성 특유의 폭우( 暴雨)때문이었다. 거센 폭포수 같은 폭우가 1시진동안 쏟아지면 하수라 강 의 수위는 단숨에 상승하여 다리와 반장(1.5m)까지 불어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불었다 빠지는 물은 웬만한 곳엔 다리를 만들 수 없게 만 들었다. 삼관의 길도 사실은 폭우가 쏟아져도 물에 잠기지 않는 언덕의 능 선을 따라 닦여진 길일뿐이었다. 그 말은 대군(大軍)과 물산을 수송하는 조 정의 입장에서 삼관이 중요했지만 이곳 진토인들은 그 길 뿐만 아니라 밀림 을 가로지를 수 있기 때문에 그 중요도가 훨씬 덜했다. 서안과 동안에 다리 를 지키는 요새 탑과 주변 작은 마을이 형성되어 하나의 요새가 된 천수교 는 그 하나만으로도 능히 일성(一城)에 견줄 만했다. "대장 이것저것 생각할 것 없이 그냥 깨버립시다." "아닙니다. 저들이 방비를 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우리의 존재를 감지하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일단 여기서 진을 치고 사태추이를 살피는 것이 상책 인 듯싶습니다." "형님, 그런 여기까지 온 보람이 없잖아요. 그렇게 죽을 똥 싸면서 달려왔 는데……." 잔폭광마는 힘으로 밀어붙이자고 주장했고, 모석은 피로도가 높을 군마와 백호영들을 생각해서인지 이미 방비를 끝낸 천수교의 반란 진토인들을 의식 해서인지 신중론을 펼쳤다. 그러나 지금 백호영을 지휘하는 것은 다름 아닌 라혼이었다. 라혼은 이곳에 진을 치고 시간을 끄는 것보다 힘을 한번 써서 라도 당장 천수교를 공략할 마음을 먹은 지 오래였다. "일단 왔다는 인사부터 해야 갰지. 모정령, 화살이 닿는 거리까지 접근해서 포진한다." "존명!" "오참위, 표참위, 육정위는 호위장(護衛將)로써 나와함께 행동한다." "알겠습니다." "맡겨주십시쇼. 대장!" 백호십일걸은 라혼 명(命)이 떨어진 순간 더 이상 머뭇거림 없이 움직였다. 붉게 물드는 노을 속에서 검은 갑주의 8백 백호영이 천수교 서안요새 앞에 포진을 마무리하고 사위는 전투의 기운에 핏빛에 잠겨드는 듯 했다. 라혼 은 백호영의 포진이 마무리되자 대열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러자 호위(護衛 ) 임무를 맡은 세 장수가 라혼을 따랐다. 라혼은 그들과 함께 천천히 앞으 로 말을 몰아갔다. "대장, 어디까지 가시려는 겁니까?" "글쎄…. 될 수 있으면 하수라 강 넘어 천수교 서안까지 가고 싶은데?" "예?" 잔폭광마는 대장의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정신이 없었다. 아무리 간덩이 가 부은 잔폭광마였지만 수천의 적이 화살을 겨누고 있는 성벽으로 말을 몰 아가는 일은 오금이 아릴만한 일이었다. "겁나는가? 내가 지켜 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주군, 싸우실 겁니까?" 아직 표범인간으로 변하지 않은 표상치의 물음에 라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일단 저쪽의 지휘관인 지키는 추장의 둘째 아들을 만나보고 기습할 것이다. 그러니 그때 날 부지런히 따라오도록!" "옛!" 위대한 열지족 추장 소노리의 둘째 아들인 초가는 족정관이 위험하다기에 동생에게 전사들을 곧 준해서 보내겠다는 전령을 보냈었다. 그러나 미리 보 낸 전령이 초가가 1천 전사들을 이끌고 천수교를 나설 무렵 오수관이 적군 에게 점거됐으며 아직 나이어린 동생의 생사도 알 수 없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말을 탄 조정의 군사들이 곧 들이 닥친다 는 소식이었다. "이럴 수가! 셋째와 다섯째가 당하다니……." "초가, 적의 수가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나가 싸웁시다." "아니야! 고작 저 정도만 올 리 없어 어디엔가 숨어있는 병력이 더 있을 거 야! 초가, 섣불리 움직여서 좋을 것이 없습니다." "우하! 그러고도 네가 위대한 열지족의 전사라고 할 수 있나? 보이지도 않 는 적이 뭐가 두려운가?" "그만! 포시노도 우하도 그만 해라!" "초가……." 신성한 전사의 용기를 상징하는 붉은 물감과 하늘을 상징하는 상서로운 청 색(靑色) 그리고 선열들의 지혜를 상징하는 흰색, 그리고 굳건한 의지를 상 징하는 검은색의 물감을 각자의 선호에 따라 얼굴에 칠한 열지족 전사들이 추장의 아들인 초가에게 나가싸우는 것과 좀 더 사태추이를 살피자는 것을 서로 주장하며 그의 결정을 종용했다. "초가, 누군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초가는 열지 전사의 보고에 고개를 들어 붉은 노을을 만들며 지평선 너머로 가라앉는 태양을 등지고 접근하는 검은 갑주의 조정의 군사를 보았다. 그 리고 잠시지만 그들이 참으로 멋지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초가는 발걸음 을 옮겨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그런 그를 열지족의 가장 용맹스런 용사들 이 뒤를 따랐다. "하남천원군 참장 라혼이다!" 천수교를 보호하는 성벽에 거의 붙어 자신의 신분을 큰소리로 외치며 밝히 자 열지족의 전사들은 일제히 그를 노리며 활에 화살을 먹였다. 그러나 그 도 그를 수행하는 장수들도 자신들에게 겨눠지는 활살을 별로 신경 쓰지 않 는 듯했다. "나는 위대한 열지족의 추장 소노리의 아들 초가다!" "그대가 이곳의 수장인가?" "그렇다!" 라혼은 열지족 추장의 아들이라 말하는 상대의 모습을 확인하자 입가에 미 소를 지었다. 붉고 희고, 검은 물감을 얼굴에 칠한 그를 보자 한 가지 계획 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나의 군사가 말을 달리기 전에 항복할 것을 권한다!" "거절한다! 나의 아버지와 선열들이 주신 내 몸의 피가 모두 허공에 뿌려지 고 땅 속에 스며들 지라도 열지족 전사에겐 항복이란 없다." 열지족 추장의 아들이 열변을 토하는 그 시간 라혼은 천리전음(千里傳音)의 수법으로 후방의 모석과 백호영 전원에게 돌격준비를 지시했다. 그리고… …. -오차, 내가 표상치와 육삼을 하늘로 던 질것이다. 그들을 이 성문 너머로 안전하게 떨어트려라! -존명! -육삼, 표상치 들었지 그럼 준비해라! 잔폭광마는 대장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음으로 명하자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였다. 라혼은 등 뒤에서 마음의 준비를 하는 백호영과 백호십일걸의 굳건한 의지를 감지하고 몇 가지 마법주문을 캐스팅 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항복할 의사가 없는 것인가?" "하하하, 당신은 말로써 승리를 하려 하는군 그것은 여자들도 하지 않는 짓 이다. 내가 묻지 항복하라 그럼 목숨은 살려주겠다." -와하하하하하하하…………. 다소 수세적이던 초가가 호탕하게 웃으며 공세적인 발언을 하자 성벽위에 있던 열지족의 전사들이 '와아'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으로 기세가 오름을 확인한 초가는 마음에 들었던 상대를 일별하고 용맹스런 열지족의 전사들에 게 명령했다. "활을 쏴라!" -핑피비비빕비핑……. 강무세가에서 제공한 무기들 중 가장 초가의 마음에 들었던 대궁(大弓)에서 발사된 수백여 개 화살은 일제히 조정의 네 장수들에게 날아갔다. 그러나 ……. "실드Shield! 점프Jump! 레버테이트Levitate!" 라혼은 전면을 시커먹게 날아드는 화살들을 [실드Shield:방패]주문으로 막 음과 동시에 [점프Jump]와 [레버테이트Levitate:부양(浮揚)]주문을 이용해 세 부하들과 함께 하늘로 솟아올랐다. [실드Shield]주문은 캐스터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서 여러 사람들까지 실드를 적용시킬 수 있다. 전방에 종( 縱)의 방패막이를 발생케 하는 방법으로는 통상의 공격에 대해서만 유효하 다. 라혼은 그것으로 자신과 세 부하들이 타고 있던 말을 보호하고 하늘로 몸을 피하는데 성공하자 아직까지 얼떨떨한 오차에게 소리 쳤다. "정신 차리고 표상치, 육삼과 성문을 열어라!" "조, 존명!" 라혼은 오차의 대답을 확인하고 떨어지는 물체의 속도를 깃털 속도만큼 줄 이는 한마디로 깃털의 무게로 몸을 가볍게 해 낙하 시 충격을 줄여 주는 [ 페더 폴Feather fall]주문을 걸어 주었다. 그리고 라혼은 자신은 그대로 떨 어져 내리며 에텔 스페이스에 보관하고 있던 강시지존(彊屍至尊) 흑산자(黑 山子)가 맡겨놓은 107구의 철강시를 성벽위에 풀어놓았다. "뭐!?" 설명은 길었지만 이 모든 것이 찰나의 시간에 벌어졌다. 열지족의 입장에선 화살을 쏘고 '어!'하는 사이에 벌어진 일렬의 일에 혼비백산(魂飛魄散)할 수밖에 없었다. 성 밖에선 조정의 말을 탄 군사들이 쇄도하고 하늘에선 검 은 옷의 괴인들 떨어져 내리자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초가, 놈들이 성문을 열려합니다." "막아라! 우리는 위한 열지족이다!" 그러나 아무리 용맹스런 열지족의 전사들이었지만 도검(刀劍)이 통하지 않 는 도검불침(刀劍不侵)의 철강시를 당해내기에 역시 무리였다. "우와! 이것들은 뭐야? 언제 매복을?" "저건 강시지존의 철강시다." "뭐…?" 천길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을 경험한 잔폭 광마는 어디선가 나타난 검은 옷의 인영들을 보고 놀라 외쳤다. 그러나 정 신을 추스르기엔 주위 상황은 너무나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자신들이 하려는 일을 눈치 첸 열지족들이 몰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캬오~!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린 검은 표범이 울부짖으며 평소에 사용하던 독문병기 인 표홀도(飄忽刀) 대신 날카로운 발톱을 세우며 울부짖으며 열지족 전사들 을 견제를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오차는 성문을 지키던 열지족 전사들에게 화살을 날려 제압하고 성문의 빗장을 제거했다. 그러나 성문은 활짝 열렸 지만 백호영이 들어 닥치려면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새 공황상태에 빠져 있던 열지족도 정신을 차리고 대응을 시작했다. "그래 한번 거나하게 놀아보자! 이 몸이 바로 앙신성의 재앙 잔폭광마님이 시다! 맹호낙아조(猛虎落牙爪)!" -쾅~! 잔폭광마는 처음부터 마적이었을 때 성명절기였던 맹호낙아조(猛虎落牙爪) 을 시전했다. 지금은 백호영의 일원이 되어 백호영의 무공을 익혀가는 중이 었다. 잔폭광마가 백호영의 일원이 되어 가장 놀란 것은 다름 아닌 백호영 의 실력이었다. 그리고 최근에 와서야 백호영들이 익히는 무상신공(無上神 功)인 여의금강공(如意金剛功)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런데 기존의 무공을 버 리고 여의금강공을 연마를 시작한지 겨우 한 달 보름 만에 예전의 공력을 회복함은 물론 답보상태였던 그전 보다 더욱 강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렇게 단기간에 강해 질 수 있는 이유가 대장인 아니 이미 마음으로 승복하 여 주군인 백호나한의 배려 때문이라는 사실을 듣고 다시 한번 충성을 맹세 했었다. 새로운 힘을 얻은 잔폭광마는 그 힘을 시험하고 싶었지만 신분이 신분이니 만큼 함부로 날 뛸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이미 형제라고 생각하 는 백호십일걸들에게 싸움을 걸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잔폭광마에 게 이것은 기회였다. "크앙~!" "우악!" -키야아아~! -크억~! 잔폭광마의 선방으로 시작된 드잡이 질은 흑표범으로 변신한 표상치가 가세 하자 열지족은 그들의 기세에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오차가 후방에 서 화살을 날리며 열지족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성벽위의 강시지존이 자랑 하는 철강시들의 난동에 일방적으로 밀리는 사이 어느 세 성벽으로 말을 탄 8백 백호영이 성문을 지나 성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라혼은 모석에게 돌관(突關)을 명하고 철강시들을 풀어놓은 직후 [블링크Bl ink]로 열지족 추장의 아들 초가 곁으로 순간이동했다. "헉!" "이얍!" -퍽! 쿠웩! -깡! 깡! 성문을 열려 하는 적들의 움직임에 막으라는 고함을 지르던 초가는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검은 갑주 차림에 장수의 모습에 기겁했고, 초가를 보위하 던 포시노는 반사적으로 그를 안듯이 덮쳤다. 그러나 라혼에게 그러한 열지 족 전사의 움직임은 별 위협이 되지 않았다. 라혼은 오히려 그를 철산고(鐵 山鼓)로 받아버리고 그와 동시에 짤막한 박도(朴刀)를 휘둘러오는 열지족 전사를 그가 휘두른 도(刀)와 함께 둘로 갈라버렸다. "우하!" -컥~! 라혼은 몸이 둘로 쪼개지는 열지족 전사의 이름을 부르짖는 열지족 추장의 아들의 목을 틀어쥐고는 사자후(獅子吼)를 터트렸다. -크앙! "추장의 아들을 잡았다!" -주군이 반적의 수괴를 잡았다! -와아! 이겼다! 전투에서 최고 지휘관을 잡는 것은 사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힘을 숭상하고 약탈을 그 업(業)으로 하여 평생 싸움터에서 보내는 열지족 전사들에게 더욱 영향력이 컸다. 이미 못한 창칼이 통하지 않는 검은 옷의 괴인들도 그렇고, 열지족에게는 수십 년 전 조정의 토벌대로 온 강무세가 에게 토벌될 때부터 악몽인 말을 탄 마군(馬軍)의 존재도 사기를 꺾기에 충 분했다. 그런데 자신들을 이끄는 추장의 아들이 어찌해볼 틈도 없이 잡히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일부는 항복을 나머지는 천수교를 달려 하수라 강 을 건너기 시작했다. "모석 이곳을 정리해라! 나머지 백호십일걸은 나와 함께 강을 건넌다!" "존명!" 라혼은 열지족 추장의 아들을 옆구리에 들고 경공신법을 펼쳐 천수교를 건 너기 시작했다. -피이이이이~! 그리고 철강시를 부리는 휘파람을 길게 불며 강시들 또한 강을 건너게 했다 . "달성모, 이 녀석은 네가 맡아라!" "예!" 라혼은 백호십일걸의 한명인 달성모(獺珹毛)에게 기절한 추장의 아들을 던 져주고는 초상비신법(草上飛身法)으로 도망치는 열지족 전사들의 머리를 발 판삼아 천수교 동안에 떨어졌다. 이미 대부분의 병력이 서안에 있었던 듯 동안에서 저항은 미미한 수준 이었다. 그러나 열지족 전사들은 항복을 하지 않고 계속 저항의 의지를 굳히지 않고 이었다. -확! 그때 '확!'하는 빛과 함께 열지족 전사들을 핍박하던 철강시들이 우수수 검 은 먼지로 화했다. "신성력(神聖力)?" 라혼은 언데드(Undead)인 강시(畺尸)가 신성력에 약하다는 사실을 익히 알 고 있었다. 이미 라혼 자신이 직접 1구의 철강시를 신성력인 성기력(聖氣力 )으로 먼지로 만든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언데드인 강시는 [터닝 Turning]주문으로 퇴치가 가능한 것이다. "무량수불(無量壽佛)! 아무리 세상이 어지러워 졌다고는 하나 저런 마물(魔 物)을 만들어 사용하다니…." 싸움이 한참인 전쟁터 한 가운데 난입한 대머리에 가사를 입은 승려가 상당 히 두툼해 보이는 선장(禪杖)을 들고 불호를 되뇌었다. 그 승려가 등장과 함께 무적의 철강시가 한꺼번에 수십 구가 검은 먼지로 화하자 열지족과 백 호영의 싸움은 이미 끝나 있었다. "이런, 망할 땡중이……." 최초로 반응 한 것은 잔폭광마였다. 잔폭광마는 내공을 이용해 손을 안대고 물건을 취하는 능공섭물(綾空攝物) 수법으로 바닥에 나뒹구는 열지족의 창 을 들어 올려 전장에 갑자기 끼어든 승려에게 힘껏 집어던졌다. 잔폭광마 승려를 시험하려는 의도로 힘을 빼지 않고 공력(功力)을 주입하여 비교적 천천히 날아가는 창은 웬만한 고수라도 능히 피할 수 있을 정도였다. 자신 의 실력을 과신하여 힘으로 창을 막으려 한다면 낭패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승려는 힘차게 날아오는 창을 피하거나 막으려 하지 않고 명상에 잠 긴 듯 눈을 반개하여 아무것도 없는 허공만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엄청난 경력(勁力)이 깃든 창머리가 단, 몇 치 앞까지 접근하자 승려의 송충이 같 은 눈썹이 꿈틀했다. -퍽! -크억! -퍽! 잔폭광마가 던진 창은 그힘을 주체 못하고 동안의 한 가옥을 통째로 꿰뚫었 고, 승려는 무방비 상태의 잔폭광마의 복부에 일권(一拳)을 꼽아 넣었다. 불의의 일격을 허용한 잔폭광마는 칠공(七孔)으로 피 화살을 내 뿜으며 허 공을 날았다. "육삼!" "이런!" "여래만천(如來滿天)!" -콰과과과광! 백호십일걸의 투기(鬪氣)에 감지한 승려는 오색광채(五色光彩)를 머금은 파 괴적인 불력(佛力)을 사방에 내뿜었다. 그러나 크게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 는지 곧 불력을 거두며 나지막이 불호를 외웠다. "무량수불, 무공이 폐했을 뿐이니 그것 외에는 별 탈 없을 것이오." "그런!" 평생을 한길로 일로매진(一路邁進)하는 자에게 더 이상 그 길을 을 갈 수 없다고 말하는 것치고는 승려의 말투는 너무 고요했다. "흐음, 모든 경맥이 이종지기로 막혀있군." "크크억~! 주, 주군!" "진정해라, 육삼! 그런데 너마저 이젠 주군인가? 대장이라고 불렀을 때가 더 좋았는데. 그것 그렇고 언제부터 여의금강공을 수련했지?" 라혼은 잔폭광마 육삼의 경맥에 뭉쳐있는 승려의 불력(佛力)을 흡성대법(吸 性大法) 상(上)의 흡인결(吸引訣)을 이용해 하나하나 흩어나갔다. 그런데 잔폭광마의 몸에서 매우 익숙한 공력인 여의금강기(如意金剛氣)가 감지되는 것이었다. 여의금강공은 무공이 전폐된 상태에서 새로 익혀야하는 무공이 었다. 그러나 라혼은 육삼의 내공을 폐지시킨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이유 를 짐작해 내기는 쉬운 일이었다. '이것도 드워프들의 치료하는 흙의 공능인가?' '치료하는 흙'은 불새의 깃털이 있는 곳의 흙이었다. 모든 것을 정화(淨化) 하는 불새의 불꽃깃털은 치료하는 힘도 있고 또 모든 것을 가리지 않고 태 워버리는 힘도 있었다. 잔폭광마가 원래 익히고 있던 무공은 잡다한 마공( 魔功)이었다. 그러니 '치료하는 흙' 속에 묻혀있을 때 자연스럽게 일어난 정화작용으로 마공을 잃었을 것이다. 그리고 치료된 이후 당분간 불새의 공 능으로 약간 이상함은 느꼈겠지만 공력의 수위 자체는 변함없었을 테니 정 화된 공력으로 여의금강공을 익히니 라혼이 백호영에게 여의금강공을 전수 할 때 성기력을 주입시켜주는 것과 똑같은 효과를 본 것이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놀란 표정으로 자신이 잔폭광마를 치료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승려에게 철강시를 부순 빚을 받아내야 했다. "시, 시주는…?" "강격(强擊)!" "헉!" -뻥~! 아라한 격투술 특유의 성기력을 이용한 기술인 강격(强擊)의 가죽공 터지는 소리가 울리며 승려는 다급성을 터트리며 그 자리에서 '푹!'꺼지듯이 사라 졌다. 그러나 상대는 다름 아닌 라혼이었다. 라혼은 승려가 사라짐과 동시 에 그의 기운이 등 뒤에서 느껴지자 주저 없이 팔꿈치는 뒤로 휘둘렀고 승 려는 코앞에 나타난 장수의 팔꿈치에 기겁하며 얼굴로 반탄강기(反彈鋼氣) 를 집중시켰다. 그러나 라혼의 여의금강공의 금강결의 오의(奧義)는 바로 강기를 파해(破解)하는 공부(工夫)였다. -뻑! "!?" "격공흡인(隔空吸引)!" "……!" 코끝에서 느껴지는 아찔한 고통에 잠시 주춤했던 승려는 사지가 결박당하는 느낌과 함께 장수의 손아귀로 빨려들어 갔다. -컥~! -화르르르~! "화둔(火遁)?" 라혼은 법술(法術)을 쓰는 것이 분명한 승려를 잡아 법술에 대하여 알아내 려 했는데 그가 불꽃과 함께 사라지자 일순 당황했다. 그 승려는 신선(神仙 )들이 사용한다는 도술(道術)의 일종인 화수목금토(火水木金土)의 오둔술( 五遁術) 중 화둔(火遁)을 사용하여 라혼의 줄기줄기 뻗어 나온 라혼의 공력 (功力)을 태우고 곧바로 줄행랑을 친 것이다. "도술을 하는 자를 만났는데 이대로 순순히 물러설 수는 없지." 라혼은 어느새 방진(防陣)을 구성하여 전의(戰意)를 꺾지 않는 열지족 전사 들을 일별하고, 그간 쓰지 않았던 영인(靈刃) 소울 블레이드를 시전했다. 영인(靈刃) 소울 블레이드는 이곳의 말로 심검(心劍)의 경지에 이른 기술로 말 그대로 영혼을 베는 영혼의 칼날이었다. 라혼은 하얀 기운으로 형상화 한 영인(靈刃)을 꺼냄과 동시에 열지족의 일각을 횡소천군(橫掃千軍)의 일 식으로 후려쳤다. -콰광~! 그러자 천지가 진동하는 굉음과 함께 천수교 동안의 일부가 완전히 초토화 되고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것이 먼지로 화해버렸다. 열지족의 전사도 드 물게 돌과 진흙으로 만든 가옥도……. "표상치!" "예!" "이곳을 정리해라! 나는 그 승려에게 빚을 받아야 갰다." "조, 존……. 명." 표상치는 주군이 그 자리에서 푹 꺼지듯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며 말을 늘렸 다. 주군의 어마어마한 신위를 목격한 백호십일걸은 물론 열지족의 전사들 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특히 잔폭광마는 주군인 백호나한이 강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지만 이것은 상상 이상이었다. 단, 한 번의 손짓에 한 공 간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라혼의 힘에 기가 질린 열지족 전사들은 전의를 상실했고, 갑작스런 폭발에 백호영들과 달려온 모석은 멍한 표정의 형제들 을 추스르기에 정신이 없었다. "어찌된 일인가? 주군은 왜 안 보이는 거야?" "형님." "육삼! 다친 것이냐?" 모석은 얼굴에 있는 모든 구멍으로 피를 흘린 덕에 피범벅인 잔폭광마에게 달려가 걱정스레 물었다. 그러나 잔폭광마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전혀 엉 뚱한 대답을 했다. "주군은 사람이 아닌가보오." "그게 무슨 말이냐?" "그런 일이 있소. 그보다 전에 백호대였을 때 말이오. 수하 한둘이 비명에 가자 습격한 일천무림인을 모조리 도륙했다는 말이 이제 실감이 나오." "……." "겨우 이 못난 놈이 다쳤다고, 눈썹하나 깜짝하지 않고 수백 명을 날려버리 니 말이오." 모석을 따라온 백호영들은 멍하니 얼이 빠져있는 열지족 전사들을 포박하면 서 승리를 자축할 틈도 없었다. 주군인 라혼의 행방이 묘연했기 때문이었다 . 보리대불(菩提大佛)은 칸 대륙에 존재하는 십일선맥(十一仙脈) 중 북지성( 北知省)에 있다는 수미(須彌)의 신선(神仙)이었다. 불가(佛家)에 속한 수미 의 불선(佛仙)인 보리대불은 이번에 보패(寶貝)를 만들기 위해서 불새의 깃 털이 필요해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토지신(土地神)들이 살고 있는 남례성 귀림으로 먼 길을 여행했다. 그러던 중 전투가 한참인 천수교를 지나다 조 정의 군사들이 강시를 무기로 사용하는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참담한 일을 목격했다. 보리대불은 사바세계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깨고 대보리 불력(大菩提佛力)으로 강시들을 태우고 그들에게 엄중히 경고하려 했다. "이럴 수가, 마인(魔人)이다. 마인이 나타났어, 벌써 그 시기가 된 것인가? 무량수불! 어서 수미산(須彌山)으로 돌아가 이 사실을 알려야한다." 보리대불은 코가 벌게진 체 능공비행술(凌空飛行術)을 시전하여 북쪽하늘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그러다 앞에서 어떤 힘이 진처오자 기겁하여 급히 순간전이대법(瞬間轉移大法)을 시전했다. "이봐!" "헉!" -화르르르륵~! 보리대불은 바로 곁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기겁하며 불화둔술(佛火遁術)로 몸을 태우며 또 다시 도망쳤다. 그러나 하루에 연거푸 두 번이나 펼친 화 둔(火遁)의 열기에 살이 벌겋게 익으며 이름 모를 산 능선 위에 떨어져 나 뒹굴었다. "크윽! 이럴 수가! 화둔을 사용했거늘 마인의 손아귀를 빠져 나가지 못하다 니……." 보리대불은 피부가 확끈 거리는 것을 참으며 주위를 둘러 산세를 훑어보았 다. "북지성인가? 크윽 그러나 선근(仙筋)인 보리근(菩提筋)이 다쳐 당분간 법 술을 사용할 수 없으니 이거 낭패로군 한시가 급한데……." 잠시 몸을 추스르고 자리를 뜨려 했으나 몸이 뭔가에 꽉 묵인 것처럼 움직 일 수 없자 안색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서, 설마……?" "휴우~! 법술이란 정말 대단하군, 매직(Magic)과는 또 다른 힘이야!" "헉! 마, 마인!" 보리대불은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 아이의 표정에 아름답기까지 한 사내가 정말 기분 좋은 듯 미소를 지으며 서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보리대불은 보 리근이 갈기갈기 찢겨지는 한이 있더라도 마인을 봉마(封魔)하는 것을 생각 했다. 그러나 그의 그런 기색을 읽은 라혼은 에텔 스페이스를 열어 힘을 개 방하여 그를 압박했다. "섣부른 짓은 하지마라!" "……." 보리대불은 아름다운 사내의 힘을 느끼고 전신을 부르르 떨며 절망감에 몸 부림 쳤다. 그리고 의도적인지 상대가 압력을 거두자 크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휴우~! 정(正)이 일척(一尺)이면 마(魔)는 일장(一丈)이라더니 말하시오. 내게 묻고자 하는 것이 뭐요?" "너는 선맥에서 왔는가?" "그렇소." "그럼 선산이 어디 있는지 알겠군." "?" "나를 선산으로 안내해라!" "허허허허, 내가 여기서 명이 끝날지언정 마인에게 선산의 위치를 말할 것 같은가?" "마인?" 라혼은 브라마에게 마계의 13번째 마왕(魔王)의 지위와 신계에 신의 전사( 戰士) 지위를 약속받은 상태였다. 보리대불은 라혼의 마왕으로써 마기(魔氣 )를 감지하고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아무리 전쟁이라 하나 강시를 사람 을 해치는 도구로 이용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마왕의 마기를 읽고 겨우 마인이라니……. "리저렉션resurrection!" "!" 라혼은 단호하기 그지없는 태도의 선불(仙佛)을 협박하려는 계획을 접고 고 위신성주문인 [리저렉션resurrection:재생] 그를 치료해주었다. "아니? 이 기운은 성선지기(聖仙之氣)? 마기와 선기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니 그 그대는 귀선(鬼仙)이었소?" "귀선?" 라혼은 마인이라 오해를 풀기위해 일부러 신성력을 사용해 그를 치료했다. 때론 만 가지 설명보다 한 가지 행동이 오해를 푸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 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귀선(鬼仙)이란 오랜 선도(仙道) 수련에 마음에 마(魔)가 들어 마인의 길로 들어선 자가 다시 신선의 반열로 오른 자를 말했다. 즉 마인도, 신선도 아 닌 이것도 저것도 아닌 존재를 말했다. 그들은 마인과 신선 그 어느 쪽에서 도 환영받지 못하는 회색부류였지만 귀선의 능력은 신과 마의 힘을 모두 가 지고 있었음으로 상대하기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자신을 보리대불이라 밝힌 승려의 설명에 라혼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선마(仙魔)의 모든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귀선이라……. 그런 것 같군. 그럼 서로 오해가 풀렸으니 함부로 내 철강 시들을 없앤 빚을 받아야 갰다." "하지만……. 강시를 도구로 삼아 사람을 해치는 일은?" "그건 내 알바 아니다. 그러나 당신이 내게 빚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 는 사실이지." "크흠~!" 보리대불은 이미 상대의 어마어마한 힘을 보았다. 앞으로 있을 신마대전에 이러한 상대가 적이 된다면 과연 그 누가 이자를 감당할지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보리대불은 힘없이 되물어야 했다. "무엇을 원하시오." "선산을 보고 싶다." "……."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보리대선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알았소이다. 내가 속한 수미산으로 안내하리다. 무량수불!" "좋아!" 보리대불은 오늘과 같은 엄청난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선견(先見)하지 못 한 사실이 이상했다. 득도(得道)이후 앞날의 일을 알지 못한 것은 정말 처 음 있는 일이었다. "허어~! 내가 모른 새 마가 끼었었나? 어찌 이런 일을 미리 내다보지 못한 것인가?" 할거도중[割據途中] "과연 백호나한은 날 실망시키지 않는군." "대장군, 삼관이 뚫린 이상 이제 더 이상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이 대로 병을 이끌고 호도를 쳐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승기를 잡은 이상 밀어붙여야 합니다." 봉수성에 자리를 잡은 하남천원군 본영(本營)으로 백호나한에 의한 삼관공 략이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하남천원군의 모든 제장들이 입을 모아 출정을 주장했다. 대장군 금영월도 가장 큰 난관이 극복되었음으로 출정을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제장들의 뜻이 그러하다면 이제 그 방법을 논해 봅시다. 호도에서 우리 하 남천원군을 두려워한 나머지 천수교를 끓기 위한 도발 할지도 모른다는 하 니 그것에 대해서도 논의해 보세." "대장군, 반적들의 허를 찔러 삼관을 얻어냈지만 지금 부터는 신중해 질 필 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급을 다투는 일이기도 하니 일단 2만 병력을 동원 해 호도로 가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일단 지금 당장 5천의 병력을 족정관과 오수관으로 보내 그곳 에 병력을 천수교로 보낸다면 빠른 시일이내에 천수교를 수비할 원군 보낼 수 있을 겁니다." "과연!" 사나운 고리눈을 부릅뜬 주작대장 상초의 진언에 금영월 대장군도 동의를 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삼관이 뚫려 봉수성에서 호도를 코앞에 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기왕이면 호도를 장악해 서해연안의 반란 진 토인들의 배후를 없애는 것이 두고두고 편한 것이었다. 상초가 내놓은 의견 에 제장들도 이의가 없어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렇게 바쁜 나날을 보내며 출정을 준비한지도 사흘이 지나 이제 하루 밤이 지나고 해가 뜰 무 렵 주작대의 상초를 선봉으로 2만 대군이 봉수성을 떠날 것이다. "흐음, 더위 때문에 고생하던 군사들이 기력을 회복해서 다행이군." "예, 이곳을 관리들이 말하기를 지금부터 더위가 한풀 꺾일 때라 그렇답니 다." "한풀 꺾인 것이 이 정도라면 한참일 땐 얼마나 더운 것인가?" 며칠을 출정준비에 눈곱 뗄 새 없이 바쁘던 시간이 흐르고 이제 한숨 돌릴 시간을 얻은 대장군 금영월은 한가로이 차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 금영월에게 현무문 시절부터 부관이었던 정령(正領) 작도인(鵲途認) 이 은근한 어투로 말을 꺼냈다. "대장군, 외람된 말씀이오나 호도를 공격하는 일은 대장군께서 직접 주도적 으로 나서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무슨 말인가?" 대장군 금영월은 작정령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짐작하고 있었지만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되물었다. "하남천원군을 이끄시는 분은 다른 누구도 아닌 대장군이십니다. 그러나 그 간 라혼참장의 행태는 그야 말로 안하무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게다가 이 제 공까지 낮지 않으니 이쯤에서 그만 제동을 걸 필요가 있습니다." "작정령." "말씀하십시오. 대장군!" "라혼참장이 하는 모든 일이 하남천원군에 누가 되는 일이 있었던가?" "……!" 작도인은 금영월 대장군의 뜻밖에 말이 일순 당황했다. "그 누구보다 하남천원군에 소임을 다하는 그이거늘 어찌하여 그를 책하려 하는 것인가? 내가 라혼참장에게 마군대장자리를 권했을 때 그것을 거절하 고 삼관으로 달려간 사람이야! 미리 어려운 곳에 가서 하남천원군이 쉽게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모든 위험을 스스로 뒤집어쓰고 있거늘 그를 견제할 이유도 필요도 없네." "죄송합니다. 그저 소인의 망언이었다고 생각해 주십시오." "아니네. 작정령 자네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모를 내가 아닐세. 그러나 백 호나한은 준재(俊才)중 준재(俊才) 영걸(英傑)중 영걸(英傑)일세." 작도인은 대장군 금영월의 말에 은근한 충격을 받았다. 금영월이 백호나한 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었기 때문이었다. 백호나한이 자 신이 이끄는 백호금군을 통째로 들어 받히고 한발 앞서 떠나고 남은 백호문 출신 금군들의 출중한 역량에 버거워하던 모습을 보인 금영월 대장군이었 다. 그리고 현재 백호문 출신 군사들의 백호나한에 대한 향수는 상당히 거 슬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지금이라도 당장 백호나한이 떨쳐 일어서면 주저 없이 따를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금영월 대장군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라혼참장은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네, 그래서인지 삼관의 마지막인 천 수교를 공략할 때 가볍지 않은 부상을 입었다는 전언이 왔네. 그것이 사실 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지만 이미 라혼참장은 호도공략엔 참가하지 않겠다 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나 다름없네." "……." "그리고 삼관으로 떠나기 전 그는 남상의 반란토벌을 위해 임시로 만든 수 군을 조련하는 데 전력투구 하겠다고 하네, 그 말은 이후의 남례성의 반란 토벌의 공을 포기하겠다는 말이나 진배없는 것이네. 나는 그런 그의 말을 듣고 잠시나마 그를 시기한 것이 부끄러웠다네. 그가 그렇게 밖으로만 도는 이유는 하남천원군 내부에서 자기를 견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러는 것일세!"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좁은 소견을 말한 것 같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였으나 작도인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지금천하는 곳곳에 서 균열이 가고 있는 상태였다. 이미 십이진가(十二眞家)중 용황가는 용황 이 잠들어 유명무실 해졌고, 실세 중 실세라던 호황가는 진골십가들의 거대 한 힘에 버거워 하고 있었다. 거기다 각지에서 수인조정을 반대하는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고 후선(後鮮)은 이미 나라를 건국하는데 성공했다. 그런 와 중에 정인대장군(征人大將軍)이었던 서제(鼠帝) 서포틈(鼠暴闖)은 10만 대 군을 원주 중경 청인성에 진군시켜 상국(相國)이란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 之下萬人之上) 지위를 만들어 사실상 천하를 주무르고 있었다. 이에 다른 진골십가(眞骨十家)들도 암암리 군사력을 가지려 모병을 빙자한 징병을 실 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원주조정은 그것을 막을 명분도 힘도 없었다. 당금 시대엔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군벌(軍閥)들을 생각해볼 때 조정으로 부터 공식적으로 대하(大河) 이남의 군사력을 통제할 권리와 명분을 가진 하남천 원군 안에서 지분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대장군 금영 월은 그러한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하남천원군의 장수들이 각기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 가능 했지만 만에 하나 금영월 대장군이 잘못되고 백호나한이 전면에 나서면 자신들의 입지가 위태롭게 되는 것은 불문가지( 不問可知)였다. "소궁주, 이제 그만 궁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지 않을 까요?" "지금 여길 떠나면 안 돼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직 사람들의 회복이 덜됐어요." "그 사람들은 백록파에서 돌봐주겠지요." "그렇지만……. 어!" "소궁주?" 검선자 주묘연은 설화가 대화도중 깜짝 놀라는 표정일 짓더니 참으로 오랜 만에 보는 듯한 천진난만(天眞爛漫)한 표정으로 얼굴에 하나 가득 미소를 짓자 의아한 생각이 들어 말을 걸려했다. "끼야~!" "소궁주?" "묘연언니, 서방님이, 서방님이 온데요!" "상공이요? 그게 무슨?" 주묘연은 설화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궁으로 돌아가는 문제를 이야기 하다 난데없이 상공이 온다며 좋아하다니……? "묘연언니, 나 어때요? 아냐 옷을 갈아입을까? 그래 그게 좋겠어!" "진정하세요, 소궁주! 도대체 상공이 언제 오신다는 거예요?" "지금 백록산을 지나고 있데요!" "그게 무슨……?"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설화 소궁주는 물론 상공도 신비스런 구석이 있었다. 수년간 한솥밥을 먹으며 지냈어도 지내면 지낼수록 더욱 모를 사람들이었 다. "무량수불, 시주에게 아내가 있었단 말이오?" 보리대불은 자신의 물음에 고개 대답하는 귀선(鬼仙) 백호나한을 새로운 눈 으로 지켜보았다. 없지는 않지만 신선들과 요괴, 마인들은 도(道) 얻기 위 해 영원히 수련하는 존재들이었다. 그것은 귀선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아니 오히려 선기와 마기를 함께 지니고 있어 내부에서 그 기(氣)가 상충( 相衝)함으로 더욱 용맹정진(勇猛精進)해야 하기 때문에 일가(一家)를 이루 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부부(夫婦)의 연(緣)으로 맺어진 신선이 아예 없지 는 않지만 극히 드문 일이었다. 보리대불은 백록산에 거처를 두고 있는 여 신선이 있는지 기억을 더듬었지만 백록산은 백록파라는 무림문파가 자리 잡 고 있을 뿐 보리대불의 기억 상에 백록산엔 여신선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러다 문득 그의 조정의 장수라는 신분에 생각이 미쳤다. "혹, 사바세계의 여인을 아내로 두고 있소?"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아, 아니오. 단지 놀라워서……." "그보다 언제까지 날 쫓아다닐 생각인가?" 라혼은 보리대불이라는 선불을 제압하고 그에게 수미산에 데리고 가줄 것을 청했다. 그러나 보리대불은 귀선을 선산(仙山)에 데리고 가는 일에 주저함 이 있었다. 그래서 수미산에 있는 선불(仙佛)들의 뜻을 묻기 위해 한발먼저 수미산에 올랐다. 그러나 수미산의 선불들은 의도를 알 수 없는 귀선을 선 산에 들이는 것에 난색을 표했고, 일단 옆에서 지켜 본 연후 판단하기로 하 는 것으로 그의 뜻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보리대불 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화둔술을 두 번이나 사용해 도망을 갔는 데도 라혼이 쫓아왔다는 사실이었다. 라혼은 보리대불의 기운을 쫓아 이미 결계로 보호된 수미(須彌)의 위치를 파악한지 오래였다. 결계 안으로 바로 화둔술을 쓸 수 없었는지 어느 한곳에 나타나 다시 기운이 사라지고 그 자 리에 다시 나타난 것을 보면 대충 위치를 짐작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지 금 보리대불은 귀찮은 혹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내가 없으면 수미에 오르지 못합니다. 무량수불." "그럼 법술이나 가르쳐 주던가?" "허허허, 제 보잘 것 없는 법술이 어찌 시주에 그것에 비하겠습니까?" 라혼은 자신을 감시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드러낸 보리대불의 의지에 찬 눈빛에 쓴 웃음을 지었다. 세상에 대가없는 일은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더 느끼는 순간이었다. 수미의 위치를 알게 된 대신 혹을 하나 얻었으니 말 이다. 라혼은 더 이상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묵묵히 길을 걸었다. 검은 갑주를 입은 장수와 굴강한 인상의 승려는 아무런 말없이 잘 닦여진 산길을 지나 그들이 도착한 곳은 삼엄한 경계가 펼쳐진 백록파 입구였다. "멈추시오. 귀공이 무슨 일로 백록파를 찾았는지 모르나 본파는 현재 봉문 중이오. 그러니 이만 산을 내려가 주시오!" "본인은 이곳에 있는 나의 아내를 찾아왔소." "아내? 귀공의 아내가 누구인데 여기서 아내를 찾는 것이오?" 라혼은 경계의 기색이 역력한 도사의 물음에 대답했다. "나의 아내는 천상천화요!" "천상천화가 당신의 아내라고? 그럼 당신이 관부제일고수 백호나한이겠구먼 ?" "그렇소. 본장이 백호나한 라혼이오!" 백록파의 1대 제자 낙성검사(落星劍士) 현고(賢故)는 갑주까지 그럴듯하게 차려입고서 자기가 백호나한이라 주장하는 얼굴이 반반한 사내를 유심히 살 폈다. 맹룡과강(猛龍過江), 용맹스러운 용만이 강을 건널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상대는 무공을 익힌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현고는 은밀히 백 록파 제자들만 알아볼 수 있는 손 움직임으로 본당에 간적(姦敵)이 왔음을 알렸다. 검은 갑주의 사내는 별 볼일 없어보였지만 같이 온 중의 안광(眼光 )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었다. "흥! 이젠 본 파가 별 볼일 없어진 모양이군. 백호나한이 남례성에서 진토 인들의 반란을 토벌하는 장수라는 것을 천하에 모르는 자가 없거늘……." 라혼은 백록파의 도사들이 우르르르 몰려나오며 도사답지 않게 노골적인 살 기를 드러내자 슬쩍 미소 지으며 보리대불을 바라보았다. "나는 천상천화를 찾을 테니 여기는 대사가 수습하시오!" "어? 아니……." 라혼은 주변의 마나를 동결시키고 그대로 몸을 활처럼 휘게 해서 그 탄력을 이용해 순식간에 몸을 이동하는 최상승의 궁신탄영(弓身彈影) 수법으로 이 제 막 포위망을 형성한 백록파의 도사들의 머리를 너머로 몸을 날렸다. "어?! 잡아라!" "매스 서제스천Mass Suggestion! 저 중을 쓰러트려야 날 쫓을 수 있다!" 그리고 쫓아오는 백록파의 도사들에게 [매스 서제스천Mass Suggestion : 집 단암시] 주문을 걸어 우선순위를 반대쪽에 있는 보리대불을 쓰러트려야만 쫓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었다. "중부터 쓰러트리고 놈을 쫓아라!" -와아~! 라혼의 주문에 걸린 백록파 도사들은 본당을 이르는 계단으로 뛰어 오르는 검은 흑갑(黑甲)의 사내를 쫓지 않고 반대쪽의 보리대불을 쳐갔다. "이, 이런……." 보리대불은 주변의 정기(精氣)가 마치 결계에 그것인냥 움직이지 않자 본신 내공만을 사용해서 죽어라 덤비는 도사들을 맞아갔다. 도사(道士)는 신선 이 되기 위래 수련하는 자들이었다. 그런 의미로 선불인 보리대불에 입장에 선 이들이 후배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가차 없는 살수를 사용해도 수세적 입장밖에 취할 수 없었다. 귀선의 술수로 인한 미혹에 빠진 것이 분 명한 이들을 해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주변 정기가 꿈쩍하지 않으니 도 사들이 휘두르는 장검(長劍)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체술(體術)을 사용해 피하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법술(法術)을 사용하지 못하니 보리대불 은 그저 절정 수준의 무공을 지닌 고수일 뿐이었다. 계속 곁에 있으려하면 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던 보리대불을 억 지로 써먹으며 골탕을 먹인 라혼은 백록파의 본당 연무장으로 뛰어 들었다. 그러나 백록파의 명성과 규모치고는 상당히 협소한 연무장엔 많은 도사들 이 검을 뽑아들고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멈춰라! 감히 백록산에서 소란을 일으키다니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구나 !" 걸걸한 말투에 단단한 바위를 연상시키는 백록파 장문인(掌門人) 만근거암( 萬斤巨巖) 오중자(晤重子)는 무거운 분노성을 터트렸다. 이미 인세의 무영 살수에게 형제이자 든든한 후원자인 장로 오문자(晤問子)를 잃었다. 그런데 간적들은 한번 본산을 불태웠다고 또다시 기망(欺罔)하려하니 그 분노가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다. "나는 백호나한 라혼이오. 오해가 있으신가본대 본장의 아내인 천상천화를 불러주신다면 오해를 풀 수 있을 것이오!" "이, 이놈이 천강진(天岡陣)를 포진(布陣)하라!" "존명!" 백록파가 자랑하는 건곤천강진(乾坤天岡陣)이 순식간에 짜이고 무서운 기세 로 상대를 압박했다. 라혼은 분노에 눈이 멀고, 귀가 막힌 이들을 말로써 설득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막무가내(莫無可奈)인 상대를 상대하는 방법 은 일단 진정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과 힘으로 제압하는 방법이 있는데 라혼 은 그 후자를 선택 한 것이다. -쿠웅! -파바바바바바박 쿠르르릉~! 라혼은 진각(震脚)의 형식을 빌어 공력을 땅의 기운과 상충시켜 백록파 연 무장 전역에 걸쳐 땅거죽을 뒤집고는 몸통전체로 권강(拳剛)의 그것과 같은 철산고강(鐵山鼓剛)을 시전했다. 철산고강의 충격파는 파곤진경(破坤震勁) 에 의해 뒤집힌 땅거죽의 흙덩어리를 사방으로 비산(飛散)시켰다. "우와악~!" "살려~!" -퍼버벅~! 후두둑~! 연무장에 라혼을 압박하는 건곤천강진을 구성한 72검사들은 물론 거리를 두 고 라혼을 견제하던 도사들은 난데없는 흙 벼락을 맞아야 했다. 그리고 천 지가 진동하는 경천동지(驚天動地)할 그의 신위에 백록파 어느 누구도 할 말을 잊었다. "이, 이럴 수가…? 사람이 어찌?" 라혼을 중심으로 부채꼴로 뻗은 형상으로 깊게 패인 흔적은 방금 그것이 꿈 이 아님을 말해 주었다. 얼마간의 말없는 대치는 하늘에서 그야 말로 눈꽃 처럼 하얀 무언가가 떨어져 내림으로 장내의 기운이 포근하게 바뀌었다. "꺄아~! 서방님!" "설화야!" 눈처럼 하얀 백의를 입은 천상천화가 검은 갑주의 하늘에서 온 천장 같은 장수의 품에 몸을 던지는 것을 지켜본 백록파의 고수들은 그제야 저 막강하 기 그지없는 자가 최소한 적이 아님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할거도중(割據途中) "허허허, 이런 귀한 손님을 못 알아보고 본도가 실수를 한 모양이구려!" 만근거암 오중자는 천상천화의 반응을 보고 검은 갑주의 장수가 천상천화의 남편이라는 백호나한임을 알았다. 어찌하여 남례성에 있어야할 백호나한이 멀고 먼 북지성에 올 수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방금 전 보였던 신위라면 충 분히 가능도 할 것 같았다. "아닙니다, 도장. 그보다 제 일행이 귀파의 제자들과 시비가 붙었으니……. " "아! 그러고 보니 현고가 보이지 않는다 했는데 그런 일이 있었구려……."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강적이 친구가 되었을 때 그는 무엇보다 믿음직스 럽게 느껴진다. 진각만으로 천지번복(天地飜覆) 신위를 보인 적이 친구가 되자 두려움 가득한 시선은 순간 존경의 염(念)이 가득한 시선으로 바뀌었 다. 백록파는 원래 수도하는 도인들의 문파이나 동시에 힘을 숭상하는 무림 대파이기도 했다. 강하다는 것은 무림인인 백록파제자들에게 가장 매력적으 로 보이는 조건이었다. 그것은 어리고 젊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장문인인 오 중자도 마찬가지였다. "본장은 과분하게도 본 백록파의 장문인 자리에 있는 오중이라 하오." "다시 한 번 인사드립니다. 라혼입니다." 오중자는 자신의 신분을 내세우지 않는 백호나한을 보며 눈가에 이채가 어 렸다. 보통은 자신의 관직과 신분을 등을 밝히는 것이 예(禮)였기 때문이다 . 그러나 그러한 의문은 곧 풀렸다. "죄송합니다. 장문인! 제가 원래 남례성에 있어야하나 지금은 약간 사정으 로 군영을 이탈한 처지라 제가 이곳에 왔었다는 것을 숨겨주었으면 합니다. " "알았소. 본파의 체면을 보아 내력을 숨기지 않은 장군께 감사드리오." 그렇게 서로 겸양의 말이 몇 마디 더 오가고 라혼은 조금은 쀼루퉁한 기색 의 설화와 함께 설화의 거처로 되어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백록파의 본당은 인세의 공격에 거의 타서 재로 변해 성한 곳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설화가 거처로 삼은 곳은 그나마 탄 냄새나 화기에 영향을 받지 않은 곳이 었다. "피! 너무해 나는 서방님이 온다고 해서 얼마나 기대했는데 싸움이나 하고! " "그럴까봐, 너에게 미리 연락했잖아! 네가 너무 늦은 거야! 설화가 마중 나 왔으면 내가 무엇 때문에 백록파 인물들과 싸웠겠냐?" 서방님에게 투정을 부리려던 설화는 자신이 미리 나가 기다렸다면 괜한 다 툼은 없었을 것이란 말을 듣고 보니 할 말이 없어졌다. "그런…. 거…였어요?" "그래! 이 철없는 아가씨야!" 라혼은 곤란한 표정을 짓는 설화의 귀여운 모습을 보며 자연스런 미소를 지 으며 설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설화도 서방님의 자상한 미소와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고 얼굴을 마주보며 아름답기 그지없는 미소 지었다. 검선자 주묘연은 가만히 마주보며 미소 짓는 부부(夫婦)의 모습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수년간 한솥밥을 먹으며 설화 소궁주와 상공 부부를 보면 서 부부라는 느낌보다 부녀사이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 가지였다. 상공의 따뜻한 눈빛과 설화 소궁주의 투명한 눈빛으로 서로 바라 보는 둘은 연인(戀人)이라기보다 가족에 가까워 보였기 때문이다. "상공을 뵙습니다." "오랜만이오, 주낭자." "소궁주와 오래간만에 회포(懷抱)를 푸시는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하나 인사는 드려야 하겠기에 부득이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아니오. 그렇지 않아도 여인천궁의 힘을 빌려야 할 일이 있으니 잘됐소." "여인천궁의 힘을 말씀이십니까?" 라혼은 설화와 주묘연에게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바로 해상세력을 기 반으로 북지성에 서부에 할거한다는 계획이었다. 여인천궁의 부공촌(父公村 )에서 생산되는 철기(鐵器)를 토귀(土鬼)에 토금전장(土金錢莊)의 이름으로 각지의 제후들에게 팔고 기회를 기다린다는 것과 이미 토귀에게 그러한 지 시를 해두었으며 선원들과 배를 사들이고 있으며 배를 만드는 기술자들 또 한 수배하는 중이란 것도 밝혔다. "그렇다면 어마어마한 자금이 소요되겠군요." 검선자 주묘연은 앞뒤 상황을 재보았다. 설화 소궁주는 상공의 뜻에 따를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여인천궁의 입장에서도 이것은 매우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비록 외당주의 신분에 있는 자신이지만 이일은 궁주의 뜻을 묻는 것이 좋았다. "알았어요. 하지만 금당주인 금선자와 궁주님 뜻도 물어야 하니 즉답은 하 지 못하는 것을 용서하세요." "아니오. 주낭자가 말한 것이 옮소! 하니 궁주에게 잘 말해주시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라혼이 두 미녀와 대화를 나눌 때 보리대불은 꿰다놓은 보릿자루마냥 방밖 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다. 라혼이 고의로 그를 팽개쳐 두었으나 백록 파에선 보리대불을 백호나한을 수행(隨行)하는 쯤으로 생각했다. 이미 백호 나한의 힘을 뼈저리게 실감한 백록파 인물들은 백호나한을 존경에 염을 넘 어선 신앙에 가까운 마음을 품고 바라보고 있었기에 백호나한을 수행(?)하 는 범상치 않은 보리대불에게 함부로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백호나한이 자 신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숨겨달라는 부탁을 과잉 해석한 오중자가 일대를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한 임시 금지(禁地)로 설정했기에 근처에 백록파 인물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여인천궁의 여인들이 승려인 그에게 접근 하는 것도 아니기에 보리대불은 상당한 시간동안 그 자리에 방치(?)되어 있 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야 주묘연의 뇌리에 그의 존재가 떠올랐다. "하온데 상공 밖에 있는 대사는 어떤 분이십니까?" 라혼은 주묘연의 물음에 밖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 "거기서 대화를 듣고 있다는 것을 아니까. 어서 들어오시오." "무량수불!" 라혼의 말에 나지막한 도호를 토하며 자리에서 일어서서 방안으로 들어선 보리대불은 다시 합장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무량수불, 본승은 보리(菩提)라 하오." "여인천궁의 외당주 주묘연입니다." 주묘연은 자신을 보리라 밝힌 범상치 않은 승려에게 공손히 일어서 인사했 다. 그러나 정작 보리대불은 아름답기 그지없는 백의미녀를 보고 깜짝 놀랐 다. '허어! 진명천자(眞命天子)의 운을 가진 여아(女兒)가 아닌가? 거기에 사신 수(四神獸) 중 백호와 주작의 기운 동시에 타고나다니…….' 백호는 결실(結實)을 상징하는 영수(靈獸)로 죽음자의 세계인 명부(冥府)의 짐승이기도 했다. 거기에 주작은 생장(生長)과 부활(復活)과 정화(淨化)를 상징하는 짐승이었다. 또한 백호는 금(金), 주작은 화(火)이므로 오행상극 도(五行相克圖) 상(上) 화극금(火克金)에 해당하는 괘(卦)를 가지고 있었다 . '생(生)과 사(死)가 한 몸에 있고, 천미지상(天美之像)에 내미지상(內美之 像)을 겸비했다. 거기에 선골(仙骨)에 선근(仙筋)까지 타고나 하늘이 내린 재목, 그야말로 천재(天才)아닌가?' 천재(天才)는 천재(天災)다. 재능 있는 자가 태어나 세상을 바꾸면 바꾸어 진 세상에 적응하기위해 피가 내를 이루고 신체가 산을 이루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난세로 접어드는 시기, 풍운(風雲)이 일면 용(龍)이 승천( 昇天)한다. '대략 효웅(梟雄)의 운세를 가진 여아가 어찌하여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것일까? 이것도 귀선의 영향일까?' 보리대불이 읽은 백의미녀의 운세는 태어나자마자 피를 뿌리며 세파에 찌들 운세였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상(像)은 청정(淸淨)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 "이봐! 수도하는 승려가 유부녀를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며 어쩌나?" "무량수불! 라혼시주, 시주의 부인되는 분이 이분이오?" 설화는 보리대불의 부인(婦人)라는 말에 얼굴을 붉히며 날아갈듯 절했다. "소첩, 설화라고 합니다." "무량수불! 선재로다, 소승 보리라 하오." "설화가 보리대사 뵙습니다." 보리대불은 날아갈듯 절을 하는 백의미녀를 바라보며 궁금함이 가득한 표정 으로 귀선(鬼仙) 라혼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라혼은 보리대불이 뭘 생각하 고 무엇을 궁금해 하든 관심이 없었다. 라혼의 입장에선 그는 어디까지나 귀찮은 '혹'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서로 인사를 했으니 이만 나가주겠나? 오랜만에 만나는 부부입장도 생각해야지 않나?" "무량수불. 하지만 시주 이것은……?" "주낭자, 보리대사에게 차라도 대접해 주시겠소?" "알겠습니다, 상공. 대사, 가시지요." 명백하고 노골적인 축객령에 보리대불은 떨어지지 않으려는 발걸음을 옮겨 방을 나서야했다. 보리대불은 귀선이 자신이 곁에 맴도는 것을 달갑게 생각 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진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귀선의 주변에서 일어나 는 일들은 그냥 넘기기에 너무나 엄청났다. 비록 사바세계와 인연을 끓고 사는 선불(仙佛)인 보리대불이었으나 천하를 피로 덮을 수도 태평가를 부르 는 태평성세로 이끌 수도 있는 진명천자의 운(運)을 한 몸에 타고난 존재를 만나 인연(因緣)을 맺었으니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주묘연이 보리대불과 함께 방을 나서자 이제야 방안에는 설화는 서방님과 단둘이 되어 그간 있었던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현석이란 아이를 의 동생 삼은 것과 장동성의 함락하는 순간, 그리고 만인객잔의 일, 금동보라 는 희한한 무공을 사용하는 고수, 등의 이야기를 했다. 라혼 또한 설화와 꼭 닮았던 불새의 무녀 가니아와 토지신(土地神)들을 만나 그들 마을에서 지내던 이야기와 봉호삼관(峰好三關) 족정관, 오수관,천수교를 단 사흘 만 에 함락시킨 일과 거기서 보리대불을 만난 이야기까지 해주었다. "꺄아! 그럼 그분이 신선이었단 말 이예요?" "그래, 보리대불은 수미선맥의 선불이라더구나!" "이따가, 시주돈을 조금 드리고 복(福)을 내려달라고 해야지!" "그게 무슨 말이야?" "신선이라면서요?" 신선에게 복을 비는 것은 민간에서 흔한 일이었다. 원래는 제왕들이 진정 아는 자에게 가르침을 받아 천하를 경영했고, 천하의 기재들이 신선에게 가 르침을 받아 출세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것이 민간에 전승되어 신선 이 복을 내려준다고 하여 얼마간 재산을 바치고 복을 빌었다. 옛날 어느 고장에 도적이 신선을 가장해 마을에 신선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감언이설(甘言利說)과 교언(巧言)으로 재산을 갈취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신선이 그 마을을 지나다 가짜신선을 잡았다. 그러나 문제는 가짜 신선 이 모은 재물이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그냥 나눠주면 분란의 소지가 될 수 도 있는 재물을 함부로 방치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숨겨둘 수도 없는 노릇 이었기에 신선은 그 재산으로 마을에 저수지를 만들게 했다. 그런 후로 마 을엔 웬만해선 홍수나 가뭄이 들지 않아 신선이 보호하는 마을이란 소문이 돌고 그 가짜신선이 만든 사당은 마을 사람들의 개인적이 복을 비는 곳이 되었다. 이렇듯 신선에게 가르침을 청하거나 복을 비는 것은 오랜 풍습이었 다. "설화야! 따지자면 나도 신선인데 신선의 아내가 다른 신선에게 복을 비는 것은……." "맞다! 그렇구나, 서방님도 신선이었지. 신선님, 신선님 세상 모든 사람들 이 행복하게 해주세요!" 라혼의 너스레에 설화는 반색하며 라혼을 앞에 두고 두 손을 모아 주문을 읊조리듯 복을 빌었다. 장난삼아 하는 설화의 기도였지만 그 기도엔 설화의 진심이 배어있음을 라혼은 느낄 수 있었다. "세상에 공으로 얻는 것은 없는데 너는 무엇을 주려는고?" 설화는 서방님의 치기에 찬 대꾸에 가만히 뭔가 궁리하는 표적을 짓더니 이 내 생글생글 미소 지으며 손을 뒤로하고 라혼의 앞으로 한발 다가섰다. 그 리고……. -쪽! "……!" 그리고 까치발을 들어 라혼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는 홍조어린 얼굴로 조용 히 속삭였다. "설화로는 안돼요?" 할거도중(割據途中) "지심(至心)! 그가 다쳤데!" 다소 날카로운 인상의 아름다운 미녀가 방안으로 뛰어들며 소리쳤다. 방안 에는 검은 피부에 붉은 입술의 진토인(塵土人) 미녀가 호리호리한 몸매를 흑의경장으로 감싼 미녀가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였다. "뭐해? 해노야 아니지, 라혼대가가 다쳤다구!" "주인님이 말씀이십니까?" "그래! 내가 누굴 말하는 줄 않았어?" 그녀들은 다름 아닌 한포포와 라혼에게 차레족의 족장으로부터 보답(?)의 주어진 지심이란 이름의 차레족 여전사였다. "어서가자!" "예!" 한포포와 지심은 서둘러 차비를 하고 방을 나섰다. 그러나 마음이 다급한 그녀를 막아서는 그림자가 있었다. "너는 어디를 가려는 게냐?" "어, 어머니……?" "……." 바로 한포포의 어머니인 묘낭(猫娘) 묘호란(猫好丹)이었다. 한포포는 갈 길 이 바쁜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그림자가 모친임을 알자 무척 당황했다. 하 지만 이내 다급한 어조로 어머니 묘호란을 채근했다. "어머니, 그가, 그분이 다쳤다구요!" "안다. 그렇게 들은 바있다." "그런데 왜?" "몰라서 묻는 것이냐?" "……." "그는 이미 아내가 있다. 당금 천하를 위진 시키는 백호나한과 천하제일미 천상천화가 부부지간이란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간 일부러 잊고 지냈던 일을 묘호란이 상기시키자 한포포는 금세 풀이 죽 었다. 그러나 그건 그것이고 해노야는 생명의 은인이며 사부(師父)였다. "알아요! 하지만 그분은 제 사부라고요! 사부님이 다치셨는데 찾아가 봬야 도리죠!" "……." 단호한 한포포의 입장에 잠시 침묵하던 묘호란은 이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우~! 포포야, 지금 천수교로 달려간다고 해도 아마 백호나한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예? 그게 무슨? 어머님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지금 하남천원군 내부에서 백호나한의 입장에 매우 미묘하단다. 너도 한동 안 왕부에 있으면서 황궁(皇宮) 출입을 해보아서 알 것이다. 그는 너무 뛰 어나기에 누군가를 모시고 있을 그릇이 아니다. 그것은 백호나한도 하남천 원군의 금영월 대장군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요?" "삼관을 단 사흘 만에 점거한다는 것은 참으로 경천동지할 일이다. 만약 백 호나한이 그 공을 내세워 호도공략까지 한다면 그 공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러난 그는 공을 세우기보다 호도를 공략하는 공을 하남천원군 대장군에게 양보함으로써 인화(人和)를 생각하고 있단다. 그러니……." "대가가 꾀병을 부리고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단다. 너도 잘 알 것이다. 그 누가 있어 백호나한을 해할 수 있겠니, 하지만 하남천원군의 수뇌는 총력을 기울여 호도공략에 나설 것이고 십중팔 구 백호나한이 이곳 봉수성의 수비를 맡게 될 거야. 그리고 그는 하남천원 군에 복귀하는 것보다 수군을 꾸미는데 전력을 다할 것이니 지금 경솔하게 행동하는 것은 백호나한에게도 우리 백수회에게도 좋지 않다." 백수회주 묘낭 묘호란은 상경묘가의 후예로 다름 아닌 백수회를 이끌던 묘 묵의 외손녀로 잠시 집을 떠나 있었기에 '묘묵의 옥'의 화를 면할 수 있었 다. '묘묵의 옥'사건이 일어나기 수년전 묘묵의 사위인 묘호란에 부친에게 반역을 도모했다는 이유로 집안 전체가 참살되고 그것이 훗날 상경묘가의 멸문으로 이어졌다. 각각의 이유는 달랐지만 수년전부터 노골적인 호제가의 견제로 일어난 사건으로 당금에 와서 그 일은 천자(天子)인 호황이 덕(德) 이 없음을 증명하는 가장 커다란 사건으로 회자되고 있었다. 라혼은 선맥(仙脈)을 발견하고, 드워프들을 만나 마음의 변화가 있었다. 홍 진(紅塵)을 피해 그만 은거하고 싶었다. 그러나 설화의 장난스런 부탁을 듣 고 그이야기는 결국 꺼내지 못했다. 깊은 생각을 하고서 말한 것은 아니지 만 자신이 그동안 겪고 느낀 바를 말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 "무량수불, 시주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시오?" "아니 별것 아니오! 묻겠소. 당신은 선불이오. 그러니 세상사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소." 보리대불은 귀선의 물음에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 이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신선들은 세상이 도의에 맞게 흘러가도록 하며, 자기 자신의 끊임없 는 수도를 하는 존재지요!" "……." "신선은 스스로 깨달아 그 깨달음을 통한 부차적인 힘을 존재입니다. 부처 또한 그 방법을 달리하나 진정 아는 존재지요. 그런데 시운을 읽고 100세( 世) 앞을 내다보게 되자 1만년 마다 세상이 뒤바뀌는 것을 알게 되었소." 1세(世)는 30년(年)이다. 이것은 우주의 시간상으로 말하는 방법으로 1세는 우주의 시간으로 1시진(2시간)이다. 우주의 1년은 129,600년 이것은 1원( 元)이라하고, 1년이 12개월로 이루어지듯이 1원은 12회(會)로 이루어지고 1 회(會)는 10,800년, 1회는 30운(運)으로, 1운은 360년이다. 하루 12시진으 로 이루어지듯이 1운은 12세(世)다. 보리대불은 여기까지 말하고 귀선의 표정을 슬쩍 살피고는 이야기를 계속이 었다. "반고족을 아시오?" "고대에 살았다는 거인들을 말하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무량수불, 태조에 이 땅을 지배하던 반고의 후예지요. 반고는 그 높은 도력(道力)으로 천지(天地)를 짓고 스스로 신의 반열에 오르려했 던 그들은 천지신명(天地神明)의 노여움을 사 멸족되었소. 그리고 세상에 나온 것이 용(龍)이오. 천지의 신들은 다시금 피조물이 신의 위치를 넘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 용들에게 쓸데없는 꿈을 꾸지 못하게 했소. 그러나 꿈이 없는 용들은 신을 섬기려 들지 않았소. 그래서 천지의 신들은 조화롭고, 고요하며 아름다운 종족을 만들었소. 그것이 선인(善人)들이오. 그러나 그 들은 자연의 조화만을 생각할 뿐인 그런 종족이었소. 그러나 아직 만족하지 못한 지신(地神)들은 땅의 다른 가치를 아는 종족을 만들었소. 아니 그들 은 선인(善人)들의 일부를 땅에 맞게 만들어 고집 세고 긍지 높은 토지신들 을 지었소. 그러자 야수(野獸)들의 신은 탐욕스럽고 난폭한 오귀(惡鬼)들을 만들었소." 선인(善人)이란 선남선녀(善男善女)를 말하는 것으로 다름 아닌 엘프(Elf) 였다. 토지신(土地神)은 드워프(Dwarf), 오귀(惡鬼)란 다름 아닌 오크(Orc) 를 말했다. "하나 천지신명은 만족하지 못했소. 꿈을 꾸고 꿈을 이루는 종족을 만들고 싶어 했소. 그리고 천지의 신들은 거인(巨人) 반고의 몸에서 사람을 지어냈 소. 그러나 모든 천지의 신들이 인간을 만든 것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소. 그리고 결국 천지의 신은 신(神)과 마(魔)로 나뉘어 끝도 없는 전쟁을 시작 했소." "그리고 그 전쟁에 천지가 견디지 못해 상제(上帝)의 뜻에 따라 신계와 마 계로 나뉘어 봉신(封神)되어 1만년에 한번 세상을 신과 마가 싸우는 전장을 만든다." "무, 무량수불! 그렇습니다." 보리대불은 귀선이 말을 받자 약간 놀라 말을 더듬었다. 그러나 상대는 감 당 못할 힘을 가진 귀선이었다. 죽 신선의 반열에 있었기에 모르진 않을 거 란 생각도 들었다. "그럼 신선이란 1만년 마다 오는 대변혁의 시기를 대비하여 힘을 기르는 존 재들인가?" "무량수불, 그렇습니다. 사바세계의 일은 그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기 에 되도록 관여하고 있지 않지요. 그러나 인연(因緣)은 그리 간단하게 끓을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가끔 세상사에 관여하는 신선도 있지만 그것을 단 순히 스쳐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뿐이지요." 라혼은 보리대불의 말을 들으며 그간 마음 한구석에 걸리던 무언가를 비로 소 풀 수 있었다. 칸 대륙에 신선이란 존재가 있다면 시드그람 대륙에는 ' 하이랜더(Highlander)'라는 존재가 있었고, 허밋(Hermit:은둔자)라는 존재 가 있었다. 그리고 각 종파별로 템플러(Templar)가 있어 종말에 대비했다. "그럼 신선들은 누구와 싸우는 것이오?" "무량수불, 그것은 각 선맥마다 다릅니다. 신과 마의 싸움의 틈바구니에서 사람을 보호하는 선맥도 있고, 신을 도와 마와 싸우는 것을 목적을 가진 선 맥도 있습니다." "그럼 마를 도와 신과 싸우는 쪽도 있겠군." "부끄럽게도 그런 마인들도 있습니다. 힘에 욕심낸 나머지 혼을 저당 잡히 고 마의 힘을 빌려 쓴 족속들……. 무량수불!" 라혼은 보리대불의 마지막 말에서 선기(仙氣)와 마기(魔氣)를 함께 지닌 자 신을 책함을 느끼고 쓴 웃음을 지었다. 라혼이 천수교에서 떠난 지 이레가 지나고 백록산에 온지는 꼭 사흘째 되던 날, 남례성 천수교에 주둔중인 백호영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전환을 통해 보고내용은 금영월 대장군으로부터 친서와 호도의 열지족이 수상한 움직임 을 보인다는 것이었다. 라혼은 일단 남례성 천수교로 가서 금영월 대장군의 친서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북지성 백록파로 돌아와 설화에게 다시 떨어져 있어야한다는 얘기를 했다. "나는 이만 남례성으로 가야겠다." "서방님……." 라혼은 시무룩한 표정의 설화에 얼굴을 들어 이마에 입을 맞추고 가만히 끌 어안았다. 그러다 문득 설화를 번쩍 들어 올려 왼팔로 둔부를 받쳐 들었다. "꺄아~!" "다음에 만날 때는 설화가 해준 밥을 먹고 싶다." "뭐야, 내려줘요!" "솔직히 말해봐 여인천궁에선 요리 같은 것은 가르쳐주지 않지?" "그런 건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어요." "뭘?" "밥이요!" 설화는 7살 무렵부터 밥을 지었다. 그러나 그 후 여인천궁에 들어설 때까지 밥 외에 불을 사용하는 요리는 하지 않았다. 그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라혼이었다. "사람이 밥만 먹고 어떻게 살아? 밥 말고는?" "알았어요. 서방님이 드시고 싶을 요리가 있다면 꼭 해드릴 깨요. 뭐 드시 고 싶어요?" "맛있는 거." "뭐예요!" 설화는 서방님이 자신을 땅에 내려주자 뭔가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이제 진짜 이별이기 때문이었다. 라혼은 설화를 내려놓고는 정색을 하고 물었다. "사실 내가 널 찾은 것은 앞으로의 일을 상의하기 위해서란다." "……." 라혼의 말에 설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서방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는 설화 네가 원주로 가서 네 신상내력을 확인했으면 한다." "예? 하지만……." "지금 가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굳이 숨길 이유는 없다. 일단 힘을 기르 고 원주로 가자!" 아직 어린 설화지만 서방님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설화가 호랑 이 그것도 신수(神獸) 백호(白虎)라는 것은 철저한 비밀이었다. 그러니 스 스로 백호임을 밝히고 원주에 나서면 그 여파가 상상을 초월 할 것이란 것 은 불 보듯 자명한 일이었다. "숨어 살 것이 아니라면 당당하게 나서는 것이 났겠지. 네게도 할아버지나 다른 친인도 있을 것이니 그들 앞에 당당하게 나서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준비하겠다." "……." 설화는 미처 생각 못했던 일을 이야기 하는 서방님이 너무나 고마웠다. 어 머니는 직접 장사지냈지만 아버지에 대한 일은 언제나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친가인 후려의 강무세가에도 나서지 못한다는 것 이 조금 답답할 때가 있었다. "서방님……." 라혼은 조용히 눈물을 글썽이는 설화를 보듬어 안았다. 그렇게 무언의 동의 를 얻어낸 라혼은 보리대불과 함께 백록파를 떠났다. 설화 또한 불타는 장 동성의 화마에서 구한 사람들을 백록파에 맡기고 여인천궁으로 돌아갔다. 세상에 나선다는 구체적인 목적이 생긴 이상 설화의 사부이자 여인천궁의 궁주(宮主) 섬섬옥수(纖纖玉手) 상유란(桑楡蘭)과 앞으로의 일을 상의해 보 아야하기 때문이었다. 할거도중(割據途中) 열지족 추장 소노리는 세 아들이 적에게 잡히자 진노성을 터트리며 1만 전 사를 일으켰다. "추장, 이번 싸움은 예측할 수 없습니다. 부디 진정하십시오." "샤먼, 몰라서 하는 소리요? 내가 세 아들 때문에 이러는 줄 아시오? 삼관 이 떨어졌으니 다음은 호도요. 내가 천수교로 가는 이유는 천수교의 다리만 끊으면 아무리 많은 적도 막을 수 있기 때문이오. 나의 세 아들이 희생되 는 한이 있더라도 천수교만은 끓어야 하오!" 이름 모를 새의 깃털과 방울, 북, 거울로 전신을 장식하고 얼굴에 주름 가 득한 늙은 무당(巫堂)은 추장의 출정을 반대했다. 그러나 추장의 의지는 확 고했다. 그리고 그런 추장을 지지하는 열지족의 동맹자들도 샤먼의 불길한 말에도 불구하고 출정을 주장했다. 하지만 늙은 샤먼은 더 이상 강하게 주 장하지 못했다. 점을 쳐보아도 조정의 토벌군의 동태를 살핀 전사들이 전한 소식을 따져보아도 싸움의 결과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샤먼의 주장 의 근거는 '알 수 없으니 가지마라'였을 뿐이었기에 더 이상 강한 주장을 펼 수 없었던 것이다. "정 그러시다면 메이를 데려가십시오." "메이를?" "메이는 추장의 따님이지만 무녀이기도 합니다. 저는 피를 볼 수 없는 몸이 지만 메이는 그러한 금제가 없으니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알았소. 그래야 샤먼이 안심된다면 그렇게 하겠소." 열지족의 샤먼은 자신의 피 외에 평생 피를 보아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추 장의 딸이라면 가장 용맹한 전사에게 시집을 가서 부족의 가장 용맹한 전사 를 낳아야 할 의무가 있음으로 무녀가 될 수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선혈 (鮮血)이 난무(亂舞)하는 전장에 딸려보 낼 수 있는 것이다. 열지족의 여자 라면 기본적으로 전사이기 때문에 전장을 따라나서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제(諸) 부족회의가 끝나고 열지족 추장 소노리는 동맹자를 포함한 열지족 전사 1만을 이끌고 천수교로 달려갔다. 라혼은 족정관과 오수관에 각각 1천5백의 군사만을 남겨두고 운용할 수 있 는 전 병력을 천수교로 모았다. 5천 위병들과 1천2백 백호영이 천수교에 있 었기에 백호영은 물론 5천 위병들도 1만 반란 진토인들이 몰려온다는 소식 을 들려와도 별반 걱정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난공불락의 삼관을 단 사흘 만에 공략한 성과는 군사들의 사기를 고양시키기에 충분했다. 라혼은 자릴 비운사이 천수교 동안(東岸) 외곽을 둘러싼 목책과 수비 상태 를 둘러보고 흡족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부하들을 치하했다. "소위교(少衛校)라 했나? 수고했다." "소장, 위교 소천위(少川威)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니 자네가 한 일은 상을 받아 마땅하다. 승리에 취한 병사들을 다스려 이토록 훌륭한 방어거점을 만들었으니 상급으로 은 1천 냥을 주겠다." "감, 감사합니다. 장군!" 위병 위교 소천위는 뜻하지 않은 상관의 친찬과 상금에 감격해 했다. 사람 은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나 신비감을 갖기 마련이다. 또 그 상대가 놀라운 업적을 이룬 존재라면 경외하는 마음까지 품게 마련이 었다. 그런 점에서 백호영이란 최정예 군사를 조련하고 거느린 백호나한 라 혼참장은 충분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단, 하루 만에 위병대장 홍대보가 주무르고 있던 봉수성을 접수함은 물론 그 여세로 봉수부는 물론 주변에 모 든 주요지역을 한손에 장악하는 위업을 보였다. 그리고 장장 두 달간 모습 을 보이지 않았음에도 봉수성은 여전히 그의 수중에 있었다. 그리고 단 사 흘 만에 다른 장수들은 거의 포기하다시피 한 난공불락(難攻不落)의 봉호삼 관(峰好三關)을 별반 큰 피해 없이 뚫었다. 전설을 넘어 신화적 존재인 백 호나한에게 치하를 받는 다는 것은 장수로써 큰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군사들도 승전을 했지만 승리의 기쁨을 누리지 못했다. 내 술과 고기를 내 줄 테니 병사들로 하여금 회포를 풀도록 해라!" "고맙습니다. 하오나 적군이 코앞에 있는 자칫 기강이 해이해 지지 않을 런 지……." "너희들은 나의 정예군이다. 오늘 한잔 술을 마시고 내일은 적의 피로 목을 축이는 용감무쌍(勇敢無雙)한군사들은 기강해이란 있을 수 없다!" -와아~! 라혼의 호호탕탕(浩浩蕩蕩)한 외침에 주위에 도열해 있던 군사들은 자신들 도 모르게 환호성을 내질렀다. 장부(丈夫)는 자신을 인정해주는 자에게 목 숨을 맡긴다 했다. 그런데 그 상대가 경외하는 존재라면 더욱 더 열광하기 에 충분했다. 라혼의 '나의 군사들'이란 한마디 말은 위병들의 가슴 속에 깊숙이 새겨지며 설레게 하기에 충분 했다. 그렇게 한동안 환호성이 이어지 고 라혼은 군사들은 물론 하수라 강의 동서양안 주민들에게까지 함께 참가 하는 성대한 연회를 명했다. 수십 마리의 소와 돼지가 통째로 장작불에 구워지고, 거기에 향기롭고 감칠 맛을 더하는 양념을 솜씨 좋은 숙수가 기름장을 만들어 발라가며 굽자 그 구수한 향기가 입안에 절로 침이 돌게 했다. 라혼의 안배로 이가 시리도록 차갑게 식혀진 술과 남례성 특산의 달콤한 과일, 천수교 양안(兩岸) 객잔주 인들이 그동안 숨겨온 갖은 재료들을 이용해 탕과 국을 끓였다. 물론 그 모 든 것들에 값은 정당하게 치룬 후였다. 단순히 삶은 고기 몇 조각과 백여 명으로 구성되어 있는 각 대(隊)당 술 한 동이만을 생각했던 군사들은 소 한마리가 통째로 구워지는 모습을 보자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세상에 이게 다 뭐래?" "역시 우리 장군님은 화통하기 그지 없구만! 오늘은 제대로 목구멍에 때 좀 벗기겠는데?" "이봐! 열지족이 1만이 곧 들이 닥친다는데 술에 취해선 아군의 등에 창 쑤 셔 넣지 말고 적당히 조절하라고……." "이놈아, 내가 신참이냐? 적군이 코앞에 있는데 떡이 되도록 마시게?" "야! 또 뭐가 온다!" 천수교 다리를 지키던 위병들은 바람에 솔솔 풍겨오는 고기가 구워지는 먹 음직스런 향기와 그 안에 은은히 배어 있는 주향(酒香)에 벌써부터 죽을 지 경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눈앞에 천수교를 건너는 수십 대의 수레에 실린 그윽하기 그지없는 주향을 풍기는 술항아리 숫자를 보고 입이 떡 벌어 질 지경이었다. "형님, 뭐가 이상합니다." "그래요. 초가형님, 설마 벌써 호도의 아버님이……." "아니다. 비록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한 기습에 갇힌 몸이지만 큰형님과 아 버님이 있는 호도는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좁은 토굴 안에 난 조그마한 창(窓)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실린 향기로운 음식냄새는 한편으로 입안에 침이 고이게 했고, 다른 한편으론 동생들의 말처럼 불안하기도 했다. 호도가 떨어지고 만에 하나 추장이신 아 버님이 잡히셨다면 바로 오늘 목이 잘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촤르르르……. -끼익~! "……!" 바로 그때 토굴의 굵은 나무창살 문을 묶은 쇠사슬 풀려지는 소리가 나며 굳게 닫힌 문이 열렸다. "나와라!" "……." 셋째 바지라와 다섯째 포이는 불안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아무런 말없이 굳 은 얼굴로 침묵한 둘째 초가을 바라보았다. 초가 또한 불길한 생각에 가슴 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내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무겁게 말 했다. "바지라, 포이 우리는 열지족의 전사이며, 추장의 아들이다. 부끄럽지 않게 당당한 모습을 보여라!" "……." 바지라와 포이는 형 초가의 말에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먼저 근 이레간 갇 혀있던 토굴을 벗어났다. "이게 뭔 일이래? 왜 우리들에게까지 군사들 잔치에 참석해야 하는 거야?" "뭘? 얻어먹는데 그런 것까지 따지냐?" "그것 그렇지만 서도, 솔직히 저기 열지족 놈들보단 말이 통하는 조정의 군 사들이 났더군." 천수교 동안(東岸)에 사는 우하레와 푸르는 강제적인 연회참가에 불만을 토 로하면서도 마을 전체에 진동하는 음식냄새에 잔치가 은근히 기대되기도 했 다. 사방에서 풍겨오는 먹음직스런 냄새에 간만에 흥겨운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에게든 맛있는 술과 음식은 기쁨이었기 때문이었다. "우와! 또 술 수레가 들어온다." "허참!" "이봐 거기 뭐해 거기 과일은 어서 옮기란 말이야." 멍하니 진한 주향(酒香)을 흘리는 수레를 구경하던 사내들은 한 병사의 고 함소리에 화들짝 놀라 검은 갑주의 군사들이 내어준 먹음직스런 과일들을 마을 공터로 옮겼다. 그것들은 열지족이 마을을 점거한 후부터 볼 수 없었 던 과일들이었다. 천수교 근처엔 이 과일이 열리는 나무가 없었고 봉수성 근처에서만 나는 과일들이었다. 라혼의 연회를 위해 봉수성까지 직접 가서 근처농가의 모든 과일과 돼지 104두를 사들였고 35두의 소는 흑막까지 가서 유목들에게 싼값에 사들였다. 전장(戰場) 한가운데서 하기에 규모가 무척 큰 잔치였지만 라혼은 열지족이 어디쯤 있는지 파악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았지만 시간은 있었다. "열지족들이 이곳까지 오려면 시간이 며칠 더 필요하겠지만 만약이란 것이 있다. 항상 경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옛, 주군!" "그리고 그동안 수고했으니 오늘은 마음껏 먹고 마시도록!" "옛, 주군!" 라혼은 집무실에 모인 백호십일걸과 잔폭광마 그리고 모원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보고받는 간단한 회의가 마무리되고 다들 자리를 떠났지만 모석과 모 원은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주군, 그간 고생한 병사들을 위로하는 것은 좋지만 일을 너무 크게 벌린 것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이것은 너무 과한 일입니다. 굳이 이렇게 하지 않아도 군사들 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습니다." 모석(矛石)은 가장 오랜 기간 라혼과 함께했던 특별한 존재였다. 한때는 같 은 집에 머물기도 했으며 그 후로 백호문이나 백호영의 궂은일은 도맡아하 는 안방마님과 같은 장수였다. 라혼은 모석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조 용히 말을 꺼냈다. "상경을 떠나오기 전 고학이 내게 천명을 받으라고 했었지?" "……." "천명을 받는다는 거창한 것을 받을 생각은 지금도 없어, 하지만 지금 내게 하남천원군의 4만 병력이 필요하다." -꿀꺽! 모석과 모원은 자신도 마른침은 삼켰다. 사실 고학에게 주군인 라혼이 마음 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하남천원군은 암중에서 장악할 수 있다고 하는 이야 길 들었다. 지금 그것이 현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모정령, 내가 하릴없이 하남천원군에 막대한 자금을 들이 부은 줄 아는가? 이미 하남천원군은 내 수중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 "그리고 오늘의 연회로 위병들 또한 나의 군사들이 돼 줄 것이다. 그렇지 않나?" 모석과 모원을 그것에 대해 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그 러했기 때문이었다. 라혼이 말하지 않았으나 금영월 대장군에게 하남천원군 을 이어받겠다고 뜻을 이미 밝힌바 있었다. 그래서 금영월도 라혼을 경계할 뿐 견제하지는 않았다. 사람이란 야심을 숨기지 않는 자보다 의도를 알 수 없는 자는 더 믿지 못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나는 3년 안에 원주로 돌아갈 생각이다." "군벌이 되실 생각이십니까?" 라혼은 모원의 질문에 전혀 엉뚱한 질문으로 답을 대신했다. "모원, 내 아내가 수인이라는 것을 아나?" "예! 제가 알기로 주모(主母)는 원래 묘(猫)가의 손이라 알고 있습니다." "저도 설화, 아니 주모가 묘(猫)가라는 것은 제 아내에게 들어 알고 있었습 니다만……?" 라혼은 의문어린 표정의 두 사람에게 선언하듯 말했다. "아니, 설화의 성은 호(虎)다." "……!" 모석은 물론 모원도 크게 놀란 나머지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어떤 추측이 나 추리가 있기 전 재차 라혼의 말이 이어졌다. "그것도 보통 호랑이가 아니라 신수(神獸) 백호(白虎)지!" "……." 라혼은 얼이 나간 표정을 하고 있는 모석과 모원에게 더욱 놀랄만한 사실을 털어놓았다. 설화가 후려의 황가인 강무세가 혈연이 있고, 설화를 처음 만 났을 때 서제가와 강무세가의 가신가인 호(護)가가 서로 살육전을 했음도 말해 주었다. 백만대군 앞에서도 두렵지 않을 것 같았던 모석은 너무도 엄 청난 사실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다. 다른 것은 모르겠으나 주모(主母) 인 설화가 백호인 것이 사실이라면 제왕(帝王)의 운을 타고난 존재가 분명 했기 때문이었다. 인구(人口)에 회자되기를 '천하에 다섯 신수(神獸)가 황 룡(黃龍),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작(朱雀), 현무(玄武)다. 수인천하( 獸人天下)를 연 것은 황룡(黃龍)이고, 용황은 청룡(靑龍)이니 다음은 백호( 白虎), 주작(朱雀), 현무(玄武)가 천하의 주인이 아니겠는가?' 라는 말이 있었다. 그저 말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에 불과 했지만 바로 그런 것이 정통성(正統性)과 명분(名分)을 부여했다. 주작과 현무는 논외지만 백호는 수인천하의 천자 위를 이을 수 있는 성골이가(聖骨二家)인 용호이가(龍虎 二家) 중 호황가(虎皇家)와 연이 있음으로 천자(天子)가 될 수 있는 명분과 근거가 충분했다. 모석은 고학이 천명을 받으라는 말을 했을 때 라혼이 알 수없는 말로 얼버무린 이유를 비로소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당분간 비밀로 하고, 모원은 고학과 더불어 앞으로의 일을 계획해라! " "조, 존명!" "설화가 진정한 신분으로 세상에 알려진 순간부터 천하의 제후들이 설화를 노리게 될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것은 철저하게 숨겨야 하는 일이다. 천하 전체와 맞설 수 있는 힘을 얻을 때까지……." "……." 모석과 모원은 굳은 안색으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설화가 비록 제왕의 운을 타고난 백호지만 여인이다. 그렇다는 것은 설화를 얻는 자가 천하의 주인이 될 명분과 정통성을 얻는다는 말이 된다. 게다가 설화는 후려의 황 가인 강무가와 혈연이 있었다. 이미 천하인들이 백호는 제왕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설화의 존재 자체가 천자의 옥새(玉璽)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이미 라혼이 천하에 천상천화 설화의 남편이라 알려져 있으나 설 화의 정체가 밝혀지면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백호의 남편이란 신분 자체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할거도중(割據途中) 금준미주(金樽美酒)와 옥반가효(玉盤佳肴), 금 항아리의 좋은 술과 옥 접시 의 맛난 안주가 부럽지 않은 연회가 시작되었다. 비록 전장의 한가운데 있 어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갑옷과 창칼을 옆에 두고 마시는 술이었지만 주지 육림(酒池肉林)이 무색할 잔치 상에 모두들 만족했다. 통째로 구운 고기와 는 별도로 날고기를 나누어 앉은 자리에서 구워 먹게끔 하였고, 각종향신료 와 과일야채가 푸짐한 잔치는 라혼이 특별히 마련된 상석에 올라 간단한 외 침으로 시작되었다. "오늘은 좋은 날이다. 마음껏 먹고 마셔라! 그리고 내일 너희는 내게 스스 로 최고의 군사들임을 증명해라!" -와~! 그리고 오늘 이 잔치에 제공된 요리를 하느라 수고한 숙수들에게 각자 은 2 0냥씩 포상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삼관을 공략할 때 크고 작은 공을 세운 자 들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며 금자(金子)하사했다. "지악(知岳)이 성벽을 넘어 홀홀단신으로 성벽 위에 올라 장도(長刀)를 휘 둘러 반적의 목 3개를 일도(一刀)에 베고, 후에 번연(蕃衍)이 지악을 노리 던 열지족의 창을 막아 공을 세웠으니 호걸 중 호걸이다!" -와아~! "공을 세웠으며 능히 포상이 따르기 마련이다. 길을 연 지악에게 은 70냥을 주고 지악을 구한 번연에게 은 60냥을 하사한다." -와아~! 그들의 영웅적 공을 호기롭게 이야기하며 흥을 돋움과 동시에 군사들의 영 웅심을 자극했다. 승리한 싸움을 후에 이야기하는 것은 언제나 웅심(雄心) 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거기에 생각지도 못했던 포상이 따르면 아무리 오 합지졸(烏合之卒)이라 할지라도 강병(强兵)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호 기로운 이야기는 그간 열지족에 의해 억압받던 하수라강 양안의 주민들도 덩달아 분위기에 취에 환호하면 박수를 쳤다. 술과 맛난 음식을 나누어 먹 으면 누구나 경계심이 누그러지게 마련이라 군사들과 함께 같은 자리에 앉 아 흥겹게 먹고 마시는 주민들은 비록 조정의 군사인 위병들과 백호영들이 었지만 자신들을 지켜주는 군사로 생각하게 했다. "열지족 추장의 세 아들을 데려와라!" 라혼은 분위기가 무르익자 포로로 잡아두었던 열지족 추장의 세 아들을 불 렀다. 그리고 겉으론 당당한 체했지만 속으로 불안에 떠는 그들을 옆자리에 앉히고 잔치에 참가 시켰다. 그런 라혼의 모습에 그들과 목숨 걸고 싸운 병사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이미 마음속으로 승복한 군사들은 그 것을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사자인 세 형제는 불안하기 그지없었 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자신들에 대한 군사들의 관심이 덜어지자 세 형제의 가장 큰 형인 초가가 입을 열었다. "우릴 어쩔 셈이냐?" 라혼은 그의 물음에 술잔을 비우고 다시 술을 따르며 말했다. "널 풀어줄 생각이다." "……!" 초가는 장수의 말에 크게 놀라며 눈을 부릅뜨고는 다시 물었다. "무, 무슨 뜻이냐?" "사실 우리에게 포로는 필요 없는 짐에 불과하다. 원래 대로하자면 전부 참 수해도 모자라지……." "크음~!" 맞는 말이었다. 조정에서 반란 진토인을 포로로 잡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것은 열지족도 마찬가지였다. 열지족 추장 소노리는 호도를 점거하고 호 도의 모든 관군들을 참(斬)하고, 남례성 절도사(節度使)까지 사지를 찢어 발겼다. 그렇게 본다면 약간의 가치가 있는 세 형제는 몰라도 5천에 이르는 포로들은 죽어도 진작 죽었어야했다. "말을 탈줄 아는가?" "그렇다!" "다행이군, 그럼 말을 내어줄테니 초로역방으로 가라 그곳에서 너의 아비인 추장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포로 한명 당 노예 둘이다." "……?" 역방(驛房)은 관도 상에 조성해 놓은 일종의 여관이었다. 역방은 천하에 걸 쳐 있었으며 전령들이 묵어가는 곳이었다. 초로역방(初露驛房)은 역방의 역 할을 하는 천수교와 말을 달려 꼭 하루거리에 있는 역방이었다. 초가를 놀 라게 하는 것은 조정의 장수가 어찌하여 추장이신 아버님의 위치를 알고 있 는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만약, 사흘이내에 이렇다 할 답변이 없다면 거래는 거부하는 것으로 알고 포로를 전부 참살하겠다. 물론 너의 두동생도 같이……." "……." 너무도 간단하게 하는 말에 초가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쉽게 말 해서 포로로 잡힌 자들을 몸값을 받고 풀어주겠다는 말이었지만 뭔가 다른 뜻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라혼은 움직이지 않는 초가에게 다시 한 번 말했다. "네가 가지 않겠다면 거래를 거부하는 것으로 알고, 지금 당장 전부 참살하 겠다." "가겠소!" "석은, 그를 배웅해라!" "옛!" 둘째 형님이 장수와 함께 어디론가 가는 모습을 불안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바라보던 다섯째 포이는 같이 남게 된 셋째형 바지라에게 더욱 달라붙었다 . "포이." "형님……?" "먹어둬라. 일단 사흘 후까진 목숨에 위협될만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걱정 말고 먹어라!" "형……." 옆에서 일련의 사태를 지켜본 잔폭광마는 불만이 술을 벌컥벌컥 들이 부었 다. "꿀꺽, 꿀꺽, 꿀꺽……. 캬야~!" -탁! "커어~! 시원하다." 잔폭광마는 옆에서 곧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딴 생각에 빠진 모석을 가 만히 지켜보다 불쑥 물었다. "형님, 이렇게 좋은날 얼굴이 그게 뭐요? 모초(茅草)가 다친 것 때문에 그 러오? 내 부모 된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그 정도 상처는 상처 축에도 끼지 못하오." "……." 모초는 모석의 아들로 지금 백호영에 속해있었는데 천수교를 공략하며 열지 족 전사가 쏜 눈먼 화살에 어깨에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모초는 지금 자신 들의 동료들과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모석은 잠시 상념에 잠겨 있다 잔폭 광마의 말을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로 눈에 아들 모초가 들어오는 것 을 보고 입가에 쓴웃음을 지으며 잔폭광마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닐세. 걱정이 되지 않는다면 거짓이나 그것 때문이 아닐세." "그럼 뭐요?" "왜? 알고 싶은가?" "골치 아픈 거라면 형님 혼자 고민하시고 내가 도움이 된다면 얘기 해 보슈 !" "그럼, 말해봐야 소용없겠군." "형님 날 너무 무시하시는 것 아니오?" "아닐세, 때가 되면 알 일이니 그러는 것일세. 어차피 이일은 모원과 고학 이 뭔가 생각해 내면 자연히 알일 일세." 잔폭광마는 모원과 고학이 생각할 문제라는 것을 듣자 호기심을 접었다. 어 차피 알지도 못하는 천하를 경영하네, 시류가 어떠네 하는 말일 것이라 지 레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말이오. 대장은 참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오. 뭐 하러 포로들에게까 지 술과 음식을 준단 말이오?" "그거 말인가?" "그리고 노예 따위를 어디에 쓴다고 5천명이나 되는 포로를 그냥 풀어준단 말이오. 그놈들이 모두 풀려나면 전부 적이 될 것이 뻔한데?" "자네는 마음에 들어 할 이야기가 아니지만 아마도 그것은 시간을 끌려는 것일 걸세." "시간을 끌어요?" "포로 5천명의 몸값은 마련하려면 그만큼 시간이 필요 할 테고 그동안 봉수 성에서 하남천원군 본군이 올 테니 말일세." 지금 천수교의 병력은 위병이 5천, 백호영이 1천 2백이었다. 총 6천여 명이 5천이나 되는 포로를 감시하는 상태라 여러모로 힘들었다. 만에 하나 누군 가 침입하여 포로들을 풀어준다면 그것만으로 큰 혼란이 일 것은 자명한 일 이었다. 라혼이 그들을 포로로 잡은 이유는 단순했다. 되도록이면 피를 덜 보고 싶 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열지족 추장 소노리가 조금이라도 머 리가 있다면 대군이 몰려오기 전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천수교 다리만큼은 끊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막으려는 라혼의 입장은 군사적으로 상당 히 어려운 지경에 있었다. 천수교를 벗어나 회전(會戰)을 생각해도 그들이 소수의 결사대를 운용하면 본진을 빼앗길 가능성이 컸다. 라혼의 입장에선 밀림은 벽(壁)이지만 그들에겐 길이기 때문이었다. 즉 군사의 운용의 폭이 열지족 전사들이 라혼보다 월등히 높았다는 것이다. 다만 라혼에게 유리한 것은 시간뿐이었다. 열지족은 조금이라도 빨리-대군이 오기 전에-다리를 끓 어야 했고, 라혼은 어떻게 해서든 본군이 올 때까지는 천수교를 사수해야 했다. 그러나 라혼에게 유용하기 그지없는 패가 있었다. 바로 5천이나 되는 포로들이었다. 포로들을 심문한 결과 그들 전부가 열지족 출신이 아니었다 . 열지족과 뜻을 함께하는 부족의 전사들도 상당수 있었기에 한 가지 계책 을 짜낸 것이다. 바로 그들의 몸값을 요구해서 반란 진토인들을 이끄는 열 지족 추장 소노리로 하여금 몸값을 마련하는 시간을 사용하도록 강요하는 것이었다. 라혼은 요구한 몸값이란 '노예'는 금은(金銀)보다 다루기 힘든 것이었다. 그런 것은 대략 1만 명이나 마련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 이 뻔했고, 그들이 마련할 노예는 다름 아닌 호도나 호도부의 주민일 것이 뻔했다. 즉 라혼은 노예를 받아냄으로 호도의 내부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을 확보할 수 있고, 만약 거부한다면 안타깝지만 약속대로 5천의 수급(首級) 을 베면 그만이었다. 전쟁에서 5천이란 전사의 수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1만이 1만 5천일 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거 기에 구할 수 있는 것을 희생시켰다는 전사들의 사기를 생각하면 소노리의 선택의 폭은 극히 좁았다. 잘못하면 열지족을 중심으로 한 동맹이 깨질 가 능성까지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밤새 말을 달려 해가 뜨고 가장 높은 곳에 머물 무렵 초가는 초로역방에 도 착했다. 자신들이 약탈과 방화덕분에 초토화가 된 건물의 후원 우물에게 물 을 길어 갈증을 해소한 초가는 멀리서 들려오는 진군북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조정의 장수 말대로 꼭 들어맞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보 다 반가운 마음이 더욱 컸다. 초가는 다시 말 등에 올라 북소리가 울리는 방향으로 말을 몰았다. -둥,둥,둥,둥,둥,둥………………. 형형색색(形形色色)의 짐승 뼈와 박제된 머리, 맹수의 가죽과 새 깃털, 그 리고 갖은 색깔의 물감으로 분장을 하고 가죽방패와 세형(歲刑) 단창(短槍) 으로 무장한 진토인들이 흥겹게 전쟁의 춤을 추며 진군하고 있었다. 진토인 들이 이렇게 진군하는 이유는 그들의 이동로가 밀림이었었기 때문이다. 밀 림을 대규모 인원이 지나면 앞과 뒤는 서로의 상황을 알 수가 없게 된다. 그것을 서로 북소리를 이용하여 지금 상태를 알고 또 기괴한 소리로 맹수를 쫒는 효과도 있었다. 북소리의 박자가 있으니 자연스레 춤이 뒤따랐 고, 춤은 전사들의 공포를 잊게 해주며 끝없는 용기가 솟아오르게 하는 묘 용이 있었다. 그런 전통이 길을 따라 움직이는 지금에 까지도 이어진 것이 다. 그리고 말을 타고 있는 전사는 얼마 없었지만 12마리의 코끼리가 있었 다. 11마리의 코끼리는 등에 전투 탑을 짊어지고 대열의 중간쯤 있었고 하 얀 물감으로 몸을 칠한 코끼리 1마리가 붉은 탑을 지고 진토인 대군을 이끌 었다. 그 하얀 코끼리 탑에 하나의 굵은 기둥이 있었고 그 기둥 끝에 몸을 기둥에 묶은 4인의 파수꾼이 사방을 감시했다. 그중 전방을 감시하는 눈자 위를 검게 칠한 파수군이 외쳤다. "수색꾼이 돌아온다! 그런데 말을 탄자가 같이 온다!" 파수꾼의 외침은 하얀 코끼리를 타고 있는 열지족 추장 소노리에게 들렸다. 소노리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앞으로 나와 파수꾼이 본 곳을 직접 확인하고 그에 따른 지시를 내렸다. "진군을 멈추고, 전열을 정비한다. 구하, 오르미를 보내 그들을 마중하라!" "옛!" -퉁,투둥, 투퉁! 추장이 탄 코끼리에서 기이한 박자의 날카롭고 청명한 북소리가 울리자 하 얀 코끼리를 따르던 북을 치는 북꾼이 그 즉시 북을 치는 박자를 바꾸었다. 북소리가 진군을 멈추라는 것을 의미하는 박자로 울리자 진토인들은 즉지 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진군하느라 흐트러진 전열을 정비했다. 그리고 열지 족의 용사(勇士) 구하와 오르미가 추장의 명을 받고 말을 몰아 달려갔다. 원래 열지족의 전사는 말을 탈줄 몰랐으나 수십 년 전 조정이 보낸 토벌대 로 온 강무세가의 말을 탄 기병(騎兵)에게 당한 후로 말을 구해 타는 법을 익히고 배웠다. 기병(騎兵)을 만들려 했지만 남례성은 말이 살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었고 기후에 적응한 말일지라도 밀림에선 소용이 없었다. 더욱이 말은 무척 고가(高價)였다. 그러나 열지족은 약탈을 생업으로 하는 호전적 인 부족이었다. 적에게 빼앗은 말을 이용하는 것을 생각하여 최소한 말을 타는 법을 배우게 했다. 그러나 말을 타는 법을 배우게 하는 것은 추장의 아들이나 유력자의 자식이 아니면 힘들었다. 구하, 오르미 두 용사와 수색꾼, 그리고 알수 없는 사람이 도착하자 또다시 북소리가 울렸다. 바로 중요한 일이 생겼으니 회의를 한다는 뜻을 가진 북 소리였다. *** 열지족 추장 소노리는 아들이 살아 돌아온 것은 기뻤으나 아들이 가져온 소 식에 고민했다. 그리고 아들의 말을 다른 동맹자들에게 들려준 것을 더욱 후회했다. "추장, 나는 몸값을 마련하여 전사들을 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가하오." "그렇소, 타지족장의 말이 옳소. 5천명의 전사를 구하는 일이오. 생각하고 자시고 할 이유가 없소." "아니오. 그들이 순순히 5천명이나 되는 전사들을 풀어줄리 없소. 이것은 기만책일 수 있소. 신중해야 하오!" 어서 몸값을 마련해야한다는 족장들의 말에 일침을 가한 세지족장 아리하는 추장 소노리에게 하나의 의견을 제시했다. "추장, 일단 원래 생각했던 대로 초로역방까지 가서 전사들을 쉬게 하고 천 수교에 사자(使者)를 보내는 것이 좋겠소." 세지족장 아리하의 의견에 일리가 있게 느껴지는지 모두가 동조하는 분위기 자 소노리는 선선히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날 오후께 다시 추 장의 셋째 아들인 바지라가 와서 포로들의 몸값에 관한 추가 조건을 이야기 하자 분위기는 어떻게든 몸값을 마련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 추가 조건 이란 5천 전사들을 멀쩡하게 보내는 대신 5104명의 포로와 10238명의 노예 를 일괄 교환하는데 추장의 세 아들의 몸값을 각 10명씩 삼아 30명이 추가 되었다. 거기에 바지라의 입을 통해 제 부족의 유력인사의 가족에 이름이 거론되자 더 이상 의논할 것도 없다는 듯이 호도로 노예를 마련하라는 전령 을 보냈다. 할거도중(割據途中) "금사제, 뭐하는가?" 백록파 장로 오진자(晤進子) 볕이 잘 드는 바위에 앉아 멍하니 산 너머를 바라보는 금동보에게 말을 걸었다. "아! 오진자 어르신."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기에 내가 접근하는 것도 몰랐나?" "하하하, 장로님께서 소요보(逍遙步)을 사용하시며 접근하는데 천하에 그 누가 눈치를 첼 수 있겠습니다. 장로님께서 자객이 아니신 것이 얼마나 다 행인지 모르겠습니다." "허어, 이 늙은이 얼굴에 금칠을 하는구먼. 나는 그만 띄우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부터 털어놔보게. 내 이미 짐작한 바가 있으니 얼른 털어놔보게." "무, 무슨…? 뭘 털어놓고 할것이 있겠습니까?" 깡마른 체구에 주름진 오진자는 시원찮은 금동보의 반응에 소매 속에서 술 병하나를 꺼내들고 금동보 눈앞에서 흔들었다. "속내를 떨어놓는 데는 이것만한 것이 없지?" "어? 하지만 백록파 본당에서는……." "싫음 할 수 없고." -뽕! -꼴깍, 꼴깍, 꼴깍, 꼴깍! "커어, 술맛한번 끝내준다." "꿀꺽." 홀인부 만인객잔에서 점소이 노릇을 하던 금동보는 하루를 멀다하고 마신 술을 백록파로 온 뒤로 구경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향기로운 주향이 코를 간질이고, 천상의 감로수(甘露水)인냥 술을 삼키는 오진자의 목울대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입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백록파 경내에서는 술을 마시면 안 되지만 오진자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저어, 어르신……." "왜? 아! 미안하네. 자네는 사색 중이었지 내 자릴 피해 줌세." "아니, 그것이 아니라……." 금동보는 뱃속에 살고 있는 술 벌레들의 봉기 때문에 일단 돌아서려는 오진 자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원래 술이란 것은 혼자마시는 것보다 둘이 함께 마시는 것이 배는 맛있는 법이니……." "됐네! 나는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곡차를 마시는 것일세. 본디 차란 혼 자 마셔도 나름대로 운치가 있는 법." 오진자의 천연덕스런 너스레에 금동보는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어야 했다 . "아, 알았습니다. 제 이야기를 안주로 풀어놓을 테니 제발 목이라도 축이게 해주십시오." "그럴 텐가? 역시 곡차는 세상사는 이야기를 안주삼아 마시는 것이 제일이 지." 금동보는 오진자가 건네준 술병을 받아들고 거의 반이나 비워버렸다. 그러 나 오진자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금동보를 막지 않았다. -꼴깍, 꼴깍, 꼴깍, 꼴깍! "크으~!" "그래 마음속에 있던 빗장은 풀렸는가?" 오진자는 백록파 인물 중 가장 오지랖이 넓은 인사였다. 그래서 당연히 백 록파와 미묘한 관계의 만인객잔과도 가볍지 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그래 서 만인객잔에 전해 내려오는 무공이 무엇이고 어떤 수련을 거치는지 잘 이 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금동보가 천상천화를 따라서 만인객잔을 떠나 백록 파 본산으로 오자 크게 놀랐다. 억만복의 전인(傳人)이 길을 떠나 강호를 주유하리라곤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진자 장로님, 저는 세상을 울려보고 싶었습니다." "그런가?" "자신도 있었습니다." "자신'도' 있었다라……." 오진자는 금동보가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 이미 짐작한 바 있었다. "백호나한 때문인가?" "예, 그날 저는 하늘 밖 하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가 그녀의 남편 이라니……." "그렇지,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지." "……." 금동보는 오진자의 말에 울컥하는 기분을 느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 다. "그래서 천상천화가 백록파를 떠났는데 따라나서지 않은 겐가?" "그러면 어찌 하겠습니다. 어차피 오르지 못할 하늘인 것을……." "천상천화야 그렇지 하지만 다른 쪽은 가능하지 않겠는가?" "예? 그게 무슨…?" "내 천하에 내세울 것은 없지만 눈치하나만은 어디에 내놓아도 떨어지지 않 는다, 자부하네. 천상천화는 아름다운 만큼 감당할 수 있는 자자 드물 것이 네 그런 의미에서 백호나한이나 되니까 그 여인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겠지 . 그런데 내가 보기에 백호나한도 여러 여인 울릴 상이야!" "……."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내 얘기 안 끝났으니까. 그러니까 그 뭐냐 여인천궁 의 외당주인가 하는 주 머시기 하는 여인 말일세." "주묘연, 주낭자 말씀이십니까?" "그래, 주낭자. 하였든 그 주낭자가 백호나한을 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더란 이 말이지." "그래서 그게 어쩠단 말씀이신데요?" "자고로 옛말에 꿩대신 닭이란 말이 있고 하니 그 여인의 마음을 차지해 보 게." "예에?" 금동보는 오진자가 노망이 나지 않았나하는 생각에 오진자의 눈동자 유심히 살폈다. 그러나 오진자는 천연덕스럽게 말도 안 되는 주장을 계속했다. "내가 보기에 백호나한은 여러 여자를 거느릴 위인이 못돼. 척 봐선 여인하 고 먼 사내라 천상천화라는 아내를 둔 것이 희한할 정도야! 그러니 주낭자 에게 돌아갈 못을 애당초 없다는 거지." "그러니까, 제가 주낭자를 어떻게, 유혹이라도 하란 말입니까?" "잘 아는군. 자고로 계집이란 것들을 지 좋다고 쫓아다니는 남자를 박대하 지 않으니까 열심히 해봐! 자네도 장가는 가야지!" 금동보는 입이 '떡!' 벌어져 할 말을 잊었다. "내가 보기에 주낭자는 일편단심의 전형 같은 여인이니 그대로 두면 평생홀 로 늙어 갈 것이야. 어쩔 수 없지 않나 자네라도 나서야 하지 않겠나? 그리 고……." 처음엔 어이없어 하던 금동보는 계속되는 오진자의 그럴듯한 감언이설(甘言 利說)에 마음이 흔들리는 듯 하더니 이내 마음이 움직였다. 하지만 소요산 인 오진자가 금동보를 꼬드기는 이유는 딴 곳에 이었다. 백록파의 장문인 오중자의 사제인 소요산인(逍遙山人) 오진자(晤進子)는 그 간 백록파를 떠나 외유하던 중 백록파가 불탔다는 소문에 부랴부랴 본산으 로 돌아왔다. 그러나 백록파가 참화를 견디고 다시 일어설 기운이 엿보이자 다시금 좀이 쑤셔 떠날 생각을 품고 있었지만 고수(高手) 한사람이 아쉬운 장문인은 그를 도무지 풀어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무 시 못 할 세력을 가진 것이 확인된 여인천궁과 교류와 돈독한 관계를 다진 다는 명분으로 백록파를 떠날 생각이었다. 위대한 열지족의 추장 소노리의 딸 메이는 포로를 잡고 있는 조정의 장수와 협상을 위해 천수교를 찾았다. 삼단 같은 흑발과 크고 선명한 눈 속에 흑 요석 같이 검은 눈동자, 남국의 더운 날씨 탓 인지 배꼽을 그대로 들어낸 옷에 탄력 있는 몸매의 추장의 딸 메이는 말에서 내리지 않고 천수교 동안 의 큰 길을 5명의 열지족 전사의 수행을 받으며 지났다. 그런데 천수교의 주민들이 호기심을 숨기지 않으며 거리로 쏟아져 나오자 기이함을 느꼈다. 분명 천수교는 전장이었다. 이미 한번 전화를 겪은 그들이 두려움이 아닌 호기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다. 그리고 두터 운 검은 갑주의 군사들과 남례성 전통의 등갑(藤甲)을 입은 군사들이 한 치 의 흐트러짐도 없이 사방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이곳이 싸움이 일어 날 곳임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어서 오십시오. 저는 백호영의 군무를 맡고 있는 모원이라 합니다. 장군께 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메이는 이제야 나타나 인사하는 젊은 문사를 보며 노골적인 불쾌감을 표시 했다. "흥! 이제야, 나타나시는 군. 관문을 지기는 자는 아무런 제제 없이 길을 따라가라고 하더니만 진토인에겐 주의할 것이 없다는 그 뜻인가?" "예? 아, 죄송합니다. 일단 안으로 드십시오." "흥!" 메이는 젊은 문사의 순진한 모습에 더욱 기분이 나빴다. 아무리 보아도 그 렇게 높은 지위에 있는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메이는 일이 어찌 되었 던 노골적이 푸대접을 받은 이상 이일을 조정의 장수에게 단단히 따져야 갰 다 마음먹었다. 모원은 한 참 바쁜 시간을 보내다 이번에 주군의 시비가 된 초초(草草)에게 열지족 추장의 사자(使者)를 맞이하라는 명을 듣고 허겁지겁 밖으로 나와 보니 사자일행은 자기들끼리 본영(本營) 근처까지 접근해 있었다. 모원은 사흘 전 벌인 잔치에 소요된 자금을 정산하고, 만약 열지족 추장이 주군이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인다는 가정 하에 1만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일 식량을 계산하느라 가장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던 사자 중 가장 조심스럽게 다뤄야할 교전상대의 사자를 소홀히 했으니 입이 열 개라 도 할 말이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원은 그 순간 쀼루퉁한 표정의 여인이 왠지 귀엽게 느껴지며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메이는 왠지 안절부절못하는 젊은 문사의 뒤를 따르며 부아가 치밀었다. 이 런 자를 거느린 조정의 장군이란 자도 별 볼일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이었다. 그러나 대청에 들어선 순간 그러한 기분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 다. "메이 누님!" "포이?" 알 수 없는 청량하고 시원한 기운과 동생 포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청 에는 상석에 자리한 화복청년과 양쪽으로 포진한 평상복 차림의 사내들이 도열해 있었지만 메이에게 뛰어가는 포이를 제지하지 않았다. 죽은 줄로만 안 동생이 무사함을 학인하고 포이을 껴안고 있은 메이에게 조정의 장수가 먼저 인사말을 건넸다. "어서 오시오. 하남천원군 참장 라혼이오." "위대한 열지족 추장의 딸 메이입니다. 장군의 위명은 귀가 따갑게 들었는 데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메이는 은연중 포이를 뒤로 보내고, 다급하게 사자로써의 예를 갖췄다. "그대가 사자로 온 것으로 본장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해석해도 되겠소?" "예, 장군의 제안을 받아들이는바 입니다." "좋아! 초초, 사자께 빙과(氷菓)를 대접해라!" "예, 주인님!" 라혼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말에 사자에게 의자와 탁자를 내어주었 다. 그리고 얼음을 갈아 그 위에 달콤한 과즙을 뿌린 빙과(氷菓)를 대접했 다. 사실 협상에는 별관심이 없는 백호십일걸과 위병장들이 이곳에 모여 있 는 이유는 이곳이 가장 시원한 곳이고, 바로 빙과를 얻어먹기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라혼이 마법의 만든 얼음으로 만든 빙과는 연회 때 장수들에게만 후식으로 제공되었는데 그 맛에 반한 라혼이 종종 만들어 먹 고는 했다. 메이는 갑자기 주위가 어수선해지며 생전 처음 보는 투명한 보석가루 같은 것을 앞에 놓이자 어리둥절해졌다. 그래서 그것을 따지려는 순간 동생 포이 가 만류하며 대롱을 보석가루 같은 그것에 꼽고는 말했다. "이게……." "메이누님, 이거 맛있어. 자 이렇게 해서 빨아 마셔봐! 빨리 녹아버리기 전 에……." "무슨…?" 진토인들은 수저나 젓가락 같은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식사를 했다 . 그러나 빙과는 손으로 먹기에 문제가 많았다. 그러나 진토인들이 음식물 을 먹을 때 거의 유일하게 사용하는 도구가 칼과 바로 대롱이었다. 정글을 여행할 때 진토인들은 빨대, 바로 대롱을 이용해서 먹을 수 있는 나무수액 이나 나뭇등걸에 고여 있는 물을 빨아 마시곤 했다. 메이는 동생의 권유와 양쪽에 있는 조정의 관리들이 너무나 맛있게 빨아먹는 모습을 보고 대롱을 살짝 빨아보았다. "어머!?" 메이는 깊고, 깊은 동굴 속에서 흐르는 샘물보다 차갑고 달콤하기 그지없는 그 맛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순식간에 점점 사그라지는(?) 보석가루를 아 쉬운 눈빛으로 보며 그 차가운 느낌을 즐겼다. 그리고 마음을 다잡으며 협 상을 시작했다. "이런 귀한 것을 대접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럼 언제 어떤 방식으로 포 로들을 건네줄 지부터 말씀해 주시지요. 그리고 그들의 모습을 직접보고 싶 습니다." "그것은 그대를 안내한 모군무와 따로 상의하시오. 그보다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어떠한 적대행위라도 발견되면 포로들을 참수할 것임을 다시 한 번 밝혀두는 바이오. 그리고 이 일에 시한을 두었으면 하오. 그것도 모군무와 상의하도록 하시오." "아니…?" "모군무가 본인의 모든 권한을 대리할 것이오. 그럼!" 라혼은 모든 일을 모원에게 밀어놓고는 황당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는 진토 인 미녀를 대청에 두고 자리를 떠났다. 어차피 이일은 시간을 끌려는 것이 기 때문에 일의 성사여부는 별상관이 없었다. 지금 라혼의 머릿속엔 온통 목우유마(木牛流馬)뿐이었다. 목우유마는 목우(木牛)와 유마(流馬)를 합친 말로 적은 힘을 들여 많은 물건을 나르는 도구였다. 그러나 그것은 시드그 람 대륙에서 라혼이 만들어 사용한 바 있는 고르곤(Gorgon)과 다름없었다. 다만 라혼이 시드그람 대륙에서 사용한 고르곤은 골렘의 일종이었지만 목우 유마는 선술에 기반을 둔 보패(寶貝)의 일종이었다. 그리고 사용방법도 고 르곤은 사람의 명령을 알아듣는 지능을 가진 것이었지만 목우유마는 완전한 기계에 가까워 일일이 사람이 운용해주어야 했다. 그러나 라혼은 목우유마 를 보고 궁극의 전투 병기인 마장기(魔壯機) 탈로스(Talos)를 제작할 수 있 는 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동안 탈로스를 만들어 내지 않은 이유는 필요가 없어서였지만 일단 만들려고 마음먹으니 마땅한 재료가 없었다. 탈 로스 1기는 어마어마한 양의 마법재료가 소요되었다. 그러나 라혼에게는 탈 로스를 만들 제원이 없었다. 몇 가지는 귀림(鬼林)의 드워프들로부터 얻어 낼 수 있다지만 중요한 몇 가지 핵심이 되는 재료는 끝끝내 찾아낼 수 없었 다. 그러던 중 라혼이 주목한 것이 실제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목우 유마였다. 메이는 일방적인 축객령에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협상의 당사자로 나선 자가 아까 그 어리바리한 젊은 애송이 문사라니 기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어, 그러니까, 뭐냐 하며……." "휴우~! 말씀하시죠." 메이는 상대가 말을 버벅이며 꺼내기 힘들어하자 노골적인 한숨을 쉬며 말 을 높였다. 하지만 모원은 죽을 맛이었다. 무정한 주군이 사전에 언질이라 도 주었으면 이렇게 당황할 일은 아닌데 라는 생각을 하는 모원은 붉어진 얼굴로 뭔가 말을 해야 했다. 일단 주군이 자신의 역량을 믿고 맡긴 일이었 기 때문이었다. "그럼, 사자님을 뭐라 부르면 좋을까요?" "……." "……." "공주님이라고 부르세요. 모군무님." "아예, 메이공주님! 그럼 협상을……." 추장의 딸인 메이에게 특별한 호칭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추장은 왕이 고, 메이는 그 추장의 딸이므로 공주의 신분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맞았다. 그러나 여기에 심각한 오류가 있었으니 조정의 입장에서 나라는 오직 하나 뿐이었다. 후선과 열지족은 그저 반란세력일 뿐인 것이다. 하지만 상대의 물음에 장난삼아 대답한 메이나 아직 정신 차리지 못한 모원을 그러한 것을 무시했다. 그러나 금영월 대장군이 이끄는 하남천원군 본군이 도착할 때까 지 약 보름에서 한 달간의 시간을 끌기위한 책략이란 것을 잘 아는 모원은 칼자루를 쥐고 협상을 이끌었다. 가급적 일이 처리되는 방향으로 하라는 언 질을 받은 모원은 금영월 대장군이 도착하기 전까지 일을 매듭지으려 했고, 그런 모원의 입장에 메이는 부아가 치밀기도 하고, 모원에게서 의외의 강 단 있는 태도에 내심 당황하기도 했다. 어차피 서로 원하는 바를 이루려는 뜻이 있으니 협상은 어느새 마무리되었다. 할거도중(割據途中) 라혼이 베푼 잔치 때문인지 천수교의 주민들과 군사들의 사이가 좋아졌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였다. 너무 사이가 좋아져 버렸다는 것이다. 천수교 주 민들이 비록 한가한 일상을 보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곳은 전장이었다. 그 래서 마음속 한구석엔 언제나 불안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천수교로 몰 려오는 수만 전사들이 라혼의 기지로 행군을 멈추긴 했지만 얼마 있지 않아 그들은 진군을 시작할 것이고 천수교는 피와 살이 난무하는 흉험하기 그지 없는 싸움터가 될 것이란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자신들에게 후하게 대해준 라혼장군이 곧 봉수성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듣고 더욱 불안 해했다. 지금은 서로편한 군사들이었지만 라혼장군이 와서 직접 챙기기 전 엔 그 군사들도 무섭게 위압하며 위협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라혼 장군이 없어지고 반란 진토인들이 점거한 호도를 치기 위해 온다는 조정의 대군이 온다하자 주민들은 피난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천수교에 사는 주민 은 대부분 봉수성과 호도로 왕래하는 사람들이 뿌리는 돈으로 유지되는 마 을이었다. 비록 밀림의 짐승을 잡는 사냥꾼과 농사를 짓는 주민들도 있었지 만 반란 진토인들이 호도를 점거한 이후 사실상 천수교는 필요 없는 마을이 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라혼은 그런 주민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바 로 자신을 따라 봉수성으로 가자는 제안이었다. "장군께서 저흴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장군을 믿고 따 라 나서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봉수성에 도착하기 전까지 마을의 모든 물자는 제가 맡아 관리하겠습니다." "장군이 좋을 대로 하십시오." 천수교주민들에게 촌장격인 노인에게 양해를 구한 라혼은 금영월 대장군에 게 줄 물자를 한곳에 모아 정리해 두었다. 그리고 열지족과 약속한 그날이 되어 라혼은 백호영만으로 포로들을 이끌고 약속장소로 출발했다. 물론 협 상의 당사자인 모원도 함께였다. "모정령, 포로들에게 이것을 먹이게." "이게 무엇입니까?" 모석은 라혼이 내민 호로병을 받아들고 마개를 땄다. 그러자 알싸한 향이 코를 자극했다. "마비산이네, 그걸 먹으면 만 하루정도는 움직일 수 없게 되지."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모석은 라혼이 무엇을 하려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멀쩡한 상태로 이들을 풀어주면 그 순간부터 백호영이 위태로워 질것이 뻔했기에 나름대로 자구책 을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다. 라혼은 약속한 장소를 앞에 두고 포로들에게 마비산(痲痺散)을 탄 물을 마시게 했다. 지금 당장을 아무런 증상이 없겠지 만 시간이 흐르면 몸이 말을 듣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게 조치를 취한 라 혼은 다시 길을 떠나 약 1시진(2시간)후 약속한 장소에 도착했다. 그곳엔 이미 족쇄를 차고, 손발이 묶인 노예들과 그들을 데려온 약 천 여명의 열지 족 전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라혼은 주위에 매복이 있는지 살펴보았지만 그런 흔적은 없었다. "어서 오세요. 조금 늦으셨군요? 약속한 노예들입니다." "……." 라혼은 인사를 건네는 메이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받고, 두려움에 떠는 노예들을 둘러보았다. 얼굴에 노예의 인이 선명한 그들은 호도의 성민 이 아니라 진짜노예들이었다. 라혼은 고개를 돌려 모원을 바라보고며 전음 입밀(傳音入密) 수법으로 물었다. -모원, 이것이 어찌된 일이냐? 모원은 마치 뒤통수에서 들려오는 듯한 주군의 음성에 화들자 놀라며 가까 이 다가와 귓속말로 보고 했다. "노예가 어때야한다는 것은 협상은 일부러 하지 않았습니다." 라혼은 모원의 보고를 듣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열지족 추장의 딸 메이 를 보고 당했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곧 노예들을 되찾을 수 있다는 생각 에 진짜노예를 내놓은 것이리라. 그러나 약속은 약속 라혼은 그냥 그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좋소. 별다른 문제가 없는 듯하니 저들을 데려가겠소." "……." " 라혼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그대로 노예들을 인수받고, 백호영 들로 하여금 그들의 손과 발의 족쇄를 풀어주게 했다. 그러자 당황한 것은 바로 메이였다. 포로로 잡힌 전사들을 빼내면 곧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여 천수교를 장악하고 얼마간 희생이 있겠지만 모두 회수할 생각이었다. 그러 나 지금 노예들을 풀어주는 자는 다름 아닌 새로운 주인이었다. "아! 그리고 저들은 모두 독에 중독되었으니 누군가 천수교까지 같이 가줘 야 갰소." "그게 무슨…?" 메이는 장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힘이 풀린 듯 쓰러지는 전사들을 보고 당황했다. "이게 무슨 짓이죠?" "유비무환이란 것이오. 우리가 안전하게 천수교까지 가기 전에 대군이 밀어 닥치면 곤란하지 않겠소?" "그런…!" 라혼은 분노에 파르르 떠는 그녀를 두고 노예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고 는 대열을 정비하여 출발시키려 했다. 그러자 노예들을 여기까지 끌고 온 열지족 전사들이 살기가득한 눈으로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라혼은 오히려 입가에 미소까지 지어보이며 입을 떼었다. "그들의 목숨은 이제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 1만 노예를 주고, 죽은 5천 전 사를 얻을 셈인가?" 열지족 전사들은 라혼의 말에 움찔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전의를 거두었다. 대화의 주도권을 얻은 라혼은 분한표정이 역력한 메이에게 말했다. "메이, 당신이 우릴 따라와라! 천수교에 도착하면 해약(解藥)을 주겠다." "거부한다면?" "사실 우리에겐 노예 따위는 필요 없다. 이미 목적을 이루었으니 손해날것 없지." 메이는 잔악하기 그지없는 조정군 장수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 노예들이야 버려두고 도망치면 말을 탄 그들을 추적할 도리가 없었다. 결 국 칼자루는 저쪽이 쥐고 있는 셈이라 메이는 결국 열지족 전사 둘과 함께 천수교까지 가기로 했다. 라혼은 뒤를 따라나서는 메이를 보고 모원에게 전 음입밀을 날렸다. -네가 저 여인을 만난 이후로 침식을 잊었다는 말을 들었다. 천수교까지 한 번 잘해 보거라! "으헉~!" 모원을 귀가에 들려오는 주군의 말에 말위에서 균형을 잃고 떨어질 뻔했다. 그리고 그런 모원을 메이는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라혼이 1만 명의 노예들과 함께 천수교에 돌아오자 천수교엔 이미 금영월 대장군이 이끄는 하남천원군 본군의 선발대가 도착해 있었다. "하남천원군 현무대장 정령(正領) 작도인(鵲途認)이 라혼참장 뵙습니다." "오느라 수고 했소. 금대장군께선……." "대장군은 내일쯤 도착하실 것이다. 한데 전투에서 상처를 입으셨다 했는데 ……." "그런 일이 있었소. 인수인계 문제는 모정령과 이야기하시오. 그럼!" 라혼은 작도인과의 대화를 서둘러 마무리하고 거처로 돌아왔다. 겉과 속이 다른 작도인과의 대화는 무척 피곤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남겨진 작도인은 그런 라혼의 태도에 울화가 치밀었다. 금영월 대장군은 10여 년간 곁에서 있던 자신보다 새파란 애송이인 그를 중시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거늘 그는 자신을 확실한 아래로 두고 자신의 수하와 이야기하라며 자릴 떠나버린 것이다. 작도인이 생각하기에 라혼 또한 금영월 대장군 밑에 있는 자신과 같은 반열의 장수였다. 비록 직급이 참장(參將)으로 정령(正領)보 다 위에 있었지만 휘하의 지휘하는 군사의 병력수로 생각해볼 때 그것은 충 분히 상쇄하고도 남음이었다. 그런 작도인의 생각은 같은 정령(正領)의 직 급을 가진 모석에게 그대로 투영되었다. "모정령이라 하였소? 그럼 보고해 보시오." "……." 모석은 작도인의 '보고'라는 말에 발끈했지만 하남대원수 금영월 대장군과 주군 라혼과의 미묘한 관계를 알기에 별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분이 상한 것을 굳이 숨기진 않았다. "크흠! 그럼, 지금 상황을 '설명해'주리다. 호도를 점령한 반란 진토인들은 열지족이란 호전적인 부족으로 열지족 추장 소노리가 여러 진토인 부족들 을 규합해 세를 떨치고 있소. 그리고 약 1만 대군으로 현재 이곳 천수교으 로 접근 중이오." 한동안 현 상황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하는 모석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었 다. 작도인은 라혼참장이 단 사흘 만에 난공불락이라는 삼관을 공략한 것을 보고 반란 진토인들에 대한 생각을 달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석의 주의하 라는 설명이 자기자랑으로 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곤 대충 설명이 끝나 자 꼬투리를 잡기 위해 한마디 툭 질문을 던졌다. "그렇군, 잘 알았소. 그런데 말이오. 내 듣기로 수천의 포로를 생포했다 들 었는데 그들의 어찌되었소?" "……1" 모석은 상대가 가장 대답하기 곤란한 내용을 물어오자 졸지에 꿀 먹은 벙어 리 신세가 되었다. 5천이나 되는 포로를 몸값을 받고 다시 넘겼으니 뭐라 답해주기 참으로 곤란했다. 작도인은 대충 던진 질문에 상대가 곤란한 표정 을 지으며 말을 못하자 뭔가 있다는 생각에 더욱 집요하게 따지고 들었다. "포로를 잡았으면 응당, 하남대원수이신 금대장군에게 보고를 하고 처우를 물어야하는 것이 도리 아니오?" "포로들은 풀어주었습니다!" 말을 못하는 모석을 대신하여 대답한 것은 모원이었다. 모원은 지금 남아있 는 군수품 목록을 건네는 것으로 자신의 일을 마치고 주군에게 봉수성으로 가게 될 천수교 주민과 노예들이 먹을 식량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집무실에 잠시 들렸다. 그러나 주군의 집무실엔 주군은 없고 현무대장 작도인이 포 로 문제를 캐물으며 모석을 다그치는 모습을 보고 대뜸 끼어든 것이었다. "풀어줬다? 물경 수천에 달하는 포로를 풀어주었다고 하는 것인가? 그리고 넌 도대체 누구냐?" "백호대의 군무를 맡고 있는 모원이라 합니다. 저 또한 원주조정의 집사(執 事) 벼슬이 있으니 말씀을 삼가 하십시오." "뭐라! 그래서 그것이 잘했다는 것인가? 포로들을 풀어주면 그 칼끝이 다시 돌아오는 것인데 한둘도 아니고 수천을……." "그것은 저희 참장군께서 결정한 일입니다." "이, 이……." 작도인은 그깟 진토인 포로들이야 벌써 죽여 처리했거니 생각하여 사사로이 포로를 다루었다는 일침을 가하기 위해 슬쩍 던진 물음의 대답이 수천이나 된다던 포로들을 풀어주었다는 것도 어이없는데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의 당돌하기 그지없는 태도에 부아가 치밀었다. "이일은 절대 묵과하지 않을 것이다. 나가보라!" "하하하, 이곳의 책임자는 아직 저희 참장군입니다. 그리고 이곳은 저희 참 장군께서 집무실로 사용하시던 방입니다." "무어라? 이 건방진……." -탁, 타닥! 작도인은 너무도 당돌한 태도에 손에 들고 있던 지휘봉을 휘둘렀지만 모원 이 맞도록 가만히 있을 모석이 아니었다. 모석은 시원시원한 모원의 말에 울그락 불그락하는 작도인의 모습에 내심 고소해하다. 그가 폭력을 행사하 려 하자 휘두른 지휘봉을 검집으로 쳐내버렸다. "이게 무슨 짓인가? 직급 상 아래이긴 하나 무관이 문관에게 무력을 사용하 려하다니?" "감히……." "그대가 1군을 맡고 있는 장수의 위치에 있어, 나름대로 존중하려 했으나 이거야 안하무인이 아닌가? 그러고도 그대가 자격이 있다 보는가? 부하들보 기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 작도인은 무관이었다. 비록 울화가 치밀기는 했지만 자신이 휘두른 지휘봉 을 쳐낸 검집에 실린 경력(勁力)이 상상을 초월하다는 것을 볼 때 그는 무 시 못 할 고수임이 분명했다. 작도인은 손이 저리는 것을 느끼며 말없이 방 을 나섰다. 작도인의 기억의 저편에서 라혼참장이 조정이 직접 임명한 봉수 성의 위병대장도 주저 없이 참수했다는 사실이 떠오르며 아까 천둥벌거숭이 같은 문관 놈이 아직까지 이곳의 책임자는 라혼참장이란 말이 위협으로 다 가왔기 때문이었다. 열지족 추장 소노리의 딸, 메이는 지난번 왔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천수교 의 풍경에 절로 안색이 굳어졌다. 마을에 지나는 군사들의 수가 더욱 많아 졌을 뿐만 아니라 전에는 느껴지지 않던 묘한 눈길이 사방에서 느껴졌기 때 문이었다. 그러니 메이는 물론 메이를 호위하는 열지족 전사도 신경이 날카 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메이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애송이 문사 가 인내한 방안에 갇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산으로 변해가고 이었다. 그때 방문 밖에서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들여왔다. "말을 탈줄 아나?" "모릅니다." "그런가? 그럼 수레를 준비해야 갰군. 물하고, 단과일이나 가져와라!" "빙과를 만드시려고요?" "그래!" "알겠습니다. 곧 가져올게요." -삐꺽, 삐꺽, 삐꺽, 삐꺽………………. 메이는 물과 단과일을 가져오기 위해 시녀가 점점다가와 방문 앞을 지날 때 쯤 벌컥 문을 열었다. "이봐!" "어머나!" 단아한 옷차림에 귀티가 흐르는 여인이 살짝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곧 이마 를 찡그리며 메이를 노려보며 차갑게 물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무녀(巫女)의 재능을 가진 메이는 자신도 모르게 시비(侍婢)의 과거를 들여 다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녀의 눈 속에 흐르는 경멸과 적의에 몸서 리치며 한걸음 물러서며 비명을 내질렀다. -끼야~! -흐응~. 그리곤 그 자리에서 혼절하는 메이를 곁에 있던 열지족 전사들이 받아들고 시비 초초를 경계했다. "초초, 무슨 일이지?" "별거 아닙니다. 진토인 계집이 스스로 비명을 지르며 기절했을 뿐입니다." 갑자기 들려오는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성에 [블링크Blink]해온 라혼은 기절 한 메이의 몸에서 뻗어 나오는 기운에 주목했다. '정제되지 않은 혼돈스런 마나가 그녀를 중심으로 폭주한다. 이건 뭐지?' 정제되지 않은 마나는 자연 그대로의 기운이었다. 무인들이 사용하는 내공 과 마법사가 사용하는 마나는 나름대로 정제과정을 거친 마나였다. 그러니 정제되니 않은 마나가 자연스럽지 않게 뭉쳐 폭주하는 것은 분명 이상한 일 이었다. 호기심에 동한 라혼은 그녀에게 손을 뻗었지만 그녀를 호위하는 진 토인 전사가 그것을 막아섰다. "상관하시 마시오. 메이님은 곧 괜찮아 지실 거요." "그렇다는 말이지?" -팍! 탁! 라혼은 건곤점혈대법(乾坤點穴大法)이란 상승 점혈수법으로 두 열지족 전사 의 마혈(痲穴)을 점혈하고 물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이 여인은 볼모다. 그러니 왜 이러는지 말해라!" "이런 비겁한……." "우리가 그것을 말해줄 것 같은가?" "그럼 이 여인을 죽이겠다." "……." 라혼은 몸이 뻣뻣하게 굳은 이를 가는 두 열지족 전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메이의 머리에 손을 얹고 흡성대법(吸性大法)을 운용하여 뭉쳐진 마 나를 흡인(吸引)했다. 그러한 라혼의 행동에 당황한 한 전사가 씹어뱉듯 한 마디를 내뱉었다. "신병이다!" "뭐?" "메이님의 어머니 되시는 분은 도라족의 무녀였다. 무녀로써 살아야하는 메 이님이 그것을 거부해서 가끔 이렇게 혼절하신다." 신병(神病)이란, 무녀, 또는 무당이 겪는 통과의례로 선무당상태에서 대무( 大巫)로 승급할 때 겪는 증상을 말했다. 그리고 또 다른 의미로 무당으로 살아야할 자가 운명을 거부할 경우 무당으로써의 권능이 발현될 때마다 겪 는 고통을 뜻하기도 했다. 전자의 경우 대무(大巫)로부터 무당이 되는 신( 神)을 받는 의식을 치루면 그뿐이지만 후자의 경우 그것을 일종의 저주에 가까웠다. 라혼은 그들의 말에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의식을 개방했다. 그러 자 유체(流體)가 빨려드는 느낌과 함께 메이의 꿈속으로 들어갔다. 무녀몽중(巫女夢中) 라혼은 익숙하지만 그러나 어색한 회색공간을 홀로 걸었다. 말 그대로 꿈속 을 거니는 라혼은 무섭고, 불안하고, 메스꺼운 공간의 기운에 영향을 받았 다. 얼마나 그렇게 걸었을까? 시간이 흐름을 알 수 없는 무의식 공간에서 어느 순간 라혼은 마음속에서 울리는 하나의 의지를 느꼈다. -누구냐? 그 어떤 존재의 물음은 소리로 들린 것이 아니라 그냥 느껴졌다. 라혼은 그 물음에 오히려 되물었다. "넌 누구냐?" -……. 잠시 고요한 침묵이 흐르고 다시 그의 의지가 전해져 왔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흐음, 이름 없는 존재로군." -그앙~! 라혼이 의사를 전달한 '존재'를 '이름 없는 존재'라 정의(定意)해 버리자 그 존재는 분노와 괴로움, 그리고 강렬한 적의라 생각되는 감정을 내뿜었다 . 그리고 '존재'는 형상을 띄기 시작했는데 어둡고 음습한 그리고 기괴한 검은 연기로 라혼의 눈앞에 나타났다. "나는 신(神)이다." "그래, 내가 보기에도 넌 신이다. 그러나 너는 이름을 가지지 못한 신이 아 닌가?" "……." 라혼의 비꼼에 그 존재는 무섭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꿈틀거리는 검은 연 기는 종국엔 하나의 작은 알처럼 변했고, 라혼은 손을 뻗어 그 알을 들었다 . 그러자 알속에 새겨진 기록이 라혼에게 전해졌다. 자신들을 도라족이라 불린 사람들이 하늘에 제사지내는 모습부터 최초로 신 기(神技)를 발휘해 그들을 도운기억 그리고 최초의 무당과 인연을 맺은 기 억도 보였다. 그러나 도라족은 존재에 대한 정의는 하지 않고 무녀의 예언 능력이나 신통한 능력만을 빌었다. 그리고 존재는 도라족의 위험을 무녀에 게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러나 존재는 무녀의 피를 따라 새로운 몸으로 옮 겨왔으나 새로운 몸은 몸주인 '존재'를 거부했다. 그리고 '존재'는 그 존재 를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을 괴롭혔다. 바로 자신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흥미롭군. 이봐!" -우아아아아악~! 라혼이 알에 신성력(神聖力)을 주입하자 알로 변한 존재는 고통에 가득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서서히 라혼의 신성력에 잠식되어 갔다. -싫어, 싫어, 안돼~.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다. 우아아아악~! 라혼의 신성력에 잠식되어 알을 점점투명하게 변하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 그리고 알이 있던 자리에 하얀 빛 무리가 영롱하게 빛을 뿜어냈다. 그리 고 그 빛은 하얗게 공간을 채우더니 회색공간을 순백의 공간으로 바꾸었다. -확~! "허억!" "주인님? 괜찮으세요?" 라혼은 눈을 뜨고 현 상태를 인지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길고긴 꿈에서 깨 어나는 듯한 기분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점혈되어 굳어있는 2명의 열지 족이 보였고, 라혼은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초초의 무릎을 베고 누 워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반각(1각 15분)동안이나 기절하셨어요." "그래?" 라혼은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메이를 일별하고 다시 그녀에게 다가가 미간(眉間)에 손을 댔다. 그러나 메이의 주변에 뭉쳐있는 마나들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것은 내가 꾼 꿈인가?" "예?" "아니다. 초초, 가서 구참위와 모원을 불러와라!" "예, 주인님." 라혼은 메이로 인해 자신이 처한 바를 깨달았다. 메이라는 여인의 몸에 신( 神)인지 귀(鬼)인지 모를 존재가 자리 잡고 있는 건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라혼은 그 미약하기 그지없는 힘을 신성력으로 정화를 시도 했다. 그러나 그 존재는 스스로 소멸했지만 또 다시 생성되었다. 라혼은 그 존재가 소멸 하는 순간 그 여파에 혼백이 잠시 멍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다는 그간 생각했던 방식으론 신계와 마계를 멸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했다. 아니 원천적으로 싸움의 방식이 틀렸던 것이다. 라혼은 아직 메이의 중심으로 뭉쳐있는 마나를 보고 문득 분노가 치밀어 올 랐다. 사람은 자기가 충분히 할 수 있다 믿은 것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않았 을 때 화을 내는 법이다. "너 정도를 당하지 못한다면 어찌 뜻을 이룰까? 흡성대법(吸性大法) 흡인결 (吸引訣)!" -구우우우우우웅~! 라혼은 이공간(異空間) 에텔 스페이스로 주변 공간을 장악하고 뭉쳐있는 기 운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메이의 몸에 붙어(?)있는 마나는 미약하 기 그지없는 저항을 했지만 곧 흡인결로 인해 라혼에게 빨려 들어갔다. 에 텔 스페이스로 빨려 들어간 기(氣)는 미미한 발악을 하더니 곧 소멸되어 버 렸다. "이건?" 라혼은 너무도 어이없게 해결(?)된 메이의 몸을 잡고 있던 '존재'의 소멸에 신과 싸우는 방법을 발견했다. 방법을 잃은 순간 새로운 것을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에텔 스페이스였다. 에텔 스페이스는 신(神)을 봉인(封印)하는 공간이기도 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에텔 스페이스의 모든 힘은 오직 라혼의 의지로만 움직이고 변화한다. 그렇 다는 것은 마력(魔力)이나, 신성력(神聖力)으로 유지되는 정신체(精神體)인 마족과 신들을 상대하는데 매우 효과적이란 뜻이 되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라혼은 자신의 가진 힘에 대한 희열에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크크크크, 이것 이었어 이것이 내 힘이었군. 에텔 스페이스는 진짜 에텔 스페이스였어." 에테르(Ether)는 우주에 가득차있는 정의되지 않은 기본적인 힘이자 물질이 다. 우주가 혼돈 속에 있을 때 그 혼돈을 이루던 물질이자 에너지다. 정기( 精氣) 에테르는 모든 물질과 힘과 현상을 이루는 바탕이었으니 에테르는 바 로 혼돈(混沌)이고, 창조(創造) 그자체일지도 몰랐다. 마법 중에 이공간(異 空間)은 [디프 포켓츠Deep pockets:깊은 주머니]이란 비교적 2서클의 초급 주문이 있었다. 라혼은 에텔 스페이스가 그런 주문을 기본으로 만들어낸 무 한에 가까운 새로운 공간차원이 바로 에텔 스페이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공간을 이용해서 마나의 운용의 폭이 넓어졌을 뿐이라고 생각했 다. 그러나 그런 것이 그 공간의 에테르를 다룬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참으 로 엄청난 것이었다. 알고 사용하는 것과 모르고 사용하는 것은 아주 중요 한 차이였다. 라혼은 에텔 스페이스에 존재하는 거대한 두 '존재' 세계수( 世界樹) 이그드라실(Yggdrasil)와 영룡(永龍) 이터너디 드래곤(Eternity dr agon)이 어떻게 에텔 스페이스에서 머물 수 있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 들은 스스로 존재하는 신이며 각 차원의 창조주(創造主)임으로 라혼의 의지 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에텔 스페이스에서 스스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 다. 창조주(創造主)란 스스로 의지만을 가질 뿐 생각하고 말하는 존재가 아니었 다. 그는 스스로 존재하며 권능(權能)을 행사하는 존재였다. 이것은 라혼이 스승 지슈인드에게 배운 용언마법(龍言魔法)의 내용이었다. 용(龍)들은 이 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계의 주인 다름 아닌 드래 곤들이었다. 영룡이 영룡인 이유는 라혼이 그를 그렇게 정의했기 때문이고, 세계수가 세계나무인 것도 라혼이 그렇게 상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라 혼에게 사명을 준 창조주 브라마(Brahma)도 사람들이 정의하고, 그러한 이 야기를 들은 라혼이 가지고 있던 인식에서 왔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의 사명이란 창조주가 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깨달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신(神)이 소명(召命)과 다름없었 다. 자연이란 정체(停滯)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항상 스스로 그러하게 변화 하는 것이다. 만고불변(萬古不變)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으로 현상을 유지하려는 어떤 그것과 라혼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세계를 신(神)으로 부터 홀로 서게 하는 임무를 받은 것이었다. "창조는 창조일 뿐, 그것은 신인가? 신이 아닌가?" 라혼은 그렇게 초초가 모원과 구만혁을 데려올 때까지 장고와 장고를 거듭 했다. '그' 도(道)를 도(道)라 말하면, 이미 '그 도(道)'가 아닌 것이다. 선도(仙道)를 배울 때 처음 배우는 바로 그것이 라혼이 결론내린 바로 그것 이었다. "주군, 찾으셨습니까?" 라혼이 생각을 정리할 무렵 방으로 들어선 구만혁이 물어왔다. 라혼은 점혈 된 두 열지족를 지풍(指風)으로 해혈하고 그들을 포박할 것을 명했다. "구만혁 저들을 포박해라!" "존명!" 라혼의 명에 따라 구만혁은 항상 지니고 다니는 포승줄로 2명의 열지족 전 사를 묶기 시작했다. 그때 때마침 깨어난 메이는 자신을 호위한 전사들을 묶는 모습을 보고 누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큰소리로 따지려 했다. "이게 무슨 짓……." "……." 그러나 고개를 돌린 라혼의 모습을 보자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전신을 부들 부들 떨기 시작했다. 라혼은 애처롭게 떠는 그녀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너는 지금부터 본장의 볼모다. 그리고 저들은 내가 책임지고 풀어주겠다. 모원 네가 책임지고 볼모를 감시해라!" "예." "……." 메이가 라혼을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그녀에게 머물던 존재가 가진 라혼에 대한 두려움에 반응한 것이었다. 메이가 신병을 앓은 이유는 어머니로부터 무녀(巫女)의 재능을 이어받았기 때문이었다. 메이가 신병을 앓게 한 그 존 재는 다름 아닌 메이의 선조들이 가지고 있건 예언하는 능력을 도라족이 숭 배했기 때문이었다. 신(神)이란 사람들이 만들고, 거기에 신성(神聖)을 부 여하고 스스로 복종하는 것이다. 백호천하(白虎天下) 천수교에 하남천원군 대원수 금영월 대장군이 이끄는 본군이 도착하자 라 혼은 금영월에게 반란 진토인들에 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직접 설명하고, 백호영과 함께 천수교를 떠났다. 1만여 진토인 노예들과 천수교의 주민들 합하여 대략 2만명의 무리를 이끌게 된 라혼은 오수관과 족정관에 미리 사 람을 보내두어 여러 가지를 준비하게 했다. 그리고 근 이레 만에 봉수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모정령, 저들이 머물 적당한 곳을 물색해라." "옛!" 봉수부에 도착한 라혼은 모석에게 제반 사항을 맡고 시비인 초초와 함께 봉 수성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여독을 풀기위해 원래 위병대장 홍대보의 거처 였다가 지금은 라혼의 관저로 사용하는 관저로 갔다. 그곳에선 라혼을 기다 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고학이었다. "주군, 돌아오셨습니까?" "고학, 수고 했네 별일은 없었겠지?" "있었습니다." "……?" 라혼은 고학이 그렇게 말하며 뒤에 시립하고 있는 초초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초초가 아니었기에 그녀는 차를 내온다는 말 을 하며 자리를 피했다. "차를 가져오겠습니다." 초초의 말에 라혼은 고개를 끄덕여 주고 고학에게 시선을 주었다. 고학은 주군의 뒤를 따르던 고아하기 그지없는 기품의 여인의 정체가 궁금했다. "저 낭자는 누구입니까?" "남례절도사 영양공의 영애라네, 그리고 지금은 내 시비노릇을 하고 있지." "예?" 고학은 너무도 엄청난 말을 하는 주군에게 또, 한번 놀라고 말았다. 고학이 주군인 라혼을 마중하지 않고 이렇게 라혼에게 독대를 청한 것은 다름 아 닌 백수회 때문이었다. 고학이 알고 있는 백수회는 십이진가(十二眞家)가 주축으로 이루어진 현 조정에 반하는 세력이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백수 회의 이름으로 라혼을 만나려하는 묘령의 여인에 정체가 다름 아닌 후선의 실세이며 현재 앙신성에서 후선의 대군을 이끌고 천원대원수(天元大元帥) 마동치(馬同治)가 이끄는 평안천원군(平安天元軍)과 대치하고 있는 낙왕(樂 王) 강무산(姜武山)의 양녀신분인 해홍군주(海紅君主)였다는 것이다. 거기 에 봉수태수가 언질한 바에 따르면 원주 중경의 호황의 비밀세력이 라혼을 예의주시한다고 했다. 그런데 사실상 이 남례성을 책임지며 독립적인 지위 를 가지고 있었던 남례절도사 영양공의 딸이라니……. "주군, 영양공이 어떤 인물인줄 아십니까?" "용황으로부터 용씨 성을 하사받은 인물 아닌가?" "그렇습니다. 영양공 용사운은 용황께서 직접거두고 키우신 분입니다. 그리 고 남례성은 사실상 영양공의 봉지(封地)와 다름없습니다."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긴데?" "이것은 그리 잘 알려진 이야기는 아닌데 영양공 용사운은 용황의 피를 이 은 분이시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수인가와는 다르게 용가는 사 람과 사이에선 용이 태어나지 않는답니다. 다만 재능이 뛰어난 기재(奇才) 가 태어날 뿐이랍니다." 고학의 말은 라혼도 잘 알고 있었다. 드래곤들 중에는 가끔 인간의 모습으 로 유희하다 자신의 능력 일부를 '여기서 놀다 감'이란 낙서처럼 인간 후손 의 피에 남겨놓는 경우가 있었다. 그것은 그 드래곤이 살아 있는 동안 각 대(代)의 한 명의 자손에게 이어지게 했다. 그런 인간을 드래곤들은 통틀어 '드래곤의 자손'이라는 표현을 하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드래곤의 마음에 달려있기에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드래곤과 타 종족사이에서 아이 가 드래곤이 아닌 이유는 드래곤이 그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드래곤과 인간의 혼혈이라고 알려진 '드래곤뉴트(Dragonewt)'라는 종족이 존재했는데 그들은 드래곤과 인간의 중간적 존재여서 보통 사람보다 키가 크며 지능도 매우 높기 때문에 마법을 사용에 능통했다. 그러나 어떠한 이 유에서인지 드래곤에 곁다리를 걸친 듯한 드래곤뉴트는 세상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다만 드래곤들이 그러한 존재가 있었다는 것 자체를 별로 좋아하 지 않는 것으로 보아 라혼이 알지 못하는 어떤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짐 작을 할 뿐이었다. 어쨌든 라혼이 보기에 초초에게선 드래곤의 기운이나 어떤 특기할 만한 기 운은 없었다. 그러나 고학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주군, 그녀를 얻으신다면 이 남례를 얻을 명분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 고학은 주군의 침묵에 입술이 말라갔다. 고학은 라혼이 주모 설화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학이 보기에 이것은 하늘이 준 기회 나 다름없었다. 어찌되었건 간에 주군은 강무세가와 어떤 선연(善緣)이 있 었고, 거기에 백수회라는 무시할 수 없는 조직의 도움까지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고학이 파악하기로 봉수성의 위병들은 이미 주군이 확실하게 장악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천시(天時) 하늘이 내려준 때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 고학은 라혼의 오랜 침묵에 스스로 안달이 나서 말을 이었다. "주군, 영웅에게 삼처사첩은 흠이 되지 않는다 했습니다. 그러니……." "고학, 그대의 천명이 겨우 이 남례인가?" "……." 라혼은 말이 없는 고학을 일별하고 탁자 위에 있는 백지에 글을 적었다. <雪花之父 虎獅天, 母 姜武惠. 설화의 아비는 호사천, 어미는 강무혜> -쿵. 고학은 탁자위에 쓰인 글귀에 경악이 도를 넘어섰다. 호(虎)라는 글자 와 강무(姜武)라는 글자가 주는 충격이란 고학이 감당하기에 너무도 어마어 마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음 글귀는 고학을 더욱 충격에 빠트리기 충분했다. <雪花之白虎. 설화는 하얀 호랑이다.> "허억!" -부스럭~. -화르르르~! 라혼은 글귀를 적을 종이를 삼매진화(三昧眞火)로 태우고 조용히 읊조렸다. "모석과 모원에게는 어머니 쪽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꿀꺽!" "나는 원주로 가려한다." "원주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옛말에 이르기를 동강서하(東江西河)를 장악한 자가 천하를 장악한다 했다 . 그렇지 않은가?" "……!" 봉수성에 백호나한이 돌아왔다. 이 한 가지 사실은 봉수성을 중심으로 흐르 던 잔잔하던 암류에 격랑이 일었다. "호영기주, 백호나한이 돌아왔습니다." "으음~! 생각했던 것보다 늦었다고 해야 하나 빨랐다고 해야 하나……." 호랑이 그림자라는 호영(虎影)은 검은 장막이 쳐진 어두운 방안에서 귀호1 호의 보고를 들었다. 하남대원수 금영월이 봉수성에 도착하자마자 삼관으로 달려간 백호나한이 쉽게 돌아오지 못할 것이란 예상을 했다. 족정관과 오 수관까지는 어떻게 가능할지 모르나 천수교는 힘들 것이란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 사흘 만에 삼관을 뚫었다. 그리고 상처를 입었 다는 소식과 금영월의 호도를 공략한다는 결정했다. 그러나 그러한 결정이 있고 한 달이 지나서야 하남천원군은 봉수성을 떠났다. "감시는?" "백호나한이 워낙 고수라 미행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원래 귀호기 주의 거처에 머무는지라 저택에 귀호들이 남아있어 최소한 백호나한이 저택 에 머무는 동안엔 저희 눈앞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그리고……." "뭔가?" "백호나한의 심복 고학이란 자가 독대를 청했는데 방안에서 나올 때 심상치 않은 표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백호나한과 같이 온 묘령의 여인은 예순군주(藝純君主)였습니다." "뭐야!" 호영은 1호의 말에 깜짝 놀랐다. 예순군주라면 남례절도사 영양공 용사운의 영애였다. 그리고 남례성은 영양공의 봉지나 다름없으니 그녀는 남례의 후 계자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아니 용사운의 아들들이 살아있다면 별무소용이 나 영양공의 목이 잘렸다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의 아들들이 살아있을 가 능성은 희박했다. 반란 진토인들의 중심축인 열지족은 중요한 위치에 있던 남자는 씨를 말려도 여인의 경우는 웬만해선 죽이지 않았다. 그래서 호영의 머릿속에선 지금 백호나한이 이곳을 차지하고 독립적인 아니 반적강무들과 연계한다는 최악의 경우까지 생각되고 있었다. 백호나한을 견제해줄 하남 천원군은 전 병력이 천수교에 있었다. 그리고 백호나한은 노예와 천수교의 주민이라는 2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봉수부로 데려왔다. 거기다 봉수성에 남아있는 위병들은 이미 그에게 장악된 상태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불길한 징조뿐이었다. "이거 좋지 않군, 좋지 않아." "……." "지심 참아!" "……." "알아 너는 주인 곁에 있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라혼대가가 있는 곳은 너 무 눈이 많은 곳이야! 넌 내 시비라고 알려져 있는데 네가 거기로 찾아가면 우리가 위험해 진다고……." 한포포는 라혼대가가 봉수성의 자기 관저에 있다는 소식에 지금 당장 행장 을 꾸리는 지심을 말리느라 애먹고 있었다. "저는 주인의 수하지 아가씨의 시비가 아닙니다." "알아, 안다 구! 누가 뭐래? 하지만 우리의 입장도 생각해 줘야지." 한포포와 지심이 실랑이가 벌어지던 중 누군가 다가오는 인기척이 있었다. "소주(少主), 백호나한이 봉수태수부에 왔습니다." "알았다." "……." "것 봐! 내가 뭐랬어. 기다리면 되는 거잖아!" 한포포는 화색이 만면한 표정으로 자기거처로 돌아갔다. 무슨 옷을 입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라혼은 봉수 관저에 도착하여 고학과 독대 후 바로 이어서 찾아온 장상(獐 商)과 해노(海老) 인치(人置)의 방문을 받았다. 다름 아닌 수군을 만드는 작업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자금이 소요되었기에 그간 자금부족으 로 일은 일대로 진척되지 않았고 현상유지조차 힘들 정도였다. 그러나 다행 히 부족한 운용자금을 봉수태수부에서 얼마간 보태주어 겨우겨우 버텼지만 제대로 된 수군을 만들려면 더욱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그러나 라혼은 이 미 그 문제에 대해서 어느 정도 해결해 둔 것이 있었다. 바로 여인천궁의 자금을 활용한다는 방안이었다. 여인천궁에서 어떠한 결론이 날지는 미지수 이나 최소한 숨통이 트일 자금정도는 끌어 쓸 수 있었다. 문제는 봉수태수 부가 무엇 때문에 자금을 댔나하는 것이었다. 라혼은 봉수태수부의 공금을 건들지 않았다. 라혼이 파악하기로 봉수성은 그리 넉넉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인데 뱃길이 막히고 호도가 반적들에게 점거당한 이후 호도에 특산물을 가져다 파는 것이 주 수입원인 봉수성은 돈 나올 구멍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봉수태수부가 쓸데 없는(?) 일에 돈을 쓴 것이다. 라혼은 두 노소(老少)의 말에 봉수태수(峰水 太守) 돈석(豚席)을 찾아 봉수태수부를 찾았다. "홍홍홍, 어서 오시오! 삼관을 도모한 장군의 신출귀몰(神出鬼沒)할 병략에 이 돈모가 아주 감탄하는 바이오. 아예 장군께서 호도까지 쳐들어갔으면 좋았을 것을 말이오. 상처를 입었다니 본관이 더욱더 안타깝기 그지없구려. " "……." "어찌되었던 금영월 대장군께서 하루빨리 호도를 탈환하셔야, 봉수성도 숨 통이 트일 텐데……. 홍홍홍홍." 돈석의 말은 왜 호도를 직접공략하지 않았냐하는 것을 약간 비틀어 표현했 다. 호도가 탈환되면 호도의 물산이 봉수성에 들어오고 그것을 라혼이 지금 꾸미는 수군의 배로 실어다 팔면 수군을 운용하는 자금에 큰 이익이 있어 도움이 됐을 것이란 것까지 말하고 있었다. 라혼은 '홍홍'대는 돈석에게 쓴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우리 수군에 자금을 댄 자가 백수회요?" "……!" 돈석은 자신이 돌려서 책망한 내용엔 대꾸하지 않고 단도직입을 물어오는 백호나한의 태도에 또다시 당황했다. 항상 이런 식의 대화지만 정면으로 치 고 들어오는 질문에 번번이 지는 돈석이었다. 그러나 돈석을 습관처럼 돌려 표현했다. "장상이란 자가 설명하지 않았습니까?" 장상이 백수회와 연관이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라혼은 돈석이 자 신의 질문에 긍정을 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군. 고맙소! 수고하시오." "아니, 그냥 가시려고?" "그저 인사차 들렸을 뿐이오. 바쁘실 텐데 이만 돌아가겠소. 아! 그리고 포 포가 오거든 내가 머무는 거처로 오라 하시오. 그리고 봉수성 무기고의 물 건들은 본장이 쓰겠소." "……!" 드워프 마을! 드워프 마을은 땅속에 있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불편했다. 라혼이야 [체인지 셀프Change Self : 변신] 주문으로 몸을 작게 만들면 되지만 가니아는 그 러지 못했기에 항상 꾸부정한 자세로 동굴통로를 걸어야했다. 웬일인지 가 니아에게는 마법주문이 통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그것은 정화의 불꽃을 다루 는 불새의 무녀가 가진 권능 때문이었을 것이다. "헤헤헤, 조금만 가면 곧 넓은 공간이 나옵니다." "……." 가니아는 살갑게 구는 토지신의 말에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드래곤(?)을 안내하게 된 카쿤은 힘들어하는 붉은 머리 여자에게 말하면 서 도 라혼의 눈치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카쿤이 드래곤의 안내역을 맡게 된 이유는 바로 그가 불개미 숲에서 두 인간을 구한 것이 드래곤을 불러들 였기(?) 때문에 카쿤은 전설로만 전해지는 무시무시한 드래곤 바로 앞을 걸 으며 뒤통수가 서늘한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가니아, 앉으시오!" "예?" 라혼은 꾸부정한 자세로 걷는 가니아를 보다 못해 허공섭물(虛空攝物)의 수 법으로 그녀의 몸을 들어 올렸다. "어마!" "우아!" 가니아는 몸이 번쩍 들리는 느낌에 낮은 비명을 질렀고 카쿤은 허공에 동동 떠있는 빨간 머리여자를 입이 헤 벌어진 체 구경 했다. "몸을 내게 맡기고 앉으시오." 가니아가 가부좌를 튼 상태로 허공에 한자 반 정도 뜻 상태가 되자 가니아 는 라혼의 능력에 새삼스럽게 놀랐고, 드워프 카쿤 역시 드래곤(?)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윽고 카쿤은 드래곤이 앞으로 머물게 될 장서고(藏書庫)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라혼이 가니아를 이곳에 데려온 이유는 따로 있 었다. "촌장을 만나고 싶다." "촌장님을요?" 라혼은 자신을 안내한 드워프에게 그렇게 한마디 던져놓고 드워프어와 시드 그람 공용어, 인시드어, 그리고 칸대륙의 언어로 적혀진 나무 조각을 역어 만든 책(冊)들 사이에서 하나를 골라 뽑아들었다. 그러한 드래곤(?)의 안하 무인 적 태도에 역시 할아버지에게 듣던 대로라고 생각하며 장서고를 나섰 다. 가니아 이곳까지 안내한 토지신이 라혼의 요구에 따라 토지신 촌장을 데려오기 위해 어디론가 가자 가니아는 라혼에게 물었다. "토지신들이 당신을 무척 어려워하는 군요." "그들은 나를 용(龍)이라고 알고 있소." "예? 용이요?" "그렇게 알고 있으면 되오. 그보다 나는 이곳에서 당신이 펼친 결계와 비슷 한 기운을 느꼈소. 그리고 당신이 이야기 해준 초록용의 이야기도 있고 해 서……." "불새의 깃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소." 라혼의 말에 가니아는 잠시 말문을 닫고 생각에 잠겼다. 가니아의 일족이 귀림근처에서 거의 천여 년간 살아왔으니 불새의 깃털이 귀림의 토지신들에 게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불새의 깃털은 인간이 지니기에 너무 위험한 물건이기에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불새의 깃털의 본래 주인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불새의 깃털을 얻어 불새를 찾으시려는 겁니까?" "그럴 생각이오. 하지만 지금은 아니오." 불새의 깃털을 가진 자는 불새와 만날 수 있다는 전설이 있었다. 불새의 고 기를 먹는 자 영원히 죽지 않으며 그 피를 얻은 자 천지를 태울 수 있는 불 꽃은 부릴 수 있다고 했다. 라혼은 자신의 대답에 침묵하는 가니아를 보고 목편으로 엮어 만든 책을 말며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에겐 아내가 있소." "……." "그 아이의 어미가 바로 강무(姜武)라는 성을 쓰고 있소. 강무라는 성을 쓰 는 자들은 오직 후려(後慮)의 강무세가 뿐이오." "!" 가니아는 라혼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깜짝 놀랐다. 주작의 무녀라며 신성시 되던 그녀였지만 한때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사랑하는 이의 아이를 낳고, 장성한 아이를 그에게 보냈다. 그런데 라혼의 입에서 정인(情人)의 가문의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당신의 아이는 아들인가? 딸인가?" "아들, 아들이예요!" "이름은?" "온, 온이에요. 우리 온을 아시나요?" 라혼은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평정이 무너진 가니아의 물음에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라혼은 후선(後鮮)의 황가(皇家)인 강무세가에 아는 바가 얼마 없었다. 앙신성으로 달려갈 때 토금전장의 토귀에게 강무세가에 대해 서 조사해보라는 지시를 했지만 결과가 라혼의 손에 오기 전에 남례성으로 달려오는 바람에 주요 인사를 제외하고는 강무세가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 었다. 그리고 라혼이 알고 있는 강무세가의 주요 인물에 강무인이나 강무온 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미안하지만 아는바 없다. 하지만 나의 아내는 그대와 꼭 닮아있다." "예?" "그녀의 모친은 바로 강무세가의 강무혜라는 여인이었다." "……!" "그리고 그 강무혜는 분명히 강무세가의 여인이 분명하다." 라혼은 불새의 무녀 가니아에게 설화에 대한 모든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설화의 부친 호사천(虎獅天)과 서제가(鼠帝家)와 강무세가의 가신(家臣)인 호가(護家)의 죽고 죽이는 살육, 그리고 설화가 신수(神獸) 백호(白虎)라는 것까지 거의 모든 사실을 알려주었다. 가니아는 라혼의 설명이 끝났지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아들 '온'의 소식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온'의 자손일지도 모르는 설화의 이야기도 관심이 가기는 했지만 '온'만큼은 아니었다. 라혼도 가니아에게 뭔가를 얻어낼 것 은 아니었기에 다소 실망스런 반응이었지만 그녀에 대한 것은 일단 접어두 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젊은 드워프 카쿤이 마을의 촌장을 데려 왔 다. "찾으셨습니까? 위대한 분이시여……." "……." "저는 마을의 촌장 일을 하고 있는 블로입니다." 극히 조심스런 태도의 하얀 수염이 얼굴에 가득한 드워프가 두 명의 드워 프 장로와 함께 라혼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라혼은 그들의 인사를 자연스럽 게 받고 위압적인 기운을 내뿜으며 그들에게 물었다. "불새의 깃털은 어디 있나?" "……!" "……!" 귀림(鬼林) 드워프 마을 촌장 블로와 장로들은 드래곤이 직접적인 질문에 무척 당황했다. 불새의 깃털은 드워프에게 있어 보물 중 보물이었다. 그것 은 모든 물체에 영향을 끼쳐 특별한 속성을 가지게 했으며 거기서 나는 고 열(高熱)은 광물의 불순물을 제거하고 제련하는데 긴요하게 사용되었기 때 문이었다. 다른 무엇보다 그러한 기능이 드워프들에겐 가장 필요한 것이다. "위대한 분이시여……. 그것을 원하십니까?" "원한다!" "……." 촌장 블로는 단호한 드래곤(?)의 요구에 말없이 몸을 돌리며 손을 뻗어 불 새의 깃털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라혼은 가니아와 함께 블로의 안내를 받아 움직이지 않으며 묘하게 정적인 기운이 흐르는 곳 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촌장 블로는 드래곤과 같이 온 붉은 머리 여자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서로 내왕은 없었지만 근 천여 년 간 이웃에 살던 존재를 모르진 않았다. 블로 는 어째서 불새의 일족인 그녀가 드래곤과 함께 있을 수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이유야 어찌 되었던 초록용이 그녀의 선조에게 불새의 깃털을 빼앗 았으니 그녀는 불새의 깃털의 정당한 주인이나 다름없었다는 것이 블로는 물론 드워프들의 안타까움이었다. 아무리 천적관계라고 할 수 있는 드래곤이라도 드워프들의 보물을 함부로 갈취할 수는 없었다. 고집 센 드워프족은 비록 드래곤족이 횡포에 휘둘리기 는 하지만 때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드래곤을 사냥하는 경우까지 있었 다. 다만 드래곤이 드워프에게 원하는 것은 그들의 보물이 아니라 그들의 손재주였다. 드워프들 또한 드래곤이 가져다주는 진귀한 재료와 드래곤 특 유의 시간개념에 의한 긴 시간을 이용해 필생의 작품을 만드는 것을 나름대 로 즐겼다. 그리고 드래곤의 레어(lair) 근처는 특이한 광물이 나오는 경우 가 많아 드워프 입장에선 땅주인에게 세금을 바치는 셈치며 드래곤의 요구 를 들어주고 보호를 받는 경우도 많았다. "촌장! 이대로 불새의 깃털을 도마뱀에게 넘길거야?" "그럼 어떻게 보란 듯이 본래 주인의 상속자까지 데려왔는데…." "장장 천년이나 불새의 깃털의 깃털은 우리 것이었다고 그런데…." 무식한 릭트의 말에 현명한 헤지드는 타이르듯 말했다. "불새의 깃털은 원래 그린 드래곤 드라오디프가 불새 일족에게 강제로 강탈 해온 것인데 주인이 따로 있는 물건이었는걸." "그걸 누가 모르냐? 헤지드, 내 말은 오랫동안 우리가 보관하고 있었으니 보관료 정도는 요구할 수도 있잖아! 게다가 그 망할 도마뱀이 도대체 뭔 상 관이냐고!" 원래 릭트의 존칭어는 용맹한 릭트였지만 하는 행동거지나 새로 뭔가를 배 우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 때문이 무식한 릭트로 통했다. 촌장인 블로 또한 신중한 블로였다. 촌장 블로와 드워프 장로들은 이일의 대처를 위해 모여 회의에 회의를 거듭했지만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드래곤이 그 간 축적해온 드워프들의 지식만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비록 그가 아 무런 말은 하지 않았지만 불새의 깃털을 불새 일족과 함께 구경한 행동은 귀림 드워프 마을 전체를 들썩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자자자자, 아직 드래곤이 뭐라 요구한 것도 없으니까 쓸데없이 떠들어봐야 입만 아프다고 카쿤이 그러는데 그 드래곤은 물론 불새의 무녀 가니아도 장서고에 얌전히 있다고 했으니 미리부터 왈가왈부하는 것도 우습다고……. " 그렇게 결론도 나지 않는 회의를 마무리하려는 블로 촌장이었다. 그러나 그 날 회의는 더욱 더 길어지고 열기를 띄게 만들기에 충분한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촌장님, 어르신들……." "어? 카쿤 아니냐?" "드래곤은 어쩌고 네가 여길 왜 온 거냐?" 드워프 장로들은 항상 드래곤 곁에 머물며 그를 감시(?)하는 카쿤이 회의가 한참인 이곳에 얼굴을 내밀자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을 했지만 겉으 론 내색하지 않고 최종선고를 기다렸다. "그게 라혼님이 이걸 주면서 만들 수 있냐고 하던데요?" "뭐냐 그게?" 카쿤이 내민 것은 설계도였다. <力石. 역석> "뭐야? 뭔데 그래?" 평소에 공부하고 담을 쌓은 릭트가 동료들이 설계도에 눈을 떼지 못하자 설 명을 요구하는 따가운 눈빛을 어릴 때부터 가장 만만했던 헤지드에게 보냈 다. "에휴~! 그러게 공부 좀 하지 그랬어? 애들 보기에 창피하지도 않냐?" "창피~이! 그럼 옛날에 네가 트롤을 처음보고 실례한 거……읍!" "제발 그런 건 좀 잊으란 말이야. 다른 건 다 까먹으면서 왜 그거 잊지도 않고 두고두고 괴롭히는 거야?" 사실 릭트가 하려는 이야기는 이미 드워프 마을에서 모르는 자가 없었다. 그것은 헤지드도 잘 알고 있었지만 릭트에겐 똑같은 일이라도 과장하고 부 풀리는 재주가 뛰어났다. 이야기를 듣는 자는 즐거울지 모르지만 그 얘기 속의 주인공은 과연 그때 내가 그렇게 까지 멍청했나하는 착각까지 들게 했 다. "얘기해 줄 테니까. 조용히 있어!" 릭트는 알았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헤지드는 릭트의 저주받을 능력을 지닌 입을 막고 있는 손에 힘을 풀고 설명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동력원이야!" "뭐?" "마법진, 또는 기환진, 그리고 부적이나 신선들이 사용하는 보패에 사용되 는 기운을 모아주는 역할을 하는 부분을 따로 분리해낸 거야!" 헤지드의 설명이 있었지만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의 릭트였다. "쉬운 말로……." "으이그~! 그러니까 이건 기운을 모아주는 보패(寶貝)란 말이다." "기운을 모아 뭐에 쓰는 건데……." "몰라." "뭐?" "만들어 봐야 알겠지만 내가 보기에 이건 그저 기운을 축적시키는 기능 밖 에 없어. 그리고……." "그리고?" "드워프어로 따로 기록된 부분을 보면 하나같이 구하기 힘든 재료야. 그리 고 몇까지는 칸대륙에서 아예 찾아볼 수 없는 재료이기도 해. 드래곤이 우 리에게 칸 대륙의 정보를 요구한 이유가 여기 있었군." 백호천하(白虎天下) 라혼이 거처로 돌아와 보니 모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원은 볼이 벌겋게 부어오르고 한쪽 눈자위가 부어오른 낭패한 몰골이었다. "누구에게 맞기라도 한 것이냐?" "아닙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래? 열지족 공주는 지금 어디에 있지?" "예? 아니요. 그저 약간의 실랑이만 있었을 뿐 별일은 아닙니다." "나는 그것은 물은 것이 아닌데?" "헉!?" 모원은 가만히 주군의 질문을 되새기고 주군이 그것을 물은 것이 아님을 깨 달았다. 하지만 모원은 꿈에도 자신이 라혼의 [헐루서네이션Hallucination : 착각]주문에 당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른 체 뒷수습을 하느라 정신없었다. "에~. 그러니까. 그것이 어떻게 된거냐면……." "주군!" "들어와라!" 하지만 바로 그때 라혼의 집무실로 잔폭광마가 들어왔다. "어? 모형제 얼굴이…. 누구냐 누가 감히 대 백호영의 군무를 씹다 뱉은 개 떡으로 만든 거야?" "아니요. 그게 아니라……." 흥분하는 잔폭광마 덕분에 모원은 더욱 울상이 되어 폐인이 되어가기 시작 했다. "열지족 공주가 그런 것 같던데?" "예? 그 진토인 계집이요? 그런 버르장머리 없는 계집은 한번 꾹 눌러주면 얌전해지기 마련이지요. 제가 해결 할까요?" "육정위님!" 모원은 잔폭광마의 지극히 잔폭광마다운 해결방식에 발끈했다. 그러나……. "육삼의 말이 맞다. 그래야 할 필요가 있겠어. 모원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 와라!" "주군?" "에?" 라혼의 말에 모원은 물론 모원을 놀리던 잔폭광마까지 놀랐는지 눈이 크게 떠졌다. 백호영에서 모원이 열지족 공주 메이를 좋아한다는 것은 눈치체지 못한 자는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은 메이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이용 한 메이의 탈출시도에 번번이 당하던 모원이었다. 졸지에 포로 신세가 된 메이는 불안한 마음을 숨기기 위해 모원에게 신경질은 부렸고 그런 메이의 심술을 모원은 모두 받아주었던 것이 도가 지나쳐 사내의 얼굴에 멍을 지게 할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뭐가 잘못된 것이 있나?" "주군, 그녀는 열지족 추장의 딸입니다. 그러니……." "메인는 반란 진토인 수괴의 딸일 뿐이다. 네가 그녀를 다루기 버거워하는 것 같으니 짐을 덜어주려는 것이다. 모원 너는 지금부터 할일이 매우 많다. 고작 반란 진토인 계집애에게 휘둘릴 시간이 없다." "……." 라혼의 단호하기 그지없는 말에 모원은 고개를 숙여보이곤 집무실을 빠져 나갔다. "대장, 메이를 어찌하시려고?" "메이는 보기 드문 미인이지 않나?" "미인이죠. 쭉빠진 미끈한 몸매에 탱탱한 가슴에 허리 굴곡하며……." "탐이 나는가?" "……." 잔폭광마는 대장의 질문에 정색을 하며 말했다. "나 잔폭광마 육삼은 거칠 것 없이 살아왔지만 형제의 여자를 건들 정도로 막돼먹은 놈이 아닙니다." 라혼은 잔폭광마의 격렬한 반응에서 그가 말하고 싶어 하는 뜻을 알 수 있 었다. 그러나 라혼은 짐짓 그것을 무시하고 말을 돌렸다. "그런가? 그것 그렇고 무슨 일이지?" "예? 아 예에. 사실은 대장을 만나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누가?" "향장자라고 자길 소개했는데 남례성에서 알아주는 부자랍니다." "향장자? 만나보지 언제든 이곳으로 찾아오라고 전해." "에? 그게 지금 같이 와서 대청에서 기다리고 있는데요?" 라혼은 잔폭광마가 말한 향장자(珦壯者)란 사람의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했 다. 장자(壯者)란 지방의 재산가를 칭할 때 쓰는 말로 향장자란 향씨 성을 가진 부자라는 뜻이 되었다. 어느 정도 세력을 가진 부호라면 라혼에게 섣 불리 접근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표면적으로 라혼이 조정의 관리인 홍대보 의 목을 벤 순간 언제 어느 때 그것을 이유로 패가망신(敗家亡身)할지 모르 는 상태였다. 거기다 여기저기 에서 많은 이목을 받고 있는 라혼이었기 때 문에 더더욱 접근하기 꺼려지는 존재라는 것은 라혼도 잘 알고 있었다. 라 혼이 스스로 파악하기로 원주 호황가와 지금은 잠깐 자리를 비우고 있는 숭 무공 원공반의 경주(慶州) 원제가, 계주(癸州) 돈제가가 있었고 백수회에 또한 소야의 일로 남례일족의 눈도 라혼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무리 비밀결 사인 백수회이지만 자금을 조달하려면 상계를 거쳐야하고 남례일족도 유수 한 상인들과 관계를 맺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백수회의 자금이 백호수영에 흘러든 것만 보더라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또한 경주와 계주에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상인들이나 남례일족과 연(緣)이 닿아있는 부 호들 또한 뭔가 냄새를 맡은 것이 분명했다. 즉, 지금 라혼이 현제 봉수성 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위치에 있기는 하지만 상인들이나 지방호족들이 보기 에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성과 다를 바 없었다. 게다가 백호나한 쪽에 서도 어떤 이권이나 이익을 보장해 준다는 조건을 제시하며 손을 벌리지 않 으니 더더욱 남례성의 지방 세력과는 인연이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때 재산가로 생각되어지는 존재가 찾아왔느니……. "그럼 이리로 모시도록." "예." 잔폭광마가 집무실을 나서자 라혼은 초초를 불러 향장자에 대해서 물었다. "향장자요? 남례성성에서 향장자라고 하면 감곡(甘谷)의 향장자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 사람은 구두쇠로 더 유명한분이시기도 합니다." "구두쇠?" 초초가 알고 있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손님이 찾아오실 것 같은데 차를 준비해 두겠습니다." "부탁하지." 초초는 차를 준비하기위해 주인님의 집무실을 나섰다. 그러나 초초는 발걸 음을 멈춰야했다. "이봐요!" "……?" 초초의 발걸음을 잡은 존재는 간편해 보이는 녹의경장차림에 보검을 등에 비껴 맨 아름다운 여인과 역시 호리호리한 몸매의 진토인 여인였다. "라혼대가, 안에 있어요?" "주인님을 찾아오신 겁니까?" "주인님? 대가의 시비인가보네?" 초초는 이 검을 메고 있는 여인이 아래위를 훑어보는 듯한 시선이 거북스러 웠다. 그러나 초초는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고 고아한 어투로 말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안에 기별하겠습니다. 어찌 되십니까?" "포포가 왔다고 하면 돼. 그럼 부탁해." "……." 초초는 녹의경장여인의 하대에 움찔했다. 그리고 그녀를 이곳까지 멋대로 들어오게 한 집안하인들을 원망했다. 초초는 비록 라혼의 하녀를 자처하기 는 했지만 주인님의 수하들은 초초를 함부로 하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보니 주인님을 제외하고 다름 사람에게 최초로 하대를 받으니 자신의 처지가 떠 올라 왠지 서러움이 몰려왔다. 그러나 초초는 그러한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라혼의 방으로 들어가 말했다. "주인님 포포라는 낭자가 찾아왔습니다." "포포가? 참 복잡한때 찾아왔군." "돌려보낼까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그들을 들여보내고 하인들에게 말해서 후원을 치 워놓도록 해라." "후원을 말씀이십니까?" "그래." 라혼은 포포가 벌써 찾아 왔다는 소식에 적잖이 놀랐다. 비록 봉수태수 돈 석에게 언질을 주기는 했지만 그녀의 신분은 함부로 움직이기에 너무도 엄 청났기 때문이었다. 백수회는 차지로 하더라도 원주 조정의 입장에선 반역 무리인 후선 낙왕 강무산의 양녀 해홍군주(海紅君主)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 었다. 라혼이 봉수태수 돈석에게 그렇게 말한 것은 자신과 거래하고 싶다면 드러내 놓고 하자는 의미였다. 그러나 백수회 전체에선 백호나한 라혼은 그저 능력이 출중한 장군이상의 존재는 아니었다. 백수회의 입장에선 라혼 은 뒤에서 후원하여 관계를 돈돈히 하는 정도였다. 라혼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라혼대가!" "주인님!" 포포는 두 번째 만남이지만 헌헌 미장부의 모습을 하고 있는 해노야 할아버 지 라혼에게 선뜻 다가서지 못했다. 포포의 방심을 흔드는 모습과 예전에 그 자애롭던 할아버지의 눈빛을 함께 지닌 그에게 뭐가 모를 어색함이 느껴 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라혼은 그런 혼란스런 포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 는지 자연스럽게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상한 미소를 지었다. "예쁘게 자랐구나." "할아버지…?" 포포는 자신도 모르게 할아버지 소리가 튀어나와 깜짝 놀랐다. 하지만 곧 새침 떼며 말했다. "뭐예요. 라혼대가 저는 진즉에 다 컸다고요." "그래 포포는 더 컸어." "지심입니다, 주인님." 라혼은 앞으로 나서며 인사하는 차레족네게 시선을 주었는 그는 차레족 족 장이 보답(?)으로 주어진 자신을 평생 곁에서 있을 그 차레족 전사라는 것 을 알았다. "지심이라……. 수고했다." "아닙니다." 지심은 자연스럽게 라혼의 왼쪽 뒤에 자리 잡는 것으로 앞으로는 주인의 곁 을 떠나지 않고 주인의 곁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라혼은 그런 그 의 태도에 별말하지 않고 포포에게 물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이냐? 이곳에 눈과 귀가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인 데?" "알아요. 하지만 라혼대가가 이곳으로 오라고 했잖아요." 라혼은 한포포의 말에 그녀가 독단적으로 움직였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 었다. 포포의 철없는 행동에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생각한 라혼은 고소(苦笑) 를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주인님, 육삼 정위님과 향장자입니다. "모셔라." 잔폭광마와 함께 집무실로 들어온 노인은 첫 이상이 매우 왜소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키가 작고 마른몸매에 날카로운 눈. 그리고 검박하기 그지없는 누런 장포차림을 하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하남천원군 참장 라혼이라고 합니다." "감곡의 향당(珦糖)이오." "자리에 앉으시지요. 포포 너도 거기자리에 앉거라." 향당은 벌써 백호나한이라 불리는 조정의 장수에게 세 번 놀랐다. 방 앞에 서 시비 행세를 하는 미녀는 분명 영양공의 영애인 예순군주 용정란이었고 이번엔 후선 낙왕부의 해홍군주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허? 용호(龍虎)와 같은 수하들을 부리며 남례성의 주인이었던 자의 딸을 시비로 부리다니…….' 향당은 남례성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부호였다. 향당이 감곡에 사탕수 수를 심어 석밀(石蜜:설탕)을 만들어 팔았다. 그 후로 향당이 사탕수수를 심은 그 지역의 이름이 감곡(甘谷)이라 붙여졌고 그곳의 주인이 향당은 이 름을 당(糖:엿)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중주의 귀족들은 향당이 만들에 낸 돌꿀(石蜜)이라고 부르며 매우 귀하게 여겼다. 단맛은 본래 귀한 맛이고 다 른 꿀보다 먹기 쉬운 석밀은 가장 비싼 상등품으로 통했다. 그렇다는 것은 석밀을 제조할 수 있는 기술은 막대한 부(釜)를 보장한다 할 수 있었다. 그 래서 다른 상인들이 한때 향당 밑에서 일하던 기술자를 빼내 석밀을 만들게 했지만 향당이 생산해내는 석밀만큼 달지 않아 가짜석밀(假蜜)이라 불렀다 . "향장자, 무슨 일로 본장을 찾으셨소?" 향당은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본론을 물어오는 백호나한을 보고 약간 당황 해 하면서도 쓸데없는 예를 차리느라 헛된 시간을 보내지는 않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장군께서 그리 말씀하시는 제가 원하는 바를 말하지요. 저는 장군의 노예 들을 잠시 빌리려 합니다." "노예들을? 이유를 설명해 주시겠소?" "곧 추수를 해야 하는데 손이 모자라 그러오." "추수? 무얼 말이오." 라혼의 질문을 대신한 것은 다름 아닌 포포였다. 포포는 왜소하고 깡마른 향당이 방으로 들어설 때부터 그가 누구인지 대번에 알아보았다. 향당은 남 례성에서 손꼽히는 부자임과 동시에 포포자신이 평소 즐기는 향당석밀(珦糖 石蜜)을 만드는 당사자이며 거의 유일하게 그 어떤 세력과도 손을 잡지 않 는 재력가였다. "대가, 사탕수수를 말하는 겁니다." "사탕수수?" "그래요. 감자(甘蔗)라고도 하는데 석밀은 만드는 원료에요." "허허허, 사탄수수가 석밀의 원료라는 것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데 군주 께서는 잘 알고 계시는 군요." "별말씀을 저도 향장께서 만드신 달콤하기 이를 데 없는 석밀을 아주 좋아 한답니다. 좋아하는 것에 관심을 가졌을 뿐입니다." 라혼은 포포와 향장자의 대화를 듣고서야 비로소 이 향장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라혼은 그 순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얼마동안 몇이나 필요하오?" "한 달간 3천 명 정도면 되겠습니다." "대가는?" "두당 은1냥을 드리지요." "거절하오." "……!" 보통 일꾼을 한 달간 부리는데 대략 은자 2냥이면 충분했다. 그런데 향당은 노예 3천을 한 달간 빌리는데 두당 1냥씩 총 3천 냥을 지불할 용의가 있다 고 제안한 것이었다. 조금 박하지만 노예를 빌려 쓰는데 그 정도면 나름대 로 값을 쳐준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흥정도 하지 않고 일어지하 거절하자 향당은 적잖히 당황했다. "향장자, 나는 향장자의 사탕수수밭을 원하오." "……!" "……." "무, 무슨…?" "내게 석밀을 만드는 비법도 넘기시오." 라혼의 말은 장내를 싸늘하게 식히기에 충분했다. 당사자인 향당은 물론 옆 에서 구경하는 처지인 포포 또한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가겠소." "육삼." 잔폭광마는 어떻게 돌아가는 지 알 수는 없었지만 대장이 명에 따라 자신의 가슴께 밖에 되지 않는 초로 노인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자 향당은 카랑카 랑한 목소리로 분노 섞인 고함을 질렀다. "이게 무슨 짓이오." 그러나 라혼은 조용히 어투로 그를 위압하며 말했다. "향장자, 내가 한 가지 제안을 하겠소. 내 제안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동업 자가 되는 것이고, 거절하면 향장자의 모든 재산을 빼앗겠소." "……." 약간의 침묵이 흐르고 향당은 무도하고 무례하기 그지없는 상대를 노려보며 무거운 입을 떼었다. 비록 후안무치(厚顔無恥)한 강도나 다름없지만 칼자 루는 그가 쥐고 있었기에 향당의 선택의 폭은 극히 좁았다. "제안이란 것을 말해 보시오." "내게 대규모 철방(鐵幇)이 있소. 그러나 철방에서 생산된 철기를 사줄 사 람들과는 연이 없소." "……." 단맛은 본래 귀한 맛이고 꿀보다 먹기 쉬운 석밀은 비싼 상품이었다. 향당 이 만들어낸 돌꿀(石蜜)을 사가는 사람들은 상당한 세력가이거나 또는 귀족 들이었다. 그리고 바로 북지성 부공촌에서 만들어질 철기(鐵器)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일치했다. 현재 모든 철을 다루는 장인들은 조정에 속해있거 나 각 지방 호족들에게 속해 있었다. 천하가 술렁이는 가운데 진골십가는 물론 많은 세력가들이 스스로를 보호할 병사를 모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들에게 나누어줄 병기는 현재 턱없이 부족했다. 사람이야 모으면 그만이지 만 그들이 들고 싸우는 무기가 쇠스랑이나 곡괭이 정도가 전부였던 것이다. 그들도 병기를 만들기 위래 철을 제련하고 병기를 만들고는 있었지만 여전 히 부족했다. 그런데 '대규모 철방'이 있다는 라혼의 말은 향당뿐만 아니라 포포에게도 놀라운 것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라혼대가에게 자신이 상당한 이미 배후세력이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었다. "허허허허, 장군께서는 참으로 특이한 방식으로 사람을 얻으려 하시는 구려 ." "어떻소. 내 사람이 되어주시겠소?" 포포는 두 사람의 대화가 갑자기 다른 방향으로 흐르자 정신이 없었다. 그 러나 그 의미는 파악할 수 있었다. '뭐야? 대가가 필요한 것이 향장자의 부가 아니라 향장자 자체란 말이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포포가 그렇게 염두를 굴리고 있을 동안도 라혼과 향당의 기이한 대치는 계 속 되었다. "허허허허, 장군께서는 참으로 잔혹한 분이시구려…." "미안하게 됐소. 지금 내게는 시간이 가장 큰 재산이기에 무리수를 두었을 뿐이오." 향당은 백호나한이 필요로 하는 것이 다름 아닌 자신의 인맥임을 알 수 있 었다. 그러나 향당의 인맥은 감곡에서 생산되는 석밀과 관련이 있을 뿐 향 당개인과는 연이 없었다. 즉 석밀을 가지고 있다면 석밀을 얻으려는 자들과 거래는 이루어 질 것이다. 그리고 당금은 난세에 접어드는 시기 조정의 장 수가 지방 부자 하나 둘 때려잡는다고 큰 문제가 생기는 세월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향당에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향당은 백호나한의 '시간이 가장 큰 재산'이라는 말에 의미를 생각했다. 라혼은 고요한 침묵 속에서 외길을 갈까말까를 고민하는 향당에게 누구도 들을 수 없게 혜광심어(慧光心語) 수법으로 눈빛을 통해 의사를 직접전달 했다. -나의 아내 천상천화는 백호요. 향당은 마음속에서 울려오는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리고 그 목소 리(?)의 주인이 다름 아닌 백호나한임을 알았다. 그리고 '백호(白虎)'라는 존재의 무게에 대해 심중한 고민에 빠졌다. 백호나한의 말이 맞다면 그는 천하를 도모하겠다는 것과 진배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미 누구에게도 숨겨야할 비밀을 알았으니 자신은 진짜 살인멸구(殺人滅口)의 대상이 되거 나 그의 심복이 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장군은 선택의 기회조차 주지 않는구려. 좋소! 내 장군의 사람이 되겠소." 라혼은 향당의 결정에 크게 반기며 직접 빙과를 만들어 대접했다. 그리고 사흘 후 감곡에서 사탕수수를 추수하고 석밀을 만드는 일을 돕기로 했다. 단순한 거래자의 관계가 아닌 동지가 되었음으로 모든 일은 자연스럽게 해 결되었다. 나중의 일이지만 라혼이 그리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향당석밀은 상품으로써의 숨겨졌던 가치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중의 일이고 지금 라혼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향당을 통한 철기에 대한 판로 를 빠르고 손쉽게 개척하는 일이었다. 향당이 제안을 받아들임으로써 어색 하고 무거웠던 분위기는 부드러워졌고, 라혼이 빙과를 만들어 내놓자 화기 애애(和氣靄靄)해지기까지 했다. "우아! 이게 뭐예요? 얼음이잖아요? 어떻게 한 거예요? 예?" 모든 일이 마무리되고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지만 향장자가 라혼대가를 돕기 로 하자 라혼대가는 두말하지 않고 향장자가 원하는 모든 것을 도와주겠다 는 약속했다. 그리고 나온 것이 갈은 과일이었다. 포포는 독불장군(獨不將 軍)이던 향장자가 라혼대가의 사람이 된 것보다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차갑 고 달콤하기 그지없는 빙과라는 것이 더욱 놀라웠다. 포포는 감탄에 감탄을 연발하면서 빙과 한 그릇을 순식간에 해치우고 라혼에게 부탁했다. "한 그릇 더 줘요!" "속을 차게 하는 것은 사실 그리 좋지 않다." "에이~! 그러지 말고 조금만 더 만들어 줘요." 지심은 포포가 라혼 주인님에게 어리광부리는 모습을 보며 그녀가 진짜 포 포인가가 의심스러웠다. 평소에는 엄격하고 차갑기까지 한 기운을 펄펄 흘 리면서도 주인님과 관련된 일에 대해선 무너지는 것을 종종 보아오기는 했 지만 지금은 아예 떼쓰는 어린소녀와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라혼과 포포의 실랑이는 계속되지 못했다. "주인님 모군무와 메이입니다." "들여보내라. 포포, 손님이 더 왔으니 한 번 더 만들어주지 하지만 배앓이 해도 날 원망하지 마라." "고마워요. 라혼대가!" "헤헤헤, 대장!" 옆에서 녹의소녀 포포가 하는 냥을 지켜보던 잔폭광마는 대장이 다시 빙과 를 만들겠다고 하지 헤픔 웃음을 흘리며 끼어들었다. 그리고 라혼은 다시 사람 머릿수만큼 빙과를 만들어야 했다. [프리즈Freeze:얼음]주문으로 물을 얼리고 하얗게 얼은 얼음 덩어리를 작은 단도(短刀)로 깎아내 그릇에 담고 그 위에 당도가 높은 과일을 갈아 얹으면 빙과는 완성된다. 무덥기 그지없 는 날씨에 빙과를 먹는 시간은 행복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모원과 그런 모 원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낌 메이는 그저 행복해만은 할 수는 없었다 . 그래서 빙과를 떠먹으면서도 라혼의 눈치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메이는 오늘부터 이곳에서 나와 함께 지낸다." "……." 메이는 라혼의 통보네 달콤한 빙과 떠먹던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은연중 굳 은 얼굴을 하고 있는 모원의 얼굴을 쓸쩍 훔쳐보고는 물었다. "절 어찌 하시려는 건가요?" "글쎄? 그건 이따 생각해 보지." "대가. 저 여자는 누구예요?" 라혼대가와 한눈에 보기에도 아름다운 진토인 미녀 사이에 오가는 대화가 심상치 않자 좀 전 향장자와 대화할 때완 다르게 냉큼 끼어드는 포포였다. "열지족 추장 소노리의 딸이다." "예에?" 라혼의 말에 포포와 열지족을 잘아는 차레족 전사인 지심 또한 크게 놀랐다 . 그러나 향당의 놀람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지금 후선의 해홍군주, 남례 성의 예순군주, 그리고 열지족 추장의 딸이 한 방안에는 있는 것이었다. 더 욱이 아까부터 옆에서 지켜보건 데 해홍군주와 백호나한의 사이는 무척 친 밀해 마치 한 가족을 보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열지족과도 무슨 거래가 있었던 거예요?" 라혼은 당돌하게 넘겨짚은 포포의 질문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비약하지마라 그녀는 사자로 온 것을 잡아둔 것뿐이다." "왜요?" "미인 이잖느냐?" "뭐라고요? 그게 무슨 말 이예요?" "세상에 저만한 미인을 보기 힘들지. 더욱이 특이하게도 검은 피부의 진토 인 미인인데?" 라혼의 천연덕스런 말에 포포와 모원, 그리고 메이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 어졌다. 그리고 포포는 화가 단단히 났는지 콧방귀를 뀌며 가시 돋친 말을 토해냈다. "흥! 과연 영웅이시군요. 하긴 영웅호걸(英雄豪傑)은 호색(好色)하고 삼처 사첩(三妻士妾)이 흉이 아니라지요. 천하영웅께선 천하에서 가장 아름답다 는 천하제일미 천상천화를 아내로 두시고도 만족하지 못하나 보군요. 시비 도 꽤 미인이네요? 설마 소문대로 여인천궁의 모근 여인이 대가의 부인들은 아니겠지요? 그리고 지심도 상당한 미인인데 그새 진토인 미녀에 취미라도 붙이셨나 보죠?" 그러나 라혼은 포포의 가시 돋친 질문에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여인천궁에 대한 것은 대부분 헛소문이다. 그리고 저기 지심은 미인(美人) 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여자는 아니야." "예?" "여자는 목젖이 없지만 지심은 있다." 라혼의 말에 따라 모두의 시선이 지심의 목 부분에 모아졌다. 그리고 지심 의 목에는 분명히 여자에게 없는 목젖이 있었다. "세상에 지심, 너 남자였어?" 포포는 귀엽고 선이 가는 지심의 얼굴과 목 부분에 있는 목젖을 번갈아보고 자신의 목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여자에게는 없는 목젖이 여자인 포포에게 있을 리 없었다. "막무가내로 동침을 요구하는 차레족 족장의 요구를 거부하려고 고른 것이 바로 이 지심이다. 그런데 내가 수하가 마음에 두고 있는 여자를 넘볼 것 같은가?" "대장!" "주군." 라혼의 말에 단번에 화색이 도는 모원과 메이, 그리고 덩달아 기뻐하는(?) 잔폭광마였다. "모원." "옛, 주군!" "네가 메이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메이는 반란 수괴 의 딸이다. 그러므로 사사로운 감정을 품고서는 네가 힘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메이를 보호하는 것보다 내 곁에 두는 것이 여러모로 나을 것이다." 모원은 주군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일개 문관인 자신이 반란 수괴의 딸을 보호하고 있는 것은 메이에게도 자신에게도 득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주군이 직접 옆에서 돌봐주는 것이 여러모로 안전하고 나을 지도 몰랐다. 모원은 자신이 주군을 크게 오해했음을 느끼고 오체투지(五體投地) 하며 말했다. "주군! 잠시나마 주군을 의심한 저를 용서하십시오." "용서를 받으려면 열심히 일해라! 앞으로 벌이는 일이 무척 많을 테니까 그 리고 너의 거처도 함께 마련했으니까." "감사합니다." "죽은 것이 확실한 영양공의 딸에 후선 낙왕부의 해홍군주 거기다 반란 진 토인 수괴의 딸까지……. 도대체 놈은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거지?" 호영은 홍대보의 집에 상주하는 귀호기의 보고를 받고 경악했다. 오늘 백호 나한이 쏟아낸 정보들은 하나같이 상상을 초월 했다. 대규모 군대를 조직할 수 있는 병기를 만드는 능력, 그리고 원주 중경의 호궁은 물론 나머지 중 원십일주(中原十一州) 제궁(帝宮)에게까지 진상되는 향당석밀을 만드는 향 장자가 백호나한 사람이 됐다는 것. 그리고 반역의 무리인 후선의 실세 중 실세인 강무산의 양녀와 각별한 관계라는 것은 실로 믿을 수 없는 엄청난 내용이 아닐 수 없었다. "반란, 반란인가?" "……!"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보건데 반란이라는 결론밖에는 도출해 낼 수밖에 없었 다. 그리고 자신들이 보고 있다는 것을 빤히 알고서 보란 듯이 정보를 흘렸 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하지만 호영 우리가 있다는 것을 백호나한이 모를 리 없습니다. 그리고 그 는 귀호기주께서 쓰시던 거처의 하인을 한명도 바꾸지 않았습니다." "자네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가?" "아무래도 백호나한이 우리가 나서기를 기다리는 듯합니다." "왜? 무엇 때문에?" "그것은 소인도 알지 못합니다만 제가 생각하기로 하남천원군은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십중팔구 모든 실권은 백호나한이 장악하고 있을 것이 분명합 니다. 비록 하남천원군 대원수 금영월 아래에 있는 무장들이 그를 견제하고 있지만 백호나한은 그들을 전혀 안중에 두고 있지 않고 있습니다. 남례성 은 이미 백호나한의 세력권이나 다름없다고 봅니다." "……." 호영은 귀호령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귀호령는 귀호기주였던 홍 대보가 공식적인 신분 때문에 움직이지 못할 때 대신 귀호기를 이끌던 인물 로 편의상 귀호령라 부르지만 공식적인 서열은 귀호7호였다. 귀호령의 이야 기는 계속 이어졌다. "백호나한이 그러한 비밀을 우리에게 흘린 것은 자신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 다. 이미 백호나한의 입김이 닿아있는 군사들만 줄잡아 6만이 넘습니다. 거 기에 반란 진토인들이 가세하고 후려의 강무세가와 손을 잡으면 사실상 남 례성은 그의 손에 떨어지는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그러니 상(上)께는 있는 그대로 보고 하고 제가 백호나한을 만나보겠습니다." "음~! 과연 일리 있는 얘기다. 하지만 우리가 주력해야 할 것은 귀림의 그 물건이다. 그가 눈치를 체고 있다하더라도 모른척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자네는 어찌 생각하나?" "사실 그 문제도 백호나한과 걸려있습니다." "……!" 어느새 호영에게 자신의 위상을 정립한 귀호령는 호영의 질문을 받고 귀호 기주 홍대보가 비명에 간 후 자신이 나름대로 살펴본 바를 말하기 시작했다 . "수개월 전, 백호나한은 한 진토인 부족을 토벌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데 바로 그 마을에서 우리가 오랫동안 추적하던 주작의 무녀로 보이는 여인의 신병을 확보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백호나한의 행방이 묘연해진 시기에 그녀 또한 함께 사라졌습니다." "아니 백호나한이 알고 있는 것은 그 보다 오래 있었던 귀호기가 몰랐단 말 인가? 그리고 그 여인 주작의 무녀라는 것은 확실한 얘기인가?" "설마 그 물건을 노리는 남례일족의 하수인으로 생각되던 우르하 부족이 주 작의 무녀를 보호하고 있을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남례일족도 그 사실을 몰랐을 정도로 치밀했으니 우리가 간과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을 수 도 있습니다. 허나 그것은 어차피 지난일 어쨌거나 앞뒤 정황으로 볼 때 바 로 그녀가 주작의 무녀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그녀가 백호나한과 함께 모습을 보인 뒤로 물건을 노리며 귀호기주를 심하게 견제하던 봉수태수가 그에게 무척 호의적으로 변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행방이 묘연했던 그때가 물건을 찾기 위한 시간이었다는 건가?" "……." 호영은 고개를 끄덕이는 귀호령을 보고 당초 했던 생각을 바꾸었다. "역시 자네생각대로 백호나한과 접촉해보는 것이 좋겠어. 자네가 책임지고 그를 떠보게" "존명!" 백호천하(白虎天下) 여인천궁의 총사 냉심소수(冷心素手) 교석심(巧釋深)은 소궁주 설화가 회궁 한 뒤로 두문불출(杜門不出)했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소궁주 되는 자가 사 사로이 궁을 빠져나가 벌인 일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도가 지나 친 일이었다. 그러나 궁주는 물론 장로들까지 소궁주가 벌여놓은 일에 춤을 추었다. 하지만 분명이 그녀가 한일은 궁을 위험에 빠지게 하는 파문당해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나 궁주님은 사부인 대장로 교운파파(敎云婆婆) 치호 연(置呼然)까지 그 수인계집애를 두둔하고 있는 것이었다. 뻔뻔스럽게도 자 기 남편의 요구를 당연하다는 듯이 여인천궁에 요구했다. 교석심이 보기에 지금 궁(宮)이 돌아가는 꼴은 그야말로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비록 총사라 는 허울 좋은 지위에 있으나 궁주가 직접 나서고, 후계자인 소궁주가 설쳐 대니 따로 할일이 없었다. 그리고 교석심에게도 소궁주 설화를 중심으로 행 사되는 궁의 일에 굳이 나서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대사저, 궁주님께서 찾으십니다." "무슨 일로?" 자신의 거처에 그 누구도 출입하지 못하게 하고 틀어박혀 그림을 그리고 있 던 교석심에게 궁도 하나가 다가와 말했다. 교석심은 눈길을 여전히 화폭에 그려진 난화(蘭花)에서 떼지 않고 물었다. "아마도 부공촌의 대장간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인 것 같아요." "부공촌을? 흥! 언젠가 궁도 옮기자고 하겠군." "대사저 말대로 아마도 분궁(分宮)문제도 같이 거론되는 것 같던데……." "그게 무슨 소리냐?" "소궁주가 그러더라고요. 서쪽 바다 어딘가에 해진(海陣)을 설치하고 거기 에 철방과 분궁을 함께 세운다고 하던데…. 자세한 것은 저도 잘 몰라요." 교석심은 소궁주 설화의 계획을 전해 듣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본래 여인천궁은 결혼을 하지 못하게 되어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유야무야 무시 되는 바람에 사문화되어 있는 궁규(宮規)지만 지금도 여인천궁 조사전(祖師 殿)에 어엿하게 명문화되어있는 궁규였다. 그런데 궁의 후계자라는 자가 남 편을 가지고 있고, 그 남편의 뜻에 따라 궁을 움직이려 하는 것이다. 이것 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교석심은 그 즉시 거처에서 나와 궁주 님의 처소를 찾았다. "어머? 대사저." "궁주님을 뵈러왔다." "예, 지금 기다리고 계셔요?" 궁주 상유란을 지척에서 모시는 다하(茶夏)는 교석심의 냉기가 풀풀 날리는 기세에 움찔하며 궁주에게 그녀가 왔음을 알렸다. "교대사저가 찾아 왔습니다. 궁주." "석심이가?" 여인천궁주(女人天宮主) 섬섬옥수(纖纖玉手) 상유란(桑楡蘭)은 교석심이 왔 다는 다하의 말에 그녀를 만났다. 교석심은 고지식한 면이 있어 다소 자유 분방한 소궁주 설화와는 잘 맞지 않았다. 그리고 설화의 남편인 백호나한에 대해서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는데 이번에 설화가 가져온 그의 요구는 교석심에게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아이 입장에선 궁이 외부 인의 손에 움직이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총사 교석심 궁주님 뵙습니다." "일어서거라. 너와 내가 이런 사이가 아니질 않느냐?" "하지만 오늘은 여인천궁의 총사로써 궁주님에게 드릴 말씀이 있기 때문입 니다." "애두 참! 그래 무슨 일이냐?" 상유란은 교석심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대충 짐작하면서도 모르는 척 다시 물었다. "부공촌의 철방을 다른 곳으로 옮긴다 들었습니다." "그럴 생각이다." "그리고 그곳에 분궁을 새운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분궁? 아! 그 이야기로구나. 사실은 분타나 총타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 데 설화가 자신이 그곳의 책임자로 있어야 해서 분타가가 분궁으로 불린 것 뿐이다." 궁주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했지만 여인천궁의 후계자가 머무는 분타 는 곧 분궁이었다. 그리고 소궁주가 계속 그곳에 머문다면 결국 분궁이 아 니라 이궁(移宮)이 될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그리고, 무산곡(巫算谷)은 은둔하기에 이만한 곳이 없지만 이미 세상에 나 선 이상 이곳을 고집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 "궁주!" "설화가 그러더구나. 여인천궁이 세상에 나서면 자연히 손님이 많아질 것이 고 그럼 무산곡에 외인들이 머물게 되는 수도 많다고……." "……." "나도 여인천궁이 강호에 얼굴을 들어내는 것을 주장하는 입장이지만 무산 곡에 잡인들이 많아지는 것은 솔직히 내키지 않아 허락해 줄 생각이다." "하지만 궁주님, 만일 그렇게 되면 여인천궁은 상공의 여인천궁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 해진(海陣)이란 것은 상공이 만들려는 것이지 우리 여인천 궁의 것이 아닙니다." "……." 겉으로 보기엔 분명 그랬다. 그러나 설화가 백호인 것을 알고 있는 장로들 과 상유란은 상공(上公) 백호나한이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구축 하려는 데에 동의하고 있었다. 이번에 항구요새를 건설한다는 것이 사전에 생각해 볼 시간이 없어 당황스러웠지만 이미 구체적인 실행단계에 접어들었 기에 상공의 뜻에 따르기로 한 것이었다. 사실 여인천궁이 그 일에 참가하 지 않더라도 상공은 그것과는 관계없이 일을 추진할 것이 분명했다. 우습게 도 이번에 여인천궁에서 상공의 계획에 참가하는 것은 오로지 상공에게 신 뢰를 보여주기 위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교석심의 말은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렇구나, 확실히 석심이 네 말이 옳다. 처음 설화를 만났을 때부터 그랬 는지 모른다. 상공과 같이 있고 싶어 하는 설화를 위해 궁과 멀리 떨어져 있는 상경에서 생활하기도 했지 생각해 보면 설화가 아니면 누리기 힘든 호 강이 아니겠니?" "……." 확실히 그랬다. 교석심이 궁내에 입지를 마련하고 영향력을 가지게 된 계기 도 궁주와 장로들이 오랫동안 외유를 했었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 궁내의 대소사를 맡아 보면서 부터였다. "석심아!" "말씀하십시오, 궁주." "그때는 상공도 홀홀단신(忽忽單身)이었단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그의 뜻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1천이나 되는 고수집단을 이끌고 있다 . 거기다 무시할 수 없는 재력과 강시지존이라는 친구도 있다. 그리고 설화 의 추측 불가능한 무공은 바로 그에게서 나왔다." "……." "비록 여인천궁이 상공에게 끌려가고는 있지만 그것이 우리에게도 이익이 된다면 상관없지 않겠니? 상공이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믿 고 도움을 청하는 것인데…." 여인천궁주 상유란과 교석심의 인식차이는 사실 분명했다. 상유란은 백호나 한과 오랜 기간 같이 지내보았고 설화의 진정한 신분을 알기에 그가 설화를 위해 움직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교석심은 백호나한이 설화를 매개로 여인천궁을 지배하려한다고 생각했다. *** "이야~! 이거 장난이 아니군. 6만이나 되는 사람들 목에 풀칠하려면 고생께 나 하겠어." 여인천궁의 재정과 재산을 관리하고 있는 금당(金堂)의 당주(堂主) 금선자( 金仙子) 하화리(夏花璃)는 설화 소궁주가 말한 계획에 혀를 내둘렀다. 항구 를 건설하고 그곳을 통해 철기를 판다는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설화가 그 항구에 장동의 피난민들을 동원하겠다고 하자 계산이 복잡해지기 시작했 다. 장동에서 서해를 보려면 근 6천리 길이었다. 맨 몸뚱어리로 나온 장동 의 피난민들이 걸어야하는 길이 그만큼 멀었다. 피난민들을 서해가 보이는 곳까지 이끌려면 반년을 족히 걸릴 것이고, 항구에 도착하더라도 그들을 먹 이고 입혀야 했다. 이건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는 무모한 일이었다. 하화리 입장에선 설화 소궁주의 뜻을 꺾게 하는 것이 더욱 쉽게 느껴졌다. 그러나 ……. "안 돼! 불가능해! 할 수 없어. 포기해!" "으~응, 역시 하언니 능력으론 안 되는 구나. 서방님에게 부탁해야지." "……!?" 금선자 하화리는 설화의 중얼거리는 말에 얼굴에 불이 올라왔다. "이, 이봐요. 소궁주! 그게 무슨 뜻이 예요?" "서방님이 하언니에게 말해서 식량을 구해보라고 했거든요. 하지만 안 된다 고 하니까? 별수 없지요." "식량이요?" 하화리는 깜찍한 표정으로 6만 명이 3년 먹을 양식을 계산한 서류를 들여다 보는 설화 소궁주를 엉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문득 짚이는 바가 있어 물 었다. "단순히 식량만 구하면 되는 거였어?" "예? 예." 지금은 난세였다. 게다가 지난 10여 년간 천하의 작황이 좋지 못했다. 각지 에서 군사를 모으고 군량을 확보하느라 곡식의 값이 종류를 불문하고 뛰기 시작했다. 또한 많은 상인들이 군량이 미리 사재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곡류 의 가격은 더더욱 치솟았다. 하지만 그것을 하화리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 하화리 또한 상당한 양의 군량을 비축해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화리 가 생각한 것은 곡식의 양이 아니라 운송이었다. 피난민들이 북지성의 거친 산길을 따라 이동할 것이 뻔한데 그들에게 때에 맞추어 곡식을 대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막대한 자금이 소요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식량이야 얼마든지 구해줄 수 있지 그러데 그 많은 것을 어떻게 옮기려고? " "그거요? 그거야 서방님이 알아서 하시겠죠." "그러니까 알아서 어떻게?" "에, 그러니까 홀인부에서 남쪽으로 길을 잡고 을주(乙州)로 넘어가서 대산 평원(大傘平原)을 가로질러 서해로 나가서 배를 통해 이동할거예요." 북지성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대종도(大縱道) 이외의 길은 지세가 험해 길이 좁고 자주 끊겼다. 젊은 장정도 넘기 힘든 길을 어떻게 간다는 것인지 모 르지만 지금 하화리의 관심사는 따로 있었다. "그게 아니라 양식을 어떻게 수송할 거냐고?" "그건……." "……." "서방님이 옮겨준다고 했어요." 소궁주 설화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하지만 하화리에겐 무척이나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상공의 수족인 토금전장의 금대부가 대량의 향신료를 남경에서 사서 흑막에 파는 일 또한 궁금하기 그지없는데 수천 석을 족히 될 양곡을 수송하는 비결은 상인의 입장에서 무척 궁금했다. "알았어, 양식을 마련해 줄 테니 상공에게 알아서 가져가라고 해." "정말요. 고마워요." "무슨 소궁주님이 부탁하신 일인데……." 하화리는 을주의 노가장(瑙家莊)에 모아놓은 군량 1만석 내놓기로 했다. 그 리고 어떻게 그것을 옮기는지 반드시 알아내겠다고 마음먹었다. 라혼은 향당의 끝없이 펼쳐진 감곡 하얗게 꽃이 핀 사당수수밭을 둘러보며 향당의 설명을 들었다. "상질의 석밀을 만들려면 사탕수수가 적당히 자랐을 때, 단기간에 벌채를 마쳐야 합니다. 또한 벌채한 사탕수수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껍질을 벗기고 진액을 짜서 다시 가마솥에 끓여 끊임없이 불순물을 제거해 줍니다. 그렇 게 나온 원당(原糖)을 다시 정제하면 석밀이 완성되는 것이지요. 이모든 작 업이 이루어지는 기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상질의 석밀이 만들어지는 것이지 요." "……." 라혼은 향당의 짤막한 설명을 듣고 석밀이 만들어지는 작업장을 둘러보았다 . 달콤하지만 왠지 느끼한 냄새가 강한 작업장을 지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허름한 마을에 들어섰다. "원래는 이들이 농장의 일꾼들인데 괴질 때문에 운신을 하지 못하고 있어 주공에게 도움을 청했던 것이지요." "괴질?" "고열과 농이 섞인 설사를 하루에도 수십 번 쏟아내고 구토하며 음식을 먹 지 못하더군요." "대장 어서 지나갑시다. 괴질이라잖소." 잔폭광마는 코를 부여잡고는 괴이한 몰골로 일행을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과 멀어지려 애썼다. "사내가 뭘 그렇게 무서워하는 거예요?" "그럼 아가씨는 무섭지 않습니까? 괴질이?" 모석의 말대로라면 싸울 때 외엔 방해만 되는 잔폭광마는 언제나 라혼의 호 위를 맡았다. 그러나 사실은 잔폭광마가 사고치지 못하도록 그가 가장 두려 워하는 존재 곁에 묶어두려는 속셈이 더욱 컸다. 그리고 자신의 신분을 노 출 시킨 포포와 스스로 호위를 자처하는 지심이 라혼을 따르고 있었다. 포 포는 해홍군주인 신분을 노출 시키는 바람에 어머니인 묘낭 묘호란으로부터 백수회로 돌아오지 말라는 엄명을 받고 아예 라혼의 곁에 붙어버렸다. "불쌍하게도……. 대가 대가는 의술도 뛰어나잖아요. 저들을 도와주는 것이 어때요?" 포포는 힘없이 말을 탄 일행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저들은 병자들이 아니다. 향장자 병자들은 어디에 있나?" "그들은 한곳에 몰아 격리시켜 두었습니다." "어르신!" 그때 누군가 뛰어와 향당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처기(處汽) 아니냐?" "어르신께서 보내 주신 의원님께서 병자들을 보시고 처방을 적어 주셨습니 다." "처방?" "마늘이나 황벽나무껍질을 먹이라 합니다." "그것뿐이냐?" "예!" "물은?" "……." 처기는 그제야 향어르신과 함께 온 존재에게 주의가 쏠렸다. 라혼은 둘의 대화에 끼어들어 물었는데 그가 멍하니 있자 재차 물었다. "물은 어떻게 하고 있나?" "물이요?" "식수 말일세." "그거야 환자들이 있는 곳이 계곡이라 계곡물을 마시고 있는데……." "의원이 그것은 일러주지 않은 모양이군. 괴질은 물을 잘못 마셔 걸리는 수 가 많지. 그러니 물은 꼭 끓여 마시고 환자가 있었던 옷이나 덮었던 이불도 삶아야한다. 그리고 환자가 손댄 음식은 손대지 말고 아깝더라도 태우거나 끓여서 땅속에 묻어야 하지…." "……." "처기, 인사드리게 내가 모시기로 한 분일세……." "예에?" 라혼이 하던 말을 멍하니 듣기만 하던 처기는 향당의 말에 크게 놀라며 잘 생겼지만 평범해(?) 보이는 라혼에게 정식으로 예를 갖추었다. "감촌의 촌장 처기입니다." "아까 의원이 말한 약재는 있는가?" "그것이 저희들이 먹던 마늘은 있지만 양이 많지 않습니다." "그렇군. 육삼, 지금 봉수성으로 가서 마늘과 약방에 들려서 적리(赤痢)에 좋은 약재를 사와라! 그리고 모석에게 모든 노예들을 이곳으로 데려 오라해 라." "존명!" "1만 명이 머물 수 있는 공터가 있나?" "옛, 안내 하겠습니다." 라혼은 감곡의 지세를 보고 이곳에 군영(軍營)을 꾸릴 생각을 했다. 1만 이 나 되는 노예들 중에서 젊고 건장한 노예는 대략 4천, 나머지는 나이가 들 었거나 몸이 부실했다. 그러나 영양상태가 좋아지면 그중 약 1천은 건질 수 있었다. 라혼은 그들에게 무장을 시켜 병졸로 훈련시킬 생각이었다. 감곡 은 사탕수수밭 밖에 수풀이 우거진 밀림이 있었지만 지세가 대략 평탄했다. 밀림의 나무를 걷어내면 훌륭한 연무장이 될 수 있었다. 병사들을 훈련시 킬 곳은 봉수성 근처에 이미 마련해 놓았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쓸데가 있었 다. 바로 봉수성의 관병을 모아 훈련시켜야 하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노 예들과 그들을 한데서 훈련하면 문제가 많을 것이기에 그것을 피하기 위해 서라도 그것을 꼭 필요한 조치였다. 백호천하(白虎天下) 백호나한이 돌아오자 봉수성은 활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각 거점에서 개별 적으로 움직이던 수군들을 흡수하는 작업을 마무리하고 그간 봉수성 창고에 자리만 차지하던 물건들이 백호수군이라 불리기 시작한 투함(鬪艦)들에 옮 겨 실었다. "대수영에 속하지 않은 수군들을 흡수하는 것은 순조롭게 마무리 되어 숫자 상으로 천하제일의 함대가 만들어 졌습니다. 투함이 23척, 순시선에 87척, 쾌속선이 157척입니다. 수군병력만 8천이 넘습니다. 그러나 배가 노후화되 거나 싸우기에 적합하지 않은 배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해노가 앞으로 힘써주시오." "힘닿는 데까지 해보겠습니다." 라혼은 수군을 흡수하는 작업을 마무리하고 돌아온 장상의 보고를 받았다. 라혼은 장상이 돌아오자 봉수성 상인들에게 창고에 쌓여있는 물건들을 사들 여 투함에 싣게 했다. 그 일을 처리하기 위해 북지성의 항구요새를 물색하 던 토귀를 불러들여 앞으로의 일을 의논했다. "토귀, 지금 토금전장의 자금사정은 어떠한가?" "부족합니다. 주공이 추진하는 일들이 모두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일인지 라……." "부족하면 꾸어 쓰면 되지 않나?" "예?" "토금전장의 이름으로 제평, 남경, 중경, 상경, 북경, 서경 등의 대부(大富 )들에게 빌리고 여인천궁에서도 얼마간의 자금을 가져와라. 그리고 향당도 도와 줄 것이다." "향당이요? 감곡의 그 향장자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그는 인색한 구두쇠로 유명한데 어찌……." "내가 검소하기는 하나 인색한 구두쇠는 아닌데……." "……." 토귀의 말에 한쪽에서 말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추레한 노인이 끼어들 며 말하자 토귀는 크게 놀랐다. 향당은 그런 토귀를 보고 라혼에게 말했다. "주공, 아무리 그래도 통성명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향당은 단 하루에 사탕수수 벌채를 끝내고, 곧바로 석밀을 만들기 시작했다 . 추수를 하던 날 향당은 백호나한이 누구인지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그날 백호나한은 검기(劍氣)로 사탕수수를 벌채했고 백호영이라는 군사들이 나 서자 일주일을 예상했던 벌채는 하루에 끝이 나버렸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추수한 사탕수수밭에 비료를 주고 다시 심어야하는 작업을 해야 했고, 동시에 벌채된 사탕수수를 다듬어 착즙을 하고 가마솥에 끓여 불순 물을 제거해야 하는 작업을 봐야 했다. 그러나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어 참 가하라 명을 받아 봉수성으로 왔는데 주공인 백호나한은 돈을 내라는 말만 할 뿐 앞으로 한배를 탄 사람들은 소개조차 시키지 않았다. "남례성의 장자 향당으로 앞으로 우리와 함께 일할 동지다. 서로간의 안면 은 차차 익히기로 하고 내가 오늘 모이라한 이유는 밝힐 것이 있어서 그렇 다." 라혼의 말에 고학과 모원, 모석 등은 눈치를 챘지만 다른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라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천상천화는 백호다." "……." "목표는 원주로의 진입이다. 하지만 나는 정치력만으로 원주로 진입할 생각 은 없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하나 나지 않을 것 같은 침묵 속에서 라혼은 홀로 이야 기를 계속했다. "나는 현 조정에 반(反)할 생각이 없다. 그러나 나름대로 영향력을 키워갈 것이다. 3년이다. 3년 안에 서해를 완전히 장악하고 동시에 장강대하를 장 악할 것이다. 또한 남해에도 영향력을 키울 것이다." "그럼 남상의 서해대수영과 남례성은 어찌하시렵니까?" 고학이 물었다. "나서지 않는다. 그 일은 조정의 하남천원군 참장으로써 임무를 완수할거다 ." 간단명료(簡單明瞭)한 라혼의 대답은 실상 간단하지 않은 일이었다. 현 조 정을 뒤엎지 않고 이어받는다는 뜻이 될 수도 있었고, 때를 보아 기다린다 는 뜻으로 들리기도 했다. "토귀, 해진이 들어설 자리는 물색해 놓았나?" "예! 비교적 한갓진 곳을 찾았는데 태회진(泰回陣)란 곳으로 옛 수군 터인 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오랫동안 방치해 두어 수십 가구가 모여 사는 어 촌입니다." "위치는?" 토귀는 주공의 물음에 지도책을 짚어가며 말했다. "태회진은 여기에 위치해 있고, 해안을 따라 만들어진 길이 있어 교통도 불 편함이 없는 곳입니다. 게다가 주변에 질 좋은 아름드리나무가 자라는 숲이 있어 조선소에서 필요한 목재와 철방에서 사용될 연료를 구하기 쉬운 곳입 니다." "철광석의 수급은?" "그것에 관해서 말씀 들릴 것이 있는데 거의 모든 철광은 조정에 속해 있습 니다. 해서 철광석은 외부에서 사들여야 하는데 저희가 소모할 대량의 철광 석을 댈 수 있는 곳은 의백성(義白城) 해상세력인 의백최가(義白崔家)정도 입니다. 게다가 배를 만드는 장인을 만이 보유한 곳도 바로 그곳인지라…… ." "여인천궁의 이름으로 그들과 손을 잡으면 되겠군. 가능한가?" "저도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의백성은 인시드 대륙북부와 연결되어 있는 곳이었다. 광산을 개발하고 관 리하는 것은 조정이었지만 외부에서 철광석을 들여오는 것은 묵인해주고 있 었다. 그리고 의백성에는 대단위 철광이 있어 거기서 채굴되는 철광석이 민 간에 흘러나왔지만 수요가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금에 이르러서는 철광 석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는 실정이었다. 라혼은 토귀의 보고를 끝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다시 설명했다. "북지성에 만드는 해진은 배를 만들고, 철기를 생산하는 것이 주가 되고 이 곳 봉수성이 기항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함대의 제독은 여기 장상이 맡 아 나와는 별도로 운영한다. 고학!" "예, 주군!" 라혼은 여기까지만 이야기하고 고학에게 설명을 부탁했다. "앞으로 모든 일은 공과 사가 나뉘어 처리될 것입니다. 공으로는 하남천원 군으로써 임무를 다하는 것이며 사로는 바다를 장악해야 합니다. 바다를 장 악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남상의 서해대수영은 조정의 토벌함대를 도움으로 써 인시드 남주무역의 지분을 확보하고 여세를 모아 여기 금대부의 토금전 장의 이름으로 장강대하의 내륙수운에 진출하여 영향력을 확대시킬 겁니다. 또한 향장자의 감곡 사탕수수 농장을 더욱 확대하여 석밀생산을 늘리고, 석밀과 철기를 주력으로 세를 확대시키게 될 것입니다." 고학이 처음 라혼에게 천명을 이야기 할 때 생각한 것은 천명을 받아 조정 에 반해 할거(割據) 후 세력을 키워나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主)가 될 존재가 신수(神獸) 백호(白虎)인 이상 생각을 달리해야 했다. 백호가 비록 신수이나 수인(獸人)인 것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섣불리 조정에 반기를 들면 조정에서는 백호를 주(主)로 하는 쪽을 가장 위험하게 보고 총력을 기 울일 가능성이 컸다. 현 천자(天子)인 호황의 입장에선 백호가 가장 껄끄러 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주조정 내부로 들어가면 백호의 존재는 후계 자의 지위를 바라볼 수 있게 되는데 그렇기 위해서는 지지기반이 확고할 필 요가 있었다. 그래서 라혼의 하남천원군의 장수로써 지위와 바다를 무대로 한 세력은 참으로 적절하다 할 수 있었다. 원주와 멀리 떨어진 남례성을 기 반으로 하고, 바다의 길을 확보함으로서 언제든 아무런 장애물이 없이 물길 을 통해 원주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게 되려면 타 세력을 압도하는 해상력이 필수조건이었다. "그리고 백호함대도 그 운영을 남례성 수군함대의 얼굴과 토금전장의 상선 단의 얼굴을 따로 할 필요가 있습니다. 형식상으로 토금전장의 선단을 남례 성 수군이 빌려 쓰며 이후로 다시 돌려주는 것으로 모양새를 꾸밀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조정에서 창설한 토벌함대와 서해대수영이 서로 힘을 겨 룰 때 어부지리(漁父之利)를 노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학의 설명이 대충 마무리 되자 모석이 물었다. "그럼 하남천원군은 어찌 하실 겁니까?" "금영월 대장군 말인가?" "예." "내가 하남천원군 장수신분을 유지하는 이상 그를 따를 것이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남례성의 안정이다. 남례성의 소요를 바로 잡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백호영은 그것을 명심해라!" "존명." "최우선순위는 백호수영(白虎水營)이다. 그 다음이 북지성의 태회진이다. 남례성의 병력증강은 봉수태수부의 자금으로만 감당한다." 회의가 끝나고 라혼은 귀림 드워프 마을로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했 다. 앞으로 여러모로 요긴하게 쓰일 역석(力石)과 그 역석을 이용한 목우유 마(木牛流馬)를 설계하기 위해서였다. 목우(木牛)는 직접 등에 싣게 되어있 는 것으로 다리가 있어 수레를 이용하기 어려운 곳을 지날 때 쓰였고 유마( 流馬)는 바퀴가 달려 수레를 끌거나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위대한 분이시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역석은 완성되었나?" "예, 활성화만 시키면 충분히 기능을 할 겁니다." 라혼은 촌장 블로가 건네주는 어른 머리통만한 12면체 형태의 역석에 마나 를 주입해 역석을 구성하는 108개의 마법진을 활성화시켰다. 역석의 구조는 12면체의 마나물질을 5겹 감싼 형태로 가장 안쪽의 안쪽만 제외하고 양면 에 한 가지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시드그람 대륙에서 사용하던 마나스톤 과 엑스시온이 합쳐진 형태였다. 마나스톤은 마법이 걸린 물체나 마법진에 지속적으로 마나를 공급하고 엑스시온은 마나스톤이 공급하는 마나를 다른 운동에너지로 바꾸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번에 새로 만든 역석(力石)은 마나스톤과 엑스시온의 일체형이었다. 마나스톤의 작동 원리는 지수화풍(地 水火風)의 4원소 원리에 에테르(Ether)개념이 석인 것이었다면 역석은 일원 (一元), 양의(兩儀), 삼재(三才), 사상(四象), 오행(五行), 육효(六爻), 팔 괘(八卦), 칠성(七星) 구궁(九宮)의 원리로 만들어 졌다. 일원은 태초에 우 주에 존재했던 단 하나의 기운으로써 질서와 혼돈(混沌)이 뒤섞인 형태 즉 에테르(Ether)를 말했고, 양의는 음양은 하늘과 땅 빛과 어둠, 뜨거움과 차 가움, 활동과 휴식, 억셈과 부드러움 등 서로 상반된 2가지를 말하고, 삼재 (三才)는 하늘(天), 땅(地), 사람(人)인데 하늘은 시간, 기후 보이지 않는 원리, 기(氣) 등이며 땅은 풍토와 보이는 물체나 힘이다. 인은 그 안에 살 아가는 모든 것은 양성(陽性), 중성(中性), 음성(陰性)이다. 사상은 태양( 太陽), 태음(太陰), 소양(少陽)), 소음(少陰)이고, 오행은 화수목금토(火水 木金土), 육효(六爻)는 삼재의 음양, 칠성은 천추(天樞), 천선(天璇), 천기 (天璣), 천권(天權), 옥형(玉衡), 개양(開陽), 요광(搖光) 팔괘는 건(乾), 태(兌), 이(離), 진(震), 손(巽), 감(坎), 간(艮), 곤(坤) 구궁은 휴(休), 사(死), 상(傷), 두(杜), 개(開), 경(驚), 생(生), 경(景)에 중궁(中宮)이 다. 이모든 것은 각각이 상징하는 것이 모두 다른데 방향으로 예를 들면 일 원은 아무것도 아닌 점(點), 양의는 선(線), 삼재는 면(面), 사상은 사방( 四方)인데 동서남북(東西南北), 오행은 오방(五方)으로 동서남북중(東西南 北中), 육효는 육합(六合)으로 동서남북(東西南北)에 상하(上下), 칠(七)은 거기에 중심 팔괘의 팔방(八方)은 동서남북(東西南北)에 동북(東北), 동남 (東南), 서북(西北), 서남(西南) 구궁은 팔방에 중궁(中宮)을 더한 것이다. 십(十)은 거기에 시간(時間)의 흐름이 더해진 것이다. 그것은 마나(Mana) 나 기(氣)의 운용에도 소용되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라혼이 마나를 주입함으로써 활성화된 역석은 그 자체적인 힘으 로 허공에 띄워졌다. 108개나 되는 마법진을 단 한번에 활성화시킨 라혼의 능력에 역석을 만들어 놓고 과연 이것을 활성화 시킬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 던 드워프들은 경이적인 드래곤(?)의 능력에 전율했다. "성능을 시험할 도구는 있나?" "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블로는 어른 머리통만한 역석의 8각 면에 관(管) 연결하고 기관을 풀었다. 그러자 임시로 만들어진 기관에 달린 바퀴가 빠른 속도로 돌기 시작했다. -드르르르르………………. -오오~! "성공이다." -우웅웅웅웅웅웅~! 그러나 바퀴가 도는 속도가 점점배가 되면서 바퀴살사이에서 엄청난 바람이 나오기 시작했다. "……." -꽈직! 퍽~! 그리고 자체적인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맹렬히 회전하던 바퀴는 임시로 만 든 기관에서 떨어져 나와 천정을 부쉈고 기관은 터지듯 분해되어버렸다. 일 이 이렇게 되자 드워프들은 드래곤(?)이 진노를 걱정하며 라혼의 눈치를 살 폈다. 하지만 라혼은 자신이 설계한 역석의 성능에 만족스러웠다. "괜찮군. 하지만 조금 큰듯한데?" 라혼의 만족스러워하는 반응에 드워프 촌장 블로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 쉬며 말했다. "이것은 시제품적인 성격이 강해서 그렇습니다. 혹시나 몰라 분해와 조립이 용의하도록 일부러 크게 만든 것이니까 앞으로는 어린아이 주먹만 하게까 지 쉽게 줄일 수 있을 겁니다. 위대한 분이시여……." "좋다. 앞으로 얼마나 만들 수 있지?" "지금 저희가 가진 재료로 1백여 개 정도 만들 수 있습니다." "시간은?" "백일정도 필요합니다." 라혼은 에텔 스페이스에서 목우유마의 설계도를 꺼내 블로에게 내밀었다. "이것은?" "역석을 이용한 운송기구다. 만들 수 있겠나?" "어렵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역석을 이용한 여러 가지 동력기관을 만들려 한다." 라혼은 드워프들에게 석밀을 만드는 공정을 설명하고, 배를 움직이는 자동 노(櫓)의 설계도 부탁(?)했다. 드워프들은 자신의 손재주를 뽐내거나 새로 운 것을 만드는데 열정적인 면이 있었다. 역석도 그렇지만 그 역석을 이용 한 다양한 생각들은 그럼 드워프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라혼은 드워프들에게 일거리를 한 아름 안겨주고 가니아가 머물고 있는 곳 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백호천하(白虎天下) 하남대원수 금영월이 직접 이끄는 대군은 벌써 보름간 천수교를 떠나지 못 하고 있었다. 천수교에 도착하면 곧바로 호도(好都)로 진격할 수 있을 것이 라 생각했으나 1만 5천의 반란 진토인들이 밀림에 스며들어있었기 때문에 섣불리 천수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5천 선발대가 그들의 매복 에 걸려 돌아온 자가 열 몇에 불과 했기 때문이었다. "금대장군, 이대로 여기서 시간을 보낼 수만은 없습니다. 다소간의 피해를 각오하더라도 대군을 몰아쳐 호도를 탈환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호도를 치고 주변을 정리하면 기반을 잃은 반란 진토인들은 지리멸렬할겁니다." "……." 금영월은 제장들의 재촉에도 별 말없이 라혼참장이 주고 간 지도를 뚫어져 라 노려보기만 했다. 제장들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듯 하지만 라혼참장 의 보고 한대로 후선의 강무세가가 반란 진토인 뒤에 있다면 밀림을 집으로 생각하는 진토인들은 두고두고 우환거리가 될 것이 뻔했다. 금영월이 생각 하기에 호도를 공략하는 것보다 1만 5천이나 되는 진토인 무리를 토벌하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만약 그들을 그대로 두고 호도를 공략한다고 해도 호 도에서 봉수성으로 가는 길이 끊기는 최악의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 였다. "대장군, 강무세가가 진토인들에게 얼마간 지원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계속 유지될 리 없습니다. 원주조정은 물론 갑주와 임주, 경주에서도 대군 이 모병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반적 강무세가는 주력은 앙신성에 묶여있다 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밀림에 숨어있는 반란 진토인들은 그 수가 너무 많습니다. 1 만이 넘는 대군을 먹이는 것은 보통일이 아닙니다." "으음……." 부관 정령(正領) 작도인(鵲途認)과 정령 상초(狀初)의 지속적이 설득에 금 영월도 어떻게든 움직여야할 필요를 느꼈다. 그러나 천수교에서 호도까지 이어진 다소 좁은 관도가 마음에 걸렸다. "대장군, 정찰병이 돌아왔습니다." "들라해라!" 금영월의 고민이 계속되는 가운데 마침 정찰병아 돌아왔다고 하잔 반가운 마음으로 그를 불렀다. "충! 대장군, 적의 대군이 14마리의 코끼리와 수만 대군을 이끌고 이라이 초지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이라이 초지?" 금영월은 이라이 초지라는 말에 자연스럽게 지도에 눈길을 주며 이라이 초 지의 지형을 살폈다. 이라이 초지는 천수교와 호도의 사이에 있는 거대한 평원이었다. 그러나 그 평원에는 사나운 맹수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어 사람 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군이 회전(會戰)을 벌이기에 그만한 곳이 없었으며 거의 유일한 곳이었다. 수만 대군이 맹수를 무서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대장군!" "천수교에 1만을 두고, 전군을 몰아 이라이 초지로 간다. 걸어온 싸움을 피 할 이유가 없겠지." "존명!" 금영월의 명이 떨어지자 4만 대군이 천수교를 떠났다. 숨어있는 진토인들은 무섭지만 들어난 진토인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천수교 동안(東岸)에서 끝없이 토해져 나오는 대군을 멀리서 지켜본 눈이 있었다. 머리는 새에 깃으로 장식을 하고 붉고 검은 물감으로 얼굴에 줄을 그린 열지족 전사는 천수교에서 더 이상 대열이 빠져나오지 않을 때까지 기 다렸다. 더 이상 문밖으로 나오는 군사가 없자 몸을 움직여 밀림 안으로 스 며들었다. 빠른 속도로 밀림을 달리던 열지족 전사는 서너 명의 열지족 전 사들이 모여 있는 곳에 도착했다. "초가님 말대로 4만에서 5만 대군이 천수교를 빠져나왔습니다." "천수교에 남아있는 관군은 얼마나 되나?" "그것은 알 수 없지만 천수교 다리가 끊는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곧 마지막 우기(雨期)가 시작되면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포로로 잡혔던 치욕을 반드시 갚아 주리라!" "검은 곰과 회색 늑대의 후예들이여……. 이제 긴 잠에서 깨어날 때다." -와아와아~! -크앙~! -아우우우~! 끝없이 펼쳐진 대초원을 가득 메운 곰인간과 늑대인간들……. 그리고 그들 의 가죽을 몸에 두른 곰 숭배자들과 늑대숭배자들 바로 흑막을 지배하는 웅 랑교(熊狼敎)의 교도들이었다. "들어라! 저기 중원에 들어가 초원을 바람을 잊은 무리들이 타락하고 또 타 락했다. 이제는 우리 진한 붉은 피를 지닌 곰과 늑대가 천하의 주인이 될 때가 왔도다." -와아와아~! -크앙~! -아우우우~! "들어라! 신룡 앙(殃)이 우리와 함께 있어 이것은 곧 천명(天命)이니 곰과 늑대의 시대가 오리라!" -카오~! 웅랑교 대종사(大宗師) 낭재천(狼在天)은 드넓은 초원 너머에 까지 울리는 대낭후(大狼吼)를 터트렸다. 그렇게 출정의식을 마친 웅랑교 3만 교도들은 흑막제일성시(黑幕第一盛市) 제평(齊平)을 향해 일제히 진군을 개시했다. *** 불새의 무녀 가니아는 스스로 토지신 마을에 남길 원했다. 만약 자신이 세 상에 나선다면 세상이 그것으로 인해 더욱 시끄러워 질것을 알기 때문이었 다. 평생을 동굴이나 집안에서 활동하거나 명상사색을 즐기던 가니아였기에 불편함은 없었다. 게다가 말로만 들었던 불새의 깃털은 가니아의 호기심을 자극했기에 나름대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가니아를 라혼이 찾아오자 가니아는 자신의 평정이 깨어질까 두려웠다. "오셨습니까? 라혼." "오랜만이오. 지내기엔 괜찮소?" "예, 이곳 토지신들이 제가 불새의 무녀인 것을 알고 이것저것 챙겨주어 불 편함은 없습니다." 라혼은 여전히 고아하고 정결한 분위기의 가니아를 보고 남례성의 진토인들 이나 드워프들이 그녀를 함부로 못하는 것을 이해했다. 아마도 그녀를 가장 함부로 다루는 자는 라혼 자신이 유일 할 것이라 생각이 들기도 했다. "카쿤!" "예! 아이쿠!" 드래곤이 가니아를 찾아오자 카쿤은 드래곤의 시야에서 벗어나 둘의 대화를 엿듣고 있다 드래곤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허겁지겁 나오다 돌로 만든 탁자에 부딪쳐 무릎에 상처가 생겼다. "저런, 조심하지 않구." "가니아." 가니아가 쓰러진 카쿤에게 다가가 상처가 나서 피가 배어나오는 곳에 두 손 을 모았다. 그러자 그렇게 밝지 않은 온유로운 하얀빛이 카쿤의 상처를 감 싸더니 이내 상처와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고맙습니다. 가니아." "카쿤!" "예, 위대한 분이시여…." "햇볕이 음습한 지하는 사람에게 좋지 않다. 가니아가 안전하게 머물 수 있 는 곳이 없나?" 카쿤은 라혼의 질문에 뭔가 궁리하는 듯하더니 라혼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 고는 말했다. "적당한 곳이 있기는 한데 그곳은 트롤 왕이 사는 곳이라." "트롤왕?" "예, 원주민들이 귀매왕(鬼魅王)이라고 부르는 엄청난 거인(巨人) 이예요. 그곳의 외부로 통하는 입구가 좁아 덩치 큰 트롤왕이 빠져나가지 못해 귀왕 곡(鬼王谷)에 갇혀있어요." "좋다. 안내해라!" "예? 제가요?" 카쿤은 드래곤에게 그 곡에 대한 것을 가르쳐준 것에 대해 후회했다. 하지 만 당장은 눈앞의 드래곤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 무서웠으니 어쩔 수 없이 안내해야만 했다. 드워프 마을은 그린 드래곤 드라오디프가 이곳에 둥지를 틀면서 그가 지슈인드 고원에서 잡아온 드워프들이 모여 만들어진 마을이 었다. 드라오디프는 드워프뿐만 아니라 가디언 삼아 트롤들을 잡아다 자신 의 레어주변에 풀고 그중 몇을 골라 마법을 걸어 훨씬 크고 훨씬 수명이 길 며 강한 트롤을 만들어 가디언으로 삼았다. 귀왕은 마지막으로 남은 그 거 대화된 트롤들의 후손이었다. 즉, 카쿤이 말한 귀왕곡은 다름 아닌 드라오 디프의 레어가 있던 바로 그곳이었다. "이곳인가?" "예." 귀왕곡은 숲과 나무를 좋아하는 그린 드래곤의 둥지답게 거대한 나무숲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게다가 솜씨 좋은 정원사가 손질을 계속한 듯 무성하지 않고 나무의 생장에 방해되는 모든 것이 제거 되어 있어다 그리고 숲의 중 심이 귀왕곡 내부로 갈수록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나무들이 있었는데 둘 레가 족히 10장(丈:1장은 대략 어른 키 한길)은 되어 보이고 키 또한 40장( 丈)이 되는 거대한 나무들이 지천에 널려있었다. 그것은 라혼과 카쿤이 숲 의 내부로 들어오자 더욱 확실해 졌다. 나무와 나무사이는 상당히 넓게 떨 어져 있어 하늘을 찌를 듯한 나무들이 있는 숲인데도 햇볕이 잘 들었다. "이곳은 귀왕림(鬼王林)인가?" "예? 어떻게 아셨어요?" "그럴 것 같더군. 그런데 정작 트롤왕은 보이지 않는데?" -꾸어어어어어어~! 바로 그때 숲 전체를 울리는 괴성이 들려왔다. 거대한 포효가 소용돌이치자 카쿤은 안색이 창백하게 질리며 떨기 시작했다. "미약하기는 하지만 피어 크라이(Fear cry)로군." 라혼은 카쿤을 떨게 한 괴성에 드래곤 특유의 피어가 섞여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라혼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않았다. -나와랏! -쿠릉~! -샤사사사사사 샤아~! 라혼이 피어 크라이(Fear cry)에 맞서 대사자후(大獅子吼)에 피어(fear)을 섞어 외치자 숲 전체가 요동치며 울부짖는 듯했다. -꾸어어어어어어~! 라혼의 말(?)에 답이라도 하듯이 괴성은 점점 가까워지고 미약하게 지축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꾸어어어어어어~! -쿵쾅, 쿵쾅, 쿵쾅, 쿵쾅, 쿵쾅………………. 그리고 라혼 앞에 나타난 것은 키가 5장(丈)정도 되어 보이는 거대한 산만 한 트롤이 자기 덩치보다 더 큰 곤봉을 든 위압적인 모습이었다. -꾸어어어어어어~! -훙~! 엄청난 풍압을 동반한 거대한 곤봉이 바람을 가르며 라혼과 카쿤이 있는 자 리를 내리찍어왔다. 카쿤은 엄청난 귀왕의 모습에 넋이 나가 꼼짝하지 못했 고, 라혼은 곤봉이 밀어낸 풍압을 느끼며 끝까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 -쿵! 귀왕이 휘두른 자기 머리통보다 큰 곤봉의 머리가 반이나 땅에 박히고 그 충격에 주변의 거대한 나무가 흔들렸다. 그러나 귀왕은 흉포한 괴성을 다시 내지르며 땅에 박힌 곤봉을 잡아 뺐다. 곤봉아래에서 피떡이 되어 형체도 없이 부숴져야할 침입자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난쟁이 꼬마를 옆구 리에 끼고 땅에 박힌 곤봉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꾸어어어어어어~! -훙~! 라혼은 귀왕이 곤봉을 거칠게 들어 올리자 몸을 허공에 띄우며 카쿤를 나무 위로 집어던졌다. 그리고 동시에 아라한 격투술 강격(强擊)을 내질렀다. -파캉! 대기가 찢기는 강격특유의 소리가 나며 귀왕의 복부에 작렬했지만 귀왕은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거대한 곤봉으로 허공에 떠있는 라혼을 후 려쳐왔다. -꾸어어어어어어~! -훙~! "블링크Blink!" 거대한 곤봉은 허공을 가르며 지나갔고, 라혼은 다시 귀왕에 등뼈 급소에 해당하는 부분에 다시금 강격을 시전했다. "강격!" -파캉! -크아아아~! 성기력(聖氣力)이 충만한 강격은 귀왕의 등뼈에 작렬하고 귀왕은 다시금 엄청난 충격이 등을 때리자 참지 못하고 푸른 피를 토해냈다. 그러나 귀왕 의 동작은 전혀 굼떠지지 않았다. 바로 뒤로 돌아서며 곤봉을 휘몰아쳤기 때문이었다. 카쿤은 까마득한 높이의 나무에 매달려 거인과 싸우는 라혼의 모습을 구경했다. 그 드래곤은 본신으로 화지 않은 체 거인 귀왕을 맨손으 로 때려잡고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의 처지를 잊은체 싸움을 구경하느라 여념 이 없었다. "만천유성권(滿天流星拳)!" -휘루루루룽……. -우르릉~! -빠바바바바바바………………. 금강만천유성권(金剛滿天流星拳), 뇌정지기(雷霆之氣)의 다른 이름인 금강 의 공력이 깃든 라혼의 권력이 선풍신법(先風身法)함께 펼쳐지자 귀왕을 중 심으로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일며 웅혼한 뇌성(雷聲)과 거친 바람이 사위를 휩쓰는 가운데 마치 콩 볶는 듯한 소리가 섞여 들여왔다. -뀌에엑~! 귀왕은 침입자가 전신을 난타하자 고통에 겨운 괴성을 지르면서도 거대한 곤봉을 휘두르는 것을 포기 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대는 곤봉이 미치지 않 는 너무 가까운 곳에 있었기에 그것을 고통의 겨운 몸부림이상의 것은 아니 었다. 라혼은 체술(體術)만으로 귀왕이란 거대한 트롤 거인을 상대하는 것 을 포기하고 마법을 시전했다. "매스 매직 미사일Mass Magic missile!" -파바바바바바……………………. [매직 미사일Magic missile]에 대량주문 [매스Mass]를 조합한 조합마법 [매 스 매직 미사일Mass Magic missile:대량 매직 미사일]이 [매직 미사일Magic missile] 특유의 하얀 빛살을 타고 귀왕을 난타하기 시작했다. 라혼이 이 렇게 약한(?) 기술을 사용하는 이유는 귀왕을 죽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 다. 라혼에게는 영인(靈刃) 소울 블레이드(Soul blade)도 있었고, 에텔 스 페이스를 이용한 궁극기인 무한(無限)의 검(劍), 인피니티 소드(Infinite s word)도 있었다. 그러나 아직 제어가 확실히 되지 않는 그런 큰 기술을 쓰 면 트롤왕이 견디지 못할 것이고 대단위 마법을 사용하면 숲이 다칠까하여 되도록 자제했다. 하지만 이런 약한(?) 공격으론 귀왕을 제압할 수가 없었 다. 그러나 필요는 언제나 발명과 발견의 어머니다. 라혼은 퍼뜩 떠오른 생 각을 실천했다. "마음속의 검이 있고 영혼의 검이 영혼을 치리니 그것이 영인(靈刃)의 오의 (奧義)다." 라혼은 마음의 검(心劍)으로 귀왕의 마음을 베어갔다. -꾸웍? 귀왕의 전신을 난타하는 [매직 미사일Magic missile]이 멎고, 광분하던 귀 왕도 넋이 빠진 듯 칠공에서 푸른 피를 흘리며 곤봉을 휘두르는 것을 잊었 다. -사아아아아~! 나무위에 카쿤은 아까까지 들려오던 귀왕의 괴성과 콩 볶는 소리가 멎고 숲 을 휘감는 바람소리만 드려오자 숨을 멈추며 질식할 것 간은 침묵에 가위눌 렸다. 그리고 거대한 귀왕이 무너지듯 스러졌다. -쿵! 촤아아아~! "성공이다. 후후후, 이거야! 나는 또다시 새로운 경지를 보았다. 하하하하 하하하하…………." 그리고 또하나의 깨달음을 얻은 희열에 찬 라혼의 웃음소리가 거대한 나무 들의 숲 사이로 넓게 퍼져나갔다. 라혼의 약점은 깨달음의 순서가 뒤죽박죽 이란 것이었다. 차근차근 역량을 쌓아 올린 것이 아니라 힘을 먼저 얻고 그 힘을 다루는 법을 뒤에 배웠다. 그러나 칸 대륙에 와서 깨달은 것은 같은 힘이라 할지라도 훨씬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무예고 무공이었다. 그러 나 라혼의 경우는 엄청난 힘을 주체 못해 제어하는데 급급해 힘이 낭비되는 요소가 많았다. 그러나 많은 기술과 무공은 라혼에게 있어 참고는 될지언 정 진정 필요한 것은 없었다. 효과적으로 다루는 힘의 크기가 작아 라혼이 그대로 사용하기에 무리가 따른 것이었다. 작은 내가 흙만으로 막을 수 있 다고 큰 강이 같이 생각하며 흙으로 만든 둑은 금세 무너질 것이 뻔하듯이 ……. 그러나 이제 라혼은 심검(心劍)의 한 부분을 깨닫고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는 것은 힘의 제어가 더욱 용의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라혼은 더욱 강해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한동안 그렇게 시원스런 크게 웃던 라혼은 격공흡인(隔空吸引)의 능공섭물( 綾空攝物) 수법으로 수십장 위의 나뭇가지에 매달려있는 카쿤을 내려주고 귀왕의 머리꼭대기 백회혈(百會穴)에 장심(掌心)을 붙이고 진기(眞氣)를 주 입했다. -크르르르르르……. 그러자 귀왕의 몸이 부르르 떨리더니 이내 눈을 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 였다. 갑자기 몸을 일으켜서 옆에서 라혼이 하는 양을 조마조마하게 지켜보 던 카쿤을 쪼그라든 간을 떨어지게 하지는 않았다. "소울 토크Saul talk!" "……." 라혼은 [소울 토크Saul talk:영혼의 대화]주문으로 귀왕과 대화를 시도했다 . 그러나 전해지는 것은 극도의 두려움뿐이었다. 라혼은 영혼으로 전해지는 깊은 두려움과 외로움 그리고 혼란을 느끼고 자신이 발휘한 새로운 심검 영인(靈刃) 소울 블레이드에 흉험한 살기가 짖게 배어있음을 알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아직 라혼이 미숙하다는 증거였기 때문이었다. 라혼은 귀 왕에게 자신이 그를 해칠 의도가 없음을 전하고 이곳에 온 목적을 전했다. 부드럽기 그지없는 기운에 다소간의 두려움을 거둔 귀왕은 자신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기억하는 모든 것을 전해왔다. 트롤, 귀매의 왕이라 불린 거대한 트롤은 그린 드래곤 드라오디프가 잡아 그의 레어를 지키는 12마리 거대화한 트롤의 마지막 남은 후예였다. 트롤들 은 그린 드래곤 드라오디프의 명령에 따라 숲을 가꾸고 침입자를 막는 역할 을 충실히 행했다. 원래 드래곤이 죽으면 그 드래곤에 속한 족속들은 해방 되지만 미숙한 그린 드래곤 드라오디프는 가디언들을 완벽하게 장악하지 못 하고 그들에게 자신의 피의 일부를 이식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렇기 때문 에 가디언 트롤들은 드라오디프의 레어였던 이곳을 떠나지 않고 숲과 나무 들을 가꾸고 지켜왔던 것이었다. 그러나 거대화된 트롤들은 그 종(種)을 번 성시키지 못하고 결국 귀왕 홀로 남게 된 것이다. 라혼은 그러한 사실을 알 수는 없었지만 귀왕의 고독과 두려움, 신념 등을 읽고 이내 [소울 토크Saul talk]주문을 거두었다. "휴우~! 이 주문은 쓸 것이 못되는군. 다른 존재의 두려움이나 괴로움을 함 께 느끼게 하다니 정신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라니……." 라혼은 처음 사용한 [소울 토크Saul talk]의 부작용에 한껏 들뜨던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자 고개를 저었다. 다른 영혼이 느끼는 그대로 느끼는 것은 참으로 무섭고 두려운, 그리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어느 정도 지능이 있는 것 같지만 야성이 있으니 안전장치를 해두어야겠지 ." 라혼은 귀왕곡에 가니아의 거처를 마련해 주기로 했다. 그리고 귀왕으로 하 여금 가니아를 보호하게 하기 위해서 그의 야성을 일부 제압할 필요가 있었 다. 그리고 라혼에게는 아주 유용한 방법이 있었다. "은섬충은 되도록 상용하지 않으려 했는데 어쩔 수 없군." 라혼은 에텔 스페이스에서 동면하듯 자고 있던 은섬충(銀蟾蟲)을 꺼내 귀왕 의 납작한 코 부근에 놓자 잠에서 깨어나 꿈틀거리던 은섬춤은 귀왕의 콧속 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라혼은 귀왕에게 명령했 다. "일어서라!" "꾸워?" 잠깐 라혼의 명령을 알아듣지 못하던 귀왕은 곧 라혼의 뭘 원하는 지 깨닫 고 거대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흐엑~!" 귀왕이 몸을 일으켜 세우자 이때까지 라혼이 하는 양을 구경하던 카쿤은 크 게 놀라 자신도 모르게 라혼의 뒤에 서서 더욱 무시무시한 드래곤의 옷자락 을 잡았다. "숙여라!" "꾸워." 라혼은 [토크 몬스터Talk monster] 마법으로 바로 의사를 전달하여 귀왕을 숙이게 하고 카쿤을 데리고 귀왕의 어깨로 올라섰다. "드래곤의 레어로 가자!" "꾸워?" 라혼은 귀왕이 자신의 명령과 이곳의 본 주인이었던 드래곤의 명이 상충되 자 무척 혼란스러워했다. 라혼은 그런 귀왕에게 다시금 심검으로 자신의 명 령이 다른 무엇보다 최우선적이 되도록 각인(刻印)시켰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명령했다. "드래곤의 레어로 가자!" "꾸워." -쿵, 쿵, 쿵, 쿵……. 라혼의 명령에 이번엔 아무런 혼란 없이 육중하기 그지없는 발걸음을 떼어 거대한 나무숲 사이를 걸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이 거대한 동굴이었다. 바 로 그린 드래곤 드라오디프의 생전에 사용하던 레어였다. 라혼은 거침없이 주인이 없는 레어가 있는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안은 의외로 깊거나 하지 않았다. 사실 이 귀왕림 전체가 레어나 다름없음으로 이곳은 단순히 거대한 드래곤의 몸을 누이는 곳이리라. "희엑~! 드래곤이다."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라혼을 따르던 거대한 지하광장을 연상시키는 레 어 한쪽에 누워있는 거대한 도마뱀을 발견하고 기겁했다. 하지만 그것이 바 로 드래곤의 사체(死體)였다. 모르긴 몰라도 충성스런 가디언인 귀왕의 선 조가 옮겨다 놓았을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어찌되었던 라혼의 입장에선 횡재 나 다름없었다. "체액을 모두 대기로 흩어졌지만 본(bone)은 거의 그대로잖아 이거 뜻밖의 횡재인걸." 라혼은 귀왕의 어깨에서 내려와 드래곤 본(Dragon bone)을 둘러보며 혹시나 하는 생각에 목 부분을 뒤져보았다. "역시 있다. 드래곤 하트(Dragon heart)다." 본래 크기보다 훨씬 작았지만 틀림없는 드래곤 하트였다. 그리고 라혼의 신 나는 드래곤 레어 탐험이 시작되었다. 드래곤 본과 드래곤 하트가 그대로 있다면 드래곤이 생전에 모아두었을 마법 아이템이나 보물들이 있을 가능성 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라혼은 상당한 양의 금(金)과 보석들을 찾아 낼 수 있었다. 황금으로만 2백만 관(貫)에 량(量)으로 따지만 2천만 냥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에 보석은 그보다 훨씬 적었지만 보석의 가치를 생각해볼 때 대략 황금과 비슷한 수준일 것이다. 라혼은 모든 황금과 드래 곤 본을 에텔 스페이스에 집어넣고는 넣고는 귀왕에게 물었다. "마법이 걸린 물건이 없는데 그것이 있는 곳을 아나?" "꾸워? 뀌워." 처음 라혼이 무얼 묻는지 알아듣지 못한 귀왕은 다른 드래곤의 재산이 있는 곳을 묻는 것으로 해석하여 레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귀왕이 도착한 곳 은 작은 통나무집이었다. 그곳은 그린 드래곤 드라오디프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 머물던 집으로 천여 년이 흐른 지금도 바로 몇 해 전 지은 것 처럼 깨끗했다. 라혼은 집안을 둘러보며 가니아를 이곳에 머물게 해야 갰다 고 마음 생각했다. 그리고 집안 공간왜곡주문이 걸려있어 겉보기보다 내부 가 10배는 넓어보였다. 그리고 상당수의 마법아이템이 쏟아져 나왔다. 드래 곤이 만든 물건이라 하나같이 훌륭하기 그지없었지만 라혼의 호기심을 자극 할 만한 물건은 없었다. 이미 라혼의 수준은 이곳은 주인이었던 그린 드래 곤 드라오디프를 훨씬 초월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마법 속성이 걸린 무기는 무공을 수련하는 무인에게는 전혀 도움 될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마나나 기(氣)가 약한 일반 병사들이 사용하기에 무구에 걸린 마법은 너무 위력적이었다. 주문이 걸린 무기는 주문을 시전되는데 사용되는 마나나 기 를 사용자에게서 강제로 끌어다 쓰게 되어 있었다. 라혼이 그것을 마나석에 서 끌어다 쓰게끔 할 수는 있지만 마나석이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보다 다 른 것에 이용하는 것이 훨씬 나았다. "흐음 쓰레기들(?)이지만 마나메탈로 만들어졌으니 녹여 다른 것을 만들면 되겠군. 이건 또 뭐야 무한주머니 잔아?" 여러 가지 조잡한(?) 물건들을 뒤적이던 라혼은 가니아를 데려오기 위해 다 시 드워프 마을로 갔다. 그리고 드워프들에게 드래곤 본과 마법물질로 만들 어진 무구들나 아이템을 건네주었다. 드워프들은 라혼이 건네준 물건들을 보고 크게 놀랐으나 카쿤의 말을 듣고 그러려니 했다. 그리고 드워프들은 그동안 비어있던 곳에 새로운 주인이 생겼다는 식으로 인식을 새로 하고 라 혼을 영주(領主)개념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가니아! 귀왕은 이 숲을 가꾸며 이곳을 지키는 존재요. 그대의 명령을 따 르게 놓았소." "배려에 감사합니다." "아내의 선조일지도 모르니까. 당신은 내 가족이오. 이것은 나 연락할 수 있는 물건이오." 라혼은 가니아를 귀왕림의 통나무집에 데리고와 이것저것 챙겨주고 마지막 으로 전환(傳環)을 주고 사용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사흘간 가니아 곁 에서 머물던 라혼은 써도, 써도 넘치는 두둑한 자금을 확보하고 봉수성으로 돌아갔다. 백호천하(白虎天下) -뿌우~! 뿌우~! 14마리의 하얀 회칠한 코끼리가 거대한 탑을 등에 지고 있는 모습이 도드라 지는 반란 진토인 진영을 바라보는 금영월은 이라이 초지에 4만 대군을 포 진시켰다. 그리고 진형을 유지한 체 천천히 반란 진토인들이 진을 친 것을 육안으로 확인되는 곳까지 이동했다. 상당히 드넓고 평탄 초지를 내버려둔 이유를 알수 있을 정도로 이곳엔 맹수들이 많았다. 대대로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당한 맹수들은 하남천원군을 괴롭혔고 덕분에 반란 진토인들과 싸우기 도 전에 상당한 피해를 입어야했다. 거기에 맹독을 가진 독사나 독충들도 하남천원군을 괴롭혔다. 그러나 여기서 대략 2만 대군이 모여 있는 반란 진 토인들을 제압하면 호도근처는 완전히 제압될 것이기에 힘을 냈다. 14마리 코끼리들이 위협되기는 했지만 그 것 외에는 별다른 것이 없었다. 넓은 초 지는 기병에게 절대 유리했고 하남천원군에는 기병 전력만 1만이었다. 비록 코끼리들 때문에 상당한 피해는 각오해야 하겠지만 14마리 코끼리가 얼마 나 유효할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반란 진토인들은 진형을 유지한 체 대치한 체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기병을 미리보내 기습을 시도할 걸 그랬나?" "대장군은 여기까지 와서 기다릴 것이 무에 있겠습니까? 돌격을 명해 주십 시오." "그렇습니다." "좋아, 화살을 쏴서 기선을 제압하고 중앙을 3천 기병으로 적 진형의 중간 을 친다. 그리고 각 2천 기병을 우회시키고 2천을 좌회한다. 그리고 1천을 따로내어 적을 후방에서 친다. 후에 대대적으로 보군을 투입하여 승리를 굳 히는 것이다." 풍부한 기병 전력을 바탕으로 한 포위전술은 이런 평평한 지형에선 가장 효 과적인 전술이었다. 하지만……. "코끼리는 어찌하시렵니까?" "장창병들로 하여금 코끼리를 맡아 처리하게 하면 될 것도 같은데……."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작전이 세워지고 하남천원군의 기세가 엄정해 졌다. 그렇게 되자 열지족 추 장 소노리는 공격이 임밖했음을 느끼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무심 하게도 하늘은 맑고 푸르기 그지없었다. "추장, 적들이 곧 공격을 시작할 모양입니다." "나도 그렇게 느끼고 있다. 관군의 배후에 있는 토루가 일을 제대로 해주어 야 할 텐데…." "걱정하지 마십시오. 토루님은 그 일을 해내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치도록 용감한 전사이니까요." "으음……. 음?" "……." 장자이자 다음 열지족 추장이 될 토루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바로 그때 소 노리는 초지 너머에서 낮게 나는 새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부쩍 많아진 날 벌레들을 보고 승리의 미소가 입가에 걸리기 시작했다. "하늘폭포가 가까워진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이제 조금만 버티면 된다. 이 사실을 전사들에게 알려라!"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이곳은 우리의 고향이니까요." "과연 그렇군. 흐하하하하하하……." 열지족 추장 소노리가 승리의 미소를 지을 때 하남천원군의 공격준비가 마 무리 되어 수천의 궁병이 진형 앞으로 나왔다. "준비!" -촤라라라락! 하남천원군는 구호에 따라 화살을 화시위에 걸고 힘껏 잡아당겨 다음 명령 을 기다렸다. "발사!" -터더덩~! 수천이나 되는 군사들이 일제히 시위를 놓자 하늘을 새까막게 덮으며 날아 간 화살은 반란 진토인 진형의 선두에 떨어졌다. -파바바바바바……………………. 열지족 전사들은 관군이 화살을 쏘는 것을 보고 일제히 갈대묶음 같은 것을 들어올렸다. "큭!" "헉!" 방패를 대신한 갈대묶음은 대부분의 화살을 막아 주었다 그럼에도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화살이 전사들의 다리에 박히면서 약간의 피해가 발생했다. 그렇게 서너 차례 화살비가 떨어지고 관군의 기병 돌격이 시작되었다. -두두두두두두두……………………. 그러자 전사들은 들고 있던 갈대묶음을 내려놓고 일제히 창을 집어던졌다. -히히히힝! 몇몇 눈먼 창에 맞은 말이 달려오는 힘에 그대로 뒹굴어 기수의 목뼈를 부 러뜨렸지만 대부분은 전력을 유지한 체 중앙돌파를 시작했다. 그야말로 대 나무를 쪼개듯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반란 진토인들이 진형을 둘로 나눈 하 남천원군의 기병들은 둘로 나뉘어 열지족 저사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그 리고 그때에 맞추어 우회하던 기병들이 좌우로 압박함과 동시 배후에서 또 다른 기병들이 쇄도하자 완전히 포위되어 각개격파(各個擊破)될 위험에 처 해 버렸다. -뿌우~! 뿌우~! 그러자 전투에 찬가하지 않던 코끼리가 전면을 밀고나오며 하남천원군의 보 군의 일제 돌격의 예봉을 미리 꺾어 대비했다. 동시에 하남천원군 진형후방 의 땅거죽이 뒤집어 지며 수천의 전사들이 괴성을 지르며 하남천원군의 뒤 를 쳤다. -아야아야아야아야아야아야………………. "뭐야?" "매복입니다. 후방에 매복이 있었습니다." "당황하지 마라! 내가 직접 저들을 막겠다. 동요하지 말고 계속 밀어붙여라 ! 승리가 멀지 않았다." 금영월은 후방에서 뜻하지 않은 공격을 받았으나 이미 승기를 잡고 있었기 에 크게 당황하지 않고 친위군을 그들을 막는데 투입했다. 아비규환(阿鼻叫 喚)의 전장은 어느새 대지가 붉게 물들고 난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열지족 전사들은 코끼리를 외부에 성채처럼 놓고 원진을 형성한 체 관군에 대항했 고 단숨에 끝날것 같았던 전투는 조금씩 늘어지기 시작했다. -쿠릉~! 쿠르릉~! 그리고 하늘이 급속히 어두워지며 뇌성(雷聲)과 함께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 기 시작했다. "하늘폭포다!" -우아~! "뭐지?"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살갗에 닿자 열지족은 마치 승리한 것처럼 사 기를 높였고 하남천원군은 쉴 새 없이 밀어붙이면서 일말의 불안한 마음 품 었다.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남례성의 열대에 호우(豪雨)는 순식간에 그 세를 더하며 마치 폭포수의 그 것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런, 후퇴하라!" 금영월은 사방이 물에 잡기기 시작하자 일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후퇴를 명 했지만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는 굉음(轟音)은 그의 외침을 허공에 묻어버 렸다. 이 엄청난 호우 속에선 사람은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다. 가만히 비 를 맞고 있으면 머리와 어깨에 떨어지는 비의 무게가 느껴질 정도여서 본능 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그것마저 여의치 않았다. 어느새 불어난 물 은 두터운 갑주차림의 하남천원군을 행동을 둔하게 만들었고 어떤 곳은 소 용돌이 까지 쳤다. 그제야 금영월은 이라이 초지를 비워둔 이유가 맹수들이 아님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쏴아아아아아! 약한 빗방울이 떨어지며 두번째 짧은 우기가 시작되었다. 이번 짧은 우기가 끝나면 남례성은 건기가 시작된다. 우기라고 해서 배만 오지 않듯이 건기 라 하여 비가 오지 않은 것이 아니 비만 그 정도의 차이때문에 계절이 없는 남례성에선 건기와 우기로 계절을 대신 했다. 오늘 부터 길게는 이레 짧게 는 사흘 밤낮동안 거의 쉬지 않고 비를 뿌리는 짧은 우기가 끝나면 그 뒤로 건기가 시작된다. "대가 지난 사흘간 어디에 있었어요?" "……." "누구랑 뭐 한 거예요?" 라혼은 봉수성의 거처에 돌아오자마자 아예 방 하나를 차지하고 눌러앉은 포포에게 심문 아닌 심문을 당해야 했다. "별거 아니야, 가니아를 만나고 왔을 뿐이야?" "가니아? 그게 누군데요?" "너도 본적이 있잖아. 홍의에 붉은 머리카락의……." "그 여자요?" "그녀가 바로 불새의 무녀 혹은 주작의 무녀다." "그럼 불새의 깃털을 얻으셨군요." 포포는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라혼이 불새의 깃털을 얻었다는 것을 학인하 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계속 질문을 퍼부어댔다. "불새의 깃털은 어떻게 생겼어요?" "글쎄? 그냥 하얀 빛 무리만 봐서 잘 모르겠는걸." "우와! 한번 보여줘요!" "그만!" "……." "미안하지만 너는 불새의 깃털이 있는 곳에 가지 못해! 거기는 토지신들이 지키고 있는 곳이라고, 그리고 불새의 깃털은 아직 그들이 보관하고 있으니 까 내가 얻었다고 할 수는 없지." "토지신들의 무공이 대단한 모양이네요. 라혼대가가 건들지 못하고 있으니. " 쉴 새 없이 묻고 떠드는 포포에게 슬슬 질려갈 무렵 라혼을 구해주는 존재 가 라혼과 포포, 그리고 지심과 초초가 있는 정자로 다가 왔다. "주군!" "어서 오게 모석." "예, 주군이 명하신 대로 천수교에서 데려온 주민들을 감곡으로 보내 땅을 개간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비거 그치는 대로 일을 시작할 수 있을 겁니다. " "수고했다. 그보다 차나 한잔 같이 하지." 라혼은 비때문에 한가해진 모석을 붙잡고 한가로이 차를 마셨다. 문론 차를 마시면서도 그간 백호영 내부에 있었던 일들이나 애로사항을 들으면서 포 포가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았다. 포포는 어릴적 수인이기 때문에 당했던 일들 때문에 낯가림이 심했다. 그러나 어머니 묘호란은 그럼 포포를 엄하게 만 키웠기에 포포가 어리광 부릴 수 이었던 것은 할아버지였던 라혼이 유일 했다. 하지만 정보를 취급하고 분석하는 버릇이 있는 포포의 질문은 라혼을 무척 피곤하게 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묻고 아닌 것은 그런 가부다 하 며 그대로 넘기는 설화와 대화와는 또 달랐다. 더욱 중요한 것은 라혼이 포 포를 신뢰할 수 없었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백수회에 속한 장상은 라혼이 느끼기에 자신의 사람이지만 포포는 백수회를 더욱 우선시 할 것이기 때문 에 그녀가 비록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리 고 포포 또한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라혼에게 비밀이 있었으니 대화는 피곤하게 진행 될 수밖에 없었다. 뜨거운 차 한 잔을 비운 모석은 정자를 떠났고 라혼은 다시 포포의 질문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저녁이 되고 늦은 밤이 되자 라혼은 집무실에서 모원이 정리해 놓은 보고서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 한참을 서류와 시름하던 라혼은 고개를 들어 한곳에 눈을 주었다. 그리고 서탁 위에 걸려있던 붓을 들어 그곳에 던졌다. -팡! 막대한 경력이 깃든 붓이 쇄도 해오자 이제 막 방안으로 스며든 그림자는 기겁을 하며 몸을 들어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허공을 날아오 던 붓이 방향을 꺾더니 계속 그림자를 노렸다. -컥! -펑! -크억! 정신없이 허공을 자유자재로 날던 붓을 피하던 그림자는 자신이 움직이던 동선(動線)을 미리 선점한 백호나한에게 목덜미를 붙잡히고 동시에 등허리 에 지금까지 피하던 경력이 깃든 붓이 작열했다. -덥석! 라혼은 자신이 이기어검(以氣馭劍) 수법으로 던진 붓을 요리조리 피하던 그 림자를 잡아 자신이 던진 붓대에 맞게 하고는 목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 었다. 라혼은 이미 그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자신의 실력을 감추고 주위를 맴돌던 모든 존재에게 라혼 독문(獨門)의 천리미향(千里迷香)을 뿌려놓았 기 때문이었다. 봉수태수 돈석의 경고대로라면 그는 원주 호황가의 끄나풀 일 가능성이 컸다. 그렇지만 천리미향을 당한 자가 다른 존재와 접촉하면 향이 전이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라혼은 그것을 이용해서 이미 그들의 조직의 대략적인 수까지 파악하고 있었기에 그들을 별로 두려워하거 나 견제하지 않았다. 드러난 비밀조직은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다. "주인님!" "자는 것을 깨게 해서 미안하군. 손님이 찾아왔으니 잘 모시도록 아침에 해 가 뜨면 그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눌 테니까." 라혼의 집무실에서 소란이 일자 방밖을 지키던 지심은 방안으로 뛰어들었지 만 상황은 이미 끝나 있었다. 지심은 검은 두건에 검은 옷을 입은 침입자를 묶고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리고 라혼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서류에 눈을 주며 서류와 시름하기 시작했다. 열국천하(列國天下) 밤새 거세지거나 잦아들기를 반복하던 빗줄기가 그 세를 줄이고 비구름에 해는 보이지 않았지만 사위가 밝아져 아침이 온 것을 알았다. “전혀 주무시지 않던데 몸이 상할까 걱정입니다.” “나는 원래 잠을 자지 않아 그러니까 지심이나 초초도 내게 맞추려 하지마 라.” “하지만 자지 않고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라혼과 처음 밤을 지새운(?) 지심과 초초는 주인이 잠이 들지 않아 같이 잠 을 자지 못하고 푸석한 얼굴로 차를 가져왔다. “라혼대가 아침이에요!” “포포 왔느냐?” “예, 대가 그런데 밤새 도둑이 들었다면서요?” “도둑이라….” 포포의 질문을 받은 라혼은 지심에게 눈길을 주었다. 하지만 지심은 고개를 살짝 저어 자신이 포포에게 말하지 않다는 표시를 했다. 초초는 밤새 라혼 의 집무실 옆에 붙어있는 작은 방을 떠나지 않았고, 집무를 보는 건물 밖으 로 나간 것은 오직 지심뿐이었다. 그런데도 포포는 밤새 일어난 일을 정확 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라혼은 자신이 머무는 집무실이 있는 건물을 초초 와 지심 외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조치했다. 시끄러운 것이 싫었고 또 지켜보는 눈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포포가 그 사실을 알고 있 다면 멀리서 나마 자신의 거처를 지켜보는 눈이 있다는 말이 되었다. 그때 누군가 밤새 침입한 자를 가두어 놓은 곳으로 빠르게 접근하는 자가 라혼의 감각에 걸렸다. “구하기 위해 온 것인가? 입을 막기 위해 온 것인가?” “예?” -팍! “어? 대가!” 포포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라혼대가가 ‘푹!’ 꺼지듯 사라지자 크게 놀라 소리 질렀고, 지심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방을 뛰쳐나갔다. “지심 같이 가!” 그러자 지심의 뒤를 포포가 따랐고, 방에 홀로 남겨진 초초도 잠시 머뭇거 리다 방을 나섰다. 이제 라혼이 집무실로 사용하던 방에는 차갑게 식어가는 차가 담긴 다기(茶器)만 남았다. ‘번을 서는 자가 없다니 함정인가?’ 귀호 1호는 백호나한이 머무는 곳이 너무도 인적이 없자 함정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백호나한의 수하들인 흑장(黑將)들은 모두 위병들 이 사용하던 연무장에 간 사실을 떠올리며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백호영이 입은 검은 갑옷 때문에 봉수성의 백성들은 그들을 흑장이라 불렀 다. “찾았습니다.” “…….” 귀호령은 혈도가 점혈된 그대로 포박되어 있었다. 복면도 벗기지 않고 제압 된 귀호령의 모습을 확인한 귀호1호는 뭔가 알 수 없는 예감에 기분이 나빠 졌다. 그때……. -빠각! “!” -퍽! ‘헉!’ -퍽! -쿵!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로 얼굴을 가린 침입자 앞에 나타난 라혼은 불문곡직(不問曲直)하고 팔꿈치로 오른쪽에 있는 자의 코를 깨고 전면에 있 는 자의 복부에 주먹을 깊숙이 박아 넣었다. 그리고 어젯밤에 침입했던 자 의 상태를 살피던 자를 발로 차서 벽까지 날려 보냈다. 그리고 지풍(指風) 을 날려 그들의 마혈을 제압하고 은섬충(銀蟾蟲)을 꺼냈다. “한번 사용하고자 하니 계속 쓰게 되는군. 하지만 이방법이 훨씬 피를 덜 보는 방법이니 어쩔 수 없지. 그나저나 어떤 놈에게 쓴다?” 라혼은 홍대보의 저택에 속해있던 하인에게 은섬충을 사용하기로 했다. 아 직까지도 복면 쓰고 있었지만 기운을 읽을 수 있는 라혼은 이미 그가 누구 인지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홍대보가 어떤 중요한 지위에 있다면 그는 최 측근에서 그를 모셨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었다. 라혼이 꺼내놓은 은섬충이 그의 콧속으로 스며들 때쯤 지심과 포포가 도착했다. “주인!” “대가!” 포포는 라혼의 머무는 거처에서 이곳까지 거리를 생각하며 은밀하게 움직였 을 이들을 감지하는 라혼의 능력에 새삼 감탄했다. “지심, 그들을 포박해서 데려와라!” “옛!” “대가 그들은 누구예요?” “그거야 심문하면 드러날 일, 그보다 아침전이겠지? 같이 아침식사나 하자 !” “하지만…….” “초초, 아침식사를 준비해줘!” “예? 예.” 포포는 그들을 심문하는 것을 보고 싶었지만 만사태평한 라혼의 태도에 어 쩔 수 없이 물러나야 했다. 그들의 정체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하는 것은 나름대로 중요했다. 추측한 사실과 확실한 정보는 분명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혼대가.” “왜?” “지금 절 놀리시는 거 맞죠.” “그게 무슨 말이야?” 포포는 방금 전 사로잡은 자들을 같은 탁자에 앉혀놓고 식사를 하게 되자 라혼이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사자들인 네 명의 침입자들은 더욱 황당했다. 호된 치도곤을 당할 것을 각오하고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였건만 그들이 끌려와 처음 당한 일이 백호나한과 같은 상에서 밥을 먹는 일이었다. 아름다운 처자와 아온다옹 말다툼을 벌이는 훈훈한 분위기는 오 히려 불안감을 가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상대는 조정이 직접 임명한 장수인 위병대장의 목을 과감하게 참한 자였다. “세상에 사로잡은 도둑하고, 그 도둑을 빼가려던 일당을 한상에 놓고 밥이 넘어가요?” “뭐가? 밥맛없게 생기진 않았잖아? 어디가나 흔하게 생긴 얼굴인데? 도둑 놈이라고 얼굴에 써 붙이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괜찮아. 네 실력이면 이것들이 떼로 몰려온대도 상대할 수 있어. 무림의 여걸이 겨우 하수 넷을 무서워 밥을 먹지 못한데서야 말이 되니?” “누가 이 허약한 놈들이 무서워 그러는 줄 알아요?” 졸지에 ‘도둑놈’에 허약하기 그지없는 하수(下手) 취급을 받는 귀호기들 은 자신들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차라리 당당하게(?) 고문을 당 하는 것이 났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구운 어린 돼지요리가 참 맛있군. 고기가 아주 연해. 어서들 먹으라고 심문을 받을 때 받더라도 먹고 받아야 되지 않겠나?” “우릴 어쩔 셈이오?” “묻는 것은 나지 네가 아니다. 그리고 나는 뭐가 먹을 때 질문을 받는 것 을 싫어하지.” 피어(fear)가 섞인 라혼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은 귀호1호는 한순간 숨이 멎 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라혼의 차가운 경고에 포포마저 조잘거리던 입을 닫고 조용히 음식을 먹었다. 아침식사가 끝나자 이번에 차를 마시고, 차마 저 다 마시자 아침수련을 마친 잔폭광마와 모석이 함께 라혼을 찾았다. 그 때까지 4인의 귀호기들을 꿰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한쪽에서 자릴 차지하고 있었다. “손님이 있었네? 초초낭자 저들은 누구요?” “저어 그게…….” 잔폭광마 초초의 설명을 듣고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주군 라혼과 뻘줌 하게 서있는 침입자들을 번갈아 보았다. 정례보고를 마친 모석은 말없이 한 쪽에 서있는 4명의 사내들을 보고 물었다. “주군, 저들이 누구입니까?” “한 놈은 이집 하인행세를 하던 놈이고 다른 놈은 나도 모른다. 하지만 짐 작 가는 바가 있지.” “예?” “고학이 오면 그에게 저들의 처우를 상의하고 처리하려고 생각중이다.” “대장 제가 고서생을 데려오겠습니다.” “그러던가.” 잔폭광마는 라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찌된 영 문인지 알아야 되겠는데 가만히 있어서는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될 것 같았 기 때문이다. 그리고 체 반각이 되기도 전에 잔폭광마는 고학과 모원이 잔 폭광마의 손에 이끌려 왔다. 그리고 약 한식경(30분)동안 라혼과 독대한 고 학은 본격적인 심문을 하기 시작했다. “너희는 누구냐?” “…….” 그러나 네 명의 사내 중 누구도 입을 벌리지 않았다. 그리고 고학 또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사실 라혼은 그들이 진정 원주 호황가의 사람일 때를 생 각하고 있었다. 조정에 반할 생각은 없었지만 때에 따라선 그렇게 될 가능 성이 있었다. 라혼은 아직까지 설화의 부친인 호사천이 누구인지 알 수 없 었다. 그리고 왜 서제가가 설화의 모친인 강무혜를 노렸는지 그리고 강무세 가는 이미 조정에 반기를 들었음에도 강무혜에 대한 일을 이야기하지 않는 지 모르는 것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서제가의 손에 자신의 가문의 여인이 당 했으니 현 조정을 성토할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강무세가는 마치 그런 일은 없었다는 듯이 그것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호사천의 경우엔 아예 존재자체가 불분명했다. 자신의 성(性)이 호(虎)임을 밝히고 이름을 숨겼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고 호황가가 그의 존재를 일부러 숨기 고 있다는 것 외엔 떠오르는 바가 없었다. 즉 호황이 적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호황과 접촉은 상당히 부담되는 일이었다. 아직 설화를 뒷받침하 는 세력이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 호황의 견제가 시작되면 그만큼 움직이기 힘들 것은 뻔했기 때문이었다. “자네 이름이 뭔가?” “저는 이름이 없습니다. 단지 7호라 불릴 뿐입니다.” “좋다. 7호 네가 아는 모든 것을 이야기해라!” “예, 저는…….” 라혼은 은섬충에 당한 자를 골라 물었고, 그는 새 주인에게 자신이 알고 있 는 모든 것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머지 세 명은 그런 7호의 태도 에 놀라 허둥댔다. 귀호령이라 불린 그였다. 그러니 귀호기의 모든 것이 백 일하에 드러난 것은 물론 호영의 일까지 낱낱이 밝혀졌다. “모석, 그들을 모두 잡아들여!” “존명!” “육정위 너도 가서 도와라!” “옛, 대장!” 두 무장이 귀호기와 호영기를 잡아들이기 위해 떠나자 포포는 라혼대가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간자였어요?” “간자라고도 할 수 있겠지.” 라혼은 포포의 간자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라혼은 호황의 비밀결 사인 귀호기가 간자라면 간자일수 있다는 뜻으로 말했지만 포포는 그는 라 혼이 귀호기에 침투시켜놓은 ‘간자’로 해석되었다. 그리고 포포는 그러한 사실을 어머니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라혼대가 저 잠시…….” “그러렴.” 라혼은 포포가 방을 나서자 지심에게 은섬충을 쓰지 않은 셋을 가두라 지시 하고 초초에게 차를 부탁했다. 그리고 다시 칠호에게 물었다. “자네는 호사천이란 이름을 들어 보았나?” “예, 잘 압니다. 그는 예전에 제가 모시던 귀호기주였습니다.” “!” 대륙은 지금 완연한 만추(晩秋)의 가을로 접어든 시기였지만 북녘의 대초원 (大草原)은 벌써 서리가 내리고 얼음이 얼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후하~!” 이른 아침 하얀 입김이 나는 쌀쌀한 흑막제일도 제평(齊平)은 오늘도 분주 한 하루가 시작했다. 이제 초로의 나이에 들어선 풍채 좋은 상인은 아직 그 강건함을 자랑이라도 하듯 제평의 대로를 당당하고 힘 있는 발걸음을 옮겼 다. “안녕하십니까? 무장자님.” “아침부터 바쁘구먼.” “지금 바쁘지 않으면 겨울을 쫄쫄 굶을 것인데 바빠야지요.” “그래, 지금 열심히 해야 겨울이 길지 않겠지.” 이미 장사를 시작해 흥정하는 사람들 사이를 걷는 상인에게 거리의 모든 사 람들이 저마다 안는 척을 하며 인사를 건네 왔다. 제펴의 상인 무호우(武呼 宇)는 사람들의 인사를 받으며 자신의 점포로 길을 재촉했다. 지금 제평은 고양이 손이 아쉬울 만큼 바쁠 때였다. 바로 길고 긴 흑막의 겨울을 준비하는 시기이기 때문이었다. 봄부터 살찌운 말이나 가축, 그리고 여분의 가죽이나 모피, 치즈, 말린 고기 등 유목을 하여 생산된 것을 차( 茶)와 의복, 곡식등과 바꾸는 장이 서기 때문이었다. 흑막의 각 지역에서 모아진 물산이 제평에 모아져 큰 상인들의 손을 통해서 대량으로 거래 되곤 했다. 제평, 아니 흑막에서 가장 큰 향료상인 무호우는 현재 제평에서 가장 영향 력 있는 인사였다. 중원으로 통하는 북지성의 대종도(大縱道)가 ‘정립천하 의 난’으로 길이 막히자 그 길을 통해 들어오던 중원과 연결되는 상로가 막히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자 차와 곡류의 가격이 폭등했고 동해의 뱃길 로 들어오는 것만으론 제평의 수요를 따라잡지 못했다. 단순히 가격이 오른 문제가 아니라 식량수급에 문제가 생길지경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호우 가 대량의 곡류와 차 등을 대량으로 풀고 말과 가축 등을 그 만큼 사들이게 되자 다소 가격이 오른 형태에서 해결되어 그의 영향력이 크게 증가되었다 . “어르신 오십니까?” “으음, 수고하네.” 후각을 자극하는 알싸한 향신료의 냄새가 진동하는 무호우의 점포엔 제평의 일반백성을 상대로 소량 판매하는 각종 향신료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이 작은 점포가 흑막의 거의 대부분의 향료상권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몇 해 전부터 제평에 향신료가 싼값에 풀리고 이제는 흑막 전체에서 사고자 하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육류를 많이 먹고 또한 즐기는 흑막 사람 들이지만 육류특유의 노린내가 좋을 리 없었고, 한겨울 얼큰한 고기국물은 먹어본 사람이라면 반드시 다시 찾게 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지금 무호우 가 취급하는 것은 향신료뿐만이 아니었다. 동업자이자 사실상 무호우 자신 이 속한 토금전장에서 되도록 많은 말과 가축, 모피들의 상품을 원했기에 그것에 신경 쓰느라 요즘은 향신료는 일는 사환에게 맡겨 처리하고 있는 실 정이었다. 그러나 서류를 정리하고 곡류를 취급하는 것만으로도 무호우에게 는 막대한 이윤이 남는 장사였다. 거기다 제평은 물론 흑막의 초원상권이 그의 손에 반쯤 쥐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어르신, 원주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원주에서? 어서 모셔라!” 오늘도 바쁘게 장당 적게는 수천 냥에서 많게는 수십만 냥의 거래내용을 담 고 있는 서류를 검토하느라 정신이 없던 무호우는 원주에서 사람이 왔다는 말에 모든 일을 뒤로 미루었다. “어서 오십시오. 오시는 길이 험한데 고생은 안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장자님, 그간 평안 하셨습니까?” 토금전장에서 제평총관직을 맡고 있는 석은추(晳銀追)는 근 두 달 만에 무 호우를 찾았다. 석은추는 중경 토금전장과 제평의 토금전장의 대리인인 무 호우사이를 왕복하는 것이 임무로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토금전 장에 대한 무호우의 창구 역할을 하는 인물이었지만 무호우에게는 어마어마 한 물량의 상품을 총괄하는 사람으로 비쳐졌다. 6천 여필의 군마를 수송하 거나 반란지역이나 다름없는 후려 남경에서 올해도 어김없이 충분한 양의 향신료를 가져온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토금전장에서 부탁한 것은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만일 석대인이 나서 주지 않았다면 흑막의 백성들이 참으로 힘들어 질 뻔 했습니다.” “아닙니다. 장사치가 장사를 하는 것인데요. 그리고 이번에 무장자님을 찾 아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기 위해서 입니다.” “앞으로의 일이라면…….” “지금 사방에서 난리가 나서 사실상 길이 끊긴 곳이 한두 곳이 아닙니다. ” “그렇습니다. 세상이 어찌되려는지 원…….” “그래서 저희 토금전장에서 한 가지 일을 벌여보려 합니다.” 무호우는 은근한 석은추의 말에 호기심을 느꼈다. 지금까지 서로 아쉬운 소 리한 적이 없었기에 토금전장에서 뭔가 원한다는 것을 상인으로써의 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무슨 일을…….” “길을 지나기 힘들어 졌으니 뱃길을 닦아야 하겠지요.” “뱃길이요?” 뱃길이란 말에 무호우는 얼른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제평은 대륙한가운데 있는 도시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토금전장이었다. 헛소리라고 호통을 처서 돌려보낼 상대가 아니었다. “예. 이번에 저희 토금전장에서 북지성에 항구를 건설하고 있습니다. 그러 데 그것이 자금이 한정 없이 들어가는 일이라 저희 토금전장만으로 힘에 붙 이더군요.” “…….” 무호우는 석은추의 말을 듣고 생각에 빠졌다. 확실히 무호우 자신에게는 현 실감이 없는 이야기였지만 저토록 막대한 물류를 움직이는 토금전장에선 당 금 천하정세는 심각한 문제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각처에 크고 작은 소요 때문에 길이 끊기거나 위험이 대폭 증가했으니 다른 길을 모색할 필요가 있 었을 것이다. 그래서 꺼내든 패가 뱃길인데 혼자하기 힘들다 함은 자신의 도움을 바라는 것인데……. 석은추는 장고에 빠진 무호우 장자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지금 그의 머릿속 에선 빠르게 손익계산이 이루어지고 있을 것이지만 석은추에게 맡겨진 임무 는 무호우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컸다. “제가 얼마나 도움을 드리면 되겠습니까?” 무호우의 결정은 처음부터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토금전장의 길이 끊기면 곧 자신의 길이 끊기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토금전장의 신용 이라면 전 재산을 걸만했다. 그러나 석은추는 그런 무호우의 말에 말라가는 입술에 침을 바르며 말을 꺼냈다. “사실 그 일은 천자가 직접 나서서 수년을 준비해 시행하여 10년이 지나도 이루기 힘든 일입니다.” “……?” “그러나 저희는 그 일은 3년 안에 끝내려 합니다. 항구를 만들고, 배를 건 조하며 그 배를 호위할 수군을 창설합니다. 그리고 항구에 각종 물건을 생 산하는 공방(工房)을 만들려 합니다.” 무호우는 석은추의 말을 듣고 토금전장이 벌이려는 일이 나라를 세우는 일 과 버금가는 일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석은추의 설명은 아직 끝나지 않 았다. “그래서 저희 토금전장에선 천하칠대도(天下七大都) 오방상제(五方上齊)의 모든 상인대부들에게 투자를 받고 있습니다. 사실 처음엔 토금전장의 신용 으로 자금을 빌리려 했으나 너무도 엄청난 자금이 투입되기 때문에 이자 부 담이 너무 크다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저희 토금전장을 중심으로 오방상제(五方上齊)의 상인들과 천하전역에 걸친 대상계(大商契) 입니다.” “…….” 계(契)란 예부터 있어 온 상호 협조 조직의 한 가지로 여럿이 일정한 목적 아래 돈이나 물품을 추렴하여 운용하거나 금전의 융통을 목적으로 일정한 인원으로 구성된 조직을 말했다. 민간에서 흔히 혼인계(婚姻契)나 상포계( 喪布契)로 경조사를 하는데 이용되는 개념이었다. 그러나 토금전장이 추진 하는 상인계(商人契) 그 규모가 진정 어마어마했다. 오방상제(五方上齊)의 모든 상인이 참가한다면 천하의 한다하는 모든 상인들이 참가하다는 말이 되니 그야말로 대상계(大商契)였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대상계는 앞으로도 계속 존속시켜 3년 후엔 전장 (錢場)에 맡긴 형식으로 운용할 생각입니다.” “대단합니다. 그려…. 그런 제가 나서서 제평의 상인들은 설득하는 것이 일이겠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그리고 3년간 상계에 이름이 있고 그간 현금을 빼지 않 는다면 거기에 상응하는 혜택을 받게 됩니다.” “혜택이라 하면…?” “바로 뱃삯을 얼마간 깎아주게 되고 투자한 지분에 따라 최우선적으로 계 원(契員)의 물건을 옮기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차후에 자금을 빌리는 것 도 편의를 봐주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은 난세입니다. 저희 토금전장은 천 하전역에 그 힘을 뻗치고 있습니다. 어느 한곳에서 난리가 나 모든 기반을 잃더라도 토금전장에 맡겨놓은 재산이 있다면 다른 지역에 가서 찾으면 됩 니다. 게다가 거래를 할 때도 장부거래가 가능하니 여러모로 편하지요. 그 리고 3년간 묻어두는 자금 외에 다른 자금은 일반전장에 맡겨둔 것처럼 사 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기존의 전장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인데…….” “바로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전장들이 투자자 된다면 그 문제는 해결될 겁니다.” 말로는 쉬웠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토금전장이 제평의 상계는 물론 천하의 상권을 장악하게 되는 셈이 되었다. 무호우 입장에선 어차피 토금전장에 매인 몸이라 마찬가지라 상관없지만 다른 대상(大商)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 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무호우의 걱정은 일리가 있는 것이었다. “지금은 난세입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무슨 사단이 벌어져 힘들게 모은 재 산을 뺐길 지도 모릅니다. 대상들은 그 기반이 방대해 견딜 수 있지만 중소 상인은 기반이 있는 곳에서 일이 벌어지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잃게 됩 니다. 그 점을 생각해 주십시오. 그리고 대상인들은 저의 장주님이 직접 나 서서 설득하고 있습니다. 이일을 위해 저희 토금전장에서는 1천만 냥의 자 금을 준비해 두고 있습니다.” “천, 천만냥!” 무장자는 석운추의 말에 눈을 그게 치떴다. 천만냥이면 제평의 모든 은자와 은 부스러기를 모은다 해도 반이나 채울까 말까한 자금이었다. 그러나…… . “자그만치 황금 1백만 관에 달하는 자금을 이 일을 위해 쓰이게 될 겁니다 .” “화, 황금으로 천만 냥이었단 말이오?” “예!” 황금(黃金)은 은(銀)의 1백배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지역에 따라 금1냥 이 120냥까지 나가기도 했다. 그렇다면 수군을 만들고 도시를 만드는 일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아니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많은 자금이 필 요한진 궁금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자금인 것이다. 토금전장 제평총관 석은 추의 마지막말은 무호우의 마음을 굳히게 하기에 충분했다. 자금이 크다면 그만큼 위험부담이 적어질 것이기에……. 4만 하남천원군이 이라이 초지에서 대패했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봉수성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거기다 하수라 강의 천수교 다리 또한 파괴되고 살아남 은 잔여 병력이 천수교 동안(東岸)에 묶여 오도 가도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라혼은 일을 수습하기 위해 오수관으로 출병했다. “라혼 참장!” “뭐가 어떻게 된 것이냐? 참람한 패배 때문에 어수선한 오수관에 도착한 라혼을 기다리던 어깨에 화 살로 인한 상처를 입은 낭패한 몰골의 정령(正領) 작도인(鵲途認)이 기다리 고 있었다. 작도인은 금영월 대장군의 오른팔로 하늘을 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수인으로 까치였다. 작도인은 현재 처한 사정을 설명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에 숨어 수천의 진토인들이 천수교 서안(西岸)을 점거하고, 다 리를 끊자 대부분 천수교 동안(東岸)에 모여 있던 수비군은 손을 쓸 수 없 게 되었다. 날 수 있는 재주를 가져 금영월대장군의 명을 받은 작도인은 반 란 진토인들은 화살을 맞고 더 이상 가지 못하고 겨우겨우 오수관에 도착한 것이었다. “면목이 없습니다. 적의 계략을 간파하지 못하고…….” “금영월 대장군은 무사하신가?” “대장군은 무사하십니다. 그러나 이대론 오래 견디지 못합니다. 살아 돌아 온 군사들은 병들어있고 괴질까지 돌기미를 보입니다. 거기다 적의 결사대 가 천수교의 군량을 비에 젖게 하여 대부분 썩어 들어가 먹지 못하고 버리 는 것이 반입니다.” 라혼은 겉으론 머리를 숙이고 말하는 작도인에게 불만이 가득한 기운을 느 끼고 눈 쌀을 찌푸렸다. “천수교에 있는 병력은 얼마나 되나?” “2만이 조금 못됩니다.” “겨우 2만?” “…….” 천수교는 중요한 곳이기 때문에 금영월 대장군이 방비 소홀하게 하지는 않 았을 것이었다. 대략 8천에서 1만 이상의 병력이 남겨두었다고 생각했을 때 단 한번의 전투에서 4분지 3의 병력을 잃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3만 군사 가 수장(水葬)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 라혼의 옛 부하들도 포함되어 있 었다. “대장, 이런 멍청한 패배자 이야기는 그만 듣고 당장 호도로 가서 놈들을 도륙합시다.” “뭐라? 네가 감히 군문의 존장을 무시하는 것이냐?” “흥! 패전지장(敗戰之將)에게 일없다.” “육평! 그만해라!” “하지만 대장 그곳엔 내 형제들이 있었단 말이오.” “네 폭마방 형제들도 나의 수하들도 있다. 그것은 너만의 문제가 아니다. ” 잔폭광마는 자신을 따라 군문으로 들어온 폭마방들이 대부분 죽었을 것이란 생각하자 가슴이 메어왔다. 그리고 자신을 형제들과 함께 있지 못하게 한 주군이 원망스러웠다. 하나 잔폭광마는 안하무인(眼下無人)의 폭급한 성격 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하남천원군에 두기에 문제가 많았었다. 그 점은 잔폭 광마 자신도 잘 알고 있었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느끼는 것은 다 를 수밖에 없었다. “작정령, 그대 또한 부하를 잃은 심정을 잘 알 터. 그와 함께하던 오랜 부 하를 잃어 그러하니 작정령이 이해하라.” “…….” 이제 완전한 하대로 바뀐 라혼참장의 말에 작도인은 울화가 치밀었지만 지 금 비빌 언덕은 그가 유일 했기에 겉으로 반반하진 못했다. 다만 속으로 이 를 갈뿐이었다. 그러나 한꺼번에 3만이란 대병력을 잃고 2만이 고립되어 버 리자 라혼에게도 뾰족한 수가 있을 수 없었다. 지금 1만 노예군과 모병된 5 천 군사들의 훈련이 한참이었지만 그들은 이제 막 군문에 들어온 자들이었 다. 족정관과 오수관을 지키던 3천과 봉수성을 지키던 5천 그리고 백호영 1 천이 라혼이 전력의 전체라고 봐도 과언은 아니었다. 다행히 수군을 조직하 느라 각 거점에서 차출해 봉수성에 모인 5천 수군이 있어 봉수성을 지키는 데 별문제 없었지만 오래 비워둘 수는 없었다. 봉수성이 문제가 아니라 봉 수부를 포함한 주변 지역을 안정시키려면 수군들로만은 힘들었기 때문이었 다. 거기다 최소한의 병력을 족정관과 오수관에 배치해두어야 하니 라혼이 사용할 수 있는 가용병력은 8천 정도뿐이었다. “어쨌든 지금 천수교에 임시라도 다리를 놓아서 금대장군과 군사들을 구하 는 것이 중요하다. 작정령, 자네가 화살을 맞은 곳이 어딘가?” “크흠, 오수관과 천수교 중간쯤 이었습니다. 방심한 나머지 너무 낮게 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적들이 밀림에 깔려있다는 말이겠군. 구참위.” “옛, 장군.” 구만혁은 작도인을 의식해서인지 라혼을 주군이라 부르지 않고 장군이라 불 렀다. “자네가 저들이라면 어찌하겠나?” “저라면 숲을 방패삼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질 겁니다. 대략 3명에서 5명 수준으로 조를 짜서 매복해 있다가 화살을 날리고 반응을 봐서 숲으로 숨어 들겠습니다.” “날아오는 화살을 무시하고 내달린다면?” “그렇다면 매복을 시도할겁니다. 저들 중 나처럼 아군의 사정을 잘 안다는 가정을 하면 들어 갈 때는 쉽게 두고 나오지 못하도록 하고 나올 때 막는 수를 쓸 수도 있습니다.” 양엽구(良獵狗) 구만혁(狗巒赫)은 고립된 군사들 사이에서 괴질이 돌고 있 는 것을 가만하여 그런 의견을 내놓았고 라혼은 그의 말을 충분히 알아들었 다. “들어라! 그곳에 우리의 형제들이 있다. 일이 어렵고 위험하기 그지없는 길이지만 우리는 가야한다. 안그런가?” “그렇습니다!” “모석!” “옛!” “그대가 군사를 이끌고 천수교 서안을 탈환해라!” “존명!” “구만혁은 궁술에 재주가 있는 백호영 2백을 데리고 숲속의 귀찮은 파리 떼를 처리해라!” “명(命) 받들겠습니다.” “만력, 웅장모, 표상치, 오차, 육삼, 고우!” “옛!” “너희는 나와 함께 천수교 동안으로 간다. 전투는 졸속(拙速)한 것이 제일 이다. 시간을 아껴라! 출진이다.” -존명! 라혼의 출진 명령에 백호십일걸들은 목소리에 내공을 실어 외쳤고 그 소리 는 오수관 전체를 울렸고 그것으로 어수선하던 오수관의 분위기는 단숨에 정리되었다. 열국천하(列國天下) -두두두두두두두……………………. 수만 기(騎)의 기마가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끝도 없이 펼쳐진 초원을 내달 리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 아닐 수 없었지만 그 장관의 목표가 되는 쪽에서 는 그것만큼 등골이 서늘한 풍경은 또 없었다. “웬 대군이지?” -둥둥둥둥둥둥둥둥…………………………. 망루에 올라 초원을 감시하던 초병은 지체 없이 비상을 알리는 북을 울렸고 , 후산(後山)의 봉오리에선 적의 침입을 알리는 봉화가 피워졌다. “무슨 일이냐?” “예, 정체를 알 수 없는 군사들입니다.” 제평의 금군대장 기도오(基桃嗚)는 망루에 올라 지평선에 이는 흙먼지를 바 라보았다. 저 정도 대군이 움직이는데 제평주위 사흘거리까지 순찰을 도는 순군(巡軍)이 발겨하지 못했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았다. 흑막전 역의 물산이 모이는 제평이었다. 단 물이 있으면 거기에 꼬이는 파리가 있 기 마련이듯이 제평부에는 거의 항상 마적이 활개 쳤기에 그 마적과 항상 싸우고 추적하는 정예순군이 있었다. 그 순군들이 저들의 존재를 몰랐다는 것은 순찰대 내부에 간자가 있거나 저들이 제평으로 돌아오는 걸 막고 있었 을 가능성이 컸다. “기대장님, 저것 보십시오. 절세웅랑기(絶世熊狼旗)입니다.” “크음…….” 기도오는 바람에 나부끼는 흑막 웅랑교의 상징인 붉은 바탕에 두발로 선체 위협하는 검은 곰이 그려진 웅기(熊旗)와 푸른 바탕에 포효하는 회색 늑대 가 새겨진 낭기(狼旗)을 확인하고 안색이 어두워졌다. “하필이면 웅랑교라니…….” 흑막은 거칠고 삭막한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흑막 사람은 그 기상이 억세 고 호전적인 기질이 다분했다. 어떤 인물이 나서 주위 부족을 제압하고 막 대한 부(富)를 가진 제평을 노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제평의 높은 담을 넘지 못했다. 제평이 제평인 이유는 제평을 통해 막대한 양의 상품이 거래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흑막의 시장을 틀어막으니 식량수급이 제대로 되지 않고 반란군은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가기 일 수였 다. 하지만 웅랑교는 대초원을 음으로 양으로 사실상 지배하고 있었다. 그 러데 그 웅랑교가 제평을 원한다면 제편에도 웅랑교를 따르는 자들이 많이 있어 성을 지키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힘들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적이다! 금군은 적을 맞아 싸울 태세에 만전을 기하라!” “꿀꺽, 조…존명!” 제평은 2개의 산이 교차되는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평원 에서 우뚝 솟은 높은 언덕 ‘V’형태로 자리 잡고 풍부한 물이 있어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제평 사람들이 산이라 부르는 언덕을 오르는데 반각이 체 걸리지 않았지만 거칠 것이 없는 흑막의 대초원의 상당히 먼 곳까지 감시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이런 곳에 거대한 성시가 자리 잡은 것은 결코 우 연이 아니었다. 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37만 명의 목을 축이기고도 남아 농사가 가능하게 했으며 거센 바람을 막아주고, 산맥(山脈)은 성벽이 되어 적의 위협을 막아주었다. ‘V’형의 지세에 입구를 거대한 성벽으로 틀어막 은 형태의 제평은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채였다. “기대장님, 지금 성에 남아있는 금군은 1만5천정도입니다.” “5천은 병을 나누어 각각 현산(玄山)과 무산(武山)으로 올려 보내고, 1만 으로 북벽(北壁)지킨다.” “현산과 무산에요?” “저들은 웅랑교다. 본시 곰과 늑대는 산을 잘 타는 법이지. 그리고 싸울 수 있는 자들을 모아 의군을 편성한다.” “알겠습니다.” 제평의 금군에 속한 군사는 5만이지만 대부분 순군으로 제평밖에 나가 있었 다. 그러나 이곳은 흑막이다. 흑막의 사내는 홀로 초원에 나가 사냥만으로 백일을 견딜 수 있을 만큼 강인했다. 그리고 누구나 집안에 활을 가지고 있 어 누구나 활을 쏠 수 있었다. 여자와 아이를 제외하더라도 10만에 가까운 군세를 순식간에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다름 아닌 웅랑교였 다. “현(玄)과 무(武), 과연 현무(玄武)의 그것처럼 단단해 보이는 등껍질이로 군.” “호인, 굳이 이렇게 하지 않아도 웅랑교의 영향력으로 약간의 시간만 투자 하면 제평을 손에 넣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가?” “천패, 대초원은 힘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곳 일세, 오랫동안 최강 세력으 로 군림해온 제평을 힘으로 누르는 것을 보여준다면 그 누가 있어 우리에게 대항하겠나?” “…….” “그리고 이미 기치를 든 이상 제평은 그 효용성이 떨어지지 원주조정에서 반란자인 우리에게 물품을 제공할 이유가 없지 않나?” “하지만 후려와 교역을 하기로 했지 않나?” “그래서 제평은 필요 없네. 힘과 식량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면…….” 웅천패(熊天覇)는 낭호인(狼好仁)의 말에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고 낭호인은 웅천패만 겨우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굉(宏)과 조(祚)가 5백년간 놀았으니, 다음은 우리가 놀아야하지 않겠나? 우(于).” “글쎄? 굉(宏)과 조(祚)는 마계의 문이 이곳에서 열리기 때문에 선점한다 는 차원에서 움직였지 않나? 난 아직도 우리가 움직여도 좋을지 확신이 서 질 않아. 그러나 심심한 것보다 낮겠지. 내가 앙(殃)자네의 말은 들은 것은 그것 때문이야! 그보다 강무세가가 신(伸)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확실한 건가?” “대륙의 다섯 신룡 중 유일하게 이름만 있는 놈이니 알 수가 있나? 하지만 자네도 느꼈지 않나 일가(一家) 전체가 기재(奇才)중 기재(奇才)들이었어 한 가문에 그토록 많은 천재(天才)가 나오는 것은 어딘가 어색한 일이지 게 다가 그들이 사용하는 무공은 화기(火氣)가 강해. 신(伸)은 불의 권능을 가 진 적룡이니 그렇게 생각한 거지…….” “그럼 신(伸)도 우리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어쩌지?” “우린 둘이고 그는 하나다. 그리고 만약 진정 신(伸)이 관련 되어 있다면 우리가 그를 감지했듯이 그도 우리의 존재를 느꼈을 거다. 나중에 뭔가 움 직임이 있겠지.” 알 수 없는 그들의 대화는 다른 사람들이 듣기에 웅얼거림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그것은 마음으로 하는 대화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눈앞의 제평은 아직도 멀리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평원에서는 지평선에 걸쳐 보이는 것 이 상당히 가깝게 느껴지는 법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다에서 섬을 발견 하고도 하루를 더 항해해야 섬에 닻을 내릴 수 있는 것과 비슷했다. 라혼이 발견한 마법 무구들은 녹여져 전부 전환(傳環)을 만드는데 투입되었 다.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 백호영에서 사용되었고, 나머지는 1천만 냥의 황 금과 함께 토금전장에 넘겨졌다. 그리고 그중 하나를 제평총관 석은추가 가 지고 있었다. 석은추는 난리가 발생하자 오늘 아침까지도 심드렁하던 사람 들이 앞을 다투어 전 재산을 맡기자 그것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판단하기 어 려워 토금전장의 주인인 금대부에게 연락했다. 그리고 한참 후 다시 석은추 에게 지시된 사항은 모두 받아주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때아니게 무호우의 점포는 자신의 전 재산을 맡기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잘 들으세요. 이 권리장이 저희 토금전장에 돈을 맡겼다는 증서입니다. 토금전장에선 이 권리장이 있는 사람에게 맡겨놓은 돈을 주니까 주의 하세 요. 만일 권리장을 잊어버리고 토금전장에서 소란을 일으키면 사기꾼으로 간주하여 처리할거니까 그리 아세요.” 무호우 장자 밑에서 일을 하던 사환은 벌써 몇 번씩 되풀이하며 권리장을 잊지 말 것을 설명했다. “그리고 이곳에 맡겨둔 재산이 모두 약탈되더라도 권리장만 있으면 천하어 디든 토금전장과 분장에 가서 돈을 찾을 수 있습니다만 3년간 토금전장의 사업에 투자한 돈을 찾게 되면 절반을 제하고 받게 됩니다.” “거기 새치기하지 말아요!” “이봐요! 이것은 인시드에서 건너온 물건이란 말이오. 그러데 겨운 은 20 냥이라니. 너무하지 않소?” “싫으면 그냥 가지고 있으면 되잖소. 다음!” “아, 아니오. 어서 증서나 써주시오.” “에이 바빠 죽겠는데…….” 소란스런 와중에 토금전장에 고용된 감정꾼들이 좌상으로 펴고 금은이 아닌 보석류나 골동품, 서화(書畵)따위 등을 감정했다. “석대인, 이렇게 해도 괜찮겠소? 웅랑교는 대초원을 사실상 지배하는 곳이 란 말이오.” “괜찮습니다.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 했는데 모르긴 몰라도 이일이 소문이 나며 인해 천하가 토금전장의 신용을 인정하게 될 겁니다. 이곳에 모아진 재산이 웅랑교 수중에 들어가더라도 천하에 비하면 작은 것이니까요.” “그렇기는 하지만…….” 석은추는 전환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그렇게 대충 둘러댔지만 말해놓고 보 니 참으로 그럴듯했다. 이제 문제는 과연 제평이 웅랑교의 대군을 막을 수 있느냐하는 것이었다. ‘설마 제평성이 함락되진 않겠지?’ 만약을 위해 은신처를 마련해두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대군이 노리고 있 는 곳에 있다는 사실은 못내 불안했다. 라혼은 천하의 그 누구보다 먼저 웅랑교의 봉기소식을 듣고는 천하의 정세 가 급물살은 탔음을 느꼈다. 이렇게 된 이상 순리를 따르는 것은 시간낭비 라 생각한 라혼은 남례성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되도록이면 불확실성을 제거 를 결심했다. “주군, 곧 천수교입니다.” 확실히 쏟아지는 빗줄기들 사이로 초고수급 여섯이 초상승의 경공신법을 시 전하여 내달리자 오수관을 떠난 반나절이 조금되지 않아서 천수교가 보이기 시작했다. “서안은 무시하고 동안으로 간다. 오차 부탁한다!” “예!” “레버테이트Levitate!” “헉!” 경험이 있는 웅장모와 표상치는 별로 놀라지 않았지만 만력, 고우, 잔폭광 마 육삼은 라혼의 [레버테이트Levitate 공중부양]주문에 기겁했다. “페더 폴Feather fall!” “……!” 너무 빠르게 움직여서 인지 쏟아지는 비 때문에 발견하지 못했는지 반란 진 토인들이 장악한 서안에서는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일곱 명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모습을 본 동안의 하남천원군은 처음엔 기겁하여 전 체가 소란스러워졌다. 그러나 상대가 백호나한임을 확인하자 마치 전투에서 승리한 것처럼 환호성을 질렀다. -백호나한이다! -와아~! -백호나한이 우릴 구하기 위해왔다. -만세~! 만세~! 라혼은 환호하는 군사들에게 손을 들어 답례하고 금영월 대장군을 찾았다. “쿨럭, 쿨럭, 쿨럭…….” “대장군!” 라혼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초췌한 몰골의 금영월이었다. 숨이 찰 때까지 고통스런 기침을 하던 금영월은 겨우 고개를 들어 라혼을 확인하고는 힘없 이 말했다. “라혼참장인가?” “그렇습니다. 대장군 작정령에게 몸이 편찮으시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 “작정령이 떠나기 전까지는 멀쩡했다네. 하지만 내 나이에 너무 오래 비를 맞으니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야!” “…….” “그보다 내 자네에게 면목이 없네. 자네에게 군사들 주고 내가 뒤를 받혔 다면 이렇게 허무하지 않았을 것을 늙은이가 평생 처음 전장에 나와 공을 세우려 너무 무리한 모양이야!” “대장군…….” “허허허, 그래도 자네가 있어 다행일세. 하남천원군을 맡아주게!” “하남천원군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보다 대장군은 몸조리에 신경 쓰십시 오. 앞으로도 계속 대장군의 힘이 필요하니 말입니다.” 금영월은 고열과 함께 실신하여 자리보전할 때부터 결심을 했지만 라혼참장 이 빈말이라도 사양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자 왠지 섭섭한 생각이 들었다. 라혼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자 패전지장(敗戰之將)이라 책망하는 것 같 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 말은 금영월의 흐릿하던 눈에 힘이 들어가게 하기에 충분했다. “저는 하남천원군의 힘으로 남례성을 얻을 겁니다.” “뭐라? 자네는 조정에 반하겠다는 말인가?” “아닙니다. 그저 제 군주를 위해서 이 땅을 얻으려는 겁니다.” “자네의 군주가 누구인가?” “죄송하지만 그것은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 다만 저의 군주는 범이고 저 는 조정을 거스를 생각은 없습니다.” 라혼은 금영월에게 설화의 일을 말하지 않았다. 설화의 정체를 밝히면 라혼 자신에 설화의 신분을 빌어 천하를 도모한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설화가 백호라는 것을 아는 모든 존재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 “그래서 지금 제가 하려는 일은 이렇습니다.” “…….” 금영월은 라혼이 벌인 자신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에 입이 쩍 벌어졌다. 수군을 모아 나름대로 해상전력을 만드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서해의 패권 을 노린다거나 남례성을 바탕으로 대군을 만든다는 계획을 듣자 자신이 라 혼의 손에 놀아난 꼭두각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허허허허, 집지키는 개와 사냥하는 개는 이토록 다르구먼. 그래 이 늙은 이를 무엇에 쓰려는가?” “대장군께서는 남례성을 맡아 주십시오.” “남례성을 말인가?” “금대장군은 하남대원수시니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 “…….” 금영월은 한동안 라혼참장의 눈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오랜 관직생활에서 체득한 감은 그를 처음 보았을 때를 기억하게 했다. 그때도 백호둔(白虎屯) 이라는 계(契)를 만들어 스스로 문제를 한 그였다. 그리고 지금의 모습도 똑같았다. 옛 이야기 중 부잣집 며느리이야기기가 있었다. 부자는 장성한 아들이 있었 는데 그 아들은 장사보다 학문에 뜻이 있었다. 부자는 그런 아들이 자랑스 러웠으나 자신이 죽고 나면 재산엔 별 관심이 없는 아들이 자신이 평생 일 구어놓은 재산을 모두 탕진해 벌릴 것이란 것을 알았다. 그래서 부자는 재 산을 관리해줄 현명한 며느리를 맞길 원했는데 ‘쌀 닷 되로 두 사람이 한 달 동안 생활할 수 있는 처녀와 자신의 아들을 결혼 시키고 자신의 재산을 맡기겠다고 했다.’ 그리고 많은 나이찬 처녀들이 그 일에 도전했지만 애초 에 쌀 닷 되로 두 사람이 한 달을 살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3년 동안 많은 처녀들이 하루에 한 끼를 먹고 버티거나 멀건 쌀죽을 쑤어 버티며 그 일에 도전했지만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고 마지막으로 어느 가난한 농부 의 딸이 그 일에 도전을 했다. 농부의 딸은 첫날 쌀 닷 되 중 일부를 고기 와 맛난 반찬으로 바꾸고 나머지 쌀로 밥을 넉넉하게 지어 배를 든든히 채 웠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가난한 농부의 딸이 배불리 먹어보는 것이 소 원이라 그 일에 나섰다며 부자에게 농부의 딸을 쫓아내라 말했다. 하지만 부자는 자기가 하지 못하겠다고 할 때까지는 그대로 두라하며 그녀의 일을 잊었다. 그리고 한 달이 되는 날, 부자의 며느리를 뽑는 시험에 감독관 겸 같이 생활을 하는 여인이 통통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부자에게 달려와 농부 의 딸이 시험에 통과했음을 알렸다. 부자는 그 말에 깜짝 놀라 어찌된 일이 냐며 물었다. 주어진 쌀 닷 되를 하루도 못되어 탕진했는데 한 달을 버텼다 는 것이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농부의 딸이 사용한 방법은 바로 벌어서 먹는 것이었다. 부잣집에서 일하던 여인으로 하여금 빨랫감이나 바느질감 등 일감을 얻어다 일을 해주 고 그 삿으로 두 명이 살아가는 데에 차고 남았다. 농부의 딸이 말하기를 자신은 어머니에게 어렸을 때부터 바느질을 배웠고 어린 동생들의 옷 또한 스스로 지어 입혔지만 농부의 딸인 자신에게 일을 맡기려는 사람이 없어 부 잣집에서 일을 하며 돈 많은 사람들과 알고 지내는 감독하는 여인의 얼굴을 빌리고 싶어 다고하며 부잣집의 며느리가 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고 말 했다. 그리고 한 달간 벌어들인 돈을 반으로 여인에게 나누어주고 부자가 며느리 들이는 시험을 하던 집을 떠났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들은 부자는 아들에게 ‘나는 이미 며느리를 보았다. 나는 약속한 대로 며느리에게 내 전 재산을 주겠다.’라고 말했고 부자의 그 말에 학식이 높았던 아들은 아 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않고 농부의 집에 찾아가 예를 다하여 농부에게 딸을 아내로 줄 것을 머리를 조아리며 빌었다. 금영월이 생각하기에 라혼 또한 옛날이야기 속의 현명한 며느리 같다는 생 각을 했다. 주어진 것만으로 일을 해결하려 하지 않고 끊임없이 상황에 맡 게 움직이는 것이 꼭 같았다 느껴졌다. “알겠네. 패장으로 내가 다시 군사를 지휘한다고 나선다면 군사들의 사기 가 떨어질 것은 자명하니 어렵고 힘든 일은 젊은 자네에게 맡기고 나는 집 이나 지키려네.” “제 뜻을 이해해 주어 감사합니다.” 라혼은 금영월의 허락을 얻자 그 즉시 고우에게 지휘권을 확보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미 위병출신 군사들은 그것을 당여하게 여겼고, 고된 훈련과 본 능적으로 수영을 할 줄 아는 말이란 동물 덕분에 백호문 출신 군사들의 병 사들의 생존율이 높아 하남천원군을 장악하는 것도 순식간에 이루어 졌다. 여기에 고학이 꾸며놓은 작업도 효과가 있어 모든 일이 마치 약속이나 한듯 물 흐르듯 이루어졌다. 그래서 당황한 것은 청룡대와 주작대였다. 이라이 초지에서 불어난 물에 익사한 것은 대부분 훈련도가 낮은 경주와 계주 출신 의 보군(步軍)과 무거운 갑옷을 입은 금군출신 중보병(重步兵)들이었던 것 이다. 정수풍운군(征獸風雲軍) 정수대장군(征獸大將軍) 강무산(姜武山)은 앙신에 서 반년간 수인조정의 평안천원군(平安天元軍)과 피 말리는 대치를 했다. 그리고 오늘 강무산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식이 도착했다. “이것이 참이냐?” “그렇습니다, 낙왕전하. 흑막의 웅랑교가 거병했습니다.” “좋아! 이제 이 지긋지긋한 숨바꼭질도 끝이다. 림아! 전군에 전투준비 시 켜라!” “아버님, 웅랑교가 거병하였다 하더라도 아직 결과를 알 수 없습니다. 좀 더 기다려 보는 것이…….” 낙왕부의 대공자이자 강무산의 아들 강무림(姜武林)이 의문을 제기했다. “웅랑교가 성고하든 성공하지 못하든 우리와 상관없다. 다만 흑막의 웅랑 교가 거병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천하각처에서 대대적인 징병이 이루 어지고, 군사둘이 조련되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 힘을 가진 쪽은 다름 아닌 십이진가(十二眞家)다. 만일 그들이 힘이 갖추어지고 두 가문 이상이 손을 잡고 우리 선(鮮)을 압박한다면 매우 위태로운 지경에 빠질 것이다. 그리 고 세 가문이 손을 잡으면 필패의 형국이다. 우리가 우리의 목적을 가지고 시간을 끌었듯이 저들도 준비가 될 때까지 시간을 끈 것이다.” “…….” “우리가 노리는 것이 단순히 지금 마동치가 이끄는 천원군을 물리치는 것 이 아니듯이 마동치가 노리는 것은 단숨에 우릴 깨고 대선제국을 멸망시키 는 일이다. 그러나 마동치의 귀에 웅랑교의 일이 들어가면 필히 발등에 불 을 끄려할 것은 분명하다.” “서로의 사정을 빤히 알고 있으니 먼저 공격하는 것이 유리하겠군요.” 후선(後鮮)은 수인들의 힘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비록 오랜 평화로 군 사가 없고, 중앙 원주조정의 영향력이 약화되어 흔들리고 있지만 그동안 축 적한 역량은 무시할 수 없었다. 게다가 각지에서 벌어지는 정립천하운동은 진골십가(眞骨十家)에게 군사적인 힘을 가질 명분과 필요를 제공했다. 이미 각각 하나의 나라나 다름없는 중원십일주(中原十一州)는 하나하나가 능히 백만대군을 만들 수 있는 저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각각 서로 를 견제하고 있으며 중주 남부에 지배력을 상실했다. 그리고 북지성의 반란 과 흑막웅랑교의 거병으로 북쪽도 떨어져 나갔다. 후선이 노린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동인성, 앙신성, 후려를 기반으로 힘을 키워 수인들을 각개격 파(各個擊破)하는 것이다. 그것은 강무세가의 후사가 든든하기에 실행할 수 있는 전략이었다. 일망평(一望平)에 진을 친 후선(後鮮)의 정수풍운군은 보군(步軍) 10만, 마 군(馬軍) 3만이었다. 앙신성 전체로 따지면 족히 30만은 되는 군세였으나 가지역의 수비를 위해 앙신성전역에 흩어져 있었다. 거기에 비해 천원군의 전력은 총17만이었다. 보군 12만에 마군 5만이었지만 그중 3만은 풍운군의 포위한 원평부에 묶여있어 14만 정도가 다였다. 그렇지만 천원군의 기병 전 력과 풍운군의 기병 전력은 질적인 차이가 있었다. 바로 후선 정수풍운군의 기병의 수준이 한수아래였다. 그러나 풍운군에게는 숨겨놓은 패가 하나 있 었으니……. 라혼이 천수교에 온지 만 하루가 지나자 모석이 백호영과 6천 군사를 이끌 고 천수교에 도착했다. 그리고 비어있는 서안을 점거했다. 서안을 점거하고 있던 반란 진토인들은 세 불리를 알고 이미 철수한 상태였다. “위병들 얘기론 곧 짧은 우기가 끝 날거라 하더군. 그러니 비가 그치고 하 수라 강의 수위가 내려가면 지금 남아있는 다리 잔해를 보강해서 다리를 보 수한다.” “하지만 우리가 다리를 다시 놓은 것을 그냥 두고 보지는 않을 텐데요?” “그들의 견제는 구참위가 할 것이고 나는 지금 즉시 동안의 군사들을 수습 해서 호도로 갈 것이다.” “예? 하지만…….” 모석은 호도를 치겠다는 주군의 말에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군사들의 사기도 그렇고, 괴질까지 돈다, 들었는데? 무리하게 움직일 필 요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일이지. 그렇게 때문에 허를 찔리는 것이 고. 어쨌든 모석자네는 서안을 책임지고 석은(席銀), 원복(願馥)은 부장으 로 모석을 돕는다. 그리고 나머지는 나와 같이 간다.” “존명!” “주군, 임시로라도 넝쿨을 역어 가교를 놓아 양안(兩岸)간에 최소한의 소 통이 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혼은 고학의 의견을 받아들여 가교를 놓기로 했다. 고학이 그 의견을 내 지 않았다면 이번에 출정하게 될 백호영들은 하늘을 가로지르는 경험을 했 을 것이다. 가교(架橋)를 만드는 데에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발판이 되는 나무는 주인 없는 서안의 가옥에 사용된 나무를 뜯어 사용 했으며 두꺼운 밧줄도 마을에 집을 뒤져 찾아낸 밧줄들을 합쳐 꼬았다. 그렇게 엉성하지만 말을 데리고 건 널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한 다리가 만들어졌다. 그러는 동 안 라혼은 호도를 공략할 공략군을 편성했는데 마군 5천, 보군 1만 2천, 백 호영 7백이 전력의 전부였다. 열국천하(列國天下) "대원수! 적도들이 움직였습니다!" "도발인가?" "예! 이번엔 저들의 기세가 만만치 않은 곳으로 보아 이번에 아주 끝장을 보려는 듯싶습니다." 천원대원수(天元大元帥) 마동치(馬同治)는 황군(皇軍) 소장(小將) 오산(吳 珊)의 말을 듣고 저들 내부에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제껏 따로 만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병(兵)을 운용하는 것을 보면 저들이 뭔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간은 그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천원군에게도 필요한 것이었기에 약속이나 한 듯 서로 를 예의주시만 할뿐 서로 대규모 도발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흐음~! 동인성과 후려에 있는 세작들에게 별다른 연락이 없었는데……." "마대원수…." "오소장은 지금 즉시 제장들에게 이일을 알리고 만반에 대비를 하라! 걸어 온 싸움을 피할 이유가 없다!" "충(忠)!" 앙신성(央信省) 일망평(一望平)에는 평안천원군 15만과 후선군 13만의 대군 이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비록 너무나 드넓어 막막하기까지 해서 어서 빨 리 광대한 평야지대를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밖에 들지 않는다 하여 '한 가 지 바람이라는 일망(一望)이란 이름이 붙었으나 양군이 서로를 정탐하고 어 느 한곳 숨을 곳이 없어 조그만 움직임도 그대로 들어날 수밖에 없었다. 일망평의 양측에 포진한 30만에 가까운 군사들이 뿜어내는 투기가 천지를 메웠다. 벌써 반년을 대치한 적이었다. 전면적인 전투는 없었지만 순찰대나 슬쩍 건드려보는 국지전은 거의 매일 일어났고 그 전투에서 다치는 군사들 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서로 증오하는 마음을 품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 다. 그리고 반년간 경험을 쌓은 군사들의 훈련도와 사기 또한 훌륭했다. "어떻던가?" "옛! 마대원수, 그전보다 군기가 엄정하고 수가 늘었으나 여전히 기병 전력 이 미약합니다. 단지 코끼리가 18마리가 되어 우리 천원군의 피해가 클 것 이라 예상됩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상병(象兵) 정도인가?" "대원수, 상병에 대한 대책은 이미 세워놓았습니다. 설사 상병이 위력을 발 휘한다고 해도 겨우 18마리입니다." 천원군의 제장들은 필승을 자신했다. 평지에서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기병이 질과 양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어느 정도의 피해가 날것이냐 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천원군보다 후선군 이 먼저 일망평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인물은 없었다. "대원수, 저쪽에서 백기를 든 장수가 나옵니다." "알았다." 비록 요식행위이긴 했지만 10만이 넘는 군사들이 대치하고 서로 목숨을 건 전투를 시작해야하는데 마지막까지 전투를 피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시늉 이라도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마동치는 저쪽과 같은 두 명의 호위기병에 호위를 받으며 중간지점까지 나갔다. "하하하, 반년이나 이웃에 있었는데 이제야 뵙습니다. 천원대원수 마대원수 !" "허허허허, 그렇구려. 강무대협!" -꿈틀! 정수대장군과 낙왕이란 직책이 있는 강무산은 마동치가 '대협(大俠) '이라 칭하자 안면이 경직되었다. 마동치는 후선군 자체를 조정에 반하는 무림세가로 폄하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강무산은 그런 마동치의 태도에서 자신이 의도한 바대로 방심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굳은 표정을 숨기지 않고 좀 전과 다른 사무적인 어투로 말했다. "이곳은 '보(保)'의 땅이고 우리 대선제국의 황제폐하는 보를 이어받을 적 통후계자의 후견인이니 순순히 군사를 물리시오." "허허허허, 우습구려. 반역도 거정 또한 반역도이고 후려의 강무세가도 반 역도이거늘 그것이 말이 되는가?" "서로 말로써 해결이 되지 않으니 창검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겠군. 만약 내 가 마대원수를 생포하게 된다면 목숨은 보장해 드리리다. 그러나 거친 저희 군사들의 손속은 매섭기 그지없습니다." "허허허허, 그렇다니 다행이오. 그러나 본인은 그런 약속을 해드릴 수 가 없어 미안하구려. 본시 반역도당은 그 자리에서 참해야 하니 말이오." 마동치가 이렇게 나오는 이유는 바로 조정, 아니 갑주(甲州)의 서제가(鼠帝 家)에서 어느 정도 준비를 끝마쳤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하기 에 일망평에서 후선군을 깨고 단숨에 앙신성을 안정시킨 후 거의 비어있을 동인과 후려로 군을 몰아갈 생각에 반역도당인 감히 낙왕이라 칭왕(稱王)하 는 강무산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그동안 적수로써 상대한 강무산은 절대 녹록한 인물이 아니었기에 더더욱 살려둘 수 없었다. 그렇게 뜻을 밝히고 서로 아군진영으로 돌아온 총대장들이 칼을 빼듦으로써 회담이 결렬되었음을 알렸다. 어차피 기대하지도 않은 것이었기에 양측 병 사들은 전의(戰意)를 드높이는 함성을 내질러 고요했던 일만평을 진동시켰 다. -와~! 와! "림아! 화무대로 돌아가거라!" "옛! 보중(保重)하십시오!" 후선군은 군사조직은 풍(風), 운(雲), 뇌(雷), 우(雨), 림(林), 화(火), 산 (山), 영(影)의 팔기(八旗)로 이루어져있었다. 풍기군은 말을 탄 마군, 운 기군은 보군, 뇌(雷)는 쇠뇌와 발석차를 다루는 노병(弩兵), 우(雨)는 궁병 , 림(林)은 중보병, 화(火)는 강무세가나 강무세가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무사들, 산(山)은 코끼리를 운용하는 상병(象兵), 영(影)은 인자(忍者)들이 었다. -하! 쿵! 하! 쿵! 하! 쿵! 하! 쿵! 마치 약속이나 한듯이 양군은 기합성을 외치고 창이나 발로 땅을 굴렀다. 그러자 메마른 황무지의 먼지가 들어서며 시야를 가려왔다. 각각 15만과 13 만의 대군이 이번 회전(會戰)에 참가하고 있었다. "중보로 전진!" 중보(重步)란 말 그대로 마동치가 이끄는 조정의 평안천원군은 무거운 발걸 음으로 발을 구르며 천천히 진형의 일부를 전진 시켰다. -쿵, 쿵, 쿵, 쿵, 쿵, 쿵………………. 수만의 대군이 일제히 진형을 갖추고 움직이는 것은 장관이었지만 그들의 목표가 되는 쪽에선 그저 장관만은 아니었다. "호오~! 의외로군. 처음부터 대규모 기병으로 돌진해올 줄 알았는데 보병을 먼저 내놓을 줄이야." "전하, 우림군(雨林軍)으로 저들을 막겠습니다." "비록 미끼이긴 하지만 군사들의 사기가 있으니 그렇게 하도록 하지 호사( 護射), 우기(雨旗) 1만의 위력을 보여주게." "맡겨 주십시오." 호사는 우기(雨旗) 즉 궁수 1만과 크고 두꺼운 방패를 가진 중보병 림기(林 旗) 2만으로 구성되 우림군 지휘해서 가장 수가 많은 풍운군 위주로 포진한 진(陣) 앞으로 나섰다. 원래는 진형의 후위에서 화살을 날리는 것이 바른 병법운용이었지만 어차피 서로 전력을 탐색하는 서전이었다. 그리고 2만의 중보병인 림기군의 보호를 받으므로 크게 다르진 않았다. "장군, 우림군 전원 포진을 완료 했습니다." "좋아! 철전을 준비해라!" "철전을 준비해라!" 쇠 화살인 철전(鐵箭)을 의미하는 검은 깃발이 흔들고 동시에 복명복창 소 리가 정수풍운군 우림군의 궁수들의 귀를 때렸다. 그러자 그들은 주저 없이 전통(箭桶)에서 가장 무거운 철전을 골라 활시위에 걸었다. 사정거리는 짧 지만 그 위력은 가장 대단한 철전을 준비시킨 호사는 적이 철전이 도달하는 거리까지 접근할 억겁 같은 시간을 기다렸다. 그리고 적군이 발걸음을 가 볍게 하여 슬슬 속도를 내기시작하자 활시위를 당기게 했다. "천원군 선봉대 돌격!" -와아~! 선봉장을 자처한 오산은 적진과 거리가 근 150보에 이르자 선봉대에 돌진을 명하며 스스로 앞서 내달렸다. 그리고 검은 비가 내리는 환상과 함께 오산 의 세상은 꺼져버렸다. 하늘을 향해 일제히 쏘아진 철전은 포물선을 그리며 돌진하는 천원군 돌격 대의 머리위로 떨어졌고 활에서 쏘아진 힘과 더불어 떨어지는 힘까지 합한 무거운 화살은 군사들이 쓴 투구를 꿰뚫고도 힘이 남아 땅에 박혀들었다. -와아! 와아! 단한번의 일제사격에 자신들을 이끄는 선봉장을 잃은 군사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고 다시금 쏟아지는 화살세례에 전열이 완전히 흐트러져 버렸다. 만 약 이 전장에 그들뿐이라면 전투는 이미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바로 지금 기병을 돌진시키면 지리멸열 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천원군 본진을 의식한 후선군은 돌격하지 않아 대부분 천원군 선본대들은 살 수 있었다. 실상 죽거나 다친 사람보다는 멀쩡한 군사들이 더 많았다. 그러나 장군을 잃은 군사에게 많은 것을 바랄 수는 없는 것이 전쟁이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대원수, 이러다간 군사들의 사기가 꺾기겠습니다." "원래 작계대로 어서 빨리 마군(馬軍)을 투입해야 합니다. 마군으로 짓밟으 면 될 일입니다. 제게 맡겨주십시오!" "사상장은 마군을 이끌고 적도들을 짓밟아버리고 양정장은 전군 돌격을 준 비하라!" "충!" 부원수(副元帥) 상장(上將) 사법린(蛇法鱗)과 정장(正將) 양석호(羊石澔)는 거의 동시에 군례를 하고 말을 몰아 자기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본격적 인 회전이 시작되었다. "이거야! 이렇게 알아서 돌격해주니 어떻게 적의 돌격을 유도하나 고민했던 것이 우습군. 우리 뇌기(雷旗)의 천보노(千步弩)의 위력을 보여줄 때다. 구전명(具全名)!" "존명!" 천원군의 기마돌격이 시작되자 후선군 또한 큰 방패와 긴 창을 든 군사들 전면에 나섰고, 후위에서는 군사들이 손수레들을 덮은 거적을 벗겨냈다. 그 러자 거의 창(槍)을 연상시키는 화살이 장전된 쇠뇌가 위용을 들어냈다. 그 리고 오랫동안 훈련을 했는지 그것을 다루는 병사들은 능숙하게 그것을 다 루었다. 4명의 건장한 군사들이 활시위를 당기고 커다란 화살이 올려지고 거의 일천을 헤아리는 모든 쇠뇌가 장전을 마치자 구전명은 검을 높이 치켜 들었다. 그러자 쇠뇌 전면의 군사들이 물러나고 구점명의 검이 내려진 순간 쇠뇌가 발사되었다. -텅 터더덩! 둔탁한 비파음이 울리며 쇠뇌에서 발사된 벼락전은 돌진하는 수만 기병을 휩쓸었다. -퍽 퍼버버벅! 굵은 화살은 두터운 갑주를 입은 기병은 물론 말까지 통째로 관통했고 가슴 에 화살을 품고 그 힘에 덩달아 뒤로 날아가 뒤에서 돌격하던 동료들을 낙 마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고작 천개의 화살로는 수만 기병을 돌격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일시에 쏘아진 수만 개의 화살은 충분히 위협이 되었 다. "아니 쇠뇌는 그렇다 치고 궁병이 사용하는 활에서 쏘아진 화살이 저렇게 멀리 날아가다니……." 마동치는 거의 200보 이상을 날아와 두꺼운 갑주로 무장한 기병들을 상하게 하자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저들이 보유한 쇠뇌정도면 능히 천원 군이 진을 친 이곳까지 그 힘을 미칠 수 있었다. 게다가 후선군의 궁병의 수가 근 2만에 달하는 것이 분명하니 상당한 피해를 각오해야 했다. 그러나 화살의 태반이 빈 땅에 박히고 악에 바친 천원군의 마군의 돌격은 전혀 그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그렇게 서너 차례 화살비를 뚫은 천원군의 마군은 장창으로 방비한 훈선군의 진형에 충돌했다. -꽈짝! 말의 돌진하는 힘이 담긴 기병창이 후선의 방어진을 깨고 후위에 기병검으 로 무장한 기병들이 후선군을 도륙하며 종심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후선군 의 진형이 무너지는 것을 확인한 마동치는 전군을 돌격을 명했고 10만 대군 이 일제히 성난 파도처럼 밀어닥쳤다. "전군돌격!" -와아~! 그에 맞서 후선의 정수풍운군 또한 각자 분대의 돌격명령에 따라 앞으로 내 달렸다. -뿌우~! 뿌우~! 그리고 18마리의 코끼리들이 그 육중하기 그지없는 몸으로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고 정수대장군 강무산은 마지막 패를 꺼들었다. "대선제국 만세!" -대선만세! 피와 살이 튀는 아비규환의 전장에 난데없이 붉은 노을 같은 검기가 충천했 다. 바로 팔기(八旗) 중 최강이며 강무세가의 힘인 화무대(火武隊)의 고수 들이었다. 붉은 갑주의 고수들이 절정의 경공신법(輕功身法)을 펼치며 적군 을 도륙하자 기세 좋게 후선군을 휩쓸던 천원군의 기병들이 맥을 추지 못했 다. 우습게도 천원군의 마군들은 후선군의 진형을 끝내 돌파하지 못하고 안 에 갇힌 형상이 되었다. 본래 기마대는 진을 형성한 보병의 종심을 가르고 지나 우회해야했다. 그러나 후선의 림기군이 장창을 든 군사들이 진형을 단 단하게 굳혀 그들의 돌파를 철저히 봉쇄한 것이었다. 적당한 공간에서 빠르 게 움직이지 못하는 기병은 그 효용성이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설상가 상으로 장창병에 무공의 고수까지 엎치고 덮치는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그 러나 전황이 후선군에 유리한 것만은 아니었다. 강무산이 생각했던 것보다 기병들의 돌격은 무서웠고 상상을 초월하는 피해를 입혔기 때문이었다. 그 리고 그간 힘들게 키워온 궁병 우기군이 저들의 돌격에 큰 피해를 입었다. "말을 탄 군사는 무섭군. 하지만 이제 저들의 패는 모두 끌어냈고 내게는 아직 패가 남아있지 풍기군을 투입해라!" "존명!" 일망평에서 전투는 어느새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확 인한 정수대장군 강무산은 아직까지 전력을 보족하고 있던 기병인 풍기군을 직접 이끌고 전장을 크게 우회하여 적의 뒤를 쳤다. 그리고 팽팽한 균형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후선군이 기병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골몰한 것처럼 천원군도 후선의 코끼리를 대비하기위해 골몰 했었다. 그러나 후선이 천원 군의 기병돌격을 가소평가 했듯이 천원군도 코끼리의 위력에 과소평가했다. 그러나 후선에선 천원군의 기병을 막는 것을 승패의 열쇠로 생각하여 이중 삼중의 준비를 했지만 천원군은 상병의 위력이 전세를 뒤집기엔 무리라 생 각해 결사대를 준비하는 것만으로 그 준비를 다했다. 그러나 후려의 강무세 가는 남례성의 진토인들과 싸움 경험이 있었고 어떻게 코끼리를 상대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어떻게 하면 코끼리를 상대하는 적에게 피해 를 받지 않을지 알고 있다는 말이 되었고, 천원군이 마련한 그물부대는 후 선의 코끼리를 보호하는 군사들에게 도륙되어 별반 힘을 쓰지 못했고 18마 리 코끼리는 그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리고 코끼리의 진가는 균형이 무너진 순간 더욱 배가 되었다. 천원군의 견고한 진형이 후방에 기병 난입 으로 헐거워 진 사이를 그대로 돌파했기 때문이었다. 전신에 고슴도치처럼 화살을 맞은 성난 코끼리들 천원군을 짓밟았고 그것을 기화로 진형을 걷잡 을 수 없이 무너졌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한 천원대원수 마동치는 후퇴명령 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징~! 징~! 징~! 후퇴를 알리는 징소리가 울리고 천원군을 등을 돌려 패주하기 시작했고, 후 선 정수풍운군은 도망가는 적군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록 승리하 기는 했지만 후선의 피해도 만만치 않아 너무 먼 곳까지는 추적하지 못했다 . 그러나 이 전투로 후선은 앙신성을 주도 원평(元平)을 제외하고 완전히 후선의 영역 안에 두었다. 그리고 원평성은 시간 지나의 식량이 바닥나기만 을 기다리면 되었다. 열국천하(列國天下) 제평(齊平)을 지켜주던 후산의 두 줄기인 현산과 무산은 웅랑교의 곰과 늑 대들에게는 그저 길이었을 뿐이었다. 제평의 금군대장 기도오가 비록 얼마 간의 방비를 했지만 웅랑교의 주공은 성벽이 아닌 후산이었기에 그 대비는 너무나 부족했다. -컹컹! -카오! -크르렁! "이런! 구원병을 아직 이냐?" "중무장을 하고 산정에 오르려면 족히 반시진은 걸립니다. 이제 1각이 지났 을 뿐입니다." "어서, 어서 재촉하란 말이다. 이들이 산을 넘으면 다 죽는다!" 그렇게 다시 1각을 전력을 다해 그들을 막았지만 중과부적(衆寡不敵)에 산 을 타는 늑대인간들의 경이로운 능력은 지리적 불리함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크르르르~! 성내로 들어가 곧바로 남벽(南壁)의 성문을 열어 소교주를 맞 이한다. 낭기(狼旗)가 웅기(熊旗)보다 더욱 뛰어남을 증명하라!" -컹컹컹! -캬오~! 동쪽의 현산은 곰인간인 웅기가 서쪽 무산은 늑대인간인 낭기가 맡아 공략 했다. 원래 제평을 감싸듯 뻗든 후산(後山)은 일부러 사람이 다니는 길을 내지 않았다. 또 오래전부터 존재하던 모든 길을 의도적으로 끊어 길로 산 을 오르려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웅랑교의 웅기와 낭기에게 장벽이 되지 못했다. "기대장님 후산에서 낭인들과 웅인들이 쏟아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뭐야? 벌써!" 제평 금군대장 기도오는 성내로 곰인간과 늑대인간들이 난입했다는 보고에 기겁했다. 그들이 산을 오르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지원하는 군사를 보낸 것인 겨우 반시진 전이었는데 웅랑교의 낭인들과 웅인들은 그것을 깨고 들 어온 것이었다. 그리고 서로 연락을 주고받았는지 남벽 밖에 포진한 간헐적 으로 화살만 날리던 웅랑교 본대가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석대인, 아무래도 제평이 웅랑교의 손에 떨어질듯 하오이다." "……." 무호우 장자의 허탈한 말에 늑대인간들이 제평의 대로를 내달리는 모습을 본 토금전장 제평총관 석은추는 얼굴이 굳었다. 목숨도 모숨이려니와 막대 한 재산을 잃게 되어 그것이 안타까웠다. "일단 마련해둔 은신처로 피합시다. 막대한 재산을 바치는데 설마 죽이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병졸의 눈먼 칼은 피해야 하겠지요." "예." 석은추는 가족을 챙기기 위해 내실로 들어가는 무호우 장자의 등을 보며 전 환을 이용해 마지막으로 중경 토금전장의 금대부에게 제평성이 떨어졌음을 보고했다. 그리고 무호우의 식솔들과 제평의 모든 재산이 모여 있다 할 수 있는 지하창고로 몸을 피했다. 남벽의 성문이 깨졌는지 화광이 치솟고 여인 의 날카로운 비명성이 석은추의 귓가에 들려왔다. 석은추를 마지막으로 휘 황찬란한 보물이 가득한 창고의 문이 닫히고 창고 안은 무거운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사람이 많군." "죄송하오. 모두 나와 인연이 있는 자들인데 그대로 둘 수 없어 모두 데려 왔소이다." 석은추는 넉넉한 창고 안에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고 혼잣말로 중얼거 리는 것을 마침 근처에 있던 무호우 장자가 듣고 변명조로 이야기했다. 그 러나 석은추는 지금은 무장자를 탓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여기에 숨는 것 자체가 미봉책이기 때문이다. "피를 본 웅랑교도들이 한바탕 휩쓸면 웅랑교의 수뇌들이 나서서 정리를 할 것이오. 흑막에서 이 제평만한 성채가 없으니 그들이 너무 심하게는 하지 않을 테니 말이오." "예." 그때 석은추가 가진 전환에서 그것을 가지고 있는 석은추 만이 들을 수 있 는 금대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석총관! 자네에게 한 가지 임무를 맡기려하네 일단 자네가 가진 예금명부 와 골동품을 전환을 통해 보내고 금은의 일부는 웅랑교에 받치게, 그리고 그들에게 우리와 거래할 뜻이 있는지 의사를 타진하게. "……!" 짧은 우기가 끝나고 후덥지근한 마지막 더위 속에서 라혼이 이끄는 하남천 원군은 관도를 따라 진군하기 시작했다. 비록 낮에는 가만히 있어도 땀이 비 오듯 하는 더위였지만 밤이면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견딜만했다. "앙신성은 지금쯤 가을일 텐데 여기는 사시사철 여름 라지?" "어이구 말도 마십시오. 두목, 처음 봉수성까지 오는데 쪄서 죽는 줄로만 알았다니까요. 게다가 고지식한 장수들이 두꺼운 가죽으로 만든 갑주도 못 벗게 해서는 하루에도 탈진해 쓰러지는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니까요." 잔폭광마의 폭마방에서 한때 마적노릇을 하던 전직 마적 구대(球帶)는 참으 로 오랜만에 두목으로 모시던 잔폭광마와 정담(?)을 나누었다. "그래서 제가 봉수성에 와서 제일 먼저 한일이 이 등갑을 구해 입는 것이었 죠." "그거 기름먹인 나무라 불에 잘 탄다! 그거는 알고 있는 거냐?" "체! 차라리 화끈하게 불에 타죽는 것이 낮지 이 더위에 두꺼운 가죽 갑옷 을 입고 서서히 쪄죽는 것은 사양할 랍니다. 그리고 이거 얼마나 가볍다고 요." "하긴 니 목숨이지 내 목숨이겠냐?" "그보다 두목은 덥지 않으세요?" -딱! "아얏!" "나는 내공의 고수다 어디 하수 중에도 못 끼는 놈이……." 구대는 두목이 고수인 것과 자신이 맞아야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 나 두목의 성격상 그런 것을 물고 늘어지면 매만 별것이 분명하기에 아무 말 없이 찌그러졌다. 지금은 해가 가장 높은 곳에 있어 잠시 행군을 멈추고 쉬어가고 있었다. 관도를 둘러싼 밀림에서 언제 독화살이 날아올지 모르고 해가지면 서늘하기에 이렇듯 대낮에는 쉬엄쉬엄 이동하고 해가져서 서늘해 지면 진군을 계속했다. 낮밤이 바뀌어 선잠을 자야 했지만 그렇게 하는 것 이 무더운 날씨에 강행군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이거 손해가 막심하겠어." 라혼은 토귀가 전해준 제평성이 거병한 웅랑교에게 떨어졌다는 소식에 이대 로 제평으로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하여 그곳의 재화를 회수해올까 생각했다. 그러나 곧 생각을 바꾸어 웅랑교와 교역을 생각했다. 라혼에게 흑막의 군마(軍馬)와 가축의 가죽, 치즈 같은 특산품과 남례성에서 생산되 는 향신료를 사줄 시장을 유지하는 것이 더 큰 이득이었다. 어차피 웅랑교 가 중원을 노리려면 북지성을 지나야 하는데 북지성은 현재 수인과는 상극 인 정립천하의 무리들이 길을 틀어막고 있었다. 중원입장에서 험하고 척박 한 북지성은 그자체가 성채(城砦)라 할 수 있었다. 흑막의 사내들이 거칠고 강인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배가 고프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육류보다 채소 를 먹는데 더 적합하다 그러나 흑막에서는 곡식과 채소를 구하기 힘들었다. 그러니 장강대하변의 기름진 땅에서 나는 양식은 흑막에도 반드시 필요했 다. 바로 그것이 라혼이 토귀에게 그들과 거래를 타진하라는 지시를 한 근 거였다. 그러나 비록 대부하는 형식을 빌리겠지만 그들은 언젠가 꺾어야 하 는 상대이기에 그것은 포기해야 했다. 천하7대 성시(成市) 중 하나인 제평 의 재화는 그야말로 엄청났다. 라혼은 나무그늘 아래에서 토금전장에서 맡 은 예금 장부를 훑어보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원하는 물건을 어떤 장소에서든 자신의 손 위로 정확히 텔레포트 시키는 [메이저 인스턴트 서먼 즈Major Instant Summons]주문으로 라혼이 만든 전환에는 위저드 마크(Wiza rd Mark)가 되어있어 사람이 손에 들 수 있는 물건이라면 전환을 가진 자가 물건을 들고 [마크Mark:표시]라고 시동어를 외치면 라혼은 어디에서든 그 것을 소환할 수 있었다. 원래는 전환을 가진 개개인에게 그렇게 물건을 옮 길 수 있는 기능을 첨가하려 했지만 그렇게 하려면 라혼의 에텔 스페이스가 중계지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라혼은 에텔 스페이스의 힘을 다루는 수련하고 있어 가급적 제 3자가 에텔 스페이스를 사용하지 않 으려했다. 누군가 에텔 스페이스를 이용하며 미묘하게 흔적을 남기기 때문 이다. "주군, 시간이 되었습니다." 모석이 하던 부관의 임무를 맡은 참령 고우가 미시(未時:오후1~3) 말이 되 어 진군을 계속할 때가 되었음을 알려왔다. "표상치는 돌아왔나?" "아직 정찰대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정찰대가 돌아오는 대로 출발 할 수 있게 준비하게." 각 백인대 별로 인원점검을 마치고 행군진형으로 도열이 마무리될 무렵 표 상치가 돌아왔다. "주군, 열지족 대군이 진을 치고 우릴 기다리고 있습니다." "2만 대군이 싸움을 벌일 만한 곳은 초로역방(初露驛房)뿐입니다." 표상치의 말을 들은 소천위는 그곳의 지명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눈치빠른 지심이 행장에서 지도책을 꺼내 라혼 앞에 펼쳤다. "우리가 있는 곳이 여기고 초로역방은 여기 이 공터이니 대략 한시진이면 도착하겠군." "허참! 이거 고맙다고 해야 하나?" 이것은 여우가 굴에서 나와 사냥꾼을 기다리는 형상이었다. 이때까지 라혼 을 괴롭히던 것은 그들이 밀림을 안식처 삼이 치고 빠지는 전술이었다. 그 런데 그것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주인님!" "말해라." "밀림이 우리들에게 익숙한 곳이기는 하지만 남례성의 부족에게도 밀림은 위험한 곳입니다. 게다가 이 근처 밀림은 맹수와 독충이 많습니다. 관도 주 변은 사람들이 왕래가 많아 그런 것이 덜하지만 조금만 깊숙이 들어가면 도 처에 위험이 산재한 곳입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이것은 기회입니다. 이번 기회에 놈들을 쓸어버립시다. " 웅장모였다. 라혼은 일단 최대한 빠르게 호도공략하고 백호영과 함께 밀림 으로 들어가려했다. 밀림이 거추장스러운 이유는 그곳이 숨기 쉽기 때문이 었다. 그러나 라혼은 그들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기에 그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열지족 추장 소노리의 승부수다. 그가 흑막 웅랑교의 봉기를 알고 그런 것일까? 그렇다면 그들 뒤에 후선 강무세가가 있었겠군. 앙신성에서도 무슨 일이 있다는 말인데….' 라혼은 열지족이 호도를 점거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열지족이 남례성의 전 역에서 들고 일어난 반란 진토인의 중심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은 가장 구체적인 형체를 가진 거의 유일한 반란 진토인 무리였다. 라혼은 속셈은 그런 그들은 적당히 압박함으로써 그들이 힘을 키우고 전 반란 진토인 세력 의 중심이 되길 바랐다. 그리고 소노리의 딸인 메이를 매개로 그들을 회유 할 생각이었는데 그가 덜컥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주군?" "공격진군대형을 유지하며 행군을 개시한다." "존명!" 라혼은 고학이 가교와 같은 자신이 생각지 못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기를 바 라며 전환으로 천수교에 있는 고학과 천하정세를 논의했다. "우아아아!" "……." "뭐야! 속았어! 모든 일을 내게 떠밀다니 이럴 수는 없어!" 여인천궁의 모든 재화를 다루고 벌어들이는 금당의 당주 금선자 하화리는 1 0만 명이나 되는 피난민과 거칠고 험한 북지성의 산길을 걷느라 고생이 이 만저만 한 것이 아니었다. 라혼 상공의 방법이란 사람들에게 '머물 곳이 있 다. 그곳까지 오면 집과 호구지책을 마련해주겠다.'였다. 그리고 그 다음은 정말 인정사정없는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각 요소요소마다 무료 급 식소를 열어 밀떡을 빚어 유리걸식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줬는데 근 십만에 이르는 배를 채워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늘도 막대한 곡식이 그 들의 입속으로 허무하게 사라졌는데 올해는 농사가 흉년이 아닌 편년작 이 었지만 많은 세력이 곡식을 군량으로 사재기하여 곡식 값이 천정부지로 치 솟았다. 하화리는 허공으로 사라지는 곡식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지난 길목요소요소까지 그것을 옮기는 일도 수월하지만은 않 았다. "하당주, 갑자기 왜 소리를 지르신 거예요?" "소궁주, 이건 너무하잖아요." "뭐가요?" "상공께서 책임지신다고 장담했는데 그게 저들을 황무지로 내몬 것이라니… ." 설화는 하화리의 푸념에 먹을 것을 얻어가는 지치고 피곤한 사람들의 얼굴 을 하나하나 살폈다. 저들 중 절반 이상은 장동의 피난민이 아닌 북지성의 유리걸식하는 자들이지만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 고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희망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제가 저들에게 약속한 것은 머물 곳 과 일거리가 전부예요. 저는 아직 제게 모든 것을 맡긴 사람들까지 책임질 힘이 없으니까요." "소궁주?" "……." "그럼 앞으로는 그 힘이 생길 것이란 말인가요?" 설화는 금선자 하화리의 물음에 신비롭고 아름다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석양이지고 하화리가 준비한 양식이 다 떨어질 때쯤 하늘에서 커다란 새가 떨어져 내려왔다. "소궁주님!" "소매?" 매소녀 응소매(鷹少梅)였다. 응소매는 가쁜 숨을 내쉬며 설화 소궁주에가 갖갖으로 한마디를 전할 수 있었다. "헥헥헥…소궁주님, 흑막에서 웅랑교가 거병해서 제평을 불태웠데요." "그래?" "뭐야? 그 웅랑교가 거병했단 말이야?" 설화는 응소매의 말에 '그런 일이 있구나.'하는 태도를 보였고 천하정세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대상인(大商人)인 하화리는 놀라 되물었다. "소매, 그게 무슨 소리니 웅랑교가 거병했는데 제평은 왜 불태워?" "아이참, 그걸 제가 어찌 알겠어요. 다만 지금 무산곡에 동맹을 청하는 웅 랑교의 고수가 와있다고요. 그래서 궁주님이 어서 빨리 회궁하시래요!" "나를?" "예." "소궁주, 아무래도 묘올산성에 틀어박힌 군사들의 힘을 빌리고 싶은 모양이 에요. 예로부터 척박한 흑막에서 일어선 세력은 하나같이 강군이었지만 물 자가 풍부하지 못한 탓에 자연 소멸하기 일쑤였어요. 흑막에서 선 세력이 중주에 있던 나라와 싸움에서 전투는 항상 이겼지만 전쟁은 이긴 적이 없어 요." "전투는 맹장이 이끄는 강병이 있는 군대가 이기지만 전쟁은 창고가 든든한 군대가 이기는 이치 말이죠!" "그래요. 그럼 그들에게 흑막과 중원을 잇는 북지성의 대종도(大縱道)가 정 립천하를 외치는 무리들이 장악하고 있으니…." "소궁주님, 금당주님 궁주님의 엄명이라고요! 이렇게 시간을 끌 일이 아니 잖아요." 응소매는 웅랑교의 사신으로 온 고수의 살기 넘치는 기세에 질려 그녀가 판 단하기에 여인천궁제일 고수인 설화가 어서 빨리 궁으로 돌아갔으면 했다. 이미 여인천궁이 자리 잡고 있는 무산곡(巫算谷)으로 진입할 때 상당한 신 위를 보이며 여인천궁의 여고수들을 너무도 간단히 제압했다. 자존심 때문 에 말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웅랑교에서 보내온 고수는 사실상 안방에 무 단으로 쳐들어온 무뢰지배(無賴之輩)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웅랑교와 우리는 아무런 교류가 없었잖아 그런데 용케 궁 안으로 들였네? 궁주님에게 무슨 복안이라도 있으신 건가?" "아니에요! 그들은 그냥 들어왔다고요. 토연이하고 미초하고 중상을 입었는 데……." "뭐야? 그럼 사신이 아니라 침입자잖아!" "하당주 언니는 이곳을 부탁해요. 소매, 가자!" "아니……." -휘익~! "나도 같이 가야……." 금선자 하화리는 눈 깜짝할 새에 점으로 변한 설화의 무시무시한 경공조예 에 할 말을 잊었다. 그리고 한참 지나서 중얼거렸다. "우리 궁의 옥녀신법이 저렇게 대단 것이었나? 난 내가 여인제일경공인줄 알았는데……." 열국천하(列國天下) 웅랑교 장로(長老) 천웅흥조(千熊興爪) 웅량흘(熊良屹)은 북지성에 거점을 마련하고 웅랑교의 남하를 위해 오래전부터 북지성에 들어와 있었다. 그리 고 최근 북지무림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여인천궁을 가장 심혈을 기울 여 주시했다. 웅량흘이 판단하기에 여인천궁의 힘은 확실히 천하를 울릴만 했으나 웅랑교에 한참 못 미쳤다. 웅량흘은 거친 흑막의 사내였고 흑막에선 약자가 강자에게 의탁하여 보호를 받는 것이 당연한 곳이었다. 그러니 '약 자'인 여인천궁은 바로 웅랑천교의 보호아래 있어야했다. "궁주, 약속한 하루가 지났소. 이제 확답을 주시오. 친구가 되겠소. 적이 되겠소." "오호호호호호, 곰이 미련하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는데 진정 그렇군요. 전 이미 확답을 드렸습니다. 웅랑교와 손을 잡을 생각은 없었다고……." 웅량흘은 미간사이에 모양의 굵은 핏대가 서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확 실히 처음부터 여인천궁주 섬섬옥수 상유란의 뜻은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웅량흘이 곰인 것을 빗대 '미련한 곰'운운했으니 엄청난 모욕감을 느낀 것이다. "내가 그대를 궁에 머물게 한 것은 그대가 원하는 것이 묘올산성의 군사들 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에요. 그 군사들은 우리 소궁주을 따르고 있기는 하지만 나는 조정의 일에 관계를 맺고 싶지 않군요." "……." 상유란의 말은 웅량흘을 혼란스럽게 하기에 충분했다. 태자가 황제의 후계 자이기는 하지만 황제에겐 신하에 불과하듯이 무림의 문파나 방파에서도 문 중의 수장이 밑으론 문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여인천궁의 소궁 주 천상천화가 궁주라도 됐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인천궁 장동 에서 조정을 돕는 무림맹의 한축을 이루었고 지금은 비로 이름만 남은 무림 맹이나 사실상 천상천화가 이끌고 있었다. 그렇게 보면 실제로 일을 벌이고 움직인 여인천궁 소궁주 천상천화가 실권을 가직 있다는 여인천궁주의 말 은 일리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대단한 천상천화지만 그녀는 여인천 궁의 소궁주였고 바로 웅량흘과 대면하는 섬섬옥수 상유란의 제자였다. 군 사부일체(君師父一體)의 법도에 따라 상유란이 마음의 결정을 제자이면서 여인천궁의 궁도(宮徒)인 천상천화는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웅량흘은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다. "클클클클, 뭐 좋소. 강호무림은 힘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곳. 말로해서 안 되니 힘을 쓸 수밖에……." "감히!" -크르르르르르…………. 웅량흘이 한마디가 여인천궁의 정청(政廳)에 떨어지자 그의 뒤에 7명의 웅 랑교 제자들이 2명의 웅인(熊人)과 5인의 낭인(狼人)으로 화신(化身)하며 진득한 살기를 흘리기 시작했다. "흥, 보자보자 하니까 너무하는 군. 검녀들은 이십팔로옥녀검진을 펼쳐라!" 이제껏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억누르고 웅랑교 장로라는 작자의 방자한 작 태를 지켜보던 검선자 주묘연은 궁주의 명이 있기도 전에 여인천궁 최고의 합격진인 이십팔로옥녀검진(二十八路玉女劍陣)를 발동시켰다. "클클클클, 이따위 어설프기 그지없는 검진으로는 본교의 칠현무진(七玄武 陣)를 이기지 못한다." "흥, 노망난 우둔한 늙은 곰 한 마리 잡기엔 충분하다. 그리고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아는 법." "묘연아!" "궁주." 상유란은 폭주하려는 검선자 주묘연을 조용히 불러 말리고 일그러진 얼굴을 한 웅량흘에게 말했다. "웅량흘 장로, 본궁주가 곡의 입구에서 소란을 피운 그대를 궁으로 들인 것 은 그대가 두려워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본궁주가 저어한 것은 웅랑교와 본궁은 그간 내왕이 없었고 아무리 힘이 지배하는 강호무림이라 하나 서로 원수질 일을 만들 필요가 없기에 그런 겁니다. 하지만 계속 안하무인처럼 행동한다면 그대들은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겁니다." "흥! 그래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뭐냐?" 상유란은 웅랑교 장로 웅례흘의 반문에 차가운 어투로 말했다. "이대로 물러가겠다면 그냥 보내주겠으나 계속 소란을 피운다면 웅랑교와 여인천궁은 한 하늘을 지고는 못하는 사이가 될 것이다." "큭큭큭큭, 그럴만한 힘이 있다면 한번 해보시지." 그러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 누구도 섣불리 더 이상 도발하지 않았다. 이 십팔로옥녀검진을 펼친 검녀들도 칠현무진을 펼친 웅랑교의 교도들로 먼저 손을 쓰지 못했다. 우습게도 일이 끝까지 가버리자 웅량흘의 눈에 여인천궁 의 만만치 않은 저력이 보인 것이었다. 지금 이 자리엔 여인천궁의 최고수 들인 장로들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허, 일이 어렵게 되었구나. 계집들의 포위를 뚫기는 쉽게 제압되지 않을 것인데…….' 여인천궁주 상유란은 이미 최후통첩을 했고, 공은 웅량흘에게 넘어왔지만 결론은 맞서 싸우다 죽느냐. 적당히 힘쓰다 여인천궁을 빠져나가느냐, 아니 면 일단 그냥 물러서느냐 였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웅랑천하(熊狼天下)를 위해 거병한 웅랑교가 기름진 남주(南主)로 가는 길을 확보하기 어려워진다 . 흑막에서 일어난 세력이 흑막을 북막(北幕)이라 하며 중원십일주지역을 남주라 불렀다. 북지성의 대종로를 장악한 정립천하의 무리와 천상천화가 이끄는 세력이 지금은 서로 대치하고 있었지만 강대한 웅랑천교의 용사들인 남하하면 손을 잡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대종로는 도처에 적은 군사로 대군을 막을 수 있는 곳이 많았다. 이모든 것을 생각해 보아도 지금 은 물러나는 것이 나았지만 웅량흘은 부러질 지언정 휘어지는 성품하고는 거리가 먼 사내였다. 일촉즉발(一觸卽發). 숨 막히는 대치가 계속 이어지자 무거운 살기는 계속 장내를 짓눌렀다. '참, 답답하네, 저러니 곰이 미련하다는 소릴 듣지, 쓸데없는 고집으로 대 세를 그르치려 하다니……. 하긴 우리 백록파의 입장에선 웅랑교와 여인천 궁이 반목하는 것이 이익이지만……." '장로님, 이거 도와줘야 하는 거 아녜요?' '아서라, 웅랑교하고 본 파하고 원수질 일 있냐? 그리고 저 고집탱이 늙은 곰도 알고 있겠지만 여기서 시비가 붙으면 저들은 살아남지 못한다.' '예?' 간판만 남은 북지무림맹이지만 그 이름을 짊어진 존재가 여인천궁이 되어 무림맹에 속한 무림문파중 가장 세력이 온전한 백록파는 여인천궁과 더불어 무림맹을 복원하려는 의도를 품었다. 비록 가주가 비명에 가는 바람에 북 지박가와 무산초가가 빠졌지만 백록파와 여인천궁이 손을 잡으면 무림맹을 다시 꾸미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게다가 천상천화에게 구명된 무림고수 들이 은혜를 갚고 협행(俠行)을 하는 차원에서 천상천화를 도와 장동의 피 난민들을 북지성에 창궐하는 산적이나 화적들에게서 보호해 주는 일을 했다 . 그리고 그 일은 장동에 무림맹이 만들어 졌을 때 우물물이 강물을 침범하 지 않듯이 조정의 일에 상관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들어 움직이지 않던 기 인이사와 무림명숙들이 대거 참가하기도 했다. 그러니 무림맹의 주축이 바 뀌었을 뿐 그 명맥이 살아있는 것이다. 그래서 북지무림맹주나 다름없는 천 상천화가 속한 여인천궁에 백록파의 장로 오진자(晤進子)와 만인객잔의 천 축대협(天軸大俠)이란 별호를 얻은 금동보(金銅寶)가 금남(禁男)의 장소인 여인천궁 궁내에 머물 수 있었다. '에휴~! 어설픈 고수에게 말을 하지 말아야지. 본래 음유한 공력과 양강한 공력을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내가 보기에 지금 형세는 중과부적(衆寡 不敵)이다.' '그 어설픈 고수라는 말을 빼고 하면 안 됩니까? 그리고 내가 그걸 물은 것 이 아니라 왜 우리가 나서면 웅랑교하고 백록파가 원수가 지는지 물은 건데 , 웬 동문서답 이예요. 혹시 그거 노망의 전조 아닙니까?' '아예 어르신 수염을 뜯어라 뜯어!' '뽑을 수염이나 있나?' '이놈이…….' 오진자는 자신을 백록산에 묶어두려는 백록파 장문인 오중자(晤重子)에게 여인천궁과 손을 잡고 북지무림맹을 복원하자고 설득하여 백록산을 탈출(?) 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문제는 또다시 여인천궁이 있는 무산곡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맹주의 지위는 여인천궁이 가져가겠지만 아직 아무런 직책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새로 만드는 무림맹에 여인천궁과 더불어 또 하나의 축인 백록파의 입지를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중량 감 있는 인물이 필요했고, 그 임무를 오중자는 오진자에게 떠넘긴 것이다. 무림맹은 세력들이 힘을 모아 공동의 일을 처리하고 조율하는 것이기 때문 에 오진자는 백록파를 대표해서 여인천궁과 직접 일을 추진할 필요하 있었 기에 여인천궁이 있는 무산곡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역마살 때문에 백록 파를 뛰쳐나온 오진자가 여인들만 우굴 거리는 곳에 있으려니 좀이 쑤셨고, 해서 만만한 금동보에게 심술 아닌 심술을 부렸다. 처음엔 존장인 오진자 의 심술을 그대로 받아들이던 금동보 또한 녹록한 한성질 이어서 이내 만인 객잔에서 점소이로 굴러먹던 성질을 드러내니 그렇게 항상 티격태격했다. 그러나 백록파를 나선 뒤 계속 붙어있던 두 걸물은 나이를 초월해서 친분이 두터워졌기에 오진자의 듬성듬성 자란 수염을 뽑네 마네 하는 농을 주고받 을 수 있는 것이다. '에잉, 한살이라도 나이 많은 내가 참아야지…….' '수십, 아니지 수백살 차이나는 나이를 왜 한두 살로 확 줄여요? 저는 장로 어르신 형님이라 고 부를 생각을 조금도 없거든요.' '이놈이… 갈(喝)!' -흐억! "……." "……." 조용하던 여인천궁의 정청에서 전음(傳音)으로 오진자와 대화를 나누던 금 동보는 오진자의 내공이 깃든 혼자만 들을 수 있는 천둥벼락같는 음공에 당 해 자신도 모르게 신음성을 흘렸다. 그러자 살기등등해서 바늘하나 떨어지 는 소리난지 않는 정청의 모든 주의를 쏠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일시에 대 부분 여인인 장내 사람들의 시선을 본이 아니게 모으게 된 금동보는 얼굴을 붉힐 뿐 아무런 말도하지 못했다. 아직 총각인 금동보가 아름다운 여인천 궁의 미녀들의 시선을 받아넘길 담이 부족했다. '이놈아! 어린놈이 어른에게 대들면 매 아니면 망신이다.' 오진자는 굳어버린 금동보에게 속을 통째로 뒤집는 위력을 지닌 전음을 날 리며 앞으로 나섰다. "험험험, 본도는 백록산의 오진이라 하오." "……." "본래 이일은 제 삼자인 본도가 나설 일은 아니나 일이 더 진행되면 여인천 궁과 웅랑교가 원수지간이 되어 여인천궁과 같은 일을 도모하려는 본파에도 영향을 미치기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소이다." "본교의 일을 방해할 셈인가?" 오진자는 불리한 입장에 있으면서고 여전히 뻣뻣한 웅량흘의 말투를 귀가로 흘리고 계속 말을 이었다. "좀 전에 웅장로께서 말하길 강호는 힘이 우선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힘 으로 고하를 나누는데 굳이 필을 볼 필요는 없지요. 그리고 묘올산성의 군 사들은 본시 장동의 위병들이고, 그들은 원래 장동에 자리 잡고 있던 북지 무림맹의 손에 키워진 군사들이지요." "그래서 그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뭔가?" "북지성엔 무림맹이 있다는 말이오." "……." 오진자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러했다. 부맹주의 신분을 가진 천상천화가 맹주에게 무림맹을 부탁받았다는 소문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천상 천화에게 구함을 받아 천상천화를 따르는 묘올산성의 1만 군사들은 오진자 의 말처럼 북지무림맹이 총괄하고 있다는 것이 맞았다. 그리고 무림맹을 이 뤘을 때 맹을 이루는 세력이 서로 어려움이나 위협에 대항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지금 오진자는 웅랑교 장로 웅량흘에게 여인천궁을 적대하는 것 은 전 북지무림을 적대하는 것과 같다는 경고를 한 것이었다. "해서 본도가 제안을 하나 할까 하오." "……." "웅랑교와 무림맹 양쪽에서 세 명씩 나와 겨루는 것이오." "그럼 진 쪽은 이긴 쪽의 뜻에 따른다는 것인가?" "허허허허, 이 제안은 웅랑교에게 과연 힘이 있는지 알아보려는 것뿐이오. 이대로 서로 충돌하면 피를 보게 될 것이고 그럼 그 순간 한 하늘을 이고 살수 없는 원수지간이 될 테니 그것만은 막아보자는 것이오." 오진자의 말은 물러가라는 완곡한 다른 표현이었지만 그것은 고집 센 웅량 흘에게 일종의 명분을 준 것이었다. 그리고 세불리를 느낀 웅량흘은 그 조 건을 받아들였다. "좋다. 웅보(熊甫) 네가 먼저 나서 거라!" "예, 사부님!" 웅랑교쪽에서 먼저 진을 풀고 한 웅인이 나서자 오진자는 상석에 앉아있는 궁주 상유란에게 양해를 구했다. "궁주, 함부로 나선 본도를 용서하십시오." "아닙니다. 제 뜻도 피를 흘리기보다 그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묘연 아 네가 먼저 나서 거라!" "예, 궁주님!" 궁주의 허락이 떨어지고 상유란이 물러서라는 손짓을 하자 이십팔로옥녀검 진을 짠 검녀들은 일제히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궁주을 보호하기 위해 그 녀 가까이 있던 검선자 주묘연이 상승 신법으로 앞으로 나선 웅인의 앞에 섰다. "웅랑교의 웅보요!" "여인천궁의 외당주 주묘연이에요. 제가 무기를 들었으니 선수를 양보하겠 어요."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크앙!" 지난 사정이야 어찌되었건 서로 비무를 하는 무인의 예를 나누고 웅량흘의 제자 웅보의 선공으로 비무가 시작되었다. 웅보는 자신의 커다란 덩치로 상 대를 위압하며 날카로운 발톱을 세운 양손을 포효와 함께 내리쳤다. 얼핏 양팔을 벌려 가슴이 노출 되어 허점이 보였지만 가슴은 갈비뼈로 보호되는 곳이라 정확하게 찔러야하는 곳이었고 만일 찌르는 힘이 모자라거나 실패하 면 찌른 자는 거의 무방비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포효하는 위세는 사람을 움찔하게 하는 무시무시한 기세가 있었고 고수인 웅보는 가슴을 보 호하는 호심경이나 외문무공을 익혔을 가능성이 있기에 주묘연은 일단 물러 섰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웅보가 사용하는 웅권의 묘용이었다. 당연하지만 웅랑교 기본 무예는 웅권(熊拳)과 낭권(狼拳)이었다. 곰과 늑대의 형상을 흉내 내어 만든 권법을 웅랑교가 창시되자 웅인들과 낭인들이 두 권법을 자 신에 맡게 다시 창안하여 사용했다. 그리고 두 권법 모두 양강(陽强)한 무 공초식이었고 저돌적인 공격력이 위력적인 무공이기도 했다. 거웅압산(巨熊 壓山)의 초식으로 기세를 잡은 웅보는 저돌적으로 여인천궁의 외당주라는 여고수를 밀어붙였고 선기를 잃은 주묘연은 손발이 어지러워지며 낭패를 면 치 못했다. -찌익~! 웅보의 발톱에 소맷자락이 찢겨나갔지만 주묘연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저돌적이지만 단순한 공격일변도의 수법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웅권은 사실 많이 알려진 무술이기에 주묘연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진짜 곰인간이 펼 치는 웅권는 더욱 위력적이어서 주묘연은 이렇다 할 돌파를 찾지 못하고 방 어에 치중했다. "햐~! 주낭자 정말 대단하네요. 마치 서로 약속이나 한듯이 공수를 나누네 요?" "동보, 너는 저렇게 못하지?" "저는 저렇게 나오기 전에 끝냈죠." "사실 그렇다만 그래서 너는 어설픈 고수야!" "아니 왜 자꾸 어설픈 고수라는 거예요? 그 어설픈 고수에게 이기지도 못하 면서?" "나는 너랑 대련이나 비무 안해. 비무하면 나는 네게 이길 수 없지만 결투 를 하면 동보 너는 '어!' 하는 사이에 염라대왕하고 상견례하고 있을 거다. " "그게 무슨 말 이예요?" 무인들의 겨루기는 대련(對鍊), 비무(比武), 그리고 결투(決鬪)를 한다. 대 련은 상대를 연습상대 삼아 무술을 연마하는 것을 말하고 비무는 말 그대로 서로의 무공 실력을 비교해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무는 서로를 상 하게 하는 극단의 무공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며 목숨을 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림인들은 비무을 할때 대부분 본 실력의 3푼이나 크게 3할 정도는 숨기고 무공을 겨루었고 그렇지 않더라고 최후의 한수는 끝까지 남 겨두는 법이었다. 그래서 승패가 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으나 결투는 상 대방의 생명을 빼앗기 위한 싸움이었다. 즉 결투란 완전히 끝장을 보기 위 한 싸움이기 때문에 살기가 짙은 무공초식이나 단 한 번에 전력을 다해 서 로 겨루기 때문에 일합(一合)내에 승부가 가려지는 수가 많았다. "…그러니까. 나는 결투가 시작되자마자 선공을 펼쳐 네가 천방지축신공을 사용하기 전에 승부를 끝낼 꺼다." "제가 호구예요? 단 한 번에 당하게……." "너 호구 맞아!" "그게 무슨……." "어? 이제 승부를 내려는 모양이다." 경지에 든 고수들의 입장에서 지리한(?) 초식싸움을 끝낸 두 비무자는 각자 비기를 준비하는 짧은 절정고수만이 느낄 수 있는 그런 시기를 가지고 서 로 내공력을 사용한 초식을 선보였다. "옥봉일취(玉鳳壹嘴)!" "패웅붕진(覇熊崩震)!" -우르릉~! 찌치직… 까강! 옥봉황의 날카로운 부리와 거대한 곰의 산을 무너트리는 기세가 출돌 하자 진기가 상충되며 두 비무자들을 밀어냈다. "어? 주낭자!" 금동보는 주묘연이 충격으로 밀려나자 휘청 이며 가볍지 않은 내상을 입은 듯 핏물을 토해내자 자신도 모르게 달려 나가 그녀를 부축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금대협! 염려해주서서 고마워요." "예? 예." 금동보는 지금 주낭자를 안고 있는 지금 상황을 스스로도 놀라 이해하지 못 했다. 오진자가 천상천화에겐 이미 임자가 있으니 주묘연을 노려보라는 말 을 농담반 진담반으로 흘려들으며 그녀를 의식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아 니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단지 주묘연이 피를 토하는 모습을 보자 몸이 멋 대로 움직여 그녀를 안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만든 것이다. "금대협, 저는 괜찮으니 팔좀……." "예? 예. 제, 제가 그만 실례를…." 오진자는 평소 여인천궁의 여인들과 격이 없이 지내던 넉살좋은 금동보가 얼어붙어 순둥이 흉내를 내자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쯧쯧쯧, 그렇게 넉살 좋은 놈이 마음에 있는 여인에게는 말 한마디 재대로 못하니 참!" 오진자는 고개를 자로 저으며 앞으로 나섰다. 서로 다쳤으니 첫 번째 비무 를 마무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번 비무는 여기서 그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승부는……." "제 패배를 시인하오." "……." 오진자의 말을 가로막은 것은 주묘연과 겨룬 웅보였다. "손속에 사정을 둔 것에 감사하오." "별말씀을……." 사실 이 자리에 있던 고수들은 그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웅보의 심장을 노리던 검선자 주묘연의 검 끝이 검로(劍路)를 바꾸어 어깨를 찔렀던 것이 다. 그러나 웅보의 패웅붕진은 그 위력이 약간만 손상이 되었을 뿐 그대로 시전되어 주묘연을 상하게 한 것이었다. 그러나 주묘연은 웅보의 필살기를 맞고도 조금 다친 정도에서 끝났기에 무공의 고하는 확실했다. 전력을 다한 자와 손속의 사정을 둔 자가 동패구상(同敗毆傷)했다면 어느 쪽이 위인지 는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장로님, 이번엔 제가 나가겠습니다." "네가? 뭐 좋겠지." 웅량흘은 아직 미숙해 초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웅보가 웅권을 보였으니 낭 권을 수련한 낭신(狼辛)의 청을 수락 했다. 자신의 제자인 웅보가 비록 지 기는 했지만 웅보가 상대한 것은 여인천궁의 주요 인사였다. 거기에 비해 웅보는 두각을 나타내는 준재이기는 하나 5백 웅기의 한명일 뿐이었다. "웅랑교의 낭신이오. 어느 고수분이 저를 상대해 주시겠소?" "궁주님 제가 나서겠습니다." "석심이 네가?" 웅랑교 쪽에서 낭인(狼人) 고수(高手)가 나서자 교석심이 앞으로 나서며 허 락을 구했다. "궁주, 이일은 여인천궁과 웅랑교만의 일이 아니라 무림맹의 일입니다. 그 러니 같은 북지무림맹의 일원으로써 저희가 한팔 거들게 해 주십시오." "오진자 장로가 나서시려는 겁니까?" "제가 다 늙은 몸을 이끌고 힘이 넘치는 후학과 겨루겠습니까, 제가 아니라 여기 천축대협입니다." "금대협이요?" 상유란 세상 편해 보이는 인상의 금동보의 맹한 모습이 왠지 못미더웠지만 교석심을 내보내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 판단했다. 교석심의 성정을 잘 아는 상유란은 그녀를 내보내게 되면 독한 손속을 사용할 것이 짐작되었기 때문 이었다. 일단 비무이고 백록파를 대표하는 고인(高人)인 오진자가 추천했으 니 쉽게 당하거나 위험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럼 부탁합니다. 금대협!" "네." "궁주님! 하지만……." "총사, 오진자의 말이 일리가 있다. 그러니 그의 말대로 하자꾸나." 냉심소수 교석심은 말 몇 마디로 비록 마음에 들지 않지만 소궁주의 세력인 장동의 군사들을 무림맹의 세력으로 만든 오진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 여인천궁에게 2만이나 되는 군사들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었 기에 더 이상 아무런 언급은 하지 않았다. 금동보는 앞으로 나서며 상승전 음(上昇傳音)으로 입술을 달싹이지도 않고 내가 공력만으로 등 뒤 쪽에 있 는 오진자에게 따졌다. '왜 날 물고 늘어져요?' '이놈아, 네놈 본 마음은 이미 주낭자에게 향하고 있는데 지금쯤 멋진 대협 의 풍모를 보여야 할 거 아니냐?' 오진자는 금동보가 보이지 않는 등 뒤 쪽에 있는 자신에게 전음을 보내자 은은히 감탄했다. 초식과 외공은 미숙하기 그지없으나 내력 운용을 하는 것 은 신기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누, 누가 누굴…….'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마라. 다른 계집애들이랑은 아무렇지도 않게 시시덕거 리면서 정작 주낭자 앞에선 똥마려운 강아지마냥 쩔쩔매지 않느냐?' '그거야! 장로님이 자꾸 이상한 말을 하니까 그런 거잖아요!' '스스로 천축대협이란 거창한 별호까지 만들었으면 그만한 실력을 보여야지 .' 천축대협(天軸大俠)은 별호는 금동보 스스로 반 장난으로 지은 별호였다. 대협(大俠)이나 영웅(英雄)은 존칭으로 별호에 그것을 넣는 경우는 찾아보 기 힘들었다. 무림의 호협을 높이는 말을 별호에 붙였으니 자화자찬도 이만 한 것이 없었다. "웅랑교 낭신이오." "에! 백록파, 아니 만인…문의 금동보요." "만인문?" "그냥 백록파에서 파생된 분파라고 생각하면 되오." "그럼 먼저 시작하겠소. 컹!" "흐헉~!" 금동보는 눈앞에서 사람이 늑대의 형상으로 변하여 허연 삼백안을 치켜뜬 늑대가 덮쳐오자 놀라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름 바 뇌려타곤(惱驢惰困)이었 다. 플어 말하면 지랄병이든 당나귀가 정신을 잃고 땅바닥을 마구 뒹군다는 뜻인데 이러한 이름의 신법이 있는 것은 아니고, 상대방의 공격을 아무래 도 피할 방법이 없을 때 땅바닥을 마구 뒹굴어서 간신히 몸을 피하는 모습 을 일컬었다. 그 모양이 너무 참담하고 부끄러우므로 고수들은 차라리 죽을 지언정 시전하고 싶어 하지 않는 수치스러운 신법이라 죽으면 죽었지 사용 하지 않는다 했다. 다른 말로 게으른 당나귀가 뒹군다는 나려타곤(懶驢惰困 )이라고도 했다. 그런 금동보의 모습에 가장 황당해 한 것은 다름 아닌 그 와 비무하는 낭신이었다. 먼저 손을 써서 선기를 잡았지만 너무도 '당당하 게' 그것도 생사투가 아닌 실력을 겨루는 비무에서 뇌려타곤을 시전하는 상 대가 너무나 우스웠기 때문이었다. "후아! 놀래라! 죽는 줄 알았네." 늑대인간 낭신이 고격을 멈추자 멀찍이 굴러간 금동보는 혀를 내두르며 몸 을 일으켜 세웠다. 넓은 정청을 꽉 매운 여인천궁의 여인들과 웅랑교의 인 물들도 천연덕스러운 금도보의 태도에 어이없어했다. 그러나 금동보는 천방 지축신공(天方地軸神功)을 시전해 낭신의 공간을 장악했다. "그럼 이번엔 내 차례요. 천방유성각(天方流星脚)! 이름은 거창했지만 실상은 엉거주춤한 옆 날라 차기였다. 다년간 무술을 수 련한 금동보의 발차기는 고수들이 즐비한 이곳에선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엉성하기 그지없는 몸부림 수준에 불과했다. 그리고 실제로 여기저기서 웃 음이 새어나왔다. "킥!" "풋!" 낭신은 발차기로 제대로 할지 모르는 이런 자와 싸운다는 것이 자신이 한심 했다. 그러나……. "……!" -퍽! 엉성한 금동보의 발차기는 멍하게 서있는 낭신의 명치에 정확히 틀어박혔고 아무런 방비를 하지 못하고 제대로 가슴을 내준 낭신은 그 충격에 그대로 나가 떨어졌다. -꿀럭, 꿀럭, 꿀럭! "크릉~!" "어?" -퍽! 이번에는 너무도 어이없이 당해 야수의 흉성을 드러내며 날카로운 예기의 낭아권(狼牙拳)을 시전하여 상대에게 달려들었지만 결과는 어이없게 금동보 가 그냥 어깨에서 수평으로 휘두른 팔꿈치에 턱을 맞고 되 튕겨 나가 떨어 졌다. 여인천궁의 여인들을 비롯한 중인들은 금동보의 너무도 어이없는 신 위(?)에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당사자인 낭신은 얼얼한 턱을 쓰다듬고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으르렁대는 입사이로 침까지 흘렸다. 그리고 금동보 가 심상치 않은 수법을 쓴다는 것을 간파한 웅량흘 장로의 미간이 좁아지며 계속비무를 주시했다. "크르르르르르르…………. 컹!" 낭신은 풍랑신공(風狼神功)의 내력을 극성으로 끌어올려 노한 늑대가 호랑 리을 찢는다는 노랑시호(怒狼嘶虎)의 초식을 시전했다. -훙훙훙훙훙훙…………. "천축승천파(天竺昇天破)!" 실내인 여인천궁의 정청에서 난데없는 폭풍을 만들어낸 신위를 보인 낭신 이었다. 그러나 천축승천파라 이름은 거창하지만 내용은 단순히 주먹을 올 려치는 것에 불과한 초식에 상승기공인 풍랑신공을 운용하며 웬만한 고수의 시야엔 잡히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던 낭신은 그 주먹질에 아래턱 을 정확하게 내주는 결과를 낳았다. -퍽! -덥석~! 비무는 금동보의 내력이 깃든 주먹이 정확하게 낭신의 아래턱에 작렬해 허 연 거품을 물고 쓰러짐으로써 끝이 났다. "우리가 졌네. 미안하지만 자네이름을 다시 말해 줄 수 없겠나?" "금동보요." "천축대협 금동보라 강호에 새로운 신성이 나타났구먼. 내 자네 이름을 기 억해 두지." 금동보는 웅랑교 장로라는 사람이 아까 잠깐 오진자의 언급한 천축대협이라 는 별호를 이름 앞에 붙여 기억한다고 하자 얼굴이 확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 그렇게 두 번의 비무를 연이어 패했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는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그래서 웅량흘은 마지막 비무에는 직접 나섰다. "마지막 비무는 본인이 직접 나서겠소. 누가 나와 손속을 겨룰 것이오?" 말로는 누가 상대해줄 것이냐 물었지만 웅량흘의 눈은 여인천궁주 상유란을 직시했다. "호호호, 웅장로가 나서신다면 본궁은 여인제일고수를 내보내겠습니다. 그 러니 조금 기다리시지요." "클클클클, 여인제일고수라 누군지 궁금하구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차를 반쯤비울 시간인 반다경이 지나자 여인천궁 의 정청에 붉은 홍의궁장의 미녀가 들어섰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본궁의 소궁주입니다." "천, 천상천화!" 명불허전(名不虛傳), 웅량흘은 천상천화가 천하제일미라 하지만 계집이 예 쁘면 얼마나 예쁘겠는가 생각했다. 그러나 천상천화가 대청으로 나온 순간 이곳의 공기는 변해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외모가 아니라 후광처럼 감 싼 기품과 말로 표현할 수없는 어떤 느낌이었다. 천하, 아니 지금 이 넓은 대청에도 세상에 나가면 아름답다고 할 미인들이 널려있었다. 그러나 천상 천화가 나타난 순간 그 여인들은 미인도(美人圖)의 한낱 배경으로 전락했다 . 설화는 주묘연이 비무를 할 때쯤 궁에 도착해 있었다. 그러나 궁주이자 사 부인 상유란의 명으로 난데없이 부랴부랴 꽃단장을 해야 했다. 그리고 번개 불에 콩 볶아 먹듯이 대청으로 나선 것이다. "여인천궁의 소궁주 설화가 인사드립니다." "웅랑교 장로 웅량흘이네 내 3초를 양보할 테니 먼저 손을 쓰시게……."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옥녀투사(玉女套梭)!" -촤라라라………………. 설화는 가느다란 손목에 감겨 있던 호접검(蝴蝶劍)을 뽑아들고 옥녀소심검( 玉女素心劍)의 옥녀투사 초식을 허공에 수놓았다. 그리고 연이어 비단에 그 림을 그리니 꽃이 피어나는 듯한 금필생화(錦筆生花)와 연못 옆에서 학과 논다. 지변조학(池邊調鶴)의 초심을 펼쳐냈다. 하나같이 옥녀무(玉女舞)를 기본으로 하는 검법초식이라 춤이었다. 무림에서 배분이 높은 선배되는 자 가 자기보다 배분이 낮은 후배 되는 자에게 3초식을 양보하면 후배는 허공 에 헛 칼질을 하여 예를 갖추는 것이 있었다. 설화가 이렇게 허공에 초식을 시전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허허허허, 좋구나! 노부와 같이 어울려보자!" 웅량흘은 약속한 3초식이 지나고 4초식 때 공격을 해오는 설화의 공격을 받 으며 말했다. 그리고 웅량흘은 망망대해(茫茫大海) 한 가운데의 허리까지 차오르는 바위섬에 서있는 기분이 되었다. '헉, 이럴수가.' 그냥 볼 때는 그저 미인의 아름다움 춤사위 같은 검법이 겨루는 입장이 되 자 막막한 하늘을 가르겠다고 설치는 천둥벌거숭이의 신세가 된 것이다. '호오~! 그간 설화가 장동성에 사람들을 돕네, 항구를 만드네 하면서 무공 수련을 소홀히 한 줄 알았더니 그새 새로운 경지에 들어섰구나. 과연 기재 중 기재로군.' 상유란은 자신이 상대해도 자신이 없는 웅랑교의 장로를 완전히 압도한 설 화의 옥녀소심검을 보고 감탄했다. '동보야, 너는 저렇게 못하지? 할려면 저렇게 해야지 너는…….' '됐네요. 결과가 같으면 됐지 멋은….' "호오 그래도 느껴지는 것이 있나보지? 하긴 무인으로 길을 걷고자 하는 사 람이 죽으면 죽었지 절대하지 않는다는 나려타곤 신공을 펼치고도 생각이 없으면 짐 싸들고 산으로 들어가 평생 나오지 말아야지. 이거 원 창피해서. ' 솔직히 금동보는 뇌려타곤이 뭔지 몰랐다. 하지만 오진자의 쿠사리를 들어 가며 그게 무엇인지 깨닫고 낯이 뜨거원 짐을 느껴야 했다. 그리고 천방지 축신공을 수련한자 특유의 민감하기 그지없는 기감에 천상천화가 진기를 실 처럼 뽑아내 웅랑교의 장로를 옭아매는 것을 보고 은은히 감탄했다. 저건은 공간을 지배하는 바로 이전의 단계였다. '천상천화가 공간을 지배하는 오의를 알고 있는 건가 아니면 스스로 길을 찾은 것인가?' 금동보는 웅랑교의 장로가 보이지 않는 실에 조종되는 꼭두각시 이상의 존 재로 느껴지지 않았다. 금동보의 짐작한대로 설화는 웅량흘을 완전히 제압 하고 있었다. 설화는 대나무들이 연못을 둘러싸듯 하는 죽렴임지(竹簾臨池) 초식으로 웅량흘을 꼼짝 못하게 묶어두고 화룡점정(畵龍點睛) 용을 그린 그림을 눈을 찍어 완성하듯이 아름다운 색으로 눈썹을 그려 미인도를 완성 하는 채필화미(彩筆畵眉) 초식으로 웅량흘의 미간(眉間)을 검첨(劍尖)으로 점했다. "……." "……." 웅량흘은 비무를 시작한 이래 아무런 손을 써보지 못하고 두 눈썹사이에 놓 인 진기(眞氣)를 머금은 천상천화의 얄팍한 검에서 전해오는 아릿한 느낌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과연 여인제일고수요. 내 오늘 유(柔)함 극의(極意)를 보았으니 그것에 만 족하고 돌아가겠소. 그러나 다음에 다시 찾아 왔을 때는 달리 생각하리라 믿소. 다음에는 강호도의를 따지지 않을 것이니……." 웅량흘은 그렇게 한마디를 던지고 무산곡을 떠났다. "쳇! 패자는 유구무언(有口無言)이라 입이 있어도 할 말을 하지 않는 법인 데 판판히 깨진 주제에……." "쯔쯔쯔쯔, 그가 그런 말을 한 것은 일종의 경고다. 자기는 웅랑교에 매인 몸이니까 다음에 올 때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을 것이 니 각오하라는……." "그게 뭔 소리예요?" "말 그대로다. 오늘은 무림의 방식을 따랐지만 이미 거병한 이상 원하는 것 을 얻기 위해 병가(兵家)가 그런 것처럼 대군을 들이대고 강요를 할지도 모 른다는 말이지……." "이곳에 대군을 뭐 하러 어떻게 끌고 온단 말 이예요?" "동보야, 너 어깨위로는 그냥 남들 보기에 징그럽지 않게 그냥 얹고 다니는 거 맞지? 곰하고 늑대는 원래 산을 잘 타는 짐승이다. 그리고 그들의 무공 실력을 봤으면서 그러 말이 나오냐? 그 정도 고수 한 백 수십 명을 대리고 와서 협박하면 충분하잖아!" "오진자 할아버지 그렇다고 해도 무서울 것 없어요." 티격태격하는 두 노소 사이에 끼어든 천상천화 설화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 자 설화가 자신의 편에 드는둣 하자 금봉보는 코를 세우며 말했다. "그렇다잖아요!" "에잉, 내가 무식한 너하고 무슨 말을 하겠니." 오진자는 기고만장(氣高萬丈)한 금동보에게 핀잔을 주고 정색을 하며 천상 천화에게 물었다. "소궁주 그게 무슨 뜻이오?" "제 서방님은 천하에서 제일 강하신 분이거든요." "……!" 열국천하(列國天下) 현무(玄武)는 북쪽 방위에 있으면서 동방의 청룡(靑龍), 남방의 주작(朱雀) , 서방의 백호(白虎)와 함께 사신수(四神獸)의 하나다. 현무는 거북과 용이 모인 것을 이른다고 했고 북방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현(玄)이라 하고 몸에 비늘과 두꺼운 껍질이 있으므로 무(武)라 했다. 현무는 사방신(四方神)중 전투를 나타내는 무신(武神)으로 오행(五行) 중 물(水), 바로 수기(水氣)를 맡은 태음신(太陰神)이며 검은 색(玄)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현무는 뇌전(雷電)을 부린다 했다. 칸 대륙의 굉(宏), 우(于), 앙(殃), 조(祚), 신 (伸)의 다섯 신룡(神龍) 중 앙(殃)의 형상이 바로 그러했다. 앙(殃)은 칠흑 같은 검은 비늘이 뒤덮은 두꺼운 몸에 비해 다리가 짧아 거북이와 닮아 있 으며 천지간에 가장 강한 기운인 뇌전을 부렸다. 그리고 그가 사는 곳은 북 쪽 끝에 황량하고 얼어붙은 땅이었으니 현무는 그를 부르는 다른 말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리고 지금 긴 잠에서 깨어 수백 년을 사색과 명상으 로 시간을 보내다 어느 날 문득 산책을 나와 낭녀(狼女)와 관계하여 스스로 자기 자신을 낳았다. 그것이 바로 웅랑교 소종사(小宗師) 낭호인(狼好仁) 이다. 난공불락이라는 제평을 간단히 함락시킨 낭호인은 절세웅랑기(絶世熊狼旗) 들에게 사흘간의 약탈을 허용했다. 약탈이 계속되던 사흘간 제평의 거의 모 든 여자구실을 하는 여인들은 7세의 소녀부터 50세 귀부인까지 가리지 않고 겁간 당했으며 대항의 기미를 보이는 사내들은 목이 잘려나갔다. 그리고 제평을 굳건하게 지키던 성문이 깨진 그 순간, 제평을 보호하던 현무산을 곰과 늑대들이 넘어선 순간 제평의 모든 것은 이미 웅랑교 소종사이며 절세 웅랑기주(絶世熊狼旗主)인 낭호인의 것이 되었다. "형님, 이래서는 안 됩니다. 제평은 흑막 제일의 성시(盛市)입니다. 이곳을 파괴하는 것은 전혀 현명하지 않습니다." "흑막에서는 승자가 모든 것을 갖는다. 그리고 제평은 우리 웅랑교에게 짐 이상의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너도 그것을 잘 알 것 아니냐?" 웅랑교 소종사 낭호인과 꼭 닮은 사내 낭호의는 낭호인과 한 어머니 배에 같이 머물던 쌍둥이 형제였고 낭기를 이끄는 낭기영주(狼旗領主)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제평을 파괴하는 것이 무슨 이득이 됩니까?" "네 뜻을 알겠다만 이미 일은 벌어졌고, 지금 명을 거두면 웅랑교의 위엄만 손상될 뿐이다." "형님……." "그만! 그 문제는 더 이상 꺼내지 마라 그보다 곧 대종사께서 제평으로 와 서 대승을 거두도록 도와준 푸른 이리와 검은 곰에게 감사드리는 제사를 지 낼 것이다. 너는 제사에 쓰일 제물과 저기 후산 산봉에 제단을 마련해라! 이것은 명령이다." "……." 앙(殃)은 재앙(災殃), 죽은 이에게서 나오는 악기(惡氣)를 뜻했다. 그런 이 름을 가진 앙(殃)이 칸의 다섯 신룡간의 마음에 들지 않는 약속 때문에 잠 잠하게 지냈어야 했다. 그러나 이름을 걸고 맹세한 약속을 어기지 않는 선 에서 벌어지는 살육의 흥분을 거부할리 없다. 그러니 비록 한 배를 타고 나 온 형제지만 고작 늑대인간인 낭호의의 말은 어느 집 개가 짓는 소리일 뿐 이었다. 웅랑교는 십이진가가 천하를 제패할 때 서로를 견제하느라 세상에 나서지 못했다. 그러다 천하가 열 두 수인가문이 나누어 가지고 중주의 풍요로움을 만끽할 때까지 척박한 흑막에서 쟁패를 계속했다. 그들의 쟁패는 서로간의 살육전으로 번졌고, 천하의 안위를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천하의 주인 된 십이잔가는 당시 호제를 주축으로 대군을 편성하여 흑막을 평정하 기에 이른다. 그 일로 곰이든 늑대든 닥치는 대로 떼 몰살되어 나갔고 곰과 늑대들은 살아남기 위해 하나의 세력으로 뭉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웅랑 교의 전신인 흑청회(黑靑會)다. 곰과 늑대가 말 그대로 무차별적으로 사냥 당하던 때 웅랑(熊狼)이란 이름을 함부로 걸 수 없어 상서로운 푸른 이리와 검은 곰의 상징하는 흑청(黑靑)이란 이름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 번의 거센 태풍 속에서 살아남은 웅랑들은 시간이 지나 원주조정의 관 심이 멀어지자 그제야 웅랑이란 이름을 건 단체인 웅랑교를 만들 수 있었다 . 웅랑교는 각 무리별로 사사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늑대 부족과 곰 부족을 하나로 통합하여 수백 년간 성장의 성장을 거듭하여 드넓은 흑막에 그 영향 력을 행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본시 곰과 이리로 기원이 다른 두 세력은 웅랑교 내부에서 끊임없는 권력을 암투를 계속하는데 낭호인을 낳은 낭녀 또한 그 암투에 희생될 뻔했었다. 흑청회라 불리기 시작 했을 때부터 회주는 낭족(狼族)들이 차지했다. 흑청 회 자체가 청랑부족이 발의하고 주축이 되어 만들어졌고 흑웅부족이 그간의 대립과 은원을 잊고 거기에 가입함으로써 만들어 졌다. 그러나 보니 낭족 이 중심이 된 흑청회는 낭족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고, 웅랑교가 되었어 도 낭족이 대종사가 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웅족의 힘이 점 점커지고 사문화되다 시피 하던 웅족의 대종사 계승권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 이에 낭족은 대종사의 피는 웅랑교의 전신 흑청회를 만든 낭청수(狼靑首) 조사(祖師)에서 부터 이어져 온다는 논거를 통해 그의 피가 끊이지 않는 한. 피로써 전통성을 갖는다는 논거를 펼쳤고, 곰과 이리를 불문하고 낭청 수는 누구나 존경에 대상이기에 웅족은 낭족들의 말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어디에나 급진적인 세력이 있기 마련이고 그 급진적인 세력이 웅족이 웅랑 교 대종사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선 웅랑교 조사 낭청수의 핏줄을 끊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낭호인과 낭호의의 어머니인 낭녀를 노린 이 유였다. 오랜만에 둥지를 벗어나 광활한 대지를 두 다리로 걷던 앙(殃)은 낭녀를 쫓 는 회색 곰들을 발견했다. 둥지를 벗어나 수백 일을 걷고, 걷고 또 걸어 처 음 마주치게 된 그들은 다짜고짜 앙(殃)을 공격했다. 진노한 앙(殃)은 벼락 을 내쳐 그들을 단숨에 태워버렸다. 그러나 추격자 중 천하를 뒤흔들만한 무공을 가진 존재가 있어 그의 목숨을 내놓는 동귀어진(同歸於盡) 수법에 상처를 입고 만다. 비록 인간으로 화(化)한 상태이긴 하지만 상처를 입었다 는 사실이 너무도 흥미로웠던 앙(殃)은 낭녀에게 웅랑교의 비밀스런 비사( 秘事)를 알게 되고 유희를 시작하게 된다. 앙(殃)은 낭녀의 눈앞에서 자신 의 본신으로 화하여 그녀가 낳을 아이는 웅랑교를 크게 성하게 할 것이라는 말을 하고 낭녀의 자궁 속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얼마 후 낭녀는 낭족 에서 선발된 낭재천과 결혼하고 낭재천은 웅랑교 대종사가 되었다. 형식적 으로 웅랑교 조사 낭청수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핏줄인 낭녀가 남편이기도 한 그에게 대종사지위를 넘겨주고 자신은 피를 잇는다는 일에 전념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낭녀는 두 명의 쌍둥이 형제를 낳는데 그때 자신이 현무 를 만난 사실을 남편인 낭재천에게 털어놓고 지금껏 비밀을 지켜오다 18년 전 강무세가의 제의를 받고 이것은 천명(天命)이라 생각하여 두 아들 중 제 왕지도(帝王之道)가 엿보이는 낭호인의 신격화작업을 시작했다. 이런 이유 로 공식적으로도 낭호인은 현무의 아들이고 낭호의는 대종사 낭재천의 아들 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차이는 영광의 중심에 서있는 낭호인과 그림자로 머물러야 하는 낭호의의 차이이기도 했다. 사흘간의 생지옥이 끝나고 웅랑교 대종사 낭재천이 제평의 후산(後山), 또 는 현무산(玄武山)이라고 불리는 산봉에서 웅랑천하(熊狼天下)를 선포하는 제사를 지냈다. 제평의 후산은 노인이라도 천천히 걸으면 산꼭대기까지 한 시진(2시간)이면 다다를 수 있는 낮은 산이었다. 그러나 끝없이 펼쳐진 평 야에서 그 정도 높이면 가희 천산(天山)에 버금갔다. 한때 제평이 있던 자 리에 먼저 자리 잡고 있던 마을사람들은 그 산을 신으로 섬겼지만 후에 수 인천하가 도래하고 웅랑의 난을 정벌하러 온 호제가 제평을 거대한 도시로 키우면서 후산은 그냥 후산이 되었다. 웅랑교 입장에서는 후산, 아니 현무 산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원주조정에게 소외당한 신(神)과 같은 심상을 느 꼈기에 이곳에 산에 대한 제식을 한 것이다. 그리고 제평전역에 더 이상의 약탈을 금지했다. 이미 산의 신에게 제사를 받친 순간 웅랑교는 정식으로 제평을 백성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토금전장의 제평총관 석은추는 초췌하기 이를 데 없는 몰골로 지하창고에 숨어든 지 이레 만에 밖으로 나섰다. 창고에 한 달 이상 먹고도 남을 넉넉 한 식량을 준비해 두었지만 무호우 장자가 식솔들에 친분이 있는 자들까지 데려오는 바람에 준비한 식량은 며칠 만에 동이 나고 말았다. 석은추는 최 소한 보름간은 숨어있고 싶었지만 그때까지 굶을 수는 없었기에 마침 웅랑 교에서 더 이상 약탈을 하지 않는다는 말을 믿고 밖으로 나섰다. 석은추가 있던 곳은 제평의 부호들이나 고관들의 관저가 모여 있는 곳이라 불에 탄 건물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어디선가 하나둘 거리로 나와 멍한 얼굴로 양 지바른 담벼락에 기대앉아 햇볕을 쬐는 사람들이 사이로 길을 걷던 석은추 는 바람사이에서 비릿한 탄내를 맡을 수 있었다. 아마도 부호들이 사는 집 은 자신들이 사용할 요량으로 불까지는 지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외의 지역은 성한 집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잡아라!" "헉!" 한 순간 모든 것을 잃고 망연자실(茫然自失)한 사람들은 지켜보며 멍하게 서있던 석은추를 웅랑교의 교도들이 잡아챘다. "이, 이보시오. 사, 살려주시오. 나는 그저 사람들을 구경했을 뿐이오." -퍽! "허억!" "시끄럽다." 석은추의 반항 아닌 반항이 짜증이 나는지 무쇠같이 억센 주먹으로 배를 때 린 웅랑교도는 반쯤 실신지경인 석은추를 어디론가 질질 끌고 갔다. 석은추 는 자신의 임무와 자기 자신을 구명해줄 패를 생각하며 죽음의 공포에 질려 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지난 이레 동안 무호우 장자가 이야기 해 준 과거 흑막에서 일어섰던 세력이 어찌하여 흑막사람들이 나약하다 깔보는 남쪽사람들에게 휘둘려왔는지를 계속 되뇌었다. 그런 석은추가 도착한 곳 은 제평대도독부(齊平大都督府)였다. 원주조정에선 땅은 넓고 사람은 없는 흑막에 제평을 중심으로 그들을 다스리는 도독부를 설치했다. 도독부를 설 치한 본래 목적은 웅랑들을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웅랑교는 오랫동 안 조정에 반하는 일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조정이 바라마지 않는 흑막의 안정을 위해 힘을 썼다. 이에 도독부는 웅랑교를 견제하면 서도 그들의 활 동을 거의 방임하며 제평의 주위에 들끓게 된 마적들의 퇴치에 더욱 힘을 썼다. 그런데 오늘 그 제평대도독부의 관사에 웅랑교의 지휘부가 들어섰으 니……. "아니? 무장자님?" "오오, 석대인도 왔소?" "이게, 무슨 일입니까?" "보시오. 여기 잡혀온 사람들 대부분 낯익은 사람들이지 않소?" "오장자, 운장자, 보대인?" 석은추는 그제야 주변을 돌아보며 다소 지저분하기는 하지만 값비싼 비단화 복을 차림의 사람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마 이들이 숨겨둔 재산을 받아내려는 것일 테지." 무장자의 말은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장자님, 창고의……." "거긴 아마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오. 석대인이 창고를 나선이후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나도 창고를 나섰다가 잡혔으니 말이오." 웅랑교는 사흘간 제평의 약탈을 허락하면서도 부자들이 사는 지역은 직접관 리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제평의 유지를 회유하여 막대한 군자금을 확보해 나갔다. "향신료상 무호우 장자, 헌데 같이 온 그대는 누구요?" "본인은 토금전장의 제평총관 석은추라 하오." "토금전장?" 웅랑교 장로이며 제평의 유지들이 회유하는 작업을 책임진 구영문(邱英紋) 은 토금전장이란 말에 관심을 보였다. 웅랑교는 흑막전역에 세력을 떨치고 있었고 그 구성원은 웅족이나 낭족이 아닌 십삼인가(十三人家)들이었다. 토 금전장이 향료를 무장자에게 공급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니 이 상할 것 없지만 같이 나섰다는 것은 뭔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토 금전장 내부에서 상당한 지위에 있는 것 같았니 아마 몸값을 제시하고 일신 의 안전을 꽤할 것이란 예상을 했다. "그래 뭐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본데 해보시오." "나는 토금전장을 대표해서 한 가지 제안을 하려하오." "……." "토금전장과 거래를 할 용의가 있소." "무슨 거래를 말씀하시는 거요?" "철기, 군량, 차, 말린채소." 웅랑교의 구영문 장로는 토금전장의 제평총관 석모라는 사내가 하는 말이 하나도 현실성 없게 들렸다. 이미 북지성의 대종도가 막혀 적은 불량이 아 닌 웅랑교가 필요로 하는 양을 대려면 동해의 바닷길뿐이었다. 그러나 앞으 로 동해는 바다전역에서 후선과 조정의 쟁패가 계속될 것이 분명했다. "철기와 군량은 지금 당장 움직일 수는 없지만 차와 말린 채소나 과일 정도 는 당장 가져올 수 있소." "그럼 당신을 풀어주어야 할 텐데 당신을 어찌 믿고?" "편지 한통이면 되오. 의백성 토금전장 지점에 제 편지를 전할 수 있다면 1 00일 내로 가져올 수 있소." "좋다. 한번 믿어보지 편지를 전하는 것 정도는 간단한 일이니 하지만 만약 우릴 놀린 것이라면 곱게 죽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많은 장자들이 토금전장에 전 재산을 맡겼다는데 그것은 웅랑교의 재산이오." 석은추는 구영문의 말에 마름 침 삼키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것은 토금전장의 재산이오. 하나 그것을 함부로 빼앗으려 든다면 우리와 거래하지 않는다 생각하겠소." "우리가 아니 내가 토금전장과 거래하지 않는다, 결정하면 너는 이미 산목 숨이 아님을 아는가?" "웅랑교가 토금전장의 '투자'를 바란다면 제평총관인 제 직권에 따라 투자 를 할 수도 있지만 만약 그대로 갈취한다면 도적의 무리와 다를 바 없으니 더 이상의 거래는 없소." "……." 석은추는 이레 동안 어두침침한 지하창고에서 생각하고 준비한 모든 패를 내보였다. 이미 전환을 통해 중경 토금전장 본장에 자신의 생각을 전했고 금대부에게 물건을 준비하겠다는 연락을 받은 상태였다. 차와 말린 채소와 말린 과일은 군량으로써 중요한 것이지만 상대적으로 구하기 쉬웠다. 언제 나 신선한 채소를 구할 수 있고 봄이 되면 산속에서 먹을 수 있는 풀들이 많았기에 굳이 그런 것들을 준비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거친 흑막에선 그런 것들이 무척 중요한 군수품이었다. "좋소. 웅랑교에 투자를 하면 향후 웅랑천하가 도래하면 부귀영화(富貴榮華 )를 함께 할 수 있을 것이오. 그럼 얼마나 투자하겠소?" "황금 일만사천십삼관, 은 오만천관 이오." "황금 백만냥?" 1관은 100냥이니 물경 황금 140만냥이란 어마어마한 거금에 구영문 장로는 현실감이 없는 어마어마한 재산에 입이 떡 벌어졌다. 토금전장이 어마어마 한 거액을 내놓자 제평대도독부에 잡혀 있던 제평의 장자들은 모조리 방면 되었다. 넉넉하다 못해 넘치는 군자금을 확보한 이상 굳이 그들을 회유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토금전장은 웅랑교의 비호아래 흑막전역에 상권을 보장받는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상단이 되었다. 그리고 흑막은 의 백성과 더불어 철광이 많은 곳이었다. 웅랑교의 수중으로 들어간 그 철광에 서 산출된 철광석은 흑막의 군마들과 함께 주요한 거래 품목이 되었다. 토 금전장에서는 그것들을 식량과 주요 물품과 물물교환을 중심으로 교역했다. 그리고 그 모든 책임을 석은추가 흑막대총관이 되어 총괄하게 되었다. *** 흑막 제평이 웅랑교에 의해 생지옥을 연출할 무렵 라혼은 하남천원군을 이 끌고 초로역방 근처 평지에 포진한 반란 진토인의 대군과 마주하고 있었다. "상병은 운용하기 힘든 병과 입니다. 코끼리란 짐승은 본래 겁이 만아 조금 만 놀라도 난동 부리기 일수 입니다. 게다가 한번 돌진을 개시하면 멈출 수 가 없는 점도 이용해 볼만 합니다." "하지만 코끼리 등에 올려진 가마에 궁수들은 그것을 보완하고 있지 않나?" "병서에 기록된 전법을 보면 초지의 풀을 묶어 달리는 말의 발을 건어 방해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건 하나마나한 이야기잔수! 저렇게 보란 듯이 포진한 놈들의 눈을 피해 서 언제 그 짓거리를 한단 말이오." 하남천원군이 포진을 하고 고우, 표상치, 웅장모 등 백호십일걸과 주작대의 정령(正領) 상초(狀初) 청룡대 참령(參領) 목남(牧南)등이 말에 탄 그대로 간단한 작전회의를 했다. "뭐라?" "그만! 코끼리는 백호영이 맡는다. 작전은 정면 돌파다. 상정령이 예비대를 맡고 나머지는 전군이 일제히 돌격하여 승부를 결정 할 것이다." "부원수 그것은 너무 무모한!" "목참령, 그대가 직급 상 참령이나 역량이 부족하다면 지위를 박탈 할 것이 다." "그, 그런……." 라혼은 그와 동시에 앞을 나서며 목소리에 내공을 실어 외쳤다. "이 전투에서 나는 너희들을 평가할 것이다. 너희들이 얼마나 용맹하게 싸 우는지 과연 어느 정도의 역량을 가졌는지 지켜볼 것이다. 내게 너희들이 정예군임을 증명하라!" -와! -히히히히힝! -두두두두두두……………………. 그리고 라혼은 홀로 적진을 향해 돌격을 개시했다. 그러자 병사들은 어리둥 절할 수밖에 없었다. 라혼이 돌격명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움직이지 마라! 돌격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다!" "……!" 총대장군의 돌격에 앞으로 뛰어나가려 하던 군사들은 대장(隊長)들의 고함 에 일시 주춤했다. 그리고 라혼의 명령이 떨어졌다. "전군돌격!" -와아~! 그러자 전면에 포진했던 중기병부터 차근차근 질서정연하게 앞으로 뛰쳐나 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반란 진토인 쪽에서도 마주 달려오기 시작했다. -크앙~! -캬오~! -우오~! 표상치와 웅장모가 반인반수의 모습으로 화신(化身)하고 포효했으며 초강남 , 만력, 고우, 달성모, 잔폭광마도 내가 공력이 섞인 함성을 내질러 기세를 북돋우었다. -뿌우~! 라혼은 홀로 거칠 것 없이 말을 몰아 성난 파도처럼 밀려오는 열지족 전사 들과 붉고 푸른 물감을 칠한 코끼리를 바라보며 마상전투용 언월도에 진기 를 주입했다. 진기가 주입된 언월도는 누런 황금빛 도강(刀剛)을 머금었다. "금강월영참(金剛月影斬)!" -슈와~! 팍! -와아~! 라혼이 황금빛 도강은 거대한 코끼리를 세로로 양단하는 신위를 보였고, 그 모습은 백호나한의 등 뒤를 쫓던 하남천원군의 마음속에서 무한한 투지를 이끌어 냈다. 거대한 코끼리를 양단한 라혼은 멈추지 않고 그대로 하얗게 칠한 코끼리가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그러나 추장이 타고 있는 하얀 코끼 리 주위엔 열지족 전사들이 겹겹이 감싸 나중엔 라혼이 탄 말을 목숨을 버 리며 육탄으로 저지했다. 열지족 전사가 목숨을 버리며 말의 다리가 잘리자 라혼은 말을 버리고 어기충소(馭氣沖宵)의 신법으로 몸을 뽑아 올려 하늘 을 걸어 다닐 경지에 이른 것으로 경공의 최상의 경지의 신법 능공허도(凌 空虛道)를 펼쳤다. "우왁! 하늘을 난다!" "막아!" 라혼이 능공허도 신법을 펼치자 말을 타고 내달리는 것보다 수배는 빠르게 하얀 코끼리에 접근했다. 간간히 몇 대의 화살이 날아왔으나 태반이 빛나갔 고 서너 대는 정확히 날아 왔으나 라혼에게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단폐장(斷肺掌)!" -뻥! -컥! 하얀 코끼리를 몰던 코낄리 몰이꾼은 어느 세 바로 곁에 접근한 코끼리를 둘로 쪼개버린 장수의 일장을 가슴에 맞고 입으로 내장을 토했다. 이것은 라혼이 사용한 단폐장에 당한 흔적으로 단폐장에 맞으며 폐가 터지며 식도 를 몸 밖으로 밀어내게 된다. 라혼은 몰이꾼을 참살함과 동시에 허공으로 몸을 띄워 하얀 코끼리가 지고 있는 탑으로 난입했다. -와창! 라혼이 난입한 그 순간 사방에서 창이 찔러왔지만 라혼의 여의금나수(如意 擒拿手)에 모조리 잡혀 부러지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동시에 라혼은 허리 춤에서 협봉검(陜蜂劍)를 뽑아들어 누런 검기로 사방벽을 잘라냈다. -촤아! 하얀 코끼리 등에 지어짐 탑이 충천하는 황금빛 검기에 잘려 쓰러졌다. 라 혼은 하늘이 붉게 물들이는 노을을 머리에 이고 말했다. "열지족 추장 소노리는 나서라!" "……." 그러나 탑 안에 있던 다섯 명의 진토인들은 아직까지 투지를 불태우며 움직 이지 않았다. 이에 라혼은 천지를 압도하는 피어(fear)를 내뿜으며 대사자 후(大獅子吼)를 내질렀다. -후아아아아앙~! -쿵! 동시에 일보를 걸으며 진각(震脚)을 시전했다. 그러자 그 충격을 이기지 못 한 코끼리는 그대로 무릎을 꿇었고 억만근 무게의 짓누름에 구슬픈 비명을 내질렀다. 내공으로 무게를 더하는 천근추(千斤墜)의 일종으로 과거 일보천 자(一步天子)라는 제왕이 사용했다는 천복일황보(天伏一皇步)였다. 일보천 자는 이 일보로 만조백관을 굴복시켰다고 하는 전설을 품고 있는 보법(步法 )이었다. "나서라!" "……." 그리고 열지족 추장 소노리가 라혼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자 그것으로 싸움을 끝났다. -와아~! -백호나한 만세! -만세! 반란 진토인의 수괴 열지족 추장 소노리가 라혼의 무지막지한 기세에 눌려 항복하자 호도와 호도 주변의 대부분의 지역이 토벌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라혼은 항복한 소노리의 딸 메이를 모원과 혼인을 맺게 하고 휘하로 끌어들 였다. 그리고 원주조정에 올리는 장계(狀啓)에 소노리를 반란 진토인의 쉬 괴가 아닌 하남천원군을 도운 조정에 귀순한 대추장으로 표현했다. 이로써 남례성 전역의 모든 반란 중 큰불이 꺼지고 밀림을 잘 아는 5만 대군을 얻 은 셈이 된 라혼의 하남천원군은 거칠 것 없이 남례성의 반란 진토인들을 토벌 또는 회유를 통해 순식간에 남례성을 제압하기에 이른다. 열국천하(列國天下) 천하의 중심이며 근원이라는 원주(元州) 중경 청인성의 천호궁(天虎宮)에서 천원대원수(天元大元帥) 마동치의 평안천원군(平安天元軍)이 대패하여 고 작 수만의 패잔병을 이끌고 포란산(抱卵山)까지 밀려난 사실에 대해 대경실 색(大驚失色)하여 연일 대책을 논의했다. 사안이 사안인 만치 사실상 최고 실권자인 서제이자 상국(相國)서포틈(鼠暴闖)과 천자인 호황이 같은 자리에 서 앞으로 대책을 논의했다. "신, 임주사마(壬州司馬) 학오(鶴澳)아뢰나이다. 반적 강무가 동해에 배를 띄워 북상하는 것이 종종 보고되는 바, 임주는 물론 신주의 백성들 까지 두 려움에 떨고 있나이다." "신, 신주사마(辛州司馬) 견치(犬齒)아룁니다. 임주사마의 말이 옳습니다. 저희 신주에서도 그들의 대선단이이 종종 목격되고 있습니다." "신, 정주사마(丁州司馬) 사모자(蛇某子)아룁니다. 그들의 선단은 저희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동해(東海)를 면한 3주의 사마들이 일제히 나서며 보고하자 위기감은 증폭 되었다. 후선의 강무세가는 예로부터 바다를 이용할 줄 아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선단이 중주의 가장 북쪽에 있는 정주에서 까지 보인다면 일 이 매우 심각해질 수 있었다. 비약을 하면 장강의 수로를 따라 원주을 노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신 신주사마 견치아룁니다. 이대로는 잘못하면 동경이 위험합니다. 하니 서경의 수군의 일부를 동경에 두어야 합니다." "신 무주사마 양초지 아룁니다. 그것은 불가하옵니다. 그렇다하면 서경이 위험해집니다. 듣기로 강무세가와 대대로 사돈 관계에 있는 해남군도의 해 왕이 서남해안을 어지럽힌다면 남상의 반란은 물로 남례성을 포기해야 할지 도 모릅니다." 신주의 견제가와 무주의 양제가가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자 곤란에 빠진 것 은 상국인 서포틈이었다. 현제 원주조정에서 서제 서포틈을 지지하는 진골 십가(眞骨十家)는 사(蛇), 마(馬), 양(羊) 견(犬)이었고, 천림왕 호천린(虎 天潾)을 지지하는 가문이 돈(豚), 우(牛), 토(兎), 원(猿)이었다. 그리고 계제가는 아직까지 중립으로 남아있었다. 상국의 입장에선 지지세력 내의 매분임으로 나서서 어느 한편을 들어주기 참으로 곤란한 지경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의 해결책은 엉뚱하게 천림왕이 나서자 해결 되었다. "폐하." "천림왕께서 좋은 방법이 있다면 말해보시오." "예, 폐하!" 천림왕이 앞으로 나서자 다소 복잡한 시선으로 무주와 신주의 대립을 보던 호황이 그가 조정에서 말하는 발언권을 허락했다. 원주에서 중원십일주(中 原十一州)와 중외오성(中外五省), 변방사역(邊方四域)을 대표하는 중신들이 회의하는 자리에선 발언권은 오직 20명의 대표들에게만 있었다. 그러나 지 금 열리는 회의는 중원십일주의 대표들만이 참석해 있었다. 변방사역과 중 외오성 대부분이 반란 중 이었고 전에도 천하의 노른자위를 차지한 진골십 가들의 등살에 참가해보아야 자리만 차지하는 지라 어느새 조정의 천원회의 (天元會議)는 그들이 만이 참가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갑주사마를 대신 한 세제 서포틈은 언제든지 발언을 할 수 있었으나 천림왕은 천원회의에 주 재자인 천자에게 발언권을 얻을 필요가 있었다. "남상의 반란과 반역을 꽤한 강무세가와 인연이 깊은 해남군도의 세력을 견 제하려면 서해는 수군이 꼭 필요합니다. 하나 동해는 적이 오직 강무세가 뿐입니다. 이번에 천원대원수 마원수가 패배했다하나 갑주엔 10만 이상의 대군이 있습니다. 그들을 임주에 보내 동인성을 압박하고 앙신성으로 재차 대군을 보내면 바다에 신경쓸 여력이 없을 겁니다. 게다가 곧 겨울이니 그 것에 준비할 시간은 충분하고 동경을 둘러싼 장호(莊湖)와 분호(分湖), 그 리고 장강의 모든 배를 징발하여 바다에서 장강으로 들어오는 입구를 틀어 막는다면 동경 황술성은 충분히 지켜낼 수 있을 겁니다." "과연 그렇겠군." 천림왕이 제시한 계책은 참으로 절묘했다. 이것은 신주와 무주가 동시에 만 족할만한 계책임과 동시에 갑주에 대군이 임주로 감으로써 상국이 서제의 힘을 빼앗는 계책이었기 때문이었다. 상국인 서포틈이 이것을 수락하지 않 으면 스스로 무주의 양제가와 신주를 견제가의 지지를 더 이상 기대하기 힘 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모든 시선이 서제의 입을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천 림왕은 한발 물러서서 과연 신기묘산(神技妙算)이라는 서제가 또 뭐라 말을 할까하는 생각을 하며 흥미로운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그때……. "폐하, 흑막에서 보내온 전령입니다." "흑막에서?" 그리고 전령이 가져온 소식은 또다시 온 조정을 발칵 뒤집기에 충분했다. "이럴 수가 웅랑들이 반란을 일으키다니……." 제평에서 웅랑교의 눈을 피해 달아난 자는 없었지만 제평전역을 순찰하던 순군들이 제평이 무너지는 것을 확인하고 의백성으로 그 소식을 전해왔다. 그것을 의백안찰사(義白按察使) 숭태평(崇泰平)이 지급으로 바닷길로 보내 온 것이다. 그리고 더불어 의백성으로 웅랑들이 넘어올 가능성이 있음을 말 하고 원군을 청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폐하, 흑막은 원래 그런 땅이옵니다. 그러니 너무 크게 심려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상국, 그게 무슨 말이오." "북지성의 대종도는 망극하게도 정립천하를 외치는 무리들이 장악하고 있습 니다. 그런 그들이 웅랑들과 손을 잡을 만무하니 일단 중주로 내려온 가능 성은 적습니다. 그리고 흑막의 웅랑들 입장에서도 굳이 북지성을 쳐서 자신 들의 힘을 소모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면 의백성은, 의백성은 어찌하시려오?" "의백성에는 쓸만한 성이 많습니다. 금세 무너지진 않을 것이니 시간은 충 분히 있습니다. 그리고 전령이 가져온 장계에도 제평대도독부의 군사들 태 반이 아직 그 세를 잃지 않았으니 당분간을 어떠한 운신하기 어려울 겁니다 ." 여기까지 말한 서포틈은 천자인 호황에게 길게 읍(揖)하며 비장한 어투로 진언했다. "폐하, 천하에 징병령(徵兵令)을 내려 주십시오." "크음!" "……." 서포틈의 진언에 장내의 모든 중신들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수인이 도래하고 수인천하가 안정된 후 최소한의 치안을 위한 군사들만 남겨두었다 . 그런데 최근 일렬의 일들로 천하가 어수선해 지자 진골십가는 이런저런 명분을 붙여 군사들을 모았다. 그러나 천자가 천하에 징병령을 내리면 천하 가 각 군벌로 나뉘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었다 . 그러나 그것은 진골십가 모두가 내심바라는 일이었다. "폐하." "천림왕은 나서지 마라." "폐하!" 호황은 발언권을 재차 요청한 천림왕을 손을 들어 말리고 장고(長考)에 들 어갔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러나 거북스런 침묵을 깬 것은 호황이 아니었다. "폐하, 하남천원군의 전령입니다." "……." 천호궁의 정전(正殿)은 다시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전령이 가져온 소식은 희소식이었다. "폐하! 남례성의 주도 호도를 탈환했습니다." "오오~!" "장계를 가져오라! 짐이 직접 읽겠다." 장계를 들고 있던 내관에게 장계를 건네받은 호황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 하게 장계를 읽어내려 갔다. 그리고 다시 내관에게 주어 큰소리로 읽게 했 다. <신(臣) 하남대원수 금영월 삼가 상(上)께 아뢰나이다. 신이 불민하야, 폐 하께서 마련해 주신 하남천원군을 잃을 뻔하였으나, 다행히 하늘이 제 곁에 훌륭한 장수를 두어 어려움은 있으나 결국 가장 큰 세력을 떨치던 반란 진 토인들을 토벌할 수 있었나이다. ……중략……. 이에 많은 진토인들이 반역의 창칼을 거두고 자발적으로 성문을 열어 하남 천원군을 맞이하니 삼가 남례성의 반란은 토벌되었음을 아뢰나이다.> -오오~! "들어라! 천하 남북이 반역이 일어나 짐이 심히 괴로웠도다. 하나 다행히 하늘이 짐을 버리지 않아 승전보를 전해 주었으니 하남대원수 금영월을 상 장군에 봉하고 공이 높은 참장 라혼을 대장군에 제수하여 서해수군를 제독( 提督)에 봉하노라!" "폐하! 하오나……." "그리고 상국의 의견을 받아들여 천하에 징병령을 내리니 대군을 모아 남적 과 북적을 상대하라!" 호황이 이렇게 선언하자 내심 서해수군의 지휘권을 넘보던 기주의 양제가 무주의 우제가 계주의 돈제가에서는 당황한 빛이 역력했고, 서해 수군에 별 관심이 없던 다름 제가들은 천자의 징병령에 만족하며 천자가 결정한 일을 추인했다. 그리고 서제는 갑주에 있는 십만대군의 일부를 임주에 보내 후선 의 영역이 된 동인성을 견제하기로 했다. *** 남례성에서 일어난 반란이 거의 토벌되었다는 소식이 후선의 황실에 들어가 자 이불리(利不利)를 따지느라 연일 격론이 벌어졌다. 그러다 원주의 호황 이 징병령을 내렸다는 소식이 지급으로 전해지자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어차피 예상했던 일입니다. 아버님." "정아, 호황의 징병령은 예상한 일이지만 남례성이 이토록 빨리 안정되리라 곤 예산치 못하지 않았느냐?" 강무세가의 가주였던 강무정은 선(鮮)을 개국하고 일선에서 물러난 노가주 이자 그의 부친이 되는 강무전을 황제로 모셨다. 일국의 황제가 되면 천하 의 중심으로 함부로 움직일 수 없기에 가주였던 강무정은 운신에 폭이 극히 좁아지기 때문이었다. 선이 안정 되려면 거센 파고를 몇 번이나 넘어야 하 기에 강무정은 보위(寶位)를 포기한 것이다. "어차피 사전 정지작업은 모두 끝났습니다. 흑막의 웅랑교가 거병했고, 남 례성이 안정되었다하나 실상 목하나만 떨어지면 더욱 걷잡을 수 없이 혼란 해 질 겁니다." "그건 그렇고 한은 아직도 그러고 있느냐?" "태자는 젊습니다. 그러니 차차 나아질 것이니 아버님은 심려를 거두십시오 ." "그렇다면 한에게는 우리가문과 대선제국의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사명이 있다. 여느 젊은이와는 다르니 하는 말이다." "태자는 현명합니다." 후선의 황실에는 7명의 영걸(英傑)과 한명의 제왕지재(帝王之才)가 있었는 데 정왕(正王) 강무정(姜武政), 낙왕(樂王) 강무산(姜武山), 평왕(平王) 강 무운(姜武雲), 백왕(白王) 강무원(姜武原), 순왕(純王) 강무식(姜武植), 해 왕(海王) 강무해(姜武海), 오왕(吳王) 강무승(姜武勝)과 태자 강무한을 말 했다. "폐하, 해왕전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해가? 들라 해라." 나라를 개국하고 급조된 황실이어서인지 법도가 제대로 서지 않았다. 그래 서 강무정은 황제인 강무전을 그냥 아버님이라 불렀고, 강무전 또한 제후의 반열에 있는 아들들을 그냥 이름 불렀다. 그러나 지금 강무세가는 천하를 차지하기 위해 공전절후(空前絶後)의 도박을 벌이고 있어 그런 허례허식(虛 禮虛飾)에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전조(前朝) 선(鮮)의 이름으로 개국을 천명(天命)한 것은 수인조정을 자극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었다. 강 무세가가 원하는 것은 천하이지 천하의 한 귀퉁이가 아니었다. "아버님, 형님!" "네가 어찌 구도에 남아있는 것이냐?" "구도에 남아있었던 것이 아니라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거요." "왜? 무슨 일로?" "동영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오." "동영에서?" "동영 각지에서 요괴들이 출몰하고 죽은 자가 산자를 뜯어먹는다 하니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소. 아무래도 동영은 우릴 돕고 싶어 하지 않는 모양이 오." 강무정은 강무해의 말에 미간이 좁아졌다. 동영의 돌격선의 도움 없이 동해 를 제압해야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동해를 장악하지 못하면 흑막 과 연결되는 길이 없다는 말이 되었다. 수 천리 바닷길을 후선의 힘만으로 완전히 장악해야 한다는 뜻이니……. *** 고학은 도대체 주군의 능력이 어디가 끝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고학이 주군 의 질문에 진언한 것은 반란 진토인을 대파하고 열지족 중심으로 모여 있는 제 부족들의 족장들을 하나하나 회유하고 회유된 진토인 부족을 길잡이로 삼아 남례성의 진토인에 반란을 각개격파(各個擊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군은 남례성에서 가장 큰 세력의 진토인 부족중 하나인 열지족의 추장 소 노리의 머리를 조아리게 함으로써 오히려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나기 전보다 더 남례성을 안정 시켰다. 소노리의 굴복을 받아냄으로써 효과는 상상을 초월했다. 열지족에게 직간접적으로 입김이 닿아있는 부족들이 소노리가 머 리를 조아린 순간 하남천원군의 영향력 안에 들었고 진토인 부족은 부인과 아이들이 있는 마을을 지키던 모든 전사들을 모두 끄집어냄으로써 단숨에 8 만 대군을 확보할 수 있었다. 열지족은 물론 다른 부족들도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해 마을에 많은 수의 전사들을 남겨두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을 호 도주변으로 끌어들이고 호도에 수만 군사를 주둔시키자 전사들이 굳이 집에 남아 있어야 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조치는 그들을 효 과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임무를 가진 고학과 모원, 토사귀 등 문관들에게는 그것이 다 일거리였다. 주군은 8만 진토인 전사들을 하남천원군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싶어 했기 때문에 그들의 녹봉을 책정하고 그들의 원래가지고 있던 지위를 고려하여 지급을 배분해야 하는 일은 정말 끝이 없었다. "모원, 신혼이라 한참 마누라 품속에서 노닐어야하는데 미안하군." "아닙니다. 고대인!" 모원은 고학이 농에 얼굴을 붉히며 손사래를 쳤다. 고학은 그런 모원을 보 고 미소 지어주고는 말했다. "아무래도 주군은 남례성을 완전히 장악할 셈인가 보네."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확신이 서진 않지만 주군이 남례성 전역의 진토인 세력분포와 부족들의 정보를 수집하시는 것을 보니 뭔가 새로운 일을 벌이 시려는 것 같더군요." "이것을 보게." "전환 아닙니까?" "이것은 참으로 획기적인 물건일세. 우리에게 이 전환이 122개가 있네. 이 것만으로도 군사의 상호간 의사소통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네. 전환으로 서 로 의견을 조율하니 서로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한곳에 뭉쳐있는 군 대처럼 움직일 수 있게 되었어." 전환의 덕을 가장 톡톡히 본 것은 다름 아닌 양엽구 구만혁이었다. 구만혁 이 천수교 서안방향의 밀림 속에서 백호영들을 전환의 수만큼 조를 나누어 밀림을 수색해 들어갔다. 그리고 매순간 순간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고 숨어 있던 진토인들 발견하면 사냥감을 몰이하듯 한곳으로 몰아 손쉽게 그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러한 성과는 전환을 통한 서로간의 의사소통이 원활했 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남례일족(南禮一族) 앙신성에서 조정의 20만 대군이 후선군에게 대패(大敗)와 흑막에서 웅랑교 가 거병하여 천하칠대도(天下七大都) 오방상제(五方上齊) 중 하나인 제평을 약탈하고 불살랐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원주(元州) 중경 천인성과 상경 황 진성의 백성들의 민심이 크게 술렁였다. 혹자는 말하길 수인조정(獸人朝廷) 4백년 사직(社稷)이 무너지는 전조가 아니냐면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흉 흉하기 그지없는 소문과 더불어 남례성에서의 반란이 토벌되었다는 이야기 와 남례성의 반란토벌에서 큰 공(功)을 세워 서해수군통제사(西海水軍統制 使)에 제수된 라혼(喇混)이란 이름이 크게 회자(膾炙)되었다. 그리고 라혼 이란 장수가 바로 민간에 회자되는 상경의 보물이었던 천하제일미 천상천화 를 아내로 가지고 있는 천하제일의 행운아 백호나한(白虎羅漢)이란 것이 알 려지며 거기에서 갖가지 풍문이 나돌았다. 천상천화가 전장에 나간 남편을 걱정하는 마음에 매일 눈물로 밤을 지새우며 하늘에 빌고 있을 것이라느니, 하는 지고지순하고 숭고한 이야기서 부터 백호나한이 예쁜 마누라가 바람 이 날까봐 철갑으로 속옷을 만들어 천상천화에게 입혔다는 다소 짓궂은 이 야기도 함께 나돌았는데 그것은 사실에 관계없이 천자가 징병령을 내리자 불안하기 그지없는 백성들이 백호나한과 천상천화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었 다. 이제까지는 자신이 스스로 원하는 자만이 군졸(軍卒)이 되었지만 이제 는 관(官)에 기록된 각 가문에서 의무적으로 한명씩 군역을 치를 사람을 내 놓아야 했다. 그러나 새삼스럽게 과거 천하가 열국(列國)으로 나뉘어 쟁패( 爭覇)하던 시기 모든 남자들이 의무적으로 1년을 농사일을 1년은 군졸이 되 어 타국을 침략하던 이야기 또한 많이 나돌았다. "캬악~ 퇴! 빌어먹을 세상!" 상경 백호대로(白虎大路)에서 떡을 파는 작은 노상(路商)을 하는 조삼(造蔘 )은 관리에게 군역의 해당자라는 통보를 받았다. 조삼의 가문은 정식으로 황진성부(黃辰城府)에 적을 두고 있었기에 징병령이 떨어지면 군역을 치를 남자를 보내야 했다. 그러나 조삼에겐 늙은 아버지와 어린 아들, 그리고 딸 들뿐이었기에 군역엔 조삼 자신이 직접 나서야했다. 그러나 조삼이 노상에 서 벌어들이는 적은 돈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조삼의 집안에서 징병령은 아 닌 밤중에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조삼이 장사를 하지 않으면 식구가 쫄쫄 굶는 마당이니 절로 욕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민심이 흉흉하여 장 사도 되지 않는 마당에 장사를 한다는 사람이 연신 욕지거리를 해대니 더욱 장사는 될 리 없었다. "어이, 조형!" 조삼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들 돌리니 이웃에 사는 원웅자(願雄仔)였 다. "뭐여? 떡 팔아줄 생각 없으면 말시키지 마! 장사도 안 되고 심사가 복잡해 죽겠으니까!" "거, 사람하고는……. 떡 두전어치만 줘봐!" "겨우 두전어치?" 조삼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마수벌이에 두 전어치를 팔아 그나마 기분이 나아졌다. 나뭇잎으로 포장한 떡을 건네고는 부러운 눈으로 원가 놈의 면상 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원웅자의 형은 하남천원군의 무장으로 그전에는 백호문의 금군이었다. 이번에 남례성에서 큰 공을 세운 하남천원군 출신을 가족으로 가지고 있는 집안은 모두 조정에서 내린 큰 상을 받았다. 안다하 는 사람들이 말하길 징병령이 떨어지며 흉흉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해 조정 을 위해 공을 세우면 보상이 있다는 본(本)을 보이기 위해 그런다고 하지만 부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게다가 이미 집안에 군졸이 있으니 천자가 내린 징병령에도 별반 흔들리지 않고 이처럼 점심(點心)을 챙겨먹을 수 있는 것 이다. 점심은 원래 마음에 불을 킨다는 의미인데 한가롭게 공부나 하는 한 량들이 정오께 먹는 간식이었다. 고관대작(高官大爵)이나 거부대상(巨富大 商)의 높으신 양반들이나 점심을 챙겨먹지 대부분의 백성들은 점심을 먹지 않았다. 그러나 원우자의 집안은 5년 전 백호나한이 백호문의 수장이 되자 이듬해부터 생활이 펴지더니 지금은 조삼 주변에서 가장 넉넉한 집안이 되 었다. "뭘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거냐?" "차라리 그때 원복형님이 금군이 되라고 했을 때 백호금군이 됐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원웅자는 자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부랄 친구인 조삼의 말에 짚이는 바 가 있었다. "난 또? 가만, 혹시……?" "오늘 오전에 우리집안에 징병령이 떨어졌어." "에? 조형의 집안에서 군졸이 될 수 있는 장정은 조형뿐이잖아?" "그러니 걱정이다. 마누라는 세상물정모르고 아들은 아직 나이가 어리니, 그렇다고 몇 년 후면 시집갈 나이가 되는 큰딸에게 장사를 시킬 수 없는 노 릇이고……. 앞으로 우리 식구 살길이 막막해 졌으니 마음이 답답하다." "그렇겠군." "그래서 자네가 부럽다고 하는 거야! 이번에 나온 자네 형의 봉록이 넉넉하 다지?" "넉넉하긴 뭘, 우리식구 배 안 곯고 살 정도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백호둔에서 나온 소출은 참으로 엄청났다. 백호금군을 가족으로 둔 집안에 한해 먹을 양식을 충당하고도 남아 대부분 백호둔을 맡 아 관리하는 토금전장에 팔려나갔고 나머지 봉록은 은자(銀子)로 대신하여 지급되었다. 거기다 원래 받은 군인전을 팔아 마련한 가게에서도 얼마간의 수입이 있었기에 이렇듯 점심을 챙겨먹는 여유까지 부릴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번에 조정에서 면포와 함께 목화솜이 하사품으로 내려 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금군이 되는 건데." "그럼 지금이라도 금군이 되면 되지 않나?" "?" 조삼은 원웅자의 말에 이게 뭔 소리인가 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원웅자의 얘기는 조삼의 마음을 크게 움직였다. "아닌 게 아니라 이번에 우리 백호대장님이 수군제독이 되었지 않나?" "그것 익히 들은 바 있지?" "이번 봄께 남상을 토벌에 수군이 동원되는데 그 군사를 원주 상경에서도 뽑는다네." "에? 그건 금시초문(今始初聞)인걸." "곧 조정에서 그런 포고문을 방으로 써서 붙일게야. 원래는 상경출신의 하 남천원군들의 집안에 먼저소식이 들어왔는데 곧 싸워야하는 수군에 가문에 서 이미 병부에 속한 장정이 있어 징병령과 상관없는지라 수군이 되겠다고 나서는 자가 없어 유야무야(有耶無耶)되는 줄 알았는데 이번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묻더군."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게야?" "수군이 되면 봉록이 나오네." "뭐야? 그게 참말인가?" "그렇지 우리 백호대장이 책임지고 하는 일인데, 참이지 않고? 다만 멀고 먼 남상까지 가서 싸워야하니 그것이 문제지." "과연 그렇군." 징병령에 의해 군역을 치르는 것은 세금과 같은 것이라 당연히 봉록이 나오 지 않는다. 물론 병졸이 되면 먹고 입는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기는 했지 만 집안에는 쌀 한 톨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원주에서 군역을 치르면 전 쟁터에 나가 싸울 일이 없었다. 다른 곳에서도 징병령에 의해 군사들이 모 이는 마당에 원주에 모인 군사들이 소란스런 앙신성이나 북지성으로 보내질 리 없었다. 그러니 웬만해선 원주에서 군역을 치르는 것이 만수무강(萬壽無 疆)에 도움이 된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서해수군이 된다함은 바로 싸움터에 나가 싸워야한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군역을 치르는 동안 봉록이 나온다는 말은 조삼의 경우 심각하게 생각해 볼 일이었다. "일단 수군이 되는 시험에 합격하면 1년 치 봉록의 반을 미리 받을 수 있네 거기다 매달 원주의 가족에게 나머지 반이 지급되지." "시험? 무슨 시험?" "이봐 수군이 되면 수개월내에 남상의 반란군과 싸워야하는데 많은 돈을 들 여 싸움터에서 오줌이나 지릴 허약한 사람들 데려가 뭘 하겠는가?" "하긴 그렇군. 그럼 봉록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있나?" "백호금군의 금군들이 받는 정도겠지. 난 이만 가겠네." 조삼은 멀어지는 원가의 모습을 보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빠듯한 살림 에 요새는 장사까지 잘 되지 않아 걱정이 이만저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징병령이 떨어졌으니……. 그러나 백호금군들이 받는 봉록이면 조 삼이 건사해야하는 다섯 식구의 호구지책(糊口之策)이 마련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군이 되기가 뭐한 것이 원주에서 군역을 치르면 전장(戰場)에 나 갈 가능성은 낮았지만 수군이 되면 필히 멀고 먼 이역만리(異域萬里)에서 싸우다 시체도 찾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라혼이 하남천원군 부원수에 직급이 참장(參將)에서 대장(大將)으로 정장( 正將) 건너뛰어 두 단계나 승급하여 서해수군통제사에 제수되자 서해수군의 제독 자리를 넘보던 기주의 양제가, 무주의 우제가, 계주의 돈제가는 당초 수군으로 편성하려던 군사들을 자신들의 방군(方軍)에 그대로 잔류시키고 새로 건조된 전선(戰船)들만 내놓았다. 그렇게 되자 서해수군을 차지하게 된 라혼에게 조정에서 받은 것이라곤 서해수군통제사라는 관작(官爵)과 2백 여척의 전선들뿐이었다. 정작 중요한 배를 운용할 선원과 수군(水軍)은 받 지 못하게 된 것이다. 바다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던 라혼에게 서해 수군통제사라는 관작은 원주 조정의 간섭을 피할 도리가 없게 하는 목줄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서해수군의 지분을 노리는 세 진가문(眞家門)이 수작은 라혼에게 새로운 빌미를 제공했다. 다름 아닌 원주의 중경과 상경, 북경, 서경에서 수군을 모집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기왕 서해수군의 제독이 된 이상 다른 세력의 입김이 있는 군사들 보다 직접 뽑은 군사들과 선원을 가 지는 것이 나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라혼에게는 이미 남례성의 경험 있는 수군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거기다 토금전장의 이름으로 미리 고용한 경험 많은 선원들도 있었기에 서해수군통제사 라혼에게 양보를 얻어내려 약속이나 한 듯 수군을 내놓지 않은 세 진가문은 서해수군에 영향력을 완전 히 상실하는 우(愚)를 범했다. *** "휴, 20만이나 되는데 흩어놓고 보니 흔적조차 없군." "나는 라혼대장군이 굳이 남례성을 완전히 장악하려는 의도를 모르겠소." 초로역방에서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하남천원군의 전 장령들의 직급이 한 단계씩 승급하여 전 주작대장인 상초와 금영월의 친위군 성격이 강했던 현 무대의 작도인은 소장(少將)으로 장군에 반열에 들었다. 그리하여 하남천원 군은 금영월 상장, 라혼 대장, 모석 등, 총 다섯 명의 장군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남례성의 진토인 전사들을 하남천원군으로 흡수하여 일개 군부로 2 0만 대군을 거느리게 되자 두 장군은 무척 바빠졌다. 상장 금영월은 남례성 을 통괄하느라 군부의 일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했다. 그것은 라혼대장군의 존재 때문이기도 했지만 정작 라혼대장군은 서해수군통제사에 제수되어 남 상을 반란 토벌하는 수군을 꾸리는데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소장 모석 또 한 그런 백호나한을 보좌하고 있었으니 20만에 육박하는 대군을 맡아 관리 하게 된 상초와 작도인은 연일함께 모여 의논했다. "전환이라 참으로 신통한 물건이로군. 아무튼 서해와 남해, 남례성의 전 해 안이 전부 우리의 통제 하에 들었으니 이제부터 천천히 그물을 당기듯 내륙 을 공략하면 되겠군." "그렇소. 그보다 앞으로가 문제요." "크흠!" 하남천원군의 모든 주도권이 일시에 라혼의 손에 넘어가자 노골적으로 그를 견제하던 상초와 작도인은 입지가 무척 애매해졌다. 지금은 일들이 너무 경황없이 몰아치는 바람에 과거를 묻지 않았고 라혼대장군 또한 그 일에 대 해선 잊은 듯 행동했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리다는 속담처럼 라혼대장군을 볼 때마다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빨 빠진 종이호랑이에 불과한 상장군 금영월에게 기대기에는 그들의 야망이 컸다. "당분간 자중하며 대장군의 신임을 얻는 수밖에요." "상소장, 하남천원군에서 눈치 밥을 먹느니 차라리 원주로 돌아가는 것이 났지 않겠소? 징병령이 내려진 마당이니 하남천원군에서 나름대로 공을 쌓 았으니 홀대하진 않을 것인데……." "원주로 간다고 해서 뾰족한 수 있겠소? 소장의 지위를 받아 장수에 반열에 있기는 하지만 조정에 줄이 없으니 한직이나 전전하고 말테지." "그럼 백호나한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수밖에 없나?" "백호나한이 사라지면 두 분은 어찌하실 것이오?" "헉!" "웬 놈이냐!" -촹! 탁! 상초와 작도인은 평생 무술을 연마한 무장답게 조정에서 하사받은 보검을 뽑아 천정을 찔러 들어갔다. 그러나 천정에선 먼지만 흘러나올 뿐 괴한은 없었다. 그리고 괴한의 목소리는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대들이 한 이야기는 잘 들었소. 그리고 본인은 그대들의 마음 편하게 해 줄 용의와 능력이 있소." 상초와 작도인은 자신들이 남례성 전역을 완전히 장악하는 일을 의논하던 남례성 전도(全圖)가 펼쳐진 탁자 옆에 서있는 호리호리한 진토인 사내를 노려보며 말했다. "네놈은 누구냐?" "자객이오." "……!" 상초와 작도인은 스스로 자객이라 말한 진토인 사내를 침중한 얼굴로 바라 보며 그가 스스로 종적을 드러내지 않고 손을 썼다면 둘 중하나 피 뿌렸을 것이라는 걸 생각하며 침중한 안색이 되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사내의 말은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했다. "그대들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자객이란 사실을 다행이라 여겨야 할 거요. 그렇지 않았다면 이미……." "그게 무슨 뜻이냐?" "말 그대로요. 본인은 그대들을 노리고 왔지만 생각이 바뀌었다는 거요." "……." "본인은 그대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겠소." "……." 스스로 자객이라고 밝힌 사내는 상초와 작도인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자기 할 말만했다. "백호나한을 공적인 자리에 나타나게 하시오." 라혼이 서해수군통제사에 제수되어 공식적으로 서해를 장악할 수 있게 되자 북지성에 마련하려던 태회진(泰回陣)은 이제 완전히 토금전장의 책임 하에 놓이게 되었다. 서해수군의 기항지는 임시로 봉수성이 되었고 남상의 서해 대수영의 반란이 토벌되면 남상 청해진(淸海陣)을 모항(母港)으로 서해대수 영의 본래 임무였던 인시드 해적들로 부터 남주 무역항로를 보호하게 되었 다. 그렇게 되자 북지성의 태회진(泰回陣)은 그 효용성이 상대적으로 떨어 졌다. "조정이 급하긴 급한 모양이다. 겨우 남례성의 진토인의 봉기를 토벌한 장 수를 직급을 두 단계나 승급시키고 서해수군제독자리를 내어주니 말이야?" "서방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라혼은 지금 태회진에 여러 가지 구조물을 설치하는 일 때문에 북지성의 설 화와 함께 있었다. "아니 그냥 하는 말이다. 그보다 생각했던 것보다 사람들이 많아졌는데 장 동의 피난민들이 이렇게 많았던가?" "아니요.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난리를 피해 다른 지역 사람들도 몰려들 고 있어 그래요." "모두 얼마나 되지?" "지금까지 약 4만 명쯤 되요.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사람들이 모일 거예요. " 라혼은 가을을 추수가 끝나자 군량을 미리확보하기 위해 대량의 자금을 풀 었다. 그리고 군량으로 사들인 곡식을 거두기 위해 천하전역을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을 해야 했다. 추수한 곡식들을 사들이는 것은 쉬웠다. 하지만 그 곡식들을 한곳에 모으고 운송하는 일은 여러 가지로 힘들고 애로 가 많았다. 하지만 라혼에게는 천하에서 가장 큰 창고가 있었고, 운송하는 일은 일도 아니었다. 라혼은 토금전장의 이름으로 조정에 세금을 대납하고 각지에서 생산된 곡식을 거둬드리는 수조권(收租權)을 대행하는 방식으로 막대한량의 곡식들을 거둬들였다. 징병령이 떨어지자 원주조정은 물론 중원 십일주의 진골십가(眞骨十家)가 당장 필요해진 것은 군량이 아닌 은자였다. 군량은 이미 어느 정도 미리 확보해 놓았지만 징병령에 징집된 군사들이 사용할 병기와 갑주를 마련하려면 은자가 더욱 필요했다. 그렇게 당장 곤궁 해진 재정을 토금전장에서 막대한 자금을 대며 번거로운 세곡(稅穀)을 대신 거두겠다고 하자 그 제안을 두말없이 받아들였다. 덕분에 라혼이 바빠졌지 만 그것으로 라혼은 남례성의 하남천원군의 군량과 흑막 웅랑교에 보낼 군 량, 그리고 북지성 태회진에서 소비될 식량을 확보하게 되었다. 더욱이 토 금전장에서 대납한 세금은 지난 3~4년간 평균 세입을 조금 넘어선 정도였고 지주와 농민들에게 거둬들인 세곡의 양은 흉작이나 평년작이었던 지난 10 년과 달리 올해는 날씨도 좋고 병충해가 없어 10여년 만에 대풍(大豊)이어 서 바로 작년에 비해 작황이 보통 서너 배가 넘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아는 것은 라혼과 토금전장뿐이었다. 세곡을 거둬들이는 관리들이 모조리 징병령 의한 군사들 모으는 일에 집중되었기 때문이었다. 라혼은 천하각처 에 토금전장의 분장에 모아놓은 곡식을 거둬 대부분 이공간 에텔 스페이스 에 두고 태회진에 들려 곡식창고에 막대한 양의 곡식을 쌓아놓았다. "상공." 라혼은 수달 만에 설화와 만나 서로 이것저것 이야기하는데 주묘연이 부르 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입니다, 주낭자." "예, 제가 방해를 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 그러나 소개 시켜드릴 뿐이 계십 니다." 주묘연이 라혼에게 소개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백록파 장로 오진자였다. "백록파 장로 오진이라 하오." "라혼입니다." "서해수군통제사에 제수 되신 것에 감축 드리오이다." "고맙습니다. 설화에게 여인천궁을 도와주신 것에 대해 들어 알고 있습니다 . 먼저 그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허허허허, 그 일은 우리 백록파에도 연관된 일이었으니 제 일이기도 했으 니 당연한 것이지요." 오진자와 라혼은 서로 겸양의 말을 건네며 화기애애(和氣靄靄)한 분위기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오진자는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내 제독께 부탁할 것이 있소." "……." "우리 백록파 고수에게 가르침을 주실 수 있겠소?" "……!" 주묘연은 오진자의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무림의 인사가 관부(官府)의 인 물에게 가르침을 청한 것이다. 특히 수인조정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중외오 성(中外五省) 중 하나인 북지성(北知省)의 대파인 백록파의 장로가 그런 발 언을 한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다. "저는 아직 비무를 거절해본 적이 없습니다." "역시 천하제일미인을 아내로 둔 영웅답게 화통하시구려." 그렇게 칭송의 말을 하던 오진자는 제자를 불러오겠다며 자리를 떠났다. "묘연언니, 백록파 제자라면 오진자 할아버지를 빼고, 금대협 뿐이잖아요?" "글쎄?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 무슨 속셈인지……." 주묘연은 털털한 오진자가 하는 일에는 항상 속뜻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어디에 속셈이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 는 일이 많았다. "그보다 주낭자!" "말씀하세요, 상공!" "의백최가와 손을 잡는 일은 어찌되어 가는지 알고 있소?" "그일은 제가 책임지고 하고 있어 잘 압니다. 그러나 의백최가가 아직 아무 런 반응을 하지 않아 뭐라 드릴말씀이 없군요." 라혼이 서해수군통제사가 되자 조정에 적을 두고 배를 만드는 장인들을 확 보하는 문제가 해결 되었지만 기주, 무주, 계주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숙련 된 인부와 장인들을 쉽사리 빼내올 수 없었다. 그래서 의백최가의 도움은 아직 필요했다. "하지만 그들도 우리와 손을 잡는 것이 이익이 됨을 잘 알고 있을 터이니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서방님, 제 생각으로는요. 아마 웅랑교 때문인 것 같아요." "무슨 말이냐?" "적의 적은 친구라는 말이 있잖아요. 정립천하군이 비록 웅랑교하고 함께 갈 수는 없지만 원주조정에 반하는 입장인 것은 같아요. 정립천하군은 창끝 은 남쪽을 겨누고 있지 북쪽에 겨누고 있지 않거든요. 그러니 웅랑교의 다 음 목표는……." "의백성……." "맞아요." 설화가 분석한 정세는 옳았다. 흑막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웅랑교의 다음목 표는 흑막 남쪽에 있는 북지성이 아니라 서남쪽의 의백성일 가능성이 컸다. 이미 북지성에서 정립천하군이 인세와 관련이 있다고 하여 무림맹이 결성 되어 사실상 아직까지 여인천궁과 백록파가 주축이 되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러니 의백성에서도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은 없었다 . "주낭자, 설화의 말이 일리가 있소. 여인천궁에 웅랑교의 고수가 찾아왔든 의백최가 쪽에도 웅랑교의 고수가 찾아갔을 것이오." "그래요, 그 점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요." "주낭자, 만일 의백최가가 웅랑교와 손을 잡게 되면 나는 서해수군통제사로 써 그들을 막아야하는 입장이 되오." "이해합니다." 웅랑교가 의백최가와 손을 잡으면 그들의 배를 타고 바로 중주에 상륙을 시 도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그러니 라혼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서해에 서 의백최가와 쟁패(爭覇)하는 일이 생길 것이 뻔했다. 라혼은 그 즉시 전 환으로 토귀에게 명하여 토금전장 흑막대총관 석은추로 하여금 그것에 관한 사실관계와 정보를 입수를 명하고, 의백성 토금전장 분장에도 지금 의백성 의 상황이 어떤지 알아보게 했다. 그리고 새삼스런 눈길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를 바라보았다. "이제 설화는 다 컸구나." "뭐예요? 전 시집가서 아이도 가질 수 있는 나이라고요." "어? 말이 이상하다. 넌 이미 유부녀잖아?" "누가 그래요?" "그건 천하 사람들이 다 아는 얘기잖아? 천하제일미 천상천화는 천하제일 백호나한의 아내라고……." "아내 취급도 안 해주면서 무슨……. 그리고 벌써 1년이 다 되 가도록 독수 공방시키는 남편 나도 필요 없네요." 라혼은 갑작스런 설화의 공격에 일순 당황했다. 자신의 앞에선 항상 어리광 을 피우던 설화가 처음으로 싸움을 걸어온 것이었다. '뭐야? 다 컸어? 서방님 미워! 아직도 날 어린아이 취급하고 있어…….' 라혼은 설화의 심사가 단단히 뒤틀린, 그러니까 삐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 었지만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좋은 말로 달랬지만 오히 려 역효과 났을 뿐 설화를 달래는 데는 결국 실패했다. "우리색시 다 큰 줄로 알았는데 아지 애네. 지금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떨어 져 지내는 부부가 많잖니……." "아직도 애라서 정말 죄송하군요. 서방님!" 설화는 그렇게 소릴 지르고는 신법을 전개해서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설화야!" "쿡쿡쿡쿡, 상공께서 설화 소궁주님에게 아주 큰 잘못을 하셨어요." "주낭자, 그게 무슨 말이오? 잘못이라니?" "그건 스스로 생각해 보세요. 부부간의 일에 끼어들면 잘돼도 욕먹고 못돼 도 욕을 먹는다 했으니 저는 말씀해 드릴 수가 없네요." "아니 주낭자!" 검선자 주묘연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피했고 라혼은 자신이 설화에게 무 엇을 질못했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특별히 잘못한 것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왠지 모를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때 백록파의 장로 오진자와 젊은 사내가 나타났다. "장군, 이 늙은이가 장군을 기다리시게 했군요." 오진자는 그렇게 말하며 금동보의 등을 떠밀어 앞으로 나서게 했다. "근자에 우리 백록파가 자랑하는 후기지수(後期之秀) 금동보라고 하오." "만인문의 금동보가 장군께 인사드립니다." "라혼이오. 그런 시작합시다." "예? 뭘……." 금동보는 백호나한의 시작하자는 말에 무척 의아해 했지만 귀가에 간질이는 오진자의 전음에 당황이 도를 넘어섰다. '이놈이 이 어르신께서 너를 위해서 창피함을 무릅쓰고 그에게 비무를 신청 했다. 그러니 네놈의 한계를 시험해 보거라!' 무시무시한 백호나한과 싸워보라는 마귀 같은 오진자의 말에 멋도 모르고 그의 뒤를 따라나선 생각없는 자신의 행동이 저주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럼 내가 선수를 쓰겠소," "아니……난!" "강격(强擊)!" -펑~! 기감(氣感)에 민감한 금동보는 코를 노리며 날아오는 기 덩어리를 느끼며 그대로 벌렁 드러누웠다. 일명 철판교(鐵板轎) 신법이란 이 수법은 정면을 치고 들어오는 공격을 피하며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수법이었다. 그러나 그 것은 상대방이 근접해 있을 때나 가능한 수법이지 거리가 떨어져 격공장(隔 空掌)으로 공격하는 상대에게 펼치면 치명적인 허점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금동보는 철판교 신법을 펼친 것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 드러눕듯 넘어진 것에 불과했다. 오진자는 그런 금동보의 모습에 얼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나마나 저기서 공격을 계속하면 땅을 데굴데굴 구르 며 또, 한번 뇌려타곤(惱驢惰困) 시전할 것이 눈에 훤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 그러나 다행히 백호나한은 재차 공격을 하지 않아 금동보는 머리를 긁적 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천방지축신공의 공력을 끌어올렸 다. '마법사?' 라혼은 지박술(地搏術)이라 표현되는 마법주문 [바인딩Binding]과 비슷한 수법을 사용하는 상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천방일권(天方一拳)!" 라혼은 역시 이름을 거창하지만 내용은 명치부근을 노리는 단순한 앞지르기 에 불과한 공격을 왼발을 축으로 오른발을 뒤로 빼는 수법으로 간단히 피하 고 자세를 낮추어 소가 산을 미는 우배산(牛排山) 수법으로 금동보를 밀어 냈다. "어?" 겉으로 보기엔 금동보가 앞으로 달려들며 정권(正拳)을 내질렀고, 백호나한 이 그 엉성한 공격을 간단히 피하며 일어낸 것이었지만 속 내용은 그것이 아니었다. 바로 천하무적이라 생각되던 천방지축신공이 깨진 것이다. 금동 보는 자신의 주먹이 그의 명치에 닿을락 말락할 때까지 별다른 느낌이 없었 다. 그러나 한순간 자신이 제압한 공간속에서 미묘한 균열을 느꼈다. 그리 고 금동보는 땅에 주저앉아 멍하니 백호나한을 마주바라보고 있었다. "이거, 이거 내 장군께 헛소리한 셈이 되었구려. 승부는 났으니 그만 물러 가겠소이다." "……." "……." 오진자는 멍한 표정의 금동보를 보고 천방지축신공이 깨졌다는 사실을 짐작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문파의 비기를 타인에게 들키기 전에 그만 사태를 마 무리 하려했다. 그러나 오진자의 말에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금동보가 펼친 공력은 깨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라혼은 그가 펼쳐놓은 결계가 여전히 거두어지지 않자 금동보를 노려보며 생각에 잠겼다. '마법이 아니다. 이것은 공검(空劍)이다. 어떻게 심검(心劍)의 다음단계라 는 공검을 정권지르기도 엉성하게 하는 자가 시전할 수 있지?' 그리고 라혼은 기(氣)로 또 다른 기(氣)를 제어하는 공검이 아닌 에텔 스페 이스의 힘으로 공간을 제어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금동보는 깜작 놀라며 더 욱 공력을 끌어올려 그것에 대항했다. 라혼은 그런 금동보의 기(氣)를 다루 는 능력에 감탄하며 에텔 스페이스를 거두고 금동보와 같이 내공으로 기를 제어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라혼은 금동보에게 형편없이 밀리기 시작했다. 금동보는 힘겹게 공간의 주도권을 확보하고 도전에 침착하게 대응해 나갔다 . 그리고 그것을 라혼은 하나하나 배워나갔다. 그러나 기(氣)를 운용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심력(心力)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육체보다 정신적인 피로 가 극대화되기 대문에 정신이 쉽게 지치는 무공이었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 이 맺히며 새로운 공부에 희열을 느끼던 라혼은 창백하게 질려가는 금동보 를 보고 공력을 거두었다. "오랜만에 스승을 만났습니다. 다시 한 번 더 인사드립니다." "……." 라혼이 받히는 예(禮)에 금동보는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했다. 무리한 공력 의 운용에 그대로 졸도했기 때문이다. 남례일족(南禮一族) 무공의 경지는 처음 입문(入門)의 과정이 있다. 입문이란 몸을 강건하게 만 드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지속적인 수련과 단련을 하여 몸을 마음대로 움 직이는 경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고수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 의 무인들은 이 단계에 머물러 더 이상 진보하지 못한다. 다음의 경지는 물 아일체(物我一體) 바로 신검합일(身劍合一)의 경지가 있다. 검과 내가 하나 되는 다시 말해 손의 연장(延長)인 병기(兵器)를 내 몸과 같이 다루는 경 지다. 여기까지가 몸을 쓰는 체술(體術)의 완성이다. 여기에 다시 힘을 키 우고 피부를 질기게 하는 외공(外功)과 진기를 다루고 폭발적인 힘을 내는 내공(內攻) 수련이 병행한 어느정도 경지에 들어선 자를 절정고수라 한다. 그리고 여기서 발기(發氣)를 하여 검이 상대의 몸에 닿지 않고도 검기(劍氣 )로 적을 상하게 할 수 있는 검기상인(劍氣傷人)의 경지에 들고 또한 그것 을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게 되면 초극고수라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몸 을 마음먹은 대로 다룰 수 있다하며 모두 고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무술을 배우지 못하고 본래가진 힘만 쎈 자에게 고수가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데 이것은 바로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거나 방심을 했기 때문이다. 이렇 다는 것은 높은 경지에 있다고 하여 무조건 이기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 된 다. 그리고 금동보의 경우처럼 체술은 겨우 입문단계이면서 운기(運氣)의 고수인 경우가 있기도 했다. 검으로 대표되는 무기를 다루는 겨우 이기어검 술(以氣馭劍術)이 무의 완성인 것처럼 내공의 고수는 청(靑), 적(赤), 흑( 黑), 백(白), 황(黃)으로 상징되는 오행(五行)의 다섯 기운이 운기조식을 할 때 머리 위 정수리에 5개의 고리가 생기며 넘어서면 주위 사물, 대자연 으로부터 저절로  진기를 받아들일 수 있는 오기조원(五氣朝元), 화로 의 불이 다시 파란색으로 변한다는 경지로 지극함이 다해 이미 그것이 겉으 로 드러나지 않는 내공을 갖게 되면 한서(寒暑)가 불침하며 진기가 끊어지 지 않는 노화순청(爐火純靑)의 경지가 내가공부의 완성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것은 한 분야의 무공에 완성일 뿐이다. 방안에 그릇에 물을 가득 차면 더 이상 그릇엔 물이 담기지 않는다. 그러나 방안에 물이 가득 차있다 면 방안의 그릇은 더 이상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손에 검 이 없어도 마음에 검이 있는 심검(心劍)의 경지. 바로 깨달음의 경지였다. 공검(空劍)의 경지는 천기간의 모든 것은 이용하는 경지다. 내공의 고수라 하여 체술의 고수일 필요는 없고, 체술, 박투술(搏鬪術)에 능하다고 하여 고수는 아니다. 얼마나 서로 조화롭게 승승작용을 하는가가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서쪽 시드그람 대륙의 마법사들과 기사들이 그런 경 우다. 마법사들은 마나를 느끼고 다루어 주문을 완성시켜 엄청난 위력을 보 이지만 몸이 약해 기사와 1대 1의 결투에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이는 마법 사들이 사용하는 마나(Mana)와 무공고수들이 수련하고 연마하는 내공심법의 진기(眞氣)가 다르기 때문이다. 요리에 비유하자면 마나는 불이고, 진기는 끓는 물이다. 요리에서 불와 끓는 물에게 얻는 것은 다름 아닌 '열'이다. 같은 힘을 이용하기 위해 다른 방식을 이용했을 뿐 음식을 먹기 쉽게 하는 것이란 목적은 동일 한 것이다. 시드그람 대륙의 기사들과 칸 대륙의 무공 고수는 서로 수련 방식이 다른데 시드그람 대륙의 기사들은 특별한 내공심 법을 익히지 않고 진도가 느리지만 선천지기(先天之氣)를 수련했고 무공고 수들은 각파의 비전에 따라 선천진기(先天眞氣)를 가공한 내공심법을 수련 하기 때문에 기사는 마법사들이 만든 마법무구를 사용하는데 별무리가 없지 만 무공고수들이 마법속성이 부여된 물건을 사용하면 자신이 익힌 내가공력 과 마나가 상충하여 마법이 시전되지 않거나 전혀 엉뚱한 결과를 초래할 수 가 있었다. 그러나 마나와 진기는 본질적으로 같은 것을 말한다. 음의 마나 와 양의 마나, 지수화풍(地水火風)의 4대 속성을 가진 마나, 빛 속성 마나 인 신성력, 어둠의 속성 마력 그리고 좀 더 근원적인 힘 에테르(ether) 정 기(精氣). 모든 힘이 근원이 되는 에테르는 일원(一元)에 해당하는 것으로 일원에서 시작하여 만물이 파생되고 다시 태극(太極)으로 모아지는 것처럼 무공고수의 진기와 마법사의 마나 신관의 신성력, 마족의 마력은 다시 세상 모든 가르침이 하나로 통하는 만류귀종(萬流歸宗)의 이치처럼 세상모든 것 이 하나가 되는 만류귀원(萬流歸元)하여 다시 태극일원(太極一元)이 된다. 라혼은 에텔 스페이스가 있으므로 공검의 깨달음은 모르나 공검의 권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마나, 신성력(神聖力), 마력(魔力), 내공심법에 의한 진 기(眞氣)와 자신이 본래 가진 선천지기까지 모든 힘을 행사하고 서로의 장 단점을 파악하고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에텔 스페이스라는 아공간(我空間) 을 통해 그 힘들이 상충되지 않게 하며 모든 힘의 궁극(窮極)을 보았다. 그 리고 얼떨결에 사용하게 된 심검(心劍)의 기술인 영인(靈刃) 소울 블레이드 를 더욱 갈고 다듬어 심검의 완성도를 높였고, 이제 진정한 공검(空劍)의 이치를 깨달았다. 공검(空劍)이란, 자신이 절대적으로 제압하는 공간을 말 하는데, 무사는 언제 어느 때라도 마음을 흐트러트리지 않고 자신의 설정한 공간 안에 모든 것을 파악하는 마음가짐이다. 그리고 싸울 때 자신이 최대 의 힘을 내를 거리에 상대를 두는 것을 말하며, 공격을 사정거리 반경인 원 (圓)에 상대를 끌어드리는 것이다. 공검의 묘리란 공간 자체를 장악하는 것 을 넘어 그것을 검(劍), 바로 무기로 삼는 것을 말했다. 심검의 다음 단계 로 분류되나 엄밀히 말하면 심검과는 또 다른 경지인 것이다. 라혼이 금동보와 비무에서 배운 것은 바로 운기(運氣)의 묘리다. 기의 크기 는 라혼이 훨씬 높았다. 그러나 기를 다루고 움직이는, 그리고 기의 흐름을 읽고 대처하는 능력은 금동보가 몇 단계나 위에 있었다. 라혼에게 있어 그 런 금동보의 능력은 또 다른 경이였다. 단순히 운기만으로 만물을 파악하고 공간을 검으로 삼는 그의 공검은 신선하기 그지없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 다. 그리고 라혼은 금동보가 사용한 그것이 마법사들의 마나를 다루는 방법 보다 몇 단계 진보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라혼은 사흘 밤 낮의 사색을 마치고 금동보를 찾았다. "오진자 장로님, 그는 깨어났습니까?" "오오! 대장군, 새로운 깨달음을 얻으신 것을 축하하오." 오진자는 금동보와 비무이후 그 자리에 서서 꼼짝하지 않고 있던 백호나한 이 찾아오자 깨달음을 얻은 것을 축하했다. 그리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길을 찾았으니, 이제 먼 길을 떠나야 할 것이오. 길을 찾고도 걷지 않으면 찾지 못한 것과 뭐가 다르겠소?" "이제 한 걸음 떼었으니 곧 끝이 보일 겁니다." 혹자들이 말하길 도(道)가 통(通)했다고 말하고 깨달았다고 말한다. 막막한 숲속에서 길 만나면 '살았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길을 만나고 도 길을 걷지 않으면 길을 찾은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오진자는 깨달 음을 얻은 백호나한에게 깨달음을 행(行)하라 말했고, 라혼은 이미 시작했 다고 대답했다. "그렇구려. 동보는 이제 막 미망에서 깨어나 있으니 만나보시오. 동보도 대 장군처럼 뭔가 깨달은 것이 있으면 좋으련만……." "예!" 라혼이 사흘 밤낮을 사색에 잠겨 있었을 때 금동보는 절망 속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천하에 적수가 없을 것이라는 천방지축신공이 허점이 발견되어 깨 진 것도 아니고 완전히 힘으로 눌렸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는 건 천방지축신 공은 백호나한과 같은 화경(化境)에 든 고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런 것 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은 그것뿐인데 그는 여러 능 력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자괴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금대협." "……." 금동보는 얼굴을 아래로 하고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다 귀가를 울리는 목소 리에 반응하여 고개를 들어 자신을 부른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가르침을 청하러 왔습니다." "가르침이오?" "금대협의 운기법은 진정 대단했습니다." 금동보는 백호나한의 요구에 발끈하며 얼굴을 일그러트렸지만 이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휴우~! 비록 만인문 비전이라 하지만 당신이라면 곧 모든 비밀을 풀 것이 니 가르쳐 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라혼과 금동보는 칠일밤낮을 침식(寢食)을 잊고 새로운 경지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라혼은 천방지축신공의 묘리와 대기운기법(大氣運氣法) 을 금동보는 라혼이 천방지축신공의 대기운기법에 맞추어 새롭게 재창조한 몇 가지 마법주문을 얻었다. 제한이 있는 것이 오히려 더욱 풍부하고 다양 한 것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런 점에 있어서 마법사들의 마법체계는 다양하 고 풍부했다. 그러나 제한이 없는 천방지축신공의 대기운기법에 맞는 마법 주문은 라혼이 생각했던 보다 많지 않았다. 그러나 라혼이 가르쳐준 마법이 란 새로운 체계는 금동보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서방님 너무해!" "소궁주, 상공께서 새로운 경지에 드셨는데 축하해야지요." "안 그래도 서방님은 충분히 넘치도록 강하다구. 거기서 더 강해져서 우화 등선(羽化登仙)이라도 하면 나는 생과부가 되는 거잖아!" 설화는 철이 들고 나서 처음으로 서방님에게 큰소리를 질렀다. 생각해보면 서방님은 자신을 칭찬하는 표현에 혼자 화를 낸 것이기에 미안한 마음이 없 지 않아 있었다. 그래서 적당한 시기에 용서해 줄 생각이었으나 서방님은 백록파의 천방대협 금동보와 비무 같지 않은 비무 후 뭐가 깨달았는지 길고 긴 사색에 잠겨버린 것이다. 설화는 겨울이 초입이라 쌀쌀한 날씨에 몸이 상할까 서방님에게 말을 시키려 했으나 오진자가 그렇게 하면 깨달음을 놓 치게 된다고 하여 가슴을 졸이며 서방님 곁을 맴돌았다. 그리고 잠깐 자릴 비운사이 이번에 금동보의 거처로 가서 다시 7일간이나 나오지 않으니 걱정 은 화로 바꾸었다. "묘연언니도 생각해 봐. 내가 얼마나 걱정을 많이 했는지 그러데 서방님는 그런 내 마음도 몰라주고 금대협에게 갔단 말이야." "그거야! 당장 확인하고 싶으신 것이 있어 그러셨겠지요." "그래도 나보다 금대협을 먼저 찾다니 너무하잖아!" "……." 잔뜩 골이 난, 설화 소궁주의 모습에 주묘연의 입가에 미소를 걸렸다. 그것 은 두 부부가 진짜 부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묘연언니." "말씀하세요." 그러다 문득 설화는 이제까지와 다른 차분한 어투로 하소연을 했다. "저는 두려워요." "뭐가요?" "서방님이 이대로 사라질까봐!" "예?" "그동안 생각해 보았는데 저는 서방님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요." "?" 주묘연은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설화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서방님에게 무공을 가르쳐주신 사부가 누구인지, 부모는 누구인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하다못해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조차 몰라요." "예?" 주묘연은 설화의 말에 은은히 놀랐다. 고인(高人)들은 자신의 신상을 밝히 기 꺼려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여인천궁에서도 굳이 상공의 내력에 대 해서는 파고들지 않았다. 처음에는 설화 소궁주가 묘가의 손이라는 소문에 묘가와 어떤 관련이 있을 것이라 짐작했지만 설화가 백호라는 것이 밝혀진 지금 그의 정체는 진정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아내인 설화가 상공의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는 것은 은은한 충격이었다. "무공을 수련하면서 궁의 장로님들이 나누시는 말씀을 들었는데 젊은 나이 에 서방님 정도의 경지는 있을 수 없다고 했어요. 그래서 제 서방님이 노회 (老獪)한 고수로 반로환동(返老還童)했데요." "서, 설마요." "하지만 상관없어요. 그래도 서방님은 서방님이니까. 하지만 지금까지 합궁 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지금이라도 당장 더 높은 도(道)를 위해 절 떠나 실지도 몰라요." "아닙니다. 소궁주 상공이 소궁주님을 생각하시는 마음은 소궁주가 생각하 는 것보다 훨씬 지극합니다." 검선자 주묘연은 설화 소궁주에게 그런 불안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상공이 나이어린 설화를 아내라고 말한 것이 백호인 설화의 신분 때 문일 것이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상공이 설화의 양부였다면 설화는 영원히 숨어살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설화의 뛰어남은 주머니속의 송곳처럼, 모 여 있는 닭들 사이에 훤칠한 백학처럼 숨어있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설화는 바로 주묘연 자신이 찾아낸 여인천궁의 미래를 책임질 기재 중 기재였다. 세상에 나선이상 설화가 백호라는 사실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든 밝혀질 것 이고 아무리 강한 상공이라 하나 양부의 신분으로 설화를 보호하는데 한계 가 있을 것이 뻔했다. 그러나 남편이라면 설화라는 여인을 얻는데 가장 방 해되는 존재가 되고 설화에게 미칠 모든 위험은 몇 배로 확대 되어 남편인 상공을 노릴 것이다. 그러니 상공의 심중에 설화의 존재가 그저 딸 같은 존 재라면 설화가 안전하다 판단한 순간 상공은 설화의 말처럼 그냥 사라져 버 릴 수도 있었다. 비록 천하에 천하제일미 천상천화라 칭송되는 설화지만 상 공 같은 고인(高人)에게는 의미 없을 것이다. 주묘연은 슬픈 표정의 설화 소궁주에게 다가가 조용히 끌어안아 주었다. "흐음, 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인가?" 밀림의 한가운데 사방에서 비둘기가 날아드는 투박한 정자(亭子)에서 호도 하남천원군부에 하남천원군의 상초와 작도인 두 장수의 목을 노리고 잠입했 다가 그들의 대화를 듣고는 대담하게 제안을 한 진토인 자객(刺客)은 전서 구(傳書鳩)들이 매달고 온 밀지를 하나하나 펼쳐보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대야(大爺), 그렇다고 하더라도 대야에 관한 소문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것은 나도 안다. 용의주도한 백호나한이 적대적인 인사였던 그들의 수작 에 넘어가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욱 타당 할 테지."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인상의 그는 남례일족의 대 야(大爺)로 최고 수장이었다. 남례일족은 사실 남례성의 진토인 전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남례일족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천하가 십이진 가(十二眞家)를 주축으로 한 수인들에게 제패되고 변방으로 생각되던 도남( 圖南)지역으로 진출하며 남례성으로 바뀐 후 독자적인 생활과 문화를 가진 진토인들과 조정에서 임관해온 관리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 나 힘을 가진 쪽은 관리들이었고 도남인들은 그들에게 티끌과 같이 하찮은 사람이라는 진토인(塵土人)이라 불리며 그들의 문화와 전통은 철저히 무시 되고 파괴되기까지 했다. 이에 도남인들은 자객(刺客)이 되어 자신들의 주 장을 펴기 시작했고 많은 남례성의 관리들이 참수되었다. 이것이 바로 남례 일족의 정체였다. 그러나 차차 중주의 문화에 적응하고 동화되어 도남인은 사라지고 진토인만 남아 수인조정이 만든 질서에 안주하자 자객으로 시작된 그들은 무림의 일각을 차지하고 남례성을 지배했다. 그러나 가끔 남례성의 진토인들을 대표하며 자객의 업을 이어나가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했다. 자객(刺客)과 살수(殺手)는 같은 의미로 생각하기 쉽지만 자객은 자신들의 행위로써 세상에 뭔가 말하려는 자를 말하고, 살수는 말 그대로 죽음을 업 으로 삼는 족속들이었다. 돈에 고용되거나 대가를 위한 자객은 있을 수 있 지만 살수는 오로지 황금이라는 대가를 위해 의미도 관계도 상관없이 살행( 殺行)을 하는 족속들이었다. "백호나한이 남례성을 떠나지 않았느니 봉수성에 있는 것이 분명한데 밖으 로 나오지 않으니……." "지금 백호나한이 머무는 저택의 경호는 의외로 허술합니다. 그냥 암살대를 편성해서 공격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것은 나도 생각해 본 바다. 하지만 백호나한이 그곳에 있다는 확신이 없 다. 그러나 암살대를 준비해 배치해 두는 것이 좋겠다." "존명!" 대야(大爺)는 강호에 남례일족이라 알려진 결사의 모든 것을 이용할 권한이 있는 존재로 그야 말로 남례일족의 전부였다. 그는 최고의 자객이며 최고 수이기도 했다. 소야(少爺)는 대야가 되기 위한 후계자들로 대야에게는 많 은 소야들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 가장 뛰어나 다음 대야로 생각되던 소야 예하(藝河)가 귀림에서 백호나한에게 무공이 전폐되자 모든 활동을 접고 사 태를 예의주시했다. 그러나 백호나한이 열지족을 꼭두각시로 만들어 남례성 을 완전히 장악하려 하는 행태를 취하자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백호나한에게 남례성 장악임무를 받은 작도인과 상초를 제거하려 했 던 것이었다. "확실히 백호나한만 없다면 나머지는 지리멸렬(支離滅裂)할 것이 뻔해 그렇 지 않더라도 그렇게 만드는 것은 쉽지. 남례성은 다시 도남이 되고 도남은 수인조정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족하겠지." 남례일족의 대야 하수(遐壽)는 백호나한을 도모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역량 을 걸었다. "자객으로써 백호나한만큼 가치 있는 자는 찾아보기 힘들지 남례가 도남이 되면 남례일족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 목숨을 버리고 죽여야할 자를 찾은 하수는 조용히 투지를 불살랐다. 남례일족(南禮一族) 겨울이 왔다. 북지성은 이미 눈이 쌓여 천지가 하얗게 변해 있었다. -뽀드득, 뽀드득, 뽀드득, 뽀드득……. 밤새 눈이 내린 다음날 아침 라혼은 해가 뜨자마자 지난 열흘간의 새로운 경험에서 얻은 깨달음을 정리하기위해 태회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이름 모를 산에 올랐다. 이산도 분명 불리는 이름이 있을 테지만 지금 라혼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흠~후~!" 라혼은 찬바람을 폐부 깊숙한 곳까지 들이마시고는 완전히 밝아진 하늘과 서편에 펼쳐진 푸르고 넓은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이 순간 라혼의 머 릿속은 완전히 비어 있었다. 어떠한 생각이나 고민도 없이 그저 바다만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라혼은 이내 고개를 돌 려 하얀 능라 비단으로 몸을 가린 산봉에 눈을 두었다. 그리고……. -휘이이이이이……. 촤라. "……!" 너무나 평범한, 그래서 생각할 것조차 없는 일이 라혼의 눈앞에서 펼쳐졌다 . 한줄기 돌풍이 불어 나뭇가지에 쌓여있는 눈이 떨어지는 사건이었다. '왜? 바람에 눈이 떨어졌지? 아니 왜 바람은 부는 거야?' 라혼은 갑자기 일어난 기이하기 그지없는 심상에 허리를 굽혀 눈을 한 움큼 주워 다시 떨어트렸다. 그러자 눈의 일부는 미풍에 날렸고, 대부분은 눈 쌓인 땅에 떨어졌다. 라혼은 고개를 계속 갸웃거리며 눈을 집어 떨어트리기 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박힌 듯 사색에 빠졌다. '뭐지? 뭐야? 왜 눈이 땅으로 떨어지는 거지? 눈이 땅에 떨어진 것은 당연 한 일 아닌가? 아니야, 이건 힘이다. 만물을 땅으로 끌어당기는 힘. 그럼 달은 해는 어떻게 하늘에 떠있을 수 있지? 신이 만든 힘?' 라혼은 시선은 땅에서 하늘로 시선이 옮겨졌다. 그리고 라혼은 하늘로 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라혼은 이미 이 세상이 둥근 구(球)라는 사실을 알고 있 었다. 그러나 그땐 그 사실이 그전 신기했을 뿐, 별 감흥은 없었다. 유체( 流體) 상태에서 본 사실이기 때문에 그저 꿈처럼 치부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몸으로 느끼고 어떤 실감을 얻고 싶어 끝없이, 끝없이 하늘 로,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리고 라혼은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대기가 차가 워지고 숨쉬기가 힘들다는 것을 체험했다. 그것은 마치 천계의 신들이 쳐놓 은 결계인 듯 라혼을 괴롭혔다. 그러나 라혼은 그런 그들과 싸워나가야 했 다. 결계 따위에 무너진다면 싸워보나 마나였다. 그러나 라혼은 결국 맨몸 으로 견디는 것을 포기하고 에텔 스페이스로 결계를 쳤다. 그리고 끊임없이 높이높이 솟아올랐다. 그러자 이번에 태양에서 내리 쬐는 따사로운 햇볕이 날카롭기 그지없는 창이 되어 라혼을 피부를 태우기 시작했다. 라혼은 다 시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결계를 손봄으로써 태양에서 쏘아 보내는 태양신 의 창을 방어했다. 그렇게 얼마나 높이 올랐을까 라혼은 높이 오르는 일을 멈추고 의식을 개방해 자신이 얼마나 올랐는지 알아보았다. 그리고 지금까 지 경험에 없던 초장거리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을 시전했다. '춥고 어둡다. 이곳이 마계인가?' 라혼은 거대한 돌과 바위산이 허공에 떠있는 곳에 홀로서서 의식을 개방해 주위를 탐색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은 커녕 그 흔한 작은 풀뿌리조차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러나 라혼은 칼처럼 뾰족한 난석지 대를 걸어보기 위해 한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라혼은 그 작을 동작에 마치 능공천상제(凌空天上梯) 신법을 펼친 것처럼 몸이 허공으로 뽑아 올려지자 순간 당황했다. '헉! 이게 뭐야?' 그리고 라혼은 천지가 분간 안 되는 상황에 빠지자 무척 혼란스러웠다. 몸 을 바로 하기위해 금리도천파(金鯉倒千波)의 묘리로 허리를 튕겼는데 사방 이 돌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돌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천지가 돌고 있는 것인가? 아니 과연 여기 가 천지간 이긴 한 것인가? 욱 그보다 뭔가가 아래위로 잡아당기는 것 같아 .' 라혼은 어떤 힘이 머리와 다리를 잡아당기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고 거대 한 바위산이 확대됨을 느끼며 격공흡인(隔空吸引) 수법으로 가장 가까이에 있던 바위덩어리를 잡아챘다. "허억~!" 단순히 잡아챈 것에 불과한데도 라혼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는 바위덩어 리에 기겁하며 몸을 바로하려 했지만 좀 전의 상황을 재연하고 싶지는 않았 다. '커억!' -쿵. 라혼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충격을 음을 예상했지만 몸이 받 은 충격에도 소리는 나지 않았다. 날카로운 바위에 입고 있던 옷이 너덜너 덜한 걸레가 되었음에도 소리가 나지 않자 라혼은 아직도 자신에 부딪친 충 격에 비산하여 허공에 떠있는 돌들을 집어 바닥에 던져 보았다. 그럼에도 소리는 나지 않았다. '여기선 아무도 아무것도 살아갈 수 없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바람도, 구름 도, 그리고 어떠한 생명도 보이지 않는다. 거대한 판게아만이 바람이 있고 구름이 있고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곳이야. 그렇다면 신은 그 곳을 보호하 는 존재였나?' 라혼은 그러한 생각을 하며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문득 자신이 생각한 아 니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사실에 의문을 품었다. '태양이 땅을 중심으로 도는가? 땅이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가? 아니 땅이 움직이는 것이었나?' 그리고 라혼은 아름다운 푸르고 둥근 탁자같이 보이는 '땅'을 보았다. 그리 고 자신의 관점에서 그 땅이 허공에 떠있는 형상을 하고 있자 왜 떨어지지 않는지 의문에 싸였다. 그러나 이내 어디가 아래이고 어디가 위인지 알 수 없는 바깥 세계의 모습에 의문만 점점 늘어갔다. 그리고 다시 땅으로 돌아 가기 위해 [플라이트Flight:비행]주문을 시전했다. 아무런 변화가 없자 라 혼은 채차 [플라이트Flight]를 시전했다. 그래도 아무런 변화가 없자 고개 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이내 깨달을 수 있었다. [플라이트Flight] 주문을 이미 시전되고 있었다. 다만 바람이 없는 공간이고 땅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멀리 있어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을……. 라혼은 에텔 스페이스를 이용해 땅과의 거리를 측정하고 결국 [플라이트Flight] 주 문을 거둬들였다. [플라이트Flight]주문으로 가기에 땅은 너무 멀었던 것이 다. 라혼은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를 하여 땅을 보호하는 결계 근처 까지만 이동하여 그대로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쿠릉쿠르르르릉! 아무소리도 나지 않는 적막한 곳에 있다가 귀가를 자극하는 바람 스치는 소 리가 새삼스럽게 생경해진 라혼은 또다시 새로운 결계에 효용에 당황했다. 엄청난 고열이 라혼을 태울 듯이 발생한 것이다. 라혼은 어쩔 수 없이 바람 을 느껴보고 싶어 약화시켰던 결계를 강화시켰다. 그리고 그 상태를 유지하 여 땅의 힘을 느끼며 몇 개의 구름층을 뚫고서야 온전한 땅의 모습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내 땅과 충돌했다. -쿵! 콰콰콰콰콰과과과………………. 그리고 엄청난 굉음과 함께 지표면이 밥주발처럼 패였다. "쿨럭쿨럭쿨럭……. 휴우! 대단하군. 이런 엄청난 충격이라니……." 라혼은 전신이 찢어져라 비명을 지르는 몸의 상태를 점검하며 눈살을 찌푸 렸다. 그리곤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 청명하기 그지없는 하늘을 보았다. "천지(天地)가 고작 거대한 우주의 티끌도 안 되는 일부분이었어." 라혼은 새로운 사실을 알고 자신이 그동안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바람에 날려 떨어지는 그동안 의심하지 않았던 단순한 것에 파생되어 엄청난 진실을 조금이나마 느끼게 되었으니 그동안 의심하지 않았던 모든 것이 새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라혼의 사색은 오래가지 못했다. "!$#$%@!!@$#%@!!!!!" "……?" 소인들이었다. 드워프정도의 작달막한 키의 사람들이 저마다 꼬챙이를 꼬나 들고 뭐라, 뭐라 소리를 지르며 라혼 주위를 에워쌌다. 라혼은 즉 [콤프리 헨드 랭귀지스Comprehend Languages:언어이해]주문을 시전해 그들의 하는 말을 엿들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이래."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마족일 수도 있어." "곧 제사장이 온다니까 뭔가 해주겠지." 라혼은 그들의 대화에 몇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이곳은 칸 대륙도 아니고 인시드 대륙도 아니며 시드그람 대륙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 었다. '남방대륙에 떨어진 모양이군. 어쩌나 그냥 이대로 돌아갈까? 아니지 기왕 여행(?) 온 김에 이들과 인연을 맺어두는 것이 좋겠어.' 라혼이 그런 궁리를 하는 동안 흰 천에 황금실로 수를 새긴 옷을 입은 노인 이 탄 화려한 황금 수레가 접근했다. 수레의 문양을 보고 짐작하건대 아마 도 태양신이거나 태양신과 관련된 신을 모시는 제사장 같았다. 이윽고 장중 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수레가 멈춰지고 건장한 노예가 수레 앞에 웅크리자 그 노인은 그의 들을 밟고 땅으로 내려서서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런 발걸음 으로 라혼에게 걸어왔다. 그리고 근엄한 어조로 입술을 떼었다. "나는 태양과 지혜의 주신(主神) 라(Ra)를 모시는 헬리오스 신전의 대제사 장 라혼이다." "……." "그대는 누구이며 어찌하여 성스런 도시 헬리오폴리스에 왔는가?" 라혼은 라혼이란 이름의 늙은 제사장의 말에 평원저쪽 언덕 너머에 많은 사 람들이 사는 도시가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왜 아무런 대답이 없는가?" "……." [콤프리헨드 랭귀지스Comprehend Languages] 주문을 통해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는 있었지만 그가 하는 남반대륙언어를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러 혹시 몰라 라혼이 알고 있는 3가지 언어 시드그람 공용어, 인시드 어, 그리고 칸 어를 모두 사용해 보았다. 그러자 그들의 태도가 돌변 했다. "외륙인이로군." "……?" 라혼은 갑작스럽게 격렬한 적의와 함께 전의를 불태우는 작은 사람들의 태 도에 얼떨떨했다. 시드그람, 인시드, 칸은 서로의 존재를 알고 미약하지만 서로 교류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방대륙은 그 어떠한 곳과도 교류가 없 어 신비에 쌓인 땅이었다. 라혼은 그 이유를 지금 이들의 태도를 보고 비로 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대가 어찌하여 게브 땅에 왔는지 모르나 비록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신성한 게브를 더럽혔으니 너의 순결한 붉은 피로만 정화할 수 있을 것이 로다." "……." 간단히 말해서 죽이겠다는 뜻의 제사장 라혼의 말에 라혼은 어이가 없었다. "게브누트에 가득한 슈여, 그대의 아버지 위대한 라의 이름으로 청하노니 나 라혼에게 그대의 권능을 빌려주소서." -휘이이이잉~! 기도인지 주문인지 헬리오스 신전에 제사장 라혼의 영창(靈唱)이 끝나자 갑 작스런 돌풍이 불기 시작했다. 바람은 점점 강해져 흩날리는 먼지에 눈을 틀 수 없을 지경이었지만 라혼은 이미 결계를 펼쳐두고 있었기에 그 자리에 태연히 서 있었다. "엘 슈El Shu!" -후웅, 후웅, 후웅…………. 바람은 점점 거세지더니 이내 작은 회오리바람으로 바뀌었다. 이에 라혼은 허리춤에서 협봉검을 뽑아들고 횡소천군(橫掃千軍)의 일식으로 크게 휘두르 며 공간을 베어갔다. -펑! 그러자 거세게 몰아치던 회오리바람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 이럴 수가……." 제사장 라혼은 외륙인이 꼬챙이를 장난처럼 휘두른 것만으로 대기의 여신 슈(Shu)의 권능을 빌어마든 신의 바람이 사라지자 눈을 크게 치켜떴다. 그 리고 비로소 상대가 태양과 지혜의 신 '라'가 머무는 신성한 땅에 기이한 상처를 낸 자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또 한번 늙은 제사장 라혼을 깜 짝 놀라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나는 라혼이다.> "……!" 바로 라혼이 허공에 신성문자(神聖文字) 히에로글리프(Hieroglyph)로 허공 에 황금빛으로 그렇게 적었기 때문이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그대 또한 나와 같은 위대한 라의 사제인가?" 라혼은 상대가 신성문자를 알아보고 다시 묻자 다시 허공에 글을 적었다. <어찌하여 나를 공격하는가?> "그대는 외륙인이 아닌가?" <나는 이 대륙에서 살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내가 공격받아야할 이유가 없다.> "그대는 외륙인이 이 땅이 와서 한 살육을 모르는가?" <살육?> 사정은 이러했다. 수백 년전 남방대륙, 이 땅에 사는 이들이 스스로 게브 대륙이아 불리는 곳에 한 무리의 외륙인들이 상륙했다. 그들은 처음 작은 마을을 이루며 살아가다 어느 순간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유입돼 스스로 나라를 세우더니 게브대륙인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기에 이른다. 그들은 강력했다. 키도 게브대륙인들 보다 머리 한두 개가 컸으며 거대한 짐승을 타고 종횡무진 전 게브대륙을 1백년 이상이나 피로 물들였다. 그러나 그들 에 자손의 키가 점점 작아지더니 게브대륙인들과 비슷하게 되고 그들이 타 고 다니던 짐승은 게브대륙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라지다. 일이 그렇게 되자 압도적인 수의 게브대륙인들은 외륙인들에게 피의 복수를 했다. 1백년간 쌓인 증오는 그들을 살아남지 못하게 했고 그 후 게브대륙 밖은 모든 존재 를 금기시하여 가끔 조난당한 외륙인들은 발견되는 족족 죽음을 면치 못했 다. "그렇게 된 것이다. 이제 내가 물을 차례다. 그대는 라의 사제인가?" <아니다.> "라혼이란 이름의 연원을 모르겠군." <그렇다.> "라혼은 태양과 지혜의 신 위대한 '라'를 가장 가까이 모시는 자의 이름이 다." <알았다. 그러나 나는 라는 모른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그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지 잘 안다. 그리고 이 땅의 율법이 날 허락하지 않으니 곧 떠나겠다 .> 라혼은 제사장 라혼의 대답이 있기도 전에 칸 대륙의 북지성 태회진이 있는 곳으로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했다. 라혼이 노예로써 팔렸을 때 라 혼을 산 주인의 가문을 상징하던 문장은 바로 태양이었다. 그러니 라혼이란 태양에게 봉사하는 자라는 뜻이 되니 '라혼'이란 훌륭한 노예의 이름이 된 다. 문장의 뜻과 의미 그리고 발음이 전혀 교류가 없는 남방 대륙인 게브 대륙과 인시드 대륙이 똑같았다. 라혼은 신성언어에 해당하는 단어이니까 과거 아주 먼 과거엔 두 대륙이 서로 교류하고 같은 말을 사용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라혼이 짧지만 긴 여행을 끝으로 원래 출발지였던 태회진의 이름 모를 산으 로 돌아왔다.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산을 천천히 내려온 라혼은 목욕을 하 기 위해 거처로 걸어갔다. "어이 이봐! 여긴 함부로 드나드는 곳이 아니야!" "……!" 라혼은 자신의 앞을 가로 막는 군졸의 얼굴을 보고 자신의 차림새를 보았다 . 여기저기 찢기고 검뎅이 묻어 거지도, 거지도 이런 상거지가 없는 몰골을 하고 있었다. 태회진으로 유입되는 대부분의 피난민들이 지금 라혼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니 그가 오해할 만도 했다. 라혼은 쓴 웃음을 지으며 발 길을 돌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군졸이 지키고 있는 방안 거처로 [텔레 포트 워프Teleport warp]했다. 괜히 쓸데없는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휴우~! 그나저나 이곳에 내가 입을만한 옷이 있나 모르겠네? 이보다 일단 씻기나 해야 갰군." 라혼의 거처는 다름 아닌 여인천궁의 소궁주인 설화가 머무는 곳이었다. 설 화는 여인천궁에서 머무는 동안 이런저런 아기자기한 물건들로 자신의 거처 를 장식하는 것을 배워 방안엔 시화(詩畵)나 아름다운 색깔의 자기나 형형 색색(形形色色)으로 수를 놓은 손수건들이 걸려 있었다. 라혼은 방안에 베 어있는 설화의 냄새와 그런 것들을 보고 미소 짓고는 몸을 씻기 위해 욕조 가 마련된 욕방(浴房)으로 들어갔다. 욕방의 커다란 나무통인 욕조 속에는 한겨울에 어디서 구했는지 꽃잎이 띄워져 있었고 물은 적당히 따뜻했다. -촤아~! 촤아~! 라혼은 일단 완전히 걸레가 된 옷을 벗고 바가지로 욕조의 물을 끼얹어 몸 을 대충 씻어냈다. 그리고 무인으로써 완성된 몸을 커다란 욕조 속으로 밀 어 넣었다. 쌀쌀한 날씨 속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산을 내려온 라혼은 따뜻 한 물속에 몸이 잠기자 전신의 근육이 한 올, 한 올 풀리는 느낌으로 받으 며 머릿속을 비웠다. 거창한 표현으로 이름 바 무아지경(無我之境)인 상태 였다. -드르륵! '음? 설화가 돌아온 모양이군.' 라혼은 방안에 누군가 들어서자 기분 좋았던 상태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그 존재가 설화임을 알고 라혼은 욕조에서 몸을 빼지 않고 지그시 눈을 감고 는 다시 그 기분 좋았던 상태로 돌아가려 했다. -콰창! "누구냐!" "……!" -와장창~! 파삭! 그러나 라혼은 끝내 그 기분 좋았던 상태로 되돌아 갈 수 없었다. 설화가 다짜고짜 욕방의 문을 부수며 들이닥치더니 옥녀진기(玉女眞氣)를 뿌렸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라혼은 기겁하여 욕조에서 몸을 빼야 했고 욕조 안에 따뜻한 물은 사방으로 튀는 그 형상그대로 순간 얼어붙어버렸다. "낭적천애(浪迹天涯)!" 파도가 절벽에 흔적을 남긴다는 초식의 이름처럼 호접검을 빼든 설화는 쉴 새 없이 작고 간결한 동작으로 라혼을 괴롭혔다. "설화야! 이게 무슨 짓이야." "서방님, 미워 어떻게, 어떻게 말 한마디 없이 어디로 가는지 알 수도 없게 사라질 수 있냔 말이에요?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옥녀소장(玉女 梳裝)!" 설화는 아름답고 고귀한 여인(玉女)이 머리까락을 빗질하며 꾸민다(梳裝)는 초식으로 라혼 더욱 압박해 들었다. 설화와 설화가 구사하는 초식은 아름 답기 그지없었지만 그것에 쫓기는 발가벗은 라혼은 죽을 맛이었다. 이거야 무림의 협녀(俠女)를 잘못 건드린 치한의 형상이 아닌가? 라혼은 시간의 흐름을 몰랐지만 이미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였다. 아침 산 책은 나갔다는 서방님이 닷새나 말없이 행방불명되자 설화는 덜컥 겁이 났 다. 서방님이 어디로 도망간다면 천하에 그 누가 있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서방님의 행방을 추적해 낼 수 있을까? 서방님이 구축하는 세력이 커 질수록 설화는 점점 불안해져만 갔다. 세상에 나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 을 체험하면 체험할수록 서방님과의 부부관계는 진정한 부부관계가 아니라 는 것을 알게 되었다. 17세 아니 이제 18세의 나이면 이미 아기를 키우는 엄마도 될 수 있는 나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설화는 어느 날 갑자기 사 라져버린 서방님을 서방님이 가르쳐 준 [메시지Message]를 사용하며 애타게 불렀다. 그러나 주문을 잘못 사용했는지 당사자가 이 세상에 없는지 아니 면 일부러 대답하지 않는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설화는 여인천 궁의 소궁주이며 이곳 태회진에 모인 수만의 사람들을 책임진 위치에 있었 다. 그래서 겉으론 아무런 내색을 하지 못하고 속앓이만 계속할 뿐이었다. 오늘도 바쁜 하루를 보내고 다시 한 번 더 서방님을 불러보기 위해 방으로 돌아왔는데 방안에서 기이한 탄내와 검은 흙이 바닥에 떨어진 흔적을 발견 하고 침입자가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상대는 군졸들과 여인천궁의 검녀들 이 이중삼중으로 엄밀히 에워싼 호위망을 뚫고 귀신같이 침입한 상대였다. 어찌되었거나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생각에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며 흔적 이 이어진 욕방의 문을 부수며 뛰어든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동안 걱 정하고 불안해하던 자신을 비웃기라도 하듯 세상 편한 모습으로 태연히 욕 조에 몸을 담근 서방님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런 모습에 왠지 모를 심 술이 나서 그대로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그런 사정을 알길 없는 라혼은 그 얌전하던 설화가 길길이 날뛰는 모습에 허둥댈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여인천궁에선 설화에게 도대체 뭘 어떻게 가르친 거야?' 라혼이 원망할 데는 다름 아닌 여인천하를 꿈꾸는 여인천궁뿐이었다. 남편 은 사흘에 한번은 패야한다고 가르친 것이 아닌지 무척 의심스러웠다. 토금전장이 천하 각처에서 수집한 정보는 대부분 고학에게 집중되었다. 그 러다 보니 봉수성의 봉수태수부의 방 하나를 꿰차고 앉아있는 고학은 앉은 자리에서 천리(千里), 아니 만리(萬里)를 내다보게 되었다. 중주의 십이진 가의 일과 후선의 일, 그리고 흑막, 의백성, 북지성 등 남상을 제외한 거의 전 지역의 정보를 앉은 자리에서 분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고학은 천하 라는 장기판을 훤히 들여다보며 천하를 경영할 수 있는 위치와 권한을 가지 게 된 고학에게 은섬충에 당한 호영과 귀호령이 붙어있어 원주 청인성에 호 천궁에 있는 호황까지 움직일 수 있었다. "의백성의 사정이 심상치 않은 모양인데……." "고대인, 주모께서 소궁주로 계신 여인천궁이 전해온 바로는 의백성의 패자 최문(崔門)에서 시간을 끌며 눈치를 보고 있는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강호의 일은 잘 알지 못하지만 그들로썬 가문의 생존 이 걸린 문제이니……." 고학은 주군 라혼의 군사로써 이일에 대한 대비책을 찾아야 했다. 이미 토 금전장과 주군의 관계를 알았음으로 고학으로썬 토금전장까지 생각하며 전 략을 세워야 했다. 그래서 토금전장이 당초 계획했던 의백성을 거처 흑막으 로 물품을 보내려는 계획 또한 염두에 두어야 했다. 흑막대총관 석은추가 보낸 소식에 의하면 웅랑교의 다름 목표는 다름 아닌 의백성이었다. 아직까 지 조정에 충성하는 정예순군들이 속속 의백성 근처로 모여들고 있지만 의 백성으로썬 그들을 받아들일 순 없었다. 그들 중에 웅랑교의 간자가 없으리 란 법이 없고 또 이미 웅랑교에 항복하여 웅랑교에 충성하는 무리가 거짓으 로 병사를 꾸미는 위병지계(僞兵之計)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홀대 아닌 홀대를 참아가며 전 제평대도독부 순군 들이 조정에 계속 충성을 바치리란 보장이 없었다. "고대인 어차피 이들은 버려지는 수가 될 가능성이 근데 차라리 그들을 우 리 세력에 끌어들이는 것이 어떨까요?" "글쎄? 그렇게 되면 웅랑교와 싸울 자들도 싸움을 포기할 것이고, 우리는 의백최가와 척을 지게 되네. 그럼 태회진에 계신 주모가 위험해 질 것인데 ……." "북지성에 주모를 따르는 군사들이 2만이나 된다 합니다. 하니 다시 한 번 천자를 움직이는 것이 어떨까요?" "호황을?" 고학은 모원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원주 조정에게 있어 주 모는 의군(義軍)을 이끄는 의병장이었다. 이미 북지성은 조정의 손을 떠난 땅이었다. 그리고 웅랑교의 거병으로 적도들인 정립천하의 무리들이 웅랑교 를 견제하느라 발이 묶였고 조정의 입장에서도 정립천하군은 북지성의 길을 지켜주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주모를 따르는 군사들의 신분은 그 경계가 애매합니다. 장동부의 관군들과 북지무림맹이 모은 의군(義軍)들이 뭉뚱그려져 있는 터라 조정의 입장에서 도 주모에게 적당한 지위의 관직을 주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고학은 모원의 말에 미소 지으며 짐짓 모르는 척 딴지를 걸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그것을 천자에게 알린단 말인가? 우리는 남례성에 있고 주모는 북지성에 있는데?" "이번 기회에 조정에다가 우리 사람을 만들어 두는 것이 좋을 듯싶은데…… ." "하하하하, 내 이미 토금전장의 금대인에게 그것에 관해 부탁해 두었네." "이런 제가 괜히 힌소리를 했군요." "그래, 그건은 우리가 독자적으로 할 일이 아니니 준비는 해두고, 주군의 재가를 기다리게 이곳은 한 여름처럼 덥지만 대륙 천하는 이미 겨울의 문턱 에 들어선지 오래 일 테니, 그리고 흑막의 겨울은 더욱 혹독해서 운신하기 힘들 터이니 시간은 넉넉하네. 아마 의백최가에서도 그것을 알고 봄에 조정 의 태도를 보고 웅랑교와 손을 잡을지 말지 결정을 미룬 것일 게야." 겨울이 없는 남례성이지만 대륙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이맘때면 웬만해선 움 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고학과 모원 등 문관들은 전환의 도움을 받아 봉수 태수부를 중심으로 제반 사항을 검토하고 주먹구구식이지만 하남천원군이 된 진토인 전사들의 봉록을 지급하자 갑자기 한가해져 버렸다. 사실 일이야 차고 넘치기는 했지만 5만 수준이었던 하남천원군을 한 순간 20만 대군이 되는 바람에 일에 치여 눈곱 뗄 새 없이 바빴다가 그 일이 어느 정도 마무 리되자 한가하게 느껴진 것이다. "그래, 신혼재미는 어떤가? 천하에 이름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미인을 아내 로 두었으니 매일 매일이 꿈꾸는 것 같을 테지?" "예? 아, 예!" "허허, 신혼재미가 얼마나 고소하기에 이렇듯 말을 못 할까?" 모원은 열지족의 추장 소노리의 딸이 메이를 아내로 맞았다. 주군 라혼이 소노리를 제압하고 그와 함께 호도로 입성하여 가장 먼저 모원과 메이를 호 도로 불러들여 반강제로 모원과 메이를 맺어주었다. 그러나 자존심이 강한 열지족의 공주라 할 수 있는 메이는 모원을 남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 래서 아직 모원은 메이와 첫날밤도 치르지 못한 상태로 외줄타기를 하고 있 었다. 이미 남례성은 주군이 장악한 상태이고 열지족이 주군에게 반기를 든 다면 저 편안한 어머니의 품 속 같은 밀림도 열지족을 구해 주지 못했다. 그러한 사정을 잘 아는 이 결혼을 거부함으로써 라혼의 심기를 거스를 용기 가 없었다. 그러나 만만한(?) 모원이라면 달랐다. 벌써 한 달이 다 되도록 백호나한은 거처에서 나오지 않았다. 백호나한의 거처는 원래 위병대장 홍대보의 저택이었다. 홍대보는 진토인들을 싫어해 집에 진토인들을 두지 않았고 덕분에 그의 저택은 남례성에서 유일하게 남 례일족의 시야에서 벗어난 곳이었다. 그리고 그 주인이 백호나한을 바뀌었 어도 저택의 하인들은 바뀌지 않아 남례일족의 대야 하수는 저택안의 사정 을 알지 못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백호나한이 저택으로 칩거한 후 그는 저 저택을 나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난 한 달간 저택을 출입한모든 존재의 행적을 축적 조사하였으나 그 어디에도 백호나한이 저 택을 빠져나간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대야를 괴롭히는 사실이 있었으니……. "대야,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난 한달 간 저택을 출입한 주요인사가 거의 없습니다." "으음." "흑장들이야. 도남전역에 흩어져 있으니 그렇다고 해도 봉수태수부의 하남 천원군 관리들도 저택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발걸음을 하지 않고 있습니 다." 대야는 충성스런 시화(柴禾)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남례일족에는 한명의 대야와 다수의 소야만이 있을뿐 그 외의 인물은 특별한 지위가 없었다. 그 래서 시화에게도 대야의 사람이라 것을 제외하고는 지위가 없었다. 그런 시 화의 의견에 대야 하수는 생각에 잠겼다. 상식적으로 오는 봄에 대함대를 이끌고 남상으로 가야하는 지금이 가장 중요하고 바쁠 때였다. 여러 가지로 의심스러운 점이 많았으나 대야는 이번 일에 목숨을 걸었다. 그런 이상 신 중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었다. 남례일족의 대야 하수는 백호나한에 대하 여 조사하면 할수록 그가 두려워 졌다. '그러나 대라신선(大羅神仙)이라 할지라도 대야(大爺)가 죽이고자 하면 죽 을 수밖에 없다.' 남례일족(南禮一族) 금군교위(禁軍校尉) 무골후(武骨侯) 호장(虎壯)은 한때 숭무공(崇武公) 원 공반(猿孔磻)이 나서기 전까지 수인제일고수로써 군림했다. 비록 원공반에 게 수인제일고수의 지위를 넘겨주기는 했지만 수인들 중 손꼽히는 장수로써 그 영향력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무골후하는 관작명이 말해 주든 그는 무학에 관심이 많았고 무림의 강자들과 교류하길 좋아했다. 그런 무골후가 일개 금군으로 인세의 고수 둘을 간단히 제압한 존재에게 관심을 갖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일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존재의 비무연(比武宴)이라는 기행(奇行)과 천하제일성 철혈사자성의 대공자를 꺾고, 수인제일고수이자 관부제일고수인 원공반에게 승리함으로써 관부제일고수가 되었다. 그러니 강자를 좋아하는 무골후에게 백호나한이란 존재는 일거수일투족이 관심에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호황이 용황에게 선양(禪讓)을 받아 천지 신명(天地神明)에게 천자로 고하는 의식을 치르는 원단(元旦)에 상경에 있 던 백호나한이 중경으로 오자 가장먼저 그를 만나보았다. 그리고 짐짓 아무 것도 모르는 척 그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고 실제로 만나본 그의 성품은 참으로 만족할 만 했다. "폐하, 봄이 되는 즉시 의백으로 원군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불가합니다. 신 또한 그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나 상대는 흑막의 정예기병. 징병령으로 창을 처음으로 잡아본 자들이 태반인 군졸들은 사지로 보낼 수 는 없습니다." "천림왕 전하, 그럼 의백성을 포기하자는 말씀이십니까?" "내 무골후 자네의 말을 모르는 바가 아니나 상대는 흑막의 기병들일세. 그 런 그들을 상대로 이제 막 무기를 만져보았을 보군을 보내 봐야 피해만 늘 지 않겠는가?" "전하, 본디 전쟁이란 군사들의 사기로 승리하고 사기로 패하는 것입니다. 원군을 보내는 것은 의백성을 지키는 군사들의 사기와 민심의 안정에 큰 도 움이 될 것이니……." "무골후." 무골후와 천림왕의 논쟁을 가만히 지켜만 보던 호황이 열변을 토하는 무골 후를 제지 했다. 호천궁의 대전(大殿)에는 호황가의 인물들이 앞으로의 일 을 논의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의백성의 일이 거론 되었고 무골후 호장과 천림왕 호천린이 극명한 입장차로 인한 논쟁이 벌어졌다. "의백성을 도와야 갰지만 천림왕의 말도 일리가 있다. 그 일은 지금 논할 때가 아닌 것 같으니 둘은 그만하라." "예, 폐하!" 사실 호황의 말처럼 이 문제는 천원회의(天元會議)에서 다루어질 문제이지 여기서 논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미리 입장을 정리해두는 것도 필요한 일이기는 했다. "폐하!" "짐에게 할 말이 또 있는가? 무골후." "예, 다름 아닌 북지성과 의백성의 문제입니다." "……." "의백성에는 의백최문이 있습니다. 그들은 세외와 교역을 톡해 막대한 부와 세력을 축적한 가문인데 의백성에서 후려의 반적 강무세가와 같은 영향력 을 가지고 있습니다." "으음." "최근 들리는 소문으로 그들에게 반적 웅랑들이 마수를 뻗히고 있다고 합니 다." 호황 또한 의백최가의 힘을 모르지 않았다. 웅랑의 대군이 그들의 배를 타 고 바다를 건너올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미 징병령을 내려 각지에서 군사를 모으는 중이니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호황의 생각을 무 골후 호장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기주와 을주에서 대군을 모으고 있지만 북지성에 서해수군의 거점을 만들어 두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북지성에 거점을?" "예, 그리고 지금 북지성은 복마전이나 다름없습니다. 다행히 서해수군통제 사 라혼 대장군의 내자 되는 이가 장동의 관군을 이끌어 반적들을 견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차제에 그에게 관직을 내려 힘을 싫어주고 북지성에서도 군사를 모을 수 있게 하소서……." "좋아! 할 수 있는 것은 해야겠지." 호황은 무골후의 의견에 선선히 허락했다. 호황이 라혼에게 이렇듯 호의를 보이는 이유는 라혼이 천자 호황의 심복인 호영을 통해 자신은 호황가의 충 복임을 알렸고, 호황이 원하면 언제든 주작의 깃털을 받치겠다는 뜻을 전했 기 때문이었다. 이에 호황은 백호나한이란 별호로 알려진 라혼에 대한 세밀 한 조사를 했고, 묘가의 손이라는 천상천화에 대한 것이 걸리기는 했으나 청류파(淸流派) 인사로 분류되는 사관산(獅官山)에게 주목받고 금군교위(禁 軍校尉) 호장(虎壯)이 직접 끌어들이려 한 것까지 알아냈다. 호황이 판단하 기에 라혼은 자신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비밀스런 관계는 천하의 누구도 짐작하지 못한 것이기에 그 묘용이 더욱 컸다. 그래서 라혼에게 더더욱 힘 을 실어주는 행보를 계속한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원주에서 수군을 모집하 겠다는 다소 엉뚱하기까지 한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천상 천화라 알려진 그의 내자에게 맡긴 군권은 언제는 거둬드릴 수 있는 것이었 다. 일단 여인의 몸이고 남편이 조정의 장수인 이상 군권을 회수할 명분은 차고도 넘쳤다. 성질대로 하는 행동은 당시에는 후련할지 모르나 언제나 큰 부작용이 따르 기 마련이었다. 소궁주의 방에서 일어난 소란은 지근거리에서 호위를 하던 여인천궁의 검녀들을 불러들였고 라혼은 자신의 알몸을 그녀들에게 전부 내 보인 꼴이 되었다. 그렇게 되자 모든 치부(?)가 백일하에 들어난 라혼은 오 히려 담담한 태도로 그녀들에게 한 마디를 던졌다. "나가." 라고……. 라혼의 담담한 말에 묘한 위압감을 느낌 검녀들은 무슨 쿤 죄를 지은 냥 방밖으로 나갔고 홀로 남은 설화는 서방님에게 칼질을 하던 자신의 행동을 깨닫고는 자리에 얼어붙어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한 체 안절부절못했 다. 그리고 라혼 또한 설화가 태어난 이후 최초로 한 과격한 행동에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설화가 준비해 놓은 옷을 찾아 입고는 설화 앞에 탁자를 마주하고 앉았다. 그러나 라혼 또한 뭔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물 을 말은 많았다. 무엇 때문에 공격했는지? 그리고 얼마 전(?) 무엇때무에 그렇게 화를 냈는지(?)를 말이다. 그러나 라혼이 처음 꺼낸 말은……. "날씨가 꽤 춥구나. 원주하고는 또 틀리지?" "예? 예." "……." 침묵. "뜨거운 차나 한잔 할까?" "예, 금방 준비할게요." 침묵. "후루루룩!" "……." "좋구나!" 어색한 침묵의 연속 속에서 마시는 향기롭고 뜨거운 차한모금은 마음을 차 분하게 가라앉히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고요한 어조로 입을 떼었다. "설화야." "예, 서방님." "내게 할 말이 있느냐?" "……." 라혼은 자신의 물음에 아무런 말을 찾지 못하는 모습의 설화의 다소곳한 모 습이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그것은 라혼에게 새로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 언제나 생기발랄한 어린아이 같던 설화에게 여인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 이었다. 라혼은 손을 뻗어 설화의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그러자 북받 치는 설움에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리고 서방님의 넓은 가슴에 몸을 던졌다. "으아아아앙~! 서방님!" "……." 라혼은 설화가 돌연 울음을 터트리자 일순 당황했지만 설화가 가슴으로 안 기자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렇게 설화의 자그마한 등을 쓸어주어 어린 아내를 안심시키며 울음이 잦아들자 턱을 감싸들어 길고 긴 입맞춤을 나누 었다. 그것으로 설화의 불안한 마음은 봄볕에 사그라지는 눈과 같이 녹아내 렸다. "……." 길고 긴 입맞춤이 끝나고 라혼은 설화의 깊고 투명하기 그지없는 눈을 마주 보며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설화는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도는 듯한 행복감을 맛보았다. 그리고 라혼은 설화에게 자신이 그동안 계획하고 실행한 여러 가지일들을 자랑하 듯 이야기 했고, 설화도 그간 있었던 자질구레한 일들과 속상했던 일들을 이야기 했다. 어느새 원래대로의 관계로 돌아온 것이다. "와! 그렇게 많은 황금이 있었어요?" "그래, 물경 2천만냥이야! 대단하지." "그럼 서방님은 천하제일의 부자이겠네요." "그래!" "천하제일고수에 천하제일부 정말 대단해요." "한 가지가 더 있지." "또 뭐가 천하제일이에요?" "내게는 천하제일 아름다운 아내가 있거든." "맞아요! 그게 가장 중요한 거죠." "……!" 설화는 그동안 그토록 불안해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서방님이 자랑 스레 말하는 모든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을 위한 것임을 느꼈기 때문 이다. "그건 그렇고 나와 잠시 여행을 떠날 수 있을까?" "예? 여행이요?" "그래, 네게 소개 시켜줄 분이 계시거든." 설화은 서방님의 말에 벌써부터 마음이 설레었다. 그러나 지금이 순간 여인 천궁의 소궁주인 자신의 신분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사실 여인천궁의 소 궁주의 신분이 아니더라도 이곳에 모여드는 피난민들에게 자신의 위치가 어 떤지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는 설화였다. 그러나 갑작스런 서방님의 제안에 마음이 동하는 설화였다. "이레에서 열흘정도면 될 것 같은데……." "그 정도라면 시간을 낼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누구를 만나러 가는 거예 요?" "글쎄? 네 어머니와 관계있는 사람." "어머니요?" 라혼은 태회진의 건설을 귀림 드워프들에게 의뢰할까하는 생각을 했다. 어 차피 대규모의 철장(鐵場)과 조선소도 그들의 도움을 받고 싶었다. 그리고 북지성에서의 광산도 발굴할 필요가 있었다. 이미 드워프들에게는 드래곤 본이라는 어마어마한 대가가 지불 되었기에 라혼은 아무런 부담 없이 그러 한 것을 요구할 수 있었다. 그것을 생각한 라혼은 설화를 보고 마음먹었던 주작의 무녀 가니아를 설화와 만나게 해주겠다는 것이 떠올라 설화에게 여 행을 제안한 것이다. 남례일족(南禮一族) 암회색 바위와 쌀쌀하기 그지없는 험산(險山). 사람들은 이곳을 흑산(黑山) 이라 불렀고 그곳에 사는 주민스스로 흑부(黑府)라 칭했다. 험하디 험한 흑 산이 유명한 것은 이곳에 강호무림을 위진 시키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었 다.천하인들 중 흑산의 위치를 제대로 아는 자가 얼마 없었지만 알만한 자 들은 모두 알고 있었고 그 알고 있는 자들 중에 웅랑교 인물도 포함되어 있 었다. "흑산자가 철강시는 그 위력이 대단 합니다. 도검이 통하지 않고 지치지 않 으니 웬만한 고수정도는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 입니다." "그거야 누구나 하는 갓이고, 문제는 흑산자의 강시를 얼마나 많이 대량으 로 만들 수 있느냐 지!" "하나 괴팍하고 자존심 강한 흑산자가 과연 우리의 뜻에 따라줄까요?" "친구가 되지 않겠다면 적이다. 흑산자가 서해수군제독과 돈독한 관계를 가 진 이상 언제고 우리 뒤통수를 칠지 모르지. 나중을 위해서라도 시간이 있 을 때 처리하는 것이 좋다." 뼛속까지 얼어 붙이는 듣한 차가운 바람 속을 뚫고 찰갑(刹甲) 밑에 두툼한 털가죽 옷을 입은 수십 명의 사내들이 흑산의 자그마한 골짜기를 따라 말 을 몰고 있었다. 바로 웅랑교 웅기영주(熊旗領主) 웅천패(熊天覇)와 웅기에 속한 웅인들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더 산을 올랐을까. 계곡사이에서 허공 에서 말소리가 웅웅대면 울려왔다. "클클클클, 더 이상 들어오면 전부 죽이겠다." -히히히힝~! 폐부를 갉아대는 목소리에 말들이 놀라 뒷걸음질치고 웅천패는 흥미로운 시 선으로 한곳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호탕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외쳤다. "저는 웅랑교 웅기영주 웅천패입니다. 고인께서는 천하의 열 두 지존중 한 분이신 강시지존이 아니신지요?" "클클클클, 내집에 찾아와 내가 맞냐고 묻다니 우습구나. 너희 곰탱이들이 무슨일로 날 찾아왔는지 모르나 본좌는 흥미 없으니 떠나라!" 흑산자는 단호하게 더 이상 어떤 협상이나 대화의 여지를 주지 않았지만 웅 천패는 그런 것은 아란 곳 하지 않고 말했다. "본 웅랑교가 이번에 천하를 도모하는데 고인의 힘을 빌리려 합니다." "……." 그러나 그 말의 대답은 계곡 앞에 반쯤 썩어문드러진 자들이 나타남으로써 끝났다. "영주, 강시입니다." "재미있군. 간단명료한 것이 마음에 들어. 웅기는 들어라!" -워! 웅기영주의 말에 짧은 기합성으로 대답을 대신한 27기의 웅기들은 어느새 놀란 말을 달래고 대열을 맞추어 섰다. "어디 그 유명한 강시지존의 강시들의 힘을 험해 볼까." "돌격!" 웅천패의 눈짓을 받은 웅고(熊考)는 대열을 갖춘 웅기들에게 공격을 명했다 . -두구구구구……………………. 좁은 산길에서의 돌격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웅인들은 기본적으로 흑막의 사람들이다. 웅랑교의 기병들이 돌격을 시작하자 그것을 확인한 흑부의 반 오는 문드러진 손으로 어렵사리 목에 걸려있는 호각을 들어 기이한 음률에 맞추어 불었다. -피~ 삐~ 비비~! 그러자 그 소리에 강시들이 반응하여 저돌적으로 달려오는 기마들을 덮쳐갔 다. -퍽! 퍼벅! 보병과 다르게 강시들이 육탄으로 말을 막아서자 일부는 강시를 튕겨 보냈 고, 일부는 말을 고꾸라트렸다. 그러나 웅인들은 십수년을 무예를 연마한 자들이었다. 말이 고꾸라지며 앞쪽으로 넘어졌지만 신법을 전개해 말에서 떨어져 나와 낙법으로 충격을 분산시켰다. 그리고 흉성을 들어내며 곰으로 둔갑했다. -크앙~! 보통 사람이었다면 곰들의 포효에 전의를 잃고 몸이 굳었을 테지만 그들의 상대는 공포와 같은 감정이 없는 존재들이었다. -쿵! 콰직! 퍽! 산자와 죽은 자의 싸움은 산자의 우세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기이한 호각소리와 함께 수백구의 강시들이 계곡 위에서 떨어져 내려오자 상황을 급변했다. -삐~~~피~ 삐~ 비비~~~! -크앙? "영주!" "파혼풍뢰강(破魂風雷剛)!" -빠강~! 수백구의 강시들이 웅인들을 덮쳐 위급지겨에 빠지자 싸움에 참가하지 않고 있었던 웅천패는 강기를 뿌려댔다. 쇠부러지는 소리를 동반한 파혼풍뢰강 은 떨어져 내려오는 강시들을 공격했고 웅인들은 본능적으로 전장을 이탈했 다. "웅기 최정예인 풍자조(風字組)가 맥을 못 추다니 과연 강시의 위력은 대단 하군. 대단해! 그러나 내 앞을 막기에 부족하다. 건곤화환(乾坤花環)!" 웅천패는 앞으로 나서며 허공에 거대한 불꽃 고리를 만들어 계곡의 절벽에 서 떨어져 내린 엉켜있는 강시들을 휩쓸었다. -화르르르르르………………. 엄청난 고열에 강시들은 순식간에 재로 변해버렸다. 웅천패가 사용한 이것 은 무공이라기보다 마법에 가까운 선술이었다. 동방대륙 오신룡(五神龍) 중 하나인 우(于)는 행동하는 가장 활동적인 용이었다. 잠들어 있기보다 깨어 있기를 좋아했고, 둥지에서 사색과 명상을 하는 것보다 여행하는 것을 선호 했다. 칸 대륙에서 그의 발길이 스치지 않은 곳은 없었고 그런 여행을 하는 도중 누군가 찾아왔다. 바로 앙(殃)이었다. 앙(殃)은 우(于)에게 굉(宏)과 조(祚)가 만들어 놓은 왕조를 부수고 자신들의 왕조를 만들어보자는 제안 을 했다. 그리고 우(于)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웅인(熊人)이 되어 그의 곁 에 머물렀다. 우(于)가 세상을 여행하면서 귀천을 떠나 거의 모든 삶은 살 아보았으나 왕조(王朝)를 여는 건국영웅의 삶은 살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앙 (殃)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간 각기 다른 삶을 경험하면서 스스로 봉인해 두었던 힘을 완전히 풀어놓았다. "이놈! 음시마강(陰屍魔剛)!" -카릉~! 웅천패는 숨어 소리나 지르던 상대가 모습을 보이며 검은 박쥐처럼 계곡사 이를 빠르게 왕래하더니 그대로 강기(剛氣)를 뿌려대자 전신에 호신강막(護 身剛膜)을 둘러쳤다. 호신강기(護身剛氣)정도는 갈기갈기 찢어 벌일 위력이 있는 흑산자의 음시마강이었지만 웅천패 독문의 호신강막은 깨는 정도의 위력만 보였다. -헉! "패웅참장(覇熊斬掌)!" "구음마조(九陰魔爪)!" -캉! -촤아아아아~! 그러나 호신강막이 깨지자 이제껏 태연하던 웅천패는 대경하며 패웅참장 초 식츨 쳐내며 허리를 튕겼고, 흑산자의 조강(爪剛)은 웅천패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그의 애마를 산체로 갈아버렸다. 그리고 무릎을 구부리지 않고 미끄 러지듯이 이동하는 귀신같은 표홀신보(飄忽神步)로 기척이나 낌새도 없이 재차 구음마조의 거무스르한 조강을 머금은 손톱을 휘둘러왔다. "욱! 감히……." 웅천패는 아니 우(于)는 인간들이 말하는 초극고수라는 괴물을 비로소 실감 했다. 본신으로 화신(化身)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쉴 새 없이 생명을 위협하는 흑산자의 압도적인 체술(體術)에 도무지 찰라 짬을 낼 수 가 없었 다. 그러나 천만다행(千萬多幸)으로 흑산자의 공격이 멈춰졌다. "웅랑교가 어찌되었든 본좌와는 상관없는 일. 떠나라!" "감히……." "……." "누구에게 명령하는 거야! 만천빙우박(滿天氷雨雹)!" -쿠릉~! "……." -탕타닥. 탕따, 두두두두두두두두두~! "여, 영주……." "크악!" -퍽 퍼벅! 분노에 찬 신룡 우(于)가 만들어낸 어린아이 머리통만한 우박이 천지사방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그것은 웅랑교의 웅인들로 흑산자도 가리지 않고 공 격했다. 그리고 좁다면 좁고 넓다면 넓은 소가 끄는 수레가 충분히 지나다 닐 수 있는 넓이의 계곡은 우(于)가 만들어낸 얼음덩어리들이 가득 메웠다. -쩡! 쩌정 푸하~! 얼음이 가득 메워진 계곡에서 누군가 얼음을 깨고 허공으로 치솟았다가 다 시 땅으로 떨어졌다. 여기저기 살가죽이 찢긴 형상의 처참한 몰골을 한 웅 천패였다. "휴우~! 이거 호인이가 알면 한소리 하겠군. 가장 똘똘한 놈들로 골라 왔었 는데……." 웅천패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바람 같은 신법을 전개해 흑산을 올랐다. 그리 고 얼마 후 웅천패가 뚫어놓은 구멍으로 검은 옷에 전신을 피를 뒤집어쓴 노인이 기어 나왔다. "지독한……." 얼음 속을 헤치고 나온 흑산자는 흑산에 부는 칼바람에 새삼스레 몸을 떨었 다. 사방에서 전신을 때려오는 바위만한 얼음덩어리를 막아내느라 무리하게 호신강기를 시전했다가 결국 공력이 고갈되어 추위조차 막을 수 없는 지경 에 이른 흑산자의 몸뚱이는 성한 곳이 없었다. 그러나 흑산자에게 희망이 있었다. 노인은 마지막 안간힘을 짜내 품속에서 곤옥 반지를 꺼내 들고 마 지막 공력을 쥐어짜냈다. 그러나 내상이 생각보다 깊었는지 공력이 모아지 지가 않았다. 그러나 흑산자는 포기하지 않고 평생정심하게 수련했던 고루 혈마공을 찬찬히 끌어올렸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흑산자는 한줄기 진 기를 끌어 모을 수 있었고 그 진가를 손으로 모아 곤옥반지에 주입했다. 그 리고 결과를 확인할 새도 없이 의식의 끈을 놓아버렸다. *** 설화는 한서불침(寒暑不侵)의 경지는 진즉에 넘어선 초극고수다. 그래서 북 자성의 차가운 겨울 칼바람도 설화에게 별 영향을 끼치니 못한다. 그러나 겨울에는 그 계절에 맞는 의복이 있었다. 한 참 멋을 낼 나이인 설화는 겨 울이라는 계절에 맞추어 여행복을 마련했지만 서방님이 말한 여행은 설화의 상상을 초월했다. "아우~! 더워! 여름옷은 준비하지 않았는데." 겨울이 없이 사시사철 무더위만 계속되는 땅. 남례성으로 설화를 데리고 [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한 라혼은 설화가 하는 잔소리에 고개를 가로 저었다. "너무해요. 미리 말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저는 겨울옷만 잔뜩 준비했는데. 이래선 입을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무슨 겨울날씨가 이렇게 더운 거예요?" "……." 라혼은 설화가 점점 여자처럼 자라는데 좋은 점도 있지만 나쁜 점도 많다고 생각하며 봉수성의 번화가로 들어섰다. 원래는 바로 귀왕림에 있는 가니아 에게 설화를 데려가려 했지만 설화가 계속 투덜거리자 기분을 풀어주는 것 이 좋겠다고 생각해 이곳에 온 것이다. 그리고 라혼의 의도는 어느 정도 적 중 했다. 반란이 토벌되고 호도와 길이 뚫리자 점점활기차진 봉수성의 번화 가는 봉록을 받는 하남천원군이 뿌리는 은자에 제법 짭짤하게 장사가 외호 호황을 맡고 있었다. 그러니 남례성 사람들이 느끼기에 제법 서늘해진 날씨 는 거리로 나와 지내기에 적합했다. 게다가 곧 대규모의 투함들이 봉수성 항구에 들어올 것이라 항만시설을 건설하거나 배들을 수리하는 인부들이 품 삯을 받아 저녁이면 그야말로 불야성(不夜城)을 이루는 봉수성이었다. 그러 나 정오의 봉수성 거리는 비교적 한산했다. 설화가 봉수성 번화가에서 가장 먼저한일은 남례성 특유의 하얀 아오자이를 사 입는 것이었다. 품이 넉넉한 바지와 길이가 긴 상의로 되어 있고 옆이 길게 트였으며 깃은 세워져 있다. 바지는 풍성하게 만들어서 통기성이 좋은 옷이었다. 특이 이 옷은 가느다란 여인의 허리선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 단 순한 옷이지만 어떻게 보면 무척 화려한 옷이었다. 특히 설화의 하얀 피부 와 섶단 같은 검고 곧은 긴 머리카락은 투명하게 하얀 의장과 그렇게 잘 어 울릴 수가 없었다. "아이고, 천상의 선녀가 따로 없구랴! 아가씨 이리와 봐요." 평생을 이곳에서 옷을 만들어 팔던 늙은 노부인은 자기가 만든 옷을 아름답 게 차려 입은 설화를 앉히고 묶은 머리를 풀어 빗으로 빗어주고는 붉은 꽃 으로 장식을 해주었다. "중주에서 오신 분 같은데 이 옷은 이렇게 입는 것이라오." "감사합니다." 라혼운 아름다운 설화의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다 치장이 끝나자 노부인에게 사례했다. 그리고 설화는 이 옷이 무척마음에 들었는지 노부인 에게 추가로 주문을 하고는 가게를 나섰다. 하얀 아오자이는 남례성 서부에 서 가장 흔한 옷이었고 거리를 지나는 진토인 여인대 절반이상이 하얀 아오 자이를 입고 있었지만 까무잡잡한 갈색 피부의 여인들 사이에 눈처럼 투명 한 설화의 미모는 더욱 돋보였다. 진토인들이 보기에 특이하고 이국적이었 다고 하는 말이 맞았다. 그리고 라혼 또한 의식적으로 [컨트롤 챰Control C harm]주문을 풀어 호기심이 넘치는 설화와 같이 걸었다. "어? 저기 대장군님 아닌가?" "저, 정말이네? 같이 걷는 저 선녀는 누구지?" "근데 우리 대장군님이 저렇게 잘생기신 분이었나?" 봉수성의 위병들은 본래 임무인 봉수성을 수비하기 위해 봉수성에 나누어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위병들은 백호나한이라 더 알려져 있는 라혼의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대화를 들은 진토인은 자연스럽게 통풍위주로 지어져 오두막 같은 선술집을 나와 대로에서 노상을 하는 자에게 뭐가 말했다. 그리고 정오의 한가로움을 즐기던 노상은 자연 스럽게 노상을 거둬드리고 슬쩍 모든 사람들에게 부러운 시선을 받는 두 남 녀를 흘낏 훔쳐보고는 어디론가 바삐 걸어갔다. 그러나 라혼과 설화는 그럼 움직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봉수성의 이국적인 풍물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뭐야? 산이 움직였다고……." 대야는 의외의 소식에 굳은 얼굴의 시화를 쏘아보았다. "이게 무슨 말이야? 백호나한은 거처에서 폐관에 들었다고 했지 않나?" "주, 죽여주십시오." "이렇게 된 이상 오히려 잘된 셈이다. 행적이 들어난 이상 감시만 철저히 하면 되니……." "존명!" 대야 하수는 자신이 직접 그를 감시하고 싶었다. 하지만 대야는 최후까지 그를 만나지 않기로 결정했다. 백호나한 정도의 고수라면 사람의 기운을 감 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공간이 얼마 나 되는지 알 수 없었기에 신중에 신중을 기하느라 그와 직접 대면하지 않 는 것이었다. 그리고 고수는 고수나름대로 기도(氣度)를 가지고 있는데 대 야는 그런 기도를 감지할 수 있었다. 자객이 목표로 삼은자의 기도에 감화 되어 결국 칼을 꺾는 예는 의외로 찾아보기 쉬웠다. 대야 하수는 방안으로 들어가 고요한 자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바로 백호나한의 초상이었 다. 직접 만나보기를 포기한 이상 그의 그림을 그리며 마음속의 칼을 더욱 날카롭게 갈아둘 필요가 있었다. 한편 대야의 눈과 귀를 자청하던 시화는 자신의 시야에서 벗어난 백호나한 의 행적을 추적하기 위해 봉수성의 비밀거점으로 직접 왔다. 그러나 시화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뭐야? 행적을 놓쳐?" "죄송합니다." "어찌된 일인가?" "그것이 대향로를 거닐던 놈이 막힌 골목으로 들어섰는데……. 그것이 그냥 사라졌습니다." "그게 말이 되는가? 내가 직접 가겠다." 시화는 남루한 옷을 갈아입고 백호나한이 사라졌다는 골목으로 들어가 누웠 다. 그리고 골목의 구석구석을 살폈으나 특이한 점은 없었다. 우측은 토만 이라는 상인의 집이고, 좌측은 오우당이라는 중주사람이 사는 집이었다. 그 리고 골목 넘어는 홍루(紅樓)였는데 그곳은 남례일족에 포함된 곳이었다. '이런 낭패가 있나!' 남례일족(南禮一族) "뭐야? 주군이 봉수성 대향로(大饗路)에 묘령의 여인과 함께 걸어가는 것을 봤다고?" "제가 본 것이 아니라 대향로에서 술을 마시던 위병들이 똑똑히 보았다고 합니다." 장상은 주군에게 서해수군통제사에 제수되자 배로 바빠졌다. 수군을 훈련시 키고 숙련된 선원을 모아 편성하는 일을 장상이 책임지고 도맡아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바쁘고 힘든 것이 어디 장상뿐이랴. 실질적으로 하남천원 군을 장악한 주군이기에 주군의 알아야하는 일과 결정을 해주어야하는 일이 어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주군은 호도를 접수하고 모원이라는 문관과 반란 진토인의 중심세력이었던 열지족 추장의 딸을 혼인 시키는 것 을 마지막으로 땅으로(?) 꺼져 버렸다. 바로 폐관수련을 명분으로 거처의 지하밀실에 홀로 틀어박힌 것이다. 그리고 주군이 모습을 보이지 않은지 한 달이 다되고 있었다. "젠장, 나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데 그 양반은 미녀를 옆에 끼고 나들이나 다니다니 이건 너무 불공평하군!" "자네 불평하는 소리가 바다건너 남상까지 들리겠네 그려……." "해노 어르신!" 봉수성 항구 선착장근처 과거 위병대장이 사용하던 집무실을 차지한 장상은 백호수영에서 주군이 서해수군통제사가 됨으로써 서해수군으로 바뀐 수군 을 조직하고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봄이 되면 서경까지 올라가 이번에 새로 건조한 배를 인수해야 했다. 노꾼과 수병, 그리고 선원을 합하며 한 척당 3백명을 태워야 했다. 서해수군에 배속될 투함과 백호수영의 몫으로 미리 확보한 투함을 합하여 투함만 총 214척이었다. 그러니 머릿수만으로 6 5000여명 이고 이중 배를 운용하는 선원만 2만여명을 확보해야 했다. 그런 데 설상가상(雪上加霜) 본래 서해수군으로 배속될 예정이었던 그나마 모자 란 선원과 수군을 기주와 무주, 계주에서 자신들의 방군으로 편성하고 내놓 지 않고 주군은 장상에게 알아서 최대한 선원을 확보하라는 명만 딸랑 던지 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해노, 어르신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수군이 어대 배만 덩그러니 있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데. 주군은……." "허허허허허, 처음부터 너무 일을 완벽하게 하려하니 그런 게야! 내가 서경 에 가서 확인하니 조정에서 만든 배는 말이 투함이지 사실은 병력수송 위주 로 만든 크기만 큰 나무상자 같은 배야. 그러니 바다에서 싸울 수 있는 실 제 전력은 많아야 서른 척이 넘지 못할 테니 그것만 제대로 된 선원을 배치 하면 될 일이지." "그것은 이미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경험이 없는 자에게 배 를 맞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누가 아무에게나 배를 맡기라 했나? 다만 경험이란 해보았다는 것에 불과 하다는 말일세." 라혼은 장상을 정식으로 서해수군의 부제독으로 삼아 수군에 대한 모든 책 임을 맡기고 해노에게는 특별한 직위를 맡기지 않았다. 그러나 경험이 일천 한 장상에게 해노의 존재는 든든한 배후일 수밖에 없었고 해노는 공식적으 로 토금전장의 사람으로 남아 있게 했다. 아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었고 경험 많은 백전노장이지만 이미 은퇴를 결심할 정도로 노쇠했기에 전장에 나가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고문내지는 조언자로써 장상을 돕는 형식 을 취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러나 라혼에게 있었어도, 장상에게 있었 어도 해노 인치는 보배중 보배였다. 그의 서해에서의 영향력은 경험 많은 선원과 선장들을 구하는 없어서는 안 될 정도였다. "서경에서도 노는 친구들이 많이 있더구먼. 이번에 옛 친구들을 모아보았네 ." 장상은 해노가 건네준 명단을 넘기면 연신 치하의 말을 입에 달았다. "아이고, 어르신밖에 없습니다. 무책한 주군보다 어르신이 백배 천배 아니 일만배가 났습니다. 아참 어르신 저번에 서해대수영과 충돌 때 상당한 위력 을 보였던 쇠뇌를 설치해야 갰는데 주공의 말로는 최대한 자리를 잡아놓으 라 했는데……." "흐음, 한번 해보세 기존에 설치되 있던 쇠뇌를 떼어 자네가 잡아놓은 자리 에 모두 설치하고 훈련을 한번 해보세 저번엔 쇠뇌에 익숙지 않아 화살이 대부분 바다에 그냥 빠진 터라 그것도 문제네." "역시 실제로 해보는 수밖에 없겠군요." 쇠뇌 하나에 대략 서너 명의 인원이 달라붙어있어야 했다. 배라는 비좁은 공간에서 되도록 배를 운용하는 주요 선원들의 동선(動線)에 방해받지 않은 상태에서 쇠뇌를 설치하려면 직접해보는 것이 가장 확실했다. 인치는 수십 척의 선단도 종종 지휘해본 경험이 있었다. 바다에 떠있는 배는 그대로 하 나의 세계다. 각각 배 나름대로 전통과 규칙, 풍토, 미신까지 가지고 있었 다. 선단을 이루고 있어도 바다에 나가면 배는 단절된 상태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러한 배들을 하나로 묶어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움직이는 일은 보통일이 아니었다. 하니 수백여척의 함대를 이루는 수군은 나름대로의 공 통적이고 절대적인 철저한 규칙이 필요했다. 항해수칙, 전투수칙, 함대의 약속된 해진(海陳)을 포진하는 것까지 통일된 이른바 교본(敎本)이 필수적 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실제로 항해나 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수립 되고 축적되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훈련을 통해서 그것을 하나하나 잡 아나가야 했다. 서해대수영을 최강이라 하는 이유는 수백 년간 그러한 경험 을 축적했기 때문이었다. -촤, 촤, 촤, 촤………………. 울울창창(鬱鬱蒼蒼)하게 밀림의 우거진 나뭇가지를 한자 남짓한 박도로 치 며 길을 만들며 이동하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다. "휴우~! 이거 너무하네. 이거 우리가 지나왔던 그 길 맞는 거야?" "그러게 그나저나 다음 마을은 20여리 정도 더 가야 한다니 하루는 꼬박 가 야 갰군." 무더운 날씨에 검은 빛이 감도는 두툼한 갑주를 입은 무장들은 무료한지 한 가롭게 잡담을 나누며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겼다. 이들은 다름 아닌 남례성 전역에 흩어져 있는 진토인 마을을 접수하는 임무를 맡은 백호영의 무인들 이었다. "신법을 전개하면 지척인 거리인데. 이거 참!" "아서라! 오차 백인장이 날아서 진토인 마을에 들어섰다가 낭패 본 게 열흘 전이다." 참위인 오차는 대략 1천명의 병사를 거느릴 수 있었지만 백호영의 머릿수는 1200여명 백호십일걸 당 약 1백 명씩 배치되어있어 통상 백인장으로 칭해 졌다. 그리고 모석이 천인장으로 불리며 2백 백호영을 통솔하고 있었다. 하 늘을 나는 능력이 있는 오차는 밀림을 지나는 답답한 행군에 지쳐 하늘로 날아올라 목표로 삼은 진토인 부락을 확인하고 수십 백호영들과 함께 경공 신법을 펼쳐 미리 마을에 도착해 하남천원군에게 복속을 권고했다. 그러나 오차가 생각했던 것보다 남례성 사람들의 자존심은 강했다. 그들은 조정의 무장들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 오차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오차는 그들의 저돌적인 대응에 불에 덴 심정으로 부락을 떠났고 대기하고 있던 하남천원 군에 소속된 진토인 전사들과 함께 마을을 포위하고 재차 권고했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권고를 무시하고 죽음으로 대항했다. 그리고 하는 수 없이 원치 않은 살육전 끝에 부락을 초토화시키기에 이른다. 그리고 남례성의 진 토인들에 관례에 따라 전사로 분류되는 사내들은 전부 참살하고 여자들과 미처 전사가 되기에 나이가 어린 사내아이들은 전부 거세해 노예로 삼았다. 이 사건으로 남례성 진토인들의 습성 중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는데 진토 인들과 강화내지는 복속을 하려면 처음부터 압도적인 전력차를 보여주어 칼 을 꺼내지 않게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이었다. 어쭙잖게 소수의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고하면 끝까지 싸울 것을 결의하고 그 결의는 자신들이 전멸 할지라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니 처음부터 우세한 전력으로 마을 포위하는 종래의 방식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에이, 진토인들은 머리가 없나? 안 될걸 알면서 왜 반항하는 거야 그냥 미 리 숙이고 들어오면 좀 좋아!" "아니, 나름대로 계산이 있어서 그러는 거야 봐! 당장 급한 불을 끄고 대군 을 피해 저 밀림속으로 숨어들면 그들을 추적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 이 처럼 든든하기 그지없는 부모 품속 같은 밀림이 있는데 겨우 서너 명되는 사자(使者)의 협밖에 굴복할 이유가 없지 않겠어?" "하긴 그도 그렇군." "그러나……." -촤! 후두둑~! 말을 하다만 대호(大豪)는 빛살같이 검을 뽑아 친구를 습격하려던 이곳 특 유의 날아다니는 뱀을 서너 토막 냈다. "이건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군. 지가 무슨 자객도 아니고……." "휴우~! 죽을 번했네." 철정산(鐵釘山)은 아직도 꿈틀거리는 토막 난 뱀을 주워들고 반을 대호에게 내밀었다. "자!" "……." 그리고 능숙하게 껍질을 벗기고 한입 깨물었다. 비린내와 함께 입안에서 오 도독 오도독 씹히는 독특한 식감을 느끼며 처음 생뱀을 회쳐먹었을 때를 추 억했다. 밀림에서 모든 것을 얻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진토인들이 뱀을 생으로 씹어 먹는 것을 처음에 무슨 과일을 먹나 해서 조금 얻어먹어 보았 는데 조금 비릿하기는 했어도 나름대로 맛이 있었다. 그러나 곧 벗겨진 뱀 껍질을 보고 자신의 입속에 들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철정산은 기겁 하며 뱉어내려 했다. 그러나 음식은 뱉어내는 행위는 진토인들에게 그 음식 을 준 사람을 믿지 못할 자라는 모욕이란 말에 억지로 삼켜야 했다. 그리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진토인 병사들은 새로운 먹을거리를 찾을 때마다. 철 정산에게 가장먼저 내밀었고 그렇게 간난아이 주먹만 한 굼벵이에 살아있는 흰개미가 득실거리는 흰개미집, 신맛이 나는 초록개미, 가끔 대열을 습격 한 맹수의 생간을 맛보아야 했다. 먹을 것을 주는 것을 거절하는 것도 모욕 이란 말에 이것저것 맞을 보았고 양이 많아 버거울 때면 호기심 많은 친구 를 둔 죄로 대호 또한 한 몫 거들어야 했다. 그러나 진토인들이 일부러 찾 아다니는 간식은 나름대로의 맛이 있었다. 인간의 적응력은 위대했고 차츰 그들이 건네주는 먹을거리에 적응이 되자 이제는 그것들을 찾아다니는 경지 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행동을 지루한 밀림행군에 소금과 같았다. 진토인 병사들이 철정산에게 그런 선물공세를 한 것은 사실 그를 골탕 먹이려는 속셈으로 시작한 것이었다. 이미 오랫동안 중주의 사람들과 부대껴 살아온 진토인들이었다. 그러니 자신들이 먹을거리가 거의 모든 음 식에 불을 사용하는 중주인들에게 어떻게 비쳐지는 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 다. 우기가 되면 엄청난 호우가 내려 불을 피울 땔감이 잃을 때가 많아 이 렇든 생으로 먹는 것이 많이 발달해 있었다. 그럼에도 거의 강압적으로 선 물공세를 하고 그것은 씹을때 주름 원숭이는 저리가라 할 만큼 얼굴을 구기 는 모습을 구경하며 킥킥댔다. 그러나 이내 그것들에 적응이 된 그들을 한 솥밥 먹는 친인같이 대했다. 오랫동안 각 부족이 나뉘어 싸움을 한 남례성 사람들에겐 피를 나눈 형제보다 같이 싸우는 형제가 진정한 형제였다. 그러 의미에서 진토인 병사가 된 그들에게 백호영은 형제였고 이젠 같은 음식을 나누어먹을 만큼 가까워진 것이다. 거대한 나무들이 있는 숲. 열댓 명의 장정들이 양팔을 벌려야 겨우 둘러쌀 만큼 두껍고 까마득한 하늘을 네 닿을 정도로 키가 큰 신성(神聖)하기까지 한 나무들로 숲을 이룬 이곳은 귀왕곡 안쪽에 비밀스럽게 귀왕림이다. "세, 세상에 저게 나무 맞아요?" 서방님의 손에 이끌려 순식간에 바뀐 풍경에 설화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했다. 엄청난 크기의 나무들이 숲을 이룬 이곳은 아름드리 나뭇가지(?) 사이로 햇볕이 부서지며 숲 전체에 골고루 비치자 그것만으로 환상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꾸어어어어어어~! 귀왕림의 환상적인 분위기에 젖어있던 설화는 어디선가 들려온 괴성에 깜짝 놀라며 서방님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어머! 서방님……!" "숲을 지키는 귀왕이 지르는 포효다." "귀왕이요?" ―쿵쾅, 쿵쾅, 쿵쾅, 쿵쾅, 쿵쾅……………. 지축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덩치를 자랑하는 집채만한 거인이 자기 덩치보다 더 큰 곤봉을 든 위압적인 모습으로 달려들자 설화는 듬직한 서방 님들의 등 뒤로 숨어 고개만 내밀에 거인의 모습을 구경했다. 설화는 그저 자연스럽게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일 뿐 척 보기에도 위압적인 거인이 두렵다 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덩치에 비해 상당히 날렵한(?) 움직임을 보이는 거인이었지만 설화가 경공신법을 펼치면 쫓아오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지 금은 서방님이란 든든하기 그지없는 존재가 곁에 있었기에 설화의 눈동자엔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고 소녀특유의 호기심만 가득했다. -쿠워? 자신이 돌보는 숲에서 침입자가 감지되자 포효성과 함께 달려온 귀왕은 침 입자가 새로운 주인인 것을 알자 투기(鬪氣)를 거두었다. 그러나 주인의 곁 에 있는 존재에겐 경계심을 놓지 않았다. 라혼은 그런 귀왕의 모습에 미소 지으며 인사를 했다. "귀왕 오랜만이다. 여기 설화는 더 이상 경계하지 마라!" "쿠르르르……." 라혼의 말에 귀왕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경계심을 풀었다. 그리고 라혼은 신기한 듯 자신과 귀왕을 번갈아보는 설화의 가느다란 허리를 한 팔로 휘어 잡고 몸을 띄워 귀와의 어깨에 내려섰다. "어마!" "가니아에게 가자!" "쿠워," 설화은 거인의 어깨에 서서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귀왕림을 구경했다. 그리 고 가니아라는 주작의 무녀대한 생각을 하면서 알 수 없는 설렘을 느꼈다. 그리고 얼마동안 거대한 나무들이 숲을 이룬 귀왕림을 빠져나와 아늑하게 보이는 통나무집이 시야에 들어오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숲과 통 나무집이 들어선 공간에 명확하게 구별되는 지점을 지나 중간쯤 되자 설화 는 이른바 꽃이 떨어지는 형상의 낙화유수(落花流水) 신법을 펼쳐 땅으로 내려섰다. 그리고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어 통나무집으로 다가갔다. 사고무 친(四顧無親)의 고아나 다름없는 설화가 최초로 자신이 이 땅에 살아있게 한 사람일지도 모르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어제나 곁에 서방님이 있어주 었지만 가끔 친인에 대한 생각이 날 때면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수인조정 의 정점에 있는 친가라 할 수 있는 호황가와 외가인 강무세가는 서로 같은 하늘을 이고 살수 없는 사이였다. 비록 서방님이 자신이 떴떴하게 신분을 숨기지 않고 나설 수 있게 힘을 기루고 있지만 그것이 외가와 친가사이에 좋은 변화를 만들어내기엔 역부족이라는 사실은 깨달은 지 오래였다. 그러 나 오늘 만나는 사람은 호황가와도 강무세가게서도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통나무집의 두툼해 보이는 나무문이 소리없이 열리며 붉은 옷에 화 려한 붉은 홍발(紅髮)을 한, 자신과 똑같이 생긴 여인이 나오며 말했다. "네가 설화구나? 어서 오련." "어머니?" "어머니가 아니라 할미란다." 무녀(巫女)인 가니아와 무녀의 재능을 보이는 설화는 서로 얼굴을 대면하는 순간 피를 통한 가족이란 사실은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서로가 서 로 같은 능력이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단지 설화가 가니아를 어머니라 부른 것은 누구에게나 어머니는 가장 가까운 친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 고 둘은 서로 손을 잡고 지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것은 그들만의 영혼(靈 魂)의 대화였다. 가니아는 설화가 살아온 인생을 엿보며 가느다란 손을 들어 곱디고운 설화 의 볼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 "우리 설화 예쁘기도 하지." "할머니……." 그리고 새삼스런 눈으로 한걸음 떨어져 있는 라혼을 보며 감사의 말을 했다 . "고맙습니다. 설화를 이렇게 곱고 예쁘게 자랄 때까지 돌봐주셔서." "그녀는 나의 하나뿐인 아내이기도합니다." 라혼은 가니아를 더 이상 하대하지 않고 존대했다. 설화가 아내인 이상 가 니아는 서열상 윗줄에 해당하기 때문이었다. 최소한 할머니뻘에 상황에 따 라 증조나 고조할머니일 수도 있는 그녀를 계속 하대하는 것은 설화가 보기 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얘야, 들어가자 구나." "예. 할머니." 설화는 아직도 벅찬 가슴으로 할머니 가니아의 손에 이끌려 통나무집 안으 로 들어섰다. 그리고 집안이 밖에서 보기보다 엄청 넓고 신선하고 시원한 기운이 감돌자 호기심어린 눈으로 집안을 둘러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 고 설화는 자신과 꼭 닮은 모습을 하고 있는 할머니 가니아 앞이 마주 앉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인이란 것도 그렇지만 설화는 가니아 곁에 있으면 무척 편했다. 아마도 서로 상성이 잘 맞는 것 같았다. 그렇게 되자 졸지에 두 여자에게 버려진 라혼은 드워프 마을로 가서 의뢰한 것들의 진 척상황을 확인하기로 했다. 그러나……. "음? 이건 흑사의……." 라혼은 흑사가 보내는 미약한 신호를 감지하고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짐작했 다. 라혼은 그 즉시 설화에게 잠시 떠나 있겠다는 말을 하고 흑막 흑산으로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했다. "나쁜 일이 아니었으면 좋으련만……." 설화는 눈앞에서 사라지는 서방님의 모습을 보며 서방님이 서있던 그 자리 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설화야." "예, 할머니." "네게 할 말이 있다." "예, 말씀하세요." 가니아는 설화를 자리에 앉히고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 "우리 일족은 대대로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을 타고 났단다." "……." 가니아의 말에 설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그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 이었다. 그래서 가니아가 하는 말에 더욱 집중했다. "그러나 네 남편과 그 사람이 연관된 일에 대해선 예측을 할 수 없었을 것 이다. 하지만 말이다." "……." "너를 보니 알겠다. 그 사람의 장래는 알 수 없지만 네가 앞으로 격어야 할 일은 눈에 보이는 구나." "제 미래가요?" "그래, 이런 것을 네게 가르쳐 주는 것이 옳은 일인지는 모르겠다만 네가 알고 있어야 할 것 같구나!" "무슨 일인데요." 설화는 자꾸 뜸을 들이는 가니아를 투명한 눈으로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리고 가니아는 무거운 음색으로 말을 꺼냈다. "네가 여황제가 되면 그는 죽는다." "예?" "아니 그가 죽으면 여제가 된다고 할까? 전후는 분명치 않지만 네가 여제가 되는 것과 그의 죽음은 동전의 양면 같은 한쪽이 위가 되면 한쪽은 아래가 되는 운명 같구나!" "아니에요. 저는 여황제 따위는 되고 싶지 않아요. 더욱이 서방님이, 서방 님이 그런……. 흑!" 무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설화였다. 그러니 가니아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 지 모를 리 없었다. 가니아는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하염없이 흐느끼 는 설화의 들을 토닥이며 한 가닥 희망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너를 아내로 삼은 그는 나의 예지력을 벗어난 사람이다. 그러니 꼭 운명이 점지한데로만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야. 그러니 미리부터 너무 상심 하지 말거라!" -휘이이이이잉~! 춥고 황량하기 그지없는 바위산 자신이 흑사(黑師)라 부르는 존재. 강호무 림의 열두 절대자중 하나인 강시지존(彊屍至尊) 흑산자(黑山子) 죽은 듯이 누워있는 관경에 라혼은 그에게 다가가 명맥을 확인했다. "휴우~! 다행히 죽지는 않았군. 그러나 당장 손을 쓰지 않으면 위험할 수도 있겠어." 라혼은 즉시 흑산자의 명문혈(命門穴)과 백회혈(百會穴)에 손을 얹고 흑사 가 익힌 마공의 기운과 비슷한 기운을 흘렸다. 이에 흑사의 내부에서 이에 호응하듯 응결(凝結)되 마기(魔氣)가 꿈틀대며 반응했다. 흑산자는 이미 극 마지경(極魔之境)을 넘어 마공의 극의(極意)인 현경(玄境)을 바라보는 이른 초극고수였다. 이미 마공과 신공의 차이에 연연하지 않는 경지에 있었기 때문에 라혼은 흑산자의 마공을 파괴하지 않으며 일부러 마기로 그의 운기 를 도왔다. 이미 금동보에게 천방지축신공이라는 대기운기대법을 알고 있는 라혼은 흡성대법(吸性大法) 상의 힘을 억누르는 흡진결(吸鎭訣)이나 공력 을 일시 흩어버리는 흡진기(吸眞氣) 수법을 사용하지 않고 흡인결(吸引訣) 만으로 공력을 도인(導引)하면서 흑산자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이미 생사 현관(生死玄關)이라 불리는 임독이맥(任督二脈)이 타통된 흑산자라 시간이 지나면 깨어나겠지만 그럼 그 시간동안 응결된 마기를 풀려면 그만한 시간 이 걸릴 것이 뻔했다. 그렇게 라혼에 의해 응결되어가던 내기가 안정되며 흑산자가 평생을 한결같 이 수련한 공력은 스스로 운공을 하며 응결된 내기를 풀기 시작했다. 그렇 게 되자 라혼은 흑산자의 몸에서 손을 떼고 호법을 서주었다. 이미 완성된 무공을 이룬 흑산자의 몸에 아무리 비슷한 공력이라 하나 외기인 라혼의 공 력에 영향을 받으면 최상의 상태로 맞춰놓은 흑산자의 공력이 흐트러질 수 도 있었기에 더 이상 간섭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무의식중에 하는 운 공이라 외부의 충격과 기운에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기에 비록 아무도 없는 황량한 산정이나 라혼이 직접호법을 섰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흑산자 주변에서 흑무(黑霧)가 일며 뭉클거리는 마기와 함께 주위를 서서 히 맴돌았다. 이른바 정종신공의 극의에 이른 고수가 운기조식을 할 때 머 리 위에 3개의 꽃봉오리가 피어 나타난다는 삼화취정(三花聚頂)과 비견되는 마공고수의 마무지경(魔霧之境)이었다. 이것은 정파의 신공은 조화를 기본 으로 하여 여러 기운이 이합집산(離合集散)하여 종극에는 평형을 이루는 것 을 목표로 하지만 사파(邪派)의 사공(邪功)은 편견지학(偏見之學)이라 하여 한 가지 기운에 집착하여 수련기간을 크게 줄이고 위력은 더욱 극대화 시 켰다. 그러다보니 사공은 위력은 대단하지만 어처구니없는 허점이 있는 경 우가 종종 있었는데 예를 들자면 색욕(色慾) 강해져 욕망에 노예가 되거나 햇빛을 견디지 못하거나, 또는 피에 미쳐 생혈을 빨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극의를 이루기 힘든 사공(邪功)이라 하나 만가지 흐름은 종국에는 같은 가르침이라는 만류귀종(萬流歸宗)이란 이치에 따라 사공에 극의를 이 루면 마무지경에 이른다. 각각 사공의 특성에 따라 안개의 색은 흑(黑), 혈 (血), 녹(綠) 등의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공(魔功)은 마기( 魔氣), 마력(魔力)을 수련하는 것으로 조화(造化)의 기운과 대비되는 혼돈( 混沌)의 기운이다. 오기(五氣), 태어나고(木), 성장하며(火), 결실을 맺고( 金), 다시 휴식(水)을 취하는 4가지 원리에 그것이 조화롭게 하는 것(土)을 합한 것을 말하는데 이모든 것을 통틀어 법(法)이라 한다. 그러나 마공은 이 법 자체를 달리 해석하여 정도(正道)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힘이었다. 그래서 정(正), 사(邪), 마(魔)로 분류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완전 한 평형도, 하나의 극단도, 전혀 다른 새로운 원리도 얻을 수 없었다. 인간 자체가 그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흘러 흑산의 하늘이 붉은 기운을 띨 무렵 흑산자를 감싸고 있던 흑 무가 용동치더니 이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흑산자의 콧속으 로 흑무가 빨려 들어가고 흑산자의 눈이 떠졌다. "흑사, 괜찮으시오?" "주공, 이 늙은이가 허명을 얻어 지존이라 하니 부끄럽소이다." 흑산자는 라혼이 명문과 백회를 토해 마력을 주입할때 이미 깨어 있었다. 그리고 주공이 마치 자기 몸의 기운인 냥 운기를 하는 것을 느끼고 크게 놀 랐다. 그리고 응결되었던 내기가 풀리며 스스로 운공이 가능할 때쯤 주입되 었던, 흑산자의 입장에서 불순한 기운을 모조리 가져가자 또 한 번 놀랐다. 웅랑교의 영주라는 불리던 젊은 고수도 그렇고 주공도 그렇고 자신 강시지 존이란 허망하기 그지없는 별호 그렇게 부끄럽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라혼은 허탈해 하는 흑산자에게 더 이상 아무런 말을 묻지 않고 기력을 찾 은 흑산자와 함께 흑산자의 거처가 있는 흑부로 바람같이 날아갔다. 그리고 흑부에 도착한 흑산자는 망연자실했다. "이럴 수가!" 흑부전역이 시뻘건 화염에 휩싸여 있었던 것이다. -크아아아아~! 라혼은 내가공력이 깃들어 웬만한 고수라 할지라도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 게 할 분노에 찬 흑산자의 대마후(大魔吼)를 귀가로 흘리고 마법주문을 캐 스팅했다. "앱설루트 배큐엄Absolute Vacuum!" [앱설루트 배큐엄Absolute Vacuum:절대진공]은 일정공간의 공기를 없애 그 안을 진공상태로 만드는 주문이었다. 진공상태가 되어 더 이상 잡아먹을 공 기가 없는 화마(火魔)는 한 순간 '푹!' 꺼져 버렸고 흑산자는 화마가 꺼지 자 아직도 살이 익다 못해 태울정도로 열을 내뿜는 마을을 한가운데로 떨어 졌다. 그리고 누군간의 이름을 부르며 불에 타다만 건물의 잔해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아로! 오헤이! 카흐야!" 그때 흑산자의 예민한 감각에 미약한 숨소리가 걸렸다. 이에 흑산자는 지체 없이 장력(掌力) 뿌려 쓰러지려 하는 건물의 뒤엎어버렸다. -펑! 그리고 바닦의 뜨겁게 달궈진 쇠고리를 잡아당겼다. -끼이익~ 덜컹! "누구냐?" "할, 할아버지……." "수야, 수야 구나!" 건물 지하의 비밀공간에 나병(癩病)을 앓는 흔적이 역력한 여인이 화기에 당해 벌겋게 익어 진물을 흘리리는 처참한 모습으로 웅크리고 있었다. 흑산 자는 이미 생명의 기운이 다한 여인을 붙잡고 진기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뜨, 뜨거워요." 라혼은 여인의 처참함에 눈살을 찌푸리다 그녀의 말을 듣고 다시 마법을 사 용했다. "콜드 에어리얼Cold Aerial!" [콜드 에어리얼Cold Aerial:차가운 공기]로 여인을 감싸자 그제야 화마의 공포에서 벗어났는지 흑산자의 물음에 힘없이 대답했다. "누구냐? 누가 마을을 이렇게 만든 것이냐?" "털가죽 옷에 갑주를 입은 사람이었어요. 어떻게 저항할 틈도 없이 하늘에 서 불우박이 떨어져 아헤 아저씨도 카흐도 순식간에 재가 되어……." -부르르르르……. 흑산자는 수야가 말을 하면서 몸을 떠는 것이 느껴졌다.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미 흉수(兇手)가 누구인지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라혼은 여인이 흑산자의 질문에 대답할때 여인의 맥을 살폈다. 그러나 이미 기력(氣力)이 쇠하고 생기(生氣)가 흩어져 아무리 라혼이라도 어찌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병이 나아 흉터만 없어지면 고운 옷을 입고 시집갈 수 있는데……." "이 불상한 것아 너는 시집 갈 수 있어." 흑산자는 그렇게 말했지만 수아는 이미 죽음직전 정신이 맑아지는 회광반조 (廻光返照)에 들어서고 있었다. "저승에 가서도 이 모습이면 저승사자가 놀랄 거예요. 그죠!" 라혼은 수아라는 여인의 말을 듣고 흑산자에게 진기를 주입하는 것을 멈추 게 했다. 그리고 신성력을 모아 연달아 주문을 외웠다. "큐어 스콜드Cure scald! 큐어 스카Cure scar! 리저렉션resurrection!" [큐어 스콜드Cure scald:화상치료], [큐어 스카Cure scar:흉터치료]에 최고 위급 신성주문 [리저렉션resurrection:부활]이 연달아 시전되자 황금빛 빛 무리가 수야라는 여인의 몸을 감쌌다. 그리고 라혼은 연달아 한 가지 주문 을 더 캐스팅했다. "클린 스킨Clean skin!" 피부를 깨끗하게 하는 [클린 스킨Clean skin]주문을 마지막으로 라혼은 뒤 로 물러섰다. 오랜 준비와 긴 시간이 필요한 최고위 신성주문 [리저렉션res urrection]를 캐스팅만으로 하기에 한꺼번에 너무 큰 힘을 썼기 때문이었다 . 마법 주문은 에텔 스페이스의 무한한 힘이 있어 9써클의 최고급 마법이라 도 하루에도 수십 수백 개씩 연달아 사용할 수 있었지만 순수 신성주문은 에텔 스페이스의 힘과는 관련성이 떨어지기에 쉽게 사용하기 버거웠다. 그 러나 바로 옆에서 라혼이 성력(聖力) 사용하는 모습을 본 흑산자에게 경이 그 자체였다. 그리고 주공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는지 수야의 모습은 한참 때의 아름다운 처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일그러지고 뭉개진 피부는 투명 하도록 하얗게 변해 있었고 화상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수, 수야!" 수야는 자신의 눈처럼 깨끗한 손을 보고 얼굴을 매만지며 놀라워했다. 그러 나……. "역시 실패인가?" "주공!" 라혼은 겉모습은 멀쩡해 보이지만 이미 생명력이 다한 여인을 보고 고개를 가로 저었다. [리저렉션resurrection]주문은 실패, 아니 이미 소용없는 주 문이었다. 명운(命運)이 다했다는 말처럼 생명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 이다. 목이 잘렸어도 생명력만 충만하면 멀쩡하게 되살릴 수 있는 라혼이었 지만 명운이 다한 상대에게는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었다. 여인은 라혼의 한 마디에서 자신의 운명을 알았는지 다소곳하게 절을 하며 말했다. "공자께서 천녀(賤女)의 필생에 소원을 들어주셨으니 무슨 여한이 있겠습니 까? 저승에서 나마 은혜를 갚겠습니다." -화악! "수야." 여인의 명운(命運)이 끝나는 순간 그녀의 몸에 머물던 신성력이 흩어지며 찬란한 황금빛과 함께 소멸되었다. "잘 가시오. 수야낭자." "주공 고맙습니다. 이 쓸모없는 늙은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 "아닙니다. 결국 수야낭자는 살리지 못했으니……." 라혼은 나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 세칭 문둥이들이 세상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늘에게 벌 받고, 버림받은 그들은 세상이 또다시 버리니 그들의 한(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한(恨)은 바로 흑산자의 한(恨)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마을에 살아있었던 사람은 수야낭자가 전부인 것 같습니다." "크음~!" 라혼은 주위를 탐색하고 그렇게 결론 내렸지만 흑산자는 포기하지 않고 불 에 탄 잔해를 뒤척였다. 그리고 흑산자가 강시를 제련하는 계곡 속 발걸음 을 옮겼다. 그러나 계곡의 내부도 무사하진 못했다. 약물 속에 몸을 담그고 있던 강시들도 여러 가지 집기들도 화마를 피하지는 못했다. 계곡동굴은 금지(禁地)로 설정되어 흑산자자신만 드나들 수 있었고 완전히 격리된 곳이 건만 불길이 닿아있다는 사실에 전율했다. 놈이 이곳까지 침입했다는 증거 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흑산자는 한쪽 벽으로 가서 장력(掌力)을 뿌렸다. -쿵! 숨겨진 밀실이었다. 다행이 이곳은 발견하지 못했는지 밀실안의 물건을 대 부분 멀쩡했다. 각종 주술도구와 책자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쪽 벽면이 투명한 얼음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 속에 전라의 여인이 잠들어 있었 다. "흑사, 저건……." "독종사인(毒宗邪人)이오." 라혼은 이어지는 흑산자의 설명에 호기심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독공(毒功)을 익히는 자들 사이에서 최고의 경지를 독종(毒宗)이라 칭했다. 그리고 독인(毒人)은 독공을 익힌 고수를 말하기도 하지만 독강시를 뜻하 기도 했다. 그래서 독종독인(毒宗毒人)은 이론상으로 존재하는 독종에 버금 가는 독강시를 말했다. 숨결하나만으로도 반경 백장이내를 무생물지옥으로 만들 수 있다는 극악한 물건이었다. 그리고 흑산자의 독종사인은 거기에 초 극고수 수준의 무공까지 견비한 괴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작입니다. 독신(毒神)이라 자처하는 친구와 수십 년간 저것에 매달렸는데 마지막 순간 깨어나질 않으니……." 라혼은 실패한 독종사인보다 초췌한 모습의 흑산자가 너무도 담담하고 차분 하게 말하는 태도에서 역시나 하는 생각을 했다. 감정기복이 심하다는 마공 의 고수이나 역시 극마지경의 경지를 넘어 현경의 경지를 넘보는 고수다웠 다. 라혼은 그런 흑산자를 일별하고 독종사인을 세심히 관찰하고 손을 뻗어 기를 흘려 넣어 그것은 상태를 살펴보았다. '강시란 블러디 골렘이다. 골렘이란 것 자체가 생명연성하는 연금술사가 만 들어 낸 것. 아무래도 동력원이 부족한 것이 원인인 것 같은데 드라오디프 의 드래곤 하트를 밖아 넣어볼까? 아서라 겨우 이런 일에 드래곤 하트를 낭 비할 순 없지.' 라혼이 독종사인을 살펴보는 사이 흑산자는 간단한 짐을 챙겼다. 그리고는 라혼에게 말했다. "주공." "말씀하시오. 흑사!" "이 늙은이가 주공의 특이한 고독에 당해 주공을 거역할 수 없음을 압니다. " "……." "하나 주공은 제게 무리한 그 어떤 요구도 하지 않고 깍듯한 스승의 예우로 대해 주셨으니 그것에 감사드리오." 라혼은 아무런 말없이 침묵을 지킨 체 그의 말을 경청했다. "나를 상하게 하고 마을을 불태운 흉수가 누구인지 알고 있으나 힘이 없어 어찌할 수 없으니 주공이 이 늙은이의 친 혈육과도 같은 마을 사람을 산체 로 태운 그에게 복수해주시오." 라혼에게 복수만큼 허망한 것이 또 없었다. 그러나 라혼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흉수가 누구입니까?" "그자가 스스로 자신을 소개하길 웅랑교의 웅기령주 웅천패라고 했습니다." "웅랑교의 웅천패?" 라혼은 사실 흑산자에 대해선 잊고 있었다. 갑주무림맹 1천여 명의 무림고 수들의 시신으로 강시군단을 만들려 했으나 실제로 사용하기에 무리가 있다 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천수교에서 흑산자가 맡기고 간 107구의 강 시들을 실전에 사용했으나 지나가던 불선(佛仙) 보리대불의 개입을 불러왔 기 때문이었다. 세상사에 관여하지 않는 선맥(仙脈)의 신선(神仙)이 개입을 불러오는 강시를 사용하는 것은 포기했다. 게다가 귀림의 드워프 마을이 축적해놓은 지식은 흑산자와 연구하던 것보다 훨씬 풍부했다. 마법물품에 관한 것은 아무래도 드워프들이 더욱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이유 로 라혼은 흑산자를 찾지 않으려 했다. 어차피 흑산자도 거의 은둔한 고인 이고 세상에 나오는 이유는 마을에 필요한 식량이나 생필품, 그리고 약재( 藥材) 때문이니 그 정도만은 흑산자의 강호에서의 위치 고려해 인연을 유지 하기 위해 힘닿는 데까지만 도울 생각이었다. 그리고 황금 1천냥은 그들이 수년간 풍족히 생활하는데 충분했다. 라혼이 생각한 흑산자와의 인연은 그 것이 다였다. 라혼은 모든 것을 잃은 노인에게 아무것도 숨김없이 솔직하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저는 웅랑교와 다툴 생각이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설화 를 감당할 만한 힘뿐입니다." "설화를 감당할 힘?" "설화는 백호입니다." "흐음." 괴팍하고 독선적이라 알려진 노강호는 라혼의 솔직한 말에 모든 사정을 짐 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습니다. 더 이상 복수를 부탁하진 않겠습니다. 하나 이 늙은이를 거둬 줄 수는 있겠지요." "제곁에 머무신다면 스승의 예우를 다하겠습니다." 흑산자는 주공이 웅랑교와 자웅을 겨룰 것을 의심치 않았다. 설화가 백호이 고 웅랑교가 원하는 것이 천하인 이상 둘이 맞붙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 러게 되면 복수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군자의 복수는 십년이 지나도 늦지 않는 법. 웅천패 네놈을 몸을 살지도 죽지도 못하게 만들어 하늘을 저주하게 하리라!' 남례일족(南禮一族) 라혼은 흑산자의 물건들을 에텔 스페이스를 이용해 모조리 챙겨들고 흑산자 와 함께 남례성 귀왕림으로 돌아왔다. 마침 라혼에게 흑산자가 머물만한 장 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귀림의 원래주인이었던 드라오디프의 동굴 레어라면 흑산자가 머물기 알맞은 곳이라 생각했다. [텔레포트 워프Telepor t warp]로 수백만리 흑막 흑산에서 남례성 귀림으로 단숨에 이동하자 흑산 자는 어리둥절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삭막한 암 회색 바위산에서 입이 떡 벌어지게 거대한 나무들 숲을 이룬 풍경으로 바뀌 었고 살을 에는 차가운 칼바람이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공기로 바뀌었기 때 문이었다. 흑산자 입장에선 자신이 지금 죽어 저승에 와있는 느낌까지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주공, 이곳은?" "남례성 귀림 귀왕곡 귀왕림입니다." "남례성? 여기가 남례성이란 말이오?" 라혼은 흑사에게 자신이 임지가 현재 남례성이란 것을 설명해 주었다. 흑산 자는 라혼에게 배운 여러 가지 흥미로운 학문-마법, 시드그람 연금술, 마법 물품 등….―을 연구하느라 흑부에서도 자신의 거처에서 두문불출했다. 그 러니 라혼이 아직도 앙신성에서 강무세가와 싸우고 있는 줄로만 알고 있었 던 것이다. 그런데 남례성에서 반란이 있었고 라혼이 하남천원군으로 남례 성의 반란을 진압했으며 지금은 남상의 반란을 토벌하기위해 서해수군통제 사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허허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허허허허, 괄목삼일(刮目三日)이라 해야 할까? 내가 주공과 해어진지 1년 이 채 되지 않았거늘……." 괄목삼일은 뛰어난 사람은 사흘만 보지 않아도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 할 정도로 성장한다는 말이지만 흑산자는 라혼보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감 탄했다. 그리고 흑산자의 상념은 거대한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속에서 폐부 를 긁는 듯한 괴성이 들려오고, 곧 거대한 거인을 보자 더 이상이어지지 못 했다. 그러나 집체만한 거인을 귀왕(鬼王)이라 부르며 마음대로 부리는 주 공의 모습에 신비감만 더해졌다. 비록 허명이라 치부하나 강호무림의 열두 절대자중 하나인 자신을 어린아이 손목 비틀듯 간단히 제압하는 무력에 세 상에 모르는 분야가 없는 해박한 지식, 수백만리 떨어진 흑막과 남례성을 자유로이 오가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능력은 경이 그 자체였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안하무인(眼下無人)이라 생각했던 자신이 그에게 승복하는 지도 몰랐다. "이곳에 흑사가 머물만한 적당한 장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소개시켜 들릴 분이 계십니다." "……." 라혼은 흑산자를 일단 가니아에게 소개하고 한 열흘정도 이곳에 머물며 설 화와 함께 지낼 시작이었다. 만약 장상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댓자나 나온 입이 하늘을 찌를 정도로 커지겠지만 라혼의 입장에선 더 이상 바쁘게 움직 여야할 이유가 없었다. 당초 목표였던 서해를 장악하는 문제는 서해수군통 제사라는 직함을 가지게 된 것으로 해결되었고, 남례성의 장악은 하남천원 군의 두 장수 작도인과 상초가 알아서 잘 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문 제는 봄에 출진하여 남상의 서해대수영을 토벌하는 것이지만 조정에 입장에 선 급할지 몰라도 라혼에게 굳이 올 내년에 끝낼 이유가 없었다. 상식적으 로 봐도 남상의 일은 한 두해에 끝날 일이 아니었다. 다만 올 봄에 남상에 서 대륙으로 오가는 항로의 최대관문인 안도(安島)만을 확실히 장악하는 선 에서 끝낼 생각이었다. 원래 라혼은 수년간 남례성에서 움직이지 않으려 했 으나 고학은 라혼이 조정의 신임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는 것을 강조하며 200여척의 서해수군 전체를 동원해 안도를 공략할 것을 건의 했고 라혼이 허락함으로써 일을 그렇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 또한 장상이 알면 입이 천외천까지 늘어날 이야기였다. 장상은 현제 남상으로 가 는 것을 상정하며 죽을 똥을 살 똥하며 일에 치이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럼에도 라혼이 더 쉬지 못하는 이유는 사실상의 최고 실권자이기 때문이 었다. 최고 실권자가 모습을 오랫동안 보이지 않으면 그것자체가 따르는 자 들의 사기에 영향을 끼치는 치명적인 위험요소임으로 여러 군데 얼굴을 내 비치며 강건함을 보여줘야 할 필요가 있었다. "서방님!" "?" 라혼은 설화가 전쟁터에 나갔다가 살아 돌아온 남편을 반기듯 눈물을 보이 며 뛰어들자 고개가 갸우뚱했다. 저녁나절 떠나서 지금이 아침이니 겨우 하 룻밤 떨어져 지낸 것뿐이고 라혼이 보기에 평생처음 만나 죽이 잘 맞는 할 머니와 함께 있었던 것치고 반응이 매우 격렬했기 때문이었다. "설화야?" "허허허허, 주공만 괄목삼일인줄 알았는데 설화 또한 그렇구려." "어머? 흑 할아버지." 설화는 그제야 계피학발(鷄皮鶴髮)의 흑산자를 알아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 도 그랬지만 그 후 같은집에서 생활하면서 여인천궁의 여인들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선풍도골(仙風道骨)의 청수(淸秀)한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건만 그 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기에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이미 화경( 化境)을 바라보는 경지에 이른 설화가 그의 존재를 감지 못 할리 없었으니 정확히 관심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쨌거나 흑산자는 설화에게 서방님 이 스승으로 모시는 분이고 할아버지라 부른 유일한 존재였다. "소녀 설화 흑 할아버지께 인사드립니다." "허허허허허……." 흑산자에게 설화는 유일하게 자신에게 두려움 없이 다가온 존재였다. 처음 백호나한부에 머물 때 존전까지 살벌하게 싸웠던 존재인 자신에게 다가와 할아버지라 부르며 두렵고 꺼림칙한 눈빛이 아닌 천호(天湖)의 물처럼 깊고 투명한 눈빛으로 두려움 없이 다가왔던 아이였다. 그리고 아이의 첫 물음 은 멋있는 외모를 왜 가꾸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보 기 드문 미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머리 매만지고 평생 손질하지 않았던 수염 을 손질했다. 그리고 완성된 것이 계피학발의 흑산자가 아닌 선풍도골의 흑 사(黑師)였던 것이다. 그래서 라혼에게는 주공이라 칭하며 깍듯이 했으나 엄밀히 따지면 주모인 설화는 손녀처럼 대했다. "설화야, 장군과 손님을 모셔라!" "예, 할머니." 흑산자는 연신 허허 웃음을 달고 설화의 손에 이끌려 아담한 통나무집 안으 로 들어갔다. 그리고 겉보기보다 넓은 집안의 모습에 깜짝 놀랐고, 붉은 머 리와 붉은 홍의가 너무 잘 어울리는 설화와 쌍둥이처럼 닮은 가니아를 보고 또 놀랐다. "설화의 할미되는 가니아입니다." "가, 가루입니다." "와! 흑할아버지 성함이 가루였어요." "응? 그렇단다." 가니아의 모습에 놀란 흑산자는 불시에 자신을 인사하는 가니아에게 오랫동 안 잊고 있었던 이름을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말했다. 그렇게 화기가 넘치는 가운데 설화가 저번에 약속했던 대로 맛있는 요리를 대접하겠다며 부엌으로 들어갔고 가니아도 설화는 어릴 적 밥 짓는 것이 외에 음식을 만 들어 본적이 없다는 라혼 걱정 섞인 말에 설화가 차지한 부엌으로 들어갔다 . 그리고 라혼은 흑산자를 그린 드래곤 드라오디프의 동굴 레어로 데려갔다 . 그리고 흑산자는 그곳에서 보물을 발견했다. 바로 드라오디프가 만든 마 법물품들이었다. 라혼에게 조잡하기(?) 그지없는 쓸모없는 물건들이지만 흑 산자에겐 달랐다. 라혼에게 말로만 듣건 물건들이 실제로 있었으니 그 감흥 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마법에 관한 방대한 서적까지 있 었으니 흑산자에겐 별천지가 따로 없었다. 그리고 외부와 차단된 넓은 공간 이 마법주문인지 원래 그런지 알 수는 없지만 서늘하게 유지되어있어 시신( 屍身)이 부패를 염려할 필요가 없어 강시를 제련하기에 그만인 곳이었다. "대단하오. 참으로 대단하오. 별 볼일 없는 노폐물을 위해 이런 곳을 마련 해 두시다니, 다시 한 번 더 감사드리오. 내 주공의 기대에 부응하여 무적 의 강시군단을 만들어보겠소." "……?" 라혼은 흑산자의 말에 턱을 긁적였다. 단지 머물 거처를 마련한 것뿐이었지 만 그러고 보니 드라오디프의 레어는 흑산자가 작업(?)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라혼은 이미 강시를 이용할 생각을 접 은 지 오래였다. 그리고 그것을 솔직하게 흑산자에게 털어놓았다. "흑사, 저는 더 이상 강시를 이용할 생각이 없습니다." "……." 라혼의 그 말은 흑산자를 당항하게 했다. 흑산자가 생각하기에 강시군단을 말고는 자신이 주공에게 해줄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공은 이미 천외천 의 경지에 달하고 용호같은 수하들이 있으니 이렇게 되면 그야말로 뒷방 늙 은이나 다름없었다. 이곳에 새로운 학문-마법이나 마법물품-는 이미 한 분 야에서 일가(一家)를 이룬 흑산자에게 호기심 이상의 것은 아니었기에 주공 이 유일한 재주라 할 수 있는 강시를 거부하자 졸지에 하릴없이 소일하는 늙은이 신세가 된 셈이었다. 만일 흑부의 일이 없었다면 이곳의 학문을 다 시 공부하며 소일하는 은둔자의 삶을 살 수도 있겠지만 흑산자에게는 세상 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복수' 웅랑교에 대한 복수였다. 어차피 뇌 속에 자리 잡은 고충(蠱蟲)은 흑산자 스스로 어찌해볼 도리가 없 었다. 물론 복수를 하겠다며 웅랑교로 찾아가 난동을 부릴 수도 있었고 또 주공은 그것을 막을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웅랑교는 너무나 거대했다. 흑부에서 주공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없어 멀고먼 남례성에 일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었지만 흑막에 휘몰아치는 풍운은 아무리 세상과 단절된 흑부라 하나 웬만한 소문은 모두 알고 있었다. 흑산자가 알고 있는 웅랑교 의 힘과 세력은 상당했다. 그 웅랑교가 흑막을 제패했으니 아무리 강호무림 의 절대자라는 흑산자도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흑산자의 곁엔 추측 불가능한, 불가사의한 능력을 가진 존재가 있었다. 그의 곁에 머물며 일을 돕다보면 기회는 반드시 온다는 것을 믿고 재주를 사용하려는 데 그 재주가 필요 없다고 하니……. 라혼은 아무런 말이 없이 상념에 잠긴 흑산자를 그대로 두고 에텔 스페이스 에서 흑산자의 물건 꺼내놓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독종사인이 들어있는 얼음덩어리를 빙동(氷洞)의 가장 시원한 곳에 두는 것을 마지막으로 상염에 서 깨어난 흑산자와 가니아의 거처로 돌아갔다. 그리고 설화가 만든 요리를 나누어 먹으며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물론 식사 후 설화는 흑산자의 머리 를 매만지고 수염을 다듬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렇게 열흘을 한량(閑良)과 같이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설화의 태도가 그전과 사뭇 달라져 있 어 라혼은 아내를 위해 큰 결심을 했다. 바로 귀왕곡에 타운 포탈(Town por tal)을 설치하기로 한 것이다. 여인천궁의 소궁주가 되기 싫다느니 여기서 그냥 이렇게 살고 싶다느니 하는 말을 하며 결론은 언제나 '안 되겠죠. 제 가 사라지면 그 사람들이 다시 추운 들판으로 쫓겨 날거예요.'였다. 그래서 언제든 가니아가 있는 귀왕곡으로 올수 있게 하기 위해 전 대륙을 범위로 하는 타운 포탈(Town portal)을 만들었다. 타운 포탈은 물계열 마법주문으로 우물이나 분수가 필요했다. 동방의 오행 과 다른 지수화풍의 4대 원소의 개념상 물은 이차원으로 통하는 문을 뜻했 기에 라혼은 드워프들에게 부탁(?)해 가니아의 통나무집 마당에 작은 분수 를 만들게 했다. 돌을 조각해 장식하는 그런 류의 분수가 아닌 최대한 자연 그대로의 돌을 이용한 작은 폭포 같은 분수는 서너 명의 드워프들이 달려들 자 반나절 만에 완성되었다. 라혼은 거기에 이제 6개 남은 위저드 스톤(Wiz ard stone)을 기본으로 초광대역 타운 포탈을 만들었다. 그리고 설화의 전 환에 언제든 시동어를 외치거나 일정한 파장의 진기가 주입되면 바로 이곳 으로 올 수 있게 했다. 그리고 흑산자와 가니아의 전환도 만들어두었다. *** 라혼 주군이 폐관수련을 한다며 두문불출하자 가장 피곤한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모석이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잔폭광마라는 천둥벌거숭이 때문이 었다. 그동안은 주군의 곁에 붙여두는 것으로 갖 시집 온 새색시마냥 얌전 하던 잔폭광마는 무서운 사람이 없어지자 앙신성 노원에서 함께 마적질을 같이 하던 수하들과 함께 봉수성 전역의 술집과 여자를 파는 곳을 휩쓸고 다녔다. 그간 주군의 곁에서 본의 아니게 금욕적 생활을 한 것을 보상받으 려는 듯 놀고 또 놀며 그간 자기 앞으로 나온 봉록을 흥청망청 써댔다. 그 러나 일에 방해가 되지 않고 사고만 치지 않는다면 풍류를 즐기겠다는데 말 릴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가진 은자를 단 사흘 만에 모두 탕진하고 , 배짱도 좋게 하남천원군의 무장을 신분을 악용해 거액의 외상술까지 먹었 다. 거기다 거액의 고리대금을 빌려 쓰기까지 하니 나중에 그 사실을 안 모 석은 머리가 지끈지끈할 지경이 되었다. 잔폭광마를 제압할 수 입는 존재는 주군 말고는 백호십일걸이 전부였고, 그중에서도 모석이 유일하게 봉수성 근처 감곡에서 노예부대를 조련하고 있었다. 나머지는 지금도 남례성의 밀 림을 헤집고 다니느라 정신없을 터였다. 모석이 다른 백호영들과 다르게 움 직인 것은 조정으로 부터 소장(少將)이 직급을 받아 장수에 반열에 들었고 라혼 주군이 남례성을 확실히 장악하는 임무를 같은 소장의 직급인 작도인 과 상초에게 맡겼기 때문에 모석은 감곡의 노예들을 조련하는 일에 매달리 게 된 것이다. 그러나 노예들을 정예군사로 만드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지 않고 거세된 체 살아온 존재 들이었다. 애초에 무기를 잡거나 싸우는 것이 원천적으로 금지되어 살아온 자들을 군사로 만드는 것이 쉽다면 이 세상에 어려운 일은 하나도 없을 것 이다. 그러나 잔폭광마를 시야에서 놓친 것이 이렇듯 후회되는 일일 줄이야 ! "형님, 걱정하지 마쇼. 그깟 빚이야. 금방 갚을 수 있소." "빚이야 자네의 일이지만 주군의 호위를 소홀히 한 것은 어찌 변명하려는가 ?" "주군의 호위는 지심도 있고, 귀호기인가 하는 놈들도 있고." "그렇지만 그 주군의 호위는 자네지 그들이 아니야!" "체! 언제 부터 그랬다고, 툭 까놓고 말해서 그게 어디 호위하는 거요. 거 의 심부름꾼이었지? 게다가 그냥 곁에 있으라해서 있었던 거지 내가 호위라 고 언질 받은 것도 없는데……." 모석은 잔폭광마의 얼굴 가죽이 '무척' 두껍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지 만 이렇듯 안하무인격으로 배짱을 튕기자 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 나 세상에 라혼 말고는 두려운 것이 없는 잔폭광마를 힘으로 누를 수도 없 었다. 비록 모석이 아직까지는 반수 우세를 점할 수 있으나 수틀리면 그렇 게 무서워하는 주군에게도 종종 덤비던 사내가 잔폭광마였다. 그러니 힘으 로 누려하면 전력을 다해 저항할 것이 분명하니 무력을 사용하는 것은 최후 의 수단으로 남겨놓을 수밖에 없었다. 즉, 라혼 없는 상태에서 모석과 잔폭 광마의 관계는 신중함과 무대포의 충돌이었다. 그리고 모석은 서해수군에 배속된 배와 원주등지에서 모병한 군사들을 인수하기 위해 봉수성을 떠났고 잔폭광마는 잔소리꾼이 사라져 제 세상을 만나 천하에 다시없는 파락호가 되었다. "나으리, 그동안 밀린 외상값이 상당한데 근 한 달이 다되어가니……." "갚아! 갚는다고, 누가 보면 돈 떼먹고 도망가는 줄 알겠네. 너 아니어도 피곤하니까. 그 얘기는 하지마. 그리고 가서 술이나 더 가져와!" "하지만 벌써 한 항아리나 비우셨는데?" -쾅! "흐엑!" "에이 이놈의 파리 새끼가?" 살벌한 분위를 조성하는데 천부적 소질이 있는 잔폭광마의 행동에 주인장을 더 이상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독하디 독한 술을 두 항아리나 내놓았다 . 어디에 어떻게 관리를 했는지 달달하지만 독한 술은 시원했다. 사실 지금 이맘때면 언제나 화류가에서 계집을 옆에 끼고 탐스런 궁둥이를 두드려가 는 가는 것을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이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궁핍한(?) 사 정 때문에 장사도 안 되는-사실은 인상이 더러운 잔폭광마가 있기 때문에- 계집도 없는 술집에 앉아 홀로 술 항아리를 기울이는 자신이 한심했다. 그 러나 더 이상 외상을 하기도 그렇고, 돈을 빌려주는 사람도 없으니 모원에 게 가서 봉록을 미리 당겨쓰는 것까지 고려했다. 그러나 대장이 무서워 차 마 그러지는 못하고 대장된 체면에 수하들에게 빌붙을 수 없으니……. "에라! 홀로자음 자작하는 것도 풍류다." "그래도 이왕이면 벗과 함께하는 것이 낫지 않겠소." "응?" 잔폭광마는 파리 날리는-다시 말하지만 원인은 잔폭광마다.― 주점에 자신 보다 먼저 와서 자릴 차지하고 있던 진토인이었다. 잔폭광마는 그가 누구인 자 알지 못했지만 그는 자신을 아는 듯 보였다. "정식으로 인사드리오. 본인은 만만평(萬萬平)에서 조그만 장사를 하는 장 사치이오." "나를 아시오?" "내 어찌 백호나한의 일보시위인 육장군을 모르겠습니까?" "……." 잔폭광마는 그냥 물끄러미 보는 것이었지만 스스로 상인이라 밝힌 진토인 사내는 그것이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서둘러 주위를 환기 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아아 무슨 의도가 있어서 온 것이 아니라 내가 본지 장군 같은 호걸에게 무용담을 듣는 것을 좋아하는 지라……. 만일 제게 장군의 무용담을 들려주 신다면 이야기 값을 대신하여 술을 사겠습니다." "아하! 그러셨구려! 뭐하시오. 어서 앉으시오. 주인장 여기 술 좀 더 가져 와!" 잔폭광마는 혼자 맨송맨송하게 술을 마시게 되어 기분이 꿀꿀한 마당에 이 상한 놈(?)이 들러붙자 짜증이 몰려오려는 와중에 '공짜 술'이란 말이 마음 에 '푹~!' 와 닿자 사내가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잔폭광마의 지론 중하나가 가장 맛있는 술은 뭐니 뭐니 해도 공짜 술이었기 때문이었다 . 그리고 태어나서 지금까지 자신이 한 영웅적이라고 생각되어지는 이야기 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술기운 때문인지 이야기는 오늘따라 술술 풀렸고, 잔폭광마는 자신의 이야기에 도취되어갔다. "그래서 말야! 꺽, 내 밑에 있겠다는 놈들을 데리고 주군에게……." -쿵! 자그마치 다섯 항아리의 독주를 비우고서야 스러지는 잔폭광마를 사내는 무 슨 괴물 처다 보듯이 처다 보았다. 그리고 멀쩡한 신색으로 일어서서 중얼 거렸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넌 천하의 영웅이겠지. 하지만 내가 보기에 술에 전 멧돼지로 밖에는 안 보이는군." "시화님." "내가 술에 타라는 것은 탔겠지?" "예, 하지만 시화님도 같이 드셨는데?" "그것은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시화는 일보시위로 알려진 자가 이렇듯 외부에서 한가롭게 술이나 푸고 있 는 모습에 처음엔 함정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러나 그간 면밀히 분석해본 결과 최근에 와서야 함정이 아닌 것으로 판당하고 오늘 드디어 그에게 접근 한 것이었다. "심독(心毒)은 다 좋은데 암시를 하려면 대화를 해야 하니……. 하지만 이 것으로 성공의 가능성을 더욱 높아졌다." 백호나한이 한 달 보름간의 칩거를 깨고 봉수태수부를 들리는 것으로 시작 하여 행보를 시작했다. 고학은 라혼에게 천하정세의 대략적인 보고했다. "…… 그럼으로써 되도록 흑막의 정예위병들을 흡수할 수 있는 방법을 현재 강구중입니다." 겨울은 만물이 휴식하는 계절이다. 그래서 그런지 것으로 보이는 천하는 고 요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수면 아래에서는 징병령에 의해 모인 중주 의 병졸이 조련되고 웅랑교는 흑막의 혹독하기 이를 데 없는 겨울을 나기위 해 모든 군사행동을 정지시켰다. 후선도 군병을 모으고 조련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 첫 단추는 재대로 끼웠으나 내년이 가장 중요한 시 기일 수밖에 없었다. "흐음 이렇게 놓고 보니 뭐가 이상한데?" "그렇습니다. 주군. 이정도 가지고는 빠르면 가을, 늦으면 2~3년 내에 후선 이고, 웅랑교고 견디지 못하고 무너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천하칠대도 오방상제 중 다섯이 중주에 속했다. 장강대하변의 풍부하기 이 를 데 없는 물산과 수인조정의 4백년의 저력은 참으로 대단하다. 중외오성 은 수인들에게 반하던 십삼인가들이 있는 곳이었다. 당연하게 조정은 그들 을 차별했고 전체적으로 중원11주보다 낙후되어 있었다. 그에 비해 변방사 역은 조정에 반하는 움직임만 없다면 관심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즉 문제만 일으키지 않으면 족한 곳이 변방사역인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천하의 모든 힘은 중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셈이었고 토금전장이 수 집한 정보를 분석해본결과 후려, 동인, 앙신을 차지한 후선은 갑주의 힘만 으로도 감당할 수 있을 정도였다. "후선은 경주, 갑주, 임주 3주와 면하고 있습니다. 이중 갑주와 임주가 느 끼는 후선에게 위협은 상당하니 그 둘은 필히 힘을 합칠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경주도 한목 거들 것이 분명하니 이렇게 본다면 후선은 풍랑 속의 조각배에 불과합니다." "그렇습니다. 웅랑교가 거병하여 흑막을 차지했다고 하지만 조정의 입장에 서는 강 건너 불입니다. 그리고 웅랑교와 후선 강무세가는 연계되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주군!" "……." 라혼은 새삼스럽게 길게 읍(揖)하며 정색을 하는 고학의 다음 말을 기다렸 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번 생각을 정리한 고학은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이야기 했다. "당금 천하의 모든 혼란은 강무세가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런 강무세가가 당금의 상황 생각하지 못했을 리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강무세가에게 가 장 필요한 상황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는데 결론은 원주를 제외한 진골십가 들이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 "그러나 후선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는 갑주, 임주는 무슨 일이 있다고 하더 라도 후선의 문제를 해결하려 들 겁니다. 후선이 살려면 진골십가 중 하나 가 수인조정에 이반해야 합니다." 원주조정을 중심으로 뭉쳐있는 수인들은 가히 난공불락(難攻不落)이었다. 그러나 내부에서 분열한다면 그것만으로 천하는 단번에 깨질 것이다. 이미 진골십가가 다스리는 십주(十州)는 각각이 독자적으로 행보를 할 수 있는 힘과 역량이 있었다. 그런 그들이 원주조정을 중심으로 뭉쳐있는 이유는 바 로 그들이 수인(獸人)이기 때문이었다. "정예기병들인 제평대도독부의 순군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좋은 생각이다. 그러나 그전에 설화가 북지성의 군권을 가지게 되면 시도해 볼만 하겠어." "그보다 장상이 불평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닙니다. 라혼은 고학의 진언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장상에게 는 미안하지만 그간 어떤 결과가 왔더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조직과 법을 새 로 새워야 했다. 귀림의 드워프들이 역석을 이용한 동력기관을 만들어내어 여러 가지 자동 노(櫓)의 시제품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배를 운용하는 여러 가지 기관이 설계되고 있어 투함에서 많은 인원을 차지하는 노꾼의 수가 줄어들고 선원의 수도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그보다 열병 식이라도 해서 건재함을 확실히 보일 필요가 있었다. 보름 전 앞마당과 다름없는 봉수성 대향로에서 백호나한을 놓쳐 체면이 말 이 아니게 된 남례일족의 시화는 새로 들어온 소식을 알리기 위해 대야가 머물고 있는 곳으로 서둘러 왔다. "대야?" "왔는가?" 시화는 대야가 머무는 거처로 들어선 순간 깜짝 놀랐다. 원래 마른체구의 대야였지만 지금 피골이 상접하다 못해 백골을 연상시키는 몰골과 파리하다 못해 검은 입술을 한 대야의 모습은 귀신이 저리가라 할 정도로 귀기를 풍 겼다. 그리고 방안엔 온통 그간 시화가 찾고자 목말라했던 백호나한의 초상 화들이 널려있었다. 백호나한의 별호의 연원이 되는 나한권을 펼치는 모습, 그가 주로 사용한다는 철산고(鐵山鼓) 애병인 협봉검을 든 모습, 그리고 초로역방에서 코끼리를 양단하고 열지족 추장 소노리의 충성을 받아내는 모 든 모습 등 그간 시화가 발이 부르트도록 수집한 백호나한의 모든 것이 생 생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 친구, 참으로 대단하지 않나?" "대야……." "나는 기쁘다네. 이 멋진 친구와 멀고 먼 길을 떠날 것을 생각하며 정말 가 슴이 설렌다네." 시화는 깊고 깊은 곳에 침잠된 대야의 눈동자를 읽고 절로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대야, 그가 전면에 나섰습니다." "그런가?" "그는 봉수성의 군사들을 열병하여 위무하고, 감곡에서 조련중인 노예부대 에도 들릴 거랍니다." "그 친구, 무던히도 내 속을 썩이더니만 이제야 나섰군. 말해보게 어찌할 생각인가?" "28명의 암살대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위병들이 봉수성 대향로를 행진하고 백호나한 또한 직접 참가한다고 하니 그때 암살대로 하여금 소란을 피우겠 습니다." "좋아! 그만 가보게 내 꼴이 우스우니 그때에 맞춰 몸을 만들어야 갰지. 이 몰골로 긴 여행을 떠나고 싶지 않으니까!" "조, 존명!" 시화는 이미 모든 것을 초월한 자객을 보았다. 마지막 한 번의 칼질을 위해 목표를 신앙으로 삼은 대야의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이제 대야는 목 표의 심장에 칼을 꼽는 그 순간까지도 단 한 점의 살기(殺氣)도 적의(敵意) 도 투기(鬪氣)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세상 누가 가장 친한 친구를 부르 러가는 데 그러한 감정을 가지고 가겠는가? '주인 모든 준비를 끝냈다. 이제 나 자신도 살기를 감춰야 한다. 아니 완전 히 잊고 지워야한다. 주인이 먼 길 떠나니 슬퍼하고 애도하는 마음으로 가 슴을 채우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 순간까지 오직 주인을 배웅한다는 생각 만을 가지고 모든 준비를 해야 한다. 이제 그는 주인의 둘도 없는 친구다.' 라혼은 고학에게 열병(閱兵)을 준비하라 지시 했지만 봉수성의 백성들은 개선식이라 말하며 참으로 오랜만에 잔치분위기를 만끽했다. 사시사철 따뜻 하고 여간해선 굶을 염려가 없는 남례성은 예로부터 이런저런 이유를 달아 근 한 달에 한번 씩은 꼭 축제나 잔치가 열렸다. 그러나 남례성 전역이 반 란에 소용돌이 속에 빠지고 그 여파로 생활이 궁핍해지자 마을이나 성시 전 체가 흥청대는 축제는 없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열리는 대규모 행사이니 봉수부에 속한 백성들뿐만 아니라 봉수부와 면한 백성들도 축제(?)를 구경 하기 위해 몰려들고 있었다. 일이 예상외로 커지게 되자 라혼은 호도에 머 무르고 있는 금영월 상장군을 봉수성으로 불러야 했다. 하남천원군의 최고 책임자는 금영월이지 라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따지자면 개선식 은 남례성의 주도인 호도에서 열리는 것이 마땅하나 이미 벌어진 판을 거두 면 백성들의 민심에 문제가 있을 것이고 그렇다고 봉수성과 호도에서 동시 에 행사를 개최하면 그 비용이 만만치 않을 것이기에 금영월이 봉수성으로 오는 것이 나았다. 그러나 그러한 사정을 납득한 금영월이지만 그의 입장에 선 남의 잔치에 끼어드는 입장이 되는지라 고사(固辭)했다. "금 상장군이 오지 않으시겠다하는데 굳이 권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대장군, 금 상장군이 그렇게 고사하시는데 강권하는 것도 모 양세가 좋이 않을 듯합니다." 라혼은 장상과 향당의 말을 듣고 더욱 고민에 빠졌다. 장상은 수군을 조직 하는 대략적인 보고를 하기 위해 왔고, 향당은 감곡에서 생산된 석밀을 중 주로 옮기기 위해 서해수군의 배를 빌리려 찾아왔다. 그러다보니 원래 라혼 과 저택을 함께 사용하는 고학, 모원, 한포포, 메이, 지심, 초초와 봉수성 에서 개선행군이 열린다는 말을 듣고 찾아온 열지족 추장 소노리에다 봉수 태수 돈석까지 있어 오랜만에 사람들로 북적였다. 라혼은 그들에게 빙과를 만들어 대접했는데 이번에 감곡에서 만들어진 석밀을 가루 내어 빙과의 단 맛을 더하자 빙과는 더욱 달콤했다. "그래요. 가가 사실 하남천원군을 실제로 장악한 것은 가가잖아요. 게다가 원주조정의 암묵적으로 묵인하는 마당에……." "홍홍홍홍, 제독 그녀의 말도 일리 있으나 어차피 개선식이 아닌 휘하 군사 들을 열병하는 것일 뿐이잖소? 그보다 이런 맛이라니, 홍홍홍홍!" 한포포의 말을 돈석이 받아 정리했다. 비록 뜻하지 않게 일이 커져버려 개 선식같이 되어버린 열병식이라도 열병은 열병이었다. 장수로써 휘하 군사들 을 열병하여 훈련도를 점검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라혼이 여전히 굳은 표정을 풀지 않자 고학이 나섰다. "주군, 차라리 이번 기회에 금상장군의 문제를 다시생각해 보는 것이 어떨 까요?" "……." "여기모인 분들은 암묵적으로 주군을 지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요?" 고학이 그렇게 말하며 좌중을 쓸어보다 봉수태수인 돈석에게 눈이 멈췄다. "홍홍홍, 본인은 이미 오래전에 제독에게 코가 꿰인 몸이오. 홍홍홍홍!" "추장께서는 어떠십니까?" "내가 무릎 꿇은 사람은 백호나한이지 그가 아니다." 고학은 그들에게 그런 말을 하게 함으로써 관계를 더욱 확실히 하고 본래 하고자 했던 말을 시작했다. "저는 한때 금 상장군을 상관으로 모시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에 대해 잘 압니다. 그는 청상 무장입니다." 금영월은 원주조정의 관부에서 청류파로 분류되는 사람이다. 청류파란 과거 시험을 통해 용황이나 호황을 포함한 십이진가의 인맥을 거치지 않고 관인 이 된 사람들을 말하는데 자신의 실력만으로 높은 관직을 가진다는 그 한가 지만으로도 존경을 받을 만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청류파 인사로 인식된 사람들은 대부분 청렴한 청백리(淸白吏)에 인격적으로 존경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허물이 있다면 어디에도 보호해 줄 세력이 없으니 금세 실각하거 나 또는 다른 누군가에게 일신(一身)을 의탁해서 청류파란 명패가 떨어져 버렸다. 그러나 그들은 조정에서는 비주류에 속하면서도 누구도 그들을 무 시할 수 없었는데 그들 특유의 높은 도덕성이야 말로 가장 무서운 무기였다 . 청류파인사들에게 지지를 받는 정책이나 사안은 그들이 지지를 보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 일을 추진하는 쪽에서는 그야말로 천군만마의 힘을 얻 은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청류파의 또 하나의 특징은 그들이 고집이 세다는 것이다. "그는 호황이 천자위에 있는 이상 호황가를 절대 저버리지 않을 사람입니다 ." 라혼는 고학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눈치 챘다. 그리고 설화가 백호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인사들도 말의 진의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 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그는 쉽게 끌어들일 수 없다는 말쯤으로 해석했다 . 라혼은 고학의 설명에도 좀처럼 굳은 안색을 풀지 않았다. 사실 고학도 라혼에게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함께자리 한 중인들에게 이야기한 것이었 다. 주군이 라혼이 그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면 인물의 중량감 때문이라 도 명령권을 행사할 수 있었고, 만약 그를 숙청하게 된다면 그것이 어쩔 수 없었고 미리 마음에 준비를 해두라는 의미였다. 고학의 생각대로 라혼은 금영월에 대해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은섬충을 사용하면 간단히 해결될 문 제지만 라혼은 금영월 상장군을 존경했다. 그런 인물에게 일군을 이끄는 자 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군권을 내맡겼고, 그전에는 휘하장수들의 끈임 없는 간언에도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자신을 믿어주었던 사람이다. 그런 대 인(大人)중 대인(大人)을 은섬충이란 벌레의 힘으로 제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점이 금영월을 끌어들이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차라리 남례성을 포기할까? 어차피 남례성은 덤이었고 금 상장군과 이대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북지성에 거점을 마련하는 것이 나을 지도…….' 그때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금영월 상장군은 하남천원군 하남대원 수로써 남례성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서해수군통제사로 써 조정에 반기를 든 서해대수영의 거점인 남상이라면 하남천원군과 별도로 자신이 차지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라혼은 남례성보가 금영월을 선택하기 로 결정했다. 그러기 위해선 금 상장군은 열병식이 아닌 개선식에 주장(主 將)으로써 참석해야 했다. 남례성의 진토인들에게 누가 최고책임자인지 밝 혀두어야 남례성을 위해서도 자신을 위해서도 유리하기 때문이다. 생각이 결정되자 이내 라혼의 표정이 풀렸다. 그러자 봉수태수 돈석이 주위를 환기 시키며 봉수성 축제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늘어놓아 좌중을 화기애애 하게 이끌었다. 그렇게 하루를 소일하고 라혼은 군사로 삼은 고학과 모원만 불러 자신의 결론을 밝혔다. "남례성을 포기하신단 말씀이십니까?" "아니 남례성보다 금 상장군과 관계가 더욱 중하단 말이지." 고학은 새로운 주군의 모습에 은은히 감탄했다.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 독존(唯我獨尊) 하늘 위, 하늘아래 오직 나뿐'이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아니 그 말이 주군 라혼을 위한 말처럼 느껴졌을 정도였건만 그런 주군이 누군가를 존경한다고 말하자 진정 그 속을 모를 사람이라 생각하며 자신이 생각한 바를 진언했다. "그것은 주군의 뜻대로 하십시오. 어차피 호황가에 적을 두게 되니 싸움이 일어나더라도 호황가 내부의 일이 될 겁니다. 하니 금영월 상장군과 척을 질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하나 남상에 대하여 가진 정보가 없어 문제가 이 니 남상에 관한 정보를 모아 계책을 마련하겠습니다." "고대인 그렇지만 남례성은?" 그러나 남례성에 기반을 둔 열지족 추장의 딸과 결혼한 모원은 남례성을 포 기한다는 말에 적잖이 당황했다. "모원, 네 장인은 스스로 자신을 지킬 힘이 있다. 그리고 이해관계가 복잡 해지고 그것에 의식할수록 머리는 굳어지는 법이다." 모원은 주공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사실 메이를 아내로 얻은 후 열지족 전 사들의 태도와 열지족의 저력을 알게 된 이후 알게 모르게 열지족의 입장을 대변했다. 주군에게 자신의 가치는 머리이지 열지족과의 관계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초로역방의 전투이후 한 달간 긴 꿈을 꾼 것 같았다. 라혼은 자신의 마음에 불을 키는 점심언(點心言)에 모원의 표정에서 뭔가 깨달았다는 것을 짐작했다. 모원은 이제 23세의 젊고 혈기 넘치는 나이였다 . 그러나 그런 모원이 고학과 더불어 천하라는 장기판에 수를 생각하고 있 었다. 토금전장에서 천하에서 수집하는 모든 정보를 분석하고 있는 그 자리 에서 수십, 수백만리 밖의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엄청난 권력이었다. 다른 이 보다 한발먼저 알고 두발먼저 움직인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엄청나게 유리했다. 그러나 아무리 전환을 이용해 멀고 먼 곳의 일을 손바닥 보듯이 안다고 할지라도 직접보지 않은 이상 격차는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그런 의 미에서 모든 정보의 정점에 있는 자가 독선(獨善)에 빠지는 것은 매우 위험 했고 라혼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난세일수록 사람들은 자신을 지배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 난세의 중심 에 있었던 남례성의 백성들도 소 닭 보듯 하던 관부의 일을 대부분 비교적 상세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불과 수개월 전 봉수성에 발을 내디딘 한명의 풍운아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나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천자(天子)가 직접 임명한 장수의 목을 베어 봉수성을 잠시나마 불안에 떨게 했던 자. 난공불 락의 난관이며 보통 이레를 꼬박 걸어야 통과할 수 있다는 봉수삼관을 단 사흘 만에 돌파한 자. 반란 진토인들에게 배상금까지 받아낸 배짱 좋은 자. 5만 대군을 몰살시켜 사기가 하늘을 찌르는 열지족 대군을 단숨에 깨고 추 장의 항복과 충성을 받아낸 자. 하나같이 전설이 될 만한 업적을 이룬 자가 봉수성에서 개선행군을 한다하니 백성들이 흥분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뭐야? 그럼 백호나한의 흑장들은 하나도 안 나온다는 거야?" "아마도……. 내 듣기로 아직도 내륙 깊숙한 곳을 뒤지고 있다하니 개선식 에 참가하기 힘들걸?" "개선식에 흑장들이 빠지면 술 없는 잔치나 마찬가지 아냐?" "엄밀히 따져서 개선식이 아니라 그냥 열병하는 거라던데?" "열병?" "거 있잖아! 경극 같은 곳이나 유세객들의 옛 이야기 속에서 백만대군을 모 아놓고 호령하는……." "백만대군이라, 그것도 볼만하겠군. 하지만 봉수성에 군사들이 그렇게 많았 나?" "글쎄? 한 십만쯤 되지 않을까?" 오랜 기간 큰 전란 없었기에 옛 이야기 속에 다소 허풍끼가 다분한 유세객 들의 이야기를 근거도 백만대군이니 10만 대군이니 하며 서로 의견을 나누 는 사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쪽에서 얼굴을 구기며 홀로 끙끙대는 사람 이 있었다. "우씨, 뭐가 이렇게 많은 거야?" 그는 다름 아닌 잔폭광마였다. 대장이 폐관을 풀고나오자 대장의 귀에 들어 가기 전에 외상값과 고리대로 빌린 은자를 해결하기 위해 굴러가지 않는 머 리로 빚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하고 또 계산했다. 그러나 매번 계산할때마다 결과는 달랐지만 어찌된 것이 점점 불어나기만 했지 줄어들지는 않았다. 처음 은 1천 냥이란 거금이 나와 계산을 잘못했을 것이라며 다시 계산에 들 어갔다. 그러나 아까 생각나지 않는 외상값이 포함시키니 이번에 1천2백 냥 이 넘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술집 구석에 앉아 계산에 계산을 거듭해 최종 적으로 은 3천 냥이라는 어마어마한 거금을 한 달 조금 넣는 기간에 사용했 다는 결론이 나왔다. 잔폭광마의 한 달 녹봉이 은자로만 5냥임으로 문제가 심각해도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애들 데리고 한 바퀴 돌아볼까?" 잔폭광마는 폭마방 출신 수하들과 계주에서 마적행(馬賊行)을 심각하게 고 려했지만 얼핏 생각해도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그러나 궁(窮)하면 변(變) 한고, 변(變)하면 통(通)한다. 했던가? 그때 마침 잔폭광마의 시야에 무척 고급스런 검은 학창의(鶴莎衣)에 청수(淸秀)한 노인이 먹은 음식 값을 지불 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입고 있는 옷과 색을 통일하였는지 묵직해 보이 는 노인이 든 검은 주머니 속에는 누런 황금이 가득 했다. 그 누런 황금사 이로 은 조각하나를 꺼내 음식 값을 치르는 모습에 잔폭광마는 눈이 뒤집혔 다. '저 주머니에 든 것이 전부 황금이라면 20냥 쯤 되겠군. 일단 그것으로 빚 쟁이들 입막음 정도는 할 수 있을 텐데…….'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 일어서서 손을 내미는 술집 주인장의 살인적 이 고리눈으로 노려봐준 후 흑의노인의 뒤를 따랐다. 뒤만 졸졸 따른다면 금세 티가 나겠지만 잔폭광마는 어려서부터 이런 일에 익숙했다. 적당히 거 리를 두고 상대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걷는지 관찰하고 목적지를 예상한 다 음 샛길로 먼저 가서 사냥감의 동태를 살피면 되는 것이다. 그럼 상대는 자 신이 미행당하는지도 모르고 방심하는 순간 잽싸게 쓱싹해치우는 것이다. 그러나 잔폭광마는 처음부처 끝까지 자신의 모습을 저 노인에게 보이지 않 을 필요가 있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워낙 개성적인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놓고 하는 마적 질을 선택(?)했는지도 몰랐다. '어라? 알아서 으슥한 곳으로 들어가네? 나야 고맙지. 가만있자 저 길은 이 쪽으로 담을 넘으면 거사(?)를 할 적당한 곳이 나오렸다.' 이미 수개월간 머물던 봉수성이었다. 거기다 한 달이 넘도록 숨어있는 도박 장, 유곽을 보물찾기 하듯 찾아다니느라 어느 세 봉수성의 샛길을 손바닥 보듯이 알게 된 잔폭광마였다. 절정이 이른 고수답게 육중해 보이는 겉모습 과 다르게 날렵하고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담을 넘은 잔폭광마는 조용히 사냥감을 기다렸다. 그리고 사냥감이 내는 기척에 새삼스럽게 흥분하며 기 회를 기다렸다. '오랜만이라 떨리는 걸. 일단 사냥감을 기절시키고 최대한 빠르게 물건을 빼서 튀는 거야. 식은 죽 먹기지.' 그리고 집과 집의 틈새에 용하게도 거대한 몸을 숨긴 잔폭광마는 사냥감이 좁은 시야를 지나자 부드럽게 틈새에서 빠져나와 흑의노인의 뒷목으로 소리 없이 손을 뻗었다. 그러나……. "호오~! 이놈 봐라?" "억!?" 잔폭광마는 마치 자신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물처럼 자신의 금나수(擒 拿手)를 빠져나간 흑의노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생긴 것은 마적두목처럼 생긴 놈이 이렇게 조잔한 짓거리라니 덩치가 아깝 구먼." "뭐, 뭘 말이오?" 잔폭광마는 예리하기 그지없는 흑의노인의 안목에 당황하며 어떻게든 일을 수습하려 했다. 지금 잔폭광마의 머릿속에는 대장이 불같이 화내면서 일벌 백계(一罰百戒)한다며 자신의 목을 자르는 장면이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보아하니, 강호에서 한가락 하는 놈 같은데. 넌 누구냐?" "그, 그걸 알아 뭘 하시려고…." "뭐하긴 소문내야지 네 상판을 보니까 조금만 수소문해도 금세정체를 알 수 있을 것 같으니 피고하게 하지 말고 좋은 말할 때 불어!" "헉!" 죽는 거야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에 퍽치기를 했다는 소문이 도는 것 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잔폭광마는 이성을 잃었다. "노인장, 미안하지만 여기서 죽어줘야 갰소." "허어~! 이놈 보게?" 흑의노인은 잔폭광마의 웅조수(熊爪手)을 표홀하기 그지없는 신법으로 피하 며 살살 장소를 이동했다. 그러나 잔폭광마는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 자 안달이 난 나머지 흑의노인의 그림자를 좇았다. '이놈 봐라? 심마지경(心魔之境)에 든 마도고수인 줄 알았더니 이건?' 흑의노인. 흑산자는 라혼이 귀왕곡을 떠난 이후 곧바로 귀왕곡을 벗어났다. 토지신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겨우 귀림을 벗어나 주공이 있는 봉수성에 도 착했다. 더운 날씨에 목이 타서 잠시 술집에 들렸는데 꼬리가 붙어버린 것 이다. 평소엔 흑산 흑부에서 거의 밖으로 나오지 않은 강시지존이지만 강호 에 다서면 천하가 좁다하며 질타하는 흑산자였다. 남례성에도 몇 번 발걸음 을 해보았고 또 남례성은 오랜 친우라 할 수 있는 천독지존(天毒至尊) 독신 (毒神)의 거처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니 자신을 따라붙는 꼬리표가 정 파(正派)의 떨거지들인지 자신을 알아본 그 지방의 패자(覇者)가 붙인 감시 자인지 파악하는 일은 일도 아니었다. 그러니 놈의 어설픈 미행은 금세 탈 로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는 행동이나 느껴지는 왠지 기도와 다르게 날카롭지 못한 눈빛에 심마(心魔)에 빠진 흑도고수인 것으로 판단했다. 해 서 몇 마디 말로써 도발하여 무공의 내력을 알아보려 했으나 알고 보니 흑 산자가 익히 잘 아는 공력(功力)이었다. '여의금강공! 주공의 수하가 어째서?' 여의금강공의 특징은 어떤 잡다한 초식에도 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적 두목같이 생긴 놈이 쓰고 있는 패도적이고 파괴적이어서 사파(邪派)계열의 것이지만 여의금강공은 정종현문의 그것에 가까웠다. 그러나 여의금강공( 如意金剛功)의 강자결(强字訣)은 놈의 패도적인 초식과 잘 어울렸다. '주공의 수하가 맞다면 같은 식구니 적당하게 주물러주는 선에서 끝내야 겠 군.' 무공을 수련하는 과정에서 절정에 순간 찾아오는 것이 심마였다. 이는 공력 이 스스로 감정(感情)에 동조하는 현상을 말하는데 이른바 마음이 일으키면 공력이 자연이 발휘되는 경지였다. 그러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상태에 서 이 경지에 이르면 공력이 마음이 가는 데로 흘러 성정(性情)이 변한다. 이때 마음속에 불같은 분노를 품고 무공을 시전하면 위력이 패도적이고 강 렬해 흑도에서는 분노를 허용했다. 그러나 그것은 종국엔 자기 스스로를 망 치는 것임으로 분노를 이용할지라도 조절이 매우 중요했다. 그 순간을 재대 로 넘기지 못하면 바로 주화입마(走火入魔)하여 폭주하는 공력에 혈도가 막 혀 폐인이 되고 심하면 죽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에 따라 정도의 차가 컸다. 어떤자는 심마에 들어 희대의 살인마가 되기도 하고 어떤 자는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둔 여인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에 이성을 잃고 그 여 인을 범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람은 때론 부도덕한 생각을 할 때가 있는데 심마에 빠지면 그것을 바로 실행에 옮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보통 때는 평소와 같아 이 시기가 되었다고 판단되면 심산유곡(深山幽谷)을 찾아 마음 을 비우는 훈련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심마에 들었는지는 안 들었는 지는 자기 스스로 판단하기 어려웠기에 적당히 훈계하여 곁에 두고 지켜볼 생각을 한 것이다. "구음귀조(九陰鬼爪)!" "금강만상파(金剛萬象破)!" -까강~! "이놈이~!" 흑산자가 손가락을 갈퀴처럼 하여 거무스르한 조기(爪氣)를 사용하자 공력 파해(破解)하는 금강결의 오의가 들어간 금강만상파을 시전했다. 그러자 실 같은 열 가닥의 조기는 단숨에 가닥가닥 깨져버렸다. 그러나 강시지존과 잔폭광마의 차이는 너무 컸다. 구음귀조 초식으로 멋지게 마무리하려던 흑 산자는 조기가 깨지며 막히자 곧바로 박투술에 들어갔다. 강호에 널리 알려 진 강시권(畺屍拳) 초식을 사용해 초근접 박투에 들어가자 잔폭광마는 주군 인 대장 말고 다른 사람에게 처음으로 비오는 날 먼지 나도록 두들겨 맞는 경험을 했다. "얼마라고?" "30냥." "은 30냥이면 반년 치 녹봉인데 그걸 한 달 만에 까먹었다는 건가?" "저어……." "뭐야? 뭐가 또 있는 거냐?" "은이 아니라 금인데요." 금은 은보다 1백배의 가치가 있었다. 그러다는 것은……. "3천 냥을 한 달 동안 까먹었다고?" 3천냥이면 라혼이 백호수장이었을 때 백호금군의 1년 예산이었다. "흑사!" "말씀하시오. 주공!" "천혈강시의 위력이 그렇게 대단하다하는데 이정도면 훌륭하지 않습니까?" "흐음~!" 잔폭광마은 대장의 고요한 말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자기를 새삼스럽게 위 아래로 훑어보는 강시지존의 시선에 오금이 저려왔다.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고 접시 물에 빠져죽을 수도 있다고 했던가? 곤란 함을 해결해줄 봉이 그 무섭다는 강시지존 흑산자였다는 것은 잔폭광마는 재수가 없어도 그렇게 없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잔폭광마도 배워 익혀두 고 있는 강시권이 강시지존의 손에서 펼쳐지자 일권을 맞을 때마다 뼛골에 까지 충격이 전해졌는데 맞으면서 졸도하고 다시 그 고통에 깨어나 다시 기 절 할 때 까 맞아야 했다. 그러나 전신이 쑤시고 결리는 것보다 산체로 강 시가 될 운명이 될지도 모른다는 상황 이 잔폭광마를 더 괴롭혔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강골에 절정의 내가고수 몇 가지 흠이 있으나 나름대로 재목입니다. 주공 철혈강시를 만드는 일은 까다로우니 차라리 귀장(鬼將) 을 만들어 보는 것이 어떨까요." "귀장이라……." 진지하게 심사숙고(深思熟考)하는 대장의 모습에 일이 점점구체성을 띄어가 자 차라리 스스로 죽음을 결심하는 잔폭광마였다. "대장, 제가 죽음으로……." -퍽! -쿠엑! "그래 아주 죽여주마! 오지분시(五支分屍)!" 그리고 잔폭광마는 대장이 진짜 화가 나면 목이 떨어지고 팔다리가 잘린다 는 것을 몸으로 직접체험을 통해 깨달았다. 그리고 라혼의 집무실에 함께 있던 초초와 지심은 양팔과 양다리, 그리고 머리가 몸통에서 한순간에 불리 되는 모습에 창백하게 질리며 몸이 굳었고, 어지간한 흑산자 또한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한사람 어렸을 적 해노야가 오빠들을 어떻게 수련시켰는 지 훔쳐본 경험이 있는 한포포는 태평스런 어조로 차를 마지며 중얼거렸다. "어머. 대가 진짜 화 많이 났나보네? 그래도 몸통은 으스러트리지 않는 걸 보니 익숙하지는 않은 모양이네……." 남례일족(南禮一族) 라혼은 향당의 석밀을 가지고 중경의 토금전장을 찾았다. 당금 대륙상계를 위진 하는 토금전장의 본장은 그것을 증명하듯 금의화복(錦衣華服)을 차려 입은 상인들로 북적였다. 사람들이 말하길 토금전장과 거래를 하지 않는 장 사꾼은 천하에 없을 것이라 했다. 천하에 거상(巨商)이라 자부하는 사람들 도 토금전장이 주축으로 한 대상계(大商契)에 계원(契員)이 되어 웬만한 거 래대금은 토금전장의 장부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관부에 은자로 세금을 낸 것을 계기로 관부 또한 계원으로 받아들여 대륙천하의 상계에 유일무이( 唯一無二)한 거목이 되어있었다. "천하의 상인들이 여기에 다 모인 듯하군."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하나 저들이 천하 상계를 주도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맞는 것일 겁니다." 라혼은 토귀의 자신만만한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돈이란 언제나 흐르는 것 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가치가 있는 것인데 토귀는 천하의 돈의 흐름 을 장악한 것이다. 원주를 중심으로 한 중원상권, 후려 남경을 중심으로 한 남해상권 그리고 인시드 남주무역항로와 북주무역항로의 상권이 있었다. 기존에 대상(大商)들은 각자의 상권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에서만 활동했다. 그러나 토금전장은 달랐다. 천하전역을 무대로 하여 입지를 넓혀왔고 대상 계를 열면서 토금전장을 통해 황금을 동경에서 서경으로까지 가지고 갈 필 요가 없게 만든 것이다. 동경 토금전장 분장에 거액의 은자를 맡기고 원주 중경에 와서는 그것을 찾아 사용했다. 아니 물건을 인수하고 장부상으로 자 금을 빼서 상대에게 지불하면 되었기에 거금을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어졌 다. 한번 원거리 거래를 하려면 상단을 조직하여 그곳에 가서 팔 상품을 들 고가 그것을 팔아 그이익금으로 다시 물건을 사들여 돌아왔다. 그러나 이것 은 그때그때 시세차가 존재하기에 확실한 상품이 아니면 손해를 보기 일 수 였다. 그러나 토금전장의 대상계를 이용하면 천하의 어디든 토금전장의 전 부(錢簿)만 가지고 재빠르게 가서 물건을 사서 표국의 도움을 받아 가지고 오면 되었다. "주공, 여기 있습니다." 작달막하고 둥근 몸매의 둥글둥글한 얼굴과 가는 눈매의 토귀는 수백명 호 장무사들이 지키는 자신의 집무실 한가운데 나타난 사내를 보고 깜짝 놀랐 다. 하나 그 사내가 주공인 백호나한임을 알고는 길게 읍(揖)하며 반갑게 맞이했다. 그리고 토금전장에서 오직 자신만이 볼 수 있는 토금전장의 현재 상황을 개략적으로 알 수 있는 극비장부를 내놓았다. 라혼은 토귀가 내미 는 장부를 죽 훑어보고 장부를 덮었다. "5백만 냥이나 손해를 보았군. 이대로 라면 원금을 회수하는데 만도 십 수 삼 년은 걸리겠어." "예, 그렇습니다. 하나 태회진에서 본격적으로 철기가 생산되면 어느 정도 보정을 될 겁니다." 말은 거금을 손해 보았다고 하지만 표정은 그 반대였다. 라혼은 토귀에게 황금 1천만 냥을 주어 은행을 조직하게 했다. 그리고 그중 5백만 냥이 중원 11주의 관부에 수조권을 사들이는 자금과 각지에 토금전장의 지부를 세우는 데 투입되었다. 이로써 토금전장은 천하저역을 시장으로 하는 상권과 십이 진가의 운용자금을 유치함으로써 단돈(?) 황금 5백만 냥으로 천하의 자금흐 름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자금의 흐름을 알면 각 세력의 군비가 어 느 정도 되는 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되고 토금전장에 속한 상인들이 주 요거래처로부터 얻어들은 정보는 살아있는 정보들 이었다. 권력자와 황금을 가진 자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상경에 토금전장의 본점을 새로이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대상계(大 商契)와 별도로 우리 토금전장이 취급하는 상품을 거래하는 부분을 그쪽으 로 옮길 생각입니다. 백호둔도 그쪽에 있으니 말입니다." "좋아! 그보다 투함의 작도(作圖)를 구해보도록. 나를 돕는 토지신이 그것 을 원하더군." "구해보겠습니다!" "그리고 향장자가 석밀을 팔기위해 원주로 오고 있는 중이다. 철기의 판로 와 각 세력들과 안면을 익혀두는 것을 소홀히 하지 마라." "이미 전환으로 들어 알고 있습니다." 라혼은 모든 일을 기대 이상으로 처리하고 꼼꼼하게 챙기는 토귀의 능력에 감탄 했다. 황금 1천만냥은 천하를 두어 번 들었다 놨다 할 수 있을 정도 거금이었다. 웬만한 대상인이라도 그 엄청난 무게에 치어 정신 못 차리고 지리멸렬할 정도의 황금을 주무르는 배포와 능력은 가히 하늘에서 내려 받 은 재능이라 할 수 있었다. "수고했다!" "고맙습니다. 상인으로 들어선 이상 천하 상계를 주무르는 것은 제왕이 패 업을 이루는 것이나 마찬가지 인데 오히려 제가 감사할 따름 입니다." 라혼은 그런 토귀에게 귀림 드워프들이 만든 5백여 개의 전환을 건네주며 다시 한 번 치하했다. 그리고 앞으로 라혼이 나설 필요 없도록 하는 상망을 조직하는 문제를 이야기 하며 정원으로 나와 에텔 스페이스에서 목우유마 를 몇 개 꺼내놓았다. "이것은?" "목우유마다. 수레를 끌거나 하는데 사용하면 된다." "……." 라혼이 꺼내놓은 목우유마는 높이가 어른 가슴께 오고, 너비가 보통사람이 양팔을 벌린 정도 되었다. 길이는 그보다 길어 전체적으로 커다란 나무궤짝 을 연상시키는데 양쪽에 5개의 바퀴가 무한궤도에 있는 형상이었다. 라혼은 목우유마를 손수 조작해 그것들을 움직이며 설명했다. -스르르르~! "이것들은 먹지 않아도 되고 쉴 필요도 없지 속도도 말이 속보로 달리는 정 도로 빠르다. 힘 또한 소 스무 마리가 내는 힘과 같다." "대, 대단하군요." "그러나 사람이 타고 직접 몰아야 하는데 이러게 몰면 된다." 라혼은 토귀를 목우유마에 태우고 토귀에게 목우유마를 모는 법을 가르쳤다 . 두 개의 <ㄱ>모양의 막대로 하는데 오른쪽은 오른쪽 궤도를, 왼쪽은 왼쪽 궤도를 조절하는 것으로 당기면 뒤로 가고 밀면 앞으로 가는 방식이었다. 즉 동시에 밀면 곧바로 나아가고 당기면 뒤로 가는 것이다. 방향을 틀려면 막대를 엇갈리게 하여 궤도의 속도를 다르게 하면 되었다. 원래는 그냥 보 통 수레바퀴를 사용했으나 라혼이 다리가 있어 수레로 이용하기 어려운 곳 을 지날 때 쓰이는 목우를 이야기하자 드워프들이 바퀴부분을 무한궤도로 만들어 가파른 언덕이나 지형이 험한 지역을 갈수 있게 만들었다. 사실은 다리를 가지고 사람이나 실제 짐승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이게 하기에 목우는 한계가 있었다. 차라리 어느 정도 자아가 있어 스스로 움직이는 골렘이라 면 가능할지 모르나 하나부터 열까지 사람의 손에 의해 움직이게 하려면 다 리달린 목우는 만들어 놔도 사람이 사용하지 못했다. "나는 이것들을 대량으로 만들 생각이다. 그러려면 필요한 것이 있다." 라혼은 유마를 조작하는 것을 멈추고 토귀에게 역석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재료가 적힌 목록과 견본품을 내밀었다. 목우유마는 바로 역석과 역석의 힘 을 발현하는 기관으로 이루어져있었다. 다른 재료는 나무나 쇠, 정도였기에 비교적 구하기 쉬웠지만 역석은 아니었다. 역석의 문제만 해결되면 역석과 역석의 힘을 발현하는 주요기관 등은 드워프들에게 맡기고 그 외 부분은 원주에 공방을 두어 만들 생각이다. "하나같이 귀한 물건들이군요. 하지만 곧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좋아. 그리고 이것은 목우유마의 제작도다. 상경 근처에 공방을 만들어라 조립은 이곳에서 하게 할 생각이니." "이거야! 만일 이것이 대량으로 만들어진다면 천하에 풀린 5백만 냥은 금세 회수되겠군요." "……." 라혼은 토귀의 말에 퍼뜩 떠오른 것이 있었다. 사실 라혼이 목우유마대한 책을 발견하고 생각한 것은 궁극의 전투 병기인 마장기(魔壯機) 탈로스(Tal os) 제작과 제작비용의 절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찌어찌하다보니 목우유 마의 본래목적인 보급품을 적은 인원으로 수송하는 기능이 필요하게 되었다 . 그것은 다름 아닌 감곡의 사탕수수를 추수하면서 목우유마를 이용하면 좋 을 것이란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이것을 토귀에게 보여준 이유는 라혼자신 이 직접 천하를 오가지 않고도 상품을 무역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현재 원거리 상행에 필수적인 말이 징병령과 함께 관부로 모두 들어가 군마로 이용되자 짐말의 가격도 덩달아 뛰었다. 그래서 그 말을 대체하기 위해 대 량으로 만들겠다고 한 것인데 철저한 상인인 토귀는 그것은 훌륭한 상품으 로 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토귀가 역석을 만들 재료를 얼마나 많이 모아 줄 수 있느냐에 달린 문제였다. 거사일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시화는 마지막으로 주인의 집을 찾았다. 그동 안 주인의 마음에 평정을 깨지 않기 위해 발걸음을 하지 않았으나 이제 때 는 오고야 말았다. "시화인가?" "그렇습니다. 대야!" "들어오지 말고 잠시만 기다려라." "예."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남례일족의 대야가 머물고 있는 초옥의 문이 열렸 다. 그리고 시화의 눈에 깡마르고 거무죽죽한 피부의 추레하기 그지없는 사 내가 모습을 나타냈다. "대, 대야!" "내 모습이 그렇게 이상한가?" "대야 눈은?" "자객으로써 예기를 다 없앴는데 눈빛만은 이 모습에 어울리지 않더군." 너무도 고요한 어투였지만 시화는 대야가 얼마나 뼈를 깎는 수련을 하며 예 기를 갈았으며 그 예기를 감추기 위해 또 얼마나 고초를 겪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가세! 그 친구가 보고 싶구먼." "대야!" 남례일족의 대야는 자객이다. 그는 남례가 남례성이라 불리기 이전 도남인 이었던 남례사람들 위해 싸웠다. 비록 각 부족 간에 다툼은 끊이지 않는 남 례성이었으나 그것은 남례성의 문제였다. 옛 부터 중주의 힘은 강대했다. 그리고 그 강대했던 힘이 한꺼번에 남례성으로 쏟아져들어 왔다. 그들에게 남례성의 사람들은 미개인이었다. 갖은 방법으로 착취하고 재산을 빼앗았다 . 그리고 거기서 작고 미약한 저항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조정의 군사들이 남례성을 떠나고 저항의 시작은 중주의 무림인들로부터 저항으로 시작되었 다. 남례성에 들어와 입지를 넓히려던 많은 무림세력들이 수많은 대야와 소 야들의 칼끝에 피를 뿌리며 사라져갔다. 그래서 세간에 알려지기를 남례일 족은 강호무림에 적을 둔 세력이라 했다. 강호의 무림세력은 그렇게 자파의 고위고수가 당하고 혈채(血債)를 갚기 위해 몇 명의 고수를 보냈지만 그들 역시 남례성의 밀림을 헤매다 종적을 알 수 없게 되기 일 수였다. 그러나 조정이 보낸 관부는 달랐다. 그들은 대병을 동원할 수 있었다. 무림세력은 조정의 눈치를 봐야 하지만 조정은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대군을 보낼 수 있 었다. 그래서 조정의 관리들이 탐관오리(貪官汚吏)가 아니라면 되도록 충돌 을 피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남례성인들의 봉기에 한 가닥 기대를 걸고 있던 남례일족이었으나 그 거세고 천지를 태울 것 같은 불꽃이 촛불의 불 꽃처럼 허망하게 꺼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대야는 선택했다. 그 불꽃이 꺼 트린 장본인을 없애기로……. 그리고 대야 하수는 자신의 목숨으로 어딘가 에 불씨가 남아 천지를 태울 수 있을 불꽃을 다시 만들기를 꿈꾸었다. -으아아아아악! 잔폭광마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그리고 팔과 다리, 그리고 목이 몸통 에 재대로 붙어있는지를 확인했다. "휴우~! 재대로 다 붙어있군. 뭔 놈에 꿈이 그렇게 실감 난거야? 죽는 줄 알았네." "고놈, 덩치는 산만한 놈이 기가 그렇게 약해서야!" "흐억~!" 흑산자였다. "노, 노인장은?" "거참 신기하네? 호오!" 흑산자는 잔폭광마의 눈을 까보고 팔다리의 이음새 부분을 보며 연신 감탄 성을 흘렸다. 그러나 생으로 강시가 되는 것이 싫어서 대장을 따랐던 잔폭 광마였다. 그런 의미로 만만치 않은 노인-사실은 무섭다.―은 잔폭광마로썬 기피하고 싶은 인물이다. 그러 흑산자가 자신의 몸을 살피며 감탄하는 것 은 오금이 저릴 만한 일이다. "뭘, 뭘 하는 거요! 저리가요. 난 강시 같은 거 되고 싶지 안 단말이오." -딱! 흑산자는 잔폭광마의 헛소리에 뒤통수를 시원스레 후려갈기며 말했다. "이놈아! 내가 피에 환장한 대마두냐? 생사람 잡아서 강시 만들게? 난 이제 껏 생으로 강시를 만든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이런, 말할 말로 할 것이지 왜 장부의 머리를 함부로 때리는 거야!" "어쭈~!" 흑산자는 반항하는 잔폭광마의 명치에 팔꿈치를 밖아 넣는 것으로 타작을 시작했다. 흑산자는 그제 있었던 주공의 무시무시한 징계모습과 살려달라는 말 대신 곱게 가게(?) 해달라고 애걸복걸하는 이놈을 살지도 죽지도, 그리 고 기절도 못하며 난도질당하고도 멀쩡한 그의 모습에 호기심을 느꼈다. 그 리고 너덜너덜해진 잔폭광마의 팔다리를 주워 방부처리를 하고 잔폭광마의 빚을 책임지는 조건으로 그를 샀다. "그러니까 대장이 절 팔았단 말입니까?" "그런 셈이지." 시원스런 매타작의 결과로 잔폭광마는 딱딱한 돌바닥에 바닥에 무릎 꿇고 있었고 흑산자는 평상에 편안하게 앉아 잔폭광마에게 주공이 용서해준 이유 를 설명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수하를……." "이게 뭔지 아냐?" 대장의 처사에 투덜거리던 잔폭광마는 흑산자가 내민 저민 고기를 보며 흑 산자의 노망기를 의심했다. 그러나 흑산자의 말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거 네 오른 팔이다." "……." "그리고 요거는 네 왼다리인데 어떠냐? 음? 거참 덩치는 산만한 놈이 담이 이리 약해서야. 쯧쯧쯧쯧……." 흑산자는 앉은 그 자리에서 눈을 까뒤집고 기절한 잔폭광마를 보며 혀를 찾 지만 그저 하룻밤 꾼 악몽이라 굳게 믿고 있었던 잔폭광마는 자신이 어렸을 독사에게 물렸던 흉터가 선명한 다리를 보고 당시 있었던 일들이 기억이 생생히 떠오르자 정신이 그것을 감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남례일족(南禮一族) 하남대원수(河南大元帥) 상장군(上將軍) 금영월(禽英越)은 대장군 라혼의 편지를 받고 봉수성으로 왔다. 편지에는 당금의 천하정세와 라혼의 입지 그 리고 앞으로의 계획이 대략적으로 적혀있었다. 어찌 보면 상관에게 경과보 고와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하는 보고서와 같은 편지의 말미에 글귀가 결정 적으로 금영월의 마음을 움직였다. <天空海闊, 海納百川. - 천공해활, 해납백천.> - 하늘은 그 끝이 없고, 바다는 매우 넓어, 모든 강을 받아들인다. 다소 무례한 글귀였다. 어찌 보면 자신이 속이 좁음을 비꼬는 말이기 때문 이었다. 그러나 글귀 속에 바다(海)라는 글자가 연거푸 사용된 것은 그만한 속뜻이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라혼 대장의 직책은 서해 수군통제사니 이것은 그가 남례성엔 뜻이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히는 말이 다. 그러니 뒷방 늙은이 흉내를 내서는 호전적인 진토인들을 다스릴 수 없 다는 뜻이 되었다. 이것은 편지의 전체적인 내용을 보면 누구나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다. 금영월이 수백기의 호위군사와 함께 봉수성에 도착하자 미리 연락을 받은 라혼과 봉수태수가 마중 나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금 상장군." "허허허허, 팔자 좋게 폐관에 들었다 들었는 데 진전은 있었는가?" "아닙니다. 사실은 폐관을 핑계 삼아 여기저기 돌아다녔습니다." "그래서 그렇군." 금영월이 뭔가 알았다는 어투로 말을 하자 라혼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 다. "그동안 겪어보니 자네는 귀찮고 지루한 일은 거의 하지 않더군. 그래서 이 번엔 남례성을 내게 떠넘기는 것이 아닌가?" "홍홍홍홍, 역시 금 상장군이십니다. 과연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습니다. 홍홍홍홍!" 금영월의 라혼에게 대한 평가를 들은 돈석은 그동안의 일을 머릿속에서 나 열하며 연신 '홍홍'댔다. 그 능력과 역량이 뛰어나 신중한 것 같아도 한번 손을 쓰면 대단한 일을 단숨에 이루고 그 뒤처리는 언제나 수하들에게 떠넘 기기 일 수였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봉수성의 위병대장 홍대보의 목을 친 것은 어쩌면 그와 암중으로 기세싸움이 귀찮고 피곤 할 것이기에 그랬는지 도 몰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백호나한이 마음만 먹었다면 홍대보 정도 인물 은 '들었다. 놨다.'하며 제압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제 거처로 모시겠습니다. 상의드릴 일도 있으니 말입니다." "홍홍홍홍, 그리고 라혼 대장군이 만든 빙과라는 것도 맛보시구요. 아주 별 미입니다." "호오, 라혼대장에게 요리하는 재주도 있었나?" "저는 웬만한 요리는 다 할 줄 압니다. 한때 불목하니 노릇도 한 적이 있습 니다. 다른 건 몰라도 밥 하나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잘 짓지요." "그런가?" "홍홍홍홍, 천하의 백호나한이 불목하니였다 믿을 수 없군." 라혼은 금영월의 태도에서 자신을 꺼려하거나 거리를 두려는 기색을 찾아볼 수 없자 마음이 기꺼워졌다. 만일 그가 불편한 마음을 먹었다면 겉으로 내 색하지 않더라도 라혼이 그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거처로 자리를 옮긴 라 혼은 금영월에게 그와 이해관계가 얽힌 몇 가지 비밀을 털어놓았다. 포포와 초초의 신분, 그리고 호황가의 비선조직인 호영기와 귀호기와 있었던 일. 그리고 현재 호황이 자신을 자신으로 사람을 알고 있으며 금영월을 후견인 으로 판당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견까지 이야기 했다. 이 모든 사실 을 알게 된 금영월은 역시나 하는 투로 투덜거렸다. "역시 남례성은 이미 자네 것인데 내게 관리를 떠넘긴 것이 맞았군. 상관인 나도 이렇게 부려먹으려 드는데 수하들은 어떨꼬." "홍홍홍홍, 금상장군의 말이 맞습니다. 수군을 맡은 장상도 그렇고, 고학이 나 모원도 그렇고 백호영의 백호십일걸도 하나같이 혹사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지휘해야하는 라혼 대장군은 한 달이 넘도록 자릴 비우기가 예사니 말도 마십시오. 지금에사 하는 말이지만 금 상장군이 이곳에 도착하 기 전까지도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한 달간 사라지고 자리에 없 었습니다. 홍홍홍" "혹시 천하에서 제일가는 미인이라는 마누라 얼굴 보러 그러는 것이 아닌가 ?" "쿨럭~!" 라혼은 봉수태수 돈석의 입담에 고소를 짓다가 금영월의 예리한 질문에 마 른기침을 했다. 금영월은 그런 라혼을 농으로 한 말이 진짜가 아닐까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라혼은 그런 금영월의 시선을 의식하며 내일 아침 열 리는 열병식으로 화제를 옮겼다. 열병식(閱兵式)은 군사를 정렬시켜 열병관 으로 하여금 그 부대의 앞뒤를 돌면서 위용(威容), 사기 등의 상태를 시찰 하는 행사다. 당연이 공식적으로 봉수성을 책임진 라혼이 행사를 명하고 군 사들의 사열을 받는 것은 필요하고 당연한 조치였다. 그러나 일일 커진 것 은 백성들이 생각하기에 이것은 사실상 남례성을 장악한 최고 실세의 행사 였다. 그러니 개선행군이니 규모가 십만이니 백만이니 하는 말이 돌아 일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른 것이다. 하지만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는 말이 있었 다. 봉수성의 백성들을 위무하고 군사들의 사기를 높일 기회를 차버리는 짓 은 어리석은 짓이다. 하지만 거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라혼의 상관이지 공 식적으로 남례성의 봉기를 해결하고 남상을 토벌하는 책임을 맡은 하남천원 군 하남대원수 금영월이었다. 남례성을 맡아 관리하는 입장인 그에게 규모 가 커져버린 봉수성의 열병식은 결코 이롭지 않은 행사였다. 이미 소문이 나기를 남례성의 반란을 완전히 토벌한 후 열리는 개선장군의 개선행군이라 났기 때문이었다. 이는 사실상 종이호랑이인 금영월을 허수아비로 만드는 행사인 것이다. 그러나 라혼의 제안처럼 라혼이 군사들을 이끌고 봉수성의 대로를 지나 성 밖 평원에 도열하여 단(壇) 아래에서 하남대원수인 금영월 에게 사열하면 금영월의 권위가 새로 정립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흐음, 아무것도 한 것 없이 공을 가로채는 기분이로구먼." "하지만 필요한 일입니다. 진토인들이 제게 승복했지만 상장군께는 승복하 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상장군께 머리를 숙이는 모습을 보인다면 승복 까지는 모르지만 상장군의 권위는 인정할겁니다." 금영월은 언제나 솔직한 라혼의 말에 쓴 웃음을 지었다. 자신은 열지족 추 장 소노리에게 대패하여 하남천원군을 위급지경에 빠지게 했고, 라혼대장은 그런 하남천원군을 수습해 소노리를 제압했으니 당연히 비교가 되고 대하 는 데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이 그대로 숨김없이 말하니 쓴웃 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내 정색을 하고 물었다. "라혼대장, 도대체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뭔가?" 라혼은 금영월의 물음에 서슴없이 대답했다. "제가 금 상장군을 존경해서 입니다." "……." "……."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저만의 이유입니다. 묻지 말아주십시오." 금영월은 라혼의 말에 코끝이 찡해지며 가슴이 뛰었다. 천하의 기재이자 개 세영웅(蓋世英雄)이라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지금 자신을 존경한다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금 상장군도 어느 정도 감지하고 계시겠지만 저는 여기저기 벌이고 있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니 신경 써야 하는 곳이 적을 수로 좋은데 남례성은 상 장군이 계십니다." "자네가 벌이고 있는 일을 내게 말해줄 수 있나?" "원하신다면 말씀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르고 계시는 것 이 저나 상장군에게나 이로울 겁니다. 나중에 다 알게 될 일입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궁금함을 잠시 접어두지. 그보다 이 빙과라는 것 참 별 미군, 좀 더 만들어주게나." 모든 이야기가 끝나자 라혼은 한포포와 초초, 지심, 그리고 메이 등 집안의 식구들을 불러 빙과를 대접했다. 어느새 빙과는 라혼가의 명물이 되어 있 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시간이 흐르고 외유를 나갔던 흑산자와 잔폭광마가 주뼛거리며 방안으로 들어서자 라혼은 재차 빙과를 만 들었다. 그리고 아침. 열병식의 주장(主將)이 하남대원수 금영월로 바뀌자 라혼은 직접 군사들을 이끌기 위해 금영월보다 일찍 거처를 나서서 봉수성 위병들 의 병영(兵營) 연무장에 도착했다. 연무장엔 이미 모든 군사들이 준비를 마 치고 밤새 검게 칠한 녹을 닦아내고 번쩍번쩍 광을 낸 창와 도끼 등 병기와 라혼이 새로 편성한 백인대와 천인대별로 새로 만든 기치를 들고 대기하고 있었다. 라혼은 단(壇) 위에 올라 단 아래서 절도 있는 소천위(少川威) 참 령(參領)의 보고를 받았다. 위병의 위교(衛校)의 직급이 있었으나 라혼에 의해 위병들이 정식으로 하남천원군에 소속되어 중앙조정의 직급인 참령(參 領)에 봉해졌다. 그리고 그들은 정식은 서해수군에 속하여 수군으로써 앞으 로 남상의 서해대수영 토벌에 참가할 병력이었다. 그들의 출신은 다양하기 그지없었는데 봉수성의 위병들, 귀순한 열지족 전사, 그리고 상경 백호금군 출신자와 주작, 현무, 청룡 등 물에 익숙한 군사들을 추려 뽑은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들 모두가 스스로 자원했다는 점이었다. 그런 점에서 군사들의 사기가 무척 높았고, 이미 한두 번의 실전경험이 있는 군사들이 니 그야말로 정예 중 정예였다. "하남천원군 서해수군 서해수군통제사 라혼 대장군 뵙니다." -대장군 뵙습니다! 연무장을 가득매운 군사들이 하나된 목소리로 일제히 군례를 받치자 라혼은 그들의 심중의 호기(豪氣)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원래 여기까지가 라 혼이 원래 생각하고 지시 했던 열병식이었다. 라혼은 자그마치 1만여 명의 정예 군사들이 도열한 연무장을 훑어보고는 손을 앞으로 뻗어 그들이 받히 는 군례를 받았다. "너희은 천하제일의 강병이고, 나는 불패의 상승장군이다. 그러니 우리는 천하에 적수가 없는 강군이다. 그것을 만천하에 자랑하라!" -와아~! 대저 군대란 남자의 세계에 극치다. 용맹과 지략, 명예와 자부심이 최대의 덕목이 되는 곳이 군대이고 전장이다. 이미 스스로 백호나한의 정예라는 자 부심을 가진 그들에게 강군(强軍)이라는 명예를 주자 열광하지 않을 수 없 었다. 이는 시드그람 대륙의 기사단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이 의식이자 전통 이었지만 이곳 에서는 병졸은 그저 졸(卒)일 뿐이었다. 사실을 따지자면 장 기판의 졸보다 못한 것인 군사들이지만 마음가짐하나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오합지졸(烏合之卒)에서 정예강병(精銳强兵)이 되는 예는 고래(古來)로 얼 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그것으로 돌격대장(突擊隊將)이며 선봉장인 잔폭광 마 육삼을 필두로 서해수군을 상징하는 대해백호기(大海白虎旗)와 서해수군 통제사(西海水軍統制使)을 상징하는 원수기(元帥旗)가 차례로 군영을 빠져 나갔다. 라혼도 지심을 부장으로 하여 행군대열에 합류하여 군영을 나섰다. -와아~! 선두의 잔폭광마가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자 봉수성의 백성들은 꽃잎을 뿌리 며 환호했고 군사들은 짐짓 무표정을 가장하며 동료들과 발을 맞추며 눈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이제 이대로 봉수성 동문 밖으로 나가 감곡에서 노예들 로 구성된 노예부대와 그들을 훈련시키던 2백 흑장, 백호영들과 자리를 함 께하여 성문위에 자리 잡은 하남대원수 금영월에게 열병하는 것으로 식은 종료된다. 그리고 자리를 다시 서해수군 본영(本營)이 되는 군영의 연무장 으로 돌아가 태평연(太平宴)을 하는 것으로 행사를 마무리 하는 것이다. 태 평연(太平宴)은 임금이 본래 싸움에 이긴 뒤에 평화를 기뻐하면 베푸는 잔 치였지만 군사들에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것은 술과 맛난 음식을 먹는 것이 중요할 뿐. "햐! 대단한 위세로군. 역시 조정의 군사들이로구먼." "허어, 이 무식한 사람을 보았나?" "뭐야? 무식?" "저기 군사들을 보게나, 태반이 피부가 짙은 우리네 사람들 아닌가." "어? 정말?" "백호나한 대장군은 실력 있고, 능력이 출중한 자는 출신이나 신분여하에 관계없이 사람을 쓰신다고 하더군. 그래서 저 군사들 대부분 스스로 지원한 거고." "에? 그럼 나도 받아줄까나?" "예끼 사람……. 아니지 받아줄지도 모르겠군. 내 듣기로 저들 모두 조정에 서 봉록을 받는 군사들인데 남상의 대수영을 토벌을 앞두고 있다고 하더군. 당장 전장에 나가는 군사들이니 저렇듯 예기가 흐르는 것일 테지." "서해대수영과 싸울 군사들이라고?" 사내는 그 한마디에 군졸이 되는 꿈을 접었다. 땅을 딛고서야 천하무적일 수 있지만 바다위에서 배를 타고 싸운다면 서해대수영은 무적이었다. 잘못 하면 창 한 번 내질러보지 못하고, 바다에 수장될 수 있었다. 바로 그것 때 문에 봉수성 출신 위병들이 바다에 익숙함에도 불구하고 별로 지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모두들 선망의 시선이나 또는 그저 사라들이 북적이는 것이 좋아 흥 겨운 마음으로 행사를 구경하는 사람들 사이로 고요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기회를 엿보는 사람이 있었다. '기회는 단 한번뿐이다. 성공이든 실패든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다. 기왕 이면 성공하고 죽는 것이 낫다.' 시화는 백호나한의 군사들이 암살대를 매복시킨 지점에 통과하기를 기다리 면 시간이 빨리 흐르지 않음을 탓했다. '32인의 암자들에게 역천잠혈광(逆天潛血狂)을 먹이고 강력한 암시를 걸어 두었다. 아무리 고수라도 고요하게 깊은 잠에 빠진 자객의 살기를 읽지는 못할 거다. 대야는 이미 생사를 초월하는 지경에 있으니 나만 평정함을 잃 지 않으면 돼. 이 번 일의 성패는 나다.' 역천잠혈광은 남례일족 비전(秘傳)의 광독(狂毒)으로 남례성의 부족 중 약 물의 힘을 빌려 믿을 없는 힘을 내며 싸움을 하던 부족이 있어 주위 부족이 모두 두려워하며 경원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힘을 주던 약물은 금단의 과 실이었다. 하나 그런 그것을 남례일족이 가져다가 가공하여 만든 것이 역천 잠혈광이다. 그러나 역천잠혈광은 사용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 이것을 복용하면 힘들 수 없는 힘을 내며 팔다리가 끊어져도 심장이 파열 되도 고통을 모르며 죽는 그 순간까지 미쳐 날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역천잠혈광의 치명적 허점이었는데 한번 발동되면 오직 살의(殺意) 만 가지고 피에 광분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두명이 그것을 복용하고 한자리 에 있으면 목표는 뒷전이고 자기들끼리 싸워 자멸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약점을 심독(心毒)이라는 기독(奇毒)이 해결해주었다. 심독은 사실 별것이 아닌데 사람의 생각을 단순하게 만들어 암시에 쉽게 걸리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역천잠혈광과 함께 사용되자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 다. 바로 심독으로 암시를 걸고 역천잠혈광을 복용시킨 후 약기운이 천천히 돌도록 가사상태로 잠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근 시화가 죽어라 붙잡고 있는 특이한 소리가 나는 피리를 불면 그들은 실혼인(失魂人)이 되 어 동귀어진을 불사하며 백호나한을 노릴 것이다. '그러나 32인의 암자들이 백호나한을 어찌할 수는 없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만 약간의 상처라도 주면 그것으로 책략은 대성공이다. 그리고 그 뒤 대야가 나서서 백호나한의 명줄을 끊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숨겨 둔 일수는 더욱 대야의 일을 용의하게 할거야!' 그리고 백호나한의 군대의 머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환호 성을 지르며 그들을 맞아갔고 시화는 잔폭광마의 모습이 보이자 입술에 피 리를 물었다. 그러나 시야에 백호나한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일순 당황하며 눈을 크게 치떴다. 그러나 사두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꿈에라도 잊을 수없는 백호나한의 모습이 보이자 자신의 신색에 실소하며 긴장을 풀었다. 그리고 고요하게 기회를 기다렸다. '지금!' 시화는 배에 힘을 가득주고 있는 힘껏 피리를 불었다. -피이이이익! 그러자 마치 바람 빠지는 소리가 넓게 퍼지고 무장들이 타고 있는 말이 흥 분했다. 그리고……. -콰창! -끼요호! -끼야! 근골이 굳기 전부터 지옥 같은 수련을 거친 살수들이 남례성 진토인 특유의 어지러운 전투화장을 전신에 하고 하늘에서 땅에서 대로가의 가옥의 지붕 에서 튀어나와 찰라 순간 일제히 라혼의 16방위를 점하며 강도를 던지고 16 명은 그대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시간 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오직 라혼뿐 이었다. 라혼은 기척도 없이 사방팔방에서 지쳐드는 그들의 공격에 공간결계를 펼치 며 주위에 자신을 호위하는 수십 기의 백호영들과 지심을 능공섭물(綾空攝 物)수법으로 밀쳐냈다. 그리고 허리춤에서 협봉검을 빼어 듬과 동시에 허공 으로 솟구쳤다. 인간 같지 않은 초인적인 빠름이었지만 죽음을 담보로 모든 잠력(潛力)을 격발(激發)시킨 살수들은 라혼의 회피동작에 반응하기 시작 했다. 그러나 이미 공세의 중심에서 벗어난 살수들의 표적은 여유를 가지고 대응하기 시작했다. '사만팔천검법(四萬八千劍法) 만천화우(滿天花雨)!' 일식(一式)에 사만팔천번의 변화를 한다는 사만팔천검법의 꽃비가 하늘을 덮는다는 만천화우(滿天花雨) 초식이 라혼의 손에서 펼쳐지자 현란하기 그 지없는 한바탕 춤이 되었다. 실 같은 검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와 공간을 장 악하고 공간(空間)을 지배자 라혼은 살수들을 휩쓸어갔다. 그리고 그 공간 에 한 존재가 난입하였으나 라혼은 별반 신경 쓰지 않았다. 바로 잔폭광마 였기 때문이었다. 기습의 묘가 실패한 살수는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 었고 이미 절반이 피를 뿌리며 스러져 갔다. 비록 둘이 함께 죽기를 바라고 공격하는 최후의 술수인 동귀어진(同歸於盡)의 극단적인 방법으로 진쳐드 는 살수들이었으나 그들은 라혼의 검망(劍網)을 뚫지 못했다. 라혼은 살수 들을 상대하며 등 쪽으로 접근하는 잔폭광마의 존재를 알아챘으나 다수를 상대할 때 서로의 등을 보호하는 것은 양의진(兩儀陳)의 기본이었다. 그러 나……. "……!?" 라혼은 자신의 가슴께 튀어나온 새파란 검강(劍剛)을 먹음은 칼끝을 목격해 야만 했다. 남례일족(南禮一族) 기이한 기성과 함께 땅에서 속은 듯, 하늘에서 떨어진 듯, 자객들 나타나 그중 절반이 피를 뿌리고 스러지고 백호나한의 선봉장 잔폭광마가 백호나한 의 등에 칼을 꼽는 모든 상황은 같이 동시에 일어났다. 그러나 그 상황을 이해한자는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초절정 고수의 움직임을 간파할 수 있는 자는 그것을 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약간 거리가 떨어져 있던 다만 백호영의 일부만이 어렴풋이 사단이 벌어졌다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젠장 심장이…….' 라혼은 상황이 다급하게 돌아가자 가슴에 박힌 칼을 무시하고 전면으로 달 려드는 울긋불긋한 전투화장을 한 살수들에게 살수를 전개했다. 심장에 검 을 박혀있기에 몸의 움직임이 둔해지자 심검(心劍)인 영인(靈刃) 소울 블레 이드를 이용해 그들은 휩쓸었다. 평정이 무너진 상태에서 펼쳐진 영인(靈刃 ) 소울 블레이드는 힘 조절을 실패하여 그들의 몸을 피 먼지로 만들었고, 범인(凡人)이 보기에 무척 민첩한 하지만 고수에게 느릿하기 이를 데 없는 움직임으로 몸을 돌려세웠다. 그리고 아니길 바랐지만 그곳엔 잔폭광마가 흉악한 안광(眼光)을 내뿜으며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누군가 라 혼이 장악한 공간에 난입한 것을 느끼고 잔폭광마를 밀치며 새로운 상대를 확인했다. 그리고 꿈결 같은 정지된 시간 속에서 라혼은 녹안(綠眼)에 유난 히 검은 피부의 깐 마른 사내를 발견 할 수 있었다. 라혼은 그에게 어떠한 적의(敵意)도, 살의(殺意)도 읽을 수 없었다. 마치 반가운 오랜 친구를 바 라보는 듯한 시선에 마음이 편안해지기 까지 했다. 그러나 그의 손에 들려 진 한자 남짓한 대검(大劍)은 그가 적이라는 사실을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 잠깐의 망설임은 그의 접근을 허용했고 라혼은 육신의 근력을 배 제한 체 오로지 천방지축신공의 묘리에 따른 공력으로 몸을 움직여 그를 맞 아갔다. 그리고 그의 심장에 협봉검을 밖아 넣는 것에 성공했다. 그러나… …. -푸학~! 마치 술이 가듯 찬 항아리가 깨지듯 그의 몸이 터지며 선혈(鮮血)이 사방으 로 튀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대로 폭발했다. 절정고수의 내가진기를 머금은 살점과 선혈은 그 하나하나가 바위를 부술 만큼 위력적이었고 바로 곁에 있는 라혼의 호신강기를 깨고 라혼의 전신을 난타했다. 그러나 그것 보다 라혼은 상대가 마지막 순간 깨달았을 듯 심검(心劍)의 공격을 받아 곧 영혼(靈魂)에 타격을 입은 것은 라혼에게 있어서 치명적이었다. -주군~! -끼야아아아악! 모든 일이 종료된 이후 날카로운 비명성과 함께 장내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범인들이 보기에 이 모든 상황은 '어?'하는 순간에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갈(喝)!" "……." "당황하지 마라! 제장들은 지금 즉시 군사들을 풀어 백성들의 동요를 막고 육소령은 호법을 선다. 지심!" "주인님!" "이것은 독혈이다. 흑사를 불러 독에 당한 중독된 사람들을 돌봐라! 소천위 네가 상장군에게 가라!" "충!" 라혼은 혼미해지려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몸상태를 점검했다. '심장이 파열되고, 오장이 으스러졌다. 멀쩡한 것 뼈다귀뿐이군. 큭큭큭큭, 인간이란, 사람의 의지란 그렇게 위대한 것이군.' 라혼은 마지막 순간 남례일족의 대야 하수의 깨달음과 더불어 마음을 공격 한 심검에 그사람의 필생의 염원과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한순간에 알게 되 었다. 아니 그 사람이 마지막 희망이자 염원이었던 라혼과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검(劍)이 되어 라혼의 영혼에 박혀 들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의 고뇌, 나약해지려는 자신을 채찍질하는 굳은 심지, 감정 모든 것이 라혼 에게 이입되어 있었다. '나는 자네를 친구로 삼지 못할 것 같군. 자네는 내게 있던 인간을 사람을 아래로 보는 어리석음과 한없이 미약한 존재라 생각했던 착각을 깨주었군. 그러니 위대한 스승이지 어찌 친구가 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피해자는 적을수록 좋겠지.' 라혼은 자신이 좀 전에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잔폭광마의 멍한 눈을 보 고 다시금 공력을 운용해 소리쳤다. "뭐하는 것이냐? 육삼, 너는 나의 일보시위가 아닌가? 또다시 누군가 공격 하면 어쩌려고 그렇게 멍하게 있는 거냐?" "주군, 그는 배…." "닥쳐라! 그 일은 나중에 책임을 물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육삼은 나의 일보시위다. 육삼!" "예? 예." 잔폭광마 육참은 미칠 것만 같았다. 악몽도 이런 악몽이 또 없었다. 기이한 소리가 귀가를 간질이자 본능적으로 주군의 위험을 감지했다. 그리고 반사 적으로 신형을 뽑아 올려 주군 호위하기 위해 대열의 뒤로 달려갔고, 회심 의 일검을 주군(主君)의 등에 정확히 꼽아 넣었다. 갈비뼈사이 찌르면 곧바 로 심장이 있는 그곳에 검을 박아 넣고 주공의 반격에 떠밀려가고 자리에서 일어선 순간 잔폭광마는 비로소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해서 는, 있어서는 안 될 짓을 자신의 손으로 저질렀다는 사실에 미칠 것만 같았 다. 꿈이라고 환상이었다고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주공의 가슴에 아직 까지 박혀있는 저 칼은 바로 잔폭광마 자신의 칼이었다. 그 순간 잔폭광마 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대장간에 대부(大斧)를 주문해 두었는데 늦어진 것이 천만다행이군. 대장 의 머리가 덕분에 부서지지 않았어.' 그리고 라혼의 호통성에 현실에서 도망치려는 상념에서 깨어난 잔폭광마 육 삼은 죽을 때 죽더라도 아니 강시가 되어 살인병기로 사용되더라도 마지막 까지 주군에게 충(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천고죄인으로써 조금이라도 가장 마음에 들었던 사내와 함께하고푼 마지막 소원이었다. *** '성공이다. 천하의 백호나한도 남례일족의 대야에겐 별수 없군. 이로써 당 분간 괜찮겠지만 백호나한이 소노리에게 준 권한에 의해 남례성도 원주조정 에 반기를 들것이다. 정왕전하에게 이 소식을 지급으로 넣어야겠지. 한데 백호나한의 수하들이 사용하는 전환이 무척 유용해 보이던데, 백호나한이 제거 되었으니 몇개 입수해서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지 살펴봐야 갰어. 그 리고 그것을 만든 귀림의 토지신들도 그렇고, 그들이 가진 그 물건도 그렇 고 다시 바빠지겠군. 하지만 그것은 남례성이 혼란한 틈을 타서 귀찮은 귀 호기의 눈이 다른 곳에 있을 때 해치우면 될 일.' 그는 후선의 팔기(八旗)중 영기(影旗)에 속한 사람으로 정왕 강무정의 명에 따라 남례일족의 표적을 백호나한에게 맞추는 공작을 진행했다. 한때 시간 에 쫓기는 듯한 대야(大爺)가 한 달 가까이 모습을 보이지 않고 거처에 들 어박힌 백호나한을 무시하고 허섭스레기에 소인배에 불과한 호도의 두 장군 을 노리자 공작의 실패를 보고할 것이 막막하기만 했다. 하나 중간에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힘들게 호도 하남천원군의 군영에 침입해놓고 맨손 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난데없는 칩거에 들어갔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대 야의 목표가 변했음을……. '그러나 의외로군. 남례일족과 천독지존(天毒至尊) 독신(毒神)과 끈이 닿아 있었다니 독신의 천독환단(天毒還丹)을 대야가 사용한 것을 보면…….' 남례일족(南禮一族) 흑산자는 라혼의 상태를 확인하고 할 말을 잊었다. 강시를 제련하는 흑산자 였다. 또한 스스로 세상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의원이면 사람의 몸속을 누 구보다 잘 알고 있는 부술사(剖術士)였다. 강시는 생기가 빠져나간 몸뚱이 에 주술로써 기를 주입해 움직일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러니 실제로 열어보 는 것이 기혈의 위치를 확인하기에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아니 그런 지식 이 없다 해도 무인이라고 명함을 내밀 수 있는 그 어떤 사람도 라혼의 상태 를 보면 혀를 내두를 만했다. '지독한 심장에 칼을 박고, 내장이 전부 파열되었다. 게다가 지독한 혈독( 血毒)에 중독되었다. 이건 그저 고깃덩어리 축에도 들지 못하는 몸을 하고 도 살아있다니.' 망연자실(茫然自失) 흑산자는 어떤 수도 쓰지 못한 체 계속 라혼의 몸을 살 펴보기만 했다. 하나같이 치명적인 상처였다. 그런 흑산자의 귀에 혜광심어 (慧光心語)가 들려왔다. '흑사, 내 몸을 스스로 치유할 수가 있소. 명운(命運)이 다하지 않은 이상 나는 그 어떤 사람도 단숨에 살릴 수 있소. 다만 시간이 필요할 뿐이오.' '헉! 주공?' 흑산자는 흑산 흑부에서 수야를 살리려 시도했던 것이 떠올랐다. 비록 생기 가 다해 죽음을 면치 못했으나 화상을 치료하고 나병으로 인한 부스럼을 깨 끗이 하여 죽는 순간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었던 주공이다. 그런 생각이 들 자 안색에 화색이 돌며 마음이 다급해졌다. 빨리 좀 전의 그 사건으로 어수 선한 이곳에서 안전한 곳으로 주공을 옮겨야 했다. 그리고 흑산자는 알맞은 장소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육삼, 말을 가져와라! 아니 그보다 거추장스러우니 칼의 손잡이 부분을 부 러트려라!" "예? 옛!" "주군." "주군." 라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렇게 말하자 백호영은 혈독 위에 그대로 무 릎을 꿇으며 소리 없이 오열했고 잔폭광마는 주군의 명령만이 지상최대의 과제인 냥 칼을 부러트렸다. -땅! -큭! 라혼는 아직도 몸에서 전해오는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 다. 몸은 아직도 살고자 비명을 지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군!" "흑사, 지독한 독인데 해독이 가능 하겠소?" "제가 익히 잘 아는 독이니 해약을 만들 수 있습니다. 다만 무공을 익히지 않은 군사들과 백성들은……." "어쩔 수 없지. 들었는가? 스스로 목숨을 보하라. 이것은 명령이다." 라혼은 혼미해지려는 정신을 다잡으며 스스로 말에 올라 명했다. "거처로 돌아간다. 열병식은 취소다." "……." 소란이 해결되자 봉수성 백성들은 호기심에 모든 사태를 구경했다. 지독한 혈독으로 악취가 진동했지만 멀리서 백호나한이 스스로 일어서서 등에 박힌 칼을 뽑고 두발로 걸어 나와 홀로 말에 오르자 천지가 떠나가라 환호했다. -만세~! -백호나한 만세! 그들 눈에는 다소 상처를 입고는 마지막 순간 큰 충격을 받고 깨어난 것으 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곁에 있던 백호영들은 그런 라혼의 모습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사실 지금 라혼의 육신(肉身)은 도저히 움직 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금동보의 천방지축신공은 대기의 기운뿐만 아 니라 몸의 내기를 운용하는 데에도 무척이나 효과적이었다. 몸을 염동력(念 動力)으로 강제로 장악해 움직일 수 있었을 뿐 지금 당장 몸에서 오는 고통 이 없어지기 전까지 어떤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지금 영혼의 한 귀퉁이에 자리한 하수라는 이름을 가진 의지가 자신을 죽음으로 데려가기 전까지, 한 가닥 가는 실 같은 생기(生氣)가 사라지기 전까지 조취를 취해야 했지만 라혼의 정신은 이미 생사(生死)를 초월해 있었다. 그리고 시험해보고 싶었 다. 이대로 껍데기를 벗으며 어찌 될까? 죽어 지옥에 갈까? 아니면 그저 명 계(冥界)로 떨어질까? 그것도 아니라면 혼(魂)과 백(魄)이 분리되어 혼은 하늘로 우주로 산산이 흩어지고 백을 땅에 120년간 머물다 지기(地氣)로 화 할까? 그것도 아니라면 브라만이 약속한대로 신(神)이나 마왕(魔王)이 될까 ? 라혼은 눈앞이 흐려지며 몸을 유지하고 제어하던 영력(靈力) 흩어짐을 느꼈 다. 그리고 더 이상 몸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허어, 그래 저 지경이 되어 거처의 대문을 들어선 다음에야, 혼절 했단 말 인가?" "그렇습니다. 상장군!" 금영월은 라혼 대장이 변을 당했다는 소식에 깜짝 놀라 서둘러 봉수성 전역 의 군권을 장악하여 행진을 구경하기 위해 모여든 군중을 해산시키고 만약 에 사태에 대비했다. 그리고 라혼을 공격한 이후의 어떠한 도발이나 반란의 징후를 찾아볼 수 없어 안도의 한숨을 쉬고 듣기로 멀쩡하게 말을 타고 거 처로 돌아갔다는 라혼이 누워있는 침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금영 월이 발견한 것은 시신이나 다름없는 라혼이었다. 그리고 심장부위에 삐죽 튀어나온 칼끝은 절로 고개를 가로졌게 했다. 그러나 아직 살아있다는 흑사 의 말에 다시금 놀랐다. 그리고 가끔 백만 명중 한명정도 왼쪽에 있는 심장 이 오른쪽에 있는 경우가 있으니 라혼은 그런 경우라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도 곧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으니 금영월은 그가 없는 남례성을 어찌하며 남상 서해대수영은 또 어찌해야 할지 생각이 복잡해졌다. '이일을 어찌할꼬. 백호영들이 날 따라준다면 어렵더라도 어찌어찌 헤쳐 나 갈 수 있겠지만 그들은 태생이 자유로운 무림인들 하나 모석이나 고우는 남 을 것이고, 다른 자들은……?' 하남천원군엔 20만이나 되는 대군이었으나 태반이 진토인들이고 열지족 전 사들이 주축으로 그들을 흡수했음으로 열지족 추장인 소노리의 입김이 강하 게 작용했다. 라혼대장에게 굴복하여 지금껏 아무런 움직임 없이 조용 했으 나 라혼이 사라진 후 일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들을 제어해야 하는 금영월 자신은 너무도 세력과 영향력이 미약했다. "일어날 것 같소?" "상장군은 걱정하지 마시오. 주공은 이런 상처 따위에 죽지 않소. 하늘은 그와 같은 영웅은 쉽게 데려가지 않으니." "으음!" 금영월은 침방 안, 라혼이 누워있는 침상 곁에 붙어 아무런 말없이 간호에 열중하는 반적 후선의 해홍군주라는 묘가(猫家) 여인과 초초(草草)란 이름 으로 시비를 자처하는 예순군주(藝純君主) 용정란(龍精蘭)의 얼굴을 일별하 고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방밖에서 커다란 대부를 들고 저승사자가 오면 때려죽일 기세로 장승처럼 서있는 사내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봉수태수부 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이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하니 일단 봉수성의 전 병 권을 확실히 장악해들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차례족은 여인들만으로 구성된 여인부족이다. 부족을 번성시키고 이어가려 면 남자가 필요했고,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주변 부족의 전사를 납치하여 관계를 가진 후 죽였다. 물론 그 전사는 종마(種馬)가 되어 마을 의 임신 가능한 모든 여인과 동침하고 죽어갔지만 사랑이 없는 관계는 여인 들에게 고역이었다. 다만 피를 이어가야 한다는 의무 때문에 고통스런 일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태어나는 아이가 무조건 여아(女兒)일 수는 없었다. 대략 절반은 사내아이가 태어났고, 그 아이들은 율법에 따라 산체로 구덩이 에 묻혔다. 그러나 사람이 어미가 갓 태어난 핏덩이를 사내아이라 하여 자 식을 묻는 것은 말로 못할 고통이었다. 그러나 궁(窮)하면 변(變)하고, 변( 變)하면 통(通)한다는 말이 있다. 자식이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이 키우 고 싶은 여인들이 해산할 때쯤 밀림으로 들어가 홀로 아이들 낳고 여아라고 속이며 몰래 키우는 경우가 생겼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아이가 사내로 여 인으로 바뀌면 들통이 나기 마련이었다. 그럼 그들은 마을에서 쫓겨나거나 종마처럼 씨를 받는데 이용되었다. 그러다 자신의 손으로 아들을 낳아 산체 로 묻은 경험이 있는 현명한 부족장이 거세(去勢)를 하는 조건으로 사내아 이도 키울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거세한 아기들이 살아남 기엔 밀림은 척박했다. 결국 그러한 조치가 있음에도 차레족은 여인들이 대 부분을 차지한 여인부족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소수의 거세된 아 이 중 지심과 같이 살아남은 아이들도 있었다. 지심은 주인과 마찬가지로 지금 사경을 해매고 있었다. 혈독에 너무 노출된 까닭에 무공을 익히지 않은 지심은 흑산자의 해약을 가장먼저 먹고도 자리 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지심은 지금 생사의 경계에서 꿈을 꾸고 있 었다. 처음 귀림에서 주인이 자신을 선택했을 때 무척 당황스러웠다. 자신 은 아이를 낳을 수없는 몸이기 때문이었다. 지심은 자신이 여자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남자라고 생각해 본적도 없었다. 다만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자들이 부러웠을 뿐이었다. 그러니 여자의 최고의 가치인 아이를 생산해 내는 능력이 없는 자신을 선택한 주인이 운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 러나 주인은 주인, 부족의 지켜준 그이니 자신도 끝까지 그를 지킨다는 맹 세를 했고 영원히 마을을 떠났다. 그러나 첫 번째 받은 임무는 차갑도록 도 도한 한 아가씨를 돕는 일이었다. 그리고 수개월간 버림받은 강아지 꼴로 주인이 다시 찾아주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다시 주인을 만났을 때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주인의 거처에 머물렀으나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초초라는 왠지 고위해 보이는 여인과 다시 같이 살게 된 포포, 그 러나 지심이 당황한 것은 주인이 잠을 자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덕분에 지심 또한 사흘밤낮을 꼬박세기 일 수였으나 몰려오는 수마를 이겨낼 수는 없었다. 깊은 밤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면 어느새 아침이었고 자신의 몸은 푹 신한 침상에 뉘어져 있기 일쑤였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주인은 처음부터 여자가 아니기 때문에 자신을 골랐다는 사실이었다. 그때부터는 호기심이 일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만나 애기를 만드는 것이 당연한데 초초든 포 포는 메이라는 기분 나쁜 여인이든 그쪽으론 도무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 인 것이다. 항상 지근거리에서 지켜보고서도 가만히 앉아 차를 마시는 것 왜에는 사색에 잠겨있는 수가 많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지심은 그에게 존 경이란 감정을 배웠다. 그리고 언제까지든 그의 등 뒤에서 진정으로 그를 따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주인을 보호하겠다며 중주인들이 입 는 갑주까지 챙겨 입고 말이라는 짐승을 겨우겨우 타는 법을 익혀 주인의 을 따랐건만 그 순간 지심은 주인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호를 받고야 말았다. 그것은 자신이 주인을 따르는 것은 짐일 뿐이란 것은 깨닫 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경황이 없어 미쳐 지나쳤던 잔폭광마라 부르는 무 례한 놈이 회심의 미소와 함께 마귀의 얼굴을 하고 주인의 등뒤에 칼을 꼽 는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안돼!' "안돼!" 그리고 지심은 생과 사를 가르는 곳에서 살아야하는 분명한 이유를 찾아낼 수 있었다. '주인이 위험하다. 등에 칼을 꼽은 그놈에게 목을 맡기고 있다. 알려야 해! ' 해약으로 해독은 했지만 아직 독기운이 남아 있어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 지만 이를 악물고 호리호리한 몸을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지체 없 이 방을 나섰다. 그리고 보았다 커다란 대부를 들고 초췌한 몰골로 서있는 놈을……. "배신자!" -퍽! "큭!" "내 죄는 나도 알고 있다. 하나 나는 주군을 끝까지 지켜야하는 임무가 있 다. 그리고 주군이 잘못되면 스스로 강시가 되어 주군의 무덤을 지킬 거다. 미안하지만 네년…. 아니 네놈……. 하였든 네 몫은 없다. 만일 주군이 청 정에 방해된다면 네 머리통 부숴버리겠다." "배신자." "……." 지심은 자신의 전력을 다해 놈에게 달려들었지만 놈의 우악스런 손길에 짚 으로 만든 허수아비처럼 힘없이 나가떨어지는 자신이 너무나 한심했다. 다 만 이글거리는 분노에 찬 시선으로 놈을 노려보며 '배신자'라고 씹어뱉듯 말하는 힘없는 자신이 너무나 분했다. 하지만 허약한 자신일지라도 주인을 지켜야 했다. "……." 지심은 말없이 일어서서 주인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잔폭광마는 그런 지 심을 굳이 막지 않았다. 그리고 또 다시 주공을 데려가려는 저승사자들과 사투를 시작했다. -자라! 자! 네가 자야 우리가 들어갈 수 있잖아! -않자! 주군을 데려가려고 어림없어 차라리 날 데려가! -어차피 살지 못해 저러다간 요귀가 된다고. -웃기마. 요귀라도 주군이다. 꺼져! -거 참 말귀 못 알아듣네. "거참, 이런 자세로 선체 눈을 뜨고 잠이 들 수 있다니 네놈도 찬 대단하다 ." 흑산자는 방을 나서며 선체 잠꼬대를 하는 잔폭광마를 보고 그렇게 중얼거 리며 여전히 변화 없는 라혼의 상태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약을 쓸수 있는 상태이면 약이라도 써보련만 이미 내장이 다진 고기인 상태이니 손써볼 수 조차 없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공의 아내인 설화에게 연락하여 주작의 무녀라는 가니아와 함께 이곳으로 오게 했다. 귀왕곡으로 주공을 옮기려 할 때 시체나 다름없는 주공에게 건들지 말라는 의사를 전달 받아 다소 안심하며 계속 상태를 주시할 뿐이었다. "그나저나 이제 올 때가 되었는데……." 나한수중(羅漢睡中) 라혼은 생(生)과 사(死)의 중간에 자리한 무의식의 공간에서 하릴없이 부 유했다. 이미 몸의 모든 감각기관은 정지되어 있어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 다. 그런 라혼에게 두 반려자(伴侶者)가 말을 걸었다. 바로 영룡(永龍) 이 터너디 드래곤(Eternity dragon)과 세계수(世界樹) 이그드라실(Yggdrasil), 라혼이 진정 죽는 그 순간까지 함께할 존재들……. -후후후, 어이가 없군. 신의 힘을 가진 네가 인간의 손에 망신창이가 되다 니……. -나도 어이없다. 하지만 나는 고무되어 있어. -뭐? 인간의 의지와 능력 말인가? -그래. -그래봐야, 별반 큰 도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건 그렇지. 하지만 마지막 순간 위협적인 공격은 내게 큰 영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후, 심검 말인가? -그래. 절대자라 칭송되는 소수의 인간은 그것을 사용한다. 그렇다는 것은 나는 혼자 싸울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 -확실히 심검의 대단했다. 내가 느끼는 것은 우리도 느끼니까. 하지만 아무 래도 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뭘? -그것은 가르쳐 줄 순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충고를 해두지. 지금 이 세계 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용이다. 네가 이 세계의 모든 용과 싸워서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 라혼은 생각했다. 자신의 힘으로 전 세계의 모든 드래곤들을 죽일 수 있을 까?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지금 자신의 힘은 드래곤 한두 마리쯤은 한꺼번 에 처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드래곤은 지극히 독선적이며 독자적이라 하나 씩 찾아가 각개격파(各個擊破)한다면 어렵지 않게 멸종시킬 수 있을 것이다 . 하지만 그들을 모두 한꺼번에 상대한다면? 마나동결결계가 드래곤에게 먹 힌다면 질 이유가 없다. 그러나 결론은 해봐야 안다는 것이다. -그보다 너는 이만 쉬는 것인 어때? 네 영혼이 타격받았으니 한 100년 정도 잠들어 있는 것이? -싫어, 시간이 지난다고 영혼에 타격받은 것이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은 이미 알고 있어. -뭐, 할 수 없지. 몸의 주인은 바로 너니까! 라혼은 영룡과 세계수의 목소리 속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죽 는 순간까지 같은 영혼인 그들에게 몸의 소유는 의미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리고 라혼은 생사의 중간 무의식의 세계에서 다시금 깊은 사색에 들어 갔다. 주군이 시체나 다름없는 상태로 있은 지 사흘이다. 고학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주군이 없는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그러나 주군이 없는 앞일은 도저히 예측할 수가 없었다. 주군의 목적은 그저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백호인 주모의 신분을 당당히 밝히는 것이 바로 주군이 목적한 바였다. 그러나 그것을 대의(大義)로 삼기엔 문제가 있 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주군이기에 주군의 등을 보고 따랐던 것뿐이었다. 그러니 주군이 없는 상황에서의 일은 상상조차 할 수가 없는 지경에 빠진 것이다. '허허, 이거 참! 백호영은 그 출신이 자유로운 강호인들. 주군이 없어지면 태반이 떨어져나가려 할 것이고, 토금전장 또한 주군과 손을 잡고 있는 듯 하나 주군이 없는 상황에서라면 어떻게 할지 알 수가 없다. 열지족 추장을 비롯한 남례성의 진토인들은 당장 떨어져 나갈 것이고, 남례성은 다시금 봉 기가 일어난다. 이젠 손에 질 좋은 무기가 들려있고 병법을 알았으니 더욱 조직적인 반란을 할 것인데…….' 고학은 하나부터 열까지 따져 봐도 이렇다 할 해결책이 서질 않자 답답한 마음에 방을 나섰다. '이렇게 된 이상 믿을 것은 오직 주모(主母)뿐인데…….' 주군인 백호나한이 부재라는 가정 하에 세력의 절반이상이 떨어져 나갈 것 이고 남은 것은 주모가 직접 맡아 건설하는 북지성의 태회진(泰回陣)과 이 익이 보장된 이상 토금전장이 남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주모인 설화는 정체가 백호인 까닭에 그것이 버거웠다. "고대인, 주모가 왔어요." "흑사께서 연락했다는 말은 들었는데 벌써 도착하신 모양이군." 어떻게 수십만 리 밖 북지성 태회진에서 단 사흘 만에 멀고 먼 남례성까지 올수 있었는지 모르나 이미 흑사에게 수삼일내에 도착할 것이라는 언질을 받은 터라 일단 그 궁금함을 접어두었다. 남례성 한구석에 처박혀 원주 중 경의 토금전장은 물론 북지성 태회진의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지경이 니 멀고 먼 거리를 한달음에 달려올 수도 있겠거니 생각했다. 사흘 전 백호나한의 목숨을 노린 사건으로 인하여 금영월의 명에 따라 봉수 성의 모든 성문을 걸어 잠그고 서해수군 소속이 된 군사들이 잔당을 수색한 다는 명분으로 봉수성내의 모든 통행을 통제했다. 또한 감곡에서 조련되어 이번 열병식때 선보일 예정이었던 노예부대가 성문을 장악해 만약에 사태를 대비했다. 외부와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는 봉수성 홍의홍발의 미녀와 백의 소녀가 도착했다. "문을 열어라!" 그리고 노예부대를 지휘하며 주모가 온다는 미리 미리 들은 백호영 십장(什 長) 오언(吳彦)은 문을 열게 했다. 원주 상경 백호문과 가까이 살던 주모는 한때 백호영들 사이에서 누구나 남몰래 연심을 품은 적이 있었기에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주모, 절따라 오십시오. 제가 주군이 있는 곳까지 안내하겠습니다." "부탁해요." 설화는 흑사 할아버지의 연락을 받고 가슴이 차갑게 굳으며 내려앉았다. 불 안이 현실로 다가오자 숨이 막히며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즉시 할머니가 있는 귀왕곡으로 서방님이 만들어둔 타운포탈을 했다. 그리 고 할머니와 함께 이틀간 쉬지 않고 달려 봉수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 고 장승과 같이 서있는 대부를 무장이 지키는 방안으로 조심스런 발걸음으 로 발을 내디뎠다. "서방님." "……." 방안에는 묘령의 여인 셋(?)이 서방님을 간호하고 있었고, 흑사의 모습도 보였다. "왔느냐?" "소녀 설화 흑사할아버지 뵈어요." 한포포는 방안으로 라혼대가의 아내라는 천하제일미 천상천화가 들어오는 순간 방안의 공기가 바뀌는 듯하는 느낌은 받았다. 그리고 상황에 맞지 않 게 남례성 특유의 하얀 아오자이가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라혼대가가 누운 침상 곁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새우고 인사말을 건넸다. "만나게 반가워요. 저는 라혼대가…. 아니, 해노야의 제자 되는 사람입니다 . 다시 인사드립니다." "반갑습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포포 낭자시지요." "처음 뵙겠습니다. 주인님의 시비 초초입니다." "지심입니다." 환자가 있는 방이라 조용하고 간결하게 인사를 나눈 그녀들은 제각기 자리 에서 일어나 방밖으로 나섰다. "놀라지 말거라. 지금 주공의 상태는 심각하다. 하지만 주공은 쉽게 죽지 않을 것이니 너무 큰 심려는 하지마라!" "아니요. 걱정 안 해요. 서방님이 죽지 않느니 걱정 말라고, 슬퍼하지 말라 고 했거든요." 그러나 흑산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설화의 투명한 눈동자를 계속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흑사, 이곳은 설화와 제가 지킬 테니 그만 쉬십시오." "부탁합니다. 가니아!" 흑사까지 방을 나서자 방안엔 시체나 다름없는 몸으로 침상을 차지한 라혼 과 설화, 그리고 가니아만이 남았다. 가니아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설 화에게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아이야, 네가 그렇게 우니까. 라혼이 당황해 하잖니?" "당황해 하라죠. 누가 이렇게 몸을 함부로 굴리래요? 설화는 그냥 서방님이 옆에 있으면 그것으로 족한데 뭘 하러 일을 크게 벌인 거냐고요. 다 필요 없어요. 아무도 모른 곳. 아니 귀왕곡에 은거한체 살아도 괜찮아요. 난 그 게 더 좋다고요." 설화는 방안으로 들어선 순간 라혼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가니아도 그 목소리를 들었다. 무녀로써 재능이 있는 설화와 이미 무녀인 가니아는 생 과 사의 경계 속에 있는 라혼의 영혼을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라혼의 상태를 라혼자신을 제외하고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겉으로 들어난 라혼의 시체와 다름없는 육신은 설화의 마음 을 아프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언제까지 계속 속상한 모습으로 있을 순 없었다. "크으응~킁!" 야무지게 코를 풀고 눈물을 닦아낸 설화는 서방님의 몸을 덮고 있는 이불을 걷어냈다. 그러자 들어난 참혹하기 그지없는 서방님의 모습에 다시금 눈물 이 쏟아지려는 것을 쿡 참고는 중얼거렸다. "치! 누가 울 줄 알고." 상태가 너무 엄중한 나머지 섣불리 건들지 않아 피가 엉겨 붙은 그대로 방 치해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썩지 않고 있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휴우~! 이거 안 되겠는걸. 이봐요. 밖에 서계시는 분." 설화는 불러도 대답 없자 방밖으로 나가 어깨를 건들며 다시 불렀다. "이봐요!" "안 돼!" 잔폭광마는 이제 자신의 몸을 밀치며 방안으로 들어서려는 저승사자의 머리 통을 대부로 내리찍으며 소리쳤다. 그러나 눈앞에는 검은 옷의 저승사자가 아닌 백의의 아름답기 그지없는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 설화는 어깨만 살짝 건들었는데 괴성을 지르며 커다란 도끼를 휘두르며 중 심을 읽고 쓰러진 덩치 사내를 황당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땅바닥에 대자로 누운 채 잠시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오려다 보던 사내는 화들짝 놀라는 시 늉을 하더니 다급한 표정으로 물었다. "주공, 주공은 아직 살아계십니까?" "서방님은 괜찮아요. 하지만 아저씨는 쉬어야 갰는데요?" "아닙니다. 그렇데 서방님이라면……." "서해수군통제사 라혼대장군의 내자되는 사람입니다." "주, 주모이십니까?" "예!" 잔폭광마는 선녀가 다름 아닌 주군의 아내라는 천하제일미 천상천화라는 사 실에 내심 안도했다. 저승사자가 물러난 것까지는 좋은데 우화등선하는 신 선을 안내한다는 선녀(?)가 모습을 보이자 막을 수도 안막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설화는 아직도 꿈속에서 깨어나지 않은 듯한 무장에게 본래 하고자 했던 부 탁을 했다. "깨끗한 침상보와 따뜻한 물을 준비해줘요. 수건도 같이요." "예?" "어서요!" "예!" 잔폭광마는 주군이 정신이 들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는 맹세를 까맣 게 잊은 채 허둥지둥 주모가 부탁한 것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 했다. 그리고 라혼의 거처에 비로소 안방마님이 생기자 침울하게 가라앉았 던 집안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설화가 손수 라혼의 몸을 허둥대는 잔폭광마 의 모습을 보고 달려온 흑산자가 준비해준 약물로 닦아내고 선혈로 얼룩져 있던 침상을 깨끗한 것으로 바꾸는 것을 시작으로 집안 분위기를 밝게 바꾸 었다. 이미 장동의 화상환자들을 손수 간호한 경험이 있는 설화는 그 모든 일을 야무지게 해냈고 집안의 대소사를 직접 챙기기 시작했다. 라혼은 집을 그냥 머무는 장소로 만 생각해 가솔들의 식사나 그 밖의 일은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모든 일은 초초가 나름대로 맡아했지만 그녀는 아랫사람을 직접부리는 일에는 익숙지 못했다. 남례절도사 영양공의 딸이라는 신분은 항상 곁에 머물던 시비에게 모든 것을 맡겨 처리했었고 지금은 그저 그 시 비의 흉내를 내는 정도였기에 집안의 하인들은 스스로 알아서 자신의 몫을 챙기며 움직였을 뿐이었다. 그러던 것은 설화라는 이 집안의 정식 안주인이 나서서 직접 집안일을 챙기자 집이 확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식객 으로 저택에 머물던 모원과 메이 부부, 고학, 흑사, 그리고 금영월에게 라 혼이 멀쩡하게 있을 때보다 훨씬 편안해졌다는 생각을 들게 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것은 피부로 느끼며 은은히 감탄하는 여인들이 있었으니 바로 한 포포와 초초였다. "우리 서방님은요. 식사를 따로 챙겨주기 전까진 차 말고는 아무것도 먹지 않아요." "맞아. 정말 그러네요. 일은 모두 모원이나 고학에게 미뤄놓고는 뭐가 그렇 게 바쁜지 스스로 뭘 찾아먹는 것을 보지 못했다니까요. 그래서 처음에 지 심이 멋도 모르고 같이 굶는 경우가 종종 있었어요." "하지만 제가 먹을 것을 챙겨드려도 중요한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며 거절하 시니……. 그땐 정말 지심까지 같이 굶고 있을 줄을 생각하지 못했어요." "먹는 것은 그렇다 치고, 잠은요. 저는 이때까지 서방님이 자고 있는 모습 을 한 번도 본적이 없을 정도라니까요. 잠을 자는지 마는지 언제나 먼저 깨 어있으니……. 그런데 이번엔 정말 자는 모습을 원 없이 구경하니 그것하나 는 좋더라고요." 천상천화가 저택에 온지 사흘, 집의 분위기는 그전과는 매우 달라져 있었다 . 단지 집안에 안주인 있어 활기차게 움직이는 것만으로 침울했던 분위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라혼의 상태에 관해서 물으면 언제나 미소를 지으며 점점나아지고 있다는 말로 답하는 그녀를 보면서 모든 근심과 걱정을 잊었 다. 그 심각했던 상태가 천상천화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한마디에 그저 흔한 감기정도로 생각되어졌다. 그래서 인지 집안에 있는 여인들이 모여 차를 나누어 마시며 수다를 떨 만큼 집안은 안정되었다. "빙과요?" "그래요. 사부님이 손수 만드시는 것인데……." 설화는 한포포가 설명하는 것을 듣고 빙과를 직접 만들어 보기로 했다. 라 혼과 같이 옥녀진기로 물을 얼리고 작은 소도로 그것을 깎아 그 위에 석밀 에 절여놓은 과일을 얹어냈다. "어머나……!" 자리에 모인 여인들은 여인천궁의 소궁주인 설화가 보인 신위에 놀라고 또 빙과를 척척 만들어 내는 것에 놀라 설화가 만든 빙과를 맞보았다. 그러나 입속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는 라혼의 빙과와 달리 얼음알갱이가 그대로 씹 히는 식감에 약간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 그것을 영감이 예민한 설화가 놓 일 리 없었다. "저는 이거 처음 만들어 보는 거라고요. 그렇게 대 놓고 실망하면 어떻게요 ." "사실 주인님이 처음 만든 빙과도 이것과 같았습니다." "얼마나 다른지 나중에 꼭 만들어 달래야지." "과연, 주모시다." 고학은 지난 사흘간의 주모인 설화의 행보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사건 이후 닷새 만에 장이서자 설화는 기다렸다는 듯이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으 로 나섰다. 그리고 설화의 신분이 단숨에 알려지며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고 설화는 여유로운 미소를 입가에 띠고 때론 싸게 달라고 조르기도 하고 새 로운 먹을거리를 보면 어떻게 요리하는 지 요리법을 묻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전 이미 설화가 라혼과 나란히 걷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있어 그때의 인연으로 라혼의 건강을 묻는 물음에 그때마다 설화의 대답은 얼마 안 있어 쾌차 할 거라며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렇게 하루. 단 하루 만에 봉수성 에서만큼은 백호나한 만큼이나 유명해진 설화의 행보는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아직 나이 어린 소녀라고만 생각했었는데 미소만으로 봉수성의 백성과 서 해수군의 군사들의 마음을 사로잡다니……." 고학은 활기에 넘치는 주모의 행보로 최소한 봉수성의 군사력과 민심을 안 정시키는 데 성공하자 내심 안도 했다. 다만 일이 일어난 직후 누구도 봉수 성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는데 남례성 전역에 백호나한이 자객의 손에 참살되었다는 소문이 돌자 다시금 고민에 빠졌다. 이 일을 계획한 세력이 작심하고 일을 벌이는 이상 가장 좋은 방법은 건재한 주군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그러기는 힘들 것이니 하남대원수 상장군 금영월 이 발 빠르게 나서야 했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곳은 바로 여기 봉수성이었 다. 문제는 남례성에 도는 소문에 흔들리는 진토인 출신 하남천원군 군사들 을 남례성 전역에 흩어져있는 백호영들이 얼마나 확실하게 장악 통제할 수 있는가였다. "흐흐흐흠~!"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고학과 달리 모원은 콧노래 달고 집무실에 들어왔 다. "뭐가 그렇게 좋은가?" "아! 고대인, 죄송합니다. 제가 늦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자네나 내가 더욱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네." "예." 사실 고학이나 모원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었다. 전환으로 남례 성 전역에 퍼져있는 백호영들과 연락하여 그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만일에 사태에 발 빠르게 대응하는 것뿐이었다. 긴장감이 무척 높은 때이나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수집된 정보를 분석하는 것 이외엔 특별한 것이 없는 것 이 현실이었다. 그리고 최근에 와서야 신혼의 재미를 본 모원을 고학은 크 게 탓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정략결혼인 모원과 메이는 혼인 후에도 별반 진전이 없다가 주모인 설화가 집안일을 챙긴 후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 지 바로 어젯밤에 첫날밤을 치렀던 것이다. 그리고 이미 그 사실은 알 만한 사람들을 모두 알고 있어 답답함 속의 한줄기 청량함이 되어주었다. 잔폭광마는 보름째 주군이 누워있는 방밖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선녀 같은 주모가 온 후로 주군을 지키겠다며 서서 잠든 채 꿈을 꾸는 부끄러운 모습 을 보이진 않았다. 이젠 쉴 땐 쉬고 주모가 챙겨주는 음식을 먹는 여유마저 생겼다. 그러나 주모가 자신에 주군의 심장에 칼을 꼽은 저주받을 사실을 안 주모의 실망한 얼굴을 볼까봐 무척이나 가슴 졸였다. 그러나 지심을 통 해 주모가 자신이 범한 씻을 수 없는 죄를 이미 알 고 있었다는 말을 듣고 주모의 앞에 무릎 꿇고 사죄했다. 그리고 스스로 가슴을 갈라 심장을 꺼내 줄 생각으로 칼을 꺼내 가슴을 찌르려 할 때 주모가 말했다. "그대의 목숨은 이미 당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서방님의 명을 그렇게 어 기고 싶은 겁니까?" 그리고 잔폭광마는 소리 내어 울며 다시금 주모 앞에서 충성을 맹세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주군과 함께 하겠노라고……. "육소령!" 잔폭광마는 자신을 부르는 깨끗하고 밝은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또, 서서 꿈꿨죠? 멍하니 서서 뭐하는 거예요?" "아, 아닙니다. 단지 생각에 잠겨있었을 뿐입니다." "자요!" 잔폭광마는 주모가 직접들 챙겨주는 저녁식사를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받아 들었다. "또, 저번처럼 궁상맞게 서서 먹지 말고 편하게 앉아서 먹어요. 알았죠!" "예." 설화는 잔폭광마에게 식사를 챙겨주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보름이나 지났건 만 서방님의 상태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설화는 실망하지 않고 라혼이 누운 침상 머리맡에 앉아 오늘 있었던 일들을 속삭이기 시작했다. "닷새 만에 지심이 돌아왔어요.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글쎄, 엉망이 되서 왔지 뭐예요. 흑사가 지심을 치료하면서 '그런 무식한 방법으로 강해 지려면 목숨이 열개라도 부족해!'라고 했어요. 어디 심산유곡 아니지…. 밀 림의 깊은 곳에서 수련이라도 하나 봐요. 그런데 지심이가 여자가 아니라면 서요? 그렇게 예쁘게 생겼는데 여자가 아니라니 나는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요. 확인(?)해 볼 수도 없고……." 오늘도 설화는 의식이 없는 라혼의 귀에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홀로 늘어 놓다 잠이 들었다. 라혼은 생사지간(生死之間)에서 부활을 위한 노력에 노력을 거듭했다. 하지 만 생각대로 잘 되지가 않았다. 육신은 이미 살지도 죽지도 않은 상태로 얼 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다만 상당한 시간이 흘렀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남례일족의 대야에 마지막 깨달음인 심검은 라혼이 깨어나지 못하 게 하는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덕분에 영력(靈力)이 약해질 대로 약해져 영혼을 매개로한 에텔 스페이스의 두 브라마의 신성력을 끌어 올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약해진 영력은 몸이 없이는 회복할 수 없는 것이기에 어 쩌면 영원히 이처럼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을 헛되이 보냈을까. 대야의 심검(心劍)에 투영된 의지를 하릴없이 관 조하던 중 라혼은 그것이 살의(殺意)나 적의(敵意)가 아닌 호의(好意)가 포 함되어 있음을 알았다. '천지(天地)와 우주(宇宙)의 모든 것은 하나다. 내가 너와 어울려 조화로우 니 그것이 곧 생(生)이로다. 그러니 나는 너를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니 그 것이 곧 생이다.' 대야의 마지막 심득(心得)에 의한 영혹 속에 깊숙이 박힌 심검을 영혼으로 감싸 흡수하고 그 도리에 따라 라혼은 천지만물(天地萬物)의 기운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이것이 내 몸의 형상을 유지한 기(氣)인가? 생명의 기운은 불완전하지만 계속 움직이는 것이니 너 또한 살아 움직여라!' 라혼은 일단 굳어버린 몸의 기운 풀어 천지와 소통(疏通)게 했다. 그러자 이미 죽은피와 살이 몸 밖으로 배출되며 계속 새로운 피와 살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뇌는 느끼고, 생각하며, 폐는 숨을 쉽다. 심장을 생명을 나르는 피를 사지 백해(四肢百骸)로 보낸다.' 뇌를 통해 통증과 더불어 향기롭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냄새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는 숨을 쉬고 심장이 뛰는 것을 뇌가 느끼기 시작했다는 증거 였다. '근육은 부드러워지고, 뼈는 강건해진다. 오감(五感)이 새로워지고 영규(領 揆)가 타통되니 육신은 천지를 닮는다.' 근골이 제 기능을 회복하자 라혼은 비로소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리고 어두 운 방안이 속속들이 보이며 새삼 눈으로 보고,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와 들 려오고, 향기로운 냄새와 입안의 비릿한 남아있는 비릿한 피 맛, 살갗에 느 껴지는 따뜻하고 포근한 무게감……. 그리고 눈물을 흘린 자국이 선명한 설 화의 모습이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난 라혼은 그 순간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을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곤히 잠든 설화의 얼굴에 눈물자국을 닦아내고 잠에서 깬 설화의 양 볼을 들어 길고 긴 입맞춤을 나누었다. 그리고 설화의 옷을 조심스럽게 벗기고는 가녀린 목덜미를 애무했다. 라혼의 입술은 설화의 하얀 목덜미를 지나 앙 증맞은 귀를 거쳐 눈꺼풀을 살짝 물고는 짭조름한 눈물을 핥았다. 그리고 코끝에 살짝 입을 맞추고 다시 입술에 잠시 머물다 이내 떨어졌다. 라혼은 설화를 겨드랑이 사이로 보듬어 안고는 따뜻한 체온과 심장의 두근거림을 피부로 느끼며 그 순간 살아있음에, 설화를 깊이 느낄 수 있음에 감동(感動 )했다. "벌써 보름이 다 되가오." "흐음~!" "이쯤에서 우리가 전면에 나서는 것이 좋지 않겠소?" "아직, 조금만 더 두고 봅시다. 봉수성에서 이렇다 할 연락이 없는 것을 보 면 백호나한의 의식이 돌아오진 않은 모양이나 사실상 하남천원군의 등뼈라 할 수 있는 하급군관들이 대부분 과거 백호금군 출신인지라 섣불리 나섰다 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일 것이오." 작도인은 상초가 너무 신중하다고 생각했다. 사실상 남례성을 한손에 장악 한 백호나한이 자객들의 공격을 받았다. 뭐 들리는 소식에 따르자면 '중한 상처는 입었으나 생명에는 지장 없다'였다. 그러나 보름이다. 백호나한이 의식을 회복하고 정신이 있다면 남례성이 이토록 조용할리 없었다. 남례성 의 모든 병권을 장악하고 있는 그가 자신의 목숨이 노려진 일을 가만히 넘 길 리 없었다. 그러나 지금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봉수성에 있는 백호나 한의 심복 고학이 시시때때로 연락을 하며 자신들의 행보를 감시하고 있었 다. 또한 비록 출입이 엄격히 통제된 봉수성이었지만 일이 벌어진 곳치고 무척 안정적이란 소문을 들었다. 그러나 역으로 그것은 하남대원수 금영월 상장군이 그만큼 손을 썼다는 말이 되며 백호나한의 상세가 위중하다는 반 증이었다. "이미 현무금군 출신 군사들과 주작금군 출신 군사들이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요. 작금의 사태는 매우 심각하오. 하남천원군의 장군은 다섯인데 백호 문의 소장 모석은 원주로 가있고, 상장군과 대장군은 봉수성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소. 그러니 장군과 내가 나름대로 움직이는 것은 오히려 그 소임을 다하는 것이오." "그렇긴 하나……." 상초는 작도인의 말에 일리가 있다 생각했지만 실상 백호나한이 그 일을 당 하기 전부터 무리하게 현무와 주작 금군출신 군사들을 빼내온 사실이 마음 에 걸렸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누구나 앞뒤정황을 따져보더라도 의심 갈 만한 구석이 너무 많았다. 직급이 소장에 제수되어 장군의 반열에 들었음으 로 독자적인 군사력을 가지는 것은 관례상 넘어갈 수 있다하지만 기다렸다 는 듯이 저면에 나서면 일을 사전에 알고 움직였다는 시선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설사 백호나한이 이대로 비명에 가도 흉수의 배후로 지목되면 목숨을 보전키 어려울 것은 너무나 자명했다. 지금에 와서 느끼는 것이지만 작도 인과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온 그 존재가 자신들을 위해 백호나한을 도모하 지는 않았을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상초의 생각은 이 어지지 못했다. "장군, 수천부에서 진토인들의 반란이 발생했습니다." "뭐야? 어느 부족이냐?" "바리 족과 나의 족 그리고 시다 족이 주축으로 중주인 출신 군사들 참살해 그 목을 장대에 꼽고 기세를 드높이고 있습니다." "지금 즉시 그 사실을 봉수성의 금 상장군께 알리고, 호도의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라!" "충!" 시다, 우구, 바리는 각기 1만에서 5천까지 전사들을 가진 대부족이었다. 이 들이 반란했다면 아마도 2만 5천 수준의 병력이 반란에 동참했다는 계산이 섰다. 이는 남례성을 장악하기 위해 얼마 전 수집한 정보에 따른 계산이라 틀리지 않으리라. "차라리 잘되었소. 이것을 빌미로 남례성 전역에 흩어져있는 하남천원군을 모읍시다. 백호나한의 백호영은 어차피 분리되어있는 존재들이고 상급 군교 는 대부분 우리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소. 반란이 발생한 수천부에 그들을 모두 밀어 넣고 서서히 지배력을 확대해 나간다면 하남천원군은 우리의 수 중에 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요." "좋소! 그렇게 합시다." 상초는 작도인의 말에 동조하면서도 깊은 수렁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것 같 은 느낌을 도저히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소리가 귀를 간질이고 하늘에 떠있는 비구름(雲雨)에 아침 해가 가려져 있었으나 그럼에도 사위에 밤의 어둠은 아침의 밝음에 맥 을 못 추고 물러났다. 눈이 부시지 않아 좋은 비오는 날 아침에 밝음은 침 방에까지 스며들었다. "음." 라혼은 콧속의 스며드는 익숙한 향기를 맡으며 눈을 떴다. 그리고 바로 섶 단 같이 고운 머리결의 주인이 알몸으로 자신에게 폭 안겨 고름 숨소리를 내는 것을 보았다. '설화가 어째서……?' 그리고 지난밤 꿈결 같은 일들이 하나하나 생생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꿀꺽!' 라혼은 마른침을 삼키며 다소 복잡한 심경으로 설화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체향과 살갗으로 전해져오는 부드럽기 그지없는 느낌을 음미했다. 단순하고 간단명료(簡單明瞭)한 것을 최선이라 여기는 라혼이었지만 설화에 관해서 만큼은 아니었다. 설화를 직접 받아내 아내로 삼았지만 지난 18년간의 세월 은 부부라기보다 후견인과 피후견인의 관계였다. 설화가 각성하면서 갑자기 커진 후, 때론 가끔 보이는 의외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하고 치기어 린 모습에 고개를 설래, 설래 젓기도 했었다. 세상의 부조리한 모습에 가슴 아파하는 모습에 걱정이 되기도 했으며 그것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 가는 모습엔 대견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잠자리만은 되도록 천천히 하려 고 했다. 설화가 가끔 지나가는 투로 그것에 대해 언급한 것은 그 나이 특 유의 호기심 정도만 생각했기에 진정 준비가 될 때까지 뒤로 미루려 애썼다 . 라혼은 일은 벌어진 것이고 설화의 얼굴을 어떻게 쳐다보아야 할지부터 걱정스러웠다. '이것 참……!' 못할 짓 한 것은 아니었지만 시쳇말로 최후 심판을 기다리는 사형수의 심정 으로 가만히 누워 라혼은 자꾸만 떠오르는 복잡한 상념을 지우고 설화의 몸 에서 흘러나오는 향기를 맡으며 심판의 때를 조용히 기다렸다. "으웅." 설화는 부끄럽지만 황홀하기 이를 데 없는 꿈속에서 깨어나기 싫어 몸을 뒤 척여 돌아누우며 서방님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 그리고 너무나 실감나는 서방님 냄새와 피부로 전해오는 감촉에 화들짝 놀 라 눈을 뜬 설화는 간밤의 그것이 꿈이 아님을 비로소 깨달았다. '몰라! 꿈이 아니었나봐!' 그러다 문득 서방님의 상태를 기억해내고 손으로 여기저기를 더듬기 시작했 다. 하루에 한두 번 전신을 닦아주던 설화는 등으로부터 관통한 군도(軍刀) 와 복부와 가슴에 난 상처들을 보고 가슴 아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신 을 안고 있는 사내에겐 그것이 없었다. "누구?" "……." 라혼은 잠에서 깬 설화가 몸 여기저기를 더듬어대자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 여야 할지 일순 당황했다. 그러나 라혼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설화는 몸 을 벌떡 일으켜 새우더니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자 어색한 미 소를 지을 뿐이었다. "서방님! 엉엉엉엉……." "서, 설화야!" 그리고 설화가 서러웠다는 듯이 눈물을 펑펑 흘리며 울기시작하자 지은 죄 가 있는 라혼은 안절부절못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다만 해줄 수 있는 것은 부드럽게 안으며 입맞춤을 해주는 것 밖에는……. "뭐야? 대규모 반란이라고?" "고대인!" 고학은 드디어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되자 낭패스런 심정을 금할 길이 없었 다. 호도의 두 장군들의 행보가 가뜩이나 수상한데 기다렸다는 듯이 반란이 발생하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일단 호도의 두 장군들이 발 빠르게 움직여 호도의 수비를 굳건히 하고 남례성 전역에 퍼져있던 하남천원군을 한데 모 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고학을 불안하게 했다. 흩어져 있으 면 군사들을 지휘하는 것은 하급 군관들이다. 그러나 한데 모여 대군을 일 루면 상급 군교들의 지휘권이 확실해지기 마련이다. 적이 없다면 또 모를까 눈앞에 자신들의 목숨을 노리는 적이 있다면 같이 싸우며 지휘하는 장수에 게 충성심이 높아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고대인, 일이 어찌되었던 일단 금 상장군께 알리는 것이 순서입니다." "부탁하네. 나는 장상에게 서해수군에 속한 군사들의 지휘권 더욱 확실히 하라 전하겠네." "예!" 모원은 고학과 함께 사용하는 집무실을 벗어나 금영월의 집무실로 뛰듯이 달려가 반란 사실을 보고했다. 모원의 보고를 굳은 안색으로 듣던 금영월은 현재 봉수성의 위병들과 노예부대, 그리고 수군들의 사기를 검토하라 지시 하고 백호나한의 부재로 지휘권이 확실치 않는 군사들을 더욱 확실히 잡기 위해 서해수군의 장상, 소천위와 이번에 새로이 봉수성 위병대장(衛兵隊將) 이 된 인무명(仁武明)과 봉수태수 돈석들을 불렀다. 지금 금영월이 확실하 게 장악하고 있는 군사는 5천 노예부대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 라혼은 설화가 손수 챙겨준 옷을 입고 설화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방을 나 섰다. 아침에 내리던 비가 그치고 구름사이로 눈부신 햇빛이 비치고 싱그러 운 공기가 바람이 되어 조용히 흘렀다. 그리고 하늘 저쪽에 천궁(天弓)이 무지개 특유의 오색영롱함을 자랑하며 걸쳐져있었다. 그러나 그런 싱그럽기 그지없는 날씨와 어울리지 않게 비에 접은 청성바닥에 무릎 꿇고 비장한 기운을 풍기는 무장이 있었느니……. -쿵! "죄를 지었습니다. 죽여주십시오." 잔폭광마였다. 밤새 방문 앞을 지키다 거친 숨소리가 들려 방안을 훔쳐본 잔폭광마는 주모를 안고 있는 주군을 보았다. 주군은 약속대로 살아나 건강 한 사내(?)의 모습을 보이자 천지신명(天地神明)에게 감사하며 처마를 벗어 나 고급스런 청석이 깔린 마당에 무릎을 꿇고 맨몸으로 비를 맞으며 주군이 나올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주군이 방밖으로 나서자 잔폭광마는 '쿵!'소 리가 나도록 단단하기 그지없는 청석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죄를 물을 것을 청했다. "떠나라! 네가 내게 칼을 댄 것이 본의가 아니었음을 안다. 그러니 목숨을 거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떠나라!" "……!" 라혼은 담담하기 그지없는 어조로 그렇게 말하고 설화와 함께 발걸음을 옮 기려했다. 그러나 잔폭광마는 다시 단단하기 그지없는 청석이 깔린 바닥에 연신 머리를 박으며 울부짖었다. -쿵! "주군, 차라리 이 몸뚱이를 강시로 만들어 주군의 뜻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 게 하소서……. " -쿵! "필부 육삼! 주군의 곁을 떠나면 이미 산목숨이 아니니 자결이라도 명 하소 서……." -쿵! "제발 버리고, 내치진 말아주십시오. 차라리 자결을 명 하소서……." 눈물은 여인에게만 무기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우직한 사내의 진심이 담긴 절절한 눈물 또한 사람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서방님……." "……." 라혼은 설화의 투명한 눈동자를 마주보고 고개를 끄덕여주고 머리가 깨져 피가 낭자한 잔폭광마에게 다가가 주문 영창(靈唱)도 없이 황금빛 기운으로 그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그리고 아무런 말없이 돌아서서 등을 보이며 몇 걸음 옮기고는 조용히 말했다. "따라와라!" -쩡! 잔폭광마는 머릿속에서 마른벼락이 치는 듯한 감흥을 받았다. 사내는 백 마디 말보다 한 가지 행동으로 말한다고 했던가. 믿고 맡긴 등에 믿음을 배신하고 칼을 밖아 넣은 자신에게 다시 등을 내보이며 따라오라는 한마디 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무언가를 말해주었다. 잔폭광마는 그 순간 대부를 집 어 들고 몸을 일으켜 세워 주군의 넓은 등을 바라보며 아무런 말없이 3보 뒤를 따랐다. 우기에 비가 많아 각 건물마다 이어지는 길에 지붕이 있는 회 랑을 만들어 폭우가 쏟아져도 저택 안에서 비를 맞지 않도록 한 길을 걷던 설화가 문득 뭔가 생각이 난 듯 말했다. "저기 서방님." "왜?" "육소령은 밤새 방밖을 지키고 있었겠지요." "?" 라혼은 설화의 말 고개를 돌려 잔폭광마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라혼은 붉은 기가 도는 잔폭광마의 안색에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뭐, 어때! 첫날밤은 원래 구경꾼이 있는 거야!" "뭐예요?" "아야!" 설화는 라혼의 너스레에 괜히 부끄럽고 심술이 나서 라혼의 옆구리를 꼬집 었고, 라혼은 죽어라 엄살을 피웠다. 라혼의 죽는 시늉에 설화는 아직 몸이 불편하냐며 걱정스레 물었고 라혼은 그런 설화의 반응에 더욱 엄살을 피워 아내를 놀렸다. 나한수중(羅漢睡中) "어찌되었느냐?" "잡지 못했습니다. 하나 이곳 밀림은 우리들의 앞마당과 같은 곳입니다. 그 러니 곧 잡을 수 있을 겁니다." "과연 백호나한의 흑장들이로군." 바리족 족장 토무는 불의의 기습에 거의 맨몸으로 도망친 30명 남짓한 흑장 들의 역량에 감탄을 표했다. 그런 토무 족장의 말에 나의족의 대전사 구르 가 나서며 말했다. "토무 족장, 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오. 부끄러운 사실이지만 전사들이 그들의 힘을 두려워하고 있소. 단하나라도 잡아 목을 베어 반드시 저 장대 에 꼽아야 하오." "그것은 잡고 나서 할 일. 그러나 지금으론 그들이 어디 있는지 조차 알 수 가 없는 것이 아니요?" 바리족과 나의족 그리고 시다족은 모두 성스런 하얀 코끼리의 후예들로써 오랫동안 서로 반목하며 쟁패를 거듭했다. 그러다 중주군사들을 등에 업은 열지족에게 강제로 흡수당했다. 그리고 하남천원군이라는 조정의 군대에 부 족에 속한 전사 대부분을 보내고 각 족장에겐 현령(縣令)이란 허울 좋은 벼 슬이 내려졌다. 그러나 문제는 이 세 부족은 남례성 진토인들 대부분이 숭 배하는 하얀 코끼리의 후예라고 자처하는 자들로써 자존심이 무척 강했다. 그들에게 열지족은 일종의 추종자에 불과한 상놈들 이었고 중주의 군사들 또한 오랑캐일 뿐이었다. "진정들 하시오. 우리끼리 반목해보아야 좋을 것은 하나도 없소. 지금 수천 부로 언제 조정의 대군이 몰려올지 모르는 상황이니 언제까지고 서른 남짓 한 흑장들에게 매달릴 수 도 없소. 하루라도 빨리 오조산(烏鳥山)으로 들어 가서 그들을 대비해야 하오." "사흘, 사흘만 주시오. 내 반드시 흑장들의 목을 따오겠소." "알겠소. 하지만 사흘뿐이오. 더 이상은 힘드오. 흑장들은 앉아서 천리밖에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반지가 있소. 이미 호도에 우리가 거 병한 사실이 들어갔을 것이니 시간이 없소." *** "쾌차하셨군요. 다행입니다, 장군." 라혼은 우선 설화와 같이 가니아를 찾아 집안 어른의 예로써 인사했다. 그 녀는 지금 꼴이 엉망인 지심을 돌보고 있었는데 침상에 누워 있던 지심은 주인을 보자 급히 몸을 일으켜 세우고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떨궜다. "주인님……." "다쳤구나. 하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닌 것 갔군." "……." 지심은 주인의 차가운 말에 움찔하며 몸이 굳었다. 하지만 라혼은 그런 그 의 반응을 무시한 체 냉담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너는 내게 그저 짐에 불과하다. 그것은 너 스스로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 다. 그러니 부족으로 돌아가라!" "……!" "난 스스로 너 하나 정도는 보호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이번 일을 당하 고 보니 그것은 교만에 불과함을 알았다. 그러니 섭섭하게 생각치 말고 지 금 당장 부족으로 돌아가라!" 라혼의 매정하기 그지없는 말에 지심은 파르르 떨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 다. 그러자 지심이 주군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아는 잔폭광마 가 나서며 그를 두둔했다. "주군, 지심은 그 누구보다 주군에게 충성스럽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내 치 시는 것보다 무공을 가르쳐 힘을 기르게 하여 중용하는 것이……." "내가 한가하게 누굴 가르치고 있을 시간이 있으리라 보나?" "하지만 주군이 아니라도 그를 가르칠 실력자는 얼마든 지 있지 않습니까?" 라혼은 어느새 속에 있는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잔폭광마를 지그시 바라 보며 조용히 말했다. "내가 바쁘게 움직이는데 누군들 한가할까?" "예?" 라혼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잔폭광마에게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나 화났거든." 자기 스스로 다소 우둔하다고 생각했던 잔폭광마는 주군의 그 치기어린 한 마디에 앞으로의 일을 짐작하며 등골이 쏴하는 느낌을 받았다. "서방님 화났어요?" "그래 아주 많이." 설화의 질문에 장난기 어린 대답을 한 라혼은 다시 지심에게 잠시 시선을 주고 가니아에게 말했다. "그래서 설화를 보내려 합니다." "서방님! 전……." "태회진을 오랫동안 비워두는 것은 좋지 못하다. 네 얼굴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니 할머니를 모시고 지금이라도 당장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설화는 서방님의 말에 그동안 내 팽개치다 시피 한 태회진이 걱정스러웠는 지 내키진 않지만 다시 서방님을 떠나있는 것에 동의했다. 그러나 오늘 당 장 떠나기엔 너무나 섭섭해 하루를 더 지내기로 했다. 그동안 친해진 한포 포와 초초, 메이 등과 작별인사라도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라혼은 지 금 당장 설화가 북지성 태회진으로 가주었으면 했지만 이럴 경우 라혼은 설 화의 뜻을 거스르는 법이 없었다. 라혼이 잔폭광마와 자신 잠들어 있는 동 안의 돌아가는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거처를 나서 고학과 모원이 있는 봉수 태수부로 향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지심은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그런 지심에게 가니아는 말을 걸었다.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는 마라! 내가 느끼기에 그는 필요 없다고 자신을 따르는 자를 함부로 버리지 않을 사람이다." "……." "그러나 허튼소리를 하거나 말을 돌려 표현하는 사람도 아니다." "가니아님?" 가니아는 지심의 붉게 충혈 된 눈을 마주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듣기로 잔폭광마라고 하는 무장이 심독에 취해 그의 등을 찔렀다고 들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의 태도가 너무 당당하더구나." "……!" 지심은 가니아의 말을 듣고서야 잔폭광마가 주인의 등 뒤에 서 있었으며 그 전과 다름없는 태도로 자신을 변론까지 했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전엔 그것이 너무 당연한 풍경이었지만 그의 처지를 생각해 보면 그것은 당연한 풍경일 수 없는 것이다. 지심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뭔가 결심을 했다. 백의 장포를 입은 미공자와 험악하기 그지없는 인상이 검은 갑주의 무장이 말에 몸을 실고 봉수성 대향로를 지나자 길을 가던 사람들은 물론 하루 장 사를 준비하던 사람들도 하던 일을 멈추고 그들을 쳐다보았다. 남례일족의 자객들에게 큰 상처를 입었을 것이라는 백호나한이 자신의 등에 칼을 밖아 넣은 장본인에게 등을 보이며 한가로이 지나는 모습은 뭔가 이상하고 어색 했기 때문이었다. "뭐야? 지금 보니 멀쩡한데, 누구냐 대장군이 이미 죽었을 것이라고 헛소문 을 퍼트린 놈이?" "그러게? 죽지는 않았어도 한 두어 달은 자리보전할 줄 알았는데?" "그보다, 저기 잔폭광마는 그때 대장군을 찌른 사람 아니었던가?" "어라? 정말이네……." 봉수성의 백성들은 백호나한이 모습을 상당기간 보이지 않고 이미 죽었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설마 하는 마음과 아무리 못해도 서너 달은 자리보전 못하리라 수군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 스스로 말에 올라 멀쩡하게 자 신의 거처로 들어갔고, 그의 부인이라는 천하제일미(天下第一美) 천상천화( 天上天花)가 밝은 표정으로 봉수성의 시전을 돌아다니니 애초에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어도 죽음까지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천하12지존 중 한명인 천 독지존(天毒至尊) 독신(毒神)이 만든 천독환단(天毒還丹)과 그 사용법등에 대한 소문이 퍼지며 무쇠도 녹인다는 독신의 독을 과연 전신에 뒤집어쓰고 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들게 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의 일 을 상상하며 '설마 아닐 거야!'라는 심정으로 삶과 죽음의 절충안인 위중한 상태이지만 죽지는 않을 것이란 말만을 되뇔 뿐이었다. 그런데 그 당사자 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건강한 모습으로 대향로를 걷자 모두들 일손을 놓고 라혼의 안색을 살피며 서로 수군대기에 바빴다. 특히 그날 이후 다시 봉수성의 위병이 되어 성내를 순찰하던 수군들이 반색하며 그 어느 때보다 도 힘 있게 군례를 했다. "충(忠)!" "……." 라혼은 그들의 군례를 눈으로 가볍게 받아넘기며 급할 것 없다는 듯이 허리 를 꼿꼿이 세우고 말에게 몸을 내맡겼다. 수군들은 그런 장군을 보며 단숨 에 사기충천하여 발걸음에 더욱 힘을 실었다. 그리고 봉수태수부의 관리들 또한 조마조마한 살얼음판 같은 상황이 그가 나타남으로써 해소되어 가슴을 짓누르던 천근 바위가 치워진 듯이 안도에 한숨을 내쉬었다. 수천부의 반 란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백호나한인 건재한 이상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믿음이 생기며 어떻게든 될 것이라 낙관했다. "다행이군. 통제사께서 무사하시니 수천부의 반란도 곧 해결되겠군." "그래, 그런데 윗분들이 수천부 진토인들의 봉기 때문에 회의 중인데 누가 미리 가서 알려야 되는 거 아냐?" "어?" 뒤늦게 뭔가 깨달은 관인들이었지만 라혼은 이미 잔폭광마와 함께 빠른 걸 음으로 내원(內院)에 들어서고 있었다. 하남대원수 상장군 금영월, 봉수태수 돈석, 열지족 추장 소노리, 그리고 고 학과 모석은 오늘 아침 수천부의 바리족 등의 반란에 대처하는 논의를 하기 위해 모였다. 이미 호도의 작도인, 상초 두 장군이 남례성 전역에 퍼져있는 하남천원군을 집결시키는 조치를 취했음으로 여기서 주된 논의의 주제는 다름 아닌 대추장 소노리의 행보와 금영월이 봉수성의 수군과 위병들을 인 솔하여 호도로 돌아갈 것이냐 아니면 좀더 사태추이를 살피고 움직일 것이 냐 였다. 그러나 가느냐 마느냐의 양단간의 일이었지만 이일은 결정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학은 호도의 두 장군에게 일말의 의심을 품고 있었 지만 금영월은 그들을 신뢰하고 있었다. 그러니 논의는 맥을 짚지 못하고 겉돌고만 있었다. 이에 고학은 금영월의 인품을 믿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 "금 상장군님,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기탄없이 말씀하시게." "호도의 두 장군의 최근 행보가 마음에 걸립니다." "……." 고학은 금영월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계속 이었다. "최근 두 장군들이 옛 현무문과 주작문 그리고 청룡문의 금군출신의 군사들 을 끌어 모아 직속수하로 삼았습니다." "그거야 장군의 지위에 있는 이상 당연한 것이 아닌가?"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시기가 무척 공교로워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시 다시피 그들은 라혼 대장군을 무척이나 경계했습니다. 비록 저희 라혼 대장 군이 그런 그들의 행태를 염두에 두지 않았지만 그들은 아니었습니다. 말하 자면 정적이 실권을 가지게 된 형국에서 죽은 듯이 지내야 마땅한 그들이 라혼 대장군이 직접 하남천원군에 흩어놓은 현무, 주작, 청룡의 금군들 감 히 다시 모은 다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지요." "……." "두 달 전부터 아주작정을 한 듯 노골적으로 남례성 각지에 흩어져있는 옛 상경출신 군사들을 모아들였고 라혼 대장군이 남례일족의 자객으로 의심되 는 자들의 죽음을 불사한 공격을 받았습니다." "크흠~." "만일 저의 이런 기우 같은 우려가 사실이라면 금 상장군이 호도로 가시며 그들이 어찌 나올지……." 고학은 끝말을 잊지 않고 흐리며 다시 한 번 금영월의 눈치를 살폈다. 호도 의 두 장군 중 한명은 그의 오른팔이었기 때문이었다. 작도인과 상초의 직 급은 소장이다. 소장은 직급은 장군에 반열에 들었고 장군의 반열에 든 장 군은 친위군 성격이 짙은 직속수하들을 거느릴 자격이 있었다. 적게는 수십 에서 많게는 수천까지 장군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가고 장군 개개인 의 성격이나 취향에 따라 전투중심의 군사나 단순히 전령(傳令), 정보수집, 군 내부의 치안을 담당하는 군사들이었다. 말하자면 라혼의 백호영과 같은 무리였다. 그러나 이런 것은 보장된 권리라기보다 그냥 일종의 관례였고 군부 내의 역학관계에 따라 얼마든지 유동성이 있는 것이었다. 비록 장군의 반열에 있더라도 군부의 이끄는 자의 참모의 위치라며 직속수하를 두지 않 았다. 그러나 금영월이 스스로 군부의 일에 손을 놓고 있었기에 직속수하를 거느린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하지만 군부내의 실력자와 반목을 했던 그 들의 입장을 생각할 때 일부러 그렇게 손쓴 것이 분명함에도 상경 금군출신 군사들을 다시 긁어모은 것은 의심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금영월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고학이 그런 얘기를 한 것은 그 자신의 안위가 걸려있어 한 것이라 믿기에 다시 한 번 심사숙고(深思熟考)했다. 만에 하나, 천에 하나 그들이 대장군 라혼의 암살을 시도한 세력과 끈이 닿 아있다면 호도는 적지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런 금영월의 고민은 길어지 지 않았다. "대장 라혼, 금 상장군을 뵀습니다." "아니 자네……?" "장군!" "주군!" 바로 어제까지 반송장이나 다름없었던 라혼이 오늘은 멀쩡한 모습으로 훤칠 하게 백의 장포를 차려입고 대청(大廳)에 모습을 보이자 모두들 깜짝 놀랐 다. 그리고 금영월은 죽은 아들이 살아 돌아온 냥 자리에서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라혼의 두 손을 잡고 반가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허어,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도 가지가지로 구만 겉으로 보아하니 멀쩡한 것 같은데 몸은 괜찮은가?" "멀쩡합니다. 그보다 제 내자의 말로는 근 보름이 다 지났다 들었는데 그간 에 일을 알 수가 없으니 고학에게 지난 일을 보고 받기위해 찾아와 보니 금 상장군께서 회의를 주재 하신다하여 찾아왔습니다. 제가 중간에 끼어들어 방해나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자네가 없어서 터진 것이 얼마나 많은데." 대청의 회의에 참가한 사람들 모두 반가운 표정을 숨기지 않고 저마다 건강 과 몸의 상태가 어떻지 한마디씩 물어왔다. 그리고 고학은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수천부 진토인들의 봉기에 대해서 설명했다. 이미 회의에 참가하 고 있는 모든 중인들이 알고 있는 것이었지만 모두들 흥미진진(興味津津)한 표정으로 고학의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바리, 나의, 시다 이 세 부족은 남례성 진토인들 사이에 신성시 되 는 하얀 코끼리의 후예로 자존심이 무척 강한 부족입니다. 그들은 서로 오 랫동안 자신들이 진정한 하얀 코끼리의 후예라 주장하며 대대로 피를 흘려 왔습니다. 소노리 대추장님." 고학은 수천부의 지금 상황과 호도의 두 장수가 조치한 보고와 봉기의 주체 들에 관한 정보를 말하곤 발언권을 소노리에게 넘겼다. 소노리는 고학의 뜻 을 이해하고 세 부족에 관한 이야기들을 늘어놓고는 말했다. "사실 그들의 입장에서 우리 열지족은 가지에 불과한 부족입니다. 중주식으 로 말해 방가(邦家)가 종가(宗家)를 친 셈이라……." 라혼은 소노리가 직접적으로 표현 하지는 않았지만 방계의 가문이 종가를 그들이 보기에 외세인 하남천원군의 힘을 등에 업고 힘으로 누른 형세라는 것을 알았다. 잠시 침묵하며 생각에 잠겨있던 라혼은 고학에게 물었다. "그쪽 방면에 파견되어 있던 백호영들은 아직 무사한가?" "전원 무사한 것으로 보고되었습니다. 현재 가장 가까이에 있는 백호영들로 하여금 그들을 도우라 했으니 어려움은 있으나 큰 사고는 없을 겁니다. 그 보다 군사들의 사기가 더욱 중합니다." "음! 일단 내가 무사하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겠군." 라혼은 고학에게 그렇게 말하며 금영월에게 고개를 돌렸다. 금영월은 고개 를 끄덕여 전환으로 전 백호영에게 라혼이 무사하다는 것을 지금 당장 알릴 것을 허락했다. "모원." "옛!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모원은 라혼의 호명에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읍(揖)하고 대청을 나섰다 . 라혼은 모원이 대청을 나서는 모습을 바라보다 금영월에게 몸을 돌려 길 게 읍(揖)하며 말했다. "상장군. 이번 일은 저를 암살하려던 세력과 관계가 있는 듯하니 다시금 제 게 전권을 맡기시어 남례성의 안정과 정 암살하려던 자들을 잡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뜻대로 하시게." 라혼은 하남천원군을 최고 통수권자인 하남대원수 상장군 금영월에게 이일 에 대한 전권 받는 것으로 일을 시작했다. 먼저 대추장 소노리에게 물었다. "소노리 대추장, 나의 시다 바리들이 약속을 어겼소. 이는 배신행위인데 남 례성에서 배신자들에게 어떤 형벌을 가하오?" "배신자는 손목과 발목, 그리고 혀를 잘라 개에게 던져줍니다. 그러나 그 세 부족의 처벌은 다릅니다. 그들이 스스로 맹세하기를 만일 약속을 어기고 배신할시 부족의 모든 전사는 산채로 땅에 묻히고, 여인은 타부족의 아이 를 낳으며, 나이어린 아이들은 거세당하여 노예가 될 것이라 했습니다." "좋소. 나는 그들 나의 시다 바리에게 맹세를 지킬 수 있게 돕겠소. 고학!" "옛!" "지금 즉시 아직 하남천원군에 속하지 않은 부족에게 항복을 권고하는 사자 를 보내 도록하라!" "예? 하지만 그렇게 하면……." "그렇게 하라!" 고학은 주군의 피를 부르는 명령에 등골이 서늘해지며 식은땀을 흘렸다. 이 미 남례성 진토인들의 습성을 잘 아는 주군이 그것을 명한다는 것은 이미 피를 보기를 작심했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를 암살하려던 자들의 배후를 캐보았을 테지? 고학!" "예? 예!" 고학은 너무도 담담히 말하는 주군에게 묘한 이질감을 느끼며 그간 조사한 바를 모두 털어놓았다. "흉수에 대해선 내 예상과 같군. 고학 나는 남례일족의 살수 한명을 알고 있지. 육삼!" "옛, 주군!" "지금 즉시 감곡으로 달려가 우르하 족의 다키라는 꼬마를 데려와라!" "존명!" "고학! 호도의 두 장군들에게 연락하여 하남천원군의 지휘권이 내게 있음을 알리고 수천부로 집결하라는 명을 취소해라. 그리고 아직 귀속되지 않은 부족이 권고를 무시하면 그 즉시 부족의 족장등 유력자으 신병을 확보해 남 례일족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토해내게 하라는 밀명을 내려라!" "꿀꺽~!" 수원숙우(誰怨孰尤)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리. 고학은 피를 부를 것이 자명한 주군의 결 정에 반대할 생각은 없었다. 자기 스스로 목숨을 잃을 뻔했고 안정을 찾아 가던 남례성이 다시 혼란스러워 질 뻔했다. 그러니 일벌백계(一罰百戒)의 이번 조치는 오히려 고학이 스스로 나서서 간언했어야할 일이었다. 그러나 고학이 걱정하는 것은 주군이 지나치게 도를 넘어 일을 어렵게 할까 그것이 걱정이었다. "허허, 이래도 걱정, 저래도 걱정 모사란 모든 것을 걱정스런 눈으로 보아 야하는 거로군." 그럼에도 고학은 주군에게 호도의 두 장군의 수상한 행보와 그간 여기저기 에서 긁어모은 남례일족에 대한 정보를 보고하고 좀 더 그들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내라는 임무를 받았다. 그리고 수천부 봉기는 하남천원군이 아닌 1만 서해수군이 해결하기로 하고 내일 날이 밝으면 출정이 가능하도록 하라 는 지시를 받았다. 덕분에 모원이 그들이 사용하게 될 보급품을 오늘 해지 기전에 확보하느라 서류와 씨름중이고 서해수군들도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덤벙거렸다. 담담한 표정과 어투였지만 주군의 분노는 부하들에게 알게 모 르게 전염되었고 그동안 군부의 일에 손을 놓고 있었던 봉수태수부의 관리 들도 그 영향을 받았는지 알아서 모든 일을 처리해 주었다. 또한 대추장 소 노리는 하남천원군에 속하지 않은 휘하 전사들과 동맹부족에게 반란토벌에 동참하라는 격문(檄文)을 띄웠고, 하남대원수 금영월은 정식으로 라혼 대장 군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서장(誓狀)을 내려주었다. 새삼 주군의 존재감이 들어나는 순간이었다. *** 이런 일은 살수나 하는 일인 줄로만 알았다. 지난 새벽 진토인 출신 군사들 이 칼을 돌려 불의의 기습을 해 수백 중주출신 군사들이 손은커녕 비명소리 한번 크게 못 지르고 목줄이 따져야 했다. 여의금강공(如意金剛功) 상(上) 의 조화심결(調和心訣)의 오의(悟意)로 그들의 살기를 읽지 못했다면 자신 은 저승에서 어찌된 영문인지 염라대왕에게 묻고 있는 신세였을 것이다. 어 쨌든 아비규환(阿鼻叫喚)의 현장을 피해 밀림 속에 몸을 숨겼지만 저들이 내부정비를 끝내고 대대적인 수색을 시작하면 일이 무척 어려워질 것임을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주군께서 무사하시고 바로 내일 대군을 이끌어 봉수성을 출발하면 열흘의 시간이 있다. 그럼 놈들이 대대적이 수색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사흘에서 닷 새뿐…….' 백호영 부장(部長) 독대오(獨大旿)는 믿음 주변에 은신해 있는 믿음직한 백 호영 대원들의 기척을 느끼며 자신감을 되새겼다. '이런 놈들, 기척을 이것밖에 없애지 못하나? 이런 놈들을 가지고 반격을 시도하라니…….' 그러나 그것을 위험한 임무를 해야 하는 부담감에서 드는 생각일 뿐 적 진 형 한가운데에 떨어지더라도 지금 대원들이면 전원이 살아 이곳을 탈출할 자신이 있었다. '독부장님, 놈들입니다. 수는 서른둘 북쪽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때 독대오의 귀가에 전음이 들려왔다. '일단 첫 번째 사냥감이로군. 저것들 해치우는데 손가락 하나라도 다치면 삼대를 비웃어주겠다. 알겠냐?' '그것은 너무 무리한 요구 아닙니까? 긁힌 상처정도는 봐줘야지요. 뭐가 어 찌될지 모르는 전장인데?' '좋아! 그 정도는 봐주지 대신 내가 열 셀 때까지 끝내는 거다.' '너무하네요.' '뭐가?' '다섯이면 충분합니다.' '그럼 셋으로 끝내!' 그렇게 진담인자 긴장감을 풀려는 농담인지 모를 대화를 전음으로 나누고 있을 무렵 믿음을 배신하고 봉기한 진토인 부족 전사들이 백호영들이 매복 한 길로 서서히 접근하고 있었다. 그들은 독대오가 일부러 만들어 놓은 사 람이 지나간 흔적을 따라 추적을 하고 있었고 백호영들은 땅이 아닌 나무와 나무사이에 매복하여 그런 그들의 모습을 서늘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 다. 그리고……. "셋이다. 하나!" -촤아! 독대오와 그의 부관격인 백호영 십장(什長) 초묵(草墨)이 전음으로 나눈 대 화를 모르는 백호영들은 그게 무슨 뜻이었지 모르지만 일단 공격신호에 반 응하며 밀림에 들어오며 하나씩 챙겨든 비수(匕首)를 던짐과 동시에 진토인 전사들이 미처 방비하기도 전에 그들의 목뼈를 꺾어 버렸다. -우둑, 뿌득~! "둘, 뭐야 상황 끝난 건가?" 진토인 전사 서른둘을 백호영 서른명이 채 둘을 세기도 전에 모두 황천으로 보내자 독대오는 자신의 머리를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살수 짓거리도 할 만하군. 어차피 죽고 사는 전장이니 누가 욕하진 않을 테지?" 비록 삼류무사였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강호인들이 그렇듯이 숨어 적을 암 습하는 무리들을 비겁하다 욕했다. 청부살인을 업으로 삼는 무인들도 숨어 서 암습하기보다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며 살수를 쓸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독대오는 강호의 비류검(費類劍) 독대오가 아니라 백호영 부장 독대오였다 . 자고로 옛 부터 '병자(兵者)는 궤도야(詭道也)!'라하며 전쟁에선 속이는 것이 최고이며, 비겁하다는 말을 최고의 찬사다. 백호나한이 멀쩡하게 살아있고, 수천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거의 동시 봉수성을 휩쓸었다. 게다가 오늘 정오가 조금 지나서 부터 굳게 닫힌 봉수성의 성문이 활짝 열려 많은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 또 팔기위해 몰려 드는 바람에 급하게 시장이 서서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리고 급한 용무를 마친 사람들이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세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니까. 백호나한의 곁에 강시지존 흑산자가 있어 그가 독신의 독을 해 독하고 오히려 그 독을 이용해 백호나한을 기사회생(起死回生) 시켰단 말이 야?" "그렇다니까! 듣기로 강시지존 흑산자와 천독지존 독신은 친구라 할 수 있 는 사이라 서로 교류가 있어 강시지존이 독신의 독을 알고 있었던 것이 백 호나한에겐 천운인 셈이지." "그런데 강시지존에게 그 정도의 의술이 있었던 거야?" "모르긴 몰라도 동경의 천의가(天醫家)나 후려의 백의성가(白衣星家)에서도 한수 접어줘야할 정도는 될 걸." "아니 그럼 백의성가의 천약지존(天藥至尊) 백의성자(白衣聖子)보다 의술이 뛰어나단 말이야?" "글쎄 나도 들은 이야기라 잘 모르겠는데 약도 잘 못쓰면 독이 되고 독도 제대로 쓰면 약이 된다고 하니 아무튼 우리 마누라의 조카가 보름 전 그때 혈독(血毒)에 당했을 때 흑산자가 와서 침을 놓고 해약으로 독을 풀었다고 그러니 의술이 있는 것은 확실하지." "오호라! 그래서 독신 독이 유출된 것치고 죽은 사람이 얼마 없었군. 그보 다 수천부의 반란은 또 어찌될까?" 사내는 친구의 물음에 차갑게 식힌 술을 단숨에 들이키고는 아무것도 아니 라는 듯이 말했다. "크으, 죽이누만……. 어찌되긴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뽑아 피를 보게 했으 니 뻔하지……." "그건 그렇지만……. 그 뻔한 게 뭐냐고?" "몰라! 하지만 바로 내일 아침 해가 뜨는 대로 출병한다고 하니 백호나한 화가 나도 단단히 난 모양이야! 사건이 일어나고 기다렸다는 듯이 칼을 돌 려세웠으니……." "그런데 백호나한을 암습한 자객이 남례일족이란 말이 있는데 그들은 어찌 될까?" "몰라! 나는 남례일족과 관련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 여기 봉수성만 해 도 그들과 선이 닿아있는 자가 한둘이 아니라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인데 그 것만 생각하면 잠자리가 편치 않다고." 아직 그런 기미를 보이고 있지는 않지만 백호나한의 군사들을 풀어 언제 시 전바닥을 뒤집을 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만 설마 하는 마음으로 백 호나한의 행보를 지켜볼 뿐이었다. *** 한포포는 라혼대가의 아내인 천상천화를 보고 여자인 자신이 보아도 아름답 다고 느꼈다. 어렸을 적 유일한 안식처나 다름없었던 해노야 할아버지의 체 향과 똑같은 향기를 가지고 있는 헌헌장부의 모습을 하고 있는 라혼대가가 그때 할아버지라는 것은 지금도 괴리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나 그 일 이 있고 천상천화가 온다는 말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일부러 라혼대가에게 아내가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는데 그녀가 온다고 하자 죽은 듯이 누워있 는 라혼대가의 모습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사실 라혼대가와 연인이 되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고 그와 관계는 그저 스승과 제자일 뿐이었다. 그리고 포포 자신보다 나이어린 천상천화의 모습은 스스로 납득 할 만 했고 우려했던 경계나 질시의 시선으로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너무도 자연스레 안주인으로써 집안의 일을 챙기자 포포는 저것이 조강지처 의 자신감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라혼대가의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면서고 천상천화, 아니 설화의 미소는 라혼대가가 곧 정신을 차리고 병석 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했다. 그리고……. "뭐야? 멀쩡하게 회복해서는 말까지 타고 밖으로 나섰다고? 그게 정말이야? 지심!" "그렇습니다. 그리고 제게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 그것 또 무슨 소리?" "저는 짐일 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면서……." "말도 안 돼! 대가가 어떻게 네게 그럼 말을……." "해서 부탁드립니다. 주인이 떠나라 했지만 저는 지금 떠날 수 없습니다. 반드시 반드시 주군에게 필요한 사람이 될 때까지 포포 아가씨 곁에 머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포포는 지심의 말을 듣고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어. 지금부터 너는 내 손님이야! 나도 객식구이긴 하지만 너 정도 책 임질 권리는 있어. 우린 친구잖아!" "감사합니다. 포포 아가씨." "그러니까 지금부터 아가씨 빼고 포포라고 불러!" "예!" "그보다 라혼대가는 언제 돌아오는 거야? 안되겠어, 설화사모에게 가봐야지 지심가자!" 사모(師母)는 사부(師父)의 부인이란 뜻이니 포포가 라혼과의 관계를 스승 과 제자로 삼았으니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스승인 라혼의 부인인 천상천화 설화는 포포에게 사모였다. 그러나 자유분방한 포포는 스승이라 하는 라혼 에겐 대가(大哥:큰 오빠)라 부르고 설화는 이름을 붙여 설화 사모라고 불렀 다. 사실 정식 사승(師承)관계가 아니 포가와 라혼을 어찌 부르던 상관은 없지만……. 포포가 지심을 데리고 집안 하인들에게 설화가 후원 정자에 있다는 것을 알 아내 가보니 이미 이 집안의 식객전부가 모여 있었다. 천상천화의 외조모라 는 주작의 무녀 가니아, 모원의 아내인 메이, 흑사라 불리는 강시지존 흑산 자, 아직까지 시비노릇을 계속하는 초초, 이번에 귀호기주로 임명된 귀호령 까지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포포는 일단 가장 어른으로 생가되는 흑산자에 게 예를 표했다. "소녀 한포포 흑사를 뵀습니다." "허허허, 그래 너도 소식을 듣고 온 모양이구나." "예, 무녀님. 설화사모!" 한포포는 자기가 인사드려야 하는 가니아와 설화에게도 예를 표하고 물었다 . "그보다 어찌된 일이예요? 어제까지만 해도 송장이나……. 합!" "훗! 맞아요. 솔직히 서방님은 송장이나 다름없었죠." "죄송해요. 설화사모." 설화는 한포포의 사과를 미소로 받고는 어떤 대답을 해줄까 고민했다. 설화 가 아는 서방님의 신분은 대선(大仙)에 버금가는 신선(神仙)이고 수미선맥 의 신선 보리대불은 서방님을 귀선(鬼仙)이라고 칭했다. 설화가 생가해도 서방님은 신선이었는데 신선이란 산사람(山人)이라 하여 세상과 인연을 갖 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아내인 설화에겐 그것을 이야기 해줬겠지만 이들에게 서방님이 신선이라는 사실을 털어놓기엔 조금 걸리는 것이 있었다 . 누구한테 전하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 사실을 지인이라 할 수 있는 이들에게라도 비밀을 가르쳐 줄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정 도는 말해줘야 했다. "사실 어젯밤에 서방님이 무슨 깨달음이 있었는지 환골탈태(換骨奪胎)를 하 셨어요." "세상에 정말이요? 그 것는 그냥 하는 말 인줄 알았는데 그럼 환골탈태하는 것을 직접 보신 거예요?" 흑사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절세고수인 백호나한이 환골탈태를 경험했다 는 말에 수긍을 하며 노란 표정을 감추지 않았지만 흑산자는 그 것뿐만이 아님을 알았다. 흑산자 또한 환골탈태를 경험한 극마지경(極魔之境)의 고수 . 환골탈태를 경험한 후 나름대로 그것에 대해 연구를 한 적도 있는 흑산자 였다. 환골탈태(換骨奪胎)는 생사현관(生死玄關)이 타통된 이후 내가공력이 마르지 않는 상태가 되어 몸과 마음 그리고 기운 즉 정(精), 기(氣), 신( 神)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근골(筋骨)이 급격하게 변하는 현상이었다. 여기 서 중요한 것인 정기신(精氣神)이 최고조에 달한 때였다. 어제까지 라혼의 상태는 절대로 정기신(精氣神)이 최고조로 달했다고 말할 수 없었다. 흑산 자 자신을 어린아이 다루듯 하는 주공의 경지가 겨우(?) 지금 막 환골탈태 를 한 고수일리 없었다. 그렇게 여인들 수다가 한참일 때 원주로 돌아간 호영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귀호기주가 된 귀호칠호 귀호령은 자신의 주 임무인 불새의 깃털의 주인인 불새의 무녀가 나타나자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이곳 식솔들 중 그의 신분 을 모르는 자가 없었음으로 모습을 보여 불새의 무녀 가니아에게 불새 깃털 을 가지고 원주 호황을 맞나줄 것을 요청하려 했다. 그러나 무녀는 불새의 깃털의 주인인 것은 자신이 맡지만 깃털은 귀림의 토지신들이 가지고 있다 며 난색을 표했다. 그러나 귀림의 토지신들이 백호나한과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귀호기주는 백호나한의 입장을 명확하게 알아야 할 필요성 이 있었다. 그러나 귀호기주는 스스로 은섬충에 당한 사실을 몰라 자신의 주인이 원주 중경 호천궁의 주인인 호황이 아니라 바로 라혼임을 아직 깨닫 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은섬충에 당한 사실을 아는 흑사는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 저를 뿐이었다. "어머? 그럼 내일 돌아가시는 거예요, 설화사모?" "그렇게 되었어요. 저 또한 여인천궁의 소궁주 신분이라……." "맞다. 천상천화는 여인천궁의 소궁주였지. 에? 여인천궁은 북지성에 있는 데……." "그러니 큰일이지요. 그보다 초초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요." "예? 마, 마님 말씀하세요." 초초는 잔뜩 주눅이 든 말투로 말했다. 스스로 라혼대장군의 시비를 자처하 니 아내인 그녀를 마님이라 부르는 것이 당연하고 스스로 그러게 부르고 있 었지만 지금까지도 그녀를 대할 땐 어딘가 어색했다. "우리 서방님에게 다른 건 몰라도 의복을 초초가 챙겨주길 바래요. 침상에 서 주무시지 않으니 한번 옷을 입으며 며칠씩 그 옷 그대로 입고 계시다고 요. 그러니 하루에 한번은 꼭 옷을 갈아입게 해야 해요. 알았죠." "알겠습니다. 마님!" 금지옥엽(金枝玉葉)에 장중주(掌中珠)였던 고귀한 신분이었던 초초, 아니 예순군주(藝純君主) 용정란(龍精蘭)은 자신감 넘치고 구김살이 없는 그녀의 당당함이 무척 부러웠다. 자신은 보호자가 필요해 라혼대장군의 시비를 자 처하며 그에게 기대고 있었지만 용정란이 보기에 천상천화는 스스로 대등하 게 라혼대장군과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혼대장군의 수하들의 태도 를 보면 모시는 주군의 아내이기 때문에 복종하는 것을 넘어 경외지심(敬畏 之心)을 가지고 그녀를 자연스레 따르고 있었다. 그것이 초초가 설화마님을 동경하는 이유임과 동시에 그녀를 꺼려지게 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이유이 기도 했다. "메이 너도 모원에게 잘해줘! 모원은 지략이나 능력이 뛰어나지만 기가 약 해서 자신의 주장을 하지 못해 그러니까 메이가 응원 해줘야해!" "예, 설화 언니!" 메이는 사실 처음부터 모원에게 그리 큰 악감정은 없었다. 다만 강한 전사 를 좋아하는 열지족 여인에게 허약해 보이는 모원은 애초에 남편감이 아니 었다. 나이는 모원이 서너살 많았지만 자신 앞에서 쩔쩔매는 모습이 꼭 나 이어린 동생 같아 놀려먹는 재미가 솔솔 했달 까? 그러데 덜컥 결혼을 하여 남편이 되자 그의 모든 것이 눈에 차지 않았다. 그러니 자연이 짜증을 부 렸고 그런 메이의 짜증을 모원이 다 받아주자 대놓고 무시하는 지경에 이르 렀다. 그러나 메이가 모원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을 때가 바로 며칠 전이었다. 라혼이 반송장으로 어떤 차도를 보이지 않자 아버지 소노리가 현 명한 메이에게 자신의 속내를 내비쳤다. 백호나한이 결국 숨을 거두고 남례 성이 혼란에 빠지면 아마도 조정의 군사들이 남례성 전 진토인 부족들에게 공적이 되니 열지족은 어떻게 해야 할 건가를 물어왔다. 자기 스스로는 백 호나한에게 머리를 조아렸으니 일선에서 물러나고 후계자인 장자(長子) 토 루가 열지족을 이끌게 되면 메이 또한 모원과 해어져 유력부족의 추장과 맺 어질 수 있다는 말을 한 것이다. 메이는 모원과 해어진다고 생각하고 또 실 제로 그럴 가능성이 높은 듯 보이자 지금껏 단점으로 보였던 모원의 다정다 감함이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하며 사무쳐갔다. 그러나 자존심이 센 메이는 그전과 큰 변함없이 모원을 대했고 한숨만 늘어갔다. 그런 그것을 설화가 눈치체고 꼬치꼬치 캐묻는 통에 진심을 내비치고 말았다. 그리고 언니로 삼 은 설화언니의 충고를 받아들여 미루고 미루었던 첫날밤을 치룰 수 있었다. "마님, 대장군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알았어요, 고마워요. 지보." "아닙니다." 설화는 이집안의 모든 하인들의 이름을 모조리 외우고 있었다. 누가 무슨 일을 하고 무엇을 잘하며, 그들 가족이 어찌되는 것 같은 시시콜콜한 모든 것을 열흘이 못되어 파악했다. 라혼의 경우 총관격인 지보는 그저 집에 딸 린 하인 1일 뿐 이었다. 수원숙우(誰怨孰尤) -쾅! "이럴 수가!" 작도인은 백호나한이 살아났으며 하남천원군 대원수 상장군 금영월로부터 다시 전권을 위임받았다는 소식에 자신도 모르게 탁자를 치며 벌떡 일어섰 다. 작도인과 함께 수천부의 반란을 어찌 이용할까 염두를 굴리던 상초는 체념끼가 서린 말투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우리가 백호나한의 수에 놀아난 것 같소." "그게 무슨 말이오?" "모르시겠소? 그는 처음부터 그리 큰 상처를 입지 않았던 거요. 애초에 우 리가 남례성을 아무런 무리 없이 쉽게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열지족과 그 동맹부족이 우리 아니 백호나한을 도왔기에 가능한 일. 하지만 백호나한은 서해수군통제사로써 남상으로 가야하오. 그럼 남례성엔 수년간 발을 디딜 수가 없소." "……!" "그는 이번 기회에 남례성 내부에 후일을 기약하며 기회를 노리는 자들에게 본은 보이려는 거요. 거기에 우리까지 놀아난 격이니……."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별 영향이 없겠지요?" 상초는 작도인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확실히 겉으로 보기에 우리의 행보는 수상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딱히 잘 못된 부분은 없소. 그러나 의심을 받을 만한 짓을 했으니 신뢰를 잃었소. 사실 이번 수천부의 반란은 대략 1~2만 정도 수준이오. 그리고 하남천원군 은 보름 내에 5만 대군을 집결시킬 수가 있소. 거기다 우리는 수천부의 세 부족에게 군량이 어느 정도 남아있는지 구성인원이 어찌되는지 전부 알고 있소. 애초에 수천부의 반란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소. 그럼에도 금 상 장군이 우리에게 맡기지 않고, 전권을 백호나한에게 주었소. 그리고 백호나 한은 우리가 전군을 수천부에 집결시키는 명을 거두게 한 그것이 바로 우리 를 믿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요." "크음~!" 작도인은 상초의 말에 침음성을 흘리며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이렇다 할 명분이나 증거는 없지만 그가 자신들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기 에 충분한 심증들은 차고 넘쳤다. 그리고 그는 조정에서 직접 임명한 자를 망설임 없이 벤 전력이 있었다. 상식적인 상대라면 얼마간 자중하면 그뿐이 나 그는 상식적인 상대가 아니었다. 불문곡직(不問曲直) 자신과 상초의 목 을 쳐낼 수 있는 존재였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백호나한에게 자신은 이로 울 것이 하나 없는 목에 걸린 가시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일 부러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제거해야할 상대인 것이다. 그것이 작도인을 안 달 나게 했다. "상소장!" "……?" "우리가 직접 백호나한을 도모합시다." "!" "우리가 내린 집결명령을 거두었으니 봉수성에 있는 병력과 봉호삼관의 병 력, 그리고 여기 호도에 있는 병력만으로 수천부의 반란을 토벌할 생각일 것이오. 어쩌면 소수의 호위병만 데리고 한발먼저 올지도 모르지……." "그을 도모한 후는 어지하려고? 그에게 굴복한 진토인들이 들고 일어날 것 이고 그의 심복들인 백호영의 고수들이 우리의 목을 노릴 것인데?" "백호나한이 살아있는 이상 우리는 살아있는 목숨이 아니오. 그가 이곳에 와 가장 먼저 할일이 뭘 것 같소. 바로 우리의 목부터 치고 우리가 모아놓 는 상경 금군출신 군사들을 장악하는 것이오. 그것은 생사가 걸린 문제란 말이오." "……." 처음엔 그저 물을 얼려 당도가 높은 과일 조각을 얹어내는 것이었다. 그 후 계속 만들어 이것저것 실험하다보니 지금은 석밀(石蜜)에 절인 과일을 얹 어내는 것으로 바뀌었다. "끼야! 서방님 이거 너무 맛있어요." 라혼은 모든 준비를 고학과 모원 그리고 토사귀와 봉수태수부 관리들에게 맡기고 잠시 거처로 돌아왔다. 본래 모든 준비는 책임자인 자신이 맡아 관 리해야 하지만 그러기보다 조금이라도 설화와 함께 있고 싶었다. 특히나 고 학이 자신이 잠든 사이에 설화가 한 모든 일은 그녀를 더욱 사랑하는 마음 이 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라혼이 거처로 돌아와 한 일은 빙과(氷菓)를 만드는 일이었다. 라혼의 거처에 머물고 있는 식객들뿐만 아니라 하인들 몫 까지 만드느라 초초가 준비한 석밀에 절여놓은 과일이 모두 떨어지고서야 라혼은 빙과를 만드는 것을 멈출 수 있었다. "허허허허, 설화가 주공이 만든 빙과를 무척 먹고 싶어 했다오." "그런가요? 초초 나는 차를 다오." "예." 라혼은 흑산자의 말을 받고, 초초에게 차를 내오라 했다. 그리고 초초가 차 를 가져온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찻잔을 내려놓으며 담담히 말했다. "나는 나를 암습한 자가 남례일족의 대야인 것은 안다!" "……." 딱히 누구에게 한말이 아닌 라혼의 말은 다소 어수선했던 대청을 조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나는 남례일족에 대해 알고자 하니 그들에 대해 아는 바를 말해주 었으면 한다." 라혼의 어투는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의 모인 모든 사 람들의 귀엔 담담하게 들리지 않았다. 사실 지금 라혼의 식객들은 모두 남 례일족과 연관이 있거나 그들에 대하여 어느 정도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 들이었다. 한포포는 남례일족의 소야와 귀림 토지신들이 가지고 있는 불새 의 깃털을 노렸고, 불새의 깃털이 남례성에 있는 이유이자 목표였던 귀호기 주 또한 경쟁자인 남례일족에 대해 누구 못지않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가니아와 메이 또한 많은 것을 알고 있으리라……. "……." 무거운 분위기가 좌중을 누르고 아무도 나서서 얘기하는 자가 없자 라혼은 다시 차를 한잔 마시고는 귀호기주 주란문(朱丹刎)을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 다. "남례일족은 어떤 자들인가?" "예, 대장군. 그들은……." 이미 은섬충에 당하여 라혼을 거부할 수 없는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남례 일족의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나름대로 파악한 남례일족을 돕는 부족과 선 이 닿아있는 유력인사의 이름까지 전부 말했다. 라혼은 그에게 그 모든 것 을 사류로 꾸며줄 것을 요구하고는 시선을 한포포에게 돌렸다. "포포야! 귀호기주가 말한 것에 보충할 것이 있지 않니?" 라혼은 물음에 잠시 망설이는 듯하던 포포는 이내 결심한 듯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털어놓았다. "제가 그들에게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얼마 없어요. 남례일족에 소야가 많다 는 것도 처음 알았을 정도니까요. 어머니라면 알고 있는 것이 더 많을 테지 만 저와 같이 일하던 소야 예하가 지나 족 추장의 둘째라는 정도만 알아요. " "좋아! 가니아 아시는 것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그렇게 라혼은 나름대로 고급정보를 한자리에 앉아 파악하고 흑산자에게 말 했다. "천독환단(天毒還丹)과 역천잠혈광(逆天潛血狂)은 흑사의 친우인 독신의 독 문지독(獨門之毒)이라 들었는데 흑사께서 친우 분을 만나주시겠습니까?" "……." "……." "알았소. 그동안 경황이 없어 남례성에 와놓고도 그를 만나지 못했으니 이 번에 한번 만나보리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라혼의 시선이 머문 곳은 한포포 곁에 있는 지심이었다. "지심!" "대가 지심은 저의 친구에요. 그러니……." "네게 힘을 주마!" "……." 라혼은 한포포의 변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렇게 말하자 포포는 물론 지심 또한 크게 놀랐다. "대신 나의 명을 거역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구나!" "주인님!" 지심은 몸을 땅에 던져 다시는 주인의 명을 어기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다 짐에 다짐을 거듭했다. 이로써 백호나한의 적이 누구인가가 명확해졌다. 한 포포는 라혼대가가 남례일족과 맞서려하자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귀림에 서의 일로 다소 삐걱거리기는 했지만 남례일족은 백수회를 지지하는 세력이 었다. 백수회로썬 간섭하거나 누구를 도울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한포포는 라혼대가가 남례일족을 멸절시킬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 만 남례일족은 남례성 사람들 그 자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라혼대가가 남례일족을 없애버린다면 백수회는 동지를 잃을 것인데 그렇다고 대가의 일에 간섭하다가는 백수회가 들어날 것이고, 대가가 남례 일족을 노릴 것이란 건 일반 백성조차 짐작할 수 있는 일.' 라혼과 백수회는 그저 좋은 관계일 뿐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가 아니었다. 포포가 평가하는 라혼의 값어치는 엄청났지만 백수회의 장로들에 게는 그저 출중한 능력의 일개 장수 일뿐이었다. 게다가 포포는 라혼대가가 뭘 원하는지 알지 못했다. 토금전장의 금대부가 투자하고 감곡의 향장자를 끌어들였다. 또한 열지족 추장 소노리를 앞세워 남례성 전역의 진토인 부 족을 제압하는가 싶더니 그 모든 것을 금영월에게 넘기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고 조정에 충성을 하는 것 같지도 않고 얼핏 서해바다를 장악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뱃길을 장악해봐야 장사치 이상의 존재는 안 될 것이었다. 어찌 보면 토금전장의 금대부가 그것을 바래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모르겠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지 뭐! 어차피 남례일족 사람들도 나름대 로 준비를 해두었을 테고 라혼대가가 가지고 있는 시간도 얼마 없으니까.' 한포포는 라혼이 서해수군통제사로써 봄이 되면 수군을 추슬러 남상으로 떠 날 것임을 상기하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지웠다. 처음 한번하고 나면 다음은 쉽다. 사실 대부분의 일이 그렇지만 특히 남녀 간의 일이 그렇다. 그러나 라혼은 지금 이 순간이 더욱 어려웠다. 설화를 안고 싶은데 그것을 표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뭘 그렇게 보는 거예요?" "설화 얼굴!" "왜요?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요?" "아니." 첫날밤을 치른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라혼이나 설화나 비몽사몽(非夢似 夢)간에 치른 거사라 지금 이순간이 무척이나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라혼 이 부활하여 잠에서 깨어났을 때 몸은 본능적인 일을 했기에 의지와는 상관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 의지는 있지만 표현할 수가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 다른 일이라면 단순하게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이는 라혼이었지만 이것은 그것과는 달랐다.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얻는 것보다 상처주지 않는 것이 더욱 힘들고, 상처주지 않는 것보다 실망을 주지 않는 것이 더욱더 어려웠 다. "서방님." "응?" "계속 그렇게 있을 거예요?" 라혼은 홍시가 된듯 붉어지는 설화의 볼을 보고, 이내 밝게 미소 지으며 말 했다. "잠깐 산책이나 갈까?" "예? 지금요?" "가자!" 라혼은 설화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했다. "어멋! 여긴……?" "봉수성 북쪽 어디야." "예?" 라혼이 설화를 데리고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한 곳은 바다 한가운데 의 기암절벽(奇巖絶壁)의 꼭대기였다. 시원한 바닷가 밤바람과 쏟아질듯 총 총히 박혀있는 밤하늘별이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었다. "배를 타고 봉수성으로 올 때 지나쳤던 곳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운치가 있군." "멋져요! 내가 별들 속에 파묻혀있는 것 같아." 그렇게 파도소리와 바람이 부는 소리를 조용히 귀가에 흘리던 설화는 조심 스런 어투로 서방님을 불렀다. "서방님." "응?" "서방님, 신선이라고 했지요." "아마도." "저 서방님에 대해 알고 싶어요." "……?" 라혼은 설화의 물음에 과연 그녀가 진실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설화가 궁금해 하는 것만 가르쳐 주기로 했다. "뭐가 알고 싶은데?" "음…. 일단 나이가 얼마나 되요?" "글쎄 대략 500살 정도." "저, 정말요?" "……." 설화는 크게 놀란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며 라혼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라혼은 겉을 보기엔 서른 안팎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또 어찌 보면 약관 18세 정도로 보이기도 했다. "고향은요?" "인시드 어딘가." "서역 말이에요?" "그래." "부모님은요?" "몰라. 철들었을 땐 나는 노예였거든." "예? 노예요?" 설화는 놀람의 연속을 경험하며 질문을 계속했다. "그런 신선은 어떻게 해서 되었는데요?" "내가 인시드 유력가의 노예였을 때 오귀(惡鬼)들이 습격해왔거든 그때 인 간 세상에 놀러온 용에게 구출 되어 그 용에게 검술을 배웠지." "세상에……. 그리고요?" "내 주인이 있던 곳으로 돌아와서 그의 밑에서 일했어." "용에게 배워 신선이 되고도 다시 노예로 일했단 말이 예요?" "아니 내가 다시 인간 세상에 왔을 때 시간이 150년이나 흐른 뒤였어. 그런 데 용하게도 그 집안의 아가씨에게 용병으로 고용되어 일했어. 그것이 인연 으로 그 집안에 정식으로 고용되어 가신 비슷한 지위를 가지게 되었지." "그리고 그 다음에 이곳으로 오게 된 건가요?" "아니, 그 뒤로 무슨 일이 있어 아라한 신전으로 가서 약 3년간 아라한 격 투술을 익혔지." "아! 맞다. 서방님 별호가 백호나한이잖아요. 그 다음 엔요?" "스승님에게 찾아가 마법을 배우고 다시 세상으로 나왔지. 서쪽 시드그람 대륙으로 거기서 몇 번의 전쟁에 참가해 이그라혼이란 칭호를 받고 나중엔 황제자리까지 앉을 뻔 했다." "뻔?" "그래 뻔! 되려했지만 결국 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솔직히 상황이 그렇게 되어 그랬을 뿐 황제자리에는 관심이 없었어. 그러니 아쉬움은 없어."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곳에 오게 된 거예요?" "암습을 당했다." "예?" "내가 시드그람의 황제로 선언하는 날 누군가 내 등에 독검을 꼽았다. 나는 안전한 곳에서 몸을 치료하기위해 잠에 빠졌는데 깨어나 보니 이곳이었지 아마 후려 근처 해안이었을 거야. 잠들기 전에 누가 음모자인지 모르기에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섬으로 옮기라고 했는데 아마도 내가 모르는 무슨 일 이 있어 나를 태운 배가 큰 바다로 나온 모양이야." "서방님!" 설화는 암습 당한 경험을 말하는 라혼의 뒤로 돌아 등을 끌어안으며 볼을 비볐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가족들이 모두 그곳에 있을 텐데 왜 돌아가시지 않으신 거예요?" "나도 돌아갈 생각을 했다 하지만 몸이 회복되지 않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를 구해준 무림의 협사들과 함께 그들의 본거지로 갔다. 일단 몸 을 회복해야 했기 때문에……. 그리고 나중엔 한 몇 년이 지나자 잠들었던 시기가 못돼도 1백년이나 되는 것을 알았어." "……." "그래서 그냥 검부에 머물기로 했지." "동인성 함관부에 있는 그 검부요? "검부를 아니?" "저는 여인천궁의 소궁주라고요. 그런데 대소쌍혈귀(大小雙血鬼)가 있는 함 관검부를 왜 모르겠어요." "대소쌍혈귀?" "모르세요? 대혈귀 한초(汗超), 소혈귀 한승(汗承) 형제요. 지금은 후선의 좌우무공(左右武公)으로 있다고요. 무림에 보기 드문 혈풍의 주인공들이라 무림에 적을 두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을걸요." 라혼은 무림에 일에 대하여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검부가 자신이 한 쓸데 없는 짓에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고 그 일로 후선의 낙왕 강무산이 포 포를 양녀로 삼아 보호했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한초와 한승 형제의 이야 기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초와 승이 살아있었다니 다행이군." "서방님 그들을 아세요?" "검부에 있을 때 마지막으로 한일이 그들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예? 그럼 서방님이 대무자란 말 이예요?" "대무자라 아마도……." 설화는 흥미진진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물었다. "그럼 혹시……? 대무도경의 지은이라는 유운검조의 무공을 얻으신 거예요? " "아니 내가 바로 유운검조다." "예? 유운검조는 250년 전 인물인데? 그리고 그분은 천하제일검 유운검선의 진짜 사부인데……." "유운검선은 날 바다에서 건져준 무림의 협사 중 하나였다. 그리고 내가 그 를 가르친 것은 맞지만 그것은 그의 사부이자 내 친우인 검부조사 조식의 깨달음을 잊게 하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것이 친우의 이 름을 빼앗는 결과를 낳을 줄은 몰랐다." 설화가 알고 있는 신비인물 유운검조는 진정한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으로 불리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서방님은 충 분이 그럴만하기에……. "세상에 유운검조와 그 후인이라는 대무자가 동일인물이고 그게 바로 서방 님이었다니, 무림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 무림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 거예 요. 가르친 사람마다 천하를 오시하는 고수이니……. 그런데 왜 검부를 떠 나신 거예요?" "글쎄다. 그것은 포포 때문이다." "포포가요?" "포포는 수인으로 묘가인데 동인성에서 수인은 살아가기 힘들지 병든 갓난 아기를 안고 어쩔 줄 모르는 포포의 모친이 안쓰러워 포포를 치료해주었는 데 그것으로 그저 불목하니 노인으로 있을 수 없게 되었어." "노인이라고요?" "그래 노인. 그래서 검부를 떠나려 하는데 포포 모녀가 눈에 밟혀 그냥 떠 날 수 없었다. 그래서 포포에게 검부조사 조식이 마지막 순간 깨달은 유운 검범을 전수해 주어 사람들이 포포를 함부로 못하게 하였는데 우습게도 그 당시 검부는 조식의 검부가 아니라 유운검선의 검부였다." "하지만 유운검선도 서방님이 가르쳤다면서요." "그것을 밝힐 수는 없었다. 어째든 유운검법의 전인이란 입장은 포포를 보 호하기에 무리가 있어 한씨 형제를 가르치게 된 거야. 그들과 포포는 배다 른 남매이기에 그들이 포포를 보호하리라 기대하면서……." "아아~! 일이 그렇게 된 것이었군요. 그런데 포포가 대소쌍혈귀(大小雙血鬼 )의 동생이었다니 비사(秘事) 중 비사(秘事)네." "그리고 그 뒤 쓸데없는 짓을 하는 바람에 너도 잘 아는 검부의 혈사가 벌 어지고 포포의 양부인 낙왕 강무산에게 그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나 를 추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고 겉모습이 이렇게 바꿨다. 그리 고 그 후 바로 너의 모친을 만나게 되어 너를 아내로 삼았지." "참 궁금해요. 어떻게 갓 태어난 날 아내로 삼을 생각을 했어요? 양녀로 삼 을 수도 있었을 텐데." "……." 라혼은 설화의 질문에 가만히 그녀의 투명한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너와 해어지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딸로 삼으면 넌 언젠가 짝을 찾아 떠났을 것이기 때문에……." "……." 설화는 서방님의 마지막말에 감동하여 길고 긴 입맞춤을 나누었다. 설화가 가장 두려워하던 일. 어젠가 훌쩍 떠나 버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그 말 한 마디에 한순간 녹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이제 언제까지고 함께할 것이기에 터질 듯한 행복감에 설화는 서방님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넘치는 사랑을 전해주었다. 날이 밝고 라혼은 금영월에게 출정보고를 하고 설화의 배웅을 받으며 1만 대군을 이끌고 봉수성을 나섰다. 반란이 일어난 수천부는 호도 남쪽에 있는 지역으로 필히 호도를 거쳐 남행을 하는 것이 유일한 길이었다. 라혼이 봉 수성을 나선지 약 2시진이 흘렀을까 감곡에 갔단 잔폭광마가 나이어린 진토 인 소년을 고치처럼 묶어 말 등에 얹은 채 따라 나섰다. "주군, 너무하십니다. 기다려주지 않으시고……." "얼굴이 부었군." 라혼은 거미에게 잡힌 파리처럼 얼굴만 내놓은 채 둘둘 말린 다키의 얼굴이 푸르뎅뎅하게 부어있는 것을 보고 중얼거렸다. "이 놈이 자꾸 도망가려해서 살짝 쓰다듬었을 뿐입니다." "살아있는 건가?" "하도 시끄러워서 아혈을 봉해놓았을 뿐입니다." 다키는 라혼이 가니아를 보호하고 있던 우르하 부족을 토벌 했을 때 라혼은 암습하려했던 소년이었다. 다키는 남례일족에게 살수훈련을 받았는데 라혼 에게 잡혀 남례일족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부족에 남아있게 되었다. 그만큼 남례일족은 철저했다. 적에게 잡힌 살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하였으며 접촉도 끊어 흔적을 찾을 수 없게 한 것이다. 만에 하나 라도 천리미향(千里迷香)같은 것에 당해 살수들을 조련하는 곳이 들어나면 심각한 타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혼은 더욱 흥미로웠다. '단순한 살수집단이 아니라는 건가? 조직에서 떨어져 나간 살수를 살려두다 니 개다가 보란 듯이 가족들과 함께 있어? 게다가 이런 나이어린 소년 함부 로 조직을 벗어날 수 있을 만큼 엉성한 곳이었던가?' 라혼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을 접어두고 소년에게 물었다. 그러자 잔폭 광마는 얼른 다키의 아혈(啞穴)을 풀었다. "남례일족이 날 암습한 사실을 아느냐?" "퉤! 그냥 날 죽여라!" "아는 모양이군. 모석과 육삼을 납치한 우르하 족이 소야에 사주를 받고 움 직였는데 그것은 네가 남례일족에서 상당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겠 지?" "……." 라혼은 소년의 마음이 당황해하는 것을 느끼고 짐작이 맞았음을 알았다. 그 리고 슬쩍 넘겨짚으며 말했다. "아마도 너는 대야 후보인 소야 중 한명이겠구나. 그리고 내가 네 부족인 우르하 족을 토벌했기에 그 지위를 잃었을 테고." "여러 말 하지 말고 어서 죽여라!" 라혼은 겉으로 들어날 만큼 당황하는 다키의 태도에 뭔가 있음을 감지했다. 죽음을 각오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나이어린 소년이 목숨 을 버리려 하는 것은 더욱 희귀한 일이다. "아니 나는 내가 알고자하는 것을 모두 알았다. 육삼 꼬마를 풀어줘라!" "아, 안 돼! 날 죽여! 안 그럼 다 죽는단 말야!" "누가?" "……." 라혼은 입을 다물고 눈을 감아버리는 다키를 보고 짐작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다. '역시 보복은 하는 모양이지. 좋아 그렇다면…….' 라혼은 감곡 우르하 부족의 마을 근처에 백호영들을 보내기로 했다. 이미 그곳에서 노예부대를 훈련시켰기 때문에 그곳 지리는 잘 알 것이고 은밀히 숨어 있을 만한 곳 또한 잘 아리라 생각한 라혼은 그 즉시 봉수성에 있는 고학에게 그에 대한 대비를 하라 일렀다. 그리고 다키는 그대로 길가에 뉘 어 손에 소도(小刀) 하나를 쥐어 주었다. "육삼, 피곤하지 않은가?" "멀쩡합니다." "좋아! 소천위." "예, 주군." "네가 군사들을 인솔해라 나는 먼저 호도로 갈 것이다." "충!" 라혼은 군사들을 인솔하는 것을 소천위에게 맡기고 잔폭광마와 함께 호도로 말을 몰았다. 수원숙우(誰怨孰尤) 호도와 봉수성을 오가는데 상인들은 대략 열흘을 잡는다. 그저 일반 여행자 라면 보름 내내 걸어야하는 거리였다. 화급을 요하는 소식을 가진 전령이라 면 닷새를 잡는다. 그런 것을 잔폭광마는 주군 백호나한의 뒤꽁무니를 쫓아 사흘 만에 남례성의 주도(主都)인 호도(好都)가 보이는 곳까지 도착했다. 그런 것이 가능한 이유는 사흘 밤낮을 잠을 자지 않고 족정관, 오수관. 천 수교 등에서 말을 바꿔가며 내 달렸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절정고수인 잔폭 광마라 할지라도 라혼이 누워있던 방을 보름간 잠을 자지 않고 지키고 또 사흘간 관도를 따라 달리는 말위에서 지내다 보니 심신이 피곤하기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투덜거리지도 못하는 입장이니 이를 악물고 주군의 등을 보며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호도성에 도착하자 하 루정도는 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힘을 냈다. 그러나……. "호도에 있는 두 장군이 내게 불만을 품고 있다. 긴장을 늦추지 마라!" "끙~!" 여지없이 기대를 저버리는 주군이었다. 그리고 이내 굳게 닫힌 호도 성문 앞까지 다다르자 성문위에서 누군가 나와 소리쳤다. "누구시오? 정체를 밝히시오." "하남천원군 라혼 대장군이시다. 어서 성문을 열어라!" 지칠 대로 지친 잔폭광마였지만 고함소리는 크고 힘이 들어가 있었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성문을 책임지고 있던 무장 탁잔(卓孱)은 백호나한이 한발 먼저 출발했다는 소식을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너무 이른 시간에 도착하자 진위여부를 따지 는 데 약간의 시간을 소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고함을 외치는 자가 백호나한의 등을 찔렀다고 했는데 백호나한이 그와 함께 있자 그것이 의심 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확인하는 절차는 간단했다. 전환(傳環 )으로 호도 하남천원군본영에 이를 문의하면 본영에서 봉수성에 이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역순으로 탁잔에게 소식이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탁잔이 본영으로부터 받은 소식은 아무래도 의심스러우니 시간을 끌라는 것이었다. "시간을 끌라고?" "제가 보기엔 백호나한 본인이 맡는 것 같은데요? 잔폭광마라는 자가 백호 나한에게 상처를 준 것은 사실이지만 백호나한자신이 그에게 다시 호위를 맡겼다 들었는데……." "으음~." "게다가 그가 백호나한이 맞는다면 전환을 지니고 있을 텐데……." 부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성 아래에서 잔폭광마라고 생각되는 자가 고 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뭐하는 거야! 봉수성에서 확인을 시켜주었으면 냉큼 성문을 열어야 할 것 아니냐! 언제까지 대장군을 성 밖에 세워둘 셈이냐! 내손에 죽고 싶은가!"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성문을 여는 기관이 고장 나 사람의 힘으로 열 려하니 그렇소." 탁신은 전환을 가지고 있고 봉수성에서 그에게 소식을 전했으니 본인이 확 실하다 여겨 성문을 열라는 신호를 보냈다. 성문을 여는 기관이 고장 난 것 은 사실이나 이미 예전의 일이고 어차피 인력을 동원해 문을 열어야 했다. -끼이이익~! "하남천원군 참위 탁잔이 대장군을 뵙습니다." "탁잔이라……? 상경출신인가?" "예, 청룡문의 금군이었습니다." "흐음, 성문이 열리는 데 다소 시간이 걸렸는데, 혹시 시간을 끌라는 명을 받았는가?" "……!" "대답하라!" "예!" 탁잔은 서늘한 백호나한의 눈빛에 등골이 찌릿한 느낌을 받으며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했다. 그리곤 그 자리에서 무릎 꿇으며 비장한 각오로 말했다. "대장군, 이 탁잔 대장군과 함께 싸우겠습니다." 탁잔은 작도인과 상초 두 장군과 백호나한의 다툼을 모르는 척 구경만 하려 고 했다. 그러나 지금 백호나한이 사실을 눈치 챈 이상 탁잔은 선택을 해야 했다. 일단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수하들을 데리고 어떻게든 하루나 이틀 정도만 버티며 추적을 뿌리치면 전환을 통해 사방에서 원군이 올 것이고 그 다음은 명장이 이끄는 군사들 틈 속에서 공을 쌓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탁잔의 돌발적인 행동에 그것을 지켜보던 군사들 또한 무릎을 꿇으며 충성을 맹세했다. -대장군을 따르겠습니다! 라혼은 그런 그들의 태도에 머리를 긁적이며 잠시 궁리했다. 그리곤 이내 생각을 끝낸 라혼은 에텔 스페이스에서 수십 개의 전환을 꺼내 탁잔이라는 무장에게 던져주며 말했다. "그 전환은 나와 직접 통하게 되어있는 것이다. 전령을 보내 내가 호도에 왔음을 알리고 결과를 내게 알려라!" "충!" 마법통신반지인 전환은 중계지을 두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전구(傳球)라 불리는 마법통신구를 중심으로 전환은 오직 자신이 속한 전구에 연락을 하 는 것이다. 그리고 전구는 전구끼리 상호 소통하는 통신망을 구축했다. 라 혼이 처음 만든 전환은 서로가 서로에게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되어있었 으나 모원이 보고체계를 잡는 것을 보고 라혼은 그에 맞는 전환을 새로이 고안해 낸 것이 바로 전구를 이용한 전환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오 히려 전환을 만드는 데 소요되는 귀한 마법물질이 훨씬 적게 들어가는 효과 를 낳았다. 그래서 초기 전환은 백호영과 토금전장의 일부 중요인사만 지니 게 되었다. 그리고 전구는 총 5개가 만들어져 호도의 하남천원군본영과 토 금전장, 그리고 고학에게 한 개씩 배치되어있었다. 물론 고학이 운영하는 전구는 나머지 모든 전구에 들어오는 소식을 모두 감시할 수 있게 되어 있 었다. 그러니 호도 본영에서 탁잔에게 시간을 끌라는 명을 내린 것은 자기 손으로 제 무덤을 판 격이 아닐 수 없었다. "육삼, 한식경정도 여기에 쉬었다가 본영으로 갈 것이다." "예, 주군." 잔폭광마는 내심 한숨을 쉬며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피로를 풀기위해 운 공을 하기 시작했다. 곧 싸움이 시작될지도 모르니 조금이라도 피로를 풀어 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호도에 주둔하고 있는 군사들은 대략 3만정도인데 진토인 출신에서 경주와 계주의 군사들까지 있었다. 그리고 작도인과 상초 를 따르는 상경 주작문과 현무문 금군출신의 군사들만 대략 1만여 명쯤 되 었다. "고소위님 서문에서 전령이 왔습니다." "전령?" 호도 남쪽 성문을 책임진 고위(高位)는 전령이란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전환이 사용된 이후 모든 소식은 전환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하남천원 군에 전령이 운용되지 않았다. 다만 어떤 물건이나 사사로운 편지를 전하기 위한 전령이 있었으나 그것도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어째 거나 전령은 만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불러와라!" 전령은 성내에서 움직인 터라 전령기(傳令旗) 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긴장 을 했는지 잔뜩 굳어있는 표정으로 뭔가를 내밀며 말했다. "라혼 대장군이 도착하셨습니다." "……!" 고위는 그 한마디에 일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전령이 내민 새로운 전환을 받아들고 물었다. "탁 참위께서는 마음의 결정을 내리셨나?" "예! 그리고 북문을 제외한 성내 각 거점에 새로운 전환을 가진 전령이 보 내졌습니다." "후우~! 그럼 나는 어찌하면 되나?" "그 전환은 탁 참위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알았네. 우리는 라혼 대장군을 따르겠네." 고위 또한 호도의 두 장군이 꾸미는 모의를 대강 눈치체고 있었다. 고위가 판단하기에 작도인과 상초는 아직까지 이렇다 할 결론을 내린바 없었다. 그 런 와중에 나흘 전 암습을 받아 인사불성(人事不省)이라던 백호나한이 건재 함을 과시하고 오늘 도착했으니……. '적이 준비하기 전에 들이치면 승리할 확률이 7할 이상이라던가?' 한식경(약 30분)의 시간이 흐르고 호도전역의 군사력이 라혼에게 집중되었 다. 그리고 라혼은 홀가분하게 하남천원군 대본영이 설치된 저택으로 말을 몰았다. '주군, 매복이 있습니다.' '나도 감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 수가 얼마 되지 않군.' 원래 남례절도사와 그 가족이 머물던 내성(內城)을 하남대원수 금영월이 하 남천원군의 본영(本營)을 설치했다. 내성 대전으로 들어서려면 2개의 문을 넘어야 하는데 마지막 문을 지나니 주위에 매복한 군사들이 흘리는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수가 수백에 불과했다. 하지만 라혼은 그들을 무시하고 대전으로 들어섰다. 대전에는 상초와 작도인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곳에서도 역시 매복이 있었다. '한심하군. 모두 합하여 5백이 조금 넘는 수준... 내성에 주둔하고 있는 군 사만 1만인데 그중 겨우 5백만을 동원할 수 있는 영향력으로 날 도모하려 들다니…….' 라혼은 대전주위에 매복하고 있는 군사들 왜에 내성 내부에 머물고 있는 군 사들이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다는 것을 알고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도대 체 무엇을 믿고 이렇게 무모한 도박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서 오시오. 라혼대장군!" "반갑습니다. 작 소장, 상 소장!" "이미 소식을 들어 알고 있습니다. 수천부의 반란을 토벌하는데 금 상장군 께 전권을 위임 받았다고요?" "그렇소." 라혼은 불안하게 움직이는 작도인과 상초의 눈동자를 보고 어떤 위화감을 느꼈다. 그 정도 되는 인물들이 칼을 뽑기로 했으면서 이렇듯 불안한 모습 을 보인다는 것은? '주군, 심독(心毒)입니다.' 라혼은 잔폭광마의 말을 듣자 그대로 몸을 움직여 작도인과 상초를 제압해 들어갔다. 그러자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뿌연 연기가 뿜어지면서 매복한 군 사들이 튀어나왔다. "독입니다." "퓨리피케이션Purification!" 라혼은 두 장수를 제압한 즉시 대전(大殿) 전체에 [퓨리피케이션Purificati on:정화(淨化)]주문을 걸었다. 그리고 사자후(獅子吼) 터트렸다. -우오오오오오~! 호도 전역에 가득 퍼진 내공이 실린 사자후에 대전안의 군사들이 칠공(七孔 )으로 피를 토하며 괴로워했다. "육삼, 전구가 있는 곳을 찾아 지금 즉시 전 호도성에 비상을 걸어라!" "존명!" 육삼이 쓰러져 괴로워하는 군사들을 사이로 대전을 빠져나가자 라혼은 창백 한 안색의 작도인을 불렀다. "작도인!" "허억~!" 심독에서 벗어난 작도인은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꾸미려 했는지 깨닫고 신 음성을 내뱉었다. 상초 또한 허탈한 심정이 되어 그 자리에 주저앉아 일어 날 줄 몰랐다. 라혼은 넋이 나가 있는 그들을 놔두고 매복했던 군사들에게 명령했다. "이일은 불문에 붙일 것이다. 그러니 지금 즉시 이곳을 장악해라" "……." "명을 따르지 않으면 명령불복의 죄를 물어 참수할 것이다." -쿵! 군사들은 가슴이 철렁하는 느낌을 받으며 종래의 목적을 잃고 대전주 위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바로 라혼이 천복일황보(天伏一皇步)를 시전한 것 이었다. 걸음걸이 하나도 사람을 위압하는 공력(功力)에 피어(fear)까지 가 미되자 사자후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군사들이 견뎌낼 수 있을 리 없었 다. 그렇게 넓은 대전에 라혼과 작도인 상초만이 남자 라혼은 그 둘을 심문 하기 시작했다. "당신들이 날 견제하고 있었다는 것은 모르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날 도모할 만큼은 아니다. 무엇 때문인가?" "……." 묵묵부답(默默不答). 작도인과 상초는 입을 다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 다. 자기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벌였으니 뭐라 할 말이 있겠는가? 바로 이것이 심독(心毒)의 공능이었다. 심독에 당하면 심독에를 걸려 암시 를 받은 내용을 위해 스스로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아 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파국으로 몰아가는 참으로 지독한 독이 아닐 수 없다. 라혼은 그들이 심독에 당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굳이 말하지 않 았다. 다만 침묵하는 그들에게 결정권이 없는 제안을 했다. "내게 목숨을 맡겨라! 그럼 이 모든것을 덮어두겠다." "무슨 말이오?" "다시 말하지 않겠다. 내게 목숨을 맡겨라!" "……." 작도인은 백호나한의 제안은 자신에게 결정권이 없음을 깨달았다. 거절하면 지금 당장 그의 손에 목이 달아날 것이고, 받아들이면 그에게 목숨을 맡기 는 것이니 어찌되든 그의 손에 자신의 목숨이 걸려있기 때문이었다. "소인 작도인 주군을 따르겠습니다." "상초가 주인님을 뵙습니다." "……." 작도인은 백호나한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여전히 자신을 지긋이 노려보 자 다시금 맹세했다. "천지신명에게 고하노니 나 작도인은 라혼 대장군을 주인으로 모시고 죽는 그 순간까지 따를 것임을 맹세합니다. 만일 이 맹세를 어긴다면 죽지도 살 지도 못하는 연옥에 들어 천년을 고통 받으리다." "나 상초 또한 그렇게 맹세합니다." "좋아! 하루를 주겠다. 호도를 지킬 군사들을 빼고 수천부로 출군할 군사를 편성해라!" "존명!" 라혼은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저간의 사정을 모두 봉수성에 알렸다. 그리고 금영월에게 두 장군들의 행태를 알려 호도는 물론 하남천원군에서 상경의 금군출신자들을 빼내 서해수군의 수군으로 삼기로 했다. 물론 금영월이 직 접 통제가 가능한 현무문의 금군은 들은 대부분 그대로 두고 백호, 주작, 청룡의 3문 출신 군사들만을 그렇게 처리하기로 하고 이틀 후 이른 아침 라 혼은 작도인과 상초를 데리고 호도의 남문으로 벗어나 수천부로 말을 몰았 다. 수원숙우(誰怨孰尤) 호도에서 수천성까지 대략 닷새거리였다. 그러나 강행군을 고집한 라혼은 총 2만 대군을 이끌고 그 거리를 단 사흘만 주파했다. 아직 나의 시다 바리 세 부족이 손을 쓰지 못하여 1천 남짓한 하남천원군이 수비하는 수천성으 로 진주한 라혼은 강행군에 지친 군사들을 이틀간 쉬게 한 후 소장 상초에 게 6천을 주어 우군으로 삼고, 작도인에게 6천을 주어 좌군을 삼았다. 그리 고 8천을 중군으로 삼아 세 갈래로 칼을 거꾸로 잡은 세 부족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밀림 속으로 숨어들어 간간히 습격하는 것으로 지 구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의 움직임은 라혼의 계산속에 모두 포함된 것 이었으니……. "역시, 밀림에 숨어들어 저항을 하는군. 반년전이라면 골치가 아팠을 것이 지만 지금은 아니지. 목남!" "예, 대장군!" "네가 중군을 맡아라!" "예?" 원주 황진성. 바로 상경 청룡문 금군중 가장 직급이 높았던 정령(正領) 목 남(牧南)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작전설명은 자신의 귀 가 잘못되지 않았음을 말해주었다. "나는 백호영들과 밀림으로 들어갈 것이다. 목 정령은 상초, 작도인과 더불 어 반적들이 이 지역을 벗어나는 것을 철저하게 틀어막아라!" "추, 충!" 고학이 세부족과 함께하던 백호영들을 구하기 위해 가까운 곳에서 원병을 청했고 달려온 대부분의 원병은 백호영들이었다. 거기엔 백호십일걸 중 석 은, 표상치가 있었고 총 180명 정도 되었다. 거기에 길잡이을 대신한 진토 인 전사가 또 120명 이었는데 라혼은 그들을 백호영으로 받아들였다. 진토 인들 사이에 흑장이라 불리는 백호영은 일종의 우상이나 다름없었다. 개개 인이 진토인 전사 스물은 너끈히 상대하는 무위에 도무지 지칠 줄 모르는 체력, 남례성에서 태어난 진토인들조차 숨이 막히는 더위 속에서 두꺼운 갑 주를 입고도 더위를 모르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흑장은 선망의 대상이 었다. 그런데 자신들이 그 흑장이 된다는 말은 진토인들에게 '너희는 내 형 제다.'라고 말해주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남례성의 진토인 부족간의 오랜 전란은 진토인들에게 형제의 의미를 바꿔놓았다. 그들에게 피를 나눈 형제 보다 같이 싸운 형제가 진정한 형제였다. 백호영 부장 독대오는 이 빌어먹을 밀림에 다시 들어올 줄은 상상도하지 못 했다. 그리고 만사의 원흉이 입이라는 격언을 생각하며 이일의 단초를 제공 한 자신의 입을 원망했다. 첫날은 그저 소규모로 추적하는 수준이었다. 그 러나 그 다음날 놈들은 아예 작심을 한 듯 밀림전역에 수천의 전사를 풀어 천라지망(天羅地網)펼쳤다. 그 다음부터는 악전고투(惡戰苦鬪) 죽을힘을 다 하여 고된 싸움의 연속이었다. 숨고 적을 습격하고 사방에서 튀어나오는 놈 들을 상대하느라 온몸에 상처를 입고 독침에 맞아 부어오른 팔을 동여매며 끓임 없이 움직였다. 그리고 마지막순간 독대오의 직속상관인 석은 백인장 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내 삶을 포기했을 지도 몰랐다. 길고 길었던 그 시 간이 겨우 사흘이 흘렀다는 말에 한숨이 날 뿐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쉬 었다. 인원이 불고 어전 일인지 진토인들의 공격이 뜸해지자 밀림 한구석에 은신처까지 두고 편안하게 쉴 수 있게 되었고 나중에 백호영 중에서 무위 로 손꼽히는 표상치 백인장까지 나타나자 한마디로 푹 퍼져 버렸다. 이레가 되자 주군이 호도의 대군을 이끌고 나타나자 이제 진짜 살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한사람도 잃지 않고 잘 이끌었다는 공(功)으로 주군이 직접치 하하고 독침에 당해 목숨이 경각에 달하던 부하들을 심후한 공력으로 순식 간에 씻은 듯이 치료하고 위무를 하는 연회까지 베풀었다. 그런데 거기까지 가 좋았다. 나의 시다 바리의 진토인들 중에서도 가장 깊은 밀림에서 생활 한 그들의 추격을 어떻게 따돌리고 상대했는지 묻자 자랑스레 그 지옥 같은 사흘간 벌인 숨어있다 기습, 다시 매복, 역추격전과 추격을 따돌리기를 위 한 갖가지 계략 등 독대오와 같은 경험을 한 백호영들도 진짜 그랬었나 하 는 표정으로 이야기 속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독대오는 주군에게 불려가 이번임무를 부여 받았다. 밀림 속을 넘나들며 본군을 습격하는 진토 인 전사들을 역습하는 임무였다. 넓디, 넓은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밀림 속을 고작 300 백호영만으로 2만 진토인 전사들을 상대하겠다는 주군을 말 리고 싶은 독대오 이었지만 마지막 용기를 내지 못해 다시 울창한 나무숲에 몸을 숨기고 있는 독대오였다. "독부장님." "왜?" "그래도 이번에 우리가 놈들을 공격하는 입장이잖습니까." "3백으로 2만을 상대하는데 그런 소리가 입에서 나오냐?" 백호영 십장(什長) 초묵(草墨)은 독대오의 면박에 오히려 반문했다. "어차피 놈들도 2만명이나 되는 병력을 모조리 밀림으로 쓸어 넣을 수는 없 지 않습니까. 기껏해야 수천 일 뿐인데 뭔 걱정입니까? 게다가 천하제일고 수인 주군이 함께 움직이는데……." "그런가?" "게다가 수틀리면 바로 본군으로 도망치면 지들이 어쩌겠습니까? 살살 약 올리면서 그간의 복수나 해주자고요." "그렇겠지?" "그럼요." "쉿!" 바로 그때 독대오는 전환을 통해 백명 안쪽의 무리들이 이동하고 있다는 소 식을 받았다. "쓰벌 놈들. 아예 대놓고 움직이나 보군." "사냥감이 떴답니까?" "그래 대략 백명 조금 못된단다." "그런 깔끔하게 쓸어야겠지요." 독대오는 초묵의 말에 살기가 스멀거리는 미소를 짓고 은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독대오 일조(一組)는 이 밀림에선 최강(最强)이다. "구르, 밀림으로 들어간 전사들이 속속 소식이 끓기고 있다들었소. 도대체 어찌된 일이요?" 바리족의 족장 토무는 질책어린 어투로 나의 족의 대전사 구르에게 경위를 추궁했다. 그러나 토무족장이 모르는 일을 구르라고 알 턱이 없었다. 다만 중주의 개들이 너무 빨리 움직인 탓에 원래 오조산에 여자와 아이들을 데리 고 숨으려던 계획이 틀어지고 밀림에 숨어 적을 암습하며 시간을 끌고 있었 다. 그리고 그 모든 책임은 쓸데없이 흑장들을 추적하느라 헛된 시간을 보 낸 나의족 대전사 구르가 책임지고 있었다. 현재 세부족의 혈맹은 토무와 구르 그리고 시다족의 샤먼인 초루가가 주축이었는데 이는 시다와 나의 족 의 족장들이 거병을 하는데 반대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바리족 의 토무가 구르, 초루가에게 힘을 실어주어 그들의 족장들을 쫓아내게 했다 . 그러니 부족 내에 구르의 입장과 지위는 위태롭기 그지없었고 그 출신 부 족과 상관없이 존경받는 샤먼인 초루가와 또 달랐다. "아마도, 흑장들이 밀림으로 들어와 손을 쓴 모양인데……. 자세한 것은 모 르겠소." "그게 말이 되오? 전사들을 백명이나 잃고 사흘이나 헛되이 시간을 보내고 서도 흑장의 손가락하나 건지지 못하고서 이제 중주의 대군을 두고 숲이 우 릴 지켜줄 것이라고 큰소리 칠 때는 언제고……." "고장하시오. 토무 족장, 지금 잘잘못을 가려 무슨 소용이오. 사태가 위급 하니 부족의 여자와 아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는 것을 논의해 봅시 다." 토무는 초루가의 말에 더 이상 구르를 다그치는 것을 멈추고 여자와 아이들 을 더욱 깊은 밀림 속으로 피난시키는 문제를 논의했다. "역시 사골곡 뿐이로군." "그렇소. 사골곡으로 가는 길만이 유일하오." 토무와 초루가는 머리를 맞대고 토의한 끝에 사골곡(沙骨谷)으로 여자와 아 이들을 피신시키기로 결정했다. 사골곡은 수천부 동쪽에 있는 황량한 계곡 으로 있는 것이라고는 모래와 바위뿐인 곳이었다. 하나 지형이 험하디 험해 많은 사람들이 숨어있기에 그만한 곳이 또 없었다. "구르, 당신에게 전사 5천을 주겠소. 중주의 군사들을 최대한 이곳에 묶어 두시오." "알겠소. 내 그리 하리다." 지은 죄가 있는 나의 족 대전사 구르는 토무와 초루가의 결정에 따를 수밖 에 없었다. 그리고 구르가 생각하기에도 방법을 그것뿐이었기에 흔쾌히 바 리족 족장 토무의 의견에 따랐다. *** "주군, 이번엔 덩어리가 큰데요. 3천명의 병력이 감지되었답니다." "5천이겠지." 라혼은 굵은 아름드리나무의 가지위에서 넓은 잔폭광마의 등짝에 가죽으로 된 지도를 펼쳐놓고 그 위에 화살표를 그려가며 뭔가를 표시하며 그의 말을 받았다. "5천이오?" "그래, 아마 노출된 그 3천은 미끼다. 진짜 두려운 것은 흩어져 숨은 2천이 지. 그리고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군." "예?" "석은!" "예, 주군." 바로 옆 나무 가지에 자리 잡고 있던 석은은 주군의 부르자 상당한 거리를 뛰어넘어 라혼이 앉아있는 나뭇가지위에 내려섰다. 그럼에도 나뭇가지는 부 러지기는 흔들리지 조차 않았다. "소천위는 지금 어디까지 왔나?" "호도군 중군과 하루거리까지 접근했습니다." 봉수성의 수군들은 연일 강행군을 거듭한 끝에 보름 만에 수천성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하룻밤만을 수천성에서 보내고 또다시 강행군을 하 여 토벌군이 있는 곳까지 달려온 것이었다. 봉기한 세 부족에게는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었지만 거병한지 보름 만에 이렇다 할 성과는커녕 쫒기는 신 세가 된 것이다. "지금부터 본격적인 사냥을 시작할 것이다. 소천위가 이끄는 봉수성 본대는 그대로 후군로 빼고 중군의 목남에게 전군으로 삼아 사냥감 몰이를 시작한 다. 지금 즉시 여기 고로천으로 목표로 적을 몬다." "존명!" 주군의 명을 받은 석은은 그 즉시 상초, 작도인 등에게 연락을 하고 어디론 가 몸을 날리는 주군을 쫒아 밀림의 나무 가지을 발판 삼아 달리기 시작했 다. 그리고 적당한 곳에 매복하고 적의 움직임을 살폈다. 3천명 남짓한 진 토인 전사들이 지나가고 얼마 있지 않아 울창한 수풀사이로 은밀히 움직이 는 존재들이 있었다. 바로 숨어있는 2천이었다. 라혼은 이미 의식을 개방해 넓은 지역의 모든 움직임을 감지하고 있었다. 넓고 넓은 수해(樹海)에서 은밀히 움직이며 밀림으로 들어온 나의시다바리 전사들을 사냥하는 것은 라 혼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쪽은 상대의 말이 환희 보이고 저쪽은 이 쪽의 말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 장기의 승부는 끝난 것이나 진배없었다. "사냥을 시작해 볼까. 백호돌격!" "백호돌격!" -촤! 촤촤촤촤촤촤촤………………. 갑작스런 소리에 반적 진토인들은 몸을 수풀사이로 숨기고 기척을 죽였으나 그것은 오히려 백호영을 도와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표상치 네 전면에 일곱, 보인 좌측이 셋…………………….' 라혼이 이런 식으로 대강 숨어있는 위치를 불러주면 고수 아닌 자가없는 백 호영들은 알아서 적의 위치를 찾아 하나하나 목숨을 끊어 주었다. 그렇게 한바탕 휘저으면 적들은 마지막 발악을 하기마련이고 그다음은 더 쉬웠다. 일방적이 도살을 끝내고 눈먼 칼에 맞은 백호영을 대충 치료한 후 또다시 숨어 은밀히 움직이는 나의시다바리 전사들 사냥했다. 3천 반적 진토인들이 이상함을 느끼고 경계할 무렵 그들은 2만 대군에게 포위된 후일 것이다. 라혼은 3천명의 전사들은 본군에 맡기고 숨어서 움직이는 2천 전사들을 사 냥하는 데 집중했다. 어서 이들을 처리하고 도망치는 세 부족을 따라잡아야 했다. 그러나 라혼은 걱정하지 않았다. 그들이 길을 떠난 것은 하루도 채 되지 않았고 태반이 여자와 아이, 그리고 나이 많은 자들이었으니 이동속도 는 한심하기 그지없었기에……. 하루가 다되도록 은밀히 뒤를 따르게 한 전사들에게 소식이 없자 대전사 구 르는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면에 중주의 대군이 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사들의 사기는 바닥에 떨어졌 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왔던 길로 되돌아가가 크게 우회하기로 했다. 그 러나 그런 그들이 목격한 것은 덩굴에 묶여 나뭇가지에 매달린 사람의 팔과 다리였다. 습한 밀림의 기후에 썩어 악취를 풍기기 시작한 한때 멀쩡한 사 람의 팔다리였을 썩어가는 고깃덩어리는 두려움을 모르는 전사들에게 공포 심을 심어 주었다. 그렇게 길을 따라 보란 듯이 걸어놓은 팔과 다리는 전사 들의 이내 전의를 상실케 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 절정은 본래 따로 떨 어져 썩어가는 팔과 다리의 주인들의 몸통이 커다란 나무기둥에 후장을 꿰 뚫고 가슴 또는 어깨로 빠져나온 전사들이 밀림의 진정한 주인이라 할 수 있는 개미의 먹이가 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자 전사들의 일부는 공포에 미쳐 무기를 팽개치고 밀림으로 들어갔고 얼마 후 찢어지는 비명소리와가 들리고 얼마 후 아직도 살아 펄떡이는 팔과 다리가 하늘에서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이미 적에게 자신의 위치를 들켰다는 것보다 자신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 믿던 밀림이 지옥의 아가리같이 느껴지자 무기를 버리고 무작정 앞 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밀림을 벗어날 때쯤 그들은 검은 갑주의 무장들을 보고 그 자리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목숨을 구걸했다. "저들을 묶어라!" "예, 주군." 백호영들은 광기에 번들거리는 충혈 된 눈으로 겁에 질린 3천 진토인 전사 들을 묶기 시작했다. 백호영들은 지난 사흘간 인간으로써 차마 할 수 없는 짓을 계속했다. 기둥을 세워 이미 숨이 끊긴 시체는 물론 아직 살아서 숨이 헐떡거리는 진토인 전사를 꼬치를 꿰듯 굵은 나무기둥에 꼽는 작업을 해야 했다. 사람을 굵은 나무기둥에 통째로 꿰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었다. 이 미 각자 수십 명씩 도륙내고 그 시체를 끌고 와 용맹한 진토인 전사들이 공 포에 젖어 이성을 찾지 못할 정도로 사람을 토막치고 나무에 묵는 작업을 했다. 이미 백호영들의 검은 갑주는 진토인 전사들의 붉고 끈적이는 피가 검게 들러붙어 불길한 악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진토인들이 공포 에 접게 만든 그 길을 호도의 군사들이 지나고 있을 것이다. "누가 너희를 이끄느냐?" "……."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울긋불긋한 전투화장을 한 진토인 전사들 틈에서 하얀 물감을 많이 사용해 화장을 한 장년의 진토인 전사가 앞으로 나섰다. 라혼은 관심 없었지만 극락조의 깃털로 장식하여 무리를 이끄는 자임을 표 사한 구르는 허탈하기 그지없는 심정으로 마귀도 하지 못할 짓을 태연히 한 상대 앞에 섰다. "신성한 하얀 코끼리의 후예 나의족의 대전사 구르요." "하남천원군 대장군 라혼이다. 내가 바로 백호나한이다." "……!" 구르는 상대가 스스로 백호나한이라 말하자 눈을 크게 치떴다. 그는 아직도 백호나한이 이미 죽었거나 봉수성 거처 구석 골방 침상에서 죽은 듯이 누 워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남례일족에서 내가 건재하다는 것을 아직 알리지 않은 모양이지?" "……!" "말하라 남례일족이라 불리는 그들에 대해서 너와 연결되어 있는 남례일족 의 모든 것을 털어놔라!" "모르오!" "육삼 시작해라!" 잔폭광마는 백호영들과 함께 열명의 진토인 전사들을 데려다 미리 준비한 장정 다리통만한 나무기둥을 땅에 박아 놓고는 끝을 뾰족하게 다듬은 그것 에 살려고 버둥거리는 전사들을 후장구멍부터 그대로 꿰어 버렸다. -끄아아아아아~! -컥! -……. 운이 좋아(?) 심장이 파열된 자는 편안하게 즉사했지만 심장을 다치지 않은 자는 칠공을 토혈하며 고통스런 버둥거리다 내팽개쳐진 개구리처럼 절명했 다. 그것이 끝나자 라혼은 창백하게 질린 구르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네가 알고 있는 남례일족은 누구냐?" "……." 라혼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체 얼이 빠진 그를 위해(?) 작업을 계속 하게 했다. 그렇게 쉰명의 전사가 산체로 꿰어질 무렵에야 정신을 차린 구 르는 자신이 알고 있고 혹은 남례일족을 짐작되는 모든 사람의 이름과 부족 출신 등을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말했다. 라혼은 구르가 털어놓은 사실을 모조리 봉수성의 고학에게 알려 그자들의 신병을 확보하라 지시 했다. "석은, 포로들을 부려 구덩이를 파게 해라!" "존명!" 석은은 공포에 질린 진토인들을 시켜 땅을 파게 했다. 이미 전의를 상식하 고 두려움에 빠진 그들은 시키면 시키는 대로 맨손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 그렇게 한나절이 지나자 창백하게 질린 호도군이 도착했고 진토인 포로들 에게 막대가 지급 되었다. 그리고 이내 거대한 구덩이가 완성되었다. 그리 고 라혼은 호도의 군사들에게 명령했다. "저들을 묻어라!" "대장군, 이미 전의를 잃은 자들을 산체로 묻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맹세하기를 만일 약속을 어기고 배신할시 부족의 모든 전사 는 산채로 땅에 묻힌다고 했다. 그들이 맹세한 바를 지킬 수 있게 하라!" 그리고 스스로 군도를 집어 나의족 대전사 구르의 팔과 다리를 자르고 턱뼈 를 부숴 버린 뒤 혀를 뽑아 소금 항아리에 담고는 말했다. "남례성 진토인 부족들의 법에 따라 이 모든 일이 정당하다. 이 팔과 다리 를 소금에 절여 주요부족에게 보내 보관토록 해라!" 일이 이쯤 되자 자신들이 판 구덩이가 밀림에 널어놓은 시신들을 묻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을 산체로 묻기 위한 구덩이라는 것을 알아첸 진 토인들을 필사의 탈주를 시도 했지만 전열을 정비하고 밀어붙이는 힘에 밀 려 구덩이 안으로 빠졌다. 이미 한나절을 땅을 파느라 힘이 소진된 그들의 저항을 미약하기 그지없었고 구덩이는 저주받을 만큼 넓고 깊었다. 진토인 부족 전사들이 서로 엉켜 바동대는 구덩이위로 흙이 쏟아지자 그들은 살기 위해 아우성을 치며 구덩이 밖으로 기어올라 왔지만 그들에게 오는 것은 광 기에 젖어가는 호도군사들의 차가운 창끝이었다. -크아 살려줘~! -죽어, 죽어! 어떻게든 살아나려는 자와 그들을 산채로 묻으려는 자의 실랑이는 반시진이 냐 계속 되다 땅이 메워지자 이내 고요해졌다. 그리고 라혼의 광기어린 명 령은 계속되었다. "전군을 행군하여 흙을 다져라!" "조, 존명!" 군사들은 다리를 타고 전해져오는 땅속에 산채로 묻힌 사람들의 숨소리와 간혼 손이 다리를 잡는 느낌에 몸서리치며 그 위를 행군했다. 그리고 이내 그 모든 것에 무감각 해졌다. 그렇게 그 근처에서 하루를 꼬박 지새우고 봉 수성의 수군들과 합류해 본격적이 추격을 시작했다. "반적들의 목표는 사골곡이 분명하다. 이미 근처에 있던 5천 하남천원군이 하루나 이틀먼저 여기 이곳을 틀어막을 것이다. 여자와 아이도 필요 없다. 전부 사골곡에 묻힐 것이다. 질문 있나?" 이미 그들의 처리를 결정한 라혼에게 뭐라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토록 참혹한 명을 내리고도 여전히 담담한 라혼의 말투를 두려워할 뿐이었다. 그 리고 추적이 시작되었다. 라혼은 단숨에 그들을 들이 치지 않고 아슬아슬하 게 도망칠 수 있을 만큼만 세 부족을 추격했고 닷새를 그러게 쉬지 않고 달 려 기진맥진(氣盡脈盡)한 상태로 사골곡 입구에 들어선 나의, 시다, 바리 세 부족이 본 것은 이미 곡의 입구를 틀어막고 있는 일단의 군사들이었다. 얼굴에 전투화장을 하고 몸에는 등갑을 입은 하남천원군 소속이 진토인 전 사들이었다. 그렇게 대도주는 막을 내리고 토무와 초루가는 항복하며 라혼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나 애당초 그들의 항복을 받아줄 생각이 없던 라혼은 구루가 이끄는 전사들과 같이 4만 명이나 되는 그들을 모조리 사골 곡에 산체로 묻고 토무와 초루가를 비롯한 수뇌급 전사 몇을 굵은 나무기둥 에 산체로 꿰어 4만 부족민들의 비석을 대신하게 했다. 물론 토무와 초루가 의 혀를 뽑고 팔다리를 잘라 소금에 절여 주요부족에게 보내냈다. 거병하고 한 달이 될 무렵 거병한 진토인 부족은 사골곡(沙骨谷)의 이름을 사골곡( 死骨谷)으로 바꾸는 것으로 완전히 토벌 되었다. 혈우기(血雨期). 나의 시다 바리 세 부족이 씨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을 시작으로 남례성 전역에서 피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남천원군의 조정에 귀순할 것을 종용하는 사자는 대부분 공격 받았고 그 부족은 전사는 부족의 모든 전사는 죽임을 당하고 여인들은 전투에 참가한 진토인 출신 전사들에게 포상으로 주어졌다. 그리고 나이어린 소년들은 모조리 감곡에 모여 세뇌를 능가하는 충성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렇게 붉은 피가 온 대지 를 적시는 겨울, 남례성의 건기(乾期)를 보냈다. 이것은 그리고 라혼은 꾸 준히 진정한 상대인 남례일족에 대해 파악해 나갔다. 백호무적(白虎無敵) 라혼이 호도의 군사들에게 그토록 잔혹한 명령을 내린 것은 일종의 경고다 . 적으로 만났다면 서로 입장이 다르니 용서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동지에서 적이 된, 가장 어려울 때 칼끝을 돌린 배신자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법 이다. "남례일족은 잘 짜인 조직이 아닙니다. 하지만 조원산에 남례일족의 살수들 을 조련하는 곳이 있음을 알아냈습니다." "살수를 조련하는 곳?" "예, 강호에서 이르기를 남례일족의 고수를 키우는 본산격인 곳입니다." 라혼은 자신의 거처 집무실에서 고학이 보고를 받으며 비로소 자신이 원하 는 것은 찾았음을 깨달았다. 수천부의 세 부족을 묻고, 아직 하남천원군 휘하에 들지 않은 부족에게 항 복을 권하는 사자를 보냈다. 그리고 대부분의 부족들은 그것은 거부하고 때 론 사자를 죽이기까지 한 부족들도 있었다. 그러나 남례성은 이미 하남천원 군이 처 놓은 거대한 그물이 있었다. 남례성 전역의 20만 하남천원군 병력 은 한날한시에 일제히 그들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라혼은 끝까지 반항하 던 부족의 전사들은 모조리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자들과 재산, 그리고 전 사가 아닌 부족민들을 그 전투에 참가했던 부대의 진토인들에게 나누어주었 다. 그리고 중주출신의 군사들은 서서히 빼내 수군으로 편성하여 사실상 일 부 백호영을 제외한 모든 하남천원군은 진토인 출신이어 이미 밀림은 반기 를 든 진토인들을 보호하지 못했다. 그리고 수개월간 남례성의 밀림을 헤집 으며 고생한 백호영들에게 밀림은 더 이상 두려운 곳이 아니었다. 마치 그 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일제히 토벌되자 남례성엔 오직 하남천원군이라는 부 족만이 남게 되었다. 하남천원군의 병사로 있는 진토인들은 봉록을 받는 군졸이기에 출신부족과 상관없이 부대를 편성했고, 그렇게 수개월간 같이 뒹굴다 같이 피를 흘리면 싸웠다. 남례성 사람들에겐 피를 나눈 형제보다 같이 싸운 형제가 진정한 형제였다. 또한 무력을 가진 전사들이 우대받는 남례성의 풍토에서 라혼이 금영월에게 주청하녀 하남천원군의 고위직 즉 많은 병력을 지휘하는 자리에 진토인 출신자들을 안배하자 그들의 눈에 자신들을 억압하고 깔보는 문관 이라 할 수 있는 관리들은 그저 자신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존재로 인식했 다. 하남천원군은 20만이다. 그들 거의 전부가 하남천원군에 복속된 부족의 영향력 있는 전사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하남천원군임을 자랑스 럽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봉록으로 주는 곡식은 굶주리는 부족 민의 배를 채워주었다. 부족민들은 그것으로 족했다. 그리고 남은 것은 남례일족이었다. 라혼은 남례일족 자체를 없애는 일은 남 례성의 진토인들을 모두 없애야 가능하다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남례일족의 시작은 한 고수의 자객행(刺客行)이었다. 남례일족의 정 점에 서있는 자는 대야였고 그 대야를 대신하는 자가 소야들이다. 라혼은 그간 수집한 정보를 통해 이미 상당한 수의 소야들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남례일족은 없앨 수 없다. 그러나 내가 남례일족의 일원이 되는 것은 충분 히 가능하지 않겠나?" "예?" 고학은 주군의 갑작스런 말에 약간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곧 그 의미를 깨 달을 수 있었다. "조원산에 감곡의 아이들을 보내 살수로 키울 것이다. 지심!" "예." "네가 남례일족의 대야가 되어주어야겠다." "예, 주인님! 주인님의 기대에 어근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라혼은 지심을 백호영과 마찬가지로 여의금강공을 전수했다. 그럼으로 지심 은 이미 상승무공을 익힐 토대가 마련되었고 나날이 성취가 늘고 있었다. "주군!" "말하라!" "그럴 바에야 차라리 대대적인 선전을 하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라혼은 아무 말 없이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모원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 진하자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남례일족이란 무림인들이 붙인 말입니다. 그러나 그 뜻을 풀어보면 남례성 의 한 부족이란 의미지만 달리 해석하면 남례성 사람 전체를 의미하기도 합 니다. 그러니 하남천원군을 남례일족 안에 포함시킨다 해도 아무런 하자가 없습니다." "과연! 주군 모원의 말이 맞습니다. 이미 남례성은 하남천원군 중심으로 뭉 쳐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가 스스로 남례일족이란 말을 쓰는 겁니다." "……." 그것으로 남례일족이란 말의 의미는 바뀌었다. 무림인들에게 남례일족은 대 야와 소야가 있는 자객조직이었다. 그러나 대야와 소야들은 이미 라혼의 손 바닥위에 있었고, 남례일족은 하남천원군을 중심으로 우리는 한 가족이라는 말로 바뀌었다. '그렇군. 그렇게 하면 남례일족은 커지고, 원래 남례일족은 사라지는 것인 가?' 라혼은 모원의 말을 듣고서야 남례일족을 소멸시키는 방법을 알았다. -휘루루루웅~! 살을 에는 매서운 칼바람이 온 대지가 하얀 눈으로 뒤덮여 하늘과 땅이 분 간되지 않는 허허벌판 위에 몰아쳤다. 바람은 간간히 대지위에 쌓인 극한의 추위에 날카롭게 변한 눈을 쓸어 올려 새로운 눈보라를 연출하기도 했다. 그런 얼어붙은 대지위에 흑막 특유의 둥근 천막 파오가 연이어 세워져 있었 다. "이대론 모두 얼어 죽을 겁니다." "조정의 개자식들이 우릴 버릴 생각이 확실해! 그렇지 않고서야 땔감은커녕 말을 먹일 건초조차 주지 않을 리가 없어!" "그만해라!" "대장, 차라리 웅랑교에 붙읍시다. 사실 조정이나 웅랑교나 그게 그거 아니 오?" 이들은 한때 제평대도독부(齊平大都督府) 소속의 순군들이었다. 하나 웅랑 교의 습격에 집을 잃은 개신세가 되어 떠돌다. 웅랑교가 제평을 불태우고 주민을 학살하며 약탈했다는 말을 듣고 대대적이 반기를 들어 의백성 접경 지역에 모여 항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그저 이곳에 모여 있을 뿐이었다. 곧 겨울이라 웅랑교는 더 이상의 군사행동을 자제했기 때문이었 다. 다만 정찰대간의 소소한 접전만 있었을 뿐. "웅랑교가 제평을 불태운 순간 그들은 우리의 적이다. 제평은 너와 나의 고 향이다. 그곳엔 내 아내와 자식 가족들이 있었다. 벌판의 야인들이 복속한 무리를 어찌 대하는지 너는 누구보다 더 잘 알터……." "젠장할, 하도 답답해서 해본 소리였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는 웅랑교와 한 하늘을 이고 살아갈 수 없다." "그럼, 창간성을 쳐 뺏읍시다." 창간성(槍杆城)은 흑막에서 의백성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자리한 성채였다. 흑막과 의백서의 문물이 오가는 길목이라 상업이 발달한 곳이었지만 워낙 척박한 곳이라 사람은 많이 살고 있지 않은 곳이었다. "예전의 창간성은 별거 아니지만 지금은 다르다. 웅랑교의 발호 때문에 많 은 병력이 모여 있는 곳이다. 그리고 거기를 뺏어 겨울을 나봐야 봄엔 다시 굶주릴 것인데 언 발에 오줌 누는 격이지." "그렇다고 이대로 얼어 죽을 수는 없지 않소?" 제평대도독부 순군(巡軍) 참장(參將) 대주원(大株原)은 직급이 가장 높아 이곳 의백 창간성이 이 멀지 않은 지역에 모인 순군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대주원은 이곳으로 오면서도 의백성으로 들어가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곳에 모인 순군들 틈에 웅랑교의 간세가 얼마나 되 는 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주원 자신도 한때 웅랑교의 도움을 받기 도 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애쓴 사람이었으니 조정의 의심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마초와 땔감조차 주지 않고 황량한 이곳에 그대로 방치하는 행태는 울화가 치밀기에 충분했 다. 그러나 달리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다. 소장 타가선(駝價先)의 말대로 죽기 아니면 살기로 창간성을 치자는 말에 계속 관심이 갈 지경이었다. "대장님, 누가 대장님을 뵙자는 데요?" "누가? 그것이 땔감과 마초를 가지고 왔는데 대장님을 만나게 해달라고만 하며 누구인지는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겠답니다." 대주원은 땔감과 마초라는 말에 눈을 번쩍 떠지며 소장 타가선과 정령 전치 (篆置)와 나누던 의논을 멈추고 파오를 나섰다. 그리고 수십 대의 썰매에 산처럼 쌓아올린 건초와 땔감으로 쓰이는 말린 가축의 배설물이 먼저 눈이 들어왔다. "무척 춥군요. 어디 따뜻한 곳은 없나요?" 두툼한 털가죽 옷을 뒤집어 쓴 여인이 그렇게 말하며 말을 걸자 대주원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나는 제평대도독부 순군 참장 대주원이오. 그리고 여기는 순군 소장 타가선과 정령 전치라 하오. 낭자는……." "지금은 낮이니 새가 듣고 있을지 모르겠군요. 이런 추위 속에서 하늘을 날 려면 얼어 죽지 십상이겠지만요." 대주원은 여인의 말을 듣고 그녀가 이곳에 있는 것이 분명한 간세를 저어한 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녀를 자신의 머무는 파오로 안내했다. 그리고 연료를 아끼느라 약한 불로만 두었던 화덕에 연료를 더 넣어 불을 키웠다. 그리고 흑막의 전통에 따라 따뜻한 버터차를 끓여 내며 그녀가 말하는 것을 기다렸다. 파오 안에 훈훈한 열기가 가득차자 이제야 살겠다는 듯이 여인은 두툼한 망 토를 벗고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휴우~! 추워 죽을 뻔 했네." "……." "죄송합니다. 제가 장군들을 너무 기다리게 했군요. 저는 하화리입니다. 지 금은 북지대장군이신 천상천화의 사자자격으로 왔습니다." "……!" 대주원과 타가선, 전치는 북지성에서 일어난 일을 대략 알고 있었다. 그러 나 천상천화가 북지대장군이라는 것은 금시초문(今時初聞)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주요한 것이 아니었다. "북지대장군의 사자가 어찌 흑막에 오셨소?" "일단 저는 공식적인 방문이 아닌 밀사(密使)임을 밝혀둡니다." "……." 하화리는 그렇게 말하고 뜨거운 버터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후룩~! "좋군요. 어렵게 돌아가는 사정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하지요. 장군께서 이 끌고 계신 순군들을 저희 북지군에 흡수하려 합니다." "……!" 노골적인 여인의 말에 대주원 등은 눈살을 찌푸렸다. 패잔병이나 다름없었 지만 일군을 이끄는 장군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기 때문이 었다. "우리보고 계집의 치마폭 밑으로 기어들어가란 말이냐?" "그래요. 그게 뭐 어때서요?" "아니 이……." "타 소장 그만해라!" "젠장, 계집의 치마폭에 휘둘릴 신세라니……." 하화리는 그의 말에 이미 원하는 것을 얻었음을 알았다. 그의 말 속에서 거 절할 생각은 없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 낭자라 하셨소? 하 낭자가 말하길 밀사라 했는데 그것은 무슨 의미요?" "조정의 재가를 받지 않았다는 의미죠. 그리고 제안을 받아들이신다면 겨울 이 끝나기 전에 고운성(孤雲城)으로 오세요. 그곳에 수만 군사들이 먹을 군 량과 마초(馬草)를 마련해놓았으니까." 대주원은 스스로 북지대장군의 밀사라 자처한 여인의 제안에 얼떨떨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고운성에 들어선 순간 순군은 사라진다는 말이었다. 그 리고 겨울이 끝나기 전에 움직이란 요구는 그만큼 은밀히 움직이란 뜻이 되 었다. 그러나 한파가 몰아치는 흑막의 대지를 한겨울에 행군하는 것은 엄청 난 모험이었다. "하지만 겨울에 움직이는 것은 무리한 요구요." "저희가 필요한 것은 불굴의 투지를 가진 강병이지, 패잔병이 아닙니다. 그 리고 이곳까지 마초를 가져오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요? 염치라는 것을 아신다면 여인인 제가 계속 무리한 짓을 시키는 것은 예의가 아니죠." "……." 묘한데서 여자를 이용하는 하화리였다. 그러나 하화리의 푸념 같은 그 말은 결정적으로 대주원의 마음을 움직였다. "알겠소. 흑막의 순군이 어찌하여 천하제일의 정예강병인지 보여주리다. 한 달 후 고운성 화로가에 앉아 따듯한 차를 마시겠소." "그런 먼저 가서 기다리겠습니다." 하화리는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런 하화리의 태도는 묘하 게 사내의 호기(豪氣)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사내들이란 조금만 긁어주면 금세사기 충천한다니까!' 겨우 한 달 전 피비가 내렸다는 것을 잊은 듯 남례성은 활기가 넘쳤다. 20 만 하남천원군은 자신들에게 지급된 봉록과 멸절된 부족들의 재산을 나누어 가져 주머니가 풍족해지자 그것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들의 돈을 노 린 상인들은 각지에 주둔한 하남천원군에 의해 안전해진 길을 따라 상행을 시작하느라 분주했다. 거기에 모석이 받아온 서해수군에 소속된 투함에 토 금전장의 상품들이 대량으로 실려 봉수성에 하역되자 상인들은 즐거운 비명 을 지르며 하루라도 빨리 상품을 팔기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 냈다. 그리고 남례일족의 문제까지 해결한 라혼은 새로이 백호영을 받아들 였다. 백호영의 전통 아닌 전통(?)에 따라 백호영의 무사들이 스스로 재능 이 엿보이는 진토인 전사들을 받아들였는데 대부분 백호영들과 같이 싸운 백호영을 동경하던 나이어린 전사들이었다. 그것은 남례성 사람들에게 최고 최강의 흑장들이 남례일족의 일원으로써 새로운 형제를 스스럼없이 받아들 인다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리고 많은 전사들이 흑장이 되려 했지만 같 이 싸운 형제만을 받아들이는 전통(?)을 설명하고 그들은 시험을 거쳐 서해 수군이 될 것을 제안했다. 그러한 해명은 자신들의 전통과도 일맥상통(一脈 相通)은 생각이었기 때문에 흑장이 되지 못한 전사들은 서해수군이 되는 것 으로 만족했다. 그리고 원주에서 모병된 군사들과 진토인 전사, 상경금군 출신의 군사들이 한데 어우러져 연일 강도 높은 훈련을 계속했다. "서해수군의 전력은 투함이 51척, 운함이 405척, 쾌속선이 201척 입니다. 선원은 5231명, 군사들은 32143명입니다. 거기에 노꾼으로 이용될 노예들이 1만입니다." 라혼은 오랜만에 모석을 비롯한 백호십일걸이 한자리에 모여 장상의 보고를 받았다. "수고했다, 장상." "아닙니다. 해노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힘들었을 겁니다." 라혼은 장상뿐만 아니라 그동안 고생한 백호십일걸들의 일일이 치하고 앞으 로의 계획을 설명했다. "앞으로 1년간은 자중하며 움직이지 않을 생각이다. 다만 남상에서 대륙으 로 오가는 항로의 최대 관문인 안도(安島)만 점거하는 것으로 모든 군사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51척의 투함을 이용해 남례성 서남해의 연안 의 안전을 확보하여 움직인다. 나머지 운함으로는 서해 남북으로 움직여 무 역을 할 것이다. 이에 기주와 무주, 계주와 대립할 수 있을 것이나 그것을 무시한다." 라혼은 의백최가가 수상하다는 명분을 들어 북지성 태회진과 봉수성을 중심 으로 세력과 지배력을 확대하고 주요 상품을 감곡의 석밀무역에 모든 역량 을 기울이기로 했다. 이미 라혼은 서해수군통제사의 자격으로 서경과 북경 에 자연적인 지분이 있음으로 그것을 최대한 확대하여 그 1년간을 서해에서 영향력을 굳히는 시간으로 잡기로 했다. 그리고 태회진에서 본격적으로 철 기가 생산되면 장강과 대하의 내륙 수운에도 세력을 뻗으며 그 후 남상 서 해대수영을 토벌 인시드 남주 항로를 완전히 수중에 넣고 본격적으로 원주 로 입성하기로 했다. "그러자면 잘 조련된 수군이 반드시 필요하다. 나는 백호영이 밀림에서 적 을 찾을 수 없이 강해 졌으니 바다위에서도 최강이 되리라 믿는다." "……!" 백호십일걸들은 주군의 마지막말에 입가에 강자의 여유 만만한 미소를 띠며 복창했다. "백호무적!" -백호무적(白虎無敵)! [[수원숙우(誰怨孰尤)는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리라는 뜻입니다.]] 백호무적(白虎無敵) 새해가 지나고 대륙에 봄이 찾아왔다. 봄이 되자 대륙에선 얼어붙어 있던 대지가 녹고, 겨우내 숨죽이고 있던 새싹들이 앙상했던 나뭇가지에 박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화려한 꽃망울을 터트리고 바람 속에 향기가 스며들 었다. "설화야. 준비 되었느냐?" "예, 사부님!" 여인천궁주 상유란은 화려한 신부복을 입은 설화를 보고 감회가 새로웠다. 그간 아직 설화가 어려 정식혼례를 올리지 않았었고 그 후론 이런저런 바쁜 일 때문에 미루고 미루던 혼례였다. 오늘로써 천시신명과 만인 앞에 백호 나한과 천상천화가 정식부부임을 선포하게 되는 것이다. "설화야. 상공이 어찌하여 혼례를 치르는지 잘 알 것이다." "예, 사부님 불초제자 이미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 "그렇다니 다소 마음이 놓이는 구나. 그리고 오늘 혼례가 끝나는 순간 너는 더 이상 여인천궁의 소궁주가 아니다. 그러나 내가 네 사부인 이상 여인천 궁은 너의 친정이나 다름없다." "예, 사부님. 사부님의 은덕에 소녀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그래……." 3년. 천하정세는 참으로 급박하게 돌아갔다. 북쪽의 웅랑교는 결국 의백성 을 점령했고 남쪽의 후선은 그 기간 동안 내실을 다졌다. 그리고 계제가(鷄 帝家)가 다스리는 임주가 학가(鶴家)의 반정으로 원주조정에 반기를 들었고 그들을 갑주에서 보낸 군사들을 그대로 휘하에 두고 후선과 손을 잡아 갑 주를 압박했다. 그러자 상국 서제 서포틈은 크게 진노하여 임주를 정벌하려 했지만 다른 십이진가들의 견제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원주에 진주시켰던 군사들을 빼 갑주로 떠나 버렸다. 호황으로써는 그저 중경에 있는 서제의 대군을 중경에서 떠나게끔 하기위한 정략이었지만 진골십가들에겐 호황이 임주의 계제가를 버린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호황의 그러한 태도는 갑주 서제가로 하여금 조정에 등을 지게 하였으니 빈대를 잡기위해 초가를 태운 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일이 그렇게 되자 조정은 군사를 보내지 못해 웅랑교가 의백성을 점령하는 꼴을 지켜보기만 했으며 후선을 토벌하는 일 또한 각 제가들이 병력을 내놓으려 하지 않아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또한 우려했던 후려의 강무세가와 비견될 만큼 의백성에 영향력이 큰 의백최가가 웅랑교와 손을 잡음으로써 이를 견제하기위해 서해수군, 통칭 백호대수영( 白虎大水營)은 본래 목적이었던 남상의 서해대수영을 토벌하는 문제를 접어 두고 이를 견제해야 했다. 남쪽 끝과 북쪽 끝에 적을 둔 백호대수영은 북해 함대와 남해함대로 힘을 분산시켜야 했고 기주의 우제가, 무주의 양제가, 계주의 돈제가의 비협조와 견제 때문에 호황으로 부터 독립적인 지위를 보 장 받았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백호대수영의 힘은 겨우겨우 의백최가의 남하를 막고 , 남상을 억제하는 수준이었지만 사실은 현재 백호대수영의 힘은 최강이었 다. 라혼이 천자인 호황과 조정으로 부터 많은 것을 얻어내기 위해 힘을 숨 겼기 때문이었다. 남상의 흑선의 충각을 이용한 충돌을 막기 위해 전선에 철갑을 두르고 배위에 천보 밖까지 날아간다는 쇠뇌, 천보노(千步弩)가 설 치되어 있었다. 그것은 태회진에서 쏟아져 나온 철기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 었다. 그리고 1천명이 한꺼번에 승선하여 바다에서 한 달을 버틸 수 있는 크기의 가희 바다 위에 철옹성인 철갑거선이 태회진의 선거에서 만들어져 그 수가 7척이나 되었고, 기존의 전함들은 귀림 드워프들이 고안한 자동노 를 설치해 서해 남북을 보름 만에 왕복할 수 있을 정도였다. 또한 그 모든 배는 전환으로 태회진에 설치된 백호대수영의 본영에서 통제하니 서해는 이 미 백호대수영의 바다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오늘 라혼은 설화와 혼례를 치 른 후 7척의 백호대함을 이끌고 의백성으로 가서 무력시위를 한 후 4척의 백호대함을 이끌고 남상으로 출정하여 서해대수영 토벌을 마무리할 계획이 다. 이는 비로소 라혼에게 설화가 백호임을 알려도 될 만큼 힘이 생겼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 시기는 남상을 수중에 넣고 해남군도마저 장악한 후일 것이다. 그리고 해남군도를 장악하는 일은 이미 고학과 모원이 토금전장의 상인들을 통해 은밀하게 진행 중이었다. 그렇게 해남군도마저 세력권아래 두면 라혼은 필히 원주조정의 부름을 받을 것이고 백호대수영은 아직까지도 쟁패를 계속하는-사실 조정의 수군이 일방적으로 밀려 바다로 나가지 못하 는- 동해로 진출하라는 명이 떨어지면 그것을 명분으로 장강대하의 내륙의 물길마저 세력권아래 둘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당당히 원주로 입성하여 상 경의 적을 두고 설화가 백호라는 것을 숨기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이미 라 혼의 힘은 토금전장을 통해 천하 상권의 7할 틀어쥐고 있었으며 백호대수영 에 속한 군사만 10만이 넘었다. 또한 북지대장군인 설화에게도 7만 대군이 있었으며, 남례성에 하남천원군 또한 23만이었다. 은실로 수놓아진 백호문양이 선명한 붉은 망토와 은빛 갑주를 입은 라혼은 출정식을 위해 바다위에 육중하기 그지없는 몸을 맡기고 있는 백호대함(白 虎大艦)을 바라보고 있었다. 7척의 백호대함과 철갑을 두른 투함들이 오와 열을 맞추어 정박해있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주군, 때가 되었습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인데 떨리는 군. 모원 너도 혼례를 치를 때 이런 기분이었느냐?" "저는 갑작스럽게 일이 진행되는 바람에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붕 떠있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런가?" 라혼은 좀처럼 입지 않은 관복을 입은 모원과 함께 방을 나섰다. -삐리리리~! 두두둥둥, 촹~! 북과 피리 등이 경사를 축복하는 음악을 연주하는 악공들이 앞장을 서고, 그리고 백호대수영의 상징이자 백호나한인 라혼의 깃발인 대해백호기(大海 白虎旗)를 든 잔폭광마가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이날을 위해 준비한 잔털 하나 없는 백마에 몸을 실은 라혼이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여인천궁의 분궁 으로 말을 몰았다. 그런 라혼의 뒤를 백호십일걸과 백호영, 그리고 지심, 상초, 작도인, 목남등 백호대수영의 기라성 같은 장군들이 따랐다. 장동에 서 난리를 피해 온 사람들과 유리걸식했던 태회진의 사람들은 은인중 은인 이자 성녀(聖女)인 천상천화를 아내로 두고 이제 혼례를 치르는 백호나한의 모습을 보기위해 항구와 여인천궁의 분궁을 이어주는 폭이 십장이 넘는 대 로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햐! 그 위세한번 대단하구먼. 그런데 혼례를 올리는데 왜 갑주를 입은 거 지?" "이런, 무식한 사람하고는 자네는 앞바다에 떠있는 전선들을 보지 못했나? 혼례를 올린 후 바로 남상으로 출정한다잖아!" "그걸 누가 모르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굳이 신랑이 갑주차림으로 혼례를 치루냐 이거지!" "에? 정말 그러네?" "그것 그런 게 아닐세." 두 사내의 대화를 엿듣던 한 노인이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노인장, 뭐가 아니라는 말이오?" "천상천화가 백호나한의 아내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지. 그러니 굳이 혼례식을 치를 이유가 없네. 한데 백호나한이 남상으로 출정을 앞두고 혼례식을 하는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지." "……." "자네들 이번에 백호나한과 천상천화의 혼례식에 초대된 하객 중에 의백최 가의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예? 의백최가 사람이 백호나한의 혼례에 초대 되요?" "노인장 그게 무슨 말이오?" "허허허, 대해왕(大海王)인 백호나한이 왜 쓸데없이 백호대수영의 배들을 바다에 늘어놓았겠나. 의백최가로 하여금 자신이 남상에 있는 동안 쓸데없 는 짓을 벌이면 재미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게지." -짝! "과연!" "그런데 그런 사실을 그리 잘 아는 노인장은 뉘시오?" "나 말인가? 그저 천하를 떠도는 설객일세." 설객(說客), 또는 유세객(遊說客)은 천하를 떠돌며 강호의 기사(奇事), 전 설이나 신화, 그리고 옛 선현들의 이야기를 하며 사는 사람들이었다. 여기 저기 권세가들의 집에 식객으로 떠돌며 자신을 써줄 주인을 찾기도 하고, 이 노인처럼 술집에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강호의 호협들 이야기를 팔 며 살기도 했는데, 요즘같이 이야기 꺼리가 많은 때 천하정세를 이야기하는 노인은 어디가나 환영받았다. "유세객이셨구려. 그래 오늘은 어디서 묶을 작정이시오?" "아직 정하지 않았다네." "그런 우리와 함께 갑시다. 내 적당한 집을 소개시켜드릴 테니." "허허허, 고맙네. 내 이만한 성시에 하룻밤 묶을 객잔이 없어 무척 당황했 다네." "하긴 그러기도 할 것이오. 북지성은 사실 아직 정립천하를 외치는 무리들 이 활개 치는 곳이라 이곳 태회진만 벗어나면 바로 전장이나 다름없으니 길 이라곤 뱃길뿐이니……." "과연 그러네 그려 백호나한이 아내인 천상천화를 무척이나 아끼는 모양이 야. 전장이나 다름없는 곳에 본영을 두다니 말일세." 설객 노인과 두 사내가 대화를 하는 순간에도 혼례행렬인지 군사들의 행군 인지 모를 혼례행렬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흑막 사 람도 있었고, 남례성의 진토인도 있었다. 또한 백호영의 무공에 감복한 북 지성의 무림인 출신도 있었고, 정립천하군의 광기어린 칼날을 피한 수인들 도 있었다. 그리고 어느덧 혼례행렬의 선두가 만들어진지 1년이 채 되지 않 는 매끈한 석판으로 포장한 짧지 않은 대로를 지나 지금 태회진 사람들이 주춧돌 하나부터 직접 놓은 여인천궁의 분궁이며 천상천화가 머무는, 태회 진 사람들이 천녀궁(天女宮)이라 부르는 궁의 문을 들어섰다. 그 문은 천상 천화에게 구명된 석공들과 목공들이 은혜를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해 있는 재주를 다해 천상천화의 공덕을 새긴 문이었다. 애기인 천상천화를 백호나 한이 받는 장면부터 강호에 여인천궁의 궁주가 천상천화의 뛰어남을 알고 제자로 삼는 장면, 그리고 장동으로 들오는 입성장면, 불타는 장동성에서 사람들을 구하는 장면에 오늘 혼례를 올리는 장면까지 아름답게 대문전체에 새겨져 있었다. 신랑인 백호나한의 혼례행렬은 천녀궁의 광장에 들어서고 신부집인 천녀궁 은 전통에 따라 신랑을 맞아하는 의식을 치렀다. 이 혼례에 하객으로 참석 한 사람들은 저마다 백호나한의 위세에 감탄하며 저마다 덕담을 나누었다. 북지대장군이며 북지무림맹의 맹주인 천상천화의 세력은 이미 태회진을 중 심으로 북지성의 4할을 차지하고 있었다. "백호나한의 위세가 저토록 대단하다니 그저 바다에서 물고기나 잡는 군사 들인 줄 알았건만……." "이거 큰일이 아니오. 백호나한이 부리는 군사가 10만이고 그 대부분이 당 장이라도 땅에서도 싸울 수 있는 군사들이라니……." 서해수군통제사인 백호나한인 적이라 할 수 있는 의백최가의 사람을 초대했 듯 천상천화 또한 정립천하군의 사람을 초대했다. 거기다 천자인 호황의 특 사와 진골십가에서 보낸 축하객에 후선의 강무세가에서도 사람이 찾아 올 정도였다. 물론 그들은 최근 서쪽 바다의 패자인 백호나한이 보내온 초대장 에 그저 그 위세를 살펴볼 요량으로 지위가 그리 높지 않은 사람들을 보냈 는데 그들은 지금 북지성에서의 천상천화의 영향력과 백호나한의 위세에 눌 려 입을 다물지 못하고, 눈을 크게 뜨며 주위를 살펴보기 여념이 없었다. 거기다 한자리에 있을 수 없는 세력이 같은 자리에 있으니 정신을 차릴 수 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런 이정도 위세라니. 지금 보이는 것만으로도 능히 한지역의 패자라 할 만하다. 그런데 백호나한은 남례성에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직 있으니, 남 상이 백호나한에게 떨어진다면 본가가 위험하다." "공자 우리를 암암리 감시하는 자들의 기세가 은밀하기 그지없습니다. 아마 십중팔구 혼례가 끝나는 대로 쫓기듯 배에 태워질 겁니다." 후선의 낙왕 강무산은 양딸인 해홍군주 한포포에게 백호나한이 자신이 스스 로 사부로 생각하는 대무자의 전인이란 것을 전해 듣고 가문의 정영(精英) 하나 보내 축하선물을 전해주기로 했다. 서로 적대관계에 있음으로 그 정도 가 최선이었을 테지만 백호나한은 천자의 특사에게 자신을 후선 강무세가의 하객으로 소개하고 그것으로 자신의 위세를 드높이는 데에 이용했다. 현제 천하에 내로라하는 세력 중 이 혼례식에 참가하지 않은 세력은 흑막의 웅 랑교가 유일했다. 그렇게 백호나한와 천상천화의 혼례식은 천하가 그들의 위상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각 세력의 대표하는 하객들 은 자신들의 지위가 높지 않음을 안타까워했다. 번쩍이는 중갑주를 차려입은 신랑이 단위에 마련된 혼례상 앞에서고 화려하 게 치장한 신부가 꽃같이 아름다운 여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나왔다. 신랑 측에선 모석이 만면에 가득한 미소를 띠고 원래 집안어른이 앉게 되 는 자리에 서있었고, 신부 쪽에선 가니아와 상유란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 다. 주례로써 흑산자가 예문(禮文)을 읽어 천지신명(天地神明)과 하객들에 게 두 남녀가 부부가 되었음을 선포하고 술을 나누어 마시는 것으로 혼례의 식을 마쳤다. 여기서 보통 가문의 혼례라면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축하주를 나누어 마시며 복을 비는 덕담을 나눌 테지만 백호나한과 천상천화의 혼례 는 달랐다. 라혼은 천자인 호황의 특사에게 본래 임무였던 남상 서해대수영의 토벌을 맹세하고 출정을 결의했다. "천하의 은덕을 입어 이제 준비가 끝났으니 남상으로 출정하여 반적을 무찔 러 천자의 위엄을 다시 세우겠습니다." 이에 천자의 특사인 무골후 호장은 천자를 대신하여 혼례를 올리는 것을 축 하하는 호황의 축문과 필승을 기원하는 격려가 담긴 성지를 읽었다. "…… 이에 서해수군통제사 대장군 라혼을 해도대원수(海道大元帥)에 봉하 니 남상의 반적을 토벌하고 사해(四海)에 짐의 위엄을 다시세우라!" "평천하만세무궁(平天下萬世無窮)!" -평천하만세무궁! 호황이 바라는 것은 뻔했다. 백호대수영의 힘으로 후선의 수군을 상대하라 는 것이었다. 하나 백호대수영의 세력권이 서해와 후선의 세력권인 동해는 남해가 있었고 그 남해에는 해남군도의 해황가가 있어 서로 어떠한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노골적으로 사해에 위엄을 떨치라하니 라혼은 원주조 정이 얼마나 다급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해도대원수의 직위는 라혼 이 바래마지 않는 지위였다. 수군총사령관에 장강과 대하에도 공식적인 영 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인 것이다. 라혼은 해도대원수의 권위를 상징하 는 천보검(天寶劍)을 두 손으로 받아들고 검을 뽑아들고 외쳤다. "출정이다!" -와아~! -백호무적! -백호무적! -백호무적! 기세를 드높이는 구호를 외친 백호영들과 군사들은 신부인 설화와 어께를 나란히 한 주군의 뒤를 따라 태회진의 대로를 지나 항구로 향했다. 아까와 다른 전장으로 향하여 행군하는 군사들에게 날카로운 예기가 가득한 기세가 흘렀다. 그렇게 태회진 라혼과 백호대수영의 장수들이선착장에 접안된 배 들에 몸을 실고 바다로 빠져나오자 이미 배아 탑승한 수군들이 갑판을 두드 리며 또 한 번 더 기세를 드높였다. -쿵! 백호무적! -쿵! 백호무적! -쿵! 백호무적! 온 바다를 메우는 듯한 구호 속에서 배전에 설화와 나란히 선 라혼은 시무 룩한 표정의 아내에게 말했다. "부인." "서방님?" 설화는 서방님의 부인이란 말에 깜작 놀라며 어리둥절했다. 라혼은 그런 설 화를 보고 턱을 긁으며 다시 말했다. "역시 어색하군. 설화야! 그리 오래 떨어져 있지는 않을 것이다." "……." "그리고 다음엔 계속함께 있을 수 있을 거다." "알아요." 일부러 밝은 미소를 짓는 설화를 뒤로하고 배 전체에 철갑을 두른 장선(將 船)으로 삼음 백호대함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붉은 바탕에 수기(帥旗)를 걸어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태회진을 벗어났다. 함대의 뱃머리는 북쪽을 향해있었고 먼 바다로 나왔음에도 여전히 돛을 펼 치지 않고 노를 저어 빠르게 북상했다. 백호대수영의 함대의 첫 번째 목표 는 의백성에서의 무력시위였다. 명분은 의백최가에서 보낸 축하객을 안전하 게 배웅하는 것이었다. 백호무적(白虎無敵) 거창하기 그지없는 혼례식이 끝난 태회진에서 신랑이 없는 와중에도 축하주 를 마시는 연회가 시작되었다. 의백최가에서 온 사람들은 반강제적으로 출 정하는 백호대수영의 대함대와 떠났고, 강무세가와 정립천하군의 하객 또한 태회진을 떠났다. 그리고 나머지 중원십일주의 손님들은 천녀궁에 남아 연 회에 참가했다. "숭무공, 아니신가?" "무골후를 뵙습니다." 호황의 특사인 무골후 호장은 경주 원제가의 보물이라는 숭무공 원공반을 아는 체하며 불렀다. 본래 공(公)의 작위가 후(侯)의 작위보다 높았으나 금 군교위인 호장은 설사 원제라도 함부로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과례는 비례라고 했네, 본래대로 라면 내가 원공에게 예를 갖춰야 하는 것 이 아닌가?" "저는 제 작위가 정당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특히나 무골후 어르신에게 말입니다." 무골후 호장과 원공반은 인연이 깊은 사이였다. 전 수인제일고수였던 호장 은 원공반이 꺾으면서 원제가 크게 기뻐하며 후작위보다 높은 숭무공의 작 위를 준 것이었다. 비록 원공반이 호장을 꺾었다고는 하나 무인으로써 그를 존경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지위를 초월해서 존장의 예우를 했다. 그러니 무골후 호장으로써도 원공반이 기꺼워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보다 참으로 대단하지 않은가?" "예, 별 큰 싸움이 없었다지만 조정에 반하는 무리가 있어 전장이나 다름없 는 북지성에 수영의 본영을 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그 의도가 궁금했었습 니다. 그러나 지금 보니 이만한 곳이 또 없더군요." "이곳의 대대로 뼈를 묻으며 살아온 토박이는 고작 30여 가호뿐이었다네 그 런데 단 3년 새 4만호로 늘었다하네 대략 20만에 달하는 성시가 그사이에 만들어진 게지." "그, 그 정도 이었습니까?" 원공반은 새삼 백호나한의 역량에 감탄하며 반들반들한 석판으로 잘 포장되 어 인상 깊었던 넓은 대로를 생각했다. 20만의 사람이 모여 사는 도시를 만 드는 것은 황제라 할지라도 3년 안에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무골 후 호장이 흰소리 할리 없으니 그것이 사실이라면 참으로 엄청난 일이었다. 사람은 정당한 대가가 있다면 때론 믿을 수 없는 일을 해내기도 한다. 태회 진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태반이 집도 절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바로 설 화가 마련한 밀떡에 연명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을 라혼은 그 들에게 일거리를 주었는데 배를 건조하는 선거와 항구, 그리고 성벽을 포함 한 방어시설이었다. 그와 동시에 라혼은 배급되는 식사를 밀떡이 아닌 객잔 의 요리수준으로 넉넉히 배급했고 나중에는 얼마든지 가져다 먹어도 될 만 큼 요리를 만들어 댔다. 그리고 또한 일한 만큼 보수를 지급하니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스스로 나서서 일을 했고, 여인천궁과 토금전장이 각지에서 모은 공장(工匠)들에게 손재주를 인정받으면 그 만큼 더 보수를 지급하자 젊은이들은 일을 하나라도 더 배우려 열심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예상한 공기(工期)보다 하루라도 작업을 빨리 끝내면 보수를 2배로 지급하자 사람 들은 더욱 열심이 스스로 어떻게 하면 일이 빨리 끝낼 수 있을까를 생각하 며 일했고 그 감독을 경험 많은 공장들이 일일이 점검하여 하자가 발생하는 것을 줄였다. 사람이 뭔가를 배우고자 하면 무서운 속도로 배운다. 그리고 각자 제몫을 다하지 못하면 눈치가 보이므로 채찍을 들고 감시하는 사람이 없어도 일을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1년 반 만에 백호대함같이 거대한 배를 건조할 수 있는 대선거가 4개나 말 들어지고 곧이어 백호대함 이 건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라혼의 계획한 따라 태회진이 본격적으로 만 들어졌는데 이때 목우유마까지 투입되고 청장의 가마에서 벽돌과 기와가 대 량으로 구워지고 태회진과 멀지 않은 오병산(五兵山) 채석장에서 좋은 돌이 채석되어 목우유마에 실려 오자 애어른 노인, 여자 할 것 없이 숙련된 20 만의 일꾼들이 도시를 만드는 것을 너무 간단했다. 이제 시전이 만들어지고 그간 모은 돈으로 장사를 시작하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하는 활기가 넘쳤다 . 당금 천하에서 태회진 사람만큼 주머니가 두둑한 곳은 없었다. 이제 올 가을부터 세금을 걷는다는 말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걱정하지 않았다. "북지대장군인 천상천화가 부리는 군사들만 7만일세. 그리고 대장군 라혼의 휘하에 10만이 있지 이들은 실제로 싸움을 준비하는 군사들이라 사기와 훈 련도가 높은 정예 군사들이지." "……." "보게, 을주의 마제가 사람이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모습이 참으로 볼만하지 않은가?" 원공반은 호면을 그대로 들어낸 무골후의 말속에서 뼈가 느껴졌다. 대외적 으로 백호나한은 원주조정에 충성하는 자였다. 그리고 실제로 호황은 그에 게 호의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무골후 호장의 말대로 북지성 천 상천화의 세력권과 바로 면해 있는 을주의 마제가에서 보낸 축하객이 여인 천궁의 여인들에게 이것저것 묻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도 그럴 것이 징병령에 대군을 모았다고는 하지만 백호나한의 군사들에 비해 오합지졸이 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최태우(崔泰宇)는 의백최문의 소유의 철광에서 생산되는 철석을 파는 책임 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중주로의 판로가 막히는 바람에 기존의 철석 도 처치곤란이거늘 흑막 웅랑교와 손을 잡은 대가로 또다시 관에서 직접 관 리하는 광산까지 떠안는 바람에 상당히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다. 최문에서 는 웅랑교와 세력비율을 맞추려 대규모로 모병을 했고 거기엔 대대로 축적 된 최문의 재산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자금이 들어올 구멍은 없고 사용되는 재산은 마른 사막에 물대듯 사용되니 아무리 최문이라도 허리가 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문득 최태우의 귀에 웅랑교가 흑막에서 생산되는 철석을 토금전장과 거래한다는 소문을 들려왔다. 그리고 놀랍게도 토금전장이 웅랑 교에게 사들인 철석이 태회진의 철장에서 철기로 가공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백호나한이 반적이라 할 수 있는 웅랑교와 은밀한 거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거래 선은 웅랑교의 것이었다. 하지만 어느 정 도 지분은 확보하고 싶었다. 그때 마침 초대장이 날아온 것이다. 최문의 가 주와 어르신들은 그냥 무시하려 했지만 최태우는 그것을 기회로 보아 초대 에 응했다. 그리고 최태우가 본 것은 본래 목적을 망각하기에 충분했다. 일 개 성채규모의 철선이 바다에 7척이나 떠있는 모습은 충격이었다. 최문이 해상세력이라 하나 뱃길을 통한 무역을 주로하기에 쓸데없이 큰 배는 없었 다. 다만 전전대 가주가 거센 반대를 불사하고 고집스럽게 건조한 최문의 자랑이자 힘을 상징하는 곤선(鯤船)이 거의 유일했다. 그러나 바다위의 성 이라는 곤선의 크기는 백호나한의 백호대함보다 조금 큰 수준에 불과 했고 나무로만(?) 만들어진 배였다. 최근에 투함이 만들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백 호대수영의 함대의 위용은 최태우의 머릿속을 하얗게 탈색시키기에 충분했 다. 그리고 지금 이 대선단의 뱃머리는 남상이 있는 남쪽이 아니라 의백성 이 있는 북쪽이었다. "최공, 이대로 이레만 더 가면 의백성이오." "……!" 최태우는 백호나한의 군사라고 알려진 고학의 말에 깜짝 놀랐다. 자신은 순 풍을 타고 왔는데도 열흘을 넘었는데 지금은 역풍을 맞으며 북상하고 있었 기 때문이었다. '태회진을 벗어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거늘…….' 뭔가 내력이 있는 것은 알았지만 최태우는 내색치 않으며 지나가는 투로 물 었다. "절 배웅하는데 너무 많은 배들이 동원되는 것 같습니다. 고공." "허허허허, 우리 해도대원수께서 마음 쓰시는 것이니 마음에 두지 마시오." "……." "그리고 우리는 토금전장이 어디와 거래하던 상관이 없소." "그 무슨……?" 그러나 고학은 그에 대한 언급은 더 이상 하지 않고 의백성에 상황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최태우는 고학의 예리한 질문에 당황하며 둘러대기에 바 빠 진땀을 흘려야 했다. 그렇게 집요하기 그지없는 고학을 상대하느라 모처 럼 승선한 백호대함을 둘러보지도 못한 채 이레를 보내야 했다. 그리고 이 레가 다 되서야 같은 배에 타고 있는 백호나한을 만날 수 있었다. "어서 오시오, 최공!" "의백최문의 최태우입니다." "곧 재독의 항구요. 우선 본좌의 혼례식에 찾아와 준 것에 감사드리오." "별말씀을……." "본좌는 조정에 충성하는 입장이라 조정에 반한 최문과 언제 서로 칼을 휘 두를지 모르오. 비록 서로 칼을 맞대고 있는 적이라 하나 한가지만을 약속 하겠소. 토금전장의 배만은 태회진을 사용할 수 있게 할 것이오." "……!" 의백성 재독(財瀆)은 최문의 본산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많은 배들이 만들어졌고 인시드 북주와 무역으로 막대한 재화가 최문을 키운 원 동력이 되었다. 그런 재독의 항구가 바다를 가득 메우며 접근하는 함대의 모습에 난리 아닌 난리가 벌어졌다. "비켜라!" -다가닥, 다가닥, 다가닥, 다가닥, 다가닥………………. 최문에서 일단의 무사들이 항구로 쏟아져 나오고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 "어찌된 일이냐?" "대주님, 대규모 선단 입니다. 못돼도 수백 척은 넘는 듯하니 타고 있는 군 사가 3~4만은 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저런 대규모선단이 재독으로 접근하도록 몰랐단 말이냐?" 최문의 무력조직인 해검대(海劍隊)의 대주(隊主) 최문요(崔聞曜)는 5백 해 검대 무사들과 이번에 최문이 모은 6천명의 군졸들로 이 위기를 넘길 수 있 을까 자문해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었다. 비 록 울며 겨자 먹기로 웅랑교와 손을 잡았지만 웅랑교의 입김이 닿아있는 군 사들을 본가가 자리한 재독에 두기 싫어 재독엔 도시의 크기에 비해 군사들 이 얼마 없었다. 사실 세력으로 따지면 웅랑교의 힘은 최문을 크게 상회했 다. 하지만 최문이 가지고 있는 해운력은 웅랑교가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었 다. "대주님, 백기입니다!" 최문요도 적의 장선으로 생각되는 배에 백기가 오르자 직접 문정하기로 하 고 쾌속선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본가의 곤선 만큼이나 큰 배라는 생각을 하였으나 가까이 접근할 수로 놀람은 더욱 커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배이며 배 전체에 철갑을 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호대수영……." 깃발에 적힌 백호대수영이라 글자에 최문요의 안색이 더욱 굳어졌다. 철갑 을 두른 거함도 인상 깊었지만 장군을 호종하듯 전열한 투함들도 나름대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호대수영의 소령 육삼이다. 그대의 소속을 밝혀라!" "재독 해검대의 대주 최문요요." "최문의 사람인가?" "그렇소!" "본 백호대함에 최문의 사람이 타고 있어 그를 내려 주려하니 배를 가까이 대라!" "본가의 사람이?" 최문요는 잠시 망설이다 이내 손짓으로 백호대수영의 장선에 배를 가까이 가져갔다. 그리고 사실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왠지 까마득해 보이는 배의 난간에서 밧줄을 타고 중년의 사내가 내여 왔다. "자네는 태우 아닌가?" "돌아왔네." 최문요는 굳은 표정으로 착잡함을 감추지 않는 최태우의 신색을 살피며 도 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백호대수영의 해도대원수 라혼 대장군께서 혼례식에 사람을 보내 축하한 최문의 얼굴을 보아 이대로 배를 돌린다. 하나 최문이 계속 조정에 반한다 면 다음엔 각오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통보하고는 거대한 철갑선은 크게 선회했다. 그런 철갑 선을 따라 대 선단이 일제히 뱃머리를 돌려 남쪽 바다로 멀어지는 모습을 구경하던 해검대주 최문요는 최태우에게 물었다. "태우, 이게 무슨 일인가?" "보면 모르나 무력시위일세." "무력시위?" "본가의 곤선 만 한 배에 철갑을 두른 것을 보았지 않은가? 과연 바다에서 저것을 만나면 어찌하려는 가?" "……." "후우~! 세상천지에 바다에서 백호대수영만한 힘을 가진 세력이 또 있을까? 주인이 없는 바다에 패자가 섰으니 이일을 어찌할꼬." 육촌간인 최태우의 탄식이 계속될수록 최문요의 안색은 굳어져만 갔다. 최 문이 해상세력으로 손꼽히지만 그것은 해상무역을 중심으로 한 상가(商家) 였다. 그러나 방금 본 백호대수영은 본격적인 수군이었다. 아까 본 전력만 으로도 서해바다 전체는 물론 능히 남해의 해남군도, 동해까지 망라한 바다 를 지배할 수 있는 힘이었다. 설화는 서방님과 정식 혼례를 치름으로써 여인천궁의 소궁주 지위를 잃었다 . 사문화된 궁규라고는 하나 궁주는 남자와 혼인을 하면 궁주의 지위를 내 놓게 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일공(一公)이라 하여 비공식적으로 남편을 두 는 것까지는 용인하였지만 설화의 경우처럼 정식으로 공표하면 어쩔 수 없 이 궁주의 자격을 잃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설화의 신분은 여인천 궁의 궁주자리에 연연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고 사실 설화자신도 여인천궁의 이어받는 것에 대해 별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설화는 현 여인천궁주 상유 란의 제자의 신분이고 북지무림맹의 맹주였다. 지금 북지무림맹은 백록파는 물론 북지박가와 무산초가에서도 실질적인 힘을 보태고 있는 실정이라 그 규모가 장동에서 맹이 결성될 때보다 훨씬 커져 있었다. "천녀, 다시 한 번 축하드리오. 백호나한과 같은 천하영웅과 부부의 연을 맺었음을 하늘과 땅에 고했으니 만인이 부러워할 일이오." "아닙니다. 그보다 새삼스럽게 올린 혼례를 참석해주셔 자리를 빛내 주신 여러분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아니오. 천녀는 북지무림맹의 맹주시니 천녀의 일은 곧 전 북지성의 일이 오. 그보다 천녀 그간 숨겨오던 태회진이 만천하에 공개되고 특히 정립천하 군에 알려졌으니 조만간 그들이 무슨 움직임 있을 것인데 그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하오." 백록파의 장문인 오중자는 장내를 정리하며 자연스럽게 앞으로의 일을 의논 하는 방향으로 논점을 옮겼다. 그러자 북지무림맹의 태상호법의 감투를 쓰 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강시지존 흑산자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 일은 무림맹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설명정도 는 해두지. 앞으로 대대적인 모병이 실시함과 동시에 본격적으로 북지성 내 에 영향력을 확대해 나갈 것이다." "태상호법, 그럼 정립천하군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그래서 무림맹의 일이 아니라 하는 거다. 이일은 천녀가 조정의 북지대장 군으로써 본격적으로 조정에 반하는 세력을 상대함이기 때문이다." "……." 흑산자의 발언이 끝나자 중인들은 저마다 흑산자의 말이 옳다, 아니다 천상 천화는 무림맹주이니 이일 또한 무림맹에서 관여할 사항이다. 아니다 자신 은 끝까지 천상천화 도울 것이니 일이 어찌 처리되던 상관없다 하는 식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그날은 백호나한에게 흑사라 불리며 최측근 인 흑산자의 일방적인 통보만 들은 채 흩어졌다. 어차피 혼례식 이후 처음 공적인 자리에 나타난 천상천화에게 축하의 말을 하기위해 자연스레 모인자 리였기에 별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흥! 이거야 백호나한이 맹주인지 천녀가 맹주인지 모르겠군." "뭐가 말입니까?" "안하무인인 흑산자의 행동을 보게 그게 다 백호나한 때문이라고!" 북지박가의 새로운 가주 철필일획(鐵筆一劃) 박오(朴旿)는 차를 마시며 흥 분하여 아무런 죄없는 백호나한을 성토하는 무산초가의 새 가주 절암도객( 切巖刀客) 초구연(超具硏)에게 물었다. "후후후, 초가주님 이곳이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무슨 뜻인가?" "이곳은 태회진입니다. 백호나한이 백호대수영을 설치하기 위해 건설한 도 시인 이곳에서 그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흑산자는 천하무림의 열두 지존 중 하나 그전부터 광오 하기로 유명했던 사 람입니다. 그 죄를 백호나한에게 물을 순 없지요." "그러나 백호나한이 그를 통해 무림맹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안 될 말 이네." "확실히 그렇지요. 하지만 백호나한이 무림맹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아내 인 천녀를 이용하면 더욱 간단하지 않겠습니까?" "……." 초구연은 자꾸 딴죽을 걸어오는 박오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박 오는 그런 초구연의 시선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사실 북지무림맹이 천상천화에게 매달린 형국입니다. 그런 천상천화를 백 호나한이 받히고 있습니다. 저는 오히려 백호나한이 북지무림맹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더군요." "무슨 말인가?" "말 그대롭니다. 어찌 보면 적지나 다름없는 곳에 본영을 두는 것도 이상하 지 않습니까? 그리고 토금전장도 이상합니다. 지금이야 태회진에서 생산되 는 철기로 막대한 부를 쌓고 있지만 철광이 있는 곳도 아니고 무엇 때문에 이곳에 대규모 철장을 꾸렸을 까요?" "흐음." "하나하나 따져보면 이모든 일은 천상천화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결정적 인 작용을 했습니다. 원주조정에서는 천상천화를 그저 단순한 여인으로 보 았습니다. 게다가 남편이 조정에 충성하는 장수이니 병권이야 언제든 거둬 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을 테지요. 그러나 보십시오. 천녀는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천녀가 굳이 무림맹주일 필요가 없는 것이 지요. 내가 백호나한의 입장이라면 천녀가 가진 7만 군사를 어떻게든 가져 올 것입니다. 그러나 천녀를 따르는 군사들은 스스로 백호나한 백호대수영 의 군사가 아닌 천녀의 군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 박오는 나름대로 생각에 잠긴 초구연에게 그런 천상천화의 소궁주 지위를 거둔 여인천궁에 이해할 수 없는 행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궁주가 아닌 소궁주였다. 곧 궁주가 바뀌는 것도 아닌데 남편을 맞이한 제자는 궁 주가 될 수 없다는 사문화된 궁규를 들어 그리 행사한 것은 천녀 개인에게 몰린 힘을 생각해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일일 수 있었다. 백호무적(白虎無敵) 3척의 백호대함과 12척의 투함 서북해역에 남겨두고 4척의 백호대함과 투함 18척, 돌격함 68척은 남상이 있는 서남해역으로 빠르게 남하했다. 그와 동 시에 기주 북경 황축성과 무주 서경 황미성, 계주 흑해성(黑亥城) 그리고 남례성의 봉수성에서 백호대수영소속의 함대와 대군이 일제히 출정하여 이 번 남상 정벌에 백호대함 4척, 투함 40척, 돌격함 120척, 병력수송을 위한 운함 314척, 그리고 그외 500여척의 쾌속선을 포함 총병력 9만 8천여명에 달했다. 그리고 또한 남례성에서 하남천원군 10만이 만약을 위해 집결했다. 라혼은 백호대함 3층 갑판에 올라 수평선 위로 남상의 대서도가 보이자 내 공이 실어 외쳤다. "들어라!" -허! -쿵! "그대들에게 묻겠다. 승리를 확신하는가?" "주군, 병법에 이르기를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승리는 쉬운 일이라고 했습니 다. 아군은 저들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으며 이 고학이 장담하건데 저는 백호대수영의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적들이 싸우는 방법을 알아 그에 대비키 위해 배에 철갑을 둘렀으며 적지인 남상의 세세한 샛길마저 기 록되어 있는 지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우릴 모릅니다. 저는 두 눈을 부릅뜬 용맹한 장수를 반장님인 어린아이가 이겼다는 말을 들은 바 없습니다." "소장들의 생각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좋다. 전 백호대수영의 군사들에게 알려라. 나는 승리를 원한다!" -명 받드오이다! 남상은 크게 대도(大島), 소도(小島), 하도(下島)의 큰 섬 세 개와 그밖에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있었는데 달리 대서도(大西道), 소동도(小東道), 하남 도(下南道)로 불리기도 했다. 과거 요괴취급 받던 수인들이 집단을 이루어 천하를 휩쓸었을 때 대륙에서 패주한 대규모 인간들이 남상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남상엔 대륙과 상관 없이 독자적인 세계를 이루며 살아가던 원주민들이 있었다. 본래 외지인과 원주민 사이는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었고 결국 험악해질 대로 험악해진 관 계는 피를 부르는 전쟁을 피할 수 없게 했다. 그러나 남상의 원주민들은 대 륙에서 건너온 그들을 이길 수가 없었다. 남상에선 귀하디귀한 철제무기로 일반군사까지 무장하고 말이라는 생전 처음 보는 짐승을 탄 기병은 그들에 게 두려움에 대상이었다. 결국 돌도끼와 청동창으로 무장한 남상의 원주민 들은 그들의 창칼에 일반적으로 학살되었다. 그사이 대륙에서는 천하를 제 패하고 패권을 차지한 수인들의 압력에 견디지 못한 아니 그들 존재자체를 인정할 수 없었던 대선제국(大鮮帝國)의 황실이 황실에 충성하던 장군의 후 손이 점령한 남상으로 황실을 옮겨 천도했다. 황실이 남상에 옮겨가자 많은 사람들이 남상으로, 남상으로 몰려들었고 남상의 세 섬은 그들을 모두 받 아들여도 좋을 만큼 컸다. 대륙을 중원십일주, 중외오성으로 분할한 수인조 정은 대륙을 떠나는 그들을 막지 않았고 오히려 끝까지 저항하는 세력을 그 곳으로 쫓아 보내기까지 할 정도였다. 남상은 세계 바깥에 있는 곳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남상은 기름진 땅이었다. 중주의 장강과 대하변의 생산력에 는 못 미치나 나름대로 곡창이라 할만 했다. 그리고 십수년 후 어느 정도 힘을 회복한 대선제국의 사람들은 대륙을 차지한 수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고 한때 남례성 일부를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수인조 정은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고 흑막에서 웅랑들을 토벌한 경험이 많은 대군 들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호제는 대군을 몰아쳐 남례성의 서해안을 점거한 남상의 대군을 몰아냈다. 그러나 바다는 건너지 못했다. 배로 십 수 일을 가야하는데 배도, 바다에 익숙한 선원도 없었다. 그러나 그 뒤로도 수차례 나 남상의 침입이 계속 시도되자 수인조정에서는 바다에 경험 많은 어부들 을 모아 수군으로 삼고 총력을 기울여 투함을 만들었다. 그리고 일시에 대 규모 선단을 이끌고 남상에 대군을 내려놓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본능적으 로 물을 무서워하는 수인들이 바다를 건널 수 없으리라는 근거가 미약한 판 단을 하고 있던 남상의 선황실은 허를 찔려 패퇴를 거듭하다 결국 대선제국 의 맥을 완전히 끊겼다. 그러나 수인들을 증오하는 남상인들은 계속 수인조 정에 반발했고 이에 수인조정은 남상을 비워버리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 들이 예전에 남상의 원주민에게 그랬던 것처럼 학살당하거나 남상에서 수십 년간 살아오던 주민들은 또다시 고향을 등지고 인시드로 또 남방에 있다는 남방대륙으로 배를 띄웠다. 그리고 수인조정은 그 뒤 해남군도, 후려, 동영 까지 복속시켜 완전한 천하의 주인이 되었다. 그리고 후려의 강무세가와 해 남군도의 해황가, 대연가(大燕家), 달피세가(達陂世家), 유포지문(流布知門 ), 경흥천가(敬興天家), 중주궁가(中主宮家)의 동영오가는 바로 남상을 정 벌한 수군세력을 기원으로 하는 세도가였다. "남상은 바다에 가로 막혀 조정의 힘이 크게 미치지 않았습니다. 조정의 섬 을 비워둔다는 방침으로 내륙에서 살수 없게 되어 있지만 알게 모르게 상당 한 주민들이 내륙에 흩어져 살고 있지만 땅의 크기에 비해 사람이 사는 곳 은 얼마 없어 비어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작계대로 대부분 평지인 대서도와 소동도에는 대주원 장군과 타가선 장군이 마군을 이끌고 들어가고 산지와 수해가 펼쳐진 하남도에는 모석 장군이 백호영이 투입됩니다. 대궁 해(大弓海)과 소횡해(小橫海)를 확실히 장악함과 동시에 내륙으로부터 세장 군이 서해대수영의 항구요새를 칠 것입니다." "얼마나 걸리겠는가?" "넉넉잡아 두 달은 걸리리라 예상됩니다." "늦다." "하지만 삼도를 완전히 장악하려면 그 정도의 시간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라혼은 남상 서해대수영의 토벌을 한달 안에 끝내고 싶었다. 태회진 모원으 로 부터 북지성 종도의 정립천하군의 움직임이 수상하다는 보고를 받았기에 남상에서 오랫동안 발이 묶이는 상황은 결코 이롭지 못했다. "내가 직접 움직이겠다. 남상의 내해에 있다가 서해대수영의 어조목(魚照目 )이 있는 곳이 확인되면 직접 그를 잡겠다. 나머진 작계대로 움직여라!" "알겠습니다." 조정이 원하는 것은 서해대수영을 토벌하고 그 자리를 서해수군이 대신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라혼은 남상을 얻을 생각이었다. 이미 감곡의 사탕수수 농사에 목우유마를 이용하니 생산력이 크게 늘었고 석밀을 만드는 과정을 드워프들이 고안한 기관을 이용하니 사람의 손이 훨씬 덜 가게 되어 인력이 남아돌았다. 사람이 남아돌자 개간을 계속하여 감곡 전역이 사탕수수밭으 로 변해갔고 거기서 생산되는 석밀은 라혼에게 주요한 수입원이 되었다. 백호대수영에 속한 군사들은 10만이었다. 그 10만개의 입을 단순히 먹이는 데만도 억만금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직급에 따라 다달이 지급 되는 봉록이 있었고 무장 또한 시켜야 했다. 이미 서해연안의 영향력을 확 고히 한 라혼은 서해남북을 오가며 무역을 했고 토금전장에서도 석밀, 철기 등을 팔아 막대한 황금을 벌어들였지만 백호대함과 같은 철갑선을 건조하 고 태회진을 건설하며, 대상계를 자리 잡게 하기위해 억만금이 한꺼번에 소 요되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선 어떤 돌파구가 없다면 현상유지조차 힘들 지 경이 되었다. 그러던 차에 라혼의 눈에 남상이 들어왔다. 그러나 남상은 빈 땅이나 다름없는 곳, 땅을 차지해 보아야 땅에서 생산 활동을 하는 농자( 農者)가 없으니 황무지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감곡의 향당이 만 든 석밀이 인시드에까지 비싸게 팔려나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생각의 조각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남상을 손에 넣은 후 그 땅에서 사탕수수를 대량으로 재배해 거기서 생산되는 석밀을 상품으로 인시드 남주 무역을 선점하여 지 분을 장악한다. 그리고 인시드의 동쪽해안 항로를 장악해 북주의 산물도 거 래한다면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 거기다 해남군도를 영향력 안에 넣어 향신료 또한 산지에서 싸게 얻는 다면 그 또한 엄청난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아~!" "웬 한숨을 그리 쉬세요?" "소매야! 3년 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가지 않 니?" "어머! 너무 해요. 아가씨, 시집도 안간 처녀에게 그런 걸 물어보다니……. " 응소매는 밑도 끝도 없는 설화의 질문에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대꾸 했다. 그리고는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을 꺼냈다. "뭐 확실히 늦었다고 생각은 되지만 아가씨는 이제 새신부라고요. 그런데 갑자기 아이는 왜 찾으시는 것예요?" "몰라! 그냥 허전해서……." "아하! 상공이 곁에 없으시니까 독수공방이 견디기 힘드신 거구나." "뭐야! 너 말이 이상하다." 응소매는 가늘어진 설화의 눈을 보고서도 시침 뚝 떼고 말했다. "아아 매정한 남정네가 혼례식을 올리고 첫날밤도 안 치르고 전장에 나가니 여인네 마음이 허하구나!" "뭐야! 자꾸 그러면 시집보내 버린다." "어머나 시집은 보내줄 생각이신 가보죠?" "너어~. 마음속에 사모하는 정인이라도 있나보지?" "어, 없어요!" 그러나 얼굴을 붉히며 당황하는 응소매의 모습은 사실을 짐작하기에 충분했 다. "가만 있자! 요새 모초가 이유도 없이 날 찾는 경우가 많던데……." "아니에요! 모 공자는 그저 안면이 있을 뿐이라고요!" "누가 뭐랬니? 소매 너 참 이상하다." "정말인데……." 모초는 모석의 아들로 설화와 동갑내기 소꿉친구로 백일잔치까지 같이한 특 별한 인연을 가진 둘은 설화가 여인천궁의 소궁주가 되어 상경 황진성내로 거처를 옮기자 자연스레 왕래가 없어졌다. 그러다 모초가 대대로 군관이었 던 모석집안의 전통에 따라 군관이 되기 위해 백호영으로 들어갔다. 모초는 백호영의 무사가 되어 사부로 모신 표상치 밑에서 남례성을 장악하는 임무 훌륭히 수행했다. 그러다 서방님이 태회진에 서해수군의 본영을 꾸리자 다 시 모석과 함께 태회진에서 지내게 되어 다시 설화와 자주 왕래하는 사이가 되었다. 설화는 나이 많고 연륜이 있는 인사들이 주위에서 떠받드는 가운 데 어릴 적 친구인 모초와 언제나 스스럼없는 응소매는 소중한 존재였고 그 런 설화를 위해 라혼은 남상으로 데려가지 않고 모초를 태회진에 남겨두었 다.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그렇게 하는 거예요?" "포포, 메이어서와!" 설화는 방으로 들어서는 포포와 메이에게 응소매에게 정인이 생겼음을 이야 기하며 수다를 떨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축하해 소매동생." "그런 게 아닌데……." "그래, 그래 이제 그만할께. 내가 잘못했어." 세 여인의 놀림이 계속되자 응소매의 눈에 습기가 비치기 시작했다. 설화는 그런 소매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주고는 화제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 "그보다 포포, 강무세가에서 온 사람들은 어찌되었나요?" "강무세가요? 그 사람들은 토금전장이 마련해준 배편으로 안전하게 떠났어 요. 근데 강무세가 사람들은 왜요?" "섭섭하네요. 만나보고 싶었는데 사실 강무세가는 제 외가거든요." "예에?" 한포포는 설화의 폭탄선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네 어머니는 강무씨에 혜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었데요. 그리고 할머니의 남편, 그러니까 외할아버지가 인이라는 함자를 쓰신 분이예요. 혹시 아세요 ?" "강무혜, 강무인?" "예, 아! 그리고 가니아 할머니의 아드님이 한분계신데 할머니가 그분을 ' 온'이라고 불렀데요." "하지만 그동안 말하지 않으신 거죠?" "그거야 당연하죠. 서방님은 조정의 장군이었고 강무세가는 조정에 반하는 후선의 황가잖아요." 설화는 한포포에게 자신의 신세내력을 떨어놓기 시작했다. 그것은 응소매나 메이도 처음 듣는 이야기라 숨을 죽이고 설화의 이야기에 빠져 들었다. "그래서 서방님이 강무세가에 어머님이 누구의 딸이며 어떤 존재인지 알아 보았데요. 그런데 지금까지도 강무세가에서 제 모친의 이름을 찾을 수가 없 었어요." "그럼 부친쪽은 부친에 대해선 모르시는 건가요?" "그건……." 설화는 가만히 한포포의 얼굴을 바라보다 이내 부친의 이름도 말해주었다. "제 성은 호(虎)예요. 아버님 이름은 호사천 그런데 호황가에도 호사천의 이름이 없으니 신기하죠!" -쿵! 한포포는 천상천화의 어머니가 강무세가의 여인이란 말을 들었을 때보 다 몇 천배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라혼대가가 말하는 주군은 다름 아닌 천상천화였어….' 백수회가 파악한 백호나한의 세력은 참으로 대단했다. 그런데 바로 그 세력 이 설화, 아니 호설화의 탄탄한 지지기반이고 북지성에서 천상천화의 영향 력을 생각하면……. '그리고 호사천이라니…….' 한포포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백수회의 정보력을 동원해 설화의 부모가 누구인지를 알아보겠다고 약속하며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설화는 그런 한 포포를 착잡한 표정으로 지켜보았고 그런 설화의 기색을 감지한 메이는 조 용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언니, 두렵지 않으세요?" "두려워. 그녀가 적으로 돌아설까봐!" "아녜요. 그녀는 적이 되지 않을 거예요." "그보다 너무 이른 것 아니에요? 상공이 남상을 손에 넣을 때까지는 시간을 두는 것이 낳을 텐데?" "아니 지금이야! 조정이 바라는 것은 단지 뱃길뿐이지만 서방님은 남상자체 를 얻고 싶어 하셔 그럼 백수회의 입김이 있는 고관들과 호영 등이 아무리 서방님을 두둔해도 원주조정에서는 본격적인 견제를 시작할거야. 그리고 그 첫 번째가 내게 준 벼슬을 거두는 것이겠지." "그것도 그렇군요. 참 그리고 상공이 함대가 남상 점령을 시작했다고 하네 요. 우리 서방님의 말로는 상공이 정립천하군의 수상한 움직임 때문에 일을 빨리 끝내려고 스스로 미끼가 되었데요. 상공도 참 어지간히 하시지 언니 가 무척 걱정되는 모양이예요." 설화는 메이의 말에 황홀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지었다. 메이는 현명하고 강 단이 있는 여인이었다. 그런 메이에게 설화의 존재는 특별했다. 호감은 가 지고 있었지만 우습게 생각하던 모원과 혼인하고 그의 우유부단함에 짜증을 냈다. 그러나 그 짜증이 그에 대한 관심인 것을 인정하고 모원을 내조했다 . 그러나 모원의 우유부단함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고 간간히 직접 라 혼상공에게 직언을 했다. 그리고 라혼은 그런 메이의 직에 힘을 실어주기도 해서 나름대로 영향력을 가진 여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메이는 추운 북 쪽 땅에 와 설화를 다시 만나면서 재능을 꽃피웠다. 아무래도 여인의 신분 이고 유부녀다보니 사내의 세계인 군부와 무림맹의 일을 처리하는데 어려움 이 따랐다. 맹주인 설화가 여인 그것도 천하제일미인인 것을 강호의 명숙들 이 어려워했기 때문이었고 군부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것은 라혼이 설화의 북지대장군으로써 일을 모원이 돕게 하자 자연히 메이가 설화의 최 측근에서 일을 돕게 되었다. 또한 무림맹의 일은 강시지존 흑산자가 후견인 이 되어 처리했다. 게다가 무림맹에 적을 두진 않았으나 천독지존 독신이 남례성을 떠나 북지성 태회진 천녀궁의 식객으로 머물고 있었고, 기환지존( 奇幻至尊) 영환자(靈幻子) 또한 본거지인 의백성을 떠나 이곳에 머물고 있 었다. 그는 흑산자가 북지무림맹의 태상호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 와 라혼이 천방대협 금동보에게 전한 마법을 보고 눌러앉아 식객으로 머물 렀다. 그런 지경이니 설화는 이미 조정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함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바로 그러한 사실을 밝히기 위해 혼례를 빙자 해서 천하에 위세를 떨친 것이다. "제독, 백호나한의 장선이 내해 한가운데 홀로 떠있다는 정보입니다." "백호나한을 태운 배가?" 서해대수영의 제독 어조목은 서해대수영의 모든 배를 이끌고 백호나한 함대 를 바다에서 요격하기위해 소동도와 안도사이의 해역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백호나한 함대가 대동도 북쪽과 소동도의 북쪽에 대군을 상륙시켰단 소식에 크게 놀라 하남도 주변 섬에 함대를 숨겼다. 안도를 거치지 않고 어떻게 대해를 건넜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지만 일은 이미 벌어졌고 어떻게든 움 직여야 했다. 과거 대륙에서 넘어온 선(鮮)의 황실이 십년 만에 다시 대륙 을 도모할 정도로 융성했으니 대륙으로 넘어가는 욕심을 버린다면 남상에 왕국을 건설하는 것은 꿈이 아니었다. 하지만 남상은 너무 드넓었고 3년이 란 시간은 너무 짧았다. 백호나한의 백호대수영을 의식해 서해대수영의 규 모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고 서해대수영이 모은 재물은 함대를 유지하는 데 에 쓰여 졌다. "함정을 위한 미끼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여 주위를 살펴보았으나 장선과 호위를 위한 투함 서너 척이 전부랍니다." "그럼 승부수로군." "그렇습니다. 제독 자기 스스로 미끼가 되어 우리를 끌어내려는 수작입니다 ." 어조목은 뜻밖의 정보에 장고에 장고를 거듭했다. 지금 배에 실린 물자로는 얼마 버티지 못한다. 식수 정도야 섬을 뒤져 찾을 수 있겠지만 120여 척 2 만여명의 배를 채우려면 작은 섬에서 머물러 봐야 지리멸렬(支離滅裂)하는 수밖에 없었다. "좋다! 백호나한은 내해에 수장시키고 인시드로 간다." "예, 제독!" 서해대수영은 대륙과 면한 해역보다 해적이 들끓는 인시드 방향의 해역이 더 익숙했다. 간혹 인시드 해안에 상륙해 해적들의 근거지를 토벌하던 경험 까지 있어 지금 서해대수영의 힘으로 인시드 대륙의 지방에 뿌리내리는 것 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충함(衝艦)이 모조리 못쓰게 되더라도 백호나한인 탄 배만큼은 반드시 바 다 속 구경을 시켜 주리라!" 어조목의 중얼거림을 들은 부제독 무초(武初)는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단순하다니. 인시드에서 서해대수영이 상륙하는 것을 그대로 묵인 한 이유는 그들에게도 해적은 귀찮은 존재이기 때문일진데 아예 살려고 엉 덩이를 들이 밀면 과연 무사할까?' 무초는 아무래도 내해 한가운데 하릴없이 떠있는 백호나한을 공격하는 것은 함정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사돈 관계를 맺고 있는 해황가의 밑으로 들 어가 해남군도의 섬 하나를 얻기로 마음을 굳혔다. 백호무적(白虎無敵) 바다에서 라혼은 무적이다. 백호대함 3층 갑판 함장실에서 라혼은 조심스럽 게 접근하는 흑선의 존재를 간파해냈다. 섬과 섬 사이에 숨어 치고 빠지기 를 계속한다면 상당히 피곤할 것이지만 그들이 넓은 바다로 나온다면 단번 에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섬에 상륙시킨 병력이 내부를 완전히 장 악하면 그 즉시 개간을 시작해 사탕수수를 옮겨 심어 2년 후에 첫 수확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즉시 닻을 올리고 남하한다." "충!" "닻을 올려라! 뱃머리를 남쪽으로 돌려라!" 항해사의 고함소리가 갑판 위를 쩌렁쩌렁 울리고 선원들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군, 대주원 장군이 청해진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답니다." "이것으로 섬 내륙을 장악하는 것은 마무리된 것인가?" "예,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라혼은 이번 남상을 점령하는 모든 지휘권을 고학에게 일임했다. 남상 정벌 에 동원된 10만 대군과 백호대수영의 모든 배중 라혼이 타고 있는 백호대함 과 호위하는 투함을 제외한 모든 배들을 고학이 통제하고 있었다. 라혼은 그저 대원수로써 이번 원정에 같이한다는 의미로 있을 뿐 모든 일은 전환으 로 고학이 맡아 처리했다. 그런 고학이 태회진이나 봉수성에 있지 않고 라 혼과 같이 백호대함에 올라 바다에 나온 이유는 해도대원수인 라혼의 위세 를 빌어 장군들을 수족처럼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백호십일걸은 고학 을 어느 정도 인정했지만 대주원이나 타가선은 고학을 그저 라혼의 모사정 도로만 생각해 가벼이 여기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원래 북지 대장군부에 속하여있었으나 설화가 여인이란 이유로 따르지 않으려하자 라 혼이 직접 나서서 백호대수영에 끌어들였다. 그들은 라혼이 거느린 장수중 수만 대군을 지휘한 경험과 능력을 갖춘 유일한 장군들이었다. 충성도 면에 서 의심스러워 고학은 그들을 견제했지만 라혼에게 그들이 배신은 별로 걱 정할 문제가 아닌지라 그들에게 선뜻 수만 대군을 맡겨 남상의 대소 양도를 점령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런 사정 때문에 그 두 흑막출신 장군은 굴러온 돌인 자신들을 견제하는 고학을 이해하면서도 곱게 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굴러온 돌인 그들을 중용한 라혼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고학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라혼을 따랐던 백호십일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라혼이 보기 에 모석이나 고우를 제외한 백호십일걸들은 무공은 높을지 모르나 장군으로 써는 1백인에서 1천인정도의 역량밖에 없었다. 1만이 넘는 군사들을 책임지 기에 다소 믿을 수가 없었다. 대주원이나 타가선 같이 수만 대군을 이끌만 한 장군이 없다면 모르나 인재가 있는데 놀려둘 라혼이 아니었다. "흑선이다!" 파수대의 파수꾼이 남쪽 수평선 너머에서 검은 점들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이 바다에서 돛까지 검은 배는 서해대수영의 흑선 외엔 없었다. 라혼은 밖 으로 나가 모습을 보이며 호기롭게 명령했다. "전투준비! 사수는 쇠뇌를 점검하고 도부수는 난입에 대비한다. 그리고 전 투 깃발을 올려라!" -와아! 대장군의 자신만만한 패기 가득한 목소리는 부하들에게 점염되어 절로 함성 을 지르며 기세를 높였다. 갑판에 설치된 천보노를 덮은 가죽덮개가 걷어내 고 도부수(刀斧手)는 무기를 챙겨들고 자신의 위치에 가서 대기했다. 그리 고 장선(將船)에 전투를 알리는 붉은 깃발이 올랐다. "함대 곤자진으로, 선두 백호대함이 맡는다." 전환을 통해 주군의 명이 떨어지자 장선인 백호대함을 십자의 중심에 놓고 항해하던 호위함들이 일제히 백호대함의 뒤로 일렬로 늘어섰다. 말 그대로 곤자진(昆字陣)이었다. "주군, 곤자진으로 가면 쇠뇌의 활용도가 줄어들 텐데요?" "어차피 배의 수가 차이가 심해 천보노는 큰 위력을 내기 힘들다. 적은 보 나마나 백호대함을 막기 위해 죽기 살기로 달려들 것이 뻔하다." 라혼은 고학에게 그렇게 대답해주고는 후위에 붙은 호위함들에게 명령했다. "백호대함에 붙지 마라 적선이 백호대함에 달려들면 1호와 3호는 5호는 우 회하고, 2호, 4호, 6호는 좌측으로 돌아 적의 배후를 친다. 목표는 어조목 의 이 탄 배다!" -존명! "속도를 최대로 높인다!" 먹이를 보고 달려드는 매처럼 라혼의 함대는 서해대수영 함대를 향해 저돌 적으로 달려들었고 거대한 백호대함이 정면으로 달려드는 모습에 서해대수 영 함대의 수군들이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제독! 백호나한의 배가 정면으로 달려들고 있습니다." "쿠쿠쿠쿠, 재미있군! 걸어온 싸움을 피할 내가 아니다. 다른 배들은 신경 쓰지 말고 전함대는 저 철갑선만을 상대한다. 충함을 전면에 배치하여 저 괴물을 막아라." "충!" 어조목은 지금 상당히 분노한 상태였다. 부제독인 무초가 수십척의 배와 함 께 행방이 묘연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와중에 눈앞에 고작 7척의 배들이 겁 도 없이 97척의 자신의 함대에 달려들고 있었으니 생각할 것도 없이 응전했 다. 비록 그 크기가 흑선의 2배인 투함과 투함의 서너 배는 됨직한 철갑거 선이었지만 일단 수척의 충함을 희생해서라도 철갑선이 멈추게 하면 일제히 배에 난입해 배를 나포하여 자신의 소유로 할 수도 있었다. 비록 큰 배이 긴 하지만 병력은 1천미만일 것이기 때문이다. "주군!" "육삼 괜찮은가?" "이 육삼,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잔폭광마는 심한 뱃멀미에 핼쑥한 몰골로 대부를 쥔 채 다리를 후들거리며 라혼에게 다가왔다. 그 뒤를 잔폭광마와 크게 다르지 않은 호리호리한 몸매 의 지심이 따랐다. 라혼은 그런 그들에게 시선을 떼고 다시 전면에 눈을 주 었다. 서해대수영의 배들은 쐐기진을 형성한 채 라혼이 승선한 백호대함을 향해 마주 달려오고 있었다. "불화살이다! 흑선에서 불화살이 날아온다!" 어느새 화살이 날아드는 거리가 되자 흑선에서는 불화살을 쏘아댔지만 백호 대함에서는 화살이 날지 않았다. -탁, 따닥! 딱! 백호대함에 씌운 철갑에 화살이 부딪혀 퉁기는 소리와 나무로 된 부분에 박 히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지만 라혼의 군사들은 커다란 방패로 몸을 가리 고 파도가 지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거리가 더욱 가까워지자 화살의 위력 과 정확도는 더욱 높아졌다. 그리고 화살은 라혼이 서있는 백호대함의 3측 갑판에까지 미쳤다. 그리고 흑선에서 쏘아진 화살하나가 정확히 라혼의 머 리를 노리고 날아들었고 라혼은 화살이 정면에 날아드는 것을 아는지 모르 는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탁! 파르르르……. "이 정도는 스스로 피하실수 있지 않습니까?" 라혼의 뒤에 있던 잔폭광마가 어느새 앞으로 나서서 라혼의 미간으로 날아 든 화살을 잡아채며 투덜거려다. "그 정도면 싸울 수 있게군. 이번에 좀 더 많이 날아온다. 미리 몸을 풀어 두는 셈치고 막아봐라!" 흑선에서 라혼의 모습을 발견했는지 모든 화살이 라혼이 서있는 3층 갑판에 집중되었고 라혼은 장군을 보호하기 위해 방패를 들고 올라오는 군사들을 손으로 들어 제지 시킨 후 잔폭광마와 지심에게 자신을 노리고 날아드는 화 살의 처리를 맡겼다. 그리고 뱃전에서 모석을 대신해 부관 역할을 하는 고 우의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충돌한다!" "출동한다!" -쿵! -꽈직! 우직끈~! 거대한 쇳덩어리를 연상시키는 백호대함은 전면에서 달려드는 서해대수영의 수십 여척의 흑선들을 부수며 계속 앞으로 진행해 갔다. 그러나 서해대수 영의 흑선들은 배가 부서지는 것은 상관하지 않고 계속 저돌적으로 달려들 었고 좌현과 우현에도 십여 척의 배가 떼로 몰려들었다. -쿵! 쿠궁! "과연 서해대수영이다. 이토록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연달아 충격을 주다니 ……." 라혼은 함대를 운용하는 훈련을 하면서 파도가 있는 바다에서 이토록 일사 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피부로 절감했다. 그런데 서 해대수영의 흑선들은 정확하게 백호대함의 중심으로 마치 부챗살처럼 촘촘 히 배를 부딪혀왔다. "활과 노를 쏴라!" "주군, 방금 그 충격에 침수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인가?" "침수되는 방을 막아두었으니 가라안지는 안을 겁니다. 다행히 좌현과 우현 이 동시에 뚫려 배가 기울지는 않을 겁니다." 백호대함은 배 밑은 서로 완전히 밀폐시킬 수 있는 방이 연이어 있는 구조 로 되어 있어 문을 닫으면 물이 가득 차더라도 문을 닫으면 방밖으로는 물 이 새지 않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백호대함이 흑선의 육탄공격에 더 이상 앞으로 진행하지 못하고 배로 난입하려는 서해대수영의 수군들이 일제히 쇠 갈고리 던져 백호대함에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이런, 끝났군." "제독, 백호나한의 장선을 따르던 투함들이 양 갈래로 흩어지고 있습니다." "훗! 날 노리고 있군. 떨거지는 신경 쓸 거 없다. 그들은 대충 견제만 하고 저 철갑거선에 타고 있는 백호나한만을 노린다." 땅에서 싸우는 것과 배위에서 싸우는 것은 다르다. 땅에서는 서로 엄밀한 진형을 형성하여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싸움을 하지만 좁고 파도에 흔들리는 배위에서는 피아가 섞여 싸우는 난전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난전이 벌 어지면 결국 머릿수 싸움이었다. 그러나 적수군이 배로 난입하여 싸움이 벌 어졌지만 라혼과 잔폭광마, 지심은 3층 갑판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검 은 흑석들이 사방에서 그야말로 새까맣게 몰려왔다. "육삼 내려가서 도와라!" "옛!" 안절부절못하던 잔폭광마은 주군의 명이 떨어지지 그 즉시 난전이 벌어진 갑판에 떨어져 내려와 큼지막한 대부를 휘둘러 적 수군의 머리를 부쉈다. "이놈들! 이 몸이 잔폭광마 육삼이시다!" -퍽! 잔폭광마의 대부는 적 수군의 무기를 수수깡 부러트리듯 부수며 무위를 과 시했고 다소 밀리는듯하던 기세를 찾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렇게 잔폭광마 가 수십 명의 피를 뒤집어쓸 무렵이 되서야 좌우로 흩어졌던 투함들이 라혼 이 원하는 위치에 이르렀다. "지심, 너는 고학을 보호해라!" "주인?" -우워어어어어어~! 라혼은 창룡후를 터트리며 수백장 거리를 단숨에 날아 서해대수영을 이끄는 어조목이 타고 있는 배에 떨어져 내려 허리춤에서 협봉검을 빼어들고 황금 빛 검강(劍剛)으로 사방에서 몰려드는 서해대수영의 수군들의 허리를 양단 했다. "막아! 죽여!" 일검을 휘둘러 수십을 베어 넘긴 라혼은 혼이 빠진 채 소리를 고래고래 질 러대는 상대에게 달려들었고 그 누구도 라혼의 앞에 서려는 자가 없었다. 그러자 어조목은 바다로 몸을 던졌다. "이런!" 수인이 있는데 어인(魚人)이 없을까. 라혼은 바다로 몸을 던진 어조목이 거 대한 물고기로 화신하자 낭패한 심정으로 바다에 뛰어들었다. "클클클, 백호나한. 내가 잠시 네가 초극고수임을 잊었구나! 하지만 땅에서 아무리 고수라 하지만 물속에서까지 그럴까?" "그러게 지금까지 물속에서 싸워보리라곤 상상하지도 못했는데 말이지." 무력답수(無力踏水). 바로 물을 밟고 둥둥 떠 있던 라혼은 바다위에서 고개 만 빠끔히 내민 채 주절대는 어조목에게 검강을 쳐냈다. -촤아! 펑~! 라혼이 방출한 검강이 바닷물과 부딪히자 엄청난 높이의 수벽이 만들어지며 그 힘에 흑선 한척이 전복되어 버렸다. 그러나 정작 라혼이 느끼는 어조목 의 기운은 아직 그가 멀쩡하게 살아있음을 말해주었다. 라혼은 바다 속 깊 은 곳까지 천근추(千斤墜)를 시전해 빨려 들어가듯 잠겨들어 귀식대법(龜息 大法)으로 숨을 멈추고 어조목의 기운을 쫓아 심해로, 심해로 더욱 깊이 잠 겨들었다. "……." 그리고 라혼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어조목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는 천만근 업력이 가해지는 물속에서 빠르게 유영하며 라혼을 노렸고 라혼은 생소한 공간속에서 몸이 마음대로 부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조목은 점점 물에 적응하는 백호나한의 움직임에 내심 당황하여 주위 맴돌며 기회를 노 렸다. '몸이 내 힘을 제한하고 있다. 육신이란 껍질을 벗어버려야 하나?' 라혼은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 어조목의 움직임을 쫓았다. 그리고……. '생각은 천천히 정리하고 이놈부터 잡는다. 이야압!' 라혼은 힘으로 수압을 밀어내며 물속이란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빠르 게 짙은 황금빛 검강을 머금은 협봉검을 휘둘렀다. 어조목은 두 눈을 빤히 뜨고 자신의 목을 베어오는 황금빛을 바라보며 절규했다. '이럴 수가 억만근의 수압을 단지 힘으로…. 안돼!' -꾸릉~! 비교적 잔잔하던 바다가 크게 요동치며 큰 배들이 마치 종이배인 냥 파문의 중심 밖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얼마 후 수십길의 물기둥이 솟아오르며 누 군가 깊은 바다 속에서 빠져나왔다. "반역자 어조목의 목을 배었다!" -만세! 백호나한이 어조목의 목을 베었다! -백호무적~! -백호무적~! 내공의 실린 라혼의 목소리는 전장해역 전체를 진동시켰고 사방에서 압도적 인 전력차를 무시하고 무모하게 포위망을 형성하던 라혼의 장선을 호위하던 투함에서 자연스레 이에 호응했다. "반역자 어조목의 참수되었으니 지금 무기를 버리고 항복한다면 그간의 죄 는 불문에 붙이겠다. 만일 반항하는 자 있다면 참하리라!" 어조목의 잘린 목을 본 서해대수영 함대의 수군들은 크게 술렁였다. 그러나 아직도 병력이 서해대수영 쪽이 월등했다. "발사!" 그러나 라혼의 밑도 끝도 없는 명령에 투함에 설치된 천보노에서 철전이 발 사되었다. -텅! 터덩! -크악! 천보를 날아가 바위에 박히는 위력이 있다는 천보노의 철전은 둔탁한 소리 를 내며 흑선을 부쉈고 일부는 흑선에 엉거주춤 서있던 서해대수영 수군들 의 몸통을 관통했다. 그러자 거친 뱃사람이기도한 서해대수영의 수군들은 흉험한 살기를 드러내며 전의를 불태웠다. 그러나 라혼은 대기를 위압하고 피어(fear)를 드러내며 무겁게 중얼거렸다. "누구한테 이빨을 드러내는 거냐? 나는 이 바다의 주인이다. 그리고 너희들 의 주인이다. 거부한다면 죽여주마!" 홀로 중얼거리는 듯한 살기 진득한 목소리는 모든 이의 귀에 선명하게 박혔 다. 그리고 라혼은 마른침을 삼기는 검게 그을린 얼굴에 흉터와 수염이 가 득한 사내를 지그시 노려보며 물었다. "바다는 누구에 것인가?" "……!" 라혼은 그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입가에 미소를 띠며 다시 물었다. "바다의 남자에게 묻겠다. 나는 바다의 주인으로 합당한가?" "이런 니미럴 합당하오. 당신은 바다의 패자요. 하지만 그게 어쩠단 말이오 ? 당신이 바다의 패자라면 나는 바다에서 살아가는 바다의 사나이요." "바다의 패자가 바다 사나이를 원한다." "……!" 천패방(天覇邦)은 이 무서운 사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뭘 원하는지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그는 자신을 서해대수영을 원하고 있다 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적진 한가운데 홀로서서 오히려 자신들을 협박하 는 배포와 역량은 큰 두려움이었다. 또 실제로 자신을 노려볼 땐 간이 헐어 버릴 정도로 무서웠다. 어차피 주인 잃은 개신세가 되었고 어조목에게 지킬 의리 따위는 없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니미럴, 알았수다. 얘들아 우리는 앞으로 대백호대수영이다! 알 것냐?" 그것을 시작으로 서해대수영은 백호대수영에 흡수되었다. 라혼은 백호대함 을 1척과 투함 6척의 수군 3천 만으로 서해대수영 97척 중 34척을 수장시키 고 63척의 배를 나포해 백호대함 1척, 투함 6척, 돌격함 63척의 친위함대를 편성해 청해진으로 들어갔다. 북명곤붕(北溟鯤鵬) 북명(北溟)에 고기가 있는데, 그 이름은 곤(鯤)이다. 곤의 크기는 몇천 리 인지 모른다. 변해서 새가 되면 붕(鵬)이라고 하는데, 붕의 등은 몇천 리인 지 알지 못한다. 세차게 날면 그 날개가 마치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 이 새는 바다가 움직이면 곧 남명(南溟)으로 옮겨간다. 남명은 천지다. 붕 이 남명으로 갈 때는 물 3천 리를 치고, 바람을 타고 오르기를 9만 리나 하 여, 여섯 달을 난 뒤에 쉰다. 라혼은 백호대수영과 서해대수영을 합하여 대수영(大水營)만을 남겼다. 백 호는 서방을 지키는 신이고, 서해는 서쪽바다라는 뜻이니 천자로부터 모든 바다를 관장하는 해도대원수로 인정받았으니 서쪽을 의미하는 이름을 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라혼은 남상 청해진에서 바다의 패자 임을 선포하고 뱃머리를 인시드 대륙으로 향하여 인시드 남쪽해안과 동쪽해 안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들끓던 해적들을 전 대수영의 세력을 한꺼번에 동원해 토벌했다. 그리고 한 달 후 토금전장에서 마련한 상품들을 배에 실 어와 인시드 남주에 항구에 하역해 지난 3년간 막혔던 바닷길이 그 전보다 안전해 졌음을 증명했다. 라혼은 자신의 피어에도 굴복하지 않았던 천패방( 天覇邦)을 서해좌수사(西海左水使)에 임명하고 백호대함 1척을 배치하여 인 시드 남쪽바다와 동쪽바다 그리고 남상의 서쪽까지 포함한 해역을 맡겼다. 즉, 전 서해대수영의 수군들은 반란이전의 본래 임무로 복귀시켜 버린 것이 다. 그리고 스스로 바다의 패자임을 선언한 백호나한의 시선은 해남군도로 향해있었다. "비어있는 섬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오산이었군." 조정의 방침으로 남상엔 사람이 살지 않는다고 믿어왔었다. 그러나 대주원 과 타가선, 모석이 과거 대선제국의 황실이 남상을 지배할 때 건설된 마을 과 성 등을 정찰했는데 뜻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다행히 규모 가 큰 마을이 얼마 없어 라혼의 대군에 맞설만한 세력은 없었지만 오랫동안 대륙의 원주조정과 상관없이 살아온 백성들이라 언제 무슨 이유로 봉기를 할리 알 수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 라혼의 군사들은 정복자이자 침략자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군사들의 창검의 서슬 퍼런 위세에 숨죽이 고 있겠지만 마음속으로 승복하지 않은 그들을 어찌 다루냐에 따라 양상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주군, 이들을 그냥 두기엔 문제가 많습니다. 그들은 조정의 백성이 아니라 도(盜)의 무리입니다." 도(盜)의 무리란, 도둑을 뜻하지만 본래 나라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을 말했 다. 나라에 세금을 바치지 않고 어떠한 부역도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 이 스스로 원해서 그런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변경지역이어서 나라가 관 리를 포기하거나 오지에 있어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을 말했다. 나라에 죄를 지은 자들이 그들 틈에 숨거나 스스로 목숨은 스스로 챙겨야 하다 보니 거 칠고 배타적인 습성을 갖게 되는데 나라가 혼란해지만 그들의 수가 늘어 큰 골칫덩어리가 되기 일 수였다. 도의 무리들의 가장 큰 특징은 나라의 법밖 에 있다 보니 법을 가벼이 여긴다는 것이다. 특히 지배자가 백성을 다스리 는 관리를 특별 예우하는 법이나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데 법의 기강을 세 운다며 아무도 원하지 않는 처벌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봉기를 불사할 정도 로 반발했다. 그러나 그대로 두면 나라의 법안에 살고 있는 백성들과 다툼 이 있거나 하여 살인, 방화 등의 중죄를 저질러 크게 문제되었을 경우 백성 을 보호해야하는 의무가 있는 나라에서 법에 따라 처벌하려 할 것이지만 무 리속의 연대를 중시 여기는 도의 무리는 국법보다 죄인이 자신들의 일원이 라는 것을 더욱 중시에 끝까지 죄인을 보호한다. 그리고 그들이 존재하는 곳은 조정의 힘이 미약한 곳이니 그대로 골칫덩어리로 남는 것이다. "다음에 벌일 일은 대군이 필요 없이 함대에 속한 수군만으로 충분하다. 도 (盜)라고 해서 법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니 그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하고 영 역을 분명히 해라! 대주원과 타가선에게 마을이 몇 개가 있고 사람이 얼마 나 사는지 조사한 후 각 마을마다 우리에게 대항하지 않는다면 지금까지처 럼 알아서 살아가도록 한다는 약속을 해주면 그것으로 족하다." "하지만 조정의 권위를 무시하는 그들이니 그것마저 거부한다면 어찌합니까 ?" 라혼의 결론에 대주원이 우려 섞인 어투로 물었다. 그리고 그 대답은 고학 이 답했다. "그것은 대참장께서 재량을 가지고 하시면 됩니다. 단지 우리가 꼭 얻어야 할 땅이나 성은 강제로 점령하시고 그 밖의 지역은 그들의 재산과 영역을 인정해주면 됩니다. 어차피 남상대륙을 개간하는 것은 조정의 방침에 어근 나는 일이니 우리와 그들이 다를 바 없습니다. 다만 주군께 한 가지 주청할 것이 있습니다." "말하라!" "남례성에서 진토인 부족에게 그랬듯이 그들을 상대로 모병을 하는 겁니다. " 고학의 의견은 이러했다. 아무리 법이 없는 도의 무리라고 하지만 무리 내 에 많은 규칙들이 있었다. 그 대부분은 무리의 연대를 강조하거나 재산 소 유권에 관한 것들이었다. 재산의 소유권이 있다면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있기 마련이니 그들을 받아들이면 될 것이고 외부에 대한 동경을 가진 자도 있을 것이니 그들 또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주군의 위업은 남아의 웅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합니다. 천명중 단한 명이라도 주군의 군사가 된다면 그들이 갖는 효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높 습니다." "……." 한마디로 백호나한을 대영웅으로 만들자는 말이었다. 라혼은 고학의 의견에 턱을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청 해진 앞바다에서 관함식(觀艦式)을 열기로 하고 남상전역에서 사람들을 모 으기로 했다. 관함식은 함선들을 모아 놓고 그 위용(威容)을 검열하는 의식 으로 바다의 열병식이었다. 관함식 행사가 열리던 날. 남상전역에서 초대된 인사 중 3분에 1이 라혼에 게 충성을 맹세하는 뜻밖에 일이 벌어져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그 뒤로도 귀순을 청하는 세력들이 줄을 이어 라혼이 남상 태회진에 발을 디딘지 3개 월 만에 남상전역 태반을 장악하는 것에 성공했다. 이는 라혼이 그들을 인 정하는 것을 전제로 한 재산과 영역을 명확히 하며 군사까지 모집한다는 제 안을 하자 자신들이 어찌 다루어질까 불안해하던 사람들이 감복에 마지않았 고 서해대수영과 밀접한 관련이 있던 세력들은 자신들이 반역자로 다뤄지는 두려움이 해소되어 서해대수영에게 한 것과 같이 대수영에서 어떤 언급을 하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충성을 맹세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수인조정 에 대한 반감이 희박한 세력들이 줄을 이었다. 그러게 라혼은 5만호 인구 3 0만에 이르는 세력을 얻을 수 있었다. 남상은 과연 서해대수영의 어조목이 새로 나라를 여는 야망을 품을 만한 저력이 있었다. "신, 무주사마 양초지 아룁니다. 해도대원수의 저의가 무엇인지 무척 궁금 하기 짝이 없습니다." "무슨 말이오?" "충분한 힘이 있으면서도 남상의 반란을 토벌하는데 3년이나 걸렸다는 것은 생각해 볼일입니다. 조정에 반한 무리를 다시 거두고, 거주를 금지한 도적 무리를 백성으로 삼은 것은 명백한 반역행위, 지금 당장 그를 불러들여 시 시비비를 따져 물어야 합니다." "을주사마 마신건 아룁니다. 애초에 남상 서해대수영 반란을 토벌하는 일은 2년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 그것은 반적 웅랑들의 발호가 없었을때 이었으며 웅랑이 의백을 치자 그것을 견제하며 힘을 키우느라 1년을 소모했 다고 크게 탁할 일은 아닙니다. 또한 남상의 백성들이 스스로 조정에 귀순 하게 한 것은 상을 줄 일이지 벌을 줄 일이 아닙니다." "그럼, 사사로이 인시드와 분쟁을 한 것은 어찌 생각하시오?" "본관은 서해대수영을 설치하면서 서해도독에게 그에 대한 전권을 위임했었 던 것으로 아는데, 본관이 잘못알고 있었던 것이오? 대장군 라혼을 서해수 군통제사로 제수할때 반란토벌 이후 서해대수영이 하던 임무를 맡게 되게 된 것이 아니요." 남상 토벌이 성공했다는 장계가 정식으로 원주 천호궁에 올라오자 조정은 그것에 관해 갑론을박 설전이 벌어졌다. 그것은 3개월전 대장군 라혼의 혼 례식때 보인 함대의 위용과 그가 가진 10만 대군의 위세를 피부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지난 3년간 그런 정병이 길러지는 것을 감지 못했는지 허탈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각 세력마다 백호나한이 가진 힘에 대 해 분석하면 분석할수록 입이 떡 벌어질 지경이었다. 남례성에 웅크리고 있 는 23만으로 불어난 하남천원군, 그의 아내인 북지대장군 천상천화의 7만, 그리고 대수영의 10만이 바로 그의 수중에 있는 군사였다. 지역적으로도 북 지성, 남례성, 남상이 완전히 그의 영향력아래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 금 천원회의(天元會議)의 을주와 계주의 사마들이 전적으로 그를 지지하고 나서니 그것을 지켜보는 호황의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아직까지는 대장 군 라혼을 믿고 있었지만 그에게 집중된 힘은 호황을 불안하게 하기에 충분 했다. 하나 호영을 통해 해도대원수인 그의 다음목표가 해남군도의 해황가 이고 그 후 후려를 가시거리에 두고 후선을 압박한다고 하니 두고 볼 수밖 에 없었다. 하지만 북지성에 있는 그의 아내가 가진 병권 어떻게든 회수해 두고 싶었지만 그것도 여의치 못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북지성에서의 그녀 의 영향력은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만들 하시오. 공을 세운 장수를 치하해야 마땅하거늘 어찌 전장에 있는 장수가 한 일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수 있단 말이오? 짐은 10만 대군을 호령 하는 해도대원수의 지위해 맞게 대장군 라혼을 직급을 대원수로 제수할 것 이오. 또한 남상의 백성들 또한 그간의 죄를 용서하고 해도대원수로 하여금 남상에 도독부를 설치케 하여 그에게 도독의 임무를 겸하도록 하겠소." "하나 남상은 비워두는 것이 그간의 방침인데……?" "방침이란 언제는 바꿀 수 있는 것이오. 짐은 그 세 가지를 호황의 이름으 로 천원회의에 가부를 묻겠소." 당금 천하의 조정이란 바로 천원회의를 말했다. 이 천원회의에서는 중원십 일주의 십이진가와 오성사역의 도독, 절도사, 안찰사의 대표가 참석하여 천 하만사를 다루었는데 사실상 중외오성과 변방사역은 발언권이 약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성사역의 도독, 절도사, 안찰사는 바로 천원회의의 의결을 통 해 임명되기 때문이었다. 천자인 호황은 이 천원회의를 직접 주관하는 권한 이 있는 십이진가의 대표인 존재였다. 그럼으로 대장군까지는 호황이 직권 으로 임명하고 천원회의에 발언권을 가진 사마들이 거부하지 않으면 대부분 통과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대원수는 스스로 군부인 원수부를 열수 있는 권한이 있는 자리이고 천원회의에 의결권을 없으나 발언권이 생기는 것이 다. 그러나 남상의 도독이 되면 의결권을 갖게 되고, 남상의 내륙을 비워둔 다는 조정의 방침을 바꾸는 일은 그가 행한 일을 사후 승인하는 의미가 있 었다. 그러니 호황이 얼마나 그를 신임하는지 알 수 있게 하는 척도인 것이 다. 그리고 호황의 이름으로 천원회의에 가부를 물었으니 발언권만 가지고 있는 사마들은 본가에 연락하여 의결권이 있는 제(帝)들에게 가부(可否)를 물어야 했다. "호호호호, 호황이 백호나한의 힘을 과소평가했구나!"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한포포는 좀처럼 웃지 않는 어머니 묘호란(猫好丹)이 웃는 모습을 보며 되 물었다. "모르겠니? 호황이 천원회의에 가부를 물은 것 말이다." "그거야. 당연하잖아요. 사실상 남상을 지배하고, 직접부리는 대수영의 수 군만 10만인데다가 해도대원수로 사해를 통괄하는 직위를 가지고 있는데?" "너는 아직 정치를 모르는 구나 그들에게 있어 백호나한의 대수영의 10만 대군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간 우리 백수회의 힘으로 백 호나한이 벌이는 일들에 대해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애를 썼고 바다에 대해 선 큰 관심이 없었으니 서해수군은 그저 하남천원군에 속해 있다고 생각했 을 뿐이다. 그리고 하남천원군이 군사들 늘리는 것을 단순히 남례성 진토인 들에 대한 회유정책으로만 알고 있다가 단숨에 바다에서 적수가 없다는 서 해대수영을 무찌르는 것을 넘어 통째로 흡수할 정도로 막강함을 자랑하니 아무리 자기 사람이라고 해도 견제를 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자기에게 충 성한다는 자가 자신도 모르게 숨어서 힘을 키우니 더욱 의심스러울 테지… …." "하지만 호황의 행보는 라혼대가를 믿어 의심치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바로 그것이다. 전혀 의식하지 못하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자가 자신들과 같은 권리를 가지고 같은 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누가 좋아할 수 있겠니? 호 황은 그저 그렇게 말함으로써 백호나한에게 자신이 자기에게까지 힘을 기르 는 것을 숨겼어도 여전히 의심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신뢰한다고 표현한 것 에 불과하단다." "그렇군요. 진골십가들이 라혼대가가 그러한 권한을 가지는 데에 반대 입장 을 취할 것이니 부결되는 것이 당연 하겠어요." "하지만 호황은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지 못한 모양이구나." 한포포는 그제야 호황이 실수했음을 알았다. 호황이 천원회의에 가부를 물 은 그 사항은 모르긴 몰라도 모두 통과될 것이 뻔했다. 어머니의 말대로 라 혼대가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였다. 그 말은 특별한 적 대세력이 없다는 말이 되었다. 북지와 남례성, 그리고 남상을 차지했다고는 하나 북지성은 정립천하군이 있어 그들을 상대해야했고, 남례성의 하남천 원군은 진토인들이었다. 남상은 5만여호 인구 30만이 드넓은 황무지에 흩어 져 있으니 어떠한 기반이 되기에 약했다. 라혼대가의 10만은 그저 10만일뿐 인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대수영의 10만 대군은 공중에 떠있는 반드시 누 군가의 도움이 있어야하는 군대였다. 그러니 굳이 적대할 이유가 없었다. 홀로는 대군을 유지할 수 없고 누군가와 필히 손을 잡아야 한다면 호황의 제안에 반대함으로써 동맹자의 가능성을 없애는 우(愚)를 범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사실이 다르더라도 백수회의 입김이 닿아있는 관리들에게 그 런 주장을 펴게 하면 라혼대가가 대원수가 되고, 남상대도독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는 것이다. "그럼 백수회는 설화의 문제에 대해선 입장정리가 끝난 건가요?" "그렇다. 백수회는 지금부터 전력을 다해 천상천화를 돕기로 했단다. 태상 회주께서 천상천화를 북지절도사가 되도록 허여 천원회의에 의결권을 가지 게 할 계획이라더구나. 그래서 말인데 포아야." "예?" "천상천화가 어려운 처지에 빠지면 백호나한이 움직여줄까?" "그거야 두말하면 입 아픈 이야기죠. 그런데 무슨 일을 꾸미시는 거예요?" "아니 뭘 꾸민다기보다 정립천하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그렇단다. 지난 3년간 척박하기 그지없는 북지성에 중주의 곡식이 들어오지 않으니 대군을 유지하기 힘든데 그런 그들이 태회진의 실체를 보았으니 군침을 흘릴 만도 하지 않겠니? 게다가 천상천화가 북지성내에 영향력을 확장하는데 열중이니 가뜩이나 어려운 정립천하군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하지 장동을 얻고 을주 를 차지했어야 하는데 천상천화가 목구멍의 가시 같이 거치적거려 시기를 놓친 데다 흑막에서 웅랑교가 거병해 그것도 견제를 해야 하는지라 이러지 도 저러지도 못하고 3년을 그냥 보냈으니……." 설화는 성녀로 추앙을 받고 그녀를 세력권 안에 백성들은 풍족한데 정립천 하군 밑의 백성들은 굶주리니 시간이 지나면 자멸할 것이 뻔했다. 그러니 정립천하군이 북지성에서 천상천화의 영향력을 일소하고 그 여세를 몰아 을 주로 대군을 들이미는 것에 대해 심각한 고려를 하기에 충분한 상황으로 흐 르고 있었다. "상아!" "아버님!" 장상은 부친인 장항상(獐杭商)이 태회진으로 자신을 찾아오자 크게 기뻐하 며 부친을 맞았다. 장상은 라혼에게 의백최가를 견제하는 임무를 띤 수군제 독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원주조정으로부터 직위를 인정받지는 못 했지만 대수영에서 장상의 손이 가지 않은 곳이 없음으로 그의 영향력은 상 당했다. "상아, 지금 보아하니 네가 뜻을 이룬 듯하구나 이 아비는 네가 자랑스럽구 나." "미약하나마 원한 것을 아주 조금 얻었을 뿐입니다. 헌데 어인 일로 태회진 까지 발걸음을 하신 겁니까?" "이 애비는 장사꾼이다. 돈 냄새가 나는 곳을 찾아다니는 것이 바로 이 애 비의 일이지." 장항상은 본래 중소규모의 선단을 꾸려 인시드와 무역으로 큰돈을 번 상인 이었다. 그러나 남상 서해대수영의 반란으로 장사길이 막히자 손을 놓고 있 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최근 남상의 반란이 토벌되고 덤으로 들끓던 인 시드 해적까지 일소되었다는 소식에 새로이 상선대를 꾸리는 중 백호대수영 에서 지분을 어떻게 배분할지 알 수가 없어 서해우수사(西海右水使)인 아들 장상에게 그에 대한 것을 묻기 위해 태회진을 찾은 것이다. "아버님, 그것에 대한 모든 권한은 토금전장이 가지고 있습니다. 소문으로 나마 들으셨겠지만 대수영을 운영하는 자금의 거의 전부가 토금전장의 창고 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인시드남주무역의 지분은 거의 토금전장에서 처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흐음, 역시 그렇구나." "아버님 토금전장의 대상계에 참여하시지 않으신 겁니까?" "그렇다. 토금전장이 벌이는 일들이 도무지 신뢰가 가지 않아 그들의 요구 를 거부했는데 그것이 이렇게 후회가 될 줄이야." "그럼 지금이라도 참여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지금 말이냐?" "그렇습니다. 토금전장의 금대인이 인시드에도 분장을 만들고 무역계를 신 설한다고 하니 거기에 투자를 하십시오. 제가 금대인께 미리 연통을 넣어두 겠습니다." "알았다. 그보다 정립천하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들었는데 거기에 대 해 아는 것이 있느냐?" 장상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정립천하군이 먼저 도발해오면 한 달이 가기 전에 웅랑교와 신경전을 벌이 는 것이 가장 큰일이 될 겁니다." 북명곤붕(北溟鯤鵬) 백호대함 3척, 투함 36척, 흑선을 포함한 돌격함 154척, 그리고 300여척 규 모의 쾌속선으로 구성된 대함대가 남해로 들어서서 남례성 남쪽끝에 있는 극남성(極南城)에 집결했다. 대수영의 목표는 해남군도였지만 해남군도가 특별히 조정에 반하거나 어떠한 적대행위를 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해남군 도의 세력을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것 또한 아니었다. 그간 해남군도의 세 력을 조사한 바로는 해황가가 종주(宗主) 격으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는 있었지만 해남군도 패권을 차지했다고는 말할 수는 없었다. 각 섬마다 산호, 향료, 희귀한 약초 등의 특산물이 나고 적게는 다섯 가구, 크게는 천 여 가구로 되어있는 섬들로 이루어진 해남군도는 사실상 독립된 지역이나 다름없었다. 해남군도는 동영에 속하여 동영대도독이 책임을 맡고 있는 곳 이지만 해남군도 최대해상세력인 해황가가 동영대도독에게 통치권을 위임받 아 다스리는 형태지만 그것이 다였다. 해남에는 해황가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고 심지어는 해황가와 해남군도의 패권을 다투는 세력에 해황가와 한 하늘을 이고 살아가는 것을 거부하는 세력조차 셀 수 없이 많을 정도였다. 섬사람들은 대게 외부인들에게 배타적인 성향을 띄고, 지도자를 신성시 하 는 경향이 짙었다. 즉, 혈연에 의한 소속감 보다 출신 섬에 따라 입장을 달 리하는데 외가와도 섬이 다르면 적대시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서로 분쟁이 붙어 싸우다 싸움을 멈출 때 서로 상대편에 여자를 주어 화해를 했는데 이 여자는 지도자 가문에 속한 여자이고 그 여자가 상대편 섬에서 아들을 낳으 면 이쪽과 혈연이 있는 셈이지만 다시 분쟁이 일어나면 당연히 외손자이지 만 또한 적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작은 섬의 지도자라도 섬을 상징하기 때 문에 함부로 머리를 숙이지 않아 수십호가 사는 섬의 지도자와 수백호가 사 는 섬의 지도자는 동급항렬에 있기 때문에 해황가의 주인인 해황은 아무리 작은 섬의 지도자라도 직접 영접을 해야 했다. 그러나 섬의 지도자의 수는 해남군도의 섬의 수만큼이나 되었다. 그리고 해남군도의 사람들은 홀로 작 은 조각배에 몸을 실고 한 달이나 항해를 하여 남례성이나 동영의 대도(大 島)의 시장에 나가 볼일을 보고 다시 한 달을 항해하여 자기 섬으로 돌아올 정도로 바다를 포근한 어머니 품으로 여기는 자들이었다. 또한 이들은 바 다의 풍요로움을 알고 바다 속의 보물들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사는 섬만큼이나 옹졸하지만 또한 끝없이 드넓은 바다만큼 마음이 넓기도 했다. 청명한 하늘, 상쾌한 바람, 라혼은 극남성주변의 백사장에서 대수영의 군사 들을 간단한 훈련을 시키고 물놀이를 즐기게 했다. 해남군도엔 해황가를 포 함 손꼽히는 세력에 해도대원수로써 후려와 분쟁할 때 움직이지 말라는 내 용에 요지를 담은 친서를 보내고 또한 해남군도에 대수영의 거점을 확보하 는 것으로 해남군도의 문제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그리고 후려 앞바다에서 후선수군을 견제하기로 했다. 현재 후선군을 상대하는 곳은 갑주가 유일했 다. 후선과 면한 경주의 원제가는 원주조정에서 대군을 모아주기만을 기다 리며 움직이지 않고 있었고, 임주는 계제가가 유명무실 해지고 학가가 전면 에 서서 후선을 두둔하는 입장을 취하는 지라 라혼 대수영인 후려의 바다를 장악한다고 하여도 큰 의미가 없었다. 단지 주공(主攻)이 결정되고 전략이 세워지면 후방교란을 위해 대수영의 수만 군사를 후려에 상륙시킬 수는 있 지만 그전까지는 후려연안을 압박하여 후선이 동해에 투입한 전력 일부가 남해로 오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럼 후선이 선택할 수 있는 패는 그간 돈독 한 우의를 다지던 해남군도의 해황가에게 아쉬운 소릴 하는 것뿐이었다. 그 리고 후려 강무세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던 동영에서 무슨 이유인지는 후선에게 별다른 도움을 주고 있지 않고 있었다. 라혼이 판단하기에 동영오 가는 동영의 패권을 두고 서로 대립하는 입장이라 쉽사리 외부로 전력을 돌 리지는 못하리라 판단했다. 그래서 그쪽에도 해도대원수의 이름으로 은밀히 친서를 보내 그 답을 기다리느라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돌아가는 사정은 복잡했지만 라혼의 입장은 단순명료했다. 바다에서의 대수 영의 영향력과 입지를 확고히 하는 것. 그것이 다였다. 해황가가 대수영을 인정하면서 고개를 숙이며 들어오고, 동영의 다섯 가문 또한 대수영을 인정 하면 족했다. 다음은 조정이 준비가 끝나면 그 때가서 움직이면 되었다. 그 러니 지금은 그저 기다리는 것이 최상의 전략인 것이다. "두목, 이제 좀 나아진 겁니까?" "내가 언제? 뭘?" "그게 동요병 때문에 생강차를 입에 달고 살았잖습니까?" 동요병(動搖病). 바로 멀미를 말했다. 잔폭광마는 예전에 마적두목 노릇할 때 부하였던 구대가 아는 체 다가와 뱃멀미에 골골대던 자신에 대해 언급하 자 안 그래도 한 인상하던 잔폭광마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시끄럽다. 그 얘긴 그만하고 술이나 가져와!" 구대는 요새 무서운 백호나한 주군 때문에 얌전해진 두목이었지만 한 성질 하던 두목이 3년 새 바뀔 리 없다는 생각을 하며 감춰 두었던 남례성의 과 일로 담근 달짝지근하지만 독한 술을 냉큼 내놓았다. 잔폭광마는 지난 한 달간 술은 구경도 못한지라 단숨에 반이나 비워버렸다. "크어, 좋다! 더없냐?" "내가 애들을 시켜 방금 드신 것보다 맛은 떨어지지만 술을 준비하라 했으 니 걱정하지 마시고 마음껏 드십시오." "나한텐 너밖에 없다. 크크크크크크." "에이구~! 참 왜 이러십니까? 형수님이 아시면 섭섭해 하실 말을……." "형수~?" 잔폭광마는 구대의 말에 묘한 그림이 그려지는 것을 느끼고 지긋이 노려보 았다. 그러나 구대는 그것을 쑥스러워 그런 다 착각하고 말을 이었다. "뭘, 전 백호대수영의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을 그 진토인 미녀와 멀 미를 핑계로 한방에서……. 쿠에에엑~!" "이자식이 날 뭘로 보고!" "두, 두목! 남녀 간의 일이란 하늘도 알 수 없는 것이니 그렇게 노여워 마 십시오. 주군이야. 오직 주모만 바라보는 분이신데 말만 잘하면……." "넌 또 뭐야!" -퍽! "꾸엑!" 폭바방 출신들의 우의를 돈독하게 하기위한 자리는 잔폭광마의 난동으로 끝 을 맺었다. 그리고 그 일은 문제를 일으키면 일벌백계(一罰百戒)라는 라혼 의 경고를 어긴 일이라 잔폭광마와 폭마방도들은 고우와 백호영들에게 잡혀 라혼의 앞에 무릎 꿇려지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라혼의 평결은 간단했 다. "묻어라!" 폭마방도들은 주군의 말에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남례성에서 수만에 달하는 여자와 아이들이 생매장 당하는 것을 눈앞에서 직접 똑똑히 때문이 었다. 잔폭광마는 주군의 그 명에 기겁하며 애걸복걸했다. "주군, 죽이시려거든 저만 죽이세요. 애들을 죄가 없어요. 어떻게 전후사정 도 살피시지 않으시고 그런 무지막지한 벌을 줄 수 있습니까?" "예외는 없다. 난동이 일으켜 내 명을 어겼다는 것이 중요하지 난동이 일어 난 이유에 대해서는 관심 없다." "주군, 저는 단매에 쳐 죽여도 할 말이 없지만 애들은 아닙니다. 제고를… …." -퍽! "……." 라혼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잔폭광마를 쳐서 기절 시킨 뒤 그와 전 폭마방도들을 모조리 묻어버렸다. "안돼~~~!" "두목!" "두목이 정신 차리셨어." "두목 정신이 드십니까?" "구, 구대. 복코, 독두? 여기가 어디냐? 지옥이냐? 천국이냐?" 정신을 차린 잔폭광마는 몸을 움직일 수 없자 자신이 죽어 저승에 왔다고 생각했다. 사위는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사방에서 폭마방의 원혼들 이 돌아다니니……. 가 아니었다. "육 소령, 정신이 드오?" "고정령?" 고우였다. 잔폭광마는 고우를 올려다보며 지금 자신의 처지를 비로소 이식 할 수 있었다. 자신과 문제를 일으킨 폭마방 식구들이 목만 내놓은 채 백사 장 모래 속에 묻혀있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잔폭광마는 살아있음에 안도하 고 고우에게 물었다. "이게 어찌된 일이오?" "주군이 육 소령 그대에게 여기서 바다를 감시하라는 명을 내리셨소. 만약 자리를 떠나면 탈영의 죄를 묻는 다고 하였소." "어,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오?" "그건 나도 알 수가 없소. 그보다 사실이오?" "뭐가 말이오?" "주군의 일보시위 지심과 연인관계라고 하는 것 말이오?" "어떤 개호로잡노무시끼가 그런 개호로잡소리를 한거야!" 그러나 고우의 다음 말은 잔폭광마를 절규하게 했다. "주군이 육소령이 그리 원한다면 알아서 해보라 허락이 떨어졌으니 잘 된거 아니오?" "꾸에에에엑! 아니야! 아니라구! 정말이야!" 호리호리한 몸매에 선이 가는 얼굴, 커다란 눈동자의 이지적인 미인 바로 지심이었다. 여자가 아닌 지심의 정체를 재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라 혼은 지심이 여자든 여자가 아니든 관심 없었고 지심과 가까이하는 사람들 도 라혼의 영향을 받아 지심을 이상한 시선으로 보진 않았다. 그리고 지심 이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 중에 입이 가볍거나 뒤에서 수군거 릴 만한 사람이 없어, 지심 여자가 아니라는 소문이 돌기는 했지만 그것을 믿는 사람이 얼마 없었다. 단순히 '여장부'여서 그런 말을 한다는 식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 지심이 수년간 보이지 않다 다시 나타나 다시 정식으로 라혼의 일보시위가 되자 항상 같이 부대끼는 사람이 라혼과 잔폭 광마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둘 다 멀미가 심해 같은 방, 침상에서 자리보 전하고 있었고 절세미인이라 할 수 있는 지심에게 관심을 보이는 수군들이 그 재미있는 이야기꺼리를 그냥 둘리 없었다. 소문이 커지고, 살이 붙으며 잔폭광마는 주군에 대한 충성심에 주군의 여자(?)인 지심을 연모하면서도 부정하고, 결국 지난 며칠간 드디어 일(?)을 벌여 괴로워한다는 참으로 그 럴듯한 이야기가 회자되었다. 잔폭광마로써는 참으로 환장할 일이 아닐 수 없었지만 대수영의 모든 군사들은 그것을 기정사실로 알고 있었으니……. 거기다 한술 더 떠 주군의 허락(?) 마저 떨어져 잔폭광마가 옛 부하들이 산 채로 묻힐 것이라 지레짐작하거 그들을 위해한 애걸이 목숨을 걸고 지심을 사랑했다 고백한 것으로 와전이 되어 진짜 사나이라 칭송되기까지 했다. 그렇게 아니라며 절규하는 잔폭광마에게 소문에 또 다른 주인공이 다가왔다 . 잔폭광마는 지심을 발견하자 더욱 악을 써댔다. "야! 이 자식아! 너 똑바로 처신하지 못해! 내가 왜 너랑 엮여져야 하냐고! 이 개호로잡……." -퍽! "컥!" 그러나 지심의 발차기에 잔폭광마의 고개가 꺾이고 얼굴을 정통으로 차여 정신없는 그의 입에 대나무 대롱을 물리고 머리마저 묻어버렸다. "주인께 방해되니 시끄럽게 굴지 마라. 그리고 나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 그건 너도 잘 알지 않느냐?" "???!!!" 지심의 날린 한마디 결정타에 잔폭광마는 소리 없는 절규를 했고, 심심한 전 폭마방도들은 '과연'을 연발하며 새로운 비밀과 지심의 발언을 나름대로 분석, 왜곡하며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러한 모든 이야기는 잔 폭광마의 귀를 간질이며 고문했다. '아니야! 아리란 말이다 이것들아! 크아아아아아~!' 그렇게 잔폭광마는 소리 없이 미쳐갔다. 괴성을 지르는 잔폭광마가 처리되자 라혼은 임시로 지은 원두막에서 대수영 의 수뇌들과 회의를 계속했다. "이번에 해황가가 보내온 답장의 내용은 그들의 의도를 여실히 보여주는 겁 니다." "무슨 말이오?" "우리의 요구는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해남군도가 조정에 반하지 않는다는 맹세를 하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애매모호한 이유들 들어 확답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조정에 대한 반역에 뜻이 있다는 증거 입니다." 드리어 라혼이 기다리던 답서가 도착했다. 그러나 그 답서의 내용 어디에도 해남군도가 처한 상황만이 나열되어 있을 뿐 입장을 분명히 하는 내용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입장을 분명히 하라는 친서를 보내보자는 쪽과 대수영 의 위세를 과시하는 무력시위를 하자는 쪽이 의견이 나뉘었다. 양쪽 다 경 우의 차이는 있으나 해남군도와 분쟁을 바라지는 않았다. "해남군도 사람은 자존심이 강해 그런 수를 쓰면 당장 분쟁이 발생 할 것이 오." "주군이 바다의 패지임을 자처한 이상 그만한 영향을 행사 못한데서야 말이 되지 않소." 작도인, 상초는 무력시위를, 모석, 고학은 다시 한 번 더 친서를 보내보자 는 의견을 피력했다. 하지만 결정권자는 그들이 아니었다. "해남군도사람이 자존심이 세다지만 나도 그에 못지않지. 내일 심천도로 갈 것이다. 그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해라!" "주군, 그럼 그들을 자극하게 될 텐데요?" "그들이 어찌 나오던 상관없지 대수영의 힘은 그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 을 만큼은 되니까. 그리고 나는 아직 후선수군과 드잡이질벌일 생각이 없다 ." 심천도(深川島)는 남례 극남성과 가장가까이에 있는 섬으로 전체 해남군도 를 통틀어 중간정도 크기의 섬이었다. 주민은 약 5백가구 3천여명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섬은 해황가의 영향력아래에 있는 중요한 섬이기도 했다 . 한 달 후, 라혼은 작도인으로 하여금 대수영은 심천도를 점령하게 했다. 그 리고 해황가에 심천도를 대수영의 요새로 사용한다는 통보를 하고 군사 1만 주둔시켰다. 작도인은 주위작은 섬들을 대수영에 복속시키고 해남군도 내 에 대수영의 영향력을 확대시키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라혼의 대수영 함대는 현재 후선수군이 장악하고 있는 남례성 동남쪽 끝의 남상 소동도 정 도 크기의 큰 섬 은석도(銀石島)를 목표로 남례성 남쪽 연안을 따라 동진시 켰다. 북명곤붕(北溟鯤鵬) 어느새 대륙은 가을이 되었다. 산천초목(山川草木)은 울긋불긋 단풍에 물들 기 시작하고 대륙은 슬슬 가을추수를 시작하고 있었다. 이맘때가 3년 전부 터 조정의 세곡을 대신 걷는 토금전장이 바빠지는 시기이며 또한 흑막 웅랑 교와의 밀무역과 후선과 밀무역도 이시기가 가장 바쁜 시기였다. 그리고 그 간 막혀있던 인시드 남주 무역 항로의 뱃길이 열리면서 서경과 동경에 인시 드로 가장 먼저 떠났던 상선들이 접안하자 전에 없는 물건을 구하려는 상인 들로 북적였다. 대부분 토금전장에 소속된 상선들이라 천하상계에 토금전장 의 영향력은 더욱 확대되었다. 전구(傳球)와 전환(傳環)으로 원주 상경 황 진성에 새로 마련한 토금전장의 대본장에서 천하각처의 물동량을 한꺼번에 관리하여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상단의 운영은 일사분란하기 이를 데 없었 다. 산학(算學)에 특출한 재능이 있는 인재를 한곳에 모아 토금전장이 벌이 는 모든 일을 한곳에서 관리하니 모든 것이 체계적이고 유기적으로 한꺼번 에 움직였다. 게다가 연일 승전보를 원주로 보내는 백호나한의 대수영이 바 로 토금전장의 주인이 지원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을 금대인이 천하를 거래하는 상인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금대인, 내 선금을 걸을 테니 내게 물건을 주시오." "우리는 값을 두 배로 쳐주겠소." 토금전장이 서경에 물건을 내리지 않고 대하를 물길을 따라 곧바로 원주로 온다는 소식에 천하각처의 상인들이 원주 상경 황진성으로 몰려들었다. 원 래 이러한 상인들은 중경의 토금전장에서 처리하지만 금대인과 직접만나 해 결하기 이야기하기 위해 상인들이 상경 대본장으로 몰려들었다. 토금전장이 원주 가져오는 것은 양탄자, 유리, 보석 따위의 사치품이었지만 천하각처 의 전란이 무색할 정도로 뒤숭숭한 지금 그런 것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 니 사람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어째 거나 토금전장이 위험을 무릅쓰고 대하의 물길로 그것들을 원주까지 가져오는 이유는 바로 라혼이 드래곤 드 라오디프의 레어에서 얻은 보석들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귀림의 드워프들 의 손을 거친 보석들은 상당한 값어치를 하면서도 정작 처리하기가 곤란했 다. 황금은 그대로 사용할 수 있었지만 보석은 황금의 몇 배의 가치를 하니 쉽사리 취급할 수 가 없었다. 장사를 하기에 따라 가격이 수배에서 수십 배까지 널을 뛰니 손해를 보지 않으려면 상당히 조심해야했다. 그래서 생각 해 낸 방법이 인시드와 칸 대륙에 보석을 파는 것이었다. "물건은 충분하다하니 너무 조급해들 할 필요는 없소. 양탄자나 유리 등은 많은 물량을 가져오지는 못했으나 보석세공품은 상당하다하니 여러분모두에 게 넉넉하게 돌아갈 겁니다." 토귀는 자신을 찾아오는 상인들을 그렇게 이야기하며 돌려보내고 모든 보석 상들에게 따로 은밀히 사람을 보내 필요한 양만큼 챙겨주겠다는 밀약을 나 누었다. 그리고 호황가와 십제가의 부인들의 몫을 따로 준비하는 등 토금전 장의 나름대로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휴우~! 정신없군." "금대인, 올해엔 적자폭이 꽤 줄어들었습니다. 인시드 남주무역이 활성화되 고 북주와 무역도 어느 정도 지분을 갖게 되어 내년쯤엔 흑자로 돌아설 가 능성이 큽니다." "그렇겠지. 이제 대략의 자금이 한꺼번에 소요되는 일이 없으니까." 태회진에서 철장, 가옥, 성채, 선거, 백호대함 건조 등 입에서 '으헉!'소리 가 절로 날만큼 어마어마한 자금이 한꺼번에 투입되니 매년 어마어마한 적 자가 발생했다. 거기다 대상계를 자리 잡게 하기위해 투입된 자금, 운송망 을 만드는데도 엄청난 자금이 소요되어 지금 토금전장의 금고는 거의 비어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황금으로 2천만냥 분의 보석이 세공된 상태 들어와 있고, 대수영이 인시드 무역로의 지분을 토금전장에 맞긴 덕에 많은 무역 상인들이 자금을 맡겨와 다소 숨통이 트이는 형국이었다. 토귀는 그 자금으 로 관으로 부터 수조권을 얻어내기 위해 미리 세금을 납부하고 세곡을 거둬 드리고 있었다. 사실 라혼의 에텔 스페이스에게 어마어마한 분량의 곡식이 쌓여있었지만 라혼은 그것을 풀 생각이 없었다. 황금보다 군량이 더욱 중요 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한꺼번에 많은 자금이 투입되는 일은 이제 없었으 며 태회진의 철장에서 철기들이 쏟아져 나오고, 남상에서 만들어진 석밀이 또 다른 수입원이 되어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생산이 시작된다고 하니 내년 부터 본격적으로 그간 투자된 자금들이 회수될 것이었다. "그보다 금대인이 만들라 해서 만들었는데 목우유마 말입니다." "목우유마는 앞으로 요긴하게 쓰일 것이야. 아직은 껍데기만 만들지만 곧 동력기관도 만들 수 있을 것이네 아 그리고 이번에 배가 들어오면 그것들을 남상으로 옮길 예정이야 그곳에서 완성하여 본격적으로 사탕수수 농장을 개간하는데 사용될 것이라네." "그렇습니까?" "아직은 우리가 쓰기에도 턱없이 부족하니 그렇지만 앞으론 우리 토금전장 에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 줄 물건이니 공방의 숙련공이 많을수록 좋아!" "알겠습니다." 토귀는 대본장의 대총관 일을 맡고 있는 골의찬(骨意贊)이 나가자 벽에 걸 려있는 천하전도를 바라보았다. 이제토금전장의 분장은 동영을 제외한 천하 전역에 산재했다. 이제 곧 인시드 남북으로 토금전장의 분장을 만드는 작업 이 완성되면 바야흐로 진정한 천하대상이었다. "올해는 부공촌에서 철기들이 본격적으로 생산되어 중주와 흑막에 팔려나간 이익과 태회진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둬들인 것이 넉넉해 새로 군사를 모으 고도 자금의 여유가 생겼습니다." "휴우~! 그거 다행이다. 이제 여인천궁은 알거지나 다름없었는데……." 모원의 가을에 세금을 걷는 작업을 마무리하고 북지대장군인 천상천화에게 하는 올해 거둬드린 세수 보고를 들은 여인천궁의 금당주 하화리가 보란 듯 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러나 토금전장의 금대인과 밀약으로 지금 서경과 원주에 들어오는 인시드의 물건들에 우선권이 있으니 여인천궁은 아쉬울 것이 없었다. 그간 태회진 사람들을 먹이고 입힌 자금은 거의 여인천궁의 창고를 털어 마련한 것이었다. 라혼은 여인천궁이 투자한 것을 생각하여 태 회진의 상권을 여인천궁이 맡도록 조치했다. 사실 그러한 조치가 없어도 태 회진은 여인천궁이 투자해 만든 것이나 다름없으니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 지만 토금전장과 관개를 돈독히 하는 것이 몇 배는 이익인 터라 더 무리한 요구는 하지는 않았다. "뭐가요. 이 태회진이 여인천궁의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건 당연하죠! 호호호호호호……." 엄살을 떨던 하화리는 설화의 말에 교소를 터트리며 웃어넘겼다. 여인천궁 인 태회진에서 운영하는 것 중 앞으로 가장 짭짤한 재미를 보게 할 만한 것 중 하나가 바로 군복을 만드는 바느질 공장이었다. 흑막에서 들려온 가죽 과 철장에서 만들어진 철갑을 바느질 하여 갑주를 만들어 냈는데 지금까진 전량 백호대수영과 북지군에 지급되었다. 그러던 것이 봄에 있었던 상공과 설화의 혼례식때 을주에서 보내온 축하객에게 철제무기와 갑옷을 대량으로 판매하기로 이미 계약을 마친 상태였다.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 온 축하객들 도 질 좋은 철제무기를 선보였으니 곧 토금전장을 통해 주문이 들어올 것이 다. 그리고 아직 생산량에 한계 때문에 을주에 물건을 대는 것도 빠듯하지 만 태회진의 많은 여자들이 이일에 매달리고 있으니 그들의 손이 빨라지면 정식으로 토금전장을 통해 갑옷을 팔 수 있을 것이다. "그보다 모군사, 정립천하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데 그것에 대한 대비는 어찌되어가고 있습니까?" "천녀, 우리 북지군에 영향력이 미치는 곳에서 새로이 3만을 모병을 지금 조련이 한참입니다. 한 달 후 그들을 각 거점에 배치하면 병력을 운용하는 데 다소 여유가 생길 겁니다. 다만 천녀가 걱정하는 그대로 정립천하군이 도발할 가능성이 있어 감시를 늦추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 곧 도발이 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정립천하군은 문제가 되지 않아요. 문제는 웅랑교예요." "천녀의 말씀은……?" "정립천하군이 우릴 공격하면 그 뒤를 웅랑교가 칠거란 뜻이죠." "하지만 웅랑교의 병력은 대부분 의백성에 있지 않습니까?" 모원의 그 말은 메이가 받았다. "서방님, 흑막의 기병들의 이동속도는 타에 추종을 불허합니다. 보름에서 2 0일 정도면 수만 대군을 대종도 입구에 집결 시킬 수 있어요. 그러니까 웅 랑교가 북지성의 움직임 파악하고 곧바로 움직인다면 대략 한 달 보름정도 소요될 거예요." 모원은 설화의 언급과 메이의 설명에 자신이 웅랑교의 움직임에 너무 소홀 히 했음을 인정하고 토금전장 흑막대총관 석은추에게 다시 한 번 웅랑교의 움직임을 알아보라 부탁하고 을주 마제에게 태회진의 대군이 움직일 수 있 는 길과 원군을 청하는 사자를 보내기로 했다. "부인, 내가 중요한 것을 노칠 뻔 했구려 고맙소." "무슨 말씀이세요. 남편이 미처 챙기지 못한 것을 아내가 대신하는 건……. 욱!" "부인!" 모원은 메이가 갑자기 구토를 하려하지 깜짝 놀라 주모인 설화에게 예의가 아님에도 메이에게 달려가 부축하며 등을 두드려 주었다. 진토인 출신 군사 들이 생전처음 겨울이라는 계절 지낼 때 적지 않은 수의 군사들이 몸이 약 해져 다시 남례성으로 보내진 적이 있었다. 모원은 그것을 떠올리며 걱정스 런 표정을 지으며 메이를 바라보았으나 메이의 구토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설화는 그런 메이의 증상에 의학에 조예가 깊은 흑산자를 불러 메이의 상 태를 진찰하게 했다. "으음!" "……." "늦었지?" "확실히 늦은 편이지." 진찰은 흑산자가 아닌 흑산자를 따라온 천독지존 독신이 했다. 진토인들이 북지성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해 그 체질을 개선하기위한 방법을 모색하던 주름 가득한 검은 피부에 백발의 왜소한 체구를 가진 독신이 늦었다고 하고 흑산자가 동조하자 모원은 안색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모원은 메에가 없는 세상은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는 강단이 있었으며 현명하고 지혜로웠다. 메이는 모원에게 절반 아니 그 이상의 존재였다. "축하하네." "아닙니다. 살릴 수…… 에?" "혼인한지 3년 만이니 많이 늦은 편이 아닌가? 메이가 아기를 가졌네. 그것 도 쌍둥이야!" "……?" "쌍둥이? 그것도 알 수 있나?" "날 뭘 로 보는 거야? 나는 의원이야! 동네가 동네이니 독에 대해 공부가 깊어 독신이라 불리는 것이지 나는 본래 의원이라고!" "사람하고는 누가 뭐랬나?" 흑산자는 왜소한 체구의 독신이 쌍심지를 켜고 따지자 슬쩍 물러나며 다시 물었다. "그러데 어떻게 쌍둥이인 것을 알아냈나?" "심장소리. 메이의 심장소리 외에 미약한 심장소리가 2개더구먼. 그리고 하 나는 사내고 하나는 계집일세." "그건 또 어찌 알았누." "강시 같은 쓸데없는 것만 만드느라 죽은 시체만 헤집고 있으니 생명의 오 묘함을 알 턱이 있나." "됐네. 임산부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구먼." 모원은 입을 떡 벌리고 혼이 빠져 나간 듯 멍하게 서있다가 이내 이성이 독 신이란 괴팍한 노인의 말뜻이 해석되어 메이의 손을 잡고 고맙다는 말을 연 발했다. "부인, 고맙소. 살아줘서 고맙소. 내 분신을 가졌다니 고맙소." "서방님." 메이는 손으로 부터 전해오는 따스한 모원의 체온과 다소 연약해 보이는 모 원의 얼굴에 자신만 바라보는 눈빛에 감동하며 세상에서 가장아름다운 미소 라는 어머니의 미소를 지었다. "어머나! 부러워라! 나이가 가장 어린 메이가 벌써 엄마가 되네." "축하해 메이야! 모군사 축하해요!" 설화는 아기를 가진 메이와 모원부부를 축하하며 내심 부럽다는 생각을 했 다. 그리고 설화는 천녀궁내에 메이의 침소를 새로 꾸미고 남녀쌍둥이라는 독신의 말에 두 아기가 쓸 물건을 준비하는 등 부산을 떨었다. 그리고 공교 롭게도 그 다음해에 비슷한 시기에 태회진에서 아이들이 많이 태어나 여인 천궁의 바느질 공방에선 때 아닌 아이들이 입을 옷이 만들어졌다. 지난 3년 간의 고생으로 주머니가 두둑해진 태회진 사람들은 새로 아이가 태어나자 그 아이들에게 돈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아이에게는 물론이 거니와 친인이 아이에게 줄 선물을 사는데 돈을 쓰니 강보부터 시작하여 베 넷저고리에 이불 아기들이 사용하는 침상과 장난감 등이 만들어지고 팔리니 그것은 이후 태회진의 새로운 특산품이 되었다. 그리고 그 것은 설화가 메 이의 아이들을 위해 해준 것이 시초가 되었다. "메이가 아이를 가졌답니다." "그래?" 라혼은 고학의 보고에 반색하며 다시 물었다. "축하할 일이군. 잘됐어!" "게다가 독신 어른이 직접 진찰하여 알았는데 남녀 쌍둥이를 배었답니다." "이거 크게 한턱 쓸 일이군. 보통선물로는 안되겠어." 라혼은 크게 기뻐하며 그들에게 줄 선물을 궁리했다. 그런 라혼에게 고학이 넌지시 농을 걸었다. "가장 큰 선물은 주군께서도 주모와 아이를 가지시는 겁니다." "……." 라혼은 고학의 그 말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보다 고학 자네도 장가를 가야하지 않겠나? 그간 바쁜 일이 많아 신경 쓰지 못했지만 이제라도 부인을 맞이하는 것이 어떠한가?" "아닙니다. 아직 갈 길이 멀거늘 여자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왜? 모원도 메이를 맞아 이제야 제몫을 하고 있는데 자네도 부인이 있으면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겠나?" 고학은 당황한 표정으로 과장되게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언감생심(焉敢生心) 그런 마음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언감생심? 그렇다면 누군가 마음속에 있단 말인데? 누굴까?" "아, 아니 그것이 아니라." 라혼은 처음으로 본 당황하는 고학의 모습이 재미있어 짓궂은 미소를 지으 며 하나하나 따져 보기 시작했다. "고학 자네는 누군가를 첫눈에 보고 연심을 품지 않을 것이니 주변에 있는 여인일 것이고……." "주군!" "그렇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샌님 같은 고 선생이 길거리에 오가는 처자에 게 마음을 주진 않을 겁니다." 옆에서 라혼이 고학을 놀리는 것을 구경하던 잔폭광마가 냉큼 끼어들었다. 잔폭광마는 극남성에서의 일로 드디어 뱃멀미를 극복하고 백호대함의 3층 갑판에서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지심도 동시에 멀미를 극복하니 소문은 끊이지 않았다. 어째거나 계속 놀림을 당하다 누군가를 놀리는 것을 보자 냉큼 끼어든 것이다. 라혼은 잔폭광마의 맞장구에 더욱 흥이 나는지 분석을 계속했다. "고학 자네가 가까이 할 수 있는 여인이라면 우리 설화하고, 일부 여인천궁 의 여인들 뿐이고……." "아닙니다. 주군! 봉수성에서 한집에 살던 포포 소저도 있고, 초초 소저도 있고, 그리고 하녀들도……." 라혼은 고학이 봉수성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당황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 고……. "설마? 초초를 마음에 두고 있었나?" "……!" 라혼은 겉으로 보기에 무표정한 고학이었지만 내심 무척 당황스러워 한다는 것을 알았다. 라혼처럼 상대의 기운을 읽는 능력이 없는 잔폭광마는 돌아 가는 사정을 눈치체고 손뼉을 치면서 소리쳤다. "맞네, 맞아! 초초 소저같이 기품이 넘치는 낭자라면 고 선생의 마음에 품 을 만하죠. 생각할수록 잘 어울리는 한 쌍이네 그려. 그렇지 않습니까 주군 ?" 라혼은 잔폭광마의 호들갑을 귀가로 흘리며 왠지 착잡한 듯한 고학을 불렀 다. "고학!" "예." "초초가 비록 아직까지 시비를 자처하지만 본래 고귀한 여인이다. 그대가 그녀를 원한다면 그녀의 마음을 달래주어라. 알고는 있겠지만 그녀는 깨끗 한 몸이 아니다. 그것 때문에 그녀 스스로를 용납하지 못하고, 자신의 이름 을 버린 것이다." "주군, 주군의 말씀은 고마우나 이미 마음을 접은 지 오래입니다." "역시, 청백하지 못한 것이 걸리는 것인가?" "아닙니다. 절대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스스로 원해서 겪은 일도 아닌데 어찌 그것을 탓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무엇 때문인가?" "그녀의 본래 신분은 대단한 겁니다. 그러니 지금처럼 주군께서 그녀의 후 견인으로 있는 것이……." "내 힘은 초초가 버리려하는 신분을 이용할 만큼 약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 지 않은가? 그리고 지심을 사모하는 육삼 같은 사내도 있는 데, 초초가 뭐 가 문제될 것이 있나?" -쿠엑~! "아니에요, 아니란 말입니다. 주군! 저는 지심 같은 애랑은 상관없단 말입 니다. 우아아아악!" 잔폭광마는 이제 미쳐가고 있었다. 이젠 지심을 보면 괜스레 의식되기 까지 했다. 맑고 청명한, 아니 구름이 끼고 바람이 불어 파도가 높아진 바다, 라혼의 3층 갑판 제독실에서 뛰어내려 백호대함의 뱃머리에서 괴성을 지르 는 잔폭광마였다. "우아아아아아아아~!" 그렇게 한동안 괴성을 지르던 잔폭광마의 눈에 멀리서 일단의 선단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돛대에 매달린 깃발은 강무세가를 상징하는 홍화기(紅火旗) 였다. 그리고 파수대의 파수꾼도 이제야 그것을 발견했는지 징을 치며 적함 이 접근했음을 알렸다. -징~! 징~! "적선이다! 강무세가의 배다!" 비교적 한산했던 갑판이 부산해지고 무장을 하고 각자 위치로 가 전투준비 를 마쳤다. 그러나 이렇게 파도가 높은 때 바다에선 전투를 하지 않는 법이 었다. 가까이 접근하여 배를 맞대고 적함에 난입하여 싸우는 행위는 그야 말도 자살 행위였다. 한 번의 파고에 배가 부딪혀 완파되면 같이 죽는 수밖 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바다는 항해를 못할 정도의 파도는 아니지만 전투를 하기엔 적합하지가 않았다. "백기를 걸어라!" 라혼은 지금 후선수군과 싸울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대수영이 남해로 진출 한 이상 후선수군과 충돌은 피할 수 없다. "주군, 그들이 과연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여기서 계속 긴장관계를 유지하고자 고집한다면 은석도를 빼앗아 버리면 된다." 백호대함에 백기가 걸리자 후선수군도 백기를 걸고 천천히 접근하기 시작했 다. 망망대해 한가운데에서 서로의 전력이 빤히 보이니 어떤 수작을 부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싸움을 하기에 날씨가 좋지 못하니 서로 의심 없이 함 대를 마주할 수 있었다. 양측 함대 대부분이 멈추고 서로 장선만이 앞으로 나오며 서로 고함을 지르면 소리가 들릴 정도까지 접근했다. "해도대원수 대장군 라혼이 귀 함대의 책임자를 만나고 싶어 하시오." "해군대장 호운추가 귀함으로 가겠소. 준비해 주시오." "좋소!" 그리고 얼마 후 후선수군 해군대장(海軍大將) 호운추(護雲追)는 말로만 듣 던 백호대수영의 철갑거선 백호대함에 올랐다. '배에 철갑을 덧댔다고 들었으나 이건 숫제 쇳덩어리가 아닌가? 이런 괴물 이 물에 뜨는 것도 용한데 빠르기까지 하다니…….' 호운추는 힐끗힐끗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백호대함의 위용에 은은히 감탄했 다. 그리고 2층 갑판으로 올라보니 술과 먹음직스런 요리를 차려놓은 주안 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해도대원수 대장군 라혼이오!" "해군대장 호운추요!" 호운추는 백호나한이라 더 많이 알려진 사내를 살펴보았다. 역시 소문처럼 상당한 미장부였지만 극강의 패기보다 담담한 기도를 가진 것이 의외였다. "허허허허, 천하에 이름 높은 백호나한을 실제로 만나니 삼생의 영광이오." "과찬이십니다. 서로 적대하는 입장이지만 오늘 만큼은 그 모든 것을 잊읍 시다." "본장은 대찬성입니다. 천하의 영웅호걸을 만나 술 한 잔 나누어 마시지 못 한다는 것만큼 아쉬운 일이 없으니." "영웅은 영웅을 알아본다고 했으니 내가 영웅이면 호장군 또한 영웅호걸이 아니겠습니까?" "그런가요? 허허허허허허…………." 일단 서로 칼을 맞대는 적의 관계였다. 그러한 긴장관계를 해소하기위해 라 혼이나 호운추나 서로 상대를 높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호운추는 검은 수 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호남형 얼굴에 체구 또한 당당했다. 무공 수위또한 낮지 않은지 눈에 신광이 어려 있고, 서슴없이 적함에 몸을 맞길 만큼 담대 했다. 라혼은 다른 무엇보다 호운추의 바로 그런 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그가 자리에 앉자 고학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소생 대수영의 군사직을 맡고 있는 고학입니다. 우리가 장군을 청한 것은 다름 아니라 당분간 남해에서 상호간에 불필요한 충돌을 자제할 것을 건의 하기 위해서 입니다." "허허, 그대들의 입장에서 반적의 무리인 우리와 협상을 하려는 것이오?" "이것은 구두로 하는 약속일뿐입니다." 고학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라혼이 바라는 것은 상호간에 무역을 목적으 로 하는 상선을 막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후선은 남경까지 대수영은 남례성 의 동남해안까지 서로의 배가 드나들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대신 대수 영에선 토금전장의 상선만 후려의 남경까지 가고 후선의 배들은 모두 허용 하는 하게 하는 것이었다. "허허, 만약 내가 상선으로 위장하여 남례성에 대군을 내려놓고 소란을 피 운다면 어찌하시려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하여 이득을 볼 수 있다 생각되면 언 제든 그렇게 하시오. 우린 서로 칼끝을 겨누고 있는 적이고 병가에서 최대 의 도는 바로 속이는 도이니……." "……." 할 수 있으면 해보라는 식의 광오하기 그지없는 말에 호운추의 눈이 가늘 어졌다. 하지만 토금전장이 주도로 하는 밀무역은 후선의 재정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후선의 황도인 남경 구도엔 토금전장의 분장 이 버젓이 간판을 걸고 장사를 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좋소이다. 해군대장인 내 명예를 걸고 약속은 지키리다." "대수영의 배가 은석도에서 보이거나 후선수군의 함대가 은석도 해역 밖에 서 보인다면 이 약속 깨진 것이오." "좋소!" 호운추는 백호나한의 언급이 해남군도의 일을 상관하지 말라는 의미가 있음 을 알았지만 흔쾌히 수락했다. 해황가와 강무세가가 사돈 관계에 있기는 하 지만 역사적으로 남해의 패권을 다투는 앙숙관계에 있었다. 그러니 해황가 가 망하더라도 강무세가에 손을 내밀 리 없으며 설사 도움을 청한다고 해도 후선 또한 제 코가 석자임으로 해남군도의 일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서로 대치하는 입장을 고수하면 서도 장사를 하는 미묘한 입장에 빠지기는 하지만 싸울 땐 싸우더라도 긴장관계가 느슨한 것은 서로에게도 좋은 것이 좋은 것이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 술을 마시고 요리를 맞본 호운천이 자리를 드려하자 라 혼은 은근슬쩍 물었다. "혹, 강무혜라는 여인을 아시오?" "……." 호운추는 갑작스런 질문에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 의 인물의 입에서 그 이름이 튀어나오자 무척 당황하며 침묵하더니 그 이름 을 말한 백호나한을 지긋이 바라보고 담담하려 노력하며 말했다. "잘 아오."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있다면 아는 만큼 말해 줄 수 있소?" "그전에 그녀를 어찌 아는지 말해 줄 수 있소?" "그녀의 마지막 순간 옆에 있었다고 말하면 설명이 충분하겠소?" "……."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호운추의 무거운 입이 떨어졌다. "이제 와서 더 이상 숨길일이 아니지. 강무혜는 황제폐하의 금지옥엽이시오 ." "……!" 바로 그 순간 라혼은 후선의 고조(高祖)의 이름이 강무전이라는 것이 떠올 랐다. "혹시, 강무인이란 분은?" "폐하의 친부요." 고학은 호운추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식은땀이 흘렸다. 라혼은 호운추의 술 잔에 남례성의 과일로 담근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염치없는 부탁일지 모르나 그녀에 대해 이야기 해줄 수 있겠소?" "……." 호운추는 백호나한의 정중한 부탁에 그가 적이라는 것을 잊고 강무혜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강무혜는 당시 강무세가의 가주였던 강무정의 동생으로 아버지인 강무전과 반 은거 생활을 한터라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에 게 남자가 생겼는데 그는 조운비(曺雲飛)라는 사내였다. 조운비는 기재 중 기재가 무엇인지 말해주듯 뛰어남을 자랑했고 세가 내에서도 그를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어느 날 그가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 고 세가에 한통의 서신이 날아오는데 강무혜에게 자신을 잊어달라는 내용이 었다. 그러나 강무혜는 납득할 수 없었다. 그리고 강무혜는 서신을 가져온 자를 닦달하여 정인을 찾아 세가를 떠나버린다. "당연히 폐하께서 크게 노하시어 세가의 무사들을 내보냈소. 그러나 그들마 저 2년 가까이 소식이 없었는데……." "갑주의 서제가 사람들이 강무세가의 무인들과 무엇 때문에 싸운 것이오?" 라혼은 호운추가 말끝을 흐리자 서병들의 이야기를 던졌다. 그러자 호운추 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조운비가 인세에 참가하여 주요한 지위에 있었던 모양이오. 그런데 갑주에 서 무슨 일을 꾸몄던 모양인데 그곳에 그녀와 그녀를 추적하던 본가의 무사 들이 있었으니 부끄러운 일이나 본가는 그들의 존재를 지워야했소. 북명곤붕(北溟鯤鵬) 후선수군과 협상을 끝낸 라혼은 함대를 작도인이 점거한 심천도로 집결시키 고 해남군도를 압박했다. "생각보다 섬들을 점령하는 것은 쉬웠습니다. 그러나 소장이 판단하기에 지 배력을 계속 유지하려면 많은 군사들이 필요한 듯하니 금 상장군에게 부탁 하여 봉수성에 집결시킨 십만대군 중 일부를 지원받아 이곳에 주둔시켜둘 필요가 있습니다." 작도인은 그간의 경과를 보고하고 심천도와 대수영의 점거한 섬들에 요새를 건설하고 군사를 주둔시키자는 주청을 했다. 앞으로도 계속 해남군도에 지 속적이고 확실한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확고한 거점이 필요했다. 그 점에 대 해선 고학은 물론 라혼도 공감하는 사항이었고, 문제는 어느 정도 세력을 형성해 놓느냐였다. "글쎄, 나는 남례성에서 군사를 가지고 오는 것보다. 해남군도 내에서 군사 를 모으고 싶은데 모병은 어찌되었나?" "그것이, 해남군도 사람들은 키가 작아 군사로 뽑을만한 장정이 드뭅니다." "키를 상관하지 않고 뽑는다면?" "키를 제외하더라도 군졸이 되겠다는 사람이 얼마 없습니다." 라혼은 오랜 훈련을 거친 정예 군사들을 여기저기 흩어놓아 놀려둘 생각이 없었다. 현재 대수영에 소속되어 있는 병력은 대략 10만, 원주조정의 지원 과 토금전장에서 나오는 자금으로 비교적 여유 있게 운용하고 있었지만 그 들에게 소요되는 비용은 50만 내지는 100만 대군을 유지할만한 자금이 소요 되었다. 군사들이 사용하는 무구들, 갑주, 전선, 등과 직급에 따른 봉록은 그들이 군영에서 먹고 입는 군량과 의복이 포함되지 않은 그야말로 순수한 봉록이었다. 보통 봉록을 받는 군사들에게 지급되는 봉록은 원래 봉록에서 먹고 입은 것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대수영의 군사들은 책정된 봉록을 모두 받았다. 유지비용이 비싼 만큼 강도 높은 훈련을 시켰고, 훈련성과가 높은 부대에 포상금까지 따로 주어지니 정예강병이 되지 않는 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작도인 또한 그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남례성의 하 남천원군으로 하여금 해남군도에 주둔하도록 주청한 것이다. "그리고 심천도에 상관을 열어 해남군도와 교역을 늘려야 합니다." "작 장군, 그것은 좀더 생각해 보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 대수영이 비록 섬 을 차지하고 눌러앉아 해황가와 껄끄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까지 그들의 반응을 볼때 완전히 돌아설 기세는 아니오. 그러나 작 장군의 말처럼 이곳 에 상관을 개설하면 그들은 사생결단을 내려 할 거요." 해남군도는 그야말로 보물창고나 다름없었다. 산호와 거북이 등껍질, 전복, 해삼, 그리고 진주 등 해남군동의 바다는 풍요롭기 이를 데 없었다. 해군 도 사람들은 지금이라도 당장 바다에 뛰어들면 사나흘 먹을 양식을 금세 구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각자 자기들이 살고 있는 섬에 어디에 무엇이 있고, 어느 시기에 어떤 것이 많은지 알고 있었다. 바다는 그들에게 식량창고이며 보물창고였다. 해황가는 남례성이나 동영, 후려, 그리고 중주까지 배를 보 내 곡식을 사와 해남군도에서 진주, 말려놓은 전복, 해삼, 그리고 반 쓰레 기 취급하는 먹고 남은 거북이 등껍질등과 바꿔 다시 대륙에 팔았다. 해황 가가 해남군도를 확실히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저 강대한 강무세가와 남해의 패권을 겨룰 수 있는 것도 그만한 바탕이 깔려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대수영의 전력을 투입하여 오랜 시간을 들여 섬 하나, 하나를 일일이 복속시키고 천천히 해황가를 해체 시키면 되었다. 만약 대륙 이 안정되어 있고 원주조정이 위엄이 선다면 오랜 시간 해남군도에 시간을 투자할 여력이 있을 테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해남군도가 얌전히 있어 준다는 보장만 있었다면 라혼이 대수영을 이곳에 진주시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병력을 진주시켜 풍요로운 바다를 보자 견물생심(見物生心) 이곳에서 한조각 이권이라도 얻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대수영이 원하는 한조각 이권은 해황가엔 심각한 위협이었다. 해황가와 적대하는 세 력이 있으니 그들이 대수영과 솜은 잡으면 그간의 힘의 균형이 깨지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였기 때문이었다. 라혼은 가지려면 전부를 갖고, 아니 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결정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 결정은 라혼이 해야 했다. "주군, 일단 해황가의 반응이 있을 때까지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어떻겠습 니까?" 라혼은 고학의 진언에 고개를 끄덕이고 회의를 끝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북지성에서 급전이 날아들었다. "주군, 태회진에서 급전입니다. 장동의 정립천하군이 남하를 시작 을주를 공격하기 시작했답니다." "대수영은 모두 태회진으로 회군한다. 남상의 대주영과 타가선에게도 이 사 실을 알려 모든 군사들의 회군을 명하라! 남례성의 금 상장군에게 알려 가 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봉수성에 집결한 십만군사를 을주 창항(倉港)으 로 옮겨라!" "예? 하오나 해남군도에서 군사를 빼는 것은 그렇다 치고 남상은 이제 막 장악했는데……." "남상은 천패방이 맡을 것이다." "하오나 그는?" 라혼은 고학을 보며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나는 믿지 못하는 자에게 책임을 맡기지 않는다!" 고학은 주군의 명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제 막 정립천하군 본군 이 종도를 빠져나와 장동성에 집결하고 장동성의 군사들이 선발대로 나온 지 하루가 지났을 뿐이었다. 정립천하군의 전체 병력이라고 해보아야 10만 에서 12만 정도를 간신히 넘을까 말까였다. 그 정도라면 주모의 8만으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테고 을주 마제가의 20만 마병들도 있었다. 게다가 정립천하군은 흑막 웅랑교를 견제하기 위해 필히 병력을 나누어야 할 테니 굳이 주군이 움직여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주군은 입장은 단호했다. "백일, 백일 안에 전군을 을주 창항에 집결시키고 군량을 모은다. 봄이 오 기 전까지 대종도를 수중에 넣을 것이다." "하오나 겨울에 싸우는 것은 여러모로 좋지 않습니다. 게다가 남례성의 하 남천원군은 대부분 추위에 익숙하지 않은 진토인들인데……." "무엇이던 겪어 보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겨울전쟁은 당분간 기밀 이다." "……!" 고학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주군의 움직임은 분명 정립천하군 에게 알려질 것이다. 그리고 창항에 집결한 남례성 진토인 군사들의 존재를 흘리면 그들은 최소한의 소기 목적을 달성하거나 또는 계획을 접고 봄의 대공세를 대비하기위해 성에서 웅크리고 겨울나기를 준비할지 모른다. 겨울 에 폭설이 내리고 간혹 가다 길이 막히기도 하는 대종도였다. 그렇기 때문 에 대공세의 시점은 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무모함은 때때로 의외의 성과 를 거두기도 한다. 겨울에 대군을 움직이는 것은 어렵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고학은 해황가에 해남군도의 지배력을 인정하며 조정에 반하지 말 라는 친서를 보내고, 전환으로 서해안에 모든 배들을 징발하여 병력과 물자 수송에 동원했다. 그간 대수영이 만들어 놓은 저력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서해좌수사 천패방에게 속한 배를 제외하고 자동노가 설치된 대수영의 모 든 배들이 한계까지 군사들을 태우고 속속 창항에 대군을 부리기 시작했다. "전하! 해도대원수의 군사들이 창항에 부려지고 있습니다." "태사, 그것은 과인 또한 알고 있소." 을주 주도 적오성(赤午城)의 마궁(馬宮). 마제가는 이미 북지성의 반란무리 들을 주시해오고 있었기에 그들의 남하에 대한 충분한 대비를 한 후였다. 그러나 한 손보다 두 손이 났다는 말이 있으니 태회진의 북지대장군으로 있 는 천상천화에게 공동대처를 요구했고 천상천화는 배로 원군을 보내겠다면 창항을 내줄 것을 요구해 왔다. 창항은 어차피 해도대원수의 대수영에서 사 실상 관리하는 항구였으니 마제가에서는 천상천화의 요구를 흔쾌히 받아들 였다. 그리고 한 3만, 적으면 1만정도의 원군을 예상했던 마제가는 백호나 한의 대수영 군사들과 북지군이 직접 움직여 창항에 지금까지 집결한 군사 들만 10만이 넘어갔다. 게다가 계속 그 병력이 불어나니 마제가로썬 불안하 기 이를 데 없는 상황이었다. 자신들의 앞마당에 정예 중 정예라는 백호나 한의 군사들이 우글거리니 근심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태사, 그들이 어찌하겠다는 계획을 들은바 없소?" "예, 전하 망극하게도 들은 바 없습니다. 하오나 해도대원수가 남상에 일을 마무리하는 대로 전하께 직접 계획을 설명한다 합니다. 소신이 보기에 이 번 일은 아마 해도대원수의 독단으로 벌어진 일 같습니다. 창항에 미리 와 있는 상초라는 장수가 있는데 그는 상경에 있을때 저와 친분이 있는 자입니 다. 그가 말하는 것으로 보아 그 또한 이번 처사에 납득을 하지 못하는 듯 싶었습니다." "그래요?" 그렇게 백호나한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당혹해하는 가운데 가신들과 이것저 것 의견을 나누던 마궁 대전에 전령이 당도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전령입니다." "들라하라!" 먼 길을 달려온 전령은 장계를 내관에게 전하며 보고했다. "전하! 적군이 신성, 이선성, 도장성을 점령하고 조안성으로 몰려들고 있습 니다." "뭐야?" "이런~!" 신성(辛城), 이선성(夷仙城), 도장성(桃杖城), 조안성(粗安城)은 북지성 대 종도를 벗어나 을주의 주도인 적오성으로 오는 길목에 있는 주요성들이었다 . 이것은 정립천하군의 목표가 어디임을 명확하게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그 성들엔 병력이 충분히 있지 않았느냐?" "그것이 마병으로 있던 인세의 무림고수들이 작당하여 성문을 열어 제치는 통에 감당할 수 없었다합니다. 다행히 조안성엔 하란파(夏卵派)가 있어 인 세의 간자들이 성문을 열지는 못하였으나 정립천하군의 대군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마제 마적한(馬赤汗)은 북지성의 종도가 어떻게 떨어졌는지 알면서도 그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 한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일은 벌어졌고, 시간은 있었 다. 게다가 천만다행으로 창항에 우군(友軍)이 있었음으로 별반 걱정은 하 지 않았다. 좀 전까지 그들이 거기 있기 때문에 불안하였는데 이제는 그들 이 있음으로 마음의 여유를 잃지 않으니 사람의 마음이란 이토록 간사하기 이를 데 없었다. "대랑후!" "옛, 형님전하!" "네가 직접 철기군 1만을 이끌고 조안성을 구원하라!" "명 받드오이다." 마제는 친동생이기도 한 대랑후(大郞侯) 마온한(馬溫汗)의 우렁차고 자신만 만한 복명소리를 듣고 태사에게 명했다. "태사는 을주 전역에 전군동원령을 내려 군사를 재정비 하시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정주 사제가에도 힘을 보태줄 것을 같이 부탁함이 오 른줄 아뢰오이다." "태사의 고견이 옳소. 정주에도 사자를 보내 도움을 청합시다." 마제는 태사 우군술(尤君述)의 진언을 받아들여 정주에도 사자를 보내 힘을 보태줄 것을 요구하는 사자를 보내기로 했다. 마제가 사태를 파악하고 급 히 대책을 의논할 무렵 아니 처음 신성이 떨어질 무렵 정립천하군과 함께 움직이는 첩자들이 가지고 있는 전환을 통해 멀고 먼 이역의 라혼은 그러한 사실을 알고 창항의 상초에게 대수영에 속한 군사를 이끌고 대종도로 들어 서는 입구인 입지성(入知城)을 치라는 명을 내려두고 있었다. 이에 상초는 대수영의 1만 군사를 말에 태워 한달 먹을 군량만 휴대한 체 입지성에 당도 했다. 바로 그 시간에 마제는 3개성이 떨어졌으며 조안성이 위험하다는 소 식을 들었고 정립천하군의 대장군 운덕은 창항에 있는 군사 중 일부가 출병 했다는 것을 감지했을 뿐이었다. 남상 청해진. 대주원과 타가선은 라혼 대장군의 납득할 수 없는 명령에 반 발하여 아직까지 엉덩이를 떼지 않고 있다가 라혼이 직접 청해진까지 와서 호출하자 내키지 않은 발걸음으로 대장군 앞에 불려나갔다. "왜 명에 따르지 않는 것이냐?" "대장군, 이제 막 안정을 찾아가는 남상입니다. 이대로 전군을 빼면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함부로 병을 철수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 니다." "그렇습니다." 라혼의 물음에 대주원이 변명을 했고, 타가선이 이를 거들었다. "그대들에 뜻을 잘 알겠다. 싸움터의 대군을 이끄는 장수가 불합리하다는 명을 따르지 않는 것은 재량권에 속한 것이니 항명의 죄를 묻지 않겠다. 그 래서 다시 한 번 명하겠다. 당장 남상전역에 퍼져있는 군사들을 집결시켜라 !" "불가합니다!" 라혼은 고집스럽게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대주원의 태도에 고민을 했다. 그를 베면 흑막 순군 출신 군사들이 반발할 것은 뻔했고 그의 주장이 틀린 부분이 없었으니 무조건 항명의 죄를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라혼은 통제되지 않는 군사는 필요 없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쓸데없는 고집을 피우는 건가?" "대장군이야 말로 무엇 때문에 고집을 피우시는 겁니까?" 라혼은 자신의 물음을 물음으로 대답하는 대주원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나는 누구에게 충성을 요구한 적은 없다. 하지만 그대에겐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대는 누구인가? 흑막의 순군인가? 대수영의 마군대장인가?" "소장은 대수영 마군대장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대수영의 사령관이 내 명을 따르지 않는 것인가?" "그것은……." "그대가 남상을 장악하는데 그간 큰 공을 들였다는 것을 잘 안다. 그리고 내 명령을 따르면 그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변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납득할만한 이유를 알고자 하는 마음도 이해한다. 그러나 그대의 처지를 생 각하라!" "……." "내게는 그대 말고도 스스로 충성을 맹세한 무장이 많다. 백호영의 백호십 일걸, 여기 육삼과 작도인도 있다. 또한 아직 경험이 일천한 젊은 무장들도 있다. 내가 그런 그들을 제쳐 두고 그대에게 일군을 맡긴 이유는 그대가 경험이 있다는 이유뿐이었다." "대장군……." 대주원은 라혼 대장군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주위에 도열해 있는 무장들의 면면을 살폈다. 하나같이 용맹한 맹장들이었다. 그리고 굴러온 돌인 자신을 중용하고 주저 없이 3만 대군을 맡긴 백호나한의 배포를 새삼 느낄 수 있 었다. "내가 그대를 믿었듯이 남상의 백성을 믿어라!" 사람에게 믿어준다는 것만큼 커다란 압력을 주는 것은 없었다. 다른 꿍꿍이 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창검으로 위협하는 것보다 한번 믿어주는 것이 큰 효과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를 신뢰하기위한 시 간은 원래 길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주군!" 대주원은 라혼 대장군에 대한 칭호를 의식적으로 '대장군'에서 '주군'으로 바꾸었다. 이는 그 나름대로의 충성맹세였다. 주군이 된 그의 말대로 그는 부하들에게 충성을 강요하는 법이 없었다. 지난 3년간 그를 지켜보았는데 그는 모든 문제를 부하들에게 떠넘기고 여기저기 일을 벌이고 만드느라 바 빴다. 자신 또한 지난 세월 출신지역이 다양한 신병들을 조련하느라 정신없 이 보냈다. 그는 자신의 집무실에 처박혀 한마디 명령만 했을 뿐 그 모든 뒤치다꺼리를 수하들이 해야 했다. 직접 챙긴 거라고는 두 배로 늘린 백호 영의 무공수련을 돕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떠맡긴 일에 관해서는 그만큼 재 량권을 인정했고 모든 장수가 스스로 자기자리를 알아서 찾았다. 대주원은 그러한 모든 것이 주군인 라혼의 제장들에 대한 무한한 신뢰의 기반위에서 이루어졌음을 지금 알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한자리 차지한 천패방은 돌 아가는 사정이 자신에게 남상을 맡기도 대수영의 군사들이 철군한다는 쪽으 로 가닥이 잡히자 내심 당황했다. 그러나 이미 결론은 났고 그날부터 남상 전역의 주요거점에 흩어져 있던 군사들이 속속 철군하고 각 거점은 새로이 모병된 군사들이 남았다. 전 남상을 통틀어 서해좌수사를 포함 비 남상출신 자들은 100명이 넘지 않았다. 입지성을 점령하라는 명을 받은 상초는 입지성 문 앞에 진을 치고 공성준비 를 했다. 그리고 입지성 주위에서 정립천하군을 감시하던 북지무림맹 소속 무사들에게 입지성에 남아 있는 병력과 그들의 수준까지 전해 듣고 그것을 기초로 전략을 수립 했다. "입지성에 남아 있는 정립천하군은 2천이오. 장동에 있던 군사들이 을주로 들어서서 3개성을 떨어트렸으나 종도를 출발한 대군은 이제막 장동을 떠났 다는 정보가 있소. 문제는 시간이오. 최대한 피해 없이 입지를 공략하고 본 군이 올 때까지 입지성에서 정립천하군의 본대를 막아야 하오. 최악의 경우 지금 조안성을 공략하는 대군까지 우리가 맡아야 할지모르나 대략 사흘에 서 닷새정도만 버티면 태회진에서 북지군 3만이 응원할 것이오." "장군,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오. 공대협!" 북지무림맹의 백면호접 공보는 상초의 설명을 듣고 한 가지 계책을 내놓았 다. 아니 사실은 미리 준비해놓았다는 말이 맞았다. "정립천하군이 인세의 마두들의 힘을 빌려 손쉽게 성을 장악하는 것을 잘 아실 겁니다. 그것을 우리라고 쓰지 말라는 법은 없지요." "잘됐군. 참으로 잘되었어!" 상초는 공보에게 3천 정예기병을 맡겨 그날 밤 바로 일을 벌이기로 했다. 북명곤붕(北溟鯤鵬) 반 조각난 달이 덩그러니 떠있는 밥 입지성의 정립천하군은 평소와 다름없 는 하루를 마감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입지성엔 1만 5천 이상의 군사들 이 있었지만 지금은 성채가 거의 텅 비어있다 시피 했다. 하지만 주위에 입 지성을 위협할만한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별문제는 없었다. 앞으로 종 도에서 본군와 그 본군의 뒤를 따르는 병참물자들이 바로 입지성에 모이면 본격적인 중주정벌을 시작하는 것이다. "하아암~!" "쯧쯧쯧 목젖 보인다." "헤헤헤, 갑자기 보초를 서는 시간이 늘어 피곤하구만." "그래도 여기서 보초를 서는 것이 나아 아무리 승승장구를 연전연승을 한다 지만 하번 수백 명씩 죽어나가는 전쟁터에 있는 것보다." "쳇! 나는 여기서 지루하게 있는 것보다 적병의 숨소리까지 들리는 전장이 더 났다고." "운이 좋으면 공을 세울 수도 있고 말이지. 그래 너는 짧고 굵게 살아라. 나 가늘고 길게 살련다." 그렇게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두 초병의 대화가 잠시 중단되고 밤의 주는 고요함속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누구냐?" "나요!" -취릿! "컥!" "침입자다!" -우득! 어둠속의 인영이 전개한 빛살 같은 쾌도(快刀)에 한 병졸의 목젖이 잘리고, 다른 한쪽은 목뼈가 꺾여 절명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시여명의 인영들이 일제히 남문으로 뛰었고 입지성 전역이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이냐?" "적병의 내습입니다." "내습? 이런 내 오늘 정찰병이 돌아오지 않아 이상하다 여겼거늘. 도대체 어디의 군사일까?" "예? 무슨…?" "이곳의 병력은 고작 2천이다. 내부에 소란이 일고, 그때에 맞춰 외부에서 성을 공략하면 금새 무너질게야!" 입지성주의 우려는 곧 현실이 되었다. 일단의 군사들이 동서에서 성벽을 넘 어 들어오고 남문을 공략하니 수비군은 한 시진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기습의 묘를 잘 살려서인지 죽은 사람은 물론 단 한명의 경상자도 나오지 않고 입지성은 떨어졌다. 그리고 새벽 무렵 상초가 이끄는 7천 본대가 입지 성에 입성하여 그에 대한보고는 그 즉시 서해에서 북상중인 라혼에게 보고 되었다. 이에 라혼은 창항에 있는 보군 3만과 군량을 입지성으로 보냈다. 그리고 이레 후 라혼은 창항에 상륙하여 토벌군을 편성했다. 대수영의 10만 대군중 순수수군 2만을 남겨두고 8만 대군과 북지군 8만중 5 만, 그리고 남례성에서 불러올린 진토인 출신 10만, 총 23만을 동원한 라혼 은 대주원에게 6만 전군(前軍), 작도인에게 8만 후군(後軍) 주고 자신이 직 접 9만 군사를 이끌고 빠르게 하지만 무리하지는 않은 진군속도를 유지하며 입지성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러한 움직임은 을주를 도모하는 운덕의 선군 이나 장동을 벗어나 천천히 입지성으로 접근하는 18만에 달하는 정립천하군 의 후군도 알지 못했다. "이럴 수가! 입지성이 떨어진지가 한 달이 다 되가 도록 몰랐다니!" 정립천하군 후군은 이끄는 언무외는 눈앞에 입지성을 두고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더욱 기가 막힌 일은 입지성이 떨이진지도 모른 체 입지성에 도착 하면 쉬게 해주겠다는 말로 군사들을 달래며 지난 사흘간 강행군을 거듭했 다는 사실이었다. "장군! 입지성에서 대군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뭐야!" 설상가상(雪上加霜). 아직 18만 대군이 행군 중이었고 언무외는 이제 막 입 지성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적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군사를 몰아치니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적병의 수는 얼마나 되느냐?" "알 수 없습니다." "이런!" "장군 그저 허장성세가 아니겠습니까? 그나마 덜 지친 기병들을 보내 저들 을 시험해 봅시다." "그 말이 옳다! 지금 즉시 기병 5천을 이끌고 나가라!" "존명!" 언무외의 중군에서 언무외 직속의 기병들이 급하게 빠져나가고 전령기를 맨 전령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움직임은 하나도 빠짐없 이 입지성과 사흘거리까지 접근한 라혼에게 전해졌다. 막대한 피해를 입고 조안성 장악에 성공한 정립천하군의 선군은 조안성에서 오지 못할 언무외의 후군을 기다리기 시작한 시점의 일이었다. "수천의 기마가 우리에게 오고 있다?" "그렇습니다. 어찌하오리까?" 상초는 적의 의도가 빤히 보였다. 18만 대군에 사태를 시간을 주는 행위는 참으로 위험했다. 지금은 긴 장사진(長蛇陣) 긴 뱀이 꿈틀거리는 형태로 선 두와 후미의 거리가 7일 차이가 날 정도로 길게 늘어선 상황이다. "매복으로 놈들을 잡는다. 마침 매복하기에 적당한 곳이 있군." 상초는 주군이 오기 전까지 최대한의 성과를 내기로 마음먹었다. 언제부터 그을 주군이라 칭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이젠 주군이라 부르는 것이 더 편 할 정도였다. "서방님, 상공이 맡길 일은 잘 되가고 있나요?" "부인! 그런 일은 신경 쓰지 말고 몸조리나 유의하세요. 그런데 아이들은 건강한 거요?" 메이는 모원이 그렇게 말하며 다가와 아직까지는 가녀린 배에 귀를 대자 까 르르르 웃으며 말했다. "아직 멀었어요." "그, 그렇겠지요." 메이는 깊고 깊은 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남편이 걱정스러웠다. 상공 백호 나한은 태회진에 본영을 꾸리면서 북지무림맹의 무림인들에게 전환을 주어 북지성 각처 특히나 대종도와 정립천하군의 주둔지 근처에 비밀리 거점을 마련하게 하여 그들의 동태를 감시하게 했다. 그것이 지금에 와서 라혼이 정립천하군의 움직임을 자기 손바닥 보듯 훤하게 알게 해주웠다. 그들이 모 낸 정보는 모원이 취합 가공하여 이용되었다. 그리고 라혼은 모원이 지금까 지 벌여놓은 것을 바탕으로 전략을 수립하길 원했고 그것이 모원으로 하여 금 밤잠을 못 자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지금 전황은 어찌되어가고 있나요?" "따라오시오. 보여주리다." 모원은 자신의 집무실을 빠져나와 메이와 함께 천녀궁의 대전으로 들어섰다 . 대전의 넓은 공간엔 북지성과 그 주변부가 그려진 지도가 펼쳐져있었고 그 위에 숫자가 기록된 말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모군사님, 나오셨습니까?" "수고하네, 별다른 일은 없었겠지?" "예, 정립천하군의 움직임으로 보아 아직까지도 우리의 움직임을 알지 못하 는 것 같습니다." "좋아, 계속 수고해주게!" 모원은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 오는 초문(貂文)에게 격려의 말을 하고 지도 위에 늘어놓은 말들을 살폈다. 초문은 수인으로 족제비였다. 그는 원래 입 지성의 관리로 정립천하군이 입지성까지 들이치자 입지성을 빠져나와 을주 적오성에서 소일하다 자신이 적을 두고 있던 백수회의 요청에 따라 태회진 에 임관한 사내였다. "대단하네요. 이대로 상공의 본군이 입지성에 들어서고 대종도에 갇힌 정립 천하군이 무너트리는 일은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쉽겠어요." "그렇소. 이미 상초 장군이 발이 빠른 마군으로 적 기마 5천을 섬멸했다오. 그리고 파죽지세로 몰아붙이고 있으니 승기가 우리에게 있다 할 수 있소." "문제는 흑막 웅랑교를 막기 위한 운창(蕓敞)의 8만이겠군요." "장동에서 종도까지 전령을 띄우면 사나흘은 족히 내달려야 하오. 거기다 정립천하군의 후군이 전령을 띄웠다 하더라도 장동까지 사나흘이오. 그러나 무림맹의 동지들이 오가는 전령을 잡기 위해 매복을 하고 있으니 하나를 잡을 때마다 하루의 시간을 버는 셈이라오. 그래서 나는 백호영을 적 후군 을 섬멸하는데 투입하지 않고 바로 장동과 종도를 점령하는 작전을 쓰려 고 려중이라오." "잘못하면 인세의 고수들과 싸우게 될 터인데. 아! 인세가 나선다면 북지무 림맹의 도움을 받는 것이……." "그것은 주군이 반대하고 있소. 지금 우리의 눈과 귀가 되는 무림인들은 북 지군에 소속되어 군적에 이름이 올라있는 사람들이라오. 하지만 북지무림맹 은 아니오." "아니 왜요? 그들은 큰 힘이 되어줄 터인데?" 모원은 주군이 나중을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금이야 당장 무림 맹이 나서면 북지를 장악하는데 큰 힘이 될 터였다. 하지만 그 후 그들에게 그만한 이권을 주고 무림맹이 계속 유지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주군은 무 림맹을 계속 그대로 둘 생각은 없었다. 궁극적으로 해체되어야 할 무림맹이 었기에 그들의 도움을 받는 일은 적을수록 좋았다. 그 점에 대해선 모원도 생각을 같이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군에게 그만한 여력은 충분했다. "군사님, 흑막에서 석총관입니다. 웅랑교가 움직였답니다." "웅랑교가?" "역시 천녀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어요." "지금 석총관이 파악하기로 못돼도 10만 이상의 대군이 동원되었답니다." 그때 모원은 눈빛을 반짝이며 말이 놓인 지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메이의 귀에 뭐가를 속삭이자 메이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가만히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모원은 그 즉시 전구로 주군에게 웅랑교의 움직임과 자신이 생각한 바를 이야기했다. 모원의 생각은 단순했다. 18만 정립천하군을 섬멸하지 않고 운창까지 계속 몰아붙인다는 계획이었다. 아직 장동이 있고 종도가 있으며 무수히 많은 산 성과 요새가 있었지만 대수영에는 백호영이 있었다. 백호영이 미리 각 거점 을 점거하고 백호나한을 상징하는 기(旗)를 내걸면 도망치기 바쁜 정립천하 군이 어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라혼은 모원이 생각한 작전대로 정 립천하군을 몰아쳤다. 백호영 전체 병력은 1831명 약 160여명 1개 백인대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백호십일걸을 백인장으로 하는 백호영들은 하루 에도 수천 리를 이동하여 1천명 병력이 수비하는 거점들을 손쉽게 점거하는 어마어마한 위력을 보였다. 그리고 장동이나 종도 같은 2만 이상이 주둔한 성채조차 라혼이 직접 이끄는 1천 백호영을 막지 못했다. 그렇게 라혼은 첫눈이 오기 전 18만 정립천하군을 15만으로 만들어 운창에 밀어 넣는데 성 공했다. 그럼으로써 운창을 제외한 전 북지성을 한 달 보름 만에 장악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그리고 그사이 호황이 천원회의에 상정한 라혼의 지위가 만장일치로 통과하였는데 그때까지 조정은 라혼이 창항에 머물고 있어 봄께 북지성 진출을 하는 줄로만 알았으니 라혼의 행사가 얼마나 바람 같았는지 알게 하는 대목이었다. 결과적으로 라혼은 남상, 남례성, 북지성의 3개 지 역을 영향력 아래에 두고 서해와 남해의 패자이며 40만 대군을 가진 존재로 급부상 했다. 그야말로 천하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최고 권력자가 된 것이 었다. "후후후, 원주 조정에서 내게 기회를 주었군." "그렇습니다. 대원수에 남상대도독이라, 거기다 봄에 천호궁으로 들오라하 니 10만 대군을 이끌고 원주로 입성하면 주군께서는 천하를 호령하는 위치 에 서게 되는 겁니다." 라혼은 조정의 사신이 와있던 창항으로 가서 대원수의 직인을 받고, 남상대 도독이 되었다. 게다가 남상을 마음대로 개간할 권리가 있으니 호랑이 등에 날개를 달은 형상이었다. 게다가 새해를 맡는 원단에 원주 중경으로 오라 는 호황의 호의는 라혼에게 큰 기회를 준 것이었다. "고학!" "옛!" "운창에 항복을 권고하는 사자를 보내라. 항복하면 받아 줄 것이나 끝 까지 대항하려 한다면 죽음뿐이다." "존명!" 라혼은 애초에 계획했던 대로 겨울전쟁을 준비했다. 그리고 북지성의 주요 거점에 주둔한 군사를 제외한 18만 대군으로 운창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겨울나기를 준비하던 운창성에선 어쩔 수 없이 대군을 보내 대수영의 군사들을 막았고 일진일퇴(一進一退)를 거듭했다. 역시 겨울전쟁은 공격하 는 쪽이나 수비를 하는 쪽이나 힘에 겨웠고 정립천하군에겐 설상가상 흑막 웅랑교가 본격적으로 운창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운창성이 웅랑교의 절세웅랑기의 깃발이 꽂혔다. 그리고 라혼이 대수영과 대치하던 8 만 정립천하군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백기를 들고 원단(元旦)이 될 무렵 라혼은 25만 대병을 몰아쳐 운창성을 공략을 시작했다. 신룡현신(神龍現身) "신출귀몰(神出鬼沒)이라 했나?" "그렇습니다. 라혼 대원수의 병의 운용은 신출귀몰하다는 말이 무엇인지 보 여주는 그것 입니다." 호황은 호영의 말을 침중한 표정으로 경청했다. "북지성의 반적들이 남하했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 남상과 남례성의 모든 군 사들을 을주 창항에 집결시킵니다. 여기서 대수영의 장군들이 그런 대원수 의 조치에 반발했지만 남례성의 하남천원군 10만, 대수영의 8만, 북지대장 군 휘하의 5만, 도합 23만 대군을 일시에 몰아쳐 미처 대비하지 못한 반적 들이 도망가기에 바쁘니 북지성 전역이 난공불낙의 요새가 아닌 곳이 없다 는 말이 무색할 정도였습니다." "흐음." "비록 운창이 웅랑의 무리들에게 떨어졌으나 반적들의 마지막 결사의 항전 에 막대한 피해를 입은바 대원수가 8만 패잔병들까지 수습하여 25만 대군으 로 운창부의 운창성을 공략하니 그들은 견디지 못할 겁니다." "화살 한 개로 토끼 두 마리를 잡은 것인가?" "그러하옵니다. 폐하! 웅랑교가 운창을 치기위해 10만을 동원했는데 지금 운창을 지키고 있는 군사는 3만 정도일겁니다. 라혼 대원수가 그들마저 섬 멸한다면 가뜩이나 사람이 적은 흑막에서 웅랑교는 더 이상 영향력을 유지 하기 힘들 겁니다." "대단하군. 라혼 대원수의 신산귀계(神算鬼計)에 탄복을 금할 길이 없도다. " 호황은 말의 뜻은 기쁜 듯이 말하지만 표정은 밝지 못했다. 호영은 그런 호 황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진언을 올렸다. "폐하! 제 뜻은 진언해도 되겠습니까?" "네가?" 호영(虎影)은 호랑이의 그림자, 호황의 가장 최측근에서 눈과 귀가 되고, 손과 발이 되는 존재였다. 호영의 임무는 호황의 뜻을 받드는 것일 뿐 자기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그러나 호황은 호영의 말을 듣기로 했 다. "말하라!" "용황 폐하의 용황가는 다재다능한 인재들에게 용씨 성을 하사하여 용황가 의 일원으로 삼았습니다. 그것은 폐하 또한 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 "라혼 대원수의 이름은 라혼입니다. 그것으로 보아 그에겐 성이 없습니다." 호황은 호영의 진언에 머리가 맑아짐을 느꼈다. 그는 이제 무시할 수 없는 힘과 세력을 가진 거물이다. 그리고 호황자신은 이제껏 그를 후원하는 입장 . 게다가 보란 듯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며 북지성의 반란군을 토벌한 것을 보면 무슨 꿍꿍이 같은 것도 없어보였다. 버거운 신하라 하지만 신하는 신 하, 호황은 그를 바다들이면 얻을 수 있는 부수적인 효과를 생각하며 마음 이 동요했다. "남상, 남례성, 북지성이 이미 그의 수중에 있습니다. 남상에 도독부가 생 겼으니 남례성에도 절도사를 두어야 하고, 봄께 북지성의 문제가 해결되면 북지성에도 절도사를 두어야 합니다." "……." 천하가 화평할 때는 중외오성이나 변방사역을 책임진 자는 원주 조정에서는 영향력을 가지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천하가 뒤숭숭할 때이니 독자적인 병권을 가진 그들이 입김이 강해질 수밖에 없는 노릇. 사실 생각해보면 호 황에겐 길은 하나뿐이었다. 싫든 좋든 그를 끌어안아야 했다. 호황은 그날 로 천원회의를 소집해 북지성의 반란군을 토벌한 대원수 라혼의 공을 치하 하고, 을주 조안성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반란군을 토벌하는 문제를 의 논 했다. 결론은 을주와 정주가 힘을 합하여 그들을 반란군 토벌을 마무리 하기로 했다. 그리고……. "남례절도사에 하남천원군 하남대원수 상장군 금영월을 제수하고, 북지대장 군 설화를 북지절도사에 제수한다. 경들은 이의가 있는가?" "폐하의 뜻이 옳습니다. 뜻대로 하소서!" 힘이란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다고 믿게 하는 것이다. 필부의 싸움 에도 뭔가 있는 듯한 사람에게 기가 죽기 마련이다. 시쳇말로 알아서 긴다 는 의미일까? 라혼은 자신이 아주 큰 힘을 가지고 있다 과시했고 천하인은 그것을 인정했다. 그리고 천자인 호황이 그것을 공인하고, 십제(十帝)가 인 정했다. 이제 백호나한은 명실 공히 천하제일인 이었다. 지금까지 대수영의 최정예 군사가 10만, 북지성과 남례성의 그의 영향력아 래에 있는 병력이 31만, 그리고 아직 소속이 불분명한 항복한 정립천하군 8 만. 총 정병 50만 대군을 그가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 중원십일주의 십이진 가는 무장을 재대로한 군사가 많아야 3만, 적으면 1만 정도였다. 그러나 백 호나한 대원수 라혼의 50만 대군은 대부분 무장과 훈련이 충실했다. 거기다 실전경험까지 풍부한 강병이고 두 달이 못되어 남쪽 끝에 있는 대군을 북 쪽으로 집결시키는 능력까지 있으니 누가 그에게 거슬리고 싶겠는가? 운창성이 보이는 벌지에 25만 대군이 진을 치고 공성병기를 만드느라 분주 했다. 운제(雲梯), 발석차(發石車), 공성탑(功城塔) 등 갖가지 공성병기들 이 만들어지고 백호영들은 북지군에 소속된 무림고수들과 운창부전역을 훑 고 다녔다. "주군, 남례성 출신 군사들이 병들어 동사자까지 속출하고 있습니다." "방한복에 불을 피울 땔감을 충분히 지급했는데도 그 모양이니…. 쯧쯧쯧." 고학의 말에 라혼보다 먼저 반응한 것은 독신이었다. 그는 부풀어 오른 하 얀 털가죽 옷을 입고 있어 주글거리는 검은 얼굴과 묘한 대비를 이루어 커 다란 생쥐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벌써 2만이 살을 에는 칼바람에 견디지 못하고 등학성(等壑城)으로 목우유 마에 실려 갔습니다." "동장군이 무섭긴 무섭군. 다른 누구보다 그에게 일군을 잃은 셈이 되니 말 이야." "허허허허허, 주공의 입에서 무섭다는 말이 나오니 참으로 신기하기 그지없 구려." "주군에게 무서운 것은 주모뿐인 줄 알았는데?" -와하하하하하하…………. 흑사의 농을 잔폭광마가 받자 좌중에 화기가 돌았다. 찬바람이 살을 에는 한겨울에 하는 전쟁이지만 군사들의 사기가 높았다. 이미 북지성에서 정립 천하군은 찾아볼 수 없었고 운창성은 추위에 떨고 굶주림에 지쳐있는 3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에 비해 라혼의 군사들은 두툼한 방한복에 충분한 땔감 따뜻한 음식까지 있었다. 그 모든 보급은 목우유마가 태회진을 왕복하며 이 루어 진 것이었지만 25만이나 되는 인원이 먹고 입을 물량을 눈 덮힌 대종 도를 따라 보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입지성과 장동, 종도 에 있는 정립천하군의 물자와 라혼의 에텔 스페이스에 물자는 25만 명의 배 를 불리고, 입히기에 충분했다. 라혼은 운창공략작전이란 간단했다. 기다리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운창에 서 마지막까지 싸우다 갖갖으로 목숨을 건진 정립천하군 군교가 말하길 운 창성의 대부분의 가옥이 불타고, 더불어 얼마 되지 않았던 군량이 유실되었 다고 했다. 라혼은 그 정보를 듣고 운창에 대군을 들이 대면 알아서 물러설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무슨 생각이었는지 웅랑교는 물러서지 않았고 라 혼은 지구전을 준비했다. 어차피 흑막은 혹한기로 접어든지 오래라 길이 막 혀 전령이나 드나들까 의심스러울 정도였으니 대군을 움직이기엔 불가능했 다. "주군, 이제 공성무기도 충분하고, 군사들의 사기도 높으니 운창성의 수비 를 시험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혼은 작도인의 의견에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한겨울에 싸우는 것은 역시 버겁지. 봄이 오고 날이 풀리면 공격을 시작하 는 것으로 하지! 심심하면 훈련도 시킬 겸 발석차를 시험해 보는 것이 어떨 까?" 그날부터 운창의 성벽은 발석차를 운용하는 군사들의 표적이 되었다. 운창 에선 흑막 특유의 강궁으로 화살을 쏘며 대항 했지만 발석차 앞에 흙과 바 위로 담을 쌓자 별 효용이 없었다. 그렇게 매일 끊임없이 운창의 성벽에 돌 이 떨어지며 성벽을 부수었다. 라혼은 그렇게 2달을 보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 북지성에 눈이 아닌 비가 내려 겨우내 쌓인 눈을 지우 고 있었다. 그렇게 밤새 비를 만들어 뿌린 구름사이로 찬란한 아침 햇빛 비 치고 포진을 완료한 군사들의 뜨거운 체온에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라 다. -후욱~! -하아~! 아직은 쌀쌀한 날씨인지라 숨을 쉴 때마다 입과 코에서 김이 뿜어져 나왔고 군사들의 눈은 정면에 거대한 거북이처럼 웅크린 성채가 바라보고 있었다. 가장 높은 언덕 위 전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붉은 망토의 장수가 잡티하나 섞이지 않은 백마에 올라 수많은 공성탑과 운제가 빽빽이 들어찬 진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오른쪽엔 거대한 대부를 등에 지고 있는 무장이 깊은 내륙엔 어울리지 않는 대해백호기(大海白虎旗)를 들고 주위를 위압하고 왼쪽으로 싸움터에 어울리지 않은 학창의의 문사가 말위에 자리하 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문사는 앞으로 나서지 않고 진언했다. "주군! 벌써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습니다. 항복할 생각은 없는 모양입니다 ." 라혼은 날이 따듯해지고 눈이 녹아내리기 시작하자 항복을 권하는 사자를 보냈다. 비록 비구름에 갇혀 어둑어둑하지만 지금은 아침임이 분명했다. 바 로 어제 오늘 해가 뜨기 전까지 무조건 항복하라는 친서를 가진 사자는 굳 게 닫힌 성문 위로 라혼의 친서를 화살에 묶어 날려 보냈다. 그러나 웅랑교 는 성채에 걸려있는 절세웅랑기를 거두지 않고 있었다. "북을 처라!" 라혼의 짤막한 명령에 원수기를 들고 있던 잔폭광마가 우렁찬 목소이로 라 혼의 명을 전했다. "전고(戰鼓)를 울려라!" -둥~! 둥~! 둥~! 둥~! 전투가 임박했음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리고 죽을지도 모르는 싸움을 앞둔 군사들은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와아~! 와아~! 25만 대군의 함성소리가 천지간을 꽉 메우고 창병은 창대로 바닥을 치고, 검패병(劍牌兵)은 검으로 방패를 때리며 북소리와 박자를 맞추었다. -쿵! 쿵! 쿵! 쿵! 25만 대군이 하나에 소리를 내는 장관은 아군에게 사기를 북돋우었고 적군 의 사기는 반감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이윽고 라혼은 해도대원수의 권위를 상징하는 천보검(天寶劍)을 힘차게 뽑아 높이 들었다. 구름사이로 삐져나오 기 시작하는 햇빛이 천보검에 부딪쳐 산란되며 자연스레 함성이 잦아들었다 . 그것은 또 하나의 장관이었다. 한 장부의 몸가짐 하나에 25만 군사들이 자연스럽게 반응을 보이는 것이니 잔폭광마는 멀리서도 잘 보이도록 붉은 망토를 두른 주군의 등을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바라보았다. 잔폭광마의 주 군은 어떤 말도 할 필요 없이 그저 보이는 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100만 대 군의 전의를 충만케 하는 대영웅이었다. 이윽고 하늘 높이 치켜든 천보검이 떨어져 아직도 어둠속에 웅크린 성채를 가리켰다. 그러자 진을 형성한 대군의 일각이 함성과 함께 떨어져 나가는 것으로 싸움은 시작되었다. -와아~! 사다리차인 운제와 공성탑이 목우유마에 실려진체 서서히 앞으로 밀려가고 어느 정도 접근하자 운창성에서도 화살을 쏘며 대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성탑에 몸을 숨기고 밀려오는 백호군에겐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쾅! 쾅! 쾅! -텅 터덩~! 따다다다다닦! -캬오~! 컹컹컹! 크앙~! 공성추가 굳게 닫힌 성문을 때리고, 화살이 난무하며, 늑대와 곰들의 외침 이 전장을 가득 메웠다. 성벽위에서 바위가 던지며 저항했지만 수에서, 사 기에서, 그리고 힘에서 압도적으로 밀리니 웅랑교의 군사들은 이내 무너지 기 시작했다. 공성탑을 타고 넘어간 백호군이 길을 뚫으니 운제를 타고 성 벽을 넘어 순식간에 운창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전투가 시작되고 반시진(한 시간)도 안 되어 운창성은 함락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쿠워어어어어~! 심장을 쥐어짜 고통스럽게 한 괴성과 함께 천지가 뒤바뀐 듯 지상위에 모든 것이 하늘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리버스 그래버티(Reverse gravity)?" 라혼은 난데없이 [리버스 그래버티Reverse gravity:중력역전]주문이 시전된 듯한 현상이 벌어지자 그 즉시 운창성 전역에 마나동결을 시도했다. -콰광! 쿵! 한길이상 떠오른 수많은 운제와 공성탑이 땅으로 떨어지는 충격에 반파되거 나 쓰러지고 병사들은 갑작스런 괴사에 당황하여 두려움에 떨었다. -우와와와와와와와!!!!!! 라혼은 즉시 창룡후(蒼龍吼)을 내지르며 말 옆구리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 고 검강(劍剛)을 십장(十丈)이나 뻗히고 아직도 굳게 닫힌 성문으로 쇄도했 다. "비켜라!" 공성추를 운영하던 군사들은 주군의 외침에 분분히 물러서고 훗날 백호나한 의 일검파성(一劍破城)이라 불리는 장관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목도했다. 1 0장에 달하던 싯누런 황금빛 검강이 백장이 늘어나며 성문이 아닌 성문을 포한한 성벽 일각을 통째로 부숴버린 것이다. -쿠릉~!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장관을 만들어 낸 대영웅 백호나한의 일성이 전장을 가득 메웠다. "전군돌격!" -우아아아아……………………. 질풍노도(疾風怒濤) 거칠게 부는 바람과 무섭게 소용돌이치는 물결과 같이 25만 대군은 일제히 운창으로 쇄도해 들어갔다. 총사령관의 엄청난 신위에 사기충천한 군사들은 사납게 으르렁대는 낭인과 웅인에게 저돌적으로 달려 들었고 운창은 함락되었다. 운창이 함락되던 그 시간 라혼은 흑막 북쪽 끝에 있는 하늘에서 거대한 거 북이를 닮은 용과 드잡이 질을 벌이고 있었다. 일반적인 드래곤의 모습과 다른 것으로 보아 칸 대륙의 다섯 신룡중 하나임이 분명한 검은 거북이에게 영인(靈刃) 소울 블레이드를 시전하며 후려쳤고, 영인이 그 무엇으로도 깰 수 없을 것 같은 단단한 등껍질에 작렬할 때마다 검은 거북이는 고통에 겨 운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했다. -크아악! -빠지지지직! 앙(殃)은 자신의 권능인 뇌전벼락으로 그를 공격하였으나 쉴 새 없이 자신 을 난도질 하자 만길 허공을 휘저으며 고통스러워했다. 그의 검에 맞으면 겉은 멀쩡했다. 그러나 속을 피 곤죽이 되어 앙(殃)으로 하여금 죽지도 살 지도 못하는 고통을 안겨주었다. 앙(殃)은 낭호인의 탈을 쓰고 천하를 제패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괘씸한 인간들에게 화풀이나 하려 술법을 전개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 하기도 전에 술법이 흩어지고 저 인간 같지 않은 괴물의 무지막지한 검강을 받아야만 했다. 본신이었다면 검강정도야 별무소용이겠으나 낭호인의 모습 으로 화(化)한 이상 그것은 큰 위협이었다. 앙(殃)은 그 즉시 광둔술(光遁 術)로 자신의 둥지 근처까지 단숨에 이동했다. 그러나 저 괴물은 여기까지 좇아와 자신을 핍박했고 앙(殃)은 그 즉시 본신으로 돌아와 뇌성벼락을 마 음대로 다루는 자신의 권능으로 벽력진(霹靂陳)을 만들어 괘씸한 놈에게 뜨 거운 맛을 보여 주려했다. 그러나 억만근 거력이 긷든 벼락은 그의 털끝하 난 태우지 못했고 이처럼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 것이다. 신에 필적하는 힘을 가진 두 존재의 충돌은 북천(北天)의 천기를 불안하게 했고 그것은 칸대륙 전역의 선맥(仙脈) 신선(神仙)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 켰다. 또한 웅랑교의 구원군을 이끌고 운창으로 내달리던 웅기영주 웅천패, 아니 신룡 우(于)는 그 중 하나가 앙(殃)의 기운임을 알고 그 즉시 북천으 로 광둔(光遁)했다. 그리고 우(于)가 본 것은 일방적으로 밀리는 앙(殃)의 처절한 모습이었다. -크아아악~! -멈추시게~! 우(于)는 즉시 눈처럼 흰 뱀의 몸체에 하얀 사슴뿔 하얀 눈동자, 형상을 한 자신의 본체를 드러내고 싸움을 말렸다. 라혼은 새로운 신룡의 등장에 손 속을 멈추고 그대로 허공에 떠서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대는 누구인가? "나는 라혼이다!" -우(于) 그가 바로 백호나한일세. 우(于)는 본래 그답지 않은 앙(殃)의 말에 놀라며 자신을 라혼이라 밝힌 자 에게 물었다. -신선은 사바세상에 간여하지 않는다 들었거늘 그대는 어찌하여 홍진에 썩 은 명리를 쫓는 것이냐? "내가 신선인 것은 사실이나 이곳 선맥과는 관련이 없다. 그러므로 이곳의 규칙이나 관습은 내겐 무의미 한 것. 그러는 거기 검은 거북이는 어찌하여 사람의 세상엔 관여한 것이냐?" -그대가 신선이라니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해선 잘 알겠구나. 우리는 그때까 지 인간세상이 평화롭길 원한다. "그래서 난세의 영웅이 되어보시겠다? 일없다. 그런 일이라면 사람들에게 맡겨라!" 우(于)는 그가 신선, 지닌 역량으로 보아 대선(大仙)이 분명하지만 단연코 이토록 무례한 대접을 받은 바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기분 나쁘다거나 하 지는 않았다. 예의는 인간들이 만들어 낸 것이고 그는 신룡이기 때문이었다 . 다만 색다른 태도에 호기심이 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더욱 유 심히 그를 살폈다. 그리고 우(于)는 라혼의 기운 속에서 한 가닥 마기(魔氣 )를 발견했다. -마기로군. "……." -네가 어찌 마기를 품고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마기를 품은 자를 용서한 적 이 없다. 그 말과 동시에 하얀 용의 백린(白鱗)이 산박하여 라혼을 덮쳤다. 신룡 우( 于)의 권능인 천빙백린(天氷白鱗)이었다. 하늘조차 얼려버리는 극한의 한기 (寒氣)를 품은 백룡의 비늘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물질세상에나 한정된 것 에텔 스페이스의 이차원결계로 몸을 보호한 라혼에겐 별 위협을 주지 못했 다. 그러나 라혼 특유의 심검(心劍)인 영인(靈刃) 소울 블레이드는 칸 대륙 특유의 상승무공 초식이 더해지며 두 신룡을 압박했다. "만리검망(萬里劍網)!" -쿠웨에에엑~! -캬오~! 북천 만리천공에 덮씌워진 검망 속에 갇힌 신룡들은 전신이 난도질당하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북쪽대지를 죽음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앙(殃)의 벽력진 과 우(于)의 천빙백린이 한꺼번에 펼쳐지며 사위를 하얗게 뒤덮는 기운과 기운의 충돌은 이 세상을 멸망시키듯 요동 쳤다. 두 신룡은 영혼을 때리는 공격에 벗어나려 이리 저리 몸을 피하고 라혼은 큰 그들을 쫓아 남하를 시 작했다. 무생(無生)의 하얀 대지에서 아직 녹지 않은 흑막의 대지에 까지 싸움의 영역을 넓힌 새 존재는 자신들이 싸우는 여파가 한가롭게 노닐던 야 생늑대를 한순간 얼려버리고 뇌성벽력이 대지를 훑자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 이에 라혼은 내키지는 않지만 두 신룡에게 공간을 자르는 무한(無限)의 검(劍), 인피니티 소드(Infinite sword)를 사용할 것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영인(靈刃) 소울 블레이드로는 두 신룡에게 그저 고통(?)스러울 뿐이지만 무한(無限)의 검(劍), 인피니티 소드(Infinite sword)는 그들의 육신을 완 전히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멈추시오! 라혼이 망설이는 그 순간 하늘이 열리며 황금용과 푸른용, 그리고 타는 듯 한 붉은 용이 내려섰다. 이에 라혼은 다시금 공격을 멈추었고 우(于)와 앙( 殃) 또한 벽력진과 천빙백린을 거두었다. 칸대륙의 오신룡(五神龍) 굉(宏), 우(于), 앙(殃), 조(祚), 신(伸)이 자연 스레 라혼을 가운데 두고 각자의 위치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황금용의 다 시 말을 커냈다. -나는 굉(宏). 그대는 누구요? "나는 라혼이다!" 라혼은 아예 뭉클거리는 극마기(極魔氣)를 뿜어내며 무한(無限)의 검(劍), 인피니티 소드(Infinite sword)를 준비했다. 그러나 굉(宏)이라 불리는 황 룡은 백룡과 같이 무작정 공경을 하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그대가 귀선인 것을 수미선맥의 보리대불에게 이미 그대에 대한 것을 들어 알고 있소. 그러니 그만 마기를 거두시오. 라혼은 황룡에게서 보리대불이란 명호가 튀어나오자 그의 요구대로 마기를 거두며 말했다. "굉, 당신이 상관하지 않겠다면 검둥이하고 흰둥이에게 보상을 요구하겠다. " -그 보상을 내가 대신 하면 안 되겠소? "내게 뭘 줄 수 있는가?" -그대에게 환도 금강을 주겠소. 라혼은 굉(宏)의 말에 크게 놀랐다. 십일선맥(十一仙脈)이 각기 하나씩 가 지고 있다는 선산환도(仙山幻島) 중 하나인 금강(金剛)을 주겠다는 뜻이었 기 때문이었다. "나보고 신선들 두목노릇을 하란 말인가?" -아니오. 금강선맥은 예전에 단절되어 금강선맥을 이을 자가 나타날 때까지 금강을 내가 보호하고 있었던 것뿐이오. 그리고 그대는 금강선맥의 핵심인 만력(萬力)을 파(破)하는 금강결(金剛訣)을 익힌 신선 그러니 금강은 그대 의 것이오. "그럼 원래 내 것이란 말이군. 그럼 보상이 아닌데?" 라혼의 그런 반응에 굉(宏)은 당황했다. 굉(宏)은 그가 싸우는 모습을 잠시 간 지켜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앙(殃)의 벽력진과 우(于)의 천빙백린이 전혀 그에게 타격을 주지 못하는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럼 천지 성망(天地晟網) 조(祚)의 선풍진(旋風陳) 그리고 굉(宏)의 천지성망(天地晟 網)또한 통할까 의문이었다. 굉(宏)은 그를 한번 시험해 보고픈 마음이 들 었다. -그대가 우리가 한꺼번에 펼치는 오신룡진(五神龍陳)을 깬다면 그대가 무슨 요구를 하던 모두 들어주겠소. "좋다!" 라혼이 굉(宏)의 제안을 호기롭게 받아들이자 다섯 신룡은 저마다 하나씩 구슬을 꺼내 오행진 방위에 놓았다. 그리고 서로 상생상극(相生相剋)하며 공간을 장악하고 라혼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라혼은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공간속에서 금동보에게서 배운 대기운기법(大氣運氣法)을 시전했다. 오룡주 가 만들어낸 공간속에서 그것을 운기하기 불가능 했지만 차원결계 밖에서는 충분히 가능했다. 그러나 신룡들의 지혜는 뛰어났다. 도저히 이 얼기고 설 킨 기운들을 풀어낼 수가 없었다. "풀어낼 수 없다면 끊는다!" 라혼은 무한(無限)의 검(劍), 인피니티 소드(Infinite sword)로 공간을 부 숴버리는 것을 택했다. "파(破)!" -파삭! 쩍! 라혼의 궁극기가 시전되자 다섯 신룡의 힘이 담긴 오룡주(五龍珠)가 동시에 깨져버렸다. -이럴 수가! 이런 공능이라니……? 다섯 신룡들은 라혼의 어마어마한 신위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라혼은 그 다섯 신룡들이 놀라건 말건 자신의 요구조건을 말했다. "내가 그대들에게 요구하는 바는…… 없다!" -……. 라혼은 지금 스스로 만족하고 있었다. 다섯 신룡들과 싸워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으니 힘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라면 스스로 능히 만신(萬神)과 만마(萬魔)와 겨룰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게다 가 무한(無限)의 검(劍), 인피니티 소드(Infinite sword)는 아직 만족할 만 큼 완성도를 보이지 않았고 개선의 여지가 많았다. 그렇다는 것은 더욱 강 해질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대가 원하는 바가 없다면 선물이라 생각하고 받아주기 바란다. 굉(宏)은 부서진 오룡주를 다시 모아 하나의 구슬로 만들어 라혼에게 주며 말했다. -이것은 다섯 신룡들의 기운을 품은 물건. 여의신주(如意神珠)다! 조(祚)는 허공에서 검 하나를 꺼내 주며 말했다. -나는 십이진가 용황 그대에게 상경 용황궁을 주겠다. 이 검은 용황궁의 창 고를 여는 열쇠, 용황의 이름으로 된 모든 것이 앞으로 그대의 것이다. 앙(殃)은 다시 낭호인의 모습으로 화신하며 말했다. -나는 당신을 앞으로 백년간 주인으로 모시며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우(于)도 앙(殃)과 같이 웅천패의 모습으로 화신하며 말했다. -저 또한 백년의 시간을 드리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伸)은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던졌다. -그대와 나는 앞으로도 계속 인연이 이어질 것이다. 지금은 인사를 나눈 것 으로 선물을 대신하지. 금의환향(錦衣還鄕) 운창으로 돌아와 대군은 수습한 라혼은 흑막으로 진격하여 제평을 손에 넣 자는 진언을 거부하고 10만 하남천원군을 남례성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시작 으로 임시로 끌어 모은 군대를 해산시켰다. 대주원과 타가선은 그동안 비워 둔 남상으로 보내고 작도인은 해남군도로 보냈다. 그리고 항복한 8만 정립 천하군 중 각자의 의지에 따라 6만여 명은 양민으로 돌려보내고 군졸로 남 기를 원한 군사들은 대수영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라혼은 설화와 백호영, 그리고 백호십일걸과 더불어 5만 대군을 이끌고 대하의 물길을 따라 원주로 입성했다. "세상에 저게 배야 성이야?" "저게 다 쇠로 되있다며?" 봄을 상징하는 백화(百花)가 꽃망울을 터트리고 향기 품은 따스하지만 청량 한 바람 속에서 정확하게 오와 열을 맞춘 대선단이 중경 청인성의 천호변 항구인 호항(好港) 앞에 도열했다. 중경의 백성들은 고금에 듣도 보도 못한 장관을 만들어낸 대수영 함대의 위용에 저마다 감탄하며 엄지손가락을 치 켜세우길 주저하지 않았다. 이미 백호나한의 공(功)은 사해(四海)와 사방( 四方)에 어우를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갑옷에 붉은 망토의 라혼과 그들의 상징이 된 위압적인 검은 갑주의 백호영, 그리고 거친 군대와 어울리지 않게 꽃같이 아름다운 처녀들이 경갑주를 착용하고 뒤를 따라 배에서 내렸다. 그리고 화려하지 않 은 단아한 느낌의 날렵하게 생긴 수레가 거중기에 실려 부두에 내려지고 북 지대장군의 직함을 가진 설화가 그 수레에 올라타는 것으로 군사를 하선 시 키는 것은 마무리 했다. 라혼이 원주로 데려온 5만 대수영의 군사 중 태반 이 원주에 적을 둔자들이었다. 호항에 하선한 군사 1만 2천은 그중에서도 고향이 중경이나 근처의 군사들이었다. "허어, 참으로 대단한 위세로구먼." "글쎄? 남상, 남례성, 북지성을 아우르는 영향력을 가진 백호나한의 위세치 고는 조촐하기(?) 그지없게 보이는데?" "그러고 보니 그렇군. 호항 밖에 천호에 떠있는 배에 아직도 많은 군사들이 남아 있는 듯한데 그들을 왜 배에서 내리지 않고 있는 거지?" 호황의 명에 따라 대수영을 마중하기 위해 호항에 나온 금위위(禁衛衛)의 위령(衛領) 견통(犬統)과 위령(衛領) 호포산(虎匍山)은 금위위보다 더 훈련 이 잘된 듯한 대수영의 군사들을 보고 자기들 끼리 이야길 나누었다. 이중 호포산은 전일 거정의 아들을 구한 인세의 무리들을 쫓을 때 금위위의 위세 를 빌어 당시 상경 황진성의 백호문 수문대장 이었던 백호나한을 겁박하다 외려 치도곤을 당한 바로 그 사람이었다. "저기 검은 갑주의 무장들이 여전에 자네가 잡아들이려 했던 그자들이 아닌 가?" "그 얘기는 왜 또 꺼내는 것인가?" 하선이 마무리 되자 기다리고 있던 금위위(禁衛衛) 금위대장(禁衛大將) 호 덕창(虎德昌)이 친히 금위위를 이끌고 인산인해를 이룬 중경의 청림대로(靑 林大路)를 뚫었다. 해도대원수 라혼을 상징하는 원수기인 대해백호기(大海白虎旗)를 따라 햇빛 에 반짝이는 기치창검(旗幟槍劍)을 빗겨든 절도 있고 질서정연한 군사들이 행군을 시작하다 모습은 그들을 아들로, 형제로, 부모로 둔 중경의 사람들 에게 마음에서 우러난 함성을 내질렀다. -와아~! "저기, 어머님 저기 형, 형님이에요." "여보!" "아부지!" 여기저기에서 가족의 얼굴을 확인한 사람들이 뛰어들어 흉험한 싸움터에서 살아 돌아온 가족을 잡아끌자 대열이 흩어지려하자 라혼은 백마의 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세웠다. 그러자 가족이 잡아끄는 손에 이끌려 대열을 이탈한 군사들은 황급히 대열로 복귀하고 갑자기 싸늘해진 공기에 구경나온 중경 의 백성들도 말문을 닫았다. 라혼의 한가지 행동에 1만 2천 군사들이 반응 을 하고 1만 2천 군사들의 태도는 중경의 백성들 소란을 멎게 했다. 그리고 조용해진 청림대로에 라혼의 내공이 실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백호무적!" 그러자 1만 2천명의 군사들은 자연스럽게 방응하며 창대로 바닥을 때리며 연거푸 세 번 구호를 외쳤다. -쿵! 백호무적! -쿵! 백호무적! -쿵! 백호무적! 그렇게 주위를 환기시킨 라혼은 모석에게 명했다. "중십보." 모석은 주군의 명을 큰소리로 복명했다. "중십보(重十步)!" -중보 앞으로~! -중보 앞으로! -허! 쿵! 허! 쿵! 허! 쿵! 허! 쿵! 허! 쿵! 허! 쿵! 그러자 복명복창 소리가 연이어 들려오고 군사들은 힘차게 발을 구르며 다 시 행진을 시작했다. 중십보란 엄밀한 진형을 형성한 군사들이 발 구르기와 기합을 내지르며 전 진하는 것을 말했다. 대략 십보(十步)정도 앞으로 진형을 옮길 때 앞에 있 는 적을 압박하면서 아군의 기세를 높이는 효용이 있었다. 라혼은 단순히 대열이 흐트러지자 구호를 외치게 하고 중십보를 명령하는 것으로 대열을 재정비한 것이었다. 백호무적이란 구호는 본래 대수영의 군사들을 조련할 때 지휘관이 제해무적(制海無敵)이라 선창하면 무조건 크게 세 번 복창하게 했는데 서해수군이 백호대수영으로 불리 것처럼 자연스럽게 제해무적이란 구호는 백호무적이 된 것이었다. 제해무적이든 백호무적이든 선창하면 복창 하는 것은 다름없었다. 작다면 작은 이 사건은 후일 크게 부풀려져 '나한일성(羅漢一聲) 만인앙복( 萬人仰伏) - 백호나한의 말 한 마디에 만인이 앙복한다.'라는 말이 천하에 떠돌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중경의 백성들에게 엄정한 군기의 정병들의 모 습에 감탄하며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만세를 부르짖기 시작했다. -만세! 만세! 만세! 대략 십보를 걸어 경보로 바뀌었건만 가족과 친지의 환호 속에서 대수영 군 사들 발에는 여전히 힘이 들어가 있었고 지치지도 않는지 정확하게 오와 열 을 맞추며 상기된 표정으로 행진했다. 군사들은 지금 이 순간 호항에서 호 천궁까지 쭉 뻗어있는 청인성 청림대로을 전우들과 행진하는 자신이 무척 자랑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하선하면 사흘간 휴가를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 놓은 터라 더욱 가슴이 뿌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대로를 행진하는 군 사들의 품속엔 그간 쓸데가 없어 대부분 모아두었던 봉록과 그 귀하디귀한 석밀(石蜜)에 남해에서 나는 각종장신구들을 품고 있었다. 주군의 해산명령 이 떨어지면 토금전장으로 가서 품속에 봉록으로 받은 전표를 은자나 곡식 으로 바꾸어 가족들에게 가져다주며 자신의 무용담은 물론 들은 풍월이긴 하나 신출귀몰하다는 주군의 영웅담 등 사흘 밤낮을 새우고도 못다 할 이야 기꺼리를 가지고 있었으니 군사들의 설렘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라혼은 이미 소기의 목적을 이루었다. 원주로 금의환향을 했으며 설화의 신 분이 무엇이던 간에 천하의 그 누구도 다른 마음을 품을 수 없을 만큼 강자 가 되었다. 이미 대륙의 서해와 인시드의 동해 바다는 대수영의 것이었고, 원주에서 모병한 5만 군사들의 가족친지들은 절대적으로 자신을 지지해 줄 것이다. 라혼은 드디어 설화가 스스로 무슨 결정을 하든 감당할 수 있는 힘 을 얻은 것이다. 라혼은 호천궁의 정문에 다다르자 백호영을 제외한 모든 군사들을 해산시키 고 설화와 모석, 상초 두 장군과 일보시위 잔폭광마와 지심만 데리고 호천 궁으로 들어섰다. 금위위들이 번쩍이는 황금갑을 차려입고 길의 양옆에 주 욱 도열하고 있었지만 모석과 상초가 느끼는 그들의 기세는 전만 못했다. 아니 대수영 군사들의 기세가 더욱 날카롭고 엄정했기에 그런 그들이 지휘 하던 두 장군에게 금위위들의 기세는 꼭두각시처럼 느껴졌을 지도 몰랐다. 그런 그들의 여유로운 신색을 훔쳐본 금위대장 호덕창 또한 느껴지는 바가 있어 내심한숨을 내쉬었다. 무장으로써 백호나한의 정병을 보자 그와 같은 군사들을 지휘하여 전장을 누비는 것은 바래마지 않는 것이었다. 호황가에 게 좀 더 여력이 있다면 자신또한 흑막의 웅랑교나 후려의 반적 강무를 직 접 토벌할 기회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라혼의 설화 일행은 정문을 통과하고도 3개의 문을 더 지나 정전 앞마당으 로 들어서는 문밖에서 천자인 호황이 불러주길 기다렸다. 금위대장 호덕창 이 먼저 안으로 들어가 호황에게 해도대원수와 북지대장군이 왔음을 알리기 위해 먼저 들어가고 얼마 후 문이 열리며 내관인 듯한 자의 목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해도대원수 라혼 공과 북지대장군 설화부인 입시요!" 라혼은 긴장한 듯한 설화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정전의 문턱을 넘어섰다. 그리고 정전 앞마당에는 금관조복을 차려입고 손가락 세 개 나비에 2척 정 도 되는 홀(笏)을 세워든 만조백관(滿朝百官)이 각자 품계에 맞추어 도열한 청석이 깔린 길을 천천히 걸었다. 정전 단상에 호면(虎面)을 그대로 들어 내고 12줄 면류관을 쓴 호황이 호랑이 특유의 위엄을 들어내며 황좌에 앉아 있었다. 단상아래까지 걸어온 라혼은 군례를 갖추며 큰소리로 외쳤다. "평천하만세무궁(平天下萬世無窮)!" 그러자 설화와 정전까지 따라 들어오지 못한 잔폭광마와 지심을 제외한 상 초와 모석 또한 크게 외치며 천자에 대한 예를 갖추었다. "평천하만세무궁!" 그리고 백관들이 홀을 높이 치켜들며 소리 높여 외쳤다. -평천하만세무궁! 정전을 울리는 만조백관들의 외침이 잦아들고 어느 세 잘에서 일어선 호황 이 개선장군을 치하하는 말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하늘이 아조(我朝)를 벌리지 않아 그대와 같은 장수를 내게 주셨으니 이는 천명이 아조에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로다. 대장군 라혼은 남례성을 안정시 키는 데 큰 공을 세우고 다시 드넓은 서해바다를 아조의 그늘에 두었으니 그 또한 공이 적지 않다. 그리고 북지대장군 천상천화는 지아비에 뜻을 따 라 조정에 충성을 다하니 모든 여인의 귀감이다. 그리고 그를 넘어서 북지 성의 불측한 무리를 토벌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을 다시 조정에 충성하 는 양민으로 만드니 또한 공이 크다 하겠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와아~! 호황은 환호하는 백관들을 손을 들어 제지시킨 후 말을 이었다. "북지대장군 천상천화를 북지절도사(北知節度使)로 제수고 하남대원수 상장 군 금영월을 남례절도사(南禮節度使)에 제수한다. 천상천화는 아직 북지성 의 북쪽엔 불측한 웅랑들이 천하를 어지럽히고 을주에 불측한 무리들이 남 아있으니 북지성을 안정시키는데 최선을 다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대원수 라혼에게는 호(虎)를 성으로 하사하고 천무공(天武公)의 관작을 따 로 내린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와아~! 그와 더불어 호황은 그 자리에 있던 모석과 상초의 직급을 한 단계 올려 참 장으로 삼고, 라혼의 밑에서 함께 싸워 전공을 세운 모든 무장들의 직급을 올려주었다. 그렇게 훈공에 따라 상을 내리는 논공행상(論功行賞)이 끝나자 라혼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신(臣), 폐하께 들릴 말이 있습니다." 라혼이 그렇게 나서자 호황은 물론 백관들도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라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말하라!" "폐하의 성은이 하해와 같습니다. 제 수하에게 폐하께 보여드릴 물건이 있 으니 그을 불러도 되겠는지요." "……." 호황이 고개가 끄덕여지자 내관이 손을 앞을 모으고 어깨를 꾸부정하게 하 여 종종걸음으로 청석이 깔리 마당을 가로 질렀다. 그리고 잔폭광마가 양손 을 앞으로 하여 보검하나를 조심스럽게 들고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힐끔힐끔 눈치를 보던 관리들과 공경대부중 험악한 인상의 무장의 손에 들 려진 보검의 정체를 알아본 자들 사이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 했다. 이윽고 보검을 받아든 라혼은 한 내관이 들고 있는 붉은 비단이 덮인 쟁반에 보검을 올려놓았다. 보검이 올려진 쟁반을 든 내관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호황에게 다가갔고 호황은 보검을 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일성 을 발했다. "용천검(龍天劍)!" 용천검은 다름 아닌 용황의 상징이었다. 대외적이 활동을 하지 않던 용황은 자신의 모든 권위를 용천보검에 담아 호제에게 주어 호제의 뜻이 곳 자신 의 뜻과 다르지 않음을 상징했다. 호제가 천자가 된 이상 더 이상 호황에게 용천검은 필요 없게 되었다. 그러나 용천검이 가진 권위는 아직 유효했다. "폐하, 소장은 용황께 용천을 직접 받은바 상경 황진성과 용황궁, 그리고 용황가의 모든 재산을 맡게 되었습니다." -쿵! 장내는 라혼의 충격적인 발언에 웅성대는 소리가 더욱 커져만 갔다. 용천검을 가진 자는 용황의 모든 권위를 갖기 때문이었다. 이는 지난 수백 년간 호제가가 주장하던 바이고 라혼 대원수는 바로 그 당사자인 호황에게 자신은 용천검주(龍天劍主)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라혼은 호황(虎皇)과 십제(十帝)들과 같은 반열에 선다는 말이 되었다. "짐은 그대가 용천검의 주인임을 인정하겠노라." 호황의 선택은 어차피 한가지였다. 이제 그의 동의 없이 조정의 뜻만으로 그를 움직일 수는 없게 되었다. 천원회의에선 이미 대수영의 함대를 이용해 동해에서 반적 강무의 세력을 몰아낼 것을 결의한 상태지만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해도대원수이기도 한 그의 뜻을 먼저 묻게 되는 상황이 되었다. 원주조정을 섬기는 관리는 조정의 명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중외오 성과 변방사역을 책임진 안찰사와 절도사 그리고 도독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조정 천원회의에서 의결하여 임명된 자들이었기에 명을 거역하면 언 제든 관직을 빼앗고 항명의 죄를 물을 수 있었다. 그러나 천원회의에서 결 정된 사항이라도 황가와 제가의 주인들이 하기 싫으면 그뿐이었다. 그 정도 로 십이진가(十二眞家)의 주인들은 스스로 독자적인 행보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용황 자신이 나서서 용천검에 부여한 권위를 거두지 않는 한 용천검 을 가진 자는 용황과 다름없었다. 방평산(方平算)은 3년 전, 제대로 된 녹봉을 준다는 말에 늙은 부모의 만류 를 무릅쓰고 대수영에 자원했다. 가까스로 대수영의 군사가 되는 시험을 합 격하고 1년 치 반에 해당하는 녹봉에 해당하는 전표를 들고 마지막으로 부 모님을 뵈었을 땐 가슴이 답답하고 목이 메어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근 한 달이 다되도록 커다란 배에 실려 망망대해를 항해할 땐 뱃멀미에 고 생하고 넓고 탁 트인 바다지만 좁은 배에서 거친 사내들과 부대껴야 했다. 그리고 오사지게 더운 남례성의 폭염 속에서 귀신같은 무관들에게 달달 볶 여지기를 석 달 다시 지긋지긋한 배에 올라 오사지게 추운 북지성의 눈 덮 인 산을 뒹굴어야 했다. 그러나 꼬박꼬박 지급되는 녹봉과 가끔 포상금까지 받아 나중엔 여유까지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나중엔 원주와 오가는 토금 전장의 배편에 편지까지 주고받을 수 있게 되어 까막눈인 늙은 노부모가 누 군가에게 대필해 보냈을 편지에 눈물로 밤을 지새운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 추억이 되었다. 방평산의 품속엔 왕후장상이나 맛볼 수 있다는 석밀과 남례성의 귀한 약술 한 병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등에 백미(白米) 한섬을 지고 있었지만 고향집으로 가는 방평산은 묵직한 쌀의 무게에 절로 흥이 났다. "아부지, 어무니!" "평산아! 아이고 내 아들 편산이가 돌아왔구나!" "형님!" 이미 소식들을 듣고 알았는지 방가의 친인들이 모두 방편산의 집에 모여 있 었다. 방평산은 쌀을 내려놓고 갑주를 입은 그대로 노부모에게 넙죽 절했다 . "허어, 큰아버지는 좋으시겠소." "잘됐네. 잘 되었어!" "형님, 형수님. 이제 평산이가 돌아왔으니 두 다리 쭉 뻗고 주무셔도 되겠 소." 방평산의 노부모는 일가친척들의 덕담에 연신 미소를 지으면서도 험 하디 험한 싸움터에서 살아 돌아온 아들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3년새 부쩍 자란 꼬맹이들은 방평산의 갑옷 있은 모습을 연신 훔쳐보았다. "자자, 평산이 형님이 과연 어떤 대공을 세웠는지 들어나 봅시다." "뭘, 그냥 어영구영 하다 돌아왔을 뿐인데……." "허어, 빼지 말고 한 말씀 하시오." "이봐! 혀가 굳었으니 말이 나올 턱이 있나 평산이 내 술을 받고 이야기보 따리를 풀어놔 보시게." "과연 평출이 형님이시오." 방평산은 연거푸 석 잔이나 독한 화주를 마시고 자신의 경험담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처음 집을 떠날 때부터 배에서 고생한일 남례성의 밀림과 북지성 의 눈밭을 구르던 일, 백호대함과 주군의 혼인식 등……. 밤이 새는 줄 모 르고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리고 다음날 친척들이 돌아가자 방평산은 노 부모에게 양이 얼마 않되 지금껏 숨겨놓고 있던 석밀과 약술을 꺼내놓았다. "어이구머니나! 이게 뭐냐?" 처음 석밀의 단맛을 본 방평산의 노모는 깜작 놀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 러자 방평산의 부친인 방두모는 버럭 소릴 질렀다. "거 여편네하고는……. 에잉 그보다 평산아!" "예, 아버지." 방평산은 아버지가 아직도 여전하시다는 생각을 하며 부친의 부름에 공손히 대답했다. "네가 돌아온다는 것을 네가 붙인 서편을 통해 알았다. 그래서 네 형이 앞 으로 일은 어찌될지 모른다며 네 혼처를 알아보았느니라." "예? 혼처라고요?" "그래 다행히 마땅한 처녀가 있어 이참에 널 장가보내려 한다." "아니, 내일 모레면 다시 군문에 돌아가야 하는데 어찌……." "그래서 오늘 중으로 혼례를 하려하니 이 애비의 뜻에 따라라!" 방평산는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 상황에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지만 늙은 부 친의 뜻은 완고했다. "어차피 평생 군문에서 보낼 생각이 아니라면 지금미리 부인을 둔다고 해서 무리가 아닐 터 이 아비의 뜻을 따라라!" "그래 평산아! 네가 벌어다 준 은자가 제법 넉넉해서 식구하나 더 들이는 여유가 생겼단다. 그리고 돌아온 대수영의 군사들은 일등 신랑감이란다. 그 리고 너도 자식은 보아야 하지 않겠니." 그렇게 방평산은 그날 다시 모인 친지들 앞에서 혼례를 치루고 첫날밤을 처 음 본 색시와 지낸 후 다음날 아침 색시와 노부모에게 문우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간단한 점심을 먹고 색시의 도움을 받아 갑주를 다시 걸쳤다. 방평 산은 자신이 갑옷을 입는 것은 부인이 도울 때서야 처음 색시의 얼굴을 자 세히 보았다. 그리고 말없이 건네주는 육향이 배어 있는 손수건을 받아들고 묘한 생각을 하며 집결지로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평오장, 아닌가? 얼굴이 뽀얀 것을 집에서 엄청 거둬먹였구먼. 킁킁 이게 무슨 냄새야! 자네 혹시 집에는 안가고 기루에서 놀다왔나? 얼씨구 이게 뭐 야? 기녀가 정표라도 주던가!" "말조심해! 이건 내 내자되는 사람이 준거야!" "뭐야? 자네도 그새 장가들었나?" "이거야! 대원수가 신출귀몰하니 수하들은 안 그러겠는가? 고작 사흘 휴가 에 장가든 놈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나도 우리 집에 가면 아부지가 장가보내 줄려나?" 호항을 벗어나지 못하는 군사들은 주군을 따라 나간 중경출신 군사들이 돌 아오자 부러운 듯 쳐다보며 이런저런 이유로 놀려댔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방평산의 경우처럼 그새 장가든 자가 의외로 많았다. 그리고 그들은 색시가 이쁘냐느니, 첫날밤은 어땠었냐느니 하는 질문에 시달려야했다. 금의환향(錦衣還鄕) 라혼은 천원회의에서 대수영으로 하여금 동해에서 후선수군을 상대하는 일 을 일부 수락하고 상초를 동해우수사(東海右水使)로 임명해 백호대함 1척을 주어 동경에 동해우수영(東海右水營)을 설치케 했다. 이는 동해의 영향력 을 행사하기위한 포석이었다. 이로써 대수영은 서해우수사 장상이 태회진 대수영 본영을 중심으로 3척의 백호대함을 가지고 서북해역를 책임지고 서 해좌수사 천패방이 남상 청해진 서해수영에서 2척의 백호대함으로 서남해역 을 책임졌다, 동해우수사 상초는 동경에 동해우수영을 두고 후선수군을 견 제했으며 작도인을 남해좌수사(南海左水使)로 삼아 봉수성에 남해좌수영(南 海左水營)두었다. 가히 사해(四海)의 주인이라고 할 만한 위용이었다. 그리고 라혼자신은 상경 황지성을 확실히 장악하기위하여 여러 가지 조치를 단행했다. 용황궁에 용호대원수부(龍虎大元帥府)를 설치하고 고학을 황진 성부윤(黃辰城府尹)으로 모석을 사문수비대장(四門守備隊將)으로 삼았다. 상경은 용황에게 통치권이 있음으로 그것은 당연한 조치였다. 호황에게 호 씨 성을 하사받고 더불어 천무공(天武公) 관작을 얻고 용천검주로써 용호( 龍虎)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게 된 라혼은 용과 호 어느쪽도 우선할 수 없 다는 주장을 펴서 호천무공(虎天武公), 용천검주(龍天劍主), 해도대원수(海 道大元帥), 용호대원수(龍虎大元帥), 남상대도독(濫賞大都督) 이란 신분을 가지게 되었는데 용호대원수부는 사해와 일역(一域), 일부(一府), 일군(一 軍) 장강대하(長江大河)를 관장했다. 남상(濫賞) 남상부도독(濫賞副都督) 토사귀(土司貴) 남상위병대장(濫賞衛兵大將) 정장(正將) 대주원(大株原) 남상동도대장(濫賞東島大將) 참장(參將) 타가선(駝價先) 남상하도대장(濫賞下島大將) 소장(少將) 전치(篆置) 대수영(大水營) 서해우수사(西海右水使) 태회진 대수영 본영 참장(參將) 장상(獐商) 서해좌수사(西海左水使) 남상 청해진 서해수영 참장(參將) 천패방(天覇邦) 동해우수사(東海右水使) 동경 동해우수영(東海右水營) 참장(參將) 상초(狀 初) 남해좌수사(南海左水使) 봉수성 남해좌수영(南海左水營) 참장(參將) 작도인 (鵲途認) 장강대하(長江大河) 수도대장(水道隊長) 소장(少將) 목남(牧南) 천호수군대장(天湖水軍隊長) 정령(正領) 소천위(少川威) 대하수군대장(大河水軍隊長) 소령(少領) 오차(烏此) 장강수군대장(長江水軍隊長) 소령(少領) 달성모(獺珹毛) 상경(上京) 황진성부(黃辰城府) 황진성부윤(黃辰城府尹) 고학(高壑) 사문수비대장(四門守備隊將) 참장(參將) 모석(矛石) 현무수문대장(玄武守門隊將) 소장(少將) 고우(膏雨) 주작수문대장(朱雀守門隊長) 소령(少領) 석은(席銀) 청룡수문대장(靑龍守門隊長) 소령(少領) 원복(願馥) 백호수문대장(白虎守門隊長) 소령(少領) 만력(蠻力) 황진성금군교위(黃辰城禁軍校尉) 소령(少領) 초강남(草江南) 용호대원수부(龍虎大元帥府) 용호대원수부 대집무(大執務) 복천진(卜天眞) 백호영(白虎營) 백호대장(白虎隊長) 소령(少領) 웅장모(熊掌模) 용호대원수부 위병대장(衛兵隊長) 소령(少領) 표상치(豹常治) 용호군(龍虎軍) 훈련대장(訓練隊長) 소령(少領) 구만혁(狗巒赫) 라혼은 상경소속 금군병력까지 장악함으로써 총 20만 대군을 움직이는 병권 을 가지고 있으며 남례성 23만과 북지성 10만 대군에게 사실상 지휘권을 행 사하고 있었다. 거기다 바다와 면한 동해의 동경(東京) 황술성(黃戌城), 서 해의 서경(西京) 황미성(黃未城), 북경(北京) 황축성(黃丑城)에 막대한 영 향력을 행사하며 본거지화한 상경(上京) 황진성(黃辰城)을 완벽히 장악함으 로써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 되었다. 그리고 이미 흑막 웅랑교까지 실제적으로 장악하고 있어 마음먹기에 따라선 흑막과 의백성까 지 얻을 수 있었으니 가희 천자의 위세를 가질 만했다. 상경의 금군과 대수 영의 군사를 합치고 새로 모병까지 하여 용호군 창설 작업이 끝나면 백호무 적이란 말이 단순히 기세를 드높이는 구호로 끝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화 되었다. *백호나한이 용천검을 들고 나타나자 서제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상경에서 힘을 키우던 천림왕(天林王) 호천린(虎天潾)은 닭 쫓던 개신세가 되어버렸 다. 천림왕은 서제가 자신 본거지인 갑주가 위태로워지자 중경에 진주시켜 두었던 자신의 군대를 모조리 이끌고 갑주로 돌아가 버려 사실상 실세가 되 었다. 그러나 임주에서 학가의 반란이 일어나고 조정이 뒤숭숭해지자 극도 로 몸을 낮추었다. 원주의 군사가 파견되는 결정이 나오면 또다시 상경의 병력이 빠져나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호황이 임주사태에 이렇다 할 해결책 을 내지 못한 이유는 바로 천림왕의 복지부동(伏地不動)때문이라고 해도 과 언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렇게 고이고이 간직한 상경의 군사들을 4년 전 자 신의 명에 따라 앙신으로 파견한 이름 없는 장수가 털도 뽑지 않고 날름 삼 켜버린 것이다. 천림왕으로써는 환장하고 팔짝 뛸 일이었다. 차라리 대군을 이끌고 임주로 갔다면 일군을 책임진 병권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후회는 아무리 빨리해도 늦는 법이었다. "이럴 수가 상경금군의 모든 무관을 모조리 바꿔버리다니……." "천무공의 수하들은 본디 백호문을 지키던 금군들이었습니다." 무골후 호장은 황진성부윤부터 말단의 관리까지 자신의 사람으로 채운 백호 나한의 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이는 그의 눈과 귀가 상경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되었다. 상경의 금군들은 지휘하던 군관들은 경험 많은 5만 정병의 기세에 눌려 말 한마디 못하고 한직으로 밀려나거나 중경으로 돌아 와야 했다. 애초에 천림왕이 관리하던 용황가의 재산이 그에게 넘어간다고 해도 관리자는 어차피 천림왕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상경에 용호원수 부를 열면서 한순간 천림왕에게 충성하는 인사들이 순식간에 교체되었다. 이제 사실상 천림왕이 영향력아래 있던 상경은 이제 완전히 그의 손을 떠나 버렸다. 더욱 화가 나는 것은 천림왕의 자금줄 중 하나였던 토금전장이 언 제 그랬냐는 듯이 손을 끓은 일이었다. 이제 천림왕 호천린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하게 된 것이다. 천림왕이 몸져누웠다는 소식에 병 문안차 찾아온 무골후 호장은 천링왕으로 하여금 울화가 치미는 소식만 전해주고 떠났고 홀로 남은 천림왕은 독한 화주를 벌컥벌컥 들이키며 울화를 삭혔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열흘 붉은 꽃이 없다하였거늘 내가 너무 욕심 을 과하게 부린 것인가?" 자포자기한 심정이 된 천림왕은 아무도 없는 방안 홀로 술을 자작하며 독백 했다. 그러나 대답을 바라지 않은 독백에 누군가 대답해오니……. "꽃이 빨리 저야. 열매가 빨리 영글지 않겠나?" "누구?" 천림왕은 술에 취해 몽롱한 전신으로 소리가 난 쪽에 눈을 주었다. 그리고 그곳에 원래부터 서있는 듯 섭선을 멋들어지게 든 백의인이 자리하고 있었 다. "누구, 누구냐?" "아무리 버린 가족이지만 날 벌써잊은 겐가?" "너, 너는……?" 천림왕은 한순가 술이 확 깨는 것을 느꼈다. 그는 절대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는 자였다. "천! 어찌 네가 살아있었던 것이냐?" 천상의 미공자를 연상시키는 백의인은 겉으로 보기에 이제 갖 스물을 될까 말까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지만 60이 넘는 나이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너 보나 연배가 윗줄이거늘 말을 조심해야지." "다, 닥쳐라! 잡종주제에……." -퍽~! "캭! 콜록, 콜록콜록~! 우웩!" 천림왕의 말이 끝나기 전에 백의인의 우수에 들린 섭선이 목젖을 때렸다. 그러자 천림왕은 격렬하게 기침을 하고 뱃속에 있던 술을 토해내기 시작했 다. 백의인은 그런 천림왕의 등을 두드려주며 말했다. "이런, 이런, 이런, 이렇게 술만 마시면 몸이 상하지 않느냐? 그러나 경고 하는데 말은 가려서 하거라. 내손에 친인의 피가 묻지 않도록!" "이 미친……." "내가 미쳤다는 것은 오랜 이야기 아니냐? 그 이야기도 그만하자구나." 백의인은 천림왕을 타이르듯 말했고 그럴수록 천림왕의 표정이 일그러져 갔 다. "어쩔 셈이냐?" "후후후후, 이제 밝은 곳으로 나오고 싶어 그런다." "무슨 말이냐?" "백호나한의 아내 천상천화를 아느냐?" "……?" "아무래도 그 아이가 내 딸인 것 같아서 말이지." 천림왕은 '천'의 말에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나는 딸에게 어미가 어찌하여 죽음에 이르렀는지 소상히 알려줄 생 각이다." "그, 그걸 왜 내게 말해주는 거냐?" "그냥 심술이라고 해두지. 상지형님이 새로 생긴 조카에게 나에게 했던 것 처럼 괄시하지 말길바란다고 전해주게 내가보기에 사위는 내 딸아이를 무척 아끼는 듯하니 말일세. 후후후" 그 말을 끝으로 백의인 '천'은 웃음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꿈결같이 느껴지 는 대화였지만 천림왕은 일부러 놓고 간 것이 분명한 부채를 집어 들고 그 것이 꿈이 아님을 알았다. "놈이 호사천 그 잡종 놈이 살아있었다니. 폐하에게 알려야해." 호사천이 말한 상지형님은 바로 호황 호상지(虎上志)를 말했다. 호사천의 출생의 비밀이란, 사실 별거 없었다. 호사천의 부친는 호제였고, 모친은 강호제일세(江湖第一勢) 철혈사자성(鐵血獅子城)의 금지옥엽(金枝玉 葉) 천향군주(天香君主) 사염애(獅念愛)다. 당시 호제가에선 강호야적에 딸 에 불과한 사염애대한 시선이 곱지 못했다. 그러나 호제의 사염애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정말 처절한 것이었다. 그러나 불 행인 것은 사염애가 호제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봄놀이를 나온 사 염애가 미행을 나온 호제의 눈에 띄었고 하늘향기라는 별호를 가진 그녀에 게 한눈에 반한 호제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내 반 강권으로 철사성에 사염 애를 달라는 압력을 넣기에 이른다. 그러나 철사성의 입장에서도 이미 부인 이 둘이나 있었던 호제였지만 탐나는 신랑감이었다. 그렇게 사염애의 뜻과 는 무관하게 일은 진행되었고 사염애는 호제의 3부인이 되었다. 다분히 정 략적인 혼사이다 보니 사랑하는 감정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자신을 아 껴주는 남편이 있고 그 남편은 사실상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인물이었다. 살을 섞는 부부지간인지라 좋은 감정은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강호의 여걸 사염애에게 중경 호궁 깊숙한 구중궁궐(九重宮闕)은 그야말로 감옥이나 다 름없었다. 잠깐 나들이를 가려해도 호위군사들과 궁녀들이 주렁주렁 따라나 서고 호제는 그녀가 바깥출입을 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그도 그렇것이 호제가의 친지들이 강호야적의 딸인 사염애를 좋게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그러나 사염애는 무공의 고수 호제가 호궁을 비울 때면 호제가 돌아오기 전까지 몰래 호궁 규중심처를 벗어나 나들이를 다니곤 했다. 그리고 사염애가 수태를 하고 아이를 낳으니 그가 바로 호사천이었다. 그러 나 갓 태어난 호사천은 호랑이가 아니었다. 호랑이인 호제와 사자인 사염애 의 자식인 호사천은 사자였다. 수인의 경우 부친이 말이면 아내가 토끼라도 말이 태어나야 했다. 부계(父系)의 피를 따라야 하는 것이었다. 모계의 피 를 따르는 경우는 부친이 수인이 아닌 인간인 경우뿐이었다. 그런데 태어난 아이는 사자였으니 호제의 진노했다. 호제는 사염애가 자신이 호궁을 비우 면 몰래 궁을 떠난다는 사실을 알고도 모른 척 했다. 사랑하는 여인이 생각 하고 있는 것을 호제정도의 인물이 모를 리가 없었다. 호제는 사염애가 자 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부부인 이상 언제 가 한번은 돌아봐 줄 것이라고 스스로 자위했다. 하지만 태어난 아이는 호 랑이가 아닌 사자였다. 이에 호제는 사염애를 별궁에 가두고 다시는 발걸음 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염애는 호제의 무관심속에서 아이를 낳은 후 조 리를 못해 몸이 약해져 쓸쓸히 죽어갔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호제는 사염 애를 찾았고 각성한 호사천을 보았다. 호사천(虎獅天) 그는 보기 드물게 호랑이와 사자의 특징을 같이 타고난 호 사(虎獅)였던 것이다. 호사천은 분명한 호제의 피를 받은 아이였다. 이에 사모하는 여인을 끝까지 믿지 못한 호제는 크게 후회하고 한때 자신이 버렸 던 아들에게 서염애에게 미안한 만큼 관심을 기울였고 어미를 잃은 소년은 아비를 얻어 나름대로 행복한 유년을 보냈다. 그러나 호제의 큰아들이지 후 계자인 태자는 자신에게 기울여야할 부친의 관심이 잡종 놈에게 가는 것을 증오했다. 이는 다른 호제의 자식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호사천에게 그 들은 가족이었다. 형제들에게 가족으로 인정받기 위해 스스로 호제가의 그 늘에서 일을 하는 귀호기주가 되어 호제가를 위해 묵묵히 일했다. 그리고 부친의 뒤를 이어 호제가 된 호사천의 상지형님은 호사천의 웬만해선 수인 의 특징이 드러나지 않는 능력을 귀히 여기고 그를 이용해 반 수인세력이라 의심되는 세력을 감시하고 증거가 들어나면 금위위를 동원하여 일소했다. 20여 년 전 호사천은 신분을 숨기고 강무세가에 잠입했다. 후려 강무세가에 잠입한 호사천은 당시호제에게 불새일족의 피를 이어받은 여인에 대한 보 고를 받았고 불새, 주작의 힘을 빌릴 수 있는 깃털의 존재를 알았다. 그런 데 호사천이 불새일족의 피를 이어받은 여인과 맺어졌다는 사실은 호사천의 역량에 두려움을 품고 있던 호제를 자극했다. 강무세가라는 실제적인 힘과 주작이라는 명분, 그리고 무엇보다 호제에게 내재된 그에 대한 증오는 호 제로 하여금 그들 제거할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호사천을 제거하는 것은 간단했다. 수인천하에 조직적으로 반하는 인세에 신분을 숨기고 잠입한 호 사천이 갑주에서 인세가 꾸미는 일을 하고 있을 때 무림마저 장악하려하는 갑주의 서제가에 인세가 암약하고 있다는 정보를 슬쩍 흘린 것이다. 물론 호사천의 정체에 대해선 인세의 주요인물이란 것을 강조했음은 물론이었다. 그리고 귀호기주인 호사천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불새의 깃털을 확보하라 는 명을 내려 모든 귀호기들을 불새의 깃털이 있다는 남례성으로 보낸다. 더불어 세제가에 호사천 곁에 있는 불새일족의 여인에 대한 정보를 흘리고 야망가인 서제 서포틈은 호제가 원하던 반응을 보였다. 연인이자 아내가 행 방불명이 되고 서제가의 무사들의 손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호사천은 상지형님 호제에게 연인을 아내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서제가가 노골적 으로 나온 이상 사실을 밝히고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야만 했기 때문이 었다. 하지만 호제는 오히려 호사천을 반역을 도모했다며 추살령을 내린다. 그리고 호사천은 자신을 추적하는 호영(虎影)의 태반을 죽이이지만 저돌적 인 동귀어진(同歸於盡) 수법에 결국 장강 어는 한곳에 수장되어 버린다. 그 리고 호사천을 추살하는 일에 직접 관여하고 시체는 찾지 못했으나 죽었다 고 결론을 내린 이가 바로 천림왕 호천린 자신이었다. "뭘 그렇게 불안해하시는 거예요?" "몰라. 앞으로 큰일이 생길 것 같은데 뿌연 안개처럼 보이질 않아." 응소매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정서가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설화 아가씨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소매는 설화 아가씨에게 앞으로의 일을 내다 보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쁜 일이예요?" "글쎄? 그것도 모르겠어!" "에이~! 그럼 좋은 일이네요. 뭐! 그리고 아가씨의 그 신기한 능력은 상공 에게는 통하지 않으니 상공과 과 관련된 일이잖아요." "그래, 그래서 더 불안해!" 설화은 아직 가니아 할머니의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 황제가 되면 서방님이 변을 당한다는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설화는 서방님을 위해 자 신이 황제가 될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자신의 신분을 끝까지 숨기기로 했고 서방님 또한 그런 자신의 뜻을 받아들여 주었다. 그러나 포포를 통해 자신 의 신분을 알린 것은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이미 서방님의 위세가 자신의 신분 따위는 아무런 상관없을 정도로 대단해졌기에 백수회로써는 굳이 자신 이 호황가와 관련 있다고 밝혀 더욱 견제를 받게 할 이유가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자신의 신분이 밝혀지면 아이가 태어날 경우 다음 대 호황이 될 가 능성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용황이 나서지 않는 가운데 용천검의 다음 주인 이 될 아이는 자연히 용황을 대신하여 천원회의에 출사할 것이고 그때도 천 하가 여전히 어지럽다면 실제적인 힘을 가진 아이는 호황이 될 수도 있었다 . 수인조정이 서로 나라를 분리하지 않고 천원회의에 묶여있는 이유는 그들이 바로 수인들이기 때문이었다. 12개 수인가문이 천하를 지배하는 가운데 인 간은 물론이고, 다른 수인가들도 그들에게 심각한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다 . 자연히 서로 힘을 모아야 했고,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수인조정은 4백년 을 이어온 것이다. 그리고 거기엔 엄청난 존재감을 가진 용황이 있었다. 고 래로 용은 황제(皇帝)을 상징함으로 십삼인가(十三人家)들도 용(龍)이 천하 를 다스리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없었기에 수인조정은 유지되었다. "에잉! 평소에 상공에 대해 그렇게 자랑을 하시더니 그건 다 거짓이었군요. 뭐, 천하십이지존이 몽땅 덤비더라도 끄떡없을 무위를 가지고 있다면서요? 거기다 60만 대군을 손끝하나로 움직이는 분인데 무얼 걱정하는 거예요. 다른 건 다 걱정하셔도 되지만 상공은 조금도 요만큼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 요." "호호호, 그러니?" "도대체가 상공이 걱정할 때가 어디 있다고 걱정을 사서하는 거예요?" "호호호호, 그래 네 말이 맞아. 천하무적 백호나한이 잘못될까 걱정하는 것 은 내가 생각해 보아도 우스운 일이지." "피! 됐네요! 아가씨, 남편자랑은 그만 듣고 싶네요." 설화는 응소매의 우스꽝스러운 표정에 기분이 풀려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지?" "꺄아! 상공!" "서방님!" 응소매는 어느새 귀신같이 나타나 등 뒤에 서있는 상공을 보고 비명을 질렀 고, 설화도 깜짝 놀랐다. 설화는 이미 화경에 경지에 들어선 초극고수 그러 나 서방님 라혼은 천상천(天上天) 하늘위에 있었다. 설화도 서방님이 접근 하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소매 너, 모초에게 고백을 받았다며?" "엥?" 응소매는 상공의 한마디에 딴청부리는 설화 아가씨를 바라보며 항의했다. "너무해 우리끼리 비밀로 하기로 해놓고!" "뭐야? 내가 알면 안 되는 일이었나? 모초가 요새 허공에 붕붕 떠다녀서 소 매, 네가 허락한줄 알았는데?" "서방님 그게 정말이에요? 소매 너 그 이야기는 왜 했어?" "모, 몰라요.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볼게요." 설화는 허둥지둥 도망치듯 방을 나서는 응소매에게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우리 초아! 잘 부탁해!" "모, 몰라요!" "하하하하하." 금의환향(錦衣還鄕) 머리카락 한 오라기 없는 대머리에 가슴까지 늘여진 굵은 염주(念珠), 그리 고 두툼한 선장을 든 승려가 번화한 상경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 승려 옆에는 눈처럼 하얀 백발과 멋들어진 하얀 수염을 가슴까지 기른 청수한 노 인이 한가로운 걸음걸이로 승려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상경 대중로(大中路) 를 걸었다. "무량수불(無量壽佛), 검야(劍爺). 검야가 간곡히 청하여 그에게 안내하는 것이지만 그의 힘은 상상을 초월하오." "압니다." "그대가 비록 '무(武)'로써 신선이 되었지만 신룡, 그것도 두 신룡과 한꺼 번에 싸워 이기진 못하지 않소?" 승려의 물음에 청수한 노인은 미소로만 답했다. 그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애매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승려는 우려 섞인 말을 계속이었다. "무량수불, 그는 귀선이오. 대개의 귀선들이 그렇듯이 그의 성정 또한 괴팍 하기 이를 데 없소. 그러니 그를 너무 자극하진 마시오." "그가 금강의 맥을 이어 신룡 굉(宏)이 맡아주고 있던 환도 금강을 받았으 니 인사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때 천하를 호령하던 용황이 기거하던 곳. 그리고 궁 어딘가에 용황이 잠 들어 있다는 전설이 서린 용황궁. 지금은 용호원수부라는 현판이 걸려있으 며 현재 천하를 호령하는 용호대원수 천무공이 둥지를 튼 곳이었다. 승려과 청수한 노인은 집주인의 위세만큼이나 거대한 궁문을 지키는 금군에게 다 가가 불호를 외며 부탁했다. "무량수불, 빈승은 보리라 하는데 이곳의 주인을 만나고 싶어 찾아왔소." "죄송합니다. 용호원수부에서는 손님을 받지 않습니다. 용건이 있으시다면 상경부의 부윤을 먼저 찾으십시오." 상경부는 황진성부의 달리 부르는 이름이다. "그런가? 허허 이것 참! 음? 검야?" 보리대불은 검야의 무형검기(無形劍氣)에 흠칫하며 표정을 굳혔다. 그는 아 무래도 이대로 물러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줄기줄기 뻗어 나온 무형의 검기는 굳게 닫힌 궁문을 넘어 외궁(外宮)을 지나 내궁(內宮)의 심처에까 지 영향을 주었다. 범인은 감지조차 못할 검기지만 웬만한 경지의 고수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기운이었다. 얼마나 그렇게 무형검기를 방출했을까? 굳게 닫힌 거대한 궁문이 열리며 갈색피부에 호리호리한 몸매의 미인이 나 와 다른 곳은 쳐다보지도 않고 곧바로 보리대불과 청수한 노인에게 다가와 말했다. "보리대불이십니까?" "그렀네만?" "제 주인이 당신을 보자고 하십니다." 그리곤 대답도 듣지 않고 등을 돌려 활자열린 궁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보리대불과 청수한 노인은 그를 따라 용호원수부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용호원수부의 안쪽 풍경은 말 그대로 군영(軍營)과 다름없었다. 금관조복 을 차려입은 고관대작들이 조회를 열었음직한 광장은 연무장이 되어 상체를 들어낸 무인들이 나름대로 수련을 하고 중갑(重甲)을 착용한 군사들이 무 관의 구령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행진을 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아마도 외궁(外宮) 전체가 이러한 형상인 것 같았다. 그리고 구중궁궐(九重宮闕)의 심처 잘 가꾸어진 정원과 인공호수 그리고, 가산(假山) 지나 숲속에 지어 진 운치 있는 별채에 도착해서야 탁자에 앉아있는 귀선(鬼仙)과 하늘 밖 하 늘 꽃이라는 그의 아내를 만날 수 있었다. "무량수불." "오랜만이군." "소녀 설화 보리대불 뵙습니다." 설화는 보리대불이 수미산의 불선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남아 알고 있었기에 예의를 다해 그를 맞았다. "여기 이분은 천산의 신선으로……." "미욱하지만 검으로 신선의 반열에 오른 자이올시다. 환도 금강의 새 주인 에게 비무를 청해도 되겠습니까?" "……!" 보리대불은 귀선을 자극하지 말라는 자신의 충고를 잊은 듯 비무를 청하는 검야의 태도에 움찔했고 설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방님의 반응을 살폈 다. 그러나 서방님의 반응은 설화가 짐작한 데로였다. "따라와라!" -팍! 라혼은 무형검기로 자신을 자극할 때부터 그가 누구인지 짐작하고 있었다. 겉모습과 기도는 변했지만 본래 가진 기운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중경의 호천궁이던 상경의 용황궁이던 성스런 천호와 맞붙어 있었다. 용황 궁엔 맑고 투명한 넓디넓은 천호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장소가 있었고 용 황의 처소에서 천호의 물결이 햇빛을 산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라혼 은 청수한 노인이 비무를 청하며 도전해 오자 극상승의 신법을 펼쳐 천호한 가운데로 떨어졌다. 이른바 물을 밟고 서있을 수 있는 경지 무력답수(無力 踏水)였다. 그러자 곧이어 비무를 청한 신선과 보리대불, 설화까지 그러한 경지의 신법조예를 보이며·천호의 맑은 물위로 떨어져 내렸다. "……." 그리고 라혼은 움직이지 않고 무형검기만을 발하는 검선에게 칼을 위에서 아래로 똑바로 내려치는 직도황룡(直道黃龍)의 일식으로 내리 쪼개갔다. 형 (形)은 단순하기 이를 데 없지만 라혼과 검선은 이미 서로 공간을 점하기 위해 치열한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검선의 무형검기와 라혼이 펼치는 대기 운기(大氣運氣)는 서로가 서로의 기세(氣勢)를 누르기 위해 치열한 접전을 펼치고 있었고 라혼은 그 와중에서도 격렬하게 움직이는 것이었다. 거세고 강한 라혼의 공격에 검선은 바람에 몸을 내맡긴 뜬 구름처럼 자연스럽게 몸 을 운신하고 검이 가고자 하는 곳에 손을 뻗었다. "대, 대단하군. 무량수불!" "……." 설화는 이 순간 무인이 만들어내는 한 폭의 그림을 보고 있는 듯했다. 맑고 투명한 천호의 수면에서 동작 하나하나가 그림 같이 검을 놀리는 서방님과 검선의 비무는 한마디로 무(武)의 극의(極意)가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었다 . 쓸데없는 힘의 낭비 없이 일수, 일수 천년의 현기와 만근거력이 담겨있으 니……. 허공에서 마음대로 몸을 놀리는 천외비선(天外飛仙)의 높은 경지와 신외지물(身外之物)인 검이 마치 경지에 이른 무인의 신체의 일부분인냥 자연스럽게 다루는 신검합일(身劍合一), 손에는 검이 없어도 마음에 검이 있는 수중무검(手中無劍) 심중유검(心中有劍)의 심검(心劍)에 경지와 그것 을 초월한 무형검(無形劍). 이모든 것은 몸으로 검으로 펼치는 무학의 최후 에 경지가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었다. 라혼은 검선과 비무 속에서 힘의 제어하는 묘리를 깨달아가고 있었다. 그리 고 라혼과 검선은 서로 검기(劍氣)로 나누는 논검(論劍)을 거두고 서로를 향하는 검 끝에 기운을 집중시켰다. 그것은 바로 검환(劍丸)으로 검 전체의 기운을 구슬만한 한 점에 집중시킨 것이었다. 라혼의 황금빛 검환과 검선 의 하얀 검환이 서로의 허점을 노리며 파고들었고 공방은 가열 되었다. 그 리고……. -쩌렁~! -콰광~! -촤악! 라혼은 고리모양의 검강인 검환(劍環)을 만들어 검선의 검환을 막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검환으로 검선을 공격했다. 검선은 검환이 깨진 충 격에 주춤했고 그 일수유(一須臾)도 못되는 짧은 당황은 허점이 되어 채 몸 을 피하지 못하고 영기선검(靈氣仙劍)으로 황금빛 덩어리를 깼다. 그러자 영기선검과 부딪힌 검환은 무쇠로 만든 공이 깨지는 굉음을 내며 사라졌고 그 여파에 고요하던 천호가 반구 형태로 밀려났다 곧 물길이 수십 장이나 치솟았다. 그리고 라혼의 주욱~! 가로 베는 횡소천군(橫掃千軍) 일식은 천 호의 호면(湖面)과 하늘로 솟아오른 물길을 갈라놓았다. 그리고 그 검세(劍 勢)에 깃든 억만근 거력은 검선을 덮쳤다. 검선은 라혼의 연이은 공세에 조 금씩 틈을 보이더니 마지막 횡소천군에 실린 거력을 가까스로 흘렸지만 최 상의 검로를 따라 거스름이 없이 다가와 미간(眉間)을 점한 폭이 좁은 협봉 검의 검첨(劍尖)에 서린 기운을 느끼고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 "내가 졌소이다." "후후후, 날 꺾으려면 억겁의 시간을 수련해도 모자를 거다. 현석(玄石)아! " "……!" 무(武)로 검(劍)으로 신선에 반열에 오른 아직까지 천하에 이름이 쟁쟁한 전설의 검호(劍豪) 검선은 바로 유운검선(流雲劍仙)이었다. 검선은 설마, 설마 했지만 상대가 할아버지의 전인(傳人)이 아니라 해노라 불리던 할아버 지 그 자신임을 확인받자 크게 놀랐다. "하, 할아버지?" "하하하하, 연배는 분명 내가 네 할아버지뻘이지만 지금은 조금 그렇군." 나이 지긋한 노인이 새파랗게 젊은 사내에게 할아버지라 부르고 있는 것이 다. 실제사실과는 맞는 행동이나 보기에는 조금 그런 상황이었다. "서방님." "설화야. 인사해라 내 양손자 유운검선 현석이다." "예에?" 설화는 검선의 정체가 약 2백 여전 천하제일검이며 아직까지 위명이 높은 존재인 것도 놀랐는데 서방님의 양손자라는 사실에 입을 벌렸다. 서방님에 게 양손자면 자신에게도 양손자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서방님은 서방 님 자신은 자신이었다. "하아~!" "왜 그렇게 한숨을 쉬시는 거예요?" 응소매는 설화 아가씨의 한숨을 쉬는 소리에 반응하며 물었다. "서방님 때문에……." "상공이 또 뭘 어쨌는데요?" "그런 게 있어. 근데 서방님하고 나하고 나이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것 같 지 않니?" "무슨 말씀을 겉으로 보기에 딱 좋은데요." 두 신선에게 서방님을 빼앗긴 설화는 응소매와 더불어 시간을 보내고 있었 다. 그때 아직까지 시비를 자처하는 초초가 손님이 왔음을 알렸다. "마님, 해홍군주가 찾아왔습니다." "포포가?" "한 낭자는 또 뭐 하러 왔데요? 그리고 후선은 상공의 적인데 군주는 무슨 ……." "소매 너어~! 나 다 듣고 있어!" "끼야! 초초 너무해 바로 등 뒤에 달고 오면 어떻게?" "달긴 뭘 달어? 내가 물건이니?" 한포포와 응소매의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고 같이 자리한 설화, 포포, 초초, 응소매는 이런저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부터 신변잡기까지를 망라하는 수 다를 시작했다. "그런데, 포포 왜 후려로 돌아가지 않는 거예요?" "후선은 수인을 싫어해요. 내 존재자체가 양부에게 큰 부담이 될 정도로… …." 설화의 물음에 포포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설화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물었다. "하지만 요새 후선 주요요직에 수인이 앉아 있지 않나요? 그 정도라면 한번 찾아가는 것도 좋을 텐데?" "그렇다고 해도 동인성과 앙신성 사람들이 수인을 싫어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죠. 그 얘긴 그만해요. 그보다 메이의 해산일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 임산부는 건강한 거예요?" "아유~! 말도 마세요. 모군사가 바람 불면 넘어질까? 비 내리는 소리에 놀 라지 않을까? 챙겨주는 통에 메이 언니는 여왕이 따로 없다니까요. 메이 언 니가 설화 아가씨를 따라나서겠다고 고집부릴 때 모군사의 표정이 정말 가 관이었다고요." "어머나 어땠었는지 환히 보인다, 보여……. 호호호호." "호호호호호……." 고개를 설레설레 저의며 말하는 응소매의 태도에 네 여자들은 웃음보를 터 트렸다. 그러다 문득 한포포가 설화에게 물었다. "그때, 제게 한 이야기 중 모친께서는 돌아가셨지만 부친은 생사를 모르신 다고 하셨죠?" "……." "부친을 찾고 싶은 생각은 없나요?" 설화는 포포의 물음에 가만히 고개를 돌려 창밖에 펼쳐진 천호의 맑은 물을 보고는 물음에 대답했다. "찾고 싶어요. 하지만 찾고 나서 그 결과가 두렵기도 해요. 포포언니 우리 는 친구 맞죠?" "……." 두 여인이 눈빛을 교환하는 이 순간 원래 조용한 초초는 물론 수다쟁이 응 소매 또한 침묵을 지켰다. 그라고 한포포가 무거운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말했다. "설화의 그 아름다움 속에 감춰진 현기야 말로 천상천화의 진면목이죠. 하 긴 그 정도가 되니 라혼 사부 같은 사내를 감당할 수 있었겠죠." "……." "어느 정도 눈치는 체셨겠지만 저는 설화의 부친을 알고 있어요. 또 그분이 살아있다는 사실도 알고요. 그리고 저는 그분을 위해서 일해요. 그분은 백 수회의 태상회주세요." "……." 한포포는 흔들리는 설화의 눈동자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분이 설화 아가씨를 만나고 싶어 하세요. 그리고 미안해요. 저를 믿고 신상내력을 말해주었는데 그 사실을 숨겨서 저는 설화의 친구이기도 하지만 백수회에서 일하는 이상 여러 가지 말 못할 비밀을 가질 수밖에 없 답니다." 설화는 포포의 변명은 이미 듣고 있지 않았다. 부친이 살아 있었으며 곧 자 신을 만나기 위해 찾아온다는 말만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 뿐이었다. 유운검선은 무도(武道)의 경지가 높아지고 검(劍)이 완성돼 갈수록 해노 할 아버지가 주었던 대무도경 상의 내용은 유운검선에게 하나의 거대한 벽이나 다름없었다.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절대자는 고독한 법이다. 하지만 유 운검선은 달랐다. 그에겐 비록 자신의 실질적인 스승인 해노 할아버지가 보 고 있는 경지를 외경하며 그곳에 실제로 발을 디디려 노력했다. 막 강호에 출도 하여 천하무림대회에서 우승하고 보잘것없다 생각했던 자신 의 경지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 검부의 부주인 대사형은 그것을 사부가 자신이 아닌 유운검선에게 유운검법의 마지막 깨달음을 전수했다고 믿어 섭 섭함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비록 해노 할아버지에게 배웠지만 자신이 전 수 받은 것이 사부님의 오의(悟意)임을 알았기에 뭐라 변명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할아버지의 정체를 폭로해서 청수를 방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 렇게 주유강호(周遊江湖)를 한 몇 십 년 후 당시 천하제일고수이자 천하제 일 검이었던 일검자(一劍者) 원숭(猿崇)을 어렵사리 꺾은 후 할아버지는 거 대한 벽이 되었다. 그 벽을 뛰어넘는 일은 유운검선으로 하여금 필생의 목 적이자 소원되어 당시 유운검선이 판단하기에 식견이 있는 고인들을 찾아 할아버지의 대무도경을 연구에 연구를 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유운신공(流雲神功)과 유운천하검법(流雲天下劍法)이었다. 그러나 유운검선 은 완성된 신공과 검법의 경지가 할아버지가 바라보는 경지보다 아래에 있 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유운검선은 스스로 신공과 검법을 버렸다. 그 러나 유운검선의 선택은 현명한 것이었다. 신공을 버린 후 새로운 눈이 떠 지고 드디어 할아버지가 바라보는 경지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의 한축이 바로 무형검기였다. 깨달음의 무공인 무형검기를 계속 수 련한 끝에 영기선검을 얻었고 그것으로 인해 등선(登仙)하여 천산선맥에 속 한 신선(神仙)되었다. 그리고 사바세상의 모든 인연을 끊고 앞으로 있을 신 마대전을 준비하며 수련을 계속했지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으 니 자신의 경지가 과연 할아버지의 경지를 넘어섰는가? 였다. 그리고 두 신 룡을 상대하여 우위를 점하고 신룡 굉(宏)에게 환도 금강을 받은 귀선에게 한 가닥 인연의 끈이 닿아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귀선을 만났을 때 할아버 지의 기운을 느꼈고, 필생의 소원이었던 일을 부탁했다. 그리고 지금 위력 은 차이가 있으나 같은 경지에 서있음을 알았고 귀선이 바로 해노 할아버지 임을 알았다. "과연, 저의 영기선검과 스승님의 영인은 같은 것이로군요." "그래 깨달음의 차이가 있어 달리 느껴지겠지만 그 원리는 같다." "그럼 스승님이 생각하시는 공검이란 무엇입니까?" 이미 신선에 반열에 올라 세속의 썩은 명리나 새로운 검도(劍道)의 경지 같 은 것은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의미가 없다고 해서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 었다. 그래서 젊은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할아버지(?)에게 스스럼없이 스승님이라 부르며 즐거운 마음으로 논검(論劍)을 계속했다. "공간 자체를 장악하는 것을 넘어 공간을 검으로 삼는 경지다. 심검을 얻고 나서야 보이는 경지이기는 하지만 심검을 뛰어넘는 경지는 아니지 그러나 공간을 마음대로 사용한다는 것은 이미 신과 같은 힘을 사용한다는 뜻이다. " "하나 공간을 검으로 쓴다고 해서 심검의 정화인 무형검기보다 나를 것은 아무것도 없을 텐데요. 차라리 영기선검을 갈고 닦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 "그것은 가는 길에 차이다. 무가 완성되어야 비로소 심검을 얻을 수 있다. 심검을 얻어 새로운 경지에 눈을 떠 또다시 새로운 무의 길을 가는데 길이 한 가지 일리 없지." 심검이란 말 그대로 마음속의 검이다. 나이어린 계집아이에게 예리한 비수 만 손에 들려있어도 그 계집아이는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상대가 세상모르 고 잠에 취해있다면 더욱 쉬운 일이다. 선악의 문제를 떠나 그 계집아이의 마음속에 비수가 있어 살의가 확고하다면 몸은 그저 마음을 따라 갈 것이다 . 심장의 위치를 알고 약간의 방법을 안다면 더욱 쉬울 것이다. 이것이 바 로 마음의 칼인 심검이다. 그리고 조금 다른 의미로 오랜 수련을 거친 무인 이라 할지라도 진검(眞劍)을 들고 싸우는 죽음의 공포를 견디기는 힘들다. 평소 연무할 땐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간단한 초식도 살의를 품은 상대 앞에 서 펼치기 힘들다. 만일 평소 연무할 때처럼 손발이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 준다면 마음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무도의 경지는 한 차원 상승하는 것이다. 그렇게 몸과 마음이 같이 최고조에 달할 때 마음과 몸이 하나 된 순간 얻 어지는 것이 심검인 것이다. 공검(空劍)은 무사가 자신이 유리한 자신이 어떤 무공을 사용했을 때 가장 유리한 거리를 말한다. 사람에 따라 그것이 점(點)이 될 수도, 선(線)이 될 수도, 그리고 원(圓)이 되어 영역을 이룰 수도 있었다. 그리고 심검은 얻 은 자에게 공검의 의미는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라혼은 그것은 새로 운 길로 보았고, 유운검선은 그것을 무형검기를 수련하면 자연히 따라오는 부차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둘은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지 않았다. 진 리(眞理)란 본래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량수불! 두 분의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그보다 시주의 입장을 말씀해줄 수 없겠습니까?" "없다." "……?" "나는 아직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결정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대가 원 하는 답을 해줄 수가 없다." "무량수불, 그러시다면 더 이상 묻지 않겠습니다. 빈승은 이만 수미로 돌아 가겠습니다." -화르르르르……. 보리대불은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몸을 불사르는 화둔술(火遁術)을 시전해 수 미산으로 돌아 가버렸다. 그리고 라혼의 시선은 유운검선 현석에게 머물렀 다. 그러자 유운검선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당분간 스승님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속세에 쓸데없는 예의범절에 얽매여 있는 나의 아내가 너 같은 노인을 어 려워하니 안 돼!" 그러자 유운검선은 손으로 얼굴을 훑는 시늉을 하더니 눈처럼 하얀 백발은 묵(墨)처럼 검어지고, 가슴까지 자라있던 하얀 수염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바로 라혼이 검부에서 해노라 불리던 시절 보아왔던 젊은 현석의 모습이었다. "어떻습니까? 천산의 다른 신선들에게 배운 기문둔갑(奇門遁甲)인데?" 그러나 목소리는 여전히 젊은 청년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목소리는 바꿀 수 없는 거냐?" "아! 이런 처음 시전해 보는 것이라 아, 아, 아~! 어떻습니까?" "이제 조금 났군. 그보다 그 선술이라는 것 내게 가르쳐줘라!" 라혼은 바로 눈앞에서 늙으수레한 노인의 목소리에서 젊은이의 목소리로 바 뀌는 것을 보고 대뜸 선술을 가르쳐 달라 요구했다. 그리고 현석은 그날부 터 라혼에게 선술(仙術)을 가르치는 선술스승이 되었다. "세자저하, 지금 우리를 도와 줄 수 있는 세력은 백호나한이 유일합니다." "그렇습니다. 아직은 우리가 천원회의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것만 으로 학가에 빼앗긴 임주를 되찾진 못합니다." 계제가(鷄帝家)의 세자(世子) 계호림(鷄豪臨)은 천무공 백호나한에게 도움 을 청하라는 가신들의 말에 선뜻 동의할 수가 없었다. 계세자가 천무공의 아내인 천상천화를 무척 원했다는 것은 천하에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백호나한이 만조백관에게 자신이 용천검주임을 밝히던 그날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정전 앞마당을 걷던 그녀의 모습에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 꼈다. 이미 잊었다 여겼고 다시 본다 해도 별 감흥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는 순간 한순간 무너져버렸다. 그런데 가신들은 그녀의 남편에게 머리를 조아리라 간하고 있었다. 계호림의 이성은 가문의 처지를 생각할 때 그에게 부탁하여 도움을 얻어내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란 것을 알았다. 그러나 한 가닥 사내의 자존심은 할머니를 따르지 않고 계제 가의 후계자라는 이름만 남은 자신을 따르는 충성스런 가신들이 원하는 답 을 할 수 없게 했다. "그가 나를 어찌 생각하고 있을지 의문이오. 하니 천천히 조심스럽게 접촉 하여 그의 반응을 살피는 것이 우선이니 그리 처리토록 하십시다." "알겠습니다. 저하의 말씀이 일리가 있습니다. 급할수록 돌아간다는 말이 있으니 상경으로 사람을 보내 그의 측근들부터 만나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숙부!" 중경으로 피신한 계제가의 식솔 중 가장 웃어른인 지세공(智世公) 계만우( 鷄萬禹)가 가신들의 의견과 세자 계호림의 의견을 수렴해 방법을 설정하는 것으로 정리하자 모두 그것을 따랐다. 지세공 계만우는 계제 계만고과 모친 이 다른 배다른 동생으로 계호림의 숙부였다. 그래서 계제 계만고의 친어미 인 태사 학초현에게 지세공 계만우는 눈에 거슬리는 존재였고 사실상 태사 학초현이 전권을 장악하고 있던 임주에 있지 못하고 중경에 거처를 마련해 살았다. 그러다 학초현이 계제가의 임주를 노골적으로 찬탈하자 친 할머니 이기도 한 그녀의 행태에 반발하고 임주를 빠져나온 계세자 계호림에게 자 신의 거처를 머물게 하고 조정의 중론이 학가를 새로운 십이진가로 받아들 이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그들에게 적극적인 힘을 얻어내는 것은 실패하였는데 상국이었던 서 포틈과 천림왕의 힘겨루기에서 계제가의 사실상의 실권자였던 학초현이 의 도적으로 중립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그 영향이 남아 그 누구도 선뜻 계제가 를 도우려 하지 않았다. 그런 계제가에게 천무공 백호나한은 마지막 남은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지금은 천무공의 세력이 천하를 압도한다고 하나 십 수 년 후가 되면 십이진가의 무장이 끝날 것이고 그럼 그들과 힘겨루기를 해야 하는 천무공은 친구하나 없는 외로운 싸움을 해야 할 것이다. 지금 힘 이 있을 때 계제가를 돕고 친구를 얻으면 나중에 큰 득이 될 것이 자명하니 그것을 근거로 천무공 백호나한을 설득하면 십중팔구 도와주리라 생각되었 다. "뭐야! 천이 살아있어?" "……." "네 입으로 천의 죽음을 확인했다고 하지 않았느냐?" 천무공과 관계가 껄끄럽기는 하지만 그의 태도는 호황가를 존중하는 쪽에 무게중심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아내인 천상천화가 호사천의 딸이 확실하 다면 완전한 정적으로 돌아서는 셈이 되었다. 지금 호황은 나이가 들어 잔 병치레가 잦아져 건강에 자신이 없고 태자또한 병약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천무공이 호황가를 지지하니 그에게 태자의 후견인이 되어줄 것을 부탁하는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이제 잘못하면 천자의 자리마저 위태 로운 상황이 되었으니……. 하지만 천상천화가 범이 틀림없다면 천무공의 숨은 의도 또한 의심스러웠다. 이렇게 된 이상 천무공에게 숨은 의도가 있 음을 알아낸 천림왕을 탓할 수만도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선수를 쳐야 합니다. 천의 딸이라면 반적 강무의 여 식이기도 하니 십제들에게 은밀히 격문을 띄워 만약의 사태에 대비토록하고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 천무공을 중경으로 불러들여 그의 수급을 베야 합니 다." "으음!" 호황은 과격한 천림왕의 계획에 찬동할 수도 무시할 수도 없었다. 용천검의 주인을 도모하는 것은 금기를 깨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비록 십이진가의 당주는 아니지만 그를 도모하는 것은 십제(十帝)중 하나를 도모하는 것과 같은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과연 반적 강무의 핏줄을 아내로 가지고 있다 는 이유로 아니 반적 강무와 손을 맞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도모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었다. "아니 안 된다. 잘못하다가는 조정의 사직이 무너진다. 하나로 뭉쳐있기에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이지 흩어지면 파멸만이 있을 뿐이다." "제가 목을 내놓겠습니다." "……!" "형님폐하는 모르는 척 가만히 계십시오. 제가 모든 업을 뒤집어쓰고 가겠 습니다." "하지만……." "제게 숨겨둔 마지막 패가 있습니다. 이제야 겨우 우리 가문이 천자의 가문 이 되었습니다. 호황가의 천년사직을 위해서라면 이 한목숨 무에 아깝겠습 니까?" 호황은 비장한 각오의 동복형제인 천림왕을 끝내 말리지 못했다. 이성은 안 되는 일이라 말하고 있었지만 호사천이란 이름이 주는 알 수 없는 분노와 천무공이 가진 힘에 대한 두려움은 호황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호황은 그저 눈을 감고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천림왕은 그것을 암묵적인 허락으로 받아들였다. 환도금강(幻島金剛) 먼동이 뜨고 날이 밝아 새파래진 하늘 높이 갖가지 형상의 구름이 떠있는 상쾌한 아침이다. 대부분 무인들은 해가 뜨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새벽연 공을 한다. 설화 또한 여느 무인과 같이 해가 뜨기 전 잠자리에서 일어나 연공수련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서방님과 설화가 거처로 삼은 용황궁 깊숙 한 곳 숲속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별채는 그렇게 일찍 하루를 시작했다. 수련을 끝낸 설화는 상쾌한 기분으로 땀에 젖은 몸을 씻은 설화는 봄의 새 순 같은 녹색 궁장을 챙겨 입고 머리를 매만진 후 서방님이 갈아입을 옷을 골라 챙겨 들고 별채후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로 그곳에 서방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 서방님은 언제나 후원의 작은 정자에 앉아 명상에 잠겼다. 설화는 오늘따라 장난기가 발동하는 것을 느끼며 정자 가운데 돌로 된 탁자에 서방님이 갈 아입을 흑의를 내려놓고는 서방님의 목을 등 뒤에서 가만히 안았다. 라혼은 설화가 자신의 목을 감싸 안아오는 느낌에 명상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기 분을 좋게 하는 설화의 체온과 체향을 느끼며 미소 지었다. 설화 또한 그렇 게 서방님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아버지가 살아계시데요." "……." "그리고 그 아버지가 조만간 절 찾으신데요." "……." 설화는 라혼을 더욱 힘주어 안으며 불안한 음색으로 말했다. "그런데요. 저는 불안해요. 저를 낳아주신 분을 만나는데 가슴이 설레기는 커녕 꽉 막힌 듯 답답해요." "앞일을 내다보는 능력이 있는 네가 불안에 떤다면 곧 큰일이 있겠구나. 어 쩌지?" "이익! 너무해 나는 진심이라고요." "우악. 케엑!" 라혼의 능청스런 너스레에 설화는 서방님의 목을 조르듯 꼬옥 안았고 라혼 은 엄살을 피우며 호들갑을 떨었다. "나보고 어쩌라고? 네가 불안하고 답답한 이유를 선견(先見) 능력이 있는 너도 모르는데 나라고 별수 있나? 닥쳐봐야 알 일이지." "누가 일을 해결하래요. 예쁘고 사랑스런 아내를 위해 위로의 말 몇 마디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예쁘고 사랑스런 아내의 힘을 '넘치도록' 북돋아 줬잖아!" 묘한 단어를 강조하는 서방님의 말에 설화 '팽!' 토라지는 시늉을 하며 말 했다. "흥! 지금 생각해보면 서방님은 낭만이 없어! 여자에게 감동을 주는 말 몇 마디도 못하고……." "여자를 감격시키는 낭만적인 말? 어떻게 하면 되는데? 설화가 가르쳐줘." "제가 왜요?" "내가 그런 말을 한다면 너뿐이잖아." "……." "여자들이 좋아할만한 말은 관심 없지만 네가 좋아하는 말은 꼭 알아두고 싶다." 설화는 서방님의 말에 새삼스레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얼굴을 붉 혔다. 그러나……. "어때 나도 설화 네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정도는 된다고." "누, 누가 가슴이 두근거렸다고 그래요. 서방님 바보!" 라혼은 새빨개진 얼굴로 경공신법을 전개하여 집안으로 도망가는 설화의 아 름다운 뒷모습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옷을 벗 은 라혼은 석탁(石卓) 위에 설화가 챙겨놓은 흑의로 챙겨 입고 약간의 시간 이 흐르고 집안에서 설화의 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옷 다 갈아입었으면 와서 식사해요!" "……." 라혼은 벗어놓은 옷가지를 챙겨 천천히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은 용 황궁의 금림(禁林)으로 한때 용황이 잠시 쉬어가던 곳이었다. 라혼은 용천 검주로써 용황궁을 접수하고 용호원수부를 열어 이곳은 천하정세를 논의하 는 궁전에서 군사들을 조련하는 군영(軍營)으로 기능을 바꿔버렸다. 본래 은밀한 내원(內院)이었던 곳까지 군사들의 거처로 개수하고 궁을 장식하던 골동품과 서화 등은 모두 토금전장에 보내버렸다. 그리고 지하 장보고(藏寶 庫)의 막대한 황금과 기진이보(奇眞異寶) 또한 토금전장의 창고로 옮겨지고 장보고는 병기를 보관하는 병기창고가 되었다. 용황궁에 속해 있던 얼마 안 되는 궁녀들과 내관들은 군무관이 되어 잡다한 일을 처리하게 했다. 그 리고 올 가을 추수가 끝나면 상경은 물론 원주전역에서 모병을 하기로 했다 . 이미 대수영 전체 병력의 절반에 해당하는 군사들이 용호군이 된 상태였 다. 사실 용호군과 대수영은 구분은 아직 의미 없었다. 다만 용호군은 전투를 목적으로 하는 순수한 군사들이고 대수영은 물길을 감시와 순찰 등의 임무 를 맡은 선원들을 말했다. 새로 창설되는 용호군은 아직까지 대수영의 군사 들이 주를 이루지만 앞으로 상경의 금군들과 백호영을 포함하고 암묵적으로 용황이 책임지던 천호남쪽 남원주의 군사들까지 관할하게 되는 군부였다. 그렇게 거창한 계획을 세워둔 라혼이었지만 신경 쓰이고 귀찮은 일은 수하 들에게 모두 떠넘기고 자신은 설화와 함께 금림에서 머물며 한가로운 세월 을 보내고 있었다. 북지절도사인 설화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모원에게 모 두 떠넘기고 있으니 부창부수(夫唱婦隨)라 할만 했다. "서방님 아!" "아!" 그리고 요새 설화는 서방님에게 이것저것 거둬 먹이는데 재미가 들렸는지 갖가지 요리를 만들었는데 처음 한입은 항상 이렇게 손수 먹여주었다. "어때요?" "맛있어." "정말이요? 다행이다. 그리고 이것도요. 아!" "……." 설화가 이렇게 행동하는데 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라혼과 설화가 거처 하는 금림은 단둘만이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인천궁주의 제자가 되 어 하루아침에 한 단체의 후계자인 소궁주가 되어 그때까지 천방지축으로 산천을 뛰어놀던 설화는 조신하고 침착한 모습을 보여야 했다. 그러나 그런 것이 딱히 거북하거나 싫지 않고 자연스러웠기에 스스럼없이 그것에 적응 할 수 있었다. 사실 빨리 커서 어른이 돼야 서방님의 진짜(?) 색시가 된다 는 동네 아주머니들의 말을 귀가 따갑게 들었기에 일부러 조신하게 행동했 지만 본성이 활달한 설화에게 약간은 부담이 되었다. 백호문 근처 백호나한 부에서 살 때도 집안에 항상 여인천궁의 검녀들이 있었고 해서 서방님에게 스스럼없이 대하는 것은 저녁에 잠들기 전뿐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태회진 에서 함께 지낼 때 신분상 시녀들이 항상 곁에 있었고 설화의 행동하나하나 가 설화를 천녀(天女)라 부르며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안위에 관련이 있어 더욱 행동이 조심스러웠다. 더욱이 북지무림맹의 인사들이 라혼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언제나 함께할 수는 없었다. 설화와 라혼에겐 단순한 부 부지사(夫婦之事)지만 그것이 권력과 연결이 되면 문제가 달라졌다. 백호나 한이 무림맹에 관여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는 무림인들에게 백호나한이 천 녀의 남편이라는 사실이 무척 거슬리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림맹 의 일반무사나 백성들은 천상천화를 중심으로 뭉쳐있었으니 그들로썬 달리 방법이 없었다. 어쨌거나 설화에게 상경에 자리 잡고 지난 석 달간의 금림에서 서방님과 둘 만 생활은 그전과 같이 말괄량이처럼 변한 것은 아니었지만 스스럼없고 활 달한 설화 본래의 모습을 되찾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요리 한 두 가지로 아침식사를 끝내고 차를 마시며 한가로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진 시(辰時:오전7~9시)가 끝나가는 무렵 라혼은 금림을 나섰다. 그리고 설화는 설거지와 빨래를 하고 간단한 점심을 준비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정오께 응소매가 찾아와 용호원수부의 이런저런 잡다한 이야기를 했다. 설화는 그 런 응소매와 점심을 함께 먹으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글쎄, 그 일로 지심이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더라고요. 하지만 그 꼬장꼬 장한 태감 영감도 만만치가 않아보였는데 앞으로 흥미진진해 졌어요." "그러니? 그런데 황태감이 지심을 양자삼겠다고 나선 것이 왜 지심이 화낼 이지? "쿡쿡쿡, 그게요. 지심이 척 보기에도 상당한 미인이잖아요. 그런데 전날 무슨 일이 있었나 보더라고요." "일? 무슨 일?" "그게 태감 영감이 손버릇이 안 좋거든요. 그것 때문에 다른 환관들이 중경 호천궁으로 자리를 옮길 때 함께 가지 못하고 주인 없는 궁성에 남은 것인 데 오히려 보는 눈이 없어지자 대놓고 궁녀들의 엉덩이를 주물렀던 모양이 더라고요." "그제 정말이야?" "예, 하지만 궁녀들 얘기를 들어보면 그 한 가지만 빼놓으면 괜찮은 분이래 요. 그런데 쿡쿡쿡……." "……?" "지심의 엉덩이도 그 변태 영감의 손을 탄 모양이더라고요. 거기까지는 괜 찮은데 문제는 지심의 반응이 무덤덤했는데 그게 변태 영감의 묘한 자존심 을 건든 모양이더라고요." "묘한 자존심?" "그게 다른 환관들이 그러는데 태감 영감이 장난을 치는 이유가 여자의 놀 라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목석같은 지심이 무덤덤하게 반응했으 니 그들 말을 빌리자면 지루한 일상에 목표가 생겼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렇 데요. 그런데 지심이 환관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어찌 알았는지 대뜸 양자 삼겠다고 소문을 내고 그것을 명분으로 노골적으로 지심의 뒤를 졸졸 따라 다니는 통에 통나무 같은 지심도 화가 나는 모양이더라고요." 설화가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사이 라혼은 집무실에서 남상과 태회진, 동경 , 서경, 봉수성 등에서 올라온 장계를 읽고, 용호군 창설에 사용되는 예산 을 계산한 내용을 검토해 결재했다. 용호원수부의 모든 자금융통은 토금전 장에서 도맡아 관리하고 있었다. 군량, 병기, 봉록, 각종 예산집행 등이 토 금전장에서 처리하게 되어 있었고 토금전장 입장에서 용호원수부가 사용되 는 자금은 계속 없어지는 자금임으로 관리가 확실했다. 그렇게 전체적인 돌 아가는 사정을 훑어본 라혼은 지심과 잔폭광마와 함께 산책 겸 시찰을 나섰 다. 딱히 정해놓고 들리는 것이 아니라 아무 곳이나 발길 닫는 데로 용호원 수부의 명패를 건 용황궁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이 신시(申時: 오후3~5시) 무렵 금림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라혼이 거처로 돌아와 하는 일은 바로 쌀을 씻어 밥을 짓는 일이었다. 라혼 이 잔폭광마와 지심, 초초, 응소매 그리고 설화와 자식이 먹을 분량의 밥을 지으면 설화는 오랜 시간을 공들여 요리를 준비했다. 그 시간 잔폭광마는 물을 길어 집안에 있는 커다란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워 넣었고 초초와 응 소매는 설화를 도와 밑 준비를 했다. 지심은 이것저것 잡다한 심부름을 했 다. 무쇠 솥 안에 쌀이 밥이 되고 뜸 들이는 시간이 끝나면 마당에 커다란 탁자를 놓고 상을 차려 식사를 시작했다. 풍성하기 이를 데 없는 식탁이었 지만 당금 천하를 호령하는 사람의 식탁치곤 무척이나 검소하다 할 수 있었 다. 그렇게 식사를 끝내고 차까지 마고나면 어느덧 땅거미가 지는 시간이 된다. 그러면 응소매와 초초, 잔폭광마, 지심이 금림을 떠나고 라혼은 설화 와 붉게 타오르는 석양을 배경삼아 비무대련을 했다. 이미 경지에 이른 설 화는 더 이상의 진보가 없이 한 가닥 깨달음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러나 설화는 그것에 대해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리고 해가 완전히 떨어져 밤하늘 에 별이 뜨면 라혼은 설화가 응소매에게 들은 용호원수부의 사람들의 이야 기를 들었다. "황태감이 지심을?" "그래요." "흐음~! 뭐 나쁘지 않은데 그런데 지심 질색한다면 어렵겠군." "소매가 그러는데 황태감의 고집이 그렇게 대단하데요. 제가 보기에 지심도 만만치 않은데……." "……." "그러고 보니 메이의 산달에 얼마 남지 않았네요." "벌써 그렇게 됐나?" "저도 메이처럼 아이를 낳고 싶은데……." "……." 라혼은 설화의 지나가가는 투로 하는 말을 못들은 척 화제를 바꾸었다. "그보다 포포는 그때 한번 들리고 소식이 없군. 벌써 보름이 다 되가는데. 장인 되는 양반이 오려면 빨리 와야지. 우리 색시 애간장을 이토록 끓게 할 까?" "하아! 그러게 말이에요." 설화는 서방님이 의도적으로 후세에 대한 화제가 나오면 말을 돌린다는 것 을 알았다. 야속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뭔가 깊은 뜻이 있거나 말 못할 고충이 있겠거니 하며 그것에 대해선 추궁하지 않았다. 라혼은 설화의 한숨 소리에 검지로 볼을 긁적이며 무거워지는 마음을 달랬다. 그렇게 용호원수 부의 평범한 하루가 끝났다. 고학이 주군으로 모신 자는 용호원수부 깊숙한 곳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 한 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 고학 자신은 잘난 주인을 모신 덕에 상경을 떠난 지 4년 만에 황진성부윤이라는 파격적인 위치에 앉아 주군이 벌여놓은 일 의 뒤처리를 하느라 그야말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천림왕의 입김이 닿아 있는 자들 몽땅 솎아낸 것까지는 좋은데 그들이 하던 일을 모조리 황진성부 윤인 고학이 해야 했으니 일에 치여 환장할 노릇이었다. 상경의 모든 자금 의 관리를 토금전장에 일임시킨 덕에 상경부의 일 자체는 확 줄었으나 나머 지는 고학이 직접 챙겨야 했고 가을 추수 후엔 대대적인 모병이 있을 예정 이라 그것까지 준비해야하는 고학 더욱 바쁜 하루를 보내야 했다. "휴우~! 그나마 다행이로군. 새로 임관한 관리들이 제목을 하기 시작하니 두어 달 후 가을추수가 끝나고 모병이 시작되어도 그럭저럭 꾸려갈 수 있겠 어." 관복을 입은 고학이 서류가 쌓인 서탁에 묻혀 한숨을 쉬고 있을 때 한 관리 가 들어와 크고 두툼한 책자를 서류가 쌓인 서탁에 내려놓고는 말했다. "고대인, 부탁하신 상경 호적부 입니다." "언제 조사한 건가?" "10년 전에 한번 했고, 3년 전 징병령이 떨어졌을 때 보완이 있었습니다." "그런가? 수고 했네 그만 퇴청하시게." "예, 고대인 고대인도 이만 들어가시지요. 시간이 되신다면 제가 한번 뫼시 고 싶습니다만……." "자네가?" 고학은 이번에 새로이 황지성부 이조집정(吏曹執政)에 임명된 묘산인(猫算 仁)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는 본래 백수회에 적을 두었던 사람으로 이조집무에서 승차하여 문관의 선임과 훈봉, 관원의 성적 고사와 포폄에 관 한 일을 맡아보는 이조의 집정이 된 사람이었다. 현재 황지성부의 가장 업 무가 많은 곳으로 고학이 사실상 집정이 할일을 하고 이조집정인 묘산인은 부사(副詞)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좋네, 오늘 일은 이쯤에서 마무리하지." "좋습니다." 묘산인이 고학을 데리고 간곳은 옥야루(玉夜樓)라는 이름의 기루였다. 기루 의 문턱을 너머서자 진한 화장을 한 여인이 다가와 호들갑을 떨며 아는 체 했다. "어머나 묘대인 아니세요? 그간 뜸하시더니 이제야 발걸음을 하시는 군요." "하하하하, 홍부인은 안본사이 더 예뻐졌구려." "호호호, 별말씀을 한데 이분은……?" "아! 인사드리시게 이번에 새로 상경부윤이 된 분이시네." "예? 그럼 백호나한의……." "어허!" "에이구머니나! 합!" 세간에선 천무공이란 정식호칭보다 백호나한이라 더 많이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용호원수부 또한 백호나한부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고학의 경우도 황지성부윤이기 보다 백호나한의 심복 군사로 더 많이 알려 져 있었다. 백호나한이 백호문의 수문대장이었을 때 강호에 명성이 높은 고 수들을 연파한 비무연(比武宴)과 천하제일미 천상천화를 아내로 둔 행운의 사내라는 점과 백호나한이 갓난아기인 천상천화를 아내로 삼는 일은 이야기 를 팔아 먹고사는 설객(說客)들이 항상 빼놓지 않은 이야기 중 하나였다. 거기에 백호나한의 영웅담이 곁들여져 민간에 전해지니 노련한 옥야루의 홍 부인이 실수할 만도 했다. "아니네. 나한은 아라한을 뜻하고 아라한은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자를 뜻하 는 말이니 백호나한 또한 존칭이 아닌가?" "그렇게 말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귀빈이 저희 옥야루에 찾아와 주셨으니 후 원별채로 안내하겠습니다." "이보게 홍부인 오늘은 내가 고대인을 뫼시기로 한 날인데 내 주머니 사정 도 생각해 주시게나." "호호호호, 설마 제가 돈 받자고 그렇겠어요. 드시긴 별채에서 드시더라도 술값은 3층 수준에서 받지요." "허허, 3층도 내겐 고급인데 뭐 기분이다. 갑시다. 고대인 기왕 홍부인이 인심을 쓰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지요." 하룻밤 술값이 은 1백냥은 쉽게나간다는 옥야루의 별채에 자리 잡은 고학과 묘산인은 기녀들의 춤과 기악을 보며 술을 마셨다. 그러니 고지식한 고학 이 이런 술자리를 좋아할 리 없었다. 묘산인은 적당한 때에 기녀들을 물린 후 고학과 독대하며 숨겨진 뜻을 밝혔다. "아시고 계시겠지만 저는 백수회에 적을 둔자입니다." "……." "고대인, 고대인은 당금 천하가 돌아가는 것을 어찌 생각하십니까?" "난세지. 아니 난세로 접어들려는 천하를 천무공께서 억지로 틀어막고 있는 상태지." 묘산인은 고학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중주의 십제들이 세력은 더욱 커질 겁니다. 그리고 그들의 세력이 천무공의 힘을 넘어서면……." "후후후, 그래 자네에게 무슨 해결방안이라고 있는가?" "힘이 있는 지금 천하를 움켜쥐어야 합니다." 어찌 생각하면 놀라운 말이었지만 고학은 이렇다 할 반응을 하지 않고 담담 하기 그지없는 어조로 묘산인에게 반문했다. "그것은 자네에 뜻인가? 아니면 백수회의 뜻인가?" "……!" 잠시 침묵이 흐르고 묘산인이 뭔가 맥을 놓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백수회의 뜻이라고 생각하셔도 되고, 제 뜻이라 여겨도 됩니다." "후후후, 지금 천무공의 적은 누구인가?" 고학은 묘산인의 애매모호한 답변을 귀가를 흘리고 다시 물었다. "그야! 천림왕이 있고, 웅랑교가 있으며, 반적 강무가……." "강무세가는 천상천화의 외가일세." "……!" "웅랑교와 다툼이 있지만 이는 조정의 문제이고 그들은 북지성을 험한 산을 넘지 못하네. 그리고 천림왕은 이빨 빠진 호랑이에 불과하지." "그렇다면 호황은 어떻습니까?" "호황?" 묘산인은 이제야 고학이 자신이 예상했던 반응을 하자 느긋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호황이 천녀의 신분을 눈치 챈 것 같습니다." "……." "그리고 천림왕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그러니……." 고학은 뒷말을 흐리는 묘산인을 바라보며 내심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자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천무공께서 새로운 천하의 주인이 되셔야 합니다." "그것은 나도 원하는 바이나 주군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네." "……!" "태상회주께 시간을 끌지 말고 하루속히 따님을 만나시라 전하시게. 더 할 이야기가 없다면 술자리는 이만 파하세." 백수회의 입장에서 천무공 백호나한과 관계는 일단은 동맹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우습게도 백수회가 백호나한에게 뭔가 요구할 수 있는 건덕지가 없 었다. 조정의 입장에서 백호나한의 존재는 그리 크지 않았다. 하남천원군을 남례성에 보낼 때의 조정이 바란 것은 봉기를 토벌하는 것이 아니라 서해 남해안 거점들의 안전 확보뿐이었다. 조정의 입장에선 남례성의 밀림에 숨 어있는 진토인들이 어찌하던 별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흑막에서 웅 랑교가 거병하고 앙신성에서 천원군이 대패하는 가운데 관심밖에 있던 하남 천원군의 승전은 분위기를 일신시키는데 이용되었다. 그러니까 딱히 조정에 서 주목할 만한 승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일부러 백호나한의 공을 칭송했지 만 주목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백호나한이 백호대수영을 꾸미는데 백수회 가 조정의 이목을 흐리는 일을 했지만 원칙적으로 조정은 바다에는 큰 관심 이 없었다. 대륙의 물산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장강대하였지 바다가 아니었 기 때문이었다. 조정이 백호나한을 제대로 된 시선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 겨우 1년 전 백호나한과 천상천화의 혼인식과 출병식 때부터였다. 그 뒤로 는 축적된 힘을 일시에 쏟아 부어 반기를 든 남상 서해대수영을 복속시키고 , 후에 정립천하군의 발호를 일시에 무너트림으로써 역량을 과시하고 원주 로 돌아와 어찌 얻었는지 알 수 없으나 용천검의 주인임을 밝히니 단숨에 천하의 패자로 등장한 것이다. 백수회가 백호나한에게 도움을 준 것이라곤 조정의 관심을 돌린 것 밖에 없었던 것이다. 상경을 장악할 때 누가 천림왕 과 선이 닿아있고 누가 소외되어 있으며 하는 것에 도움을 주었지만 백수회 의 상경에서 영향력 확대를 위해 한 일이었고 그러한 것은 고학도 알고 있 고 암묵적인 동의하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백수회는 껍데기만을 얻 은 것이었다. 상경의 금군은 백호나한의 수하들이 모조리 장악했고 금전에 관한일은 토금전장이 도맡아하기로 하니 황진성부 관리들이 하는 일은 그야 말로 잡무뿐이었다. 그러나 백수회를 무엇보다 답답하게 하는 것은 백호나 한의 숨은 의도를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환도금강(幻島金剛) 무덥던 여름이 지나고 가을 추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올해는 그야말로 지 독한 흉년이었다. 징병령에 많은 인력이 농사일을 하지 못하고 병영으로 불 려 다녔기 때문이었다. 토금전장에선 그러한 사정을 간파하고 올해는 관부 를 대신해 세금 걷는 일을 하지 않았다. 처음 2년간은 관부에 바치는 은자 보다 실제로 거둬들이는 세곡이 훨씬 막대했는데 그것을 눈치 챈 관부가 3 년째 되는 해에 막대한 은자를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3년째 되는 해에 토금전장이 본격적으로 철기를 생산하여 막대한 이문을 보고 있 었고 관부에선 징병한 병졸을 무장하는데 막대한 자금을 사용해야 했기 때 문이었다. 그런 관부에게 토금전장이 수조권을 가지고 막대한 이득을 본 사 실을 그냥 넘어갈리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명분으로 토금전장은 올해엔 수 조권을 사들이지 않았고, 관부에선 작년에 비해 절반도 못되는 세금수입을 얻었을 뿐이었다. "주공, 고금에 유래 없는 흉년입니다. 내년 봄께 주공이 가진 곡식을 푼다 면 막대한 이득을 올릴 수 있을 것인데……." "아니, 곡식은 그냥 푼다." "……." 라혼은 토귀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올해 흉년은 농사를 지를 농자가 병영에 불려 다니느라 농사를 하지 못해 생긴 일이다. 그 증거가 용황이 가진 땅에서 나온 소출은 작년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토귀!" "예, 말씀하십시오. 주공!" "천하가 토금전장의 금대부와 나와 관계를 알고 있다. 아직까지는 딱히 나 와 척을 진 세력은 없지만 무슨 일로 누구와 관계가 틀어질지 아무도 모른 다. 그리고 그 영향은 토금전장에게 직간접적으로 미칠 것이다." "……." "하지만 토금전장에 전환과 목우유마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그럼 드디어 목우유마를 상품으로 내놓는 겁니까?" "그렇다. 전환도 같이 판매할 것이다." "오오~!" 이미 목우유마는 누구나 관심을 갖는 물건이었다. 전환의 경우 은밀히 사용 했기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목우유마는 북지성 정립천하군과 싸움에서 보급물자를 수송하는 데 사용되어 익히 알려져 있었다. "목우의 본체는 얼마나 만들어 두었지?" "지금까지 3천여기가 넘을 겁니다. 모두 동력기관만 설치하면 바로 움직이 겠끔 해두었습니다." "좋아! 동력기관이 완성되는 대로 넘겨줄 테니 묵우를 완성하여 판매를 시 작하도록." "예, 주공!" 라혼은 목우유마와 전환을 팖으로써 천하에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할 생각이 다. 기존엔 라혼이 일일이 역석과 전환을 활성화 시키는 귀찮은 작업을 해 야 했다. 그러나 이젠 신룡 굉(宏)이 준 여의주(如意珠)가 그것을 대신해 주었다. 당금 천하에 라혼과 비견될 세력이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정치적 영향력이 가진 힘에 비해 그리 크다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라혼 이 바라는 것은 천하의 안정이었다. 신룡 조(祚)가 용황으로써 하고 있었던 일 또한 중재자로써의 역할이었다. 조(祚)가 용황의 지위를 벗어버린 것은 다름 아닌 정립천하운동 때문이었다. 사실 수인조정을 이루는 십이진가(十 二眞家)의 천하는 인간이 생각하기에 너무 오랜 기간 지속되어왔기에 한번 쯤 변화가 필요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라혼은 천하가 그렇게 되는 것 을 원하지 않았다. 최소한 설화가 살아있을 때까진……. 그렇기 때문에 용황과 비견되는 정치적 영향력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그래 서 생각한 것이 바로 태학(太學)이었다. 태학이란 본디 나라의 젊은 인재를 키우는 곳인데 라혼은 이미 용황궁이었던 용호원수부에 태학이 들어설 자 리를 마련해 둔 상태였다. "계세자가 천무공을 만나고 싶어 한다?" "그렇습니다, 고대인!" 고학은 중경에 있는 계세자가 주군을 만나고자 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가 있 었다. 현재 주군은 거의 칩거상태로 찾아오는 모든 손님은 고학의 선에서 처리되었다. 천하의 새로운 패자가 등장했으니 만나서 줄을 대려고 하는 자 가 어디 한둘이겠는가? 호황의 추파부터 진골십가의 간접적인 접촉시도, 거 부거상들의 선물을 빙자한 뇌물공세까지 하루에도 만남을 청하는 사람들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 모든 책임은 그것이 아니어도 바쁜 고학에게 떠넘겨졌고, 고학 또한 이조집정인 묘산인에게 그것을 떠넘 겼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주군이 무시할 수 없는 유일한 상대들 호황 과 십제들이 공식적인 만남을 청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비로소 비 록 이름뿐인 계제가이나 진골십가의 공식적인 면담요청이 들어온 것이다. "묘집정, 알겠네. 내가 직접 그들을 만나보겠네. 보름 후 황학루에서 보자 고 전하게." "알겠습니다." 계제가가 요구할 사항이란 뻔했다. 아마도 용호원수부의 힘을 빌리려는 속 셈이리라. 고학은 이미 계제가의 요청이 있을 경우를 대비해 임주에 이목을 깔아두고 있었다. 주군의 뜻 또한 계제가를 도와주려 마음을 결정한 상태 문제는 얼마나 많은 것을 계제가에게 얻어내느냐 이었다. 일단 계제가를 도 움으로써 우호세력하나를 얻을 수 있다. 거기까지가 주군이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고학은 계제가를 용호원수부에 끌어들임으로써 공식적으로 분리되 어 있는 남례성과 북지성을 용호원수부가 관할하는 것으로 체제를 바꾸는 것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상 북지성과 남례성은 주군인 백호나한에게 귀속된 것이나 마찬가지이었지만 조정 즉, 천원회의에서 언제든 절도사를 바꿀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수년간은 용호원수부와 적대하지 않으려 그 일을 꺼내지 않을 것이지만 그들이 스스로의 힘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는 다면 가장먼저 처리할일이 바로 그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절도사 를 임명함과 동시에 대군을 이끌고 남례성과 북지성에 들어가면 용호원수부 의 영향은 크게 줄어들 것이 분명했다. 차제에 확실하게 못 밖아 두는 것이 나중을 위해서라도 중요했다. 천하십이지존 중 자객지존(刺客至尊) 사신(死神)이란 자가 이었다. 세상에 죽이지 못할 자거 없으며 목표 가된 자는 반드시 죽음을 면치 못했다. 사신 은 목표를 제거하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백호나한." "영주, 백호나한의 죽음을 바라는 자는 호황과 인세지존(人世至尊) 운제(雲 帝) 위천락(爲天樂), 그리고 강무세가입니다." "세군데서 동시에 청부가 들어왔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영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인상의 중년인, 자객교(刺客敎)의 영주이며 강호에 사신이란 명호를 당당하게 쓰는 자. 죽음 절대자 자객지존이었다. "후후후후, 백호나한을 멱을 따려면 자객교는 사라져야한다. 너는 그것을 아느냐?" "인세천하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최대의 걸림돌이 바로 백호나한입니다. 저 는 스스로 자객의 길을 택했을 때부터 자객을 새로운 세상엔 필요 없는 존 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긴하게 써야할 곳을 찾았으니 아쉬움은 없습니다." 사신이란 이름을 가진 중년인은 자객교의 대종사(大宗師) 서원(徐洹)의 말 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객은 피에 미친 살귀가 아니다. 이는 자객교의 첫 번째 가르침이었다. 자객교의 연원은 근 천여 년에 이르는데 천하가 백국(百國)으로 나뉘어 쟁 패하는 전국시대(戰國時代), 그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나 둘 스러져간 나라의 무사들이 스스로 자객을 자처하며 나라의 원수를 척살했다. 그들의 첫 번째 척살목표는 적국에 나라를 들어 바친 매국노와 그들과 부화뇌동(附 和雷同)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는 대부분 실패로 끝나기 마련이 었다. 그들의 정체가 탄로나면 바로 용모파기가 그려진 방이 곳곳에 나붙고 거사를 도모하기도 전에 도망치기 급급하다 제풀에 지쳐 이름 모를 광야에 서 죽어 까마귀밥이 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자객교의 전신인 대살회(代殺 會)가 만들어지고 자신과 전혀 이해관계가 없는 먼 타국에 있는 자를 도모 하면 그에 답하여 자신들 본래 목표를 또 다른 이가 처리해주는 식의 방법 이 동원되었다. 그 대살회를 전국시대의 마지막 패자로 기록된 상무황(尙武 皇) 천상제(天上帝)의 강제국(强帝國)의 막대한 물적, 인적 지원으로 만들 어진 것이 바로 자객교였다. 자객교의 설립목적은 이미 자객으로 이름난 인 재들을 흡수 암중으로 활용하고 강 나라 내에서 자객의 확대를 막는 일이었 다. 그러나 천하를 제패한 대강제국이 백년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고 강 황실을 지키던 자객교는 그대로 허공에 뜻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 후 자객 교는 자객이 아닌 살수가 되어 가늘게 명맥을 이어오다 천하의 주인이 십이 진가의 수인들로 바뀌며 다시금 성세를 누리고 있었다. 자객교 자체가 수인 조정에 반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객교는 세상에 그늘에 위치해 있었 고, 그 그늘로 쫓겨 오거나 스스로 들어온 자들은 필연적으로 밝은 곳을 점 하고 있는 자들에 대한 증오가 있었다. 그래서 대체적으로 자객교의 자객, 아니 살수들은 수인들에게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근 천여 년에 이르는 자객교의 역사 속에서 축적된 살예, 귀계, 심계는 깊 고, 또한 심오하다. 너무나 엄청난 것을 만들어낸 자객교의 선열들은 그것 으로 인해 자객교를 없애고자하는 마음까지 접을 정도였다." "……."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방법을 체계적인 학문으로 만들어 그것이 있는 한 자객교는 계속이어 질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원치 않는다. 대종사 !" "말씀하십시오. 영주" "남례성 남례일족의 대야가 그를 도모했다 실패한 사실을 아는가?" "압니다. 이미 자객교의 대자객들이 그에 대한 실패원인을 분석 중에 있습 니다." 사신은 '실패'라는 말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대야의 자객행은 실패했지만 살수로써는 성공했다네." "……." "백호나한의 심장은 일보시위 잔폭광마의 칼에 찔리고 대야는 천독환단(天 毒還丹) 복용해 육신을 무기로 하여 백호나한에게 혈독을 뒤집어쓰게 했네. 대야는 목표한 바를 모두 완벽하게 성공시킨 셈이지. 그러나 백호나한은 살아남았네. 그리고 독으로는 천하제일이라는 독신이 그의 곁에 있고 독에 목숨을 잃을 뻔 한 그가 독에 관한 조예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 기환지존( 奇幻至尊) 영환자(靈幻子)또한 그의 곁에서 3년을 보냈으니 환술을 기반으 로 한 인술(忍術)에도 조예가 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며, 그 자신은 천하 고수. 과거 자객교가 만들어진 목적이었던 자객으로 자객을 막는다는 생각 을 하였는지 남례일족이 대야를 키우는 수련을 거친 살수들이 백호나한의 주위에 포진되어 있다네. 남례일족의 새로운 대야 지심이 그의 일보시위인 바에야." 자객교 대종사 서원은 자객지존 사신이 이미 백호나한을 염두에 두고 있음 을 알았다. 얼핏 어렵고 힘들고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다르 게 말해서 그의 목숨을 취하기 위한 모색에 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영주, 천림왕이 휘하무사들을 결사대로 하여 목표를 도모할 것이라 합니다 ." "언제쯤 일 것 같은가?" "그간 거의 칩거상태였던 백호나한이 천원회의에 참석하기위해 중경 호천궁 으로 오는 때를 노릴 것 같습니다." "그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군." 조정의 천원회의는 십제들이 보낸 사마들이 수시로 모여 천하정세를 논의했 는데 그중 가을추수가 끝나고 각 지방에서 조정이 사용할 세금을 걷는 문제 를 조율하기 위해 열리는 대천원회의는 무척 중요했다. 이 회의의 결정에 따라 원주를 제외한 십주의 십제들이 얼마나 많은 세금을 내야하는지 결정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요새처럼 십제들의 군비가 무한정 확장되고, 게다 가 올해엔 대흉년을 맞이하여 그 문제는 첨예하게 대립되는 문제였다. 조정 의 입장에선 세금을 늘려 구휼미를 확보해야할 필요가 있었고, 십제의 입장 에선 세금을 깎아 현 상태라도 유지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조정의 뜻은 바 로 그들의 뜻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기에 자신들이 손해를 보지 않고 구휼미를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신들이 차지한 중주이외의 곳에서 더 세금을 걷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조정의 입김이 닿는 중주이외의 곳은 천무 공 백호나한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남례성, 북지성, 남상이었다. 그러나 그 곳은 오히려 중주에서 흘러드는 곡물이 없으면 생활의 곤란을 겪는 곳이었 다. "아마도 이는 천림왕의 계략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조정의 진정한 뜻이 무 엇인지는 모르지만 99개의 보주를 가진 자가 100개를 채우기 위해 단 1개의 보주를 가진 자에게 그 1개의 보주를 빼앗으려 한다면 1개의 보주가 전부 인 주인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겁니다." "아니, 지난 3년간 토금전장에서 거둬들인 세곡은 참으로 엄청난 것이네 그 것이 전부 용호원수부의 수중에 들어있다면 남례성, 북지성, 남상을 압박하 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 백호나한이 그것을 내놓지 않으면 백성들이 등 을 돌릴 것이고 내놓으면 그것은 그것대로 조정에 이득이지. 당금 천하에 홀로 백호나한의 심기를 거스를 세력은 없지만 적당한 명분이 있다면 단순 히 동조하는 것으로 경쟁자를 압박하는 것은 당연한 일. 대종사." "말씀하시지요. 영주!" "시기는 우리가 정하지 못했지만 거사의 장소는 우리가 정하세." "장소라 함은?" "백호나한의 무덤은 독점도일세." "이, 이곳을 말씀이십니까?" 자객교가 자리 잡은 곳. 수많은 자객들이 조련되고 탄생하는 곳이 바로 독 점도(獨占島)였다. 천호 한복판에 덩그러니 떠있는 바위섬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은 무인도였다. 정해진 뱃길 외엔 온통 소용돌이치며 외부와 단 절되어있어 무언가를 숨어서 하기에 이만한 곳이 따로 없었다. 섬의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아 병영이 머물기에 적당치 않았고 한때 수적들이 차지하고 있었다가 지금은 자객교의 차지가 된 곳이었다. "백호나한은 해도대원수이기도 하네. 천림왕의 결사대를 수적으로 분장해 백호나한이 탄 배를 공격하고 독점도로 유인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일 세." "과연 그렇군요. 이곳이라면 아무리 날고기는 백호나한이라고 목을 내놓지 않고는 못 배길 겁니다." 자객은 목표가 정해지면 목표가 머무는 생활반경의 모든 지형지물을 목표보 다 더 정확히 꿰뚫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객교의 자객들은 기암괴석(奇 巖怪石)이 난무한 이곳 독점도에서 배우고 익혔다. 즉 자객교의 누구나 섬 전체를 눈을 감고도 어디가 어디인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곳이었다. 여기저 기 뚫려있는 밀도(密道)와 기관(機關), 진식(陳式)등이 설치되어 독점도는 가히 천혜의 요새나 다름없었다. 백호나한이 섬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물밑 에 진식을 발동시켜 섬을 외부와 출입을 단절시킨 후 백호나한과 함께 상륙 한 군사들을 도륙하고 기력을 소진시킨다면 목을 베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쉬운 일이라. 나타영주(??靈珠). 이것은 사람의 형상으로 환생할 수 있는 보패(寶貝)를 말했다. 그리고 지금 신선으로써는 미숙한 유운검선이 라혼의 부탁을 받고 만들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영주(靈珠)의 기본이 되는 것은 놀랍게도 풍운 뇌우토(風雲雷雨土)의 정순한 기운이 서린 여의신주(如意神珠)였다. 완전한 형상의 인간을 만드는 일은 참으로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만 한두 가지 기 능을 만 강조한 나타영주을 만드는 것은 가능했다.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 그리고 사람의 기운이 만나 생성되는 것이 바로 사람이다. 태중(胎中)에 혼(魂)과 백(魄)이 성장하다 어느 순간 혼백(魂魄) 과 영(靈)이 만남으로써 하나의 생명체가 이루어진다. 인간은 영(靈)과 육 신(肉身)의 복합체로 육신을 이루는 것이 혼백(魂魄)이고, 영(靈)은 의식과 사고, 마음의 안식처이며 혼백은 영혼의 집이다. 사람에게는 9개의 영이 있는데 3개씩 3조의 영이 천지인(天地人) 삼재에 부응한다. 1개의 영(靈)은 129,600개의 혼(魂)을 거느리며, 하나의 혼(魂)은 129,000개의 백(魄)을 거느린다. 영(靈)은 육신을 마음대로 규제할 수 없지만 지배할 수는 있다. 영이 육신을 떠나면 혼은 하늘로 퍼지고, 백은 땅으로 가라앉는다. 신선은 선골(仙骨)을 타고나 선근(仙筋)을 가진 자를 말하는데 영이 육신을 규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들이었다. 신선은 겉으로 보기에 늙은 노인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어느 젊은이보다도 육체가 강건하다. 대부분 신선들 은 무력이 강하지만 그렇다고 무림의 고수보다 월등하다고 말할 수 없다. 신선이 존경받고 경외 시 되는 이유는 그들이 세상사에 관여하지 않기 때문 이었다. 선술, 법술, 도술, 환술, 기문둔갑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천시(天 時)와 지리(地理)를 통달하였으니 그들은 스승으로써 존경받을 만했다. "검야. 라혼이 왔습니다." "고맙습니다. 주작의 무녀." 현석은 오늘로써 나타영주를 만드는 기한인 백일이 다되었음을 알았다. 현 석은 지금 남례성 귀림 깊숙한 귀왕곡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영주를 만드는 작업을 했다. 기본적으로 무로써 검 한 자루로 신선이 된 현석에게 그것은 무척 피곤한 일이었다. 그리고 본래 용(龍)의 둥지였다는 이곳 깊 숙한 동굴 얼음덩어리 속의 여인의 육신은 현석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완성된 나타영주는 선골을 타고난 부부를 찾아 태중에 심어 환생케 해야 하 는데 사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아무런 수련 과정이나 깨달음이 없이 태어날 때부터 천지를 뒤엎을 힘을 가지고 태어난 아기가 올바른 사고 를 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갓 태어난 아기에게 천년의 지혜가 있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혼백이 없이 육신만 가지게 하는 방법이 있었는데 껍데 기를 구해다 씌우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나타영주의 껍데기가 분명한 얼음 덩어리 속의 마물은 사기(邪氣)가 있어 무엇이 나올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러나 귀선(鬼仙)인 스승님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을 것이 분명하기에 영 주를 만들어 놓고도 마음이 답답했다. "스승님." "수고했다." "스승님 다행히 영주는 완성되었지만 이것으로 무엇을 하시려는 겁니까?" "귀림의 토지신들을 구워삶을 생각이다." "예?" 라혼은 처음 만났을 때의 앳된 모습을 하고 있는 현석에게 물었다. "왜? 얼음덩어리 속의 독종사인에게 이 귀한 여의주로 만든 나타영주를 심 을 까봐 걱정이 된 것이냐?" "아니었습니까?" "사기를 품은 독종사인에 영주를 심으면 본래가진 힘에 만분지일(萬分之一) 도 사용하지 못하지." "……." 라혼은 현석이 마기를 지닌 귀선인 자신을 의심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 았지만 굳이 변명하지는 않았다. 라혼은 영이 깃든 나타영주를 받아들고 에 텔 스페이스에서 그린 드래곤 드라오디프의 드래곤 하트를 꺼냈다. 그리고 광대역 타운 포탈을 설치할 때 사용한 6개의 위저드 스톤(Wizard stone) 중 하나만을 남겨두고 5개를 회수했다. 현석이 만든 나타영주는 라혼이 알고 있는 자아석(自我石) 에고 스톤(Ego stone)의 일종이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큰 줄기는 같은 것이었다. 라혼은 5개의 위저드 스톤에 풍운뇌우토( 風雲雷雨土)의 오신룡의 기운을 속성을 설정하고 화수목금토의 방위에 돌을 배치했다. 이는 역석을 만드는 방법과 똑같은 원리였다. 그리고 여기에 드 래곤 하트를 설치하여 역석을 활성화하는 근원기관을 만들었다. "뭐라고 부를까? 그렇지 원석(元石)이라 부르면 되겠군." 그리고 8일간 나타영주와 영을 잇는 작업을 시작하여 결국 소기의 목적을 이루었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보다 원석의 힘이 훨씬 강했다. 그래서 역석 을 활성화 시키는데 에만 사용하기엔 다소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은 그것 이외의 필요한 곳은 없었다. "서방님, 이제 원석을 완성하신 거예요?" 라혼이 서늘한 드라오디프의 레어에서 나와 가니아의 통나무집으로 들어서 자 그곳엔 설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상경 용호원수부에서 가니아에 게 라혼이 지금 이곳에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온 것이라. 그러나……. "아니 네가 어떻게 여길 올수 있었지?" "뭐가요? 서방님이 직접 만들어 두신 빛나는 문을 통해 왔는데요?" 라혼은 설화의 반문에 마당으로 나와 타운포탈이 설치된 분수를 확인해보았 다. 그리고 그것이 정상작동을 하는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 고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위저드 스톤은 힘을 담는 매개체인데 속성 을 한가지로 정의하면 1개나 6개는 10개나 같은 정도의 힘밖에는 내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6개의 위저드 스톤을 모두 사용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각각 다른 속성의 힘을 담아 원석에 설치하니 생각했던 것 보다 위력이 강해진 것이다.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었던 거예요?" "미안하다." "예? 갑자기 왜?" 라혼은 다행히 1개의 위저드 스톤이 제몫을 했기에 망정이 그렇지 않았다면 설화가 차원을 틈새에서 죽지도 살지도 못할 지경에 처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부주의 때문에 설화가 잘못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미안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래서 라혼은 설화를 와락 껴안았다. "어맛!" "……." 설화는 서방님의 품속이 싫지는 않았지만 가니아 할머니와 검선이 보고 있 다는 생각이 들자 얼굴을 붉어졌다. 환도금강(幻島金剛) 귀림의 드워프들은 이미 라혼이 드래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눈 앞의 귀선이라 칭해지는 존재가 드래곤를 때려잡는 신룡들을 때려잡은(?) 어마어마한 자라는 것 또한 알았다. 그러나 중간계를 지배하는 드래곤이 아 니라면 드워프가 머리를 조아릴 이유가 없었다. 드워프가 드래곤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하는 이유는 엘프, 드워프, 오크는 요정(妖精)족이고 드래곤 족 은 태어나면서 정령(精靈)과 친화력이 깊었기 때문이었다. 정령과 요정은 같은 테두리에 드는 것이었기에 그들이 드래곤을 무서워하고 요구를 거절하 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본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상대가 인간이라면 또 달 랐다. 그가 아무리 드래곤을 압도하는 힘을 지닌 자라 할지라도……. "우리는 당신이 드래곤이 아니라는 것을 아오." "……." 라혼은 원석을 들고 드워프 마을을 찾았으나 드워프 촌장 신중한 블로는 말 에 턱을 긁적이며 쓴 웃음을 지었다. "당신이 비록 우릴 속였지만 우리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고 친구로 대 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더 이상의 협조는 기대하지 마시오." "……." 라혼은 드워프 촌장의 최후통첩에 할 말을 잊었다. 그러나 이내 한숨을 내 쉬고 드워프의 말을 선선히 받아들였다. 어차피 그들을 속여서 많은 일을 하게 했고 앞으로도 그들의 도움이 필요했지만 드워프의 고집을 알고 있는 라혼은 그대로 물러났다. "그대들의 뜻은 알겠소." "하지만 젊은 드워프들 몇몇이 계속 당신을 돕기를 원하오. 그들을 거둬줄 수 있겠소?" 귀림의 드워프들이 라혼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라혼이 북천에서 앙(殃)과 우(于)와 싸울 때 천하의 신선들이 그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굉(宏)이 그 를 금강의 주인으로 삼자 천하십대선맥들은 귀선이 금강의 주인이 되었다며 큰 우려를 나타냈다. 그중 남례성에 적을 둔 선산 봉래(蓬萊)의 선인들이 친분이 있는 귀림의 토지신들에게 귀선에 대한 것을 물었고 그 과정에서 드 워프들은 라혼이 드래곤이 아님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날로 마을에 선 그를 계속 도울지 말지를 결정하는 회의가 벌어졌고 결론은 돕지 않는다 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목우유마라던 지 역석 등 새로운 것에 관심을 가 지고 거기에 빠져있는 젊은 드워프들은 개인적으로 라혼과 거래를 할 것을 소망했다. "그래서 마을차원이 아닌 그들 개인차원에서 당신과 함께하겠다고 했소." "그들은 당연이 마을을 떠나야 하겠지?" "그렇소." "몇 명이나 되오?" "34명이오." "좋소. 그럼 불새의 깃털과 드래곤 본, 완성된 역석, 그리고 귀왕곡에서 찾 아낸 마법물품을 돌려주시오." "……!" 블로는 그의 당당한 요구에 일순 말문이 막혔다. 그가 요구한 그것들은 마 을의 전부였지만 물건의 주인은 다름 아닌 바로 그였다. 목수에게 좋은 목 재만큼 탐나는 것이 없고, 석수에게 좋은 돌만큼 값진 것이 없다. 뛰어난 장인인 드워프들에게 드래곤 본만큼 좋은 재료가 또 없으며 불새의 깃털만 큼 좋은 도구는 세상에 또 없었다. 그날로 다시 마을회의가 벌어졌고 결론 은 인간과는 거래하지 않지만 봉래의 신선들과는 종종거래를 했다는 예들어 금강의 주인인 그와 거래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순 간 라혼을 난감하게 했던 드워프들의 파업은 그렇게 흐지부지 넘어갔다. 설화는 지금 유운검선을 어찌 불러야 할지 난감했다. 첫 만남이후 한동안 서방님을 차지하고 앉아 신선들이 쓰는 술법을 전수하고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그에 대한 호칭에 대해선 생각해 보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렇게 며 칠 같이 살게 되니 왠지 어색했다. 그것은 나이 많은 남편(?)을 둔 여자의 고통적인 고민이었다. "저어, 진지잡수세요." "……." 한참을 호칭에 대한 고민을 하다가 한말이 결국은 '저어'였다. 겉으로 보기 에 약관의 청년인 유운검선이었지만 2백여 세가 넘은 나이에 지금도 그 이 름이 칭송되는 존재다 보니 설화는 무척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유운검선의 입장에선 꽃같이 아름다운 설화의 이러한 불편해하는 태도가 무척 걸렸다. 오랜만에 만난 할아버지이며 마음을 터놓아도 될 스승이자 지기인 라혼의 어린 아내가 계속 이런 식이면 아마도 엉덩이를 걷어차서라도 쫓아 보낼 것 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랜 기간 최고의 자리에 있으면서 타인과 교류가 보통사람과 달랐던 현석에게 어찌하면 양할머니(?)이자 사모(師母) 인 그녀가 불편해 하지 않을 방법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고개를 끄 덕이며 그녀를 따라 가니아의 통나무집 안으로 들어갈 뿐이었다. 가니아가 직접 텃밭을 일구어 가꾼 야채들로 상이 차려지고 간단한 식사가 끝난 후 설화가 차를 준비하기위해 주방으로 들어가자 가니아가 현석에게 말했다. "검야, 설화가 당신을 어려워하는 것은 당신을 어찌 부를지 난감하기 때문 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당신에 대해서 아주 많은 것을 알고 있더군요. 옛날이야기 속의 전설적인 사람이 갑자기 가족이 되면 어색해 하지 않는 것 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지요." "……." "설화는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성정을 가진 아이니 검야도 너무 어색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가요? 그렇군요. 내가 그녀를 어색해 했던 것이군요." 그렇게 현석과 가니아의 짧은 대화가 오가는 사이 설화는 쟁반에 차가 담긴 주전자와 찻잔을 받쳐 들고 거실로 나왔다. 설화는 손님인 유운검선에게 차를 먼저 따라주었다. "고맙습니다, 천녀. 하지만 순서가 틀리셨습니다. 신모(神母)님에게 먼저 차를 드려야지요." "예?" "잊으셨습니까? 저는 천녀의 양손자(?)입니다." "……?" 설화는 유운검선의 갑작스런 말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직 아이도 갖지 않은 자신에게 2백 살은 훨씬 넘은 손자가 생긴 셈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당황해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천녀와 저는 이미 가족이니 손님 취 급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니 말입니다." "예에. 죄송합니다." "그리고 저는 앞으로 검야라고 불러주십시오." "예, 검야!" 그렇게 차 한 잔을 비우고 서로의 관계가 정립되어 어색함이 덜어지자 현석 에게 설화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저어 어떻게 해서 서방님의 양손자가 되신 거예요?" "……." 현석은 설화의 질문을 받고 늙은 노인모습을 하고 있었던 해노 할아버지의 모습을 회상하며 이야기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야기가 끝나고 설 화의 결론은……. "어쩜, 지금하고 똑같네요. 같은 사람이니 당연한가?" 은섬충의 위력은 대단했다. 일정한 방법에 따라 키워진 은섬충(銀蟾蟲)에 당한사람은 근본적으로 성정이 바뀌었다. 은섬충을 번식시키려면 은섬충에 감염된 사람을 가사상태로 만들어 골수를 파먹고서야 3~4개의 개체로 분리 된다. 은섬충에 당한 사람이 하독한 사람을 위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바로 은섬충의 사랑(?)때문이었다. 은섬충이 번식을 하려면 암컷과 수컷이 교미 를 해야 하는데 양고(陽蠱)에 당한 사람은 음고(陰蠱) 지닌 사람의 명에 절 대 복종, 아니 경애하고 아끼게 되는 것이었다. 라혼은 그 은섬충을 귀왕림의 귀왕, 강시지존 흑산자, 남상부도독 토사귀, 귀호기주 귀호령 주란문 그리고 호영(虎影)에게 사용했다. 천림왕이 라혼은 도모할 것을 맹세한 그 자리에 호영은 몸을 숨긴 체 호황과 천림왕의 대화 를 들었고, 호영기는 그때부터 쭉 천림왕의 행보를 감시했다. 잠시나마 한 때 호영기를 이끌었던 천림왕은 그들의 감시를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중요한 정보가 노출되어도 그러려니 했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것은 전환을 통해 고학에게 알려졌고, 게으른 주인을 둔 고학은 눈곱 뗄 새 바쁜 공무와중에 도 그것을 바탕으로 천림왕을 일거에 제거하는 묘책을 짜내야 했다. "독점도는 천험의 험지이고 대군을 풀어놓아도 자객교의 살수들이 반항을 하면 큰 피해가 발생할 겁니다. 그러나 그들을 상대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 다. 그들을 섬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틀어막고 강호의 세력에게 그들의 토 벌을 부탁하면 됩니다. 특히 철사성은 인물들이 자객교의 자객에게 변을 당 한 인물들이 많다고 하니 복수를 위해서라도 동조할겁니다." 라혼은 고학의 설명을 들으면서 독점도의 위치가 표시된 지도에서 눈을 떼 지 않고 있었다. 고학은 그런 주군을 길게 읍하며 굵고 차분한 어조로 주위 를 환기 시켰다. "주군." "말하라." "호황이 주군과 저흴 버린 이상 우리도 호황에게 더 이상 지킬 의리는 없다 고 봅니다." "……." 고학은 잠시 말을 끓고 주군의 반응을 살피고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세간에 수인천하를 두고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누런 산에 터를 닦고, 청목으로 집을 짓네. 하얀 범은 마루 위에, 붉은 새는 대문 위에, 검은 거북이 지붕 위에 오르면 , 찾아온 옛 벗과 천배(千配)를 나누리. 누런 산은 토(土) 황룡을 뜻하고 청목(靑木)은 청룡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 러니 이 노래는 황룡이 토덕(土德)으로 요괴에 불과하던 수인들을 계도하고 , 목덕(木德)을 가진 청룡이 수인천하를 이룩했음을 말했다. 그리고 그 뒤 에 금덕(金德)을 지닌 백호와 화덕(火德)을 상징하는 주작, 수덕(水德)을 현무까지 노래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의 옛 친구는 인간을 말했다. "주군, 민심(民心)은 곧 천심(天心). 주모는 백호이고 주모의 외증조모는 주작의 신모이십니다. 이는 천명(天命)입니다." "……." 고학은 조용히 생각에 잠긴 주군을 바라보며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천하인들이 말하길 한결같이 당금 천자인 호황에게 덕이 없다고 합니다. 그는 진명천자(眞命天子)가 아닙니다. 주군은 용황을 대신하시는 분이십니 다. 호황이 진정천하를 위하는 마음이 있다면 천하가 어지럽고 위태로운 지 금 용천검의 주인을 도모하는 것을 묵인하는 과오는 범하지 않았을 것입니 다." 라혼은 고학의 말에 자신이 멈추면 넘어지는 외바퀴 수레를 굴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라혼이 조정에 출사한 것은 사실은 확실한 신분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설화가 여인천궁의 소궁주가 되고 얼떨결에 공을 세운 자신은 하루아침에 장수에 반열에 오른 것이다. 사실 라혼이 참장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모석 때문이었다. 모석은 라혼이 병법에 밝고 무예가 출중한 숨은 인재라는 것을 소문냈고, 부수문장이었던 모석이 백호문의 수문대장 자리를 스승이었던 라혼에게 양보함으로써 출사한지 며칠 되지 않아 장군이 될 수 있었다. 당시 청류파로 분류되던 황진성부윤 사관산(獅官山)과 사문 수비대장 견헌승(犬獻勝)은 천하정세가 어지러워지자 훌륭한 인재들이 조정 에 끌어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잘난 마누라 건사하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이었을 줄이야.' 그렇다. 라혼의 목적은 오직 설화를 건사하는 것뿐이었다. 처음 생각했던 대로 그저 호제가의 사생아(?) 정도였다면 여인천궁의 궁주로 비교적 평탄 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설화는 백호였다. 호랑이로 화했을 때 털이 누 렇지 않고 하얗다는 것뿐이었지만 문제는 백호는 제왕이라는 세간의 속설이 었다. 그러한 사실을 안 것은 여인천궁의 여인들과 라혼 자신뿐이었지만 영 원한 비밀을 없는 법이었다. 게다가 당시엔 앙신성에서 '거정의 난'이 일어 나고 정립천하운동이 각지에서 소란을 일으키던 시기였다. 그래서 라혼은 천하의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지려했고, 결국 가졌다. 고학은 그러 한 힘을 바탕으로 천하를 두고 도박을 하라 말하고 있지만 라혼에겐 또 다 른 힘이 있었다. 천하와 싸우기에 부족하나 천하를 위압하기에 충분한 힘. "고학." "말씀하십시오." "오는 원단에 천자가 무후(武后)로 바뀔 것이다. 십제는 물론 흑막 웅랑교 와 후선에 용호왕의 이름으로 교지(敎旨)를 보내 입조를 명해라!" "예? 그런…." 고학은 자신의 생각을 뛰어넘는 주군의 말에 입을 '쩍!' 벌어졌다. 게다가 '용호왕(龍虎王)'이라니……. "십제에게 천림왕과 호황의 음모와 설화가 백호이며, 가니아의 존재를 알려 라. 전 용호군에 용호왕의 이름으로 집결을 명하라." "하, 하지만 일은 은밀하게……." "고학 설화는 호황가의 핏줄이다. 은밀하게 일을 진행할 이유도 필요도 없 다. 호황스스로 용황을 대신하는 나를 도모하는 것을 알고서도 묵인했다. 그대의 말대로 그는 스스로 천자의 덕이 없음을 증명했는데 무엇을 주저하 리." 만추(晩秋)에 접어드는 때 천하는 백호나한의 거병소식에 크게 술렁였다. 장강대하의 수로를 타고 백호나한 휘하의 십대장군들이 10만 정병을 이끌고 상경에 집결하기 시작했고, 스스로 용호왕이라 칭왕한 백호나한은 백호인 천상천화가 진정한 진명천자임을 주장하며 천하 제후들에게 격문을 띄웠다. 진골십가의 십제 중 계제가가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고, 을주 마제가와 정 주 사제가가 이일은 호황가의 내부 문제이라는 이유를 들어 중립을 천명했 다. 그것을 기화로 다른 진골십가도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갑주의 서제 가는 백호나한의 거병에 극렬하게 반대하며 원주 남부를 위협했다. 이에 임 주를 장악하고 있던 학가(鶴家)는 백호나한을 계세자가 적극지지하고 나섰 다는 사실에 불안을 느끼며 그가 일으킨 거병을 성토했다. "이런 무모한 사람을 보았나. 은밀하게 움직여도 될까 말까한 일을 이렇듯 대놓고 하다니…." 중경 청인성과 청인성부의 인구는 무려 5백만에 육박했다. 중경이 위험해지 만 지금이라도 당장 1백만대군을 모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중경이었다. 그러 한 성시를 고작 10만으로 정면승부를 하려는 백호나한의 시도는 무리 그 자 체였다. "태상회주, 일은 벌어졌습니다. 일단 중경의 병권을 쥐고 있는 무골후를 움 직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흐음." 백수회의 태상회주 호사천은 천림왕을 충동질하여 그로 하여금 백호나한을 도모케 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사위인 그에게 위험을 알리고 호황과 알력이 생기도록 일을 꾸미도록 했다. 그러나 자신이 미처 알리기도 전에 천림왕이 자객교에 청부한 사실까지 알고 자객교의 비밀근거 지를 천하에 알리기까지 했다. 호사천은 그것을 전해 듣고 호황의 비밀세력 인 호영에 사위의 간세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일을 이토록 크게 벌일 것이라곤 상상치 못했다. "묘낭, 나도 밝은 곳으로 나가야 할 것 같소. 어떻게 하든 모든 책임은 호 천린에게 미뤄야 하오. 아직은 때가 아니야." "알겠습니다. 제가 직접 백호나한을 만나보겠습니다." 그렇게 지하에 숨어있던 백수회가 전면에 나서서 백호나한과 호황사이를 오 가며 중재 시도하기하기 시작했다. 환도금강(幻島金剛) 천하가 호황과 스스로 용호왕(龍虎王)이라 칭왕(稱王) 한 백호나한의 무력 충돌을 숨죽이며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정작 이모든 일을 벌인 장본인인 라 혼은 용황궁 금림의 정자에서 태평하게 독서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런 라혼 을 위해 차를 내온 설화가 걱정스레 물었다. "이렇게 빈둥거려도 되는 거예요?" "음? 뭘 말이야?" "……." 설화는 라혼의 이유를 모르겠다는 식의 능청스런 반문에 어이없어하며 다시 말했다. "도대체 일을 벌였으면 책임을 져야죠. 일은 수하들에게 모조리 미뤄두고 서방님은 이게 뭐냐고요?" "뭐가? 고학도 그렇고, 모석을 비롯한 장군들도 제몫을 다하는데…. 왜?" "어유! 도대체 무슨 꿍꿍이에요? 일은 있는 데로 크게 벌려놓은 이유가 뭐 냐고요?" "타초경사지계(打草驚蛇之計)." "……?" 설화는 서방님의 한마디에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수풀을 때려 숨어있 는 뱀을 놀라게 하는 타초경사(打草驚蛇)는 두 가지 의미로 쓰였는데 하나 는 숨어있는 뱀을 쓸데없이 놀라게 하여 화를 자초한다는 의미와 반대로 뱀 을 잡기위해 '일부러' 수풀을 건든다는 의미가 함께 쓰였다. 라혼의 겨우는 후자 쪽이었다. "설마? 그런 거였어요?" "그래." 설화가 묻고, 라혼은 답했다. 그리고 설화는 나름대로 하나하나 따져보기 시작했다. "호황이 묵인 하에 천림왕이 흉계를 꾸몄으니 서방님은 용황을 대신하는 용 천검주로써 나름대로 스스로 자위하는 것이고, 저의 신상을 공개함으로써 제게 집중될 눈과 귀를 서방님과 호황의 대립으로 쪽으로 돌린 거군요." 설화는 스스로 그렇게 말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생각해보 니 천하는 자신이 백호라는 것에 대한 진위여부에는 관심이 없고, 서방님과 호황의 무력충돌에만 관심이 쏠려있는 상태였다. 워낙 거창하게 들고 일어 선 터라 설화 자신이 백호라는 것은 그저 거병의 명분쯤으로 취급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당장 천하의 운명이 좌지우지되는 상황에서 말 만들어내 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든 백호는 제왕이네 하는 이야기는 사람들에 관심 에서 멀어지기 마련이었다. 서방님는 자신에게 돌려질 화살을 대신 맞고 있 는 것이었다. "그래, 그리고 네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아무래도 내 장인 되는 분이 뒤에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아서…. 온다는 말이 있은 지가 석 달이 다되 었는데 그림자도 볼 수 없으니 겸사겸사 터트린 것뿐이야. 그보다 설화야." "예." "앞으로 하기에 따라서 네가 무후가 될지도 모르는데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한다." "아니요. 싫어요. 저는 무후나 여황 따위는 되고 싶지 않아요." 라혼은 단호하게 거부를 하는 설화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싫으냐?" "싫어요. 저는 그냥이대로가 좋아요." "그럼, 하지 않아도 돼. 그런데……." "……." "천하에 천자가 바뀐다고 큰소리 쳐났는데 실없게 됐군." 천하지존의 자리를 '해라 마라. 하기 싫으면 말던가.'라는 식의 라혼과 설 화 부부의 대화를 누군가 들었다며 그 누군가는 어이가 없어 턱이 빠졌을지 도 몰랐다. 그러나 다행히 지금 금림에는 오직 라혼과 설화 둘뿐이었다. 어 쨌든 라혼은 설화가 하기 싫다고 말하는 것을 강요할 생각이 없었다. 지금 이라도 당장 설화가 은거하자고 한다면 라혼은 주저 없이 모든 것을 정리하 고 환도(幻島) 금강(金剛)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설화가 자신을 따 르는 북지성의 사람들 버리고 은거를 택할 리 없었다. "그럼 앞으로 어찌하실 요량이세요?" "장인이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모양이니 장인의 정치력을 믿어야겠지." "에? 그럼 중경으로는 가지 않는 거예요?" "글쎄? 그건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소한 겨울에는 군사들을 움직 이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 봄이 올 때까지 움직이지 않을 작정이다." "그렇구나. 그런데 잘못하면 천하를 상대로 싸움을 벌여야 하는데 자신은 있어요?" "일단 후선의 황실인 강무세가에서 네 존재를 알았을 테니, 어떤 식으로든 접촉이 있을 거고, 을주와 정주는 우리쪽에 호감을 표시하며 중립을 선언했 으니 됐고, 계주의 돈제가와 경주의 원제가 또한 아직 입장정리를 하지 못 하고 있지만 그들이 내게 적대할 가능성은 적지. 남례성의 하남천원군에 그 곳 출신군사들이 많은데 그들이 고향을 떠난 지 4년이 못되었으니까. 나머 지 가문도 당분간 움직이려 하지 않을 거고 문제라면 갑주 서제가와 임주를 장악한 학가정도랄까?" 그렇게 라혼은 용호왕부 금림에서 설화와 함께 한가롭기 그지없는 태도로 급박하게 돌아가는 천하정세를 논하고 있을 때, 상경 현무수문금군이 관할 하는 양항은 남상과 남례성, 북지성의 군사들을 가득 실은 배들이 연일 분 주하게 군사들을 내려놓았다. 이미 남쪽 끝 이역만리에서 북부에 20만 대군 을 한 달 만에 옮겨놓은 경험이 있는 대수영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남례성 에서 10만이나 되는 남례성의 군사들이 없었다. 그저 원래 대수영에 포함되 어 있는 군사 약 5만이 집결된 것뿐이었다. "옛 부터 장강대하를 장악한 자가 곧 천하의 주인이라 했는데…. 천자가 바 뀔 모양이로세." "일하다 말고, 뭔 소리여?" "아니 어제 술을 마시는데 우연찮게 용호군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북지성, 남상, 남례성, 남례성 밑에 해남 등 세상천지에 흩어져 있다가 모 여 자기가 있었던 곳의 이야기를 하는데…. 나도 모르게 그이야기에 빠져들 었지 뭔가? 그런데 지금 보니 중경의 호천궁에 앉아있는 호황에게 가짜천자 라고 하는 백호나한의 군사들이 사방에서 몰려드는데 그게 다 장강대하의 물길을 타고 모여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과연! 백호나한의 수군들이 장강대하를 장악했으니 반쯤 천하 지존인 셈이 군." 오대(伍大)와 부문(浮文)은 상경 양항에서 날품팔이 일하는 잡부들이다. 그 러나 그런 그들의 눈에도 급박하게 돌아가는 천하정세가 보였다. 호천궁의 호황은 지는 해이며 상경의 용호왕은 뜨는 해로 느껴졌다. 상경에서 백호나 한이 용호왕의 이름으로 천하의 제후들에게 보냈다는 격문의 내용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그리고 격문에 포함된 호황의 묵인 하에 백호나한을 도모하 려한 천림왕의 기도는 당근 천자에게 덕이 없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며 누 구나 입을 모았다. 천림왕의 이름으로 진골십가의 십제들에게 사변(事變)이 있을 것이라는 밀서가 전달되었고 을주와 정주에서 그것을 증명했으니 증 거는 명백했다. 수인조정을 지지하던 반대하던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현 천자인 호황은 덕이 없다고 입을 모으니 하루하루 먹고살기 힘든 백성들 사 이에서도 천자가 바뀔 것이라고 수군댔다. 수인조정을 지지하는 인사들은 호황이 용황에게 선양(禪讓)의 절차를 통해 양위(讓位)를 받아 천자에 오른 호황이 용황를 대신하는 용천검주를 해치려 하는 것을 막지 않고 오히려 묵인한 것은 본래 평등한 십이진가의 열두 제 왕들의 결속을 해친 일이라며 비판했고, 조정에 반하는 쪽에서는 이는 수인 천하가 끝나는 전조라며 비아냥댔다. 즉, 백호나한의 행사는 파격적이었으 나 정론에 가까웠던 것이다. 호황이 천자라 하나 이는 일반 백성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이었다. 수인천하(獸人天下)를 이룩한 십이표기(十二標旗)의 후신인 십이진가(十二 眞家)의 가주들은 원칙적으로 같은 반열에 있었다. 천하의 모든 땅을 제패 하고 천하를 분할해 각 지역의 제(帝)가 되고 중앙의 황(皇)과 제(帝)를 두 어 지방의 십가(十家)는 진골십가(眞骨十家)로 불리었고, 중앙의 이가(二家 )는 성골이가(聖骨二家) 또는 용호이가(龍虎二家)로 불리어 서로 황(皇)과 제(帝)가 되어 원주에 천원회의를 통해 천하 다스렸다. 사실상 따로 떨어진 나라나 다름없는 십이진가가 하나로 뭉쳐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들 이 사람들에게 요괴(妖怪) 취급을 받던 수인(獸人)이기 때문이었다. 힘으로 천하를 제패했지만 천하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보통사람, 따로따로 떨어 져서는 감당이 될 리 없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옛 부터 신성시하는 용호(龍 虎)가 천자의 자리에 있다는 명분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리고 십이진가의 결속은 그보다 더 중요했다. 그런데 호황이 스스로 그 결속을 해치는 일을 묵인한 것이다. "어찌하여 무골후께서 가만히 계시는 것입니까?" "이미 청인성부에 강제징집령이 내려 군사를 모으고 있건만 가만히 있다니 그것이 무슨 말인가?" 중경의 금군들을 총괄하는 금군교위 무골후 호장은 난데없이 찾아와 닦달하 는 금위위의 금위대장 호덕창을 의아하다는 것을 숨기지 않으며 반문했다. "일개 야적에 불과한 천한 놈이 천하지존인 천자를 능멸하고 있는데 어찌하 여 가만히 두고 보시냐는 것입니다." 숭무공 원공반에게 석패하기 이전 무골후 호장은 수인제일고수로 명성이 드 높은 영향력 있는 명사였다. 성정 또한 강직하고 호탕한지라 제 무장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다. 호장이 호황가에 적을 두고 있어 그렇지 청류파에 가 까운 인물이었다. 지금 호황에게 덕이 없다고 천하인이 성토하는 와중에 호 황을 변론하는 이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런 지경인데 호황의 최 측근인 무골후가 침묵하고 있었으니……. "확실히 천자를 폐위해야한다는 말은 심했지. 하지만 천하는 천자가 다스리 는 것이 아니네. 폐하가 천자의 자리를 양위한다고 해서 호제로써 지위가 흔들리는 것이 아니야. 후선의 강무세가에게 천원회의에서의 참석케 한 것 도 백호라고 주장하는 천상천화의 외가이기 때문이지 남적인 강무세가를 인 정했으니 부적인 웅랑교도 인정할 수밖에…." "무골후께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사실은 천이 찾아왔었네." "천이 형님이요?" 호덕창은 호사천의 이름이 호장에게 언급되자 움찔했다. 사실 호사천의 그 림자는 호황가에 무척 컸다.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한 그의 노력을 모르는 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천이 천상천화는 자신의 딸이니 인정해달라고 하더군. 천림왕에게도 그렇 게 말했는데 천림왕은…." "……." "아마도 폐하께서 천이를 버린 것이 확실한 듯하네. 천이는 잔꾀가 많아 어 떤 움직임을 바라고 천림왕을 충동질 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으나 일이 이렇게 불거지니 천이도 무척 당황한 모양이더군." "그래서 뭐라 답하셨습니까?" 무골후는 호덕창의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면 힘을 주어 말 했다. "나는 한 번도 천이가 가문의 일원이 아니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 "천자의 문제는 천원회의에서 다루어지는 것이 옳다. 그러나 백호나한이 무 력으로 일을 해결하려 한다면 내손으로 직접 그의 목을 밸 것이다." "……!" 무골후 호장의 뜻은 확고했다. 무력도발은 막을 것이나 명분싸움에는 끼어 들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었다. "용호왕은 우리를 인정한다는 건가?" 선(鮮)의 정왕 강무정은 용호왕부의 용호왕에 이름으로 날아온 격문을 들고 , 이 일이 이불리(利不利)를 생각했다. 그런 강무정에게 격문을 가져와 전 해준 해왕 강무해가 말했다. "형님, 해군대장의 말로 백호나한이 우리에게 큰 적개심은 없고 혜아에 대 해서 물었다고 했으니 격문의 내용은 사실 일겁니다." "천상천화가 혜아의 핏줄인 것이 사실이란 것은 나도 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입조하는 문제와는 별개의 일이지. 내가 고민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입장을 가질 것이냐다. 백호나한의 주변에 있는 주작신모(朱雀神母)는 너 와 내게 외할머니가 되시는 분이시다. 하지만 그것도 우리가 이루려는 대업 보다 중하진 않다." "……." "자고로 천자에게 덕(德)이 없으며 천하가 흉년이 들고, 백성이 고단해 짐 으로 천명(天命)을 받은 이가 진명천자(眞命天子)로써 혁명(革命)하여 도탄 에 빠져 허우적대는 천하 만민을 구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작금을 상황 은 천하 만인이 그러한 천명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어찌해야 합니까?" "모르겠다. 그에게 간 천명을 되돌리려면 덕을 잃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외조모와 조카가 그에게 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입장을 고려해서 우리와 충돌을 피하는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해왕 강무해는 정왕 강무정의 말을 무슨 뜻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백호나한의 군사들과 직접적인 충돌은 거의 없었다. 직접적인 충돌을 우려한 상황에서도 밀약으로 충돌을 피했다. 조정이 동해를 안정시키라는 명을 받았으면 서도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것은 명백하게 백호나한이 선 제국에 적의가 없음을 증명해 주었다. 뿐만 아니었다. 동영의 내부 문제로 인해 동영과 거래 선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남해에서 밀약으로 토금전장이 주도하는 중주와 밀무역이 이루어지므로 선 제국의 재정에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토금전장이 백호나한과 관계가 깊다는 것은 천하에 모르는 이가 없 었으니 그것에도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럼 결국 우리는 그를 도와야 하는 거군요." "아니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관계를 유 지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럼……." "호황과 용호왕의 쟁패에서 우리는 용호왕을 지지해야 갰지. 하지만 이일은 어전회의에서 다루어야 할 사항이다." 정왕과 해왕의 밀담을 그렇게 결론이 났지만 어전회의에서 결론은 정왕 강 무정의 의도와는 전혀 달랐다. 정치적 문제에 대해선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던 낙왕 강무산이 적극적으로 나서며 용호왕를 지지했고, 검부(劍府)의 좌우무공(左右武公) 한씨 형제도 그에게 적극적인 지지의사를 표명했다. 더 욱 결정적이었던 것은 웅랑교의 소종사 낭호인과 웅천패가 백호나한에게 충 성을 맹세했다는 소식이었다. 게다가 이미 서해우수사로 태회진 대수영 본 영을 책임진 장상(獐商)이 의백최가의 안방이라 할 수 있는 재독항에 대수 영의 분영을 설치하고 곧 인시드 북주 무역을 재개할 것이라는 소문과 웅랑 교가 이끄는 저 유명한 흑막의 12만 철기병이 북지성 대종도를 따라 남하하 고 있다는 믿지 못할 소식은 강무세가로 하여금 선택을 강요하게끔 했다. 그리고 강 건너 불구경하던 을주의 마제가와 정주의 사제가 또한 웅랑교의 대군이 남하에 기겁하며 백호나한과 친구가 될 것이냐 아니면 단순한 걸림 돌이 될 것이냐를 두고 새로운 결정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의 결론은 용 호왕를 소극적 지지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중주는 후려, 동인성, 앙신성을 장악한 후선과 남례성, 남상, 북지성, 그리고 의백성과 흑막을 장악하고 있는 웅랑교에 중주가 완전히 둘러싸인 형국이 되었다. 그러나 그 형세 속 에서 백호나한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백호나한이 웅거한 남원주 또 한 중주에 포위된 형상이란 것이었다. 정확히 백호나한의 거점은 상경 황진 성을 중심으로 한 황지성부 일대 뿐이란 것이었다. 시간이 없어서인지 남원 주의 지방 태수들은 천림왕이 입김이 닿아있는 그대로였고, 그들은 언제 백 호나한이 자신을 쫓아낼지 신분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는 점이다. 백호나한의 행사에 극렬한 반응을 보였던 갑주의 세제 서포틈이 주목한 점 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장기에서 궁을 잡으면 이기는 것처럼 모 든 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백호나한만 제거되면 모든 세력이 외해되리 라는 것을 꿰뚫어 본 것이다. 서제는 그러한 자신의 판단을 믿고 남원주의 태수들을 포섭함과 동시에 군사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가문 을 인정받으려하는 임주의 학가를 끌어들여 적극 동참하게하고 정인대장군 의 이름으로 격문을 띄워 백호나한이 용황의 권위를 상징하는 용천검을 가 지고 있다고 하나 종적을 알 수 없는 용황이 하사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주장을 하며 백호나한을 반역자로 규정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러한 사태를 불러온 호황이 아무런 반응 보이지 않는 가운데 호황과 용호왕 백호나한의 쟁패는 서제와 무력충돌을 예고했다. 용호왕의 용호군은 훈련도가 높고 전투경험이 풍부한 정병이었고, 갑주의 서병들 또한 그에 못지않은 정예병이었다. 예고된 서제 서포틈과 용호왕 백 호나한의 충돌은 그야말로 천하의 패권을 두고 하는 진검승부였다. 이 싸움 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천하의 운명이 좌우되기 때문이었다. 이미 천하인 의 머릿속엔 당금 천자인 호황은 없었다. 환도금강(幻島金剛) 금강(金剛)은 벼락이다. 천지간에 가장 강한 기운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뇌 정지기(雷霆之氣)다. 하늘에 환인(桓因)이 있어 천둥벼락을 마음대로 부렸 는데 그가 벼락을 다룰 때 사용한 무기가 바로 금강저(金剛杵)다. 환인의 금강저는 만사만악(萬邪萬惡)의 부수고, 천지간에 모든 힘을 부쉈다. 또한, 환인에게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 하백(河伯), 뇌공(雷公) 의 다섯 신하가 있었는데 풍백은 바람을, 우사는 비를, 운사는 구름을, 하 백은 강을 뇌공을 벼락을 다스렸고 그들은 환인과 언제나 함께 있었다. 환 인이 다스리는 나라는 환국(桓國)인데 환국이 자리 잡고 있던 곳은 천호(天 湖) 일대다. 천지(天地)를 연 반고족(盤古族)이 융성하여 사방 1백만리를 다스렸는데 오 만하고 탐욕스럽기 이를 데 없어 사방 1백만리나 되는 영토를 가지고도 부 족하여 하늘 밖 하늘과 땅속 깊숙한 곳, 큰 바다 속 심해마저 자신의 것으 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천지신명에게 노여움을 사 멸족(滅族)되 었다. 그 후 억겁의 시간이 흐르고 반고족의 피를 이어받은 종족이 다시금 이 땅위에 생겨나니 그들이 바로 구환족(九桓族)이다. 환인은 9개의 환족을 하나로 묶어 나라를 세우니 그것이 바로 환국이다. 환국은 9천년 동안 이 땅을 다스리다 천지신명의 쟁패하는 와중 멸망하고, 수백 년 후 다시 환국 의 맥을 이은 나라가 서니 바로 단국(檀國)이다. 단군(檀君)이 다스리는 단 국은 다시 1만년을 이어가다 다시금 재발한 신마쟁패의 틈 속에서 멸망의 길을 가니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다. 환국 9천년과 단국 1만년 동안 되풀이 되는 신마쟁패에서 살아남으려 많은 것들이 만들어지고 준비되었지만 언제 나 너무 늦었다. 환단(桓檀)이 준비한 것 중 한 가지가 바로 선산환도(仙山 幻島)다. "민간에 전해진 전설 속에선 선산환도의 신선들이 천지를 안정시켰다고 알 려져 있지만 그것은 그저 바램 일 뿐입니다." "……." "환인과 단군은 하늘님이 현신한 존재로 전승되고 있지만 사실은 2만년전 그리고 1만년전, 존재했다는 나라의 통치자였습니다. 황제(皇帝)가, 그리고 호황이 천자(天子)라 칭해지는 것은 하늘이 바로 환단(桓檀)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백왕(白王)과 입건(立巾)이라 단국이 멸망한 후 백왕이 천손을 기다리지 않고 황국(皇國)을 개국하고, 그에 반발한 입건이 제국(帝國)을 개국합니다. 천하가 황국과 제국으로 나뉘어 쟁패를 시작했는데 뇌공, 풍백 , 하백, 우사, 운사 다섯 신들은 그들의 쟁패에 끼어들지 않은 체 방관으로 일관합니다. 후에 천손이 강림하지만 황국과 제국은 천손은 천손이라 받아 들이지 않고 결국 환단의 정통성은 거기서 끝나게 됩니다. 후에 황국에서 불세출에 영웅이 나와 제국을 멸하고, 제국의 공주를 아내로 맞아 그 아들 이 다시 황국을 빼앗고 스스로 천손(天孫), 아니 천자(天子)라 칭하며 오신 에게 충성을 요구하지만 오신은 그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왕조를 연 가문은 오신(五神)의 보호를 받지 못함으로 짧게는 수십년, 길어야 수백년 을 유지하지 못하고 역사의 격랑 속으로 사라졌지요." "오신은…?" "스승님이 생각하신 것이 맞습니다. 오신룡이 바로 오신이지요." 라혼은 현석이 들려주는, 본래 알고 있었던 이야기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가 무척 흥미로웠다. "스승님, 오신룡이 어떤 존재인지 아십니까?" "……." 라혼은 현석의 질문에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칸대륙에 드래곤들이 서식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라 혼은 그들이 무엇 때문에, 무슨 이유가 있어 그러는지 알지 못했다. "오신룡은 단국의 오신입니다. 환국을 연 환인의 오신과 다른 존재죠. 환국 은 신들이 다스리는 나라였고, 오신은 당연히 신의 이름입니다. 단군이 환 인을 대신하였듯이 오신룡이 오신을 대신한 것이지요. 오신룡은 환국의 환 인에 명을 받은 환웅(桓雄)이 키운 존재라고 합니다." 신화(神話)는 모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모호한 이야기가 곧 신화이 니……. "환웅이 오신룡을 마련했듯이 단군은 선산환도를 만들었습니다. 열개의 선 산환도에 주인은 정해졌지만 금강의 주인은 끝까지 정해지지 않았다가 스승 님이 금강의 주인이 되신 겁니다." "때가 가까워오니 아무에게나 준 것이겠지." "그건 그렇지가 않습니다. 금강이란 모든 것을 부수는 천둥벼락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환도금강에는 뇌전도(雷電刀) 금강저와 쌍전석(雙箭石) 그리고 법륜(法輪)이 함께 보관되어 있습니다. 금강의 주인이라 함은 곧 전 륜성왕(轉輪聖王)을 뜻하는 겁니다." "전륜성왕이라고?" 전륜성왕(轉輪聖王)이란, 통치의 수레바퀴를 굴려, 세계를 통일·지배하는 이상적인 제왕을 말한다. 확실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하늘을 상징하는 모 든 신중의 왕들은 천둥벼락을 무기로 삼는다. 만일 금강에 그러한 힘이 숨 겨져 있다면 그리고 그러한 힘을 가진다면 세계의 왕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 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현석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금강선맥은 동방십일선맥의 맹주나 다름없습니다. 싸움이 벌어진다 면 동방십일선맥은 금강의 주인의 명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금강의 주인을 결국 찾지 못했다면 본래 굉(宏) 금강의 주인을 대신하기로 되어있었습니 다." "……!" "하지만 굉(宏)은 성마의 기운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스승님에게 금강을 준 것에 대하여 선계의 선인들은 큰 우려를 표명하고 있지요. 그러나 앙(殃) 과 우(于)가 스승님을 1백년간 따르겠다는 말을 듣고 이토록 잠잠한 것이지 요." "그게 무슨 뜻이지?" "모르셨습니까? 이는 오신룡이 직접 스승님을 시험하겠다는 의도가 있고, 선계의 선인들은 시험이 끝나는 1백년 후를 가만히 기다린다는 뜻인데?" 쉽게 말해서 앞으로 닥쳐올 변고에 장수노릇을 할 존재가 필요한데 힘쎈 놈 이 보이자 일단 덥석 잡고보는 심보였던 것이다.. 전륜성왕이니, 선계의 우 두머리니 하는 것은 그냥 하는 말이었다. 목숨이 위태로는 위험한 일을 시 키면서, 영웅입네, 용사네 칭호를 부여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 다. '허어, 또 혹! 이었어?' 주어진 힘이 클수록 책임과 의무 또한 막중해지는 법. 라혼은 안 그래도 관 심이 있는 선산을 준다기에 덥석 받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신룡에게도 자 신이 사용한 방법이 통한다는 사실에 너무 흥분한 나머지 굉(宏)이 금강을 주는 이유를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라혼은 모처럼 한가한때(?) 금강을 찾 아가려고 마음먹고 그전에 신선인 현석에게 선산환도가 어떤 것인지 물었다 . 대략적인 내용은 여인천궁에서 설화를 가르치기 위해 보내준 책에 있는 내용과 대동소이 했다. 그러나 선산환도의 유래에 대해서는 내용이 조금 달 랐다. "그렇다면 최소한 백년간은 금강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말이렷다." "예? 무슨……." 현선을 라혼 스승님의 말에 설마 하는 표정을 지으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늘에 떠있는 섬이라면 그야말로 난공불락이지 네 말대로 금강의 주인이 전륜성왕이라면 전륜성왕처럼 이용해 주겠다." "안됩니다. 선산환도를 속세에 이전투구(泥田鬪狗)에 이용하는 것은……." "왜 안 되는데?" 라혼의 물음에 현석은 대답하지 못했다. 신선인 현석이 생각하기에 귀선인 스승님은 이미 속세의 덧없는 진흙탕의 개싸움을 하는 한복판이 있는 존재 였다. 선산환도는 선맥의 신선들의 의지에 따라, 각 선맥의 규칙에 따라 움 직이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볼때 스승님은 금강선맥의 유일무이한 선인이 고, 스승님의 의지가 곧 선맥의 의지가 되는 상황에서 천산선맥의 선인인 유운검선이 간섭할 수 있는 이유가 없었다. 자신의 목숨을 노린 호황에 대한 백호나한의 분노성이 천하를 뒤덮은 가을 이 지나고 겨울이 가까워 올 무렵 호황과 백호나한간의 대립은 당사자인 호 황이 침묵하고 오히려 아직까지 상국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서제가 칼을 빼 듦으로써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에 백호나한은 남쪽의 강 무세가와 손을 잡고 북쪽의 웅랑교에게 복속을 다짐받으니 천하를 주유하는 유세객들의 입술에서 침이 마를 날이 없었다. 겨울은 대군을 움직이기에 적당치 않은 계절이었다. 천하에 누구나 예상하 듯이 단 한 번의 충돌로 우위가 가려지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자연히 신중 한 움직임을 보일 수밖에 없었고, 위험을 줄이기 위해 중립을 선언한 십제 들에게 자신을 지지해 줄 것을 부탁하는 친서 보내니 하루에도 수십 수백 명의 전령이 매서운 겨울바람 속에서도 비지땀을 흘리며 천하를 종횡했다. "아버님, 서제가 남원주의 태수들을 포섭하고 일부 태수들은 그에 동조하며 부화뇌동(附和雷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는 그것은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겁니까?" "초야, 그것은 주군의 뜻이다." "예?" "고선생이 서제의 그런 움직임을 보고 그에 맞대응하려 했는데 주군이 이례 적으로 나서서 만류한 모양이더라." 모초는 아버지 모석의 말을 언뜻 이해할 수 없었다. 전체적인 세력은 용호 원수부, 아니 용호왕부가 컸지만 천하의 패권은 원주에서 결판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천하의 패권이 걸린 마당에 주군은 왜 움직이지 않는 겁니까? 아버님 지금이라도 당장 주군을 찾아가서 진언해야 옳지 않 겠습니까?" 모석은 아들 모초에게 어릴 적 여린 모습을 벗고 당당한 장부로 자라나자 자기 말을 들어보라는 청년 특유 패기만만함을 보고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소 엉뚱하다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20여 년간 주군을 모셔왔다. 주군이 설로촌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처음 만나 것이 바로 나다. 그때는 농번기에 일꾼하나 들이는 셈치고 먹을 것과 잠자리, 그리고 그때 아직 젖 먹기였던 주모인 설화는 너와 네 어미의 젖을 먹고 자랐다." "……." "초야, 너 또한 어렸을 적부터 주군을 보아왔지 않느냐 네가 보기에 주군은 어떤 사람인 것 같으냐?" "아버님, 제는 감히 주인 되는 분의 품평을 할 도량은 되지 못합니다." "그래도 네가 생각하는 바를 말해 보거라." 모초는 아버님의 말에 곰곰이 따져보았다. "주군은 바람 같고, 구름 같은 분입니다. 그리고 한여름의 폭우 같기도 하 고 때론 천둥벽락같이 사람을 놀라게 하는 분이십니다." "설명을 해보아라!" "평소에는 하늘위에 구름처럼 유유히 바람에 몸을 맡기고 흐르다가 무슨 일 이 벌어지면 갑작스레 뇌성호우(雷聲豪雨)처럼 급박하게 움직이니까요." "쯧쯧쯧, 어디서 좋은 말만 듣고 그대로 읊는구나. 어디서 주워들은 것이냐 ?" 모초는 아버지의 면박에 얼굴을 붉히며 동료들과 함께 주루에 들려 유세객 이 하는 말을 그대로 옮겼다는 것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저도 그 설객노인의 이야기에 크게 동감하는 바입니다." "확실히 그 비유는 나도 공감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러나 수하의 입장에서 보면 주군은 독불장군이다." "예?" "주군이 직접 나서면 무슨 일이든 폭풍처럼 밀어붙인다. 그런 상태에서 주 군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기도 바쁜 나나 다른 장수들은 어떤 의견을 말하 거나 생각할 여유가 없다. 처음 출병하여 앙신으로 이동할 때도 주군은 군 사들의 생존율을 높이는 방안으로 보군을 마군으로 바꾸는 계획을 세웠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그러나 결국해냈다. 제대로 된 마군을 아니었으나 내가 생각하기에 후선의 마군을 상대하기에 부족하지 않 았다. 그 뒤 남례성으로 가는 도중은 어떻더냐? 지금 대수영의 모태가 된 함대를 고작 수일 만에 꾸렸지 않느냐. 남례성의 봉수성에 도착했을 때는 또 어떻더냐? 독단으로 조정이 직접 임명한 장수를 베었다." "……." "그러나 부장인 나는 주군에게 어떠한 간언도 하지 못했다. 아니 주군은 자 신의 뜻대로 움직였고, 나와 다른 장수는 그저 따랐을 뿐이다. 그것은 천하 에 주군의 책사로 알려진 고 선생도 크게 다르지 않다. 주군은 어떠한 일이 든 누구에 의견을 묻거나 하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는다.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하고 결정하고 실행하니 주군이 나서는 순간 수하들은 그저 주군의 얼 굴만 쳐다보게 되었다." "그렇지만 지금 주군이 나서지 않는 것은……." "허허허, 주군은 상인의 기질이 다분하다. 봉록을 확실하게 챙겨주는 대신 그만큼 확실하게 부려먹으니 말이다. 그리고 남원주의 태수들은 천림왕과 연이 깊다. 상경이야 사람이 많고 넓지 않은 지역이니 사람을 통째로 갈아 치울 수 있지만 남원주의 태수들은 다르다. 그들은 각 지방의 토호(土豪)들 이니 태수의 자리에서 쫓아낸다고 해도 그 영향력은 살아있다. 그들은 스스 로 자기 밥그릇이 있는 자들이니 자연히 그것을 지키려 들것이고 서제와 주 군사이에서 눈치를 보고 있는 형국이다. 지금 당장 급한 불을 끄자고 그들 을 회유하자면 나중에 더 큰 이득을 약속해야 한다. 지금 서제가 하고 있는 작업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독불장군인 주군이 그런 것을 좋아할 턱이 없지." 모초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젊은이답게 자신의 의견을 좀처럼 굽히지 않았 다. "하나 당장 급한 불은 꺼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 코가 석자인데 나중 일을 걱정하여 일을 어렵게 한다는 것은……?" "초야, 그것은 주군에게 그 정도는 무시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정 궁금하거든 겸사겸사 용황궁으로 가서 직접 물어보면 될 것이 아 니냐? 나도 궁금하니 말이다." "제가요? 궁에요?" "그래, 그런데 며늘아기는 언제 집에 데려 올 거냐? 네 어미가 기다리다 지 쳐 목이 빠지게 생겼는데?" "예? 그, 그게 아직 시국이 시국이니 만큼 좀 더 시간을 두고……." "이런, 그 아이가 아직도 대답이 없는 게로구나. 네게 사방에서 청혼이 들 어와서 네 어미는 거절하느라 정신이 없다고 하던데 아직까지 감감 무소식 이니……." 모석은 지금 황진성 사문수비대장이고 용호왕 백호나한의 최측근으로 사실 상 용호군의 최 선임자였다. 그리고 그 밑에 아들인 모초는 그 자신도 전도 가 촉망되는 청년이었다. 당연히 용호왕부와 어떻게든 인연을 맺고 싶어 하 는 자들에게 모초는 그야말로 1등 신랑감이 아닐 수 없었다. 용호왕부의 제 장들에겐 막대한 권한이 있었고 백호나한이 천하의 패자로 등장할 경우 모 석의 가문은 명문 중 명문이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부자가 동시에 백호나한 을 섬기고 있고, 모초는 천상천화와 젖을 나누어 먹은 사이였다. 어떻게 보 면 아무것도 아닌 사이지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그것은 비범한 것이었다. 당연히 모초에게 추파를 보내는 가문의 여식들은 백호나한의 위세를 증명 하듯 하나같이 녹록치 않은 가문들이었다. 그러니 촌부의 아낙이었던 모석 의 부인이자 모초의 모친이 안달 할만도 했다. 그러나 모초에겐 이미 마음 준 여인이 있었고, 모석이 보기에도 모초가 마음 준 여인 나름대로 흡족했 다. 이미 백호영 내에서 모초와 응소매의 사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난세지시(亂世之始) "하아~!" 봄이라지만 아침을 아직 쌀쌀하여 숨을 쉴 때마다 입과 코에서 하얀 김이 새나왔다. 신주관(迅走關)은 황지성부에 들어서는 입구라 할 수 있는 천험 의 요새였다. 상경 황진성으로 들어서려면 반드시 신주관을 거쳐야 했고 돌 아가려면 개세산맥(蓋世山脈)을 끼고 천여리를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이 신주관이 뚫리면 상경까지 장애물이 없는 평평한 평야라 상경까지 거칠 것 이 없었다. 그래서 이름이 빠르게(迅) 달리다(走)란 의미의 신주(迅走)였다 . 고학은 약 18000여명으로 이루어진 용호군 군단 중 고우와 웅장모, 초강 남 이끄는 3개 군단으로 하여금 병주의 토병(兎兵)들을 견제하게 하고, 모 석 총사령관으로 하여 5개 군단을 바로 이 신주관을 지키게 했다. 그리고 3 개 군단은 평야에 지어진 조그만 성에 두어 만약에 사태에 대비한 예비군단 으로 만들었다. "우우우으~! 날씨 참 쌀쌀 하구만." "아직까지는 그렇지?" 까무잡잡한 얼굴의 체가가 부르르 떠는 시늉을 하자 같이 번을 서던 동료 동글동글한 얼굴에 누두덩이 두툼한 만동(晩洞)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 다. 체가는 남례성의 진토인이고, 만동은 흑막의 순군출신이었다. 만동은 이러한 날씨가 익숙하고 별 감흥이 없었지만 추위에 익숙하지 않은 체가에 게는 가히 좋은 날씨가 아니었다. 둘은 지금 신주관의 망루에서 번을 서고 있었다. "아직 시간이 안 됐나?" "아니 이제 금방이야." "그보다 아직까지도 용호왕 전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던데 큰일이 로군." "큰일은 무슨 우리가 무슨 애도 아니고……." "그게 아니라 고위군관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서병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하더군." "에?" 만동은 체가의 말에 흥미가 동했는지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더디게 흘러가는 시간 때문에 심심해서 그 이야기를 꺼낸 체가는 만동의 반응에 말 을 옮기는 것인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말문을 닫았다. 그러한 체가 의 태도는 만동을 더욱 안달 나게 했다. "뭐야? 왜 말하다 마는 거야? 나만 알고 있을 테니 알고 있는 것을 이야기 해봐!" "그럴까?" "그래." "사실 크게 대단한 것은 아니니 말해주지. 서병의 군사들이 쳐들어오는 것 은 알 테지?" "천하에 그걸 모르는 자가 얼마나 되겠나?" "그러데 서병들이 쳐들어오는 것이 본래 이상한 것이라면?" "에? 그건 또 뭔 말이야?" "용호군만 자그마치 20만이야. 용호왕 전하가 부릴 수 있는 군사들은 북지 성에도, 남례성에도, 남상에도 있어." "그런데?" "사실 위쪽에서 지금 쳐들어오는 군사들이 어마나 되는지 가르쳐 주고 있지 는 않지만 대략 2배는 될 거라고들 하지 않나?" "그렇지." "그게 말이야. 아무리 많은 머릿수를 끌고 와도 여기에 용호군이 버티고 있 는 이상 신주관을 통과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 만동은 체가가 뭘 말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인상을 구기며 대 답을 재촉했다. "거참 답답하구먼.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말해봐!" "그러니까 머릿수가 아무리 많아도 신주관을 통과하기가 힘들다는 말이지. 그런데 서병들이 이곳에 집결하고 있다고 하니 이곳에서 끝장을 보자는 식 으로 나오니 이상하다는 말이지." "그래서?" "군관들 말이 이곳에서 싸움 길어야 반년이라고 하더구먼. 수틀리면 북지성 과 남례성, 남상에 있는 대군을 끌어오면 그뿐이라는 거지. 그런데 그것을 할 수 있는 분이 용호왕 전하뿐이라는 거지."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군관들 말이 용호왕 전하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고 하니……." 체가는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위해 만동에게 하는 대수롭지 않은 이 이야기 가 어떤 파급효과가 있을 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듣고 있는 만동도 ……. "어?" "뭐가?" "저기 누가 온다?" 만동은 눈을 가늘게 뜨며 아침안개에 흩어지는 희뿌연 새벽안개 너머 다급 하게 말을 질주하는 존재를 발견했다. "정찰병이로군." 만동은 그가 정찰병이라는 것을 알고, 전환으로 그의 도착을 알렸다. 그리 고 얼마 후 만동과 체가는 온 벌판을 쌔까막게 덮으며 끊임없이 접근하는 서너 줄기의 개미떼 같은 적병의 접근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정찰병으로 생각되던 아침의 기병이 도착하고 신주관 전역에 비상이 걸렸고, 체가와 만동은 교대를 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주먹밥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그리 고 그 이유가 지금 보이는 저 개미때를 연상시키는 군사들에게 있음을 알았 다. "설마 백만대군은 아니겠지?" 세제 서포틈의 대군과 신주관의 용호군이 서로 눈치를 보며 일진일퇴를 하 고 있을 무렵 라혼은 인상을 구기며 덩그러니 매달려있는 커다란 수레바퀴 모양의 법륜을 바라보고 있었다. "금강을 띄우려면 법륜이 움직여 줘야 하는데 꿈쩍하지 않으니 이거 참." 라혼은 금강, 아니 선산환도가 그저 허공에 떠있다는 섬이라는 것을 알아냈 다. 그리고 천산의 신선인 현석이 말한 금강의 주인이 11선맥을 이끈다는 말의 의미도 알게 되었다. 11개의 선산환도는 각각 하나의 도시이고, 금강 은 수도에 해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금강이 대륙의 중심인 천호에 건설 된 것이다. 그러나 11개의 선산환도는 본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사람들 을 대피시키기 위해 만들었지만 재난은 예상치 못한 형태로 미처 대비하기 도 전에 들이닥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라혼은 더욱 당혹스럽게 한 것은 금강이 미완성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법륜은 만들어지고서 단 한 번도 작동하지 않은 것이었다. 라혼은 손에 들고 있는 금강저를 넣었다 뺐다 하며 이런저런 궁리를 했다. 라혼이 들고 있는 금강저는 반자정도 길이의 수정(水晶) 칼날이 손잡이 양 쪽에 달려있었는데 라혼은 그것은 일륜(日輪)과 월륜(月輪)을 연결시키는 부분에 삽입시켰다. 금강의 서고 백서에서 '일륜과 월륜이 연결되는 부분에 금강저를 꼽으면 법륜이 구른다.'라고만 되어있어 라혼은 그 간단한 행위 를 계속 하고 있는 것이었다. "금강저 2개를 <十>모양으로 겹쳐놓으면 쌍전석이 되고, 도저히 모르겠군." 라혼은 벌써 열흘 남짓 그 일에 매달려 있었다. 금강의 서고에서 이것저것 뒤적이다 보니 라혼은 상당히 많은 시간이 흘렀음을 알았다. 해서 원래 목 적이었던 어떻게 되었든 금강을 띄워놓고 보자는 생각에 작업을 시작했는데 그것인 벌써 열흘 전이었다. "후우, 아무런 연락이 없는 것을 보면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약 속한 날짜를 훨씬 지났으니 이만 돌아가 볼까?" 라혼은 금강저 2개를 챙겨들고 금강 안으로 들어왔던 그 길로 밖으로 나섰 다. '기왕에 물에 몸을 담그는 김에 목욕이나 해야겠군.' 라혼은 시리도록 차가운 천호의 물속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목욕을 했다. 맑 은 천호의 물속으로 밝은 햇빛이 산란하는 모습을 보니 밖은 밝은 대낮임을 알 수 있었다. -촤아~! 바로 허공으로 몸을 뽑아 올린 라혼은 눈부신 햇살에 눈살을 찌푸렸다. 얼 마나 오래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상당한 시간을 어슴푸레한 어둠속에서 지냈 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내 파란하늘을 볼 수 있을 만큼 적응이 되고 라혼 은 상쾌한 기분에 숨을 기지개를 펴며 숨을 크게 들이 쉬었다. "주인!" "주군!" 지심과 잔폭광마는 오늘도 라혼이 물속으로 들어간 그 지점으로 발걸음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오매불망(寤寐不忘) 기다리던 주군이 태평하게 기지개 를 하며 하품(?)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잔폭광마는 빠른 경공신법을 발휘해 최대한 빠르게 라혼이 있는 곳으로 뛰어와 무릎을 꿇었다. 그러한 태도는 지심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육삼, 지심. 많이 기다렸겠구나? 미안하다." "아닙니다. 주군이 살아 계신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입니다." 죽은 아버지가 살아 돌아온 아들 같은 행동을 하던 잔폭광마가 자신이 진짜 죽었다 살아 돌아온 것처럼 말하니 라혼은 고개를 갸웃하며 지심에게 물었 다. "지심, 내가 얼마동안 금강 안에 있었기에 육삼이 이러는 거지?" "5달입니다." "5달? 이런 그런 전환으로 연락을 했으면 되지 않나?" 라혼의 질책어린 질문에 잔폭광마가 나서며 말했다. "그것이 도무지 주군에게 만은 연락이 되지 않았습니다." "……!" 라혼은 그제야 금강을 감싸고 있던 그 결계가 문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도 감지하지 못하는 결계니 전환으로도 어쩔 수 없었겠지….' 그리고 라혼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으나 갑주 서제가와 관계가 궁금하여 지 심에게 전후사정을 물었다. 그리고 라혼은 그제야 호황이 붕어와 호태자의 급서를 알았다. 또한 갑주서제가의 공격과 병주 토제가의 가세 상경부을 중 심으로 신주관에서 고전에 대한 것도 들었다. '후우~! 장인에게 시간이 너무 부족했어.' 라혼은 지심의 보고와 잔폭광마가 핏대를 세우고 당장 손을 보자는 말을 들 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상경은 물론 북지성, 남례성, 그리고 남상의 관리는 대부분 백수회와 연이 닿아 있는 자들이었다. 그러니 백수회를 실재로 움 직이는 호사천이 용호왕부내의 영향력은 상당한 것이었다. 그래서 라혼은 호사천이 찾아오자 옳다구나 하며 사실상 그에게 용호왕부를 떠맡긴 것이다 . 조정의 일을 장인인 호사천에게 맡기고 자신은 설화와 북지성 태회진에 머물며 슬렁슬렁 의백성과 흑막을 장악하고자했다. '시간이 1년 정도만 있었어도 장인이 용호왕부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실권 을 행사할 수 있었을 텐데.' 라혼은 그러한 상념을 털어버리고 지심으로 하여금 자신이 무사함을 상경의 고학에게 알리도록 했다. 그리고 섬 전역에 흩어져 있던 백호영과 대수영 의 수군들을 모아 상경으로 돌아가려는데 남례성 귀림의 드워프들을 이곳까 지 실고 온 부자서가 난색을 표하며 독점도 주변의 소용돌이의 밀도가 높아 졌다는 말에 배로 귀환하는 것은 틀렸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큰 문제 가 되지 않았다. 소용돌이치는 수역을 벗어난 곳에 배를 대고 [레버테이트L evitate:부양(浮揚)]주문을 걸어 옮기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라혼이 고민하는 것은 연락을 받고 배가 올 때까지의 시간이었다. 한발 먼저 [텔레 포트 워프Teleport warp]할 것인지 말 것인지……. 그런 라혼에게 카쿤이 말을 걸어왔다. "여기 이 소용돌이는 마법으로 만들어진 것인 모양이죠?" "그렇겠지." "소용돌이를 만들려면 상당한 압력차가 있어야 하는데 이렇게 대량으로 만 들려면 상당히 고생했겠어요." "음? 그게 무슨 말이지?" "이 호수의 물은 대체로 잔잔한 편인데 이렇듯 소용돌이를 치게 하려면 압 력차이가 상당해야 되지요. 수압이 높은 쪽에서 낮은 쪽으로 이동하며……. 우악!" -쪽쪽! 라혼은 카쿤을 번쩍 들어 볼에 뽀뽀를 퍼부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라혼의 행동에 카쿤은 기겁했다. "우악! 저겐 장래를 약속한 여자가 있다고요." "맞아 바로 그거였어. 압력차, 힘의 차이!" 바람이 불고,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며, 불을 피우면 따뜻해지는 이유는 서 로 간에 차이를 메우기 위해서 이다. 라혼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마법, 특히 4대원소 마법은 평형을 유지하는 자연 상태의 마나에 배열을 인 위적으로 무너지게 하여 여러 가지 효과를 내게 하는 것이다. 라혼은 신룡 굉(宏)이 왜 자신에게 금강을 주었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때 굉(宏)은 라혼이 금강결(金剛訣) 전인임으로 금강의 주인이라고 했다. 그리고 법륜을 이루는 겹쳐진 2개의 수레바퀴 일륜과 월륜은 힘은 완벽한 평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법륜을 움직이게 하려면 그 평형상태를 깨야 하고 라혼이 알고 있는 금강결은 세상의 모든 힘을 깨는 묘용이 있었다. 그 리고 금강저 또한 만가지 힘을 깨는 것이니……. "카쿤, 지금 즉시 이 금강을 하늘에 띄울 것이다. 저들과 함께 안정한 곳으 로 피하게 해라!" "에? 아니……." 라혼은 자신을 고심한 문제가 해결될 기미를 보이자 카쿤에게 그렇게 한마 디 던져놓고 다시 물속에 몸을 던졌다. "주군!" "주인!" "……." 모두들 세상 급할 것 없다는 라혼의 태도가 갑자기 돌변해 또다시 물속에 몸을 던지자 황당한 표정으로 멍하니 라혼이 뛰어든 천호를 바라보았다. 그 리고……. "야! 카쿤, 방금 라혼님이 이 선산환도를 띄운다고 하지 않았냐?" "어? 맞아!" 카쿤은 몰의 물음에 정신을 차리고 백호영와 대수영의 군사들을 이끌고 자 객교의 본당에 해당하는 건물이 있던 작은 분지로 몸을 피했다. 산이 움직 이면 약한 지진이 동반 될 수 있기 때문인데, 풍화작용 때문에 독점도의 돌 들은 부서지기가 쉬웠다. 그러니 섬 중심부에 자리한 분지가 그나마 가장 안정한 곳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다시 법륜이 있는 거대한 지하공간에 도착한 라혼은 양손에 금강저를 나눠 쥐고 금강결을 묘리로 진기를 운용했다. 그러자 양손의 금강저는 기다렸다 는 듯이 하얀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빠지직~! 빠지지지지지직~! 그리고 양손의 금강저에서 시퍼런 뇌전(雷電)이 발생하며 서로 칼끝을 통해 서로 뇌전을 교환했다. 라혼은 그러한 금강저 두개를 합쳐 하나의 <十>모 양의 쌍전석을 만들었다. -빠지지지직~! 팍! 라혼은 왜 쌍전석을 따로 뇌전도(雷電刀)라고 부르는지 그 이유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이 간단한 이치를 몰라 지난 열흘간 고민한 것이 억울할 정 도였다. 라혼은 그리고 마지막 단계인 손에 쥔 쌍전석을 일륜과 월륜 사이 에 꼽아 넣었다. -우웅~. 그러자 폐부를 긁는 듯한 기성이 울리며 거대한 법륜이 돌기 시작했다. -팍! 그리고 금강 내부가 갑자기 대낮처럼 밝아지며 약한 지진이 난듯 방이 흔들 리기 시작했다. 라혼은 법륜이 있는 거대한 공간을 빠져나와 환한 통로를 지나 수두로 갔다. 언제나 열려있던 수두방은 굳게 닫혀있었는데 라혼은 당 황하지 않고 '누르시오'라고 글 밑에 그려진 손바닥 모양의 그림에 손을 대 고 살짝 밀었다. 그러자 수두의 손잡이가 없는 문은 '싸아'하는 음향과 함 께 부드럽게 열렸다. 라혼은 그것을 보고 모든 기관이 법륜이 움직여야만 작동된다는 것을 알았다. 라혼은 호기심 가득한 심정으로 수두방 한가운데 의 덩그러니 놓여있는 의자에 몸을 실었다. 그러자 오른쪽 벽의 금강내외부 도에 빛이 들오며 금강의 현 상태를 알려주었다. 이미 지난 5달 동안 금강 에 대해 연구한 라혼은 저것이 무얼 뜻하는지 알았다. 그리고 전면의 벽이 환상처럼 사라지고 신기루 같은 아지랑이 현상이 일어났다. 그리고 라혼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천호의 전경이었다. "사방 18만 리의 모든 것을 볼 수가 있다고 했던가?" 그리고 라혼의 무릎위에 지금 눈앞에 펼쳐진 천호중심으로 떠있는 환도 금 강의 모습이 보였다. 라혼은 그 환도 금강을 잡는 시늉을 하고 들어 올렸다 . 그러자 더욱 투명한 금강이 분리되며 라혼의 손에 딸려 올라가고 라혼이 적당한 위치를 잡자 밑에 있던 금강이 서서히 라혼이 잡아 놓은 위치로 딸 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쿠르르르르르르~! -촤아아아아아아~! 천호 한가운데 외로이 떠있던 독점도에서 미약한 미진이 일어나며 잔잔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섬전체가 솟아오르는 가 싶더니 거대한 땅 덩어리가 보이고 사방 20리에 달하는 섬이 허공에 떠오르는 장관을 보였다. "아이고 신주님 노여움을 푸세요. 앞으로 깍듯이 모시겠습니다." 잔폭광마는 미진이 계속되더니 섬이 솟아오르는 기사(奇事)에 그간 토지신 들에게 함부로 한 것을 후회하며 사과에 사과를 거듭했다. 그러나 사과를 받는 드워프들도 거대한 땅덩어리가 솟아오르는 장광에 입을 떡 벌리고 그 장관을 구경하는데 정신이 없었다. 이미 자신들이 생활했던 바위섬이 선산 환도라는 것을 알고 있던 드워프들이 그 정도이니 아무것도 모르는 백호영 들과 배짱 두둑한 대수영의 수군들은 안색이 굳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괴사 중 괴사를 지켜보았다. 금강의 전체적인 외관은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납작한 팽이를 닮아 있었다. 독점도라 불리던 바위산을 중심으로 평평한 벌판이 둥그렇게 펼쳐져 있고 그 밑에 산이 거꾸로 달려있는 형상이었다. 난세지시(亂世之始) 경험을 했느냐 못했느냐의 차이는 컸다. 신주관 전투의 승패는 바로 그것이 갈라놓았다. 신주관 험한 협로에서 싸움은 시작할 때부터 서제가 이끄는 서병이 우위를 점하며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우위는 지난 한달 보름 내내 지속되었다. 서제는 충분한 시간과 병력을 가지고 지속적이고 꾸준한 공격 을 했고, 모석을 총대장으로 하는 용호군은 한걸음, 한걸음 꾸준히 뒷걸음 질 쳤다. “용호군의 약점이 지구력이었다니…….” 모석은 훈련도, 장비, 병량 등 모든 것이 넉넉한 군대를 이끌고도 열세를 면치 못하자 기운이 빠질 지경이었다. 서병이 구사는 하는 전술은 극히 단 순했다. 차근차근 신주관의 거점을 확보해나가며 한발, 한발 조금씩, 조금 씩 전진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단순하고도 우직하기 그지없는 작전은 참으 로 무서운 것이었다. 서제 서포틈은 자운봉과 우산봉의 샛길이란 샛길 모두 를 전장으로 삼고 1백명씩 몇 백 개조로 병력을 나누어 교체 투입시켰고, 모석은 그런 서제의 파상공격을 저지하는 수준에서 맞대응했다. 그러나 바 로 그것이 패착이었다. 서제가 이끄는 서병에는 용호군의 백호영에 해당하 는 무사집단이 있었는데 이른 바 흑사대(黑死隊)로 불리는 무사들이었다. 그들은 1백명 이하의 군사들끼리 벌어진 소규모 전투에서 무서운 위력을 발 휘했고, 뒤늦게 백호영을 투입했지만 한번 밀린 기세는 좀처럼 돌리기 힘들 었다. 그러나 30만에 달하는 대군이 산길을 이용할 수는 없는 법. 신주관의 주요 거점은 여전히 그 수비가 공고했다. 하지만 문제는 군사들의 사기였 다. 갑주의 서병들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소모적 지구전술(持久戰術)에 익숙했 다. 앙신성에서의 ‘거정의 난’을 토벌하는데도 그만한 시간이 걸렸으며 그 후 후선의 대군과 피 말리는 대치상황에도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용호 군에게는 그러한 경험이 없었다. 언제나 바쁘게 여기저기를 자리를 이동하 며 전투를 치렀고, 대치상황이래보아야 북지성 운창에서 웅랑교를 고사시키 기 위한 대치가 전부였다. 모석의 실수는 최소한 파상적이고 소규모 접전일 망정 대등한 군세를 유지하여 군사들의 머릿속에서 진다는 생각을 심어주어 선 안되었다. “아버님.” “오! 초구나. 어서오너라!” 모석은 이제 한사람의 무장으로써 인정받고 공을 세워가는 모초가 대장군막 으로 들어서자 반갑게 맞이했다. 하지만 잔뜩 굳은 심상치 않은 모초의 기 색에 의아해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야?” “아버님, 소자가 하는 말을 들어주십시오.” “도대체 무슨 말이기에 그렇게 뜸을 들이는 것이냐?” “아버님 주군은 무사하신 겁니까?” “음?” 모초가 묻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소문이었다. 백왕 호사천이 용호 왕 백호나한을 도모했다는 소문이었다. 그러나 용호군과 백호나한의 심복들 은 그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며 애써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버님, 지금 군사들 사이에 그러한 이야기기 나돌고 있습니다.” “군사들이 말이냐?” “그렇습니다. 심지어는 백수왕야와 서제가 짜고 용호군을 고사시키려 하고 있다는 말까지 돌고 있습니다.” “이런!” “아직까지는 그냥 하는 말인 듯하나 계속 밀리는 기색을 보인다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질 겁니다.” 모초가 전해온 소식은 모석의 어깨를 더욱 무겁게 했다. 이러한 모든 문제 는 주군의 무사가 확인된 순간 봄 햇살에 눈 녹듯 한꺼번에 해결될 문제였 다. 하지만 모석 또한 심중으로 주군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는 의심을 하 고 있었으니……. “아버님도 모르시는 겁니까?” “…….” 모초는 부친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내심 한숨을 쉬며 나름대로 생 각 했던 해결방안을 이야기 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것은 사기 문제입니다. 군사들로 하여금 우리가 이 기고 있다,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품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생각해 둔 바라도 있는 것이냐?” “가장 좋은 방어는 공격이라 했습니다.” 모석 또한 아들이 생각한 그것은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닳고, 닳은 서제가 이쪽에서 그러한 수를 쓸 것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알고 있으 면 그만한 대비가 있을 것이니 모석은 바로 그것이 염려가 되어 실행으로 옮기지 못했다. 그리고 모초에게는 생각해 보마고 하는 말로 돌려보내고 공 세로 나가는 것에 대해 고민 시작했다. 그러나 모석의 고민은 이내 해소되 었다. “장군!” “들어와라!” “상경에서 고학 군사의 연락입니다.” “…….” “주군이 회궁 했다 합니다.” “뭐라? 그것이 참이냐?” “예, 그리고 지금 즉시 상경으로 회군하라 명했습니다.” “……!” 모석은 라혼이 벌이는 일에 대해선 아무리 납득할 수 없는 명이라 할지라도 믿고 따랐다. 그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대군에게 등을 보이고 도망 치는 위험천만한 퇴각이나 작정하고 한다면 못할 것도 없다. “알았다. 전군에게 주군의 회궁 하셨다는 소식을 알리고 신속히 행군준비 를 해라!” “충!” *** “백호나한이 멀쩡하게 돌아왔다니…….” 서제 서포틈은 용호군이 신주관을 버려두다 시피하고 내빼자 무슨 계략이 있다 짐작하고 신중하게 전후사정을 살폈다. 그리고 곧 백호나한이 무사생 환(無事生還)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전하, 모석이 수하들의 사기를 생각해서 퍼트린 헛소문이 아니겠습니까? ” “아니네, 상경에 있는 세작이 직접 두 눈으로 백호나한을 태운 배가 양항 에 들어오는 것을 확인했다고 했네. 천상천화가 직접 마중한 것은 술수일지 모르나 백왕이 진정 백호나한을 도모했다며 일보시위인 진토인 계집과 육 삼이란 자가 멀쩡하게 살아있을 리 없지.” 서제는 문득 자신이 백호나한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백호나한 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받은 순간 여유가 사라지고 30만 대군, 저 정예 중 정예라는 용호군을 압도하는 능력을 보여준 천하제일의 군병들 이끌고 있는 자신이 단지 백호나한이 무사하다는 소식에 주춤하고 있으니 말이다. 서제 는 도저히 그러한 감정을 인정할 수 없었다. “백호나한이 있건 없건 가장 큰 난관인 신주관이 떨어진 이상 거칠 것 없 다. 신주관에 군사 1만을 남기고, 상경으로 갈 것이다.” 용황궁의 정전. 라혼은 고학, 호사천, 그리고 설화와 앞으로 행보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옛 말이 틀리지 않군.” “신주관은 상경을 지키는 마지막 관문인데…….” “빙장어른, 그것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황진성부로 들어온 서제는 스스로 독안으로 기어들어온 쥐새끼일 뿐이니 말입니다.” “…….” 라혼의 30만 대군을 끌고 옷 서제를 다 독안에 든 쥐라는 말에 호사천은 어 이가 없었다. 또한 고학도 어이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서제의 전략을 분석한 결과 서제는 지구전술의 달인이었다. 30만의 풍부한 병력은 한두 번 진다고 해도 완전히 소진되지 않는다. 서제 서포틈이 상경부에 속한 논 밭을 태우는 청야전술(淸野戰術)을 시도하면 그 피해는 막대하다 할 수 있 었다. 상경은 인구 250만의 천하대도이기 때문에 싸움와중에도 그들의 배를 곯게 해서는 안 된다. 이 싸움은 어디까지나 용호왕과 서제의 권력투쟁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설화만은 남편이 지금 무얼 하려하는지 짐작했다. “서방님, 천자가 되시려는 거예요?” “……!” 밑도 끝도 없이 불쑥 튀어나온 설화의 말은 호사천은 물론 고학도 눈을 부 릅뜰 만큼 놀라운 것이었다. “글쎄…? 나는 그냥 네가 그 자리에 있어 주었으면 하는데?” “전 싫어요!” “그렇군. 그럼, 빙장어른이 호황이 되면 되겠군.” “끄응!” 호사천은 사위의 말을 가벼운 농담으로 치부하며 앓는 소릴 냈지만 고학은 긴장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물었다. “주군, 중경으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라혼은 고학의 물음에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호사천에게 물었다. “천자의 일이야 천원회의에서 다룰 일이지만 호가의 당주는 빙장어른이 맡 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 호사천은 사위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나는 내가 천하에 기재라 자부했건만…….’ 호사천에게 백호나한이란 자는 도무지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자였다. 그는 해도대원수로써 모든 물길을 장악하고 있는 자였다. 그러니 그의 역량이면 군사들을 천호를 가로질러 중경에 내려놓는 일을 쉬운 일이리라. 게다가 호 황가는 지금 당주가 없는 상태, 현재 천림왕 득세를 하고 있다고 하나 병권 을 쥐고 있는 금군교위 무골후 호장은 아직까지 천림왕을 지지할 생각이 없 어보였다. 20만 용호군이 뒤를 받혀준다면 호황가의 당주가 되는 일은 손바 닥 뒤집는 것만큼 쉬운 일이리라. 호황의 붕어와 호태자의 급서가 천림왕과 서제에게 기회였듯이 자신에게도 기회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호사 천은 백호나한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무서운 존재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 껴야 했다. 라혼은 그렇게 호사천에게 약간의 언질을 주고 자신과 설화의 진정한 보금 자리인 금림으로 들어왔다. 금림에는 흑산자와 아기를 않고 있는 까무잡잡 한 피부에 야성녀에서 푸근한 기도를 가진 메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소첩, 메이가 상공을 뵙습니다.” “주공을 뵈오.” “오랜만입니다. 흑사! 메이 이 아이가 모원의 아들인가?” 라혼은 흑산자와 메이의 인사를 반가운 마음으로 받고 메이의 품에 안긴 아 기를 건네받았다. “산입니다.” “모산이라…. 좋은 이름이다. 산아 그러고 보니 내가 미처 네 백일 선물은 준비하지 않았구나! 뭐가 좋을까? 그래…….” 라혼은 모산에게 뭘 해줄까 궁리하다. 이내 생각을 정리하고 강보를 벗겨냈 다. 그리고 내기(內氣)를 아기의 몸에 침투시켜 아직 굳지 않은 뼈와 근육 을 어루만져 주었다. 심장과 내장을 튼튼히 하고, 서서히 막혀가는 영규혈( 領揆穴)에 기운을 심어 막히지 않게 했다. 그리고 임독이맥(任督二脈)을 다 시금 단단히 했다. “허! 벌모세수(伐毛洗髓)를 이렇게 쉽게 하다니…….” 라혼이 아기에게 시술하는 벌모세수를 하는 지켜보던 흑산자는 절로 감탄했 다. 아기를 벌모세수를 하는 정도야 흑산자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러 나 그것은 엄청난 심력과 내력고갈, 그리고 원정(元精) 소모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아기가 해도 자라면서 습관이나 불의의 사고를 당하는 등 외부자극 에 반응하여 근골이 제대로 잡히지 않을 수 있었다. 거기다 하늘의 기가 통 하는 영규혈이나 내력을 쌓는데 필수 불가결한 임독이맥을 튼튼하게 해주어 도 그 또한 시간이 흐를수록 닫혀간다. 하지만 어렸을 때 이렇게 벌모세수 를 해주면 손 더 쉽게 기초가 쌓이고 나중에 상승공부를 할 때도 큰 도움이 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라혼은 주요 혈에 내기를 심어 시간이 지나더라도 막히지 않게 조처했다. “메이, 앞으로 잔병 치례하는 일을 없을 거다. 내가 이놈을 효자 중 효자 로 만들었으니…….” “감사합니다. 상공.” 메이는 상공이 산이에게 무었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흑산자의 중얼거림을 들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아이가 커서 아버지를 따라 문에 뜻을 둘지, 아니 면 무에 뜻을 둘지 모르지만 어느 쪽에 뜻을 둔다고 해도 대성할 기틀을 마 련한 것이었다. 그리고 상공의 말처럼 최소한 잔병치례는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새로 태어난 아기 산을 중심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누고 아기가 잠들자 설화와 메이는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아기를 방으로 옮겼다. 여인들이 사라지고 대청에 흑산자와 라혼만이 남자 흑산자가 조심 스런 어투로 질문을 던졌다. “설화에게 들으니 주공께서 후세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하던데 사실입니 까?” “사실이오.” “…….” 흑산자는 라혼의 긍정에 그 연유에 대해서 물어야 할지 고민했다. 말 못할 고충이 있는 것이 분명하니 더 이상 묻기가 뭐했기 때문이었다. 라혼은 그 런 흑산자와 서늘한 정자에 자리 잡고 해가 지는 서편에 해가 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설화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오.” “……!” “흑사께서는 의학에 밝으시니 한번 봐주시오.” 흑사는 그 말을 듣고서야 후세를 바라지 않는다는 말의 진의를 알 수 있었 다. 본 부인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이면 첩을 들이면 그뿐이었다. 그러나 주공이 후세를 바라지 않는다는 말 그러한 뜻이 없다는 것을 완곡하게 돌 려 표현 한 것이다. “가엽게도…….” “…….” “그 보다 주공!” “말씀하시지요.”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흑산자는 심중에 품었던 질문을 하기위해 무거운 어 조로 라혼을 불렀다. 그리고 물었다. “북지성에 웅랑교의 웅천패가 있습니다.” “…….” 침묵. “흑사!” “…….” “그때도 말했다 시피 복수를 도와 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천지가 어두워지고 맑은 밤하늘에 별이 호수에 내려앉자 설화가 따뜻한 차 를 내왔다. 라혼과 흑산자는 말없이 차를 마시며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주공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 라혼은 흑산자가 떠나는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흑산자는 외골수 였다. 웅랑교의 웅천패가 오신룡중 하나인 우(于)라는 사실을 알았어도 복 수를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그르고 그에겐 마지막 한 가지 수가 남 아 있었다. 독종사인(毒宗邪人) 그 저주받을 마물이……. 아마도 영환지존 영환자라면 독종사인이 깨어나지 않는 이유를 알 것이고 해결책까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우(于)는 어쩔 수 없으리라.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칠흑 같은 어둠이 지배하는 시간. 송개는 오늘도 그 누구보다도 먼저 하루를 시작했다. 용호왕과 서제의 다툼은 상경의 장사치 들에겐 참으로 힘겨운 때를 맞게 했다. 대하의 수로를 통해 오는 상품은 있 지만 남원주를 비롯한 갑주, 병주, 임주의 장사꾼들이 상경으로 오질 않으 니 물건은 창고에 쌓여만 같다. “후우~. 오늘 따라 유난히 어두운 것을 보니 구름이 날이 흐리겠군. 비라 도 오려나?” 송개가 하는 일은 해가 뜨면 현무문을 열리고 상경에서 양항으로 들어서는 물품을 옮기는 일꾼들을 관리하는 것이다. “아이구. 오늘도 송대인이 가장먼저 나오셨군요. 그런데 밤일을 제대로 치 르고 나오시는 겁니까?” “예끼, 이래 뵈도 나는 아직 한창때야!” “아닌 것 같은데……?” “객쩍은 소리 말고 신패나 내놔!” 부두에서 짐을 나르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신분이 확실 하고 무슨 일이 벌어 졌을 경우 조사가 용의하게 되어있었다. 요즘은 뜸하 지만 하루에도 엄청난 물량의 짐이 하선되고 또 배에 실려 나갔다. 개중엔 한상자만 없어져도 손해가 막심한 고가품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것에 대한 관리를 철저히 하려다보니 신분이 확실하지 않으면 짐에는 손을 대지 못하 게 하기위해 양항을 관리하는 관청을 따로 두었는데 어렵고 힘든 일을 신분 이 확실한 사람만 골라 쓰기에 지난한일이었다. 그래서 송개같은 사람이 필 요했다. 일꾼들에게 신패를 발급하여 자신의 이름으로 사고에 대해서 책임 지는 것이었다. 그렇게 부두 일꾼들이 하나 둘 모여들고 일꾼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은 일거리가 있으려나?” “글쎄…. 어제 백호나한이 멀쩡하게 돌아오는 것을 자네도 보았지 않은가? 용호왕부 돌아가는 눈치가 심상치 않으니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 같더라고 , 어제 저녁부터 수군 소속의 군선들이 모여드는 것 같으니…….” “에이, 대수영의 물건이야 지네들이 나를 텐데 우리들에게 일거리가 돌아 오겠습니까?” “그렇지?” “오늘도 공치면 안 되는데…….” “왜? 호호루(好好樓) 단향이 젖가슴이 그렇게 그립던가?” “아! 단향이 뿐이겠습니까? 추월이, 세연이, 국향이…….” “에라! 자식아, 젊은 놈아 밤낮 그 생각이지…….” “에헤헤헤헤, 몰라나? 그 자식 숫총각이야!” “아유 비린내, 어쩐지 젖비린내가 풀풀 풍기더라니.” 그러다 문득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하늘을 쳐다본 한 일꾼이 어둠이 가시는 하늘위에 거뭇한 구름 같은 그림자를 발견하고 옆에 있는 동료에게 물었다 . “어이, 제게 뭐여?” “아! 뭐가? 글쎄 구름 같기도 하고 시커먼 것이 소나기 오려나?” 그들의 말에 하나둘 고개를 꺾어 하늘을 본 사람들은 점점 밝아오는 새벽에 그것이 절대 구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서, 설마? 산?” “마, 마져 산, 산이여!” “세상에 하늘에 떠 거꾸로 있는 산이라니?” 그날 아침 상경의 백성들은 하늘위에 둥실 떠있는 산을 보았다. 그리고 이 내 그것이 신선들이 산다는 선산환도임을 알았고, 그것을 백호나한이 부린 다는 것도 알았다. “세, 세상에…….” “저런!” 라혼은 놀람을 감추지 못하는 용호군의 장군들의 주위를 환기시키고 말했다 . “금강이 양항에 내려앉으면 용호군 전군은 금강에 오른다. 오늘부터 용호 왕부는 금강에 둘 것이다.” “조, 존명!” 라혼은 염동력으로 그저 떠있을 뿐인 환도금강을 움직였다. 그리고 금가에 상주하고 있는 귀림의 드워프들은 금강이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을 찾 아내느라 라혼이 정리해 둔 법륜의 원리를 공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지 만 그전에 허장성세(虛張聲勢)를 떨 필요가 있어 금강을 끌어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날 20만 용호군과 기본적인 물자만 실은 금강은 허공에 떠올라 빠 른 속도로 북쪽으로 날아갔다. “물길을 지배하는 것이 대수영(大水領)이니, 하늘을 지배하니 대공영(大功 領)인가?” 발산개세(拔山蓋世) 천하가 뒤숭숭한 때 천자의 붕어는 중경 청인성의 백성들에게 적지 않은 불 안감을 주었다. 신성한 호수 천호 남쪽 땅에서는 용호왕 백호나한과 상국 서제 서포틈 쟁패가 거듭되고 있었고, 그 전란의 불씨가 언제 어느 곳으로 번질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봄이 왔지만 사람들의 마음이 얼어붙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천하제일대도(天 下第一大都) 중경(中京) 청인성(靑寅城)의 청림대로(靑林大路) 시전거리는 한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라혼은 그 청림대로를 지나 호천궁의 정문으로 걸어들어 갔다. 호천궁의 대상(大喪) 기간은 이제 종반을 향해가고 있었다. 천자가 붕어하고, 후계자인 호태자가 승하하여 사변(斜邊)이 발생하였음으 로 호천궁은 궁문을 굳게 닫고 금위위(禁衛衛)들은 호천궁을 중심으로 하늘 마저 가둘 수 있는 천라지망(天羅地網)을 펼쳐놓고 있었다. 그러나 조문을 하기위한 귀인들까지는 막지 않았다. 라혼은 홀로 청림대로를 걸어 호천궁으로 향했다. 검박한 백의에 허리엔 누 구나 보기에도 보검임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용천검을 차고 걷는 모습은 한 가롭기 그지없었다. 근 반년 간 환도금강에 머물면서도 라혼이 있었던 곳은 서고와 수두, 그리 고 법륜이 있던 거대한 방뿐이었다. 그런데 20만에 육박하는 용호군의 군사 들이 금강에 오르면서 기초적인 수색을 행했고, 그 과정에서 환도 금강의 건설자로 짐작되는 존재들의 시신과 유골들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유품이라 할 수 있는 것들 중에 그들의 일기와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 순간 까지 연구와 고심을 한 흔적 역력한 유물 또한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라혼을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고 넘칠 정도였다. 고대 환단문명은 물건을 땅위로 떨어지게 하는 힘인 중력자(重力子)와 오히 려 밀어내어 뜨게 하는 힘인 반중력자(反重力子)라는 새로운 힘의 개념을 발견하고 ‘다르마 챠크라’ 즉, 법륜이라는 반중력자를 발생시키는 기관까 지 만들어 냈다. 그리고 법륜을 이용한 선산환도, 그네 말로 ‘하늘나루’ 를 만들었으며 움직이지 않고 그저 떠있는 선산환도를 최종적으론 하늘을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게끔 연구를 계속하고 있었다. 환도 금강의 건설자들이 남긴 기록 속에서 그들이 선산환도를 움직이게 할 수 있게 하는 한 가지 유력한 가설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마치 물에서 노를 젓듯이 물건을 땅에 떨어지게 하는 힘인 중력(重力)을 끌어당겨 밀어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에 관한 새로운 동력기관의 개략적인 원리까지 기록되 어 있었다. 라혼은 환단인들이 법륜을 만든 원리와 하늘을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는 원 리를 금강을 움직일 수 있게 고민하는 귀림의 드워프들에게 말해주었고, 드 워프들은 금강 안에서 발굴한 재료면 자그마한 환도정도는 만들 수 있겠다 며 흥분했다. 법륜에서 나오는 힘은 바로 수두에서 조정하게 되는데 그간 라혼은 금강의 수두에서 환도 금강을 염동력(念動力)만으로 움직이게 했다. 그러나 이젠 무식하게(?) 염동력만으로 금강을 움직이게 하는 방법보다 좀 더 확실한 방 법을 발견한 라혼은 흥분했고, 그것이 라혼을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라혼은 붕어한 호황에게 일단 망자의 예는 갖추기 위해 차분한 걸음걸이로 호천궁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호천궁의 정문인 청림문(靑林門) 앞 광 장에 들어서려는 라혼을 광장의 외곽에 물샐틈없이 인의 장막을 친 금군들 중 한명이 정중한 어투로 막아섰다. “물러서시오. 여기서부터는 잡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소.” “나는 상경 용호왕부에서 왔소.” “……!” 라혼의 앞을 막아섰던 금군은 용호왕부라는 말에 움찔하더니 의심스러운 구 석이 있는지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보기 시작했다. 그때 그 군관에게 누군가 다급히 다가와 귀엣말을 하자 군관은 눈에 띄게 당황하며 어찌할 바를 몰 라 했다. ‘이런 망할! 어젯밤 꿈자리가 뒤숭숭하더니만.’ 중경금군 부장 가연적(伽淵跡)은 눈앞의 사내가 용호왕 백호나한이라는 수 하의 말을 믿어야 할지, 아니면 절차대로 일단 상부에 보고를 부터 해야 할 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깨끗하지만 검박한 백의에 한눈에도 보검임을 알 수 있는 검을 허리에 찬 이 사내가 용호왕이라면 자신의 목숨을 그의 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을 아니었다. 천하의 용호왕이 금군 군졸하나 때 려잡았다고 그것을 따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나중에 자신 을 거론하며 불쾌한 표정만 지어도 앞날이 무척 고단할 것은 뻔했다. 그러 나 문제는 용호왕에게 적지나 다름없는 이곳에서 홀로 걸어왔다는 것이 무 척 수상했다. 그래서 가연적은 비굴하지 않은 태도를 유지하며 신중한 어조 로 물었다. “혹시, 용호왕 전하이십니까?” “그렇소. 본인이 용호왕이오.” “잠,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아, 아닙니다. 소, 소장이 천림문까지 안내하겠습니다.” “부탁하겠소.” 가연적은 눈앞의 사내가 자신이 용호왕임을 시인하자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당황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렇다고 사내에게 의심이 거둬지지 않아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청림문까지 안내하겠다고 자처했다. ‘문지기 노릇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금위위인데 용호왕의 진면목을 아는 놈, 한 놈은 있겠지.’ 그렇게 염두를 굴린 가연적은 보란 듯이 광장을 가로질러 청림문 앞으로 한 걸음, 한걸음 다가섰다. 그리고 금빛 찬란한 갑옷으로 중무장하고 장승처럼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서있는 금위위(禁衛衛) 위사(衛士)에게 정중하게 어 투로 말을 건넸다. “청인성 금군 부장 가연적이 황진성의 용호왕부에서 오신 용호왕 전하를 모셔왔습니다.” “…….” 가연적은 뺨과 등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금위위 위사 놈이 뭐라고 해주기만 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러나 무표정한 위사 견포(犬浦)또한 내심 당황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종적이 묘연하던 용호왕이 돌아왔다는 소식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대단하다는 용호왕이 단신으로 초라하게 호천 궁을 찾았다는 사실이 보고도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웬만한 고관대작이라 도 미리기별을 하지 않았으니 들여보낼 수 없다하며 돌려보낼 수 있지만 상 대는 용호왕 백호나한이었다. 그리고 백호나한의 이름의 무게는 잠시 기다 리라는 말조차 꺼내기 힘들게 했다. 견포는 작년 이맘때 은색갑주차림의 백 호나한를 본적이 있었다. 금군 부장이란 자가 데려온 백의 사내는 확실히 용호왕 백호나한이었다. “금위위 위사 견포가 용호왕 전하를 뵙습니다.” 가연적은 잠시 뻣뻣한 자세를 유지하던 금위위 위사가 백의 사내에게 무릎 을 꿇어 예를 표하자 자신을 따라온 용호왕이 백호나한이 맞다는 것을 깨닫 고 그에게 예를 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때는 지났으니……. 그렇게 갑작스럽고 격식을 깨는 파격적인 용호왕의 방문은 참으로 많은 사 람들을 당황하게 했다. 적지나 다름없는 중경에 단신으로 들어와 홀로 붕어 한 호황을 조문하니 라혼은 단숨에 폭풍의 핵으로 급부상했다. “전하, 천재일우의 기회입니다.” “그렇습니다. 백호나한이 무슨 이유 때문에 단신으로 호천궁을 찾았는지 모르나 이번기회를 놓치면 앞으로 다시는 이러한 기회가 없을 겁니다.” 천림왕의 책사 토현귀는 망설이는 천림왕을 종용했다. 이미 토현귀의 가문 인 병주 토제가에서 용호왕을 반적으로 규정하고 거병하여 토병 7만이 남원 주를 들어선 상태였다. 토현귀는 토병을 막아서고 있던 용호군이 갑작스럽 게 퇴각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토제가는 이것이 무슨 책략이 아니겠는 가 의심하며 사태추이를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용호왕이 그 흔한 시종조차 거느리지 않고 호천궁에 발을 들여놓으니 그것은 하늘에서 내린 기회로 보였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천림왕 호천린 또한 마찬가지였다. “알았네. 그 일은 애초에 하려다 실패한 것. 술시초에 정전으로 천원회의 를 소집하게. 거기가 감히 용호왕으로 칭왕한 난신적자(亂臣賊子) 백호나한 을 단죄할 것이야.” “옛, 전하!” 토현귀는 천림왕의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조정, 천원회의를 구성하는 사 마(司馬)들에게 백호나한을 정당하게 척살했음을 인정받을 수 있다면 천림 왕은 그 공으로 천자 호황이 될 수 있었다. 임시로 거처로 삼은 호천궁의 화려하기 그지없는 방에 탁자에 앉아 차를 마 시던 라혼은 극도로 숨긴 잡스런 살기를 품은 자들이 호천궁 곳곳에 스며드 는 기척을 읽고, 일이 계획한 대로 흘러가고 있음을 알았다. “눈앞에 먹음직스런 고깃덩이가 있으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군.” 라혼은 용천검의 검경(劍莖)을 잡아 검을 뽑아들고 검신(劍身)과 검인(劍刃 )부분을 찬찬히 살폈다. 확실히 용천은 명검(名劍)중 명검이라 할 수 있었 다. “검으로 태어나 몸에 피를 묻히지 않은 검인데…….” -땡이잉~! 용천검의 검신을 튕긴 라혼은 은은히 울리는 검명(劍鳴)에 귀 기울이며 나 지막이 중얼거렸다. “살겁(殺劫) 한번이면 좋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겠지.” 그리고 라혼은 호천궁 대정전에서 천원회의가 소집되었다는 통지 받았다. 천림왕이 소집한 천원회의에서는 최근 용호왕부와 서제간에 다툼을 중재하 기 위해 그 당사자라 할 수 있는 용호왕 백호나한과 천림왕이 대면한다는 명분으로 소집되었다. 비록 천림왕의 상주 노릇을 하고 있다고 하나 그는 천원회의을 소집할 권리도 천원회의에 참석할 자격조차 없었지만 전란의 종 식이란 큰일을 명분을 하고 있어 아무도 그것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았다 . 라혼은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수인조정의 위세만큼이나 크고 굵은 기둥 120 개가 지붕을 받치고 있는 형상의 대정전(大正殿)에 들어섰다. 비록 회의에 결정권과 정식 발언권이 있는 자는 10여명에 불과 했지만 이러한 형태의 대 정전에서의 천원회의는 십제의 사마들을 보좌하며 사마들에게 발언권을 위 임받는 형식으로 여러 가지 의견이 도출 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 까지 열린 천원회의는 대부분 사마들만 참석하는 10여명 안팎의 소규모 회의였 다. 아무래도 입과 귀가 많으니 무슨 일에 결론내기가 쉽지 않은 대정전 천 원회의보다 10인 정도만 참석하는 회의가 간단했을지 모른다. “어서 오십시오. 용호왕!” “무골후.” 라혼이 대정전 전역에 숨어 은신한 자들의 기운을 감지하곤 씐 웃음을 지을 때 금군교위 무골후 호장이 아는 체하며 다가오자 짧게 읍(揖)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무골후 호장은 천림왕이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백호나 한이 대정전에 들어선 순간부터 주위를 경계하며 백호나한의 곁을 떠나지 않고 맨 돌았다. 어차피 수상하고 알 수 없는 암류를 느낀 중신들이 백호나 한에게 다가오지 않으니 겉으로 보기에 말상대나 해주고 있는 것처럼 보였 다. “허허허, 용호왕. 그렇게 용천검만 들고 따르는 자 하나 없이 단신으로 호 천궁을 찾아오니 제 수하들이 무척 당황했을 겁니다. 그래 무슨 바람이 불 어 이렇게 사전 통지도 없이 중경을 찾은 것이오?” “전란을 피하기 위해서 입니다.” “전란을 피한다?” “갑주의 서병들이 남원주를 넘어 상경으로 대병을 몰고 오고 있습니다. 이 는 무척 어리석은 일입니다. 내가 서상국과 대립하여 싸움이 벌어지면 고생 하는 것은 백성들입니다. 내가 어리석은 불초(不肖)라서 상국이 거병하였으 니 내가 상경을 떠나면 됩니다. 그러니 조정에서 이 일을 중재하여 불필요 한 전란은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혼의 말은 고요한 듯 했지만 말에 실린 공력은 대정전에 있는 모든 사람 의 귀속에 또렷이 틀어 박혔다. 그리고 그러한 라혼의 발언은 모든 사람들 이 판단하기에 어느 정도 진정성이 있는 말이었다. 어차피 서제 서포틈이 거병한 명분은 백호나한의 천자인 호황을 성토하는 격문을 띄운 일과 스스 로 용호왕이라 칭왕(稱王)한 것이었다. 그러나 용천검의 주인로써 용황의 대리인 백호나한이 함부로 칭왕한 것은 다소 괘씸한 면이 없지는 않지만 불 가해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천자를 성토하는 격문은 어차피 천자 스스로 용천검주인으로 용황을 대신하는 백호나한을 암살계획을 묵인한 것에 비롯 된 것이었다. 사람들이 보기에 백호나한은 힘이 있음에도 장인인 백왕 호사천에게 상경을 맡기고 은인자중(隱忍自重)했다. 즉 백호나한은 끝까지 갑주 서제가와 충 돌을 피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미 용호왕부의 용호군 이 상경으로 회군한 상태였다. 그리고 홀홀단신으로 호천궁을 찾아와 자신 이 성토한 호황을 조문하였으니 중신들이 느끼기에도 백호나한이 나름대로 사죄를 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대정전에 모인 중신들은 그 이면에 있는 사실 또한 놓치지 않았다. 백호나한을 도모하려하여 천자의 덕을 실추시키고, 용호왕부를 역적이라 규 정한 존재가 바로 천원회의를 소집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백호나한과 백 왕 호사천은 오래전부터 내왕이 있는 사이이며 백호나한이 아무리 자세를 낮춘다 하더라도 서제는 절대 빼어든 칼을 다시 집어넣지 않을 것이란 사실 이었다. 하지만 끝가지 파국을 피하려하는 백호나한의 모습은 바로 충신(忠 臣)의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라혼의 태도는 천생 무장인 무골후의 마 음을 크게 움직였다. “허허허, 용호왕께서 그러한 생각을 하고 계셨다니 저는 용호왕의 그러한 의도를 적극 지지하겠습니다.” “무골후가 그리해 주신다니 감사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중경 청인성의 전체 병권을 손에 쥐고 있는 금군교위 무골후 호장의 묵직한 충격을 주는 발언을 들은 중신들은 갑자기 변한 형세에 저마다 눈치를 살 피며 이것이 앞으로 어찌될 것인가를 정리하기에 바빴다. 서제가 실권을 장 악하여 천자인 호황의 위엄을 위협할 때 무골후와 천림왕은 같은 배를 탄 동지였다. 그러나 조정에서 원군을 보내지 않아 의백성이 너무도 어이없게 흑막 웅랑들의 손에 떨어지고, 임주의 반란을 제때에 손쓰지 못한 것이 천 림왕이 움직이려 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란 것은 알 만한 사람을 누구나 아는 일이었다. 그러니 누가 평가하더라도 천생무장인 무골후이 천림왕과 사이가 좋은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그리고 그간 알게 모르게 무골후가 백 호나한을 도와왔으니 지금의 그에 발언이 딱히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호가의 당주가 없는 지금 호황가의 큰 힘 중 하나인 금군교위 무골후 호장 이 백호나한을 지지한다고 하니 이로써 확실하게 천림왕과 척을 지겠다고 선언한 셈이니 귀추가 주목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무골후께 묻겠습니다. 내가 알기로 십이진가 중 성골이가로 불리는 용호 이가는 서로 번갈아가며 천자가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다음 천자는 용황가에서 나와야하지 않겠습니까?” “…….”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대정전은 라혼의 한마디에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 다. 그리고 고요해진 대정전에 라혼의 차분하지만 그 말의 무게가 가볍지 않은 발언이 계속 이어졌다. “또한, 나 또한 호황가의 일원으로 말하는데 저는 다음 호황은 지금 상주 를 자처하는 천림왕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호황 폐하의 후계자였던 호태자 저하께서 손(孫)을 남기지 않았고 승하하셨으니 사사로이 나의 장인이 되 는 백왕 전하가 호황의 위에 오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 “…….” “닥치라!” 라혼의 엄청난 파급효과를 지닌 발언이 계속되자 대정전 뒤, 방에서 심복들 에게 준비한 것들에 대해 보고받던 천림왕 호천린이 분노성을 터트리며 대 정전 상단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서 용천검을 얻었는지 모르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필부에 불과한 네 가 감히 천자와 조정을 욕되게 하고 호황가의 일까지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것이냐!” “하하하하, 우습구나. 그래서 너는 필부가 두려워 뒷구멍에 숨어서 날 잡 을 궁리만 하는 것이냐?” “뭐, 뭐라! 네가 진정 죽고 싶은 게로구나.” 라혼은 천림왕이 짐짓 흥분을 가장하며 눈치를 살피는 모습에 역시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라혼은 이미 마음의 결정을 한 상태였다. “호천린, 네가 감히 용천검의 주인인 날 겁박하여 용황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냐?” “흥, 용황 폐하가 직접 나서서 용천을 주었는지, 네가 용황의 뜻과 상관없 이 용천을 얻었는지 어찌 알고 우리가 널 믿겠느냐?” 라혼은 가만히 용천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날카롭게 천림왕을 쏘아보며 말했다. “내가 왜 소인배와 말을 섞는지 모르겠군. 호천린아! 호천린아! 너는 도대 체 무슨 헛꿈을 꾸는 것이냐? 네가 그렇게 하고서도 위엄이 선다 믿는 것이 냐? 이곳은 천하를 다스리는 법을 만드는 천원회의가 열리는 곳이다. 그러 니 너는 더 이상 방해하지 말고 붕(崩)하신 선황 곁에서 자리를 지켜라!” “이, 이놈~!” 방해하지 말고 빠지라는 라혼의 말은 천림왕을 흥분케 하기에 충분하다 못 해 넘쳤다. 그제서야 대정전의 중신들은 백호나한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천림왕을 조정에서 배제하려 한다는 것을 말이다. 하나… …. “네가 이 자리에서 검을 뽑아들었으니 그 뜻은 조정을 반하겠다는 뜻이렷 다. 그리고 선황이 너로 인해 마음에 병을 얻어 붕어하셨으니 너는 두말할 나위 없이 난신적자다. 역적을 주살하라!” 그것이 시작이었다. 천림왕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지붕에서 관복을 차려 입은 신료들 사이에서 날카로운 칼을 꼬나 쥔 자들이 덮쳐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그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자극적인 말로 천림왕을 충동질까지 한 라혼은 일단 곁에 서있는 무골후에게 혼자 감당할 수 있으니 전장에서 벗 어나라는 의념(意念)을 전달했다. 범인(凡人)들이 눈을 깜빡이는 찰나의 시 간에 한가롭게 전음을 시전하는 것보다 생각하는 마음을 전달하는 방식은 무척 효과적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천방지축신공을 일으켜 자객들의 몸을 잡고 돌개바람이 낙엽을 쓸듯이 선풍소엽(旋風掃葉) 초식으로 쓸어갔다. -사사사사사사……. 삭! 넓은 대정전에 돌개바람이 휩쓸고 지나가자 라혼을 암습했던 자들의 목이 가을바람에 밤송이 떨어지듯 우르르르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가희 신 기에 가까운 무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라혼 은 대정전의 지붕에 붙어서 숨을 죽인 체 기회를 노리는 존재에게 검강을 내쳤다. -쾅! “헉! 이것이 백호나한의 일검파성(一劍破城)?” 무골후 호장의 감탄성과 함께 지붕이 흔들리며 흩날리는 먼지에 몸을 은신 한 체 몸을 내던지듯 일침을 찔러오는 하얀 수염의 자객이 섬전처럼 라혼에 게 내리꽂혔다. 높은 지붕에서 수직으로 떨어져 내리는 살수는 이격의 가능 성을 배제한 그야말로 필사필기(必死必技)가 아닐 수 없었다. 바로 자객교 의 제일자객이며 천하에 이름 높은 12명의 절대자중 한명인 자객지존(刺客 至尊) 사신(死神)의 살검이었다. 라혼은 스스로 목숨을 던져 떨어져 내려오는 사신의 살검에 용천검으로 천 정을 찔렀다. 누르스름한 황금빛 검강(劍剛)을 머금은 용천검을 하늘로 승 천하는 황룡의 그것인 냥 손가락 하나 넓이의 뾰족한 사신의 검첨(劍尖)의 날카로운 그 가운데에 일순간 정확하게 맞닿았다. 그리고……. -추왁~! 사신이 첫 자객행을 나섰던 그때부터 언제나 목표한 자의 숨통을 끊어놓았 던 협검(陜劍)이 둘로 갈렸고, 사신의 몸뚱이 또한 그와 운명이 크게 다르 지 않았다. 한순간에 수십 명을 도륙한 것치고 피한방울 튀지 않은 백의와 피를 더 달 라고 보체는 듯한 늘어뜨린 용천검의 울린이 혈풍이 휩쓸고 간 대정전의 중 신들은 묘한 심상에 빠져들었다. -찰박, 찰박, 찰박……. 숨 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대정전에 진득한 피에 젖은 발로 걸음을 옮 기는 라혼의 발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렸다. 중신들은 숨을 죽인 체 대정전 바닥에 피에 젖은 발자국을 남기며 천림왕에게 서서히 다가가는 백호나한을 주시했다. 그러나 천림왕이 준비한 것은 자객교의 자객들만이 아니었다. “금위위는 역적 라혼을 척살하라!” -충! 천지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복명소리와 함께 5천 금위위가 대정전 안팎을 포위했다. 그리고 대정전으로는 금위위(禁衛衛) 금위대장(禁衛大將) 호덕창 (虎德昌)이 금위위 중에서도 정예 중 정예들을 이끌고 대정전 안으로 쏟아 져 들어와 라혼을 포위했다. 라혼은 이미 금위위들이 움직인 그 순간부터 그 자리에 못이 박힌 듯 가만히 서서 그들이 하는 냥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대정전에 있던 중신들이 안전하게 몸을 피신시킨 호덕창은 손들었다 다시 내리자 강궁(强弓)을 소지한 금위위들이 시위에 살을 매겼다. 그리고……. “사(射)!” -핑! 퉁~투두둥! -타! 타다다다닥!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순차적으로 쏘아진 강전(强箭)들은 본래 라혼이 서있 던 그 자리를 지나 대정전에 깔린 단단하기 그지없는 청석바닥들 깨며 박혀 들었다. 그리고 라혼의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은 검공이 시전되었다. “대십자파천황(大十字破天荒)!” -쿠하~! 황금빛 빛무리가 거대한 대정전 건물을 한쪽 면만 남긴 체 산화시키고 대정 전의 앞마당은 땅거죽을 완전히 뒤집혀 초토화되었고, 단단한 돌로 잘 포장 된 마당도, 그곳에서 기치창검을 든 금위위들도 그 막대한 힘에 태풍에 가 을낙엽 날리듯 사방으로 비산했다. 라혼은 내기(內氣)를 땅에 흐르는 기운과 충돌시켜 진각(震脚)을 밟아 다시 한 번 천지를 진동시켜다. -쿠웅! -우르르르르르……. 묵직한 소리가 호천궁에 울리며 사방 건물들이 흔들려 기와가 떨어져 내렸 고, 지진이 난듯 흔들이는 땅위에 서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라혼은 그 와 더불어 피어(fear)를 내뿜으며 천년공력이 담긴 노성을 터트렸다. “하늘 위, 하늘아래 오직 나는 홀로 위대하다!(天上天下 唯我獨尊) 내게 거역한 자는 살려두지 않으리라!” 그리고 라혼은 검강을 백장이나 뽑아내어 횡소천군(橫掃千軍) 일식으로 주 변을 휩쓸어 버렸다. -콰과과가가가가가가……. 황금빛 영롱한 검강은 백장이내에 라혼의 지금 가슴 높이보다 높은 모든 것 을 베어버렸다. 남아 있는 것은 오직 한때 대정전 북쪽 면의 십이표기 문양 이 조각된 벽과 다른 곳보다 약 3계단 위에 있는 천자의 평상(平床)뿐이었 다. 라혼은 몸을 돌려 오체투지(五體投地)한 형상의 중신들 사이를 지나 평 상 앞에 섰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 너무 큰 두려움에 혼백이 날아간듯 머리를 들지 못하는 천림왕에게 잠깐 눈을 주고 아직도 멍한 표정의 중신들 을 둘러보며 일갈했다. “5월 초하루, 황진성에서 천원회의를 열어 호황과 천자를 선출할 것이다. 각 주의 사마들은 십제들이 직접 입조하라 전하라! 오지 않는 자는 참하리 라! 또한 이 자리에서 선언하는바 사사로운 욕심에 천하 만민을 도탄 속으 로 밀어 넣은 서포틈의 죄를 물을 것이다.” “…….” 그리고 라혼은 그 즉시 그 자리에 [쉐도우 이미지 셀프Shadow image self] 주문으로 지금 자신과 풍기는 기운과 똑같은 허상(虛像)을 만들고, 결계를 해제한 환도 금강으로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하여 중경 청인성으로 섬을 이동시켰다. 에텔 스페이스를 공간에 대치시키고 금강의 건설자들이 고안한 방법으로 중력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얼마 후 환도 금강은 중경성 상공에 그 웅자를 드러냈다. “저, 저게 뭐야?” “세상에 산이, 산이 허공에 산이 떠있다.” 중경 청인성은 사람들은 남녘에서 산이 날아오는(?) 괴사(怪事)에 저마다 일손을 놓고 그것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또한 거리가 가까워 질수 록 허공에 떠있는 산의 규모에 다시 한 번 놀랐다. 그리고 그 거대한 땅덩 어리는 호황궁 상공에 원래부터 그 자리에 떠 있었던 것처럼 멈춰 섰다. 그 리고 서서히 하강한 금강에서 18000여명의 용호군을 빠져나와 호천궁을 장 악했다. 그리고 라혼은 다시 [쉐도우 이미지 셀프Shadow image self]주문으 로 만들어진 허상이 자리한 그곳에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하여 과도 한 피어(fear)의 공포에 노출돼 원기(元氣)가 상한 중신들에게 [홀리 샤우 트holy shout : 신성한 외침]주문이 곁들인 사자후(獅子吼)를 터트려 심장 이 옥죄이는 듯한 공포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 -우오오오오오오~! 그러고 나서야 한때 대정전이라는 건물 안에 있던 중신들은 실태를 추스를 수 있었다. “웅장모, 호황가의 당주를 상징하는 대보(大寶), 폭호도(暴虎刀)를 수습하 고 천자의 옥새(玉璽)를 찾아라! 또한 갑주의 서제가 사람과 병주 토제가 사람, 그리고 천림왕 호천린과 그를 따르는 무리의 신병을 확보하라!” “존명!” 중신들은 자신들 틈에서 백호나한의 지목한 세력의 사람들을 잡아들이는 모 습을 보고 지붕이 없어진 대정전에서 호천궁을 가리고 있는 허공에 떠다니 는 거대한 땅덩어리와 그곳에서 쏟아져 나온 군사들을 보며, 아득한 꿈결 속에서 본 듯한 일검을 내쳐 대정전을 부수고 수천 금위위 위사들이 도열한 마당을 뒤집는 모습을 회상했다. 어느 누가 있어 그의 일검을 막을 것인가 ? 어느 누가 저 하늘을 나는 섬을 떨어뜨릴 수 있을 것인가? 아니 지금 자 신들이 보고 느낀 이것을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어쨌거나 백호나한이 천 원회의를 소집한 5월 초하루는 체 1백일이 남지 않았다. 발산개세(拔山蓋世) 계세자(鷄世子) 계호림(鷄豪臨)과 지세공(智世公) 계만우(鷄萬禹)는 지금 신선들이나 타고 다닌다는 선산환도를 타고 임주(壬州)의 주도(主都) 백유 성(白酉城)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이미 백호나한은 용호군 5개 군단 9만 대 군을 병주(丙州)의 주도(主都) 청묘성(靑卯城)에 내려놓고 그길로 금강을 띄워 촌각의 지체함도 없이 임주로 향하고 있었다. “세자저하, 용호왕 전하가 약속한 용호군 3만6천이면 복권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듯싶은데 어찌하여 안색이 좋지 못하십니까?” “그렇게 보이는 가요?” “…….” 계세자 계호림은 숙부의 물음에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우리야, 임주를 되찾으니 좋겠지만, 수인천하는 어찌될까요?” “…….” “백호나한이 용천검의 주인으로 용황을 대리하는 자라 하지만 그는 십이진 가가 아닌 십삼인가일 뿐입니다. 그가 우리 임주 문제를 해결하고, 자기에 게 검을 겨눈 서제가와 토제가를 토벌한다고 해서 머리를 조아리며 상경으 로 와서 천원회의에 직접 참석할 십제가 있겠습니까?” “세자저하, 그거야 두고 보아야 할일이 아닙니까? 환도 금강이라는 이 천 공성을 가진 용호왕 전하에게 누가 감히 검을 겨눌 수 있겠습니까? 중경을 출발하지 고작 하루만에 9만 대군을 병주 청묘성에 내려놓았고, 이제 곧 임 주 백유성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마 십중십, 백이면 백, 백유성 에는 백호나한이 전권을 장악하고 천공성을 띄워다는 소문조차 들어가지 않 았을 겁니다.” 계세자 계호림은 병주의 청묘성이 어찌 떨어졌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 다. 단단하고 견고해 보이는 성벽은 하늘을 나는 환도 금강을 막을 수 없었 다. 금강은 토제궁의 상공(上空)에서 내려앉아 백호나한이 자랑하는 절정고 수들로만 이루어 져있는 백호영이 토궁을 장악 궁에 남아 있던 토제와 토제 가 식솔들의 신병을 확보하고 그 뒤로 9만 대군이 일시에 청묘성을 장악했 다. 그리고 백호나한의 군대는 토제의 성지(聖旨)를 이용해 병주에 남아있 는 5만 토병과 토제가의 토병을 상징하는 기치를 들고 원주로 들어가 있는 7만 토병의 뒤를 치기위해 내달리고 있었다. 그 대단하다는 진골십가(眞骨 十家) 중 한곳이 참으로 어이없이 무너진 것이었다. “숙부, 수인천하를 이룩한 십이표기의 후예인 십이진가의 시대는 끝난 것 같습니다.” 계호림은 토제가가 무너지는 것을 생각하며 힘없이 읊조렸다. 그러나 지세 공 계만우는 감상적인 조카의 생각과는 생각의 궤를 달리 했다. “저하의 말씀엔 일리가 있습니다. 앞으로 어찌될는지는 모르나 천하, 천지 의 어떤 존재도 백호나한을 어찌할 수는 없을 겁니다. 난세는 힘 있는 자가 법인 세상을 말합니다. 사실상 용호왕이 천하를 압도하는 힘을 가진 이상 세상은 그를 중심으로 돌아갈 것은 뻔한 이치지요. 그리고 십이진가가 4백 년을 이어왔으니 지금에 와서 그 운을 다했다고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앞 으로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겁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용호왕이 있게 되겠지 요. 그리고 용호왕 전하는 우릴 좋게 보신 듯하니 우리 계제가의 성세는 앞 으로도 천년만년 계속될 것입니다. 그보다, 이제 곧 백유성인데 준비하셔야 지오.” 계세자 계호림은 숙부인 지세공 계만우의 백호나한에 대한 태도에 묘한 위 화감을 느끼며 갑주를 챙겨 입었다. 그러나 앞으로 천하는 백호나한을 중심 으로 돌 것이며 자신의 운명도 그와 함께해야 할 것이란 말에는 동의 할 수 밖에 없었다. 금강을 움직이게 하는 작업은 진이 빠지는 일이다. 그러나 지난 사나흘 동 안 금강을 움직이느라 고생한 라혼은 중력자와 반중력자에 대한 이해가 높 아졌다. 하지만 오랜 시간동안 정신을 집중하는 작업은 참으로 피곤하기 그 지없는 일이었다. 라혼은 전면 벽에 펼쳐진 산이 허공을 날아오는 괴사에 난리가 벌어진 백유 성 사람들을 보며 계궁의 대전 앞마당에 금강을 정지 시켰다. 금강을 움직 이는 데 처음 움직일 때와 이처럼 정지할 때가 가장 힘이 들었다. 그래서 금강을 원하는 자리에 멈추게 한 라혼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말을 탄 군사들이 가볍게 뛰어내릴 수 있을 만큼 고도를 낮추었다. 원래 금강에는 그럴만한 출구는 없었지만 급하게 임시출구를 만들었다. “주군, 계세자 일행과 군사들이 금강을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후우~! 고학 그럼 부탁하네.” “예!” 수두로 들어온 고학이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라혼에게 짤막한 보고를 하고 다시 수두를 나섰다. 고학이 짤막한 보고를 하고 수두 금강 주변부를 감시 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옆방으로 가자 라혼은 수두 한구석에 깔아놓은 두 툼한 이불위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꿀물 같은 단잠에 빠졌다. 평상시 잠을 자지 않는 라혼이었지만 금강을 움직이게 하는데 엄청난 심력(心力)을 쏟 아야 했고, 그러한 심력을 회복하는데 수면만큼 좋은 것이 없었다. 본래는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잠기는 것으로 하여 했으나 어처구니없게도 명상 중 단잠에 빠지고 만 라혼은 명상에 잠기는 것보다 차라리 수면을 취하는 것이 났다는 결론을 내리고 참으로 설화가 없는 곳에선 오랜만에 달콤한 잠에 빠졌다. 라혼이 그렇게 태평하게 달디 단 잠에 빠진 사이 백호영들은 엊그저께 청묘 성 토궁에서 했던 일을 했다. 그러나 이번에 한 번 해보았던 일이고, 토궁 의 구조를 속속들이 아는 계세자의 수하들이 길안내를 하자 더욱 수월했다. -꺄아~! -탁탁탁타………………. 위압적인 검은 갑주의 무장들이 허공에 떠있는 산에서 떨어져 내려와 궁 안 을 어지럽히자 궁녀들과 내관들이 몹시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혼비백산( 魂飛魄散)하여 여기저기를 뛰어 다녔다. “독대장님, 우측에 궁수들입니다.” “좋아 저놈들은 우리가 제압한다. 따라와라!” 백호영 대장(隊長) 독대오(獨大旿)는 부장(部長) 초묵(草墨)이 발견한 금강 을 겨누는 궁수 수백에게 달려들었다. 50여장 떨어진 거리였지만 백호영들 에게 그만한 거리는 지척이나 다름없었다. 계궁을 수비하던 궁수들이 독대 오들을 발견하고 화살을 날렸지만 당황한 궁수들의 화살은 태반이 아무것도 없는 하늘로 날아오르고 십여 개만이 백호영의 몸을 맞췄지만 화살을 맞은 백호영들이 주춤하게만 했을 뿐이었다. “이런 썅!” 그러나 화살세례를 받는 것이 기분 좋을 리 없었다. 독대오는 3개의 비도( 飛刀)를 궁수들에게 던졌고, 그것을 신호로 비도술에 재간이 있는 백호영들 은 각자 실력에 맞게 한개 에서 많게는 예닐곱 개씩 던져진 비도가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 갑주를 착용한 궁수들의 목과 눈에 틀어박혔다. -퍽, 퍼퍽퍽! -크헉, 악! -콰창~! 그리고 백여명의 백호영 무장들이 시퍼런 도기(刀氣)를 머금은 강도(鋼刀) 를 휘두르며 약 3백여 궁수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백여마리 늑대가 수백 양떼를 덮치는 기세였다. 그렇게 백호영들이 휩쓸고 지나간 자 리는 다시 용호군들이 자리를 잡았고, 그야말로 한순간에 계궁을 지키는 금 군들이 제압되었다. “군사님, 초강남 장군이 계궁 전역을 완전히 제압했다 합니다.” “긴장을 늦추지 마라 여기는 토제가의 토제처럼 병권이 확실한 곳이 아니 다. 학초현은 아녀자에 불과하다. 최소한 백유성의 병권을 확실히 할 때까 진 끝난 것이 아니다.” 고학은 금강이 햇빛을 가린 탓에 어둑어둑한 백유성의 거리를 투영한 마치 샘처럼 생긴 천리경(千里鏡)을 내려다보며 한곳에 집결하고 있는 군사를 발 견하고 그것을 가리키며 옆에 있는 계세자의 심복에게 물었다. “저기, 저곳 군사는 누가 지휘하는 것이요?” “아마 학상(鶴想)이란 자로, 학초현의 외조카요.” “그럼, 저 군사들은…….” “학가의 군대요.” 고학은 계순(鷄順)이라 밝힌 계세자 계호림의 심복이 전해준 정보를 전환을 통해 백유성을 장악한 임무를 맡은 웅장모에게 전했다. “웅장군, 서문대로에 학가에 충성하는 군사들이 모여들고 있소.” 웅장모는 고학의 전언에 휘하 군사들을 서문 쪽으로 몰아치며 물었다. “병력은 얼마나 되는 것 같소?” -대략 7~8천은 되는 것 같소. 하나 숨어 가옥에 가려보이지 않은 군사들이 있으니 그보단 적지 않을 것이오! 웅장모는 학상이란 자가 이끄는 군세가 만만치 않음을 인식하고 어찌할까 고민했다. 그때 부관 참위(參尉) 궁상(宮上)이 진언했다. “장군, 저들은 아마 우리가 여기 있는 줄 모를 겁니다. 그러니 매복을 하 는 것이 어떨까요? 금강에서 저들의 움직임을 한눈에 볼 수 있으니 그것을 이용하면 적이 눈치를 채더라도 손해는 없을 것인데?” “과연!” 웅장모는 부관 궁상의 제안을 받아들여 5천명을 매복시켰다. 백유성의 백성 들은 자신의 집안으로 군사들이 흉흉한 살기를 들어내며 집안으로 들어서자 아무 소리 못하고 두려움에 떨었고, 매복한 용호군들은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며 창틀에 숨어 신호를 기다렸다. “학장군, 저 것을 타고 내려온 군사들이 계궁을 휘젓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가하게 군사들이 모이기를 기다릴 때가 아닙니다.” “태사는 아직 무사한 것이겠지요?” “태사께서는 비밀통로로 몸을 빼신지 오래입니다. 아직 계궁이 혼란하니 지금이 적기 입니다. 어서 빨리…….” “하지만 다른 성문을 지키는 군사들이 움직인다는 소식이 없는데…….” “학장군이 움직이면 그들 또한 따를 것이오.” 태사 학초현은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태감 학태는 줏대 없이 어물거리기만 하고 딱 잘라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우유부단(優柔不斷)하기 그지없는 학상 을 재촉했다. 계피학발(鷄皮鶴髮)의 태감(太監) 학태(鶴太)는 어렸을 적 낙 마(落馬)로 신(娠)이 다쳐 환관이 된 자였다. 그리고 지금 학가의 성세는 그로인해서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계군에 들어 출세를 위해 갖은 모 략과 권모술수를 부렸고, 계제에게 학가의 의동생인 학초현을 소개한 이도 바로 그였다. 계제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학초현을 등에 업고 임주 조정의 여러 대소신료들을 포섭, 후에 학초현이 세자를 생산하고 그 세자를 또 다 시 계제로 옹립함으로써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그리고 외조카이 기도 한 계제가 자신의 권력을 견제하자 태사 학초현을 전면에 내세워 계제 를 탄핵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의동생 학초현은 이미 권모술수에 닳고, 닳은 여인이 되어 있었다. 친 아들이기도 한 탄핵된 계제 에게 독주를 주어 죽이고 학가를 학제가로 인정받기 위해 서제를 지지하고, 뒤로는 후선의 강무세가와 관계를 돈독히 하는 등의 일들을 벌였다. 그렇 게 되자 학태는 학초현의 수족으로 부려졌고, 한때 손가락 하나로 움직였던 학상에게 이토록 답답하게 군사를 움직이라 종용하는 신세가 되었다. “알았소. 태감의 말대로 일단 궁으로 가겠소.” 그렇게 학상은 전초도 보내지 않고 군사들을 움직였다. 그리고 군사들이 백 유성 서문대로에서 북쪽에 위치한 계궁으로 돌아가는 모퉁이를 반이나 지났 을까? -삐이이이익! “뭐? 뭐냐?” -히히히이잉~! -와아~! -탁타타다다닥! 가옥의 창문과 지붕에 매복한 용호군의 궁병들은 효시(嚆矢)가 날아 찢어지 는 휘파람 소리를 내자 일제히 화살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워낙 근거리에서 쏘아대는 화살인 지라 대부분 빗나감이 없이 학상이 이끄는 군사들에 몸에 틀어박혔고, 갑작스런 함성소리에 놀란 말들은 학가의 군사들을 더욱 당황 하게 했다. -쿠어어엉~! 그리고 웅장모가 웅인으로 화신하며 포효를 터트리는 것을 신호로 골목골목 숨어있던 용호군이 일제히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웅장모의 서슬 퍼런 대 도(大刀)에 학상과 학태의 목이 달아나고 그들의 목을 자른 웅장모는 신법 을 발휘해 지붕위로 담숨에 뛰어 올라 그들의 목을 높이 치켜들고 항복을 종용했다. “이것이 패장 학상의 목이다. 항복해라! 항복하는 자 목숨만은 살려줄 것 이다.” 그리고 이것이 백유성에서의 큰 싸움의 전부였다. 밀도(密道)를 통해 도망 쳤던 태사 학초현은 양엽구 구만혁이 추적하여 반나절만에 잡아들이고, 아 직 뜻을 밝히지 않던 무장들이 계세자 계호림이 나서서 그간의 죄를 사해 줄 것을 약속하자 하나둘 항복하는 것으로 백유성 싸움도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싸움이 마무리 될 무렵 라혼은 잠에서 깨어나 고학으로 부터 승전 보고를 받았다. “용호군의 피해는?” “전사가 45인, 중상자가 184인입니다. 백호영 중에서는 중상만 34명입니다 .” 천하칠대도 오방상제에는 미치지 못하나 대도(大都)라 할 수 있는 임주의 주도를 점령하는데 그만한 피해는 경미하다 할 수 있었다. “좋아! 다친 사람을 치료하고 상경 용호왕부로 갈 것이다.” “주군, 이미 중경에 1개군단, 병주에 5개 군단을 두었습니다. 계세자가 아 직 병권을 확실히 잡지 않은 이상…….” “아니, 초강남과 웅장모는 계세자를 계속 돕는다.” “……!” “고학, 백호영들만 금강에 오르게 해라! 이 길로 회부할 것이다.” 용호군은 총 11개 군단으로 되어있고, 용호군의 11개 군단은 군단장은 백호 십일걸이었다. 모석은 중경에, 고우, 석은, 원복, 만력, 오차는 병주에 초 강남과 웅장모는 임주에 남으니 남은 것은 이제 남은 것은 표상치, 달성모, 구만혁의 3개 군단 뿐이었다. 1개 군단이 1만8천여 명이니 3개 군단 5만4 천의 병력으로 서병 30만을 어찌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병력이었다. 그러나 명을 떨어졌고, 고학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라혼은 신성마법을 숨기지 않고 병사들을 치료했다. 이미 스스로 그어놓은 선을 넘었으니 꺼리길 것이 없었다. 그리고 초강남과 웅장모에게 계세자를 계속 도와 그가 안전하게 병권을 확보하도록 도우라 명한 라혼은 금강을 일 정한 위치까지 끌어올리고 밖으로 나가 에텔 스페이스에 금강을 갈무리 하 고 상경으로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했다. 그리고 다시 금강을 상경 칠흑 같은 밤 하늘위에 꺼내놓고는 설화가 있는 용황궁 귀림으로 들어섰다. “상공께서 중경성을 초토화시키고 호황의 상징인 폭호도와 천자의 옥새를 임의로 가져온 것은 잘못된 일이예요!” “그렇지 않아 메이, 이미 서제와 서방님의 싸움은 누구나 생각하는 그대로 천하의 패권을 두고 쟁패하는 거야. 그리고 지금은 조정이란 것이 없어. 천림왕이 서방님을 도모하려하고, 호황이 그것을 묵인한 것으로 스스로 덕 이 없음을 증명했지. 그것으로 조정의 권위까지 같이 무너진 것이야. 이대 로 가면 천하가 백국(百國)으로 갈려 싸움을 계속하게 될 거야. 지금같이 어정쩡한 시기에 강력한 지도자가 서는 것이 오히려 백성들에게는 이롭지. ” 라혼은 기척을 죽인 체 메이와 설화의 대화를 들었다. 그리고 내심 크게 한 숨 쉬었다. 라혼은 설화와 약속을 깜박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평안해 지 기를 바라는 설화와 한 약속을……. 라혼은 천하에 자신의 힘을 보여주고 자기네끼리 지지든 볶든 관심을 끊으 려했다. 라혼은 기본적으로 신선(神仙)이었다. 지금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 습에 대해선 관심도가 덜했다. 앞으로 닥쳐올 큰일이 있으니 만인위에 우뚝 선 제왕이 되는 일은 관심 밖의 일이었다. 지금 라혼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던 금강을 손봐서 금강의 원래 목적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멸망으로 부터 구하는 일이었다. 라혼은 일부러 기척을 내며 방안으로 들어섰다. “서방님!” “상공.” 널찍한 방안에는 잔폭광마와 지심, 초초가 함께 자리하고 있었는데 모두 갑 자기 기척을 내며 나타난 라혼을 보고 주춤한 기색을 보였다. 바로 지척에 서 갑작스레 기척이 감지되자 크게 놀란 모양이었다. “설화, 메이.” “…….” “나는 설화의 말대로 판을 갈아 엎어버렸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그런 바보짓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이 다다. 그러니…….” “제가…. 제가할게요.” “……?” 설화는 라혼에게 자신이 백호로써 ‘신수 백호는 제왕이다.’라는 말을 싫 어했던 이유를 털어 놓았다. 라혼은 설화의 말 못할 고민에 턱을 긁적이며 고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말했다. “가니아의 예언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군.” “예?” “고학에게 들으니 나와 연락이 5달 정도 끊기자 장인이 날 암살했다는 소 문이 돌고, 그것으로 서제가 거병했다고 하니 말이야.” 라혼은 그렇게 웃어넘기고, 초초를 불렀다. “초초.” “예.” “너는 지금부터 내 여동생이다.” “……!” 초초는 너무도 갑작스런 라혼의 말에 움찔하며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 초초 를 라혼은 더욱 몰아 붙였다. “내가 오라비가 되는 것이 싫은가?” “아니, 아닙니다.” “그럼 좋다는 것이군. 네가 날 오라비로 모셨으니 내 부탁 한 가지만 들어 주어라!” “무, 무슨……?” “노총각 하나를 네가 맡아 주어야 갰다.” “예, 예?” “고학 말이다. 모원이 이토록 아름다운 아내를 맞았으니 홀아비 고학이 무 척 적적해 하는 것 같아 말이다.” “하, 하지만…….” 라혼은 초초의 태도에서 당황을 읽었지만 싫은 기색은 없어 보이자 어리둥 절해하는 설화에게 눈짓했다. 설화는 평생 안하던 짓을 하는 라혼의 행동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며 초초에게 말했다. “킥! 서방님 고 군사님은 좀 고지식하고 고리타분한 사람이라 초초와는 맞 지 않아요. 초초에게는 차라리 저기 육장군 같이 듬직한 사람이 좋다고요. 초초 고학이 정 싫다면 육장군은 어때?” “아, 아니요. 저는 고 군사님이 싫지 않아요.” “…….” 사실 초초에게 잔폭광마 같은 야차(野次)같은 거친 사람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지심과 연인이라고 하니 그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도 않았다. 그렇게 초초는 잔폭광마가 알면 게거품 물 이유로 기겁하며 손 을 내저었지만 노총각 잔폭광마는 고학이 초초에게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발산개세(拔山蓋世) 아침이 밝고 상경의 백성들은 천길 하늘 위에 떠 있는 산을 보았다. 그러나 전처럼 크게 놀라지 않았다. 갑주의 서병들이 코앞까지와 있는 상황이니 오히려 든든하기조차 했다. “모든 군사를 데리고 떠나기에 상경을 서제에게 내주는 줄 알았는데 아닌 가벼?” “아니지……. 자네 모른 소리 하덜말어. 백호나한이 천하제일미녀라는 천 상천화를 두고 갔는데 떠나긴 어딜 떠나!” “뭘, 그냥 한번 해본 소린데 따지기는.” 아직 중경 호천궁에서 벌인 일은 민간에까지는 알려지지 않아 저마다 백호 나한이 자신이 부리는 군사들을 데리고 어디서 뭘 했는지 무척 궁금해 했다 . 그리고 그것은 설화도 마찬가지였었다. “세상에, 그래서 그새 중경, 병주, 임주를 돌고 오신 거예요?” “그래.” “하지만 주력은 어디까지 황진성 코앞에 까지 다다른 30만 서병이잖아요? ” “어떻게 할까? 금강을 땅바닥에 딱 붙이고 쟁기로 밭 갈듯 갈아엎을 수도 있고, 금강에 불붙인 기름 항아리를 하늘에서 떨어트릴 수도 있고, 천호변 에서 주먹만 한 자갈을 천길 하늘 위에서 흩뿌릴 수도 있는데?” 설화는 라혼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천길 하늘 위에서 떨어진 자갈 돌은 그 위력이 능히 사람의 뼈를 부러뜨릴 수 있을 것이며 하다못해 활살 을 날려도 서제의 서병은 변변찮은 대항도 하지 못하리라. 서제의 30만서병 중 갑옷을 제대로 챙겨 입은 자는 대략 10만, 나머지는 방패하나만 들고 있 거나 창한자루에 모든 걸 맡긴 군사들이라는 것은 설화 또한 알고 있었다. “그렇군요. 금강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었군요.” “그런 방법은 마지막에나 쓸 거야.” “그럼 그것 말고 다른 수가 있단 말씀이세요?” “방법은 무슨 그냥 힘으로 밀어 붙이는 거지 뭐! 그보다 설화 금강 구경하 지 않을래?” “할래요.” 침상에서 일어난 설화는 침의 차림 그대로 세숫물 대야에 따라 세수부터 하 려 했다. 라혼은 그런 설화에게 다가가 팔을 가만히 잡고는 씩 웃어 보인 후 그대로 천호 한가운데로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했다. “끼야~!” “차가울 거야.” -풍덩~! 무색투명한 호수에 빠진 설화는 뼛속까지 시려오는 느낌에 움찔했다. 그러 나 등 쪽으로부터 전해오는 따스한 느낌에 살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눈앞 에 펼쳐진 아침 햇살이 산란하는 아름다운 천호 물속 전경에 감탄했다. ‘아, 아름다워….’ 그러나 너무나 갑자기 물속으로 들어와 귀식대법을 펼치기에도 숨이 모자라 금세 숨이 가빠와 지는 것을 느꼈다. 라혼은 설화가 답답해하는 기색을 보 이자 그 즉시 수면으로 고개를 뺐다. -촤아~! “푸하!” 그리고 라혼은 설화에게 마법주문을 걸어주었다. “워터 브리딩Water breathing!” [워터 브리딩Water breathing 수준호흡]주문은 시간제한이 있는 비교적 초 급마법주문이었지만 감각기관을 둔하게 하는 귀식대법보다는 나았다. “이제 물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을 거야.” “정말…….” -첨벙! 라혼에게 물속으로 끌려들어간 설화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 숨을 크게 들이 쉬었다. 그런데 물속이란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선한 공기가 폐를 가 득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설화는 천진난만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서방님을 바라보았다. 라혼은 그런 설화의 앙증맞은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살짝 입을 맞추고는 검 지로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설화는 사랑하는 이의 입맞춤에 행복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서방님이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은빛 비늘을 가 진 물고기들이 떼 지어 유영하는 아름다운 ‘은빛 물고기들의 군무(群舞)’ 가 펼쳐지고 있었다. ‘아름다워요.’ 설화는 물속인지라 음파가 아닌 마음으로 말하는 혜광심어(慧光心語)라는 극상승 전음입밀(傳音入密)로 속삭였다. 라혼은 설화의 등을 가슴으로 감싸 안으며 물결에 수초처럼 흐트러지는 머릿결에 입을 맞추고 턱을 어깨에 살 짝 괴었다. 설화는 그런 라혼의 얼굴에 자신의 볼을 갖다 대며 손으로 서방 님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렇게 넓디넓은 하늘 호수 물속에서 전라(全裸)의 남녀가 사랑을 속삭였고 , 물고기들은 때 아닌 기경에 호기심과 경계심을 가지고 가까이 접근하지도 멀리 도망가지도 않고 주위를 맨 돌았다. 용야평원(容野平原)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상경 황진성의 주작문 망루. 주 작금군 십장(什長) 도오진(刀五塵)은 용야평원으로 들어서는 적군을 발견하 고 망루에 설치된 종을 치기 시작했다. -뗑뗑뗑뗑뗑뗑뗑뗑뗑………………. 주작문 망루에서 울리는 다급한 종소리에 주작대로에 적을 두고 하루를 시 작하려던 백성들은 저마다 손을 놓고 종소리가 울리는 주작문 망루를 올려 다보았다. 저마다 서제가 대군을 끌고 상경으로 온다는 소문을 들어 그것을 모르는 자가 없었지만 막상 그 일이 실제로 닥치자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히야~! 두두두두두두두………………. 등에 <令>자가 새겨진 삼각기를 맨 전령이 주작금군 주둔지를 빠져나와 대 로를 달려 용천궁, 용호왕부로 치달렸다. 이미 전환으로 전후사정이 전달되 었을 테지만 다로 전령을 보내는 것은 상경의 백성들로 하여금 큰 변고가 일어났음을 알리는 의미도 있었고, 그것은 일반 군졸들의 마음을 다잡게 하 는 의미도 있었다. 사실 서병의 움직임은 금강의 천리경에 포착되어 있어 웬만한 군관들은 이 미 알고 있었고, 위에서부터 가장 하위에 있는 군졸까지 각오한 일이었기에 별반 혼란 없이 순식간에 병력배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상경의 바로 앞 마당이라 할 수 있는 용야평원에 서병의 모습이 보였다고 해서 지금 당장 싸움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었다. 성을 떨어트리는 일은 그것도 천하칠대도 중 하나인 상경을 치는 일이 그리 간단한일이 아니었기에 성 앞에 진을 치 고 방법을 모색할 것이기에……. “30만 대군 치고 수가 적어 보이는데?” 금강 안 천리경이 설치된 방에서 용호군의 장군들과 고학이 서병들이 목책 을 쌓고, 진을 치는 모습을 보며 이런 저런 의견을 나누었다. “세작으로부터 신주관에 3만, 신주관 안팎에 각기 3만 씩 두었다고 하더군 요. 그것으로 보아 상경공략은 대략 20만 정도로 시도할 모양이오.” “겨우 20만으로 황진성을 공략하려 한단 말이오?” “서제에게 동조한 세력이 병주의 토제가 뿐만 아니라는 뜻이겠지요. 그리 고 과거 상경은 천림왕의 본거지나 다름없었소. 당시 천림왕과 힘겨루기를 하던 서제가 상경에 아무런 수작을 하지 않았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지요.” 그렇다. 천림왕과 서제가 손을 잡은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었다. 그전 십여 년간 천림왕과 서제 서포틈은 참으로 불편한 관계에 있었음으로 상경 내 상당한 암약세력이 있을 수 있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상경금군이나 용호군 내부에도 서제의 암중비약(暗中飛躍)하는 세력이 없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 “그보다 천호변의 자갈돌들을 모으는 일은 어찌되어가고 있습니까?” “그 점은 걱정 마시오. 대수영 수도대장 목남 소장이 휘하 수군들이 지난 이레간 모아들인 주먹만 한 자갈을 엄청나게 쌓아놓았으니 금강에 옮겨 실 기만 하면 되니까.” “기름은?” “화공에 쓰일 기름은 천호수군대장 소천위가 책임지고 모아들이고 있지만 만족할만한 양은 되지 못한다 하오이다.” “그보다. 주군은 지금 어디계시는 것이오?” 용호군 장군 달성모의 질문에 장내의 시선이 고학에게 모아졌지만 고학이라 고 해서 주군의 소재를 알지는 못했다. “열지부인에게 알려 지금 찾고 있으니 곧 모습을 보이실 게요.” 열지부인이란 다름 아닌 메이를 부르는 말이었다. 메이는 열지족 추장의 딸 이고 열지족은 씨족임으로 ‘열지’는 성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메이를 열 지부인이라 불렀다. 공식적인 지위는 없지만 주모인 천상천화를 가장 가까 이에 있는 여인인지라 누구도 함부로 할 수없는 여인이었다. 그리고 용황궁 귀림에 백호나한, 천상천화내외 이외에 인물이 거처하는 것은 열지부인 메 이가 유일했다. 설화는 오랫동안 시리도록 찬물 속에서 유영하여 추운기가 들어 붉디붉은 홍의 궁장을 꺼내 입었다. 그리고 라혼에게는 자신이 입은 홍의와 어울리는 청명한 하늘 빛 연청의를 꺼내 손수 입혀 주었다. 그렇게 타는 듯한 붉은 옷을 입은 설화와 시원한 연청의를 입은 라혼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침방을 나선 시간은 정오를 향해가는 늦은 아침이었다. 고학 군사에게 주군에게 서제의 대군이 몰려왔다는 소식을 전해주라는 부탁 은 받은 메이는 발그레한 홍조를 띤 설화와 평소와는 다른 준수한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천상의 미남자 같은 상공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나서자 자신이 할 말을 잊어버렸다. ‘설화 언니도 그렇지만 상공이 저런 미남자 이었나?’ 메이는 그 둘을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느끼며 심장이 두근거렸다 . 라혼이 의식적으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묘한 호감을 가지게 하면서도 그리 매력을 느끼게 하지 않게 하는 묘용이 있는 [컨트롤 챰Control Charm 매력조절]주문을 해지 시킨 현상이었다. 그 주문은 잘생겼지만 그것이 잘생 겼다고 느껴지지 않게 하는 주문이었던 것이다. “메이가 상공께 아침 인사드립니다.” “메이도 편히 쉬었나?” “예.” “메이 부탁할 것이 있는데…….” “예? 마, 말씀 하세요.” “밖에 지심에게 전해 백수왕야를 대전에 모시라하고, 육삼에게는 상경의 주요 인사들을 모으라 하게…….” “예, 그리고 지근 서병이 주작문 앞 용야평원에 진을 치고 있는 중이랍니 다.” “그렇군.” 메이는 상공에게 말 못할 어떤 기세를 느낄 수 있었다. 메이 또한 무녀(巫 女)의 재능이 있어 가끔 앞날을 내다보는 어떤 계시를 받곤 했는데 지금도 그러한 계시가 살짝 보였다. 그러나 메이는 뭔가 중요한 것 같으면 서도 알 수 없는 느낌에 뭐라 말 할 수없는 답답함을 느꼈다. ‘뭐지? 분명 뭔가 보였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메이는 이내 상념을 털어버리고 밖에서 기다리는 지심과 잔폭광마에게 상공의 명을 전했다. 그리고 라혼은 설화와 함께 금강으로 천천히 산책하듯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설화에게 선산환도에 대한 유래 와 금강의 이모저모를 이야기 해주며 급할 것 없다는 듯이 용호왕부를 나서 서 금강이 정박(?)해있는 양항으로 향했다. 그렇게 조용히 담소를 나누며 세상 태평한 모습으로 걷는 모습은 진정 한 폭의 그림 같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묘한 감흥이 일기에 충분했다. “누구지?” “용호왕과 천녀시잖아!” “정말, 대단하네, 천하제일미 천상천화라는 소린 들었지만 백호나한도 그 에 못지않군.”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야.” 그렇게 라혼과 설화는 그 신분에 맞지 않게 호위 군사나 시종하는 사람도 없이 상경의 대로를 걸어서 양항에 들어섰다. 대로를 지나가는 금군들은 자 신들의 평안한 신색을 한 주군의 모습에 묘한 감흥을 받아 자신감이 넘치는 군례를 하며 지나쳐갔다. 금강이 정박한(?) 양항은 여러 가지 물자를 금강에 옮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 막대한 양의 군량과 화살, 천보노를 비롯해서 주먹만 한 돌멩이가 가득담 긴 자갈부대에 기름 항아리와 바싹 마른 건초 등이 도르래까지 이용하여 끊 임없이 금강에 실렸다. “이대로 들어가면 방해되겠군.” 라혼은 거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양항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은 그들의 일 을 방해할 것이 분명하기에 설화의 가는 허리를 잡고 금강 안으로 [텔레포 트 워프Teleport warp]했다. “서방님 저 이거 가르쳐 줘요.”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를?” 라혼은 설화의 부탁에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라혼의 [텔레포트 워프Telepor t warp]는 일반적인 마법주문이 아니라 에텔 스페이스를 이용한 것이었다. 일반주문을 알고는 있지만 라혼이 알고 있는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 주문은 시드그람 대륙의 제국 마법길드의 표준좌표를 이용한 주문이었다. 즉, 동방대륙인 칸 대륙엔 이 표준좌표가 있을 리가 없었다. 표준좌표 이용 하지 않고 목적지가 그 지역에 대한 공부와 실제 살던 경험으로 머릿속에 그림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친근한 지역으로 [텔레포트 워프Telepo rt warp] 할 수 있는 주문이 있지만 설화를 가르칠 정도로 제대로 알고 있 지는 못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설화가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 p]같은 고위마법주문을 사용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안 되는 거예요?” “힘들겠어. 이건 마법이야. 네가 익힌 옥녀심공의 내력과 충돌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아. 전에도 말했을 텐데?” “제가 깜박 했어요.” 라혼은 실망스런 기색이 역력한 설화에게 금강의 여기저기를 안내했다. 사 실 금강의 내부는 그리 볼만한 것이 없었다. 금강은 사람들을 피신시키기 위해 만든 피난처여서 거주공간과 식량들을 보관하는 커다란 창고가 있을 뿐이었다. 볼만 한 것이라면 법륜 정도랄까? 라혼과 설화가 법륜 방에 들어 서자 법륜근처에서 상주하다시피하고 있는 귀림의 드워프들이 아는 체하며 다가왔다. “라혼님. 설화!” “어머? 오랜만이네요. 카쿤!” 그렇게 설화와 반갑게 인사를 나눈 카쿤은 라혼에게 설계도를 펼쳐 보이며 물었다. “이것 봐! 풍화륜(風火輪)이야. 이것만 있으면 금강을 움직이게 할 수 있 다고, 뿐만 아니라 비차(飛車)도 만들 수 있어 이거 정말 대단해! 그리고 이것은 몰이 환단인의 유물을 뒤지다 발견했는데 황건역사(黃巾力士)의 설 계도야. 여기에 황건역사가 자유로이 천공을 날아다니는 풍화륜이 달려있는 데 그 풍화륜의 힘을 증폭시키며 금강을 움직이게 하는 것도…….” “아니, 풍화륜만으로는 금강을 움직일 수 없다. 풍화륜이 아닌 법륜 연구 해야해. 풍화륜은 바람과 불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지만 법륜은 중력자와 반 중력자를 이용한 거야. 그 둘의 차이는 개미와 황소의 차이만큼 커!” “역시 그런가?” “하지만 풍화륜도 쓰기에 따라 쓸모가 많겠군.” 설화는 카쿤과 서방님의 대화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가만히 경청했다. 그 리고 맹렬히 구르는 커다란 수레바퀴 형상의 법륜을 대충 둘러본 후 뭔가에 홀린 듯 열중하는 토지신들과 헤어져 법륜방을 나서자 설화는 라혼에게 물 었다. “금강은 원래 움직이는 거 아니었어요?” “아아! 그거 사실은 내가 강제로 움직이게 한 거야. 하지만 그것은 혼자만 알고 있어야해. 금강이 나 없이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이 알려져 봐야 좋을 것이 없으니까?” “알았어요.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을 게요.” 그리고 라혼은 설화를 수두로 데려갔다. 그렇게 설화에게 금강을 보여주자 시간은 어느새 정오를 지나고 있었다. 발산개세(拔山蓋世) “허! 이거야. 너무 어이가 없어 말도 나오지 않는군.” 서제 서포틈은 상경성의 견고해 보이는 성병이 한눈에 보이는 위치에 자리 한 군막에서 용호왕의 이름으로 온 격문을 읽고 너무도 어이없어 헛웃음만 웃었다. 서찰안의 내용은 이러했다. 백왕 호사천은 호황가를 이끄는 호황이 되고, 신수 백호 천상천화는 여천자 로 무후(武后)가 되며 서제가 가진 최고 관직인 상국(相國)의 지위를 거둬 용호왕 자신이 상국의 지위를 갖는 다는 것이었다. 거기다 흑막과 의백을 장악한 웅랑교와 반적 강무세가를 인정하며 그들 또한 반년 후인 원단(元旦 )에 입조(入朝)할 것을 ‘명(命)’했다는 것이다. 더욱 황당한 것이 이 격 문이 실제로 십제와 후선, 웅랑교에 보내졌다는 사실이었다. “하하하하, 자기들끼리 다 해먹겠다는 수작이로군. 문백 그대는 어찌 생각 하는가?” “격장지계입니다. 그가 우릴 흥분시켜 무엇을 얻으려는지 모르나 스스로 우릴 징계하겠다고 선언해놓고 이렇듯 격문을 보내온 것은 그것 외엔 생각 할 수 없습니다.” 서제의 꾀주머니 서문백 서영은 용호왕의 이름으로 서제 앞으로 보내진 편 지를 그렇게 해석했다. 그러나 그가 마법에 대해 알았다면 서제의 손에 들 린 격문에 기이한 문양이 [위저드 마크Wizard Mark] 주문이라는 것을 알았 을 것이다. 그러나 라혼이 걸은 주문에 따라 특별한 문양은 격문을 읽은 모 든 사람이 몸에 새겨진지 오래였다. “전하! 상경에서 일단 군사들이 빠져나오고 있습니다.” “뭐야?” “뭘 어쩌자는 거지?” 너무 어이없어 화조차 나지 않는 격문을 보낸 후 다음은 서병들에 비해 한 줌도 되지 않는 병력의 군사들로 일전을 결하자고 성을 빠져오니 무슨 광대 노름 같은 것이 도깨비에게 홀린 기분이었다. 그때……. “전하 저들은 백호나한이 직접 이끄는 군사들입니다. 백호나한이 성에서 나왔습니다.” “뭐라? 그게 참인가?” 서제는 무장의 말을 듣고 군막을 나섰다. 선명한 글자가 큼지막하게 쓰여진 호천무공(虎天武公), 용천검주(龍天劍主), 해도대원수(海道大元帥), 용호 대원수(龍虎大元帥)의 깃발과 상국용호왕(相國龍虎王) 깃발을 세워든 모습 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앞에 붉은 망토에 은빛 갑주를 입은 백호나한을 짐작되는 자의 모습이 보였다. “전하, 걸어온 싸움을 피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일단 군사들을 포진을 하 심이…….” “음…….” 서제의 고개가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서영은 전령들로 하여금 군사들을 포 진케 했다. 방패병은 제 일선으로 두고 그 뒤로 궁수를 궁수 좌우로 창병을 포진했다. 그리고 용호군의 포진을 고려하고 그들보다 풍부한 병력을 바탕 으로 진형을 편성했다. 양측의 저마다 진형을 완성시키고 심장이 펄떡이며 긴장감을 높아만 갈 때 라혼은 홀로 말을 몰아 진형을 빠져 나왔다. 그런 라혼의 손에는 드워프의 손길이 미친 철궁(鐵弓)이 들려 있었는데 라혼은 아무런 말없이 시위에 화 살을 걸었다. 그리고 심안(心眼)을 열어 저 멀리 점처럼 보이는 서제 서포 틈을 겨누고 화살에 공력을 주입했다. -팅~! 라혼의 철궁에서 쏘아진 화살은 공기를 가르며 수백장 밖의 서제 서포틈을 노리고 날아갔다. -퍽! “크억!” 수백장을 날아온 화살은 그 힘을 잃지 않고 서제가 아닌 그의 곁에 있던 서 문백의 가슴에 박혀 여력으로 그의 몸뚱이를 십여 장 가까이 날려 보냈다. 참으로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그리고 서문백 서영의 죽음을 멍하니 지켜보 던 세제는 재차 화살이 날아와 자신이 몸을 실고 있던 애마의 이마를 꿰뚫 자 심장이 멎는 듯 기겁성을 터트리며 자신의 애마와 함께 고꾸라졌다. “헉!” 그제야 정신을 차린 서제의 호위무사들은 몸을 날려 서제를 보호했다. 그리 고 또 하나의 화살이 날아와 세 명의 중갑주를 입은 호위무사를 꿰뚫자 서 제는 악에 받힌 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돌격! 전군 돌격하라!” -전군 돌격! -둥둥둥둥둥둥……………………. 서제의 앞뒤 가리지 않는 돌격명령에 서병 무장들의 어리둥절한 복명복창소 리가 들리고 서병들은 뭐가 뭔지도 모르고 돌격북소리에 맞춰 앞으로 치달 리기 시작했다. 적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궁사(弓射)도, 아군의 기세와 전의 를 드높이는 함성도 없는 맹목적인 돌격은 그것만으로 기세를 크게 죽인 것 이다. 그런게 라혼은 단 서너 발의 화살로 서제를 당황하게 하여 격장지계( 激將之計)와 같은 효과를 거두고 진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전통(箭 桶)에 화살을 모두 소비할 셈으로 서제가 있는 방향으로 황금빛 강기를 머 금은 화살을 연달아 날려 보냈다. 그리고 무작정 돌격해 오는 서병의 대군이 용호군 궁수들의 사거리까지 접 근하자 라혼은 크게 소리쳤다. -사(射)! -텅! 터더덩! -끼아! 슈웅 타다다닥! 상경 성벽 위에 설치된 천보노에서 웬만한 창대 굵기 철전이 쏘아지고 포진 한 용호군의 궁수들이 화살을 날리자 무조건 치달리는 서병들의 피해가 막 심했다. 그렇지만 18만에 달하는 군사들이 일제히 몰아쳐오는 광경을 참으 로 두려운 것이었다. 그렇게 3번의 화살세례를 맞으며 쇄도한 서병들을 맞 이한 것은 용호군이 아니었다. 전면에 포진한 군사들이 미리 약조된 작전대 로 전면을 가린 방패를 거두고 뒤로 물러섰고, 서병을 맞이한 것은 다름 아 닌 사방에 방패를 붙이고 전면에 빼곡히 과창(戈槍) 밖은 형상에 3명의 궁 수와 1명의 운전수 태운 목우유마였다. 고대에 말이 끌던 전차(戰車)의 운 용을 그대로 차용한 신병기였다. 목우유마의 옆 바퀴에는 각기 1개씩 회전 하는 칼날을 달았고 탑승한 궁수는 적이 접근 했을 땐 긴 나무자루에 창에 수직 칼날을 붙인 <ㅏ>형태의 극(戟)으로 적병을 공격했다. 용호군의 신병 기 ‘갑차(鉀車)’는 얼른 보기에 고슴도치 형상을 닮아 있었다. 상당한 거 리를 전력으로 뛰어온지라 숨을 헐떡이며 달려든 서병들은 용호군의 신병기 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죽어갔고 상경의 성벽 위에 설치된 천보노에서 굵은 철전이 벼락처럼 떨어지니 이것은 일방적인 학살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우측으로 우회한 마군(馬軍)이 무작정 앞으로 달려드는 서병의 옆을 치자 더욱 혼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전열이 무너지고 우왕좌왕하는 군 사는 아무리 수가 많아보아야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3배에 달하는 병력차는 큰 위협이 될 수 있는지라 너무 몰아붙이지 말고 도망갈 길을 열 어주며 도망치는 적병을 추결하며 섬멸하는 것이 병법상의 상책(上策)이었 지만 라혼은 싸움을 오래 끌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라혼은 최고 명령권자인 서제를 노리던 철궁을 거두고 검신(劍身)만 4척(12 0cm)에 달하는 드워프의 손길이 스친 거검(巨劍)을 뽑아 들고는 설화가 직 접 고르고 고른 명마의 옆구리를 찼다. 그러자 라혼을 태운 말은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나가며 참혹한 혈해에서 허우적대는 가운데 살려 달라고 울부짖 는 아비규환(阿鼻叫喚) 전장 한 복판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 뒤를 잔폭광 마를 비롯한 1800여명의 백호영들이 따라 붙었다. “인보케이션 배리어Invocation barrier! 리버스 그래버티Reverse gravity! ” 라혼은 [인보케이션 배리어Invocation barrier 주문결계]와 함께 [리버스 그래버티Reverse gravity 중력역전]을 시전했다. 그러자 라혼과 라혼을 태 운 백마주변 1장이 주문의 영향력이 발휘 되었다. 그리고 그 효과로 라혼의 1장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허공으로 치솟아 버렸다. 그것은 마치 한줄기 얇 은 가을바람에 마른 낙엽이 날리는 비산하는 형상이었다. 그렇게 길을 뚫은 라혼의 목표는 다름 아닌 서제 서포틈이었다. 서제에게 [위저드 마크Wizar d Mark] 주문이 걸려있는 이상 그가 다른 차원에 있지 않은 한 라혼은 그의 소재를 알 수 있다. “이, 이런 퇴각. 퇴각하라!” 서제 서포틈은 그 무시무시한 화살이 더 이상 날아오지 않아 고개를 들어 전장을 살피고 일방적으로 도륙되는 군사들의 모습에 악에 받혀 퇴각을 명 했다. 그리고 자신을 목표로 백호나한이 돌격해 오자 기겁하여 악을 쓰듯 퇴각을 명령하며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터운 인해(人海)를 뚫은 백 호나한이 달려드는 모습에 서제가의 무사단체인 흑사대(黑死隊)를 이끄는 서중(鼠中)은 흑사대 일부를 서제를 호위케 하고 나머지 흑사대 무사들의 전열을 정비하여 백호나한에게 마주쳐갔다. 본래 흑사대는 서제 자신의 명 이 없이는 움직일 수 없었으나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는 법. 지금처럼 위급 한 때엔 흑사대주인 서중에게 임의적 판단이 더욱 중요했다. “장기에서 왕을 잡으면 이긴다. 이 싸움도 저 백호나한만 잡으면 이긴다. 천하에 서제가에 흑사대가 있음을 알리자! 승리는 흑사대로 인해 갈릴 것이 다.” -와! “살(殺)!” -죽여라! 흑사대주 서중의 말은 흑사대 무사들로 하여금 승리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 그리고 그것은 흑사대의 사기와 기세를 높이는데 충분했다. 그렇게 3천 흑사대와 1천8백 백호영들 간의 첫번째 접전이 벌어졌다. 라혼은 도망치는 서제를 그대로 두고 자신을 목표로 달려드는 흑사대에 황 금빛 검강을 머금은 거검을 횡소천군 일식으로 휘둘렀다. 그러지 초승달 형 상의 검강이 넓게 퍼지며 흑사대가 타고 있는 말과 함께 가로로 양단돼 버 렸다. 그리고 라혼은 허리를 튕겨 몸을 허공을 뽑아 올려 다시 말 등을 박 차고 올라 백호영 독문 무공 맹호낙아조(猛虎落牙爪) 일식을 전개했다. 백 호영은 상승무공을 특기로 하는 고수들이었다. 개중엔 잔폭광마처럼 마술( 馬術)이 뛰어난 자도 더러 있었지만 전장에서 기병과 맞붙어 싸울 정도의 실력을 되지 않았다. 그래서 고안 된 것이 비단잉어가 파도를 넘는 형상의 금리도천파(金鯉倒千波) 신법을 이용하고 높이 뛰어 올라 떨어지며 시전하 는 맹호낙아조를 수련 시켰다. 맹호낙아조는 다름 아닌 잔폭광마의 독문무 공이었다. 라혼이 그렇게 먼저 몸을 띄우자 그것을 신호로 맹호낙아조의 조예에 자신 이 있는 수백 백호영들이 일제히 몸을 허공으로 뽑아 올렸다. 그러자 흑사 대는 마치 검은 벽이 무너지는 듯한 환상을 보며 손에 쥔 마창(馬槍)을 힘 껏 내 찔렀다. 그러나 갈고 닦은 맹호낙아조 초식을 수련하는 첫 번째가 찔 러오는 창을 피하는 수련이었으니……. -콰창! 라혼이 가장 먼저 찔러오는 창을 내치며 맹호낙아조의 초식에 따라 검강을 쳐냈다. 그 일식에 대여섯 명의 흑사대가 피떡이 되어 나가 떨어졌고 동시 에 잔폭광마를 선두로 한 백호영과 흑사대간의 충돌이 벌어졌다. -쿠창차자차창! 백호영의 목숨 건 맹호낙아조는 순간적으로 흑사대의 전열을 흐트러트렸고 결과는 백호영의 압도적인 우세였다. 그러나 백호영의 맹호낙아조는 결과가 성공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집단전에서는 사용하는 데 많은 위험이 노출 되었다. 맹호낙아조을 시전한 백호영 태반이 전투불능 상태가 되어버 린 것이다. 그러니까 적 기병을 내쳐 낙마시킨 것까지는 성공적이었으나 기 병끼리 충돌하는 와중에 끼어 말발굽에 짓밟히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라혼은 그 즉시 천방지축신공을 끌어올려 모든 움직임을 한 순간 정지시킨 후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오는 신선처럼 허공을 노닐듯 정교하기 그지없는 천외비선(天外飛仙)을 시전했다. 천외비선은 일검을 내쳐 소나무 솔잎을 가 지는 상하지 않은체 일시에 떨어트리는 비공(秘功)이었다. 라혼은 거기에 심검의 독문경지는 영인(靈刃) 소울 블레이드까지 가미했다. -팍~! 그리고 결과는 흑사대는 물론 그들을 태운 말까지 붉은 피먼지로 흩어버렸 다. 너무도 엄청난 라혼의 신위에 백호영과 흑사대의 싸움이 일시 정지 되 었으나 라혼은 서제의 충복 중 충복으로만 이루어진 흑사대를 살려둘 생각 이 없었다. “패력선풍!” 패력선풍(覇力仙風), 몸을 축으로 팽이처럼 회전하는 원심력으로 상대를 제 압하는 일반적인 초식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황금빛 검강을 머금은 거검으 로 펼쳐지고 있었다. -콰차차차자차차…………. 황금빛 검강에 갑주와 군마가 통째로 갈리는 소리에 정신이 퍼득난 잔폭광 마가 괴성을 지르며 라혼은 따라 전장에 뛰어 들었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백호영들도 흑사대를 도륙하기 시작했다. “우오오오오~!” -콰창! 이미 백호나한의 신위에 전의를 상실한 흑사대는 이미 기세가 오를 데로 오 른 백호영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렇게 마지막 흑사대 무사까지 도륙한 라혼 은 천지가 진동하는 대사자후(大獅子吼)를 터트리고 대지를 울리는 진각(震 脚)을 밟았다. -우아아아아아아……. -쿵! 그리고 일방적인 도살이 벌어지던 시체가 산을 이루고 뜨거운 피가 내를 이 루는 용야평원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백호무적!” -와아~! -백호무적! -백호무적! -백호무적! 누군가 선창에 용호군은 승리의 함성을 지르며 천지가 ‘웅웅’대는 구호를 외쳤다. 그리고 살아남은 서병들은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손에 든 병 기를 진득한 피에 절은 땅에 떨어트렸다. 용호왕과 서제의 용야전투에서 서제 서포틈은 18만 대군과 심혈을 기울여 키운 흑사대 대부분을 잃고 고작 수백기의 호위병만 대리고 패주했고, 용호 왕 백호나한은 적병 3만을 주살하고 15만을 포로로 잡아 그들로 백호군을 조직하여 단숨에 10만 대군을 얻었고 그들의 배를 불린 서제의 군량 수만 석을 마구, 갑주를 얻으니 한 번의 전투로 모든 것을 얻었다 할 수 있었다. 고학은 서제와의 싸움에서 금강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주군의 의지에 난감하 기 이를 데 없었다. 그간 자신이 준비한 전략은 모두 금강으로 이용한 것이 기 때문이었다. 주군은 한번 결정한 것에 대해선 번복하는 일이 없었다. 그 래서 따로 고안 한 것이 바로 목우유마를 이용한 갑차(鉀車)였다. 목우유마 는 사실 그동안 병참수송이나 공성전에서의 충차(衝車)나 운제(雲梯)를 실 은 수준으로만 이용해 왔었다. 그러던 것을 목우유마에 천보노나 발석차를 설치하는 것은 고려해 보았으나 그 효용성엔 의문이 생겼다. 그때 고대에 사용 되었다가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전차(戰車)의 운용방식이 떠올랐고 그 렇게 만들어 진 것이 바로 갑차다. 그리고 갑차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서제와 싸움을 끝난 것이 아니었다. 금강의 천리경이 설치된 방에서 고학은 서제를 추격하는 주군을 대신해서 용호군을 총지휘하고 있었다. “군사님, 토병 토벌군의 고우 장군의 연락입니다. 군량이 떨어져 가니 집 어진(集魚津)으로 군량을 보내 달랍니다.” “그일은 수도대장 목남장군에게 맡기면 되겠군. 고우장군에게 전해라. 원 주로 들어선 7만 토병은 오도 가도 못하고 갇힌 신세이니 쓸데없이 피 흘릴 것 없이 항복을 유도하라고, 그렇지 군량와 함께 토제의 친서를 보내면 되 겠군.” “알겠습니다.” “임주에서 웅장군의 연락입니다. 계세자가 순조롭게 병권을 장악하고 지방 태수들의 충성을 받아내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헌데 동인성에 있는 후선군 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전갈입니다.” “토금산장으로 하여금 용야전투를 소문내고 있으니 후선군이 함부로 움직 이지는 못할 거야. 게다가 금강을 통하여 수십만 대군이 순식간에 움직일 수 있으니 임주의 경계를 넘었다 하더라도 걱정할 것이 못된다.” 그렇게 고학은 금강의 그리 크지 않은 방에서 여러 가지일들을 한꺼번에 처 리했다. 이제 백수왕야 호사천이 호황이 되고 백호인 주모가 여천자(女天子 )로 무후(武后)가, 주군은 상국(相國)이 될 것이라는 내용의 격문이 천하를 울리는 용야전투의 소문과 함께 제후들에게 전해질 것이다. 이제 바야흐로 새로운 천하가 열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천상무후(天上武后) 용호군의 기동력은 타에 추종을 불허했다. 라혼은 용야평원전투에서 마군( 馬軍) 2만 추려 도망치는 서제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신주관에서 상경까지는 대략 사나흘 거리고, 말을 내달린다면 하룻길이었다 . 그러나 서제는 그 만 하루라는 시간을 만년처럼 보내야 했다. 사방이 탁 트인 용야평원은 서제 서포틈과 그의 호위 군사들을 숨겨주기 못했다. 그들 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죽어라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더해가며 주마가편( 走馬加鞭)할 수밖에 없었다. 추적하는 백호나한의 발길을 붙잡기 위해 수십 명의 흑사대 무사들이 목숨을 던졌으나 그들은 백호나한이 휘두르는 백광( 白光)의 기운에 그들은 태운 말과 함께 피 먼지로 변하여 허공을 말발굽 아 래에 누워 자그마한 걸림돌도 되지 못했다. 그러나 서제는 삶에 희망을 버 리지 않았다. 신주관을 중심으로, 신주관 남쪽과 북쪽 도합 12만 정병이 있 었기 때문이었다. 신주관 북쪽 용야평원에 해당하는 곳에 병참기지 겸 후위 대가 있었는데 5만 대군이었다. “이럇, 이럇! 모두 힘을 내라! 곧 아군 진영이 나온다.” -두두두두두두두두……………………. 서제와 그의 호위 군사들을 태운 말은 하루 종일 치달려 탈진 직전이었고, 뒤쪽에선 백호나한과 백호영들이 사흘밤낮을 달려도 지치지 않는 말을 타고 있는지 겨우 수백여장거리까지 추격해왔다. 서제의 망상은 사실 반쯤 맞았다. 라혼의 목적은 서제가 아닌 용야평원 남 부이며 신주관 북쪽 자과촌(自過村)에 진을 친 5만 서병을 치는 것이었다. 라혼은 1천6백 백호영을 태운 군마에 천독지존 독신이 제조한 잠혈광(潛血 狂)이란 독을 먹이고 [레스터레이션Restoration 체력회복]주문은 걸어두었 다. 잠혈광에 중독되면 최후의 한순간 까지도 체력을 짜내 보통사람이라도 사흘 밤낮을 움직임이 격렬한 춤을 추거나 싸움을 할 수 있게 하는 기독(奇毒)이 었다. 남례성 진토인의 한 부족은 한때 그것으로 제 부족들을 두려움에 떨 게 하였으나 그 후유증이 심각해 오히려 자멸의 길을 걷게 한 요물이었다. “자과촌에 진을 친 적병은 5만 대군이다. 한시도 방심하면 자신은 죽고, 동지는 위험에 빠진다. 백호영은 천하무적이다.” -하! -두두두두두두두두…………. 백호영들은 거친 말발굽소리 속에서 선명하게 들려오는 주군의 목소리에 반 응하며 투지를 불태워다. 1천6백여 병력으로 5만 대군이 진을 친 곳을 달려 들면서도 추호의 두려움도 없었다. 그들은 태운 말은 잠혈광의 약기운에 지 칠 줄 모르고 내달렸지만 그들은 순수한 체력으로 하루 내내 전속력으로 질 주하는 말위에 고삐를 움켜쥐고 있어야 했다. 입에선 단내가 나고, 말 등에 얹어진 둔부는 있는지 없는지 감감 조차 없었다. 그렇게 백호영들 또한 한 계상황까지 몰리다 보니 5만이던 10만이든 깨부수고 어서 빨리 땅에 두 다 리를 뻗고 누워 쉬고 싶을 뿐이었다. 백호영에게도 남은 것은 ‘악’뿐이었 다. 그때, 땅거미가 지고 하늘이 회색에서 밤의 검은 옷으로 갈아입을 시간 자 과촌에 자리 잡은 서병들을 지휘하고 서제의 배다른 동생이기도 한 자운왕( 自運王) 서포운(鼠暴運)은 하루에 한번 이상은 오던 전령이 오지 않아 걱정 하는 가운데 서제가 이끄는 본군과 연결되는 보급로을 정찰하는 정찰병이 가져온 소식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어떻게 단 한번 의 전투로 18만 대군을 한꺼번에 잃을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대패했을 지 라도 18만이란 숫자는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무방비 상태에서 불의에 기습을 당했다 하더라도 못해도 수만 군사는 건져야 이치에 맞거늘……. “그래서 형님 전하가 불과 수십 기의 호위군사만 데리고 패주하고 있단 말 이야?” “뿐만 아닙니다. 그 뒤를 기천은 되어 보이는 추격군이 따라붙고 있습니다 .” “자운왕야, 전초에서 보곱니다. 일단의 기병들이 본진으로 쇄도하고 있답 니다.” “뭐야?” -둥둥둥둥둥둥둥둥………………. 전초의 보고와 더불어 비상을 알리는 둥소리가 울리며 자과촌의 본진은 소 란스러워 지기 시작했다. 이건 빨라도 너무 빠르게 일이 진행되어가고 있었 다. “상경이 지척이라지만 치달려도 하룻길이다. 적병을 지쳤다. 당황하지 말 고 대처하라!” 그러나 서포운의 외침은 공허하기만 했다. 비교적 안전한 후방으로 치부되 던 자과촌이었다. 그와 비례해서 군사들의 마음엔 방심(放心)이란 요물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것이 장수의 일성에 진정될 리 없었다. 주변 경계를 하기위한 군사들은 제외하고 손에 병기를 든 이를 찾아보기 없었으니 병가 에서 창이라도 찾아 집어 들고 나서면 다행이었으나 자기들끼리 우왕좌왕하 는 통에 일찌감친 불을 붙여둔 화톳불이 쓰러지며 화재까지 발생하니 그 혼 란의 정도는 이루 말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 서제가 들어서자 그것을 적병일 내습한 것으로 오인한 서병들은 고함을 지르며 달려드는 이 들까지 있었다. -와! “뭐? 뭐냐? 이분은 서제 전하이시다. 이, 이런!” 바로 그때 고작 2백여장 거리까지 따라붙은 백호나한이 뛰어들자 혼란은 더 이상 걷잡을 수 없게 확산 되고 말았다. 이제 막 어둠이 깔리는 시간이었 다. 해가 지기직전 저녁을 먹고 하루 중 가장 편안한 시간을 보내던 군사들 이었다. 그들은 전혀 싸움을 할 준비도 각오도 되어있지 못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말을 탄 군사가 보이면 아군인지 적군인지 확인할 새도 없이 몸을 피하느라 급급할 뿐이었다. 서제 서포틈은 5만 군사가 지칠 대로 지친 2천에 많이 못 미치는 군사들에 게 농락당하는 꿈같은 현실에 기막혀하며 혼란을 틈타 남녘에 웅크리고 있 는 개세산(蓋世山) 신주관으로 말머리를 돌려야 했다. 다음날 새벽. 표상치가 이끄는 마군들이 도착하고 주변을 시작했다. 날이 밝은 후 지난밤 전투의 전과를 확인한 라혼은 백호영들에게 보급창이도 했 던 자과 촌에서 얻은 재화의 삼분지일을 백호영들에게 포상하고 반은 밤새 워 달려온 마군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육분지일에 해당하는 재화는 군비로 전용했다. 서제가 이끌고 온 총 30만 대군이 반년 먹을 군량 과 군관들의 봉록, 화살, 무기와 갑주 등 어마어마한 양 이었다. 라혼은 그 렇게 전리품은 정리하고 항복한 서병들로 이루어진 12만 백호군과 3만 용호 군의 본대를 기다리기 위해 자과촌에 열흘간 머물면서 개세산을 바라보았다 . 서제에겐 아직 7만에 달하는 대군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자과촌의 5만군 사중 대략 5천이 도륙되고 2만을 포로로 잡았으니 혼란한 와중에 흩어진 패 잔병들이 신주관으로 도망을 쳤다면 능히 9만여 명에 달할 수도 있었다. 그 러나 패잔병은 패잔병들이었다. 백호나한이 천하가 좁다하고 폭풍처럼 몰아치자. 하늘이 놀라고 땅이 흔들 렸다. 용전대전이 있은 지 한 달. 병주의 토제가는 7만 대군을 그에게 모조 리 들어 바쳤으며 임주의 학가는 한순간 몰락했다. 또한 학가와 연계하여 호시탐탐 임주를 넘보던 후선은 백호나한의 진노성에 화들짝 놀라 군사를 거두었고, 흑막의 웅랑교는 다시 한 번 백호나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백 왕 호사천은 일지감치 중경으로가 호황가를 단속하여 단숨에 호황으로써의 입지를 굳혔고, 서제는 아차 하는 사이에 병주로 부터 넘어온 11만 대군에 게 퇴로를 차단당한 체 신주관에서 8만으로 줄어든 군사들과 함께 굶주리다 백호나한에게 무조건 항복하라는 종용을 받고 이내 항복하기에 이르렀다. 5월 초하루 상경 황진성. 용호왕부의 편액을 걸고 있는 상경 용황궁은 다시 그 궁명(宮名)이 용호궁(龍虎宮)으로 바뀐 대궐의 정전 앞뜰에 금관조복( 金冠朝服)을 챙겨있고, 신분과 직급에 따라 얄팍하고 길쭉한 상아로 만든 상아홀(象牙笏)이나 나무로 만든 목홀(木笏) 두 손으로 모아 쥔 만조백관이 각자 직급과 품계에 맞춰 도열해 있었다. 용호군 따스한 봄 햇살이 비추는 정전 앞뜰의 풍경은 만은 사람들이 있음에도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정 전 북쪽 하늘에는 일천 개의 깃발이 꼽혀있는 허공에 떠있는 산. 금강이 그 웅자를 과시하듯 떠 있었고, 일천팔백 백호영의 고수들이 뜰의 담벼락을 끼고 도열해 사위를 위압하는 기세를 내뿜었다. 오시(五時)가 가까워질 무렵. 중후한 느낌의 주악(奏樂)이 고요했던 뜰을 울리며 황룡문(黃龍門)이 열렸다. 반투명한 자수정 구슬을 꿴 21줄 면류관( 冕旒冠)을 쓰고 눈처럼 깨끗한 하얀 궁장에 선명한 보랏빛으로 앞섬과 풍성 한 소매에 테를 두른 백단(白緞) 대례복(大禮服)을 입은 천상무후(天上武后 )와 칠흑처럼 검은 바탕에 앞섬과 소매에 금실로 장식한 하얀 태를 두른 흑 단(黑緞)차림의 황천상국(皇天相國)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뜰로 들어섰다. 장중한 주악이 흐르고 그 주악에 맞춰 우윳빛 투명한 상아홀을 가슴께 모아 쥐고 천천히 행진하는 무후(武后)와 상국(相國)의 뒤를 일산(日傘) 받쳐 든 내관과 궁녀들이 뒤를 따랐다. 만조백관은 무후와 상국이 일보, 일보 발 을 내디디며 자신들 앞을 지날 때에 맞춰 두 손으로 모아든 홀을 들며 고개 를 숙여 보였다. 정전으로 오르는 계단 가장 앞줄에 있는 남녀노소(男女老 少)의 다양한 수인천하의 주인들인 일황십제(一皇十帝)는 각자 자신의 가문 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장식한 구장복(九章服)을 차려입고 정전으로 오르는 상국과 무후를 바라보았다. “평천하만세무궁(平天下萬世無窮)!” -평천하만세무궁! 천상무후와 황천상국이 단에 올라 몸을 돌려세우며 앞뜰에 눈을 주자. 면목 상 천하백관의 우두머리인 태공(太公)이 선창하고 만조백관이 이를 연호했 다. ‘평천하만세무궁’은 십이진가가 인정한 천자에게만 허용된 연호(連呼 )였다. 라혼이 힘으로 밀어붙인 오늘의 의식은 다소 졸속한 면이 없지는 않으나 법 과 절차에 맞춰 진행되었다. 수인천하에서 천자로 인정받으려면 십이진가 당주들인 진골십가의 십제의 동의를 얻어내야만 했다. 이를 위해 라혼은 서 제 서포틈의 항복을 받아낸 후 그를 폐위하고 다시금 금강을 움직여 갑주의 주도 흑자성에 가서 서포틈의 가문이자 서제가의 종가에 해당하는 흑서가( 黑鼠家)와 대립각을 이루는 백서가(白鼠家)의 인물은 서제에 앉히는 것으로 마무리했고, 병주 토제가 또한 그와 비슷하게 처리했다. 임주의 계제는 이 미 라혼의 사람이었고, 을주 마제가와 정주 사제가는 비교적 우호적인 세력 이었고 그들 스스로 백호인 설화를 천상무후로 인정했다. 그리고 나머지 가 문은 끝까지 결정을 보류하다가 라혼이 행사하는 군사적 압력과 한 가지 제 안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라혼인 그들에게 던져준 것은 다름 아닌 목우유마를 살 수 있는 권리였다. 한참 경쟁적으로 재무장을 하고있는 그들에게 목우유마로 만든 갑차(鉀車) 라는 신병기는 참으로 탐이 나는 물건이었다. 그러한 것을 우호적인 세력에 게만 판다하니 중원십일주의 주인들 사이에서 싸움이 벌어지는 이때에 도저 히 거부할 수 없는 조것이 아닐 수 없었다. 거기다 목우유마를 파는 유일한 상단인 토금전장은 그와 더불어 앞으로도 계속 수조권을 갖기를 원했고 십 제들은 그것 허락해야 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백호나한이 무후를 인정하 지 않는 자는 적으로 간주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 “여(余) 라혼은 용황 폐하를 대신하는 자로써 용황의 이름으로 천상무후를 새로운 천자로 인정할 것이다. 고로 천하에 무후를 부정하는 자는 본 용호 왕의 이름으로 쳐부술 것이며 언제나 무후와 함께하여 무후를 지키는 보검 이 될 것을 하늘에 두고 맹세한다. 또한 천상무후는 4백년 사직을 이어온 십이표기의 수장을 넘어 천하 만백성의 어머니이니 오는 원단에 이를 천지 신명(天地神明)께 고할 것이다.” 웅혼한 공력이 섞인 외침이 용호궁 정전 앞뜰에 울려 퍼졌다. 라혼의 이러 한 선언은 이미 예고된 것으로 따로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후선과 웅랑교를 두고 한 것이었다. 라혼은 이미 후선황실에 동인성, 앙신성, 후려에 제(帝) 3인을 인정하며 원단(元旦)에 입조(入朝)을 종용하는 친서를 보냈다. 물론 라혼은 자신에게 100년 충성을 약속한 오신룡 중 앙(殃)과 우(于)가 장악 하고 있는 웅랑교에도 공식적으로 흑막, 의백성에 2명의 제(帝)를 인정하며 입조하라는 친서를 보냈음은 물론이었다. 라혼의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조정(朝廷) 천원회의에 확실한 의결권을 행사 할 수 있는 자가 열둘에서 다섯이 늘어 열일곱이 되는 일임으로 십제들이 좋아할 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천상무후를 인정한 마당인지라 기세에 밀리고 무후가 된 천상천화 외가라는 입장이 고려되었다. 무력을 동원하지 않고 웅랑교가 웅제(熊帝)와 낭제(狼帝)로 두로 나누어 서로 견제케 하고 후선이 셋으로 나눈다는 이이제이(以夷制夷)를 하자는 주장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리고 사실상 힘이 있는 실세가 천하의 패권을 차지하니 그가 검을 뽑아들고 무력을 동원하라 명하면 따라야 하는 입장인지라 되도록이면 대 규모 원정을 피하는 것이 나은 십제들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끌려 다니는 형세가 달갑지 않았을 뿐 이었다. 그리고 진골십가라 불리던 십제들은 오는 원단엔 면목상의 천자가 아닌 진정한 천자, 진명천자(眞命天子)가 나올 것 임을 그땐 자신들로 허리를 굽혀 굴신(屈身)하는 관리들처럼 천자인 천상무 후에게 고개를 숙여야함을 알았다. 그러나 오늘까지는 무후가 십이표기를 대표하는 수장에 불과함으로 비록 단 아래에 있을망정 고개를 숙이는 참담 함은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고 있는 십제들의 눈에 자신들의 머리를 짓누르는 위압감이 들게 하는 하늘에 떠있는 성 금강의 모습이 들어왔다. ‘백만대군을 사흘이면 어디로든 옮길 수 있고, 높은 성벽도, 험한 지형도, 난공불낙의 요새로도 막을 수없는 저것이 백호나한의 손에 있는 이상 그를 거역할 수는 없겠지…….’ 서제가의 새로운 서제 서오승(鼠悟昇)의 생각은 다른 십제들, 아니 용호궁 정전 앞뜰에 모인 모든 사람들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설화를 천자 위에 옹립한 라혼은 전후처리에 골몰했다. 폐주 서포틈 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과 남상의 오지로 귀향을 보내고 그들의 재산을 몰 수 했다. “주군, 이것이 폐서제에게 군량과 군자금을 지원한자들의 이름이 적힌 연 판장과 그 장부입니다.” 라혼은 폐주 서포틈을 도운 남원주 호족들의 명단을 들여다 본 후 한마디로 잘라 명했다. “그들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고, 식솔들은 모두 남상으로 보내라!” 지금 남원주에 있는 군사만 60만이었다. 녹봉이 지급되는 용호군과 대수영, 그리고 상경금군이 총 26만, 토병과 서병의 항복병이 30만이었고, 남원주 의 각 지방 태수들이 가지고 있는 군사가 대략 4만에 달했다. 앞으로 수를 줄여나갈 생각이지만 한 10년 동안은 그 정도 세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자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는데 상경 황진성의 논밭은 파종시기를 놓쳐 가을에 수확기가 걱정이었다. 그런 의미로라도 라혼은 자신에게 등 돌린 자들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재산은 100만 대군을 최소한 3, 4년은 거뜬히 버틴 수 있게 할 만큼 많았다. 그리고 라혼은 30만에 이르는 항복병들로 구성된 백호군을 둔전병으로 만들 어 남원주 전역의 몰수된 땅을 개간하기 시작했다. 1500기의 목우유마를 이 용해 저수지를 만들고, 길을 닦는 작업을 시작했다. 또한 각지의 유민들은 받아들여 그들에게 개간된 땅을 나누어 주었는데 지난 일정량의 정액 소작 료만을 받고 나머지는 얼마가 되었든 농사를 지은 이에게 주어지도록 했다. 소작료는 그 지방의 지난 3년간 평균소출에 십분지일에 해당하는 액수임으 로 전혀 부담되는 금액이 아니었다. 라혼이 이렇게 조치한 것은 광대한 토 지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함이었다. 보통 정전법(井田法)이라 하여 토지를 <井>자 모양으로 9등분하여 주위의 8 구획을 8호(戶)에 나누어 주어 사전(私田)으로 경작하고 중심의 1구획은 공 전(公田)으로서 8호가 경작하여 조세로 할당했는데 이러한 방식은 관리가 일일이 그해 소출이 얼마나 되는지 조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상 당이 번거로울 뿐만 아니라 소임을 맡은 관리가 부정을 저지를 소지가 많았 다. 대개의 탐관오리들이 조정에는 소출이 적다 신고하고 백성들에게 과다 한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중간의 차익을 착복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든 세금을 일정액의 지세(地稅)로 못 박아 놓고 받으며 관리도 쉬울 분더러 부 정을 저지를 여지가 없게 되게 되는 것이다. 라혼이 이러한 정책을 과감히 실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서해 남북 항로에서 막대한 수입이 보장되고 있으 며 아직도 상당한 분량의 군량이 에텔 스페이스에 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라혼이 소유한 토지에서 농사를 짓는 자는 라혼에게 소작료를 바치 는 것으로 세금을 전액 면제해 주었고, 지방현령에게 바치는 세금은 바로 남원주 토지의 8할을 소유한 라혼의 주머니에서 나가도록 조처함으로써 남 원주를 완전히 장악했다. 그리고 그것은 갑주와 병주의 몰수한 토지 - 제가 가 소유한 토지와 별도의 토지 - 에도 똑같은 정책을 수행하였는데 이미 갑 주와 병주는 라혼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그와 더불어 각 제후들의 정영(精英)을 상경의 태학(太學)으로 불러 모아 가르치고 용호군의 무장으로 뽑아 임관시키는 정책을 수행했는데 말하 자면 인질에 해당하는 것으로 달라진 천자의 위상을 증명했다. 다만 후계자 인 세자나 왕자들이 아닌 중신들이나 가신들의 자제를 뽑아 약간의 체면을 유지하였으나 중신들의 자제들이 상경에 잡혀있으니 어떤 면에서 보면 더욱 운신의 폭을 제한하는 것이 될 수 있었다. 천상무후(天上武后) *** 고금에 다시없을 대영웅이 나와 난세로 치닫던 천하가 일시에 안정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강력한 힘이 어지러워지려 하는 세월을 억지로 짓누르고 있 을 따름이었다. 본디 ‘앙신성의 거정의 난’과 ‘정립천하운동’은 오랜 기간 천하를 다스려온 십이진가에 반하여 일어난 것이었다. 그리고 그 후 흑막에서의 웅랑교의 거병과 후선의 발호 또한 십이진가 외 수인들과 십삼 인가로 불리는 순수 인간들의 싸이고 싸인 불만에 비롯됐다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금 천하형세를 보면 그 기세가 꺾였다 하나 수인천하를 열었던 12 표기의 후예들은 여전히 성세를 자랑하고 있었고,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 다. 난세를 틈타 세를 떨치려던 정립천하의 무리들은 천하가 안정되는 듯하 자 지하로 숨어들고, 강호의 인세(人世)또한 모든 대외적인 활동을 접고 모 습을 보이지 않았다. “상국, 그곳은 세외(世外)입니다. 천하가 안정된 마당에 어찌하여 무리한 원정을 하시려는 겁니까?” “무리한 원정? 무엇이 무리한 원정이란 말인가? 해남군로의 진출은 대수영 만으로 할 것이고 그대들에게 손을 벌리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해남군도 는 동영보다 더 가까이에 있으며 해남을 지배하는 해황가는 본래 조정에 충 성하던 수군들이 아니었던가?” “상국, 이제 막 천하가 안정되었습니다. 내부정비에 힘을 써야 할 이때에 해남을 정벌하는 것은 쓸데없는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 라혼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중신들의 태도에 고개를 가로 저었다. 라 혼은 황천상국이라는 전에도 없고 후에도 없을 거창하지만 애매모호한 직책 을 가지고 있었다. 라혼은 용황을 대신한 용천검주로써의 신분과 바다와 물 길을 책임진 해도대원수, 용호왕, 금강을 가지고 있음으로 정식지위는 아니 나 천공대원수(天空大元帥)라 칭해지기도 했으며 만인지상(萬人之上)인 여 천자의 남편으로 황천상국의 지위를 새로이 만들어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실질적인 힘은 남상, 남례성 그리고 천호 남쪽의 원주를 실질적으로 지배하 였고, 갑주와 병주, 그리고 임주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관례대로 따 지자면 라혼 스스로 천자가 되는 것이 이치에 맞았다. 그러나 당금천자는 무후였고, 무후의 남편인 상국은 철저하게 무후에 뜻에 따라 움직였다. 5년 전, 설화가 천상무후가 되었음을 천하에 선포하고, 천호의 하늘 위 가 장 높은 곳까지 띄워 올린 금강에 올라 진정한 천자, 진명천자가 되었음을 봉선(封禪)의 예로써 하늘에 고(告)한 후, 라혼은 공식적인 자리에 모습을 보이지 않고 내부정비작업을 시행했다. 용호군과 백호군으로 따로 운영되던, 서병과 토병을 항병(降兵)으로 구성된 백호군을 용호군에 흡수통합하고, 더불어 무골후 호장의 병권을 임시로 회 수하여 중경의 금군까지를 망라한 용호군은 70만을 철저한 중앙상비군화 했 다. 이에 용호군은 용호금군이 되어 금군교위라는 직함을 그대로 유지한 무 골후 호장이 맡게 되었다. 또한 금위위도 용호금군에 두었으며 원주의 모든 군권이 궁극적으로 무후에게 집중되게 했다. 거기에 더불어 각 제후들의 군사 1만씩을 모아 평안천원군(平安天元軍) 20만을 재구성했는데 라혼이 스 스로 천원대원수가 되어 이들을 지휘했다. 용호금군은 원친적으로 원주를 벗어나지 않을 군대이기 때문에 천하전역에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군대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 천원군을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따로 대공영( 大空營)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이는 천원군이 금강을 탄 군대였기 때문이었 다. 그리고 천원대장군으로 남례절도사 금영월을 임명해 실질적으로 그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새로운 남례절도사로는 고학이 제수되었고, 그때부터 고 학은 해남군도 진출을 위한 여러 가지 준비를 해왔다. 그리고 라혼은 금강을 북지성 태회진으로 옮겨 본격적인 개수 작업을 했다. 북지성의 태회진의 백성들은 이미 스스로 태회진을 건설한 사람들이며, 설 화에 대한 충성심이 높고, 금강에 관심이 많은 다른 십제들의 눈을 피하기 최적의 장소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천하제일철방에서 생산된 철기와 백호대함 같은 엄청난 규모의 철갑선을 조선술은 라혼으로 하여금 다른 장 소가 떠오르지 않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선산환도를 손보는 작업에 귀 림의 다른 드워프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그들의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이게 했으며 라혼은 그들을 위해 귀왕곡의 타운포탈을 이용할 수 있게 해 주었 다. 덕분에 귀왕곡이 소란스러워져 그곳에 머물던 가니아는 상경 용호왕부 금림에 머물게 되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갖추고 군비를 마련하였으며 전략 또한 섰다. 그리고 오늘 공식적인 자리에서 무후인 설화에게 보고하고 허락을 얻어내려 하는데 중신들의 뜻밖에 격렬한 반대에 부딪친 것이었다. 중신들, 중원십일주, 중 외오성, 변방사역으로 구분되는 20개 지역의 사마들이 참석한 천원회의에서 남상과 남례성만이 해남진출을 지지하였고 갑주, 병주, 임주는 라혼의 눈 치를 보며 가타부타 발언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앙신, 동인, 후려의 후선이 분리된 3선 사마들이 극렬하게 반대하고 있었으며, 나머지 중원십일 주의 사마들은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모원이 안찰사 로 있는 북지성의 사마또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라혼은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무후인 설화와 더불어 의자에 앉아 아무런 말없이 담담한 표정으로 전면을 주시하는 호황이 된 호사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진주구슬을 꿴 21줄 면류관을 쓰고 아무런 말없이 천좌 (天座)에 앉아있는 설화에게도 잠깐 눈을 주었다. 그리고 이내 한숨을 쉬며 말문을 닫았다. ‘북지사마의 태도를 보면 오늘 일은 장인이 꾸민 것이 분명하다. 북지성의 관리들 대부분이 백수회 사람들이니까. 그렇다면 설화도 이번 일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말인데…….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라혼은 같은 말을 두고 ‘아’다르고 ‘어’다르다는 식의 천원회의의 말싸 움이 싫어 그것의 모든 것은 장인인 호사천에게 맡겨두고 있었다. 즉 천상 무후인 설화를 두고 조정의 일은 호황 호사천이 군부의 일은 자신이 맡아 처리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리고 지난 5년간 그러한 역할분담은 무후인 설 화의 지지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는 설화가 호황의 친딸이며, 상국 라혼의 아내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 라혼은 난데없는 호황의 견제에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천원회의가 끝나고 설화와 금림으로 돌아온 라혼은 아내에게 물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말해줄 수 없겠니?” “미안해요. 저는 아버님의 뜻을 거부할 수 없었어요.” “장인이 왜?” “아버님은 천하가 저보다 서방님의 이름이 높이 칭송되는 것을 거북해 하 세요.” “…….”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한참 뒤 라혼은 다시 물었다. “그것은 너의 뜻이기도 하겠지?” “…….” 라혼은 설화의 무겁게 끄덕이는 고개 짓에 숨이 막히며 가슴이 답답해져왔 다. 정적(政敵), 설화는 라혼을 정적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의 일은 천하에 무후가 남편을 견제하고 있다고 공식적으로 포고함과 다름없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당금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무후가 아닌 상국이 었다. “이런, 이런. 가니아의 예언이 사실이었군. 내가 죽어야 네가 진정한 여황 이 될 터이니 말이다.” “그, 그게 무슨.” “천하인의 뇌리에서 천하는 무후가 아닌 상국의 것이라는 생각을 지우려면 내가 죽는 도리밖에 없다.” “서방님!” 라혼의 단호한 말에 설화는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서방님!’을 외쳤다. 그러나 라혼은 그것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장인이 무슨 생각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모르나 내가 직접 관여하는 군부 는 대수영이 유일하다. 용호금군과 천안군은 이미 너의 군대가 아니냐?” “제발 그만 하세요.” “…….” “제가 왜 그걸 모르겠어요. 서방님의 심복이라 할 수 있는 고학은 해남진 출이란 미명하에 남례성에 가둬두고 있고, 백호십일걸들은 군문을 벗어났거 나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다는 것을 서방님은 스스로 자신에 집중되려는 세 를 흩어버렸음을…….” 설화는 서방님의 얼음 칼처럼 날카로운 어조가 무엇보다도 가슴 아팠다. 그 리고 이내 눈물을 보이며 하소연을 시작했다. “중신들이 무슨 결정할 때마다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바로 서방님의 의중을 묻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어떤 때는 ‘진명천자는 백호나한이지 천상천화 가 아니다.’라는 말까지 하는 자가 있었어요. 그리고 제가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비밀이 아니에요. 그리고 말을 하죠. 상국이 새로운 여인을 맞아 후계를 튼튼히 해야 한다고…….” “…….” “전 제가 이렇게 질투심이 강하고 독점욕이 강한 줄 예전에 미처 알지 못 했어요.” 라혼은 설화의 눈물을 닦아주고 가만히 아내를 끌어안았다. “서방님……. 엉엉엉~!” 중신들은 모르리라 언제나 차갑고 도도한 무후가 이렇게 서방님의 품에 안 겨 서럽게 울때도 있다는 사실을……. 라혼은 우는 설화를 달래 진정시키고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이젠 황천상국이 없어도 될 것 같다.” “…….” “우리 상국을 죽이자.” “예? 그게 무슨 말이세요?” 라혼은 깜짝 놀라는 설화에게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내가 해남으로 가서 전투도중 죽임을 당하겠다.” “아니요. 그럴 수 없어요. 그래선 안돼요.” “진짜 죽는 것이 아니라 죽은 척하는 거다. 천하의 백호나한을 죽이려면 그렇게 죽이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후 나는 남례성 귀왕곡에 머무를 거 야. 너는 언제든 나를 만날 수 있는 거야.” “하, 하지만…….” “내가 왜 스스로 천자가 되지 않고 널 무후로 만들 줄 아니?” “……?” “나는 너 이외의 여인을 아내로 두기 싫었기 때문이다. 네가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을 중신들이 알면 나는 천하의 안녕을 위해 다른 여인을 취 해야만 했을 것이기 때문이란다.” 설화는 서방님의 말에 목이 매어왔다. “그런데 네가 무후임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내가 다른 여인을 취해 후계 를 보아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니……. 설화야!” “…….” “엄밀히 따지면 넌 호황가의 핏줄이다. 직계가 아니면 방계를 찾으면 그뿐 이지 하니 후계자는 호황가에서 찾아 양자를 삼든 양녀를 삼든 하여 해결하 면 된다. 그것이라면 장인 또한 너의 뜻을 반대하지는 않을 거다. 그리고 지금 이 이야기는 너만 알고 있어야 해.” 라혼이 해남군도를 조정에 끌어들이려 하는 이유는 바로 군자금 때문이었다 . 원주에만 90만에 달하는 상비군이 존재했다. 거기에 10만 대수영까지를 포함해서 100만 대군이 전적으로 라혼의 호주머니에서 나가는 자금으로 유 지되고 있었다. 평화시에는 아무것도 하는 일없이 막대한 물자를 소비해대 는 조직이 바로 군대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대로 현상유지하고도 남았지만 무슨 일이 벌어졌을 경우에는 재정운용에 무리가 갈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 다. 천상무후(天上武后) “역석과 법륜의 이것은 같으면서도 다르군.” “그래 법륜의 구동기관이 바로 역석과 비슷한데 역석이 훨씬 효율이 좋아! ” “확실히 효율이 좋지 역석은 108개의 마법진을 거의 동시에 활성화시킬 수 있는 괴물이 만든 건데” 귀림의 드워프 장로들은 금강 안에 마련된 자신들의 실험실에서 법륜의 설 계도를 보며 서로의 의견을 나누었다. 최초의 드워프는 불과 대장장이 신. 헤파이토스에서 비롯하여다 하는데 헤파이토스는 티탄신족이었다. 이 티탄 신족이 바로 반고족의 다른 이름이었기 때문에 드워프들은 자신들이 반고족 의 후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미천한 손재주를 가진 인간이 만들어놓은 금 강은 그런 드워프들의 자존심을 은근히 자극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금강은 물론 금강보다 더한 것은 만들어야 하는 사명감에 무섭도록 금강, 선산환도 의 핵심인 법륜을 파고들었다. 그것은 금강을 움직일 수 있게 하라는 라혼 의 요청과도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환단인들이 고안한 선산환도를 움직일 수 있게 하는 방법은 선산환도를 허 공에 띄우는 법륜과 별도로 새로운 법륜을 만들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법륜을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드워프들의 손에 새로운 법 륜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금강을 움직이는 방법은 라혼이 힘쓰는 방법밖에 는 없었다. 그렇게 장로들이 법륜을 파고들 때 젊은 드워프들은 풍화륜(風 火輪)을 이용한 비차(飛車)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자자 준비됐어.” “그래? 그럼 간다.” 금강은 거대한 땅덩어리였다. 사방 20여리에 달하는 금강 위 평평한 대지에 만도 능히 인구 100만의 도시가 설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그런 것이 금 강의 내부를 생각하면 능히 금강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 금강의 모처에 마련된 드워프 마을에 속한 널찍한 공간에서 젊은 드워프들이 새로 이 만든 풍화륜(風火輪)을 이용한 비차(飛車) 시험 작을 만들어 실험하고 있었다. 몰이 머리를 보호하는 투구를 쓰고 목우유마에 달리는 역석에 시동했다. 그 러자 머리위에 달린 수레바퀴가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위이이이이잉~! 몰은 맹렬히 회전하는 풍화륜인 회전하면서 나오는 폭풍 같은 바람을 느끼 며 더욱 속력 배가 시켰다. 그러자 몰의 몸을 실은 비차가 서서히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된다. 된다.” -뿌지지직! 쾅! 펑! 그러나 맹렬히 회전하는 힘을 이기지 못한 풍화륜이 깨져나가며 실험은 실 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자 실험 공간 밖에서 작은 구멍으로 내부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드워프들이 들어와 완전히 망가진 비차의 잔해를 치우며 몰 을 찾았다. “몰, 괜찮냐?” “이게 괜찮게 보이냐? 다음엔 니가 해. 에구구구 죽는 줄 알았네.” “아무래도 축이 되는 부분이 너무 약해 풍화륜의 수레 살을 감싸는 테도 그렇고 아예 테를 없애버리는 것이 나을지도.” “야야,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아까 보니까 풍화륜이 비차 본체에서 떨어져 나가려고 하더라고…….” “그래?” 그렇게 시험제작한 비차의 잔해를 모아 검토에 검토를 거듭했다. 금강에 있 던 환단인들의 유물은 단순한 원리와 개념만 기록되어 있을 뿐 이었기에 아 무리 드워프들의 기술이 인간들보다 월등하다 하더라도 쉽게 뚝딱하고 만들 어 낼 수는 없었다. “비차를 만든다더니 아직도 이 수준인건가?” “라혼님!” 카쿤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 를 돌렸다. “내가 생각하기에 풍화륜이 너무 크군.”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내가 생각하기에 풍화륜은 법륜을 장착하고 허공에 떠있는 배를 자유로이 움직이게 하는 보패야. 금강을 만든 환단인들이 풍화륜의 규모를 크게 한 것은 바로 이 금강을 움직여보려 했기 때문이지 풍화륜만으로 비차를 만드 는 것은 무리인 것 같군.” “하지만 비차는 풍화륜만 설치되어도 된다고 했으니 일단 그 기록을 믿고 실험을 해봐야죠. 어떤 일이든 섣부른 결단은 안 할수록 좋은 거니까요. 그 리고 풍화륜이 법륜의 다른 형태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기 하지만 혹시 모 르는 일이니까요.” “확실히 그렇군.” 라혼은 카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안될 것이다 생각하고 하지 않는 것 보다 해보고서 진짜 안 돼는 것인지 그런 무엇 때문에 안 되는지 알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군. 그보다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 “무슨 일인데요?” “아무래도 내가 떠나야 할 시기가 된 것 같다.” “예?” 라혼은 드워프들에게 자신이 처한 상황과 설화만 알고 있는 계획에 대해서 털어놓았다. “에? 지금 라혼님이 계시지 않으면 천하가 다시 혼란스러워질 텐데요?” “그것은 내가 있어도 마찬가지지. 목숨을 걸고서라도 세상을 뒤집으려는 자들은 계속 늘어갈 것이고, 시간에 지날수록 세를 더해만 갈 것인데 그것 은 누가 나서서 해결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지.” “그도 그렇군요. 인간들이 치박이고 싸우는 거야! 어제오늘 일이 아니니까 …. 그런데 그 얘기를 저희에게 하는 이유는 뭔데요?” “그것은 이 금강 때문이야.” “…….” “그래서 말인데 너희들이 금강을 맡아주었으면 한다.” 카쿤와 다른 젊은 드워프들은 금강을 맡아달라는 라혼의 말에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어지는 라혼의 말엔 모두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실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선산환도는 애물단지나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법륜의 비밀을 푸는 것이지. 장로들의 법륜에 관한 연구에 이 금강의 법륜을 볼 필요가 있다면 금강을 포기하고 법륜을 연구해라!” “예에?” “하지만 그렇게 되면 설화는?” “그래서 장로들이 아닌 너희들에게 말하는 거다. 너희들도 앞으로 닥쳐올 인간뿐만 아닌 모든 종족, 모든 생명들이 견디어야 할 시기가 온다는 것을 알거야. 그것에 비하면 인간들끼리 치고 박는 싸움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 리고 설화가 살아있을 때까지는 금강을 그대로 남겨두길 원하기 때문에 너 희들에게 말해두는 것이고.” 젊은 드워프들은 라혼의 말 속에서 뭔가 숨겨진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었 다. 그러나 드워프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묻지 못했다. 상국 백호나한 라혼은 자신의 해남군도 정벌의지를 힘으로 밀어 붙였다. 이 에 백호나한의 해남군도 정벌은 백호대함 12척, 투함 103척, 그리고 쾌속선 684척 등 총병력 10만의 원정함대가 동원되었다. 겨우 자그마한 섬들이 무 리를 이룬 지역을 정복하기 위한 것치고는 다소 과한 듯 했지만 중신들은 그것이 자신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과시용이라 판단했다. 백호나한의 정복사 업은 많은 상인들이 관심을 가졌고, 또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해남군도 는 산호와 거북 등껍질인 별갑, 진주 등의 산지였기 때문이었다. 그곳은 천 하인 들에게 있어 보물이 숨 쉬는 곳이기도 했다. “대장군, 상국께서 본진을 이끌고 남하를 시작했다 합니다.” “흥! 한줌도 안 되는 것들이 감히 상국의 권위를 시험하려들었다니, 상국 께서도 너무하시지 그런 무리쯤이야 이거에 쓸어버리면 되는 것을…….” 남해좌수사 대장 작도인은 지난 5년간 각고의 노력 끝에 심천도(深川島) 남 해좌수영을 열고 해남에서 대수영의 영향력을 확대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지금 조금이나마 그 결실을 맺은 상황에서 대대적인 정벌 계획은 무척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찌되었든 상국께서 한 달 보름이면 도착하실 것이다. 그러니 그전에 최 대한 전과를 올려놓을 필요가 있다. 오지(烏智) 전함대를 모아 그동안 들어 갈 엄두를 내지 못했던 녹사해(綠砂海)로 가자.” “충!” 작도인은 사실 백호나한의 장군으로써 아직까지 오지에 처박혀 있는 것에 대해 섭섭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한 일이 있었기에 아무 런 말을 하지 못하고 묵묵히 맡은바 임무에 충실했다. 그러나 그간 해남군 도의 가치를 생각하며 앞으로 해남군도가 상국의 손에 정복될 경우 해남은 자신에게 맡겨질 것이란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지난 5년간 작도 인은 해남의 물길을 모조리 파악하고 바다 속 모래톱나 암초의 위치들을 조 사했다. 그리고 드넓은 해남군도의 대략적이 해도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 나 단 한곳 해남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바다인 녹사해는 접근조차 할 수가 없었다. 해남인들이 격렬한 반응을 보이며 저항을 했기 때문이었다. 작도 인 함대에게 그런 그들이 조각배들을 타고 저항하는 것은 별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른 할일도 많은 상태에서 굳이 저항을 무릎 쓰고 일을 강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그때는 순순히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 나 녹사해는 해남을 정복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말하지면 해남 인들의 저항에 최후의 거점이 될수 있는 여지가 너무 많았던 것이다. 이에 그때를 위해서라도 녹사해의 물길을 미리 파악해 두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물론 녹사해를 미리 선점하는 것도……. 녹사해는 진녹색 모래사장을 가진 섬들이 있는 바다였다. 녹사해의 투명한 녹옥(綠玉:에메랄드) 빛 바다는 얼핏 파랗게 투명한 천호의 그것을 떠올리 기에 충분했다. 대륙인들이 천호를 신성하게 여기듯이 해남인들은 이 녹사 해를 신성하게 여기는지도 몰랐다. 바다위에 떠있는 거대한 철갑선 백호대 함을 포함한 수십 척의 배들로 이루어진 작도인 함대는 그 녹사해에 거침없 는 물보라를 일으키며 기세당당하게 들어섰다. “이상하군. 전에는 이쯤 되서 더 이상 녹사해 안쪽으로 배를 들이 밀면 죽 음을 불사하고 막을 기세더니 만 어째서 단 한 놈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거 지?” “그러게 말이야? 저쪽도 머리가 붙어있으니 생각이란 게 있는 모양이지. 모르긴 몰라도 상국의 대 함대를 이끌고 내려온다는 것쯤은 모르는 놈이 없 을걸.” 그랬다. 해남군도에서 어떤 소문의 전파속도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빨랐다. 한때 녹사해를 조사하려는 시도 때마다 어떻게 알았는지 개미떼처럼 이 녹 색바다를 매우며 자신들의 길을 막았다. 그래서 한번은 남해죄수영에서 가 장 빠른 쾌속선을 보내 녹사해에 잠깐 들어갔다 나오려는 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다. 쾌속선이 녹사 해에 접근하기도 전에 최후로 보급을 위해 들림 섬에서 이미 그 의도가 탈 로나 물과 식량을 받지 못해 녹사해는 구경도 못하고 뱃머리를 돌려야 했던 적도 있었다. “그래도 너무 조용하지 않아?” “그래 그때 기세를 보아선 악소리라도 질러보고 죽을 놈이 한두 놈은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역시 기분 나쁘군.” 그렇게 선원들과 수군들은 알 수없는 불길함에 저마다 의견을 나눌 때 작도 인은 해남사람들이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 그다지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이 해남군도 전역을 통 털어서 대수영 남해좌수영을 어찌할 수 있 는 세력은 전무했다. 백호나한의 해남정복은 해남의 종주로 군림하는 해황 가의 기세를 꺾는 것에 있었다. 그리고 만일 해황가가 끝까지 저항의 의지 를 꺾지 않는다면 그들이 숨어들 곳은 바로 이 녹사해의 바다였다. 해남에 서 지내며 안 사실이지만 해황가가 해남에 종주로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녹사해의 섬들이 그들이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쿵~! 순조롭게 항해를 계속하던 백호대함이 바다속에 숨은 함정이라는 모래톱에 좌초했다. -끼이이이~! 그그그그그……. 뿐만 아니라 덩치가 큰 배들은 모두 배 밑 바닥이 바다 바닥을 긁는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견시수! 전초선의 신호를 보지 못했나? 어찌하여 심도를 확인하지 않은 것이냐?” “그, 그것이 전초선에선 아무런 신호도 하지 않았습니다.” “뭐야?” “선장님, 전초선에서 연락입니다. 바다 밑 바닥이 솟아올랐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땅이 솟아오르다니?” 그러나 선장의 추궁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해일이다.” 누군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를 질러댔고 대수영 남해좌수영에 소속된 투함의 선장은 멀리 하얀 띠가 무서운 속도로 다가서는 모습을 보고 비명을 지르 듯 명령했다. “배를 돌려라! 어서 배를 돌려!” “안됩니다. 배가 좌초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제야 바다 밑 땅이 갑자기 솟아오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해일(海 溢)이 발생하여 일시에 바닷물이 빠진 형상이었다. 그러나 이유를 알아서 지금 무엇을 하겠는가? 피할 수없는 죽음의 그림자가 지척에 있거늘……. -쏴아~! -콰과과과과과과……………………. 소름끼치는 시원한 파도소리와 천장높이로 솟아오른 거대한 파도는 일시에 무너지며 남해좌수영의 함대가 자랑하는 절대로 부서지지 않을 백호대함을 참으로 간단하게 산산조각 내며 모든 것을 휩쓸어 버렸다. 천상무후(天上武后) -쾅! “뭐야? 전멸!” 라혼은 작도인의 남해좌수영이 전멸했다는 소식에 크게 놀랐다. “어찌된 일이냐? 자세히 말해보라. 해남군도에서 남해좌수영을 상대할 수 있는 세력이 없다고 하지 않았다고 했지 않나?” “죄송합니다. 남례절도사 대인께서도 지금 사실 확인 작업을 하고 있답니 다. 남해대수영의 전멸소식은 심천도 남해좌수영 본진으로 해남 녹사도주의 이름으로 경고와 함께 전해졌답니다.” “녹사도? 해황가가 아니라 녹사도?” 라혼의 해남군도 원정함대는 이제 막 대하를 빠져나와 서해로 들어서는 서 경 황미성에 집결한 상태였다. 그리고 말이 원정이지 해남군도엔 작도인의 남해좌수영 조차 상대할 수 있는 세력이 없었다. 라혼이 굳이 전무후무한 대함대를 이끌고 해남군도로 가려는 이유는 해남군도는 남방대륙으로 가는 통로이기 때문이었다. 라혼의 이번 원정은 해남군도를 정복한다는 명분으로 사실은 남방대륙으로의 진출을 하기 위한 원정이었다. 남방대륙은 전설의 대륙으로 황금이 넘치는 땅이라고 했다. 그리고 라혼은 아주 잠시나마 남방 대륙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설화는 물론 조정을 좌지우지하는 호황 호사천부터 사마들까지 남방대륙 ‘게브’를 전설속의 땅으로만 알고 있었 다. 그러나 그곳은 실재하는 땅이었다. 즉 라혼은 해남군도를 지배하려는 생각은 없었다. 강무황가를 조정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듯이 해황가를 굴복시 키고 그들이 머리를 조아리면 해황가를 진정한 해황가로 인정하여 조정에 입조케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라혼은 그들의 도움을 얻어 남방대륙 게브로 가는 길을 얻을 셈이었다. 그러나 남해좌수영의 전멸하는 화를 당한 이상 해남인들이 조직적인 저항에 부딪치며 순조롭게 길을 얻는 방법을 없을 것 이다. “심천도 남해좌수영 본진에 연락해서 녹사도가 어디인지 알아봐라!” “충!” 라혼은 의식을 날려 보내는 원신출초(原身出超) 술법을 발휘하여 유체(流體 ) 상태로 해남군도 상공을 날며 그곳의 해도를 작성했다. 그러나 알려진 섬 이름을 기록해 두었지만 대부분 위치만 그려 넣었다. 그리고 작도인의 임 무가 하늘위에선 보이지 않는 심도(深度)와 해남인들이 부르는 섬의 이름들 을 기록하여 바로 이 해도를 완성시키는 것이었다. 전환으로 심천도 남해좌수영 본진과 연락한 부관 유연(柳然)이 해남군도의 해도를 들고 와서 제독실에 비치된 널찍한 탁자에 펼쳐놓았다. “상국, 여기 이곳 전역이 녹사해라 불리는 바다인데 대략 10~18개의 녹색 모래사장이 있는 섬들이 존재한답니다. 해남인들이 이곳을 신성시 여겨 작 제독께서 그간 해남인들과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이 해역은 건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 라혼은 유연이 숯을 이용해 양피지 지도에 임의로 섬들을 그려 넣은 해도를 보면서 라혼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곳은 해남군도의 한복판에 있는 해역인 데 라혼은 이곳을 관찰하면서 분명 해남군도의 내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 었다. 라혼이 유체상태에서 조차 감지할 수없는 곳은……. ‘유체와 같은 정신체로써는 감지하지 못하는 곳 설마 선산환도? 맞아! 해 남군도에도 선맥이 존재한다고 했다. 금오도라고 했던가?’ 11선맥의 선산환도 중 아미(峨嵋), 곤륜(崑崙), 수미(須彌), 천산(天山)의 4선맥은 북지성 험한 산세 속에 숨어있었고, 봉래(蓬萊)는 남례성의 밀림에 장백(長白), 태백(太白)은 의백성에 삼신(三神)은 후려에 천지(天池)는 천 호(天湖) 서쪽에 흐르는 장강(長江) 천하제일대호(天下第一大湖) 중호(中湖 ) 어딘가에 있었으며 금오도(金烏島)는 해남군도에 있다고 했다. 금강의 주 인은 11선맥의 우두머리가 되어 신마쟁패의 틈바구니 속에서 사람들을 구해 야 했다. 그랬기 때문에 천산의 신선인 유운검선 현석이 각 선맥들의 소재 를 소상히 가르쳐 주어 라혼은 그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먼저 금강을 사바세계의 쟁패의 틈바구니에 끼워 넣어 할 말은 없지 만 뼈아프군. 설마 선맥이 사바세계에 일에 끼어들 줄이야!’ 선산환도는 신마(神魔)같은 초월적 존재가 감지하지 못하도록 허공에 숨어 드는 결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랬기에 선산환도는 그냥 찾아서는 보이지 않 았다. 그리고 한 달 후 해남군도에 들어선 원정함대는 심천도와 그 주위 섬에 나 눠 상륙하여 오랜 항해의 피로를 씻고 급변한 해남군도의 상황을 살피기 시 작했다. 그리고 라혼이 심천도에 자리 잡은 지 사흘이 못되어 남해죄수영 작도인 함대를 지원하던 고학이 찾아왔다. “고학이 주군을 뵀습니다.” “오래간만이로군. 초초는 잘 있나?” “잘 있습니다.” “둘째를 보았다고 들었다. 설화가 무척 부러워했는데.” “주모, 아니 폐하께옵서 괜히 마음상하지 않았을까 걱정입니다.” 고학의 부인인 용정란은 설화 곁에 머물며 설화가 얼마나 아이를 원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용정란은 둘째 아들을 보았음에도 의남매를 맺어 오라버니인 라혼에게 그 사실을 알리는 것을 무척이나 어려워했었다. 그리 고 고학은 그러한 용정란의 고민을 가장 가까이에서 듣고 같이 고민한 끝에 무슨 비밀을 알리듯 무척 조심스럽게 라혼에게만 살짝 알렸었다. 그러나 백호나한의 심복 중 심복이라는 남례절도사의 득남이었다. 당연히 소문이 나고 축하하는 친서가 오가는 와중이니 무후인 설화가 그것을 끝까지 모르 고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가족의 경사를 당사자가 아닌 다른 사람 입에서 알게 된 설화는 섭섭함을 숨기지 않아 고학을 무척 당황시켰었다. 용정란 은 용황가에서 용씨성을 하사받은 가문에서 태어났고, 지금은 백호나한의 의매(義妹)였다. 설화에게는 시누이가 되었고 지금 무후가 되고나서 마음 편하게 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명이었다. “그보다 앞으로 어쩌실 겁니까? 작 제독이 이끄는 남해수군이 전멸당한 것 은 아무래도 사실인 듯싶습니다. 그러나 해남군도에도 주군의 위명이 퍼져 섣부른 움직임을 일단 자제하고 사태추이를 살피는 듯한데 앞으로가 중요합 니다.” “안다. 그래서 녹사해의 문제를 해결한 연후 애초의 계획대로 해황가에 최 후통첩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 “녹사해로 직접 들어가실 작정이십니까?” “그럴 생각이다.” “그럼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라혼은 고학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냥 살짝 들여다보고만 올 것이다. 이곳에 머물던 작도인이 없는 이상 고학 그대가 나서서 일을 추진해야해 직접 싸우는 것은 최하책이다. 그들이 알아서 고개를 숙이며 들어오게 하여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것이 상책 중 최상책이지.” “알겠습니다. 주군에 뜻에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라혼은 고학에게 대부분의 함대를 맡기고 가장 빠른 중형 쾌속선 5 척으로 선단을 이루어 녹사해로 떠났다. 역석을 이용한 동력기관이 설치된 대수영이 자랑하는 쾌속선은 아주 빠른 속도로 물살을 갈랐다. 돛도 없고 노도 없는 쾌속선은 바람개비 형태의 나선추진기로 물을 밀어내며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사흘을 쉬지 않고 물살을 가르던 선단은 녹옥 빛 투명한 바다를 만날 수 있었다. “이곳이 녹사해인가?” “상국, 이곳이 작 제독이 변을 당한 그곳인가 봅니다.” 상국을 보좌하는 유연이 투명한 바다물속에 반 토막 난 백호대함의 잔해를 발견하곤 안색이 굳혔다. 그러나 남해수군 전체를 끌고 갔었다고 하는데 잔 해는 백호대함의 반 토막뿐인지라 유연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척 궁금했 다. 유연은 본래 후선 강무황가의 외손으로 해남군도에 대해 비교적 잘 아 는 무장이었다. 라혼은 이번 원정엔 심복부하들은 철저히 배제시켰다. 잔폭 광마와 지심도 이미 설화를 지키는 금위위와 어림군에 배속하여 곁에서 떼 어놓은 지 오래였다. 적당한 시점에서 일을 대충 마무리하고 장렬한 전사(? )를 할 생각이었는데 심복부하들을 데리고 오면 쓸데없이 복수를 외치며 설 칠까 저어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번 원정함대의 수뇌부는 모두 일의 경 중 따질 줄 아는 신중한 자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라혼은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백호대함의 잔해를 보고서도 선단을 멈추지 않 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3시진(6시간)정도 더 나아갔을까. 갑자기 바다 밑 땅이 쭈욱 솟아 떠올랐다. “상국, 땅이 떠오르고 있습니다!” “해일이다. 해일이 온다!” 해도가 완성되지 않은 지역으로 들어선지라 속도를 줄여 투명한 물속에 암 초가 있는지 살피던 견시수의 놀란 목소리와 파수대에서 먼 바다를 살피던 파수꾼의 비명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라혼은 난데없는 하얀 띠가 온바다 를 넓게 포위하며 빠른 속도로 접근하자 처음엔 환상이 아닌가했다. 그러나 급속도로 접급한 파고의 기세는 자신은 환상이 아니라 시위하는 듯 굉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콰과과과과과과……………………. 그리고 바다 물로 이루어진 산은 거대한 벽을 만들면 일시에 무너져 내렸다 . “으악~!” “어?” 이제 죽는 구나 생각한 도구(渡口)는 얼굴에 물방울이 튀기는 느낌에 소름 끼쳐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점점 멀어져가는 파도소리에 어리둥절 해하며 심하게 흔들리는 배의 난간을 부여잡고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뒤쪽 으로 멀어지는 해일의 기세에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도구의 머릿속엔 살 았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그리고 정신을 수습해 주위의 동료들이 괜찮은지 두리번거릴 그의 눈에 물방울이 뛴 은빛비늘에 햇볕을 산란하고 뱃전에 오 연히 서서 황룡이 그려진 붉은 망토를 표표히 휘날리는 존재가 눈에 띄었다 . ‘주, 주군…….’ 도구는 자신이 피할 도리가 없는 천길 하늘로 솟아오른 물벼락을 피한 것이 요행이 아니라 주군 백호나한이 뭔가 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도구가 탄 배는 전초선으로써 원래 주군이 타고 있던 배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전속전진하라!” 라혼의 공력이 깊든 목소리가 바다에 울리자 잠이 얼이 빠져있던 선원들은 다시 노련한 움직임을 보이며 배의 속도를 높였다. 라혼은 의식을 개방해 금오도라 짐작되는 녹사도를 찾으며 물속에 숨어 있는 암초를 확인했다. 그 리고 라혼은 눈에는 보이면서 개방된 의식에는 보이지 않는 녹색바위섬을 발견했다. 그것으로 라혼은 눈앞에 저 섬이 선산환도중 하나라는 것을 의심 치 않았다. 금강이었던 독점도가 바로 이와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상국!” “감히!” 그리고 그 섬에 배들이 집인냥 꾸미고 널빤지로 배와 배사이에 연결하여 마 을을 형성한 수상마을에 일단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바도 그들이 물을 부 려 라혼의 선단을 공격해왔다. 라혼은 천보검을 뽑아 삼천공력이 깊든 검경 (劍勁) 바다에 휘둘러 물을 부리는 힘을 파괴하고 물위를 달리는 절정의 등 평도수(登萍渡水) 신법을 전개하여 녹사도의 수상마을로 쇄도해 들었다. 그 리고 기선을 제압하기위한 일검을 내치려던 라혼은 파리하게 질린 소녀의 두려움 가득한 표정과 모여 있는 마을 사람들의 절망을 읽고는 검을 거두고 천복일황보(天伏一皇步)의 보법을 밟았다. -쿵! 하늘마저 굴복하게 한다는 위엄이 가득한 한걸음은 모든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그러나 단 한사람 둥근 쟁반크기의 기하학적인 형태의 머리를 가지고 있는 지팡이를 든 소녀는 안색만 창백하게 질렸을 뿐 두려움의 감정 을 보이지 않았다. 커다란 맑고 투명하고 신비한 초록색 눈동자에 다소 까 무잡잡한 해남인들과 다르게 눈처럼 하얀 피부와 선명한 붉은 머리결의 소 녀는 한눈에 보기에도 대단한 미태가 엿보이는 미소녀였다. 하지만 라혼은 그런 소녀의 미모보다도 소녀 자체에 관심이 컸다. ‘어째서 마족이 금오도로 짐작되는 이곳에 있는 거지?’ 그때 라혼은 녹색바위섬에서 자신을 부르는 기운을 감지했다. 그리고 마족 소녀도 그것을 알았는지 자신이 안내하겠다는 듯 먼저 발걸음을 떼었다. 그 러나 과도한 힘을 사용한 탓에 다리에 힘이 풀려 스러지려는 것을 라혼이 가느다란 팔을 잡아 부축했다. “아!” “어!” 라혼의 부축하는 행동에 사람들은 두려움 속에서도 부지불식간에 탄성을 흘 렸고, 마족소녀도 화들짝 놀라 팔을 뺐다. 그리고 침묵. “…….” 잠시 그렇게 마족소녀의 흔들리는 시선이 라혼에게 머무르고, 수상마을 사 람들도 두려움 속에서 라혼의 기색을 살폈다. 그렇게 얼마 후 마을 사람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노인이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가루다이십니까?” “가루다.” “가르다였어.” “가루다래!” 노인이 그렇게 묻자 라혼에 대한 두려움에 떨던 사람들이 흥분하며 술렁거 렸다. 뿐만 아니라 마족소녀도 눈빛을 빛내며 라혼의 대답을 기다렸다. “가루다?” 노인은 라혼의 부정을 포함한 반문에도 실망하지 않고 가루다에 대해 설명 하기 시작했다. 노인의 설명은 하나의 노래처럼 운율을 타는 듯 시작되었다 . “하나의 존재이며 많은 이름으로 불리는 존재. 태양의 새, 불의 새, 생명 의 새, 신의 새, 지혜의 새, 크고 큰 새, 황금의 새, 영원의 새, 불멸의 새 , 불사의 새, 부활의 새, 존귀한 새, 평화의 새, 축복의 새, 검은 새, 하얀 빛의 새, 붉은 새, 가루다, 금시조, 묘시조 봉황, 주작, 피닉스, 붕, 로크 , 공작, 세발 까마귀, 금오…….” 노인의 새에 대한 찬양은 끝도 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녹사해의 바다처럼 녹색투명한 눈동자를 가진 선명한 붉은 머리 마족소녀가 앞으로 나서며 홍조 띤 얼굴로 라혼의 손을 잡아끌자 노인은 입을 다물고 공손한 태도로 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라혼은 마족소녀의 손에 이끌려 자신을 부 르는 녹색 바위섬으로 발걸음은 옮겼다. 그리고 수상마을 접안한 체 남겨진 라혼의 부관인 유연은 어찌된 영문인지 몰랐지만 일단 우호적이 모습을 보이는 마을 사람들의 태도에 안심했지만 수군들로 하여금 마을을 점거케 했다. 그런 유연의 귀에 상국의 전음성이 들렸다. ‘오래 걸릴지 모른다. 시간이 지나더라도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라! 이유는 노인이 설명해 줄 것이다.’ 라혼이 마족소녀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거대한 신전이었다. 그곳에 긴 몸을 똬리를 틀어 허공에 떠있는 불꽃용이 라혼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인군. 신(伸)!” “그대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존재로군.” 그는 칸 대륙을 지키는 다섯 신룡중 하나인 신(伸)이었다. “아직 때가 되려면 멀었는데 벌써 만나게 될 줄이야. 하지만 그것이 내겐 무척 신선한 일이야.” “무슨 말인가?” “나는 앞으로 일을 내다볼 수 있다. 그러나 너는, 너에 관한 일은 알 수가 없었다.” -화르르르르…………. 용의 형상을 한 불꽃이 크게 타오르더니 신(伸)의 모습은 불타는 새의 모습 으로 바뀌어 있었다. “라혼, 너는 나를 무엇으로 생각하는가?” “칸대륙을 수호하는 다섯 신룡중 하나가 아닌가?” “후후후, 너는 나의 일면만 보고 있군. 나는 용이 아니다.” “그럼 넌 뭐지?” “나는 태양신이다.” “뭐?” “놀랬나?” 종족과 문명마다 태양신의 이름이 달랐지만 태양신은 하나였다. 태양을 상 징하는 짐승은 새였고, 태양은 앞날을 내다보는 지혜의 눈과 무기로는 활을 사용했다. 또한 부활을 상징했으며 생명을 상징하기도 했다. “나는 신계의 주신(主神) 중 하나지만 태양신이지만 마신의 이름도 가지고 있다. 물론 마신의 이름이 된 태양신의 이름은 태양의 권위를 잃었지만 말 이야. 라혼!” “…….” “나는 지금 매우 생소한 경험을 하려하네. 바로 질문이란 것을 말이야. 그 대는 혹시 신과 마를 평정할 자가 아닌가?” 라혼은 세상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한없는 지혜의 눈을 마주 바라보며 담담 히 긍정을 표했다. “그렇습니다.” “그랬군. 그대는 신과 마를 평정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모릅니다.” “그렇군. 그럼 지금 나는 신룡 신(伸)으로써 그대에게 할 이야기만 하지. ” 라혼은 태양신의 화신인 신(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 왜 신(伸) 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는지 신(伸)의 이야기 속에서 알 수 있었다. 신(伸)은 가니아의 조상이었다. 그리고 그 피는 가니아를 거쳐 강무황가로, 그리고 설화에게까지 이어졌다. 즉, 신(伸)은 강무세가로 하여금 새로운 천하의 주인이 되게 돕고 있었다. 신(伸)은 앙(殃)과 우(于)가 세상에 나온 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앙(殃)과 우(于)가 웅랑교을 이끌고 세상을 분탕 질 치고 돌아가면 혼란스런 천하를 강무세가로 하여금 안정시키게 할 생각 이었다. 그러나 예측하지 못한 존재가 세상에 나오는 바로 라혼이었다. 그 러나 그 또한 감당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날 앙(殃)과 우(于)가 죽 음을 공포를 느꼈던 그날 라혼을 보고 신(伸)은 깜짝 놀랐다. 신을 압도하 는 힘을 가진 존재였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자신의 권능인 예지력이 통하 지 않는 존재였다. “내가 칸대륙의 패권을 차지하고자 한 이유는 이곳에서 마계의 문이 열리 기 때문이다. 마계의 문이 열리면 마계마왕군이 쏟아져 나올 것이고 그러자 면 모든 존재가 하나가 되어 그들을 막고 열린 마계의 문을 닫으면 천계의 문이 열릴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기 때문이네. 때가 가까워지면 마계의 마 왕들은 언제나 휘하 병력을 강제로 열린 마계의 문을 통해 중간계의 혼란을 야기 시켰네.” 신(伸)은 자신의 이야기를 끝내고, 라혼에게 하얀 빛 덩어리를 주며 말했다 . “그건 신(伸)으로써 자네에게 약속한 선물이네, 생명의 씨앗이며 불새의 피지.” “나는 영원불사의 삶은 필요 없는데?” “아니 자네가 신이 되고자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네가 인간임을, 인간으 로 죽을 수 있는 축복을 줄 거야. 그리고 자네가 동방대륙을 제패하였으니 나는 자네에게 먼저 넘어온 마계마왕군들의 처리를 맡기겠네.” “그럼 그에 따른 보상을 해주길 원합니다.” “…….” 태양신의 화신인 신(伸)은 어떻게 보면 신이 사명을 부여하는 영광을 주었 는데도 당연하다는 듯이 보상을 요구하는 라혼은 태도에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물었다. “무엇을 원하는가?” “태양의 신은 의학의 신이기도 한데 나의 아내가 아이를 가질 수 있게 할 수는 없겠습니까?” “그대 아내가 아이를 가지게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아이는 그대의 아이 가 아니다.” “…….” “태양신의 피는 순결하다. 태양신의 피는 다른 신의 피를 용납하지 않는다 . 그리고 그것은 그대의 피도 마찬가지다.” “그럼 다른 사내의 정(精)이며 된다는 겁니까?” “아니다. 이미 그릇이 깨졌거늘 거기에 무엇을 담을 수 있겠는가?” “그럼?” “앙(殃)이 낭녀의 몸속에 들어가 다시 태어난 것처럼 누군가 그녀의 몸속 에 들어가 자라야 갰지.” “그러나 그것은 이미 임신한 여인에게 만 가능한 술법이지 않습니까?” “잊었는가? 나는 태양신이다. 또한 의학의 신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대의 아내는 나의 피를 이은 여자다.” 신(伸)의 말은 간단했다. 자신이 설화의 몸속에 들어가 다시 태어나겠다는 말이었다. 라혼은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아직도 철부지인 아내를 위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했다. “후우~! 그럼 죽은 척하는 일은 백지화해야 하나?” 라혼은 신(伸)의 예상대로라면 대략 50년 후, 마계의 문이 열리 때를 대비 하여 지금부터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녹사도의 일로 해남군도 는 아무런 저항 없이 조정의 21번째 방(方)이 되었다. 그리고 본래 라혼이 원했던 남방대륙 게브와의 교역도 간단하게 이루어 졌는데 게브는 태양신 ‘라(Ra)’가 지배하는 땅이었고 태양신은 친절하게도 그들에게 라혼의 함 대가 올 것임을 미리 신탁(神託)하여 간단하게 교역이 이루어지게 해주었다 . 천상무후(天上武后) 라혼은 녹사도에 마족소녀와 함께 상경으로 개선했다. 천하제일인의 귀환은 그 위세가 참으로 대단했다. 남해좌수영의 전멸이라는 뜻밖의 피해를 입었 지만 해황이 입조(入朝)하여 천자인 천상무후에게 인(印)을 받아 천하이십 일방(天下二十一方)이 완성되었다. “미안하다.” “아니에요.” “나는 네가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네 곁에 있으려 했다.” “…….” 설화는 숨이 막혔다. 라혼이 녹안홍발의 미녀와 같이 귀환한다고 하는 소식 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가 해남군도의 성녀라는 소릴 들었을 때부터, 불안 한 감정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무후이네 천자네 하는 말을 꺼내기 전에 설 화는 여자였다. 북지성에서 장동의 피난민들을 도울 때 모든 것을 다 잃고 도 젖먹이 아기를 두고 미소 짓는 부부를 볼 때부터 라혼의 아이를 가지고 싶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항상 곁에 있어주고 앞으로도 함께할 그에게 아기를 낳아주고 싶었다. 아니 그를 닮은 아기를 가지고 싶었다. 그러나 어 느 날 자신이 아기를 가질 수 없다는 말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을 맞 보아야 했다. 그래서 세상 누구보다 사랑하는 남편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떠, 떠나시려는 거예요.” “그래 언젠가는 아니 누군가 말하길 50년 후 쯤 그 시기가 온다고 하더군. ” “날 놀리다니……. 무엄하게!” 불안에 떨던 설화는 50년이라는 말에 눈물을 참으려 애쓴 자신이 창피한 나 머지 가는 허리에 손을 얹고 장난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설화의 입가 에 있던 미소는 그대로 사그라졌다. 라혼의 담담하고 진정미안해하는 표정 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진정이군요.” “그래.” “무슨 이유인지 알아도 제가 알면 안 되나요?” 라혼은 설화에게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수백 년 후의 일이야. 이세상은 사람의 것이 아니야. 백년 도 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천년의 짐을 지울 수 없지. 스스로 한계를 넘어 한팔 거들려 용맹정진하는 숨은 이가 그때 세상에 나설 거야 그때까지는 너의 백성들이 평화롭게 살아갈 권리와 의무가 있어.” “…….” “천계보다 수백년 먼저 마계와 세상과의 아주 좁은 문이 열려. 그 문으로 는 마계의 마왕이나 마공들이 이쪽으로 넘어올 수 없어. 하지만 마군과 마 졸들을 충분히 넘어올 수 있다.” 설화는 아무 말 없이 라혼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나는 비록 수백 년의 평화일망정 그 평화를 위해 마계로 가서 단 하나의 마물이라도 세상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할 거다.” “50년이면 충분해요. 그러니 미안해하지 마세요.” 라혼은 설화를 가만히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런데 딸이 좋을까? 아들이 좋을까?” “예?” “내가 왜 바다의 성녀를 데려왔는줄 알아?” 설화는 라혼의 물음에 몸이 살짝 굳으며 가슴이 철렁 내려 안는 것을 느꼈 다. 라혼은 그런 설화의 반응에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녀 또한 가니아와 같은 무녀인데 아이를 낳게 하는 권능이 있데.” “……?” “우리 백호가의 대가 끊이지 않을 수 있다고.” “그, 그런 나도 아기를 가질 수 있다는 말 이예요?” “그래!” 설화는 라혼의 확신에 찬 태도에 희열을 느끼며 재차 물었다. “나와 서방님의 아기 말 이예요?” “그래, 설화 너와 나의 아기.” 천상무후 7년. 원단(元旦) 정월 초하루. 천하이십일방 21인의 제후들이 무 후에게 조의진하(朝儀陳賀)하기 위해 상경 황진성에 모였고, 또한 각지의 유수 관리들과 고관대작들이 전문(箋文)을 올려 진하(陳賀)하였다. 상경의 용호궁 지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전각인 교태전(交泰殿)에서 어의들 과 궁녀와 내관들 할 것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리고 교태전 담 밖을 엄 밀히 호위하며 지키는 군사들의 마음도 교태전에 쏠려 있었다. “이노무시끼들이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는 거야? 똑바로 서있지 못해!” “아이고 육장군님 목소리가 너무 커요. 애가 들으며 어쩌려구.” 평소에 누가 잔폭광마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는 두말 할 것도 없이 석달 은 자리보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흐엑! 설마 들리지는 않았겠지?” “폐하는 무공의 고수라서 아마도 들었을지도…….” 잔폭광마는 부관의 말을 듣고 그럴지도 모르겠다, 생각하고 발을 동동 굴렀 다. “어떻하지, 어떻하지 부관 어떻게 좀 해봐!” “그러지 말고 조용이 좀 하십시오. 천하의 어림군 장군이신 장군이 이러시 면 어찌합니까? 어림군은 귀신도 쫓는 군대 아닙니까?” “야! 아니 조용하게 야! 이놈들아 귀신도 이 담을 넘지 못하게 두 눈을 부 릅뜨거라! 알았지 한순간이라도 깜박이는 놈이 있으면 전원 천호 물에 한 달 보름을 빠뜨려 버릴 거다. 알았지?” “예에~!” 잔폭광마의 소곤대는 경고에 어림군도 마주 소곤대듯이 대답했다. ‘지심이는 좋겠다.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으니……. 이거야 궁금해서 원.’ 그렇게 잔폭광마가 교태전 내를 경비하는 책임을 맡은 지심을 부러워하고 있을때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온통하얀 용호궁은 조용하지만 참으로 격동 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모든 이목(耳目)이 용호궁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교태전에 쏠려있고 무슨 소리만 나면 가던 길을 멈추고 그곳을 바 라보았다. 그리고 용호궁의 정전에는 무후가 빠진 상태에서 상국이 주재하는 천원회의 가 열리고 있었는데 그들은 사마들이 아닌 21방의 주인들이 직접 참가한 진 정한 천원회의였다. “다행히 정주의 수확이 풍성하니 그 곡식을 흑막으로 돌리겠소. 이의 있소 ?” “…….” “그럼 흑막의 일은 되었고…….” “상국, 임주와 동인성 사이에 산적들이 출몰하고 있습니다..” “그 문제라면……. 임주 계제의 말에 라혼은 동인성의 낙제(樂帝) 강무산에 얼굴을 보았다. 이 에 낙제 강무산이 말을 시작했다. “그들은 스스로 정립천하군이라 참칭하는 무리들인데 사실은 그저 화적떼 에 불과합니다. 날이 풀리면 대대적인 소탕에 들어갈 것이니 그때를 대비하 여 임주에서도 도움을 바랍니다.”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저희도 돕겠습니다.” 그렇게 그냥 사마들이 해도 되는 사안을 가지고 회의는 쓸데없이 길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상국, 축하드리옵니다. 무후께서 원자아기씨를 생산해 내셨습니다.” 용황궁에 끝까지 남아있던 덕에 내관으로서 최고위 관직인 상선의 지위에까 지 오른 황태감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왕자의 탄생을 알렸다. 그러자 그것을 기다리고 있던 21방의 제후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진하(進賀)했다. “진하 드립니다. 상국 그리고 호황 전하!” 진하(進賀)는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백관(百官)이 임금에게 나아가 축하하 는 예(禮)였다. 21방의 제후들이 진하하는 일은 무후가 명백하게 자신들의 윗줄에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앞으로 천하의 주인이 탄신 하셨으니 경사 중 경사입니다. 저희 의백에서 는 옥에 갇힌 자들을 풀어 천태자의 덕을 칭송하겠습니다.” “흑막 또한 그에 따르겠습니다.” “…….” 천태자(天台子)가 태어난 소식은 단숨에 용호궁을 넘어 상경의 저자거리에 알려졌다. 이에 상경의 백성들은 저마다 기쁨의 함성을 지르며 거리로 쏟아 져 나와 만세를 외쳤다. “만세!” “만세!” 백성들은 알았다. 무후의 아기가 태어난 순간을 천하21방의 제후들이 지켜 보았음을 제후들이 천태자를 다음 천하의 주인임을 인정하였음을……. 그리 고 곧 천하 만민이 천태자의 탄신을 알게 되었다. 후기(後記) 천하의 시간은 역동적으로 흘렀다. 세상은 사람의 것이라 주장하며 사람이 천하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정립천하의 무리와 그와 동조하 는 강호무림의 인세가 천하를 어지럽혔다. 그러나 무후와 상국은 그들이 백 성을 상하게 않는 이상 그들에게 어떤 핍박도 하지 않고 오리려 수인도 사 람일뿐이라는 말로서 그들의 논리를 반박할 뿐이었다. 천하가 안정되고 갑차를 만들기 위해 구입한 목우유마가 본래용도인 물류를 나르는 일을 하자 천하에 때 아닌 길을 닦는 토목공사가 이루어졌다. 한여름 소낙비 같은 나세가 끝나고 민심이 안정되자 수확량이 늘었다. 백성 들은 태평가를 부르고 천하에 도적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살림이 넉넉해진 백성들은 배움의 열의가 생겨 아이들은 현자에게 맡기는 천하에 글 읽는 소리가 구미산골에서 조차 울려 퍼졌다. 이에 천하제후들은 태학을 세워 인재를 키워 출셋길을 열어주니 인재가 풍부해졌다. 백성들은 유래 없는 태평성대에 무후의 덕을 칭송하며 기원하기를……. -천지신명(天地神明)이시여! 천상무후(天上武后)를 보(保)하소서. 라고 하며 무후의 치세가 계속되기를 바랬다. 그리고 그런 백성들의 마음이 하늘에 닿았는지 무후의 치세는 반 백년간 계속되었다. 깊고, 깊은 밤.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여전히 아름다운 아내의 얼굴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아무런 기척을 내지 않고 길고, 긴 여행길에 올랐다. 남편이 어둠속으로 사라지자 꼭 감은 눈에서 참고 또 참은 눈물이 흘러내리 며 베개를 적셨다. 세상을 위해 아니, 자신을 위해 남편은 자기발로 지옥으 로의 여행을 떠났다. 날이 밝아왔다. 오늘도 어제처럼 이제 쉰을 넘어서는 아들이 문우를 하기 위해 찾아올 것이다. 언제나 듬직하고 현명한 아들이고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른 아들이었지만 그러나 어제와 또 달랐다. “어머니, 아버지는 떠나신 겁니까?” “알고 있었더냐?” 예법에 맞게 호칭을 하려면 모후(母后)라 해야하고 상부(上父)라 해야 하지 만 천자(天子)인 아들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곳에서는 여느 평범한 집안 처럼 어머니라 부르고 아버지라 불렀다. “예, 소자 예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랬구나. 너희 부자는 부자만 아는 비밀이 많았지. 공주라도 이었다며 그리 외롭지 않았을 터인데.” 천상무후와 황천상국의 아들인 용호붕(龍虎鵬)은 몇 해 전 천자의 위를 양 위 받아 황제(皇帝)가 되었는데 정식명칭은 황천상제(皇天上帝)였다. 붕은 모후의 타박에 쓴 웃음을 지으며 엷은 금안(金眼)을 눈에 웃음기를 가득 머 금고 말했다. “어머니, 사내들에겐 사내들만의 이야기가 있는 법이랍니다. 그것은 아무 리 어머니라고 해도 여인이상 들려주기가 곤란하지요.” “여인이 알아서 좋을 게 없는 이야기라…….” “여인이 알아서 좋을 것이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제가 여인들에게 알려주 고 싶지 않은 겁니다.” “원, 녀석두.” 붕은 다시 슬퍼하는 모후를 기색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에 그동안 숨겨온 한 가지 비밀을 털어놓았다. “어머니, 지금 아버지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으십니다.” “음? 그걸 네가 어찌아누?” 붕은 모후의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반은 사실이고 밤은 거짓인 대답 을 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마계의 문이 열린다는 곳에 수하를 보 내 동태를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게 정녕 참이냐?” “예.” “거기가, 거기가 어디더냐?” “동영입니다.” “차비를 해주거라! 내 그곳으로 갈 것이다.” “어머니 진정하세요. 그곳은 바다 한가운데 입니다. 그리고 이미 마계의 문이 닫힌 지 오래라 그곳은 지금 그냥 보통 바다일 뿐입니다.” 그러나 붕은 모후의 뜻을 꺾지 못했다. 무후 51년. 오월. 무후와 황제께서 사라진 상국을 찾아 천호에 배를 띄웠다 . 무후 51년, 유월. 무후께서 대하의 물길을 타고 서경에 도착하셨다. 이에 서경 황미성을 다스리는 양제와 만조백관이 나와 마중하니 무후와 황제께서 서경에 이레를 머무셨다. 무후 51년, 유월. 대해의 날씨가 나빠 배를 띄우지 못하자 무후와 황제께서 대하를 건너 육로로 통해 남하를 하셨다. 이에 계주의 백성들이 나와 스스 로 길을 쓸고 치워 길에 자그마한 돌멩이 하나 보이지 않게 하였다. 또한 돈제가 또한 백관을 이끌고 마중하였다. 또한 생신을 맞이하신 무후를 맞아 돈제가 소 일천두. 돼지 일천오백두를 진상하였고 무후께서 그것은 백성과 나누시었다. 무후 51년, 시월. 계주 흑해성에서 다시 배를 띄워 봉수성으로 향하였다. 무후 51년, 십일월. 남상대도독과 남례안찰사가 나란히 먼 바다까지 나와 백관을 이끌고 마중해 무후와 황제의 앞길에 안녕을 기원했다. 무후 52년, 십이월. 무후와 황제께서 봉수성에 잠시 머물러 새해를 맞으시 고, 천하에서 모인 백관들의 조하를 받았다. 또한 생신을 맞이하신 황제에 게 백관들이 진하 드리며 남례성에서 만들어진 술 일천단지와 과일 등을 산 같이 쌓아 바치고 소 일천두와 돼지 이천두을 잡아 백성들과 나누었다. 무후 52년, 삼월. 무후와 황제께서 바다에 배를 띄우시고 남해로 향하셨다. 무후 52년, 사월. 바다에서 폭풍우가 몰려올 조짐이 있어 극남성으로 피하 였다. 극남성의 백성들이 무후를 위해 스스로 별궁을 지어 바치니 무후와 황제께서는 크게 기뻐하시며 별궁의 이름을 곤붕(鯤鵬)이라 하셨다. 무후 52년, 칠월. 무후와 황제를 태운 배가 동영에 도착했다. 동영의 백성 들 또한 무후와 황제를 위해 길을 내고 별궁을 지었다. 이에 무후가 별궁의 이름은 남명(南溟)이라 하였다. 무후 52년, 팔월. 무후는 동쪽바다로 배를 띄우고 백일 간 머물다 돌아오셨 다. 설화는 1년이란 긴 시간을 들여 그곳으로 왔다. 아들은 이곳이 그곳이라 하 나 보이는 것은 짙푸르기만 한 바다와 일렁이는 파도뿐이었다. 뭔가 원해서 온 것은 아니지만 설화는 실망스런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산위라면 비석 이라도 세워 표시하련만, 동쪽 멀고먼 바다 위 망망대해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설화를 태운 배들이 어느 지점을 통과하자. 아무것도 없는 바다위에 서 신기루인냥 환상이 펼쳐졌다. 그것은 온통 설화의 웃는 모습뿐이었다. 아무것도 모를 쪼그만 계집아이가 난데없이 ‘서방님’이라 부르는 모습. 빨간 홍의를 입고 좋아라. 뛰어다니던 모습. 설화에게 처음 여인을 느끼던 때의 모습. 행복에 겨워 춤을 추는 모습. 그리고 진정한 부부가 되어 서로 사랑하던 모습. 아들에게 직접 젓을 물리고 행복해하는 모습. 그것은 바로 라혼이 설화에 대한 추억이었다. 그리고 그 환영은 모두 설화가 밝게 웃고 있는 모습만 펼쳐졌다. 무후를 수행하기위해 온 무사들과 상궁들은 환상처 럼 펼쳐진 무후의 어릴 적 모습과 한참 꽃이 피던 때의 모습을 보면서 상국 이 얼마나 무후를 사랑했었는지 생각하며 감동했다. 그렇게 환상은 사흘밤 낮동안 펼쳐졌고, 이내 사라졌다. 그리고 설화의 손에는 아무도 모르는 보석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거기에는 지난 신기루처럼 펼쳐졌던 모든 것이 담겨져 있었다. 거기엔 타인에게 보여 줄 수 없는 둘만의 비밀스런 이야기도 담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행복한 기억뿐이었다. 그래서 설화는 슬펐다. 자신은 못해주고 미안한 것만 자꾸 생각나는데 남편의 추억엔 그런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뱃길을 돌려 동영 남명궁에 돌아왔다. 거기서 기다리는 아들이 하는 말을 들고 더 이상 슬퍼하지 않았다. “어머니, 아버지는 새로이 여행을 떠나셨을 뿐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본래하시는 일은 천하를 다스리거나 하는 일이 아닌 온 천지의 생 물들을 구하시는 일입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네 아비는 신선이었지. 그저 때가 되어 하늘이 내린 소임을 완수하러 가신 것일 뿐. 나또한 숫한 여인들의 남편과 아비들을 사 지로 보냈는데…….” 무후 55년, 팔월. 무후께서 천지로 돌아가셨다. 이에 천하백성이 슬퍼하고, 21방의 제후들이 무후의 붕어를 애도하였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부 ? [라혼 3부] [ 이그라혼 연대기 기사의 시대 ] 프롤로그 Prologue 빛도 없고, 하늘도 없고, 땅도 없는 암흑의 심연. 얼마나 오랫동안 이 차디 찬 암흑공간에 머물렀는지 모른다. 끝도 없고 시작도 없는 이공간 속에서 잠깐이나마 무료함을 달래주는 것은 악에 바쳐 덤벼드는 귀여운(?) 마족들 이다. 그렇다. 이곳은 마왕의 세계, 마계다. “전 마왕군 전투준비!” -크아아앙~! “샤라즈, 겨우 1억 정도의 병력으로 내게 이빨을 드러내다니 나 또한 마왕 인데 대우를 해주어야 할 것 아닌가?” 암흑의 공간 너머에서 잡스런 살기를 감지한 라혼은 의식을 개방하여 그 마 왕군을 이끄는 마계의 제왕 다크로드 샤라즈에게 의념을 전달했다. “라혼, 차원과 공간의 마왕이여……. 나 마계 암흑의 군주 다크로드 샤라 즈는 그대의 마왕으로써의 권능을 거두려 하노라!” “마왕의 권능 따위는 나도 필요 없다. 하지만 그대는 나의 안식을 방해했 다. 그러니 그 대가를 치르라!” “무적의 마왕군이여, 너희는 3계 최강의 군대다. 공격!” -크아아아아앙~! 라혼은 3억 킬로미터 밖에서 일견 먼지처럼 보이는 실제론 하나하나가 거대 한 하나의 달에 크기에 육박하는 크기의 마계마왕군들의 일제돌격에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의식을 개방해 3억키로 입방미터의 공간을 장악하 고 일검을 내쳤다. “나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을 소멸하리라! 무한(無限)의 검(劍), 인피니티 소드(Infinite sword)!” -크아아아아아! -……. 단 한 번의 내친에 공간을 울리던 마계마왕군의 마물들은 침묵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화아아악~! 10억 킬로미터 밖에 대기한 100억 본군이 선발대겸 결사대인 1억 마왕군 전 멸한 순간 수초의 시간차를 두고 라혼이 떠있는 공간 1킬로미터까지 접근했 다. 한 번의 인피니티 소드가 시전되고 숨을 고르는 찰라의 시간을 놓치지 않고 덮쳐든 것이다. 그리고 승부는 바로 이 순간 결정된다. -쿠아~! 마계마왕군을 이루는 거대한 마물들은 일제히 마광포를 뿜어댔고, 라혼은 그 즉시 에텔 스페이스 차원결계를 쳤다. 그리고 동시에 전면에 검을 휘둘 러 공간을 찢었다. “무한의 공간 밖 차원의 틈새로 꺼져라! 티어 디멘션(Tear dimension)!” -쿠오오오오오~! 라혼은 공간을 찢는 티어 디멘션을 시전하고 몇 개의 차원을 뛰어넘어 20억 킬로미터 밖으로 몸을 빼냈다. 그리고 티어 디멘션으로 찢어진 공간이 일 그러지며 마계마왕군을 이루는 마물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끼아아아아~! 깊고 깊은 검은 구멍을 순식간에 그 세를 확대시키며 마물들 대부분을 없애 버렸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달만한 마물들에게는 라혼의 영인(靈刃) 소울 블레이드가 작열했다. -크앙, 크, 쿵, 암흑의 심연 같은 공간속에서 라혼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빛줄기가 번쩍일 때마다 마물들은 라혼에게 흡수되었다. “라혼, 차원과 공간의 마왕이여…….” “와라! 다크로드 샤라즈.” 불길한 화염이 감싸고 있는 샤라즈는 수십만도에 이르는 붉다 못해 하얀 불 꽃을 토해 냈고 그 죽음의 불꽃이 미치는 공간에 있는 마물들은 ‘앗!’ 소 리도 내지 못하고 소멸해 버렸다. 그러나 그러한 물리적인 공격은 라혼의 차원결계를 뚫지 못했다. 라혼은 샤라즈의 불꽃을 정면으로 받으며 인피니 티 소드를 다시 한 번 쳐냈다. “크아아아아아~!” 거대한 검붉은 불꽃 덩어리를 이루던 다크로드 샤라즈는 서서히 소멸하더니 이내 3미터 정도의 작은(?) 인간형의 모습으로 변했다. “후우~! 역시 마계의 최강 마왕답군, 샤라즈.” 라혼은 아직까지 수만도의 체온을 유하고 있을 다크로드 샤라즈의 양뿔사이 에 손을 엇졌다. “라혼.” “뭔가?” “그대는 강하다. 그러나 마계가 무너지는 순간 천계의 다음 상대는 인간이 라는 것을 아는가?” “후후후, 샤라즈여 거짓과 허위는 내게 통하지 않는다.” “라혼이여, 모든 인간 왕의 왕인자여, 어찌하여 내가 그대를 속인다고 생 각 하는 가? 그대 또한 그러한 것을 짐작하고 있을 터인데?” “…….” 약간의 망설임. 샤라즈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나는 태양을 상징하는 신이었다. 그러나 인간에게 잊혀지고 인간이 새로 운 태양신을 섬기면서 나는 어둠속에 갇혀 마왕이 되었다. 신계, 아니 천계 의 천족들이 유일신을 섬기면서 우리는 멸망되어야할 존재가 되었다. 그러 니 그 유일신도 인간이 만들어 낸 것.” “…….” “라혼이여, 마족들이 인간을 증오하는 만큼 천족들도 인간을 질투하고 시 기한다.” “닥쳐! 천족들이 그러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다면 지금 마계를 정복했듯 이 신계를 토벌하면 그뿐이다.” “크크크크크, 마왕을 추종하는 인간은 극소수, 하나 신계의 천족들을 추종 하는 인간은 거의 전부다. 네가 인간을 지켜주기 위해 무기를 들어도 인간 이 보기엔 너는 신에게 반하는 존재 마왕이다.” “…….” 샤라즈는 자신을 제압하고 자신을 소멸시키기 위해 이마에 얻은 손을 통해 서 흔들림을 느꼈다. “위대한 라혼이여, 무서운 라혼이여, 그대의 손에 다섯 마왕이 소멸되었다 . 마계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우리는 이제 신계와 싸울 힘을 잃었다 . 하지만 우리가 있음으로 인해 인간들에게 평화가 있다.” “생각해 보지. 하지만 나는 힘들게 사로잡은 널 풀어줄 생각이 없다.” “자, 잠깐! 계약을, 계약을 하자!” “?” “중간계의 어떤 흑마법사가 마왕을 소환하는 의식을 치르고 있다.” “…….” “라혼이여, 중간계로 돌아가라. 돌아가서 마계마왕군의 전위대가 되는 거 다.” “중간계라……. 그리운 곳이군. 하지만 널 포함해서 7마왕을 모두 잡고 돌 아가도 중간계는 그대로 있을 거야.” 다크로드 샤라즈는 단호하기 그지없는 라혼의 태도에 진저리치며 다급한 어 조로 말을 이었다. “내 이름을 걸고 장담하건데 그럼 중간계에서 인간은 멸종될 것이다.” “……?” 마족은 정신체다. 그러므로 그 존재를 증명하는 이름은 마족에겐 생명과 같 은 것. 만일 이를 걸고 한 약속이 부정되면 스스로 소멸될 수도 있었다. 그 럼으로 다크로드 샤라즈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무슨 말이냐?” “고귀한 라혼이여, 1만년전 천족과 싸움에서 천족과 밀약을 했다. 마계와 중간계, 그리고 신계를 하나로 통합하는 계획을 말이다.” “…….” “신마의 균형이 없이 신계와 중간계만이 통합되면 중간계는 신계에 영향을 받아 완벽해진다. 슬픔도, 괴로움도 그리고 죽음조차도 없는 세상이 된다. ” 슬픔이 없으면 기쁨을 모른다. 괴로움이 없다면 즐거움도 없다. 죽음이 없 으며 삶도 없다. 인간에게 완전한 세상은 곧 죽음이다. 영원한 삶은 곧 죽 음인 것을……. 라혼은 고민했다. 인간이 가장 바라는 세상이 된다. 그것이 비록 멸망일 지 라도 인간은 누구나 그것을 원한다. 그러므로 완전해지고 그렇게 웃으며 소 멸되는 것도 좋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렇게 소멸하는 것은 신의 의지에 벗어나는 것이다. 슬픔을 알게 하여 기쁨을 느끼게 하고, 죽음의 두 려움을 속에서 삶의 행복을 누리며, 괴로움 속에서 즐거움을 찾게 하는 것 이야 말로 신이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라혼은 결정했다. “샤라즈, 마계의 군주여. 그럼 그대가 나와 무엇을 계약하려 하는가?” “시간! 마계마왕군의 중간계 침공시간을 그대가 원하는 순간에 이루어지게 하겠다. 하지만 그대가 중간계로 돌아간 100년에 한에서다. 그대의 요구가 없더라도 딱 100년이 되는 순간 중간계와 마계가 통하는 문이 열릴 것이다 . 하지만 그때까지 중간계에 있는 모든 마계의 족속들 그대의 명을 거절치 못하리라! 그것을 나 마계의 군주 다크로드 샤라즈의 이름으로 맹세한다.” “…….” 라혼은 자신의 손등에 ‘맹약의 인’이 새겨지고 그와 똑같은 문양이 샤라 즈의 검붉은 피부에 새겨지는 것을 확인하고, 그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그 리고 그 순간 라혼은 의식의 속도로 중간계로 향하는 통로에 발을 들여놓았 다. ‘인간 전체의 운명을 모든 사람들이 선택해야한다. 완벽해진 후 그렇게 소 멸하던가. 아니며 불완전하지만 영의 진보를 꾀하던가. 하지만 지금 나의 결정은 산자가 죽은 자를 부러워하는 세상으로 만들 것인데…….’ 라혼은 중간계의 미친 흑마법사의 소환진에 몸을 맡기며 인간의 슬픔 운명 을 한탄했다. 그러나 인간 전체의 운명을 홀로 선택할 수는 없었다. 라혼은 진짜 아는 12인의 현자를 찾아 이 문제를 물어 인간의 운명을 선택할 것이 다. 다크로드가 약속한 100년의 시간 속에서 12명의 성현을 찾아 물을 시간 을 충분했다. 짧은 여행 짧은 여행 음울한 분위의 괴기로운 그로테스크한 공간. 마치 깊은 어둠을 닮은 검은 연기가 공간을 가득체운 그 안에서 한 존재의 울부짖음이 공간 울렸다. “라푸네, 라푸네, 나의 라푸네…….” 애잔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는 소름끼치는 저주으로 바뀌었다. “베르그, 저주받아 마땅한 놈. 그래 나는 널 저주한다. 네 놈의 뇌를 유리 병에 담아 영원히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하여 이언스 계곡 깊숙한 곳에 봉 인할 것이다. 이놈~!” 그리고 다시 애잔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라푸네’를 불렀다. “아아~! 라푸네, 나의 라푸네…….” 그렇게 애잔하게 ‘라푸네’를 부르고, ‘베르그’라는 자에게 소름끼치는 저주를 퍼붓기를 반복하던 목소리는 갑자기 희열에 들떠 부르짖었다. “성공이다. 마계의 문이 열렸다. 이제 나를 버린 세상은 멸망할 것이다. 라푸네 베르그 네가 날 농락하고 구하려한 세상은 너로 인해 멸망할 것이다 . 그리고 너는 나를 영원히 버리지 못할 거야!” 수백 개의 갓 태어난 어린아이의 해골로 그려진 마법진에서 진득한 어둠의 검은 구멍이 생성되었다. 그어둠이 물처럼 출렁이더니 검은 머리와 검은 눈 동자를 가진 미남자가 발가벗은 모습으로 솟아올랐다. 그러자 진득한 마기 에 영향을 받아 당장이라도 흘러내릴 듯한 짓무른 피부에 산발한 회색 머리 의 노파가 주문을 외듯 물었다. “마계에 족속이여, 그대는 누구인가?” “나는 공간과 차원의 마왕이다.” “헉!” 마계의 문을 열어 마계의 마물을 소환하려던 노파는 스스로 마왕이라 밝힌 존재가 소환되자 크게 놀랐다. 노파는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마왕 과 계약을 시도했다. “위대한 마왕이여, 나는 그대와 계약을 원한다.” “거부한다!” “…….” “그보다 여기는 어디지?” 마계의 문을 연 노파. 마녀는 소환자와 계약을 하지 않으려하는 자칭 마왕 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주문을 캐스팅 했다. “리턴Return!" [리턴Return]은 소환마법으로 소환된 존재를 돌려보내는 디스펠(Dispell) 주문이었다. 콘트롤 되지 않는 존재는 아무리 마왕이라도 마녀에겐 필요 없 었다. 그러나 상대는 역시 마왕이었다. 소환된 존재를 돌려보내는 [리턴Ret urn] 주문을 캐스팅 했는데 오히려 마계와 연결된 문이 닫혀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준수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하고 있 는 마왕의 몸이 심한 가뭄을 만난 땅처럼 갈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커억~! 이런 속았다.” 그리고 마녀는 뭐가 어찌된 것인지 모르지만 일단 괘로워하는 마왕을 제압 할 요량으로 주문을 캐스팅 했다. “페러라이즈Paralyze!” [페러라이즈Paralyze 마비] 주문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마왕이었다. “크아~!” 마왕의 갈라진 피부에서 인간의 그것과 같은 선명한 붉은 핏줄기가 뿜어져 나오고 그 강력한 힘을 품은 피화살은 마녀를 덮쳤다. 마녀는 물론 피화살 을 맞은 공간 안의 집기란 집기는 모조리 부서지거나 구멍이 숭숭 뚫렸다. 그러나 정작 마계에서 소환된 마왕이란 존재 또한 무사하지 않았으니……. “이런 마계에 적응된 몸이 붕괴할 줄이야.” 그랬다. 마계의 마왕들이 마계에서 사용하던 마력보다 훨씬 미약한 마력만 을 사용할 수 있는 이유는 마력의 태반을 신체를 구성하는 데 사용했기 때 문이었다. 그러나 라혼은 본래 인간. 끝까지 인간의 몸을 버리지 않았기에 중간계로 나서서 신체를 구성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친 마녀의 [리턴Return ]주문에 마계의 문이 닫히자 마계의 마기에서 완전히 벗어난 마기에 찌든 신체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라혼은 일단 몸의 붕괴를 전력을 기울여 막는 수밖에 없었다. 신성력을 이용한 신성마법을 사용했다간 자칫 마기에 찌든 신체가 소멸할 수도 있었다. *** “퓨리피케이션Purification!” “기분 나쁜 곳이군.” “그래요. 하지만 이엇스 계곡의 마녀 소굴이니까 어쩌면 당연한 일이죠.” 신성주문 [퓨리피케이션Purification 정화]이 펼쳐지자 마녀가 걸어놓은 저 주마법이 무산되며 계곡을 감싸고 있던 기분 나쁜 안개가 걷히며 일단의 사 람들이 들어섰다. 겉보기엔 과연 저걸 입고 움직일 수나 있을까? 하는 의문 이 드는 풀 플레이트 아머, 전신판갑옷을 입은 기사와 서너 명의 신관들. 주먹만 한 진 보라색 수정이 박힌 지팡이를 든 매혹적인 보라 빛 머리를 가 진 이지적인 미녀. 각양각색의 무구와 무기로 무장을 한 십여 명의 사내들 이었다. “나이트 그레이드, 오비라이언 형제는 쉬어야 합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오비라이언 신관님.” “더 이상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별 말씀을…. 스탄티 신관님 그는 쉬게 하고 다른 분은 괜찮으시겠지요? ” “괜찮습니다.” “저도 괜찮습니다.” 아마도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자가 기사이며 그가 이 무리의 리더 인듯 했다. “그럼 제가 선두에서고 오드넨씨와 함씨가 제 뒤를 받혀주십시오. 그리고 메이지 카이렌이 뒤를 따릅니다. 나머지 인원은 신관님들을 보호하며 천천 히 진입하는 겁니다.” “예.” “예.” “아! 그리고요. 이엇스의 마녀는 네크로맨서(Necromance)로 유명하니까 언 데드가 공격해 올지 몰라요.” 나이트 그레이드는 보라 빛 머리의 메이지 카이렌의 경고에 고개를 끄덕이 며 마지막 지시를 했다. “그럼 모두 긴장을 늦추지 말기를 바랍니다. 출발하겠습니다.” 그렇게 일단의 일행은 음습한 이엇스 계곡 깊숙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마녀가 거쳐하는 기이한 악령문자가 새겨진 동굴에 도착할 때까지 언데드는커녕 그 흔한 트랩도 걸리지 않았다. “이거 왠지 맥이 빠지는 군요. 음습한 것 외엔 걸리는 것이 없으니…. 하 지만 여기 입구는 뭔가 있는 것 같아요. 디텍트 매직Detect Magic!” 여마법사 카이렌은 마녀의 거처로 들어서는 입구에 악령문자를 보고 뭔가 수상한 점을 느꼈는지 [디텍트 매직Detect Magic 마법감지]주문으로 입구를 살폈다. “역시, 페러라이즈 주문이에요. 마녀가 인정하지 않은 존재가 이곳을 지나 면 마비 증세를 보일 거예요. 이건 암흑 마법 계열이니까 신관님이 나서시 는 게 좋겠군요.” 카이렌의 말에 스탄티라 불린 신관이 나서서 두손을 모아 기도하며 주문을 외웠다. “리무브 커스Remove curse!” [리무브 커스Remove curse 저주해제] 주문이 시전되자 성스런 하얀 빛 무리 가 동굴 입구에 피로 쓰인 악령문자가 지워졌다. 그때……. -카오! “헉!” -쾅! 서너 구의 좀비(zombi)가 무서운 속도로 튀어나와 입구 마법트랩을 무산시 킨 신관을 물어뜯으려 했다. 그러자 바로 곁에 있던 기사는 몸통을 던져 적 을 공격하는 록 스트라이커로 좀비의 몸통을 들이 받았다. 기사의 갑옷은 보통 평범한 갑옷이 아니었던 듯 좀비와 접촉한 순간 하얀 빛이 터져 나오 면 기사에게 록 스트라이커로 들이 받힌 존비는 재로 변하며 부서졌다. 기 사는 더 이상 나머지 좀비와 드잡이 질을 벌이지 않으며 신관을 데리고 뒤 로 물러섰다. 동시에 등을 보이는 기사를 덮치려던 좀비를 후위에 있던 두 용병이 손에 들고 있던 도끼를 던짐으로써 일단 주춤하게 만들었다. “카이렌!” “라이트닝Lightning!” -파직~! 카이렌의 보라색 수정에서 번갯불이 작열했지만 아직 3구나 남은 좀비는 계 속 움직이고 있었다. 좀비의 썩어 문드러지는 살이 타는 냄새에 눈살을 찌 푸린 나이트 그레이드는 은보다 효과가 좋은 미스릴이 코팅된 바스타드 소 드를 뽑아들고 카이렌의 [라이트닝Lightning] 주문에 주춤한 좀비를 그대로 내리쳤다. “이야압!” -쭈악! 그러자 좀비 한구가 그대로 오른 어깨부터 사타구니까지 갈라지며 스러졌고 기사는 몸을 오른 족을 한 바퀴 반을 회전하며 왼쪽을 파고드는 좀비의 목 을 잘라냈다. 나이트 그레이드가 그러게 순식간에 좀비 2구를 상대하는 사 이 두 용병 사내는 나머지 한구의 좀비의 머리통을 도끼로 찍어 부숴 놓았 다. “역시 이엇스의 마녀의 좀비답네요. 좀비가 이렇게 재빠를 수가 있다니.” 카이렌은 아직도 꿈틀대는 좀비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용병들의 보 호를 받던 신관하나가 나서서 좀비 잔해를 모으게 하고는 뭔가 붓고는 신성 력으로 불꽃을 만들어 좀비잔해를 태웠다. 그 모습을 본 카이렌은 입맛을 다시며 지나가는 투로 중얼 거렸다. “아깝네, 좀비의 잔해는 귀한 마법시약인데….” “메이지 카이렌, 언데드의 잔해는 부정한 것입니다.” “알아요. 그리고 전 성황청이 금지하는 마법시약은 사용하지 않아요.” 그렇게 좀비의 잔해까지 처리한 일행은 횃불을 만들어들고는 다시 마녀의 동굴로 조심스레 들어섰다. 그러나 저항은 마법트랩과 좀비 4구가 전부였던 듯 거미줄과 그로테스크한 각종표본이 보관된 지저분한 마녀의 거처는 설 렁했다. “오드넷, 함, 다른 곳으로 통하는 통로가 있는지 살펴봐주시오.” “알았소.” 마녀의 거처에 정작 마녀가 없자 허탈해진 일행은 여기저기 둘러보기 시작 했다. “나이트 그레이드 여기 문이 있소.” 함이라고 불린 용병이 발견한 문은 서가 사이 파묻혀 있었는데 문고리 대시 손을 집어넣을 수 있게 홈이 파여 있었다. 기사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조심스럽게 문잡아 당겼다. -끼이이익! “흠! 이건?” “피 냄새로군.” 문을 열자 동굴에서 진득한 피 냄새가 퍼지자 기사는 더욱 긴장하며 좁아 보이는 통로로 들어섰다. 그리고 나이트 그레이드가 발견한 것은 마녀의 시 체와 피부가 흉측하게 갈라진 남자의 시체였다. “뭐야? 우리 말고 누가 마녀를 해치운 거야?” “아뇨, 사고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저 남자는 아마도 제물이었던 모양이고 마지막 순간 뭔가 잘못되어 뭔가 폭발한 모양인데요?” “그렇군.” “됐소! 일이 어찌되었건 이엇스의 마녀가 죽었으니 성황청에서 그에 합당 한 보상이 주어질 것이오. 어서 이곳을 태우고 떠납시다.” 그때 발가벗은 남자를 살펴보던 젊은 신관이 소리쳤다. “여기 이 사람 아직 살아있어요.” “어디? 정말이네 미약하지만 숨을 쉬고 있어요.” 짧은 여행 *** 후덥지근한 오월즈 지방의 날씨는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다. 특히나 두터운 무구를 챙겨 입어야 하는 입장에선 가만히 있어도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이엇스 계곡은 기분 나쁜 음습함이 있었지만 최소한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푹푹 찌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축축하기까지 한 이엇스 계곡에 서 잠을 이룰 만큼 신경이 굵은 것도 아니지만……. “메이지 카이렌, 그는 좀 어떤 것 같소?” “글쎄요? 저는 솔직히 그가 살아 움직인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에요. 그 보다 신관님이 보시기엔 어떠세요?” 카이렌의 물음에 프리스트 스탄티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내가 보기에도 이것은 기적이요. 사악한 기운에 이렇게까지 노출되고도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보면 참으로 모진 것이 생명이라는 생각이 드오.” “그래요.” 카이렌은 신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흉측하게 쩍쩍 갈라진 피부를 들어 내놓고 있는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처음 사내를 발견하고 그의 상태를 확인 한 신관들은 그가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사흘째 되던 날 사내는 짐마차에서 내려와 스스로 걷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상태가 나아졌냐 하면 그것도 아니 었다. 그는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했다. 그와 의사소통을 가능한 것 은 천만다행히도 글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많은 어휘를 아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마법사의 교육을 받았는지 특이하게도 마법사들이 마법진에 써넣 는 문자인 히에라틱(Hieratic)을 사용했다. 그래서 이엇스의 마녀를 제거하 기위해 온 일행들은 그가 마녀에게 잡혀 노예로 부려지다. 최후의 순간 희 생물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리고 그것은 마녀를 죽인 장본인도 다 름 아닌 바로 그일 것이라 생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리고 마법문자 히에라틱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메이지 카이렌이 그와 함께했다. -탁탁! “저 여기 있어요.” 라혼이란 이름을 가진 그 사내가 자말고 몸을 일으켜 세우며 땅을 두드렸다 . 그것은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그가 카이렌을 부르는 유일한 수 단이었다. 카이렌은 그 사내 라혼의 어깨를 두드리며 알았다는 신호를 했다 . <적이다.> “적이요?” 카이렌은 라혼의 등에 의문기호를 그려 ‘적’의 의미를 되물었다. <무서운 적, 큰 1 작은 10 이상> “무슨?” <깨워라. 싸움. 준비. 냄새. 온다.> 사내는 긴박한 의미를 포함한 여러 단어를 짓무른 손에 들려진 작은 나무막 대기로 땅을 훑듯이 흘려 적었다. 마법문자에 대해 조금 아는 스탄티는 카 이렌의 어깨너머로 사내가 쓴 글자를 살짝 보고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 다. “메이지 카이렌, 그의 말을 믿어봅시다. 이곳은 몬스터들이 득실댄다는 쟝 기스 숲이오. 조심해서 좋을 것이 없소.” 프리스트 스탄티는 카이렌에게 그렇게 말하곤, 리더인 나이트 그레이드에게 그것을 알렸다. 그러나 그레이드는 만약을 위한 준비를 하면서도 회의적인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것은 무더운 날씨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용 병들도 마차가지였다. -탁탁! “저 여기 있어요.” <적. 많다. 승리. 없다. 도망.> 사내가 쓴 문자를 해독하던 카이렌은 사내의 등에 글을 적었다. “적이 더 많아졌다는 건가요? 그래서 도망쳐야 한다고요?” 카이렌의 물음에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카이렌 은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고개를 들어 주위 숲을 살폈다. 그리 고 주문을 캐스팅했다. “디텍트 올Detect All!” 그러나 카이렌의 [디텍트 올Detect All 전 방위 탐색.]주문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주변은 작은 생물과 벌레들 그리고 숲의 나무들과 식물들이 내뿜는 생명의 기운뿐이었다. 만일 몬스터 같은 사악한 속성의 생물이 근 처에 있다면 숲의 생명들이 먼저 반응해야 옳았다. 카이렌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며 사내의 등에 아무것도 없으니 안심하라는 글귀를 적었다. “주변엔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 안심하세요.” 그러자 사내는 가만히 뭔가를 생각하는 가 싶더니 다시 땅을 긁적였다. <적. 보이지 않는다. 디텍트 이블Detect Evil. 나. 왼쪽> 카이렌은 단번에 그 의미를 파악하고 [디텍트 이블Detect Evil 사악한 기운 감지] 주문을 캐스팅했다. “디텍트 이블Detect Evil!” 카이렌은 3서클마스터였다. 60야드 밖까지 기운을 감지할 수 있는 [디텍트 이블Detect Evil]을 마나의 운영을 통해 100야드 까지 탐색 범위를 확대시 킬 수 있었다. 그리고 카이렌은 말할 수없는 불길한 기운을 얼핏이나마 감 지해 낼 수 있었다. 평소라면 무시해도 될 만한 수준의 기운이었지만 그녀 는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사내의 경고에 마지막으로 확인해보기 로 했다. “신관님, 저기 저쪽에 뭔가 있는 것 같아요. 사악한 기운을 감지하는데 성 직자이신 신관님이 더 강력할 테니 한번 해봐주시겠어요?” “알았소. 디텍트 이블Detect Evil!” 마법사인 카이렌의 마법주문과 프리스트 스탄티의 주문은 같지만 운용되는 체계가 달랐다. 마법력과 신성력이란 전혀 다른 힘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악한 것을 감지하는 데에는 아무래도 마력과 반대되 는 힘인 신성력이 훨씬 나았다. 마법사들이 쓰는 매직 파워(Magic Power), 마법력은 이블 포스(Evil force), 마력과 홀리 오러(Holy Aura), 신성력의 가운데 부분에 위치한 힘이었다. 일반적으로 마나(Mana)는 마법력을 뜻하는 것이지만 학술적으로 마력, 마법력, 신성력과 기사들이 사용하는 뉴트럴 포스(Neutral force)또한 마나 안에 포함되는 것이다. 스탄티는 [디텍트 이블Detect Evil]주문을 이용한 탐색을 끝내고 고개를 갸 웃하며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을 마주 보았다. “스탄티 신관님, 뭐가 찾아낸 것이 있습니까?” “없소. 하지만 느낌이 좋지 않소.” -탁탁! <급하다. 도망. 왜. 빨리> “아니요. 저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어요.” 카이렌은 나이트 그레이드와 용병들의 회의적인 시선을 의식하며 사내의 등 에 글귀를 적었다. 그러자 한동안 가만히 있던 사내는 한숨을 쉬며 다시 땅 에 글을 적었다. <검.> 어려운 뜻 문자인 히에라틱이었지만 기사인 그레이드는 검을 의미하는 문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 고 짐이 될 것이 뻔한 사내였지만 그의 손에 자신이 평소 음식을 먹거나 사 냥한 짐승을 손질할 때 사용하던 다용도 단검을 그의 손에 쥐어주고는 경계 를 강화하는 수준으로 사내의 경고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약 20분쯤 지났을 까 잠도 오지 않고 뭔가 예사롭지 않은 사내의 경고에 의식적으로 주위를 살피던 그레이드는 갑자기 풀벌레소리가 들리지 않고 바람한 점 없는 숲의 나무가 스치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자 머리털이 곤두섰다. “나이트 그레이드, 뭔가 다가오고 있소.” “오드넷, 함 전투를 준비하시오.” -샤악, 샤악, 풀잎 스치는 소리가 점점 더 선명하게 들려옴에 따라 일행의 긴장감은 점점 그 수위를 높여갔다. 그리고……. -꿔어어어어어어~! -카르르르르르……. “젠장 오우거다!” 지상최강의 몬스터 오우거(Ogre)였다. 그 피부는 바위인 듯 단단하고(스톤 스킨:stone skin), 10피트(약 3m)에 달하는 당치에 아름드리나무 굵기의 팔 뚝과 다리 마법내성에 자기 몸집만한 곤봉을 젓가락처럼 휘두르는 괴력은 가히 지상의 왕자다웠다. 거기에 보이는 것만 10여 마리나 되는 트롤(Troll )들이 어둠속에서 붉게 빛나는 눈동자로 으르렁대며 일행을 위협했다. “화살이 통하지 않는 상대다. 장창을 들고 스크랩(scrap)을 짜고 진형을 단단히 해라.” 용병들은 혹시나 대형몬스터를 만날 것을 대비해 준비한 장창을 들고 팔랑 크스(Phalanx) 방진형태의 밀집 진형을 형성했다. 과연 이것인 트롤들에게 는 몰라도 오우거에게 통할까 의심스러웠지만 어찌되었다 이것만이 최선이 었다. “스트렝스Strength!” “신이 여러분과 언제나 함께 계시오. 블레스Bless!” 메이지 카이렌은 공격마법이 전혀 듣지 않는 오우거를 상대하는 데에 자신 이 큰 도움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일행 중 최강자인 나이트 그레이드에게 힘 을 1.5배 정도로 증가시키는 [스트렝스Strength] 주문을 걸어주었다. 마녀 사냥에 따라나선 신관들은 저마다 이 위기를 무사히 탈출하게 할 수 있게 기원하며 용병들에게 신성주문 [블레스Bless 축복]으로 개개인의 능력을 전 반적으로 향상시켰다. 그러나 기사 한명과 서른 남짓한 용병들이 상대하기 에 오우거 한 마리만도 벅찼다. 그렇다고 트롤 10여마리를 한꺼번에 상대하 는 것도 쉬운 것도 아니었다. 다행이라면 다른 방향에서 몸을 들어낸 트롤 들에게도 오우거는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트롤들과 오우거는 서로 으르렁대며 대치하고 있었고 인간들은 그들이 서로 싸워주기만을 간절히 비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다소 약간이나마 지능이 있 는 트롤들이 뒤로 물러서자 오우거가 그 흉험한 눈길을 일행에게 돌렸다. 지금 오우거의 관심사는 트롤들이 아니라 인간들인 모양이었다. -꿔워어어어어어……. -쿵, 쿵, 쿵, 쿵, 쿵…………. 그리고 오우거는 흉성을 터뜨리며 손에 든 곤봉을 빙빙 돌리며 육중한 발걸 음으로 달려들기 했다. 그때 주문을 미리 캐스팅하고 있던 카이렌이 주문을 시전했다. “그리스Grease !” -쿠워? -쿠궁! 기세 좋게 달려오던 오우거는 그대로 미끄러지며 요란하게 넘어졌다. [그리 스Grease]주문은 바닥을 미끄럽게 만드는 1서클의 간단한 마법주문이었지만 적절히 사용하며 참으로 효과적인 주문이었다. 그리고 나이트 그레이드는 바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무거운 풀 플레이트 아머의 중갑주를 착용한 사람답지 않게 그대로 점프하며 바스타스 소드를 거꾸로 하여 오우거의 목 부분을 찍어 내렸다. -꾸웪~! 푸르스름한 검기 소드 오러(Sword Aura)를 머금은 나이트 그레이드의 바스 타드 소드는 바위처럼 단단한 스토 스킨 피부를 뚫고 들어가 오우거의 숨통 을 단숨에 끓을 수 있었다. -와아~! 잔뜩 긴장한체 오우거의 돌진을 두려운 심정으로 보고 있던 팔랑크스 진형 을 형성한체 장창을 들고 있던 용병들은 지상최강의 몬스터라는 오우거를 간단하게 제압한 카이렌과 나이트 그레이드의 활약에 자신들도 모르게 함성 을 질렀다. 보기엔 간단한 나이트 그레이드의 행동은 사실 죽느냐 사느냐의 도박이었다. 다행히 의도한 바대로 정확히 목부분을 찔렀기에 망정이지 실 패 했다면 오우거의 반격에 뼈도 못 추릴 뻔 한 모험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레이드에겐 그 방법밖에 없었다. 오우거와 드잡이질 벌이느라 지금 전력 에 타격이라도 받으면 아직도 빈틈을 노리며 붉은 눈을 번뜩이는 트롤들을 상대하는데 큰 어려움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이트 그레이드 는 전투가 아닌 도주를 선택해야 했다. -끼아아아아악……. “이런 젠장, 와이번이잖아! “여기 쟝기스 숲이 아니라 몬스터 숲이었어? 뭔 몬스터들이 떼를 지어 나 타나는 거야?” 용병들의 욕설 섞인 비명 같은 중얼거림에 반응하듯 트롤무리 뒤쪽에서 또 한 마리의 오우거의 괴성이 들려왔다. -꿔어어어어어어~! 이번에 나타난 오우거는 자신의 앞을 막고 있는 트롤들에게 곤봉을 휘둘렀 고, 트롤들은 피하느라 급급했다. “이때에요.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해요.” -탁탁! 그대 사내가 카이렌의 주위를 끌고 팔을 들어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그리 고 그 의미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의 위험을 미리 감지한 사내가 가리키는 곳은 아마도 가장 안전한 퇴로 일 것이라는 것을……. -쿠어어어어어~! -카르르르르…………. -쿵퍽! 우찍끈~! 일행은 오우거와 트롤이 무시무시한 싸움을 뒤로 하고 대부분의 짐을 그대 로 둔 체 몸을 피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앞날은 순탄하지가 못했다. *** 라혼은 자신을 돕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 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일단은 몸의 붕괴를 무슨 수를 쓰던 막아 야 하는 것이 급했다. 일단 여기가 어디인지 자신을 구한 사람들이 누구인 지 부터 알아야 했다. 다행히 그 일행 중에 마법사의 존재가 있음을 알았다 . 그래서 마법문자 히에라틱으로 대화를 시도했는데 다행히 마법사인 듯한 존재가 자신의 의도를 알아채고 등에 자신의 정체에 대해 물어왔다. 라혼은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주고는 마법사에게 몇 가지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 자신이 있는 곳은 시드그람 대륙의 최남단. 오월즈 반도라는 것이었다. 오 월즈 반도라는 지명을 생소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시드그람 대륙의 최남단 의 황무지와 정글지대 남쪽바다의 반도지방을 알고 있었다.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고, 말할 수도 없고, 냄새조차 맡을 수없는 상황 속에서 외부 상황을 인지하는 것은 오직 미약하게나마 느껴지는 피부의 자극과 육감뿐이 었다. 그리고 그 육감에 사방에서 몰려드는 마물들의 기척이 감지되었다. 라혼은 다급한 심정으로 자신을 돕는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려 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볼 수 없다고 라혼의 경고를 무시했다. 라혼은 자신에게 무기를 줄 것을 요구하고 누군가 쥐어주는 단검을 들고 설탕물에 몰려드는 몬스터들을 존재를 감지하고 그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원인은 내가 내뿜는 마기로군. 내가 내뿜는 마력에 마물들을이 취해계속 다가오는 것이야. 그렇다면…….’ 라혼은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내뿜는 마기에 취해 접근하는 마물들 때문에 선의로 자신을 돕는 사람들이 곤경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후우~! 붕괴가 가속되더라도 몸을 싸울 수 있을 정도까지는 회복시켜야해 !’ 그러자면 시간이 필요했다. 라혼은 다소간에 희생을 치르더라도 시간을 벌 어야만 했다. 어차피 자신의 감각범위에 모여든 몬스터들의 수는 상상을 초 월했다. 지금 이름 모를 숲 전체에 몬스터들이 우글거렸다. 가까운 곳에 대 형몬스터는 물론 먼 곳에 중소형 몬스터까지……. ‘내가 움직이면 나를 중심으로 형성된 고리가 깨진다. 몬스터들이 나를 중 심으로 차근차근 강력하니까 내가 지속적으로 움직이면 균형이 깨질 거야! ’ 그리고 라혼은 자신의 계획을 밀어붙였다. *** -이야압! -카울~! -크엉~! “라이트닝Lightning!” -파지직~! -펑! “이런 젠장 몬스터 서식지도 아닌데 뭐가 이렇게 많은 거야?” “피터! 피터 이 새꺄 눈을 떠! 야임마!” “헉헉헉, 트, 틀렸어요. 이미 숨이 끊어졌어요.” 오우거를 피해 도망친 그날 밤 이후 마치 지옥의 숲을 산책하는 냥 쟝기스 숲을 헤맸다. 어디를 가도 평소에는 일부러 찾아도 보이지 않는 몬스터들이 우글댔다. 다행히 위험을 미리 감지하는 존재가 있어 불의의 습격을 당한 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끊임없이 몰려드는 몬스터들은 일행의 진을 빼놓았 다. 그리고 하루 새 10명의 생목숨이 끊겼다. “그는 그대로 두고 어서 이동한다.” “뭐요? 피터를 이대로 두면 몬스터들의 한끼 식사꺼리가 되는데 묻어는 주 어야 할 거 아니요?” 은빛으로 빛나던 갑옷이 검붉은 몬스터의 피로 얼룩져있는 나이트 그레이드 의 매몰찬 명령에 방금 죽은 용병과 절친한 사이인 듯한 사내가 격렬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그런 그의 반발을 용병들의 최고참격인 오드넷이 나서며 타이르듯 말했다. “이봐, 하프, 여기서 땅을 팔 수 있는 여력이 남아 있는 사람이 있나? 가 만히 있어도 몬스터는 몰려오고, 움직여도 몬스터는 몰려오는 상황에서 시 간도 없어.” “오드넷씨.” 오드넷은 하프의 어깨를 잡고 힘을 주어 흔들어 주며 고개를 돌렸다. “메이지 카이렌 물주머니에 물 남은 것 없소?” “드세요. 몇 모금 남아 있을 거예요.” “고맙소.” -꼴깍, 꼴깍, 꼴깍. “후! 이제 살겠구만. 고맙소.” “별말씀을…….” 카이렌은 몬스터의 체액 뒤집어 쓴 용병에게 물주머니를 건네받고 얼마 남 지 않는 물을 마셔버리려다. 나이트 그레이드의 말위에 엎드려있는 사내가 물을 마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자는 듯 가만히 있는 그를 건드려 입에다 물주머니를 물려주었다. 그렇게 물을 마신 사내는 몸을 일으켜 세우 더니 가래가 끓는 듣기 거북한 목소리로 한쪽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끄륵…… 물…… 백야드…….” “어머? 말을 할 수 있었네?” 사내가 말하는 것을 신기해하는 카이렌과는 달리 급하게 도주하느라 미쳐 물을 챙기지 못하던 그레이드는 물이라는 말, 정보자체에 흥미 있었다. 격 렬한 전투를 계속하는 와중에 각자 지니고 있던 물주머니의 물은 모두 마셔 버린 지 오래였다. 더운 오월즈 지방의 기후는 조금만 움직여도 땀을 흘리 게 만들었으며 몸밖으로 배출된 수분을 보충하기 위해 끊임없이 물을 마셔 대야 하는 상황이었다. “모두 이동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백야드 정도밖에 물이 있다고 하니까 모 두 힘내라.” 그레이드의 지시 뒤로 사내의 가래 끓는 말이 이어졌다. “몬스터……크륵…다수. 조심……캭!” “이봐요! 정신 차려요.” 그리고는 검은 핏덩어리를 토해내고 그대로 말 등 위로 쓰러지자 카이렌이 걱정스러운 듯 사내의 몸을 흔들었다. 그러지 프리스트 스탄티가 카이렌에 게 말했다. “그는 아마도 자신의 몸을 스스로 치료하고 있는 것 같소. 예전에 신전에 서 요양 중인 환자들을 돌본적이 있었는데 저렇게 검은 피는 죽은피라오. 죽은피를 몸 밖으로 내보냈다는 것은 몸이 회복되어가고 있다는 증거요. 그 러니 그는 괜찮을 것이오.” 이엇스의 마녀를 잡기위해 성황청에 고용된 나이트 그레이드와 용병들은 하 루에도 예닐곱 번이나 생과 사를 오가는 전투를 치러야 했다. 부유하고 명 성이 높은 귀족이 아니면 받기 힘들다는 신관의 치료를 받아가며 조금씩, 조금씩 쟝기스 숲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사이 마녀의 거처에서 발견한 사 내는 한사람의 용병 몫을 해낼 정도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신관들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존경할만한 남자로군.” “예?” “아무래도 생명의 기운까지 뽑아 쓰는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스승님?” “사악한 기운 중간에 성스러운 기운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신성력이라 보 다 그의 생명의 기운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아. 생명의 기운을 다루는 것으로 보아 그는 대마법사로써의 재능이 있었을 거야. 그런데 저런 사내가 이엇 스의 마녀에게 잡혀있었다는 것이 이해가 되니 않는구나.” 프리스트 스탄티는 자신을 따라나서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제자에게 멀 쩡하게 움직이는 사내의 상태를 설명해 주었다. 사내가 회복하고 무기를 들 고 싸울 수 있을 정도까지 되자 일행은 큰 부담을 덜었다. 그러나 지난 사 흘간 5면의 사망자가 발생하여 일행은 신관 4명과 기사와 마법사, 그리고 여기저기 크고 작은 상처를 간작한 15명의 용병들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하 루만 더 가면 지긋지긋한 쟝기스 숲이 끝나고, 무장병력이 있는 케사로 요 새가 나온다. 더욱이 와이번(Wyvern)을 제외하고 상대하기 거북한 몬스터는 없었다. “라혼, 이제 하루만 더 가면 케사로 요새가 나와요 거기까지 가면 안전 할 거예요.” 라혼은 보랏빛의 아름다운 머릿결을 가진 메이지 카이렌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는 다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다시 카이렌의 아름다운 보라색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메이지 카이렌, 그동안 고마웠소.” “아니에요. 우리야 말로 고맙지요. 라혼이 없었다면 살아있을 사람이 몇이 나 되겠어요.” 라혼은 이들에게 차마 자신 때문에 마물들이 모여들었다는 것을 말하지 못 했다. 그리고 지금 약한 하급 몬스터들만 눈에 띄는 이유가 자신이 마기를 갈무리하여 마기에 취해 다가오는 오우거 같은 대형 몬스터가 없기 때문이 란 것을……. 그리고 케사로 요새로 향하는 마지막 하룻길은 몬스터의 습격이 없었다. 일 행은 그동안 쟝기스 숲에서 벌어졌던 입에서 단내 나게 무기를 휘두른 일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어려움이 있으면 보상도 따르는 법. 용병들 은 자신이 죽인 몬스터의 이빨이나 발톱 등을 챙겨 가지고 있었다. 이는 케 사로 요새의 사령관에게 보여주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 리고 몬스터의 이빨과 발톱은 마법시약으로 가공되어 팔리기도 하기 때문에 쓸모가 많았다. 죽을힘을 다해 도착한 케사로 요새는 무장한 군인들 뿐 만아니라 일반평민 들까지 모여 있는 규모 있는 소도시를 방불케 했다. “아니 신관님? 이엇스의 마녀가 무섭긴 무서웠나보죠? 사람숫자도 줄어들 어있고, 상당한 고생을 하신 듯한데…….” “마녀는 처리되었네. 그러니 더 이상 유아납치는 없을게야.” 우락부락한 인상에 케사로 요새의 부사령관인 피렌사는 마녀를 사냥하기 위 해 떠났던 사람들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허겁지겁 달려와 보니 모두 낭패한 꼴이라 혹시 실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갓 태어난 어 린아이를 잡아가던 마녀가 처리되었다 하자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 나 마녀만 없으면 평화로운 쟝기스 숲에서 이렇게 낭패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 무슨 일을 당했기에…….” “바로 그것에 관해서 자네에게 할 말이 있네. 베르그 남작에게도…….” “예? 무슨?” “보게.” 피렌사는 스탄티 신관이 내미는 가죽 주머니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 러자 주머니를 열자마자 섞은 내가 진동했지만 정작 피렌사는 가죽 주머니 를 재차 확인하고는 놀란 표정이 되어 스탄티 신관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이건?” “맞네 고블린의 이빨과 발톱이네. 그 외 다른 몬스터들도 있었지만 챙겨올 수 있었던 것은 이것이 전부였다네.” “그럼? 쟝기스 숲이 몬스터 숲이 되었단 말씀이십니까?” “마녀가 마지막 순간까지 뭔가를 한 모양이네, 납치된 유아들은 그것의 제 물의 되었을 테고…….” “알겠습니다. 이일은 남작님에게 알려야 되겠습니다.” 짧은 여행 *** 라혼은 케사로 요새의 비어있는 병영에서 살아남은 용병들과 같이 지냈다. 케사로 요새의 경비병과 평민들은 라혼의 모습에 기겁하며 무슨 괴물 보듯 쳐다보았지만 같이 생사를 넘나드는 싸움을 한 용병들은 라혼의 쩍쩍 갈라 지고 굵은 밧줄을 붙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에도 거부감 없이 대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용병들은 요새의 사령관이자 이 지방 영주인 베르그 남작의 요 청에 의해 다시 쟝기스 숲으로 들어가기로 되어있었다. 충분한 준비와 장비 , 넉넉한 병력이 있고 그에 따른 보수가 약속된다면 숲 근처에서 배회하는 몬스터를 처리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비록 다시는 쟝기스 숲이 있는 방향을 보고 오줌조차 싸지 않으리라 생각했었지만 말이다. “여기, 로브야. 수도사처럼 얼굴은 완전히 가리고 다닌다면 그나마 조금 나을 거야.” “고마워.” “고맙긴 뭘. 이정도 일가지고…. 그보다 자네는 몬스터 사냥에 나갈 생각 이 진짜 없는 건가? 자네의 그 특별한 능력이라면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인데 ?” “움직이지 않으면 죽을 처지여서 억지로 몸을 움직인 것인데 나보고 더 무 리를 하라는 것은…….” “아, 알았네. 그보다 받게 몬스터를 잡아서 현상금이 나왔는데 자네 몫도 챙겨왔네. 많지는 않지만 자네 몸이 회복될 때까지는 될 거야. 자네의 특이 한 능력과 그 정도 칼솜씨면 용병으로써 먹고사는데 충분할거야. 용병이 되 고 싶으면 언제든 말하라고 너라면 대환영이니까.” 라혼은 오드넷의 말에 볼을 긁적이며 씩 웃었다. 그래봐야 완전히 구겨진 얼굴이 더욱 구겨진 모습이었지만….라혼은 그가 챙겨준 작은 돈주머니에서 금화 3골드와 은화 60실버가 들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품속에 갈무리 한 후 그대로 침대에 들어 누웠다. 용병들이 사용하는 병영은 지금 텅 비어있 었다. 다른 용병들은 필로를 풀자마자 몬스터를 잡아 생긴 돈으로 돌아오지 못한 동료들의 기린다며 술집에 모여 술을 마시거나 도박 등을 하며 시간 을 보내고 있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베르그 남작이 용병들이 마시는 술 만은 그냥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어찌되었든 라혼은 혼자 병영의 침대를 차 지하고 누워 자신의 몸을 관조했다. ‘젠장, 조금만 힘을 쓰려하면 마기가 날뛰니 이거야.’ 폭발하는 마기를 억지로 내리누르고 있는 라혼은 시간이 지날수록 중간계에 적응한 몸이 그 힘을 더해간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문제는 몸속의 마력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다. 그래서 다른 마족들이 하는 것처럼 강건한 신체를 재구성할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럼 자신은 진정한 마왕이 되는 것이나 다름 없게 된다. 지금의 몸이 있음으로 해서 스스로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 고 바로 그 몸이 영혼이 마계의 사악한 마기에 영향을 받지 않게 막아주고 있었다. 그러나 마계의 군주 다크로드 샤랴즈와 약속한 100년의 약속은 라 혼으로 하여금 느긋하게 마음을 먹게 하지 못했다. 시간이 갈수록 본래 힘 을 회복할 것이지만 문제는 그 시간이란 것이었다. 이대로라면 100년이 지 나도 반에 반도 회복하지 못할 것이고, 그때도 과도한 힘을 쓰면 몸 자체가 붕괴해버릴 위험이 높았다. ‘뭔가 획기적인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라혼이 그렇게 고민에 고민을 하는 사이 나이트 그레이드가 메이지 카이렌 과 용병들을 데리고 다시 숲으로 들어갔고, 케사로 요새는 각지에서 몰려든 용병들로 들끓었다. 이 지방 영주인 베르그 남작이 쟝기스 숲이 몬스터 숲 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풀어 몬스터 토벌대를 모집했기 때 문이다. 또한 베르그 남작이 충성을 서약한 오월즈 후작 또한 휘하 기사들 을 보내와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쟝기스 숲의 끄트머리에 마이더라는 지역이 있는데 이 지역은 상인들이 지나다니는 통로 였다. 만일 쟝기스 숲이 몬스터들의 서식지가 되면 마이더의 무역로는 제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된다. 더욱이 마이더 지방은 오월즈 후작의 직할영지였 다. *** 케사로 요새는 조금 어수선한 가운데 각지의 모험가, 몬스터 사냥꾼, 몬스 터의 부산물을 얻으려는 마법길드의 마법사들이 모여들었다. 쟝기스 숲 외 각의 지형은 그리 험하지 않았고, 숲도 통행이 어려울 만큼 나무들이 빽빽 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찌 보면 용병들이나 사냥꾼들이 몬스터를 잡는데 그 다지 큰 위험 없이 몬스터를 사냥할 수 있는 사냥터 같았다. 그러나 문제는 숲의 중심부로 갈수록 대형 몬스터들이 우글거리고 이엇스 계곡지역은 대 형 몬스터 천국일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숲의 중심부로 들어간 파티는 대부 분 반 이상 살아 돌아오지 못하거나 어떤 경우엔 소식이 끊긴 예도 있었다. 다만 몇몇 파티가 미끼작전을 이용해서 미노타우로스나 트롤을 사냥하는 데 성공한 것이 전부였다. “이제 어중이떠중이들은 믿을 수 없소. 정식으로 토벌대를 구성해서 이엇 스 계곡까지 들어가 대형 몬스터들을 잡아 없애야 하오.” “…….” 베르그 남작은 보통 사람들보다 머리하나는 더 큰 덩치에 하얗게 샌 흰 머 리와 흰 수염의 노익장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노련한 전사의 외양을 가지 고 ‘라푸네’라는 다소 여성스런 이름을 가지 라푸네 데 베르그 남작은 오 월즈 지방에서 이름 높은 기사이며 황무지였던 케사로 요새 근방을 개척하 여 스스로의 힘으로 베르그 남작가를 연 사람이었다. 그리고 베르그 남작의 지위를 오월즈 후작이 인정하고, 키파이 왕국의 국왕으로 부터 정식귀족작 위를 받은 입지적인 인물이었다. 또한 오월즈 후작가의 여자를 아내로 두고 있기도 했다. “남작님의 심중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트롤이나, 미노타우로스 정도라면 충분한 병력과 실력 있는 기사만 있으면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오우거라면 다릅니다. 여기 오우거를 단칼에 잡으신 그레이드 경도 계시지만 그것은 한두 마리일 경우지요. 숲의 중심부에 들어갔다 겨우 목숨 만 붙어살아 돌아온 자들의 증언도 귀여겨 들어보아야 할 겁니다. 그들의 증언으론 오우거 하나를 겨우 상대하고 있는데 사방에서 오우거가 두셋씩 출몰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말이오? 토벌대를 구성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거요?” “아닙니다. 토벌대를 구성하는 것에 대해선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무턱 대고 숲에 들어가는 것은 신중하지 못한 일이란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럼 반대가 아니라니 일단 토벌대부터 구성하고 봅시다. 그리고 이곳은 내 땅이오. 나는 내 백성들을 지켜야할 의무가 있으니 토벌대는 내가 직접 이끌겠소.” 오월즈 기사단의 기사, 나이트 렌치와 나이트 그로얀은 막무가내로 밀어붙 이는 베르그 남작의 행사에 눈살을 찌푸리며 소태를 씹은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둘은 그를 돕기 위한 손님일 뿐이니 결정권은 어차피 그에게 있었다 . 어차피 그의 말대로 이 땅은 그의 땅이기 때문이다. “겁쟁이들 같으니라고, 후작이 자랑하는 오줠즈 기사단의 기사란 놈 들이 책상머리 앞에서 안 되는 이유만 생각하고 있는 꼬락서니 하고는……. ” 회의실로 사용하던 식당을 벗어나 캐사로 요새의 자신의 집무실에 들어온 베르그 남작은 가슴속에 품고 있던 생각을 그대로 토해냈다. “제론!” “부르셨습니까? 로드.” “가서 그레이드 경과 카이렌 양을 불러와!” “알겠습니다. 로드.” 성실하고 충성스러운 집사 제론이 자신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집무실을 나서자 베르그 남작은 책상위에 양피지 지도를 펼쳐놓았다. 그리고 지도의 한 지점 이엇스 계곡이라고 표시된 바로 그 지점에 본래 그 답지 않은 애잔 한 눈을 하고 손으로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지젤.” 누구의 이름일까? 그렇게 잠시 어떤 추억에 잠겨있던 남작은 이내 크게 심 호흡을 하며 마음을 추스르는 한마디를 했다. “나는 베르그 영지의 영주다. 지젤! 그것은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 앞으로도 그럴 것이야!” 그리고 남작은 양피지 지도위에 작은 붉고 파란 깃발이 박힌 나무토막을 올 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얼마 후 남작의 집무실에 평상복차림의 그레이 드와 카이렌이 들어왔다. “로드, 그레이드 경과 카이렌 양입니다.” “오오, 쟝기스 숲의 용사 어서 오시오.” “저희만 따로 부르신 것을 보니 무슨 어려운 부탁할 것이 있으신 모양이죠 ?” “허허허, 이 늙은이를 너무 몰아붙이지 마시오. 메이지 카이렌.” “남작님을 누가 뒷방 늙은이라고 하겠어요. 아직도 오우거 한두 마리는 문 제없다는 배포를 가지신 분인데…….” “허허허허, 그렇소이까? 어서 자리에 앉으시오. 제론, 포도주를 가져와라! ” “예, 로드.” 남작가의 집사 제론이 집무실을 나서는 모습을 본 그레이드는 베르그 남작 에게 시선을 주며 물었다. “저희만 따로 부른 이유가 뭡니까?” “나는 말을 빙빙 돌리는 재주가 없네. 그래서 본론을 말하지. 나는 자네가 탈로스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아네.” “…….” “날 도와주게.” “죄송합니다. 제가 탈로스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저는 왕을 위해 서만 탈로스를 사용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리고 탈로스는 제 고향에 있 는데 이곳까지 탈로스를 가져오려면 여기저기 보는 눈이 많습니다.” “그런가? 미안하네. 내가 너무 무리한 부탁을 했어.” 탈로스(Talos)는 궁극의 병기다. 5미터에 달하는 덩치에 어떤 마법도 통하 지 않는 항마법력, 육중한 몸체임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민첩하여 말보다 빨 랐으며, 검신만 3미터에 이르는 두툼한 널빤지 같은 장검을 수수깡 휘두르 듯 하는 괴력의 강철거인이었다. 탈로스의 상대는 오직 탈로스뿐이었다. 그 러한 탈로스를 사용할 수만 있다면 쟝기스 숲의 대형 몬스터는 실력 있는 기사 앞을 막아서는 굼뜬 코볼트일 뿐이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강력한 탈로 스이기에 그 관리가 소홀함에 있을 리 없었다. 탈로스를 사사로이 소유한 자들은 충성을 서약한 군주에게 그레이드와 같이 군주의 요청이나 자신의 가문을 보호하는데 에만 사용하겠다는 맹세를 했다. “부하들에게 듣기로는 몬스터의 접근을 미리 감지하고 위험을 경고하는 특 이한 능력이 있는 자가 있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 “그런 자가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 그자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겠나?” “예?” 카이렌은 남작이 라혼의 이야기를 꺼내자 별로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환자였다. 오드넷의 말로는 두 달째 병영침대에 누워 꼼짝하지 못한 다고 했다. 그러나 남작은 그런 그녀가 무슨 표정을 짓던지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미끼가 되어 대형 몬스터들을 조금씩 유인해서 상대하는 수가 최선이네. 그렇지 않고 무작정 숲속으로 들어가면 아까 나이트 그로얀이 걱정한대로 큰 피해를 입을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네. 하지만 몬스터의 접근을 알고 미리 대비하는 식으로 몬스터들을 차근차근 하나씩 처리해 나가면 몬스터 토벌은 쉽게 이루어 질것이지.” “하지만 그는 환자예요. 트홈으로 돌아가신 스탄티 신관님은 그가 얼마 살 지 못할 거라고…….” “그래서 그에게 직접 부탁하지 않고 그대들을 부른 것이네.” “무슨?” “그를 자네들이 구해왔다고 들었네. 그러니…….” “지금 저희 보고 목숨을 구해준 것에 대한 빌미로 그의 도움을 얻어내라는 말씀이신가요?” “부인하지 않겠네. 하지만 이해해 주게 내겐 이제 남은 자금이 얼마 되지 않네. 그렇다고 케사로 요새에 모인 용병들이 떠나면 쟝기스 숲의 마물들이 내 땅으로 넘어올 거야.” 카리렌은 남작의 간곡한 말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런 카이렌에 게 그레이드가 말했다. “메이지 카이렌, 그와 우리는 빚이 없소. 우리가 움직이지도 못하는 그를 데려온 것과 그가 있음으로 해서 우리가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동전 의 양면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오.” “맞아요. 우리가 그를 버려두고 왔다면 대부분 그 숲을 빠져나오지 못했겠 죠.”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오.” 그레이드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카이렌은 더 이상 자신에 의견을 내세울 수 가 없었다. “알았어요. 단, 그의 몸의 상태를 보아서 부탁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도록 해요.” “그거야 당연하잖은가? 아무리 다급해도 환자를 데려갈 수야 없지.” 카이렌의 말에 베르그 남작이 대답했다. *** 라혼은 그레이드가 준 상당히 질 좋은 롱소드를 허리에 차고 용병들이 나누 어 준 가죽갑옷을 챙겨 입은 후 로브를 뒤집어썼다. 그리고 참으로 오랜만 에 병영 밖으로 나섰다. “그렇게 차려입으니 노련한 전사같구만, 잘 어울려. 가세 남작이 자넬 만 나고 싶어 하니까.” 라혼은 오드넷을 뒤를 따라 몬스터 토벌대를 이끄는 베르그 남작에게 안내 되었다. 남작은 마구간에서 자신의 애마를 직접 손질하고 있었는데 나이가 들었음에도 강인한 인상을 풍겼다. “자네가 그 사내인가?” “라혼입니다.” “라혼이라? 자네의 이름이 반왕의 이름과 같군.” “…….” “어쨌듯 자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네. 그래서 말인데 자네 말을 다룰 줄 아나?” “예, 탈줄 압니다.” “좋아! 자네에게 특별히 말 한 마리를 주지 한 놈 골라봐. 그리고 그것은 특별 수당이라 생각해도 좋네.” “감사합니다.” 라혼은 남작의 권유에 가장가까이에 있는 말을 선택했다. “좋은 놈이군. 그럼 자네가 준비되는 대로 출발하세.” “예.” 마구간지기들이 남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라혼이 고른 말에 고삐와 재 갈을 물리고, 말안장을 얹었다. 라혼은 요새로 들어와 헤어진 후 두 달 만에 자신을 찾은 카이렌과 그레이 드의 부탁을 두말 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생활이란 것을 하려면 돈이 필요 했고, 또한 그들에게 마음에 빚을 갚아야할 필요도 있었다. 어차피 가만히 있는 다고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쟝기스 몬스터 토벌대는 500여명의 병력과 3인의 마법사, 4인의 신관 기사 가 남작을 포함해서 4명이었다. 그런대로 구색을 제대로 갖춘 토벌대였지만 상대는 트롤이나 미노타우로스 그리고 지상최강의 몬스터 오우거였다. “많이 나아졌군요.” “아! 메이지 카이렌.” 케사로 요새를 빠져나와 숲으로 들어서는 입구쯤에서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머뭇거리던 카리렌이 라혼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냥 카이렌이라고 해요.” “카이렌.” “풋, 그보다 몸은 어떤가요?” “점점나아지고 있소.” “다행이군요.” 카이렌은 로브를 뒤집어써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라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같이 죽을 고생을 하며 사지를 헤치고 나온 그였고, 몸 상태가 엉망인 그 를 가장 가까이에서 돌보았던 카이렌이었다. 누구 말마따나 그런 그의 모습 은 여자의 동정심 모성애를 자극했는지 카리렌은 그에게 끌리는 자신의 감 정을 깨닫고 내심 무척 방황했었다. 더군다나 스탄티 신관이 그런 카이렌의 마음을 눈치체고는 그가 생명력을 고갈시키며 무리하게 움직였음으로 곧 생명을 다할 것이란 말을 했다. 그래서 카이렌은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고 일부러 그를 찾지 않았었다. 그러나 두 달 후 다시 만난 그는 그전보다 훨 씬 나아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와 어떻게 해볼 생각은 없었지만 그레이드 의 부탁을 두말한 고 승낙하면서 한 그의 말이 가슴에 꼽혔다. “같이 생명을 걸고 싸운 사람은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진한 피를 나눈 형 제요. 형제가 도움을 청하는데 돕는 것은 당연한 것이오.” 그 한마디에 나이트 그레이드는 항상 근엄하고 차가워 보이는 얼굴에 미소 를 드리웠고, 그 즉시 그가 차고 있던 롱소드를 선물하며 말했다. “전장에서 무기를 나누는 일은 생명을 나누는 것과 같지. 받게, 나의 형제 여.” 카이렌은 그때 그 모습을 회상하면 지금도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남자는 저렇게 형제가 되는 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미안해요.” “뭘 말이오?” “그동안 무시하고 있었던 것.” “이거 충격이군? 나는 바빠서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그, 그게 아니라…….” “아니긴? 남자의 마음을 헤집어놓고 미안하다면 다요.” “…….” “풋!” 라혼은 보랏빛 머리에 보랏빛 눈동자가 매력적인 가이렌의 이지적인 얼굴에 당황 끼가 보이자 웃음을 참지 못했다. 라혼 또한 카이렌 같은 매력적인 여성에게 관심이 없지는 않았다. 자신을 성심성의껏 도와준 그녀에게 호감 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라혼은 마계로 들어가 그곳에서 상당히 오랜 시간 보낸 존재였다. 그럼으로 중간계의 모든 것이 새롭고 아 름다웠다. 수풀에 스치는 바람소리도 후덥지근함 속에 한줄기 부는 맑고 청 량한 바람도 대가를 바라지 않고 도와준 신관과 다소 숨은 의도가 있었지만 자신의 몫을 챙겨준 용병들도, 그리고 순수함을 간직한 카이렌의 영혼도… …. “이런, 절 놀렸군요.” “우헤헤헤헤헤, 얼음 마녀에게 저런 말괄량이 같은 표정을 짓게 하다니 라 혼 자네 대단 하구만.” “그러게.” 오드넷과 함은 이미 그동안 같이 부대껴 온 카이렌과 마음을 터놓고 지내고 있었다. 비록 3서클 마법사에 불과한 카이렌이지만 마법사인 이상 어디를 가던 기사보다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신분이었다. 그러나 서글서글한 카이렌은 그런 것에 스스로 구애를 받지 않았다. “얼음 마녀라니요!” “실수, 실수, 사실은 얼음 미녀지. 암!” 어쨌거나 더운 날씨임에도 로브를 뒤집어쓴 기괴한 차림을 한 라혼의 의외 의 장난에 카이렌은 왠지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오드넷과 함의 악의 없는 농담에 반응하며 행군의 무료함을 달랬다. *** 쟝기스 숲 외관에 해당하는 지역은 이미 몬스터 토벌이 마무리되어 있었고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몬스터들은 소형 몬스터들인지라 토벌대의 규모에 놀 라 접근하지 않는 듯했다. 토벌대장인 베르그 남작은 그렇게 사흘 동안 무 리하지 않게 쟝기스 숲 중심으로 행군했고 하루만 더 가면 대형 몬스터들이 출몰하는 숲의 중심 지역 있었다. “뭔가, 감지되는 것이 없나?” 라혼은 베르그 남작의 물음에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하며 남작의 시종에 게 부탁했다. “죄송하지만 당신이 가진 크로스 보우를 빌려주시겠소?” “…….” 베르그 남작에게 기사수업을 받는 소년이라기에 나이가 많아 보이고 청년이 라기에 아직 어린 시종은 말없이 등에 메고 있던 석궁을 라혼에게 건네주었 다. 라혼은 말위에서 석궁, 크로스 보우(Cross bow)의 시위를 당기고 크로 스 보우용 화살인 볼트(bolt)를 걸었다. 라혼의 단순한 행동에 그 크로스 보우의 주인인 남작의 시종은 물론 베르그 남작과 그레이드와 오월즈 후작 의 기사들도 깜짝 놀랐다. 크로스 보우를 장전하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었 다. 보통 사람은 시위를 당기지도 못하고 훈련된 병사는 크로스 보우를 땅 에 세우고 있는 아랫배로 지지한 후 두 손을 이용해서 단숨에 시위를 잡아 당겨야 했다. 물론 모든 크로스 보우가 다 그런 것이 아니라 연사를 중요시 하는 크로스 보우도 있었지만 지금 라혼이 간단하게 시위를 잡아 당겨 화살 을 장전한 크로스 보우는 대형 몬스터를 잡기 위해서 가져온 엄청난 탄성을 가진 활이었다. 라혼은 주위 사람이 놀라건 말건 크로스 보우를 들고 한쪽 방향을 향해 볼 트를 발사했다. -텅! -쿠엑! 그리고 저 멀리 50야드 밖에 숨어 있던 코볼트 한 마리가 괴성을 지르며 죽 어 나자빠졌다. 그리고 라혼의 궁사는 계속되었다. 라혼의 손에 든 크로스 보우에서 볼트가 튕겨져 나갈 때마다 어김없이 수풀에 숨어 있던 코볼트들 이 단발마의 괴성을 지르며 나자빠지고 난데없는 괴성에 긴장하던 토벌대의 용병들은 신기에 가까운 활솜씨에 절로 감탄했다. 그렇게 34개의 볼트가 허공을 가르고 34마리의 코볼트가 볼트에 급소를 맞아 절명했다. “잘 썼소. 잘 만들어진 무기요.” “자네 대단하군.” “별말씀을…. 제가 생각하기로 숲의 중심부에 있는 대형 몬스터들은 굶주 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코볼트의 시체를 걸어두면 썩은 고기를 좋아 하는 트롤이 기어 나올 겁니다.” “미스터 라혼의 말대로 시험해 보아야할 여지는 충분 합니다.” “그렇군.” 역시 사람은 뭔가는 한 가지가 있고 볼일이었다. 라혼이 힘 좋은 장정이 온 힘을 다해 요령껏 당겨야 하는 크로스 보우의 시위를 말위에서 너무나 간단 하게 당겨 연사하며 열이면 열, 백이면 백의 명중율의 활솜씨를 보이자 라 혼의 감지능력을 의심하기 까지 하던 나이트 렌치가 ‘미스터(Mr.)’라는 존칭을 붙여가며 추켜세우니 말이다. 라혼이 이렇게 잘난 척 나선 이유는 토벌대 내에서 발언권을 확대시키기 위 해서였다. 쟌기스 숲의 몬스터들은 바로 자신이 내뿜는 마기에 취해 몰려든 것이기 때문에 일말의 책임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라혼, 당신의 정체는 도대체 뭐죠? 그 정도 능력을 가지고서 마녀에게 잡 혀 제물이 될 뻔하다니 저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아요.” 해가 떨어진 쟝기스 숲에 야영준비를 마치고 무더운 날씨지만 모닥불을 피 워 음식을 조리하고 식사를 할 때 카이렌이 라혼에게 다가와 대뜸 정체를 물어왔다. 라혼은 그녀의 물음에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다. “내 이름은 라혼. 그리고 나는 마녀에게 잡힌 적이 없소. 또한 제물이 될 뻔했다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그럼, 당신이 마녀를 해치운 것이었나요?” “글쎄 그 부분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대들이 해치운 것 아니었소?” “아니에요. 우리가 마녀의 소굴로 들어갔을 땐 마녀는 이미 죽어 있었어요 .” “그럼 내가 해치운 모양이군.” “그렇게 말 돌리지 말고 말해 봐요? 그레이드 경처럼 수련여행을 하던 기 사인가요?” “아니, 나는 마녀가 소환한 마왕이요.” 라혼의 솔직한 대답은 카이렌의 원한 답이 아니었다. “흥! 됐어요. 말 하디 싫으면 싫다고 하면 되지 날 놀리다니…….” 그렇게 팽도라진 표정을 지으며 돌아서는 카이렌의 모습에 오드넷이 말을 꺼냈다. “이거 요새 내 눈이 호강하는 걸. 언제나 냉철하고 차분한 카이렌 양의 다 양한 표정을 볼 기회가 이렇게 많다니…….” “맞아요. 오드넷 대장.” “라혼, 아는지 모르겠지만 용병들 사이엔 규칙이 있지.” “과거를 묻지 마라!” 오드넷의 말에 함이 맞받았다. “이 녀석이 대장 말씀하시는데…….” “왜 대장이 대장이요?” “니가 대장이라고 부르니까!” “내가 대장이라고 불러서 대장이면 내가 왕이라고 하면 왕이겠네요!” “이게……. 저리가!” “왜 제가 가요. 대장이 가요!” 그렇게 언제나처럼 격의 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고단한 하루를 끝냈다. 짧은 여행 *** 다음날 아침. 드디어 쟝기스 몬스터 토벌대는 대형 몬스터가 출몰하는 지역 에 들어섰다. 라혼은 이미 쟝기스 숲 전체의 몬스터의 수와 종류 지금 위치 들이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아니 라혼은 원한다면 어제 만났던 작은 벌레 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는 지 알 수 있었다. 이 세상 무엇이던 어떤 물질 이던 각각의 기운이 있다. 라혼은 그 모든 기운을 느끼고 감별할 수 있었다 . 그리고 그 범위는 서방 대륙인 시드그람 대륙과 인시드, 칸에 이르는 판 게아 전역은 물론 둥근 공과 같은 땅덩어리를 넘어 신의 하늘 결계 밖 무생 의 공간 저 너머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라혼의 인간으로써 뇌의 인식능력상 판별하는 것은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다. 그러나 몬스터, 마물이라고 불리 는 족속들은 마계와 가까운 존재들이어서 마왕으로써의 라혼에게 더욱 쉽게 감지되는 존재들이었다. 몬스터들은 라혼이 마왕으로써 존재를 드러내고 마력을 나눠주어 부하로 삼 을 수도 있지만 그럴 경우 마계의 문이 열리면 인간과 생명을 위해 싸우려 는 존재들인 은둔자(Hermit), 불사의 하이랜더(Highlander) 그리고 각종파 의 템플러(Templar)등……. 비밀결사들의 공격을 받게 된다. 마계마왕군 전 위대의 역할은 인간세상을 어지럽히고 그들의 희망을 꺾어 천계 천족들과의 싸움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라 혼이 마계의 절반을 초토화시킨 이상 라혼이 마계에 편에 서서 천족과 싸우 지 않는다면 마계를 멸망하거나 영원히 마계에 갇혀 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라혼은 천계에 대한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마계와 천계는 본래 하나였다. 그러나 마계의 마왕들은 완벽한 세상을 위해 완벽한 우주에 대항하는 생명을 말살하고자 했다. 그러나 천계는 그것을 거부했다. 당연히 전쟁을 일어났고, 중재자이며 지켜보는 자인 드래곤들은 천족과 동맹을 맺고 마계를 중간계와 분리했다. 그러나 마계와 천계는 본래 하나 마계가 분리되자 천계도 같이 분리되었고 1만년마다 천계와 마계는 전투를 벌였다. 마계가 이긴다면 모든 생명의 말살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 나 천계가 이긴다면 인간이 위험했다. 마계의 마족들 다음으로 생명을 위협 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천계가 인간을 생명으로 보 고 끝까지 보호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생명들을 위해 인간을 적으로 규정 할 것인가? “모를 일이지…….” “음? 뭐라고?” “아니 그냥 혼잣말이야.” 카이렌의 반응에 상념에서 깨어난 라혼은 손사래를 치고는 말의 옆구리를 찾다. 말은 라혼의 뜻을 알고 앞으로 나아가 베르그 남작에게 다가가 말했 다. “남작님, 제가 트롤들은 유인하겠습니다. 이곳에 진형을 만들어 주십시오. ” “자네가 말인가?” “예.” “알았네. 자네 의견을 받아들이지.” “그럼 크로스 보우를 다시 빌릴까 합니다.” “크로스 보우? 칼!” 라혼의 부탁에 남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가르치는 시종 칼을 불렀다. “예, 마스터!” “미스터 라혼에게 크로스 보우를 드려라!” 베르그 남작의 시종 칼은 남작의 말에 두말하지 않고 라혼에게 등에 지고 있던 크로스 보우와 볼트가 담기 통을 건넸다. 이미 그의 실력은 똑똑히 보 았고, 아직 나이어린 칼에게 그것은 경이였다. “칼 네게는 미안하지만 크로스 보우를 그에게 주었으면 하는데 괜찮겠느냐 ?” “예, 괜찮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라혼씨가 사용하는 것이 훨씬 나은데요 뭐. 그리고 크로스 보우야 또 구하면 그만이니까요.” “그렇다는 군.” “칼이라고 했나? 고맙군. 잘 쓰지.” 라혼은 존경심이 가득한 칼의 눈빛에 크로스 보우를 들어 보이며 감사를 표 했다. 그리고 남작에게 말했다. “트롤 세 마리와 미노타우로스 다섯입니다.” “……?” 라혼은 남작의 대답을 듣지 않고 빽빽한 나무사이로 나있는 길이라기보다 어두컴컴한 동굴 같은 입구로 말을 몰아갔다. 라혼의 감각에 근처에서 배회 하는 트롤들과 미노타우로스가 포착되었기 때문이었다. 라혼은 크로스 보우 를 장전하고 의식을 확대해 제 3의 눈으로 수풀너머에 웅크린 트롤 한 마리 를 겨누었다. 그리고 크로스 보우의 방아쇠를 가만히 당겼다. -텅! -핑! -카아아아아~! 그러자 크로스 보우는 특유의 묵직한 소음와 함께 발사된 볼트는 허공을 가 르고 수풀을 꿰뚫으며 그 너머의 트롤의 어깨에 틀어박혔다. 그렇게 라혼은 숲속 길을 누비며 연속적으로 10개의 볼트를 더 날리고는 말머리를 돌려 토벌대가 진을 치고 있는 곳까지 내달렸다. 그런 라혼의 뒤를 화살에 맞아 화가 폭발해 앞뒤 가리지 않는 흥분한 트롤과 미노타우로스들이 저돌적으로 추격했다. -우워어어어어어~! -카아아아아아아~! -촤라라라락……………………. -쿵, 쾅, 쿵, 쾅, 쿵, 쾅, 쿵, 쾅…………. “트롤이다.” “진형을 흩트리지 마라! 침착해라!” 라혼이 몬스터떼를 꼬리에 달고 나타나자 토벌대는 긴장하며 손에 쥔 무기 를 더욱 세게 움켜주었다. 그리고 라혼이 몬스터들을 토벌대의 정면이 아닌 측면에서 토벌대 앞을 30야드 앞을 가로질러 다렸고 노련한 용병들과 베르 그 남작을 라혼이 무엇을 바라는 지 곧 깨달았다. “궁수 앞으로, 준비, 발사!” -핑, 피비비핑! 베르그 남작의 다급한 명령에 이미 각자 화살을 시위에 걸고 있던 크로스 보우를 들고 있던 궁수들이 앞으로 나서서 라혼을 추격하느라 정신없는 몬 스터들에게 화살 세례를 선사했다. 겨우 30걸음 밖의 표적이었다. 백명이나 되는 솜씨 좋은 궁수들이 화살은 거의 대부분 몬스터의 몸에 격중했다. 3 마리 미노타우로스는 고슴도치가 되어 움직이지 못했고, 재생능력이 뛰어난 트롤들을 꿈틀대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5마리 미노타우로스는 피 를 토하며 도주를 시도했다. “기회다! 장창병 돌격 앞으로!” -와~! 길이만도 3미터에 달하는 장창으로 팔랑크스 방진을 구축하고 있던 창병들 이 베르그 남작의 명령에 함성과 함께 일제히 앞으로 튀어나갔다. -꺄라라라라라락 3마리의 트롤과 5마리의 미노타우로스가 창병들의 굵직한 창머리에 꿰뚫려 검붉은 몬스터 특유의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미노타우로스의 경우에는 심 장이 꿰뚫리는 것으로 끝이었지만 트롤은 달랐다. 온 몸에 창이 박혀 있음 에도 가래 끓는 숨소리와 함께 붉은 눈동자를 희번덕거렸다. 역시 경이적인 재생력을 가진 트롤다웠다. 그런 트롤들의 머리를 커다란 양날도끼 배틀 엑스(Battle axe)를 든 용병이 트롤들의 목을 잘라냄으로써 숨통을 완전히 끓어놓았다. -와아~! 그렇게 첫 전투를 다친 사람도 없이 간단히 끝낸 토벌대는 트롤과 미노타우 로스의 잘린 머리를 높이들에 승리의 함성을 내질렀다. “수고했네.” “아닙니다. 그보다 몇 마리 더 유인해 올까요?” 베르그 남작은 라혼의 물음에 크게 기꺼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겠는가?” “문제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날 하루에만 트롤 12마리, 미노타우로스 9마리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만일 숲속에서 멋모르고 행군하다 트롤을 만났다면 필히 죽거나 크게 다치는 사람이 나올 것이지만 단단히 방비를 한 상태에서 덤벼드는 트롤은 인간들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트롤의 피와 체액은 힐링 포 션(Healing potion)을 만드는 데 중요한 재료가 되었으며 미노타우로스의 뿔과 힘줄 또한 쓰임새가 많았기에 해체작업을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몬스 터를 사냥할 때는 한가하던 키파이 왕국 마법사 길드에서 파견된 마법사 위 저드 오린은 몬스터 해체작업을 일일이 확인하며 품질을 체크했다. 그렇게 그 장소에서 사흘을 머물 동안 트롤 54마리와 미노타우로스 32마리 를 잡는 엄청난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아직 지상최강의 몬스터 오우거는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그리고 라혼은 이제 주위엔 몬스터가 없다는 말을 들은 라혼이 추천한 위치까지 토벌대의 주둔지를 옮겼다. “이번엔 오우거 2마리 같습니다.” “오우거라…….” 라혼은 가장가까이에 있는 오우거 두 마리를 감지하고 토벌대를 이끄는 베 르그 남작에게 경고 했다. 그러니 이미 트롤을 54마리나 잡은 토벌대였다. “알았네. 그레이드 경, 렌치 경, 그로얀 경.” “저희들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리스 주문을 준비하세요. 공격마법은 그다지 효과가 없으니까 달려오는 오우거를 그리스 주문으로 쓰러트리고 곧바로 디스펠해서 기사님들이 상대 해야 해요.” “맞습니다. 단번에 오우거를 상대하려면 목이나 연한 눈부분을 찔러야 하 는데 괴력가진 놈을 상대하는 쓸데없는 모험을 하지 않으려면 메이지 카이 렌의 말처럼 일단 오우거를 쓰러트려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카이렌의 제안에 이미 그녀와 손발을 맞춘 적이 있는 그레이드가 나서며 말 했다. 그러나 남작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우둔한 오우거를 쓰러트리는 데 마법까지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 어디로 달려들지 미리 않다면 병사들로 하여금 발을 걸어 넘어트리는 밧줄 을 사용하는 방법도 있을 텐데?” “일단 오우거를 잡는 것은 처음인데 확실한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베르그 남작은 나이트 렌치의 의견에 동의하고 마법사들로 마법을 준비하라 부탁을 했다. 이에 마법사들은 오우거가 지나갈 길목에 마법진을 그려 마 법트랩을 설치했다. 1서클 주문인 [그리스Grease]는 주문을 시전하는 캐스 트로 부터 10야드 내에서만 효과가 있기 때문이었다. 신체능력이 딸리는 마 법사들에게 지상최강의 몬스터 오우거를 열 걸음까지 접근 시키는 것은 아 주 위험한 모험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한 마리는 제가 원하는 곳까지 유인할 수 있는데 다른 한 마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한마리가 제 도발에 걸려 쫓아올 때 괴성을 지르면 다른 하나가 반응할 것이라 정확히 어느 방향으로 튀어나올지 알 수가 없다는 거죠.” “그렇군.” “어쩔 수 없죠. 나머지 한 마리는 제가 어떻게 해볼게요.” “저도 카이렌 양을 돕겠습니다.” 메이지 카이렌이 위험을 무릅쓴다고 하자 신관하나가 나서며 [그리스Grease ]주문의 [디스펠Dispell 주문해제] 주문은 자신이 하겠다고 나섰다. [그리 스Grease]주문은 1서클 마법이었음으로 체계가 다른 신관의 백마법으로도 해제가 가능했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라혼은 말을 몰고 나아가 근 처를 배회하는 오우거에게 볼트를 쏘아 보냈다. -텅! 핑! -퀴워어어어어어! 라혼의 크로스 보우에서 발사된 볼트는 정확히 오우거의 눈 속에 파고들었 고 오우거의 고통스런 괴성이 온 숲을 울리고 곧 생나무 부러지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오우거가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크워어어어어어~! -우찍끈~! 그리고 라혼은 오우거가 내뿜는 흉험한 기운에 놀란 말을 진정시키며 몸을 뺐다. 그리고 마법사들이 준비한 마법트랩으로 오우거를 유인했다. 라혼을 태운 말은 트랩지대를 아무런 이상 없이 통과했지만 눈에 뵈는 것이 없는 오우거는 3미터에 달하는 거구를 이끌고 무작정 라혼을 쫓았다. 그리고 트 랩지대를 지나는 순간 하얀빛이 폭발하며 마법주문이 발동되었다. -크워어~? -쿠궁! 육중한 덩치가 쓰러지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오우거는 바닥을 나뒹굴었고 오우거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근처에 몸을 숨기고 있던 토벌대의 용 병들이 우우 나서며 튼튼한 그물을 경쟁적으로 내 던졌다. 그리고 그물에 덥힌 오우거를 향해 장창을 든 창병들이 덮쳤지만 역시 오우거의 질긴 가죽 은 장창으로도 약한 상체기만 낼뿐 치명상을 주지 못했다. 다만 그물에 갇 힌 오우거가 더욱 흉성을 드러내며 광분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때 이쪽 오 우거를 맡은 베르그 남작과 나이트 렌치가 소드 오러를 머금은 바스타드 소 드를 휘둘러 오우거의 목을 잘라내야 했다. 그러나 질긴 오우거의 피부로 감싼 목은 단 한번에는 잘리지 않고 여러 번에 나누어 내리쳐 겨우 숨통을 끓을 수 있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오우거 한 마리를 겨우 잡을 무렵 근처에 서 배회하던 오우거 한마리가 튀어나오며 괴성을 질러댔다. -크워어어어어……. 그리고 손에 든 곤봉을 바람소리가 나도록 위압적으로 휘두르며 천천히 조 심스럽게 접근했다. -붕~! 훙~! -크르르르르르르……. 하지만 작전대로 하려면 오우거가 화를 돋울 필요가 있었다. “궁수대, 준비~! 발사!” -투둥두두둥! -크워어어어어……. -쿵, 쿵, 쿵, 쿵, 쿵, 역시 우둔하고 단순한 오우거였다. 질긴 피부에 때리는 볼트의 고통에 흉성 을 질러대며 물불 가리지 않고 저돌적으로 돌격해오는 오우거가 10야드까지 접근하자 미리 주문을 캐스팅해 두었던 카이렌은 그대로 주문을 시전했다. “그리스Grease!” -쿠워? -와장창~! 그렇게 땅에 넘어져 거대한 덩치를 일으켜 세우지 못한 오우거에게 튼튼한 그물 든 용병들이 요령껏 내던졌고 기사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신관은 나서 서 주문을 해지했다. “디스펠 매직Dispell Magic!” 그리고 다음에 나이트 그레이드가 푸르스름한 소드 오러를 머금은 바스타드 소드를 오우거의 목덜미에 정확히 박아 넣음으로써 오우거 사냥을 마무리 했다. 그렇게 그런 방식으로 서너 마리의 오우거와 40여 마리의 트롤을 처 리한 토벌대는 이엇스 계곡으로까지 진출했다. 그렇게 한 달을 사냥한 끝에 쟝기스 숲에서 몬스터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게 되자 베르그 남작을 회 군을 결정했다. 그리고 이번 몬스터 토벌에서 베르그 남작은 상당한 양의 오우거 가죽과 트롤의 체액등 전리품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몬스터들이 쟝기스 숲에 모여드는 바람에 지불해야 했던 자금을 회수하고도 남았다. 그렇게 베르그 영지의 몬스터 소동이 일단락되고 케사로 요새로 개선한 토 벌대는 각자에게 약속받은 보수와 약간의 보너스를 받고 그간의 피로를 펍( pup)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의 무용담을 이야기했다. “와하하하하…….” “그런데 말야. 그 친구가 목이 잘린 트롤이 살짝 꿈틀 대는 것에 기겁해서 땅을 대굴대굴 구르더라니까!” “맞아! 그거 나도 봤어! 나는 그 친구가 미친것이 아닌가. 했었다니까!” 라혼은 다소 과장되고 실제보다 더 우스꽝스럽게 이야기를 가공하는 그들의 입담에 입가를 일그러트려 나름대로의 미소를 짓고 술집 구석에 앉아 무슨 방법을 사용했는지 이슬이 송골송골 맺힐 정도로 시원한 맥주를 들이켰다. 그런 라혼에게 함이 대장이라고 부르는 오드넷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휴우~! 이것으로 베르그 남작 영지의 일도 끝이군. 그래 자네는 앞으로 어찌할 생각인가?” “여행을 할 거요.” “여행? 무슨 꼭해야 할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글쎄요…….” “그럼 우리 패랑 같이 가세.” “…….” 오드넷을 손에든 맥주잔을 기울이고는 말을 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우리 패에게 위저드 오린 경이 이번에 획득한 몬스터 부 산물을 키파이 왕국 마법사 길드 총본부가 있는 오리안까지 수송을 의뢰했 어. 나이트 그레이드 경이 적극 추천했다더군.” 라혼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오드넷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알았소. 나도 하겠소.” “좋아!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네. 참 그리고 이번에도 그레이드 경과 카이 렌 양도 동행하게 되었네.” 라혼은 맥주를 한잔 더 따라와서 다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왁자하게 떠들다가 주먹다짐이 벌어진 용병들의 활기찬(?)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 이렇게 흥겨운 분위기는 공허한 마계의 공간에선 절대 맞볼 수 없는 것이 었다. 마계에서는 살기 넘치는 싸움이 아니면 죽음보다 고요한 침묵만이 있 을 뿐이었다. 그것도 아니면 욕망을 자극하는 유혹을 내뿌려 의지를 시험하 는 속삭임과 라혼을 속여 이용하여하는 시도만이 끊임없이 되풀이 될 뿐이 었다. 나중에는 공허하고 어두운 공간에서 부유하는 길고 긴 침묵의 시간이 가장 좋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가장 참을 수 없는 시간은 바로 아무것도 할 것이 없던 지루한 그 시간일 것이다. ‘흐음. 하아~! 이것이 사람 사는 냄새로군.’ *** 키파이 왕국의 수도 오리온까지의 여정은 몇 번의 코볼트떼들의 습격을 제 외하고는 평탄한 여행이었다. 오리안까지 무사히 도착한 용병들은 저마다 흩어져 각자 새로운 일거리를 찾거나 이미 상당한 거금이 있었음으로 일을 찾지 않고 여자가 있는 술집을 찾아 틀어박히거나 했다. 카이렌은 마법사 길드 총본부로 들어갔고, 나이트 그레이드는 이제 그만 여행을 멈추고 고향 으로 돌아갈 것임을 밝혔다. 라혼은 오드넷과 함과 함께 오리안의 중심가에 조금 벗어난 여관을 겸한 술집에 틀어박혔다. “오랜만에 오리안에 왔는데 스카라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빌어 먹을…….” “왜? 그 여자가 널 기다리기로 약속이라고 했었냐?” “그런 약속은 안했지만 서도…….” “애라! 자식아 작작 좀해라. 작작 좀해.” “대장은 왜 날 따라와서 잔소릴 해대는 거요?” “내가 따라왔냐? 네가 잘 아는 곳이 있다며 끌고 왔지.” 술직 구석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벌써 사흘째 술이나 마시며 시간을 죽이 던 오드넷, 함, 그리고 라혼은 알게 모르게 주목을 받고 있었다. 이유는 물 론 더운 날씨임에도 로브를 깊숙이 뒤집어쓰고 얼굴을 가린 라혼 때문이었 다. 더군다나 거의 말을 하지 않으니 벙어리라는 소문도 있고, 외국의 첩자 라는 소문도 있었다. “줄리, 여기 맥주한잔, 뭐? 라혼도 없어? 줄리 두 잔이다.” 스스로 최고급 용병이라고 자랑하는 ‘떠버리 함’의 주문을 받은 가슴을 거의 반이나 내놓고 흐트러진 풍성한 드레스 차림의 진한 화장의 여자가 커 다란 맥주잔 4개를 들고 함이 있는 탁자로 다가갔다. “어? 내가 벌써 취했나? 두 잔을 시켰는데 4잔으로 보이네.” “풋! 두 잔은 주문 받은 거고, 한잔은 내가 마실 거, 그리고 나머지 하나 는 오드넷씨 거야!” “뭐야? 그게?” “한잔은 서비스라는 말이지.” “그래?” “어맛!” 함은 줄리라는 여자가 술잔을 내려놓자 그대로 잡아채며 그녀를 자신의 무 릎위에 눕혔다. “서비스 하는 김에 확실하게 하는 것이 어때?” “참아줘! 지금은 대낮이라고 해도 떨어지지 않았다고.” “뭐야? 그럼 해가 떨어지면 가능한 거야?” “생각해 봐서!” 줄리는 자연스럽게 함의 품속에서 벗어나 오드넷과 라혼 사이에 자리 잡았 다. 그것을 함이 비꼬며 투덜거렸다. “이런 젠장, 애인은 바람맞히고 중늙은이와 목석같은 놈에게 들러붙다니. ” “시끄러! 내가 어째서 니 애인이야?” “그래 잘 해보라구. 이 최고급 용병 함은 조용~히 찌그러져 맥주나 빨고 있을 테니…….” 줄리는 투덜대는 함을 무시하고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에게 눈길을 주며 물 었다. “라혼이라고 했나요. 우리 인사해요. 전 줄리라고 해요.” “라혼이다.” “어머나 벙어리는 아니네! 라혼씨는 뭐하는 분이세요?” “글쎄…….” “함하고 같이 있는 것을 보니 용병 같은데 아니었나요?” “글쎄? 그렇다고 해두지…….” 줄리가 로브를 뒤집어 쓴 사내에게 접근하는 이유는 그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서였다. 하루에도 별의별 사람들이 거쳐 가는 여관이었지만 이 사내만 큼 특이한 사람은 그중에서도 드물었다. “라혼씨는 날씨도 더운데 왜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건가요?” “왜? 내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한가?” “그만 둬, 라혼.” “함은 가만히 있어! 네가 왜 나서고 난리야!” “줄리, 정 그 친구 얼굴이 보고 싶으며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할 거야. 그리 고 쓸데없이 비명을 지르면 약속하는데 이 컵으로 네 입을 막아주지.” “흥! 이봐요. 용병아저씨 내가 왕성 파티에 나가 조금만 일에도 괴성을 질 러대는 귀족아가씨인줄 알아요?” “각오가 됐다면 상관하지 않겠어.” 함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오드넷도 코를 긁적이며 자연스럽게 고 개를 돌렸다. 그리고 라혼은 얼굴을 가릴 로브를 벗었다. “흐읍!” “허억~!” “크흠!” 줄리는 라혼이란 이름을 가진 사내가 로브를 벗자 심장이 멈추는 줄로만 알 았다. 마치 완전히 부서진 머리를 억지로 다시 끼워 맞춘 것 같은 얼굴과 붉은 피에 물든 흰자위는 정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술집 여기 저기서 라혼을 주시하던 술꾼들도 헛숨을 들이키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들은 가장가까이에 있던 줄리만큼 놀라지 않았다. 줄리는 사내가 다시 로 브로 얼굴을 가리고서야 안도에 한숨을 쉴 수 있었다. 그 일이 있은 이후로 는 줄리라는 여자는 라혼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는 일없이 한 달 을 빈둥거렸을까. 오드넷은 일거리를 알아보기 위해 오리안의 용병길드 사 무실을 찾아갔고 함은 어느새 줄리라는 여자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어 그 녀와 함께 있었다. 라혼은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명상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저녁시간 한자리에 모인 셋은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었 다. “일거리를 구했네.” “에? 대장 벌써 일하시려는 거유? 아직 벌어놓은 것이 꽤 남았는데?” 오드넷은 함의 말을 무시하고 라혼에게 얼굴을 돌려 물었다. “이번일은 전쟁이야.” “전쟁?” “잘은 모르지만 부르다 공국에서 내전이 벌어졌다는데 키파이 국왕이 부르 다의 누군가를 지원하기 위해 슘에서 의용군을 모집한다더군.” “슘? 거기가 어디유?” “몰라! 부르다를 지원하는 부대를 만든다고 하니까, 부르다로 넘어가는 길 목이겠지. 생각 있나?” 오드넷의 물음에 함은 기지개를 피며 권태로운 어투로 말했다. “난 싫수다. 돈도 제법 넉넉하게 남아있고…….” “라혼, 자네는?” “난 참가하지.” “에? 그럼? 난?” “그동안 즐거웠네. 형제.” 라혼은 주저 없이 함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장비를 챙기기 위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혼자 남겨진 함은 소리쳤다. “대장, 라혼, 아무리 그래도 줄리 하고 작별인사 할 시간은 줘야지…….” 재생의 조건 “이런 법이 어디 있어!” “참아, 함.” 오드넷, 함, 라혼은 부르다 공국으로 넘어가는 접경지역의 요충지 ‘슘’에 서 의용군에 가입했다. 말이 의용군이었지만 사실 병력을 지휘할 기사부터 일반 병사까지 전부 용병으로 이루어진 부대였다. 거의 국가간의 전투규모 를 자랑하는지라 탈로스까지 동원된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그러나 오드넷과 함은 아무런 문제없이 고용되었지만 라혼은 그 외모 때문에 고용을 거절당 했다. “아니, 생긴 걸로 싸우나? 얼굴이 다소 거북하게 생긴 게 무슨 죄라고…… .” “함, 그만해!” “라혼, 너는 화나지도 않냐?” “화나면? 여길 들어 엎을까?” “못할 것도 없지.” 라혼이 던진 말에 함이 흥분하며 동조했다. 그러나 오드넷은 함의 행동에 크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그럼 우린 여기서 작별인가 보네.” “대장!” 오드넷과 함은 이미 계약을 한 상태였다. 이대로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하 면 탈영이 되어 추적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미 병사가 된 이상 상관의 명 령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그리고 며칠 후면 부르다로 넘어간다. 그런 어쩔 수 없이 라혼과 해어지게 되는 것이다. “오드넷, 함, 난 이만 떠나겠다.” “무슨 소리야. 아직 시간이 있다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잖아.” “아니, 내게는 할일이 있어.” 라혼은 작별에 아쉬워하는 둘을 두고 슘을 떠났다. 목적지는 없었지만 키파 이 왕국이 대륙 최남단에 위치한 왕국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라혼의 발걸 음은 북쪽을 향해가고 있었다. 50골드 74실버와 기사 그레이드에게 받은 롱 소드와 숏소드, 몬스터 사냥용 크로스 보우와 베르그 남작이 준 말 한마리 라는 재산을 가진 라혼은 급할 것 없는 발걸음으로 천천히 북진하기 시작했 다. 평원을 만나면 말 등에 올라 질주하고, 숲길을 만나면 산책을 하듯 거 닐었다. ‘이 추세하면 일년정도 지나면 에텔 스페이스를 일부남아 사용할 수 있겠 어.’ 에텔 스페이스(Ether Space). 마계에서 라혼으로 하여금 차원과 공간의 마 왕이라는 존칭을 갖게 한 힘. 에텔(Ether)은 우주에 가득차있는 힘을 말했 다. 정확히 마라하자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힘의 근원적인 개념이 바 로 에텔이었다. 라혼은 에텔 스페이스는 그 근원적인 에너지를 의지에 따라 제어할 수 있는 다른 차원 공간을 말했다. 그리고 라혼은 그 에텔 스페이 스를 현 차원에 대치 또는, 치환함으로써 물질계의 모른 힘을 이용할 수 있 었다. 현재는 에텔 스페이스는 라혼의 몸속의 마력 이블 포스(Evil force) 를 억누르고 있는 상태였다. ‘이내로 마력이 소멸되기 기다리는 것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간단한 방법은 에텔 스페이스로 마력을 빨아들여 없애는 것이 최선인데 그렇게 되 면 몸이 견디지 못해. 그렇다고 한번 붕괴되었던 몸을 억지로 유지하고 있 는 상태니 몸을 단련하는 것도 의미가 없고……. 답답하군.’ 지금 라혼은 완전히 무장해제한 상태였다. 수련으로 해결된다면 수련을 하 면 된다. 그러나 수련을 하던 하지 않던 몸속에 내재된 어마어마한 마력은 그것에 구애를 받지 않고 아주 조금씩 소멸할 것이고 마력이 몸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소멸되기까지 대략 100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차라리 몸을 바꿔? 아니야, 몸을 바꾸면 그건 내가 아닌 거야. 인간 라혼 은 소멸하고 라혼의 기억을 가진 새로운 라혼이 되는 거야. 나 라혼의 영혼 에만 영향을 받는 에텔 스페이스가 라혼의 기억을 가진 다른 라혼이 사용할 수 있을 리가 없어. 그럴 바에야 100년의 시간을 그저 기다리는 것이 나아 .’ 라혼은 끊임없이 사색하고 생각하며 여행을 계속했다. 그리고 라혼의 관심 밖의 일이지만 아무래도 시드그람 대륙은 많은 것이 바뀐 듯싶었다. 자신이 시드그람 대륙을 떠날 때만해도 여행자가 여행을 하는데 불편함이 없었다.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길이 평평한 돌로 포장되어 있는 가도를 찾았지만 도처에 길이 끊겨 있었다. 어떤 때는 시드그람의 아주 중요한 가도임에도 오랫동안 보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흔적만 남아 있던 때도 있었다. 그리고 어느 지방, 어느 도시에 들어서더라도 여행자를 환영하는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나같이 귀찮은 일이 생기기 전에 빨리 가라는 투였다 . 처음에는 그저 수상해 보리는 자신의 차림 때문이거니 했지만 대체적으로 여관이 여행객을 반기지 않는듯했다. 라혼은 거기서 각 마을과 마을들이 대부분 무척 폐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라혼의 목적지가 정해지 지 않는 여행은 1년 동안 계속되었다. *** 안젤리아드 산 유리 같은 바다. 라혼은 몬타나 해를 왕복하는 여객선에 몸 을 실었다. 드디어 에텔 스페이스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단지 그것뿐 이었다. 라혼은 더 이상 의미 없는 여행을 멈추고 어딘가에 정착하고 싶었 다. 그런 와중에 하늘색 투명한 바다를 만나자 이왕이면 이 바다가 보이는 곳에 자릴 잡으려 생각했다. “우욱~!” “세나! 괜찮아?” -탁탁탁탁. 연인을 보이는 커플이 배 난간에 붙어 구역질을 하는 모습이 라혼의 시야에 잡혔다. 타인의 일에 별 관심을 갖지 않는 라혼이 그들에게 관심을 갖은 이유는 여자가 토한 오물의 방울이 강한 바닷바람을 타고 라혼이 한곳에 놓 아준 짐에 튀었기 때문이었다. 라혼은 크로스 보우 손잡이 부분에 뛰 오물 방울을 망토자락으로 닦아내고 그들보다 바람을 먼저 받는 쪽으로 이동했다 . 그런 라혼의 행동에 커플은 상당히 무안 했는지 얼굴을 붉히며 사과를 해 왔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큰 결례를 저질렀군요.” 상당히 예의바른 태도였다. 라혼은 그런 갓 스물쯤 되어 보이는 그 사내의 정중한 사과를 받으며 말했다. “아내가 배멀미를 심하게 하는 가 본데 선장에게 생강을 얻어 먹이도록 하 시오. 상당히 도움이 될 거요.” “아! 그런가요? 하지만 세나는 지금 배 멀미가 아니라 임신을 해서 입덧을 하는 중이라서 그게 도움 될까 모르겠습니다.” “축하하오.” “예? 아! 예에~! 감사합니다. 저는 로카데 차이저라고 합니다.” 사내는 라혼의 축하한다는 말에 어리둥절한 기색을 보이더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로카데 차이저라고 소개했다. “라혼이오.” “로키.” 예쁘장한 미모의 입덧을 심하게 한 탓에 다소 창백한 보기 드문 흑발 미녀 였는데 머리카락이 검어서 그런지 하얀 피부가 더욱 하예 다소 병약해 보이 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남편이 로브를 뒤집어쓴 수상한 사람과 통성명을 하자 경계하는 빛이 역력한 표정으로 남편을 불렀다. “괜찮아! 세나, 친절한 분이셔.” 그래도 역시 경계를 풀지 않는 세나였다. 그러자 로카데는 라혼에게 어색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세나가 좀 예민해서요.” 그렇게 사과한 로카데는 아내에게 돌아갔고, 라혼은 그들이 편히 쉬도록 배 려하기 위해 선실 안으로 들어가 적당한 곳에 자릴 잡고 엉덩이를 붙였다. 그리고 아까 본 그 젊은 부부를 생각했다. ‘여자는 햇볕에 타지 않고 입고 있는 옷도 고급이고 남자는 용병차림을 하 고 있었지만 예의범절에 밝은 것으로 봐서 이름 있는 기사의 종자이겠군. 그리고 신분 높은 여자와 덜컥 사고치고 최후의 수단으로 도망치는 커플인 가?’ 그리고 라혼은 그들에 대한 것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 -해적이다~! 배의 메인마스트 꼭대기에 설치된 파수대에서 견시수가 소릴 질렀고, 노스 포트 항구에서 출발해 몬타나 해를 가로질러 몬타나 반도로 가는 여객선 레 이디 아르웬의 갑판은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캡틴!” 레이디 아르웬호의 선장 바운고르스는 우현에 나타나 수평선위로 보이는 섬 뜩한 해적깃발을 망원경으로 확인하며 거기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해적선은 홀수가 날렵해서 속도가 무척 빨랐다. “일등항해사, 다른 방향에서 또 다른 배가 없는 확인하고, 손님들에게 무 기를 나눠줘서 육박전에 대비한다.” “예, 캡틴.” 해적선이 다가오는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는 체 오랜 동료이자 부관인 일등 항해사에게 지시를 한 캡틴 바운고르스는 검은 점 같은 해적선에서 여전히 눈을 떼지 않고 중얼거렸다. “망할 해적놈들이 미쳤나? 내 레이디가 사람이 많은 여객선인 것을 모르는 건가?” 해적들의 배는 속도위주의 쾌속선이다. 빠르기를 우선으로 개조된 배이니 만치 배가 크지 않았다. 일반 선박이면 최소한의 선원으로 운영되는 것이라 해적선의 해적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르웬은 여객선이다. 가끔 여자 손님이 타기도 하지만 대부분 건장한 남자 여행객이 주를 이룬다 . 그 말은 언제든 그들의 손에 무기가 주어지면 싸울 수 있는 병력이 된다 는 점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을 태우는 배라 해적들이 무리하 며 좇아올만한 가치 있는 물건이 없다는 것이다. “캡틴, 뒤쪽에도 해적선으로 보이는 배가 한천 있답니다.” “그래? 크기는?” “나베룽가형 쾌속선입니다.” “이쪽은 나베소틸레니까. 모두 150명쯤 되나? 우리 쪽은?” “캡틴까지 132명입니다. 이중 참전경험이 있는 자가 80명쯤 됩니다.” 레이디 아르웬호의 선장 바운고르스는 도주할것인지 싸울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그때 누군가 낱선 사람의 목소리가 바우고르스를 불렀다. “캡틴.” “당신은 누구요?” “나는 제프리 세나데온 햄튼이네.” “기사쇼?” 남루한 용병복장에 날카로운 인상의 갈색머리의 중년 사내 햄튼은 거친 선 장의 말투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자기 할 말을 했다. “저들이 노리는 것은 바로 내가 가진 물건이네.” “당신이 가진 물건이 대체 뭐요?” “어차피 생명을 같이할 사이이니 가르쳐주지. 마나스톤 2개와 포스스톤1개 일세.” “에엑?” 교묘한 말로 얽어매서 같이 싸우도록 종용하는 햄튼이었다. 그러나 아르웬 호의 선잔 바운고르스는 마나 스톤(Mana stone)과 포스 스톤(Force stone) 이란 말에 얼이 빠져버렸다. 그것들은 탈로스를 만드는 핵심부품이 아닌가? “내 일행은 5명의 기사와 1명의 마법사가 있네. 그리고 저들 중에도 기사 와 마법사가 있을 가능성이 크네.” “그렇겠지요. 포스스톤과 마나스톤을 중간에서 쓱싹하려는 무리들인데…… .” 일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나빴다. 그리고 아까는 그냥 지나쳤지만 기사의 중간 이름의 무게는 아르웬호의 선장에게 커다란 바위같은 무게감으로 다가 왔다. 그는 시드그람을 지배하는 다크 듀크(Dark duke) 또는 아이언 듀크(I ron duke)라고 하여 검은 공작, 강철의 공작이라고 부르는 제국의 1인자 갤 공이 파트로데스 즉 대부로있는 세나데온 일족의 이름을 가지 기사였기 때 문이었다. 하긴 그 정도 인물이니 마나스톤과 포스스톤을 취급할 수 있을 테니까 납득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바운고르스는 완전히 코가 뀌었다 는 사실 개달았다. 갤 공의 영향력은 직할영지가 있는 몬타나 반도뿐만 아 니라 신성 시드그람 제국에서도 첫 손꼽혔다. 누가 뭐래도 자타가 공인하는 제국 1인자 프리캡스가 아닌가? 물론 신성 시드그람 제국 이외의 지역에서 도 그를 무시할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었다. 그러니 뒤탈 때문이라도 레이디 아르웬의 모든 존재는 실종 돼야 하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쩔 생각이오?” “배위에선 선장의 명령이 절대적이라고 들었는데 아닌가?” 캡틴 바운고르스는 나이트 햄튼의 말에 험상궂은 한 인상하는 얼굴을 구기 며 옆에서 선장과 손님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부관이자 일등항해사 노만에게 명령했다. “젠장! 이렇게 된 이상 하나씩 상대한다. 노만!” “예, 캡틴!” “우현의 나베소틸레형 배를 공략한다. 다행히 우리 배가 풍상 측에 위치해 있는 이상 뒤쪽의 배가 좇아오기 전에 우선 한쪽을 작살낸다. 알았지!” “예, 캡틴 하지만 저놈들 배는 충각이 설치되어 있을 텐데요.”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라혼은 갑작스런 사태에 선원들의 지시에 따라 갑판으로 나섰다. 짐 속에 포함된 크로스 보우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아르웬호의 궁수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라혼은 다른 활을 다룬 경험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선원들이 바쁘 게 이동하는 통로를 열어주려 배 난간에 바싹 붙어 있었다. “여기 생명줄 받으쇼. 배가 심하게 움직일 거니까 여기 이 홈에 단단히 묶 어야 할 거요. 그리고 내가 아르웬호의 궁수대 대장이니까 살고 싶으면 내 지시에 충실해야 할 거요. 형씨들 중에 용병도 있을 것이고 군 경험도 있을 수 있지만 지금 그런 것은 모두 잊어야 할 거요.” 아르웬호의 선원하나가 밧줄을 활을 든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자신도 밧줄을 허리에 묶어 난간에 묶었다. 사실 싸움이 일어나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 아 끊어버릴 밧줄이었지만 허리를 단단히 묵은 밧줄의 감촉은 불안한 마음 을 어느 정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배가 급속기동하며 크게 휘청거릴 때 만에 하나라도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며 사기를 떨어트리는 일 을 막아주는 효과는 충분했다. “또, 만났군요. 라혼씨” “……?” 라혼은 왼쪽에서 긴장한 표정으로 말을 거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곧 아버지 가 될 청년이었다. “로키라고 불러주십시오. 모두들 로키라고 부르니까.” “전투는 처음인가?” “아닙니다. 전에도 몇 번…. 하지만 배를 타고 싸우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 니다.” 로카데 차이저, 로키라는 애칭의 사내는 무척 긴장이 되는지 라혼에게 계속 말을 시켰다. 라혼은 다소 귀찮은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건성으로 남아 그의 말에 대꾸를 해주었다. “캡틴, 놈들이 노를 꺼내 우회기동을 시도하는데요.” “알아 나도 보고 있잖아.” “…….” “노만, 침로를 죄현으로 3포인트” “좌현으로 3포인트!” “3포인트!” 선장의 지시에 부관이 소리쳤고, 조타수가 복창을 하며 키를 돌렸다. 그렇 게 반나절을 추격과 회피를 반복했지만 상대는 빠르고 민첩한 해적선이었다 . 레이디 아르웬호는 결국 두 척의 해적선이 쳐놓은 그물을 벗어나지 못했 다. “햄튼 경, 우리가 얻은 것은 겨우 십분의 시간이오. 건투를 부탁하겠소.” “으음. 레이몬드와 카츠만는 남고 나머진 나와함께 해적선에 난입한다. 그 리고 세나데나는 누가 지키고 있지?” “피터와 일란이 보호하고 있습니다.” 피터와 일란은 기사들의 종자이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체계적인 훈련을 쌓 은 만큼 제몫을 해주리라 기대 할 수밖에 없었다. “레이몬드 자네가 객실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켜주게.” “알겠습니다.” “좋아! 철가면 기사단은 무적이다. 빅토리 아이언 마스크!” -빅토리 아이언 마스크! 난데없이 터져 나온 구호에 갑판위에 나와 있는 선원들과 여행길에서 마른 하늘의 날벼락을 맞은 손님들은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곧 아르웬호에 기사 들 그것도 강철 공작의 철가면 기사단의 기사들이 있다는 사실에 흥분하며 자신들도 모르게 구호를 따라 외쳤다. -빅토리 아이언 마스크! -와아~! 철가면 기사단, 아이언 마스크 나이트(Iron Mask Knight)들이 그들 특유의 거무튀튀한 갑옷을 입은 모습을 보이자 마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인 냥 함성 이 터져 나왔다. 그런 와중에도 레이디 아르웬호와 해적선은 점점 가까워 졌다. “충돌한다!” “충돌한다!” 뱃전에 나가 앞을 살피던 견시수가 소리를 질렀고 그것을 받아 아르웬호의 일등항해사 노만이 소리쳤다. 이에 사람들을 지휘하는 선원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충돌에 대비하라는 지시를 했다. “배가 크게 요동 칠거요. 밧줄에 너무 의지하지 말고 무엇이든 단단히 잡 으쇼.” 로키는 궁수대장의 말에 배난간을 단단히 부여잡으며 중얼거렸다. “세나, 사랑해!” “…….” 라혼은 로키의 중얼거림을 똑똑히 들었다. 그리고 라혼이 탄 배는 부서지는 소리가 나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댔다. -쿵! 끼이이이익~! -와아~! “정신 차리고 좌현으로 가서 화살을 날려!” 임시 궁수대장을 맡은 아르웬호의 선원이 비명을 지르듯 소릴 질렀고 라혼 을 비롯한 궁수들은 몸을 바로하고 몸을 묶은 밧줄을 끊어버리고 좌현갑판 으로 나가 그곳에 배치된 궁수들과 함께 화살을 날렸다. 그러나 파도에 흔 들리는 배위에서 정확한 궁사가 힘들었기에 사람을 맞추기보다 해적선의 주 돛을 맞추는데 급급했다. 어떤 경우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날아 먼 바다 에 떨어지는 화살도 꽤 되었다. 그러나 배위에서 궁사하는데 익숙한 선원들 은 간간히 해적들에게 타격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쪽에서 화살을 쏘는데 해적들이라고 얌전하게 화살세례를 맞을 이유가 없었다. -탁~! 타닥~! 해적들의 궁사는 비교적 정확하게 아르웬호의 갑판에 떨어져 사람들을 위협 했다. 그러나 라혼은 짮은 시간에 3명의 해적들을 맞추며 주위를 살 폈다. 서로 화살세례를 나눈 해적들과 아르웬호 사람들은 함성을 질러 전의 를 북돋우며 갈퀴가 달린 밧줄을 던지며 서로의 갑판으로 난입하려 했다. -와아~! -빅토리 아이언 마스크! -빅토리~! 아르웬호와 날렵한 해적선이 바삭 붙자 거무튀튀한 갑주의 중무장을 한 기 사들이 해적선에 난입했고 기사들이 파르스름한 소드 오러를 머금은 바스타 드 소드를 무차별적으로 휘두르자 좁은 배에 밀집되어 있던 해적들이 ‘악! ’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피를 뿌렸다. 바다 위에서 싸우는 특성상 대부분 방어구를 착용하지 않고 무기로는 샤벨이나 망고슈등 가볍고 날렵한 무기만 을 가진 해적들은 중갑주로 몸을 보호하고 있는 기사들을 어찌할 수가 없었 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썅! 밀어붙여, 바닷물에 밀어 빠뜨리란 말이야!” -와~! 해적선의 해적선장인 듯한 자가 악을 쓰며 명령하자 해적을 들은 머릿수를 믿고 일제히 4명의 기사들에게 달려들었다. “이, 이런…….” 나이트 햄튼은 해적들이 맨몸으로 들이밀며 악으로 깡으로 막무가내로 밀어 붙이자 순간 당황했다. 자신이 베어 넘기 해적들이 흘린 피로 배 바닥이 미 끄러웠으며 그나마 파도에 일렁이니 몸의 균형을 잡기 힘든 상태에서 해적 들의 저돌적인 공격을 노련한 그를 당황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팍! 쿠엑~!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자신의 전면으로 달려들던 해적의 가슴에 적확히 틀어박힌 화살의 여력은 뒤로 퉁기듯 날려 보냈다. 그리고 그것은 나이트 햄튼에겐 짧은 순간의 여유를 주기에 충분했고 햄튼은 그 순간을 이용해 몸 의 균형을 잡고 차지(charge) 돌격을 시도할 수 있었다. 쿼럴을 날려 기사들을 위기에서 구한 라혼은 신기에 가까운 활솜씨로 해적 들을 지휘하는 해적들을 저격했다. 대담하게 라혼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 고 있던 해적선장은 이미 라혼이 쏘아 보낸 쿼럴에 눈이 관통되어 몬스터 사냥용 크로스 보우의 위력에 몸이 튕겨 바다에 빠져버린 지 오래였다. 그 래서 기사들이 난입한 해적선에는 머릿수만 많을 뿐 뒤에서 상황을 판단하 여 지시를 해줄 사람이 없어 60여명의 해적들은 단 네 명의 기사들 서슬 퍼 런 기세에 대응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양치기 개에게 몰리는 양떼들처럼 어 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나 해적선은 한척이 더 있었다. “충돌한다!” “충돌한다!” -쿵! 이번엔 대놓고 후위에 충돌한 해적선이었다. “이런 젠장 방향타가 나갔다.” “그딴 건 나중에 신경 써도 돼! 일단 놈들부터 막고 보는 거야!” 아르웬호의 선장 바운고르스는 블레이드 부분이 완만하게 휘어진 그랜드 샴 서를 빼들고 외쳤다. “바다의 쓰레기들을 무찌르자!” -와~! 바다에서 싸우는 싸움은 대부분 적함에 난입하여 난전이 이루는 것이 보통 이었다. 난전에서 승리하려면 먼저 기선을 제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 다. 그다음은 역시 머릿수였다. 그러나 단순히 해적들이 감당하기에 궁극의 병기라는 탈로스를 제작하는데 핵심부품인 마나 스톤과 포스 스톤은 너무 대단한 것이었다. 뒤에서 쫓던 해적선은 해적선이 아니었다. “캡틴, 소드 오러에요. 저것들 해적이 아니라 정식해군입니다.” 바운고르스는 자신이 적이 내던지 미끼를 덥석 물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쪽은 진짜 해적선이고 다른 한쪽은 해적으로 위장한 어딘가의 해군이었던 것이다.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기사들은 해적선 난입해서 해적들을 몰아 치느라 정신이 없었고 이쪽엔 기사들이 난입하니 피해가 막심할 것은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르웬호의 후미에 달라붙어있는 적함에서 소형보트와 뗏목 내려지고 해병들이 옮겨 타고는 아르웬호 우현에 달라붙 었다. 전면에 중갑주의 실력 있는 기사를 내보내고 소형 선박으로 우현을 노린 전법은 웬만한 훈련이 되지 않고서는 어려운 작전이었다. “젠장! 밧줄을 끊어! 저것들이 내 배위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란 말이야!” 레이디 아르웬호의 선장 바운고르스의 비명같은 명령을 비웃기라고 하는지 해적으로 위장한 해병들이 아르웬호의 간판위로 난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갑판 위는 삽시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이봐! 명사수, 그쪽은 됐어 이쪽 갑판이 위험하니까 이쪽을 도우라고. 저 기 저쪽으로 올라가면 아르웬호의 갑판이 한눈에 보일 거야! 그리고 우리는 그에게 놈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막는다.” 아르웬호 궁수대의 임시 대장이었던 선원은 라혼의 신기에 가까운 솜씨에 감탄하며 그렇게 지시했다. 그리고 규격이 맞을지 모르지만 남아 있은 쿼럴 과 화살을 그에게 몰아주고 선원이 지정한 장소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라혼은 아르웬호 갑판이 한눈에 보이는 장소에 자리를 잡고 퍼펙트 샷(perf ect shot)에 가까운 궁술 솜씨를 보이며 사람들을 도왔다. “궁수대 뭐하나! 저기 저놈을 잡아!” 난데없이 명사수가 등장에 전황을 어렵게 하자 해적선을 지휘하는 자가 롱 소드로 로브를 뒤집어 쓴 궁사를 가리키며 저격을 명령했다. 그러나 맞출 듯, 맞출 듯, 하면서도 번번히 빗나가기 일쑤였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도 한 호흡에 한명씩 나가떨어지고 있었다. “이런 젠장! 저놈 때문에 일이 틀어지게 생겼잖아! 나이트 세르겐 저 놈을 무슨 수를 쓰던 해결해!” “예!” 함장의 명령을 받은 세르겐은 거추장스러운 갑옷을 벗어 버리고 마스트에 올라 아르웬호의 후미의 미즌에 갈고리를 던져 걸고 심호흡을 한 후 그대로 몸을 날렸다. “이야아압!” 줄을 타고 아르웬호에 옮겨 탄 세르겐은 롱소드를 뽑아들고는 다른 것은 신 경 쓰지 않고 아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힌 궁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시퍼 런 소드 오러를 머금은 롱소드를 치켜들고 달려들자 라혼을 보호하기 위해 난전에 참가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던 로키가 비명을 지르며 라혼의 주의를 끌었다. “라혼씨 적이 달려옵니다.” “…….” 라혼은 이미 그의 존재를 알아 체고 크로스 보우에 쿼럴을 장전하여 그에게 쏘아 보냈다. 그러나 이미 주의를 기울이고 있던 기사는 몸을 숙이는 것으 로 라혼이 쏜 쿼럴을 피했다. 그렇게 2개의 쿼럴이 더 그를 노리고 허공을 갈랐지만 얻은 것이라곤 좌측어깨를 조금 스친 상처를 만든 것뿐이었다. 라 혼은 겁에 질려있는 로키와 그외 사람들을 보고는 크로스 보우를 내려놓고 롱소드를 뽑아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던져 갑옷조차 벗고 달려드는 기 사를 상대했다. -캉! 허공에서 떨어지며 무서운 기세로 내려치는 궁수의 일격을 맞받아친 나이트 세르겐은 뒤로 주춤 물러서고 말았다. 아무리 불의의 일격이라지만 소드 오러도 구사할 줄 모르는 상대에게 밀린 것은 무척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 다. 비록 상대의 무기를 부숴놓았지만 말이다. ‘큭!’ 라혼은 반 토막 난 롱소드를 움켜쥐고 소드 오러로 코팅된 상대의 반격에 받은 큰 충격에서 회복하려고 의식을 집중 했다. 역시 소드 오러를 마나를 운용하지 않고 맨몸으로 맞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이야압!” “큭!” 그리고 먼저 충격에서 벗어난 상대는 무서운 기세로 소드 오러를 머금은 롱 소드를 휘둘러왔고, 라혼은 그것을 간발의 차로 피하며 반도막 난 롱소드를 휘둘러 그를 위협했다. 그러자 그의 가슴에 기다란 상흔이 생기며 피가 튀 었고 그는 의외의 반격에 화들짝 놀라며 다시 한 번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그런 그의 행동은 라혼으로 하여금 틈을 발견하게 했고 라혼은 그 즉시 손에 든 반 토막 난 롱소드들 던지며 동시에 허리춤에서 숏소드를 빼 들고 앞으로 돌진했다. “어?” -챙! “컥!” 단 한 번의 수세는 승패와 생사를 갈라놓았다. 나이트 세르겐은 얼굴로 날 아드는 반 토막 난 반사적으로 쳐냈지만 그것은 스스로 한순가 시야를 가리 는 행위였고, 0초의 공방에서 바로 그것은 매우 치명적인 실수였다. 본래는 갑옷으로 보호되던 심장에 정확하게 단검을 쑤셔 넣은 상대를 생명의 기운 이 끊기는 그 순간까지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결국의식을 끈 을 놓쳐버린 그는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다. 로키가 보기에 라혼과 소드 오러를 휘두르는 기사와 싸움은 ‘투다닥’하는 사이에 너무 간단하게 승부가 갈린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라혼은 아무 일 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위치로 돌아가 퍼펙트 샷을 구사하며 해적들의 기세 를 크게 위축시켰다. 한편 너무도 어이없이 실력 있는 기사를 잃은 함장은 노성을 지르며 명령했 다. “세르게! 젠장 보르먼 태워! 태워버려…….컥!” “함장님!” 너무도 어이없는 일이었다. 분기를 참지 못하고 화를 내던 함장의 목을 악 마의 궁수가 날려 보낸 쿼럴이 관통하며 목뼈를 부러트려 즉사시킨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몸을 노출한 체 지휘를 하던 지휘관에게는 어김없이 쿼럴이 날아들었고 위장 해적함의 지휘체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제는 세불리를 판단하고 후퇴를 명령할 자들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지휘체계가 무너진 쪽이나 처음부터 지휘체계라고 불릴만한 것이 없었던 쪽이나 이젠 죽기 살기로 싸워서 판가름 낼 수밖에 없는 입장에 처한 것이다. 재생의 조건 *** 몬타나 해의 동쪽 코스타 서쪽연안에서 해상 발생한 레이디 아르웬호의 참 사는 해적의 전원과, 아르웬호의 선원과 선객 태반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아르웬호의 선장을 온몸에 상처를 대충 싸매고 아르웬호의 방향타를 수리를 독려하고 한 사람의 노획된 값비싼 무구와 장비를 분류하 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것들은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전리품으로써 배분될 예정이었다. “퍼펙트 아처, 당신이 사용하던 롱소드가 부러졌다고 들었소. 해적들에게 노획한 물건 중 당신이 가지고 싶은 것은 뭐든 가지시오.” 소드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까지 포함된 싸움에서 라혼의 저격은 아르웬호 쪽 사람들이 승리하고 살아남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선장의 제안에 불만을 품는 이는 없었다. 라혼은 선장의 말에 상당히 보물 축에 드는 질 좋은 샤벨을 골랐다. 샤벨은 세이버(saber)라고도 하는데 제 법 묵직한 칼로 한쪽에 예리하게 날이 서있는 칼이었다. 이것은 완만하게 굽은 형태이지만 찌르기도 가능 칼이었다. 아직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는 라 혼은 기사로 짐작되는 자의 소드 오러에 무기가 파괴된 경험 때문에라도 두 툼한 샤벨을 고른 것이다. 그렇게 샤벨 한 자루와 샤벨을 허리에 찰 벨트만 고르자 레이디 아르웬호의 선장 바운고르스는 의아한 듯 물었다. “방어구는 필요 없소?” “괜찮소. 그보다 내가 가지고 있던 쿼럴을 모두 사용 했는데 쿼럴은 챙기 지 않았소?” “쿼럴이라면 저쪽에 따로 모아두었소.” 쿼럴이나 화살은 소모품으로 처리를 하더라도 헐값 밖에 받지 못했다. 활의 종류에 따라 화살의 길이가 천차만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라혼 의 크로스 보우에 맞는 적당한 쿼럴은 없었다. 라혼의 크로스 보우는 대형 몬스터 사냥용이었기 때문에 쿼럴의 굵기가 굵었는데 이쪽의 쿼럴은 굵기가 라혼의 크로스 보우에 사용하기엔 가늘었다. 라혼은 크로스 보우를 버리고 해적으로 위장했던 정규해군의 노획된 물건 중 드워프의 손길이 미친 물건 이 분명한 탄성궁을 골랐다. 그리고 적당한 양의 화살을 챙겨 에텔 스페이 스에 집어넣었다. “아니 그것으로 된 거요? 크로스 보우와 일반 활과는 많이 다를 텐데?” 라혼은 캡틴 바운고르스의 질문에 탄성궁, 스프링이 보우(Springy bow)에 화살 먹여 허공을 날렸다. 그리고 라혼이 쏜 화살은 정확하게 해적선의 메 인마스트 깃대를 꿰뚫었다. 그리고 하나의 화살을 더 날렸는데 두 번째 화 살은 첫 번째 화살을 정확하게 둘로 쪼갰다. “허! 대단하군.” -짝짝짝짝! 라혼의 신기에 가까운 활솜씨에 선장의 감탄성과 손뼉을 치는 소리가 동시 에 들렸다. 손뼉을 친 사람은 3명의 기사를 이끌고 70명의 해적들을 전멸시 킨 철가면 기사단의 기사 햄튼이었다. “대단한 솜씨군. 듣자하니 소드 오러를 사용하던 검사도 한순간에 제압했 다고 들었는데 수련여행을 하는 기사인가?” “아닙니다.” “용병인가?” “그렇습니다.” 사실 햄튼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얼굴을 가린 그를 무척 경계했었다. 임무가 임무이다 보니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해적선에서 순간 밀릴 때 그가 날린 쿼럴은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으며 조사해보아야 알 일이 지만 어딘가의 훈련 받은 정규해군들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도 그의 역할이 결정적인 이상 적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정규해군까 지 동원해 물건을 강탈하려는 세력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이상 그와 같은 실력자의 도움이 무척이나 절실한 것이었다. “나는 제프리 세나데온 햄튼, 갤 공의 철가면 기사단의 부단장이네.” “라혼입니다.” “라혼, 우리와 함께 아인윌까지 가주겠나? 보수는 넉넉히 쳐주겠네.” 라혼은 햄튼 경의 의뢰를 받아들였다. 어차피 특별히 할일도 없었기 때문이 었다. *** 레이디 아르웬호는 해적과의 전투이후 닷새간의 항해 끝에 본래 목적지인 몬타나 반도 사우스포트 항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곧 겔 공의 직할 영지인 겔 지방으로 쉬지 않고 달려야 함에도 임신 중인 세나데나는 현재 절대안정이 필요했다. 그러나 햄튼 경이 가지고 있는 물건을 한 시라도 빨 리 아인윌로 가져가야 했다. 그래서 햄트 경은 라혼을 세나데나와 로카데 차이저 부부 곁에 남겨두고 자신들은 먼저 떠나기로 했다. “차이저, 세나데나를 부탁한다.” “마스터,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녀는 제 아내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햄튼 경은 기사들과 함께 사우스포트를 벗어났다. 라혼은 나포한 2 척의 해적선이 팔리고, 노획한 해적들의 물건이 처분되기를 기다리며 두 부 부와 여관에서 함께 머물렀다. 그리고 세나데나와 로카데 차이저 부부에 대 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세나데나는 검은 공작으로 유명한 다크 듀크 갤 공의 손녀였는데 그녀의 부 친은 갤 공의 셋째 아들이었다. 세나데나의 아버지는 갤 공의 2부인의 아들 , 즉 서자로 태어나 상속권이 없음으로 일찌감치 이름 있는 기사에게 보내 져 종자으로써 기사수업을 받고 자신이 모시는 기사가 모시는 백작에게 충 성을 맹세하고 기사로써 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결혼하여 일가를 일구어 세나데나를 낳고 살다가 얼마 전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리고 곧 어머니 쪽도 딸을 홀로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났는데 그녀의 부친에 종자으로 기사수업을 받던 차이저가 다른 기사를 새로운 마스터를 모시는 것을 포기하고 그녀의 곁에 남았다. 그리고 형편상 정식 결혼은 하지 못한 채 세나데나의 부친이 남긴 재산으로 생활을 하다. 아들의 부고를 전해 받 은 갤 공이 그녀와 그녀의 남편인 차이저를 보기를 원해 고향을 떠났다. 변 고를 당한 것이다. 이 사정을 알게 된 라혼은 그들 부부가 갤 공에게 이용 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본래 목적은 마나스톤과 포스스톤을 아인윌로 수송하는 것이고 그녀는 단순히 적의 눈을 속이기 위한 눈가림이었던 것이 다. 그러니 자신들의 일을 이미 누군가 눈치 챘다는 것을 안 순간 나 몰라 라 내팽개쳐놓고 자기들끼리만 아인윌로 달려간 것이란 것을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라혼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사우스포트의 ‘태양신의 쉬어가는 곳’이란 거창한 이름을 가진 비교적 규 모가 크고 깨끗한 여관의 아침이 밝아왔다. 로키와 세나는 벌써 2개월을 이 곳에서 지내며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인윌로 기사들이 중간에 무슨 일을 당했는지 오랫동안 소식인 없어 한 달 전 가진 거금을 들여 상인 길드에 편지를 의뢰했다. 그러나 지금껏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하압!” 로키는 언제나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검을 휘둘렀다. 기사가 되기 위해 종 자이 된 이후로 거의 빼먹지 않고 매일같이 수련에 수련을 거듭했다. 그러 나 로키는 가장 중요한 때,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받지 못했다. 바로 마나 를 다루는 수업을……. 실력으로써 기사로 인정받으려면 마나를 검에 코팅하는 소드오러를 사용할 수 있어야 했다. 물론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비 마나유저 기사도 있었지만 마나를 다루지 못하면 궁극의 병기인 탈로스를 움직일 수 없었다. 탈로스는 기사들이 다루는 마나, 학술적으로 뉴트럴 포스(Neutral force)라 불리는 힘을 바탕으로 작동하고, 또 그것이 아니더라도 지금 만들어지는 대부분의 마법무구들이 바로 뉴트럴 포스를 기반으로 만들어 졌다. 그렇기 때문에 기 사로써 인정받으려면 마나를 다루냐 못 다루냐는 것은 매우 결정적이고 중 요한 요소였다. 로키는 자신의 욕심 때문에 세나가 힘들어하는 것에 대해 가슴이 아팠다. 친할아버지인 갤 공을 만나지 않으려 하던 세나를 설득한 것이 바로 자신이 었기 때문이었다. 저 유명한 철가면 기사단의 부단장이 로키에게 마나를 다 루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약속했기에 세나는 할아버지를 만나고 로키자신 은 기사가 되는 마지막 벽을 넘을 수 있다는 생각에 세나를 설득했는데 아 무래도 갤 공은 세나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침울해 하는 세나의 얼굴을 볼 때마다 갤 공에겐 화가 나고 세나에겐 미안했다. “기초가 비교적 탄탄하군.” “라혼씨!” 멍하닌 상념에 잠긴 로키는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임 라혼인 것을 확 인하고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먼저 말을 걸때까지는 언제나 소 닭 보듯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그가 먼저 말을 건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시기로 보아 마나를 다루는 법을 배울 때가 된 것 같은데? 아직 마나를 다룰 줄 모르나?” “예, 그렇게 됐습니다.” “그럼 내가 가르쳐주지. 재능이 있는데 스승이 없어서 재능을 썩히는 것은 아까운 일이야!” “예? 라혼씨 그게 정말입니까?” 로키는 난데없이 찾아와 마나를 다루는 법을 가르쳐준다는 그의 말을 도무 지 믿을 수가 없었다. “대신 나중에 한 가지 부탁을 들어준다는 조건이 있다.” “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할 수 있어. 할 수없는 일은 부탁하지 않아!” “그런데 라혼씨는……?” “대충 마나 페터라고 알면 돼!” “아! 그러셨군요.” 마나 페터(Mana fetter)는 과도한 마나수련에 마나가 뭉쳐 마나를 응용하는 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했는데 말 그대로 마나를 움직이지 않게 하는 족쇄( fetter)였다. 비록 마나은 운용하지 못하지만 다른 이에게 가르침을 주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잘 들어! 나는 3분 이상 마나를 운용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충분한 이해 가 없으면 시도하지 마라. 언제 어느 때 내가 망가질지 모르니까.” “예? 라혼씨에게 그렇게 위험한 것이라면…….” “상관없으니까. 이렇게 제안을 하는 것 아닌가.” 라혼은 동방의 칸 대륙의 내공심법을 그에게 전수했다. 시드그람 대륙 기사 들의 마나 운용법은 칸 대륙의 선천지기(先天之氣)를 수련을 위주로 한 선 천진기(先天眞氣)였다. 시드그람 식의 표현으로 뉴트럴 포스가 바로 선천진 기였다. 생명체가 가진 본연의 힘임으로 마법사의 마법주문과 반발하는 칸 대륙의 여타 내공심법과는 달리 마법력과 반발하지 않고 잘 조화되는 유일 한 힘이 바로 선천진기였다. 사실 마법사도 이 선천진기를 수련해 그 힘을 바탕으로 외부 대기에 흩어져있는 마나를 가공해 주문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 그러니 마법사와 기사의 힘은 같은 생명 본연의 힘에 기반 함으로 서로 반발하지 않고 잘 조화를 이루는 것이었다. 라혼이 로키에게 전수한 내공심법은 체계화된 동방 대륙의 선천지기를 수련 하는 선천기공 중 가장 단순한 삼재기공(三才氣功)이었다. 그 성취가 가장 더뎌서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는 수련기간이 무척 길었다. 하지만 그것을 전수하는 자는 다름 아닌 라혼이었다. 지난 2개월간 마력이 소멸한 만큼의 여력이 생긴 라혼은 이제 배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세나를 보고 한 가지를 계획했다. 몸속의 마력을 에텔 스페 이스로 순간 빨아들이고 갑작스런 힘의 이동에 붕괴하려는 몸을 그대로 두 고 유체이탈를 해서 아스트랄 바디(Astral body) 상태에서 중심세포를 임신 한 세나의 자궁에 이식한다는 계획이었다. 어머니의 자궁은 또 하나의 세계 나 다름없다. 또 당분간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되겠지만 태아는 절대적으로 보호를 받는다. 라혼은 과거 황당하게도 어려지는 경험을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몸이 붕괴되는 것을 느꼈고, 아주 잠시지만 자신을 인지 하지 못했던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라혼은 자신의 이름인 라혼을 잃고 싶지 않았다. 더 정확히 라혼이라고 불리는 이름에 약속된 권 능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라혼이란 이름에는 차원과 공간의 마왕 으로써의 권능과 신이 약속한 ‘신의 전사’의 권능이 모두 포함된 것이다. 라혼이란 이름은 마왕과 신의 전사로써의 이른 바 정체성(Identity)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세나에게서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지을 권리 가 있는 대부가 되려는 생각에 미치게 된 것이었다. 아기의 아버지인 로카 데 차이저에게 그가 간절히 원하는 마나를 다루는 기술을 가르쳐주어 그것 에 대한 조건으로 아이-자기 자신의-에 이름을 ‘라혼’이라고 짓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금 무리를 하여 약간의 여유가 생긴 에텔 스페이스을 이용하면 흡성대법(吸性大法)과 대기운기법(大氣運氣法)에 따라 타인의 내 재된 기운을 임의로 움직일 수 있을 정도는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 라혼씨의 가르침은 언뜻 너무 간단해서 의아할 정도였다. 세나의 아버지이 기도한 마스터가 겨우 이런 호흡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마나수련법은 너무나 간단했다. 라혼씨가 가르쳐준 방법이란 것은 숨을 들이쉬고, 멈추고, 내쉬는 이 세 가지뿐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처음뿐이었다. 들이쉬고, 멈추고, 내쉬는 단순한 호흡을 끊임없이 이어지며 타이밍을 맞춰서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라혼씨의 말대로라면 언 제 어느 순간에도 호흡을 잃지 않으며 특이하고 일정한 타이밍을 맞춰야 했 기 때문이다. 처음엔 의식적으로 나중엔 무의식적으로도 그 타이밍을 놓치 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편안한 명상을 유지하는 상태로도 타이밍을 놓치기 일 수였다. 그때마나 어떻게 알았는지 라혼씨의 끔찍한 호통소리를 들어야 했다. “정신 차려! 타이밍을 놓치면 그것은 그냥 숨 쉬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 그리고 가끔 허공에 ‘붕!’뜬 상태를 경험했는데 그것을 경험하고 깨보면 그때마다 라혼씨는 전신이 땀범벅인 모습으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러나 로키는 더없이 상쾌하고 몸속의 넘치는 힘 느꼈다. 그렇게 100여 일 동안 끊임없는 수련을 한 덕에 아주 잠시지만 소드 오러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훌륭하군.” 소드 오러로 코팅된 롱소드로 검술 연습용 더미를 완전히 깨끗하게 양단한 로키는 감격의 겨운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롱소드를 바라보았다. “라혼씨, 아니 마스터 덕분입니다.” “좋아! 그럼 대련한번 해볼까?” “좋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쉽게 당하지 않을 겁니다.” 라혼은 로키에게 마나운용법 뿐만 아니라 보법(步法), 스텝(step)도 가르쳐 주었다. 시드그람의 기사들은 중갑주로 중무장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에 검술 자체도 묵직한 파괴력을 위주로 발달했다. 즉 날카롭게 베거나 급소를 찌르기보다 쳐부숴서 제압하는 것을 선호했다. 당연하지만 그러한 파워 소 드는 체격이 좋고 힘 있는 기사가 유리했다. 로키의 체격 또한 보통사람들 보다는 훌륭했지만 기사치고는 왜소한 편에 속했다. 아무리 마나를 다루는 마나유저가 되어 소드 오러를 사용한다 할지라도 체격의 차이는 분명히 존 재했다. 그래서 라혼은 한 달 전부터 로키와 대련을 통해 강력한 일격을 흘 려 상대의 균형을 무너트리는 검술을 암암리 전수했다. 그리고 그러한 검술 을 사용하는 데 필수적인 특유의 가벼운 스텝은 당연히 가르쳐야했다. 강력 한 일격에 적을 제압하는 공격 위주로 한 여느 시드그람 기사들과 다른 수 비를 생각한 스텝을……. -휘이~! -촤아~! -끼이익~! 라혼과 로키의 대련은 칼이 맞부딪치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몸을 뒤로 빼서 피하거나 역동적인 몸놀림으로 산대의 공격을 흘리고 허점을 노리는 대련이었다. “갑옷으로 온몸을 둘러싼 적에게 치명상을 안기려면 피하면서 친 공격은 그다지 효과 없다. 문제는 균형이다 상대의 스텝을 엉키게 해서 균형을 빼 앗는 것이 중요하다.” “압니다.” “알기는 뭘 알아!” 라혼은 로키의 물러나려는 기색을 읽고 거기에 힘을 더 보태줘서 그의 균형 을 흔들리게 했다. 그리고 반동으로 힘껏 찔러오는 로키의 검을 ‘주욱!’ 잡아당기듯 옆으로 흘리며 오른발을 로키가 디뎌야 할 땅을 선점했다. 결과 는 극명했다. “어어~!” -덥석! 균형을 읽고 땅을 구른 것이었다. “자기기술에 신경 쓴 나머지 정작 상대의 전략을 보지 못하니까 그런 거야 ! 하지만 나름대로 훌륭해. 기술 자체가 익숙하지 못해서 의식해야만 펼칠 수 있으니까. 기사가 똑같은 동작을 평생 반복하는 이유는 무의적으로 연습 한 동작이 자연스럽게 사용되기 위해서야! 그래야만 자신이 무슨 기술을 쓸 까 신경 쓰지 않고 상대에 맞춰 그때그때 응용하는 것이니까.” “후우~! 마스터의 검술은 혹시 고대 기간테스들의 카마리에 검술 아닙니까 ?” 라혼은 로키의 질문에 쓰러진 그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워주며 말했다. “카마리에 검술이라……. 향상된 카마리에 검술이다.” “그렇군요. 배우기가 까다로워서 실전된 검술이라고 들었는데 과연 그렇군 요.” “카마리에 검술 같은 경우 이끌어주기 대련이 없는 이상 발전이 없는 검술 이지 공격일변도의 기술을 힘 있게 쳐내기만 하면 되지만 상대에 맞춰 수비 를 생각한 카마리에 검술은 대전자의 반응을 항상 생각해 두어야 하기 때문 에 다양한 실전경험이 무척 중요하지 하지만 나의 카마리에 검술은 스텝을 보완해서 상대가 먼저 움직이기 전에 상대가 그렇게 밖에 움직일 수 없게 만드는 좀 더 세련된 검술이다.” 로키는 라혼의 말에 충분히 수긍했다. 상대가 뭔가 하기를 기다리기보다 먼 저 흔들고, 단순한 공격 패턴을 케이스별로 분류해 거기에 맞춰 자연스럽게 대응하는 법은 확실히 위협적인 고급기술이었다. 물론 나중에는 케이스 바 이 케이스 형태의 어떠한 스타일의 상대도 요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궁극 적이 목표였지만 그것은 모든 동작이 몸에 완전히 익어 소화가 완전히 끝난 후의 일이었다. “로키!” “세나! 왜 나왔어? 바람이 찬데.” 로키가 생각을 정리한때 배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검은 머리가 인상적인 세나가 남편을 불렀다. 이제 그녀는 넉 달 후면 출산이었다. 여행을 떠난 얼마 후 임신한 사실을 알았고, 타향인 사우스포트의 여관에서 5달을 머무 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할아버지인 갤 공에게 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리고 해적들은 처리하고 기사들 몫까지 받은 돈도 얼마 남지 않 았다. “로키, 집으로 돌아가자. 나는 낫선 곳에서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아.” “하지만 세나, 그 몸으로 여행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야.” “아니 갈래 집으로 갈래.” “세나데나…….” 로키는 막무가내인 세나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몰라 도 손녀인 세나를 반년가까이 아무런 언급도 없이 내팽개쳐 둘 수는 없는 것이었다. 로키 또한 갤 공이 원망스러운 마당에 태어나서 처음 친 할아버 지를 만날 기대에 부풀었을 세나의 마음이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지 짐작하 고도 남았다. “알았어, 세나. 카고네로 돌아가자. 내가 항구에서 남쪽으로 가는 배가 있 는 지 알아볼 깨.” 로키는 지금 남아있는 돈으로 과연 여행자금이 충분할지 걱정스러운 마음을 접고 남쪽으로 가는 배편을 알아보기 위해 그날은 하루 종일 부두를 기웃 거려야 했다. 그리고 로키에겐 익숙한 배한척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레이디 아르웬호였다. 그러나 배에서의 안 좋은 기억은 그 배에는 부 탁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게 누구야? 미래의 아버지 아니야? 아니 이미 아버지인가?” “글쎄, 겨우 5달 만인데 벌써 해산했으려고?” “그거야 물어보면 알 일이지, 어때 그 예쁜 미인 아내가 아이를 낳았나?” 레이디 아르웬호의 선원들이었다. 5달 전에 참혹했던 일을 이미 기억에서 지웠는지 상당히 밝은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아니 아직……. 아직 서너달은 너 있어야 합니다.” “거봐 내 뭐랬어!” “근데 다크 듀크는 만나보았나? 진짜 소문대로 눈빛만으로 상대를 위압하 던가?” “그래 맞아 자네 아내는 강철의 공작에 손녀라고 했지? 그럼 자네도 대귀 족이 된 건가?” “아닙니다. 그간의 사정이 있어서…….” 로키의 어색하고 곤란한 표정에 선원들은 그에게 뭔가 말 못할 사정이 있음 을 알았다. 그래서 그에 대해선 더 이상 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부두에는 무슨 일로 왔나? 말해봐! 우리가 도울 일이 있으면 뭐든 도와주지.” “그래 맞아! 생사를 같이한 동지인데 그 정도야 못하겠어?” “그게, 저, 사실은 세나와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배편을 알아보고 있었습니 다.” “고향? 고향이 어딘데?” “바보야! 일단 노스포트로 가야 하니까 남쪽이지!” “그런가?” 로키는 그들에게 임신한 아내와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연을 털어놓아다. 그 리고 그것은 의도하지 않게 갤 공을 비롯한 귀족들의 성토하는 장을 만들었 다. “알조다, 알조야 서자가 낳은 손녀보다 물건이 더 중요했었단 말이군. 물 건을 얻으니까 손자고 뭐고 내팽개쳤다는 소리잖아! 그것도 아기를 밴 손녀 를…….” “귀족들 하는 짓거리가 다 그렇지 뭐. 어쩌면 그게 자네에게는 잘된 일일 수 있어.” “그건 뭔 소리야?” “사실 귀족영애라는 것들이 별건가? 본인에 의사와도 상관없이 여기저기 팔려 다니는 신세인데 임신을 하지 않았으면 강제로 이별하고 이 친구 아내 는 갤 공의 친손녀라는 타이틀로 누군가에게 시집을 보내버렸겠지.”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배를 타기 전에 용병짓거리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땐 애송이라 몬스터 사 냥이나 전쟁에는 참가하지 못했어. 그래서 한 것이 가출한 귀족 계집아이 좇는 일이었어.” “그때도 애송이고 지금도 애송이고.” “이자식이 형님 말씀하시는데…….” “그래서 가출한 아가씨 뒤꽁무니만 쫓아 다녔다는 거야?” “그래 용병질을 딱 2번 했는데 2번 다 비슷한 의뢰였어. 처음에 아버지가 정한 혼처가 싫다고 무조건 도망친 계집애였는데 귀족영애만 아니었으면 어 휴~!” 선원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울화가 치미는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이 야기를 계속했다. “그런데 차라리 처음의 그 싸가지 없는 계집에가 나았어. 나중에 받은 의 뢰는 어휴~! 서로 간절히 사랑하는 연인과 도피를 한 케이스인데 그 부모라 는 작자들이 둘을 강제로 떼어내는 모습에 일이고 뭐고 당장 칼을 뽑고 싶 은 심정이었다니까. 그러다가 다음 의뢰가 상품수송이었는데 육로가 몬스터 의 출몰로 끊겨 배를 탔지. 뭐 그 후로는 ‘주욱~!’ 뱃놈이 되었지” “너도, 참 파란만장한 인생이구나!” “뭐, 그렇다는 거지. 그리고 미래의 젊은 아버지!” “예?” “너희라면 우리 선장님이 싼값에 노스포트까지 보낼 수 있는데. 우리 배에 타지? 사흘 뒤쯤 출발이라고.” “그래 그때 그일 때문에 손님이 없어 배를 화물선으로 개조한 탓에 그전보 다 좀 못하지만 둘쯤이야 문제없다고……. 정 그대 그 일이 마음에 걸린다 면 어쩔 수 없지만.” “아, 아닙니다. 저희야 고맙죠.” 로키는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싼값’이란 말에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리고 자신이 머무는 여관을 알려주었다. 선원들이 사흘 뒤라고는 했지만 출 항날짜는 전적으로 선장의 권한이었기 때문에 선원들은 정확한 날짜와 시간 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레이디 아르웬호는 사흘 뒤가 아닌 나흘 후에 사우 스포트를 출항했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행에 라혼이 동행하고, 아 르웬호의 선장 바운고르스는 세명의 뱃삯을 받지 않았다. 재생의 조건 *** “페펙트 아쳐가 아르웬호에 같이 탑승했단 말이지?” 대머리에 사선으로 깊이 팬 왼쪽 눈이 인상적인 포렌데 해의 악명 높은 해 적 캡틴 바보사는 친동생이 바조가 죽었다는 소식에 불같이 진노했다. 그다 지 사이가 좋지 않고 관계가 소원한 나머지 몬타나 해에 틀어박혀 있던 동 생이었다. 그러나 어찌되었던 피를 나눈 동생이었다. 그러므로 피의 복수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일을 벌인 장본인들이 검은 공작의 철가면 기 사단이란 사실을 알고 복수를 해주려는 계획을 접었어야 했다. 그런 와중에 사우스포트의 술집에서 해적선장을 퍼펙트 샷으로 살해한 궁수에 대한 소 문이 캡틴 바보사의 귀에 들렸다. 그리고 참으로 알맞게도 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배가 값비싼 모피를 실고 사우스포트를 떠났으며 거기에 동생 을 죽인 원수인 페펙트 아쳐가 같이 탑승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포렌데에서 몬타나까지 와서 헛걸음 할 줄 알았는데 적당한 먹이를 실고 우리 코앞을 지나고 있단 말이지…….” “그렀습니다. 캡틴!” “피의 빚은 피로 받아내야 갰지?” “그리고 약간의 수고비도 챙겨야죠.” 코가 잘려나가 오크를 닮은 얍삽하게 생기 사내의 말에 캡틴 바보사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씩 웃고는 허리춤에 시미터(Schimitar)를 뽑아들고 외쳤다. “피의 복수를!” -복수를! -호우! 호우! 몬타나로 원정을 온 포렌데 해적들은 캡틴 바보사의 출정명령에 뱃사람 특 유의 함성을 지르며 전의를 다졌다. *** 로키가 고향으로 갈 배편을 구하고 가장 아쉬웠던 것은 라혼과 헤어져야 한 다는 것이었다. 철가면 기사단의 기사들이 자신들 받은 전리품을 일부를 그 에게 양도하는 것으로 그와 계약했지만 라혼의 실력으로 볼 때 그를 근 반 년가까이 잡아두기에 한참 모자란 금액이었다. 그리고 로키는 그에게 실전 되었던 카마리에 검술까지 전수받았으니 더 이상 그에게 요구하는 일은 너 무 염치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로키를 안타깝게 한 것은 조금만 더 그의 가르침을 받고 싶은 욕망이었다. 그런데 마스터 라혼은 당연하다는 듯이 선뜻 동행을 제의했고 로키는 앞으로도 당분간 계속 그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뛸 뜻이 기뻤다. “나이트 차이저, 앞으로도 계속 북풍이 불어올 거야. 침로를 남쪽으로 향 하고 있는 우리로썬 바람을 완전히 등에 두고 달리는 것이니까 순풍에 돛단 셈이지.” “선장님, 저는 아직 기사가 아닙니다.” “그거야 소드 오러를 사용할 줄 아는 마나유저니까 지금 당장 어디 가서 기사로 행세해도 누가 뭐라 그러겠나?” 캡틴 바운고르스의 말은 확실히 틀리지 않았다. 사실 마나유저는 어디를 가 든 환영받는 존재였다. 굳이 기사단에 속한 정식기사 레귤러(regular)가 아 닌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프리 나이트(free knight)로 활동해도 기사로써 의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보다, 페팩트 아처에게 검술 수업을 받았다고?” “그렇습니다.” “그럼 그는 수련 여행 중이었던 기사였던가? 사연이 많은 사람 같던데?” 로기는 선장의 물음에 마스터의 신상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 지 고민할 때 그를 찾는 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키!” “오! 차이저 부인.” 세나였다. 세나는 아르웬호의 선장이 남편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인사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선장님. 좋은 아침이네요.” “바닷바람이 무척 찬데…….” “아니요 너무 선실에만 있었더니 답답해서요.” “하긴 신선한 바람을 쐬는 것도 좋지요. 크게 불편한 점은 없으십니까?” “괜찮습니다. 오히려 전보다 더 편하더군요.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 “허허허허,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예의바른 사람은 어디서나 환영받기 마련이었다. 전에는 다른 손님도 있고, 그녀가 입덧을 심하게 하는 바람에 서로 인사를 나누지 못했지만 지금 보 면 현숙하고 고아한 귀부인이 따로 없었다. “세나 괜찮아?” “괜찮아. 그런데 라혼씨는?” “마스터는 저위에 있어!” 세나는 로키가 가리키는 하늘 위를 올려다보았다. 로브를 뒤집어쓴 그는 아 르웬호의 메인마스트 가로 돛, 스팽커 붐(Spanker boom)에 서있었다. “라혼씨는 참 이상한 사람이야.” “응? 뭐가?” “그전부터 느낀 건데 라혼씨는 나를 피하는 것 같아.” “그래? 마스터가 원래 과문한 사람이잖아. 특별히 세나만 피하는 것이 아 닌데 뭐.” “그런가?” 세나는 스팽커 붐에 서서 바람을 맞으며 바다를 바라보는 그에게 눈을 떼고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남편에게 물었다. “그런데 로키는 이제 기사가 된 거야?” “에헴! 기사로써 장비만 챙기면 완벽한 기사라고…….” “대단하네….” “그럼 누구 남편인데. 앞으론 Sir. 로카데 차이저라구! 그리고 세나는 세 나데나 차이저 부인이고….” “그런 말은 결혼식 올리고 하는 것이 어때요, 차이저 경?” “…….” 로키는 세나의 말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7살 때 세나의 부친인 나이 트 슐레 세나데온 콰이스 경의 시동으로 그에게 기사수업을 받기 시작할 때 세나를 처음 만났다. 그리고 2년전 마스터 슐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그 후 반년도 1년도 되지 않아 콰이스 부인마저 돌아가셨다. 그렇게 이세상에 세나만이 홀로 남게 되었는데 그런 그녀를 끝까지 지킨 이가 소꿉친구이기 도 한 로키였다. 그리고 그 둘은 자연스럽게 연인이 되었고, 부부가 되었다 . 즉 만인의 축복을 받아야할 결혼식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숲속에서 조용하게 이루어졌다. 그때 로키는 언젠가는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겠다고 세나에게 약속했었다. “그럼, 여기서 결혼식을 올리면 되잖아!” “누구?” “노만씨!” “아하하하……. 엿들어서 미안하게 됐군. 하지만 좁은 배안이라고 도란도 란 이야기하는 것도 다 들리게 되어 있어. 그러니까 우리 잘못 만은 아니라 고…….” 갑판 바로 밑 선창에서 카드도박을 하고 있던 선원들이 어색하게 미소를 지 으며 손을 흔들었다. “우릴 좀 도와주는 셈치고 레이디 아르웬호 갑판에서 결혼식을 올려라. 결 혼식은 성스러운 일, 성사고 갑판에서 성사가 벌어진 배는 언제나 신의 축 복을 받거든, 그렇지?” “어? 마, 맞아!” 그런 미신은 없었다. “살벌한 일도 있었고 하니까 액땜하는 셈치고 어때? 푸르른 바다위에 떠있 는 배에서 축복받는 결혼식이라면 옛날이야기에서나 나올만한 멋진 결혼식 이 될 거야!” “그래, 재미있을 거야.” 로키는 뭔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면서 세나의 의견을 물었다. “선상결혼식이라……. 정말 낭만적이지 않아?” “세나? 진짜 할 거야?” “바다에서의 선상결혼식이라구. 아! 로맨틱해…….” 세나는 고지식한 면이 있는 로키에게 결혼식이야기를 꺼낸 것을 후회했다. 사실 숲속에서의 둘만의 결혼식도 요정의 축복을 받은 것 같아 참 좋았었다 . 자신은 그것으로 만족했는데 로키는 축하해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이유로 언제나 미안해했다. 시간이 흘러 곧 아기까지 낳을 마당에 그런 것은 다 잊 은 줄 알았는데 로키는 아직까지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 부러 과장하며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아주 쬐끔이지만 선장이 주례를 보는 선상결혼식에 대한 기대로 있었다. “좋아! 세나 양이 허락한 이상 밀어붙이는 거야!” 아르웬호의 일등항해사 노만은 이상한 곳에서 전의를 불태우며 손바닥을 비 비고서는 선장실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날 밤. 환한 보름 달이 뜨고 밤하늘엔 요정들의 마법가루가 뿌려지는 시간 바람 한 점 없는 잔잔한 몬타나의 바다위에 떠있는 배에서 신랑과 신부가 서로 마주보며 결 혼의 의식을 치루었다. “에헴! 에, 또. 레이디 아르웬호의 선장으로써 고대로부터 내려온 전통에 따라 두 선남선녀의 결혼식을 주재합니다.” “…….” “신랑은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그녀가 당신의 아내임 당당히 말할 수 있 습니까?” “예.” “그럼 포세이돈에게 말하십시오. 그녀 세나데나가 당신의 아내임을…….” “슐레 세나데온 콰이스의 딸 세나데나는 포르데 차이저의 아들인 로카데 차이저의 아내라는 것을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당당히 밝힙니다.” “신부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증언한 그의 말을 모두 인정합니까?” “예.” “남편과 아내는 서로 입맞춤을 나눔으로써 그것을 증명하십시오.” “…….” “나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대신해서 그의 이름으로 세계의 바다가 모두 마르는 그 순간까지 오늘의 이 맹세가 기억될 것임을 선포합니다.” 선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치러진 선상결혼식은 선장이 깨끗한 물을 신랑과 신부의 눈썹 사이에 찍어 바름으로써 끝이 났다. 그리고 선원들은 그들의 결혼식을 빌미삼아 맥주를 마시고 음식을 먹으며 흥겨운 잔치를 벌였다. 그 리고 잠시 가라않았던 북풍이 불기 시작하자 포도주잔을 들고 있던 바운고 르스 선장은 혼잔 말인 듯 중얼거렸다. “좋군. 성사가 무사히 끝난 후에 순풍이 부는 것은 좋은 징조다.” 흥겹게 먹고 마신 다음날 아침 레이디 아르웬호의 선원들은 아직 잠에서 깨 어나지 못했다. 다만 밤새 불침번을 서던 노만과 선원 벤, 그리고 라혼만이 깨어있을 뿐이었다. “흐아아아합! 치사하게 의리 없는 놈들 같으니라고. 껀수를 만든 게 누군 데 이 몸 불침번을 서야 하는 거야!” “일등항해사님, 저기 뭔가 보이지 않았어요?” 노만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졸음을 쫒기 위해 투덜거리다 벤의 말 에 하품을 할 때 동반되는 눈물을 닦아내고 전면을 보았다. “음? 뭐지?” 엷게 깔린 새벽안개 너머로 살짝 비치는 실루엣은 분명 배였다. 노만은 즉 시 망원경을 꺼내 배의 메인마스트에 인식 깃발을 확인했다. “처음 보는 문장인데? 벤, 선장님과 애들 깨워 아무래도 수상하다.” 안색이 굳은 노만의 지시에 벤은 비상종을 때렸다. -땡땡땡땡땡땡땡땡땡…………………………. 그릇 깨지는 소리 같은 종소리가 고요한 아침 바다에 울리고 밤새 술을 마 셨던 선원들이 여기저기서 사악한 마법사가 소환한 좀비처럼 기어 나왔다. “아부, 잠이 깼으면 깃발신호를 보내봐!” “예, 치프 노만” 아부는 붉고 하얀 기발을 흔들었지만 저쪽의 배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 다. 분명 요란하게 쳐댄 종소리도 들렸을 테고 깃발 신호도 보았을 테지만 여전이 아무런 반응이 없이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그때서야 밖으로 나온 캡틴 바운고르스는 잔뜩 굳은 표정의 노만에게 망원 경을 건네받고 급속도로 접근하는 배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바운고르스가 뭔가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섬뜩한 해골이 그려져 있는 해적기가 마스트에 걸렸다. “이런 젠장! 몬타나에 왜 이렇게 해적이 들끓는 거야!” “총원전투준비!” 캡틴 바운고르스가 뭐라 지시를 내리기도 전에 노만이 알아서 전투를 준비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노만! 스팽커 붐 홀 인.” “스팽커 붐 홀 인!” “조타수 하드 보드! 좌현으로 자입.” 캡틴 바운고르스는 일단 회피기동을 시도했다. 방향타과 가로 돛을 좌현으 로 돌려 배의 침로를 왼쪽으로 돌린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의도를 비웃기라 도 하듯 해적선은 노를 꺼내 젓기 시작했다. 단거리를 민첩하게 움직이는 것은 범선보다 노를 이용하는 것이 빨랐다. “젠장! 또 해적을 위장한 해군이야?” “아닙니다. 왼쪽 눈에 상처 난 해골깃발 저거는 포렌데의 악명 높은 캡틴 바보사의 깃발입니다.” “포렌데에서 굴러먹던 놈들이 뭐 하러 몬타나에 와서 설치는 거야?” 몬타나 해는 남쪽으론 엘프들의 땅인 발트엘프가 북쪽은 몬타나 반도가 있 는 바다였다. 발트엘프는 지역전체가 삼림으로 둘러싸여 있는 거대한 숲이 었다. 당연히 사람이 살지 않아 도시 또는 마을이 없었다. 또한 몬타나 반 도는 다른 대륙의 다른 지방보다 낙후된 편이라서 해상무역항로는 남쪽의 노스포트, 북쪽의 사우스포트을 잇는 코스타 연안항로가 전부였다. 그외 몬 타나 반도를 끼고 돌아 바이킹 섬까지 이어지는 항로가 있었지만 크게 얻어 먹을 것은 없는 항로였다. 남쪽의 노스포트는 왕국의 어머니 안젤리아드 북 쪽에 있는 항구라는 뜻이며, 북쪽의 사우스포트는 아인윌의 남쪽항구란 뜻 이었다. 코스타 연안항로의 북쪽에는 남쪽항구, 남쪽에는 북쪽항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포렌데 해는 동쪽에 마고대륙-실제론 몬타나 반도보다 작지만- 서쪽엔 대륙본토, 북쪽엔 안젤리아드, 남쪽엔 스웨야드를 있는 위 성항구가 있어 그야말로 황금의 바다였다. 게다가 반왕시대를 잠깐을 제외 하고 마고대륙은 해적들의 천국이었다. 즉 떡고물이 많고 숨을 곧이 많은 포렌데를 두고 뭐하러 몬타나 해까지 들어와 노략질을 하는지 레이디 아르 웬호의 선원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 라혼은 해적선이 가까워지자 결정을 해야 했다. ‘아직은 조금 불안한데? 해적선의 병력은 300명을 훌쩍 넘기고 있어. 거기 에 비해 이쪽은 73명. 로키가 충분한 몫을 다 한다고 해도 힘들고 세나도 위험하다.’ 그리고 라혼은 이내 그동안 미뤄왔던 결정을 했다. ‘어차피 해적들 손에 살아남으려면 모험을 해야 돼. 그럴 것이면 모험은 나 혼자 충분하다.’ 라혼은 스프링이 보우를 꺼내들고 전망이 가장 좋은 자리에서 꾸준히 다가 오는 해적선을 바라보고는 스프링이 보우의 시위를 풀었다. 그리고 갑판으 로 뛰어내려와 긴장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로키에게 스프링이 보우를 내 밀었다. “마스터?” “선물이다.” “무슨?” “전에 나와 약속했던 것이 있지?” “예.” 라혼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로키에게 말했다. “나는 너와 세나 사이에서 태어날 아기의 대부가 되고 싶다.” “예?” “나의 이름은 라혼. 곧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라혼이라고 지어다오.” “…….” “그리고 내가 너에게 가르쳤던 것은 그 아이에게 가르쳐다오.” “마스터!” “그리고 그것에 대한 증표로 아이가 자라서 혼자 이 스프링이 보우의 시위 를 걸때 그 아이에게 이 스프링이 보우를 주어라.” “알겠습니다. 그런 부탁이라면 얼마든지 듣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 은 마스터가 가지고 있는 것이…….” 라혼은 손을 들어 로키의 이야기를 멈추게 하고는 허리춤에서 단검하나를 꺼내 로키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것은 나의 형제 그레이드의 물건이다. 역시 적당한 시기에 아이에게 줘 라!” “마스터.” -스르릉~! 그리고는 샤벨을 뽑아들고 외쳤다. “모두 똑똑히 보아라! 무서운 자 라혼, 이그라혼의 마지막 가는 길을……. 나 라혼의 이름으로 새로 태어날 것이니 그가 또다시 이그라혼이 될 것이 다! 이것이 소드 마그누스의 힘이다!” 레이디 아르웬호의 선원들과 로카데 차이저는 한 사내가 고요한 바다를 울 리는 외침과 함께 훌쩍 날아 해적선에 떨어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쾅~! 굉음과 함께 해적선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레이디 아르웬호의 선원 들의 그 믿을 수없는 광경을 보고 간밤에 마신 술이 아직 덜 깼나. 생각하 며 볼을 꼬집는 자가 있을 정도였다. 비기닝Beginning 비기닝Beginning 일격에 해적선을 소멸시킨 라혼은 마지막 순간 몸속에 내재된 마력을 개방 하고 그것을 에텔 스페이스로 빨아냈다. 그러자 예상하고 우려했던 육신의 붕괴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먼지보다 작은 입자로 분해되던 육신 속에서 라 혼은 아스트랄 바디(Astral body) 상태, 즉 반정신체 상태에서 불사의 새 피닉스(phoenix)의 피로 보호되는 씨앗을 세나데나의 자궁으로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시켰다. 그리고 그 안에서 라혼은 육신을 재구성했다. 마력, 이블 포스(Evil force)가 아닌 라혼이 가진 생명본연의 힘으로……. 문득 시간을 인지했다. 시간의 흐름을 인지했지만 그것뿐이었다. 찰나의 시 간이 흘렀는지 아니며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공간을 인지했다. 다음은 밝음과 어두움을, 그리고 따뜻하고 포근함을, 마지막으로 자신의 현재 상태를 인지했다. ‘성공이다.’ 모험이 성공했음을 알았다. 이곳은 여인, 아니 어머니의 태중에 나는 웅크 리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보이지는 않지만 공간이 생각보다 무척 넓었다 . ‘어머니의 뱃속이 넓은 것이 아니라, 내가 작은 것인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배꼽부위를 만져보았다. 그러나 예상했던 대로 탯줄은 만져지지 않았다. ‘당연한 것인가? 단지 신체를 재구성하는데 외부로 부터 보호를 받기위해 여자의 자궁을 빌렸으니…….’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섭섭한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태중 에 품은 어머니하고는 피가 이어지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라혼은 그렇 게 잠깐 정신이 들어 현재의 상황을 인지하고는 갑자기 몰려오는 피곤함에 잠이 들었다. 정신체인 상태로 꿈속에서 자신을 관조했다. 정신체는 사고하는 기능이 매 우 단순하다. 몸이 있고 뇌라는 기관이 있어야 비로소 사고를 할 수 있었다 . 시간이 흐를수록 단순한 기억의 편린이 아닌 점점선명해지는 기억과 본래 지니고 있던 지식들이 명확하게 사고되고 인식되기 시작했다. 몸이 회복되 며 감각이 살아나자 몸은 허기짐을 통보해왔다. 탯줄이 없으니 어머니로부 터 양분을 공급받지 못했다. 그렇다고 태중에 따로 먹을 것이 있을 리 없었 다. 허기짐 다음의 느낌은 숨이 막혀온다는 것이었다. 의외의 생각지도 못 한 복병이다. 그러나 그것을 인식하기 전까지 숨을 쉬지 않고도 멀쩡히 버 텼는데 이제 와서 숨이 막혀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태중을 빠져나 가거나 아니면 다는 방법을 찾아야했다. ‘그래 맞아! 뇌가 정상적이 활동을 시작한 거구나 그러니 그에 따른 에너 지가 필요할 테고 에텔 스페이스를 이용하면 어찌될 것도 같은데…….’ 역시 생각대로였다. 공기나 음식물을 섭취하지 않고도 에텔 스페이스가 자 연적으로 생명을 유지시켜주었다. 그런데 문득 지금 자신의 몸이 어떤 형태 인지가 궁금했다. 탯줄도 없고 태만 빌렸을 뿐 어머니라는 생명체와 완전히 무관한 자신의 몸이……. 그러나 다행히 자신의 신체는 태아의 그것과 똑 같았다. 라혼은 쉴 새 없이 생각하고 사고하고 문제점을 찾았다. 그리고 점 점 인식의 범위가 넓어지며 종국에는 기감이 열렸다. 어머니의 몸에서 나오 는 기운과 그리고 또 하나의 기운. ‘뭐야? 이건 뭐지?’ 아기였다. 어머니의 태중엔 태아가 자라나고 있었다. 라혼은 태아가 자리 잡은 곳으로 가서 그 곁에 가만히 누웠다. 그리고 어머니의 묵직한 심장소 리와 태아의 콩닥대는 심장소릴 들었다. 어느 순간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리 와 낮과 밤 어머니의 기분과 몸 상태 등이 명확하게 감지되기 시작했다. -엄마! 아파? -아니, 졸려서 그래 루나야! 엄마가 아픈 것처럼 보이니? -응! ‘누구지?’ -루나야! 엄마 피곤하게 하지 말고, 이리와! -아빠! ‘뭐야?’ -세나, 괜찮소? 식사를 거의 하지 못하고 있다던데? 그러면 뱃속의 아기에 게도 좋지 않소. -후후후~!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루나를 가졌을 때도 입덧에 고생한 잘 알잖아요. -엠마부인에게 들으니 첫째 애와 둘째아이는 다르다고 하던데……. -그건 사람마다 달라요. 모두 똑같을 수는 없죠. -그렇구려. 그보다 이번엔 아들일까? 딸일까? -아들이었으면 좋겠죠. -마스터의 유언엔 아들이거나 딸이란 말은 없었지만 기왕이면 아들에게 ‘ 라혼’이란 이름을 잇게 하고 싶은 것은 사실이오. -또 딸이면 어쩌시려고요? -딸의 이름도 준비해 두었지. -뭔데요? -세나테이아 어떻소? -세나테이아. 예쁜 이름이에요. -이번에 태어날 녀석이 딸이든 아들이든 상관없소. 앞으로도 한 열 명쯤 더 낳으면 그중에 하나는 걸리지 않겠소? 우리는 젊으니까. -설마 저보고 이런 고생을 10번이나 더 하란 말인가요? -하다보면 무슨 일이든 익숙해지기 마련이오. 우리 힘냅시다. -싫어요. 절대 싫어요. -차이저는 우리 셋뿐이잖소. 열심히 노력해서 가문을 번성시키려면 이 방법 밖에 없지 않겠소? -딴데 가서 알아보세요. -그것도 일리 있는 생각인데 지금이라도 당장 실행에 옮길까? -뭐라고요. 입덧으로 고생하는 임신한 아내를 앞에 두고 그게 할 소리예요. 당장 나가요. 나가서 애를 만들어 오든 주어오든 마음대로 해요. -뭐라고? 허락했으니까! 그럼 당장 가지! -두근두근, 두근두근, 두근두근, 두근두근 -……. ‘어머니가 화났나? 아니야 조금 흥분했군. 농담 아니었나? 그런데 조금 불 안해하는데?’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부인! -어때! ‘철렁?’ -그 아인 누구예요? -놀랬지? 백작전하의 손자야! 인사드리어라. -트라킨 네부카드 사이스입니다. ‘휴우~! 어머니가 느끼는 감정을 나도 같이 공조하나?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 기분은 이성적인 사고와 다른 거구나. 아버지, 그런 류의 농담은 하 지 말아요. 농담이란 것은 알지만 기분은 그렇지 않으니까…….’ -사실은 오늘 백작님이 이 아이에게 기사수업을 가르치라고 해서……. -그럼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내는 건가요? -그래! -……. -……. ‘졸려…….’ 라혼은 더 이상 대화를 엿듣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어머니의 몸을 건강하게 해드려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보답을 해야 하는데 ……. 자고나서 해도 상관없겠지…….’ 단잠에서 깨어났다. 시간이 훌쩍 지났음을 알 수 있었다. 아니 항상 깨고 자고를 반복하는데 깨어있는 순간을 일부만 기억하는 지도 몰랐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모든 것을 기억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야 하나? 긴 시간을 인식하게 된 판단의 계기는 편안하고 포근하던 공간이 아주조금 답답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몸의 감응이 그전보다 더 확실하게 느껴지고 시간의 흐 름을 좀 더 정확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같은 태를 쓰는 누이가 자꾸 얼굴을 찬다. 아마도 좀이 쑤신 모양이다. 그 것은 라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전에 하려다 만 어머니 몸을 건강하게 만 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어머니가 살아오면서 지금껏 축적된 노폐물을 찾아 걸러내고 혈관에 쌓인 흐르지 않는 핏덩어리를 용해시켰다. 또한 뼈의 밀도 를 높였으며 신진대사를 활발하게 했다. 그리고 덤으로 쌍둥이 누이에게도 뼈와 근육을 잡아주어 잔병을 치레를 하지 않게 체질을 개선했다. 그렇게 어머니의 건강 그리고 누이의 체질을 건강 체질로 만들었다. 지금 셋은 하나의 세계를 공유하고 있다. 라혼이 어머니를 위한 마음은 어 머니의 태중의 아이를 위한 마음에 대한 동조와 같은 것이다. 어머니가 슬 프면 같이 슬프고, 기쁘면 같이 기뻤다. 어머니의 영혼과 동조하고 있다는 것을 이내 깨달았지만 거부하지 않았다. 원래 개개의 모든 영혼은 이렇게 하나였던 것이다. ‘대충 한 달 정도 남았겠구나.’ 세상에 나갈 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명상에 잠긴 상태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가 무척 고통스러워하기 시작했다. 같은 태 를 쓰고 있는 누이는 그것이 무척 당혹스러웠는지 무척 불안해하며 버둥거 렸고 나 또한 그것에 동조해 마음이 안정되지 못했다. ‘허! 마음이 불안하다니 몸이 새로 태어나니 영혼도 그에 대응하는 건가? 가만히 따져보면 이것은 곧 세상으로 나갈 징조인데…….’ 그리고 새하얀 빛이 눈을 찌르며 시각을 자극했다. 누이는 그것에 더욱 동 요하며 꿈틀 댔고 그럴수록 어머니의 고통을 길어져만 갔다. 그래서 누이를 먼저 내보내기로 했다. ‘그래 네가 누나다. 먼저 나가.’ 최후의 발악을 하는 누이를 빛으로 힘껏 밀어내고 자신도 곧 빛으로 나갔다 . ‘으악! 아파!’ 태어날 때의 고통은 연약한 아기의 몸으로써 견디어내기에 너무 고통스러웠 다. 이성을 가지고 감당하기에 너무나 큰 고통은 기억하기조차 싫었다. 강 렬한 빛은 꼭 감은 눈 커플을 뚫고 와 시신경을 자극했고, 엄청난 소음에 귀는 멍해졌다. 거기다 숨은 쉴 수 없지, 갑자기 차갑기 그지없는 공기가 연약하기 이를 때 없는 피부를 자극하니 죽을 것만 같았다. 결정적으로 왜 아기를 거꾸로 잡고 패냐고 어디 때릴 때가 있다고……. -짝짝짝! -응애, 응애, 응애……. ‘아파, 제발 때리지 마! 골까지 울린다고!’ 자지러지게 울며 그제야 폐라는 기관을 사용해서 숨을 쉬는 법을 강제로(?) 깨닫고는 이내 지처 잠이 들었다. *** “어머나, 세상에 애를 이렇게 잘 낳는 분은 처음이우. 어떻게 한번 진통도 없이 문이 열리자마자 힘 한 번에 쑨풍쑨풍 애를 낳는 것이오? 그것도 쌍 둥이를…….” 쌍둥이를 받아낸 노련한 산파 엠마부인은 나중에 나온 쌍둥이의 몸의 양수 를 대충 닦아내고 강보에 싸며 산모에게 호들갑을 떨었다. 쌍둥이중 하나는 탯줄이 없었지만 처음 애를 받고 곧바로 애가 뚝 떨어지니 그것에 기겁하 여 탯줄이 있고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하마터면 애가 침대 바닥에 떨 어질 뻔했기 때문이었다. 뒤에 나온 아기는 사내아이여서 차이저 가를 이을 아이였으니 엠마부인으로썬 십년감수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세상에 내가 수십 년간 근방 아이들을 모두 받아봤는데 마님만큼 애를 쉽게 낳는 분은 진정 처음이우. 저번에 루나를 낳으실 뗀 사흘을 고생 고생 해서 날 피곤하게 하더니만 이번엔 준비를 단단히 하고 왔는데 이렇게 쉽게 애기를 낳으니 내가 다 허탈할 지경이우.” “그, 그런가요?” 세나데나는 자기가 생각해도 첫아이인 루나와 비교해서 너무 쉽게 아기를 낳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뱃속에서 한아이가 다른 아이를 밀어낸 듯한 느 낌까지 생생하게 들었다. 그리고 쌍둥이를 낳았음에도 기진맥진한-사실은 죽을 고비를 넘긴- 루나 때와는 달리 지금은 금방 움직여도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어쨌든 쌍둥이가 엄마를 힘들게 하지 않고 태어났으니 참으로 효자 효녀 우. 근데 욘석들 너무 일찍 나오는 바람에 정신이 없게 생겼네. 뜨거운 물 도 아직 준비 못했는데…….” “저도 도울게요.” “무슨 소릴! 아무리 아기를 쉽게 낳았다고 하지만 여자가 아기를 낳은 일 은 큰일이우. 앞으로 쌍둥이를 돌보려면 고생이 심할 텐데 아무 소리 말고 가만히 있어요.” 그리고 얼마 후 뜨거운 물과 함께 세나데나의 남편인 나이트 로카데 차이저 경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엠마부인의 노련하고 조심스런 손놀림에 아 기가 씻기는 것을 지켜보다 그녀가 일을 마무리하고 방을 나서자 로카데는 아내가 누워있는 침대 맡에 무릎을 꿇어 시선을 마주보며 식은 땀범벅인 아 내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작게 속삭였다. “세나, 수고했어. 차이저 가문에 세나테이아와 라혼이 한꺼번에 태어났군. ” “그래요. 쌍둥이인 줄을 진짜 몰랐는데…….” “아무래도 유모를 구해야겠어. 루나도 아직 어리고, 쌍둥이를 키우려면 세 나 혼자선 힘드니까.” “그보다 루나는 지금 어디서 뭐해요?” “트라킨이 돌보고 있어. 루나가 트라킨을 따라다니는 것을 보면, 그 녀석 하는 폼이 당신과 같아 당신도 날 처음 보았을 때 무척 따랐었지. 그 어머 니에 그 딸이랄까?” “뭐예요?” “어! 이 녀석 깼다. 라혼인가? 테이인가……? 테이로구나!” 로카데는 아내 세나에게 잠에서 깬 아기를 건네주었다. 세나는 행복한 미소 를 지으며 아기에게 첫젖을 먹였다. *** 잠에서 깨어나 가장 먼저 한 일은……. 젖이나 빠는 것이었다. 먹고 싸고, 먹고 싸고, 또 먹고 싸고……. 세상에 갓난아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 직 그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부모가 아기에게 바라는 것도 잘 먹고 잘 싸는 것 외에는 없으니까……. 젖꼭지가 입술에 느껴지면 무조건 빨고 보았다. 오랜만에 먹은 음식(?)인 것도 사실이지만 이것도 다 효도를 하기 위해서다. 되는대로 젖을 빨아 에 텔 스페이스에 젖을 보관하고 있다가 누이가 한밤중에 배고픔을 느끼는 기 색이 보이면 손가락을 물려주어 그곳을 통해 젖을 먹여주었다. 그러나 싸서 (?) 잠이 깨 울어 제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타이밍에 맞춰 같이 싸서(? ) 번거로움을 덜어주는 수밖에……. 어느 순간에서 부터인가 주위 사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제나 시야 엔 엄마가 보였다. 가끔 눈을 맞출 때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그런 엄마는 다른 일을 하다가도 날 포근하게 안아주신다. 그럼 또 웃음이 나온 다. -캬르르르르……. “어유! 그럴게 좋아! 어구구구구……. 어구구구구…….” 아무것도 아닌 행동인데 웃음을 멈출 수가 없다. 적당히 해야 엄마가 누이 도 안아주실 텐데……. -캭 으앙, 으앙, 으앙, 으앙……. 으이구…. 저 울보 또 운다. 근대 같이 울고 싶어지는데 참아야 한다. 그래 야 엄마가 힘들지 않지. 참자. 나는 안 운다. 절대 울 수 없다. “그래, 그래, 테이도 예뻐, 이쁜 우리 테이 그만, 그만~!” 휴우~! 위험했다. 어? 근데 저 녀석 배가 고픈 모양인데……. “왜? 배고프니? 잠시만…….” 어? 이번엔 내 차례라구요. 유모 젖도 맛있지만 엄마가 더 좋은데……. “유모!” “예, 부인.” “우리 테이가 배가 고픈가 봐요.” “아유! 우리 아가씨는 이제야 젖을 찾네요. 도련님은 먹성이 너무 좋아. 탈인데 아가씨는 먹는 양이 이렇게 적어서야.” 모른 소리! 걔가 먹성이 얼마나 좋은데. 이제는 배가 고프면 지가 알아서 내 손가락을 찾는 다니까……. “어? 도련님은 좀 전에도 드셨는데?” 유모! 엄마와 나 사이를 훼방 놓지마아~! “아니요. 라혼이 젖을 빠는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데요.” 역시 엄마다. 사랑이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는 어머니의 품속에서 편안하게 젖을 빨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어머니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에 마음이 편안해지며 자신도 모르게 젖을 빨다 잠이 들었다. 다 빨아 먹었다. 이제 내 몫은 챙겼고 누하고 내가 저녁에 먹을 분량을…… . 핫! 이런, 깜빡 잠이 들었었군. 어라 이 녀석이 에휴휴휴~! 오늘밤은 쫄쫄 굶게 생겼군. 누이가 싸면 그때 한번 졸라 볼까? 아서라 가뜩이나 피곤하실 텐데……. -야앙야야양~! 얼씨구? 누이가 옹알이하네? 벌써 날짜가 그렇게 흘렀나? 그럼 나도? “마마 적 됴” 어라? 나는 조금만 연습하면 말을 할 수 있겠는데? 말할까? 아니 관두자. 튀어봐야 귀찮은 일만 생길걸 뭐. 누이가 하는 데로 따라만 해야지. 생각과 행동하는 수준이 아기의 수준에 맞춰졌다는 것에 대해 무척 흥미로 웠다. 지금까지 쌓아온 지식과 오랜 세월 걸쳐 갖가지 경험한 것은 그때, 그때의 기분에 따라 사고하고 판단하는데 아주 약간의 기준만이 되었을 뿐 이다. 지금의 나는 이전까지의 내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완전한 새로운 개체처럼…….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엄마가 좋고, 아빠가 좋았다. 다만 빈틈만 보이면 다가와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대는 큰 누나만 아니면……. 그리고 또 한 가 지 아빠라는 인간이 거칠게 않아들고 위험천만하게 들었다 놨다 하니 심장 이 박동이 빨라진다. 그러나 쬐끔 재미있을 지도……. 우악~! 쌍둥이 누이가 또 장난을 걸어온다. 이젠 곧잘 기어 다니며 아주 잠 시지만 두발로 서기도 한다. 그래서 넘치는 힘을 주체 못하고 내게 장난을 걸어왔다. 낮이라면 엄마가 놀아주겠지만 지금은 해님도 잠을 자는 한밤중. 오늘도 나는 쌍둥이 누이와 레슬링 한판-아니 여러 판-으로 힘 좋은 그녀 와 놀아주어야 했다. 으엑! 언제 이빨이 났지? 아프잖아! 이게 이야압! 우 하하하하하하 감히 내게 도전을 하다니……. 아니 누나 울지마! 이것 바라 까궁! 까꿍! 휴우~! 한 고비 넘겼다. 우악! 그래 너는 뭉개라 나는 뭉개 질 란다. 이것이 한 침대를 쓰는 쌍둥이의 비애라면 비애랄까? “우리 아가씨하고, 도련님은 참 순해요. 밤에 깨서 울지도 않고…….” “그래요. 참 착한 아이들이예요.” “어머? 이빨이 났나보네? 이제 슬슬 젖을 떼야 될 시기가 왔나?” 무슨 그런 참담한 말씀을……. “아니요. 당분간 좀 더 젖을 먹이겠어요. 루나 때는 젖이 많이 나오지 않 아서 속상했는데 지금은 젖이 넉넉하게 나오네요. 그러니까 당분간 더……. 엄마 만세! “엄마! 엄마! 아빠!” “루나아가씨 나리께서 돌아오신 겁니까?” “응! 유모 모르는 아저씨랑 같이 왔쪄! 아빠가 엄마 불러오래.” “모르는 아저씨? 유모 라혼 좀 받아요.” 어머니 웬만하면 큰누님은 데려가시죠. “그리고 루나도 좀 봐주세요. 루나! 너 또 동생 눈 찌르거나 하면 않되 알 았지!” 엄마가, 엄마가……! “그럼 부탁해요.” “여기는 걱정 마시고 어서 가보세요. 안주인을 찾는 것을 보니 중요한 손 님이 오신 모양인데…….” “그리고 부엌에 마테차 아직 남아있죠?”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그거면 충분할 거예요. 나리도 그 젊은 나이 에 부기사단장이 되었고, 백작님의 신임이 두터우니 여기저기에서 찾오는 손님이 많을 거예요. 그럼 마님도 이제 아가씨들과 도련님을 돌보는데 만 전념할 수 없을 만큼 바빠질 텐데…….” “후후, 안 그래도 정식으로 하녀를 둘까 고려중이에요. 유모의 말대로 남 편이 손님을 자주 데려온다면 아무래도 그래야겠죠.” “아유~! 그만 내려가 보세요. 늦어지면 나리가 얼마나 무안해 하겠어요.” “알았어요. 루나! 너 유모 말 잘 들어야해!” “알았쪄!” 아빠가 출세가 빠른 모양이구나. 재능이 있는 줄 알았지만. “나온.” “그래요. 루나 아가씨, 아가씨의 동생이신 라혼 도련님이시랍니다.” 온다. 누님의 무서운 손가락! 하나, 둘 잡았다. “헤~! 이뿌다, 이뿌다.” 어라? 큰 누님도 귀여운 구석이 있었군. “내 아들은 라혼 차이저에요. 콰이스가 아니에요!” 뭐지? “미세스 세나데나. 어찌되었건 당신이 세나데온 일족의 여자란 것은 부정 할 수없는 사실이오. 그리고 당신이 낳은 아들이 세나데온 일족의 일원이 된다는 것이 뭐가 잘못되었단 말이오? 그리고 아기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차 이저의 이름보다 콰이스의 이름을 갖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오.” “좋아요. 세나데온의 이름은 받아들이겠어요. 하지만 차이저는 콰이스가 되진 않을 겁니다.” “후~! 알겠소. 하지만 한 가지만 더 부탁드리겠소. 아이를 기왕 세나데온 일족의 이름을 갖게 되었으니 일족의 파트로네스이신 갤 공 전하가 지은 이 름도 같이 써주시오. 그분은 부인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니 말이오.” “알겠습니다. 내 아들에게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름을 받겠습니다. ” “여보!” “세나, 레이몬드 경의 말처럼 그분은 당신의 친조부요. 그것은 부정할 수 없소. 한낱 기사의 아들에 이름치고는 길어 졌지만 다 뜻이 있는 이름들이 오.” “차이저 경, 그리고 앞으로 아이가 나이가 차면 기사수업을 받게 될 텐데 …….” “라혼은 제가 직접 가르칠 것이오. 그 아인 ‘라혼’이란 이름을 이를 의 무가 있소.” “그러시군요.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주시오. 공작 전하께서 무엇 때문 에 아이에게 직접 이름을 지어주고, 세나데온 일족으로 받아들였는지는 감 히 짐작할 수는 없으나 제 개인적인 판단으론 아이에 미래를 위해서라면 차 이저 가를 잇는 것보다. ‘콰이스’가 되는 것이 났다고 생각하오. 지금 이 말이 무례하다면 사과하겠소.” “충고는 고맙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제 아들은 남편에 이어 차이저 3대가 될 겁니다.” “정 그러시다면 더 이상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 니다. 하지만 미세스 세나데나 한가시만 말씀드리자면 전하께서는 부인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더 부인을 아끼고 관심이 지대하시오.” 어른들의 복잡한 사정이로군. 가만있자 그럼 이제 나는 라혼 차이저가 아닌 가? *** “말도 안 돼요. 그때는 나 몰라라 편지 한 장 보내지 않고 반년이나 방치 했으면서 이제 와서 멋대로 라혼의 이름을 지어 보내오다니…….” “세나, 어쨌거나 그분은 세나의 할아버지지고 라혼에겐 외증조부가 아니오 .” 로카데는 아내가 무척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동안 거의 인연을 끊긴 상대로 지냈던 대단한 조부가 갑자기 관심을 보이니 말이다. 처음 그녀의 조부가 그녀를 보고 싶다고 했을 때도 이처럼 자기방어를 했었 다. 그러나 친 혈육 그것도 가장 가까워야 할 조부가 자신을 보고 싶다고 부른 것은 나름대로 설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한번 버림받았다. 아 마도 그 상처는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아들이 세나데 온이 되는 것도 싫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족에 포함되는 것과 되지 않는 것 에 차이는 컸다. “어쨌거나 강철의 공작께서도 나이는 어쩔 수가 없다보오. 이렇게 가족을 챙기시니 말이오.” “…….” “세나, 갤 공이 무엇 때문에 철의 공작이라고 불리고, 공작가의 기사단이 왜, 철가면 기사단인 줄 아시오?” “…….” “그분은 두 아들을 적의 손에 잃으셨소. 분쟁이 있을 때 그분의 아들을 인 질로 잡고 철군을 요구 했지만 그것을 오히려 기회로 삼아 정적을 뿌리까지 뽑은 전적이 있는 분이오. 승기를 잡고 있는 상태에서 아들의 전사소식을 오히려 병사들의 투지를 불태우는 데 이용했소.” “세상에 다시없을 냉혈한이죠.” “후, 세나. 그때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은 진정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관심을 보이는 행동이 그분의 적들에 표적으로 삼게 했기 때문이라오.” “하지만 지금은요?” “지금은 내 능력을 믿는다는 말이겠지. 그리고 사이스 백작가는 갤 공을 지지하고 있소.” 로카데는 아내에게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이번에 사이스 백작 기사단의 부 단장이 된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을 것이란 말은 끝내 하지 않았다. 확실히 아들이 다크 듀크에게 직접 이름을 받았으니 로카데의 입지는 더더욱 공고 해졌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백작과 다크 듀크는 거의 동등한 관계에서 로카데 자신으로 인해 암묵적인 동맹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언제는 이해관계가 틀어지면 바로 인질이 되는 것이다. 비기닝Beginning ***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라혼은 3년 만에 부활했다. 그때 세나의 뱃속에 있던 아이는 세나루나였다. 늦겨울과 초봄사이에 태어난 루나는 엊 그제 4살을 맞이한 생일잔치를 했다. 그리고 우리 쌍둥이 남매의 첫 생일도 약 한달 반쯤 남은 것 같았다. 한일이라고는 먹고, 자고, 싸고, 쌍둥이 누 이인 테이를 돌보는 일뿐이었다. 후~! 애의 몸을 하고 애를 돌보는 일은 쉬 운 일이 아니다. 그런 나의 필사적인 숨은 노력 때문에 엄마와 유모가 비교 적 여유를 가지고 이제 4살 된 딸과 이제 첫돌을 맞이하는 쌍둥이를 무리 없이 키우는 것이다. 그러나 자라나는 아이는 아주 잠시만 한눈을 팔면 탈 이 난다. -응애, 응애, 응애, 응애……. “마님, 큰일 났어요. 테이 아가씨가 불덩이처럼 뜨거워요.” “라혼을 다른 방으로 옮기고, 프랜스에게 에드몬 씨를 불러오도록 해요. 어서요, 유모!” 테이가 탈이 났다. 낮에는 조금 무덥고, 밤에는 아직 추운 환절기 날씨에 적응하지 못해 감기에 걸린 것이다. 하지만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갓난 아기에게 평범한 감기일지라도 치명적일 수 있었다. 잘못하여 감기가 폐렴 으로 발전하면 그대로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쌍둥 이 누이와 다른 침대에 누운 라혼은 누이가 걱정되었다. 어쩐지 더웠다. 추 웠다. 괜찮을 까 싶더라니……. “까꿍~! 어버버버버버……. 까꿍~!” ‘이 아줌마(?)는 애기를 안는 것이 서투르군.’ 유모와 엄마가 테이에게 붙어있는 동안 루나 누나와 나를 돌보게 된 하녀 프랜스 처녀는 어지간히 심심했던지 날 가지고 논다. 그리고 루나 누나도 다르지 않았다. “루나 아가씨. 라혼 도련님 안아볼래요.” “응, 나온 줘!” ‘어디 애를 맡길 데가 없어서 이제 갓 4살짜리에게 넘기는 거야! 우와!’ 루나는 라혼을 안아들자마자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덕분에 라혼은 바 닥에 굴러 떨어지는 줄 알았다. ‘머리, 머리를 받혀줘야지. 어이 누님! 왜 또 손가락을 내 얼굴로 가져오 는 거야?’ 라혼은 루나의 장난감 인형이 되었다. 루나는 두툼한 손가락으로 라혼의 코 를 찌르고 뭐가 좋은지 앙앙거렸다. 그리고 이마를 두드리며 강권했다. “나온, 코 자! 코 자!” 졸리지 않지만 자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그녀는 지금 4살이고 자기 뜻대 로 풀리지 않으면 화를 내며 울음보를 터트리기 때문이다. 그럼 가뜩이나 피곤한 엄마가 더 힘들어 지니까! 쌍둥이 누이도 돌보기 힘든데 이젠 3살 위의 누나까지 돌보게 될 줄이야! -텅! ‘우왁!’ 루나가 품속에 안은 라혼을 바닥에 뉜다는 것이 라혼이 무거운 머리가 바닥 과 강렬하게 조우하게 만들었다. ‘아우~! 아파 확 울어버릴 까부다!’ “어머! 루나 아가씨 아기를 그렇게 다루면 안돼요!” ‘그럼 4살짜리에게 애를 맡긴 너는? 응징이다!’ “안돼요. 도련님! 울지 마세요!” 울기직전의 표정을 짓자 나이트 차이저 가의 하녀 프랜스 처녀는 다급한 표 정을 지으며 라혼을 안아 달랬다. ‘알았어! 안 울 테니까, 프랜스 처녀 제발 흔들지 좀 말아!’ 그리고 밤을 2번 지새고서야 엄마를 만날 수 있었다. “맘마!” “뭐?” ‘어?’ 오랜만에-어언 3일만에- 엄마를 만나 탄성 터트렸다. 그러자 엄마가 눈빛을 빛내며 다시 말을 시켰다. “아가야! 다시 말해봐. 맘마!” ‘할까? 말까?’ “맘~마!” 라혼은 엄마의 간절한 눈빛에 굴복하고 말았다. “맘마~.” “끼야아! 말했어. 프랜스 너도 들었지. 라혼이 말했어!” “예, 마님 저도 들었어요.” 그리고 그날 저녁 라혼은 아빠에게 ‘바빠’라는 말도 해주었다. “하하하하! 그래 내가 아빠다. 역시 내 아들은 천재였어. 세나, 라혼이 말 을 했으니까 테이도 시켜보자.” “그래요.” 그리고 그 불똥은 쌍둥이 누이에게 옮겨갔다. “테이야. 아빠!” “앙앙!” “세나 들었지. 아빠라고 하는 거.” ‘내 귀에는 ‘앙앙’이라고 밖에 들리지 않았는데……?’ 아빠가 그동안 무척 심심하셨나 보다. 테이랑 달리기 시합을 시키다니……. 또 그것을 동조하는 엄마는 뭐야? 근데 기사단의 부단장씩이나 되는 양반 이 요새 왜 이렇게 한가하다지? *** “차이저 경, 도대체 명령에 불복하는 이유가 뭐요?” “그들은 그저 배가 고파 그런 것뿐입니다. 주동자 몇몇만 처벌하면 끝날 일을 군대를 끌고 가서 마을 전체를 불태우라니요. 저는 그런 명령을 받을 수 없습니다.” “나이트 차이저, 경은 사이스 기사단의 부단장이오. 솔선수범을 보여야할 자가 이렇게 대놓고 영주님의 명령을 거부하면 도대체 어쩌자는 거요?” “그래암 경, 저는 제 스스로도 사이스 기사단의 부단장의 위치가 과분하다 고 여기고 있습니다. 저는 마스터 슐레에게 힘 업는 자들을 핍박하라고 배 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반역자들이오. 반역자를 처단하는 일이 어째서 그릇된 일이란 말 이오. 그리고 조용히 처리하기엔 놈들에 수가 너무 불어나 있소. 불이 더 커지기 전에 본보기를 보여야 한단 말이오.” “…….” 나이트 그래암이 떠나자 잠시 자리를 피해있던 세나가 남편에게 다가가 그 의 목을 어루만져주며 물었다. “일이 생각한 것보다 심각한가 봐요?” “애들은?” “자요.” “꾀나 시끄러웠을 텐데 용케 깨지 않는군.” “쌍둥이들은 루나때 와는 다르게 확실히 손이 덜 가요. 그런데 조금 전 백 작님이 마을을 태우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하는데 무슨 의미인가요? 그게 요 새 밖으로 나가지 않는 이유였나요.” 로카데는 아내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결정된 것은 없지. 백작님은 지금 부재중이시고 아드님이신 에게너 자작이 일의 조속한 해결을 위해 너무 서둘러서 그래.” “영주님의 명령이라는 건?” “영주대리인 에게너 자작의 명령이지.” 로카데는 아내인 세나에게 그일에 관해 이야기해주었다. “사이스 백작령 안에 오스와일그 남작이란 자가 있어, 그가 영주로 있는 지방에서 농노들이 반란을 일으켜 그 문제 때문에 사이스 백자가에 도움을 청했는데 솔직히 우리 쪽에서는 그 작자를 그다지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지. 욕심이 많아 영주민들을 어지간히도 쥐어짰는지 그곳에 사는 평민 들 대부분이 고향을 등졌다더군.” “상당히 심한 사람인가 보군요.” “하지만 어쨌건 백작령에 속한 영주가 정식으로 도움을 청해온 일이야. 그 런데 그 웃기는 작자가 폭도들의 마을을 완전히 파괴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거야. 영주 대리인인 에게너 자작은 그것을 주의 깊게 생각하지 않고 그대 로 수락하고 나에게 그일 맡겼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명령에 나름대로 전후사정을 알아보았는데 그 작자가 자기 아들의 토너먼트 참가비용을 마련 하기위해 농노들이 겨우내 먹을 식량을 모조리 팔아버렸다는 거야. 그래서 굶주린 농노들이 봉기한 거고.” “세상에 그럼 심한 짓을…….” “그래서 폭도를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입을 줄이려는 수작으로 마을 하나를 없애달라고 하는 파렴치한 짓을 사이스 백작가에 요구하고 있는 거야.” 세나는 남편의 주먹을 불끈 쥐며하는 그 이야기에 분노했다. “그리고 에게너 자작도 그러한 전후사정을 알게 되었지만 이미 오스와일그 남작이란 작자의 요청을 수락한 상태라 명령을 거둘 수 없게 되었지. 하지 만 나는 그것이 아무리 사이스 백작가의 후계자 에거네 자작의 명예에 관련 된 일이라지만 굶주림에 지치다 못해 반발한 그 사람들을 살육할 수는 없어 . 절대로…….” “알아요. 저는 당신을 믿어요.” *** 태어나서 처음 맞는 생일이다. 그래서 많은 손님들이 찾아왔다. 분명 갓 첫 돌이 지난 아기들의 생일이었지만 잔칫상에 올라온 음식은 통돼지 바베큐, 포도주와 맥주 등이다. “하하하하, 이 아이가 앞으로 차이저 가를 이어받을 아이인가? 이름이…… .” “라혼이라고 부르게…….” “아니지, 그 유명한 다크 듀크의 증손자인 녀석이고 그가 이름을 지어 보 내주었다고 들었는데?” “라혼 가이우스 세나데온 차이저. 이게 이 녀석의 풀네임이지.” ‘라혼 가이우스 세나데온 차이저? 또 ‘가이우스’라…….’ “아버지보다 이름이 기니 더욱 훌륭하게 자라겠군.”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이런, 이런 자식자랑에 팔불출이 따로 없군. 루나 때도 그러더니만……. ” “그말 그대로 돌려주지 트라킨 때 자네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 나?” “그랬었나? 그보다 트라킨은 어떤가? 기사로써 재능이 있나?” “충분히! 7살 때 나보다 뛰어나.” “다행이군.” 아버지와 굉장히 친한 사람인가 보구나……. “이런 자리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오스와일그 남작의 문제를 자네가 맡기로 최종 확정되었어.” “…….” “아아! 그런 눈으로 볼 것 없어 다 계획이 있으니까. 내가 형님에게 자네 에게 그 일에 대한 전권을 가지고 일을 처리하게 하라고 부탁했어.” “하지만 나는 그 돼지를 도와줄 생각이 없어.” “내말을 끝까지 들어. 우리 사이스 백작가가 굳이 오스와일그 남작 같은 시골귀족 따위의 요청을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어. 자네가 기사단을 끌고 가서 적당히 요령껏 털고 자네가 의견을 제시한 그대로 주동자 몇몇만 잡아 내 처리하라고. 그리고 오스와일그 남작이 그따위 일로 백작가에 도움을 청 할 생각을 못하게 만드는 것이 자네가 할 일이야.” “고맙군. 이 신세를 어떻게 갚지.” “나중에 술이나 한잔 사!” 그리고 아빠의 얼굴을 한 달 동안이나 볼 수 없었다. 덕분에 엄마와 같은 방에서 함께 지냈지만 아빠를 걱정하며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을 지 켜보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 아빠가 능력이 있긴 있나보다. 시간이 지날수록 집안에 사람이 많아진다. 하녀와 하인이 생겼고 얼마 전에는 사람들이 와서는 우리 집 옆에 새로 집 을 지었다. “꼬맹아! 테이는 어디가고 너 혼자 있어?” “테이 누나는 새집에 놀러갔어.” “이런 또 엄마한테 혼나게 생겼네. 너는 사내자식이 되가지고 레이디를 챙 기지도 못하고 뭐하는 거니?” 이제 10살이 된 엄마를 쏙 빼닮아 칠흑 같은 검은머리에 깨끗하고 흰 피부 를 가진 루나 누나는 집안에서 동생들을 챙기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도 쌍둥이 동생들은 내버려둔 체 아빠에게 기사수업을 받는 종자인 트 라킨이 수련하는 모습을 몰래 훔쳐보고 온 모양이다. “그러는 루나누나는 어디서 뭘 하다 온건 데?” “꼬맹이 너는 알거 없어! 쪼끄만게…….” 할말이 없으면 언제나 ‘꼬맹이’,‘쪼끄만게’뿐인가? 누나라고 있는 것들 이 귀한 동생은 챙기지 못할망정 구박이나 하고……. “그나저나 이 계집애는 어떻게 가만히 있을 새가 없어. 꼬맹이 너는 어디 가지 말고 여기서 놀아 알았지.” “알았서.” 그리고 루나는 라혼의 칠흑 같은 검은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어 넘겨주고는 먼지를 털은 후 옷맵시를 잡아주었다. 이것은 엄마가 루나 누나에게 해준 것과 똑같은 것이다. 루나 누나를 항상 이런 식으로 애정을 표현한다. 다시 혼자 남겨진 라혼은 따가운 봄 햇살을 피하기 위해 마당에 있는 굵은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 나뭇가지에 가만히 앉아 명상으로 시간을 죽였다. 그리고 얼마 후 조용히 접근하는 기척에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이놈!” “끼야하하하하하…….” 아빠였다. 최대한 기척을 죽이며 접근하는 아빠였지만 라혼의 이목을 피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라혼은 짐짓 모르는 척 아빠의 손에 몸을 맡겼다. “수련이 부족하구나. 이렇게 쉽게 적에게 뒤를 내주다니…….” “아빠!” 아빠는 라혼을 번쩍 들어 목마를 태우고는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들, 오늘은 뭐했지?” “그냥, 토라랑 놀았어.” “테이는?” “테이누나도 같이.” “뭐하면서 놀았는데?” “공 던지기.” 이런저런 말을 물으시지만 아빠는 다른 생각을 하는 기색이다. “너는 앞으로 뭐가 되고 싶으냐?” “기사! 아빠 같은 기사가 될래!” 역시 뭔가 있다. “라혼은 이제 몇 살이지?” “7살!” 아! 그렇군. “기사가 되려면 트라킨 형처럼 매일 같이 수련해야하는데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그럼 내일 부터 기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한다. 할 수 있지?” “응!” 후우~! 어째 불안하군. “여보, 어서 들어와요. 그리고 라혼은 내려놓고요.” “세나 좋은 냄새가 나는데 뭘 만들었지?” “그냥 쇠고기 스프예요. 백작부인이 향신료 나눠주셔서 그걸로 쇠고기 스 프를 끓였어요.” “그래? 기대 되는 군.” “그런데 라혼만 데리고 들어오신 거예요? 루나하고 테이는요?” 이런! 누나들 오늘 혼나겠다. “아니? 라혼만 저기 나무위에 올라가 앉아 있던걸?” “뭐라고요? 라혼, 너 엄마가 나무위에 올라가지 말라고 했어 안했어?” 헉! 들켰다. 아빠 미워! “했어요.” “나무위에서 떨어지면 다치면 좋아?” “안 좋아요.”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엄마에게 용서를 빌 때는 의젓하게 할수록 좋다. “다시는 나무 위에 안 올라가겠습니다.” “…….” 엄마표정이 흐뭇해졌다. 됐나? “세나, 너무 아이들은 다그치지 말라고 나무 위에 좀 올라가 있는 게 뭐 어때서…….” 허~! 정말 고맙습니다. 아버지. “아니 애가 위험천만하게 나무위에 있다가 떨어지면 어쩌려고요? 그러다 어디 부러지기라도 하면 당신이 책임질 거예요?” 엄마가 이렇게 나온 이상 양보가 최선인데……. “알았어. 그만해 세나. 라혼 엄마 말 명심해라! 자고로 남자는 여자말대로 하면 손해 보는 일은 없단다.” 좋았어요! “그리고 루나는 동생들 돌보라니까 어디를 간 거야? 여보, 전 애들을 찾아 볼 테니까! 라혼 좀 씻겨요.” “그러지. 그리고 애들 너머 몰아세우지 마. 아직 애들이야. 딱히 속 썩이 는 일은 없잖아.” “알았어요. 라혼, 누나들 어디 갔어?” 가정의 평화와 특히 내 안식을 위해……. “응가 하러…….” 거짓말은 아니다. 사실이다. 라혼의 감각에 테이는 화장실에 있었고 루나는 테이를 화장실에서 찾아 지금 이리로 오고 있으니까. 하지만 아이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엄마는 안심하지 못하신다. 집밖으로 나가 누나들을 직접 찾 아 데려온 엄마는 하루 종일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뛰어다니느라 먼지투성이 가 된 테이를 씻기고 저녁식사를 시작했다. 온가족이 모인 저녁 식사시간 새로 지은 집으로 이사와 라혼이 예상했던 대 로 교육문제가 거론 되었다. “이제 우리 쌍둥이들도 뭔가 가르치기 시작해야 할 것 같아. 라혼은 내일 부터 검술 기초를 가르칠 생각인데…….” “그럼 루나랑 테이도 같이 가르쳐요.” “루나랑 테이도?” “잊었어요? 내 아버지도 내게 기초검술을 가르치셨다고요.” “그거야, 그렇지만……. 그러지 뭐!” 역시 현명하신 어머니……. 루나도 그렇고 테이도 그렇지만 라혼이 뭔가 특 별대우를 받는 것을 무지하게 시샘 낼 것은 뻔했다. 그러니 애초에 처음부 터 같이 가르쳐서 누나들이 제풀에 나가떨어지면 그때 따로 여자로써 배워 둬야 할 것들을 가르치실 생각이신 것 같다. 하지만 루나가 트라킨을 좋아 하는 것과 테이는 라혼과 따로 있기 싫어한다는 것을 고려하신 걸까? 어찌되었든 다음날 라혼과 차이저 가의 처자들은 트라킨의 지도아래 기초 검술동작을 배웠다. 그사이 어른들은 이사를 위해 새집으로 짐을 옮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른 존재를 가르치는 재미에 푹 빠져있는 14살의 소년과 그 소년에게 관심 이 많은 10세 소녀, 호기심이 왕성한 7살 여자아이, 그리고 나름대로 하수 의 가르침 즐기는 라혼은 그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검술수련을 했다. 그 다 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그것은 엄마와 유모, 하인 2명과 하녀 3명이 새 집에서의 짐정리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예전에 살던 집에 하인들의 가족이 이사 와서 6살의 토라와 5살인 주노 형제도 같 은 울타리 안에서 살게 되었다. 그것으로 차이저 가의 식솔은 크게 늘었다. *** “대장. 들었어? 전쟁이래.” “전쟁? 산적토벌이 무슨 전쟁이냐?” 9살이 된 라혼은 자신의 똘마니 토라와 주노의 호들갑을 심드렁하게 대답했 다. “대장은 알고 있었던 거야?” “당연히 알고 있었지. 내가 너희들 같이 글씨도 읽지 못하는 까막눈 인줄 아냐? 산적을 토벌을 위해 용병을 모집한다는 포고문이 붙은 지가 언젠데 지금 호들갑이야?” “그럼, 내일 킴벌리 시내에서 출정식 열린다는 것도 알아?” “어? 그건 처음 듣는 말인데?” 킴벌리는 사이스 백작령의 주도에 해당하는 도시였다. 차이저 가는 킴벌리 시와 조금 떨어져있는 곳의 장원이었고 킴벌리까지 가려면 걸어서 대략 30 분쯤 걸렸다. 놀러 다니기에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신성 시드그 람 제국은 물론 대륙에서도 알아주는 유력가문인 사이스 백작가의 본가가 있는 큰 마을이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돌아다니기에 결코 좋은 곳이 아니 라는 말이다. 게다가 그 산적토벌대에 아버지가 참가하시기 때문에 어머니 에게 들킬 위험이 매우 높았다고 볼 수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거기는 레이스 네부카드 사이스의 본거지라는 것이다. 라 혼보다 2살 위인 그 녀석은 아버지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에게너 네부카 드 사이스 자작의 아들, 즉 아버지의 주군이신 헬버트 네부카드 사이스 백 작의 친손자였다. 2년전 그 녀석 생일파티에 초대되어 처음만난 그 녀석은 한마디로 철부지 그 자체였다. 그에 비교해서 라혼의 누나들은 엄청 조숙한 편이었다. 9살이나 먹었으면서 아니, 9살 밖에 안 되는 놈이 사람을 무시 하는 것하며 자기가 대단한 사람인냥 거들먹거리는 행태가 정말 보기 안 좋 았다. “어때? 대장.” “집 떠나면 고생이야. 킴벌리에 가면 조슈아 패거리들도 있고…….” “무슨 소리야. 대장 조슈아 패거리들이 뭐가 무서워? 대장답지 않게……. ” 죠슈아 패거리는 킴벌리에서 사는 아이들을 휘어잡고 있는 아이들이다. 사 는 세계가 틀리 달까? 아버지에게 정식을 기사수업을 받는 라혼과는 별인연 이 없는 아이들이었지만 토라와 주노는 종종 마을에 놀러가서 걔네들에게 맞고 왔다. 그래서 한번은 라혼이 나서서 적당한 수준에서 손봐준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또래 아이들을 혼내준 정도였지. 서너 살 위의 죠슈 아와 직접 부딪친 것은 아니었다. 죠슈아는 패거리를 이끄는 골목대장답게 자신의 분수를 잘 알고 있었다. 사이스 기사단의 부단장 아들인 라혼의 그 러한 도전적인 행동을 아무 일도 아니라는 냥 묵인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 이 라혼의 똘마니 토라와 주노의 간이 배 밖으로 나오게 된 계기가 되어 한 동안 라혼의 위세를 믿고 까불다가 죠슈아 패거리의 나이 많은 아이들에게 얻어터지고 돌아온 것이다. 내 식구가 얻어맞고 왔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 겠는가? 당장 킴벌리로 달려가 죠슈아에게 따지려는데 녀석은 레이스와 그 패거리들에게 당하고 있었다. 신나게 얻어터지고 있는 죠슈아를 본 라혼은 그들 사이에 끼어들기에도 뭐하고 해서 발걸음을 돌리려다. 레이스와 그 패 거리-라혼과 같이 사이스 가의 기사들이나 가신들의 아들들이다.―들이 저 항도하지 않고 그저 맞고만 있는 녀석을 몰매를 때리는 것도 모자랐는지 몽 둥이 같은 흉기까지 들고 설치려하자 하는 수없이 나서서 레이스의 비위를 살살 맞춰가며 특별한 빚이 없다면 차이저 가에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그러 자 레이스는 자기가 뭐라도 되는냥 죠쥬아의 처분을 라혼에게 맡겼다. 그것 으로 라혼은 겉으로 무지하게 살벌하지만 실제론 거의 타격이 없는 교묘한 수법을 사용해서 죠슈아를 패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눈치 빠른 죠슈아도 죽는 시늉을 하며 동조하자 더욱 실감이 났고 레이스와 그 패거리는 질린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떠났다. 뭐 그런 이유로 라혼은 아이들의 세계에서 은근히 따돌림을 당했지만 애초에 그들과 어울릴 생각이 없었던 라혼은 그 것을 무시했다. 그래서 지금 라혼 곁에는 같이 노는 친구는 똘마니 토라와 주노뿐이었다. 그리고 이 녀석들은 된통 당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죠슈아 패거리를 은근히 무서워했다. 그래서 든든한 라혼이 같이 가주길 바라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들에게 불행인 것은 라혼에게 소년 특유의 호기 심이 없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안가. 겨우 산적토벌대의 출정식인데 뭐 볼게 있겠어.” “대장, 정말 이러기야. 같이 가자! 재미있을 거라고.” 그러나 라혼의 마음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나 라혼에게도 쥐약은 있었으 니……. “어딜 가는데?” “세나테이아 아가씨 그게요…….” 라혼에게 없는 호기심까지 모두가진 소녀 테이가 어디선가 나타나 물었다.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 쪽을 닮은 진한 갈색머리를 곱게 땋은 주근깨 가득한 얼굴의 테이를 본 녀석들은 자기들이 왜 그녀의 생각을 못했을까 하는 표 정을 지으며 바로 테이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출정식이라고? 재미있겠다. 라혼 너도 갈 거지.” ‘묻기는 이미 마음을 정했으면서…….’ 그렇게 테이를 포함한 아이들은 라혼이 킴벌리에 갈 것임을 대답도 듣지 않 고 기정사실화 하며 자기들끼리 떠들기 시작했다. “기사들이 포함된 토벌대니까. 우리 아빠도 내일 출정식에 나오겠네? 라혼 , 너 뭐 들은 거 없어?” “트라킨 형이 뭔가 준비하느라 바빴어. 트라킨 형이 하는 말론 그 토벌대 에 우리 아빠도 참가하신다나봐.” “그래?” “그런데 킴벌리에 출정식 구경하러 가는 거 엄마께 말하고 가야하지 않을 까?” “음……. 패스!” 라혼의 제안에 뭔가 궁리하는 척하던 테이는 간단한 한마디로 라혼의 정당 하고 현명한 의견을 묵살했다. 이럴 땐 후환을 예상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 이 너무나 저주스러웠다. 혼나는 것이야 무섭지 않았지만 비록 산적토벌이 라는 간단한 일이이라도 흉험한 싸움터에 남편을 보내 마음이 아플 어머니 가 속상해 하는 것을 보는 것은 그 무엇보다 두려웠다. 비기닝Beginning *** 달도 뜨지 않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 라혼은 조용히 거실로 나왔다. 거실에 는 바로 얼마 전 아버지가 직접 유명한 장인에게서 특별히 주문한 풀 아머 세트가 차이저 가가 기사의 가문인 것을 증명하듯 장식되어 있었다. 바로 어제까지 아버지에게 기사수업을 받는 종자 트라킨이 기름으로 닦고 손질한 무구들이었다. “엔챈트 안 아티팩트 Enchant an Artifact!” 마법부여. “인챈드 웨폰Enchanted Weapon! 인텐서피케이션Intensification! 퍼머넌시 Permanency!” 라혼은 아버지의 갑옷에 특별한 마법진을 그리지 않고, 6서클 [엔챈트 안 아티팩트 Enchant an Artifact 마법부여]주문을 마법진 대신 시전하고 그 위에 4서클 [인챈드 웨폰Enchanted Weapon 무구에 마법속성부여.] 주문 걸 었다. 또한 6서클 속성주문 [인텐서피케이션Intensification 강화], 8서클 의 [퍼머넌시Permanency 영구속성] 주문을 연속적으로 시전했다. 그리고 마 지막으로 마왕으로써 라혼 자신을 상징하는 디바인 마크(Divine Mark)를 새 기고 [언디텍트Undetect]주문을 걸어 어느 누구도 아버지의 무구에 마법이 걸려있음을 모르도록 숨겼다. 이 세상 어떤 존재도 라혼이 숨긴 이 마법주 문을 감지해낼 수 없다. 신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라혼만의 특별한 권 능인데 물건에 주문을 건 것이 아니라 물건이 차지한 공간에 주문 걸어두었 음으로 물건을 아무리 분석해보아도 다른 차원에 걸려있는 마법주문을 파악 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다만 따로 [언디텍트Undetect]주문을 걸어둔 것은 마법의 발현될 때 그것을 숨기기 위한 것이었다. 라혼이 갑옷에 걸어둔 주문은 아버지가 나중에 어떤 마법사에게 일시적인 도움을 위한 주문을 받았을 경우 그것이 라혼의 수준으로 강화되어 영구히 지속되게 하는 주문이었다. 어느 누군가가 아버지에 임시적으로 경량화 마 법주문이나 내구성 강화 주문을 걸어두었을 경우 속성주문 [인텐서피케이션 Intensification]의 영향을 받아 9서클 수준으로 강화되고, 그것이 [퍼머넌 시Permanency]로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다. 그리고 라혼을 상징하는 디바인 마크는 그것이 라혼이 허락한 사람에게만 허용되게 했다. 라혼의 디바인 마크는 마계의 군주 다크 로드 샤라즈와 계약한데로 마계마 왕군 전위대 사령관으로써의 권위가 있었다. 그리고 또한 태양신의 기사로 써의 권위까지 포함하고 있음으로 그 권위는 3계를 망라한 것이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중간계를 지배하는 드래곤들에게는 그것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신과 마의 사이에선 언제나 중립을 지키는 입장을 유지해왔음으로 라혼의 상징을 가진 자를 함부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 일 라혼이 인간의 탈을 버리고 마왕이나 신이 된다면 사이스 백작가의 유력 한 기사 로카데 차이저는 신, 또는 마왕이 선택한 영웅(hero)이 되는 셈이 된다. “휴우~! 다됐다.” 라혼은 마법이 아닌 권능, 미라큘러스(miraculous)를 행사하는 수준이었다. 라혼이 사용하는 마법체계는 고룡급 에인션트 드래곤이 사용하는 용언마법 의 원형이 되는 언령마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언령마법은 뜻이 곧 발현되 는 마법으로 그야말로 신의 권능, 기적이었다. 다만 마법주문을 구성해 가 는 방식이 보통 마법과 같은 이유는 라혼의 인간으로써 인식체계에 한계 때 문에 인간의 마법체계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고 위마법주문을 사용하면서도 수명이 깎이거나 생명력을 잃어버리는 현상이 없는 것이었다. 만일 보통의 마법사였다면 방금 라혼이 사용한 주문을 사용 했다. 수명이 깎이는-쉽게 말에서 노쇠현상이 빨라지는- 것은 물론 생명력 의 고갈로 거의 빈사상태에 이르렀을 것이다. 물론 라혼이 미라큘러스을 행 사할 수 있게 한 것은 에텔 스페이스였다. 라혼은 에텔 스페이스의 공간에 서 주문을 조합해서 그 결과만을 소환하는 방식으로 마법을 발현했다. 만일 라혼이 에텔 스페이스를 다룰 수 없다면 3에서 4서클 수준의 마법사정도에 불과했다. 거기에 몸이 완성되는-완전히 성장한 이후- 때를 기준으로 하면 이변이 없다는 가정 하에 소드 마스터 수준의 ‘마검사’일 것이다. 하지 만 에텔 스페이스는 마법뿐만 아니라 검사로써의 능력도 확대시켜주었다. 바로 공간 자체를 무기로 하는 ‘소드 마그누스’가 될 수 있었다. “방어구는 되었고, 공격무기들은……. 역시 그대로 두는 것이 났겠지.”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며 오히려 배운다는 말이 있다. 나 아닌 다른 존재에 게 자신이 가진 지식이나 기술 전하려면 그것에 대한 이해가 뛰어나야 한다 .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면서 그러한 것의 이해도를 놓이고 자신 스스로의 인식체계를 확립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제자가 제자 맞 아 가르치는 것을 보면 그 제자의 이해도는 극명히 드러나게 되는 것이었다 . 그런 원리로 라혼은 자신을 가르치는 아버지의 수준을 누구보다도 명확하 게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현재 소드 마스터에 근접해 있었다. 소드 마스터란 오러 블레이드(Aura blade)를 사용하는 검사를 말했다. 소드 오러(Sword Aura)를 사용하는 검사를 통상 숙력자란 의미로 소드 익스퍼트 라고 하는데, 마나를 운용하는 이해가 높아져 깨달음을 얻으면 소드 오러의 밀도가 높아져 오러 블레이드가 된다. 밀도가 높은 형상화 된 오러 블레이 드로 이 세상에서 자르지 못할 물질은 없었다. 마나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 음으로 마나를 이용해 신체를 강화시키는 능력도 뛰어나므로 인간으로써는 최강자가 되는 것이다. 거기에 계속적인 수련을 하다보면 마나는 생명력을 활성화 시켜 신체를 재구성하는 경지까지 으르게 된다. 거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몸이 아닌 마음 영혼으로 마나를 움직이는 단계가 되어 겉은 멀 쩡해도 내부가 곤죽이 되는 섀도 오러 블레이드(Shadow Aura blade)를 사용 하게 되면 ‘그랜드 소드 마스터’ 또는 ‘그레이트 소드 마스터’로 불리 게 된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를 넘어서는 경지 ‘소드 마그누스’는 절대공 간을 지배할 수 있는 자였다. 소드 마그누스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였던 자 가 그 다음 경지를 상상하여 만든 말로 그것을 아는 자는 드래곤이나 라혼 을 상대하던 마계의 마족만이 알고 있는 말이었다. 라혼의 경우 에텔 스페 이스가 ‘소드 마그누스’의 기본조건이 ‘절대공간’을 자연스럽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스스로 소드 마그누스라 자처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라혼 은 진정한 소드 마그누스라고는 할 수 없었다. 라혼이 아버지의 바스타드 소드나 롱소드 등 공격무기에 마법을 걸지 않는 이유는 마법무구가 검술의 진보를 방해하기 때문이었다. 마법무구, 마법검 이나 마력검 등은 사용자의 마나를 강제로 뽑아 쓰기 때문에 검사 스스로 마나를 컨트롤하는 것을 방해했으며 그것으로 이내 마나운용이 크게 왜곡되 어 더 이상의 진보를 방해했다. 물론 사용자의 마나를 가져다 쓰지 않는 무 구도 있었지만 뭔가에 의지하는 것은 수도자의 입장에선 독이나 다름없었다 . 그 예로 동방대륙인 칸의 수행자들은 방어구조차 입지 않고 종국에는 무 기를 버린 상태로까지 자신을 밀어 넣는 경우가 있었다. 반면에 서방 대륙 인 시드그람 대륙의 기사들은 방어구 착용은 기본임으로 누구나 단순하고 파괴력 넘치는 파워검술만 비정상적으로 발전되어 있었다. 어쨌거나 라혼은 그렇게 아버지의 갑옷에만 손을 쓰고 방으로 돌아갔다. 라 혼에게 가족과 특히 부모의 존재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 었다. 스스로도 그것이 자신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머리 로는 알지만 가슴으로는 내일 출정하실 아버지가 걱정이 되어 자다 말고 일 어나 그 흔한 마법주문하나 걸리지 않는 아버지의 평범한 갑옷에 그런 엄청 난 주문을 걸어두고서야 잠을 잘 수 있었다. 지금 아버지의 갑옷의 속성은 오러 블레이드가 아니면 그 무엇으로도 생채기하나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 “아니야! 경량화 속성도 걸어두자. 단 전투가 발생했을 시에만 발동되게 해서…….” 그렇게 침대의 이불 속에 파고들어 잠을 청하던 라혼은 갑자기 몸을 일으켜 세우곤 다시 거실로 나갔다. *** 한 참 자랄 나이의 소년에게 잠을 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대부분 잠을 자는 시간에 성장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라혼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밤새 방과 거실을 오가느라 잠을 자지 못한 라혼은 유난히 피로함 을 느꼈다. “흐아아아암~!” “쯧쯧쯧쯧, 그렇게 해서 목젖이 튀어나오겠니? 좀 더 벌리지 그래?” “라혼, 밤새 뭐하느라 식탁 앞에 앉아서까지 하품을 하는 거냐?” “그냥 잠을 조금 설쳤을 뿐이야.” “왜? 무서운 꿈이라도 꾼 거니? 그럼 누나한테 오지 그랬어?” “사내자식이 어떻게 아직도 악몽에 잠을 설치냐.” 쌍둥이 누이인 말괄량이 테이와 이제 처녀티가 나기 시작하는 세살 연상인 루나 누나의 라혼을 대하는 태도는 이렇게 달랐다 “내가 언제 무서운 꿈을 꾸고 그게 겁나서 잠을 설쳤다고 했어? 테이 넌 나랑 처음 방 따로 쓸 때 같이 자달라고 징징 댔잖아!” “내, 내가 언제……. 그리고 너 누나라고 안 불러?” “체, 겨우 1초 먼저 태어났으면서…….” “흥! 그 1초차가 승부와 생사를 가르는 걸 모르나요. 견습기사님.” 라혼은 한번 해보자고 덤벼드는 테이의 태도에 한발 뒤로 물러섰다. 이런 상황에선 가만히 입 다무는 것이 최상이다. 그러나 싸우자고 덤볐는데 상대 가 피해버리면 그것보다 곤혹스러운 것은 없는 법. “왜, 대꾸를 못해? 대꾸할 말이 없지! 그치!” 그렇게 항복을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테이의 태도는 라혼이 가만히 있더라도 라혼을 돕는 원군을 불러들이기에 충분했다. “테이! 그만하지 못하니. 네 말대로 누나가 되가지고 가만히 있는 동생을 이기려들면 어떻게 하니.” “하지만 언니, 이건 라혼이 먼저 시작했잖아!” “테이, 니가 먼저 악몽이니 뭐니 하면서 먼저 시작했잖아!” “언니는 나만 미워해!” 흐흐흐, 9살짜리 계집애가 12살짜리 계집애를 말로써 이겨낼 수가 없지. 그 러나 여기서 적당히 끊어줘야 할 필요가 있었다. 안 그러면 테이가 루나 누 나마저 이기려들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빠랑 엄마는 뭐하는 거야? 나 배고픈데.” “조금만 더 기다려봐! 아빠 오늘 출정하시잖아.” “아, 맞다. 트라킨 형도 이번엔 같이 간다지?” “응.” 햐~! 대단하다. 3살 때 처음만난 사람을 지금까지 좋아하네. 하긴 트라킨이 한 인물하지. 거기다 아버지에게 교육을 확실히 받은 탓에 그의 사촌 레이 스와는 완전 딴판이고. 지금도 그런 면이 엿보이지만 나중에 기사가 되면 기사도의 전형이 될게 분명해. “아빠다.” 그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식당으로 들어섰다. 출정식은 정오께 열리지만 병사들의 집결은 훨씬 이른 시간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아 버지는 벌써 완전무장을 하신 모습이다. “아빠가 우리 딸하고 쌍둥이들을 기다리게 했구나. 모두 앉아라. 트라킨 너도 자리에 앉아라!” “예, 마스터.” 고동색 머릿결에 또래보다 훨씬 건장해서 이제 16세임에도 불구하고 웬만한 어른보다 큰 트라킨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소년을 아직도 성장기가 끝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두 자리를 잡고 식탁에 앉자 하인들이 간단한 식 사를 내왔다. 오늘의 아침 식사도 평소와 다름없이 오트밀 죽과 구운 빵. 그리고 달걀 프라이와 라이스 조금이었다. “아빠, 오늘 출정식 구경 가도 돼요?” 루나가 물었다. “그러려무나.” 너무 간단한 허락. “아빠, 우리는요.” 이번엔 테이다. “그래 너희도.” 아빠의 선선한 허락에 테이는 싱글벙글 이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당연한 것 이다. 킴벌리 근처의 모든 주민이 모이는 구경거리였다. “루나, 네가 쌍둥이들을 잘 챙겨야 한다. 알았지.” “엄마는 가지 않을 거예요?” “아니 나도 갈 것이지만 엄마는 성에 일이 있거든. 그래서 그래.” 아마도 사이스 백작부인이 기사들의 아내들을 모아 뭘 할 모양인 것 같다. 그렇게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마친 아버지와 아버지의 종자인 트라킨이 자리 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엄마부터 루나 누나, 테이 누나까지 한번씩 안아주 시고는 라혼과는 눈을 마주치며 벽에 걸려있는 단검을 가져와 주시며 말했 다. “라혼.” “예.” “네 이름은 나의 스승이신 마스터 라혼의 이름이다.” “…….” “그리고 그것은 마스터 라혼이 네게 남긴 것 중 하나다. 내가 없는 차이저 가는 네가 지켜야 한다. 무슨 뜻인지 알겠지?” “예, 아버지.” “녀석. 그럼 다녀오마!” 그리고 아버지는 라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고는 현관 밖으로 나섰다. 현 관 밖에는 하인 두 명이 간단한 무장을 하고 아버지와 트라킨이 탈 말의 고 삐를 잡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로 차이저 가의 일원으로 토벌대에 참 가해서 전장에서 기사이신 아버지의 시중을 들게 될 것이다. 물론 싸움이 벌어지면 같이 싸우기도 하겠지만. “그런 이따가 다시보자구나. 트라킨 가자.” 그렇게 장원의 대문까지 마중한 어머니와 누나들 그리고 장원에 같이 사는 식솔들을 뒤로하고 아버지는 트라킨과 두 하인을 과 함께 점점 멀어지셨다. 이번에 참전한 하인들은 라혼의 똘마니 토라와 주노의 아버지들이었다. “바머, 마차를 준비하세요. 우리도 곧 킴벌리로 갈 거니까.” “예, 마님.” 아버지가 점점 멀어져 저 멀리 언덕을 넘어가 더 이상 보이지 않자 어머니 는 또 다른 하인 바머에게 마차를 준비할 것을 지시했다. “엄나, 토라와 주노도 같이 가면 안 돼요.” “후, 그러렴. 가는 길에 같이 가자. 그 아이들의 아버지들도 참전하니 말 이다.” 자식들 엄마의 말에 입이 귀에 걸렸구만. 에휴~! 철없는 것들 아무리 산적 토벌이라지만 죽을지도 모르는데……. 퓨어릴러티Puerility 퓨어릴러티Puerility 사이스 백작가의 영지는 오랜 세월동안 별무리 없이 평탄한 세월을 보내왔 다. 그것은 현 사이스 백작이 대단히 정치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헬버트 네부카드 사이스 백작은 카고네 지방의 유력자로써 네부카드 일족의 파트로네스 즉 대부들 중 한명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그런 신분 을 이용해 물리력보다는 정치력으로 일은 해결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 동안 백작령 주민은 이렇다 할 전란을 겪지 않았다. 그러나 전란 이 없었음에도 사이스 가의 기사들은 저마다 나름대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 는데 그것은 잠시 수련여행을 떠나 사이스 백작과 그다지 인연이 없는 분쟁 지역으로 가서 용병형식으로 전투에 참전하거나 다른 귀족가가 개최하는 토 너먼트에 참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35세의 로카데 차이저는 부단 장이란 지위와 그다지 외유를 하지 않아 그 실력에 비해 외부에 이름이 그 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사이스 백작은 전쟁은 물론이고 가문의 위세를 뽐내는 토너먼트도 개최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 아트란 산의 산적을 토벌한다며 토벌대를 조직 하고 거창하게 출정식까지 한다는 것은 전혀 사이스 백작의 취향이 아니었 다. 아마도 이번에 킴벌리에서 열리는 출정식은 사이스 백작의 장자인 에게 너 네부카드 사이스 자작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라혼은 그러한 사실을 가끔 찾아오는 콘라드 네부카드 사이스 경과 아버지 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는 트라킨의 아버지고 백작의 차자였는데 오히려 그의 신중한 성격이 경솔하기 그지없는 형인 에게너 자작보다 백작 의 성격을 많이 닮아 있었다. 대단히 정치적인 콘라드 경과 아버지 로카데 는 매우 죽이 잘 맞는 편이었는데 명성을 중시하고 외부로까지 나가 이름을 얻는 다른 기사들과 다르게 스스로 기사도를 지키며 성실한 아버지의 신중 한 성격이 둘을 그렇게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라혼의 눈에는 그것 말고 다른 것도 눈에 띄었는데 아직 어린아이인 자신과 친해지려고 노력하는 태 도는 아마도 외증조할아버지를 의식해서인 것 같았다. 그와 아버지간에 오가는 이야기를 대충 들어보면 형인 에게너 자작이 일을 벌려놓으면 동생인 콘라드 경이 뒷수습하는 형식으로 일을 해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어쨌거나 요새는 노쇠한 백작은 뒤로 물러나 있고 그의 아 들들이 백작가의 대소사를 도맡아 하니까 앞으로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다. 정오로 접어드는 시간 라혼은 똘마니들과 테이의 손에 이끌려 출정식을 구 경하려 사방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북적이는 킴벌리 시내를 쏘다녔다. 사람 들이 모이는 자리라면 당연히 여기저기에서 이것저것 파는 노점상들이 생기 기 마련이고, 대부분 그런 것들은 아이들의 눈에 신기하게 비치기 마련이었 다. “대장, 저쪽에 광대들이 있어!” 연신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똘마니 토라와 주노는 뭔가 발견하고 다가가기 힘든 루나가 아닌 만만한 라혼에게 말하며 눈동자는 루나의 입을 향해 있었 다. 똘마니들이 무리의 권력구도를 본능적으로 느낀 것일까. 라혼은 누나의 말을 거절치 않을 것이고 누나인 루나가 가만히 있으라고 하면 라혼은 가 만히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똘마니들에게는 이일에서 만큼은 든 든하기 그지없는 응원군이 있었다. “재밌겠다. 가보자, 루나언니……. 응~!” 차이저 가의 차녀 세나테이아였다. “그래.” “루나 아씨 저쪽이에요.” 이놈들이 묻기는 라혼한테 물어놓고는 루나가 허락하자 모든 일은 끝났다고 생각하는 지 벌써부터 광대들의 재주부리는 것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뭉쳐 있는 그곳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라혼은 두 레이디들을 호위하듯 누나들의 뒤를 따랐고, 누나들 또한 우스꽝스런 옷을 입고 재주넘기를 하는 광대들의 재롱을 구경하며 사람들과 함께 웃음보를 터트렸다. 라혼도 광대들의 우스 꽝스런 몸짓에 크게 웃으며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이번엔 마술 사가 나와서 마술을 부리는 것을 구경하는데 토라가 라혼의 옆구리를 찌르 며 불렀다. “대장, 저기…….” 토라가 눈으로 가리킨 그곳엔 죠슈아 패거리가 자릴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쪽도 라혼의 존재를 발견하고 자기들끼리 뭐라 수군거리는 것이 보였다. 당사자인 죠슈아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같이 손발을 맞춰 레이스와 그의 도 련님 패거리들을 속이는 쇼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아이들은 라혼 과 죠슈아의 은밀한 거래를 알지 못하고 오히려 라혼이 죠슈아를 반죽음 상 태로 몰고 갔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라혼은 원망의 대상 이면서 두려워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라혼이 이곳 킴벌리에서 놀지 않았기 에 거의 잊혀져가는 존재였었다. 하지만 뭐가 어찌되었건 라혼은 아이들의 일에는 관심 없었다. 그리고 눈치를 보아하니 죠슈아도 이쪽을 무시하는 듯 했으니 똘마니들이 걱정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라혼, 아는 애니?” “누구? 쟤?” “그래.” “그냥 안면이 있는 사이지. 킴벌리에서 노는 아이들인데 나랑 무슨 상관있 겠어.” 라혼은 루나의 물음에 아무것도아니라는 듯 말했고, 루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항상 차이저 가의 장원 안이나 멀리 나가 봐야 장원과 가까운 곳에 흐르는 개울가 인 라혼이었기 때문이었다. 행동반경이 빤해서 항상 시야에 있는 라혼이니 루나는 동생이 킴벌리 아이들 사이에서 ‘도그란의 폭군’ 이라는 악명을 떨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 리 없었다. 도그란은 차이저 가의 장원이 있는 지역을 말했다. “어? 돈 받는다. 가자 대장.” 마술사가 커다란 나무통에 소녀를 넣고 칼을 꼽아 넣고는 사람들의 궁금증 을 자아내게 하고는 광대들로 하여금 돈을 걷게 했다. 그러자 모여든 사람 들의 일부는 자리를 피했고 대부분은 저마다 얼마씩 동전을 꺼냈다. “재미있게 보고 즐겼으면 그만한 대가는 지불해야지. 아무것도 없다면 모 를까…….” 라혼은 그렇게 말하며 오늘 엄마에게 받은 용돈 중 일부를 꺼내들었다. 그 런 라혼의 태도에 똘마니들은 히히 낙락했다. 라혼이 돈을 냄으로써 사람들 이 떠나가 여유가 생긴 이곳에서 당당하게 자릴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그리고 칼이 빽빽하게 꼽혀있는 통 안에 여자 아이가 어떻게 됐을지도 궁 금하기도 했다. 붉고 푸른 물감으로 일부러 바보스런 분장을 한 광대들은 라혼이 돈을 꺼내자 다소 의외라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씩 웃고는 동전바구 니를 내밀었다. -짤랑~! 돈바구니를 든 광대가 멀어지자 쌍둥이 누이 테이가 옆구리를 찌르며 물어 왔다. “얼마냈어?” “3코퍼.” “뭐야? 뭘 그렇게 많이 낸 거야?” “이봐요. 레이디 세나테이아, 차이저 가의 장남인 내가 그 정도도 못할까? 그리고 5명분인데 뭐가 어때서…….” 동화 1코퍼는 두 사람이 펍에서 한끼 식사를 해결 할 수 있는 가치를 가지 고 있었다. 그렇게 큰돈은 아니지만 아이들에게는 상당한 거금이었다. “그래 라혼, 무슨 일이든 차이저 가의 장남으로써 부끄럽지 않아야 돼.” “칫!” 칭찬하는 루나누나와 핀잔주는 테이, 겨우 세살차이가 나는데 루나와 테이 는 이렇게 다르다. 아무튼 이제 아이들은 라혼과 누나들, 똘마니들까지 다 섯 명 뿐인 상태에서 마술사는 통에 박힌 칼을 하나씩 빼기 시작했다. 사람 들은 하나의 칼이 빠져나올 대마다 탄성을 지르며 칼에 피가 묻었는지 확인 했다. 그리고 마지막 칼이 뽑혀지고 나무통의 뚜껑이 열리며 소녀가 아닌 예쁘게 생긴 처녀가 ‘짜잔!’하고 튀어나왔다. -오~! 그리고 아까 돈 바구니를 들고 돌아다니던 특이하게 가면을 쓰고 있던 광대 가 가면과 헐렁한 옷을 벗고 나타나 사람들을 다시 한 번 놀라게 했다. -와아~! -짝짝짝짝짝………………. 확실히 돈을 내고 끝까지 본 보람이 있는 볼거리였다. 아마도 그냥 발걸음 을 돌린 사람들은 돈을 걷던 광대중 하나가 칼이 빽빽이 박혀있는 통속에 들어가 있던 소녀라는 것을 전혀 모를 것이다. “우와! 대단해. 어떻게 한 거지?” 테이는 손이 아플 때까지 박수를 치면서 그렇게 탄성을 질러댔다. 그렇게 광대들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사람들을 향해 마치 왕에게 허리를 꺾 어 절을 하듯 정중하게 인사하며 장내를 치우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사 람들이 킴벌리 마을의 중앙광장을 향해 몰려가기 시작했다. 아마도 출정식 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우아! 이거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 “어쩌지?” 라혼이 광장에 들어서자 가장먼저 본 것은 몇 그루 없는 굵은 나무위에 자 리 잡은 죠슈아 패거리였다. 광대들이 돈을 걷을 때 몸을 뺀 녀석들이 미리 와서 자릴 잡은 모양이었다. “대장, 우리도 나무위에 올라가서 보자.” 토라가 말했지만 우리는 쟤네들과 처지가 달랐다. 자칭 레이디들이 둘이나 있는 마당에 그녀들이 나무에 오르는 것은 어려웠다. 특히나 이 토벌대에 아버지가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이상 더욱더 힘들었다. 그때 라혼의 시야 에 적당한 자리가 눈에 띄었다. “누나, 저기 저쪽으로 가자!” “어디?” 그곳은 사이스 백작의 기사들의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들의 우두 머리 미래의 사이스 백작, 소공자 레이스는 백작의 성에서 나오지 못했는지 레이스가 보이지 않았다. 라혼에게 레이스를 제외하면 껄끄러운 존재는 없 었다. 자신을 보호하는 하인들까지 대동한 그들이 자리 잡은 곳은 그야말로 명당이었다. “대장, 거기는…….” “됐어 따라와. 쟤네들도 하인들과 같이 있는데 뭐. 그리고 이런 날에 너희 들에게 뭐라 그러겠어?” 아무래도 신분이 틀리다보니 토라와 주노는 거북해 했지만 그렇다고 누나들 에게 나무에 올라가라고는 할 수 없었다. “여어! 이게 누구야. 라혼 차이저 아니야?” “하하, 안녕.” 이제 10살 밖에 안 된 놈이 말투가 완전 애늙은이다. 저 녀석 아버지가 평 소에 행동하는 것이 녀석을 보면 모두 드러난다. “어인일로 행차시나?” “누구냐?” “왜 있잖아. 도그란의 폭군!” “아! 얘가 걔였어?” 아이들의 수군대는 소리가 들린다. “쌍둥이랑, 루나 누나도 왔네.” “안녕, 제브.” “오랜만이네. 그리고 내 이름이 쌍둥이냐? 내게도 어엿한 이름이 있어.” “하긴 테이는 라혼이랑 쌍둥이면서도 남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닮은 데 가 없으니까.” 확실히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라혼과 갈색 눈동자와 진한 갈색머 리를 곱게 땋고 얼굴에 주근깨 가득한 테이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뭐라구! 너 말 다했어?” 테이는 아담스 경의 둘째아들 제브의 그냥 지나가는 말투에 던진 한마디에 발끈했다. 제브는 그다지 악의 없이 한 말이었지만 테이가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다. 라혼과 루나는 같은 검은 머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테이만 갈색이 었기 때문에 은근히 신경 쓰는 모양이던데 제브가 고의는 아니겠지만 정곡 을 찌른 셈이니……. ‘루나가 나서서 말려주길 바라는 것도 포기해야 갰군.’ 루나 누나도 입술이 쌜쭉한 것을 보니 제브의 말에 그다지 기분 좋아보이지 는 않았다. 라혼이 테이의 기분을 알듯이 루나도 테이의 기분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싸움이 번지기 전에 라혼이 나서며 말했다. “확실히 내가 잘생기긴 했지. 하지만 내가 남자로 태어나서 다행이지 여자 로 태어났으면 아담스 가의 둘째는 상상병으로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거야. 그러니까 항상 신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라고…….” “……!” 약간의 침묵. “우아아아, 보이냐 이 닭살.” “아니지, 아니야. 네가 내 얼굴을 찬찬히 뜯어본 이유가 테이랑 나랑 비교 하려고 그런 것이 아니야. 그렇지 제브.” “뭐?” “친구, 우리는 그냥 친구로 남세. 나는 그런 취미 없으니…….” “괴롭히지 말고 날 차라리 죽여라 죽여!” 애들은 단순하다. 처음엔 그저 제브의 과장된 반응을 재미있어 하던 아이들 은 라혼이 자연스러운 어투와 진지한 표정으로 은근슬쩍 밀어붙이자 그것은 이미 기정사실화 되었다. 사실 라혼은 보기 드문 미안을 가지고 있었다. “제브, 너 설마 진짜냐?” “설마 남자를…….” “아냐, 우리 형이 그랬는데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도 있대.” “그럼 제브도?” “봐바. 제브 얼굴이 붉어졌어.” 그렇게 소재가 제공되자 아이들의 상상력은 거기에 살을 붙이기 시작했다. “라혼에게 끌리는 자신을 느끼고, 라혼의 쌍둥이 누나에게 관심을 두었던 거군. 그런데 둘이 그다지 닮지 않았으니까.” “맞아. 일리가 있어.” “야! 이것들이 사람 앞에 두고 뭐하는 짓이야?” 라혼은 발끈하는 제브의 어깨에 팔을 얹고는 말했다. “제브, 우린 이정도로만 하세.” “라혼, 너…….” 당황스런 상황에 얼굴이 붉어진 제브였지만 이미 눈에 색안경이 씌워진 아 이들은 그것을 제브가 부끄러워서 그런다고 해석했다. 그리고 제브가 라혼 에게 뭐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누군가 소리쳤다. “기사들이 온다.” -와~! 말을 탄 기사들을 선두로 백작가의 병사들과 산적을 토벌키 위해 모집한 용 병들이 저마다 무기를 들고 그 뒤를 따랐다. ‘어째 옛날의 병사들보다 더 어중이떠중이냐?’ 라혼은 산적떼를 토벌하러 간다는 병사들이 행진하는데 발을 맞추기는커녕 줄만 대충 맞춰서 광장으로 들어서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라혼이 시드 그람 대륙을 떠나기 전 시드그람 제국의 군단의 군단병들은 장비도 통일되 고 절도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병사들의 모습은 장비도 제각각이고 소속도 제각각이고 저런 병사들로 뭘 할 수 있을까 의심이 되었다. 기사들과 병사들이 비워둔 광장에 모이고 미리 마련된 단상에 백작가의 집 사가 나와 크게 소리쳤다. “헬버트 네부카드 사이스 백작님의 아드님이신 에게너 네부카드 사이스 자 작이십니다.” 그리고 우람한 덩치를 자랑하는 에게너 자작이 말에 몸을 실은 체 단상의 아래로 모습을 보였다. “아트란 산에 산적이 시민들의 목숨을 빼앗고, 재산을 약탈했다.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신성한 귀족으로써의 의무다. 나 에게너 네부카드 사이스는 악을 증오하고, 정의를 실천하는 기사로써 그들 에게 철퇴를 가하리라!” -와~! “출정이다. 정의는 승리한다.” -와! 그리고 광장에 집결한 토벌대는 기사들을 선두로 해서 킴벌리 중앙대로로 행진을 시작했다. 어찌 보면 설렁하기 그지없는 출정식이었다. 그러나 아이 들은 기사들의 위풍당당함에 감탄하며 눈빛을 반짝였다. “우리 아빠다.” 아버지가 루나와 쌍둥이를 발견했나보다 아버지가 깃발을 들지 않는 왼손을 흔들었고 누나들은 그에 호응하여 더욱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라혼도 누 나들과 같이 손을 흔들면서 다른 생각을 했다. ‘겨우 산적을 토벌하는데 백작가 기사들이 모조리 동원되었네? 무슨 일이 지? 단순히 에게너 자작이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뭔 가가 있는 건가?’ 퓨어릴러티Puerility *** 라혼은 누나들과 백작님의 성으로 갔다. 그곳에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었 다. 겨우 산적을 토벌하러가는 군대가 출정식을 갖는다는 것도 조금 오버하 는 일인데 부인들까지 나서서 배웅하는 것을 보이는 것은 우스웠기에 백작 부인이 부인들을 불러 사람들이 없는 백작성에서 백작님과 함께 기사들을 배웅하신 것 같았다. “어서들 오너라.” -백작부인 뵙습니다! 백작부인이 부른 것이 라혼의 어머니만이 아니듯 출정식을 구경하던 아들이 모두 같이 백작부인에게 합창하듯 인사했다. 60대 중후반의 백작부인은 아 이들의 모습에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면서 아이들을 이곳까지 데려온 백작가 의 집사에게 말했다. “루만, 아이들에게 쿠키와 우유를 갖다 주세요.” “예, 백작부인.” 그리고 라혼을 포함한 아이들은 각자의 엄마와 눈을 맞추고 백작부인에게 인사하며 우르르르 방을 나섰다. “아이들이 참 귀엽군요.” “아아, 나도 빨리 아이를 가져야하는데…….” “아! 맞다. 바이얼 부인은 이제 신혼이죠? 저는 두 분이 약혼자였을 때도 항상 같이는 것만 봐서 결혼생활을 오래한 것으로 착각했지 뭐예요.” “근데 연애기간이 길면 힘들다던데…….” “연애기간이야 길었죠. 하지만 무슨 일만 있으면 스스로 일을 만들어서 나 돌아 다니니 기다린 세월이 태반인데.” “하긴 우리 그이도 기사수련여행이나, 어디 붙어있는 지도 모를 귀족가의 토너먼트를 쫓아다니는 남편이어서 얼굴보기도 힘들다니까요.” “맞아요. 그래서 저는 차이저 부인이 무척 부러울 때가 많아요.” “차이저 경은 외유를 거의 하시지 않으셨으니까.” 부인들의 수다는 백작부인의 둘째 며느리 옆에 자리 잡고 앉아있는 세나데 나에게 귀결되었다. “아마, 루나 낳기 전 같이 여행할 때부터 지금까지 떨어져 지내신적이 거 의 없으실 텐데.” “그렇죠 뭐. 하지만 어떤 때는 답답할 때도 있지요. 항상 집에만 계시니까 .” “맞아요! 나도 혼자있는 게 적응이 되다보니 남편이 어디 가지 않고 집에 오래있으면 어디 좀 가줬으면 할 때가 있으니까요.” “맞아, 맞아!” -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 남편들이 흉험한 곳에 갔지만 특별히 걱정하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이 시 대의 기사들은 강했다. 그리고 특별한 사람들이었다. 기사의 최고 덕목은 명예와 용기. 제 실력도 갖추지 않고 기사행세를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에 게 비웃음을 사는 것이었다. 특히나 사이스 백작 가같은 대귀족의 기사는 허투루 볼 수는 없었다. 기사자격이 되지 않는 자에게 작위를 준다는 것은 스스로 사람 보는 눈이 없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즉, 그것은 귀족으로써 명예에 걸려있는 문제였기에 사이스 백작 가의 기 사전원이 기본적으로 소드 오러를 다루는 마나유저였다. 사이스 기사단의 어느 누구도 산적에게 당할 만만한 사람을 없었다. “자자, 이제 그만들 하세요. 어머님.” 수다를 떨며 웃고 떠드는 사이에도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백작가의 장자 에게너 자작의 부인 자작부인이 나서며 침목을 도모하는 부인들을 만류하 고 나섰다. 부인들은 조용히 시선을 모으는 가운데 젊은 부인들의 대화에 미소만 짓던 백작부인이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입을 열었다. “사실은 이번에 레이스를 그란의 유벤트 기사단에 보내기로 했어요.” “…….” “그래서 레이스와 함께 유벤트 기사단에 같이 갈 누군가 보내야 갰는데… …. 세나데나.” “예, 부인.” “그래서 라혼을 같이 보냈으면 해요.” “라혼을요?” “모든 비용은 우리가 부담하는 거니까. 그런 것은 걱정 말고.” “…….” 세나는 백작부인의 권유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만일 따로 불러서 이런 말 을 했다면 단연코 사양했을 것이지만 지금은 자리가 안 좋았다. 부인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백작부인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은 여러모로 좋을 것이 없 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겸양의 말을 해야 했다. “라혼은 아직 어리고 부족한 면이 너무 많습니다.” “지금 당장이 아니라. 레이스가 13세가 되는 2년 후쯤이 될 겁니다. 그때 가 되면 라혼도 11세가 되니 그다지 큰 무리는 없을 거고, 아이의 장래를 생각하면 떨어져 지내는 것도 나쁠 것이 없을 겁니다.” “…….” 세나는 내키지 않는 일이기는 했지만 백작부인이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더 이상 거부할 명분을 찾기 힘들었다. 그러나 레이스와 같은 또래의 아들이 있는 부인들은 부러움이 가득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는 백작부 인이 앞으로 백작가를 잇게 될 레이스의 평생 동반자로써 라혼을 선택한 것 이란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 끼리끼리란 말이 있다. 그것은 아이들의 세계 매우 중요한 키워드였다. 루 나와 테이는 당연한 듯이 계집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고, 라혼은 또 래 아이들 틈에 껴서 백작님의 장손자 레이스의 대장놀이에 반 강제로 참여 해야했다. “이야압!” -딱 따닥! 딱. -퍽! “아얏!” 벌써 4명 째다. 11살이나 된 놈이 할 짓이 없어서 동생들과 대련이라니…… . 물론 명분은 사이스 백작가 전통의 검술을 가르쳐 준다는 것이었다. 그러 나 아무리 보아도 저건 즐기는 거다. “힘이 그렇게 없어서야 어떻게 사이스 가의 검술을 배우겠냐?” 아이들에게 1살 차이는 엄청난 것이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어린아이 가 한살이라도 많은 아이를 이기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었다. “자, 다음은 라혼이다. 와랏!” 라혼은 레이스의 호명에 두툼한 목검대신 얄팍한 투창 수련용 스피어를 잡 았다. “어라? 비겁하게 스피어를 들면 어떻게 목검으로 해!” ‘그놈 참 짜증나네. 확 패버려?’ 라혼은 레이스의 딴지에 가장 가벼운 목검과 배가 부풀어 오른 둥그런 쟁반 같은 방패인 버클러 골라들었다. 그리고 전설의 검사인듯 있는 폼, 없는 폼, 다잡고 있는 레이스 앞에 섰다. “자! 그럼 시작한다.” “그래.” -딱딱딱딱! 퉁! 딱! 따닥딱! 라혼은 레이스가 더 이상 애들 괴롭히지 못하도록 완전히 진을 빼놓을 생각 으로 카마리에 검술 특유의 힘을 흘리는 검술을 구사했다. 것으로 보기엔 라혼이 무척 위태, 위태해 보였고, 레이스는 적당히 하다가 끝낼 생각으로 회심의 일격을 가했다. 그러나 라혼이 버클러를 교묘히 비틀어 레이스의 균 형을 읽게 만들었다. “어? 아깝다. 저기서 라혼이 조금만 여력이 있었으면 끝나는 건데…….” 그렇게 아이들 중 누군가가 중얼거렸고, 그것이 레이스의 자존심을 건드렸 는지 이제는 인정사정 보지 않고 목검을 휘둘러 댔다. 그러나 라혼은 항상 아슬아슬하게 피하거나 막아냈고, 그럴수록 레이스는 더욱 발광했다. 그러 나 레이스가 용쓰든 말든 여유 있는 페이스를 유지하며 그 녀석을 상대했다 . 레이스는 하다하다 안되니까 이젠 몸싸움까지 불사하려는 듯 달려들었지 만 움직이지 않는 듯하면서도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살짝살짝 비트는 신 기에 가까운 라혼의 스텝에 말려들어 기회를 만들 수 없었다. “헉헉헉헉, 이제 그만하자.” 라혼은 드디어 항복 선언을 받아냈다. “헉헉헉헉, 라혼 검술이 완성되기도 전에 방패에 의지하는 것은 안 좋아. ” 딴에는 맞는 말이다. 방패에 너무 의지하면 검술이 늘지 않는다. 겉으로 보 기에는 라혼이 일방적으로 밀린 싸움이었지만 레이스도 그렇고, 대련을 지 켜본 아이들도 라혼이 스러지지 않은 이유를 라혼이 들고 있는 버클러에 두 었다. 그만큼 라혼의 방패를 사용하는 빈도수가 많았다는 말이었다. “이젠 힘들어서 못하겠다.” “그럼 이제 뭐하지?” “마을에서는 아직 축제가 끝나지 않았을 텐데?” “엄마의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킴벌리에 축제가 벌어지면 마을 중앙광장에 야시장이 선다. 그러나 이번엔 출정식이라서 광장을 비워둘 수밖에 없었지만 출정식을 끝났고 마을광장을 비워둘 필요가 없는 이상 광장에 새로운 노점들이 생겼을 가능성이 컸다. 아이들은 솔직히 거기에 가고 싶었지만 후환이 두려웠다. “뭐 어때 가자.” “그래도 될까?” “까짓것 뭐 어때. 가자!” 레이스가 한마디 하자 아이들은 저마다 그에 호응하며 동조했다. 그러나 라 혼은 조용히 한발 물러서 섰다. 그리고 아이들이 모두 연무장을 빠져나갈 때 아무런 말없이 뒤로 빠졌다. 그런데 그것은 제브가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 “라혼! 너는 빠지는 거냐?” “아니, 지금 내가 좀 급해서…….” “제브, 네가 기다렸다가 라혼이랑 같이 와!” “왜 내가?” “넌 라혼이랑 동갑이잖아!” 진짜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다. 라혼은 ‘난 니들과 놀기 싫어! 피곤하단 말이야!’라는 말이 턱밑까지 올라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좋겠네. 제브. 사랑하는 레이디 라혼과 잠시나마 둘만 있게 되어서……. ” “맞아! 그래서 제브가 라혼을 챙기는 거구나.” “우악! 아니야. 아니라구. 몇 번을 말해야 하는 거야! 야! 라혼 네가 말 좀 해봐!” “나는 널 친구이상으로 받아들일 수 없어.” 라혼은 쓸데없이 참견을 한 제브에게 처절한 살포시 복수를 하고는 뒤가 급 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화장실을 찾았다. -아니란 말이야! 앙아아아아아……. ‘사내자식이 그만한 일로 울기는…….’ 라혼은 진짜 화장실에 들어가 일을 보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런 라혼의 눈 에 저 멀리 나무 밑에 처량하게 쪼그리고 앉아있는 제브가 보였다. 라혼이 화장실에서 나온 것을 확인한 제브는 쪼르르 달려와 훌쩍이며 말했다. “훌쩍, 라혼 어떻게 애들이 진짠 줄 알아.” “예휴~! 내가 너 땜에 살수가 없다. 아담스 가의 차남이 남에게 눈물을 보 이다니 부끄럽지도 않냐? 놀림 좀 받았다고 찔찔 짜기나 하고…….” “…….” “놀림 받고 싶지 않으면 당당해져. 알았지.” 라혼은 제브에게 그렇게 이야기하고 마을이 아닌 성 안쪽 후원으로 발걸음 을 옮겼다. “어? 마을엔 안가?” “뭐 하러? 가봤자 놀림 받을게 뻔한데…….” “하지만 레이스가…….” “너는 레이스에게 충성의 서약이라도 했냐?” “아니.” “그럼 뭣 때문에 걔 말을 들어야 하는데?” “그거야, 당연히 백작님의 손자고…….” “미래 사이스 백작가의 주인이라서?” “…….” 고개를 끄덕이는 제브에게 라혼은 그런 거 흥미 없다는 태도로 말했다. “기사의 의무는 그때 가서 하면 되지. 게다가 네가 기사라도 되냐? 다시 말하지만 당당한 기사는 비록 군주라 할지라도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어 야 해!” 라혼은 제브가 불안한 표정을 짓든 말든 누나들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내아이들의 위험천만한 힘자랑을 보는 것보다 계집애들 수다가 마음이 편했다. 게다가 아직 누나들의 철벽방어가 뚫린 예는 지금 까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조용하게 시간 때우기에는 거기가 최고였다. “라혼, 같이 가!” “너, 나랑 있으면 또 놀림 받는다.” “뭐 어때 나는 당당한 사나이라구.” ‘당당하다’라는 말이 무척 가슴에 와 닿은 모양이었다. 라혼은 제브의 단 순함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마 당당하라는 충고 한마디에 이놈이 내게 들러 붙어버리는 것은 아니 겠지?’ 남자아이들이 레이스를 중심으로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면 여자아이들은 이 제 13세가 되는 레이스의 친누나 카시아를 중심으로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 고 있었다. 에게너 자작에게는 레이스와 카시아 말고도 얼마 전 시집간 큰 딸이 하나 더 있었다. “어머? 라혼!” “제브도……?” 백작가의 정원의 잔디에서 동그라게 앉아 그들의 어머니들처럼 수다를 떨던 소녀들이 후원으로 라혼과 제브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아는 체하면 손을 흔들었다. “라혼, 이리 와!” “오늘은 어째 안 나타나나 했다.” 같이 오면 언제나 누나를 찾는 라혼이었기에 라혼은 자연스럽게 무리에 낄 수 있었다. 게다가 미소년이랄 수 있는 라혼이었기에 여자아이들은 라혼이 오면 이것저것 챙겨주기에 바빴다. 다른 여자아이들은 평소와 다름없는데 루나와 테이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게다가 카시아도 풍겨오는 기세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그리고 라혼은 그 이유를 알았다. “라혼, 이번에 네가 레이스 도련님과 그란 유벤트 기사단에 함께 가게 되 었데.” ‘에? 이게 무슨 얘기?’ “그건 2년 후라고 하니까. 아직 먼 이야기고 하지만 그전에 레이스 도련님 과 함께 도련님의 교사이신 모함아드씨에 같이 수업하게 될 거야.” “그래, 사이스 백작가에서 큰돈을 들여보내는데 어느 정도 수준은 돼야 하 니까.” ‘뭐야 그럼?’ “도련님과 같이 수업해야 하니까. 아마도 성에서 같이 지내게 될 공상이 크겠지.” ‘나보고 레이스의 상판을 매일 보고 있으라고?’ 사실 레이스가 그리 막돼먹은 놈은 아니었다. 다만 버릇이 없을 뿐이었다. 처음부터 아들을 기대한 에게너 자작이 딸만 연속으로 둘을 낳고서야 비교 적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이었다. 위로는 백작부인부터 백작가의 하인들까 지 떠받드니 그런 성격을 가진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런 분위기는 아이 들에게까지 이어져 레이스 말이라면 껌뻑 죽는 시늉까지 해야 했다. 귀한 아들일수록 패면서 키워야 하는데……. “라혼, 가자.” “시끄러 가려면 혼자가 나는 누나들이랑 있는 것이 더 좋아!” 라혼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제브를 그대로 두고 테이와 루나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제브, 너도 이리와!” 친절한 루나가 가지도 오지도 못하는 제브의 손을 이끌어 자신의 옆에 앉혔 다. 여자아이들은 다소 부끄러워하는 제브가 귀여웠는지 입을 가리며 웃었 다. 라혼이 사내아이들 보다 계집아이들 틈에 있는 것을 선호하는 이유는 오직 레이스뿐이었다. 사내아이들 특유의 서열싸움이 있었는데 라혼은 그것 이 참 애매했다. 그냥 죽어지내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굳이 그럴 이유가 없 고, 그렇다고 태어난 순간부터 싸가지를 팔아먹은 레이스를 어떻게 하기도 귀찮았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여자아이들 그룹에 끼는 것이다. 여기서 라 혼은 항상 논외다. 적당히 물어오는 답에만 대답하다보면 루나와 테이가 적 정한 수준에서 보호해준다. 문제는 단지 좀 시끄럽다는 것이지만……. “트라킨, 봤니? 너무 멋있게 변하지 않았니? 루나는 좋겠다. 매일 같이 지 내잖아.” “그래 옛날에는 좀 이상한 애다 싶었는데 지금 보면 정말 멋있게 변했어. ” “왜? 내년 봄 축제 때 한번 노려보게?” “애는 말이 그렇다는 거지…….” “…….” 그렇게 그날도 무사히 어머니들이 딸들을 부름으로써 소녀들의 수다는 끝이 났다. 하지만 라혼은 그때까지 레이스를 잡느냐 마느냐를 두고 고민에 고 민을 거듭했다. 그리고 결론은 무시였다. ‘지금까지처럼 적당히 비위맞춰주면 되겠지. 괜한 트집을 잡으면 그것 그 때 가서 생각하고……. 그런데 설마 백작성에서 지내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 . 그럼 낭팬데…….’ *** 백작부인이 준비한 저녁식사를 얻어먹고 어두운 밤길을 바머가 모는 마차에 몸을 실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똘마니들의 표정이 그리 좋지 못한 것을 확 인한 라혼은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무슨 일 있는 거냐? 표정이 왜 그래?” “대장…….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싱겁기는…….” 뭔가 말하려다 만 토라의 태도가 걸리기는 했지만 굳이 캐내보아야 쓸데없 는 일에 말려들 것 같다는 생각에 무심하게 지나쳤다. 라혼이 아이들과 백 작성으로 갈 때 마을에 남아있던 똘마니들이 죠슈아 패거리들에게 걸린 모 양이었다. 그러나 라혼은 그 아이들과 관계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 협박은 당한 모양이었지만 얻어맞은 구석이 없는 것 같으니까 그것으로 족했다. 다음날 아침. 어머니가 드디어 레이스와 함께 앞으로 그란의 유벤트 기사단 에 입단하는 문제를 이야기 했다. 대부분 백작성 후원에서 여자아이들에게 들었던 그대로였다. 다소 틀린 점이 있다면……. “그리고, 현자를 초빙해 소공자님과 너를 포함해서 사이스 가에 소속된 다 른 기사들의 아이들도 같이 배울 거야. 그러니 차이저 가의 장남으로써 부 끄럽지 않아야 한다. 알았지.” “네.” 라혼은 레이스는 물론 그 패거리까지 같이 공부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남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1대1이면 어떻게 해보겠는데 레이스는 물론 그 패거 리라니……. “그리고……. 아니, 아무튼 사흘 뒤부터 시작되니까 그리 알고 있어라.” “네.” 그리고 그날 저녁 라혼은 레이스를 잡고 천재로 두각을 나타내느냐 아니면 지금까지처럼 알면서도 모른 척 할 수 있어도 할 수없는 척 하는 태도를 고 수할지 고민했다. 그때 라혼의 예민한 귀에 어머니와 유모의 대화가 들려왔 다. “아니? 카시아 아가씨와 도련님과의 약혼이오?” “그래요! 유모.” ‘으엑! 이게 뭔 소리야?’ “카시아, 정도면 훌륭한 며느릿감이기는 하지만 나는 왠지 내키지가 않아 서…….” “무슨 말씀을요. 그건 우리 도련님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하시고 높이 평가하는 거잖아요.” “그래도 나는 걱정이 돼요. 아마도 라혼의 증조할아버지를 보고 그러시는 것 같은데 사실 라혼이 태어나고 이름을 지어 보낸 것 이외엔 편지 한 장 주고받지 않았으니.” “그것 때문만은 아닐 거예요. 나리도 젊은 기사들에게 존경을 받는 분이시 고 동료 분들 사이에서도 신뢰가 두터운 분이니. 게다가 백작님도 손녀를 밖으로 시집보내는 것보다 가까이에 두시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셨을 수도 있고요. 그냥 받아들이세요. 그것이 도련님의 앞날에도 이득이 될 일이니까 요.” 그 후로는 같은 이야기의 반복이었다. 라혼은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일이 진행되는 것에 한숨이 나왔다. ‘카시아 누나가 약혼녀라……. 에잇! 뭐 어떻게든 되겠지. 몸이 완성되면 무서울 것이 없다. 그때 가서 안 되면 힘으로 밀어붙이면 그뿐이지…….’ 퓨어릴러티Puerility *** 사이스 백작부인이 초청한 현자 모함아드는 이제 십여세 된 백작의 손자뿐 만 아니라 몇 명의 아이들을 더 가르치게 되었다. 그러나 많은 아이들을 한 꺼번에 가르치게 되어 다소 소란스럽고 아이들 간에 성취도 차 때문에 힘들 어지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백작부인의 배려로 대부분 어린아이들이었 지만 읽고 쓰기가 가능한 아이들이라 그것에 맞춰 수업을 진행하니 생각했 던 것보다 수월했다. 그런데 모함아드는 유독 한 아이가 계속 마음에 걸렸 다. “수학과 기하학은 그냥 보기에 그다지 쓸모없어 보이지만 신학과 더불어 모든 학문의 기본이다. 라혼, 네가 나와서 문제를 풀어 보거라.” 사이스 백작가의 후원. 현자 모함아드의 가르침을 받게 된 열다섯 명의 9세 ~13세에 이르는 아이들이 고운 모래가 담기 모래판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모 여앉아 있었다. 모래판에는 삼각형과 사각형의 그려져 있었고 도형의 넓이 를 계산하는 문제가 있었다. -사악, 싹, 싸악……. 모함아드는 라혼이란 아이가 자신이 낸 문제를 푸는 모습을 보며 알 수없는 무언가를 느꼈다. 하지만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잘했다. 들어가도 좋다.” “…….” “이처럼 넓이는 사각형을 기준으로 계산한다. 삼각형을 사각형이 둘로 쪼 개진 형태로 정의할 수 있기 때문에 사각형으로 생각해서 계산하고 반으로 나누면 본래의 넓이가 나온다.” “그럼 둥그런 원은 어떻게 계산하는 겁니까?” 모함아드는 아이의 질문에 입가에 미소를 띠면 말을 이었다. “원을 계산하는 수식도 물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 넓이를 구하는 개념 이 정확히 잡히고, 그 외 다른 수학적 이해가 늘어야 알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질문이 나왔으니 정확한 원의 넓이를 구하는 공식정도는 가르쳐주마. ” 모함아드는 직사각형태의 모래판에 설치된 막대기를 밀어 모래를 평탄하게 만든 후 커다란 캠퍼스를 이용해 정확한 원을 그렸다. “원은 여기 이점 바로 중심점과 바깥에 둘러진 선의 거리가 일정한 것을 말한다. 여기서 중심점과 둘레를 이루는 선이 거리를 반지름이라고 한다. 원의 넓이는 반지름 곱하기 반지름 곱하기 <π>다.” “파이요?” “후후, 너희들이 이<π>를 이해하려면 그만한 수학지식과 논리적 이해가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오늘은 이만하자구나.” -수고하셨습니다. 마스터 모함아드~! 정오에 가까워 올 무렵이 되자 모함아드는 수업을 끝냈다. 몇몇 아이들을 제외하고 대부분 몸을 비틀며 배배꼬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모함아 드는 낭랑한 아이들의 인사를 받고 자신을 따라다니는 젊은 도제에게 도구 를 챙기라하고 사이스 백작부인이 배정해 준 자신의 거처로 발걸음을 옮겼 다. 그때 다른 아이들처럼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고, 자신을 따라온 아이의 기척을 느꼈다. “무슨 일이지? 라혼 군.” “저어, 물어볼게 있는데요.” “뭔데 그러느냐?” “지금 당장 알고 싶은 건 아니고요.” 모함아드는 질문을 하려는 아이에게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해 보거라.” “신이 지배하는 완벽한 세상은 사람에게 좋은 세상인가요? 지금보다 더 나 을까요?” “글쎄……. 신이 직접 통치한 다라……. 천국을 말하는 것이야?” “아니요. 신이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와서 지배하는 거 말예요.” 예사롭지 않은 아이의 물음에 모함아드는 ‘좋지 않겠느냐. 신이 지배하는 세상이라면 행복이 넘치는 세상인데…….’라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 고 아이는 자신의 대답을 듣지 않고 꾸벅 인사를 하고 아이들이 있는 곳으 로 쪼르르르 달려갔다. 그리고 모함아드는 아이의 말에 신을 의심하게 되는 마음이 생긴걸 알고 허허 웃었다. “허허허, 신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날 시험하시는 군.” “예? 무슨 말씀이세요. 프러페서?” “아, 아니다. 그런 일이 있다.” 현자 모함아드는 난데없는 곳에서 난데없는 아이에게 심도 있게 고민해야 될 숙제를 받고 벌써부터 고민하기 시작했다. ‘왜? 그 아이는 신이 다스리는 세상이 과연 좋을까라는 의문을 품게 되었 을까? 완벽한 세상이라, 완벽한 세상…….’ *** “라혼, 뭣 때문에 남편을 기다리게 하는 거야?” 제브다. 그때 당당 하라는 말을 해주었던 것이 실수다. 이젠 지가 라혼의 남편이라고 농담을 지껄인다. 그렇게 대놓고 애인(?)이 된 것처럼 행동하자 아이들은 재미는 있어 할망정 놀리지는 않게 되었지만 ‘레이디 라혼’이 란 별명을 갖게 된 라혼의 입장에선 결코 좋아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차라 리 ‘도그란의 폭군’이라고 불리는 것이 백배천배 나았다. “이혼이야! 너랑 안 놀 거니까, 신경 끄시지.” “아웅! 그럼 안 되지, 레이디 라혼.” 어께에 턱하니 손을 올려놓은 제브의 유들유들한 태도는 이놈이 과연 조금 놀렸다고 찔찔 짜던 그놈인지가 의심스러웠다. 겉은 제브라도 속은 다른 놈 일 수 있다는 의심을 하는 라혼이었다. “거기 꼬맹이들 꾸물대지 말고 빨리 안 올래?” 레이스와 마스터 모함아드에게 같이 가르침을 받는 아이들중 라혼과 제브가 9살 동갑으로 가장 어렸다. 백작부인이 손자와 라혼만 같이 가르치겠다고 밝히자 아들을 가진 어머니들이 자신의 아들도 같이 가르치게 해달라고 부 탁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백작부인은 한 가지 제한조건을 걸었는데 최소한 읽기와 쓰기는 돼야 한다고 말이다. 본래 목적이 레이스를 그란으로 보내기 전에 어느 정도 교양을 닦아주려는 것이었다. 때문에 현자 모함아드가 아 이들에게 읽고 쓰는 법까지 가르치느라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 기에 레이스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 중 그것이 가능한 아이들을 모아보니 레이스를 포함해서 15명쯤 되었고 9살의 라혼과 제브는 그 무리에서 가장 막내가 되었다. 어느 무리에서든 간에 막내는 가장 만만한 존재지만 가장 보호받고 귀여움을 받는 존재이기도 하다. “야! 니네 부부 때문에 형들이 굶고 있어야겠어?” ‘아! 이거 완전히 굳어져 버렸군.’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식당이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서 기다 란 테이블에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데 레이스가 라혼과 제브를 보자마 자 한다는 소리가 저거다. “마누라 간수 제대로 해야지. 안그래 제브?” “시끄러, 앤트! 나는 방금 이혼 당했어.” -오오오오오~! “불쌍한 제브.” “걱정 마! 세상엔 라혼은 같은 예쁜 남자(?)가 얼마든지 있으니까.” -와아~! 계속 놀리는 분위기가 이어지자 제브의 표정이 굳어가는 것을 느낀 라혼은 내심 한숨을 내쉬며 제 무덤을 팠다. “자꾸 내 남편 괴롭히면 뽀뽀해 버린다.” -오오오오오오~! “그럼 어디 한번 해봐!” -쪽! -!!!!!!! “우와! 라혼! 이 자식! 내 소중한 첫 키스를……!”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네까짓 게 하는 표정으로 말을 하던 앤트는 남자에게 첫 키스를 빼앗기는 황당한 사태에 비명을 질러댔다. 더욱 그를 광분하게 한 한마디는……. “앤트 형 아직 이었어?” “저번에 마가렛 누나랑 했다고 했지 않았나?” 그렇게 저번에 허풍떨었던 사실이 들통 난 방년 13세의 앤트는 괴성을 지르 며 라혼에게 달려들었다. “라호온~! 너 오늘 각오해!” “야! 왜 내 뒤에 숨는 거야?” “무슨 말씀 레이디는 기사의 보호를 받는 거야. 미래의 나이트 제브.” “야. 그땐 그때고 지금은 다르지…….” “피해!” 라혼과 제브는 앤트의 덩치가 큰 것을 감안해 식탁 밑으로 몸을 던졌다. 앤 트가 식당 밑으로 들어오려면 나가 도망치고 앤트가 나오면 다시기어 들어 가길 반복했다. 그러자 앤트는 아이들을 동원하기에 이르렀다. “야! 꼬맹이들 잡아!” “야, 잡자.” 으음 레이스 이 녀석 잃지 않겠다! 레이스가 ‘야, 잡자.’라고 하자 결국 다른 아이들까지 라혼과 제브를 잡으려 들자 제브는 금세 잡혀버렸다. 그러 나 정적 라혼은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야! 거기, 거기 막아!” “쪼끄만 게 재빠르긴 엄청 재빨라요.” “잡았다!” 결국 라혼은 잡히고 말았다. 그때……. -덜컥~! “……?” “…….” 식당 문이 열리며 레이스의 어머니인 자작부인과 누나 카시아가 아이들에게 먹일 요리를 가지고 나타나신 것이다. “이게 뭐하는 짓들이냐!” “에~!” “자작부인을 뵙습니다!” -자작부인 뵙습니다. 라혼은 자신의 목을 감고있는 앤트의 팔을 풀고 자작부인에게 정중한 인사 를 했다. 그러자 퍼뜩 정신을 차린 아이들이 합창하듯 자작부인에게 인사를 했다. “앤트 군. 왜 라혼의 목을 조르고 있었지요?” “예, 그게…….” “별거 아닙니다. 제가 너무 귀엽다며 뽀뽀를 하려 들어서 제가 도망치는 중이었습니다. 다행히 자작부인께서 들어오셔서 저는 정절을 지키게 되었습 니다. 그러므로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킥!” “풋!” 라혼의 천연덕스런 표정으로 사실을 왜곡하자 앤트 얼굴이 벌게졌다. 그리 고 자작부인의 뒤에 서있던 카시아를 비롯한 아이들의 웃음을 참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여왔고 자작부인 또한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었지만 나이 어린 라혼의 의젓한 태도가 실소를 자아냈는지 입가에 웃음기를 머금고는 잠시 고개를 돌려 헛기침을 하여 표정을 고치며 말했다. “흠흠! 자자, 그만들 하고 어서 자리에 앉도록 해요.” “예.” 그리고 아이들은 자작부인이 특별히 신경 써서 준비한 스프에 부드러운 빵 을 찍어 먹는 것으로 점심을 해결 했다. 그리고 식사가 끝나고 아이들의 각 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라혼, 같이 가!” “…….” “휴~! 그나저나 오늘은 자작부인 때문에 넘어갔지만 내일이 걱정이다.” “뭐가? 앤트가 그렇게 무섭냐?” “라혼, 넌 괜찮은 거야?” “우리 아버지들은 지금 앤트보다 훨씬 무서운 산적들과 한참 싸우고 계실 텐데 겨우 앤트에게 맞는 게 무섭다니 참내!” “그, 그렇지, 아빠는 무서운 산적들하고 싸우고 있겠지?” 마스터 모함아드에게 배우는 아이들 중 가장어리고 동갑내기라는 것 때문에 라혼과 제브는 단짝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레이스는 생각했던 것보다 나 대지 않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나대려 해도 그럴만한 시간이 없었다. 그란 유벤트 기사단으로 입단하기 전에 백작가의 자손으로써 부끄럽지 않게 하기 위해 이것저것 배우고 익히느라 정신이 없어 아이들하고 놀 시간 따위는 애 당초 없었다. 라혼은 제브의 수다를 귓가로 흘리면서 급할 것 없는 걸음걸이로 킴벌리 마 을의 시내로 들어섰다. 킴벌리의 백작령의 중심가였지만 축제 때를 제외하 고는 그다지 볼만한 것이 없는 시골 도시에 다름없었다. “그럼 내일 봐!” “그래.” 그리고 마을을 벗어나는 갈림길에서 라혼은 제브와 헤어지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들어섰다. 이제 닷새정도 오간 길이었지만 약간 낯이 설었던 풍경도 길가의 풀잎도 모든 것이 금세 익숙해져 있었다. 마스터 모함아드의 수업은 대략 아침 9시정도에 시작되었고, 정오 무렵 끝났다. 그리고 성에서 점심 을 먹으면 1시에서 2시쯤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바로 어 제까지는 차이저 가의 하인인 바머가 마차를 끌고 와 마차를 타고 다녔지만 오늘부터는 걸어서 다니기로 했다. 그래서 라혼은 집으로 가는 길을 털래, 털래 발걸음을 옮기며 아까부터 계속 신경이 쓰이는 움직임에 주목하고 있 었다. ‘얘 네들이 왜 이러지?’ 라혼의 감각에 걸려든 움직임의 정체는 다름 아닌 죠슈아 패거리였다. 그러 나 라혼의 주위를 수상하게 맴도는 아이들 사이엔 죠슈아는 보이지 않았다. 라혼이 스무 그루 남짓한 작은 규모의 숲길로 들어서자 얼굴에 포대기를 뒤집어쓴 아이들이 손에는 저마다 몽둥이를 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 그리고 아무런 말없이 몽둥이를 휘둘러왔다. 그러나 아무리 어린아이의 몸 을 하고 있다지만 라혼은 라혼이다. 사방에서 휘둘러오는 몽둥이들을 슬쩍 슬쩍 너무도 간단하게 피하면서 놈들이 휘둘러오는 몽둥이를 잡은 손을 잡 아채 그대로 꺾어 무력화 시키고 제 분에 못 이겨 무조건 달려드는 녀석은 정말 아슬아슬하게 몸을 돌려 피하며 발을 걸어 넘어트렸다. 옷자락을 잡아 채 잡아당기고 팔을 꺾어 미는 수법에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아이들은 속수 무책으로 나가떨어졌다. “야! 한꺼번에 덮쳐!” -와~! 그러나 놈들은 포기하지 않으며 계속 밀어붙였고 라혼은 대응하는 수위를 높였다. 달려오는 힘에 더해 자신의 힘을 보테며 그대로 업는 듯 집어던져 땅바닥에 메다꽂아 버린 것이다. “우왁!” -퍽! 그리고 급소에 해당하는 부분에 팔꿈치를 맞은 아이들은 너무 극심한 고통 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며 땅바닥에 누워 몸을 웅크린 채 가는 신음만을 흘렸다. 그렇게 총 18명의 아이들 중 서있는 아이는 단 3명 만이 남자 서로 눈치를 보더니 이내 사방으로 냅다 뛰기 시작했다. 각기 다 른 방향으로 도망치는 그들의 모습에 라혼은 바닥에 나뒹구는 몽둥이를 집 어 들고 그대로 내던졌다. -퍽! “악!” 라혼이 던진 몽둥이는 도망가는 놈들의 다리를 정확하게 맞췄고 놈들은 앞 으로 달려가는 힘에 앞으로 거칠게 꼬꾸라지며 땅바닥에 쭉 뻗었다. “너희 셋 다 이리 안와? 얼굴 가렸다고 내가 니들이 누군지 모를 것 같아? 엉!” “…….” “얼씨구…….” 세 중 한 놈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가 싶더니 다시 도망을 기도하자 라혼은 몽둥이를 던져 놈의 허벅지를 맞췄다. “한 번만 더 해! 다음엔 머리통이니까.” 라혼의 으름장에 다시 한 번 도주를 시도하던 녀석은 물론 다른 놈들도 다 리를 쩔뚝거리며 라혼이 있는 곳으로 왔다. “모두 얼굴에 뒤집어 쓴 거 벗어.” “…….” “이것들이…….” -딱! 딱! 딱! 딱! 라혼은 복면을 벗으란 말에 서로 눈치를 보며 주저주저하던 놈들의 머리통 을 시원스레 내갈기며 말했다. “맞고 하고 할래, 그냥 할래?” 아이들은 라혼의 손에 들린 몽둥이를 두려운 눈으로 쳐다보며 얼굴을 가린 복면을 벗었다. “날 노린 이유가 뭐냐?” “…….” 라혼의 물음에 아무도 나서서 답하는 놈이 없자 게중 가장 똘똘해 보이는 놈을 몽둥이로 지목하며 다시 물었다. “너, 날 습격한 이유가 뭐냐?” “보, 복수를 위해서…….” “뭐?” “복수…….” “너, 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설명해 봐!” 라혼은 지목한 놈이 개미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떠듬대자 자신의 사람 보 는 눈이 없을 인정하고 또 다른 놈을 지목해 물었다. 하지만 그놈도 오십보 백보였다. “그, 그러니까. 복수를 해야 하는데…….” 이것을 보면 확실히 귀족가의 아이들과 길거리의 아이들은 차이가 있었다. 라혼보다 나이가 많은 아이들 같은데 자기가 하고자하는 말을 표현조차 하 지 못하니 말이다. 라혼은 인내심을 가지고 그들을 심문(?) 할 수 밖에 없 었다. 그리고……. “그러니까 일주일도 전에 니네 대장이 레이스와 그 패거리들에게 몰매를 맞고 크게 다쳐서 꿈쩍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니들은 복수를 다짐하 고 목표로 삼은 것이 이 몸이시다. 이 말이냐?” -끄떡, 끄떡, 끄떡, 끄떡, 끄떡………………. 라혼은 자신들의 마음을 알아주었다는 듯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놈들에게 물었다. “나는 그때 백작성에서 누나들하고 있었어. 니네 대장이 그렇게 된 것하고 는 아무런 관련이 없단 말이야. 그거 알어?” “도, 도그란 애들 때문에…….” “누구? 우리 집 똘마니들?” “그래.” “우리 집 똘마니들이 왜?” “…….” -딱! “묻는 말에 대답 안 해?” 라혼은 머뭇거리는 놈들의 태도에 즉각적이고 효과적이라는 것으로 증명된 몽둥이질을 했다. 그리고 라혼의 몽둥이에 지목된 녀석이 변명하듯 말했다. “나, 난 그냥 보고만 있었어. 얘가 걔들을 잡아다 혼내 주자고 했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그래서……. 우리 집 똘마니들을 혼내 줄려고 잡았는데 레이스들에게 걸 렸다.” 라혼의 물음에 자기들이 캥기는 짓을 한 것은 알았는지 말이 없었다. 그러 다 한 아이가 변명 비슷한 말을 꺼냈다. “그때 대장은 걔들을 그냥 보내주려고 했었단 말이야. 그런데 레이스가… …. 너를 대신해 징계한다며. 대장을…….” “그건 참 불쌍하게 되었다만 나는 무슨 죄가 있어서 습격씩이나 하냐? 엉! 내가 니들 대장을 패는데 손이라도 거들었냐? 망이라도 봤냐? 우리 집 똘 마니들이 관련되어있다곤 하지만 그건 니들이 잘못한 거잖아?” “…….” 라혼이 정색을 하며 따지고 들자 아이들은 다시 벙어리 흉내를 냈다. 그러 다 한 아이가 용기를 내며 말했다. “넌 전에 대장을 때렸었잖아?” “그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고 니네 대장이 그걸 같고 뭐라고 하든?” “…….” “아니지 니들이 잘못한 것은 사실이니까. 죠슈아에게 따져야겠다. 죠슈아 지금 어디 있어?” “…….” -딱! 딱! 딱! “너, 앞장서!” “…….” “눈알 굴리지 말고 어서 뛰어!” -딱! “아얏!” 라혼은 가장 어수룩해 보이는 놈을 골라 정신없이 몰아치며 죠슈아가 있는 곳으로 달리게 했다. 킴벌리 외곽 한적한 길에서 도망가는 소년과 도망가는 소년을 쫓아가는 몽둥이를 든 소년, 그리고 그들의 뒤를 일단의 소년들이 따라 달리는 기이한 모습이 연출되고 있었다. *** 헝클어져 떡이진 갈색머리에 앓는 소리는 내며 계속 식은땀을 흘리는 소년. 바로 킴벌리 마을의 아이들의 대장 죠슈아였다. “대장 괜찮아?” “무, 물.” “물? 알았어. 여기…….” 이제 13살의 죠슈아는 또래아이들 보다 덩치가 큰 편이었다. 선천적으로 힘 이 좋았기 때문에 무리 없이 두해 전부터 마을 아이들의 대장노릇을 했다. 고아였지만 그다지 말썽을 피운 것도 없고 애들끼리의 다툼도 알아서 해결 해서 아이들의 부모들도 고아인 죠슈아와 노는 것을 별말하지 않고 받아들 였다. 개중엔 먹을 것을 챙겨주는 부모들도 있어 궁핍하지만 그런대로 그럭 저럭 살아가는 아이였다. “여기냐?” 죠슈아는 상당히 낯선 앳된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긴장했다. -덜컹~! 거의 부서질 듯한 죠슈아가 잠자리로 사용하는 버려진 창고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피유~! 쉰내하고는…….” “…….” “오랜만이군. 킴벌리의 대장 죠슈아!” “누구?” 죠슈아는 문이 열리고 갑자기 밝은 빛이 눈을 자극하자 눈살을 찌푸리며 무 례하기 그지없는 말을 토해내는 상대를 바라보았다. 눈이 밝은 빛에 적응되 기까지 잠시 동안이지만 밝은 빛을 등에 지고 서있는 모습이 너무 멋있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에 킴벌리의 죠슈아가 이런 몰골을 하고 있다니……. 그보다 너 고아 였다며? 그런데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살 수 있다니 신기하네.” “누구야? 누군데 와서 시비야!” “누구긴 나다.” 그리고 빛에 적응된 죠슈아는 자신에게 시비를 거는 상대를 알아보았다. “넌! 도그란의 폭군!” “이제 정신을 차렸군.” “네가 날, 무슨 일로?” 라혼은 아이들의 심문하면서 그 아이들이 자신들의 대장을 변명하는 과정에 서 죠슈아가 고아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도 이 지방 아이가 아닌 외부에서 흘러든 아이란 것을……. 그리고 라혼은 아까 있었던 일을 죠슈아 에게 말해주었다. “그러니까 애들이 복면을 쓰고 널 습격했단 말이야?” “그래! 자세한 사정은 들어서 알고는 있지만 이건 묵과 할 수 없는 일이지 . 당장 백작님에게 말해서…….” “잠깐!” “…….” “애들이 뭘 모르고 한일이니까 네가 용서해줘라!” 라혼은 가소롭다는 미소를 지으며 일부러 비아냥댔다. “내가 왜? 너도 알다시피 난 너희 패거리와 아무런 원한이 없다고……. 그 때도 내가 아니었으면 이런 신세를 면치 못했을 텐데 오히려 은인인 내게 복수한다는 것을 참아줄 이유가 있을까?” “제발, 제발 부탁이다. 나를 봐서라도 용서해 주라!” “내가 왜 널 봐야 하는데?” “그건…….” 죠슈아는 라혼의 의외에 태도에 말을 잇지 못했다. 아이들은 분명 복수의 상대로 아무런 죄 없는 엉뚱한 상대를 골랐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사이스 백작의 기사단 부단장의 아들이 고발하면 아 이들이야 나이가 어려 어찌어찌 용서받는다고 하지만 그들의 부모는 범죄행 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지도 몰랐다. “미안하다. 사과한다. 내가 무슨 일이든 할 테니까. 애들은 용서해라!” 라혼은 죠슈아란 아이의 태도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요놈 봐라? 잘 가르쳐놓으면 나름대로 쓸모가 많겠는데?’ 의지할 곳 없는 고아에다가 몸의 상태가 그다지 좋지 못한 것 같았는데 자 세를 꼿꼿이 하는 태도는 그만큼 의지가 강건함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뼈와 근육이 발달한 것을 보니 검사로써 소질이 엿보였다. “네가 그렇게 까지 말한다면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뭐냐? 말만 해라!” “네가 내 똘마니가 된다면 네 패거리도 내 똘마니가 되는 거니까. 그냥 용 서할 수도 있지.” “…….” “…….” 자식이 무슨 비장한 결단을 내린다고 지 똘마니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보는 지……. “알았다. 나는 네 똘마니다. 되었냐?” “아니지,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텅! “혈맹이라고 들어는 봤는지 모르겠네? 죠쥬아는 바닥에 떨어뜨려진 단검을 바라보며 가만히 주워들었다. 그리고 물었다. “혈맹?” “말은 공허하고, 잉크는 물에 씻겨 알 수 없게 되는 것. 그러나 피의 맹세 는 몸속에 흐르는 피가 마르기 전까지는 유효하지.”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거지?” “너는 군주와 기사놀이도 안 해봤냐?” 죠슈아는 라혼이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알았다. 그리고 스스로 군주 역할을 하며 아이들에게 받았던 그것을 했다. “나 킴벌리의 죠슈아는 라혼 차이저…….” “내 풀 네임은 라혼 가이우스 세나데온 차이저다. 외우기 어려우면 그냥 라혼이라고만 해!” “…….” 조슈아는 다시 몸을 바로하고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 “나 킴벌리의 죠슈아는 라혼 가이우스 세나데온 차이저를 내 몸에 피가 다 마를 그날까지 군주로써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며, 지금 이 순간부터 운 명을 함께할 것을 맹세하겠습니다.” -싸악! 그리고는 라혼이 준 단검을 검집에서 뽑아 잡고는 손바닥을 그어 피를 냈다 . “좋아! 너희들은 나가 이제부터 둘만의 의식을 치러야 하니까.” “……?” 눈치를 살살 보던 아이들은 라혼이 몽둥이를 들자 기겁하며 다 쓰러지게 생 긴 낡은 창고를 나섰다. “죠슈아! 네가 나의 신하가 된 이상 한 가지 비밀을 가르쳐주마.” “……?” 라혼은 의문부호가 가득한 죠슈아의 땟물이 흐르는 몸을 때리기 시작했다. -퍼버버버버거 퍽! -캭~! 그리고 마지막 일격이 등에 작렬하자 죠슈아는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는 검은 핏덩이를 토해냈다. 그리고 온몸에 기이한 힘이 느껴지며 얼마 후 고 약한 악취를 동반한 피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시커먹게 죽은피를 토해냈다. 그리고는 몸에 힘이 쭉 빠지며 상당히 개운해지는 느낌 을 받았다. “휴~! 이제 대충 마무리 되었군. 죠슈아, 옷은 네가 입은 그것뿐이냐?” “예? 예.” “그렇군. 짐은?” “예?” “내 사람이 된 이상 같이 살아야지. 어서 짐을 챙겨.” 라혼은 어안이 벙벙한 죠슈아를 몰아쳐 짐을 챙기게 했다. 죠슈아는 뭔가에 홀린 표정으로 주섬주섬 뭔가를 챙기더니 창고 구석 땅을 파 항아리 안에 그동안 모아둔 동전을 꺼내들어다. 부피로 보니 동화로도 상당히 많은 것 같았다. “얼마냐?” “얼마 안 됩니다.” 이젠 존댓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킴벌리의 대장 죠슈아였다. 라혼 품속에 서 용돈으로 받은 14코퍼 전부를 꺼내 죠슈아에게 건네주었다. “잘됐군. 그걸로 옷을 사 입어. 조금 모자라지만 네가 가진 돈을 합하면 깨끗한 옷 몇 벌은 구할 수 있을 거야.” “…….” “옷을 사고 우리 집으로와! 어디에 있는지는 알겠지?” 그렇게 밖으로 몸을 돌려 나가는 얼떨결에 피의 서약까지 해가며 군주로 모 시게 된 라혼의 등을 멍하니 쳐다보던 죠슈아는 그의 단검이 자신의 손에 있다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 라혼을 불렀다. “저, 저기 단검,” “그런 거지꼴을 해가지고는 우리 집에 못 들어와. 그거는 통행증 같은 거 니까 이따 가져오면 되. 그리고 맹세를 했으면 호칭을 정해야 겠지? 마스터 도 괜찮고, 로드도……. 아니 그냥 대장이라고 해라. 그럼 이따 보자.” “예, 대장.” 13살의 소년이 9살의 소년에게 스스럼없이 높임말을 사용했다. 하는 죠슈아 나 받는 라혼이나 너무 자연스러워서 아이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 멀어지는 도그란의 폭군을 바라보던 아이들은 걱정스런 눈빛으로 죠슈아 에게 물었다. “대장 괜찮아?” “괜찮아.” “근데 진짜 도그란의 폭군을 대장으로 모실 거야?” “응, 그래. 아까 니들이 본 그것은 군주와 기사놀이가 아니라 정식으로 한 맹세였어.” 아이들은 아직도 피가 마르지 않은 죠슈아의 갈라진 손바닥을 보며 자연스 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난삼아 칼로 손바닥을 베는 짓을 하지는 않을 것 이기 때문이었다. 퓨어릴러티Puerility *** 차이저 가의 안주인 세나데나는 차이저 가의 장남 라혼이 자기보다 서너 살 위로보이는 소년을 주워(?)오자.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차라리 길 잃은 개나, 새끼 고양이 따위를 주워왔다면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아들이 주워온(?) 것은 소년이었다. 그러나 세나데나는 일단은 두고 보기 로 했다. “마님, 저 고아 녀석이 계속 도련님과 놀게 놔두실 거예요?” “왜요? 라혼이 걱정되나요?” “소문이 그다지 썩 좋다고는 못하는 놈인데 순진한 우리 도련님에게 나쁜 물을 들이면 어쩌시려고.” “글쎄요. 그 아이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라혼이 저리도 좋아하고, 그 아이도 라혼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 시늉까지 하는데. 일단 두 고 보기로 해요.” “그건 그렇지만…….” “그보다. 동생을 뺏긴 테이가 볼이 부풀대로 부풀었던데 괜찮으려나 모르 겠네요.” “왜 아니겠어요. 테이 아가씨하고 도련님은 항상 같이 있었는데 이제 도련 님은 그녀석하고만 노시니.” 세나데나와 유모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집안의 일들을 챙겼다. 차이 저 가의 재산은 로카데 차이저의 부친인 포르데 차이저가 남긴 약간의 재산 과 세나데나의 부친인 슐레 세나데온 콰이스가 남긴 재산을 합친 것이었다. 그다지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로카데 차이저가 기사로써 행세하기엔 충분했 다. “잘하면 올해엔 라혼에게 말 한 마리 정도는 장만해 줄 수 있겠네요.” “그렇죠. 명색이 기사가문의 장남인데 아직까지 말이 없는 것은 체면이 서 질 않죠.” “후후후, 유모는 그저 라혼이야기만 나오면 그러시는 군요.” “그런가요? 호호호호호…….” -탕! 쾅! 딱! “이게 무슨 소리지?” 세나데나와 유모는 밖에서 들려오는 철판 두드리는 소리에 창문 밖을 내다 보았다. 서나데나의 눈에 비친 광경은 예전에 트란킨이 사용하던 검투연습 용 갑옷을 입은 죠슈아와 라혼이 서로 대련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죠슈아 는 공격을 하지 않고 라혼이 무차별로 휘두르는 목검을 받아내기 바빴다. 아무리 봐도 라혼이 큰 형뻘 되는 소년을 괴롭히고 있는 것처럼 밖에 보이 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한 세나데나는 밖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라혼! 지금 뭐하는 거니?” “엄마!” 세나데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라혼, 기사가 갖춰야할 덕목이 무엇이냐?” 그러자 라혼은 숨도 쉬지 않고 기사도를 읊었다. “충성, 공정, 자애, 예절, 봉사, 관용 그리고 명예이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용기입니다.” “그렇다. 지금 네 행동이 공정한 것이냐? 관용적인 것이냐? 명예로운 일이 냐? 용기 있는 것이냐?” 세나데나의 호통에 라혼은 잠시 조용히 침묵을 지키더니 의젓하게 자세를 잡고는 정면으로 눈을 맞추며 말했다. “어머니, 저는 놀이친구가 필요해서 죠슈아를 신하로 삼은 것이 아닙니다. 죠슈아는 앞으로 저와 함께할 동지이며 운명을 같이 할 자입니다. 그래서 죠슈아는 강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배우고 익힌 차이저 가의 카마리에 검술은 대련을 통해서만 익힐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답지 않은 진지하고 당당한 말에 사람을 괴롭히는 아들을 야단치려 던 세나데나는 라혼이 대견하다는 생각에 내심 흐뭇한 생각이 들었다. “그럼 지금 하고 있던 그것이 검술 수련이라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알았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나는 너희들 일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 겠다. 하지만 그런 수련은 시끄러우니 자제하거라.” “예.” 라혼은 그렇게 공손히 말하고는 장원 밖으로 나갔다. 세나데나는 그런 아들 의 뒷모습을 보고 자신의 결정이 옳은 것인지 생각했다. 아들의 의젓한 태 도에 넘어가 일단 그 아이를 인정하는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휴~! 아이가 너무 빨리 자라는 구나. 조금 천천히 자라도 되는데…….” *** “대장! 괜찮을 까요?” “너 우리 엄마 무시 하냐? 한번 약속을 하시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시는 분이다. 이제 너도 인정하시는 분위기니까. 넌 나만 믿으면 돼!” 죠슈아는 무거운 검투용 갑옷을 입고 라혼의 뒤를 따르며 엉뚱한 생각을 했 다. ‘내가 요 쪼끄만 꼬맹이를 군주로 삼았다니……. 게다가 존댓말까지……. 내가 지금 미친 건가? 아니면 악몽을 꾸고 있는 건가?’ 꼬마 대장 라혼의 뒤를 따라 도착한 곳은 한적한 개울가였다. “여기가 좋겠군.” “…….” “잘 들어. 내가 네게 그 무겁고 거추장스런 갑옷을 입힌 이유는 근력과 지 구력을 키우기 위해서야. 어느 정도 몸이 만들어 질 때까지 계속 하고 있어 야 돼. 그리고 지금은 목검을 들게 했지만 갑옷의 무게에 익숙해지면 검투 용 바스타드 소드를 들고 다녀야해.” “…….”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강해지려면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여. 만약 네가 생각했던 만큼 강해지지 않으면 나는 널 버릴 거야.” -흠칫. 죠슈아는 꼬마대장의 앳된 목소리로 설교하는 것을 아무런 생각 없 이 멍하니 듣고 있다가 버리겠다는 말에 가슴에 얼음덩어리가 달라붙는 듯 사늘함을 느껴야 했다. “네가 날 따라오지 못한다면 넌 그저 짐 일뿐야.” 그리고 꼬마대장은 손에든 목검으로 둥그런 원을 그렸다. “지금 너와 나의 차이를 보여주지. 무슨 수를 써서든 날 이 동그라미 밖으 로 밀어내봐!” 직경이 1야드(1보:96cm)도 안 되는 동그라미였다. 그러나 죠슈아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은 무거운 갑옷을 입고 있었고, 꼬마대장은 맨몸이었 다. ‘혹여 다치기라도 하면…….’ 하는 생각에 함부로 할 수는 없었던 것 이다. 그러나 꼬마대장이 얼마나 대단한지 시험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자! 갑니다.” 죠슈아는 그렇게 말하며 그냥 힘으로 밀어붙일 생각에 천천히 다가갔다. 그 러나……. “어?” -콰당! “컥!” 어느 순간 갑자기 땅이 사라지고 하늘이 잠깐 보이자 엄청난 충격이 등으로 부터 전해져왔다. 그리고 파란 하늘이 노래지며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지 를 분간할 수 없었다. 죠슈아는 한 순간 빠져나갔던 영혼이 돌아오자 자신 이 땅바닥에 내 팽개쳐진 개구리처럼 쭉 뻗어 있음을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그런 죠슈아의 귀에 들리는 꼬마대장의 목소리……. “그렇게 나를 잡아 잡수 하는 무방비 상태로 오면 상대가 정말 고마워 할 거다. 적에게 감동 주는 일은 그만하고 제대로 하는 게 어때? 안 그러면 다 른 방법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아직도 얼떨떨한 죠슈아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운 후 다시 신중하지만 아 까보다는 공격적인 자세로 꼬마대장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결과는 땅이 사라지고, 잠시 하늘이 보이고 등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후 하늘이 노랗게 변한 현상을 반복 관찰하는 것이었다. 계속 그런 식으로 몇 번씩이나 일광 욕하는 개구리를 흉내 내던 죠슈아는 오기가 치민 나머지 무거운 갑옷을 입 은 그대로 몸을 날려 꼬마대장의 작은 몸을 잡으려고 했지만 언제나 시야에 서 ‘푹!’꺼지듯 사라지고 앞으로 내달리는 기세에 못 이겨 앞으로 고꾸라 지며 땅바닥 구르기를 반복했다. “목검을 사용해도 되겠죠.” “좋을 대로.” “이야압!” 목검까지 휘둘렀음에도 꼬마대장은 닿을 듯 닿을 듯 하면서도 죠슈아가 마 구잡이로 휘두르는 목검에 닿지 않았다. 분명 상대를 보고, 상대를 향해 휘 두름에도 허공만을 가르는 목검을 휘두르다 제풀에 지쳐 몸의 균형이 살짝 흔들리면 ‘휘!’ 하는 느낌과 동시에 어느 샌가 땅바닥을 구르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계속 그런 식이자 오기를 넘어서 악이 받친 죠슈아는 아예 넘어지지 않기 위해 엎드린 자세로 기어가 꼬마대장이 그려놓은 원안으로 들어갔다. 어떻게는 옷자락이라도 잡으면 직경 1야드 크기의 원 밖으로 밀 어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난감해하는 꼬 마대장의 얼굴을 본 죠슈아는 꼬마대장도 이 방법에는 대응할 방법이 없는 것 같았다. 그렇게 죠슈아는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열심히 기었다. 그러 나……. -퍽! 죠슈아는 눈앞으로 날아온 꼬마대장의 발바닥을 보는 것을 마지막으로 정신 을 놓아버렸다. 그리고 그런 죠슈아의 귀속으로 꼬마대장의 목소리가 깊숙 이 쑤셔 박혔다. “아까는 나 잡아 잡수 하더니, 이젠 나 죽었소냐? 굼벵이도 너보다는 낫겠 다. 구르는 재주라도 있으니…….” *** 라혼이 죠슈아를 주워온 후 버림받은 똘마니들과 쌍둥이 동생을 뺏겨버린 테이는 필연적으로 가까워졌다. “라혼 어디 갔어? 또 죠슈아인지 머슈아인지랑 같이 있는 거야?” “대장은 아침에 백작성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요?” “그래? 그럼 걔는 지금 어디 있는 데?” “요앞 개울가에서 수련한다고…….” “어? 아가씨 어디가요?” 테이는 토라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개울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철컥, 딱! 철컥, 끼익 퍽~! 개울가엔 두툼해 보이는 묵직한 갑옷을 입고는 개울가의 커다란 바위를 상 대로 목검을 휘두르는 소년이 있었다. 뭐라 쏘아붙이려고 온 테이는 너무도 진지하게 수련에 열중하는 모습에 본래 목적을 잃고 둔덕에 쪼그리고 앉아 죠슈아가 검을 휘두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토라와 주노는 무슨 일 이라도 벌일 기세였던 테이가 가만히 앉아 구경만 하고 있자 은근한 어투로 말을 걸었다. “테이 아가씨 구경만 하실 거예요?” “응? 아! 아니지. 따라와!” 토라의 말에 상념에서 깨어난 테이는 이내 자신의 목적을 생각해 내고 한참 수련에 열중하고 있는 죠슈아를 불렀다. “거기, 나 좀 보지?” “……?”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수련을 멈춘 죠슈아는 몸을 돌려 자신을 부른 존재를 확인했다. 갈색머리에 주근깨 가득한 귀여운 소녀 테이였다. “너, 언제까지 우리 집에 계속 있을 거냐?” “…….” 죠슈아는 당돌하기 그지없는 꼬마대장의 쌍둥이 누나의 말에 움찔했다. 그 러나 이내 마음을 다잡으며 말했다. “나는 대장이 떠나라고 할 때까지 대장의 곁을 지킨다.” 당당하게 말하는 죠슈아의 태도에 약간 기세가 눌린 테이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눈을 치켜뜨며 다른 꼬투리를 잡았다. “야! 너! 내 동생한테는 꼬박꼬박 존댓말을 해주면서 나한테는 왜 안 하는 거야?” “대장은 내가 충성을 맹세한 상대지만 너는 아니야. 존대 대장에 한해서다 . 너에게까지 존댓말을 할 이유가 없잖아!” “뭐야! 라혼에게 맹세를 했으면 내게 맹세한 셈이나 마찬가지잖아. 그치. ” “예? 그런가? 맞아요. 테이 아가씨 말이…….” 킴벌리의 아이들을 주름잡던 죠슈아였다. 그런 죠슈아의 강경한 어조엔 특 유의 힘이 실려 있었다. 그러니 9살짜리 소녀 테이는 그 기세에 밀려 한발 슬쩍 물러서는 태도를 보이며 자신을 따라온 토라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러 자 무서운 죠슈아의 눈길을 피해 테이 등 뒤에 숨어있던 토라는 갑작스런 테이 아가씨의 질문에 당황하며 뭘 물었는지도 긴가민가한 상태에서 무조건 테이의 말이 옳다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 강제로 원군을 끌어들인 테이는 의기양양한 태도로 허리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봤지? 그러니까 앞으로는 내게도 존댓말을 하라고…….” 그런 테이를 보고 죠슈아는 다소 엉뚱한 생각을 했다. ‘이건 완전히 애네? 꼬마대장하고 쌍둥이라고 들었는데 행동하는 게 완전 히 딴판이야? 아니지 이게 정상적인 거고 꼬마대장이 이상한 건가?’ 그러나 죠슈아의 상념은 길어지지 못했다. “뭐야! 왜 말이 없어? 지금 주인에게 반항하겠다는 거야?” “난 노예가 아니야!” 테이의 ‘주인’운운하는 말에 죠슈아가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 테이는 죠슈아가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자 깜짝 놀라 다리에 힘이 풀린 듯 그대로 주저앉으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리고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무 서운 표정을 하고 자신을 노려보는 죠슈아를 보았다. 조슈아의 무섭게 일그 러진 표정과 강렬한 시선에 덜컥 겁이 난 테이는 그대로 울음보를 터트렸다 . “으앙아~!” 그렇게 테이가 울어버리자 테이를 울린 죠슈아는 무척 당황했고, 토라와 주 노도 어찌할 바를 모르며 발을 동동 구르다. 결국 같이 울기 시작했다. “엉엉~! 울지마요. 아가씨~! 엉엉엉…….” “죠슈아 미워~! 엉엉엉…….” “엉엉엉엉엉~!” 본의 아니게 꼬마대장의 누이를 울려버린 죠슈아는 참으로 난감했다. 지금 에 와서 달래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그대로 두기도 뭐하고 이러지도 저러지 도 못한 채 시간은 흘러가고 그들의 울음소리는 더욱 커져만 갔다. 그때 지 금 이 순간 죠슈아에게 가장 듣고 싶기도 하고 가장 듣기 거북하기도한 목 소리가 들려왔다. “테이가 왜? 여기서 울고 있는 거야?” “…….” “대자앙~!” “라호온~!” 라혼이 나타나자 토라와 주노 두 똘마니들과 테이가 더욱 서럽게 울며 라혼 을 불렀고 죠슈아는 아무것도 한 일없이 멍하니 서있었다. 라혼은 일단 우 는 테이와 똘마니들을 달래고 전후사정을 물었다. 그리고 대충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죠슈아가 내게는 존대를 해주면서 누나에게는 평대를 했단 말 이지…….” “으응.” 라혼은 쌍둥이 누이인 테이가 울먹이며 하는 대답에 골치가 아파왔다. 다소 막무가내인 테이를 다독이며 죠슈아의 자존심을 건들이지 않을 방법을 찾 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면 될 것도 같은데…….’ 라혼은 뭔가 결정을 하고 테이와 죠슈아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보았다. 그리 고는 이내 마음을 굳히고는 죠슈아에게 말했다. “죠슈아!” “…….” “네가 피로 맹세한 군주로써 첫 번째 명령이다.” “……!” “레이디 세나테이아를 너의 귀부인으로 삼아 경애하고 지켜주어라!” 라혼은 그냥 눈을 딱 감고 그렇게 명령했다. 기사가 귀부인을 경애하고 보 호하는 일은 무척 명예로운 일이었다. 물론 이것은 군주가 명령할 사항은 아니었고 타의에 의해서 귀부인에게 기사의 맹세를 하는 것은 기사로써 명 예에 문제가 있었지만 어차피 죠슈아는 기사가 아니었다. “빨리 맹세해.” “에? 그, 그러니까. 킴벌리의 죠슈아는 레이디 세나테이아 양을 경애하며 무슨 일이 있을 지라도 목숨은 바쳐 지키겠습니다.”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귀부인을 지키는 기사의 맹세였다. 테이는 일이 묘하 게 꼬이며 죠슈아가 진지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한쪽 무릎까지 꿇으며 맹세 를 하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랐다. 라혼은 그런 테이의 옆구리를 팔꿈 치로 찌르며 재촉하자 테이는 얼떨결에 죠슈아의 맹세를 받아들였다. “테이.” “어? 그, 그래요. 나의 기사님.” 어찌 보면 참으로 우스운 광경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소년과 소녀는 진지하 기 그지없었다. “자! 그럼 앞으로는 테이는 죠슈아의 귀부인으로써 예를 다해야 하고, 죠 슈아도 테이를 귀부인을 대하는 태도로 예의 갖춘다. 둘 다 알았지.” “응? 으응.” “예.” 그렇게 라혼은 나중을 책임지지도 못할 일은 벌여놓고는 그녀답지 않게 수 줍어하는 테이를 내버려 둔 채 얼굴이 붉어진 죠슈아를 데리고 오늘의 훈련 을 시작했다. 그리고 졸지에 테이 아가씨에게도 버림받은 토라와 주노는 조 금 떨어진 곳에서 처량하게 쭈그려 앉아 대장과 죠슈아가 대련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 오늘도 여느 때와 같이 아침 일찍 일어나 수업을 받기위해 백작성으로 온 라혼은 성 사람들의 태도에서 뭔가 모를 긴장감 같은 것을 감지했다. “라혼, 이제 오는 거냐?” “좋은 아침.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나도 몰라. 간밤에 전령이 도착했다는데 무슨 나쁜 일이 생겼나봐.” 라혼은 앤트의 말에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산적토벌대에 나쁜 일이라면 토벌대에 참가한 기사들 중 누군가가 신변에 무슨 이상이 생겼음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신가? 친구.” “제브.”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성의 사람들 표정도 그렇고 무슨 일이 있는 거냐 ?” 라혼은 제브의 물음에 앤트에게 들은 그대로 알려주었고 제브 또한 걱정스 런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수업 시간이 다되어 아이들이 모두 모이고 마지 막으로 레이스가 모습을 보이자 아이들은 일제히 레이스에게 질문을 퍼부어 대기 시작했다. “레이스, 그게 사실이야?” “무슨 일이 생긴 건데?” “나쁜 일이야?” 아이들이 질문에 레이스는 편치 않은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를 꺼냈다. “그게….” “그게?” “전쟁이 난 모양이야!” “뭐어? 전쟁!” 아이들은 레이스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콘라드 삼촌이 지금 할아버지와 병사들을 모집하는 일을 의논하고 계셔. ” “누구랑 어디랑, 전쟁이 터졌는데?” “그건 나도 잘 몰라.” 라혼은 아이들의 거듭된 질문과 레이스의 반복되는 답변을 뒤로하고 사이스 백작령이 있는 지역과 산적이 출몰한다던 아트란 산의 위치를 기억해 냈다 . 그러나 라혼의 짧은 견문으로는 아트란 산을 경계로 백작령이 끝나고 그 너머에 무슨 후작이 다스리는 지역과 몇 개의 조그마한 남작령이 있다는 사 실만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제국에는 사이스 백작가를 적대할 세력이 없을 텐데? 후방에 자리한 백작 령이 외국군대의 침입을 받을 일은 없고……. 무슨 후작인가 하는 쪽은 백 작가에게 군수물자지원을 받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럼 다른 쪽 경계 일까? ’ 라혼은 그동안 대륙의 정세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은 것을 후회 했다. 아 이의 몸을 하고 있는 이상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아보아야 소용이 없다는 생각에 그냥 아버지와 아버지를 찾아온 손님들이 나누는 대화정도만 들어 두었을 뿐이었다. 기본적인 정보가 없으니 판단도 내릴 수 없었다. 상황이 중대함을 대변하듯 그날 수업은 취소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안 사실 이기는 하지만 백작령 수준의 귀족간의 분쟁 아니라 백작령이 속한 신성 시 드그람 제국이 주체가 되는 국가 간의 전쟁이었다. 전령 또한 에게너 자작 이 보내온 것이 아닌 신성 시드그람 제국 황제가 사이스 백작에게 정식으로 참전을 요구하는 친서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신성 시드그람 제국과 전쟁을 하는 곳은 제국의 북부와 국경선을 면한 프린든 왕국이었다. 스트레인Strain 스트레인Strain 1천 년 전 역사상 최초로 전 세계를 발아래둔자.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얻고 도 끝내 시드그람 제국 황제가 되지 못해 반왕이라 불리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이그라혼’이다. 반왕 이그라혼이 끝내 대륙의 절대적인 패권자이면서도 시드그람 제국 황제 의 자리에 앉지 못함으로 해서 그가 가지고 있던 엄청난 힘은 제국과 괴리 되고 말았다. 제국 원로원은 반왕이 불의한 자들에게 암살당한 후 부랴부랴 그의 동생 유니어를 새로운 시드그람 제국 황제로 옹립했다. 하지만 신황 제로 등극한 유니어 황제는 시드그람 시민들로 부터 반왕 이그라혼의 암살 과 관여되어있다고 의심받는 자였다. 그것은 반왕의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 당연히 그는 시민으로 부터도, 실제적 군사력을 가진 기간테스 군단의 장 군들로 부터도 인정받지 못했다. 거기에 시드그람 제국이 아닌 반왕 이그라혼 개인에게 복종을 맹세한 북부 황무지의 바르바로이들이 자신들이 보덴이라 부르는 반왕의 복수를 외치며 대대적으로 남하 했지만 이그라혼이 기간테스들은 그들을 막지도 움직이지 도 않았다. 그들을 이끄는 장본인이 반왕과 운명을 같이하기로 맹세한 비운 의 전사 ‘마이트’였기 때문이었다. 유니어 황제는 바르바로이들의 복수의 칼날을 피해 민심이 흉흉한 시드그람 제국의 제도 그란을 버리고 자신의 본가가 있는 본거지인 인시드로우로 피 신한다. 그러나 황제는 인시드로우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그가 그란을 두 고 도망친 일은 황제로써 책무를 저버린 행사였으며 유니어의 본가는 배다 른 형인 이그라혼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기도 했던 것이다. 반왕을 절대적 으로 지지하는 곳이기도 한 인시드로우에서 유니어 황제는 누군가가 보낸 암살자의 손에 서거했고 아무도, 그 누구도 유니어 황제가 누구에게 무엇 때문에 죽임을 당해야 했는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시대는 변하고 있었다. 제도 그란을 점령한 바르바로이의 왕은 스스로 반왕의 정통 후계자임을 주장하며 시드그람 제국 황제의 관을 스스 로 만들어 썼다. 그러나 시드그람 제국의 황제는 무관의 제왕이었으며 제국 원로원의 인준과 시민이 지지가 있어야만 비로소 황제로 인정받을 수 있었 다. 그랬기에 스스로 황제라 자칭한 바르바로이 출신 야만왕을 아무도 황제 로 인정하지 않았음은 당연한 이치였다. 당연히 그 사건으로 인해 그동안 그들의 행사를 묵인하던 기간테스 군단의 장군들과 시드그람 제국의 세력들 은 반 바르바로이 기치를 천명했다. 그리고 탈로스의 제작자로 알려져 있는 대마법사 바우어의 모국인 한스 왕 국은 바우어의 도움으로 궁극의 병기인 탈로스 만들어내었는데 한스 왕국은 그 탈로스를 바탕으로 잠시 시드그람 대륙의 패권자가 되어 반 바르바로이 동맹을 이끌고 그란을 점거하고 있던 야만인들을 3년여 간의 전쟁 끝에 다 시 북쪽 차가운 황무지로 쫓아 보내고 마침내 제도 그란을 탈환했다. 궁극 의 병기 탈로스를 가지지 못한 야만인 황제는 속수무책으로 패주하면서 그 앙갚음으로 그란을 파괴하고 불을 질러 아무도 살지 못하는 황무지로 만드 는 만행을 저질렀다. 돌무더기 황무지로 변한 그란이었으나, 그곳은 위대한 시드그람 제국의 발 상지이며 모든 도시들의 왕이었고 세계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한스 왕가는 시드그람 제국 황제의 가문이 되었으나 제도 그란을 다시 건설하지는 못했 다.반왕 이그라혼 휘하 군단장들이 자신들에게 충성을 할 것이라고 착각함 으로써 멸망의 화를 피하지 못하고 결국 그란의 지배권을 상실했다. 그리고 탈로스를 만드는 비밀이 밝혀지며 반왕 이그라혼 사후 그의 부하들은 세계 를 분할했다. 그러나 아직 시드그람 제국을 잊지 못하는 그란 시민들은 초토화된 도시를 복구하고 위대한 이그라혼이 직접세우고 반왕의 아내인 용기의 여신 안젤리 나의 이름을 딴 ‘전사들의 어머니’ 도시 안젤리아나드에 사신을 보내 이 그라혼의 피를 이은 유일무이한 존재 여왕 바라니아에게 신성 시드그람 제 국 황제가 되어줄 것을 간청했다. 신성 시드그람 제국의 건설자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반왕의 후예라고 자처하는 이그라혼이 창설한 군대 기간테스 출 신의 새로운 귀족들인 ‘기간트’들의 충성을 이끌어내려 했다. 퀸 바라니 아는 그들의 청은 받아들여 신성 시드그람 제국의 새로운 여황제가 되었고, 그녀만이 가진 이그라혼의 이름은 기간트는 물론이고 기존의 귀족들도 이 그라혼의 피를 이은 그녀를 인정함으로써 단숨에 시드그람 제국이 복원되는 듯싶었다. 반왕의 영향력은 그때까진 살아 숨 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복원된 시드그람 제국은 고작 수십 년을 가지 못했다. 시드그람 제국을 복원하려던 숭고한 정신을 가진 자들은 사라진 제국 원로 원엔 권력에 취해 시류를 읽지 못하는 자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자신들 의, 원로원의 권력을 강화하느라 혈안이 되어있었다. 그들은 제국의 주권자 는 황제가 아닌 원로원이라 주장하며 제국의 부활을 위해 옹립한 여황제를 무시하고 그녀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간트들을 견제하는 정책 등을 잇달아 추진했다. 그들의 횡포가 가장 극에 달했을 때 이그라혼의 피를 이은 유일 무이한 여황제가 붕어했다. 신성 시드그람 제국의 불행은 퀸 바라니아가 붕 어로 인하여 이그라혼의 피가 단절됨으로 해서 시작되었다. 퀸 바라니아는 끝까지 독신으로 남았고, 그녀가 자손을 잇지 못하고 붕어함 으로써 반왕 이그라혼의 피는 단절되었다. 그럼으로써 신성 시드그람 제국 은 더 이상 이그라혼의 이름을 사용함에 그 근거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아니 이그라혼 사후 50년이란 시간은 세대가 바뀐 기간트들로 하여금 더 이 상 그의 이름에 연연하지 않게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을지도 몰랐다. 이제 기간트라고 불리는 자들은 이그라혼의 직접적인 부하가 아닌 그들의 아들 이나 손자였다. 그랬기에 그들의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옛날이 야기 속의 영웅은 그저 이야기 속의 영웅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너무 오랫 동안 제국 원로원에게 시달려왔고, 여황제의 붕어로 더 이상 꺼리길 것이 없어지자 아무런 미련을 두지 않고 제국을 이반했다. 다만 아름다운 퀸 바라니아에게 충성을 다짐한 기사들이 끝까지 신성 시드 그람 제국을 지켜냄으로써 천여 년 간의 많은 나라와 왕가들이 서고 또 쓰 러지는 가운데에서도 제국의 명맥을 이어왔다. 그리고 퀸 바라니아와 기사 들의 숭고하고 고매한 정신적인 사랑은 아직까지도 칭송되고 노래로 불리어 지며 또한 기사들의 귀부인을 경애하고 끝까지 지켜주는 전통으로 이어 내 려져 왔다. 하지만 기사들이 지킨 신성 시드그람 제국은 기사도의 본류를 형성하면서도 기사들 개개인이 독립적인 개체로 정신만을 공유함으로써 신 성 시드그람 제국은 제국의 이름으로 묶인 수백 수천 개의 독립된 나라들의 집합체나 마찬가지였다. 즉 황제의 아무리 간단한 요청이라도 자신의 정신 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당당히 거부할 수 있을 만큼 현 신성 시드그람 제 국 황제는 힘이 없었다. 신성 시드그람 제국의 황제는 단지 위대한 도시들 의 왕. 그란을 지키는 의무를 가진 사람일 따름이었다. “콘라드, 우리가 굳이 움직여야할 필요가 있겠느냐?” “단연코 움직여야 합니다. 아버님!” 노쇠함을 감추지 못하는 사이스 백작은 장년의 혈기왕성한 아들의 거침없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별로 내켜하지 않았다. “무엇 때문이야?” “요청은 황제가 했지만 이번 일의 배경은 갤 공입니다.” “나또한 그쯤은 안다. 그 양반은 나이가 들었어도 여전히 정력적으로 움직 이는 구나.” “그렇습니다. 아버님 갤 공은 늙었습니다. 그가 아무리 정정함을 자랑한다 고 해도 나이는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이번 일에 적극 적으로 나서야 하는 이유입니다.” 사이스 백작은 문득 평소와는 다르게 참전을 종용하는 콘라드의 태도에 의 문을 느끼며 물었다. “무엇 때문이냐?” “갤 공과 신성 시드그람 제국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프린든 왕국이 사라 지면 갤 공은 이름뿐인 제국 1인자가 아니라 명실상부한 제국1인자, 프리켑 스가 됩니다. 아버님도 아실 테지만 우리 곁에는 갤 공의 손녀와 증손자가 있습니다.” “차이저를 말하는 거구나.” “그렇습니다, 아버님.” 사이스 가는 그동안 무력이 아닌 정치적인 해결을 선호했었다. 그렇기 때문 에 제국 내에 이렇다 할 적이 없었다. 그러나 저 대륙 전역에 이름 높은 다 크 듀크, 아이언 듀크, 강철의 공작, 검은 공작, 철혈의 공작 라마르 반트 세나데온 콰이스 폰 갤 대공은 그 이름이 말해주듯 적당한 타협을 모르는 자였다. 지금은 불멸의 공작가로 불리는 콰이스 가는 플레이나 왕국의 신하 였다. 그러나 플레이나 국왕에 부당한 견제와 모함으로 멸문에 위기에 처하 자 자신들의 군주인 플레인 왕가에 칼끝을 겨누고 결국 승리한다. 그러나 콰이스 가는 스스로 왕위에 오르지 않고 신성 시드그람 황제에게 충성을 맹 세했다. 이에 제국의 황제는 그를 갤 지방을 다스리는 대공의 지위를 인정 하며 황제의 위상을 드높인 그에게 제국1인자라 부르며 칭송했다. 그러나 갤 공이 다스리는 갤 지방은 제국과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갤 지방의 다른 영주들은 그런 갤 공의 행사에 불만을 품고 반발하지만 콰이스 가의 주인들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젊은 나이에 가문을 이어받은 다크 듀크는 힘으로 자신들을 핍박하던 자들을 꺾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 침내 전통적인 강국인 프린든 왕국까지 넘보는 힘을 가지게 된 것이다. 제 국과 괴리된 갤 공이 프린든 왕국을 멸망시키고 영토를 제국과 이어지게 되 면 그 막대한 영향력을 제국에 행사할 것이 뻔했다. 그러자면 파트너가 필 요했다. 그리고 사이스 가는 그런 더없이 훌륭한 파트너였다. 하지만 그러 자면 콰이스 가가 납득할 만큼의 성의는 보여야했다. 세계 모든 기사들이 말하는 격언이 된 ‘피를 나눈 형제보다, 같이 피 흘리면 싸워준 형제가 진 짜 형제다.’말이 바로 그들의 기본적인 정신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전쟁의 참전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승산은?” “갤 공이 작심하고 나선 일입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나중을 위 해서라도 확실하게 지분을 확보해 두어야 합니다.” 사이스 백작은 아들의 패기만만함이 부럽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너 무 뒷방 늙은이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번 일을 사실상 주도한 갤 공의 나이는 사이스 백작보다 10세 정도 윗줄에 있 었기 때문이다. “도박이겠구나. 국가 간에 전쟁이니 탈로스가 사용될 것이고, 우리 가문이 보유한 탈로스는 누구에게 줄 생각이냐?”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키클로급 브론데스는 우리가문이 보유한 탈로스 중 최강이니 당연히 형님께서 사용하게 될 거고, 동급의 아로게스는 나이트 로카데 차이저에게 줄 생각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3기의 기가급 탈로스들은 우리 가문의 가장 오랜 충신들에게 주면 됩니다.” “아로게스를 차이저에게?” “모르셨습니까? 나이트 차이저는 사이스 기사단 최강의 기사입니다.” *** “야! 들었냐? 오늘 백작님이 보유한 탈로스를 사열한대.” “뭐? 그게 정말이야?” “그래. 이번에 발발한 전쟁에 탈로스도 투입 한다나봐!” 아이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최고최강의 병기 탈로스를 실제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라혼은 다른 아이들 같이 마냥 좋아 할 수만은 없었다. 탈로스까지 동원되는 것을 보면 이것은 국가 간의 전면 적인 전쟁이었다. 그리고 대단히 정치적인 사이스 백작이 탈로스를 사용하 는 것을 보면 단순한 국경분쟁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었다. 만에 하나 천 에 하나 단 한기의 탈로스라도 잃게 된다면 백작가의 힘은 그만큼 약화될 것이 뻔했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태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라혼,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는 거야?” “어? 아니 별거 아니야. 그런데 왜?” “애들이 연무장으로 갔어. 지금 탈로스를 꺼내고 있대. 우리도 빨리 가자. ” 라혼은 제브와 같이 연무장으로 달려갔다. 연무장에는 백작가의 식솔들과 이번에 아트란 산의 산적토벌에 참가하지 않은 기사들이 모인가운데 궁극의 병기 탈로스가 꺼내지고 있었다. “야! 탈로스다.” 라혼은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좁고 어두운 창고에서 넓고 밝은 연무장으로 스스로 걸어 나오는 탈로스를 구경했다. 둥글둥글해서 둔중하고 다소 우스 꽝스런 몸체에 비해 커다란 손과 발이 큰 외양을 가진 탈로스 3기와 그에 비해 날렵한 몸매에 눈 부분이 횡길이의 구멍이 뚫려 있는 샬렛(Sallet)투 구 모양의 외눈을 가진 탈로스 2기, 총 5기의 강철거인은 사방을 위압하며 사이스 백작가의 힘을 과시하듯 연무장에 우뚝 섰다. “우와~! 저게 바로 탈로스구나.” “그런데 지금 누가 들어가서 움직이는 거지? 기사들은 모두 밖에 있는데? ” “바보, 지금 저건 탈로스 혼자서 움직이는 거라고.” “에?” “탈로스는 골렘이야. 어느 정도는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자아를 가진 존 재라구. 저 상태에서 골렘의 주인이 허락한 자, 그러니까 기사가 탈로스의 심장부분에 들어가 빙의하면 비로소 제 위력을 내게 되지.” “우아~! 앤트 형 대단해. 그런 것도 다 알고…….” 앤트는 제브가 존경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씩 웃고는 제브의 머리를 헝클어트리고는 말했다. “모든 기사의 꿈이 탈로스를 운용하는 파일럿이 되는 거야. 일단 기사가 되는 것이 목표인 자가 그런 간단한 상식을 모르면 안 되지.” 라혼은 앤트의 설명을 들으며 탈로스를 유심히 살폈다. 가슴 표면에 사이스 가를 상징하는 문장을 무늬를 파고 그 속에 금과 은, 미스릴 등 마나물질 채워 넣은 상감 형식으로 그려져 있어 그거 하나만은 멋졌는데 탈로스 자체 는 라혼의 눈엔 그렇게 대단해 보이지가 않았다. ‘어째 예전에 만든 탈로스보다 발전되기는커녕 오히려 약해보이지?’ 라혼은 시드그람 대륙을 떠나기 전 사용되던 탈로스보다 지금 사이스 백작 가가 자랑스럽게 내 놓은 탈로스가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하자 의아함을 감 추지 못했다. 특히 통통한(?) 모양의 탈로스는 라혼이 보기에 조잡하기 이 를 데 없었다. ‘뭐야? 저 통통한 뚱땡이 탈로스는 걷는 것을 보면 밸런스도 엉망이고, 싸 울 땐 우스꽝스럽게 뒤뚱거리며 전장을 뛰어다닐 것이 훤하군. 그나마 저 샬렛 투구형태의 머리를 한 놈이 좀 낮군. 성능을 다운그레이드한 양산형인 가? 사이스 백작가가 그 정도 힘밖에 없었다는 건가? 백작이 충성을 서약한 신성 시드그람 제국의 힘이 약한 건가? 아니면 진짜는 숨겨두고 있는 건가 ?’ 다른 아이들은 탈로스에 대한 지식이 비교적 많은 앤트에게 탈로스 대한 이 것저것 물었고, 라혼도 그것을 관심을 갖고 귀여겨들었지만 그동안 궁극의 병기네 최강의 무기네 하는 소릴 들은 것치곤 지금 연무장의 세워놓은 탈로 스는 일단 겉보기엔 그렇게 대단해보이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사용자의 마나량에 따라 어느 정도 성능이 향상되는 시스템은 주목할 만했다. 그럼에 도 라혼의 결론은……. ‘아무튼, 조잡해.’ *** 사이스 가가 소유한 5기의 탈로스는 백작의 차남인 콘라드 네부카드 사이스 경이 직접 인솔하여 파일럿이 탑승하지 않은 그대로 본가에 남아있던 기사 들과 함께 ‘포른’이라는 지역으로 둔중한 발걸음을 옮겼다. 거대한 강철 거인이 줄지어 이동하는 모습은 전쟁하고는 별 상관없는 백작령의 주민들에 게 그저 평생 보기 드문 볼거리에 지나지 않지만 거인들의 행진을 마음 편 하게 만은 볼 수 없는 사람들이 이었는데 바로 전장에 남편과 아들을 보낸 여자들과 그 가족들이었다. 아트란 산의 산적을 토벌하기 위해 출정한 기사들은 잠시 집에 들를 짬도 없이 거기서 그대로 어딘지도 모를 제국 북쪽 국경으로 배치되었다. 며칠의 시간이라도 주면 좋으련만 자세한 사정은 알 수가 없으나 프린든 왕국이 선제공격을 가해왔다는 말도 있고 사기에 문제가 생길까 병사들을 일부러 집에 들르지 하지 않게 한다는 말도 있었다. “마님, 어서 그만 집으로 돌아가요. 나리에게 그 뭐냐? 하여튼 좋은 것을 준다고 콘라드 경이 그랬으니 나리께서 크게 다치시는 일을 없을 겁니다.” “그래, 그렇겠지?” 멀리서 나마 강철거인들이 행진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세나데나는 저 멀리 점이되어 사라지는 거인들을 바라보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디 아무 일 없어야 할 텐데…….” 세나데나는 몸을 돌려 언덕 아래에서 기다리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손수 마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가던 중 세나데나의 눈에 무겁기 그지없는 검투 연습용 갑주를 입고 달리기를 하는 소년의 모습이 들어왔다 . “에이, 저 놈은 하루 종일 지치지도 않고 저 짓거리네……. 마님, 마님이 뭐라고 좀하세요. 저 아이는 하는 일없이 빈둥거리고만 있다고요.” “당분간은 그냥 두세요. 좀 우습기는 하지만 라혼이 자기 신하로 삼은 아 이니.” 세나데나는 유모에게 그렇게 대답해 주고 길을 재촉했다. 오랫동안 마차를 몰고 길을 지났어도 사람구경하기 힘든 시골길을 지나 이윽고 차이저 가의 장원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장원을 지키고 있던 하인 바머가 반갑게 마중하 며 손님이 있음을 말했다. “마님, 지금 돌아오십니까? “제가 없는 그 동안 별일 없었나요?” “아닙니다. 손님이 찾아오셨는데 지금 거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손님? 누구지요? 얼마나 기다리셨나요?” “예, 저는 처음 보는 분인데 갤에서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손님이 찾아 오신지는 한 15분쯤 되었습니다.” “갤에서?” 갤은 세나데나의 친할아버지가 다스리는 지방이었다. 손님이 세나데나의 할 아버지 검은 공작이 보낸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거실에 서 세나데나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세나데나와 같이 칠흑 같은 검은 머리 를 짧게 깎은 강인한 인상을 기진 중년의 덩치 큰 사내였다. 그는 세나데나 를 보자마자 대뜸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아는 체했다. “한눈에 너 인줄 알아보겠구나.” “누구신지…….” “아! 이런 미안하다. 나는 트라얀 반트 세나데온 콰이스 너에겐 숙부가 되 는 사람이다.” “……!” 세나데나는 서글서글한 태도의 중년 사내가 자신의 숙부라고 소개하자 내심 크게 놀랐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추스르고 공손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로 자신을 소개했다. “차이저 가의 안주인이 되는 세나데나 차이저입니다.” “이런, 이런 말에 가시가 있구나.” “…….” 사내는 세나데나의 너무나 차가운 태도에 섭섭함 감추지 않고 말했다. “뭐, 좋다. 이유야 어쨌건 아버님이 네게 못할 짓을 한 것은 사실이니. 하 지만 그것은 널 보호하기 위함이었다는 것만은 알아주었으면 한다.” “이미 그 일은 마음에 두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 다행이구나.” 세나데나는 아무런 표정에 변화 없이 말했고, 자신을 숙부라 소개한 트라얀 은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해석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절 찾아오신 건가요?” “무슨 일은 그냥 널 한번 보고 싶었을 뿐이다. 네가 아는지 모르겠지만 우 리 콰이스 가는 120년 동안이나 길고도 고단한 싸움을 해왔다. 단 한 번에 패배가 가문의 멸망으로 이어지는 그런 싸움을 숱하게…….” “…….” “덕분에 대부분의 콰이스들은 제 명을 다 체우지 못한 채 전장에서 싸늘히 식어갔지. 너무나 많은 피를 보았기에 콰이스들은 될 수 있는 한 핏줄이 이어진 가족을 끔찍이 아끼는 전통이 있다.” “언제 가문의 승리를 위해 희생될지 모르니 당연히 그렇겠죠.” “부인하지 않겠다.” 너무나 단정적인 트라얀의 말에 그를 비아냥대던 세나데나는 말문이 막혀버 렸다. 그리고 아이언 듀크가 왜 철혈의 공작이라는 불리는지 그 한 가지 단 면을 본 듯했다. “휴~! 그럼 이야기 해주세요.” “뭘 말이냐?” “그때 저를 찾지 않은 이유를요.” 트라얀은 세나데나가 마음의 문을 조금 열었다 느끼고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은 아버님이 조급하게 굴어서 일이 그렇게 된 거다. 아버님은 슐레 형님이 돌아가시고 네가 홀로 남았다는 소식에 너를 하루라도 빨리 곁에 두 고 싶어 하셨다. 우리가문 사방에 적이 많아 네게 무슨 일이 생길까 불안하 셨던 게지. 그런데 그것을 프린든 놈들이 어찌 알았는지 중간에 널 납치하 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리고 네가 사우스포트 항에 도착할 무렵에 또다시 널 납치하려는 음모가 진행 중이었다. 널 아인윌까지 호송하는 임무를 맡았 던 기사들은 네가 중요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줘야만 했다. 임 신 중인 널 데리고 사선을 넘어 아인윌까지 간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럼…….” “그렇다. 넌 모르겠지만 햄튼 경은 그때 희생되었다.” “그런…….” “네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 후엔 아버님은 진정 너를 찾지 않으시고 햄튼 경을 살해한 세력을 찾겠다며 한동안 광분하셨지. 하지만 아버님은 결코 널 잊지 않으셨다. 네가 가슴에 상처를 안고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도 네가 첫 아이인 루나를 낳을 때도…….” “그럼 왜, 왜 편지 한 장 보내지 않았나요? 편지정도는 얼마든지 보내줄 수 있었잖아요.” 약간 북받쳐 오르는 목소리로 따지듯 묻는 세나데나를 보고 트라얀은 강렬 한 시선을 발하며 말했다. “콰이스가 자신의 가문을 위해 피 흘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콰 이스가 아닌 충직한 신하들과 동지들이 흘린 피의 무게는 그렇게 가벼운 것 이 아니다. 햄튼 경이 너를 보호하기 위해 희생되었다. 겨우 당신의 손녀를 보호하기 위해 콰이스 가는 충직한 신하이자 동지를 잃었다. 만일 아버님 에게 너와 햄튼 경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 한다면 아버님은 주저 없이 너를 버렸을 것이다.” 세나데나는 트라얀의 단정적인 말에 충격을 받으며 자신도 모른 새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눈이 뜨거워지며 굵은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그 런 세나데나를 본 트라얀은 볼을 긁적이며 다시 부드럽게 말했다. “미안하다. 네가 본가를 알지 못하는 슐레 형님의 딸이라는 것을 잠시 잊 었구나.” “그건 무슨 말씀이신가요?” “아버님의 그러한 생각을 이해할 수 있는 자가 세상에 얼마나 되겠느냐. 아버님은 군대를 물리면 살릴 수 있는 큰형님을 주저함 없이 희생시키셨다. 사실 그땐 잠시 물러서고 다음을 기약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버님은 그 때까지 일을 진행시키느라 흘린 피가 많으니 거기에 아들의 피가 더해질지 라도 그들이 흘린 피를 가치 없게 할 수는 없다고 하시며 최후의 공격을 감 행했다. 그래서 슐레 형님은 그런 아버님을 원망하며 집을 떠났다.” “…….” “그러나 그것은 결코 겉으로 보이는 치졸한 원망 따위의 감정이 아니다. 아버님과 슐레 형님의 생각이 달랐다고 할 수 있다. 슐레 형님은 눈을 멀게 하면 눈을 뽑고, 팔이 잘리면 팔을 자르는 식의 방법으론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래서 형님이 선택한 것이 사이스 백작이다. ” 세나데나는 단순히 아버지 슐레 세나데온 콰이스가 2부인의 아들인 서자였 기에 가문으로 부터 버려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숙부 트라얀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단언할 수 있다. 형님이 아버님의 방식을 반대했을망정 가문은 버리 지 않았다고……. 그리고 또한 트라얀 반트 세나데온 콰이스, 내 이름 사이 에 콰이스 가의 발상지 이자 고향인 ‘반트’가 덧붙여 진 것은 형님이 죽 었다는 소식을 받고 난 이후다.” “……!” 충격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심하기 그지없었던 아버지는 공식적이진 않 았지만 죽는 그 순간까지 콰이스 가의 후계자였던 것이다. 숙부는 지금 그 것을 말하고 있었다. “10년 전인가 널 찾은 오코넬 경이 쓸데없는 소릴 했다더구나. 차이저 가 의 장남을 콰이스 가에게 달라고 했다지?” “그런 일이 있었지요.”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그것은 아버님의 뜻이 아니다.” “알아요. 알겠어요.” 명문의 자부심. 피와 피를 통해 이어지는 성향을 결정하는 인자 스트레인(s train), 기질은 세나데나의 몸속에도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아버지는 버림 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로 가문을 나섰고, 할아버지는 그런 아버지 를 아무 말 없이 끝까지 기다렸다. 그들은 세상에 둘도 없는 고집쟁이였다. 그들만이 통하는 언어는 타인이 볼 때 이해하려 해도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그런류의 것이었다. 세나데나는 그동안 가슴 깊숙한 곳에 응어리 졌던 마 음이 한순가 풀리는 것을 느꼈다. 트라얀은 세나데나의 표정에서 바로 그것 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런데……. 먼 곳에서 숙부가 찾아왔는데 이렇게 세워만 둘 셈이냐?” “아!” 세나데나는 숙부 트라얀에게 의자를 내어주며 집안 어딘가에 있을 아이들을 불렀다. 세나데나는 다소 무뚝뚝한 아버지 슐레의 성격을 당신이 돌아가실 때까지 줄곧 겪어왔다. 또 아버지가 얼마나 고집쟁이였는지 새삼스레 새록 새록 되살아났다. 만일 그런 똑같은 고집쟁이가 서로 싸움을 한다면 아마도 아버지와 할아버지 그것과 같으리라……. *** 차이저 가에 손님이 찾아왔다. 어머니의 숙부, 그러니까 라혼에게 외가 쪽 작은 할아버지 쯤 되시는 분이시다. “하하하하하, 벌써 가신을 거두었다고?” “예.” “으하하하하, 그리고 네쌍둥이 누이는 그녀석의 귀부인이고!” “예.” “하하하하하, 이거 재미있군. 정말 재미있어.” 이분이 갤 공의 후계자라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호탕하게- 게걸 스럽게- 웃는 이 사람이 철혈 공작의 후계자라는 것과 그 흔한 수행기사도 없이 적지를 뚫고 여기에 와 있는 자체가 수상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다크 듀크라는 별명을 가진 갤 공의 아들답게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 그리고 오뚝한 콧날이 판에 밖은 듯 꼭 닮아있으니 친척인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피의 맹약이라……. 라혼, 너는 혈맹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느냐? ” “죽을 때까지 함께하겠다는 맹세 아닌가요.” “맞다. 그럼 그것이 콰이스 가의 전통이라는 것도 아느냐?” “…….” “피를 나누어 받은 형제보다 같이 피 흘려 싸운 형제가 진정한 형제다. 동 방에서 건너 온 고대기사들의 격언이다. 콰이스 가문은 바로 그 동방기사들 피를 이어받은 가문이지. 그리고 너 또한 어머니로부터 그 피를 이어받았 기에 칸의 후예다.” 라혼은 트라얀 할아버지-일단 중년이다.―의 말에 무척 흥미가 일었다. “칸의 후예요?” “그래 칸의 후예, 그들이 시드그람 대륙에 얼마나 오래전 들어 왔는지는 모른단다. 스스로 ‘칸’의 전사들이라고 밝힌 그들의 강인함과 흉포함은 모든 이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그들의 말발굽은 시드그람 대륙 전역에 찍혀있지. 그리고 그들은 갑자기 나타난 것과 같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 러나 그들의 후예 콰이스 가가, 아니 그 이전에 뭐라고 불렸던 간에 대륙에 서 숨을 쉬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지. 내가 있고, 또 네가 있으니까.” 서방 대륙인 시드그람에서 동방 대륙을 부를 때 칸 대륙이라고 했다. 그러 나 칸 대륙인들은 스스로 살고 있는 땅을 ‘천하’, 또는 그냥 ‘대륙’이 라고만 칭했을 뿐이었다. 그 땅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강성한 제국이 있었 는데 다름 아닌 ‘강(强)’제국이었다. 강제국은 스스로의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끝없이 세상으로 뻗어나갔는데 그 시기가 시드그람 제국의 위대한 정복이 시작되기 시작할 무렵인 1600년 전이었다. 라혼은 칸 대륙의 역사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히 알고 있었다. 마계로 들어서기 전 한동안 칸 대륙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라혼에 실제 선조로 짐작되는 곳 또한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를 가진 사람들이 사는 칸 대륙이었다. 피 가 이어지지 않았음에도 라혼이 지금 부모와 닮아있는 것도 바로 그것 때문 일 것이다. “그러나 칸의 후예는 피를 이어가는 것보다 정신을 이어가는 것을 소중히 여긴다. 그것을 잊지 말거라. 그것은 네가 스스로 칸의 후예라고 자처한다 면 그것을 잊으면 안 된다.” “정신이요? 무슨 정신 말이에요?” “나도 아버지 그러니까 네 증조할아버지에게 그렇게 물었지. 하지만 때가 되면 알게 될 거라면서 가르쳐주시지 않으셨단다. 나는 지금도 그것이 무엇 인지 알지 못한다. 어렴풋이 짐작이나 할까? 그러니 나는 네게 네 외증조할 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전해줄 수밖에 없구나.” “무슨 재미있는 얘기를 그리하는지 모르지만 식사를 하시고 계속하세요.” 라혼과 트라얀의 대화는 거기서 중단되었다. 그리고 식당에서는 아버지가 안 계신 뒤로 조용했던 식사시간이 참으로 오랜만에 떠들썩하게 진행되었다 . 분명히 어머니는 작은 할아버지를 오늘 처음 만났다고 했는데 그냥 보면 오랫동안 알고지낸 것처럼 스스럼없어 보였다. 그리고 다음날 동틀 무렵 작 은 할아버지는 떠날 준비를 했다. 작은 할아버지는 황제에게 제국군 총사령 관의 직책을 받고 제국군의 집결지로 이동하는 중 어머니를 만나보기위해 일부러 길을 돌았다고 한다. “이번에 가면 또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세나데나.” “살아있다면 언젠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저는 콰이스의 딸이니까요.” “그래, 세나루나, 테이, 라혼. 잊지 말거라 너희는 위대한 칸의 후예라는 사실을…….” “예.” 그렇게 배웅하는 세나데나와 아이들을 뒤로하고 말에 몸을 실었다. 그때 라 혼이 질문을 던져왔다. “작은 할아버지.” “…….” “신들이 다스리는 완벽한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 나는 천국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아마 신이 다스리는 세상 이라면 인간은 스스로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할 테지? 운명이 정해져 있더라 도 당사자가 모르면 운명은 개척할 수 있다고 믿는다.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 그리고 신은 노력하는 인간을 사랑하시니까 네가 말한 그런 세상은 없을 거야.” 그리고 그는 차이저 가의 장원을 떠났다. 스트레인Strain *** 무덥던 여름의 끝 무렵이 되었지만 아직도 한 낮의 햇살은 따가웠다. 그러 나 가을 문턱에 들어선 지금 아침에는 살살한 날씨를 보였다. 그리고 신성 시드그람 제국과 프린든 왕국의 전쟁은 아직도 계속되어 전쟁에 참전한 기 사들은 아직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영웅담과 전황 등은 바람을 타고와 사이스 백작령의 주민들의 입에서 입으로 회자되었다. “차이저 경이 참으로 대단하다지?” “그 소문은 나도 들었어. 소드 마스터였다 메?” “게다가 에이스 파일럿이고…….” “에이스 파일럿?” “거 뭐냐? 탈로스라고 강철거인 말이야. 그걸 5기 이상 파괴하거나 붙잡으 면 에이스라고 불리는데 우리 나이트 차이저 경의 손에 프린든 왕국의 탈로 스가 7기나 파괴되거나 나포되었다고 하더군.” 그리고 사이스 백작령 주민들에게 이번 전쟁의 주인공은 단연코 사이스 기 사단의 부단장 로카데 차이저였다. 이번 전쟁에 사용된 탈로스는 제국과 프 린든 왕궁을 모두 합하여 200여기 정도 된다고 하는데 혼자 7기의 탈로스를 잡았다는 것은 아주 대단한 것이었다. 물론 이번 전쟁이 배출한 영웅 중 에이스 칭호를 받은 기사는 양측을 합하여 8명 정도였다. 그중 12기나 되는 프린든 왕국 근위 탈로스를 잡아 자신이 소유한 탈로스에 18개의 킬 마크 를 새긴 독보적인 존재도 있었다. 일명. 레드 바론(Red Baron) 붉은 남작, 또는 피의 남작 블러드 바론(Blood Baron)이라 불리는 젊은 가온 와이너 디 크니얼 남작이었다. 이름 앞에 ‘ 가온(Gaon)―뛰어난 자.’라는 칭호가 붙은 그는 붉은 적사자 문장이 새겨 진 자신의 붉은 탈로스와 휘하의 ‘적사자 군단’ 레드 라이언(Red Lion)을 이끌고 이번전쟁에서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눈부신 전공을 세웠다. 그가 가진 탈로스는 최강의 탈로스인 타이탄급 헬리오스(Helios)였는데 이번 전 쟁에 사용된 총 7기의 타이탄급 탈로스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는 이미 프 리든 왕국의 이름 높은 근위기사가 탑승한 같은 타이탄급 탈로스 솔(Sol)을 파괴하는 기염을 토해 전 대륙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프린든 왕국에도 레드 바론에 대항하는 영웅이 존재하였는데 적기사 붉은 남작을 대응하는 의미로 청기사, 블루 나이트(Blue Knight)라 불렸는데 이 번 전쟁엔 가문이 아닌 개인의 프리나이트 자격으로 참전한 소드 마스터 다 리우스 펠레 데 트란 자작이었다. 그는 프린든 왕을 군주로 하는 바이나 공 국의 유력한 귀족이었는데 프린든 왕은 그의 역량을 높게 평가하여 이례적 으로 왕실 소유의 타이탄급 탈로스 솔(Sol)을 맡겨 레드 바론, 크니얼 남작 을 상대하게 했다. 이렇게 전쟁은 이미 알려진 영웅이 진가를 발휘하고, 로카데 차이저와 같은 숨겨진 영웅이 빛을 발하게 했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어두움도 있는 법. 영광된 전공을 세운 기사의 소식과 함께 사이스 백작가에 사이스 출신 기사 의 전사 소식 또한 함께 전해졌다. “야! 들었어? 콘라드 경이 제브네 집에 찾아갔었데.” “제브네 집에?” “그게 무슨 말이야?” “아마도…….” 마이킨은 말끝을 흐렸지만 설명은 듣지 않아도 뻔했다. 지금 전쟁에 참전한 기사들의 아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다름 아닌 콘라드 경의 방문이었 다. 전선에 보낼 보급품을 챙기느라 한 참 바쁠 콘라드 경이 아무런 이유 없이 방문하는 이유는 딱 한가지뿐이었다. 바로 기사들의 전사소식을 전하 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전사한 기사이야기 같은 꿀꿀한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 었다. 지금 아이들의 관심사는 오직 사이스 백작령의 영웅 로카데 차이저의 영웅담이었다. “내가 생각해 볼 때 타이탄급이 아닌 키클로급 아로게스로 7기나 잡았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거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냐?” “그래 맞아! 만일 차이저 경에게 타이탄급 탈로스가 주어졌다면 붉은 남작 이 별거냐? 그리고 우리 사이스 기사단은 무적이라, 붉은 남작의 적사자 군 단은 쯤은 아무것도 아니야.” “야! 라혼, 니네 아빠얘긴데 넌 왜 가만히 있냐? 차이저 경이 우리 아빠였 다면, 온 사이스가 떠나가라 자랑하고 다녔을 텐데?” “어? 으응. 걱정이 되서. 제브네 아버지 아담스 경도 탈로스를 타시다가 전사하셨잖아. 프린든 놈들이 에이스 마크를 단 우리 아빠만 노리면 어떻게 …….” “짜식이 걱정도 팔자다. 내가 생각하기에 차이저 경은 무적이다.” 라혼의 말은 진심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버지 로카데 차이저가 조잡한 탈로스를 타시고서 전장을 누빈다는 생각에 걱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마 도 타이탄급이라 불리는 탈로스의 성능을 짐작하건데 만일 아버지가 자신이 예상한 성능을 가진 탈로스와 맞붙을 경우……. 정말 상상하기도 싫은 경 우였다. 이럴 땐 정말 생각 없이 결과에만 주목하는 아이들이 부럽기까지 했다. “그런데 지금 이기고 있는 거야? 지고 있는 거야?” “그거야 당연히 이기고 있지.” “아니, 일단 탈로스끼리 전투가 끝나봐야 알걸?” “아니지. 제국엔 아직 참전하지 않은 탈로스가 있어 하지만 프린든 놈들은 자기네들이 보유한 탈로스 전부를 꺼내들었다고…….” “그나저나 제브는 오늘 빠지려는 모양이다. 그지?” 그날도 그다음 날도 제브는 수업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리고 3일 지나고서 야 잔뜩 움츠린 모습으로 나타났다. 아이들은 아무도 풀이 죽은 제브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것은 라혼도 마찬가지였다. 한쪽은 아이들의 영웅이 된 기사의 아들이고, 한쪽은 아버지를 잃은 아이였다. 그 차이는 빛과 어둠처 럼 컸다. 가을이 되자 프러페서 모함아드에게 배우려는 아이들이 늘었다. 하지만 이 미 수업 진도가 꽤 많이 나가 있었음으로 새로운 아이들은 모함아드의 제자 인 아부다힘이 가르쳤다. “오늘은 역사를 이야기 해보자. 그보다 먼저 올해가 몇 해인지 아는 사람? ” “저요!” “레이스 말해보거라.” “통합력 1624년 입니다.” “잘 말해 주었다. 그럼 통합력은 무엇을 기준으로 만들어졌는지 아는 사람 ? 앤트!” “철황제 하야덴이 시드그람을 제국으로 선포한 날입니다.” “그것도 옳은 말이기는 하다.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고대 시드그람 제국의 건설자 철황제 하야덴 시드그람이 ‘그레이트 람’을 제도 그란으로 삼고 자신이 정복한 영역을 시드그람 제국이라 천명한 원년이 통합력 1년 이다. 그러니까 하야덴 루츠라는 위대한 정복왕이 고대 도시국가 ‘람’의 왕이 된 후 나중엔 제국의 일원이 되는 고리아족의 대규모 침입을 기점으로 위대한 정복이 시작된다. 그리고 수십 년간 계속된 대륙정복이 서서히 마 무리될 무렵 그냥 단순히 ‘위대한 람’, ‘그레이트 람’이라고 불리던 도 시국가 연맹체를 제국화 하여 통합 시드그람 제국을 만들고 원로원과 당시 패권국인 ‘람’시민의 지지를 얻어 제국최초의 황제로 등극한 날을 기점으 로 시드그람 치세 원년이란 의미로 사용되던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와 올해가 통합력 1624년이 인 것이다. 정식 명칭은 시드그람 제국 통합력이다 . 이 고대 시드그람 제국이 서고, 유지되고, 멸망하기까지…….” 라혼에게 그날 역사수업은 정말 짜증나기 그지없었다. 현자라고 명성이 자 자한 모함아드가 알고 있는 역사 중 틀린 부분과 잘못알고 있는 부분이 꽤 많았기 때문이었다. 라혼은 1천년전 시드그람 제국에 살았던 당사자로써 그 때 배우고, 익히고, 직접 경험한 라혼은 단편적인 지식으로 억측하고 확실 하지 않는 일을 단정적으로 말하는 모함아드가 그릇된 현자 같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1천년전 이 땅에 살았었던 라혼 자신도 그전의 역사에 대해서 잘못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현자 모함아드의 이 야기는 큰 틀에선 모두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고대 시드그람의 피를 통한 제위 상속이 아닌 비록 정적이었다 하 더라도 역량이 있는 자에게 제위를 잇게하는 전통은 참으로 주목할 만한 일 이다. 백작이나 공작, 또는 일정한 규모의 왕국의 왕가 정도라면 역량이 의 심스러운 어린 군주라도 경험 많은 신하들이 알아서 이끌어 나갈 수 있겠지 만 그전까지 로유 대륙이라 불린 땅의 이름을 시드그람 대륙으로 바꾸어 놓 을 정도로 대륙전체를 석권한 고대 시드그람 제국 같은 상상을 초월하는 국 가라면 역량이 충분히 검증된 사람만이 황제가 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 “조지, 질문 있느냐?” “예.” “해봐라.” “그럼 지금 있는 신성 시드그람 제국과 고대 시드그람 제국은 다른 건가요 ?” “아주 좋은 질문을 해주었다, 조지.” “…….” 조지는 모함아드의 칭찬에 얼굴이 살짝 붉어지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 고 모함아드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나중에 다시 심도 있게 다룰 것이지만 고대 시드그람과 지금 신성 시드그 람 제국의 차이를 설명하려면 반왕 이그라혼에 대해 알아야 한다. 지금은 그냥 간단하게 설명할 테니 그냥 듣도록.” “…….” “600여년을 이어온 시드그람 제국은 분열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하는데 이 유는 제국이 당시 유일한 적국이었던 파시아의 인시드로우 침입에 손을 쓰 지 못하는 등…. 노후화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외국의 침입을 속수 무책으로 당하고 제국 내부에서도 유력자들이 제국의 한 축을 이루는 원로 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만연하기 시작했다. 시드그람 제국의 말기 황제들이 제국의 분열을 막기 위해 새로운 통합의 가치를 찾으려 한다 . 그것이 바로 유일신교, 지금의 지고교다. 모든 신을 부정하고 오직 하나 의 신만이 유일하다는 교리는 확실히 거대한 제국을 하나로 묶기에 적합한 교리다. 그러나 그 교리는 자신들의 대대로 모셔온 신들을 포기하지 않으려 는 자들에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유일신교를 믿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황제가 그것을 국가적으로 국교로 삼는 일은 만신전 판테온에 새겨진 철황제 하야덴으로 부터 내려온 황제의 철칙중 하나인 ‘ 믿음을 강요해선 안 된다.’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일이 뿐더러 유일신교와 반유일신교간에 분쟁을 야기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유일신교도들은 제국말 기 로젠다로, 유세프 두 부자를 지지하여 황제로 옹립하고 제국을 신국으로 만들려는 작업을 계속했다. 이것은 관용와 포용을 근간으로 하는 제국의 통합정신을 흔들고 무모하게 사고방식까지 통합하려는 시도를 함으로써 결 정적으로 제국으로 인한 평화에 균열이 가게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럼 지고교는 나쁜 건가요?” “그것은 절대 아니다. 지고교, 당시 유일신교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고의 이름을 빙자해 권력을 얻으려는 자들이 나쁘다” 아이의 질문에 대답해준 모함아드는 설명을 계속 이어갔다. “아무튼 유일신, 지고의 이름을 그릇되게 부르는 자들에 의해 제국의 분열 이 가속되자 결국 세명의 황제가 제국을 다스리는 기형적인 정치체제, 일명 삼두정치가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제국의 혼란은 반왕 이그라혼이 본격적으로 전면에 나섬으로써 일시에 해결되었는데 유일신교의 성지 케루 빔이 반왕의 무적군단 기간테스들의 총공격을 받고 세명의 삼두 황제와 그 들을 추종자, 반왕을 싫어한 유일신교의 법황, 그들만의 그릇된 성전에 참 가한 유일신교도, 그들 중 어느 누구 단 한명의 생존자도 없이 자신들의 성 지와 함께 사라지게 된다. 이로써 반왕의 본격적인 ‘피의 길’ 블러드 로 드가 시작되게 되지. 기간테스 군단이 지나가는 길은 언제나 붉게 물들었고 반왕에게 저항하는 자들이 대부분 유일신교도라서 그것은 반왕의 종교탄압 으로 비쳐질 수 있지만, 나는 단연코 그것이 종교탄압의 문제가 아니라 정 치적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지금의 신성도시 탄티노에 있는 성황청이 증명한다. 탄티노 성황청의 초대 성황이자 이그라혼과 동시대에 활동한 성 자인 아스파탐1세는 권력을 탐하는 자들에 의해 어그러졌던 유일신교의 교 리를 정리하여 혼란한 대륙에 복음을 전파한다. 그리고 반왕이 그에게 자신 의 죄 사함을 청한 것을 보면 반왕이 특정한 종교를 탄압할 생각은 애당초 없었던 것으로 볼 수 있지. 그리고 지고교의 성자들 이야기도 나중에 다시 다룰 것이다. 어째든 이점은 차치하고 정치적으로 제국의 통합에 반대하는 세력을 일소한 이그라혼은 고대 시드그람 제국밖에 있는 두 세력, 마고제국 과 북부 바바리안들까지 시드그람 제국의 이름으로 묶어 그간 혼란스러웠던 대내와 대외를 통틀어 정치상황을 안정시키게 된다. 그러나 반왕이 정식으 로 시드그람 제국 황제가 되었음을 선포하려던 그날 조카라고도 하고 동생 이라고도 한 유니어가 음모를 꾸며 유일신교도를 사주한 자에게 암살당하게 된다. 바로 그 시점이 고대 시드그람이 멸망한 시점이다. 그 후 20여 년간 제국은 잦은 내전과 북부 바바리안들의 침입 등으로 완전히 공중 분해되고 지금의 신성 시드그람 제국의 전신이 서게 되지. 비운의 여황제 퀸 바라니 아때 30년간의 소강기를 맞이한 시드그람 대륙은 퀀 바라니아의 죽음을 기 점으로 완전히 분열되게 된다. 그리고 지금의 신성 시드그람 제국은 여왕을 경애한 기사들의 손에 의해 이룩된 것이다. 그러므로 정통성은 있을망정 고대 시드그람과 지금의 신성 시드그람 제국은 엄연히 다르다.”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라혼이 기억하고 있는 그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기 는 했지만 완전히 아니라고 부정할 수만은 없는 이야기였다. 그날 수업이 끝나고 라혼은 아직도 풀이 죽어있는 제브의 손을 억지로 끌고 죠슈아에게 데려갔다. 죠슈아는 꼬마대장 라혼의 아버지가 소드 마스터이며 사이스는 물론 전 대륙에 이름이 드높은 기사가 되자 자신이 하는 수련이 나중에 큰 도움이 될 것이란 사실에 믿음을 가지며 수련에 열중했다. 그리고 토라와 주노도 기사가 되겠다며 죠슈아가 수련장으로 삼은 개울가에서 시키지도 않 은 검술수련을 하고 있었다. -퍽! 깡~! 철컥! 까강~! 죠슈아는 이제 목검이 아닌 검투수련용 두툼한 철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 리고 죠슈아와 조금 떨어진 곳에선 토라와 주노가 목검을 차이저 가의 카마 리에 검술의 검형에 맞춰 휘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시작한지 한 달 남 짓밖에 되지 않아 꼬마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목검을 휘두르는 것이 귀엽기 는 하지만 그다지 볼품은 없었다. 그리고 검형에 맞춰 휘두르는 가운데에서 도 아이들답게 그다지 집중하지 않아 멀리서 걸어오는 라혼을 발견하고는 이내 목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고 쪼르르 달려갔다. “어? 대장이다.” “어디? 정말이네. 대장~!” 풀이 죽어 어깨가 늘어진 제브를 데리고 수련장을 찾았던 라혼은 주인을 본 강아지마냥 자신에게 쪼르르 달려오는 똘마니들 보고 한숨을 내쉬며 꾸짖 었다. “너희들 이런 식으로 하려면 죠슈아 수련하는 데 방해하지 말고 딴 데서 놀아!” “…….” “내가 그랬지. 수련할 때는 집중해서 하라고? 아까 너희들이 하는 거 보니 까, 전체 검형중 중간부분에서 멈췄던데 가서 3번 더하고 와!” “아, 알았어, 대장.” 아이들은 대장의 꾸지람에 금세 풀이 죽어 고개를 숙였다. 라혼은 그런 아 이들에게 흘러가는 투로 말했다. “그 수련마치고 개울에서 물고기 잡아 구워먹자.” “알았어. 대장!” 정말 다루기 쉬운 놈들이다. “하지만, 대충했다간 물고기고 뭐고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응.” 라혼은 그렇게 똘마니들이 다지 개울가의 자신의 자리에서 사뭇 진지한 표 정으로 검형을 펼치는 것을 보고 씩 웃으며 제브를 데리고 수련을 마무리하 는 죠슈아에게 갔다. “쟤가 그 킴벌리의 대장 죠슈아야?” “그래 맞아. 쟤가 바로 걔야.” 라혼이 죠슈아를 신하로 삼았다는 이야기는 아이들 사이에서 유명한 이야기 였다. 하지만 라혼이 그다지 떠벌이지 않는 성격이라 그 소문은 금세 사그 라졌고 아이들은 후덕하고, 인정 많은 차이저 부인이 고아인 죠슈아를 거두 었고 라혼은 그저 주인집 아들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부유한 집에서 아이를 거두어 가문의 후계자와 평생을 함께할 가신으로 삼는 경우는 보기 드문 일만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대장, 왔어?” 이젠 서로 친해진 죠슈아는 라혼을 편하게 대했다. 몸과 마음이 약해진 상 태에서 자신을 따르는 꼬맹이들을 위해 몸을 파는 심정으로 4살이나 어린 꼬마를 대장으로 삼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처음과는 달랐다. 시험해 본적은 없었지만 쪼금만 움직여도 헉헉대며 진이 빠지던 전과는 달리 지금은 무거 운 검투수련용 검을 하루 종일 휘둘러도 조금 피곤하기만 할 뿐 지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꼬마대장의 아버지인 로카데 차이저 경이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는 소문은 믿을 수 없던 꼬마대장의 능력을 납득할 만한 이 유가 되어주었다.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죠슈아는 소드 마스터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셈이니까. “너, 딴생각하며 칼 휘둘렀지?” “어? 알았어?” 라혼의 지적에 죠슈아는 겸연적인 어투로 그것을 시인했다. 라혼은 그런 솔 직한 죠슈아의 태도에 내심 흡족해 하면서도 잘못을 지적해 주었다. “다른 생각을 하면서 수련하려면 달리기를 하라고 했지? 검을 휘두르면서 잡생각이 많으면 안 돼.” “알았어. 앞으론 주의할게. 그런데 이쪽은?” “인사해. 서로 누군지는 알지?” 그다지 크지 않은 곳에서 함께 사는 사이였다. 백작성과 킴벌리 마을에 또 래 아이들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는가. 모두들 서로 누가 누구인지 얼굴정도 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죠슈아는 비록 고아였지만 강단이 있는 소년이어서 준귀족에 해당하는 기사들의 아이들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바로 그 점 때 문에 레이스가 죠슈아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지만 다른 아이들은 킴벌리의 대장 죠슈아를 은근히 두려워했다. 바로 그런 죠슈아를 겁 없이 쥐어 팬 라혼에게 ‘도그란의 폭군’이란 별명이 붙은 것이다. “아담스 가의 제이브러스 네부카드 아담스다. 제브라고 불러.” “킴벌리의 죠슈아.”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제브의 풀 네임이었다. 그렇게 제브와 죠슈아는 서로 악수하는 것으로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제브 어때? 같이 수련해 보는 것이? “수련? 설마 나보고 죠슈아하고 대련하라는 말은 아니겠지?” “왜? 싫어? 무섭냐?” “…….” “죠슈아 오늘은 아담스 가의 검술을 보자. 목검 있지?” 라혼은 보통 사내아이들이 가장 꺼려하는 말인 ‘무섭냐?’라는 말로 제브 의 거절을 원천봉쇄하고는 제브에게 목검을 주었다. “에? 진짜?” “그럼 시작!” 제브는 ‘시작!’이라고 외치는 라혼이 너무나 저주스러웠다. 9살인 제브에 게 13살의 죠슈아는 어른이나 다름없었다. 죠슈아는 13살이 불과 하지만 몸 은 이미 웬만한 어른에 필적했다. “야! 라혼…….” “알았어, 그럼 핸디캡을 주지. 죠슈아는 공격금지다. 대신 몸싸움은 알아 서 해.” 제브는 라혼의 말에 내심 안도하면서도 조금 언짢았다. 그래도 자신은 기사 가문의 아들인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럼 간다. 이야압~!” -딱, 딱, 딱, 딱, 따닥, 닥딱! 그러나 봄부터 4달 가까이 라혼과 대련을 계속해온 죠슈아였다. 그런 죠슈 아에게 제브의 서툰 공격은 검세 하나하나가 선명히 보였다. 차라리 토라와 주노가 흥분하면 마구잡이 휘두르는 목검보다 상대하기가 쉬웠다. 그도 그 럴 것이 어설픈 정통검술은 검로가 정확하기만 하기 때문에 그것을 예측하 여 상대 하기란 너무도 간단한 일이었다. 그런 의미로 제브는 단 한 번도 무거운 검투용 갑옷을 입은 죠슈아의 몸을 격중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기사 가문의 아들답게 흥분하면서도 목검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짓은 하지 않았 다. “헥헥헥헥…….” 제브는 비 오듯 땀을 흘리며 숨이 턱까지 차오르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목검 을 휘둘렀다. 집에선 어머니가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눈물로 밤을 지새웠고 아버지를 잃은 제브는 아버지를 잃은 슬픔보다 어머니가 슬퍼하시는 것에 더욱 짓눌리며 풀이죽어있었다. 그러나 지금 있는 힘을 다해 목검을 휘두르 는 이 순간만큼은 그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어 좋았다. 지금은 오직 나이트 필리스 네부카드 아담스의 아들로써 죠슈아의 몸통에 일격을 줄 생각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제브는 매일 개울가에서 검술을 수련하기 시작 했다. 매리지Marriage 매리지Marriage 신성 시드그람 제국과 프린든 왕국 간의 ‘1년 전쟁’은 끝났다. 이 전쟁으 로 인해 프린든 왕국은 사우스포트 항구를 기점으로 왕국의 동부지역을 절 반을 잃었다. 이로써 갤 공은 신성 시드그람과 연결된 통로를 확보하였고, 사우스포트를 자유도시로 만들었다. 그동안 관망하고 있던 신성 시드그람 제국의 탈로스를 소유한 귀족들이 속 속 황제의 부름을 받고 참전하기 시작하자 국가 간의 전쟁에서 무엇보다 중 요한 탈로스 전력에서부터 힘의 균형이 깨지기 시작했다. 그에 비해 프린든 왕국을 맹주로 하는 왕국연합에 속해 프린든 국왕의 신하국인 바이나 공국 , 시오나 왕국이 프린든 국왕의 참전요구를 사실상 거부, 전쟁이 계속될수 록 전황은 프린든 왕국에게 불리해져만 갔다. 다만 바이나, 시오나는 갤 공 과 신성 시드그람 제국 황제에게 5월을 기점으로 형성된 전선을 새로운 국 경으로 하고 그 이상 확장을 시도할 경우 전적으로 참전할 뜻을 밝혔을 뿐 이었다. 그리고 이른바 사우스포트 회담에서 그러한 것을 골자로 한 강화협 상이 진행되었고 모든 프린든 왕국의 귀족들은 10월까지 제국연합군의 점령 지에서 떠나기로 했다. 또한 서로 포로로 사로잡은 기사들은 강화협상이 이 루어진 순간 몸값을 받지 않고 석방되었다. 전쟁은 끝이 났지만 아버지는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다. 아트란 산에 출몰하 는 산적을 토벌하겠다며 출정한지 만 2년이 되는 해에 에게너 자작은 물론 대부분의 사이스 기사들은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소드 마스터이자 도합 9기 의 탈로스를 잡은 에이스 파일럿인 로카데 차이저와 소수의 기사들은 고향 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어서 오세요. 콘라드 경.” “오랜만입니다, 부인. 라혼 너도 오랜 만이구나.” “안녕하세요. Sir. 콘라드!” “라혼 잠깐 안본사이 몰라보게 자랐구나. 이제 11살이던가?” “예.” 이번에 남작의 작위를 받은 사이스 백작의 차남 콘라드 네부카드 사이스 경 이 차이저 가의 장원을 찾아왔다. 그는 1년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된 결정 적 요인이 된 탈로스를 보유한 귀족가문들의 참전을 이끌어낸 공적이 인정 되어 신성 시드그람 제국 황제로부터 작위를 수여받았다. 콘라드 남작은 전 쟁에 불참한 가문들을 직접 방문하여 설득해 13개 가문의 탈로스들을 참전 시킴으로써 제국에서 나름대로의 정치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바쁘실 텐데, 무슨 일로 저희 집까지 찾아오신 건가요?” “예,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전쟁으로 획득한 땅 중 일부를 우리 가문의 몫 으로 받게 되었는데 아버님과 형님을 대신에서 제가 그곳의 영주가 되었습 니다.” “축하드립니다.” “아닙니다. 그리고 귀댁의 남편 분께서도 이번에 땅을 얻어 영주가 되었는 데 그것을 알려드리려고 왔습니다.” “그런가요?” “그래서 그 일로 로카데의 친구, 콘라드로써 상의드릴 것이 있어 찾아왔습 니다.” “…….” 세나데나는 그의 말에 뭔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라혼을 방으로 보냈다. “라혼, 너는 네 방으로 올라가 보아라.” “예, 어머니.” 라혼은 차이저 가의 장남으로써 부끄럽지 않은 태도로 공손히 대답하고 방 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귀는 여전히 열어놓고 콘라드 경과 어머니의 대화를 엿들었다. “부인, 부인께 부탁드릴 말이 있습니다.” “무슨…….” “1년 전쟁 초기, 로카데와 형님이 작전권 문제로 크게 충돌하고 그 후로도 쭉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었던 모양입니다.” “…….”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소드 마스터는 어디를 가던 준 백작으로써 대접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로카데가 비록 사이스 가의 기사이 지만 형님이 함부로 할 수는 없지요. 아마 제국연합군 내부에선 형님보다 소드 마스터인 로카데를 더 높게 대우했었던 모양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그렇게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으시는 겁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부군이신 로카데는 이제 사이스 백작가를 넘어선 존재 라는 겁니다. 특히 형님은 로카데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럼, 우리가 떠나야겠군요.” 사실 이일은 세나데나도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다. 사이스 백작가는 부유 한 가문이기는 하지만 소드 마스터를 거느릴 만큼 세력이 큰 가문이 아니었 다. 그리고 그냥 맨몸으로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영지를 가진 영주가문으로 써 장원을 옮기는 것뿐이기에 콘라드가 죄스러워하는 태도를 보이며 굽히고 들어올 이유는 없었다. “제가 부탁하려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부인.” “……?” “아버님은 로카데가 떨어지는 것 또한 원치 않으십니다.” “그럼?” “아마도 카시아와 라혼의 약혼을 기정사실화 하고 결혼까지 강행하실 생각 인 것 같습니다. 제가 로카데에게 그런 연락을 보냈는데 로카데는 부인의 의견을 따르겠다고 하더군요.” “…….” “부인, 로카데 아니 차이저 가는 지금 조력자가 필요합니다. 제국 어느 곳 에서도 사이스 백작가 만큼 훌륭한 조력자를 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리 고…….” 그렇게 콘라드 남작은 간곡한 어조로 어머니를 설득했고 라혼은 사이스 백 작이 원하는 정략결혼에 대해서 나름대로 이익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의 말 대로 차이저 가가 땅을 얻었다지만 주민의 대부분은 프린든 왕국 백성일 것 이고,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전쟁에 피폐한 곳일 가능성이 컸다. 치안상 태도 엉망일 것이 뻔하며 거기에 저항군을 빙자한 도둑과 강도들 또한 극성 일 것이다. 게다가 본래 그 땅의 영주였던 자가 호락호락 온전한 상태로 땅 을 넘겨줬을 지도 의심스러울 뿐더러 영지를 관리하는 자들이 도망치고 없 을 테니 지금 아버지로써는 땅의 주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서류하나 딸랑 가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사이스 백작가문이 조력이 있다면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은 뻔했다. ‘카시아와 결혼이라……. 내키지는 않지만 그게 아버지에게도 도움을 주는 일이니 나쁠 건 없겠지.’ *** 카시아는 부모님이 자신을 이제 11살인 꼬마에게 시집보내려 한다는 사실에 무척 기분이 상했다. 라혼이 비록 귀여운 아이이기는 하지만 애였다. 그러 나 약혼도 아닌 결혼이라니……. “너무해 그 아이는 귀엽기는 하지만 아직 애라고…….” “아가씨, 그래도 앞으로가 기대되는 아이잖아요. 그리고 검은 공작의 증손 자이기도 하고요. 뭐하나 빠질 것이 없는 남편감이잖아요.” “나도 알아, 유모. 하지만 너무 어려.” “후후후, 걱정 마세요. 소년은 금세 어른이 되니까요. 카시아는 오늘 결혼을 통보를 받았다. 오는 5월 축제 때 정식으로 결혼식을 한다는 것이었다. 흐트러진 붉은 곱슬머리에 하얀 피부를 가진 15세 소녀 는 자신도, 남편이 될 상대도 너무 어리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 아 이와 약혼얘기는 2년 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차이저 부인이 약혼문제는 남 편이 돌아오면 상의해 보아야 한다며 결정을 미루고 있었다. 결혼은 아주 중요한 일이므로 가장의 의견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에 그것은 할머니나 , 어머니도 납득하며 인정한 문제였다. 그러나 지금은 돌아가는 사정을 보 면 아무래도 결혼을 밀어붙이는 듯했다. “그런데 라혼은 이번에 레이스랑 그란에 간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어떻게 되는 거지?” “아, 그거요. 큰 마님하고 작은 마님이 하는 말씀을 들었는데 도련님과 함 께 그란으로 갈 아이는 제브라는 아이로 바꾼다고 하더군요. 사이스 백작가 를 위해 목숨을 잃은 기사의 아들을 사이스 백작가가 챙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그래?” “아유~! 우리 아가씨 벌써 결혼을 하실 나이가 되었다니 제가 한 달 후까 지 이 세상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신부로 만들어 드릴게요.” “…….” 카시아는 유난히 호들갑을 떠는 유모에 태도에 한숨을 내쉬었다. ‘후~! 하지만 내가 아무리 예쁘게 꾸미고 있으면 뭐해. 남편이 꼬맹인데. ’ *** 라혼과 카시아의 결혼은 정략결혼답게 당사자인 라혼과 카시아의 의견은 전 혀 고려하지 않는 상태에서 진행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내일이 결혼식이 거 행되는 날이었지만 라혼이 지금 있는 곳은 죠슈아와 제브가 수련하는 개울 가였다. -휙! -탁! 라혼이 돌을 던지면 죠슈아는 그것을 받아냈다. 그리고 죠슈아는 받아낸 돌 을 다시 제브에게 던졌고, 제브는 그것을 받아 다시 라혼에게 던졌다. 하지 만 아이들의 놀이치고는 조금 살벌하지 그지없는 놀이였다. 힘껏 던진 돌을 맨손으로 잡아 아주 잠깐의 여유도 없이 되던지는 것이었다. 두세 번 정도 면 가능할 지도 모르지만 힘껏 던진 돌을 계속 받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 었다. 그러나 세 아이는 온몸에 땀을 비 오듯 흘려 셔츠가 흥건하게 젖어들 때까지 돌 던지기를 쉬지 않았다. “우왁!” 그러나 손을 가죽으로 감싸 보호구까지 착용한 제브가 제일먼저 나가떨어졌 다. “괴물 같은 놈들.” “네가 너무 약한 거야.” “쳇!” “대장, 제브가 항복했으니까. 이젠 제대로 하지?” “좋아!” 그리고 이번에 돌멩이 대신 단검으로 그러한 동작을 반복했다. 날아오는 돌 을 잡아채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시퍼런 날이 서있는 단검을 잡아채 는 것은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돌멩이 대신 단검으로 서로에게 던지 고 받는 라혼과 죠슈아를 땅 바닥에 주저앉아 지켜보던 제브는 고개를 설레 설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하여튼 둘 다 괴물이라니까.” 처음엔 모래주머니였다. 그것은 움직임 포착하는 눈과 민첩성 순발력을 키 우기 위해 기사들이 하는 일반적이 수련이었다. 그러나 라혼은 그것을 개울 가의 주먹만 한 자갈돌로 대신했다. 처음엔 모래주머니 받듯이 손바닥으로 받아내다 손이 퉁퉁 붓기도 했었다. 그래서 그것을 참지 못하던 제브는 가 죽 끈을 손에 감아 돌 받기를 했다. 그러나 라혼과 죠슈아는 무슨 똥배짱인 지 맨손으로 힘껏 던져진 돌을 받아냈다. 그리고 나중엔 지금처럼 시퍼런 날이 선 단검을 받아 던지는 지경까지 왔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하면 크게 다칠 수도 있는 위험하기 그지없는 수련법이었다. 돌 받기를 할 때는 멀쩡 하던 죠슈아는 더욱더 땀을 흘렸고, 숨 또한 눈에 띄게 거칠어져있었다. 그 리고 이내 집중력이 흐트러졌는지 죠슈아가 내던진 단검이 라혼 발치에 박 혔다. -팍! “헉헉헉헉헉…….” “뭐야? 벌써 지친 거냐?” “그만해, 이 괴물아. 그보다 넌 내일 카시아 누나랑 결혼식이잖아? 이렇게 한가하게 노닥거려도 되는 거냐?” “뭘, 결혼식 준비야. 백작부인과 어머니가 알아서 하시는데 뭘. 그리고 그 동안 예행연습도 충분히 했고.” “하긴……. 어? 비 온다.” 하늘에서 물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져 내리고 이내 비로 바뀌자 라혼과 제브 , 죠슈아는 차이저 가의 장원으로 달려갔다. 처음엔 약하게 한두 방울 떨어 지던 비는 라혼일행이 집에 도착할 무렵에는 빗방울이 제법 굵은 부슬비로 바뀌어 있었다. 라혼이 집안으로 들어서자 유모가 반색을 하며 맞아주었다. “아이고~! 라혼 도련님 내일 결혼 하실 분이 이게 뭐예요. 비에 흠뻑 젖었 네. 어서 이리로 와서 몸을 식지 않게 하세요. 감기 들겠어요. 제브 도련님 도…….” 그리고 유모는 하녀들에게 뜨거운 목욕물을 준비하라 지시하고 벽난로에 불 을 붙였다. 그리고 뜨거운 수프를 끓여 마실 동안 준비된 뜨거운 물로 목욕 까지 한 세 아이들은 거실에 벽난로 가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 러는 사이 잠시 외출했던 어머니와 누나들이 돌아왔다. “어휴, 정말! 우리는 자기 때문에 이렇게 고생하는데 자기는 따뜻한 곳에 서 졸고 있다니…….” “에? 왔어? 흐아아아압!” “으이구! 목젖 보인다. 네가 내일 결혼할 새신랑이라는 것이 믿기지가 않 는다.” “테이야. 그만해! 라혼 이리와 봐.” “응.” 라혼은 노곤한 몸을 일으켜 세워 자신을 부르는 루나누나에게 갔다. “내일 입을 결혼식 예복이 오늘에야 완성되었어. 그러니 한번 입어보자.” 이 결혼을 별로 내켜하지 않는 어머니대신 루나 누나가 이것저것 챙겨주었 다. 이 결혼이 끝나면 차이저 가의 장원은 사이스 백작령을 떠나 프린든 왕 국 동부 점령지에 마련된 차이저 영지로 옮겨지게 된다. 이미 차이저 가의 재산을 처분하는 일은 콘라드 남작이 직접 나서서 해결해준 덕분에 대부분 처리되었고, 남아있는 것은 장원뿐이었다. “우와! 우리 라혼 너무 멋지다. 카시아에게 주기는 너무 아까워.” “에헴. 내가 한 미모 하기는 하지.” “나왔다. 라혼의 공주병(?).” 특별히 만든 하얀 바탕에 금실로 수놓은 결혼예복은 라혼의 검은머리와 무 척 잘 어울렸다. 루나는 옷맵시를 잡아주며 진정으로 감탄하며 말했고 라혼 은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였다. 그러자 옆에서 라혼의 결혼예복 입은 모습 을 구경하던 제브는 라혼의 그런 태도를 ‘공주병’이라고 표현했다. 하지 만 가만히 있을 라혼이 아니다. “왜? 질투 나냐? 내가 시집가서?” “그래 질투난다. 어디 가서 너같이 예쁜 사내아이를 만날 수 있겠냐?” 이것은 라혼과 제브의 격의 없는 농담이었지만 지금 이 자리는 둘만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제이브러스 네부카드 아담스! 너 뭐라고 했어?” “흐엑! 테, 테이야 이건 그러니까…….” “소문을 듣고도 설마 했는데 너 정말 라혼을 짝사랑한 거야?” 헉! 한마디 말로 제브를 물론 라혼에게까지 타격을 주는 테이였다. “그동안 둘이 함께 붙어 다니던 것이 수상하긴 했는데 그 소문이 사실일 줄이야.” 이것은 아예 결론적인 말이 아닌가? “설마, 너희들 내일 결혼식이 열리는 중간에 사랑의 도피를 계획하고 있는 거 아냐?” 소설을 써라, 소설을 써. “아니지 제브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을 보면 밤사이 도망을…….” “그만!” “아냐!” 라혼과 제브는 테이의 상상의 나래를 거의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잡고는 말 했다. “절대 그런 일은 없으니까 걱정 마!” “어?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는 던데? 너희들 정말…….” “죠슈아. 네가 말 좀 해줘.” 라혼의 구원요청에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죠슈아가 나서며 그 특유의 진지모드로 테이에게 말했다. “레이디 세나테이아, 제가 보기엔 대장과 제브는 그런 관계는 아닙니다.” “그래? 그럼, 그런가 보지 뭐!” 하나뿐인 남동생과 남의 집 귀한 아들을 폐인 일보직전까지 몰고 가던 테이 는 죠슈아의 한마디에 그대로 물러섰다. 라혼은 사내아이들끼리의 농담은 웃어넘길 수 있었지만 여자아이들의 수다는 도무지 감당이 되지 않았다. 라 혼과 제브를 ‘부부’라고 놀리는 사내아이들은 이미 아니라는 전제로 그저 놀리는 것이지만 계집아이들은 그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임은 물론 있지도 않은 사실까지 덧붙여 그것을 사실로 믿어버리는 경향이 짙었다. *** 봄꽃이 만발하는 5월을 기점으로 열리는 봄 축제는 밀을 수확기전에 미리 마을 사람들의 우의를 다지는 축제였다. 또한 젊은 남녀의 사랑이 가장 많 이 맺어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올해 축제는 특별했다. 전 쟁에서 돌아온 기사들이 서로 실력을 뽐내는 토너먼트가 개최되고, 기사들 을 따라 참전했던 백작령의 영지 병사의 승전 퍼레이드도 계획되어있었다. 또한, 11살 꼬마신랑과 15살 소녀의 결혼식이 열리기도 했다. “아버님. 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뭐가 부족해 이제 겨 우 11살이 된 꼬마를, 그것도 차이저가 별로 내켜해 하는 않는 결혼을 밀어 붙이다니요.” “쯧쯧쯧, 에게너 아직까지 그 소리냐? 그만큼 설명했으면 알아들을 만도 하건만, 라혼 그 아이는 차이저의 아들이기도 하지만 갤 공의 증손자다.” “그래 봐야. 차이저 아닙니까? 콰이스가 아닌데…….” “칸의 후예를 아느냐?” “……?” 에게너는 아버지 사이스 백작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사이스 백작은 그런 에게너를 보고 내심 한숨을 쉬며 말했다. “콰이스 가는 칸의 후예다. 칸의 후예는 상속권에 대해서는 남녀차를 거의 두지 않는다. 갤 공이 라혼 그 아이를 칸의 후예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라 혼 또한 갤 공의 후계자 후보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갤 공에겐 아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아들에겐 자손이 없지.” “……!” “그 아이의 아비는 소드 마스터, 탈로스를 타지 않고서도 오러 블레이드만 으로 기사가 탑승한 탈로스를 상대할 수 있는 탈로스 이상의 가치를 가진 존재다. 그리고 그러한 존재가 자신의 아들을 기초부터 가르쳤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이는 우리와 멀어지게 되어 있다. 아비가 소드 마스터고 , 증조부가 천하에 아이언 듀크다. 그것만으로도 놓쳐서는 안 되는 이유는 충분하다.” 사이스 백작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않는 장남에게 한마디 첨 언했다. “차이저와의 일은 콘라드가 알아서할 거야.” 어른들의 사정이야 어찌되었던 소꿉장난 같은 라혼과 카시아의 결혼식은 순 조롭게 진행되었다. 헬버트 네부카드 사이스 백작이 보는 앞에서 평생을 함 께 하겠다는 맹세를 하고 신관의 축복을 끝으로 신랑이 신부에게 키스함으 로써 혼인의 서약이 완성 되었다. 그리고 곧이어 기사들이 기량을 겨루는 토너먼트가 시작되었다. “라혼, 어떠냐? 마상창 시합은 처음 보는 것일 텐데?” “굉장히 멋있습니다. 백작님, 마상창은 토너먼트의 꽃이죠.” 사이스 백작은 어린아이처럼 흥분하는 라혼의 모습에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 어린나이에 결혼이란 것을 해서 그 분위기에 주눅들것이라 예상했는데 의 외로 평소와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아! 아깝다. 이기고 있었는데 말에서 떨어져 녹다운이 됐네.” 사이스 백작은 방금 사이스 기사단의 기사가 외부에서 참전한 기사에게 단 한 번에 역전을 당해 패배하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하는 라혼을 다시 불러 물었다. “재미있느냐?” “예, 무척이요.” 그리고 은근슬쩍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라혼, 너는 카시아를 좋아하느냐?” “아니요.” “……!” 사이스 백작은 라혼의 주저함 없는 말에 흠칫했다. 어쨌거나 카시아는 친손 녀였기에 정략결혼 일망정 기왕이면 행복하길 바랐다. 그런데 라혼의 입에 서 부정적인 말이 튀어나오자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카시아가 제 아내로서, 미래의 차이저 가에 안주인으로써 의무를 다한다면 저는 그녀를 사랑할 겁니다. 그러나 만일 지금 제가 어리다는 이 유로 절 소홀히 하고, 아내로써 남편으로 대하지 않는다면 제가 계속 남편 으로써의 의무를 하리라는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 도저히 11살짜리 꼬마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사이스 백작 은 라혼의 말에 의식적으로 근처에 같이 자리하고 있는 차이저 부인의 눈치 를 살폈다. 그러나 그녀 또한 라혼의 당돌하기 그지없는 말에 당황하는 빛 이 역력했다. 라혼이 한 말은 ‘일단 아내가 되었으니 받아들인다. 그러나 성에 차지 않으면 버리겠다.’라고 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혼식을 올린 당일에 신부의 할아버지에게 할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아이 는 한걸음 더 나아가고 있었다. “백작님, 검투가 시작되었으니 그쪽으로 가 봐도 되겠습니까?” “음? 그, 그러려무나.” “카시아!” “…….” 카시아는 지금 당돌하기 그지없는 꼬마의 말에 자존심이 상해 있었다. 그러 는 와중에 꼬마가 자신을 부르자 안색을 굳히고 낮게 코웃음을 치며 무시했 다. 그러나 그걸 그대 둘 라혼이 아니었다. “백작님, 카시아 네부카드 사이스 양은 아직 차이저 부인이 아니로군요.” “……!” “저는 이미 한 여자의 남편이 되었다고 믿었는데 그것은 그저 봄날의 이벤 트였던 모양이군요.” 라혼의 발언은 분위기를 싸늘히 식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듣기에 따라 준비되지 않는 아이들의 결혼을 밀어붙였다는 비난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 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한 상대는 꼬마였다. 그래서 그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속뜻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혼 인서약이 끝난 지 겨우 서너 시간이 지났을 뿐이었다. ‘어라? 이정도하면 될 줄 알았는데 반응이 영 시원치 않네?’ 라혼은 사이스 백작과 백작부인이 안색을 굳힌 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 자 좀 더 강하게 밀어붙일 필요를 느꼈다. 가뜩이나 누나들에게 휘둘려 살 아왔는데 그다지 정도 없는 계집아이에게 휘둘리는 것은 절대 사양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어린아이임을 방패로 백작을 조금 긁었는데 원하는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저는 아버지에게 남편으로써 아내를 어떻게 대하는지 보고 배웠는데 카시 아는 아니었던 모양이죠?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남편을 대놓고 무시하 는 것을 보니 백작님의 손녀는 차이저 가에 시집온 것이 아니라 제가 사이 스 가에 시집간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듣자듣자 하니 못하는 말이 없구나. 나이…….” “라이나!” “어머니.” 라혼의 카시아 교육문제를 비꼬는 말에 자작부인이 발끈하며 나섰지만 백작 부인이 그녀의 말을 끊고 나서며 말했다. “세나데나, 당신의 아들은 또래의 아이 답지 않게 참으로 의젓하군요. 나 는 라혼을 손녀사위로 맞은 것을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아이의 말은 맞 습니다. 손녀가 아직 적응하지 못해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지요.” “아, 아니 별말씀을요.” 백작부인의 사과를 받은 어머니는 얼이 빠진 그대로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 다. 그리고 백작부인의 시선이 카시아에게 향하고 백작부인 특유의 위엄이 서린 말투로 차분하게 말했다. “카시아, 너는 카시아 네부카드 사이스가 아니라, 카시아 차이저다. 보아 라, 네 남편은 비록 너보다 나이는 어릴망정 자신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있 다. 너도 네 입장을 이젠 알았으리라 믿는다.” “…….” 카시아는 할머니의 위압적인 목소리에 주눅이 들어 울상이 되었고, 그런 카 시아를 라혼이 당당한 승리자의 모습으로 불렀다. “카시아.” 카시아는 하는 수 없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고 라혼의 내민 손을 잡 았다. 그리고 의기양양해 하는 꼬마 남편의 팔짱을 끼고 그가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어린부부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휘파람을 불며 환호 했고 라혼은 눈을 반개하고 거만한 귀족처럼 손등을 보이게 하여 손을 돌렸 다. 그런 치기 가득한 행동은 사람들의 웃음 이끌어 냈고, 그것을 지켜보는 사이스 백작과 백작부인은 저 아이가 아까 전까지 무섭도록 따지고 들던 그 아이와 같은 아이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허! 황금의 입이라는 내가 11살 꼬마에게 휘둘릴 줄이야…….’ 매리지Marriage *** “어? 대장!” “라혼!” 라혼이 카시아와 더불어 나타나자 죠슈아는 물론 제브도 크게 놀랐다. 죠슈 아는 오랜만에 자기 패거리들을 만나 그 아이들과 더불어 이번 봄 축제의 중심인 토너먼트 대회장을 제집인 냥 돌아다녔다. 그리고 제브는 다른 집 아이들처럼 아버지나 형이 대회에 참가하지 않아 그냥 죠슈아와 붙어 다녔 다. 그러던 중 잠깐 휴식시간을 빌어 비교적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는데 죠슈아가 오늘 결혼식을 올린 라혼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제브는 아까까 지 같이 있었으면 서도 뭐가 반가운지 라혼을 크게 부르고 손을 반갑게 흔 들었다. 라혼은 그런 제브와 죠슈아를 발견하고 카시아와 더불어 아이들에 게 왔다. “여기서 뭐하지?” “뭐하긴, 아까 마상창 토너먼트 예선이 끝나고, 검투가 시작되기 전에 잠 시 쉬는 중이지. 그런데…….” 제브가 질문에 대답하며 카시아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라혼은 제브에게 카시아를 소개했다. “이번에 결혼한 내 아내다. 인사해 카시아 내 친구 제브다.” “응? 아, 안녕 제브.” “뭘 새삼스럽게 카시아 누나랑 나는 이미 아는 사인데…….” 이미 아는 사이라도 결혼을 하면 새롭게 태어난다고 하여 다시 정식으로 소 개하는 풍습이 있었다. 하지만 이미 아는 사이인 사람과 새삼스레 인사를 다시 나눈다는 것은 조금 쑥스러웠다. “그리고 이쪽은 동지 죠슈아.” “바, 반갑네. 카시아라고 해.” “죠슈아입니다.” 라혼은 죠슈아를 대하는 카시아의 태도에 인상을 와락 구기며 다소 무거운 어조로 친구들에게 부탁했다. “제브, 죠슈아. 잠깐 자리를 비켜줄래?” “어? 그래.” 죠슈아는 라혼의 부탁에 패거리들을 이끌고 자리를 피했다. 그들이 자리를 떠나자 라혼은 카시아를 쏘아보며 설교하듯이 말했다. “그전에 무슨 관계였던, 제브와 죠슈아는 내 친구야. 제브는 어렸을 적부 터 알고 지냈으니 그렇다고 치지만 내가 동지라고 소개한 죠슈아를 초면에 하대하는 것은 보아줄 수가 없군.” 라혼의 설교에 카시아는 기가차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자신은 사이스 백작 의 손녀였다. 그러나 죠슈아는 어디서 굴러먹었는지 알 수없는 근본도 모르 는 고아였다. 서로 말을 섞는 것조차 싫었는데……. 게다가 할머니의 말 때 문에 꼬맹이에게 휘둘리는 것도 서럽고 짜증나는 일이 건만 남편행세까지 톡톡히 하려드니 화가 나다 못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뭐야! 요, 꼬맹이가 아까부터……. 음!” 드디어 폭발한 카시아는 꼬맹이에게 뭐라 한마디 쏘아붙이려 했지만 할 수 없었다. 입이 막혀있으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라혼은 눈을 날카롭게 치켜뜨며 사나운 말을 토해내려는 카시아의 입술을 입으로 덮쳤다. 라혼의 그 동작은 카시아가 미처 반응 할 틈조차 없을 정도로 빨랐다. 그리고 혀 를 놀려 카시아의 입속을 간질이며 길고 또 깊은 딥 키스를 했다. “푸하~!” “…….” 너무나 순식간에 키스를 당한 카시아는 라혼의 입술이 떨어지자 그때서야 숨을 몰아쉬며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그리고 방금 자신이 뭘 당했는지 깨달은 카시아는 다시 라혼에게 따지듯 물었다. “너! 지금 내게 뭐 한 거야?” “아직 모자란 건가?” “무슨? 저리……. 어? 음!” 소중한 첫 키스를 너무도 폭풍같이 당한 카시아는 자신의 입술을 훔친 간 큰 꼬맹이에게 뭐라 하려다 라혼이 다시 입술을 덮쳐오자 의식적으로 몸을 빼려했다. 그러나 뭔가에 걸려 넘어지려는 순간 라혼이 자신의 허리를 받히 고 또다시 입술을 덮어오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라혼이 자리를 비켜달라는 말에 약간 거리를 두고 있던 아이들은 호기심에 먼발치에서 그 것을 지켜보았다. 제브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라혼과 카시아 부부의 키스장 면을 빼놓지 않고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라혼, 저 자식이……. 부럽다.” 뿐만 아니었다. 어느새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길고, 긴 키스를 하는 꼬맹이 들의 모습을 구경하느라 정신없었다. “말려야 되는 거 아냐?” “왜?” “아직 애들이잖아.” “그래도 방금 결혼한 따끈따끈한 신혼부부잖아.” “그래도…….” “그나저나 징글징글하게 오래도 하는군.” 그러나 키스에 열중하는 라혼은 자기가 장소를 잘못 택했음을 인정하며 카 시아의 목덜미 부분에 마나를 뭉쳤다. 그러자 카시아는 키스하는 모습 그대 로 졸도해버렸고 라혼은 그제야 입술을 뗐다. 그리고 졸도한 카시아를 안아 들고 천연덕스런 표정으로 사람들을 둘러보며 의식적으로 의기양양한 표정 으로 말했다. “이런 졸도해버렸네. 이봐요. 길 좀 비켜주지요. 내가 좀 급한데…….”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상식을 초월하는 일을 당하면 어안이 벙벙해져 이 성적인 대응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라혼과 카시아의 키스 장면을 훔쳐본 사람들이 모두 그 대부분의 사람에 속했다. 라혼은 자신의 몸집보다 큰 카 시아를 안아들고, 눈앞에 보이는 오늘 토너먼트에 참가한 기사의 천막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이 빠져있는 제브와 죠슈아에게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제브, 죠슈아 니들이 밖을 지켜줘라!” “엉? 어, 그, 그래!” 제브와 죠슈아는 무슨 큰 임무를 받은 것처럼 라혼과 카시아가 들어간 천막 입구를 지켜야만 했다. “가요, 가! 방해되잖아요.” 제브가 자꾸만 모여드는 사람들을 보내려 했지만 사람들은 자리를 뜨지 않 으려 했다. 하긴 세상에 어딜 가서 이런 구경꺼리를 볼 수 있겠는 가? 한편 라혼은 일이 뜻하지 않게 커져버리자 무슨 꿈을 꾸는지 잠에 빠진 그 대로 황홀한 표정을 짓는 카시아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젠장 하필이면 뽀뽀를 하다니…….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군.” 라혼이 카시아에게 불시에 키스를 한 것은 카시아의 기를 꺾기 위해서였다. 반항하는 카시아를 마나 포스를 운영해 부드럽게 옭아매며 찐한 키스를 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남이 키스하는 모습을 멍하니 구경하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대충보고 못본척 지나갈 줄 알 았던 사람들이 멍하니 서서 구경할 줄을 미처 몰랐다는 것이 실수였다. 그 렇게 한 두 사람이 대놓고 구경을 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그야 말로 순식간이었다. 구경꾼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많아지며 줄어들 기 미가 보이지 않았다. 라혼은 일단 입을 통해 마나를 흘려보내 카시아를 꿈인지 생시인지 알지 못 하게 해놓고 이 궁지에 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느라 머리를 굴렸다. 중요한 것은 그 자리를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당당하게 무마할 수 있을 것인 가였다. 일단 카시아가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녀 를 기절 시키고 최대한 당당하게 행동했다. 그러나 아무리 막 결혼한 사이 라지만 지금 라혼의 나이는 어디까지나 11살 꼬맹이에 불과 했던 것이다. “그나저나 일은 벌어졌고……. 에라! 내 마누라 내 맘대로 하는데 누가 뭐 라 그러겠어. 당당하면 되는 거야 당당하면……. 나는 그렇다 치고 이 애한 테는 상처가 크겠는걸. 좋은 꿈을 꾸고 있는 모양인데 조금만, 조금만 더 두지. 깨어난 순간 지옥이니…….” *** 11살 남편이 15살 아내와 동침했다는 소문은 하루도 안 돼. 전 사이스 백작 령에 퍼졌다. 그리고 하루가 더 흐르자 소문은 더 먼 곳까지 퍼져나갔다. 백작령에 사는 대부분의 주민이 모여 있던 곳에서 벌어진 일이고 목격자만 도 수백 명이었다. 게다가 토너먼트에 참가하기위해 온 기사들을 시종하러 옷 사람들까지 있었으니 소문의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사람들은 종종 자 신들이 납득할 수없는 말을 들으면 사실 자체를 왜곡하는데, 결혼하고 사고 친(?) 사실은 사고치고 어쩔 수없이 결혼한 것으로 왜곡되어 버렸다. 게다 가 1년 전쟁의 영웅의 아들이 사고를 친 경우라 아버지의 유명세와 더불어 더욱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다. “세상에……. 어쩜, 그렇게 감쪽같이 속일 수 있어?” “…….” 테이였다. 뭐가 그렇게 쌓인 것이 많았는지 아침부터 내내 저 지경이었다. 게다가 어머니와 루나누나의 표정도 그렇게 좋지만은 못했다. 이제 소드 마 스터 로카데 차이저와 11살 때부터 사고 친 희대의 바람둥이 아들의 이야기 는 언제나 함께 따라다닐 것이 뻔했다. 그것은 그다지 명예로운 일은 아니 었다. “아, 아녜요. 아가씨.” “카시아 언니는 가만히 있어요. 언니도 잘한 거 하나도 없어요.” “아닌데…….” 확실히 그 키스로 기죽이는 방법은 확실히 효과만점이었다. 도도하기 그지 없던 카시아가 테이한테도 쩔쩔매는 것을 보니. 하지만……. “테이 누님, 그만하시죠. 이제 한 가족인데……. 그리고 부부간의 일을 너 무 추궁하는 것도…….” “아아~! 그러셔? 이젠 아내가 있는 유부남이니까, 시집안간 누나들은 거치 적거리기만 하신다?” 이것이 11살짜리 쌍둥이 누이에게 들어야할 말인가? 평소라면 이때쯤 구원 의 손길을 내밀던 루나누나도 모른 척 하는 것을 본 라혼은 정말 어찌해야 할지 대책이 서질 않았다. 그래서 라혼은 무조건 빌었다. 테이가 뭐라고 추 궁하건 무슨 억측에 말도 안 되는 말을 해도 무조건 잘 못했다며 빌었다. 그러나……. “그래도 없는 아기를 어떻게 데려와? 아, 알았어. 미안해 이제 그만 해라 …….” 그러나 스스로 만들어낸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자기 스스로 믿어 버리곤 없는 아기를 어디서 구해오란 말인지……. *** 라혼에게는 정말 파란만장한 봄 축제가 끝나고 원래는 라혼이 하게 되어 있 던 레이스와 함께 그란의 유벤트 기사단 입단은 제브가 대신하게 되어 레이 스와 제브, 그리고 앤트까지 포함한 세 아이만 제도 그란으로 떠났다. 그리 고 카시아는 아버지가 있는 차이저 영지로 가기 전까지 백작령의 차이저 가 의 장원이 있는 도그란에서 지내기로 했다. 백작부인은 카시아와 라혼을 백 작성에서 머물도록 할 생각이었겠지만 라혼은 그 빤한 속셈을 알고 일언지 하로 거절의 뜻을 분명히 했다. 물론 꿍꿍이가 있는 사이스 백작은 어떻게 든 라혼을 설득하려 했지만 그의 입은 라혼의 한마디에 막혀버렸다. “소드 마스터에 에이스 파일럿인 아버지 말고 다른 사람이 절 가르친다고 요?” 사이스 백작은 솔직히 그다지 안전하다고는 하지 못할 프린든 점령지에 손 녀를 보내기엔 다소 걱정스러웠다. 그리고 소드 마스터 로카데 차이저에 대 해 어떤 확신이 설 때까지 로카데 차이저의 아들을 교육을 명분으로 잡아두 려는 속셈도 있었다. 그러나 라혼은 그런 사이스 백작에게 차이저 가문의 영지에 가는 것이 두려워 가지 않는 아내는 필요 없다고 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이스 백작은 라혼을 달래는 방법 외엔 없었다. “아버님, 라혼은 어린아이입니다. 그냥 뜻대로 밀어 붙이면 그 아이가 뭘 어쩌겠습니까?” “형님,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뭐가 말이냐?” 콘라드는 에게너 형님의 짜증스러워 하는 말에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것이 일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어렵게 말하지 말고 쉽게 말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데?” “지난 토너먼트 대회 이후 라혼과 카시아에 관한 소문이 파다한 것은 형님 도 아시지 않습니까?” “뭐가? 헛소문에 불과 한 것을…….” 에게너 자작이 별거 아니라는 듯 말하자 콘라드 남작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말했다. “헛소문이지요. 하지만 일부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적당한 사실이 곁들여 진 거짓은 사실보다 더 설득력을 갖습니다. 지금은 11살짜리 꼬마가 사고 쳐서 그것을 책임지게 하기위해 우리가 결혼을 강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 니다. 그런 와중에 라혼이 어디 가서 ‘이 결혼은 무효다’라고 한마디만 하면 우리가문의 명예는 크게 실추될 것이 뻔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니, 계속해 보거라.” 에게너 자작이 헛소리라며 더 이상 들으려 하지 않자. 사이스 백작이 나서 며 말했다. “라혼은 이제 11살이지만, 카시아는 15살입니다. 지금은 라혼의 행동 때문 에 말이 없지만 만일 라혼이 만에 하나 그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생각할 겁 니다. ‘맞아. 11살 꼬맹이가 15살 소녀를 유혹할 수 있을 리 없어. 하지만 15살 소녀가 11살 꼬맹이를…….” “그만!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단호히 부정하는 에게너 자작은 진실을 알고 있는 자신조차 납득이 되는 말 에 안색을 굳혔다. 자신의 둘째 사위이기도 한 라혼이 압력을 이기지 못하 고 그렇게 말하고 다니면 사람들은 콘라드가 말한 것처럼 믿을 것이 뻔했다 . 억측이지만 소드 마스터가 된 로카데 차이저를 잡기위해 백작가가 그렇게 일을 꾸몄다고 생각하는 사람까지 생길지 몰랐다. 그것은 신중한 아버님이 나 현명한 동생의 머리 속에서 이미 고려되고 있는 상태일 것이다. 그리고 보니 그 꼬맹이가 이런 상황까지 의도하고 일을 벌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 각까지 들 정도였다. *** 라혼은 보무도 당당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결혼식을 하고 2주 동안은 백작 성에서 머물고 있었다. 어머니와 누나들은 3일 정도 머물고 집으로 돌아갔 지만 라혼은 사이스 백작과 약간의 신경전을 하고 나서야 카시아와 함께 집 으로 올 수 있었다. “자, 다 왔다. 여기가 차이저 가의 장원이다.” “…….” 마차에서 밖으로 나온 카시아가 가장먼저 본 것은 마중 나온 차이저 가의 하인들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도련님 그리고 작은 마님. 큰 마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 다.” “그래 고마워. 우리 색시 예쁘지?” “예? 아 예, 참으로 아름다우신 분입니다.” “…….” 카시아는 나이어린 남편의 행동을 보고 혼란스러울 때가 많았다. 결혼식 날 황홀하고 꿈꾸듯 한 키스는 지금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울렁거리고 심장이 터질듯이 두근댔다. 그리고 그 무서운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눈 하나 깜 빡하지 않고 자기 할 말을 다 할 때는 정말 나이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지금 보면 영락없는 11살 꼬마에 불과하니…….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카시아는 라혼의 뜻을 거부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자!” “…….” 카시아는 라혼이 팔을 살짝 들자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는 자신이 아직까지 는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우와~! 대장 왔네.” “예쁘다. 공주님 같아.” 토라와 주노였다. 라혼은 아이들이 수줍어하며 몸을 배배꼬자 미소를 지으 며 카시아를 소개했다. “이 대장의 아내다. 예쁘지?” “응! 예뻐.” “인사해. 이쪽이 토라. 그리고 주노.” “카시아입니다.” “토, 토라예요.” “주노입니다.” 확실히 카시아의 태도는 죠슈아때와는 달랐다. 라혼은 그런 카시아에게 씩 웃어주고는 어머니와 누나들이 기다리는 거실로 들어섰다. “어서 오너라.” “어머님, 라혼 가이우스 세나데온 차이저가 신부를 데려왔습니다.” “카시아입니다.” “후후후……. 어서오너라. 차이저 가의 가족이 된 것을 환영한다.” “어서 와요.” “어휴~! 애늙은이 같으니라고 격식은 무척 따져요. 하지만 어서 와요. 진 심으로 환영합니다.” 라혼은 집안의 여자들-어머니와 누나들-에게 카시아를 맡겨놓고 자리를 피 해 주었다. 신부를 데려와 집안 여자들에게 소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 이었다. 결혼은 남편과 했지만 생활은 그 집안의 여자들과 더 많이 하기 때 문이었다. 특히나 집을 자주 비우는 기사들의 경우에는 더욱더 그랬다. 만 일 집안의 여자들이 신부를 가족으로 받아주지 않으면 여자를 버리거나 가 족과 떨어져 살아야 했다. 가문의 후계자인 장남의 경우엔 가족과 떨어져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므로 강제적으로 이혼을 해야만 했다. 어쨌든 집 안을 실질적으로 지키고 유지하는 여자들에게 새로 가족이 된 신부가 가족 내에서 그 위치를 명확하게 하고 친분을 돈독히 하는 것은 가문을 위해서라 도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카시아의 경우 이미 알만한 것은 모두 아는 사이이니 물어보고 말고 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호기심 왕성한 소녀 테이는 카시아에게 물어볼 것 이 너무 많았다. “그날은 제가 미안 했어요. 카시아 언니.” “아니요. 괜찮아요.” “근데 그날은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미처 물어보지 못했는데 제브 말로는 우리 라혼이랑 키스하다 졸도까지 했다고 들었는데 정말 키스가 황홀했어요 ?” “예? 그, 그게…….” 테이의 직접적이고 다소 노골적인 질문에 카시아는 무척 당황했다. 그러나 테이의 재촉이 계속되자 카시아는 하얀 얼굴이 자신의 탐스런 붉은 머리처 럼 붉어지며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예요? 빼지 말고 말 해봐요. 우리가 남인가? 어서요. 빨리.” “조, 좋았어요.” “졸도 할 만큼?” 그리고 재차 퍼붓는 테이의 질문에 카시아는 그저 보일 듯 말듯 고개를 끄 덕일 수밖에 없었다. “테이야. 이제 그만해.” “칫! 언니도 궁금하다고 했잖아!” 그리고 계속되는 곤란한 질문이 터지려 하자 루나가 나서서 말려주었다. 그 리고 딸들이 말하는 것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세나데나가 푸근한 미소를 지 으며 조용히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아가.” “예, 어머님.” “방을 어떻게 하기로 했느냐?” “예?” “…….” “그게, 방은 따로 썼어요.” 카시아는 어머님의 물음에 진의를 몰라 당황하다가 어머니의 차분한 미소에 무엇을 물어보는 것인지 깨닫고 공손히 대답했다. 사실 어린나이에 결혼을 한 경우 어느 정도 나이가 찰 때까지 방을 따로 쓰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러나 라혼의 경우 다소 불명예스러운 소문이 퍼져 있어 아들의 어머니조차 도 판단하기 어려웠다. 이미 관계가 진전되어 있는데 떼어놓기도 뭐하고, 아직 거기까지 가지 않았는데 일을 만들 수도 없으니 말이었다. 그리고 초가을에 들어서자 차이저 가는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길을 떠났다. 아버지의 시종하인으로써 따라나선 토라와 주노의 아버지들이 아버지 로카 데 차이저와 함께하기로 해서 토라와 주노 두 가족이 동행했다. 일행은 콘 라드 경이 이끌었는데 콘라드 경 또한 사이스 백작가의 몫으로 받은 영지로 이동하며 함께하기로 한 것이었다. 사실 프린든 점령지가 다소 안정된 이 후 가는 것이 옳지만 이는 손녀를 만나고 싶어 하고 되도록이면 가까이 두 고 싶어 하는 갤 공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차이저 영지가 위치한 땅은 갤 공에 영향력이 미치는 곳이었다. 콘라드 경의 말처럼 전쟁에 황폐화 되 고 반란군이 득실거리지는 않은 곳이었다. 본래 아버지가 갖게 될 땅은 다 른 곳이었지만 그곳은 전화가 휩쓸고 간 지역이라 갤 공이 손을 써서 아버 지가 비교적 안전한 땅을 갖게 하도록 했다고 한다. 어스파이어Aspire 공지 오타 수정해 주시는 분들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특히 신화시대님과 재치 님 정말 감사합니다. 코멘트를 읽어 보신 분을 아실 테지만 저는 오타신고가 들어오면 바로바로 수정하며 때론 문장도 다듬습니다. 책으로 나온 글들을 읽어보니 어찌나 어 색하던지 탈고작업을 거의 하지 않아서인지 문제가 많더군요. 그렇다고 탈 고 작업을 한꺼번에 몰아서 하기에 여러모로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한 것이 님들을 이용하려는 본 작가의 으흐흐흐흐흐……. 츱! 아무튼 이번 공지는 <카페광고> 입니다. 그냥 저 혼자 쓰는 카페인데 힘들 게 정리한 자료를 혼자보기 뭐 하더라고요. 그래도 멤버가 3명(-.-) 신화시대님이 코멘트 창으로 오타 교정봐주시는데 번거로운 것 같아 라혼 카페에 교정게시판을 만들어 놨습니다. 사실 저도 코멘트 창을 보면서 확인 해 가며 수정 하는 게 글자가 너무 붙어있어서 힘들었거든요.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고 그러니까, 관심 있으신 분은 한번 찾아오세요. 네 이버 카페구요. <강무의 라혼 이야기>카페입니다. http://cafe.naver.com/rahon.cafe 다소 분량이 많은 글은 유조아의 코멘트보다 이쪽게시판에 올려주세요. 가 장 관심 있게 지켜봐주신 신화시대님의 오타교정 해주신 것으로 수정하는데 생각보다 편해서……. 그리고 라혼 카페에는 글이 올라가지 않습니다. 저는 온리 유조아에만 글을 올립니다. 다른 곳에 글을 올려 봤는데 귀찮아 서리……. 조회수를 올려보려 글을 끊어 쓸까(6kb 정도로 대략 하루 3편)정도 생각해 보았는데 그렇게 하면 오타를 찾아주시는 분도 귀찮고 솔직히 나도 귀찮고 ……. 그러다 보니 20편까지(2편의 지도 빼고) 벌써 책 한권 분량이 조금 넘더군요. 그럼 공지 끝! 21회 본편 시작! ---------------------------------------------------------------------- 어스파이어Aspire -쏴아아아아아아아아………………. 봄기운이 완연한 5월초, 겨우내 얼어붙어 빙벽을 이루던 폭포는 봄이 온 것 을 반기며 시원스레 물줄기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정오의 태양이 폭포 위를 지날 때 사람의 그림자가 햇빛을 잠시 가리더니 이내 깊은 숲속의 정적을 깨트리는 폭포 아래로 몸을 던졌다. -풍덩~! “푸하~! 으으으 차거~!” 블루블랙의 푸른 기가 감도는 검은 머리에 깊고, 깊은 검은 눈동자의 청년 은 이제 막 얼음이 녹아 시리도록 차가운 물속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서도 말로만 차갑다 할뿐 물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맑고 깨끗한 무색투명한 수면 아래로 아무것도 입지 않은 전라의 모습으로 차가운 물속을 한가로이 노닐 었다. 그러다 문득……. “응? 방금 목욕을 시작했는데…….” 선이 굵어 다소 강인한 인상을 풍기는 이야기 책속에 표현된 바로 그 미남 자의 얼굴을 한 청년은 알 수없는 소릴 하면서 물 밖으로 몸을 뺐다. 그리 고 한낮의 밝은 햇볕아래 선명하게 드러난 황홀하기까지 한 청년의 나신은 군더더기 없는 몸매에 자잘하게 나뉘어 있는 부드러운 근육들은 청년이 특 별한 수련을 거쳤음을 말해주었다. 청년은 몸에 남아있는 물기를 털어내고 한쪽에 대충 벗어두었던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아름답고 완벽한 몸매위 로 꽉 끼는 바지와 셔츠가 입혀지자 청년의 인상은 또 한 번 바뀌었다. 호 리호리한 몸매의 소년으로……. “라혼!” “나 여기 있어.” 이제 16세가 된 라혼이었다. “헥헥헥, 힘들다. 라혼 그냥 집에서 수련하면 안 되니? 내가 널 찾아다니 느라 얼마나 고생이 심한 줄 알아?” “뭘? 내가 있어봐야 이 근처지…….” “여기 찾아오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알아?” 약간 억지스런 말이었다. 라혼을 찾을 사람은 많다. 죠슈아도 있고, 다른 하인들도 있었다. 굳이 자기가 직접 찾아와서 투덜댈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라혼은 그런 것을 따져 물어 테이와 말싸움 할 생각은 없었 기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갔다. “무슨 일인데, 누나가 날 찾아온 거야?” “아! 맞다. 자세한건 가면서 얘기해 줄께.” 라혼은 테이의 뒤를 따라 산 아래로 내려갔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이윽고 험한 산길이 끝나는 곳에서 말 두 마리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라혼은 자신의 말과 테이가 타고 온 말을 부르기 위해 휘파람을 불 었다. -휘익~! 라혼의 긴 휘파람 소리에 반응한 말들이 이내 식사를 중단하고 라혼과 테이 에게 다가왔다. 라혼은 테이가 탈 말의 고삐를 먼저 잡고는 말했다. “레이디 퍼스트!” “피.” 테이는 장난스럽게 말하며 자신보다 머리하나 만큼 큰 라혼의 도움을 받아 말 등 위에 몸을 실었고 라혼도 말에 올라타 말 옆구리를 살짝 차 말을 천 천히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무슨 일인데?” “갤의 할아버지가 사람을 보냈어.” “그런데?” “루나 언니랑 우리들 생일선물하고, 할아버지가 너에게 보내는 편지를 가 져왔어.” “편지라고?” 루나누나와 쌍둥이 남매의 생일은 한겨울이었다. 한겨울의 이 지방은 여행 하기에 그다지 좋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갤 공은 여행이 가능한 봄이 되면 언제나 사람을 시켜 선물을 보내주었다. “누나는 이번에 뭘 받았는데?” “파리안 시집.” “시집? 시를 모아놓은 책?” “그래.” “…….” “뭐야! 왜 말이 없는데? 혹시 나랑 안 어울리는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라혼은 묘한데서 핵심을 찔러드는 테이 말에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말을 돌렸다. “루나 누나는?” “이게 어딜 말을 돌리고 있어. 라혼, 너 이 누나보다 덩치가 커졌다고 날 우습게 아는 모양인데 나도 이제 어엿한 숙녀라고……. 파리안 시집 정도는 받을 정도의 교양도 있고. 언니가 받은 은거울은 하나도 안 부러워!” 라혼과 테이가 할아버지가 보낸 선물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쌍둥이 남매를 태운 말들은 어느새 숲길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거칠 것 없는 벌판에 나오게 되자 라혼과 테이는 말을 더욱 빠르게 몰기 시작했 다. 그렇게 10분 정도 말을 내달리자 저 멀리 영주성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 했다. 바로 소드 마스터 로카데 차이저 반 하이슬란드 백작의 성이었다. 하이슬란드, 차이저 가가 자리 잡은 땅의 이름이다. 하이슬란드는 넓이만 따지자면 사이스 백작령의 2배에 달하는 땅이었다. 물론 태반이 원시림을 유지하는 숲과 산으로 이루어진 곳이었고 사람의 수도 훨씬 적었다. 그러나 비교적 규모가 작은 조그마한 라일라 강이 흐르고 그 주위로 비교적 비옥 한 농경지가 있는 곳이기 도 했다. 북쪽으론 갤이, 동쪽으로는 시오나 왕국 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지만 시오나와 국경은 험하기 그지없는 게룽가 산맥 이 자리 잡고 있어서 사실상 막혀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하이슬란 드 남쪽과 서쪽에 걸쳐 울창한 숲이 가로 막고 있어 약간은 폐쇄적인 땅이 었다. 그러나 고대 시드그람 제국 때부터 있어왔던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길 이 있는데, 바로 그란과 아인윌을 연결하는 가도였다. 하이슬란드가 제국령 이 된 순간부터 상인들이 그 길을 이용하게 됨으로써 하이슬란드는 더 이상 시골오지의 폐쇄된 지방이 아니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사이스 백작가의 도 움을 받아 이번에 새로 서쪽 숲을 가로지르는 길을 닦아 1년 전부터 상인들 의 왕래가 더욱 빈번해졌다. 그래서 차이저가 소유의 여관과 시장이 새로 들어선 영주성 아래의 헤사르 마을은 날이 갈수록 번창하고 있었다. 그러나 꿀이 흐르는 곳엔 벌레가 끼어들기 마련이어서 달갑지 않은 손님도 하이슬 란드 남서부를 뒤덮은 벨리아 숲에 출몰하기 시작했다. 바로 도적들이었다. 아직은 그 규모가 작아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대상은 건들지 못하고 소수 의 여행자들만 피해를 입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그것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 고 있었다. “아버지.” “어서 오너라. 나이트 제튼 경이시다.” 성에 도착한 라혼이 다목적으로 사용되는 중앙홀로 들어서자 그곳엔 금발에 크고 푸른 눈이 인상적인 건장한 사내가 아버지와 함께 있었다. “라혼 가이우스 세나데온 차이저입니다.” “네란 세나데온 제튼이다. 과연 듣던 대로 멋지구나! 그런데 아직 성년식 을 치루지 않았나?” “아직 그란에서 작위 승인서가 오지 않았습니다.” “하하하하, 고지식한 것은 우리 공작님을 꼭 닮았군.” 소드 마스터인 아버지는 어디를 가든 백작에 준하는 대우와 대접을 받지만 본래는 준남작이어야 했다. 그리고 3대 이상 무사히 가문의 영지를 유지하 고 수호의 의무를 다한 후에야 정식으로 남작가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 러나 갤공은 손녀를 위해, 또 증손자인 라혼을 위해 신성 시드그람 제국 황 제로 하여금 이례적으로 아버지에게 백작의 작위를 수여하게 했다. 그로써 차이저 가는 당당한 신성 시드그람 제국의 귀족으로 백작가문이 되었다. 그 리고 백작가인 차이저 가문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라혼은 관례에 따라 성인 식을 무사히 마치면 자동적으로 자작이 되었다. 성인식은 16세 생일에 치르 는 것이므로 라혼은 지금 준자작의 상태에 있었다. 즉, 스스로 자작이라고 소개해도 아무런 하자가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신성 시드그람 제국 황제가 보내는 작위를 인정하는 친서가 도착하면 그때부터 신성 시드그람 제국의 정식귀족으로 인정받는 자작이 되는 것이었다. “어쨌든, 이것은 전하께서 네게 주는 선물이다.” 제튼 경이 준 것은 쿠쿠리(Kukri) 단도였다. 약25센티 길이의 날 부분은 머 리가 크고, 완만하게 휘어진 내측에 예리한 날이 서있어 다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무기다. 쿠쿠리는 나무를 하거나 짐승의 머리를 잘라 낼 수 있는 등 여러모로 훌륭한 도구였다. 제튼 경이 내민 쿠쿠리는 용도가 다양하다는 것을 증명하듯 그 흔한 장식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는 투박한 모양을 하 고 있었다. 라혼은 그 쿠쿠리가 무척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질 좋은 철로 제련이 되어 있어 보기보단 상당한 값어치가 나갈 것이었다. “우와! 감사합니다.” “마음에 드나?” “물론입니다, 제튼 경. 여기저기 효용성이 높은 훌륭한 도구인데 막 쓰기 에 너무 아까울 정도로 잘 만들어 졌네요.” 제튼 경은 드워프 장인의 손길이 스친 물건임에도 겉보기엔 거무튀튀하고 투박하기 그지없어 과연 갤 공의 증손자가 그것을 보고 실망하지 않을까 하 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실망하지 않도록 미리 쿠쿠리에 대한 효용과 갤 공 의 뜻을 생각해 두었다. 그러나 쿠쿠리를 받아들고 좋아하는 소년의 모습에 서 자신이 쓸데없는 걱정을 했음을 알았다. 그러나 준비해둔 말이 아까워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쿠쿠리는 본래 사냥용 무기지만 격투할 때도 사용한다. 칼날이 앞으로 구 부러져 있어 상대로 하여금 위치에 따라 길이가 달라져 보이게 하지.” “과연 그렇군요.” 라혼은 제튼 경의 말에 쿠쿠리를 이리저리 살펴보기에 바빴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가족에게 관심을 받는 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특히 자식 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흐뭇해 하는 부모님의 모습은 라혼에게 무엇과 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갤 공 전하가 네게 주는 편지다.” 라혼은 제튼 경이 내민 붉은 밀랍으로 봉인된 두루마리 편지를 건네 받아 그 자리에서 조심스레 봉인을 뜯고 내용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라혼 가이우스 세나데온 차이저에게……. 네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네 이름을 짓느라 고심 했던 때가 엊그제 같 은 데 벌써 성년이구나. 이제 네 어머니와 너, 그리고 네 누나들을 보고 싶 은 마음을 참을 수가 없구나. 트라얀에게 네 어미의 마음 속 응어리가 풀렸 음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라혼아! 보고 싶구나. 그러나 넌 나를 만나는 것보다 네 미래에 더욱 중요 한 일이 있단다. 나는 네가 그란 유벤트 기사단에 입단해 주었으면 한다. 3 년. 단 3년의 시간 동안만 네가 그곳에 있기를 바란다. 이것은 이 할아버지 에게도, 너의 가문에도, 그리고 네게도 앞으로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 -라마르 반트 세나데온 콰이스 폰 갤> 갤 공의 친서는 그의 성품을 말해 주듯 참으로 간략한 내용만을 담고 있었 다. “아버지, 할아버지가 저보고 그란 유벤트 기사단에 입단하라는 데요?” “그러냐?” “알고 계셨어요?” “그래 오래전부터 그런 이야기가 있긴 했다. 편지에는 그 이야기뿐이야?” “예, 여기.” 로카데는 라혼이 건네준 갤 공의 친필서한을 받아 내용을 확인하고, 쓴 웃 음을 지었다. 라혼의 말대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제외하면 그냥 유벤트 기사단에 입단하라는 말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로카데는 편지를 다시 말며 아들에게 물었다. “그래 너는 어찌할 생각이냐?” “저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데요.” “그러냐?” 그리고 라혼은 제튼 경에게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그런 두 부자 의 대화에 제튼은 무척 당황했다. 신성 시드그람 제국은 물론 전 시드그람 대륙에도 이름 높은 아이언 듀크의 간곡한 친서를 받고도 그것을 그저 가벼 운 종이쪼가리 취급하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적으로는 증조할아버지의 안부편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국1인자 프 리켑스의 친필서한이었다. “아, 아니, 하이슬란드 백작님! 이것은 갤 공 전하의 뜻입니다.” “알고 있소. 하지만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아들의 뜻을 꺾지는 못하오.” “무슨……?”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되었소. 나는 소드 마스터요. 소드 마스터가 된 순 간부터 나는 아들을 가르칠 생각에 흥분을 했소. 그러나 아들은 나의 가르 침을 거부했소. 내가 그런 아들을 어찌했을 것 같소.” “…….” “억지로라도 끌어다 앉혀 놓고 가르치려 했소. 그러나 나는 결국 아들의 고집을 꺾지 못했소.” “그러나 이것은 고집을 꺾고, 꺾지 못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헉!” 제튼은 말하다말고 갑자기 밀려오는 유형의 살기에 한발을 뒤로 빼고 허리 에 매어져 있는 롱소드의 그립을 꽉 움켜잡았다. 그러나 제튼은 바로 눈앞 에서 천천히 롱소드를 뽑아 자신을 겨누고 로카데 차이저의 검날이 목젖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와도 식은땀을 흘릴 뿐 결국 롱소드를 뽑아들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살기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헉헉헉헉…….” “킬링 오러(Killing aura)라는 것이오. 라혼은 소드 마스터의 킬링 오러를 정면으로 받으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소.” 제튼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겉보기에 보통 기사와 다를 바 없는 로카데 차 이저가 소드 마스터라는 사실을 새삼 절감했다. 제튼은 소드 마스터 정도는 오러 블레이드만 주의한다면 철가면 기사단의 실력 있는 기사 서넛이면 충 분히 상대할 수 있는 존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경험은 그것이 얼 마나 허황된 생각이었는지 증명해 주었다. 바로 정면에서 느릿하게 뻗어오 는 검을 보고서도 아무것도,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저 검 자루를 꽉 움켜잡고 부들부들 떠는 것 외엔……. ‘이것이 소드 마스터의 힘? 이건 차원이 달라…….’ 익스퍼트(expert)급 기사가 소드 마스터를 상대하는 것은 이제 막 진검을 잡은 애송이가 경험 많은 기사에게 덤비는 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 았다. “하지만 라혼은 완전한 거부는 하지 않았소. 그러니 잘 설득해 보시오. 못 말리는 고집쟁이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꽉 막힌 녀석은 아니니…….” “예.” 그리고 뜨거운 맛을 본 나이트 제튼의 태도는 좀 전보다 더 조심스러워져 있었다. *** -퍽! 라혼은 영주성의 수련장에서 증조할아버지에게 선물 받은 쿠쿠리를 던지는 연습을 했다. 수련장 양쪽에 표적을 걸어 놓고 양쪽을 왔다 갔다 하며 표적 에 쿠쿠리를 박아 넣었다. “멋지네.” “한번 볼래?” 라혼은 수련장을 들어서는 2미터 장신의 사내에게 쿠쿠리를 힘껏 던졌다. -탁! 그러나 사내는 자신을 노리고 날아오는 쿠쿠리를 당황하지 않고 그대로 잡 아채서 이리저리 살폈다. “대장, 이거는 요새 벨리아 숲에 출몰한다는 도적들 잡기에 딱 좋겠는데? ” “아니 방금 발견한 건데 이리 줘봐!” 20세의 죠슈아는 주군인 라혼이 그랬던 것처럼 쿠쿠리를 그에게 힘껏 던졌 다. 그리고는 살짝 놀랐다. “어?” 칼날이 앞으로 꺾인 쿠쿠리는 직선이 아닌 약간 곡선을 그리며 날아갔던 것 이다. 그러나 라혼은 죠슈아가 잠시나마 당황한 것이 억울할 정도로 너무도 간단하게 쿠쿠리를 잡아 그대로 수련장 반대편에 있는 표적에 던졌다. 그 러자 쿠쿠리는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가 표적에 정확히 틀어박혔다. -퍽! “어때? 하다보니까 발견한 건데 손목의 스냅하고 던지는 각도에 따라 날아 가는 궤도가 달라지더라고.” “재미는 있지만 그다지 쓸모 있게 보이지는 않는데?” “무슨 말을! 연구하는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지.” “누가 마스터 아들이 아니랄까봐 마스터랑 똑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쯧쯧쯧, 스스로 연구하고 깨달아야지 진정한 자기 거라고……. 머리로 아 무리 알고 있고 예상을 해도 언제나 예상을 뛰어 넘는 무언가는 있는 법.” 라혼은 죠슈아의 장난 섞인 존대에 세상에 다시없는 현자를 흉내 내면서 말 했다. 아버지는 라혼이 수업을 거부하자 대신 죠슈아를 가르쳤다. 종자였던 트라 킨이 그의 아버지인 콘라드 남작의 부름을 받고 그가 영주대리로 있는 사이 스 가의 영지로 간 이후엔 죠슈아에게 차이저라는 성을 주고 하이슬란드 백 작의 이름으로 기사작위를 수여했다. 물론 죠슈아의 충성서약의 상대는 라 혼이었다. 소드 마스터인 로카데 차이저 반 하이슬란드 백작에게 충성서약을 하려는 기사는 많았다. 그러나 아직은 본래 사이스 가의 기사였다가 아버지를 따르 게 된 3명의 기사들을 건사하는데도 버거운 상태였고, 거기다 서쪽으로 길 을 닦는 토목공사를 추진하느라 자금이 그다지 넉넉하지 않아 찾아오는 기 사들을 그냥 돌려보내고 있었다.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는 존재에 혹해 찾아 오는 기사라 하지만 가문의 기사가 된 이상 그에 합당한 ‘충성의 대가’를 지불해야 했기에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앞으로 영지의 세금 수입이 안정되고 헤사르 마을에 설치한 시장과 여관이 번창하면 다소 여유 가 생길 것이고 기사 또한 늘릴 수 있을 것이다. “그보다 마을로 내려가서 알아볼게 있어. 같이 갈래?” “마을에? 아! 그렇군. 곧 봄 축제가 열리지.” “그것도 있고.” 라혼은 쿠쿠리를 수련장 한쪽에 놔두고는 죠슈아와 함께 성을 나섰다. 그리 고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라혼을 알아본 사람들이 인사를 건네 왔다. “안녕하세요. 도련님.” “수고.” 라혼은 사람들이 건네 오는 인사를 일일이 받아주며 시장으로 들어섰다. 말 이 시장이지 근처에서 재배한 야채나 게룽가 산에서 발원한 라일라 강에서 잡은 생선 따위를 파는 정도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한적한 시골 마을인 헤사르 마을에 적잖은 활기를 주고 있었다. “어머나……. 라혼 도련님.” “사비나 더 예뻐졌는데?” “몰라요. 절 놀리시다니……. 벌이예요.” 시장에서 이번에 새로 과일가게를 연 사비나는 시장 거리를 걸어가던 라혼 을 스스럼없이 부르며 아는 체했다. 그리고 라혼의 칭찬에 볼에 홍조를 띠 며 설탕에 절여 놓은 산딸기가 담긴 병을 던졌다. 라혼은 사비나가 던진 유 리병을 받고는 말했다. “맛있겠다. 그런데 이건 상이지 벌이 아니잖아?” “이 사비나가 사랑을 가득 담아, 직접 만든 거예요.” “고마워. 맛있게 먹을게…….” 그렇게 등을 돌리고 가던 길을 가려던 라혼을 사비나가 불러 세웠다. “어머? 그냥가면 어떻게 해요. 값은 치루고 가셔야지요?” “에? 그냥 주는 거 아니었어?” “무슨 말씀. 저는 장사꾼이라고요.” “큭! 또, 당했다.” 라혼은 짐짓 당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에텔 스페이스에서 은화 1실버를 꺼내 사비나에게 던져 주며 말했다. “이거 포함해서 그거만큼 사비나가 알아서 챙겨서 성으로 보내줘.” “언제나 감사합니다. 손님!” 라혼은 언제나 활기찬 처녀 사비나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가던 길을 계속 갔 다. 그리고 라혼은 생긴 지 이제 3년 정도 된 헤사르 마을의 유일한 여관으 로 들어섰다. 그러자 여관을 맡아 관리하는 아블이 반갑게 맞이했다. “아이구, 라혼 자작님 어서 오십시오.” “자!” “이건?” “사비나가 만든 설탕에 절인 산딸기.” “아이고, 그 계집애가 또 도련님에게 물건을 강매했군요. 몹쓸 녀석 같으 니라고.” 차이저 가 소유의 여관을 관리하는 아블은 라혼이 내민 것을 받아들고는 밖 을 내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됐어. 그보다 손님은 있나?” “예, 날이 풀리자 손님이 끓이지 않을 정도는 됩니다.” “그래? 혹시 그란에서 온 손님은?” “그란에서요? 지금 여관에 딱 한분이 머무시는데 그란에서 온 건지는 모르 겠고……. 튜트를 가진 손님인데 아마도 떠돌이 악사 같았습니다.” “떠돌이 악사? 음유시인인가?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는데?” “잠시 외출하셨습니다.” 라혼은 아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아블에게 물었다. “그보다 그란에 무슨 일이 있는지 주워들은 것 없어?” “예? 그렇게 물으시면……. 아! 콘레로3세 황제께서 후계자를 확정하는 문 제가 있었는데 그 얘기를 들은 지가 지난 가을이었으니 지금쯤 후계자가 결 정되었을 겁니다.” “그래?” 지금까지 황제가 정한 후계자가 순조롭게 황제가 된 경우는 드물었다. 힘없 는 황제가 내세우는 후계자란 아예 눈가림용이거나 정식 후계자여도 제국 귀족들의 이해가 상충해 전혀 엉뚱한 이가 제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니 황제가 후계자를 정하는 중요한 일은 그동안 역사가 그렇게 말해주었듯이 이젠 사람들의 관심조차 끌지 못했다. 라혼은 아블이 챙겨주는 차를 마시며 여관의 유일한 손님을 기다렸다. 그러 나 그는 기다린 보람도 없이 그란이 아닌 시오나 왕국에서 온 떠돌이였다. “역시 하이슬란드는 아직까지는 시골이로군.” 라혼은 여관을 나서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스파이어Aspire *** 라혼이 별다른 수확도 없이 집으로 돌아오자 약간 기세가 꺾인 듯한 제튼 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를 기다리셨다구요.” “그란으로 가는 문제를 다시 생각해 줄 수 없겠나?” “글쎄요…….” “…….” “아무런 이유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일방적인 제안은 그다지 내키지 않아 서 말이죠. 설혹 그것이 할아버지의 뜻일지라도…….” 제튼은 아직 어리게만 보이는 라혼의 말에 은은한 충격을 받았다. 이 아이 는 멋도 모르고 그저 치기어린 투정으로 갤 공의 제안을 거부한 것이 아님 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라혼은 갤 공의 친서의 의미를 명확하게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이유를 안다면 그란으로 가겠나?” “납득이 된다면…….” “후, 좋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지만 내가 널 인정한 다는 의미에서 말해주마. 전하께서는 널 후계자 후보로 생각하고 계시다.” “…….” 제튼은 그렇게 말하며 라혼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소년의 표정은 ‘그래서?’라고 묻는 것 같았다. 라혼의 그런 심드렁한 반응에 스 스로 엄청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믿는 나이트 제튼이 당황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유벤트 기사단에 입단해 인맥을 쌓을 필요가 있는 거다.” “그게 다예요?” “……!” 라혼은 증조할아버지인 갤 공이 자신을 후계자로 하든 말든 애당초 관심이 없었다. 라혼의 입장에서 할아버지의 유산은 그다지 탐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라혼의 입장에선 절대사양인 것이었다. 권력이란 사람들이 힘이 있 다고 믿는 자에게 모이기 마련이다. 사람들에게 자신이 힘이 있다고 믿게 하는 것은 간단하다. 힘을 보여주면 된다. 라혼에게 그것만큼 쉬운 일이 또 없었다. 그런 라혼에게 증조할아버지인 갤 공의 세력은 그냥 짐이었다. 될 수 있으면 짊어지는 것을 사양하고픈…….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제튼 경은 무척 당황스러웠다. 예상했던, 아 니 그저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반응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 소년에게 일말의 경외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절 생각해 주시는 할아버지의 마음만은 고맙게 받죠.” “아, 아니…….” “하지만 콰이스 가에서 해결할 문제를 차이저 가에게 지우지는 말았으면 합니다.” “이건 콰이스 가나, 차이저 가의 문제가 아니다. 세나데온 일족의 문제다. ” 라혼의 단정적인 말에 제튼 경은 신중한 표정을 지으며 무거운 어조로 말했 다. “전하의 아드님이신 트라얀 공이 다음 갤 공이 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 다. 그러나 트라얀 경에게는 자손이 없다.” “…….” “지금 갤 공의 연세는 80세를 훌쩍 넘었고, 트라얀 공 또한 60세에 가깝다 . 그런데 그 뒤를 받혀줄 후계자가 없다.” “아까 저는 그냥 후보 중 하나라면 서요?” “확실히 그랬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갤 공의 후계자는 오직 너뿐이다. ” 라혼은 제튼 경의 기세에서 방금 뭔가를 결심한 듯한 기운을 발견했다. 그 리고는 내심 엉뚱한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내게 뭔가 있어 보인다. 그 말이지……. 놀라는 척이라도 할 걸 그랬나?’ 세상에서 가장 피곤한 사람 중 하나가 누구를 도와주겠다며 당사자는 전혀 원하지 않는 일을 꾸미는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일을 만드는 사람 말이다. *** 라혼은 답변을 유보한 채 제튼 경을 위한 만찬이 끝난 후 카시아와 함께 어 두워진 회랑을 지나 방으로 돌아왔다. “라혼, 그것이 사실이에요?” “음? 뭘?” 방으로 돌아온 카시아는 자신의 드레스를 벗는 것을 도와주는 자상한 남편 에게 물었다. “갤 공의 후계자 후보가 되었다는 거 말이에요.” “그게 벌써 우리 마나님 귀에까지 들어갔나?” “아이, 장난치지 말고……. 어머.” 라혼은 카시아가 만찬회에서 입었던 초록빛 드레스를 한쪽에 치우고 카시아 를 등 쪽에서 껴안았다. 그리고 새하얀 목덜미에 키스하고는 그대로 안아들 어 푹신해 보이는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부드럽게 애무를 시작했다. “그만, 그만해요.” 그러나 카시아는 라혼의 부드럽고 능숙한 애무를 받으며 황홀해 하면서도 남편을 밀어냈다. 그러자 라혼은 애무를 멈추고 몸을 일으켜 세워 침대에 걸터앉았다. “왜, 그래?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하지 말고 솔직히 말해요. 어떻게 할 생각인지.” “뭘?” “갤 공의 후계자가 되는 문제요.” “그거는 일단 거절이야.” “…….” 카시아는 철없는 남편의 말에 어이없어하면서 다그치듯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갤 공의 후계자로 거론되는 사람들 중 라혼이 가장 정통성 있는 후계자잖아요. 아버님이 소드 마스터이시고, 내 친정 쪽에서도 발 벗고 나서줄텐데…….” “그거야. 그렇지만……. 그 얘긴 그만하고 자자. 내가 기분 좋게 해줄게. ” “아니요. 그전에 확실히 해두어야겠어요.” “거절이라고 말했잖아!” “안돼요. 받아들여야 해요.” “…….” 라혼은 카시아의 강경한 태도에 입맛을 다시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 며 말했다. “갤은 여러 가지로 피곤한 문제가 많은 땅이라고, 빌며 사정해도 모자랄 판에 멋대로 후계자 후보라니……. 그런 골치 아픈 걸 대단한 것이라도 된 것인 양 후계자 후보라니 나는 사양이야. 갤 공이 되는 것은 엄청난 짐일 뿐이야. 나는 그런 짐 덩어리를 짊어질 생각이 없어. 그리고 나 좀 나갔다 올께 내일 아침에 보자구.” “라혼! 이 밤중에 어디를 가려는 거예요?” 카시아는 황급히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따라 나섰지만 방문 밖으로 나선 라 혼의 모습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에이! 요, 꼬맹이가 또 어딜 간 거야. 조금 삐져도 어디론가 사라지니… …. 마을에 정부라도 두고 있는 거 아냐? 혹시 가끔 성으로 잼과 마멀레이 드를 가져다주는 그 계집애가……. 설마!’ 카시아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는 뭔가 결심한 듯 방으로 들어가 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침대 머리맡의 끈을 당겨 하녀를 불렀다. 이 끈은 하녀방 의 종과 연결되어 있는 끈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작은 마님.” “그린데 경을 불러라.” “예?” “그린데 경에게 내 오늘 갈 곳이 있다고 전해.” 카시아는 그 누구와도 남편을 공유할 생각이 없었다. 결혼식 날 황홀하기 이를 데 없는 키스는 아직도 기억이 생생했다. 그리고 그 후 3년을 기다려 남편과 방을 함께 쓰게 되었다. 라혼은 그때 생각했던 것보다 더 훌륭하게 자라주었다. 언제나 부드럽고 능숙하기 그지없는 애무를 받을 때마다 남편 이 의심스러웠다. 비록 경험이 없는 카시아였지만 라혼의 애무는 14살 소년 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라혼은 언제나 남편으로써의 의무 를 다해주었고, 보고 있으면 심장이 터져버릴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주었으니까. 하지만 그럴수록 카시아는 남편을 독점하고 싶었다. 어머니에 게도, 그의 누나들에게도 이 세상 어떤 여자에게도 남편을 뺏길 수는 없었 다. 절대로……. “절 찾으셨다고요?” “밤늦게 죄송해요. 그린데 경, 제가 어디를 좀 갈 곳이 있어서 그러니 같 이 가주시겠어요?” “물론입니다.” 카시아는 하녀와 경비병 둘을 데리고 성 밖으로 나섰다. 헤사르 마을로 들 어선 카시아는 굳게 닫혀있는 시장거리의 상점가로 들어서서 그 계집애가 운영한다는 가게를 찾았다. 그리고 카시아의 코끝에 향기롭고 달콤한 냄새 가 나는 가게가 보였다. “부숴라!” “예?” “내말 안 들리느냐 부수란 말이다.” “예!” 보초를 서다가 작은 마님을 따라 나선 영주성의 경비병인 조는 그녀의 뜻밖 의 명령에 어리둥절했다. 이곳은 자신도 잘 아는 곳이었다. 마을 처녀인 사 비나의 과일가게였던 것이다. 영문을 알 수는 없지만 명령은 명령. 조는 손 에 들고 있는 도끼 창을 힘껏 휘둘러 사비나의 가게 문을 부쉈다. -쾅! 쾅! 콰삭! 그리고 문이 부서지며 집이 흔들렸고 한쪽 선반에 진열되어 있던 쨈과 마멀 레이드들이 담긴 유리병이 바닥에 떨어져 깨져나갔다. 카시아는 달짝지근한 향기가 확 퍼진 가게 안으로 들어가 방문을 대신한 천 쪼가리를 확 잡아 제쳤다. 그곳엔 어둠속에서 두려움에 떠는 소녀가 있었는데 카시아는 그녀 만 홀로 있는 것을 확인하고 눈살을 찌푸리며 날카롭게 물었다. “라혼은 어디에 있느냐?” “…….” 그러나 잠자리에 들어있다 뭔가 부서지는 소리에 잠에서 깬 사비나는 두려 움까지 겹쳐 지금 상황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경비병 당장 이년을 끌어내!” “예.” “사, 살려주세요.” 사비나는 거친 사내의 손길에 끌려나와 잠옷차림으로 부들부들 떨면서 무조 건 빌었다. 지금의 상황에서 사비나가 이성적인 생각을 하기엔 두려움이란 괴물이 너무 컸다. “라혼은 어디로 갔지?” “모, 몰라요. 살려주세요.” -짝~! -끼야~! 카시아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분명한 그 계집애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갈기 고 다시 다그쳐 물었다. “바른대로 말해. 방금까지 라혼이랑 같이 있었잖아.” “모, 몰라요. 정말이에요.” “이년이 끝까지…….” “카시아!” 지금까지 영문을 모르고 카시아의 행동을 지켜보던 그린데 경은 지금에서야 전후사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재차 올라온 카시아의 손을 잡고 그 녀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리고는 멍하게 서있는 경비병에게 명령했다. “그 여자를 묶어, 성으로 데려간다.” “예.” “카시아, 여기서 추궁해보야 소용없습니다. 일단 성으로 돌아갑시다.” 카시아는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이 지금 무슨 추태를 부렸는지 깨닫고 멍하 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밤중의 소란에 마을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나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 라일라 강의 발원지인 게룽가 산의 폭포에서 시리도록 차가운 물에 몸을 담 그고 당분간 갤 공의 뜻에 따라야 할까, 말까를 고민하고 이내 생각을 정리 한 라혼은 하늘이 파래지며 새벽이 밝아 올 무렵 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잠이 들어있을 아내가 깨지 않게 조심조심 방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이제 오시는 건가요?” “어? 깨어있었네?” “…….” “울었어?” 라혼은 눈두덩이 부어있고 약간 충혈기가 보이는 카시아를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그러나 카시아는 대답대신 원망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며 가시 돋친 말을 쏟아냈다. “그년이 그렇게 좋던가요?” “……?” “그래서 밤마다 그년을 찾아간 건가요?”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보니 그년뿐만 아니었군요. 또 누구누구가 있나요.” 라혼은 카시아에게서 이상함을 느꼈다. 카시아가 가지고 있는 생명의 기운 이 본래의 빛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하룻밤 사이에 그녀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라혼은 그러한 기척을 느끼고는 카시아의 눈동자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라혼은 그녀의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 을 확인했다. “카시아!” “이거 놔! 놓으란 말이야!” 라혼은 아내의 이상 징후에 긴장하며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는 와락 껴안았 다. 나이는 4살이나 위인 그녀였지만 키는 라혼이 훨씬 컸다. 그런 라혼이 카시아를 품에 안자 그녀의 머리는 가슴에 파묻혔다. 그러나 카시아는 그런 라혼을 거부했지만 끝내 놓아주지 않자 그의 어깨를 물고 늘어졌다. “카시아…….” 라혼은 카시아의 너무나 거센 반항에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러자 카시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라혼을 밀치고 물러나 발작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방안에 비치된 물건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비명소리에 하인들이 몰려 왔고, 얼마 후엔 어제 밤 카시아를 수행하던 나이트 그린데도 나타났다. “라혼, 이게 어찌된 일인가?” “저도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아침에 돌아와 보니 카시아의 태도가 완전히 돌변해서…….” “어제 밤에 어디서 무엇을 했나?” “그야, 폭포에서 목욕을……. 설마? 뭐 아는 것이라도 있는 겁니까?” “음. 보여줄 것이 있으니 따라와 보게.” 그리고 라혼은 그린데 경의 뒤를 따라 지금은 그냥 창고로 사용하는 영주성 의 감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라혼은 그곳에서 마을처녀 사비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사비나?” “라혼 도련님…….” -덥석! “사비나!” 사비나는 다리를 오므린 채 고개를 무릎에 묻고 있다가 라혼의 모습을 확인 하고는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라혼은 기절한 사비나의 상태를 확인하며 그 린데 경에게 물었다. “왜? 사비나를 여기에 가둬놓은 겁니까?” “그건 나도 묻고 싶은 말이야. 어젯밤 카시아가 성을 나서더니 그 여자의 가게를 부수고 그녀를 밖으로 끌어내 자네 행방을 추궁하더군.” “……!” “그런데 자네 정말 그 여자와 아무런 관계없나?” 라혼은 그린데 경의 물음에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있는 사비나를 조심스럽게 안아들며 되물었다. “의심스러운 겁니까?” “미안하네.” 그린데 경은 라혼의 반문에 사과의 말을 했다. 카시아는 라혼이 안아들고 밖으로 나가는 처녀를 그의 정부로 의심, 아니 확신하는 것 같았지만 그린 데 경이 보기엔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사비나를 안아들고 감옥 밖으로 나온 라혼은 영주성의 손님방으로 가서 침 대에 그녀를 가만히 눕혀놓았다. 아버지의 명성 때문에 방문하는 손님들이 항상 끊이지 않아 언제든 사용할 수 있게 한두 개 정도의 손님방은 깨끗하 게 치워져 있었다. “누구냐? 그 여잔?” 라혼이 사비나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까지 덮어 줄때 테이가 찾아와 물었다. “마을에서 과일 파는 사비나.” “그건 나도 알아. 그런데 왜 니가 그 여자를 그렇게 조심스럽게 다루는 거 냐구?” “무슨 소리야? 누나가 기회가 될 때마다 그랬잖아. 여자는 델리케이트하니 까 조심스럽게 다루라며?” “누가 아무 여자한테나 그러라고 했니? 그리고 하녀들이 수군거리는 소릴 들었는데 그 여자 네 애인이라며?” “이제 없는 이야기 만들면서 놀 나이는 지나지 않았어?” “이게 이젠 컸다고 누날 놀려?” “그래 봐야 쌍둥이지…….” 라혼의 반항에 테이는 미간을 찡그리며 뭐라고 쏘아붙이려다 말았다. 테이 가 보기에도 아닌 밤중에 사비나를 끌고 와 가둔 카시아의 상태가 정상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가장 혼란스러울 사람은 다름 아닌 라혼 일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도련님.” “아! 잘 왔어. 수아가 사비나를 좀 돌봐줘.” “예, 그보다 백작님이 찾으십니다.” “알았어. 그럼 부탁해.” “걱정 말고 맡겨두세요.” 라혼은 수아에게 사비나를 부탁하고 테이와 함께 거실로 향했다. 그곳에 소 드 마스터 특유의 아버지의 정제된 기운과 어머니, 그리고 카시아의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동생아!” “왜?” “아버지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가는 거니?” “거실에 있겠지…….”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몰라! 거기 없으면 집무실로 가보지 뭐.” 그러나 아버지는 거실에 있었다. “어서오너라.” “아버지.” “테이야. 미안하지만 자리 좀 비켜주겠니?” “예, 엄마!” 테이가 거실 밖으로 나가는 것을 확인한 세나는 아들에게 물었다. “라혼.” “…….” “카시아의 말로는 네가 정부를 두고 있다고 하던데 사실이냐?” “아직까지는 없었습니다.” “무슨 말이냐?” 로카데는 아들의 말에 침중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러나 라혼의 입에선 로카데는 물론 세나데나까지 당황하게 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아버님 저는 카시아와 이혼하겠습니다.” “……!”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던 카시아는 라혼의 이혼선언에 놀라 벌어진 입을 다 물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거기서 왜 이혼이란 참담하기 그지없는 말이 나와?” “제겐 정부 따위는 없습니다. 설혹 카시아가 잡아온 그녀가 정부였다고 하 더라도 어젯밤 카시아가 한 일은 절대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아버님이 허 락하시던 허락하지 않던 저는 지금 이 순간부터 카시아를 아내로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이놈!” “아버님, 그리고 전 지금 그란으로 떠나겠습니다.” “…….” 로카데는 아들이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임을 알았다. 자세한 앞뒤 사정은 모르지만 아들이 한 말은 사실임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혼의 이유 또한 타당했다. 질투에 눈이 멀어 앞뒤분간 못하고 패악을 떠는 것은 평민 여자 라면 어떨지 모르나 백작가의 여자가 그런다는 것은 확실히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이혼까지 연결된다는 것은 너무 무리한 처사가 아닐 수 없 었다. “라혼, 왜 그러느냐? 카시아에게 잘못이 있다는 것은 알겠다. 그러나 그것 이 이혼의 이유가 될 만큼 큰일은 아니지 않느냐?” “어머니, 저는 절 믿지 못하는 자를 곁에 두고 싶지 않습니다. 특히 아내 된 자라면 더더욱.” *** 라혼은 그길로 성인식을 겸한 16세 생일에 받은 스프링이 보우(Springy bow )와 롱소드 한 자루만 챙겨들고 누나들에게 작별인사도 하지 않은 채 집을 떠났다. 라혼은 카시아가 그렇게 된 것은 자신의 책임이 컸다는 것은 알았다. 카시 아와 의견대립이 벌어지면 라혼은 언제나 몸을 피해 밖에서 하룻밤을 보내 곤 했다. 그리고 가끔은 잠을 자고 싶지 않아 침대를 빠져나와 성의 지붕꼭 대기에 올라 대자연을 관조하며 명상으로 시간을 보낸 적도 많았다. 어찌 보면 그런 것들이 카시아가 의심을 품을 수 있게 한 정황 증거가 되었을 것 이었다. 충분히 납득이 되고 또 이해도 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라혼은 자 신이 그러는 이유를 카시아에게 알려줄 수 없었다. 아내이지만 모든 것을 알려 주기에 라혼의 비밀은 너무 크고 무거웠다. 처음부터 정략결혼 따위는 하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그것보다 카시아는 라 혼과 맞지 않았다. 그녀는 라혼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다. 그러나 라 혼은 어떤 존재에게 영향을 받아 생각을 바꾸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라혼이 카시아를 완벽하게 지배하려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카시아의 영혼에 상처가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라혼이 보기에 카 시아의 정신은 온전치 못했다. “차라리 병이라면 죽는 그 순간까지 곁에 있어줄 수 있는데. 질투에 미쳐 버리다니…….” 가슴 한쪽이 아려오고 눈에는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아마도 라혼은 자신 이 카시아를 사랑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막 시 작되려는 사랑이었을 것이다. 그랬었기에 자신을 믿지 못하는 그녀가 싫어 졌는지 모른다. 그러니 이별을 통고 한 자신이 이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라혼은 불쌍한 카시아에 대한 상념을 지우며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했다. 라혼을 태운 질 좋은 명마는 4년 전 대대적인 보수를 한 가도를 바람같이 내달렸다. 그란이 있는 남쪽으로……. 어스파이어Aspire *** 라혼은 하루를 꼬박 말을 달려 벨리아 숲 입구에 있는 여관에 도착했다. 아 침부터 그 다음날 새벽까지 쉬지 않고 내달린 말은 기진맥진하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라혼의 말은 3년 전 갤 공에게 생일선물로 받은 노들랜드산 우 르고종 명마로 그 값어치는 하나의 성채가격과 맞먹었다. 그러나 아무리 비 싸고 또 좋은 말이었지만 하루를 꼬박 쉬지 않고 달리는 일은 무리였다. “그란으로 가는 전령이신가 보죠? 손님.” 여행자치고 너무도 간단한 라혼의 차림새를 본 여관의 주인은 그렇게 물으 며 다가왔다. 라혼은 지금 모자가 달린 두툼한 망토와 허리에 롱소드만 걸 려있을 뿐 여행을 하기엔 차림새가 너무 단출했다. “아닙니다.” “그런가요? 이 근처 분은 아니신 것 같은데? 손님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헤사르에서 왔습니다.” “아! 혹시 백작님의 기사이십니까?” “…….” 말은 비싼 짐승이었다. 말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신분임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주인은 라혼이 하이슬란드 영주의 성이 있는 곳인 헤사 르에서 왔다고 밝히자 그것을 생각하고 물어왔다. 라혼은 그런 주인의 물음 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바에 앉아 차를 주문했다. 차가 나올 때쯤 상인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상인들을 호위하는 용병들로 보 이는 사내들이 이층에서 하나둘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라혼이 짐작한 대로 남쪽에서 가도를 타고 북상하는 대상들이었다. “아무래도 튜니튼은 여기서 빠져야 할 것 같수다. 부상이 너무 심해서…… .” “알았소. 원래 약속한 보수의 반을 드리죠.” “이거 고맙소. 역시 프린뱅크의 상인들은 사람이 됐다니까.” 보통 부상을 입고 중도에 빠진 용병에게는 보수를 지불하지 않았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싸워주었으므로 도의상 어느 정도 대가를 주는 경우도 있었지 만 그것은 체면에 죽고, 체면에 사는 귀족들이나 하는 일이었다. 바늘로 찔 러 피한방울 나지 않을 상인이 그 정도 대우를 하는 것은 확실히 감사를 받 을 일이었다. 문제를 해결한 경험 많은 노련한 용병은 여관에 어제까지 보지 못한 낮선 사내를 발견하고, 넉살좋게 말을 붙이며 다가섰다. “여~! 좋은 아침. 이봐! 주인장 못 보던 젊은 친군데 누구요?” “아! 하이슬란드 백작님의 기사분이십니다.” “오! 소드 마스터로 유명한 분의 기사라면 대단하겠군.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인사나 나눕시다. 나는 아스벤 이외다.” “가이우스요.” 라혼은 넉살좋게 다가오는 용병사내가 귀찮았지만 이름정도는 말해주었다. 아까 얼핏 듣기로 벨리아 숲에 출몰한다는 도적들과 충돌해 부상까지 당한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어제저녁까지 없던 사람이 있으면 수상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니 스스로 아스벤이라고 소개한 용병은 미리 위험요소 를 확인해야겠기에 라혼에게 다가와 아는 채 한 것이었다. 그러나 라혼이 이 지역의 영주인 로카데 차이저 반 하이슬란드 백작의 기사라고 밝혀두었 으니 더 이상의 추궁은 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용병의 행동은 라혼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여관의 아침을 떠들썩하게 하던 대상무리가 여관을 떠나고 여관은 다시 고요해졌다. 그리고 라혼은 여관에서 휴식을 취하며 하루를 보냈는데 그날 밤에서야 기다리던 죠슈아가 도착했다. “대장!” “너무 늦어!” 죠슈아는 라혼이 그 어떤 여행 장비도 없이 무작정 말을 몰고 영주성을 나 서자 허겁지겁 여행 장비와 백작님과 백작부인, 그리고 루나와 테이까지 나 서서 챙겨준 노잣돈을 받아들고 가도를 내달렸다. 그리고 벨리아 숲으로 들 어서는 마을에 있는 여관에서 라혼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대장이 맨몸으로 떠나고, 헤사르 마을이 발칵 뒤집혔어. 그런데 설마 진 짜 맨몸으로 여행을 할 생각을 하다니…….” “뭘? 집에 오래 있어봐야. 신경만 쓰이지……. 일부러 도망 나온 건데.” “그리고 마스터가 대장에게 전하라는 말이 있는데.” “…….” 라혼은 마침 여관의 주인이 가져다준 차가운 맥주를 마시며 죠슈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카시아와 이혼문제는 좀 더 신중하게 결정할 문제니까 대장이 돌아오는 3 년 후 다시 생각해보시자더군.” “그래?” 하긴 사이스 백작가문의 여자를 이제 갓 성년식을 치룬 애송이의 말 한마디 로 내칠 수는 없는 문제였다. 라혼의 성정을 잘 아는 아버지와 가족들은 그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그것은 솜털도 빠지지 않은 애송이의 투정으로 밖에는 비치지 않을 문제였다. 비록 카시아의 행동이 다소 무리가 있다고는 생각할 테지만 말이다. 역시 그 정도는 라혼도 짐작하는 일이었 고 그렇기 때문에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온 것이었다. “왜, 그랬어?” “뭘?” “비록 정략결혼이었지만 그동안 잘 지냈었잖아?” “그랬지.” “진짜 이혼할 생각이야?” “그래.” 죠슈아는 이런 라혼을 전에도 본적이 있었다. 누구나 원하는 소드 마스터의 가르침을 안 받겠다고 고집부릴 때도 이런 식이었다. 너무나 간단히 대답 하는 투정 같은 결론을 들었을 땐 죠슈아는 그래도 못이기는 척 가르침을 받을 줄 알았다. 그러나 라혼은 무시무시한 마스터의 기운에도 눈 하나 깜 빡하지 않고 그것을 거부했다. 이에 분노한 마스터가 기사의 가문에서 단련 하지 않는 자는 필요 없다며 먹을 것을 주지 말라고 명령하며 방에 가두었 다. 그리고 라혼은 그날부터 방을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사 흘이 지나자 백작부인과 라혼의 누나들이 몰래 음식을 넣어주었다. 깨끗하 게 비워진 식기는 라혼이 굶지 않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고, 마스터를 포함 해서 모두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난 후 다소 화가 누그러 진 마스터가 라혼을 찾았을 때 마스터가 발견한 것은 푸석푸석하고 검게 죽 은 피부에 해골의 그것인 냥 앙상한 몰골을 한 아들이었다. 그리고 영주성 은 발칵 뒤집혔다. 백작부인과 아가씨들이 방안으로 넣어준 음식들은 요강 안에서 악취를 풍기며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라혼은 장장 한 달이나 아무 것도 먹지 않은 것이다. 마스터는 생각치도 못했던 아들의 비참한 몰골에 망연자실했고, 백작부인은 울부짖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마스터는 라혼이 결정을 내린 일에 대해서는 무슨 일이든 무리하게 강요하는 법이 없었다. “내게 이유를 가르쳐 줄 수 있어?” “너도 잘 알다시피 나는 누군가 내가 원치 않는 일을 하라고 하는 것을 용 납 못해.” “…….” “그리고 질투에 미친 아내만큼 남자를 피곤하게 하는 존재는 없지.” 죠슈아는 라혼의 말에 동감하면서도 선뜻 동의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문제에 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라혼과 죠슈아는 벨리아 숲으로 말을 달렸다. 벨리아 숲을 관 통하는 길은 프린든 왕국의 귀족이 하이슬란드를 다스릴 때도 아주 중요한 통로였으므로 비교적 관리가 잘되어 있었다. 라혼과 죠슈아는 마치 경주하 듯 빠른 속도로 말을 몰아 정오를 지나 막 저녁으로 들어가는 시간이 되자 벨리아 숲을 관통하는 벨리아 가도 중간쯤에 위치한 언덕에 데드몬그 요새 곁을 자났다. 보통은 날이 밝더라도 요새에서 하룻밤을 보내기 마련이었지 만 라혼은 데드몬그로 들어서지 않고, 남쪽으로 뻗은 가도를 따라 말을 내 달렸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이내 칠흑 같은 밤이 찾아왔다. 그리고 날씨가 점점 흐려지더니 이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라혼은 말을 멈출 생 각을 하지 않았고, 죠슈아 또한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쏴아아아아아~! 그러나 끝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비는 강행군을 하는 라혼의 발걸음을 가 로막기에 충분했다. 라혼이 빗속에서 천천히 걷는 말위에서 휴식을 고려할 때 앞쪽에서 희끄무레한 불빛이 포착되었다. 그리고 점점 가까이 접근할수 록 그것이 사람이 불을 피운 것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날이 풀리 자 가도를 따라 북상하는 또 다른 대상들이었는데 그들은 가도 근처 공지에 천막을 쳐놓고 야영을 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사방이 탁 트인 지붕만 있 는 형태의 천막에서 불을 피우고 일단의 용병들과 상인들이 모여 따뜻한 스 프를 들고 있었는데 그들은 라혼과 죠슈아가 다가가자 경계의 빛이 가득한 표정으로 약간 적의가 있는 물음을 던졌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벨로아 숲 에 도둑들이 있다는 소문을 모르는 여행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누구요?” “헤사르에서 그란으로 가는 여행자요.” 용병중 리더인 듯한 자가 나서서 억수같이 내리는 빗줄기를 넘어 접근하는 불청객의 정체를 물었고, 그 물음에 죠슈아가 나서서 답했다. 이런저런 질 문이 오간 끝에 라혼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자 용병은 뒤로 물러서고 대상을 이끄는 상인이 나서서 라혼과 죠슈아를 대접했다. 아무래도 귀족을 상대하 기에 그들의 태도는 너무 딱딱했기 때문이다. “설마 지금시간에 이런 곳에서 제국 유일의 소드 마스터이신 하이슬란드 백작님의 아드님을 만날 줄이야. 그란으로 가시는 길이시라고요.” “그렇습니다.” 자기를 프랑쥬라고 소개한 중년의 상인은 도무지 라혼을 놓아주려 하지 않 았다. 그런 그의 태도는 삼자 입장인 용병들이 보기에도 썩 좋게 보이지 않 았다. 이런 한밤중까지 빗속을 지나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 줄 잘 알고 있는 용병들은 화를 내지 않고 무던한 귀족청년의 인내심에 감탄할 정도였 다. 그러나 실상은 그 반대였다. 라혼이 상인을 놓아주지 않는 것이었다. 카시아와 문제 때문에 결정한 그란 행이었지만 제국1인자인 할아버지가 무 슨 이유 때문에 대외적으로 소드 마스터에게 수업을 받는다고 알려져 있는 자신을 유벤트 기사단에 보내려 하는지 아직 알지 못했기에 그란에 본거지 를 두고 있다는 상인에게 필요한 정보를 얻으려 최소한의 질문으로 그가 자 신이 아는 것을 털어놓게 하기위해 짧은 질문을 계속 던졌고, 장황하지만 그래도 여기저기에서 주워들은 것이 많은 상인은 오히려 라혼의 눈치를 살 피며 이야기를 멈추지 못했다. “지금 여기 하이슬란드를 비롯하여 프린든 왕국과 1년 전쟁으로 얻은 땅은 그동안 말로만 제국 1인자 이었던 다크 듀크에게 실질적으로 그란에 영향 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에 힘입어 공작을 대신해 그란에 머물 고 있는 트라얀 공이 전면에서 실질적인 힘을 가지고 이름뿐이었던 제국 의 회에 힘을 실어주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그란 정계에 묘한 움직임을 보이게 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다름 아닌 다크 듀크를 다음 황제로 옹립시키려는 움직임이죠.” “지금의 황제는 오히려 트라얀 공보다 젊을 텐데요?” “아니 구체적으로 논의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런 말이 오가는 정도일 뿐이죠.” 라혼은 제국의 1인자 프리켑스 갤 공이 자신에게 무엇을 시키려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갤 공의 후계자라면서 아인윌로 부르지 않고 그란 유벤트 기사단에 입단시키려 했다. 그러나 상인의 장광설 속에서 라혼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갤 공은 자신을 제국의 황제로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유벤트 기사단은 고대 시드그람의 건설자 철황제 하야덴 시드그람 때부터 존재한 단체였다. 지금의 신성 시드그람 제국과 고대 시드그람 제국이 다르 듯이 유벤트 기사단도 달랐지만 13세에서 24세까지 젊은이들을 한곳에 모아 가르치는 일종의 교육기관이었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 이 없었다. 귀족의 자손은 가문을 이어갈 후계자와 상속권이 없는 자손으로 나뉘는데 가문을 이어갈 후계자는 대부분 장남이고 어렸을 적부터 가문의 역량을 총 동원해 가르치게 된다. 그러나 차남이하의 형제들은 다른 기사의 시동으로 들어가 기사수업을 받아 기사로써 성장하는데 힘 있는 가문일수록 상속권이 없는 자손일지라도 명성이 높고 실력 있는 기사에게 자손을 맡기기를 원했 다. 그러나 명성이 높고 역량이 출중한 기사일수록 재능이 있는 아이만을 골라 가르쳤다. 그러다 보니 최선이 아닌 차선으로 유벤트 기사단으로 보내 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벤트 기사단의 오랜 전통은 그 역사에 비례하여 뛰 어난 기사들을 많이 배출해 왔고, 그러한 명성이 쌓이고 쌓여 지금은 아예 가문의 후계자를 맡기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유벤트 기사단에 입단하는 청소년들은 비슷비슷한 처지인 경우가 많아 그것으로 인해 하나의 인맥을 형성하게 되었다. 서로 얼굴을 몰라도 유벤트 기사단 출신이라는 이유만으 로 협상이나 부탁을 하는데 있어서도 유리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혹자는 유벤트 기사단을 일컬어 도련님 기사단이라 비아냥 대기도 했지만 제국의 황제는 물론 귀족의회를 이루는 귀족들은 유벤트 기사단 출신자들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대부분의 귀족가문의 주인들은 자신들의 영지에 머물 렀고 그란의 귀족회의에는 발이 넓은 형제를 보내기 마련인데 그들 대부분 이 유벤트 기사단 출신인 경우가 많았다. 다음날 아침. 라혼과 죠슈아는 북상하는 대상들과 헤어져 남하를 계속했다. 간밤에 모든 비를 쏟아놓은 하늘은 맑고 화창했다. 내리쬐는 싱그러운 아 침햇살 아래에서 라혼과 죠슈아는 빠르게 남하를 계속했다. 그리고 정오께 가 되어서야 지겹도록 똑같은 경치를 보여주던 벨리아 숲을 빠져나올 수 있 었다. *** 죠슈아는 처음으로 라혼과 함깨 여행을 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하루 종일 말에서 내리지 못하고, 말위에서 하루를 보내기를 몇 번, 여행기간을 보통 한 달 이상 넉넉히 잡아야 도착할 수 있는 멀고, 먼 그란까지 단 일주일 만 에 주파해낸 것이다. 덕분에 라혼의 노들랜드산 우르고종 명마는 물론 한 덩치 하는 죠슈아를 태우고 일주일 내내 가도를 질주한 말은 고생 끝에 완 전히 비루먹은 망아지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고생의 끝이 눈앞에 보이기 시 작했다. 고대 시드그람 제국과 흥망을 같이하고 신성 시드그람 제국에서도 제도로서 역할을 톡톡히 하는 세계 모든 도시의 왕. ‘위대한 그란’이었다. 도시를 둘러싼 7개의 언덕에는 2천년의 위용을 자랑하는 듯한 단단하고 굳건한 성 벽이 둘러쳐있고, 언덕꼭대기에 하늘 높이 솟아오른 망루는 보는 이로 하여 금 절로 탄성을 자아냈다. “저게 샤를로스 망루탑이로군.” 7개 언덕에 하나씩 세워져 있는 망루탑은 저마다 전설이 있었다. 비운의 여 황제 퀸 바라니아를 경애한 기사들 중 능력이 출중한 일곱 명의 기사가 있 었는데 그들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그들의 후손들이 망루탑을 건설하며 그 들의 이름을 망루탑에 붙였다. 그런 그들의 의도는 성공해 그들 가문은 천 년의 세월에 묻혀 사라졌지만 각 언덕에 세워진 그들의 시조의 이름이 붙여 진 탑들은 지금도 그 기능을 잃지 않고 있었다. 북풍의 기사 사를로스, 달의 기사 아이서스, 백색의 기사 에보릭스, 영광의 기사 기오르가, 죽음의 기사 고른, 비밀의 기사 블라드미르, 여왕의 기사 벡터의 이름은 귀부인을 경애하는 기사도의 상징이자 기사를 꿈꾸는 모든 소년의 영웅이었다. 죠슈아는 전설의 도시 그란을 둘러싼 성벽을 보고 감탄성을 터트렸지만 라 혼은 다른 생각을 했다. ‘제도 그란이 단단한 등껍질에 숨은 겁먹은 거북이 꼴을 하고 있다니?’ 죠슈아는 그란을 둘러싼 성벽과 망루를 보고 위대한 도시들의 왕 제도 그란 을 느꼈고, 라혼은 세상이 두려워 꼭꼭 숨은 힘없는 제국을 느꼈다. 고대 시드그람 제국의 그란은 도시성벽 따위로 감싸지 않아도 그 누구도 침입할 생각조차 못하는 불침의 도시였다. 그란에서 결정된 일은 곧 대륙의 법이었 다. 시드그람 대륙자체가 그란의 성벽이었던 것이다. 라혼은 말로만 들었던 바라니아 방벽을 본 라혼은 그동안 마음 한구석에 있 던 께름칙한 그 무언가가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80년 후면 마계의 문이 열리고, 인간으로써는 어쩔 수 없는 엄청난 규모의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그래서 라혼은 되도록이면 피를 부르는 무리한 일은 벌이고 싶지 않았다. 단 80년이란 짧은 세월 동안이라도 사람들이 되도록이면 큰 풍파 없이 지내 길 바랬다. 그러나 제도 그란을 둘러싼 높은 성벽은 지금 시대가 그다지 평 화롭지 못함을 증명하고 있었다. “어차피 이 시대의 전쟁은 탈로스로 시작해 탈로스로 끝난다.” “음? 뭐라고 했어?” 라혼의 혼잣말에 죠슈아가 반응했다. 라혼은 그런 죠슈아의 이름을 힘을 실 어 불렀다. “죠슈아!” “…….” “아무래도 강철의 공작은 날 황제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 같아.” “……!” “황제가 되어서 1만기의 타이탄급 탈로스를 거느려 볼까?” “꿈같은 말이군. 타이탄급 탈로스 1만기면 온 세상을 정복하고도 남겠다. ” 죠슈아는 라혼의 말을 그렇게 받았다. 시드그람 북부의 강국이었던 프린든 왕국이 보유하고 있던 탈로스는 80기가 채 되지 못했다. 강철의 공작이라는 갤 공이 운용할 수 있는 탈로스는 40여기 정도였고, 신성 시드그람 제국의 탈로스 숫자도 120여기가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거기다 최강의 탈로스라 는 타이탄급 탈로스는 양국이 모두 합해서 20여기 정도였다. 만일 황제에게 20여기 정도의 타이탄급 탈로스가 있다면 제국은 물론 전 시드그람 대륙 어느 누가 황제의 권위를 무시할 수 있을까? 그러데 타이탄급으로만 1만기 라니……. 진정 꿈같은 말이었다. “그렇게 되려면 넉넉잡고 한 50년쯤 걸릴 거니까. 그때까지 건강하게 살아 남아라. 아, 그렇지 네가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된다면 70살이 되어도 정정 할 거니까 그럼 네게 1만 탈로스 군단을 맡기지. 열심히 수련하라구.” “그런 대장은?” “가이아멜프(Gaiamelp)!” “가이……. 뭐?” “가이아멜프, 하늘을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강철거인. 탈로스의 원형인 진 정한 궁극의 무기지. 그거 한 6천기 정도만 제작해서 네 말대로 세계를 정 복해 볼까?” “…….” “시드그람 대륙은 물론, 인시드, 칸이 있는 판게아는 물론 남방의 게브 대 륙까지 손에 넣는 거야. 땅, 바다, 하늘 모두를 영역으로 삼는 것도 괜찮겠 군.” 죠슈아는 라혼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단순히 소년 특유의 허풍 이라고 치부했다. 고대 시드그람 제국의 건설자 하야덴 시드그람과 미완의 정복자 반왕 이그라혼의 연대기를 접하면 누구나 한번쯤은 꿈꿔보는 이야기 였기 때문이었다. 다만 누가 대장 아니랄까봐 그 스케일이 어마어마했다. 시드그람 대륙을 넘어, 인시드 대륙, 칸 대륙, 게브 대륙까지 모든 땅을 정 복하고도 모자라 바다와 하늘까지 정복하겠다니……. 그러나 훗날 죠슈아는 나중에 지금 이 말이 그저 소년의 허풍이 아닌 ‘마그누스 이그라혼’이라 고 칭송될 자가 앞으로의 목표를 밝히는 선언이었음을 알게 된다. 유벤트 기사단 유벤트 기사단 확실히 대륙 북부에 위치한 하이슬란드보다 남부에 위치한 그란이 기후가 온난했다. 따뜻한 해류가 흐르는 마에스트 해의 영향을 받은 그란은 서쪽의 사이스 백작령보다도 기후가 따뜻했다. 훈훈한 바람이 부는 계절이 오자 많은 대상들이 그란으로 들어가고 또 나왔 다. 신성 시드그람 제국 상인에게 막대한 통행세를 물리던 프린든 왕국이 1 년전쟁에서 패하고 프린든 왕국의 동부 절반이 제국령이 되자 갤 지방의 아 인윌과 제도 그란으로 연결되는 안정적인 통로가 확보되었다. 고대로부터 아인윌은 모피가 유명한 곳이었고 더불어 가죽제품도 질이 좋아 아인윌 가 죽은 최상품의 대명사나 다름없었다. 제국의 상인들에게 그런 아인윌의 모 피와 가죽제품은 훌륭한 상품이었다. 고대 시드그람 제국의 모든 가도는 그란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것은 대부분 의 가도가 관리를 하지 않고 방치된 덕에 태반이 파괴된 지금이라도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시드그람 대륙의 어느 가도에 들어서더라도 그 가도는 그란과 연결되어있었다. 바로 그것이 지금의 그란을 유지하는 원동력이었다 . 잘 닦여지고 돌로 포장까지 된 가도는 많은 짐을 실은 수레가 지나다니기 편했고 그것으로 인해 대상들이 가도를 중심으로 무역을 했다. 그리고 그 가도의 중심에는 위대한 그란이 있었다. 상인들에게 그란만큼 좋은 입지조 건을 가진 도시는 또 없었다. 라혼은 북쪽으로 출발하는 상단의 대부분이 하이슬란드를 거쳐 갈 것임을 알았다. 이것으로 보아 갤 공이 아버지를 하이슬란드의 백작으로 삼은 이유 를 알 수 있었다. 아인윌과 그란이 이어지는 가도가 있는 곳은 모조리 갤 공과 연관된 사람들이었다. 새로이 제국령이 된 동프린든의 다른 지방은 아 직 프린든 왕국의 사주를 받은 자들의 활동에 의해 아직은 혼란한 상황이었 다. 그러나 아인윌과 그란을 이어주는 가도 주변부는 갤 공이 휘하 철가면 기사단의 기사들을 직접 투입하는 열의를 보여 그 어느 곳보다 안정적이었 다. 그래서 해마다 아인윌과 그란을 오가는 대상의 숫자는 늘어만 갔다. 라혼과 죠슈아는 따스한 봄바람을 느끼며 천천히 그란의 북쪽문인 엘노스 게이트로 말을 몰았다. 그란으로 들어서려는 사람들을 검문하는 경비병들로 인해 엘노스 게이트의 주변부는 무척 붐볐지만 라혼과 죠슈아는 신분을 증 명하는 하이슬란드 백작가의 문장이 새겨진 목걸이 보여주는 것으로 간단하 게 성문을 통과했다. “굉장해. 축제도 아닌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가다니……. 그란에 살면 매일 매일이 축제 같겠는 걸.” “글쎄…. 지내다 보면 그것도 익숙해질 거야.” 도시를 감싼 바라니아 성벽 안쪽은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많은 사람들이 오 가고, 거리에는 사이스나 하이슬란드에서는 어쩌다 한번 보는 승용 수레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바쁘게 지나다녔다. 또한 화려한 장식을 한 고급 마차 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고 그것은 도심에 가까울수록 빈도가 높았다. 죠슈아는 생전 처음 보는 도시의 활기참에 두리번거리기 바빴지만 라혼은 3 층 이상 올라가지 않은 건물들을 보면서 입맛이 씁쓸했다. 라혼이 살았던 시대의 그란은 대부분 5층 이상 건물들이 연이어져 있어 1개 블록의 건물이 한 건물인양 붙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그란의 인구는 500만이었다. 그 러나 지금 그란의 인구를 흔히 100만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80만이 조금 넘 는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란은 엄청난 대도시였다. “그런데, 대장 이제 어디로 간다지?” “일단 여관을 잡고 한 며칠 쉬자.” “에? 트라얀 공에게 가지 않고?” “거기 가면 귀찮은 일이 많을 거야. 그전에 여관에서 여독을 풀어두는 것 이 나아.” 죠슈아는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거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트라얀 공은 그란에서 가장 주목받는 존재다. 어떻게 보면 제국전체가 그를 중심으로 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만큼 그를 한 번이라도 만나려는 손님이 많을 것이고 미리 약속을 하지 않고서는 만나기 조차 힘들 것은 뻔했다. 트라얀 공이 라혼이 그란에 왔다는 사실을 안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여관은 어디 가서 찾지?” “적당한 가게로 가서 물건하나 사고 그 사람에게 묻자.” “뭘, 사려고?” 라혼은 죠슈아의 물음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 라혼의 시야에 잡힌 것은 꽃을 파는 가게였다. “저기 꽃이나 한 송이 사자.” “꽃?” 라혼은 꽃가게로 말을 몰아가 땅으로 내려선 후 가게로 들어갔다. 그리고 가장 처음 눈에 띤 파란 꽃잎의 히아신스 한 송이를 꺼내들었다. “어서 오세요.” 그러자 어디선가 소녀의 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혼은 습관적으로 히아 신스에 코를 갖다 대다가 소녀의 목소리에 반응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선명한 붉은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고, 검은 흙이 하얀 얼굴과 앞치마에 묻 은 모습을 한 미소녀가 초록색 눈을 깜빡이며 서 있었다. “깜찍하게 생겼네.” “뭐라고요?” “아니, 그냥 혼잣말이야. 이거 얼마지?” 습관이란 무섭다. 라혼은 하이슬란드의 헤사르 마을에서 하던 대로 스스럼 없이 소녀를 대했다. 그러나 곧 꽃집 소녀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지며 불쾌 한 기색을 보이자 라혼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헤사르에서는 누구나 라 혼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비록 라혼 자신은 처음 보는 얼굴일지라 도 상대는 이미 자신을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이슬란드 주민에게 라 혼과 아버지는 정복자였기 때문에 두려움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인지 태도가 무척 딱딱했다. 그래서 항상 대화를 시작할 때 누구에게나 붉은 머 리에 초록 눈동자를 가진 소녀에게 했던 식으로 한두 마디 칭찬부터 하곤 했었다. 그럼 딱딱하게 굳어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약간은 부드럽게 변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하이슬란드의 헤사르가 아니라 그란이었다. 그 러한 사정을 모르는 초록 눈동자를 가진 소녀는 놀림을 받았다고 생각했는 지 표정이 굳은 채 약간 딱딱한 어조로 대꾸했다. “한 송이만 사실 거라면 5코퍼에요,” “이게 5코퍼나 한다고? 뭐가 그렇게 비싸!” “안 사시려거든 그냥 두시던가요.” “아니, 사지…….” 라혼은 에텔 스페이스에서 5코퍼짜리 동전 하나를 꺼내 지불하며 물었다. “이 근처에 혹시 묵을만한 곳 없나?” “이 길로 쭉 따라가다 보면 크리스털 카슬 이란 이름의 여관이 있어요.” “크리스털 카슬?” “그다지 고급여관은 아니지만 깨끗하고 음식 맛도 좋아 만족하실 거예요. 쓸데없이 비싸기만 한 고급여관보다 훨씬 나아요.” “이름이 마음에 드는군. 고마워, 그리고 이거 받아.” 라혼은 손에 든 히아신스를 꽃집 소녀에게 건네주고는 가게를 나섰다. 그러 자 초록색 눈동자 소녀가 따라 나오며 꽃을 내밀며 말했다. “저는 이것을 받을 수 없어요.” “원래 목적은 묵을만한 곳을 찾는 것이었어. 내게 꽃은 필요가 없었다고. ” “그럼 돈을 돌려드리죠.” “아니, 꽃을 산 이상 꽃은 내 것이고 나는 여행자에게 묵을 곳을 친절하게 가르쳐준 아름다운 레이디에게 꽃을 선물한 거야. 설마 선물한 꽃을 돌려 주는 모욕을 주려는 것은 아니지?” 귀부인이 기사가 선물한 꽃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나는 당신이 끔찍하게 싫습니다.’라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받은 꽃을 돌려주면 그것을 꽃을 받 지 않겠다는 뜻이고 귀부인을 경애하는 기사도의 입장에서 그만한 모욕이 또 없었다. “…….” “그럼,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레이디.” 라혼은 멋들어지게 기사가 귀부인에게 바치는 절을 하고 다시 말 등에 올라 탔다. 그리고 초록눈동자를 가진 소녀가 가르쳐준 방향으로 조금 빠르게 말 을 몰았다. 그리고 검은 머리 기사에게 뜻밖에 꽃을 선물 받은 꽃집의 소녀는 파란색 선명한 히아신스의 향기를 맡고는 중얼거렸다. “귀여운 애네. 유벤츠인가? 나를 모르는 것을 보니 봄에 들어올 신입인가 보군.” 그리고 그녀는 다시 하던 작업을 마무리하기 위해 가게 뒤편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밖에서 일을 보고 돌아온 정원사 노인이 마차에서 작업도구를 정리 하며 그녀에게 말을 건네 왔다. “쉬포니아 아가씨, 일은 끝나신 겁니까?” “아니요. 아직 조금 더 남았어요. 그리고 여기요.” “이게 뭡니까?” “손님이 왔었어요.” “5코퍼군요. 꽃바구니라도 만들어 파신 겁니까?” “아니요. 어떤 멋진 기사가 이거 한 송이를 사서 내게 선물하면서 치룬 값 이에요.” “예?” 늙은 정원사는 쉬포니아의 말을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그녀의 입가에 어린 미소를 보고 뭔가 좋은 일이 있었겠거니 짐작했다. 계절은 완연한 봄이었던 것이다. *** 크리스털 카슬이란 이름을 가진 여관에서 사흘정도 쉰 라혼은 트라얀 공이 머물고 있는 저택을 찾았다. 그리고 저택의 대소사를 챙기는 집사 셀랑드에 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여관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이 되자 트라얀 공이 보낸 사람이 왔다. 라혼과 죠슈아는 여관에 그동안의 숙박비를 지불하고 저택으로 자리를 옮겼다. 집사인 셀랑드의 안배로 방에서 하루를 쉬고, 저녁 무렵에야 바쁜 하루를 끝낸 트라얀 공이 라혼을 찾았다. “몰라보게 자랐구나. 라혼!” “트라얀 공을 뵙습니다.” “그래, 아버님께 연락은 받았지만 유벤트 기사단에 입단할 것이라고?” “예.” “언제 입단할 생각이냐?” “저는 유벤트 기사단에 대해 그다지 아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단지 할아 버지가 부탁하셨기에 그란으로 온 것뿐입니다.” “그러냐? 사실 나도 유벤트 기사단에 대해 그다지 아는 바가 많지 않다. 셀랑드!” “예, 전하!” 트라얀 공은 셀랑드에게 라혼이 유벤트 기사단에 입단하는 문제를 맡기고 다시 라혼에게 물었다. “듣기로 너와 같이온 젊은 기사가 있다고 하던데, 이따 저녁식사 시간에 만나볼 수 있겠느냐?” “그렇게 하죠.” “그런데 그 녀석이 네게 피로써 충성의 서약을 한 그 녀석 맞냐?” “맞습니다.” “네 아버지의 성격에 실력이 되지 않는 자를 기사로써 인정하지 않았을 텐 데…….” “죠슈아는 이미 마나유저입니다.” 그리고 저녁식사시간이 되어 라혼은 죠슈아를 트라얀 공에게 소개했다. 트 라얀 공의 저녁식사는 제국의 최고 권력자의 만찬회답게 대략 20명 이상의 사람들이 초대되어 식사를 함께했다. “허허허, 이런 영광이…. 제국 유일의 소드 마스터 하이슬란드 백작님의 아드님이시라고?” “1년전쟁때 타이탄급이 아닌 키클로급 탈로스로 9기의 탈로스를 잡은 에이 스 파일럿이기도 하죠. 만약 하이슬란드 백작에게 타이탄급 탈로스가 주어 졌다면 적기사 가온보다 더 많은 탈로스를 잡았을 거요.” “호호호, 갤 공의 증손자인 것을 한눈에 알겠군요. 아주 매력적인 검은 머 리와 신비로운 검은 눈동자를 가졌어요. 그런데 벌써 결혼을 했다지요? 안 타깝군요.” 만찬회의 주인공은 당연 라혼이었다. 트라얀 공이 라혼을 챙겨주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저마다 ‘나는 너에 대해 이정도 알고 있다’는 식의 말을 한 마디씩 했다. 누가 강철의 공작의 아들이 아니랄까봐 가족이 아닌 자들을 대하는 트라얀 공의 태도는 딱딱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데 라혼이 칭찬 받을 때마다 자랑스럽다는 듯한 미소를 보이자 사람들은 더욱 라혼에게 관 심을 가졌다. 그냥 자기끼리 하는 말일 망정 이야기의 주제의 중심에 있는 라혼으로써는 일일이 반응 정도는 해주어야 했다. ‘쳇! 식사를 편하게 하기 위해서 날 이용하다니…….’ 라혼은 가끔 미소를 지어주며 자기 앞에 놓인 식기를 비우는 트라얀 공의 속셈을 꿰뚫어 보았다. 그리고 오늘 이후 똑같은 말을 약간의 기교로 변화 를 주며 계속하는 이 사람들-아마도 귀족들이 분명한-의 입을 통해 그란의 유력자들에게 라혼의 존재가 각인 될 것이었다. 자손이 없는 트라얀 공이 총애하는 조카손자로 말이다. 라혼은 폭풍 같은 질문에 식사를 포기하고 식탁위의 맛있게 생긴 음식들은 에텔 스페이스로 요령껏 집어넣었다. 그리고 길고 긴 만찬이 끝날 무렵에는 말을 하느라 대부분 음식을 남긴 다른 사람들과 대조되게 라혼의 식기와 죠슈아, 트라얀 공의 식기는 깨끗이 비워져 있었다. 그리고 산뜻한 디저트 로 만찬회가 끝나자 거실로 자리를 옮겨 차를 마셨다. 거기서는 트라얀 공 이 이런저런 가벼운 주제로 대화를 시작하자 그제야 라혼은 쉴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술이 나오자 라혼은 트라얀 공에게 아직 독한 술을 시작하지 않았음을 알리고서야 그 자리에서 몸을 뺄 수 있었다. “휴우~! 대장 요리가 맛있었어?” “글쎄……?” “식사를 하면서 뭔 말이 그렇게 많은 지…….” “원래 만찬회가 그렇지 뭐.” 그렇게 라혼이 트라얀 공의 저택에서 머무는 동안 거의 매일 만찬회에 참석 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라혼으로 하여금 유벤트 기사단이 운영하는 기숙 사를 이용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트라얀 공의 배려로 라혼과 죠슈아는 별다른 절차 없이 간단하게 유벤트 기 사단에 입단했고, 많은 선물을 받았다. 거의 맨몸으로 떠나온 라혼과 죠슈 아에게 기사로써 갖춰야할 기본적인 무장과 시종까지 붙여주었는데 라혼은 갑옷 등의 무구는 고맙게 받았지만 시종은 거절했다. 그리고 라혼은 트라얀 공의 저택에서 일주일을 시달린 후에야 유벤트 기사단의 기숙사로 거처를 옮길 수 있었다. “대장, 트라얀 공의 집사가 신경을 많이 썼나본데.” “그러게…….” 라혼은 자신이 머물게 될 거처의 화려함에 볼을 긁적이며 그렇게 대답했다. 라혼은 기숙사라기에 작은 방에 침대와 책상 정도만 비치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라혼과 죠슈아가 머물 기숙사는 하나의 독립된 3층 건물 이었다. 그리고 건물 안에 비치된 가구는 모두 나무냄새가 진한 새것이었고 , 2층의 개인방 옷장엔 라혼과 죠슈아가 앞으로 입을 옷가지가 가득 걸려있 었다. 물론 전부 새 옷이었다. “하인을 붙여준다는 이유가 이거였나?” “아무래도 하인을 구해야겠어.” “그래야겠지?” 라혼과 죠슈아가 기숙사, 아니 기숙저택(?)의 규모에 놀라고 있을 때, 손님 이 찾아왔다. “오랜만이네. 친구들!” “제브!” 훤칠한 키에 앳된 얼굴의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짓고 있는 소년은 다름 아닌 제브였다. “라혼, 너는 어째 갈수록 예뻐 지냐?” “왜? 그동안 내가 보고 싶어 밤잠이라도 설쳤냐?” “내 마음을 알아주어 고맙소. 레이디 라혼!” “뽀뽀라도 해줄까?” “그건 사양일세. 친구! 그리고 죠슈아는 아직도 올려다 보아야할 만큼 크 네?” 라혼과 제브는 기사가문의 자손답게 대략 180센치로 또래의 소년들보다 컸 다. 그러나 죠슈아는 그보다 머리하나가 더 큰 2미터의 키를 자랑했다. “그런데? 오늘 내가 올 줄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냐?” “넌 모르는 구나. 너 유벤츠들에게는 물론이고, 모르긴 몰라도 그란 전체 에서도 널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걸.” “그게 무슨 소리야?” “제국1인자 갤 공이 널 후계자로 점찍고 있다는 소문 말이야. 혹시 너는 모르고 있었냐?” “아아! 그거……. 트라얀 공 이후 후계자 후보 중 하나라는 언질은 받았어 .” “우와! 그럼 그게 진짜였어?” “후보 중 하나일 뿐이야.” “야! 그래도 그게 어디냐? 아무튼 그것도 그렇지만 신성 시드그람 제국 유 일에 소드 마스터의 아들이라는 것 때문에 선배들이 너에 대한 관심이 무지 하게 많아.” 제브는 오랜만에 고향친구를 만나 시간가는 줄 모르고 떠들었다. 그리고 유 벤트 기사단의 선배로써 이런저런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유벤츠사이에선 선후배관계가 매우 중요해. 그것은 대대로 이어지는 전통 같은 거니까 조심해야 한다고.” “어떻게 해야 하는데?” “글쎄……. 이런 말하면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어떤 집안의 자 식이냐 보다 선배가 후배를 이끌어 간달까?” “너는 유벤츠가 된지 5년이나 됐잖아? 그럼 네게도 존대를 해야 하는 거냐 ?” “원칙적으로 그렇지만 너하고 내가 생판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그냥 편안 대로 해. 참 그리고 죠슈아의 실력이면 바스라를 가질 수 있을 거야.” “바스라?” “서열 같은 건데 가장 강한 13명에게 주어지지 1부터 13까지, 바스라를 가 지면 선후배관계를 초월하니까…….” “뭐야? 그럼 나도 바스라를 가지면 되잖아!” “라혼, 네가?” 죠슈아는 20세였다. 덩치로 보아 힘이 상당할 것이고 소드 마스터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면 나름대로 기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라혼은 이제 갓 성년식을 치룬 16세였다. 일반평민이었다면 아직도 꼬마취급을 받을 나이였 다. 겉보기엔 이미 다 자란 것처럼 보이겠지만 근력이나 기술이 딸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현재 유벤트 기사단의 바스라를 가진 13 명은 바스라13을 가진 18세가 되는 선배 한명을 제외하고 모두 22에서 23세 가 넘은 선배들이었다. 그들 중 나이제한에 걸려 이번에 24세의 선배 세 명 이 유벤트 기사단을 떠나 바스라가 비워져 이번 봄 축제에 열리는 토너먼트 에서 기량을 겨루어 바스라 서열을 다시 정하게 되는 것이다. “잊었냐? 우리 아버지가 소드 마스터라는 사실을?” “뭐, 너는 생일이 빨라서 이미 16세가 지났으니까 참가자격은 충분하겠지. ” “아! 그러고 보니 제브 너는 생일이 여름이었지. 그럼 아직 15살 꼬맹이잖 아!” “이게! 그래도 나는 네 선배야!” 그렇게 유벤트 기사단의 첫날이 저물었다. 유벤트 기사단 *** 기숙저택에 짐을 풀고 난 그 다음날 라혼과 죠슈아의 입단식이 열렸다. 유 벤트 기사단은 3월부터 5월까지 신입을 받았는데 그때마다 두세 명의 선배 유벤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유벤트 기사단의 단장으로부터 서품-기사 작위 가 아닌 유벤츠 작위-을 받으며 유벤츠임을 증명하는 휘장을 받게 된다. 그 리고 그것을 증명하는 서류에 선배 유벤츠들이 이름을 적게 된다. 즉, 상당 히 조촐한 입단식이었다. 나중에 그해의 신입을 받는 것이 종료되는 5월의 마지막 날에 신입생도환영식이 열리지만 말이다. 그런데 증조할아버지와 아 버지의 유명세 때문인지 수십 명의 유벤츠들이 몰려들어 참으로 거창한 입 단식이 되어버렸다. “라혼 가이우스 세나데온 차이저.” “죠슈아 차이저.” “너희는 유벤트의 전통과 기사단의 규율을 준수하겠는가?” “예.” “예.” “유벤츠 사이스와 유벤츠 아담스는 그들이 유벤트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음 을 인정하고 증인이 되어줄 수 있는가?” “나 레이스 네부카드 사이스는 그들이 유벤트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음을 인정합니다.” “나 제이브러스 네부카드 아담스도 그들이 유벤트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음 을 인정합니다.” “신성 시드그람 제국 황제 폐하를 대신하여 카이자드 쉬포니스 캐리언은 그대들을 유벤트 기사단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겠노라.” 중년을 넘어 초로의 풍채 좋은 유벤트 기사단의 단장 카이자드 쉬포니스 캐 리언 백작은 그렇게 선언하고 라혼과 죠슈아의 손에 유벤츠를 상징하는 백 색바탕에 황금실로 수놓아진 휘장을 놓았다. 휘장에는 올해를 뜻하는 통합 력 1630년을 뜻하는 ‘1630’이란 숫자가 문장의 리본부분에 새겨져 있었다 . 아마 이것으로 선후배관계를 알수 있나보다. “유벤츠가 된 것을 축하하네. 라혼군 그리고 죠슈아군.” “감사합니다. 캐리언 백작님.” 캐리언 백작은 라혼의 어깨를 두드리며 인자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라혼과 죠슈아의 입단의식이 거행된 곳은 유벤트 기사단의 본단 건물 앞으로써 유 벤트 기사단에서 가장 유서 깊은 건물이었는데 지금은 유벤츠를 가르치는 교수들의 집무실이 모여 있는 건물이었다. 캐리언 백작은 자신의 집무실이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제브와 레이스를 필두로 여기저기에서 입단을 축하하는 말을 한마디씩 했다. “이젠 우리는 친구이자 동지일세, 친구!” “축하한다. 라혼 차이저.” “나는 레이미 하레시온 라이콘 3년차다.” “나는 플랜 산드로스 6년차다.” ……. 라혼은 그렇게 수십 명이 한꺼번에 자기소개를 해오는 통에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라혼은 그들의 반짝이는 눈동자에서 선망의 빛을 읽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이름이 생각보다 유명해서인가? 아님 할아버지 때문인가?’ 하지만 라혼은 그들의 관심이 증조할아버지 갤 공 때문인지, 아니면 소드 마스터이신 아버지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모르긴 몰라도 둘 다 이유일 것이다. *** 약 2주간 지내면서 라혼은 유벤트 기사단이 도련님 기사단이라고 불리는 이 유를 알 수 있었다. 유벤트 기사단에 속한 현자들의 수준은 훌륭했다. 검술 스승들도 가르침을 주는데 무척 뛰어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유벤츠들 은 크게 2부류로 나뉘었는데 어떻게든 실력을 갈고 닦으려는 모범생과 유벤 츠란 신분을 이용해 즐기는 부류였다. 유벤츠는 그 신분이 하나같이 대단한 존재들이었다. 제국에 한다하는 집안의 자손들이 막대한 자금을 들여 유벤 트 기사단에 입단시킬 정도이니 더 말을 해서 뭘 하겠는가? 그렇게 대단한 녀석들이니 강제로 뭘 시키는 경우는 없었다. 이것은 신성 시드그람 제국 황제와 각 지방을 다스리는 영주의 관계와 비슷했다. 그러나 각 학문을 담당한 교수별로 수업시간을 정해놓고 학생을 받는데 과 정을 이수 받으면 입단의식 때 받은 휘장에 과정을 이수했다는 문장을 추가 하게 된다. 즉 수업에 참가하는 것엔 강제성이 없지만 체면에 죽고 사는 귀 족들이니 유벤트 기사단에 입단해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입단 때 받은 휘 장을 그대로 가지고 떠난다는 것은 창피한 일인지라 놀기 바쁜 유벤츠라도 한두 개 수업에는 참석하곤 했다. 유벤츠의 수업은 오전 3시간, 오후 3시간 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3시간이 한명의 교수가 진행하는 1개 단위의 수업 이었다. 가르치는 분야는 군사학, 교양학, 수학, 기하학, 문학, 철학, 정치 학, 법학, 마법일반 등으로 다양했고, 각종 무기를 다루는 무기술, 기마술, 궁술, 맨손으로 싸우는 체술, 마상창술 그리고 유벤츠 중 최고 엘리트만이 배울 수 있는 탈로스 운용 등 스스로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최상의 조건이었다. 또한 과외로 헐링(hurling)과 폴로(polo), 갑주를 입은 채로 가죽 공을 차는 풋볼(football)등을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비공식적인 유벤츠의 놀 거리가 많았는데 그란의 귀족영애들이 다니 는 로즈 아카데미의 행사에 초대되거나 귀족들이 여는 연회에 참석하는 것 도 빼놓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유벤츠라는 신분은 스스로의 역량을 키우거 나 누구에게나 인정받으면서 놀기에도 이만한 것이 없었다. “야, 라혼! 너 친구 버리고 혼자 놀면 좋냐?” “왜, 또 시비야?” “그래도 명색이 기사단인데 기사수업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고리타분하 게 책이나 파고 앉아있냐?” “너 우리 아버지가 누군지는 아냐?” “누가 니네 아버지가 소드 마스터인거 몰라서 그러냐? 네가 기사수업에 나 오지 않으니까 친구잘못 둔 죄로 선배들이 날 닦달해대서 미치겠으니까 그 러지…….” 라혼은 지난 보름간 수학과 철학, 정치학 등의 인문계열의 수업에만 참석하 고 무예를 배우는 기사수업엔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니 소드 마스터의 아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 하는 유벤츠들이 안달할 만도 했다. 그런데 유벤츠 사이에서도 묘한 분위기 같은 것이 있었는데 제브나, 죠슈아 같이 귀족가문의 자손과 덤으로 끼어온 유벤츠는 무시하는 경향이었다. 그 래서 그들은 죠슈아가 기사수업에 참석함에도 라혼을 찾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런 선배들과 격의 없이 지내는 제브는 참으로 대단했다. 제브 스 스로가 말하길 11살때 그란으로와 유벤츠가 되었을 때는 자기 나이가 가장 어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실력이 좋아 선배들에게 막내로써 귀여움을 받아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고 말했다. 바로 그 점이 함께 입단한 레 이스와 멀어진 이유였다. 제브와 레이스는 처음 유벤트 기사단에 입단해서 함께 수업을 받았는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2살이나 어린 제브의 실력이 나 았다. 그것은 쓸데없이 자존심만 쎈 레이스가 제브를 멀리하게 된 이유였다 . “어떡할 거냐?” “당분간은 안 돼! 하던 것이 끝나면 모를까.” “그럼 과외시간에라도 안되겠냐?” “과외? 무슨 과외?” “실은 나 헐링을 하거든……. 어때 우리부에 들어오는 것이?” “뭐, 그 정도라면……. 그런데 해가 저물어 가는데 안돌아가도 괜찮냐?” “에휴~! 말도 말아라.” 라혼의 말에 대뜸 제브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란에 와서 느낀 건데 레이스 그 자식 좀생이가 따로 없어.” “레이스가?” “실력도 형편없는 놈이 자존심만 있어 가지고 에휴~! 네가 온 이후로 그간 잠잠했던 히스테리를 부리는데 환장하겠더라고…….” 사이스 백작령에선 레이스는 아이들 사이에서 왕이나 다름없었다. 라혼까지 도 그 녀석에게 한수 접어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유벤트 기사단에는 제국 내에서 사이스 백작가보다 세력이 큰 가문의 자손들이 그야말로 널려 있었다.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돈다고 생각했던 녀석이니 적잖이 고생했을 것은 안보고도 훤했다. 그런 와중에 어린 제브가 자기보다도 두각을 나타내 니, 우물 안 왕인 개구리가 신하인 지렁이와 세상에 나왔는데 우물 밖에선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발견하고 그저 지렁이라고 생각했던 신하는 사실은 새끼 뱀이었음을 발견한 것이었다. “말이 나왔으니 고자질을 해야겠다. 너 아냐 죠슈아가 대놓고 따돌림 받고 있다는 거? 그거, 좀생이 레이스 때문이야. 레이스가 죠슈아의 출신이 근 본도 모르는 고아라고 떠들고 다녔다고…….” “…….” 라혼은 오늘도 뒤뜰에서 수련에 열중하고 있는 죠슈아에게 그런 사정이 있 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뭐, 나같이 도련님들과 덤으로 온 녀석들이 도련님들에게 조금 무시를 받 는 것은 관행처럼 이어져오고 있었지만 죠슈아 만큼 대놓고 그러진 않았거 든……. 그런데 덤으로 유벤츠가 된 녀석들조차도 죠슈아를 무시하는 거야. ” “…….” 레이스의 행태에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처음부터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어느 정도 이해는 했었다. 그런데 18살 이나 되어 자기 자신 정도는 챙길 줄 아는 나이가 되었는데 아직도 그 상태 라면 진짜 한심하기 그지없는 놈이었다. “제브야.” “왜?” “정 뭐하면 같이 이리로 옮겨와라! 보다시피 죠슈아하고 나하고 둘이 쓰기 에 넓으니까.” “뭐? 정말……! 아니, 관둘란다. 그래도 사이스 가의 기사가 될 몸이 주군 을 팽개칠 수는 없으니까.” 제브의 풀 네임인 제이브러스 네부카드 아담스 중 중간 이름인 네부카드는 제브가 속한 일족의 이름이었다. 네부카드 일족의 대부, 파트로네스는 사이 스 가였다. 네부카드 일족의 클리엔테스인 제브로써는 선택의 여지가 그다 지 많지 않았다. “너도 참 앞날이 갑갑하다. 그보다 그란의 봄맞이 축제는 언제 열리는 거 야?” “으이구. 바깥일에 관심 좀 가지셔. 봄맞이 축제는 일주일 뒤면 시작된다 고. 벌써부터 온 그란이 술렁이는 데 한 번도 시내에 나간 적 없지?” “그런가?” “어쨌든 네 말대로 오늘은 너무 늦었다. 나, 간다.” “그래.” 라혼은 제브를 현관까지 배웅하고 뜨거운 목욕물을 준비했다. 그리고 아직 까지도 뒤뜰에서 수련에 열중하고 있는 죠슈아를 찾았다. 죠슈아는 카마리 에 검술의 기본검형에 따라 바스타드 소드를 휘두르고 있었는데 라혼은 한 동안 죠슈아가 바스타드 소드를 휘두르는 모습을 지켜보다 한마디 툭 던졌 다. “칼을 휘두를 땐 딴생각을 하지 말라고 했잖아!” “어? 대장 왔어.” 라혼의 지적에 수련을 멈춘 죠슈아는 나뭇가지에 걸어둔 수건으로 흐르는 땀을 훔쳐내며 물었다. “대장은 어떻게 내가 딴생각을 하면서 검을 휘두른다는 것을 알아보는 거 야?” “그야 당연하지 잡생각이 많으면 검세가 날카롭지 못하니까.” “그렇겠군. 그보다 오랜만에 대련해볼래?” “싫어!” 죠슈아는 라혼이 대련을 거부하자 턱을 긁적이며 쓴 웃음을 지었다. 라혼이 소드 마스터인 마스터 로카데 차이저의 가르침을 거부하며 굶은 사건 이후 로는 제대로 수련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한 적한 곳에서 시간을 보낼 따름이었다. 그러나 죠슈아는 물론 마스터도 라혼 이 놀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옷은 갈아입을 때 라혼의 인상적인 근육이나, 안정적이 걸음걸이는 웬만한 수련이 없고서는 가질 수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목욕물 데워놨으니까. 목욕이나 확실히 하라고.” “알았어. 그런데 아직도 트라얀 공에게 하인을 보내달라는 부탁을 하지 않 은 거야?” “그게 그렇게 됐어. 아무래도 그쪽에서 온 하인은 감시자이기도 할 테니까 .” “그런가? 복잡하군.” “그래서 내일은 시내에 같이 나가서 하인을 구해보자고. 시간돼?” “나야, 대장이 간다면 어디든 갈 수 있지.” 라혼은 죠슈아의 말에 씩 웃어보이고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문득 죠 슈아를 불렀다. “죠슈아!” “왜?” “너는 강해!” “알고 있어!” 라혼은 죠슈아의 자연스런 대답 속에 깃들여진 자신감을 느낄 수 있었다. 상대의 검술에 따라 반응하는 카마리에 검술에서 상대의 실력을 꿰뚫어보는 안목은 매우 중요했다. 죠슈아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라혼에게 가르침을 주려는 아버지의 노력 덕에 죠슈아는 지난 5년 내내 소드 마스터의 집중적 인 가르침을 받는 행운을 누렸다. 아버지는 제국 유일의 소드 마스터다. 그렇다는 것은 제국에서 최강자라는 것과 다름없었다. 전장에 탈로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이후로 소드 마스터 의 가치는 그만큼 감소되었다. 우습게도 소드 마스터가 운용하는 마나와 소 드 익스퍼트가 운용하는 마나의 양은 같았다. 다만 운용하는 기술이 소드 마스터가 월등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탈로스를 운용하는 데엔 오로지 마나 의 양만이 중요시되어 탈로스에 탑승하면 소드 마스터나 소드 익스퍼트나 전력상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소드 마스터의 미묘한 움직임이나 싸움의 승기 를 잡는 기세싸움은 탈로스를 탑승하면 거의 효과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소드 마스터로 이름 높던 기사가 탈로스 운용에 재능이 높은 에이스 파일럿에게 패배하는 일이 종종 벌어지자 소드 마스터가 되기 위해 고된 수련에 매진하는 사람의 수가 줄어들었고 그것은 소드 마스터의 존재를 희 미하게 만들었다. 아버지의 경우도 소드 마스터여서 명성이 높았다기보다 중급탈로스인 키클로급 탈로스를 타고서 9기의 탈로스를 잡은 에이스 파일 럿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배우기가 어렵고 까다로운 카마리에 검술 덕 분이었다. 카마리에 검술의 대가인 아버지에게 둔중한 탈로스의 움직임은 다음은 어디를 어떻게 공격할 것인가를 알려주는 표시가 되었고 카마리에 검술 특유의 균형 무너트리기는 탈로스의 밸런스를 무너트리기에 적합했다. 부딪혀서 힘겨루기식의 전투가 아니라 힘을 슬쩍 흘림으로써 균형을 무너 트리고 허점을 노리고 검을 내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아버지의 성과 는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소드 마스터에게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 것이 아 닌가하는 생각을 하게했다. 죠슈아는 트라킨과 더불어 소드 마스터의 가르침을 받는 아주 대단한 존재 였다. 이미 죠슈아는 완성된 기사였고 부족한 것이 있다면 풍부한 실전경험 정도였다. 그런 죠슈아의 눈에 도련님들의 실력은 몇몇을 제외하고 한심하 게 보일 정도로 형편없었다. 바로 그 점이 라혼으로 하여금 바스라 서열 결 정전에 나가는 것을 포기하게 한 이유였다. 애들이 장난치는데 끼어들어 보 았자 아무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눈치를 보아 하니 바스라 서열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할아버지의 후광 때문인지 선배라 고 귀찮게 구는 사람이 없으니 굳이 나서서 쓸데없는 주목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라혼이 판단하기에 지금 유벤트 기사단엔 쓸 만한 인재는 없었다. 역량도 없는 주제에 쓸모없는 자존심만 강한 인재는 있으나 마나였다. *** 오전에 수학수업이 끝나고 점심을 먹은 라혼과 죠슈아는 그란시내로 나갔다 . “그런데 하인을 어디서 구하지?” “크리스털 카슬의 주인에게 부탁하면 누군가 소개해 주겠지. 집안 청소하 고, 간단한 식사정도만 만들 수 있는 사람이면 되지. 그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잖아.” “몇 명이나, 구할 건데?” “하루에 한 번씩은 청소를 해야 하니까. 집의 크기도 있고……. 3명은 돼 야 하지 않을까? 마구간 관리도 해야 하니까 말이야.” “하녀 포함해서?” 라혼은 고개를 돌려 특유의 진지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엉뚱한 것을 물어오 는 죠슈아의 얼굴을 보면서 말했다. “너 그거 혹시 농담이냐?” “…….” 약간의 침묵. “아니, 그냥 궁금해서…….” “하녀라도 할머니부터 소녀까지 다양 할 테고, 중년의 아줌마일 가능성이 큰데 뭘 기대하는 거야?” “기왕이면 젊고 예쁜 아가씨면 좋잖아.” “왜? 어떻게 해보려고?”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게 좋은 거잖아.” “미안하지만 젊은 아가씨 구할 시간이 있을 만큼 한가하지 않다고.” 그렇게 쓸데없는 잡담을 늘어놓는 사이 라혼과 죠슈아를 태운 말은 어느새 그란시내에 들어서고 있었다. 축제가 얼마 남지 않은 그란은 도시전체가 축 제준비에 술렁이고 있었다. 거리엔 설치물이 들어서고 큰 길의 각 건물은 봄맞이 대청소가 한참이었다. 시골 출신인 죠슈아는 벌써 축제가 시작된 것 같다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그리고 라혼은 도시를 가로질러 목적 지인 크리스털 카슬 여관에 도착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크리스털 카 슬에서 일하는 소년이 다가와 반갑게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Sir. 라혼, Sir. 죠슈아!” “아직 이름을 기억하고 있네?” “상인으로써 그 정도는 기본이죠.” “그래? 자, 오늘은 오래있지 않을 거야 하지만 이 녀석들 여물은 챙겨줘. ” 라혼은 소년에게-그래 봐야 라혼과 동갑이거나 약간어린- 약간의 팁을 주며 부탁했다. 그러자 소년은 라혼과 죠슈아를 태우고 온 말들의 고삐를 능숙 하게 잡고 여관의 뒤쪽에 있는 마구간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라혼과 죠슈아는 여관 안으로 들어섰다. 크리스털 카슬 여관은 여느 여관과 마찬가지로 술집과 음식점, 여관을 겸하고 있었다. 라혼과 죠슈아 가 바에 다가 가자 바 안쪽에 있는 바텐더가 아는 체하며 인사를 건네 왔다 .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라혼 경과 죠슈아 경이 아니십니까? 오오~! 유벤 츠가 되셨군요.” 바텐더는 라혼과 죠슈아가 입고 있는 제복을 보더니 감탄어린 탄성을 토했 다. “어떻게 모두 우리 이름을 다 알고 있는 거지 보름 전에 한 사나흘 묵은 것밖에 없는데?” “그거야 당연하죠. 트라얀 공과 깊은 관련이 있는 분이신데……. 관심 없 는 것이 이상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 거였나?” “귀한 분들이 오셨는데 뭘 드릴까요?” “흑맥주, 죠슈아는?” “흑맥주.” 라혼과 죠슈아는 바에 자리를 잡고 앉아 바텐더가 내준 차가운 맥주를 반잔 이나 비우고는 말했다. “사실은 부탁할 것이 있어서 왔어.” “예? 제게요?” 라혼은 바텐더에게 하인을 구하는 문제를 말했다. “글쎄요? 귀족가의 하인은 구하기가 힘들어서 그란에 워낙 귀족들이 많이 몰려있는 바람에 실력 있는 하인은 구하기 힘들죠.” “아니, 전문 하인이 아니라 그냥 사람이면 돼!” “그렇게 까지 말씀하신다면……. 구하는 거야 어렵지 않죠.” “오늘 어떻게 안 될까. 마구간지기 포함해서 한 3명 정도면 되겠는데? 사 례는 충분히 할게.” 바텐더는 원하는 말을 들었는지 그제야 자신의 주변에 적당한 사람이 있는 지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적당한 사람이 한명 있기는 한데 나이가 좀 많습니다. 상관없겠습니까?” “일만 제대로 해준다면 상관없어. 누구지?” “평생 마부 일을 하던 사람인데 마구간지기 정도라면 가능합니다. 괜찮으 시다면 그의 의향을 물어보죠.” “부탁해. 집안일 할 사람은?” “그의 부인이 한때 하녀였다고 하니까. 같이 고용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 까?” “그거 잘됐군. 부탁해!” 바텐더는 라혼의 허락이 떨어지자 여관의 사환을 불러 어디론가 심부름을 보냈다. 그리고 라혼과 죠슈아는 흑맥주를 마셔가며 잡담으로 무료한 시간 을 보냈다. “이 근처에 그 빨간 머리 꽃집아가씨가 있는 꽃가게가 있지 않나?” “아! 그 깜찍하게 생긴 여자애 말이구나.” “어차피 할일도 없는데 다시 가볼까? 대장.” “글쎄……. 왜 관심 있어?” “아니 그때 하는 거보니까 대장이 관심 있어 하던 것 같아서.” “관심이 전혀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난 굳이 찾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 하지만 화창한 봄날 모처럼 그란 시내에 나와 여관구석에서 흑맥주나 홀짝 이고 있는 것은 라혼이 생각해도 궁상맞았다. 그래서 말은 그대로 여관 마 구간에 놓아둔 채 거리로 나섰다. 딱히 할일은 없었지만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유벤트 기사단 그란에서 유벤츠라는 신분은 라혼이 생각했던 것보다 대단한 것이었다. 말 이라는 것, 특히 기사들이 타는 건장하고 훈련이 잘된 말은 비싼 것이다. 말을 타고 다니면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라 혼은 사람들의 시선이 말 때문인 줄로만 알았다. 말을 타고 있었을 때는 죠 슈아와 잡담을 하며 무심히 지나쳤는데 그냥 거리를 걸어보니 말 때문만은 아닌 것이 확실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망어린 시선으로 유벤츠 제복을 입은 자신들을 훔쳐보고 있음이 피부로 느껴졌다. 그러나 라혼이야 남이 보 건 말건 신경 쓰지 않았지만 죠슈아는 사람들의 시선을 은근히 거북해했다. “대장, 아까부터 사람들이 계속 쳐다보는 것 같지 않아?” “알아, 그러니까 기사로써 품위를 잃지 마.” “나는 대장처럼 얼굴가죽의 두께가 그다지 두껍지 않아.” “말을 타고 있을 땐 아무렇지도 않은 주제에 사람들하고 눈높이가 맞춰지 니까 간이 쪼그라들기라도 하냐?” “쳇! 내가 말을 말아야지.” 그렇게 한 시간 정도 거리를 하릴없이 배회한 라혼과 죠슈아는 자신들과 똑 같은 하얀 유벤츠 제복을 입은 무리와 마주쳤다. “이게 누구야? 이번에 새로 입단했다는 그 유명한 신입 아니야?”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라혼은 그들의 가슴에 유벤트 기사단를 상징하는 문장의 리본 그림부분에 새겨진 입단연도를 보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 사실 확인할 필요도 없이 신 입인 라혼과 죠슈아에게 거의 대부분이 선배이긴 했지만……. “너희들 여기서 뭐하냐?” “하인을 구하기 위해 잠깐 나왔습니다.” “그래?” 야펀이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이제 3년차 되는 선배는 죠슈아를 힐끔 쳐 다보고는 말했다. “거기 덩치 큰 친구는 이미 정식 기사라지? 그럼 바스라 서열 결정전에 참 가하겠네?” “그러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유벤트 기사단에서 신입이 바스라 서열 결정전에 참가한 예는 드 문데, 뭐 아주 없지는 않으니까 잘해보라구.” “예.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사람을 만나기로 되어 있어서…….” 라혼은 정중하지만 비굴하지 않은 태도를 견지하며 선배들과 헤어지려했다. 그러나 선배들은 유벤트 기사단 최대 관심인물인 라혼을 여기서 놓아줄 생 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하인을 구하러 나왔다면서? 좀 기다리게 하면 어때. 어차피 평민들일 텐 데.” “…….” “우리랑 함께 가자. 네게 소개해 줄 사람이 있으니까.” 그렇게 선배들은 라혼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라혼과 죠슈아를 어디론가 데려갔다. 라혼과 죠슈아가 유벤츠 선배들과 함께 도착한 곳은… …. “로즈 아카데미! 일명 숙녀들의 정원이지, 어떠냐? 이 선배가 존경스럽지 않냐?” 기껏 데려 온 곳이 새침데기 귀족 아가씨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니……. “봄맞이 축제 때, 유벤츠 중에서 메이킹을, 로즈 아카데미에서 메이퀸을 뽑아 퍼레이드에 참가하게 되지. 너도 여자깨나 달라붙게 생겼다만 올해의 메이킹은 이미 뽑혔으니 내년을 기약하라고.” “하하하, 그거 아깝군요.” 로즈 아카데미는 로즈 후작부인이 설립한 것으로 일종의 사교클럽에서 발전 한 것이었다. 그란은 다른 곳에 비해 워낙 많은 귀족들이 모여 있다 보니 서로 교류가 빈번해지고 하루가 멀다 하고 파티가 열렸다. 그란에 있는 귀 족들은 중앙귀족은 아니지만 각 가문의 수장을 대신해 제국의회에 대리참석 하기 위해 보내진 형제들이었다. 아무리 본가끼리 사이가 나쁠지라도 서로 대화를 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고, 그때 이용되는 것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 럼 서로 교류를 갖고 안면을 익혀두는 것은 더더욱 중요하기 마련이고, 그 래서 간단한 저녁만찬이나, 혹은 조촐한 파티, 대규모 연회를 여는 일이 잦 았다. 그리고 그 일은 대부분 안주인들이 도맡아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체면치레라도 하려면 그에 따른 교양이 필수적이었고, 만찬회 같은 경우 초 대하는 쪽에서 어린자식들도 어느 정도 교양이 있을 필요가 있었다. 특히 안주인의 교양이 돋보이게 하는 것이 바로 딸의 교양이었다. 아들의 경우 어렸을 적부터 신전이나, 본가 기사의 시동으로 보내졌기 때문에 나이가 어 느 정도 차서 집에 남아 있는 것은 딸일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자기 자신은 본가의 수장의 형제로써 신분이 보장되어 있지만 아들은 방계에 해당하기 때문에 기사가 되거나 신관 등이 되어 신분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딸이 야 적당한 혼처로 시집보내면 해결되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딸의 교육은 더 욱 중요했고 교양 있는 귀부인으로 이름 높았던 로즈 후작부인이 귀족영애 를 몇 명 맡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오늘날 로즈 아카데미의 전신이 었다. 처음엔 춤과 파티예절, 식사예절 같은 것을 가르치곤 했는데 후에 로 즈 아카데미라는 이름을 건 이후엔 각종학문과 귀부인으로써의 우아한 취미 생활 등까지 가르치는 곳이 되었다. 제국의 황제가 유벤츠 출신이면, 황후 는 로즈 아카데미 출신이었다. 유벤츠와 로즈 아카데미의 영애들이 갖은 명 목으로 서로 만나는 일이 잦다보니 서로 인연이 되어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 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의 미래에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유벤츠는 상속권 없는 대부분 자손들이고, 로즈 아카데미는 상속권 없는 집안의 딸들이었다. 상속권이란, 봉토, 즉 영지를 이어받을 권리를 말한다. “그런데 이곳엔 무슨 일로 온 겁니까? 제가 알기론 로즈 아카데미는 엄격 한 곳이어서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곳이라고 들었는데.” “물론 그렇지 하지만 로즈주얼에서 정식으로 공식적인 초청을 받고 온 이 상 거리낄 것 없다.” “로즈주얼이 뭡니까?” “로즈 아카데미의 보석, 최고의 숙녀들을 말하지.” 야펀선배가 자기 딴에는 위해준다고 데려온 모양이었는데 라혼은 솔직히 내 키지가 않았다. 최고의 숙녀든, 최하의 숙녀든 당분간은 조용히 있고 싶었 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배의 성의를 거부하는 것은 모욕이기에 말없이 선 배들의 뒤를 따라 로즈 아카데미 안쪽으로 들어갔다. 잘 가꾸어진 장미정원을 지나 아담한 숲길을 통해 테라스가 있는 공간에 도 착했다. 우거진 나뭇가지가 따가운 햇볕을 가려주는 그 공간은 분명 야외임 에도 어떤 공간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비취 빛 대리석으로 포장된 넓은 테라스에 대략 18명의 소녀들이 뭐가 재미있는지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있 었다. 그리고 그중 한 소녀가 이쪽을 발견하곤 말을 건네 왔다. “늦었잖아!” “미안, 아네스.” 야펀 선배는 새침 떠는 소녀에게 사과하며 양해를 구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야펀이 아닌 라혼과 죠슈아에게 머물러 있었다. “누구야? 못 보던 얼굴인데?” “아! 인사해 이번에 새로 입단한 신입이야.” “라혼입니다.” “죠슈아입니다.” “아네스예요.” 라혼이 이름을 밝히자 아까부터 술렁이던 소녀들이 서로 귀엣말을 나누며 라혼을 더욱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어머 역시! 검은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져서 혹시나 했는데 걔 맞지.” “맞아! 나도 그 아이 이름이 라혼이라고 들었어.” “그런데 이미 유부남이라지?” “맞아! 이미 11살 때 결혼식을 올리고 찐한 장면을 연출한…….” “어머 웬일이니…….” 소녀들이 낮게 소곤거리는 대화를 들은 라혼은 아무래도 이쪽과는 별 인연 이 없을 것이라 짐작했다. 인생의 목표가 좋은 집에 시집가는 것인 아가씨 들이 이미 결혼한 유부남에게 접근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쩝쩝, 시원섭섭하군. 그런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테이만의 장기가 아니구나. 나도 모르는 자식이 7명이나 된다니.’ 라혼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여기 있는 소녀들의 리더인 듯한 아네스가 헛기침으로 주위를 환기시키고는 말했다. “크흠! 자자자, 여기 남자애들이 왔으니까. 연습 제대로 하라고. 사교계에 데뷔할 때 아름답고 우아한 모습을 유지하고 싶다면……. 그리고 특히 로 즈주얼로써 부끄럽지 않게.” “알았어요. 아네스 언니.” “그럼 부탁해. 야펀!” 그리고 소꿉장난 같은 파티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춤을 신청하고, 정중히 거절하는 법과 상대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무도회장으로 나가는 것을 연습했 다. 그녀들은 이른바 코틀리 러브(courtly love), 궁정풍 연애를 연습했다. 라혼은 처음엔 그다지 내키지는 않은 일이었지만 차차 익숙해지면서 나름 대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춤이란, 기본적으로 자연스런 스텝을 밟는 것이었고 스텝만으로 상대의 균 형을 무너트릴 수 있는 라혼이 춤을 잘 추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했다. 게다가 라혼은 파트너의 춤추는 버릇이나 정도에 따라 춤추는 스텝에 미묘 한 변화를 주는 배려를 아끼지 않았으니 시간이 갈수록 처음엔 그다지 관심 없어하던 소녀들이 라혼에게 몰렸다. 사람들은 대부분 무슨 일이건 이미 포기한 일에 대해서는 별다른 감정 없이 편안하게 생각한다. 그것은 연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남자나, 여자나 가 능성 있는 상대에게는 호감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자기를 멋있게, 예쁘게 보이려 애쓰지만 스스로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애초에 그런 관계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의식적으로 꾸미려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다소 풀 어진 태도를 취하기 마련이다. 여기서 라혼이 유부남이란 사실은 로즈 아카데미의 아가씨들로 하여금 은연 중 다소 느긋한 태도를 가지게 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라혼의 누이들 과 지내면서 배운 여성을 배려하는 태도는 여기 있는 아가씨들을 더욱 편안 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의 미묘한 차이를 모르는 유벤츠 선배들 은 내심 ‘역시 유부남은 달라. 아가씨들은 유부남을 좋아한다는 것이 사실 이었어.’라고 생각하고 라혼에 대한 평가를 자기들 멋대로 ‘수단 좋은 바 람둥이’로 정의했다. 그러나 그것이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닌 것이 제국 제 일가는 권력자의 후계자 후보라는 배경에 누구나 꿈꾸는 듯한 외모, 스스럼 없고 여자를 배려하는 태도는 확실히 부정할 수 없는 바람둥이의 그것이었 다. 거기다 춤까지 잘 췄으니……. “어머나! 벌써 시작한 거야?” “네가 늦은 거야, 레이미. 시작한지 한시간은 넘었을 거라고. 그런데 쉬포 니아도 왔네?” “로즈주얼이 오늘 유벤츠를 초대했다고 해서 데려왔어.” 그란에 사는 귀족영애라면 18세를 전후해 사교계에 데뷔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들의 데뷔가 이루어지는 무도회는 처녀를 상징하는 계절인 봄에 개최되 었다. 그래서 여기 모인 같은 나이 또래의 아가씨들은 봄맞이 축제기간에 열리는 무도회에서 데뷔가 예정되어 있었다. 로즈 아카데미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우아한 아가씨들의 모임인 ‘로즈 주얼’은 로즈 아카데미 영애들의 선망에 대상이었다. 이 로즈주얼의 일원 이 되려면 이미 로즈주얼에 속한 소녀가 추천하고 다른 일원으로 부터 특별 한 반대가 없으면 일원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곳 야외이면서도 아늑한 하 나의 공간은 로즈주얼들이 사용하는 특별한 곳이었다. 그래서 그곳을 로즈 주얼 홀이라고 부른다. 선명한 붉은 머리에 인상적은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쉬포니아는 레이미 언 니의 손에 이끌려 반 강제로 로즈주얼 홀에 왔다가 이번 봄 무도회에서 데 뷔하는 언니들과 춤 연습을 도와주는 유벤츠 사이에서 한 존재를 발견하고 유심히 관찰했다. “귀엽게 생기긴 했지만 관심 끊어. 저래 뵈도 이미 아내가 있는 유부남이 라고, 왜 있잖아 유벤트 기사단에 입단한 갤 공의 증손자!” “이제 보니. 순 바람둥이 아냐.” “어?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그런 일이 있어.” “혹시 그 히아신스의 왕자님이 쟤였어?” “몰라!” 아네스는 쉬포니아의 히스테릭한 반응에 역시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러한 그들의 대화는 꽃집아가씨를 기억하고 있던 라혼의 귓가에 걸렸다. 라혼은 새로 나타난 두 명의 소녀 중 하나가 익히 본적이 있는 꽃집의 그 소녀인 것을 알고 약간의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대뜸 한다는 소 리가 ‘바람둥이’였으니 쓴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음? 왜, 그래?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어?” 라혼이 고소를 짓자 지금 라혼의 파트너인 소녀가 그렇게 물어왔다. “아니, 조금 힘들어서요.” “그러네. 쉬지 않고 계속 춤을 추었으니……. 그만하자.” “고맙습니다. 샤를 양.” 그리고 멋진 마무리 동작과 함께 서로 마주보며 인사하는 것으로 춤을 멈췄 다. 그리고 그녀를 숙녀가 대기하는 장소까지 에스코트하는 것으로 마무리 하고, 숙녀에게 양해를 구한 후 꽃집아가씨에게 다가갔다. “다시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레이디…….” “쉬포니아예요.” “레이디 쉬포니아!” 라혼은 멋진 궁정식 예절을 선보이며 쉬포니아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하이슬란드의 라혼입니다. 레이디.” “캐리언 가의 쉬포니아입니다. 유벤츠 라혼.” “예, 그날은 제가 아주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히아신스 한 송이를 5 코퍼에 팔아 바가지를 씌운 것은 너무 했습니다. 하지만 쉬포니아 양이라면 그만한 가치를 하죠.” “그런가요?” “그럼, 나중에 또 만나길 바랍니다.” 라혼은 그렇게 작별을 고하고 시선은 아네스에게 돌리고 말했다. “레이디 아네스, 저는 사실 다른 볼일이 있어 시내에 나왔다가 야펀 선배 를 만났습니다. 좀더 있고 싶긴 하지만 시간을 너무 지체했군요. 그래서 저 는 이만 돌아갔으면 합니다.” “그래요. 저희가 시간을 너무 빼앗았나 보군요.” “아닙니다. 저도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럼!” 라혼은 너무나 정중한 궁정식 예절로 양해를 구하고 죠슈아와 함께 그곳을 빠져나왔다. 쉬포니아는 자꾸 치근대면 뭐라 한마디 해주려고 마음먹고 있 었는데 정중한 인사와 몇 마디만 건넨 그가 급한 일이 있다며 자리를 뜨자 괜히 놀림 받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건 ‘나는 네게 별다른 관심이 없다’라고 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이, 뭐야!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숙녀에게 충분한 시간을 줘야하는 거 아냐!” *** “대장은 낯간지러운 말을 잘도 하데. 난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아서 혼났 는데…….” “너도 테이랑 16년 동안 살아봐. 그럼 자연히 몸에 배게 되어있어.” “테이가?” “몰랐냐? 테이 그런 거 의외로 좋아해.” 라혼은 쌍둥이 누이인 테이가 궁정식 연애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자 아까 배 운 인사법을 복습하는 죠슈아를 보고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덩치는 산만한 녀석이 자기 반도 안 되는 테이에게 잡혀 살 것이 눈에 훤 히 보인다. 하긴 나야 테이가 잡혀 사는 것보다 잡고 사는 것이 좋기는 하 다만…….’ 라혼은 이미 죠슈아를 인정하고 있었다. 아직은 애송이에 불과한 죠슈아지 만 의지가 굳고 듬직하니 그만한 신랑감이 또 없었기 때문이다. 우직하고 성실한 성정은 앞으로 경험이 쌓이고 관록이 붙으면 쓸 만한 인재가 될 것 이고, 죠슈아 같은 사내는 여자를 사랑하면 지고지순하게 끝까지 사랑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서로 말은 하지 않지만 세상 무서운 것 없는 테이가 얌전 하게 있을 때는 항상 죠슈아가 있었다. 죠슈아가 테이에게 마음을 고백하는 과정만 남기고 있었지만 라혼은 아직 때가 이르다고 생각하여 기회를 주지 않고 교묘히 방해하고 있었다. “라혼 경, 오셨군요.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기로 했지?” “일을 하겠답니다.” “그럼 내일 내 거처로 보내줘.” “알겠습니다.” 라혼은 크리스털 카슬 여관의 바텐더에게 사례비조로 1실버를 주고 여관 마 구간에 맡겨놓은 말을 찾아 유벤트 기사단의 기숙저택으로 향했다. 죠슈아 는 오늘도 어김없이 뒤뜰로 나가 수련을 시작했고, 라혼은 목욕을 했다. “쉬포니아 캐리언. 쉬포니스 일족의 캐리언 가는 현 황제 콘레로3세의 가 문인데…….” 신성 시드그람 제국의 황제는 제국의회에서 선출했다. 그러나 아무나 황제 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공식적으로야 신성 시드그람 제국의 공식귀 족이면 누구나 자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황제로 선출되는 가문은 대부분 그 란에 본가가 있는 몇몇 명문가뿐이었다. 황제는 언제나 그란을 지켜야만했 다. 그래서 암묵적으로 황제를 배출한 가문은 그란에 본가를 둔 가문이 압 도적으로 많았다. 그리고 최근 120여년간 황제는 오직 쉬포니스 일족의 캐 리언 가에서만 배출되고 있었다. 유벤트 기사단 *** 도시전체가 술렁이는 축제가 시작되었다. 제도 그란의 축제는 규모 면에나 볼거리 면에서나 참으로 엄청난 것이었다. 봄을 상징하는 꽃으로 장식된 마 차에 탄 봄의 여왕과 여왕을 호위하는 기사-유벤츠의 메이 킹과 로즈 아카 데미의 메이퀸-의 퍼레이드를 시작으로 신성 시드그람 제국의 귀족가의 깃 발을 든 기수들이 행진했다. 또한 제국은 물론 대륙 전역에서 지난 1년 동 안 가장 실력 있는 토너먼트 챔피언들이 모여 진정한 최강자를 뽑는 챔피언 십 토너먼트에 참가하는 명성 높은 기사들이 줄지어 지나갔다. 그리고 가장 유명한 서커스단과 그란의 코먼 아카데미 학생들이 저마다 기묘하고 화려 한 화장에 이날을 위해 특별히 만든 옷을 입고 뒤를 따랐다. 퍼레이드 중간 중간에 그란의 시민들을 위해 제공되는 빵을 가득 실은 수레가 지나며 사 람들에게 빵을 던져주었고, 헌 옷일망정 값비싼 옷들이 나눠졌다. 그리고 총 12기나 되는 탈로스의 행진은 퍼레이드를 절정에 다다르게 했다. 그 이름은 귀가 닳도록 들었지만 좀처럼 구경하기 힘든 탈로스의 원형이라 는 우라노스에 타이탄급 크로노스, 키클로급 브론테스, 아로게스, 스테로페 스 그리고, 기게스 등이 거리를 지나자 그란의 시민들은 환호했다. 그 탈로 스들은 그란에 본가를 둔 가문들이 소유한 탈로스로 특히 우라노스는 신성 시드그람 제국의 황제 된 자가 가지게 되는 황제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 탈 로스는 그란을 떠나지 않는 그란을 지키는 시티가드 탈로스였다. “굉장해! 사이스나 하이슬란드에서의 축제는 그냥 조촐한 잔치에 불과했어 .” “지금은 그냥 맛보기야. 오늘 전야제 이후엔 최고 중 최고를 가리는 챔피 언십 토너먼트에 대륙 서커스 경연대회, 10만 골드 요리사 선발, 연극, 경 마, 전차경주, 마법사들의 [칸트립Cantrip 마법장난] 시연 등이 연이어 벌 어진다고…….” [칸트립Cantrip]은 학파와 관계없이 모든 마법사가 수련기간 동안에 배우는 마법으로 수련생이 어떻게 많은 양의 마나를 끌어내는지를 연습하는 방법 이다. 그 효과는 개인의 창의성에 따라 다양한데 모든 마법은 바로 [칸트립 Cantrip]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란의 축제는 고대 시드 그람 제국 이전 폴리스였던 ‘람’ 시절부터 수천 년간 이어져 내려온 그 역사만큼이나 대단한 것이었다. “한 달 동안 먹고 마시기만 한다니……. 축제 한번에 들어가는 비용이 도 대체 얼마야?” “그란에 이런 속담이 있어. 한 달의 천국은 1년의 힘이 된다. 세금은 아까 울지라도 축제를 준비하는 비용은 아깝지 않다.” “확실히 그럴만하군.” “그보다 퍼레이드가 끝났는데 뭐 좀 마시러 가자 목마르다.” “모든 상점이 문을 닫았는데 어디 가서?” “걱정 마. 다른 곳은 장사를 하지 않아도 여관과 술집은 장사를 계속하니 까.” 다른 상점은 다 문을 닫는 축제 기간이었지만 여관과 술집은 영업을 계속했 다. 뿐만 아니라 축제기간에 한해서 그란 여관조합에선 조합원이 아닌 자에 게도 장사를 허용했다. 그도 그럴 것이 축제기간에 그란을 찾은 사람들이 머물 곳과 식사를 할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여관이라도 축 제기간 중 단 하루 쉬는 날이 있었는데 그란의 명물인 ‘10만 골드 요리사 ’를 뽑는 날이었다. 요리사에게 있어 10만 골드의 요리사가 되는 일은 부 와 명예를 한꺼번에 얻는 일이었다. 요리사의 가치가 10만 골드에 버금간다 는 뜻임으로 그 타이틀을 가진 요리사는 무슨 일을 해도 성공하기 마련이었 다. 그렇게 사람들 틈에서 퍼레이드를 구경한 라혼과 죠슈아, 제브는 맛있 는 냄새를 풍기는 노천카페를 찾았다. “어서 오십시오. 몇 분이십니까?” “보다시피 셋.” “흑맥주로 할까요? 포도주로 할까요?” “흑맥주, 소시지 3인분.” “그러죠. 그보다 자리가 없어 그러는 데 합석을 해도 되겠습니까?” “뭐 어쩔 수 없지.” “저를 따라 오십시오.” 거리에 마련된 임시 테이블엔 손님들로 꽉 차 있었다. 메뉴는 오직 소시지 와 무료로 제공되는 빵, 그리고 맥주와 포도주 정도였지만 대량으로 구워지 는 소시지에서 풍겨 나오는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는 그것을 상쇄하고 남음 이었다. 라혼과 죠슈아, 제브는 비교적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차지한 테 이블로 안내되었는데 그들은 귀족 같지는 않고 부유한 상인 같았다. 옷감은 고급이었지만 옷에 귀족신분을 상징하는 문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시오. 나는 제럴드라고 하오. 여기는 랑스고, 보다시피 장사꾼이오 .” “랑스입니다.”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라혼입니다.” “죠슈아입니다.” “제이브러스입니다.” 라혼은 먼저 인사를 건네 오는 귀밑에 흰머리가 보이는 노년의 상인과 서른 안팎의 젊은 사내에게 마주 인사했다. “허허허허, 이거 오늘 내가 귀한 사람을 만났구려. 소드 마스터인 하이슬 란드 백작의 아드님 아니시오?” “맞습니다. 제가 그 라혼입니다. 절 아시는 군요.” “유벤트 기사단의 하얀 제복을 입은 라혼이란 이름은 가진 이는 오직 한사 람뿐이지요.” “…….” “ 라혼 경, 정도 되는 분이시라면, 황금궁전에서 열리는 파티에 초대받았 을 텐데?” “초대를 받아 지금 거기로 가는 중입니다.” 라혼은 이미 황제로부터 자작으로 정식인준을 받은 상태였다. 그리고 라혼 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그러한 사실도 대부분 알고 있기 마련이었다. 그러 나 유벤트 기사단의 규정에 따라 유벤트 기사단의 일원은 모두 유벤츠의 신 분을 우선하게 되어 있어, 라혼이 유벤츠인 이상 ‘자작’이라 칭호만은 보 류되어 있는 상태였다. 라혼이 노상인과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 주문한 소시지와 흑맥주가 나왔다. 라혼은 동석한 상인에게 눈으로 양해를 구하고 음식을 들기 시작했다. 시원 한 흑맥주를 목울대를 움직여가며 단숨에 반 컵이나 비워버리고, 접시에 담 겨 나온 소시지를 포크로 푹 찍어 한입 베어 물었다. 그러자 바삭하게 구워 진 외피 안에 육즙이 터지며 입안으로 고였다. 그렇게 단숨에 주문한 것을 다 먹은 라혼은 흑맥주로 입가심을 하고는 동석을 허락해준 상인들에게 감 사를 표했다. “저희는 식사가 끝났으니 이만 일어서겠습니다.” “허허허, 부럽구먼. 맛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으니…….” “예?” “나이를 먹으면 속이 약해져서 조금만 무릴 주면 금방 탈이 나지. 나도 한 때는 소시지 열개 정도는 단숨에 먹어치울 수 있는 위장을 가지고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단 2개도 벅차더군.” “그렇습니까? 그럼 제가 실례를 한 건 아닌가 모르겠네요.” “아닐세. 보기 좋았네.” 라혼은 노상인에게 다시 목례하고 자신과 제브, 죠슈아의 식기를 챙겨서 자 리를 떠났다. 제럴드는 대귀족가의 손인 소년이 테이블 위에 식기를 직접 들고 가는 모습을 보며 눈가에 이채를 띄었다. 그리고 세명의 유벤츠가 사 람들 틈으로 사라지자 그때까지 아무런 말없이 침묵하던 랑스가 입을 떼었 다. “총수님, 특이한 귀족이로군요. 아직 그란의 분위기를 모르는 것일까요?” “글쎄, 그거야 모르지. 하지만 저 젊은이는 사려가 깊은 것 같네. 정중한 태도야 대륙 제일 명문의 자손이니 특이할 것은 없지만 우릴 배려해서 자기 가 먹은 식기를 손수 치운다는 것은 누가 가르쳐줄 수 있는 사항이 아니지. 네가 보기에 어떤 것 같으냐?” “제가 보기엔 아직까지 그란에서 귀족과 상인들의 험악한 관계를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뿐이냐?” “예?” “네 말대로 저 귀족 젊은이가 아직까지 상인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다는 사 실을 알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 랑스는 그제야 총수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챌 수 있었다. 아직 적대적 인 생각을 갖지 않는 유력한 귀족을 발견했다면 당연히 친구로 만들어야 한 다. 랑스는 너무나 간단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란의 평민들이 축제를 즐기듯이 귀족들에겐 귀족들만의 축제가 있었다. 황제가 기거하는 황금궁전에서 열리는 궁정무도회가 바로 그것이었다. 사교 계에 처음 데뷔하는 꽃 같은 아가씨들이 대거 참석하는 무도회는 해가 질 무렵 시작되어 자정이 넘어선 시간까지 계속된다. “휴~! 여기는 발에 차이는 것이 한다하는 귀족들이로군.” “왜? 그래서 기가 죽냐?” “그래, 기죽는다.” “그러 길래 뭐 하러 따라 오냐?” “누가 이럴 줄 알았냐? 하나같이 중후하고 높으신 어르신들만 있으니 불편 해서 원.” 라혼은 제브의 말에 씩 웃으며 말했다. “옛날이야기 속에 왕자가 신부감 고르는 파티가 아닌 이상 무도회가 다 이 렇지, 뭐! 젊은 사람들도 꽤 많이 참가했겠지만 어느 누가 저기 기라성 같 은 중후한 귀족 틈에서 마음 편히 놀 수 있겠냐? 그네들도 우리처럼 어딘가 에 처박혀 있겠지.” “체! 이럴 줄 알았으면, 선배들이랑 로즈 아카데미의 가장무도회에나 가는 건데…….” “대충 트라얀 공하고, 황제 폐하에게 눈도장이나 찍고 빠지면 될 거야. 그 때까지는 날 버리지 말아주게 친구.” “화, 황제 폐하라구?” 제브는 라혼의 말에 깜짝 놀라 말을 더듬었다. 아무리 실권 없는 황제라고 하지만 그래도 황제라는 신분은 신성한 것이었다. 형식적인 것이긴 하지만 신성 시드그람 제국에 속한 모든 귀족가문은 궁극적으로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그 귀족가문에 속한 기사들의 궁극적 인 충성을 받는 가장 꼭대기에 위치한 존재인 것이다. “그래, 황제! 내가 무엇 때문에 이 지루한 궁정무도회에 참석했을 것 같냐 ? 다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서란 말이지. 그래서 말인데 친구. 자네도 나와 같이 가줘야겠네.” “뭐, 뭐라구! 나도?” “오! 그렇게 해주겠다고. 친구, 자네는 정말 진정한 친구일세.” “야, 라혼!” 바로 며칠 전 트라얀 공의 집사 셀랑드가 라혼이 사는 모습을 살피러 왔었 다. 그리고 용돈 겸 생활비를 챙겨주면서 황금궁전의 궁정무도회 초대장과 트라얀 공의 친서를 함께 건네주고 갔는데 거기엔 안부를 묻는 말과 함께 무도회에 참석해서 신성 시드그람 제국 황제 콘레로3세를 알현하라는 내용 이 적혀있었다. 알현이라고 해보아야 인사하고 대화하는 몇 마디 나누는 정 도가 다 이겠지만 무도회 같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트라얀 공이 라혼을 황제 에게 정식 소개하는 것이다. 그것은 여러 가지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초대받은 손님이 들어오는 문이 아닌 황금궁전 안쪽의 문이 열리면 서 팡파르가 울렸다. -빵빠바방~빠, 방빠 바~! “신성 시드그람 제국 황제! 콘레로3세 폐하와 린세시아 황후이십니다.” -짝짝짝짝짝짝짝……………………. 황제와 황후가 홀의 안쪽 문을 통해 모습을 드러내자 무도회장은 박수가 터 져 나왔다. 그리고 호명되지는 않았지만 검은 머리의 강인한 인상의 트라얀 공도 황제내외 보다 한발 뒤에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황제가 앞으로 나서 자 이내 박수가 잦아들었다. “여러분, 올해도 챔피언 중 챔피언이 나올 것이며, 새로운 숙녀가 나올 것 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선보일 그녀들을 박수로 환영해 주십시오. 이는 황 제로써 요구입니다.” -와하하하~! 황제가 무도회의 시작을 선언하는 것으로 홀의 2층 계단에서 오늘 데뷔하는 하얀 드레스 차림의 아가씨들이 가족 중의 남자형제, 숙부 등으로 구성된 샤프롱의 손을 잡고 무도회장에 내려오기 시작하자 귀족들은 아까 황제를 맞이할 때와는 다른 흥겨운 표정으로 박수를 치며 그녀들을 맞이했다. -오오오오~! -짝짝짝짝짝짝짝……………………. 그리고 그녀들이 모두 홀 중앙에 모이자 황제는 앞으로 나와 최고의 숙녀 데뷔땅뜨를 뽑았다. 그리고 오늘 무도회 최고의 여자가 된 처녀가 젊은 청 년들 중 한명을 지목하여 중앙홀로 나서면 음악이 연주되고 그들이 춤을 추 기 시작하는 것으로 궁정무도회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왜 황제가 고른 여자가 데뷔땅뜨가 되는 거지?” “몰랐냐? 최고의 남자가 최고의 여자를 고른다는 거잖아. 원래는 황제가 그녀와 춤을 춰야 하는데 데뷔땅뜨와 춤을 출 기회를 무도회에 참석한 청년 들에게 넘긴 거야.” “쳇, 복잡하군.” “원래 복잡할수록 그럴 듯해 보이는 거야.” “하여간 아저씨하고 할아버지들만 바글거리는 줄 알았는데 이 젊은 것들은 어디서 다 기어 나온 거야?” 라혼은 그런 제브와 조용히 서있는 죠슈아를 데리고 트라얀 공이 있는 곳으 로 갔다. 그러자 젊은이들에게 밀려난 귀족들에게 파묻혀 있던 트라얀 공이 자신에게 접근하는 라혼을 발견하고 반색을 하며 반겼다. “오, 왔구나 라혼!” “트라얀 공을 뵙습니다.” “그래, 죠슈아도 반갑고 거기 새로운 친구는 누구냐?” “고향친구인 제이브러스입니다.” “트라얀 공을 뵙습니다.” “그래 만나게 되서 반갑구나. 라혼, 셀랑드에게 듣자니 하인을 들였다더구 나. 하인이 필요하면 내가 보내줄 수 있었을 텐데…….” “사실은 기숙사라기에 작은방을 예상했었거든요. 저택 한 채를 내어줄지 미처 몰랐어요. 기왕 말씀하신 김에 하녀 한명만 보내주세요. 집이 커서 리 즈부인이 청소하기도 버거워하니까요.” “허허허, 그러냐?” 언제나 딱딱한 표정을 짓던 트라얀 공의 미소를 처음 본 귀족들은 라혼에 대해 호기심을 보였다. 트라얀 공은 그런 귀족들에게 라혼을 소개했다. “이 아이가 제 조카딸의 아들입니다. 모두 아실 테지만 소드 마스터 하이 슬란드 백작의 장남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허어, 듣던 것보다 참으로 미남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오늘 데뷔한 영애들이 무척 실망이 크겠는데요. 벌써 결혼을 했다지요?” 라혼은 프리켑스 파에 해당하는 귀족들이 앞 다투며 저마다 한마디씩 하는 통에 꿀 먹은 벙어리 흉내를 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트라얀 공에게 황제의 시종이 와서 말했다. “트라얀 공 전하, 폐하께서 손자 분을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알았다. 곧 가겠다.” 트라얀 공의 친서의 내용을 보면 이미 약속된 만남이었지만 그래도 요식행 위는 필요했다. 그리고 라혼은 죠슈아와 제브와 함께 황제를 알현했다. “라혼 가이우스 세나데온 차이저입니다.” “제이브러스 네부카드 아담스입니다.” “죠슈아 차이저입니다.” 셋은 신성 시드그람 제국 황제 콘레로3세에게 정중히 인사하고 황제의 말을 기다렸다. “반갑구나. 라혼이라고 했던가?” “예, 폐하.” “허허허허, 만일 네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무도회장에 네 시선이 한번이라도 닿길 원하는 영애들로 넘쳐났을 거다. 그렇지 않소? 린세시아. ” “그렇습니다, 폐하. 참으로 잘생긴 젊은이입니다.” “과찬이십니다.” “아니다. 이제 물러가도 좋다.” “물러가겠습니다.” 황제는 라혼의 외모만을 언급했다. 미리약속을 하고 알현을 한 것치고는 무 척 허망한 만남이었다. ‘트라얀 공이 강권한 만남이었나?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인가? 뭐, 뚜껑을 열어보기 전엔 알 수가 없겠지…….’ 라혼은 지금 알 수 없는 일로 궁리해봐야 아무런 소득이 없음을 알고 꼬리 에 꼬리를 무는 상념을 지웠다. 정보가 없이 궁리 끝에 나온 결론은 결국 억측이기 때문이다. 유벤트 기사단 *** 그란의 축제가 끝나고 유벤트 기사단의 바스라 서열결정전이 시작되었다. 유벤트 기사단의 단장에게 바스라 서열 결정전에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유벤츠에게 순서대로 숫자가 적힌 징표가 주어지고 본관 건물에 이름이 올 라가게 된다. 그리고 유벤트 기사단의 단장이 동전을 던져 짝수번호가 도전 자가 될지 홀수번호가 도전자가 될지를 정하는 것으로 바스라 서열 결정전 이 시작된다. 도전자로 결정된 유벤츠는 결투상대를 지목하고 장소와 시간 을 정해 징표를 걸고 각기 2명씩 총 4인의 참관인이 보는 앞에서 겨루게 되 는데 한번이라도 패배하면 바스라 서열 결정전에서 탈락하는 서든데스 형식 으로 치러진다. 이때 이미 바스라를 가진 유벤츠는 여기에 참여하지 않는다 . 즉 그것은 예선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렇게 바스라를 가진 유벤츠를 포함 32인이 되면 바스라 서열 결정 토너먼트가 시작된다. 그리고 거기서 13인 의 바스라의 서열이 결정되는 것이다. “하이슬란드의 죠슈아 차이저, 다고네 트리티겔 카리스에게 도전합니다.” “카리스의 다고네 트리티겔 카리스 도전을 받습니다. 시간은 내일 아침 8 시 미류나무숲에서 참관인만 대동한 채 합니다. 동의합니까?” “동의합니다.” “그럼 내일 봅시다.” 이번 유벤트 기사단의 바스라 서열 결정전에 참가한 사람은 총 127명이었다 . 기존에 바스라를 가진 유벤츠가 9명이나 남아있었으므로 127명이 23명으 로 줄어들 때까지 결투를 계속해야 했다. 그래봐야 한 사람당 서너 번이지 만……. “짜식이 자기도 덤으로 온 주제에 인상 구기기는…….” “참아. 죠슈아는 가만히 있는데 네가 그러면 더 비참해. 그리고 유벤트 기 사단의 도련님 전체하고도 죠슈아랑은 안 바꿔!” “에? 거기에 나도 포함되는 거냐?” “글쎄, 너를 포함시킨다면 생각해 볼 문젠데.” “됐다. 그걸 물어본 내가 얼간이지. 그런데 그거 아냐? 너도 도련님 기사 단의 유벤츠중 하나라는 사실을…….” “나 도련님 맞아! 소드 마스터 아버지에, 어머니는 제국의 최고 권력자의 손녀시라고, 어디를 보나 도련님 맞잖아!” “잘났어, 정말. 죠슈아! 이런 녀석하고 잘도 지내왔구나 내 너에게 경의를 표한다.” “너도 지내다 보면 차차 익숙해질 거야.” 제브는 죠슈아가 특유의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하는 이 말이 과연 이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었다. “라혼, 지금 죠슈아가 농담한 거 맞냐?” “글쎄? 농담 같은 진담인지, 진담 같은 농담인지, 나도 알쏭달쏭할 때가 많아서…….” “…….” 죽이 잘 맞는 두 동갑내기 고향친구는 죠슈아의 진지한 농담에 대해서 거처 로 돌아갈 때까지 계속 담론을 나누었다. 내일 아침에 결투가 있었지만 이 변이 없는 한 승패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미 기사작위를 받은 자 와 그냥 유벤츠인 자가 싸웠는데 기사가 지는 일은 기사로써 죠슈아 개인의 명예뿐만 아니라 죠슈아를 기사로 인정해 작위를 준 아버지의 명예도 실추 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라혼은 죠슈아로 하여금 바스라 서열 결정전에 참 전하도록 했다. 명예가 실추될 위험보다 죠슈아가 다양한 실전 경험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어서 오세요, 도련님.” 집에 도착하자 트라얀 공이 보내준 하녀 신디가 반갑게 인사를 건네 왔다. 트라얀 공은 신디 말고도, 2명의 하녀와 1명의 남자하인을 보내주었는데 그 들은 교육까지 받은 고급하인들이었다. “식사를 준비해 드릴까요?” “부탁해, 신디.” “곧,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신디가 식사준비를 위해 주방 쪽으로 들어가자 제브가 라혼에게 물었다. “너, 감시받는 게 싫다며 스스로 하인까지 구한다고 하더니, 왜 갑자기 생 각이 변한 거냐?” “그냥 감시받는 게 여러모로 나을 것 같아서…….” “그게 무슨 소리야?” “그냥, 하인이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편하잖아. 그보다 넌 요새 나하고만 있다.” 라혼의 물음에 제브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에휴~! 그게 다 너 때문이야.” “나? 내가 어쨌게?”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거야? 아니면 진짜 모르는 거야?” “뭔 소리야?” “이 제브님이 네 오른팔이란다.” 지금 라혼의 위상은 그야말로 어마 어마했다. 본래 부터 주목받고 있는 라 혼이었지만 공개 된 자리에서 지금 현재 그란 최고의 권력자가 직접 챙겨주 는 모습을 보였고 황제까지 관심을 가진 관계로 축제이후 그 존재감이 몇 배 증폭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라혼의 곁에 있던 제브는 졸지에 라 혼의 오른팔이 된 것이다. 이미 유벤츠 사이에서 라혼은 구름 위에 있는 존 재였다. 그런 존재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 말을 건넬 수 있는 제브의 위상 은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라혼님의 친구라는 것 때문에 은근히 따돌림 당한다고?”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네가 내 친구라는 것만으로 따돌림 당하면 그럼 나는?” “당연히 따돌림 대왕이지.” 사실 라혼의 표정은 그다지 풍부한 편이 아니었다. 조각상 같은 외모에 엄 청난 배경까지 있으니 쉽사리 말을 걸기가 힘들었다. 선배들이야 선배라는 입장이 있어 몇 마디 건네기는 했지만 그것뿐이었다. “솔직히 너는 어렸을 적부터 그랬어. 지금 생각해 보면 이렇게 네가 내 친 구라는 것이 정~말! 희한하다.” 라혼이 제브의 말에 뭐라 대답하려고 하는 그때 밖에서 누군가 라혼을 큰소 리로 불렀다. “라혼!” 라혼은 밖에서 여러 명의 인기척을 느끼고, 제브, 죠슈아와 함께 밖으로 나 섰다. 라혼과 죠슈아가 머무는 기숙저택의 울타리 밖에 유벤트 기사단의 선 배들이 있었는데 한명은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고 다른 유벤츠는 그를 말리 느라 약간의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크라프, 흥분하지 않는다고 했잖아.” “그래 크라프 너는 잠시 빠져있어.” 라혼은 자신을 쏘아보는 크라프 선배의 적의어린 시선에 의아해 하며 일단 인사부터 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들. 그런데 무슨 일로…?” “라혼, 네게 물어 볼 것이 있다.” “뭡니까? 야펀 선배?” “쉬포니아를 알고 있겠지?” “물론 알고 있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너는 이미 결혼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쉬포니아 를 치근대는 거지?” 라혼은 야펀 선배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라혼의 그런 어이없어 하는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한 크라프 선배가 코웃음을 치며 비아냥거렸다. “세상에 둘도 없는 바람둥이니 쉬포니아뿐만 아니겠지? 나약한 라혼 도련 님.” 아마도 라혼이 기사수업에 나서지 않는다고 그러는 모양이었다. 라혼이 별 말 하지 않고 조용이 침묵을 지키자 옆에서 보다 못한 제브가 나서며 물었 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야펀 선배. 라혼이 쉬포니아를 치근대다니요?” “제브, 넌 빠져라. 이일은 유벤츠의 전통에 아주 중요한 일이다.” 라혼은 도무지 그들의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쉬포니아는 축제 전에 바로 야펀 선배를 따라 로즈 아카데미에서 인사를 나눈 것이 마지막 이었다 . 그러나 그것보다도 라혼이 실제로 쉬포니아를 치근댔다고 하더라도 이렇 게 떼로 몰려와 따져 물을 일은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라혼 은 제브에게 물었다. “쉬포니아가 도대체 누구냐?” “그녀는 퀸이야.” “뭐?” “그러니까 모든 유벤츠의 경애를 받는 상대라고. 쉬포니아는 캐리언 백작 의 딸인데 그녀가 태어난 순간 유벤츠 선배들이 그녀를 보호하겠다는 맹세 를 했대. 그런데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 오면서 퀸 바라니아와 그녀를 경애 했던 기사들처럼 유벤츠는 쉬포니아를 아끼고 보호하는 거지.” 라혼은 비로소 자신의 죄목을 이해했다. 비록 누명이지만 말이다. “야펀 선배, 저는 선배와 함께 축제 전 로즈 아카데미에 가서 그녀를 본 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녀를 치근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 라혼은 야펀 선배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대답은 크라프가 먼저 했다. “가증스러운. 쉬포니아가 직접 말한 사실이다. 그럼 그녀가 있지도 않는 거짓을 말했단 말이냐?” “라혼, 로즈 아카데미에서 네가 쉬포니아에게 꽃까지 주었다는 사실을 모 르는 영애는 없다. 그래도 부정할 셈이냐?” “그것은 쉬포니아를 몰랐을 때 저를 도와준 보답을 한 것뿐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유벤츠의 전통에 해가 되었다면 비록 모르고 한 일일지라도 사과 하겠습니다.” 라혼은 다소 억울한 면이 있었지만 쓸데없는 것에 집착하는 도련님들과 다 투고 싶지 않아 선선히 사과했다. 귀족으로서 이정도 저자세를 유지하는 것 은 파격에 가까웠기에 몰려온 선배 대부분은 수긍하는 듯 했다. 그러나 크 라프 선배는 그것만으로 성이 차질 않는 모양이었다. “흥! 그것은 그렇게 말로만 넘어가서 될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사과는 우 리가 아닌 쉬포니아에게 하는 것이 옳지 않나?” 크라프의 요구는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의 안색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그의 요구는 모욕과 다름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체면에 죽고 사는 귀족이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유감을 표명하는 것만으로도 파격이었다. 그런데 당사자 앞에 가서 사죄하라는 것은 진정 무리한 요구였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쉬포니아를 찾아가 사과하겠습 니다. 그녀에게 안내해 주십시오.” 그러나 라혼에게 귀족으로서의 체면 따위는 전혀 고려할 가치가 없는 것이 었다. 만일 가문을 대신해 사과하라고 했다면 받아들이기 곤란했을 것이지 만 이것은 순전히 개인의 사과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라혼은 거리낌 없 이 크라프의 요구대로 쉬포니아를 찾아 사과하기로 했다. 스스로 잘못한 것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만일 누군가에게 호의나 또 는 아무런 생각 없이 한 일이 그에게 큰 문제를 일으켰다면 사과하고 용서 를 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유벤트 기사단 *** “진짜 ‘다크 프린스’가 이곳으로 오고 있단 말이야?” “그래요, 아가씨. 크리프 도련님이 탈로스 클럽 유벤츠들과 함께 다크 프 린스에게 몰려가 그 일을 따진 모양이에요.” “바보 크리프!” 쉬포니아는 라혼이 직접 찾아오고 있다는 하녀의 말에 울상이 되어있었다. 소문난 이야기는 사실을 왜곡한 점이 많았다. 축제 이후로 다크 프린스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그는 유벤트 기사단 내에서는 물론 로즈 아카데미에서 도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다. 유명하고 주목받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 연관된 가십거리를 찾는 사람은 있게 마련이고 그런 그들에게 쉬포니아가 자랑하 던 멋진 기사에게 꽃을 받은 스토리의 주인공이 다크 프린스라는 사실은 수 십 가지 억측과 추측이 난무하기에 충분한 소재였다.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 속에서 쉬포니아는 그 대단하다는 다크 프린스에게 지속적인 구애를 받고 도 흔들리지 않는 도도한 숙녀이기 때문에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경애하는 여왕이네 하면서 접근을 꺼려하는 유벤츠의 태도가 더 피곤할 따 름이었다. 로즈 아카데미의 다른 언니들은 유벤츠들과 잘도 연애를 하는데 정작 유벤트 기사단 내부에서 살고 있는 쉬포니아는 그런 연애에서 논외의 대상이었다. 그런 와중에 비록 사실은 아닐지라도 다크 프린스와 자신의 이 야기를 듣는 것은 쉬포니아에겐 비밀스런 즐거움이었다. “칫! 쓸데없는 전통을 내세워서 죄 없는 사람을 핍박하고 모욕주다니……. ” 이번 일은 유벤츠의 일이지 쉬포니아와는 관계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 고 쉬포니아는 다른 누구보다도 다크 프린스 라혼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다 . 배경이 워낙 대단한 그인지라 아버지인 캐리언 백작도 관심 있게 주시하 고 있으며 식탁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가 주제가 된 적도 많았다. 아버지의 말을 빌면 특이하게 그는 제국 제일의 기사인 하이슬란드 백작의 아들임에 도 기사수업은 거의 참가하지 않고 학문을 닦는 일에만 몰두하며 교실과 거 처만 오가는 모범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신분 때문인지 다른 유벤츠와는 어울리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로즈주얼이 다크 프린스를 초대하려 탈 로스 클럽 전체를 초대해도 당연히 그는 볼 수가 없었다. 저번에 라혼이 탈 로스 클럽의 리더인 야펀과 같이 나타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음을 나중에 야 알았다. 쉬포니아는 자신을 이런 지경에게까지 몰아넣은 유벤츠들이 원망스러웠다. “아가씨, 그가 왔어요.” “후우~! 알았어. 곧 나간다고 전해.” “예, 쉬포니아 아가씨.” 쉬포니아는 가장 아끼는 옷을 꺼내 챙겨 입고 타는 듯이 붉은 머리를 매만 졌다. 그리고 그와 유벤츠들이 기다리는 응접실로 나갔다. “레이디 쉬포니아.” “어서 오세요, 유벤츠 라혼. 그리고 여러분…….” “제가 쉬포니아 양을 찾아온 이유는…….” “잠시만!” “…….” “유벤츠 라혼이 절 찾아오신 이유는 이미 짐작하고 있습니다. 사과하지 않 으셔도 됩니다. 저에겐 사과를 받아야하는 이유가 없습니다.” 쉬포니아의 말에 라혼은 의외라는 미소를 지었고, 크리프와 야펀 등 유벤츠 들은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가요. 그럼 저는 용서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물러가겠습니다.” “잠시만요. 그때도 그러시더니 지금도 그러시는 군요. 저는 이미 유벤츠 라혼이 결혼한 몸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렇다고 너무 몸을 사리시는 것은 실례일 수 있습니다.” “그런가요?” “저는 당신이 제 친구가 되어주었으면 합니다.” 쉬포니아는 더 이상 유벤츠 사이에서 그저 경애하는 존재로만 있고 싶지 않 았다. 그래서 즉흥적이지만 그라면 우습지도 않은 유벤츠의 전통을 상관하 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에 그렇게 제안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그 와 인연을 맺고 싶었다는 것이다. 이대로 그를 보내면 그는 분명 자신을 피 할 것이 분명하기에……. “영광입니다. 레이디 쉬포니아. 기꺼이 당신의 기사가 되어드리겠습니다. ” 그리고 쉬포니아의 직감대로 라혼에게 유벤츠의 웃기지도 않은 전통은 아무 런 상관없었다. 쉬포니아가 원했고, 라혼이 받아들였다. “쉬포니아!” “라혼, 네놈이…….” 덕분에 유벤츠 선배들은 꼴이 무척 우습게 되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뭐가 마음에 들지 않은 지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던 크리프가 한쪽 장갑을 집어던 지며 외쳤다. “라혼, 네가 감히 선배들을 우롱하다니 참을 수 없다. 결투를 신청한다.” “크리프 무슨 짓이야! 신입에게 결투라니…….” “이거 너무하는 군요. 확실하지도 않은 세간의 소문만으로 절 몰아붙일 땐 언제고 이제 와서 결투라니요. 도대체 제가 선배들에게 무슨 잘못을 했습 니까?” 라혼이 순종적이기까지 한 지금까지의 태도와는 다르게 돌연 고압적인 자세 로 도전적인 눈빛을 쏘아 보내자 유벤츠들을 순간 움찔했다. “거, 건방지다.” “뭐가?” “……!” 순간 찔끔한 사실이 스스로 창피스러웠는지 선배중 하나가 나섰지만 라혼의 말은 더욱 짧아져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라혼의 태도는 쉬포니아는 물론 제브와 죠슈아도 놀라게 했다. “크리프, 나가지.” “…….” 그렇게 한마디 던진 라혼은 먼저 등을 돌리다 문득 다시 몸을 돌리더니 거 추장스러워서 끼지 않은 부드러운 세무가죽으로 만든 장갑을 빼들고 크리프 의 뺨을 후려쳤다. -퍽! “결투는 이렇게 신청하는 거야!” “…….” “라호~온!” 그러자 크리프는 이성을 상실해 라혼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크리프는 이 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놔! 이 근본도 모르는 잡종 놈아!” 어마어마한 덩치의 죠슈아가 라혼에게 달려드는 크리프를 낚아채 움직이지 못하도록 제압했기 때문이었다. “주제도 모르는 애송아. 오늘 네게 차이저 가의 기술을 보여 주마!” 라혼은 신체가 제압된 크리프의 화를 더욱 돋웠다. 그리고 응접실을 빠져나 와 캐리언 백작의 연무장에 들어선 라혼은 허리춤에서 롱소드를 빼어들고 죠슈아에게 말했다. “됐어. 놈을 풀어줘라!” “큭!” 죠슈아는 라혼의 말에 크리프의 꺾은 팔을 풀어주며 약간 힘을 주어 밀었다 . 크리프는 꼴사납게 넘어지는 수모는 가까스로 모면했지만 앞으로 쏠린 균 형을 잡기위해 엉거주춤한 모양새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아까 크 리프가 ‘잡종’ 운운할 때 마음이 상했었던 모양이었다. “뭐하는 거야? 어서 자세를 잡으라고. 5년이나 유벤츠로 뒹굴었으면서 균 형하나 못 잡다니……. 가소롭군.” “죽인다!” 라혼의 비아냥거림에 크리프는 이성의 끈을 끊고 롱소드를 뽑아 죽일 듯이 휘둘렀다. 그러자 소드 마스터인 로카데 차이저 반 하이슬란드 백작의 검술 을 볼 기회를 얻어 성질 급한 크리프를 말리지 않은 야펀은 무지막지한 크 리프의 기세에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러나 그것은 쓸데없는 걱정인 뿐이었 다. 라혼은 내리 쪼개오는 크리프의 검세를 지켜보다 들고 있던 롱소드를 슬쩍 들어 비틀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크리프가 내리치는 롱소드가 깨지는 소리 와 함께 바깥쪽으로 튕겨나갔다. -쨍! “헉!” 그리고 라혼은 들고 있는 롱소드를 그 자리에서 가만히 뻗었다. “…….” 수십명의 사람이 모여 있는 캐리언 백작의 연무장은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 다. 라혼의 손에 들린 롱소드의 포인트(point)는 정확하게 크리프의 두 눈 사이를 점하고 있었다. “패배를 인정합니까, 크리프 선배?” “…….” 크리프는 지금 놀라운 경험을 하고 있었다. 사람이 날카로운 검끝에 가려 보이지 않는 그런 경험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환상인지 착각인지 모르겠지 만 검끝에서 흘러나온 어떤 힘이 전신을 옭아매고 끓어오르던 투지를 사그 라지게 했다. “졌다.” 그렇게 패배를 시인한 크리프는 오른손에 들고 있는 검을 땅에 꽂고는 허리 에서 검집을 풀었다. 결투는 죽음을 담보로 하는 기사들의 신성한 싸움이다 . 싸움에서 진자는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그래서 기사에게 생명과 같은 무 기를 승자에게 주는 것이다. 이는 토너먼트의 규칙이기도 한데 즐기기 위한 싸움이라도 결투는 결투이기 때문이다. 라혼은 크리프가 풀어놓은 검집에 그의 롱소드를 집어넣어 다시 크리프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 결투로써 결투전에 있었던 일은 모두 잊어주십시오. 크리프 선배!” “나는 기사다. 결투이전의 일은 이미 마음에 두지 않는다. 그리고 내 몸값 은 확실히 지불하겠다.” 싸움에서 이긴 자가 승자의 아량으로써 무기를 돌려주면 패자는 자신의 몸 값을 지불해야할 의무를 지게 된다. 이런 규칙도 토너먼트의 규칙인데 기사 개인의 취향이 반영되거나 평범한 것이라도 상대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모르는 무기를 가져가 처분하는 것보다 무기를 되돌려주고 몸값을 받는 것 이 백번 나았다. 그리고 서로의 생명을 앗으려는 진짜 결투가 아닌 다음에 야 보통은 다 이런 식으로 처리되었다. 기사들 간의 결투는 실력행사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중 하나다. 그러므로 그 결투 이전의 문제는 전적으로 승자의 뜻대로 이루어지며 결투 이전이나 결투중의 일을 거론하는 일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일이고 그것은 결투를 지켜본 공증인들의 명예까지 깎는 일이다. “선배님들 제가 유벤츠의 전통을 몰라 쉬포니아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쉬포니아는 유벤츠로서 경애하는 숙녀이니까 그것을 온당하다 생 각하여 받아들인 겁니다.” 다시 저자세로 나오는 라혼의 태도에 약간 어리둥절해하던 야펀을 비롯한 유벤츠 선배들은 그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유벤트 기사단에 소속된 기사 전원이 레이디 쉬포니아의 기사가 아닌가. “네 말에도 일리가 있다. 쉬포니아가 유벤츠의 여왕이 아니라. 유벤츠가 쉬포니아의 기사지. 인정하겠다. 라혼 가이우스 세나데온 차이저.” 한바탕 소동은 그것으로 좋게좋게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다시 라혼과 죠슈 아의 기숙저택으로 오는 길에 제브가 물었다. “야, 라혼! 아까는 무슨 배짱으로 그렇게 막나간 거냐?” “배짱? 배짱은 무슨…. 이 세상에서 부모님하고 누나들 빼고는 다 내 아래 야.” “나도?” “당연하지.” “…….” “배고프다. 가서 밥이나 먹자.” 라혼은 자신의 말에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짓는 제브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말했다. 레드 바론(Red Baron) 레드 바론(Red Baron) “으으으……. 춥다!” “뭐가 춥냐? 우리 아버지 영지의 봄 날씨 같은데.” 라혼이 유벤트 기사단에 입단한지도 벌써 2년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또한 이제 곧 라혼의 18세 생일이었다. “라혼 너도 웃통 벗고 수련해봐. 춥다는 말이 안 나오나.” “뭘, 죠슈아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나는 평범한 사람이야. 죠슈아 같은 괴물이 아니란 말이야!” 수련 하느라 상체를 완전히 벗고 있던 제브는 라혼이 차지한 벽난로가에 바 싹 붙어 몸을 녹이며 그렇게 말했다. “그게 다, 수련이 부족하다는 증거야. 격렬하게 몸을 움직였는데 몸이 얼 어 있다니…….” “에휴~! 내가 너랑 말을 하지 말아야지.” -덜컥! “끼야~!” “우왁!” 그때 응접실의 문이 열리며 일단의 소녀들이 들어와 제브의 잘 발달된 상체 근육을 보고는 비명을 질렀다. 제브는 날카로운 비명소리에 기겁하며 라혼 의 무릎을 덮고 있던 담요를 빼앗아 몸을 가렸다. “제브, 넌 어쩜 그렇게 매너가 없니? 로열 살롱이 너 혼자 쓰는 곳도 아닌 데.” “멋대로 로열 살롱이라고 갖다 붙이기는……. 쉬포니아 여기는 엄연히 라 혼과 죠슈아의 개인 기숙저택이라고…….” “어쭈! 이게…….” “사교계에 데뷔했으면 얌전하게 있을 것이지. 남자들의 거처를 들락거리기 는…….” “뭐야? 너 말 다했어!” 쉬포니아와 제브는 처음에는 무척 어색해 하더니 한번 말을 트고 친해진 뒤 로 너무 사이가 좋아져 버렸다. 라혼이 거처로 쉬포니아를 초대한 이후 쉬 포니아의 친구들, 그러니까 유벤트 기사단 내부가 궁금했던 로즈 아카데미 의 영애들과 특히 로즈주얼 아가씨들이 출입하면서 라혼의 거처는 로열 살 롱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유벤츠 사이에서 명물이 되었다. 꽃이 있으면 벌과 나비가 꼬이기 마련이고, 그런 유벤츠들과 함께 로열클럽 이란 비공식 클럽까지 생겼다. 물론 그 무리의 중심은 다크 프린스 라혼과 유벤츠 퀸 쉬포니아였다. 그리고 로열살롱의 유명한 것들 중 하나가 유벤츠 최고참 제브와 쉬포니아의 한 치 양보가 없는 말싸움이었다. 평소 둥글둥 글한 성격의 제브와 활달하지만 다른 곳에선 얌전한 숙녀인 쉬포니아의 망 가진 모습을 구경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쉬포니아가 오 늘 데려온 처음 보는 여자아이들은 그런 쉬포니아의 모습이 신기할 지도 모 르겠지만 항상 그들의 모습을 구경하던 라혼은 이 지겨운 싸움을 중단 시켰 다. “너는 가서 옷이나 입어!” “우악~! 라혼!” “엄마~!” 라혼은 제브의 상체를 가려주던 담요를 빼앗아 버린 것이다. 그러자 제브는 근육이 붙어 제법 두툼해진 팔로 상체를 가리며 2층으로 뛰어 올라갔고, 쉬포니아가 데려온 소녀들은 벌거벗은 남자의 모습에 약한 비명을 질렀다. 어쨌든 제브와 쉬포니아의 말싸움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언제 철들려는지…….” “날씨가 쌀쌀한데 어쩐 일이야?” “겸사겸사, 인사해 여기 내 사촌동생 카렌, 지젤, 그리고 율리아나.”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라혼입니다. 숙녀분들.” “카렌입니다.” “지젤이에요.” “율리아나입니다.” 보랏빛 머리의 카렌과 화려한 금발의 지젤은 비슷한 또래였지만 쉬포니아처 럼 선명한 붉은 머리에 크고 아름다운 초록 눈동자를 가진 율리아나는 무척 어려 보였다. “카렌과 지젤은 이번에 로즈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되었고, 율리아나는 잠 시 놀러온 사촌이야!” “그렇구나.” “그리고 참고로 말해두는데 황제 폐하의 손녀라고…….” “와우! 그럼 공주님이네. 다시 한 번 인사드립니다. 프린세스 율리아나!” 라혼의 멋지고 정중한 궁정식 예절에 율리아나의 볼이 잘 익은 사과 처럼 달아올랐다. “속지 마, 율리아나! 다크 프린스의 마음은 그 머리카락의 그것처럼 시커 멓다고…….” “뭐야! 너무하잖아! 사람을 앞에 두고…….” “너는 보는 여자마다 무조건 작업 걸잖아.” 그랬다. 바람둥이로 소문난 라혼은 아름다운 아가씨들에게 이것저것 선물하 기를 좋아했는데 크지 않은 자그마한 선물에 감동해 라혼에게 반한 소녀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리고 가끔은 직접 솜씨를 부려 요리까지 대접하기도하 고 시간이 늦어지면 집 앞까지 에스코트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라혼이 여자아이들과 어울리는 것과 소녀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당사자들은 설렘 때문에 며칠 밤을 새기도 한다는 것이다. “솔직히 라혼, 네가 그러는 것은 저주야, 저주!” “너무하네! 저주라니…….” 그렇게 쉬포니아와 그녀의 사촌여동생들 뒤로 약속 같은 것도 없었지만 라 혼을 무슨 영웅처럼 따르는 후배들과 친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지금 유 벤트 기사단은 물론 로즈 아카데미에서도 수업은 없었다. 아마도 겨울 추위 가 풀리기 전까지는 계속 그런 상태일 것이다. 그란의 겨울은 그다지 춥지 는 않았지만 난방이 없는 공간에서 가만히 앉아 수업을 하거나 쌀쌀한 바람 이 부는 연무장에서 수련하기에 그다지 좋은 날씨는 아니었다. 라혼의 기숙 저택 이른바 로열 살롱에 2십여 명의 인원이 모이자 제브가 말했다. “라혼, 뭐 먹을 만한 거 없냐?” “없어.” “그럼, 뭐 좀 만들어봐!” 제브의 말에 응접실에 모인 유벤츠들이 시선에 기대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다크 프린스의 로열클럽의 또 하나의 명물은 라혼의 요리솜씨였다. “글쎄……. 창고에 소시지가 남은 것이 있는데 그걸 구워볼까?” 라혼은 직접 창고에 들어가 소시지 꾸러미를 들고 나와 벽난로에서 벌겋게 달아오른 숯을 꺼내 깨진 항아리에 담고 소시지를 굽기 시작했다. 단순히 굽는 바비큐였지만 소시지가 구워지는 고소한 향기가 응접실을 가득 채우자 여기저기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라혼, 아직 멀었냐?” “글쎄 이대로도 맛있지만 소스가 더해지면 더 맛있겠지…….” 라혼은 주방으로 들어가 능숙한 솜씨로 향신료를 다듬어 버터와 크림, 치즈 등을 섞어 소스를 만들었다. 그리고 응접실로 나와 소시지에 소스를 발라 가며 숯불에 구워냈다. 사실 손님을 맞는 응접실에서 요리를 하는 것은 그 다지 올바른 것은 아니었지만 라혼은 그것에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라혼은 알맞게 구워진 소시지들을 비스듬히 반으로 잘라 자그마한 나무꼬챙이에 끼워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숙녀들이 있는데 접시에 담아주면 안될까?” “그냥 잡수셔! 겨우 소시지 반개를 먹으면서 식기까지 사용해야 되겠냐? 어차피 응접실에서 음식 해먹는 것도 그런데? 정 거북하면 먹지 말던가?” “어어! 누가 뭐랬냐? 그냥 그렇다는 거지.” 제브는 라혼이 소시지 꼬치를 빼앗으려는 시늉을 하자 몸을 뒤로 빼며 소시 지를 한입 베어 물었다. 그러자 지극히 단순한 소시지 바비큐였지만 적당히 구워진 소시지를 깨물자 안에 맛있고 따뜻한 육즙이 입안에 가득 퍼지며 기막힌 감칠맛을 냈다. 특히 겉에 발라진 매콤한 소스의 맛이 더해져 더할 나위없는 요리가 되어 있었다. “음~! 이거 맛있네. 이거 혹시 무슨 마법 아니냐? 어떻게 네 손에 닿으면 뭐든지 맛있냐? 이번 봄 축제에 10만 골드의 요리사 콘테스트에 나가면 당 장 우승할 거야.” “그 말이 맞아!” “맛있어요. 라혼 선배!” “아아~! 그만들 하셔 오늘은 여기까지니까.” “우우우~! 너무해.” 그러나 소년과 소녀들은 알았다. 라혼이 차갑고 산뜻한 과일 사베트를 만들 어 줄 것임을……. 그리고 오늘도 어제처럼 흥겹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것 임을……. 라혼의 거처가 이렇게 유벤츠들과 로즈 아카데미의 영애들이 모이는 장소가 된 이유는 단한가지 즐거웠기 때문이었다. 라혼의 배경이 워낙 대단하다보 니 가문을 들먹이는 아이들이 없었다. 그리고 유벤트 기사단 불멸의 바사라 1이자 역대 최강자라 불리는 죠슈아의 고아였던 본래 신분이 어느 정도 알 려졌기에 아버지가 모시는 군주의 아들을 따라 덤으로 온 아이들도 주눅 들 지 않았다. 맛있는 요리와 쾌활한 제브의 입담은 분위기를 흥겹게 만들었고 , 응접실에서 소시지를 굽고 식기를 사용하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격식에서 벗어난 특별함이 있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하나둘 아이들이 모이고 입소문 이 퍼지면서 로열 클럽이라는 비공식 명칭까지 생겼다. 그리고 오늘도 시간이 지날수록 손님이 점점 많아질 뿐 줄어들지는 않았다. -와하하하하하……. “그래서 말이야, 레이디 라혼은 남편을 위해 요리 솜씨가 좋아졌다는 전설 이 있지.” “그 얘기 그만 좀 우려먹어라. 듣는 사람도 지겹겠다.” “애들아 지겹냐?” -아니오! “거봐! 재미있다고 하자나.” “으이구!” 그렇게 그날도 흥겨운 하루가 지났다. *** “가온, 여기는 뭐 하러 온 거야?” “이곳에 누님이 있어서 찾아와 본거야.” 유벤트 기사단의 정문으로 붉은 머리에 붉은 기가 감도는 크림슨 아이즈를 가진 사내와 평범한 갈색머리에 평범하게 생긴 건장한 사내가 말머리를 나 란히 하며 들어섰다. 가슴엔 똑같이 포효하는 붉은 사자 문장이 그려진 옷 을 입은 두 사내의 당당하게 가슴을 편 도도한 자세는 그들의 자신감을 대 변해 주는 듯 했다. “누님?” “어머니는 다르지만 내겐 아주 소중한 분이지.” “그렇군. 그보다 이번에 프린든 왕국과 전쟁은 아마 아주 험 할 거야.” 갈색머리의 사내는 붉은 머리의 사내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내 화제 를 바꾸었다. “그렇겠지. 공작이 프린든 왕국의 도발을 적당한 선에서 처리할 생각 없어 보였으니까. 저번에 프린든의 반쪽만 얻은 것은 순전히 힘이 부족해서였어 . 하지만 공작은 아예 이번엔 프린든 왕국의 씨를 말릴 작정을 할 가능성이 크지.” “프린든 놈들도 멍청하지. 강철의 피가 흐르는 아이언 듀크를 감히 도발할 생각을 하다니. 하여튼 이번 전쟁의 규모는 저번의 다섯 배는 될 거야. 아 니 더 될지도 모르지…….” “그렇겠지.” “그보다 가온, 이번엔 영지를 받으라고, 언제까지 전쟁터를 쫓아다닐 수는 없잖아. 영지야 은퇴할 때까지 대리인을 세워서 관리하게 하면 되잖아. 자 네나 나나 늘그막에 비빌 언덕이 있어야지.” 붉은 머리의 사내 가온은 오랜 친우의 말에 쓴 웃음을 지었다. 전장에서 지 금까지 전장에서 구르며 살아오던 자신들이었다. 언제어디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 판국에 노후를 걱정하는 그의 말이 의미심장했다. “글쎄, 생각해보지. 하지만 프린든의 새 국왕이 공작의 반응을 예측하고도 도발한 것을 보면 꿍꿍이가 있지 않겠어. 모르긴 몰라도 바이나 공국과 시 오나 왕국 중 하나와 동맹을 맺고 있을 걸. 아니면 둘 다일 수 있지.” 프린든 왕국은 7년 전 갤 공의 주도로 이루어진 신성 시드그람 제국과의 ‘ 1년전쟁’의 치욕을 씻기 위해 이를 갈며 전쟁을 준비했다. 갤 공도 그것을 짐작하고 정전을 협의하는 강화가 이루어 그 순간부터 7년이라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갤지역 북방 바바리안들을 토벌과 회유, 협박 등으로 후방을 안정시켜 철가면 기사단의 여력을 확보했다. 또한 그란으로 트라얀 공을 보내 제국 귀족들의 도움을 약속받았다. 프린든 왕국의 새로운 국왕 슘터는 야심만만하고 패기 넘치는 젊은이였다. 그의 아내는 시오나 왕국의 공주였고, 누이들의 남편은 바이나 공국의 유력한 귀족들이었다. 그는 1년전쟁의 강화조건중 하나였던 자치도시로 남겨 중립지역으로 놔둔 사우스포트를 사실상 손에 넣음으로써 우회적으로 조약을 파기했다. 젊은 프린든 국왕의 행보에 갤 공은 노골적인 전쟁준비를 함으로써 무언의 압박 을 가했고 그것이 지금까지 왔다. 그리고 갤 공이 선전포고를 하든 프린든 왕국이 전쟁을 선언하든 그것은 이제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전쟁은 기정사 실화가 되어 가고 있었다. 이번엔 프린든 왕국이 멸망하기 전까지 강화는 없으리란 것을 갤 공을 아는 이들은 모두 짐작하고 있는 일이었다. 레드 바론(Red Baron) *** 비교적 한가한 이른 아침, 라혼은 집에서 온 편지를 읽었다. 어머니와 루나 , 그리고 테이의 편지를 꼼꼼하게 읽어 내려가던 라혼은 이내 모든 편지를 다 읽고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도련님, 식사하세요.” “알았어. 식당에 가서 먹을 게.” “예.” 라혼은 편지의 마지막에 자신의 서명을 하고 마나를 운용하여 잉크를 말렸 다. 그리고 종이를 말아 밀랍을 녹여 붙이고 언제나 목에 걸려 있는 차이저 가의 문장이 새겨진 인장으로 표시한 후 끈으로 묶었다. 그리고 다시 비단 주머니에 담아 집에서 온 편지들이 담겨있던 편지함에 넣고 미리 준비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누이들을 위한 작은 선물을 담았다. 그렇게 그리 작지 않은 편지함을 가득채운 라혼은 뚜껑을 닫고 밀랍으로 봉인하고, 편지 함을 기름먹인 가죽주머니에 담았다. 그렇게 일을 마무리한 라혼은 편지함을 들고 방에서 나와 식당으로 발걸음 을 옮겼다. “좋은 아침입니다, 도련님.” “그래 피트, 이거 집으로 보내는 편지야.” “아이구~! 이거 묵직하군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편지는 트라얀 공에게 부탁하면 되었다. 트라얀 공은 아인윌의 갤 공과 정 기적으로 서한을 주고받았고, 서한을 지닌 전령들이 이용하는 길이 바로 하 이슬란드를 관통하는 가도였다. 지금 쓴 편지가 언제 하이슬란드의 집에 도 착할지는 모르지만 테이의 생일 이전에 도착할 것이다. 그렇게 트라얀 공이 보내준 하인 피트에게 편지함을 건네준 라혼은 식당으 로 들어섰다. “대장, 어서와.” 식당엔 죠슈아가 아침수련을 마친 모습 그대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오트밀 죽과 소금에 절인 야채, 그리고 달걀프라이, 우유 정도의 비교적 간단한 식사였다. 라혼이 자리를 잡고 식기를 반쯤 비울 무렵 죠슈아는 자신의 식 기를 깨끗이 비우고 물을 마시며 넌즈시 라혼을 불렀다. “대장.” “…….” “물어볼 것이 있는데.” “뭔데?” 라혼은 고개를 들어 평소의 그답지 않게 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한 죠슈아를 바라보았다. “이번에 프린든하고 다시 전쟁이 난다는 것 대장도 잘 알지.” “그런데?” “참전할 거야?” “안 해!” “…….” 라혼은 자신이 참전하지 않겠다는 말에 실망하는 표정의 죠슈아에게 말했다 . “나는 참전하지 않겠지만 너는 참전해야 할 거야.” “뭐?” “지금 아버지 곁엔 쓸 만한 기사가 없어. 그러니 너라도 가야지.” “저, 정말이야? 하지만…….” “나는 괜찮아. 날이 풀리면 하이슬란드로 가서 아버지와 함께 참전해서 죠 슈아 경의 이름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라고.” “왜, 참전하지 않으려는 거야? 대장의 실력이면 마스터에게도 큰 도움이 될 텐데?” 죠슈아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식사를 끝낸 라혼은 우유가 담긴 잔을 단숨에 비우며 말했다. “이번전쟁은 아무런 성과도 없는 전쟁이 될 것이기 때문이지.” “뭐?” “할아버지가 이번에도 승리하면 제국 내에서 할아버지, 아니 트라얀 공의 위치는 확고해지지. 하지만 전통적으로 제국의 귀족들은 힘이 한곳으로 쏠 리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경향이 있어. 할아버지를 열렬히 지지하는 몇몇 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싸우는 시늉만 할 걸.” “전장에서 누가 그런 명예롭지 못한 짓을 한다는 거야?” “에게너 네부카드 사이스 자작!” “……!” “그 사람은 싸움에서 이기려는 생각보다 프린든 왕국을 약탈하는데 더욱 열중했지. 그리고 모르긴 몰라도 1년전쟁 때 한몫 단단히 잡았을걸.” 죠슈아는 라혼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바로 그 에게너 자작의 밑에서 마 스터 차이저가 싸우고 명성을 얻었지 않은가? “그렇게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어. 나는 아직 전장에 나갈 준비가 되어 있 지 않은 것뿐이니까. 그보다 오랜만에 산책이라도 나갈까?” “…….” *** “가온 경, 편히 쉬었는가?” “신경 써주신 덕분인지, 아주 푹 쉬었습니다.” “허허허허, 그런가. 앉게.” 캐리언 백작은 뜻밖의 손님을 기꺼운 마음으로 환영했다. 가온 와이너 디 크니얼 남작, 일명 붉은 남작이라는 전 시드그람 대륙에서도 이름 높은 기 사인 그였기에 캐리언 백작은 오랜만에 진정한 기사를 보는 기분이었다. 아 침에 먹는 것치고는 푸짐하기 이를 데 없는 식단이 캐리언 백작이 얼마나 그를 환영하는 지를 대변했다. “와이너, 이렇게 왔으니까 그란에 머물 때만이라도 이곳에서 지내렴.” “그렇게 하죠. 누님!” “안녕하세요, 숙부.” “안녕하세요.” “오~! 나의 보석들, 쉬포니아, 율리아나.” 가온은 이제 어엿한 숙녀인 쉬포니아와 귀여운 율리아나에게 웃어 보이며 조카들의 인사를 받았다. 캐리언 백작은 황제와 나이차이가 많은 배다른 동 생이었다. 그리고 황제의 손녀인 율리아나도 가온에겐 조카가 되는데 콘레 로3세 황제의 며느리가 바로 가온의 또 다른 누이였다. 즉, 쉬포니아와 율 리아나 둘 다 가온의 조카인 것이다. 그러나 황제의 아들의 아내인 작은 누 이는 가온과 사이가 좋지 못했다. 아니 그녀가 가온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 고 있다는 것이 정확했다. 붉은 남작이라 이름 높은 가온은 정부의 아들로 서자였다. 원래는 여느 서자들처럼 귀족도 평민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기 사로써 입신하려 피나는 노력을 해야 했지만 신이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지 그의 재능은 참으로 보기 드문 것이었다. 그의 뛰어남은 솔리지 후작가문을 넘어서 언리어스 일족 전체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솔리지 가 문엔 이미 적자가 있었고 불행이도 그의 재능은 평범이하였다. 뛰어난 서자 와 부족한 적자. 당연히 후작은 물론 그의 가신들까지 그것을 걱정했다. 그 래서 가온은 가문을 떠나야 했다. 가문의 이름도 허락받지 못하고 언리어스 일족의 일원으로서도 인정받지 못한 채 자기를 뜻하는 이름인 와이너만 가 지고 세상으로 나왔다. 그리고 기사로선 수치스럽게 전문적인 용병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스스로의 실력과 역량만으로 차츰 용병기사, 프리 나이트로 서 두각을 나타내며 나름대로 명성을 얻었다. 그러던 중 가온은 군주이자 스승이었던 용병단장으로부터 타이탄급 탈로스 헬리오스와 용병단을 유산으 로 물려받아 그의 이름인 ‘크니얼’을 새로운 자신의 이름으로 삼았다. 가온 와이너 디 크니얼 남작이 된 그는 자신만의 명성을 쌓아가면서 스스로 의 실력으로 ‘가온’이란 칭호와 작위까지 얻어내고 7년전 프린든 왕국과 신성 시드그람 제국 연합의 ‘1년전쟁’에서 자신의 이름을 확고부동한 위 치까지 끌어올렸다. 그러나 세상의 문은 높았다. 그때까지 이름 없는 기사 였던 자는 소드 마스터라 하여 노른자위 같은 영지와 백작의 작위를 모두 얻었고, 가온에게 주어진 것은 그가 모시던 작자의 지독한 약탈행위에 의해 황폐화 된 땅이었다. 가온은 제국에 적대적인 그 땅의 통치를 포기하고, 다른 제국귀족에게 헐값으로 팔아 부하들에게 그들이 흘린 피와 땀의 대가 를 줄 수 있었다. “아무튼 이번에 일어날 전쟁은 그 규모가 어마어마할거야. 신성 시드그람 제국의 모든 기사들이 참전하는 전쟁이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7년 전에 프린든 왕국의 기사들도 그다지 전사한 자 가 많지 않으니까 그들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들은 이번 전쟁을 위 해 이를 갈며 준비를 하고 있었을 테니 말입니다.” “일리 있는 말이야. 하여튼 지금 그것으로 유벤트 기사단에 전역을 신청하 는 유벤츠가 많아. 모두들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자기 가문으로 돌아가려는 게지.” “그렇습니까?” “아버지 혹시 라혼도 전역을 신청했어요?” 캐리언 백작과 가온 경이 전쟁에 관해 이야기 나눌 동안 얌전히 있던 쉬포 니아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후후후, 아니다. 다크 프린스는 아직 전역을 신청하지 않았단다.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 일단 스물이 넘은 아이들은 대부분 기사단 을 떠날 것이고, 관례적으로 전쟁에 참전할 수 있는 나이가 되는 아이들도 있을 거니까.” “그렇군요.” “아마도 그 녀석은 이번 봄에 떠날 공산이 크다. 그의 아버지는 제국 유일 의 소드 마스터이지만 휘하에 거느린 기사는 얼마 없다고 들었으니까. 죠슈 아 같은 실력 있는 기사 하나가 무척 아쉬울 테니 말이다. 죠슈아가 떠나게 된다면 라혼도 같이 떠날 거야.” 쉬포니아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서운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저번에 라혼 이 단 한번 실력을 보인 적이 있었는데 다른 유벤츠의 말로는 라혼이 크리 프를 자극해 극도로 흥분상태로 몰아넣고 소드 마스터의 검술로 알려진 카 마리에 검술로 그를 무력화 시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식으로 싸워서는 라혼은 크리프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말까지 할 정도였다. 아버지 캐리언 백작의 크리프에 대한 평가는 평범하고 무난한 기사였다. 그런 크리프도 꼼수를 쓰지 않으면 당해내지 못할 라혼이 참전한다는 것은 무척 위험할 일 이었다. 그렇게 쉬포니아가 말없이 라혼을 걱정하고 있을 무렵 가온은 소드 마스터 의 아들이 유벤트 기사단에 있다는 말에 호기심이 일었다. “하이슬란드 백작의 아들이 이곳에 있습니까?” “그렇다네.” “소드 마스터인 그가 아들을 다른 곳에 보낼 리가…….” “물론, 하이슬란드 백작은 자신의 후계자를 곁에서 떠나보내는 것을 그다 지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을 테지. 하지만 그의 아내는 갤 공의 손녀일세. 그리고 라혼은 세나데온 일족의 이름을 가지고 있고, 그 녀석이 이곳에 머 무는 비용은 트라얀 공이 책임지고 있다네.” “다크 듀크의 의지로군요. 그런데 아까 얼핏 다크 프린스라고…….” “아아, 그거 말인가? 그거 그녀석의 별명이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고 붙여진 별명이지.” 가온은 캐리언 백작의 말투에서 그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었다. 캐리언 백작 같은 사람이 ‘그 녀석’이라고 부를 정도라면 쉬포니아와 관계가 그 다지 간단한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알기로 그의 아들은 이미 결혼을 했다던데, 그 말고 다른 아들이 또 있었나?’ *** 이렇다 할 목적지를 두지 않고 걷던 라혼과 죠슈아는 그란의 뒷골목이랄 수 있는 빈민가에 발을 들여놓았다. 귀족층과 정계에서는 지금 프린든 왕국과 의 사이에서 감도는 전운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오갔지만 그런 일 은 이런 사람들에겐 다른 세계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귀족들이 전쟁비용을 부담하느라 버거워 겨울이 되면 그들이 형식적으로 풀던 딱딱한 빵과 누더기 담요를 나눠주지 않아 겨울을 나기가 더욱 힘들어 지는 것, 그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거리와 땟물이 얼룩진 얼굴들을 한 비참한 몰골의 아 이들, 화장을 한 건지, 분장을 한 건지 모를 정도로 하얀 분을 떡칠하고 어 깨는 물론 가슴 윗부분까지 그대로 드러내 놓은 여자들, 그리고 라혼과 죠 슈아를 아니꼬운 표정으로 꼬나보는 거리의 부랑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개 중에는 깨끗하고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무리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라혼과 죠슈아를 발견하고는 자연스럽게 접근하여 정중한 어투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데이몬드라고 합니다.” “라혼입니다.” “죠슈아입니다.” “보아하니 유벤츠 같은데 길을 잃으신 겁니까?” “아닙니다.” 자줏빛 모자를 쓰고, 말끔하게 차려입은 신사처럼 보이는 사내는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다시 물었다. “그러시군요. 혹시 무슨 볼일이라도 있어서 파이스 포인트에 오신 겁니까? 말씀하시면 제가 도와줄 일이 있을 겁니다.” “그냥 산책중입니다.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우리는 산책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산책이라고요? 파이스 포인트 거리를 말입니까? 하하하하…….” “하하하하…….” 라혼의 답변에 자신을 데이몬드라고 소개한 사내는 뭐가 우스운지 웃음을 터트렸고, 사내를 보좌하듯 따르던 서너 명의 사내들도 같이 웃었다. 라혼 은 그런 사내들에게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지만 죠슈아는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뭐가 그렇게 우스운가?” “…….” 죠슈아의 거친 반응에 사내들의 웃음이 거짓말처럼 멎었고 처음 말을 걸어 왔던 데이몬드라는 자가 2미터에 육박하는 죠슈아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다 시 입가에 미소를 짓고는 정중히 사과하며 설명했다. “죄송합니다. 파이스 포인트 거리를 산책한다기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 렸습니다. 이곳은 아주 위험한 곳이죠. 강도에, 도둑에, 살인자, 부랑자들 이 득실대는 거리라서 몬스터 숲보다도 오히려 위험한 곳이죠. 이런 거리를 산책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못되죠.” “알았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실례하죠.” 라혼은 이들이 뭐하는 사람들인지 대충 짐작이 되었다. 아마도 거리를 지배 하는 갱쯤 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네 말대로 도둑들이 득실대는 거리를 귀족도련님이 지나가다 앞뒤 생각 없는 놈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일 이 복잡해지겠기에 적당히 달래서 보내려는 속셈일 것이다. 파이스 포인트 거리 내부에서야 살인이 벌어지건 불이나건 상관하지 않을 그란의 높은 분 들이지만 명문 귀족가의 도련님들이 사고를 당하면 기사단이 들이닥쳐 범인 을 잡겠다며 들쑤시고 다닐 것은 뻔했다. 어쩌면 본보기를 보인다며 아무나 잡아다 족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면 가뜩이나 고단한 삶을 사는 이들 이 더욱 고단해 질것이었다. 라혼은 굳이 빈민가를 둘러볼 이유가 없었기에 이쯤에서 물러서기로 했다. 그러나 모든 일은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가 종 종 있다. “어서 꺼져 방세를 내지 못하면 나가야지…….” “쿨럭, 쿨럭, 쿨럭……. 이봐요. 제발, 며칠만 시간을 줘요. 몸을 추스른 후에 반드시 방세부터 낼게요. 이 겨울에 어디로 가란 말이에요. 콜록.” “시끄러! 한 달이나 앓아누웠던 주제에 며칠 만에 멀쩡하게 회복하겠다고? 성황청의 성자라도 만나기 전에는 어림없어. 시끄럽게 하지 말고 꺼져! 그 리고 경고하는데 뒈지려거든 내 집 근처에서 뒈지지 마. 그랬다가는 네년 딸도 같이 저승으로 딸려보내 줄 테니까.” “제발,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라도 며칠만…….쿨럭, 쿨럭, 쿨럭!” “시끄러! 창녀 주제에 별걸 다 끄집어내내. 화대까지 계산해서 그동안 머 물게 해준 거야. 너하고는 요만큼의 빚도 남아 있지 않아! 어서 꺼져!” “악~!” 다 쓰러져가는 허름하기 그지없는 집 앞에서 병색이 완연한 여자와 수염이 덥수룩한 덩치 큰 사내가 실랑이 끝에 사내가 자꾸만 달라붙는 여자의 팔을 거칠게 잡아채 차가운 거리로 내동댕이쳤다. 그러자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힘없이 오물이 질척한 땅바닥을 뒹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러한 광경 을 유벤츠의 하얀 제복을 입은 라혼과 죠슈아가 내내 지켜보게 되었다는 것 이다. 라혼은 그들의 일에 그다지 상관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까부터 기분이 언짢 았던 죠슈아는 참지 않았다. 외할아버지 슐레 세나데온 콰이스 경에서 아버 지 로카데 차이저 반 하이슬란드로 이어진 기사도 정신은 죠슈아에게까지 이어져있었다. 본래 정의감과 책임감이 강해 자기를 위해 사고를 친 아이들 을 위해 9살 꼬맹이였던 라혼의 똘마니가 되겠다고 맹세한 죠슈아였다. 그 런 죠슈아에게 전통 기사도 정신까지 더해졌으니 저런 꼴을 보고 그냥 넘어 갈리 없다. “멈춰라!” “…….” 죠슈아는 화가 단단히 났는지 온 거리가 떠나갈듯이 고함을 지르고 성큼성 큼 걸음을 옮겨 병든 여인을 내치는 인간 같지 않은 사내에게 다가갔다. 얼 굴을 수염이 뒤덮은 사내 또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덩치였지만 죠슈아 보다는 작았다. “병들고 지친 여자를 거리로 내치다니…….” “어, 어…….” 마나유저인 죠슈아의 기세에 사내는 주춤 물러서며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라혼은 화가 머리끝까지 난 죠슈아의 팔을 슬며시 잡으며 말렸다. “대장?” “왜? 저 사내를 어떻게 하려고?” “그야 당연히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못하게 혼 줄을 내줘야지.” “그리고 그 다음엔?” “…….” “저 나쁜 남자를 때려주고 난 다음에는 어쩔 건데? 한바탕 휘젓고 집으로 돌아가 ‘나는 정의를 위해 힘을 썼다’며 혼자 흐뭇해하려고?” 라혼의 말은 죠슈아뿐만 아니라 철없는 귀족도련님을 달래서 사고가 일어나 기 전에 파이스 포인트 거리에서 내보내려던 데이몬드까지 표정을 바꾸게 하기에 충분했다. “대장 지금 그게 아니잖아!” “네가 나선 이유가 저 털북숭이 남자를 혼내는 것이 아니라 여기 이 불상 한 여자를 도와주려는 거 아니었어? 그런 거라면 그 방법부터 찾아야지. 네 화풀이는 접어두고…….” 죠슈아는 라혼의 말에 무척 당황했다. 죠슈아는 그냥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에 나선 것이었을 뿐 여자를 어떻게 돕겠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어느새 정신을 차린 여자가 간절한 표정을 지으며 애걸 했다. “도와주세요. 쿨럭, 자비로우신 기사님들 불상한 저를 도와주세요. 쿨럭, 쿨럭, 쿨럭!” “어?” 라혼은 여자의 애걸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죠슈아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 “그냥 몇 푼주고 떠나자.” “그럴 수는 없어.” “후우~! 정말 대책 없군. 그럼 어디 적당한 곳에 그녀를 맡기고 치료사에 게 그녀의 상태를 보여, 물론 비용은 기사도 정신을 발휘한 네가 책임져.” 죠슈아는 라혼의 차가운 태도에 움찔했다. 그러나 죠슈아는 라혼의 말이 최 선임을 알았다. 한동안 머물 곳을 마련해주고 병이 들었으므로 치료사에게 보이는 것 이외에 더 이상 여자에게 해줄 것은 없었다. “이봐! 이름이 뭐지?” “카린느, 카린느예요.” “나이트 죠슈아 경이 널 도와주겠다고 한다. 걸을 수 있나?” “예, 걸을 수 있어요.” “그럼 가자!” “저,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제게 딸이 있어요. 그 아이와 같이 가 면 안 될까요?” “그럼 어서 데려와라!” “예!” 여자는 라혼의 짜증 섞인 말에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어디론가 급히 사라졌 다. 그리고 얼마 후 앙상하게 삐쩍 마른 소녀의 손을 잡고 다시 나타났다. “딸인가? 이름이 뭐지?” “리디아, 리디아예요.” 라혼은 크고 푸른 눈동자에 두려움을 가득 담고 있는 삐쩍 마른 금발 소녀 를 말없이 가만히 내려다보다 살며시 안아들었다. “리디아, 몇살?” 그러나 소녀는 두려움에 떨뿐 라혼의 물음에 대답을 하지 못하다가 겨우 기 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11살.” “그렇군.” 라혼은 나이에 비해 발육이 되지 않은 소녀를 한 팔로 안아들고 소녀의 머 리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이런 곳에서 마왕의 신부를 만나다니…….’ 마왕의 신부란 마왕을 잉태할 수 있는 여자를 말했다. 그리고 신의 아이도 잉태하는 여자를 뜻하기도 했다. 말은 거창하지만 사실 그다지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순수하고 강한 영혼을 가진 여자를 의미하는 것이 기 때문이었다. 마왕이나 신이 인간의 태를 빌려 태어날 경우 숙주가 되는 여자에게 영향을 받게 된다. 나쁘게 말해서 오염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마왕의 신부라 불리는 여자의 몸을 빌려 태어나면 본래 순수한 마왕, 또는 신이 화신하게 되는 것이다. 정신체인 그들에게 순수함을 유지하는 것은 무 엇보다 중요했기에 그런 순수하고 강한 영혼을 가진 인간여자는 신체를 재 구성하느라 마력의 태반을 잃는 마족이라면 누구나 탐내는 보물이었다. “리디아가 무척 귀엽군, 카린느 내가 리디아의 후견인이 되도 좋을까?” “예?” “리디아를 내게 맡기라고.” 카린느는 라혼의 강권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심 불안했다. 그다지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는 귀족 도련님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리디아 를 원하는 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카린느 보다 더욱 곤혹스 러운 것은 다름 아닌 죠슈아였다. 불상한 여자를 돕는 것조차 달갑게 생각 하지 않던 라혼이 삐쩍 말라 볼품없는 소녀를 보자 태도를 바꿨기 때문이었 다. 어쨌든 라혼과 죠슈아는 카린느 모녀를 데리고 파이스 포인트를 빠져나 와 일단 단골술집이 된 크리스털 카슬로갔다. 라혼은 리디아를 만난 후부터 크리스털 카슬에 들려 기숙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한시도 품에서 떼어 놓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병든 카린느를 유벤트 기사단의 하녀로 고용하기까지 했다. “대장, 설마 어린 아이를 좋아하는 취미가 있는 거야?” “몰랐냐? 나 아이들 좋아해! 특히 여자아이를…….” “설마…….” 죠슈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라혼과 라혼 품에 파묻혀있는 리디아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나 라혼은 죠슈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신경 쓰지 않고 리디 아를 불렀다. “리디아!” “…….” “너는 나의 소중한 보석이다.” 리디아는 아직도 지금의 상황이 낯설었는지 경계심을 풀지 않았지만, 다만 한 가지 가슴이 콩닥거릴 만큼 멋있는 오빠가 자신을 무척 아낀다는 느낌만 은 확실히 받았다. 그리고 리디아에게 그날부터 하루하루가 새로운 나날들 이 시작되었다. 레드 바론(Red Baron) *** “뭐야? 이 사람들은 다 뭐냐? 오늘 하루 종일 집을 비우더니 이건(?) 어디 서 주워온 거냐?” “주워 오다니? 그건 운명이었어.” “이 꼬마가?” 제브는 라혼의 품이 자기 자리인양 안겨있는 리디아를 가리키며 그렇게 물 었다. “리디아는 나의 사랑스런 보석이라고…….” “혹시 걔, 니 딸이냐?” “아무리 나라지만 7살 때 애를 만들 수 있었겠냐?” “너라면 가능했을지도.” 라혼은 제브를 무시하고 리디아를 카린느에게 보냈다. “리디아, 리즈부인이 스프를 다 끓였을 테니까 그것을 가지고 엄마한테 가 서 드시게 해.” “예, 라혼님.” “제브에게도 인사하고…….” “제브님.” “어? 그, 그래…….” 제브는 리디아의 인사를 받으며 어색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소녀가 주방으로 사라지자 라혼에게 다시 물었다. “진짜 쟤 뭐냐?” “말했잖아. 내 소중한 보석이라고.”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그렇게만 알아둬. 그보다 내일도 시내에 나갈 건데 같이 갈래?” “시내에? 뭐 하러?” “리디아 옷 좀 맞추러…….” “라혼 너, 진짜 리디아를 키울 거냐? 걔는 길가에 버려진 새끼 고양이 같 은 게 아니라고.” 라혼은 제브에게 카린느가 빈민굴에 창녀라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제 브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쓸데없는 선입관을 줄 필요는 없기 때문이 었다. 물론 죠슈아에게도 리디아와 카린느의 신분 대한 이야기는 하지 말라 고 해두었다. “그거야 그렇게 하겠지만……. 에잇, 그보다 날이 따뜻해지면 귀향을 해야 할 것 같아. 죠슈아에게 들으니 너는 남아 있겠다며?” “그럴 생각이야.” “왜? 이번 전쟁은 그 규모가 엄청나다고 하는데? 일생일대의 기회라고…… .” “그래 봐야 전쟁이야. 그리고 나는 되도록이면 피는 보고 싶지 않아.” “설마 무섭다는 것은 아니겠지?” 라혼은 제브의 물음에 그의 둥글둥글한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며 조용히 말 했다. “내가 참전하고 안하고는 문제가 아니지. 하지만 제브, 무슨 일이든 두려 워하는 감정을 갖는다는 것은 좋은 거야. 고향에 돌아가면 아마도 네 형 자 니가 가문을 이어받아 새로운 아담스 경이 되어 있을 거야. 그럼 자니도 참 전을 할 것이고 너도 형을 따라 참전할지 어쩔지 모르지만 전장에서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마! 두려움을 아는 자만이 용감한 자 이니까.” “좋은 말인 것 같은데, 갑자기 웬 개똥철학?” “그러니까, 나는 전쟁이 무서워서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다는 말이지.” “뭔 소리여?” 간단하게 전장에 나서는 것이 무섭다는 말이었지만 제브는 라혼의 말속에 숨은 뜻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라혼의 무섭다는 말은 진정이었다. 진실을 외면하고 숨은 뜻을 찾으려는 제브는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어휴~! 난 모르겠다. 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냐.” “…….” 라혼은 제브의 말에 미소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여자애들에게 우리 리디아가 입을 만한 옷을 얻을 수 없을까?” “글쎄? 옷을 얻는 거야 문제 되지 않지만……. 너 혹시?” “혹시, 뭐?” “리디아를 키워서 잡아먹으려는 거 아니냐?” “다른 녀석에게 주기 아까우니까 정말 그래볼까?” “야!” 제브가 전혀 농담 같지 않은 라혼의 말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을 때 선명한 붉은 머리에 초록 눈동자를 가진 소녀가 응접실로 들어섰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는 거야?” “쉬포니아 어서 와! 지금 라혼이 정부를 들였다고.” “정부? 그게 무슨 말이야?” “어?” 제브는 쉬포니아가 응접실로 들어오자 가벼운 마음으로 농담을 던졌는데 그 녀가 의외로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자 움찔했다. “라혼, 정부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라혼이 정부를 두는 일을 네가 알아서 뭐하려고? 남자들만의 일에 숙녀가 끼어드는 것은 보기에 좋지 못해.” 제브가 그렇게 말했지만 쉬포니아는 평소완 다르게 제브를 무시하고 라혼에 게 재차 물었다. “그게 사실이야, 라혼? 정말 정부를…….” “지금 당장은 힘들지만 앞으론 어떻게 될지 모르지.” 쉬포니아는 눈의 여왕의 얼어붙은 심장도 녹일만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라혼을 보고서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쉬포니아는 내 심 안도하며 짐짓 화가 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흥! 로즈 아카데미의 모든 소녀의 마음을 훔쳤으면서 그런 마음을 품다니 책임감이 없군.” “아니지, 나는 귀부인을 경애하는 기사야. 귀부인이 원한다면 그 정도쯤이 야.” “뭐야?” “흥분을 가라앉히시죠. 레이디 쉬포니아! 그냥 그렇다는 거지, 진짜 그런 다는 것은 아니니까. 그보다 쉬포니아에게 소개 시켜줄 아이가 있어.” “흥! 그게 누굽니까? 유벤츠 라혼!” “나의 사랑스러운 보석!” “뭐?” 라혼은 의아한 기색이 역력한 쉬포니아에게 리디아를 소개했다. 쉬포니아는 앙상하게 마른 소녀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곧 맑고 투명한 리디아의 푸른 눈동자를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인사해. 나의 소중한 보석, 리디아야!” “리디아입니다.” “귀엽게 생긴 아이네. 누구야?” “말했잖아. 나의 소중한 보석이라고.” 그날부터 리디아는 로열 클럽의 마스코트가 되었다. *** “허허허허, 후견인? 라혼이 어디서 꼬마계집아이를 데려와 후견인이 되었 다고?” “그래요 아버지. 상당히 고생을 많이 한 아이 같았었는데 라혼이 한시도 품에서 떼어놓지 않는 거예요.” “허허허, 다크 프린스를 혼자 독차지한 소녀의 신분이 궁금하군.” “그건 라혼이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걔가 누구냐고 물으면 ‘나의 소중한 보석이야.’라고만 한다고요.” “재미있는 친구군.” 가온은 이곳에 온지 겨우 사흘이었다. 낮에는 거의 밖에서 이런저런 일을 처리하느라 바쁘게 돌아다니다 저녁 무렵엔 돌아와 누님의 식구들과 같이 저녁식사를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반드시 한번은 이렇게 다크 프린스라는 별명을 가진 소년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한 번도 만나본 일이 없는 상대 지만 그 소년이 벌이는 일은 하나 같이 흥미를 끌었다. “삼촌, 내일도 바쁘세요?” “왜?” “사실은 지금 아이들 사이에서 붉은 남작이 우리 집에 머물고 있는 것도 화제가 되고 있거든요.” “나보고 거길 가자고?” “쉬포니아, 숙부는 한가한 분이 아니란다.” “아닙니다, 누님. 오다가다 잠깐 들리는 일인데 뭐가 어렵겠습니까?” “와! 삼촌 최고!” 가온은 스스럼없는 조카의 행동에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지만 그런 분위기가 싫지 않았다. *** 라혼은 리디아에게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직접 대륙 공용어 교재를 만들었다. 그것은 일종의 단어카드였는데 한 면에는 단어가, 또 한 면에는 단어가 뜻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라혼은 그것을 가지고 리디아 앞에 늘어놓고 한 장을 들며 물었다. “리디아, 이게 뭘까?” “사과.” “…….” 라혼은 그림이 아닌 글자만 보고도 단번에 알아맞히는 리디아를 놀랜 눈으 로 바라보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리디아, 너 읽을 줄 아니?” 그러자 리디아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라혼은 다시 물었다. “쓸 줄도 아니?” “조금요.” 라혼은 어제 밤새 만든 교재인 단어카드가 쓸모없어졌다는 것을 알고 약간 허탈해졌다. 그리고 리디아의 어머니인 카린느의 신분이 의심스러웠다. “읽고 쓰는 법은 누구한테 배웠는데?” “엄마한테 서요.” 그리고 라혼은 그날 리디아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는 선에서 마무 리하고 카린느가 누워있는 방을 찾았다. “아! 일어나지 말고 그대로 있어요.” 그냥 침대만 덩그러니 있던 방이었지만 지금은 무척 아늑하게 꾸며져서 여 자가 사용하는 방다웠다.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집안에 드나드는 로즈 아카 데미의 영애들이 선물한 리디아의 옷들이 걸려있었다. “물어볼게 있어서 왔어요.” “제게요?” “리디아에게 읽는 법을 가르치려고 했더니 이미 알고 있더군요. 저 정도면 수준에 맞는 책만 구해주어도 될 정도로 총명한 아이더군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에 대해 물어도 되겠습니까?” “후우~! 다 말씀드리지요.” 카린느는 딸의 후견인을 자처한 젊은이가 누구인지 그의 하녀들에게 들었다 . 그리고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이곳에 출입하는 귀족가의 젊은 이들에게 그는 공공연히 리디아의 후견인이 되었음을 말했다. 그렇다는 것 은 귀족으로써 자신의 이름을 걸었다는 것을 의미하였으므로 나중에 마음이 바뀐다고 할지라도 리디아를 함부로 하거나 버리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에 딸의 신상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저는 본래 귀족가의 하녀였어요. 그러다가 임신을 했고, 그 사실이 들통 나 그 집에서 쫓겨났죠. 읽고 쓰는 법은 그때 어깨너머로 배워두었다가 리 디아에게 놀이삼아 가르쳤을 뿐이에요.” “리디아의 아빠는 누구지요?” “…….” “아니, 말하기 거북하다면 하지 않아도 됩니다.” “죄송합니다.” 라혼은 카린느가 뭔가 숨기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굳이 추궁하지 는 않았다. “치료사 말로는 이렇게 몇 달 쉬면서 요양하면 곧 회복될 거라고 하더군요 . 그런데 잠시 실례해도 될까요?” “예?” “저도 치료사 수업을 받았거든요. 한 번 진찰해보고 싶군요.” “예.” 라혼은 그녀에게 양해를 구한 후 그 자리에서 마나를 운용해 카린느를 잠들 게 하고 몸에 쌓인 노폐물을 거둬주었다. 그러자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죽 은피가 카린느의 땀구멍으로 땀과 함께 새어나왔다. 라혼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마법력과 신성력을 동시에 운용해 카린느의 몸이 더욱 빨리 몸을 회복 하게 했다. “홀리 블레스Holy Bless!” [홀리 블레스Holy Bless 신성한 축복]은 병든 자의 병을 빨리 낫게 하는 신 성주문이었다. 이제 일주일만 푹 쉬게 두면 그녀는 오랜 병마를 뒤로 하고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라혼은 신디에게 일러 뜨거운 목욕 물을 준비하라고 부탁했다. 레드 바론(Red Baron) *** 오늘은 늦잠을 잤다. 거의 정오에 이를 무렵 잠에서 깨어났으니 아까운 오 전의 한가로운 시간을 잠으로 흘려보낸 셈이다. “흐아아압!” 라혼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고 늘어지게 기지개를 폈다. 그리고 창문 을 가리 두터운 커튼을 거둬 밝은 햇빛이 방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라혼은 눈부신 정오의 햇살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내 적응하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은 되도록이면 하고 싶지 않은데…….” 라혼은 프린든 왕국과의 전쟁에 참전하는 문제로 생각이 많았다. 물론 지금 당장 참전한 의사는 없었다. 그러나 전황이 불리해져 아버지가 고전한다면 당연히 전장으로 뛰어들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라혼이 고민하는 것은 손 에 피를 묻히는 일이었다. 수천수만 아니, 수백만의 피를 보아야 하는 것이 싫었다. 라혼이 전쟁에 참전하다면 주목을 받을 것은 분명했다. 능력을 숨기다고 해 도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전장이었다. 라혼은 자신이 아는 누군가가 눈앞 에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지 않을 것임을 스스로도 잘 알고이었다. 그런 그들을 구하기 위해 힘을 쓴다면 라혼은 영웅이라 불릴 것이다. 전쟁에서 영웅이 나오는 이유는 죽음의 공포를 잊기 위한 방편이며 평범한 병사들이 기꺼이 죽음을 각오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피와 살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자는 없다. 그리고 영웅은 신이 내려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웅이 만들어지고 칭송되는 것이다. 또한 영웅에겐 피와 생명, 그리고 자신의 모든 역량을 받히는 무리가 있기 마련이고 그 추종자들로 인해 영웅은 무시할 수없는 정치력을 지닌 존재가 된다. 그리고 영웅은 그것으로 인해 외부의 적이 아닌 내부의 적과 새로운 싸움을 해야 했다. 라혼이 영웅이 되어 정치적인 힘을 가지게 된다며 라혼 의 정치행위는 ‘힘’이었다. “600년 아니 시간이 흐름이 다른 마계의 차가운 암흑공간에서 영원 같은 시간을 마왕들과 싸우면서 지냈다. 아버지를 사랑하고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어주고 싶지만, 꿀같이 달콤한 평화를 깰 수는 없지.” 라혼은 아버지나 가족들에게 제발 큰 어려움이 없기를 빌었다.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는 것은 포기할 수 있었지만 가족의 어려움을 모른 척 할 수는 없 었기 때문이다. “도련님 일어나셨네요.” “안녕, 신디.” “손님이오셨어요.” “손님?” “캐리언 백작 댁에 묵으신다던 레드 바론 가온 경이에요.” “붉은 남작이 왜?” “쉬포니아 양이 모시고 오셨어요.” 라혼은 하녀 신디의 말에 손과 얼굴을 씻고 옷을 챙겨 입은 후 응접실로 내 려갔다. 로열 살롱이란 불리는 라혼과 죠슈아의 기숙저택 응접실은 오늘따 라 유난히 많은 유벤츠들이 모여 있었다. 고향 친구이면서 얼굴보기 힘들었 던 레이스의 모습까지 보였다. “라혼, 빨리 와! 레드 바론이야! 레드 바론이 왔어.”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제브는 라혼이 위층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발견하고 어린아이 같이 상기된 표정으로 큰소리로 불렀다. 그러자 응접실 중앙서 자 리에 앉지도 않고 서있는 그대로 집주인을 기다리던 사자 갈기 같은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당당한 체구의 남자가 몸을 돌려 응접실로 들어서는 라혼 을 바라보았다. ‘크림슨 아이즈?’ 라혼은 자신을 정면으로 쏘아보는 붉은 남작 가온 와이너 디 크니얼의 피를 머금은 것 같은 진홍빛 서린 눈동자에 무시 못 할 힘이 실려 있음을 느꼈 다. ‘크림슨 아이즈’를 가진 자는 평생 살육의 멍에를 지고 살아가는 운 명을 가진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선명한 진홍 눈동자를 가진 레드 바론 은 선혈이 난무하는 전장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라혼은 무엇 때문인 지 알 수는 없지만 그가 자신 시험하고 있다는 사실은 짐작할 수 있었다. “만나게 되서 영광입니다. 유벤트 기사단의 라혼 가이우스 세나데온 차이 저입니다.” “가온 와이너 디 크니얼 남작이다.” 가온은 전장에서 적들을 위압하던 자신의 눈빛을 당당하게 받아내는 청년의 검은 눈을 보고 이채를 띠었다. 아무리 이름 높은 기사라 할지라도 자신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고 이처럼 담담한 눈빛을 보이지는 못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찾아오신 겁니까?” “쉬포니아에게 자네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래서 한번 만나보고 싶었지. ” “그러십니까? 영광입니다.” 라혼과 가온의 만남은 사실상 그것으로 끝이었다. 가온은 애송이들 틈에 끼 어서 그들의 선망어린 눈빛을 받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붉 은 남작은 라혼이란 잠자는 사자 같은 존재를 기억 한구석에 담아 두었다. *** “봤냐! 그 박력, 그 위압감!” 제브는 가온 경을 실제로 본 이후로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수십 명의 유벤츠 가운데 가만히 서있는 것만으로 존재감을 들어내는 데 진짜 붉은 사자한마리가 있는 것 같더라니까.” 확실히 가온 경의 존재감은 온실 속에 있는 유벤트 기사단의 도련님들이 보 기에 무척 대단해 보였을 것이다. 붉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전장을 휩쓰는 그의 모습을 상상만 해도 젊은 기사들의 피가 끓는 것이리라…….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좀 해라.” “그런데 라혼 너는 붉은 남작과 인사하면서 떨리지 않았냐?” “우리 아버지는 제국최강의 기사야.” “으이그~! 잘났다.” “그럼 아버지 아들인데…….” 제브는 라혼의 대꾸에 고개를 저으며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죠슈아에 게 물었다. “네가 보기에 어떤 것 같아? 그와 차이저 경을 비교해서?” 제브의 질문을 받은 죠슈아는 팔짱을 끼고 무언가 궁리를 하더니 진지한 어 조로 말했다. “가온 경은 불같이 자신을 숨기지 않는 분이고, 마스터 차이저는 바다와 같이 잔잔한 분이지.” “무슨 말이야?” “기사로서의 능력을 묻는 것이라면 소드 마스터이신 마스터가 확실히 위다 .” “죠슈아의 말이 옳아! 하지만 군대를 장군으로서의 능력은 제국은 물론 대 륙전역에 명성이 높은 용병단을 이끄는 가온 경이 높을 거야.” 제브는 죠슈아와 라혼의 평가가 옳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오늘 본 붉은 남작의 존재감은 그것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보다 너랑 이렇게 노닥거리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전역을 신청 했구나.” “응. 오른 사이스에서 편지가 왔는데 봄이 오기 전에 돌아오라는 내용이었 어.” “갑자기 왜?” “백작님이 위중하셔서 하루라도 빨리 돌아오라더군. 그래서 아마 이번 주 내로 작별을 해야 할 것 같아.” 며칠 후 제브는 고향으로 귀향했다. 그리고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유벤 츠들이 본가로 돌아가 프린든 왕국과 전쟁을 준비했다. 하지만……. “도련님, 트라얀 전하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트라얀 공이?” “급한 일입니다. 지금 당장 준비해 주십시오.” 라혼은 죠슈아는 저녁 무렵 찾아 온 트라얀 공이 보낸 기사를 따라 트라얀 공의 저택으로 갔다. 저택에 분위기는 뭔지 모르지만 심상치 않은 일이 벌 어지고 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을 만큼 술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라 혼은 응접실이 아닌 트라얀 공의 집무실로 안내되었다. “라혼입니다.” “죠슈아입니다.” “어서오너라.” 언제나 여유만만하고 서글서글하던 트라얀 공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그대 로 드러낸 채 라혼을 맞았다. “죠슈아 미안하지만 자릴 비켜주겠느냐?”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그리고 트라얀 크게 심호흡을 하며 라혼에게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흐음~! 라혼.” “…….”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 “누…….” “너의 외증조부말이다.” 라혼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에 순간 당황했다. 그러나 그 상대가 갤 공이라는 말에 조금 안심하면서도 큰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80세가 넘은 노 인이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돌아가신 분이 영향력과 지금 벌려놓은 일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본래 뿔뿔이 흩어져 따로 놀던 제국은 프린든 왕국과 전쟁을 명분으로 하나 로 묶었던 카리스마 넘치는 분이었다. 그런 분이 죽음으로써 사라졌으니 제 국은 전쟁을 앞두고 구심점을 잃은 셈이 되었다. 비록 트라얀 공이라는 걸 출한 후계자가 있었지만 트라얀 공은 강인하다는 인상보다 부드러운 인상이 짙은 인물이었다. 즉 겉보기에 존재감이 떨어지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 러나 이제 갤 공이 없는 이상 트라얀 공이 새로운 갤 공이 돼야 하지만 넘 어야할 산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급히 아인윌로 가야한다.” “알았습니다. 저도 곧 떠날 준비를 하겠습니다.” “아니, 너는 계속 이곳에 있기를 바란다.” “예?” “아버지가 돌아가신 일은 아직 극비에 붙여졌다. 나는 어쩔 수없이 돌아가 야 하지만 너는 남아 있어야 한다. 내가 네게 이 일을 말해준 것은 네가 가 족이기 때문이다.” “…….” “그러니 명심하거라. 내가 아인윌로 돌아가서 정식으로 발표를 할 때가지 절대 비밀이란 것을…….” “알겠습니다.” 라혼은 유벤트 기사단의 거처로 돌아와 다음날 아침 유벤트 기사단의 단장 인 캐리언 백작을 찾아 전역을 신청했다. “허어~! 이거 유감이군. 쉬포니아가 무척 섭섭해 하겠는데……. 자네는 전 역하지 않겠다고 들었는 마음이 바뀐 건가?” “예, 아무리 생각해도 아버지 곁에 기사들이 얼마 없어서요.” “하긴 그렇다고 들었네. 자네의 부친이 소드 마스터로 명성이 높아 여기저 기에서 찾아오는 손님이 많지만 받지 않는다는 소문은 들었네. 돌아갈 때 다시 한 번 들려주게나. 저녁식사라도 같이하세.” “괜찮습니다.” “아닐세. 그간 다른 아이들 때문에 일부러 자네를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나는 자네에게 관심이 많다네. 유벤트 기사단의 문장에 식물만 잔뜩 덧새겨 진 자네의 문장도 흥미롭고 말이네…….” 캐리언 백작은 라혼의 하얀 유벤츠 제복 가슴부위에 새겨진 문장을 가리키 며 말했다. 유벤츠의 문장은 유벤트 기사단을 졸업한 사람이 무엇을 배웠는 지 보여주는 척도였다. 그리고 대게 머리를 가만히 앉아서 쓰는 교양과목은 식물을, 헐링이나 풋볼, 폴로, 기마술 등 몸을 쓰는 과목은 동물계통의 문 장이었다. 유벤트 기사단의 문장은 어떤 과목을 이수하면 특정부분이 빨강 으로 바뀐다던지, 전체적인 변화보다 약간의 변화만 주어 얼핏 보기엔 똑같 은 문장으로 보일만큼 통일성을 유지했다. 그러나 유벤츠들은 그차이를 확 연히 구분하기 마련이었다. “초대하신다면 응하겠습니다.” “그럼 오늘 저녁 어떤가?” “좋습니다. 그럼 이따 찾아뵙겠습니다.” 할아버지 돌아가신 것은 보통문제가 넘었다.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서 전쟁이 흐지부지되는 것은 좋지만 작정하고 칼을 뽑은 프린든 왕국이 침략 자가 사라졌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였다. 그들은 잃 어버린 영토를 되찾고 복수를 해야 한다는 대의명분이 있었다. 제국은 갤 공의 죽음으로 손을 터는 귀족이 많을 것이고, 전쟁은 그들에게 하등 이익 될 것이 없는 방어적 성격이 짙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일에 나설 귀족이 라면 동부 프린든 지역에 땅을 가진 귀족들뿐이었다. 하지만 그들 또한 사 태가 불리하게 돌아가면 언제든 손을 빼면 그뿐이었다. 겨우 7년이다. 7년 이란 시간은 전쟁으로 황폐화 된 토지를 농지로 다시 개간하기에 너무 짧은 시간이다. 그것은 땅은 있지만 땅을 개간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천년(A thousand years) 겔 공이 다스리는 갤은 무척 광대한 지방이었다. 본토 신성 시드그람 제국 의 반에 해당하는 넓이에 주도인 아인윌은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거대한 대 도시였다. 차라리 하나의 왕국에 가까운 그곳을 통치하는 갤 공이 스스로 왕위에 오르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검은 공작, 강철의 공작으로 더 유명한 라마르 반트 세나데온 콰이스 폰 갤 대공의 아버지 콰이스 남작은 본래 플레이나 왕국의 신하였다가 꺼꾸러트 리고 입신했다. 왕가가 콰이스 남작이란 하급귀족에게 패배하자 왕의 복수 를 명분으로 플레이나의 대귀족들은 그를 핍박했다. 그러나 콰이스 가에겐 천만다행히도 그들은 힘을 합치지 않고 독자적으로 움직이며 때론 서로 방 해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사이가 나빠진 귀족들은 대규모의 내전이 벌이게 된다. 종래목적이었던 콰이스 가를 토벌하여 플레인 왕가의 복수를 하겠다는 명분을 사라지고 스스로 새로운 왕이 되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50여 년간의 내전이 벌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콰이스 가는 끈질기게 살아남아 갤 지방 전역을 안정시킨다. 그러나 갤 공의 손에 멸문 당한 가문에 동생을 누나를, 딸을, 손녀를 시집보냈던 가문과 그러한 가문 에서 며느리를 받아들인 이웃한 프린든 왕국의 귀족들과 사이가 좋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갤 공은 오랜 전란에 지쳐있었다. 그래서 스스로 신성 시드 그람 제국의 신하가 되어 프린든 왕국을 남북으로 압박해 섣불리 도발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갤 공은 왕이 아니었다. 갤 지방을 책임진 대공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갤 지방엔 내전에서 갤 공에게 협력해 그를 승리하게 한 대 귀족가문이 많았다. 암묵적으로 갤 공의 후계자를 새 로운 갤 공으로 인정하는 것이 있었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노쇠한 갤 공은 죽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음모로 인해 갤 공의 후계자인 트 라얀 공 또한 암살당했다. 그로써 프린든 왕국과 전쟁은 전운이 높아져만 가는 가운데 서로 눈치 보기 에 들어갔다. 갤은 갤 대로 제국은 제국대로 그 일로 인해 소란스러웠다. 제국의 황제와 의회는 프린든 왕국에 사우스포트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수준 에 새로운 평화협상을 진행 했지만 프린든은 사태추이를 살피며 다소 부담 스러웠던 갤 지방이 공중분해 되기를 은근히 기다리며 답변을 유보하고 있 었다. 그러나 최소한 철혈의 가문이라던 콰이스가는 후계자를 찾지 못하고 그대로 공중분해 되고 말았다. *** 세계 모든 도시의 왕 제도 그란이 언제부터 이 자리에 세워졌는지 정확하게 아는 이는 얼마 없다. 그러나 누구나 교양과목으로 배우는 고대 시드그람 제국사에 그란은 지금으로 부터대략 9000년 전에 세워졌다고 했다. 혹자는 신이 이 세상을 직접 지배하고 있을 때부터 존재했다고도 한다. 그것을 증 명이라도 하듯 땅을 파면 고대인의 주거 터나 건물의 잔해로 추정되는 쏟아 져 나오곤 한다. 그리고 그란은 일반인 모르는 비밀이 있었는데 그란의 지 하 깊숙한 곳에 도시가 들어설만한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특별한 사람 들만 들어갈 수 있는 시장이 있었다. 바로 도둑들만이……. “마스터, 이제 더 이상 주저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니 좀 더 두고 보는 것이 나을 거야, 좀 더 기다려봐서 그가 떠난 후에 손을 쓰는 것이 시끄럽지 않고 좋아.” “알겠습니다.” 다소 어둑어둑한 방. 선홍색의 아들다운 눈동자를 가진 은백발의 신사가 흑 발의 교활한 눈빛을 발하는 사내가 건네주는 서류를 읽고 붉은 잉크로 서명 을 하며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실크라, 네가 그 아이의 신상을 캐고 있다고 들었다.” “헉!” 실크라는 마스터의 말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쉽구나. 내가 하는 일에 실트라 네가 그토록 관심이 많을 줄이야. 하지 만 규칙은 규칙, 하루를 주겠다.” “마스터, 용서를…….” -딸깍! 실크라는 매혹적인 사내가 책상의자 에서 몸을 일으켜 세워 방 한쪽에 있는 모래시계를 돌려놓자 안색이 하얗게 탈색되며 두려움 가득한 표정으로 허 둥지둥 방을 벗어났다. 그런 실크라의 모습을 무심한 눈으로 쳐다본 은발의 신사는 조용히 누군가에게 지시했다. “하루 안에 실크라와 연관된 모든 존재를 지워라.” “마스터, 레이나는 어떻게 할까요?” “…….” 어둠속에서 들려온 물음에 선홍빛 눈동자를 가진 은발의 신사는 아무런 말 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레이나는 건들지 마라!” “알겠습니다.” *** 그란의 지하에는 거미줄 같은 동굴이 사방으로 뚫려있었는데 이곳을 잘 알 지 못하는 자는 길을 잃기 일쑤였다. 도둑들은 이곳을 도둑의 소굴(a robbe r's hideout)이라고 불렀는데 통상 ‘하이드아웃’이라 불렀다. 하이드아웃 은 도둑들의 암시장인 ‘포로스’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있는 동굴이 이 어진 지역 전체를 말했다. 누구든 이곳에 들어온 자는 나갈 수 없었으며 이 곳을 출입할 수 있는 자는 세상 모든 도둑의 왕인 시프로드의 허락이 있어 야만 했다. “레이나님 도와주십시오.” “아! 실크라, 소식은 들었습니다. 시프로드에게 하루의 시간을 얻으셨다고 요.” 진보라 빛의 매혹적이 아름다움이 풍기는 풍성한 머릿결의 고혹적이 미소를 지으며 사색이 되어 찾아온 사내를 맞이했다. “도와주십시오. 레이나님!” “훗, 저를 너무 과대평가 하시는 군요. 아무리 저라고 해도 시프로드께서 이미 결정한 일을 뒤집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제게 그 꼬마 계집애의 신상을 알아보라고 하실 때엔 일이 틀어질 경우 책임지시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물론, 그럼 말을 했지요. 하지만 제가 책임질 수 있는 일이 있고, 책임질 수 없는 일 있습니다. 당신의 문제는 이미 제가 책임질 단계가 아닌 것 같 군요.” “이이이, 창녀야! 내가 당하는 데 네년이 무사할 줄 아느냐! 나는 네 사주 를 받았을 뿐이지 않느냐. 내가 당하면서 곱게 당해 줄 것 같아!” 실크라는 레이나가 자신을 도와줄 것 같지 않다는 판단이 서자 자신의 처지 를 잃고 고래고래 소릴 질러댔다. 그러나 레이나는 고혹적인 미소를 거두지 않고 나긋나긋한 톤으로 말을 이었다. “무례하군요. 당신이 그렇게 되었는데 시프로드가 내가 꾸미고 있는 일을 모를 리가 있나요. 어쨌든 그분이 하루를 약속했으니 제가 당신의 무례를 참을 수밖에 없군요. 서두셔야 할 겁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분의 모래시 계의 모래는 계속 떨어지고 있을 테니…….” “내가 혼자 죽을 것 같아!” -챙! 싵크라는 귀신같은 솜씨로 단검을 꺼내 레이나에게 던졌지만 레이나 아름다운 육체를 싣고 있던 가로 눕는 의자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그리 고 방안에 같이 있던 그녀의 시중을 드는 시녀들조차 사라지고 모습이 보이 지 않았다. “우아아아아~!” -찌익, 찍 쫘악! 흥분한 실크라는 사방에 드리워진 천들을 찢어발기며 흉성을 터트렸다. 그 리고 그런 그의 모습을 레이나의 시녀는 은밀한 곳에서 차갑기 그지없는 눈 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흥! 멍청한 자식. 쓸데없는 짓을 하다니…….” “레이나님 실크라가 돌아갔습니다.” “됐어. 거기는 상관 말고 밀실로 가자. 그가 이번에도 날 가만 둘지 알 수 없으니까.” 레이나는 짜증스런 어투로 습하고 어두운 통로를 지나 자신만의 비밀스런 방으로 들어갔다. “마왕의 신부로 마왕을 소환하다는 것은 알겠는 데 도대체 누굴 소환하려 는 건지는 모르겠어. 마왕을 소환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피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피의 대가도 없이 소환에 응할 마왕이 어디 있냐고…….” “레이나님, 시프로드를 너무 자극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나도 알아. 하지만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마법사의 탑의 노인네 들처럼 마왕을 소환하려하는 시프로드의 행보를 지켜만 볼 수는 없었단 말 이야. 자기가 무척 똑똑한 줄 아는 멍청한 실크라 때문에 일이 더 힘들어졌 어. 당분간 눈치나 보며 지내야겠지. 일단은 시프로드는 우리 마법사들과 오랜 동맹이니까.” “그런데 파이스 포인트에 들어와 그 아이를 데려간 그가 과연 아이의 가치 를 알고 있을까요?” 아까 실크라와 고혹적이고 매혹적인 태도로 대화를 나누던 레이나는 사뭇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글쎄? 나도 그것이 궁금해. 겉으로 보기엔 불쌍한 아이여서 데려가 키우 는 동정어린 젊은 귀족가의 도련님의 행동 같았지만 파이스 포인트의 데이 몬드 패거리들에 말을 들어보면 그것이 아니거든 처음엔 휘하 기사가 아이 의 엄마를 돕는 것에 짜증을 부리다. 아이를 보고서 태도를 확 바꿨다고 했 거든. 그네들 말론 나니 어린 여자아이에게 흑심을 품는 그런류의 사람이라 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절대 그런류의 사람은 아니야.” “역시, 아이의 가치를 알고 있다고 봐야겠군요.” “무슨 수로?” “예?” “솔직히 우리도 그 아이가 마왕의 신부라는 것을 시프로드가 우리에게 가 르쳐주어서 그런 가보다 하지 누가 한눈에 그걸 알아보냐구. 미리 알고 일 부러 찾아들어간 것이면 모를까?” “…….” 시녀 사이나는 레이나의 말에 일리가 있음을 알았다. 하이드아웃의 도둑들 은 레이나를 전대 시프로드의 딸, 정부, 동생 등으로 알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도둑들은 비밀이 많았다. 그러나 레이나의 신분은 그들이 상상하 는 것과 달리 인시드로우에 있는 ‘마법사의 탑’에서 시프로드를 돕기 위 한 조력자였다. 도둑들이 훔친 물건 중 마법이 걸린 물건들도 많았고, 또 지고교 성황청이 금지하는 마법시약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암시장 포로스의 최대 고객은 다름 아닌 마법사들이었다. 도둑들과 마법사들과의 관계는 참으로 역사가 깊었 는데 인시드로우에 마법사의 탑을 다름 아닌 도둑들의 자금으로 세웠을 정 도였다. “레이나님, 아무리 생각해도 제물도 없이 마왕을 소환한다는 자체가 이해 가 되질 않아요. 오래전 오월즈 지방에 미쳐버린 마녀가 마계의 마물을 소 환하기 위한 소동을 벌였을 때도 수많은 영아들이 희생했잖아요.” “나도 그것을 나름대로 조사해 보았는데 당시엔 실패했다고 생각했지만 나 중엔 성공했었다는 사실을 알았지. 그리고 실제로 마족으로 의심되는 존재 도 있었고…….” “그런 그때 그 마족이 이곳에 있다는 말 이예요?” “그래 탑의 원로들은 그것을 의심하고 계셔. 하지만 또 의문이 생기는데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내가 필요하냐는 거지. 이미 소환된 마족을 때를 기 다려 마왕의 신부에게 심으면 되는데 말이야.” 레이나는 마법사의 탑에서 네크로맨서 수업을 받은 소서리스였다. 그녀는 시프로드의 요구에 의해 마법사들에게 은밀히 키워진 존재였다. 봉인된 마 계의 마족을 소환하는 흑마법을 전문으로 하는 그녀는 또한 공식적인 첩자 의 역할도 맡고 있었다. “메이지 레이나, 마스터게서 찾으십니다.” “……!” “…….” 레이나와 시녀로 자처하며 그녀를 돕는 여마법사들은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심장이 멎는 충격을 받았다. 비밀리 마련한 이곳은 전대 안전하리라 생각 했었는데 어느새 발각되고 만 것이다. 마치 무서운 것을 만나 머리만 숨기 고 아무도 모를 것이라 믿는 칠면조가 된 기분이었다. “레이나, 내 필요에 의해서 당신이 봉인된 흑마법를 배웠다는 것을 아오. 하지만 이번일은 너무 경솔했소.” “죄송하게 되었군요. 하지만 저는 흑마법사가 되어 영원히 이곳을 벗어날 수 없게 되었어요. 희생을 했다면 저에겐 제가 해야 할 일을 알아야할 권리 도 있는 거예요.” “무엇이 궁금하오.” “정말 마계의 문을 열건가요?” “모르오.” “…….” “그것도 계획의 일부지만 확정적이진 않소. 그대에겐 미안한 말인지 모르 나 나는 그 일을 추진하면서도 의심이 들 때가 많소. 이것은 확률이 확실한 도박도 아니고 그저 몸부림일 뿐이요. 나는 너무 오래 기다렸소. 그리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소.” “당신에게 말인가요?” “아니 우리 모두에게…….” 레이나는 선홍색 눈동자의 매혹적이 시프로드의 말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 그가 우리라고 하면 도둑들을 말하는 것이고 더 정확히는 시드그람 모든 도둑왕들의 조합인 ‘유니온’을 말했다.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하이드아웃 의 시프로드는 유니온의 총수이며 실제로 그들을 지배하는 존재였다. “무슨 말인가요?” “그것은 당신의 스승들에게 묻도록 하시오. 당신의 스승들이 겨우 내 부탁 을 받고 당신을 흑마법사로 키웠을 것 같소? 당신은 내 요구로 키워진 것이 아니라 당신 스승들이 판단으로 당신을 흑마법사로 만들어 내게 보내 준 것이오.” “…….” 천년(A thousand years) *** 축제를 얼마 앞둔 그란은 무척 술렁이고 있었다. 그러나 올해 행사는 예년 만 못했다. 프린든 왕국과의 전운이 감도는 시점이라 황제는 물론 귀족들로 전비로 막대한 자금을 소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행사는 줄었지만 규모 만은 여전히 대단했다. “라혼, 그렇게 기죽을 필요는 없잖아.” “기가 죽었다고?” 유벤트 기사단의 다크 프린스 라혼은 갤 공이 돌아가시고 트라얀 공이 비명 에 간 후 꼴이 참 우습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든든하던 뒷배경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라혼이 기가 죽을 리 없었지만 쉬포니아가 보 기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 넌 너야. 뭐가 두려워서 유벤트 기사단엔 발걸음을 하지 않는 거야 ?” “그거야! 이제 나는 유벤츠가 아니라서 그런 거잖아.” “변명하지 마! 저번에 쿠라가 한 말 때문에 그런 거잖아.” 라혼은 쉬포니아의 말에 유벤트 기사단을 떠나던 날 자신을 무슨 영웅처럼 따르던 쿠라의 말을 기억해 냈다. 라혼은 ‘불쌍하게 되었군. 눈꼴사납던 천하의 다크 프린스가 이젠 별 볼일 없게 되었으니…….’라고 한 그의 말 에 그를 무섭게 노려본 적이 있었다. 아마 그것을 쉬포니아가 보았었던 모 양이다. “그 녀석이 한말하고 내가 궁정무도회에 가는 것이 무슨 상관인데? 나는 작년에도 무도회에 가지 않았었다고…….” “정말 이럴 거야? 숙녀가 자존심까지 접으며 이렇게 부탁하는데…….” “무도회에 함께 갈 파트너라면 크라프 선배가 있잖아. 나는 지금 거기 입 고갈 옷도 옷을 살돈도 없어!” “정말 끝까지 그럴래?” “알았어. 간다, 함께 가준다.” “진작 그럴 것이지.” 라혼은 결국 쉬포니아의 강권에 항복 선언을 하고 말았다. 유벤트 기사단의 기숙저택을 나온 라혼은 자신이 손수 고용한 마부 우든의 집에 머물고 있 었는데 오늘은 식료품을 사기위해 잠시 시장에 나았다가 우연히 쉬포니아를 만났다. 유벤트 기사단을 떠난 후로 2달 반만에 만난 쉬포니아는 라혼을 보자마자 이전 궁정무도회에 자신의 파트너가 되어 줄 것을 요구했다. 라혼 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 그것을 정중히 거절했지만 쉬포니아는 막무가내로 졸라대니 라혼은 두 손을 들고 그녀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까, 우든 할아버지에게 들으니 네 말을 팔 생각이라면서?” “그래, 성하나의 값어치와 맞먹는 하는 명마니까. 그것만으로 리디아가 로 즈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까지 생활할 수 있을 거야. 그런데 문제는 말을 사줄 사람이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거지. 그렇다고 헐값으로 넘기면 내가 곤란하고 말이지…….” “그래서 어쩔 생각인데?” “챔피언십 토너먼트에 참가하는 기사들에게 가보려고.” “적당한 거간꾼에게 부탁하면 되잖아.” 라혼은 굳이 쉬포니아에게 거간꾼이 끼며 중간에 농간을 부릴 가능성이 높 다는 것을 설명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그런데 나 정말 옷이 없어.” “그냥 유벤트 기사단의 제복을 입어. 설마 그것마저 팔아치우진 않았을 테 지?” “하지만 난…….” “아직은 유벤츠야. 축제가 끝나고 새 학기가 끝나기 전까진.” “그런가? 그럼 난 가 볼께…….” “뭐, 벌써?” “무도회가 오늘 저녁 아니었어? 너나 나나 가서 준비를 해야 하잖아.” “정말! 그런 이따 봐.” 라혼은 쉬포니아와 헤어져 본래 목적인 장을 보기 위해 그란의 시장으로 들 어섰다. 고기 집에서 돼지 뒷다리를 소금에 절여 말린 생햄 서너 덩이와 잡 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쇠고기를 사고, 말린 야채와 신선한 봄 야채를 샀다. 장을 보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고, 허리춤에 롱소드를 차고 장을 보는 모습 이 어색하고 상인들의 신기한 눈총을 받아야 했지만 축제기간엔 시장이 서 지 않기 때문에 미리 한 달 먹을 것을 준비해 두어야 했다. 축제 때엔 빵과 맥주가 무료로 공급되기는 그것만으론 허기는 메울망정 만족감을 주기 힘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필요한 식료품을 모두 구입한 라혼은 자신의 말에 그것들을 싣고 우 든의 집이 있는 그란 남쪽 성문 밖을 향해 갔다. “오! 노들랜드산 우르고종 명마가 장을 보는 짐말로 이용하다니 믿을 수가 없군.” “…….” 집으로 가는 길을 재촉하던 라혼은 그 말이 들려온 곳에 시선을 주었다. 그 곳엔 상인을 짐작되는 사내가 있었는데 낯설지 않은 사내였다. “안녕하십니까? 또 만나게 되는 군요. 랑스라고 합니다.” “라혼입니다. Mr. 랑스.” “혹시 저를 기억하십니까?” “죄송하지만 상당히 오래전에 만난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그럴 만도 할 겁니다. 2년 전 이맘때 잠시 합석을 한 것이 전부였으니 말 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그때 나이든 신사 옆에 있던…….” “절 기억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자작님.” 라혼은 2년전 궁정무도회에 가기 전 퍼레이드를 구경하고 노상인과 합석해 소시지를 먹었던 것을 기억해 내고 그가 그때 말없이 앉아있던 사내라는 것 을 알 수 있었다. “외증조부 되시는 분의 일은 참으로 안 되었습니다.” “…….” “혹시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길에서 이럴 것이 아니라 자리를 옮기는 것이 어떨까요?” 라혼은 랑스라는 상인이 자신에게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을 알 았다. 그리고 대충 속내도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라혼은 그를 따라 은행 가 거리로 가 그중 한곳으로 들어갔다. ‘프린뱅크.’ 유벤트 기사단 내부에서만 생활하고 외출이라고 해보아야 산책정도로만 그 쳤던 라혼이었지만 그란에서 귀족과 평민, 부자인자와 가난한자의 격차와 차별이 무척 심한편이라는 사실정도는 느끼고 있었다. 특히 서로 이익을 다 투는 평민출신 상인들과 그란에 적을 두고 토지가 아닌 상업으로 가문의 세 를 유지하는 귀족들 사이가 나빴다. “어서 오시오, 오랜만이구려.” “다시 만나 뵙게 되는군요. 제럴드씨” “허허허허, 이 늙은이를 기억하고 있었군요. 라혼 자작님.” 랑스라는 사내가 안내한 곳엔 그때 그 노상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라혼은 지금에서야 프린뱅크의 총수에 이름이 ‘제럴드’였다는 사실을 알 았다. 프린뱅크는 제국은 물론 대륙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대한 상단이었다. 그렇게 때문에 그란의 귀족들의 위세에도 꿈쩍하지 않고 장사에 있어서만 은 대등하게 거래를 할 수 있었다. 바로 그것 때문에 귀족들이 자신들과 같 은 자리에 서려하는 평민부호를 싫어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찾으신 겁니까?” “허허허, 장사꾼이 별것 있겠습니까? 투자를 해보려고 그러지요.” “투자요?” “그렇습니다. 저는 라혼 가이우스 세나데온 차이저에게 투자를 하려합니다 .” “…….” 프린뱅크의 총수 제럴드의 말은 솔직히 의외였다. 그는 자신이 지금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 약간의 돈 을 ‘빌려’주어 도움을 준다든지 아니면 라혼이 팔려고 하는 말을 후한 값 에 사주는 정도를 예상하고 있었다. 유벤츠의 도련님들은 라혼의 집안이 쫄 딱 망한 것으로 생각했지만 자신의 본가는 차이저 가지 콰이스 가가 아니었 다. 그리고 라혼의 아버지는 소드 마스터이며 하이슬란드의 백작이었다. 다 소 위세가 꺾였을망정 집안이 망하지는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하이슬란드 는 그란에서 아인윌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지방이었다. 즉 상단의 입장에선 관계를 돈독히 해야 할 필요가 있는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지금 투자를 말하고 있었다. “제게 투자를요? 어느 정도를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얼마를 원하십니까?” “…….” ‘이것 봐라? 진짜인 모양이네. 뭐 내가 거부할 이유가 없지…….’ 라혼은 제럴드가 자신의 그릇을 시험하려 한다는 사실을 눈치체고 조건을 제시 했다. “제게 투자하려면 프린뱅크가 가진 전부와 그 열배에 해당하는 자금을 끌 어들일 수 있는 보증인정도는 되어주셔야 제대로 된 투자라고 할 수 있지요 .” “…….” “무슨…….” 제럴드는 내심 10만 골드정도를 생각하고 있었다. 10만 골드는 프린뱅크 전 체 자산에 20분의 1정도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그 정도면 하이슬란드 영 지를 지키고도 남을 엄청난 거금이었다. 그런데 그가 원하는 것은 프린뱅크 의 전부였다. 제럴드는 그의 광오하기 그지없는 배포에 뭉툭한 둔기로 한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당장은 제럴드씨가 생각한 정도만 도와주셔도 저로썬 넘치고 고맙지요. 그러나 그것은 투자가 아닌 아주 약 간의 ‘도움’일 뿐입니다.” ‘뭐야? 겨우 이 정도에 망설인다 말이지……. 뭐? 그 정도가 이용하기 딱 알맞지만…….’ 제럴드는 문득 자신의 앞에 있는 곤궁한 처지에 놓여있는 젊은이에게 오히 려 자신이 그릇을 시험받는 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 가지 질문을 던 졌다. “라혼 자작, 프린뱅크의 자산이 어느 정도인지 아시오?” “뭐한 150만 골드에서 200만 골드정도 하겠지요. 신용만으로 1000만 골드 를 끌어 쓸 수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으니까?” “뭐 대략 그 정도요. 내가 그 자금을 당신에게 투자를 한다면 당신은 그것 을 무엇을 하는데 쓸 작정이오?” “딱히 쓸데는 없지만 황금은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닙니까?” 옳은 이야기다. 황금은 많을수록 좋다. 하지만 쓸데가 없는 황금은 그저 누 런 금속 덩어리에 불과할 뿐이었다. ‘이게 뭐지? 지금 내가 놀림을 당하고 있는 것인가? 쓸데가 없는 황금을 원하면서 프린뱅크의 전부를 원해? 이건…….’ 제럴드는 깨달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아름다운 젊은이가 원하는 것이 무엇 인지를 만일 그가 노회한 능구렁이였다면 그의 요구를 듣고 금세 깨달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럴드는 지금에서야 그가 무엇을 원하는 지 알 수 있 었다. ‘설마 프린뱅크 자체를 원한 것이었나?’ 제럴드는 젊은이의 맑고 강인한 눈빛을 확인하고 자신의 짐작이 다르지 않 았음을 알았다. “제 요구에 대한 대답은 나중에 Mr. 랑스가 해도 됩니다. 저와 함께할 시 간은 그가 더 많을 테니까요. 그리고 제럴드 총수님은 원래 생각하셨던 것 을 제 아버님께 투자해 주십시오.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 제럴드는 라혼의 마지막 말에 전율이이 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가 원 하는 것이 자신이 아닌 랑스라는 것에 대해 우습지고도 않은 질투심이 일는 것에 대해 내심 당황했다. “주제를 모르는 애송이 군요. 하지만 그의 말은 일리가 있습니다. 지금 당 장은 그보단 그의 부친 쪽이 투자 상대로써 적격이지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 제럴드는 랑스의 침묵에서 그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그의 젊음이 부러웠던 적이 없었다. 라혼이란 젊은 귀족의 마지막 말은 ‘ 내 능력을 보고나서 나와 함께할지 말지를 정해라!’였다. 그리고 그 때는 아마도 자신이 노쇠해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거나 이미 하늘에 부름을 받은 이후일 것이다. 재미있는 연극을 보며 미처 클라이막스에 해당하는 부 분을 보지 못하는 그런 심정이었다. “그의 말대로 두고 봐야겠지요. 그리고 선금 차원에서 10만 골드의 황금은 그의 부친에게 투자하는 것도 좋을 겁니다. 콰이스 가가 공중 분해되어 그 에 충성하던 기사들, 특히 탈로스를 가진 기사들이 갤 공과 트라얀 공이 여 러 가지 의미심장한 행보로 직접 챙기던 라혼 자작에게 모일 가능성이 큽니 다. 소드 마스터에게 자금을 대서 그에게 힘을 실어주면 그의 말이 그저 젊 은 혈기에 치기어린 허풍에 불과할 지라도 충분이히 남는 장사가 아니겠습 니까?” “그렇구나. 우리가 원래 하려던 것도 라혼 자작이 아닌 하이슬란드 백작에 게 투자하는 것이었지…….” *** 날이 포근해지는 봄이 오자 라혼은 죠슈아를 북상하는 상단에 딸려 미리 하 이슬란드로 보냈다. 그리고 자신은 그란에 남아 일을 마무리 하고 그 뒤를 따르기로 했다. 얼굴도 보지 못한 외증조부가 돌아가시고 그분의 영향력을 생각해 볼 때 아버지 곁에 실력 있고 믿을 만한 기사가 하나라도 더 많이 있어야 했기에 그란에서 아인윌로 떠나는 상단이 출발할 때 죠슈아를 보냈 다. 원래는 같이 하이슬란드로 떠나려 했지만 하이슬란드 본가엔 카시아가 있었 다. 그리고 카시아의 영향력은 누구도 무시하지 못했다. 일단 아버지 곁을 지키는 기사들은 본래 사이스 백작가의 기사들이었고 라혼이 도망치듯 그란 에 오기까지 그들은 카시아를 끝까지 보호하고 변호하려했다. 라혼은 그녀 와 이혼하려는 것에 대해 아직도 생각의 변화가 없었지만 차이저 가의 든든 한 뒷배경이 되어주던 할아버지가 없는 지금 아버지에게 제국의 유력한 귀 족인 사이스 가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그녀를 자극할 필요 는 없었고 더더욱 카린느와 리디아를 하이슬란드로 데려갈 수 없는 것이었 다. 그래서 라혼은 두 모녀를 그란에 적당한 자리를 잡아 두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행히 그것은 늙은 마부 우든과 그의 아내 리즈가 모녀를 돌봐 주 겠다고 해서 걱정을 덜었지만 문제는 ‘돈’이었다. 그냥 생활하는 데야 큰 돈이 필요 없었지만 라혼은 리디아에게 그란에 살고 있는 귀족영애들처럼 제대로 된 교육을 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그것을 트라얀 공에게 부탁하려는 데 갤 공이 죽었다는 소식과 함께 그의 장례식장에서 트라얀 공 또한 어디 선가 날아온 독화살을 맞고 비명에 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콰이스 가가 몰락하자 그란에 콰이스 저택도 한순간 사라져 버렸다. 본래 콰이스 가는 재산이 넉넉한 가문이 아니었다. 장장 120여 년간을 피 흘리며 쉼 없 이 싸워온 가문이 재산을 모을 틈이 있었을 리 만무했다. 그란의 저택은 콰 이스 가의 세력을 믿고 자금을 댄 사람들이 마련해 준 것이었다. 일이 그렇 게 되자 지금 라혼은 집으로 돌아갈 여비조차 없는 상태였다. 게다가 그동 안의 생활비로 가지고 있던 값나가는 물건과 옷가지들을 대부분 팔아 치운 덕분에 라혼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평상복 몇 벌과 롱소드 한 자루 그리 고 노들랜드산 우르고종 말뿐이었다. 여비가 없다고 해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라혼이 아니었지만 그란에 남을 카린느와 리디아 모녀의 생계를 어떻 게든 챙겨줘야 했다. 라혼은 프린뱅크 총수 제럴드의 그 이름에 비해 허름하기 까지 한 집무실을 빠져나와 늙은 마부 우든의 집이 있는 그란 남쪽 성문 밖으로 나섰다. 그 리고 급할 것 없는 한가한 걸음으로 한 시간 정도를 걸어 집에 도착했다. “라혼!” “리디아!” 평범하기 그지없는 농가인 우든의 집에 도착한 라혼을 가장 먼저 반기는 것 은 다름 아닌 리디아였다. “나의 소중한 보석!” “끼야~! 싫어!” “싫어?” “쉬포니아 언니가 그랬어. 숙녀는 함부로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라혼은 통통하게 살이 올라 귀엽기 그지없는 리디아를 안아들고 볼에 입맞 춤을 하려다 리디아의 거부에 움찔했다. 아침까지 쉽게 허락(?)해 주었으면 서 지금 안 된다고 하면……. “쉬포니아가 찾아 왔었구나.” “응!” ‘그 녀석 쓸데없는 소릴…….’ 아마도 시장에서 쉬포니아를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니라 그녀가 직접 찾아 나 섰던 모양이다. “리디아양, 당신위해 음식을 만드는 기사에게 허락해 주십시오.” “애~! 좋아. 자!” -쪽쪽쪽쪽쪽……. “우악! 그만, 그만…….” “허락한 이상 책임져야지.” -쪽쪽쪽쪽쪽……. 라혼은 자신의 품속에서 버둥거리는 리디아를 놓아주지 않고 계속 볼에 뽀 뽀를 했다. “어이구! 도련님 그러다 리디아 볼이 다 닳아 없어지겠습니다. 그리고 노 들랜드산 우르고종 명마가 겨우 식료품을 나르는 짐말일 되다니 참!” “그렇다고 멀쩡한 말을 놔두고 내가 짐을 질 수는 없잖아.” “그거야 마구간에 늙은 노새를 데려 가실 것이지…….” 평생 말과 함께 살아온 우든은 최고의 명마가 겨우 짐말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 못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리디아, 나는 우든할아버지와 짐을 풀 테니까. 집에 들어가 있어.” “싫어 나도 같이 할래!” “그럼 이것은 리즈 부인에게 가져다 줘!” 라혼은 자신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는 리디아에게 오늘 먹을 신선한 야채를 주며 심부름을 시켰다. 신선한 야채정도야 직접 키워 먹는 농가였지만 지 난 2년간 거의 비워둔 곳이라 사람이 돌보지 않는 밭이 많아 황폐화 되어 있었다. 라혼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올 때부터 우든이 가진 밭을 갈고 여 러 가지 채소를 심었지만 그것들이 싹이 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 터였 다. “이 정도면 반년은 먹고도 남겠습니다.” “반년이요? 저는 한 달분만 산건데?” “허허허, 도련님이 사 오신 것들만 먹는 다면 그렇지요. 하지만 아무리 2 년 동안 방치된 집이지만 그래도 먹을 것은 얼마든지 있답니다.” “그런가요?” “자연에서 그냥 얻어지는 먹을 수 있는 풀이 있고 들 과일도 있지요. 그리 고 인심 좋은 이웃들이 나누어준 채소와 밀이면 그럭저럭 생활이 가능할 정 도는 됩니다.” 라혼은 우든과 함게 그가 청소해 놓은 농가의 서늘한 창고에 시장에서 사온 식료품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오늘 먹을 것만 챙겨서 창고를 나서자 리디 아가 라혼의 말과 장난치며 놀고 있었다. “너도 수고 했다.” 우든은 말의 고삐를 잡고 마구간으로 가서 익숙한 손놀림으로 등자 등 마구 를 정돈하고 말의 털을 골라주기 시작했다. 라혼은 그런 우든을 뒤로 하고 리디아와 함께 집안을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라혼, 리즈부인이 스튜를 만들 거래요.” “스튜? 그거 맛있겠군. 내가 도와 줄 것은 없어?” “리디아와 함께 ‘얌전히’ 기다리시면 되요. 그리고 그것은 이리주고요. ” 카린느는 밖으로 나서려다 라혼이 리디아와 함께 오늘 먹을 것을 들고 들어 오자 라혼의 손에 들려있는 가죽 가방을 빼앗아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그 리고 라혼은 평소대로 리디아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그네 의자에 앉아 리 디아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며 시간을 보냈다. “라혼, 그럼 축제 때까지는 여기 있는 거야?” “그래.” “그럼 리디아랑 같이 축제구경을 할 수 있는 거야?” “그래.” “와! 신난다.” 라혼은 리디아와 즐겁게 이야기 하면서도 주변을 맴도는 것이 분명한 자들 에게 무척 신경이 쓰였다. ‘내가 할아버지에게 특별취급 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왜 나까지 감시를 하 는 거지?’ 라혼은 유벤트 기사단을 나섰을 때부터 자신을 주시하는 존재가 있음을 알 았다.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갤 공과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트라얀 공의 유언장에 자신에 대한 의미심장한 언급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렇지 않 고서야 콰이스가아닌 차이저인 자신에게 감시의 눈길이 있을 리 만무했다. ‘이상하군. 설사 내게 모든 것을 맡긴다는 유언이 있었어도 한순간 와해된 콰이스 가가 무슨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손에 떨어질 것이라곤 얼 마 되지 않는 콰이스 가의 재산이 전부일 텐데?’ 라혼은 그들의 의도가 어찌되었던 일단 모른 체하며 리디아의 몸에게 자신 의 디바인 마크(Divine Mark)를 새겨두었다. 자신이 리디아를 애지중지하는 모습을 보았으니 리디아에게 위해를 가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냥 지켜만 보는 거라면 쓸데없이 들쑤셔서 일을 복잡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 “다크 프린스가 프린뱅크의 총수를 만났다고?” “그렇습니다. 마스터! 그리고 그는 자신이 거둔 두 모녀를 위해 말을 팔려 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마스터, 그는 두 모녀를 남겨두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습니 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금입니다.” “계속해 봐!” “자연스럽게 그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해줄 방법이 있습니다. 그의 말을 우 리가 팔아주는 겁니다.” 시프로드는 실크라를 대신해 자신을 보좌하는 바스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 다. “좋아. 그렇게 하지. 정 말을 살 작자가 나서지 않는다면 우리가 사두는 것도 좋을 거야.” “알겠습니다.” 시프로드는 바스텐이 자신의 집무실을 나서자 아무도 없는 어둠속에서 혼자 중얼거렸다. “바스텐에 대한 조사는 끝냈나?” “끝났습니다.” 그러자 어디선가 그 중얼거림에 대한 답변이 흘러나왔다. “실크라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그가 뒷구멍으로 모은 재산을 회수한 것을 보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뿐인가?” “아직까지는 그렇습니다.” “양호한 편이군. 레이나는?” “아직까지 아무런 움직임이 없습니다. 인시드로우의 마법사들이 뭔가 메시 지를 보낸 모양인데 그럼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그런가?” “…….” 그리고 상당한 시간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그러다 문득 시프로드가 물었다. “네가 나와 함께한지 얼마나 되었지?” “300년입니다. 아버지!” “벌써 그렇게나 되었나?” 시프로드는 공허하기 그지없는 시선을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두고 하염없이 시간을 흘려보냈다. 천년(A thousand years) *** “흠흐~흠음으…….” 라혼은 처마 밑에 놓아둔 긴 의자에 앉아 자신의 무릎을 베고 자든 리디아 의 금발머리를 쓰다듬으며 낮은 콧노래를 불렀다. 붉게 타오르는 석양의 빛 은 리디아의 하얀 볼을 빨갛게 물들이고 세상을 붉게 물들였다. 참 오랜만 에 맞는 한가한 오후였다. “차를 드릴까요?” “부탁해, 카린느.” 카린느는 석양에 물든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스스로도 주책없고 주제가 넘는다 생각하고 있었지만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아직은 어린나이임에도 딸과 자신의 보호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끌리는 것인지도 몰랐다. “여기 조금 뜨거우니까 천천히 드세요.” “고마워.” -후룩~! “딱, 좋은데? 맛있어.” 카린느는 라혼의 미소에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끼며 리디아의 발치에 앉 았다. “정말 고마워요.” “뭐가?” “전부요.” “너무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이것도 다 대가를 바라고 하는 일이니까.” “예?” 카린느는 그 말에 의문 가득한 표정을 지었지만 라혼은 조용히 석양을 바라 보았다. 그러다 문득 해가 완전히 저물어 어둑어둑해질 무렵 지나가는 말처 럼 중얼거렸다. “대가가 뭔지 가르쳐주지 않는 것이 리디아가 더 행복할거야. 리디아가 행 복해 하면 돼.” “우우웅~! 라혼…….” 라혼은 무슨 꿈이라도 꾸는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리디아를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안아들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완연한 봄 이었지만 해가 떨어지자 날이 쌀쌀해졌기 때문이다. “도련님.” “음? 무슨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리즈부인” “호호호호, 부인은요. 도련님도 참!” 리디아를 침대에 눕혀놓고 나온 라혼을 리즈부인이 찾았다. “다름이 아니라 어느 지체 높은 귀족 가에서 어린 하녀를 뽑는다고 하는데 리디아가 어떨까 해서요.” “리디아를 하녀로요?” “예, 아주 지체 놓은 가문이니 그 집에 맡겨 놓으면 도련님도 안심하고… ….” 라혼은 리즈부인의 제안에 턱을 긁적이며 쓴 웃음을 지었다. 아마도 리즈부 인은 라혼의 집안 쫄딱 망해 몰락한 귀족이 된 줄 아는 모양이다. 하지만 라혼의 행동은 리즈부인이 오해할 만도 했다. 세상의 어느 귀족이 밭을 갈 고, 자신의 품위를 유지하는 옷을 팔아 생활비를 마련하겠는가? 게다가 밭 까지 직접 갈아주고 기사신분의 상징이랄 수 있는 말까지 파니 말이다. “생각해 부셔서 감사하지만 저는 부인이 생각하는 것만큼 곤궁하지 않습니 다. 리디아를 하녀로 보내다니요. 리디아는 로즈 아카데미에 보낼 겁니다. ” “리디아를 로즈 아카데미에 말이우?” “제 아버지는 하이슬란드의 백작입니다. 다만 지금은 절 돌봐주던 외가가 힘들어져 잠시 돈이 떨어진 것뿐입니다.” “아이고, 그럼 내가 잘못 알았네. 나는 도련님의 가문이 망한 줄로만 알았 지 뭐유.” 라혼은 리즈 부인의 악의 없는 말에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귀족가의 하녀는 고급직종이었다. 기본적으로 숙식이 제공되며 급료도 여자가 다른 일을 하 는 것보다 적지 않았다. “그런데 유벤츠 도련님들은 그것을 모르나 보우. 그전까지는 좋다고 쫓아 다니더니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는 태도가 달라지니 말이우.” 확실히 그랬다. 하루가 멀다 하고 놀러오던 아이들이 갤 공과 트라얀 공의 유고 소식을 들은 후로 그다지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다소 괘심한 노릇이 었지만 라혼은 그것에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그들에 대해 그다지 놓은 평 가를 내리고 있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리디아가 상처받는 것을 우 려한 라혼은 캐리언 백작과 쉬포니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유벤트 기사단을 나섰다. 유벤츠에게 있어 제국1인자인 다크 듀크의 콰이스 가는 대단한 존 재였지만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도 하이슬란드 백작가라는 신흥귀족은 그들 이 보기에 눈 아래에 있는 존재였다. “거 여편네, 도련님에게 쓸데없는 소리 하는 거 아녀?” “이 양반이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런데…….” 그때 막 말먹이를 챙겨주고 온 우든이 들어오면서 그렇게 소리쳤다. 라혼은 두 내외의 싸움이 범지는 것을 말리며 그렇게 또 하루를 보냈다. *** 그란의 축제가 시작되었다. “우아! 라혼, 저것 봐. 꽃마차야!” “리디아, 너무 호들갑떨지 마!” “엄마는 내가 애가 뭐.” ‘역시 영혼이 강해서인가? 구김살을 찾아볼 수가 없군.’ 라혼은 처음 만났을 때와 전혀 다른 리디아의 모습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 다. “카린느, 나는 이제 약속이 있어서 여기서 가보아야 해. 크리스털 카슬 여 관에 우든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알았어요. 우리는 염려 말고 어서가보세요. 쉬포니아 양이 기다리겠어요. ” 축제가 시작되는 날 저녁엔 궁정무도회가 열린다. 그리고 라혼은 거기에 쉬 포니아의 파트너로써 참가를 하게 된다. 아직은 이른 오후였지만 미리 가서 기다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 바로 몇 달 전까지 유벤츠의 신분으로 2년이나 머물렀던 유벤트 기사단으로 들어선 라혼은 그곳 풍경이 무척이나 어색했다. “라혼, 여기는 웬일이냐? 게다가 유벤츠 정복까지 차려입고?” “…….” 라혼은 인사도 없이 말을 걸어온 상대를 바라보았다. 한때 무척 가깝게 지 냈던 미그남이었다. “미그남, 잘 있었어?” “나야 잘 있지. 그런데 무슨 일이냐?” “쉬포니아가 파트너를 부탁해서 말이지. 지금 데리러 가는 중이야.” “쉬포니아가? 왜 너한테?” “…….” “아아~!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궁정무도회 같은 공식적인 자리에 가 는데 네가 유벤트 기사단의 정복을 입고 가는 거지?” 라혼은 엉뚱한 것을 따져 묻는 미그남의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 “이거, 쉬포니아에게 부탁을 받았는데 마땅히 입고갈 옷이 없어서 말이지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유벤츠도 아닌데 유벤츠 정복은 안 되지.” “한번, 봐주라.” 라혼은 가시 돋친 말을 계속하는 미그남을 태도에 좋게좋게 넘어가려했다. 그러나 미그남은 순순히 물러서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역시, 안 돼. 당장 그 정복 벗어!” 라혼은 그의 태도에 부아가 치밀기 시작했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 인하고는 미그남을 마주보며 씩 웃었다. “왜 웃는 거야?” “내가 시간이 없어서 말이지…….” “뭐……?” -퍽! “큭!” -덥썩~! 라혼은 그대로 오른쪽 다리를 들어 미그남의 목덜미를 크게 후려쳤다. 미그 남이 보기에 라혼이 말을 하다말고 몸이 그대로 뒤로 넘어지는 것을 의아한 눈으로 보다가 뒷덜미에 큰 충격을 받고 앞으로 고꾸라지면 하얀 거품을 물고 기절했다. 라혼은 땅바닥에 내팽개쳐진 개구리처럼 뻗은 미그남을 가볍게 집어 들어 한쪽 수풀에 그대로 집어던져 버렸다. 그리곤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갈 길을 재촉했다. 이 사건의 전모를 아는 것은 오직 청명한 하늘을 날아다 니는 새와 다람쥐뿐이었다. *** 쉬포니아는 오늘 기분이 너무 좋아 날아갈 것만 같았다. 지금 이 순간 다크 프린스 라혼 자작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초저녁이라 재미없네. 오늘 데뷔하는 아이들이 나와야 조금 재미있 으려나?” “그렇겠지.” 라혼은 쉬포니아의 말에 대꾸해주며 리디아을 위해 황제의 요리사가 만든 먹음직스런 요리들을 에텔 스페이스에 챙겨 넣었다. “이게 누구야? 라혼 아니야!” “야펀 선배, 오랜만입니다.” 1년 전 유벤트 기사단을 나간 야펀이었다. “유벤트 기사단을 나왔다고 들었는데, 아니었나?” “오늘만 다시 유벤츠가 되기로 했습니다.” “그래? 그보다 반갑군.” 야펀 이바트 레아모스는 그란에 본가를 둔 레아모스 가의 장남이었다. 본래 서글서글한 성격인 그인지라 라혼이 배경이 무엇이던 그다지 신경 쓰지 않 았다. 라혼이 너무나 대단한 배경 덕에 접근하려는 사람이 없었을 때 가장 먼저 다가온 사람이고, 배경이 사라진 지금에 와서도 그다지 태도에 변화가 없었다. “그래서 쉬포니아에게 강제로 끌려나온 거란 말이야?” “강제라니. 야펀, 그게 무슨 말이야?” “취소, 취소! 모든 유벤츠가 경애하는 숙녀가 그런 말 몇 마디에 이러면 안 돼지.” “흥!” 야펀의 정확한 상황인식에 쉬포니아는 발끈했지만 야펀의 처세술은 뛰어났 다. “그보다, 라혼.” “예.” “왜 죠슈아와 같이 본가로 돌아가지 않았냐?” “여기서 해야 할일이 남아 있으니까요.” “그래? 무슨 일인지 물어도 될까? 혹시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도울게.” 라혼은 야펀 선배가 선의에 감사하며 카린느와 리디아 모녀의 이야기를 했 다. “음, 네가 최근에 어디서 어린 여자아이를 데리고 왔다는 말은 들었어. 그 아이가 문제구나.” “저는 리디아를 로즈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끝마칠 때까지 돌볼 생각입니다 .” “뭐? 로즈 아카데미라면 지금 너에게 부담되지 않겠어?” “그래서 말을 팔 생각입니다.” “네 말을 말이야? 그거 우르고 종 명마잖아. 얼마에 팔 생각인데?” “1000골드 정도는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다.” “1000골드? 하긴 그 정도 값어치는 하지. 음…….” 라혼의 말에 팔짱을 낀 채 잠시 생각에 잠기던 야펀은 “좋아! 내가 사겠어.” “선배가요?” “그래, 네 말 같은 명마는 보기에도 드무니까 기회가 있을 때 사야지.” “고맙습니다. 야펀 선배.” “뭘, 어차피 누군가는 살 말을 사주는 것뿐인데…….” 천년(A thousand years) *** “이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아주 곤욕스러워 졌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요? 나르도르프 공작.” “베리스리아에서 온 그자 말이오.” “루더 말이오?” “그자가 과연 그를 완전히 처리할 수 있겠소?” “글쎄…….” 분위기가 점차 무르익어가는 신성 시드그람 제국 황금궁전의 무도회는 오늘 사교계에 데뷔하는 아가씨들이 나옴으로써 절정으로 달아올랐다. “솔직히 나는 트란얀이 좀 더 살아주었으면 하는 심정이오.” “과연, 그런 갤에서의 혼란은 더욱 가중되겠지.” “그럼 약간에 손이라도 써두는 것이…….” “아니 그대로 둡시다. 어차피 목적한 바는 이루었소. 더 이상 흔적 남기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처사요.” 노회한 나르도르프 공작은 오늘 무도회의 레이디에게 선택되어 춤을 추고 있은 청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 젊은 친구는 트라얀이 없어도 여전히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는군.” “무슨 말이오?” “황제가 저 친구를 마음에 두고 있는 듯해서 말이오.” “황제의 후계자로 말이오?” “사실 우리의 눈을 가리려 관심 없는 듯 행동 하지만 황제에게 저보다 탐 나는 후계자가 또 없소.” “그렇군. 소드 마스터라면 그만한 가치는 하지.” “게다가 우리의 입맛에도 딱 맞는 황제감 아니오?” “그것은 좀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봅시다. 트라얀이 살아남아 우리의 존 재를 안다면 저 잘생긴 청년도 적으로 돌아설 수 있으니 말이오. 일단 지금 은 파티를 즐깁시다.” 나르도르프 공작, 레아모스 공작, 그루미아 공작은 그란에 본가를 두고 있 는 세 공작가문이다. 왕가와 황족이 없는 제국에서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대단했다. 그들 가문은 귀족의회를 이끄는 실질적인 세력으로 그란의 정가 를 암중으로 조정해 왔다. 최근 100여 년간 12명의 황제 중 8명은 그들의 의도한 대로 선출되었다. “할아버님. 나르도르프 공작 전하, 그루미아 공작 전하.” 야펀은 할아버지 곁에 그란3공작이 있음을 알고 정중히 예를 표했다. “야펀, 시킨 대로 했느냐?” “예, 라혼이 눈치 채지 못하게 말을 사주겠다고 했습니다.” “잘했다. 얼마를 원하더냐?” “1000골드였습니다.” “알았다.” “예, 그럼.” 야펀이 고개를 살짝 숙여보이고는 멀어지자 그루미아 공작이 물었다. “1000골드라면……?” “노들랜드산 우르고종 명마지요.” “그것을 라혼 자작이 가지고 있었단 말이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다크 듀크는 그를 아꼈던 모양이오.” “허! 그거 아깝군. 내가 그걸 먼저 알았다면 미리 사두는 건데…….” *** “에루리아! 이제 그만 내 파트너 돌려줘!” “너무해! 라혼하고는 이제 시작인데…….” “그래, 에루리아. 다른 사람에게도 기회를 줘야지.” 오늘의 여왕이 된 에루리아는 자신의 첫 상대로 라혼을 지목했다. 라혼이 로열 살롱에 있을 때 멤버 중 하나여서 편하기도 하고 또 가슴 한구석에 마 음을 품고 있었기에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한 상대였기 때문이었다. “에휴~! 정말 대단하다. 어쩜 하나같이 음흉한 늑대라는 것을 알면서도 노 리는 애들이 많은지 원.” “너도 그중 하나잖아!” “뭐야?” “그래서 싫다는 사람 억지로 끌고 온 거 아냐?” “이게…… 어?” 라혼은 쉬포니아의 가는 허리를 부드럽게 끌어안고는 느끼하게 말했다. “하지만 네와 춤을 추는 순간만큼은 잘 왔다는 생각이 드는데 책임져 줄 거지?” “글쎄…….” 쉬포니아는 라혼의 그런 말에 기분이 좋아졌지만 쉽게 허락하기는 싫었다. “아마도 이게 마지막이 될 것 같은데…….” “마지막? 그게 무슨 말이야?” “아까 야펀 선배가 내 말을 사주겠다고 했잖아. 여기서 처리해야 할일이 끝났으니 하이슬란드로 돌아가야지.” “그렇구나. 그게 그렇게 되는 거구나. 그럼 네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지. 자!” 라혼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자세를 잡는 쉬포니아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 중 앙으로 나가 춤을 추었다. “쉬포니아.” “왜?” “리디아를 부탁해!” “걱정 마!” “전에 말했던 대로 리디아가 13살이 되면 로즈 아카데미에 보낼 거야.” “지금 11살이니까? 2년 후네?” “…….” “많이 보고 싶을 거야!” “나도……. 하지만 진짜 떠나려면 아직 멀었어.” 쉬포니아는 라혼의 말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진지하게 나가다가도 이 런 식으로 농담을 던져왔다. 쉬포니아에게 있어 라혼은 꿈속에서 그리던 왕 자님과 다름없었다. 그것은 라혼을 아는 대부분의 소녀들도 마찬가지였다. 재미있고 편안한 그리고 은근히 설레게 하는 라혼은 그야 말로 완벽한 왕자 님이었다. 그러나 너무 완벽해서 접근할 수 없었다. 누구에게나 진지하고 똑같은 미소를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쉬포니아는 바로 라혼의 그 편안한 미소가 그를 향한 마음을 접게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 미소는 자신에게도, 제브에게도, 그를 따르는 후배들에게도 그리고 다른 소녀들에게도 똑같이 지어주는 미소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가끔 라혼이 고지식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만일 라혼이 엉큼한 바람둥이였다면 로즈 아카데미의 모든 영애들이 은밀한 불명예를 안았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 “역시 공작들이 수를 쓴 것이었군.” “그렇습니다. 폐하! 위태롭기는 하지만 콰이스 가의 철가면 기사단의 기사 들이 트라얀 공을 안전한 곳에 피신시킨 상태입니다. 갤 공의 죽음도 조사 해 보았지만 음모라기보다 노환으로 인한 자연스런 죽음일 가능성이 큽니다 .” “그렇겠지. 그래 그는 지금 어디에 있나?” “하이슬란드에 있습니다.” “하이슬란드에?” “하이슬란드에만 탈로스를 소유한 아이언 마스크 나이트가 12명입니다. 거 기에 콰이스 가가 소유한 12기, 하이슬란드 백작의 탈로스 전력 2기까지 포 함해서 26기가 있습니다.” “역시 그랬군. 하이슬란드에 갤 대공의 충신들이 모이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되었는데 트라얀 공이 거기로 피신해 있었어.” 콘레로3세 황제는 자신의 비밀 기사인 나이트 루더의 보고에 수염을 쓰다듬 으며 재작년 소년을 소개받았을 때 기억을 떠올렸다. ‘최후에 모든 것을 맡길 존재라고 했던가?’ 황제는 지금 황금궁전의 홀에서 조카딸과 춤을 추고 있는 청년을 만나 보려 는 계획을 접었다. 지금 그를 만나는 것은 앞일을 생각할 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트라얀 공이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채 살아있음에도 자신의 죽음을 공표한 이상 그대로 따라주는 것이 좋겠지.” 신성 시드그람 제국 황제 콘레로3세는 새삼 아이언 블러드(Iron Blood), 철 혈을 가진 콰이스 가의 기질에 놀라움을 급치 못했다. 다크 듀크가 죽고, 트라얀 자신은 암습 받은 상황에서 그가 선택한 것은 가문의 존속이 아니라 신하들을 살리는 길이었다. 트라얀은 자신이 암습당한 중상을 입은 그 시점에서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공표해 갤의 야심가들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그리고 그 즉시 아인윌에 있는 콰이스 가의 모든 힘을 하이슬란드로 옮긴 것이다. 그것으로 콰이스 가는 사라졌지만 다크 듀크에게 충성하던 충신들은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 은 채 새로운 보금자리를 얻는 결과를 얻었다. 그리고 지금 그의 암살을 사 주한 그란의 3공작과 황제 자신, 그리고 갤의 대영주들도 트라얀 공이 살아 있음을 알았지만 이미 모든 것은 정리된 후였다. 또한 그가 살아 있으므로 해서 내전으로 번지려던 갤의 정세는 개전 소강상태가 되어있었다. 갤 대공 의 지위는 잃었으나 그가 한 일은 결과적으로 훌륭한 결단이 된 것이다. “곧 트라얀 공이 살아있다는 소문이 퍼질 거고, 그럼 기회를 엿보던 프린 든은 땅을 치며 후회하겠군. 그리고 그란의 세 친구는 밤잠을 편히 자기는 글렀어. 허허허허 일이 아주 재미있게 되었구먼.” 천년(A thousand years) *** 라혼은 무도회가 끝나고 쉬포니아를 그녀의 집까지 바래다주고 집으로 돌아 왔다. “늦으셨군요. 즐거웠나요?” “아주 재미있었어. 그보다 리디아는?” “아까까지 라혼을 기다리다 지쳐 잠든 걸 방에 옮겨놓았어요.” “그런가? 미안한데.” 집으로 돌아오자 카린느가 잠들지 않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흐아아압! 나도 피곤하군. 카린느도 어서 가서 쉬라고.” “하지만 목욕물을…….” “그 정도는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으니까 상관 말고 들어가 쉬어. 그리고 내일 아침은 내가 준비할게.” “예?” 라혼은 거의 강권하다시피 카린느를 방으로 들여보내고는 밖으로 나왔다. 맑은 밤하늘에 별이 쏟아질듯 총총히 박혀있어 꽤나 운치가 있었지만 라혼 은 그간 깨닫지 못한 것을 발견하고 머리를 굴리느라 바빴다. ‘이건 뭐지? 나를 감시하는 눈이 늘었다. 게다가 그들은 서로 모르는 것 같다.’ 라혼은 지금 자신을 주시하는 눈이 크게 3부류라는 사실을 알았다. 축제의 열기 때문에 사람들로 북적이는 그란에서는 미처 알지 못한 사실을 한적한 곳에 위치한 우든의 집에 도착하니 비로소 알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주시를 받으면 ‘간질간질’한 어떤 느낌을 받기 마련인데 기감이 뛰어난 자에게 그것은 어느 쪽에 있는 지까지 알게 해준다. 그리고 라혼의 경우 은 밀하게 숨어있는 그들을 손바닥 보듯 훤히 알 수 있었다. ‘하나는 원래 있던 놈들이고, 둘은 오늘 늘어난 놈들인데……. 그러고 보 니 처음 놈들은 날 따라오지 않았어. 뭐 제국 귀족들이 우글거리는 황금궁 전에 있었으니 굳이 감시할 필요는 없었겠지만…….’ 라혼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다시 집 안으로 들 어갔다. 행동반경이 정해져 있는 상대라면 굳이 졸졸 쫓아다닐 필요 없이 몇 군데 장소를 정해서 감시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 다 문득……. “그런데 미그남 녀석을 손봐줄 땐, 아무도 없었잖아? 축제 퍼레이드를 구 경한다고 하지만 날 감시하려면 계속 따라와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나 라혼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만큼 어떤 결론을 내지는 않았다. 뭐, 어 차피 결론 다음 행동이라고 해보아야 모르는 척하는 것이었을 거니까. 다음날 아침. 라혼은 에텔 스페이스에 챙겨놓은 음식들을 꺼내는 것으로 식 사준비를 마치고 리디아를 깨웠다. “잠꾸러기 공주님. 어서 일어나셔야지요.” “아우웅~! 싫어 더 잘래.” “어서 일어나 맛있는 거 준비해 놓았다고…….” “맛있는 거?” 침대 속으로 파고들던 리디아는 맛있는 것이란 말에 반응을 보이며 부스스 한 얼굴로 라혼을 바라보았다. “어서 세수하고, 식당으로 와. 안 그러면 내가 다 먹어버린다.” “알았어.” 그간 궁핍한 생활을 해와서인지 리디아는 먹을 것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지금에 와선 무턱대고 먹기보다는 맛있는 것을 찾긴 했지만 말이다. 라혼은 리디아를 씻기고 손수 아름답게 빛나는 금발머리를 곱게 땋아주고 함께 식 당으로 들어섰다. “와! 맛있겠다.” 식당에 차려진 아름답기까지 한 음식들을 본 리디아는 뛸 듯이 기뻐하며 얼 른 자기자리에 앉았다. “아유! 이게 다 뭐유?” “어제 궁정무도회에 나온 음식을 조금 챙겨왔습니다.” “이 많은 것들을 말이우?” “감탄은 먹고 나서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호화롭기까지 한 아침식사를 마친 라혼은 차를 마시며 우든에게 말 이 팔렸음을 말해주었다. 우든은 지난 2년간 지극정성으로 돌본 말에게 새 주인이 생겼다는 말에 무척이나 섭섭했다. “그거 다행이군요. 그럼 이제 떠나시는 겁니까?” “별일이 없다면 축제가 끝날 때까지는 여기 있을 겁니다.” “리디아가 무척 섭섭해 하겠군요.” 그리고 라혼은 여느 때와 같이 처마 밑 긴 의자에 앉아 조용히 사색에 잠겼 다. 비록 자신을 숨어서 바라보는 놈들이 있지만 한적한 곳에 위치한 농가 가 조용하다는 것은 변함없었다. 그리고 그런 라혼에게 책과 밀랍 먹인 목 판 등 문구를 든 리디아가 다가왔다. “벌써 시간에 그렇게 됐나? 어디까지 했더라?” 라혼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루 3시간 정도 리디아에게 이것저것을 가르쳤 다. 그렇게 오전 시간을 보내고 점심을 먹은 후엔 함께 축제가 계속되는 그 란시내로 나가 축제를 즐겼다. 그리고 그날 저녁 라혼에게 한 장의 편지가 배달되었다. “트라얀 공이 살아계시고 하이슬란드에 있다고?”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그러나 그 무게는 간단치가 않았다. 그것은 트라 얀 공이 살아계시는 것은 맞지만 무사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갤 공이 돌아가시고, 그것을 수습하기 위해 트라얀 공이 아인윌로 떠났다. 그리고 그란의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자에게 암습을 당하고 중상을 입었다. 그러나 바로 곁에 있던 대마법사의 도움으로 정신을 잃지 않은 트라얀 공은 자신 의 건재가 아닌 죽음을 공표하고 하이슬란드로 피신했다는 것이다. 라혼은 갤 공의 갤에 대한 지배력이 그다지 크지 않음을 예전부터 알고 있 었다. 그랬기 때문에 후계자로 삼으려던 할아버지와 트라얀 공의 움직임이 그다지 달갑지 않았었다. 그리고 살아있음에도 죽음을 공표한 트라얀 공의 행동으로 볼 때 트라얀 공의 지지기반이 매우 취약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 돌아가는 사정의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이것은 라혼이 급히 돌아가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 “위쪽에서 명령이 떨어졌어. 오늘이야!” “뭐? 벌써? 하지만 그가 길을 떠난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잖아? 혹시 모 르니까 이틀 정도는 기다려야 할 것 아닌가?” “낸들 아나. 우리 말고 그 집을 감시하던 자들이 있었으니까 그렇겠지.” “그럼 오늘 밤인가?” “아니 그자들이 관심 갖는 것은 도련님 쪽이야. 우리의 목표인 계집아이는 관심이 없다고. 하지만 급하게 내려온 명령인 걸 보면 지금 당장 하라는 것 같아!” “쳇! 흔적을 남기는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어차피 노인하나랑 여자 둘은 방해되지 않으니까. 가자!” 한적한 곳에 자리한 농가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있던 둘은 은밀 하게 농가로 접근했다. 이미 이 집의 구성원의 위치는 파악이 끝난 상태였 고, 자신들의 실력이라면 그들의 눈앞에서도 꼬마 여자아이 하나쯤은 문제 도 아니었다. ‘늙은이는 마구간에, 그의 부인은 부엌에 있다. 그 창녀 계집은 꼬마와 함 께 있지만 이거면 서너 시간은 세상모르고 꿈속에서 헤맬 거야.’ 사내는 꼬마 계집아이와 그 아이의 엄마가 있는 방의 창문 틈을 통해 수면 제를 살포했다. 그리고 얼마 후 물에 적신 거즈로 입과 코를 가리고 방안으 로 스며들어 눈이 퉁퉁 부은 계집아이를 안아들고 밖으로 나섰다. 그러는 순간에도 아이의 엄마는 약에 취해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 라혼은 하루빨리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당부대로 편지를 받고 난 사흘 후 새 벽에 길을 나섰다. 아직 말을 팔지는 못했지만 쉬포니아에게 그 일을 부탁 해 놓았으므로 걱정은 없었다. 간편한 차림에 여행도구나 돈 한 푼 없이 길 을 나섰지만 라혼이 여행을 하는데 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미 몸이 완성 되었으므로 음식물을 섭취하지 않아도 되었고, 잠을 자지 않아도 되었 다. 쉴 필요도 먹을 필요도 없는 라혼에게 집으로 돌아가는 여행은 그저 잘 포장된 가도를 따라 쉬지 않고 걷는 것일 뿐이었다. 그런 라혼에게 먹여야 하고 때때로 휴식을 취하게 해주어야 하는 말은 아무리 명마라도 그저 짐 이 될 뿐이었다. 라혼은 그렇게 가도를 따라 걸으면서 때론 농부의 수레를 얻어 타기도 하고 아무것도 없는 적막한 곳을 혼자 걸으며 사색에 빠지기도 했다. 그렇게 사 흘을 걸어 황제의 직할지를 벗어나는 경계에 다다를 무렵 북방에서 그란으 로 접어드는 첫 관문인 ‘바이첸 관문’이 보였다. 모든 여행자는 이곳에서 검문을 받아야만 했다. 라혼은 바이첸 관문을 지키는 경비병에게 자신의 귀족문장을 보이는 간단한 절차를 밟고 그곳을 통과해 여행을 계속 했다. *** “뭐야? 바이첸에서 그의 흔적이 드러났다고?” “옛! 아주 당당하게 자신의 문장까지 내보이며 관문을 통과 했답니다.” 그란의 3공작은 트라얀의 건재가 확인되었고, 그의 세력이 온전하게 보존되 었다는 소식에 일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당초에 그의 생사에 관해서는 그 다지 큰 관심이 없는 그들이었지만 온전한 힘을 유지한 콰이스 가는 있어서 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콰이스 가의 실질적인 힘이 거의 손실 없이 하이슬란드에 모여 있다는 소식은 그들을 무척 당황케 했다. 갤지방은 아직 은 살얼음판같이 위태위태한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아인윌, 하이슬란드, 그 리고 가도 주변부의 영주들은 갤 공에게 충성하던 자들이었다. 상업에 기반 을 둔 3공작 중 대륙북부 무역을 한손에 장악한 그루미아 공작에게 그것은 치명적인 요소였다. 대륙북부의 최대 무역로인 그란-아인윌 무역을 통째로 잃은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루미아 공작은 한 가지 카 드를 준비하기로 했다. 다름 아닌 하이슬란드 백작의 장남을 그란에 억류한 다면 아무리 철혈의 콰이스라도 길을 막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 다. 만일 살아생전에 갤 공이었다면 어림도 없는 것이었겠지만 지금 결정권 자는 하이슬란드 백작이기에 그것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루미아 공작에겐 그럴듯한 명분이 있었다. “도스카나 경, 그는 신성 시드그람 제국의 황제가 될 것이다. 반드시 데려 와야 한다.” “옛, 전하! 천년(A thousand years) *** ‘어라? 그란을 벗어날 때 떨어졌던 그놈들이잖아?’ 라혼은 이 순간 자신을 가운데 두고 자신이 모르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 음을 알았다. 그전부터 뭔가 모종의 움직임이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지금 상황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굳이 관여하고 싶은 생각 도 없었다. 그러나 라혼 자신을 감시하던 자를 포함한 32명의 무리들이 그 루미아 공작가의 깃발을 당당히 들고 맹렬히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은 순식간에 라혼을 추월하여 넓게 에워쌌다. “인사드립니다. 그루미아 기사단의 이르카에 산드로스 도스카나입니다. 하 이슬란드의 라혼 가이우스 세나데온 차이저 자작님이 맞습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신지…….” “자작님께선 차기 신성 시드그람 제국의 황제로 추대되셨습니다. 그러니 속히 그란으로 돌아가셔서 귀족원의 인준을 받고 콘레로3세 폐하를 알현하 셔야 합니다.” “차기 황제 말입니까? 제가요?” “그렇습니다.” 나이트 도스카나의 태도는 일단 정중했다. 그러나 다른 기사나 병사들의 태 도는 누가 봐도 위협적이었다. 절대 차기 황제 후보를 대하는 적절한 태도 가 아니었다. “이미 그란에 남겨두신 자작의 가족도 각하의 후견인이신 그루미아 공작 전하가 보호하고 계십니다. 어서 저희를 따르시지요.” “…….” 라혼의 주저하는 듯한 태도에 나이트 도스카나는 넌지시 그의 여자를 잡아 두었다는 것을 흘리고는 여지를 주지 않으려 재빨리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자작님이 타실 말을 가져와라!” 그러나 라혼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뭐야? 왜 리디아의 존재가 사라져버린 거지? 카린느는 무사하다. 우든과 리즈도 그의 집이 아닌 다른 곳에 있지만 신변에 위협은 없는 듯하다. 그런 데 왜 리디아는 없는 거지?’ 라혼은 도스카나의 말에 의식을 개방해 리디아의 존재부터 찾았다. 이미 자 신을 상징하는 디바인 마크를 새겨둔 이상 라혼이 원할 경우 어디서 무얼 하고 지금 상태가 어떤지 까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리디아 는 그 존재가 사라진 것처럼 라혼의 기감에 잡히지가 않았다. ‘그것도 마왕의 신부의 능력인가? 아니야! 그것과는 관련이 없다. 이계로 빨려들어 간 것은? 아니야 이계의 문이 열렸다면 내가 모를 리가 없다. 하 지만 이건 설마…….’ 라혼은 그 순간 만 가지 생각이 교차되며 한 가지 가정을 떠올릴 수 있었다 . 초고대문명이 1만년 마다 되풀이 되는 신과 마의 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만든 피신처에 대한 것이었다. 천족과 마족은 정신체다. 그 들의 감각기관이 동물인 인간처럼 눈과 귀 같은 오감 일리 없었다. 그들이 의존하는 것은 오로지 기감뿐이었다. 그리고 초고대문명은 그들의 기감을 가리는 공간을 만들어 냈는데 라혼은 그것에 대한 존재를 알고 있었다. ‘동방의 칸대륙엔 그것이 있었다. 그런 것이 동방에만 있으리란 법은 어디 에도 없어. 나 말고도 리디아의 존재를 감지한 세력이 있었어.’ 라혼은 그렇게 결론내리고 자신을 데리러온 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두 부류 의 감시자들의 기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라혼은 지금 한가로운(?) 상태 가 아니었다. “자작각하, 여기서 이렇게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말에 오르십시오. ” 라혼은 도스카나의 위압적인 최후통첩에 군말 없이 그가 준비한 말에 몸을 싣고는 그대로 말 옆구리를 차며 그란으로 말을 내달렸다. -히히히힝~! “어?” “이, 이런…….” “쫓아라!” -두두두두두두두…………. 너무나 조용해서 적막하기까지 한 가도는 순식간 도망가는 자와 추격하는 자의 말발굽 소리로 요란해졌다. “저런 멍청한……. 도망을 가려면 북쪽으로 가야지 남쪽으로 가다니……. ” “크크크, 아마도 너무 당황해서 방향을 헷갈렸나 보지.” “그는 그렇게 우둔한 자가 아니다. 반드시 어디선가 농간을 부릴 것이다. 방심하지 말고 쫓아라!” “예!” 그러나 반대방향으로 도주하는 라혼을 비웃으며 뒤를 쫓던 그루미아 공작의 병사들은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거냐? 느린 말을 주라고 하지 않았느냐?” “저건 군마가 아닙니다. 짐수레를 끄는 말 중에 겉만 그럴듯한 말입니다. ” “그럼 저건 어떻게 설명할거냐?” 처음 30분간은 어렵지 않게 뒤를 쫓던 도스카나는 라혼을 태운 말이 지치지 도 않고 속도를 더해가자 말을 준비한 젊은 기사를 추궁했다. 그러나 100키 로에 가까운 짐을 등에 진 군마와 그냥 혼자 달리는 짐말의 차이는 컸다. 라혼은 자신을 태운 말이 그다지 좋은 말이 아님을 깨닫고 마나를 운용해 몸무게를 0 에 가깝게 줄여버렸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이 아닌 리디아를 감시한 자의 기를 찾는데 몰두했다. 지금 자신을 추격하는 자들은 전혀 고 려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찾았다!” -팍! 라혼은 그것으로 농가를 감시하던 자들 중의 하나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 놀랍게도 황금궁전에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쪽은 리 디아를 발견한 장소인 그란의 빈민가 파이스 포인트에 있었다. 라혼은 그것 을 확인한 순간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을 했다. 보통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5서클 [텔레포트Teleport] 주문은 친숙한 곳인가 아닌가에 따라 크게 좌우되며 일반적으로 텔레포트 좌표라는 것이 중요했 다. 그러나 라혼의 이공간 에텔 스페이스를 이용한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는 에텔 스페이스라는 이차원적 공간을 현 차원에 평행하게 놓은 후 거기를 통해서 이동하는 것이었다. 라혼의 영혼과 연결된 에텔 스페이스는 모든 것이 라혼의 의지대로 이루어지는 곳이므로 생각의 속도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라혼이 마법사는 절대 할 수 없고 상상도 못할 격렬하게 내달리는 말위에서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로 사라지자 그 뒤를 쫓던 도스카나는 기겁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속았다. 환상마법이다. 단치오 너는 저 말을 계속 좇아라. 나머지는 모두 북쪽으로 간다.” “옛!” 그루미아 공작의 기사 도스카나는 그 순간 최선의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환상주문을 사용할 수 있는 스크롤이라는 상식적 판단은 누구나 공 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때론 상식적인 판단은 비상식적인 것을 만나면 혼 란만을 가중시킬 뿐이었다. *** “캬아~! 좋다. 시프 로드의 일을 하면 보수가 두둑해서 좋단 말이야.” “쉿! 죽을라고 그래? 시프 로드의 일을 함부로 떠들면 너나 나나 곱게 죽 지 못한단 말이야.” “사내자식이 겁은 많아가지고…….” 그란은 축제가 한참이었지만 두 사내는 어둡고 음습한 술집의 한구석에 앉 아 맥주를 들이킬 뿐이었다. 도둑들에게 그란의 축제는 대목이었다. 흥겨운 축제의 분위기에 휩쓸린 부유한 자들의 주머니를 터는 재미가 쏠쏠했기 때 문이었다. “그보다, 죽었다던 트라얀 공이 건재하다고 들었는데 괜찮을 까나 몰라?” “뭔 소리야?” “너도 봤잖아! 그 애송이가 그 계집애를 끔찍하게 아끼는 거 말이야.” “…….” “우리가 그다지 흔적은 남기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뒤가 켕긴단 말이야.” “자식이 겁은 많아가지고……. 어?” “헉!” -퍽! -콰창~! 두 사내는 갑자기 나타난 검은 머리에 곱상하게 생긴 도련님의 모습을 눈을 크게 치켜뜨고 입을 벌려 크게 놀랐다는 표정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그 리고 그 답례로 발차기 한방을 얻어맞고 그리 좁지 않은 가게 저편까지 날 아가는 경험을 해야 했다. “어디 있나?” “무, 무슨…….” -퍽! “크헉!” 그리고 또한 사내는 그의 물음에 원하지 않는 대답을 한 대가로 복부로 주 먹을 받아내야 했다. 그리고 그 아픔이 느껴지기도 전에 사내는 깊이를 알 수없는 수렁 같은 그의 검은 눈동자를 봐야 했다. 공포, 생명 본연의 죽음 을 두려워하는 것을 뛰어넘는 공포감을 맛보아야 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 가 귓속으로 파고들어 고막을 울리고 미처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도 전에 입 이 벌어지고 멋대로 움직이는 성대를 통해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토해냈다 . 사내는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말하고 나서야 압도적인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세상이 하얘지며 ‘환희’의 감정이 영혼을 지배했다. “흐흐흐흐흐흐으으으으윽 흐헤흐헤…….” 사내는 그 황홀하기 그지없는 환희 속에 숨어 공포의 기억을 지우려 애썼다 . 그러나 공포를 지우려하면 공포의 기억이 떠올라 선명해지고, 다시 공포 에서 벗어나면 환희가 교차했다. “야! 칸파, 정신 차려. 칸파!” 지난 두 달 동안 매일같이 지켜봐왔던 샌님 같이 곱상한 얼굴을 한 미남자 의 킥 한방에 가게 저편 구석에 처박혀 정신을 놓았던 사내는 정신이 들자 아수라장으로 변한 단골 술집 한구석에서 기이한 웃음과 신음이 교차되는 소리를 흘리는 동료를 발견할 수 있었다. 평소에 그다지 표정의 변화가 없 던 동료가 두려움 가득한 표정으로 허공을 보는가 하면 침을 흘리며 실실대 는 표정을 반복해서 짓자 두려움이 밀려들어 왔다. “미, 미쳤어! 도, 도망가야 해!” *** 라혼은 자신이 아닌 리디아를 주시하던 사내의 영혼을 압박하여 원하던 대 답을 얻어낼 수 있었다. 사내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덕분에 라혼의 압도적인 존재감을 무방비 상태로 마주한 사내의 영혼이 그 것을 견디지 못하고 깨져버렸지만 말이다. “그란의 땅속 깊은 곳에 그런 것이 있었단 말이지.” 라혼은 사내가 가르쳐준 하이드아웃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통해 땅속으로 들 어갔다. 물론 자신을 방해하려는 자들이 앞을 막아섰지만 라혼은 그들을 무 시하고 땅속으로, 땅속으로 내달렸다. 그런 라혼의 앞길을 어마어마한 함정 들이 가로막았지만 이 세상 어떤 것도 라혼이 가고자 하는 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 “막아! 막으란 말이야!” “안됩니다. 들어오는 입구를 함몰시켰는데도 소용이 없습니다.” “젠장 어디서 저런 괴물이 나타난 거야!” 하이드아웃과 지상으로 통하는 수많은 통로 중 침입자가 발생한 통로를 지 키는 드랄은 지금 자신이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생전 처음으로 통로에 설치된 모든 트랩을 발동시키고도 막지 못해 통로를 포기하는 셈치고 아예 통로 자체를 무너트려버렸는데도 침입자는 빠른 속 도로 접근하고 있었다. 이제 방법은 육탄으로 그를 저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 -쿠르르르르르…………. 지축이 흔들리는 기이한 소리와 발바닥을 통해 흔들리는 땅의 느낌이 너무 도 생생했다. 하이드아웃의 중심지인 포로스 서쪽 통로는 거대한 강철 문이 굳게 닫혀있었지만 갑자기 나타난 침입자를 막기에는 너무도 연약해 보였 다. 그리고……. -쾅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30센티 두께의 강철문은 형편없이 찌그러져 버렸다. 그 리고 드랄 앞에 나타난 사내는 엄청난 위압감을 뿌리며 장내를 압도했다. “블러드?” 라혼은 초고문명이 만들어 놓은 결계 안에 들어서자 비로소 결계 안에 살아 있는 것들이 뿜어내는 기운을 감지할 수 있었다. 라혼은 그곳 하이드아웃에 서 마족의 마기를 감지하고 에텔 스페이스에 봉인해 두었던 마력을 개방했 다. 공간과 차원의 마왕이 가진 숨 막힐 듯한 마기는 거대한 지하 공간을 꽉 메우며 모든 존재를 옭아맸다. 저 마계를 지배하는 1인자 다크로드 샤라 즈 조차도 감당하지 못하는 마력은 하이드아웃의 모든 것을 정지시켰다. “안내하라.” “에? 옛!” 그 숨 막힐 듯한 부동의 공간에서 움직이는 것을 허락받은 하이드아웃의 문 지기 드랄은 본능적이 두려움에 떨며 땅속 깊은 하이드아웃에서도 가장 깊 은 땅속에 있는 시프로드에게 자꾸만 힘이 빠지려는 다리에 힘을 주며 발걸 음을 옮겼다. 언제 떠들썩한 적이 있었냐는 양 도둑들의 암시장인 포로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 딱딱하게 굳은 석고상인양 식은땀을 흘리며 굳어 있었다. “머, 멈춰!” “…….” “레, 레이나님…….” 그리고 부동의 공간이 된 하이드아웃에서 라혼의 의지와 상관없이 스스로 움직이는 존재가 있었다. 어둠과 무척 잘 어울리는 매혹적인 풍성한 진보라 색 머리와 선정적인 여체의 굴곡이 그대로 들어난 여마법사가 검은색 마법 석이 박힌 스태프를 든 채 두려움이 가득찬 눈빛으로 라혼의 앞을 막아섰다 . 라혼은 공포에 맞서는 와중에도 자신의 의지대로 몸을 움직이며 마왕을 거 역할 수 없는 흑마법사임에도 불구하고 마왕을 거부하는 그녀가 무척 흥미 로웠다. “너, 너는 누구냐?” “…….” 라혼은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거 역할 수없는 위엄이 서린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너는 강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가졌구나.” “무, 무슨 짓을…….” “나는……너를……원한다.” “그, 그런……. 안 돼!” 라혼은 마법사의 마법력, 매직 파워(Magic Power)가 아닌 마력, 이블 포스( Evil force)의 마나를 기본으로 주문을 발현하는 마법을 익힌 흑마법사가 마왕의 부름을 거부하자 더욱 흥미가 일었다. 신관이 믿음으로 신의 힘을 빌려 발현하는 신성력, 홀리 오러(Holy Aura)의 마나를 기반으로 하는 백마 법과 마찬가지로 흑마법은 마왕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계약과 같 은 것이어서 흑마법을 익힌 자는 마왕의 부름과 요구를 거부할 수 없는 것 이었다. 백마법 또는 신성마법이라 부르는 신에 대한 믿음에 기반을 둔 권 능을 행사하는 사제가 애당초 신의 부름을 거부할 리가 없었다. 어차피 숭 고한 믿음을 갖지 못한 자는 그러한 권능을 허락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라혼은 파리한 입술을 깨물며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는 그녀에 대한 시험을 중단하며 그녀의 등 뒤로 나타난 은백발의 사내에게 눈길을 주었다. “블러드.” “나의 불멸의 주인이시여, 당신의 종 블러드가 인사드립니다.” “…….” 그리고 그는 두 무릎을 꿇고 무릎걸음으로 걸어 가 엎드려 라혼의 발에 입 을 맞추었다. 더할 나위없는 극경의 예였다. “기다렸더냐?” “천년의 기다림은 지금 이 순간 찰나에 불과합니다. 나의 주인, 모든 왕들 의 왕 위대한 이그라혼이시여.” 천년(A thousand years) *** 갤 공이 돌아가시기 전 갤은 물론 제국의 모든 귀족이 프린든 왕국과의 전 쟁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특히 갤 공이 직접 주도적으로 준비한 프린든 왕 국과 전쟁에 갤의 대영주들은 자신들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전쟁을 준비하 는 정력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신은 갤 공에게 시간을 주지 않았다. 반드시 쓰러트려야하는 외부의 적을 두고서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던 구 심점이 사라진 갤의 대영주들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앞일을 모색해야 했 다. 갤 공의 죽음은 그의 나이가 있으므로 어느 정도 충격이 덜했다. 그리 고 그에겐 모두가 납득할만한 걸출한 후계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후계자가 누군가에게 노림을 당해 쓰러졌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서로 도와가며 계획적인 전쟁준비를 마친 상태 즉 서로 칼을 쥔 상태에서 내부의 적이 드러난 이상 이제까지의 친분은 쓰레 기통에 버려진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다. 갤 공이 살아있을 땐 그들 은 형제였다. 그러나 그 갤 공의 후계자가 스러졌고, 그 장소는 비밀스런 회동장소였다. 그것은 달리 말해 배신자가 있다는 뜻이었다. 갤은 원래 플레이나 왕국이 자리 잡고 있던 지방이었고 콰이스 가는 플레이 나 왕국을 멸망시킨 장본인이었다. 그리고 갤 공을 도운 유력한 귀족들의 지위는 갤에서 갤 공과 동등했다. 갤의 모든 일은 갤 공을 의장으로 하는 원탁회의에서 결정되고 실행되었다. 그것은 철저한 믿음에 기반을 둔 정치 체제였다. 그런데 그 믿음이 깨진 것이다. 그 순간 그들에게 있어 갤 공의 후계자 트라얀의 생사는 논외의 것이었다. 칼을 손에 쥐고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상황이, 누구와 손을 잡아야 할지 어떤 행보를 해야 할지 아무것 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 되고 만 것이었다. 그리고 ‘갤 공이 노환으로 죽고 , 트라얀이 암살당했다.’라는 소문은 그러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제 국은 칼을 거두었고, 프린든은 갤지방의 고조되는 긴장감을 읽고 그들이 서 로 칼끝을 겨누기만을 기다렸다. 그런 시점에서 콰이스 가의 충복들이 하이 슬란드에 모여 있고, 트라얀 공이 아직 죽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허허허, 그 젊은이는 이것을 알고 있었나?” “그것은 알 수 없지만 우리 프린뱅크에서 마련한 10만 골드의 자금은 트라 얀 공에게 있어 가뭄에 단비입니다.” “아니다. 우리의 투자 대상은 트라얀 공이 아니라 하이슬란드 백작이야. 그리고 그것은 그 젊은이에게 우리의 성의를 보인 것에 불과하다.” “그렇군요.” 랑스는 제럴드 총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콰이스 가의 힘이 하이슬란드에 숨어든 이상 하이슬란드의 영주인 차이저 가를 파트너로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런 것은 빨리할수록 좋다.” “이미 그란 본점의 루타에게 1만 골드를 맡겨 하이슬란드로 보냈습니다. 아마 지금쯤 하이슬란드의 데드몬그 요새부근에 도착해 있을 겁니다.” “잘했다. 그런데 그루미아 공작이 뭔가 꾸미는 것 같던데 그것은 알아보았 느냐?” “어찌된 것인지 자세한 영문을 알 수는 없지만 그루미아 공작이 주도적으 로 라혼 자작을 차기 황제 후보로 하려한다는 소문입니다.” “황제 후보? 이상하군. 자세한 것을 조사해봐!” “옛, 총수!” *** “차기 신성 시드그람 제국의 황제라기에 조금 흥미를 가졌었는데 그건 인 질이었군.” “그렇습니다. 주인님.” 라혼은 의자에 편한 자세로 앉아 공손하게 서있는 블러드에게 도둑길드가 파악하고 있는 자신 주변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자세한 보고를 받았다. 원 래 이곳은 시프로드의 방이었지만 지금은 라혼의 방이었다. “그보다 이 답답한 곳에서 천년이나 있었다니 지겨웠었겠군.” “아닙니다.” “그럴 테지 너는 인간이 아니니까.” 참으로 냉정하기 그지없는 말이었지만 그 말을 한 라혼이나 그 말을 들은 시프로드나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럼 네가 가진 것이 어느 정도 되는지 말해라.” “예, 그럼 일단 대략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이드아웃 창고에 숨겨진 재화는 그란의 모든 재화를 합친 것보다도 많습니다. 그리고 대륙의 모든 도둑길드는 유니온에 영향을 받고 유니온은 사실상 제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 “저기 구석에 숨어있는 놈처럼 길드 마스터가 네 자식들이냐?” “일부만 그렇고 나머지는 아닙니다.” “좋아! 계속해 봐!” 라혼이 기대했던 것은 아니지만 블러드가 가진 힘은 대단했다. 그러나 라혼 은 암흑가의 힘보다 하이드아웃이라는 장소 자체에 더욱 관심을 가졌다. 이 곳은 초고대문명의 유적이다. 게다가 아직까지 결계가 그 기능을 하고 있었 으니까 뭔가 대단한 것이 숨겨져 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훌륭해! 그런데 이곳은 어떻게 찾게 되었지?” “우연이었습니다. 천년전 배신자를 추격하면서 발견한 동굴이 이곳까지 이 어져 있었습니다.” “그래? 뭔가 특별한 것은 없었나?” “없었습니다. 유적은 지금 재화를 모아두는 창고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뭔가 알아낸 것이라도 있나?” “예, 어렵사리 그들이 남긴 문헌을 해독할 수 있었습니다.” “…….” 라혼은 블러드가 한쪽 벽면을 채운 서가에서 두루마리 형식의 책을 뽑아 건 네주자 그것을 펴보았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흥분 을 감출 수 없었다. “카마르게나의 마도사가 남긴 문헌이군. 아니, 훨씬 이전의 것이야!” 블러드가 건네준 문헌에는 카마르게나의 마도사가 우연한 기회에 유적을 발 견하고 그것을 연구한 내용이 담겨져 있었는데 내용은 매 1만년 마다 마계 의 문이 열리고, 신과 마가 싸운다는 것을 담고 있었다. 라혼도 익히 아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라혼의 흥미를 잡아 끈 것은 그 엄청난 마도문명을 이 루어 냈던 카마르게나의 마도사가 흥분한 초고문명의 유적이었다. 라혼은 서가에서 이곳을 처음 발견한 마도사가 연구한 것들을 한 번에 죽 읽어 내 려갔다. 그러던 중 한 가지 단어가 또다시 라혼은 흥분시켰다. <다르마차크라(Dharmachakra)> 진리(Dharma)의 바퀴(Chakra) 카마르게나의 마도사가 발견한 것은 그들의 최대 발명품인 마나석의 원형이었다.다르마는 진리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지 만 진정한 힘을 뜻하며 차크라는 바퀴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사용가능 한 것 쓸 수 있다는 의미가 있었다. 그러므로 다르마차크라는 ‘힘을 쓸 수 있게 하는’이라는 의미도 될 수 있었다. “블러드, 나는 당분간 이곳에서 머물겠다. 편지를 써 줄 테니까 내 가족들 에게 내가 무사하다는 것을 알리고 카린느와 우든, 리즈를 부탁한다.” “알겠습니다. 그들은 지금 그루미아 공작 가에 억류되어 있는데 구해낼까 요?” “아니, 너의 존재를 세상이 알아서 좋을 것 없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나지 그들이 아니야. 내가 없어진 이상 그들을 계속 잡고 있을 이유가 없어 .” “알겠습니다. 그것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것으로 위대한 도둑들의 제왕은 라혼의 집사가 되었다. 그리고 라혼은 전 설의 마도왕국 카마르게나의 마도사가 발견한 유적이 있는 시프로드의 보물 창고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카마르게나의 마도사 들이 만든 마나스톤의 원형이 되는 다르마차크라의 흔적이 있는지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다크 프린스(Dark Prince) 벽돌모양의 만든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 금괴는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금괴는 상당히 넓은 공간에 성을 쌓고 그 안에 그란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만들어지고 사용된 수만 가지 금화가 둑에 갇 힌 물처럼 고여 있었다. 그리고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신이 부여한 재능으 로 깎고 다듬은 보석들과 시간을 넘어서 숨 쉬는 예술품들이 자리를 차지하 고 있었다. 그러나 산처럼 쌓인 보물들보다 귀중한 것은 바로 보물을 품고 있는 거대한 방이었다. “아무것도 없군. 이것 외엔…….” 라혼은 보물이 쌓여있지 않은 유일한 공간 방의 중심부에 다르마차크라 문 양 중심에 박혀 있는 정령석을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하게 그 신비에 돌에 서 뿜어져 나오는 힘을 전신으로 느꼈다. 라혼이 바라보는 문양은 외부와 내부를 가리는 결계를 유지하는 마법진이었다. 정령석에서 나오는 기운은 일정한 공간의 모든 기운을 감춰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 유심히 살핀다면 분명 자연스럽지 않은 무언가를 느낄 테지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 으면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른바 신의 눈 아래에서 숨는 것 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피신처를 만들어 두었으면서도 사용하지 않은 것이지? 신 까지 속일 수 있는 지혜를 가진 자들이 어째서 살아남지 못하고 멸망한 것 일까? 신과 마의 싸움 속에선 인간을 그저 풍경에 지나지 않았다. 장애가 되면 제거하고, 그렇지 않으면 방치한다. 인간 중에 인간을 뛰어넘는 초인 이나 영웅이 나온다 하더라도 신과 마왕의 조금 큰 벌레에 불과한 것이 아 니었던가?” 살아남기 위해 건설했으면서도 그것을 이용하지 않는 고대인들의 선택이 이 해가 되지 않았다. 마계에 난입하기 전 라혼은 동방에 잠시 머물었었다. 그 곳에서 이곳과 비슷한 이유로 만들어진 선산환도를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원래의 목적대로 사용되지 않았다. 라혼은 그것을 세계를 ‘혼돈’으로 뒤 덮는 어마어마한 전쟁인 너무나 빨리 휩쓸었기에 미처 대비하지 못했다 생 각했다. 그러나 아주 잠시 마계의 문이 열려 서전이 시작되려 할 때 멸망의 때를 조금이라도 늦춰볼 생각에 스스로 마계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그곳 에서 억겁의 시간을 상상을 초월하는 싸움을 계속 하면서 그 전쟁에 대한 몇까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로 신과 마의 전쟁이 시작되면 천년을 싸워 도 결말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무언가가 있다. 분명 무엇인가가 있어.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대비를 한 존재들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을 리 없다. 인간은 지식과 지혜를 전함으 로써 성세를 유지했다. 그러나 의도적이라고 할 만큼 치밀하게 인간을 퇴보 시킨 저의가 분명 있다.” 라혼은 머릿속에서 뭔가 알 수 없는 생각이 간질거린다는 느낌을 받으며 가 장 인간다운 길을 가보기로 했다. 그리고 관심을 두지 않았던 산처럼 쌓여 찬란한 빛을 뿜어내는 보물들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저 쓰레기들을 어떻게 사용한다지?” 어마어마하게 쌓여있는 황금은 지금 상태에선 쓰레기만도 못했다. 왜냐하면 사용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둑놈이 꿍쳐둔 황금은 제 가치를 하 기 어려웠다. 미미하게 소량으로 조금씩 사용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렇게 해서는 이렇게 모아둔 가치가 없었다. “음……. 그것은 찬찬히 생각하고, 일단 밥이나 먹어야지.” 라혼이 비록 본능을 뛰어넘은 인간이긴 하지만 먹는 것을 즐기는 것은 인간 의 특권 중 하나였다. 라혼은 하이드아웃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 고 있는 창고를 빠져나와 시프로드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러다 문든 발걸음 을 돌려 리디아가 있는 곳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라혼!” “…….” 리디아는 어미를 만난 고양이처럼 라혼의 품이 뛰어들며 참았던 울음을 터 트렸다. 라혼은 그런 리디아를 안아들며 달랬다. “울지 마!” “라혼, 엉엉엉어엉…….” “괜찮아.” “지금까지 얼굴한번 찡그리지 않았는데 당신 앞에서는 그 아이도 우는 군 요.” 지금까지 리디아를 돌봐주고 있었던 레이나였다. 라혼은 자신을 보고서도 동요하지 않는 그녀를 무심한 표정으로 한동안 바라보다 불쑥 질문을 던졌 다. “마왕의 신부가 있다는 것을 아나?” “물론, 그 아이가 마왕의 신부라는 것도 압니다.” “그럼 너 자신도 마왕의 신부라는 사실은?” “무, 무슨…….” 레이나는 소녀를 안고 있는 무시무시한 자가 던진 한마디에 아름다운 보라 색 눈을 크게 치켜떴다. “라혼, 마왕의 신부가 뭐야? 마왕이라니, 나 무서워…….” “리디아는 내가 무서워?” “아니!” “나는 마왕이기도 해.” “정말? 그럼 나는 라혼의 신부야?” “글쎄? 나는 네 남편이 되기에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 않은 남자데?” “웅……. 그게 무슨 말이야?” “글쎄……. 무슨 말일까?” 라혼은 딱딱하게 굳어 할 말을 잃은 채 서있는 레이나를 그대로 두고 리디 아를 한 팔로 안아든 채 그 방을 나섰다. “…….” 첫인상(?)이 너무나 강렬했던(?) 탓인지 라혼이 걷는 길은 한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라혼은 사람들이 멀리서 자신을 알아보고 보이지 않는 곳에 숨 어서 숨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이드아웃에 들어선 그 순간 라 혼은 참으로 익숙하고도 기분 나쁜 기운 이블 포스를 느꼈다. 리디아는 마 족에게나 필요한 존재였기에 라혼은 이곳이 지난 번 전쟁의 와중에서 남겨 진 마족들의 후예가 웅크린 곳이라는 판단을 하고 그들이 반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도록 마력을 개방했다. 그러나 이곳의 주인이 ‘블라디미르 B. 블 러드’라는 사실은 정말로 의외였다. 그러나 라혼의 처음 판단이 아주 그른 것은 아니었다. 이곳엔 반마족이 상당히 많았다. “그런데 라혼은 집에는 언제 돌아갈 거야? 엄마 보고 싶어.” “맛있는 것으로 배를 채운 후 집으로 돌아가자.” 그러나 라혼은 곧 그 말을 한 것을 후회해야 했다. 포로스를 아무리 돌아다 녀 보아도 도둑놈들과 장물애비의 도시인 하이드아웃엔 리디아가 먹을 만한 음식이 없었다. 냄새 고약한 오래 묵은 소시지는 그나마 양호했다. 쥐 고 기 스테이크, 지렁이로 만든 스프, 이름 모를 땅 벌레로 만든 요리에 살아 있는 구더기까지 있었다. “리디아, 그동안 뭘 먹고 지냈니?” “레이나 언니가 고기를 먹지 않아서 똑같이 감자랑 콩이랑, 꿀에 절인 과 일만 먹었어.” “알만 하군.” 하이드아웃의 지배자 시프로드는 사람이 먹는 음식을 먹지 않았다. 당연이 그런데 에는 관심이 없었을 것이고 그것이 반영되어 참으로 독특한 식문화 가 발달되었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라혼은 더 이상 먹을 만한 것은 찾는 것을 포기하고 블러드의 집무실로 돌아왔다. “블러드.” “…….” “통신마법아이템을 만들어 주겠다.” “피아 링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고르곤과 워크도 만든다. 그러니 그것들을 만드는 재료를 구해줘야 겠다.” “알겠습니다. 준비해 두겠습니다. 피오레나를 찾으시는 겁니까?” “음, 누구?” “피오레나말입니다. 주인님의 아내이며, 아바론에 함께 묻히신 분.” 라혼은 그제야 블러드가 누구를 말하고 있는 지 알 수 있었다. “피아도 아직 살아있나?” “200년 전, 한 모험가 그룹이 아바론을 찾아 포렌데 해에 배를 띄운 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증언하기를 안개 자욱한 바다 너머에 발견한 섬에서 섬을 지키는 은발의 여신에게 쫓겼다고 했습니다. 만나본 일은 없지만 그것은 피오레나가 맞습니다. 9서클의 대마법사였던 분이시니 뭔가 남겨두었을 지 도 모릅니다.” 라혼은 블러드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다 문든 방안 두리번거리던 라혼은 뭔가 깨달아 지는 것이 있었다. “블러드, 지금 나와 연결된 인과를 아는 데로 말해바라.” “안젤리아드의 마법사의 탑은 주인님의 자손이 만든 것입니다. 이미 그분 들은 없지만 저와 인연에 끈이 닿아있습니다. 지금 주인님과는 거리를 둘 것이지만 피오레나가 현신하면 그들은 주인님의 힘이 되어 줄 겁니다. 그리 고 저와는 관계가 없지만 마법사들이 드워프 산맥의 드워프들과 주인님의 이름을 매개로 교류를 하고 있습니다. 천년이 지났지만 드워프은 주인님을 기억할 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조금 다른 얘기지만 북쪽 바이킹과 바바리안 들은 아직도 이그라혼이 돌아와 자신들을 이끌어 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 다. 그들에게 있어 이그라혼은 그들의 주신 오딘의 화신입니다.” “마법사, 드워프, 바바리안이라…….” “…….” “뭐, 좋아.” 라혼은 자신이 블러드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얌전히 기다리고 있던 리디아 를 손짓으로 부르며 말했다. “블러드, 나와 리디아는 지금 지상으로 나갈 것이다.” “곧 안내자를 준비하겠습니다.” *** “놓치다니? 도스카나, 그것이 무슨 소리야?” “죄송합니다. 공작전하!” “이런…….” 그루미아 공작은 조금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프린뱅크 놈들이 하이슬란드 백작을 지원하고 나섰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트라얀 공을 화를 풀 차선의 카드가 쓸모없게 되어 버렸다. 다음에 남아 있는 것은 시오나 왕국 통과하는 길이 있었지만 그들이 무거운 세금을 매길 경우 막대한 손해를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하!” “무슨 일이냐?” 그루미아 공작이 완전히 틀어져 적대관계가 된 트라얀 공과의 관계를 개선 할 방법을 찾느라 고심을 하고 있을 때 집사 아일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라혼 자작이란 분이 찾아왔습니다.” “뭐야?” 그루미아 공작은 아일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하, 그의 여자를 잡아놓았지 않습니까?” “그 평민여자?” “소문에 그녀를 위해 애마까지 팔지 않았습니까?” “과연 일리가 있어. 아일 그를 정중히 모셔라!” “예!” 그루미아 공작은 다소 느긋함이 느껴지는 마음으로 도스카나에게 말했다. “경은 여자가 있는 곳을 잘 지키게…….” “알겠습니다.” “그럼 나는 쉬어볼까?” 저쪽에서 필요로 하는 것을 안 이상 느긋하게 대응하며 상대를 안달하게 만 드는 것은 정석이었다. 그러나……. “뭐야? 그가 이미 자신의 여자를 찾았다고? 왜 막지 못 한 거야?” “면목 없습니다.” 그루미아 공작은 그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왜 그 런 느낌이 들었는지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내가 아주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군.” *** 그루미아 공작이 홀로 고민에 빠져있을 때 라혼은 그루미아 저택이 마치 제 집인양 잘 가꾸어진 정원에 나가 차를 마셨다. “라혼, 우리 할아버지하고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쉬포니아 말론 네가 본가 로 돌아갔다고 들었는데?” 평범한 갈색 머리에 전형적인 귀족가의 영애인 글로리아였다. 그녀는 라혼 보다 2살 위이고 얼마 전까지 로즈 아카데미의 학생이었다. “별거 아니야. 집으로 가려는데 도스카나 경이 내가 차기 황제로 내정되었 다는 말을 전해 듣고 발길을 돌린 것뿐이야.” “정말? 그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그란의 3공작중 하나인 그루미아 공작가가 후견인이 되어준다면 신성 시 드그람 제국의 황제라는 것도 해볼 만하지 않겠어?” “그럼, 당분간 여기서 지내겠네?” “아마도 계속 신세진다는 말이 맞겠지. 그보다 바이젠 공은 집에 안 계신 것 같네?” “우리 아버지야. 항상 바쁘지 뭐.” 라혼은 다소 친분이 있는 글로리아와 정원 테라스에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 를 나누었다. 대부분 그루미아 집안 사정에 대해서 묻고 답하는 것이었지만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글로리아는 자신이 지금 라혼에게 아주 중요한 정보 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라혼은 여자들 사이에서의 ‘수다’를 통해 오가는 정보의 양과 그녀들의 인물에 대한 평가가 상당히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여자들의 수다를 통해 전해지는 정보는 라혼에게 있어 매우 활용도가 높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루미아 공작 전하는 공처가였단 말이야? 이거 의외인걸.” “할머니가 워낙 조용하신 분이라 밖으로 소문은 나지 않았지만 할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으신 일이라도 할머니가 허락하시면 할 수 있거든.” “이야! 내가 이집에서 편하게 지내려면 공작부인에게 잘 보여야겠네?” “맞아! 그런데 라혼.” “뭐?” “그 여자 누구야?” “누구? 카린느?” “그래. 하녀들 얘기론 보통사이가 아니라던데?” “리디아의 모친이야.” “특별한 관계는 아니고?” “특별? 글로리아 너……. 질투하는 구나.” “무, 무슨…….” “하진 이 몸이 잘나긴 했지. 차기 황제가 될 몸이니까. 황태자잖아! 여기 서 하얀 말 한마리만 구해서 타고 다니면 완벽하겠군.” “우에~!” “어? 비난 하는 거야?” “호호호호호호…….” 라혼의 장난스런 말투에 글로리아는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리고 는 유쾌한 듯이 말했다. “다크 프린스, 누가 지었는지 몰라도 별명하나는 잘 지었단 말이야? 모든 소리엔 힘이 깃들어져 있다고 하는데 정말일까?” 다크 프린스(Dark Prince) *** 라혼은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그가 있는 황금궁전을 찾았다. 원론적으로 황 제의 후계자는 황제가 지목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신성 시드그람 제국 황제 후계자는 의무만 있을 뿐 그다지 큰 권한은 없는 지위였다. 그것은 황제의 힘이 크지 않은 제국이니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후계자로 내정 되었다 하더라도 정치적 상황이나 대외적, 대내적 여건에 따라 언제든 간단 하게 지위를 거둘 수 있었고 ‘종신적 지위’인 황제가 붕어한 후 후계자를 제쳐두고 전혀 다른 인물이 제위에 오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차 기 황제로 내정된 자는 그에 따른 대접을 받을 수 있었으며, 또한 황제의 유고시 황제를 대리할 수 있었다. “어서 오게.” “하이슬란드의 라혼 가이우스 세나데온 차이저 자작입니다.” 콘레로3세는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아름답기까지 한 젊은이를 맞이했다. 황 제는 한쪽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젊은이가 그란에 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 다. 갤 공이 실질적인 제국 1인자가 되고 그가 제도 그란으로 보낸 트라얀 공과 필연적으로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다. 그리고 사적인 이야기를 나눌 땐 언제나 빠짐없이 그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소년이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 로 트라얀 공을 다음 황제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을 때 그가 지나가듯 한 말은 라혼이란 소년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 그가 말하길 ‘저는 아버님처럼 나이가 들고도 정력적으로 일하고 싶지 않 습니다. 하지만 제 외종질이라면 훌륭한 황제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라 고 했다. 사실상 천거나 다름없었다. “나는 자네를 잘 알고 있네.” “…….” “트라얀 공에게 자네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 “그렇습니까?” “헌데 괜찮은가?” 밑도 끝도 없는 물음이었다. 하지만 라혼은 황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아마도 라혼의 후견인이 된 그란의 3공작이 트라얀 공을 도모한 것을 묻는 것이리라. 그란 3공작이 트라얀 공을 도모해 콰이스 가를 와해시켰다는 사실은 아직까지는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문 극비였다. 황제가 그것을 묻는 것은 라혼이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가를 떠보려는 것이었 다. “괜찮습니다.” 담담하기 그지없는 라혼의 대답에 황제는 의외라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황제 후계자라는 지위가 그다지 중요한 지위가 아니라는 사실은 신성 시드 그람 제국 황제에게 힘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대부분의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말이 좋아 황제의 후계자이지 사실상 인질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라혼은 스스로 인질이기를 자처했다. 황제는 그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궁금함을 접고 화제를 바꾸었다. “내일 모레 임페리얼 챔피언십 토너먼트가 있네. 그곳에서 시민들에게 자 네를 소개하겠네.” “알겠습니다.” 이것은 황제가 라혼을 다음 대 황제로 인정한다는 말이며 그것을 그란의 시 민들에게 공표하겠다는 것을 의미 했다. “축제기간이라 귀족의회에서 인준하는 절차는 거치지 못했지만 자네의 후 견인이 그루미아 공작인 이상 별 무리는 없을 거야. 그건 그렇고 손녀 딸아 이가 자네 요리솜씨가 참 대단하다고 하더군.” “아! 율리아나 말씀이시군요.” “언제 기회가 되면 어떤가? 나에게도 자네의 요리솜씨를 보여주는 것이… ….” “좋습니다. 폐하의 요리장이 주방을 빌려준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만들어 들일 수 있습니다.” 황제가 당당한 대귀족에게 자신이 먹을 음식을 준비하라고 하는 것은 예의 에 어긋나는 것일 수 있었다. 음식을 준비하는 것은 시종이나 하인이기 때 문이었다. 개다가 차이저 가는 특례로 인한 신흥귀족이었다. 사실상 이제 갓 대귀족의 이름을 가진 자에게 그러한 요구를 하는 것은 상대에 따라서 엄청난 무시라고 받아들여도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라혼은 황제의 요구를 액면그대로 받아들이고 흔쾌히 수락했다. “지금 말인가?” “거창한 것은 시간이 걸려 만들 수 없지만 간단한 요리 정도라면 할 수 있 습니다.” “좋네, 요리장에게 말해 두겠네.” 황제는 나이어린 젊은이를 떠보려는 생각 자신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라는 다소 무례한 요구를 했다. 그러나 라혼이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장 솜씨를 자랑하려는 태도를 보이자 황제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황제의 속내야 어떻든 라혼은 황금궁전의 주방으로 들어가 황제의 식료품 창고에서 갖가지 향신료를 꺼내기 시작했다. 사프란, 로즈마리, 아니스, 월 계수, 캐러웨이, 울금, 진피, 후추, 고추, 생강, 겨자, 강황, 마근, 회향, 정향, 육계, 계피, 너트메그, ·코리앤더 등을 수십 가지 향료 늘어놓은 라 혼은 그것들을 가루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상당히 자극적인 냄새가 주 방을 채웠고 이 주방을 빼앗긴 요리장과 그의 도제들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으로 황제의 후계자로 지목된 앞치마 두른 귀족 도련님이 하는 냥 을 멀뚱히 지켜보았다. “우아! 저 비싼 향료들은 저렇게 많이…….” “도대체 뭐하는 거죠?” “나도 몰라. 하지만 요리하는 귀족이라니 나 참.” 가루로 만든 향신료들을 한데 섞어 노란 가루를 만든 후 걸쭉한 스프를 만 드는 데 사용되는 루와 함께 둥그런 볼에 물을 담아 풀었다. 그리고 양파, 피망, 당근, 감자들을 다듬고 센 불에 잘 볶아 물을 붓고 끓였다. 마무리로 아까 물에 풀어 두었던 향신료 믹스를 거기에 부었다. “호오? 이거 특이한 향취인 걸?” “스승님 저게 무슨 요리죠?” “동방요리다.” “예?” “특별한 명칭은 모르지만 동방의 인시드 대륙에서 저런 식으로 여러 가지 향료를 혼합한 양념을 사용한다고 들었다.” “마살라입니다.” “…….” 호기심 많은 도제의 질문에 대한 정확한 대답은 라혼이 대신해주었다. 그리 고 한 술 더 떠서 그들을 불렀다. 원래 요리의 비법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 서는 안 되는 것이어서 자신의 주방을 내놓은 요리사들은 멀찌감치 떨어져 라혼이 하는 양을 구경만 했다. “거기 있지들 말고 와서 보세요.” “예? 아니…….” “괜찮으니까? 멋대로 10만 골드 요리장의 주방을 차지하고 요리를 하는데 궁금한 것을 참으면 안 되죠.” “그래도 되겠습니까?” 하지만 라혼이 허락하자 풍채 좋은 요리장은 라혼의 곁에 다가와 커다란 냄 비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독특한 향기를 뿌리는 어찌 보면 기분 나쁜 노 랗고 걸쭉한 음식에 보던 요리장이 물었다. “이게 마살라입니까?” “아니요. 아까 노란 가루상태를 마살라라고 하고 이것은 그것을 이용한 마 살라 요리입니다.” “그렇군요.” “마살라(Masala)는 ‘섞는다.’라는 뜻이죠. 인시드에선 누구나 사용하는 혼합양념이죠.” “인시드 사람들은 모두 부자인 모양이죠? 이 비싼 향신료들을 사용하니 말 입니다.” 라혼은 호기심 많은 젊은 도제의 질문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시드그람에서 향신료가 비싼 이유는 인시드 해를 건너왔기 때문에 운송료 가 포함되었기 때문이죠. 사실은 그다지 않은 것들이 입니다. 하지만 여기 선 황제의 식료품 창고가 아니면 만들 수 조차 없는 고가의 요리라는 것은 맞지요.” “그렇구나.” “넉넉히 만들었으니 맛을 보세요.” “예? 하지만…….” “너무 많이 만든 것은 제 실수 입니다. 그러니 사양치 말고 드세요.” 요리장과 그의 도제들은 라혼의 귀족 같지 않은 태도에 놀라워하며 황제보 다 먼저 그것을 맛보았다. 혀끝을 아리는 느낌과 매콤하면서도 청량한 느낌 은 신선하기까지 했다. “우아! 이거 독특한데? 맛있어.” “소금이 들어가지 않아 싱거울 줄 알았는데 감칠맛이 나는 군.” 라혼은 요리장에 중얼거림에 멀찍이 떨어져 있었을망정 그가 자신이 요리하 는 과정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음을 알았다. “요리장에 맛보기에 어떻습니까? 폐하의 입맛에 맡겠습니까?” “이것은 폐하의 취향에 딱 맞을 겁니다. 매운맛을 좋아하시는 편이시라.”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라혼은 황제의 식사를 책임진 요리장의 말을 듣고 자신의 짐작이 틀리지 않 았다는 것을 알았다. 어느 가문이든 식료품 창고를 둘러보면 그 집안의 입 맛을 짐작할 수 있었다. 라혼이 황제의 식료품 창고에서 향신료의 종류가 많다는 것을 보고 이 요리를 생각해 낸 것이었다. 요리가 완성되었을 무렵 황제에게 손님이 찾아왔는데 나르도르프 공작과 그 의 측근에 해당하는 귀족들이었다. “대단하군. 이런 맛이 있을 줄이야. 혀가 얼얼한데도 먹는 것을 멈출 수가 없군.” “폐하께서 만족하셨다니 다행입니다.” “이게 뭔가? 나는 동방의 향료무역을 하면서도 이런 맛을 내는 향신료가 있다는 말은 들은 기억이 없네만.” 그란의 3공작은 대규모 무역을 통해 가문의 세를 유지하는 가문이었다. 나 르도르프 공작 동부를, 레아모스 공작은 남부, 그리고 그루미아 공작 북부 무역과 제국 내부 무역을 했다. 동부무역의 주 상품은 인시드에서 수입하는 향신료였고, 향신료에 관해선 나르도르프 공작가가 거의 독점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라혼은 나르도르프 공작에게 마살라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 다. “나도 마살라가 뭔지는 알아 하지만 내가 아는 그것은 냄새가 너무 지독해 사람이 먹을 만한 것이 아니었어.” “마살라는 만드는 지역이나 사람에 따라 달라집니다. 수십 가지나 되는 향 신료를 혼합하여 만드는데 혼합하는 방법과 양에 따라 크게 변하죠.” “결국 자네의 솜씨가 좋다는 말이군. 훌륭하네.” 나르도르프 공작은 라혼을 치하하며 처음 먹어보는 이국의 색다른 요리에 감탄했다. 라혼은 자신의 요리에 순수하게 감탄하는 나르도르프 공작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마살라는 인시드 대륙 어느 곳에서나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입맛에 맞 으신다면 요리사를 배에 태워 인시드로 보내십시오. 그리고 거기서 입맛에 맞는 마살라 가루를 만들어 향신료 대신 그것을 가져오는 것은 어떻습니까? ” “과연, 이런 맛을 내는 조미료라면 상품가치가 있겠어.” 나르도르프 공작은 상인으로써 마살라라는 새로운 상품을 바라보았다. 대부 분의 귀족들은 광대한 토지를 소유한 지주였다. 당연히 귀족의 힘과 세력의 기반이 되는 것은 그들의 토지와 영지였던 것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그 란 3공작은 토지가 아닌 상업으로써 자신들의 가문을 이룩한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귀족들 사이에서 그다지 환영받는 입지를 가지고 있지 못했 다. 실제론 제국 전체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세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 을 귀족들이 인정하지 않았다. 기사도의 여러 덕목 중 중요한 하나가 ‘청빈’이었다. 그러한 기사도의 세 례를 받은 신성 시드그람 제국의 귀족들에게 금으로 사람을 부리고 제도에 서 사치스런 생활을 하는 3공작은 그다지 좋게 보지 않았다. 심지어는 영지 가 없는 그들은 귀족이 아니라는 말까지하는 자까지도 있을 정도였다. 마살라의 상품가치를 생각하던 나르도르프 공작은 문득 그러한 말을 꺼낸 존에게 생각이 미쳤다. ‘그러고 보니 이 친구는 지방 귀족들 같지 않게 장사로 돈을 버는 것에 대 해서 거부감이 없는 것 같군.’ 하지만 나르도르프 공작은 그러한 생각을 접었다. 상당히 마음에 드는 친구 이기는 하지만 그는 엄밀히 따져서 원수관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작 전하, 전하가 제 후견인이 되어 주어주십시오.” “음?” “……!” 갑자기 터져 나온 라혼의 엄청난 부탁에 나르도르프 공작은 물론 그와 같이 황제를 찾은 귀족들도 깜짝 놀랐다. “그게 무슨 말인가? 후견인이라니?” “저는 전하와 제 작은 외할아버지와 관계가 험악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 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 일뿐입니다.” “크흠! 나는 자네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 수가 없구먼.” “전하,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제 가문은 상당히 곤란한 지경에 빠져있습니다.” “…….” 라혼은 나르도르프 공작에게 차근차근 조리 있게 현 상태를 설명했다. “제게는 외증조부 되시는 갤 공께서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추진한 일이 있 습니다. 바로 프린든 왕국과의 2차 전쟁이었습니다.” “…….” “지금 프린든 왕국의 새 국왕 슘터 파브릭스 바란은 사태 추이를 살피고 있을 뿐 전쟁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성 시드그람 제국은 이 미 전쟁을 잊어가고 있습니다.” “자네는 내가 프린든 왕국과 전쟁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는 것을 아는가? ” “압니다. 하지만 프린든이 도발하지 않는다면 모를까 제국에 칼끝을 겨눈 다면 공작전하의 입장도 달라질 것이라 믿습니다.” “…….” 당돌하고 젊음의 패기가 느껴지는 말에 나르도르프 공작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주판을 튕겼다. ‘트라얀 공을 뒤로하고 그를 도모하는데 일조했던 나에게 도움을 받겠다니 ……. 하지만 이 젊은이가 미래의 하이슬란드 영지를 물려받아 대귀족이 되 니까 지금 후견인이 되는 것이 좋겠지? 하지만…….’ 나르도르프 공작은 라혼에게 후견인이 되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좋네. 나르도르프 가는 자네를 지지하지. 하지만 나는 전쟁에는 동의할 수 없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거 정말 맛있더군. 그러고 보니 내가 이것을 먹을 것이 아니라 자네가 이 요리로 나를 먹은 것이 되나?” 라혼이 그날 콘레로3세 황제에게 대접한 마살라 요리는 장안에 화제가 되었 다. 차기 황제가 황제를 위해 직접 만든 요리를 만들었다는 사실도 흥미로 웠지만 때마침 찾아온 나르도르프 공작이 그것을 맛보고 그 맛에 반해 라혼 의 후견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호사가들에 입에 오르내리기에 충분했다. 다크 프린스(Dark Prince) *** 오늘은 챔피언 중 챔피언을 뽑는 임페리얼 챔피언십 토너먼트가 개최되는 날이다. 또한 라혼이 황제의 후계자라는 것을 시민들에게 공포하는 날이기 도 했다. 나름대로 신경 쓰며 옷을 챙겨 입는 가운데 쉬포니아가 찾아왔다. “라혼, 너 무슨 생각으로 되돌아 온 거야?” “왜? 내가 그란에 있는 게 싫어?” “내가 그걸 묻는 것이 아니잖아.” “그럼 묻고 싶은 것이 뭔데?” 쉬포니아는 라혼에게 말을 판 자금을 대신 받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마침 야 펀이 대금을 지불하자 리디아의 모친에게 전해주려 그녀를 찾았다. 그러나 라혼이 머물던 농가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 살고 있는 주민들 에게 일단의 기사와 병사들이 늙은 마부 부부와 울부짖는 젊은 부인을 끌고 갔다는 것을 들었다. 주민의 증언대로라면 병사들의 가슴을 덮고 있는 휘 장에 그려진 삼각형 형태의 문장은 그루미아 공작 가를 상징하는 문장이었 다. 그래서 뭔가 있다고 생각한 쉬포니아는 나름대로 그루미아 공작가문을 살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간다고 작별인사까지 한 라혼이 바로 그 그루미 아 공작의 저택에 머물고 있으니 무슨 일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 던 것이다. 하지만 라혼은 태평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자신을 맞으니……. “왜 난데없이 황제의 후계자야?” “그거야 내가 차기 황제로 지목되었기 때문이지.” “확정된 것은 아니잖아. 아버지 말로는 공론화가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귀 족의회에서 승인받은 것은 아니라고 하던데, 고향에 돌아가서 기다리다가 결정이 났을 때 돌아와도 되잖아.” “쉬포니아, 네가 나를 걱정해주는 마음은 고맙게 받을게. 하지만 나는 네 가 생각하는 것처럼 위험하거나 곤란한 입장에 처해있지 않아.” 라혼은 그렇게 말하며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가가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 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입술을 빼앗긴 쉬포니아는 순간 얼어붙었 다. 라혼은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쉬포니아에게 블러드의 보물 창고에 있던 물건들 중 에텔 스페이스에 챙겨두었던 브로치를 손수 그녀의 가슴에 달아주며 말했다. “이것은 도둑 우두머리에게사 얻은 거야. 네가 날 위해 애써준 보답이야. ” 자신의 가슴에 달려있는 루비와 에메랄드로 너무나 아름답게 세공된 브로치 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쉬포니아는 조용히 라혼의 이름을 불렀다. “라혼.” “응?” 그리곤 다소 화가난 목소리로 따졌다. “이 바람둥이야! 너는 어떨지 몰라도 나는 그게 첫 키스란 말이야!” “오우! 이런. 영광인데 내가 쉬포니아의 첫 키스 상대라니…….” “이 바보야!” -퍽! 그리고 라혼의 얼굴에 제국에서도 이름 높은 기사의 딸다운 쉬포니아의 펀 치가 작렬했다. 라혼은 쉬포니아의 주먹을 일부러 피하지 않고 맞아 주고는 엄살을 피우며 너스레를 떨었다. “쉬포니아, 이게 무슨 짓이야. 나는 오늘 시민들과 귀족들에게 선을 보여 야 한다구.” “흥, 좋아! 내가 폐하를 봐서 참는다. 오늘은 이 정도로 넘어가지만 다음 에 또 그러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쳇! 너무하는군. 그렇게까지 말하며 날 차다니…….” “차기 뭘 차! 너는 이미 유부남이잖아. 내가 너랑 사귀면 그건 불륜이야 불륜!” “쳇! 나는 이미 이혼을 선언했다 뭐.” “뭐?” 쉬포니아는 이혼을 했다는 라혼의 말에 그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내가 그란에 온 이유가 그것 때문이야. 사실이라고 .” “그럼 그동안 왜 말을 안했어?” “묻지 않았잖아! 아, 알았어,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사실은 아내가 질투심 이 조금 강해서…….” 라혼은 카시아의 질투심으로 인해 벌어진 일과 이혼을 선언한 일 그리고 도 망치듯 하이슬란드를 떠나 그란으로 온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겨우 그것 때문에 이혼하겠다구?” “어차피 11살때 한 정략결혼이었어. 사실 그동안 이것을 숨겨온 것은 아버 지에게 사이스 백작가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야.” “그럼 지금은?” “트라얀 공도 계시고 그분에게 충성하는 철가면 기사단도 있어, 게다가 그 루미아 공작과 프린뱅크가 아버지에게 자금을 투자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쉬포니아만 알고 있어 아내인 카시아의 명예도 있는 것이니까.” “그, 그러지 뭐.” 쉬포니아는 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라혼의 말에 심장이 고장 난 듯 두근거리 자 내심 당황했다. 얼떨결에 입맞춤을 당했을 땐 그저 어이가 없었다. 그러 나 이런 말을 듣고 보니 말뜻이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로써 나는 본능을 참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 그동안 파릇파릇한 아가씨들을 옆에 두고 손대지 못한 것은 굶주린 사람이 진수성찬을 눈앞에 두고 참은 것과 같다는 거지.” “이이이…….” -퍽! “헉!” 라혼은 정강이를 부여잡고 엄살을 피웠다. 쉬포니아는 그런 라혼을 무시무 시한 표정으로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래 잘해 보셔! 다크 프린스. 그리고 앞으로 나랑 아는 척 하지 마!” “쉬포니아!” “흥!” 라혼은 단단히 토라진 채 방을 나서는 쉬포니아의 선홍색 붉은 머리카락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이런, 진짜 상처를 준 모양이네. 하지만 너는 나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 고 있는 것이 나아!” 라혼은 지금 정치를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비교적 순조로운 출발이었지 만 앞으로도 계속 그러리란 보장은 없었다. 라혼은 영지로 돌아가 하이슬란 드가 가진 힘을 키우는 것과 그란에서 정치적 역량을 키우는 것 중 후자를 선택했다. 그리고 이미 트라얀 공을 도모하려는 음모를 꾸민 3공작 중 2공 작과 손을 잡았다. 라혼의 이러한 처사에 트라얀 공이라면 ‘허허’ 웃고 말테지만 그에게 충성하는 철가면 기사단의 기사들이 그것을 이해하지는 못 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위해를 당했을 때보다 자신이 지지하는 존재가 위해를 당했을 때를 더욱 참지 못하기 때문이다. 믿지 못할 상대와 손을 잡은 라혼의 입장에서 쉬포니아는 하나의 걸림돌이 될 수 있었다. 걸림돌이 되는 것은 상관없지만 그것으로 인해 친구가 어려 움에 빠지는 것은 사양하고 싶은 일이다. “무슨 일 있었어? 쉬포니아 표정이 장난 아니던데?” “별일 아니야. 가벼운 입맞춤을 했더니 놀랐나봐!” “입맞춤? 네가 쉬포니아에게 키스를 했다고?” 글로리아는 그의 말에 놀랐지만 라혼이 바람둥이로 유명하다는 것이 떠올라 그러려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와 사귄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라혼 같은 바람둥이가 여자와 입맞춤하는 일은 많았을 것이라 지레짐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네가 키스한 것에 놀랐다면 처음이었던 거야?” “그래. 내가 그란을 떠나기 전에 그녀에게 이것저것 부탁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마음써준 것이 고마워서 나도 모르게 입을 맞췄지 뭐야.” “그래? 그런데 왜……?” “글쎄……? 글로리아는 알겠어?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말이야.” “화? 내가 보기에 화가 난 것 같지는 않던데?” “절대 아는 척하지 말라는 절교 선언까지 했다고. 하도 고맙고 예뻐 보여 서 그런 걸 가지고 내가 왜 그런 말을 들어야 하냐구!” 글로리아는 라혼의 억지스럽기까지 한 논리에 미소 지으며 말했다. “후훗! 고맙다고 숙녀의 입술을 훔치다니. 소녀에겐 키스는 꿈이야!” “무슨 말이야? 내가 여자애들에게 고맙다며 뽀뽀를 얼마나 많이 받았는데 …….” 라혼의 사실을 근거한 너스레에 글로리아는 할 말을 잊었다. “에헴! 그보다 레이디 글로리아 가시지요. 제가 경기장까지 에스코트 하겠 습니다.” “부탁합니다. 프린스 그란 라혼!” 글로리아는 이야기를 하다말고 돌연 화제를 바꾸어 정중한 어투로 말하는 라혼에게 귀여운 미소를 지으며 팔짱을 끼었다. ‘프린스 그란’은 황제의 지목과 의회의 추인을 받은 정식 후계자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프린스 그란 이 되면 그란의 행정을 책임지는 관직인 집정관과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권 리가 생긴다. 제도 그란의 세금을 걷고 공공시설을 관리하는 등 잡다한 일 을 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축제를 차질 없이 진행되도록 하는 일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권리는 있었지만 힘은 없었다. 프린스 그란이 있거나 말거 나 그란 시정의 모든 일은 집정관이 거느린 행정부에서 처리되기 때문이다. *** -와~! -와아~! 그란의 축제행사중 가장 역사가 오래되었으며 또한 평민과 귀족, 남녀노소 를 불문하고 가장 인기 있는 행사가 바로 임페리얼 챔피언십 토너먼트였다. 이 토너먼트는 신성 시드그람 제국의 이름 높은 기사뿐만 아니라 시드그람 대륙 전역에서 한다 하는 강자들이 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 란의 임페리얼 챔피언십 토너먼트에 참가할 자격이 있는 자는 다른 토너먼 트에서 승리를 차지한 챔피언이거나 누구나 인정하는 강자이어야 했다. 즉 임페리얼 챔피언십 토너먼트에 참가할 자격이 있다는 의미는 이미 챔피언이 라는 말과 같은 것이었다. 임페리얼 챔피언십 토너먼트는 이 대회의 주관자인 신성 시드그람 제국의 황제가 개회를 선언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뿌우~! 뿌우, 뿌우~! “신성 시드그람 제국 황제 콘레로 3세 폐하이십니다!” 호른과 나팔 소리가 울리고 간단한 확성기를 통해서 황제의 이름이 크게 불 리자 시민들은 환호성으로 황제를 맞이했다. -와~! -와~! 황제는 환호하는 시민들에게 손을 들어 답례하고 곁에 있던 검은 머리가 인 상적인 아름다운 청년을 자신의 옆에 세웠다. 그리고 확성기를 통해 그가 시민들에게 소개되었다. “그란의 왕자 라혼 전하이십니다.” -와아~! 시민들은 황제의 옆에 서있는 프린스 그란에게 환호를 보냄으로써 자신들이 그를 반대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상당히 자의적인 해석이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것으로 라혼은 그란의 왕자 프린스 그란이 되어 황제의 후계자가 되었음을 공포했다. 그리고 저마다 위용을 뽐내는 챔피언 나이트들의 행진 이 뒤를 이었다. “레스 토너먼트 챔피언 다비데 페트론 백작!” -와~! “비너시드 토너먼트 챔피언 죠바니 베네트 경!” -우오~! “스웨야드 토너먼트 챔피언 찰스 스웨시온 바인간트 자작!” 신분에 따라 차례대로 호명되는 기사들은 토너먼트 경기장을 돌며 자신의 위세를 관객들에게 과시했고 어떤 기사는 눈여겨 보아두었던 귀부인에게 경 의를 표하면 증표를 받아내 랜스에 묵어 높이 치켜들며 ‘나는 나의 레이디 의 명예를 위해 이 경기에 참가한다.’라는 것을 선언했다. 그런 기사가 나 오면 사람들은 더욱 흥분하며 열광했다. 이윽고 임페리얼 챔피언십 토너먼 트에 참가하는 기사들이 모두 선을 보이고 시합장에 도열하자 시민들은 일 제히 경기가 시작되기를 바라며 황제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폐하.” “음?” “제가 개회를 선언하게 해 주십시오.” “자네가 개회를? 좋도록 하게…….” 라혼은 황제에게 이번 챔피언십 토너먼트의 우승자에게 수여될 검을 건네받 았다. 개회 선언은 황제가 우승자에게 줄 검을 단상에 꽂아 넣는 행위였다. 그러나……. “…….” 라혼이 우승자에게 수여될 검을 들고 단상에 서자 사람들은 조용히 침묵하 며 어서 빨리 시합이 시작되기를 바랐다. 라혼은 그런 시민들과 기사들의 바람을 저버리고 우승자에게 수여될 귀중한 미스릴이 합금된 검을 허공으로 집어던졌다. “…….” 그리고 에텔 스페이스에서 스프링이 보우를 빼들고는 화살을 쐈다. -쨍~! 마나가 주입된 화살은 정확하게 검신부분에 맞혔고 검은 그 무지막지한 힘 에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 산산이 부서진 은빛 파편에 햇빛이 산란되는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했지만 라혼의 그러한 행동은 사람들의 경악스런 표정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묘 한 침묵 속에 빠져든 경기장의 모든 시선은 그 일을 벌인 자에게 모아졌고 라혼은 앞으로 나서며 에텔 스페이스에서 바스타드 소드형태의 검을 꺼내들 고 높이 치켜들며 말했다. “나, 라혼 가이우스 세나데온 차이저는 그대들의 기량을 높이 평가하며 이 검을 우승자에게 주노라! 이것은 플래티움 아스카론! 반왕 이그라혼의 제 일기사 벡터의 검이다.” -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 이그라혼이 드래곤 로드 아스카론에 받은 드래곤 본으로 만든 검이 바로 ' 플래티움 아스카론'이었다. 검신 전체가 아스카론의 비늘로 만들어져 있고, 후에 여러 용사의 손을 거치며 마법반응이 좋은 드래곤 본으로 만들어진 검체에 무수히 많은 마법들이 새겨졌다고 한다. 그러한 전설속의 검이 눈앞 에 보이자 믿음보다는 의심이 먼저 들었다. 그러나……. “플레어Flare!" -화르르르르르…………. 시동어를 외치자 하늘을 감싸는 거대한 불꽃이 터져 나오며 사람들은 경악 했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라혼을 바라보던 기사들은 너울거리는 불꽃에 놀란 애마를 달래느라 고생했다. 그리고 말이 진정하자 이제까지와는 다른 눈으로 검은 머리의 왕자가 들고 있는 검을 바라보았다. “위대한 용들의 군주 아스카론은 공평무사하다. 또한 이검의 최초 주인은 기사도를 지키는 것을 명예로 생각했던 제일기사 벡터이며 그 뒤 이 검의 주인 된 자들은 기사도를 지킨 영웅들이었다. 오늘은 오랜 시간 어둠속에 봉인된 ‘플래티움 아스카론’이 새 주인을 맞는 날이 될 것이다. 챔피언에 게 영광이~!” -챔피언에게 영광이~! 라혼이 검을 꽂으며 ‘챔피언에게 영광이~!’라는 선언을 함으로써 경기는 시작되었다. -우오오오오오~! 그리고 기사들의 투지 가득한 함성은 토너먼트를 보러온 관객들의 피마저 끓어오르게 하기에 충분했다. 라혼이 상품으로 내건 플래티움 아스카론은 그 가치가 일국에 맞먹는 것이었다. 그 검을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6서클의 대마법사와 소드 마스터를 합친 것과 같은 존재가 되기 때문이었다. 검에 새겨진 마법은 위대한 현자인 유레카스가 평생이라는 시간을 들여 새겨 넣 은 것이고, 용사 마운스는 그것을 들고 한때 강성했던 레굴르스 제국을 건 설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후 수백 년간 여러 영웅들과 왕들의 손을 거쳐 어느 순간 세상에서 사라진 검이었다. 그러한 것이 고작 토너먼트 시합의 상품으로 내걸린 것이다. “저, 저것이 지, 진짜 플래티움 아스카론인가?” “그렇습니다, 폐하!” “…….” 콘레로 3세는 자신의 옆에 앉는 라혼을 보며 뭐라 말할 수 없는 거대함을 느꼈다. “제게는 저 검 말고도 보물이 많습니다. 폐하.” 라혼은 자신을 주목하는 귀족들의 시선과 열기를 더해만 가는 시합장을 보 고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 누구도 자신을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는 허수아비 후계자로 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크 프린스(Dark Prince) *** 너무나 어마어마한 상품이 걸린 임페리얼 챔피언십 토너먼트의 경기는 시간 이 지날수록 열기가 더해져만 갔다. 마상창, 검투, 격투, 궁술, 그리고 진 정한 최강자를 가릴 시합인 로얄배틀 토너먼트는 소규모의 기병전과 같이 많은 기사가 두 편으로 갈라져 2열 횡대로 정렬하여 긴 창과 검을 가지고 싸우는 것을 말했다. 바로 그 시합에서 마지막으로 살아남는 자가 세계 챔 피언이 되어 플래티움 아스카론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저 붉은 갑옷의 기사는 누구지?” “예, 폐하. 그는 크론 토너먼트 챔피언으로 메사리프입니다.” “성은 없나?” “그는 평민기사입니다.” “크론에서 평민이 토너먼트 챔피언이라?” 마고지방을 예로부터 귀족들이 평민을 혹독하게 다루기로 유명했다. 그곳에 귀족과 농노화 된 평민만이 존재했다. 자유시민이란 계급이 존재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 마고지방의 도시 크론에서 평민이 말을 타는 것이 허용되 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큼 참으로 대단한 일이었다. 황제가 새삼스런 눈으로 붉은 갑옷이 인상적인 기사에게 주목할 때 라혼은 전혀 다른 의미로 그를 보고 쓴 웃음을 지었다. ‘저 녀석, 스승님이 날 감시하기 위해 보낸 건가?’ 라혼은 붉은 갑옷에 날카로운 눈빛을 한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 다. 지금까지는 철저하게 힘을 숨겨와 그를 감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라혼 이 ‘플래티움 아스카론’을 꺼내 든 순간 그의 기척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라혼은 쓸 만한 인물이 찾으려 플래티움 아스카론을 꺼내들고 그 힘을 보 이면서 기사들의 반응을 살폈다. 대부분 동요하는 빛을 보이는 가운데 단 1 명만이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고 침착함을 유지해 라혼은 계속 그를 주시 했다. 그리고 언뜻언뜻 보이는 날카로움은 인간으로썬 가질 수 없는 힘을 교묘히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가 자신이 잘 아는 존재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자신의 권능까지 사용하는 것을 보니 저 녀석 진짜이길 생각인가 보군.’ 라혼이 예측한데로 올해 임페리얼 챔피언십 토너먼트 우승자는 바로 그였다 . 발군의 실력으로 기라성 같은 명성 높은 기사들을 물리치고 플래티움 아 스카론을 뽑아들어 높이 치켜들며 자신이 새로운 검의 주인이 되었음을 선 언했다. *** 토너먼트가 끝나고 그것을 기념하는 성대한 연회가 개최되었다. 각 종목의 챔피언들과 로얄배틀의 우승자 월드 챔피언의 승리를 기리는 연회의 주인공 은 단연 그들이었다. 황제는 일일이 말을 건네며 그들의 승리를 축하하고 우승상금과는 별도로 금화를 하사했다. 라혼은 그런 황제와 같이하면서 그 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크론의 메사리프입니다.” “오오~! 올해의 월드 챔피언! 자네의 빛나는 승리를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폐하.” 역시 붉은 색 계통의 화려한 연회복차림의 사내는 마치 가냘픈 미녀와 같은 마력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었다. 만일 여장을 한다면 그것자체로 세 상에 둘도 없는 미녀라고 칭송받을 만했다. 다만 그의 두 눈에서 뿜어져 나 오는 강렬한 투기는 그가 전사임을 대변했다. “황금 빛 영광과 백금 찬란하고 고귀한 무용을 칭송합니다. 순수한 붉은 전사여…….” -오오~! 라혼의 한 줄의 시 같은 말에 황제는 물론 주변의 귀족들도 감탄어린 표정 을 지었다. 그다지 별스러울 것도 없는 말이었지만 플래티움 아스카론 같은 보물을 내놓은 배포를 본 사람들은 라혼이 어떤 말을 하건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말은 들은 메사리프는 더없는 투지 가득한 눈빛으로 라혼을 쏘아보며 말했다. “화려한 붉은 불꽃은 어둠을 밝히는 법이죠. 다크 프린스(Dark Prince:어 둠에 왕자)!” “하하하하, 오랜만이군. 메사리프! 나는 자네가 이길 줄 알았어. 폐하 오 랜 친구를 만났는데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되겠습니까?” “허허허, 이런, 이런 자네의 친구였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폐하!” “좋네, 허락하겠네.” “감사합니다. 폐하!” 라혼은 황제에게 양해를 얻고 메사리프에게 말했다. “가지.” “…….” 라혼은 메사리프와 발코니로 나섰다. 그리고 시드그람 대륙의 북쪽 끝 얼어 붙은 대지로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했다. *** 어슴푸레한 하얀 하늘 아래 펼쳐진 백색의 얼어붙은 끝없는 대지. 생명에겐 가혹하기 그지없는 이 땅은 거대한 서리의 거인들이 지배하는 땅, 얼음지 옥 니플헤임이었다. “이 녀석 설마 초장거리 워프를 못하는 거 아냐?” “건방지다. 인간!” “늦었어.” “흥!” 라혼은 몸을 뒤로 돌리며 타는 듯한 붉은 눈동자와 머리카락을 가진 미인을 쳐다보았다. 라혼은 인간으로써는 절대 가질 수 없는 투기를 발하는 그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물었다. “무엇 때문이냐?” “인간! 네가 아무리 위대한 최고룡 지슈인드가 아끼는 자라 하지만 사악한 마기에 절어있는 이상 너는 드래곤의 적이다.” “내게 마기가 있다는 것은 옛날부터 알고 있었잖아. 왜 지금에 와서 새삼 스럽게 그것을 문제 삼는 거지? 레드 드래곤 프리사메티?” “흥! 네가 마왕이 되어 마계마왕군의 선봉장으로 세상을 혼란으로 몰아넣 기 위해 중간계에 왔다는 것을 안다. 인간!” “그래서? 네가 나를 제거하겠다는 것인가? 아님 내 힘이 어느 정도나 되는 지 시험하겠다는 거냐? 애송이 드래곤!” “건방지다!” -쿠오오오옹~! -쿠릉~! 하늘과 땅을 위압하는 용의 포효가 백색의 얼어붙은 대지를 울리고 그 엄청 난 힘을 견디지 못한 땅이 뒤집혔다. 참으로 가공할 만한 힘이었다. 그리고 허공으로 비산한 얼어붙은 눈이 가라앉자 그곳엔 어느새 피보다 붉은 드래 곤이 그 웅자를 들어 내놓고 있었다. -크르르르르……. 오로지 탐욕과 폭력의 가치만을 추종하는 막강하고 대단히 난폭한 레드 드 래곤 일족의 프리사메티는 성질 급한 화룡일족의 성정을 그대로 들어내듯 하늘을 향해 브레스(Breath)를 내뿜었다. -쿠하하하하하하…………. 프리사메티의 드래곤 로어(Dragon Roar)를 피해 허공으로 몸을 피했던 라혼 은 프리사메티가 다짜고짜 파이어 브레스(Fire Breath)를 뿜자 에텔 스페이 스로 초공간 결계를 펼쳐다. 신의 권능을 가진 용이 뿜어내는 숨결은 그 불 꽃이 차가운 대기를 순식간에 달구어놓았고 달구어진 대기는 얼어붙은 대지 를 순식간에 기화시켰다. 그리고 그것은 거대한 폭풍. 스톰(storm)이 되어 갈 조짐을 보였다. “플라잉 피스트Flying fist!”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 같았던 레드 드래곤의 파이어 브레스가 멈춘 순간 초 공간결계에서 빠져나온 라혼은 용의 관자노리에 해당하는 부분을 후려쳤다. 그러자 [플라잉 피스트Flying fist:허공을 나는 주먹] 기술에 당한 프리사 메티의 육중하기 그지없는 동체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라혼은 그 순 간 프리사메티의 목 언저리에 있는 거꾸로 박힌 비늘 모양을 한 곳에 손을 쑤셔 박았다. “뱀파이어릭 터치Vampiric touch!” -쿠어어어어어어…………. [뱀파이어릭 터치Vampiric touch]주문는 흑마법의 대표적인 것으로 상대의 생명력을 갈취하는 극악한 주문이었다. 라혼은 용의 역린에 해당하는 부분 밑에 있는 용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기관 드래곤 하트에 직접 손을 대고 만년을 산다는 용의 생명력을 흡수했다. 그러자 용은 급격히 힘을 읽고 가 는 숨만 보존한 상태가 되었다. 라혼은 프리사메티가 그러한 상태에 이르자 손을 떼고는 말했다. “내손에 소멸한 마왕이 다섯이다. 프리사메티! 너는 마왕은커녕 마왕이 부 리는 졸개도 당하지 못 할 만큼 약해빠진 애송이다.” -날 어쩔 셈이냐? “어쩌긴 스승님이 보내준 똘마니인데 잘 가르쳐서 써먹어야지.” -……. “너는 스승님에게 속은 거다 프리사메티. 아마도 스승님은 네게 이젠 나를 이길 수 있다고 말했을 테고, 너는 그 말을 믿고 내게 덤볐을 테지. 애송 이 도마뱀!” -크릉……. 라혼이 스승이라고 부르는 존재는 최고룡 지슈인드을 말했다. 모든 용족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용이며 가장 지혜로운 용이다. 마나 윌(Mana Wall )이라고도 불리는 지슈인드 고원의 주인이며 거대한 판게아의 중심에 둥지 를 튼 위대한 용이었다. 저 마계의 마신 앙그라마이뉴와 천계의 주신 아후 라마즈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중간계 최고의 존재가 바로 최고룡 에인션 트 골드 드래곤 지슈인드다. 그는 라혼으로 하여금 인간의 운명굴레를 벗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준 분이었다. 프리사메티는 이제 갓 2000살이 넘은 젊은 용이었다. 천년전 한참 인간들 틈에서 유희를 즐기던 프리사메티은 운 없게도 드래곤 로드 아스카론과 최 고룡 지슈인드 부부의 일에 관여하게 되었다. 그때 그들은 마계의 마왕자를 쫓고 있었는데 패기만만한 젊은 프리사메티는 그들과 함께 그 일을 해결하 려 했다. 그러나 에인션트 드래곤 부부는 프리사메티를 애송이 취급하며 끼 워주지 않았었다. 그때 만난 것이 인간 같지 않은 인간 라혼이었다. 그리고 프리사메티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에가 맞는(?) 수모를 겪었고, 그에게 검술을 가르침을 받은 드래곤이 되었다. 그리고 천년 이제 2000살이 갓 넘 은 프리사메티는 모든 드래곤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드래곤 중 하나가 되었 다. 같은 또래의 드래곤들은 그저 눈빛만으로 위압할 수 있었고, 4, 5000살 의 에인션트 드래곤들과도 맞서도 밀리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레드 드래곤 프리사메티는 전룡이라고 불렸다. “어떤가? 프리사메티 옛정을 생각해서 묻겠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내게 100년간 충성해라!” -내가 끝까지 거부한다면? “생령이 빠져나간 드래곤, 그것도 가장 가력하다는 레드 드래곤의 껍데기 다. 쓸데야 많지.” -나는 드래곤이다. 한없이 자유로운 용이다. 100년의 자유를 잃으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 “그럼 100년간 잠드는 것을 어떠한가. 프리사메티?” -인간이여! 무슨 꿍꿍이가 있는 가보군. “내게는 두 창조신이 있다. 그중 하나가 영룡(永龍) 이터너디 드래곤(Eter nity dragon)이고, 다른 하나가 세계수(世界樹) 이그드라실(Yggdrasil)이다 . 그들은 내 영혼의 공간에서 잠에 들어 나를 꿈꾸고 있지만 너도 알고 있 다시피 이제 그들의 힘이 필요한 시기다.” -인간들의 법 중에 승자가 패자의 모든 것을 갖는다는 법을 알고 있다. 나 는 그 인간이 만든 법이란 것중 그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지. 나는 네게 졌 다. “사양하지 않겠다. 프리사메티 너는 소멸하고 새로운 네가 될 것이다. 화 염의 용이여.” 라혼은 프리사메티와의 대화를 끝내고 그의 마지막 생명력을 빼앗았다. 그 리고 동시에 생명의 빛이 꺼진 프리사메티의 심장에 영룡 이터너디 드래곤 의 기운을 심었다. 그러자 붉은 비늘을 가진 거대한 드래곤의 몸이 점점 하 얗게 변하더니 희미해져만 갔다. 그리고 종국엔 투명해진 용의 몸은 그대로 부서져 내렸다. “…….” 라혼은 겉모습은 소멸한 듯한 프리사메티가 아직 힘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계속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라혼의 눈앞에 환상처럼 아름답기 그지없 는 붉은 용이 웅자를 드러내며 서 있었다. -나는 프리사메티 화염일족의 용이다. “과연, 창조의 힘은 위대하군. 드래곤을 이처럼 완벽하게 재현하다니……. ” 라혼은 에텔 스페이스를 얻은 얼마 후 투신 발록과 일전을 벌인 일이 있었 다. 그때 에텔 스페이스가 찢어놓은 차원의 틈새로 빨려나간 적이 있었는데 라혼은 차원과 차원을 넘나들며 억겁의 시간 속을 부유했다. 아무것도 없 는 차원과 차원을 넘나들며 창조의 기운이 태동하는 2개의 공간을 거칠 수 있었는데 라혼은 그곳에서 영룡과 세계수를 만났다. 아니 아무것도 아닌 것 에 라혼은 어떠한 이미지를 생각했고 그 영향으로 하나는 영룡이 다른 하나 는 세계수가 되었다. 그리고 라혼은 그들과 함께 차원과 차원을 방황했다. 그리고 라혼은 차원의 마왕 아르켈라스트가 만든 이차원에 스며들었다. 아 르켈라스트는 라혼의 영혼을 그저 인간의 영혼으로 알고 흡수하려 들었는데 라혼의 영혼은 억겁의 시간동안 차원과 차원을 헤매고 라혼의 영혼에 깃든 두 창조신의 힘에 비해 차원의 마왕 아르켈라스트의 힘은 미약하기 그지없 었다. 라혼은 그를 자신의 영혼에 흡수함으로써 차원의 마왕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후 마신 앙그라마이뉴다가 차원의 마왕을 대신해서 만든 공간의 마왕 일피메리토스는 차원의 마왕을 소멸시킨 라혼을 소멸하여 마왕으로써 의 권능을 행사하려 했다. 그러나 그 또한 오히려 라혼에게 흡수되어 라혼 은 차원과 공간의 마왕이 된 것이다. 라혼이 인간으로써 마왕의 극렬한 마 기를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라혼의 영혼과 함께하는 반려 영룡과 세계수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창조신이었다. 유일한 존재인 그들이 같은 차원 에 있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라혼의 에텔 스페이스에 머물며 라혼 과 함께했다. 그들에게 있어 이것은 짤막한 유희였다. 다크 프린스(Dark Prince) *** 임페리얼 챔피언십 토너먼트에서 공포된 황제의 후계자가 ‘플래티움 아스 카론’을 상품으로 내놓은 것과 무명이었던 월드 챔피언이 그에게 피의 맹 세를 한 것은 그란 시민들의 입에 회자되기에 충분했다. 또한 그루미아와 나르도르프, 레아모스 그란의 3공작이 그를 후견하고 있다는 소문은 시민들 로 하여금 다크 프린스라고 불리는 그를 단숨에 중심인물로 보게 하기에 충 분했다. 권력이란,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다고 믿게 하는 것이다. 라혼은 3 공작이 자신에게 지지의사를 확고히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자신의 뒤에 있다고 사람들이 믿 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다. “저하, 안됩니다. 이제 막 축제가 끝났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그런 일을 벌일 여유도 자금도 없습니다.” “파벨 경, 그럼 자금문제만 해결된다면 일을 할 수 있다는 거요?” “자금이 있다 해도 힘듭니다. 파이스 포인트는 의지만으로 덤벼들만한 곳 이 아닙니다. 서류상의 주인과 실제 재산권을 행사하는 주인이 다르고 조그 마한 건물을 손대는 것도 막대한 저항을 받는 곳입니다.” “그것도 내가 해결하지. 콘술 파벨! 지금 나는 당신에게 부탁하는 것이 아 니요. 명령하는 것이오. 자금과 파이스 포인트의 소유권 문제를 해결하고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능력부족을 이유로 당신을 탄핵하겠소.” 그란의 집정관 오브킨 파벨은 그란의 빈민가인 파이스 포인트를 밀고 포룸 을 건설하겠다는 다크 프리스의 말에 난색을 표했다. 확실히 파이스 포인트 거리는 그란 시의 시궁창과 같은 곳이었다. 그래서 그간 파이스 포인트를 정리하려한 여러 시도는 있었다. 그러나 서류상의 주인과 실제주인이 다르 거나 실제 주인이라고 해도 재산권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그곳에 기 생하는 갱들이 폭력과 협박 뇌물 등으로 그 계획을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까지 말한다면 좋습니다. 하지만 이일은 전적으로 당신이 책임지 겠다면 도움은 드리겠습니다.” “좋소. 파벨 경!” 파이스 포인트는 라혼의 수하인 블러드가 직할하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지 금 라혼이 추진하는 일은 시작한 순간 이미 성공한 것과 같았다. 하지만 집 정관 파벨은 ‘그란의 왕자’라는 허울 좋은 칭호를 가진 그를 내심 아무것 도 모르는 도련님이라 비웃었다. “각하, 이미 지시를 받은 이상 목수들과 건설업자들은 수배해야…….” “이 건은 무시한다.” “예? 하지만…….” “됐어. 지금 그의 뒤를 3공작이 봐준다는 것은 헛소문에 불과하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아는 사실이야. 아마 건물 하나 정도 부수고 신전하 나 짓는 정도로 끝날 거야. 그 정도 수준에서 처리해! 가뜩이나 바쁜데 코 흘리개 뒷바라지 할 새가 어디 있어!” “알겠습니다. 각하!” *** “역시 움직이지 않고 있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주인님. 오브킨 파벨은 그루미아 공작 계열의 사람으로 12년 간 그란의 집정관자리에 있었지만 자기에게 실패의 책임이 돌아올 일은 그 루미아 공작의 말이라도 따르지 않는 인물입니다.” “칸 대륙 속담 중 ‘배를 땅에 깔고 누워 움직이지 않는 개’라는 말이 있 지. 책임 추궁이 두려워해야할 일을 하지 않는 관료를 비꼬는 말이다. 딱 그에게 어울리는 말이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엎드려 움직이려 하지 않는 개는 쓸모가 없지요.” 라혼은 블러드의 맞장구에 씩 웃으며 앞으로의 계획을 의논했다. “집정관 파벨을 실각시키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아. 하지만 새로운 집정 관에 내 사람을 앉히는 일은 골치 아픈 일이지. 그란에 내 사람이라고 할 만한 인사가 없으니까. 블러드, 네 입김이 닿아있는 능력있는 인사가 없을 까?” “죄송합니다. 나름대로 역량이 있는 사람을 알고 있지만 인지도가 높지 못 합니다. 차라리…….” “차라리 뭐?” “주인님이 직접 집정관이 되는 방법이 있습니다.” “내가?” 라혼은 블러드의 제안이 일리 있다고 생각했다. “좋아, 그렇게 하지.” “그리고 포럼 건설의 자금은 차용해서 충당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도둑 들의 자금을 사용하여 출처를 불명확이 하는 것보다. 다소 비싼 이자를 물 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역시 1000년을 묵은 도둑 우두머리다웠다. 시프로드 블러드, 블라디미르 B. 블러드는 1만년전 신마전쟁 중 마계의 문이 닫힐 때 중간계에 남은 마족의 후예였다. 순수마족이 아닌 반마족으로 뱀파이어 로드였다. 라혼이 억겁의 시간동안 차원과 차원을 넘나들고 차원의 마왕의 힘을 흡수한 뒤 중간계로 돌아 왔을 때 중간계의 시간은 겨우 반나절이 흘렀을 뿐이었다. 그리고 차 원의 마왕에게 종속된 블러드는 자연히 라혼에게 종속되었다. 라혼은 자신 의 수하가 된 뱀파이어에게 두 창조신의 권능을 빌어 신성결계를 걸어 찬란 히 빛나는 태양 아래서도 걸을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라혼이 마계로 뛰 어들자 자연히 블러드에게 걸어두었던 신성결계가 해제되고 블러드는 그 후 로 쭉 어두운 하이드아웃의 깊숙한 곳에서 나오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처럼 태양아래에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블러드 곁을 지키는 세 뱀파이어 또한 더 이상 새벽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알았어. 그럼 너도 세상에 나설 준비를 해라!” “예?” “설마 나보고 해도 해도 끝이 없고 표시도 나지 않는 일을 계속하라는 것 은 아니겠지? 그런 일은 집사가 하는 것이지 않나?” “하지만 주인님 곁엔 지금 드래곤이 있지 않습니까? 드래곤는 저 같은 마 족을 싫어 할 텐데요?” “그 녀석은 신경 쓰지 마라! 드래곤이지만 드래곤이 아니거든.” “……?” “적당한 신분을 만들어서 나를 찾아와라. 내가 너를 고용해서 너의 능력을 과시하고 내년엔 네가 직접 그란의 집정관이 되는 거다.” “제가 말입니까?” “그래, 황제가 되면 그란은 내 집이 된다. 그리고 내 집의 집사는 바로 너 다.” “알겠습니다. 나의 주인이시여.” 프린든의 국왕이 아무리 성질이 급하다고 하지만 기다림의 묘를 무시할 수 는 없을 것이다. 그랬기에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3년까지 별다른 군사적 도발을 하지 않고 기다릴 가능성이 높았다. 라혼은 바로 그 시간을 최대한 이용해야만 했다. 일단 그란에서 확고한 지지기반을 확보하여 영향력을 확 대해 나가고, 언제든 움직일 수 있는 군사력을 가져야 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란의 정계를 좌지우지하는 3공작가를 버리는 써먹든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다. “아! 그리고 그 흑마법사 아가씨는 어떻게 하고 있지?” “레이나는 지금 자신의 거처에 틀어박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적당한 마법사가 필요한데 그녀를 빌려도 될까?” “흑마법사를 말씀이십니까? 흑마법사가 있다는 것을 알면 성황청에서 문제 삼을 텐데요?” “그거야 모르면 그만이지. 문제 삼는다 해도 물러설 내가 아니다.” 블러드는 주인이 대량살육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성황 청이 그의 길을 막아선다면 과거 신성도시 케루빔이 지도에서 사라졌듯이 지금 성황청이 자리한 성지 탄티노 또한 소멸의 화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 *** “레이나님, 그가 찾아왔어요.” “그?” “시프로드의 주인이라는 사람 말예요.” 레이나는 그가 나타난 이후 암묵적으로 허용되던 모든 자유를 박탈당했다. 인시드로우의 마법사의 탑에도 어떠한 연락도 하거나 받지 못한 채 아무것 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레이나는 그렇지 않더라도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마왕의 신부, 자신이 마왕의 신부였다는 사실은 레이나에게 커다란 충격 그 자체였다. 시프로드가 자신의 태를 빌려 마왕을 낳게 하려 했다는 사실 이 치가 떨릴 만큼 소름끼쳤다. “오랜만이요. 레이나 양!” “이제 한 달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라혼은 가시가 돋친 그녀의 태도에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지금 라혼에게 그녀가 꼭 필요 했다. “후우~!” “피곤하군요. 할 이야기가 없다면 그만 나가 주시겠습니까?” “레이디 레이나! 나는 라혼 가이우스 세나데온 차이저, 그란의 왕자요.” “……!” 레이나는 라혼의 신분을 알고 침묵했다. 이미 리디아라는 소녀와 함께 있으 면서 그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의 후계자라는 이야기는 처 음 듣는 말이었다. “혹시 몰랐던 거요?” “그래요. 당신이 온 후로 저는 이곳에 갇혀 옴짝달싹할 수 없었어요.” “그렇군.” “…….” “레이나, 나는 당신이 내 곁에 있어주길 원하오.” “무슨 뜻인가요?” “홀리 파이어Holy Fire!” “흠!” 라혼은 레이나의 물음에 신성력을 사용한 [홀리 파이어Holy Fire;성화] 주 문을 시전하여 보여주며 말했다.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마왕의 화신이 아니요. 나는 마왕이며 동시 에 신이 선택한 전사이기도 하오.” “그, 그럴 리가? 어떻게 신성력과 마력을 한 몸에…….” “블러드가 당신과 리디아를 데려온 것은 마계에 있는 나를 온전한 힘을 지 닌 채 소환하려했기 때문이오. 아마도 리디아가 아기를 가질 수 있을 나이 가 되면 당신을 마왕에게 주고 그 대가로 마계에서 내 소재를 알아 나를 리 디아의 몸으로 통해 태어나게 하려 했겠지.” “그, 그런…….” “놀라는 척 할 필요는 없소. 당신도 당신이 그런 식으로 이용당하리라는 것쯤 알고 있었지 않소.” “…….” 라혼의 차가운 말에 레이나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라혼은 그런 레이나에게 다가가 그녀의 팔을 잡으며 이제까지와는 다른 태도로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나 당신은 마왕의 복종하라는 명령을 단호히 거부할 힘이 있었소. 그 러니 당신의 동의 없이 벌인 일은 절대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오. 레이나! ” “……!” “그래서 나는 당신을 설득하려 하오.” “……?” “나의 아이를 낳아 주시오.” “무슨? 설마…….” 레이나는 매력적인 사내의 눈을 마주보며 부르르르 떨었다. 그가 무엇을 원 하는 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소. 당신의 낳을 아이는 마계의 족속이오.” “거절하겠어요. 나는 절대 마왕을 낳지 않겠어요.” “마왕이 아니오. 당신이 낳아야 하는 존재는 투신이라고 불리는 존재요.” “……!” “싸움에 미쳐 악마로까지 불리는 존재요. 당신이 그를 낳아야 하는 이유를 듣고 싶지 않소?” 라혼은 파리하게 질린 레이나의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을 확인하고 태곳적부 터 계속되어온 신과 마왕의 전쟁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곳을 보시오. 당신알고 있는 어떠한 문명이 이렇게 거대한 지하 도시를 건설할 수 있었겠소. 이곳은 단순히 지하공간이 아니오. 수만 명이 숨을 쉬는데도 공기가 탁하지 않소. 또한 신의 눈에 조차 속이는 결계까지 펼쳐 져 있소.” “…….” “레이나 지금 당장 결정할 필요는 없소. 나는 당신이 지금 내말을 의심하 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소. 하지만 당신이 나와 함께 있어준다면 나는 그대를 언제나 항상 내 곁에 둘 것이오.” 레이나는 지금 그의 말이 단순한 사랑고백이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쉽게 받아들이기에 간단치 않은 것 이었다. 그러다 문득 한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런 것이라면 굳이 제가 아니더라도 리디아의 몸을 이용하면 될 텐데요? ” “물론 리디아의 태 또한 이용할 것이오.” “그럼 그 아이도 당신의 여자가 되는 건가요?” “아니, 단순히 태를 빌리는 일이오. 결혼하지 않은 깨끗한 처녀의 몸이라 도 아이를 낳을 수 있소. 그것이 마왕의 신부요.” “…….” “내가 당신을 거두려는 이유는 당신이 흑마법사이기 때문이오.” 레이나는 그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르 떨었다. “리디아는 내가 후견인으로 있는 이상 귀부인으로서 생을 살아갈 수 있소. 하지만 당신은 이미 그런 삶을 살만큼 평범하지 않지. 나또한 평범하지 않 으니 당신을 거두는 것에 두려움은 없소. 당신은 마왕의 신부요. 당신이 환 생이란 것을 하여 여자로 태어난다면 또다시 마왕의 신부로 태어날 것이오. 그것은 당신의 영혼이 강하기 때문이오. 마왕의 신부와 성녀는 같은 것이 오. 성녀가 성녀인 이유는 신을 섬기기 때문이오.” “…….” 라혼은 그녀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그녀를 가만히 끌어 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매혹적인 입술을 자신의 입으로 덮고 진한 키스를 시작으로 그녀의 아름답고도 강한 영혼을 탐닉했다. 페데Fehde “어떻게 그가 주군의 목숨을 노린 자들과 손을 잡을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원수에 앞잡이가 되다니…… .” 콰이스 가의 충성스런 기사들은 남쪽에서 봄바람을 타고 들려온 소문에 흥 분을 감추지 않았다. “그 상인이 전해준 금은 필시 그들이 내놓은 더러운 황금이오. 그것을 받 지 말았어야 했어!” “스테판코, 바커, 리페르 함부로 말하지 마라. 우리는 식객이다.” “메이지 마테우스, 이곳은 돌아가신 갤 공이 마련해 놓은 은신처입니다. 이곳은 새로운 콰이스 영지가 아닙니까?” “스테판코 말을 삼가라! 하이슬란드는 엄연히 차이저 가의 땅이다.” 철가면 기사단의 젊은 아이언 마스크 나이트는 마법사 마테우스의 호통에 입을 다물었지만 이 땅이 콰이스 가의 땅, 바로 철가면 기사단의 땅이라는 생각을 거두지는 않았다. “아무튼 모두들 명심해라! 로드 트라얀이 몸을 회복할 때까지 하이슬란드 백작과 어떠한 잡음도 일어선 안 된다. 그리고 너희들이 성토하는 그 젊은 이는 트라얀 전하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명심해라!” “저는 마테우스 님의 말씀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기사단을 떠날망 정 그 같은 배덕자에게 제 검을 바치고 싶지 않습니다.” “저희도 스테판코와 의견이 같습니다.” “허어, 우리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살아남는데 필요한 자금이다. 그 돈의 더럽고 깨끗하고를 따질 만큼 우리에게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니야.” 메이지 마테우스는 콰이스 가의 젊은 기사들의 독선적인 모습에 한숨이 나 왔다. 그들의 그러한 기질은 철혈의 공작이라던 갤 공의 그것과 같았다. 그 리고 공교롭게도 그 다음날 소공자 라혼의 친필 서한이 도착했다. “로키, 라혼의 편지가 왔다고요?” “그렇소, 보시오.” 세나데나는 집으로 돌아오겠다던 아들이 생각을 바꾸어 그란에 머물겠다는 소식을 보내와 무척이나 섭섭했었다. 그런 내용의 편지 이후 처음 보내 온 편지라 허겁지겁 편지 두루마리를 펼쳤다.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라는 문장으로 시작된 편지에 가족의 안부를 묻는 일상적인 내용과 자신 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가문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그란에서 사귄 친구들과 그들 사이에서 벌어진 재미있는 일들도 있 었다. “하아! 그 아이의 편지를 보면 마냥 행복한 것만 같군요.” “세나, 라혼은 강한 아이요.” “그보다 할아버지의 기사들이 라혼을 좋게 보지 않는 것 같던데 걱정이에 요.” “그래서 나도 걱정이오.” “예?” “보시오. 내게 보낸 편지요.” 라혼은 가족에게 모두 편지를 보냈다. 대부분의 내용을 비슷했지만 문장에 서 풍겨오는 느낌이 모두 달랐다. 어머니와 아버지에겐 제몫을 다하는 의젓 함을 누이들에게는 약간의 치기어린 농담이 담겨져 있었다. “기사들을?” 라혼이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기사들은 보내달라는 내용이 추가되어 있었 다. 그리고 이번엔 트라얀 공에게 보내는 편지를 따로 붙였는데 거기에도 그러한 내용이 담겨있다고 했다. “탈로스를 가지지 않은 기사들만으로 되도록 많은 인원을 보내달라고 하는 데 어찌해야 될지 모르겠소.” “트라얀 삼촌은 어떻게 하기로 했나요?”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그분과 상의를 해보아야 할 것 같소.” “신중하게 결정하세요. 제가 보기에 라혼은 콰이스 가의 유산을 받을 생각 인 것 같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소.” 로카데는 아내에게 키스하고 방을 나서서 서재로 향했다. 서재에는 창백한 안색의 병색이 완연한 중년 사내가 편지지를 바라보며 미간에 골을 만들고 있었다. “라혼의 편지 입니까?” “그러네. 보겠나?” 로카데는 트라얀 공이 건네준 편지를 죽 훑어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아버지의 피는 라혼에게 더 진하게 이어진 모양이야.” 라혼이 트라얀 공 앞으로 보낸 편지에는 자신이 무력을 가져야 하는 당위성 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었다. “차이저, 자네의 아들은 참으로 대단하군. 방어가 아니라 정복의 완성이라 니……. 그리고 어찌 알았는지 철가면 기사단의 어린 기사들의 불만까지도 예상하고 있지 않나? 마치 직접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일세.” “이 녀석 내 앞으로 보낸 편지에는 이런 이야기는 없었는데…….” “어머니를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은 갸륵함일 테지.” “어떻게 하겠습니까?” “내가 왜 기사들을 이끌고 하이슬란드에 왔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이미 모 든 기력을 잃었어. 앞으로 라혼 그 아이의 시대야. 이 편지를 받고 보니 역 시 내 눈이 정확했던 모양이야.” “그렇다고 기력을 잃으시면 안 됩니다. 지금 전하가 기력을 상실하시면 그 원망은 제 아들에게 전가 될 것이니 말입니다.” 트라얀은 로카데 차이저의 말에 힘없이 미소 짖고는 말했다. “마테우스를 불러주게 아무래도 어린놈들을 보내야 할 것 같은데 그 놈들 을 설득시키려면 그가 필요하니 말일세.” “알겠습니다. 제 아들 녀석이 전하를 편히 쉬게 두질 않는 군요.” *** “뭐야? 돌아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다시 그란으로 가는 거야?” “어쩔 수 없어, 테이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대장의 곁이야.” “아예, 라혼이랑 결혼이라도 하지 그래? 이혼선언까지 했겠다, 무서울 것 도 없네 뭐!” “테이!” 라혼의 쌍둥이 누이 테는 다시 그란으로 오라는 라혼의 편지를 받고 당장이 라도 떠날 기세로 허겁지겁 짐을 챙기는 죠슈아의 뒤에서 뭐가 불만인지 계 속 조잘거렸다. “라혼도 그래, 이 누님이 보고 싶지도 않은가? 아마 그 쉬포니아인지 뭔지 가 순진한 라혼에게 꼬리쳤을 거야. 그리고 리디아인지 뭔지 하는 계집애도 수상해!” “그만해! 테이, 라혼과 쉬포니아는 그런 사이가 아니야.” “네가 어떻게 알아! 그리고 남녀사이는 신도 알 수 없는 거라고. 네가 그 란을 떠난 지 수개월은 흘렀는데…….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뭐 야!” “테이, 너의 쌍둥이 동생은 상당히 금욕적이야.” “하긴 그녀석이 고리타분하기는 하지.” 테이는 죠슈아의 말에 동의하며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라혼은 좋겠다! 황제의 후계자가 되었으니 매일 같이 연회에 초대되겠지. ” “…….” “가만! 동생이 그란에 있는데 가족들이 무관심한 것은 문제가 있지.” “뭐?” “나 갈 테야!” “테이?” “어차피 가도를 따라 여행하는 것이니 위험은 없고 죠슈아 너도 실력 하난 쓸 만하니까!” 죠슈아는 막무가내 테이가 말을 하다말고 또다시 엉뚱한 곳에 빠져들자 무 척 당황했다. 죠슈아는 테이를 말리고 싶었지만 말려야할 이유가 떠오르지 않아 결국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죠슈아가 예상했던 과는 달리 마스터 로카데는 너무도 간단히 테이의 그란 행을 허락했다. 게다가 백작부 인과 세나루나까지 포함해 차이저 가의 여자 모두가 따라나서는 여행이 되 었다. 그리고 그녀들의 호위를 명분으로 하이슬란드에 모인 철가면 기사단 의 기사 34명이 따라나섰다. 게다가 차이저 가 소유의 탈로스 3기중 2기도 같이 그란으로 떠났다. 세나데나는 갤 공의 손녀이므로 기사들은 트라얀 공 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트라얀 공이 라혼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그들에 대한 명령권을 위임한다는 위임장이 동봉되어 있었 다. *** “뭐야? 테이에 어머니까지 함께 온다고?” “그렇습니다. 주인님!” “그럼 카시아는?” “그녀는 지금 아기를 낳기 위해 사이스 본가에 있습니다.” “아기?” 라혼은 뜻밖의 소식에 블러드의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주인님 부친 곁에 남으셨던 사이스 가의 기사, 나이트 제튼의 아이입니다 .” “확실해?” “그쪽에 있는 도둑길드의 사기꾼들이 그것을 빌미로 그녀를 협박하려 한 것을 제가 손써 두었습니다.” 라혼은 카시아의 부정에 묘한 배신감을 느꼈다. 그러나 곧 그러한 배신감을 느끼는 자신이 우스워졌다. 라혼이 지금까지 그녀와의 이혼을 정식으로 공 표하지 않은 이유는 그 내용이 너무나 일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남 에 눈을 신경 쓸 라혼이 아니었지만 큰누나인 루나가 트라킨 네부카드 사이 스, 아버지에게 기사수업을 받은 종자이기도 했던 그와 관계 때문이었다. 지금 나이가 찬 둘을 맺어주자는 움직임이 있는 이상 라혼으로썬 괜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 일은 모르는 척 덮어두지. 그보다 받아! 마법통신반지다.” “피아 링이군요.” “의사만 전달할 수 있는 기능만 가지고 있어. 이것이라면 유니언의 지배력 을 더욱 확고히 할 수 있을 거야. 단, 이곳엔 결계가 있기 때문에 통신이 않되 하지만 마법 통신구의 중계를 받으면 되지…….” 라혼은 블러드가 구해준 정령석을 이용해 초장거리 통신반지 피아 링을 만 들었다. 만일 라혼이 에텔 스페이스를 경유하는 마법 아이템을 만들었다면 훨씬 대단 했을 것이지만 최고, 최대무기인 에텔 스페이스가 라혼의 외의 존재가 이용하게 하는 것은 문제가 있었다. 라혼이 에텔 스페이스를 이용해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를 할 수 있듯이 워프게이트를 열어 거리에 상관없이 대량의 물자를 한꺼번에 옮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이공간 에텔 스페이스 경유지로 설정하면 간섭이 심해져 라혼의 에텔 스페이스의 지배력을 떨어트리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라혼이 고안한 통신체계를 이용하면 시드그람 대륙 북쪽 끝에서 남 쪽 끝까지 미치는 유니온의 영향력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 는 것은 라혼이 시드그람 대륙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실시간으로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단순히 먼 거리에서 서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 것만 으로 라혼은 이미 상대의 패를 알고 카드도박을 하는 도박사가 된 것이다. “이 통신체계는 인시드로우의 마법사들이 운용하는 통신체계보다 뛰어나군 요. 마나를 다룰 수 없어도 이 아이템을 사용하는 데 무리가 없으니 말입니 다.” “물건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운용하는 것은 역시 사람이다. 연락망을 구 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알겠습니다.” “일단은 100개의 피아 링과 연계된 통신구 10개를 준비했다. 대륙전체에 흩어놓으면 흔적도 남지 않을 것이지만 일단은 그것이 다다. 하이드아웃의 장인들에게 당분간 정령석을 가공하는데 에만 주력하도록 해라!” 라혼에게 단번에 1000개나 되는 피아 링을 활성화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이미 어느 정도 힘을 가진 정령석을 그 구조단위에서 마법 진을 만들어 주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일은 창조의 힘이 아니고서는 물질의 본질을 바꾸는 일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기도 하지 만……. *** 홍염의 기사 메사리프 세나데온 발. 임페리얼 챔피언십 토너먼트 우승자로 플래티움 아스카론의 주인이 된 자.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 압도적 인 존재감을 감출 수 없었다. “발 경!” “…….” 타는 듯한 붉은 머리와 세상을 오시하는 눈동자의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사 내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가던 길을 멈추고 몸을 돌려세웠다. 메사리프 를 불러 세운 이는 다름 아닌 그루미아 공작의 집사 다지르였다. “발 경, 저희 공작전하가 경을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무슨 일로?” “…….” 그루미아 공작의 집사 다지르는 이제 막 기사작위를 인정받은 자가 뻣뻣하 기 그지없는 태도로 되물어오자 살짝 안색이 굳었다. 하지만 다지르는 내색 치 않고 다시 말했다. “무슨 일인지는 제가 알 도리가 없지요. 다만 저는 전하의 뜻을 전할 뿐입 니다.” “이유가 없다면 만나지 않겠다.” “크흠! 알겠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고위 귀족이 누군가에게 만남을 요청했는데 아무런 이유 없이 거절하는 것 은 굉장한 모욕이었다. 면담요청을 아무런 이유 없이 거부하는 행위는 ‘나 는 당신을 믿을 수 없다.’라는 것은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 다. 더욱이 지금 메사리프가 기가하는 곳은 그루미아 공작의 저택이었다. 그 집에 머물면서 집주인의 면담요청을 거부한 것은 진정 있을 수 없는 일 이었다. 그래서 메사리프의 여지없는 거절에 다지르의 안색은 붉게 물든 채 몸을 돌려 사라졌다. 메사리프, 레드 드래곤 프리사메티의 입장에선 그러한 인간들의 규범을 따 라 주어야할 이유가 없었다. 비록 라혼에게 패해 그의 수족이 되었지만 위 대한 종족 드래곤으로써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틀 속에서 움직여야할 의무 는 없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행동은 공작은 물론 그루미아 가의 기사들에 게도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그가 검을 바친 군주인 라혼에게 집중되었다. *** “후우! 너무 완벽하군.” 라혼은 프리사메티가 저지른 일에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었다. 본래 프리 사메티는 대기에 흩어졌다. 그리고 지금 프리사메티 영룡 이터너디 드래곤 의 아바타르였다. 아바타르는 신이 인간으로 현신한 화신체를 말하는데 지 금 프리사메티가 그러했다. 창조신 브라마의 인과율에 따라 이 세계의 현신 은 브라마의 손에서 떠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이터너디 드래곤은 이세계 의 ‘창조’로써 현세의 인과율에서 벗어난 존재다. 그럼으로 이 세계에 들 어오기 위해서는 그릇이 필요했고 프리사메티는 그 그릇에 해당했다. 그러 나 문제는 본래 이터너디 드래곤이라도 아이덴티티, 정체성은 프리사메티였 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세계의 ‘창조’인 브라마의 인과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너무나 완벽하게 레드 드래곤 프리사메티의 정체성을 가 진 덕분에 지금 프리사메티는 스스로 약속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매여 있다 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어머니와 누나들이 오기 전에 이 일을 해결해야겠지.” 라혼은 에텔 스페이스에서 물방울 진주로 장식된 상아 깃털 부채를 꺼내들 고는 방을 나섰다. 그리고 라혼이 찾은 곳은 공작부인 머무는 별관이었다. “어서 오세요. 프린스 그란!” “공작부인 뵙습니다.” “호호호, 제게 찾아온 것을 보니 그 문제 때문이군요.” 그루미아 공작의 아내는 이제 서른 후반의 아름다운 귀부인 이었다. 그녀는 그란 사교계의 여왕이라 불리는 화려한 여자였는데 그녀의 영향력은 남편 인 그루미아 공작뿐만 아니라 그란의 대부분의 귀족들이 그녀의 말을 무시 하지 못했다. “그렇습니다. 공작부인 하지만 그것보다 부인의 마음을 얻고 싶습니다.” “내 마음을요? 오호호호호호…………. 그거 재미있군요.” “메사리프의 일은 그루미아 공작과 페데를 치르더라도 물러설 생각이 없습 니다.” “……?!” 공작부인은 페데(Fehde)라는 말에 놀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페데는 자유 인 사이, 특히 귀족이나 영지와 영지 사이에 벌이는 합법적인 전쟁 이었다. 확실히 메사리프가 공작을 모욕한 것은 선전포고를 받는다 하더라도 할 말 없는 행위였다. “메사리프는 사람들이 만들어 규칙이나 규범 같은 것을 인정하지 않는 친 구입니다. 그러니 제가 물러선다고 해도 그는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 “그런가요?” “하지만 저는 원칙적으로 그루미아 공작과 척을 지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공작가의 여자입니다. 프린스 그란.” “그러나 현명한 분이시기도 하지요. 괴팍스런 기사의 개인적인 고집 때문 에 저와 공작가가 적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호호호호, 저를 과대평가하시는 군요.” 라혼은 품속에서 하얀 부채를 꺼내 웃는 그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그리고 이것은 저의 선물입니다. 뇌물이라고 받아들여도 좋습니다. 부치 는 시늉만 해도 차갑기 그지없는 바람이 만들어지는 마법물품이기도 하지요 .” 공작부인은 라혼이 뇌물이라며 건네준 부채를 펼쳐보고는 눈을 반짝였다. 상아뼈대에 진짜 새의 그것과 구별할 수없는 깃털은 분명 손으로 세공된 것 이었고, 부채를 장식한 떨어지는 물방울 모양의 진주만으로도 그 값어치를 헤아릴 수조차 없게 했다. 그런데 거기다 마법 주문까지 걸려있다면 이것은 돈이 있어도 구하지 못할 보물이었다. “알겠습니다. 프린스 그란. 제가 바깥양반을 설득해 보지요.” “감사합니다. 이것으로 공작전하가가 명목상의 후견인이 아닌 진짜 후견인 이 되어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 점도 이해시킬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공작부인은 황홀한 진주와 상아특유의 빛을 바라보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 그리고 그것을 든 채 남편에게 찾아갔다. 그루미아 공작과 공작부인은 나 이차이가 많은 부부였지만 금슬이 좋기로 유명했다. 그루미아 공작이 자신 의 아들과도 나이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아내를 끔찍이 아끼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부인!” “피곤해 보이시는 군요.” “갤 지방의 영주들 사이에서 긴장관계가 높아져 그쪽일이 여기저기 문제가 발생하는 바람에 신경을 썼더니 그런 모양이오. 한데 어쩐 일이오?” “라혼 자작이 찾아왔었습니다.” “그가 말이오?” “그의 기사가 저지른 일은 무마해 달라며 제게 이것을 주더군요.” 그루미아 공작은 부인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다음 말을 기다렸다. 공 작이 아내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녀가 아름답기도 하지만 언제나 현명한 판 단을 내리는 여인이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을 닥쳐 곤란함에 빠져 있을 때 같이 고민할 수 있을 만큼 교양 있는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지금 발 경이 소유한 플래티움 아스카론이 누구의 것 이었는지를 말입니다.” “……!” “지금 우리는 그를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흐음…….” 그루미아 공작은 젊은 아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명확하게 이해했다. 처음 라혼 자작을 황제 후계자로 지목한 이유는 하이슬란드에 웅크리고 있 는 트라얀 공을 잡아두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지난 토너먼트이후 그의 영향 력이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커져있었다. 또한 지난날 트라얀 공과 함께하던 의회의 귀족들이 그를 중심으로 재결집을 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게다가 뜻하지 않게 나르도르프 공작가도 그에게 호감을 보이고 있었으며 레아모스 공작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루미아 공 작에겐 자신을 모욕한 기사를 처벌한다는 그의 기세를 꺾을 명분이 있었다. 여기서 그루미아에게 라혼 자작의 가치를 재평가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그저 단순한 인질로 생각할 것이냐, 아니면 손을 잡는 동반자가 될 것이 야…….” “아닙니다. 그와 손을 잡으려면 그의 신하가 되어야 합니다.” “음?” “잊으셨습니까? 그는 차기 신성 시드그람 제국의 황제입니다.” 페데(Fehde) “레니아 언니!” “리디아!” 너무나 오랜만에 밝은 태양아래에서 잘 가꾸어진 정원을 산책하던 레니아는 반가운 얼굴을 보고 미소 지었다. “리디아 그동안 잘 있었니?” “응!” “리디아 그 분은 누구시니.” “엄마, 이 언니가 내가 전에 말했던 그 언니야.” “레니아라고 합니다.” “카린느입니다.” 카린느는 상당히 색정적인 매력을 풍기는 보랏빛 풍성한 머릿결을 가진 그 녀를 경계했다. 리디아는 분명 납치를 당했었다는 것을 카린느는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카린느의 기색을 잃은 레니아는 여자가 보기에도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그저 리디아의 친구일 뿐입니다. 미세스 카린느. ” “…….” 놀리는 것인지 아니면 진정인지 모를 레니아의 어투는 오히려 카린느의 경 계심을 더욱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레니아가 지금껏 살아오던 곳은 도둑과 사기꾼들이 우글대는 하이드아웃이었다. 그곳에서 생활한 레니아는 스스로 감추는 법을 알아야했고, 어떤 말을 해도 진정인지 거짓인지 알 수없는 모 호함이 있었다. 카린느가 그저 보통여자였다면 깊게 생각하지 않고 그러려 니 넘어갔을 일이지만 그녀는 산전수전 다 겪은 여자였다. 그런 두 여자의 미묘한 대치상황에 그사이에 낀 리디아는 이러지도 저러지 도 못하고 눈치를 보며 끙끙댔다. 다행이 그때 리디아의 주의를 돌리는 일 이 벌어졌다. “어? 메사다. 메사!” 리디아의 눈에 모퉁이를 돌아오는 홍염의 기사 메사리프가 잡힌 것이다. “아까도 보고 뭐가 반갑다고 쪼르르 달려오는 거냐? 꼬마!” “나 꼬마 아니야!” 타는 듯한 붉은 머리의 미남자 메사리프, 아니 프리사메티는 은근히 드래곤 피어를 발현해 접근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만들어 쓸데없이 다가오는 사람 을 막았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리디아는 프리사메티의 드래곤 피어(Drag on Fear)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처럼 천진난만한 얼굴로 그에게 안겨들었다 . 리디아에게 있어 메사리프는 라혼과 더불어 가장 만만한 존재였다. “세상 어디에 가봐라 너 정도 계집아이는 모두 꼬마라고 부르지. 인정할 것은 인정해!” “이익!” “어!” 리디아는 메사의 말에 그의 화려하기까지 한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이 계집애가 이 몸의 머리카락을 뽑으려 들다니…….” “그래서 지금 리디아를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메사리프는 귀엽지 않는 콩알만 한 꼬마계집애가 무척영악하기까지 하다는 사실을 방금 깨달았다. 그가 함부로 할 수 없는 유일한 상대의 등 뒤에 숨 어 고개만 빠끔히 내밀고 혀를 살짝 내미는 것을 보면 그새 자신이 그에게 반항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눈치 챈 것이 분명했다. “철 좀 들어라! 철 좀 들어! 네가 사고 친 것 때문에 내가 고생이잖아.” “고생하거나 말거나!” “너 아냐? 네가 그런 표정지으면 무척 귀엽다는 것을…….” “……?” “맞아! 새침데기 공주님 같아.” 라혼과 리디아의 절묘한 콤비 플레이에 더욱 인상 구기는 프리사메티였지만 그런 그의 모습 또한 리디아가 보기에 귀엽기(?) 그지없었다. “너무 하시는 군요. 저는 소개시키지 않으실 건가요?” “아! 미안 서로 인사하라고 이쪽은 메사리프 세나데온 발 나에게 충성을 맹세한 2번째 기사고, 이쪽은 마법사인 레니아!” “메사리프다.” “레니아입니다.” “흑마법사군.” “흑!” 프리사메티의 타오르는 듯한 눈빛에 기가 질린 레니아는 자신도 모르게 신 음성을 흘리며 주춤 물러섰다. 아까까지 리디아와 티격태격하며 귀엽기까지 한 표정을 짓던 존재라고는 상상치 못할 정도로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눈 빛이었다. “메사, 우리 ‘자기’ 그만 겁줬으면 하는데…….” “네가 일을 하는데 흑마법사가 필요한 건가?” “마왕이 마녀를 수하로 두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 아닌가? 프리사메티. ” “흐음…….” 드래곤은 신과 같은 권능을 행사하지만 육신을 생명을 가진 존재였다. 그래 서인지 마왕의 신부라고 불리는 특벼한 영혼을 가진 여자에 대해선 모르는 것 같았다. 아닌 마왕의 신부에 대해서는 알지 몰라도 구별하는 능력은 없 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프리사메티는 본래의 프리사메티가 아니었다. “상당히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인간이로군.” 그러나 지금 프리사메티의 자아는 그것에 대한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보다 이렇게 모이기도 어려운데 맛있는 것이나 같이 먹을까?” “와! 신난다.” “문제는 다 해결 된 건가?” “그거라면 최후통첩 비슷한 것을 했으니 공작의 결단만 남았어. 우리가 고 민할 일이 아니지.” “인간의 일은 인간으로서 해결할 생각이 아니었던가?”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나는 인간이야. 내가 가진 힘으로 문제를 해 결하는데 그게 뭐 어때서…….” 레드 드래곤 프리사메티는 라혼의 말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확실 히 그란의 모든 인간이 모두 덤벼들어도 무서울 것이 없는 프리사메티였다. 그러니 그루미아 공작이 어떻게 나오든지 알바 아니었다. 그것은 라혼에게 도 마찬가지였다. 라혼이 아까워하는 것은 그의 조력을 얻지 못함으로써 그 루미아 공작가가 가진 정치력과 인맥을 이용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을 뿐 이었다. “도무지 알 수 없군. 이따위 인간들의 도시쯤이야. 내가 모습을 보이는 것 만으로도 간단히 접수할 수 있지 않은가?” “확실히 그렇지. 내 목적이 단순히 인간을 지배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가 장 간단하고 쉬울지 모르지.” “…….” “북풍과 봄볕이다.” “북풍과 봄볕?” “매서운 북풍이 아무리 거세게 휘몰아치더라도 나그네의 외투를 벗길 순 없다. 그러나 따사로운 봄볕은 나그네로 하여금 스스로 외투를 벗게 한다. ” “그럼 너는 인간들이 스스로 널 따르게 하겠다는 거냐?” “그래, 그리고 무리사회를 이루는 동물들은 원래 가장 힘센 놈을 따르기 마련이다.” “재미있군. ‘무리사회를 이루는 동물’이라고? 탄티노의 성황청 놈들이 들으면 기겁할 발언이군.” 프리사메티는 인간을 많은 동물 중 하나로 생각하는 라혼을 흥미로운 표정 으로 바라보았다. 인간들은 스스로 인간이야 말로 가장 아름다운 생명체라 자부하며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은 영혼을 가지고 있지 못한다고 생각했 다. 엘프나, 드워프, 드래곤, 오크 들은 요정 족에 속한다고 믿었다. 사실 이 그렇지만 인간은 요정 또는 정령계에 속하는 종족을 제외한 종족 중 유 일하게 신의 권능이라는 마법을 사용하는 종족이었다. 레니아는 라혼과 붉은 머리기사의 대화를 엿듣고 붉은 머리 기사가 인간이 이외의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일부러 감추어 두었음에도 자신이 흑 마법사라는 사실을 단번에 꿰뚫어본 그의 능력을 볼 때 그가 어마어마한 존 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보다 뭐 먹고 싶니? 리디아.” “아무거나 라혼이 만든 거라면 다 좋아!” “내가 만든 거?” “응!” “그럼 뒤뜰에서 고기나 구워먹자!” 라혼은 리디아의 말에 그루미아 공작의 식료품 창고에서 숙성시켜놓은 돼지 고기와 각종야채들을 가져와 특제 양념을 발라가며 참나무 장작불위에 올려 놓고 굽기 시작했다. 리디아는 꼭 여행을 떠난 모험자들 같다며 좋아했지만 지금 라혼의 행동은 그루미아 공작을 자극하는 일이었다. 집주인의 허락도 없이 함부로 식료품 창고를 뒤진 일이나 역시 주인의 집에서 스스로 음식 을 해먹는 행위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것을 알고 있는 카 린느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라혼 자작님, 우리는 손님인데 이렇게 허락도 없이 일을 벌이는 것은…… .” “걱정 마! 어차피 여기 이 빨갱이가 사고를 쳐놓은 덕분에 이 정도는 아무 런 상관없어 어차피 물에 빠져 흠뻑 젖었는데 비 온다고 몸을 사릴 이유는 없으니까.” “그렇지만…….” 카린느는 여전히 걱정스런 표정을 지우지 않았지만 장작불 위의 바비큐는 구수하기 그지없는 향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더욱이 라혼이 특별히 만든 바비큐 소스와 어우러진 향기는 바람을 타고 그루미아 공작의 저택 전역에 퍼져나갔다. “어머? 세상에, 그게 다 뭐야?” “어서와 글로리아.” “글로리아 언니!” 라혼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접한 글로리아는 그의 기사가 한 행동 때문에 곤 란한 지경에 빠졌을 그를 도울 일이 있을까 찾아왔다. 그러나 자신이 걱정 한 상대는 태평스럽게 자신이 이집의 주인인양 고기를 굽고 있으니 조금 황 당했다. “세상에 지금이 어떤 때인데 한가롭게 고기나 굽고 있는 거야?” “뭐가?” “몰라서 물어?” 라혼은 글로리아의 자신을 걱정해주는 말에 씩 웃었다. 확실히 그랬다. 세 간에선 그란 3공작이 라혼을 후견하기 때문에 역대 어느 황제 후계자보다도 확실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달랐다. 그리고 웬만한 식견이 있 는 사람들 사이에선 모두 알고 있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빛 좋은 개살구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그리고 라혼이 벌이고 있는 그란의 오랜 빈민가인 파이 스 포인트 정비에 어떠한 도움도 주고 있지 않았다. 그것이 현실이었다. 라 혼은 실질적인 힘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시점에서 그루미아 공작 가와의 분란은 라혼에게 치명적인 것이었다. “알아. 네 할아버지가 져주지 않는다면 아마도 페데까지 이어지겠지.” “전쟁? 지금 우리 그루미아 가문하고 전쟁을 하겠다는 거야?” “그래.” “지금 그걸 말이라고 생각해 겨우 둘이서 할아버지랑 맞서겠다는 거야?” “아니, 지금 하이슬란드에 있던 철가면 기사단의 기사들이 그란으로 오고 있는 중이야. 대략 서른 명 정도 되고 죠슈아도 같이 올라오니까 상당한 전 력일 걸!” “뭐? 정말!” “게다가 탈로스까지 2기나 온다고, 어때 이 정도면 할 만하지 않겠어?” 글로리아는 라혼의 말에 그저 놀랄 뿐이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아는 레니아는 경악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란은 제도다. 황제가 머무는 도 시이기 때문에 그란으로 군사력을 그것도 탈로스를 가지고 들어올 수는 없 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란의 영향력이 미치는 황제 직할지 전체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다만 황제의 요청에 의해 직할지의 길을 통과 할 수는 있지만 대부분의 신성 시드그람 제국의 기사들은 황제의 직할지 안으로 탈로스를 끌고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 거 원래 비밀로 해야 하는 거 아냐? 특히 그루미아 가문 사람에겐? ” “사실 그렇지, 하지만 탈로스까지 거느리고 있는 수십 명의 기사들이 그란 으로 이어지는 가도를 타고 오는데 그것이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도 아니잖 아.” “그런가?” “내가 그루미아 가문과 사이가 좋지 않게 되더라도 벌써부터 너와 내가 미 워할 필요는 없잖아!” 확실히 그랬다. 어른들의 일이야 이상하게 꼬여가고 있었지만 글로리아 자 신은 라혼을 돕고 싶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서로 칼끝을 겨눌 정도로 험악해질 사이가 되더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라혼을 미워하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어휴~! 나도 모르겠다. 적이 될지 모르는 가문의 집에서 한가하게 고기나 굽는 너나 그걸 먹는 나나 똑같지…….” “잘 생각했어. 여기 받아!” 라혼은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고깃덩어리를 글로리아에게 내밀었다. 글로리 아는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고깃덩어리를 그대로 베어 물고는 감탄사를 연발 했다. “음, 맛있어!” “확실히 그렇지. 고귀한 공작가의 영애가 커다란 고깃덩어리를 통째로 뜯 게 만드는 맛이니까…….” 라혼의 그날 벌인 격식을 깨는 행위가 세간에 알려지자 사람들은 무척 즐거 워했다. 귀족가의 식객으로 있으면서 주인의 식료품 창고를 털어 그 집 뒤 뜰에서 그것을 요리해 먹은 일은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게 다가 그 일을 벌인 당사자가 프린스 그란, 차기 황제였다는 사실이 더욱 흥 미를 끄는 요소가 되었다. 그리고 어느새 홍염의 기사라는 별명이 붙은 마 고 출신의 월드 챔피언이 공작과의 면담을 무시했다는 것이 같이 알려지면 서 그루미아 공작가의 대응에도 관심이 쏠렸다. 페데(Fehde) *** “뭐야? 철가면 기사단이 그란으로 오고 있다고? 게다가 탈로스까지…….” “그렇습니다. 공작 전하!” 그란 3공작 가운데 하나인 레아모스 공작은 라혼 자작에게 무력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다. 더욱이 껄끄럽기 그지없는 철가면 기사단이라면 말할 것 도 없었다. 아직까지 비밀이 유지되고는 있지만 자신과 다른 공작들이 트라 얀 공을 도모한 사실은 언젠가는 밝혀지게 되어있었다. 그러데 복수할 권리 가 있는 자들이 그란에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반란행위야. 그란으로는 어떠한 군사력도 들어와선 안 돼! 당장 의회의 의장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귀족의회를 소집해라.” “알겠습니다. 전하!” 레아모스 공작은 이번일이 단순히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도련님이 벌이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겉보기엔 앞뒤 분간 못하는 철부지가 아무 생각 없이 일을 벌인 듯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음모라고 보기에는 졸렬했지만 우연이라고는 할 수 없는 의도적인 흐름이 보였다.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무력으로써 기반을 든든히 한다. 확실히 정석 이긴 하지. 그러나 이렇게 보란 듯이 움직이다니……. 다른 의미로 대단하 다고 해야 하나?” 라혼 자작은 인질이었다. 트라얀 공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그런 존재였다. 인질인 자에게 뭔가를 얻어 내려하는 것은 어리석음일 뿐이었다. 즉 그는 정치적 협상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러한 존재가 가장 껄끄러 운 철가면 기사단의 기사들을 그란으로 불러올린 것이다. *** -딱, 딱, 딱, 딱! “레아모스 공작 발언하시오.” 신성 시드그람 제국의 귀족의회. 원래는 힘이 약한 황제의 권위를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실상 아무런 권한도 없는 이 름뿐인 기관이다. 지방의 귀족들이 모두 독립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어 그들 간에 분쟁이 생기면 조정하는 일이 전부인 기관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의 회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란 3공작이었다. 신성 시드그람 제국의 그 늘에 있는 대영주들에게 있어 그란의 귀족의회는 황제보다도 유명무실한 곳 이었다. 오목하고 둥근 형태의 회의장에서 이번 회의를 소집한 레아모스 공작이 앞 으로 나와 발언을 시작했다. “오늘 급하게 여러분을 모이게 한 것은 불측하게도 반란의 음모를 꾸미고 있는 자가 있기 때문이오!” -웅성, 웅성, 웅성, 웅성, 웅성…………. -딱, 딱, 딱, 딱! “조용! 조용히들 하시오.” 레아모스 공작의 발언에 갑작스런 비상 호출이 무엇 때문인가 했던 의석을 가진 귀족들이 서로 뭔가 아는 것이 있는지 물어보느라 회의장이 소란스러 워 졌다. 그러자 귀족의회의 의장인 아난 백작이 의사봉을 치며 장내를 수 습하고 그들을 대신해 레아모스 공작에게 물었다. “레아모스 공작 전하, 그게 무슨 말이오? 반란이라니?” “그렇소. 반란이오.” “누가? 무슨 이유로 반란을 획책한다는 말이오?” “다크 프린스, 라혼 가이우스 세나데온 차이저 자작과 트라얀 반트 세나데 온 콰이스 공작이오.” -쿵! 레아모스 공작의 말에 장내는 싸늘하게 식었다. 그러나 회의에 참석한 귀족 들의 얼굴에는 공통적으로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드리워져 있었다. “레아모스 공작! 그게 무슨 뜻이오? 라혼 자작은 그란의 왕자이며 차기 황 제요. 그가 뭐가 아쉬워서 반란을 획책한다는 말이오?” “지금 수십명의 철가면 기사단과 2기의 탈로스가 그란으로 접근하고 있소. 그란으로 군사력을 불러올리는 일은 엄연한 반란행위요. 사이스 경!” “난 당신의 주장을 믿을 수 없소. 여기 누구라도 당신의 말만을 듣고 프린 스 그란으로 추대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그에게 죄를 물을 수는 없소.” “그렇다면 그를 이 자리에 불러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주겠소. 만일 그가 이것을 거부한다면 명백한 반역자요!” “그것은 공작 당신의 일방적인 주장이잖소! 확실하지도 않은 일에 모욕적 인 변론을 하게 하는 것은 그를 무시하는 행위요!” 사이스 백작의 친동생인 마이얀 네부카드 사이스 경은 레아모스 공작을 맹 렬히 비난했다. 라혼은 사이스 가의 사위였고, 지금 그를 중심으로 라혼의 지지 세력이 결집되고 있었다. 레아모스 공작이 반란 운운하며 강경한 어조 를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사이스 가를 중심을 모이는 세력을 와해시키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명목상이긴 하나 그루미아 공작과 나르도 르프 공작이 후견인으로 있으면서 별다른 움직임이 없이 견제를 하지 않자 트라얀 공이 갤에서 실각한 이후 와해된 세력들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아직 은 초기이고 별다른 특기할 만한 것은 없었지만 귀족의회를 장악하고 있는 3공작파로써는 그들에게 신경이 쓰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 “의회에서 반란혐의에 대한 자기변론을 하라고?” “그렇습니다. 전하!” 보라색 망토가 인상적인 근위대 정복차림의 기사가 가져온 소식은 라혼은 물론 레이나까지 의아하게 만들었다. “무슨 말이야? 반란이라니?” “그것에 대해선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다만 레아모스 공작님께서 전하 를 반란혐의로 고발하셨다는 것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봐요! 반란이라니요? 지금 전하가 반란을 해서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 다는 것을 당신이 더 잘 알잖아요.” “어쨌든 지금 당장 저희와 함께 가주셔야 합니다.” 라혼은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반란혐의에 뭐가 뭔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 었다. ‘이건 뭐지? 다소 무례하기는 하지만 허락 없이 식료품 창고를 턴 것이 다 소 무례하기는 하지만 그것 때문에 당치않게 반란죄를 덮어씌울 리는 없고 ……. 뭐지? 아직까지는 3공작과 밀월관계일 텐데……. 레아모스 공작이 날 견제할 이유가 있나?’ 트라얀 공이 실각하고 겨우 반년이 지났다. 표면적으로 라혼은 어떠한 힘도 없는 천둥벌거숭이와 같았다. 다만 자신의 이름을 알리려 좌충우돌하는 것 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라혼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근위기사를 따라 귀족의회 회의장으로 갔다. 그리고 아무런 설명을 듣지 못한 상태에서 발언대에 세워졌다. “프린스 그란, 지금 이 자리는 그대의 반란혐의에 대한 변론을 위한 자리 요. 할 말이 있으면 하시오.” 밑도 끝도 없는 의장의 말에 라혼은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무슨 이유로 반 란혐의 받고 있는지도 가르쳐주지 않고 자기를 변론하라니……. “…….” 라혼은 회의장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느끼고 차분한 어조로 물음을 던졌다. “나는 내게 무엇 때문에 반란혐의가 있는지 모른다. 누가 나서서 설명을 해줘야 할 것 아닌가?” “…….” -웅성, 웅성, 웅성, 웅성, 웅성…………. 느닷없는 하대에 회의장이 소란스러워지고, 의장인 아난 백작은 의사봉을 두드려 장내를 정숙 시킨 후 라혼에게 말했다. “프린스 그란, 여기는 제국 귀족 의회입니다. 말을 가려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설명을 듣지 못하셨다니 제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 라혼은 조용히 침묵한 채 레아모스 공작이 자신을 고발한 근거가 그란으로 오고 있는 철가면 기사단과 2기의 탈로스라는 것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자기들이 한 짓이 있으니까. 트란얀 공의 기사들이 그란으로 오 는 것이 싫다는 말이로군.’ 라혼은 그란 3공작이 트라얀 공의 암살을 사주 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레아모스 공작, 그대는 겨우 그 일로 나에게 모욕을 주는가?” “……!” “나는 그대가 트라얀 공의 암살을 사주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증거도 있다.” -쿵! 레아모스 공작은 그의 말에 얼굴에 핏기가 가시며 창백해졌다. 그리고 그가 어떤 결정을 채 내리기도 전에 라혼의 발언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외증조부시기도 한 갤 공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너의 그 사악하고 치졸한 음모를 모른 체했을 뿐이다. 지금 이 자리를 빌려 선언 한다. 나 라혼 가이우스 세나데온 차이저는 힘으로 레아모스의 죄를 물을 것이다. 레아모스 페데를 준비해라!” 선전포고. 그것은 분명한 선전포고였다. 라혼이 롱소드를 뽑아들어 레아모 스 공작을 가리킨 그 순간 회의장은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 다. 그리고 그 고요함 속에서 낭랑한 패기만만한 청년의 말이 계속되었다. “사흘 후, 그란 서쪽 벌판에서 일전을 준비해라. 레아모스! 만일 나의 이 말마저 무시한다면 네 목에 1만 골드의 현상금을 붙여 암살자를 보낼 것이 다. 비겁한 레아모스!” 모욕도 이만한 모욕이 또 없었다. 기사도의 본가라는 신성 시드그람 제국에 서 암살을 사주한 것 자체가 명예롭지 못한 일이었는데 많은 귀족들이 자리 한 의회에서 비겁하다는 말까지 들었으니 체면에 죽고 사는 귀족으로선 치 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레아모스 공작은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회의장을 빠져나가는 라혼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레아모스 공작이 보기에 라혼 자작은 미숙한 애송이였다. 레아모스는 그를 반란혐의로 고발해 기를 꺾고 그란으로 철가면 기사단의 기사들을 그란으로 오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본래 의도였다. 원래 생각대로라면 당황한 애송 이가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으며 허둥대는 모습을 보길 원했었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것은 복수를 명분으로 한 선전포고였다. *** 라혼이 레아모스 가에 선전포고한 일은 그날로 커다란 뉴스가 되어 그란의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전쟁을 선포한 명분이 복수였으므로 그 일에 관련된 나머지 두 공작가도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의견이 분분 했다. “라혼 자작의 선전포고는 정치적 발언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전하! 겨우 사흘입니다. 진정 싸움을 할 의사가 있었다면 한 달 정도의 시간을 말했어야 했습니다.” “그에겐 자신을 포함한 기사가 2명뿐입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아마도 대 전사 결투일 가능성이 큽니다.” “아니다. 다크 프린스가 의회에서 한 발언은 레아모스로써는 이만저만한 모욕이 아닐 수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가 한 말이지만 한사람의 귀 족으로서 한 발언이라는 점을 중요시 여길 것이다.” “공작전하, 그럼…….” “결정을 해야겠지. 그란의 3공작이 손을 잡고 트라얀 공과 싸우는 것으로 …….” 나르도르프 공작의 마음은 정해져 있었다. 어차피 트라얀 공과의 싸움은 피 할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전하, 다크 프린스가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그가?” “전하, 만나보십시오. 어쨌거나 후견인이 아닙니까? “음, 들여보내라!” 나르도르프 공작가 저택의 응접실로 들어온 존재는 검은 바탕에 금실로 화 려하게 수놓은 로브를 입은 보라색 머리의 여마도사였다. 상당히 화려한 화 장과 풍성한 로브사이로 간간히 요염하기 그지없는 몸매가 돋보이는 매력적 인 여자였다. “4서클 마법사, 레이나입니다.” “어서 오시오. 메이지 레이나! 내가 바로 나르도르프 공작이오.” “처음 뵙겠습니다. 전하!” “음!” 나르도르프 공작과 그의 충성스런 가신들은 다크 프린스가 보낸 여마도사가 내뿜는 아찔한 매력에 얼굴을 붉혔다. “크흠흠! 그래 무슨 일로 나를 찾은 것이오?” “저는 다크 프린스를 주인으로 하는 비밀기사단의 후예입니다.” “비밀기사단? 처음 들어 보는데?” “그러실 겁니다. 비밀기사단은 다크 프린스 전하께서 저희에게 붙이신 이 름입니다.” “무슨 말이오?” “다시 정식으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퀸 바라니아의 일곱 기사 중 비밀의 기사 블라드미르 경의 후예입니다.” “…….” 레이나는 경악의 표정을 짓는 나르도르프 공작과 그의 신하들을 보며 웃음 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비밀기사단이니, 비밀의 기사 블라드 미르 경의 후예라는 것은 순전히 지어낸 말이기 때문이었다. 비밀기사단은 하이드아웃의 도둑들과 시프로드가 거느린 유니언 조직이었다. 그러나 레이 나는 알지 못했다. 비밀의 기사 블라드미르는 시프로드 블라디미르 B. 블러 드의 또 다른 신분이자 이름이었다는 사실을……. “이번에 저희 다크 프린스 전하께서 레아모스 가문과 합법적 페데를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아실 겁니다.” “그렇소만?” “그래서 저희 전하께서는 나르도르프 공작 전하께서 저희 쪽의 공증인이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 나르도르프 공작은 매혹적이고 마력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여마도사가 하는 말의 의미를 파악하느라 애썼다. 도움을 청하는 것이 아닌 공증인이 되어 줄 것을 원한 것이다. 합법적 사전인 페데에서 공증인은 대개 탄티노에 있 는 성황이 그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성황은 양측진영에 사제를 파견해 불 법적인 일을 하지 않는가를 감시했다. ‘이건 나서지 말고 가만히 있으란 뜻인가?’ 그러나 나르도르프 공작은 그저 이름뿐인 후견인이란 꼬리표 때문에 그를 도와야 하는 입장에서 자유로워지는 명분을 거절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알겠소. 다크 프린스의 뜻이 그러하다면 그렇게 하겠소.” “감사합니다. 나르도르프 공작 전하. 그리고 괜찮으시다면 레아모스 가에 게 확답을 받아주십시오. 페데에 응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말입니다. 참고 로 저희 비밀기사단의 동지들은 곳곳에 있다는 것을 그에게 가르쳐 주십시 오. 그리고 그런 그들은 언제든 암살자가 될 수 있음도 함께 말입니다.” “…….” “그럼.” 상당히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미녀 마도사가 떠나고 묘한 침묵 속에서 나르도르프 공작이 무겁게 말을 꺼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인 것 같소?” “전하, 죄송한 말이지만 저는 비밀의 기사의 후예라는 그녀의 말을 믿기 힘듭니다.” “카프라 경의 말도 맞지만 어떤 세력이 실질적으로 다크 프린스에게 도움 을 주는 세력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플래티움 아스카 론만 봐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검을 차지한 홍염의 기사 메사리프 또한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말처럼 어떤 세력이 그의 뒤 를 받쳐주고 있고 그 세력에 메사리프 또한 일원으로 참가하고 있다면 보통 일이 아닙니다.” “리오센 경, 그란에 그러한 단체가 천년간이나 있었다는 것은…….” “잊으셨습니까? 나이트 메사리프는 마고에서 평민자격으로 토너먼트 챔피 언이 되었다는 사실을…….” “…….” *** 사람들은 뭔가 있는 자보다, 뭔가 있는데 그것이 뭔지 알 수 없는 자에게 두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라혼은 그러한 사람들의 심리를 찔러 변수를 만들 수 있는 세군데 세력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바로 황제, 그루미아 공작, 나르도르프 공작이었다. 이미 레아모스 공작을 혼내주기(?)로 마음먹은 라 혼은 그 셋에게 비밀기사단이란 듣기에도 비밀스런 세력을 보여주었다. 그 러자 그들의 방침이 모두 ‘일단 두고 보자.’로 바뀌었다. 그리고 나머지 사이스 가를 중심으로 한 무리는 레아모스의 화를 돋우면 돋았지 화해나 중 재를 할 만한 세력이 아니었다. “주인님, 제게는 이틀이란 짧은 시간동안 실력 있는 기사를 모을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블러드, 내가 네게 뭘 하라고 했나?” “예?”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그럼 힘을 숨기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너도 빨갱이 도마뱀과 똑같은 소릴 하는군.” 라혼은 하이드아웃에서 블러드의 보물창고를 뒤지며 그에게 물었다. “그보다 화려한 갑옷이 필요한데 여기엔 없나?” “화려한 갑옷 말씀이십니까?” “그래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쇼를 공연하는데 그만한 배려는 있어야 지 않겠어?” “쇼라고요?” 블러드는 도무지 주인인 라혼의 생각을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정치적으로 레아모스 가문과 척을 짐으로써 그란의 귀족들과 대립각을 세우게 되었다. 그것은 그루미아 가문과 나르도르프 가문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승패 에 상관없이 라혼이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었다. “이거 괜찮군.” “주인님, 그것은 의장용 갑주입니다. 그것을 입고 전투를 하시기에 부족합 니다.” 라혼이 찾아낸 갑옷은 과거 하드린안 왕국의 위대한 정복왕 레펠왕이 황제 로 등극하면서 입었던 화려하기만 한 의장용 갑옷이었다. 황금과 백금, 그 리고 청금석이 상감 되어진 아름다운 갑옷이었지만 방호력은 믿을 수없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다만 명장의 손을 거친 예술작품인지라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볍고 움직이는 데에도 거부감이 없었다. “전투야! 맨몸으로도 할 수 있다. 하지만 하려면 멋있게 해야지 않겠어? 그보다 밖에서 활동할 신분은 만들었나?” “예, 탄브라 남작이라는 신분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탄브라?” “다이만 지역의 작은 시골 영주로 자손이 없이 죽은 가문입니다. 그의 영 지가 암시장이 서기에 적당해 그의 죽음을 숨기고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처 럼 꾸며두었습니다.” “남작이라 조금 약하지 않을까?” “그래서 약간의 소문을 만들었습니다. 탄브라 영지에서 동광이 발견되었다 는 소문을 흘려두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곳에 동이 묻혀있 다는 사실은 수년전 알았지만 동광을 개발해 얻는 이익보다 암시장을 유지 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에 일부러 그대로 두었을 뿐입니다.” 자신이 다스리는 영지에 동광이 발견되어 하루아침에 돈방석에 앉은 이름 없는 시골귀족이 그란으로 온다는 각본이었다. “다이만 지역의 대영주가 누구였지?” “세그노스 후작입니다.” 세그노스 후작은 신성 시드그람 제국의 남쪽 방패 역할을 하는 인물로 상당 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대대로 제국과 사이가 좋지 못한 길고마 제 국과 항상 마주보는 관문을 지키는 사람이라 담대하기 이를 데 없는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길고마 제국은 지금 시드그람 대륙을 삼분하는 나기아 왕국, 루파 공화국과 더불어 당당한 한축을 이루고 있었다. 나기아 왕국은 시드그람 대륙 동남 부의 거대한 왕국으로 유서 깊은 강국이었고, 루파 공화국은 마에스트 해와 레판트 해, 그리고 인시드 해(서드 해)를 장악한 해상제국이었다. 그리고 길고마 제국은 시드그람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군사대국이 었다. 그러나 북쪽으로는 신성 시드그람 제국이 동쪽으로 루파 공화국이 있 었다. 서쪽으로 안젤리아드의 동맹국들이 있고 남쪽엔 무시할 수없는 강국 데일, 페라도스, 파리 국이 있으며 넓고 기름진 영토를 가지고 있음에도 단 한 개의 항구도 가지고 있지 못한 가장 불운한 제국이기도 했다. “세그노스 후작이라면 적대할 수는 없지.” “알겠습니다. 그것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페데(Fehde) *** 라혼이 레아모스 가에 선전포고한 사실을 이미 모르는 자는 없었다. 그러나 정작 그 일을 벌인 당사자는 한가롭게 자신의 기사와 그루미아 공작가의 정원에 무척이나 편해 보이는 의자에 누워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렇게 참 으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라혼과 메사리프는 한 여자에 의해 깨져 버렸다. 쉬포니아였다. 그리고 그녀의 첫 질문은……. “라혼, 너 정말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일 저지른 거야?” “대책? 나가 싸우면 되는 일에 대책이라면 뭘?” “싸워줄 사람들을 모아야 할 거 아니야!” “겨우 사흘 만에 사람들을 모아야 얼마나 모은다고? 게다가 어중이떠중이 들을 모아봐라 사고안치면 다행이지.” “라혼!” “아아 그렇게 흥분하면 피부에 좋지 않아! 네 피부가 얼마나 매력적인데. ” “정말? 아니 그게 아니잖아!” 라혼은 볼이 붉게 달아오른 쉬포니아 볼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보다 인사해. 이쪽은 나의 2번째 기사 메사리프, 그러고 보니 나는 빨 강머리를 가진 미인을 무척 좋아했었나봐!” 라혼의 너스레에 쉬포니아 녹색의 눈동자를 상큼 치켜떠 보이고는 상당한 미남자에 압도적인 존재감을 가진 기사를 바라보았다. “메사리프 세나데온 발, 메사리프라고 불러주십시오. 레이디.” “제가 메사리프 경에게 결례를 범했습니다. 캐리언 가의 쉬포니아입니다. ”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레이디 쉬포니아!” “자자, 인사도 나누었으니 일단 여기 앉아. 차줄까?” 쉬포니아는 라혼이 그답지 않게 살갑게 구는 모습에 어색해 하며 일단 의자 에 앉아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야펀에게 들었어. 네가 페데를 선포했으면서도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 지 않는다고…….” “내가 어쩔 거라고 말하면 야펀 선배에게 가르쳐주려고? 그거 스파이아냐? ” “내가 그렇게 생각이 없는 줄 알아?” “쉬포니아, 이것은 정략이고 권모술수야. 네가 나를 걱정해서 찾아와 준 것은 고마운데 너와 나의 관계를 아는 야펀선배라면 네 표정만 보고서도 여 러 가지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거야.” “에?” 라혼에게 유벤트 기사단 선배인 야펀은 야펀 이바트 레아모스 바로 라혼이 선전포고한 레아모스 공작의 손자였다. “그럼 야펀이 날 속였단 말이야?” “속였다기보다 이용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지.” “그 말이, 그 말이잖아.” “어떻게 받아들이든 야펀 선배가 또 뭐라고 하지 않았어? 내가 뜻을 거두 고 대화로 일을 해결하자는…….” 쉬포니아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라혼이 자신이 알고 있는 그 라혼인지 의심이 같다. 전에도 능글맞은 면이 있었지만 부드러운 신사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수십 년간 정계에서 굴러먹던 능구렁이 같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야펀은 라혼이 이일로 힘들어 할 수 있으 니 그럴 땐 자존심 상하지 않게 협상을 유도해 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 었다. “역시 그랬었군. 하지만 나는 선전포고를 거둘 생각이 없어.” “그럼 무슨 수라도 있는 거야?” “안 가르쳐줘.” “뭐야! 그게?” “쉬포니아, 나는 지금 결전을 앞두고 있다고, 그리게 네게 묻는 것은 기밀 을 가르쳐 달라는 것과 다름없어.” 라혼의 말에 쉬포니아는 조금 상처받았다. 그 말은 곧 자신을 믿을 수 없다 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알았어. 아무래도 내가 잘못 온 모양이군.” “미안해! 그래도 나를 찾아와 준 것은 아무래도 네가 유일하군. 나를 따르 던 로얄 살롱의 멤버들은 내가 유벤트 기사단을 떠난 이후로 얼굴조차 본적 이 없는데…….” “…….” 라혼은 쉬포니아를 움직인 것은 야펀이지만 그 뒤엔 많은 세력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난데없이 비밀기사단이란 듣도 보도 못한 세력이 라혼의 뒤 에 있다고 하니 그것이 과연 실체가 있는 것인지 무척이나 궁금했을 터였다 . 그리고 당사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편안하게 누워 시간을 보이고 있으 니 비밀기사단이란 환상을 계속 커져만 가는 실정이었다. “그보다 그렇게 딱딱한 이야기는 접어두고, 네게 부탁할 것이 있는데……. ” “부탁? 무슨……?” “일은 벌여놨는데 준비가 미흡해서 말이지. 갑옷까지는 구했는데 말이 없 더라고, 빌려달라는 말은 못하겠고 말 한마리만 팔아라.” “뭐어?” “이왕이면 털이 하얀 백마가 좋겠군.” 쉬포니아는 라혼의 부탁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 “도무지 알 수가 없군.” 그루미아 공작은 연신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리고는 다시 한 번 물었다. “바로 내일이 그날인데도 전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지금은 캐리언 백작가의 쉬포니아 양이 가져온 말을 씻기느 라 분주하게 움직일 뿐입니다.” “레아모스 공작은 지금 전투준비에 한창이라지?” “예, 전하! 그러나 그쪽도 다크 프린스가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아 어떻 게 대응 방법을 찾는데 어려움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럴 테지…….” 라혼과 레아모스의 페데는 참으로 묘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미 전 쟁을 선언한 이상 양측은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해서 승리할 수 있었다. 동 맹자를 모은 다거나, 자신이 소유한 탈로스를 동원하는 등의 조치를 취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애송이였다. 비록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받긴 했지만 삼자가 보기에 그것은 온당한 비난일 따름이었다. “사흘이라……. 왜 사흘이란 촉박한 그지없는 시간을 잡았을까?” *** “왜? 사흘이냐고?” “그래.” 라혼은 글로리아의 질문에 쉬포니아가 가져온 잡티하난 섞이지 않은 하얀 말의 목을 부드럽게 애무하듯 쓸어내리며 대답해주었다. “아무리 공작가라지만 그 정도는 시간은 있어야 전쟁준비를 할 거 아냐?” “그러니까, 네 말은 레아모스 공작에게 전쟁을 준비하는 시간을 주기 위해 사흘 후라고 했단 말이야? 지금.” “그래.” 글로리아와 쉬포니아는 똑같이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으며 동시에 소리쳤 다. “바보니?” “멍청이!” 라혼은 그녀들의 말을 듣고는 생글생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걱정해 주는 것은 고마운데 바보에 멍청이라니? 너무하네.” “누가 널 걱정한데?” “맞아!” “그런가? 그보다 출출한데 간식이나 먹자고.” 라혼은 그녀들과 함께 자신의 식솔들과 차와 과자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 기를 나누었다. 쉬포니아와 글로리아는 나이트 메사리프와 메이지 레이나의 표정에서 내일에 대한 근심을 찾아볼 수 없자 필승을 자신할 뭔가가 있겠 거니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결전의 날이 밝았다. “그럼 가볼까?” 황금과 백금, 청금석이 상감된 갑주에 금실로 수를 놓은 백색 망토를 두른 라혼은 백마에 올라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 뒤를 라혼과 대조적인 붉은 갑옷에 전신이 검은 흑마를 탄 메사리프가 뒤를 이었다. 그렇게 화려한 차 림의 라혼의 모습에 그란의 시민들은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저마다 승리를 기원하는 환호를 보냈다. “잘싸우쇼!” “이겨야, 돼!” “멋있어요!” 라혼은 그런 시민들의 말에 일일이 대응하며 미소 가득한 얼굴로 눈인사를 했다. 라혼의 그러한 여유로운 태도에 시민들은 재미있어하며 자신들도 모 르게 환호성을 질렀다. -와~! 그리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파급되며 마치 승리한 개 선장군을 환영하듯 라혼에게 환호했다. -와~! 와~! 그리고 누군가 라혼에게 꽃을 던지기 시작하자 시민들은 더욱 흥겨워했다. 라혼은 자신에게 던져진 꽃을 받고 구경하는 아가씨들에게 되던져주며 천천 히 결전장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란의 시민들은 그런 라혼의 뒤를 따르며 라혼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라혼, 라혼, 라혼, 라혼…………. 그러자 라혼의 뒤를 따르던 메사리프가 라혼과 말머리를 나란히 하며 말을 걸었다. “창피하지도 않냐?” “뭐가?” “이 사람들 네가 동원한 사람들이잖아?” “절반정도는 그렇지. 나머진 아니야.” 그랬다. 라혼에게 환호를 보낸 사람도, 꽃을 던져준 사람도 블러드의 사주 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블러드의 존재를 아직 모르는 메사리프지만 라혼이 사람들을 동원하는 계획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다고 무슨 도움이 되나?” “정치를 하는 입장에서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는 것은 중요하지. 비록 힘없 고 어리석은 평민들이지만 때론 가장 큰 힘을 내기도 하고, 가장 현명한 판 단을 내리기도 하거든.” 라혼은 성문을 빠져나와 이미 기다리고 있는 레아모스 공작가의 기사들과 병사들과 마주보는 곳에 섰다. 그리고 라혼의 뒤를 따르던 시민들은 멀찌감 치 떨어져 자리를 잡고 다크 프린스와 레아모스 공작 간에 전쟁을 구경했다 . “이게 뭐야? 지금 장난하자는 거야?” 중갑주를 차려입고 전차에 몰을 싣고 있는 레아모스 공작은 다크 프린스가 기사 한명만 대동한 채 나서자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다. 황제가 대관식 장에 나서서 입으며 딱 좋을 하려한 갑주에 백마의 흰 망토는 절대 싸우려 는 사람의 복장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이 어찌되었던 격식은 갖춰야 했다. 레아모스 공작은 손자인 야펀과 함께 50보 거리에 떨어진 곳까지 전차를 몰 았고, 라혼도 거기까지 가서 레아모스 공작과 마주보았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항복인가?” “아니다. 레아모스 가의 기사들은 나 혼자만으로도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 다. 공작!” “뭐라!” “라혼, 네가 비록 내가 아끼는 후배지만 우리 가문을 모욕하는 발언 하지 는 말아라! 타협을 원한다면 피를 보지 않고서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 나?” 라혼은 흥분한 레아모스 공작대신 앞으로 나선 야펀을 바라보며 그의 질문 에 대답했다. “야펀 선배, 나를 먼저 자극한 것은 선배의 조부입니다. 그리고 아실지 모 르겠으나 트라얀 공을 도모한 것은 선배의 조부만이 아닙니다. 그란의 3공 작이 모두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란의 왕자인 제가 그란 3공작 모 두와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닙니까?” “그럼, 우리 가문이 본보기라고 말하는 것이냐, 지금?”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야펀 선배.” 라혼의 야펀에 대한 깍듯한 태도와 발언 레아모스 공작을 더욱 자극했다. “그럼 공작 시작해 볼까?” “건방진.” 그것으로 협상은 결렬되었고, 전투 아닌 전투가 시작되었다. “메사.” “…….” “미안하지만 피를 보지 않고 이긴다.” “쳇! 재미없군.” “그럼 일단 대장부터 잡아볼까?” 라혼은 레아모스 공작이 제자리로 돌아간 것을 확인하고 에텔 스페이스에서 스프링이 보우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화살을 시위에 걸어 힘껏 잡아당겼다 . -핑! 대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시위를 떠난 화살은 순식간 100보를 격한 허공 을 가르고 날아 레아모스 공작의 투구를 때렸다. -땅! “전하!” “할아버지!” 2번째 화살은 야펀의 어깨를 그대로 꿰어버렸다. “야펀!” “도련님!” “응사, 응사해라!” 레아모스 공작이 오늘 이끌고 나온 병력은 50명의 기사와 500명의 병사들이 었다. 그에 반해 라혼이 동원한 것은 기사 1명뿐이었다. 그리고 550명과 2 명의 전투는 라혼이 쏜 화살 2대로 시작되었다. “토마스 경, 적일 돌격합니다. “전열을 흩트리지 마라! 코엘, 자네가 저들을 제압하게…….” “예!” -퍽! “크억!” 저주받을 화살은 레아모스 기사단의 단장이 나이트 토마스의 허벅지에 박혔 고 나이트 토마스는 말에서 떨어졌다. “토마스!” 라혼은 이 집단을 지휘할만한 인사를 차례대로 무력화시키고는 대기를 압박 하는 피어(fear)를 뿜어냈다. 그러자 메사리프, 아니 레드 드래곤 프리사메 티 또한 드래곤 피어(Dragon Fear)를 내뿜으며 무리 안으로 뛰어들었다. 드래곤 피어는 생명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공포를 느끼 게 하고, 라혼의 피어는 영혼을 두려움에 떨게 한다. 그리고 두려움이란 진 득한 공포 속에서 몸을 자유로이 움직이는 자들은 영웅족이라고 부른다. 넓 은 벌지에 포진한 550인의 군인들은 두려움에 포로가 되어 움직임이 둥해졌 고, 단지 훈련받은 대로 무조건 적을 향해 내달릴 뿐이었다. -꽈창! -크억! 라혼은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기사들에게 바스타드 소드를 휘두르며 양들을 농락하는 한 마리 사자가 되었다. 힘껏 휘두른 바스타드 소드는 레아모스 공작의 기사에 두터운 갑주를 찌그러트리고 뼈를 부쉈다. 파리한 마나를 머 금은 워엑스의 날을 잡아 부러트리고, 그 도끼를 휘두른 기사의 이빨을 모 조리 부러트렸다. “플레어Flare!” -화르륵~! 그리고 메사리프의 플래티움 아스카론에서 불꽃기둥이 뻗어 나와 말을 타지 않은 병사들을 휩쓸어갔다. “저, 저럴 수가!” “…….” “…….” 프린스 그란과 레아모스 공작의 페데에 공증인이 된 황제와 두 공작, 그리 고 귀족들은 550명의 병력을 일방적으로 몰아치는 2명의 기사의 모습에 입 을 다물 수 없었다. 그란을 둘러싼 바라니아 방벽에 자리 잡고 넓은 벌판에 서 벌어지는 전투를 지켜보던 황제는 친동생이기도한 유벤트 기사단장 카이 자드 쉬포니스 캐리언 백작에게 물었다. “자네는 알고 있었나. 다크 프린스가 저런 무용을 지닌 존재였다는 것을? ” “죄송합니다. 저 또한 모르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의 부친은 소드 마스터 로카데 차이저 반 하이슬란드 백작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전장엔 단 두 명의 기사만이 서있었다. 그리고 한 기사가 자신에게 승리를 안겨다준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와아~! 그러자 그 전투를 지켜본 그란의 시민들은 새로운 영웅에게 환호성 보내주 었다. “나 라혼 가이우스 세나데온 차이저, 그란의 왕자다!” -차이저 전하 만세! -만세! 라혼은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레아모스 공작을 찾았다. “공작!” “…….” 레아모스 공작은 라혼이 쏜 화살에 투구에 맞아 잠깐 기절했었지만 이내 깨 날 수 있었다. “이제부터 레아모스 가문은 나 라혼 가이우스 세나데온 차이저의 신하다. 인정하는가?” “…….” 레아모스 공작은 라혼의 눈빛을 받는 순간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충격 을 받았다. 그리고 영혼을 옥죄는 기운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젊은 폭군은 그것만으론 만족하지 않았다. “나는 그대가 피의 서약을 하길 바란다.” 레아모스 공작은 그의 요구에 칼로 자신의 손을 베고 그 피를 보여주며 말 했다. “나는 당신의 충성스런 신하가 될 것임을 피로써 맹세합니다.” 레아모스 공작의 행동은 당장 엄청난 파급효과를 만들어 냈다. 그란의 3공 작중 하나가 그의 신하를 자처한 사실은 신성 시드그람 제국에 불어 닥칠 폭풍우를 예고했다. 페데(Fehde) *** 다크 프린스가 레아모스 공작의 기사단과의 전투에서 보여준 무용은 마치 폭풍처럼 엄청난 방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사람들은 2대 550의 전투는 마나 유저가 사용하는 소드 오러(Sword Aura)나 오러 블레이드(Aura blade)같은 고급 검술을 사용해서 이긴 것이 아닌 전략과 절묘한 전술적 승리로 높은 가치를 부여했다. “여러분, 이번에 다크 프린스와 레아모스 공작의 기사들의 전투를 보면 전 투의 승패가 기사 개개인의 능력만이 다가 아님을 보여주었습니다.” “교수님!” “쥬트군.” 유벤트 기사단의 군사학 강의 시간. 그간엔 유벤츠에게 그다지 인기 있는 과목이 아니었지만 다크 프린스의 전략이 바로 유벤트 기사단의 군사학 강 의에서 나온 이론에 근거한 작전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수업에 참가하는 유벤츠가 크게 늘었다. “그럼 다크 프린스의 무용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다는 말씀이신가요?” “글쎄…? 그 점은 일단 접어두고 분석부터 해봅시다. 처음 전투가 시작될 때 다크 프린스의 화살은 레아모스 공작, 야펀 자작, 그리고 기사단장을 무 력화시켰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레아모스 측의 지휘체계는 완전히 붕괴되었 고, 그들이 선택한 것은 앞으로 내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최 대 실수는 압도적인 병력차를 고려하지 않은 엉성한 밀집대형을 취했다는 겁니다. 여기서 전투는 단순하기 그지없는 밀어 붙이기가 되었는데 여기서 다크 프린스가 선택한 것은 기사들을 말에서 떨어트려 그들의 목숨을 담보 삼아 레아모스 측 기사들의 움직임을 묵었다는 겁니다.” “…….” “그러나 내가 이렇듯 결과만을 놓고 분석하는 것은 약간의 지식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실행하려면 그만한 자신감과 역량이 뒷받침이 되지 않았다면 만용에 불과하니 다크 프린스의 무용은 길 이 빛날 만 하다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란에서 귀족들 간의 무력을 동원한 페데는 사상최초였다. 그래서 대부분 의 유벤츠들은 다크 프린스와 레아모스 공작간의 전투를 직접 보았다. 그리 고 자신에게 파도처럼 돌진해오는 적에게 단 2기의 기사가 뛰어드는 장면은 기사가 아니라도 피를 뜨겁게 달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바로 반년전까지 유벤츠로 나의 수업에 빼놓지 않고 참가 했던 모범 생도를 소개하려 합니다. 프린스 그란 라혼 가이우스 세나데온 차이저 전하이십니다.” -우오오~! -짝짝짝짝짝짝짝…………………………. 유벤츠의 열렬한 환호와 박수를 받으며 등장한 검음 머리와 카리스마 넘치 는 검음 눈동자의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얼마간 그러한 상태가 지 속되며 이내 잦아들자 라혼은 앞으로 나서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렇게 열렬한 환대에 감사합니다. 여러분!” -우와~! -짝짝짝짝짝짝짝…………………………. 라혼은 다시한번 터지는 박수소리를 손을 들어 조용히 시킨 후 발언을 시작 했다. “제가 여기에 여러분들을 만나러 온 이유는 이미 소문을 들어 알고 있다시 피 고대 시드그람 제국의 힘이자 칼이었던 옐리언츠 기사단과 레기온 기사 단을 지금 재현하기 위해서 입니다.” “…….” “옐리언츠는 구성원 대부분이 소드 마스터라는 믿기지 않을 만큼 대단한 집단이어서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고 그다지 필요하지 않지만 레기온 기사단 은 지금 필요합니다. 여러분도 아실 테지만 프린든 왕국과 전운이 감돌았다 는 사실을 아실 겁니다. 7년 전 우리는 그들과 1년간의 전쟁을 치렀고 그때 제국은 제국 연합군이란 형태로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러나 그 비합리적이 고 엉성한 구성은 프린든 왕국군에 비해 압도적인 전력을 보유하고 있음에 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1년간이나 시간을 낭비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레기온 기사단이란 상비군 조직을 만듦으로서 힘의 낭비가 없는 신속하고 빠른 군단을 편성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려 합니다.” 라혼의 연설은 거기서 끝났다. 그러나 라혼이 그날 유벤트 기사단에서 한 발언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라혼이 구상한 레기온 기사단은 무슨 일이 생기면 황제가 각 지방의 영주들에게 도움을 줄 것을 요청하는 식의 체제에서 황제의 요청과 귀족의회의 승인만으로 움직이는 세력을 만든 다는 것이었다. 이른 방 중앙군 창설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같은 제국의 울타리에 있었지만 사실상 완전한 독립체의 연합이나 다름없었던 제 국을 제도 그란을 중심으로 힘을 결집시킨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던 것 이다. 지방 대영주들이야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던 그러한 움직임은 그란을 중심 으로 급물살을 타고 있었다. 이미 자신의 무용과 역량을 한껏 과시한 젊은 왕자가 자신의 개인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다소 졸렬하지만 빠르게 일을 추 진했다. 라혼이 노린 상대는 다름 아닌 유벤트 기사단, 귀족가의 젊은 도련님들이었 다. 이미 그들은 라혼이라는 실체를 보아버렸고 그 무용에 반했다. 그런 그 들에게 원론적으로 옳은 논리를 제시하며 참여를 호소하자 단번에 그 위력 이 나타났다. ‘모두를 위하여.(for All)’라는 말은 기사의 검을 바칠 대 상을 군주나 혹은 가문이 아닌 모든 것이라는 꿈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 “레기온 기사단이라? 다크 프린스는 누구도 하지 못했던 고양이 목에 방울 을 단 셈인가?” “폐하, 그는 너무 경솔했습니다. 그 일은 좀 더 심중히 해야 할 필요가 있 는데 이대로라면 제국의 다른 대영주들의 반발이 심할 겁니다.” “글쎄? 처음 그가 그 대단한 레아모스 가문에 전쟁을 선포했을 때도 경솔 한 애송이라고 말했지.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그 젊은이는 단 한 번의 무 용을 과시해서 한 달 만에 그란정계를 한손에 틀어쥐었네.” “…….” 황제는 다크 프린스에 관한 보고서를 읽어 내려가며 말했다. “제도 그란의 저력은 대단하지. 그란은 제국의 축소판과 같아서 각가지 이 해가 상충하고 반목하고, 때론 손을 잡기도 하는 괴물과 같은 곳이야. 그런 그란을 그 청년은 자신의 이름을 영웅화 하면서 하나로 묶었네.” “표면적으로야 그렇지만 실상은 다르지 않습니까? 그에게 패에 항복한 레 아모스 가도 공작이 패전의 책임을 지고 가문의 일에서 완전히 손을 뗐습니 다. 그리고 다크 프린스에 대한 충성맹세는 공작의 개인적인 것으로 하였지 않습니까? 물론 겉으로는 다크 프린스를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모습을 보이 고 있지만은 다른 2공작은 겉으로만 지지할 뿐 실질적인 도움은 주지 않고 있습니다만…….” “확실히 그래, 말로만 그의 의견에 찬성할 뿐 주머니는 풀지 않고 있지. 그런데 나는 기대가 되네, 과연 다크 프린스가 이번에도 단 2명으로 50명의 기사와 500명의 병사들을 상대할 수 있는 역량을 보여줄지…….” 다크 프린스가 주창한 ‘레기온 기사단’이 성공하려면 무엇보다 그들을 편 성하고 유지할 자금이 필요했다. 그리고 구성원이 되어줄 실력 있는 기사들 또한 필요했다. 그리고 기사와 유지비용 충족시켜줄 수 있는 세력은 역시 신성 시드그람 제국의 대영주 가문이었다. 중요한 것은 정책을 지지하는 발 언이 아닌, 실질적인 도움이었다. *** “중요한 것은 거품이야. 거품!” “뭐?” 메사리프는 라혼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거품이라니?” “어차피 그 전투는 내가 급조한 각본상에서 이루어진 쇼야. 지금 나에 대 한 지지는 그저 거품이라고…….”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고?” “레이나, 네가 설명해줘.” 한동안 바쁘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라혼은 그란의 집정관 오브킨 파벨을 탄핵하는 문제를 레이나와 더불어 의논했다. 라혼은 이번 일을 통해 뜻하지 않은 수확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레이나의 재발견이었다. 블러드에게 레 이나에 대해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다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다만 그 녀가 마왕의 신부라는 것이 중요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데 뜻밖에 정국을 읽고 ‘비밀기사단’이란 이름으로 블러드가 이끄는 도둑들을 살짝 흘리는 책략을 내놓았다. 뿐만 아니라 직접 라혼의 사자가 되어 라혼이 원하는 바 대로 라혼과 레아모스 가문과 충돌에 어떠한 세력도 끼어들지 못하게 하는 어렵다면 어려운 임무를 훌륭히 소화해 낸 것이다. “전하의 인기는 지금 대단합니다. 그러나 인기란 것은 그야말로 시간이 지 나면 사그라질 거품과 다름없는 거죠. 그리고 그 인기 때문에 실질적인 힘 을 가진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이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 게 인기가 있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무척 큼 힘이 됩니다. 시민들에게 인기 가 높은 전하를 돕는다는 것 자체로 그들의 호감을 살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결정적으로 그들의 이익에 반하는 일을 하지 않는 이상 당분간 수세적 입 장과 양보를 받아낼 수 있다는 거죠.” “역시 모르겠군.” “알고 보면 재미있는 것 중에서 정치가 제일이지. 그리고 비밀기사단은 반 대만 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역량이 있어. 내 목표는 어디 까지나 프린든과의 전쟁을 대비하는 것이라고.” 그렇다. 라혼은 지금 자신을 받치고 있는 지지기반이 거품일 뿐이라는 사실 은 너무나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시시콜콜한 것을 메사 리프에게 말하지 않았다. 라혼이 하든 말든 메사리프가 관심을 가질 일은 없을 것이지만……. “그보다, 메사.” “…….” “경고하는데 발작하지 마라?” “……?” 메사리프는 라혼의 경고에 발끈하면서도 그런 말을 하는 의도가 궁금했다. 그리고 메사리프는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나이트 메사리프, 탄브라의 블라디미르 B. 블러드 남작 입니다.” “…….” 메사리프 아니 레드 드래곤 프리사메티는 은발에 선홍빛 눈동자의 미남자를 상대를 태워 버릴 듯한 무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미 라혼의 언 질을 받은 그는 함부로 발작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라혼, 너 진정 마왕이 된 거냐?” “진정해. 드래곤인 네가 나를 돕는데 뱀파이어 로드정도야. 애교 아니겠냐 ?” “그런 말장난으로 넘길 일이 아니지 않는가?” “프리사메티, 뱀파이어의 중요한 속성을 잊었나? 지금은 태양이 지배하는 대낮이라고…….” “…….” 프리사메티는 창문을 통해 비치는 한여름의 따가운 햇살에 바라보며 새삼스 런 눈으로 어둠의 족속을 바라보았다. “데이워커인가?” 데이워커(Daywalker). 태양빛 아래에서도 걸을 수 있는 뱀파이어를 말했는 데, 뱀파이어이면서도 뱀파이어를 사냥하는 뱀파이어 헌터였다. 뱀파이어는 본래 마족으로 중간계에 남은 마족이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들이 세력을 떨치면선 원래 인간이었던 자를 깨물어 뱀파이어로 만들었다. 그러나 결국 본래 처음부터 마족이었던 자들은 본래 인간이었던 뱀파이어들에게 소멸되 고 만다. 그리고 인간 출신의 뱀파이어들은 그들만의 역사를 시작하는데 본 래 인간이었던 습관대로 인간사회에 파고들어 인간에게 기생했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을 숙주로 하는 족속들은 인간들이 좋아할 리 없었다. 그리고 뱀파이어를 사냥하는 인간이 생겨나고 그들을 사대하던 뱀파이어들은 복수 로 그들 깨물어 뱀파이어로 만드는 저주를 내렸다. 뱀파이어를 증오하는 마 음 그대로 뱀파이어가 된 뱀파이어 헌터들은 가치관에 혼란을 느끼면서도 증오의 마음으로 뱀파이어를 사냥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 또 한 뱀파이어를 사냥하는 헌터들에게 사냥 당하곤 했다. 그리고 임신 중에 뱀파이어에게 물린 여인이 나오고 그 여인을 통해 태어난 뱀파이어가 있었 는데 그는 특이하게도 뱀파이어로써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서 뱀파이어에게 치명적인 약점이랄 수 있는 태양빛아래에서 당당히 걸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뱀파이어 헌터의 손에서 키워지며 뱀파이어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손에 뱀파이어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뱀파이어들에게 낮귀신(Da ywalker)이라고 불리는 그도 사라졌다. “아니, 그 데이워커는 아니야! 그는 충성스런 나의 종일뿐. 그리고 현존하 는 뱀파이어들의 군주이기도 하고…….” “라혼, 네가 어둠의 족속을 부리는 일은 심각한 일을 불러올 수 있다. 드 래곤 로드 아스카론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너도 잘 알지 않나? ” “드래곤 로드는 내게 빚이 있지. 그리고 나를 일차적으로 감시하는 분은 최고룡 지슈인드다. 그리고 스승님이라면 이정도 일가지고 재미있어 할망정 뭐라고 하진 않지…….” “…….” 젊은 용, 프리사메티는 라혼의 말이 틀리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이 유인지는 모르지만 중간계 최강의 존재인 최고룡 지슈인드는 항상 라혼이란 인간 제자를 두둔했다. 그리고 그의 존재감은 아무리 드래곤 로드라 할지 라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블러드.” “예, 주인님.” “지금부터는 그 호칭부터 바꿔. 너는 지금 구리광산을 발견한 졸부로 그란 에 진출하려는 신흥귀족이니까.” “알겠습니다. 전하!” 블러드는 이미 인간이 생명으로써 가지고 있는 감정을 이미 잊은 존재였다. 깊은 수렁속의 공허함만이 가득한 그런 존재로 그저 라혼에게 종속된 존재 였다. 그래서 드래곤 피어를 담은 무시무시한 프리사메티의 눈빛을 받고도 위축되지 않았다. 그러나 용의 눈빛은 삿된 것을 파괴하기도 했다. 그래서 블러드의 지금 약간의 타격을 받은 상태였다. “그런데 네가 준비한 뇌물은 얼마나 되지?” “탄브라 영지에서 발견된 구리광산을 통째로 바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통째로?” “광산을 담보삼아 제 입김이 닿아있는 곳에서 자금을 빌리는 형식으로 충 당하는 겁니다. 물론 저희와 관계없는 곳에서도 충분한 자금을 끌어 쓸 수 도 있을 겁니다.” “나쁘지 않군. 좋아 그렇게 하지. 하지만 너와 나의 관계는 비밀로 해두는 것이 좋을 거야.” “알겠습니다.” 라혼은 외부에 알려질 블러드와 자신의 관계를 약간 비틀어 줄 생각이었다. 블러드는 어디까지나 실질적인 힘이 없는 다크 프린스를 도와 그란에서 자 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는 겉과 속이 다른 인물이 되어줄 필요가 있었다. 그 것이 나중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좋았다. “메사.” “왜?” “블러드의 정체에 대해선 비밀이다.” “…….” *** “공작 전하, 파벨 경은 우리의 오랜 동지입니다. 도와 줘야 하지 않을까요 ?” “글쎄, 다크 프린스가 작심하고 시작한 일인데 우리 쓸데없이 그와 충돌할 필요가 있을까?” 그루미아 공작은 집정관 오브킨 파벨의 부탁을 받고 온 것이 분명한 기르스 남작의 말에 난색을 표했다. “지금 다크 프린스의 기세를 꺾어놓을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확실히 그렇기는 하지 하지만 파벨 경의 직무유기는 너무나 명백하지 않 나? 파이스 포인트 거리를 정리하겠다는 다크 프린스의 의지는 지금도 확고 하고 그의 개인적 인기 때문인지 전과 같은 저항을 찾아보기 힘드네. 거기 다 다크 프린스가 자비로 일을 추진하겠다고 까지 나섰는데 업자를 물색하 는 일조차 하지 않은 것은 문제가 있지.” “하지만 프린스 그란이 그란의 통치를 책임지는 일은 없었습니다.” “프린스 그란에게 집정관과 똑같은 권리가 있지 않나?” “진정 파벨을 버리실 작정이십니까?” “말이 너무 심하구먼. 지금은 아무리 헛된 거품일망정 그에게 정면으로 대 항하는 것은 어리석을 일이야.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철가면 기사단의 기사 34명과 2기의 탈로스가 그란으로 남하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게… …. 게다가 이젠 그에게 레아모스라는 신하가 있어.” 그루미아 공작의 말은 기르스 남작에게 하는 경고가 아닌 자기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이미 다크 프린스는 트라얀 공의 암살을 뒤에서 사주 했다 는 것으로 레아모스 가문에 전쟁을 선포했다. 만일 똑같은 이유로 그루미아 가문에 그러한 일을 한다면 아인윌과 모피무역을 물론, 제국내의 상행위도 크게 위축될 것은 뻔했다. 게다가 아직은 소문이 퍼지는 와중이겠으나 단 2인의 기사로 50인의 기사와 500인의 군대와 싸워 이긴 사실은 대영주들로 하여금 다크 프린스의 이름을 기억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영 향력을 발휘할지는 모르나 단순히 트라얀 공과 권력다툼으로 손을 썼다는 것보다 훨씬 파괴력이 큰 것만은 분명했다. “신성 시드그람 제국은 기사도가 지배하는 나라지. 그러니 다소 손해를 보 더라도 불의하다고 생각되는 쪽과 거래를 끊는 것은 그들에게 당연한 것이 당연할 선택이지. 다크 프린스는 스스로 무용을 보임으로써 기사로써 이름 은 얻었다. 그루미아 가문은 불의한 자를 돕기 위해 정의로운 기사를 탄압 하는 자로 비치면 우리가문은 끝이 아닌가?” 기르스 남작이 떠나고 혼자 생각에 잠긴 그루미아 공작은 젊은 아내의 말을 다시 한 번 심도 있게 고민했다. 지금 그루미아 가문이 다크 프린스에게 충성하면 그에게 실질적인 힘이 되어 줄 것이었다. 그러나……. “하지만 제국의 진짜 실세들이 다크 프린스 같은 자를 용납할리 없지. 그 와의 관계는 이것으로 좋아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관계…….” 그루미아 공작의 독백은 대부분의 귀족들이 내린 결론과 같았다. 한여름의 소나기는 그저 소나기일 뿐 대부분의 날들은 화창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성기사(holy knight) 성기사(holy knight) 물은 낮은 곳에 고이고, 황금은 높은 곳에 고인다. 하루에도 수십 명의 사 람들이 십여 년간 그란의 집정관이었던 파벨을 탄핵하고 실세가 된 그란의 왕자에게 갖가지 보물들을 싸들고 찾아왔다. 특히 최근 영지에서 구리광산 이 발견되어 졸지에 부자가 된 탄브라 영지의 시골 영주가 다크 프린스에게 그 광산을 통째로 들어 바치는 일까지 있었다. 그리고 프린스 그란은 그 광산을 담보로 막대한 자금을 빌려 파이스 포인트를 정리하고 포룸을 건설 에 사용했다. “세상에나, 캐리언 백작의 영애에게 어린아이 주먹만 한 루비가 박힌 홀을 선물했단 말 이예요?” “아유~! 그뿐만 아니라 그루미아 공작 전하의 손녀에겐 커다란 진주를 선 물했데요. 그리고 공작부인에게 물방울 진주로 장식된 상아깃털부채를 선물 했다던데 그게 마법이 걸린 것이라 부치는 시늉만 해도 시리도록 차가운 바 람이 분데요.” “어머나, 세상에…….” “그리고 어젠 폐하의 손녀인 율리아나 공주에게 마치 깃털처럼 가벼운 드 레스를 선물했데요.” “맞아 나도 들었어. 그걸 주면서 나중에 그걸 입고 춤출 나이가 되면 가장 먼저 춤을 출 권리를 약속받았다지요.” “참 로맨틱한 분이시네요.” 그란 사교계의 주요 화제는 단연 다크 프린스였다. 사교계에서 떠도는 소문 은 대개가 유명인의 개인적인 사생활속의 가십들이 떠돌기 마련이고, 지금 그란에서 개최되는 무도회장이나 각종연회에 참석한 일이 잦아진 다크 프린 스가 누구에게 어떤 비싼 선물을 줬는데 그 선물의 가치가 어느 정도라든지 하는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그리고 또한 그란에 적을 둔 귀족들 사이에선 다크 프린스가 지고 있는 막대한 채무가 화제가 되었다. “도대체 이해 할 수 없군. 그렇게 막대한 자금을 무리하게 끌어 쓰다가는 이자에 치어감당하지 못하게 될 텐데…….” “다크 프린스가 여기저기에서 끌어온 자금이 벌써 100만 골드가 훌쩍 넘었 다는 말이 있소.” “흠! 그 정도면 그란을 새로 만들어도 남을 정도로군.” “그럼에도 자금을 긁어모으는 것은 멈추지 않고 있다는 거요.” “후~! 도무지 알 수 없군.” 그들에 입에 오르내리는 화제의 주인공은 자신의 기사와 더불어 쥬리안 백 작가의 연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라혼과 메사리프는 말할 것도 없이 그리고 블러드, 레이나까지 상당한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으면 감히 끼어들기 힘든 에너지를 뿜어내곤 했다. “아쉽군. 그냥 만찬회 수준의 연회라 아가씨들에게 춤을 신청할 수 없으니 말이야.” “너무해요!” “아니, 내말은 레이나와 춤을 추지 못해 아쉽다는 거지.” 어느새 라혼에게 적응한 레이나는 라혼을 편하게 대했다. 그리고 사실상 언 제나 같이하는 사이라 친해지지 않으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했을 것이지만… …. “언제나 그런 생각이 들곤 하지만 자네 곁엔 아름다움으로 넘쳐나는군.” “쥬리안 백작님.” “…….” 쥬리안 백작은 그란 동부의 영지의 영주로써 신성 시드그람 제국의 동방무 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부유한 항구 벨리아를 소유한 제국의 유력자였다. 그는 평소엔 벨리아에 머물다가 2,3년에 한번은 그란에서 길게는 1년에서 6개월 정도 머물기도 하는 인물이었다. “듣자하니 자네에게 2명의 누이가 있다고 들었네.” “예, 그렇습니다.” “큰 누이는 상대가 정해진 걸로 알지만 자네와 쌍둥이 누이는 아직 혼처가 없다지?” “싫습니다.” “……?” “만일, 제 누이를 빼앗아 가려고 생각하셨다면 참아주십시오. 아직은 보내 기 싫습니다.” “음? 허허허허허허…….” 쥬리안 백작은 크게 한방 먹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 그럴 마음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은근히 반응을 떠보기 위해 그런 질문을 던졌는데 라혼이 생각할 것도 없다는 식으로 곧바로 의사를 분명히 했기 때문이었다. 쥬리 안 백작이 보기에 지금 다크 프린스는 제국의 대영주들과 어떻게든 관계를 맺어야할 이유와 필요가 춘분하다 못해 넘쳤다. 그래서 슬쩍 건드려보았으 나 보기 좋게 한방 먹은 것이다. “걱정 말게 내겐 홀몸인 아들이 없으니. 하지만 딸은 있는데 아깝군. 자네 는 이미 사이스 가의 사위지?” “그거 참 아쉽군요.” 라혼은 쥬리안 백작 개최한 만찬회에 참석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은근한 어 조로 그를 불렀다. “쥬리안 백작님.” “왜, 그러나?” “이 자리에서 이런 부탁을 드리는 것이 실례인지 모르지만 백작님의 항구 를 이용해도 될까요?” “항구를? 무슨 말인가?” “지금의 여러 가지로 바빠 정신이 없지만 배를 구입하려고 합니다. 벨리아 에 자리를 마련해 주십시오.” “배를? 자네가 말인가?” 라혼이 지금 쥬리안 백작에게 하는 부탁은 전용부두였다. 부두의 창고시설 과 기타 여러 가지 편의시설을 한곳에서 사용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거야, 어려울 것 없지.” “고맙습니다. 대금은 확실히 지불하겠습니다.” “허허허, 그러게, 그런데 여기 아름다운 레이디는 소개시켜줄 생각이 없는 건가?” “아! 죄송합니다.” 라혼과 쥬리안 백작간의 탐색전은 그것으로 끝났다. 단순한 농담 같은 가벼 운 대화는 서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쥬리안 백작은 현재 다크 프 린스가 궁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라혼은 그란뿐만 아니라 제국의 유력자들에게도 자신이 주목받고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쥬리안 백작이 라혼을 떠보기 위해 언급한 다크 프린스의 쌍둥이 누 이의 존재는 새로운 폭풍의 핵이 될 것이라곤 지금 이 순간 누구도 짐작하 지 못했다. *** 달빛이 창가로 스미는 방. 라혼은 오늘도 잠들지 못하고 서류작업을 했다. 십여 년간 그란의 집정관이었던 파벨이 물러나면서 심술을 부린 덕에 기초 자료부터 모조리 재검토를 해야 했다. 원래 이일은 블러드가 맡아하기로 되 어있었지만 중앙관청의 행정관들이 태업으로 일관하는 바람에 라혼까지 한 손을 거들어야할 지경에 이른 것이다. 시간이 넉넉하다면야 천천히 길들일( ?) 수도 있지만은 지금 라혼에겐 벌여놓은 일에 비해 그다지 시간이 충분하 지 않았기에 평소보다 몇 배로 폭주한 서류작업을 달디 단 잠을 포기하면서 계속하는 것이다. “아직도 일을 계속하시는 거예요?” “이런 일부러 불조차 켜지 않았는데 자는 데 방해되었나?” “후후후, 몰랐나요? 저는 마녀라고요. 마녀들은 밤에 정신이 더 맑은 법이 죠. 특히 보름달이 뜨는 밤은…….” 레이나가 특유의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등 뒤에서 목을 감싸 안아오자 라혼은 수첩에 지금 들고 있는 서류의 문제점을 메모하고 펜을 내려놓았다. “긴장되나보지?” “그래요.” “사실은 나도 긴장돼.” “…….” 라혼은 레이나의 가느다란 팔에 입을 맞추며 그녀의 볼을 매만졌다. “손이 차갑네요?” “여름밤이잖아. 겨울에는 따뜻할걸?” 레이나는 라혼은 홀로 독차지 할 수 있는 깊은 밤이 가장 좋았다. 처음에 마왕을 낳아달라고 정말 상상치 못했던 프러포즈를 받을 때는 무척이나 라 혼을 원망했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당신의 어머니와 누이들이 저를 어떻게 받아드리던 상관없어요.” “그래도 나는 레이나를 숨길 생각이 없어. 정면으로 부딪쳐보는 거야.” “알아요. 당신은 돌아가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레이나는 라혼의 무릎위에 몸을 싣고 자신의 존재 때문에 부끄러워하거나 곤혹스러워하지 않는 사랑스런 그에게 진한 깊은 키스를 해주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그가 또다시 키스해주었다. 그렇게 한참동안을 연인들 만의 밀어를 나누던 라혼과 레이나는 이제 달빛조차 들어오지 않은 포근한 어둠속에서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런데 어머니와 누이, 거기다 34명의 기사들까지 오는데 계속 그루미아 공작에게 신세를 지실 생각인가요?” “그래. 굳이 따로 거처를 만들 이유는 없어.” “…….” 기사가 34명이라는 것은 말의 숫자가 50마리 이상이라는 것이고, 각 기사에 게 딸린 개인시종 등을 포함해서 100명 이상의 적지 않은 인원이라는 뜻이 었다. 그루미아 공작이 라혼에게 제공한 건물은 아직도 빈방이 많아 그 정 도 인원은 수용하고도 남았지만 어찌 보면 남에 집에 군대를 주둔 시켜놓은 셈이었다. “공작을 압박할 셈이군요.” -쪽. 레이나의 말에 라혼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는 말했다. “아버지가 무슨 생각으로 보내주셨는지 모르지만 탈로스까지 앞뜰에 세워 놓으면 그루미아 공작이 날을 위해서 그럴싸한 장원이라도 구해주지 않을까 ? 물론 그렇다고 여길 떠날 생각은 없지만…….” “……?” “어차피 1, 2년이야. 내가 잠을 자는 것까지 포기하고 일에만 매달리는 것 은 그 시간 안에 그란에서 벌여놓은 일을 마무리해야 하기 때문이야.” “그런 그 후로는 그란으로 돌아오지 않으시려는 건가요?” “글쎄……!” “어머.” 라혼은 자신의 무릎을 방석 삼아 앉아있는 레이나의 부드러운 몸을 안고 일 어서서 그녀를 침대에 눕히며 말했다. “그란의 시민들이 나를 잊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돌아올 수 있을 테지, 기 다려도 소식이 없다면 레이나가 방법을 생각해 내면 되지.” “뭐예요? 그게……. 아~!” 어디를 어떻게 했는지 레이나는 즐거운 비명을 질렀고, 비명을 지르는 그녀 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사랑해요, 라혼. 당신이 제 몸을 탐하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나는 당신을 사랑하게 됐어요. 당신은 그것을 책임져야 해요. 영원 히…….’ 성기사(holy knight) *** -사악! “헉헉헉헉헉헉……………….” -크악~! “누구야? 누가 당했어?” “젠장 알게 뭐야!” 눅눅하고 습기와 진득한 악취를 내뿜는 습지. 일단의 사내들이 두려움에 질 린 얼굴로 마른땅을 골라 죽어라 달리고 있었다. 아마도 이곳의 길을 잘 아 는 자들인 듯했다. “두목, 이제 열 명 정도밖에 남지 않았어요.” “조금만 더 가면 수도원이다. 설마 거기까지 쫓아오지는 않을 거야! 그러 니까 죽기 싫음 뛰어!” -크앙! “살려~ 켁!” “히에엑!” “뭐였어? 뭐냐구?” 두목의 등을 보고 죽어라 달렸지만 추격자들은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는지 하나씩, 하나씩 착실히 사내들은 제거해 나갔다. 조금이라도 선두그룹과 거 리가 벌어지면 후위그룹의 앞쪽에 달리는 자는 어김없이 저주받을 검은 그 림자의 공격을 받았다. 그런 후위그룹의 사내들은 누구도 앞으로 나가려는 자가 없었고 그럴수록 선두그룹과의 점점 멀어질 뿐이었다. 그런 식으로 15 0여명에 일행이 거의 희생되고 이제 남은 것은 고작 10여명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누구야! 모습을 보여! 나는 다슬란의 붉은 도끼다. 사나이 답게 정정당당하게 붙잔 말이야!” “…….” 그리고 두목과 떨어진 후위의 세명 중 용기를 쥐어짜낸 사내는 허공에서 무 너져 내린 듯한 검은 그림자에게 납치되듯 하늘로 꺼져(?)버렸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본 나머지 사내들은 공포에 질린 나머지 비명을 지르며 길이 아 닌 곳으로 달려갔다. “흐에에엑~!” “우아아악!” 그러나 이곳은 도처에 수렁과 늪이 트랩처럼 널려진 곳이었다. 무작정 아무 곳으로나 도망친 사내는 결국 수렁에 발을 담갔고, 서서히 가라앉았다. “누, 좀, 도와…!” 늪에 빠져 서서히 가라앉는 사내는 무의식속에서 추격자들에 대한 두려움과 늪 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다급한 마음이 어우러진 비명을 지를 때 그 앞으 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 칠흑 같은 검은 기운이 감싸고 있는 로브, 진득한 피에 젖은 선뜩한 선홍빛 눈동자, 그는 살아있는 존재라면 소름 끼칠 만큼 사악한 기운을 품은 사내 였다. -크르르르르르……. 그리고 마치 시종처럼 그 검은 사내를 따르는 두발로 선 2마리 늑대의 모습 이 늪 속에 빠진 사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이다. “그들이 가는 방향에 지고교 수도원이 있다. 그들과 관련되면 여러모로 귀 찮게 된다. 이제 그만 사냥을 끝내라!” -크르르르르르르르……. -삭! 검은 그림자와 같은 사내는 허공으로 꺼져버렸고, 서있는 늑대들 또한 날렵 하기 이를 데 없는 동작으로 수풀사이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태고의 신비함 을 간직한 늪지는 아무것도 없는 양 본래의 고요함을 회복했다. “헉헉헉헉헉헉헉…….” 이젠 두목이고 부하고 관계없이 죽어라 달릴 뿐이었다. 이미 다슬란 일대의 뒷골목을 다스리던 절대적인 도적단의 수백 명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얄팍하게 생긴 면상의 형태의 흉터가 선명한 두목은 전 두목을 암살하고 두목이 된 자였다. 루파 공화국의 손꼽히는 대도시중 하나인 다슬란의 시 프 마스터가 된 나오는 한동안은 모든 것을 다 얻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오는 자신이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다슬란의 도둑길드를 장악한 나오는 다슬란의 갱, 매춘부, 사기단, 불법노 예상인, 도박사들을 압박하여 돈을 벌어들이는데 혈안이 되었다. 당연히 하 부조직들에게 무리한 요구가 거세지고, 거물급이 다슬란을 떠났다. 그러나 시프 마스터 나오는 스스로 범죄단을 구성해 다슬란의 밤거리를 장악해들어 갔다. 그리고 곳 그에게 도둑왕들의 모임인 유니온에서 회색의 경고장이 날아왔다. 자중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나오는 그것을 무시했다. 그 후 다슬란에 무허가 조직이 생겼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나오는 대수롭게 생각하 지 않았다. 그리고 악몽을 시작되었다. 하나, 둘, 나오의 수족과 같은 심복 들이 실종되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더니 옴짝달싹 할 수 없게 되자 유니온 에게 검은 편지, 블랙레터(black-letter)가 보내졌다. 그리고 거기에 함께 딸려온 상자엔 악취를 풍기는 귀와 코, 반지가 껴진 잘려진 손가락, 문신이 새겨진 피부가죽이 들어있었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조직의 정체는 다슬란 의 새로운 도둑길드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슬란을 떠났던 거물급 인사 들도 어느새 돌아와 있었다. 다슬란의 모든 기반을 상실한 나오 패거리는 고향을 떠나야 했고, 숲으로 스며들어 산적이 돼야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들어온 수만 골드에 달하는 금괴를 비밀리에 수송한다는 믿기 어려운 정보 가 입수되고 그것을 위해 습지에 숨어든 순간 실체 없다고 여겼던 유니온의 죽음보다 공포스런 손길이 드리워졌던 것이다. “허억!”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두운 습지를 달리던 도둑들 앞에 칠흑 같 은 어둠이 감싼 존재가 모습을 보였다. -크르르르르르……. 이제 예닐곱 밖에 남지 않은 일행의 뒤는 꾸부정하게 두발로 선 늑대들이 가로 막고 있었다. “누, 누구냐!” “이레이저.” “…….” 이레이저(eraser, 지우개)라 자신은 소개한 사내는 선뜩한 붉은 눈빛을 발 하며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검은 편지를 지우는 것이 내 임무다. 나오!” “헉!” 선고하듯이 말한 이레이저는 검은 안개를 피워 올려 울창한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을 가리며 도둑들을 덮쳤다. -뿌직! 펑! “크억!” “꾸엑!” “우아아아~!” 순식간에 한 사내의 목을 꺾고, 다른 사내의 가슴에 손을 밖아 심장을 뜯어 낸 이레이저의 모습에 기겁한 도둑들은 비명을 지르며 나이프를 사방을 휘 저었다. 그러나 두려움에 젖어 발광하는 것으론 등 뒤로 접근하는 웨어 울 프(늑대인간, Were Wolf)의 공격에 대응할 수 없다. -카아아~! “살려~!” 늑대의 억센 이빨이 도둑의 목덜미를 꽉 물고 고대를 돌려대자 연약한 인간 의 목뼈는 이내 견디지 못하고 부러져버렸다. “썅!” -휘익~! 나오는 한때 거대한 도시를 호령하던 도둑들의 우두머리답게 이내 공포에서 벗어나 분신과도 같은 나이프를 휘두르며 검은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촤아~! -치이이익~! 그리고 도둑특유의 민첩함을 활용한 나오의 공격은 효과가 있었고, 이레이 저의 상처에서 지글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은이로군.” 나오는 비로소 사내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 애써 알려고 하지 않 았었다는 것이 정확했다. 두발로 서있는 늑대를 부리는 존재가 보통 인간일 리 없었다. “너, 넌 인간이 아니구나!” “깨닫는 것이 늦었다. 나오! 벌써 해가 지기 시작하고 있지 않은가? 태양 이 지고, 달이 뜨면 네 손에 들린 은 쪼가리는 더 이상 너의 생명을 지켜주 지 못한다.” “…….” “두, 두목!” “개 썅! 내게 들러붙지 마!” 나오는 자신의 다리를 잡는 부하를 차내며 머리를 맹렬히 머릴 굴렸다. 지 금은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은으로 도금된 나이프 때문에 괜찮지만 그의 말 대로 해가 지면 그는 물론 웨어 울프들도 강해질 것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 았다. 비록 그러한 존재를 처음 만나는 것이지만 어둠의 속성을 가진 존재 가 밤에 더 강해진다는 것을 모르진 않았다. “아깝지만 어쩔 수 없지! 에잇!” -촤르르르르……. 나오는 품속에 은화가 가득 든 돈주머니 사내에게 흩뿌리고 동시에 몸을 날 렸다. 그러나 이레이저는 은화 따위는 무서워하지 않는 듯 움직였고 그 순 간 나오는 자신을 지켜주는 생명과 같은 나이프를 집어던졌다. 그리고 그것 은 효과가 있었던 듯 일순간 이레이저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그리고 나오는 그대로 우측으로 몸을 날려 언덕 위로 뛰어올라갔다. “두, 두목 같이…….” -촤아~! 그러나 아직까지 살아있던 두 도둑은 나오가 산위로 도망가는 것을 확인한 이레이저와 그의 충직한 시종인 늑대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너희는 흔적은 지워라. 놈은 내가 직접 마무리 하겠다.” “컹, 컹.” 이레이저는 늑대들에게 도둑들의 시체를 처리하도록 명력한 후 나무위로 올 라 나뭇가지를 밟으며 산위로 올라갔다. 이곳은 곳곳에 수렁이 있는 습지에 서 조금 벋어난 지역이었지만 길을 모르는 이상 가급적 땅을 밟지 않는 것 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검고 커다란 박쥐처럼 나무와 나무사이를 날듯이 뛰던 이레이저는 곳 표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표적은 길을 잘못 들었는지 막다른 낭떠 러지에 몰렸다. 그러나……. “죽기 아니면 살기다.” 나오는 결국 목표한 곳까지 왔다. 그러나 생각보다 계곡이 너무 깊어 조금 망설이다.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느낌에 크게 심호흡하며 물속으로 뛰어들었 다. “흐음. 재미있군. 아직은 해가 지지 않았으니 울창한 숲에서 도망치는 것 보다 계곡이 나을 지도 모르지…. 이거 귀찮게 되었는데…….” 그러나 이레이저는 포기하지 않고 계곡을 따라 내려갔다. 맑은 물이 있는 곳엔 사람이 살기 마련이고, 이 계곡 근처엔 수도원이 있었다. 그리고 그 수도원에서 제조 되는 포도주는 맛이 좋기로 유명했다. -촤아~! “헉헉헉헉헉헉헉…….” 깊은 계곡이 개울로 바뀌고 사방이 비교적 탁 트인 곳에 이르자 나오는 어 렵게 물가로 나와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이제 시간이 없었다. 이미 서산 에 걸린 해는 마지막 숨을 토하듯 붉은 빛을 뿌리기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 이었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나오!” “안 돼, 크아아악!” 이레이저는 자신을 이렇게까지 고생시킨 장본인을 쉽게 편안한 죽음을 내리 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목표의 피를 말리는 방식으로 엄청난 고통 속 에서 목표가 죽게 만들었다. 나오는 전신이 한꺼번에 오그라드는 고통 속에 서 바싹 마른 고목처럼 말라가며 죽어라 질러대던 비명은 이내 잦아들었다. “물러서라! 이 사악한 어둠에 존재여!” -확! -크아아아아아~! 성직자들이 사용하는 [홀리 워드holy word 신성언어]가 가미되 외침이 터져 나오고 하얀 빛이 이레이저를 덮쳤다. 그러자 신성력과 상극의 존재인 이 레이저는 불의에 공격에 심각한 타격을 입고 물러섰다. “나이트 그래험!” “위대한 태양의 신이여! 그대의 이름은 찬란함 그 차체이니, 미천한 종이 그대의 권능을 정당하게 행사함을 지켜보소서.” 비교적 가벼운 차림의 사내가 보기에도 찬란한 은빛으로 빛나는 디바인 파 워 소드(Divine power sword)를 들고 짧은 기도를 했다. 그리고 고함과 함 께 검을 힘껏 휘두르며 이레이저에게 달려들었다. “우오오오오~!” “크아아아아~!” -파창~! 성기사, 그중에서도 신에게 인정받은 전사 팔라딘(paladin)만이 사용하는 성검(Divine power sword)은 성스러운 힘을 가지고 있지만 보통의 롱소드와 별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좀비나 스겔레톤 등 언데드 몬스터나 마족에겐 치명적인 무기였다. 대게 신의 권능이 발현될 때 엄청난 위력을 보이지만 보통상대에게는 롱소드보다 약간 더 단단하고 잘 부러지지 않을 뿐이었다. “지고의 힘은 누구보다 위대하다. 콜 라이트닝Call Lightning!” -파지지직~! “크아~!” 이레이저는 갖갖으로 디바인 소드의 영향력을 피했지만 그와 동행인 클레릭 (cleric, 수도사)이 발한 [콜 라이트닝Call Lightning]에 정통으로 당하고 말았다. 신성력을 사용하는 신성주문이기에 이레이저는 엄청난 타격을 힘고 휘청거렸고, 그것은 디바인 소드를 다루는 기사는 놓치지 않았다. “크하! 나 이제 편히 잠들 것이다.” -화르르르르르……. 디바인 소드에 허릴 잘린 이레이저는 순식간에 타오르며 먼지로 소멸하며 죽음의 축복을 기뻐했다. “나이트 그래험!” “저는 괜찮습니다. 가인 사제님. 그보다 그를…….” “아!” 덩치가 좋아서 다소 둔중해 보이는 수사는 급히 뱀파이어의 공격을 받은 피 해자를 수습했다. “허어~. 허어~. 유니온, 도둑 왕들, 무서운……. 그란! 그란……. 헉!” “이봐! 이봐!” 바싹 말라 미라의 모습을 하고 있던 피해자는 공허한 눈빛으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몇까지 단어를 쥐어짜듯 내뱉고 숨을 거두었다. “죽었군요.” “무서운 일입니다. 설마 이곳에 뱀파이어 같은 삿된 족속들이 있을 줄이야 .” “가인 사제님, 무슨 뜻일까요?” “나이트 그래험, 아무래도 이것은 신이 경에게 사명을 주는 계시적일 일인 듯하오.” “…….” “그란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지만 경의 여행은 끝이 아니라 지금 시작되는 듯합니다.” “그것은 지고의 말씀입니까?” “아폴론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나이트 그래험은 가인 사제의 사람좋은 미소를 하며 하는 말에 하얀 이가 도드라지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고개를 북쪽으로 돌렸다. 정확히 루파 왕국 전체를 두고 보아도 위대한 도시 그란은 서북쪽에 있었지만 길고마 제국 출 신인 그는 습관적으로 북쪽으로 고갤 돌린 것이다. *** “나카가 팔라딘 그래험 멜다자 지훈에게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나이 할라 전역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 “그리고 무슨 정보를 얻었는지 그래험이 매우 빠른 속도로 북진하고 있는 데 약 반 달 후면 그란에 입성할겁니다.” “나카가 정보를 흘렸을 리는 없을 것이고, 역시 나오가 뭔가 알고 있었던 모양이군.” 블러드는 최근 그 동안 느슨하게 풀어두었던 조직을 재정비하는 일에 몰두 했다. 주인님이 돌아온 이상 예전에 자신이 맡아 했던 임무에 충실해야했기 때문이다. 시드그람 대륙의 모든 주요도시들의 도둑길드를 다잡아 믿을 수 있는 자에게 마법통신반지인 피아 링을 맡겨야 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유 니온에는 자신이 유니온의 통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들도 있었 고, 유니온에 대해서 알아도 그다지 관심 없는 부류도 있었다. 도둑들 자체 가 워낙 자유분방한 족속들인지라 통제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난센스 이긴 했다. 하지만 확실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상호간의 고하를 분명히 할 필 요가 있기는 했다. 그래서 통제할 수 없는 다슬란의 시프 마스터 나오와 같 은 부류는 일제히 제거하는 숙청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일을 무리하게 추 진하면 어디선가 탈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은 다슬란의 일은 마무리 되었으니 그곳에 새로운 시프 마스터를 알 아보아라.” “옛!” 블러드는 저택의 지하실을 통해 밖으로 나섰다. 따가운 여름햇살에 눈살을 찌푸리며 챙이 넓은 모자를 쓴 그는 강렬한 햇살아래가 그다지 어울리지 않 는 창백한 안색으로 그루미아 가의 저택으로 들어섰다. “라혼, 너 많이 컸다. 이젠 머리가 컸다고 이 누님은 막 무시해도 되는 거 냐?” “그런게, 아니잖아! 테이.” “시끄러! 네가 날 얼굴도 모르는 작자들과 결혼 시키려는 거잖아!” “누나 그게 잘난 동생을 뒀기 때문이잖아! 나는 어엿한 공직을 가진 사람 이야! 이제 좀 그만 해!” 블러드는 라혼 주인님에게 종속된 존재였다. 그래서 어디에 있든지 찾으려 고 생각하면 금세 찾을 수 있었다. 라혼이 있는 곳이야 집무실로 사용하는 서재였지만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블러드가 판단하기에도 때가 좋지 않았 다. 그래서 물러나려 할 때 라혼의 구원요청이 들려왔다. ‘블러드, 어서 들어와! 최대한 근엄한 표정을 하고…….’ “……!” 블러드는 방문 너머에서 쌍둥이 누이와 말싸움을 계속하며 보내온 [메시지M essage]를 듣고 얼굴표정을 무겁게 하고 집무실로 들어섰다. “아, 안녕하세요. 탄브라 남작님.” “…….” “오늘은 날씨가 참 좋지요. 좀 무덥긴 하지만…….” “실례합니다. 레이디 세나테이아!” “예, 그럼 일보세요.” 아무리 막무가내 시골 처녀 같은 테이였지만 근엄한 표정의 블러드에겐 함 부로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가 서재를 빠져나가자 라혼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식은땀을 닫아냈다. “휴우~! 이제 내일모레 시집가도 모자란 나이가 아닌데…….” “세나테이아 양의 혼처를 결정하신 겁니까?” “결정이야. 오랜 전에 했지. 그런데 그녀석은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 인지 모른다니까? 말괄량이 테이도 다른 일에 ‘온리 마이 페이스(only My pace)’이면서 그일 만큼은 스스로 하지 못한다니까. 괜히 나만 중간에서 골치 아프지 뭐.” “그럼 죠슈아 경에게 전하의 의중을 비치면 되지 않습니까?” “싫어! 아직은…….” “그렇습니까?” 라혼은 지금 테이와 함께 참석해 달라는 파티 초대장에 치여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모두 테이를 한번보자는 말하자면 선을 보는 파티였다. 그것뿐만 아니라 지금 어머니는 그란의 유명한 뚜쟁이들이 몰려와 테이 쟁탈전 안에 곤욕을 치루고 있었다. 덕분에 어머니의 레이나에 대한 평가는 처음보다 상당히 고무적으로 변한 것이 있지만……. “하지만 곤란한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있지. 레이나가 그 아줌마들을 처 리해주는 덕분에 예쁨 받고 있으니 다행이지.” “상상이 됩니다. 레이디 레이나는 보통 여자가 아니니 말입니다.” 블러드는 자신이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은 가운데 하이드아웃에서 스스로 무시할 수 없는 영역을 구축한 레이나를 높이 평가했다. 처음 하이드아웃에 발을 들여놓고 영원히 태양아래에서 걸을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서도 당찬 모습을 잃지 않았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에게 뚜쟁이로 나선 그란의 귀부인들 쯤은 기세만으로 눌러버렸을 것이다. “그보다 무슨 일이지?” “죄송합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 블러드는 주인님에게 나이할라에서 벌어진 일을 이야기했다. “흐음, 그러니까. 지고교에서 뱀파이어 족의 존재를 감지하고 그란에 뭔가 가 있다는 단서를 잡았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전하! 그간 지고교에서 끊임없이 제게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일로 내가 모종의 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안 이상 그들은 발 빠르게 움직일 겁니다.” “골치 아프게 됐군. 아직까지 그네들과는 부딪치기 싫었는데…….” “죄송합니다. 그래서 다시 하이드아웃으로 돌아 갈까합니다.” “아니 됐어. 그 뭐야 그래…….” “그래험 멜다자 지훈 왕자입니다.” “그 사람만 잡으면 될 것도 같으니까.” 그래험 멜다자 지훈. 태양의 신 아폴론을 섬기는 성기사였다. 명성 드높은 팔라딘이며, 길고마 제국 황제 투반2세의 손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알아! 나도 귀는 있어. 신에게 바치는 성스런 여행을 하는 왕자 출신의 성기사의 이야기 정도는 들어 알고 있어. 그런 유명인사가 그란에 오는데 프린스 그란인 내가 그를 만나는 것이 특이한 일은 아니지.” “…….” “태양신의 기사라…….” 성기사(holy knight) *** 철가면 기사단의 젊은 기사 나이트 스테판코는 나이트 죠슈아 정도의 기사 가 어찌해서 여자들과 시시덕거리기나 하는 자에게 충성해야만 하는지 답답 했다. 처음 그의 실력을 보았을 때 등골이 쩌릿했던 느낌을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시간이 늦었는데 아직까지 수련하십니까, 죠슈아 경?” “아, 스테판코! 잠깐 몸을 푼다는 것이 이렇게 되었군.” 세나데나 백작부인을 호위하는 철가면 기사단의 기사들이 다크 프린스의 거 처에 임시로 수련장 꾸며두었는데 그곳의 주인은 이미 죠슈아였다. 스테판 코는 흥건하게 흘린 땀을 마른 수건으로 닦아내는 그에게 침중한 어조로 물 었다. “죠슈아 경, 우리는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하는 겁니까?” “글쎄? 그거야 대장이 결정할 일이지.” “그럼 대장에게 말씀 좀 해주십시오. 이곳은 우리 트라얀 전하의 암살을 사주한 가문의 저택이 아닙니까?” “……!” 죠슈아는 나이트 스테판코의 말에 코를 긁적였다. 처음 그와 만났을 때 그 의 태도는 거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딱히 대화를 나누거나 서로 교류하지 는 않았지만 스테판코가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진 않았다. 그 러나 여행 중에 난데없이 떠돌이 오크 무리를 만나 위험한 상황에 빠졌었는 데 그때 이후로 말을 걸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 친해지게 된 사이 였다. 죠슈아가 생각하기에 스테판코는 물론 바커, 리페르 등 아이언 마스 크 나이츠는 자신이 인정하는 상대와 그렇지 않은 상대를 대하는 태도가 달 라지는 모습을 보였다. 잘은 표현하지 못하겠지만 그들은 무척 독선적이라 는 공통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스테판코, 불만이 있다면 대장에게 직접 이야기해봐라. 굳이 나를 통할 이유가 없어.” “…….” “전에 대장이 얼마나 강하냐고 물은 적이 있었지?” “예.” “그걸 보여주지. 따라와라.” “……?” 죠슈아는 수련장을 벗어나 스테판코와 함께 라혼 대장이 일하는 서재로 들 어섰다. 그곳엔 라혼이 마법사라는 레이디 레이나와 함께 뭔가를 한창 의논 중이었다. “태양신 아폴론의 사제 중 팔라딘으로 인정받은 이는 전 대륙을 통틀어 스 물이 못돼요. 그리고 디바인 파워 소드를 사용할 수 있는 권능을 인정받은 자는 그중에서도 손꼽히죠.” “역시 숨는 것이 나을까?” “마음에도……. 어머!?” 레이나는 라혼 손에 들린 숏소드를 보고 깜작 놀랐다. 그 칼은 라혼이 뽑아 든 것이 아니라 누군가 라혼의 두 눈썹사이를 노리고 던진 것이기 때문이었 다. “놀래라. 죽을 뻔 했잖아?” -휙! -탁! “웃!” 라혼은 약간 힘을 실어 예고도 없이 숏소드를 던진 죠슈아에게 되던져 주었 다. 그러자 자신에게 던져진 힘이 실린 칼을 잡은 죠슈아는 손아귀에서 전 해오는 충격에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휴! 대장은 정말 가차 없군.” “그러는 넌 왜 안하던 짓을 하는데?” “그냥!” “…….” 라혼은 죠슈아의 이 장난이 무엇 때문인지 짐작이 갔지만 굳이 이해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스테판코 경.” “전하를 뵙습니다.” “죠슈아는 그렇다 치고 경은 내게 볼일이 있어 온 것 같은데…….” 스테판코는 다크 프린스의 직접적인 물음에 일순 당황했다. 하지만 당당한 태도를 견지하며 물었다. “사실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지를 묻고 싶습니다.” “짧으면 반년, 길면 3년 이상.” “…….” 아무리 대화할 땐 군말 없이 간단하고 명료하게 하는 것을 신조로 삼는 철 가면 기사단의 기사지만 이런 식의 앞뒤 잘라먹은 답변에는 조금 어이가 없 었다. “그럼 그때까지 계속 여기서 머무르실 겁니까?” “그럴 생각입니다. 나이트 스테판코.” “이 저택의 소유주가 저희 트라얀 전하를 상하게 한 자들의 배후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라혼은 당당하게 따져 묻는, 어찌 보면 무례하기까지 한 태도에 오히려 미 소 지으며 말했다.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은 집주인도 알고 있지. 그래서 아마도 지 금 잠을 못 이루고 있을걸.” “!” “트라얀 전하를 암살하려는 배후는 그란 3공작이 아니야. 진짜는 갤의 누 군가지. 그렇기 때문에 트라얀 공이 하이슬란드에 있는 거야.” “무슨…?” “아인윌과 그란은 멀지. 트라얀 전하가 멀고 먼 곳에 있는 적이 두려워 몸 을 피할 리 없지 않나? 그렇다고 뒷돈을 댄 3공작의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 니야. 그렇기 때문에 아이언 마스크 나이츠가 이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잠 자리가 상당히 뒤숭숭할걸.” 스테판코는 다크 프린스의 말에 신선한 기분을 느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 루미아 가의 기사들과 수련장을 함께 쓰는 것이 불편하다고 따로 수련장 만 든 것이 후회될 지경이었다. 그의 말처럼 진짜 실체는 따로 있고 3공작은 그저 곁다리를 걸친 것이 분명하다면 이 정도로 괴롭혀주는 것이 딱 좋을지 도 몰랐다. “그런 이유로 나는 이곳을 떠날 생각이 없다.” “하지만 그와 손까지 잡은 것은…….” “스테판코 경, 원칙을 따지는 것은 옳은 것이다. 그러나 원칙을 강요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그것이 정략이지. 그리고 정략은 전략이다. 어디서 어떤 전략을 사용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은 리더의 몫이다.” “…….” 스테판코는 다크 프린스의 말에 뭔가 말할 수없는 충격을 받았다. 경험 많 은 노장의 저런 말을 했다면 ‘과연 그렇겠군.’하며 넘어 갔을 말이다. 그 러나 그 이야기를 한 당사자는 자신보다 조금 어린 청년이었다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나이트 그래험을 아나?” “위대한 빛의 팔라딘 말입니까?” “그래. 그가 그란으로 오고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나는 그를 여기로 초대 할 생각이니 그를 잡을 각오를 단단히 하도록.” “예. 예!?” 스테판코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길고마 제국의 왕자이기도 한 그를 잡겠 다니……. “말 그대로다. 아직 십 여일정도 남았으니까. 그때 귀하들의 실력을 보겠 다. 만일 실력이 내 일을 하기에 미치지 않을 경우엔 하이슬란드로 보내 주 겠다.” “…….” “그리고 죠슈아는 내일부터 파이스 포인트 공사장에 가서 그쪽 일을 도와 줘. 메사리프도 함께 할 거야.” “무, 무슨……. 설마?” “알았어, 대장.” “죠슈아 경!” 스테판코는 탈로스를, 죠슈아 같은 실력 있는 기사를 공사장의 인부로 보내 는 다크 프린스와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죠슈아 경의 태도에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아까 죠슈아 경이 다크 프린스에게 기습하듯 숏소드를 던진 것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일 모두가 스테판코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 들이었다. *** “뭐라? 나보고 저 장난감을 타고 거기서 일하라고?” “그래!” “거절한다면?” “거절하지 마. 명령이니까!” “……!” 라혼은 메사리프의 반발을 간단히 묵살하고는 말했다. “네가 내 곁에 있는 이유는 날 돕기 위해서야. 그렇지?” “맹세는 맹세. 그런데?” “네가 얌전히 블러드와 여기서 서류작업을 하겠다면 내가 나가지.” 메사리프는 결국 탈로스를 몰고 공사장으로 가는 것을 선택했다. 뱀파이어 같은 기분 나쁜 족속과 일하는 것보다 인간을 틈에서 일하는 것이 나았기 때문이었다. 라혼이 탈로스를 토목공사 현장에 투입한 이유는 선례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 사실 아버지가 보내준 2기의 탈로스는 1만 기간트라 급의 기게스로써 둥 글둥글한 몸통에 커다란 손과 발이 달린 저성능의 탈로스였다. 라혼의 눈으 로 보기에 전투용은커녕 작업용도 되지 못하는 탈로스였지만 그래도 탈로스 가 움직이는 괴력은 토목공사를 하는데 쓸 만했다. 성기사(holy knight) 탈로스는 탑승자의 마나에 의해 조종되는 것이기 때문에 마나를 다룰 줄 아 는 마나유저가 탑승해야 정교한 움직임을 보일 수 있었다. “라혼, 아무리 그렇다고 평민을 기사로 선발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저항을 불러올 텐데요?” “상관없지 않나? 기사작위를 주는 것이 아니라 기병대를 조직하는데…. 용 병들에게도 말을 지급하는 경우가 있잖아.” “하지만 마나를 다루는데 소질 있는 사람들을 모은다는 것은…….” “내가 왜 죠슈아와 메사를 거기로 보냈을 것 같아? 언제나 그렇지만 찬성 을 이끌어내려는 것이 아니라 반대하지 않는 것이 중요해.” “하지만 최근 라혼은 민중파로 불리기 시작했단 말 이예요.” “그런가?” 확실히 그랬다. 그란 귀족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3공작이 침묵하고 있는 가 운데 라혼의 처가이기도한 사이스 가가 세력을 모으고 있었다. 그러나 사이 스 가 또한 라혼의 배후세력이나 마찬가지여서 그란의 전 권력이 라혼에게 집중되어 있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라혼의 입장에선 실질적인 도움을 전혀 받고 있지 않은 상태였지만 시민들이 보기에는 라혼의 권력이 무척이나 대 단한 것처럼 비쳐졌다. 그리고 라혼이 그들을 위해 딱히 위해준 것은 없었 고 앞으로도 할 예정은 없지만 평민의 보호자라는 의미로 ‘호민관’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그란은 시민들의 힘이 강한 곳이었고, 귀족들과 골이 깊었다. 물론 그것은 가난한 자에게는 상관없는 부유한 상인과 부유한 귀족들의 소 모적인 기세싸움이었다. 우스운 것은 제국의 지방 영주들에게 있어 그란의 귀족이나 상인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황금을 벌기위해 평민들과 아귀다툼을 벌이는 그란의 귀족들을 전혀 명예롭지 못 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레기온 기병대의 모집하는 일은 귀족주의자들에게 공격의 빌미 를 제공할 수 있단 말이죠. 게다가 우리가 보유한 탈로스는 저성능 기게스 2기뿐이잖아요.” “민중파라…….” 라혼은 레이나의 말에 곰곰이 생각했다. 라혼의 스스로 어떤 이들을 대변한 다거나 하는 일은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란의 귀족과 부유한 상인 들의 대립은 ‘밥그릇 싸움’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 “그것은 아마도 전하께 막대한 자금을 빌려주는 자들이 대부분 평민들이기 때문일 겁니다.” 라혼은 블러드의 분석에 크게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이런 발목이 잡힌 셈이군.” “전하가 그들에게 빚이 있는 이상 전하는 그들을 대변하는 대변자가 돼야 합니다. 전하께서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테 니 말입니다.” 라혼은 사실 민중파를 자처하여 벌써부터 적을 만드는 것에 대해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블러드의 의견은 라혼이 마음의 짐을 덜게 해주었다. “그럼 답은 간단하군. 블러드, 자금을 있는 데로 끌어 모아서 그들의 남은 여력을 모조리 끄집어내서 공동운명체로 만들어라. 그리고 귀족들에게 내 가 민중파로 나선 것을 숨기는 거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자금으로 진짜 평민들을 위한 정책 몇까지를 시행하는 것도 좋 겠지. 학교라던가, 신전 같은 것을 세우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고…….” 어차피 일반시민의 인기를 바탕으로 한 권력기반이었다. 그런 바에야 민중 파라는 타이틀까지 가지면 화고한 정치적인 뿌리를 내리는 일이었다. 부유 한 평민들은 아무리 부자라도 귀족의회의 의석을 가질 수 없었다. 그란의 의회는 제국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 유명무실한 기관이었지만 제도 그란에서 만큼은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의회에서 모든 법제가 만들어지기 때문이었다. 가령 평민들의 상회엔 상품을 보호하기 위한 물리력을 갖지 못하게 한다던 지 그란-황제직할령을 포함해서-에서 평민들의 소유를 금지하는 품목을 결 정하는 일을 처리하기도 했다. 또한 귀족들은 멋대로 담합을 일삼으면서도 평민들에겐 담합을 금지하는 법을 엄격히 적용하는가 하면 세금을 내는 문 제 또한 자기들 유리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 평민들은 지방영주들의 형제로 그란에 파견된 귀족들과 친교를 맺고 나름대로 그들의 횡포에 대항하고는 있지만 어차피 가재는 게 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라혼의 존재는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 “호호호호호호…….” 쉬포니아와 글로리아, 그리고 라혼의 두 누이인 루나와 테이는 그루미아 공 작부인과 차에 곁들인 과자를 먹으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물론 주제는 라 혼이었다. “설마요. 팔라딘인 그래험 경을 잡으라는 명령을 내렸다고요?” “그래요. 아이언 마스크 나이트들이 그것을 무슨 기밀인 쉬쉬했는데 라혼 이 대놓고 말을 하자 놀라는 표정이 정말이지 가관이었다고요.” “저런, 기분이 상했겠군요. 농담을 한 것 가지고 가슴을 졸였을 테니 말입 니다.” “어머? 그거 농담 아녜요.” “테이! 무례하게…….” 공작부인은 라혼이 선물한 부채로 차갑기까지 한 바람을 일으키며 테이의 깜찍한 말투에 호기심을 보였다. “농담이 아니라니? 그럼…….” “예, 공작부인. 라혼은 가끔 그런 식으로 말을 던지지만 절대 헛말은 아닙 니다. 저희나 부모님도 가끔 동생 그런 태도에 속지만 대부분은 자신이 말 한 그대로 실행에 옮깁니다.” “언니 말이 맞아요. 아버지가 라혼에게 검술을 가르치려고 했을 때 하지 않겠다고 고집피울 땐 정망 대단했었다고요.” “아! 그러고 보니, 저번에 단 둘이서 전투를 치르겠다고 말할 때도 저는 농담인줄로만 알았었어요.” “맞아! 그런 일도 있었지.” 공작부인은 다크 프린스와 가깝다면 가까운 이들의 한결같은 말에 심중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결과를 알고 있는 지금이라면 ‘그런 일도 있었구나 .’하고 넘어갈 일이지만 그전에 단 둘이 수백 명의 적군을 상대하겠다고 하면 코웃음을 쳤을 일이었다. “설마, 진짜 나이트 그래험을 잡겠다는 겁니까? 그래험 경은 길고마 제국 의 왕자이기도 합니다. 비록 그 아비가 제위와 먼 황자이기는 하지만 어엿 한 황제의 피를 이어받은 손자입니다. 그런 자를 사로잡겠다는 것은……?” “하지만 할머니, 설마 그러기야 하겠어요? 자기 입으로 프린든과의 전쟁을 대비해야한다고 외치는 그인데 길고마 제국까지 건드릴 정도로 어리석은 짓을 할리가 없잖아요.” “…….” 공작부인은 글로리아의 말에 뭔가 석연치 않는 것을 느꼈다. 전쟁을 준비한 다면서 그란을 뜯어고치는 일을 하질 않나, 그렇다고 힘 있는 지방 대영주 들에게 지지를 호소하기는커녕 대담하게 누이에게 들어오는 청혼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있는 라혼의 행보는 모두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걔는 원래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요. 고지식한 녀석이라 문제가 생기면 정 면으로 부딪치는 것밖에는 모른다니까요.” “문제? 나이트 그래험이 그란으로 오는 것이 문제가 되나요? 세나테이아 양.” “뭐가 문제인지는 저도 알 수가 없죠. 나중에 가봐야. 그것이 문제를 정면 으로 해쳐나가는 방법이었다는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죠. 나중에 생각 해보면 정말 어이없는 일이 많았어요.” 그루미아 공작부인은 다크 프린스의 누이들이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흥 미로웠다. 그리고 지금 그의 문제가 무엇인지 호기심이 일었다. 도대체 무 엇이 문제이기에 팔라딘 그래험을 잡겠다고 공언하는지 말이다. 그러나 공 작부인은 팔라딘 그래험이 그란으로 온다는 사실이 어떻게 해서 자신이 알 게 됐는지를 간과했다. 그렇게 라혼의 이야기 왜에도 여러 가지 주제로 대 화를 나누던 공작부인은 자매의 높은 교양에 감탄하며 조촐한 다과회를 마 쳤다. “쉬포니아, 글로리아.” “…….” 공작부인과 다과회가 끝나고 루나가 둘을 불러 세우며 물었다. “실은 저희 어머니가 지금 라혼이 책임진 토목공사에 일하는 사람들을 위 해 약간의 음식을 준비해 나눠주기로 했어요. 같이 갈래요?”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준다고요?” “예, 원래 그곳에 살던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레이나의 말로 무척이나 곤궁 한 사람들이 많다 고해서 어머니가 그 사람들을 위해 스프와 빵을 준비했어 요.” “저는 갈래요. 글로리아는…….” “글쎄, 나는 좀…….” “가자! 파이스 포인트가 위험한 곳이긴 하지만 죠슈아 경과 메사리프 경도 함께 있을 테니까 걱정할 것 없다고.” “그럴까?” *** 보통 피부가 검은 민족은 머리가 검었다. 그래서 검은 피부에 은발머리를 가진 나이트 그래험은 어디에서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마스터, 그 소문이 사실일까요?” “뭐가 말이냐?” 태양신 아폴론의 사제 코넬리는 검술에 재능이 있어 그래험이 시동삼아 함 께 여행을 해왔다. 그리고 이미 상당한 실력을 갖춘 상태라 교단에서 성기 사로써 서품만 받으면 당당한 신전수호기사, 템플러(Templar)가 될 수 있었 다. 하지만 아폴론의 오러클(oracle, 신탁)에 의해 여행을 계속하게 되어 아직 시동인 신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코넬리는 불만이 없었다. 오 히려 환영했다. 템플러가 되면 평생 신전을 지키며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 에 고되고 힘든 여행일망정 그것이 나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평생 신전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싫다는 것은 아니었다. “여관에서 여행자들이 그랬잖아요. 1명의 기사만을 데리고 50명의 기사와 500명의 병사를 제압한 그란의 왕자가 마스터를 잡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다 잖아요.” “음모? 음모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좋지 못한 일을 꾸미는 것이지 않은가? ” “예?”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이것은 나를 초대하는 거다.” “초대요? 설마 그 다크 프린스인가 뭔가 하는 작자를 찾아 가시겠다는 거 예요?” 그래험은 코넬리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말했다. “내가 알기로 다크 프린스는 너보다 나이가 두어살 정도 어리다. 최소한 스물이 넘지 않았지.” “설마요?” “너는 그러한 소문을 내게 전한 여행자가 단순한 여행자로 보이더냐?” “설마? 여행자가 아닌…….” “아니 그냥 평범한 여행자다.” 그래험은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해맑기까지 한 얼굴의 코넬리에게 자신이 생각한 바를 이야기했다. “우리가 루파의 나이할라를 떠난 지 얼마나 되었지?” “열흘이요.” “나이할라에서 그란까지 다슬란 항구에서 쾌속선을 띄우고, 각 지점마다 말을 바꿔 타는 전령이라면 대략 열흘거리다. 그런데 우리가 그란에 도착하 려면 넉넉잡고 4, 5일은 있어야한다. 그러나 아까 우리가 만난 여행자는 우 리처럼 말이 아닌 두 다리로 걸어서 왔다.” “에 그러고 보니…….” “게다가 우리가 그란으로 가는 이유는 아는 사람이 드문 비밀이다.” “헉! 그럼 다크 프린스가 뱀파이어 로드?” “그것은 섣부른 억측이다. 코넬리!” “하지만 그 도둑놈이 죽으면서 한 증언이 사실이라면 한통속일게 빤하잖아 요.” 단정적인 결론이었지만 그래험 또한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진 상을 조사하기 위해 5일정도 시간을 허비하고 그란 행을 결정했다. 자신의 신분이 신분이다 보니 딴에는 은밀하고 신속한 움직임을 보였었다. 그런데 아까 여행자들이 자신들끼리 한 이야기는 놀랍기 그지없었다. 그란에서 들 은 소문이라며 떠벌이는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최소한 자신이 그란 행을 결 정한 시점에서 멀리 떨어진 신성 시드그람 제국의 제도 그란에 그러한 소문 이 돌기 시작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것으로 그란의 다크 프린스라 는 자는 유니온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한 셈이었다. 성기사(holy knight) *** 다크 프린스의 탈로스가 포룸 건설에 투입되자 가장 어려운 부분이 쉽게 해 결되어 진척이 무척 빨라졌다. 이제 허름한 건물들을 모두 부수고 기초지반 을 다지기와 배수로, 하수도 공사를 시작하여 모든 작업이 빠르게 이루어 졌다. 또한 공사도중 고대 시드그람 제국시절의 하수도 유적이 발견되어 그 것을 보강해 지하에 주거지를 만드는 작업도 병행되었다. 그리고 동네가 동 네이다 보니 이름 모른 유골들이 나오기도 하고 때론 오래전에 묻어두었던 듯한 금화가 가득 든 항아리까지 발굴되기도 했다. 라혼은 그런 값비싼 물 건이 나오면 파이스 포인트 거리의 공동기금으로 만들어버려 미리 혼란을 막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관리자가 파이스 포인트 거리의 지배자였던 갱 데 이몬드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블러드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존재였으므로 그 자신은 모르지만 라혼의 수하나 다름없었다. 데이몬드는 블러드가 하이 드아웃 깊은 곳에 웅크린 시프로드라는 사실을 자체를 알지 못했다. “Mr. 데이몬드, 당신이 파이스 포인트의 유력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 니다.” “…….” “그래서 당신을 지금은 물론이거니와 포룸이 완공된 이후 파이스 포인트의 보안관으로 삼고 싶습니다. 어떻습니까? 하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Mr. 데 이몬드?” 데이몬드는 그간 자신의 영지나 다름없었던 파이스 포인트의 낡고 허름한 건물들이 강철거인 탈로스에 의해 허물어지는 것을 씁쓸한 표정으로 지켜봐 야만 했다. 유니온에서 다크 프린스의 일에 적극 협조하라는 지시가 떨어졌 기 때문이었다. 합당한 보상이 주어질 것이라고는 했지만 그간 힘겹게 다져 놓고 조심스럽게 관리해오던 기반이 통째로 무너지는 것이 아깝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러나 그 대단하다는 다크 프린스가 자신에 파이스 포인트에서 주 인 없는 보물을 관리자로 삼고 이젠, 공식적이 지위까지 만들어 주자 어안 이 벙벙했다. “예? 나리 하지만 왜 저를…?” “내 애인이 당신을 적극 추천하더군요. 그리고 당신과 나는 이미 안면이 있는 사이가 아닙니까? 뭐 한번 스쳐지나간 사이이긴 하지만…….” “그, 그렇습니까?” 데이몬드는 다크 프린스의 말에 다크 프린스를 비밀기사단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비밀기사단의 정체는 바로 유니언이었던 것이다. ‘후후후후, 합당한 대가라는 것이 이것이었어. 이제 나는 냄새나는 변두리 시궁창 같은 거리가 아닌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거리의 지배자가 된다는 건가? 그렇다면 주저할 이유가 없지.’ 라혼은 레이몬드가 대놓고 눈알 굴리는 것을 보고 별로 탐탁지 않았다. ‘아직 젊어서 그런가? 눈알 굴리는 것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뻔히 보이잖 아. 블러드 보고 잘 가르쳐야 되겠군.’ 사실 데이몬드는 버리는 수였다. 라혼이 만든 새로운 파이스 포인트 거리는 깨끗하고 웅장한 곳이어야 했다. 시민의 편안한 휴식처이자 그란의 상질이 될 만한 예술품으로 가득한 그러한 공간이 되어주어야 했다. 이른바 지저 분한 빈민가가 제도 그란이 자랑할 만한 포룸으로 변했다는 상징성이 중요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파이스 포인트는 거지, 창녀, 좀도둑 등이 득실대던, 아닌 그들이 은신할 수 있는 일종의 은신처나 다름없었다. 가난한 빈민들이야 라혼이 제 공한 일자리와 포룸 끄트머리에 건설할 공동주택 인슐라를 약속받아 만족했 지만 문제는 일터를 잃은 창녀들과 포주, 땀 흘려 먹고살 생각이 없는 자들 이었다. 비록 열 명중 한 명꼴의 소수이긴 하지만 문제는 언제나 현 상태가 불만족스러운 소수에게서 파생되기 마련이다. 라혼은 그들을 제어하기 위해 뭔가 조치를 취해야 했고, 라혼의 최초 생각 은 경비병을 고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현명한 레이 나가 파이스 포인트를 완전히 장악했었던 데이몬드를 소개한 것이었다. 그 리고 블러드에게 그에 대해서 물었는데 여러 가지 다양하기까지 한 도둑들 이 있어 이해관계가 얽기고 설긴 파이스 포인트를 젊은 나이임에도 그곳을 거의 완전하게 한손으로 틀어쥔 사람이란 말에 생각을 달리했던 것이다. 그 리고 때마침 금화 항아리가 발견되어 사람들이 보물에 현혹돼 술렁이자 그 책임을 그에게 떠맡겼던 것이다. 그리고 효과는 라혼이 예상했던 것보다 뛰 어났다. 보물의 관리자가 데이몬드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소요가 잦 아든 것이다. “좋습니다. 미력하지만 나리, 아니 전하를 돕겠습니다.” “조수는 Mr. 데이몬드가 알아서 하시고, 그들을 고용하는 자금은 공동기금 에서 충당하십시오. 그리고 문제가 생기면 탄브라 남작과 상의하도록 하십 시오.” “알겠습니다.” “그리고 당분간은 비공식적인 지위입니다. 하지만 귀족의회에서 승인이 떨 어지면 파이스 포인트의 보안관은 공식적인 관직이 될 겁니다.” 라혼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허리를 꺾어 인사를 하는 그가 조금 못미더웠다. 결과를 보면 보통 놈은 아닌데 하는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 다. “왜요, 라혼? 그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요?” “솔직히 그래! 그보다 레이나는 어머니와 같이 거기 가지 않았었나?” 라혼은 데이몬드가 나가고 바로 들어온 레이나에게 물었다. “갔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드는 바람에 준비한 음식들이 많이 모자를 것 같아서 지금 추가로 만드는 중이에요.” “그래?” “백작부인께서 인부들 몫만 생각하고 준비를 하셨는데 그 가족들까지 몰려 드는 바람에 정신이 없어요. 호위하는 기사들까지 나서서 몰려드는 사람들 을 정리하고 있을 정도라고요.” “호오! 그거 큰일이군.” 레이나는 이야기를 하면서 고운 손으로 라혼의 목과 뺨을 쓰다듬으며 애정 표현을 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대낮부터 요부가 꼬리치는 것처럼 보이는 숙녀로서 그다지 정숙하지 못한 행동이었지만 라혼은 그녀의 애정표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라혼, 데이몬드는 일정한 영역을 장악하면 그것에 만족하는 사람이에요. 좋게 말해서 분수를 아는 사람이지만…….” “…….” “만일 그를 크게 쓰시려면 자기스스로 뒤집어쓴 주먹 패라는 허물을 거둬 줄 필요가 있어요.” “어떻게?” 라혼은 레이나의 손을 잡아끌어 입을 맞추며 물었다. “블러드를 이용하면 되요. 블러드가 나서서 그를 양자로 삼는다던지 아니 면 후견인이 되면 아마도 새로운 야심이 생길 거니까요.” “맞아! 그런 수가 있었군.” “어멋!” 라혼은 이미 그러한 생각을 두고 있었지만 짐짓 놀라는 척하며 레이나의 손 을 잡아끌어 그녀를 무릎에 앉혔다. “아잉~! 뭐예요. 저는 바쁘다고요. 지금쯤 빵이 다 구워졌을 텐데 어서 가 봐야 해요.” “쩝! 아쉽군. 그럼 키스라도 해줘. 그렇지 않으면 풀어주지 않을 테야.” “아이참~! 자요.” 라혼은 눈을 감고 입술을 삐죽 내미는 레이나의 얼굴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 다. “하하하하, 뭐야? 그게 꼭 모이를 쪼아 먹는 새 같잖아! 하하하하하……… ….” *** “어디서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드는 거야? 그란에 굶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 던 거야?” “아우! 팔 아파. 이럴 줄 알았으면 오지 않는 건데…….” “미안해요.” 사람들에게 스프를 나눠주던 쉬포니아와 글로리아는 한정 없이 몰려드는 사 람들의 행렬에 기가 질린 나머지 투덜거렸고, 그녀들을 끌어들인 루나는 계 속 사과를 해야 했다. “아, 아니에요. 그냥 좀 힘들어서 그런 거예요.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이 런 보람 있는 일에 불러줘서 고맙기까지 한데요. 사실 조금 힘들긴 하지만 나름대로 재미있어요.” “그래요. 그보다 준비한 것들이 모두 떨어져 가는데 어쩌죠.” “메이지 레이나가 곧 빵을 가지고 올 거고 스프는 물을 더 붓고 끓이면 될 거예요.” “그렇군요.” “그런데 도대체 그 여자는 누구에요, 세나루나?” “예?” 루나는 난데없는 질문에 쉬포니아의 질문에 일순 말문이 막혔다. 처음 그녀 를 소개 받았을 때 동생은 당당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애인’이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 달 이상 같이 생활하면서 애인이란 관계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지만 쉬포니아에게 그대로 전해야 할지 망설여지는 것은 사실 이었다. 루나가 보기에 쉬포니아도 동생과 보통관계는 넘어보였기 때문이었 다. 테이의 말처럼 라혼은 밖에다 내돌리면 분명 ‘사고’를 칠거라고 했는 데 그란에 도착해서 그 말을 실감했다. 하긴 사이스에서 살 때도 그런 조짐 을 보였지만 테이와 함께 하나뿐인 순진한(?) 남동생을 보호하느라 고생 아 닌 고생을 한 사실이 있었다. “도대체 라혼과 무슨 관계기에 백작부인에게 살갑게 구느냐고요.” “예? 그게…….” 쉬포니아는 레이나와 라혼의 관계를 이미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다소 속상하고 마음에 드는 경우는 아니었지만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었 다. 그러나 라혼의 모친이 그란에 오고 천박하게 생긴 여자가 세나데나 백 작부인에게 점수를 얻어가는 것을 보자 알 수없는 감정이 치밀었다. 쉬포니 아는 이미 라혼이 그의 아내와 이혼을 선언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언니! 여기 스프 사왔어!” 때마침 곤란한때 테이가 나타나 자신을 부르자 반갑기 그지없었다. 테이와 함께 어머니도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죠슈아 경이 스프가 가득 담긴 나무통 을 마차에서 내려놓자 곧이어 그란의 빵가게에서 만들어놓은 빵을 사러간 메사리프 경도 마차 한가득 빵을 싣고 돌아왔다. 사실 준비한 것들이 모두 떨어지면 모든 것을 정리하면 그뿐이지만 세나데나는 일찍 온 아이들이 빵 과 스프를 먹는 것을 부러운 눈으로 보는 아이들을 보고 도저히 중단할 수 가 없었다. 그래서 그란의 여관과 식당을 돌면서 그들이 만들어놓은 스프를 모두 사들인 것이다. -와! 그리고 아직 음식을 먹지 못한 사람들은 산처럼 쌓인 빵을 실은 마차가 도 착하자 환호성을 질렀다. “모두들 수고하네.” “라혼!” 잡티하나 섞이지 않는 하얀 말을 탄 검은 머리의 미남자가 갓 구운 빵을 실 은 마차와 함께 모습을 보이자 테이가 반갑게 맞이했다. 그러자 장내는 단 숨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다크 프린스?” “맞아, 그야!” “그 사람이야, 그 사람!” -와~! 그리고 라혼을 알아본 사람들은 음식을 먹다말고 아까와 다른 의미의 환호 성을 질렀다. 그들에게 있어 라혼은 일자리를 주고, 쉴 곳을 약속한 은인이 었다. 때문에 누가 시키지도 않고 인위적으로 유도하지도 않은 자연스런 환 호를 보내는 것이었다. 원래 인간은 동물이어서 먹을 것과 머물 곳을 해결 해준 자에게 호감을 보내기 마련이다. 그러나 라혼은 뜻밖의 환대에 약간 어리둥절했다. “…….” 하지만 라혼은 손들을 들어 그들의 환대에 답했다. 의도하지 않은 상황이었 지만 이런 진심에서 우러나온 환대가 싫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칫! 고생을 우리가 했는데 명예는 자기가 독차지하고…….” 사람들이 진정되자 테이가 볼멘소릴 했다. 그러나 라혼은 다행히도 그런 테 이를 다독이는 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누나가 고생한 것이 내게 큼 힘이 되었어. 그래서 고마워!” “당연하지!” “그럼 앞으로도 수고해.” “뭐? 이 고생을 또 하라고?”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 저 사람들 중 몇몇을 고용해서 그들 로 하여금 하루에 한번 빵과 스프를 나눠주라고 그리고 누나들은 그 사람들 을 관리하면 되는 거야.” “흠~!” “귀족에겐 그에 따른 의무와 책임이 있는 거야.” 그러나 테이는 이곳에 계속 나와야 한다는 사실이 걸렸는지 쉽게 대답을 못 했다. 하지만……. “대장 좋은 생각이야. 그란에 이렇게 굶고 있는 아이들이 있는 줄 미처 몰 랐어.” “할께!” 라혼은 어릴 적에 굶어본 기억일 있는 죠슈아가 찬성하자 테이가 냄큼 하겠 다고 나서는 것을 보며 생각했다. ‘이렇게 보면 테이가 죠슈아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잡혀있는 것 같단 말이야.’ 테이와 죠슈아가 서로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사실은 그 둘 왜엔 누구나 알 고 있었다. 어머니도, 루나도, 그리고 테이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쉬포 니아나 글로리아도 눈치 챌 정도였다. 하지만 둘은 아직도 서로 서로가 자 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탐색전을 계속했다. “라혼, 일이 바쁠 텐데 뭐 하러 나왔니?” “아니에요, 어머니 너무 집안에만 있는 것도 좋을 것이 못되잖아요. 그냥 산책삼아 나온 것뿐이에요.” “그러니?” “레이나에게 들었어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힘드셨을 테 니 조금 쉬세요.” “그래요. 어머니 라혼의 말대로 조금 쉬세요.” 라혼의 어머니를 쉬게 하고, 즉석에서 일할 사람들을 모았다. 묽은 스프를 떠주고, 빵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 나눠주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어려운 일을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들을 쉽게 모를 수 있었다. 그리고 라혼은 데이몬드로 하여금 빵을 만들 밀가루와 제빵사, 스프를 만들 재료 등을 수급하게 했다. 이른바 무료 급식소를 설치한 것이었다. 쉬포니아와 글로리아, 그리고 루나가 이제껏 팔이 빠져라 고생한 것이 허무 할 정도로 너무도 간단하게 사람들을 고용해 일을 처리한 라혼은 데이몬드 를 불러 급식장에 질서를 바로잡자 할일이 없어진 기사들을 모았다. “내일쯤, 그가 온다. 그리고 나는 이미 그에게 결투장을 보냈다. 각오를 단단히 해라!” 듣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 한 라혼의 발언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음식을 들던 사람들의 입을 통해 소문이 퍼졌다. 다크 프린스가 말한 ‘그’가 누구 인 지는 뻔했다. ***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그란과 대략 반나절 거리에 있는 여관에서 자신 앞으로 보내진 편지를 받았 다. 다크 프린스가 보낸 편지였다. “세상에! 이건 결투장이잖아요. 뭐? ‘기다리고 있었다. 내일 방벽 밖에서 싸우자.’ 뭐 이런 밑도 끝도 없는 편지가 다 있죠?” 코넬리는 편지에 씌여진 두 문장을 읽으며 말했다. 너무도 간단한고 분명한 뜻이 담은 문장이었지만 협박도 아니고, 초대장은 더더욱 아닌 결투장이 분명한 편지는 그 속에 내포된 의미는 간단치 않을 것이라 것에 그래험의 고민이 있었다. ‘내가 여기에 묶게 될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여관의 주인은 편지를 내밀 었다. 신성 시드그람 제국에 도착한 이후로 날 한눈에 알아보는 자가 없었 는데 여관주인은 날 알아보고 쉴 방까지 준비해 두었어. 게다가 1605년 산 최고급 나이할라 포도주까지…….’ 그래험는 다크 프린스란 존재에 대한 호기심이 원래 그란으로 온 목적이었 던 ‘유니온과 뱀파이어’를 넘어서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공개 적으로 자신을 잡게 다고 하질 않나, 이젠 팔라딘에게 결투장까지 보내는 격식이라니……. 나이트 그래험이 놀란 것은 신을 군주로 삼는 성기사에게 사사로운 결투를 신정하는 일은 무척이나 이례적인 일이었는데 성기사는 사사로운 결투를 하 지 못하는 규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스터, 받아드릴 실겁니까?” “다크 프린스는 분명히 뱀파이어를 부리는 유니온이란 조직과 연관이 있다 . 코넬리!” 그래험의 입장에선 이것은 사사로운 결투가 아니었다. “너도 준비를 단단히 해라. 1대1의 결투가 아닌 것 같으니까.” “알겠습니다. 마스터 그래험.” 성기사(holy knight) *** “스테판코, 다크 프린스라는 작자 도대체 뭘 어쩌자는 거지? 나이트 그래 험을 습격하겠다고 하지 않았었나?” “맞아! 이건 아무리 봐도 우릴 놀리려는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그럴 수 는 없는 거야.” “…….” 스테판코는 동료들의 말에 뭐라 대답해줄 수가 없었다. 마치 장난 같은 명 령이지만 이미 공표된 사항이 되어 명령을 거둘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었 다. 다크 프린스가 팔라딘 그래험에게 결투를 신청한 사실은 그 이유를 불 문하고 사람들에게 소문이 나 있는 상태였기에 벌써부터 기대하는 이가 많 았다. “그의 속셈이 무엇이던 일단 그 명령을 따른다. 우리가 우려했던 비겁한 습격이 아닌 결투장까지 보낸 이상 팔라딘도 각오는 하고 있을 것이니까!” “그래, 리페르의 말이 옳다. 다크 프린스는 기사라기보다 정치꾼이다. 그 속을 짐작하려고 골몰하는 것보다 철가면 기사단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모습 을 보이는 것이다.” “빅토리 아이언 마스크!” -빅토리 아이언 마스크! 34명의 아이언 마스크 나이트들은 일제히 승리의 구호를 외치며 자신들이 제국 최고의 기사단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 “체, 시끄러운 놈들이군.” “그렇습니까? 사실 그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남은 것은 자부심뿐인 기사들 이니까요. 그 점은 이해해 주십시오. 메사리프 경.” “솔직히 그딴 것엔 관심 없어. 빨리 끝내자고, 제1기사.” -스르릉~! 죠슈아는 메사리프 경의 말에 마음을 가라앉히며 느릿하게 바스타드 소드를 뽑아들었다. 그것은 2미터의 신장에 맞춰 소드 마스터인 로카데 차이저 반 하이슬란드 백작이 직접 마련 준 특별한 검이었다. 죠슈아는 그란으로 돌아온 후 대장의 곁에 있는 메사리프 세나데온 발이란 존재가 거슬렸다. 자연스럽게 타인을 위압하는 맹렬한 투기를 뿜어내는 듯 한 기도는 자신을 자극했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검을 휘두르는 건너편에 그 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그리고 오늘 월드 챔피언이기도한 메사리프에게 대 련을 부탁했다. “후우~!” 죠슈아는 파리한 바스타드 소드의 검신에 비친 자신의 눈동자를 보고 시선 을 언뜻 유약해 보이는 붉은 머리 사내에게 두었다. 그는 어느새 검신에 기 이한 문양이 새겨진 플래티움 아스카론을 뽑아들어 늘어뜨린 채 종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투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보통 기사라면 그것만으로 전의 를 상실할 무지막지한 기운이었지만 일부의 사람에게 강렬한 투기는 자신의 투지를 일깨우는 자극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한 자를 바로 ‘전사(Warrio r)’라고 한다. 그리고 죠슈아는 그러한 전사의 기질이 다분했다.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나이트 메사리프!” “좋도록!” -쾅! 메사리프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죠슈아는 상체는 거의 움직이지 않은 채 스텝만으로 메사리프와의 거리를 좁혀 마치 몸 자체를 내던지는 듯한 힘 있는 공격을 했다. “큭!” 임팩트 순간 모든 힘과 기를 집중하는 고급검술에 불시에 당한 메사리프는 죠슈아의 내친 검을 반사적으로 막으며 충격을 흘리기 위해 몸을 뒤로 날렸 다. 그리고 균형을 잃지 않도록 몸을 추스른 후 한 번의 공격 후 그 자세 그대로를 유지하는 죠슈아를 보며 눈초리가 매섭게 변했다. 선기를 확실히 잡을 수 있는 상황인데도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진지하게 제 대로 하라는 무언의 압력이기 때문이다. “다시 갑니다!” “…….” -캉! 창~! 끼기기익! 메사리프는 이번엔 죠슈아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자세를 잡았고, 보기만 해도 위압적인 덩치를 가진 그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민첩함을 보이며 힘 있고 강력한 일격을 내쳤다. 그러나 메사리프는 이번엔 물러서지 않고 힘으 로 맞받아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히엽!” “이런!” 메사리프의 검술이 파워검술계열임을 안 죠슈아는 힘을 흘리는 카마리에 검 술로 대응하기 시작했고 메사리프의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그러나 메사리프 의 균형을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다. 카마리에 검술은 상대의 균형을 무너트 리는 검술, 죠슈아는 메사리프가 역시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크래시 락!” “뭐?” -쾅! 죠슈아는 다시금 자신도 파워검술을 구사하며 커다란 바위도 단숨에 부숴버 릴 듯한 내려치기를 선보였다. “뭐야? 왜 죠슈아 경과 메사리프 경이 싸우고 있는 거야?” “대련 같은데?” “역시 죠슈아 경의 싸움은 박력이 넘치는 군.” “그리고 그 무지막지한 공격을 막아내는 메사리프 경은 또 어떻고…….” 마나가 깃든 검격의 충돌음은 기사들의 귀에 들리고 제국최고의 기사단의 일원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질만한 동작으로 사고가 난 지역을 순식간에 에워쌌다. 그리고 그들은 검이 격돌할 때마다 번개 불 같은 섬광을 뿜어내 며 싸움을 하고 있는 둘을 발견 할 수 있었다. “헉헉헉헉헉…….” “후~!” 그렇게 맹렬한 드잡이 질을 벌인 둘은 떨어져서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려는 순간 그들을 말리고 나온 존재가 있었다. “적당히 하지.” 라혼이었다. “대련하는 것은 좋은데 너무 시끄럽잖아. 끝장을 보고 싶으면 한적한 곳에 가서 마저 하던가.” “…….” 오랜만에 한적한 오후를 맞아 리디아와 홍차와 과자를 먹던 라혼은 갑작이 주위가 소란스러워지자 무척이나 언짢았다. 그리고 그러한 기색을 숨김없이 내보이자 죠슈아는 물론 메사리프도 내심 찔끔한 기분이 들며 땀이 싸늘하 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특히 메사리프, 아니 위대한 화룡족 레드 드래곤 프리사메티는 본능적으로 계속 까불면 다친다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이렇 게 많은 인간들이 보는 앞에서 먼지가 나도록 두들겨 맞는 것은 절대사양 하고 싶었다. “아니 됐어. 이만하면 충분해?” “…….” 메사리프가 칼을 거두자 죠슈아는 다소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오 랜만에 호적수를 만나 끝장을 보고 싶었지만 같은 주군을 모시는 입장이니 가끔 대련하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리고 아쉬운 것은 아이언 마스크 나이트들로 마찬가지였다. 굉장한 실력자들의 대결을 더 볼 수 없었기 때 문이었다. *** 하룻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다. 맑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하기 그 지없는 기분 좋은 그다지 특별한 날 같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란의 호기심 많은 시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도시락바구니를 챙겨들고 동쪽 성문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정오 무렵이 되자 백마를 탄 다크 프린스 칠흑같이 검은 블루블랙의 머릿결을 휘날리며 일단의 기사들을 이끌고 성문 밖을 나섰다. “우왁! 다크 프린스다!” -와~! 라혼은 자연스럽게 터져 나온 사람들의 환호를 답례하며 동쪽으로 쭉 뻗은 잘 포장된 가도 저편을 바라보며 기사들을 정렬시켰다. “여기서 한 시간을 기다린다. 만약 그래험이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추격을 시작할 것이다.” “…….” 라혼이 말했지만 반응하는 기사는 없었다. 그러나 라혼은 무심히 가도 저편 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지루하게 한 시간이 지났을까? 누군가 이쪽으 로 내달리며 소리쳤다. “와요! 그가 그래험 경이 와요!” 다른 사람들처럼 이곳에서 기다리기 지루했던 소년이 먼 곳까지 나가서 망 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십여 분이 흐르고 말을 탄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은빛으로 빛나는 풀 플레이트 아머를 차려입고 금실로 수놓 은 태양신을 상징하는 문장이 새겨진 깃발을 들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당당 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전투준비.” “……!” -스렁, 스러러러렁~! 아이언 마스크 나이트들은 다크 프린스의 명령에 반사적으로 각자의 무기를 빼들면서도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결투지만 결투 전에 몇 마디 대 화도 없이 바로 싸움을 시작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기사 앞으로.” -푸릉~! “살상이 목적이 아니라 사로잡는 것이 목적이다. 적을 말에서 떨어트린 후 사로잡는다.” “…….” “나이트 차지(Knight charge)!” -우와~! 라혼의 돌격명령이 떨어지자 나름대로 기세를 높이는 함성을 지르며 앞으로 내달렸지만 석연치 않은 뭔가가 있다는 것을 느낀 기사들의 돌격 기세는 그다지 예리하지 못했다. “우왁! 마스터 그냥 무작정 달려드는 데요.” -팍! 그래험은 다크 프린스의 기사 수십 기가 돌격해오자 깃발을 바닥에 꼽고는 검을 뽑아들며 코넬리에게 지시했다. “우리도 가자!” “옛, 마스터!” -히~히히히힝! “우아아아아아아~!” 그리고 서로 마주 달리는 그들은 금세 격렬한 조우를 했다. -쾅창~! “우악!” 가장 먼저 그래험의 공격을 받은 기사는 그 충격에 나가떨어졌고, 나이트 그래험과 코넬리는 기사들과 엇갈렸다. 그리고 그 기세 그대로 전면에 백마 를 단 검은 머리의 청년을 목표로 치달리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두…………. 라혼은 그가 자신을 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들자 라혼 또한 말의 옆구리를 차며 앞으로 튀어 나아갔다. “죠슈아, 메사 너희들은 끼어들지 마라!” 라혼은 자신의 뒤를 따르던 둘에게 명령하고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팔라딘 그래험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에텔 스페이스에서 스프링이 보우를 꺼내들고 화살을 쏘아 보냈다. -핑! 나이트 그래험은 정면으로 날아드는 화살에 기겁을 하며 방패를 들어 화살 을 막았다. 정면을 달려드는 기사에게 마주 달리며 화살을 쏘는 대담함에 등골이 서늘해지는 순간이었다. 말을 달리며 화살을 쏜다는 것은 엄청난 고 급기술이었다. 달리는 말은 흔들리기 마련이고 그 말위에서 정확하게 화살 을 날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음?” 갑작스런 화살에 놀란 그래험은 화살을 거둬낸 후 더욱 황당한 경험을 했다 . 순간 다크 프린스의 종적을 놓쳤기 때문이었다. 정면으로 마주 달려오던 그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마스터, 오른쪽이요.” 코넬리는 말을 저토록 잘타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달리는 말위에서 난데없 이 화살을 쏘질 않나 거의 전속력에 가까운 말을 순간적으로 방향을 바꾸질 않나……. 라혼은 팔라딘에게 가볍게 화살을 날리고 몸 전체를 왼쪽으로 쏠리게 해 순 식간에 방향을 전환하여 팔라딘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다시 오른쪽 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그래험의 뒤를 쫓는 철가면 기사단 사이로 파고들었 다. “형편없군.” 그리고 목소리에 마나를 실어 그들의 귀에 똑똑히 들리도록 중얼거렸다. 그 러자 신기에 가까운 기마술에 넋이 나갔던 기사들의 눈빛이 바뀌며 나이트 그래험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싸움은 그대로 난전이 되었다. “우오오오오……!” -와장창~! 요란한 고함소리와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벌판을 울렸다. -와~! -잘한다! -짝짝짝짝짝짝……. 실로 박진감 넘치는 전투에 구경꾼들의 환호성이 이어지고 박수가 터져 나 왔다. 그리고 그들은 서른 명이 넘는 기사들은 하나 둘 낙마시키는 팔라딘 그래험의 이름을 연호하며 응원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래험, 그래험, 그래험 그러나 구경꾼들의 응원에도 불구하고 팔라딘 그래험은 결국 말에서 떨어지 고 그의 시동은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러자 이제 열 명 남짓 남은 아이언 마스크 나이트들은 그래험의 주면을 돌며 기회를 엿보았는데 구경꾼들의 비 난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겁하다~! -말에서 내려서 싸워라! -우우우우우우~! 그것을 의식한 철가면 기사들은 말에서 내려서서 팔라딘 그래험에게 달려들 었다. “플래시Flash!” -번쩍! 그 순간 팔라딘 그래험은 준비해 두었던 권능을 사용했다. [플래시Flash 섬 광]에 당한 기사들은 일순간 시력을 상실했고 그 시간은 지금 이 순간 영원 과도 같았다. -깡! “……?” 그래험은 어느새 나타나 자신의 검을 막은 존재를 바라보며 눈을 크게 치떴 다. “성기사이니 목숨을 뺏으려는 것은 아닐 테고 팔 하나는 자를 셈이었나?”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고 다소 흥분 상태였다고 해도 다크 프린스의 접근을 허용한 사실은 충격이었다. 이들의 태도를 보건데 목숨을 뺏으려는 결정적 이 공격이 없다는 것은 눈치체고 있었지만 만일 그가 등을 노렸다면 위태로 운 상황이 나올 뻔했기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실력도 없는 주제에 자존심만 강한 녀석들이로군. 아무리 팔라딘을 상대 하는 것이지만 서른 명이 겨우 하나를 당해내지 못하다니…….” “…….” 라혼은 어정쩡하게 서있는 아이언 마스크 나이트들에게 한마디 쏘아붙이고 는 팔라딘 그래험을 바라보며 말했다. “팔라딘 그래험, 귀하의 명성을 귀가 따갑게 들어 알고 있다. 오늘 보니 과연 대단함을 알 수 있었다. 괜찮다면 오늘 결투의 끝을 우리 둘이서 내는 것은 어떤가?” “…….” “그대가 나을 꺾는 다면 그대의 의문을 풀어주겠다. 내가 그대를 꺾더라도 의문은 풀어주겠다.” 성기사(holy knight) 그래험은 절대 질 일은 없다는 듯이 자신만만하고 오만 끼 가득한 다크 프 린스의 태도에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경고의 의미로 성검에 마나를 주입 해 은은하고 하얀 검광을 만들어 냈다. 소드 마스터의 상징인 오러 블레이 드였다. “당신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나또한 전력을 다해 상대하겠소.” 팔라딘의 칭호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서른도 안 된 젊은 그래험이 팔라딘이란 영광된 칭호를 가진 이유는 단지 그가 황 제의 손자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오, 오러 블레이드……?” 철가면 기사들은 그래험 경의 오러 블레이드를 보고서야 지금까지 자신들이 상대하던 믿을 수 없는 역량을 보이던 기사가 소드 마스터임을 알았다. 그 리고 그저 힘없이 휘두른 그래험 경의 검세가 왜 그토록 강했는지 그 이유 를 그제야 알았다. 소드 마스터라는 족속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존재다. 묵직한 무쇠 칼을 휘둘러서 제대로 된 위력을 보이게 하려면 체중을 실어주 는 정확한 폼과 힘을 집중해야한다. 그래서 익스퍼트(expert)급 정도의 기 사라면 상대의 다음 동작이 힘이 들어간 것인지 아닌지를 구별해 낼 수가 있었다. 하지만 소드 마스터가 되면 그러한 상식은 깨진다. 체중이 실리지 도 않은 무너진 폼에서 쳐오는 검에 바위도 부술 힘을 실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소드 마스터였다. “차이저의 아들, 라혼 가이우스 세나데온 차이저, 그란의 왕자요.” 그러나 다크 프린스는 물러설 기색이 없어보였다. 오히려 그가 들고 있기에 너무나 평범해 보이는 롱소드를 세우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것은 이야기 속의 영웅들이 전장에서 호적수를 만나 싸우기 전에 자신을 소개하는 태도 였다. “태양의 종, 그래험 멜다자 지훈이오.” 라혼은 그가 자기 소개를 하자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먼저 공격을 했 다. 그다지 위력적인 공격이 아난 슬쩍 검을 휘두르는 수준에서 선공을 하 고 곧바로 스텝을 밟아 순식간에 거리를 줄이며 몸통을 던져 록스트라이커 를 시도 했다. ‘무모한…….’ 라혼의 공격은 무모하기 그지없었다. 가벼운 가죽갑옷, 아니 갑옷이라고 하 기도 민망한 무장을 하고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기사의 가슴으로 뛰어드 는 그 행위는 개구리가 거북이에게 뛰어드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험은 그런 다크 프린스의 공격에 그의 검을 쳐올리며 가슴을 비워두었다. 그리 고 손잡이, 그립(grip)에 달린 폼멜(pommel)을 이용해 그를 내리찍으려 했 다. 그러나……. -쾅! “큭!” 다크 프린스의 공격이 한발 빨랐다. 그래험은 록스트라이커라는 기술 이름 처럼 바위가 후려치는 느낌을 받으며 뒤로 수미터나 허공을 나는 경험을 했 다. 일순 아찔해졌던 그래험은 곧 의식을 회복하고 땅바닥을 뒹구는 수모만 은 피할 수 있었다. 그래험을 록스트라이커로 한방먹인 라혼은 연계공격을 하지 않고 느릿한 발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또다시 회초리를 휘두르는 듯 가볍게 롱 소드를 휘둘렀다. -챙~! 팔라딘 그래험은 힘이 담겨져 있지 않은 다크 프린스의 검격을 오러 블레이 드로 쳐내고 차지(charge, 돌진)를 시도했다. 그러나 라혼은 저돌적인 그래 험의 돌격에 순간적으로 대각으로 스텝을 밟으며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검을 피함과 동시에 그의 몸통을 후려쳤다. -쾅! 라혼의 롱소드는 철판갑옷으로 보호된 그래험의 허리에 작렬했고 그래험은 무시할 수없는 묵직한 충격에 신음을 삼켜야 했다. 그리고 공방을 계속 이 었다. “대, 대단해 전하께서 저런 무용을 가진 기사였다니…….” “소드 마스터인 그래험 경이 전하의 옷깃조차 건들지 못하잖아.” 팔라딘 1인을 당해내지 못한 기사들에게 지금 다크 프린스의 역량은 대단한 것이었다. 자신들은 파리를 잡기위해 휘두르는 것 같은 검격에 나가떨어지 기 일쑤였는데 다크 프린스는 그런 공격을 너무나 간단히 피해내는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오러 블레이드이지만 맞추지 않으면 소용없는 것이었다. 그 러나 오러 블레이드를 이룬 소드 마스터의 공격을 피하고 흘린다는 것은 그 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걸 해내는 존재와 상대하는 그래험은 자신의 실력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나이트 그래험, 무거운 갑옷을 겹겹이 껴입은 둔중한 자가 휘두르는 검을 피하지 못한다면 우습지 않나?” “확실히 그렇군. 결투 중에 미안하지만 좀 벗어도 될까?” “좋다. 대신 나도 무기를 바꾸겠다.” 라혼은 그래험의 요구를 흔쾌히 수락하고 완전히 폐기직전인 롱소드를 바라 보았다. 역시 소드 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는 위력이 대단했다. 라혼은 스 스로 한 가지 핸디캡을 주었는데 오러 블레이드 사용하지 않고 순수한 기술 만으로 그를 꺾는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가 무거운 갑옷을 벗고 나서더라 도 기본적인 풋워크가 갑자기 달라질 리 없으니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싸움이 일시 중단되자 라혼은 철가면 기사들에게 잡힌 그래험의 시동을 풀 어주게 하고 뒤로 물러섰다. -웅성, 웅성, 웅성, 웅성, 웅성, 웅성………………. 다크 프린스와 팔라딘 그래험 경이 서로 물러서자 구경꾼들 사이에서 소란 이 일었다. 그러나 라혼이 무기를 새것으로 바꾸고 팔라딘 그래험이 갑옷을 벗은 채 방패만을 챙겨들고 앞으로 나서자 두 기사에게 환호성을 보냈다. -와아~! 라혼은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천천히 앞으로 달리기 시작하며 이내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 그래험 또한 투구를 벗고 은발을 휘날리며 마주 달려왔다. -쾅! 라혼은 첫 번째 접전에 그래험의 검을 흘리며 몸을 반 바퀴 회전시켜 그 힘 으로 위력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그리고 다시금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확실히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갑옷을 벗은 그래험은 동작이 민첩해지고 몸 놀림이 가벼웠으나 본래 익힌 검술이 무거운 공격을 하는 파워검술이라 그 한계가 있음을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 그에 반해서 다크 프린스의 검술은 현란하고 롱소드 한 자루만으로 공격과 방어 그리고 반격까지 해내는 모습 을 보자 은은한 충격이었다. 게다가 춤추듯 한 스텝은 마치 두 사람을 상대 로 싸움을 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촤아~! 그때 돌연 거리를 벌린 다크 프린스가 검 끝으로 땅바닥을 훑어 흙먼지를 일으켜 그래험의 시야를 가렸다. 그리고 곧바로 위세 좋게 찔러 들어왔다. 그래험은 반사적으로 흙먼지 사이로 뻗어오는 롱소드를 쳐냈다. -챙! 그리고 그 순간 나이트 그래험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감지했다. ‘무기를 버렸다?’ 라혼은 흙먼지를 일으켜 그래험의 시야를 가림과 동시에 롱소드를 집어던지 고 그래험이 그것을 걷어내는 것을 확인한 후 그대로 몸을 날리며 감각적으 로 그래험이 검을 잡고 있는 손을 잡아채고는 팔꿉치로 그의 겨드랑이를 침 과 동시에 팔뼈를 부러트렸다. -우득~! “큭!” -휘익~ 쿵! 라혼은 그래험의 팔을 부러트림과 동시에 거의 무방비 상태인 그를 등으로 업듯이 하여 앞으로 넘기며 땅에다 메다꽂아버렸다. “…….” 라혼은 기절한 팔라딘 그래험의 손에서 태양신 아폴론의 성검을 빼앗아들고 높이 치켜들었다. -와아! 그러자 구경꾼들 사이에서 함성이 터져 나오며 다크 프린스를 연호하기 시 작했다. -다크 프린스, 다크 프린스, 다크 프린스…………. 사람들이 보기에는 자욱한 흙먼지가 가라앉는 짧은 순간 승부가 나고 승자 인 다크 프린스가 팔라딘의 상징인 디바인 파워 소드(Divine power sword, 성검)를 높이 쳐든 것처럼 보였다. *** 다크 프린스가 팔라딘 그래험을 꺾는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은 열광했다. 수 십 명의 기사들이 달려들고도 당해내지 못한 일당백의 기사를 갑옷도 입지 않은 채 홀로 나서서 쓰러트렸기 때문이었다. 레아모스 가문과의 싸움에서 승리는 운과 챔피언 메사리프가 가진 마법검 플래티움 아스카론 때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젠 누구도 다크 프린스의 기사로서의 역 량을 우습게 말할 수 있는 자는 없어졌다. 다크 프린스 라혼은 이제 그란의 소중한 보석이 된 것이다. “칫, 힘을 다 빼놓고 승리한 주제에 그란의 보석이라니…….” “코넬리, 확실히 다소 지쳐있었긴 했지, 하지만 그만큼 집중력은 예리해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마스터…….” 뭔가 불만 가득한 코넬리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깨어났다고 들었소. 고귀한 팔라딘.” 라혼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프린스 그란.” “경의 신성력이 무척 대단하군요. 뼈가 부러졌을 텐데 하루 만에 팔을 움 직일 수 있으니 말입니다.” “아! 이건 코넬리가 한 겁니다.” “사제이셨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아직 서품을 받지 못했습니다. 전하!” “종단에 돌아가면 템플러가 될 겁니다.” “그렇군요. 어쩐지 실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 코넬리 경, 잠 시 자리를 피해주실 수 있습니까?” 그래험의 고개가 끄덕이는 것을 본 코넬리는 방을 나섰고, 라혼은 코넬리가 밖으로 나서자 차원결계를 쳤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마기를 개방했다. “헉!” “역시 마기를 느끼시는군요. 고귀한 팔라딘.” “다, 당신은…….” “마왕이냐고 물으신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팔라딘 그래험.” 라혼은 한순간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저는 신의 전사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허용된 신성한 기운을 발했다. 사악하기 그지없는 이블 포스(Evil force, 마력)와 신성한 홀리 오러(Holy Aura)를 같이 발하는 상 대를 마주본 그래험은 뭐라 말할 수 없는 혼란에 휩싸였다. “당신이 추적하는 유니온은 내 종이 수장으로 있는 단체입니다. 그리고 그 는 뱀파이어 로드이기도 하죠.” “…….” “그리고 당신이 해치운 뱀파이어는 바로 그가 부리는 존재였습니다.” “그것을 내게 가르쳐 주는 이유가 무엇이오?” “이것은 당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무슨……?” 라혼과 함께하는 두 창조신중 영룡 이터너디 드래곤(Eternity dragon)은 전 룡, 워리어 드래곤 프리사메티의 모습으로 화해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 나 세계수 이그드라실(Yggdrasil)을 그래험으로 화할 필요가 있었다. 라혼은 점점 투명해지며 소멸해가는 그래험을 착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래험이란 이름을 사용하는 존재는 계속 존재할 테지만 그의 영혼은 육신 을 잃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걱정마라. 나의 반려여……. 나는 영룡과는 다르다. 그는 이모든 것을 기 억하고 누구도 모르는 그대의 진정한 정체 또한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대와 함께 싸우리라. “큭!” 그래험은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정신이 멍했다. 그리고 눈앞에 호기심 어린 표정을 자신을 보고 있는 다크 프린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 다. “이그라혼? 당신이 천 년 전 시드그람 대륙을 완전히 통일시켰던 그였습니 까?” “내가 원망스럽지 않은가? 나는 그대의 육신을 이용하여 영혼을 소멸시키 려 했는데?” “다소 그런 마음이 들기는 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무엇을 위해 그리 했는 지 알기에 이해합니다.” “…….” 영룡 이터너디 드래곤은 완전한 프리사메티의 자아를 가진 프리사메티가 되 었다. 그러나 세계수 이그드라실은 그래험에게 자신의 힘을 맡기며 하나가 되었다. “당신이 아직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이그라혼, 나의 왕이시여…….” 그렇게 태양신 아폴론의 종, 팔라딘 그래험 멜다자 지훈은 라혼의 3번째 기 사가 되었다. 탈로스(Talos) 탈로스(Talos) “뭐요? 시민의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오?” “왜 말이 안 됩니까? 고대 시드그람 제국에 민회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부 활시키는 것뿐인데 도대체 뭐가 문제입니까?” 귀족의회에서 민중파로 알려진 다크 프린스의 발의로 불거진 시민의회를 인 정해주는 법안은 새로운 폭풍을 예고했다. 이미 파이스 포인트를 정리하여 이제 며칠 후 축제가 열릴 때 시민들에게 정식으로 공개할 예정이고 레기온 기사단의 창설도 마무리 되어가는 상황에서 실질적인 실적과 무력까지 보 유한 다크 프린스의 발의는 말도 안 된다며 일축하기에 무리가 있었다. 귀족의회와 황제의 승인이 떨어졌지만 예산을 지원하지 않은 레기온을 다크 프린스가 개인자금을 투입하여 스스로 기사들을 모아 만들었기 때문에 현 상태에서는 거의 사병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레기온 기사단의 구성원으로 그란의 각 가문의 아들들이 참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비난하는 이는 없었다. 게다가 현재 레기온의 운용비용은 전적으로 다크 프린스의 주머니 에서 나가기 때문에 명령권을 귀족의회로 가져오기도 뭐했다. 귀족들이 생 각하기에 그들은 쓸모없이 막대한 소비만 해대는 단체이기 때문이었다. “이미 제국 내 자유도시에서 위원회 형태로 의회가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란에도 그것을 두자는 겁니다. 그란을 운영하는 세금을 부담하는 시민들에 게 그에 따른 권리를 주는 것이 마땅한 것이 아닙니까?” “민중을 통치하는 권한은 푸른 피를 타고난 고귀한 존재의 의무요. 어리석 은 민중과 교활한 상인들이 통치의 권한을 갖는 것은 신에게 반하는 행위요 . 프린스 그란!” “나는 그들에게 통치의 권한을 주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사이스 경! 그 들에게 문제를 호소하고 요구할 장을 마련해 주자는 것이오. 시민에겐 목숨 과 재산을 보호받을 권리가 있고, 귀족은 그것을 보호해야할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란의 시민은 이미 보호되고 있소. 어느 누가 그란을 침범한단 말이오? ” “그럼 재산은 어떻습니까? 부당하게 재산을 빼앗기고도 그것을 호소할 데 라고는 자신이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귀족뿐이지 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지금 이 순간 민회를 부활시켜 줄 것을, 지난 천 년간 시민들에게 빼앗았던 민회를 개최할 권리를 줄 것을 정식으로 요구하는 바입니다.” 그것은 다크 프린스의 공식적인 민중파 선언이었다. 그동안 라혼은 귀족들 을 자극하는 언사나 행동을 하지 않았다. 레기온 기사단이 아직 걸려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인기를 지지로 바꾸는 시간도 필요했기에 침묵 아닌 침묵을 하고 있었다. *** “자요.” “고마워, 레이나!” 라혼은 배가 산만 하게 부풀어 오른 레이나가 건네주는 차를 얼른 받아들었 다. “힘들 텐데 어서 앉아.” “아니요, 아직은 괜찮아요. 너무 움직이니 않는 것도 좋지 않다고요. 그보 다 어땠어요?” “대부분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더군. 하지만 통과 될 거야. 선례가 없는 일 이 아니라 이미 예전에 존재했던 거니까.” 그란 3공작 중 레아모스 공작은 라혼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이고 그 루미아 공작 또한 무턱대고 반대할 입장이 되지 못했다. 나르도르프 공작이 라면 반대편에 설수 있었지만 그는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지금 시끄러운 것은 라혼이 정식으로 민중파를 대변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사 실상 레기온 기사단을 장악하고 있고 시민과 젊은 귀족들에게 압도적인 지 지를 받고 있는 입장이었기에 여파가 큰 것이다. “미안해요. 이런 때 도움이 되지 못해서…….” “무슨 말을, 아이를 낳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 그리고 내 일은 끝났어. 귀족의회가 찬성하던 반대하던 민회는 만들어지게 되어 있어. 블러드가 이 미 손을 써놨다고. 그것을 귀족들이 인정하느냐 마느냐는 별개지만…….” 라혼은 레이나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며 말했다. “오늘은 뭐, 먹고 싶은 것 없어?” “카레요.” “카레라……. 내가 오늘도 솜씨를 부려보지.” 나르도르프 공작이 라혼의 제안을 받아 다소 맛이 순화된 마살라(Masala) 양념을 들여와 지금 그란은 카레요리가 유행이 되었다. 그리고 라혼은 카레 요리의 대가로 소문이 나 있었는데 나르도르프 공작의 입맛을 사로잡은 갓 은 바로 라혼이 만든 마살라였기 때문이었다. *** 레기온 기사단은 크게 유벤츠, 아이언 마스크 나이트, 그리고 일반기사들로 되어있었다. 124명의 기사로 이루어진 레기온 기사단은 단장인 라혼을 중 심으로 죠슈아와 메사리프 두 부단장과 객장으로 팔라딘 그래험이 중심이 되는 군사조직이다. 기사단 산하에 1천여기의 기병대가 있었고 가장 중요한 탈로스 전력은 3만 기간트라 사이클로스 급 아로게스 2기와 1만 기간트라 기가스 급 기게스가 10기로 기사단 전력으론 웬만한 왕국의 근위기사단 전력보다 조금 손색이 있는 정도였다. “기갑사령관님.” “무슨 일인가?” “사고가 터졌습니다.” 야펀은 자신의 백업이기도한 부관의 말에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야펀 은 라혼의 부탁으로 레아모스 가문이 보유한 탈로스를 가지고 레기온 기사 단에 입대했다. 그리고 9기의 탈로스 전단을 운용하는 기갑사령관이 되었다 . 사실상 레기온 기사단의 핵심전력을 맡고 있으므로 실세 중 실세였다. 레 기온의 모든 훈련은 야펀이 기획하고 실시했는데 이는 레기온이 투입되는 곳이 주로 전장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탈로스 중심의 전투가 벌어지니 당연 히 레기온 유일의 탈로스 전단을 지휘하는 야펀의 위치와 역할이 중요했다. “또, 유벤츠하고 철가면들이겠지?” “그렇습니다. 기갑사령관님!” 레기온 기사단이 보유하고 있는 탈로스는 레아모스 가문의 아로게스 1기 말 고는 모두 트란얀 공이 공여한 탈로스였다. 그런데 라혼은 그것들을 철가면 출신자에게만 주지는 않았다. 현재 124명의 기사들 중 마나유저는 38명이 고 그중 탈로스를 운용할 수 있는 실력자는 30명이었다. 그 30명중 철가면 기사단 출신이 18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현재 10명의 레귤러 파일럿에 포함 된 기사는 3명뿐이었다. 2기의 아로게스는 각각 죠슈아와 야펀이 운용했고, 10기의 탈로스가 레귤러 파일럿에 의해 운용 되고 있었다. 보통 탈로스는 실력보다는 가장 믿을 만한 기사에게 주어지기 마련인데 라 혼은 그것을 철저한 실력위주로 바꿔놓았다. 탈로스를 운용할 수 있는 기사 들에게는 모두 파일럿 자격을 주어 라혼 자신과 수뇌급 4명을 포함한 15명 의 레귤러 파일럿과 10명의 세미 파일럿, 그리고 10명의 예비 파일럿으로 나누었던 것이다. “휴~! 정말 하루가 멀다 하고 사고가 벌어지는군. 녀석이 나한테 기갑사령 관 자리를 맡길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야펀은 유벤츠 도련님들과 자기들이 최고인줄 아는 철가면들을 생각하며 한 숨을 쉬었다. 레기온에 입대한 유벤츠는 야펀 자신이 리더로 있던 탈로스 클럽에서 데려온 인재들이었다. 대부분 탈로스를 다뤄본 경험이 있는 우수 한 인재들이었지만 가문에 돌아가더라도 가문이 소유한 탈로스는 이미 주인 이 정해져 있거나 간혹 탈로스의 주인이 되더라도 탈일이 없거나 또 탈로스 를 보유하지 못한 가문의 자식들이었다. 그들이 레기온이 된 이유는 순전히 탈로스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탈로스가 타고 싶어 레기온에 참가한 인재들 이라 대부분 재능이 있었다. 그래서 15명의 레귤러 중 라혼과 죠슈아, 메사 리프, 그래험 그리고, 야펀 자신을 제외하고 7명의 유벤츠가 레귤러에 속해 있었다. 대부분의 탈로스가 콰이스 가문의 소유였던 것이고 보면 철가면 기사단의 불만이 클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유벤츠든, 철가면이든 세상에 자기네가 최고로 잘난 줄 아는 자존심만 높은 녀석들이니……. “온실 속의 화초 같은 도련님들 같으니라고…….” “비겁? 비겁하다고? 전쟁은 장난이 아냐? 전장은 피와 살이 튀는 그런 곳 이다. 전장에선 승자가 되기 위해 싸우지 않아. 살아남기 위해 싸울 뿐.” “그렇다고 레귤러가 되기 위해 동료를 다치게 하는 것은 용서가 안 돼!” “너희는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동료라도 해치나 보지?” “뭐야! 지금 우릴 모욕하는 거냐?” “그렇다면 어쩔 테냐!” “그만들 못 두겠나?” 야펀은 양편으로 갈라서서 당장이라도 칼부림을 할 기세인 그들에게 호통을 쳤다. 그러나 야펀에겐 그들의 달아오른 열기를 단숨에 식힐만한 카리스마 가 부족했다. 유벤츠 출신에게나, 철가면 출신에게나 야펀은 레기온 최강의 탈로스인 아로게스를 가지고 입대했기 때문에 다크 프린스가 레아모스 가 문에 대한 배려로 기갑사령관이 된 자라 인식되어 있었다. 그리고 기사로서 의 역량이나 경험도 별 차이 없는데다가 하다못해 나이도 비슷하고 오히려 야펀보다 선배가 되는 자들도 드물지 않았다. 야펀은 아직도 기세등등한 그 들의 모습에 내심 한숨을 쉬며 물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 “아르, 네가 설명해라!” 야펀에게 지목된 아르는 이번에 유벤트 기사단을 나와 새로 입대한 신입이 었다. 역시 탈로스 클럽 출신자로써 탈로스 운용에 재능을 보여 단번에 세 미 파일럿이 된 기사였다. “저치들이 어제 훈련 중 사고로 다친 제임스 경에 대해 말했기 때문입니다 .”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말해주지. 저들이 계획적으로 제임스 경을 다치게 했다고 실토했다. ” “뭐야? 그건 그저 우리끼리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사고가 있을 때 우 리 중 누구도 그의 근처에도 있지 않았어. 혹시 너희들 중 누군가 그래놓고 우리에게 덮어씌우고 있는 거 아냐?” 그리고 인내의 끈은 그것으로 끊겼다. 그들은 야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 로 격돌했고, 수명의 중상자를 발생시켰다. 그러한 사실은 알게 된 라혼은 턱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한심하군. 이거 무슨 동네 꼬마들 싸움도 아니고…….” “어떻게 할까? 주동자를 처벌하는 것으로 끝낸다 하더라도 문제가 될 텐데 ?” “흐음.” “…….” 라혼은 편한 자세로 푹신한 소파를 차지하고 있는 메사리프와 꼿꼿한 자세 를 유지하는 죠슈아, 그리고 그래험과 야펀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사실 라혼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이었다. 레기온의 다른 기사들에겐 솔직히 뭔가를 기대하지 않았다. “야펀 선배, 선배의 아로게스를 빌려줘.” “음? 그거야……. 그런데 뭐하려고?” “뭘 하긴 훈련이지. 메사, 다른 아로게스는 네가 타!” “왜?” “훈련.” “……?” “그리고 사고 친 놈들을 레귤러로 승격시켜서 기게스를 지급해줘요. 야펀 선배.” 라혼의 말에 야펀은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짐작이 갔다. “이번 축제 때 레기온의 힘을 보여줘야 하니까. 기게스에 도색을 해줘요. ” “도색? 탈로스에 도색이라니 사치로군.” “내가 다크 프린스잖아. 역청을 발라서 장작불에 대충 그슬리라고 그 일은 사고 친 놈들에게 맞기면 되겠군.” “그런데 뭘 하려고? 도색해서 보기 좋게 만드는 거야 좋지만 훈련한번하면 보기 흉해질 텐데?” “그건…….” “라혼!” 라혼이 야펀에 질문에 뭐라 대답할 때 누군가 날카롭게 라혼의 이름을 부르 며 노크도 없이 뛰어들었다. 라혼의 쌍둥이 누이인 테이였다. “헉헉헉…….” “뭐야?” 급한 듯이 이름을 부르며 방으로 뛰어들던 테이가 숨을 헐떡이며 말을 잇지 못하자 라혼이 물었다. “레이나가, 레이나가…….” “레이나가 뭐?” “아기를, 아기를 낳으려고 해!” “…….” 라혼은 쌍둥이가 하는 말에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는 느낌을 받았다. 레이나 가 지금 낳고 있는 존재에 대한 회의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엔 이일은 경사였다. “축하한다. 라혼!” “대장, 이제 곧 아버지가 되겠구나.” “음? 으응!” “뭐야? 너! 기쁘지 않은 거냐? 레이나가 임신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그렇게 기뻐하더니 지금 태도가 뭐야?” 라혼은 테이의 말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을 내보냈다. 그러나 그래험 경은 그 자리에 남아 착잡한 표정의 라 혼에게 말을 걸었다. “메이지 레이나는 저와 비슷한 경우군요.” “…….” “그녀를 사랑하십니까?” “글쎄? 나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몰라. ‘이것이다.’ 생각하면, 또 다른 감정이 생기기도 하거든. 하지만 레이나를 사랑 하냐고 묻는다면 ‘그렇다. ’일거야.” 그래험은 라혼의 대답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당신의 아들로 태어나는 그 존재에 대해 레이나에게 숨기십시오.” “이상하군. 사랑한다면 진실을 가르쳐줘야 하는 것 아닌가?” “당신도 알지 않습니까? 그녀도 어렴풋이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녀는 내가 먼저 이야기 해주길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어머니에게 자신이 낳은 아기는 특별합니다, 라혼. 그녀가 자신이 낳은 아기를 어머니의 눈으로 보게 하는 것이 그녀를 위하는 것입니다.” 연인으로서는 숨김이 없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가족을 위해서라면 진실을 알리는 것을 보류하는 지혜가 필요한 법이다. *** 만반의 준비를 해두었다지만 새 생명이 태어나는 일은 사람들을 허둥대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곧 생명이 태어나고 아기울음소리가 울리고 나서 야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아기의 탄생을 축복해주었다. “전하, 아들입니다. 차이저 가문을 이을 아들이에요. 아기가 아주 튼튼하 고 건강해요.” “산모는 어떻습니까? 산드라 부인?” “산모도 아주 건강해요. 아기가 효자여서 그런지 지어미 고생을 시키지 않 았어요.” “수고하셨습니다. 산드라 부인.” “저야 뭐, 한 게 있나요 부인께서 큰일을 하신 건데……. 라혼은 경험 많고 유능한 산파인 산드라 부인에게 크게 사례하고 방으로 들 어섰다. “지쳐 보이는군.” “그래요. 산드라 부인말로는 쉽게 아기를 낳은 편이라고 들었지만 이렇게 힘들 줄은 미처 몰랐어요.” 라혼은 아직도 땀이 송골송골 맺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녀의 품속에서 잠든 아기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좀 안아보아도 될까?” “어서 안아보세요.” 라혼은 아기를 받아들고는 그녀를 재웠다. “슬립sleep!” “왜……?” [슬립sleep 잠] 주문으로 잠드는 레이나에게 미소를 보여준 라혼은 방에 차 원결계를 친후 표정을 굳히며 아들에게 말했다. “중간계로 온건을 환영한다. 마계대공 아프수 아브주!” 그러자 감겨있던 아기의 눈이 치떠지며 이마에 뿔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갓 태어난 생명에겐 절대 있을 수 없는 처절한 붉은빛 분노를 담고 깊이 잠긴 심연의 어둠과도 같은 검은 눈을 뜬 아기는 라혼의 영혼을 옥죄이며 말했 다. -건방지구나. 라혼! 감히 날 마계대공이라 칭하다니……. “그럼 뭐라 불러줄까? 모든 신들의 아버지? 아니면 모든 마왕들의 아버지? ” -나는 아프수 아브주다. 아프수는 모든 신들을 낳은 존재다. 그리고 그 신들은 모두 없애려 하다가 오히려 신들에게 유폐된 가련한 존재였다. 라혼은 마계의 깊고 깊은 심연에 위치한 감옥에서 굵은 강철사슬에 묶여 있는 그를 만났다. 그는 의지만이 남은 존재였고 그의 의지는 한가지였다. 바로 모든 신들을 멸망시키는 것이 었다. 아프수는 모든 능력이 봉인된 단순히 영원한 의지만 있는 존재였다. “아프수, 그대는 계약을 이행하겠는가?” -큭큭큭큭……. 라혼 어리석구나. 나는 의지만이 남은 존재다. 의지만이 남 은 존재에게 계약을 요구하다니……. “그렇군. 그럼 너는 지금 태어난 인간으로서 너의 운명을 결정해라.” -나는 아프수 아브주 그러나 나의 이름은 그들에게 경각심을 갖게 할 터. “그럼 너는 라혼 가이우스 세나데온 차이저의 아들 아론 세나데온 차이저 다.” -큭큭……. 좋을 대로 해라. 그것을 끝으로 아기의 이마에 흉측했던 뿔이 사라지고, 눈동자 또한 원래 어린아이의 그것과 같은 맑은 빛을 회복하더니 이내 눈을 감았다. 라혼은 한동안 아프수의 모습이 사라진 아이의 붉은 얼굴을 바라보며 나지 막이 중얼거렸다. “아프수의 의지가 사라진 마계는 지금쯤 난리가 났겠군. 리디아는 올해 14 살이었지. 3, 4년 정도 남았나.” 탈로스(Talos) *** “나르도르프 공작전하, 시민의회라니 말이 됩니까? 천한 것들이 모여서 무 슨 이야기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실 겁니까?” “마이얀 경,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지 않소?” 마이얀 네부카드 사이스, 사이스 백작의 친동생이기도 한 그는 다크 프린스 가 완전히 민중파를 대변하고 나서자 반 다크 프린스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 나섰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사이스 가문은 다크 프린스의 아내의 친정이기 도 했다는 사실이다. 자세한 속사정은 알 수 없었지만 표면적으로는 다크 프린스가 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에게서 자손을 보는 부정을 저지른 것 때문 에 사이가 소원해졌다는 이야기가 있을 뿐이었다. “뭐요? 자른 공, 그게 무슨 말씀이오? 그럼 나르도르프 공작가는 시민의회 를 인정하겠다는 겁니까?” 마이얀은 나르도르프 공작의 장자 자른 공의 말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그것은 아직 검토 중입니다. ” 자른 공의 말에 마이얀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지금의 발언은 자신과, 아니 사이스 가문과는 교류하지 않겠다는 완곡한 표현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르도르프 가의 뜻이 그렇다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러시겠습니까? 배웅을 해드리지요.” 마이얀이 떠나고 그를 배웅한 자른이 돌아오자 마이얀의 방문으로 중단되었 던 논의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상하군. 메이지 레이나와 다크 프린스 사이에서 자손을 보았다고 하더 라도 상속권이 없는 자손이 아닌가? 그런데 겨우 그런 것때문에 사이스 가 가 다크 프린스와 반목한다?” “맞습니다. 게다가 다크 프린스의 부친 하이슬란드 백작은 사이스 백작가 의 신하였지 않습니까?”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사이스 가문은 그동안 다크 프린스를 음으로 양으로 도왔다. 사위와 장인의 관계를 차치하더라도 굉장히 가까운 사이인 것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게다가 에게너 네부카드 사이스 백작의 친동생 인 콘라드 네부카드 사이스의 장자가 다크 프린스의 큰누이가 약혼관계에 있고 곧 결혼이 예정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사이스 가와 다크 프린스의 차 이저 가는 가깝고 또 가까운 사이였다. “에게너 네부카드 사이스 백작이 경솔하다는 평을 듣기도 하지만 바람기 많은 딸의 남편을 혼내려는 것도 아니고…….” “언제나 그렇지만 다크 프린스 본인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도 너무 예상 밖의 일이 많아.” 지금 나르도르프 공작은 시민의회 문제보다 더 절실한 문제가 있었다. 바로 트라얀 공과 하이슬란드 백작이 그란으로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철가면 기사단의 주력과 탈로스까지 가고 말이다. 명분은 트라킨 네부카드 사이스와 다크 프린스의 누이인 레이디 세나루나의 결혼식 참관이었지만 사 실상 콰이스 가를 무너트리는 데에 일조한 3공작은 불안하기 이를 데 없었 다. 다크 프린스가 3공작과 손을 잡은 상황이지만 트라얀 공이 어떤 식으로 나설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 그란은 이미 라혼의 것이었다. 그란 3공작과 힘 있는 부유한 상인들이 라혼 을 후원하고 있으며 길고마 제국의 왕자이기도한 팔라딘 그래험 멜다자 지 훈이 있었다. 그는 아폴론의 기사로 그의 지지는 곧 모든 종파가 라혼에게 호감을 가지게 하는 이유가 되었다. 게다가 서로 의견을 조율하여 한목소리를 내던 3공작은 각기 따로따로 라혼 과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그들의 입장차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비밀리에 의견을 조율하기가 힘들었다. “마이얀 경이 나르도르프 공작에게 찾아가 시민의회문제를 걸고 넘어졌다 고?” “그렇습니다. 전하!” “이유가 뭔데? 짐작 가는 바라도 있는 건가?” “사이스 가 내부가 시끄러운 모양입니다.” “무슨 말이지?” “전대 사이스 백작이 돌아가시고, 지금 백작에 오른 에게너 네부카드 사이 스 백작과 콘라드 네부카드 사이스 남작 간에 감정의 골이 깊어져 있는 상 태입니다.” “…….” 라혼의 무언의 재촉에 블러드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전대 사이스 백작과 지금 사이스 백작은 서로 성격이 다릅니다. 그러나 콘라드 남작은 오히려 아버지 보다 더 뛰어난 정치력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 는 인물입니다. 지금 사이스 백작의 방식은 기존의 가신들과 사사건건 충돌 을 빗고 견디지 못한 그들이 사이스 백작을 떠나 콘라드 남작에게 가는 경 우가 생겼는데 처음에는 황폐한 영지를 개척하느라 힘든 그에게 본가의 지 원형식으로 인정하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본가인 사이스 영지보다 콘라드 남작의 영지가 오히려 번영하는 형상이 되어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 사이스 영지를 떠난 사이스 가문의 가신들이 몸만 옮겨가지 않았다. 그들이 가진 재산이 함께 갔다는 것이 문제였다. 게다가 사이스 백작가의 하부귀 족들이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선대의 예를 들어 콘라드 남작에게 중재를 부 탁하는 경우가 잦아지며 정치적으로 사이스 백작의 입지가 사이스 영지 내 에서 약해지기 시작했다. 아직은 그들의 어머니 노 백작부인이 살아있어 문 제가 덜했지만 날로 쇠약해져만 가는 노마님이 사라지만 반목이 더 심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최근 전하의 아버님이 콘라드 남작을 돕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마이얀 경이 그렇게 나설 이유는 없지 않나?” “잊으셨습니까? 미세스 카시아를 말입니다.” 라혼은 카시아의 일을 떠올리며 코끝을 긁적였다. 그리고 에게너 네부카드 사이스 백작과 아버지의 사이가 그다지 좋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사 실상 그간 차이저 가문이 받은 사이가의 도움은 대부분이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콘라드 남작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그렇게 되면 사이스 백작 의 입장에서 자신은 정적이었다. 그란의 일보다 본가의 일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는 마이얀 경에게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기세를 꺾어놓을 필요가 있었 던 것이다. “저들은 아직 전하가 카시아의 부정을 모를 것이라 판단하고 있을 테지만 …….” “내가 일방적으로 이혼을 선언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빌미로 날 압박 할 테지. 카시아의 부정이 밝혀지기 전까지 시민들에게 부정적인 모습을 보일 거고, 덤으로 시민의회마저 무산되며 더욱 미움 받을 테지.” 지금 라혼의 정치적 기반은 다름 아닌 ‘인기’였다. 인기를 사그라지게 하 는 방법 중 가장 유효한 것이 실망감을 안겨주는 것이다. ‘아내를 버리고 정부에게 자손을 보았다.’라는 사실은 확실히 부정적인 것이었다. “미세스 카시아의 부정을 밝히며 정식으로 이혼을 선언하는 것이 어떨까요 ?” “아니 그대로 둔다. 어차피 앞으로는 부담스럽기만 한 인기니까 거품을 뺄 필요가 있어. 하지만 당분간은 지금 이대로가 좋으니까, 마이얀 경에게 내 가 카시아가 나 아닌 다른 남자의 자식을 낳았다는 사실을 알리는 수준에서 처리하자고…….” “알겠습니다.” *** “언니, 정말 예쁘다.” “애는…….” 루나는 결혼식에 입을 눈처럼 하얀 드레스 입어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루나를 테이는 부러운 듯이 바라보았다. “어머나! 루나 양 이 가는 허리 좀 봐! 다소 끼지 않을까 걱정 했는데 조 금 헐렁하네요. 좀 줄여야 갰어요.” 루나의 결혼예복을 만든 중년부인들이 루나의 몸매에 맞춰 옷을 수선할 곳 을 살피며 연신 감탄했다. 물론 새 신부에게 자신감을 주기 위해 칭찬을 하 지만 지금은 스스로 진심어린 감탄을 했다. 그리고 다른 부인 들어와 루나 에게 향긋한 향기가 감도는 주머니를 건네주며 말했다. “사향이에요. 이것을 지니고 있으며 몸에서 은은 향기가 날거예요.” “사향이오?” “동방에서 건너온 귀한 물건이랍니다. 이것만 있으면 남편에게 넘치도록 사랑을 받을 거예요.” “특히 밤에 그 효능이란 대단하죠.” “맞아요. 사랑의 향기죠. 호호호호호호………….” 부인들의 웃음소리에 사향이 담김 향기주머니의 용도를 알게 된 루나는 얼 굴을 붉혔고, 테이는 향기가 마음에 드는지 갖고 싶어 하는 표정이 역력했 다. “언니, 나 조금 나눠주면 안 돼?” “테이 누나 몫은 따로 챙겨두었어.” “뭐? 정말!” 라혼이었다. 라혼은 어머니와 함께 루나 누나의 드레스 입은 모습을 보기위 해 조금 전 방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누나는 그게 뭔지나 알고 탐내는 거야?” “뭐기 향기주머니잖아!” “그거 무스크(musk)야! 일명 사랑의 향기.” “근데?” 라혼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설명을 해주다. “남자를 흥분하게 하는 향기라고…….” “뭐?” 세나데나는 자기들끼리 소곤대는 쌍둥이 남매의 자애로운 미소로 보고 루나 에게 말했다. “예쁘구나.” “엄마!” “벌써 네가 시집갈 나이가 되다니……. 세월이 무척 빠르구나.” “…….” 세나데나는 말없이 자신과 꼭 닮은 딸의 볼을 쓰다듬었다. “예쁘기도 하지 우리 딸.” “엄마 저는요?” “으이그~! 테이 누나는 가만히 좀 있어. 루나누나는 결혼을 앞둔 신부잖아 ! 그걸 샘내서 어쩌자는 거야? 하여튼 샘은 많아가지고…….” “이게! 이젠 집에서도 누나를 이기려드네.” “어어, 나는 이미 애 아버지야! 아직도 애 취급하면 안 돼지……. 새 신부를 돕기 위한 부인들은 여느 집 막내 같은 행동을 하는 다크 프린스 의 모습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전 대륙에 명성이 높은 무용을 자랑하는 기 사의 행동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 콘라드 남작이 정치적이 수완은 대단했다. 프린든 왕국이 중립지역으로 만 든 사우스포트에 친제국세력을 키워 사우스포트를 거점으로 삼으려던 프린 든 왕국의 전략에 전면적이 수정을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라혼이 미처 손 을 쓰지 못하는 사이 로카데 차이저 반 하이슬란드 백작과 트라얀 반트 세 나데온 콰이스 공작의 노력 덕에 프린든 왕국은 군사력을 모아놓고도 근 2 년 동안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못했다. “폐하, 이것은 기회입니다. 더 이상 머뭇거리다가는 영영기회를 놓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갤지역은 대영주들의 반목이 심화되었고, 제국은 관심 이 없습니다. 눈에 가시 같았던 콘라드와 로카데 차이저가 그란으로 간 이 상 시간은 우리 편입니다.” 슘터 파브릭스 바란 안 프린든, 프린드 왕국의 국왕은 신하들의 진언이 옳 다고 여겼고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그러나 침묵하고 있는 자 신의 후견인이며 프린든 왕국의 최대실세인 래곤 공작에게 물었다. “래곤 공작, 그대의 뜻을 어떠하오.” “저는 반대입니다. 바이나 공국과 시오나 왕국이 참여하지 않은 전쟁을 도 박입니다.” “하지만 그 망할 트라얀이 그란에 가서 무엇을 할지는 뻔하잖소. 제국의 다른 귀족들에게 정식으로 도움을 청할 것이 뻔하오.” “그래서 반대하는 겁니다. 차라리 2년전 쳐야 했습니다. 지금은 그들이 나 름대로 준비를 할 기회를 주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공은 영토를 수복하는 것에 반대란 말이오? 그런 것이오.” 국왕의 숙부이기도 한 래곤 공작은 조카의 말에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렇다면 최소한 바이나 공국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다리우스 펠레 데 트란 자작 말입니다.” “알겠소. 그를 총사령관으로 삼고 잃어버린 영토를 찾겠소.” “현명하신 판단이십니다. 폐하!” 탈로스(Talos) *** “파일럿들 사이에서 불만이 많은 모양이군요.” “문책을 해도 시원치 않은 일인데 오히려 탈로스까지 지급했으니, 받은 쪽 이나 잃은 쪽이나 말이 많지. 그런데 어쩔 셈이야?” “그 일은 임페리얼 챔피언십 토너먼트에서 해결할겁니다. 야펀 선배.” “무슨 말이야?” “결승이 끝나고 레기온 기사단의 이름으로 탈로스 전투시범 행사를 치를 겁니다.” “탈로스 전투시범? 전투시범이라 좋은 생각이긴 한데 그것과 파일럿의 불 만은 무슨 상관인데?” “그 문제는 제게 맡겨두시고 선배는 출진준비를 해주십시오.” 야펀은 라혼의 난데없이 출진을 언급하자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무슨 정보라도 들은 것이 있나?” “예, 프린든 왕국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은 모양입니다.” “그런가? 그래서 트라얀 전하와 하이슬란드 백작님이 그란으로 오는 건가? ” “트라얀 전하는 10년전 전쟁 때도 제국연합군 총사령관이셨고, 아버지는 소드 마스터이시니 제국의 대영주들도 자질에 문제를 삼지 않을 겁니다.” 야펀은 라혼의 발언에 언뜻 한 가지 그림이 그려졌다. 다크 프린스는 프린 든과 전쟁을 계기로 그 영향력을 제도 그란을 넘어 제국으로 확대시킬 생각 이었던 것이다. “다시 제국연합군을 구성할 생각인거냐?” “그거야 당연한 거죠. 하지만 어디까지나 주력은 레기온이 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야펀은 라혼의 대답에 자신이 점점 멍청해 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실력위주 로 귀중한 탈로스를 맡기고, 기갑사령관이라는 중요 직책을 가진 자신만 하 더라도 3자가 보기에 언제 칼을 거꾸로 잡아도 이상할 것이 없는 존재였다. 실제로 그러한 제안을 본가인 레아모스 가문이나 다크 프린스의 독주에 반 감을 품을 세력에게 받기도 했다. 이렇게 일반적이 상식을 벗어나는 일을 하는 라혼이 상식적인 일을 하는 것이 오히려 비상식처럼 보일 정도였다. “전하, 그래험 경이십니다.” “이곳으로 모셔라.” 트라얀 공이 그란에 머물 때 집사였던 셀랑드가 팔라딘 그래험이 왔음을 알 려왔다. 그리고 얼마 후 라혼이 집무실로 사용하는 서재로 그래험이 들어왔 다. “그래험 같던 일은 잘되었어?” “그럭저럭 만족할만한 수준은 되었습니다. 전하.” “얼마나 구할 수 있는데?” “500개에, 개당 90골드.” “무슨 말이지? 뭐, 길래 90골드나 하고 500병이나 하는 거야?” “아폴론 신전에 힐링 포션(Healing potion) 구입비용입니다. 포룸 내부에 아폴론의 지성소를 지어주는 대신 레기온에 힐링 포션을 공급해주기로 했습 니다. 재작년에 의뢰 했는데 이제 완성이 되었다고 연락이 왔군요.” 야펀은 씀씀이가 너무 큰 라혼의 금전 감각에 입이 벌어질 지경이었다. 대 충 백작정도의 유력자가 사는 성하나 짓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1000골드였다 . 그런데 라혼이 포션을 구입하는데 사용한 비용은 45000골드 성 45채를 짓 는 비용이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래험의 발언은 야펀으로 하여금 혀를 내 두르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지고교에서 1000개에 개당 75골드, 제우스 신전에서 400개에 75 골드, 대지의 여신 시전에서 300개 70골드로 했습니다.” 총, 2200개에 171000골드였다. 야펀이 알기로 포룸을 건설하는데 들어간 비 용이 2만 골드 조금 넘는다고 들었다. 그것도 짧은 시간에 완성시키느라 본 래 공사비용보다 서너 배 많은 자금이 투입되었다고 들었는데 힐링 포션 구 입비용에 그것에 근접하는 비용이 지출된 것이다. 그리고 개당 90골드라면 대량 구입해서 가격이 깎아졌다고 생각할 때 100골드짜리 최고급 힐링 포션 이 분명했다. 아폴론은 의학의 신이기도 했다. “충분치는 않지만 레기온이 사용하기에 그런 대로 괜찮군. 미리 확보해둔 600개의 힐링 포션이 있으니…….” 이쯤 되자 야펀은 기가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비싼 힐링 포션을 2800 개나 보유하고 있다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어림잡아도 25000골 드 레기온 기사단을 창설하고 지금까지 들어간 비용이 1만 골드 안팎이었음 으로 이것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는 비용이었다. 배보다 배꼽이 크다는 말은 아마도 지금 사용되라고 만들어진 말이 분명했다. 사실 라혼이 힐링 포션을 이렇게 대량으로 구입한 비용은 탈로스를 제조하 는 비용이었다. 그러나 탈로스의 주요부위는 도저히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1만 기간트라의 기가스 급이나 3만 기간트라 키클로 까지 어떻게 제작이 가능했지만 5만 기간트라의 타이탄급은 도저히 제작이 불가능했다. 지금 하이드아웃에서 손재주가 뛰어난 자들이 기술을 축적하고 있었지만 1,2년내에 결실을 볼 수 있는 그런류의 것이 아니었다. 지금 대 륙에 유력자들이 보유한 5만 기간트라 타이탄급 탈로스는 대부분 1천년이상 묶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라혼이 생각하는 탈로스는 최하가 키글로급 탈로 스였다. 기가스급 탈로스는 효율이 너무 떨어져 사실 탈로스의 기능을 하지 못했다. 라혼은 타이탄급 탈로스를 제작하려면 드워프 족 장인의 힘을 빌리지 않고 서는 힘들다는 결론을 내리고 탈로스를 제작하는 것을 전면 보류했다. 그리 고 거기에 투입될 예산을 돌려 힐링 포션 구입에 투입했다. *** 트라킨 네부카드 사이스, 소드 마스터 로카데 차이저 반 하이슬란드 백작에 게 기사수업을 받은 젊은 인재였다. 사우스포트 동부 접경지역에 영지를 가 진 콘라드 네부카드 사이스 남작의 2자다. 190센치의 키에 고동색 머리 20 대 후반의 트라킨은 이미 프린든 점령지에서 주목받는 기사다. “이제 사흘만 더 가면 제도 그란이다. 그러고 보니 넌 그란이 처음이겠구 나.” “그렇습니다. 아버님.” 콘라드 남작은 이제 결혼하는 장성한 아들이 못내 자랑스러웠다. 아들은 자 신이 가지지 못한 눈부신 무용을 가지고 있었다. 프린든 왕국이 수상한 움 직임을 보이고 다크 듀크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갤 지역이 어수선해지자 루 나와 트라킨의 예정되어 있던 결혼은 할 수 없이 미뤄지다 이번에 겨우 결 혼식을 치르게 된 것이다. “네 스승도 그러고, 루나 그 아이도 근 3년만인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는 루나에겐 미안하지만 라혼이 더 보고 싶습니다. ” “라혼이? 50명의 기사와 500명의 병사와 전투에서 이기고, 팔라딘 그래험 경을 제압했다는 소문 때문이냐?” “죠슈아하고는 하이슬란드에 들릴 때마다 대련을 했는데, 라혼은 굳이 사 양했었거든요.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 정도 일 줄 은…….” 트라킨은 자신이 검술의 기초를 잡아주었던 꼬맹이가 지금 전 대륙을 울릴 정도의 무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흥미로웠다. 그리고 어렸을 적 라혼을 가르칠 때 추억을 떠올려보며 검술에는 관심 없이 놀 궁리만 하던 귀여운 꼬맹이의 모습이 자꾸만 겹쳐졌다. 5년 전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았 으니 16세의 소년은 21세의 청년으로 자라나 있을 것이니 그것도 궁금했다. “듣기로는 라혼의 곁에 엄청난 기량을 가진 기사들이 많다고 하더구나. 너 도 잘 아는 죠슈아는 물론 세계 토너먼트 챔피언에, 팔라딘 그래험 경도 함 께하니 참 앞날이 기대가 되지 않느냐?” “예, 그보다 영지를 이렇게 오래 비워둬도 괜찮겠습니까?” 콘라드 남작은 아들의 말에 표정이 무거워지며 말했다. “아마도 반드시 탈이 날거야. 1년이라는 당초 예상보다 1년을 더 추가했으 니 나쁘지 않지만 프린든 국왕 슘터가 진공을 개시하면 주요 전략거점인 사 우스포트부터 장악하고 그다음이 우리 영지를 도모하겠지.” “그럼 아버님은 영지를 포기하시려는 겁니까?” “그런 것 같으냐?” “그렇지는 않으리라 봅니다. 하지만 저는 이유를 짐작할 수 없어 그럽니다 .” 콘라드는 아들의 너무나 솔씩 담백한 점이 걱정스러웠다. 정치적 입장이 모 호한 대화나 다른 생각을 가진고 태도 돌변하는 자들을 너무 많이 봐와서인 지 나중에 그러한 자에게 크게 당하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프린든과 적극적으로 맞서려는 세력은 네 스승과 트라얀, 그리고 라 혼정도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기에 우리 부자가 포함되겠지만 왕국의 역량을 총동원해서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으려는 프린든과의 싸움은 어렵고 또 어렵지. “…….” “어차피 우리 영지는 프린든 왕국군의 일차 목표에 가깝다. 옥쇄보다는 전 력을 유지하는 것이 여러모로 났지 않겠느냐? 어차피 너의 결혼이라는 명분 도 있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다지 마음에 드는 결정을 아니군요. 적이 쳐들어온다고 도망부 터 친 셈이라…….” 콘라드 남작은 아직 젊은 아들의 불만에 어색한 웃음을 대답을 대신했다. 그때 마차에 타고 있던 콘라드 남작의 아내가 얼굴을 보이며 말했다. “여보,” “마리니아!” “부자들끼리 이야기는 그쯤하시고 어디 쉴 곳이 없나 봐주세요. 제시가 힘 들어 하는 것 같으니까.” “조금만 참으시오. 한 시간 정도 더 가면 쉴만한 여관이 나올 테니, 거기 서 하룻밤 묶읍시다.” 제시는 이제 9살 난 트라킨의 여동생으로 콘라드 남작이 영지에서 낳은 딸 이었다. *** “카시아가 루나 누나와 트라킨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그란으로 온다고 ?” 라혼은 뜻밖에 소식을 전하는 블러드에게 되물었다. “예, 사이스 백작과 백작부인과 함께 지금 막 출발했다는 소식입니다.” 요새 대립각을 세우는 사이가 가의 영지에는 마법통신반지 피아 링을 가진 정보원이 상주해 있었다. “친 조카의 결혼식이니 참석하는 것은 당연하고 카시아 또한 일단 아직은 정식 아내니까 참석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건가?” 라혼은 누나의 결혼식을 그란의 축제가 시작되는 그날 치르고 그때에 맞춰 파이스 포인트의 포룸을 정식으로 개방할 계획이었다. “카시아가 낳은 아기는? 이제 2살 정도 되었을 텐데?” “그 아기는 낳자마자 나이트 제튼이 노스포트의 펍을 운영하는 주인 부부 에게 맡겨졌습니다.” “아들인가?” “딸입니다.” “그런 나이트 제튼은?” “그는 딸을 부부에게 맡기고 행방을 감추었습니다. 찾을 까요?” “아니, 됐어. 마이얀에게 내가 카시아가 나 아닌 다른 남자에 딸을 낳은 사실을 안다는 것을 알렸나?” “마이얀은 그녀의 부정에 대한 사실을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 서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것 같아 보류해 두었습니다.” “훔…. 잘 했어. 모르고 있다면 경사를 앞두고 굳이 들쑤실 필요가 없지. 그나저나 이 천더기 마누라를 어떻게 처릴 한다지.” 이혼을 선언했지만 공표하지는 않았다. 라혼은 지금 공식적으로 카시아의 남편이었다. 그러나 이미 다른 사내의 딸을 낳은 이상 자연적인 이혼 상태 지만 곧 누나의 결혼이라는 경사를 앞두고 있었다. 라혼은 루나 누나가 아 무런 걱정 없이 축복받는 시작을 선물하고 싶었다. “어머니나, 테이의 태도를 보면 카시아의 일을 모르는 눈치던데…….” “허락하신다면 암살자를 보낼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냥 정식으로 이혼장을 보내는 것으로 처리하지. 제튼하고 연락이 끓긴 모양이니 내가 친필로 그러한 사실을 언급하면 알아서 포기할 거야. 일단 그녀의 부모는 그러한 사실을 아는 듯하니 말이야. 그리고 겸사겸사해 서 노스포트로 가서 준지할 일도 있고 말이야. 레기온 기병대에 속한 유니 온 조직원을 시켜 그란으로 오는 그녀에게 우연을 가장해 친서를 전해주자 구.” “알겠습니다. 그렇게 처리토록 하겠습니다.” 라혼은 카시아를 생각하며 언제나 마음이 답답하고 입이 썼다. 머리로는 자 신이 그녀를 버린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행동이 언짢은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하아~!” “어머나 안 돼요. 어머니가 한숨을 쉬면 아기가 걱정합니다.” “그래요?” “엄마, 그게 진짜야?” 리디아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에게 물었다. “그런, 아기는 엄마의 뱃속에서 오랫동안 있었기 때문에 엄마에 기분이 어 떤지 근방 알아챈단다.” “피! 거짓말.” 이제 숙녀 티가 나기 시작하는 리디아는 엄마의 말에 약간 반항어린 말을 했다. 그러나 눈을 감고 꼼지락대는 아기의 모습이 귀여운지 아기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아기가 잠들자 카린느는 조심스럽게 아기를 앙 증맞은 침대에 눕혔다. “아기가 착하네요. 그다지 울지도 않고, 나는 이지지배 키울 때 어찌나 울 어대는지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는데……. 그때 고생을 생각하면 정말……. ” “어? 엄마 내가 그랬어?” “안 그랬을 것 같니?” 카린느와 리디아는 일부로 분위기를 밝게 하려 노력했지만 레이나의 얼굴에 서 어두운 기색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기를 낳고난 산모가 기분이 가라앉는 경우는 드문 경우가 아닌지라 걱정 말라는 말은 들었지만 레이나 경우는 너무 심했다. 언제부터인가 아기에게 눈길을 주기를 거북해하는 모습이 보 였기 때문이었다. “리디아.” “응? 왜, 언니.” 리디아는 자신의 손을 잡고 뭔가 말하려는 듯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는 레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내가 생각해도 라혼이 바쁜 것은 알지만 아기까지 낳은 언니에게 너무 무심했으니까.” “아니 그것이 아니야. 너, 너에 대한 이야기야.” “나? 내가 왜?” “그게…….” “왜? 뭔데, 그래?” 그러나 레이나는 결국 리디아에게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레이나는 라혼이 아기를 처음 보았을 때 자신에게 [슬립sleep]주문을 걸고 뭔가 했다는 사 실을 알았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 이유를 물었을 때 라혼은 피로를 푸는 데 잠이 최고의 명약이라는 말로 얼버무렸다. 그러나 그때 레이나는 불현듯 라혼이 처음 자신을 원했을 때 한 말이 떠올랐다. ‘정말, 내 아기가 마계의 족속일까?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라혼의 진정한 의도는 뭘까?’ 그리고 라혼의 존재와 진정한 의도에 대한 회의감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꼬 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 라혼이 단순히 권력을 탐하는 존재라면 얼마 든지 그를 도와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정체를 숨긴 진정한 마왕이라면, 하는 생각이 정신을 지배하자 레이나는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럼 자신이 낳은 아기는 어쩜 세상을 멸망으로 몰고 갈지도 모를 존재일 수 있 기 때문이었다.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만일 아기가 세상을 멸망으로 이끌 존재라면 자신의 손으로 아기를 없앨 수 있는 가였다. 그래서 사랑하는 연인인 라혼에게 그 것을, 사실을 묻기가 겁났다. 아니길 바라지만 라혼이 자신이 한 말을 반드 시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아는 레이나였다. 탈로스(Talos) *** “백작님!” “음?” “저기를 보십시오.” 사이스 백작은 지평선 넘어 달려오는 일단의 기마를 확인하고 호위 기사들 에게 명령했다. “레이스, 너는 제이브러스와 마차를 호위하고, 나머지는 만약에 사태에 대 비해라. 로즌 경” “예, 백작님.” “경이 저들이 어디에 누구인지 말아보시오.” “알겠습니다! 앤트, 따라와라!” 나이트 로즌은 최근 기사작위를 받고, 사이스 기사단에 입단한 앤트와 함께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어느새 알 수 없는 무리들은 그들의 가슴에 새겨진 문장이 식별 가능할 정도의 거리까지 접근해 있었다. “멈춰라!” 나이트 로즌은 말을 타고 달려오는 자들의 가슴에 그려진 올챙이 두 마리 같은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레기온 문장을 확인하고 다소 안도하며 외쳤다 . 레기온의 올챙이 문장은 손가락으로 장난치듯 그린 것 같은 우스꽝스런 모양을 하여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이미 레기온 기사단의 그 문장은 지원 을 청하는 황제의 친서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었다. 나이트 론즌의 외침에 기세 좋게 달려들던 수십 기의 기마들이 일제히 고삐 를 잡아당겨 말을 세웠다. 그런 그들의 말을 능숙히 다루는 솜씨와 군마로 훈련된 질 좋은 준마를 본 로즌은 레기온이 듣고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 르다는 것을 느끼며 다시 그들의 정체를 물었다. 일은 확실할수록 좋은 법 이니까? “그대들은 누군가?” “레기온 기병대 소속 백인대장 코란입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사이스 기사단의 로즌 네부카드 넬슨이다. 지금 사이스 백작 내외분 을 모시고 그란으로 간다.” “아! 사이스 영지에서 오신 분들이시군요. 혹시 카시아 자작부인이 함께 계십니까?” “그렇다.” “잘되었군요. 부관, 그것을 가져와라!” 레기온 백인대장 코란은 부관에게 뭔가 건네받고는 나이트 로즌에게 내밀었 다. “그란 전하의 친서입니다. 죄송하지만 카시아 자작부인에게 직접 전해야 하닌 양해를 구해주십시오.” 백인대장이 내민 두루마리는 일종의 위임장이었다. 그것은 전령이 하여금 받듯이 당사자와 직접만나 친서나 전언을 전하게 해야 하는 경우 전령을 보 낸 자가 신분을 증명하는 증명서 같은 것이다. 나이트 로즌은 친필로 양해를 구하고 전령의 신분을 증명하는 내용의 위임 장을 보고는 말했다. “알았네. 잠시 기다려 주겠나?” “예!” 약간의 시간이 지체되고, 백인대장 코란은 말에서 내려 사이스 백작 앞에 섰다. 그리고 그 곁에 차분하게 앉아있는 젊은 귀부인이 나서며 물었다. “제게 직접 전해줄 편지가 있다고요?” “카시아 자작부인이 되십니까?” “그래요. 접니다.” 그녀의 고개가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코란은 기름먹인 길쭉한 가죽주머니에 서 질 좋은 군청색 비단주머니 안에 든 라혼의 친서를 꺼내며 말했다. “그란 전하가 부인께 보내는 친서입니다.” “…….” “죄송합니다만, 저희는 이제 먼저 떠나려 합니다. 양해를 부탁합니다.” “답장은 필요 없나요?” 편지를 건네받은 카시아는 전령이 곧 떠나려하자 의아한 듯 물었다. “말씀드릴 순 없지만 저희는 다른 임무가 있습니다. 백작님께서 양해해 주 신다면 저희는 이만 실례할까 합니다.” 코란의 말에 그다지 말이 없던 사이스 백작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자네는 작위를 받은 귀족인가?” “아닙니다.” “그럼, 저 말은 자네 것인가?” 코란은 사이스 백작의 말투에서 고깝다는 뉘앙스가 풍기는 것을 느꼈지만 내색치 않고 성의껏 대답했다. “아닙니다. 군마는 레기온의 기본 장비입니다. 말은 레기온의 소유입니다. ” “평민에게까지 말을 지급하다니……. 뭐 어쨌든 되었네. 임무가 있다니 어 서가 보게.” “예, 그럼.” 코란은 마치 들으라는 듯이 긁는 백작의 말에 울컥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 은 표정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푹 숙이고 물러섰다. 그리고 부하들을 다그 쳐 그 자리를 벗어나 노스포트 항구로 향했다. 첫 번째 임무를 마쳤으니 노 스포트로 가서 1500명의 병력을 실을 배와 그들이 사용할 물자를 구해 비축 해야했다. 그는 유니온의 입김이 닿아있는 실력 있는 용병이었다. 자칭 레기온 기병대라는 무리들이 떠나고 그들의 출현으로 잠시 긴장했던 사이스 백작도 기사들을 수습해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차로 돌 아가 카시아는 남편이 보낸 편지를 보기 위해 비단주머니의 입을 묵은 끗을 풀었다. 붉은 밀랍에 남편의 인장이 찍힌 봉인을 뜯어내고 둘둘 말아진 편 지를 펼치고 내용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그러다 문득 카시아는 눈을 크 게 치켜뜨고 손이 떨린 나머지 결국 편지를 마차 바닥에 떨어뜨렸다. “카시아, 왜 그러니? 도대체 무슨 내용인데…….” 카시아의 놀라는 모습에 그녀의 어머니인 라이나 백작부인은 친서를 읽었다 . 그것은 이혼장이었다. 그러나 화낼 수도 없는 것이 어떻게 알았는지 카시 아의 부정에 대해 돌려서 언급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카시아와 라이나 백작부인만이 탑승한 마차 안, 한동안 질식할 것만 같은 침묵이 흐르고 라이나 백작부인은 딸에게 한숨 섞인 어조로 말했다. “휴우~!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쩌겠니. 네 아버지에게 말해서 우린 여기 서 돌아가 잤구나.” “아니에요!” “카시아!” “전 라혼 가이우스 세나데온 차이저의 정식아내에요. 이 편지에 대해선 그 에게 직접 따지겠어요.” “안 된다. 그것은 가문의 명예와도 관련된 일이다. 이것은 조용히 처리하 는 것이 옳다.” “제가, 제가 그렇게 부끄러운가요? 그래요?” “그 얘기가 아니잖니!” “엄마. 난 그이를 사랑해요. 그의 앞에 서지 못해도 되요. 다만 한번만이 라도 그의 얼굴만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해요. 그러니까 제발…….” 라이나 백작부인은 카시아의 울먹이는 말에 뭐라 대답해줄 수가 없었다. 사 랑하는 남자의 정식 아내임에도 남편 앞에 당당히 설 수 없는 딸이 측은하 기까지 했다. *** “아직도 기분이 안 좋아?” “아니요. 이젠 괜찮아요.” 레이나는 걱정스레 말을 건네는 라혼에게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그리고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라혼.” “왜?” 그리고 던지 짤막한 물음……. “아론은 우리 아기 맞죠.” “…….” 레이나는 그의 침묵에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절망감을 맛보아야 했다. “아론은…….” “아니에요. 그냥한번 물어본 거예요. 아론은 라혼 가이우스 세나데온 차이 저의 아들이죠.” “그것만은 분명하지. 이것은 나중에 확실해지면 말해 주려고 했는데 이혼 장을 보냈어. 사이스 백작가에서 답변이 도착하면 나와 결혼해줘!” “정말요?” “그럼 정말이지.” “사랑해요.” 라혼은 활짝 웃는 표정의 레이나의 눈을 마주보며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오오라를 내뿜는 그녀였지만 한 가닥 슬픈 그림자가 엿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라혼은 그것이 아론 때문 인줄로만 알았다. 아 론이 태어난 것은 처음부터 약속된 것이고, 비록 피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누가 보더라도 라혼의 아들인 것만은 분명했기 때문이고 정식으로 레이나와 결혼하면 아론은 공식적으로 자신의 후계자가 되기 때문에 보상을 충분하 다고 생각했다. ***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잡티하나 없는 깨끗한 흰 피부, 다소 이국적인 모습을 한 사내가 제도 그란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남자인 것이 분명한데 하얀 부채를 손에 든 그는 헐렁하고 하늘거리는 특이한 복식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것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문양으로 장식된 옷자락은 사람 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다만 한 가지 사내의 옷을 감싸고 있는 옷은 전체가 같은 무게의 금보다 몇 배 비싸다는 실크라는 것이다. 사내는 아무것도 급할 것이 없다는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사람들을 구 경했고 그자신도 사람들의 구경꺼리가 되었다. “뭐야? 광대가?” “글쎄? 광대가 실크로 옷을 해 입지는 않을 것 아냐?” “그럼 인시드에서 온 사람 아닐까? 그쪽 사람들은 옷을 헐렁하게 입는 다 고 들었는데?” “하지만 저 사람은 터번을 하지 않았는걸.” “터번?” “왜 있잖아. 머리에 수건을 둘둘 감는…….” “아! 정말 그렇군.” 사람들은 여자처럼 부채를 부치며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거리를 걷는 사람의 정체에 대해 저마다 의견을 나누었다. 그때 다소나마 사람들의 호기심을 풀어줄 일이 생겼다. “용호 공, 용호 공!” “…….” “이렇게 혼자 함부로 돌아다니시면 어떻게 합니까? 당신만 믿고 따르는 사 람들 생각도 좀 하세요.” “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멀리 나왔나 보군요.” 다소 뾰족한 고깔모자에 전체적으로 평범한 회색 톤의 헐렁한 로브차림의 마법사인 듯한 백발의 노인이 사내에게 말을 붙인 것이다. “이곳은 누누이 이야기 하지만 귀공에게 무척이나 위험한 곳입니다. 그러 니 제발 자중하십시오.” “백성들의 표정이 활기차고 밝은 것이 그런 생각이 들지는 않는 군요. 하 지만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법사!” 그리고 그들은 시드그람 대륙 공용어가 아닌 중저음의 묵직한 언어로 대화 를 나누었다. “용호 공, 공은 아직 피부로 닿지 않으시겠지만 이곳에선 수인은 라이칸슬 로프라고 하여 괴물 취급하며 사냥당하는 존재입니다. 칸 대륙과는 틀려요. ” “귀에 딱지 앉겠습니다. 그만하세요. 지금까지 별일 없으니 되지 않았잖습 니까? 그보다 법사 이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에게 우리의 뜻을 전하는 일은 어찌되었습니까?” “글쎄요.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황제에게 실권이 없습니다. 이 성시를 지 배하는 가문을 크게 3가문이고 그들의 영향력은 이 성시에 속한 영지가 전 부입니다. 그리고 영지를 나서면 다른 나라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크고 작 은 영지들이 있습니다.” “이곳도 저희 고향과 별반 다를 것이 없나보군요.” 백발의 마법사는 사내의 자조적인 어투의 말에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전 시드그람 대륙으로 보자면 이곳에 있는 황제도 일부만 다스립니다. 이 나라의 남쪽엔 강력한 권한을 가진 또 다른 황제가 있고 그 나라 서쪽엔 왕이 없는 나라가 관부를 이루어 다스리고 있기도 하죠. 그리고 더 남쪽으 로 내려가면 주변국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또 다른 제국이 있습니다.” “법사, 저희 고향은 제왕들이 황천상제를 모시고 있고, 인시드는 성황을 중심으로 모여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그러한 존재가 없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이곳엔 크고 작은 나라들이 많습니다.” “백국이 난립하는 전국인가?” “전국이오?” 마법사는 사내가 하는 말 중에 뜻을 알 수 없는 단어에 의문스런 표정을 짓 자 그것에 대해 설명했다. “사실 제 고향에서도 1600여 년 전까지 여기저기에서 크고 작은 나라들이 난립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싸우기도 하고 동맹을 맺기도 하는 등의 일이 빈번했지요. 특히 강(强)이라는 나라가 들어서기 직전까지가 매 우 심했습니다. 십여 개의 고만고만한 세력들이 서로 상쟁을 했으니……. 그래서 그 시기를 따로 전국시대라 불렀지요.” “그런가요? 하지만 이곳은 전쟁이 잦아 전장만 쫓아다니는 직업의 사람들 이 있지만 칸 대륙처럼 수만에서 수십만이 모여 싸우는 경우는 없습니다. 나라와 나라 끼리에 전쟁도 수천 명이 모여 전투를 벌이는 경우도 매우 드 뭅니다.” “하하하하, 움직이는 철인형을 말씀하는 겁니까? 이곳에서 그것을 구경 할 수 있다하니 봅시다.” ‘용호’라 불리는 사내가 늙은 마법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곳까지 온 이유는 다름 아닌 이곳의 무장들이 조종한다는 탈로스라 불리는 철인형이었 다. 전통적으로 이맘때 열리는 축제에 잠깐 민간에 선을 보인다는 말에 그 것은 보려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 “칸 대륙에서 온 사신이오?” “아니 정식사신은 아니네. 하지만 칸 대륙에서 상당한 고위급 인사가 그란 을 찾은 모양이네. 우리 가문의 인시드와 무역의 책임자의 소개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로열티(royalty)일수도 있다고 하더군. 그러니까 비공식적인 사신이지.” 라혼은 나르도르프 공작의 이야기에 호기심을 보였다. 시드그람과 칸은 중 간에 인시드가 가로놓여 있는 셈이라 거의 단절되어 있었다. 특히나 인시드 대륙 서남부 해안의 섬들을 거점으로 한 해적들의 극성에 항로자체가 없다 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왕족씩이나 되는 인물이 멀고 먼 이역 까지 찾아온 것은 참으로 특이했다. “누군지 모르지만 멀고 먼 동방대륙에서 이곳까지 왔다니 그것만으로도 만 만치 않은 사람이겠군요.” “그렇다네. 폐하께선 올해 궁정무도회에 귀빈으로 그를 초대하기로 했다네 , 그런데 그들이 자네를 만나보고 싶어 하더군.” “저를 말입니까?” “내가 보기에 뭔가 부탁할 것이 있는 눈치였네. 만나보겠는가?” “만나겠습니다.” 나르도르프 공작은 라혼이 그들을 만나겠다고 하자 집사에게 자신의 장원에 머물고 있는 그들을 불렀다. 그리고 집사를 따라 나선 자들은 자연스런 수 염에 장중한 느낌을 받게 하는 헐렁한 옷을 입고 손에는 30센치정도의 길이 에 2인치 너비의 납작하고 길쭉한 나무판자를 양손으로 들고 있었다. “이분이 그란 전하이십니다.” 그리고 집사가 라혼을 소개하자 그들은 두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리며 예를 표했다. “$#%@!@% 그란!#$# %@!%#!(대부 심호인이 그란 전하를 뵙습니다!)” “그란 !#$# %@!%#!(그란 전하를 뵙습니다!)” 라혼은 금관조복에 홀까지 든 그들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자 그들의 뒤에 서있던 머릴 터번으로 가린 자가 나서며 통역했다. “이들이 프린스 그란에게 예의를 갖추는 겁니다.” “그런 것 같군. 그란에 온 것은 환영한다고 전해주겠나.” “예, #$&%%#$#&#(전하께서 당신들은 환영한답니다.) “&*@#@%$!(환영을 해주시니 감사하나이다.) “고맙다고 하는 군요.” 라혼은 통역을 하는 인시드 인에 말에 실소했다. 칸 대륙언어를 아는 라혼 에게 장중하고 예의를 다하는 말을 그의 입에서 다시 들으니 다소 무례하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저들의 그들 나름대로의 정중한 태도가 아니라면 뜻을 오해할 수도 있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저 인시드인 통역은 거간꾼이로군. 그나저나 대부(大父)라면 지금 관직에 있지 않지만 언제는 부름을 받으면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인사란 뜻인 데…….’ 라혼은 생각을 정리하고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일로 나를 찾았는지 물어봐주겠나?” “예, (*%#$@ #%@ #%@!%@?(자기를 왜 찾아 왔냐는 데요?) “@#^$^　!#^@$%^% $#$%&$^?(자네가 설명해 주겠나?) “#$^?(제가요?)” “#%#@$%%! ㄲㅉ$%@ㅇㅆ#ㅎㄸㅉ#ㅉ@ㄹㅉ@#!.(자네도 우리의 사정을 잘 알고 있지 않나? 우리 대황자 저하가 바라는 것은 당분간 몸을 의탁할 곳이네.) 그렇게 그들과 대화를 나누던 인시드인 통역은 라혼에게 말했다. “당분간 그란에 머물 수 있게 허락해 달랍니다.” “그게 다인가?” 나르도르프 공작은 상당이 긴 대화를 나누었음에도 의외로 통역이 짧다 의 아한 듯 물었고 인시드인 통역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인시드인 통역이 빼놓고 말하지 않은 ‘대황자(大皇子)’라는 단어 는 라혼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들의 어투나 정황을 봐서 이들은 도망자였 다. ‘칸 대륙에서 무슨 일을 벌어진 모양이군.’ 라혼은 나르도르프 공작을 슬쩍 보고는 그들의 언어로 직접 질문을 던졌다. “ㄲㅉ$% ㄲㅉ$ %@$#$ ^@!#%$^$ @##$^#(대황자는 누구를 말함인가?) “……!” 대부 심호인은 갑자기 들려온 명확한 발음의 고향 말에 깜짝 놀라며 눈을 크게 치떴다. 그러나 이내 침착함을 회복하고 예를 다해 말했다. “대황자 저하는 선대 황천상제의 장자이십니다.” “그런가? 그런데 왜 황천상제의 아들인 자가 멀고 먼 서역의 나라까지 와 서 몸을 의탁하려하는가?” “…….” “말하라! 도움을 받고 싶다면 그대들의 처지를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대부 심호인은 부끄러운 이야기라 차마 말을 하지 못하다가 양인(洋人)의 왕의 재촉에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부끄러운 일이나 아국에 모반이 생겨 대황자께서 나라를 떠날 수밖에 없 었습니다. 그러니 저희처지를 굽어 살피시어 모쪼록 도움을 주소서.” “그대들을 도우면 내게 무슨 이득이 있는가?” “이(利)라 하시면? 금전을 말하는 것입니까?” “내 어찌 금전을 말함이겠는가? 본왕의 뜻은 그대들이 나를 도울 재주가 있냐는 말일세. 그대를 보니 그대가 모시는 자의 사람됨과 출중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네. 아직 이곳 말과 글을 몰라 당분간 어려움을 겪겠지만 그대가 이곳의 말과 글을 배우면 능히 인재라 하지 않겠나? 그저 객으로 머 무는 것보다 동지가 되는 것인 여러모로 낫지 않겠나?” 대부 심호인은 그란왕이란 자의 청산유수와 같은 말에 놀라고, 그가 하는 제안에 또 한 번 놀랐다. 이곳에서 이역인인 자신들을 중용(重用)하겠다고 하니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곳에 사는 양인과 같이 얼굴 윤곽이 또렷하기는 했지만 자신들과 같이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그가 동포처럼 느껴지기에 그에게 호감이 가긴 했지만 이일은 자기가 함부로 결 정할 사항이 아니었다. “그란왕 전하의 뜻은 감사하오나 제가 모시는 분의 의중을 물어야 합니다. ” “그리 하게. 하지만 결정이야, 천천히 내려도 되지만 오늘 저녁 자네와 자 네가 모시는 대황자를 초대하고 싶네. 괜찮겠는가?” “망신(亡臣)을 이리 환대해 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길게 읍(揖)하며 물러갔다. 나르도르프 공작은 라혼이 자신 은 전혀 알아들을 수없는 언어로 대화하자 놀란 표정을 지우지 않고 말했다 . “놀랍군. 자네가 저 사람들의 말을 하다니…….” 탈로스(Talos) *** 라혼은 손수 동방에서 온 손님들을 위해 절인 야채와 밥, 그리고 국을 준비 했다. 동방의 칸 대륙은 라혼에게 있어 그리운 곳이었다. 마계로 들어서기 전 가장 오랫동안 머문 곳이기 때문이었다. “라혼, 뭐해?” “밥과 국, 그리고 동방대륙식 이스트 샐러드.” “와! 맛있겠다.” 리디아는 라혼이 주방에서 뭔가 만든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가끔 옆에서 구 경하곤 했다. “오늘 먼 동방에서 온 손님을 초대했다며?” “리디아 그 손님이 동방 황제의 아들이라는 거 아니?” “뭐? 정말! 오늘 초대받은 손님이 동방의 황태자야!” “그래. 그러니까 숙녀로서 부끄럽지 않도록…….” “알았어, 조신하게 연기하지 뭐.” 라혼은 귀엽게 미소 짓는 리디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주방을 빼앗겼 던 요리장에게 뒷마무리를 부탁하고 밖으로 나섰다. “저어, 라혼!” “왜?” “레이나 언니가 이상해.” “뭐가 이상한데?” 라혼은 나란히 걷던 리디아의 은근한 어투의 말에 반응하며 되물었다. “아론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한숨을 짓고, 나한테도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말을 안 해.” “레이나가?” “응!” “흐음, 그럼 잠깐 짬을 내서 아론이라도 보러갈까?” 라혼은 리디아와 함께 레이나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서 오세요. 라혼! 요새는 얼굴보기 힘드네요.” “정말, 같은 집에 살면서도 그렇지 카린느?” “그래요. 여기 아론이오. 좀 오래 안고 있어서 그런지 힘드네요.” “우와! 이 녀석 제법 묵직한 걸.” 라혼은 아론을 받아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 말없이 조용한 레이나의 기색을 보고는 말했다. “카린느, 리디아 잠시 자리를 피해 주겠어?” “그럴게요.” 카린느와 리디아는 아무런 말없이 자리를 피해주었고 그들이 방을 나서자 라혼은 정색을 하며 레이나에게 말했다. “의심스러운가?” “…….” 라혼의 갑작스런 물음에 레이나는 잠시 침묵하더니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 “솔직히 그래요.” “그렇군.” “당신은 한 번도 제게 진정한 당신을 보여준 적이 없어요. 그렇지 않나요? ” “맞아! 사실이야.” “말해줘요. 당신이 누구인지…….” “나는 마왕이며 신의 전사다. 그리고 지금 그란의 왕자이기도 하고, 그리 고 이 아이는 마계의 가장 은밀한 곳에 감금 되어있던 존재의 화신이고…… .” “당신은 잔인한 사람이군요. 어떻게……. 내게 그럴 수 있는 건가요?” 라혼은 지금 레이나의 태도에 무척 혼란스러워졌다. 그녀는 오전까지만 해 도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그녀의 태도는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유도 알 수 없었다. 어차피 첫인상이 너무 강렬했으니 자신 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을 것이기에 정체를 숨겼다는 이유는 라혼으로서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무작정 원망하는 감정을 품고 있으니… …. 레이나는 마계의 사악한 족속을 낳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을 사랑한다 고 믿었던 연인은 그 일을 강행했다. 그러자 문득 의심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마음을 써주고 챙겨주는 그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한번 의심이 들기 시작하는 마음은 커지기만 할뿐 없어지지 않았다. “우리 잠시 떨어져 있는 것이 좋겠어. 날 원망하는 당신을 보고 있기 힘들 군.” “…….” “리디아에게 비밀을 말해주려거든 그렇게 해. 뭐라고 말해줘도 상관없어. 실수는 한번으로 족하니까.” 라혼은 아론을 침대에 누이고 방을 빠져나왔다. 라혼은 지금 레이나의 감정 기복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론을 낳는 일은 처음부터 예정된 일이었고 임 신기간 동안 그녀에겐 마음의 그늘이 없었다. 그럼에도 갑자기 자신에게 원 망하는 마음을 품게 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 “이곳은 정말 이상하군. 일국을 이어받을 왕자라는 자가 궁에 머물지 않고 신하된 자의 식객으로 있다니…….” “용호 공, 신성 시드그람 제국은 특별합니다. 자질만 된다면 누구나 제위 에 오를 수 있습니다.” “일반 백성이나, 노예라 할지도 말이오?” “글쎄요? 절대 안 된다는 법은 없지만 아마도 불가능 하겠지요. 명목상이 긴 하지만 신성 시드그람 제국의 황제는 신성 시드그람 제국이란 울타리 안 에 있는 모든 귀족과 기사들이 궁극적으로 충성을 바치는 존재니 말입니다. ” 용호린(龍虎麟)은 이 나라 출신의 법사, 위저드 베르그스의 말에 납득이 되 면서도 또한 아리송했다. 법과 제도, 풍속이 완전히 다른 이역(異域)이니 그러려니 넘어갈 뿐이었다. “그럼 오늘 우리를 초대한 그는 황제의 핏줄이 아닙니까?” “그렇다고 하더군요. 제가 잠깐 알아보았는데 이번 그란왕은 그란을 사실 상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습니다.” “법사, 그게 무슨 말이오? 황제의 후인이면 지방이면 몰라도 수도에서 위 세가 대단한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요?” “아닙니다. 용호 공, 황제의 후계자 ‘프린스 그란’이 된다고 해도 실제 로 제위에 오른 경우는 반에 반도 되지 않습니다.” 용호린은 위저드 베르그스의 설명에 위세가 대단하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 지 알았다. 지급 법사가 하는 말은 그란왕이란 자가 그만큼 뛰어난 자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리라. “urtjfnkjaueiigfuvjkcnvaluli.anvfv hwe;offnv,z aif cschbiwcF CBMsdBAV Bk UFA.GNVBSVBFKG(어서 오십시오, 노블 이스트! 저는 집사 셀랑드라고 합 니다. 전하께서 기다리십니다. 저를 따라 오십시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 “…….” 용호린과 그의 일행은 그란왕이 통째로 빌려 쓰고 있는 별채로 안내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고향 말을 잘한다는 그란왕의 환대를 받았다. “어서 오시오. 과인의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하오.” “저희를 이리 환대해 주시니, 이 용호모 감사할 따름입니다.” “용호? 동방에 용호란 말이오?” “그렇습니다만.” 라혼은 동방 칸 대륙인 무리를 이끄는 대황자가 용호라는 말에 호기심이 일 었다. “용호라는 성을 쓴다면 이름은 어찌되오? 나는 ‘라혼’ ghidk vurenav ur hb(가이우스 세나데온 차이저)요.” “용호린입니다.” 용호린은 양인(洋人) 왕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도중 ‘라혼’이라는 이름 에 묘한 생각을 했다. 고조(高祖)의 친부인 황천상국(皇天相國)께서 본래 서역출신인데 수인들이 도래하던 시절 고향을 등진 사람들의 후인이라는 것 이다. 그래서 그분은 인시드 대륙 아라한 신전에서 전래한 나한신권(羅漢神 拳)의 달인이라 백호나한(白虎羅漢)이라 불렸었다. 용호가(龍虎家)에 있어 백호는 어미요, 나한은 아비라 사당을 지어 천상무후(天上武后)와 황천상국 (皇天相國)을 나란히 국조(國祖)로 모시고 있었다. 그리고 황천상국의 이름 이 다름 아닌 ‘라혼(喇混)’이라 했는데 그것이 이름이자 성(性)이라 했다 . 그래서 용호린은 지금 그란왕이란 자가 혹시 그분과 피가 이어진 한 갈래 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멀고 먼 이역만리 타향에서 비록 600년전, 아 니 1000전 갈라졌다고 해도 같은 조상을 가진 존재가 있다는 것이 든든하기 이를 데 없었다. “린이라, 좋은 이름이오. 내 그대를 위해 손수 음식을 준비했으니 드시도 록 하시오.”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이곳특유의 산해진미와 밥과 국, 겉절이가 나오자 용호린과 그를 따 라 고향을 떠난 동방인들은 크게 감동했다. 그들이 가장 어려워하던 것이 입맛에 맞지 않는 너무 기름진 음식들이었는데 밥과 국도 그렇지만 지금 내 오는 음식들은 대부분 깔끔하고 담백한 류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떻소. 먹을 만하오?” “아주 맛있군요.” “다행입니다. 그대와 나는 연배가 비슷한 것 같은데 이참에 의형제를 맺는 것이 어떻소? 이렇게 만나게 된것도 인연인데…….” “의형제요?” “왜, 싫소? 내가 부족해 보이오?” “아니, 아닙니다. 오히려 고향에서 쫓겨너 갈 곳 없는 신세인 저를 받아주 시는 것만으로도 감읍하기 그지없는데…….” “그럼 되었소. 지금 이대로 천지신명에게 형제가 되었음을 고합시다.” “좋습니다. 그럼 제가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라혼은 아까 레이나의 일로 마음이 편치 못했는데 용호린이란 동방의 왕자 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이내 기분이 좋아졌다. 그의 모습이 마계로 들기 전 가장 사랑했던 누군가와 무척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팅팅팅팅팅! 라혼이 유리로 만들어진 술잔을 스픈으로 치며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는 행 동을 했다. 하지만 이미 모든 사람들이 자신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대화 에 열중하던 라혼과 동방의 황태자, ‘프린스 이스트(prince east)’를 주 목하고 있었다. “여러분, 저는 이 자리에서 ‘린’과 형제가 되었음을 알립니다. 그리고 나의 형제로서 여러분께 정식으로 소개드립니다. 용호 가의 ‘린’ 입니다. ” -와아~! -짝짝짝짝짝짝짝…………. 다크 프린스의 발표에 만찬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환호하며 박수로서 축하의 뜻을 전했다. 그리고 박수가 잦아들기를 기다린 라혼은 발언을 계속했다. “지금 우리는 형제가 되는 의식을 치르려 합니다. 여러분께서 그것을 참관 해주십시오.” 라혼은 언제나 지니고 다니는 나이트 그레이드의 숏소드를 꺼내 팔뚝을 그 어 피를 냈다. 그리고 포도주가 담긴 잔에 그 피를 받고는 용호린에게 칼을 건넸다. 용호린 또한 라혼과 같이 소매를 걷고 팔뚝을 그어 피를 내게 하 여 잔에 피를 받아냈다. “@%#$^%#$# %^@$%^@@^ @#$^$@#^@# @#%@#%!!@#% (천지신명에게 고하노니. 같은 씨와 같은 태에서 태어나지 못했으나 지금 이 순간 형제로서 맺어졌음 을 알립니다. 형 라혼!) “@^@^#573457 (동생 용호린!)” 그리고 라혼과 용호린은 피가 섞인 포도주를 나누어 마심으로써 형제가 되 는 의식을 마쳤다. 그리고 라혼은 어머니와 누이들에게 용호린을 소개했다. 이로써 마그누스 이그라혼은 동방의 기사 ‘린’이라고 불리게 된 4번째 기사를 얻었다. *** 린은 라혼의 의형제가 된 이후 자신을 따라온 충성스런 신하들과 함께 의형 라혼이 머무는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것을 라혼이 바랬기 때문이었다. “린, 하루속히 이곳의 말과 글을 익혀야 한다. 너는 물론이고 네가 이끄는 신하들에게도 그러한 사실을 주지시켜라.” “예, 알겠습니다. 형님! 한 달 만에 익혀 보이겠습니다.” “사실 한 달도 너무 늦다. 나는 곧 전장에 나가야 하고 너와 네게 충성하 는 무사들도 같이 데려갔으면 하기 때문이다.” “예? 그 말씀은…….” “사실 그란왕이란 지위는 허깨비 같은 거다. 내가 그란의 최고 권력자처럼 비춰지는 것은 타협의 산물이지.” “…….” 라혼은 린에게 신성 시드그람 제국의 사정과 황제와 그 후계자의 관계를 설 명해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허망하기 그지없는 단순한 인기에 권력의 기반 을 둔 사실 까지도……. “그래서 내가 이곳을 떠나 전장에서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하면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 내 후견인인 3공작은 외가 쪽을 멸문에 이르게 하는 데 에 일조를 했다. 내가 그러한 사실을 연연해하지 않아도 내가 권력을 잡고 있는 이상 계속 불안할 것이기에 뭔가 수를 쓸 것이 분명하다.” “형님도 참 복잡하군요.” “세상사가 다 그렇지.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고향을 등지고 이역만리까지 흘러들어왔느냐?” “휴우~! 이런 말을 하면 고향을 욕하는 것과 같지만 형님으로 모신 마당에 게 무엇을 숨기겠습니까?” 용호린은 서자였다. 용호린과 부황은 비록 부자지간이었지만 나이차이가 15 세 밖에 되지 않았다. 부황이 태자 시절 궁의 허드렛일을 하는 여인에게서 본 자식이었다. 비록 그 여인이 태자의 첫정을 받아 용호린을 낳았지만 용 호린의 할아버지가 급서하고, 용호린의 부황은 약관도 못된 나이에 임금이 되었다. 부황이 황천상제가 되자 신분이 천했던 용호린의 모친은 후궁이 되 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래서 제위를 받을 수 없는 용호린은 황천상제 의 첫 아들임에도 태자로 책봉되지 못하고 대황자로 만족해야했다. 용호린이 15세 무렵 황후에게서 천태자가 생산되고 돌이 지날 무렵 용호린 의 배다른 동생은 태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 후 황후의 견제는 눈에 보일 정도로 심해졌다. 16세의 대황자는 갓 서른이 넘은 황천상제의 총애를 받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정사의 중요한 사항에서 학문, 무예 등 여러 분야에 서 서로 대화를 나눌 정도로 부자라기보다 친구에 가까운 아버지와 아들이 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태자를 생산한 황후가 눈엣가시처럼 여길 만도 했 다. “그리고 저는 제위를 탐했습니다.” “…….” “사심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때 황실의 상황은 바람 앞에 등 불이었기 때문입니다. 부황은 병마와 싸움에 지쳐가고, 때마침 북방의 반란 을 토벌하고 돌아온 제게는 작은 할아버지뻘이 되는 분이 야심가였기 때문 입니다. 그런데 모후께선 그분의 야심을 읽지 못하시고 나를 견제하기 위해 그분을 동생의 후견인으로 삼았습니다.” 린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저는 태자인 동생을 위해 그분을 경계했지요. 그런데 부황께서 말씀하시 길 자신이 붕어하면 제위는 그분에게 주고 동생을 보호하라 했습니다. 그러 나 저는 처음으로 부황의 뜻을 따르지 않고 직접 황천상제가 되려 했습니다 . 하지만 저는 경솔했습니다. 제힘으론 그분을 당해낼 수가 없었기 때문입 니다. 저는 그분에게 반감을 품은 북방으로 가서 후일을 기약하려 했지만 북방은 이미 힘이 없고, 동생과 모후는 죽임을 당했지요. 천하는 이미 그분 손에 떨어졌고 저를 지지하던 자들이 제 목으로 그분께 용서를 구하려 하 니 죽음의 사막을 건너 이곳까지 흘러든 것이지요.” 라혼은 린이 자신에게 원수인 자를 ‘그분’이라고 하는 말에 또 다른 속사 정이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용호린은 동생을 위해 그와 대적했지만 동생의 친모는 오히려 용호린을 견제했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것을 이용해 용호린을 변방의 오지로 쫓아 보내고 황천상제가 붕어하자 태 자와 황태후를 사사하고 실권을 장악한 것이었다. 용호린은 자신이 북방에 버티고 있으면 감히 태자를 해치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그의 과단성을 용 호린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리고 천하에 암운이 드리우자 힘이 있음에도 스스로 물러서서 황실의 힘이 골육상쟁에 소모되지 않게 한 것이다. “그랬었군.” 라혼은 린이 동방에서 가져온 차를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집사 일을 하는 셀랑드가 들어와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저, 전하, 동방의 무사들과 레기온들이 시비가 붙었습니다.” “……?” 라혼은 집사의 말에 린과 함께 사고가 발생한 곳으로 갔다. 탈로스(Talos) *** “#$^@^$@# !#%@#%@(연공하는 것을 훔쳐봤다.)” “뭐라는 거야?” “에~! 그러니까. 수련하는 것을 보았답니다.” 스테판코는 인시드인의 말에 반문했다. “그래서, 그게 뭐?” “그게,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수련하는 것을 훔쳐보는 것을 금기시 하는데 그것을 어긴 경우라…….” “시드그람에 왔으며 시드그람의 법에 따라야지. 그딴 거 좀 봤다고 다짜고 짜 칼을 휘두르는 경우가 어디 있어?” “#$^@#$^ #%@%@(지금 이 양인이 뭐라고 하는 거냐?)” “!#%%#$^$#%&%$&(이곳의 법도엔 그런 것은 상관없습니다. 수련하는 것을 보든 말든.) “@#%##$^%#$%^(그가 그렇게 말한 거냐?) “@#$%^#$@@#@$^$@#$^%#$^@!(아니오.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지금 이 기사 분은 그니까 뭐냐. 아! 이곳에서 살려면 이곳의 법도에 따르랍니다.) “$%^#@$@%(뭐야? 이런 건방진!)” 스테판코는 인시드인 통역이 뭐라 말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저 건방진 이스 턴(Eastern)이 지껄이는 말이 곱지 않음을 알았다. 그래서 스테판코가 발작 하려 할 때 귀청이 터질 듯한 엄청난 고함소리가 터졌다. “@#^@$^@$(멈춰라! 이게 무슨 짓인가?) 심후하기 그지없는 내공이 실린 린의 일갈에 동방무사와 대치중이던 기사들 이 깜작 놀라며 멍한 표정이 되어 다크 프린스와 혈맹을 맺었다는 동방의 왕자를 바라보았다. “#@%#$%#$^!#%$#@^##$^%@^(객이 되어 주인집에서 소란을 피우다니 이런 무 례한 경우가 어디 있나?)” “^#@%%^$# %!^ !#$@^@^@@^#%$%@(저하, 저들이 우리가 연공하는 것을 훔쳐 보고도 그 일을 따지니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곳의 법 도가 그렇다고만 하니…….)” 린은 자초지종을 알았지만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고향을 등진 충직한 수하를 차마 다그칠 수가 없었다. 그때 라혼이 나섰다. “!$^#$%&@#시드그람$%&$@@@^$%& @#^%#$%!$^#$#%@$#^@#$(동방대륙과 시드그 람의 풍속은 다르다. 린, 기왕 이렇게 시비가 붙었으니 비무로 풀자. 이곳 에서도 무인들 간에 시비는 비무로 푸니 말이다.) “#^!$#^%$^!#^$~!@%$(좋습니다. 형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라혼은 문제를 일으킨 레기온 기사들을 보고 다시 똑같은 의미의 말을 했다 . “동방에서도 서로 시비가 있을 때 결투로서 해결한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 게 결투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권했고 이들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기사도에 입각해서 그것을 받아들이겠나?” “알겠습니다. 전하!” “좋아! 그럼 시작한다. 누가 먼저 나설 텐가?”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가장 먼저 나선 것은 스테판코였다. 자고로 철없는 것들은 싸워야 친해지는 법이다. 그리고 싸움의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스테판코 세나데온 르마!” “$%&!^@#^(은창 장조요!)” 은창(銀槍) 장조(掌朝)는 양인이 그들 나름대로 예를 갖추는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며 마주 인사했다. 그리고 가만히 그와 마주서서 자신의 애병(愛兵) 이기도 한 은창을 앞으로 내밀었다. “흐업!” “@!%#@^ $&#%$&(금강창(金剛槍) 구조(九爪)!) 스테판코가 기합성을 내지르며 차지(charge, 돌진)를 시도하자 장조는 9개 의 창영을 구사하여 그의 움직임을 막고 목젖에 날카로운 예기를 뿜어내는 창날을 겨누었다. 단 한수에 제압한 것이었다. “저, 졌다.” 스테판코는 은색 창이 9개로 뻗어 나오고 거기에 대응하는 사이 순식간에 제압당하자 허탈한 심정이 되어 손에 들고 있는 검을 땅에 꽂았다. “#$^ !$^#$%^@% @#%#%$^&$@#^%$@^(장조라 했나? 너무 쉽게 끝나 체면이 말 이 아닌데 한사람만 더 상대해 줄 수 있겠나?)” “%$&!^%#$%&(얼마든지…….)” “죠슈아!” “대장.” “부탁한다.” 오만기 서린 자부심 가득한 무인의 태도에 호감을 느낀 라혼이었지만 일은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었다. 동방 칸 대륙과 시드그람 대륙은 분명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어느 한쪽이 배려하거나 양해해 주어야 했다. 그런 점에서 동방의 무사들이 자신의 관습을 고집하는 것은 불합리 했다. 이곳은 동방이 아니기 때문이다. “죠슈아 차이저!” “$%&!^@(장조라 하오!)” 장조는 거의 9척 장신은 되어 보이는 거구의 사내가 나서자 본능적으로 긴 장했다. 덩치도 덩치지만 아까 싸운 양인과 기세부터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쾅~! “헛!” 그리고 아까 싸운 양인이 선보였던 돌진과는 차원이 다른 돌진에 거대한 바 윗돌에 맞은 듯 뒤로 퉁겼다. 또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강맹한 힘이 실린 공격을 오랫동안 무술을 익히며 몸에 배어든 기술로 막아냈다. 그리고 기회 를 노려 회심의 반격을 했지만 상대는 그저 힘만 가진 그런 존재가 아니었 다. 죠슈아는 완전히 수세에 몰린 상대의 창끝이 어깨를 노려오자 휘두르던 바 스타드 소드를 놓아버리고 창대를 잡아채며 그대로 몸통을 던지며 록 스트 라이커를 시도했다. -퍽! “컥~!” 승부는 두 호흡 만에 승자와 패자로 결정되었다. 장조는 무기를 빼앗기고 땅바닥에 뒹구는 신세가 되어야 했다. “#@$^#!@%^$^@$(장공의 창을 빼앗다니…….)” “$%&!#$^&!@$ #^!^@%^#$% #$^$%^#$%&@$^(이쪽에도 고수는 있었군. 단순한 공격일변도의 무공만 있는 줄 알았는데, 저런 감각적인 야수공의 달인이라 니…….)” 라혼은 죠슈아의 감각적인 싸움기술에 흡족했다. 처음부터 기본기와 감각을 키우는 수련을 시킨 것이 지금에 와서 빛을 보기 시작했음을 알았다. 앞으 로 실전경험만 풍부해지면 더욱 다양한 기술을 보일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 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은 죠슈아 자신도 느끼고 있는 사실이었다. *** 라혼은 레이나에게 가지 않고 밤새 그간 밀린 서류작업을 마무리했다. 그리 고 아침이 되어 하던 일을 멈추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명상에 잠겨있었 다. 그러나 자신을 찾는 다급한 목소리에 고요한 아침을 방해받았다. “라혼! 라혼!” “무슨 일인데 아침부터 호들갑이야? 누나?” “큰일 났어. 레이나하고 아론이 사라졌어.” “뭐?” 라혼은 테이의 손에 이끌려 레이나와 아론이 머무는 방으로 달려가야 했다. 그곳엔 어머니와 곧 결혼하는 새 신부 루나누나가 함께 있었다. “라혼.” “어머니.” “오늘쯤 네 아버지가 오실 것이라 들었다. 그래서 레이나를 찾았는데 레이 나는 물론 아론도 보이지 않는 구나. 짐작 가는 것이라도 있느냐?” “…….” 라혼은 어머니의 말을 듣고 의식을 개방해 레이나의 기운을 찾았다. 그러나 레이나의 기운은 어디에도 없었다. 라혼은 레이나가 자신의 감각에 걸리지 않자 금방 하이드아웃이 떠올랐으나 블러드의 본거지나 다름없는 곳으로 몸을 피할 리 없었다. ‘아프수 아브주! 그가 레이나를 숨기고 있다. 실수다. 그를 믿는 것이 아 니었는데…. 아니야. 그는 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럼 레이나 스스로 의 의지인가?’ 라혼은 레이나의 존재가 감각에 잡히지 않자 아론으로 화신한 아프수를 의 심했다. 그러나 그는 의지만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라혼의 도움이 없으면 신성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결론은 어미를 생각하는 아기의 마음이 그를 움직였다는 뜻이 되었다. “라혼!” “예?” “무얼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는 것이냐. 네 아내와 아들이 사라졌다. 어서 조치를 취해야지 않겠니?” “후우! 어머니, 그녀는 스스로 떠났습니다. 저는 그녀가 스스로 돌아오길 기다리겠습니다.” “라혼! 그게 무슨 말이야? 레이나야 그렇다 치고 아론은 어쩔 건데?” 라혼의 힘없는 말에 발끈하는 테이였다. “어디에 있던 아론은 내 아들이야. 그리고 어머니 이일은 이대로 덮어두고 싶습니다.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루나누나 미안해 곧 결혼하는데 이런 불미스런 일이 생겨서…….”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세상에의 모든 것이 자신을 중심으로 돈다고 생각하는 라혼이 힘없이 양해를 구하자 세나데나는 아들을 다그칠 수 없었다. 테이 또한 라혼의 힘없는 모습에 안쓰러운 눈빛으로 뭐라 말을 하려다 그만 두었 다. “라혼, 레이나는 현명한 여자야. 조금 오해받을 정도로 활달하지만 정숙하 고 지혜로운 여자라는 것은 네가 더 잘 알거야. 그러니 네 말대로 기다려 보자꾸나.” “고마워, 루나 누나!” 라혼은 레이나의 향기가 남은 침대에 홀로 누웠다. 그리고 잠이 들어 참으 로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꿈인가? -……. -이상한데? -이제야, 이상함을 느낀 건가? -넌 나군. -그래 난 너다. -이상해. -그래 이상하지. 너는 그녀를 사랑했는데 그녀가 떠나자 오히려 해방감이 느껴지니 네가 생각하고 있는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사랑이 아니란 말이지? -그래. -후후후, 그것은 네가 껍데기를 벗기 시작하는 중이란 뜻이다. -무슨 말이지? -너도 알잖아! 이것은 해탈의 과정이다. -해탈? -인간의 모든 감정 중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감정 그것이 ‘사랑’이고 가장 마지막에 남아있는 욕심이 애욕이지. -그럼 나는 인간이 아닌가? -너는 이미 1200여년을 살았고, 600년을 마계에서 보냈다. 누가 널 인간으 로 볼까? -그럼 난 뭐지? 마왕? 신? -혼란스러운 모양이지? -그래 혼란스러워. -그것은 아직 인간성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다. 하지만 꿈에서 깨면 너는 더 이상 혼란스러워 하면 안 돼. 너는 이미 홀로 존재하는 자다. -나는 외로운 자인가? -너는 인과에서 자유로운 자. 응보는 스스로 결정하는 자. 인과응보의 사슬 을 끊을 수도 얽매이는 것도 자유로운 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를 버려야 하겠지. -아니……. 그게……. -내가 없어야 진정한 자유. 그렇지 않는 가? ‘나’ 라혼은 꿈속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 언젠가 경전에서 읽 고 감명 받았던 내용과 똑같았다. “아내가 떠났다는 것으로 깨달음을 얻을 줄이야. 하하하, 재미있군.” 라혼은 진리란 언제나 가깝고 원래 알고 있던 곳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기며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탈로스(Talos) *** 프린든 왕국의 수도 솔드란. 국왕이 머무는 궁성의 넓은 홀에 귀족들과 이 름 있는 기사들이 중무장을 한 채 모여 있었다. 프린든의 국왕 슘터 파브릭 스 바란 안 프린든 또한 명장이 만든 풀 플레이트 아머를 착용한 채 앞으로 나섰다. “드디어 때가 왔다.” “…….” “저 간악한 검은 공작에게 복수의 칼날을 휘두를 순 없게 되었지만 잃어버 린 영토를 회복하고 갤을 정복하는 일은 무엇보다 영광된 일이다.” “…….” “레곤 공작.” “예, 폐하.” 국왕의 부름을 받은 레곤은 단상에 올라 주위를 둘러본 후 왕에게 한쪽 무 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출전보고를 시작했다. “바이나 공국과 시오나 왕국이 포함된 우리 연합군은 이번 전쟁에 타이탄 30기, 키클로 70기, 기게스 100기에 500명의 기사, 총병력 25000명에 달하 는 대군을 투입하기로 했습니다. 폐하!” -우오오오오오~! 레곤 공작의 말이 끝나자 홀을 가득채운 기사들이 우레와 같은 함성 내질렀 다. 슘터 국왕은 손들은 들어 그들을 진정시킨 후 말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신성 시드그람 황제와 조약은 모두 파기한다. 또한 모 든 백성들에게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알려라!” “프린든 만세!” -프린든 만세~! 기사들과 귀족들은 궁성을 빠져나와 왕과 함께 진군을 시작했고, 각 가문의 전령들은 가문의 문장이 깃발을 휘말리며 자신들의 영지로 말을 달렸다. 이제 그들은 각자 가문으로 돌아가 가문이 소유한 탈로스와 병사들을 데리 고 미리 약속된 집결지로 모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솔드란 전역 에 국왕이 선전포고를 하였음을 천명하는 포고문이 읽혀졌다. -국왕폐하만세! -국왕폐하만세! 솔드란의 시민들은 국왕이 직접 이끄는 근위기사단과 중앙기사단의 행군하 는 큰 길로 나와 그들에게 환호를 보냈다. 전쟁에서 이기던 지던 상관없는 민중들이었지만 위풍당당한 왕의 모습은 절로 감탄할만한 것이었다. *** “이제 일어났니?” 세나데나는 만 하루를 꼬박 잠을 자던 아들에게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예, 어머니. 아버지는요?” “아직 도착하지 않으셨단다. 어제 오려고 했지만 조금 지체되어 전령을 보 내왔단다.” “그렇군요. 다행이네요. 마중을 나가지 못해 면목이 없었는데.” “애도, 그런데 괜찮은 거냐?” “괜찮을 리 있겠어요? 마누라가 아들을 데리고 도망갔는데…….” “…….” “그보다 배고픈데 뭐 먹을 만한 것 없어요?” 세나데나는 아들의 너스레에 자애로운 미소를 보여주고 손수 식사를 챙겨주 었다. 라혼은 어머니가 챙겨준 음식들을 모두 비우고 집무실로 사용하는 서 재로 들어섰다. 그러자 집사 셀랑드는 라혼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차 를 내고 전령이 왔음을 보고했다. “전하, 오늘 트라얀 공작전하와 하이슬란드 백작님이 오시기로 되었습니다 .” “알아. 어머니가 가르쳐줬어. 전령이 왔다지?” “그러셨군요. 만 하루 전 사실상 작은 마님이란 부르던 분이 사라져서 라혼의 기분이 그 다지 좋지 못할 것이란 생각에 집안은 개미새끼 기어가는 소리도 나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그러나 셀랑드가 느끼는 라혼의 태도는 평상시와 전혀 다를 바 없다고 느껴졌다. “어제 무슨 일은 없고?”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여러 손님들이 찾아왔다가 그냥 돌아간 것을 제 외하고는 말입니다. 그것도 블러드 경이 나서서 수습해 특기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라혼은 셀랑드에게 보고를 받고 아버지와 트라얀 공을 마중 나갈 준비를 했 다. 모두들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것을 느끼고 쓴웃음을 지었다. 라혼은 표면적으로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로 알려진 죠슈아와 메사리 프만을 데리고 아버지를 마중하기 위해 북문 밖으로 나섰다. “라혼, 도망간 그 계집애 어떻게 처리할거냐?” “그냥 놔둘 거야.” “너는 못 느끼겠지만 어제 하루 소문 엄청나다고, 어떤 사람은 네가 슬픔 에 못 이겨 자살했다고 하는 사람까지 있었어. 그 일이 내 귀에까지 들린 것을 보면 보통일이 아닌데?” 라혼은 메사리프의 말에 그란 사교계에서 자신의 신변에 대한 관심이 얼마 나 큰지 생각해내고 손으로 얼굴을 훑어 내렸다. 인간들 일에 관심 없는 레 드 드래곤 프리사메티까지 그것을 걱정할 정도면 일이 어떻게 소문났는지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라혼은 파티나 만찬회에 쫓아다니는 일은 하지 않았 지만 봄맞이 궁정무도회에 얼굴을 내밀어야 하는 상황이 마음에 걸렸다. 졸 지에 홀아비신세가 된 라혼의 입장에서 가장 힘든 일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 이다. “대장, 저기…….” 죠슈아가 가리킨 곳엔 십여기의 탈로스와 수십 명의 말을 탄 기사, 그리고 수백 명의 병사들이 줄지어 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라혼에게 특히나 반가운 것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하이슬란드 백작을 상징하는 문장이 그려 진 깃발이었다. *** 신성 시드그람 제국 유일의 소드 마스터가 그란으로 왔다. 제국 유일의 소 드 마스터라는 말은 이미 제국에서 가장 강한 기사라는 뜻이 되었다. 그리 고 그의 아들은 다음 대 황제가 될 프린스 그란이었고 그에게 검술을 배운 두 기사 죠슈아 차이저와 트라킨 네부카드 사이스의 무용의 뛰어남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또한 로카데 차이저 반 하이슬란드 백작은 10년전 프린든과 1년 전쟁 때부터 기사도의 수호자라 칭송되어 기사라면 누구나 한번쯤 만나고 싶어 하는 그런 존재였다. “아빠!” “오! 테이야. 몰라보게 예뻐졌구나.” “아버지.” “루나, 네가 벌써 시집을 가다니, 어렸을 적부터 트란킨을 그렇게 쫓아다 니더니 이제 정말 가는 구나.” “몰라요.” “하하하하하…….” 로카데가 지난 2년간 떨어져 지내던 딸들과 상봉을 하는 것을 보던 트라얀 공이 불쑥 끼어들었다. “허어, 이 할애비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구나.” “아니에요. 할아버지…….” 테이는 짐짓 토라진(?) 시늉을 하는 트라얀 공에게 다가가 볼에 입을 맞추 며 귀여운 표정을 지었다. 옆에서 그것을 본 라혼에게는 조금 두드러기가 돋아나는 장면이었지만 트라얀 공은 그런 테이가 귀여운지 너털웃음을 터트 렸다. “이거 횡재한 기분인걸. 껄껄껄껄…….” 트라얀 공와 가족들은 하이슬란드 집에서 이미 수년간 같이 생활했다. 특히 나 서글서글한 트라얀 공의 성품과 테이의 막내로써의 재능은 상성이 아주 잘 맞았다. “호호호, 그만들 하시고 여독부터 푸세요. 그리고 너희들도 그쯤하고 할아 버지와 아버지를 쉬게 하렴.” “세나, 나는 괜찮은데…….” “여보!” 세나데나는 남편과 숙부가 도착해 어수선해진 장내를 정리했다. 고작 여행 정도로 피곤해할 로카데나 트라얀이 아니었지만 집안에선 큰 마님인 뜻을 거역하진 않았다. “그래, 그래 엄마 말대로 조금 쉬었다 다시 보자구나.” 그리고 로카데와 세나데나 부부와 트라얀 공은 이층의 전망 좋은 베란다에 나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나, 라혼이 아내가 갓 태어난 아들을 데리고 집을 나갔다고 하던데 그 게 무슨 말이오?” “말 그대로에요.” “아니, 그게 정말이냐?” “예, 숙부.” “그럼 큰일이 아니냐? 그 여자야 그렇다 치더라도 아기는 차이저 가의 핏 줄인데……. 조치는 취했겠지?” “아니요. 라혼, 그 아이가 찾는 것을 포기했어요.” 세나데나의 말에 트라얀 공은 펄쩍뛰며 다그치듯 말했다. “라혼이 그러더라도 네가 나서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 아니냐?” “그렇지 않아도 제 나름대로 찾아보았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어요.” “세나, 내가 보기에 라혼은 평상시와 다름 없어보였는데 혹시 그 아이가 있는 곳을 알고서 그러는 것 아닐까?”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하지만 그 애 고집에 스스로 찾지 않겠다고 말한 이상 무슨 소릴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당신도 잘 알잖아요.” “하긴 내 아들이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 그 속을 알 수 없으니…….” “라혼에게는 말하지 말고 우리라도 그 아이를 찾아야 해요. 몇 번 안아주 지도 못한 손자데…….” 그렇게 부모님이 사라진 손자 때문에 걱정할 때 라혼은 동생으로 삼은 린과 팔라딘 그래험과 함께 있었다. “이따가 우리 아버지를 소개시켜주지.” “기대가 되는 군요. 전하의 부친께선 제국 제일의 기사시니…….” “그런데 대장, 진짜 레이나를 찾지 않을 거야?” “그 얘기는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마스터에게 아론은 손자야. 지금 백작부인께서 아무말 하지 않은 것은 대장의 기분 때문이라고 손자를 잃어버린 할머니의 심정도 생각해야지 않겠어?” 라혼은 죠슈아의 말에 가만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녀와 아론이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어.” “…….” “그러나 그녀는 이미 스스로 떠났다. 아론은 내 아들이기 이전에 그녀의 아들이기도 해.” 라혼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날 밤 꿈속에서 깨달음은 자신 스스로를 돌아보 게 했고 이전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이게 되었다. 여전히 레이나의 기운 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기운으로 찾을 수 없다면 다소 시간을 걸리겠지만 지혜로 찾으면 그뿐이다. 어차피 레이나의 능력이나 주변 여건 등을 고려해 보면 그녀를 찾아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어서 데려와야지!” “찾아 데려오면? 그녀를 가둬둘까? 아니면 그녀의 품에서 그녀의 아기를 빼앗을까?” “아론은 대장의 아들이야. 마스터의 손자고 차이저 가의 자손이잖아.” “그녀를 찾아낸다고 해도 문제의 본질은 전혀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일 바 에야. 자유롭게 풀어두는 것이 나!” “그렇습니다. 죠슈아 경, 아무리 시간이 흐른다고 한다 해도 아론이 전하 의 아들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메이지 레이나 양은 또한 지 혜로운 여자니까 아들을 잘 가르칠 겁니다. 차이저 가가 기사의 가문이지만 마법사 한명 정도는 배출돼도 상관없지 않습니까?” 죠슈아는 레이나가 마법을 시전하는 것을 한 번도 본적이 없지만 그녀가 마 법사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팔라딘 그래험 경의 말처럼 제국의 신흥 유력가문으로 떠오르는 차이저 가에 마법사가 배출 되는 것도 괜찮을 것이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맞아.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그렇게 말하면 되겠군. 그 젊은 나이에 4서클 익스퍼트니까. 그걸로 밀고 나가야겠어.” “대장!” 린은 함께 있으면서도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것에 조금 답답했다. 그리고 의형으로 모신 라혼을 그 수하인 듯한 자가 뭔가를 따지고, 한쪽에 선 그들이 뭘 하든 관심 없다는 듯한 태도의 강렬한 인상을 가진 붉은 머리 의 미남자의 태도 또한 놀라웠다. 아무리 친한 주종이지만 한나라를 이끌 수장이 될 자를 보필하는 자들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막돼먹은 법도를 가진 양인들이지만 자신들의 주군이고, 황태자의 신분이거늘 이토록 예의가 없다니……. 이것이 이들의 예법인가?’ 린은 그나마 검은 피부에 은발의 사내가 그나마 제일 마음에 들었다. 그리 고 그 또한 왕자의 신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은근히 호감이 갔다. “전하, 나이트 제이브러스가 찾아왔습니다.” “제브가? 이리로 안내해줘.” 그리고 몇 분후 선이 굵어졌지만 아직까지 남아있는 제브가 특유의 장난기 어린 미소를 하고 서재로 들어왔다. “제브!” “라혼! 죠슈아!” “언제 왔어?” “지금 막! 차이저, 아니지 하이슬란드 백작님이 오셨다며?” 라혼은 오랜 친구를 반갑게 맞이하며 그가 모르는 세 사람을 소개 했다. “여기 빨갱이가 메사리프 세나데온 발, 검은 얼굴의 친구가 그래험 멜다자 지훈, 그리고 이쪽이 동방의 용호린이야. 죠슈아 차이저경은 알지?” “반갑습니다. 사이스 기사단의 제이브러스 네부카드 아담스입니다.” “반갑습니다.” 제브는 오늘 처음 본 그들을 보면서 내심 감탄했다. 하나같이 개성이 넘치 고 강력한 인상의 사내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제브가 그들과 인사할 때 집사 셀랑드가 콘라드 네부카드 사이스 남작과 새 신랑인 트라킨 네부카드 사이스가 도착했음을 알려왔다. 라혼은 모두를 데리고 응접실로 나갔다. “오오~! 라혼!” “어서 오십시오. 콘라드 남작님.” 응접실에는 콘라드 경과 트라킨, 그 가족 밖에 없었다. 아마도 현재 라혼이 이 집의 주인임으로 집사인 셀랑드가 자신에게 먼저 알린 모양이었다. 라 혼이 콘라드 경과 트라킨을 반갑게 인사를 나눌 무렵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 고 트라얀 공이 응접실로 들어섰다. “이 친구야!” “하하하, 신수가 훤하군?” “하하하 그런가?” “스승님.” “그래. 트라킨 이제 네가 내 사위가 되는 구나.” “그런데 내 며늘아기는 어디 있나?” “어허! 아직은 아니야. 시아버지 대접은 나중에 받으라고…….” 오랜만에 친구의 얼굴을 본 로카데는 근심을 잊은 듯 큰소리로 웃었다. 그 리고 문득 예사롭지 않은 기세의 사내들을 느낀 로카데는 아들에게 물었다. “라혼, 그들은 누구냐?” “예, 아버지에게 소개시키기 위해 불렀습니다. 제 동지들입니다.” 라혼은 메사리프, 그래험, 린을 소개했다. 로카데는 그들이 하나같이 쉽게 볼 수 없는 강자라는 것을 깨닫고 새삼스런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특 히나 1년도 전에 팔라딘으로 유명한 그래험을 꺾었다는 아들의 실력이 무척 이나 궁금했다. 겉보기엔 4년 만에 보는 아들은 그 기세가 변함없었기 때문 이었다. ‘이 녀석 예전에 나를 훨씬 초월했었군. 벌써 라혼씨의 경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인가?’ 로카데는 소드 마스터가 되고나서도 수련을 멈추지 않았다. 최강에 기사라 는 명성을 얻고 있는 가운데 자만에 빠지지 않은 이유는 젊은 날 최고의 경 지를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소드 마그누스의 힘 일순간 공간을 장악하고 공 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부수는 것이 아닌 소멸시키는 그 충격적인 장면은 아직까지 생생히 기억하고 그려낼 수 있었다. “자네 아들 정말 대단하군. 나라면 하나같이 머리에 이고 다닐 만큼 대단 한 기사들을 하나도 아니고 4명씩이나 옆에 두고 있으니 말일세.”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리고 네 명이 아니라 다섯 명이네.” “다섯? 제브도?” “아뇨. 저는…….” 로카데의 다섯이란 말에 콘라드 경은 라혼 옆에 있는 제브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제브 손사래를 치며 그것을 부정했다. “설마, 내 귀한 딸을 공짜로 데려갈 셈이었나?” “……?” “아버지 말이 맞습니다. 매형이 처남을 도와야죠.” “부자가 똑같구먼. 내 아들 하나 있는 것을 부려먹으려 들다니…….” 그렇게 북풍의 기사 트라킨은 이그라혼의 5번째 기사가 되었다. ------------------------------------------ 탈로스(Talos) *** 위대한 도시의 왕. 제도 그란의 치부였던 파이스 포인트는 단 1년 8개월 만 에 포룸으로 거듭났다. 포룸(forum)은 도시 광장을 뜻하는 것으로 공공 건 축물에 둘러싸여 있는 공간을 말했다. 집회장이나 시장으로도 사용되며 주 변에 신전, 회당, 도서관, 학원, 목욕탕 등과 함께 도시 기능의 중심시설 형성된 곳이다. 광장에 면해서 주랑이 둘려지고, 중심부에는 보통 분수나 전승기념비 등이 세워지게 되는데 지금은 그곳에 분수가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 시설 전체를 포룸이라 지칭하며, 그란에는 가축전용, 야채전용의 포룸 등 전적으로 시장으로써 사용되는 포룸도 있다. 이제 파이스 포이트 거리는 ‘포룸 마그나’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고 특히 ‘바실리카 세나데온’은 그 규모가 엄청났다. 바실리카(basilica)는 공공 건물의 꽃으로 보통 직사각형 평면의 건축물인데 법정이나 상업거래소, 집 회장, 투표장, 때로는 왕궁이나 공공관서로도 사용되는 건물이었다. 말하자 면 라혼은 바실리카 세나데온을 파이스 포인트 포룸에 둠으로써 황제가 되 겠다는 의지를 돌려 표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바실리카에서 큰 누이인 세나루나의 결혼식이 열리게 된다. “포룸 마그나, 대광장이라 급하게 만든 티가 보이는군.” 사이스 백작은 사위가, 아니 이제 사위였던 자가 만든 포룸을 보고 그렇게 평했다. 잘 포장된 바닥과 굵은 대리석 기둥이 연이어진 주랑 등 한눈에 보 기에도 시원하고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하는 포룸이었지만 기둥과 벽면이 아 무런 장식도 되어있지 않아 다소 황량한 느낌을 주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백작님. 하지만 비어있는 벽면은 곧 부조와 조각으로 채워지고 우리가 걷는 이 길은 영웅들의 상이 세워져 영웅의 길이 될 거라 고 하더군요.” “흐음~! 그거 흥미롭군. 그럼 첫 번째 조각석상은 라혼 자작의 것이 되는 건가?” “글쎄요? 첫 번째는 힘들지만 그 또한 이곳에 자신의 석상을 남겨두기를 원할 테죠.” “그런가?” 에게너 네부카드 사이스 백작의 숙부가 되는 마이얀 네부카드 사이스를 모 시는 기사 슈트앙은 백작에게 다크 프린스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포룸으로 안내했다. 정식개장은 하지 않았지만 포룸으로 들어오는 시민들을 막지는 않았다. 다만 수레나 말, 소 같은 것만 통제했을 뿐이었다. “다크 프린스는 이곳을 관리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고용했습니다. 경비 병에 청소부 등을 말입니다. 게다가 포룸은 지하에도 있습니다.” “지하에도?” “옛 시드그람 제국의 하수도였던 공간을 보수해서 제법규모가 대단한 지하 회랑을 만들었는데 지금은 거의 비어있습니다. 뭐 앞으로 상회나 은행들 그리고 시장이 설 것이라 하더군요. 그리고 레일을 깔아 그 위로 열차가 지 날 수 있게 했는데 수레나 짐말들을 통제하는 대신 그것으로 물건들을 실어 나르는 거죠.” 슈트앙이 사이스 백작에게 다크 프린스가 건설한 포룸을 보여주고 설명을 하는 이유는 그가 오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대부분 제국의 지방 대 영주들은 그란의 실제적인 힘을 우습게 아는 경향이 있었고 사이스 백작은 그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유벤트 기사단 출신이면서도 그란의 3공작 가문을 단순히 평민들과 밥그릇 싸움만 하는 한심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 러나 그란에서 부유한 평민들의 힘은 지방 대영주 귀족들이 인정하든 인정 하지 않던 알게 모르게 영향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 평민들의 대변자가 바 로 프린스 그란 라혼 가이우스 세나데온 차이저 자작이며 그란의 보석 ‘다 크 프린스’였다. 그러나 때때로 짓궂은 장난을 좋아하는 운명의 여신은 원 래 의도하지 않은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다. “이곳이 바실리카 세나데온입니다. 조카이신 트라킨 경과 다크 프린스의 큰 누이인 세나루나양의 결혼식이 열리기로 약속된 곳이지요.” “…….” 바실리카 세나데온은 정면에 회랑풍의 앞뜰 아토리움을 갖추고, 당 안에는 정면 입구로부터 차례로 전실 나르테크스, 열주로 구분된 네이브(nave, 본 당)와 중앙의 폭넓은 본당을 끼고 좌우로 각각 2열의 회랑 아일(aisle, 측 랑)로 된 회당부, 좌우로 내민 날개식 복도인 트란세프트를 거쳐, 내당의 제단 뒤에 튀어나온 원형 평면과 반원개로 된 앱스(apse)로 끝난다. 본당 양쪽의 열주와 아케이드로 지탱된 본당 측벽의 상부에는 채광용 고창이 줄 지어 있어 그곳을 통해 비쳐진 빛은 내부를 어둡지 않게 만들었다. 그리고 곳곳에 드래곤, 엘프, 드워프, 페어리, 오크, 인간, 왕, 기사, 농민, 신과 마왕 등 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부조와 조각, 그리고 아직도 마무 리 작업이 한창인 벽화 등은 내부 공간을 하나의 세계로 만들고 있었다. “포룸 전체를 장식할 것들이 모두 여기에 모여 있군. 대단해…….” 사이스 백작은 진정 순수하게 감탄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들 에 정신이 팔려 여기걸음을 옮기는 도중 사고가 일어났다. -콰창~! “헉!” 부조나 조각상은 규격에 맞춰 미리 제작이 가능 했지만 벽화는 그러지 못했 다. 벽화는 건물이 완공되고 나서야 시작할 수 있었고 사흘 후 결혼식까지 기본적인 마무리를 하기 위해 예술가들이 피 말리는 시간과의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뜩이나 바쁜 와중에 누군가 물감통을 엎지르자 누군지도 확인하지 않고 소릴 질렀다. “어떤 저주받을 놈이야!” 그림을 그리는데 열중하던 사내는 누군지 모를 상대에게 버럭 소릴 지르며 물감을 가득 머금은 붓을 집어던졌다. 그리고 붉은 색 선명한 물감을 머금 은 붓은 물감통을 엎지른 장본인의 얼굴에 정확하게 부딪쳤다. “이, 이런!” “백작님!” “저, 저놈을 당장 잡아!” “옛!” 봉변을 당한 사이스 백작은 눈에 물감이 들어가 고통스러워하며 자신에게 붓을 던진 자를 잡으라 명령했다. 그리고 눈에 들어간 물감을 씻기 위한 물 을 구하기 위해 사이스 기사단의 기사들은 온 바실리카를 소란스럽게 만들 었다. “감히 귀족을 시해하려 하다니…….” 독한 물감이 눈에 들어가고 점성이 강한 벽화용 물감이 얼굴에 묻은 사이스 백작은 붉게 충혈 된 눈으로 자신에게 붓을 던진 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시해라니요. 그것은 사고였습니다.” “뻔뻔한……. 네가 내게 붓을 던진 것을 여기 있는 모두가 보았다.” “그런…….” “그놈을 끌고가 중앙광장에서 목을 매달아라! 죄목은 귀족을 시해하려한 죄다.” 불같이 노한 사이스 백작의 명령에 기사들은 사내를 끌고 바실리카 밖으로 나섰다. 그때 누군가 그들을 저지하며 나섰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너는 누구냐?” “파이스 포인트 보안관 데이몬드요.” 사이스 백작은 그가 성을 말하지 않은 것을 보아 평민임을 짐작하고 거만하 게 말했다. “이놈이 날 시해하려했다. 그래서 내가 가진 직권으로 놈을 처벌하려한다. ” “무슨 죄를 어떻게 지었는지 모르지만 이곳에서 발생한 모든 일은 내 소관 입니다. 그러니 물러나 주십시오.” “데, 데이몬드씨 그것은 실수였습니다. 붓을 던진 것뿐인데 우연히 이분의 얼굴에 맞은 거라고요.” “시끄럽다. 당신도 비켜라! 이놈은 내가 직접 처벌하겠다.” 데이몬드는 호위기사까지 거느리고 있는 상대에게 더 이상 세게 나가지 않 고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 “그럼 관계가 없는 제3자에게 재판을 받게 해야 합니다. 그에게도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지 않습니까?” “앤트, 이 건방진 자를 내 눈앞에서 치워라!” “예, 백작님.” “사이스 백작님, 그는 다크 프린스의 심복입니다. 그렇게 함부로 하실 상 대가 아닙니다. 그리고 곧 성사가 열릴 장소에서 소란을 피우는 것은 보기 에도 좋지 않습니다. 그는 이곳의 치안을 책임지는 보안관이니 그자의 신변 을 넘기십시오.” “시끄럽다. 라혼 자작은 내 사위고 그 아비는 내 신하다.그의 이름을 들먹 여 봤자 소용없다.”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나있는 사이스 백작은 이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반면 에 소란을 일으킨 상대가 뜻밖의 거물인 것을 확인한 데이몬드는 표정에 난 색이 어렸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제 막 완공된 포룸의 첫 번째 행사를 사람 목을 매다는 것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정황을 보건대 지금 백작이란 작자 에게 붙들려있는 자는 죽을죄를 지은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민중파로 알려진 다크 프린스의 장인이란 작자가 재판도 없이 시민을 매달았다는 말 이 퍼지면 자기 스스로에게도 이롭지 못했다. ‘어떻게 해서든 이 경우 없는 작자에게 저 사람부터 구해야 하겠군. 빌어 먹을 하필 저런 생각 없는 작자를 장인으로 둘 건 또 뭐야.’ 데이몬드는 결정을 내리고 부하들에게 신호를 보내 사람들을 모으라 지시하 고 시간을 끌기 위해 사이스 백작에게 말을 건넸다. “아! 사이스 백작님이셨군요. 사흘 후면 이곳에서 조카분의 결혼식이 열리 는데 불상사가 있어서 되겠습니까? 누가 보면 그 결혼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아 일을 만드는 것으로 보겠습니다.” “뭐야? 이 천한 놈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저도 압니다. 그자가 백작님을 몰라보고 실수를 한 모양인데 너그럽게 용서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한창 바쁜 사람들이 이일 로 일손을 놓고 있는데 조카분의 결혼식 준비가 늦어지게 해서 백작님이 좋 을 것이 없지 않습니까?” 유들유들한 태도의 듣고 생각해보면 사람의 성질을 긁어대는 말에 사이스 백작은 이성을 상실한 지경이었다. 그때 나이트 슈트앙이 그에게 다가가 조 용히 말했다. “백작님, 보십시오.” “뭘…?!” 사이스 백작은 어느새 바실리카 세나데온 내부를 가득 채운 사람들이 적의 를 가지고 자신을 바라보자 뜨겁게 달아올랐던 머리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 꼈다. 적의를 가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은 그것 자체로 공포일 수 밖에 없었다. 사이스 백작의 곁엔 호위기사가 4명이나 있지만 여기 있는 이 들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목숨이야 부지할 수는 있겠지만 불상사가 발생하 고 그 책임을 고려해 볼 때 가뜩이나 가문의 노가신들이 자신을 탐탁하게 보지 않고 콘라드에게 호감을 보이는 상황에서 이일로 일이 복잡해질 수 있 었다. 그렇게 상대가 모여든 사람들을 보고 기가 꺾인 것을 확인한 데이몬드는 돌 연 태도를 바꿔 사람들로부터 그를 보호하는 시늉을 했다. “뭐냐? 대원들은 백작님을 보호해라. 백작님 저희가 길을 만들 테니 일단 이곳을 벗어나 주십시오. 사람들이 심상치 않습니다.” “…….” 그리고 지금 사이스 백작의 머릿속엔 자신의 얼굴에 붓을 던진 사내는 없었 다. 지금 데이몬드가 써먹은 이 방법은 파이스 포인트 사창가에서 소란을 피우는 귀족 뼈다귀를 상대할 때 종종 사용해왔던 수법이었다. 상대를 살살 부아를 돋게 해서 주위를 돌린 후 은밀히 모은 사람들로 하여금 상대를 압 박하는 것이었다. 자고로 몸 파는 창녀일망정 여자에게 행패부리는 족속은 뒤끝이 지저분하기 마련이라 위협을 당했어도 그것이 불특정 다수라면 누군 가에게 원한을 갖는 경우도 별로 없고 그 때를 맞춰 이런 식으로 태도를 바 꿔 도와주는 척하면 원한도 사지 않고 귀찮은 상대를 쫓아 보내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 “사이스 백작이?” “예, 전하.” 라혼은 블러드를 통해 낮에 사이스 백작이 일으킨 해프닝에 대해서 보고 받 고는 중얼거렸다. “그 양반 아주 작심한 모양이군. 완전히 동생하고 갈라서서 좋을 것이 뭐 가 있다고.” 그랬다. 아무리 경솔하다는 평가를 듣는 사이스 백작이지만 거기서 그런 일 을 벌인 것을 볼때 미리 생각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거기서 사람을 재판도 없이 처형하면 그 죄는 사위인 라혼이 뒤집어쓰게 되어있었 다. “조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그 일의 배후엔 지방의 대영주들이 있을 겁니다. 그들은 강력한 황제가 나타나는 것을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으니까 말입 니다.” “그런 것 같군.” 라혼의 입장에서 사이스 가에 바라는 것은 정치력 정도였다. 그리고 사이스 가의 정치력은 콘라드 남작이었다. 사이스 백작에게 바라는 것이라면 군사 적 협력 정도지만 그것도 지금에서는 그다지 큰 의의가 없었다. 그것은 사 이스 백작도 감지하고 있을 것이고 사위와 장인이란 관계도 사실상 끝났기 에 그런 일을 서슴없이 벌인 것이리라. 라혼은 사이스 백작의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라혼 에게는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린든 왕국이 바이나 공국, 시오나 왕국과 연합하여 잃어버린 영토를 수복하고 혼란스러운 갤을 정복하 겠다고 선언한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블러드는 이미 프린든 왕국과 가칭 왕국연합군의 동향을 빠짐없이 거의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 리고 라혼이 출정해서 노려야할 첫 번째 목표도 이미 정해둔 상태였다. “진격하는 속도가 한심하군. 벌써 일주일전에 솔드란에서 출정한 슘터 왕 이 아직도 자국 영토조차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니…….” “프린든 왕국군의 집결지는 예상했던 대로 사우스포트 근처의 델커드같습 니다.” “어떻게 될 것 같은데?” 라혼의 물음에 블러드는 곧바로 대답했다. “슘터왕이라면 대부분 집결이 완료된 상태에서 사우스포트에 입성할 겁니 다. 하지만 래곤 공작이라면 일단 사우스포트를 장악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둘 테니 누구 의견이 관철되는 가에 따라 시간이 차이날 겁니다.” 도시를 장악하는 데에는 보병전력이 필수적이었다. 시민들을 통제하고 치안 을 확립해야 비로소 도시가 기능하기 때문이었다. 만일 무턱대고 탈로스만 으로 밀고 들어가면 도시는 자체적인 약탈과 방화가 발생하고 치안이 엉망 이 될 것이 뻔했다. 지금 사우스포트의 경우 1년전쟁 이전까지 프린든 왕국 의 영토였기에 친 프린든 세력이 존재했다. 최근 제국과의 무역으로 급성장 한 친 제국세력도 공존했지만 그들은 이익에 따라 언제든 태도를 달리하는 믿을 수 없는 세력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점을 프린든 국왕 슘터는 알지 못 했다. 그는 정치가나 전략가라기보다 기사였기 때문이다. “휴우~! 루나 누나에게 미안하네. 결혼하자마자 남편을 전장으로 보내는 아내가 될 신세니…….” 레기온 기사단은 귀족원의 결의에 의해서만 움직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레기온은 라혼의 절대적인 지배력 하에 있는 군사력이었다. 이제껏 계속 밀리기만 한 귀족원이 미리 움직이겠다는 라혼의 뜻을 받아줄리 없었 다. 그래서 라혼이 생각한 것이 자신이 가진 첩보력-유니온에 의한-을 공개 하지 않고 제국이 가지고 있는 자체 정보력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전쟁의 기술(Art of war) *** 드디어 그란의 봄 축제가 시작되었다. 올해에는 그전과 다른 특별한 이벤트 가 많이 계획되어 있었는데 시민들은 만날 때마다 그것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웠다. “다크 프린스가 올해 축제에 금화 1만을 내놓았다고 하던군.” “캬! 손 큰 것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그게 다 자기 큰누나 결혼식 비용이잖아.” “따지기는……. 이보라고, 그 돈은 대부분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들에게 음 식을 대접하기위해 책정된 금액이야. 그리고 하객들이라는 것이 포룸 마그 나에 참관한 ‘모든’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결국 우리가 먹을 음식들을 마 련하기 위해 지불된 비용이란 말이야.” “그게 그거지.” “아무튼 통이 화통하게 크단 말이야.” 한달에 이르는 축제를 시작하는 첫번째 행사인 퍼레이드를 구경하기 위해 미리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 었다. “아! 정말 로맨틱하지 않니. 이 봄 축제를 시작하는 날 그란의 모든 사람 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결혼식이라니…….” “맞아! 맞아! 새로 지어진 거리의 새로 만든 건물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다 니 정말 축복받는 신부일거야.” “그런데 다크 프린스는 조금 안됐어. 부인이 갓 낳은 아들을 데리고 사라 졌다지?” “부인? 내가 듣기론 애인이라던데?” “다크 프린스가 정식으로 청혼해서 이미 아내나 다름없다고 들었거든?” “그럼 지금 있는 아내는?” “로즈 아카데미에 다니는 친구가 그러는데 다크 프린스가 그란으로 올 때 이미 이혼한 상태였다나 봐.” “정말? 그런데 왜 숨긴 거래?” “숨긴 것이 아니라, 말을 하지 않은 거겠지. 그게 뭐 좋은 일이라고 떠벌 이겠어.” “그럼 지금 다크 프린스는 혼자란 말이잖아.” “왜? 노려보려고?” “그러~엄! 나정도면 훌륭하지.” “웬일이니~!” 소녀들이 수다를 떠는 사이 저 멀리서 환호성이 점점 크게 울려왔다. 드디 어 축제의 첫번째 행사인 퍼레이드가 시작된 모양이었다. -와아~! 봄의 여왕을 상징하는 꽃으로 장식된 화려한 마차와 그 마차를 호위하는 젊 은 기사. 신성 시드그람 제국 모든 귀족 가문의 문장이 그려진 깃발을 든 기수. 그리고 그 뒤를 임페리얼 챔피언십 토너먼트에 참가하는 대륙전역에 서 초청된 챔피언들이 행진했다. -와아~! 그리고 올해 퍼레이드에 추가된 레기온 기사단과 기병대 그리고 레기온이 보유한 검게 도색되어 위압감을 풍기는 12기의 탈로스가 행진하자 시민들은 더욱 큰 환호를 보냈다. “멋있다.” “그래, 정말 기대된다. 탈로스끼리의 전투를 직접 보게 될 줄이야.” 올해 토너먼트 식전행사로 레기온의 사열과 탈로스를 동원한 모의 전투가 계획되어 있었다. 축제 때에 행진하는 모습만 겨우 구경할 수 있는 탈로스 가 모의전투지만 실제로 움직이며 싸우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기대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 저건 뭐지?” “다크 프린스다!” “정말!” -우와~! -다크 프린스! 다크 프린스! 다크 프린스! 황금과 백금, 그리고 선명한 파란색의 청금석으로 장식된 화려한 갑주 차림 의 다크 프린스와 다부진 체격에 은빛 갑주를 차례입고 은실로 수놓아진 망 토를 두른 기사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행진했다. 그리고 잡티하나 섞이지 않은 네 마리의 하얀 말이 끄는 우윳빛 유리로 장식된 순백의 마차가 기사 들의 호위를 받으며 그 뒤를 이었다. 선명한 붉은 갑옷에 타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의 기사와 이국적인 용모에 비 늘갑옷 차림의 동방기사, 투박한 갑옷이 너무 잘 어울리는, 지금이라도 당 장 전장에 나서도 될 것 같은 거구의 기사, 그리고 황금빛 갑주를 입은 검 은 피부에 은발머리 기사, 이렇게 4명의 기사가 마차를 호위했다. 오늘 결혼할 신부가 타고 있는 마차가 모습을 보이자 사람들은 축복을 상징 하는 쌀과 꽃을 던지며 그들의 결혼을 축복해주었다. *** 퍼레이드가 끝나고 포룸 마그나에 도착한 신랑과 신부는 바실리카 세나데온 의 회당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회당 안에는 거리의 번잡함을 피한 그란의 유력귀족들과 콘레로3세 황제가 자리해있었다. 태양신 아폴론의 사제가 주 례를 맡아 성사를 집전했고 신랑과 신부는 스테인드글라스에 투과되어 환상 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빛 무리를 배경으로 키스로써 부부가 되었음을 만 인 앞에서 증명했다. “이로써 이들이 부부가 되었음을 아폴론의 이름으로 선언합니다.” -짝짝짝짝짝짝짝……………………. 사제의 선언에 회당안의 사람들은 박수로써 그들의 앞날을 축복했고, 갑주 차림의 기사들은 검을 뽑아들고 터널을 만들었다. -와아! 부부가 된 신랑과 신부가 바실리카 세나데온 밖으로 나서자 회당 안으로 들 어가지 못한 그란의 시민들이 그 모습을 보고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포룸 마그나 중심부에 마련된 거대한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환호에 신 혼부부는 조금 당황했지만 곧 미소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들어 그들에 게 답례하고 마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파이스 포인트 거리 전체에서 일 제히 시민들을 대접하기 위한 요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오늘을 위 해 몇 달 전부터 수백 명의 요리사들이 동원돼 갖가지 요리들이 만들어졌고 , 지금 이 순간에도 만들어지고 있었다. 기둥과 기둥사이에 자리를 잡은 요 리사가 갖가지 음식들을 시민들에게 내놓았다. “우아~! 이거 내가 죽어서 천국에 온 것 아닐까?” “맞아. 여긴 천국이야.” 수만 명의 시민들에게 나누어지는 광경은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음식을 나 누어주는 사람도, 그 음식을 받는 사람도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기 때문이었 다. 한쪽에선 수십 마리 소와 돼지, 그리고 닭 수천 마리가 통째로 구워졌 다. 거대한 솥에선 맛좋은 스프가 끓고, 수천통의 맥주와 포도주가 나누어 졌다. 산처럼 쌓인 빵과 신선한 과일, 새로 집을 얻은 파이스 포인트 주민 들이 솜씨를 부린 호박파이, 사과파이, 양배추파이, 감자샐러드, 담백한 밀 죽 등이 선보여졌다. 조금씩 맛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러 더 이상 먹을 수 없다는 것이 저주스 러울 정도로 호화로운 만찬이었다. “참으로 대단하군. 그란의 축제를 자기 누이 결혼식 여흥으로 만들다니… ….” “제가 보기엔 자기가 만든 포룸 마그나를 자랑하는 행사 같습니다만?” “그것도 그렇지. 행사의 이유야 어찌되었든지 간에 이들이 이러한 만찬을 베푼 다크 프린스를 기억할 것이라는 거야. 올해를 다크 프린스가 축제를 연 해로 말이야.” 프린뱅크의 총수 제럴드는 가난했던 어린 시절 언제나 꿈꾸던 광경이 눈앞 에 펼쳐지자 그러한 광경을 만들어 낸 자의 역량에 감탄했다. 대중은 어리 석어서 꿈을 보여준 자를 무조건 믿고 따르는 속성이 있었다. 이제 늙어 가 슴 설레는 일이 별로 없는 제럴드조차도 그가 펼쳐 보이는 꿈만 같은 광경 에 마음이 들떴다. “도대체 탐탁지 않습니다. 이런데 그렇게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붓다니……. ” 제럴드는 랑스의 말에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차피 투자를 했으면 상대를 믿어야지. 내가 보기에 이것은 공돈 같지 않구나. 다크 프린스는 그 돈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는데 성공한 것 같으 니 말이다. 지금에 와서 느낀 거지만 장사는 돈을 버는 것이 아니더구나.” “예?” “장사는 신용이고, 신용을 얻으면 돈은 자연히 모이기 마련이다.” “그렇죠.” 랑스는 제럴드 총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장사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격언이었기 때문이었다. “신용이라는 것은 돈이 아니라 결국 사람이다. 주변에 신용 있는 사람을 많이 둔다는 것 자체가 성공했다는 것이지.” “예? 무슨 말씀이신지……?” “다크 프린스가 신용할 만 하다는 말이다. 그보다 우리도 먹자! 내가 장사 꾼이 된 이유는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기 위해서였는데 그 꿈을 지금에서야 이루게 되었구나.” 랑스는 프린뱅크의 지저분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 가끔 파이스 포인트의 갱 들을 이용하곤 했었다. 그때마다 느낀 것이지만 거리는 불결하고 어디선가 큰소리로 싸우는 소리가 아련히 들려오는 그곳이 무척이나 불쾌했다. 그러 나 지금 생에 다시는 못 볼 만찬회가 열리는 파이스 포인트, 아니 벌써 이 젠 포룸 마그나라는 이름이 더 익숙해진 거리는 그에게도 묘한 감회가 들게 했다. 배타적이고 적의에 찬 눈동자가 아닌 미소와 누구나 건배하는 거리 는 지금 이 순간 살아 생동감이 넘쳐났다. “다크 프린스에게 건배를~!” -다크 프린스에게 건배를~! 누군가 건배를 했고, 그들이 선창했다. 그리고 그 소리는 파리스 포인트 거 리 전역에 울려 퍼졌다. -다크 프린스에게 건배를~! *** 축제가 시작된 후 첫 번째 저녁, 신성 시드그람 제국 황제가 머무는 황금궁 전 ‘도무스 아레아’에서는 매년 궁정무도회가 개최되었다. 무도회야 매달 또는 매주 갖은 명목으로 개최되는 것이지만 축제가 시작하는 첫 번째 날 은 여러 가지로 특별했다. 일단 황제가 주관하는 무도회이고, 나이가 찬 귀 족처녀들이 첫 선을 보이는 날이기 때문이다. “허허허허…. 트라얀 공, 그러면 라혼 자작이 다크 듀크의 정식 후계자라 고 생각해도 좋소?” “그렇습니다. 폐하!” “그럼, 공의 부친이 가지고 있던 제국1인자 ‘프리켑스’의 칭호를 라혼 자작이 잇기엔 나이가 너무 젊지 않소?” “어차피 프리켑스, 제국1인자라는 칭호는 모두의 인정을 받아야하는 겁니 다. 라혼은 아직 어리지만 자신의 역량을 드러낼 기회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 그때 가서 모두가 인정하는 가운데 당당히 프리켑스가 되면 그뿐입니다. ” “흐음……. 처음 공이 처음 그를 소개했을 때부터 그러리라 짐작 했소만 역시 다크 듀크의 안목은 뛰어났소.” “그렇습니까? 하지만 돌아가신 아버님은 라혼을 여러 후보 중 하나로만 생 각하셨습니다. 저 또한 그리 생각했었습니다.” 콘레로3세는 한때 죽었다고 소문이 났었던 트라얀 공작의 태도에서 다크 프 린스, 그란의 보석이라고까지 불리는 라혼 가이우스 세나데온 차이저 자작 에 대한 경이감을 읽을 수 있었다. 사실 갤 공과 트라얀 공작이 다크 프린 스 라혼에게 해준 것은 존재를 알리는 정도였다. 갤 공의 수명을 다해 죽음 을 맞이하고 그의 죽음과 함께 콰이스 가가 몰락했을 때만해도 다크 프린스 라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제국 유일의 소드 마스터의 아들이면서도 이렇다 할 무용을 보여준 적도 없 고 황제 자신가 알기로도 고향으로 돌아갈 여비와 자신이 책임지기로 한 소 녀를 위해 말까지 팔았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가 차기 신성 시드그람 제국 황제로 내정되어 ‘프린스 그란’이란 지위를 얻은 것은 순전히 살아남은 트라얀 공작의 움직임을 제한하기 위한 그란 3공작의 정치적 술수였다. 프 린스 그란이란 지위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허울 좋은 칭호일 뿐이다. 그러나 그 후 다크 프린스의 행보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플래티움 아스카론이란 희대의 마법검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놓고, 그것 으로 화염의 기사로 통하는 메사리프의 충성을 얻어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자신의 기를 꺾으려는 레아모스 공작을 압도적인 무용과 배짱으로 제압하 는 무용을 보이는 가하면 건국하면서부터 신성 시드그람 제국과 대립해 긴 장관계에 놓여있던 길고마 제국의 왕자이며 시드그람 대륙에서도 이름 높은 팔라딘인 그래험를 실력으로 제압하고 그와 교분을 맺었다. 그것은 그란의 시민들이 볼 때 그란의 왕자가 길고마 제국 왕자보다 위에 있음을 증명하 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렇게 2년. 지금 그란의 보석 다크 프린스는 제국뿐만 아니라 전 대륙에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콘레로3세에게 ‘라혼은 갤 공의 후계자다’라는 트라얀 공작의 말은 무너져 버린 콰이스 가가 다크 프 린스에게 기대려는 모습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다크 프린스가 갤 공의 정식 후계자가 되면 혼란스런 갤 지역에 가장 큰 지분을 가지고 뛰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폐하! 시간이 되었습니다.” “벌써 그렇게나 되었나? 황후는 준비가 다 되었느냐?” “황후께옵서도 준비가 마무리 된 것으로 압니다.” “알았다. 황후가 준비가 끝나는 대로 다시 와서 알리라!” “그리하겠습니다. 폐하!” 시종장이 나가자 트라얀 공작은 황제에게 물었다. “어째서 여자들은 준비하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을 투자할까요?” “공도 궁금하오? 사실은 나도 그것이 무척 궁금하오.” “그렇습니까?” 그란을 떠나기 전까지 트라얀 공작은 황제와 손을 잡고 있었다. 갤 공이 프 리켑스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었지만 제국에서 볼 때 신참자에 근거지인 갤 은 북쪽의 변방이고 또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제국1인자라는 칭호가 무색했다. 그런 입장에서 황제와 갤 공은 죽이 잘 맞는 동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한때 트라얀 공을 다음 황제로 하자는 움직임이 나왔을 때 콘레로3 세 황제는 오히려 그것을 환영했다. 그리고 지금 황제에게 트라얀 공작은 몇 안 되는 친구중 하나였다. 전쟁의 기술(Art of war) *** 올해 궁정무도회는 어느 해보다도 화제가 만발했다. 제국 유일의 소드 마스 터이며 최강의 기사인 로카데 차이저 반 하이슬란드 백작이 참석했고, 또한 황제의 배려로 오늘 결혼한 부부의 결혼피로연을 겸한 무도회였기 때문이 었다. 게다가 특별한손님으로 동방의 황태자가 참석했으며 작년엔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팔라딘 그래험이 자리를 빛냈다. 즉 다크 프린스를 포함해서 왕자라고 불릴만한 존재가 3명이나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나이트 메사리 프와 나이트 죠슈아 그리고 임페리얼 챔피언십 토너먼트의 참가자 등 이미 그 무와 용기가 증명된 기사들도 많이 참석했다. 거기에 콘라드 남작과 같 은 정치적 영향력이 있는 귀족들과 포룸 마그나의 정식 개장 및 하이슬란드 백작의 딸과 콘라드 남작의 장자의 결혼식에 참가한 제국의 실세 유력자들 도 자리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을 따라나선 각 가문의 자손들도 대거 참석 하고 있었기에 규모면에서나 질적인 면에서나 그전의 궁정무도회와는 달랐 다. “와우! 작년과는 하늘과 땅 차이네. 올해는 수준이 무지하게 높아.” “테이누나 좀 얌전하면 안 될까? 가뜩이나 주목 받고 있는데…….” “아유! 불쌍한 내 동생아. 내가 그렇게 생각이 없는 줄 알아? 어차피 멀리 떨어져 있어서 내가 무슨 말하는 지 어떻게 알겠어?” 라혼은 살짝 미소까지 지으며 말하는 내용과 표정이 다른 쌍둥이 누이의 태 도에 고개를 저었다. 테이의 말대로 지금 라혼의 주위에 포진한 죠슈아, 메 사리프, 그래험, 린들 때문에 감히 접근하려는 자들이 없었다. 다만 멀리서 알게 모르게 주목만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누나의 실체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본성을 숨기지 않으시겠다고?” “라혼, 너 말이 ‘무척’ 이상하다.” “어머나, 너희는 붙어있으면 싸우는 구나.” “어서와! 쉬포니아! 그 드레스 너무 예쁘다. 쉬포니아의 초록색 눈동자랑 너무 잘 어울려.” “그러니? 고마워. 네 하늘색 드레스도 무척 잘 어울려.” “오랜만이네. 쉬포니아.” “그래, 오랜만이야.” 화려한 미남 왕자군단이 몰려있는 곳에 최초로 접근한 여자는 쉬포니아였다 . 라혼과 레이나의 관계가 밝혀지고 그녀가 임신한 이후로 의식적으로 라혼 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자제하던 그녀였지만 테이하고는 자주 교류했다. “소식은 들었어. 여기서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뭐할지 모르지만 어떻게 된 거야? 이건 친구로서 묻는 말이야!” “레이나가 내 아들을 데리고 사라졌어. 그게 전부야!” “정말?” 라혼은 언제나 거침없는 쉬포니아를 바라보며 오히려 되물었다. “그런데 그 가슴 아픈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뭐야?” “혹시 모르는 거니?” “뭘?” “네, 전 아내가 여기에 있어.” “아아, 카시아 말이군. 그거라면 알고 있었어. 하지만 둘러봐도 보이지 않 더군.” “아휴! 너는 알면 알수록 불가사의다. 거북하지도 않니?” “그건 사실이지만……. 그보다 크리프 선배에게 청혼 받았다며?” “어, 그거? 어떻게 알았어?” 쉬포니아는 라혼의 갑작스런 물음에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레기온 기갑사령관이 야펀 선배잖아.” 야펀과 크리프는 유벤트 기사단의 동기로 서로 매우 친한 사이였다. “난데없이 유벤츠의 전통을 무시했다며 화내며 찾아 왔을 때부터 알아봤지 . 크리프 선배가 네게 관심이 무척 많다는 것을…. 하긴 그 덕분에 우리가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지만…….” “그보다 소개시켜주지 않을 거야?” “그렇군. 서로 인사들 해 린, 쉬포니아.” 라혼은 쉬포니아의 말에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하며 린을 소개시켜주었다. 린 과 쉬포니아가 서로 인사를 나눌 무렵 팡파르가 울리며 황제의 출현을 예고 했다. ―빵빠바방～빠, 방빠 바～! “신성 시드그람 제국 황제! 콘레로 3세 폐하와 린세시아 황후이십니다.” 초대받은 손님이 들어오는 문이 아닌 황금 궁전 안쪽의 문이 열리면서 팡파 르와 함께 콘레로 3세 황제와 린세시아 황후가 홀의 안쪽 문을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무도회장에서는 열렬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짝짝짝짝짝짝짝…………. 호명되지는 않았지만 검은 머리에 강인한 인상의 트라얀 공작도 황제 내외 보다 한 발 뒤에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황제가 앞으로 나서자 이내 박수가 잦아들었다. “오늘 결혼한 젊은이에게 다시 한 번 축하의 말을 전하고, 여러분 모두를 환영합니다. 또한 오늘 첫 선을 보일 그녀들에게도 오늘 결혼식을 올린 그 들처럼 앞날에 축복이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황제가 무도회의 시작을 선언하는 것으로, 홀의 2층 계단에서 오늘 데뷔하 는 하얀 드레스 차림의 아가씨들이 가족 중의 남자 형제, 숙부 등으로 구성 된 샤프롱의 손을 잡고 무도회장에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무도회에 참 석한 사람들은 박수로써 그들을 맞아주었다. ―짝짝짝짝짝짝짝…. 그리고 황제는 라혼을 발견하고는 자신의 뒤를 따르던 시종장에게 시켜 그 를 불렀다. 라혼은 황제의 부름에 시종장을 따라가 조용히 황제 곁에 자리 했다. “허허허, 자네 얼굴보기 힘들구먼.” “죄송합니다.” “아니야, 자네가 그간 얼마나 바빴는지 나또한 잘 알고 있네. 그러니 너무 마음에 두지는 말게.” “고맙습니다.” “그보다 오늘 데뷔탕트는 자네가 선택해 보겠나?” “예? 그 말씀은…….” “그냥, 내 뜻대로 따라주게……. 어차피 자네도 언젠가 해야 할 일이 아닌 가?” 황제의 말은 그 뜻하는 바가 컸다. 이제껏 황제는 라혼을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특별히 지지하지도 그렇다고 견제하지도 않았다. 마치 소, 닭 보듯 하던 황제가 무도회에서 황제의 권한―권한이라기도 우습지만―인 최고의 숙녀를 선택한 권리를 제안한 것은 황제는 앞으로 라혼을 지지하겠다는 완 곡한 표현이었다. 라혼은 황제의 의미심장한 제안을 받아들여 오늘 데뷔한 영애들 중에서 처 음 보는 오렌지 머리 아가씨를 선택했다. 그녀는 오렌지색 머리카락에 푸른 눈이 아름다운 보기 드문 미녀였는데 그란 출신의 아가씨 같지는 않았다. 만일 그녀가 그란에 비교적 오랜 기간 있었다면 소문이 났을 것이고 그러면 라혼이 몰랐을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쌍둥이 누이인 테이는 쉬포니아를 비롯해 많은 친구를 사귀고 있었고 그녀들은 테이가 라혼이나 그래험, 메사 리프라는 화려한 배경을 가진 덕분에 언제나 라혼이 머무는 거처에 모였다. 그리고 거기서 오간 이야기는 거의 대부분 테이의 입을 통해 라혼에게 전 해지기 마련이었다. 무도회에 참석한 귀족들은 황제가 아닌 다크 프린스가 데뷔탕트를 뽑자 놀 라면서도 대부분 납득했다. “아름다운 레이디, 당신이 있어 무도회가 더욱 빛을 발하는 군요. 당신에 게 선택된 행운아가 부러울 따름입니다.” “고, 고마워요.” 라혼이 선택한 그녀는 그란에 온 것도 난생 처음이거니와 이 같은 대규모 무도회도 진정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궁정무도회 최고의 숙녀가 되었어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자상하한 미소 를 지어보이며 물었다. “역시,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기가 싫군요. 저와 첫 번째 춤을 춰주시겠습 니까?” “예? 예, 그러세요.” 라혼이 오늘의 데뷔탕트가 된 그녀를 손을 살며시 이끌어 홀 중앙에 서자 궁정악공들이 연주를 시작했다. 라혼은 살짝 허리를 구부리는 것으로 숙녀 에게 경의를 표했고 숙녀는 무릎을 살짝 구부리는 것으로 그에 화답했다. 그리고 황제는 물론 무도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저는 아름다우신 레이디의 이름조차 모르는 군요. 저는 라혼 가이우스 세나데온 차이저, 그란의 왕자입니다. 레이디는…….” “솔리지 후작 가의 에이린이에요.” “오~! 이름이 무척 예쁘군요. 기품 있고 아름다운 빛과 같은 이름입니다. 레이디 에이린.” 라혼은 에이린이란, 이름의 후작가문의 영애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한 나머지 몸이 뻣뻣하게 굳어있자 제브가 표현하길 너무나 느끼해서 사과 10 통을 먹어도 느끼함이 가시지 않을 말들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에이린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버지를 따라 그란에 와서 장난 반 진심반으로 무도회에 참가했다. 게다가 나이도 오늘 데뷔하는 아가씨들 과 비슷하고 해서 경험삼아 참석한 무도회에서 데뷔탕트로 뽑히고 프린스 그란에게 지목되어 춤까지 추면서 달콤하기 그지없는 말들이 동화책 왕자님 같은 ‘진짜’ 왕자님에게서 흘러 나오자 가슴이 터질듯이 두근거렸다. “어휴~! 아무리 내동생이지만 정말…….” 테이는 빨갛게 달아올라 홍당무가 되어버린 소녀를 보며 한숨을 내쉬며 중 얼거렸다. 라혼이 지금 저 순진한 아가씨에게 뭐라고 하고 있는지 눈에 보 였기 때문이었다. “대장 말로는 테이 네가 가르쳐준 것을 아주 조금 써먹는 거라던데?” “내가 가르쳐 줬나? 자기가 알아서 배운 거지.” 죠슈아는 입술을 삐죽 내미는 테이의 골난 표정이 귀엽다는 생각을 하며 뭔 가 결심한 듯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테이의 정면에 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 며 물었다. “세나테이아 양, 저와 춤을 춰주시겠습니까?” “…….” 테이는 죠슈아의 갑작스런 요청에 깜짝 놀랐다. 덩치가 크고 건장하다 못해 위압적인 죠슈아였기에 허리 굽히는 것이 꼭 협박하는 것처럼 박력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렸을 적부터 그와 같이 지내온 테이였다. 남들이 보 기에 당당하고 박력 넘치는(?) 태도였지만 테이는 그 안에서 안절부절못하 는 죠슈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 “호호호호, 영광입니다. 나의 기사님!” 그리고 우아한 태도로 죠슈아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킥!” 쉬포니아는 그 둘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실소했다. 아직까지도 소꿉장난 같은 연애를 하는 테이와 나이트 죠슈아가 무척 귀엽다 생각하며 때론 능글 맞은 애늙은이 같은 라혼이 테이하고 같이 있으면 영락없는 막내가 되는 이 유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라혼과 오늘의 데뷔탕트 에이린의 독무대가 끝날 무렵 자연스럽게 여기저기 에서 춤을 추는 커플들이 홀 중앙으로 나왔다. 그리고 한곡이 끝날 무렵 라 혼은 자연스럽게 에이린을 놔주었다. “참으로 멋진 시간이었습니다. 레이디 에이린.” “저도 즐거웠습니다. 전하!” 라혼이 에이린에게서 떨어지자 그녀에게 애프터 신청이 줄을 이었고 라혼은 천천히 일행이 있는 곳으로 왔다. “#$^! ^&$*@%$&^$%^*@%$&@!%!$^(참으로 멋진 행사군요. 조금 그렇긴 하지 만 말입니다.)” “린#@$^&* $%&$@$%&^%$#@@%$*&#&@#$^!(린, 너도 춰보지 그래. 보법과 박자 에만 신경 쓰면 의외로 쉬운데?) “$%?(제가요?)” “#$쉬포니아@%$#@^!#$%(여기 쉬포니아에게 춤을 신청해봐! 내가 잘 얘기해 줄께.) “#$^@….(아뇨, 전….)” 쉬포니아는 프린스 린과 말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언급되자 고개를 돌렸다. “쉬포니아, 린이 너랑 춤을 추고 싶은가봐! 그런데 그가 살던 곳에선 귀족 들이 이와 같이 남녀가 춤을 추는 행사는 하지 않아서 어색할 테니까 네가 좀 가르쳐줄래?” “내가?” “@!@ @!@%!%(아닙니다. 아니에요. 낭자!)” “린이 아주 간절히 부탁하는데 나를 봐서라도 받아주지 그래.” 라혼은 린의 의견을 묵살하고 쉬포니아에게 그렇게 제안했다. 쉬포니아는 린의 표정을 보고 라혼이 전한 그것과 다르다는 것을 눈치 챘지만 왠지 장 난을 치고 싶을 마음이 들어 선선히 승낙했다. “좋아요. 제가 가르쳐 드리죠. 프린스 린!” “…….” “#$^!#$@#%!#$^%$^%&@%$&^^@!#^(여기선 여인의 마음을 무시하는 행위가 가 장 비겁한 행위다. 린)” 린은 의형의 말에 붉은 머리 양인 처자가 내민 손을 잡고 그녀에게 이끌려 홀 중앙으로 나갔다. 역시 처음이라 어색하고 실수를 연발했지만 라혼이 판 단한 대로 용호린 또한 무공의 고수이자 기재였다. 일정한 보법과 흘러나오 는 음악에 맞춘 움직임을 금방 배울 수 있었다. “라혼!” “제브, 너도 참석했었냐?” 사이스 백작가 사람들과 함께 있었던 제브는 춤이 시작되어 어느 정도 행동 의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유벤츠잖아! 다른 기사들이야 무도회에는 참석하지 못하고 붙박이 호위기 사 신세지만 나는 유벤트 기사단 출신이라 무도회에 참석할 수 있었어. 그 래 봐야 백작님하고 자작의 뒤치다꺼리 신세지만…….” “자작이면……?” “맞아! 레이스야.” “…….” 에게너 네부카드 사이스 백작이 가문을 이어받았으니 그 후계자인 레이스가 자작의 작위를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보다 이것은 친구로서 묻는 건데…. 우리 아가씨랑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그건 마땅한 이유가 있었어. 가르쳐 줄 수는 있지만 사이스 가문의 명예 와 관련된 문제니까 너의 입장에선 모르는 것이 나아.” “뭐가 문제인지는 모르지만 네가 용서하면 안 되겠냐? 매일같이 눈물을 흘 리는 카시아가 너무 불쌍해서 그래.” “하지만 나는 이미 이혼장을 보냈고, 다른 여자에게 아들까지 낳았어.” “그렇지만 우린 백작님도 레이디 카시아도 그 문제에 대해선 덮어둘 수 있 는 입장인데…….” 라혼은 제브의 말에 그가 자신을 찾아와서 이런 말을 꺼내는 배경에 사이스 백작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넓은 무도회장 건너에서 사이스 백작 이 알게 모르게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라혼은 오 랜 친구의 얼굴을 보고서 포도주 잔을 들고 천천히 기울였다. 그러자 붉은 포도주가 바닥에 쏟아졌다. “제브, 만일 이 엎질러진 포도주를 다시 이 잔에 담을 수 있다면 카시아를 다시 아내로 받아 줄 수 있어. 하지만 엎질러진 포도주는 다시 되돌리지 못하겠지.” “…….” “하지만 이 잔에 다시 포도주를 채울 수는 있어.” “그게 무슨 뜻이야?” “미안하지만 카시아는 아내로서 자격을 상실했어.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지 만 다시 시작하는 것은 가능해.” “그럼 카시아 아가씨와 다시…….” “그래, 하지만…….” 라혼은 제브의 말을 끊으며 짧은 침묵을 하고는 명확한 어조로 말했다. “카시아가 낳은 자손은 상속권을 갖지 못할 거야.” “……!” 제브는 라혼의 그러한 답변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카시아 아가씨가 낳을 자손이 상속권을 갖지 못한다면 결국 받아 줄 수는 있지만 정식 아내로서 지위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그것은 아내가 아닌 정부나 다름없었다. 제브는 사이스 백작에게 라혼의 말을 전했고, 백작은 가타부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카시아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의 기술(Art of war) *** 챔피언십 토너먼트 식전행사로 계획되어 있던 탈로스 모의전투는 토너먼트 가 끝난 다음 따로 열렸다. 참으로 보기 드문 볼거리에 임시로 만든 행사장 은 그란에 살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모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정도 로 성황이었다. 신성 시드그람 제국 콘레로3세 황제와 3공작, 그리고 귀족 들이 모두 참석한 이 행사는 레기온 기사단이 황제에게 사열을 받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레기온은 형식상 황제의 명령을 받아 귀족원을 승인으로 움직이는 군사력이 었으므로 황제에게 사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레기온은 126명의 기사 와 기병대 1024명, 탈로스 사이클로스 급 아로게스 2기, 기가스 급 기게스 10기 총 12기의 탈로스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라혼은 콘레로3세 황제에게 레기온을 이끄는 기사단장으로서 군례를 바치고 탈로스 모의전을 준비하기 위해 대기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번에 모의전 에 참가하는 기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메사리프 경과 내가 아로게스를 타겠다. 그리고 전번에 있었던 소요사태 의 책임은 이것으로 용서하겠다.” “…….” 밑도 끝도 없는 다크 프린스의 말에 그때 소요의 장본인들인 레귤러 파일럿 들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 어리둥절해 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이 유를 알 수 있었다. -쿵, 쿵, 쿵, 쿵……. -와아~! 이윽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탈로스들이 커다란 널빤지 같은 탈로스 전용 브 로드 소드와 보기에도 위압적인 크기의 워액스를 들고 나오자 그것만으로도 분위기는 달아올랐다. -워어어어어어~! -와아~! 탈로스에는 음성증폭주문이 걸려있었다. 증폭주문으로 토해진 목소리는 굵 고 거칠어 졌고 그것은 전장에서 사기를 높이는 효과가 있었다. 지금 상황은 라혼이 이끄는 5기의 기게스와 챔피언 메사리프가 이끄는 5기 의 6대6의 대치상황이었다. 탈로스들은 양편으로 나뉘어 서로를 향해 워크 라이를 내뱉으며 기세를 드높였고,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위압적인 탈 로스의 고성에 흥분이 고조되었다. “…….” 그리고 날렵한 아로게스의 브로드 소드가 높이 치켜 들려올라가자 흥분에 환호를 보내던 사람들은 일말의 기대감에 일순간 침묵했다. -돌겨~억! 그리고 길게 늘어지는 돌격명령이 떨어지고 총12기의 탈로스들은 땅거죽을 헤집으며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와아~! -쿵쿵쿵쿵쿵쿵쿵쿵……. -워어어어어어~! -쾅창~! -와! 육중하고 둔중한 강철거인의 발소리와 함께 양편은 조우했고 거대한 강철거 인들이 뒤얽히는 광경은 엄청난 박력을 뿜어냈다. 그러나……. -꽈칙~! 날렵한 몸체의 아로게스가 뚱뚱한 공 같은 몸매의 어찌 보면 우스꽝스럽게 생긴 탈로스, 기게스의 투구부분을 깨버렸다. 단순한 시범으로 대중에게 보 이는 모의전투에서 탈로스가 파손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웅성, 웅성, 웅성……. -쾅! 쁘직~! 그러나 그것은 사고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2기의 아로게스가 동시 에 2기의 기게스의 팔 부분을 잘라내고 탈로스를 부숴대자 그것을 지켜보는 모두가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전하! 이게 무슨……. -……. 라혼은 거추장스러운 무기를 버리고 자신에게 의문성을 던지는 기사가 타고 있는 기게스의 흉갑부분을 잡고 자신이 타고 있는 아로게스의 엑스시온에 마나를 주입해 힘을 증폭시켜 흉갑을 거칠게 뜯어냈다. -쾅창~! -크억~! 그러자 가슴부분에 탑승한 기사가 얼이 빠진 모습으로 기어 나와 사태를 파 악하려 애썼다. -쿠오오오~! 다시 한 번 워크라이가 터지고 그것에 반응한 시민들은 열광했다. 어찌된 일인지 모르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모의 전투였던 것이다. 탈로스를 부수 는 것은 진정 의외였지만 그 일을 벌인 상대는 다름아닌 다크 프린스였다. 누이의 결혼식 만찬을 시민과 나누기 위해 1만 골드를 쓴 자였다. 시민들은 그렇게 납득하고 희대의 볼거리를 있는 그대로 즐겼다. -와아, 와~! 시민들은 열광 했지만 귀족들은 아직까지 경악스런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세상에 단순한 여흥을 위해 탈로스를 부수다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2기의 아로게스는 시민들의 열광과 귀족들의 경악어린 표정을 무시하고 전 장을 누비며 이제 5기 남은 기게스를 일방적으로 사냥하기 시작했다. 이러 한 일방적인 전세는 아로게스의 성능이 월등했다는 것과 기게스에 탑승한 파일럿들이 라혼과 메사리프처럼 아군 탈로스를 부술 담력이 없었기 때문이 었다. 그래서 나머지 5기의 탈로스도 엉거주춤한 태도를 보이다가 하나하나 부서져 고철이 되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워어어어~! -와아, 와아~! 10기의 기게스를 모두 고철로 만든 2기의 아로게스가 승리의 함성을 지르자 시민들은 함께 열광했다. 그때 아직도 경악스런 표정을 지우지 못한 황제에게 누군가 다가와 속삭였 다. 그리고 그 내용은 황제와 같이 자리한 귀족들에게 알려졌고 트라얀 공 작이 황제에게 말했다. “폐하, 그들이 전쟁을 선언했다면 받아주면 그뿐입니다. 제게 용감하고 충 성스런 기사들이 있고, 여기 소드 마스터이며 제국 최강의 기사 로카데 차 이저 반 하이슬란드 백작이 있습니다.” “…….”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행사장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 뜨겁게 달아오르던 행사장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때에 맞춰 아로게스의 머리가 앞으로 젖혀지며 모습을 드러낸 라혼은 큰소리로 황제에게 말했다. “황제폐하! 감히 신성 시드그람 제국에 도전하는 자들이 있다고 들었습니 다. 앞으로 제국을 이끌 자로써 부탁하오니……. 지금 당장 레기온 기사단 의 출정을 허락해 주십시오.” “…….” 콘레로3세는 지금 자신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꿈에서 헤매 는 착각에 빠졌다. 단순한 모의전투 시범에 탈로스가 파괴되고, 그것에 시 민들이 열광하며, 프린든 왕국이 선전포고와 함께 국경을 넘었단 소식이 전 해지고, 미처 어떤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공개된 자리에서 저러한 부탁을 하니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일반 시민들이 보기에는 프린든 왕국군이 국경을 넘어 침공하는 것 으로 전쟁이 시작되었고 다크 프린스는 자신이 직접 가겠다며 황제에게 청 원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거기다 한때 그란의 최고 권력자였던 트라얀 공작 의 육성이 행사장을 울리자 황제에겐 더 이상 선택권이 없게 되었다. “폐하!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지금 즉시 귀족의회를 소집해 프린든과의 전 쟁을 결의하고 레기온 기사단을 급파해야 합니다. 레기온은 지금과 같은 상 황에 대비키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폐하! 어서 결단을…….” “결단을…….” 트라얀 공작과 관계를 유지하던 귀족들이 동조하며 황제에게 결단을 종용하 고 그러한 분위기는 시민들에게서도 나타났다. ‘쳐들어왔으니 맞아 싸우자 !’라는 단순한 논리는 이미 이곳 분위기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 런 언급을 하지 않고 굳은 얼굴로 생각을 정리한 콘레로3세 황제는 무언가 결단을 내린 듯 자리에서 일어서서 시민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였다. “…….” 황제는 앞으로 나서며 손을 들어 웅성대는 사람들을 조용히 시킨 후 말했다 . “신성 시드그람 제국 황제의 이름으로 프린스 그란, 라혼 가이우스 세나데 온 차이저에게 한시적인 절대지휘권을 주어 출정을 명한다. 이에 이의가 있 는 귀족의회의 의원은 지금 말하라!” “…….” 그러나 이미 분위기는 결정되어 있었다. 누구도 이런 상황에서 섣불리 반대 의 말을 할 수 없었다. “지당하고 옳은 결정입니다. 귀족원은 폐하의 결정을 지지합니다.” 그루미아 공작이 나서서 지지할 뜻을 분명히 하자 이젠 더 이상 망설일 이 유가 없었다. “프린스 그란.” “예, 폐하!” “출정하라!” -와아~! 황제폐하 만세! 다크 프린스 만세! 라혼은 황제의 출정명령과 귀족의회의 승인이 떨어지자 그 자리에서 레기온 들을 이끌고 출정했다. *** “세상에 그 낯 뜨거운 짓을 하고서도 멀쩡하다니 그것도 재능이야, 재능! ” 메사리프는 라혼의 얼굴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라혼은 그런 메사의 말에 쓴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레기온은 하릴없이 몇 달의 시간을 보냈 을 거야.” 라혼은 지금, 레기온 기사단과 함께 그란을 뒤로하고 천천히 북상 중이었다 . 라혼이 번거롭게 이러한 ‘쇼’를 한 것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 때문이 었다. 일단 생각보다 프린든 왕국군의 움직임 굼떴고, 사이스 백작이 그란 으로 온 이후 귀족들의 움직임이 수상해졌기 때문이었다. 축제기간에 묻혀 잘 들어나지는 않았지만 축제가 끝나면 무슨 일이 나도 날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그래서 라혼은 블러드를 트라얀 공에게 소개하고 오늘과 같은 일을 벌인 것이다. 일단 ‘전쟁이 났다. 그것에 대응해야 한다.’라는 명목으로 공개된 자리에 서 그것을 발표하고 결국 원하던 결론을 이끌어 낸 것이다. “그런데 탈로스는 왜 부순 거야?” 라혼은 메사의 질문을 받고 의기소침한 파일럿 나이트들의 모습을 훑어본 후 말했다. “나는 처음부터 그 볼품없는 탈로스를 전장에 끌고 갈 생각이 없었어. 그 렇다고 트라얀 할아버지에게 돌려줄 수도 없고 그래서 부순 거야.” “……?” “탈로스를 타는 파일럿 나이트는 우수한 재원이지. 그러나 기가급 탈로스 는 효율이 꽝이야. 차라리 맨몸으로 싸우게 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지.” “그럼 그냥 그란에 두면 되잖아?” “나도 그럴 생각이었어. 하지만 같잖은 장난감 때문에 싸우는 놈들이 있어 서 말이야.” 라혼의 말에 메사리프는 풀이 죽어있는 파일럿 나이트들을 슬쩍 곁눈질해 보았다. 사실 메사리프는 라혼이 탈로스를 부수던 구워서 먹던 관심 없었다 . 다만 그래야 했던 이유가 궁금했을 뿐이었다. “대장, 트라킨과 동방기사들이야.” “빨리도 오는군. 그나저나 새신랑이 힘이 남아 있으려나 몰라?” 그란의 성문을 나선지 대략 1시간이나 흘렀을까? 그제야 라혼이 기다리던 존재가 나타났다. 메사리프, 죠슈아, 그래험은 레기온과 함께하기로 했으니 바로 출발할 수 있었지만 린과 트라킨은 아니었다. 트라킨과 린, 그리고 린을 따르는 동방의 무장들과 팔라딘 그래험을 스승처럼 생각하는 코넬리가 아폴론 종군사제 자격으로 쫓아왔다. “늦었어!” “봐주라.” 라혼의 흰소리에 트라킨은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라혼은 그런 트라킨이 왠지 모르게 얄미웠다. 행사장에서 출발할 때 루나 누나를 위해 트라킨과 린에게 잠시 시간을 주었는데 한 시간이나 지체했기 때문이었다. “#@&!(형님!)” “#$^@$#@(결정이 빠르군.)” “#$^#$&# %$&#% @#%$%^@#$^#$^(이미 형님과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주저할 이유가 없습니다.)” 라혼은 이역만리 타향에서 자신과 상관없는 전쟁에 오직 형으로 삼은 자신 을 위해 갑주를 챙겨든 린이 고마웠다. 라혼은 린과 눈을 맞추며 그에게 사 의를 표하고 얼떨결에 출정하게 되어 정신없어 보이는 레기온 기사단을 둘 러보며 말했다. “지금부터 쉬지 않고 달려 7일 안에 사우스포트까지 갈 것이다.” “…….” 라혼의 말에 트라킨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순한 편지만 든 전령이 라도 사우스포트에서 그란까지 가는데 열흘이상이 걸렸다. 그런데 1천이 크 게 상회하는 부대를 7일이라니……. “상당한 강행군이 될 것으로 예상되지만 나는 제군들을 믿는다. 그리고 파 일럿 나이트들은 실망하는 표정을 거둬라. 내가 그대들을 위해 전선에 탈로 스를 준비해 두었으니 말이다.” “……?!” 라혼의 그 발언에 마나유저인 파일럿 나이트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그리고 라혼의 발언은 계속 이어졌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제군들에게 최후의 선택을 할 기회를 주겠다. 지금 이 자리에서 결정하라 그대들의 목숨을 내게 주던가, 그대들의 목숨을 가지고 지금 떠나던가.” “…….” 그러나 아무도 떠나는 사람은 없었다. 당연한 결과였지만 라혼은 말고삐를 움켜쥐고는 비릿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지금 선택을 후회해도 소용없다. 그러나 후회하게 될 것이다.” “…….” “낙오자는 탈영으로 간주해 처형할 것이다. 가자!” -히히히힝~!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라혼을 선두로 레기온 기사단과 기병대, 51명의 동방무사들을 포함한 1200 여기의 무리들은 그야말로 바람 같은 속도로 잘 포장된 가도를 치달렸다. 전쟁의 기술(Art of war) *** “행정관님, 그란에서 전언입니다.” “그란에서?” “다크 프린스가 지금 막 그란을 출발했답니다. 모두 말을 타고 있으니 못 해도 보름이면 이곳까지 도착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래? 얼마나 되는데?” “레기온 기사단 전체가 움직이는 수준이지만 병력은 그다지…….” 콘라드 남작의 영지 행정관 휴즈는 본래 사우스포트의 장물애비였다. 물론 겉으로는 몰락한 귀족행세를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1년 전부터 유 니온의 부탁을 받고 콘라드 남작 영지에서 행정관 노릇을 하고 있었다. 물 론 콘라드 남작은 휴즈의 정체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다만 남작에게 막대 한 재산을 빌려주고 대신 그것을 지분으로 하여 행정관이 되었다. 어찌 보 면 돈으로 지위를 산 경우라 콘라드 남작은 처음에 그를 별로 탐탁하게 여 기지 않았었다. 그러나 휴즈가 행정관이 되어 사우스포트에서의 인맥으로 영지에서 사용되는 각종 물품이 원활히 조달해 공급되고 콘라드 남작이 추 진하는 사우스포트의 친 제국세력을 만드는 일에 큰 수완을 발휘하자 그에 대한 신임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금 남작이 아들의 결혼식에 참 석하는 것을 명목으로 자릴 비우며 영지를 맡아 관리하는 영주대리인까지 될 정도로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우스포트는 휴즈의 안방 이나 다름없었고, 친 제국 인사를 만드는 일은 유니온에서도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는 일이었기에 어차피 목적이 같았다. 그리고 콘라드 남작은 미처 모르고 있지만 프린든 왕국 쪽 인사의 상당수도 휴즈에게 포섭되어 있었다. 그들은 언제든 때가 되면 프린든 왕국군의 뒤통수를 칠 것이었다. “뭐, 유니온의 총수가 다크 프린스를 돕는 이상 뭐가 있어도 있겠지.” “팔라딘 그래험이나 나이트 트라킨 정도의 역량 있는 기사가 도착하면 이 곳에 모아놓은 병력과 노스포트에서 모은 용병들로 그럭저럭 막아낼 수는 있을 거야.” “하지만 탈로스 전력에서 크게 밀리지 않겠습니까?” “뭘 걱정하나? 다크 프린스의 부친은 소드 마스터 하이슬란드 백작이잖아? 그리고 하이슬란드에 철가면 기사단의 탈로스가 수십 기가 있는데 그 정도 면 버티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지.” 휴즈 또한 프린든 국왕의 군대가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대단해서 조금 불 안하기는 했다. 그러나 이미 수틀리면 도망칠 구멍도 만들어 놨고 유니온에 서도 일이 틀어지면 몸을 빼도 된다는 언질까지 받아놓은 상태였다. “어쨌든 사우스포트의 우리 쪽 사람들에게 열흘정도만 시간을 끌어보라고 말해둬야겠군.” *** -두두두두두두두두……………………. 1천여기의 기마가 초원을 질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란을 출발한지 사흘째 되는 레기온들이었다. 레기온들은 자신들을 이끄는 다크 프린스가 선택을 후회하게 될 것이란 말을 지금 이 순간 뼈저리게 통감하고 있었다. 그들이 사흘간 주파한 거리는 500키로가 넘었다. 서신만 지닌 전령의 하루 이동거 리가 160키로인 것을 가만하면 1200여기의 레기온은 전령보다 빠르게 달린 셈이었다. “라혼, 기사들과 병사들이 너무 지쳐있어. 그들에게 휴식이 필요해!” 빠르게 질주하는 말위해서 트라킨은 그렇게 말했고, 라혼은 그런 트라킨에 게 물었다. “트라킨, 나 믿어?” “…….” 트라킨은 라혼의 엉뚱한 물음에 그것이 뭘 뜻하는지 몰라 대답을 주저하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믿어!” “그런 믿어! 이정도 행군에 나가떨어질 놈들이라면 필요 없어. 콘라드 남 작님의 영지까지 앞으로 4일이야!” “…….” 트라킨은 라혼의 말에 학을 떼었다. 그란에서 그곳까지 7일만에 주파하겠다 고 한 말이 진심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싸워야 하는 기사와 병사들에게 말위에서 먹게 하고, 잠조차 말이 쉴 때 요령껏 쉬 게 하는 라혼의 무리한 행군은 기사들 사이에서 불만이 많았다. 그리고 4일째 되는 새벽아침에 드디어 불만이 폭발하고 말았다. 4동안 잠을 재우지 않고 말을 달리게 하자 피곤함이 겹쳐 낙마하는 사고가 줄을 이었 고 기사들 중 1명이 말에서 떨어져 그대로 잠이 들어 일어날 줄을 몰랐다. 그런 것을 라혼이 그를 걷어차 깨우자 기사는 라혼이 자신을 모욕했다고 소 리치며 발작한 것이다. “발로차서 깨운 것은 미안하다. 항의는 받아들였으니 이제 그만 출발한다. ” “거절하겠소, 세상에 이렇게 무리한 행군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소 .” “축하한다. 당신은 그것을 경험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쯤하고 출발한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사이에도 시간을 멈추지 않는다.” “귀가 먹은 모양이군. 나는 더 이상 당신을 따를 수 없소.” 라혼은 피곤에 절은 몰골로 자신에게 반항을 하는 기사를 가만히 바라보고 무미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어조로 명령했다. “하고 싶은 말 다했으면 어서 말에 올라라.” “싫소.” -팍! -털석! “……!?” 침묵. “모두 출발한다.” -땅! “헉!” 투구 위로 검에 맞은 스테판코는 기겁했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은 1200여명 모두가 공유했다. “명령불복은 사형이다. 출발해라!” 스테판코는 지금 자신이 지독한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왜 아까까지 다크 프린스와 대화를 하던 기사의 목이 몸과 분리되어 있는지 도무지 이해 되지 않았다. 그러나 확신 할 수 있는 것은 그를 그렇게 만든 자가 자신도 충분히 그렇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자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행군 5일째 이젠 모든 것이 조금씩 적응을 되기 시작했다. 머리는 무겁고 다리에 감각이 없다. 그러나 적응이 되었다는 것은 몸이 아니라 정신이었다 . 그래서 하루 전 직접 목격한 사건의 전말이 하나하나 떠오르며 그것만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군 기사를 아무런 이유 없이 미친 자를 따라 가 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정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기 사가 명령을 세 번이나 불복한 사실이나 지금 도망치고 싶은 이유가 무조건 쉬고 싶다는 본능 때문이란 것은 스스로 인정하지 않았다. “대장, 후위에 도망병이야!” “정지!” 벌써 5일이나 잠을 자지 않아 초췌하기 이를 데 없는 레기온들은 복명복창 도 하지 않고 달리는 말을 멈췄다. 라혼은 잠시 침묵으로 흙먼지가 가라않 기를 기다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무거운 입을 뗐다. “전역신청을 받겠다.” “……?!” “억지로 쫓아오는 자는 필요 없다. 나는 나를 따르는 자하고만 승리의 영 광을 나눌 것이다.” “…….” 라혼은 잠시 말하는 것을 멈추고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른 후 묵묵히 자신을 말을 기다리는 레기온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너희들이 나의 부하가 아닌 형제가 되어주길 원한다. 그러나 나약한 자는 필요 없다. 내가 앞으로 가려하는 길은 약자는 절대 지날 수 없는 길 이며 강자라 할지라도 믿은 직한 동료가 없이도 갈 수 없는 길이다.” “…….” “스스로 자신을 돈에 몸을 판 용병이라고 생각한자도 필요 없다. 나는 내 게 피를 바칠 자만을 원한다. 왜냐하면 나는 이그라혼이 될 것이기 때문이 다.” 라혼의 선언에 피곤이 찌든 기사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곧 회의적인 시선으로 이제 갓 스물하나가 된 청년을 바라보았다. 이그라혼은 시드그람 대륙전역을 정복한 자의 이름이었다. 그럼에도 반왕이라 불리는 자이기도 했다. “완전히 미쳤군, 미쳤어. 당신이 시드그람 대륙을 통째로 삼키겠단 말이오 ?” “그렇다.” “젠장! 미친놈이 마음에 들기는 처음이군. 어서 대충 정리하고 갑시다. 그 란에서 사우스포트까지 7일에 주파하겠다는 미친 소리를 실천하는 미친 당 신이니 미친척하고 한번 믿어보리다.” “그대의 이름은 뭔가?” “젠장맞을……. 아돌프 멘델이오. 빌어먹을 됐소?” 흉터가 가득한 인상적인 대머리의 헌상 궂은 서른 중반 정도 됨직한 기사 아돌프 멘델은 라혼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그리고 이그라혼의 6번째 기사가 되었다. “좋다. 여기서 꾸물거릴 이유가 없지. 날 따르지 않겠다면 여기서 돌아가 도 좋다. 죠슈아, 메사리프, 그래험, 린, 트라킨, 그리고 아돌프 출발하자! ” “요하!” 그렇게 선두가 떨어져나가며 출발했다. 그리고 그 뒤를 동방의 무사들과 코 넬리가 따르고 약간 주저하던 기색을 보이던 철가면 기사단 출신의 기사들 이 뒤를 이었다. 그리고 남아있는 기사들과 떠난 기사들을 바라보던 평민으 로 이루어진 기병대 일부가 말을 달렸다. “어쩌지?” “어쩌긴 쉬만큼 쉬었으니 달려봐야지, 북쪽 끝 얼어붙은 땅에서 태양이 이 글거린다는 남쪽 끝까지…….” 그리고 남아있던 유벤트 기사단 출신의 기사들이 이젠 멀어져 점이 되어가 는 자의 등을 바라보며 말을 달렸다. 그리고 대부분의 기병대 또한 말 옆구 리를 치며 어제와 그제처럼 말을 달렸다. 그리고 뒤에 남은 200여명은 힘없 이 말 머리를 남쪽으로 돌려 천천히 남하를 시작했다. *** 그란에서 출발한 총 1205명의 병력은 콘라드 남작의 영지에 도착하자 1001 명이 되었다. 라혼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무리한 진군에 따라 와준 그들에게 3일간의 휴식을 주어 피로를 풀게 했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가운데 7일간이나 잠을 자지 않고 말을 달린다는 것은 웬만한 체력이나 정신력 가지고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레기온으로 선 발되는 첫 번째 조건이 바로 체력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단 7일 만에 1600 키로의 거리를 주파했으면서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의지력이었다. “휴우~! 정말로 일주일 만에 도착하다니…….” “나를 따라오려면 앞으로도 그 정도는 돼야 해.” “그보다 이것 써먹을 만한데 이제 저1001명은 네가 무슨 명령을 내려도 따 를 것이니까.” “내 예상이 틀리지 않다면 사흘이나 닷새 후에 첫 전투가 있을 거야. 그보 다 트라킨, 피곤하지 않아?” “말도 마라! 피곤해서 죽을 것 같다. 그런데 너무 피곤해서 잠도 안 온다. ” “쯧쯧쯧……. 수련이 부족하구먼. 아버지가 가르쳐준 호흡법으로 명상을 하면 피로쯤이야 간단하게 풀 수 있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그런데 넌 괜찮은 거냐?” “나도 쉴 거야. 트라킨, 네가 쉬는 거 보고…….” “흠! 그래, 그래 너 잘났다. 네가 대장이라 이거지.” 트라킨은 라혼의 말에 미소를 짓고는 자신의 방으로가 잠을 청했다. 트라킨 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서자 행정관 휴즈가 라혼의 방을 찾았다. “전하!” “사우스포트에서 우리가 도착한 사실을 아나?” “아직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곳에도 첩자들이 있으니 곧 저들도 알겁니다.” “사우스포트에 있는 탈로스 전력은?” “예, 타이탄 급 솔(Sol)이 10기, 키클로 급 스테로페스(Steropes)가 15기 브론테스(Brontes)가 8기, 그리고 기가스급 소형 탈로스 골리앗(Goliath)이 30기입니다.” 골리앗은 최근에 개발된 소형 탈로스로써 밸런스도 엉망이면선 크기만 큰 기게스(Gyges)를 대신한 신형 탈로스였다. 사실 골리앗은 탈로스라기보다 향상된 개념의 마법갑주와 같았다. 어차피 기게스는 탈로스끼리의 전투에선 그다지 별 위력이 없었고 움직임이 둔중해서 말을 탄 기사나 기병을 상대 하는 데도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했다. 다만 보병이나 장창병들에게는 엄청 난 위력을 보였는데 탈로스를 상대하기 위해 보병을 투입하는 멍청이는 없 는 이상 쓸모가 없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반왕의 기간테스 군단이 사 용했다는 기간테스 아머를 모델로 한 골리앗이었다. 크기를 버리고 민첩함 을 선택한 탈로스였던 것이다. 그러나……. “크기가 줄어들면 엑스시온도 소형화 되고 결국 힘도 줄어든다는 말이지. 골리앗 한기 당 기사 둘을 투입하는 것이 훨씬 남는 장사지.” “…….” 그렇게 중얼거린 라혼은 휴즈에게 물었다. “사우스포트에도 도둑들이 이용하는 쥐구멍이 있겠지?” “예? 도둑들이 은밀히 이용하는 길이 있기는 하지만……. 설마?” “적이 우리의 존재를 모를 때 기습하는 것이 최선이다. 내일까지 저들이 내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하면 한번쯤 뒤흔들어 놓는 게 좋다. 그렇게 알고 준비하도록 퇴로는 걱정하지 말고 밤안개처럼 스며들 수 있는 진입로만 준 비하도록.” 휴즈는 그란에서 이곳까지 1000명의 병력을 데리고 7일만 주파한 다크 프린 스의 말에 기가 질려버렸다. 아무리 사우스포트에 조력자가 있다고는 하지 만 100명의 기사와 900명의 병력으로 200명의 기사와 1만명의 병력이 지키 고 있는 도시를 공격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도시 안으로 들어가서 기 습을 하면 확실히 큰 피해를 줄 수는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기습에 참가한 자는 모두 옥쇄할 각오를 해야 했다. 그리고 들어가는 것만 생각해 보란 요구는 희생을 불사하겠다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몇 명이나 들여보내실 겁니까?” “한 50명 정도…….” “50명입니까? 알겠습니다.” 행정관 휴즈는 다크 프린스의 말에 자살 공격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희생 될 자들을 위해 신에게 기도했다. 전쟁의 기술(Art of war) *** 프린든 왕국이 영토 수복과 갤 원정에 동원한 전력은 타이탄 30기, 키클로 50기, 기게스 70기였고 그것을 2개 군단으로 나누었다. 남부군단 5만 기간트라 타이탄(Titan)급 솔(Sol) 10기 3만 기간트라 키클로(Kyklo)급 스테로페스(Steropes) 15기, 브론테스(Bront es) 8기 1만 기간트라 기가스(Gigas)급 골리앗(Goliath) 30기 기사 63 +137 기병2000 보병8000 북부군단 5만 기간트라 타이탄(Titan)급 솔(Sol) 20기 3만 기간트라 키클로(Kyklo)급 브론테스(Brontes) 27기 1만 기간트라 기가스(Gigas)급 골리앗(Goliath) 30기 기사 90 +160 기병2000 보병10000 *북부군단은 잠정적으로 갤 지방으로 진출하기로 되어있기 때문에 시오나 왕국과 바이나 공국의 전력이 추가된다. 시오나 왕국 3만 기간트라 키클로(Kyklo)급 브론테스(Brontes) 15기 1만 기간트라 기가스(Gigas)급 기게스(Gyges) 20기 기사35 +3 보병2000 바이나 공국 3만 기간트라 키클로(Kyklo)급 아로게스(Arges) 5기 1만 기간트라 기가스(Gigas)급 기게스(Gyges) 5기 기사10 +2 보병1000 프린든 왕국의 1차 목표는 잃어버린 영토의 수복이며, 2차로 갤의 대공 이 었던 다크 듀크가 사후 혼란스런 갤의 원정이었다. 프린든 왕국군으로만 이 루어진 남부군단은 영토수복이 마무리 되면 남쪽에서 치고 들어오는 신성 시드그람 제국의 공격을 막게 되며, 북부군단은 연합군으로써 갤 지방에 진 출하도록 되어있었다. 남부군단 사령관 테호도르 모리우스 그라이안 후작은 남부군단의 전체 전력 을 사우스포트에 모아놓고 국왕의 최종 진격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 이미 콘라드 남작이 사우스포트에 심어놓은 세력을 일소한 상태였고 지금 은 늦어도 며칠 후 진격을 앞두고 참모들과 최종점검을 하고 있었다. “콘라드 남작은 모사꾼일 뿐입니다. 그의 아들 트라킨이 제법 실력이 있는 기사라지만 그 또한 결혼식을 핑계로 영지를 떠난 상태. 그의 영지엔 기갑 전력은 전무하고 여기저기에서 급하게 긁어모은 용병 3천이 전부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실상 에드몬 성채가 있는 곳까지 이렇다 할 저항세력은 없 습니다.” “흐음~! 그럼 그 후가 문제이갰구만.” “제국에 이렇다 할 주도 세력이 없는 이상 3개월에서 길게는 반년까지 별 다를 군사적 움직임을 없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 강력 한 공격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라이안 후작은 물론 참모로써 회의에 참석한 기사들도 에드몬 성채까지 진격하는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다만 그 후 제국의 반 격이 어느 정도 수준일 것이냐가 주요 관심사였다. “어차피 공은 제국 쪽으로 넘어갔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제국군의 북진을 저지하는 것 외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오늘은 이만 끝내겠다.” “예, 각하!” 그라이안 후작은 회의를 마치고 차를 마시며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했다. “다크 듀크가 없는 이상 이 땅에 관심 갖는 제국의 힘 있는 귀족은 많지 않을 거야. 하지만 자존심이 강한 놈들이니 사태가 어떻게 변할지 예측을 할 수 없으니…….” 갤의 대공 다크 듀크가 제국의 그늘 아래로 들어간 것도 고작 몇 십 년이었 다. 제국의 입장에서 갤 공은 심하게 말해서 외국인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그리고 그 갤 공이 주도로 이루어진 프린든 동부 점령은 고작 10년이 채 되 지 않았다. 생각하기에 따라 제국의 입장에서 이 땅 또한 자신들의 것이라 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다만 그라이안 후작과 그의 정치적 후원자 인 레곤 공작의 바람은 그란에 있는 황제의 권력이 강화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신성 시드그람 제국 귀족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이었다. *** 스테판코는 하루를 꼬박자고 나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전선이라고 해도 과 언이 아닌 곳에서 미친 듯이 잠에 취한 것은 결코 옳은 일은 아니었지만 말 이다. “여어~! 스테판코, 이제야 깨어나셨나?” 아돌프 멘델, 나름대로 실력 있는 기사였지만 예의범절하고는 담을 쌓은 자 였다. 유벤츠 도련님들이 아이언 마스크들에게 거칠고 품위가 없다고 쫑알 댈때(?) 문득문득 생각나는 존재가 바로 그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멘델 경!” “좋은 아침? 정오가 넘어선지 한참인데 아직도 꿈을 꾸시나?” “…….” 같은 말을 해도 꼭 저런 식이었다. 하지만 근 2년이나 함께 지내다 보니 이 젠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침이고 저녁이고 간에 스테판코 아직까지 꿈나라에서 헤매는 놈들 깨우 라고…….” “예?” “무서운 대장이 적전정찰을 한다더군.” “하지만 사흘간 휴식을 취하라는 말이 있었잖습니까?” “그건 기병대 병사들에게만 해당되는 거라더군, 우라질 일이지. 봉급도 쥐 꼬리보다 쬐금 많이 주면서 기병대 봉급의 3배니까 그 값을 하라나? 젠장 할!” “그런 기사만 참가하는 정찰이겠군요.” “자세한 것은 나도 몰라. 참모회의 같은 거니까 일단 모두 깨워서 식당으 로 모이라고 해! 참고로 이것을 빌어먹을 명령이야!” 스테판코는 그길로 다시 동료들을 깨우기 위해 방으로 들어서야했다. 나중 에 안 사실이지만 명령을 받은 당사자는 가장 먼저 깨어있던 멘델에게 내려 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따지는 스테판코에게 멘델은……. “내가 받은 명령은 결과적으로 이루 졌다. 그것이 중요하지 내가 무엇을 이용하든 상관없지 않나?” 이라고 말해 스테판코의 복장을 뒤집어 놓았다. 왜냐하면 잠에 취한 기사들 을 깨우는데 상당한 고생을 했기 때문이다. *** “어제의 모습을 용서하는 것은 오늘까지다. 전장에 나온 기사가 긴장을 풀 고 꿈속에서 해매는 꼴은 오늘로써 끝내기 바란다.” 라혼은 넓은 식당을 가득 메운 다소 기사들에게 그렇게 인사했다. 7일간 잠 을 자지 않고 말을 달린 반동으로 다소 풀어진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라혼이 마치 먹이를 찾는 독수리의 그것과 같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기사들을 노려보자 장내는 다소나마 긴장감이 감돌았다. 사실 라혼이 레기온 기사단을 창설했고 라혼의 강권으로 철가면 기사단의 기사들이 레기온이 되었다. 하지만 포룸 마그나를 건설하는데 심력을 쏟다 보니 조직의 관리나 훈련 등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래서 레기온 들은 레기온을 만든 이가 다크 프린스라는 것은 알았지만 서로 얼굴을 보는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사실상 지금 2기의 아로게스를 가지고 천천히 북상중인 기갑사령관 야펀이 기사단을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러니 어떠한 연대감이나 리더의 기질을 알고 거기에 맞춰 행동하는 훈련 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셈이었다. 그러나 지난 7일간의 강행군과 명령불복을 이유로 기사의 목을 자르는 과감 함을 보였고 하겠다고 말한 것은 밀어붙여서라도 실행에 옮기는 추진력을 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여줌으로써 절대적인 존재감과 자아가 강한 신성 시드그람 제국 출신의 기사들을 장악하는 카리스마(charisma)를 내뿜었다. “…….” 100명의 기사들이 모인 콘라드 남작 성의 식당은 고요한 침묵이 지배했다. 그리고 그 침묵은 라혼이 발언을 시작함으로써 깨졌다. “그러나, 제군들은 내게 증명해주었다. 전령이라도 열흘이 걸리는 거리를 제군들은 7일 만에 주파했다. 그러므로 이름그대로 베테랑(veteran)이다. 그러나 나는 제군들이 그것을 넘어선 엘리트(elite)가 되어주길 원한다.” “…….” 짧지만 격조 있는 어조의 말은 레기온들의 마음속에 파고들었다. 확실히 무 리한 강행군을 한 경험은 그들에게 나름대로의 해냈다는 자신감을 주었다. “지금 나는 사우스포트를 정찰할 것이다. 50명의 기사는 나를 따르고 나머 지는 레기온 기병대와 용병들을 확실히 장악해라. 이상!” 라혼은 그렇게 일방적인 지시를 내리고 50명의 기사를 뽑아 성을 나섰다. 여느 기사단의 그것처럼 기사들의 발언권을 보장하지 않는 다크 프린스의 행태에 기사들은 약간의 불만을 품었지만 라혼은 자신의 입맛에 맞는 형태 의 전통이 설 때까지는 독단적인 행보를 그만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전장에서 함께 싸우고 피 흘리는 자와의 전우애, 개인적이 이익보다 전체를 생각하는 충성심, 그리고 그것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용기, 그리고 꿈을 공유하고 같은 꿈을 꾸는 마음 등이 생기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라혼은 지금 레기온이란 불리는 기사들을 그러한 전통을 만들어내고 이끌어 갈 씨앗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다. 권력은 칼을 가진 자가 쥐게 되고 칼을 가진 자의 지지가 진정한 권력의 기반이 되는 것이다. *** 콘라드 영지에서 사우스포트까지 거리는 걸어서 하루 길이었다. 그러나 라 혼과 50명의 기사들은 가벼운 무장에 말을 타고 달렸으므로 저녁을 들어서 는 시간에 출발했어도 해질 무렵 사우스포트를 방어하는 성벽이 보이는 곳 까지 진출했다. “겨우 저것을 직접 보려고 그 비싼 힐링포션까지 사용한 거냐?” 트라킨은 오랫동안 달리는 말위에 있었던 덕분에 허벅지에 멍이 들고 울혈 이 고인 기사들을 위해 최고급 힐링포션을 말 그대로 물 쓰듯 퍼 쓴 라혼에 게 혀를 내둘렀다. 달리는 말에서 울혈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본 라 혼은 그 기사의 바지를 까 내리고 검붉게 멍이든 허벅지를 베어 울혈을 짜 내곤 힐링포션으로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그리고 황량한 벌판에서 멀쩡한 기사들이 바지를 까 내리고 생살을 째는 희귀한 경험을 해야 했다. “아니, 여기까지 왔는데 안쪽도 둘러봐야지 않겠어?” “뭐?” “이보쇼! 미친 대장, 아무리 미쳤다지만 이미 적의 손에 떨어진 도시 안을 관광하겠다는 것을 너무하지 않소?” “확실히 그렇군. 그럼 공격이다. 적이 점령한 도시를 공격하는 것은 정상 적인 것이겠지?” “…….” 멘델은 다크 프린스의 말에 입을 쩍 벌리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리고는 당장 따지듯이 물었다. “정말 미친 거요? 거기엔 기사만 수백 명에 1만이상의 병력, 게다가 탈로 스까지 버티고 있는데 거길 딸랑 50명으로 공격하겠다는 미친 소릴 하는 거 요? 지금!” “아주 정황한 분석이다. 그 미쳤다는 소리만 빼고.” “이런, 우라질 일이 있나.” 라혼의 긍정에 멘델을 비롯한 기사들은 넋이 나간 표정을 지으며 공황에 빠 졌다. 그러나 라혼은 그런 그들 데리고 남쪽으로 말을 달렸다. 그곳에 장물 애비 출신 행정관 휴즈가 사우스포트의 도둑길드에 손을 써서 도둑들이 은 밀히 지나는 길을 안내할 자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이제 하늘은 태양이 마지막 붉은 숨을 토해낸 뒤 완전히 어두워지고 유난히 밝은 달과 별이 총총히 박혀 어둡지 않는 밤이었다. 즉 기습하기에 그다지 좋은 날은 아니었던 것이다. “정말 올까?” “휴즈 씨가 부탁한 일인데 뭐 그리고 오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더 낫지 않 아? 추가 요금을 받을 수 없겠지만 여기서 이렇게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수 고비가 나오잖아.” “하긴…….” 사우스포트 항구와 그다지 멀지않은 해안가에서 열명 안쪽의 사내들이 모닥 불을 피워놓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오지 않더라도 이들은 해 가 뜰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 것이다. “에이 이거 너무 심심하군. 술을 마실 수 없으니……. 참!” “맞아! 그건 그렇지?” “누가 도둑이 되면 편하다고 했는지 몰라? 이것도 이것 나름대로 힘들고 위험한 일인데…….” “킬킬킬……. 맞아! 한탕 크게 해서 편하게 먹고 살려고 고향을 떠나왔는 데 도둑놈이라는 명예롭지 못한 직업을 가지고서도 아직까지 이 모양이니… ….” “어? 근데 무슨 소리 들리는 것 같지 않아?” 농담을 나누며 긴장을 풀던 도둑들은 동료의 말에 하던 말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한 사내는 가만히 땅에 귀를 대고 이상 유무를 확인했다. “말발굽 소리야! 50기가 넘어!” “뭐야? 들통난거야?” “튈까?” “아니 우리와 약속된 그자들일지도 모르잖아?” “사우스포트에 숨어들려는 놈들이 이렇게 대담하게 말을 몰고 올 리 없잖 아?” “원래 기사라는 조속들은 상상을 초월한 멍청한 짓을 많이 하잖아.” “마이어와 내가 남지 너희들은 은신처로 가서!” 겉보기에 순박해 보이는 사내가 나서서 말하자 다른 도둑들은 그곳과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요란한 말발굽 소리는 점점 커지 며 밤의 정적을 깼다. -두두두두둗두두두두………………. “마이어인가?” “예, 제가 마이어입니다요. 나리!” 그리고 말위에서 마이어의 이름을 묻는 말이 튀어나오자 마이어는 상대가 자신들이 기다리는 그들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너희가 해야 할 일은 알고 있을 것이다. 부탁한다.” “예? 예, 알겠습니다. 나리!” 마이어는 아무런 의심 없이 바로 찌르고 들어오는 상대의 태도에 조금 당황 했다. 이런 경우가 많지는 않았지만 자신들의 도움을 받는 사람들은 이것저 것 물어오는 것이 많았다. 뭐, 도둑놈들하고 같이 일을 하려면 그렇게 신경 쓰이는 것이야 당연 했지만……. 하지만 이번 상대는 자신들이 도둑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알아서 하라고 하니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라혼, 이 사람들은 누구지?” “휴즈하고 아는 사람들, 거창하게 친 제국 인사들이야.” “그래?” “신분을 숨길필요가 있는 사람들이니. 그들을 위해서 그들이 누구인지 알 려고 하지 마.” 마이어는 숨어있던 동료들에게 신호를 보내며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다른 기사들과 다르게 어둠에 파묻혀 그림자가 짙 은 기사였다. ‘저 사람이 다크 프린스라는 사람인가? 에이~! 아니겠지. 자살 공격이나 다름없는 이 작전에 그 대단한 다크 듀크의 손자가 올 리 없잖아! 그런데 그 옆에 있는 사람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누구지? 나를 모르는 것을 보면 우리 과는 당연히 아니겠고…….’ 말에서 내린 그들은 도둑들이 준비한 4척의 소형 보트에 몸을 옮겨 실었다. 그리고 도둑 4인은 배에 올라 삿대를 잡았고 나머지 도둑들은 이들이 타고 온 말을 약속된 장소까지 옮겨두기 위해 말 50마리의 고삐를 서로 연결하 느라 부산했다. “나리, 준비 다되었습니다.” “가자!” 라혼의 고개가 끄덕여지자 4척의 소형 보트는 달그림자로 숨어 사우스포트 선착장 쪽으로 조용히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삼엄한 경비가 선착장과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보트의 방향은 늪지 쪽으로 들어섰다. “나리, 여기서 부터는 걸어야 합니다. 여기는 늪지라서 발밑을 조심해야 합니다. 제가 밟는 곳만 밟고 따라 오십시오.” “…….” 마이어는 그렇게 자기 할 말만 하고는 늪에서 단단한 길만 골라 밟으며 앞 장섰다. 그리고 그 뒤를 라혼이 따르자 달빛아래에서 긴 행렬이 만들어지며 길을 걸었다. 그리고 그 길에 끝에 비좁은 토굴이 나오고 그 토굴은 사우 스포트의 빈민가 안에 있는 선술집의 지하와 이어져 있었다. “나리 저희는 여기까지만 안내하기로 되어있습니다.” “수고했다. 이것은 본래 보수와 상관없는 것이다.” “아이구! 이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라혼은 자신과 기사들을 안내해준 마이어에게 금화2개를 주고 말했다. “가만 보니 여기는 술집 같은데 맞나?” “그렇습니다. 나리!” “그럼 장사를 해야지. 주인장을 어디 있나?” “이곳은 제가 장사하는 곳인뎁쇼?” “그래? 그럼 잘됐군. 내 부하들에게 술을 한잔씩 돌리게…….” “예? 술을 말씀이십니까?” “그래!” “하지만?” “왜 문제라도 있나?” 마이어는 지금 이자가 제정신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적지에 들어와서 술을 찾다니……. “밤에 장사를 하는 것은 금지되어서…….” “당신이 그런 소소한(?)것에 얽매이는 사람을 아니지 않나.” 그렇게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술통이 꺼내지고 지나치게 긴장한 기사들에게 술잔이 돌려졌다. “이번 기습작전이 성공하기 기원하며, 건배!” “…….” 그리고 라혼이 선창하며 건배를 외쳤지만 기사들은 도무지 할 말을 잊었다. 일단 의구심을 꾹꾹 눌러가며 여기까지 왔지만 이것은 자살공격이 다름 아 니었기 때문이었다. “왜 그런 표정들을 하고 있는가? 꼭 죽으로 온 사람들처럼…….” “라혼, 도대체 어쩔 셈이냐? 진짜 이대로 기습을 할 작정인거냐?” 굳은 표정을 하고 있는 기사들을 대신해서 트라킨이 물었다. 라혼은 거친 사구려 맥주가 든 거품가득한 잔을 내려놓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내가 제군들을 이곳에 끌고 온 이유는 이곳에 있는 탈로스들을 ‘탈취’ 하기 위해서다.” “……?!” 전쟁의 기술(Art of war) 또다시 경악스런 표정이 기사들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탈로스는 탈취하기 어려운, 아니 거의 불가능한 물건이었기 때문이었다. 탈로스는 본래 골렘(G olem)이기 때문에 자아를 가지고 있고 골렘은 만들어질 때부터 소유권을 명 확히 하기 위하여 주인이 누구인지를 인식하게 되어 있었다. 그것이 ‘골렘 의 맹약’이었다. 그래서 주인과 주인이 허락한 자가 아닌 다른 존재의 지 시를 받지 않으며 거부를 하는 것이다. 가끔 전투과정에서 탑승한 기사의 마나고갈로 인한 나포가 되는 수가 있지만 그땐 탈로스 전문 마법사가 탈로 스의 자아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 새 주인을 맞게 하는 것이다 . 그러나 그 자아를 붕괴하는 작업이 간단치 않고 대력 며칠의 시간이 걸리 기 일쑤다. 즉, 적진에 있는 탈로스를 파괴가 아닌 탈취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 일을 하려는 자는 다름 아닌 라혼이었다. “탈로스의 자아를 붕괴하는 작업은 내가 하겠다. 그 점에 대해선 염려하지 않아도 좋다. 사우스포트는 프린든 왕국 남부군단 전체가 집결해 있는 곳 이고 우리가 탈로스를 탈취하려한다는 것을 모른다. 아니 경계상태를 보아 우리가 여기 있다는 자체를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옳다.” “…….” 지금 말을 하는 사람은 라혼이 유일했고 나머지는 조용히 침묵했다. “지금 프린든 남부군단의 탈로스는 사우스포트 중앙광장에 세워져 있다. 그러므로 파일럿 나이트들은 나를 따라 중앙광장으로 가서 탈로스를 탈취하 고 나머지는 주위를 소란스럽게 한다. 별동대의 지휘는 메사리프와 그래험 이 할 것이다. 그리고 참고로 말해주는데 우리가 이곳으로 들어온 통로는 이미 붕괴되어 이제 외부로 나가는 길은 성문을 깨고 나가는 것 밖에는 없 다. 세부 작전은 이렇다…….” 라혼은 기사들에게 사우스포트 도둑길드에서 제공한 정보를 기초로 중앙광 장으로 진입과 그곳에 세워둔 탈로스의 위치 등을 고려하여 각 파일럿 나이 트에게 탈로스를 배정했다. “그런 각자 건투를 빈다. 이상!” 그렇게 일방적인 작전회의가 끝이 나고 기사들은 저마다 목이 타는 것을 느 끼며 쓰디쓴 사구려 맥주를 들이켰다. 그리고 그 와중에 한사람만의 목소리 가 울렸다. “빌어먹을, 내가 그때 미치고 환장하지 않고서야 저 미친 대장을 따르다니 ……. 그래 좋시다. 나도 한번 미처 볼 랍니다. 대장! 앞장이나 잘서쇼!” “좋다! 간다.” 멘델의 말은 거칠기 이를 데 없었지만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다잡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래서 기사들은 거의 체념하는 심정으로 라혼을 따라 선 술집 밖으로 나섰다. 이미 늦은 시간, 한밤중이 지나 새벽이 가까워지는 그 때 40인의 기사들은 오와 열을 맞춰 질서정연한 당당한 모습으로 중앙광장 으로 움직였다. 나머지 10명은 메사리프와 그래험과 함께 은밀히 움직였다. “메사리프 경, 어떻게 하실 겁니까?” “글쎄?” 소란을 일으키라는 임무를 맡기는 했지만 딱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때 마친 순찰 도는 병사무리가 모퉁이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 들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너희는 누구냐? 창과 방패!” “…….” “창과 방패!” 전부 7명의 병사들은 ‘창과 방패’를 거듭 말했다. 아마도 그것이 오늘 밤 에 군호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메사리프와 4인의 기사들이 프린든 왕국군의 군호의 대꾸를 알 리 없었다. “수상한 놈들이다!” -삑이이익~! -삑이이익~! 프린든 병사는 상대가 대답이 없자 뿔피리를 힘껏 불었고, 여기저기에서 그 에 화답하는 뿔피리소리가 울려 퍼졌다. “호오~!” 메사리프는 자신의 고민을 대신 해결해준 프린든 병사에게 여자가 지었다면 황홀하기 그지없었을 미소를 지어 보여주었다. 그리고는 검을 빼들고 동시 에 순식간에 거리를 줄이며 검면으로 그 병사를 후려쳤다. -퍽! “헉!” 갑작스런 감당할 수 없는 공격에 프린든 병사들은 헛바람을 들이키며 몸이 굳었고 메사리프는 7개의 통나무를 한순간 베어 넘기는 것처럼 그들을 베었 다. 그리고 멍청히 서있는 기사들에게 호통을 쳤다. “뭘 멍청하게 있는 거야? 임무를 잊었나? 계속 멍청하게 굴면 너희들부터 콱 죽여 버리고 나 혼자 한다.” 메사리프가 먼저 일을 시작하고 조용하던 사우스포트의 밤이 소란스러워지 고 또 그 반대쪽에서 그래험이 일으킨 소란이 일자 프린든 병사들은 어느 쪽을 달려가야 할지 우왕좌왕했다. 라혼은 사방에서 뿔피리 소리가 울리고 횃불들이 밝혀지자 가볍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앞에서 일단의 병사들이 쏟아져 나오며 라혼과 마주쳤다. 그러자 라혼은 먼저 상대에게 소리쳤다. “창과 방패!” “위대한 영광! 뭐냐? 도대체 무슨 일이냐?” “모릅니다. 저희는 중앙광장을 가서 대기 하라는 지시만 받았을 뿐입니다. ” 라혼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상대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급박하게 울리 는 피리 소리를 추적했다. 사실 암구호까지 아는 상대를 의심하기엔 라혼의 태도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복장이야 각자 형편이 되는 대로 챙겨 입었 고, 의심스럽다면 상대가 무기가 모두 검이었다는 것이었지만 프린든 기사 는 너무나 경황이 없는 나머지 그러한 사실을 간과했다. 라혼이 오늘 프린든 군의 군호를 알고 있었던 것은 메사리프가 [메시지Mess age] 주문으로 미리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라혼은 마주친 모든 프 린든 군을 속여 가며 중앙광장까지 무사히 진출할 수 있었다. “휴~! 대단한 위용이군.” 33기의 대형 탈로스와 30기의 소형탈로스가 광장을 둘러싼 광경을 상당히 위압적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속전속결이다. 여기를 수비하는 자들은 대부분 일반 병사들 이다. 기사가 있기는 하지만 서너 명에 불과하다. 여기서 긁힌 상처라도 나 는 놈은 비웃어 주겠다.” “…….” 라혼은 자신을 따르는 기사들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가벼운 농담을 던졌 지만 딱하게 굳은 기사들의 표정을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라혼은 그런 그 들의 모습에 고개를 저으며 공격명령을 내렸다. “돌격! 신성 시드그람 제국 만세!” -시드그람 제국 만세~! “저, 적이다!” 라혼은 일단 40인의 집단을 이루어 첫 번째 탈로스가 있는 방향으로 돌진했 다. 프린든의 병사들은 어두운 사우스포트 길에서 일단의 무리들이 쏟아져 나오자 미처 대응을 하지 못하고 소리만 지르며 창을 앞으로 겨눈 채 엉거 주춤 서있었다. “죠슈아!” “우아압~!” 라혼은 죠슈아의 이름을 불렀고 죠슈아는 브로드 소드를 크게 휘두르며 앞 을 막아선 프린든 병사들을 쳐갔다. “우아아아악!” -붕~! “트라킨, 준비해!” 죠슈아의 일격에 프린든 병사들의 엉성한 진형이 무너지자 라혼은 트라킨의 이름을 부르며 소울 블레이드(Soul blade)로 첫 번째 목표로 한 탈로스의 심장, 엑스시온을 쳤다. 영인, 소울 블레이드는 겉을 멀쩡한 채 내부만 상 처 내는 기술이었다. 이것은 동방의 심검(心劍)의 무형검기(無形劍氣)의 경 지와 비견되는 기술로 소드 마스터를 넘어선 존재인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기술이었다. 따로 그림자 오러 블레이드라 하여 섀도 오러 블레이드(Shadow Aura blade)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물질이 아 닌 영혼을 파괴하는 검술 마음으로 적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는 활검의 경 지였다. “됐다!” 라혼의 소울 블레이드는 탈로스의 자아를 순식간에 소멸시켰고 동시에 탈로 스에 새로운 자아를 부여하는 인챈드(Enchanted)작업을 했다. 라혼은 3명의 탈로스 전문 마법사가 며칠을 끙끙대며 하는 작업을 칼을 휘두르는 짧은 시간에 해냈다. 트라킨은 라혼이 검을 허공에 휘두르고 ‘됐다!’는 말에 반신반의 하면서 도 손가락 끝을 깨물어 피를 빨아들여 탈로스의 눈 부분에 뿌렸다. -부어어~! 그러자 탈로스는 새로운 주인을 맡는 예로 무릎을 굽히고 머리를 조아렸다. “…….” “뭐해? 어서 타!” 트라킨는 진짜로 탈로스가 자신을 주인을 받아들이자.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지금은 한가롭게 넋이 빠져 있을 틈이 없었다. “문을 열어라!” 탈로스는 새로운 주인의 명령에 가슴 부분이 열렸고, 트라킨은 그곳으로 몸 을 밀어 넣었다. “뭐야? 어찌 된 거냐? 배신이냐?” “모르겠습니다!” 수십명의 괴한들이 난입하고 장내가 혼란스러워지자 오늘 광장을 지키는 기 사가 뛰어나와 우왕좌왕하는 병사들을 진정시키고 전령을 보내 적의 주공이 이곳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이곳 중앙광장을 외부로 나가는 길 몇 군데만 차단하면 닫힌 공간이기 때문에 희생을 굳이 무릅쓰지 않고 포위망을 형성 하는 데만 주력했다. 어차피 자아를 가진 탈로스는 어느 정도 자체 방어력 이 있고 가만히 서있는 탈로스라 할지라도 거대한 강철동상 어찌 할 수 있 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침입자가 탈로스에 탑승하자 상황을 급 변했다. 괴한이 탑승한 탈로스는 국왕을 주인으로 하는 타이탄급 솔이었다. 괴한이 국왕일리 없으니 저자는 슘터 국왕 폐하에게 솔을 하사받은 10명의 근위기 사 중 한명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파일럿 나이트들을 불러! 저들이 나머지 탈로스들을 모두 부수기 전에! 어서~!” “예, 예!” 기사는 목이 터져라 악을 썼고 부관은 파일럿 나이트들이 쉬고 있는 임시 병영으로 뛰었다. 그러나 악을 쓰던 기사가 더욱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뭐야? 배신자가 둘?” 괴한들은 2번째 탈로스도 탈취한 것이었다. 그것도 바로 눈앞에서……. 일 이 이쯤 되자 기사가 할 수 있는 얼마 없었다. “돌격! 저들을 막아라! 막아야 한다!” 그렇게 목이 터져라 외치며 괴한들을 향해 달려드는 수밖에……. -적들은 내가 막겠다. 어서 나머지도 확보해! 트라킨이 탑승한 탈로스에서 음성증폭장치를 거친 말소리 굵고 거친 음성이 흘러나오고 2번째로 탈로스 확보에 성공한 기사와 함께 무작정 달려드는 프린든 병사들을 휩쓸어갔다. -쿵쿵쿵쿵쿵……. -부웅~! -콰자창~! “크억!” “끄악!” 거대한 탈로스 전용 브로드 소드가 병사들을 일거에 휩쓸며 앞으로 나서자 프린든 병사들은 믿음직스럽던 아군 탈로스가 적이 되어 자신을 들을 공격 하자 공황상태에 빠졌다. 그렇게 2기의 탈로스가 무작정 달려드는 병사를 상대할 동안 그새 3번째 기사가 프린든 왕국의 탈로스를 확보하고 가세했다 . 그런 식으로 하나둘 탈로스를 확보하는데 성공해 남부군단이 보유한 타이 탄급 탈로스 솔 10기를 확보하고 그것들로 광장을 드나드는 입구를 막아서 자 광장을 외부와 차단되었다. 졸지에 역으로 독안에 갇힌 신세가 된 프린 든 병사들는 탈로스의 어마어마한 위력에 지휘자를 잃고 광장 가운데에 모 여서 눈앞에서 나머지 탈로스들도 괴한들이 확보하는 것을 멍하니 바라 볼 뿐이었다. 그렇게 광장에 모아둔 33기의 탈로스를 모두 확보한 라혼은 나머 지 10여기의 골리앗에 확보하고 나머지는 모두 부숴버렸다. 사우스포트에 골리앗은 30기였지만 아마도 그것은 여기저기에 분산 배치를 해두었기 때문 에 이날의 참사에서 빗겨갈 수 있었다. “동쪽 성문으로 간다. 트라킨 앞장서!” -쿵쾅, 쿵쾅, 쿵쾅, 쿵쾅, 쿵쾅…………. 수십 여기의 탈로스가 지축을 울리며 시내를 내달리자 그제야 잠에서 깬 프 린든 기사들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스테판코, 윈터 너희 두 팀은 그래험과 메사리프를 구원한다.” “예!” 사우스포트의 모든 탈로스 전력을 확보한 이상 이곳에 1만 이상에 병력이 있다 해도 무서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전쟁을 탈로스만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탈로스가 아무리 난동을 부려봐야 시가지에 숨은 1만 병력을 어 찌할 수는 없었다. 일단 돌아가서 기병 전력과 보병들 추스른 후 다시 와야 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그전에 넌지시 항복을 권하거나 도시를 떠날 것을 종용해 보는 것도 좋았다. 아군이던 적군이던 피를 덜 흘리는 것이 여러모 로 좋았기 때문이다. “이제 너희들은 내게 증명했다. 너희는 엘리트다!” “…….” “그리고 우린 승리했다. 그렇지 않은가?” -우워워워워워워워~! 사우스포트의 밤하늘에 탈로스 33기의 기염에 토해지며 멀리 퍼졌다. 그리 고 들어올 땐 은밀하게 들어왔지만 성문을 나설 땐 당당하다 못해 요란스러 웠다. 탈로스(Talos) 탈로스(Talos) 다크 프린스의 대담하고도 엄청난 시도는 멋지게 성공했다. 그러한 적군은 물론 아군의 의표까지 찌르는 작전은 압도적으로 불리한 전세를 단숨에 역 전시켰으며 신생 레기온 기사단을 제국은 물론 전 대륙을 통틀어 가장 강력 한 전력을 갖춘 기사단으로 거듭 태어나게 했다. -쾅!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탈로스가 탈취 당하다니 ……. 그것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뭐라고 말을 해봐라!” 프린든의 슘토국왕은 사우스포트의 남부군단이 탈로스 전체를 도둑(?)맞았 다는 소식에 불같이 분노했다. “폐하, 고정하십시오.” “이게 고정해서 될 일인가?” 프린든의 바란 왕가는 40기의 타이탄급 탈로스 솔을 보유함으로써 프린든 왕국을 다스리며 시오나 왕국, 바이나 공국을 신하 국으로 둘 수 있었다. 그런데 10기의 탈로스가 강탈당함으로 인해 바란왕가의 입지가 크게 상해있 었다. 그러니 지금 당장이라도 남부군단 사령관인 테호도르 모리우스 그라 이안 후작의 처형하라는 말이 목 언저리에서 간당간당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슘터 국왕 소유의 탈로스를 제외 하고서라도 33기나 되는 탈로스 전 력이 지금 상대해야하는 적국에게 고스란히 넘어간 사실은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치명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폐하, 일은 벌어졌고, 그 여파를 생각해 볼 때 다시 한 번 결단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레곤 공작,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요?” “…….” 슘터왕의 반문에 렌곤 공작은 침묵으로 그에 대한 대답을 대신했다. 왕도 이미 공작이 무엇을 말하려는 지 짐작하고 있었고, 자신도 그러한 고려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천명하오. 영토를 회복하기 전까지 강화는 없소. 아시겠소?” “하지만 폐하! 처음부터 아슬아슬한 전력으로 일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지 금 적은 강해졌고, 그 마큼 우리의 힘은 줄어들었습니다.” “시끄럽소. 경이 아무리 사사로이 내게 숙부가 되지만 프린든의 국왕은 짐 이요. 그리고 짐은 고작 한 번의 큰 패배 때문에 영토 회복을 포기할 순 없 소. 지금 즉시 솔드란에 남아있는 기갑전력 전부를 사우스포트로 이동시키 시오. 또한 국가적 위기를 맞이한 이상 탈로스를 보유하고도 움직이지 않는 자들에게 친서를 보내 참전을 종용하시오.” “예, 폐하!” 슘터 왕의 강경하기 그지없는 어조에 레곤은 내신 한숨이 나왔다. 수도 솔 드란의 모든 기갑전력을 빼왔다는 것은 이것을 국가적 위기라고 선언한 것 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잃어버린 영토 회복을 명분으로 법적으로는 외국을 공격하는 입장에서 일어 선 군대를 소집하는 왕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대를 만드는 왕의 입지는 분명 다르다. 전자의 경우 힘 있는 자들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발을 뺄 수 있는 여지가 있었지만 후자의 경우 그럴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 원정군 을 이끌고 갈 때는 본국을 방위할 전력을 남겨둬야 하고 본국이 안정돼야만 하는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다소 비협조적인 자들에게 그다지 큰 압력을 행 사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본국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소집하는데 이 에 응하지 않으면 바로 왕에게 반란죄를 물어 처벌할 수 있는 권한과 명분 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도 왕이 힘이 없다면 대영주들에게 휘 둘릴 것이지만 프린든의 바란 왕가는 프린든 왕국을 다스리는 것을 넘어 바 이나 공국을 속국으로 시오나 국왕을 신하로 둘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가진 왕가였다. *** 콘라드 남작성의 연병장을 둘러싼 형태로 세워져 있는 탈로스의 위용은 멘 델의 말처럼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아침 햇살아래 금빛으로 번쩍이 는 10기의 최강의 탈로스 타이탄급 솔(Sol)의 모습은 그 이름과 같이 태양 이 서있는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전원탑승!” 사우스포트에 있는 프린든 남부군단에게 33기 탈로스-골리앗은 제외-를 탈 취해온지 일주일이 지났다. 라혼은 작전에 참가한 레기온의 파일럿 나이트 들에게 하루정도 쉬게 하고 그 뒤로 쭉 강도 높은 훈련을 계속했다. 말을 타고사우는 것과 두발을 땅에 두고 싸우는 것은 다르다. 몸의 균형을 잡는 방법도 힘을 주어 무기를 휘두르는 방법도 판이하게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탈로스를 타고 싸우는 방식 또한 다를 수밖에 없었다. 탈로스에 파 워를 높이기 위해 탈로스의 심장인 엑스시온에 마나를 주입하는 방식 등이 좀 더 숙련될 필요가 있었다. 지금 시드그람 대륙 최고의 에이스 파일럿은 레드 바론(Red Baron) 또는 블 러드 바론(Blood Baron)이라 불리는 일명 붉은 남작 레드 바론 가온 와이너 디 크니얼 남작이었다. 그리고 신성 시드그람 제국에 유명한 에이스 파일 럿이 있는데 라혼의 아버지 소드 마스터, 로카데 차이저 반 하이슬란드 백 작이었다. 만일 레드 바론과 하이슬란드 백작이 서로 싸우게 된다면 당연히 오러 블레이드를 다루는 소드 마스터인 하이슬란드 백작의 승리다. 하지만 탈로스를 타고 맞붙었을 경우 서도 동급이라는 것을 가정해도 레드 바론이 한수 위일 것이다. 하이슬란드 백작은 탈로스를 운용하는 훈련을 많이 하 지 못했기에 미숙할 수밖에 없고, 반면에 레드 바론은 전장을 전전하며 항 상 자신의 타이탄급 헬리오스(Helios)를 운영해왔기 때문에 마스터 오브 탈 로스(Master of Talos)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이유로 라혼은 레기온의 파일럿 나이트들을 지난 6일간 달달볶아대면 서 자신의 탈로스에 익숙해지도록 훈련을 시켰다. 훈련은 라혼이 유벤트 기 사단에 있으면서 공부한 선진적인 군사학 이론을 바탕으로 한 탈로스 운영 전술을 그대로 시현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뭐하는 거야? 트라킨, 죠슈아의 백업이 무력화 되었잖아! 좀 더 강하게 치란 말이야!” -알았어! “죠슈아,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 주공은 네가 아니야. 너는 적의 가장 강 력한 탈로스를 막는 게 임무잖아! 혼자 설치면 어쩌자는 거야!” -미안, 웃! 그리고 라혼은 레기온의 탈로스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각기 마다 마법통 신이 가능하게 해두었다. 콘라드 성의 그렇게 좁다고 할 수 없는 연변장은 거대한 탈로스 6기가 각 3기씩 세력을 이루어 교전하고 있었다. 이것은 좁 은 공간에서 적 탈로스와 전투를 상정한 훈련이었다. 3기의 탈로스를 1개 유닛(unit, 단위)로 삼고 3유닛 9기의 전력이 1개 대대로 구성되고 현 레기 온의 기갑사단 35기 탈로스 전력은 9유닛 3대대 27기에 +8기 친위대대겸 예 비 탈로스로 편성했다. 편성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탈로스를 이용한 기갑 전술의 기본 단위인 3기의 탈로스로 이루어진 ‘유닛(unit)’을 활용하고 그것을 확대해가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조금 부서져도 상과 없어.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것이 부담스러우면 검게 그을려 주겠다.” -그것만은 참아줘, 라혼 대장! “그러니까, 확실히 하란 말이야! 어차피 그냥 얻은 철인형이다. 흠집이 조 금 나는 것을 무서워하지 말란 말이야!” 탈로스는 이 시대 무력의 상징이자 그 자체였다. 무력이 곧 권력이 되고, 어느 정도 권력을 가진 자만이 영화를 누릴 수 있는 시대이므로 탈로스는 더욱더 귀중할 수밖에 없었다. 1기의 탈로스가 파기되면 그만큼 권력이 줄 어들기 때문이었다. 지금 탈로스는 구하고자해서 구할 수 있거나 만들고자 해서 만들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탈로스의 심장이자 핵심인 엑스시온은 오직 드워프들만이 만들 수 있었고, 탈로스를 제작하려면 일단 탈로스 전문 마법사의 도움을 받아가며 엑스시온 을 중심으로 장갑을 덮씌워야 했다. 그러나 그러한 여건이 허용되는 곳은 오직 안젤리아드의 마법사의 탑뿐이었다. 그들의 시조는 ‘반왕 이그라혼’ 의 2째 아내인 9서클 마법사 그랜드 메이지 피오레나의 양자와 양녀들이었 고 반왕과 동맹관계에 있었던 드워프 산맥의 드워프들과 교류하고 있었다. 마법사의 탑은 그랜드 메이지 피오레나의 제자라고 알려진 고대 한스 왕국 의 궁정마법사 대마법사 바우어가 야만왕 그란을 파괴할 때 해체되어 기간 테스 군단의 장군들에 의해 종군 마법사로 전장을 쫒아 다니며 혹사 당하는 마법사의 탑 출신의 마법사들을 안젤리아드에 모음으로써 이룩된 단 체였다. 마법사의 탑은 어느 왕국이나 제국에 속하지 않은 초국가 단체였고 탈로스를 제작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기도하여 각국에선 자국의 심장부인 수도에 마법사의 탑의 지부라고 할 수 있는 마법사 길드를 유치하고 있었 다. 모든 마법사가 마법사의 탑에 속한 것은 아니지만 탈로스 전문 마법사 은 전부 그곳 출신이었다. 마법사란 족속은 대부분은 마법연구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는 존재들이 었고, 그들의 수입원이랄 수 있는 탈로스 제작은 관심 있는 몇몇 마법사들 에 의해서만 1년에 고작 서너 기를 만드는 것이 전부였고 그것들은 엄청난 재화와 마법실험에 사용되는 마나물질들과 교환되어 마법사의 탑의 주요수 입원이 되었다. 그리고 마법사의 탑의 출신은 시드그람 대륙 전역에 걸쳐 있음으로 모두들 자기가 고향의 이익을 대변―그다지 열심이진 않지만……. ―하여 의도하진 않았지만 각국에 골고루 탈로스를 판매함으로써 힘의 균형 을 유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탈로스가 많이 제작되지 않는 이유는 또 있었는데 탈로스의 심장인 엑스시온을 만드는 핵심 물질인 ‘마나 스톤(Mana stone)’이 구하기가 쉽 지 않았다는 것도 큰 이유 중 하나였다. 마나스톤은 마법사, 아니 특히 연 금술사들에게 영원한 연구에 대상으로 만인 누군가 2개 이상의 마나스톤을 보유하고 있다면 그는 마법사의 탑에 1개의 마나스톤을 주고 나머지 한 개 로 그는 타이탄급 탈로스를 갖게 될 것이다. 또한 탈로스는 한번망가지면 수리하는 것이 불가능 했다. 탈로스에 걸린 마 법주문으로 어느 정도 파손은 자체적인 수리가 되지만 한계이상이 되면 그 대로 작동 불능이 되어 ‘죽은’ 상태가 될 수 있었다. 그런 귀중한 탈로스를 이처럼 험하게 다루는 위인은 오직 라혼뿐이었다. 대 부분의 귀족들은 평상시엔 자기가 사는 성의 지하 깊숙한 곳에 고이고이 모 셔두고 쓸 일이 생기면 꺼내 전장에서야 탈로스에 탑승했다. 에이스 파일럿 이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빠르게 탈로스에 적응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라 혼은 미숙한 상태의 전력을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전력을 쓰고 싶지 않았다. 훈련 때문에 서너 기의 탈로스가 부서지더라도 모두가 숙련된 상태 가 되기를 바랐다. *** “세상에!” -쿵쾅, 쿵쾅, 쿵쾅, 쿵쾅, 쿵쾅……. -끼이익~! 라혼의 손에 파괴된 10기의 기게스를 제외한 유일한 기갑전력인 키클로급 아로게스(Arges)를 가지고 보름 만에 콘라드 성에 도착한 야펀은 연병장에 서 진짜 피 튀기는 전투를 방불케 하는 기갑전이 한창인 것을 보고 입이 쩍 벌어졌다. 이곳으로 오는 가운데 미리 소식은 들었지만 중급 키클로급 이 상의 탈로스 수십 기가 움직이는 모습을 실제로 보니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 로 대단했다. “호오! 대단하구려. 탈로스끼리 기갑전 훈련이라니……. 길고마 제국의 기 갑전 훈련보다 강도가 훨씬 높구려.” 야펀은 자신이 어렵사리 초빙한 종군 마법사의 감탄성도 들리지 않았다. 한 마디로 압도당해 버린 것이다. 비록 기갑사령관이란 직책으로 사실상 레기 온 기사단을 이끈 그였지만 아직 젊고 미숙했고 전쟁에 참전하는 것도 이번 이 처음이었다. 서로 탈로스 전력을 아끼느라 잘하지는 않지만 전쟁의 승패 를 좌우하는 대규모 기갑전은 노련한 베테랑이라 할지라도 압도당하기 마련 이었다. “야펀 사령관!” “예?” “계속 여기서 있을 것이 아니라면 저쪽으로 갑시다.” 야펀은 위저드 타르코 아르스 코펜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한창 훈련을 진행 중인 라혼이 있는 발코니로 갔다. 그곳은 콘라드 성의 연병장 전체가 한눈 에 내려다보이는 곳이기도 했다. “뭐하는 거야? 바커, 자꾸 그런 식을 몸을 사리면 탈로스 압수해 버린다! ” -죄, 죄송합니다. 대장! “놀랍군! 통신마법구인가?” 라혼은 야펀과 수염을 깎지 않은 초로의 인물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제스처 를 하고 전체 통신을 열어 지시했다. “전원 달리기다! 성 주변으로 5바퀴 돌고 와!” -옛! 그러자 라혼의 전면에 있는 수정 형태의 마법통신구에서 수십 명의 복명복 창소리가 터졌다. 그런 것을 목격한 위저드 코펜은 두 눈이 휘둥그레 해지 며 다가와 투명한 수정에 새겨진 미세한 마법진을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 다. “마법사님!” “아! 미안하게 되었네. 야펀은 최고사령관인 라혼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엄한 것에 한눈을 파는 종 군 마법사를 질책어린 어조로 불렀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요. 야펀 선배.” “첨은 본대를 따라 잡으려고 계획했었지. 그런데 네가 7일 만에 행군을 끝 마친 바람애 더욱 무리를 했다고…….” “그렇습니까? 그런데 이분은…….” “위저드 코펜, 내가 종군 마법사로 모셔왔어.” 라혼은 마음은 여전히 자신이 만든 통신구에 가있는 그에게 인사했다. “라혼 가이우스 세나데온 차이저, 레기온 사령관입니다.” “타르코 아르스 코펜입니다. 6서클 유저이며, 탈로스 스킬 보유자입니다. ” “그러시군요.” 라혼은 그가 이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를 둘러싼 마나 량을 보고 그 정도 는 될 것이라는 짐작했었다. 그리고 조금 놀란 표정으로 야펀을 보았다. 확 실히 그란 3공작은 역량을 대단했다. 6서클 마법사는 대마법사라는 칭호를 받는 존재였다. 그러한 존재를 종군 마법사로 고용하는 것은 아무리 힘 있 는 가문이라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라혼의 입장에선 그다지 도 움이 되지 않는 존재이긴 했지만……. “그런데 이것은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그전에 수십 기나 되는 탈로스 프 린든 왕국군에게 탈취하셨다고 했는데 도대체 무슨 방법을 쓰신 겁니까? 그 리고 1대 1 통신마법이 아닌 다대 다의 다중 마법통신은…….” “미안하지만 지금 물으신 것은 전부가 기밀사항입니다. 위저드 코펜!” 게다가 오히려 호기심 많은 이 대마법사 때문에 라혼은 골치가 아파왔다. 탈로스(Talos) *** -쾅! “비겁하게 도둑질을 한 주제에 순순히 물러가라고 협박을 해?” 단, 하룻밤 새 남부군단 전체 전력을 말 그대로 강탈당한 그라이안 후작은 사우스포트에서 철수를 강권하는 서신을 받고 불같이 진노 했다. “후작 각하, 폐하께서 북부군단의 전력일부를 우리 쪽에 돌린다고는 하지 만 시간이 너무 촉박합니다. 못해도 보름은 더 기다려야 도착할 텐데……. ” 탈로스가 탈취당한 날에서 3일 정도 지난 후 제국 레기온 기사단을 이끄는 라혼 자작으로 부터 친서가 도착했다. 내용은 순순히 물러나 줄 것을 종용 하는 것이었다. 물론 처음엔 사실상 항복권고를 뜻하는 친서를 갈기갈기 찢 어버리는 것으로 의지를 표명했다. 하지만 신성 시드그람 제국 황제의 후계 자라는 라혼 자작은 3일 마다 비슷한 내용의 친서를 계속 보내왔다. 그리고 그렇게 2주가 흐르자 친서의 내용이 다소 강경한 협박의 문구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미 제국이 모집한 용병 2천이 우리가 보는 앞에서 상륙했습니다. 이로 써 그 라혼 자작이라는 애송이의 보병전력은 6천에 이르고 있습니다.” “크윽! 애송이 놈.” 말로는 ‘애송이’라 폄하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지금 사우스포트 도시 방 벽 밖에 주둔한 라혼 자작은 사우스포트 선착장에서 빤히 보이는 해안에다 배로 실어온 병사들을 상륙시켰다. 그라이안 후작은 바로 눈앞에서 적 전력 이 상승하는 모습을 아무런 손을 쓰지 못한 채 지켜만 보아야 했다. 전쟁이 시작되거나 전운이 감도는 시점에서 용병을 모집하는 곳은 수도이거나 미 처 예상할 수 없는 곳이어야 했다. 그래야 모집된 병사들 사이에 첩자가 숨 어들 여지를 줄일 수 있었다. 그런데 전쟁을 선포한지 한 달이 체 되지 않 은 시점에서 2천이나 되는 병사를 모았다는 것은 미리부터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반증이며 또한 절대지휘권을 가지고 전장에서 황제를 대신한다는 자의 역량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했다. “각하! 사우스포트의 도시 방벽과 시가전을 유도한다면 얼마간 시간을 끌 수도 있습니다. 폐하께서 보내주신 기갑전력이 도착할 때까지 어떻게든 버 티면…….” “그 불한당 같은 놈들이 도시를 부수려고 작정하면?” “설마 그렀게까지야. 하겠습니까? 사우스포트에서 나오는 세금 수입은 만 만치 않은데…….” “부서진 건물은 다시 지으면 그만이고 사람들이 떠나면 모으면 돼! 잊었나 ? 그 애송이 놈은 웬만한 도시와 비견되는 거리를 모두 부수고 2년 만에 전 혀 다른 모습으로 만들었다는 존재라는 것을?” “하지만 각하 그거야 그냥 하는 말이겠지요. 빈민굴을 밀어버리고 길하나 만드는 것이야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라이안 후작은 전세가 한 수에 역전되는 그러한 일을 당하고도 상대의 역 량을 과소평가하는 참모진과 부장들을 가진 자신이 너무 한심스러웠다. 입 에 ‘애송이’, ‘도적’, ‘불한당’을 달고 있었지만 내일 아침 해가 뜰 때 공격을 시작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낸 존재는 절대 그러한 평가를 받아 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애송이란 말 자체에 현혹된 이들이 진짜 애송이 였다. “그가 그란에서 무엇을 건설했건 상관없네. 하지만 탈로스까지 토목공사에 동원하는 배짱을 가졌다는 것과 그것으로 인해 도시를 파괴하는데 거부감 이 덜할 것이라는 것이야. 그의 입장에선 지금 최전선이랄 수 있는 도시보 다 안정적인 항구를 원한다는 거야. 내가 그의 입장이라면 전투를 핑계로 이곳에 쓸데없는 건물을 모조리 부수고 야적장을 만들겠네. 이것을 그가 생 각하지 않을 리 없단 말이야!” “…….” 그리고 그라이안 후작은 더 이상 프린스 그란인 라혼 자작을 애송이라 칭하 지 않았다. 방법을 철수뿐이었지만 누구도 철수를 주장하는 이가 없는 가운 데 결론이 나지 않는 회의는 하염없이 길어져만 갔다. 그때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회의실에 젊은 기사하나가 뛰어들며 말했다. “사령관 각하, 제국군으로부터 서신입니다.” “…….” 그라이안 후작은 회의적인 시선으로 화살에 매달러 온 것이 분명한 두루마 리 편지를 폈다. <그라이안 후작에게……. 야전침대가 자꾸 등에 배기는 군. 귀관이 괜찮다면 지금 공격해도 되겠는가 ? 아무래도 쓸데없는 회의만을 계속 하고 있을 것 같아 제안하는 바이네. 귀관의 군대는 아침 해가 밝았을 때보다 밤에 싸우는 것이 유리하겠지? 나 도 내일 아침에 공격하겠다는 당초의 약속을 어긴 입장이니 그 정도는 감내 하겠네. 참고로 말해 두네만 나는 군자금이 풍부하네. 그럼으로 귀관의 생 명을 보장하지 못하네. 귀관도 알다시피 탈로스는 시야가 무척 좁으니 알아 서 피하시게……. 답장은 하지 않아도 되네. 다만 한 시간 정도는 기다려주 지. -레기온 사령관, 신성 시드그람 제국 프린스 그란, 라혼 가이우스 세나데온 차이저 자작> “하하하…….” 그라이안 후작은 친서의 내용을 보고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각하, 제국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게다가 탈로스들이 일제히 곧 공격하겠다며 소리치는 바람에 병사들의 동요하고 있습니다.” 그라이안 후작은 편지를 작전회의에 참석한 남작이상의 작위를 가진 기사들 에게 보여주며 물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소?” “걸어온 싸움피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동의하는 거요?” “예!” 그라이안 후작은 참모로 참석한 자들의 강경한 태도에 내심 한숨을 내쉬며 화답하는 편지를 썼다. *** “결국, 전쟁은 길어지겠군.” 라혼은 강경하고 모욕적인 단어로 점철되어있는 답서를 보며 고개를 내저었 다. “짧게 끝내려고 했는데 잘되지 않는군.” 라혼은 이미 프린든 국왕 슘터가 전쟁의지를 꺾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전체 기갑전력을 상실한 남부군단 사령관 그라이안 후작 에게 다소 강경한 협박을 시도 했지만 그들이 보낸 답변은 무척이나 실망스 러운 것이었다. 위로는 왕부터 일선 지휘관까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군대라면 프린든 왕국 내에 화평론을 펴는 존재가 없거나 있어도 미미하다 는 말이 되었다. “레곤 공작이란 자는 그나마 대화를 시도해 볼만한데 그쪽은 너무 거물이 라…….” 그렇다. 제국, 아니 그란에서 프린스 그란인 라혼이 나름대로 영향력을 가 지고 있었지만 그란 밖에선 그저 갓 스물 넘은 애송이나 다름없었다. 그리 고 겉으로 들어난 라혼의 행적은 쓸데없는 일에 앞뒤 가리지 않고 황금을 뿌리며 나대는 존재일 뿐이었다. 제국의 귀족들이야, 황제의 후계자이니 나 름대로 성향이나 역량들을 파악하고 있어도 외국인 프린든의 입장에선 프린 스 그란은 왕국의 공작과 맞상대할 존재로 보지 않았다. 트라얀 공작이 나 선다면 레곤 공작이 접촉을 시도할지도 모르나 트라얀 공작의 성향자체가 무슨 일이든 끝장을 봐야하는 성격이니 라혼이 원하는 원만한 해결을 도출 해내길 기대하는 것은 힘들었다. “대장, 시간 다됐어!” “그래? 그럼 해산시켜서 편히 쉬게 해. 야간에 기습이 있을지 모르니까 경 계 확실히 하고 기습에 대비하도록 해.” “공격 안 해?” “어차피 전세는 우리에게 유리해. 그런데 굳이 피해를 감수하며 어려운 싸 움을 할 필요가 없지 않아?” 라혼의 공격준비가 끝났음을 알리러 온 죠슈아에게 그렇게 지시하고는 그 자리에서 그라이안 후작에게 보낼 편지를 써서 죠슈아에게 건네주었다. <그라이안 후작에게……. 역시 태양이 지면 휴식을 취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네. 그래서 오늘 저녁 공격을 취소하겠네. 다행히 푹신한 침대가 도착해서 오늘은 그것으로 하룻 밤 정도는 견뎌보려 하네.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군. 그럼 당초 약속대로 내 일 아침에 보세. -레기온 사령관, 신성 시드그람 제국 프린스 그란, 라혼 가이우스 세나데온 차이저 자작> *** -쾅!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애송이를 보았나! 감히 날 놀리다니…….” 그라이안 후작은 진정으로 분노했다. 이제까지는 부장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의식적인 분노였지만 이번엔 달랐다. 하루의 시간을 주고 다시 결단을 종 용하는 조기 개전을 타진하는 친서에 이번에 그것을 취소하는 편지는 ‘너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니 내가 마음 내킬 때 언제든 처리하겠다.’ 라는 뜻이었다. 모욕도 이만한 모욕이 또 없었다. 게다가 위압적이고 사람 을 깔보는 듯한 어조는 그라이안 후작을 더욱 분노케 했다. “테틀베리 경!” “예, 각하.” “야간 기습을 준비하시오.” “하지만 저들이 대비를 하고 있다면…….” 그라이안 후작은 테틀베리 남작의 걱정스런 말에 왈칵 짜증이 치밀어 오르 는 것을 느꼈지만 얼굴에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으며 설명했다. “어차피 곧 전투를 대비해 긴장감이 한껏 높아진 병사들이오. 그 흥분과 초초감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 성질의 것이오. 그것은 공격을 준비하던 제국 군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오. 어차피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채 피곤 에 지친 상태에서 전투를 치를 바에야 기습이라도 하는 것이 낫지 않겠소? ” “과연 그렇군요. 알았습니다. 곧 준비하겠습니다. 사령관 각하!” *** 그날 밤이 지나고 자정이 넘어서고 서너 시간 후면 아침 해가 떠오를 새벽 무렵 테틀베리 남작이 이끄는 결사대가 제국군 배후에서 공격신호를 기다렸 다. 사우스포트를 빠져나와 밤을 새워 제국군 진영을 크게 돌아 약속했던 지점에 도착한 그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모르는 듯 조용한 제국군 진영의 동태를 살폈다. “역시 전쟁이 무엇인지 모르는 애송이였군.” “테틀베리 경, 돌격준비가 끝났습니다.” “좋아! 시작하자. 전진에 뛰어들자마자 일단 불부터 질러라 그럼 그라이안 후작 각하가 그것을 신호로 대응할 것이다.” “예!” 테틀베리 남작은 어둠속에서 도열한 정예기병 1천을 둘러보며 곧 있을 피가 낭자할 살육의 공포를 잊었다. 그리고 한쪽 날이 얇게 선 묵직한 기병대용 군도를 뽑아들었다. 완만하게 휘어진 세이버(saber)이지만 찌르는 공격에 유용한 무기였다. 테틀베리 남작은 묵직한 세이버의 익숙한 손잡이 감촉을 음미하면서 기병대를 이끌고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에 어느 정 도 속도가 붙자 세이버를 앞으로 휘두르며 명령했다. “기병대 돌격~!” -돌격!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맹렬한 기세로 적군 진영을 목표로 돌격을 감행하는 기병들의 기세는 사뭇 대단했다. 그러나 겨우 1천기의 기마로 만반에 준비를 갖춘 35기의 탈로스 와 6천 병력이 있는 진영을 치는 것은 그야 말로 자살 행위였다. -화르르르…………. 테틀베리 남작은 1천기의 기병대로 이루어진 결사대의 선두가 제국군 진영 에 다다를 무렵 적진에서 불꽃이 피워 오르자 본능적으로 일이 잘못되었음 을 알았다. “탈로스다!” 그리고 돌진하는 결사대의 좌우에서 갑자기 시커먼 덩어리가 일어서더니 기 병들을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시커먼 탈로스가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고 결사대의 진형을 흩트리고 뒤이어 제국군 기병대가 역으로 덮쳐오기 시작했 다. 진형을 정비해 맞서 싸우며 크게 뒤지지 않는 전력이었지만 프린든의 기병들은 이미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칠 생각도 못한 채 공황에 빠져 비명 같은 고함만 질러댔다. “테틀베리 남작님 실패입니다. 퇴각을 명령해주십시오.” “퇴각! 퇴각하라!” -퇴각! -퇴각이다! 전군 퇴각! 그러자 프린든의 결사대 기병들은 일제히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쫒지 마라! 레기온은 전열을 정비하고 적의 주공에 대비한다. 긴장 을 풀지 마라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탈로스(Talos) 레기온 기사단와 기병대를 지휘하는 그래험은 신속하게 전열을 정비하고 다 음 전투에 대비했다. 프린든왕국군의 움직임은 이미 라혼에게 포착되어 있 었다. 라혼은 소규모 정찰대를 편성해 그들에게 피아링을 주어 성 밖으로 빠져나온 1천기의 기병을 추적하고 있었다. 사실 라혼은 의식을 개방한 상 태여서 사우스포트 내부의 움직임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것을 자신의 진정한 정체를 하는 메사리프나 그래험 외에 다른 존재들에게 납득 시키는 것은 힘들어 번거로운 요식행위를 한 것이었다. 이는 앞으로 모든 전장을 라혼이 쫓아다닐 수 없기에 부관이랄 수 있는 죠슈아, 트라킨, 린 등의 기사들에게 피아링을 이용한 정찰의 효용성과 본을 보이기 위해 다소 번거로운 작업을 한 것이었다. 아무튼 거의 실시간으로 적의 움직임을 파악한 라혼은 검게 도색된 2기의 아로게스를 공격이 예상되는 지점에 엎 드리게 했다. 새벽으로 향해가는 깊은 밤의 어둠은 검게 칠해진 아로게스를 숨겨주었고 적은 탈로스의 출현만으로 전의를 상실한 채 물러갔다. “계속 소란스럽게 소릴 질러! 우리는 지금 의외의 기습을 허용한 상태다. 어이 거기 빨리 빨리 하지 못해!” 보병대를 지휘하게 된 아돌프 멘델은 병사들에게 비명성을 지르게 하고 일 부에겐 횃불을 들고 진내를 뛰게 했다. “아돌프, 천막 몇 개더 부수고 불을 질러!” “젠장, 살다살다 아군 진영에 불을 지르는 일을 할 줄이야! 불을 질러!” “옛!” 연출된 혼란이지만 역시 어지럽게 일을 벌이자 연기하는 병사들도 흥분을 했는지 두서없이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야! 이 빌어먹을 놈아! 거긴 보급창이잖아! 거기다 불을 놓으면 어떻게! 너희들은 뭐해 빨리 안 꺼?” “하지만 작전이…….” “이런 꼴통들 그렇다고 내일 부터 쫄쫄 굶을래? 어서 빨리 기어 나오지 못 해!” 멀리서 그러한 혼란한 모습을 지켜본 프린든 왕국의 남부군단 사령관 그라 이안 후작은 기습작전이 성공했다고 믿고 공격을 지시했다. “탈로스들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테틀베리 경이 제몫을 다해주고 있습니다 .” “역시 애송이였어. 모두 나가 제국의 코흘리개의 볼기를 쳐서 보낸다. 전 군 공격!” -전군 돌격! -와아~! 사우스포트의 성문이 열리고 기사단과 기병을 필두로 남부군단 전체 전력이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전하, 프린든 군이 사우스포트를 빠져나왔습니다.” “그래험, 너구리가 둥지에서 나왔다. 우회해서 적 보병을 쳐! 곧 탈로스 2 유닛을 보내주겠다.” -알았다. “%$^!% ㄸ^#$^#!$^^%&@!#$&(린, 항구 선착장을 장악해라!)” -#$^!$(알겠습니다. 형님!) 피아링으로 각 지점에 대기하고 있던 전력에게 쉴 새 없이 지시가 떨어졌다 . “야펀, 전면은 선배의 탈로스 전력이 막고 2유닛을 그래험에게 보내줘.” -알았어. 피아링을 이용한 유기적인 명령에 레기온의 전력 몇 배의 상승효과를 가져 왔다. 미리예상하고 약속된 것에 맞춰 움직여 줘야 하는 일도 피아링이면 실시간의 판단으로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주군, 흑태자의 명이 떨어진 겁니까?” “그렇다네. 지금 즉시 항구 선착장을 장악하라는 명이 떨어졌네. 어서가세 !” “충! 노를 저어라! 선착장에 적병이 남아있을지 모른다. 신속하게 하되 가 급적 소리는 내지 말아야 할 것이야!” 그렇게 2각(30분)쯤 노를 저었을까, 멀리서 철인형이 움직이는 육중한 발소 리와 간담을 아리게 하는 고함소리가 들려왔지만 양인들의 이국적인 도시의 항구는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egyrenk renov niueafcnyeba(적이다! 제국놈들이 몰려온다!)” -땡땡땡땡땡땡땡땡땡…………. “이런, 들킨 모양이군.” 린은 지난 한 달 동안 양인들의 말을 배워서 저들이 뭐라고 소리치는지 어 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알아들을 수 없어도 이런 상황에서 뭐라고 하 는지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었을 테지만……. “흐음? 모여드는 적병의 수가 그러게 많지 않은걸?” 린은 공력을 눈으로 집중해 어둠속을 뚫고 종소리에 모여드는 적 병력이 의 외로 적다는 것을 알았다. -촤아~! 그때 무언가가 물속으로 떨어지며 커다란 물기둥을 만들고 비산한 물방울이 자신의 수하들이 타고 있는 조각배에 비처럼 떨어졌다. “당황하지마라! 발석차다. 웬만해서 맞지 않는다. 어서 있는 힘을 다해 노 를 저어라!” 은창 장조는 양인들과 전투에 동요하는 수하들을 진정시키고 주군인 대황자 용호린에게 말했다. “발석차를 이용하는 것을 보니 양인들은 화석포가 없는 모양입니다.” “그렇군. 하지만 아무리 눈먼 발석차이나 소발에 쥐를 잡을 수도 있는 법. 나 먼저 가겠네. 천천히 따라 오시게…….” -휘익! “헉! 주군! 이런……. 뭐하는 거냐? 주군의 몸에 생채기 하나라도 나면 네 놈들 제명에 죽지 못하리라! 어서 노를 저어라!” 장조는 주군이 몸을 날려 도가비전의 등평도수(登萍渡水)로 물 위를 나는 듯 달려가자 안달하며 수하들을 닦달했다. “gnjnvkwbbv wnciunalialrew(마법사다! 궁수대 어서 마법사를 쏴!)” -핑 피빙~! “하앗~!”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뭔가 보았다는 병사의 말에 혹시나 하여 궁수대를 모 으고 시커먼 바다를 향해 돌을 날렸다. 그런데 어둠속에서 물위를 나는 존 재를 발견한 노련한 백인장은 궁수들에게 사격을 명령했다. 그러나 상대는 배위에서 펄떡이는 물고기 같은 움직임으로 환상처럼 서른 개가 넘는 석궁 화살을 피해냈다. 바로 황금 잉어가 엄청난 파도를 넘는다는 금리도천파(金 鯉倒千波)의 수법이었다. “팔방풍우(八方風雨)!” “으악~!” 일시에 8개 방위를 점하고 쳐내는 팔방풍우 초식은 누구나 흉내를 내는 초 식이었지만 아무나 린과 같은 위력을 내지는 못했다. “이럴 수가! 소드 마스터?” 10년 전에도 제국와 전쟁에 참전한 경험이 있는 백인장은 운도 없게 지금 하이슬란드 백작의 부대를 습격하는 작전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거 기서 시퍼런 오러 블레이드로 아군 기사를 방패와 갑옷을 통째로 베는 모습 을 목격했었다. 그리고 지금 몸을 8개로 분신하여 각각 오러 블레이드를 먹 음은 검으로 거의 쉰 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오러 블 레이드에 베어 넘겨지는 모습은 공포를 넘어 환상이었다. *** -쿵쾅, 쿵쾅, 쿵쾅, 쿵쾅, 쿵쾅, 쿵쾅…………. “함정이었어, 초보적인 도발에 당하다니…….” 그라이안 후작은 자신이 애송이의 도발에 당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얼마 전까지 아군 탈로스였던 서른기의 탈로스는 지금 자신의 병사들을 짓 밟고 있었다. 이미 자신의 유일한 기갑전력이었던 20기의 골리앗은 한순간 의 접전으로 사라진지 오래였다. “각하, 제국군 보병들이 전투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아군 전열은 무너져 이미 손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퇴각을 명해주십시오.” “각하! 적 탈로스 2기가 사우스포트를 공략하고 나섰습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나 흘렀는지 몰라도 검던 하들이 회색빛을 띄기 시작 했다. 그리고 점점 더 푸르른 모습으로 변해갈 때 그라이안 후작은 사방에 서 들려오는 단발마의 비명소리와 탈로스의 육중한 대지를 짓이기는 소리와 함께 성문은 부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지휘체계는 무너졌고, 병 사들은 두서없이 섞여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사우스포트까지 공략 당하자 상대의 귀신같은 용병술에 감탄했다. 그리고 사우스포트 성문이 거대한 해 머를 든 탈로스에 의해 깨져나간 것을 본 그라이안 후작은 힘없이 명령을 내렸다. “퇴각한다!” “후퇴! 전군 후퇴하라!” -후퇴! 사령관의 퇴각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프린든 군은 무기를 버리고 사방으 로 흩어졌다. “그래험, 야펀, 적을 추적해라.” -옛! -알았다. “아돌프, 우리는 사우스포트를 점거한다. 린, 너는 그 자리에서 대기해! 모두 훌륭하게 잘해주었다.” 진영에서 마법통신구로 전장을 지휘하던 라혼은 통신구를 종군 마법사인 코 펜에게 넘기고 밖으로 나섰다. 비릿한 혈향이 아침의 상쾌함을 망쳤지만 이 냄새는 승리의 냄새였으므로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았다. “도시를 탈환하라!” 라혼이 말위에 올라 사우스포트 쪽으로 쇄도하고 그 뒤를 십여 명의 호위 기사들이 따랐다. “시드그람 제국 만세!” -시드그람 제국 만세! -요호~오! 총사령관이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나타나자 전장에 있던 병사들이 승리의 환호를 질렀다. 얼핏 봐도 아군에게 그다지 큰 피해 없는 대승이었기 때문 이었다. 탈로스(Talos) 탈로스(Talos) 다크 프린스의 사우스포트 공략전은 단 서른 명의 사망자만 내고 프린든 왕 국 남부군단 전체를 완전히 괴멸시킨 대승으로 끝이 났다. 포로만 해도 6천 에 달하고 프린든 군의 전사자만 4천에 이르렀다. 남부군단 전체병력이 1만 이 조금 넘었으므로, 그것은 도망치는 데 성공한 자가 남부군단 사령관 테 호도르 모리우스 그라이안 후작을 포함한 100명 안팎정도의 극소수라는 뜻 이었다. “대장, 포로로 잡힌 기사들은 모두 143명이야.” “역시 고급인력이군. 그 혼란스런 와중에도 대부분 살아남았잖아?” “그들 중 몇몇이 지금 당장 몸값을 줄 테니 풀어달라고 하는데 어쩌지?” 기사들은 일반 병사완 다르게 몸값을 받아낼 수 있었다. 기사의 신분이나 중요도에 따라 최소 100골드에서 많게는 5천 골드까지 했다. 몸값은 기사 그 자신이 부담하거나 기사의 충성을 받는 영주가 부담하게 되어있는데 지 금의 경우 그들은 왕을 위해 싸웠으므로 몸값을 지불할 의무는 왕이 지게 되어있었다. 그러나 왕에게 알리고, 왕이 몸값을 마련한 후 그것을 여기까 지 보내려면 전쟁 상황에 따라 못해도 3개월에서 수년이 걸릴지도 모를 일 이었다. 하지만 기사 자신이나 그가 속한 가문이 몸값을 낼 수 있다면 굳이 기약 없는 포로생활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에게 펜과 종이를 제공해. 그들의 몸값 책정은 휴즈에게 맡기면 될 거야. 편지의 배달자는 일반 병사들 중에서 뽑으면 될 거야. 그들을 시중들 던 자들이 죽지 않고 잡혔다면 그들을 덤으로 풀어주면 되니까.” “포로들 말이 나와서 말인데, 병사들이 그들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 어서…….” 라혼은 죠슈아의 말에 조금 곤혹스러웠다. 사우스포트 공방전에 참가한 병 사들에게 사우스포트는 본래 제국에 속한 도시라는 예를 들어 어떠한 형태 의 약탈도 금지했다. 그러나 일부 병사들이 혼란한 와중에 도시를 약탈하려 했고 라혼은 그들을 처벌했다. 하지만 전쟁에서 도시가 함락되면 약탈을 하여 챙기는 부수입을 챙기는 것은 승자로써 당연한 권리였으므로 병사들에 게 라혼의 처사는 부당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고 항복한 프린든 병사들에 대한 권리까지 무시하는 것 또한 부당한 것이었다. 포로들은 노예로써 팔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라혼이 그들의 사적인 재산권까 지 손댄다는 불만인 것이다. “대장, 그들의 주장도 일리가 있어. 포로들 정도야 어찌되던 상관없지 않 아? 자그마치 6천명이나 되는 포로들을 모두 노예로 팔수 있는 것도 아니고 …….” “죠슈아, 지금 즉시 전 병력을 소집해.” “병력 전체를?” “그래, 기사부터, 기병대, 일반보병들까지 모두 다!” 라혼은 이 문제를 해결해 두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전쟁에서 승리한 ‘ 다음’ 약탈을 하는 것이야. 상관없지만 한창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일부 나마 약탈에 정신이 팔려있다면 그만큼 전력에 손실이 있는 것이었다. 포로 들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문제도 전투가 벌어지고 끊임없이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입장에서 병사가 개인적으로 소유한 포로는 그저 짐이었다. 해결 방 법이란 노예상인에게 헐값으로 넘기던가. 그냥 죽여서 처리하던가. 둘 중에 하나였다. 이것은 병사들의 통제에 관한 문제였다. 노예를 팔러 나다닌다 거나 혹여 반항하는 포로들 때문에 사고라도 나면 역시 전력에 문제가 생기 기 마련이다. 사우스포트의 도시 중앙광장. 일주일전 유래 없는 승리를 거둔 병사들이 모 여 있었다. 라혼은 모두 6천여 명에 달하는 병사들 앞에 나아가 날카로운 눈으로 그들을 쓸어보았다. “감히, 내게 포로들 소유권을 운운하는 놈이 있다고 들었다.” “……!?” 병사들은 다크 프린스에게 느껴지는 위압감에 흠칫하며 숨소리조차 내지 않 았다. 라혼은 병사들의 영혼을 위협하는 피어(fear)를 피워 올리며 으르렁 대며 말했다. “너희들이 나의 병사가 된 이상 몇 가지 규칙을 지켜야 한다. 첫째 사사로 운 약탈을 금지하고 약탈한 재산은 모두 공평하게 분배된다. 둘째 포로의 처우는 전적으로 내가 결정한다. 셋째 너희들의 목숨은 지금 이 순간부터 내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정한 규칙에 따르지 않는 자는 그 자리에서 처형 하겠다. “…….” 라혼은 병사들에게 다소 불만스런 기색을 읽고는 그들의 마음을 억누른 피 어를 거두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나는 그대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겠다. 만일 내 규 칙이 마음에 들지 않아 따를 수 없다면 떠나라!” 라혼이 제안을 했지만 움직이는 이가 없었다. 그래서 라혼은 한 가지 조건 을 더 추가했다. “지금 떠난다면 각기 2골드를 주겠다. 이는 너희들이 원하는 포로들의 몸 값이다.” 그러자 광장이 조금 소란스러워지며 한 병사가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약 백여 명가량의 병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라혼은 자신이 약속 한대로 그들에게 2골드씩 주어 그들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다시 병사들을 보며 말했다. “기한은 내일 이 시간까지다. 무슨 결정을 하든 비난하지 않겠다. 그러나 내일 시한이 종료된 이후로 군대 내에서 사적인 재산권을 주장하는 이나 내 게 불만을 품는 일은 금지다. 5년의 복무기간동안 말이다.” 라혼의 그날 발언으로 대략 1천여 명이 전역을 신청했다. 그들 대부분은 라 혼의 처사에 불만을 품은 것이라기보다 피와 살이 튀기고 사람의 몸이 거대 한 강철거인의 발에 짓이겨지는 충격적인 장면을 견디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 *** “라혼, 그것은 경솔한 짓이었어.” “맞아! 사사로운 약탈을 금지하는 것과 포로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게 하는 것은 좋았지만 그들에게 떠날 빌미를 제공한 것은 아무래도 네 실수야.” 트라킨과 야펀의 말에 라혼은 전역병들에게 주어진 지출 내역서에 서명하고 는 태평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 일은 그쯤 해두자고. 그보다 지금 여기로 참전군을 보내는 귀족들 문 제를 생각해야해!” 그렇다. 지금 라혼은 신성 시드그람 제국 황제로 부터 한시적인 절대지휘권 을 부여받고 있었다. 그러나 신성 시드그람 제국에서 황제의 영향력은 그다 지 대단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서너 기의 탈로스와 기사단, 그리고 나름대로 병사를 모아 사우스포트로 집결하는 중이었다. 대략 한두 달 후면 꽤 많은 병력이 모여들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 전체적인 전력이 상승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라혼이 전력으로 포함하지조차 않는 1만 기간트라 기가급 기게스 만 가지고 있는 자도 독자적인 지휘권을 가지려할 것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자기가 모집한 병사들의 지휘를 자기가 하겠다는 데에야 뭐라 할 수도 없 는 노릇이었지만 말이다. “솔직히 나는 병력이 늘고 전력이 상승하는 것은 좋지만 통제가 되지 않는 그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그래서 말인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그 들을 그란에서 논의 중인 제국연합군에 넘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어때?” “하지만 굳이 우리와 함께하겠다는 자들이 생기면? 우리의 승리는 그만큼 대단한 것이었다고…….” 역량이 입증되고 승리한 군대와 함께하는 것 자체가 기사로써 영광일 수 있 었다. 중요한 공을 세운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는 어디서 누구누구와 함께 싸웠다.’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명예로 운 경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 내 규칙을 따르겠다는 자만 받아들이지 뭐. 모든 지휘권과 결정권 그리고 병사들의 편성권을 내가 갖는다는 것에 동의하면 받아주지.” “그것은 무리한 요구가 아닐까? 자신의 부하를 자신이 직접 지휘하지 못한 다는 것은 귀족으로써 권리를 포기하란 말인데?” “그게 싫다는 자를 굳이 받아들일 이유가 없어.” 트라킨은 라혼이 이미 결정을 내렸음을 알고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사 실 트라킨 자신도 아버지 콘라드 남작이 모아놓은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지 않는 상태였다. 단지 기갑사령관 야펀의 배하에서 기갑대대 지휘관 노릇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럼 다음 안건. 6천명이나 되는 포로들의 처리에 관해서 말인데…….” “대장, 그 빌어먹을 식충이 포로들이야. 노예상인에게 넘겨버리면 그뿐 아 니오?” 라혼이 포로들의 처리문제를 꺼내자 아돌프가 나서서 말했다. 라혼은 그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조금 다른 생각을 했다. 포로들은 어차피 어떻게든 처리 해야 했고 그것을 잘 아는 노예상인들은 값을 깎으려는 모습을 보일 것이다 . 그러나……. “역시 1천명이나 되는 병력이 빠져나간 것은 전력상 타격이 있어서 말인데 포로들 중에서 항복병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떨까?” “글쎄? 하지만 그들은 프린든의 병사였어. 무지렁이 평민들이라 지금은 아 무런 생각이 없겠지만 나중에 배신이라도 하게 되면 치명적일 수가 있잖아. ”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겠지. 일단 포로들에게 5년만 레기온 보조병 으로 복무하면 자유와 합당한 보수를 준다고 설득하면 대부분 승낙할거야. ” “그렇게 되면 그들 대부분이 고향으로 돌아가지는 못 할 텐데? 누가 적국 의 병사로 있었던 자를 받아주겠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은 노예가 되도 마찬가지지. 나중에라도 몸 값을 지불하면 된다지만 그럴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되겠어.” “만에 하나 그들이 문제를 일으키면?” “그럼 어제 내가 선언한 그대로 항복병은 내 개인적으로 책임지지.” 야펀은 라혼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6천명의 포르들은 라혼이 지휘하는 병사가 되었고 그로써 라혼은 3만 기간 트라 키클로급 이상으로만 구성된 35기의 기갑연대를 포함, 104명의 기사, 1230기의 기병대, 총 12000명의 군대를 가지게 되었다. 이처럼 한사람이 단 일한 지휘권을 행사하는 군대는 시드그람 대륙전체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군 대였다. *** 사우스포트를 장악하고 항복병까지 받아들여 병력이 늘은 레기온이 연일 강 도 높은 훈련을 계속할 때 제도 그란은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승리가 전해 지면서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술집에 서너 명만 모여도 그란의 보석인 다 크 프린스가 어떻게 싸우고, 어떻게 승리했다는 말이 오가며 그의 승리에 건배했다. 그러나 제국의 귀족들은 다크 프린스가 서른 기 가량의 탈로스를 보유했다 는 사실에 일말의 불편함을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탈로스를 탈취할 수 있 는 방법에 대해 호기심을 들어내기도 했지만 귀족원은 그 일로 연일 시끄러 웠다. “프린스 그란의 탈로스는 레기온이 확보한 것입니다. 레기온은 황제직속의 군사력이며, 제국귀족원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크 프린스는 이것을 확실히 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것에는 이의가 없습니다만……. 그전에 확실히 해둘 것이 있소. 다크 프린스의 능력이 검증된 이상 그에게 부여한 절대지휘권에 한시적이란 꼬리표를 떼 주고 대 프린든 전쟁의 전권을 맡겨야 할 것이오. 그리고 그 를 다음 황제로 확실히 못을 박아 둘 필요가 있소. 본인은 프린스 그란에게 ‘시드그람’의 칭호와 프리켑스 자격을 부여해줄 것을 요청하는 바이오. ” “말도 안 되는 소리! 고작 한 번의 운 좋은 승리에 황제의 이름과 1인자의 영광을 주잔 말이오?” “흥! 그럼 목숨을 걸고 얻어낸 탈로스를 거저먹겠단 말이오? 그거야 말로 말이 되지 않는 거 아니오.” “다크 프린스가 전쟁에 참전하겠다는 용감하고 숭고한 기사도 정신을 가진 기사들을 거부했소. 우리는 그에 대한 다크 프린스의 해명을 들어야 하오 바로 이 자리에서…….” “아니 전선에 있는 최고지휘관이 그것도 절대지휘권을 가진 자가 결정한 일을 문제 삼겠다는 말이오? 그것이 가당키나 한 말이오? 당신도 알다시피 프린든 국왕은 지금 어떠한 형태의 협상도 거부한 상태요. 지금 그것을 알 고 하는 말이오? 친 갤 공의 인사들은 트라얀 공작이 그란으로 돌아오고 생전의 갤 공의 위 세보다 더한 존재인 다크 프린스가 있자 다시 한 번 결집했다. 다크 프린스 가 그저 평민들의 인기가 아닌 실제적인 힘을 가지게 되자 이제껏 관망하던 귀족들은 일제히 반 다크 프린스 세력을 형성했고, 그들은 어떻게든 하루 가 다르게 달라지는 다크 프린스의 기세를 꺾으려 했다. 그러나 친 다크 프 린스 진영은 프린스 그란인 다크 프린스를 확실하게 제위에 올리려는 움직 임을 노골적으로 추진하니 두 세력이 만나는 귀족의회는 시끄럽기 그지없었 다. 덕분에 대 프린든 제국연합군을 편성하는 문제는 미처 다뤄지지도 못했 다. 그리고 우습게도 친 다크 프린스든 반 다크 프린스든 다크 프린스와 레 기온의 역량을 믿고 있었다. 어차피 방어적입장이라면 반 토막 난 프린든 왕국군쯤은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 나 문제는 그러한 믿음이 프린든 국왕 숨터로부터 오판을 할 여지를 주었다 는 사실이었다. 탈로스(Talos) *** 병사 1인당 통상 700그램의 식량을 소비한다고 하면, 12000명이 하루 동안 먹어치우는 식량은 8400킬로, 8.4톤이나 되었으며 한 달 동안 252톤이나 되 었다. 여기에 기사들과 기병대, 그리고 수레를 끄는 짐말을 포함한 3천 여 필―기사와 기병의 수는 1500여명이지만 전투에서 손실을 감안 여분의 말이 필요하다.―의 말이 먹어치우는 말먹이도 상당했다. 말한 마리가 하루 먹 어치우는 양도 700그램, 3천 여필의 말이 하루에 2.1톤, 한 달이라면 63톤 이나 되었다. 거기다 기사와 병사들의 봉급, 병사들을 훈련시키느라 사우스 포트 주민을 고용한 비용과 그들에게 제공한 식사에 성과급제도 까지 추가 되자 아찔할 정도의 자금이 소요되었다. “젠장, 자기들이 개전하지 않았으니 자금을 댈 수가 없다?” 지난 한 달간은 프린든 군이 사우스포트에 모아두었던 식량을 사용할 수 있 었지만 앞으론 달랐다. 순전히 라혼의 호주머니에서 레기온을 먹이고 입혀 야만 했던 것이다. 이미 전쟁은 벌어졌고, 프린든 국왕은 정전협상에 나오 려하지 않고 있었다. 사우스포트를 장악함에 따라 고스타 연안 항로라는 보 급로를 확실하게 했고 사우스포트와 이어지는 남부 노스포트는 안젤리아드 의 곡창지대와 바로 연결되는 곳이었다. 그러나 제국의 늙은 너구리들은 라 혼에게 군자금을 지원하는 것을 계속 질질 끌고 있었다. “레기온이 귀족원에 속한다고 주장하면서 창설자금도 대지 않은 주제에 유 지자금도 주지 않겠다니, 이건 무슨 심보인지…….” “미안하군. 정말 네게 면목 없다.” “야펀 선배가 무슨 죄가 있다고…….” 빙빙 돌려가면서 말하지만 레기온은 황제와 귀족원에 속한 군사력이라면서 군자금은 주지 않겠다는 그야말로 어이없는 친서를 본 야펀은 라혼에게 사 과했다. 군자금은 댄다면 그것은 대부분 3공작의 주머니에서 나올 것이지만 그들이 자금은 내놓으려 하질 않으니 전선에 나와 있는 최전방의 군대에게 ‘알아서 해결하라’는 내용의 편지밖에 보낼 수 없었다. “어차피 내거니까. 아깝진 않지만 왠지 괘씸하네.” 라혼은 그렇게 투덜거리며 지난 한 달간 사용된 자금의 회계장부를 덮었다. 그리 참모회의에 참석한 기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군자금은 내가 개인적으로 해결하는 것으로 하고. 우선 오늘부터 우리와 함께 싸우게 될 분들을 소개하겠다.” 라혼은 자신이 모은 병사의 지휘권을 포기하고 휘하로 들어오길 자처한 기 사들을 소개했다. “다임러 에두아르 고들리프 자작, 만슈발 다우스 이스터 남작, 베르 호지 슨 렐프 경, 히르턴 알치콘 경, 그리고 다미아니 다마쿠스 다마르 경이다. ” -짝짝짝짝짝………………. 참모회의에 참석한 스무 명 안팎의 기사들은 그들이 소개되자 박수로 환영 을 뜻을 표했다. 그들 모두 10년전 프린든 왕국과 1년 전쟁에 참전한 경험 을 가진 자들로 현재 제국령 동부 프린든의 영주들이거나 영주의 아들들이 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프린든 왕국의 침략은 무시할 수 없는 발등에 떨어 진 불이었다. “고들리프 자작과 이스터 남작은 탈로스 파일럿이기도 하니 기갑사령관 야 펀의 휘하에서 싸우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작위를 가진 그들의 입장에서 공작의 손자일지라도-그것도 그란 3공작의- 작위가 없는 자의 밑에 배속된다는 것은 그다지 탐탁지 않은 일이었다. 하 지만 이러한 것을 감내하기로 한 이상 겉으론 불만을 내보이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럼 회의를 시작하지. 오늘도 특별한 안건은 없고 누가 건의할 사항이 있나?” “제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말해봐, 아돌프 돌격대장.” 레기온의 기사들중에서 직속부하가 가장 많은 아돌프가 손을 들었다. 돌격 대장은 레기온의 보병들을 지휘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한 달간 강도 높은 훈련 때문에 병사들의 피로도가 말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휴식을 주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멘델 경의 말이 옳습니다. 일반 병사는 물론 기사들도 휴식이 필요합니다 .” “좋아! 그 건은 받아들이도록 하지. 하지만 모두에게 경고는 잊지 말도록. 휴가를 나와 사고를 치는 놈은 내가 직접 처벌하겠다. 물론 사고를 친 당 사자와 그의 동료, 그리고 그의 상관까지 각오하는 것이 좋을 거다.” 라혼의 으스스한 경고에 회의에 참석한 기사들은 차라리 부하들에게 휴가를 주지 말까하는 생각까지 했다. 특히 거친 놈들이 많고 필히 사고뭉치가 많 은 돌격대장 아돌프 멘델은 말을 괜히 꺼냈다고 후회했다. “그리고 이왕 병사들에게 휴가를 주기로 한 이상 휴가가 끝난 이후 프린든 의 국경을 넘기로 하지.” “예? 공격입니까?” “그래.” “그냥 여기서 방어를 하는 것이….” “아니 공격이다. 나는 방어하는 것에 그다지 익숙하지 못하다. 그리고 공 격에 앞서 대대적인 재편성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미안하지만 여기모인 귀 관들은 휴가를 포기해라!” 라혼의 결단이 내려진 이상 이것에 반대하면 곧 항명죄였다. 참모들이 자기 의견을 말할 수없는 것은 상당히 불합리한 것이긴 하지만 참모라 할 수 있 는 자들이 라혼의 지혜에 따라오려면 아직은 멀었다. 이 자리에서 라혼만큼 군사전략에 대해 이론이든 실전이든 대등하게 논할 수 있는 자는 없었기 때문에 레기온의 불합리한 독재적 체제는 지금 레기온에게 가장 합리적인 지휘체계이기도 하였다. *** “로사레이 후작의 군대는 어찌되었나?” “예, 폐하. 후작님은 지금 몬테로프 지역까지 진출했습니다. 약 일주일 후 면 사우스포트 앞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폐하! 그 정도면 하루나 이틀 간격으로 몬테코나 항구에서 출발한 코넌트 백작의 해군도 사우스포트 항구를 봉쇄할 수 있습니다. 다크 프린스에게 이렇다 할 해군전력이 없는 이상 그의 주요보급로인 코스타 연안항로을 장 악하는 것은 문제가 없을 겁니다.” “좋아! 바이나 공국의 본격적인 참전문제는 어찌되어 가는 가?” “바이나 공국의 통령 자하로프는 우리들의 참전요구를 받아들이려고 하고 있지만 공의회의 귀족들이 대부분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어 애를 먹고 있는 모양 입니다. 그래서 그는 폐하의 확실한 약속을 원하고 있습니다.” 슘터왕은 기분이 상했음을 숨기지 않고 짜증이 묻어나는 어투로 물었다. “그래서 또 무얼 바라던가?” “예, 무관세 항구 이용권을 바라고 있습니다.” “흥! 항구를 공짜로 이용하겠다고? 아예 몬타나 해의 모든 항구를 거저 달 라고 하지?” 불만을 토로하는 슘터였지만 아쉬는 것은 바이나의 황금 벌레들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었다. 프린든 보호령 바이나 공국은 상인국가로 이익이 없으면 단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 족속들이었다. 자신들에게 충분한 힘이 있으 면서도 군대를 유지하는데 드는 유지비가 아까워 프린든 왕국에 막대한 세 금을 바치며 보호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10년 전 ‘1년 전쟁’으로 프린든 의 영토가 반 토막이 나자 스스로 무장을 하기 시작하여 프린든 국왕 슘터 도 그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시오나 왕국의 에드리언 왕은 전적으로 참전의사를 밝혀왔지만 시 오나 왕국의 늙은 여우 퀸 실로네는 돌아가는 상황을 봐가면서 참전시기를 조절할 것입니다.” 퀸 실로네는 에드리언 왕의 큰 어머니였다. 에드리언은 사적으로 슘터와 4 촌이었지만 퀸 실로네는 시오나 왕국 내에서 친 프린든 세력과 길을 달리하 는 세력의 우두머리다. 그들은 시오나 왕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세력 이었지만 슘터왕에겐 손톱 밑에 가시 같은 존재들이었다. “쳇, 전쟁의 전자도 모르는 할머니가 국정을 좌우하는 자리에 있으니 에드 리언도 참 답답하겠군. 그래서 모두 얼마나 되겠나?” “예, 모두 모여 봐야 전체규모를 알겠지만 지금 프린든 왕국연합군은 6백 여명의 기사와 기병 3천, 보병 3만입니다. 중요한 탈로스 전력은 타이탄급 30여기 키클로급이 60여기 기가스급 70여기입니다.” “…….” 슘터 왕은 그다지 늘지 않은 기갑전력에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10년전 ‘1년 전쟁’이 끝나고 프린든 왕국의 탈로스 전력은 총 80기 정도였다. 그 러나 이번에 프린든 왕국이 동원한 탈로스 전력은 140기에 이르렀다. 그러 나 그중 남부군단의 63기나 되는 탈로스를 모조리 잃자 그 전력공백은 상당 했다. 탈로스끼리 기갑전이 벌어지더라도 탈로스가 파괴되는 경우는 흔치않 았다. 파괴되는 경우라도 부서져 나가는 것은 거의 전부가 기가스급 기게스 나 골리앗정도였다. 그리고 기가스급은 드워프의 도움이 없이도 만들 수 있 는 유일한 탈로스로써 재정이 허락하는 한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었다. 그 러니 제국의 애송이에게 강탈당한 33기의 탈로스는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게다가 탈로스를 탈취할 수 있는 방법이 있고 그가 그것을 아는 유일한 자 이므로 그와 상대할 때는 더욱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프린든 왕국의 입 장에선 다크 프린스라는 존재자체가 ‘저주’에 다름 아니었다. *** “육로로 오는 프린든의 후작 군대는 그렇다 치고, 바다에서 오는 프린든 해군은 치명적인데…….” 라혼은 육로를 통한 보급수송체계가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바닷길이 봉쇄되 면 단기간은 견딜 소 있지만 장기적인 항로봉쇄는 곤란에 빠질 것은 분명했 다. 노스포트와 이어진 코스타 연안항로는 레기온의 보급로인 동시에 사우 스포트 시민의 식량수입로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공세를 취하기로 결정한 지금 그것은 정말 골치 아픈 일이었다. “사령관, 제국에는 해군이 없는 것이오?” “아쉽게도 없다.” “그럼 사우스포트의 가치는 반으로 떨어지는 것 아니오?” 라혼은 고들리프 자작의 지적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어쨌건 이것은 내 실수다. 하지만 사우스포트에는 조선소가 있으니 한 달 정도면 전함 한 두척 정도는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노스포트에서 선원과 해병을 모집하고 안젤리아드 공화국의 전함을 구입해 해군전력을 확충한다.” “안젤리아드 공화국이라……. 안젤리아드 공화국은 어떠한 형태의 전쟁에 도 참전하지 않소. 혹시 그것을 간과한 것이 아니요?” “안젤리아드 공화국이 참전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남아도는 배를 파는 것 뿐이다. 어차피 지금 사우스포트 선착장 창고에 쌓여있는 식량도 안젤리아 드에서 생산된 것이 아닌가?” “하지만 식량을 파는 것과 무기를 파는 것은 다른 것 아니오?” 라혼은 딴죽 거는 태도로 변해가는 고들리프 자작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 다. “안젤리아드 공화국은 프린든 국왕에게도 탈로스를 팔았다. 그에 비하면 우리가 구입하려는 것은 전함 몇 척이다. 그리고 안젤리아드가 전함을 팔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사우스포트에서 전함을 진수 시키면 그만이지 않은가? 코스타 항로의 보급로가 잠시 막힌다하더라도 제 국의 보급선이 뱃길만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 라혼의 반문에 고들리프 자작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빠가 빨리 와야. 어른들이 조금이라도 도와 줄 텐데 말이야!” -와하하하하하……. 라혼의 장난기 서린 말에 좌중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지금 제국군은 최고사 령관인 라혼을 비롯하여 아돌프를 제외하곤 서른을 넘긴 이가 거의 없었다. 그러니 라혼의 농담은 사실이었다. 그란에서 본군이랄 수 있는 제국연합군 이 창설되면 라혼은 방어에 신경 쓰지 않고 공세적 입장을 취할 수 있기 때 문이었다. 바로 그 제국연합군의 최고사령관이 다크 프린스의 친부인 로카 데 차이저 반 하이슬란드 백작이었다. “자자, 고들리프 자작이 지적한 것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니까, 이것을 해결할 방법을 찾아보자구. 누구 의견 없나? 없군. 하루 동안 고민해보고 내일 다시 모이자. 이상!” 라혼은 답이 빤히 정해진 것을 가지고 머리를 맞대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주변 정세전달만하는 것으로 작전회의를 마쳤다. 라혼이 해군을 생각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훨씬 나중에 일이었다. 신성 시드그람 제국과 면한 바다는 서쪽에 몬타나 해와 동쪽의 마에스트 해였다. 마에스트 해는 남쪽에 루파 공화국 북쪽에 게라스 왕국을 두고 있었고, 몬타나는 남 쪽에는 안젤리아드 공화국에 북쪽연안은 프린든 왕국, 바이나 왕국, 바스티 아 연합왕국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프린든 왕국을 제외하고 바이나 공국과 바스티아 연합왕국은 해운국으로 해상무역이 발달한 나라들이었다. 해군을 만들려면 그들과 외교에도 신경을 써야 하기에 황제와 귀족원의 외교적인 노력과 도움 없이 레기온처럼 라혼이 독단적으로 만들어 내기 어려운 것이 었다. “이거 참, 괜히 몸집을 불렸네?” 회의가 끝나고 집무실에서 차를 마시며 한 가지 계획을 떠올린 라혼은 그렇 게 중얼거렸다. 탈로스(Talos) *** 사우스포트에는 해안요새가 있고 그곳에 해안방어용 투석기가 설치되어 있 었다. 그래서 프린든 해군의 항구봉쇄는 투석기 사정거리가 크게 미치지 않 은 곳에 있었다. “여전히 굼뜨군.” “뭐?” “슘터왕 말이야. 바바리안의 피를 이어받은 것치고 움직임이 너무 느려… ….” “하지만 그게 정석이지 확실한 전력을 집결시키고 한꺼번에 몰아붙이는 것 . 정석중 정석이지.” 라혼은 죠슈아의 말에 귀불을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정석이지. 하지만 전투 정직하게 치고 들어오는 것만큼 상대 하기 쉬운 것은 없다.” “뭔가 시작할 생각인가?” 라혼의 말에 메사리프가 물었다. “그래, 조금 무리한 작전이지만 성공하면 이 전쟁을 단기간에 끝낼 수 있 을 거야.” “무슨 작전입니까?” 라혼은 그래험의 물음에 작전회의에 참석한 기사들을 둘러보곤 말했다. “나랑 솔드란 구경갈사람?” “솔드란? 혹시 프린든 왕국의 수도를 말하는 거냐?” “맞아! 야펀 선배 프린든 왕국의 수도다.” “빌어먹을 혹시 또 미친 짓을 하려는 거요? 지금 솔드란에 가봐야 아무것 도 없지 않소?” “후후후, 솔드란엔 프린든의 보물이 있지.” “젠장, 보물이 아무리 많으면 뭐하오? 가져올 수도 없는 것인데? 가만 설 마…?” 아돌프는 뭔가 말하려다.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솔드란엔 ‘프린든의 보물’이라는 애칭을 가진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아돌프 퀸 아레니아스 파브릭스 레곤, 슘터 국왕의 사촌이자 레 곤 공작의 딸이지.” “미쳤군, 미쳤어. 물론 그 여자가 세상의 둘도 없는 미인이라고 소문이 났 긴 하지만 고작 여자하나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려는 거요?” “물론 그것은 개인적인 소망이고, 이 작전의 목적은 전장을 프린든 왕국의 영토로 국한 시키기 위한 것이다. 더불어 수도까지 위협받는 상황에서 아 무리 막무가내 슘터지만 생각이 있다면 신중하게 움직일 거야! 전쟁 수행 의지를 꺾지 않는다 해도 우리가 프린든 왕국의 영토 내를 휘젓고 다니면 그것만으로도 우리에게 이익이다.” “사령관, 하지만 그것은 무리하고 쓸데없는 움직임이잖소?” “쓸데없는 것인지는 두고 보면 알 일이고, 확실히 위험한 일이며, 죽을 고 생이 예정된 작전이다. 그러므로 빠질 사람은 빠져도 좋다. 참고로 죠슈아, 메사리프, 그래험, 린, 트라킨, 아돌프는 선택권이 없다. 물론 야펀 선배 도…….” “나도?” 라혼이 자신의 이름을 거명하자 아돌프는 죽을상을 지었지만 야펀은 반문했 다. 아돌프를 제외한 다섯 명은 라혼과 이래저래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야펀 선배는 여기를 지켜야지. 기갑사령관이잖아!” 기갑사령관은 탈로스의 전략전술적인 중요도를 생각할 때 보통 최고사령관 이 겸한다. 그러나 1만 이상의 대규모 병력을 지휘할 땐 기갑사령관 따로 두는데 그렇게 되면 기갑사령관 부사령관을 겸직하는 위치에 있게 된다. “빠질 사람 없나?” “언제 출발하게 되는 것이오?” “지금 당장 간다.” “…….” 이스터 남작의 질문을 끝으로 작전회의에 참석한 모든 이가 침묵을 지켰다. 라혼은 그런 그들을 두러보곤 야펀에게 물었다. “어느 정도 기갑전력이면 사우스포트를 지킬 수 있겠어?” “단순히 지키는 정도라면 10기?” “좋아 12기 주지. 나머지는 모두 나를 따라 솔드란에 간다. 하루를 주겠다 . 각자 열흘분의 식량을 챙기고 레기온 기사단과 기병대만 출정준비를 하라 !” 라혼의 최종 명령이 떨어지자 사우스포트 병영이 소란스러워지며 출정준비 에 부산하게 움직였다. *** 사우스포트에서 프린든 왕국의 수도 솔드란까지 가는데 건장한 장정의 걸음 으로 열흘정도 걸렸다. 전령이라면 3일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전령이 그란에서 사우스포트까지 열흘을 잡고있는데 ㅁ반해 이미 그 거리를 7일만에 주파한 전력이 있는 레기온들에게 솔드란까지 사흘만에 가 겠다는 라혼의 명령은 무리 없이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한번 결정하면 그대 로 밀어붙이는 최고사령관의 성격을 파악한 레기온들은 불평이나 불만을 품 지 않았다. “우욱~!” -탁탁탁탁! “처음이라 고생이 심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사우스포트를 출발한지 하룻밤을 꼬박 새고 그 다음날 저녁 이젠 유 병해진 다크 프린스의 강행군을 처음 경험한 고들리프 자작은 휴식시간에 땅으로 내려서자마자 시큼한 위액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레기온 기사단의 한 기사가 등을 두드려주며 걱정스레 말을 건넸다. 그 또한 피곤 한 기색이 역력하기는 했지만 눈빛이 살아있는 것이 고들리프에게 매우 인 상적이었다. “이거 면목 없군.” “뭘요. 모두 힘든 것은 마찬가지 아닙니까?” “글쎄…….” 고들리프 자작은 그러한 강행군으로도 멀쩡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다크 프린스를 바라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그런 고들리프에게 등을 두드려준 기 사는 무슨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말했다. “우리끼리 이야기지만 어건 인간이 아닙니다. 마계의 마왕조차 상종 못할 대마왕이지.” “그런가? 나도 그렇게 생각했네.” 고들리프 자작은 기사의 말에 진지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그 말에 동조했다. “여기서 여섯 시간을 쉰 뒤 다시 이동할 것이다. 불은 피우지 마라. 탈로 스를 숨기고 외곽 경비조를 평성해라. 모두 푹 쉬어라! 그리고 작전회의 배 석자들은 모여라!” 라혼의 명령에 하룻밤을 꼬빡 샌 레기온은 그대로 땅바닥에 주저앉으며 저 마다 품속에서 말린 말고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내일부터는 평균속도로 행군해도 될 것 같다.” “빌어먹을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먼. 그런데 지근 우리가 어디쯤 온 거요?” “그걸 가르쳐 주기 위해 작전회의를 소집한 거다.” 라혼은 양피지로 만들어진 지도를 펼친 후 손가락으로 한 지점을 짚으며 말 했다. “우리는 현재 이곳까지 진출해 있다.” “에?” 라혼이 지적한 지점은 솔드란의 북쪽이었다. 이곳이 지도에서 라혼이 손가 락으로 가리킨 그 지점이라면 길을 상당히 잘못 든 셈이었다. 그러나 25기 탈로스와 1백여명의 기사 900여기의 기병대를 프린든 왕국영토 깊숙한 곳까 지 끌고 온 당사자는 여유만만인 표정으로 말했다. “몬타나 반도가 비록 넓은 평야지대지만 장애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우 스포트와 솔그란 사이엔 북쪽에서 남으로 흐르는 거대한 강이 있지. 그리고 그 강의 발원지는 여기 브로스 호수다. 여기서 남쪽으로 한 시간 거리에 바로 그 호수가 있다.” “…….” 프린든 왕국의 수도 솔그란을 품고 있는 지방은 브로스 호수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는 2개의 강 사이에 있는 비옥한 토지에 건설된 도시였다. 그 리고 솔그란의 서쪽을 흐르는 큰 강인 오베른 강의 지류인 소 오베른 강을 중심으로 세워져 있었다. 즉 도시 전체가 강을 해자삼아 건설된 확고한 방 어체계를 지니고 있었다. “모두 알다시피 솔그란을 동서에 흐르는 강의 다리가 수도를 방위하는 방 어거점이다. 방어거점이 뚫리면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나무로 만든 다리를 불태울 거야. 진입로는 오직 북쪽뿐이지 그래서 프린든 왕국은 브로스 호수 에 여러 개의 방어요새를 만들어 놨다.” “흐음, 엘바 요새…….” “그렇다. 많은 요새가 솔그란의 북쪽을 지키고 있지만 여기 엘바 요새는 공략하기가 무척 까다롭지 아무리 무적의 탈로스라도 여기를 치기는 어렸다 .” 엘바 요새는 엘바언덕에 세워진 망루요새로 ‘솔그란의 빗장’이라는 별명 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 무리를 하기로 했다. 엘바는 여기 있는 우리만으로 친 다.” “뭐요? 이런 미친…….” “그다지 미친 소린 아니다. 나이트 아돌프!” “아니 여기 있는 숫자래 보아, 8명인데…….” “미안하지만 7명이다. 여기 고들리프 자작은 레기온을 지휘해야 하니까?” “8명이든, 7명이든 요새엔 못해도 1천명의 수비명이 있을 텐데…….” “바로 그거다. 요새엔 1천명밖에 없다. 아니 그보다 적을지도 모르지 수도 를 지키는 탈로스 전력까지 빼낸 슘터 왕이니까 여기에 1천명을 고스란히 묵혀 두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까, 많아야 1천이고 어쩌면 그보다 적을 수도 있다는 말이로군.” 라혼은 트라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품속에서 엘바 요새의 지형지물을 기록한 양피지 지도를 펼쳤다. “이게 뭐야?” “엘바 요새의 지도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나는 이미 2년 전부터 프린든 왕국과 전쟁을 상정하고 준비를 해왔지. 나 는 이것 말고도 솔그란의 지도도 있어.” 물론 지도는 이번 작전을 기획하면서 라혼 스스로 만든 것이었다. 의식을 개방하고 유체, 아스트랄 바디(Astral body) 상태로 정찰하여 엘바 요새와 솔그란의 지도를 작성해두었다. 그렇기 때문에 초행길임에도 길을 잃지 않 고 길잡이도 없이 이곳까지 헤매지 않고 온 것이었다. “구체적인 작전 설명은 충분히 휴식을 취한 뒤에 다시 하겠다.” *** 라혼의 레기온이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엘바 요새에선 정체를 알 수 없는 군대의 출현에 발칵 뒤집어져 있었다. 지금 엘바 요새를 지키고 있는 병력 은 고작 3백 명의 병사와 3명의 기사뿐이었다. “탈로스가 25기입니다. 그것은 소드 오러를 다루는 기사만 25명이라는 말 입니다.” “혹시 아군이 아닐까?” “겨우 한 시간 거리에 멈춰 서서 벌써 3시간이나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아군이었다면 우리에게 연락을 취해도 한참 취했을 시간입니다.” “커내버럴 경의 말이 옳습니다. 황금색으로 도색된 탈로스는 솔이 분명하 고 저것이 폐하의 군대가 아니라면 지금 사우스포트에 있다는 다크 프린스 의 레기온일 겁니다.” “그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오? 사우스포트와 여기의 거리가 얼마인데 프린 든 왕국의 영토를 절반이나 가로질러 왔단 말이오.” “상식적으로 말이 되던 되지 않던 저들이 적이라면 이곳에서 저들의 발을 붙잡아야 합니다.” 엘바 요새 사령관 비네 자작은 나이트 케내버럴의 말에 한숨이 나왔다. 비 록 엘베 요새가 굽이굽이 굽은 언덕과 숲의 길목에 세워져있는 공략하기 까 다로운 요새라지만 적들이-적이라고 예상되는-좁은 길에 탈로스를 서너 기 희생될 것을 각오하고 공격하면 순식간에 함락될 것은 뻔했기 때문이었다. 3중 방호벽이 뚫리면 3백의 병력으로 대략 1천여명의 병을 막기란 힘들 것 이기 때문이었다. “저들이 적이라면 그냥 지나가 주는 것이 좋을 텐데…….” 이미 솔그란에 마법통신구로 이곳에 의문의 군대가 출몰했음을 알렸다. 마 법사가 없어 정확한 상황을 전하지 못했지만 솔그란과 연결된 수정구에 간 략하게나마 적의 규모와 도움을 청하는 소식을 전했다. “하필이면 이런 때 자릴 비우다니……. 메이지 바딘은 아직 찾지 못했느냐 ?” “자주 낙시를 가시는 브로스 호수로 수색대를 보냈습니다. 거기에 계시다 면 곧 도착할 겁니다.” “이거야! 답답해서 원.” 비네 자작은 솔그란과 마법통신을 통해 솔그란에서 지원군을 보냈는지 확인 하고 싶었다. 그것은 삶과 죽음에 문제였다. 그것은 엘바 요새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라 솔그란의 운명과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지금 솔그란엔 탈로 스 전력이 없고, 엘바 요새가 함락되면 솔그란까지 탈로스를 막을 수 있는 전력이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약탈자(Pillager) 나도 모른 새 3권까지 마무리 했더군요. 74회 까지가 3권 끝부분이었습니다 . 그런데 11월 말에 하겠다던 출판은 감감무소식이고 담당자는 누구인지 모 르겠고, 계약서에 사인은 벌써 한 달 전에 했는데 돈은 궁하고……. 투덜, 투덜, 투덜……. 궁시렁~! 궁시렁~! 아무튼 공지입니다. *** 뒤에 본편이 있습니다. 그냥 넘기지 마세요.*** 다름이 아니라 이해를 돕기 위한 작가설정입니다. 네이버 라혼 카페에 올라 가 있는 내용이지만 제가 좀 부지런하지 못한 관계로 거의 사용하지 않아서 여기에 다시 올립니다. 가이아멜프Gaiamelp 마장기(魔壯機) 금속으로 만든 탈것. 일명 메탈 시터Metal Seater라고 불리는 매개물. 안에 사람이 들어가 뜻대로 조종해서 싸우는 것으로 전사들의 병기라고 불 릴 정도의 무기이다. 온 몸이 강철로 되어있고, 무기로는 커다란 검을 쓰며 날아다닐 수 있다. 크기는 매우 커서 대(對)자이언트로도 쓰일 정도의 크기. 철로 된 거인을 상상하면 된다. 타이탄Titan 자이언트Giant 골리앗Goliath 가이메르프(Gaiamelp)라고 일본애니메이션 에스카플로네에서 나왔던 그 무 기입니다. 영문 스펠은 같지만 발음이 틀리다는 것을 눈치 채셨을 겁니다. 가이아멜프 가이메르프 본 작가의 실수지만 그냥 내식으로 밀어붙이렵니다. 시무신(屍武神) 네크론Necrons 네크론Necrons는 영웅을 갑옷에 가두어 귀화(鬼火)로 태워 영혼이 갑옷에 깃들게 하여 만들어낸 귀장(鬼將)이다. 귀장(鬼將)의 능력은 뛰어나 능히 1 만 군대의 힘과 같았다고 한다. 이것은 한때 우리나라 굴지의 게임개발업체 미리내가 만든 게임 시무신대전 (屍武神大戰) ~네크론Necrons~에서 따왔습니다. 본 작가의 설정도 게임 그 대로입니다. 탈로스(Talos) 본래는 강철거인. 탈로스는 라혼이 고대 마도왕국 카마르게나의 가이아멜프 마장기에 영감을 얻어 만든 것. 기본적으로 골렘(Golem)이여서 간단한 명령에 스스로 움직이는 정도의 자아 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마나유저가 탑승해 빙의하면 탈로스는 거대한 갑옷 그이상의 역할을 한다. 그리스 신화 우라노스(Uranus) 탈로스의 원형 라혼이 처음 만들었던 그대로……. 마나를 다루지 못해도 누구나 조종할 수 있는 탈로스. 그러나 마나를 다루는 기사가 파일럿인 것이 더욱 효과적이 다, 타이탄(Titan)급 5만 기간트라 인간형 크로노스(Kronos) 개량형 -> 현재까지 사용된 것 중 가장 강력한 탈로스 히페리온(Hyperion) 개량형2 헬리오스(Helios) 개량형2a 솔(Sol) 특별제작 키클로(Kyklo) 급 또는 사이클로스(Kyklo) 급 3만 기간트라 외눈박이 브론테스(Brontes) 천둥 원형 아로게스(Arges) 번개 공격력 강화 스테로페스(Steropes) 전광 스피드 강화 기가스(Gigas)급 1만 기간트라 기게스(Gyges) 커다란 손발을 가진 자. 골리앗(Goliath) 급 기장병 AS 기간트라 1기간트라는 1서클 [라이트Light] 주문으로 1개의 광구(光球)를 만들 수 있 는 마나 량을 말한다. 유닛(unit) 3기 대대 2유닛 이상 통상 3유닛 9기 기갑연대 2대대 이상 통상 3대대 27기 +5이상 목우유마(木牛流馬) 고르곤(Gorgon) 수송전용 탈로스 골렘이며 고대 시드그람 제국시절 반왕 이그라혼이 사용했 던 탈로스. 그 후 고르곤은 전투용 탈로스로 개조되었음 대부분 (키클로급: 고르곤의 특징인 외눈의 전통이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음.) 목우유마(木牛流馬)는 동방에서 비슷하지만 다른 개념의 보패(寶貝) 황건역사(黃巾力士) 동방에서 서방의 탈로스의 개념의 무기 완전한 골렘이며 사람이 타고 조종 하지 않는다. 일반적인 전투골렘보다 전투력이 뛰어나지만 기사가 조종하는 탈로스에겐 손색이 있다.( 그러나 법륜시스템에 의해 하늘을 날수도 있다. ) 이상이 지금까지 정리한 설정입니다. 물론 이것 외에도 법륜(法輪), 선산환 도(仙山幻島), 태극도(太極圖), 각종 보패(寶貝) 등 동양적 환타지물의 설 정이 많습니다. 간간히 양념처럼 또는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할 겁니다. 그 러나 이그라혼 연대기는 어디까지나 중세유럽 위주의 세계관입니다. 그리고 저도 노파심이 가지고 있는 것 중 하나가 국가와 국가 간의 전쟁에 그것도 왕이 친정하는 전쟁에 전체 병력 3만이라고 했더니 너무 적다던가 또는 많다고 하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각자 설정하는 나름이겠지만 저는 개 인(기사)이 활약할 수 있는 최대한 병사수를 책정하다보니 그러한 숫자가 나왔습니다. 실제로 중세 동서양을 막론하고 농업문명에서 이정도가 한계입니다. 중세 유럽에서 1만단위의 전투는 극히 드물었습니다. 고대에는 병사가 치안을 맡 고 있었고 평범한 농사꾼이라도 군적(16~50세 때론 60세)에 올라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고을(도시안)에 병사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고려시대때 군 사가 전체 50만이라고 했지요.(여기서도 노비와 양반은 빠집니다.) 나관중의 삼국연의에서 10만이니. 100만이니 하는 병력을 허구입니다. 정사 (正史)에서는 최대가 10만, 조조의 아들 위나라에서 제갈량을 막는 사마의 에게 2만 주네마네 제정이 파탄 나네 하는 논의가 벌어지기도 했지요. 100만대군이 현실성 있게 된 것은 근세에 와서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근거로 국가간의 국운을 건 전쟁에 2만~3만이라는 숫자를 사 용한 겁니다. 중세의 입장에선 조금 많은 병력이죠.^.^ *** 엘바언덕은 연못보다 조금 큰 수준의 브로스 호수 정남쪽에 위치하고 있었 다. 그 언덕의 망루를 중심으로 엘바요새가지대가 형성 되어 있었는데 요새 라고 불리지만 특별한 구조물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호수 주변으로 둘러싼 거대한 원시림과 그 원시림에 감추어진 올록볼록한 작은 언덕들이 연이어진 곳이었다. 만약 이곳의 지리를 모르고 들어선다면 자연적인 미로 에 갇혀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을 못하여 길을 잃게 된다. 엘바요새의 방벽 은 다름 아닌 구불구불한 길과 호수를 둘러싼 숲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러 한 엘 바요새를 탈로스로 공략한다가 생각 했을 때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 는 것이 앞을 가로 막는 잡목을 들을 제거하며 통로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 러나 엘바 요새에는 대 기갑 함정이 중첩되어 설치되 있었다. 프린든 왕국 의 수도 솔그란이 포함된 육지 속 섬과 같은 지역에서 성장할 때부터 이곳 은 아주 중요한 전략거점이었기 때문에 탈로스 시대와 더불어 도시국가로 출발한 고대 공화정 솔그란 사람들 때부터 탈로스를 생각한 함정이 있어왔 고, 북쪽 바바리안 계통의 프라크인 집단 솔그란을 정복한 후에도 이곳의 중요성을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그러나 공화정 솔그란을 정복한 프라크인 도, 프라크인이 세운 프린든 왕가에서 왕권다툼이나 내전이 있을 때도 엘바 요새는 솔그란으로 통하는 길을 제공했다. 그래서 엘바 요새의 방벽인 숲 은 숲의 이름을 갖지 못하고 요새로써만 기억되었다. “적은 이 숲에 익숙하다. 하지만 적은 우리들의 역량을 모른다. 게다가 어 두운 숲은 적에게도 그다지 익숙하지 않을 거야.” “빌어먹을, 뭐가 뭔지 보여야. 그란으로 가든 솔그란으로 가든 아니면 지 옥이라도 찾아갈 것 아니오?” “그것은 걱정 마! 여긴엔 세상에가 가장 뛰어난 길잡이가 셋씩이나 있으니 까.” “에?” 아돌프는 라혼 대장의 말에 달도 별도 뜨지 않은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윤 곽만 겨우 감지할 수 있는 일행을 둘러보았다. 아돌프의 오른쪽에는 몸집이 큰 기사들중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2미터 장신의 죠슈아가 있었고, 왼쪽에 는 겉모습은 예쁘장해서 수작을 걸려다가도 그런 짓을 하면 왠지 안 될 것 같은 께름칙한 느낌을 받는 붉은 머리와 타오르는 눈동자를 가진 메사리프, 그 옆에는 여기 있는 기사 중에서 가장 유명한 기사인 팔라딘 그래험, 이 제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이국적이며 상당한 미남자인 동방의 기사, 그리고 소드 마스터 로카데 차이저 반 하이슬란드 백작의 시동으로 어렸을 적부터 소드 마스터에게 수업 받은 나이트 트라킨이 있었다. 그들 모두 어느 자리 에 있더라도 빛이 날 사내들이었다. “일단, 나, 그래험, 그리고 메사리프가 길잡이다.” “대장이? 언제 이 우라질 숲에 와 본적이 있었던 적이 있소?” “아니, 없어. 나는 이곳이 처음이다. 말을 끓지 말고 작전계획이나 마저 들어.” “…….” 아돌프는 라혼의 면박에 이 자리에서 가장 연장자답지 않게 두툼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마도 어두워서 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을 테지만 지금 이 자리엔 어둠을 꿰뚫어볼 수 있는 사람이 4명은 되었다. 라혼, 메사리프, 그래험 그리고 무공고수인 린이었다. 아돌프에게 다행인 것은 그들이 모두 속으로 웃을망정 누군가를 놀리지 않는 존재들이란 것이었다. “아까 말했던 대로 고들리프가 언덕능선을 따라 진입로를 만들기 시작하면 우리는 적의 배후로 가서 망루를 점령해 불을 지른다. 어때 간단하지?” “그런데 그것만으로 될까?” “이곳 수비형태는 망루에서 전체적인 전황을 보고 아군에게 신호로 지휘하 는 것이야. 숲과 언덕이 만들어낸 사각지대에서 매복한 수비병이 숲으로 진 입한 적군을 섬멸하는 형태지. 숲 곳곳에 늪이 있고, 잡목과 비슷비슷한 덤 불로 어우러져있어 이정표는 가장 높은 언덕에 우뚝 솟은 망루 탑뿐이야. 그러나 그곳으로 접근하려면 수많은 매복을 만나게 되어 그야말로 개미지옥 이지. 하지만 망루가 사라지고 숲에 넓게 퍼진 매복병들을 지휘하지 못하면 수비측의 이점은 이곳에 익숙하다는 것뿐이야. 그것도 지휘부가 무너졌어 도 싸우려는 전의를 꺾지 않은 병사에게만 허락된 이점이다.” 라혼은 트라킨의 질문에 긴 설명을 하고 구체적인 실행계획을 말했다. “길잡이가 셋이니까 팀을 나눈다. 그래험, 린, 아돌프가 팀을 이뤄서 망루 서쪽 병영을 치고, 메사리프, 죠슈아, 트라킨이 팀은 망루를 태운다. 나는 와일드카드로 불의에 상황에 대비하겠다.” “젠장할 그럼 대장은 불구경이나 하고, 싸움구경이나 하겠다는 거요?” “그대가 하겠다면 양보하겠소. 아돌프 멘델 경!” “아니, 굳이 내가 하겠다는 것보다도…….” 라혼이 스스로 맡은 임무는 양팀의 중간쯤에 ‘혼자’있다가 상황에 따라 움직이겠다는 것이었다. 아돌프는 차라리 적들이 우글거리는 곳에서 신나게 싸우더라도 잠시나마 적진인 이곳에서 벌줌 하게 혼자 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아돌프!” “왜요?” “죽지마라. 우리 중 가장 연장자라고 해서 먼저 죽을 필요는 없다.” “……?!” “농담이다.” “빌어먹을 사람 목숨 같고 하는 농담 좀 하지마쇼. 이중에서 내가 가장 실 전경험이 많소.” “그런가? 나는 다른 사람은 걱정이 되지 않는 데 너만은 걱정이 되서 말이 지.” “이런…….” 아돌프는 여전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둠너머에서 웃음을 참은 표정이 그려 지지 인상을 구겼다. 지금에 와서 첫 전투에 출전하는 애송이 취급 받을 것 이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거 내가 혼자 투덜거렸다고 복수하는 거요?” “알긴 아는군.” “이런 빌어먹을…….” *** -쿵, 쿵, 쿵, 우직끗~! -촤아~! 우드드득! 멀리서 들려오는 나무가 부러지며 마지막 비명을 토해내는 섬뜩한 소리와 뿌리째 뽑히지 않으려 아우성을 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사령관 각하! 적들이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탈로스를 이용해 길을 확보하는군. 병력배치는 이상 없겠지?” “옛!” “일단 아침이 밝아 올 때까지 현 지점에서 대기하라고 해! 길이 하룻밤 만 에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다. 내일 탈로스 사냥을 시작한다.” “옛! 전원 현 위치 대기. 반복한다. 전원 현 위치 대기!” 비네 자작은 나이트 에이킨이 매복한 병사들에게 신호명령을 내리기 위해 망루 꼭대기에 불빛신호를 보내는 곳과 연결된 파이프에 말했다. 그러자 불 이 켜진 망루 꼭대기 방에서 불빛을 막았다 보였다하며 약속된 신호를 만들 었다. “이거야, 저들은 시간이 없을 텐데 시간이 넉넉할 때나 써먹는 작전을 사 용하다니…….” 엘바요새 사령관 비네 자작은 이미 솔그란과 마법통신을 통해 구체적인 보 고 궁정 마법사를 통해 국왕과 연락을 한 상태였다. 그래서 지근 엘바요새 를 공격하는 자들의 정체가 다크 프린스가 이끄는 정예 레기온이라는 사실 을 알고 있었고 지금 그들의 뒤를 치려 국왕의 군대가 빠르게 접근중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또한 내일이면 솔그란과 엘바요새 사이에 존재하는 서너 개의 주둔지의 병사들이 지원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이것을 아 는지 모르는지 길을 만들겠다고 숲의 나무를 제거 하고 있었다. 수 키로평 방미터에 달하는 숲을 저런 식으로 길을 만들려면 몇 주가 걸릴 것이기 때 문이었다. “어쨌든 적이 시간을 낭비해주면 우리야 고맙지만……. 왜 탈로스를 정면 으로 오지 않고 무리하게 숲으로 왔을까?” 엘바 요새는 하나의 길목이기도 했다. 지금은 폐쇄되어 사용할 수 없지만 분명히 탈로스가 다닐만한 길이 존재했다. 언덕과 언덕사이로 굽이치는 길 은 간신히 탈로스 1기가 지날 수 있는 좁은 길이었고 비네 자작은 그곳으로 적군이 들어올 것을 판단을 하고 언덕 위에 병력을 배치한 상태였다. 만일 적 지휘관이 탈로스의 희생을 각오하고 과감하게 밀어붙인다면 지금 엘바 요새는 얼마든지 뚫을 수도 있었다. 지금 저들을 상대하기엔 엘바요새의 병 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 라혼은 엘바요새의 병영으로 미리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로 스며들 었다. 약 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병영은 십여 명의 병사들만이 중요지점 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라혼의 목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이곳이로군.” 라혼이 찾은 곳은 다름 아닌 엘바요새의 식량창고였다. 라혼은 천여 명이 겨울을 날정도로 쌓아놓은 식량을 에텔 스페이스에 집어넣고 아무도 보이지 않은 빈 병영을 가로질러 무기창고를 찾아 들어갔다. 그곳에 수천 명을 무 장시킬 수 있는 무기가 뽀얀 먼지를 뒤집어쓴 채 쌓였다. 먼지가 쌓였을망 정 나름대로 제대로 기름칠을 해두어 녹이 쓸거나 한 것은 없었다. 무기 창 고는 엘바요새의 주요 방어수단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듯이 작은 전두 도끼 나 활과 화살이 많았다. 그리고 다시 마구간에 들려 얼마 되지 않는 말먹이 까지 확보할 때 쯤 병영에서 불길이 오르며 소란해졌다. “이제 온 모양이군. 그나저나 도둑질도 나름대로 재미있는데…….” 라혼은 사실 군대를 유지하는 비용이 만만치가 않고 빌리는 형식으로 끌어 쓴 빚을 갚기 위해 솔그란 원정에 나선 것이다. 수백 년간 시드그람 대륙 북방의 강국이었던 프린든의 수도를 털면 짭짤한 수입이 될 것이기 때문이 었다. 물론 일반 평민들을 대상으로 도시나 마을을 약탈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대신 솔그란을 품고 있는 비옥한 곡창지대인 포타미아 지역 귀족들 의 창고를 털면 상당한 양의 곡식과 자금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 다. 포타미아 지역의 기름진 영지는 대부분 프린드 왕가의 소유이며 국왕의 부 의 원천이었기 때문에 프린든의 전쟁 수행의지를 꺾는 매우 유효한 방법이 기도 했다. 전쟁이란, 돈이 없으면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라혼에게 세계모든 도둑들의 왕 시프로드 블러드의 조력이 있으므로 프린든 왕가의 재산이 어디어디에 있는지 하는 정확한 정보가 있었다. 도둑의 왕 노릇을 천 년간이나 하던 블러드는 왕가의 재산이 숨겨진 장소나 창고들을 미리미리 알아두어 왕국이 망하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 혼란한 와중에 보물 들을 재산을 훔쳤다. 블러드의 보물창고에 쌓여있는 보물들 태반이 그런 식 으로 얻은 보물이었다. 지난 천 년간 수십 개의 왕국이 멸망했고, 왕권다툼으로 내전이 벌어지기도 하고, 야심가의 전쟁으로 어떤 지역이 혼란해지면 블러드의 사주를 받은 도둑들은 그 지역의 목표로 삼은 보물들을 훔치고 창고를 털었다. 라혼은 그러한 블러드 식 돈벌이를 하는 것이다. 물론 이번 경우엔 처리하기 부담 스런 보물이 주요 목표가 아니라 식량과 현금 그리고 물자들이었다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그리고 첫 번째 목표가 바로 이곳이었다. 라혼은 창고 건물 에 불을 놓는 것으로 증거를 인멸하고 느긋한 걸음걸이로 그래험 팀이 싸우 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적이다!” “맞서지 마라! 망루로 후퇴하며 적의 수를 파악해!” 몇 명이 불의 습격에 당했는지 수 명으로 줄어든 프린든 병사들은 노련한 백인장의 지시에 망루로 후퇴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현명한 판단이군.” 혼란스런 상황에서 적절한 판단을 내린 상대를 칭찬했다. “대장이오?” “왜 이렇게 지체 된 거야?” 아돌프였다. 그리고 그래험와 린도 라혼 곁으로 모여들었다. “형님, 이곳은 거의 비어있었습니다.” 이젠 제법 시드그람 공용어를 약간 어눌한 정도로 구사하는 린이 말했다. “그런 것 같군. 그럼 메사리프 팀을 지원하는 게 좋겠어. 린은 날 따라오 고 둘은 망루를 점령해라!” 라혼은 그래험과 아돌프를 망루 쪽으로 보내고 린과 함께 적이 매복하고 있 는 언덕으로 갔다. “린, 활 다룰 줄 알겠지?”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다룹니다.” “좋아! 이것 받아.” 라혼은 린에게 아까 무기창고에서 털은(?) 장궁 서너 개와 화살통과 100개 묶은 화살 2묶음 주었다. “형님 이것은 언제?” “아까 챙겨뒀어. 아무래도 이곳 요새 지휘관은 뛰어난 사람 같아. 혼란을 유도해볼까 하고 고들리프에게 잡목을 제거하라고 했는데 전혀 움직임이 없 어. 그리고 병사들의 훈련이 잘 돼 있더군.” 린도 의형의 말에 공감했다. 갑작스런 기습에도 대응하는 모습은 절대 오합 지졸이 보여줄 수 없는 것이었다. “메사리프에게는 마법검으로 불을 일으켜 망루를 태우면 아무리 훈련이 잘 되어있는 병사들이라도 당황할 테니 그때를 노려 저쪽 어림에 화살을 쏘면 더욱 혼란스러워 지겠지. 모르긴 몰라도 여기 지휘관은 저기 있는 언덕 어 림에 병력을 배치했을 거야!” “과연! 그렇군요.” “신호는 망루에서 올라온 불길이다.” 라혼은 린에게 그렇게 설명하며 에텔 스페이스에서 스프링이 보우(Springy bow)를 꺼내 3대의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린 또한 5개의 화살을 시위에 걸 었다. 용호린은 궁술에 나름대로 조예가 있었지만 아스라한 언덕 윤관만 보 이는 상황이었음으로 맞출 생각을 포기하고 양으로 위협하기로 한 것이다. *** “돌로 쌓은 망루탑이라 불이 붙을까 모르겠군.” “그래 쉽지 않겠어.” “걱정 마라. 이것이면 충분할 거다.” 메사리프가 긴장된 순간에도 여유를 잃지 않고 자신의 검을 들어 보이며 말 하자 죠슈아와 트라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검 플래티움 아스카론의 마 법이라면 불을 붙이는 정도야 쉬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험 경과 아돌프 경이 도착해 소란을 일으키면 그대 같이 합시다.” “좋아!” 이미 그들은 마법통신반지 피아링으로 서로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적이다! 몇 놈 되지 않는다. 화톳불을 밝혀 환한 망루입구의 수비병들은 망루를 둘러싼 방벽을 방패삼아 어둠속으로 화살을 쏘아대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도 가지.” 일단 지금 팀을 이끄는 입장인 메사리프가 앞장서서 소란이 인 반대편 방벽 담장을 날렵하게 넘어섰다. 2.5미터의 방벽이었지만 셋에겐 장애가 그다지 되지 못했다. “동쪽이다. 허처슨 백인장 저놈들 막아!” 지금 망루를 수비하는 병력은 예비 병력으로 남겨둔 약 70여명 정도였다. 나름대로 정예 병력이었지만 난입에 성공한 자들은 소드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들이 분명했다. “우아아아악~!” 죠슈아는 망루 방벽 너머로 난입하자마자 서너 명의 병사들을 베어 넘기고, 그래험과 아돌프에게 화살을 쏘는 병사들을 휩쓸어갔다. 그렇게 죠슈아가 공간을 만들자 메사리프가 망루쪽으로 뛰었고 트라킨이 그 뒤를 따르며 메 사리프를 엄호했다. “파이어 버스트Fire burst!” -쾅! -화르륵~! [파이어 버스트Fire burst 폭발]주문은 강력한 불꽃의 구가 폭발하면서 주 위에 타격을 준다. [파이어볼Fireball]과 비슷하지만 폭발하는 속성이 더욱 강화된 주문이었다. 이것은 플래티움 아스카론이 만들어낸 주문이 아닌 마 법생물 레드 드래곤 프리사메티의 주문이었다. 프리사메티의 입장에선 위력 을 크게 줄인 주문이었지만 그것을 겪는 사람의 입장에선 경악스러울 만큼 위력적인 것이었다. “콜록, 콜록. 이것이 일국과 맞먹는 가치를 지닌다는 마법검 플래티움 아 스카론?” 예상치 못한 어마한 폭발의 충격에 강풍에 나뭇잎 날리듯 날아가 땅에 쳐 박혔던 트라킨이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어마어마한 위력에 서 엘바의 망루탑은 쓰러지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망루탑 창으로 불도마뱀 의 혓바닥 같이 널름거리는 불꽃은 원래 임무는 훌륭히 완성했음을 증명했 다. “여기서 볼일을 끝났다. 돌아가자!” “죠슈아는?” 충격을 등뒤로 받은 죠슈아는 그제야 커다란 브로드 소드로 땅을 짚으며 일 어섰다. “으으. 미리 이럴 거라고 말해주면 안 됩니까?” 죠슈아은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자신의 뒷목을 주무르며 투덜거렸다. “그만 투덜대고 가자! 라혼이 오늘밤 안에 이곳을 통과할 생각인 모양이니 까!” 한바탕 소동이 빚어진 엘바의 망루탑은 침입자가 모두 떠난 후에야 엄청난 충격파에 실신한 병사들이 심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특히 마법이 시전될 때 곁이 있었던 자들은 눈과 입, 코와 귀에서 피를 쏟아내며 죽어있었다. 트라킨도 프리사메티가 암암리 [실드Shield 방패]주문으로 보호해 주지 않 았다면 이들처럼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구멍으로 피를 쏟아내며 죽어있 을 것이었다. 요행히 살아난다고 해도 지독한 중상을 면하긴 어려울 것이었 다. *** -쾅~! -핑~ 피비핑, 핑핑! 망루에 거대한 불꽃이 일며 한순간 이나마 사방이 환해지자 라혼과 린은 표 적을 삼았던 언덕으로 화살을 날렸다. 그리고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 로 빠른 속사로 쏘아진 화살은 적의 공격에 대비해 매복해 있던 엘바요새 수비병에게 날아갔다. “뭐야?” “적이다! 적이 배후에 있다.” 린이 처음 쏜 화살은 형편없이 빗나갔지만 라혼이 쏜 3개중 하나의 화살은 정확하게 적 병사의 허벅지를 관통했다. 이미 눈이 아닌 제삼의 눈으로 사 물을 보는 라혼이었으므로, 라혼에게 어둠은 장애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3대의 화살을 한꺼번에 쏘는 것은 많은 훈련이 필요한 것이었다. 매복한 병사들의 뒤에서 날아온 화살에 소란이 일자 그 소리로 병사의 위치 를 파악한 린은 그곳으로 화살을 날렸고 3개 중 1개는 병사들의 몸에 적중 했다. 단 2명의 궁사가 쏜 화살에 2백 명의 매복한 병사들은 자신들에게 날 아오는 화살이 없는데도 공황에 빠져버렸다. 바로 자신들이 역매복에 걸렸 다고 착각했었기 때문이었다. 라혼은 매복병들이 무력화되었다고 판단하고 현재 숲 외곽에서 대기 중인 기병대에 돌격을 명령했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단순히 길을 따라 달리는 것 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라혼의 레기온은 아무런 피해 없이 엘바 요새를 통과했다. 약탈자(Pillager) *** 사우스포트와 제도 그란 사이에 공식적인 마법통신망이 개설되었다. 신성 시드그람 제국의 종군 마법사 위저드 타르코 아르스 코펜이 책임진 마법통 신망을 통해 사우스포트에서 파악한 대략적인 전황과 정보, 그리고 다크 프 린스의 ‘솔드란 공략 적전’이 귀족의회에 알려졌다. “그런 무모한 작전을 강행하다니……. 본인은 라혼 자작의 사령관으로써의 역량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소.” “공인으로써 고작 여자 하나를 납치하기위해 제국 레기온의 중요한 전력인 탈로스 대부분 이끌고 적국의 수도로 무작정 쳐들어가다니……. 그것은 도 저히 묵과할 수 없는 것이오.” “맞소! 당장 결의를 통해 다크 프린스에게 부여된 절대지휘권을 회수해야 하오.” “그의 무모함은 비판받아 마땅하나 비판은 비판으로써 끝나야 하지 않겠습 니까? 지금은 전쟁 중입니다. 전쟁 중에 절대지휘권을 가진 사령관을 문책 하면 그것이 어떻게 절대지휘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황제 폐하도 다크 프린스의 절대지휘권은 ‘한시적’이라고 못을 박았지 않소? 때가 되어 절대지휘권을 회수하는 것일 뿐이오.” “그렇다면, 어서 제국연합군을 창설하여 제국연합군 총사령관을 선출합시 다. 폐하의 한시적은 제국연합군 총사령관이 전선의 지휘권을 장악했을 때 가 아니겠소?” 그러나 그것은 반 다크 프린스 진영에겐 하나마나한 이야기였다. 지금 대 프린든 전쟁을 책임질 제국연합군 총사령관 물망에 올라와 있는 인물은 소 드 마스터 로카데 차이저 반 하이슬란드 백작이었기 때문이었다. 다크 프린 스의 부친인 그가 제국연합군의 총사령관이 되면 반 다크 프린스에겐 엎친 데 덮친 격이 되기 때문이었다. 하이슬란드 백작이 총사령관이 돼야 하는 명분은 많았다. 일단 제국 제1의 기사라는 타이틀과 소드 마스터라는 점, 사실상 주력이 될 철가면 기사단을 직접 컨트롤할 수 있다는 점, 실제적인 전쟁이 발발한 곳이 옛 프린든 왕 국 영토이며 하이슬란드는 그곳에 속해있는 영지였기에 그 대표성을 무시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반 다크 프린스 진영은 겨우 백작이 제국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선출 하기 어렵다는 예와 한 가문에 너무 큰 힘을 몰아주는 것은 좋지 않다는 이 유를 들어 총사령관의 선출을 미루고 지휘할 지휘관도 없이 제국연합군의 구체적인 편성부터 하자며 나서고 있었다. “허허, 이것 참! 라혼, 그 아이가 확보한 탈로스 때문에 귀족원의 힘이 갑 작스레 커지니 여기저기 문제가 생기는 구나.” 오늘도 아무런 결말 없이 싸움만 하다 끝난 귀족의회에서 돌아온 트라얀 공 작은 조카사위인 로카데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제국연합군 총사령 관으로 거론되는 입장인 로카데는 매일같이 그 지겨운 귀족원 입씨름 공방 을 지켜보아야만했다. “확실히 10기의 타이탄급 솔과 25기의 키클로 급 탈로스가 가지는 영향력 은 대단하긴 하지. 그러니 귀족원이 정신 못 차릴 밖에 현재 제국 내에서 그만한 전력을 가진 대영주는 없으니까.” “그것 때문에 요즘 여기저기에서 말들이 많습니다. ‘탈로스는 누구의 것 인가.’라며 말이죠.” 지금 레기온은 법적으로 황제 직속이면서 귀족원에 견제를 받고, 실제적으 론 라혼의 것이었다. 말하자면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인데, 그렇게 따지면 탈로스는 라혼의 것이여 야했다. 아니 작전에 참가해 실제로 탈로스의 주인 이 된 자들의 것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귀족의회에서 레기온의 탈로스는 레기온 기사단의 것이라는 결의를 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은 당 사자인 라혼이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에 따라 어찌될지 모르는 것 이었다. 현재까지 라혼은 탈로스의 소유권을 명확히 하는 것에 대해서 아무 런 언급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이제 곧 겨울이 오고, 몬타나 반도는 겨울이 혹독한 편인데 겨울 을 날 준비가 잘 되어가는 지 모르겠군.” “…….” 계절은 한여름이었지만 사우스포트에 몇 년간 군대를 주둔시킬 필요가 있으 니 첫 번째로 맞는 이번 겨울을 무사히 보내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 엘바요새를 별 피해 없이 무사히 통과한 라혼은 통상적인 진군속도를 유지 하며 사방에 정찰대를 투입했다. 이제 본격적인 전투와 전투를 계속해야 했 음으로 병사들의 피로도를 낮춰야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정찰 대에서 엘바요새로 가던 대규모 응원군을 발견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적의 대규모 병력이 운집한 곳은 가이즈 성이야. 솔드란으로 가는 주요 길목이지.” “여기 가이즈는 대 기갑전투를 상정해 설계된 성이라고 알고 있는데 시간 이 지체되겠군.” “아니 우리가 굳이 가이즈 성을 공략할 필요는 없어.” “무슨 말이야?” “가이즈에 5천명의 병력이 모여 있다는 것은 엘바요새에서 우리에 대한 정 보가 솔드란으로 갔다는 뜻이되.”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야? 수도를 지키는 중요한 방어거점이니까. 통신마 법정도는 할 줄 아는 종군 마법사가 있을 거잖아! “바로 그거야. 정찰병의 보고는 그들에게 탈로스 전력이 없다고 했어. 그 런대 우리는 탈로스만 25기인 대규모 기갑부대야. 아무리 대 탈로스 방어시 설이라지만 키클로급 이하에나 효과가 있는 거야.” “아! 가이즈 성의 병력은 미끼겠군.” 트라킨은 라혼의 말에 동조하면 되물었다. “그럼 슘터왕이 탈로스들을 이끌고 우리 뒤를 쫓고 있다는 뜻인가?” “그래 그리고 엘바요새의 저항이 미약했던 것으로 봐서 수비할 병력이 매 우 모자랐다고 할 수 있어. 그것은 프린든 군이 우리의 움직임을 놓쳤다는 말이되.” “엘바의 프린든은 우리가 나타나자 그때서야 마법통신으로 우리의 출현을 알렸겠고…….” “아마도 굼벵이 슘터가 뙤약볕에서 비질 땀을 흘리며 달려오고 있을 걸.” -와하하하하하……. 라혼이 슘터의 움직임을 평할 때마다 굼뜨다는 말을 했다는 것은 이미 알려 진 사실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레기온들에게 프린든 왕국 국왕의 별 명이 ‘굼벵이 슘터’가 되어버렸다. 가벼운 농담으로 기분을 기사들의 가 볍게 한 라혼은 지도의 한 지점을 짚으며 말을 이었다. “여기는 귀족의 별장 같은 곳인데 제법 규모가 큰 마을이 있다. 우리는 이 곳에서 보급물자를 약탈로 보충하고 최대한 빠르게 여기를 공략한다.” “…….” “그러나 아까도 말했다시피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약 탈을 하는 것도 작전이다. 최대한 빠르게 바람처럼 움직여야 할 필요가 있 어. 필요한 것만 최대한 빠르게 확보하고 계속 움직여야한다는 것이다. 마 을을 파괴하고 느긋하게 물건을 고를 시간도, 창고를 털어 바리바리 짐을 쌓아가지고 나올 시간도 부족하다.” “그럼?” “필요한 품목을 미리 생각해서 그것만 최대한 빠르게 확보하고 빠진다. 그 점을 명심해 괜히 마을 사람들하고 실랑이하며 보낼 시간이 없다는 것을 부하들에게 주지시켜라.” *** 레이볼루 마을은 한가로운 시골마을 이면서도 수도와 가깝다는 점 때문인지 갖출 것은 모두 갖춘 마을이었다. 여관도 있고, 가게도 있다. 다만 포타미 아 지방 대부분이 치안이 안정되어 있어, 마을을 방어하는 시설이 없을 뿐 이었다. “아린, 이 녀석 너 엄마 말 안 들어?” “싫어! 나 나가서 놀 거야!” “안 돼! 너 그러다가 제국병사에게 잡히면 어쩌려고 그래?” “피, 거짓말! 여기 어디에 제국병사가 있다고 그래?” 쪼르르 도망가는 개구쟁이 꼬마의 뒤를 꼬마의 엄마로 보이는 중년여자가 쫓으며 말했다. “아린! 너 촌장님에가 일러서 혼내준다.” “싫어! 엄마 미워!” 그리고 낮은 언덕은 잘도 오르던 꼬마는 정상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숨을 헐떡이며 꼬마를 쫓던 여인이 가만히 서있는 꼬마를 잡고서 거친 숨을 몰아 쉬며 말했다. “헥헷헥……. 아린 너 각오해. 내가 아주 혼내 줄 테니까…….” 숨을 고르기 위해 아들의 손을 꼭 잡은 여인은 허리를 폈다. 그리고 그런 여인의 눈에 수평선 너머에서 먼지구름이 접근하는 것이 보였다. “저게 뭐지?” “엄마 잘못했어, 다신 안 그럴게……. 으아아아앙~!” “…….” 꼬마는 제국군이 진짜 자신을 잡으러왔다고 믿은 나머지 울음을 터트렸고, 꼬마의 엄마는 아들을 안고 언덕을 뛰어 내려갔다. “촌장님 큰일이에요. 제국군이 제국군이 나타났어요.” “뭐?” “어서 몸을 피하세요. 탈로스까지 있어요. 어서 도망가야해요.” 그러나 촌장이 뭔가 결정하기도 전에 제국군의 탈로스와 기병대는 마을 덮 쳤다. -쾅~! -끼야야악~! -퍽! 쿵! 수십 기의 강철거인은 마을로 들어서자마자 건물을 부수기 시작했고 곧이어 말을 탄 기병대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은 레이볼루 마을의 번화가로 난 입해 가게들을 부수고 상품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치즈와 과일, 여행자들이 먹은 건조 식량 등 식료품을 털기 시작했다. “어서, 어서 빨리해라! 우리에겐 시간이 없다. 반항하는 자는 죽여도 좋으 니까 시간 지체하지마라!” 에베르트는 사람이 타지 않는 여분의 말에 식료품을 챙기면서 재촉을 계속 했다. 그의 재촉하는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목표한 양의 물품을 모두 확보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은 동쪽언덕의 귀족 별장 끊임없이 힐끗거렸 다. 전력을 포위, 진입 그리고 별동대로 나누어 빠른 약탈 작전이 한참일 때 라 혼은 메사리프와 더불어 귀족 별장의 창고를 털고 있었다. 창고에 그득 쌓 인 곡식과 은밀한 곳에 숨겨진 10만 골드는 됨직한 한 상자 분량의 금화를 챙기고 마지막으로 메사리프로 하여금 불을 놓게 하여 증거를 인멸했다. 화룡의 마법으로 순식간에 큰불로 번지며 검은 연기를 토해내자 귀족별장을 약탈하여 값나가는 물건을 챙기던 별동대는 하던 일을 멈추고 저마다 물건 을 한 아름씩 안은 채 장원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검은 연기를 발견한 에베 르트는 아직도 약탈에 열중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신호가 왔다. 퇴각한다. 모두 퇴각한다!” 라혼의 레기온은 마을에 진입한지 20여분 만에 볼일 모두 끝내고 빠져나갔 지만 마을사람들은 그 후로도 한참을 집안에서 공포에 떨었다. 마을을 약탈한 라혼은 그길로 100명 안팎의 수비병이 지키는 라유 요새를 점거하고 하루를 묵었다. 그리고 그날 약탈한 신선한 야채를 포함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했다. 라혼은 그렇게 주변 23곳을 사흘간 약탈하고 나서 야 본격적인 솔드란 공략에 나섰다. 약탈자(Pillager) 공지 이그라혼 연대기 ~기사의 시대~ 가 내일 출판된답니다. *** 라혼이 프린든 왕국의 수도 솔드란과 반나절 거리의 요새에서 다음날 솔드 란 공략에 대해 작전회의를 할 무렵 프린든의 본군을 이끄는 슘터 왕은 그 제야 불타버린 엘바요새에 도착해 있었다. -쾅! “비겁한 강도 같으니…….” “폐하, 고정하십시오. 폐하의 백성들이 약탈당한 것은 불행한 일이나 그란 의 얼간이가 포타미아로 들어선 것은 오히려 잘된 일입니다.” “무슨 말인가?” 완전히 붕괴한 엘바 언덕의 망루와 솔드란에서 그란의 얼간이 다크 프린스 가 포타미아 전역을 약탈하고 돌아다닌다는 보고를 받은 슘터는 불같이 화 를 냈다. 그런 국왕을 메이지 바딘의 도움으로 죽음의 고비를 넘긴 엘바요 새 사령관 비네 자작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폐하! 포타미아는 대륙 속에 거대한 섬과 같은 곳입니다. 서쪽의 오베른 강이 있고, 동쪽의 로인 강이 있습니다.” “계속하라!” 비네 자작은 국왕이 흥미를 보이는 듯하자 차근차근 그동안 생각해둔 바를 말하기 시작했다. “북쪽엔 폐하의 본군이 있고, 남쪽은 소 오베른 강과 솔드란이 틀어 막혀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란의 얼간이는 스스로 그물 안으로 뛰어든 커다란 쥐 새끼입니다.” “흐음~!” “지금은 여름이라 두 강의 수위가 높습니다. 포타미아 밖에서 거대한 포위 망을 짜고 폐하께서 그들을 압박하신다면 승산은 저희에게 있습니다. 25기 나 되는 탈로스 전력이 부담스럽지만 잘만하면 큰 피해 없이 그란의 얼간이 를 생포할 수 있을 겁니다.” “좋아! 아주 좋아! 짐은 경의 의견을 받아들이겠다.” *** 먼동이 터오는 아침. 프린든 왕국의 수도 솔드란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 미 다크 프린스의 군대가 엘바요새를 통과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서부터 솔드란 사람들은 지난 며칠 동안 그야말로 말할 수 없는 공포에 떨어야 했 다. 솔드란을 중심으로 수십 곳이 파괴되고 약탈되었다. 집이 파괴되고 재 산을 약탈당한 사람들이 솔드란으로 몸을 피하면서 긴장감을 고조되었다. 다행이 어제 왕의 군대가 엘바요새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잠시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솔드란 북쪽 성벽에 수십 기의 강철거인이 도열 하여 공격준비를 하자 사람들은 막연한 공포에 떨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준비는 모두 했습니다. 국왕 폐하께도 알린 이상 하루 나 이틀만 지켜낼 수 있다면 이것으로 전쟁자체를 반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섣부른 낙관론은 금물일세. 상대는 교활하기 이를 데 없는 다크 프린스야 .” 레곤 공작은 근위기사단 부단장 프리츠의 무장다운 자신만만한 말에 그렇게 대꾸했다. 하지만 그조차 다크 프린스가 솔드란를 공략할 것이라는 것엔 회의를 품고 있었다. 그는 이미 프린든 왕가의 재산이랄 수 있는 포타미아 를 휘저었다. 마을이 약탈당해 솔드란으로 도망 온 피난민들의 증언을 들어 보면 다크 프린스는 살육이 동반되는 약탈행위는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 솔드란의 시민들은 그들이 전하는 과장된 이야기에 두려움에 떨고 있었지만 내용을 가만히 살펴보면 탈로스가 마을로 난입해 마을의 주 요 건물을 부수고 20분에서 30분가량 약탈한 후 바람같이 떠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초췌한 몰골이긴 하지만 피난민들이 짊어지고 온 식료품과 형편이 되는 자들이 여관까지 잡고 생활하는 것을 보면 모두가 재산을 숨겨두는데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애당초 재산을 약탈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 했다. 즉, 다크 프린스는 약탈하는 시늉만 한 것이다. 그저 마을에 난입해 집을 부수고 크게 떠든 후 농노들이 거두어들인 수확물 창고를 불태우는 작 업만 가장 신속하게 한 것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국왕은 솔드란에 수도를 방어하기위해 탈로스를 배치할 수밖에 없고, 타버린 곡물은 모두 국왕의 재산이었다. 국왕으로서는 전쟁을 계속 수행하려면 임시적으로나마 세금을 다시 거둬들일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또한 수도를 적에게 내 줄 뻔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문제는 도망치는 것인데 궁금하군. 어떻게 사방이 막힌 포타미아 를 빠져나갈지…….” 레곤 공작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침햇살에 황금빛으로 빛나는 본래 왕국의 재산이었던 타이탄 급 솔의 위용을 성벽에서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크 프 린스의 지휘 하에 있는 탈로스들이 일제히 전진하는 모습을 연출되었다. “적이 움직입니다.” “당황하지마라. 이곳은 수도다. 절대 적의 말발굽에 유린되어서는 안 된다 . 상대는 무자비한 암흑의 황태자다.” “옛!” “나의 명령이 떨어지면 투석기와 대 기갑 발리스타를 쏴라.” 레곤은 프리츠 부단장의 외침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시선은 적에게 떼지 않았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거지?” 적의 탈로스 대열에서 3기의 솔이 앞으로 나섰는데 그 탈로스의 양손에 보 기에도 부담스런 거대한 탈로스 전용 전투 도끼 각각 들려 있었다. “바위를 떨어트릴 기중기 준비해라! 적이 성문을 깨려들지 모른다.” 프리츠는 왜 한꺼번에 돌격해서 혼란을 조장하고 공략을 시도하지 않고 단 3기의 탈로스만 투입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만약을 위한 대비를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적 탈로스가 발리스타 사정거리 안까지 들어왔습니다.” 발리스타(ballista)는 활의 원리를 이용하여, 큰 목제의 틀에 동물의 힘줄, 말의 털, 여자의 머리털 등으로 만든 시위를 걸고 그 장력을 이용해서 돌, 나무탄알, 화살, 창 등을 날리도록 만든 쇠뇌다. 대 기갑 발리스타는 200 키로 무게의 돌을 220~280미터까지 날릴 수 있었으며, 지금은 탈로스를 잡 기위해 거대한 기둥 같은 대 기갑 화살이 장전되어 있었다. “기다려라! 아직 너무 멀다. 확실하게 잡아야 한다.” 솔드란의 대 기갑 발리스타는 4기 정도였다. 한번 발사하면 재장전이 쉽지 않기 때문에 한 번에 많은 효과를 거둘 필요가 있었다. “음~! 드디어 접근을 멈춰군. 뭘 하려는 거지?” 라혼은 솔드란의 도시방벽과 대략 200미터 안쪽까지 접근했다. 그리고 가져 온 탈로스 전용 전투도끼를 땅에 박아놓았다. 그리고 자신을 호위하기 위해 같이 온 죠슈아와 메사리프도 라혼이 탑승한 탈로스가 잡기 쉽도록 도끼를 대지 박아 세워놓았다. “솔드란에서 날아오는 화살과 돌은 너희들에게 맡긴다.” -맡겨둬, 대장! -알았다. 라혼은 대지에 박혀있는 6개의 도끼중 하나를 뽑아들고 무지막지한 힘을 솔 (Sol)의 엑스시온에 주입했다. 그리고 자신이 타고 있는 솔이 들고 있는 커 다란 도끼에 오러 블레이드를 형성함과 동시에 동작을 크게 하며 도끼를 힘 껏 집어던졌다. -우아아악! 탈로스 특유의 괴성과 함께 내던져진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도끼는 완만 한 포물선을 그리며 솔드란의 도시 성문에 작렬했다. -콰앙! 가공한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도끼에 직격단한 성문은 낡디 낡은 종잇장 처럼 바스러져 버렸다. “이럴 수가…….” 솔드란의 수비병들이 경악스런 표정을 짓고 있을 무렵 2번째 도끼가 다시 한 번 성문에 작렬했다. -쾅! “성문이 깨집니다.” “이, 이런 발리스타는 화살을 쏴라!” “쏴랏!” -텅, 텅 터텅! 둔탁한 기성과 함께 4발의 굵은 기둥 같은 화살이 쏘아졌고 이미 조준이 완 료되었었는지 4발의 화살은 정확하게 앞으로 나선 3기의 탈로스에게 떨어졌 다. -캉~! 퍼버벅! 1발의 화살이 탈로스가 쳐올린 검에 산산이 부서져 버리고 3발의 화살은 땅 에 떨어졌다. -우워워워워워워워~! 그것을 신호로 라혼은 3번째 도끼를 집어던지고는 함성을 내질렀다. 전장을 압도하는 힘이 깃든 함성 소리에 공격명령을 기다리던 탈로스들 화답하듯 이 함성을 내지르며 일제히 대지를 박찼다. -크아아아아~! -크워워~! -쿵! 쿵! 쿵! 쿵! 쿵…………. 25기의 탈로스들의 진공에 솔드란 수호의지를 불태우던 병사들의 눈에 공포 가 어렸고, 전투를 지휘하는 프리츠의 고함 소리는 공허하게 울렸다. “어서 발리스타를 재장전하고 투석기는 돌을 던져라!” “더, 던집니다. 당겨라!” 투석기는 무게 1톤의 바위덩어리를 엄청난 속도로 150미터 가량 날려 보낼 수 있는 무기였다. 그러나 그 명중률은 형편없었다. 그래서인지 투석기로 던져진 둥글게 다듬어진 돌덩어리 대부분이 맨땅에 떨어져 대지를 굴렀다. -쾅! 그러나 용하게도 땅에 떨어진 후 구르는 돌에 부딪혀 타격을 입은 탈로스들 이 생겨났다. “프뢰벨, 괜찮은 건가?” -괜찮습니다. 제 아기도 전투력을 잃지 않았습니다. “모두 눈먼 돌에 조심해라! 라혼은 1톤에 달하는 돌과 정면으로 부딪힌 파일럿 나이트가 무사함을 확인 하고 성문위에 설치된 수 톤의 바위를 매달고 있는 기중기에 도끼를 던졌다 . -부웅~! 쾅! 그리고 탈로스가 던진 도끼에 축이 꺾이면서 기능을 상실했고 가장 먼저 솔 드란의 성문에 도착한 죠슈아와 메사리프는 반파된 성문을 깨기 시작했다. -쾅! 쾅! 쾅! 콰당! 이미 라혼이 집어던진 오러 블레이드까지 머금은 도끼에 당한 성문은 몇 번 의 도끼질을 견디지 못하고 깨져 나갔다. -성문이 뚫렸다! -성문이 뚫렸다! 시드그람 만세! -시드그람 만세! -와! -전군 공격! 성문이 뚫리자 죠슈아가 기쁨의 함성을 내질렀고, 한참 대지를 박차고 달려 오는 탈로스들이 이에 호응했다. 라혼은 도시 안으로 난입하면서 후위에 대 기 중인 레기온 기사단와 기병대에게 공격명령을 내렸다. “죠슈아! 오른쪽을 맡아! 메사리프 왼쪽이다. 작전대로 하는 거다.” -옛! -옛! 죠슈아와 메사리프는 미리 약속한대로 솔드란의 수비병들을 공격했다. 무지 막지한 탈로스의 도끼질에 솔드란의 수비병은 어떡게 해보지도 못한 채 순 한 양떼들처럼 도망 다니기 급급했고 뒤이어 23기의 탈로스 부대가 성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자 전황은 더 이상 걷잡을 수 없이 흘렀다. 성문이 깨지 고 탈로스가 도시 안으로 난입한 순간 전투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그라혼 만세! 그리고 탈로스를 타고 있는 누군가가 승리의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소리쳤 다. 그러자 마치 미리 약속이나 한 것처럼 나머지 파일럿 나이트들이 그를 따라 외쳤다. -이그라혼 만세! -이그라혼 만세! 그리고 그것은 뒤를 따라 쇄도하는 1천여기의 레기온 기사단이 따라 복창하 기 시작했다. 아무리 탈로스 전력이 없는 솔드란이라지만 이토록 쉽게 적국 의 수도를 공략한 ‘힘’을 보인 라혼은 레기온들에게 이미 위대한 정복자 이그라혼이었다. ------------------------------- 레기온(Legion) *** “우리는 프린든 왕국 최정예인 왕실근위대다.” “…….” “우리의 임무는 왕궁을 지키고 왕의 가족을 보호하는 일이다. 명심해라 죽 음으로 흉악무도한 제국군을 막아야 한다.” “…….” 왕실근위대장의 결의에 찬 연설이 이어졌지만 왕실근위대의 사기는 그다지 호전되는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왕실근위대의 병력은 고작 500명 안팎의 창병인데 몰려오는 적은 10여기의 탈로스를 포함한 기병대였다. ‘죽음으로 ’라는 말이 무척이나 현실적인 상황인 것이다. -쾅~! 퍽! 라혼은 솔드란 시내로 들어서고 탈로스들 1개 대대, 9기의 탈로스를 직접 이끌고 프린든 왕국의 왕궁을 장악하기 위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솔드란의 중안대로를 따라 달렸다. 인구 10만의 몬타나 반도 최대도시 솔드란을 겨우 1000명의 병력으로 점력하려면 무엇보다 왕족들의 신병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들의 신병이 빨리 확보할수록 쓸데없는 희생을 줄일 수가 있었다. -전하, 입구에 저항군입니다. “그들은 무시해라. 슘터왕의 왕비와 그의 친여동생인 왕녀의 신병을 확보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나를 따라라!” 라혼은 프린든 왕국의 근위병들로 보이는 그들을 무시하고 왕궁과 도시를 가르는 벽을 부수고 왕궁 안쪽으로 진입했다. -퍽! 벽을 부수고 안으로 진입하자 잘 가꾸어진 정원이 나왔고 라혼은 거추장스 러운 정원수를 뽑아내며 자신이 이끄는 기갑대대를 따라온 기병대를 투입했 다. “왕족을 찾아라! 시녀 복장을 하고 도주를 시도할지도 모르니까 함부로 죽 이진 마라!” “옛!” “스테판코, 탈로스를 인수해라!” 왕궁 정원의 중앙까지 진출해서 자신이 타고 있는 탈로스를 원래 주인인 스 텐판코에게 주며 땅으로 내려섰다. 한편 스텐판코는 자신의 아기(baby)를 험하게 다루던 라혼이 아기를 넘겨주자 안도에 표정을 노골적으로 지으며 탈로스에 탑승했다. “스테판코, 다음에도 부탁한다.” “윽!” 그러나 라혼의 말에 스테판코는 자신의 아기가 다크 프린스의 전용 탈로스 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절망했다. “싫어? 그럼 다른 걸 이용할까?” 약간 화색이 도는 스텐판코였지만……. -탈로스는 뭐니 뭐니 해도 손에 익을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냐? -맛습니다. 리페르 말이 전적으로 옳은 말입니다. “그런가? 하긴 쓰던 물건이 제일 좋은 법이지……. 스테판코는 자신과 같은 타이탄급 솔을 가지고 있는 바코와 리페르의 말에 설득되는 라혼의 태도에 절망했다. ‘정말 니들이 내게 이럴 수 있어?’ 바코와 리페르는 스텐판코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충분히 예상하면 딴청 을 피웠다. 평생처음 타이탄급 탈로스를 가진 그들은 스테판코의 아기처럼 자기 아기가 험하게 다뤄지는 꼴은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미안한 일이지만 앞으로도 라혼이 탈로스를 타게 된다면 스텐판코가 희생하는 것이 몇 배 나 았다. -글로네 왕비의 위치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실력 있는 호위 기사들이 있어 신병확보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잘했다. 오코너 백인대장, 지금 곳 그쪽으로 기사를 투입하겠다. 그들의 발을 묶어라!” -옛! 실없는 말로 전쟁의 긴장을 풀어주던 라혼은 왕궁내부로 들어간 30개 백인 대 중 중앙부를 맡은 오코너 백인대가 왕비의 위치를 찾아내자 기사들과 함 께 그쪽으로 갔다. “스테판코, 네가 여기를 지휘해라!” -옛! “그리고 린과 기사단은 날 따라라!” 라혼의 다른 기사들은 대부분 솔을 타고 있었지만 린은 탈로스를 탑승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마법무기인 탈로스가 린이 운용하는 공력과 맞지 않았 기 때문이었다. 동쪽 대륙의 무사들이 익히는 내가공력이라는 것은 특별한 기운으로 정제된 마나였고, 순수한 마나만을 융합하는 마법진으로 이루어진 엑스시온은 순수하지 못한 마나를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순수한 마나란 동방에서 선천진기(先天眞氣)라고 불렸다. 그러나 선천진기는 무공 고수가 수련하기 까다로운 것이었으며 실제로 위력적인 면에서 발달된 기공 (奇功)들보다 훨씬 미치지 못했다. 그렀다고 린과 같은 기공을 익힌 무공의 고수가 탈로스를 타는 것이 불가능 하지는 않았다. 엑스시온을 설계할 때 린의 공력을 받아들일 수 있게 바꾸 면 되었다. 그리고 본래 탈로스는 마나유저가 아닐지라도 상관없던 물건이 었다. 그런 것을 대마법사 바우어가 엑스시온을 탑승자의 마나를 에너지원 으로 사용할 수 있게 설계하면서 획기적인 변화를 이룩한 것이다. 엑스시온 에 파일럿이 마나를 주입함으로서 탈로스의 반응속도, 즉 민첩성이 크게 향 상되었으며 순간적으로 괴력을 내는 일까지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 므로 린의 기공공력에 맞춰 마법진에 새로운 값을 부여하면 린도 탈로스에 탑승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 탈로스를 제작하는 단계에서 시행해야했고 라혼이 생각 한 탈로스는 딱히 마나유저가 아니더라도 다룰 수 있는 탈로스였기 때문에 특별히 만든 탈로스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그렇다고 마나유저가 탈로스를 다루면서 민첩성이나 순간적으로 강한 힘을 내는 것을 버릴 생각도 없었다. 라혼은 모든 힘을 에테르(ether)단계에서 다루는 유일한 마법사였다. 마법 생물이라는 드래곤들도 마법을 발현할 때 에테르 단계에서 다루지 않았다. 에테르는 에너지의 근원적 힘이며 바로 위대한 ‘창조’의 힘이다. 모든 물 질이 최하단위를 원자라고 하는데 원자를 이루는 힘이 마나(Mana)다. 이 마 나를 이용해 마법적 힘을 발생시키는데 바로 에테르가 이용되는 것이다. 마나를 물과 비교한다면 물로 술을 빚을 수 있는 것처럼 마나도 정제할 수 있다. 물을 끓이면 요리를 할 수 있듯이 마나도 형질을 바꾸어 마법을 부릴 수 있다. 마법, 소드 오러 또는 오러 블레이드, 신성력 등의 힘을 발현하 는 것은 주문이나 호흡법을 통한 정신의 집중이다. 이 정신, 또는 의식의 집중으로 이 세상에 가득한 마나를 움직여 마법을 시전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원리는 마법을 만들어 냈다는 드래곤들의 용언마법도 크게 다르 지 않았다. 그러나 라혼은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 자연 상태에선 평형을 이 루는 마나 배열, 또는 균형을 어그러지게 하여 발생되는 것에 주목했다. 그 리고 마나를 다루고 운용하는 모든 존재를 관찰했다. 거기서 그러한 모든 것을 움직이는 거대한 힘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아니 지만 그것이 있음으로 해서 마나가 움직이는 그리고 마나를 움직이게 함으 로서 여러 가지 결과를 내는 바로 그것 이젠 잊혀진 마도왕국 카마르게나의 마도사들이 발견한 바로 그것 에테르였다. 마나가 평형을 이룬 상태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세계는 ‘완벽’하기 때문이다. 그 완벽한 세계에 에테르가 발생함으로서 균형이 깨진다. 하지만 마나는 언제나 평형을 이루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움직이게’되는 것이다. 마나가 움직이면 곧 에너지가 발생하고, 에너지는 완벽한 세계에서는 필요 없는 것이기 때문에 또다시 평형을 이룬 마나를 움직이게 한다. 그렇게 ‘움직임’은 점점증가하고 완벽한 세계는 카오스(chaos, 혼돈)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여러 가지 혼돈 중 질 서(cosmos)라는 특이한 혼돈이 생겨나 물질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질서란 무한한 혼돈 중에 포함된 것이다. 즉, 원래 질서와 혼돈은 대립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질서가 한가지일 이유는 없다. 우주에는 여러 가지 질 서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인간 사이에 법도 지역과 전통에 따라 또는 가문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는 거처럼……. 사실 라혼이 생각한 마나의 평형이라는 기본 전제도 혼돈 이후의 것일지도 몰랐다. 혼돈이 혼돈인 이유는 법칙이 없는 상태로 모든 것이 혼재된 것이 기 때문이다. 어쨌든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에 눈이 떨어지며, 해가 뜨고 지 는 힘의 근원을 마나라고 가정했을 때 그것을 움직이고 질서와 법칙에 맞게 하는 것이 바로 에테르라고 가정하면 에텔 스페이스에서 그 에테르를 다루 어 마법을 소환하는 것에 대한 설명이 가능했다. 에텔 스페이스라는 이공간 자체에서는 라혼의 의지가 곳 창조주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을 알 았다고 뭐가 변한 것은 없다. 단순히 현상에 대해서 이론을 세운 것이기 때 문이다. 아직 이 세상에 존재하는 에너지에 대한 이해도가 낮으므로 에테르 가 어떤 일을 하는지 알 수는 없었다. 흔히 무거운 물건이 땅으로 떨지는 이유, 어떤 물체가 물에 떠다닐 수 있는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마법이 발현되어 마법이 되는 이유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 고 거기에서 만큼은 자신의 이론이 꽤 정확하게 들어맞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따로 마법사가 마나를 운용하지 않고도 마법통신이 이루어지는 피아 링의 존재가 가능했고, 이블 포스(Evil force, 마력), 매직 파워(Magic Pow er, 마법력), 홀리 오러(Holy Aura, 신성력)과 기사들이 사용하는 마나인 뉴트럴 포스(Neutral force) 모두를 이용할 수 있는 원리였다. 보통의 경우 마계의 족속이 사용하는 이블 포스는 신성력과 엄청난 반발하지만 라혼은 태연히 두 가지 힘을 같이 사용했다. *** 스테판코가 기사 5명과 기병대 50명의 도움을 받아 자신을 포한 10기의 탈 로스를 가지고 궁전으로 들어서려는 프린든 왕실근위대를 상대하고 있는 사 이 라혼은 7명의 기사와 린이 이끄는 동방무사들 50명, 그리고 기병대 50명 을 이끌고 오코너 백인대가 있는 궁전의 중앙홀로 뛰어 들어갔다. 라혼이 이끄는 레기온 기병대 900여명중 대략 400여명이 왕궁장악에 투입된 것이었 다. 솔드란의 점령은 라혼이 성문을 깬 순간 거의 마무리 되었다고 해도 과 언은 아니었다. 최대한 빠르게 왕비, 또는 왕녀의 신병을 확보해 아무런 대 책도 없으면서 우격다짐으로 싸우려드는 기사들의 항복을 이끌어내야 쓸데 없는 피해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잘못하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솔드 란의 시내로 탈로스들을 투입하여 대규모 학살이 벌여야할지도 모르기 때문 이었다. “나이트 스타시오, 전투는 이미 끝났소. 솔드란에 기갑전력이 전무한 이상 더 이상의 저항은 의미없다는 것을 잘 알지 않소?” “나이트 오코너, 그대 또한 기사라면 생명을 기사가 생명을 다해 지키겠다 고 맹세한 존재가 있을 것이오. 나는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에게 맹세했소. 내 몸속에 피가 다마르는 순간까지 프린든 왕가를 수호하겠다고 말이오.” 오코너는 근위기사 스타시오의 말에 감동했다. 비록 사령관인 라혼의 명령 으로 쓸데없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 자신을 소개하며 몇 마디 말을 건넸는데 그의 대답은 진정성이 느껴졌다. 이미 겹겹이 둘러쳐진 포위망에 글로네 왕비는 도주를 포기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그녀를 호위하는 자의 기세만큼은 참으로 대단했다. ‘이들은 하나하나가 정예중 정예다. 혈로를 뚫으려 거첸 공격을 하면 지체 없이 물러서고 사각에서 견제가 들어온다. 이렇게 손발이 잘 맞는 병사들 은 본적도 들은 적도 없다.’ 오코너가 스타시오의 깊은 충성심에 감탄할 때 스타시오는 오코너의 부하들 의 정확하고 유기적인 움직임에 감탄했다. 라혼은 레기온 기병대들을 10, 1 00, 1000의 단위로 팀을 이루어 금전적 포상과 어마어마한 징벌, 즉 당근과 채찍을 무기삼아 직접 조련한 군대였다. 여기서 제1원칙은 하나하나가 막 대한 투자로 이루어진 훈련을 받는 귀중한 재원이라는 것을 감안 가능한 피 해를 입지 않고 적을 제압하는 것이었다. 소수의 적을 상대할 때 적이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하는 소드 마스터가 아닌 이상 소드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 라 할지라도 공격할 수 있는 방향은 정해져 있었다. 적이 힘을 집중하는 곳 은 한번 강하게 공격하고 물러서면 공격받지 않는 양쪽에서 압박하는 것이 다. 그리고 후위가 따라붙어 다시금 포위망을 형성하여 적을 지치게 하는 전법이었다. 물론 적이 죽기를 각오하고 우격다짐으로 저돌적인 공격을 하 면 가장 압력을 심하게 받는 곳에서 기사가 막고, 병사들은 기사를 백업한 다는 개념이었다. 그리고 오코너의 부하들은 그러한 유기적인 움직임을 명 령이 없이도 훈련한 그대로 훌륭히 수행하고 있었다. 오도 가도 못하는 스타시오는 결국 적의 지원군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 입술 을 지그시 깨물었다. “비오, 네가 왕비님을 모셔라! 나는 혈로를 뚫겠다.” “대장…….” 비오는 대장을 불렀지만 스타시오는 이미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뛰어나가려 듯 하다가 측면을 공격했다. “나는 프린든 왕실 근위기사 가디언 스타시오 파브릭스 루디엔이다. 이야 압!” “헉!” -콰창~! 시퍼런 소드 오러를 머금은 나이트 스타시오의 롱소드는 측면에 약간 방심 하고 있던 레기온의 가슴을 가르고 지나갔다. 그러나 레기온들은 진형을 흩 트리지 않고 공백을 매우며 스타시오를 압박했다. 그러나 이미 죽음을 각오 한 기사의 저력을 피해 없이 막기란 불가능 했다. “대항하지 말고 모두 물러서라!” 스타시오가 두 번째 병사의 기병용 세이버(saber)를 부러트리고 어깨에 치 명적이 상처를 준 후 새로운 먹잇감을 찾을 때 물러서라는 명령과 함께 모 두가 썰물처럼 물러서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따라 붙으려 했다. 그러나 자 신을 노리고 날아드는 뭔가를 반사적으로 쳐내느라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 -캉! “웃!” 라혼은 프린든의 기사가 물러서는 레기온에게 악착같이 달라붙으며 롱소드 를 휘두르려 하자 손에 들고 있던 롱소드를 힘껏 집어던졌다. 그와 동시에 스텝을 밟아 순간적으로 가속하여 포위망을 형성한 레기온들의 머리를 뛰어 넘어 공격하는 리프어택을 시도했다. “큭!” 스타시오는 엄청난 힘이 담긴 롱소드를 처낼 때 순간적으로 박은 충격이 손 목에 전해지며 무기를 놓칠 뻔했다. 그렇게 주춤하는 사이 상대가 허공에서 떨어져 내려오자 기겁하며 롱소드를 쳐올리려했다. 그러나 아까 받은 충격 은 손목이 스타시오의 명령을 거부하고 있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상대 의 공격을 막아내는 정도가 전부였다. -쾅! “욱!” 그 공격으로 스타시오는 뒤로 주르륵 밀려났고, 라혼은 가장 날뛰던 자를 쳐내자 레기온들에게 부상자를 수습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뭐하는 거냐! 형제가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셈이냐. 부상자를 수습 해서 치료하라 말이야!” “옛!” 레기온은 최고 사령관의 무용에 조금 멍했다가 서둘러 죽음에 이르는 중상 을 입은 전우들을 후위로 끌어내 상처에 1개에 100골드나 하는 힐링포션을 몇 개나 들이 부었다. 그리고 각자 한 병씩 먹여주었다. 그렇게 빠르게 응 급치료를 한 덕에 그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모습을 목격 한 프린든 왕실근위기사들은 내심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일개 병사에게 웬 만한 귀족들도 사용하지 못하는 비싼 힐링포션을 물 쓰듯 퍼 섰기 때문이었 다. “나는 라혼 가이우스 세나데온 차이저 자작, 레기온 사령관이다. 퀸 글로 네 더 이상의 저항은 피해만 부를 뿐이니 순순히 항복해주길 원한다.” “당신이 그 유명한 다크 프린스이시군요!” 글로네 왕비는 슘터왕보다 2살 정도 연상 있었지만 서른이 넘지 않은 아름 답고 기품 있는 귀부인이었다. “그렇습니다. 퀸 글로네, 항복하시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왕비님 항복을 하시려거든 제 생명이 다하거든 하십시 오.” “스타시오 경…….” 라혼은 절망적인 상황임에도 불굴의 의지를 꺾지 않는 나이트 스타시오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바닥에 나뒹구는 아까 자신이 던졌던 롱소드를 세우고 말했다. “라혼 가이우스 세나데온 차이저, 당신께 결투를 청합니다.” “…….” 다크 프린스의 갑작스런 행동에 레기온들은 물론 스타시오로 놀랐지만, 스 타시오는 어쩌면 이것이 기회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며 다크 프린스와 마 주서서 허리를 꼿꼿이 하고 검을 세워 결투를 받아들였다. “스타시오 파브릭스 루디엔, 당신의 요청을 받아들입니다.” 라혼은 상대가 자신의 결투 신청을 받아주자 롱소드를 수평으로 잡고 짧은 기합성과 함께 그대로 뛰어들었다. 스타시오도 상대가 달려들자 고함을 지 르며 마주 달려갔다. “합!” “이야~!” -캉! “이런……!” -빡! 푸른 소드 오러를 머금은 스타시오의 검을 쳐낸 라혼은 상대의 가슴으로 뛰 어들어 그대로 록 스트라이커를 작렬했다. 그야말로 바윗덩어리에 맞은 듯 가슴을 보호하는 판갑옷 플레이트 아머가 형편없이 우그러진 체 뒤로 튕겨 나간 스타시오는 땅에 떨어지는 지는 충격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힘겹게 다시일어선 그였지만 그의 몸은 스타시오의 의식을 붙잡아 두는데 실패했 다. “…….” 라혼은 허공을 날아 5미터 밖 단단한 바닥을 구르던 상대가 벌떡 일어서서 방어 자세를 취한 그대로 기절한 기사의 투지에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 리고 검을 거두고 무방비 상태로 앞으로 나아가 기절한 기사의 무기를 거두 었다. “나이트 스타시오, 그대는 용감한 기사다.” 글로네 왕비는 ‘파팍’하는 순간 호위기사 스타시오 경이 허공을 날아 땅 과 거칠게 부딪치고 다시 일어서서 방어 자세를 취하자 내심 안도에 숨은 내쉬었다. 그러나 다크 프린스가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거의 무방비로 스타 시오 경에게 접근하자 의혹의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다크 프린스가 무기를 빼앗는데도 가만히 있는 스타시오 경의 모습에서 그제야 이미 선채 기절한 것이었음을 알았다. “퀸 글로네, 다시 한 번 권하겠소. 나는 나의 형제들이 다치는 것을 원치 않소. 그러니 이만 항복해주시오. 당신이 계속 고집을 피운다면 나는 형제 들의 안전을 위해 탈로스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솔드란의 시민들을 죽일 수밖에 없소.” “제가 항복한다면…….” “행동의 자유는 제약받겠지만 생명을 보장하겠소. 물론 저항하지 않는 병 사와 시민들을 해치지 않는다는 약속을 드리지요.” “하아~! 항복하겠어요.” “현명한 결단이오.” 라혼은 힘없이 항복하겠다는 말을 한 여왕을 치하하며 오코너에게 지시했다 . “퀸 글로네의 신병을 확보해라.” “옛!” 그리고 피아링을 통해 글로네 왕비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전 레기온에 전하 고, 린과 친위기사들을 이끌고 다음 목표로 생각되는 후원 쪽으로 달려갔다 . “기사단은 나를 따라 왕궁 후원으로 간다. 그곳에서 라이친 백인대의 수색 을 돕는다.” “옛!” 라혼은 이미 느린 속도로 왕궁의 지하를 벗어나는 일단의 무리를 발견했다. 그들 중 체내에 정제된 마나를 가진 마법사로 생각되는 존재가 2명이 포함 된 것으로 보아 그들 중 중요한 인물이 포함된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 다. 레기온(Legion) *** 칠흑같이 어두는 토굴, 프린든 왕가가 만약을 위해 만들어놓은 비밀통로를 통해 젊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나이 지긋한 노인 등 약 20여명의 인원이 쾌쾌한 곰팡내가 나는 길 숨을 몰아쉬며 움직였다. “이제 절반 정도가 지났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소 오베른 강어귀에 다다 를 겁니다. 강에 배를 띄우면 티베라 항구까지는 금방입니다. 힘들을 내세 요.” “좀 천천히 가면 안 될까요? 글로네 왕비님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요? ” “왕비님께서는 아마도 제국군에게 잡혔을 확률이 큽니다. 제가 모르는 비 밀통로가 또 있다면 모르지만 제국군이 이 통로의 입구를 찾느라 혈안이 되 어있으니 빨리 이동해야 합니다.” “…….” -입구를 찾았다! 여러 사람의 흔적이 있다. 마법사가 같이 있을지 모르니 주의하라! 그러나 어두운 통로 뒤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사람들을 다급하게 했다. 그 러나 통로는 한 사람이 겨우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 “이런, 오데브, 레히트, 뒤를 부탁한다. 아이리네 왕녀님 서둘러 주셔야 갰습니다. 오데브와 레히트가 통로를 붕괴시킬 겁니다. 하지만 자칫 붕괴되 는 범위가 예상한 것보다 넓을 수가 있습니다.” “…….” 아이리네 왕녀의 호위임무를 맡은 왕실근위기사 필히너는 그렇게 말하며 이 동하는 페이스를 높였다. 그리고 대략 15분을 뛰었을까? 드디어 통로의 끝 을 의미하는 빛이 보였다. “하아! 하아! 하아!” “허억!” 그러나 통로의 끝에서 기다리는 것은 해방감이 아니라 당혹감이었다. 비밀 통로의 출구를 어떻게 알았는지 2기의 황금색으로 도금된 탈로스 솔과 50여 명의 제국군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수고하셨소. 나는 레기온 기사단의 돌격대장 아돌프 멘델이다.” “헉헉헉헉…….” “누가 아이리네 왕녀이신가? 우리 대장이 한번 보자는데?” 제국군을 피해 그 고생을 하면 뛰어왔는데 출구에 제국군이 기다리고 있자 호위기사들과 나이트 필히너는 물론 아이리네 왕녀 또한 허탈할 수밖에 없 었다. “제가 프린든 왕가의 아이리네 파브릭스 바란입니다. 멘델 경!” 먼지가 쌓인 비밀통로를 좁디좁은 통로를 뛰어오느라 입고 있은 고급스런 드레스가 찢기고, 선명한 오렌지 빛 머리에 허연 먼지와 하얀 얼굴에 땀과 먼지 뒤범벅이 된 그녀였지만 피할 수 없다면 당당하게 행동하겠다고 마음 먹은 아이리네는 어머니를 닮았다고 하는 오렌지 색 눈동자에 힘을 주며 당 당히 말했다. “이런 꼴이 말이 아니구먼, 갑시다. 왕녀님, 우리 대장이 당신을 한번보자 고 하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에스코트를 부탁합니다. 나이트 멘델!” 아돌프는 시커먼 검댕이 묻은 낭패한 몰골의 왕녀의 당당한 태도에 씩 웃으 며 그녀의 손을 잡아 부축하며 지하수로 밖으로 나섰다. *** 프린든 왕국의 수도 솔드란은 전투를 시작한지 2시간 만에 정복되었다. 인 구가 10만에 육박하는 대도시를 점령하는데 웬만한 마을을 점령하는 시간보 다 짧은 시간 안에 정복한 것이다. 비록 탈로스가 시가지로 난입하면서 건 물이 많이 부서지기는 했지만 만약을 위해 시민들을 소개시켜 두었음으로 인명피해는 별로 없었다. 게다가 놀랍게도 사상자 또한 50여명에 그치는 수 준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레기온 쪽에서는 죽은 사람이 한명도 나오지 않았 다. 부상자가 발생하면 빠른 힐링포션으로 응급치료부터 했기에 전투가 끝 난 지 6시간이 흐른 지금 레기온에선 단 한명의 부상자가 없었다. “대장, 일단 들어난 프린든 측, 기사는 모두 가두어두었어. 그리고 지금 전장을 수습하고 있는데 조금 늦어지고 있어. 사상자는 얼마 되지 않는데 부상자만 3천여 명이나 되어서…….” “2유닛정도로 부서진 건물 밑에 매몰된 사람들을 구해주고 이번 전투에 쓰 인 힐링포션 수를 파악하고, 남는 것이 있으면 중상자들에게 주라고.” “프린든 병사에게?” “그들은 용감한 군인다. 이그라혼이 그들의 용기에 감탄하여 힐링포션를 지원하는 거다. 무슨 이야긴지 않겠어?” 죠슈아는 라혼이 그 비싼 힐링포션를 좀 전까지 칼을 맞대고 싸우던 자들에 게 준다고 하자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부상자를 수습하고 탈로스가 부순 건물의 잔해에 매몰된 사람들을 구하는 것까지야 대승리를 거둔 승자의 관 용으로써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들에게 힐링포션까지 지급하는 것은 여 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죠슈아, 비록 서로 생명을 빼앗기 위한 싸움을 한 사이지만 지금은 싸움 이 끝났어, 그리고 지금 그들은 전쟁이란 재앙을 맞아 다쳐서 죽어가는 사 람들이다.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나는 사람이란 모두 똑같은 존 재라고 생각해. 그냥 중대한 상처를 입고 죽어가는 사람을 돕는다고 생각하 라고…….” “알았어. 대장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런데 앞으로 ‘이그라혼’이란 이름을 사용할 생각이야?” “글쎄? 아직은 정식으로 공표할 생각은 없어.” “그런데? 어째서 실패한 영웅의 이름을 쓰는 거야? ‘차이저’를 새로운 영웅의 이름으로 만들 수 있는데?” 라혼은 가장 오랜 친구이자 큰 변수가 없다면 앞으로 가족이 될 나이트 죠 슈아 차이저 경의 질문에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라혼이란 이름을 잇는 자야. 대륙에 나 말고도 라혼 이란 이름을 사용하는 자가 없지는 않겠지만 이그라혼의 이름을 잇는 자는 오직 나뿐이야.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그라혼이란 이름을 누구나 인정하는 때 이을 거야.” “그런가?” 죠슈아는 라혼의 이름에 관한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마스터 로카데 차이저 는 자신에게 고등검술을 가르쳐준 존재의 이름이 ‘라혼’이었으며 그가 자 기를 희생하면서 ‘라혼’이란 이름을 이어줄 아기를 원했다는 것과 위대한 검사를 기리기 위해 세나데나 아가씨에게 ‘라호니아’라는 이름을 일부러 주지 않고 첫 아들에게 주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마 그때가 라혼 대장에게 자신의 검술을 가르치는 것을 포기할 때였을 것이 다. 그러나 지금 이야기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라혼 대장은 그때 죽은 그 라혼을 알지도 못했을 분더러 오히려 죽은 지 4년 후에나 태어났다고 들 었기 때문이었다. “뭔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아니, 별거 아닌데 대장의 이름에 얽힌 전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그 라혼의 이름을 잇는다는 것은 들은 기억이 없는 것 같아서 그게 숨겨야 할 만큼 대단한 일인가 해서.” “아아 그거 우리 아버지는 이그라혼이니 그런 거 몰라!” “그런데 어째서, 무슨 근거로 이그라혼인거야?” “그거야 내가 이그라혼의 환생 비슷한 것이랄까?” 죠슈아는 다소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환생?” “마법으로 기억을 가지고 다시 태어났다고나 할까?” “마법? 그런 마법도 있었어?” “있어! [리인카네이션Reincarnation 환생]이라고 6서클급 주문이야. 6서클 대마법사라면 시행이 가능하지 수 있어 접촉한 시체의 주위에 새로운 존재 가 나타나고 환생한 사람은 자신의 전생에 대해 알고 있게 되지.” “잠깐만! 6서클의 대마법사가 시체를 접촉해야한다고? 내가 듣기로 해적선 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들었는데?” 라혼은 녀석 답지 않게 계속 말꼬리를 잡고 물어오자 에텔 스페이스에서 중 간계에 처음 돌아와 곤란한 처지의 자신을 구해 주었던 나이트 그래이드의 단검에 꿈을 통해 다른 존재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하게 하는 [인스트럭 트 드림Instruct Dream 가르치는 꿈]주문을 걸고 품속에서 꺼내는 시늉을 하며 꺼내들었다. “이게 뭔지 알지?” “그거 대장의 숏소드잖아?” 죠슈아는 라혼 대장이 꺼내든 숏소드가 무엇인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자신 이 9살의 꼬맹이 대장에게 충성 맹세를 하고 신분을 증명하는 물건으로 받 은 추억 때문이었다. “이걸 품고, 잠을 자봐 그러면 무슨 뜻인지 알 테니까.” “뭐?” “그거 보기에 평범해 보이지만 일정한 조건이 되면 발현되는 주문이 걸려 있는 마법아이템이거든…….” 라혼은 그래이드 경이 여행할 때 구운 고기나 썰어 먹었을 평범한 숏소드에 소드 익스퍼트가 사용하는 기술 몇 가지와 소드 마스터가 되는 수련법, 그 리고 소드 마스터가 사용하는 기술을 새겨 넣었다. 아버지에게 여전의 자신 이 벌인 일에 대해 들었다면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믿을 것이고 그 럼 조금이라도 얻는 것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라혼은 아직도 알 수 없다는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짓는 죠슈아에게 화제를 돌리며 물었다. “그보다 이 도도한 왕녀님은 왜 아직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거야? 좀 알아 봐!” “알았어.” 아이리네 왕녀는 왕궁으로 들어온 뒤 포로 신세인 처지를 잊은 듯 라혼을 만나기 전에 목욕부터 하겠다는 고집을 피웠다. 하지만 라혼은 라혼대로 왕 비와 왕녀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면 서도 저항의지를 꺾지 않는 프린 든 기사들을 쫓아다니느라 바빴기 때문에 하라는 대로 해주라는 지시를 했 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솔드란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라혼은 점령군 최고 사령관으로써 왕녀를 만날 필요가 있었기에 지금 왕궁으로 들어와 그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지금 현재 죠슈아와 왕비를 감시하는 린, 왕녀를 감시 하는 아돌프를 제외한 그래험, 메사리프, 트라킨은 저항군을 산발적인 움직 임을 보이는 저항군을 상대하느라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슘터의 집무실을 차지한 라혼은 왕녀의 준비가 끝났는지 알아보기 위해 방 밖으로 나가는 죠슈아의 등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미리 알아서 자신의 진정한 정체를 이야기 해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지만 질문엔 사실대로 대 답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결국 라혼은 죠슈아를 속여야만 했다. 레이나 는 자신의 진전한 정체에 의심-혹시나 세상을 혼란으로 몰고갈 마왕이 아닌 지를-를 의심해 결국 떠나갔다는 것이 충격이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조금 이라도 자신들과 다른 존재에게 거부감을 가진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기 도 했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이 믿고 싶은 사실만 믿는 다는 사실을……. 자신의 조그마한 수작을 믿고 따라준다면 좋겠지만 역시 친구를 속이는 짓 은 정말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죠슈아, 너는 진실을 알아도 내 곁에 있어주겠지. 충성스런 기사로써…… . 하지만 용서해주게 나의 자그마한 속임수는 네가 나를 친구로 생각해주길 바라는 마음이야. 나는 이미 나와 백년을 함께할 아내를 잃었어. 친구마저 잃고 싶지 않아!” 라혼은 가끔 레이나가 떠난 날 꾸었던 꿈속에서 자신이 속삭였던 ‘과연 네 가 인간인가?’라는 질문을 떠올리곤 했다. 아마도 레이나가 떠난 이유가 아마도 그것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기 때문에 꾼 꿈이었을 테지만 라 혼에게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컸다. 그리고 지금 자신을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의 존재가 자신에게 위안을 줌으로써 자신이 관계없이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란 존재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했다. 그렇다고 라혼이 자기 정체성을 잃어가는 불안하고 위험한 단계는 아니었다 . 지금 라혼은 자신이 ‘나’라고 주장할 수 있는 영혼이라는 고정된 실체 가 존재가 없어지는 아나트마(anatma)의 단계에 있었다. 그리고 라혼은 지 금 그것을 받아들여야 할지말지를 결정을 유보해두고 있는 상태였다. 레기온(Legion) *** 솔드란의 경비병으로 20년 이상의 세월을 보낸 고참병 로마냐는 제국군들이 기사들은 모두 잡아가두면서 7천여 명이나 되는 병사들을 신분을 보장한 채 솔드란의 치안유지에 투입하는 것을 보고 멍청한 건지 현명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비록 제국군의 탈로스가 왕궁과 성문에 버티고 있어 로마냐 자신은 어떻게 해보려는 생각은 없었지만 제국군은 겨우 1천의 병력밖에 가 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무장한 7천여 명의 일부라도 봉기한다든지 하는 무슨 문제가 발생하면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 그러나 지도자가 없이 ‘우우’ 몰려가보아야 이미 그러한 상황을 대비하 고 있는 제국군에게 개죽음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로마냐 아저씨.” “왜?” “베키가 그러는데, 우리가 제국군과 함께 국왕과 싸워야 된데요. 그거 정 말이에요?” “우리가? 슘터 국왕 폐하와 싸운다고?” 경비병이 된지 얼마 되지 않는 애송이 녀석의 말에 고참 경비병 로마냐는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너는 ‘무서운’ 다크 프린스가 명령한다고 국왕폐하의 군대에 창 을 들이댈 생각이냐?” “예? 아니요, 그건 아니지만…….” “실없는 소리 말고 근무나 잘서. 잘못하면 죽는 수가 있어!” “예? 그건 무슨 말씀이세요?” “아무래도 공기가 무슨 일이 벌어져도 벌어질 것 같아 그래.” “무슨 일이라니요?” 로마냐는 통행이 금지되어 한산하고 아무도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 귀기스 럽기까지한 거리를 둘러보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너나 나나 다크 프린스의 병사냐?” “아니요!” “오늘 아침까지 서로 목숨을 뺏기 위해 험한 전투까지 한 사이에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프린든 왕국 솔드란의 경비병이다. 그렇지 않냐?” “맞습니다. 나는 솔드란의 경비병입니다.” “그런데 우리 손에 들고 있는 게 뭐냐?” “그야, 창이죠!” “뭐가 이상하지 않냐?” “에? 그러고 보니 우리는 포로로 잡혀있지 안네요.” “지금 우리가 목숨을 걸고 앞으로 나서면 다크 프린스는 상당히 골치 아파 질걸.” “정말이네?” “설마 진짜 몰랐던 거야? 고참병 로마냐는 생각이란 것이 뭔지도 모르는 애송이를 데리고 뭐하는 건 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아마도 오늘이나 내일쯤 뭔 사고가 터져도 터질 거야.” “그렇군요.” 그러나 고참병 로마냐가 생각한 그런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다. 라혼은 대부 분 포로로 잡힌 솔드란의 수비병들을 따로 가두지 않고 2명씩 솔드란 도시 전역에 뿌려두었다. 그리고 이미 통금지령이 내려져있고 솔드란의 사람들도 다크 프린스가 도시를 불 지르고 약탈을 하지 않을까 지레 겁먹고 각자 자 기 집에 숨어 꼼짝하지 않았다. 그렇게 솔드란의 시민과 탈로스의 위력을 두려워한 프린든 병사들이 알아서 기어준 덕에 아무런 사고도 발생하지 않 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레기온이 편하게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솔드란을 점령한 레기온 전체 병력의 몇 배나 되는 병력의 프린든 병사들이 무기를 가지고 도시 전역에 뿌려져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폭발직전의 화산과 같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 “여왕과 왕녀 덕분에 끝까지 저항하던 기사들이 항복했지만 이런 상태가 오래가진 않을 거야.” “지금 이곳으로 슘터왕의 대군이 달려오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가 알고 있소. 오히려 그것 때문에 쓸데없는 피를 부르는 저항을 멈춘 것이긴 했지 만…….” 라혼은 트라킨과 고들리프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한여름의 솔드란이지만 우리에겐 지금 살얼음이 얼은 물 위이지.” “뭔가 생각이라도 있는 거냐?”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내 목적은 솔드란, 특히 프린든 왕가의 보물 들이야. 최대한 빨리 털어서 여길 뜨는 것이 최선이지.” “겨우 보물만 얻고 도망치기 위해 이곳까지 왔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고들리프 경.” “하지만 모처럼 적의 수도를 점령했는데…….” “이 도시를 제대로 점령하려면 그만한 전력이 있어야하지. 지금은 그저 도 시에 진입한 것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슘터에게 치명적이지…….” “…….” “그래서 지금은 퇴각 작전을 논의 하는 것이다. 우리가 목표는 3군데다. 왕립 마법길드의 보물과 프린든 왕가의 금고, 그리고 프린든 근위기사단의 무기고다. 오늘 밤 안에 최대한 가지고 갈 수 있을 만큼 들고 여기를 빠져 나가 사우스포트로 복귀하는 거다.” 라혼의 말에 고들리프는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어렵게-사실은 쉽게 - 적국의 수도를 점령하고서 한다는 일이 겨우 약탈이나 하고 떠나자니…… . 게다가 명령에 무조건 따르겠다는 맹세를 하였지만 결정이 너무 일방적이 라 그 점 또한 다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거야, 이렇게 제멋대로 일을 행사하다니…….’ 승리에 가려져 잘 보이지는 않지만 고들리프 자작이 생각하기에 사우스포트 를 나선 것부터가 경솔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지 휘권을 포기한 자신이지만 지금 레기온에서 작위를 가진 이는 오직 라혼 자 작과 자신뿐이었다. 그럼에도 사령관인 라혼은 자기에게 어떤 의견도 물어 오지 않고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형식의 회의만 계속했다. *** 아이리네는 제국군에게 포로로 잡힌 신세지만 오히려 도도한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비록 약자의 허세인 도도함이었지만 말이다. “공주님 그를 너무 기다리게 하는 것 아닐까요?” “고작 하루밖에 기다리게 하지 않았어.” “하지만…….” “어차피 왕비님도 있고, 레고 숙부님도 계셔. 내가 굳이 그를 만날 이유가 없어.” 아이리네는 잔뜩 겁을 먹은 시녀에게 그렇게 말하며 여전히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최소한 하루나 이틀쯤 시간을 끌어볼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 문에 부담스럽게 위압적인 덩치를 가진 나이트 죠슈아의 물음에도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얼마 후 또 누군가 찾아왔다. -똑똑. 노크 소리가 울리자 아이리네 왕녀와 함께 있던 시녀는 두려움을 감추지 않 으면서 문 앞으로 나갔다. “무슨 일인가요?” “레기온 사령관이십니다.” “흠! 와, 왕녀님은 아직 준비가 되어있지 아, 않습니다.” 시녀는 두려움에 떨면서 말을 더듬으면서도 모시고 있는 분의 뜻을 거스르 지 않았다. 하지만 참다못해 여기까지 찾아온 젊고 아름답기까지 한 정복자 는 황홀하게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준비는 필요 없소. 아름다운 레이디!” “어? 안 돼요!” 갑자기 거칠게 방문을 열어 제치는 다크 프린스의 행동에 시녀는 기겁하며 말렸지만 이미 그의 몸은 방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이리네는 갑자기 방 으로 들어서는 무례한 사내의 태도에 내신 기겁하면서도 겉으론 침착한 태 도를 유지하려 애쓰며 떨리는 목소리도 말했다. “무, 무례 하군요.” “…….” 라혼은 말없이 창백하게 겁에 질린 왕녀의 몸을 노골적이고 찐득한 시선으 로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한 라혼의 태도에 왕녀는 더욱 당황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무, 무슨…….” “상당히 매력적인 몸이로군.” “……!” 아이리네는 다크 프린스의 한마디에 주체할 수없는 두려움에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무섭고도 두려운 상대는 지금 자신을 왕녀가 아닌 여자로, 아니 그저 단순히 전리품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의 물음은 그녀를 무척 혼란스럽게 했다. “프린세스 아이리네, 내가 청혼하면 받아 줄 텐가?” “……?!” 다크 프린스의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은 아이리네는 그것을 어 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나 자 신의 처지를 생각한 아이리네 왕녀는 곧 침착함을 되찾으며 차분한 어투로 되물었다. “무슨 뜻인가요? “내겐 지금 아내가 없다. 물론 약혼자도 없지. 독신인 내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그대에게 청혼하는 것이 이상한가?” 딴엔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미안하지만 제겐 이미 약혼자가 있어요.” “저런, 그거 아깝군. 혹시 누구인지 물어도 될까?” “실오나 왕국의 에드리언 국왕이에요.” “흐음!” 라혼은 그녀의 말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이리네 왕녀의 시녀 에게 말했다. “레이디…….” “미란다 입니다.” “미란다 양, 자리를 피해주시겠소?” “……!” “…….” 라혼의 말에 아이리네와 그녀의 시녀인 미란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나 라혼의 그녀들의 반응에 상관없이 방문 밖을 지키는 부하들에게 말 했다. “미란다 양을 왕비에게 데려가라. 왕녀는 내가 직접 지킬 테니까 아돌프 경에게 그렇게 말해둬라!” “예, 전하!” 라혼의 말에 레기온들은 돌아서며 묘한 미소를 지으며 서둘러 자리를 피해( ?)주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요?” “내가 뭘 말이오?” 방문이 닫히고 단 둘이 되자 아이리네는 따지듯이 물었다. 하지만 라혼의 반문에 차마 생각한 바를 입으로 꺼내지 못한 아이리네는 입술을 깨물며 눈 을 치켜뜨며 무섭게 노려만 볼뿐이었다. 그러나 라혼은 그녀가 어떤 표정으 로 죽일 듯이 노려보든 말든 소드벨트 풀어 놓고 갑주를 벗었다. 그러한 라 혼의 행동은 아이리네의 표정을 더욱 차갑게 만들었다. “흠!” 그러나 바론 눈앞에서 솔직히 건장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다크 프린스가 셔 츠를 벗고, 바지까지 벗자 볼이 살짝 붉어졌다. 조각과 같은 잔 근육이 발 달한 남자의 알몸에 지금껏 의식적으로 취해오던 냉정한 표정이 깨지며 몸 을 돌렸지만 강렬했던 인상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생뚱맞 게도 심장이 그녀의 의지에 반하고 있었다. ‘괜찮아. 그는 날 아내로 생각한다고 했어, 원하지는 않았지만……. 아니 그게 아니잖아! 소리를 질러야 하나? 어쩌지? 어쩌지?’ 아이리네는 온갖 생각을 하면서 그가 뒤에서 거칠게 덮쳐올 것을 대비하며 각오를 다잡았다. 그러나 상대는 한참을 기다려도 기대(?)했던 일은 벌어지 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귓속으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촤아! 촤아! 어이없게도 상대는 곧바로 자신을 덮쳐오지 않고 자신이 목욕을 위해 준비 한 목욕통의 물로 목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기(?) 전에 몸을 씻는 건가? 나야 좋지 땀 냄새를 맡지 않아도……. 아 니야! 명예가 더럽혀질 바엔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끓는 것이…….’ 아이리네는 칸막이 사이로 미치는 목욕하는 남자의 실루엣을 멍하니 바라보 며 치욕스런 삶과 명예를 지키며 죽는 것 사이에서 갈등했다. 그리고 결론 은 목숨을 걸로 최후의 협상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몸을 노린다면 죽겠다고 말하면 그가 자신을 놓아 줄지도 몰랐다. 아이리네는 그렇게 결심하며 자 살할 도구가 방안에 있는지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황당하게도 다크 프 린스가 탁자 위에 풀어놓은 소드벨트에 그의 롱소드가 그대로 있었다. 그리 고 그제야 방밖을 지키는 제국군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도주의 가능성 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아! 이방을 나가고 요행히 제국군이 장악한 왕궁을 빠져나간다 하더라 도 이로울 것이 없어. 교활한 다크 프린스가 그것을 원하고 있는지도 몰라! ’ 계속 이 방에만 잡혀있던 아이리네였지만 제국군이 왕궁을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을 것이란 것은 짐작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운가 보군.’ 라혼은 에텔 스페이스에서 새 옷을 꺼내 입은 후 한쪽에 서서 멍하게 생각 에 잠긴 아이리네 왕녀를 바라보고는 마나를 운용하여 젖은 머리를 말리고 커다란 침대에 몸을 누이고는 정신이 돌아와 경계의 빛을 띤 공주에게 물었 다. “같이 잘까?” “…….” “싫다면 할 수 없지. 그보다 침대가 참 푹신하군.” 아이리네는 자신에게 한번 묻고는 그대로 잠든 사내의 태도에 왠지 모를 분 한 마음이 들었다. ‘무얼 하자는 거지?’ 아이리네는 그날 저녁 자신을 헷갈리게 했던 다크 프린스 알 수없는 행동을 한 이유를 나중에 알게 되었다. 아름다운 처녀와 혈기 왕성할 나이의 사내 가 같은 방에서 함께 밤을 지새웠다는 간단한 사실은 그것만으로 간단한 것 이 아니었던 것이다. 레기온(Legion) *** “라혼 사령관이 지금 아이리네 왕녀와 함께 있다고?” “그렇습니다, 로드. 왕녀를 시중들던 시녀를 내보내고 방문 앞을 지키던 병사들까지 자릴 피하게 했습니다.” “그럼 왕녀와 동침을 하고 있단 말이냐?” “아마도……. 그럴 겁니다, 로드!” 고들리프 자작은 자신을 수행하는 시종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무지 다크 프린스라 불리는 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렵게 프린든 왕국의 수도 솔드란을 점령하고서 한다는 일이 프린든 왕가 의 금고를 터는 일이었다. 이미 레기온은 밤새 솔드란 전역의 귀족저택을 뒤져 막대한 양의 재화를 확보했으며 그 재화를 실을 말을 확보하느라 바쁘 게 움직이고 있었다. 내일이나 또는 모레쯤에 솔드란을 빠져나가겠다는 뜻 을 분명히 하고서 프린든 국왕 슘터의 친동생인 아이리네 왕녀를 취하는 모 습을 보인 것이다. “순결하지 못한 왕녀는 인질로써 가치가 반감될 텐데? 도대체 어쩔 셈이지 ?” 고들리프 자작은 다크 프린스가 아이리네 왕녀를 취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을 곰곰이 따져보기 시작했다. ‘프린세스 아이리네는 프린든 왕가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신분이고, 아직 독신인 시오나 왕국의 에드리언 왕의 약혼자라는 소문도 있다. 그전 에 슘터에게 있어 누구보다 소중한 존재라고 알려져 있다.’ 프린든의 슘터왕은 10년 터울의 동생을 끔찍하게 생각했는데 그도 그럴 것 이 아이리네 왕녀는 태어나면서부터 슘터의 손에서 자랐기 때문이었다. 아 이리네를 낳고 약해진 남매의 친어머니가 병이 들어 결국 왕녀가 6세 되던 해에 돌아가신 후 슘터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아이리네를 끔찍하게 챙기 며 보살폈다. 동생을 지키기 위해 검술을 익히고 왕자로써 후계자수업을 착 실하게 받았다. 아이리네의 몸에 작은 상처라도 생길 때면 선왕이 살아계시 던 때도 왕궁이 뒤집어지기 일 수였다. 솔드란에선 가장 확실하게 패가망신 하는 방법으로 아이리네 왕녀를 다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정도로 슘터 왕의 여동생 챙기기는 대단했다. 그리고……. ‘설마……. 슘터에겐 아직 자손이 없다. 그리고 아이리네 왕녀는 슘터의 유고시 프린든 왕가의 제1상속자!’ 고들리프 자작는 프린든 왕가가 어떤 상속의 법칙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현 프린든 왕가의 주인인 슘터와 가장 가까운 촌수를 가지고 있 는 왕족이 아이리네 왕녀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 아이 리네가 시오나 왕국의 에드리언 왕과 약혼한 것이 사실이라면 얼마간 왕가 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지만 프린든 왕국의 통치권은 잃게 된다. 보통의 경우 왕녀가 결혼을 하거나 혹은 남편이 내국인이 아니면 왕국의 통치권을 포기하게 된다. 물론 여자에게 아예 통치권을 인정하지 않은 왕가도 있었다 .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이 미리 정해둔 법대로 되는 것은 아님으로 다크 프린스가 아이리네 왕녀와 정식 결혼을 하고 통치권을 주장할 수도 있었다. ‘왕녀와 결혼하고 슘터와 전쟁에서 승리하면 프린든 왕가 자체가 다크 프 린스의 손에 떨어지는 것인가?’ 프린든 왕가는 그저 프린든 왕국만의 왕가가 아니었다. 프린든 왕가는 바이 나 공국을 속국으로 시오나 왕국을 신하국으로 그리고 몬타나 반도의 크고 작은 왕국들의 맹주적 위치에 있었다. 그것은 이들 나라가 대부분이 프라크 족이 세운 나라들이고 프린든 왕국은 프라크 족의 종주국이었기 때문이었 다. 여기 북방에 있으면서도 바르바로이 계통의 프라크 족과 달리 고대 시 드그람 제국 군단병 세력이 세운 플레이나 왕국-콰이스 가가 속했다가 멸망 시킨 왕국, 현재 갤지방- 같은 나라도 있었다. 다크 프린스에게 실제적인 힘이 있는 이상 아이리네 왕녀를 아내로 맞이하 고 슘터를 무찌르고 현재 혼란스런 갤 지방을 안정시킨 후 시드그람 대륙 북방을 자신의 세력권으로 묶을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와 더불어 신성 시드그람 제국 황제가 되면 대륙의 절반에 해당하는 지역에 다크 프린스의 영향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모든 일이 잘 되었을 경 우를 상정한 것이다. 1000년 이상의 세월동안 프라크 족이 건설한 국가와 고대 시드그람 제국의 군단병의 후예가 건설한 국가는 태생이 서로 달라 운명과 같은 앙숙관계에 있었다. 그리고 다크 프린스는 갤 공의 외증손이며 그가 왕녀를 취한 행위 는 프린든 왕국의 입장에서 침략자의 약탈행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사실상 사병이나 마찬가지인 레기온은 공식적으로는 신성 시드그람 제 국 황제의 직속군이었다. 다크 프린스가 가진 절대지휘권은 프린든 왕국과 의 전쟁에 국한 되어있으므로 갤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다시 황제에게 그 문 제에 관한 권한행사를 허락 받아야하고 귀족원의 승인을 받아야만 했다. 그 렇지 않을 경우 반역행위에 해당하는 죄를 뒤집어쓸 수도 있었다. 그리고 프린든 왕가와 신성 시드그람 제국과 역사적 전통적 관계 또한 썩 좋지만은 않았다. 또한 아이리네 왕녀가 가직 법적 상속권 또한 바르바로이 의 법이 살아있는 프린든 왕가에서 지상권을 가진 슘터왕이 거두어버리면 그뿐이었다. 그럼 다크 프린스는 아무런 실속이 없이 단순히 약탈자에 난봉 꾼이란 불명예스런 평가를 받아야 할지도 몰랐다. *** 어슴푸레한 새벽, 새로운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해가 뜨기 한두 시간 전의 시간. “라이트Light!” 라혼은 눈을 뜨고 어두운 실내를 밝히기 위해 [라이트Light, 빛]주문을 시 전했다. 비록 어둠속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라혼이었지만 지금은 뭔가를 보기위해 불빛이 필요했다. 밝게 빛나는 마법적인 빛은 방안의 모든 것에 밝게 비추었고 한쪽에 쪼그리고 잠든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울면서 잠이 들었는지 눈물자국이 선명한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면서 라혼은 중얼거 렸다. “생각보다 겁이 많은 것인지? 아니면 현명한 건지?” 그리고 탁자에 일부러 벗어놓은 롱소드가 그대로 있는 것을 바라보며 말했 다. “어쨌든 내가 싫지는 않은 모양인데 다행이로군.” 무기를 풀어놓고, 방문 앞을 지키는 병사까지 치워주었는데 도망을 가지 않 은 그녀의 태도을 나름대로 해석한 라혼은 곤하게 자는 아이리네 공주를 부 드럽게 안아침대로 옮겨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드레스를 끈을 느슨하게 풀 어주며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럼 나는 볼일이나 볼까?” 그리고 라혼은 그대로 솔드란의 곡물창고를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 로 돌며 그곳에 있는 곡물들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10만에 달하는 솔드란의 시민들이 3개월간 먹을 수 있는 식량을 모조리 턴 라혼은 마법사 길드의 비밀창고에 들러 탈로스를 만드는데 필요한 마법물질들을 털었다. 또한 솔 드란에 신전과 각 귀족가문의 알려지지 않은-사실은 도둑길드 유니온에게 파악된-밀실을 돌면서 막대한 재화들을 털었다. 그것들은 지금 레기온들이 확보한 재화를 훨씬 뛰어넘는 엄청난 것이었다. 또한 왕궁과 솔드란 경비대 의 무기고의 쌓아놓은 질 좋은 무기들도 모조리 쓸어 담았다. 그렇게 두 시 간을 솔드란 전역을 돈 라혼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아이리네가 잠든 방으로 돌아왔다. “아직 그대로군.” 라혼은 아이리네가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고 무장을 하기 시작했다. 통기성 이 좋은 셔츠에 질긴 와이번 가죽으로 만든 가죽갑옷 그 위에 몸통을 보호 하는 판갑옷을 입고 소드벨트를 매는 것으로 간단한 무장을 마쳤다. “깨어난 거 알고 있으니까, 그만 일어나는 것이 어때?” “절 어떻게 한 거죠?” “어떻게 하긴 저기에서 궁상맞게 쪼그리고 자는 것을 침대로 옮겨 주었을 뿐이야.” “그런데 제 옷은 왜 벗겼나요?” “내게 누나가 둘이나 있다고, 누나들이 그러는데 여자들이 입는 옷은 풍성 해 보여도 꽉 끼는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조금 풀어준 것뿐이야. ” 너무도 자연스러운 말투에 아이리네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 하지만 그 일을 한 상대가 남편이나 시중을 들어주는 시녀가 아닌 사내라 는 사실은 그녀를 당황하게 했다. “그게 말이 되요.” “안 될 것은 또 뭐야! 그보다 이리와!” “뭐, 뭐하는 거예요?” “배고프지 않아? 아침 식사해야지. 왕녀씩이나 되었으면서 이렇게 헝클어 진 채 식당으로 나설 거야?” “식사는 방에서 해도 되잖아요!” “내 부하들은 지금 무척 피곤해. 그리고 여기로 식사를 챙겨올 만큼 한가 한 부하는 없어.” 라혼은 능숙한 솜씨로 아이리네 왕녀의 오렌지 색 머리를 빗기고 곱게 땋아 주었다. 그리고 새삼 여자의 적응력에 감탄했다.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인 데 그녀는 자신의 성격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거기다……. “이건 평민들이나 하는 머리잖아요?” “이렇게 한다고 해서 네가 고귀한 공주님이란 것이 변하지는 않아! 그리고 유지하기 힘든 풍성한 머리모양보다 이게 훨씬 편해. 전장에선 되도록이면 편한 것이 제일 멋지고 아름다운 거야.” 살짝 투정까지 부리는 것을 보니 말이다. 아이리네는 자신이 허락지 않는 이상 이 제멋대로인 사내가 강제로 뭔가를 이루려 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 깨달았다. 그리고 마음이 안정대자 왠지 그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그런 생각을 드는 자신이 어이없었지만 조심스럽게 머리카 락을 매만지는 그의 손길이 싫지는 않았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다됐어. 가지…….” “옷도 갈아입고 싶은 데요?” “옷?” “미란다가 챙겨온 옷이 있어요.” “어디 있는데?” 지금 이곳은 아이리네가 사용하던 방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포로 신분이 왕 비와 귀족들을 감시하기 쉽도록 서너 군데 큰방에 몰아두었고 아이리네가 있는 이곳은 외국의 사신이 머무는 방이었다. 말하자면 멀리서도 감시가 쉬 운 위치에 만들어진 건물에 있는 방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이리네 왕녀의 시녀인 미란다는 그의 거처로 가서 드레스를 한 아름 가져와 왕녀가 갈아 입을 옷이 있는 것이다. “내가 골라주지.” 라혼은 아이리네의 옷상자를 보고 턱을 긁적이며 가장 편해 보이고 단순한 형태의 드레스를 골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라혼은 여자들의 특성중 하나 인 몸치장하는데 시간을 잡아먹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는 의도로 그녀 에게 선택권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이게 가장 좋군. 이거 입어!” 입을 옷을 고르는 권리를 박탈당한 아이리네는 선선히 옷을 받아들고 칸막 이 뒤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나 여자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는 칸막이 뒤에서 계속 보스락 대며 그 단순한 형태의 드레스를 가지고 맵시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작전회의 겸 아침식사에 참석한 기사들은 라혼이 아이리네 왕녀와 팔짱을 끼고 식당으로 들어서자 순간 얼어붙었다. 그렇지 않아도 라혼이 왕녀와 동 침을 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는데 저렇게 대놓고 행동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멘델 경.” “왜?” “전하하고 왕녀의 사이가 의외로 좋아 보이지 않습니까?” “정말 그래 보이는 군. 원래 인질이 된 여자가 자신을 인질로 잡은 남자를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고는 들었지만 그게 단 하루 만에 저렇게 되기는…… .” “원래 라혼 선배는 유벤츠였을 때부터 손이 빨랐어, 여자들에게는 왕자님 일줄 모르겠지만 남자들의 입장에서 그야 말로 사악하게 미소 짓는 대마왕 이었다고 어떻게 발만 들여놓았다 하면 빠져들어서 유벤트 기사단에선 ‘늪 ’이라고 불렸다니까!” “하긴 열 살도 되기 전에 장가간 경험이 있는 ‘경험자’는 뭐가 달라도 다르군.” 유벤츠 출신의 기사와 하이슬란드에서 수년간 보낸 철가면 기사단 출신의 기사가 세상의 이런저런 일에 경험이 많은 아돌프와 더불어 서로 정보와 의 견을 교환(?)하며 라혼과 프린든 왕녀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식당으로 들어 서서 함께 앉아 식사를 하는 다정한 모습을 연출하는 현상에 대해 분석을 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대화는 근처에서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 기사들로 하여금 납득할만한 논리(?) 제공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관심을 보이는 모 습이 보였다. 그것은 기사에게 귀부인과 로맨스는 매우 중요한 로망이었고, 숙녀를 마음을 얻는 방법과 기술은 누구나가 큰 관심을 가지는 분야기 때 문이다. 어쨌든 솔드란에서 맞는 첫 번째 아침식사가 끝나자 라혼은 아이리네를 방 으로 돌려보내고 기사들에게 밤새 지시한 사항의 진척상황에 대해 보고를 받았다. “목표로 한 곳에 있던 황금과 보물들을 일단 왕궁으로 옮겼습니다.” “좋아! 그것들을 가져갈 방법은?” “포로로 잡힌 기사들의 말과 여분으로 가져온 말을 이용하면 기동력의 감 소 없이 모두 옮길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레기온을 태울 말에도 약 2, 3 킬로의 재화를 나누어 실어두었습니다.” “병사들의 피로도는?” “만 하루이상 쉬지 못한 병사가 많지만 사기가 높아 피로를 호소하는 레기 온은 없습니다.” “그럼 지금 당장 움직여도 되겠나?” “옛!” “그럼 정오까지는 솔드란을 벗어날 수 있도록 준비한다. 정찰병이 슘터왕 의 본대에 관한 보고가 들어오는 데로 다시 작전회의를 갖는다. 그때는 참 모진만 모인다. 이상!” 그리고 대략 정오가 가까워진 시간 정찰병이 돌아와 슘터왕의 본대가 솔드 란과 반나절 거리에 있는 요새에 도착해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가져오자 라혼은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고 말했다. “다행이군. 우리는 이 길로 솔드란을 떠난다.” 라혼의 결정에 이 전쟁 자체를 별 의미 없게 생각하는 메사리프와 진정한 라혼의 정체를 아는 그래험, 그리고 명령이 떨어지면 주저 없이 목숨이라도 바칠 죠슈아는 별말 없었지만 트라킨과 린, 아돌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포타미아가 대륙의 섬 같은 지역이라고 네가 말했잖아? 그전부터 궁금했 었는데 어떻게 포타미아를 벗어날 생각이지?” “맞소! 아무리 굼벵이 슘터지만 우리를 병 안으로 기어든 우리를 순순히 보내줄지 않을 것이잖소?” “무슨 계책이라도 있는 겁니까, 형님?” “계책까지는 거창하진 않아도 내게 방법은 있다. 날 믿어라!” 라혼이 그렇게 말하자 그 셋은 납득하며 물러섰다. 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라혼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들리프 자작의 경우는 또 달랐다. “그 방법이란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오? 이것은 레기온의 목숨과 프린든 과의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일이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알아야할 권리가 있지 않소?” 확실히 타당한 의견을 개진한 것이었지만 아직 별 생각이 없는 라혼으로써 는 설명하기가 난감했다. 라혼이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많았다. 지금 1000 여명의 레기온과 탈로스 25기를 한곳에 모아놓고 통째로 사우스포트까지 단 번에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 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라혼이었기 에 퇴각에 관해선 별문제가 없었다. 프린든 군이 전부가 덤벼든 다해도 무 섭지 않았다. 정 곤란하면 모두 무찔러버리고 천천히 다음문제를 생각하면 그뿐이었다. 라혼 자신과 메사리프, 그래험 정도의 존재가 진짜로 나서면 프린든 왕국군 정도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라혼의 목적은 프린든과의 전쟁이 아니었다. 라혼의 목적은 세상사람 모두 가 ‘납득’하는 수준의 전공과 레기온 기사단과 기병대의 개인적인 충성을 얻어내고 그들에게 자신의 전투 방식을 습득시키는데 있었다. 이른바 빠른 이동과 효과적이고 유기적인 전투를 중심으로 한 ‘엘리트’를 만들려는데 있었다. 일단 전쟁이 벌어지면 며칠 밤을 새며 빠른 이동을 하여 적이 전 혀 상상할 수 없는 곳을 치고 충분한 정찰병을 운용해 적보다 훨씬 넓은 시 야를 갖게 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백번 훈련을 하는 것보다 한 번의 실 전에서 얻어지는 것이 많기 마련이다. 라혼이 생각하는 전쟁의 승패는 양군이 모여 회전을 벌이는 전투에 있는 것 이 아닌 그전에 어떻게 준비하고 미리 정보를 입수해 대비하느냐에 달려있 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전투 지휘관의 역량이지만 병사들에게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강행군을 견딜 수 있는 지구력과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기를 잃지 않는 내구력이었다. 지구력은 강도 높은 훈련에서 나오고, 내구력은 그 집단의 전통에서 나온다. 즉 고생을 해본 병사가 고참병으로 있는 것만 으로도 집단의 전투력은 상승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실제 전쟁 중에 병사 가 하는 전투행위는 ‘행군’이다. 군대가 얼마나 빠르게 움직여주느냐에 따라 전쟁의 유불리가 결정이 된다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이렇게 원래 목적이 ‘교육’이었던 라혼에게 고들리프 자작의 정당한 질문 은 상당히 곤혹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라혼에게 질문에 대답할 의무가 있 었다. 라혼은 지도를 프린든 왕국의 지도를 가져와 펼치며 말했다. “우리는 솔드란를 빠져나가 이 길을 타고 여기까지 가장 빠른 속도로 이동 한다. 예상 소요시간은 대략 10시간 하지만 도하작전까지 생각하면 대략 3, 4시간 정도 더 걸릴 것이라 예상된다. 일단 도하를 하면 바로 진지를 구축 해 6시간 정도 휴식을 취한 후 사우스포트까지 쉬지 않고 달린다.” “도하? 그 강은 로인 강이 아니오? 내가 알기로 로인 강은 상당히 깊고 넓 은 강이라고 들었는데 게다가 적군이 강을 따라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으면 전투가 있지 않겠소?” “당연히 포위망은 형성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단단한 주머니라 도 날카로운 송곳에 꿰뚫린다. 아무리 강을 방패삼아 우릴 막으려 해도 우 리의 전력은 막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굼벵이 슘터가 이끄는 본대뿐이다. 언 제나 하는 말이지만 우리에 가장 큰 적은 시간이다. 그러니 서두른다. 이상 !” 질문을 계속하려는 고들리프 자작에게 더 이상 설명하기가 궁하던 라혼은 말을 돌리며 기사들을 재촉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죠슈아가 질문을 던져 왔다. “그런데 대장, 왕녀는 어떻게 할 셈이야? 강도 높은 강행군이 될 텐데? 함 께 데려갈 거야? “귀찮기 만할 포로를 데려가서 뭐하겠어?” “그렇군.” “무슨 상상들을 하는지 모르지만 나는 나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는데 왕녀 와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다. 죠슈아!” “내가 뭐랬나? 그냥 대장이 왕녀를 각별하게 대해서 그렇다는 거지. 나는 먼저 가서 준비해야겠어. 바쁘다 바빠!” 어색하기 그지없는 죠슈아의 태도에서 간밤의 일이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충분히 상상이 가는 라혼이었다. 비록 일부러 의도한 상황이긴 하지만 그런 것으로 오해를 받는 것만큼 쑥스러운 일이 없었다. “아이리네가 상처받지 않으려나 모르겠네. 왠지 그녀에게 미안해지는 걸. ” 레기온(Legion) *** -쾅쾅쾅! “이봐! 부상자가 죽어가고 있다. 어서 문을 열어라!” -쾅쾅쾅! “빨리 문을 열지 않으면 부숴버리겠다. 이봐!” 프린든 근위기사단의 나이트 베셀은 드넓은 문을 두드리며 뒤에 있는 레곤 공작을 바라보았다. 제국군은 솔드란에 있던 기사와 귀족을 왕실 연회가 벌 어지는 넓은 홀에 가둬 두었다. 모두들 몸값을 내겠다고 귀족의 이름을 걸 고 맹세를 했지만 다크 프린스는 솔드란이 장악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하루 나 이틀 정도 그들에게 자유를 박탈했다. 나름대로 타당한 논리고 또 곧 풀 어주겠다는 약속을 한 이상 포로 신분인 그들은 그의 말대로 따라야 했다. 그리고 하룻밤이 지나자 말이 많고 생각이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파악한 제국군의 전력에 대해 논의하며 한 가지 작전을 세웠다. 제국군의 병력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파악한 그들은 목숨을 걸고 이곳을 탈출하여 제국 군과 싸운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전에 일단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했다. “부숴버리게…….” “예, 공작전하.” -쾅, 쾅, 쾅! 두 명의 건장한 기사가 몸통은 던져 두툼한 나무로 만든 문을 부수고 밖으 로 나섰다. “어라? 어떻게 된 거지? 아무도 없잖아?” “공작 전하! 밖에 제국군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럴 리가…….” “제가 한번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베셀은 레곤 공작의 허락을 받아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왕궁이 텅 비어 있 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조용하자 께름칙한 생각에 발소리를 죽이며 주변을 살폈다. 그때 베셀의 귀에 갸얄픈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탕탕탕~! “이봐요! 밖에 누구 없어요? 무슨 일이예요?” 베셀은 즉시 그곳으로 가서 문에 걸린 빗장을 치우고 문을 열었다. 그곳에 여자들이 잡혀있는 곳이었다. “글로네 왕비님!” “그대는?” “근위기사 베셀입니다.” “무슨 일인가요? 멀리서 싸움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폐하께서 오신 건가요? ” “아직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계속 이곳에 계셔주십시오. 교활한 다크 프린 스가 무슨 계책을 꾸미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당분간 이대로 있 어 주십시오. 섣불리 움직이다 당할 수 있습니다.” “알겠어요. 그리하지요.” 베셀은 다시 레곤 공작에게 그러한 사실을 알렸고, 공작은 불안한 가운데에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일단 어떻게든 무기를 확보하고 사태를 파악해야겠소. 우리 모두 여길 나 갑시다.” “예, 알겠습니다.” 기사들은 미리 조를 나눈 그대로 왕궁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왕궁안에 제국군의 모습이 보이지 않지만 무기고도 비어있습니다. 왕궁 안에 무구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하다못해 벽을 장식한 무기도 없습 니다.” “무기가 없어?” “주방에 가보시오. 거기에 하다못해 식칼이라도 있겠지. 나머지는 의자다 리를 부숴서라도 곤봉이라도 드시오.” “맞아! 그러는 것이 좋겠군.” 그러나 주방에도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하다못해 금속냄비까지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래서 자랑스러운 프린든 근위기사단은 의자다리와 탁자 다리 로 된 곤봉으로 무장을 해야 했다. “이래선 싸울 수 없겠군.” 그때 누군가 레곤 공작을 다급한 목소리로 불렀다. “레곤 공작전하!” “무슨 일이냐?” “다크 프린스가 제국군 모조리 이끌고 솔드란을 떠났습니다. 지금 솔드란 엔 제국군이 한명도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리고 여기…….” 레곤 공작은 기사가 건네주는 편지를 담는 길쭉한 비단 주머니를 받아 다크 프린스의 인장이 찍힌 밀랍봉인을 뜯고 두루마리 서한을 펼쳐 내용을 확인 했다. <아헨의 공작 아이온 파브릭스 레곤 귀하에게……. 얼굴을 보고 작별을 고해야 함이 타당하나 이렇게 서한으로 작별을 고하는 것을 용서하시오. 내가 얼마나 바쁘게 움직였는지 아신다면 이해하시리라 믿소. 약속대로 귀족들은 몸값을 받고 풀어주었소. 이 서한을 받기 전에 미 리 나와 있었다면 그래도 용서하겠소. 그리고 귀하의 딸이 상당한 미인이라 던데 시간이 없어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쉽구려. 나중에 웃는 얼굴로 다 시 만납시다. -프린스 그란 라혼 가이우스 세나데온 차이저 자작> 레곤 공작은 서한을 정치적 오른팔인 바딘 백작에게 건네주며 허탈하게 웃 었다. “허허허허……. 어이가 없군. 어이가 없어. 신분을 불문하고 한곳에 몰아 넣은 것이 이상하다 생각했었는데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군.” “공작전하, 곡물창고가 전소되어 저장해두었던 밀이 모두 재가 되었습니다 .” “공작전하, 왕실금고가 비어있습니다.” “공작전하, 왕립 프린든 마법사 길드의 창고도 비어있답니다.” “공작전하, 대지의 여신 신전을 비롯한 신전의 금고와 창고가 약탈당했습 니다.” 그리고 계속이어 지는 보고에 다리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북방에 서 가장 부유한 프린든 왕국의 수도 솔드란은 다크 프린스라는 약탈자에게 막대한 재화를 탈취 당한 것이다. 시간을 두고 파악을 해야 갰지만 포타미 아 전역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다리에 힘이 풀리는 공작이었다. 왜냐하면 레곤 공작은 아직은 젊은 슘터왕을 대신해서 프린든 왕가의 재정을 관리하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어깨를 더욱 무겁게 한 것은 다크 프린스가 아이리네 왕녀의 순결마저 약탈했다는 사실이었다. 동생을 끔찍하게 아끼는 슘터왕이 그 이야기를 들 으며 임시세금을 징수하여 전쟁을 지속하려 들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 러나 왕이 군대를 유지하며 전쟁을 계속하려면 임시세금가지곤 턱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 “뭐야? 그란의 애송이가 솔드란을 떠났다고?” “그렇습니다. 폐하! 방금 솔드란에서 레곤 공작님이 직접 마법통신을 보내 왔습니다.” 브라돈 요새에 머물고 있던 슘터는 뜻밖에 소식에 기뻐해야할지 화를 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일단 수도에서 적이 물러났으니 마음의 여 유를 가지고 포위망을 좀 더 확실히 하여 적을 압박하면 되었다. 물론 그전 에 먼저 솔드란으로 돌아가 시민들을 안심시키는 것이 우선이었지만 말이다 . “가자! 자세한 보고는 왕궁에서 받겠다.” “교활한 애송이의 계책이 아닐까요?” “그것은 가면서 천천히 확인하면 된다. 일단 기갑부대와 기사단만 솔드란 으로 미리 간다. 어차피 그러려고 생각한 것이니 주저할 이유가 없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슘터왕은 단달음에 솔드란까지 달려와 도시와 아내와 동생이 무사함 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내심 죽일 놈이지만 제국 제일의 기 사의 아들답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곧 부정했지만……. “죄송합니다. 솔드란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되었습니다. 레곤 숙부! 전투의 경과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아마도 다크 프린스가 던졌다는 도끼는 마법이 걸리 특수한 신병기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 솔드란을 지키다 전사한 기사들에게도 충분히 포상하세요.” 가족이 무사하고 전투의 파괴의 흔적이 생각보다 미미해서 안도한 슘터는 고생이 심했을 숙부를 심하게 대하지 않았다. 게다가 수도를 지키는 탈로스 까지 꺼내든 슘터이다보니 그에게도 수도가 유린당한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 었다. 이럴 땐 서로 싸우기보다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정치적으로도 이득이 었기 때문인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제국군이 왕궁의 금고와 보물창고, 무기고, 솔드란에 있는 신전의 창고, 솔드란의 유력한 귀족가문의 금고와 왕립 프린든 마법사 길드의 창고가 약 탈당했으며 왕궁의 식량창고 도시 곡물창고에 인위적인 화재가 발생해 보관 하고 있던 밀이 전소되었으며, 그리고…….” “그리고요?” 울그락불그락하는 국왕의 눈치를 살피던 레곤 공작은 말을 이었다. “포타미아 전역의 피해는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추가적 피해가 아닌 이미 알고 있던 피해를 말하자 화를 속으로 삭 이는 슘터였다. 그리고 그런 국왕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레곤 공 작이었다. “폐하! 제국군의 위치가 확인되어 있습니다. 로인 강 하류 알파칸 다리 남 쪽 30키로 지점에서 도하를 시도하는 중이랍니다.” “뭐야? 기사단을 출정한다. 그다지 멀지 않는 곳이다. 반드시 잡아야 한다 .” “폐하 기사들의 피로도가 너무 높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들은 도시를 약탈한 도둑에 불과하다. 한시가 급 하단 말이다. 출진이다. 어서 준비를 해라!” “옛!” 슘터 또한 기사들의 피로가 얼마나 되는지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자신 또 한 무리한 강행군 덕분에 무척 피곤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집에 돌아와 있다 몇 시간을 머물고 다시출정하려니 정신적인 피로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새 거기까지 가서 도하를 시도하다니 그들도 어제부터 쉬지 못했을 텐 데…….” *** “브란통 백작님 국왕이 탈로스 부대와 기사단을 이끌고 지금 막 솔드란을 떠났다고 합니다.” “하루, 하루만 저들의 발을 잡아놓으면 전쟁의 신은 프린든의 손을 들어줄 거야.” “백작님 제국군 또한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것을 모를 리 없습니다. 상 당한 피해를 각오해야 할 겁니다.” 브란통 백작은 부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하루정도는 버텨낼 자 신이 있었다. 이미 가문이 보유한 키클로스급 브론테스(Brontes) 2기와 스 테로페스(Steropes) 1기 기가급으로 기게스(Gyges) 7기 골리앗(Goliath) 6 기의 만만치 않는 기갑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루만 제국군의 도하를 막 으며 이곳을 지키고 있으면 곧 국왕의 본대와 사방에서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던 전력이 이곳으로 집중될 것이었다. 정면으로 막아서는 것이 아닌 강을 건너는 것을 막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의견은 레기온 진영에서도 이야기 되고 있었다. “이제 어쩔 셈이오. 도하를 막는 프린든 군의 전력이 생각보다 막강하오. 다른 길로 가보아야 이미 완전히 노출된 상황 어떻게 할 셈이오?” 라혼은 고들리프의 투덜거림에 슬슬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미 프린 든 군과 전투경험이 있고 지휘관으로써 능력도 그런대로 우수한 것 때문에 데리고 왔지만 자기가 방법이 없으니 남도 방법이 없을 것이라는 고지식한 그의 성격은 라혼의 스타일과는 전혀 상성이 맞지 않았다. “글쎄 지금에 와서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지. 정면 돌파를 하는 수밖에… ….” “그게 무슨…….” “스테판코, 네 탈로스 내가 이용해야겠다.” “예, 하지만 조금 조심스럽게 다뤄주십시오.” “글쎄, 그것은 생각해 보지 그보다 너 물속에서 숨을 얼마나 참을 수 있지 ?” “예? 한 4~5분쯤 숨을 쉬지 않을 수 있습니다만?” “마나유저라면 그 정도가 보통이겠지? 좋아! 1개 대대만 남고 나머지는 모 두 도하지점을 확보한다.” “사령관 지금 강바닥을 걸어서 강을 건널 생각인 것이오?” “그럴 생각이다. 어서 준비해라! 시간이 최대의 적이다.” 라혼의 명령은 지극히 타당한 것이었다. 전쟁 병기인 탈로스는 폭우 속에서 도 아무런 문제없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귀중한 기갑전력을 물속 에 집어넣는 짓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라혼에게 탈로스는 그저 도구일 뿐 이었다. 게다가 레기온 기사단의 파일럿 나이트들로 자신들의 사령관의 명 령에 따라 탈로스를 험하게 다루는 데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고들리프는 자신의 가문이 소유한 탈로스를 강물 속에 밀어 넣지 않아도 되는 것에 만 족하며 16기의 탈로스가 강물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그 모습을 강 건너에서 지켜보던 브란통 백작은 조금 당황하며 대응태세를 갖추느라 정신이 없었다. “적이 강을 건넌다. 성능차이가 나지만 적은 강을 건너는 불리함이 있다 뭍으로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철저히 막아야 한다!” “백작님 제국군이 급하긴 급한 모양입니다. 탈로스를 강물에 집어넣은 것 을 보니…….” 브란통는 부관에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 서도 불안함을 심정을 떨치지 못하 며 아로게스에 몸을 실었다. “병사들을 부탁하네.” “옛! 아무리 봐도 제국군의 작전은 무리한 작전입니다. 제국군의 탈로스가 수면위로 오르면 창을 던지십시오. 그 정도만으로도 상당한 효과를 볼 수 있을 겁니다.” “과연 그렇게 하지.” 레기온의 도하를 막는 프린든 군의 대응이 시작될 때 라혼은 강의 가장 깊 은 곳에 있었다. 탈로스의 방수효과가 그런대로 뛰어나 숨구멍을 막아둔 것 만으로도 수중에 있는데도 내부엔 아직 물이 차오르지 않고 있었다. “죠슈아, 메사리프, 그래험, 트라킨, 아돌프가 앞장을 서고 그 뒤를 나머 지가 따른다. 각 유닛은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적 기갑전력을 무력화시켜 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라! 레기온 최초의 기갑전이다. 오늘 승리하고 앞 으로도 계속 패배가 없는 레기온 기갑부대의 전설을 만드는 거다 알겠나?” -호우! 마법통신석을 통해 16기의 탈로스에 탑승한 파일럿 나이트들이 기합성이 전 해져 왔다. 벌써 만 이틀을 편히 쉬지 못한 그들이었지만 사기만은 대단했 다. “이겼으니 사기가 대단한 것은 좋은데 문제는 참패했을 때 사기를 유지하 느냐 인데 그렇다고 일부러 질수도 없는 노릇이고……. 승패는 운명에 맡기 고 오늘은 이긴다.” 라혼은 솔의 엑스시온에 마나를 주입하며 탈로스의 골렘의 자아와 빙의하고 몸을 쭉 뽑아 올렸다. -촤아~! “우악!” 물속에서 갑자기 솟아오르며 높은 물기둥 만들어 만반의 대비를 하고 있던 브란통의 기갑부대는 갑작스런 물벼락을 맞으며 순간 당황이었다. 찰라의 주춤거림이었지만 공격하는 자는 다름 아닌 라혼이었다. -우아아아악! -콰창~! 허공에서 떨어져 내려오르며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는 최강의 타이탄급 탈로 스 솔(Sol)의 위용을 대단했다. 떨어져 내린 순간 스테로페스가 절단 나고 바로 이어진 빠른 돌진에 브론테스가 록 스트라이커에 당했다. 그리고 귀신 같은 솔은 새로운 먹잇감을 찾으며 빠르고 민첩하게 움직였다. -우악! -구워어어어어어~! 그리고 5기의 황금빛 동체를 들어낸 솔이 물밑에서 솟아올라 전장에 난입하 기 시작했다. 일부 골리앗과 기게스가 들고 있던 창을 던지며 막아보려 했 지만 상대는 라혼의 최상급 익스퍼트 기사들이 운용하는 5명의 기사들이었 다. 놀란 가운데 던져 힘이 재대로 실리지 않는 탈로스용 투창을 순순히 맞 아줄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5기의 탈로스가 강변으로 나와 앞을 저돌적인 돌진을 할 무렵 10기의 탈로스가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그 뒤를 받쳤다. -이그라혼 만세! -이그라혼 만세! 가장 먼저 나와 1기의 키클로급 탈로스를 완파하고 1기의 탈로스를 무력화 시켰으며 십여기의 탈로스를 몰아붙이는 라혼의 활약에 시작함과 동시에 승 패가 결정되자 이젠 자연스럽게 ‘이그라혼’을 연호하는 레기온의 기사들 이었다. “하이 나이트들에게 킬 마크를 모두 뺐기지 않으려 거든 부지런히 움직여 야 해!” 승패가 결정된 이상 남은 것은 누가 전공을 차지하느냐 였다. 그리고 탈로 스 자체의 성능차와 기사들의 역량, 탈로스를 다루는 숙련도 등 모든 것에 뒤진 브란통 백작의 부대는 전투가 시작된 지 10분이 채 되지 않은 상황에 서 괴멸되었다. 3천명의 나름대로 규모 있는 보병들은 순식간에 기갑전이 일방적인 사냥으로 허무하게 끝나고 자신을 포위한 제국군의 탈로스의 위용 에 질려 항복권고를 하지 않았는데도 손에 든 무기를 버렸다. 라혼은 항복한 그들에게서 그들이 로인 강을 지키기 위해 가져온 배를 빼앗 아 강 건너에 있는 레기온들을 도하하는데 이용했다. 너무도 간단하게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레기온 사령관의 모습에 고들 리프 자작은 다시 한 번 결심했다. “후우! 저 인간에 대해선 생각하지 말고 그러려니 따라야겠군. 그래야 정 신 건강에 좋겠어.” 라고 말이다. 다크 프린스의 레기온이 로인강 도하를 성공하고 그 소식이 슘터 국왕에게 전달되자 프린든 왕국은 더 이상 도발행위를 멈추었다. 사우스포트 북쪽 벌 판에 진을 치고 있던 로사레이 후작의 군대 또한 사우스포트가 중립지역이 되어 사실상 프린든 왕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자 그것에 대비해 방어거점으 로 보수한 플린트 요새로 퇴각했다. 그러나 아직 코넌트 백작의 해군도 사 우스포트 항구를 봉쇄는 풀지 않고 있었다. 다크 프린스가 이끄는 레기온의 보름이 채 되지 않는 솔드란 원정은 그렇게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레기온이 솔드란에서 가져온 막대한 재화는 절 반은 레기온을 창설하고 그 동안 유지하는데 소요된 비용을 갚는데 사용되 었고 나머지 절반은 일반적인 원칙에 따라 원정에 참가한 레기온 기사단과 기병대에게 계급과 지위에 따라 보너스를 지급했다. 그러고도 남는 자금은 앞으로도 소요될 군비로 사용하도록 했다. “레기온은 제국의 자금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프린든 왕국이 만들어 준 것 같군.” “생각해보니 과연 그런 걸, 탈로스도 원래 프린든 왕국의 것이고, 레기온 을 창설하고 유지한 자금이 프린든 왕가의 재산이니 우리는 제국의 레기온 이 아니라 프린든의 레기온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굼벵이 슘터에게 미안해지는 걸, 탈로스와 황금 그리고 친동 생의 순결까지 빼앗고도 우리는 그와 싸우고 있잖아!” -와하하하하하…………. 사우스포트의 펍, 원정을 끝내고 돌아온 기사들이 잠시 휴가를 받아 나와 있었다. 기사와 기병대를 포함 1024명의 병력이 위험천만한 원정에 참가하 여 1024명 모두 멀쩡하게 살아 돌아왔다. 그것도 믿기지 않는 대승리를 계 속하면서 말이다. 보름이 못 되는 짧은 원정에 3년 치 보수에 해당하는 용 돈과 전리품으로 프린든 근위기사들이 사용하던 질 좋은 말과 명장(名匠)의 손길이 스친 각종 무구가 분배되었다. 북방의 강국 프린든 왕국 최고의 기 사들이 사용하던 무구들은 레기온 기사단의 기사들이 만족하기에 충분했다. 주머니가 든든했고 눈부신 전공을 세웠으며 자랑삼아 보여줄 증거까지 있 었다. 거기다 무용담을 들으려는 사람들까지 있으니 사우스포트 전역의 술 집은 연일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보통으로는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 생 각이 기발하고 엉뚱한 작전으로 승리를 거둔 이야기와 무용담을 이야기하던 자가 흥이 나면 공짜 술을 얻어 마실 기회도 종종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크 프린스는 단 한명의 기사와 더불어 500명의 병사와 50명의 기사를 사상자 없이 제압했고, 고귀한 팔라딘 그래험 경과 겨뤄 승리하고 그를 영 원한 동지로 삼았으며 동방의 황태자를 형제로 삼았다.” -호우! “프린든 왕국과의 싸움에서 33기의 탈로스를 얻었으며, 7명의 기사만을 이 끌고 엘바요새를 공략했다!” -호우! “단 100명의 기사와 900명의 병사만을 이끌고 120명의 기사와 1만 명이 지 키고 있는 인구가 10만에 달하는 도시를 정복했다.” -호우! “그리고 욕심 많은 그는 왕녀의 처녀마저 정복했다.” -와하하하하하하……. “다크 프린스가 아니면 그 누가 있어 위대한 이그라혼의 이름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는 이미 이그라혼이다! 동지들이여 건배를 하자! 이그라혼에게 영광을, 적에겐 죽음을!” -이그라혼에게 영광을, 적에겐 죽음을! 질리지도 않는지 사우스포트로 돌아온 지 일주일이 다되었는데도 매번 비슷 한 무용담을 이야기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누군가 흥분에 겨워 술 잔을 돌릴 때면 이런 식으로 연설을 했다. “무슨 이단교회의 광신도들 갖군.” “광신도라……. 사실 이들은 이그라혼이란 이름에 홀린 광신도가 맞지 않 습니까?” “사실 나도 그중 하나라네. 만약 자네가 다크 프린스가 싸우는 모습을 보 았다면 그 무용에 매료되었을 것일세.” 고들리프 자작은 야펀과 펍의 구석진 자리를 자지하고 맥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나저나 그는 어째서 하필이면 지금 이그라혼의 이름을 꺼내들었을 까요 ?” “그거야 알 수 없지. 이그라혼에게 ‘라혼’이란 이름을 있는 자가 존재했 고 그런 것이 1000년의 시간을 견디며 살아남아 다크 프린스에게 이어졌다 고 말하니 그러려니 할 뿐이지.” “하지만 솔직히 지금 레기온이 라혼에게 심취하고 있는 것은 라혼 자신에 게 절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 시드그람 대륙 전체에서 이그라혼이란 이름에 자유로운 자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신성 시드그람 제국의 유서 깊 은 가문은 물론 대륙 전역의 이름 있는 가문 대부분이 ‘기간트’들입니다. 반왕에게 충성하던 자들의 후손들입니다. 라혼이 스스로 이그라혼의 이름 을 천명한 것은 그들의 군주가 바로 자신이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 만 기간트의 후예라고 하지만 지금 이그라혼이 기간테스 군단을 이끌던 100 0년 전이 아닙니다.” 고들리프 자작은 야펀의 말에 그도 다크 프린스에게 심취해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그나 자신이나 누군가 다른 존재와 같은 꿈을 꿀수 있는 입장이 되 지 못했다. 그는 그의 가문을 이끌어야하고 자신도 자신의 가문을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크 프린스가 스스로 어떠한 주장을 하 던 동등한 관계여야지 군주와 신하의 관계가 되어선 안 된다. “확실히 반왕의 이름은 위대하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아니지. 그런데 말이 야 사령관은 말이야 앞뒤 생각 없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더군. 그가 무얼 원했는지는 나중에 가봐야 알게 되지만 말 일세. 사령관은 이그라혼의 이름을 공공연히 사용함으로써 나타날 불이익 정도는 이미 예상하고 있을 거야. 물론 그에 대한 대비도 세워 두었을 것이 고, 우리는 그저 가만히 그를 관찰하면 돼.” “관찰이 아니라. 감시 아닙니까?” “처음엔 그랬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그럼 관찰이라고 해두죠.” 야펀은 비공식적으로 공개된-라혼이 알고 있고 암묵적으로 인정받은- 그란 귀족원을 감시자였고 고들리프 자작은 신성 시드그람 제국의 실세들이 보낸 감시자였다. 다크 프린스라는 애송이가 프린든 왕국의 탈로스를 얻어낸 비 밀은 누구나가 탐낼만한 것이었고 그에게 있는 탈로스 전력이 무시할 수 없 는 것이었기에 참전을 명분으로 고들리프가 온 것이다. 지금 야펀과 고들리프가 안타까워하는 것은 라혼이 너무 서둘렀기 때문이었 다. 특히 고들리프는 최소한 10년 정도 느긋하게 기다려 신성 시드그람 제 국의 황제가 된 후 제국의 기사들에게 진정한 충성을 받아낸 이후 이그라혼 의 이름을 꺼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모든 제국 귀족이 라혼을 따른다면 그때 가서 그와 함께해도 상관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그라혼의 이름은 시드그람 대륙 전체의 군주가 될 자라는 의미가 있었다. 인시드로우와 마고 , 몬타나 반도, 그리고 북쪽 바바리안들에게까지 충성을 받는 존재를 말했 다. 1000년이나 자릴 비운 왕이 나름대로 살아가는 나라로 다시 돌아와 왕 이 되려하는 것은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 일이다. “해보나 마나한 생각인가? 애당초 프린스 그란인 다크 프린스를 다음 신성 시드그람 제국의 황제로 만들 생각이 없었으니까……. 내 불행은 그를 적 대할 수밖에 없는 내 운명이겠군.” 고들리프는 지금 생각해보면 확실한 지위나 직책은 없었지만 이번 원정에서 사실상 ‘원정군 부사령관’의 일을 했다. 사령관이 전면에 나가 싸울 때 기병대를 추스르고 전체 병력을 이끄는 일은 하이 나이트라고 불리는 다른 기사가 아닌 바로 자신이었음을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다크 프린스 매사 투덜대는 자신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크 프린스가 솔드란을 공략해 막대한 재화를 노획하므로 수도를 적에게 유린당한 프린든 왕의 입지는 매우 좁아졌다. 전쟁을 계속할 여지를 없애 2 차 제국-프린든 전쟁은 사실상 끝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하지만 겉 으로 보는 것만큼 일이 그렇게 간단치가 않았다. 반 다크 프린스에게 있어 그 사건은 다크 프린스에게 군대를 유지하는 비용을 무기삼아 그를 통제하 려는 유용한 카드가 쓸모없게 되었음을 의미 했으며 ‘13일 원정’이라는 다크 프린스의 솔드란 원정의 이야기가 시민들에게 전해지면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란의 보석이었던 다크 프린스는 이제 제국의 보석이 된 것이다. 1000명의 레기온으로 1만명의 지키는 10만명의 대도시를 정복했고 단 한명의 사상자도 없다는 사실은 이미 전설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많은 제국의 젊은 기사와 소년들이 다크 프린스의 이름에 열광했으며 그가 이그라혼의 이름을 잇는 자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단번에 그 사실을 인 정해버렸다. “더 이상은 안 됩니다. 다크 프린스가 슘터 왕과 강화를 맺어버리고 탈로 스 부대가 포함된 레기온과 그란으로 돌아오면 그를 막을 방법이 없어집니 다.” “맞소. 법적으로 황제의 직속군인 이상 레기온의 탈로스가 그란으로 들어 오는 것을 막을 명분이 약하고, 사실상 레기온 기사단은 그의 사병이나 마 찬가지이며 구성원 모두가 그에게 심취해 있소. 지금 상태로 그가 레기온과 함께 그란으로 돌아오면 그는 진짜 이그라혼이 되려는 헛꿈을 꿀 것이오. ” “고들리프 자작이 평가는 정확하오. 그는 너무도 간단히 모든 예측을 뛰어 넘는 존재요. 불확실한 존재가 야망을 품고 황제가 되어서는 안 되오.” 그란에 있는 나르도르프 공작의 저택에서 열린 만찬회에 모인 귀족들은 저 마다 다크 프린스가 가진 힘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다크 프린스에 대한 이야기는 최근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면 어디서나 주제가 되었기 때문에 그 다지 특이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이들은 반 다크 프린스로 분류되 는 귀족들이며 거기에 지금껏 침묵으로 일관하던 제국의 유력가문의 사람들 도 자리를 함께했다. 그리고 거기서 오간 대화의 결론은 지금 프린스 그란 은 다음 황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일단 그와 레기온을 떼어 놓아야하오. 무슨 방법이 없겠소?” “하이슬란드 백작을 제국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따로 약간의 투자 를 통해 레기온의 병력을 크게 늘리는 겁니다. 현재 레기온은 가지고 있는 탈로스 정력에 비해 운용할 수 있는 병력이 부족하니 명분은 우리에게 있습 니다.” “레기온 기사단 내부에 우리 쪽 지지자를 집어넣자는 말이군.” “바로 그렇습니다, 다이란 경. 또한 다크 프린스가 벌여놓은 일이 있는데 그것은 사우스포트의 항구와 코스타 항로를 지킬 수 있는 해군을 창설하는 일입니다. 지금 다크 프린스는 그 사업을 추진하는데 모든 것을 힘쓰고 있 는데 그것을 명분으로 그에게 레기온의 지휘권을 거둬들여 제국연합군 총사 령관인 하이슬란드 백작에게 주는 겁니다.” “과연 친 아버지가 지휘권이 책임지는 것이니 거부할 이유가 없겠군.” “그리고 다크 프린스에게 해군을 창설하는 전권을 맡겨 안젤리아드 공화국 에 군함 구입 건에 대한 모든 책임과 권리를 주는 겁니다.” “너무 빤하지 않소? 자신을 레기온와 떼어놓으려는 조치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챌 텐데?” “그래서 달콤한 꿀이 필요한 겁니다. 레기온의 창설 자금과 그간의 유지비 용 등의 빚을 귀족원이 책임지고 해군을 창설하는 자금을 지원하며 레기온 기사단의 기사단장의 지위를 그대로 인정한다고 약속하면 그 또한 납득할겁 니다.” “너무 티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추진할 필요가 있겠군.” “그리고 이것은 조금 다른 이야기 이지만 하이슬란드 백작이 제국연합군의 총사령관으로 오래 있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해서 시오나 왕국을 자극 하여 침공을 유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행히 떠도는 소문 중 다크 프린스 가 솔드란을 점거했던 날 시오나 왕국의 에드리언 왕의 약혼녀인 아이리네 왕녀를 취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을 이용하면 그로 하여금 하이슬 란드 영지를 치게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영지를 보호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영주인 하이슬란드 백작은 총사령관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영웅은 신의 사랑을 받고 사람들에게 칭송되지만 권력자들에게 골치 덩어리 일 뿐이었다. 특히 원하지 않았고 또 통제되지 않는 영웅은 기존의 통치세 력이 결코 원하지 않는 존재다. 아발론(Avallon) 사우스포트로 돌아온 라혼은 사우스포트를 공략하면서 붙잡은 프린든 기사 들을 모두 석방하고 프린든 출신의 병사들도 고향을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 다. 이미 눈에 콩깍지가 쓰인 사우스포트의 시민들과 병사들은 그러한 조치 에 다크 프린스의 관대함을 칭송했지만 실상은 6000여명이나 되는 입을 줄 이기 위한 방편이었다. “프린든 병사들을 풀어준 것은 그렇지만 그들에게 급여까지 준 것은 쓸데 없는 낭비야.” “아니 애초에 계약할 때 나는 그들을 고용했어, 그리고 그들은 포로의 신 분이 아니라 항복병의 신분이었으니까 그들이 보수를 받는 것은 합당한 거 야, 트라킨.” “딴에는 그렇군. 그보다 굼벵이 슘터는 끈질긴 데가 있는데? 아직도 항구 봉쇄를 풀고 있지 않잖아?” “프라크 족의 종주국인 프린든 왕국이잖아. 그 정도 자존심은 있는 것이 당연하잖아. 그보다 레기온의 기강이 조금 해이해진 경향이 있는데 그건 어 떻게 되었지?” “글쎄? 레기온 기사단장이면서 객원기사인 내게 그걸 물으면 어떻게? 아돌 프는 죠슈아, 아니면 메사리프에게 물어야지? 아! 야펀 경도 있군.” 트라킨과 린, 그래험은 레기온 기사단 소속이 아닌 객원기사에 해당했다. 트라킨의 콘라드 영지에서 모은 보병대와 린의 동방 무사들은 단순히 라혼 과 이해가 맞아 떨어져 함께 싸우는 동맹군 내지는 의용군이었던 것이다. 현재 레기온은 35기로 구성된 1개 기갑연대, 기사 124명, 기병대 1114명, 보병 3213명만이 신성 시드그람 제국 황제를 위해 5년간 황제에게 충성하고 레기온으로 복무하겠다는 계약한 정규군 이다. 그리고 콘라드 남작가가 모 은 3214명의 보병, 린의 동방무사 51명, 고들리프 등의 132명의 기사와 그 들이 이끌고 있는 참전군 312명―이들은 기사들의 하인이나 시종으로 전투 를 담당하는 병력이 아니다. 물론 유사시에 병사로 이용되기도 한다.― 탈 로스 3기는 보조병으로 전쟁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래서 모르는 거야?” “후우~! 안 그래도 아돌프가 그것 때문에 하루 종일 입에 욕을 달고 있어. 솔직히 메사리프는 무슨 일이든 그다지 앞으로 나서려하지 않고 죠슈아도 아직은 집단을 통솔하는데 한계가 있으니 아돌프만 힘들지…….” “매형이 조금 돕지 그랬어?” “싫다. 보름간 적진 한가운데서 긴장을 늦추지 못한 것이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고, 솔직히 나는 조금 더 쉬고 싶다고.” “수련이 부족하군.” “으이그~! 내가 어쩌자고 괴물들 틈에 끼어서 고생인지 모르겠다.” “괴물?” “지금 사우스포트의 병사들이 죠슈아, 메사리프, 그래험, 린, 아돌프, 그 리고 나까지 하이 나이트라고 부르는데 네 별명이 압권이지 ‘대마왕’이야 . 네 덕분에 우리들은 괴물기사들이란 어뚱한 꼬리표가 붙었다고…….” “대마왕이라? 어떻게 알았지? 그것은 숨기고 싶은 비밀이었는데?” 라혼의 ‘진담’에 트라킨은 맞장구를 치며 웃었다. “하하하하……. 네가 대마왕인 것을 인정하는 거냐? 하지만 진정한 별명은 대마왕이 아니라 대마왕도 깔아뭉갤 대마왕인데?” “예리하군.” 라혼은 진정 오래간만에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콘라드 남작의 영지 행정관 휴즈가 사우스포트 내에 친 제국 인사들을 소개하여 그들의 도움을 도시를 안정시키고 육로를 통한 보급물자의 원활한 수송이 이루어지자 라 혼이 직접 나서서 해결해야 하는 일이 크게 줄어들어 있었다. 다만 해군을 창설하는 문제 때문에 지금 사우스포트 조선소 도크에서 만들어지는 전함을 설계하느라 잠깐 바빴지만 배가 완성되는 것을 기다릴 동안 한 일주일 정 도 한가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라혼이 설계한 전함은 기존의 전함에 사 우스포트를 공략하는 과정에서 노획한 1만 기간트라급 탈로스에서 엑스시온 를 떼어내 동력을 이용한 ‘자동노’를 설치했다. 자동노는 스크루(screw, 나선형 추진기)로 배의 속도를 엄청나게 향상시킬 수 있었지만 스크루가 물 속에 장치되므로 만드는 데 상당히 까다로웠다. 그래서 1척만 시험 삼아 만 드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더 만들어 낸들 해군이 될 뱃사람이 부족한 상태였다. 육군에 해당하는 레기온은 나름대로 전통이 있었지만 해군은 그 야말로 처음부터 시작해야했다. 대지는 어머니와 같아서 태어날 때부터 누구나 익숙하지만 바다는 애인과 같아서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지옥의 유황불 위에서 구워질 놈들아! 빨리빨리 안 움직일래?” 이름 아침의 사우스포트의 병영은 아돌프 멘델의 고함소리로 시작되었다. 휴가기간이 끝나고 레기온 전부가 모인지금 승리를 자축하느라 해이해진 기 강을 바로 잡기위해 해가 뜨기 전 기상하여 아침 수련을 해야 시작했다. “우리는 최고최강의 레기온이다. 레귤러는 풋내 나고, 베테랑은 가소롭다. 우리는 이그라혼의 엘리트다.” “…….” “엘리트는 거저 되는 것이 아니다. 뼈를 깎는 수련과 일주일동안 쉬지 않 고 달려가 10배가 넘는 적군과 싸워 이기는 자가 바로 엘리트다. 그렇지 않 은가?” -그렇습니다. “뭐가 그래? 아직도 꿈속에서 헤매는 것이냐? 너희는 고작 레귤러가 아닌 가?” -우리는 엘리트입니다. “뭐라고? 안 들린다? 베테링?” -우리는 이그라혼의 엘리트입니다. “안 들린다?” -우리는 엘리트다~! “내게 그것을 증명해라!” -우아아아~! 라혼이 지휘권을 행사하는 8000여명의 병력이 일제히 내지르는 함성은 사우 스포트 도시전역에 퍼져 시민들에게 아침 해가 떴음을 알게 해주었다. “우리는 세계최강이다. 우리는 이미 그것을 증명해보였다. 뛰어난 무공을 세워 명성을 얻는 것은 쉽다. 하지만 명성을 계속 이어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엘리트란 명성을 이어가는 자다.” 레기온은 이미 기량과 사기, 훈련도와 숙련도 면에서 최고수준에 다다라 있 었다. 또한 하루도 빼지 않고 기사부터 일반 병사까지 함께하는 아침 수련 은 치러진지 한 달 정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미 명물이 되었다. “휴, 별일도 없는데 늦잠 좀 자게 두면 안 되나?” “그러게 말이야! 훈련이 화끈한 것은 마음에 드는데 해가 뜨기 전에 침대 에서 일어나는 것은 영 익숙하지가 않단 말이야.” “그거는 레이디 클라레와 너무 늦게까지 함께하지 않으면 금방 적응될 거 야.” “아니 차라리 엉덩이가 조금 아프고 말지 그것 힘들어.” -와하하하하하……. 리페르의 너스레에 아침식사를 위해 식당에 모인 기사들의 웃음이 터졌다. 하이 나이트인 아돌프 멘델이 새벽에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기사들의 엉덩 이를 걷어차 깨웠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엉덩이를 걷어차이는 기사가 없었 지만 처음 아침수련이 시작될 때 그런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령관님 들어오신다. -우르릉~! 그렇게 식당에 모여 동료들과 웃고 떠들던 기사들은 사령관이 식당으로 들 어오자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은 아침이다.” 라혼은 아침인사를 건네며 자리에 앉자 식당에 모인 기사들도 자리를 잡았 다. “오늘 형제들에게 작별의 말을 미리 하려한다.” -웅성웅성웅성웅성……. 라혼의 갑작스런 발언에 여느 아침과 같았던 식당은 번화한 시장의 한가운 데 있는 것처럼 소란스러워졌다. 라혼은 손을 들어 소란스러워진 식당은 조 용히 시키며 말을 이었다. “그란 귀족원에서 제국연합군이 구성되었으며 로카데 차이저 반 하이슬란 드 백작이 총사령관으로 내정되었다. 모두 알고 있겠지만 제국연합군 총사 령관은 나의 아버님이 된다. 레기온은 총사령관의 배하에 있게 될 것이다. ” “…….” “레기온은 신성 시드그람 제국의 정규군으로 제국연합군의 중심이다. 이것 은 누가 시켜줘서 얻는 위치가 아니다. 자기 자리는 스스로 찾는 것이다.” “프린스 그란 전하, 저희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전쟁은 사실상 이미 마무리되었고 프린든이 계속 도발을 한 다해도 우리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전쟁은 확실한 승리가 보장되는 것이 최선이다. 나는 귀족원의 결정을 존 중한다.” “하지만 레기온을 강화하는 것으로도 충분한 효과 있는 것이 아닙니까? 지 금에 와서 새삼스럽게 제국연합군을 구성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라혼은 계속 이어지는 질문세례에 잠시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 “나는 프린스 그란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공공에 대한의무는 여기까지 인 듯싶다.” “이그라혼! 당신이 원한다면 지금즉시 그란으로 달려가 당신을 황제로 만 들겠습니다.” -닥쳐라!!! -웅~! 라혼의 말이 계속되자 누군가 격정적이고 과격한 말을 하며 외쳤지만 곧 라 혼의 피어(fear)가 서리 고함에 뜨겁게 달아오르려던 분위기는 차갑게 냉각 되었다. “귀족원이 그러한 결정을 한 이유는 귀관들이 바로 그러한 생각을 하기 때 문이다. 귀관들은 도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는 것인가? 내가 권력을 얻기 위 해 나라에 칼을 겨누는 짓도 서슴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것인가?” “…….” “그대들이 나의 처지를 생각하고 걱정해주는 것은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 러나 내가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는 모두를 위한다는 것이다.(for All)” 마치 울부짖는 듯한 라혼의 외침은 기사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기사들 은 바보가 아니었다. 마무리되어 가던 전쟁에 새삼스럽게 제국연합군이 편 성되고 레기온을 이끌고 대(對) 프린든 전쟁을 수행하던 다크 프린스의 지 휘권을 빼앗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제국연합군의 총사령관이 다크 프린스의 아버지인 로카데 차이저 반 하이슬란드 백작이란 것은 아버지를 인질로 하여 아들을 협박하는 것이었다. 또한 귀족원의 이러한 조치는 프린스 그란인 다크 프린스를 다음 황제로 옹 립할 생각이 없다는 의미도 내포하는 것이었다. “제국에 대한 나의 봉사는 여기서 끝났지만 그대들은 이미 나와 함께 목숨 걸고 싸운 형제다. 우리가 형제라는 사실은 이미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함께 묶여있는 형제다.(band of brothers)” 그리고 라혼은 침묵에 싸여있는 식당 나섰다. 라혼은 그란 귀족원에서 마법통신을 전해진 소식을 듣자마자 해군을 창설하 는 지위조차 벗어버렸다. 귀족원으로썬 약간의 제약을 주려한 것뿐인데 라 혼이 모든 지휘권을 내놓겠다고 하자 오히려 놀랐다. “이로써 제위와는 멀어졌군요.” “아니, 조금 돌아가는 것뿐이야.” “돌아간다고요?” 라혼은 그래험의 질문에 그렇게 대답했다. “나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지만 기다릴 줄 아는 지혜정도는 있거든.” “기다림의 지혜라…….” 기다리는 것은 답답하고 때론 패배처럼 보이지만 세상 모든 일을 하는데 있 어 가장 중요한 지혜다. 영웅(Hero) “도대체 어쩔 셈이지?” “이런 빌어먹을! 내가 무엇 때문에 그 고생을 하면서 저 망할 것들 엉덩이 나 차고 있는데 우릴 떠나겠다는 거요?” 식당에서 발표가 있은 후 트라킨과 아돌프가 라혼의 집무실로 들어와 따지 듯 물었다. 라혼의 집무실엔 죠슈아, 메사리프, 그래험, 린은 물론 야펀, 고들리프까지 있었다. 바로 레기온들로 부터 하이 나이트라고 불리는 존재 들이었다. “그렇소, 사령관! 제가 듣기로 귀족원에선 사령관의 기사단장으로서의 지 위와 해군창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것을 포기할 필요는 없지 않소?” “아니, 해군에 관한 지원은 받아들이기로 했다. 신성 시드그람 제국의 모 든 해군은 내 지휘 하에 있게 되지.” “이런 빌어먹을! 조각배 한 척도 없는 대 제국해군 좋아하네. 이 겁쟁이 놈아! 이 아돌프님이 네게 인생을 걸었다. 아니 네가 원한다면 당장 죽어줄 수도 있어! 레기온들 전부가 네 말 한마디에 웃으며 죽어줄 수 있단 말이 다.” “…….” 라혼은 자신의 멱살을 쥐고 흔드는 대머리에 흉터투성이 사내의 포효를 그 대로 받으며 미소 지으며 말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너는 날 믿지 않는군.” “뭐?” 아돌프는 라혼의 말에 정신이 멍해졌다. 그리고 그런 그의 귓가에 라혼의 목소리가 울렸다. “신성 시드그람 제국을 장악하는 것은 쉬워. 내겐 무적의 군대가 있고, 충 성스런 아돌프 같은 기사가 있지. 내가 검을 들어 제도 그란의 바라니아 방 벽을 깨면 시민들은 열광적인 지지를 보내줄 거다.” “……!” “제국의 유력자라는 놈들은 3년 내에 해결할 수 있다. 왜냐하면 레기온은 무적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여기 그래험은 길고마 제국의 왕자고, 지 금까지 우리의 적이었던 슘터와 손을 잡으면 시드그람 대륙 북방이 내손에 떨어진다.” 야펀과 고들리프는 라혼의 발언에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과대망 상에 걸린 광기어린 발언이 엄청난 현실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 금이라도 당장 밖으로 나가 ‘그란으로 가겠다!’라고 외치면 레기온은 물 론 8천여 명의 병력이 환호성을 지르며 전의를 다질 것이 눈앞에 그려졌다. “하지만! 그럼 내전이 일어난다. 피비린내 나는 골육이 상잔하는 내전을 거쳐서 얻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넓은 땅덩이 뿐이다.” “…….” “내가 원하는 것은 그런 대륙의 절반을 통치한다는 허울 좋은 왕좌가 아니 야!” “도대체 뭐요? 빌어먹을 대륙절반을 가지는 것보다 더 대단한 게 뭐요? 이 그라혼이란 이름을 이었으니까 북쪽 황무지의 야만의 땅과 남쪽의 모든 왕 국을 정복해 발아래 두려는 것이오? 그런 거요?” “고작 시드그람 대륙? 아돌프 스케일이 작군. 이왕 정복을 하려면 인시드 대륙을 넘어 동방대륙까지 가야하지 않는가? 그리고 저 멀리 전설의 남쪽 대륙을 찾아내 그곳에도 이그라혼의 깃발을 꽂아야 할 것이 아닌가?” 아돌프를 비롯하여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기사들은 숨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너무나 허황된 이야기였지만 그 말을 하는 존재가 다름 아닌 라혼 이었다. 고작 3개월 동안이지만 그는 군대를 지휘하여 믿기지 않는 대승리 를 몇 번이나 계속했다. 그리고 라혼의 승리는 하나같이 적군이던 아군이던 피를 보지 않고서 거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 그의 군사적 재능은 이미 증 명되었다. 그랬기에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기사들에게 그저 허황된 말로 들 리지 않는 무게가 있었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넓은 땅을, 전 세계를 지배한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 “내겐 전 세계를 정복해야하는 이유가 없어.” “전 세계를 정복하는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이 있다는 거냐?” 트라킨의 질문에 라혼은 몸을 돌리며 말했다. “나는 라혼이다. 운명이 나를 ‘라혼’이라고 했고, 나는 라혼이란 이름을 가진 순간부터 영원히 라혼이다.” “…….” “나는 이미 모든 것을 얻었어. 다만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을 뿐이야. 그리 고 나는 그 일을 하는데 필요한 것이 있을 뿐이야.”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형님? 마치 선문답 같은 말을 하는 이유가 뭡니까 ?” “내가 원하는 것은 ‘신용’이다.” “신용?” “나는 이미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이제 신용을 얻어야 돼.” “무엇에 관한 신용을 말이오?” “모든 것에 관해, 내 언행이나 약속이 틀림이 없이 지켜질 것이라는 믿음 을 얻어내는 것이다.” 라혼의 말에 모든 기사들은 의혹어린 표정을 지었다. 다만 그래험만이 알겠 다는 미소를 지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앞으로 어쩔 셈인데? 또 너 때문에 레기온 기사단에 입단한 나와 죠슈아는? 린의 사정도 그렇고, 트라킨이나 아돌프, 고들리프, 야펀은 별 상관없겠지만…….” 뜬 구름 잡는, 이해력을 넘어서는 이야기는 메사리프의 현실적인 물음에 모 두가 피부로 느끼는 화제로 돌아오자 모두를 눈을 빛냈다. “그 점에 대해선 모두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 야펀 선배는 레기온 기갑사 령관이고 고들리프 자작은 스스로의 입장이 있겠지만 우선 죠슈아!” “…….” “아버지가 이곳으로 오신다. 아버지를 도와줘.” “떠날 생각인거야, 대장?” “그래, 기사수업여행이랄까?” “멋지군. 그럼 나도 네 부친을 도와야 하나?” 라혼은 메사리프를 가만히 보다가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메사는 그냥 전역해라!” “뭐?” “너는 전역하는 게 나아! 그리고 매형도 아버지를 도와 줄 테지?” “나야 뭐, 스승님을 돕는 것이 당연하지…….” “그리고 아돌프.” “…….” “아버지를 부탁한다.” “…….” 언제나 거침없이 떠드는 아돌프는 라혼의 말에도 입을 꼭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라혼은 아돌프가 아버지를 위해서 일해 줄 것을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그에게 중요한 임무를 부여했다. -복무기간이 3년이었지? 복무기간이 다된 일반 기병대를 최대한 끌어들여라 . 너는 나의 6번째 기사다. 아돌프는 머릿속에서 울리는 듯한 라혼의 목소리에 놀라 뭔가 물으려 했다. 하지만 이어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다. -야펀과 고들리프는 6명중에 포함되지 않아! 뭐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알 수는 없지만 라혼 대장이 이상한 이야기를 하면 서 순순히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몰래 미소 짓는 아돌프였다. 라혼은 아돌프에게 [텔레파시 메시지Telepathy Message]를 보내는 가운데서 도 다른 기사에게 당부를 계속 했다. “린, 너는 더 이상 여기 있을 필요가 없어. 그란으로 돌아가 나머지 동방 인들을 이끌고 하이슬란드로 가라!” “하이슬란드 말입니까?” “우리 가문의 영지이지만 비어있는 곳이 많아 적당한 땅에 자릴 잡고 그곳 에 있어. 네게 내 몫으로 배당된 전리품을 모두 줄께 그것과 네 몫의 전리 품을 합치면 마을하나정도는 만들 수 있을 거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래험…….” 라혼은 그래험에게 말을 하면서 동시에 린에게도 [텔레파시 메시지Telepath y Message]를 보냈다. -아돌프가 3년간 쓸만한 기병대를 모을 거야! 하이슬란드로 가서 네가 할일 은 그들이 사용할 말을 훈련시키는 일이다. 그러니 적당한 장소를 골라 튼 튼한 요새부터 세워라. 자금은 그란의 집정관 탄브라 남작이 대줄 거야! 이 곳에서 형제가 아닌 자는 야펀과 고들리프뿐이다. -알겠습니다. 형님 하지만 제 사람 중엔 뱃사람이 많습니다. 라혼은 린의 전음입밀(傳音入密) 수법에 미소 지으며 그에 대한 답변을 했 다. -잊었느냐? 나는 해군의 책임자다. 마에스트 해로 나가는 항구 중 하나를 쓸 권리가 있다. 항구 도시 벨리아의 영주인 쥬리안 백작을 찾아가 나의 대 리인으로써 항구 이용권을 달라고 해라. 몇 년 전에 이미 이야기가 되어있 다. 선단을 구성하는 것의 자금도 탄브라 남작이 대줄 것이다. 그러나 탄브 라 남작은 겉으로 나와 관계를 끊은 존재다. 그것을 염두에 둬라! -알겠습니다. 형님! 용호린은 형님과 그래험의 대화에 정신이 팔린 야펀과 고들리프를 슬쩍 바 라보고 아돌프와 눈이 마주치자 입술을 살짝 비틀어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흉터투성이 대머리인 아돌프 또한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저도 여길 떠났으면 좋겠습니다. 제겐 너무 오랜 여 행이었으니 말입니다.” “고귀한 팔라딘, 우리의 우정은 영원히 계속될 겁니다.” 결국 라혼이 물러서자 메사리프, 린, 그래험이 이곳을 떠나기로 했다. 어차 피 그 셋은 라혼이 아니면 이곳에 계속 있을 이유가 없었으므로 어쩌면 당 연한 결과였다. 특히 메사리프의 경우엔 오직 라혼의 명령만 들으며 다른 사람은 어떤 존재이던 깔아뭉개는 태도를 취했기에 강제전역을 하는 것이 나았다. *** 라혼은 식당에서 발표를 한 그날 사우스포트를 떠났다. 이미 레기온의 격정 적인 모습과 아돌프의 과격한 발언을 고들리프와 야펀이 들었으니 귀족들의 귀에도 들어갔을 것이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라혼이 계속 사우스포트에 남 아 있으면 라혼이 원하지 않더라도 누군가 일을 벌일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 이다. 아무리 라혼 혼자 독재적인 위치에 있는 레기온 기사단이었지만 그들 모두 가 ‘생각’이란 것을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무슨 일을 벌일지 몰랐다. 누군가에게 심취한 나머지 그가 원하지 않는 일을 그를 위해서 저지르는 존재는 광신도와 같았다. 광신도는 자신이 신을 위하여 일을 한다고 생각하 겠지만 그 행위 자체가 신이 원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배웅은 여기까지하지.” “아쉽군. 생각해보니 스승님이 그다지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덩달 아 나도 아무런 목적도 없이 떠나는 여행을 해본 적이 없군.”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트라킨! 나는 라혼 대장의 기사인데…….” 라혼을 배웅하기 위해 나온 트라킨과 죠슈아였다. 그래험과 린, 메사리프 등은 한발 먼저 떠났고, 아돌프는 라혼이 떠나 사기가 저하된 레기온을 독 려하느라 바빴다. “됐어. 그보다 진전은 있어?” 밑도 끝도 없는 말에 죠슈아는 품속에서 그레이드의 숏소드를 꺼내 라혼에 게 돌려주며 말했다. “없어. 하지만 대장에게 짐이 되지 않을 만큼은 될 수 있을 거야!” “무슨 말이야? 둘이서만…….” “그런 게 있어. 트라킨 매형. 그보다 죠슈아 우리 테이 잘 부탁해!” “에?” “누구처럼 이 핑계, 저 핑계대면서 기다리게 하지 말고…….” “크~! 그런 것을 원망하다니…….” 라혼은 얼굴이 붉어진 채 말을 하지 못하는 덩치 큰 사내의 가슴을 주먹으 로 치며 말했다. “루나 누나만큼 성대한 결혼식을 해주진 못해 미안하지만 테이는 결혼식만 큼은 부모님이 했던 방식을 꿈꾸고 있거든…….” “무슨 방식인데?” “숲속에서 둘만의 결혼식과 바다에서 선상결혼식이야.” “…….” “죠슈아! 우리 쌍둥이 누나 너무 기다리게 하지마라.” 라혼의 말에 붉게 타오르는 죠슈아를 보고 큭큭 대던 트라킨은 라혼에게 물 었다. “얼마나 오래 여행을 하려고 그런 말을 하는 거냐?” “사실은 나도 몰라! 3년이 될지 10년이 될지.” “10년?” “3년 이내엔 돌아오지 않을 거고 10년이 되기 전까지는 돌아올 계획이니까 .” 그리고 라혼은 트라킨과 죠슈아에게 아돌프와 린이 하려는 일에 대해 말해 주었다. “레기온의 지휘권은 일단 아버지에게 있을 거야. 하지만 곧 무슨 변화가 있겠지. 내가 생각하기론 야펀이 레기온을 맡을 가능성이 커.” “네 말대로라면 야펀은…….” “지금 내 입장에서 야펀은 믿을 수 없는 정적이지. 하지만 그는 능력 있는 기사야. 트라킨도 콘라드 경과 내가 적대적 입장이었다면 나를 견제 했을 거야. 하지만 나를 실각시킨 세력에 속한 이상 주의할 필요가 있을 뿐이야. 물론 고들리프 자작도 그렇지만……. 그러니까 둘이 아돌프를 잘 달래서 그들을 노골적으로 견제해서 발생할 불필요한 충돌을 미리미리 막으라고.” “알았어. 그들이 입장을 달리할뿐이란 것은 나도 잘 아니까. 그보다 여행 의 목적이 있는 것 같은데?” 라혼은 트라킨의 질문에 먼 지평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발론, 아발론을 찾아 볼까해!” 트라킨은 아발론이 반왕 이그라혼이 잠든 섬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그라 혼을 자처하는 라혼에게 반왕과 연결된 고리를 증명하는 것은 무척 중요할 수 있는 일이었다. 영웅(Hero) “정말 의외로군. 어느 정도 반발은 예상했는데 이렇게 순순히 물러설 줄이 야.” “그가 완전히 손을 뗀 이상 하이슬란드 백작에게 총사령관 직을 줄 필요가 있겠소?” 귀족들은 다크 프린스가 사우스포트를 벗어났다는 소식을 접하자 중구난방 으로 떠들기 시작했다. “제국연합군을 유지할 필요가 없으니 그것부터 논의 합시다.” “프린든 왕국과의 강화부터 논의해야하는 것 아니오? 어찌되었든 전쟁은 마무리해야 하지 않소?” “그래요. 시오나 왕국건도 계획을 중지해야 하오.” 귀족원은 다크 프린스에게 약속했던 모든 것을 중지했다. 해군을 꾸리는데 필요한 자금 지원도 레기온을 창설한 자금을 보정해 주는 것도 약속을 지키 지 않았다. 제국연합군 또한 명칭만 제국연합군이지 규모는 2000여명에 지 나지 않는 군대가 되었다. 그리고 레기온 사령관에 기갑사령관이었던 야펀 이바트 레아모스를 임명하는 것을 시작으로 5년간 사우스포트에 주둔 시켰 다. 그리고 새로운 레기온을 그란에서 뽑았는데 이는 다크 프린스에게 영향 을 받던 종래의 레기온과 구분을 위해서였다. 중요한 것은 레기온의 탈로스 였지 기사들과 군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 사우스포트를 떠난 라혼은 그란에 돌아와 있었다.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로 그란으로 돌아온 라혼은 하이드아웃에 들어가 블러드와 만났다. “주인님! 아쉽게 되었습니다.” “아니 어차피 이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어.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존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니까.” 라혼은 린이 하는 일을 도우라는 지시를 내리고 물었다. “내게 자금을 댔던 자들에게서 빚을 떠안는 일은 어찌되었지?” “예, 프린뱅크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상인들이 우리가 내세운 대리인들에게 채무를 떠넘겼습니다.” “프린뱅크?” “예, 그들은 우리 쪽 제안을 거절하고 오히려 뒤를 캐려고 하더군요. 적당 히 위장했습니다만 아마도 저희를 3공작 쪽이 내세운 집단이라고 생각했었 던 것 같았습니다.” “그럼 그 사람들은 끝까지 믿어도 되는 건가?” “그것은 두고 봐야 할 겁니다. 지금 늙은 총수는 주인님께 호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외 사람은 부정적이니까요.” 라혼은 표면상으로 자신이 어려울 때 지원하겠다고 하던 프린뱅크의 노신사 의 얼굴이 떠올랐다. “프린밴크 총수의 이름이 제럴드였지?” “예, 그렇습니다.” “그도 다크 프린스의 비밀기사단을 들어보았을 테지?” “그거야 누구나 아는 이야기 아닙니까?” “도망치긴 했지만 내가 아내감 하나는 잘 봤어. 비밀 기사단의 이름을 이 용하자고.” “예?” 라혼은 블러드에게 지금 에텔 스페이스에 쌓여있는 것들에 대해 말해주고는 이야기를 계속 이었다. “지금 우리에겐 자금은 있지만 마음대로 쓸 수 없지. 하지만 프린뱅크라면 전면에 내세우기 적당해 비밀기사단으로써 그들에게 접근해 봐!” “과연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말이야. 아무래도 그란 3공작과는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들 의 힘을 줄일 수 있을까?” “있습니다. 그들은 상업을 기반으로 한 가문인 이상 프린뱅크를 키우면 됩 니다.” “어떻게?” “잊으셨습니까? 저는 도둑들의 왕입니다. 3공작의 상단을 털면 됩니다. 물 론 다른 상단도 가끔 털어줘야 겠지만 말입니다. 프린뱅크 상단은 물건이 아닌 자금을 터는 식으로 하면 겉으로 보기에 같이 털리는 것이지만 실상 우리의 자금이 프린뱅크로 흘러가는 이상 그쪽엔 피해가 없습니다. 3공작의 상단에서 얻은 물건은 여러 경로로 위장하여 프린뱅크가 유통하면 거기서 도 상당한 이문이 남을 겁니다. 결과적으로 3공작의 상권이 서서히 감소하 게 되는 것이죠. 피아 링을 이용하면 큰 위험부담이 없이 일을 실행할 수 있습니다.” 역시 도둑의 왕, 시프로드다운 생각이었지만 라혼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 건은 그렇게 처리하도록 해. 나는 당분간 쉬어야겠어. 피아도 찾아봐 야 하고, 드워프들에게도 볼일이 있거든.” -흑흑흑흑흑…………. 어두운 방, 하지만 머무는 사람이 지체가 높은 사람인지 값비싸 보이는 갖 가지 물건들로 화려하게 장식이 되어 있었다. “나는 억울해! 내가 어쨌다고 날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어두운 방에서 홀로 눈물을 흘리는 소녀는 프린든 왕가의 아이리네 왕녀였 다. 평생 잊지 못할(?) 밤이 지나고 오빠가 돌아온 후 아이리네 왕녀는 기 뻤다. 비록 호감이 가는 존재였긴 했지만 그는 침략자에 불과 했기 때문이 었다. 그러나 궁에선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자신이 다크 프린스에 게 순결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리네는 억울하기 그지없는 소문 이었다. 특히나 가깝게 지내며 친구처럼 믿었던 시녀 미란다마저 자신의 결 백을 의심했다는 것이다. 차라리 그것이 사실이고 결백을 주장하지 않고 받 아들였다면 이토록 비참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차라리 그를 따라갈걸.” “누구? 나?” “누구?!” 그때 그녀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잊을 수 없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아이 리네는 어둠속에서 그의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자신이 있는 곳은 다린 지 방의 왕가 소유의 별장 절대 그가 찾아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이리네는 이것이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요. 당신이요.” “이거 영광…. 웁!” 라혼은 아이리네가 갑작이 와락 끌어안으며 입술을 덮치자 당황한 나머지 뒤로 쓰러졌다. -콰당~! “다, 당신…….” “와우! 이거 무지하게 뜨거운 환영인사데?” “어떻게?” “빨리도 묻는 군.” 아이리네는 지금 정신이 없었다. 넘어지면서 바닥에 부딪힌 팔에서 전해지 는 통증은 이것이 꿈이나 환상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했다. 자신이 끌어안고 키스를 퍼붓던 상대는 ‘진짜’였다. “저리 비켜요!” 화들짝 놀란 아이리네는 그에게 떨어지려 했지만 이번엔 그가 놓아주지 않 았다. “오랜만이군. 내 장난 때문에 울면서 지낼 것이라 생각은 했었는데 다른 의미로 울고 있었네.” “놔! 놓으란 말이야!” “싫어! 뽀뽀한번 더해주면 놓아주지.” “이 파렴치한…….” 아이리네 왕녀가 라혼의 능글능글한 장난에 진짜 화를 내려할 때 방밖이 소 란스러워졌다. -탕, 탕, 탕! “왕녀님 괜찮으신 겁니까? 무슨 일입니까?” “공주님, 아이리네 공주님!” “안 되겠어! 문을 부숴라!” “예?” “왕녀게서 명예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시는지 모른다. 어 서 문을 부숴라!” “옛!” -쾅! 쾅! 쾅!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아이리네는 깜짝 놀라 다크 프린스에게 말했다. “당신 몰래 들어온 거였어요?” “그래! 내가 여기 있는 것은 아무도 몰라! 네 오빠에게 잡히면 나를 뼈째 갈아 마시려 들걸.” “그럼 어서 도망을 가야 하잖아요.” “싫어! 목숨을 걸고 겨우 찾아왔는데 키스 한번으로 너무 아쉽지.” -쾅! 문이 부서지려 하자 아이리네는 다급한 나머지 다시금 그의 입술을 덮고 부 드럽게 빨았다. “됐지요. 어서 도망쳐요!” -콰당~! “헛!” 이제 막 몸을 일으킬 찰나 굳게 잠겨있던 문이 부서지며 무장한 경비병들이 방으로 들어섰다. “프린세스 아이리네, 괜찮으십니까?” “괘, 괜찮아요!” “어머? 아이리네 공주님 팔을 다치셨군요.” 그제야 아이리네는 팔이 살짝 까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저런 덧나겠네. 나이트 캐란스, 왕녀님이 놀란 것 같으니 그만 물러나 주 세요. 여기는 저희가 있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올리비아 부인. 저희는 물러가도록 하지요. 부서진 문도 내 릴 고치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친절하시군요.” “별말씀을…….” 나이트 캐란스는 아이리네 왕녀에게 눈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경비병 이 밖으로 나가자 하녀들이 방을 치우기 위해 부산하게 움직였고 올리비아 부인은 아이리네를 침대에 앉혀놓고 상처를 치료했다. 치료라고 해보아야 붕대를 감아두는 것이었지만……. 그대 라혼은 아이리네가 자리 잡은 침대 밑에 있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텔 레포트 워프Teleport warp]로 몸을 뺄 수 있었지만 아이리네의 의외의 반응 에 이대로 떠나기가 너무도 아쉬워 남은 것이다. 라혼이 그녀를 찾은 것은 그녀의 처지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아내로 삼아 프린든 왕가 에 지지를 얻어낼 생각을 가지고 있던 라혼이었기에 미래의 아내에게 점수 를 따놓기 위해 여기로 온 것이다. 라혼은 이미 아이리네 왕녀의 기운을 알 기 때문에 찾고자 마음먹으면 그녀가 세상 어디에 있건 찾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올리비아인지 뭔지 이 아줌마가 계속 저러고 있으면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잖아! 오늘은 그만 가도 내일 다시 올까?’ 그런 생각을 하던 라혼의 눈앞에 아이리네의 치마 자락이 보였다. 라혼은 짓궂은 미소를 지고는 슬며시 손을 그녀의 치맛자락 밑으로 넣고 아이리네 의 고운 다리를 잡았다. “학!” “어머? 겨우 이정도 가지고 엄살을 피우시는 거예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흉터도 남지 않을 거라고요.” “아, 아니, 됐어요. 피곤하니 그만 잘래요.” “그러시겠어요? 그럼 편히 쉬세요. 무슨 일이 있으면 부르시고요.” “예!” “저기….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고 편히 쉬어요. 왕녀님의 오빠는 여전 히 왕녀님을 사랑하시니까요. 슬퍼하거나 괴로워하지 말고 마음을 단단히 먹도록 해요. 알았지요.” 그렇게 몇 번이나 다짐시키듯 말한 올리비아 부인은 하녀들이 부서진 방문 대신 임시로 쳐둔 커튼 밖으로 나갔다. 아이리네는 그녀를 배웅하는 척하고 방밖에 누가 있는지 둘러보고 허리를 숙여 침대 밑을 바라보며 말했다. “됐어요. 음?” 그러나 침대 밑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봐요. 이봐요.” “나 찾는 거야?” “핫! 어, 어느새…….” “나는 소드 마스터라고 그것도 그랜드 소드 마스터! 그런 이 몸의 움직임 을 네가 볼 수 있을 리가 없지. 근데 뭐, 먹을 것 없어? 배가 고픈데?” “칫! 잘난 척 하지 말고 이거나 먹어요.” 아이리네는 마치 주인이라도 된 양 자신의 침대를 차지하고 있는 다크 프린 스에게 간식거리로 놓아둔 쿠키를 주었다. “맛있군.” “그보다 여긴 어떻게 찾아왔어요? 내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그랬나?” “그리고 당신은 제국군을 이끌고 있잖아요. 오빠는 아직도 항복할 기세가 아니었는데?” 라혼은 계속되는 그녀의 질문에 왠지 짓궂은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권력투쟁에서 밀렸거든 암살자를 피해 도망치다 보니 ‘우연히’ 여기까지 왔고 이곳에서 네 모습을 보았을 뿐이야.” “뭐예요? 그게 정말이에요?” “그런 정말이지 않고.” “…….” 라혼은 자신의 거짓말에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손을 잡아주는 그녀의 모 습에 은은히 감동했다. 자신의 장난에 상당한 고초를 겪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오히려 자신을 걱정해 주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될까?” “뭔데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도울게요.” “우리 아버지가 손을 쓰시기 전까지 한동안은 아무도 모르게 숨어있어야 하는데. 돈도 다 떨어졌고 그렇다고 모습을 들어낼 수도 없으니까 여기서 지내면 안 될까?” “여, 여기서요?” “그래 여기서!” “하지만…….” “암살자들도 설마 내가 프린든 국왕의 동생과 함께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할 거야.” “안되는데…….” 그러나 말과는 달리 아이리네의 고개를 허락을 의미하는 동작을 하고 있었 다. “고마워! 그런데 혹시 이집에 요리사 있어?” “……?” 영웅(Hero) -쾅! “다크 프린스를 놓치다니 그러고도 네가 대륙 최고의 어새신 길드의 이끄 는 자인가?” “…….” 한동안 불같이 화를 내는 척하던 그루미아 공작은 날카로운 어조로 평범한 인상의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웃고 있는 길드 마스터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다크 프린스의 행방에 대한 것은 모른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 드려서 죄송합니다만 다크 프린스에 관한 건은 더 이상 받지 못함을 이해해 주십시오.” 갑작스런 발언에 언제나 미소어린 표정을 짓는 어새신 마스터를 지긋이 노 려보던 그루미아 공작은 무거운 어조로 물었다. “무슨 뜻인가?” “하찮게 보실지 모르지만 저희도 장사를 하는 입장이라 손해가, 아니 모든 것을 잃을 것이 뻔한 일을 계속할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감히 나와 관계를 끊겠다고 말하는 것인가? 지금.” “유감스럽게도 그렇습니다. 공작전하!” “네가 그렇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은가?” 어새신 길드 마스터는 그루미아 공작의 협박을 특유의 미소로 받아 넘기며 말을 돌렸다. “그동안 거래를 하던 정를 봐서 한 가지만 말씀 드리지요. 공작 전하께선 말을 잘못 타셨습니다. 전하께서 상대하시려는 분은 ‘이그라혼’이 맞는 것 같더군요.” 그루미아 공작은 어새신 마스터의 입에서 난데없이 이그라혼이란 이름이 거 론되자 의혹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루미아 공작은 다크 프 린스가 스스로 이그라혼의 이름을 잇는 자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전에 알아보라고 말씀 하신 다크 프린스의 비밀 기사단은 아무래도 저희 를 말하는 것 같더군요. 저도 제가 이끌던 조직이 1000년이나 되었다는 사 실에 조금 놀랐습니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제가 계속 공작전하를 돕는다면 배신자가 되어 가장 먼저 제거될 겁니다. 그리고 전하 또한 공격받을 것이 고 말입니다.” “…….” “하지만 공작께서 훌륭한 인질들을 가지고 계시죠. 그렇기 때문에 제가 사 실을 밝히고 전하께 진실을 말씀 드리는 겁니다.” -꿀꺽! 그루미아 공작은 말도 안 되는 상상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의 말대로라면 확실히 자신은 말을 잘못 골라잡아도 한참 잘못 고른 셈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저희 군주께서는 아주 관대하시지요. 전하가 비록 한 번의 실수를 하셨지만 기회를 더 주셨습니다. 제 주인께서는 글로리아양은 무척 각별하 게 생각하시더군요.” “허, 허허허.” 그리고 다크 프린스가 자신의 주인이라는 것을 당당히 밝히는 그의 말에 그 루미아 공작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가 귀족의 말을 듣고 지휘권을 순순히 내놓은 이유는 언제든 돌아올 수 있었기 때문이란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란의 세 공작은 대규모 무역을 통해 가문의 세를 유지하는 가문이었다. 나르도르프 공작은 동부를, 레아모스 공작은 남부, 그리고 그루미아 공작은 북부 무역과 제국 내부 무역을 했다. 나르도르프 가의 동부무역 인시드 향 료무역은 린이 장악하기로 했고, 레아모스 가의 남부무역은 프린뱅크와 탄 브라 남작의 이름을 사용하는 블러드가 담당하기로 했다. 어차피 외국과 무 역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규모로 물품을 모아 한 번에 수송을 할 수 있는 능력만 되면 되었기 때문이다. 판로에 관해선 대륙전체에 촉수가 있는 유 니온이 있기에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그루미아 공작가가 장악하고 있는 것 은 북부 무역과 제국 내부 무역의 상권이었고, 그 영향력이란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블러드는 그와는 손을 잡기로 한 것이다. 가을은 언제 어디서나 풍요로운 계절이었다. 또한 마법이 시작되는 계절이 기도 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평생 한번은 찾아온다는 마법의 가을은 아이 리네에게도 찾아왔다. “다린의 가을은 그 색이 뚜렷하기로 유명하지요. 하늘은 높고, 모든 나무 들이 한순간 불타오르듯 울긋불긋 물들고, 북쪽에서 내려오는 바람에 낙엽 이 흩날리는 풍경은 봄의 그것과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답니다.” “그래요. 정말 아름다워요.” 아이리네는 올리비아 부인과 함께 낙엽이 지는 테라스에 나와 티타임을 즐 겼다. 어찌 보면 황량해 보이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잘 익은 과실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을의 단내덕분에 풍요로워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렇 게 아름다운 곳이기에 프린든 왕가에서 별장을 지어 왕가의 가족들의 요양 처로 삼았다. “정말? 이번에 새로 온 견습요리사가 그렇게 미남자라며?” “그래, 그뿐 인줄 아니, 요리장 안데르씨가 세 사람 몫은 충분이 한다고 칭찬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정말?” “게다가 얼마나 용감하다고 겨울 소시지를 만드는 작업을 하는데 도살할 멧돼지가 도망치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다칠 뻔했는데 그 사람이 나서서 성난 멧돼지를 잡았데.” “어머? 정말! 대단하다. 멧돼지는 위험한 야수인데 용감하게 맞서다니…… .” “그리고 이건 너에게만 이야기 해주는 건데.” “뭔데?” “그 사람 말이야. 요 앞에 있는 폭포 밑에서 매일 밤 알몸으로 목욕을 한 데…….” “어머, 웬일이니! 알몸으로 그 차가운 물속에 들어간단 말이야?” “그래, 정말 터프하지 않니.” 안 보이는 곳에서 자기들끼리 소곤대는 시녀들이었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바 람을 타고 아이리네와 올리비아 부인의 귀가를 간질였다. 원래는 시녀들끼 리 잡담을 나누는 것이 금지 되어 있었지만 최근 주방에 새로 고용된 잘생 긴 청년에 대한 이야기는 이 별장에 있는 모든 여자들의 관심사였기에 올리 비아 부인도 짐짓 모르는 척 시녀들의 이야기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어머? 그 사람이다.” “뭐? 정말!” 그리고 곧 검은 머리를 뒤로 질끈 묶고 요리사 모자와 간편해 보이고 밀가 루가 묻은 요리복장을 한 젊은 사내가 테라스로 무언가를 들고 나타났다. “무슨 일인가?” “안데르 씨가 공주님을 위해 간식거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수 고하시는 분들을 위해 만든 거구요.” 왕녀를 호위하는 기사들은 부담스럽게 잘생긴 견습요리사가 내미는 과자에 헤벌쭉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제가 만든 건데 맛없다고 타박하지나 마십시오.” “무슨 말은 가이가 만든 과자는 충분히 맛있어. 하지만 안데르가 만든 것 엔 조금 못 미칠 뿐이야. 그러니까 계속 노력하라구. 우리가 계속 도와 줄 테니까.” “그래, 그래, 이런 맛있는 도움은 언제든 줄 수 있으니까 열심히 해야 해! ” “아아, 어서 들어가 봐! 공주님은 테라스에 있으니까.” “옛 그럼.” 아이리네 왕녀의 전속 요리사인 안데르의 견습요리사 가이는 이곳 별장에서 인기가 높았다. 왜냐하면 최고의 요리사가 되기 위해 수련한다는 그는 수 백 명에 이르는 별장의 시녀나 호위기사와 병사들의 식사를 담당했는데 매 일 새로운 메뉴를 제공하고 맛 또한 훌륭해 평판이 높은 데다 시험 삼아 만 들어본 음식들을 이렇게 일반 경비병에게 주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란 동물이어서 맛있는 것을 주는 사람에게 호감을 보이기 마련이었다. 게다 가 조금 우스운 일이기도 하지만 견습요리사 가이가 아이리네 왕녀에게 한 눈에 반해 매일 간식을 만들어 대고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별 장의 모든 여인네의 관심이 받고도 다른 사내들은 오히려 격려까지 하고 있 다는 것이다. “에구! 불쌍한 것 하필이면 왕녀님에게 반할께 뭐람.” “그러게 말이야. 우리야 입이 심심하지 않아 좋지만 저 녀석 하는 것을 보 면 불상하군.” “하지만 말이야. 여자들은 저렇게 한 여자에게 지극 정성인 남자를 좋아한 다니까. 우리 베티도 가이의 이야기를 입에 달고 있어. 난 왜 그러지 못하 냐고 말이지.” 견습요리사 가이는 미로처럼 굽이치는 정원을 산책로를 지나 아이리네 왕녀 와 올리비아 부인이 있는 지붕이 있은 테라스로 다가가 허리를 굽히고 말했 다. “공주님, 간식을 가져왔습니다.” “흠, 달콤한 냄새가 여기까지 나는 군요. 오늘은 무엇입니까? 가이.” “예, 꿀에 절인 떡입니다. 점심을 드시지 않았다기에 식사가 되는 것으로 준비했습니다.” 가이는 가져온 쟁반을 테라스 탁자에 놓고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그 안에 는 초록색, 분홍색, 흰색, 초콜릿색 등 갖가지 색의 꽃이 피어있었다. “어머나! 예쁘기도 하지. 이건 진짜 꽃잎이야.” “이건 먹어버리기 너무 아까운 걸.” 꽃잎이 반투명한 얇은 막에 씌워 꽃잎처럼 장식된 떡에 붙어있고 벌꿀을 발 라 반짝이는 모습은 떡을 하나의 보석처럼 빛나게 했다. 아이리네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분홍색 떡을 집어 입에 넣고 깨물고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어머! 이거 아직 따뜻하네? 깨무니까 꿀물이 터져 나와!” “만족하신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저는 물러가겠습니다. 저녁을 준비해야 하니까요.” “그러세요. 여기 제 성의입니다.” 올리비아 부인은 금화 3개를 주며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가이는 그녀가 주는 포상금을 받아 갈무리 한 후 테라스에서 멀어졌다. “공주님 그거 아세요?” “뭘요?” “저 가이가 공주님에게 반했다는 사실을요.” “정말이요?” “예, 오늘 준비한 간식도 안데르가 만든 것이 아니라 가이가 만들었을 거 예요.” “그렇군요.” 올리비아 부인은 흐뭇한 미소를 짓는 아이리네 왕녀를 유심히 바라보며 고 개를 내심 갸웃거렸다. ‘저건 사랑에 빠진 표정인데? 설마……. 에이 아니겠지 잠잘 때만 빼놓고 내가 계속 곁에 있었는데. 그럼 무엇이 그녀를 기분 좋게 했을까?’ 아이리네는 다크 프린스가 변장조차 하지 않고 별장을 찾아와 자신의 전속 요리사인 안데르를 존경한다며 제자로 받아달라고 하자 크게 놀랐다. 원래 는 떠돌이 요리사가 경비병들과 실랑이하면 산책을 나서려던 자신이 그를 불쌍히 여겨 고용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데 그는 말쑥한 차림에 당당하게 안데르를 지목하며 제자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다. 뭐 생각했던 것과 조금 틀렸지만 아이리네는 그를 별장의 주방에 고용하는데 성공했다. 그리 고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한 달이 지난 지금 오랫동안 함께 지내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누구나 친구처럼 되어버렸다. 게다가 그녀 를 더욱 당황스럽게 한 것은 가이라고 불리는 그가 자신에게 반했다고 공공 연히 떠들고 다녔다는 것이다. “왜, 내게 반했다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니는 거예요?” “떠든 적은 없어 다만 티를 내고 다녔을 뿐이야.” “그게 그거 아닌가요?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정체를 숨겨야 된다면서 변 장도 하지 않고 괜찮겠어요?” “어설프게 변장을 해보아야 어색하기만 하지. 게다가 내 미모는 어떤 변장 술로 가려도 빛이 나거든.” “우에엑! 그렇게 잘난 척 하는 것도 병이야. 병!” “하하하하,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해가 지고 하루 종일 바싹 붙어 감시를 하던 올리비아 부인이 사라지자 오 늘도 어김없이 다크 프린스는 아이리네의 방에 찾아왔다. 그리고 오늘 별장 에서 있었던 이야기와 그밖에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궁금한 것은 참으면 안 되지. 뭐가 궁금한데?” “왜 가이는 내게 반했을 까요?” “흐음! 왜 그랬을까? 사실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네게 반한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내가 너무 잘났잖아! 별장의 모든 여자들이 내게 반해버리면 여기에 계속 있기 힘들잖아!” “우에에엑! 또 잘난 척!” 내심 기분이 좋아진 아이리네이였지만 겉으로는 토하는 시늉을 하는 그녀였 다. 라혼은 아이리네의 그런 반응에 정색하며 말을 이었다. “사실이잖아! 오늘 간식을 갔다 줄때 올리비아 부인의 눈빛도 나를 유혹하 는 눈빛이었다고 올리비안 부인정도면 상당한 미인인데 내가 아이리네를 유 혹하는 중이 아니었다면 넌지시 받아들였을 거야.” “뭐라고요? 누가 누굴 유혹해요?” “내가 너를 유혹하는 거지.” “흥! 누가 유혹에 넘어갈까봐?” “어? 그럼 안 되는데? 나는 여기 목숨 걸고 하는 거야. 내 목숨은 네게 달 려있다고 제발 유혹에 넘어가 주라!” “흐음! 생각해 보죠.” 라혼의 너스레에 아이리네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러자 라혼은 한숨을 쉬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휴우~! 아이리네!” “왜요?” “너 방금 내게 멋지게 유혹 당했어.” “뭐야? 날 놀리다니…….” 아이리네는 그가 거만한 포즈를 취하며 그렇게 말하자 왠지 모를 패배감을 느끼며 토라지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라혼은 화들짝 놀라며 창문 밖으로 나가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이크! 아이리네 화났다. 도망가야지.” “어딜 가요. 이리 오지 못해요?” “아하하하하……. 내가 어딜 간다고 그래. 자자 아아 피곤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아이리네의 침대로 파고드는 라혼이었다. “뭐해? 어서 자자. 나는 아침부터 고된 일을 해야 한다고.” “하여튼 못 말려!” 아이리네는 사랑스러운 그의 곁에 누워 라혼의 머리를 가만히 가슴으로 끌 어안았다. 그리고 이제까지와 다른 슬픈 표정을 지으며 눈물 한 방울을 흘 렸다. ‘당신은 곧 절 떠날 테죠. 전 그것을 알아요. 그러나 당신이 없는 세상은 제겐 의미가 없어졌답니다. 하지만 전 행복해요. 당신이 보여주는 세상의 이야기가 절 행복하게 하고, 당신의 체온이 절 행복하게 합니다. 그래서 저 는 슬퍼요. 당신이 떠날 것을 알기에…….’ 솔드란의 시민의 입장에서 다크 프린스는 침략자요 약탈자였지만 의외로 그 에 대한 평판을 나쁘지 않았다. 너무 화끈하게 패했다보니 그들이 보여준 무용이 경이롭게 비쳐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비싼 힐링포션으로 목숨을 구한 부상을 당해 죽어가던 부상병들과 격렬한 전투의 여파로 무너진 건물 잔해에 깔려 죽음을 기다리다 구출된 사람들은 자신들을 구해준 레기온들에 게 오히려 고맙다는 감정을 품었다. 그리고 그 당사자인 다크 프린스가 제 국의 귀족들에게 탄핵을 당했다는 소문은 솔드란의 시민들마저 안타깝다고 말하는 이가 많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계속 레기온을 이 끌고 사우스포트에 있었다면 그에 대해 공공연히 좋게 말하는 솔드란 시민 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다크 프린스의 평판이 좋아지다 보니 그와 염문을 뿌린 아이리네 왕녀에 대한 구구한 억측과 소문이 만들어졌다. “그래 그러니까. 다크 프린스가 아이리네 왕녀에게 반해 구애를 했지만 결 국 실패했다는 말이야. 아이리네는 끝까지 정조를 잃지 않았다는 말이지. 그 다크 프린스가 아이리네 왕녀를 강제로 어떻게 하진 않았을 테니까.” “하긴 그의 아버지가 신성 시드그람 제국 제1의 기사라지.” “제국에선 기사도의 상징 같은 사람이라고 하더군. 그런 그의 아들인 다크 프린스가 여자를 함부로 할리 있겠어? 게다가 나는 레기온이 솔드란을 점 령했을 때 그의 부하가 여자를 겁탈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적이 없다고.” “맞아! 나도 우리 딸이 어떻게 될까봐 꼭꼭 숨겨두었는데 나중에 듣고 보 니 레기온은 함부로 하지 않았어. 다른 군대가 솔드란에 들어왔다면 절반이 불타올랐을 걸.” “흥! 모르는 소리. 놈들은 고작 1천명이 조금 넘었을 뿐이었다고, 이틀이 라는 짧은 시간에 뭘 얼마나 할 수 있었겠어?” “하긴 그런 면도 있겠군. 하지만 다크 프린스는 비록 적이지만 존경 할만 해. 그가 이뤄낸 업적을 보라고 자네 말대로 솔드란은 1천명이 간신히 넘는 병력으로 점령했어. 그것도 단 한명의 전사자도 없이. 다크 프린스는 신의 사랑을 받는 영웅임이 분명해!” “맞아, 하지만 영웅은 시기를 받는 존재지 우리에겐 다행이지만 멍청한 제 국 귀족들이 그를 쫓아냈으니 그들에겐 안 된 일이지.” “혹시 말이야. 다크 프린스가 우리 아이리네 왕녀님과 잘 되어서 프린든 왕국을 지켜준다면 어떨까?” “정말 그럴 수도 있겠네?” 다크 프린스를 직접 상대하던 프린든 왕국 백성들 사이에서 오히려 그에 대 한 평판을 좋아지는 데에 넘어서서 영웅시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그리고 적 의 입장인 프린든 왕가의 왕녀과 이루지 못한 사랑이야기는 이미 민간에 퍼 져 음유시인들에 의해 노래 불리어졌다. 그리고 지금 신분을 숨기고 고독한 여행 중일 그를 앞길이 평탄하기를 비는 노래도 불렸다. 전설은 언제나 당 사자가 사라지면 시작되는 것이고, 다크 프린스가 사라지자 그는 어느새 전 설의 영웅이 되어 가고 있었다. 공주님을 사랑한 요리사(A cook who loved a princess) 다린 지방은 한적하기 그지없는 시골 마을이다. 프린든 왕국이 대륙 북방에 위치한 탓에 겨울 추위가 비교적 매서운 편이지만 봄과 여름 가을이 그만 큼 아름다운 곳이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다린의 가을은 무척 아름다웠다. 그래서 이곳엔 프린든 왕가의 요양 별장이 있었고 지금 이 별장에 프린든의 전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왕녀가 3년째 머무르고 있었다. 봄이 멀지않은 겨울막바지의 눈 쌓인 다린은 상당히 추웠다. 라혼은 아이리 네의 곁에서 벌써 3년이나 머물고 있었다. 원래는 잠깐 들려 그녀의 반응을 살피고 안심시켜주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왔었는데 어찌어찌 하다 보니 3년 이나 그녀의 곁을 떠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견습요리사에서 ‘견 습’이란 꼬리표가 떨어지고 당당한 요리사가 되어 있었다. 물론 아이리네 왕녀나 기사들의 요리는 요리장 안데르가 직접하고 있었고 라혼은 여전히 시녀들이나 경비병들 그리고 별장에 고용된 사람들이 먹을 음식을 대량으로 만들었다. 물론 아이리네의 간식거리도 라혼이 직접 만들었다. “가이, 벌꿀을 벌써 다 썼더구나. 마을에 가서 벌꿀을 사와야겠어.” “예, 마스터 또 필요한 것 없어요? 가는 김에 같이 사올게요.” “글쎄? 아, 그라프씨 댁에 가서 산딸기 요구르트를 얻어오렴. 작년에 얻어 먹어보니 맛이 괜찮더구나.” “그라프의 산딸기 요구르트, 벌꿀. 이것뿐이에요?” “그래 그것뿐이다.” 라혼은 마스터 안데르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주방을 나섰다. 안데르는 왕 가에 고용된 요리사답게 솜씨가 뛰어났고 요리에 대한 풍부한 식견과 지식 은 참으로 대단했다. 그리고 라혼이 그를 진정한 스승으로서 대하는 이유는 그가 훌륭한 인격자라는 데에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요리장의 허락 없이 함부로 간식을 만들어 요리장을 고용한 자에게 주는 행위는 해서 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안데르는 라혼이 만들어 내는 동방의 간식들 에 크게 감명 받아 그것을 묵인했다. 그리고 결국 아이리네 왕녀의 간식을 만드는 일을 라혼에게 일임시키기 까지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의 존재 가치가 있게 하는 중요한 임무중 하나를 어디서 온지도 알 수 없는 애송이 요리사에게 양보한 것이었다. 그러한 사실을 안데르의 다른 도제들이 불만 을 토로하는―수백명분의 음식을 만드는 것을 라혼 혼자서 해냈지만 사실은 그들이 도와야 하는 일이었다.― 과정에서 알게 된 라혼은 새삼스런 눈으 로 그를 바라보았고 진정한 스승으로 모시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하아~!” 매서운 막바지 겨울 추위에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지만 별장은 오가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라혼이 지나가는 이들에게 일일이 눈을 맞추고 인사를 하며 별장 밖으로 나서려는데 누군가 불러 세웠다. “가이, 어디가?” “마을! 주방에 벌꿀이 떨어져서…….” “그래? 조금만 기다려 줄래 나도 마을에 볼일 있거든.” “그럼 어서 준비하고 나와! 갔다 와서 저녁을 준비해야 하니까.” “그래!” 두툼한 털옷을 입고 정문 쪽으로 걸어가는 라혼을 별장의 시녀 프랜스가 불 러 세우고 동행을 부탁하자 라혼은 선선히 승낙했다. 그리고 그녀가 준비하 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 위해 양지바른 곳으로 나갔다. 그러다 문득 별장 의 높은 창문에서 아이리네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손을 흔 들어 주었다. “풋!” “어머? 뭐 재미있는 것이라도 있는 거예요?” “아? 아녜요. 그냥 재미있는 추억이 떠올라서…….” “그래요?” 아이리네는 낮에 자신이 멀리서 바라보더라도 귀신같이 눈치 채고 손을 흔 들어 주는 라혼이 무척이나 신기했다. 자기 말로는 사랑이 넘치니까 그런다 지만……. “그보다 국왕 폐하도 너무하시지. 공주님을 이곳에 3년이나 내 팽개쳐 두 다니…….” “아니에요. 전 이곳이 좋아요.” 아이리네는 올리비아 부인에게 그렇게 말하며 다시 눈을 창밖으로 향했다. 그러자 어느새 라혼은 커다란 하트 모양에 화살이 박힌 그림을 눈 위에 그 려놓고 있었다. 아이리네는 그런 라혼의 장난에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 리고 그런 그녀의 모습을 올리비아 부인이 발견하고 조용히 뒤로 접근해 창 밖을 바라보았다. “저 젊은이는 언제나 한결 같군요.” “예? 아니, 예 그래요.” “어머나? 그런데 저 아이는 누구지?” 그때 아이리네는 라혼의 팔짱을 끼는 소녀를 목격했다. 라혼은 자신이 지켜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황한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포기 한 듯 어깨를 나란히 하고 별장을 벗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가이에게도 이제 진정한 짝이 생길 모양이군요.” “그, 그래요. 다행이군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이리네의 몸은 가늘게 떨렸다. 벌써 3년이나 은밀한 사랑을 나누고 있었지만 한 번도 그와 손을 잡고 걸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 서 장난이라도 막무가내로 팔짱을 끼는 창밖의 소녀가 그저 부럽기만 했다. *** “제발 떨어져 걷자. 프랜스!” “싫어! 춥단 말이야!” 라혼은 막무가내로 달라붙는 프랜스의 태도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지금은 바람이 심하지 않아 별로 안 춥단 말이야.” “어머나 이상도 하지. 나는 추운데.” “프랜스.” “왜?” “너 내가 좋냐?” “응, 좋아!” “미안하지만 어쩌지? 나는 이미 임자 있는 몸인데?” “알아! 공주님 말이지. 충고하는데 요리사하고 공주님은 전혀 어울리지 않 아. 이제 그만 포기하고 프랜스에게 오라고.” 라혼은 프랜스의 말에 정색을 하며 대꾸했다. “무슨 소릴. 요리사와 공주는 어울리지 않을지 몰라도 나하고 아이리네 공 주님은 충분히 어울려!” “포기해. 안 어울려!” “어울려!” “안 어울린다니까?” “내기할래!” “그래 내기 하자! 넌 뭘 내놓을 건데?” 라혼은 프랜스가 팔짱을 풀고 두 손을 허리에 척 얹으며 묻자 씩 웃고는 말 했다. “목적이 달성되었으니 내기취소!” “뭐야? 어! 거기 안서!” 프랜스는 혀를 날름 내밀고 도망가는 요리사를 잡기 위해 뛰었지만 간신히 풀려난 그는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잡아 팔짱을 끼 려는 소녀와 그것을 피하려는 라혼의 실랑이는 마을입구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마을에 들어선 라혼은 프랜스와 헤어져 마을 유일의 잡화점으로 들 어갔다. “오오 이게 누구신가? 공주님을 사랑한 요리사가 아닌가?” “아아 오랜만이군, 딜버트. 혹시 벌꿀을 구할 수 있을까?” “벌꿀? 창고에 조금 남아있는 것이 있을 거야. 잠시만 기다리라고…….” “그럼 찾아놓도록 해. 그리고 그라프 씨댁이 어디 있는지 알아?” “그라프의 집이라면 별장과 반대편 마을 어귀에 있어. 그런데 그라프는 왜 ?” “마스터가 그 집 산딸기 요구르트를 조금 얻어오라고 해서.” “하긴 그 집 산딸기 요구르트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산딸기 요구르트지. ” 그렇게 말한 잡화점 주인 딜버트가 식료품 창고로 들어가자 라혼은 그라프 의 집을 찾아갔다. 그리 크지 않은 마을에서 3년이나 살다보니 마을 대부분 의 사람들과 안면을 트고 지내는 라혼이었기에 누구 하고나 격의 없이 지냈 다. 딜버트가 가르쳐 준대로 쉽게 그라프의 집을 찾은 라혼은 눈이 쌓인 울타리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탕탕탕. 그리고 얼마 후 안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려오며 문이 열렸다. “누구세요?” “안녕 챌시!” “어머! 가이씨. 우리 집엔 무슨 일이세요?” “우리 마스터가 너희 집 산딸기 요구르트를 얻어오라고 해서.” “안데르 씨가요? 남은 것이 있으려나 모르겠네. 일단 들어와서 몸이라도 녹여요.” “고마워! 그런데 그라프 씨는 안보이네?” “아버지요? 아버지는 돌리오 씨네 펍에 계실 거예요.” 겨울이 오면 대부분의 시간을 술집에서 보내는 여느 농부들과 같이 챌시의 아버지 또한 펍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테리아 부인은?” “어머니는 돌도레스 부인하고 수다나 떨고 있을 테죠. 아! 찾았다. 다행히 한통정도 남아 있었네요.” 챌시는 주방 구석에서 산딸기 요구르트가 담긴 통을 가지고 나왔다. 라혼은 무거워 보이는 사람 머리통만한 오크나무통을 받아들어 바닥에 내려놓고 은화 2개를 꺼냈다. “어머! 그냥 가져가세요. 저희는 또 있으니까.” “아니 받아둬! 이렇게 해야 또 내년에도 올수 있지.” “그렇지만 2실버라니 너무 많아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산딸기 요구르트인데 이정도 값어치는 해! 요리사 의 안목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면 받아둬!” “호호호, 가이 씨도 아시는 군요.” “그럼 나 갈께.” “어머 벌써요?” “저녁 준비해야하기 때문에 바쁘다고.” “그럼 조심히 가세요. 고마워요.” 라혼은 그라프의 집에서 나와 다시 딜버트의 잡화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딜버트의 잡화점에서 멀지않은 곳에 위치한 돌리오 여관에 한 눈에도 질 좋은 말 십여 마리가 묶여져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한갓진 시골마을이었지만 바로 근처에 왕가 소유의 별장이 있었기에 기사들이 잠깐 쉬어 간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라혼은 거기엔 관심을 끊고 잡화점 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서와 다행이 한 단지 정도 남아 있었어. 하지만 이것뿐이니까 아껴 쓰 라고…….” “알았어.” “그보다 이번에 온 기사들은 지체가 높은 귀족들인 가봐.” “응?” 딜버트는 턱으로 돌리오 여관 방향을 가리키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평소엔 거만하게 굴던 고급스러워 보이는 복장을 한 기사들이 쩔쩔 매더 라고, 아마도 왕녀님을 뵈러온 왕가의 왕족인 가봐!” “그래?” 라혼은 딜버트의 말에 의식을 개방하여 돌리오 여관에서 몸을 녹이고 있는 자들을 살폈다. ‘호오! 이것 봐라? 상당한 실력자들에 마법사까지 있네?’ 라혼은 딜버트에게 벌꿀 값을 치른 후 잡화점을 나서서 돌리오 여관으로 향 했다. 마을에 같이 나온 프랜스와 거기서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보통 마을 사람들은 여관에 귀족들이 있으면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꺼리지만 왕 가 별장의 하녀인 프랜스는 그런 것을 따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끼이이익! 라혼이 안으로 들어서자 펍 중앙에 지펴놓은 모닥불에서 몸을 녹이던 제대 로 된 무장을 한 기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었다. 그것은 호위임무를 맡은 기사들에게서 볼 수 있는 자연스런 반응이었지만 날카로운 시선을 받 는 입장에선 움찔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시선에 주눅들 라혼이 아니었고 바로 그것이 경험 많은 나이트 필히너를 자극했다. 라혼은 일행 중 가장 지위가 높아 보이는 사람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바(bar)로 가서 이 여관의 주인인 돌리오에게 물었다. “여기 프랜스 안 왔어?” “프랜스? 아 별장의 하녀 말이로군. 아니 아직 안 왔는데?” “그래?” “아! 나리 뭐 필요한 것이라도 있습니까?” 그때 라혼의 등 뒤로 지체 높은 귀족을 모신 기사가 접근하자 돌리오는 입 가에 미소를 만들며 친절하게 물었다. 라혼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가 일을 볼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물러섰다. 하지만 그의 목적은 여관의 주인인 돌 리오에게 있는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체격이 건장한 것을 보니 무술을 익힌 것 같은데 기사는 아닌 것 같고 별 장의 경비병인가?” 나이트 필히너는 그가 여관 주인과 말을 놓고 편하게 대하는 태도를 보고 그렇게 질문을 던졌다. “아닙니다. 나리, 저는 별장의 요리사입니다.” “요리사? 혹시 자네 이름이 가이 아닌가?” “예? 제가 가이가 맞습니다만 어떻게?” “하하하하,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유명인을 만났군.” “폐하! 이 청년이 가이랍니다.” “공주님에게 반한 그 요리사!” 서른 중반의 기사의 말에 라혼은 일이 복잡해 졌음을 알았다. ‘폐하’라고 불리는 존재가 여기 있다면 그는……. “구, 국왕폐하……?” 그제야 자신의 가게를 찾은 지체 높은 귀족의 신분을 눈치 챈 돌리오는 바 밖으로 나와 머리를 조아렸다. 그것은 라혼도 마찬가지였다. 라혼은 몰랐지 만 가이라는 요리사는 솔드란 사교계에서 유명했다. 아이리네 왕녀가 별장 으로 온지 2년 쯤 되고 왕녀를 돌보는 책임을 맡은 올리비아 부인이 잠시 솔드란을 다니러 갔었다. 그때 왕녀의 근황을 국왕에게 이야기하며 아이리 네 왕녀에게 반한 요리사 이야기 또한 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삽시간에 소문이 퍼져 라혼은 자기도 모른 사이 유명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요리사가 공주님을 사랑한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무엄하기 이를 데 없는 사 실이었지만 슬픔에 잠긴 공주를 위해 매일매일 아름답고 달콤한 간식들을 만드는 요리사의 순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국왕이 흡족해하자 그것은 스캔들이 아닌 로맨스가 되었다. 공주님을 사랑한 요리사 단 십여명의 호위기사만 동행을 한 슘터 국왕의 갑작스런 방문에 언제나 평 온하던 다란의 별장을 발칵 뒤집었다. 오빠가 휴양을 하고 있는 여동생을 찾은 일이었지만 별장의 식구들은 바짝 긴장한 채 하루하루를 보냈다. 들리 는 말로는 왕은 봄이 올 때까지 별장에서 동생과 함께 머무를 생각이라고 하는 모양이니 최소한 한 달이나 두세 달은 별장에 머물 것이다. “내 생각엔 아마도 폐하께서 화가 풀리셔서 왕녀님을 솔드란으로 데리고 가실 것 같아.” “아무래도 그렇겠지? 3년이나 이곳에 버려두다시피 했으니 돌아가실 때도 되었겠지?” “맞아. 결혼도 하셔야 하잖아.” “결혼? 누구랑?” “비키가 올리비아 부인의 하는 말을 들었는데 시오나 왕국의 에드리언 왕 과 어렸을 적부터 결혼이 약속 되어 있다고 하던데?” “그럼 다크 프린스는?” “그거야! 스캔들이지. 들려오는 소문에 다크 프린스는 오래전에 실종되었 다던데…….” 갑작스런 국왕의 출현에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아이리네 왕녀가 솔드란으 로 돌아가 결혼을 할 것이라고 말을 했다. “그나저나 안됐지 뭐야. 내가 보기에 가이 녀석 진심인 것 같던데.” “그래 봐야. 고작 일개 요리사야.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는 상대였다고…… .” “좋은 녀석인데…….” “좋기는 뭐! 그 녀석 은근히 인기 있는 거 몰라서 그래? 대부분의 처녀들 이 그 녀석을 노리고 있다고 왕녀님에게 손색이 있다지만 그 안데르 씨에게 인정받은 실력 있는 요리사야. 어디 가서도 먹고살 걱정이 없는 최고의 신 랑감이지.” “내가 최고의 신랑감이란 것은 인정하지. 하지만 나를 감당할 수 있는 여 자는 세상에 얼마 없을 걸.” “어, 가이!” 저녁 식사가 끝나고 주방의 따뜻한 아궁이에 모여앉아 술을 나눠 마시며 잡 담을 나누던 별장의 고용인들은 가이의 출현에 깜짝 놀랐다. 가이는 저녁시 간이면 항상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기 일 수였기 때문에 늦은 밤엔 그의 얼 굴을 보기 힘들었다. 그러니 밤에 그가 모습을 보이자 옹기종기 모여 자릴 잡고 있던 사내들은 놀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네가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이냐?” “그냥! 너희들 얼굴 보고 싶어서.” “에? 이건 또 오우거 풀 뜯어 먹는 소리야? 매일 보는 상판들이 뭐가 보고 싶다는 거냐?” “그런데 나는 그거 안 줄 거야?” “뭐? 아! 그래 마셔 답답할 땐 이거 마시고 푸념한번 하면 기분이 풀리지. ” 사내는 알겠다는 투로 위로의 말을 건네며 술을 따라주었다. 라혼은 사내가 따라 주는 거친 술을 따른 잔을 단숨에 비우고 독한 술기운에 혀를 내둘렀 다. “후아~! 이거 상당히 독한데?” “하하하하, 뭘 이정도 가지고…….” “하하하하하…….” “큼흠! 그보다 작별인사를 미리 해두려고…….” “작별인사? 그건 또 뭔 말이래?” 라혼은 지난 3년간 함께 일하고 일상의 즐거움을 나누었던 친구들의 얼굴을 일일이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여행을 하고 있었어. 그런데 예정에도 없이 이곳에서 3년이나 머물 렀을 뿐이야.” “아! 그렇군. 가이는 여행자였지.” “나는 하도 넉살 좋게 굴 길래 여기 토박이인줄 착각하고 있었는데.” “그래 언제 떠나려고?” “글쎄……. 지금 당장 떠날 수도 있고, 봄이 오면 떠날 수도 있고, 흠모하 는 공주님이 떠날 때 떠날 수도 있겠지. 그래서 미리 이야기 해두는 거야. 내가 갑자기 사라져도 그런가보다 하라고…….” 사내들은 라혼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여기 있는 사람들 중 이곳 별장을 관리하는 사람도 있었고 왕녀가 솔드란으로 돌아가게 된다 면 같이 갈 사람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들도 얼굴 마주 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네?” “자자자, 그런 우중충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소시지나 구워먹자.” “에? 함부로 훔쳐 먹으면 안 되잖아? 도둑질인데…….” “누가 국왕의 식료품 창고를 털자고 했나? 내 소시지를 대접하는 거지. 다 만 불을 이용하는 것뿐이지만…….” “역시 가이는 뭔가 안다니까.” 라혼은 에텔 스페이스―지금 에텔 스페이스는 훌륭한 창고로 쓰고 있다.― 에서 소시지를 사람 수대로 꺼내 불에 구웠다. 역시 에텔 스페이스에 꺼낸 향신료를 발라가면 맛있게 구워진 소시지에서 풍겨 나오는 향기는 입안에서 절로 침이 고이게 했다. “음! 역시 안데르씨가 애지중지하는 요리사의 소시지답군.” 라혼은 그들이 소시지를 한입 베어 물고 만족한 모습으로 칭찬의 말을 아끼 지 않자 볼을 긁적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볼게, 국왕폐하도 계신데 적당히 하라고…….” “에, 벌써?” 라혼은 주방을 벗어나 정원으로 들어섰다. 창백한 겨울 달빛이 비치는 눈 쌓인 정원은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냈고 처음 계획한 여행을 시작해야 할지 아니면 일단 가족에게 돌아가야 할지를 생각했다. “역시 일단 집으로 돌아가서 1년쯤 쉴까?” 살갗을 어루만지는 겨울의 여왕의 손길을 음미하며 생각을 정리하던 라혼은 문득 자신의 등 뒤로 누군가 접근하는 것이 느꼈다. 하지만 그가 일부러 기척을 죽이고 접근한다는 것을 안 라혼은 일부러 아는 척 하지 않았다. “시간이 늦었는데 여기서 뭘 하나?” “아, 필히너 경!” 이번에 국왕을 호위하는 총 책임을 맡은 나이트 필히너였다. “그냥 잠시 찬바람을 쐬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래?” -팡! 그리곤 갑자기 라혼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뻗어내는 필히너였다. 라혼은 그 의 갑작스런 공격에 주먹을 잡아 거둬내며 반사적으로 그의 품으로 파고들 어 가슴을 보호하는 판갑옷 플레이트 아머의 목 어림을 잡아갔다. “흡!” 너무나 자연스러운 반격에 필히너는 무릎을 쳐올리며 반격을 시도 했지만 라혼은 그의 공격에 순순히 당해줄 생각이 없었다. -콰창! 라혼은 필히너의 위협적이 무릎 공격에 허리를 살짝 비틀어 피해내고 그대 로 필히너의 가슴에 록 스트라이커를 먹였다. 그러나 자세가 무너진 상태에 서 들어간 록 스트라이커는 제대로된 위력을 보이지 않았고 라혼은 공중에 서 균형을 다잡으며 너머 진 필히너의 허리춤에서 숏소드를 낚아채듯 뽑아 들고 그의 목젓을 겨누고 말했다. “제 실력이 궁금했다면 그냥 물어보시죠. 번거롭게 힘을 쓸 필요 없지 않 습니까?” “끙! 자네의 그 말을 듣고 보니 내가 괜한 고생을 사서한 것 같군. 미안하 지만 그걸 좀 거둬 주겠나? 내 숏쇼드는 상당히 날카롭단 말일세.” 라혼은 처음부터 검을 뽑아 공격한 것이 아닌 주먹을 내질렀다는 것을 보고 처음부터 그가 자신을 시험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라혼의 감 각에 주변에 매복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기에 그가 개인적인 호기심 으로 자신을 도발했음을 짐작했다. 라혼은 그의 목을 겨눈 칼을 거두고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었다. “이제 그만 일어나시죠. 눈밭에 계속 누워 계서서 건강에 좋을 것 없으니 까요.” “끙! 명색이 왕실근위기사단인데. 내 꼴이 말이 아니구먼.” 라혼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켜 세운 필히너는 몸에 묻은 눈을 털어낸 후 날 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며 물었다. “스스로 정체를 숨길 생각이 없는 모양이니 직접 묻겠네. 자넨 누군가?” “라혼 가이우스 세나데온 차이저 자작, 로카데 차이저 반 하이슬란드 백작 의 아들입니다. 필히너 경!” “헉!” 필히너는 지금 이 순간 입으로 심장을 토해낼 정도로 크게 놀랐다. 자신만 만한 태도에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의 가이라는 공주님을 사랑한 요리사 의 자신이 다크 프린스라고 주장하는 그의 말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크 프린스의 이름의 무게는 필히너에게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지금 그의 태도 나타났다. 한발을 뒤로 빼고 허리춤 에 롱소드의 그립을 꼭 잡은 그의 모습은 언제든지 검을 뽑아 낼 수 있는 모습이었다. “나이트 필히너, 저는 괴물이 아닙니다. 쓸데없는 살기를 거두시지요. 이 곳엔 국왕이 계시지 않습니까?” “무, 무슨 속셈이냐?” “뭐가 말입니까?” “네가 정체를 숨기고 여기에 있는 이유와 순순히 정체를 밝힌 이유 말이다 .” 라혼은 노련한 기사 필히너가 일부러 큰 목소리고 질문을 던지며 시간을 끌 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것에 신경을 쓰지 않으며 그의 질문에 답했다 . “내가 여기 있는 이유는 내 아내 된 여자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고, 순순히 정체를 밝힌 이유는 굳이 정체를 숨길 이유가 없기 때문이지.” “무슨 뜻이냐?” “말 그대로다. 내게 없는 이유를 또 만들어 내라는 것이 아니라면 계속 추 궁하려 하지 마라. 나이트 필히너!” “흐윽!” 필히너는 달빛아래에서 바로자신의 숏소드에 황금빛 오러 블레이드가 뻗어 나오는 모습에 신음성을 내 뱉었다. 검 자체에 오러 블레이드를 씌우는 것 이 아닌 짧은 숏소드 칼날보다 1미터 가량 벗어난 순수한 오러 블레이드는 그가 상급 소드 마스터라는 사실을 증명했기 때문이었다. “어, 어드밴스 오러 블레이드라니…….” “조용한 밤이지 않습니까? 필히너 경, 하지만 경이 원한다면 저 아름다움 보름달을 피에 물들게 할 수 있습니다. 현명하게 판단하십시오. 제 정체에 대해서 슘터에게 말해도 되지만 그 외 사람들에겐 비밀입니다. 만일 제 정 체를 밝힌다면 저는 슘터와 동등한 입장에 설 겁니다. 나이트 필히너!” “…….” “그리고 여기 경의 검입니다.” 라혼은 아직도 얼이 빠져있는 필히너에게 들고 있던 숏소드를 건네주고 그 와 멀어졌다. 그리고 필히너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난 모퉁이를 돌때 아이 리네의 방으로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했다. 라혼이 필히너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아이리네는 활활 타오르는 벽난 로 가에서 오빠와 차를 마시고 있었다. “아린, 아직도 이 오빠에게 화가 풀리지 않는 거냐?” “예? 아니에요.” 아이리네는 라혼이 혼자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들어 오빠와 차를 마 시면서도 안정부절하지 못했다. “그럼 왜 그렇게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거야?” “그냥……. 아니 조금 피곤해서요.” “무슨 소리. 솔드란에선 새벽까지 이어지는 무도회에서도 멀쩡했잖아?” “그게 습관이란 게 무섭더라고요. 해가 떨어지면 자는 버릇이 들다보니 이 시간까지 깨어있는 게 좀 그런 것뿐이에요.” “그런 거냐? 그럼 들어가 쉬어라.” “아하합! 아무래도 그래야 갰어요. 오빠도 편히 쉬어요. 휴양하러 왔다면 서 무리하지 말고…….” “그래.” 아이리네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오빠의 볼에 뽀뽀를 하고 살롱을 벗 어났다. 슘터는 그런 동생의 태도에 왠지 모를 섭섭함을 느꼈다. “저 녀석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것이 분명하군. 다 자기를 보호하기 위 해서 그랬을 뿐인데…….” 사랑스런 여동생을 보낸 슘터는 벽난로 가에 깔아놓은 푹신한 카펫에 몸을 누이고 참나무가 타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눈을 감았다. 그때 호위기사인 나이트 필히너가 뛰어 들어왔다. “폐하!” “필히너 경? 밤늦게 무슨 일이지?” “급히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지? 솔드란에서 무슨 급한 연락이라도 있는 건가?” “아닙니다.” 나이트 필히너는 다급한 마음에 일단 왕을 찾아왔지만 이 일을 어떻게 설명 해야할지 난감했다. 다크 프린스가 보여준 힘은 자신의 역량을 벗어나는 것 이기에 어떻게든 왕을 피신 시켜야 하지만 왕이 왕녀를 버리고 몸을 피신하 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도대체 뭔가? 무슨 일이기에 감히 날 방해했는가?” “폐하, 다크 프린스입니다. 그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이야? 혹시 경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실입니다. 아이리네 왕녀를 흠모한다는 그 요리사의 정체가 바로 다크 프린스였습니다.” “뭐라고?” 슘터왕은 충성스런 신하 필히너의 말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 가이 인가 뭔가 하는 요리사의 체격이 다년 간 수련을 한 체격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고 자신도 기사로써 수련을 해보았기 때문에 그가 상당한 수련을 한 몸 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신중한 나이트 필히너가 그의 뒷 조사를 하고 다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그가 바로 다크 프린스라니……. “폐하 일단 피하셔야 합니다. 그는 상급 소드 마스터만이 사용한다는 어드 밴스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 했습니다. 여기 있는 전력 전부가 그에게 덤벼 도 그를 막을 수 없습니다.”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다크 프린스가 왜 여기 있어? 이유가 없잖 ……. 설마!” “폐하! 이, 이런…….” 슘터는 그제야 동생의 안절부절 못하던 태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 그리고 머릿속에서 말도 안 되는 상상이 떠올라 일단 그것을 확인해야 했 다. 아이리네는 방까지 따라온 시녀가 침대를 따뜻하게 데워주고 방을 나서자 창문을 열어놓고 그를 기다렸다. “하아~!” “추운데 왜 창문은 열어놓고 있는 거야?” “어머!” 그러나 등 뒤에서 익숙한 사내의 향취가 나며 자신을 부드럽게 안아오자 깜 짝 놀라며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예요? 혹시 나도 모르는 비밀스런 길이라도 있는 거예요?” “나만의 마법이야. 마법사에게 마법 주문의 비밀을 묻는 것은 실례라고… ….” “피! 언제나 그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지.” 아이리네는 귓불에 그의 숨결을 느끼며 창문을 닫았다. “그런데 오빠는 언제 돌아간데?” “몰라요. 숙부랑 무슨 일이 있어 도망쳐온 모양인데 금방 돌아가진 않을 것 같아요.” “숙부라면 레곤 공작을 말하는 건가?” “그래요. 당신이 우리 집의 재산을 도둑질해간 바람에 왕가의 재정이 말이 아니라고요. 어쩜 그렇게 먼지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털어갈 수 있어요? ” “어이, 그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서로 전쟁하면서 서로의 재산을 약탈하 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게다가 프린든 왕가의 재산이 겨우 그것뿐 이 아니잖아!” “참 그리고 필히너 경이 당신의 뒤를 캐고 있어요. 그러니 조심해야 해요! ” “이런 어쩌지 필히너에게 내가 누구라는 것을 가르쳐 줘 버렸는데.” “뭐예요? 설마 아니겠죠.” “아니 사실이야. 아마도 지금쯤 아린의 오빠에게 내가 여기 있었다는 사실 을 보고하고 도망치자고 했을 걸. 아니면 지금 여기로 달려오던가.” “또 날 놀리는 거죠?” 그러나 방문 너머로 누군가 빠르게 접근하는 발자국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 다. 왕녀가 쉬고 있는 방 근처에서 저토록 당당하게 소리를 내면 걷는 존재 는 오직 그녀의 오빠뿐이었다. -저벅저벅저벅저벅저벅……. “뭐해요! 어서 숨어요!” “뭘? 일부러 부른 건데 내가 숨으면 의미가 없잖아?” “뭐라고요?” -쾅당! “아린!” “…….” “…….” 그리고 아이리네가 어찌 해볼 틈도 없이 방문은 거칠게 열렸다. 커다란 침 대에 거기가 원래 자기 자리인양 앉아있는 검은 머리의 사내와 그 옆에 잠 옷차림으로 서있는 아이리네, 그리고 방문을 거칠게 열어젖히고 그것을 보 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슘터였다. “오, 오빠.” “아하하하하,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형님!” “누가 네 형님이야! 이 도적아!” “폐, 폐하!” 슘터는 철가면을 쓴 듯이 낯 두꺼운 천한 요리사 놈이 여동생의 침대를 차 지하고 앉아 자신을 ‘형님’이러고 부르자 허리춤에 롱소드를 뽑아 그의 목을 쳐갔다. 라혼은 앉은 자세 그대로 앞으로 튀어나가며 검을 잡은 슘터 의 오른손 팔목을 잡으며 겨드랑이로 어깨를 집어넣고 그대로 업어서 매쳐 버렸다. -챙그랑! “폐하!” 아이리네는 바로 자신의 눈앞에서 ‘휙휙’하는 사이 오빠가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있자 비명을 지르려던 것을 그대로 먹어버렸다. 그리고 라혼이 오 빠의 순식간에 두 팔을 제압하고 목을 금방이라도 부러트릴 듯이 부여잡자 크게 놀랐다. “라혼!” “폐하께 무슨 무엄한 짓이냐!” 그러나 라혼은 아이리네와 필히너의 목소리를 귓가로 흘리며 슘터왕에게 말 했다. “지금도 우리 아버지랑 전쟁을 계속하는 관계라는 것은 알아. 하지만 지금 여기서 나와 임시적인 휴전을 하는 것이 어때?” “욱, 우욱!”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풀어주지? 받아들인다면 발을 두 번 구르라고… ….” “욱!” -탁탁! 라혼은 슘터가 발로 바닥을 구르자 손과 목을 풀어주었다. “쿨럭~! 꿀럭, 꿀럭, 꿀럭.” “오빠!” 슘터는 기침을 심하게 하면서도 동생에게 손들며 말했다. “나는 괜찮아. 아린! 그런데 언제부터 저놈이……. 한 거지?” 슘터는 차마 말을 흐리며 동생에게 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얼굴이 붉어진 아이리네가 아닌 요리사 놈이 대신 했다. “나와 아린은 3년 정도 묵은 사이지.” “닥쳐라! 이 도적아!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요리사 놈이…….” “뭐야? 모르는 거야? 필히너 경 아직 보고하지 않았나?” “그게…….” “네가 그 잘난 다크 프린스라는 것은 짐도 알고 있다. 이 천박하기 그지없 는 도적놈아!” “그럼 나눌 이야기도 많을 텐데 차라도 끓일까? 내가 준비하지!” 라혼의 유들유들한 태도는 슘터의 화를 돋우기에 충분했다. 프린든 왕가는 물론 솔드란의 귀족들의 모든 재산을 털어간 도적놈이 지난 3년간 아이리네 에게 순정을 받치는 요리사 흉내를 내며 곁에 머물고 있었단 사실은 그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이 뻔뻔하고 간악한 도적아! 감히 여기서 주인 행세를 하다니 간이 얼마 나 큰지 보고 싶구나!” “그건 내가 오래오래 충분히 살고 죽으면 그때 확인해 봐 얼마나 큰지.” “이, 이이…….” “참고로 여기에 있는 30여명의 기사와 100여명의 경비병이 모두 덤벼든다 고 해도 날 어쩔 수 없어. 그렇지 않소? 나이트 필히너!” 필히너는 다크 프린스의 말에 자신을 쏘아보는 왕에게 고개를 숙여 보일 수 밖에 없었다. 만일 자신이 그와 1대1로 맞섰다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 다. 지금 필히너는 왕이 흥분하여 그를 자극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크윽!” “자자, 얼굴 붉히지 말고 엎질러진 물이고, 빵으로 구워진 밀가루야. 차를 들면서 앞날을 상의해 보자고.” 지난 3년간 라혼에 대해 많은 것을 겪은 아이리네가 가장 먼저 상황에 적응 했다. 그녀는 라혼이 차를 끌이자 찻잔을 미리 준비해 탁자에 놓았다. 라혼 과 함께 차를 즐길 땐 찻잔을 준비하는 것은 언제나 그녀의 몫이었기 때문 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사랑을 나누고 있기에 시녀를 부를 수가 없어 그랬 지만 그런 아이리네의 모습은 슘터의 이마에 핏대가 붉어지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무작정 화를 낼 수도 없는 것이 자신의 왕국의 자기 소유의 별장에서 적인 다크 프린스가 주도권을 잡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에, 일단 아린과 나의 결혼을 축복해 주었으면 해!” “뭐야! 이 도적…….” “그리고 프린든 왕국은 이그라혼과 동맹을 맺어줬으면 한다.” “……!” 폭발할 것 같은 슘터의 분노는 라혼의 한마디에 그대로 수그러졌다. 대신 무섭게 치켜뜬 눈으로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일국을 이끄는 왕의 모습으 로 그의 진정 뜻밖의 제안을 생각했다. 다크 프린스가 스스로 반왕 이그라혼의 이름이 잇는 자라고 주장했다는 사 실은 알고 있었다. 물론 슘터는 그런 사실을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지만 말 이다. “프린든 왕가는 이그라혼과 그다지 깊을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 르겠군.” “지금 천년전 이그라혼과 관계를 맺고 있는 곳이 얼마나 될까?” “…….” 그리고 침묵은 뜨겁던 차가 차갑게 식어갈 무렵까지 이어졌다. 그 무거운 침묵을 깨고 나선 것은 슘터였다. “네가 가진 것은 지금 아무것도 없다. 네 부친이 제국연합군 총사령관이지 만 그야말로 허울뿐인 지위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야. 그것을 아는가?” “무슨 소릴. 아버지는 레기온의 절대적이 지지를 받고 있고 제국연합군의 중심은 레기온이다. 그리고 지금 그것이 무슨 관계인거지? 나는 이미 프린 스 그란이 아닌 이그라혼으로써 네게 말하는 거다.” “그럼 다시 묻지 이그라혼에게 무엇이 있나?” “아무것도 없다. 단지 그 이름뿐이지.” “그런데도 지금 짐에게 뻔뻔스럽게 동맹운운 하는 건가?” “무슨 말을 나는 매제잖아? 동맹쯤은 해주면 어때서? 내가 이래 뵈도 아버 지 못지않은 소드 마스터인데 밥만 먹여줘도 이익이지. 유사시에 널 도울 칼이 될 수도 있고.” “그럼 내게 그 증거를 보여라!” 라혼은 슘터가 이미 자신을 허락했다는 사실을 알고 필히너에게 검을 빌려 그에게 어드밴스 오러 블레이드(Advance aura blade)를 보여주었다. 공주님을 사랑한 요리사 프린든 왕국과 신성 시드그람 제국의 전쟁은 3년을 지나 4년째에 접어드는 이 순간에도 끝나지 않았다. 다크 프린스가 프린든 왕국이 보유한 탈로스 전력의 절반에 해당하는 탈로스를 탈취하고 쉬지 않고 몰아쳐 프린든 왕국 의 수도인 솔드란까지 일시 점거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지금 이 순간 에도 국지전이 계속 되고 있었다. 제국으로써는 최전선 이랄 수 있는 사우 스포트 이상 진출할 뜻이 없었고 프린든 또한 사우스포트에 웅크리고 있는 제국연합군 세력을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결론은 종전 강화협상이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프린든은 프린든 대로 제국은 제국대로 강화를 할 뜻이 없 는 듯했다. 프린든의 슘터 국왕은 솔드란의 방비를 소홀히 함으로써 수도를 적에 내준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납득할 만한 승리가 필요했고, 제국의 원로원 은 다크 프린스에게 심취한 레기온이 모두 5년간의 충성 서약의 의무를 마 치고 전역을 하길 원했기에 이렇다 할 전투가 없는 전쟁 상태가 당분간 지 속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3년이 흐른 지금 전쟁이 발발하기 2년 전 레기온이 되었던 다크 프 린스의 대승리 세례를 받은 이들 대부분 전역 처리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나머지 레기온들은 다크 프린스의 ‘13일 솔드란 원정’에서 얻은 레기온 의 운영자금을 까먹으며 전쟁이라는 긴장상태를 유지한 채 전역만을 기다리 는 신세가 되어 있었다. 그들 중에도 예외는 있었는데 다름 아닌 탈로스를 배정받은 파일럿 나이트들이었는데 그들의 충성의 의무를 다하고도 레기온 에 남아 있었다. 바로 그들이 제국연합군 총사령관 로카데 차이저 반 하이 슬란드 백작의 든든한 지지기반이었다.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지.” “마스터, 올해도 귀족원의 지원이 없는 겁니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구나. 라혼이 남겨둔 자금은 얼마나 되지?” “아직 1, 2년은 버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병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의 이야기입니다.” 로카데는 트라킨의 의견에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신병을 안 받을 수는 없어, 어렵더라도 신병은 계속 받아야해. 올해도 전 역하는 병사들이 있으니까 그들의 공백을 메우는 것은 중요해.” “하지만 프린든 군은…….” “일단은 공식적으로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황이야. 강화가 이루어지지 않 은 이상 전력을 유지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거다.” “알겠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올해 신병의 훈련은 누가 맡기로 했지?” 트라킨은 마스터 로카데의 질문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제껏 제국연합군의 전체 병력을 훈련을 책임진 아돌프가 죠슈아를 추천 했습니다.” “죠슈아를?” “라혼이 떠나면서 아돌프에게 부탁한 것이 있어서 의무기간을 마치면 레기 온 떠나게 되어있기 때문에 마스터 곁을 계속 지킬 죠슈아와 함께 일을 하 며 대규모 병력을 다루는 요령을 익히게 한 모양 입니다.” “라혼이 아돌프에게 부탁한 일이 있었다?” “예, 마스터! 차이저 가문에 적을 둔 충성스런 기사들이 없는데 전역하는 레기온 기병대에서 재능이있고 나름대로 쓸만한 자들을 골라 가문의 기사단 을 꾸릴 생각인가 봅니다. 귀족의회가 하는 것을 보아 제위에 오르는 것은 물 건너 같으니 나름대론 준비를 해야 했었겠지요.” “녀석, 아비가 주변머리가 없어 하지 못한 일을 하다니…….” 어찌 보면 현 차이저 가의 당주인 로카데가 보기에 아무리 장자이며 후계자 가 한 일이었지만 그것은 명백한 월권행위였다. 하지만 라혼이 하는 일이 가문에 도움이 되고 어엿하게 자기 영역을 꾸린 아들을 아버지 로카데는 대 견스러워 했다. “그나저나 어디서 무얼 하기에 이 녀석은 소식이 없는지.” “라혼은 이미 적인 프린든 왕국에서도 명성이 높은 기사입니다. 하지만 저 는 그 지닌바 무용이나 지략에 비해 명성이 하잘것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그 녀석을 어찌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허허허허, 아들이 아무리 천하무적이라도 부모의 걱정하는 마음을 거둘 수는 없는 법이야. 너도 이제 아버지가 되니 곧 그 마음을 알게 될 거다.” 트라킨은 계속 사우스포트에 머물면서도 가끔 휴가기간을 이용해 그란에 머 물고 있는 아내 세나루나를 보러 갔었다. 그리고 그 수고로움의 결실이 있 어 아기를 가진 루나는 올 봄께 해산이 예정되어 있었다. 트라킨은 장인이 기도한 마스터 로카데의 말에 마음이 그란에 있는 사랑하는 아내 곁으로 가 있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물었다. “그보다 죠슈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죠슈아? 무슨 말이냐?” “마스터도 아시지 않습니까? 죠슈아가 처제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말 입니다.” 로카데는 트라킨의 지금 무엇을 물어오는지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다. 테이 는 벌써 24세가 되었다. 이제 곧 노처녀에 해당하는 나이였다. 약혼자나 혼 담이 오가는 일은 없었지만 암묵적인 상대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글쎄……. 죠슈아가 사윗감으로써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지만 라혼의 돌 아왔을 때 힘이 되어줄 가문과 연을 맺는 것이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 어서…….” “하지만 라혼은 죠슈아가 가족이 되어 주었으면 하던데.” “허허허허, 그러니까 네가 잘 말해 보거라. 더 이상 내 딸을 기다리게 하 면 엄한 놈에게 뺐길 지도 모른다고 내 딸이 이래봬도 상당히 인기가 많으 니 말이다.” “아!” 트라킨은 비로소 마스터 로카데의 말을 이해했다. 죠슈아는 은근히 고집이 있는 사내여서 라혼이 돌아올 때까지 테이와 결혼을 미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 그를 움직이려면 이정도 충격요법이 필요 했다. 아돌프는 전역했으며, 그와 함께 레기온의 초창기 창립 멤버가 함께 빠졌다 . 또한 올봄의 휴가는 총사령관인 로카데와 트라킨, 그리고 죠슈아가 아내 의 해산, 결혼 등으로 사우스포트를 비웠고 프린든-제국의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 라혼이 비록 슘터와 손을 잡기로 했지만 신분은 계속 숨기기로 했다. 라혼 이 신분을 밝히면서 파생될 갖가지 문제를 줄이기 위해서 그렇게 합의를 본 것이었다. 그래서 라혼은 여느 때와 같이 수백명분의 식사를 책임져야 했 고, 아이리네를 위해 간식을 만들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슘터로 하여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여동생을 털도 뽑지 않고 해치워 버린 자에 대한 심술을 부리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가이, 오늘 저녁에 폐하께서 성대한 연회를 베푸신대.” “연회? 저녁식사 준비 다되었는데 무슨 연회?” “미안하지만 여기 적힌 메뉴를 준비해야해!” 라혼은 시종 벤이 내민 종이에 적힌 빼곡한 메뉴에 골치가 아파왔다. “어떻게 뻑 하면 다된 저녁에 연회야?” “쉿! 가이 말조심해. 폐하의 명령이야. 군소리 말고 하자고 힘들긴 하지만 보너스가 넉넉히 나오잖아.” 라혼은 치사하게 사람을 괴롭히는 슘터의 농간에 다 집어치우고 못하겠다고 배짱을 부릴까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저런 걸 왕이라고 모시는 백성들이 불쌍하다. 불쌍해! 후우~!’ 저녁까지 일이 늘어났지만 그만큼 보상이 뒤따르므로 주방의 일꾼들은 열의 를 가지고 일을 했다. 만일 라혼이 정체를 밝히거나 또는 못하겠다고 항의 를 한다면 이곳에 머물기 힘들어지거나 주방동료들의 짭짤한 수입이 없어질 수 있었다. 바로 어제까지 격의 없이 지내던 동료들이 갑자기 머릴 조아리 며 어려워하는 기색을 보인다면 그것보다 어색한 것은 없었다. 그러므로 라 혼은 오늘 저녁 식사로 만든 요리들을 에텔 스페이스―라혼은 뭐든지 그냥 버리는 법이 없다.―에 갈무리하고 슘터가 요구한 연회요리를 준비하기 시 작했다. “쳇! 그래도 만들기 불가능한 것은 없네.” 그랬다. 라혼이 힘을 쓴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아니면 고생한 보수를 챙겨 주는 것을 보아 주방에서 함께 고생하는 요리사의 사정을 생각해 줘서인지 모르지만 슘터가 요구한 연회메뉴는 손이 많이 가고 만들기가 다소 까다로 운 것이 몇 가지가 있을 뿐 재료가 없어 만들지 못하는 것은 없었다. 라혼은 야채를 다듬거나 야채를 이용한 복음요리와 약간의 고기가 들어가는 국을 끓이는 요리에는 익숙했지만 육류중심의 요리엔 그다지 조예가 깊지 못했다. 가축을 도살하는 것도 닭이나 오리를 잡는 정도였지 소나 양, 돼지 를 도축하는 것은 익숙하지 않았다. 간식거리에 육류가 들어가는 경우는 거 의 없으므로 더욱 그랬다. “나는 요리사지 부처(butcher)가 아니란 말이야!” “덩치가 아깝다. 기사들에게 밀리지 않은 덩치를 가지고 있으면서 겨우 돼 지 잡는 것을 못한단 말이야?” “오호 그래? 그럼 네가 하면 되겠네.” “그래주고는 싶지만 나는 연회장에서 바비큐를 해야 한다고. 연회장에 피 냄새 풀풀 풍기면서 고길 구울 수는 없잖아.” “연회장에 내가 나가면 되지. 나랑 바꾸자.” “이런, 너는 연회장에 나가면 모든 여자들의 시선을 빼앗아 분란을 만든다 며? 게다가 주방의 일손이 너무 딸린다고 그나마 네가 우리들 중 손이 제일 빠른데 네가 주방에서 빠지면 안 돼 잔말 말고 빨리 잡아!” “젠장 알았어. 대신 고기가 맛없어도 난 책임 없다.” 가축을 도축하는 것은 그저 죽인다고 다가 아니었다. 실력 있는 도살자(but cher)가 잡은 식육과 그냥 잡은 고기의 맛은 분명 다르다. 생체가 죽는 순 간 공포에 의해 경직되는 현상은 고기의 맛을 비리게 하는데 경직된 고기가 풀리는데 약 사나흘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른 바 숙성과정이 필요한 것이 다. “내가 이 복수는 꼭 한다. 꼭 요리하는 데에서 조차 피를 보게 만들다니… ….” 라혼은 누군가에게 불만을 터트린 후 동료들과 함께 완만하게 휘어진 날카 로운 칼을 준비하고 일단 도축될 돼지의 다리를 묶었다. -꾸웨~ㄱ! 돼지는 이상스런 느낌에 비명을 지르며 반항했지만 장정 서너 명이 한꺼번 에 달려들어 제압하자 버둥대면서도 결국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칼 줘!” “여기! 고기를 숙성시킬 시간이 부족하니까 돼지가 고통을 덜 받도록 단숨 에 심장을 찔러야해!” “알았어!” 라혼은 장정 셋이 달라붙었는데도 계속 꿈틀대는 새끼보다 조금 큰 돼지의 사람이라면 명치부분을 쓰다듬고 살짝 상처를 냈다. “뭐야? 그게?” “기다려봐!” 라혼은 칼로 상처를 낸 부분에 손을 쑥 집어넣고 돼지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 그리고 격렬하게 뛰는 심박을 인위적으로 조정하며 어느 순간 심장이 멎 게 했다. 그러자 돼지는 한차례 부르르 떨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우와! 신기한데 어떻게 한 거야?” “그러게 피가 튀지도 않고 돼지도 고통이 없이 가버렸으니 고기 맛이 어느 정도 보장 되겠군.” “잡담들 그만하고 저기 양하고 염소도 잡아.” 두 마리의 돼지와 양, 염소를 잡은 라혼은 비교적 능숙하게 잡은 가축들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통돼지 바비큐를 하기 위해선 피를 빼고 내장을 제거해 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머지 부산물로 다양한 요리를 만들 수 있기에 적당 한 통에 내장을 따로 보관하는 작업이 끝나자 이반에 라혼의 주특기인 야채 다듬기가 시작 되었다. 빠르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야채를 다듬고 시리도록 차가운 물로 씻어낸 야채를 이용해 여러 가지를 만들었다. 야채는 겨우내 땅에 묻어 두었던 것들이라 못쓰게 된 부분이 많았기에 그만큼 손이 더 같 지만 가축을 해체하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가이, 야채를 다 다듬었으면 음식 만드는 것을 도와라!” “예, 마스터. 무얼 할까요.” “거기 크래커에 치즈를 장식하고 캐비아를 곁들이는 요리다.” “간단하군요.” 저녁이 다된 시간에 왕의 명령으로 밤 8시에 예정된 연회 때문에 주방은 그 야말로 전쟁터였다. 간단한 연회준비였지만 이것은 왕이 개최하는 연회였다 . 절대 소홀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 돼지고기 뒷다리 다 구워진 것같아 누가 오븐에서 쫌 꺼내줘!” “야! 좀 멀쩡한 과일이 없어? 이것은 갈아서 양념으로밖에 쓰지 못한 물건 이잖아!” “상태가 양호한 것은 이미 연회장에 세팅했어요. 이건 양념과 소스용으로 쓸 거예요.” “그래? 그럼 저쪽에 둬!” “야! 버터가 모자라! 누가 창고에서 버터 좀 가져와!” “가이, 그거는 애들에게 맡기고 여기 과일 좀 다듬어 갈아 줘라!” “뭐가 뒤바뀐 거 아니야? 내가 과일 다듬기라니?” “좀 봐주라! 네가 손이 제일 빠르잖아! 하는 김에 감자도 같이 해줘!” “시간 됐다 바비큐를 담당한 사람은 어서 굽기 시작해라!” 손이 빠른 능숙한 요리사가 2명이나 자릴 비우자 일이 거의 마무리 되던 주 방은 더욱 분주해 졌다. 그런 와중에도 하나 둘 음식이 완성되어 아름답고 커다란 접시에 담겨 밖으로 내어졌다. 그렇게 9시까지 정신없이 바쁘던 주 방은 10시가 되어 식사가 마무리 되어가자 조금 한숨 돌리 정도는 되었다. “휴~! 오늘도 전쟁이었군.” “가이가 없이 이렇게 짧은 시간에 국왕의 연회를 준비하라고 하면 목숨 걸 고 도망칠 테다.” “그래 가이, 떠날 때 떠나더라도 폐하기 계신동안엔 아무데도 가지 마라! ” 라혼은 자신이 없다면 슘터의 심술도 없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말이야. 아까 연회장에서 심상치 않은 이야기가 오가던데?” “뭐가?” “올 봄에 제국으로 대대적인 침공이 있을 거래.” “뭐야? 그럼 다시 전쟁이 시작되는 거야?” “글쎄? 내가 알기로 협상이 계속 결렬되는 바람에 다크 프린스 전쟁 때부 터 쭉 전쟁상태라던데?” “그런가?” 라혼은 자신의 귀에 이러한 이야기를 들리게 하는 슘터의 의도가 무척 궁금 했다. 하지만 슘터가 무슨 일을 꾸미던 라혼은 일부러 관심을 보이지 않았 다. 프린든 왕국의 총동원령을 내리기 전까지 프린든 군이 사우스포트에 있 는 제국연합군보다 압도적인 세력을 만들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프린든 왕국이 노리는 것은 사우스포트가 아닌 ‘갤’ 이었다. 일어버린 영 토를 회복하는 것은 보류한 프린든 왕국은 신성 시드그람 제국의 귀족들의 관심이 없어 아직까지 혼란한 갤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프린든 왕국, 시오 나 왕국, 바이나 공국들 프린든 왕국을 종주국으로 하는 왕국 연합군의 대 규모 공세는 구심점이 없이 서로 반목하던 갤의 대영주들이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공주님을 사랑한 요리사 오빠에게 암묵적인 허락을 받은 이상 조금 편해질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날 이후 아이리네는 라혼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거의 없어졌다. 그런 아 이리네의 원망은 노골적인 방해를 하는 오빠 슘터에게 향해졌고, 슘터는 여 동생의 냉대를 받은 화풀이를 라혼에게 했다. 그리고 군주의 태도는 군주에 게 충성을 바치는 기사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어이~! 요리사.” “무슨 일이 십니까? 로드 오토.” “자네가 만든 간단한 간식이 솔드란까지 유명하더군. 한번 만들어와 봐.” 별스러울 것도 없는 부탁이지만 상당히 아니꼬운 어투가 느껴지는 것이었다 . “알겠습니다. 있다가 조금 챙겨드리죠.” “아니, 아니 아니지. 나는 지금 먹고 싶어 당장 만들어 와!” “지금이요?” “그래 지금 당장!” 라혼은 입가에 비웃음이 가득한 세 명의 근위기사들의 뒷골목 파락호 같은 건들거리는 태도에 잠시 동안 말없이 침묵했다. 그리고 의식을 개방해 주변 을 살펴본 후 섬광보다 빠르게 손을 뻗었다. “어?” 라혼은 자신에게 말을 건 오토의 팔꿈치 부분을 틀어쥐고 슬쩍 잡아 당겼다 . 그러자 오토는 오랜 수련을 거친 기사답게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고 라 혼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오토가 잡아당기는 그 힘을 타고 세 명의 근위기사들 틈으로 뛰어든 라혼은 오토의 팔을 놓고 왼쪽에 있는 기사의 가 슴을 보호하는 흉갑의 윗부분을 잡고 강하게 잡아 당겨 그제야 반응하려는 또 다른 기사와 충돌 시켰다. -쾅~! “큭!” “커헉!” 강하게 정면으로 충돌해 서로의 이마를 들이 받은 기사들이 코를 부여잡고 비틀거릴 때 오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며 한 순간 망설였다 . 그리고 그 망설임은 격렬하게 움직이는 라혼에게 정지된 시간과 같은 것 이었다. -빳! “켁!” 그렇게 한순간 프린든 왕가의 근위기사 셋을 맨손으로 제압한 라혼은 그들 셋을 공중에 띄워 놓고 다지기 시작했다. -빠바바바바바바바바바바……………………. 약 3분이 흐르고 완전히 떡이 된 오토에게 라혼은 한마디를 던졌다. “고마워! 덕분에 한결 났군. 포겟Forget!” 그리고 [포겟Forget 망각]주문으로 방금 일어난 기억을 지워 주었다. 모처 럼 슘터가 계속 치사하게 굴어서 얻은 스트레스를 해소할 사람이 생겼는데 알아서 기어주면 무척이나 섭섭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 약 한 달 동 안 세 사람은 요리사에게 반죽되는 밀가루가 되는 악몽을 종종 꾸기 시작했 다. 유난히 뜨거운 여름 파죽지세로 갤을 점령해가던 프린든 왕국 연합군은 사 우스포트에 웅크리고 있던 제국연합군이 움직이자 상당한 저항에 부딪쳤다. 그리고 갤 지역에서의 제한적인 공방은 전쟁의 당사자인 양쪽 어느 누구도 원하지 않는 확전일로에 있었다. 거대한 해일을 마주한 작은 쪽배신세가 된 갤의 대영주들은 화급하게 원탁 회의를 구성하고 구심점으로 트라얀 공작을 지목했다. 이에 그때까지 그란 에 머물던 트라얀 공은 귀족원으로 부터 갤공의 지위를 인정했다. 그러자 트라얀 대공은 다크 프린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내정하고 휘하 철가면 기사 들과 함께 아인윌로 귀환했다. 귀족원이 트라얀 공을 갤공으로 인정한 것은 그란에 체류한 철가면 기사단의 무력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러한 그란 귀족의회의 행보는 프린든 왕국의 발호에 이렇다 할 행동을 취하 지 못하고 있던 사우스포트의 제국연합군으로 하여금 제국은 갤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받아들여 전격적인 행동을 하게하는 빌미가 되었다. “일이 복잡해졌군.” “폐하! 이렇게 당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 전쟁은 죽느냐 사느냐 입니다.” “하지만 지금 왕궁 연합군이 내가 가질 수 없는 전력의 전부야.” “바이나와 시오나는 아직 전력은 투입하지 않고 있습니다. 바이나는 백인 위원회가 있어, 통령 자하로프 조력은 더 이상의 어려울 것이지만 시오나는 다릅니다. 에드리언 왕에게 더 많은 것을 약속하시고 그의 군대의 일부를 시오나 남부 제국과 접경지역에 주둔 시키게 하는 겁니다. 그것만으로도 제 국은 상당한 압력을 받을 겁니다. 그리고 이참에 그동안 왕녀님의 스캔들 때문에 소원했던 관계를 풀고 왕녀님과 에드리언 왕의 결혼도 추진해야 합 니다.” “좋은 생각이지만 더 이상 전쟁이 커지면 우리가 감당 할 수 없게 돼. 그 점은 고려한 것인가? 비네 자작.” “이대로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이 종전협상이 이루어지면 프린든 왕국은 상당한 어려움에 빠집니다. 특단의 대책이 없고서는 난국을 타개할 수가 없 습니다. 폐하!” 슘터는 엘바 요새를 지키다 다크 프린스에게 패전한 후 가까스로 살아남아 현명한 조언자로써 많은 역할을 수행하는 비네 자작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확실히 능력 있는 자였지만 슘터가 보기에 그는 야심 있는 야심가였다. 그 리고 그런 그를 마음대로 농락했던 존재가 바로 곁에 있었고 지금 전쟁의 직접적인 당사자는 그를 후계자로 선포한 존재였다. “일단 천천히 생각해 보세. 얻은 것이 없더라도 전쟁이 확대되는 것보다 이쯤에서 마무리 하는 것이 좋을 듯싶어.” “폐하, 무슨 그런?” 비네 자작은 왕이 이번 갤 침공을 그다지 찬성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 었다. 만일 진정으로 찬성했다면 직접 갑옷을 입고 전장에 나섰을 왕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연일 상당한 대규모의 전투가 계속되는 지금에도 슘터왕 을 수도에 조차 돌아오지 않고 다린의 별장에서 왕녀와 휴양하고 있었다. 왕의 그러한 모습이 시사 하는바는 무척 컸다. 비네 자작이 솔드란으로 돌아가자 슘터는 움직여야 할 시기가 왔다고 생각 했다. 그리고 그전에 모든 상황을 알고 있으면서 여전히 요리사 흉내만 내 며 모르쇠로 일관하는 자와 서로의 입장을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내 입장을 듣고 싶다?” “그렇다.” 라혼은 슘터의 말에 뭔가 생각하는 듯이 먼 하늘을 보다가 문득 말했다. “나를 버리는 수라고 생각했었는데 의외군?” “그건 무슨 말이냐?” “누구 덕분에 나는 상당히 오랫동안 홀로 밤을 지새웠다고, 그래서 나는 네가 아이리네와 나의 결혼을 반대하는 줄 알았지.” “……!” 슘터는 눈앞의 사내가 한 순간이라도 대단하다고 느낀 바로 그 존재인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상황은 무척 심각하게 흘러가고 있는데 한다는 이야기 가 고작 저거라니……. “뭘 그런 눈으로 보나? 지금 프린든 연합군과 칼을 마주대고 있는 존재는 나의 아버지와 작은 외할아버지야! 도대체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 것이 라고 상상한 거야?” “욱!” 프린든 왕국의 국왕 슘터는 단연코 이러한 무례한 말을 서슴없이 뱉어내는 자와 대화를 해본 기억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지금이 라도 당장 세상에 다크 프린스가 모습을 드러내면 숱한 프린든의 충성스런 기사들이 그가 휘두르는 검에 이슬로 사라질 것이 뻔했다. “아아, 그런 눈으로 볼 필요는 없고 한 가지 제안을 하지.” “제안?” “어차피 네가 원하는 것은 그동안의 과오를 씻을 한 번의 승리겠지? 안 그 래?” “…….” 슘터는 건방지고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의 말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놈의 말에 눈빛을 빛냈다. “한 번의 승리쯤은 멋있게 연출해줄 수 있지.” “무슨 말이냐?” “관록 있는 왕이라면 내가 이 정도까지 말하면 척하고 알아들어야지.” “끙~! 좋아! 한번 크게 이기고 종전강화협상을 하겠다. 되었나?” “오! 알면서 모르는 척 했던 거야? 역시 정치가의 모습이군. 하지만 비위 를 조금 긁는 다고 냉큼 아는 척하다니 아직은 미숙하군.” 슘터는 이런 놈을 아이리네의 연인으로 만든 운명을 저주했다. 당장이라도 놈의 목을 치고 싶었지만 어드밴스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하는 상급 소드 마 스터라는 아주 부담스런 사실은 슘터가 성질대로 하지 못하게 했다. 다만 씹어뱉듯 질문을 던질 뿐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내가 프린든 왕국 연합군으로 참전하겠다.” “뭐?” “물론 내 이름을 걸지는 않겠지만……. 그래서 말인데 적당한 작위나 이름 을 만들어 줘라!” “도대체 어쩔 셈이지?” 라혼은 뜨악한 표정을 감추지 않는 슘터의 얼굴을 보고 히죽 웃어주었다. 겔은 옛 플레이나 왕국 때부터 존재하던 대영주들이 가진 힘은 상당히 골치 가 아팠다. 그들은 오랜 기간 전쟁을 치러온 터라 외골수적인 면이 강했다. 조금 치사하고 지저분한 방법이긴 하지만 프린든 왕국의 힘으로 그들의 힘 을 줄여놓을 필요가 있었다. 다란지방은 한해 열심히 일한 농부의 결실을 거두기 수확기에 접어들었다. 추위가 심한 곳에서 재배되는 봄밀은 봄에 파종을 해서 늦여름에 수확을 하 는데 바로 그 시기가 된 것이다. 슘터왕은 휴양을 끝내고 오랫동안 비워 두었던 솔드란으로 돌아갔다. 아이 리네 왕녀도 왕과 함께 솔드란으로 돌아가자 다란의 왕가 별장은 여느 때처 럼 한가한 시절로 돌아갔으며 공주님을 사랑한 요리사 가이도 별장을 떠났 다. “칫! 의심은 많아가지고.” 슘터는 라혼의 참전 의사를 거절하며 아이리네를 데리고 솔드란으로 돌아갔 다. 때마침 얌전하던 북구의 바바리안들이 갤의 영역으로 침입한 덕분에 전 황이 프린든에게 유리해졌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치사한 짓을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라혼이 다란의 왕가 별장에 머물던 이유였던 아이리네가 사라진 이 상 계곡 그곳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사라진 라혼은 잠시 미뤄두었던 여행을 시작했다. 집에 잠깐 들릴까 생각해 보았지만 집에 들르면 곧 전쟁에 관여 해야하는 상황에 빠지게 되므로 그것은 포기했다. 이미 슘터와 비밀스런 약 속을 한 상태라 그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제국 귀족들의 견제를 받으며 이겨서도 져서도 안 될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절대로 사양 하고 싶은 일이었다. “이거 참! 그놈에 체면이 뭔지.” 우습게도 ‘다크 프린스’의 이름의 정치적인 체면은 그 당사자인 라혼에게 상당히 골치 아픈 것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에게 다크 프린스는 승리의 이 름이었다. 만일 라혼이 이름을 걸고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인다면 사람들은 다크 프린스의 이름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낼 것이 분명했다. 우습게도 영웅 에게 무능력만큼 큰 죄악이 없었다. 즉 라혼에겐 이름에 대한 책임, 바로 체면이란 것이 생긴 것이다. 그런 이유로 라혼은 아버지가 직접 관련된 전 쟁에서 한발 물러서서 강 건너 불구경을 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만일 라 혼의 참전 의사를 받아들였다면 어떻게든 큰 피해 없이 종전이 이루어지도 록 막후에서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슘터는 지금 전쟁 이 자신의 뜻과 벗어난 상태에서 마무리 되는 것을 원할 리 없었다. “귀족들이 발목을 잡겠지만 아버지가 쉽게 당하실 분도 아니고, 갤의 피해 가 막심하겠지만 그것은 대영주들이 감당 할 거니까. 굳이 나서지 않아도 얻을 것은 얻어지는 건가?” 라혼은 결국 이번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 복잡하게 얽힌 전쟁이고 특 별한 일이 없는 이상 전쟁은 약간의 시간을 끌다 자연히 중단 될 것이기 때 문이다. “그럼 나는 다시 아발론으로 가볼까?” 라혼은 급할 것 없다는 듯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가지고 있는 짐은 작 은 가죽가방 정도였지만 그것을 그저 멋이었다. 대부분의 물건은 에텔 스페 이스에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긴 여행(Journey) 라혼은 쉬지도 먹지도 잠도 자지 않고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끊임없이 남하 했다. 시간은 넉넉했고 딱히 할일도 없었기에 한 달이나 길을 걸어 전쟁의 영향이 미치는 곳을 벗어났다. 전란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은 민심이 흉흉하 고 검문이 까다롭기 때문에 일부러라도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라혼의 걷고 있는 곳은 북부에서 벌어진 전쟁의 영향 을 받지 않는 평화로운 고장이었다. “여기서는 괜찮을지 모르겠네. 그전 마을에선 수상하다면 대번에 첩자로 몰려고 했는데…….” 라혼은 지팡이를 짚으며 사람들이 자유로이 드나드는 마을로 접근 했다. 다 른 것보다 오랜만에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고 싶었고 날씨가 우중충 한 것 이 곧 한바탕 폭풍우가 쏟아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라혼이 들어선 이름 모를 마을은 상당히 규모가 있는 곳이었는데 평화로운 마을인지 들어서는 어귀를 지키던 경비병은 드나드는 사람들을 지켜만 볼뿐 검문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라혼은 마을에 들어서서 일단 여관을 찾아들 어갔다. “어서 옵쇼!” “빈방 있나?” “예, 있습니다. 어떤 방을 원하십니까?” “어떤 방?” “예, 저희 크랜들리 여관에서는 로얄 룸에서 값싼 유스룸까지 있습니다. 형편이 된다면 최고급 로얄룸에 머물면 될 것이고, 주머니가 가볍다면 여러 명이 함께 쓰는 유스룸에 묵으시면 됩니다.” “로얄룸으로 하지. 그보다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고 싶은데? 될까?” “알겠습니다. 목욕물을 곧 준비하지요. 절따라 오십시오.” 라혼은 여관의 점원을 따라 나름대로 깨끗한 방에 안내 되었다. 라혼이 원 래 사용하던 방과 확실히 차이가 있었지만 이런 여관에서 그런 사치를 찾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곳이 방에 딸려있는 욕실입니다. 목욕통과 뜨거운 물이 준비되는 대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식사는?” “일단 씻고 나서 따로 주문하지.” “예, 그렇게 하시지요. 로얄룸은 하룻밤에 5실버입니다. 그리고 목욕비는 따로 계산하셔야 하는데 1실버 되겠습니다. 얼마나 묵으실지 모르지만 하루 치 방값은 선금으로 주셔야 합니다.” “이것으로 방값과 목욕 값을 해결하고 나머지 돈으로 미안하지만 내가 입 을 옷을 구해 주게. 그리고 5실버는 자네가 수고비로 갔게.” 여관 점원은 남루한 차림의 여행자가 황홀하게 빛나는 금화를 내밀자 조금 놀라며 물었다. “옷이라면 어떤 옷을?” “그저 여행하기 간편한 옷이면 돼.” “알겠습니다.” 금화 1골드는 은화 100실버였다. 은화 1실버는 동화 100코퍼였는데 1코퍼는 두 사람이 한끼 식사를 해결할 정도의 가치가 있었다. 시드그람 대륙에서 같은 무게의 금과 은의 가치차이는 약 70배 정도 되었고 은과 구리의 가치 또한 약 90배 정도 났는데 은과 구리는 무기나 각종 생활물품을 만드는 데 사용되고 있어 시드그람 대륙의 기축 화폐로서 기능은 황금이 담당했다. 은 화는 금화보다 작게 만들어져있고 동화도 은화보다 크기가 작게 주조하는 형식으로 금화 1골드와 은화 1실버의 가치 차이를 100배 수준으로 맞췄다. 즉, 1골드 10000코퍼에 해당하는 가치가 있기 때문에 구리돈, 동화를 주로 사용하는 보통평민들에게 금화는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은 큰돈이었다. *** -쏴아아아아아~! 가을로 접어드는 늦여름의 무더위 끝에 저녁 무렵 쏟아지는 시원스런 소나 기는 반가울 수 있었다. 그러나 여행을 하는 사람들에게로 하늘에 구멍이 난 듯 쏟아지는 비는 참으로 난감한 처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두 마리 말이 끄는 승용마차와 그 마차를 호위하는 수십 명의 무장한 병사들이 가도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세실리아 아가씨! 곧 드빈에 도착할 겁니다. 빗속에 여행을 하게 되어 죄 송합니다.” “얼마나 걸릴 것 같은데?” “대략 1시간이면 됩니다.” “서둘러줘! 나 목욕하고 싶단 말이야!” “예.” 귀족가의 영애를 호위하는 일을 맡은 용병 크로우는 비를 맞으며 고생하는 것은 자신들인데도 마른 마차 안에서 편안하게 앉아가는 계집아이가 영 마 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계집애의 투정을 받아주는 기사의 성격도 꽤나 신 경이 굵다고 생각했다. “칫! 이래서 귀족 계집애가 상전인 여행은 짜증난단 말이야!” “그래서? 북쪽의 전쟁터에 가려고?” “싫어! 전쟁터의 군인이 되는 것은 나름대로 짜증난다고 같잖은 애송이들 의 지시를 받는 것은 사양이야!” “그래도 몇 년 전 다크 프린스의 밑에 있었던 녀석들은 한몫 단단히 잡았 다고 하던데?” “그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잖아. 이번 일을 끝내고 다음은 데이란에서 몬 스터 토벌이나 참가할래.” 데이란의 몬스터 숲에선 매년 연례행사처럼 몬스터 토벌대가 구성되었다. 겨울이 되면 굶주린 오크들이 인간 마을을 약탈하기 위해 몰려오곤 했는데 그것을 데이란의 영주가 방비보다 공세적인 입장에서 토벌을 하기 시작했다 . 그러면 겨울에 몰려오는 놈들이 없거나 소수여서 피해가 훨씬 적었기 때 문이었다. “올해 데이란의 몬스터 토벌대는 상당히 대규모로 조직된다는 말이 있어. ” “뭐?” “술집에서 어떤 녀석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는데 데이란의 숲을 몬스터 숲으로 만든 뭔가를 찾았다는 거야.” “그게 뭔데?” “그냥 얼핏 스쳐들은 거야. 드빈의 용병길드에 뭔가 소식이 들어온 것이 있는 지 알아보자고.” 그리고 그들은 드빈에 들어서서 마을에서 가장 고급여관인 크랜들리 여관에 짐을 풀었다. *** -흠, 흐음, 흠! 흠으흐음! 흠……. 살갗을 자극하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 라혼은 오랜만의 한가함에 긴장을 풀며 콧노래를 불렀다. 커다란 목욕통에 몸은 담근 채 마시는 맥주는 더없 이 맛이 좋았다. 그러나 그런 라혼의 기분 좋은 한가함은 방해를 받았다. “실례합니다. 손님.” “……?” 약간 머리가 벗겨진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의 중년사내가 미안한 기색이 가 득한 얼굴을 보이며 목욕실로 들어왔다. “죄송합니다만 손님의 방을 바꿔주실 수 없겠습니까?” “방값은 선불로 줬는데?” “예, 그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손님께서 부탁하신 옷들도 마을 의 재봉사에게 주문을 해 두었습니다. 내일쯤 치수를 재러 사람이 올 겁니 다.” 라혼은 헌옷을 생각 했었지만 그 점원이 옷을 구해달라는 말에 재봉사를 부 른 모양 이었다. 라혼은 이곳에서 사흘이상 머물 생각이 없었지만 재봉사가 있다는 말에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재봉사라…. 뭐, 괜찮겠지. 그런데 방을 바꿔달라니 무슨 말인가?” “그게 저번에 저희 여관에 머물며 손님이 빌린 방을 썼던 숙녀분이 지금 찾아와 이방을 쓰시겠다고 부탁하셔서 지금 손님께 양해를 구하는 겁니다. 저희 여관에서 목욕실이 갖춰진 방은 이방이 유일해서…….” 라혼은 모처럼의 한가한 시간을 방해받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기사 도 정신을 발휘하여 숙녀에게 방을 양보하기로 했다. “뭐, 그렇다면 하는 수 없군. 대신 깨끗한 옷을 빌려주겠나?”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곧 준비해 드리지요.” 여관의 주인이 목욕실을 나서자 라혼은 목욕을 마무리하고 여관에서 일하는 심부름하는 소년이 가져다 준 옷을 입었다. 그 옷은 깨끗하게 세탁되긴 했 지만 상당히 남루한 낡은 옷이었다. “휴! 상당히 남루하군.” “죄, 죄송합니다. 찾아보았는데 깨끗하게 세탁된 옷은 이것뿐이라.” “뭐, 어쩔 수 없지. 세탁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내가 벗어놓은 옷도 세 탁해 주겠니?” “예, 10코퍼입니다.” “여기 12코퍼다. 10코퍼는 세탁비고, 2코퍼는 네가 갖거라.” “고맙습니다, 손님.” 라혼은 심부름하는 소년에게 세탁비와 약간을 팁을 주며 방 침대 위에 아무 렇게나 던져놓은 빈 가죽가방을 챙겨들고 방을 옮겼다. 그리고 다시 새로 바뀐 방의 침대에 가죽가방을 던져놓고는 식사를 하기위해 1층의 펍으로 내 려왔다. 저녁시간이 다 되어서인지 펍은 약간 분비는 편이었는데 한쪽 구석 엔 무장을 한 사내들이 젖은 몸으로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이 보였다. “식사를 하시려고요?” 라혼이 펍에 나타나자 여관에 처음 들어왔을 때 방으로 안내한 점원이 아는 체하며 말을 걸어왔다. “여기서 가장 자신하는 것이 뭐지?” “뭐든지 다 맛있습니다만 스테이크를 드셔보시죠.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 “그래? 그럼 그것으로 하지.” 점원이 권한 스테이크로 식사를 끝낸 라혼은 포도주로 입가심을 하고 방으 로 돌아갔다. 아니 돌아가려 했다. “이봐요!” “…….” 방이 있는 2층으로 돌아가려던 라혼은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 다. 흑갈색 머리에 짙은 화장을 하고 가슴이 깊게 패인 드레스를 입은 여자 였다. “나말이오?” “그래요. 이제 초저녁인데 벌써 잠이 들면 시간이 아깝지 않아요? 저와 이 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때요?” 남자를 노골적으로 유혹하는 몸짓과 고혹적인 미소를 뿌리는 여자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뻔했다. 라혼은 잠시 뜸을 들이다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 했다. “영광입니다, 레이디.” “호호호호, 레이디라고 불릴만한 처지는 못 되요.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 갑군요. 저는 도리스라고 해요.” “라혼입니다. 도리스 양” “어머! 당신의 외모만큼이나 평범한 이름이 아니네요.” “그런가요?” 자신을 도리스라고 소개한 여자는 라혼의 반응에 더욱 고혹적인 미소를 지 으며 은근슬쩍 달라붙었다. 라혼은 그런 그녀와 함께 다시 바로 내려와 자 리를 잡고 벌꿀술을 주문했다. “라혼씨는 어디사람이에요?” “고향을 묻는 거라면 대답하기가 애매하군요.” “그냥 편안하게 말해요. 그게 더 정감 있다고요. 그런데 대답하기 애매하 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태어난 곳과 지금 집이 있는 곳이 다르거든.” “그렇군요. 그럼 다음 질문 라혼씨는 뭐하는 분이세요? 아니, 잠깐 제가 맞춰 볼게요. 혹시 음유시인?” “음유시인?” “아니면, 용병?” 도리스라는 여자는 그런 식으로 대화를 주도하며 별것 아닌 일에도 과장되 게 즐거워했다. 라혼에게 이런 유의 여자는 접해볼 기회가 없었다. 언제나 명망 있는 귀족가문의 영애들만 대한 라혼에게 거리의 꽃이라고 불리는 여 인의 향기는 전혀 색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그래서 그 사람은 결국 주사위 도박을 하다가 그대로 쓰러져 영영 일어나 지 못했어요. 도박사다운 최후였죠.” “오우, 도박을 그렇게 좋아했다니 행복한 죽음인가? 아니면 개죽음인가?” “생각하기 나름이겠죠.” “그런데 말이야. 만일 신이 세상을 직접 지배한다면, 그래서 세상이 완벽 해진다면 어떨까?” “생뚱맞게 그게 무슨 소리예요?” “재미있잖아? 한번 생각해봐!” “음, 글쎄요. 그런데 어떤 신이 세상을 지배하는 데요?” “세상의 모든 신.” “와우! 그럼 세상이 엄청나게 복잡하겠네요. 전에 들은 이야긴데 이 세상 의 신을 모두 합치면 밤하늘의 별만큼 많데요. 어쩌면 하늘에 떠있는 별들 하나하나가 다 신의 이름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고 하던데 그 많은 신들이 인간을 지배한다면 어휴 인간은 비록 왕일지라도 수많은 상전을 모시고 있 어야 할 거예요.” “그럼 하나의 완벽한 신이 인간을 지배한다며, 그래서 슬픔도 어려움도 세 상의 모든 나쁜 것들이 사라진다면 어때?” “어떻긴요. 좋겠지요. 하지만…….” “하지만?” “아마도 완벽해진 세상이 오면 저 같은 여자는 버려질지도 몰라요.” 라혼은 도리스의 말에 왠지 모를 슬픔이 담겨있는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말이야?” “저는 허점투성이에 그다지 완벽하지 못한 여자거든요. 완벽한 신 앞에 설 수 조차 없을 거예요.” “무슨 소리 완벽한 신은 세상의 모든 것을 포용한다고.” “글쎄요? 제 마음이 절 포용하지 못하는데 그게 무슨 소용일까요. 신이 그 런 제 마음을 바꿔준다면 모르지만 그럼 그 마음은 신의 마음이지 저 도리 스의 마음이 아니잖아요. 다른 건 몰라도 제 마음만큼은 제 것이었으면 좋 겠어요. 그것이 좋든지 아니면 나쁘든지.” 라혼은 도리스라는 여자의 이야기에 새삼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신학의 원 론적인 이야기로 ‘신이 인간에게 자신을 섬길 선택권을 준다.’는 이야기 를 도리스는 마음을 자신의 것이라고 표현 한 것이다. 만약 그녀가 신을 섬 기는 사제 또는 수녀이거나 저명한 현자, 학자였다면 라혼은 ‘옳은 말이다 .’라고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도리스라는 여자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여자였다. “어리석은 질문에 현명한 답변이었어. 자, 이것은 도리스의 지혜로운 답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야.” “에이, 뭘요. 무슨 그냥 주워들은 이야기를 전했을 뿐인데. 어머!” 도리스는 라혼이 내미는 금화 3개를 보며 깜짝 놀랐다. 그녀에게 금화 1골 드도 무척 큰돈이었는데 그게 3개나 되었기 때문이었다. “주워들은 이야기라도 제대로 알고 있는 것 같더군. 나는 그 이야기를 듣 고도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도리스가 말한 것이 진정 옳은 이야기야. 그리 고 즐거웠어.” “아! 저…….” 그리고 라혼은 그녀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손등 에 입을 맞추고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와 헤어졌다. 라혼은 도리스라 는 거리의 여자를 통해 여행이 사람을 가르친다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새삼 깨달았다. 여행은 이미 알고 있는 것, 머릿속에 있지만 그저 한마디 격언 으로만 남아 있는 것을 깨달음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긴 여행(Journey) *** 아침이 밝자 밤새 내리던 비는 기세가 한풀 꺾였지만 아직도 비구름은 걷히 지 않고 비를 계속 뿌려대고 있었다. “간밤에 폭우는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실베론 강이 범람을 했을 가능성이 있어요. 실베론 강이 범람하면 남쪽으로 가는 길이 끊겼을 겁니다. 비가 그 치더라도 물이 빠지려면 사나흘은 족히 걸릴 겁니다.” “고맙소.” 여관주인의 말에 나이트 올레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폭우로 강이 범람했다 면 못해도 일주일은 이곳에서 머물러야 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러 한 사실을 홀에 나와 자리를 잡고 맥주잔을 기울이고 있는 용병들에게도 알 려주었다. “크로우 씨, 여관 주인이 어젯밤 폭우로 실베론 강이 범람했을 것이라 했 소. 아무래도 이곳에서 당분간 머물러야 할 것 같소.” “알겠습니다. 올레르 경.” “당신도 알겠지만 한곳에 오래 머물다 보면 뜻하지 않은 문제가 생길 수 있소. 하지만…….”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와 제 동료들 중에 쓸데없는 문제 일 으킬 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필요한 전달 사항과 몇 가지 주의를 요청한 나이트 올레르가 떠나자 크로우는 동료들과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어쩐지 무지막지하게 쏟아 붓더니만 결국 문제가 생긴 모양이군.” “그건 그렇고 아까 하던 이야기 다시 해봐.” “아까 말한 게 내가 알고 있는 전부야. 그리고 이것은 확실하진 않은데 마 왕이 사용하던 무기가 마족의 손에 들어갔다고 하더군. 그래서 진상을 조사 하기 위해 지고교에서 사제단을 파견했다고 하는데 다른 종파에선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으로 봐선 그건 아닌 것 같아.” “마족이 무서운 존재이긴 하지만 마계 군주급이 아닌 이상 그다지 위협이 되지는 않지.” 군주급 마족이란 몬스터를 현혹해서 부릴 수 있는 존재를 말했다. 사람이 상대하기에 위력적인 몬스터들이 계획적이고 집단적으로 움직이면 상당한 위협이 될 수 있지만 그냥 마족이라면 그저 조금 강력한 몬스터일 뿐이었다 . 물론 마족이라면 무척 강력한 존재이긴 하지만 상대하지 못할 것을 없었 다. 그리고 현존하고 예전에 발견되었던 마족들은 저마다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기 때문에 약점만 파악하면 의외로 쉽게 처리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마족은 인간이 상대하기에 강력한 존재임을 분명한 사실이었다. “진짜 마족이 나타났다면 마나를 다룰 줄 아는 기사들이 나서야 하는 거잖 아?” “마족이 있든 없든 간에 몬스터들을 토벌해야 하는 것은 변함없지. 자세한 사정은 용병길드에서 알아보자고.” 용병길드는 상공업자들의 일상적인 길드(guild, 조합)이 아니었다. 단순히 주요 길목에 용병들이 모이는 매음굴이나 술집 같은 곳을 말했다. 즉, 제대 로 된 조직이 아니라 그저 용병들이 모이 곳을 말했다. 그곳에서 ‘어디서 언제까지 무슨 일로 용병을 모집한다더라.’하는 정보와 용병이나 용병단이 필요할 경우 수소문할 수 있었다. 용병들은 그러한 장소를 자기들끼리의 길드라고 불렀다. *** 아침까지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정오를 넘기면서 잦아들었다. 그러나 하늘 을 가린 회색 구름은 여전히 비를 머금고 있었다. “휴! 아직도 비가 그치지 않다니 더 이상 폭우가 계속되면 홍수가 날지도 모르는데…….” “이봐! 늦었다고 뭐하느라 지금에야 오는 거야?” 드빈의 재봉사는 여관 주인의 말에 지지 않고 대구했다. “비가 그치는 것을 기다렸지. 오래간만의 손님인데 옷감이 젖으면 안 되잖 아. 그런데 손님은 어디 계시나?” “기다려! 돌리, 손님에게 재봉사가 왔다고 알려라!” “예, 마스터.” 심부름하는 꼬마가 이층으로 올라가자 재봉사는 가져온 물건을 테이블에 올 려놓기 시작했다. “뭘 그렇게 많이 가져온 거야?” “한 푼이라도 벌어야지. 얀의 말로는 거의 짐이 없이 온 손님이라고 하던 데 그럼 가지고 있는 옷감도 없을 거 아냐? 그래서 집에 있는 물건을 가져 온 거야.” 재봉사가 가져온 물건을 정리하자 여관의 심부름하는 소년이 내려와 말했다 . “올라오시래요.” 재봉사는 치수를 잴 줄자만 챙겨들고 소년을 따라 이층으로 올라갔다. “나리 재봉사입니다.” “들어와!” 재봉사는 손님의 몸의 치수를 줄자로 재고 초를 먹인 나무판자에 못으로 긁 어 치수를 기록하고는 말했다. “나리, 제가 옷감을 몇 가지를 가져왔습니다. 밑에서 골라 보시지요.” 라혼은 재봉사의 말에 홀로 내려가 재봉사가 가져온 천을 골랐다. “이걸로 하지.” “단추는 어떻게 할까요?” “단추는 나무로 하고 뱀브레이스를 만들 수 있나?” “뱀브레이스라면……. 뭘 로 말입니까?” “리넨을 누빈 것으로 하면 돼.” “알겠습니다.” 뱀브레이스(vambrace)는 팔뚝을 보호하는 방어구였다. 팔에 천을 감거나 적 당한 가죽을 잘라 팔목에 대면되는 것이었지만 몸통을 보호하는 아머(armor )보다 더욱 요긴한 것이었다. 라혼은 재봉사에게 단순하고 활동하기 편한 모양의 여행복 서너 벌과 연회복 주문했다. “얼마나 걸리겠나?” “일주일은 기다리셔야 합니다. 그리고 나리가 주신 돈으론 부족합니다. 연 회복만 해도 비록 금동 단추이지만 값어치가 상당한 것인데…….” “1골드를 주지 나머지는 가봉할 때 알려주도록.” “알겠습니다.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재봉사가 허리를 굽실거리며 여관을 나서자 라혼은 점심을 주문했다. “어머나? 연회복이라고요? 라혼 씨는 귀족이었어요?” 그때 도리스가 아는 체를 하며 다가왔다. 라혼은 어제완 다른 수수한 모습 을 한 그녀를 반갑게 맞았다. “도리스, 식사는 했소? 안 했다면 같이 합시다.” “그래요. 라혼씨가 사주시겠다면 요.” 라혼은 도리스의 식사까지 주문하고 그녀와 함께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이 야기를 나누었다. -호호호호호……. 별스러울 것도 없는 신변잡기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도리스는 연신 웃음을 터트렸고 라혼도 그 시간을 즐겼다. 하지만 그들이 있는 곳은 비에 발이 묶 인 사람들이 있는 술집이었다. “이봐! 조금 조용히 해주겠나?” “……?” 우락부락하고 얼굴에 흉터까지 있는 자가 소리치자 라혼은 손들고 머리를 까딱하는 것으로 사과하고 도리스에게 말했다. “우리가 너무 시끄럽게 했나보군.” “라혼씨는 참 예의가 바르시네요. 보통은 저것을 시비 거는 것으로 받아들 이는데?” “그건 도리스에게 잘 보이려는 남자들의 객기일거요.” “어머? 그런 라혼씨는 제게 잘 보이고 싶지 않으세요?” “나는 잘 보였잖소. 대부분의 여자들은 문제를 일으키는 남자를 그다지 좋 아하지 않는데 말이오?” “호호호호호……. 그래요. 라혼씨는 정말 여자에 대해서 잘 아시는 군요. ” “내겐 누나가 2명이나 있고, 그녀들이 여자에 대해서 날 가르쳤소. 누나들 에게 배운 것이 있다면 여자든 남자든 결국 사람이란 거요. 말을 하다가 상 대방이 조금 참고 넘어가면 될 것을 문제를 키우는 것을 바라는 사람이 없 고, 그것이 여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 것뿐이오.” “정말 그러네요.” 도리스는 잔뜩 찌푸린 하늘이 어두워지는 시간이 되고서야 여관을 떠났다. 하루 종일 보이지 않던 해가 완전히 지자 또다시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이 내 빗발이 굵어졌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저녁이 되자 사람들이 모여든 펍은 벌써부터 거나하게 취한 술꾼들의 걸걸한 목소리로 소란스러워졌다. 라혼은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그런 라혼에게 짙은 화장을 한 도리스가 다가와 옆에 자리하며 물었다. “계속 여기 있었던 거예요?” “어찌하다보니 그렇게 되었군.” “어머 도리스 누구야? 무척 잘생긴 분이네?” 뭔가 쭈뼛쭈뼛 거리며 말을 건넨 도리스가 다시 뭐라고 하려던 차에 다른 여자들이 다가와 호들갑을 떨며 이것저것 정신없이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 “귀족이라면서요?” “일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오신건가요? 아닌 그냥 지나가는 길?” 라혼은 그녀들의 질문에 자신이 상속권 없는 귀족가의 자손쯤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그녀들이 관심은 라혼의 대답이 아닌 모양 인지 끊임없이 질문을 퍼붓고 있었다. 그렇게 아주 잠깐이었지만 라혼은 펍 의 거의 모든 여자들을 차지하고 있는 형상이 된 것이다. “이봐! 형씨, 너무하는 거 아냐?” “…….” 노골적인 시비를 걸어오는 상대에게 라혼은 뭐라 대답해줄 말이 없었다. 단 지……. “시끄럽게 했다면 미안하오.” 하며 물러설 수밖에 하지만 문제는……. “당신 뭐예요. 당신이 뭔데 우리에게 시비를 거는 거예요?” 이렇게 앞뒤 생각하지 않고 치대는 여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라혼은 그들이 처음부터 이런 목적으로 접근했다는 사실을 눈치체고 있었다. 아마 도 무장도 하지 않은 떠돌이 돈 많은 몰락귀족에게 뭔가 우려내려는 수작인 모양이었다. 라혼은 일이 커지기 시작하자 흥미로운 표정으로 주의를 집중 한 사람들을 둘러보고 미안한 표정이 가득한 도리스를 슬쩍 바라본 후 점점 목소리가 키우며 싸우는 둘의 행태를 구경했다. 이것이 진짜라면 나서서 말 려야 하겠지만 서로 짜고 연기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얼마나 잘하는 지 구 경이나 하자는 심보로 나서지 않았다. “아니 이 계집년이…….” “악!” 이젠 말로 안 되니까 힘까지 쓰는 사내였지만 라혼은 여전히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만 보았다. ‘어어? 그렇게 노골적으로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 안 되지. 실감나게 뺨도 때리고 해야지.’ 이들이 이런 연극을 하는 이유는 아마도 어제 라혼이 도리스에게 준 3골드 때문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거금을 거리에 여자에게 주고, 오늘 낮 엔 되도록 문제를 피하려는 모습을 하자 이런 식으로 소란을 피우면 창백하 게 질린 샌님이 금화를 바칠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라혼이 아무런 반응이 없자 남자의 패악을 떠는 연기는 도를 넘어섰다. 그러자 그 들이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방해꾼이 끼어들었다. “어이, 이봐! 적당히 하지? 여기는 너희들만 있는 곳이 아니잖아? 상대가 사과 했으면 됐지 여자와 싸울 것까지는 없잖아?” “…….” 나 상당히 거칠어. 하는 것 같은 인상의 사내가 자신과 비슷한 인상의 사내 들을 배경으로 그렇게 말하자 라혼 앞에서 여자와 꼴값을 떨던 사내는 진짜 화가 났는지 일을 키워버렸다. “시끄러! 닥치고 술이나 곱게 처먹어. 그리고 너!” “나?” 라혼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사내는 아예 본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여기 계집애들은 모두 내가 데리고 있는 애들이야. 충분히 즐겼으면 대가 를 치러야지 않겠어?” 일이 이쯤 되자 라혼은 그냥 금화 몇 개 던져줄까? 아니면 손을 봐줄까? 하 는 것 사이에서 약간 망설였다. 하지만 그 사내 뒤에서 용병으로 보이는 사 내들이 나서는 것을 보며 결정을 보류했다. 라혼은 지금 결정을 무척 후회 하게 되지만 그것은 나중 일이었다. “이제 보니 강도였군. 일을 방해해서 미안한데 아까 내게 한 그 말에 대한 사과를 받아야겠어.” “이런 썅!” -퍽! “이야압!” “우왁!” -철퍼덕! 이미 화가 폭발한 사내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상 대는 경험 많은 용병이었다. 시골 마을의 건달 따위가 상대할 존재가 아니 었던 것이다. 용병은 사내의 주먹을 슬쩍 피하며 배에 펀치를 먹이고는 뒷 덜미와 허리춤을 잡아 비가 내려 진창으로 변한 펍 밖으로 집어던져 버렸다 . -와! 휘익! 짝짝짝짝…………. 용병이 속 시원하게 물을 흐리던 사내를 처리하자 사방에선 휘파람을 불어 대며 박수를 쳤고, 사내를 멋지게 처리한 용병은 멋들어지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라혼의 주위에 몰려있던 여자들이 모두 흩어져버렸다. 라혼은 아직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도리스를 슬쩍 바라본 후 위층으로 올 라갔다. 그녀의 태도를 보건데 이러한 일을 꾸민 것은 그녀의 본의가 아님 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녀와 관련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 그날일이 있은 후로 도리스는 크랜들리 여관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 후로는 다른 여자들이 돈을 노리고 접근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라혼은 그녀 들을 상대하지 않았다. 그렇게 4일 정도가 흐르고 날씨가 개자 비 때문에 발이 묶였던 사람들이 여관을 떠났다. 하지만 라혼은 이 마을의 재봉사에게 주문한 옷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머물렀다. 숙녀가 그녀를 호위 하는 기사들과 떠나자 라혼은 방을 다시 로얄룸으로 옮기고 뜨거운 목욕을 했다. 그리고 며칠 후 드디어 주문한 옷이 모두 완성되자 라혼은 방값을 지 불하고 마을 떠나 무작정 남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휘익! -퍽! -빠각, 빠각, 빠가갂~! 라혼은 누군가 앞을 가로 막으려 하자 귀찮은 듯이 들고 있던 막대기를 휘 둘렀다. 이미 그들의 존재는 파악하고 있는 라혼이었기에 망설임은 없었다. 얼굴을 가리고 길을 막는 놈들이 선한의도를 가지고 있을 리 만무했기 때 문이다. 용병들이 떠난 후 라혼은 자신 주위를 끊임없이 맴도는 놈들의 움 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돈 많고, 겁 많은(?) 여행자는 그들에게 있어 머 금음직스런 사냥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기다려 숨어있던 놈들에겐 미안하지만 라혼은 그들과 아주 잠시라도 얼굴을 맞대고 싶지 않 았기 때문에 주저 없이 몸을 움직여 그들의 팔을 분질러 버렸다. 그리고 식 은땀을 흘리며 얼굴을 가린 수건사이로 고통스러워하는 신음을 흘리는 그들 을 사이를 지나 길을 떠났다. 긴 여행(Journey) 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꼬박하루를 걷자 드디어 실베론 강에 도착했다. 이 지방을 비옥하게 적셔주는 고마운 강이었지만 얼마 전 폭우로 범람해 홍수 를 인한 재난이 발생했다. 강변에 평원에 만들어진 밀밭이 물에 잠기고 강 가에 건설된 많은 마을들이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라혼이 들린 강변 마을 은 홍수로 인한 피해를 입었으면서도 비교적 활기찬 모습으로 피해를 복구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어서 오세요!” “피해가 상당했던 모양이군?” “뭘요. 4, 5년에 한번은 있는 일인데요.” 라혼은 천막으로 만들어진 간이식당에 여점원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대비를 해야 하지 않나?” “대비야 하고 있죠. 북쪽으로 반시간 거리에 지대가 높은 언덕에 피난처가 있어요.” “강이 범람하지 않도록 둑을 세우면 되지 않나?” “둑이요? 소용없어요.” 라혼은 그에게 약간의 팁을 주며 이유를 묻자 그녀는 친절하게 대답해주었 다. 그곳은 지대가 평평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강을 중심으로 느낄 수 없을 만큼 완만한 경사지대라는 것이다. 폭우가 내리면 주변의 모든 빗물이 강으 로 모이기 때문에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홍수가 지나가면 땅이 무척이나 기름지게 되어 3, 4년간 풍요로운 수확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비록 이번 홍수로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내년에 보장될 풍요로움에 사람들의 표정이 그다지 어둡지만은 않았다. “이곳에 마을이 있는 것은 지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에요. 홍수 때문에 건물이 모두 물에 휩쓸려갔지만 한 달도 못돼서 다시 마을이 본래모습을 찾을 거라고요. 다만 올해는 20년이나 된 다리가 없어져서 그게 심각한 피 해랄까?” “…….” “아참! 손님 식사하셔야죠. 지금은 소시지와 양송이 스프, 빵 정도예요. 사정이 이래서…….” “술은 없나?” “포도주와 맥주가 있어요.” “포도주로 하지.” “곧 갖다드릴게요.” 예견된 재난은 재난이 아니라 극복해야하는 시련이다. 이 마을 사람들의 표 정에서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라혼은 천막으로 유난히 따갑게 느껴 지는 햇살만 가린 식당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동쪽에 서 서쪽으로 흐르는 강엔 북쪽과 남쪽을 있는 배다리가 놓아져 있었는데 급 하게 만든 티가 역력했다. 하지만 짐을 가득 실은 마차가 건너는 것을 보니 허술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어이! 이봐, 젊은 친구!” “……?” 다리를 건너려는 라혼을 누군가 불러 세웠는데 그는 무장을 한 경비병이었 다. “자네 말이야! 검은 머리.” “저, 말입니까?” “그래, 못 보던 친구인데 더비에 주민이 아니지?” “저는 여행자입니다만?” “다리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더비의 주민뿐이라고, 자네는 통행 세를 내야해!” “통행세? 얼마입니까?” “짐은 없는 같으니까, 2코퍼만 내게.” 라혼은 그에게 말없이 2코퍼를 건네주었다. 다리에 통행세를 물리는 것은 그 지방 영주의 특권이었다. 어떤 경우 다리를 지날 때 마다 무조건 통행세 를 걷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렇게 강을 건넌 라혼은 가도를 따라 계속 남하 했다. 밤이 이슥한 무렵까지 걷자 외딴곳에 지어진 여관을 만날 수 있었다. 라혼은 그냥 지나칠까 생각하다가 이내 시끌시끌한 여관으로 들어섰다. “뭘 드시겠소?” 라혼이 바에 다가가 자릴 잡자 다소 비대해 보이는 주인이 대뜸 그렇게 물 어왔다. “맥주. 쉴만한 방은 있습니까?” “독방은 없고, 저기 저치들과 함께 쓰는 방은 있소. 방값은 선불이오.” 라혼은 주인이 턱으로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한눈에도 거친 용병 들임을 알 수 있었다. “아니, 됐습니다.” “여기 맥주요. 식사는? 하시겠소?” “뭐가 있습니까?” “생햄과 훈제 칠면조가 조금 남아 있소.” 라혼은 무뚝뚝한 주인에게 생햄―돼지 뒷다리를 소금에 절여 수년간 자연 건조한 것.―과 빵을 주문해 먹고 여관을 나섰다. 하늘에 별이 쏟아질듯 총 총히 박혀있었지만 달이 뜨지 않아 칠흑같이 어두운 밤길을 걸었다. 얼마 후 깊은 어둠에 잠긴 숲을 만났지만 라혼은 멈추지 않고 계속 걸음을 뗐다. 산짐승과 대부분의 몬스터들은 야행성이라 한밤중의 숲은 위험하기 짝이 없었지만 라혼에겐 그다지 큰 상관이 없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달도 뜨지 않은 그믐밤은 그들에게도 활동하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사악솨아~! -쿠구구구구……. -찌릇, 찌릇……. 깊고 깊은 숲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산들산들한 밤바람에 수풀이 스치는 소 리와 밤새소리, 그리고 풀벌레소리는 그 깊은 어둠에 잠긴 숲속에 생명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피비린내?’ 그때 숲속을 유영하며 음악을 연주하던 산들바람이 라혼의 코끝으로 진득한 피비린내를 실어왔다. 하지만 밤의 숲은 밝은 낮보다 활기찬 곳이었다. 맹 수가 사냥에 성공하여 지금 이 순간 포식을 하고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피비린내가 더욱 강해진다는 것은 내가 그곳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리고 라혼은 곧 여러 구의 시신을 뜯어먹는 늑대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크르르르르릉~! 늑대들은 불청객의 출현에 털을 빳빳이 세우며 경계의 기색을 보였지만 라 혼은 그런 늑대들을 무시하고 늑대들이 뜯어먹고 있는 존재를 확인했다. “오크?” -컹컹컹컹컹! 늑대들이 만찬거리가 된 존재는 예닐곱 구의 오크 시체와 3명의 사람이었다 . 오크들은 조잡하나마 무장을 하고 있었고,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늑대들 은 자신들의 만찬을 방해한 존재에게 적의 가득 담고 짖어댔지만 상대는 늑 대들의 깽알거림을 무시로 일관했다. “이거야! 어두워서……. 라이트Light!” -깨겡! -컹컹컹컹컹……. 라혼이 [라이트Light 빛]으로 주변을 대낮처럼 밝게 만들자 달려들 준비를 하던 늑대들은 뒤로 물러서며 더욱 시끄럽게 짖어댔다. 그러나 라혼은 늑대 들이 짖어대던 말던 싸움에 흔적을 살폈다. “오크무리가 대략 80여 마리, 오크에게 습격당한 쪽은 30여명 이 전투로 태반이 크고 작은 부상당했고……. 마차가 한대. 대략 이틀 전에 사고를 당 했군.” 라혼은 늑대들이 시끄럽게 짖어대는 와중에도 대강의 정황을 파악하고 길에 떨어진 롱소드를 집어 들고 시신에서 검대와 검집을 풀러 무장했다. 그리 고 늑대들에게 피어(fear)뿜어내고는 그 자리를 천천히 벗어났다. 그러자 늑대들은 꼬리를 말고 숲속으로 도망치려다 이내 그 무서운 존재가 사라지 자 엉금엉금 기어 나와 잠시 방해 받았던 만찬을 다시 시작했다. 그 후로도 산짐승들이 뜯어먹는 몇 구의 오크시체를 발견할 수 있었지만 사 람의 시신은 없었다. 그리고 새벽 무렵 라혼은 오크무리에 습격당한 사람들 이 도주에 성공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서 오크들이 추격을 포기하고 저쪽 수풀로 들어갔군.” 라혼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렇게 사흘을 꼬박 걸어 숲을 통과한 라혼은 동틀 무렵 숲의 끄트머리에 있는 마을에 다다를 수 있 었다. 맹수가 서식하는 숲과 근접한 마을은 굵은 통나무로 방책이 둘러쳐져 있었는데 경비가 비교적 삼엄했다. 라혼은 마을의 성문을 두드렸다. -탕탕탕~! “누구요?” 그러자 성문 위에서 경비병으로 보이는 자가 소리쳤다. “나는 여행자요. 이 마을에서 잠깐 쉬어갔으면 하는데 문을 열어주십시오. ” “알았소. 성문을 열 테니 조금 물러서시오.” 라혼은 마을의 경비병의 말대로 조금 물러섰다. 그러자 성문은 뒤로 눕듯이 들려 올려졌다. -끼이이익~! “어서 들어오시오.” “…….” 라혼은 경비병들의 재촉에 서둘러 마을로 들어섰고, 이내 통나무를 엮어 만 든 문이 닫혔다. -쿵. “며칠 전, 오크 떼에 습격을 당한 사람들이 왔는데 혹시 운이 좋소?” “안 그래도 오다가 오크 시체를 십여구 봤습니다.” “그렇소?” “흔적을 대강 살펴보았는데 대략 80여 마리는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럼 그들 이야기가 사실이 확실하군. 아! 나는 로므아스의 경비대장 리 펜이오.” “라혼입니다.” 자신을 리펜이라고 소개한 그는 라혼을 모습을 살피더니 물었다. “그런데 일행은 없소?” “없습니다.” “혼자서 여행을 한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상당히 용감한 모험가시군. 어쨌든 로므아스에 온 것을 환영하오. 여관은 저기 로므아스 여관이 유일하니 괜한 고생하지 마시오.” “감사합니다.” 라혼이 이 마을에서 받은 인상은 상당히 어수선 하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원래 카겔라 숲에는 오크가 서식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 데 백여 마리의 오크에게 습격당한 사람이 쫓겨 오자 대책을 세우느라 분주 했다. 숲에 오크들이 활개를 치면 숲에서 사냥을 하며 살아가는 로므아스 마을은 삶의 터전을 빼앗기게 되어 상당히 곤란한 처지에 빠지기 때문이었 다. 벌써부터 용병을 모으네, 토벌대를 구성하네, 하는 말을 많았지만 가난 한 마을에 용병을 고용할 자금이 있을 턱이 없었다. 마을의 젊은이들을 모 아 토벌대를 만들어야 했지만 그것만으론 확인된 것만 80여 마리나 되는 무 장한 오크무리를 토벌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손을 놓고 있다면 오크마을이 형성되어 버릴 수도 있었다. 카겔라 숲은 산짐승이 풍부해 오크들이 서식하 기 적당한 숲이었기 때문이다. 긴 여행(Journey) “어라? 드빈의 그 겁쟁이 아니야?” “누구라고? 어, 정말이네?” 크로우와 그의 동료들은 한쪽 구석에서 아침을 들다가 여관으로 들어서는 미남자를 발견했다. 나흘간이나 한 여관에서 같이 묶었지만 그다지 교류가 없었다. 크로우들은 자기들이 분명 곤경에서 구해주었건만 그는 고마움을 표시하지 않아 인상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더욱이 서로 같은 곳에 있으면 서도 인사조차 없었다. “어떻게 용케 여기까지 왔네? 운이 좋은 가보군.” “그러게? 그렇데, 저 검은 가죽 검대 하기스 것 아닌가?” “정말이야! 한쪽 가드(guard, 손막이)가 부러진 롱소드는 바이타의 것이 분명해!” 용병들은 며칠 전 카겔라 숲을 지나던 중 오크무리에게 습격을 당해 5명의 동료를 잃었다. 그중 셋은 숲길에 그대로 버려두고 왔어야 했는데 그 동료 들의 무구를 몰락귀족으로 보이는 겁쟁이 놈이 무장하고 있자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봐!” “…….” “그래, 당신. 그 검대하고 롱소드, 어디서 얻었나?” “오는 길에 주웠소만?” “어디서? 어떻게?” “이곳으로 오는 길에 오크시체와 같이 있던 사람의 시체에서 얻었소. 아는 분이었소?” “그 무구는 우리의 동료들 것이었어. 나흘이나 한 여관에서 있었는데 얼굴 정도는 알았을 것 아니야?” “나도 당신들이 누구인줄은 알고 있소. 하지만 내가 만난 시체는 까마귀가 눈을 파먹었는지 얼굴을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소.” “빌어먹을…….” 크로우는 오랫동안 같이 다니던 동료가 까마귀밥이 되었다는 말에 욕지거리 를 내뱉었다. 그리고는 멀쩡한 모습을 하고 있는 그에게 괜한 심통을 부렸 다. “그쪽은 멀쩡하군? 같이 동행한 사람도 없는 모양인데 우라지게 운이 좋아 . 그리고 그것은 내 친구의 유품이야 미안하지만 돌려주었으면 좋겠군.” “…….” 크로우의 말엔 겁쟁이 놈은 군말 없이 롱소드를 풀었다. 그러나 그것이 크 로우를 더욱 기분 나쁘게 했다. 이런 겁쟁이는 멀쩡한데 용감한 동료들은 비명에 갔기 때문이다. “저리 꺼져!” “…….” 역시 말없이 물러서는 모습에 더욱 기분이 상한 크로우였다. 숲 한가운데에 서 오크들의 습격 때문에 일행을 책임진 나이트 올레르가 중상을 입어 벌써 사흘째 이곳에 발이 묶여야 했다. 로므아스 마을은 사냥꾼들의 마을이어서 숲속 갚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다음 마을 까지는 꼬박 이틀을 걸어야 도 착할 수 있는 곳에 있었다.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오크무리가 또다시 습격 한다면 상당히 곤욕을 치루는 것을 각오해야 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 발 이 묶인 셈이다. *** 라혼은 동료를 잃고 신경이 예민해진 용병들과 떨어진 곳에 자릴 잡고 음식 을 주문했다. 이곳 여관에서도 독방은 없었기에 라혼은 간단한 식사만 하고 마을을 떠날 생각이었다. 토끼고기 스프와 꿀을 바른 빵으로 식사를 마친 라혼은 여관 밖으로 나섰다가 마을 잡화점 진열대에 프라이팬과 냄비를 보 고 가게로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못 보던 분인데 여행자인가 보군요. 찾으시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조리 기구를 구입하려하는데 물건 좀 봅시다.” “조리기구라면 기본적으로 철 냄비는 있어야 하겠고, 나이프는 있으십니까 ?” 라혼은 냄비와 그릇, 컵, 나이프, 프라이팬과 양념통에 차까지 구입했다. 또한 비옷과 모포와 더불어 배낭까지 구입하고 짐을 꾸린 후 그것을 짊어지 고 밖으로 나섰다. “문을 열어주시오.” “어?” “마을을 떠나려는 거요?” “그렇소. 리펜씨” “아니, 오크떼가 출몰했는데 위험하지 않겠소?” “마을에서 볼일은 모두 끝났소. 문이나 열어주시오.” “다음 마을까지 가려면 꼬박 이틀이나 걸어야 하오.” “그렇소? 알았으니 문이나 열어주시오.” 경비대장 리펜은 오늘 새벽에 도착한 여행자가 몇 시간 만에 마을을 떠나려 하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 입으로 오크 시체까지 보았다면서 동행 도 없이 혼자 위험한 길을 떠나겠다고 하니 몇 번이고 만류했다. 하지만 그 는 결국 여행자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죽더라도 내 원망을 마슈. 이거야 원 용감한 건지, 무모한 건지. 라일, 문을 열어라!” “고맙소.” -끼이이익~! 문이 접혀지자 라혼은 마을을 나서서 가던 길을 계속 갔다. 등에 매고 있던 배낭까지 에텔 스페이스에 집어넣은 라혼은 급할 것 없는 걸음으로 숲을 관통하는 길을 걸었다. 그렇게 한나절을 걷고 오후가 되자 라혼은 문득 걸 음을 멈추고 에텔 스페이스에서 스프링이 보(Springy bow)를 꺼내들고 시위 에 화살을 걸었다. -팅! 라혼의 탄성궁에서 쏘아진 화살은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500미터 밖까지 날아가 숲속에 떨어졌다. -꾸웩~! 그리고 난데없는 돼지 멱따는 소리가 고요한 숲속에 울려 퍼졌다. 바로 라 혼이 쏜 화살에 맞은 오크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였다. 라혼은 이미 의식을 개방해 오크의 존재를 감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크와 함께 있는 인간의 존재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이거 내가 괜한 짓을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라혼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재차 화살을 날렸다. -팅! “…….” -꾸웩! 라혼은 오크의 사체를 발견한 그때부터 숲에 몬스터가 얼마나 있는지 수색 했다. 그러나 카겔라 숲에는 그다지 위험한 몬스터는 없었고, 정작 중요한 오크도 서식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중 라혼의 감각에 하나로 뭉쳐 숲을 이동하는 오크무리가 걸려들었다. 전체 숲을 통틀어 오크는 오직 그 한 무 리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오크무리를 이끄는 것은 마법사였다. 아마도 지적 생명체의 정신이나 마음을 조작하는 마법전문의 인챈터(Enchanter) 이거나 자신들의 도울 물체나 생물 즉 창조 또는 소환전문의 컨져러(Conjur er)계통의 마법사 인듯했다. “무슨 목적이 있는지 모르지만 좋은 의도는 아니겠지?” 굳이 찾아서 어떻게 해볼 생각은 없었지만 저렇게 길가에 매복하고 있다면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3대째 화살이 허공을 가르고 나서야 오 크들은 길가로 쏟아져 나와 괴성을 지르며 라혼이 있는 곳으로 치달리기 시 작했다. -꾸웨엑~! -옥크, 옥크……. 라혼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오크무리에 연속해서 화살을 날렸다. 빛살처럼 날아간 화살들은 어김없이 오크의 몸통에 작렬했고 무리의 수는 꾸준히 줄 었다. 그렇게 1분간 24대의 화살은 24마리의 오크의 숨통을 끊었지만 50마 리로 줄어든 오크들은 100미터 앞까지 진출해 했다. 하지만 거리가 가까워 질수록 과녁은 더욱 커지는 법이다. 라혼은 3대의 화살을 한시위에 동시에 먹이고 난사를 하기 시작했다. -핑! 한번 활시위가 튕겨질 때마다 3개의 화살이 허공을 격하고 날아가 오크를 잡았다. 그렇게 잡은 오크의 수가 30여 마리 추악한 얼굴에서 내뿜는 입김 이 선명하게 보이는 거리까지 접근하자 라혼은 조준을 포기하고 7대의 화살 을 시위에 걸고 스프링이 보를 석궁처럼 눕혀 발사했다. -핑, 파바바바다닥! -꾸웨엑~! 그러자 남은 오크는 이제 23마리가 십여보 앞까지 접근했다. 라혼은 에텔 스페이스에서 1대의 화살을 꺼내 시위에 걸어 스프링이 보와 화살에 마나를 주입해 가장 가깝게 접근한 오크를 맞췄다. -팅! -퍽! -꾸웨엑~! 마나를 머금은 평범한 화살은 강력한 힘을 품고 날아가 오크의 가슴을 관통 하고 뒤를 따르는 오크의 머리에 박히고도 남는 힘으로 오크를 10여 미터나 뒤로 날아가 처박히게 했다. 라혼의 화살에 무리 대부분을 잃었음에도 마 법주문에 홀린 오크들은 괴성을 발하며 달려들었지만 라혼의 쏘는 화살은 그들의 몸을 꿰뚫고 지나가 두세 마리의 오크를 동시에 잡았다. 그렇게 오 크의 수를 18마리로 줄인 라혼은 오크가 코앞까지 접근해 꼬챙이같이 생긴 글래이브를 찔러오자 몸을 뒤로 뺐다. 그러면서도 화살을 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팅! -꾸웨엑! 그렇게 마지막으로 화살을 날린 라혼은 스프링이 보를 에텔 스페이스에 집 어넣고 아직까지 에텔 스페이스에 쌓여있는 프린든 왕국에서 약탈한 바스타 드 소드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땅에 착지한 순간 어드밴스 오러 블레이드를 뽑아내며 주춤한 오크무리로 뛰어들었다. “우아아압!” -촤아~! 본래 롱소드보다 길이가 긴 바스타드 소드에 그 길이를 넘어선 황금빛 어드 밴스 오러 블레이드까지 더해지자 마치 장창 끝을 잡고 휘두르는 듯했다. 그렇게 어드밴스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바스타드 소드를 들고 몸통을 돌 리며 사방을 공격하는 그레이터 휠윈드(Greater Whirlwind) 기술이 시전되 자 순식간에 12마리의 오크가 허리와 가슴, 그리고 목이 통째로 잘려나갔다 . 그리고 남아있던 6마리 오크도 몸이 쪼개지는 비운을 면치 못했다. “후우~!” 80마리 가까이 되는 오크를 몸에 피한 방울 묻히지 않고 간단히 해치운 라 혼은 아직까지 나서지 않고 숨어있는 마법사를 추적했다. “흐엑~!” 자신이 소환한 오크를 너무도 간단히 해치운 무서운 상대가 자신을 찾아냈 다는 사실을 안 마법사는 기겁하며 자리를 벗어나려 했지만 상대는 너무나 빨랐다. 라혼은 도망치려는 마법사의 뒷덜미를 낚아채 땅바닥에 집어던지며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누구냐? 나를 노린자가!” 라혼은 이 마법사가 자신을 노리고 오크를 매복시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질문은 그렇게 했다. 당연히 마법사는 자신이 노린 존재는 그가 아니므로 손을 저어가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아닙니다. 저는 당신을 노린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당신은 소드 마스터 입니다. 그런 당신을 고작 오크 몇마리를 소환해 상대하겠습니까?” “내게 거짓은 통하지 않는다? 너는 도리스가 보낸 암살자임이 분명해! 그 렇다면 살려둘 수 없다.” “나리, 저는 5서클 마법사입니다. 나리를 주인으로 모실 테니 목숨만은 살 려주십시오. 도리스라는 분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하긴 도리스가 날 상대하라고 보낸 자 치고는 너무 허술하긴 하군. 그럼 네 정체가 뭐야? 그리고 저 오크들은 뭐고?” “예? 그, 그건…….” 라혼은 그가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짐짓 의혹어린 시선과 함께 그의 목젖에 칼끝을 겨누며 말했다. “갑자기 주인으로 모시겠다고 맹세하다니 역시 수상해. 나의 환심을 사서 신임을 얻은 뒤 날 공격할 셈이었나?” “아, 아닙니다. 저는 나리를 노린 것이 절대 아닙니다. 제 목표는 세실리 아라는 백작가의 영애였습니다.” “세실리아를?” “아십니까?” “비 때문에 여관에서 며칠 같이 지냈지. 그런데 그 소녀는 무엇 때문에 노 린 거냐?” “저도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아는 대로 말해봐! 나중에 세실리아를 만나서 네 말이 사실인지 알아야 하니까. 만일 거짓이라면 너는 도리스의 하수인이 분명해.” 묘한 곳에서 드빈의 여자 도리스의 이름을 파는 라혼이었다. 그러나 마법사 는 78마리 오크를 단신으로 무찌른 상급 소드 마스터가 이토록 경계하는 ‘ 도리스’라는 존재에 일말의 경이감을 품었다. 그리고 진땀을 뻘뻘 흘리며 자신이 알고 있는 세실리아에 관한 모든 것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세실리아는 카를 백작가의 제일 유상상속자입니다. 바로 최근 그녀의 부 친인 백작이 급작스럽게 서거하여 카를 가의 막대한 재산 중 일부가 그녀 몫으로 돌아가기로 되어있습니다만 죽은 카를 백작이 가문을 이을 아들이 없는 관계로 백작의 작위는 그의 동생이 잇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세실 리아의 숙부이기도 한 그는 가문의 막대한 재산이 반 토막 나는 상황을 원 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너는 그가 부리는 마법사란 말이냐? 겨우 이제 갓 백작의 작위를 가진 자가 5서클 마법사를 암살자로 사용할 정도라고 믿지 못하겠는데?” “아닙니다. 저는 단지 용돈이나 벌자고 이일에 나선 것뿐입니다. 새로운 카를 백작하고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카를 백작은 어새신 길드에 의뢰했 고 저는 그들에게 의뢰를 받았을 뿐입니다.” 라혼은 중년에서 노인으로 넘어가는 초로의 마법사가 하는 말에 거짓이 없 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 넌 뭐냐?” “예?” “네 정체를 묻는 거다. 나를 주인을 모시겠다면서 자기를 소개하지 않을 셈이었나?” “아, 예. 제 이름은 무자딘. 갈루아 학파의 위저드 리하르트의 제자입니다 . 나리!” “평민출신인가?” 라혼은 5서클의 마법사이면서도 자신을 ‘나리’라고 부르며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그에게 대뜸 물었다. 그러자 그는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떠듬 떠듬 사실을 실토했다. “노, 노예였습니다.” “노예라고? 노예가 마법사가 될 수 있나?” “노예로 스승님의 수발을 들다가 어깨너머로 몇까지 마법을 훔쳐 배웠습니 다.” “그럼 정식제자가 아닌가?” “…….” 라혼은 그가 정식제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말은 ‘갈루아 학파의 위저 드 리하르트의 제자’라고 했지만 그는 인정받는 마법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 만일 제대로 된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면 돈 몇 푼 벌자고 청부살인이나 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3서클 마법사만 되어도 모셔갈 곳은 얼마든지 있었다. “정식제자가 아니더라도 5서클 마법유저라면 어디든 자리가 있을 텐데…. 청부살인은 부업인가?” “청부를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어새신 마스터가 제 능력을 시험한 다며 이일을 맡겼습니다. 실패하고 말았지만…….” 전문 킬러치고는 일처리가 상당히 어설프긴 했다. 처음 습격을 시도할 때부 터 오크들만 우우 몰아 일을 처리하려 했고, 방금 전 매복이 들통 난 순간 에도 물러서지 않고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인 것을 보면 이런 일에 그다지 익 숙하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흠.” 무자딘의 말에 몇 가지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일처리는 어설프지만 계 획은 치밀하다는 것이다. 일단 오크에게 습격당해 죽었다면 인간의 소행을 의심할 수는 없다. 그리고 드빈이나 로므아스에서 그 백작가 영애의 경호상 태와 서두르는 기색이 없는 것을 보아 그들은 백작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를 수가 있었다. “백작이 언제 죽었나?” “예? 아, 보름전입니다. 세실리아라는 아가씨는 아마도 지금 부친이 돌아 가셨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겁니다.” 라혼이 마법사의 확인에 돌아가는 상황을 추리할 수가 있었다. 급서한 백작 은 계획된 암살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상속자를 같이 노릴 수는 없는 것이다. ‘역시 복잡한 일에 끼어들었나? 귀족들의 집안싸움인데 이쯤에서 모르는 척 넘어갈까? 모르긴 몰라도 제대로 된 암살자들이 그녀를 노릴 텐데. 일단 오크들이 출몰했다고 알려진 이상 숲을 지나다 사라진 귀족영애가 암살되 었다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할 테니까…….’ 일을 몰랐다면 모를까 대충이나마 전모를 파악한 라혼은 일단 그들을 돕기 로 했다. 하지만 문제는 어느 선까지 돋느냐 인가였다. 무자딘의 말대로 숙 부가 배후라는 것도 의심스러웠다. 아무리 5서클의 실력 있는 마법사라지만 초짜에게 의뢰자의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는 것은 의심스럽기 짝이 없는 일 이었다. 그러니 무작정 그 작자를 족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무자딘.” “예, 주인님.” “너는 어떻게 생각하나? 내가 세실리아를 도울까? 그냥 경고만 해주고 말 까?” “어떤 결정을 하던 저는 주인님 뜻대로 따르겠습니다.” 라혼은 초로의 마법사의 얼굴을 가만히 지켜보다 다른 말을 했다. “내가 알기로 어새신들은 배신자를 용서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괜찮겠나? 네가 날 주인으로 모신 것 자체가 배신행위인데?” “예? 그것이…….”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귀찮은 것은 싫거든, 아무래도 너를 거두면 널 노 리는 암살자들이 계속 나올 텐데 나는 내 한 몸 챙기는 것도 힘들어서 말이 지.” “……!” 라혼은 단순한 말장난에 눈에 띠게 당황하는 그의 모습에서 마법사답지 않 게 성정이 무척 단순하다는 것을 알았다. 한편 무자딘은 자신이 지금 어떤 처지에 있는지 깨닫고 말을 잊었다. 그리고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며 소드 마스터인 그가 자신을 거둬주길 바랬다. 라혼은 그의 그런 태도에서 그가 어째서 청부살인업자가 되려 했는지 그 이 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러고 보니 이용해 먹기 딱 좋은 놈이군.” “예?” “너는 앞으로 무자딘이 아니라 헤딘이다. 피오나 학파의 그랜드 위치 피오 레나의 제자 위저드 헤딘이다. 알겠나?” “피오나 학파라구요? 그런 학파는 없는……. 가만 피오레나요!” 마법사의 어머니, 이것이 반왕 이그라혼의 두번째 부인이기도 한 피오레나 의 존칭이다. 전에도 없고 후에도 없을 9서클 마스터인 그녀는 안젤리아드 에 마법사의 탑을 세운 대마도사들의 양어머니이자 스승이기도 했다. 또한 탈로스의 실제 설계자이기도 하며 반왕과 함께 영원히 아발론에 잠든 위대 한 마법사였다. “나는 라혼, 이그라혼의 이름을 잇는 자다.” “예에! 다, 당신이 그 다크 프린스?!” “받아라.” “이, 이건?” “그 것은 나의 증표이자 통신반지다.” “피, 피아링?” “역시 마법사라 아는 것이 많군. 그것을 가지고 하이슬란드로 가서 아돌프 멘델을 찾아라.” “예? 예.” “…….” “…….” 라혼은 멀뚱멀뚱하게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헤딘을 바라보다 말했다. “뭐해? 어서 가지 않고?” “지금, 저 혼자 말입니까?” “그래, 빨리 가!” “하지만 숲길은 혼자 여행을 하는 것은…….” “나는 제 앞가림도 못하는 마법사 따위는 필요 없어. 빨리 가.” “주, 주인님은?” “나는 백작영애에게 경고라도 해주고 여행을 계속하겠다.” “하, 하지만…….” 라혼은 그가 어새신들의 공격에서 자신을 보호해 주길 원한다는 것을 알았 지만 이내 무시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선 매우 현실적인 문제가 튀어나왔다 . “그게 지금 제겐 한 푼도 없습니다.” “…….” 라혼은 아무런 말없이 그에게 100골드를 건네주었다. 그렇게 길가에서 주운 (?) 마법사를 하이슬란드로 보낸 라혼은 로므아스 마을로 발걸음을 되돌렸 다. 긴 여행(Journey) 무자딘은 품속에 금화주머니의 묵지함에 방금 그 일이 꿈이 아님을 알았다. “우헤헤헤, 자그마치 100골드는 될 거야. 바보 같은 놈 같으니라고 내가 진짜 자기를 주인으로 모신 줄 아나봐.” 무자딘은 마법사이지만 그 흔한 매직스톤이나 지팡이도 없었다. 기본적인 마법의 가루를 제조하는데 사용되는 엘릭시르(elixir)조차도 없었다. 그야 말로 이름뿐인 마법사다. 무자딘은 아주 어릴 적에 깊은 숲속에 홀로 마법 연구에만 몰두하는 위저드 리하르트에게 팔려 40년간 그의 수발을 들었다. 마법은 그때 위저드 리하르트의 마법연구를 도우면서 배웠고 나름대로 재능 이 있어 5서클 주문까지 사용할 정도가 되었다. 위저드 리하르트는 무자딘 에게 무관심했다. 따로 챙겨주거나 뭔가를 가르쳐 준적은 없지만 어렸을 적 부터 같이 생활을 했기에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문제는 위저드 리하르트가 정식으로 제자를 들이면서 시작되었다. 오랜 종복인 무자딘은 새로운 상전 을 그다지 탐하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본분을 다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무자 딘의 재능은 지체 높은 귀족출신의 위저드 리하르트의 제자에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무자딘의 신분은 노예였고, 노예가 마법을 익히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노예는 죄를 지은 사람이거나 전쟁포로였다 . 노예를 부리는 입장에선 노예는 잠재적인 적일 수 있기 때문에 시드그람 대륙 공용법으로 노예에겐 마법, 검술 등 위험한 주요지식이나 기술을 가르 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무자딘과 위저드 리하르트만 있을 땐 그다지 상관하지 않던 것이 귀족출신 마법사 지망생이 들어오면서 문제가 된 것이다. 무자딘의 존재가 세상에 들 어나면 위저드 리하르트는 상당히 곤란한 처지에 빠질 수 있었기 때문에 귀 족출신 마법사 지망생은 어떻게든 무자딘을 처리하려 했다. 무자딘이 할 수 있는 것은 도망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평생을 사람구경하기 힘든 오지에서 살아온 무자딘에게 세상을 만만 한 곳이 아니었다. 3년이나 세상을 떠돌았지만 알게 된 거라곤 5서클 마법 사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며 자신의 가치정도였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초 라하기 그지없는, 게다가 조금 어눌하기까지 한 무자딘을 5서클 마법사로 인정해주는 이는 없었다. 거기다 마법사의 상징 중 어느 하나라도 가진 것 이 없는 바에야……. “이정도면 큼지막한 매직스톤이 박힌 지팡이를 살 수 있을 거야. 그것이면 어디를 가도 대접받을 수 있어.” 그렇게 히히 낙락한 웃음을 지으며 바삐 걷던 무자딘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잠깐 그러고 보니 나 방금 고용되었잖아?” 그제야 위저드 리하르트와 같이 마법사로써의 삶을 상상하던 무자딘은 아주 대단한 후견인을 만났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무자딘은 현명하진 않지만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일단 그 자리를 모면하려 자신을 죽이려던 어새신 마스터에게 했던 그대로 빌어서 얻은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이것은 기회였 다. 다크 프린스의 명성이 절정에 달 할 때 무자딘은 세상을 처음 접했다. 술집 에 들려도 그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고 지금 그의 가문은 북방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그 가문의 영지가 하이슬란드라는 것은 너무 나도 유명한 사실이었다. “아냐, 나를 이용하려는 수작이야. 도망쳐서 숨어야해!” 그러나 ‘이용해 먹기 딱 좋다.’는 말이 다시금 무자딘의 뇌리를 지배하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다시 멈춰 서서 고민했다. “애라! 하이슬란드의 차이저 가는 이제 제국에서 손꼽히는 명문 중 명문인 데 그곳의 전속마법사라면 나쁠 것 없지 어차피 내 사정을 아는 사람 밑에 있으며 보호도 받을 수 있을 거고 가자! 아냐, 그래도…….” 무자딘, 아니 세상을 바꿔놓을 이그라혼의 대마법사 헤딘은 망설임과 의심 으로 멈칫멈칫 하면서도 운명처럼 하이슬란드로 걸음을 옮겼다. -탕탕탕탕~! “누구냐?” “문 좀 열어주시오.” 해가지고 별이 뜰 무렵이라 문이 굳게 닫힌 방책 위에서는 어두운 방책 밑 이 보이지가 않았다. 일단 사람의 말을 하는 것을 봐서는 오크는 아닌 것 같았지만 추악하고 냄새나는 오크 또한 지능을 가지고 있었기에 확실히 확 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경비병은 방책 밑으로 횃불을 던지며 소리쳤다 . -화르르~! “얼굴을 보여라!” 라혼은 경비병이 시키는 대로 떨어진 횃불을 들고 얼굴을 보였다. 그러자 라혼을 기억하는 경비병한명이 아는 체했다. “어, 오늘 낮에 길을 떠났던 그 여행자잖아?” “그렇군. 하지만 일단 리펜 대장님께 알려.” 약간의 시간이 지체되고 곧 문이 열렸다. 라혼이 마을로 들어서자 로므아스 마을의 경비대장 리펜이 물어왔다. “어떻게 된 거요? 혹시 가는 길에 오크라도 만난 거요?” “한 무리의 오크를 만났습니다. 하지만 제가 모두 처리했으니까 내일 가서 사체를 확인하십시오. 그리고 그 오크들은 마법사의 미혹에 걸려있었습니 다. 숲엔 오크 마을이 생겼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 그게 정말이오?” “그렇습니다, 그럼…….” 라혼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경비대장 리펜을 지나쳐 여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그제야 정신을 차린 리펜이 물어왔다. “다, 당신은 누구요?” “라혼, 하이슬란드의 라혼 가이우스 세나데온 차이저 자작이요.” 리펜은 정체를 알 수 없던 여행자의 이름을 듣고서 기억 저편에 묻혀져있던 한 존재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다크 프린스, 그는 다크 프린스였어.” “예? 그런 거물이 우리 마을 같은 깡촌에 뭐 하러 오겠어요?” “그건 모르지만 내일 마을에서 하루거리까지 수색을 해야겠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숲엔 더 이상 오크는 없다.” 아직도 젊은 여행자의 말이 믿기지가 않은 리펜이었지만 내일 찾아보기로 했다. 여관으로 들어선 라혼은 동료들과 술을 마시며 무료한 시간을 죽이는 피부 가 까무잡잡한 용병에게 다가가 말했다. “크로우씨.” “나 말이오?” “당신의 고용주를 만나고 싶소.” 나흘 동안 한 여관에서 지내다 보면 오다가다 이름 정도는 자연스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내 고용주? 백작가의 영애 말이오?” “그렇소.” “무엇 때문이오?” “어차피 당신도 알게 될 일이지만 숙녀분과 기사에게 먼저 전해야 할 것 같소.” “…….” 정중하고 사리에 맞는 이야기였지만 크로우는 눈앞에 그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미 겁쟁이에 도움을 줬음에도 사례는커녕 고맙다는 말 한마 디 없었던 놈이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그의 정중함을 크로우가 보기에 비 굴함이었다. 가뜩이나 오랫동안 같이하던 친구를 잃어 기분 또한 그다지 좋 지 않아 그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내일 다시 오쇼. 우리는 내일도 계속 여기 머물고 있을 거니까.” “아니, 이것은 그녀에게 무척 중요한 이야기요. 미안하지만 지금 그녀를 만나야겠소.” “나하곤 상관없는 일이야. 좋게 말할 때 꺼지라고, 지금 우리는 너랑 노닥 거릴 만큼 기분이 좋은 상태가 아니야.” “무례하군.” “뭐야!” -퍽! 용병들은 자신의 눈앞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크 로우가 발작하려는 것을 말리려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정작 크로우는 구석 에 처박혀 있었던 것이다. “이 자식! 어?” -팍! 허공을 알아 구석에 처박혀 있던 크로우는 멀쩡한 모습으로 몸을 일으켜 세 우고 앞으로 달려들려 했다. 그러나 뭔가가 날아와 자신의 등지고 있던 벽 의 튀어나온 기둥이 박히자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벽의 일부가 된 나무기 둥에 박힌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롱소드였던 것이다. 크로우는 반사적으 로 왼쪽 허리에 비어있는 검집 손을 대며 중얼거렸다. “어, 어떻게…….” “나는 네가 함부로 해도 될 정도로 약하지 않다. 다시 한 번 부탁하겠다. 네 고용주에게 내가 만나자는 뜻을 전해라!” “…….” 용병들은 위압감을 뿜어내는 상대를 만나 저마다 무기 손잡이를 움켜쥐며 눈치를 살폈다. 일이 어찌되었던 공격을 받은 이상 그는 적이었다. 하지만 무기도 들지 않은 상대를 앞에 두고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크로우는 그런 동료들의 어깨를 잡아 물러서게 한 후 라혼의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세실리아 아가씨는 불러주겠소. 그럼 누가 찾는다고 전하면 되겠소?” “하이슬란드의 라혼 가이우스 세나데온 차이저 자작이다.” “하이슬란드?” “다크 프린스!?” 크로우와 용병들은 너무도 엄청난 상대의 정체에 갖가지 놀란 표정을 지었 다. 입을 쩍 벌리고 다물 줄 모르는 자기 있는 가하면 저도 모르게 한걸음 물러나는 자, 무기를 그때까지 무기에 손을 얹고 있던 자는 번쩍 손을 들은 자, 그리고 대부분은 눈을 크게 뜨며 놀람을 표시했다. “자,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저, 전하!” 크로우는 빳빳하게 굳은 모습으로 황급히 레이디 세실리아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여관의 식당은 숨소리조차 울리지 않을 정도로 침묵 속에 빠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드디어 레이디 세실리아의 시녀가 밖으로 나와 예 법에 맞춰 머리를 살짝 숙여 보이는 것으로 절을 했다. “아가씨께서 만나시겠답니다. 전하.” “안내하시오.” “예, 저를 따라 오십시오.” 라혼이 백작영애인 세실리아의 시녀를 따라 그녀가 머무는 뒤뜰로 가자 그 제야 식당에서 긴장한제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던 용병들은 한숨을 쉬며 자 기들끼리 소곤거렸다. “굉장하군.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그 박력이란…….” “역시 단 한명의 기사만 데리고 50명의 기사와 500명의 병사를 이긴 자의 박력이야.” “아까도 말이지 한순간에 그 크로우를 날려 보내고 그 짧은 순간에 롱소드 까지 빼앗았잖아.” 그러면서 아직까지 여관의 나무기둥에 깊숙이 박혀있는 크로우의 롱소드를 바라보았다. 라혼은 아무런 압력이나 기운도 내뿜지 않았다. 그들이 느낀 위압감의 정체는 다름 아닌 다크 프린스에 대한 경외감이었다. 바로 다크 프린스라는 이름에 거친 용병들을 주눅 들게 한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다크 프린스가 이런 곳에서 혼자 돌아다니는 거지? 그의 아버지는 지금 프린든 왕국연합과 전쟁 중 이잖아. 아버지가 싸우는데 아들 이 이런 곳에서……?” “그러게? 다크 프린스는 황제의 후계자이기도 하잖아? 그럼 그란에 있는 게 맞는 게 아닌가?”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다크 프린스와 반대파 귀족들이 귀족원을 장악해 서가 아닐까?” “뭐?” “왜, 있잖아. 제국의 귀족들은 강력한 황제가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다는 말이 있잖아.” “어쨌거나 오늘 눈이 이일은 두고두고 자랑할 만하겠어. 그 제국 제1의 기 사의 아들과 싸울 뻔했잖아.” *** “아토베니스의 카를 백작가의 세실리아입니다. 전하! 이렇게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이슬란드의 라혼 가이우스 세나데온 차이저 자작입니다. 레이디 세실리 아” “그런데 늦은 시간에 저를 급히 찾으셨다는데…….” 오지마을의 허름한 여관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드레스 차림의 숙녀와 창백한 안색의 그녀의 호위기사는 자기를 다크 프린스라 주장하는 존재를 접견했다. 그가 이런 곳에 있다는 것이 그의 정체를 의심하게 했지 만 다크 프린스가 그의 부친에게 자신이 심혈을 기울려 창립한 군대의 지휘 권을 넘겨주고 사라졌다는 것을 아는 나이트 올레르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 를 주시했다. “사실을 확인한 뒤 말씀드리는 것이 나을지 모르지만 마음을 단단히 먹어 야 합니다.” “무슨 뜻인가요?” 라혼은 그녀에게 오늘 겪었던 오크떼와 싸운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 오크를 다루던 마법사가 말하길 레이디 세실리아 부친인 카를 백작께 서 급서하였다고 했소. 그리고 당신의 숙부가 암살자들을 고용해서 백작의 유일한 상속자인 당신을 해치려 했다는 것이오.” “거짓말!” “아가씨!” -창! “너의 정체가 뭐냐? 에이킨 경이 세실리아 아가씨를 해칠 리 없다. 아니 백작님이 돌아가셨다는 것도 믿을 수 없군.” 라혼은 자신에게 칼을 겨눈 창백한 안색의 기사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 리곤 순간적으로 그의 품으로 파고들며 검을 든 손을 겨드랑이에 끼고 목을 잡아 힘을 주었다. “큭!” 부상에서 미처 회복하지 못해 창백하던 나이트 올레르의 얼굴이 금세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라혼은 오히려 그의 목을 조른 채 번쩍 들어 올리며 세실리아에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 오크를 조종해 레이디를 습격한 마법사도 그들에게 이용당한 것 같았소. 잡혀서 고문을 받더라도 침묵을 지켜야하는 어새신이 그런 자 에게 의뢰자의 정체를 가르쳐 줄 리 없지 않겠소?” “그, 그럼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는 말씀인가요?” “글쎄, 그것까지는 사실인 것 같지만…….” -덥석! 라혼은 눈을 허였게 뒤집으며 부르르 떠는 기사를 풀어주었다. “켁! 케헥~! 헉헉헉…….” “나이트 올레르, 나는 라혼 가이우스 세나데온 차이저 자작이오.” “…….” 라혼은 그가 자신을 시험하려 했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거침없 이 칼을 들이대는 그의 태도는 무척이나 불쾌했다. “배후에 누가 있던지 간에 확실한 것은 당신을 노리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입니다. 레이디 세실리아!” “…….” “그럼…….” 그리고 라혼은 말없이 방을 나섰다. 비록 여행 중에 만난 정체가 의심스러 운 존재가 스스로 유명인의 자처하고 나선다면 의심스런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단순이 시험을 하기위해 스스럼없이 무기를 겨눴다는 것 은 기사들에게 있어 다크 프린스의 이름이 얼마나 가벼운 것인가를 증명했 다. 아니 신성 시드그람 제국 황제가 얼마나 가벼운 것인지 실감했다고나 할까? “너무 무거운 것도 문제지만 가벼운 것도 문제다.” 라혼은 자심의 이름에 무게를 더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군주의 이름에 무게를 더하는 것은 다름 아닌 ‘피’였다. 군주의 위엄이란 산처럼 쌓인 시체와 바다와 같은 피위에 있는 것이다. 역사에 남아 대대로 칭송되 는 위엄 있는 군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백성들을 사랑한 자이지만 살아 있을 때 그러한 위엄을 가지려면 마치 제물처럼 피가 필요했다. ‘어차피 나는 마왕이 아닌가? 하지만…….’ 라혼은 이름 모를 지방의 오지마을에서 귀족가의 기사의 태도에서 피를 볼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라혼은 아직 피를 보면서 까지 위엄을 얻어야하는 이유는 찾지 못했다. 긴 여행(Journey) 프린든 왕국이 1년전쟁때 종전강화로 중립자유도시가 된 사우스포트를 무력 으로 점거해 본격적으로 시작된 전쟁은 벌써 5년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다 크 프린스의 사우스포트 탈환전를 제외하고 전쟁기간 내내 서로 간에 큰 충 돌이 없는 긴장관계를 유지했지만 프린든, 바이나, 시오나의 왕국연합군의 대대적인 갤 침공은 전쟁의 양상을 단숨에 바꿔버렸다. ‘왕국-제국 전쟁’의 주전장은 이제 갤이 되었고 지금 갤에선 하이슬란드 백작의 제국 레기온과 갤의 대공이 된 트라얀 공의 철가면 기사단을 주축으 로 한 갤 연합군이 제국연합군으로 한축을 이루었고, 프린든 왕국을 중심으 로 한 왕국연합군, 거기다 무시할 수 없는 북쪽 황무지의 바바리안 세력이 끊임없이 남하를 계속했다. 왕국연합군은 바바리안 세력에 끊임없는 구애를 하고 있었지만 바바리안은 통일된 세력이 아니었기 때문에 별 성과가 없었 다. 적게는 100명에서 많게는 2천명까지 바바리안 전사를 거느린 족장들이 간헐적인 침입을 계속했고 그 양상도 다양해 약탈을 업으로 하는 부족이 있 는 가하면 어떤 부족은 갤지역에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기도 했다. “빌어먹을 야만인 놈들 이러다간 갤 북부가 초토화 되겠어.” “대공 전하 고정하십시오. 트라킨을 보내놓았으니 어떻게든 해결이 될 겁 니다.” 아인윌의 궁성. 트라얀 반트 세나데온 콰이스 폰 갤 대공과 제국연합군 총 사령관 로카데 차이저 반 하이슬란드 백작은 커다란 테이블 위에 양피지로 만들어진 지도를 펼쳐놓고 갖가지 색깔의 깃발들을 내려다보며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원래 갤의 남부에서 벌어진 왕국연합군과의 전쟁은 하이슬란드 백작이, 북부 바바리안의 소요를 막는 일은 트라얀 대공이 맡고 있었다. 서 로 따로 움직여온 그들이지만 곧 닥쳐올 겨울을 나는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갤의 주도인 아인윌에서 회동을 했다. 가을 추수기가 가까워지자 왕국연합 군은 가을추수와 곧 닥쳐올 겨울에 대비하기 위해 군사적 움직임을 자제했 지만 문제는 북부 바바리안들이었다. 갤 대영주들의 내전과 왕국연합군의 대대적인 침공으로 그들에 대한 억지력이 사라지자 국경지역에서부터 간헐 적으로 시작된 바바리안들의 약탈이 아예 작심을 한 듯 본격적으로 시작되 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이슬란드 백작은 남부에서 일부 전력을 빼내 바 바리안들의 약탈 행위에 대처하는 북부에 투입했다. “문제는 지금 부터야 추수기가 끝나면 쌓여있는 곡물들을 노리는 놈들의 공세가 더욱 심해질 거야. 레기온 기사단의 투입으로 한숨 돌리게 되었지만 프린든이 우리의 전력이 약해진 것을 그저 보고만 있을 리 없어.” “흐음~! 문제로군요.” 다른 참모들을 배석시키지 않은 가운데 지금 가지고 있는 정보로 의견을 나 누었다. 공식적으로 황제와 귀족의회가 보낸 지휘관과 그 지방을 책임진 통 치자의 관계였지만 사적으로 하이슬란드 백작은 트라얀 대공의 조카사위였 으며 수년간 함께 살아온 가족이다. 자칫 알력이 생기기 쉬운 관계에 있었 지만 서로가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므로 아직까지는 그다지 큰 문제 는 없었다. “대공 전하, 사령관 각하, 코나크리 백작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코나크리 경이?” “이쪽으로 모실까요?” “이리로 모셔오게.” “알겠습니다.” 제 세상만난 듯 날뛰는 바바리안 전사들을 대처하기 위해 이런 저런 논의를 하던 둘은 밤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찾아온 존재를 만났다. 갤의 대영주중 한명이며 처음부터 끝까지 콰이스 가문과 혈맹을 지켜온 코 나크리는 다크 듀크가 살아있을 때부터 그와 함께해온 인사였다. 트라얀 대 공과도 각별한 사이였다. “대공 전하, 그리고 처음 뵙겠습니다. 차이스 세나데온 코나크리 백작입니 다.” “로카데 차이저 반 하이슬란드 백작입니다.” “그래 무슨 일인가, 이 밤중에?” “자네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왔네.” “……?” 바바리안은 궁극의 병기인 탈로스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 대부 분의 성인 남녀는 칼만 쥐면 곧 전사가 되어 전장을 누빌 수 있을 만큼 강 인했다. 전쟁에서 탈로스를 보유하고 병참능력에서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는 상대에겐 당할 수 없었지만 바람처럼 나타나 일부지역을 휩쓰는 약탈을 막 기란 힘든 일이다. “무슨 말입니까? 코나크리 경.” “객관적인 전력상으론 탈로스가 없는 바바리안들이 우리와 비교가 되지 않 지. 하지만 전쟁에서 승리할 생각 없이 그들이 필요한 것을 약탈해가는 일 에 탈로스는 필요가 없어.” “…….” “하지만 바바리안들을 우리가 용병으로 고용할 수는 있지 않겠나?” 코나크리 백작의 말에 트라얀 대공은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자세히 말해봐.” “과거 다크 듀크가 건재할 때 잠시 논의 된 적이 있는 내용인데 유력한 바 바리안 세력을 지원하여 그들로 하여금 흩어진 바바리안 세력을 하나로 통 합시키는 방안이네.” “그들만의 왕국을 세우도록 지원을 하잔 말인가?” “그렇지. 그 때에는 거기에 소요될 막대한 재정이 부담스러웠고, 또 하나 로 통일된 왕국을 이룬 바바리안들이 힘이 커지는 것을 저어한 다크 듀크가 잠시 보류해 둔 계획이야. 하지만 지금이라면 그다지 큰 재정은 들이지 않 고도 일을 진행시킬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어.” 트라얀 대공은 코나크리 백작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제국 귀족원의 군비지원과 프린뱅크의 자본은 제국연합군의 가장 큰 힘이었다. 전쟁이 한창이지만 단지 갤의 힘만으로 감당하던 때보다 오히려 재정이 풍 족했다.―정확히 트라얀 대공이 운용할 수 있는 자금- 문제는 날뛰는 바바 리안 중 누구와 손을 잡을 것인가 이었다. “코나크리 경, 생각해둔 사람이 있는 겁니까?” 로카데의 물음에 노회한 코나크리 백작은 한사람을 지목했다. “게르누스, 젊고 패기가 넘치며 야심만만한 부족장이 있다네. 그의 용맹한 두 동생과 더불어 대략 1300명 규모의 전사들을 이끌고 있는 자인데, 의심 많은 노회한 늙은 족장들은 우리가 약속을 하고 실제로 지원을 해줘도 확 신이 설 때까지 움직이려하지 않을 테지만 그라면 우리가 약속의 실체를 보 인 순간 스스로 참지 못하고 일을 시작할 거야.” 모든 도시의 왕은 제도 그란이다. 그리고 모든 도시의 여왕은 바로 안젤리 아드다. 용기의 정령이며 반왕 이그라혼의 첫번째 아내이기도 했던 퀸 안젤 리나의 이름을 가진 도시는 가든 오브 월드(garden of world)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인구 80만의 대도시이면서 숲과 정원 그리고 대리석으 로 포장된 광장과 광장을 둘러싼 천년이 넘은 고풍스럽고 거대한 건축물이 즐비하며 마법사들의 중심인 마법사의 탑과 기사들의 요람인 예니체리 사관 학교가 있었다. 반왕이 죽고 고대 시드그람 제국이 멸망했지만 안젤리아드 는 반왕의 부하들인 기간테스들에게 제도인 그란보다 더 중요시 여겨지며 보호되었다. 기간테스의 후예인 기간트들은 아직도 예니체리 사관학교 출신 이란 것을 명예롭게 여겼다. <안젤리아나드. 시드그람 제국의 황제이며 파의 왕중왕, 마고의 황제, 바라 군 왕국의 황제 임페라토르 이그라혼의 도시.> 안젤리아드의 중앙광장은 하얀 대리석 블록으로 포장이 되고 거대한 건물들 에 둘러싸여 있어 마치 왕궁의 홀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이곳에 아름 답기 그지없는 분수가 있었다. 라혼은 그 분수를 둘러싼 벽면에 새겨진 글 귀를 읽으며 쓴 웃음을 지었다. 분수는 반왕을 중심으로 그에게 충성을 맹 세했던 기사들과 전사들, 마법사들이 조각되어 있었다. “당시엔 지위가 낮았던 놈들도 같은 자리에 있군. 그들은 나중에 일국을 세운 왕이 되는 자들인가?” 라혼은 로므아스 마을에서 세실리아에게 신변에 위험이 있음을 경고를 하고 마을을 떠났다. 원래는 신분을 밝힌 후 세실리아 편에 서서 문제를 해결해 주고 그 가문의 지지를 얻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호위기사가 보인 태 도에 라혼은 위험에 빠진 상속녀를 돕는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알았다. 그녀가 정말 위급한 상황이었다면 끝까지 도움을 줄 수도 있었지만 블러드에게 연락하여 전후사정을 알아본 결과 그녀의 어머니 와 외가 쪽 기사들에 의해 이미 음모를 꾸민 숙부란 작자를 해결했다는 말 에 신경을 끊고 여행을 계속해 안젤리아드 공화국으로 왔다. 안젤리아나드, 안젤리아드 공화국은 아직까지도 전설을 간직한 도시였다. 안젤리아드 공화국 사람들은 퀸 바라니아만을 남기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아발론으로 몸을 피한 반왕이 다시 돌아와 왕이 되어줄 것이라고 굳게 믿 고 있었다. 역사서엔 마고 정복군 최고 사령관 바슈 더 하레스의 개선식이 열릴 때 독 대거에 찔려 숨을 거두었고 그 시신이 안젤리아드로 옮겨졌다고 되어 있으나 유명한 반왕의 유언은 안젤리아드의 궁성에서 나온 말이고 상 처를 치유하기 위해 한적한 섬, 아발론으로 옮겨갔을 뿐이라고 믿는 것이다 . 그들은 9서클 마스터라는 인간으로서 신에 가까운 능력을 보유하고 있던 그 랜드 위치 피오레나가 무슨 방법이던 실행 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 른바 민간에서 믿는 단순한 믿음이 아니다. 안젤리아드에 마법사의 탑을 세 웠던 대 현자들이 사람을 가사상태로 만들어 독이 중화될 때까지 천년을 기 다릴 수 있다는 말을 하였기에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반왕을 기다렸다. 안젤리아드의 공화정은 단순했다. 100명의 시민이 1명의 백인장을 뽑고, 그 10명이 모여 다시 1명의 천인장을 선출했다. 그리고 12명의 천인장이 1명 의 만인장을 뽑고, 그 만인장들이 모두 모여 10~20인의 위원회를 선출했다. 안젤리아드 공화국은 바로 십인위원회에 의해 통치되었다. 천년전 반왕이 남긴 영광된 이름으로 유지되는 안젤리아드 공화국은 시드그람 대륙을 통틀 어 열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국이었지만 ‘가만히 있을 때만 강국’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었다. 대륙각처에서 아직도 건재함을 과시하는 기간트 귀족 들이 안젤리아드 내에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고, 안젤리아드 내정에 깊숙이 관여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외교적인 문제가 발생 했을 경우 기간트들 의 로비에 결국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거나 대응하는 방식도 강력하지 못했 다. 이것은 백인장, 천인장, 만인장, 십인위원회로 이어지는 통치계통이 막 대한 자금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원래 전투에 나서서 싸울 때 기능을 발휘하는 그것이 천년의 평화로 인해 순수한 정치체제가 되었고 선거에서 돈으로 표를 사는 행위가 공공연히 이루어지니 정치를 하는 입장에선 막대 한 자금이 소모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자금 중 일부는 기간트들에게 서 나와 안젤리아드의 십인위원회는 그들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인민을 착취하고 표를 얻기 위해 자선을 한다.” 라혼은 안젤리아드 시민들이 공화국 정부를 비꼬는 말에 동감했다. 돈이 곧 권력인 안젤리아드의 깨끗한 광장은 인민에게 돈을 주기 위해 끊임없이 청 소를 시켰기 때문이었다. 돈으로 표을 사는 행위를 금지하기 위해 직접적으 로 돈을 주는 것을 금지시키자 공공사업이라며 광장청소 같은 것을 시킨 후 보수를 주었다. 10명의 청소원이 하면 될 일을 130여명이나 투입하니 야외 광장의 깨끗함이 유지 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라혼은 그렇게 도시를 둘러보고 분수에 서서 북서쪽과 남서쪽으로 나있는 길을 번갈아 보았다. 북서쪽에는 드워프들의 도시가 형성되어 있는 불칸화 산으로 가는 길이었고 남서쪽은 포렌데 해로 나가는 항구가 있었다. 드워프 들에겐 한가지 물건과 천년전 동맹을 재확인 할 필요가 있었고, 포렌데 해 에는 아발론이 있었다. “산으로 갈까? 섬으로 갈까?” 라혼으로썬 어차피 양쪽 다 들려야 할 필요가 있었지만 문제는 어느 쪽을 먼저 선택해야 하는 가였다. 아발론은 이제 영웅이 잠든 신비와 전설의 섬 이고, 불칸의 드워프들은 오랫동안 인간의 발걸음을 거부했다고 한다. 잠시 고민을 하던 라혼은 일단 아발론 섬을 찾기로 했다. 아발론이 자신이 생각 한 그 것이 틀림없다면 엄청남 힘이 되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형님, 교활한 남쪽 돼지 놈들의 말을 믿으십니까?” “나는 그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이 식량과 무기는 못 믿을 이유가 없지 않느냐?” 게르누스, 스스로 갤의 정복자로 자처하는 그는 갤의 새로운 대공이 보내온 물자를 둘러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갤을 약탈하는 놈들을 대신 잡아달라는 것이겠지. 하 지만 나는 그들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 “그렇습니다, 형님. 우리는 이것들로 전사들을 모으고 무장시켜 주변의 제 부족들을 흡수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전사의 수는 그다지 풍족하다 보 기 어렵습니다.” “무슨 말이야. 둘째형?” 우락부락한 체구에 금발을 양 갈래로 딴 전형적인 바바리안 전사 아포릭스 는 역시 금발에 날카로운 눈매와 콧날을 가진 둘째 형 베오리우스에게 물었 다. “아포릭스,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적은 오베르그스야, 남쪽으로 내려와서 도둑질이나 하는 놈들이 아니라는 거지.” 오베르그스는 이들 3형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작자였다. 5000명의 전사를 가지고 있으며 근방의 패권자였다. 갤에서 행해지는 모든 약탈은 거의 대 부분이 그의 사주로 행해지는 것이다. 3형제 또한 그의 압력에 못 이겨 갤 로 들어왔지만 이런저런 이유를 달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오베 르그스가 이들 3형제를 치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아내된 자가 이들 형제의 친어미였기 때문이었다. 이들 3형제가 그저 평범했었다면 족장의 양자의 신 분으로 비교적 편안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형제는 독수리처럼 현명하고, 여우처럼 지혜롭고, 곰처럼 힘이 셌다. 그리고 그들의 친부가 남겨준 늑대처럼 충성스럽고 용맹한 부하들까지 거느리고 있었다. 오베르그 스의 입장에선 품안에 길들이지 못한 맹수를 키우는 입장이라 날이 갈수록 노골적인 도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오베르그스와 그와 손을 잡은 동맹자들의 힘을 게르누스 형제들이 감당할 수 없었다. 더구나 지금 그의 손엔 그들을 낳아준 어머니가 있었다. 끊임없이 반란을 부추기는 오베 르그스와 힘이 모자라고 어머니를 위해 굴종하는 게르누스는 위험한 줄타기 를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베오리우스, 네 말대로 일단은 오베르그스가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의 세력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겠지. 그리고 어머니를 그 교활한 늙은 곰에게서 빼내 와야 해.” “뭐야? 그럼 전투는 없는 거야?” “아니 일단 요새 계속 내 귀를 간질이는 놈을 만나볼 필요가 있어.” “누구?” “북풍의 기사 트라킨!” 북풍의 기사 트라킨은 최근 갤을 침입한 바바리안들에게 공포의 이름이었다 . 트라킨이 이끄는 1200명의 기병대는 그야 말로 바람처럼 나타나 바바리안 들을 습격했다. 세계를 한순간 얼어붙게 만드는 차디찬 북풍처럼 트라킨의 검은 매섭기 그지없었다. 때론 기사단과 기병대만으로 습격하는가 하면 때 론 그 무서운 강철거인을 데리고 나타나 용맹한 전사들을 산채로 짓밟았다. 그가 모습을 보인지 이제 1달이 조금 넘었지만 그의 칼에 스러진 전사의 수는 8000명에 가까웠다. 1000명 이상의 전사를 가진 부족 절반이 사라진 것이다. “그에게 포로로 잡힌 전사만 2000명 정도 된다. 우리에겐 그 2000명의 전 사가 매우 요긴하게 쓰여 질 수 있지.” “그리고 북풍의 기사를 멈추게 했다는 명성도 필요하고…….” 라혼은 안젤리아드 항구에서 배를 구입하려 했다. 그러나 문제는 라혼의 목 적이었다. 아발론을 찾기 위해 마고연안을 뒤지겠다는 말에 힘들게 구한 배 를 운용할 선원을 고용할 수 없었다. 마고연안은 전통적인 해적들의 소굴이 었고 해적들은 안젤리아드의 해군력이 미치지 않는 곳을 넘나들며 해적행위 를 하고 있었다. 그런 곳에 기어들어가 보물찾기를 하겠다는 것은 맹수 앞 에서 살찐 토끼가 서성이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의도를 숨기고 선원을 고용할 수는 없었기에 라혼은 결국 구입한 배를 몰고 마고의 시가 항구까지만 가기로 선원들과 계약할 수밖에 없었다. “가이 씨, 시가 항으로 가는 화물선단이 구성되었습니다.” “언제 출항입니까?” “일주일 후 일겁니다. 그때쯤 바람의 방향이 순풍으로 바뀌거든요. 물론 그전에 선주회의에 참석하셔야 합니다.” “그 건은 앨프릭 씨가 처리하세요. 선원들이 안젤리아드로 귀환하려면 돌 아오는 배에 몸을 실어야 하니까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라혼은 아발론 탐험대를 안젤리아드가 아닌 마고대륙의 해적소굴에서 찾기 로 했다. 아발론에 무슨 보물이 묻혀있는지 모르지만 라혼이 원하는 것은 아발론의 보물이 아니라 아발론 섬 자체였다. 그러므로 대부분 해적으로 봐 도 무방한 마고반도의 선원들을 보물에 대한 환상을 미끼로 고용할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라혼의 아리안 호가 낀 상선단은 순 풍을 타고 포렌데 해를 가로질러 시가 항구로 입항했다. 항해 중 해적선으 로 보이는 배가 몇 척 보이긴 했지만 18척의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는 선단 이어서인지 섣불리 접근하지 않았다. 그렇게 별다른 사고 없이 무사히 시가 항구에 닻을 내린 아리안 호의 선원들은 노임을 받고 일부는 다시 선단에 고용되고 일부는 술집에 처박혔다. “일단 마고연안을 뒤지려면 마고해운조합에 배를 등록시키는 것이 여러모 로 좋습니다. 마고의 해적들 중엔 조합에 가입한 배는 공격하지 않는 놈들 이 있으니까요.” “고맙습니다. 앨프릭 씨.” 라혼은 아리안 호의 선장이었던 앨프릭의 도움을 받아 아리안 호를 마고해 운조합에 등록시켰다. 그리고 선원을 모으려 했지만 이곳에서도 안젤리아드 와 비슷한 현상이 벌어졌다. “내가 충고 한마디 하지. 아무리 무법자들인 해적이지만 그들 나름대로 규 칙이 있소. 해적은 해적 나름대로 관리하는 해역이 있단 말이오. 만일 당신 이 마고의 모든 해적을 통합한 해적왕이 된다면 또 모르지만 무작정 배를 끌고 가서 자기 앞마당 같은 바다를 휘저으면 가만히 있을 놈들은 아무도 없단 말이오.” 한 경험 많은 선장이었던 자의 말이었다. 라혼은 일이 생각했던 보다 간단 치 않음을 느끼고 짙푸른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곳이 대지나 산이었다면 걸 어서 가면 되지만 바다 위의 섬을 찾는 일이다. 그것도 바다 위를 떠도는 섬을……. 아발론(Avallon) 아발론, 천 년 전에는 해적섬이라 불리며 포트엔젤이란 항구도시가 자리 했 다. 포트엔젤은 반왕에게 정복당한 후 반왕이 건재한 순간까지 포렌데 해를 지배했다. 반왕의 애인이라고도, 또는 4번째 부인이라고도 하는 퀸 리토레 이나의 영지였었고 반왕의 몸을 담은 관이 도착하자 그녀는 섬을 폐쇄했다. 그렇게 천사의 항구는 포렌데 해의 통치를 포기했고 사라졌던 포렌데의 해 적들은 다시 바다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포렌데의 뱃사람들은 포트 엔젤을 아발론으로 바꾸어 불렀다.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자욱한 안개 바다 너머 누구도 찾을 수 없는 섬은 그렇게 전설이 되었다. “Mr. 퍼펙트를 찾아 왔어요.” “…….”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항구의 선술집. 한때 잘나가던 뱃사람이었음직한 술집 주인에게 로브로 얼굴을 가린 가녀린 체구의 여자가 은화 한 닢을 내밀며 물었다. 주인은 그녀가 내민 은화를 말없이 바라보다 집어 들어 통에 넣고 는 아무런 말없이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 여자는 선술집 주인이 가리킨 방향에 테이블에 두 발을 올려놓고 의자에 기 댄 채 팔짱을 끼고 잠을 자는 사람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여자는 그가 자 신이 찾는 Mr. 퍼펙트라는 건지 아니면 그에게 물어야 한다는 건지 판단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주인에게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질문을 하려 했 지만 선술집 주인은 그녀를 외면한 채 컵을 닦는 일에 열중했다. 여자는 그 런 그의 태도에서 더 이상 물어보지 말라는 강렬한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여자는 긴 한숨을 내쉬고 술집주인이 지목한 남자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어, 당신이 퍼펙트인가요?” “…….” 챙이 넓은 모자를 눌러쓰고 선술집 테이블 하나를 장악한 채 잠을 자던 사 내는 모자를 들고 자신의 휴식을 방해한 존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물음은 대답하지 않은 채 짜증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스틸! 내가 쉬고 있을 땐 방해하지 말랬잖아?” “벌써 일주일째 자리만 차지하고도 말이 많군. 그 숙녀분이 일주일치 자릿 세를 대신 냈으니까 받아둔 것뿐이야!” “쳇 치사한 놈. 무슨 일입니까? 레이디.” 여자는 사내의 무례한 태도와 정중한 어투간의 갭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조 금 어리둥절한 기색을 보이다 이내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 “후우. 당신이 100미터 밖의 동전도 맞춘다는 퍼펙트가 맞나요?” “날 그렇게 부르는 놈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화를 시작할 때 먼저 자신 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요? 오랫동안 무례하기 그지없는 뱃사람들 틈에서 있 기는 했어도 그새 예법이 바뀐 것은 아닐 테고…….” 여자는 사내의 말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루시라고 합니다. 마법사이고요. 듣자하니 당신은 아발론을 찾고 있 다고 들었습니다.” “…….” “하지만 혼자 찾는 것보다 동료가 있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레이디 루씨…….” “그냥 루씨라고 부르세요.” “루씨 양, 제가 아발론을 찾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섬을 찾은 후 보물을 나눌 생각이 없는데 말이오.” “아니 보물은 나눠야 합니다.” “그럼 교섭 결렬입니다. 안녕히 가시오, 레이디.” 사내의 단호한 축객령에도 루씨는 오히려 입가에 미소까지 머금으며 말했다 . “12척의 배를 포렌데 바다에 제물로 바치고도 여전히 어리석군요.” “…….” 퍼펙트는 퍼펙트 샷이란 별명에서 만들어진 이름이었다. 3년 전 홀연히 나 타나 아발론을 찾겠다며 무작정 배를 이끌고 바다로 나가던 의문의 사내였 다. 하지만 과거에도 반왕의 보물을 찾으려는 사람은 있어왔기에 그것은 이 야기 축에도 끼지 못하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난파당하고 조난당하고 툭하 면 해적들과 싸워대는 등……. 포렌데 전역의 술집에서 그의 이야기가 회자 되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지금 귀신같은 활솜씨와 더불어 12척이나 되는 배를 바다에 제물로 바친, 악운의 대명사가 되었다. “아발론은 무작정 바다를 헤집는 다고 찾아지는 것이 아니에요. 아발론으 로 가려면 언제나 아발론을 가리키는 지침이 필요하죠.” “지침?” “그래요. 아발론을 가리키는 지침이요.” “그건 나도 알고 있지만 지침이 없는 상태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면 뭘 하 나?” “아니요. 저는 그 지침이 있는 곳을 알아요.” “흥미로운데? 그래 그곳이 어디요?” “그것은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 “…….” 사내, 아니 라혼은 루씨라는 3서클 마법사의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최소한 그녀가 잘못알고 있을 지더라도 속이려는 의도는 없는 것 같았다. 라혼은 장장 3년이나 포렌데 바다를 헤맸다. 처음엔 하늘 높이 날아올라 안 개지대를 속을 뒤졌지만 아발론은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더욱 확신했다. 아발론은 동방의 선산환도(仙山幻島)와 같은 신이 찾지 못하는 것이라고… …. 그란 지하 수백 미터 아래 도둑들의 소굴인 하이드아웃 또한 신이 존재 를 느낄 수 없는 곳이었다. 천년전 그 곳이 해적들의 소굴이었을 때, 섬은 한 장소에 있었다. 그러나 배를 타고 기억을 더듬어 그곳을 찾아갔지만 섬 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래서 라혼은 배를 이끌고 바다로 나아가 무작정 떠 다녔다. 의심나는 곳이 있으면 가보고 주변을 살피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 았다. 그리고 지금은 섬 자체가 포렌데가 아닌 큰 바다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대양항해가 가능한 배를 조선소에 주문한 상태였다. 3년 간 12척이나 바다에 제물로 바친 대가로 라혼은 누구보다 뛰어난 선원이 되 었으며 포렌데 해의 구석구석을 라혼보다 잘 아는 사람 또한 드물 정도였다 . 포렌데 해보다 몇 백배 넓은 대양을 뒤질 각오를 하던 라혼에게 뜻밖의 단서를 가지고 동업을 하자는 묘령의 여인의 제안은 솔직히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당신과 나, 그리고 또 누가 있소?” “일단은 당신이 3번째예요.” “3번째? 그럼 나와 당신 말고 한명이 더 있고, 또 다른 누구를 끌어 들이 겠단 말이오?” “일단은 당신 다음으로는 없어요.” “그럼 나머지 하나는 누구요?” “캡틴 부츠예요. 사실은 그가 당신을 끌어 들이자고 했어요.” “부츠? 그 빌어먹을 해적 놈이?” 라혼이 포렌데 해에 바친 12척의 배중 4척이 바로 그의 부하를 만나 침몰했 다. 물론 부츠 해적단의 5척을 완파하고 3척을 나포했지만 라혼의 발을 끈 질기게도 잡는 그놈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었다. 서로간의 잦은 충돌 때문에 서로 상대를 어떻게든 해결하려 했고 결국 바다 한가운데에서 서로 마주하게 되었다. 싸움의 결과는 라혼이 그의 목에 칼을 들이 대고 서 로간의 일을 방해하지 않도록 협정을 맺었다. 표시는 라혼이 그의 깃발을 단 배가 접근하면 먼 거리에서 화살을 날린다는 것이었다. 파도에 출렁이는 배위에서 역시 파도에 출렁이는 배의 메인마스트에 화살을 정확히 맞히는 존재는 그다지 많지 않았기에 훌륭한 표식이 되었다. 물론 그 협정을 맺은 뒤에도 각 항구마다 놈의 사주를 받은 놈들이 습격해왔다. 물론 라혼은 그 때마다 숨어있는 부츠를 찾아내 응징했다. 그를 없애 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의 영향력으로 인해 라혼이 바다를 뒤지는 데 비교적 수월 했기에 내버려 두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틈이 있다 싶으면 다른 생각을 하는 부츠의 이름이 루씨라는 여자의 입에서 튀어 나오자 라혼은 대뜸 거친 욕으 로 반응했다. “루씨, 지금 그놈 어디에 있지?” “예?” “부츠 말이야!” “캡틴 부츠라면 선착장 자기 배에 있는데…….” 루씨는 갑자기 눈빛이 변하며 무섭게 쏘아보는 그의 태도에 움찔하며 말끝 을 흐렸다. 그러나 라혼은 그녀의 태도엔 아랑곳 하지 않고 바에서 컵을 닦 고 있는 스틸에게 소리쳤다. “놈이 일을 크게 벌일 모양이야! 적당한 곳에 숨으라고…….” “이런 젠장 부탁인데 가게 밖에서 하면 안 될까?” “봐서! 레이디 루씨, 당신도 저 친구하고 같이 숨으시오.” “예?” “당신이 지금 내 말을 따르겠다면 당신의 제안을 받겠소.” “무슨…….” “갑시다.” 어느 새 쇠바가지 같은 철제투구와 징 박힌 가죽갑옷까지 챙겨 입은 스틸이 루씨의 손을 잡아끌자 라혼은 에텔 스페이스에서 스프링이 보를 꺼내들고 가게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골목길 귀퉁이를 겨누고 화살을 쏘아 보냈다. -핑! -티, 팍! 라혼이 발사한 화살은 건물 벽에 부딪혀 방향을 꺾더니 몸을 숨기고 있던 사내의 가슴에 틀어박혔다. “빌어먹을 들켰다. 모두 쳐라!” -우와~! 좁은 골목에 수십 명이 한꺼번에 몰려들자 라혼은 활과 화살에 마나를 주입 해 탄성과 관통력을 높이고 시위를 놓았다. -핑! -파파파파파파! 그러자 화살은 골목을 가득 메우며 달려드는 십여 명의 사내들의 몸통을 통 째로 관통하고 건너편 건물에 박혔다. 라혼이 한번에 화살을 3대씩 눈에 보 이지 않는 속도로 난사하자 좁은 골목길은 순식간에 주검들로 넘쳐 났다. 그러나 습격자들은 물러서지 않고 계속 밀려들었다. 라혼은 뭔가 마음에 들 지 않는 표정을 짓고 눈살을 찌푸리며 스프링이 보를 에텔 스페이스에 집어 넣고 대신 팔시온을 꺼내들었다. “우아아압~!” 라혼은 초승달 모양의 황금빛 오러 블레이드를 난사하며 자신을 공격하려 한 놈들을 통째로 베어버렸다. 바로 최상급 소드 마스터의 증거인 허공을 격하고 오러 블레이드로 공격하는 플라잉 오러 블레이드(Flying Aura blade )였다. 근거리는 플라잉 오러 블레이드로 원거리는 스프링이 보로 사냥하며 순식간에 장내를 평정한 라혼은 이 일을 사주한 놈이 있는 여관으로 천천 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 이럴 수가…….” “꿀꺽~!” 그 동안 퍼펙트라 불리는 사나이는 피를 보는 것을 저어했다. 그러나 오늘 은 피에 미친 사신같이 사정보지 않고 사람들을 베어 넘기자 망원경으로 그 것을 지켜보던 캡틴 부츠는 새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공포에 떨었다. 그리고 그 유혈극을 벌인 당사자가 바로 눈앞으로 뛰어내리자 숨 쉬는 것조차 잊 었다. “퍼, 퍼펙트!” “내게 보낸 그 여자의 정체가 뭐냐?” “…….” 라혼은 해적선장 부츠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그의 항해사와 부선장의 목 을 베었다. 섬광조차 보이지 않는 빠른 손놀림이었다. -텅, 터덩! “허헉! 방금까지 살아있었고 자신과 농담까지 주고받던 사람의 머리 3개가 땅에 구 르자 부츠는 기겁했다. “다음은 진짜 네 오른팔과 왼팔이다. 아는 것이 있으면 어서 말하는 것이 좋을 거야. 캡틴 부츠!” “그, 그녀는, 루씨 양은 코라트 왕국의 고, 공주다.” “공주? 흥미롭군. 계속해봐!” “내가 아는 것은 그것뿐이다. 40년전 코라트는 타라곤 왕국에 병합되었어. 그녀는 코라트 왕국의 부흥운동을 위해 아발론의 보물을 찾으려는 거야. 내가 아는 것은 그것뿐이야!” “그럼 날 공격한 그 해적분장을 한 그놈들은 타라곤의 군인들이겠군. 어쩐 지 화살 1개에 흩어지는 어중이떠중이 해적 같지 않더라니…….” 라혼은 처음, 아니 2번째 십여명의 몸을 관통하는 화살을 보여줬는데도 불 구하고 달려드는 해적들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 정도 실력행사를 하 면 물러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전의를 잃 지 않고 몰려들자 사정을 보아 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타라곤에 날 코라트 왕국 부흥운동의 무척 중요한 인물이라고 소개를 했겠군? 그렇지?” “…….” 라혼은 부츠가 보물섬이라고 알려진 아발론을 찾을 수 있는 단서를 양보했 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 지난 3년간 라혼은 아발론을 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했다. 그냥 무작정 바다를 뒤지는 일은 물론이고 아발론에 다녀왔다는 선원의 후손이나 그 선원의 이야기를 들었다는 자들의 이야기 까지 모조리 수집하고 연구했다. 그중에는 과거 아발론이 포트엔젤이라는 해적소굴이었던 시절 그곳을 찾을 수 있게 하는 지침에 관한 것도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섬을 가리키는 지침 따윈 없었다. 마법적인 작용으로 어 디에 있건 마법수정구 같은 것을 가리키는 마법아이템이 있었다. 그것이 섬 에 있고 그 수정구를 가리키는 지침이 있다면 그것을 이용해 안개 자욱한 바다 한가운데 섬을 드나들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마법수정구가 섬을 벗어난다면? 지침은 더 이상 섬을 가리키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알고서도 루씨라는 여자에게 관심을 보인 이유는 이제 스물 한 두어 살 정도의 젊은 나이 이면서도 3서클 마법사라는 점이다. 그 정도 재능을 가진 마법사라면 친구가 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것뿐이다. 아발론(Avallon) 왕국-제국의 전쟁은 장장 7년을 지루하게 끌며 이어지다 1년 전에 겨우 끝 이 났다. ‘7년전쟁’으로 명명된 왕국-제국 전쟁에서 프린든 왕국은 프린 든 왕국대로 실질적인 전쟁당사자가 된 갤은 갤 대로 얻은 것 없이 잃은 것 만 많은 전쟁이 되었다. 프린든 왕국이 갤의 남부 영토 일부를 점령했지만 사우스포트를 완전히 제국에게 내준 것은 뼈아픈 실책이었다. 갤은 갤 대로 갤의 대공이 된 트라얀 대공의 입지가 굳혀진 것 외에 북부 바바리안의 남 하로 머리에 불덩어리를 이고 있는 형상이 되었다. 비록 최근 두각을 나타 내는 젊은 부족장 게르누스가 트라얀 대공과 손을 잡고 있어 약탈행위는 줄 었지만 그와 그의 두 형제의 역량이란 두려운 것이었다. 7년 전쟁의 최대 수혜자는 다름 아닌 다크 프린스였다. 그는 이 전쟁으로 전 대륙에 이름을 떨쳤고, 그와 함께하기로 한 기사들 또한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명성을 얻었다. 다크 프린스의 부동의 후견인인 로카데 차이저 반 하이슬란드 백작은 제국연합군의 총사령관으로서 동 프린든에 막강한 영향 력을 가지게 되었으며 트라얀 반트 세나데온 콰이스 폰 갤 대공은 갤에서 확고부동한 지위를 확보했다. 또한 압도적으로 유리한 장기에서 스스로 악 수를 둔 귀족원은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고, 사실상 전비를 부담한 시민계급의 성장은 눈부셨다. 그들은 대부분 민중파인 다크 프린스의 열렬 한 지지자이기도 했다. “아버님!” “오! 어서 오너라!” “작위를 새로이 받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너도 소식을 들었나 보구나.” 콘라드 남작은 오랜만에 귀환한 듬직한 아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자랑스러워 했다. 콘라드 남작은 라혼에 의해 제국의 영토로 완전히 복속된 사우스포트 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도시총독이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라혼의 몬타 나 해군창설계획을 이어받아 순수 전투 목적의 전함만 3척이나 운용하는 책 임까지 맡게 되었다. “사람들 말론 아버님께서 백작 작위를 받게 된다고 들었는데…….” “하하하, 네가 이 아비를 너무 낮게 평가하는 구나.” “그럼?” “사우스포트 후작이다.” “후작이라고요?” “그리고 네 장인은 공작이 될 거다.” “예에?” 트라킨은 아버지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전쟁을 수행하는 내내 이가 갈 리도록 발목을 잡는 그란의 제국 귀족원과 대립해야 했다. 그런데 어떻게든 자신의 가문과 장인인 마스터 차이저의 힘을 깎아 내리려고 안달하던 귀족 원이 어떻게 그런 파격적인 일을 가결할 수 있는지가 의문이었다. “하지만 귀족원이 그것을 인정할리 없지 않습니까?” “물론 일부 귀족의원들은 그런 일에 절대 반대를 했지. 하지만 이제 그란 귀족원엔 그런 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야.” “예?” “몰랐느냐? 지금 그란에 민회가 생겼다는 것을…….” 트라킨은 평민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조합과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민회가 작위까지 만들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민회는 단순히 평민들이 이익을 위해 만든 것이지 않습니까?” “표면적으로는 그렇지 하지만 그 민회를 이루는 위원들이 귀족의회에 의석 을 가진 의원들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예?” 신성 시드그람 제국과 프린든 왕국 간에 벌어진 7년의 전쟁은 전쟁의 한쪽 당사자이면서도 평화롭게 지내던 제국의 여느 귀족들로부터 현 제국 귀족원 이 그 역량을 의심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미 다크 프린스의 활약으로 전쟁이 벌어진 그해에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는 상태 에서 공을 세운 다크 프린스에게서 절대지휘권을 회수한 일은 결과적으로 전쟁을 길어지게 한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세상의 보는 눈이 두려워 그의 부친에게 군대를 맡겨 놓고도 제대로 지원을 하지 않고서 종전협상에 무심 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사실이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어찌된 일인지 대륙의 북부에서 벌어진 일들이 순식간에 제국전역의 술집에서 이야기되고 전쟁에서 용감히 싸운 기사들의 이름으로 건배를 했 다. 다크 프린스라는 이름으로 엮인 신흥세력과 제국의 기존 기득권 세력의 알 력다툼을 모르는 입장에선 넉넉한 자원이 있으면서도 고의로 전쟁을 끝내지 않는 귀족원에 의심의 눈초리를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프린든 왕 국연합과 7년 만에 종전 강화가 이루어진 후 귀족원은 새로운 얼굴로 채워 지기 시작했다. 이른바 시민을 보호하는 호민위원이면서 귀족원에 의석을 적극적으로 확보한 사람들이 그들이었는데 그로 인해 콘라드 남작에겐 후작 작위가 로카데 차이저 반 하이슬란드 백작에겐 공작 작위가 수여된 것이다 . 이것은 민중파로 불리게 되는 당파의 정치적 선언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되어 다크 프린스는 제위에 오를 기반이 마련되게 되었다. ” “라혼이 황제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다. 7년전 라혼이 사우스포트를 떠나지 않고 레기온과 반란을 일으켰 다면 이런 결과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보거라 그를 후견하는 후견인인 네 장인과 트라얀 대공, 그리고 내가 있다. 뿐만 아니라 그란의 민회는 라 혼의 발의에 의해서 만들어 졌어. 그래서 그란의 시민들은 아직도 그를 잊 지 않고 있다.” “…….” “그리고 그란 한복판에 있는 포룸 마그나는 시민들로 하여금 라혼이 자신 들과 함께 있는 느낌을 주지.” 트라킨은 사우스포트를 몰래 도망치듯 떠나던 라혼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미 소를 지었다. 3년이나 10년후 에 돌아오겠다고 하며 떠났지만 돌아올 때라 면 바로 지금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녀석 그러고 보니 골치 아픈 일을 피하려고 도망친 거였군. 하지만 녀 석이 원하는 무대가 만들어 졌으니 돌아올 때가 되었나?’ *** 마고반도의 나린탄 항구에서 벌어진 학살극에 대한 소문은 바람을 타고 포 렌데 해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멸망한 코라트 왕국을 부흥하려는 비밀결사 와 그것을 토벌하려는 타라곤 왕국의 병사 간의 피비린내 나는 암투라고 하 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표면적으론 퍼펙트와 캡틴 부츠의 해묵은 싸움이었다 고 소문이 났다. 캡틴 부츠는 포렌데에서 악명 높은 해적선장으로 수십 척 규모의 해적선단을 이끌고 있는 자였고, 반면에 퍼펙트는 3년전 포렌데에 나타나 아발론을 찾겠다며 온 포렌데 바다를 헤매는 의문의 사나이였다. 처 음 그가 자신의 배를 이끌고 바다로 나왔을 때 잦은 충돌이 있었는데 귀신 같은 활솜씨와 일당백의 검술로 자신의 구역에서 활개 치는 그를 손봐주려 던 해적들이 오히려 나가 떨어졌다. 그러던 중 남 포렌데 해의 패자인 캡틴 부츠의 해적선단과 정면으로 맞서게 된 퍼펙트는 부츠 해적단마저 물리침 으로써 그의 상징인 백발백중의 화살이 보이면 해적들이 알아서 피하게 되 었다. 그러나 부츠의 집요한 성격으로 인해 퍼펙트와 그의 부하들 간의 충 돌이 그 후에도 몇 번이나 있어왔다. “그게 정말인가?” “예, 생존자의 증언도 그렇고 현장에 남은 흔적을 봐선 그 정도의 실력자 가 확실합니다.” “골치 아프군. 이미 멸망한 코라트에 그런 실력자가 남아 있었다니…….” “최상급 소드 마스터면 탈로스를 맨몸으로 상대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8 년전 신성 시드그람의 다크 프린스가 프린든 왕국의 탈로스를 탈취한 사례 가 있습니다. 마법사들이 말하길 탈로스가 가진 골렘의 자아를 붕괴시킨다 면 탈취는 충분히 가능할 것이랍니다. 세상에서 베지 못할 것이 없다는 오 러 블레이드로 탈로스의 엑스시온에 충격을 주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상급 소드 마스터 정도의 존재라면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그때 선장실의 문이 열리며 항해사가 말했다. “제독님, 캡틴 부츠의 화이트호스 호를 발견했습니다.” “뭐야? 추적해라! 아무리 놈이라도 바다위에선 그다지 힘을 쓰지 못할 것 이다.” “옛!” 제독의 명령이 떨어지자 타라곤 해군함대의 갑판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또 한 기함의 선수와 선미에서 붉고 푸른 깃발이 이리저리 움직였고 기함과 기 함을 따르는 3척의 전함들은 일제히 돛을 내리고 노를 끄집어냈다. 멀리서 그러한 모습을 확인한 라혼은 손가락에 침을 묻혀 바람의 세기를 확 인하고 명령했다. “부츠 부선장 전투를 준비해라!” “에? 빌어먹을 저건 타라곤 정규 함대야. 오로지 전투를 위해 설계된 배라 고!” “나도 알아!” “내 화이트호스는 덩치 큰 성과 같은 배야. 직접 전투에 투입하기에 너무 둔하다고…….” “그것도 알아. 하지만 걸어온 싸움 피할 생각은 없다. 부선장!” 라혼은 나린탄에서 사고를 치고 그 즉시 캡틴 부츠 해적단의 기함이인 화이 트호스에 몸을 싣고 항구를 떠났다. 물론 루씨도 함께였다. 그리고 그녀가 지닌 아발론을 가리킨다는 지침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침로를 잡고 항해를 계속했다. “그제 아침에 본 그놈들이 우리의 위치를 저들에게 알려주었나 보군.” 라혼은 전 포렌데 바다에서 자신의 명성을 떨치게 한 스프링이 보를 꺼내들 고 타라곤 해군함대가 사정거리 안으로 접근하길 기다렸다. 그때……. “퍼펙트! 순순히 항복해라! 그렇지 않으면…….” -슉! 팍! -컥! “꺄아~!” 부츠의 부하해적 하나가 루씨를 잡고 협박을 시도하려다 라혼이 쏜 화살을 목젖에 맞아 뒷머리로 화살촉을 보인 채 그대로 쓰러졌다. 반면에 루씨는 곁에 있던 해적이 갑자기 입을 막으며 목에 단검을 들이 대자 크게 당황했 다. 그리고 그가 뭐라고 소리치자 몸을 돌린 퍼펙트의 화살이 그의 입속에 틀어 막히며 피가 튀자 자신도 모르게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나 정작 라혼은 그런 루씨를 무시한 채 스프링이 보를 에텔 스페이스에 집어넣 고 팔시온을 꺼내 넋 나간 표정을 하고 있는 부츠를 정수리부터 가랑이까지 쪼개 버렸다. -쫘~ㄱ! 실제론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해적들의 머릿속에선 사람의 몸이 반쪽으로 갈라지는 섬뜩한 소리가 울렸다. “퉛!” 라혼은 혀끝으로 느껴지는 듯한 피 맛을 뱉어내며 반월도 형상의 팔시온을 들어 해적들을 가기키며 말했다. “나랑 같이 싸울래? 나한 테 죽을래?” “…….” 그러나 누구도, 아무도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라혼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 가 화이트 호스호의 조타수의 목에 팔시온을 갖다 대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 다. “싸, 싸우겠습니다. 캡틴 퍼펙트!” “다른 놈은?” “싸웁니다.” “좋아! 루씨양 파이어볼 주문 할 수 있소?” “하, 할 수 있어요.” “그럼 주문을 준비해 주시오.” “하, 하지만 제가 가진 매직파우더론 1번의 파이어볼 밖에는 만들 수 없어 요!” 매직 파우더(Magic powder)는 마법사가 주문을 이룰 수 있도록 보조하는 가 루였다. 학파에 따라 전통적으로 보석(保石)을 사용하기도 하고 물약을 사 용하기도 했지만 가장 일반적인 것은 바로 매직 파우더를 이용하는 것이다. 보석은 사용하기 까다롭지만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고, 물약은 가장 효 과적이지만 휴대가 불편했다. 매직 파우더는 각 속성이 정해져 있는 단점이 있지만 휴대가 간편하고 사용하기 편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럼 조심해야겠군. 주문을 준비 했다가 위급할 때 한번 사용하시오.” -텅! “캬아~!” 쇠뇌였다. 거의 투창 두께의 화살이 화이트호스의 뱃전에 박히는 소리였다. 대략 십여 개의 화살이 날아와 1,2개가 배에 박혔지만 그것만으로도 이미 기가 죽어있는 해적들의 전의를 꺾어 놓았다. 라혼은 어차피 억지로 싸움에 뛰어드는 입장인 그들에게 용감히 싸워 줄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적함이 흩어져 포위망을 구축한다.” “목표는 적 함대의 기함이다. 최고속도로 기함만을 노린다.” “충돌속도로! 최속전진!” 그러나 숙련된 뱃사람들답게 배를 움직이는 데엔 단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 었다. -깡! “루씨, 파이어볼!” 라혼은 선수에 서있는 자신을 노리고 정확하게 날아든 쇠뇌 화살을 쳐내며 소리쳤다. “준비되었어요.” “그럼 조준하시고 발사!” “파이어볼Fireball!” -화르르르~! -쿠하! [파이어볼Fireball]은 폭발성을 가지고 있으며 불덩어리로, 불꽃이 사방으 로 흩어지면서 부차적인 타격을 주는 공격주문이었다. 선박 자체가 불에 잘 타는 나무로 만들어져 있는 이상 이보다 더 위력적인 것이 또 없었다. 그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선수에 [파이어볼Fireball] 공격을 받고 불이 붙은 타라곤 함대의 기함은 단숨에 혼란에 휩싸였다. “적함에서 떨어져라 배에 불이 옮지 않게 해야 한다! 하드보드, 자입한다. ” 화이트호스의 조타수는 타라곤 함대의 기함이 마법사의 주문에 불타오르자 키를 좌현으로 크게 꺾으며 바람을 후방에서 받는 상태로 돛을 움직여 방향 을 바꾸는 자입을 시도했다. 급격하게 가까워지며 충돌하려는 기함이 어떤 수를 쓰기도 전에 불타오르자 화이트호스의 입장에선 타라곤 함대의 기함이 육탄으로 들이 받는 형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본래 해전에선 서로 배를 들이 받듯 달려들다가도 적당한 거리에서 속도를 줄이며 서로 선회하여 상 대의 갑판을 난입해 전투를 치루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같이 죽자고 덤벼드는 꼴에 다름 아니었다. -끼이이익~! 갑작스런 움직임 둔중한 화이트호스 호는 비명을 지르며 선체 전체가 잠시 기울어 졌다. 다행이 뒤에서 바람을 받는 풍상 측에 위치했기에 그나마 민 첩한 움직임을 보이는 화이트호스였다. “후우~! 이제 우리가 풍하 측이다. 돛을 완전히 접는다.” 해전에 익숙한 화이트호스의 조타수는 재빨리 상황을 정리하고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라혼은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화이트호스와 가장가까이에 있 는 기함을 보호하는 호위임무를 띤 배를 가리키며 지시했다. “다음은 저거다. 적함은 우현으로 접근한다.” “스타보드, 우현 전타, 배를 선회한다.” 라혼의 지시가 떨어지고 조타수의 외침이 갑판을 울리자 해적들은 그것에 맞는 움직임을 보였다. “루씨 양, 괜찮소?” “하아, 하아 저는 괜찮아요.” 무리한 마법운용으로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루씨의 상태를 살피던 라혼은 그녀를 보호하던 해적에게 지시 했다. “그녀를 안으로 데리고 가서 쉬게 하라!” “예.” 이쪽의 의도를 알아챈 타라곤의 함선은 용감하게 마주 달려오기 시작했고 라혼은 선수로 나아가 스프링이 보를 꺼내들었다. 그러나 아직 남아있는 타 라곤 해군 함선은 2척이나 더 있었다. 라혼은 멍하니 자신을 주시하는 해적 들을 둘러보고 스프링이 보를 에텔 스페이스에 집어넣고는 팔시온을 꺼내들 고 그대로 힘껏 내던졌다. “뭐 상관없겠지. 플라이트 소드(Flight sword)!” 황금빛 오러 블레이드를 진하게 머금은 팔시온은 긴 호선을 그리며 쇠뇌를 쏘아대며 접근하는 적함의 메인마스트(Mainmast 주 돛)을 부러트리고 배의 중심 뼈대를 이루는 선저의 용골까지 부숴놓았다. -퍽! 우지직~! “이, 이럴 수가…….” 해적들은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바라 보았다. 황금빛으로 물든 칼이 수십 미터 밖의 배의 주 돛을 부러트려 버린 것이다. “다음은 저거다.” “…….” “조타수!” “예? 예, 하드보드 돛을 올려라.” “적함이 도망친다!” “추적하지 마라. 전장을 이탈하라!” “자입, 스팽커 붐 홀 인 전장을 이탈한다.” -이겼다! -아자! 아자! 아자! 비록 그다지 원하지 않은 항해였고, 뜻하지 않은 전투였지만 해적들은 기가 막힌 대승에 환호했다. 한편 라혼은 돌아왔어야 하는 팔시온이 돌아오지 않자 미간을 좁혔다. 플라이트 소드 기술은 무기에 마나를 심어 의지에 따 라 움직이게 하는 기술이었다. 그런데 그 무기가 의지를 벗어나 바다 속으 로 가라앉았다. 라혼은 그 즉시 선장실로 가서 현 위치를 기록하고 안젤리 아드에 소재한 도서관에서 구한 천 년 전 당시 고지도의 사본과 대조했다. “이런 젠장!” 아발론, 아니 해적섬 포트엔젤은 바로 그곳에 있었다. 아발론(Avallon) 짙푸른 바다 청명한 하늘. 한때 이 바다를 주름 잡던 해적 선장의 배였던 화이트호스 호가 그곳에 떠 있었다. 섬을 찾아 3년을 헤맸다. 지금 항로는 그간 숱하게 왕복했던 바로 그 항로였다. 라혼은 일단 전장에서 벗어나 타 라곤 함대가 전장을 정리하고 떠난 후 다시 그때 그 지점으로 돌아왔다. “수중호흡주문은 물속에서도 지속시간 내에 자유롭게 호흡할 수 있어요. 하지만 제 주 전공 주문이 아니니까 지속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거예요.” “알겠소. 하지만 나는 물속으로 들어가지 않을 거요. “예?” 루씨는 퍼펙트와 해적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바로 방금 전에 이 배의 원래주인이 그의 손에 살해되었다. 이들은 바로 죽은 그의 부하들이었던 것이다. “알았어요. 그럼 혼자 들어가 볼게요.” “이 끈을 허리에 묶으시오.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신호를 보내시오. 그럼 바로 끌어올려주겠소.” “알았어요. 워터 브리딩Water breathing!” -첨벙! 라혼은 루씨가 주문과 함께 물속으로 뛰어들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아 배 난간에 발을 걸치고 챙이 넓은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감각에서 루씨의 기운이 어느 순간 사라지는 것을 느끼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1시간 쯤 흘렀을까 루씨에게서 신호가 왔다. “신호입니다.” “끌어올려!” 다섯 명의 건장한 해적들이 끙끙대며 물에 잠긴 그녀의 허리를 묶은 밧줄을 잡아당겨 끌어올렸다. “에어 브리딩Air breathing!” [에어 브리딩Air breathing]은 [워터 브리딩Water breathing]의 역마법이며 디스펠(Dispell) 주문이다. 루씨는 물에서 나오자마자 자신에게 걸린 주문 부터 풀었다. 그러지 않으면 밖으로 나와서도 공기로 숨을 쉬지 못하기 때 문이다. “콜록, 콜록……. 헉헉헉헉…….” “괜찮소?” “괜찮아요.” “이곳이 아발론이 맞는 것 같소?” “맞아요. 이 아래에 사람이 지어놓은 성이 있어요. 수압 때문에 더 내려가 지는 못하지만 볼 수는 있었어요. 가라앉은 섬이에요.” 라혼은 직접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녀의 안전을 고려해 일단 참기로 했다. 장장 3년을 헤맸고 이제 찾았다. 비록 바다 밑에 가라앉 은 섬 이었지만 천년동안 그곳에 있었으니 며칠 더 지나더라도 그곳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찾긴 했지만 이래선 보물이고 뭐고 건 질수가 없겠군.” “그러네요. 하지만 상관없어요. 어차피 그다지 큰 기대를 걸지 않았으니까 요.” “앞으로 어쩔 셈이오?” “Mr. 퍼펙트, 당신은요?” “나야 타라곤 왕국과 적이 된 이상 포렌데를 떠나야겠지.” “그것은 저도 마찬가지에요. 당신을 따라가겠어요.” “날?” 라혼은 진갈색 머리에 주근깨 가득한 루씨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말 했다. “그럼 아발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겠소?” “원한다면…….” “원하오.” “그럼 포기하겠어요.” -짝! “좋아!” 라혼은 루씨의 아발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다는 말에 손뼉을 치며 좋아했 다. 그리고 캡틴 부츠의 부하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미안 하지만 너희들은 여기서 죽어줘야겠다.” “……!” “헉!” “무슨…….” 라혼은 에텔 스페이스에서 롱소드 한 자루를 꺼내 황금빛 오러 블레이드를 덮씌우며 차갑게 웃었다. 그러자 해적들은 그대로 얼어붙으며 뒤로 주춤주 춤 물러섰다. “잠깐만요.” “…….” “비록 해적들이지만 그들을 무참히 죽일 이유가 없어요.” “아니 아발론이 여기 있다는 것을 안 이상 이들을 살려둘 수가 없지.” “하지만 저들이 없으면 육지로 돌아갈 수가 없잖아요.” “육지로 가는데 보트하나면 충분해! 그리고 이놈들은 부츠의 부하였어. 놈 의 복수를 하려든다면 그것도 골치 아프고 항복을 한다면 배신자야. 배신자 들은 믿을 수 없어.” 해적들은 이미 거듭 퍼펙트의 능력을 보았다. 그래서 이미 전의를 상실하여 감히 반항을 할 생각도 못한 채 그저 두려움에 떨며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 “안돼요. 그래도 일단은 우리의 일을 도운사람들이잖아요.” “그들은 바다의 쓰레기, 해적일 뿐이야.” 사실 라혼은 부츠해적단의 해적들을 진정으로 죽일 생각은 없었다. 선원으 로써 그들의 능력은 훌륭했다. 사우스포트에서 해군창설이 어느 정도 마무 리 되었는지 모르지만 전투에 능하고 배짱 두둑한 이만한 스킬(skill)을 지 닌 선원을 구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이들의 성향 이었다. 가능성이 있으면 용맹하기 그지없는 그들이지만 패색이 약간이라도 짙어지면 몸을 뺄 궁리만하는, 그들의 전투력은 그다지 가치 있는 것이 아 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투는 해병을 따로 훈련시키면 보정할 수 있으니 단순한 선원으로 이들을 끌어드릴 수 있다면 상당한 도움이 될 터였다. 라혼은 충분히 압력을 주었다고 판단하고 절망으로 물든 표정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슬쩍 살길을 보여주었다. “다만…….” “…….” “해적의 신분을 벗는다면 생각을 달리 할 수 있을지도…….” “캡틴 퍼펙트를 따르겠습니다.” “수입만 보장해 준다면 당신의 배를 타겠습니다.” “조타수?” “저도 따르겠습니다.” 라혼은 해적들이 모두 한목소리로 그렇게 이야기 하자 미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좋아! 나는 라혼 가이우스 세나데온 차이저 자작, 신성 시드그람 제국 프 린스 그란, 그란의 왕자다. 너희들은 지금 이 순간 신성 시드그람 제국 해 군에 입대했다. 동의하는가?” “…….” “다크 프린스?” 바다 바람에 흩날리는 라혼의 검은 머리를 본 해적들은 그제야 퍼펙트의 진 정한 신분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들의 처지를 잊고 놀라워했다. 캡틴 부츠 의 집요함에 근 2년간 그를 추적하고 조사해 그 능력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그것은 해적들의 피 해라기보다 부츠의 피해였다. 그리고 비록 신성 시드그람 제국과 그다지 관 련이 없는 포렌데 해이지만 다크 프린스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가 스스로 반왕 이그라혼의 이름을 잇는 자라고 주장했다는 것을 상기하 자 왜 퍼펙트가 아발론 섬을 찾는데 그렇게 열정적이었는지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포렌데의 해적들에게도 반왕 이그라혼의 이름은 특별했다. 반왕은 대륙전체를 석권한 존재이기도 했지만 또한 바다 역시 석권한 존재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해적들의 바다인 포렌데를 역사상 유일하게 해적이 없는 바다로 만든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화이트호스 호의 조타수 고베르는 부츠 해적단의 전체를 모아 해적단의 주 인이 퍼펙트로 바뀌었음을 선언했고 이미 퍼펙트란 존재에 경이감을 가지고 있던 대부분의 선장들은 그가 새로운 우두머리가 되었음을 인정했다. 그리 고 그 자리에서 라혼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포렌데 해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부츠 해적단을 장악 신성 시드그람 제국의 해군력으로 만들었다. 라혼은 3개월간 부츠 해적단을 정리하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 하고 다시금 바다로 나왔다. 때마침 나린탄의 조선소에서 주문한 배가 완성되어 그것을 타고 아발론이 가라앉은 그 지점으로 온 것이다. 라혼이 조선소에서 주문한 배는 특별했다.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배는 선창을 줄이고 각종 기계장 치를 달아 혼자서도 대양항해를 할 수 있게 만든 배였다. 라혼은 적당한 지 점에 배를 정박시키고 몸 주변에 공간결계를 친후 바닷물 속으로 뛰어내렸 다. “……!” 깊고 깊은 물밑에서 라혼은 거대한 성채와 마을의 시가지의 윤곽이 선명하 게 드러나는 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흐릿한 기억저쪽에 있는 포트 엔젤의 마을, 바로 그 모습이었다. 천년이란 시간은 거의 모든 것을 변하게 했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기 마련이었다. 라혼은 어느 순간부터 외부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느끼며 성채 안으로 들어섰다. 예상이 맞는다면 이 섬은 초고대문명의 유산일 가능성이 컸다. 동방에선 반고(盤古)족이라 불리기도 하며 고대 마도 문명인 카마르게나의 마도사들이 이야기한 티탄(Titan) 신족의 이야기. 신에게 도전한, 아니 신 에게 쫓겨난 위대한 거인들의 이야기. 하늘도 땅도 깊은 바다 속도 그리고 거대한 대지의 어머니 품 밖으로 그 영역을 넓힌, 그리고 멸망의 길을 걸은 태고인들의 전설. 그리고 위대한 신들에 의해 봉인된 거인들이 남겨놓은 유산. 하늘을 나는 배, 하늘에 떠있는 도시. 라혼은 흥분했다. 감히 인간으로 신과 싸우고 또 극복해낸 자들이 남겨놓은 유산을 하나하나 찾을 때마다 진정한 힘을 느꼈기 때문이다. ‘성의 지하 깊숙한 곳에 그것이 있을 가능성이 커.’ 라혼은 과거 천 년 전엔 무심히 지나쳐 넘겼을 성채 지하에 도안된 문양들 을 세심히 살폈다. 움직일 때마다 천년의 두께로 쌓인 먼지가 퍼지며 시야 를 가렸지만 어떻게든 흔적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라혼은 과거 자신이 피 아와 함께와 묻혔을 묘에 도착했다. 그때는 비록 관에 실려 이곳으로 운구 되었지만 살아있던 상태였다. 그때 라혼이 처한 처지는 수개월간 또는 수년 간 가사상태를 유지하며 독이 중화되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의식 이 깨어났을 때 장소는 이곳이 아니라 멀고먼 동방의 해안가였다. 그때는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아발론을 찾는 과정에서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로 섬의 주인인 리토레이나가 자신의 몸이 담 긴 관을 가지고 먼 바다까지 나갔다는 것이다. 그것은 북구 바이킹들의 장 례풍습이었다. 위대한 왕이나 전사가 죽으면 망자가 가장 사랑한 여자를 배 에 태워 새로운 모험을 떠나게 하는 것이었다. 리토레이나가 북구 바이킹의 피가 흐르는 자손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덕분에 라혼은 초고문명의 존재 를 누구보다 더 많이 알게 되었고 그들이 가진 진정한 힘을 아는 존재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피아는 어디 있는 거지? 블러드 말론 수백년 전까진 모습을 보였 다고 했는데? 설마 숨이 맊혀 죽을 리는 없는데?’ 라혼은 지금은 비어있지만 자신이 누워 있는 관이 놓여 졌을 제단이 있는 방을 살폈다. 그리고 문뜩 바닥에 뻘 처럼 쌓여있는 먼지를 걷어내자 은발 의 아름다운 여자 얼굴이 나타났다. 피아였다. ‘피아!’ 세상에는 피아를 9서클 마스터 그랜드 위치 피오레나라고 불렀다. 하지만 피아는 사실 스파르토이(Spartoi)다. 스승인 위대한 고룡 에인션트 드래곤 지슈인드가 보물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이빨을 뽑아 만든 용아병(龍牙兵)이 다. 골드 드래곤이기도 한 지슈인드의 본(Bone, 뼈)의 색깔인 황금색 몸체 를 한 스켈러튼(skeleton, 해골)의 모습을 한 스파르토이는 지슈인드의 금 화를 지키는 가디언(guardian)이었다. 그러던 중 위대한 최고룡의 제자인 라혼에게 우연히 발견되어 자아를 가진 돌, 에고 스톤(Ego stone)을 심고 드래곤 로드 플래티넘 드래곤 아스카론의 피를 머금은 진흙을 빚어 아름다 운 여자의 형상으로 만든 특별한 골렘이다. 라혼은 그런 존재에게 피아라는 이름을 주고 자신의 영을 심었다.―피를 섞었다.― 피아, 피오레나가 발하 는 마법은 모두 라혼이 에텔 스페이스에서 발현하여 소환한 마법주문이었다 . 피아 자체로는 소드 마스터에 근접하는 육박전을 하는 가디언 골렘에 불 과했다. 하지만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비록 만들어진 생명체일망정 라 혼과 영이 연결된 유일한 존재였다. 말하자면 어느 장소에 있던 피아는 라 혼의 대리인이 될 수 있는 아바타르(Avatar, 화신한 사람) 같은 것이다. ‘찾았다. 그런데 왜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거지?’ 라혼은 마치 석상 같이 굳어있는 피아를 발굴해 일단 에텔 스페이스에 집어 넣고는 더욱 깊숙한 지하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 끝에서 두개의 겹쳐진 수 레바퀴 문양을 발견했다. ‘다르마차크라(Dharmachakra)다. 찾았어.’ 라혼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황금빛으로 물든 주먹으로 다르마차크라 문양 이 그려진 바위를 쳤다. -콰우우웅~! 오러 피스트(Aura fist), 철권에 기운을 실어 때리는 검술로 치자면 오러 블레이드에 비견되는 투격기술이었다. 라혼의 무지막지한 오러 피스트에 가 격당한 바위는 수중에서 비명을 지르며 갈라졌고 만년의 봉인은 해제 되었 다. 동방에 허공에 떠있는 신비한 산과 섬이 있으니, 신선들이 사는 선산환도( 仙山幻島)라 불렸다. 그리고 그것과 같은 것이 이곳 포렌데 바다에도 있었 으니 아발론이었다. 그러나 아발론은 라혼이 생각한 그런 선산환도와는 달 랐다. 차원이 다르달 까? 그란 지하 깊숙한 곳, 거대한 지하 공간인 하이드 아웃처럼 단순히 신의 눈 아래에서 숨을 수 있는 결계만이 펼쳐진 곳이었다 . 다만 하이드아웃처럼 이미 누군가 발굴을 끝낸 유적이 아닌 라혼이 최초 로 발굴하는 유적이란 점이 달랐다. 수십 톤에 달하는 바위로 봉인된 섬의 중심부에는 강력한 힘이 느껴지는 다르마차크라가 구르고 있었다. 라혼은 일단 ‘비스라 바즈라 (Visra Vajra 쌍전석, 금강저)’를 뽑아 차크라(chak ra 바퀴)를 멈추게 했다. 그리고 그것을 해체하여 모조리 에텔 스페이스에 담고서 물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비교적 선명하게 느껴지는 아발론을 확인 하고 갑판에 피아를 꺼냈다. 라혼은 여신상 같은 아름다운 피아의 몸에서 진흙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피아가 깨어나지 않는 이유를 알았다. “무슨 일이 있었군.” 진흙이 묻어 있을 때는 몰랐는데 진흙을 씻어내고 보니 뼈가 뒤틀리고 피부 가 갈라져 있는 모습이 보기에도 섬뜩했다. “휴우~! 죽은 거군. 죽어버린 거야.” 라혼은 완전히 망가진 피아의 상태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피아의 골격과 내장은 드래곤 본이었다. 그녀의 잔해는 여러모로 쓸모 있다는 것 에 만족하며 3여년에 걸친 보물찾기는 끝이 났음을 알았다. 초고문명의 완 전한 다르마차크라의 표본을 얻었고, 드래곤 본을 회수한 것은 그런대로 보 물찾기에 보낸 세월에 대한보상은 되었지만……. “착잡하군.” 라혼은 한때 자신의 아내라고 오해받을 정도로 가깝고 피아가 죽었다는 사 실에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라혼은 처음부터 정을 주려하지 않았지만 자아 를 가진 존재는 그것자체로 생명력을 가진 존재였다. 그래서 인지 아무리 물건일 뿐이다. 잔해는 귀한 드래곤 본이다. 라고 생각해도 섣불리 손을 대 는 것이 왠지 모르게 불경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 물건이다. 어차피 생명이 다한 주검은 그저 고깃덩어리에 불과 하지 않은가? 피아도 그것과 다를 바 없어 명성높은 기사들의 무기로써 새로 태 어나는 것이 이대로 묻히는 것보다 낫지.” 라혼은 그렇게 자위하며 피아의 머리에 마나를 주입했다. 아무리 마법으로 만들어진 생명체인 스파르토이지만 나름대로의 장례를 치러주고 싶었다. 일 단 보기 흉하게 뒤틀린 뼈를 맞추기 위해 마나로 스승 지슈인드의 본의 형 질을 변화하여 모습을 잡아주기 위해서였다. “음?” -라혼. 그때 머릿속에서 미약한 속삭임 같은 것이 울렸다. 그리고 그것이 점점 선 명해 지더니 이내 명확한 의사가 전달되었다. -라혼, 저 살아있어요. 슬퍼하지 말아요. 라혼은 피아의 속삭임에 자신도 모르게 환희의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본격 적으로 피아의 몸에 마나를 주입했다. 지금 피아의 상태는 죽은 것이 아니 라 단지 기운이 빠졌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살아있었구나! 살아있었어.” 라혼은 피아와 다시 영이 연결되며 그동안 피아가 겪었던 일들이 꿈처럼 환 상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섬의 영주였던 리토레이나가 섬을 찾는 도구인 지침이 가리키는 신비한 수 정구와 라혼의 몸이 담긴 관을 가지고 섬을 떠나자 결계가 발동되었다. 피 아는 라혼과 연결이 끊어지자 혼란에 휩싸여 한동안 죽은 듯이 모든 활동을 멈추었다. 그러자 섬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피아가 죽었다고 여기고 관에 넣어 본래 반왕의 시신이 안치될 방에 안치했다. 그리고 수백 년이 흐르고 섬이 무인도가 되었을 무렵 일단의 무리들이 섬에 침입했다. 그들은 섬의 여기저기를 뒤지며 보물을 찾았지만 애당초 리토레이나를 섬기던 가신들이 모두 가져간 보물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성의 여기저기를 뒤졌고 결국 피아가 담긴 관의 뚜껑을 열고 말았다. 눈을 뜬 피아는 라혼의 안식을 지켜야 한다는 판단을 했다. 그래서 섬에 침입한 모든 존재를 죽이 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 잠들었다. 그리고 다시 수백 년 후 몇 번의 침입자 를 더 몰아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지축이 흔들리는 지진이 발생해 섬은 바다로 침몰했다. -슬퍼하지 말아요. 피아는 기쁨이나 슬픔 같은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다만 영이 연결된 라혼 이 느끼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피아는 본래의 아 름다운 모습을 되찾고 눈을 떴다. 그리고 라혼의 그것과 꼭 닮은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고운 목소리로 라혼의 이름을 불렀다. “라혼.” 부츠 해적단은 우두머리가 바뀌며 큰 변화를 겪었다. 일단 소속단원을 일부 는 신성 시드그람 제국의 해군이 되어 몬타나 해의 사우스포트로 떠났고 남 은 자들은 그대로 부츠 해적단의 해적으로 남았다. 라혼은 포렌데 해에 남 은 그들에게 제국의 사략함대의 지위를 약속하고 화이트호스의 조타수였던 고베르를 대리인으로 삼아 포렌데의 해적단을 맡겼다. 또한 약간의 지원을 했음을 물론이었다. 덕분 에텔 스페이스에 있는 보화의 태반이 사용되었지 만 포렌데 해의 지분을 확보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보면 날로 먹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포렌데의 해적은 그냥 단순한 해적질만 하지는 않는다 . 그들은 마고반도와 안젤리아드, 그리고 대륙본토를 잇는 해운업자이기도 했다. 이른 무장상선인데 해적질은 그저 부업일 뿐이고 주업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악명 높은 해적단들은 자기 선단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기 단체에 소속되지 않은 배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이것이 포렌데 해적의 실체 중 하나였다. “그게 정말이야?” “그래, 부츠 패거리들이 퍼펙트에게 충성을 했다고 하더군. 들리는 말론 그가 아발론을 찾았는데 그 와중에 캡틴 부츠를 살해하고는 그 패거리들까 지 빼앗았다고 하던데…….” “그뿐만이 아니야. 타라곤 해군 함대와 전투를 벌였는데 전함 1척을 침몰 시키고, 1척은 반소시켜 버렸데. 항구로 들어온 반쯤 타버린 배는 결국 폐 기했다니 타라곤 왕국으로서는 참패도 이런 참패가 없지.” “클클클, 벨라스케스 녀석 입에 거품을 물고 있겠군.” “그렇게 말이야, 자기도 해적인 주제에 타라곤 해군제독이 되었다고 뻐기 더니만.” “어쨌든 말이야. 부츠, 아닌 퍼펙트 해적단의 규모가 커졌어. 무장선만 3 척이나 구입을 했다고 하더군. 그래서 그들의 영향력이 있는 항구에서 대대 적으로 선원들을 모으고 있데. 한번 가볼래?” 로브를 깊게 눌러쓴 루씨는 선원으로 보이는 술꾼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목 에 걸린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언제나 일정한 방향을 가리키는 코라트 왕 가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지침이 달려있는 펜던트가 전설의 아발론 섬을 가 리키는 지침이었다는 사실에 흥분하며 왕국의 부흥의 꿈을 꾸었다. 그러나 그녀가 찾아낸 아발론은 이미 바다 깊숙한 곳에 잠겨있었다. 아발론의 보물 은 결국 찾을 수 없었지만 그녀는 새로운 보물을 발견했다. 단신으로 수백 명의 타라곤 병사들을 때려잡고 타라곤 함대를 쳐부순 새로운 보석을 발견 했기 때문이었다. 그라면 어쩌면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코라트의 백성들을 구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신분은 제국의 후계자였다. 신성 시드그람 제국이 비록 타라곤 왕국에 비해 큰 나라이긴 하지만 멀리 떨어져있어 어떤 도움도 줄 수 없음을 알았다. “마법사님.” “…….” “캡틴 퍼펙트가 돌아왔습니다.” “알았어요.” 펍의 한쪽 구석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루씨는 퍼펙트가 돌아 왔다는 말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륙에서 손에 꼽히는 대도시인 안젤리아드의 선착장은 언제나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루씨는 인부들이 바삐 움직이는 선착장을 가로질러 <퍼펙트 해운>이란 간판이 걸려있는 건물로 들어섰다. “돌아오셨다고 들었어요.” “루씨 양.” “예, 말씀하세요.” “루씨 양이 회사를 맡아주었으면 하오.” “예?” “루씨 양은 마법사의 탑에서 오랫동안 공부를 했다고 들었소. 대리인 고베 르가 해적단에 속한 선장들을 관리하지만 합법적인 일을 하려면 아무래도 정식허가를 받은 회사의 이름이 있어야겠지. 안젤리아드 공화국 법에 마법 사의 탑에 소속된 마법사는 자국의 시민으로 인정한다고 했소. 그래서 루씨 양에게 부탁하는 거요.” “후우~! 알겠어요. 제가 회사를 맡을게요.” 라혼이 루씨에게 맡긴 퍼펙트 해운회사는 표면적으로 프린뱅크의 막대한 투 자를 통해 회사를 설립했고 명실상부한 합법적 기업이다. 물론 실제론 블러 드가 관리하는 유니온의 자금이었다. 퍼펙트 해운회사는 해적단과 같은 몸 체를 하고 있었지만 표면적으로는 서로 달랐다. “좋아! 여기 피아링이오.” “피아링이오? 이게 그 피아링인가요?” “그렇소. 그 피아링은 블러드라는 존재와 연결되어 있소. 고베르는 물론 각 선장들도 하나씩 가지고 있소.” “저, 전설이 사실이었군요. 당신은 진짜 반왕의 후예가 맞군요. 바다위에 떠있는 배와 마법통신을 하다니……. 이것은 오직 피아링만 가능 하다고 들 었어요.” 루씨는 자신의 피아링을 바라보며 등골이 싸해지는 느낌을 받으며 퍼펙트, 아니 다크 프린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당신은 반왕 아니, 그랜드 위치 피오레나의 비의를 얻었나요?” “비의?” “마법사의 탑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설 같은 거예요. 탈로스, 워프게이트, 피아링, 트윙 에고 스톤(Twig ego stone) 분명 반왕 그것들로 전 대륙을 통 치했다고 전해지죠. 그리고 그것을 만들 수 있을 만한 존재는 9서클 대 마 도사 그랜드 위치 피오레나 정도 일거에요. 지금도 많은 마법사들이 그것들 을 재현하기 위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있지만 결국 모두 실패하고 말았 어요. 혹시 당신은 그 비의를 발견한 건가요?” “…….” 라혼은 그녀의 뜻하지 않은 질문에 볼을 긁적였다. 그리고 잠시 뜸은 들인 후 물었다. “완벽한 신에 의해 지배되는 세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예? 무슨…….” “말 그대로 슬픔과 죽음이 없는 완벽한 세상 말이오.” 루씨는 갑자기 엉뚱한 질문으로 화제를 돌리는 그의 태도에 뭔가 있는 생각 을 하며 그다지 깊은 생각을 하지 않고 말했다. “좋겠지요. 행복이 넘쳐나는 세상이라니, 하지만…….” “하지만?” “불가능한 말이죠.” “가능하다면 어떨 것 같소?” 루씨는 잠시 침묵하더니 똑 부러지는 어조로 말했다. “타라곤 왕국이 코라트 왕국을 멸망시킨 사실이 있는 이상 저는 진정으로 행복하지 못할 테니까요. 제 행복을 위해 신이 코라트를 부흥시켜준다면 타 라곤 국왕은 불행해 하겠죠. 하지만 저는 그들이 불행해 지기를 바래요. 그 들의 코라트 왕국의 백성들이 흘린 피에 대한 값을 치러야 하니까요. 미안 하지만 세상엔 이러한 일이 너무나 많아요. 원하던 원하지 않던 희생을 하 는 것이 좋다고만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렇군. 결국 같은 이야기야.” “뭐가요?” “인간은 언제나 자유를 꿈꾸고 또 원한다는 것을 말이오.” “예?” 라혼은 답을 찾았다. 인간은 언제나 자유를 꿈꾼다. 그러나 세상엔 진정한 의미의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왕도, 아 무것도 거칠 것이 없는 유랑자에게도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가지고 있지 못 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유를 꿈꾼다. 그러한 인간의 성향이 완벽한 신이 지배하는 세상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자유의지로 신의 지배를 바 라는 자들도 있겠지만 그것을 선택하지 않은 자도 있기 마련이다. “그건 그렇고 비의를 알고 있냐고 물었소?” “예.” “당신이 비의를 알고서도 충격 받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일부 가르쳐줄 수 도 있소.” “저는 충격 받지 않아요.” 라혼은 루씨의 눈에 호기심어린 소녀의 눈빛과 지식을 갈망하는 현자의 눈 빛을 읽었다. “반왕 이그라혼이 얻어 세상을 지배하는데 사용했던 탈로스, 워프게이트, 피아링 등은 카마르게나의 마도사들의 지식이오.” “…….” “그리고 그 카마르게나의 마도사들은 지금은 사라진 초고대문명에서 그 비 의를 얻어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소.” “설마, 그 전설이 사실이란 말인가요? 태고인들 신과 대적했던 거인들이 이룩했다는 문명이 실재했다는 건가요?” “판타스몰 포스Phantasmal Force!” “앗!” 루씨는 갑자기 마법주문은 시전하는 퍼펙트를 놀랜 토끼눈으로 바라보았다. 1서클의 기본 마법주문인 [판타스몰 포스Phantasmal Force 환상]지만 그것 도 마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마법은 아무런 준비 없이 허공 어떤 물건이나 생물, 또는 물리적인 힘의 환상을 만드는 것을 보면 그가 좀 더 고위 마법주문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판타스몰 포 스Phantasmal Force]는 시각적인 것으로 이를 보고 믿는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기도 하는 주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루씨를 더욱 놀라워하게 만든 것은 마법진의 도안이었다. 견습 마법사로써 숱한 마법서를 탐독하며 갖가 지 마법진을 보았지만 [판타스몰 포스Phantasmal Force]로 만들어진 마법진 은 본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 이건?” “워프게이트의 마법진이오.” “하지만…….” “워프게이트 겉면의 마법도안은 이것과 다르겠지. 당연하지만 그 워프게이 트와 효과는 같지만 개념이 틀리니까.” “그럼 진보된 워프게이트란 말씀인가요?” “확실히 진보되었다고 할 수 있지. 반왕의 워프게이트는 반왕이 없으면 사 용할 수 없지만 이것은 반왕이 없더라도 사용될 수 있는 거니까.” “예?” 라혼은 워프게이트 마법진의 환상을 거두면서 말했다. “내가 왜 이그라혼을 자처했는지 아시오?” “…….” “내가 이그라혼를 자처한 이유는 내가 바로 이그라혼이기 때문이오.” “……?” 너무나 엄청난 진실에 직면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은 오히려 차분해진다. 루 씨도 차분해졌다. 그리고 질문을 던졌다. “제게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죠?” “첫째는 당신이 그것을 궁금해 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당신에 내가 알 려준 단서를 가지고 워프게이트를 실현해 낼 수 있는지 궁금해서요.” “…….” “사실 내가 이그라혼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소. 중요한 것은 나 아닌 다른 존재가 워프게이트와 같은 것을 만들 수 있는가요.” 라혼은 그 즉시 4장 분량의 워프게이트 마법진 도안을 그려서 루씨에게 주 며 말했다. “만일 당신이 무슨 수를 쓰든지 워프게이트를 완성시킨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카마르게나의 비의와 초고대문명인 티탄문명의 비의도 전해 주겠소.” “제가 그것을 완성시키지 못한다면 요?” “당신은 실패할지 모르지만 당신의 후세는 성공할 테지…….” 루씨에게 자신의 지식의 일부를 전한 것이 무척 잘한 일이라고 여겼다. 지 식은 공유될수록 커지는 것이지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분명 마법사의 탑 의 고위 마법사들에게 조언을 얻을 얻으려 할 것이고 자신의 존재는 자연스 레 그녀의 입을 통해 알려지게 될 것이다. 피아의 상태는 심각했다. 비록 미소를 지으며 말을 할 수 있었지만 몸이 붕 괴될 때 신체 내부의 마법진이 으스러져 석상과 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 라 혼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수리(치료)를 했지만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신체가 으스러질 때 내장을 이루는 드래곤의 피를 머금은 진흙에 바닷물 이 스며들었어.” 지금 피아의 모습은 그로테스크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가뭄에 바짝 마른 강 바닥의 그것처럼 쩍쩍 갈라진 피부가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듯이 황금색 으로 빛나는 뼈에 간신히 붙어있는 형상이었다. “결론은 용의 피를 구해 진흙을 만들어 다시 신체를 빚으면 된다는 말인데 …….” 라혼은 프리사메티를 불러 피를 얻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피아의 신체를 그전처럼 예쁘게 빚을 자신이 없는데, 다시 스승님에 게 부탁해 볼까?” 라혼은 손만 대도 피부가 바스러지는 피아를 보며 방법을 모색했다. 사실 황금색 해골상태인 스파르토이 본연의 모습이어도 상관을 없다. 그러나 앞 으로 데리고 써먹으려면 스켈러튼 모습으로 돌아다녀선 조금 곤란했다. “굳이 여자의 모습일 필요는 없으니까 갑주를 입혀 볼까? 얼굴에 철가면을 씌우고 신분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면…….”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라혼은 일단 피아의 전신에 붕대를 감아 피부와 내장 이 붕괴되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안젤리아드의 무기 점에서 전신 풀 플레 이트 아머를 구입하고 대장간에 투구를 대신할 철가면을 주문했다. 그리고 갑옷에 임시로 마법진을 그려 피아의 뇌 역할을 하는 에고 스톤(Ego stone) 과 연결시켰다. “피아, 깨어나라!” -라혼? 피아의 목소리는 그전과 같이 고운 목소리가 아닌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를 냈다. 게다가……. “움직여봐!” -끼이익, 끼긱, 끼이익 움직일 때마다 쇳소리까지 났다. “하아~!” 중년의 귀부인이 첫눈 쌓인 창밖을 보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녀는 제 국, 아니 전 시드그람 대륙에서 존경받는 귀부인중 한명이었다. 신성 시드 그람 제국 제1기사의 아내이며 다크 프린스라는 이름의 영웅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두 딸은 북방의 이름 높은 기사들의 아내였고 그녀가 안 주인으로 있는 하이슬란드의 차이저 가는 명실 공히 대륙제일의 기사가문이 었다. 그러나 그녀는 8년을 넘어 9년째가 다되도록 편지 한 장 보내 지 않 고 있는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였다. “세나, 날씨가 춥소. 이렇게 창문을 열어놓고 있으면 찬바람이 들어오지 않소? 몸이 상하겠소.” “아니에요. 처녀적 처럼 금방 감기에 걸리고 그러진 않으니까 너무 걱정 말아요. 남들은 아기를 낳고 나면 몸이 약해진다는데 저는 오히려 애들을 낳고서 체질이 변했나 봐요!” “사실은 내가 춥소. 7년이나 북국의 차가운 바람을 맞았더니 추운 건 딱 질색이 되었다오.” “어머나! 그 말을 당신을 존경해 마지않는 젊은 기사들이 들었다면 무척 실망하겠는 데요. 제국 제1의 기사가 추위를 타시니…….” “하하하하, 하지만 어쩌겠소. 추운 게 싫다는 것은 사실이니…….” 신성 시드그람 제국에서 세나데나는 최고의 귀부인(The first a Lady)라고 칭송 되었다. 그녀는 그란에 머물 때 두 딸들과 더불어 가난한 사람들을 위 해 치료소를 세우고 굶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었다. 매일 밤 사 교계 파티가 연이어지는 그란에서 남편을 전장에 보낸 귀부인은 사치와 향 락에 물들지 않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왔던 것이다. 그란의 시민들은 그녀 의 덕을 칭송했고, 과연 다크 프린스의 어머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크 프 린스 말고도 그녀의 손에 양육된 하이슬란드 공작의 시동이었던 북풍의 기 사 트라킨과 다크 프린스 제1기사 죠슈아의 용감하고 정의로운 품성은 또한 그녀의 덕이 되었다. 아버지는 존경을 받고, 어머니는 경애를 받는다. 아들은 영웅이며, 딸들은 아름답다. 사위들은 용감하고 정의로운 기사다. 그러한 가문은 시민의 힘으 로 공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바야흐로 제국에서, 아닌 시드그람 대륙 전체를 놓고서 이만한 명문가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물론 인위적으로 그렇 게 몰아가 영웅 만들기를 하는 것이 없지는 않지만 객관적으로 봐도 차이저 가는 최고의 가문을 손꼽히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세나데나는 남편의 엄살에 창문을 닫고 숯이 붉게 빛을 내며 타오르는 벽난 로 가까이 갔다. 그때 서쪽 문이 열리며 일단의 꼬마들이 그녀의 품속으로 달려들었다. “할머니!” “어머나 제온, 라킨…….” 4살의 제온은 제온 네부카드 사이스, 트라킨과 세나루나의 아들이었고 3살 의 라킨은 라킨 세나데온 차이저, 죠슈아와 세나테이아의 아들이었다. 프린 든 왕국과 ‘7년 전쟁’으로 아이들의 아버지들이 전장에 있을 때 그란에서 세나데나의 손에 키워진 아이들이었다. “이놈들 할애비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가 보구나.” “할아버지. 에! 곤작 전아 봬어요.” “곤작 전아 봬어요.” “허허허…….” 로카데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손자를 번쩍 들어 안아 올리며 너털웃 음을 터트렸다. “할아버지, 나도, 나도…….” “그래 제온도 안아보자. 이 녀석들 이젠 양팔로 안고 있기에 힘겨울 정로 도 자랐구나.” “제온, 라킨! 이 녀석들 또 할아버지 힘들게 하는구나!” 세나테이아는 눈이 쌓인 털 망토를 입은 채 홀(hall)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녀 옆에는 배가 부풀어 오른 세나루나도 함께 있었다. “어쩐 일이니, 게다가 루나까지……. 이 한 겨울에 이곳까지 아직 여물지 도 않는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을 한 거니?” “엄마는 한겨울은 무슨 여행길 대부분이 조금 쌀쌀한 정도였다 뭐! 막판에 눈 때문에 고생을 좀 했지만…….” “너는 어째 애엄마가 되었어도 철이 들지 않니.” “그래요. 어머니, 하이슬란드의 겨울이 오기 전에 도착하려고 시간을 넉넉 히 잡고 온 거예요. 올해 겨울 첫눈이 빨랐던 건 뿐이고요.” “그래도 겨울은 보내고 올 것이지.” “아이들에게 하이슬란드의 겨울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라혼도 이제 돌아 올때가 되었구…….” “세나, 루나는 홀몸이 아니잖소. 루나 어서 이리 오너라. 갑자기 추워지는 바람에 몸이 상했을까 걱정이구나.” “피! 언니만 홀몸이 아닌가?” “뭐야? 그럼 테이 너도…….” “짜자잔 이번에도 언니보다 한발 늦었지만 나도 둘째를 가졌네요.” 세나데는 테이의 말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이구! 이런 철없는 것. 임시초기에는 무리한 일은 하면 안 되는 것을 알면서 그 몸으로 여행을 한거니?” “칫! 여행 도중에 알았다 뭐!” 혀까지 삐쭉 내밀며 귀여운 표정을 짓는 테이의 모습에 로카데 차이저 반 하이슬란드 공작은 연신 너털웃음을 터트렸고 루나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 만 아직도 철없이 막내노릇을 하고는 있는 딸이 걱정인 세나데나는 못마땅 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표정은 손자들의 맑은 눈동자 공격 에 자애롭기 그지없는 미소 띤 얼굴로 바뀌었다. 그리고 잠시 뒷마무리를 위해 지체한 트라킨과 죠슈아가 들어서자 전장에서 돌아온 남편들과 아무런 걱정 없는 한때를 보내는 귀부인들이었다. 다만 그 자리에 아들이자, 동생 이 빠져있는 것이 아쉬울 뿐……. *** 불칸 화산의 드워프 계곡 도시는 도시가 건설된 이래로 가장 큰 초대형 거 물급 존재의 방문으로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특히 욕심 많은 드래곤 들에게 보물을 빼앗기지 않으려 최대한 없어 보이면서도 그들을 만족스럽게 하기위해 드워프 장로들은 하루에도 서너 주먹씩 머리가 빠질 지경이었다. 덕분이 이일을 초래한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시장 마데인은 하루에도 수 백년씩 늙어가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인정하는 건데, 그를 이그라혼이라고 인정하는 건데…….” 하며 하루에도 몇 번씩 되뇌곤 했다. 드래곤 로드와 최고룡 지슈인드가 불 칸 계곡도시에 머무른 지 이제 겨우 사흘째였지만 시끄럽고 번잡한 것을 싫 어하는 두 고룡들 때문에 도시는 올 스톱 상태에서 시민전부가 바늘하나 떨 어지는 소릴 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마계의 데몬메탈이면 그 가치가 이 드워프 촌의 몇 배의 가치가 있는 보 물인데 그것을 잃다니…….” “하지만 잃어버린 것은 잃어버린 것입니다.” “라혼,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헤이론이 그것을 제게 가 져왔을 때 나는 그것에 생명의 축복을 내렸어요. 그것이 품은 힘은 그것을 얻는 누구라도 사용할 수 있지만 엉뚱한 존재가 그것을 얻으면 이 세계에 혼란이 올 거예요. 반드시 찾아서 적당한 조치를 취해야 해요.” 라혼은 하이엘프 드라이어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에 군 말없 이 순종하는 태도를 보이는 라혼의 모습에 지슈인드는 잔뜩 골이 난 표정으 로 비아냥 거렸다. “오호! 백수십년을 함께 보낸 스승에겐 꼬박꼬박 말대답하면서 정신을 잃 고 겨우 몇 년 같이 보낸 양어머니 말에 껌뻑 죽는 구나?” “북풍과 따사로운 봄볕에 차이죠. 스승님과 같이 보낸 100여년의 세월이 어디 인간이 사는 겁니까? 하루가 멀다 하고 목이 잘리고 팔다리가 끊어지 는 경험을 했는데…….” “그렇게 사랑의 매로 가르쳤으니까 어디에 내놔도 맞고 다니지 않을 정도 는 되었잖느냐?” “그거 어디 사랑의 매입니까? 미친 칼부림이었지.” “이놈!” 순간 대기를 위압하고 곁에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드래곤 로드 아스카론 마저 긴장시킨 드래곤 피어(Dragon Fear)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 드래곤 피어에 한 중심에 있는 라혼은 깐죽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만 하시죠. 스승님 드래곤 로드께서 겁먹지 않습니까?” “에구구구~! 늙으면 죽어야지 하나밖에 없는 제자 놈이 힘없다고 괄시를 하니…….” “드래곤 가운데 제일 팔팔하시면서 무슨…….” “에라!” -딱! 라혼은 후두부를 강타하는 강렬한 충격에 눈물을 찔끔하며 아파했다. 분명 무한차원결계로 보호를 하고 있었음에도 충격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역시 중간계 최고최강의 존재 지슈인드였다. “이놈아! 무한과 무한이 서로 상쇄되면 결국 1이다.” “크~! 말로 하면 될 것을 꼭 뼈에 사무치게 만들어요.” “중요한 것이니까 그렇다.” “둘 다 모두 그만하세요.” 드래곤 로드 아스카론의 고요하지만 위엄 있는 목소리도 말하자 지슈인드는 머리가 큰 제자에게 한방 멋지게 먹였다는 생각에 씩 미소 지어보이며 라 혼의 울화를 돋웠다. 하지만 라혼은 아스카론에게 부탁할 것이 있었으므로 스승 지슈인드의 도발에 발작하지 않았다. “라혼, 당신의 마기를 중간계에 풀어놓은 행위는 무척 경솔했어요. 중간계 의 몬스터들이 마기에 반응해 준동할 거예요.” “압니다.” “예상을 하고도 그런 무책임한 일을 벌였단 말인가요?” “제가 틀렸고 어리석은 결정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적당한 몬스터들의 발호 는 인간을 이롭게 할 겁니다.” “무슨 뜻이지요?” “모든 생물이 그렇듯이 위협과 위험이 있을수록 강해집니다. 행복한 평화 와 번영을 지속하다가 갑자기 닥쳐온 재앙에 한순간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몬스터를 발호하게 하여 인간이 그것에 대응 하는 법을 알게 하는 것이 났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요. 하지만 천천히 뜨거워지는 물속의 개구리는 피 하지 못하고 삶아져 버리지만 펄펄 끓는 물속에 던져 넣은 개구리는 피해서 살아남습니다.” 라혼은 드래곤 로드의 말에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어차피 즉흥적으로 벌인 일이고 변명은 그럴싸하게 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젊은 프리사메티에게 들었습니다. 다시 과거의 이름을 찾으려고 했다면서요? 그런 부질없는 놀이에 시간을 투자할 필요가 있나요? 당신은 인간족 전부를 합친 것보다 가치가 있는데요?” 라혼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답했다. “당신이 드래곤 족이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저 또한 인간 족의 생존을 위해 노력합니다.” “때가 되면 나서면 될 것을 굳이 왕이 될 필요는 없지 않나요? 인간은 관 계가 가까울수록 더 중요시 여기는 성향이 있는데 그런 인연의 사슬을 스스 로 얽어매다니…….” “마왕자 일피메리토스에게 영혼이 잠식당했을 때 선신(善神) 아후라마즈다 , 마신(魔神) 앙그라마이뉴, 그리고 이 세계의 브라마라는 존재에게 신계와 마계의 소멸을 부탁받았습니다.” “…….” “그리고 영겁의 시간동안 마계를 정복하고 마계군주인 샤라즈가 말하길 신 계와 마계, 그리고 중간계가 하나로 합쳐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 “저는 마계를 정복하면서 절반을 멸했습니다. 그러자 샤라즈는 저에게 신 계가 중간계를 차지하면 완벽해지고 마왕과 마족이란 적이 사라지만 생명을 지키는 천사들이 다음 적을 인간을 지목할 것이라고 했지요. 하지만 저는 인간들에게 물었습니다. 완벽한 신에게 통치되는 세상이 온다면 어떻겠냐고 …….” 라혼은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을 정리한 후 이야기를 계속이었다. “그리고 알았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다름 아닌 ‘자유’였습니다. 신에게 조차 자유로워지고 싶어 하는 인간의 꿈이었습니다. 창조신이 원한 것도 그 들이 원하는 자유입니다.” “자유는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원하는 것이기도 하지. 그래서 생 명에겐 죽음의 권리가 있는 것이고…….” 라혼의 말을 지슈인드가 그렇게 받았다. 그리고……. “라혼, 그냥 왕이 되고 싶었다고 해라!” “그래요. 인간이 권력욕을 갖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니까요.” 라혼을 너무나 잘아는 스승 최고룡 지슈인드와 양어머니 하이엘프 드라이어 드의 말이었다. 라혼이 주문한 피아의 갑옷이 완성되었다. 라혼은 어떻게든 드래곤 로드 아 스카론과 스승 지슈인드에게 용의 피를 얻으려 했지만 아스카론은 처음부터 자신의 피를 머금은 진흙으로 내장과 피부를 만든 피아를 좋아하지 않았다 . 그래서 스스인 지슈인드에게 부탁했지만……. “용의 피는 생명의 기운이 충만하기 그지없는 거야. 내피를 쓰면 내 피에 내재된 나을 이 닮게 되지.” 라고 하여 포기했다. 성질 더러운(?) 스승님을 닮은 피아는 상상하기 조차 싫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드래곤 로드 아스카론를 도발해 다시 한판 벌일까 생각 했었지만 아무리 라혼이라도 그렇게 까지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 나 다행히 생명의 관장하는 권리를 가진 드라이어드가 피아에게 생명의 축 복을 해주었다. 그러나 엘프의 마법은 조화로운 것이기에 효과가 무궁무진 하면서도 겉으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보였다. “라혼, 이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관심과 사랑을 기울이면 생명력을 가지게 되요. 농부에게 괭이가, 어부에겐 낚싯대가, 화가에게 붓이, 대장장 이에겐 망치와 모루가 소중한 평생의 동반자랍니다. 피아의 영혼은 라혼의 일부라고 들었습니다. 그녀를 아끼고 사랑하세요. 이 세상에 모든 것들 중 함부로 해서 좋을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 누구에게나 소중한 물건은 있다. 사람은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망가 지면 가슴아파한다. 나무꾼에게 도끼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도구이자 벗이다. 그것은 검사가 검을 소중히 여기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라혼은 드라이어드의 말에 차가운 금속성의 갑주차림의 피아를 바라보았다. 황금빛 으로 번쩍이는 것이 아마도 스승님 취향이 반영된 것 같았다. 라혼은 아스 카론에게 다시 피를 얻어내려 드워프들이 만드는 갑옷에 대해선 관심 갖지 않은 결과물이 지금 피아의 몸을 둘러싼 황금과 백금으로 장식된 화려하기 그지없는 갑주였다. “후~! 누가 골드 드래곤 아니랄까봐! 온통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군.” 하지만 황금가면을 쓰고 황금갑옷을 입은 여신 같은 피아의 모습은 거무튀 튀한 그전의 갑옷보다 훨씬 나아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확실히 한결 났군, 아름다워.” “예쁜가요?” “어? 목소리가 복원되었네?” “지슈인드님이 소금기가 없는 부분으로 성대를 만들어 주셨어요.” 라혼은 금속성의 듣기 거북한 목소리로 말을 하던 피아가 그전과 같이 고운 목소리로 말을 건네 오자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인지 스승님 앞에서 존 경하는 모습을 보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라혼.” “예, 어머니.” “저는 이제 숲으로 돌아가겠어요. 라혼이 찾는 물건은 데이란의 몬스터 숲 에 있을지 몰라요. 명장 헤이론이 제게 생명의 축복을 받고서 산들바람의 받기위해 페어리 퀸 피에게 갔는데 장난을 좋아하는 그녀가 그것을 가지고 멀리 달아났어요. 화가 난 헤이론이 그녀를 쫓았지만 도망가기로 마음먹은 요정은 잡을 순 없지요.” “피가요?” “라혼, 피는 아직도 당신을 기다립니다. 그녀를 찾거든 다정하게 대해주어 야 해요. 사랑에 빠진 요정만큼 슬픈 존재는 없으니까요.” 라혼은 하이엘프 드라이어드가 발트엘프의 자신의 신전으로 돌아가자 두 마 리 위대한 고룡들과 함께 불칸 화산 계곡의 드워프 도시를 나섰다. 무론 계 약 불이행의 책임으로 라혼이 살아있는 동안 영원히 드워프들은 라혼에게 봉사하겠다는 맹세를 받아낸 것은 물론이다. 라혼은 드워프들에게 아발론에 서 찾은 다르마차크라를 보여주며 재현을 요구했다. 물론 그 외에도 전투용 타이탄급 탈로스 120기와 다목적 작업용 워크 200기, 수송용 고르곤 300기 를 2년 안에 완성하기로 했으며 시드그람 대륙어디든 달려가서 무엇이든 건 설할 준비가 되어있는 드워프 인부 3000명도 약속했다. 라혼은 도움이라곤 눈곱만치도 되지 않는 에인션트 드래곤들과 다시 여행을 시작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 데몬메탈이 있을 지도 모르는 데이란으로 [텔 레포트 워프Teleport warp]를 하고 싶었지만 두 고룡은 한가하게 육로여행 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황금가면에 황금갑주를 입은 여기사와 백금발의 미모의 엘프, 그리고 황금빛 찬란한 머리의 이지적인 미남자, 또 그에 절대 처지지 않는 미모의 라혼까지 이상하고도 무척 튀는 일행은 천천히 걸어서 불칸화산 지대를 빠져나왔다. 라혼으로써는 답답한 여행이었다. 그러나 마 음에 들지 않는 일은 한꺼번에 생길때가 있었다. -이봐! “……?” “단단해 보이는 드워프인걸?” 멀리서 그 짧은 다리로 뒤뚱거리며 달려오는 존재는 계곡의 도시 경비대장 다이난이었다. “후아, 후아, 명장 헤이론님을 찾는 여행이라고 들었습니다. 후아, 후아, 그래서 저도 동행을…….” 그렇게 라혼은 현재 할일이 없어 낮잠을 자다 깬 나이 많은 드래곤 2마리와 감히 드래곤하고 여행을 하겠다고 나선 간이 부은 드워프 하나를 데리고 드라이어드가 당부한 데몬메탈로 만든 ‘그것’을 찾기 위한 여행을 시작했 다. “드래곤에 드워프에 엘프까지 끼게 되면 환상의 파티겠군.” 그리고 ‘말은 화근의 근원이다’라는 말을 새삼 느끼게 하는 라혼의 투덜 거림이었다. 홀로 정처 없이 쉬지 않고 길을 걷는 방식의 여행이 아닌 쉴 때 쉬고, 해가 떨어지면 잠을 자는 제대로(?)된 여행을 한지 1개월이 지났다. 음유시인 흉내를 내는 지슈인드와 언제나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엘프 모습의 아스카 론 척 보기에도 한 힘쓰게 생긴 드워프 전사에 몸에 딱 맞는 화려한 갑옷을 입은 여전사 그리고 라혼의 일행을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무슨 이야기책 속의 원정대나 모험자들의 그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띠링~! “위대한 영웅이 잠든 섬~.” -딩 띠링 디 띵디디딩……. “아발론에 묻힌 왕중왕의 보물이여, 섬을 지키는 위대한 마법의 어머니~. 튜트를 연주하며 감미로운 목소리로 노래를 하는 스승 지슈인드를 바라보며 라혼은 이마를 감싸 쥐었다. 노래를 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불러도 당사 자가 있는 앞에서 칭송하는 노를 읊어대니 아무리 낯가죽이 질긴 라혼이라 도 계속 듣고 있기에 고역 아닌 고역이었다. -띠리리이잉 띠딩……. “왕중왕의 돌아오리라. 영웅의 섬 아발론에서~.” -와아아아~! -짝짝짝짝짝짝짝……. 이윽고 노래가 끝나자 춥고 어두운 밤, 여관에 마련된 모닥불가의 모인 여 행자들은 황호성과 아낌없는 박수를 쳐주었다. “음유시인에게 맥주를 사겠소. 정말 훌륭한 노래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한곡 부탁하면 안 되겠소? 아름다운 사랑의 멜로디로 말이오. 1실버 내리다.” 그리고 흥에 겨운 사람들은 새로운 노래를 부탁하며 은화를 던졌다. 그러자 지슈인드는 흥이 나는 듯 다시 자리를 잡고 튜트를 연주했다. 감미로운 멜 로디가 흐르고 새로운 노래가 시작되었다. 라그나혼의 슬픈 목소리 천상에 부유하는 하얀 말 차디찬 갑옷 안에 뜨거운 강철 심장 어둠보다 눈부신 파리한 검 차가운 얼굴, 얼굴보다 더 차가운 눈 라그나혼의 슬픈 목소리 라혼은 이번 노래는 자신을 칭송하는 노래가 아니자 안도하며 노랫말에 빠 져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알았다. 그 노래는 라혼이 스승 지슈인드를 처 음 만났을 때 스승님이 불렀던 노래라는 사실을……. 지슈인드는 노래가 끝나자 허밍으로 음률을 대신하며 포근한 느낌의 자장가 를 불렀다. 여관의 모든 사람들이 그 자장가에 취해 졸기 시작할 무렵 허밍 을 끝이 났다. “라혼.” “예.” “예술은 아름다운 것이다.” “예?” “노래를 부르고 악기로 아름다운 소릴 만들며, 마음을 그리는 것은 자유를 꿈꾸는 자의 유희다.” “…….”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것도 예술이지만 때론 놀기도 해야 한다. 드래곤들 은 태어나면서 권능을 가지고 있지만 노는 방법을 모른다. 너는 언제나 여 유를 가지고 있지만 그 여유를 즐기는 법을 모르더구나.” 라혼은 그날부터 지슈인드에게 악기를 다루는 법을 배웠다. -딱! “그렇게 하면 악기 울겠다. 어떻게 감성이 그러게 메말랐는지.” 그리고 라혼은 그 후 스승님이 자신의 뒤통수를 때릴 이유를 일부러 만들었 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늦가을 즈음 불칸을 출발한 ‘그건’원정대는 4개월이나 여행을 하고 나서 야 데이란에 들어섰다. 한겨울 내내 길에서 시간을 보내고 봄이 멀지 않은 때 도착은 데이란은 분위기가 수상했다. “휴~! 지난겨울 대단했었다오. 몬스터들이 단체로 뭘 잘못 먹었는지 갑자 가 날뛰며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덮치니, 내가 아는 것만도 마을 3개가 몬 스터 습격 때문에 초토화 되었다오. 다행히 영주님이 가을에 조직된 몬스터 토벌대에 참가한 용병들이 남아있었기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영주님 사는 성까지 몬스터들이 침입할 뻔 했다니까요.” “그렇습니까?” “보아하니 기사인 듯하고 저기 엘프 아가씨는 마법사인 듯한데 올봄에 있 을 대대적인 몬스터 토벌에 참가해 주시오. 그러겠다면 내 숙박비는 받지 않겠소.” 라혼은 여관주인의 은근한 부탁에 고개를 끄떡였다. 아무래도 지난 가을 불 칸에서 마기를 방출한 영향으로 몬스터들이 반응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 서 그를 통해 몬스터 토벌대 참가의사를 영주에게 전달했다. 이 여관은 영 주소유였기 때문이다. 영주소유의 여관에서 영지에 들른 사람이 비공식적인 면담요청을 하는 것은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일자리를 알아보기 위 한 자유기사라던가 여러 가지 직능을 가진 기술자들이 영주 저택이나 성으 로 직접 찾아가는 것보다 같은 평민의 입장인 그의 고용인에게 자리를 주선 하는 경우는 더욱 흔했다. “그럼 당신이 우리 일행에 대해 이곳 영주님에게 소개를 해주시오. 저기 드워프 전사와 여전사 그리고, 나는 참가할 용의가 있고, 엘프와 다른 사람 은 물어봐야 알겠군.” “그렇습니까? 그런대 올해는 희한하군요. 안 그래도 엘프 1명과 꼬장꼬장 한 드워프 1명이 몇 년 전부터 영주님의 귀빈으로 머물고 계신데, 저의 고 장에 불운이 끝나고 행운이 오려나 봅니다. 또 엘프와 드워프가 찾아오니 말입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엘프와 드워프가 손님으로 오는 것을 행운 의 징표로 여겼다. 그렇다고 공짜로 묶게 해주거나하는 일은 없지만 말이다 . 라혼은 여관지배인을 통해 얻은 정보를 스승 지슈인드와 아스카론에게 이 야기하고 물었다. “그래서 두어 달 후 봄에 몬스터 토벌대에 끼려합니다. 두 분 모두 참가하 시겠습니까?” “몬스터 정도는 너 혼자서도 간단하게 해결 할 수 있잖아?” “몬스터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문제는 숲에 몬스터를 끌어 모으는 ‘그것 ’을 찾아내려면 사람들과 묻어서 같이 다니는 수밖에 없습니다. 양어머니 말로는 그것을 지닌 존재가 페어리 퀸일지 모른다고 합니다. 요정의 여왕이 무슨 이유로 ‘그것’을 이곳에 가지고 왔고 몬스터들을 모으는지 모르지 만 요정이 몸을 숨기려하고 도망치려 하면 어떤 존재도 잡을 수 없다는 사 실을 잘 아시시 않습니까?” “발트엘프의 페러리 퀸이라면 ‘피’ 말이군요. 요정들은 자신들의 고향을 여간해선 떠나지 않는 법인데? 당신은 어째서 요정들의 여왕인 그녀가 ‘ 그것’을 가지고 발트엘프를 떠났는지 아는 모양이군요. 우리에게 말해줄 수 없나요?” 라혼은 아스카론의 물음에 당혹감을 느꼈다. 그때 옆에서 잠자고 있던 드워 프 전사 다이난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것은 제가 조금 압니다.” “당신이요?” “예, 아스카론님. 천년이나 된 옛날에 발트엘트 숲 한가운데 인간의 아이 가 기억을 잃고 조난을 당했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발트엘프는 광대한 삼 림지역 전체가 드라이어드님의 보호아래에 있는 곳이지요. 그런데 그 인간 의 아이는 하늘에서 떨어진 듯 숲 한가운데에서 조난을 당했으니 정말 신비 한 일이지요. 어쨌든 그 인간아이를 가장먼저 발견한 것이 바로 어린 엘프 소녀와 요정의 여왕이었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 인간의 아이가 눈을 뜨고 처음 한일이 엘프 소녀의 귀를 만지고 페어리 퀸의 날개를 잡았답니다. 그 리고 인간의 아이는 드라이어드님의 양아들로 거두어졌고, 몇년뒤 숲을 떠 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엘프소녀와 페어리 퀸은 소년을 기다렸다고 하지요.” 다이난은 이야기하면서 라혼을 힐끔힐끔 훔쳐보았다. “흠! 엘프 소녀의 귀를 만지고, 요정, 그것도 요정들의 여왕의 날개를 잡 은 소년이라……. 무척 흥미로운 이야기군요.” 엘프들의 전설, 아니 그저 옛날이야기에 귀를 만지는 것을 계기로 사랑에 빠지는, 운명의 상대를 만나는 이야기가 종종 회자되고 있었다. 인간으로 치면 첫 키스나 첫 경험 정도의 일이지만, 그런 작은 일에도 민감한 엘프들 에게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특히 어린 엘프들에겐 더욱 그랬다. 나중에 성인이 되면 그것이 별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 의미가 사 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나 로맨스를 꿈꾸는 소녀 시절의 일이기 에 더욱 그렇다. 페어리들에게도 그런 유의 이야기가 있었는데, 페어리들의 경우엔 날개가 엘프의 귀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크면 알게 되 는 인간의 그것보다 엘프들이나 페어리들에겐 그러한 하나의 계기를 영원히 간직한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요정만큼 슬픈 존재는 없다고 하는 것이다. 거의 무한 한 생을 가진 요정이 전체 삶에서 찰나 사랑을 영원히 간직하며 슬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엘프도 다르지 않았다. 인간을 사랑한 엘프는 인 간의 짧디 짧은 사랑의 달콤함을 나누고 결국 배신당해 그를 떠난 후 슬픔 에 잠긴 채 평생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랩소디(rhapsody) “뭐야?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로드. 엘프와 드워프가 끼어있는 여행자들이 몬스터 토벌대 에 참가를 원합니다. 특히 드워프는 차돌처럼 단단해 보이는 것이 전사 같 았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같은 일행에 있는 여기사와 수련여행 중이라는 기 사의 실력도 상당해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녁 만찬회에 그들을 초대하겠다. 노을이 질 무렵 성으로 모셔라.” “예, 알겠습니다. 로드!” 데이란의 젊은 영주 라이너 레마르스 디 데이란 남작은 여관지배인이 가져 온 소식에 크게 기뻐하며 그들을 성으로 초대했다. 이미 자신의 성에 머물 고 있는 엘프가 말하길 여행을 허락받은 엘프는 마법으로든 무술로든, 그만 한 실력이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년이 된 드워프는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힘과 지구력, 그리고 고집스럽고 우직한 성격 때문에 우직한 전사 였다. 또한 자신이 사용하는 무기는 자신이 직접 만드는 전통이 있는 그들 은 무기를 지니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뛰어난 대장장이였다. 데이란 남작은 하인들에게 만찬회를 준비 시켰다. 덕분에 그의 식품창고가 거덜 났지만 말이다. 데이란 영주 성은 귀빈을 맡기 위해 한바탕 소동이 벌 어졌고 하늘은 어느새 오렌지 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며 붉기를 더해 갔다. “휴~! 오늘 무슨 날이었나? 뜬금없이 웬 만찬회라지?” “겨우내 날뛰던 몬스터들이 잠잠해졌잖아. 게다가 날이 풀리는 데로 일단 여기 있는 인원만으로 1차 몬스터 토벌을 시작한다고 하던데? 겨울동안 굶 주렸던 몬스터들을 사냥한다면서?” “그런가? 하지만 아침까지는 잠잠했잖아. 크로우 뭐 아는 것 없어?” “글쎄? 남작의 말론 오늘 귀빈이 초청되었다고 하던데.”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여관에 드워프와 엘프가 포함된 여행자들이 왔다고 들었는데.” “길조잖아! 몬스터 사냥을 준비하는데 엘프와 드워프가 찾아왔으니 만찬회 를 열만 하네, 짠돌이 남작이 자기 식료품 창고를 거덜 낼 정도면 그들이 몬스터 토벌에 참가를 한다는 뜻이잖아!” “어쨌든 우리도 초대되었으니까. 간만에 포식하겠군.” 겨우내 몬스터들의 습격에 겨울바람을 맞으며 데이란 영지 여기저기를 뛰어 다니던 용병들은 영지 주민들을 영주성이 있는 마을로 대피 시키고 성에 모 여 있었다. 경비나 보초는 남작의 병사들이 하고 있는데 용병들은 몬스터가 출현하면 그때서야 움직이는 체제로 되어 있었다. 국가 간의 전쟁을 할 때도 겨울이오면 암묵적인 휴전상태가 되었고, 용병들 에게도 겨울은 휴식기였다. 일단 급한 대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용병들을 다시 고용해 몬스터가 날뛰는 벌판으로 내보내려면 그만한 보수를 약속해야 했다. 거기다 가을 토벌이 끝나고 해산한 상태였기 때문에 데이란에 남아 있던 용병들은 몬스터와 전투에 다쳐 상처를 치료하던 사람과 그의 동료들 이었다. 병력도 적고 문제가 생기는 지역은 많으니 그들은 추운 겨울바람을 뚫고 데이란을 종횡무진 달려야 했다. 하지만 용병은 속된 말로 칼밥을 먹 는 사람들이었다. 정당한 보수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이었던 것이 다. 결국 그들을 움직이기 위해 데이란 남작은 용병들이 원래 받는 보수에 서 특별수당에 새로운 부상자까지 책임져야 했다. 게다가 겨울 장비까지 따 로 구해 지급하게 되니 올해 겨울 3년치 몬스터 토벌 자금이 한꺼번에 소요 되어 지금 남작의 주머니 사정은 심각했다. 거기다 몬스터 때문에 영주민들 이 봄의 파종을 하지 못하면 내년부터는 몬스터의 습격에 손을 놓을 지경에 있었다. 주머니가 가벼워지니 씀씀이가 심중해지고, 그러다보니 용병들을 출동시키는 것을 자제하게 되어 용병들 사이에서 ‘짠돌이’라는 귀족으로 써는 그다지 명예롭지 못한 평가를 받게 되었다. 데이란 영주의 만찬회에 초대를 받은 라혼은 깨끗한 연회복으로 갈아입고 데이란 영주가 보내온 안내자를 따라 일행과 함께 영주성을 찾았다. “어서 오십시오. 남작님께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라혼은 마중 나온 남작의 하인장을 따라 만찬회가 열리는 식당으로 안내되 었다. 식탁에는 이미 푸짐하기 그지없는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고 용병으로 보이는 거친 사내들이 자리해 있었다. 라혼과 일행이 자리에 들어서자 모양의 탁자 중앙에 자리한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인사말을 건네 왔다. “라이너 레마르스 디 데이란 남작입니다.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그때 용병들이 자리 잡은 자리에서 작은 웅성거리는 기색이 보이더니 개중 한명의 목소리가 데이란 남작의 귀가 걸렸다. “저, 저 사람이 다크 프린스라고!” “…….” 상당히 작고 낮은 탄성이었지만 그 의미는 또렷하기 그지없었다. “하이슬란드의 라혼 가이우스 세나데온 차이저 자작입니다.” “……!” “그리고 이분은 제 스승이신 시드시고, 그분의 아내입니다. 여기 드워프분 은 불칸 화산 계곡 도시의 경비대장 다이난이며, 제 호위기사입니다.” 라혼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어깨에 튜트를 둘러메고 음유시인 노릇을 하 는 지슈인드와 엘프 모습을 하고 있는 드래곤 로드 아스카론을 부부로 소개 했다. 드래곤들에게는 인간처럼 부부관계를 맺고있는 경우는 없었지만 한때 둘이 짝짓기(?)를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으므로 부부라고 소개해도 그다 지 틀리지 않았다. “그, 그러시군요. 자리가 마련되었으니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하지만 지금 데이란 남작은 머릿속이 복잡해져있었다. 엘프와 금발 미남자 가 부부라는 것보다 스스로 이그라혼을 잇는 자라고 주장하는 다크 프린스 가 불칸의 드워프와 함께 여행을 한다는 점이 더욱 주목을 끌었기 때문이다 . 불칸의 드워프가 이그라혼과 관계가 깊었다는 것은 교양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저, 안젤리아드 공화국의 부는 불칸에서 흘러나 오는 드워프 장인들의 물품무역이 때문이라는 것 또한 익히 알려진 사실이 었다. “음식을 가져와라!” 데이란 남작의 명령에 그의 하인들이 구운 새끼 돼지 바비큐와 훈제 칠면조 , 과일들이 가득 담긴 쟁반이 식탁위에 놓여졌다. 그리고 이어서 포도주가 담긴 따지며 잔이 채워지자 뭔가 홀로 생각에 잠겨있던 데이란 남작이 자리 에서 일어서서 잔을 들었다. 그러자 음식들이 식탁에 차려지면서 다소 소란 스럽던 식당이 조용해지며 사람들이 시선이 만찬의 주관자인 남작에게 모였 다. “오늘 뜻하지 않은 귀빈이 제게 초대되었소. 그란의 보석이며, 신성 시드 그람 제국의 별인 그의 영광을 위해 건배를 하고자 하오.” “…….” “이그라혼에게 영광을! 적에겐 죽음을!” -이그라혼에게 영광을! 적에겐 죽음을! 8년전, 다크 프린스가 소수의 레기온 기사단을 이끌고 사우스포트를 점거하 고, 탈취한 프린든 왕국의 탈로스로 13일간의 원정으로 프린든 왕국의 수도 솔드란을 단 한명의 사상자 없이 정복하고 돌아오자 살아돌아온 레기온들 이 그에게 그렇게 건배를 했다고 한다. 사우스포트에서 다크 프린스의 무용 담을 들은 자들이 제국각지에서 그이야기를 했고, 마지막으로 그에게 건배 를 했다. 거의 매년 몬스터 토벌대가 구성되는 데이란 지방이었다. 제국 각 지의 용병들이 찾아왔고 다크 프린스가 레기온 사령관이었던 당시 사우스포 트에 있었던 자들도 거기에 포함되어있었다. 자연히 데이란 남작 또한 이그 라혼에게 바치는 건배의 구호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이 자리에 있는 용병 들도 마찬가지였다. 라혼은 술잔을 높이 치켜들고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우락부락한 사내들의 시선에 약간 당황했다. 블러드가 일부러 소문을 냈다는 것은 알 고 있었다. 하지만 사내들의 선망어린 시선은 생각했던 것과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라혼은 어느새 한 지역의 통치권을 가진 자가 서슴없이 건배를 할 정도의 존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라혼은 그들이 바라는 한마 디를 해야 했다. “건승을 위하여!” -호우! 그러자 용병들은 크게 호응하며 단숨에 포도주가 가득 채워진 술잔을 비웠 다. 라혼으로서는 뜻하지 않는 곳에서 뜻하지 않은 환대였다. 4년 전, 어느 귀족가문의 기사가 자신의 정체가 의심스럽다며 서슴없이 검을 빼들었던 것을 비교해 보고 자신의 이름이 생각했던 것보다 작다고 여겼었다. 그리고 곧 신성 시드그람 제국 밖으로 나가 외국생활을 하고 돌아와 이곳을 보니 마치 숙성이라도 된 것처럼 이름에 무게가 실려 있었다. “전하, 전하께서 저희 영지에 방문해 주신 것에 대해 영광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저도 볼일이 있어 들린 것뿐입니다.” “소개 해드릴 분이 있습니다. 그를 만나주시오.” “누구를 말이오?” “제 집에 머무르는 드워프와 엘프입니다. 한스!” 라혼의 일행을 마중하고 이곳까지 안내한 하인장 한스는 주인의 눈짓에 식 당 밖으로 나가 하녀에게 지시 했다. “진짜 귀빈이 오셨으니 마님이 한께 자리해야 하니까 마님에게 식당으로 나오시라고 전해라.” “예!” “그리고 너는, 아니다 거기는 내가 직접가야겠다.” 원래 거친 용병들이 참가하는 만찬회였다. 이건은 원정을 떠나기 전에 거나 하게 먹고 마시는 행사였기에 남작부인이 참석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를 초 대된 귀빈의 정체가 무시할 수 없는 거물임이 밝혀진 이상 그만한 예우를 해야 했다. 손님을 맞는데 가문의 안주인이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은 큰 결 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중으로 뭔가를 끝내야 한다며 대장간에 처박힌 드워프와 그의 곁에 있는 엘프도 어떻게 해서든 모습을 보여야했다. 돌아가는 사정을 보아 그 귀빈이 토벌대를 이끌게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땅, 땅, 땅, 땅……. 하인장 한스는 한달음에 한적한 곳에 자리한 대장간을 찾았다. 날은 벌써 어두워진지 오래지만 대장간의 붉은 불꽃은 더욱 세를 더하고 있었다. “헤이론 어르신!” “뭐야? 나는 만찬회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했잖아!” “죄송합니다만 귀빈이 찾아왔습니다. 저희 주인님께서 꼭 참석해 주셨으면 하고…….” “시끄러 왕이라도 왔으면 모를까. 오늘 중으로 일을 끝내야 한단 말이야! ” “왕이라면 왕입니다.” “뭔 소릴 하는 거야? 신성 시드그람 제국에 왕이 어디 있어? 여긴 황제를 모시는 땅이 아닌가?” “맞아요. 그 황제의 후계자가 왔습니다. 다크 프린스라고요.” 추운 날씨임에도 후끈한 대장간의 열기에 웃통을 벗고 담금질을 하던 헤이 론은 지난 5년간 이곳에 머물며 귀가 따갑게 들었던 존재가 찾아왔다는 말 에 호기심이 생겼다. 4년전 이그라혼의 이름을 잇는 자라고 주장하는 그 때 문에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가? 제발 불칸의 건설자 파워햄과 약속을 모르는 자이기를 빌고 또 빌었다. 아니 최소한 ‘이볼브액터’ 회수할 때까지는 말이다. “그렇단 말이지. 그럼 만나봐야지.” “저어 그런데 파엘님은…….” “그 쫑긋 귀는 지금 여기 없어. 아마 이사벨하고 같이 있을걸.” “마님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