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영매-설봉 서(序) 휘류룽! 쒜에엑……! 푸른 창공에 시커먼 먹장구름이 드리워졌다. 새털구름 하나 없이 맑은 하늘이었다. 손으로 만지면 푸른 물감이 묻어나올 듯 푸르디푸른 하늘이었다. 지금은 아니다. 어디서 몰려왔는지 하늘을 온통 가린 시커먼 먹장구름이 푸름을 대신했다. 하늘의 맑은 정기(精氣)가 소멸되고, 인간들이 멸종(滅種)하며, 악마가 세상을 지배한다는…… 바로 그날이 도래한 것 같았다. 무엇보다 급한 것은 두 다리의 오금을 저리게 만든 먹장구름이 일신을 향해 쏟아져 내린다는 것이다. “후욱!” 그는 자신도 모르게 깊은 숨을 들이켰다. 범인(凡人)들은 나직한 신음, 혹은 외마디 단말마로 놀람을 표시하지만 그는 언제나 깊은 숨을 들이켜 마음 속에 이는 격동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게 수양(修養)을 해왔다. ‘태산(泰山)이 무너져도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不動心)……’ 그가 추구하는 바다. 그가 평생토록 연마해야 하고, 또 그러고 싶은 유일한 심공(心功)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부동심이 깨졌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언제나처럼 깊은 숨을 들이켜 내면의 격동을 자제했지만 손 끝, 발 끝 마디마디까지 덜덜 떨리는 공포에 대항하기에는 너무 미약했다. 육신으로 쏟아지는 먹장구름의 기세는 ‘항거불능(抗拒不能)’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동천(東天)! 서지(西地)! 남중(南中)!” 그는 일성(一聲)을 터트림과 동시에 뒤로 쭉 물러섰다. 음성에도 놀람은 배어나왔다. 하늘을 갈라버릴 듯한 거센 고함이었으되 미미한 떨림이 스며나왔다. 세상을 온통 뒤덮은 먹장구름 앞에서는 한낱 발악에 지나지 않는 음성, 그도 그런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듯했다. 쒜엑! 파라락! 페에엑! 옷자락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는 경기(勁氣)가 요동쳤다. 세 사람은 스물두 번에 걸친 실전비무(實戰比武)에서 경험하고 익힌 그대로 그의 말을 잘 따라주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듯한 형국인데도 불구하고. 그도 물러서서 방관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양 손에는 유엽도(柳葉刀) 열 자루가 잡혀 있었고,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비도술(飛刀術)이 펼쳐졌다. 카아악……! 대기를 찢어발기는 파공음이 유엽도의 뒤를 쫓았다. 소리보다 빠른 비도. 파공음 뒤로 그의 신형이 따라붙었다. 오른손에는 검을, 왼손에는 륜(輪)을 들고서. 우르르릉……! 먹장구름은 외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거치적거리는 것은 무엇이든 쓸어버리겠다는 듯이, 항거할 수 없는 힘으로 밀려들었다. “천좌(天左)! 지우(地右)! 남중직(南中直)!” 그의 머리 속에는 하나의 그림이 그려졌다. 구달(具達)이 하늘에서 좌측으로 비스듬히 갈라 치며 염왕검법(閻王劍法)을 시전한다. 염왕검법에는 패도(覇刀)를 능가하는 거력이 담겨 있으니, 먹장구름의 한귀퉁이를 잘라내기에는 부족함이 없으리라. 위진(衛震)은 땅에서 우측으로 솟구쳐 오른다. 그는 그래야 한다. 그가 익힌 섭혼도법(攝魂刀法)은 말 그대로 혼을 끌어당기는 섬뜩함을 풍기며 먹장구름의 일각을 무너트리리라.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염왕검법에 버금가는 패력(覇力)을 지니고 있고, 위에서 아래로 내리치는 힘만큼 아래에서 위로 올려치는 힘도 강하니까. 아니, 무학(武學)의 상리(常理)를 벗어난 공격인 만큼 효과는 기대할 만하다. 좌와 우에 패력을 놓았다. 문제는 중앙이다. 먹장구름의 가장 강한 힘은 중앙에 몰려 있으리라. 그리고 중앙을 찢어놓지 않는 한 먹장구름의 가공할 힘은 사(四) 인(人)의 육신을 난타하리라. 중앙에 한재(韓材)를 놓았다. 그는 침착하다. 칼로 목을 찔러도 눈을 돌리지 않는 담력이 마음에 들었던가? 살쾡이처럼 민첩한 몸놀림이 그를 다시 보게 만들었을 수도 있지. 어쨌든 그는 그가 보아왔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무인(武人)답고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다. 한재는 만자탈(卍字奪) 두 개로 천지합일(天地合一)을 시전한다. 분명하다. 먹장구름은 갈라질 수밖에 없다. 그는 세 사람의 안위를 지켜주어야 한다. 앞에 나선 세 사람은 수비(守備)는 일절 배제한 공격을 쏟아붓는다. 그들의 뒤에 그가 있기 때문에. 그를 믿기 때문에. 아니, 스물두 번에 걸친 실전비무에서 서로를 완벽하게 믿어야만 된다는 사실을 절절이 깨달았기 때문에. 유엽도 열 자루로 극한 위기를 모면시켜 주고, 검과 륜으로 폭포수처럼 쏟아내리는 거력을 막아낸다. ‘부상은 있어도 위험은 없다.’ 그는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다고 자신했다. 꽈콰과광……!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구달, 위진, 한재가 그가 생각한 방식으로, 그가 생각한 위력으로 먹장구름에 부딪친 결과였다. 그리고 보았다. 가랑잎처럼, 줄 끊어진 연처럼 풀풀 날려가는 삼 인의 모습을…… 그는 눈을 부릅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이 고작이었다. 삼 인은 그를 믿고 있었지만 그는 그들을 구해 주지 못했다. 아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잘못되었다. 염왕검법도, 섭혼도법도, 만자탈도…… 그 무엇도 먹장구름의 일각을 무너트리지 못했다. 먹장구름은 한 치도 줄어들지 않은 기세 그대로 그의 육신을 삼켜들었다. 파앙! 오른손에 묵중한 통증이 전달되어 왔다. ‘항거할 수 없는 힘……’ 그가 미증유의 힘을 느꼈을 때, 그는 검을 놓치고 있었다. 여섯 살 때부터 그의 손에서 벗어난 적이 없던 애검(愛劍) 독불검(獨不劍)이 찢어진 손아귀를 벗어나 허공으로 날았다. 검신(劍身)이 가닥가닥 조각난 채로. 또 보았다. 최대한의 진기를 모아 날린 파륜(波輪)이 먹장구름을 뚫지 못하고 되튕겨 나오는 것을. 파륜은 한재와 구달이 찢어놓은 먹장구름을 산산이 흩어놓았어야 한다. 독불검은 한재와 위진이 조각낸 먹장구름을 향해 십팔쾌(十八快), 십삼중(十三重), 십구환(十九幻)의 묘미를 쏟아내고 있어야 한다. “크크큭……!” 그의 입에서 실낱 같은 웃음이 새어나왔다. 백팔나한대진(百八羅漢大陣)도 아니고 겨우 십팔나한대진(十八羅漢大陣)에 불과한 것을…… 이것이 이토록 엄청난 것이었나…… 퍼억! 퍽퍽퍽……! 먹장구름이 그의 육신을 난타했다. 독불검과 파륜이 그의 손을 떠났을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그의 육신은 구달, 위진, 한재와 마찬가지로 가랑잎이 되어 허공을 날았다. “크크크큭……!” 그는 웃음을 그칠 수 없었다. 뼛골을 으깨는 듯한 충격은 느껴지지 않는다. 삼 인이 그보다 앞서 저승 문턱으로 들어섰다는 것도 아픔이 아니다. 단지…… 십팔나한대진에 무너졌다는 충격이 그의 육신과 마음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第一章 방수(幇手) 쫦 1 쫦 “……음! 안 볼 걸 그랬어.” 조자경(趙慈景)은 아미(蛾眉)를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혹시나 해서 서책을 펼쳐 들었건만 도무지 못마땅한 글귀만 눈에 들어왔다. 지수사(地水師, /). 주역(周易)에서 사(師)는 스승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싸움이라는 말로 풀이된다. 지수사라는 괘(卦)는 군인으로 말하자면 전쟁으로 돌입하는 최악의 괘이다. 수(水)는 우(憂)로도 풀이된다. 싸움에 돌입할 때이니 주변에 사람인들 오죽 많이 모이랴. 사람이 많이 모이면 다툼도 일어나기 쉽고, 경쟁도 치열해진다. 지수사…… 이 괘는 지인용(智仁勇)을 겸비한 뛰어난 자에게는 기회의 괘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위험천만한 괘이다. 자신에게 그만한 실력이 없다면 방수(幇手)를 구할 일이다. 방수조차 구할 수 없는 처지라면 은인자중하고 근신할 때이다. 특히 이 괘는 병자에게 좋지 않다. 오랫동안 병을 앓은 병자가 이 괘를 얻으면 좀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조자경이 관심을 가진 부분은 오직 이 부분이었다. 총관(總管)인 광량(廣亮)의 병세가 어느 정도이고 언제쯤 쾌차할 것인가. 결과는 점을 쳐보지 않느니만 못했다. “안 볼 걸 그랬어. 하기는 이런 점괘가 맞을 리 없지.” 조자경은 실없는 짓을 했다고 자책했지만 이미 보아버린 나쁜 글귀는 쉽게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원래 주역에 달통한 처지도 아니고 주역이 점이나 치라고 만들어진 점술서(占術書)도 아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답답한 마음에 서죽(筮竹)을 뽑아봤는데…… 조자경은 창 밖으로 눈길을 던졌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나뭇가지를 차디찬 북풍이 뒤흔든다. 모질게…… 마치 ‘이래도 네가 부러지지 않을래?’ 하고 조롱하는 듯 마구 뒤흔든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 춥다. 눈도 많이 내리지 않고 그저 춥기만 한 황량한 겨울이다. 이 겨울 한가운데에서 한 생명이 생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다. ‘훌훌 떨치고 일어나야 할 텐데……’ 간절한 바람이랄까? 하나 그 생각이 얼마나 부질없는 생각인가는 누구보다도 조자경 자신이 잘 알았다. 광량은 빼빼 마른 육신만큼이나 건강과는 거리가 멀었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 휘청거리는 몸으로 백문장(白門莊)의 대소사를 총괄해 왔다. 대소사라고 해봐야 이십여 식솔을 먹여살리는 호구지책(糊口之策)에 불과하지만. ‘아씨……’ 먼 꿈결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아득한 소리가 들려왔다. 광량이 부르는 소리인가? 너무 가늘다. 유난히 이목이 청수하시던 아버지가 부르는 소리? 아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잔웃음을 먼저 띄워주셨다. 항상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해주던 유모의 음성? 그것도 아니다. 이미 육 년 전에 백문장을 떠나간 유모인데…… ‘아씨……’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그제야 조자경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아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게 하세요? 한참을 불렀는데.” 눈이 마주치자 봉아(鳳兒)가 호들갑스럽게 말을 건네왔다. “응? 응…… 왜?” “마님께서 부르세요. 빨리 오시래요.” “어머니가?” 조자경은 불현듯 치미는 불안감에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딸을 부르는 데 꼭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보고 싶어서 부를 수도 있고, 담소(談笑)나 나누고자 부를 수도 있다. 하나 지금은 아니다. 그럴 때가 아니다. 지금 시점에서 어머니가 부른다는 것은 오직 하나만을 의미한다. 광량의 병세가 호전되거나 악화되었거나 둘 중 하나. “취휴각(取携閣)……?” “네.” 조자경은 시녀의 입에서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벌떡 일어섰다. 취휴각의 ‘취휴’는 취구휴득(取求携得)이라는 말에서 따왔다. 손을 내밀면 잡아주라는 뜻이다. 광량은 취구휴득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도움을 가장 빨리 줄 수 있는 정문 옆에 사방 열 자 남짓한 건물을 지어놓고는 취휴각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조자경은 사람 발길이 끊어진 지 오래되는 연무장(練武場)을 빠른 걸음으로 가로질렀다. 한때는 삼백여 명에 이르던 무인들이 굵은 땀을 쏟아내던 연무장이다. 하나 지금은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 있다. 그래도 광량이 병들기 전에는 잡초 한 올 없이 깨끗했는데…… 취휴각도 쓸쓸하기는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곤 했었다. 어떤 사람은 병자를 데리고, 어떤 사람은 구휼미(救恤米)를 얻고자, 또 어떤 사람은 백문장에 몸을 의탁하고자. 지금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언제든지 도움을 청하고 싶은 사람은 찾아오라고 대문을 활짝 열어제쳐 놓았지만 문턱을 넘나드는 발길은 이십여 명밖에 되지 않는 백문장 식솔들뿐이다. 그리고 그 수조차 점점 줄어들고 있다. 조자경은 옛날에는 너무 비좁았던, 하나 광량 혼자 병상에 누워 있기는 너무 큰 취휴각으로 들어섰다. 취휴각은 무덤 속만큼이나 조용했다. 몇 년 동안이나 손질하지 않아서인지 전각의 문이며 기둥이며 모두 낡고 칠이 벗겨져 처량하기까지 했다. 여기에 차전초와 애쑥만 무성하게 자란다면 공동묘지의 을씨년스러움과 다를 바가 무엇이랴. 조자경은 오늘따라 유난히 적막하여 생기(生氣)마저 소멸된 듯한 전각으로 들어서자 까닭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그런 두근거림은 광량의 병상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자 한결 가라앉았다. 어머니가 누구인가. 천화신의(天花神醫) 하문화(夏雯和). 지금은 멸문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한때는 중원 제일 의가(醫家)로 칭송받던 광동(廣東) 하가(夏家)의 진전을 고스란히 이어받으신 분이지 않은가. 과장된 말이라고 비웃어도 좋지만 아마도 당금 무림에서 어머니보다 무공이 뛰어난 사람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아도 의술이 뛰어난 사람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아야 되리라. 어머니가 광동 하가의 유일한 생존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없지만. 그런 분이 일심으로 병구완을 하고 있는 이상 병세가 급박하게 악화되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으리라. 인기척을 느낀 어머니가 돌아보았다. 언제나처럼 사람의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훈훈한 미소를 띄운 채. 뭇 군웅으로부터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여인’이란 칭송을 받았던 미모를 한 점 구기지 않은 채. 어머니가 차분한 음성으로 말문을 여셨다. “임종(臨終)이시다. 먼 길을 가시는 분이니 정성껏 배웅해라.” 광량은 오랫동안 병을 앓은 팔십 노인네들이 으레 그렇듯이, 생기를 잃은 모습이었다. 퀭하니 안으로 파고든 눈두덩, 핏기 잃은 혈색, 쭈글쭈글하니 굵은 주름으로 뒤덮인 얼굴, 그리고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쭈그러든 몸. 뼈만 남은 앙상한 손마디는 서재에서 보았던 마른 나뭇가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광량은 무인이 아니다. 지고한 내공심법(內功心法) 같은 것은 차치하고라도 하다못해 시중 하류잡배들도 펼칠 줄 아는 간단한 권각술(拳脚術)조차도 모른다. ─`허허! 무공을 배운 사람들은 많아. 나는 그들을 적재적소(適材適所)에 활용할 수 있는 재주만 있으면 돼. 백문장이 무가이니만치 무공을 배우려고만 했다면 두어 수 정도는 쉽게 배울 수 있는데도 그는 배우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이십여 년이나 백문장 총관을 맡을 수 있었을까? 총관이라면 하루가 멀다 하고 무림인(武林人)을 만나야 하고, 그들 중에는 악의를 지니고 찾아온 자도 상당수에 이르렀을 텐데. 누구나 가지는 의문이다. 하나 광량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그런 의문을 갖지 않는다. 광량은 사람을 읽는 기술이 유달리 독특한 사람이다. 사람을 첫 대면 하는 순간 그 사람의 성격이며, 무공 정도, 무공의 성격, 백문장을 찾아온 목적 등을 직감했고, 거의 틀리지 않았다. 거기에 학문에 밝고, 병법(兵法)에 능통하니…… 불청객이 찾아와도 대처방법을 떠올리기는 어렵지 않으리라. 그래서 그를 만나는 사람들은 마치 발가벗고 선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말하고는 한다. 무림에서는 광량과 같은 사람을 책사(策士)라고 부른다. 백문장주 조항(趙項)과 광량의 만남은 백문장이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장주의 무공이 하잘것없었거나 광량의 지략이 조금이라도 못 미쳤다면 백문장의 성세는 있을 수 없었으리라. 둘 중 한 사람의 능력이 넘쳤다면? 그런 상황이었으면 두 사람의 의기가 투합될 리도 없었겠지. 광량은 최선을 다했다. 무념(無念), 무욕(無慾)의 경지에 접어선 듯, 한 점 사심 없이. 그것만은 의심해서는 안 된다. 장주가 세상을 버린 지 십 년이 흘렀어도 일심으로 백문장을 위해 경주했고, 임종을 앞둔 지금 그가 지니고 있는 것은 입고 있는 옷 한 벌밖에 없으니까. 백문장은 중원(中原)에서 가장 뛰어난 책사라고는 할 수 없어도 충성심만은 대단히 강한 책사를 곁에 둔 셈이다. 책사 광량. 그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 배웅이라고 해봐야 별달리 할 것도 없었다. 광량은 이미 저승 문턱에 바싹 다가섰는지 좀처럼 눈을 뜨지 않는다. 호흡도 거의 끊어져 귀를 바짝 갖다대지 않으면 들을 수 없을 만큼 숨소리가 미약하다. ‘안녕히 가세요.’ ‘이제 모든 것 다 훌훌 털어버리고 편히 가세요.’ 온갖 말들이 머리 속에서 맴돌았지만 단 한 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임종.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오리라 생각했지만 막상 코 앞에 닥치고 보니 막막하기만 했다. 친할아버지처럼 자상하게 대해 주시던 지난날이 주마등(走馬燈)처럼 스쳐 간다. 서글픔이 몰려와 감정을 격하게 만든다. 하나 눈시울을 붉히지는 않았다. 참았다. 광량이 원하지 않을 것 같아서. 결국 조자경은 아무 소리도 못 하고 앙상하게 말라버린 손마디를 잡아주는 것으로 배웅을 대신했다. 광량도 친손녀처럼 애지중지하던 조자경이 와 있다는 것을 느꼈음인가? 결코 떠지지 않을 것 같던 눈꺼풀이 위로 치켜지며 회갈색으로 퇴색해 버린 눈동자를 드러냈다. “저예요. 정신이 드세요?” 조자경은 급히 물었다. 여느 때처럼 징그럽게 낄낄거리며 바람이 새는 듯한 음성이 토해지기를 기대하면서. 그러나 광량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잠시 동안 그윽한 눈빛으로 쳐다보더니 눈가로 눈물 한 방울을 또르륵 흘려냈다. “후우!” 깊은 숨. 그리고 광량은 눈을 감았다. 영원한 안식을 찾아서. 백문장 사람들은 조용하게 움직였다. 오백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너른 장원에 이십여 명밖에 되지 않는 사람들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움직여봐야 어느 구석에서 무얼 하는지도 알 수 없지만, 누구 한 사람 손을 헛되이 놀리지 않았다. 일반 농민들이 사용하는 초라한 목관(木棺)에 뉘어진 광량. 그것도 그에게는 사치인지 모른다. 실패한 책사가 편히 죽었다는 것만으로도 황감하지 않을까? 광량은 실패했다. 소도 기댈 언덕이 있어야 비비지 않느냐고 항변할지라도, 몸을 담았던 문파가 존폐위기에 처하도록 내버려두고 이승을 하직했다는 것은 실패 중에서도 가장 비참한 실패다. 그는 편히 눈감았을까? 편안해 보이기는 하다. 늘 이마에 ‘내 천(川)’ 자를 그리고 다녔지만 관 속에 누워 있는 모습에서는 어떠한 고민의 흔적도 엿볼 수 없다. “봉(封)!” 천화신의 하문화가 짤막하게 명(命)했다. 그녀의 명에 따라 하인 두 명이 관뚜껑을 닫고 못질을 하기 시작했다. 네 귀퉁이에 먼저, 그리고 관을 빙 둘러가며 촘촘히…… 못질을 마치자 다른 하인 두 명이 더 달려들었다. 관을 든 하인 네 명과 뒷산에서 땅을 파고 있을 하인 네 명, 도합 여덟 명이 백문장에 기거하는 사내들 전부다. 여자도 많지 않다. 부엌에서 일하는 찬모(饌母)가 두 명, 천화신의의 시녀가 두 명, 조자경의 시녀가 두 명. 천화신의와 조자경까지 합해야 겨우 여덟 명에 불과하다. 더욱 가관인 것은 무공을 익힌 사람들의 숫자다. 다섯 손가락으로 꼽아도 남아도니…… 천화신의와 조자경, 그리고 조자경이 짬날 때마다 가르친 봉아와 취아(聚兒)의 무공실력이 겨우 평범을 넘어선다. 백문장이 이 모양이 되도록 방치한 것은 책사의 잘못이 크다. 광량은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이보다는 좀더 나은 여건을 만들어놓고 죽었어야 옳다. 그래야 책사이지 않은가. 장주도 무책임한 것은 마찬가지다. 백문장을 강성한 문파로 이끌어 올렸던 근원, 백학검법(白鶴劍法)이 장주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삼 단계로 이루어져 있는 백학검법. 조자경은 겨우 일단계에 들어섰고, 가장 진도가 빠른 문인(門人)도 이단계를 완성하지 못했다. 그래서야 무인들이 떠나가는 것을 말릴 수 없다. 껍데기를 배우려고 시간을 투자하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굳이 세상의 몰인정함을 탓할 일만도 아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없는 처지에 계속 장(莊)에 머물러 달라고 말하는 것이 더 뻔뻔스럽다. 백문장주는 도대체 백학검법의 진수를 어디다 숨겨놓고 변괴를 당했단 말인가. 모두 무책임하다. 한때는 건곤방(乾坤幇)과 같은 사대(四大) 패강(覇强)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백문장이 풍전등화(風前燈火)가 되어 휘둘리는 것은 어쩌면 모두의 무책임이 낳은 결과이리라. 사실 광량의 죽음은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다. 한때는 백문장주 조항과 함께 절강성(浙江省) 전역을 떨쳐 울린 이름이었으나 지금은 기억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조문(弔文)을 오는 사람도 없다. 부고(訃告)를 내지 않은 탓도 있지만, 부고를 냈다 할지라도 조문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무림인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할지라도 천화신의 하문화와 조자경에게는 큰 의미를 지닌다. 이제 앞으로…… 그녀들이 백문장을 실질적으로 이끌어가야 한다. 우선 시급하게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은 광량처럼 비굴하게 삶을 유지하든가 아니면 백문장의 현판을 내리든가 양자택일(兩者擇一)해야 한다는 것이다. 광량의 죽음을 사대 패강이 알게 되면 기회다 싶어 굶주린 늑대처럼 달려들 테니까. 매운 삭풍(朔風)이 유난히 거세게 불던 겨울날, 그는 그렇게 쓸쓸히 죽었다. 쫦 2 쫦 조자경은 청색 무복(武服)을 입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처음으로 입는 무복이다. “이제 백문장은 무가(武家)이되, 무가가 아닙니다. 당주(堂主)들에게도 제 갈 길을 찾아가라고 일러뒀습니다. 조만간 모두 떠날 겁니다. 무인이라고는 아무도 남지 않겠지요.” “싫어. 사람들이 왜 떠나야 돼?” “그것이 무림입니다. 철저한 강자존(强者存)의 세계가 무림이지요. 아씨, 앞으로는 무공을 익히시더라도 숨어서 익히셔야 합니다. 이 늙은이의 말을 새겨들으셔야 합니다. 무공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개 장원…… 백문장은 앞으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어린 나이에 알아듣기에는 너무 어려운 말이었다. 왜 사람들이 떠나야 하고, 왜 숨어서 무공을 익혀야 하는지…… 여(呂) 당주, 정(鄭) 당주, 고(高) 당주, 한(韓) 당주. 사당(四堂) 당주들이 하나씩 백문장을 등질 때에도 배시시 웃으며 언제 돌아올 것이냐고 물었다. 그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모른 채. 조금 더 나이가 들어 주변 상황을 알 때쯤이 되어서야 조자경은 광량이 한 말을 이해했다. 강자존의 세계, 무림. 될성부른 새싹은 지켜보고 가꿔주는 것이 아니라 싹이 나오기도 전에 짓밟아 버리는 것이 무림이다. 다행스럽게도 광량의 고육지책(苦肉之策)이 들어맞아 무림에서 잊혀졌기에 망정이지, 조금이라도 무공과 연관된 행동을 했다면 오늘까지 살아 있지도 못했으리라. “아씨, 정말 예뻐요.” 시녀 봉아가 호들갑을 떨었다. 조자경은 봉아의 말을 귓전으로 흘려들으며 동경(銅鏡)을 쳐다보았다. 낯선 사람이 서 있다. 열 살을 갓 넘었을 때부터 입어보지 못한 무복이여서 남장(男裝)을 한 것처럼 어색하기만 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바닷물결처럼 푸르디푸른 색감이 마음에 든다는 것. “어머니는 어디 계셔?” ‘정전(正殿)에 계시겠지.’ “정전에요. 오늘 소작인(小作人)들과 만나시는 날이잖아요.” 조자경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광량이 살아 있다면 광량이 했을 일이다. 소작인들과 만나서 내년 농황(農況)에 대해서 담소를 나누고, 적정선에서 소작비(小作費)를 산정하는 작업을 한다. 백문장의 소작비는 저렴하기로 유명하니 별다른 이견(異見)이 없는 의례적인 만남일 뿐이다. 조자경은 검을 챙겨서 요대(腰帶) 안쪽에 찔러넣었다. 열 살 되던 해, 아버지가 생일 선물로 주신 자령검(紫靈劍). 검명(劍名)처럼 검신(劍身)에 자줏빛 광채가 어려 붉은 노을 아래에서 백학검법을 펼치면 현묘한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검을 소지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녀는 광량의 충고를 잊지 않았다. 자령검을 손에서 놓은 적은 하루도 없지만, 세상 밖으로 가지고 나간 적도 없다. 오로지 지하에 마련된 연공실(練功室)에서 겨우 일 단계밖에 남지 않은 백학검법을 수련하고 또 수련했다. 검도 십여 년 만에 밝은 햇살을 대하니 느낌이 새로울 게다. “갔다 올게.” “다녀오세요.” 조자경은 방문을 힘차게 밀었다. 북풍한설(北風寒雪)이 매섭게 몰아쳤지만 조자경에게는 산들바람처럼 시원하게만 느껴졌다. 백문장이 새롭게 태어나는 날이기에. 백문장은 마을 사람들이 ‘영산(靈山)’으로 부르는 이름없는 야산을 등지고 서 있다. 이름없는 야산은 어머니가 팔을 둘러 아이를 보듬어안듯이 야트막한 산자락으로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백문장은 그 중에서도 가장 안쪽에 위치한다. 산이 비록 백 장(丈)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북풍(北風)을 막아주기에는 충분하다. 특히 백문장이 위치한 곳은 절벽을 이루고 있어 배후 공격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광량은 거기에 약간의 손질을 했다. 백문장 후원(後園)에서부터 절벽 중간까지 이어지는 암굴을 팠고, 암굴 끝 부분에는 무인 여섯 명을 상시 배치했다. 가파르기 이를 데 없는 절벽인지라 밧줄을 타고 내려오기도 어려운 곳이지만 그래도 일침(一針)을 더 박아놓은 것이다. 뿐만이 아니라 절벽 중간에 동혈(洞穴)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암굴 끝 부분은 전방을 감시하기도 용이했다. 암굴 끝에 올라서면 백문장을 비롯하여 마을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영산’의 산자락도, 산자락 너머 광활하게 펼쳐진 들판도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보인다. 숨이 탁 트이는 느낌이다. 절벽 중간에 뚫어놓은 동혈이 있기에 백문장의 수비는 견고하다. 그 누구든 백문장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이백 장 너머에서부터 종적이 발각되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이백 장 거리라면 술에 취해 널브러져 있던 사람도 정신을 수습하고 병기를 챙기기에 충분한 시간을 준다. 조자경은 동혈 끝 부분에 섰다. 여느 때처럼 마을과 그 너머에 펼쳐진 드넓은 논이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어렸을 적에는 연신 감탄을 토해 냈던 경관. 하나 지금은 조금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대신 먼지구덩이 속에 나뒹구는 다탁(茶卓)이며, 침상이며, 한쪽 구석에 나뒹구는 주담자까지…… 무인들의 손때가 묻은 집기들을 바라보았다. 감회가 새롭다. 광량은 이곳에 무인 여섯 명을 상주시켰다. 세 명씩 이교대로 경계를 세우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각 당주들로 하여금 직접 하루에 한 번씩 순찰을 돌도록 하여 경계태세에 만전을 가했다. 사당 당주들이 밤이고 낮이고, 때를 가리지 않고 들이닥치니 그야말로 잠시도 한눈을 팔 틈이 없다. 만약 조금이라도 나태한 행동을 보였을 때에는 가차없이 파문(破門)된다. 하지만 백문장이 세워지고 십 년 동안 절강성 오대 패강의 중심을 유지하면서 경계가 태만하여 축출당한 무인은 없다. 지금은 모두 떠나고 없지만, 그때만 해도 백문장 무인들의 충성심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이곳은 스스로 자원한 자만이 올라올 수 있는 요지다. 그만큼 천루(天樓)라고 불리던 동혈은 백문장 경계의 핵심 부분이었다. 지금은 아무도 없다. 경계를 설 이유도 없고, 설 만한 무인도 없다. 조자경은 잠시 동안 동혈을 서성이며 먼지가 가득 묻은 집기들을 만져 보기도 하고 제자리에 정돈해 보기도 했다. 아무 의미가 없는 행동이지만. ‘이곳에…… 다시 사람이 머물 거야. 꼭 그렇게 만들고 말겠어.’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삼백여 명에 달하던 백문장 무인들은 모두 천루를 안다. 천루는 다른 사대 패강도 알고 있다. 백문장을 치기 위해서는 천루부터 숨통을 조여야 하는 것. 그 점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나 천루 무인들이 수면을 취하는 침상 밑으로 또 다른 암굴이 뚫려 있다는 점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천루에서 직접 경계를 서는 무인들도 자신들이 잠자는 침상 밑으로 천루에 올라오는 길과 거의 비슷한 또 다른 통로가 존재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 했으리라. 조자경은 가지런히 놓인 침상 세 개 중 가운데 침상을 밀었다. 삐이걱……! 오랜 세월 동안 방치해 놨던 나무침상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아픈 신음을 토해 낸다. 침상 밑도 먼지투성이였다. 두텁게 깔려 있는 먼지들이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그 사람들…… 광량의 의도대로 되어 있기를 바래. 그렇지 않으면 내 손으로 죽여버릴 거야.’ 조자경은 손에 먼지가 묻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먹만한 돌조각들을 부지런히 집어냈다. 돌조각이 치워지면서 조금은 반듯해 보이는 청석(靑石)이 보이기 시작했고, 조금 더 치우니 손잡이까지 드러났다. “히히히! 히히히히힛!” 예순은 훌쩍 넘겼음 직한 노인이 실성한 듯 광기 어린 웃음을 토하고 있다. 옷은 다 헤져 너덜거리고, 머리는 봉두난발(蓬頭亂髮). 씻기는 언제 씻었을까? 겉으로 드러난 살결이 때에 짓눌려 시커멓다. 언뜻 보이는 붉은 피는 살이 부르트다 못해 터진 결과이리라. 그는 춥지도 않은 것일까? 한여름에나 입을 수 있는 옷을 입고, 기형적인 눈사람 앞에서 낄낄거리며 웃고 서 있다. 작은 돌멩이를 집어든다.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그는 집어든 돌멩이를 눈과 눈 사이에다가 박아넣는다. 눈이 세 개…… 뿐만이 아니라 오른팔은 세 개, 왼팔은 네 개다. 머리 쪽에 듬성듬성 박힌 작은 나뭇가지들은 머리털을 나타낸 것이리라. “히히히! 낄낄! 히히히히!” 도저히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행동…… 조자경이 암굴을 내려와 백문장에서도 몇 사람밖에 모르는 절곡(絶谷)에 들어서서 만난 첫 사람이었다. 삼십을 조금 넘어선 듯한 사내. 그는 바지를 벗고 앉아 있다. 차디찬 눈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다리를 활짝 펼치고…… 눈은 감고 있다. 입은 약간 벌어져 있는데 듣기 민망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온다. 조자경은 사내의 허벅지와 허벅지 사이에 놓인 닭을 보는 순간 사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고 얼굴을 돌려버렸다. 계간(鷄姦). 말로만 듣던…… 봉아가 낯부끄러운 말을 했을 때, 인간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느냐며 웃어넘긴…… 계간을 직접 보았다. 절곡에 들어서서 만난 두 번째 사내는 그녀가 생각하기에 인간으로 대우하고 싶지도 않은 하급동물이었다. ‘이…… 이……!’ 그녀는 너무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백문장을 재건할 수 있다는 희망이 너무 어처구니없게 사라지고 있지 않는가. ‘그 사람…… 그래, 그 사람은 뭔가 달랐어. 그 사람을 찾아야 돼. 이런 쓰레기 인간들은 덤터기로 줘도 필요없어. 그 사람만 있으면……’ 아직 희망은 남아 있다. 그녀는 누가 자신을 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열락에 들떠 있는 사내를 뒤로했다. 절곡은 넓지 않다. 그렇게 험하지도 깊지도 않다. 그러나 이곳에 사람이 숨는다면 찾기는 용이하지 않다. 마을 사람들조차 모르는 절곡. 이곳은 수천 년 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원시림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나무마다 수령(樹齡)이 사오백 년은 족히 넘은 것들이며, 잡초들도 허리춤까지 자라 있다. 동물들도 다니지 않아 흔하디흔한 소로(小路) 하나 찾을 수 없다. 백문장 최후의 비처(秘處)가 이곳이다. 광량이 이 절곡을 발견한 것은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만약 천루를 만들지 않았다면 이 절곡 또한 발견할 수 없었으리라. 천루에 올라서서 바라보면 우측으로, 안으로 움푹 파여진 듯한 검은 그림자가 보인다. 무엇일까? 천루를 만든 이상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조사할 필요가 있었다. 광량은 모든 조사를 손수 했다.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나무 한 그루 베어가지 않은 원시림은 그렇게 해서 발견되었다. 광량은 천루에서 보았던 검은 그림자 부분을 흙더미로 막아서 완벽한 절곡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곳에 삼백여 백문장 사람이 이 년 동안 버틸 수 있는 건량(乾糧)을 비축해 놓았다. 백문장 최후의 비처는 사용할 일이 없었다. 백문장이 하늘을 날고 있을 때는 힘이 강해서, 장주가 변괴를 당하고 무인들이 조각조각 흩어졌을 때는 손댈 가치가 없어서. 조자경은 근래에 인간이 만들어놓은 듯한 소로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머리 속에 떠오른 사내가 광량이나 자신이 기대한 대로 되어 있다면 그야말로 다행이지만 그녀가 절곡에 들어서서 보았던 사람들처럼 광인(狂人)이나 다름없이 변모해 있다면`─`이들은 처음부터 그랬지만`─`그녀가 생각한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흩어지지 않겠는가. 그녀는 자신할 수 없었다. 목매달아 죽은 시신을 보았다. 누구 한 사람 시신을 수습하려는 사람이 없었는지, 그는 목매달아 허공에 걸린 채로 부패되어 가고 있었다. 바위와 바위 사이에 쪼그려 앉은 사내도 보았다. 그는 추워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바싹 오그린 채로 연신 부들부들 떨면서 주절거렸다.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잘못……” 모두가 광인들이다. 이 조그만 절곡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미친 인간들, 도태된 인간들뿐이다. 하기는 기대할 것도 없다. 처음부터 이들은 미친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렇다면 그 사내는……? 그 사내도 별다를 것이 없으리라. 다른 사내들이 그렇듯이 그 사내도 백문장을 들어설 때의 모습에서 조금도 변해 있지 않으리라. 광량이 원망스러웠다. 그는 무엇 때문에 이런 미친 인간들을 백문장의 마지막 비처에 은신시켰는가. 차라리 무공에 재능이 있는 사람을 골라 무공연마라도 시켰다면 백문장을 재건한다는 것이 꿈만은 아닐 텐데. 그녀는 마지막 희망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내를 빨리 보고 싶었다. 또한 빨리 보는 것이 두려웠다. ‘역시……’ 조자경은 하늘이 무너지는 좌절감을 느꼈다. 이 사내가 광량을 따라 백문장을 들어설 때의 모습은 다른 광인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피죽 한 그릇 제대로 먹지 못한 몰골에 삶에 차이고 찌든 모습. 그런데도 그녀가 사내를 뚜렷이 기억하는 것은 화살이 꽂히듯이 날카롭게 날아오던 눈빛 때문이었다. 백문장에 있던 어떤 무인들도 사내와 같이 강렬한 눈빛을 지니지는 못했다. 무인인가? 한 순간에 든 착각이었다. 그만큼 사내가 던진 눈빛은 강렬했다. 그녀는 곧 자신의 생각을 지워버렸다. 눈빛의 종류가 달랐기 때문이다. 사내가 던진 눈빛은 무인들이 흔히 발산하는 투쟁심(鬪爭心)도 아니었고, 내력이 안으로 갈무리된 상승무인들이나 발산한다는 광목(光目)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보아온 숱한 눈빛, 아름다운 여인을 보았을 때 본능적으로 나타내는 감탄의 눈빛도 아니었다. 정확히 표현할 수는 없지만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서 사람을 관찰하는…… 무엇인가 기분을 께름칙하게 만드는 그런 눈빛이었다. 마치 발가벗은 몸을 고스란히 보이고 있는 기분이랄까? 비록 잠깐에 불과하지만 사내는 그녀의 전신을 훑어내렸다. 그때가 사 년 전이니…… 열일곱 살 때다. 가슴은 봉긋하게 솟아오르고, 얼굴은 꽃봉오리가 망울을 터트리듯이 피어날 때다. 사내가 눈길을 직시해 오면 얼굴부터 붉어질 무렵이다. 묘하게도 사내의 눈길이 전신을 훑어내려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잡념(雜念)이나 욕념(欲念)이 섞이지 않은 눈빛이라서일까? 맑고 싱싱하고 살아 있는 눈…… 그 눈빛은 열일곱 살 처녀의 뇌리에 각인(刻印)되어 틀어박혔다. 그것뿐이다. 일순간에 스쳐 지나간 눈빛을 제외하면, 그는 어느 광인들이나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그래서…… 세월이 지나면서, 아니 하루가 되지 않아 잊어버렸다. 오늘 절곡에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절곡에서 만난 몇 사람에게 실망을 느끼기 전까지만 해도. 광량은 이 사내를 일컬어 ‘주정중독자(酒精中毒者)’라고 했다. 걸인으로 남이 버린 음식찌꺼기를 주워먹는 처지였지만 그 주제에도 술을 얻어먹으려고 주루(酒樓)만 맴돌았다고 했다. 조자경은 사내를 언뜻 알아보지 못했다.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 본 강렬한 눈빛이 뇌리를 스쳤지만 어떻게 생겼는지, 키는 컸는지 작았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사내를 알아본 것은 사내의 곁에 나뒹구는 주병(酒甁)과 멀리서도 맡을 수 있는 진한 술냄새 때문이었다. 정말이다. 술냄새가 아니었다면 사내를 알아보지 못했으리라. 독한 화주(火酒) 냄새…… 그때도 그랬다. 백문장에 들어설 때도 역겨운 화주 냄새를 풀풀 풍겼다. 지금과 똑같은…… 사내는 누워 있었다. 한낮인데도 불구하고 술병들 틈에 섞여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이 곯아떨어져 있었다. 광량은 어쩌자고 절곡에 술도 준비해 놓았는가. 피를 접한 무인은 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지만 술만 준비해 놓지 않았어도 이 사내만은 주정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텐데. 사 년이란 세월이면 벗어나고도 남을 기간인데. 헛된 바람인지도 모른다. 주정중독에서 벗어났다 할지라도 무공도 모르는 광인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틀렸어. 이런 사람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다고…… 단순한 동정심이었어. 그래, 광 총관은 무인이 아니었어. 무인이 무인을 보는 눈하고 다를 수밖에.’ 조자경은 고소(苦笑)를 지었다. ─`절곡에 있는 광인들…… 요긴한 자들입니다. 그들이 광인이 되기 전에는 그래도 명성깨나 있었던 자들이죠. 서화(書畵)에 뛰어나고 특히 잉어를 잘 그린다는 신필(神筆) 박우(朴羽)는 기형 눈사람이나 만들면서 낄낄거리는 인간이 되었다. 다도(茶道)에 뛰어나 많은 사람들의 흠모를 받았다는 운단서(雲檀瑞)는 닭과 성교를 하는 인간이 되어버렸다. 호랑이도 오금을 저린다는 엽사(獵師) 남도동(南禱東)은 목매단 시신이 되어 육신조차 온전하지 못한 처지다.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초라한 그의 몰골을 보고 하늘에 떠 있는 별도 훔칠 수 있다는 대도(大盜) 마임호(麻淋鎬)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다른 자들의 명성도 그에 버금가면 버금갔지 못하지는 않다. 절곡에 있는 여덟 명의 광인들은 모두 일각에서 세상을 오시(視)했었다. 비록 무림(武林)과는 무관하지만. 이 사내…… 술에 취해 곤드레만드레 떨어져 있는 이 사내의 과거는 듣지 못했다. 그래도 광량이 데려온 사내이니만치 이 사내도 어느 한 부분에서는 두각을 나타내던 자이리라. 그러면 뭐 하랴. 한결같이 폐인(廢人)이 되어버렸는데. 고쳐서 쓸 수도 없는 폐인이. 그래도 그들의 옛 명성이 있기에 한 가닥 기대를 했다. 광량이 벌인 일이라면 어떠한 가치가 있을 줄 알았다. ─`소저, 제가 죽거든 절곡에 가서 간절하게 도움을 청해 보십시오. 그들이라면 소저에게 큰 힘이 되어줄 겁니다. 도와주기만 한다면. 허허허! 이 늙은이는 약조를 했죠. 이 못난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그들에게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겠다고. ─`그들은 왜 절곡에 들어갔어요? 외로울 텐데. ─`허허! 세상에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버리고 싶은 자들이죠. 이렇게 생각하세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기쁨도 그들의 아픔을 달래줄 수 없다고. ─`가슴 아픈 사연들이 있겠군요. ─`미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움을 청하기도 쉽지 않을 겁니다. 그들에게 조건 같은 것은 필요없어요. 무조건 도와 달라고 떼를 쓰십시오. 허허! 소저는 여려 보여도 무척 강하죠. 이 늙은이가 이날까지 살아오면서 소저의 눈에서 눈물이 나는 것을 보지 못했습죠. 절곡에 들어갈 때에는 눈물도 준비하십시오. 소저가 하실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도와 달라고 떼를 쓰는 방법밖에…… 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방도가 없습니다. 떼를 써라? 그럴 필요도 없었다. 이들에게는…… 쫦 3 쫦 합덕현(合德縣) 고가촌(高家村)은 한(漢) 무제(武帝) 시절부터 이어온 아름다운 마을이다. 적원평야(積苑平野)가 끝없이 펼쳐지다가 동양강(東陽江)이 굽이쳐 흐르는 곳과 만나는 곳에 위치한 마을이 고가촌이다. 평야라고 해서 들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소나무숲으로 덮인 구릉이 군데군데 펼쳐져 있으며, 만물이 소생하는 봄부터는 온갖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색들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것 같은 장관이 펼쳐진다. 조자경은 들판을 가로질러 고가촌으로 들어섰다. 백문장에서부터 고가촌까지는 사십 리[明尺`:`1리=2㎞] 길. 신법을 펼치면 두 시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지만 조자경은 이틀이 지나고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절곡에서 백문장을 통해 관도(官道)로 나선 것이 아니라 절곡 너머로 해서 산길을 타고 빙빙 돌아왔기 때문이다. 검을 찬 이상 사대 패강의 이목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한때나마 오대 패강에 올라섰던 백문장인지라 조자경이 검을 차고 나타난 것을 보면 촉각을 곤두세울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검을 차지 않을 수도 없다. 방수를 구하는 일이지 않은가. 백문장을 일으켜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일으킬 테니 한 팔이 되어 달라는 것이지 않은가. 방수를 구하고 문하인(門下人)을 챙기는 순간부터 사대 패강과의 일전(一戰)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어쩌면 백문장 정문을 활짝 연 그 순간이 백문장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문하인에게 어떤 무공을 가르칠 것인가? 모른다. 광량이 백학검법에 버금가는 무공비급(武功秘)을 구하고자 사방팔방(四方八方)으로 뛰어다녔어도 겉표지조차 구경하지 못했다. 절곡에 은둔해 있는 광인들을 너무 믿었다. 광량이 한 일이기에 그런 믿음이 심어졌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비록 무공은 모르지만 지혜는 뛰어난 만큼 서로가 숙의하여 기이한 무공이라도 창출해 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기대가 어긋났다고 주저앉을 수는 없다. 그녀는 잘 알고 있다. 여기서 주저앉으면 영원히 일어설 기회가 없다는 것을. 허리에 검을 차기까지 무려 십 년이 걸렸다는 사실을. 그것도 광량의 죽음이 안겨준 충격, 이제는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각오가 없었던들 영원히 검을 찰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찾아다녀야 한다. 설혹 의도가 사대 패강의 귀에 들어가서 검을 뽑아야 하는 지경이 되더라도. 고가촌 입구에는 족히 사백여 년은 살았음 직한 고목이 마을의 수호신처럼 우뚝 서 있었다. 그리고 고목 아래에는 동네 사람인 듯한 노인 세 명이 양광(陽光)을 받으며 장기에 열중했다. “멋있어.” 그녀는 세월이 느껴지는 고목을 보며 감탄했다. 노인 중 한 명이 장기판에서 얼굴을 떼고 그녀를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장기에 열중하며 말을 받았다. “죽은 나무 같아도…… 낄낄! 봄이 되면 다시 새잎이 나지.” “무슨 나무죠?” “감나무.” “많이 열리나요?” “많이는 안 열려도 아주 달지.” 말을 받아주던 노인은 차(車)를 움직여 졸(卒)을 취했다. 대국(對局)을 보니 면상(面象) 대(對) 원앙마(鴛鴦馬) 포진(布陣)에서 시작한 듯싶고, 말을 받아주던 노인은 차(車)를, 묵묵히 장기에 몰입해 있는 다른 노인은 마(馬)를 잘 쓰는 것 같았다. “쯧! 자네는 너무 차에 치중한단 말야. 그건 상(象)으로 쳤어야지.” 관전하고 있던 노인이 핀잔을 늘어놓았다. 조자경은 장기판 곁에 쭈그리고 앉아 다음 수를 구경했다. 그녀가 보기에는 상살전(相殺戰)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지만 양쪽 기물(器物)에 큰 손실이 없어 장기전(長期戰)으로 들어서는 형국이었다. 노인들은 그녀가 옆에 앉는 것도 모르는 듯 장기에만 몰입했다. 서너 수가 더 진행되고…… 노인 한 명이 궁(宮)을 들어 안으로 틀어박을 무렵, “미행자는 없습니다.” 어디선가 극히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확실한가?” 관전하고 있던 노인이 허공에 물었다. “확실합니다. 소저가 온 방향을 샅샅이 뒤졌습니다만 그림자도 비치지 않습니다.” 허공에서 다시 응수해 왔다. “그것 이상하군. 건곤방(乾坤幇), 천력문(天力門), 철응방(鐵鷹幇), 비살문(秘殺門)이 그리 만만하지는 않을 텐데…… 비살문의 귀살대(鬼殺隊)는 은신술(隱身術)의 달인들이다. 염두에 두었겠지?” “은신술의 달인이 아니라 귀신이 직접 나타났다 해도…… 미행자는 없습니다.” “쯧쯧! 요즘 것들은 패기가 지나치단 말야.” 노인은 가볍게 혀를 찼다.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는 허공 속 무인에게 한 말이지만 그 말은 핀잔이라기보다는 은근한 자부심이라는 편이 옳았다.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허공에서 낭랑한 음성이 들린 후, 깊은 정적이 이어졌다. 일다경(一茶頃) 정도의 시간이 다시 흘렀다. 그 동안 노인들은 대여섯 수를 더 놓았지만 서로 상대방의 기물에는 손상을 입히지 못한 채 겉으로 빙빙 돌기만 했다. ‘놀라운 솜씨……’ 조자경은 솔직히 감탄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검을 잡은 탓인지 여인들이 기본적으로 익혀야 하는 자수(刺繡)나 화예(花藝)보다는 장기나 바둑 같은 것이 더 적성에 맞았다. 특히 장기나 바둑은 병법(兵法)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어 현현기경(玄玄棋經) 같은 책은 달달 외우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조자경 스스로 자신보다 두어 수는 더 앞서는 노인들이라고 감탄할 지경이니. “다시 살펴보았지만 미행자는 없습니다.” 허공에서 자신만만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사이에 벌써 고가촌 주위를 샅샅이 뒤진 모양이다. 그제야 노인 세 명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조자경을 바라보았다. “백문장은 무림에서 도태(淘汰)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찌 다시 검을 차셨는가? 그렇군, 광량이 죽었군.” “고명(高明) 숙부를 뵙고 싶어요.” 조자경은 세 노인의 날카로운 눈빛을 바로 받으며 당당하게 말했다. 불청객(不請客). 조자경은 마을로 들어서는 순간 불청객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뼈저리게 절감했다. 고가촌에서 그녀를 반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현(現) 촌장(村長)을 비롯하여 촌장 집에 모여든 중년인 네 명 역시 정이 뚝 떨어지는 냉랭한 표정들이다. ‘십 년의 세월……’ 조자경은 세월의 벽을 실감했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야 돼. 도와주면 다행이고 도와주지 않아도…… 꼭 도와줘야 할 텐데.’ “고 숙부님이 어느 분이신지 궁금하군요.” 십 년 전의 얼굴이라 보면 기억날 줄 알았는데 기억나지 않았다. 사당(四堂) 중 백표당(白豹堂)을 이끌었던 고명(高明). 중년인 네 명 중에 누가 고명 당주인가. “고명은…… 마을에 없소.” 중년인 중 눈매가 위로 치켜 올라가 성정(性情)이 사나워 보이는 중년인이 툭 쏘듯이 내뱉었다. ‘그랬구나. 그렇지. 이 자리에 있었으면 알아봤을 거야.’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려야겠군요. 도와주시겠어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니 우리도 바로 말하겠소. 대가는 무엇이오?” 조자경은 입술을 짓깨물었다. ─`그들은 대가없는 일에는 간여하지 않습니다. 설혹 옆에서 사람이 죽어가도 대가가 없으면 손을 쓰지 않는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얻기만 하면 백표당이 부활한 것과 진배없습니다. 허허허! 장주가 고명 당주를 얻은 것은 천운이지요. 객잔(客棧)에서 우연히 만나 논검(論劍)을 하다가 비무(比武)까지 하게 됐는데, 진 사람이 이긴 사람의 수하가 된다는 일생을 건 조건이었죠. 젊은 사람들의 치기(稚氣)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 고명 당주가 있었으면 모르되, 지금 실정에서 이들에게 정(情)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렵다. 정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지만. 그렇다면 광량이 말한 대로 대가를 주고 몸을 사는 길밖에 없다. “백문장은 천석꾼이라 할 수 있어요. 재산은 제법 있는 편이죠. 얼마나 원하나요?” 촌장은 쉰 정도 먹어 보이는 중년인으로 키가 작지만 몸집이 다부지며, 눈매가 날카로웠다. 산도적이라면 고개를 끄떡여도 농부라고 하면 고개를 가로저을 그런 사람. 그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돈은 우리도 생활할 만큼 있소. 다른 걸 줄 수 있소?” “원하는 것이 뭐죠?” “완벽한 백학검법.” ─`그들을 얻는 방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완벽한 백학검법. 고가촌 사람들은 여러 문파와 손속을 겨뤘는데 어떤 때는 지고 어떤 때는 이겼죠. 유일하게 지기만 한 무공이 바로 백학검법입니다. 그들은 고 당주가 진 것을 마을 전체가 진 것으로 생각하죠. 그러나 고 당주가 백문장 당주직을 맡고 있으니 비무를 청할 수도 없고…… 그러다 장주님이 변괴를 당하셨고…… 사람과 비무를 할 수는 없어도 논검으로라도 우열을 가려보고 싶은 것이 그들 생각입니다. ……완벽한 백학검법을 찾기 전에는 그들을 찾지 마세요. 시간낭비일 뿐이죠. 광량이 옳았다. 이들은 완벽한 백학검법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조자경에게는 백학검법 육식(六式)밖에 없다. “안 되겠군요.” “유감이오.” 고가촌 방문은 너무 싱겁게 끝났다. “충고 한마디 해도 되겠소?” 촌장이 비웃듯이 싱글거리며 말했다. “……?” “검을 차지 마시오.” 조자경의 아미(蛾眉)가 파르르 떨렸다. “광 총관은 우리를 찾아오지 않았소. 웬 줄 아시오?” “……” “고명, 여송(呂松), 정항(鄭恒). 백표당, 백호당(白虎堂), 백룡당(白龍堂). 백문장 삼당 당주가 건곤방(乾坤幇)에 몸을 의탁했소.” “네? 네엣!” 조자경은 진심으로 놀랐다. 처음 듣는 소리다. 이제까지 광 총관은 물론이고 그 누구도 그런 소리를 해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알고 있었을까? 그래서 얌전히 무가(武家)임을 포기하고 소작인들과 담합(談合)을 벌이고 있는 것일까? “놀랐소? 하하하! 아직 어려도 한참 어리군. 이보시오, 소저. 그 정도의 정보는 절강성 어린아이들도 알고 있는 게요. 상대를 그렇게 몰라서야 누가 대신 검을 들어주겠소. 가르쳐 주는 김에 하나 더 가르쳐 드리지. 백응당(白鷹堂) 당주인 한병(韓秉). 그 사람은 덩치가 집채만하니 어디에 투신했겠소?” “천력문(天力門)……?” “하하하! 그것도 절강성 사람이라면 어린아이부터 곧 무덤에 들어갈 늙은이까지 모두 알고 있는 일이오.” 조자경은 현기증이 핑 돌았다. 고가촌 촌장이 심한 말을 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이 백문장을 포위하다시피 둘러싸고 있는 건곤방, 천력문, 철응방, 비살문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광 총관은 생전에 사대 패강과 보타산(普陀山)의 보타문(普陀門), 그리고 천태산(天台山)의 천룡사(天龍寺) 스님들만이 진정한 무공이 무엇인지를 안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또 그에는 못 미치지만 고가촌 사람들과 형주(衡州) 한가(韓家)는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사람들이라는 것도 말씀하셨다. 고가촌에는 고명 당주가, 형주 한가에는 한병 당주가 연관있지 않은가. 그들은 자신을 무척이나 아껴주었고, 그 기억이 아직도 새로우니 만나기만 하면 도와줄 줄 알았다. 대가를 바란다면 줄 생각도 했다. 소작으로만 해마다 이천 석씩 거둬들이는 전답이 있지 않는가. 무가로 다시 일어서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무림에 명성을 날리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러나 비명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복수는 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복수만 할 수 있다면 모든 전답을 주어도 아깝지 않다. 그런데…… 그런데 사당 당주들이 원수일지도 모르는 사대 패강에 몸을 의탁하고 있다니. 조자경은 둔중한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서 좀처럼 빠져 나오지 못했다. 그때, “하나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오. 소저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이 있는데……” 촌장은 말꼬리를 흐렸다. “뭐죠?” “소저의 미모는 절강 제일이오. 내 이 나이가 되도록 내로라 하는 소항(蘇抗) 미녀들을 수없이 보았어도 소저 같은 미모는 처음이오. 솔직히 주책없이도 소저를 보는 순간, 가슴이 뛰었지. 거두절미하고…… 소저를 꼭 닮은 딸아이 하나만 낳아주면 도와주겠소. 나는 아들밖에 없거든.” 말을 하는 촌장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욕념(欲念)이었다. 굶주린 승냥이가 닭을 쳐다보듯이, 붉게 물든 눈동자로 조자경의 전신을 훑어내렸다. “뭐, 뭐요!” 조자경은 벌떡 일어섰다. 第二章 비감(悲感) 쫦 1 쫦 “더럽고 추잡한 놈! 퉤엣!” 조자경은 송충이가 몸을 기어가는 느낌에 연신 침을 뱉어댔지만 촌장의 끈끈한 눈길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촌장 집을 어떻게 빠져 나왔는지 모른다. 그들이 꼭 강제로 억류할 것 같은 불안감에, 그리고 잠시라도 더 머물렀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여인 특유의 경계심에 자리를 박차고 뛰쳐 나오기는 했지만…… 동양강 강가에 이르러서야 조자경은 정신을 수습했다. 푸른 물이 넘실거리며 흐른다. 매서운 겨울 강바람이 옷섶을 파고들어 살을 엔다. 값을 치러야만 움직이는 고가촌 사람들. 그들에게는 적도 동지도 없다. 누구든 가장 후한 값을 주는 사람 편에 서서 사나운 승냥이처럼 겸(鎌)을 휘두른다. 어제는 건곤방과 어울려 천력문과 싸웠지만, 오늘은 천력문 편에 서서 건곤방에 겸을 들이대는 사람들이 고가촌 사람들이다. 그들은 강자존이라는 무림의 철칙을 알고 있기에 자유분방하게 행동할 수 있다. 사대 패강은 마음만 먹으면 고가촌 정도는 단숨에 몰살시킬 수 있다. 그러나 고가촌을 몰살시키기 위해서는 아무리 못 잡아도 전력의 삼 할 정도는 손상된다. 삼 할…… 고가촌을 제거하는 데 그만한 대가는 치러야 하지 않느냐고 생각하겠지만, 사대 패강에서 추락하기에도 충분한 손실이다. 그만큼 사대 패강은 서로 간에 팽팽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고가촌은 그런 점을 잘 알기에 마음놓고 활동한다. 사대 패강의 입장에서도 적이 되어 밀어닥칠 때는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지만 언젠가는 적당한 값에 그들의 힘을 이용할 때가 있기 때문에 웬만하면 건드리지 않으려고 한다. ‘어리석었어.’ 조자경은 후회했다. 무림의 비정한 생리를 좀더 일찍 깨달았어야 한다. 그랬다면 함부로 검을 차고 나서는 일 따위도 없었으리라. 아니, 검을 차기 위해서는 재삼재사 숙고했겠지. 강호(江湖) 초출(初出). 조자경은 보살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가운데 강호로 출도한 셈이다. ‘먼저 어머니와 상의했어야 했어.’ 희망에 들떠서 걸어왔던 길이건만 돌아가는 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형주 한가는 찾아갈 필요도 없다. 고명 당주가 건곤방에 투신한 관계로 백문장을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이 고가촌의 입장이라면 형주 한가도 비슷한 이유를 댈 것이다. 한병 당주가 천력문에 투신해 있으니 입장이 곤란하다고. 그것은 핑계에 불과하다. 현 무림에서 백문장을 도와주려는 문파는 아무도 없으리라. 이득은 없고 해(害)가 자명한 일에 발벗고 나서줄 사람이 어디 있으랴. 방수(幇手)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문파가 소림사(少林寺)다. 하나 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인 소림승들이 중원 일각에서 반딧불처럼 미미한 빛을 발하다 무너진 백문장 따위에 관심을 가질 리 없다. 구대문파(九代門派)로 거론되는 무당파(武當派)나 화산파(華山派), 아미파(峨嵋派) 등도 마찬가지다. 그 다음, 구파일방에 버금가는 문파를 생각해 보았다. 적어도 폐가(廢家)나 다름없는 백문장을 절강성 제일 패자로 부상시키기 위해서는 구파일방에 버금가는 세(勢)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올망졸망한 문파만 생각날 뿐 백문장을 절강성 패자로 부상시켜 줄 만한 문파가 생각나지 않는다. 결국 이 넓은 천하에 자신을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일까. 조자경은 절곡에서 느꼈던 절망과는 또 다른 절망, 비참함을 맛봤다. 천애고아(天涯孤兒)가 되면 이런 심정이 들까? 세상은 넓어도 작은 육신 하나 머물 곳이 없어 허우적거리는 그런 심정이었다. ‘이랬어. 이래서 어머니가 포기한 거야. 소작인들과 쌀 몇 톨을 이야기하시면서 숨죽이고 사시는 거야. 광 총관도…… 모두 어쩔 수 없어서 눌러참고 사는 것을…… 호호호!’ 조자경은 절곡에 있는 광인들을 이해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심해지면 조자경 자신도 광인이 되어버릴 것 같지 않은가. 지금만으로도 충분히 가슴이 터질 것 같지 않은가. 울분이 솟구쳐 미친 듯이 웃어젖히고 싶지 않은가 말이다. 이제 어디 가서 방수를 구해야 한단 말인가. 조자경은 고가촌장의 말을 상기해 냈다. ─`소저의 미모는 절강 제일이오. 내 이 나이가 되도록 내로라 하는 소항(蘇抗) 미녀들을 수없이 보았어도…… 난생처음으로 대한 끈적끈적한 눈빛…… 미모(美貌)에는 자신있다. ‘절강성 제일 미녀’, ‘서시(西施)의 환생’과 같은 찬사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말이지 않은가. 어떤 사내라도 자신을 보면 미혹되지 않을 리 없다. 자신이 주체가 되어 백문장을 일으킬 수 없다면, 타인(他人)에게 부탁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무엇인가를 대가로 주어야 한다. ‘몸뚱이……’ 조자경의 눈빛은 차디차게 흐르는 강물만큼이나 차게 변했다. 백문장은 반드시 일어서야 한다. 그녀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아버지의 몰골을. 머리를 내리친 것은 도(刀)다. 도만이 머리를 반쪽으로 갈라버릴 수 있다. 양 팔을 잘라버린 것은 검이 지닌 예리함이고, 심장을 찌른 것은 폭이 좁고 예리한 협봉검(峽封劍)이다. 허벅지를 반쯤 갈라버린 것은 부(斧)가 틀림없고…… 아버지는 무려 열네 가지의 병기에 육신을 난자당했다. 한 사람이 두 가지의 병기를 사용했다고 가정하더라도`─`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일곱 명이 협공(挾攻)했다는 결론이 된다. 아버지는 비참하게 돌아가셨다. 검을 들었으니 바람처럼 스러지는 운명이라지만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문인이라는 사람들은 복수할 생각은 하지 않고 떠나가 버렸다. 그것도 적일지도 모르는 사대 패강에 귀속된 사람이 대부분이니 분함은 더욱 크지만 어찌 하랴. 아직은 누구 소행인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피살당했는데 자식 된 자가 원수의 윤곽조차 모른대서야 말이 되는가. 광량은 알아내지 못했다. 어쩌면 알아냈어도 상대가 너무 거대한 세력이기에 말을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원수를 알아냈어도 광량이 그랬을지 모르는 것처럼 원수가 사대 패강이라면, 아니 그 중에 한 문파일지라도 복수는 요원하다. 방법은 오직 하나다. 백문장을 다시 일으켜 예전의 성세를 구가하는 것. 그때가 되어야만 아버지의 복수를 할 수 있다. ‘몸뚱이로 된다면…… 주겠어.’ 조자경은 자신이 어디로 가야 되는지 알게 되었다. 생각을 돌리니 세상이 바뀌는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온통 암흑뿐이던 세상이었는데, 생각을 바꾸자 밝은 빛으로 가득 찬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몸값을 모르고 산다. 하나 조자경은 자신의 몸값을 알고 있다. 몸을 버릴 생각까지 했다면…… 고가촌 따위는 찾아오지도 않았다. 고가촌장 따위의 인간에게 몸을 던진다는 것은 혀를 깨물고 죽느니만 못하리라. 고가촌의 모든 전력을 통합해 봐도 과거 백문장의 일개 당(堂)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까. ‘항주(杭州) 서천목산(西天目山)으로 가자. 절검노자(切劍老子)라면……’ 그녀는 어렵지 않게 한 인물을 떠올렸다. ─`절강성에는 일인(一人)으로 사대 패강 중 한 세력과 견줄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절검노자죠. ─`그렇게 강한 사람이 있어요? ─`절검노자는 강한 편이지만 무적(無敵)은 아닙니다. 그의 외호가 절검노자가 된 것도 누구에겐가 패한 다음에 검을 분질러 버렸기 때문이죠. ─`……? ─`왜, 이 늙은이가 헛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해할 수 없어요. ─`허허허! 그렇겠죠. 이 늙은이가 절검노자를 사대 패강의 한 세력과 견준 것은 그의 후덕한 인품 때문이죠. 인품은 인맥(人脈)을 낳습니다. 절검노자가 알고 있는 지인(知人)들은…… 절강성에서만 하더라도 그가 위해를 당하면 천룡사도 보타문도 움직일 겁니다. 절검노자는 나이가 칠십에 가까운 노인이다. 더군다나 인품 또한 후덕하니 증손녀밖에 되지 않는 조자경에게 흑심을 품을 리 없다. 그러나…… 그러나 세상은 요지경 속이지 않은가. 그렇게 후덕한 절검노자에게도 우환(憂患)이 있으니, 손자인 서정웅(徐正雄)이 절강성에서 이름난 호색한(好色漢)이라 하루가 멀다 하고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은 이미 소문도 아니다. 서정웅을 개심(改心)시켜 올바른 길로 들어서게만 한다면 절검노자가 움직여주리라. 다른 일도 아니고 아버지의 복수를 한다는데야. ─`호호호! 아씨, 서정웅이라는 그 인간 말예요. 얼굴은 제법 반반하다네요. 하지만 아무리 얼굴이 반반하면 뭐 해요? 청루(靑樓)에 틀어박혀 살다시피 한다는데. 소문에는 화류병(花柳病)에도 걸린 적이 있다는데…… 어휴! 생각만 해도 속이 매슥거리네. 그녀는 발걸음을 재게 놀리기 시작했다. 항주에서도 창기(娼妓)들이 많기로 소문난 황음로(荒淫路)에 가면 인간말종 서정웅을 만날 수 있으리라. 쫦 2 쫦 ‘응……?’ 동양강을 벗어나 야트막한 야산으로 막 접어들 무렵, 조자경은 심상치 않은 예감에 걸음 속도를 늦췄다. 째째짹! 째짹……! 산새들이 평화롭게 지저귄다. 산새들만큼이나 주위는 평화롭다. 아침에 내린 눈인지, 아니면 오래 전에 내린 눈이 녹지 않은 것인지. 설경(雪景)이 드넓게 펼쳐진 것은 보기 좋았으나,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것은 좋지 않았다. 그 때문인가? 산야에 펼쳐진 아름다운 설경, 평화롭게 지절대는 새소리에도 불구하고 까닭 모르게 마음이 불안하니. 째째짹! 째째짹……! 산새들의 지저귐이 요란스럽게 귀를 간질인다. ‘아니야. 이것은 예기(銳氣)……’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발에서 기운이 빠져 나가는 것 같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아름다운 설경뿐인데…… 그녀는 허리춤에 꼽힌 자령검을 슬쩍 만져 보았다. 검병(劍柄`:`손잡이)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손에 착 달라붙는다. 기침단전(氣沈丹田). 전신에 흩어져 있던 기(氣)를 단전에 모았다. 백학검법의 기본 요체다. 기침단전이 이루어져야만 정신을 응집시킬 수가 있고, 백학검법의 정교한 검세를 펼쳐 낼 수 있다. 조자경은 숨을 내쉬었을 때 기가 위로 뜨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걸음을 떼어놓았다. 뽀드득, 뽀드득……! 걸음걸음마다 눈 조각이 상큼한 소리를 토해 낸다. 조자경의 모든 신경은 주변으로 흘렀다. 나무 뒤, 바위 뒤…… 사람이나 맹수가 숨어 있을 만한 곳은 남김없이 훑고 지나갔다. 직접 가서 눈으로 확인할 필요는 없다. 몸에 와닿는 예기(銳氣)의 실체가 있는지 없는지만 확인하면 된다. ‘으음……!’ 확실히 심상치 않다. 강호(江湖) 경험이 전무하지만 칼 끝처럼 파고드는 예기를 놓칠 만큼 우둔하지는 않다. 그리고 그 기운은 걸음을 떼어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꼭 그만큼씩 더욱 날카로워진다. 주변 공기까지 꽁꽁 얼어붙은 느낌이다. 누가 숨어서 지켜보고 있을까? 맹수…… 그렇다. 맹수가 숨어서 지켜보고 있다면 꼭 이런 느낌을 주리라. 한 걸음, 두 걸음…… 계속 걸음을 떼어놓았다. 상대가 맹수라면 일 검에 요절낼 자신이 있다. 예기를 흘려낸 정체가 인간이라면…… 부딪쳐 보아야 알겠지만 그 동안 백학검법`─`비록 전반부에 불과하지만`─`을 익히면서 누군가와 겨뤄보고 싶은 자신감을 얻곤 했다. ‘누구라도 좋아. 자신있어. 헉! 으음……!’ 애써서 심력(心力)을 낭비할 필요도 없었다. 굽이진 길을 돌아서면 예기의 주인이 나타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는데 과연 그랬다. 무슨 나무로 불을 지피는지 연기도 냄새도 나지 않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젊은 청년 두 명이 불을 쬐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조자경이 나타날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설원에 낯선 처녀가 나타나도 전혀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봐라. 어쭙잖은 무공 나부랭이를 익혔지. 안 그래?” 청년 중 백설처럼 하얀 백의(白衣)를 입은 청년이 회의(灰衣)를 입은 청년에게 말했다. “……” 회의를 입은 청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기도(氣度)는 백의를 입은 청년과 전혀 달랐다. 백의 청년이 자유분방하고 퇴폐적인 요소를 풍겨낸다면 회의 청년은 강직하고 경직되어 보였다. “예기를 쫓아올 정도라면 백학검법 전반부를 완전히 습득한 게야. 후후후! 그 정도 검법이면 몇 초(招)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삼 초.” “자신있어?” “……” “후후후! 삼 초라…… 그럼 네 무공이 나보다 훨씬 낫다는 소리군. 솔직히 난 십 초 내에 꺾을 자신이 없어.” 두 청년은 조자경을 쳐다보지도 않고 그들끼리 말을 주고받았다. 하나 그들이 말하는 내용은…… 조자경은 솔직히 기분이 언짢았다. 이들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백학검법 운운하는 것으로 보아 고의적으로 예기를 흘려 자신을 유인했으며, 좋은 목적으로 한 행동은 아닌 것 같지 않은가. 하기는 중원 무림에 아는 사람도 없으니 의도적으로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치고 좋은 목적을 가진 사람은 없으리라. “아우, 그렇게 고개만 숙이고 있지 마. 그래도 저 계집이 절강성 제일 미녀라네. 네게는 그림의 떡이지만. 하하하!” 조자경은 단칼에 백의 청년의 목을 떼어내고 싶었다. 그가 계집 운운한 것은 자신을 일컫는 말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녀는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백의 청년은 무방비 상태로 농을 흘리고 있지만 회의 청년은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부터 끈끈한 기운으로 전신을 옭아왔다.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가차없이 검을 찔러넣겠다는 듯이. 그녀는 백의 청년이 무슨 말을 하든 간에 간여할 만한 정신적인 여유가 없었다. 불순한 동기를 지니고 나타난 자들이라면…… 힘에 벅찬 강적이다. “형님에게는 그림의 떡이 아니란 말입니까?” “하하하! 아직도 그걸 몰랐나? 계집이란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인 게야. 먼저 눈 딱 감고 꾹 눌러버리고 나면…… 후후! 그 다음에는 누가 손을 대고 싶어도 못 대지. 그게 체면이거든. 하하하!” “그럴 생각이오?” “절강제일미녀라면 해볼 만하지 않나?” “아버지가……” “제길! 그놈의 아버지!” 백의 청년이 회의 청년의 말을 끊었다. “그놈의 아버지, 아버지! 세상에 어떤 아버지가 자신이 건드린 여인을 자식에게 주지? 그런 소리…… 잠결에라도 들은 적 있어?” “……” “막지 마라.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이 일이라면…… 후후! 아버지도 실수할 때가 다 있군.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다니, 아버지답지 않아.” 백의 청년이 일어섰다. 그리고 그제야 조자경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백의 청년은 결코 잘생겼다고 할 수 없었다. 고가촌장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을 만큼 단단해 보였는데, 백의 청년은 보통사람보다도 뼈대가 가늘어 보였다. 성격만은 못된 것이 분명했다. 제대로 웃지도 못하고 비틀려진 듯 일그러진 웃음을 흘리고 있는 것이 세상을 비비꼬며 살아온 망나니를 보는 듯했다. 회의 청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불가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우리 이야기를 다 들었으니 부언설명을 할 필요는 없겠지? 그렇게 눈치없는 계집도 아닐 테고.” 계집? 백문장에서 손 끝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자란 조자경으로서는 처음 듣는 험악한 소리였다. 아니, 이제까지 두 청년이 주고받은 말조차 귀를 의심하고 싶을 정도로 기가 막힌 소리들뿐이었다. 이건 뭔가? 마치 청루의 기녀를 대하듯이 대하고 있지 않는가. 이들의 정체는 짐작이 간다. 고가촌장의 아들들. 특히 백의 청년의 음성은 낯익다. 고가촌을 들어설 적에 감나무 아래서 들었던 그림자의 음성과 비슷하지 않은가. ‘부동심(不動心). 마음이 흔들리면 진다.’ 금방이라도 육욕(肉慾)을 채울 것처럼 싱글거리며 다가오는 백의 청년을 보면 솟구치는 울화를 참을 수 없었다. 그럴수록 더욱…… 조자경은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산 넘어 산이다. 회의 청년이 발산하는 예기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백의 청년이 은연중에 발산하는 예기도 평범한 것이 아니다. “처음이지?” “……” “그래, 처음일 거야. 아버지가 여자를 보는 눈은 탁월하지. 헌 여자는 거들떠보지도 않거든. 처녀인지 헌 여자인지 가려내는 눈은…… 하하! 그것만은 도저히 아버지를 따를 수 없단 말야.” ‘참을 수 없어.’ 조자경이 그토록 유지하려던 평상심(平常心)이 깨어졌다. 그녀는 자령검을 뽑아들었고,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고수들이란 점을 망각한 채 전권(戰圈)으로 뛰어들었다. ─`백학검법 전반부 제육식(第六式)은 연정화기(練精化氣)를 기르는 데 목적이 있다. 검을 검으로 보지 말고 신체의 일부로 생각하여야 한다. 잡념을 없애라. 정신을 하나로 통일시켜라. 기는 호흡에 구애받지 말아야 하며 항상 단전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의식은 검이 공기의 흐름에 순응하는지 역류하는지까지 파악하여…… 쉬익……! 검이 흐른다. 백학검법 제일식은 잔잔하고 우아하게 펼쳐져야 한다. 상하상수(上下相隨)가 연공(練功) 비결이다. 검식을 전개하면서 검, 손, 허리, 다리가 일치하는 것을 말하며, 움직이면 전신이 움직이고[일동전동(一動全動)] 머물 때는 전신이 머물러야[일정전정(一靜全靜)] 한다. 그래야 힘이 깃들여 있지 않는 것 같은 검식 속에 강렬한 힘이 내재된다. 신체 각 부분에서 끌어올려진 힘이 나선운동(螺旋運動)에 의해 한 점에 집결될 때, 그 힘은 어린아이의 힘이라 할지라도 감히 맞받을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하물며 내력(內力)을 연성한 무인이 전개하는 바에야. 백의 청년은 음충맞은 웃음을 흘리던 것과는 달리 검식이 전개되기 무섭게 신법(身法)을 펼쳤다. 고가촌의 무공은 전에 본 적이 있다. 아홉 살인가? 열 살인가? 너무 어렸을 때라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고명 당주가 가문의 무공이라며 선보였을 때의 충격만은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다. 백문장의 무공과 성질이 전혀 달랐기 때문에. 강하다. 패력적이다. 바위가 앞을 가로막으면 바위를 부수고, 태산이 앞을 가로막으면 태산을 부술 기세다. 어찌 보면 외공(外功)인 것도 같은데 공격을 거둬들일 때는 만(慢`:`느리고), 장(長`:`길고), 세(細`:`가늘고), 균(均`:`균등하게)의 묘리(妙理)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고명 당주는 말했다. 이것이 금강공(金剛功)이라고. 터엉! 쇠와 바위가 부딪쳤을 때나 들릴 법한 소리가 튕겨나왔다. 조자경은 화들짝 놀라 뒤로 두 걸음이나 물러섰다. 백의 청년이 몸을 옆으로 피하며 일권(一拳)을 내뻗었는데, 기가 막히게도 정확히 검배(劍背)를 가격했다. 조금이라도 방향이 삐뚤어졌다면 손이 잘려나갔으리라. 하나 지금, 뒤로 물러서 있는 사람은 조자경이고, 웃음을 되찾은 사람은 백의 청년이다. ‘이, 이럴 수가!’ 조자경은 너무 놀라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단 일 초 상대밖에 되지 않는단 말인가. 아무리 전반부밖에 없는 백학검법이라 백학검법의 묘용을 정확히 모른다고 하더라도 이건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자신이 약한 것인가, 아니면 상대가 터무니없이 강한 것인가. 손목이 자르르 울려왔다. 권과 검이 부딪쳤을 때, 검을 놓치지는 않았지만 검을 타고 흘러 내려온 잔력(殘力)이 손목을 강하게 후려쳤다. 마비되는 느낌…… 그렇다. 조자경은 오른손이 마비되는 충격을 받았고, 뒤로 물러서 있지만 다시 검을 전개할 투혼(鬪魂)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하! 내가 이겼나? 너는 삼 초 승부를 말했지만 이건 일 초밖에 안 되잖아?” “방심(放心).” 회의 청년이 말했다. “아직도 모르는군. 무림에서는 방심이 되었든 속임수가 되었든 사기가 되었든 이기는 사람이 살아남는 거야.” 조자경은 그들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방심이라고? 그토록 준비하고 검을 펼쳤는데 방심? 그렇구나! 평삼심을 잃었으니…… 검공에 내력이 온전히 깃들여 있지 않았어. 그래서 맥없이 당하고 만 거야. 그녀는 깊게 자책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백의 청년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쫦 3 쫦 조자경은 혼이 나간 표정으로 눈 앞에 펼쳐진 지옥도(地獄圖)를 바라보았다. 임자 잃은 팔 한 개가 눈 위에 뒹굴고 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토해 낼 것 같은 삼척장검을 굳게 쥐고. 손에서는 아직도 바위를 부술 것 같은 힘이 느껴진다. 그러나 불행히도 어깨 부근에서 잘린 팔은 하얀 설원에 혈화(血花)를 뿌려내고 있다. 백의 청년. 그는 눈을 까뒤집고 누워 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살아 있었다. 검을 튕겨냈을 때와 똑같은 권법(拳法)을 전개했고, 기어이 조자경으로 하여금 자룡검을 놓치게 만들었다. 동시에 혈도(穴道)가 막히는 충격도 받았다. 턱 밑, 머리와 목이 만나는 염천혈(廉泉穴)에 창이 틀어박히는 듯한 극렬하고도 강한 충격이었다. 정신을 잃는 것은 당연하다. 정신을 오래 잃지는 않았다. 그저 깜빡 정신을 놓쳤을 뿐이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에 조자경은 설원 위에 반듯이 눕혀 있었고, 가위에라도 눌린 듯 엄청난 무게에 짓눌려 몸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춥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이었다. ‘이상하다?’ 춥다는 느낌과 동시에 찾아온 느낌이었다. 순간, 그녀는 검을 놓쳤을 때보다 더욱 크게 놀라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쳤다. 평생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는 가슴을 낯선 손길이 만지고 있지 않는가. 그것도 옷 위로 만지는 것이 아니라 손바닥의 억센 감촉이 맨살 위로 느껴진다. 다른 쪽 가슴은 무엇인가가 빨고 있다. 너무 강하게 빨고 있어 아프기까지 하다. 더욱 기가 막힐 노릇은 음부(陰部)에도 감촉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가슴과 마찬가지로 맨살 위로. 방초(芳草)를 만지고 있는 것은…… 손이다. 그녀는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발가벗은 몸으로 눈 위에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또한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 백의 청년이라는 것, 백의 청년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알몸이란 사실도. “아아악……! 비켯! 비키란 말야!” 조자경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치면서 몸을 빼내려고 발버둥쳤다. “후후! 이제 정신을 차렸군. 의외로 내력이 약해. 백학검법이 전반부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내력을 꾸준히 연마했으면 벌써 깨어났어야 하는데……” 그는 양 손으로 손을 틀어잡고 다리로 하반신을 짓누르며 다른 말도 했다. “흔히들 하는 말이지만 죽은 고기는 맛이 없잖아? 발버둥쳐 봐. 있는 힘껏. 하하하, 좋아! 그렇게, 그렇게 발버둥치는 거야. 하하하! 아주 흥분되는데? 이제 천천히 느껴야지? 이제 너는 나 없이는 못 사는 여자가 되는 거야. 과정을 천천히 느껴보라구. 후후!” 조자경은 있는 힘껏 사내를 밀어냈다. 하나 역부족이다. 사내가 움켜쥔 팔목은 족쇄에 채인 듯 꼼짝도 할 수 없고, 뱀처럼 하반신을 감아오는 다리 역시 천잠사(天蠶絲)처럼 질기고 강했다. 그녀는 다리가 벌어지고 말았다. 몸으로 몸을 짓누르고 한쪽 다리를 교묘하게 움직여 허벅지를 밀치고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윽고 사내의 두 다리가 벌린 다리 사이로 들어왔을 때, 음부에 사내의 양물(陽物)이 닿았을 때 조자경은 한 줄기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이건 아닌데…… 이렇게 몸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런 인간에게…… 차라리 혀를 깨물자. 이렇게 몸을 망치느니 혀를 깨물어 육신이라도 깨끗이 간직하자. 아니다. 어차피 몸은 망치기로 결심하지 않았는가. 지금에 와서 그까짓 정조(貞操)가 무에 그리 중요한가. 미친개에게 물린 셈치는 거야. 미친개에게…… 그리고 꿋꿋이 살아남아 복수하는 거야. 이놈이 상대할 수 없는 아주 강한 무공을 익힌 다음, 살점을 조각조각 찢어서 죽이는 거야. 별의별 생각이 주마등(走馬燈)처럼 스쳐 갔다. 그런데…… 파앗! 이제 끝이구나 하는 순간, 사내의 몸이 용수철처럼 튕겨나갔다. 쉬익! 차앙! 파악……!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육신 중 일부분이 잘려나가는 소리도 들렸다. 팔 하나가 허공에 떠올랐다. 하얀 설경이 지겹다는 듯 허공에 둥실 떠오른 팔은 붉디붉은 혈화를 뿌려냈다. ‘피도…… 아름답구나.’ 피가 튀는 모습을, 인간의 육신이 잘려나가는 모습을 난생처음 보았지만 조자경이 느낀 감정은 뜻밖에도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누구…… 큭!” 백의 청년은 알몸을 가릴 여유도 없었다. 욕념에 사로잡힌 사람이 살기(殺氣)를 느끼고 몸을 튕겨냈다는 것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조자경과의 일전에서 증명되었지만 그는 분명히 평범한 고수가 아니다. 하나 그가 몸을 일으키고, 겨우 ‘누구’라는 말을 하는 동안 땅거죽을 밀어내고 솟구친 인형은 회의 청년의 한 팔을 자르고 백의 청년의 심장에 검을 틀어박았다. 심장에 박힌 검은 시중에서 동전 석 냥이면 살 수 있는 흔한 청강장검이다. 결코 보검이라고 할 수 없고, 특이한 점도 전혀 없다. 사내는 특이하다. 흑색 일색이다. 입고 있는 의복뿐만이 아니라 얼굴색도, 검을 들고 있는 손도 새까맣다. “이, 이, 이건…… 적명검(寂命劍)…… 법(法).” “……” “비, 비살문…… 왜……? 비살문이 왜 나…… 를……” “죽는 사람은 세상에 남아 있는 일을 생각할 필요가 없어.” 흑의인은 심장에 틀어박힌 검을 약간 비트는가 싶더니 쑥 뽑아냈다. “크윽……!” 백의 청년은 잠시 비틀거렸다.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고 있지만 이미 구멍이 뚫려버린 심장에서는 겉잡을 수 없을 만큼 많은 피가 흘러내렸다. 배를 적시고, 조금 전까지 활력이 팽배해 있던 양물을 적시고, 하얀 설원에 뚝뚝 떨어져 내렸다. 쿵! 백의 청년은 통나무가 쓰러지듯이 거칠게 무너졌다. 그리고 손가락 하나 꼼지락거리지 않았다. “소문주님의 말씀을 전하겠다.” 흑의인이 입을 열었다. 누구에게 말하는 것일까? “백문장은 고가촌이 건드릴 상대가 아니다. 지금은 이 정도의 경고로 끝내겠다만,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벌어질 경우에는 전면전을 각오해라. 소문주님의 말씀. 글자 하나 빠트리지 말고 고스란히 전해라.” 회의 청년에게 한 말이다. 어처구니없게도 단 일 검에 팔을 잘려버린 회의 청년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히 지혈(止血)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형이 죽은 마당에서도. “네 이름을 알고 싶군.” 회의 청년은 음성도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처럼 떨림이 없었다. “이름…… 강호에 머물 자격도 없는 놈이군. 충고하건대 네놈도 오래 살고 싶으면 검을 버리는 게 좋아.” 흑의인과 회의 청년 중 누가 더 냉정할까? 아니, 누가 더 냉혹할까? 성격을 알 수 없다면 겉으로 드러난 것, 누가 더 냉혹한 음성을 토해 낼까? 두 사람은 감정이 말살되어 있다는 점에서 말투가 비슷했다. “그렇군. 그래, 당신 말대로 강호에 머물 자격도 없군. 당신 모습을 보는 순간 알았어야 하는데. 일흑(一黑)! 영광이군. 비살문 십대고수 중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었다는 일흑의 검공을 직접 볼 수 있는 영광을 주다니.” “지금 사라지지 않으면 목숨을 취하겠다. 고가촌에 소문주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니까.” “목숨을 살려주신다 이 말이지. 고맙군. 그럼 호의를 베푸는 김에 하나만 더 베풀지. 내 이름을 기억해 둬. 고가촌의 냉혈검(冷血劍)이 바로 나야.” “고표(高豹), 기억할 가치도 없는 이름이지만 알고 있지.” 고표의 눈빛이 짧게 흔들렸다. “다음에 보지. 다음에는 내가 찾아가지. 풋! 정말 어처구니없게 당했어. 항시 깨어 있으라. 그토록 간단한 이치를 망각하고 있었다니. 형이 여색을 탐하지만 않았어도…… 아니지. 결국 깨어 있지 못하고 감각을 닫아버린 것은 나이니 내 잘못이 크지. 역시 비살문이야. 틈을 놓치지 않았으니까. 그렇지 않소? 만약 내가 깨어 있었다면 그래도 공격을 가해 왔겠소? 일흑, 당신의 그 치밀함…… 꼭 배워두리다.” 말을 마친 고표는 미련없이 등을 돌려 설원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자신의 육신에서 떨어져 나간 팔을 설원에 그대로 두고, 발가벗은 채 죽은 형의 시신 역시 그대로 두고. ‘일흑!’ 조자경은 일흑이란 말을 듣는 순간 깜짝 놀라 흑의인을 다시 쳐다보았다. 일흑이란 말을 들어서인지 과연 소문에 듣던 일흑과 한 치 틀림이 없다. 검은 옷, 검은 얼굴, 검은 피부, 검은 신발, 검은 검…… 백의 청년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자마자 조자경은 몸을 일으켜 옷부터 주워입었다. 청색 무복은 이미 옷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백의 청년이 옷을 갈가리 찢어버려 몸을 가리기는커녕 어느것이 상의고 어느것이 하의인지 알아볼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급한 대로 걸쳐 입었다. 그때는 이미 백의 청년이 심장을 관통당한 다음이었다. 그녀는 백의 청년이 벗어놓은 백색 장삼을 주워서 몸에 걸쳤다. 자신을 탐하던 사내의 의복. 옷에 사내의 체취가 그대로 묻어나는 것 같아 께름칙하고 역겨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일흑이란 소리가 들려왔다. 그 전에 백의 청년이 말한, 비살문이라는 소리만 들었어도 그리 놀라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그때는 몸을 가리기에 정신없어서 듣지 못했다. 일흑. 비살문 십대고수 중 일인. 사대 패강 중에서도 가장 은밀하고 신비로운 문파가 비살문이지 않은가. 비살문은 살수(殺手)들의 집합체답게 모든 것이 안개 속에 가려져 있다. 문도는 몇 명이나 되는지, 문파의 정확한 위치는 어디인지, 비살문에서는 어떠한 무공을 가르치는지…… 그러나 그 중에서도 십대고수로 일컬어지는 열 명만은 확연히 드러나 있다. 그들은 숨을 필요가 없다. 무공이 너무 강해 백주대로(白晝大路)를 활보해도 어찌할 사람이 거의 없다. 또한 그들은 각기 백 번에 걸친 살수업에서 단 한 번도 실수하지 않은 살수계(殺手界)의 신(神)이라는 풍문도 떠돈다. 백 번은 너무했다 생각되지만 단 한 번도 실수하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리라. 그가 나타났다. 냉혈검 고표라는 이름도 낯익다. 올가미를 씌운 것처럼 전신을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던 예기의 주인이 냉혈검 고표였다니. 냉혈검은 항시 이긴다. 모순되게도 냉혈검처럼 많이 패한 무인도 드물다. 그토록 패하고도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것이 기적으로 생각될 만큼. 옷을 벗었을 때 보면 징그러울 만큼 크고 작은 상처로 가득하다나? 그는 목숨이 위태로울 만큼 치명상을 당해도 경이로운 생명력으로 부활한다. 그리고는 자신이 왜 패했는지를 분석하고, 무공을 수련한 다음 반드시 상대를 죽여버린다. 무림에 떠도는 말이 있다. 냉혈검 고표를 상대할 때는 검에 잔정을 남기지 말라고. 냉혈검을 죽일 때는 죽음을 확인한 다음에도 최소한 다섯 번의 칼질을 더 하라고. 그래서 그는 팔을 잘리고도 웃을 수 있었던 게다. 다음에 만난다면…… 십대고수 중 일인인 일흑도 방심해서는 큰코다치겠지. 어쨌든 일흑은 이제 편히 발을 뻗고 자기는 틀렸다. 냉혈검과 적이 되었으니. 조자경은 이름없는 야산에서 절강성을 떨쳐 울리는 상승 무인을 둘이나 만난 셈이다. 일흑은 검에 묻은 피를 설원에 뿌린 다음 조자경을 향해 돌아섰다. “소문주님의 말씀을 전하지.” 그의 음성은 정나미가 떨어지도록 냉혹하다는 점에서 고표에게 말했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첫 번째, 앞으로 다시는 검을 쓰지 마라.” 고가촌장에 이어서 두 번째 듣는 말.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검을 들 기력이 없다. 이들과 자신과의 차이는 너무 크지 않은가. 이들과도 이런데 정작 사대 패강에는 얼마나 많은 무인들이 득실거리고 있을까? 무림 정세도 잘 모르고, 무공도 형편없는 처지에 검을 차고 나섰다. 그야말로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달려든 격이다. 검을 쓰지 마라? 검을 들 기력도 없다. 조자경은 이상(理想)과 현실이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 절감했다. 그 괴리감은 그녀를 절망 속으로 밀어넣기에 충분했다. 이들이 이런 정도라면 절검노자에게 응원을 청한들 백문장을 다시 일으키거나, 아버지의 복수를 할 가망은…… 희박하리라. “두 번째, 백문장에 가서 얌전히 기다려라. 소문주께서 연공(練功)이 끝나는 한 달 후, 백문장을 방문하시겠다는 말씀이셨다.” 비살문 소문주가 백문장을? 왜? “이번에는 내 말이다. 너는 소문주님이 생각하고 있는 여자. 다시는 내가 검을 사용하지 않게끔…… 함부로 나다니지 말고 행동거지 조심해라.” 조자경은 웃고 싶었다. 그러나 웃음 대신 입꼬리가 부자연스럽게 비틀어졌다. 아버지만 살아 계셨어도…… 백학검법의 중반부와 후반부만 구할 수 있어도 이런 자들에게 이따위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될 텐데. 호랑이도 발톱과 이빨이 빠지면 한낱 토끼에게 놀림을 받는다더니 자신이 그 꼴이지 않은가. 뭐라고? 소문주가 생각하고 있는 여자이니 함부로 나다니지 말고 행동거지 조심하라고? 언제 봤다고? 소문주라는 작자가 누구인데 그따위 망발을 함부로 한단 말인가. 그자는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세상 모든 여자를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놈들의 입을 막을 수만 있다면…… 누구든 내게 힘을 줄 수 있다면…… 몸뚱이가 아니라 영혼이라도 팔겠어.’ 조자경은 입술을 짓깨물었다. 第三章 운명(運命) 쫦 1 쫦 백문장이 환히 내려다보인다. 아침 안개가 슬그머니 물러가는 가운데 아침을 짓는 연기가 솟아오른다. 위용스런 건물들도 고요하고 평화로운 아침을 맞이하고 있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모두들 일어나 있겠지만 어디에 틀어박혔는지 하루 종일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곳이 백문장이다. 조자경은 천루에 앉아 아침을 맞이하고 있는 백문장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축시(丑時)가 지나 인시(寅時)에 가까워질 무렵, 백문장에 도착했다. 거처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하루 종일 굶어 배도 고프고, 몸도 피곤에 지쳤고, 입고 있는 옷도 말이 아니지만 그녀가 마음에 받은 상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백문장에 돌아오니 그런 느낌이 한결 짙어졌다. 깜깜한 밤에 사람이 백문장을 들어서고 있건만 나와서 맞이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문지기가 있기는 하지만 칠십에 가까운 노령(老齡)인지라 제대로 문을 지킨다고 보기는 어렵다. 도둑이 들면 마음껏 훔쳐 갈 수 있는 곳. 백문장이 그런 곳이다. 실제로 도둑도 여러 번 들었다. 없어진 물건도 많지만 오죽하면 남의 물건을 훔치겠냐는 심정에서 가볍게 흘리고 말았는데. 이곳이 무가인가? 평범한 도둑 한 명 방비하지 못하는 곳이, 깜깜한 야밤에 태연히 정문을 밀치고 들어서도 가로막는 사람 한 명 없는 곳이…… 이런 곳에서 일흑이나 냉혈검 같은 자들과 싸워야 한단 말인가. 비살문 소문주가 온다고 했다. 그가 오면 과연 제대로 말이나 할 수 있을까? 그가 무지(無知)한 자라서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무력이라도 행사하면 막을 방도는 있는가? 백의 청년처럼 강제로 겁간(劫姦)이라도 하려 들면 누가 제지할 텐가. 한심하기만 했다. 그녀는 곧바로 암굴을 통해 천루에 올랐다. 옛날부터 천루에 올라서면 마음이 편해지곤 했다. 아버지가 변괴를 당한 다음 무인들이 떠나갈 적에도 천루에 올라 분루(忿淚)를 삼켰다. 백문장이 너무 가볍게 무너질 때도 천루에 올랐다. 광량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그저 먹고 살기에 급급한 사람처럼 행동할 때에도 천루에 올라 야속함을 홀로 달랬다.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아버지와 같은 초강자가 없는 문파는 이미 구심점을 잃어버린 것과 같다. 백문장이 같은 절강성이라도 태주부(台州府)나 진주부(晉州府)에 위치했다면 그럭저럭 형주 한가처럼 위세를 누리고 버텼을 지도 모른다. 금화부(金華府)에서는 그게 어렵다. 사대 패강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기 때문에 어느 한 문파가 약해지면 그것은 곧 멸문으로 통한다. 광량도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무인들이 떠나는 것을 방치했을 게다. 그런 것을 야속하게만 생각했으니…… 백문장이 오대 패강 중 하나로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버지가 신화적인 무인이었던 점도 있지만 사당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상했다. 아무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지만 사당이 합심하여 백문장을 이끈다면 다른 문파도 함부로 나서지 못할 텐데. 고가촌이나 형주 한가도 존립하고 있는 마당에 백문장이 그토록 쉽게 무너지다니.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광 총관이 실질적인 백문장주인 역할을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그 역할을 조금 더 나누어서 사당을 이끌었다면…… 그 부분만은 아직도 미지수다. 광량이 왜 그토록 쉽게 포기했는지. “휴우!” 조자경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치고 싶다. 차라리 미쳐 버린다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지 않는가. 지금도 머리 속에 생생한 아버지의 죽음도 깨끗이 잊어버리고, 자신이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고. 광인이 그립다. 그녀는 절곡에 있는 광인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현실을 냉정하다. 이제 그녀는 선택해야 한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절검노자를 찾아가거나, 아니면 모든 것을 잊고 전처럼 소작인들에게 소작이나 받으며 살아가는 것. 그것도 편히 살 수 있는 방편이다. 아버지의 죽음만 잊는다면. 그리고 그녀가 선택할 길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대로 살아가는 길뿐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갈래지만 실제로 걸어갈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인 셈이다. 결국 선택의 여지가 없다. 단 한 번의 외유(外遊)에 불과했지만 영혼까지 갈가리 찢긴 채 돌아온 심정이었다. 조자경은 일어서서 침상 쪽으로 갔다. 그리고 절곡으로 향하는 암굴로 들어섰다. 광인들을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광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다시 한 번 본다면 마음 속에 일어나는 번뇌를 조금은 잊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여전했다. 신필 박우는 눈사람 대신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장난을 치고 있었고, 운단서는 닭장 앞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다. 대도 마임호는 예전 그 자리에서 연신 잘못했다는 말을 반복하고. 점쟁이 전인수(田仁秀)는 울다가 웃고, 웃다가는 다시 운다. 창화성(昌化城)에서 제법 큰 약초상(藥草商)이었다는 홍문성(洪汶成)은 머리에서 피가 흐르는 것도 개의치 않고 머리를 쥐어뜯고 있다. 악공(樂工)도 있다. 오경(吳敬)은 모든 악기에 능통하고, 특히 그가 만든 악기는 하나같이 명품이다. 하나 그는 지금 백치(白痴)가 되어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하루 일과의 전부다. 아직 이름도 모르는 그 사내는……? 술병들은 즐비한데 주정중독자는 보이지 않았다. 술병에서 술냄새가 진하게 풍겨나는 것으로 보아 오늘 새벽에 비운 술병이 틀림없었다. 그는 어디로 갔는가? 조자경은 무심히 그가 거처하는 초옥(草屋)으로 들어섰다. 초옥은 말이 초옥이지 돼지우리나 다름없었다. 초옥 안은 어둡지 않다. 지붕을 수리한 지가 오래되어 군데군데 햇살이 비쳐 들고 있다. 비라도 오면 빗물이 줄줄 흘러내리리라. 이런 곳에서도 사람이 사는구나. 자연스럽게 인상이 찡그려지는 고약한 냄새,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술병들, 지푸라기, 나무껍질들…… 조자경은 주정중독자가 없다는 것만 확인하고 몸을 돌렸다. 그러나 곧바로 나가지 못했다. 무엇인가가 묘하게 사람을 잡아당겼다. 초옥 한구석, 그다지 어둡지 않은 초옥 안에서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곳에 그녀를 잡아당기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녀는 발 끝에 차이는 물건들을 피해 가며 천천히 구석으로 다가섰다. “훗!” 실소가 터져 나왔다. 구석에는 조잡하게 만든 탁자가 놓여 있고, 그 위에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토우(土偶`:`흙인형)가 제멋대로 나뒹굴었다. 그녀의 관심을 끌어당기던 것, 그것은 하찮은 토우에 불과했다. 정교하게 만든 토우도 아니다. 어린아이가 만들었어도 이것보다는 더 잘 만들었을 것 같은 조잡한 토우다. 그녀는 미련없이 등을 돌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쉽게 떠나지 못했다. 다시 무엇인가가 그녀의 뒷머리를 끌어당겼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고 가자는 심정에서 머리를 돌렸는데, “아!” 그녀는 가볍게 탄성을 토해 내고 말았다. 토우는 한결같이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있었다. 어떤 것은 짧은 것, 어떤 것은 뭉툭한 것, 또 어떤 것은 주먹보다 조금 큰 둥그런 것을. 조자경은 한참 동안 토우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 이것……! 아!” 그녀는 다시 한 번 탄성을 토해 냈다. 움직일 수 없다. 아무렇게나 어지럽게 널려 있는 토우에 불과하지만 만약 토우가 진짜 사람이라면. 그래서 토우가 널려 있는 자리에 토우의 형상대로 서 있다면. 누구 한 사람 움직일 수 없다. 토우는 두 종류였다. 그냥 흙으로 버무려 만든 토우와 흙에 풀을 섞어 만든 토우. 종류가 다른 두 토우는 구분없이 이리저리 엉켜 있었다. 하나 자세히 보면…… 이렇게 기가 막힐 노릇이 있는가. 탁자의 맨 가장자리에 있는 토우는 풀을 섞어 만든 것이다. 모형은 오른다리를 낮게 구부려 중심으로 삼고 왼발은 가볍게 앞으로 내딛어 허보(虛步)를 만들었다. 왼손은 앞으로 쭉 뻗었고, 오른손은 신장의 절반만한 막대기를 머리 위로 치켜들고 있다. ‘허보가검(虛步架劍).’ 검을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 가르치는 기본적인 검공. 조자경은 토우가 무슨 동작을 취하고 있는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손에 든 것은 검이라야 맞는다. 그러면 완벽하게 허보가검을 취하고 있는 토우가 된다. 토우는 바로 앞에 등을 보이고 있는 흙만으로 빚은 토우를 노리고 있다. 그러나 찌를 수가 없다. 토우가 허보가검에서 허보평벽(虛步平劈)으로 자세를 전환하여 공격할 경우, 바로 옆에 있는 흙으로 빚은 토우에게 옆구리를 찔리고 만다. 그렇다면 옆구리를 노리고 있는 흙으로만 빚은 토우는? 상체를 우로 돌려 반마보(半馬步`:`양 다리를 구부려 허리를 낮추고 체중은 약간 뒤쪽에 실은 자세)를 취했다. 손에는 신장보다 훨씬 기다란 것을 두 손으로 잡고 있다. 손에 잡고 있는 것. 그것은 창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완벽한 나중평찰창(拿中平槍)의 자세가 된다. 역시 창법(槍法)을 수련하고자 하는 초심자들에게 가장 기본적으로 가르치는 공부(功夫)다. 나중평찰창에서는 도보란(跳步`:`뛰어오르는 것), 요상보란(繞上步) 등 어떠한 보법(步法)도 취할 수 있지만 창두(槍頭)는 곧게 찔러가게 되어 있다. 노리는 곳은 분명히 허보가검을 취하고 있는 토우의 옆구리다. ‘있을 텐데……’ 조자경은 나중평찰창을 취하고 있는 토우를 노리고 있는 또 다른 토우를 찾아보았다. 풀을 섞어 만든 토우 중에 있을 텐데…… 찾았다. 창을 들고 있는 토우가 창두를 내뻗는 순간, 토우의 머리와 허리는 쌍검(雙劍)에 찔리고 만다. 등을 돌리고 있어서 쉽게 찾지 못했다. 이것 역시 쌍검을 배우고자 하는 초심자에게 가르치는 기본공부인 번신쌍초검(身雙抄劍)이다. 등을 돌리고 있는 자세 그대로 왼발을 앞으로 들어올리는 힘을 이용하여 허리를 뒤로 한껏 젖힌다. 그러면서 손에 들고 있는 쌍검은 머리 위로 하여 뒤로 힘껏 내지른다. 왼발을 들어올렸으니 몸의 균형은 왼쪽이 약하게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쌍검을 쳐낼 때는 왼손에 든 검은 낮은 위치, 오른손에 든 검은 높은 위치를 공격하여 몸의 균형을 맞추게 된다. 정확히 창을 들고 있는 토우의 머리와 허리다. 모든 토우가 물고 물리는 관계다. 토우가 두 패로 나뉜 사람들의 싸움이라면…… 누구도 움직이지 못한다. 만약 무리하게 움직인다면, 그때는 피보라가 몰아친다. 누구 한 사람 요행을 바랄 수 없고, 거의 동시에 공멸(共滅)하고 만다. “이, 이것! 대단해. 누가 이런…… 설마 주정중독자가……?” 조자경의 눈동자는 흥미로움으로 빛났다. 광인을 보아야만 상심한 마음을 달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 순간만은 어제 겁간을 당할 뻔했던 일도, 백문장이 무인공성(無人空城) 같다는 느낌도 모두 잊어버렸다. 그녀의 모든 의식은 토우에 집중되었다. 누구나 무공의 기본을 알고 있다면 이런 장난 정도는 할 수 있으리라. 정말 그럴까? 나중평찰창이니 번신쌍초검이니 하는 초식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가장 절묘한 시점에서 전개한다는 것과 알고 있다는 것은 별개다. 아무리 하찮은 초식이라도 적시에 전개할 수만 있다면 절초(絶招)를 전개한 것과 다름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 지금 눈 앞에 놓여 있는 토우들이 그런 형국이다. 나중평찰창을 취하고 있는 토우의 등은 비어 있다. 그러니 굳이 번신쌍초검이 아니라도 등 뒤를 노릴 만한 초식만 있으면 되지 않을까? 그럴 필요도 없다. 그저 검을 들고 등을 노리는 토우만 만들어놓는 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아니다. 그녀가 보고 있는 토우는 피할 구석이 없다. 창두를 찔러넣은 토우가 창을 버리고 세상에서 가장 빠른 신법을 펼친다 해도 번신쌍초검은 피할 수 없다. 허보가검이라면 뒤로 물러서 피할 수 있으련만. 가장 천적인 초식들. 조자경은 눈이 부셨다. 이것은 토우가 아니라 한 폭의 그림이다. 가장 훌륭한 무공교두(武功敎頭)이며, 절묘한 무공비급(武功秘)이다. 특히 조자경의 눈길을 끈 것은 거의 오십여 개에 달하는 토우가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공격모습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에 대응할 수 있는 초식도. “훌륭해. 너무……” 조자경은 자신도 모르게 토우 중 하나를 집어올렸다. 자세히 관찰해 보고 싶어서. 순간, 그녀의 등 뒤에서 벼락같이 고함이 터져 나왔다. “만지지 맛!” 조자경은 느닷없는 고함 소리에 깜짝 놀라 토우를 놓치고 말았다. 텅! 흙으로 만든 토우이니 몸체가 강할 리 없다. 바닥으로 떨어진 토우는 조자경의 간절한 바람을 아랑곳하지 않고 산산조각나 버렸다. “나갓!” 고함이 다시 터져 나왔다. 주정중독자…… 그다. 그가 이 초옥의 주인이고, 그가 토우를 만들었다. 그리고 탁자 위에 그려진 한 폭의 무공비급을 창출해 냈다. “도와주세요. 제발!” 조자경은 자신도 모르게 산발괴인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도와주세요. 도와만 주신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요. 제발, 제발 도와주세요.” 조자경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깨달을 여유가 없었다. 그녀의 머리 속에는 오직 하나, 광량이 남겨준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무조건 도와 달라고 떼를 쓰십시오…… 절곡에 들어갈 때에는 눈물도 준비하십시오. 소저가 하실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도와 달라고 떼를 쓰는 방법밖에…… 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방도가 없습니다. 조자경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나왔다. 광량이 말해서가 아니라 그녀는 지금 진실로 도움이 필요했다. 주정중독자의 도움이. 순간적으로 스쳐 간 생각이지만 주정중독자가 끝내 도와주지 않겠다고 하면 목숨을 끊어버릴 생각까지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모른다. 모든 것이 너무 급작스럽다. 분명한 것 하나는 진실로, 간절히 애원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탁드릴게요. 제발, 제발 도와주세요.” 쫦 2 쫦 성도 이름도 모르는 낯선 사내. 해가 석양으로 기울어가는 가을 저녁 무렵이다. 외출을 나갔다 돌아온 광량이 걸인 한 명을 데리고 들어왔다. 머리는 봉두난발이었고 의복은 헤어질 대로 헤어져 맨살이 보일 뿐 아니라 까마귀가 형님 하고 달려들 정도로 지저분했다. 광량이 걸인을 데려오는 일은 늘 보아오던 일이다. 그는 걸인을 데려와 깨끗이 목욕시키고, 충분히 조섭(調攝)을 취하게 했다. 시간이 흐르고…… 몸도 마음도 정상인과 다름없다고 생각되면 그제야 좋은 말로 권고했다. “언제까지 걸인으로 살 텐가? 백문장에는 사람 손이 많이 필요한데 머물 텐가?” 그러면 백이면 백 ‘네’라는 대답을 한다. 그러나 막상 허드렛일을 견뎌내는 사람은 드물다. 편한 거처, 좋은 옷, 좋은 음식은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일을 시킬라 치면 인상을 쓰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다 떠나간 자도 있었다. 그냥 떠나가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들에게 공통된 점 하나는 소리없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야반도주(夜半逃走). 광량이 데려온 자들 거의 대부분은 그런 행동을 했다. 야반도주를 하니 지은 죄도 있지 않겠는가? 실제로 그들이 도주하고 난 뒤, 장원 구석구석을 뒤져 보면 없어진 물건이 한둘 아니다. 백문장에는 귀한 보옥(寶玉)이 없다. 백문장 정도의 장원이면 으레 있기 마련인 비단이나 인삼 같은 값진 물건도 없다.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곳간은 항시 열어둔다. 훔쳐 가고 싶으면 훔쳐 가라고. 곳간이래야 곡물밖에 없고, 곡물은 아무리 많이 훔쳐 가봐야 겨우 쌀 한 가마니가 고작이다. “평생 빌어먹다 죽을 놈들!” 곳간지기 방삼(方三)은 곡물이 없어지고 난 다음에는 꼭 그런 말을 했다. 그러나 광량의 엄명이 지엄하여 열쇠를 채우지 못했다. 그게 늘 불만이었지만.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줬는데 쓰다 달다 말 한 마디 없이 사라져? 그게 인간이야? 빌어먹을! 또 뭐가 없어졌나……” 백문장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그런 소리를 했다. 그런 면에서는 광량도 냉정했다. 취휴각을 열어 빈민(貧民) 구제(救濟)에 앞장섰지만 사지가 멀쩡하면서도 일을 하지 않으려는 자는 가차없이 내쳤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도둑질을 했다 하여 관가(官家)에 고변하는 행동 따위는 하지 않았다. ─`무가의 망신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겠지만 일부는 그렇지 않은 자도 있을 겁니다. 훔쳐 간 것이 얼마 되지 않지만 그걸 밑천 삼아서 재기한다면 불탑을 천 개 세운 것보다 더 큰 공덕이죠. 허허허! ─`걸인들에게 그러는 것보다 차라리 사람을 더 쓰면 어때요? ─`백문장은 무가이되 무가가 아닙니다. 온전한 무가라면 당연히 사람이 많이 필요하겠지만…… 지금은 필요없습니다. 겨우 몇 사람 사는 것뿐인데. 나중에 소저가 백문장을 일으키신다면 그때나 사람을 더 쓰십시오. 광량이 데려온 자들 중 극히 몇 명은 아무것도 훔치지 않고 사라졌다. 그들에게도 특색이 있다. 누가 봐도 ‘가망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다. 도둑질도 앞날에 대한 희망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희망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당장 오늘내일 먹고 살 염려는 해야 할 수 있는 행동이지 않은가. 그들은 희망이 없다. 인간이 그럴 수 있겠냐고 생각하겠지만 지금 당장 누가 죽여도 순순히 죽음을 달게 받을 사람들이다. 삶에 대한 목적도, 바라는 것도,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 백문장 사람들도 그들이 사라진 다음에 뭐가 없어졌나 뒤져 보는 사람은 없었다. 하인이나 시녀가 보기에도 그들은 죽음을 찾아갔으면 찾아갔지 무엇을 훔칠 필요조차, 생각조차 못 느끼는 사람들로 보였으니까. 어떤 사람은 의지가 소멸되었고, 어떤 사람은 정신이 빠져 나가 껍데기뿐인 육신을 걸머지고 살아간다. 광량은 그런 사람들만 모아서 절곡으로 들여보냈다. 절곡에는 그들이 평생 동안 살 수 있는 건량과 술과 안식처가 있으니까.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아도 된다는 자체가 그들에게는 큰 위안이 되었으리라. 주정중독자라고만 알고 있는 사내는 목욕도 마다하고 기름진 음식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술만 찾았다. 뱃속에 술귀신이 가득 들어 있는지 보통 사람들 같으면 인사불성(人事不省) 정도가 아니라 생명이 위독할 정도로 술을 마셔댔다. 그것도 하루도 빼지 않고. 이상한 것은 광량의 태도였다. 다른 광인들은 강제로 목욕도 시키고, 음식도 억지로 떠먹였는데 주정중독자에게만은 그가 하고자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술을 원하니 술을 주었다. 술이라도 주는 대로 마시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늘 싸구려 화주(火酒)만 원했고, 방삼은 주정중독자가 마실 술을 사기 위해 주루를 들락거려야 했다. 근 보름간 그는 빈둥대며 술만 마셔댔다. 그리고는 어느 날 갑자기 땅으로 푹 꺼진 듯 종적을 감춰버렸다. 백문장 식솔들이 모두 놀랄 사건이었다. “저놈 팔자가 우리보다 낫군 그래.” “총관님을 이해할 수 없단 말야. 다른 자들이 저런 행동을 했다면 당장 쫓아냈을 텐데.” “그러나저러나 언제까지 주정중독자를 모시고 살아야 하는 거야?” “아마 쉽게는 안 물러날걸?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두고 마시고 싶다는 술 실컷 마시게 해주는데 엉덩이를 달싹거릴 필요가 있나? 봉 잡았지, 봉.” 백문장 식솔들의 불만이 점차 고조될 무렵, 그는 마치 모든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감쪽같게 사라진 것이다. ‘절곡으로 들어갔어.’ 조자경만은 주정중독자의 행방을 직감했다. 그러나 광량에게 묻지는 않았다. 그가 아무도 모르게 주정중독자를 움직였다면 그만한 고충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겠기에. 아니다. 실제 속마음은 그들이 절곡 안에서 백문장을 위해 무슨 일인가를 해주리라 기대했다. 주정중독자의 과거가 어떤지는 모르지만 절곡으로 들어간 사람들의 신분이 하나같이 범상치 않았으니까. “나갓!” 주정중독자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쏘아보며 고함쳤다. 무서운 분노였다. 아내가 간통하는 현장을 목격한 남편보다 더한 분노가 떠올랐고, 일가족을 몰살한 원수를 만나서 검을 치켜든 사람보다도 더한 살기가 전신에서 쏟아져 나왔다. “도와주세요, 제발……” 조자경의 뇌리 속에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 사내에게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밖에는. 어떤 도움? 그것도 모른다. 자신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도 모른다. 무조건 도와 달라는 말을 해야만 할 것 같은 절박감만이 가득했다. 잠시, 초옥 안은 기이한 정적이 흘렀다. 주정중독자도 더 이상 나가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고, 조자경도 울며 매달리지 않았다. 눈빛과 눈빛만이 사납게 부딪쳤다. 여인은 간절한 애원의 눈빛이 확실하나 사내는 활활 이글거리는 눈빛이…… 아니다, 무엇인가 갈망의 눈빛 같기도 하고, 시중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파락호(破落戶)들의 끈끈한 눈빛 같기도 하다. “옷을 벗어.” “……네?” 조자경은 자신이 잘못 듣지 않았나 하고 귀를 의심했다. “……” 다시 이어지는 침묵. 그녀는 잘못 듣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주정중독자는 확실히 옷을 벗으라고 말했다. 이런……! 이놈 역시 수캐에 불과했던가? 좋다. 옷을 벗어주마. 몸뚱이를 가지고 싶다면 마음껏 가져라. 하나, 조금이라도 기대에 어긋난다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게 죽여버리리라. 토우로 표현된 한 폭의 무공도(武功圖)가 현실로 재현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무공이 약하더라도 주정중독자 한 놈쯤은 충분히 죽일 자신이 있다. 조자경은 사내의 눈을 쏘아보며 일어섰다. 옷을 벗기 시작했다. 사내의 눈을 계속 쏘아보면서. 애원의 눈빛이 아니라 강렬한 투혼을 싣고서. 그러나…… 낯선 사내 앞에서 옷을 벗는다는 것이 쉽지 않다. 몸이 만년빙굴(萬年氷窟) 속에 빠진 듯 부들부들 떨리고 옷을 벗어나가는 손에서도 힘이 빠진다. 겉에 입고 있던 장삼을 벗었다. 백의 청년이 입고 있던 장삼…… 놈의 체취가 물씬 배어 있는 장삼…… 그 장삼은 다른 사내 앞에서 벗겨져 바닥에 떨어졌다. 갈기갈기 찢어져 옷이라고는 할 수 없는 청의 무복이 나타났다. 무복 안에 받쳐입은 붉은 말흉(抹胸)도, 속살도 보인다. 요대를 풀고, 상의를 벗었다. 입술을 한 번 짓깨문 조자경은 망설임없이 하의도 벗어내렸다. ‘자! 이제 마음대로 해봐’ 하는 눈길로 사내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사내의 눈길은 여전히 광기로 어른거린다. 붉은 말흉과 한 줌 고의(袴衣)도 마저 벗으라는 듯이. 이제는 망설임도 없다. 부끄러움도 없다. 조자경은 손을 목 뒤로 돌려 말흉을 풀어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고의조차 벗어던졌다. 조각을 빗어놓은 것같이 매끄러운 알몸이 드러났다. 그녀의 몸매는 날씬하고 희고 깨끗했으며, 사지의 조화가 잘 어루러져 완벽했다. 천장을 뚫고 들어온 햇빛 속에서 희멀쑥하고 몽글몽글한 젖가슴이 좌우로 갈라져 봉긋이 솟아 있었다. 가늘고도 탄탄한 몸매는 허리에 이르러 정점을 이루었다. 두 손가락으로 감아쥘 만한 허리…… 세류요(細柳腰)라는 말이 있는데 조자경의 허리가 그랬다. 허리를 지나면 다시 볼록한 엉덩이가 나타나고…… 아! 천상의 신이라도 눈독을 들일 만큼 요염하고 매혹적인 여인. 그녀를 본 사람은 한결같이 소유욕(所有慾)에 몸살을 앓는다. 홍조를 살짝 띤 해말쑥한 얼굴, 우아한 이마에 드리운 비단결같이 부드러운 검은 머리칼. 그리고 하늘처럼 맑고 별처럼 초롱초롱한 두 눈이 지성(知性)으로 이글거려 매력적이며,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우뚝 선 코가, 또 방싯 열린 육감적이고 도톰한 붉은 입술이, 그 사이에서 반짝이는 새하얗고 가지런한 이빨이, 귀염성있게 움푹 파인 보조개까지 모두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알몸을 본다면…… 장담할 수 없다. 누가 음욕(淫慾)에 시달리지 않을지. “누워.” 사내의 음성은 냉랭했다. ‘죽이겠어. 토우…… 장난이었으면, 토우와 같은 절기(絶技)를 꺼내놓지 않으면 죽여버리겠어.’ 침상을 향해 돌아서는 조자경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돼지우리와 같은 초옥, 그리고 쥐새끼들이 똥오줌을 갈겨놓은 것 같은 침상. 이런 곳에서 순결을 빼앗길 줄이야. 눈물이 솟구쳐 또로록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초옥은 굵다란 나무기둥 네 개 위에다 풀더미를 올려놓은 것이 고작이었다. 침상에 누우니 말라비틀어진 풀더미가 보였다. 해마다 풀을 갈아줘야 하는데 술주정꾼이 그런 일을 할 리는 없고…… 지붕을 갈지 않아 검게 그을린 형색으로 썩어가고 있었다. 지붕 사이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였다. 그나마 다행이지 않은가. 하늘이 보이고 있으니. 사내가 음욕에 들떠 송충이처럼 달라붙을 때 하늘만 쳐다보고 있으면 되지 않겠는가. “눈감앗.” 시종 명령조. 침상가에 다가온 사내는 도무지 거침이 없었다. “음……!” 조자경은 가는 신음을 토해 냈다. 드디어 닥칠 것이 닥치고 말았다. 그녀의 봉긋한 가슴에 사내의 손이 얹어졌다. 조자경은 두려움에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이 떨었다. 가슴도 쿵쾅쿵쾅 뛰었다. 백의 청년에게 강제로 당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 젖가슴을 통해 전달되었다. 백의 청년에게 입으로 말하기 민망하도록 유린당한 젖가슴이다. 입으로, 손으로…… 하나 거기서 흥분을 느낀다거나 두려움을 느낄 여유는 없었다. 몸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발악만이 있었다. 지금은 다르다. 사내의 손이 젖가슴에 닿자 다음 행동이 예상되었고, 예상은 했지만 두려움을 금할 수 없었다. 주정중독자는 손만 얹어놓았을 뿐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놀라움에 떠는 가슴의 고동을 즐기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그러다 갑자기 얼음처럼 차디찬 손이 아랫배를 향해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흑!” 조자경은 다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주정중독자는 간지러울 만큼 손에 힘을 주지 않고 살갗을 쓸어내렸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주정중독자는 어떤 기분인지 모르겠지만 송충이가 기어가는 느낌이 들어 소름이 오돌토돌 돋았다. 주정중독자는 한참 동안 가만히 있었다. 가슴에 손을 얹어 가만히 있었던 것처럼. 애무를 하는 것도 아니고 변태적인 성욕자처럼 희귀한 행동을 즐기는 것 같지도 않았다. 어쩌면 그녀가 알지 못하는 변태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배 위에 손을 얹어놓고 가만히 있겠는가. 염려하던 일……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랫배에서 비처(秘處)로…… 그는 성숙하고 순결한 처녀의 나신을 즐기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조자경은 부끄럽고 창피했다. 그녀 스스로 옷을 벗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할 권리는 없지 않는가. 스스로 옷을 벗었으니 마음대로 해도 괜찮다는 생각인가. ‘죽이겠어. 죽여버리고 말겠어. 토우…… 토우……’ 오직 두 가지만을 머리 속에 떠올렸다. 죽이겠다는 살념(殺念)과 토우의 형상.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몸은 수치에 민감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다리를 오므렸다. 청천 백일하에 비처를 드러내놓고 낯선 사내가 빤히 눈뜨고 지켜보는 가운데 만지게 할 수는 없지 않는가. “움직이지 맛!” 사내는 한 톨의 인정도 남겨주지 않았다. ‘좋아. 마음대로 해. 가지고 놀고 싶으면 마음대로 가지고 놀아. 마음대로……’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조자경은 다리에 힘을 풀었다. 어차피 들개에게 던져 버린 육신이 아니던가. 손길은 비처에 머물렀다. 백의 청년도 방초만 건드렸을 뿐 몸의 가장 깊숙한 부분까지는 만지지 않았는데 그곳에서 뱀처럼 차가운 감촉이 느껴진다. 그는 또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손길은 다시 움직였다. 허벅지에, 무릎에, 발가락까지. 주정중독자에게 알몸을 샅샅이 보인 셈인가? 이제 남길 것도 없다. 인생은 이렇게 끝나고 말았다. 아니, 지금부터 시작이다. 돌아갈 수 없는 길로 들어선 이상 망설임없이 일로 직진해야 한다. 주정중독자는 백문장을 오대 패강으로 키울 수 있는 힘을 줘야 한다. 자신에게 그만한 능력이 없다면, 주정중독자 본인이 나서서라도 백문장을 일으켜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이리라. 세상에서 가장 처참하게. 조자경은 이를 악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독한 여자가 되기로 작심했다. 그때, 예의 냉막한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도와줄 게 뭐냐?” 쫦 3 쫦 조자경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직도 주정중독자의 입에서는 술냄새가 풀풀 풍기고 있었지만 목소리만은 무척 맑았다. 적어도 조금 전까지 들었던 목소리와는 전혀 달랐다. “백문장을 오대 패강으로 키울 수 있도록 힘을 줘.” 조자경은 자신이 반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육신이 망가졌다. 이틀 사이에 두 사내에게 알몸을 보이고 만지게 했다. 여인으로서 이처럼 기구한 운명이 또 어디 있을까. 자포자기는 사람을 멍들게 하지만 때로는 가장 강한 힘이 될 수도 있다. 절곡에 있는 광인들이 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인생이 나락(那落)으로 떨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않은가. ‘나는 이제 새로 태어나는 거야. 가장 비정하고 독한 여인으로.’ 조자경은 마음 속으로 이를 갈았다. 알몸을 본 이상 사내는 도와주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는 길밖에 없다. 주정중독자에게서는 무공을 익힌 어떠한 흔적도 볼 수 없으니 백학검법 전반부만으로도 충분하리라. 그러나, “크크크! 힘을 달라고? 내게 그런 힘이 있어 보이나? 없어. 이제 그만 꺼져.” 사내의 대답은 매몰찼다. “뭐, 뭣!” “자꾸 귀찮게 할래? 꺼지라는 말이 안 들…… 컥!” 주정중독자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벌떡 일어선 조자경이 목을 움켜잡았기 때문이다. 조자경은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주정중독자가 무공을 익히고 있다면 반항을 하리라. 상승무공을 익혔다면 가벼운 손짓만으로도 나가떨어질 것이고,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평범한 무공을 익혔다 할지라도 반항은 하리라. 그렇지도 못하면…… 죽는 수밖에 없다. 용서할 기분이 아니니까. “……” 주정중독자는 처음 이외에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목이 점점 조여져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굵은 힘줄이 툭툭 불거져 나왔지만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을 뿐 반항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조자경의 손을 밀쳐 내지도 않았다. 결국 먼저 포기한 사람은 조자경이었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눈동자가 돌아가 버릴 순간, 조자경은 힘을 풀었다. 허탈했다. 하기는 이런 미친 인간들에게 무엇을 기대하겠다고. 주정중독자의 말대로 주정중독자에게 무슨 힘이 있다고. 조자경은 탁자 위에 있는 토우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토록 그녀를 놀라게 만들었던 토우. 그녀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던 토우. 이성을 마비시켜 무릎을 꿇고 도와 달라고 애원하게 만들었던 토우. 그리고 스스로 옷을 벗게 만들었던 토우…… 지금은 그저 평범한 토우로 비쳐졌다. 흙인형은 흙인형일 뿐이다. 거기에는 절묘한 무공도 없고, 백문장을 오대 패강으로 키워줄 만한 거력(巨力)도 없다. 비틀거리며 일어선 조자경은 넋 나간 사람처럼 옷을 주워입었다. 누구의 잘못인가. 본인의 잘못이지 않은가. 누구를 원망하랴. 아무도 원망할 수 없다. 주정중독자도 사내. 여인이 무릎을 꿇고 애원하고 있는데 욕념이 생기지 않을 리 없다. 그런 상황에서는 어떤 행동을 해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직감을 느끼게 되어 있으니까. 이상했다. 평소대로라면 고의를 먼저 입고 말흉을 입었을 텐데 손길이 먼저 말흉으로 간다. 사내가 알몸을 보고 있는데, 여인으로서 가장 수치스러운 부분을 먼저 가려야 되는데 손에 잡히는 대로 옷을 입게 된다. 옷을 다 입고 삶의 의욕을 상실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초옥을 나설 때였다. “몸은 좋던데…… 옷을 너무 쉽게 벗어서 탈이야. 쯧! 그러고도 아직 순결을 지키고 있다니 병신들만 만났나?” 주정중독자의 비꼬는 듯한 소리가 그녀의 신경을 건드렸다. 살려주려고 했다. 죽일 가치도 없는 인간이었다. 아니, 옷을 입는 동안에도 신경조차 쓰지 않은 인간이었다. 그런데 죽고 싶어서 환장했단 말인가? 그래서 비웃어? 조자경은 천천히 돌아섰다. 여전히 비웃고 있다. 봉두난발을 한 터라 머리칼이 얼굴을 가득 덮어 기색을 알아볼 수는 없지만 머리칼 사이로 반짝이는 강렬한 눈빛이 조롱을 담고 있다. “죽여주지.” 그녀의 입에서 살의(殺意)를 품었다고는 믿기 어려운 저음(低音)이 흘러나왔다. “불쌍한 인간. 가만히만 있었으면 목숨은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동정심이 많은 여인으로 착각할 만큼 조자경의 음성은 부드럽고 낮았다. “크크크! 그래서?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투인데? 나도 가만히 있으려고 했는데 말이지. 이놈이 말을 들어야지.” 주정중독자는 손을 들어 보였다. “오랜만에 호강을 했잖아?” “일 각이야.” “응?” “네놈이 그 말을 한 덕에 일 각 동안은 목숨을 붙여주지. 대신 육신이 고달플 거야. 오랜만에 호강을 한 그 손도.” 살의가 뼛속 깊이 박히면 침착해진다. 조자경이 그랬다. “영광이군. 살이 아주 야들야들하던데.” 조자경은 앞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주정중독자를 한 번씩 죽였다. 조금 전처럼 목을 졸라 죽이기도 하고`─`눈이 툭 불거져 나올 때까지`─`뼈마디를 모두 분지른 다음 입을 짓이겨 죽이기도 하고`─`살려 달라고 애원을 했지만 듣지 않았다`─`머리칼을 움켜잡고 나무기둥에 짓이겨 죽이기도 했다. “이제야 변했군.” 그의 지척에 이르렀을 때 그가 한 말이었다. “이거 놀랄 일 아닌가? 순진하고 철없는 아가씨가 눈 깜짝할 순간에 무림인처럼 변했으니.” 천천히 손을 들어올려 목을 움켜잡아 갈 때 한 말이었다.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죽음 자체를 모르는 사람처럼. 아니면, 자신을 죽이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처럼. “말투도 변하고. 크크크! 빠른 변화야. 죽여주지? 그런 말은 진짜 살의를 품은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소린데…… 순진한 아가씨가 살의까지 품었다? 크크크!” 목을 움켜잡았을 때 입은 웃으면서도 눈은 전혀 웃지 않으며 한 말이다. 조자경은 목을 움켜잡았지만 힘을 줄 수 없었다. 사 년 전에 보았던 눈빛…… 옷을 뚫고 알몸까지 샅샅이 훑어내리던 강렬한 눈빛이 다시 터져 나왔다. “이봐, 천둥벌거숭이 아가씨. 제안 하나 할까? 무엇에 관심이 있나? 아까 보니까 토우에 관심이 있는 것 같던데. 토우 정중앙에 앉아. 그리고 몇 시간이나 버티는지 보자고. 한 시진만 버틴다면 천둥벌거숭이 아가씨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지.” 유희(遊戱)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사내는 탁자를 초옥 밖으로 옮겼다. 조자경이 떨어트려 부서져 버린 토우 자리는 비워놓고 다른 토우들은 그녀가 보았던 그 자리에 놓여졌다. “방법은 간단해. 의념(意念)으로 토우 한가운데에 서는 거야. 토우들을 흙조각으로 보면 안 돼. 그러면 재미없지. 실제 살아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거야. 듣고 있어? 다음은…… 크크! 버텨봐.” 조자경은 토우 앞에 섰다. “내 이름은 갈천상(葛天霜)이야. 이름이 뭐지?” “조자경.” “예쁜 이름이군.” 조자경은 갈천상이라고 이름을 밝힌 주정중독자를 돌아보았다. 그의 입에서 예쁘다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지금까지 취한 모든 행동이 성격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면 그는 예쁘다는 말 따위는 하지 못해야 한다. “토우를 진짜 사람으로 생각해야 돼. 토우를 흙조각으로 본다면 한 시진이 아니라 열흘도 버틸 수 있지 않아? 너를 보면 알지. 네 얼굴이 얼마나 일그러졌는지. 크크크! 속일 생각은 하지 마. 크크!” 조자경은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입술도 붉고 예쁘다. 그 안에 숨어 있는 이빨도 하얗다. 이 사내…… 그렇게 나이가 많지 않다. 유창하게 줄줄 흘러나오는 말이 귓전을 간질이는 동안 그녀는 잘도 움직이는 사내의 입술을 쳐다보고 있었다. “반말하지 마. 이 내기에서 이기면 백문장을 오대 패강에 올려놓을 때까지 내가 네 주인이야.” “……” 조자경은 사내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보고, 토우에 눈을 돌렸다. 토우 군상들을 앞에 놓고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녀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쓰려왔지만 눈 한 번 깜빡이지 못했다.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구슬 같은 땀방울은 눈을 더욱 피곤하게 만들었다. 하나 역시 닦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소매만 들어올려 이마를 훔치면 한결 편할 텐데…… 꼼짝도 할 수 없다. 전신이 가늘게 떨리며 경련이 일어난다. ‘숨이 막혀.’ 그녀의 솔직한 심정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주저앉아 버리고 싶었다. 토우를 단지 흙으로 빚은 인형으로 보았을 때는 감탄을 터트릴 뿐이었는데, 사람으로 여기고 그 한가운데 서 있다는 생각을 하자 사방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살기를 감당할 수 없었다. 희한하게도 토우들은 하나로 엉켜서 덤벼든다. 토우는 분명히 두 패였다. 풀을 섞어 만든 무리와 흙으로만 빚은 토우가 엉켜서 싸우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그들 한가운데 들어서자 그들은 자신들끼리의 싸움을 중지하고 오로지 자신만을 적으로 삼은 듯했다. 모든 병장기가 오로지 자신만을 향해 짓쳐 들었다. 토우가 취하고 있는 형상에서 다음 행동을 유추해 낸다면 사방 어디에도 활로(活路)가 없다. 가만히 서 있는 것만이 활로다.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어야만 이들이 공격하지 않는다. 독사굴에 빠져 있는 착각마저 들었다. 발 밑에 우글거리는 독사. 움직임은 고사하고 움직일 기미만 보여도 독아(毒牙)로 발목을 물어뜯을 것 같은 기분…… 시간이 조금 흘러서야 조자경은 토우들이 왜 한결같이 자신만을 공격하려고 하는지 이유를 알아냈다. 갈천상이란 자가 토우들을 배치하면서 방향을 약간씩 틀어놓았다. 위치는 처음 봤던 그대로였으되 다음 초식은 정중앙을 향하도록. 아니다. 그렇지 않은 토우도 있다. 뒤에 물러서 있는 토우들은 각기 엉뚱한 방향을 향해 초식을 쏟아낸다. 실로 기가 막힌 안배다. 마보평륜곤(馬步平棍)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토우가 들고 있는 병장기는 곤(棍)이다. 곤은 크게 휘둘러치는 것과 찌르는 동작으로 나눌 수 있는데 마보평륜곤은 보법을 전개하지 않고 바로 휘둘러 전면에 있는 적을 친다. 적을 공격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눈 깜짝할 순간이다. 단지 마보평륜곤만을 상대한다면 피할 수 있는 신법이 있다. 상대에 따라서는 역공(逆功)까지 취할 수 있다. 하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토우는 마보평륜곤만이 아니다. 좋다. 모든 공격을 물리치고 앞으로 쏘아나간다면? 대검전점[帶劍前點`:`검을 젖혀올려 앞쪽에 점격(點擊)을 가하는 것]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대검전점이 점격을 가하는 시점은`─`마보평륜곤과 똑같은 시간에 초식을 전개했다고 가정하면`─`자신이 마보평륜곤을 뚫고 나왔을 때와 딱 맞아떨어진다. 기가 막힌 일은 또 있다. 빙 둘러싼 인형들을 뚫고 나와 제이진(第二陣)과 부딪칠 경우, 상식대로라면 마보평륜곤 뒤에 기다리고 있는 대검전점하고만 병장기를 맞대야 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여기서만은 그런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대검전점 우측에 있는 토우가 들고 있는 병기는 륜(輪)이다. 던질 수 있는 병기. 좌측에 있는 토우는 부(斧)를 들고 있다. 자그마한 토우인지라 대부(大斧)인지 소부(小斧)인지 판단할 수 없지만 어느것이든 던질 수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대검전점뿐이 아니라 마보평륜곤 우측에 있는 토우는 정면만이 아니라 측면도 공격할 수 있어 바로 따라붙을 수 있으며, 좌측에 있는 토우도 대검전점과 동시에 공격을 가할 수 있다. 죽을고생을 다해 제일진을 뚫어도 여전히 제일진과 똑같은 형국이 되고 만다. 이것은 찢어도 찢어도 찢어지지 않는 그물이다. “음……!” 조자경은 신음을 토해 냈다. 얼굴색이 파리하게 질린 지는 오래 전이다. ‘더 이상은 무리야. 버틸 수 없어.’ 악마가 속삭였다. 지금 포기한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으니 그만 포기하라고 끊임없이 부추긴다. ‘질 수 없어.’ 얄미운, 죽이고 싶도록 미우면서도 유일한 희망처럼 느껴지는 갈천상을 떠올리려고 했지만 얼굴도 기억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가 약간이라도 잡념을 떠올리려고 하면 토우들이 공격을 가해 왔다. 이럴 수 있는가. 단지 인형에 불과한데 사람 마음을 읽고 공격여부를 결정할 수 있단 말인가. ‘착각이야. 내 스스로 착각에 빠지고 있는 거야. 이건…… 최면(催眠)이야. 토우, 작은 인형…… 그래, 최면이야. 약해지면 안 돼.’ 아버지가 보기 너무 딱해서 도와주고 있는가. 악마의 꼬임에 넘어갈 만하면 그와는 전혀 다른 생각이 의지를 더욱 굳건하게 해주었다. ‘졌어……’ 더 버틸 기력이 없다. 한 시진이 되려면 아직도 일다경(一茶頃) 정도는 더 남았는데. 심공(心功)을 운용하여 들끓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지만 토우들이 마음 편하게 운공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운공조차 못 한다면 단지 체력으로만 버텨야 하고, 여자의 몸이지만 백학검법을 수련하면서 다진 체력이 있기에 자신만만했지만 그것 또한 어처구니없음이 곧 드러났다. 이상하게도 토우는 체력까지 갈취해 갔다. 심력(心力)을 너무 과도하게 쓰면 과도하게 연공(練功)한 것과 거의 맞먹는 체력낭비가 발생한다. 토우들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방관하지 않았고, 조자경은 천릿길을 단숨에 달려온 것처럼 지치고 말았다. “헉! 으……!” 다리가 비틀거렸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처음에는 다리가 비틀거리는 것으로 시작되었지만 곧바로 현기증으로 이어지고 몸 전체가 마비된 듯 의지와는 상관없이 비틀거렸다. 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탁자를 움켜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것도 헛손질에 불과했다. 그녀의 고갈된 체력은 시력까지 빼앗아갔고, 방향 감각도 망실시켜 버렸다. 털썩! 쿵! 우르르……! 조자경은 탁자를 넘어트리며 땅에 쓰러지고 말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조자경은 애써서 눈을 뜨지 않았다. 얼굴에 물방울을 한 방울씩 떨어트리고 있는 갈천상에게 할말이 없다. 마음 같아서는 토우들을 어떻게 배치했는지만이라도 알고 싶다. 아니, 그것은 이미 머리 속에 각인되었다. 토우들의 위치며, 각 토우들마다 어떤 무공을 전개하고 있었고, 어떤 병기를 들고 있는지. 토우를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았으니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문제는 초식 운용이다. 사람은 흙으로 만든 인형이 아니다. 장시간 동안 토우처럼 움직이지 않고 서 있을 수 없다. 또한 마음 속에 생각했던 것처럼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초식을 뿜어낸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탁자 위에 놓인 토우는 무공을 모르는 평민들도 알고 있는 평범한 초식을 사용하여 절대무적의 위력을 발휘했지만, 사람이 똑같은 초식을 사용한다면 추풍낙엽(秋風落葉)이 되고 말리라. 그 비결을 알고 싶었다. 그러나 내기에 졌다. 갈천상이 말한 한 시진을 버티지 못했다. 이대로 돌아가야 하나. 이대로 허무하게…… 똑! 똑! 똑……! 얼굴에 떨어지는 물방울이 고드름처럼 차고 아프게 떨어졌지만 차마 눈을 뜰 수 없었다. 눈을 뜨면 무슨 말인가는 해야 하니까. “그만 눈떠. 이제는 내숭까지 떠나? 내숭을 떨려면 눈꺼풀을 떨지 말든지.” 들켰다. 그녀는 눈을 떴다. “졌어……” 마음 속 번민과는 다르게 패배를 자인하는 말이 순순히 흘러나왔다. “좌우지간 계집애들은 하나같이 말을 안 들어서. 쯧! 이런 것 아는지 모르겠네? 계집애가 다 찢어진 옷을 입고 눈바닥에 누워 있으면 이상하게도 욕정이 치밀어. ‘나 좀 어떻게 해줘’ 하는 환청까지 들리고 말야. 키키!” 갈천상…… 이 사내는 광인이 아니다. 무공을 익혔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모르지만 머리 속에 든 지력(智力)만은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다. 조자경은 갈천상이 새롭게 보였다. 망나니나 하는 말투도 어느 정도 익숙해져 부담없이 받아들였다. 조자경은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어지럽다. 속도 메슥거리고 구역질이 거세게 치밀어 오른다. 심력을 과도하게 사용하면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무공이란 의(意), 기(氣), 력(力)이 하나가 되어야만 상승경지를 이룩할 수 있지. 자신있어?” 뜻밖의 말이다. 이 사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겐가. 지금 들은 소리는 ‘옷을 벗어라’고 한 말보다 더 뜻밖이다. “네?”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가는귀까지 먹었니?” “자신있어요.” “그래서 내가 얻는 건 뭔데?” “……” 아무것도 없다. 재산은 있는 편이다. 전답(田畓)을 직영(直營)하면 천 석 정도는 무난히 수확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 정도로는 너무 부족하다. 나중이라면 모른다. 백문장이 오대 패강으로 올라서면 막대한 이권(利權)도 따라올 테고, 그때가 되면 풍족한 대가를 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뭘 줄 거야? 줄 게 없어?” “네……” 조자경은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나를 위해서 죽어.” 조자경의 고개가 다시 발딱 치켜졌다. “네. 얼마든지요.” “나를 위해서 싸워.” “싸우겠어요.” “평생…… 노예처럼 부려먹으려고 하는데?” “확인할 게 얼마나 많죠? 대답은 모두 ‘네’예요.” 조자경은 배시시 웃었다. 이 사내는 도와주기로 작심했다. 말하는 것은 어떤가. 백문장을 오대 패강으로 끌어올릴 자신이 있다는 투이지 않은가. 그것이면 된다. 그래서 아버지의 복수만 할 수 있으면. 백문장이 거대세력이 되건 안 되건 별로 관심이 없다. 모두가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한 방편이니까. 그 다음은 죽어도 좋다. 갈천상이 몸을 요구한다면 그까짓 몸뚱이 줘버리지. 아마 그때쯤이면 도검(刀劍)에 찢겨 엉망으로 변해 있을 몸뚱이니. 요구 자체를 못 할지도 모르지 않는가. 싸우다가 죽는다면. 조자경의 마음은 한결 편안해졌다. “백문장을 오대 패강으로 이끌어 올릴 힘을 달라고? 흥! 미친 소리…… 좋아 좋아. 미친 세상, 미친 인간…… 미친 짓을 한 번 더 한다고 나쁠 것도 없지. 어차피 미친 인간이니까.” 갈천상은 혼자말로 자조했다. 그러나…… 토우 때문일까? 그녀는 갈천상이 세상에서 다시없는 기인으로 보였다. 그가 도와주기만 한다면 백문장은 단숨에 오대 패강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으리라. 믿음이었다. “간섭하지 마라. 내가 무슨 짓을 하든 간에.” “물론이죠.” 조자경은 묻기가 무섭게 대답했다. 갈천상이 금방이라도 마음을 바꿀 것 같았다. 토우로 본 그의 능력은 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그의 정서는 왠지 불안해 보였다. “거기까지야. 사대 패강이 백문장을 간섭할 수 없을 때까지. 네 목적이 무엇이든 상관없어. 그때부터 너는 내 소유야. 육신은 물론 영혼까지. 알아들어? 너는 네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어. 이 순간부터는.” 갈천상은 ‘소유’라는 말을 특히 힘주어 말했다. 조자경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말하는 소유라는 것이 기껏해야 육체 아니겠는가. 목적을 따지지 않겠다? 좋다. 그때까지 아버지를 죽인 원수가 누구인지 알아낸 다음, 거대해진 백문장의 힘으로 단숨에 몰아치리라. 백문장이 다시 무너지는 것은 상관없다. 백문장의 기둥이 되고자 모여든 사람들이 죽어가도 상관없다. 어차피 그들은 백문장이 쓰러지면 사대 당주가 그랬듯이 옷을 바꿔입을 인간들이지 않은가. 아버지의 복수만 하면 된다. 설혹 복수를 못 하는 한이 있더라도 상관없다. 백문장이 싸움에서 지더라도 원수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것이고, 남은 전력(戰力)으로는 사대 패강과 어울릴 수 없다. 결국 몰락의 길을 걷게 되리라. “크크크! 비밀 하나 말해 줄까? 내 소유가 되면…… 너는 죽어. 반드시.” 갈천상은 절곡에 있는 누구보다도 완벽하게 미쳤다. 적어도 조자경이 본 지금의 갈천상은 그랬다. “옷은 왜…… 벗으라고……” 그것만은 궁금하다. 단지 알몸을 구경하려고 옷을 벗기지는 않았을 텐데. “크크크! 천둥벌거숭이 아가씨.” “……” “간섭하지 마.” 이런 기가 막힐 일이…… 조자경은 가슴 속에서 분노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적어도 그 부분만은 명쾌하게 해명해 줘야 되지 않겠는가. 앞으로 같이 한호흡으로 백문장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서로가 어색한 문제는 말로 푸는 것이 최상책이지 않은가. 그런데…… 뭐? “크크크! 몇 살이야?” “뭐요? 스물한 살이요. 왜 물어요?” “스물한 살짜리 무공이 그 정도야? 내가 뭘 했는지도 몰라? 크크크! 무공은 옷이다. 아무리 좋은 비단옷이라도 내 몸에 맞지 않으면 차라리 무명 삼베옷을 입는 게 나아. 백학검법? 쿠쿠쿠! 키키!” 이자는 도대체 어떤 성격인가. 사람을 끝없이 나락으로 떨어트려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인가? 이제는 선친의 무공까지 비웃고 있는 것인가? 아니다. 백학검법이 뛰어난 무공이기는 하지만 자신에게는 맞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걸 꼭 이런 식으로 말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옷을 벗긴 것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녀는 도무지 갈천상의 성격을 종잡을 수 없었다. 하기는 주정중독자의 성격이 평범할 리 없겠지만. “내가…… 체질을 파악하는 방법이다. 다시는 귀찮은 질문 하지 마.” ‘섭섭하게……’ 조자경은 그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이율배반적이다. 지금도 이자에게는 모욕, 수치, 살의만을 느끼고 있는데 무엇인가 가까운 것이 멀리 도망친 듯 섭섭한 느낌이 든다. 몸 속에 색기(色氣)가 흐르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자…… 자신의 알몸을 보고 아무런 욕구도 느끼지 않은 이자. 분명히 범상한 자가 아니다. 사내라면 도저히 그럴 수 없다. 정상적인 사내라면. 그녀는 갈천상이란 사내에게 급격하게 빨려드는 마음을 느끼고 얼굴을 붉혔다. “장(莊)에…… 지금 같이 가실 거죠?” 그녀는 어느새 말투가 다시 바뀌었다. 강인한 무인, 독한 여자가 되겠다는 마음 일각이 무너지면서 사내에게 의지하고픈 마음이 불길같이 치솟았다. 그리고 그런 마음은 막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내일.” “네?” 갈천상의 눈길이 다시 험악해졌다. “휴우!” 한숨이 절로 새어나왔다. 앞으로 갈천상이라는 이자와 생활할 일이 무겁게 가슴을 짓눌렀다. 이자는 오직 하나만을 요구하고 있다. 완벽한 순종. 물음조차 던질 수 없는 절대적인 순종. 그런데도 개망나니 같은 주정중독자가 믿음직스러운 것은 왜일까? ‘역시 단순한 주정중독자가 아니었어. 절곡에 들어온 광인들은 다 그래. 이들이 광기에서 깨어나 도와주기만 한다면 단숨에 일어설 수 있을 텐데.’ “왜…… 왜 도와주기로 작정했죠?” 묻지 말라는 소리를 들었으면서도 엉겁결에 물었다. “천둥벌거숭이. 너는 한 시진을 넘겼어.” “뭐, 뭐요!” 조자경의 눈초리가 급격하게 치솟기 시작했다. 第四章 광인(狂人) 쫦 1 쫦 조자경이 엉겁결에 부숴버린 토우 하나가 갈천상을 끌어들였다. 만약 토우가 서른여섯 개 그대로였다면 한 시진은커녕 반 시진도 버티지 못했으리라. 토우 하나의 공백은 그만큼 컸다. 한낱 인형이 그러할진대 막상 사람이 그 형상을 띠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서른여섯 명이 토우처럼 진형을 갖추고 서 있을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 다음 초식을 정확한 시간에 완벽한 초식으로 뿜어낼 수만 있다면…… 거의 천하무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어멋! 아씨, 몰골이 이게……” 조자경은 호들갑스럽게 놀라는 봉아를 밀치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놀랄 만도 하다. 몸에 맞지도 않는 백색 장삼`─`그것도 남장(男裝)에다가, 원래는 백색이었지만 정신없이 휘적휘적 걷느라고 흙탕물이 튀어 무척 더러워져 있는`─`을 걸치고 있는가 하면, 온갖 난리를 겪는 바람에 머리는 엉클어질 대로 엉클어져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한시도 손에서 떼어놓지 않던 자령검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리라. 사실 조자경도 자령검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무인이 검을 잃어버려? 어쩌면 자신은 아직 무인이 될 준비가 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았지만 예상외로 그리 큰 충격은 없었다. 조자경이 정작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일흑의 깨끗한 무공, 눈 깜짝할 순간에 승부를 갈라버리는 비살문의 무공을 보고 난 다음에는 머리 속이 하얗게 타버렸다. 일흑이 떠난 다음에도 쉽게 일어서지 못했으니까. 검도 그때 잃어버린 것 같은데…… 선친이 열 살 기념선물로 주신, 유품(遺品)이나 진배없는 검이었는데, 그것마저 챙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충격이 너무 컸다. 만약 절곡에서 토우가 그려낸 환상적인 도공(圖功)을 보지 못했다면 지금쯤 누구처럼 목을 매거나 미쳤을지도 모른다. 그런 일이 있었는 줄 봉아는 상상도 하지 못하겠지. “떠들지 마. 어머니는?” “취운각(翠雲閣)에요.” “찾으셨어?” “오시는 대로 바로 들르시라고…… 빨리 목욕물을 데울게요. 몸단장이나 하시고……” 봉아는 마치 그런 몰골로 어떻게 돌아다녔냐는 투다. 그러면서도 웃음을 억지로 참는 표정이 역력하다. 왜 이런 몰골이 되었는지를 안다면 울음을 터트리고도 남을 것을. “그래.” 조자경은 대답을 하면서 갈천상을 떠올렸다. 지저분하기로 말하자면 그가 한결 더 심하다. 목욕을 하고, 깨끗한 장삼으로 갈아입고, 허리에 검을 차고 서 있으면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보니 광기 어린 눈빛과 붉은 입술밖에는 정확히 보지도 못했는데. 무공은? 그걸 물어보지 않았다. 무공이 얼마나 강한지. 백문장을 오대 패강에 올려놓은 완벽한 백학검법에 비해서 어느 정도인지. 하기야…… 그걸 꼭 물어봐야 아는 일인가. 토우를 보면 짐작하고도 남지. 아마도 아버지가 전개하는 백학검법과 비등한 정도는 될 거야. 조자경은 까닭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를 생각하기만 하면 알몸으로 누워 있던 광경, 광기 어린 눈으로 비처까지 샅샅이 살펴보고 있는 그의 모습이 되살아난다. ‘흥! 체질을 알 수 있다고!’ 조자경은 괜히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런 식으로 무골(武骨)을 파악해야 된다면 중원 천지에 무공을 익히고자 하는 여인은 단 한 명도 없으리라. 그리고 또…… 무공을 전수해 줄 것도 아니면서`─`조자경은 자신이 아무리 무공을 익혀도 백문장을 오대 패강으로 올려놓을 자신이 없었다. 사대 패강의 무공이 워낙 강해 보여서`─`체질감별은 왜 한단 말인가. 도와 달라고 했지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아무래도 너무 쉽게 넘어갔어. 한 시진을 넘겼으면 내가 주인이 되는 거잖아? 그 부분만은 확실히 해둬야 해. 뭐? 소유가 되어야 한다고? 흥! 내일 오면 단단히 못을 박아야지.’ 머리 속에서 그의 영상을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았다. 이런 일은 처음인데…… 그와 헤어진 지 일 각(一刻)도 되지 않았는데 허전하기 그지없다. 또 불안하다. 자신의 거처에 있으면서도.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보고 싶다. “그래, 어디어디 다녀왔느냐?” 어머니는 말 한마디 없이 나갔다 왔어도 큰 꾸지람을 하지 않는다. “고가촌……” 조자경은 그 말만 했다. 절곡에 다녀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절곡에서 기인(奇人)을 만났다고 하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웃고 말리라. 세상 사람들에게 절곡이 만들어진 배경을 설명하고, 현재 절곡에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말해 준다면 혹여 믿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머니는 믿지 않으리라. 광량이라 할지라도 반신반의(半信半疑)하는 정도에서 그쳤으리라. 그들이 절곡에 들어갈 때의 모습을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렇다. 광량도 동정심으로 그들을 절곡에 들여보냈는지 모른다. 그들은 어차피 세상과 격리되어 살아야 하고`─`그들도 그걸 원하지만`─`현재 백문장의 입장에서 절곡은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무림세가라고 할 수도 없는 백문장을 공격하여 무림의 지탄을 한 몸에 받을 미련한 사람은 없으니까. 비축해 둔 건량이 있고,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장소가 있으니 광인들이 생활하기에는 아주 적합하지 않은가. 그래서 광량은 천불탑을 세우는 셈치고 광인들을 절곡으로 들여보냈으리라. 물론 그들이 제정신을 회복해서 일조(一助)해 주기를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고가촌이라면……?” “촌장을 만났어요.” “철두(鐵頭)……?” “네.” 조자경은 피식 웃었다. 고가촌장의 외호는 벽혈권(碧血拳)이다. 외호에서 짐작하다시피 그의 최고 무공은 권법이다. 기기묘묘(奇奇妙妙)한 보법과 어우러진 십육초 권법은 막아내기가 무척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강성 사람들은 벽혈권이라는 외호보다는 철두라는 말에 더 익숙해져 있다. 고가촌장과의 승부는 늘 박치기로 결말이 나기 때문이다. 시신이 있고, 머리가 망치로 얻어맞은 듯 으스러져 있다면 틀림없이 그의 작품이다. “도움을 청했니?” “네.” “뭐라고 하든?” “……” 대답할 말이 없어 대답하지 못했다. “휴우!” 어머니는 한숨부터 쉬셨다. 이미 결과를 예측하고 계신 게다. 하기는 무림정세에 대해서는 어쩌면 광량보다도 더 잘 알고 계실지 모른다. 어머니는 자신과 같은 입장을 벌써 오래 전에 경험하지 않았는가. 외가(外家)가 멸문당했으니 원수도 있을 터였다. 그리고 어머니도 무림인이니 복수를 하고자 했으리라. 그래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에게 시집와서 백문장이라는 거대한 세력을 등에 업었어도 원수에 대해서는 일언반구(一言半句) 말 한마디 꺼내지 않았다. 그게 무림이다. 시류(時流)를 알아야만 무림에서 살아남을 수 있고, 문파를 존속시킬 수 있다. 어머니의 원수는 누구인가. 아버지의 원수는 사대 패강 중에 있으리라 짐작할 수 있지만 광동 하가를 멸문시킨 원수는…… “봉변은 당하지 않았니?” “네에?” 조자경은 너무 놀랬다. 그것까지 짐작하고 있었던가. “이렇게 무사히 돌아왔으니…… 비살문의 소문주가 청혼을 넣어왔다. 그래서 안심하고 떠나보낼 수 있었지. 너도 무림이란 곳이 어떤 곳이란 걸 알아야 하니까.” “그, 그 말씀을 왜 지금에서야……” “거절할 게 아니었니?” “저는 결혼 안 해요.” “호호호! 그래? 그럼 이 에미가 늙어죽을 때까지 옆에 있어주겠니?” “네.” 100 “호호호! 언제 철이 들런지.” 어머니는 예의 포근한 미소를 띄우며 바라보셨다. “이 에미도 그렇겠지. 사대 패강과의 혼담은 반대한다. 아버지를 죽인 흉수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비살문이 원수면…… 어쨌든 비살문 소문주가 청혼을 넣어왔으니 네게 마음이 있는 게고, 암중으로 보호해 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까 안심하고 보낼 수 있더구나.” “그럼 다음 달에 방문한다는 게……?” “호호! 비살문 고수를 만났니? 그렇지 않기를 바랬는데 결국 일이 있었구나.” “저는 아무 탈도 없어요.” 조자경은 백의 청년을 생각하며 얼굴을 붉혔다. 그래서 더욱더 단호하게 말했다. “다음 달에 온다고 했니? 그럼 청혼 여부를 확인하러 오는 거겠구나. 거절할 명분을 생각해야겠다. 기분상하지 않게……” ‘그 사람이라면 거절할 명분을 충분히 생각해 줄 거예요.’ 조자경은 또 갈천상 이야기를 꺼낼 뻔했다. 이상하게도 그가 옆에 있다고 생각하니 복잡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도 너무 쉬워 보였다. 다음날 아침, 조자경이 침상에서 일어나 세면을 하고 머리를 가다듬고 있을 때, 취아가 호들갑스럽게 들이닥쳤다. “아씨! 아씨!” “아침부터 왜 이렇게 소란이야?” “그, 그 인간이 또 왔어요!” “그 인간?” “그 인간 말예요, 그 인간.” “천천히 말을 해야 알지. 누구……” 불현듯 조자경의 머리 속에 한 사람의 영상이 떠올랐다. 갈천상! 그녀는 머리를 매만지고 있던 중이라는 것도 잊고 벌떡 일어섰다. 취아는 봉아와는 달리 조용한 성격이다. 분한 일을 당해도 혼자 씨근덕거리며 속으로만 삭일 뿐 겉으로 내색하는 법이 없다. 그런 아이가 눈이 퉁방울만하게 커져 가지고 회랑(回廊)을 쿵쾅거리며 달려올 정도라면…… “그 사람이 어디 있지?” “거기에요.” “거기가 어디야?” “취, 취휴……” 취아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조자경이 평소와는 다르게 신법까지 펼치며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아씨가 왜 저러지?” 취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문장 총관의 거처치고는 더럽게 누추하군.” 이상하다. 그가 없을 때는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는데 막상 얼굴을 대하니 얼굴도 몸도 음성도 굳어진다. 아니, 굳어지다 못해 얼음장처럼 쌀쌀하게 대해진다. “광 총관은 이것도……” “죽은 사람은 거론할 필요가 없어. 죽은 사람은 젓가락 하나 들지 못해. 세상에 남은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 무슨 고통을 받는지, 죽는지 사는지…… 죽은 사람은 걱정하지 않아.” ‘아녜요. 죽은 사람도 영혼이 있으니……’ 곧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참는 것도 고역이다. 왜 이 사내와 만나기만 하면 싸우게 되는 걸까. 사내가 틀린 말을 하는 것도 아닌데 왜 듣기 싫은 걸까? 왜 아니꼽게만 들리는 걸까? 조자경은 퍼뜩 뇌리를 스쳐 가는 생각이 있어 더욱 몸이 굳어졌다. 갈천상이 광 총관의 죽음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는 절곡에만 묻혀 있었는데. 절곡에서 도움을 청할 때에도 광 총관에 대한 물음은 한 마디도 던지지 않았다. 광 총관이 책사라는 점을 알고 있다면, 당연히 한 마디쯤 물어왔을 텐데. 광 총관이 죽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이 처음 절곡에 들어서기 전부터. 어쩌면…… 광 총관이 임종하는 순간에 알았을지도 모른다. 절곡에 갇혀 있다시피 한 몸이니 그럴 수야 없겠지만 이 사내라면…… 도대체 이 사내는 누구인가? 알몸까지 보인 사내이건만 사내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 없었다. “당신…… 누구죠?” “……?” 갈천상은 무슨 뜻이냐는 눈빛으로 되물어왔다. “절강 무림에서 갈천상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어요. 학자(學者)도 많고 재사(才士)도 많지만……” “천둥벌거숭이. 넌 참 귀찮군. 도대체 그 대가리는 어디다 쓰려고 달고 다녀? 간섭하지 말라고 했잖아!” “뭐라고요!” 이 사내…… 왜 이렇게 얄미운 말만 골라서 하는가. 아예 사람 속을 휘젓고 있지 않는가. 이렇듯 무시해도 괜찮단 말인가. “백문장주직이 공석(公席)이지? 머리가 없으면 안 되지. 네가 되었든 천화신의가 되었든 백문장주직을 계승해. 오늘 당장. 하나 백문장에 대한 권한은 없어. 전권은 내 거니까. 크크크! 이것은 문서로 확약해 놔. 즉, 백문장을 팔아먹어도 너희 모녀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어. 항의조차 듣기 싫어. 명심해 두는 게 좋을 거야. 아참! 중요한 게 빠졌군. 백문장주직을 계승하기 전에 장주의 신물(信物)을 가지고 와. 재산에 관한 모든 문서도.” 갈천상은 일방적으로 어이없는 말만 늘어놓았다. 말대로라면 자신들 모녀는 허깨비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가 무엇인가를 하는 동안`─`좋은 쪽이라면 괜찮지만 나쁜 쪽으로 일이 진행된다 해도`─`방구석에 틀어박혀 숨죽이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 않은가. 항의조차 듣기 싫다니. 선친이 피땀 흘려 이룩해 놓은 모든 것을 한입에 꿀꺽 삼키면서. 이자를 백문장에 끌어들인 것이 잘못된 행동은 아닐까? 후회가 치밀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리라. “그건…… 저 혼자 결정하기 힘들어요.” “어제 말했을 텐데? 오늘 오겠다고? 그 동안 아무 상의도 하지 않았단 말야? 크크! 계집들의 공통된 행동 중 하나는 행동이 느리다는 거지.” “네. 아무 상의도 하지 않았어요.” 이제는 반발심마저 치밀었다. 너무 불쾌하게 밀어붙이고 있지 않는가.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도 깨무는 법이다.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고 하지만 그건 해봐야 아는 일이고. 서로 손발을 맞춰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몰아붙이는 것은…… 그것도 적반하장(賊反荷杖)으로 말이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너무 심하지 않은가. 그런데…… 오히려 갈천상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지 않는가. 때가 덕지덕지 붙은 얼굴에 그것도 서캐가 바글거리는 머리가 반쯤 가리고 있어 표정을 정확히 볼 수는 없지만 얼굴의 일그러짐, 취하는 행동 등이 틀림없이 어이없다는 투였다. 아니나다를까, “정오(正午)까지 시간을 주지. 그때까지 신물을 가져 와. 절충은 없어. 조건을 수용하든지, 아니면 거래를 깨든지.” “거래요?” “……” “무슨 거래요?” 조자경의 말투도 갈천상처럼 비틀리기 시작했다. 그를 그리워하던 어제의 일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보니 근본도 뿌리도 모르는 사내…… 이런 자를 보고 싶어했던가. 이런 자를 믿고 의지하려 했던가. 토우? 지금 생각한 것인데 그것도 한낱 사기극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움직이는 동물이다. 시간도 끝없이 흘러간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인간도 시간 속에서 정체할 수는 없다. 토우가 만들어낸 형상을 인간이 재현하려면 정체되어야 한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도 움직임을 멈추는 것뿐만이 아니라 호흡까지 멎어야 한다. 사내는 내기로 한 시진을 요구했다. 한 시진 동안 돌이나 토우처럼 정체될 수 있는 인간이 어디 있는가. 그것도 서른여섯 명이나. 갈천상에 대한 호기심이 씻은듯이 사라져 갔다. “백문장을 일으키는 것과 너를 소유하는 것. 거래가 아닌가?” “아니죠. 내기에서 이겼으니까요.” “쿠쿠! 내기에서 이겼다? 계집들은 한결같이 단순하단 말야. 한 시진에서 일향경(一香頃`:`향 한 자루 타는 시간)이 모자란다면? 너를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서 내기에 이겼다고 말했다면?” 편안하게 해준다? 이런 위인이? “이런 더러운……” 조자경의 입에서도 험한 말이 새어나왔다. “크크크! 성질나니 영락없이 암코양이군. 이 거래는 없었던 것으로 하지.” “좋아. 당신 같은 자에게……” 그때였다. “아니다. 그렇게 하자꾸나.” 조용한 음성과 함께 천화신의 하문화가 걸어 들어왔다. 하기는 갈천상이 새벽같이 나타났다는 소문은 백문장 식솔 모두에게 활력을 안겨주는 소식이었다. 광량이 죽은 이후, 무덤같이 침울한 분위기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백문장이 아니던가. 그런데 어느 날 소리없이 사라진 주정중독자가 나타났다. 광 총관에게 편애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융숭한 대접을 받던 자가. 그는 백문장주의 위패는 물론이고 자신에게 과분한 대접을 해줬던 광량의 위패(位牌)에조차 향을 올리지 않았다. 다짜고짜 취휴각으로 들어섰을 뿐. 하기는 주정중독자이니 사람이 갖춰야 할 도리를 거론하는 자체가 무리겠지만. 사라진 광인이 다시 돌아오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소문거리다. 조자경이 머리도 빗다 말고 산발한 채 달려갔다. 소문거리다. 세상 사람들은 관심도 두지 않을 일이지만 백문장 식솔들에게는 확실히 소문거리였다. 그들에게는 조그만 일이라도 신선한 일이 벌어졌으면 하는 마음이 잠재되어 있으니까. 천화신의가 소문을 듣지 않을 리 없다.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조자경이 머리도 묶지 않은 채 달려갔다는 말에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으리라. “어머니!” 조자경이 놀라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하고 그럴 수는 없다는 뜻도 담아서 외쳤다. “너는 가만히 있거라.” 천화신의는 가볍게 팔을 들어 조자경을 제지했다. “소협(小俠)이라 불러야 할지 대협(大俠)으로 불러야 할지……?” 사실 갈천상의 지금 형색으로는 용모나 나이를 도저히 알아볼 수 없었다. 방갓도 쓰지 않고 복면을 한 것도 아닌데. 단지 지저분한 것만으로 얼굴마저 감출 수 있다니. 변용술(變容術)의 대가(大家)가 이 말을 듣는다면 단숨에 달려와 갈천상의 얼굴을 보고자 할 것이다. “명칭 따위가 중요한가? 소협이든 대협이든 가치있는 사람이 불러야만 의미가 있지. 기분 내키는 대로 편하게 부르쇼.” 갈천상은 천화신의에게조차 막말을 했다. 그때, “포영매(抱影魅).” 천화신의가 흑호(黑號) 비슷한 말을 꺼냈다. 더욱 놀라운 점은 포영매라는 말을 듣는 순간 갈천상은 움찔했다. 너무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진 행동이라서 쉽게 잡아낼 수 없었지만 갈천상에게 온갖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조자경의 눈만은 피하지 못했다. “크크크! 내가 포영매 같다는 말이군.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자리에 더 있을 필요가 없지.” 갈천상은 서슴없이 문 쪽으로 걸어갔다. “소협, 가기는 이르지 않아요? 우선 골수까지 파고든 주정중독부터 치료해야 될 것 같은데.” “상관하지 마.” “내가 천화신의예요. 최소한 한 달간은 치료를 받아야 해요. 솔직히 말하면 소협이 누구인지 나도 몰라요. 다만 망부(亡夫)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한 번 언급한 적이 있고, 소협을 대하는 순간 그 말이 떠올라서 읊어봤을 뿐이에요. 치료를 받아요. 그리고 망부의 신물은 정오까지 갖다 드리죠. 이제 백문장의 총관으로, 그리고 장주 대임(代任)으로 우리 모녀를 보살펴줘요.” 갈천상의 눈빛이 증오로 가득 찼다. 누구에게 던지는 증오일까? 조자경은 의문투성이였지만 어머니가 이끄는 손길에 끌려나오고 말았다. 쫦 2 쫦 ─`포영매가 누구인지 나도 모른단다. 네 아버지에게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지. ‘내가 포영매만 같으면 벌써 절강성 맹주(盟主)가 됐을 텐데’ 하는 말. 뛰어난 인재가 등장했구나 하는 마음에서 여쭤봤지만 명쾌한 대답은 듣지 못했단다. 그자에 대한 소문은 워낙 허황한 게 많아서 들을 가치도 없다시면서. 오죽하면 그 사람의 작호가 포영매겠니. 도깨비 그림자를 품은 사람. 봉아가 머리를 매만져 주고 있었지만 귀찮기만 했다. 지금은 오직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어머니는 말을 하지 않으신 게 있다. 광량에게도 전권을 위임하지 않으신 어머니인데, 갈천상에게는 너무 쉽게 양도해 버렸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다. 그가 절곡에 들어간 것은 사 년 전이다. 그때도 어머니는 그를 본 적이 있다. 그럼 그때는 왜 아는 척을 하시지 않았을까. 광량과 어머니가 합심하여 설득했다면 지금쯤 백문장의 기치가 푸른 하늘에 휘날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거늘. 무엇보다 갈천상이 어떤 인간이냐 하는 점이 궁금했다. 그와 마주서기만 하면 짜증이 치민다. 말을 나누다 보면 분노를 참을 수 없다. 그런데도 그와 떨어져 있으면 허전하다. 절곡에서 떠나올 때부터 느끼던 심정. 이것이 사랑인가? “훗!” 조자경은 피식 웃고 말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어처구니가 없지 않은가. “아씨, 왜 웃어요?” “아니야. 이제 그만하면 됐어. 머리 묶어주고, 가서 방 아저씨 좀 모셔와.” “방 아저씨요?” “응. 중간에서 노닥거리지 말고 곧바로 다녀와.” “피잇! 노닥거릴 사람이나 있어야 노닥거리죠.” “정말? 덕진(德眞)은 내보내도 되겠네?” “몰라요! 아씨는 너무 짓궂어.” 봉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백문장 하인 중 제일 젊은 덕진은`─`그래도 서른둘이지만`─`오래 전부터 봉아와 가까운 사이였다. 드넓은 장원이니 두 사람 숨을 장소가 없으랴.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옛날 비룡당 당주의 거처에 들렀던 조자경은 거의 벌거벗고 있는 두 남녀를 발견했다. “소, 소저. 드, 등이 간지러워서 좀 긁어 달라고…… 저, 저는 그럼 이만……” 덕진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은 다음 꽁지가 빠지게 도망쳤다. “그거 하고 있었지?” “아, 아니에요. 등이 간지럽다고 해서. 정말이라니까요?” “그럼 너는? 너는 왜 옷을 벗고 있는데?” “저, 저도 등이 간지러워서.” “너, 바른 말 하지 않으면 어머니께 이른다.” “아, 아씨. 그게……” “맞지? 둘이 그런 관계지?” “……네.” “언제부터?” 집요한 질문이 시작되었다. 두 남녀가 성적으로 호기심을 느끼고 가까이 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온갖 이야기를 봉아의 입을 통해 들었다. 한참 이성에 눈뜰 나이, 조자경은 자신보다 두 살이나 어린 봉아가 벌써 육체의 문을 열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자신보다 어른스럽게 보이기도 했다. 그 관계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혼인 안 할 거야?” “아직요. 어디 가서 논밭이라도 살 수 있는 돈이 되거든요.” “얼마나 더 있어야 되는데? 내가 줄까?” “아녜요. 우리 힘으로 모아서 살고 싶거든요. 아씨께 도움을 받으면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아씨를 떠올리게 될 거예요. 그래서는 안 되잖아요.” 조자경은 확실히 봉아가 자신보다 성숙했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남녀가 만나 서로 사랑하게 되면 무엇인가 알 수 없는 현상이 생기는 것일까. 그녀는 봉아가 방을 나가고 난 다음에도 갈천상에 대한 생각에만 집착했다. “절강성에서 사대 패강 사람말고 무림 소식에 가장 정통한 사람이 누구죠?” “고가촌이나 한가 사람들입죠.” “그 사람들도 말고요.” “그럼…… 잘 생각이 안 나는뎁쇼.” “우리 장원에서 광 총관님 다음으로 바깥출입이 제일 많으시잖아요. 잘 생각해 보세요.” “세상 돌아가는 일이라면 몰라도 무림 소식이라면…… 도박판이나 기웃거려야 들을 수 있을지…… 아! 그 사람이라면 혹시……” “누구 생각나는 사람 있어요?” 조자경의 얼굴이 밝아졌다. “능공(陵拱)이라고…… 지도(地圖)를 만드는 자인데, 중원 전역을 떠돌아 다니느라고 집에 붙어 있는 날이 손을 꼽읍죠. 그러잖아도 얼마 전에 돌아왔다는 풍문은 들었는데, 총관님께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코빼기 한 번 못 봤습죠.” “그 사람이 무림 소식을 잘 알까요?” “아무래도 중원을 떠도니까 들은 풍월도 많을 겁니다요. 한데 지금 집에 있을지…… 하도 도깨비 같은 놈이라서 종잡을 수가 없습죠.” ‘도깨비…… 포영매……’ 세상일이 왜 이렇게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것일까. 전에는 한쪽 귀로 흘려들었을 말이건만 끈적끈적한 아교처럼 마음 속에 달라붙는 것은 왜일까? 포영매……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치료를 받기로 작정했을까? 조자경은 어느새 갈천상을 포영매로 확신하고 있었다. “지금 바로 그 사람 좀 불러오실 수 있으세요? 힘들면 제가 가도 되고요.” 방삼은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조자경은 요조숙녀(窈窕淑女)의 표본이었다. 걷는 모습도 차분하고, 말도 조용조용히 했다. 어머니가 원래 그런 분이니 닮을 수밖에 없겠지만 무가의 여식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집안에서 조신했다. 방삼으로서는 조자경이 이렇게 서두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제가 가서 불러옵죠. 술귀신이라서 술 한턱 사겠다고 하면 금방이라도 달려올 위인입죠.” 또…… 술귀신…… 주정중독자…… 모든 일이 갈천상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 같지 않은가. 방삼이 능공이란 자를 데려온 것은 해가 서녘으로 뉘엿뉘엿 기울어져 갈 무렵이었다. “헤헤! 소인에게 볼일이 있으시다굽쇼?” 말하는 모습 하고는…… 능공은 영락없이 쥐였다. 구부정한 허리, 가는 손발, 작은 얼굴, 실실 웃는 입…… 의관이라도 반듯하다면 인물이 한결 나아 보일 텐데 그렇지도 못했다. 남루하다는 표현조차도 어색한 의복이다. 군데군데 기운 자국이 가득하고, 그나마도 금방이라도 뜯어질 듯이 위태로워 보인다. 방삼과 어울리니 나이도 비슷할 텐데 겉보기에는 열 살은 위인 것처럼 바싹 늙어 보이니. 그러나 조자경에게는 다시없이 반가운 손님이었다. “죄송해요. 오시라 가시라 해서……” “헤헤! 아직 가라는 말씀은 안 했습죠. 무슨 일이신지……?” 능공이 쥐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무림인에 대해서 여쭤보려고요.” “무림인이라면 누구를……?” “혹시 포영매 갈천상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셨어요?” “낄낄낄! 포영매 말입니까?” 능공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허리까지 구부려가며 웃어댔다. “아세요?” “알다뿐입니까? 중원을 떠돌아 다니는 사람 치고 포영매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요. 한데 포영매의 이름이 갈천상입니까?” 조자경은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다. “그건 나도 잘 몰라요. 어서 그 사람에 대해 아는 대로 말씀해 주세요.” 능공이 돌아갔다. 네 식구가 한 달을 편히 지낼 수 있다는 거금, 은자 한 냥을 쥐여주었으니 집에 있는 동안은 편히 지낼 수 있을 게다. “아마 사흘도 못 갈 겁니다요. 이런 술귀신한테는 돈을 줘서는 안 되는데……” 방삼이 반은 농담으로 반은 진담으로 말했지만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그들이 돌아가고 난 다음 조자경은 멍하니 앉아 갈천상에 대한 생각을 정리했다. 봉아가 들어와 초에 불을 켜주고 나간다. 어지간해서는 농담 한두 마디라도 던지고 나갈 봉아건만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그냥 나간다. 오히려 그게 낫다. 지금은 누구하고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신동(神童) 신동 하지만 포영매만한 신동은 없습죠. 아! 무림에서는 천골(天骨)이라고 말합죠? 포영매가 바로 천골입죠. 태어난 곳은 사천성(四川省)인데 갓난아기 때 부모를 잃고 백부(伯父)에게 양자로 갔습죠. 포영매가 무공에 천부적인 자질을 드러낸 것은 불과 열 살 때였다. 개방(幇) 문도가 펼친 봉법(棒法)을 우연히 본 포영매는 타구십팔초(打狗十八招)를 그대로 재현해 낸 것이다. 당시 포영매가 본 것은 타구십팔초 중 광구견미(狂狗見尾) 일초뿐이었다고 한다. 당연히 그 소문을 들은 개방문도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이튿날 개방문도 네 명이 포영매를 찾았고, 포영매가 펼친 타구십팔초를 보았다. 그들은 질겁을 했다. 열 살짜리 아이가 펼쳤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초식이 정교했기 때문이다. 반(反), 벽(僻), 전(轉), 착(捉), 도(逃), 인(引), 봉(封), 전(輾)의 팔자(八字) 진결(眞訣)이 완벽하게 가미되어 있지 않는가. 비록 내력(內力)이 없어 위력을 발휘할 수는 없지만 초식만은 완벽했다. 개방문도 네 명은 포영매를 잡아 분타(分舵)로 끌고 왔다. 잡는 데도 그냥 잡지는 못했다. 아무리 내력이 없어도 초식이 완벽한 이상 저항하기로 작정했으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무공을 최소한 오 년 이상 익힌 분타 무인들이 어린아이 한 명을 잡는 데 치른 대가는 다리 골절 한 명, 팔이 부러진 무인이 한 명, 죽봉(竹棒)에 머리를 얻어맞아 혼절한 무인이 한 명이었다. 분타주는 포영매를 심문했다. 열 살바기 아이가 혼자서 개방절초인 타구십팔초를 익혔다고 하면 지나가던 개도 웃을 일이지 않은가. 그것도 단 일 초만 보고 나머지 십칠 초를 유추해 냈다고 하면. 아이는 똘망똘망한 음성으로 제안했다. “그럼 시험해 보시면 되잖아요. 다른 무공 없어요? 다른 걸 한 번만 보여주세요.” 개방분타주는 분타주 이상만 익힐 수 있는 타구봉법(打狗棒法) 삼절초(三絶招) 중 일초 타단구퇴(打斷狗退)를 시전해 보였다. “어렵군요. 하지만 최고는 아녜요.” 아이는 타단구퇴를 손쉽게 재현해 냈다. 하나 이초(二招) 구구입동(駒狗入洞)은 쉽게 전개하지 못했다. 손을 이리 뻗기도 하고, 발을 돌려보기도 하고…… 한동안 시간을 주었는데도 일초 이상은 전개하지 못했다. 그러나 타단구퇴를 한 번 보고 재현해 낸 것이 어딘가? 혹시……? 결국 분타주를 비롯한 개방문도는 누군가가 이 어린아이에게 타구십팔초와 타구봉법 삼절초 중에서 일초만 전수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을 어린아이가 치기(稚氣)를 참지 못하고 드러낸 것이다. “네 이놈! 어서 바른 대로……” 분타주는 말을 잇지 못했다. 완벽하다. 완벽하게 구구입동을 재현해 낸다. 어린아이가 하는 몸짓은, 손짓발짓은 분타주조차 오의(奧義)를 완벽하게 깨달았다고 장담하지 못하는 구구입동이다. 아이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또다시 다른 초식으로 이어진다. 이번에도 엉성하기 이를 데 없는 몸짓에 불과하지만 이제는 그 누구도 믿지 않을 수 없다. 조금만 시간을 주면 제삼초(第三招) 취구번신(臭狗身)이 재현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포영매의 무공은 하루가 다르게 진보했다. 초식뿐만이 아니라 보법(步法), 신법(身法), 권법(拳法), 각법(脚法)…… 각종 병장기까지.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니고 무공비급을 얻은 것도 아닌데 그의 무공은 하루가 다르게 높아졌다. “이건 어제 익히던 무공이 아닌데?” “그건 아무리 익혀도 최고가 될 수 없는 무공이었어요.” “그럼 지금 익히는 것은?” “몰라요. 해봐야 알죠.” 늘 그런 식이니 무림 일각이 발칵 뒤집힐 수밖에 없다. 개방분타 사건을 믿지 못한 몇몇 무인이 직접 포영매를 찾아가 시험해 보았다. 하나 그의 말은 한결같았다. “최고가 아녜요.” “그럼 어떤 무공이 최고냐?” “몰라요. 하지만 아저씨가 펼친 무공은 아녜요. 첫 번째 초식은 궁보반당권(弓步反撞拳)으로 파해(破解)할 수 있고, 두 번째 초식은 마보충권(馬步衝拳)에 이은 궁보천수추장(弓步穿手推掌)으로 깰 수 있어요. 세 번째는……” “그, 그런 무공으로……” 포영매가 말한 무공은 한결같이 강호(江湖) 삼류무인들도 알고 있는 평범한 초식들이었다. 또한 아이의 말이 설득력있게 들린 것은 궁보반당권과 마보충권이 확실히 별개의 무공이라고 하지만 연결이 확실하지 않은가. 확실한 것은 또 있다. 속도와 내력을 상관하지 않는 논검(論劍)이라면 두말할 나위 없이 패배다.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무공이란 전개하는 사람의 성취여부에 따라 삼류무공도 일류무공으로 탈바꿈되는 거란다.” “만류귀원(萬流歸原)이죠. 그런데 모순되게도 만류귀원의 경지에 이르려면 최고의 무공을 익히고 있어야 돼요. 그렇지 못하면 같은 정도의 무공밖에는 상대할 수 없어요.” “이 무공으로는 만류귀원에 도달할 수 없다는 말이냐?” “없어요. 그냥 그 무공에 전념하셔서 일가(一家)를 이루는 데 만족하세요.” 사천 무인들은 그를 주목했다. 포영매는 최고의 무공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어떤 무공을 익히고 있느냐는 초유의 관심대상이었다. 덕분에 살판난 사람은 포영매를 입양한 백부였다. 군소문파는 물론이고 아미파(峨嵋派), 청성파(靑城派)와 같은 대문파도 관심을 보여왔고, 그들이 관심이 보일 때는 빈손으로 찾아오지 않았으니까. 그러던 포영매가 어느 날 갑자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백부에게도, 백모에게도, 의붓 형제들에게도 단 한 마디 남기지 않은 채. 그때 포영매의 나이 열네 살이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어디 심산유곡(深山幽谷)에 틀어박혀 절정무공을 익히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보는 눈이 많은 백부 집에서는 마음놓고 무공을 익히기 힘들었으리라. 그가 무림에 출도했을 때, 그의 경지는 얼마나 높아 있을까? 스스로 창안해 낸 심공(心功)으로 내력을 다지고, 스스로 창안한 절기로 무장하고…… 어쨌든 그는 최고의 무공만을 추구했으니 그가 출도할 때 그를 상대할 자는 많지 않으리란 추측이 지배적이었다. 또 하나의 추측거리는 그가 언제 출도할 것이냐는 점이다. 열 살에 개방 타구봉법의 오의를 깨달았다면, 그리고 백부 집을 떠날 당시의 무공도 범상치 않았다면. 그러나 세인들의 추측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포영매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를 보았다는 사람도 없다. 그야말로 완벽하게 증발해 버린 것이다. 도깨비처럼. 포영매에 관한 소문은 시간을 넘어 전 무림에 퍼져 나갔지만 믿는 무인들은 거의 없었다. 그가 사라지자 모든 무인들이 한결같이 부정했기 때문이다. 포영매에게 무공을 파해당한 무인들은 파해법이 노출될까 봐 전전긍긍했고, 개방분타주는 총단의 질책이 두려워 함구했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개방 절기를 누출한 격이니까. “포영매의 출신을 알고 입양한 백부가 있는데 왜 이름을 모르죠?” “알고 있는 사람도 있겠습죠. 하나 모두 입에 올리기 꺼리는지라…… 포영매를 입양했던 백부도 포영매가 떠난 다음에 곧바로 그 비방을 떴다는 소문입죠. 원래 무인들이 그렇잖습니까요. 워낙 끈질기고 포기를 모르는 사람들이라…… 등쌀이 웬만했겠습니까요?” 포영매에 관한 소문은 절대 있을 수 없는 허황된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하나 그게 설혹 허황된 뜬소문에 불과할지라도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그런 인간이었으면 하는 바람은 간절할 게다. 그래서 포영매에 관한 소문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지금도 가끔 극히 뛰어난 신동이 나타나면 ‘이놈, 혹시 포영매 아냐?’ 하는 소리로 놀리기도 한다. 여기까지가 능공이 한 말이었다. 조자경은 포영매에 관한 소문의 진위 여부를 파악할 수 없었다. 아니, 갈천상이 포영매인가 하는 점을 확신할 수 없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게다. 갈천상이 포영매라면 무림 최고수는 안 되었을망정 주정중독자로 전락하는 일은 없었어야 한다. 일견(一見)한 것만으로 비전비기(秘傳秘技)를 깨닫고, 더군다나 무공까지 익히고 있었다면…… 그런 사람을 상대할 무인이 얼마나 될까. 갈천상은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 그건 확신한다. 절곡에서 그의 목을 졸랐을 때, 손아귀에 와닿던 감촉은 분명히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저항에 불과했다. 목뼈가 으스러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갈천상이 포영매라면 백문장은 천하에 다시없는 방수를 얻은 셈이다. 하나 갈천상이 포영매가 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다. 그렇다면 갈천상이 백문장에 들어오기 전에는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광 총관이 절곡에 들여보낼 정도라면 평범한 신분은 아니었을 텐데. ‘휴우! 그런 복이 굴러 들어올 리 없지.’ 결국 조자경은 ‘아니다’로 심증을 굳혔다. 그래도 지워지지 않는 의문이 있으니. 그럼 왜 어머니가 포영매라는 말을 꺼냈을 때 갈천상이 움찔했냐는 것이다. 도대체 왜……? 쫦 3 쫦 “호호! 아씨! 그 사람 말이에요. 주정중독자. 그 사람 알고 보니까 꽤나 미남이던데요?” “무슨 소리야?” “에이…… 시치미 떼도 다 알아요. 척하면 착이라고요. 언제부터 만났어요?” “무슨 소리냐니까!” 조자경은 성질난 척했다. 간밤에는 갈천상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느라고 자정이 훨씬 지나서야 잠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잠이 깨어서도 몸이 무겁고 머리도 개운치 않았다. 그런데 아침부터 듣는 소리가 또 갈천상에 대한 소리라니. 봉아는 찔끔거렸다. 어렸을 적부터 조자경과 같이 생활해 왔으니 한 자매나 다름없는 사이인데 오늘처럼 신경질적으로 말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취휴각에 있는 주정중독자요. 목욕을 하니까……” “미남이야?” “네.” “몇 살이나 되어 보이던데?” “스물은 훨씬 넘은 것 같은데 서른은 안 된 것 같고…… 몰랐어요?” 봉아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주정중독자가 돌아온 아침부터 하루 동안 조자경이 보여준 행동은 예전과는 사뭇 달랐다. 그런 행동은 백문장 식솔들의 입방아에 오르기 딱 알맞았고, 종래에는 전부터 알던 사이였다고까지 발전한 상태였다. “치료는?” “받았어요. 날이 밝자마자 마님께서 다녀가셨어요.” 어머니는 어제가 근래 들어 가장 행복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에게 환자를 돌본다는 것은 큰 기쁨이리라. 천화신의라고 불릴 만큼 의술이 뛰어났으면서도 근 이십여 년 동안 환자를 치료해 보지 못했으니. 어머니는 어찌 된 일인지 백문장이 오대 패강의 반열에 올라선 다음에도 원수의 정체는 밝히지 않았다. 아마도 절강성의 맹주도 되지 못하는 백문장으로서는 원수와 상대하기가 벅차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버지께서 짬이 나실 때마다 물어봤는데도 웃기만 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원수의 정체는 고사하고 천화신의라는 작호조차 사용하지 않으셨다. 오죽하면 조자경이 나이 열두 살이 될 때까지 어머니가 이름도 별로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무가출신 정도인 줄로만 알았을까. 만약 그때, 진자(疹子`:`홍역)를 심하게 앓지 않았다면 끝내 몰랐을 게다. 광 총관의 병세를 치료하기도 했지만 그건 약간의 고통을 덜어주는 정도에 불과했다. 아무리 중원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의술의 대가라 할지라도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병에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지 않는가. 갈천상과 같은 중증의 환자야말로 어머니가 있는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상대다. “지금 뭐 하고 있어?” “탕약(湯藥)을 먹은 다음 자고 있어요. 약보다도 술을 끊는 것이 중요한데 술을 잊기 위해서는 잠자는 것이 최고라고요.” “그래.” 조자경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정말 이상하다. 왜 그를 보지 않으면 마음이 심란한 걸까? 보기만 하면 역겨움이 치미는데. 특히 하류잡배들이나 사용하는 무식한 말투는. 말투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다. 사람 성격이 비비틀어질 대로 틀어져서 내뱉는 말이라고는. “흥!” 조자경은 옆에서 봉아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코웃음을 쳤다. 갈천상에게 필요한 처방전(處方箋)은 삼황사심탕(三黃瀉心湯). 대황(大黃`:`장군풀의 줄기 뿌리), 황련(黃連`:`깽깽이풀의 뿌리), 황금(黃芩). 주정중독을 치유하는 데, 삼황사심탕에 소용되는 약재들이다. 오랜 세월 동안 주정중독에 걸려 있었으면서도 갈천상의 체력은 무척 강했다. 본인이 주정중독에서 벗어나려고 노력만 한다면 예상외로 빨리 일어설 수 있으리라는 언질을 들을 만큼. 치자(梔子`:`치자나무의 열매), 황백(黃柏`:`황백나무의 속껍질)을 주(主)로 국화(菊花), 금은화(金銀花`:`인동꽃) 등 열입곱 가지의 약재를 부(副)로 하여 만든 천화신의만의 비방(秘方) 치황해독환(梔黃解毒丸)도 세 끼 식사 전에 투여되었다. 침(針)과 부항(附缸)도 병행되었다. 원래 침과 부항은 같이 쓰는 것이 아니지만 갈천상의 경우에는 체력이 강하고 주정중독이 뼛속 깊이 스며 있어 강도 높은 처방이 아니면 재발할 소지가 많았다. “계속 저렇게 잠만 자는 거예요?” “잠자는 게 편하지. 술을 끊으면 금단(禁斷) 증상이 나타나는데 예상외로 견디기 힘들단다.” “완전히 끊을 수 있을까요?” “본인 의지에 달렸지.” “……” “환경 영향도 크고.” 조자경은 미소지었다. “그럼 완전히 끊기는 틀렸군요. 치유되자마자 백문장 총관직을 수행하려면 골치 아픈 일이 많을 테니까요.” “잠에서 깨면 치황해독환을 한 알 더 복용시켜라. 상태가 많이 좋아졌어.” 갈천상의 안색을 다시 한 번 살핀 천화신의는 다른 환자를 돌보기 위해 일어섰다. 갈천상의 중독도 심한 편이지만 다른 자들에 비하면 훨씬 덜한 편이다. 신필 박우는 심기증(心氣症`:`병이 아닌데도 본인은 병으로 생각하여 아픈 것)이며, 계간(鷄姦)으로 하루를 보내는 운단서는 억울반응(抑鬱反應`:`괴롭고 슬퍼서 견딜 수 없을 때 나타나는 반응)의 변형이며, 잘못했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대도 마임호는 진단 결과 적면공포증(赤面恐怖症)으로 나타났다. 머리를 피가 나도록 쥐어뜯는 약초상 홍문성은 억병(病`:`히스테리)으로 보기보다는 가벼운 증세다. 홍문성에 비하면 피식 웃다가 엉엉 울고, 그러다가는 다시 웃고 하는 점쟁이 전인수가 훨씬 병이 깊었다. 병명(病名)은 정신분열(精神分裂). 치유도 쉽지 않다. 하루 종일 하늘만 쳐다보는 악공 오경이 전인수와 같은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은 뜻밖이다. 하는 행동이 워낙 달랐으니. 이들은 각기 격리되어 치료를 받았다. “천화신의가 백문장 안주인이라니…… 크크크! 횡재했군. 기왕이면 절곡에 있는 미친놈들도 치료해 주지? 미친놈들이지만 가슴 속에 살념(殺念)을 숨기고 있는 작자들이니 이용하기에 따라서는 좋은 물건이 될 수 있는 놈들이지. 키키키!” 천화신의가 약속대로 백문장의 신물인 독명검(獨明劍)을 갖다주었을 때 갈천상이 한 말이다. 그때서야 천화신의는 광량이 죽기 전에 한 말의 진의를 깨달았다. ─`광인들을 절곡에 넣어두겠습니다. 어차피 세상과 어울려 살 수 없는 인간들이니, 내치면 굶어죽을 게 뻔하지요. 호생지덕(好生之德)쯤으로 생각해 두십시오. 제가 죽고 난 후, 그들이 다시 세상에 나온다면…… 마님도 더 이상 숨어지낼 수는 없을 겁니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겠지요. 죽더라도 무림에 나서든가, 아니면 땅이나 일구고 살든가. 세상에 미친 사람은 많다. 백문장에 도움을 청하러 오는 사람들 중에는 환자도 있기 마련이고, 자신도 모르게 품 속을 더듬어 침을 만지작거릴 때도 있다. 하나 치료해 줄 수 없다. 그들을 치료해 준다면 명의(名醫)가 있다는 소문은 날개를 달고 절강성 전역으로 퍼져 나갈 테고, 그날 봤던 끔찍한 검공이 들이닥치리라. 백학검법? 놀라운 무공이다. 백학검법은 백문장으로 하여금 단숨에 절강성을 움켜쥐게 했다. 그러나 그날 봤던 끔찍한 검공의 상대로는 어쩐지 미진한 감이 든다. 검을 맞대면 꼭 질 것만 같다. 백학검법을 펼치는 사람은 남편. 남편을 사지(死地)로 내몰 수는 없지 않는가. ─`마님의 고민이 어디에 있는지 압니다. 저도 알고, 돌아가신 장주님도 알고 계셨죠. 허허허! 장주님과 저는 상대가 누군지 분분한 의견을 나누곤 했죠. 만약 무림에 나서기로 작심하셨다면 최대한 신중을 기하십시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도 모르게 말입니다. 광인들을 치료해 주는 일은 비밀에 붙여졌다. 백문장 식솔들이야 너나할것없이 모두 한집안식구처럼 지내고 있으니 특별히 입단속을 염려할 필요도 없었다. 문제는 약재다. 광인들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많은 약재가 필요하고, 약재를 조달하는 일은 방삼이 맡았다. 방삼이 거래하는 약재상(藥材商)이 비밀을 지켜줘야 한다. 신중할 때는 여자보다도 더 꼼꼼히 일처리를 하는 방삼이 선택한 약재상이니 입이 무거울 것은 분명했지만. 그런 면에서 취휴각은 광인들을 치료하기에는 부적합했다. 그곳은 정문 곁에 있어 사람들 발길이 많이 닿는 곳이다. 천화신의는 갈천상을 무극전(無極殿)으로 옮겼다. 장주의 집무실. 백문장주가 급변을 당한 후에는 드나드는 사람이 없는 곳이다. 먼지만 가득 쌓였지만 장주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을 옛날 그 위치, 그 자리에 보관하고 싶어 시녀에게조차 출입을 금지시켰으니까. 천화신의는 무극전을 청소시켰다. 자신의 거처를 취운각에서 무극전으로 옮겼고, 무극전 지하에 있는 장주의 연공실에는 갈천상과 광인들을 몰아넣었다. 아주 훌륭하다. 광인들을 지하 연공실에 넣어두자 미친 웃음 소리도 울음 소리도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았다. 천화신의가 좌정(坐定)을 하고 의식을 집중해 봐도 숨소리 한 올 들리지 않았다. ‘아직은 괜찮아. 하지만 아무리 숨겨도 소문은 날 거야. 갈천상이 제 몫을 못 해준다면…… 백문장은 끝이야. 제 몫…… 일개 주정중독자에게 무슨 기대를……’ ─`주정중독자…… 누구죠? 전부터 아는 사람인가요?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주루에서 만나 데리고 왔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자가 저를 찾아왔어요. 술이나 실컷 먹을 수 없겠냐면서. ─`광 총관이 데려올 정도라면 능력이 대단한 사람일 텐데……? ─`단 한 마디만 듣고 데려왔습니다. ─`어떤 말인데요? ─`천생아재필유용(天生我材必有用`:`하늘이 나를 낳았으니 반드시 쓸모가 있다). ─`단지 그 말만 듣고…… ─`살아 있었어요. 정신이…… 육신은 술에 찌들었지만 마음은 불타고 있었어요. 이 늙은이가 감동할 정도로. 그자가 절곡에서 나온다면 목적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 늙은이는 정신이 흐려져서 사실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없으니…… 도박을…… 하는 수밖에 없어요. 백문장이 무림에 나서기 위해서는. ─`광 총관도 못 한 일을…… ─`이 늙은이는 겁이 많아서요. 그자는 겁이 없어요. 없을 수밖에 없지요. 주정중독자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니. 의지가 박약하거나, 세상에 한이 많은 사람일 겁니다. 확실한 것은…… 백문장에 그가 필요로 하는 게 있다는 거죠. ─`재산인가요? ─`글쎄요……? 그럴 수도…… 이 늙은이가 죽으면 마님과 아씨밖에 남지 않으니. 갈천상이 주정중독에서 벗어나 무슨 일을 벌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재산만 가로채 도주할지도 모르고, 어쩌면 정말로 백문장을 도와줄지도 모른다. 사내들이 도박장에서 도박하는 심정이 이럴까? ‘능력이 있다 해도…… 이건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니. 휴우……!’ 태평하기만 한 조자경과는 달리 천화신의의 내심은 오뉴월 가뭄에 콩깍지 타듯이 바짝 타들어갔다. 第五章 쫦 1 쫦 “미쳤어요! 주정중독을 뿌리뽑아야……” 한 달은 족히 치료를 받아야 된다는 갈천상이 칠주야(七晝夜) 만에 모든 약을 물리쳤다. 그 소리를 듣고 가만히 앉아 있을 조자경이 아니다. 그녀는 한달음에 달려와 방문을 벌컥 열어제치며 고함부터 질렀다. 그러나 황급히 입을 다물어야 했다. 방 안에는 어머니가 숙연하게 앉아 있었으니까. “천둥벌거숭이군. 왔나?” “그 말,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조자경은 다시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러나 전과는 많이 달라진 어감(語感)이었다. 그렇다. 그녀는 이미 방심(芳心)을 빼앗긴 상태였다. 그녀 자신은 극구 부인하고 있지만 천화신의를 비롯한 백문장 모든 식솔이 그렇다고 쑥덕거리는 것을. 난생처음 사내로 접하는 사람. 그는 아직도 함부로 말하고 있지만 그런 말투도, 그가 화를 내는 것도 밉지 않았다. 웬만큼 약을 올려서는 까딱도 하지 않게 된 조자경이다. 그러면서도 습관적으로 고함을 치는 이유는 자신도 몰랐다. 그가 곁에 없으면 허전한 마음을 가눌 길 없다가도 그를 보기만 하면 언성부터 높아졌다. 그리고 갈천상은 그녀의 기대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게 부화를 돋우는 말만 했다. ‘다시는 보지 않을 거야.’ 몇 번이나 마음 속으로 다짐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성난 망아지처럼 뛰쳐 나와 연화각(蓮花閣)으로 돌아가면 슬그머니 갈천상의 얼굴이 떠오르고 보고 싶어진다. “잘 왔어. 씨근덕거리지 말고 앉아, 크크크!” 오늘도 갈천상은 좋은 말로 시작하지 않았다. “징그럽게 웃지 좀 말아욧!” 조자경은 다시 한 번 툭 쏘아대며 갈천상의 맞은편에 앉았다. 갈천상도 많이 변했다. 환골탈태(換骨奪胎)라는 말이 있다. 인간이 긍정적인 면으로 가장 많이 바뀐 모습을 환골탈태라고 한다면 갈천상은 환골탈태했다. 옷은 절곡에서 입었던 누더기 옷을 입고 있지만 그때만큼 냄새도 나지 않고 더럽지도 않다. 봉아가 그 옷을 빨고 난 다음 몸살을 앓을 정도로 검은 물이 많이 나왔다니…… 머리도 여전히 산발한 채다. 영웅건(英雄巾)을 가져다줘도 묶지 않는다. 하나 비살문의 일흑처럼 시꺼멓게 때가 다닥다닥 붙어 있던 얼굴은 건강한 싱그러움으로 빛난다. 강렬한 눈빛의 정체도 알아냈다. 그것은 만인을 압도해 본 사람만이 폭출할 수 있는 기상이다. 그가 술에 절어 있을 때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침상에 누워 잠만 자고 있을 때도 몰랐지만 다탁을 앞에 두고 오연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심약한 사람은 머리부터 조아렸을 기도(氣度)가 물씬 풍겨나오지 않는가. 고귀한 신분으로 자란 사람이다. 만인을 호령해 본 사람이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무공을 궁극에 이르도록 익혀 기도만으로 상대를 압도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른 사람이다. 그런데 갈천상은 그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를 정확히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를 보고 있으면 믿음직한 것은 사실이다. “천둥벌거숭이,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지도(地圖)나 봐.” 갈천상은 비웃는 말투였다. 기분 나쁘게. ‘꼭…… 이래. 안 보면 보고 싶은데, 보면 기분이 나빠져.’ 조자경은 아미를 찡그리며 다탁으로 눈을 돌렸다. 다탁에는 절강성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사대 패강을 비롯한 여러 문파들이, 그들의 분타까지 각기 다른 색깔의 점으로 찍혀 있었다. 백문장이 위치한 금화부 적성현(積筬縣)에서 동북으로 이십오 리만 가면 태백산(太白山)이 있고, 봉술(棒術)로 태백산보다 더 널리 알려진 건곤방(乾坤幇)이 있다. 서북으로도 이십오 리다. 맨손으로 황소를 눕힐 수 있는 거력을 선보여야 입문할 자격이 있다는 천력문(天力門)이 심요산(深山) 한 자락에 위치해 있다. 서남으로 이십 리에 위치한 동산(東山)에는 ‘무적의 비조대(飛鳥隊)’로 유명한 철응방(鐵鷹幇)이, 동남 이십 리 대분산(大盆山) 어딘가에는 하루의 시간만 주면 누구의 목숨도 끊을 수 있다는 비살문(秘殺門)이 있다. 절강성 전체도 아니고 동서로 칠십오 리, 남북으로 육십여 리가 조금 넘는 금화부(金華府) 좁은 땅에 절강성의 패권을 차지하려는 이문(二門) 이방(二幇)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문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동해(東海)로 나가면 보타산(普陀山)에 보타문(普陀門)이 있고, 불교(佛敎) 천태종(天台宗)의 발원지인 천태산(天台山) 천룡사(天龍寺) 스님들의 무공도 중원 각지에 널리 알려진 바다. 그러나 천룡사나 보타문 스님들은 절강성 패권에는 눈도 돌리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불공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결국 금화부를 쟁취하는 문파가 절강성의 패권을 차지하게 된다는 경우가 발생했다. 백문장은 참으로 묘한 곳에 위치해 있다. 사대(四大) 패강(覇强)들 한가운데…… 좋은 점도 있다. 장주가 변괴를 당하고, 문도들이 모래알처럼 흩어졌어도 백문장이 멸문(滅門)당하지 않고 현판을 걸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지리적인 이점 때문이다. 사대 패강은 백문장을 건드리지 않는다. 암묵적으로 서로 간의 중립지역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갈천상이 지도를 사이에 놓고 나직하게 말했다. “백문장주 조항이 죽고 난 다음……” “감히 아버님 함자를 함부로……” “시끄럿! 네게는 아버지가 될지 모르지만 나는 얼굴도 보지 못한 귀신이야. 내게 더 이상의 예의는 기대하지 마라.” 조자경은 이를 악물었다. 이 사내는 여자를 모르는 풋내기가 분명하다. 그렇지 않으면 여심을 이렇게 모를 리가 없다. 그토록 서로 화해하려고 노력하는데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아니, 아예 그럴수록 더 삐뚜로 나가니. “백문장주 조항이 죽고 난 다음 근 십 년 동안 백문장주직은 공석이었지. 그대로 놔두어서는 곤란해.” 갈천상은 말을 마친 후, 천화신의와 조자경을 빤히 쳐다보았다. 두 사람 중에 누가 백문장주직을 맡을 것인지 결정하라는 독촉의 눈빛이었다. “휴우! 내가 맡죠.” 천화신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됐군. 천둥벌거숭이, 너는 마방(馬房)에 가서 발 빠른 말 이십 필과 건장한 놈 스무 놈을 골라와.” “……?” “홍첩(紅帖)을 안 보낼 거야!” 갈천상이 소리쳤다. 그러나 그가 소리치기 무섭게 조자경도 소리쳤다. “미쳤어욧!” “미쳤냐구? 내가? 크크크! 미쳤지.” “정말 미쳤군요. 사대 패강은 우리가 다시 일어서는 것을 바라지 않아요. 만약 그런 기미가 보이면……” “사람을 보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린다?” “흥! 알고는 있네요.” “천둥벌거숭이. 그럼 너는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지? 내게 백문장을 일으킬 힘을 달라고 했는데 어떤 힘을 달라고 한 거지?” “토우요.” “토우?” “절곡에서 봤던 토우. 그 무공을……” “건방진 소리 하지 맛!” 이번 고함은 다르다. 툭 하면 고함을 지르는 갈천상이지만 이번 고함 속에는 노여움이 섞여 있다. 그것도 절대로 범해서는 안 될 금기를 어긴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것 같은 노여움이. “약속대로 한다. 백문장은 내가 좌지우지한다. 내 뜻대로. 이미 독명검이 내 허리에 있어. 보이나?” “……보여요.” 조자경은 힘없이 대답했다. 도저히 갈천상이라는 이 사내와는 정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없다. 진짜 미친 인간과 대화하는 기분이니. “홍첩을 보내고 정식으로 백문장을 출범시킨다.” 갈천상의 눈가는 광기로 번들거렸다. 쫦 2 쫦 정월(正月)을 열흘 앞둔 십이월(十二月) 스무하루는 무척 추웠다. 옷깃을 아무리 여며도 북풍한설이 옷섶을 파고 들어와 살갗을 얼음으로 만들어놓았다. 입김을 뿜어내면 곧바로 얼음가루가 되어 떨어지는 지독한 추위에 싸리눈까지 몰아치니, 길을 오가는 사람들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이런 날씨에도 길을 오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길가에 따뜻한 장작불이 피워져 있다면 발길이 당길 수밖에 없다. “저기 불이 있는데?” “무슨 불이지?” “알게 뭐야. 어서 가서 불이나 쬐다 가자구. 어이구, 추워!” 길손 몇 사람이 불을 찾아 날아들었다. 장작불은 그냥 지펴진 불이 아니었다. 보기에도 건장한 청년이 길손을 위해서인지 불기가 멀리까지 퍼져 나가도록 잘 말린 마른 장작을 연신 집어넣었다. “누군지 복 받겠수다.” 길손 중 한 명이 고마움을 표시했다. “정월 초하루, 백문장주가 취임을 하니 시간 나시는 분들은 모두 오셔서 국수나 한 그릇 들고 가시오. 이 모닥불도 백문장주님이 특별히 지펴준 불이오.” 건장한 청년은 무성의하게 읊어나갔다. “백문장? 백문장주? 이게 무슨 일이야?” “글쎄…… 조 장주님이 돌아가신 다음 백문장은 끝났잖아?” “그러게…… 누가 백문장주로 취임한다는 거지?” 아무리 추운 날씨라도 화끈화끈한 장작불이 있고, 거기에 걸맞은 이야깃거리가 있는 이상 사람들의 발길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그럼 자네는…… 이거 돈 받고 하는 짓인가?” “말 시키지 마쇼. 하루 품삯이 은자 반 냥이라 덜컥 달라들었더니 추워서 미치겠소.” “아따, 이 사람 엄살 하고는. 아, 불 곁에 있으면서 뭐가 추워?” “장작 떨어지면 가져 와야 되니까 그렇죠! 이놈의 바람은 왜 이렇게 부는지 너무 잘 탄다니까. 아예 사람을 골탕먹이려고 장작을 바짝 말려놨나 봐.” “하하하!” “하하하!” 금화부…… 모두 예순 곳에서 거의 같은 대화가 나누어졌다. 쫦 쫦 쫦 “경문혈(京門穴`:`제12늑골 바로 밑)은 전신을 마비시키는 마혈(麻穴)이자 혼혈(昏穴)이에요. 지력(指力)을 전격적으로 펼치면 누구도 당하지 못하죠. 하나 침구(鍼灸)에서는 경문혈을 생혈(生穴) 일(一), 미혈(迷穴) 삼(三), 사혈(死穴) 이(二), 범혈(凡穴) 사십이(四十二)로 분류한답니다. 경문혈에 침을 놓아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마흔여덟 군데 중에서 오직 한 점만 취해야 되죠.” 천화신의가 침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침을 맞는 사람은 점쟁이 전인수였다. 점쟁이, 학자, 악공, 도둑…… 이런 사람들에게 정성을 쏟아서 무엇 하나 하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거짓이리라. 의원 본연의 자세라든가, 한 생명을 인간답게 살게 해준다는 도의심 같은 것을 생각하기에는 백문장이 너무 위태로운 지경에까지 이르러 있지 않는가. 그래도 천화신의는 온갖 정성을 다했다. 이미 절강성 각 문파로 홍첩이 배달되었고, 사대 패강을 비롯한 몇몇 문파에서는 반드시 참석하겠다는 답변도 받은 터였다. 갈천상은 움직이지 않았다. 장주로 취임하는 날이 코 앞으로 다가왔는데 백문장 식솔은 단 한 명도 늘지 않았다. 그가 총관으로 취임하여 한 일이라고는 막대한 은자를 뿌려대며 백문장주의 취임을 널리 알린 것뿐이다. 효과는 컸다. 하루에 은자를 물경 서른 냥씩 뿌려댔으니…… 네 식구가 족히 삼 년은 호의호식하며 지낼 수 있는 거금이 아니던가. 그런 돈을 길거리에 뿌리듯이 써버렸으니 세인들의 이목인들 집중되지 않으면 비정상이리라. 백문장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품을 팔아 은자를 벌고자 하는 사람들이지 문도로 입문하겠다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백문장이 과연 얼마나 많은 재산을 비축해 놓았느냐. 절강성 각 문파들도 예민하게 촉각을 곤두세우는 부분이다. 어떤 문파 사람은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백문장을 흡수했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재산의 많고 적음은 한 문파가 성장하는 데 큰 변수가 된다. 사대 패강의 주요 쟁점지인 금화부에서 과거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백문장이 막대한 금력(金力)을 바탕으로 꿈틀거린다면 무심히 지나칠 수 없다. 반대로 백문장은 그런 인상을 심어주어서는 안 된다. 실력을 갖춘 다음에는 몰라도 현재는. 정월 초하루, 장주의 취임식은 대성황을 이루리라. 그리고 그들은 말하겠지. 백문장의 위용을 보여 달라고. 무엇을…… 도대체 무엇을 보여준단 말인가. 자신과 딸이 익히고 있는 어쭙잖은 무공을 선보인단 말인가. 사서 개망신을 당하자는 겐가. ─`그믐까지는 광인들을 낫게 해야 합니다. 적어도 운신할 수 있게끔은 만들어놔야지요. 군웅들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합니다. 갈천상의 말을 믿는 수밖에 없다. 아니, 죽은 광량의 안목을 믿는 수밖에 없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갈천상이 자신을 장주로 대해 주고 있다는 점. 그것은 변한 말투에서부터 읽을 수 있다. 길 가는 강아지 쳐다보듯 하는 눈빛과 무심한 태도는 변하지 않았지만 말투만은 공손해졌다. 백문장에서 유일하게 공대를 받는 사람이라고나 할까. 천화신의는 최선을 다했다. “생혈은 오직 한 점. 바로 여기.” 천화신의가 경문혈에 침을 찔러넣었다. 천화신의가 사용하는 세침(細針)은 워낙 가늘고 작아서 언뜻 보면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는 듯했다. 그러니 침이 꽂히는 자리를 육안으로 식별해 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경문혈을 찌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것은 굳이 무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혈도에 대해 약간의 지식만 있으면 알아볼 수 있다. 하나 그녀가 말한 생혈의 위치는 안력(眼力)을 고도로 수련한 무인도 쉽게 알아볼 수 없었다. 전인수는 날카로운 침이 육신을 찔러와도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지 멀뚱거리기만 했다. 갈천상은 천화신의의 시술을 무심히 지켜보고 있다. 그는 또 변했다. 전에는 육신이 변했지만 지금은 정신이 변했다. 가장 두드러진 현상이 말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눈가에 짙은 허무를 드리우고 있다. 성격은 양극단을 보여 어떤 때는 자상하다가도 어떤 때는 난폭하기 이를 데 없다. 자칫 이중인격자나 정신파탄자로 오인하기 십상이다. 아니다. 그렇게까지는 보이지 않는다. 그의 겉모습은 조용하기 이를 데 없어 마치 선방(禪房)에서 화두(話頭)에 몰두하고 있는 고승을 보는 듯하다. 주정중독이 제거되면서 나타나는 일시적인 우울증 현상인가? 그렇다고 볼 수 없다. 단 칠주야밖에 시술받지 않았지만 갈천상의 육체는 완벽하게 건강했다. 그것은 누구보다도 천화신의가 잘 안다. 그는 우울증 따위에 걸릴 사람이 아니다. 요즘에 와서야 느낀 사실이지만 갈천상은 마음만 먹으면 주정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굳이 자신이 치료하지 않더라도. 그는 의술을 알고 있다. 중원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자신조차 혀를 내두를 만큼 고명한 의술을 지녔음이 틀림없다. 신체에 대한 이해가 무척 깊다. 상승 무공을 익히면 어느 정도는 혈행(血行)이나 기행(氣行)을 이해할 수 있지만 갈천상 정도가 되려면 전문적인 의원이 되고자 노력했어야 한다.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단지 천화신의의 직감일 뿐이다. 천화신의는 그 점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침을 시술할 때에는 딱히 할 일도 없었으니까. “지정혈(支正穴)은 소장경(小腸經)의 요혈이죠. 무인들은 한 쪽 팔의 신경을 마비시키는 데 활용하지만…… 침구에서는 상반신의 잠력(潛力)을 극대화시키는 요혈로 사용하죠.” 갈천상은 말이 없다. 석상처럼 앉아 고슴도치가 되어가는 전인수를 바라볼 뿐이다. “휴우! 이 사람들은…… 취임식에 나서기 힘들 거예요.” 천화신의는 힘들게 말했다. 정말 힘들었다. 아무리 내공을 꾸준히 연마해 왔다고는 하지만 극도로 정신을 집중해야 하는 시술은 극심한 탈진을 불러왔다. 이들을 정월 초하루까지 멀쩡한 사람으로 만들기는 어렵다.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 달 남짓한 기간에 천하의 광인을 멀쩡하게 고칠 수 있다면 천하제일의 신의(神醫)라는 소리를 들어도 무방하리라. “이들은…… 참석할 겁니다.” 어둠 같은 침묵이 깔려야만 들을 수 있는 조그마한 소리가 울렸다. “이제 겨우…… 휴우!” 뭔가를 말하려던 천화신의는 침구를 챙기고 일어섰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속을 전혀 알 수 없는 사람, 자신이 생각한 바는 반드시 관철하고야 마는 들소 같은 인간에게는 어떠한 말도 불필요하니까. 조자경은 숨돌릴 틈도 없이 바빴다. 백문장주의 취임식에 참석하겠다고 의사표시를 해온 군웅은 모두 이백여 명에 육박한다. 건곤방에서는 소방주(小幇主)인 일음마봉(一陰魔棒) 무기(茂基)를 필두로 소방주의 울타리라고 할 수 있는 건곤십삼봉(乾坤十三棒)이 참석의사를 표시해 왔다. 천력문에서 황우당(黃牛堂) 당주인 거산파장(巨山把掌)과 황우당 열두 향주(鄕主)인 십이력(十二力)이, 철응방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비조탈명(飛鳥奪命)이란 자와 철응방주가 가장 믿는다는 사귀(四鬼)가 참석을 통보해 왔다. 비살문에서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하나 비살문은 원래 정식적인 절차 따위는 일체 무시하는 문파이니 아무런 통보를 해오지 않았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전혀 없다. 그들은 참석한다. 누가 참석할지, 몇 명이나 참석할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참석하리라. 백문장을 흡수해 버린다. 백문장이 다른 문파에 흡수당할 것 같으면 아예 잘라버린다. 백문장 자체는 발 밑에 낀 때만큼도 중히 여기지 않으나 금화부가 다른 문파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만은 방관하지 못하리라. 그 생각을 하면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도대체 뭘 믿고……’ 갈천상에 대한 야속함이 뭉클 피어났다. 그러나 눈을 뜨면 고심할 틈도 없이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일하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는데 방문하겠다는 사람은 많으니. 무림군웅들뿐인가? 금화부 사람들도 백문장주의 취임에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지 않는가. 영접 준비를 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몸이 두 개라 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안 되겠어요. 사람을 더 써야지.” “벌써 스무 명이나 썼는뎁쇼.” “그럼 어떡해요. 손길이 이렇게 더딘데.” “좀더 채근을 해봅죠.” 방삼이 안타까운 듯 말했다. 과거, 백문장이 군웅들을 맞이할 때는 물경 삼백여 명이 움직였다. 사내들은 군웅들이 거처할 곳을 마련하고, 비무대(比武臺)도 설치하고, 군웅들이 먹을 음식과 술을 나르기도 했다. 여자들도 바쁘기는 매한가지다. 장원 구석구석을 닦고, 음식을 장만하고…… 지금은 겨우 남자 여자 다 합해서 서른 명도 안 되는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으니, 청소는 고사하고 연무장에 보기 싫게 자란 잡초도 뽑을 틈이 없다. “갈천…… 갈 총관은 어디 있죠?” “무극전에 있을 겁니다요. 거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잖습니까?” 방삼이 볼멘소리를 했다. 성질날 만도 하다. 광량이 죽은 후, 광량이 하던 일까지 도맡아 하는 사람은 방삼이다. 그런데 정작 공(功)은 다른 사람이 차지해 버렸으니. 주정중독자가 하루아침에 총관이 된 것도 이해하기 힘들다. 하물며 그랬으면 무슨 일인가는 해야 하는데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다. 계획없이 홍첩을 띄운 것은 무엇이며, 은자를 물쓰듯 써가며 세상천지에 장주의 취임식을 알린 것은 또 무엇인가. 그것은 그렇다고 치자. 그랬으면 영접 준비나 제대로 할 수 있도록 고심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지 않는가. 이건 아예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으니. “일 잘하는 사람으로 스무 명쯤 더 구해 보세요. 시간이 없어요. 그리고 안에도 손이 턱없이 부족해요. 음식 잘하는 여자도 구해 보세요. 한 스무 명쯤.” “구해 보기는 하겠습니다만……” “빨리요.” “그럽죠.” 부리나케 뛰쳐 나가는 방삼을 지켜본 조자경은 입술을 짓깨물면서 무극전으로 향했다. “도대체 뭐 하자는……” 무극전을 벌떡 열어제친 조자경은 너무도 숙연한 분위기에 할말을 잊어버렸다. 박우, 운단서, 마임호, 전인수, 홍문성, 오경, 그리고 갈천상. 절곡 광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다. 이들은 절곡에 있을 때에도 한자리에 모인 적이 없고, 백문장으로 와서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각기 제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지 같이 모이지는 않았다. ‘다 나았나……?’ 언뜻 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었는지는 자신을 향해 씩 웃는 박우의 얼굴을 보는 순간 깨달아 버렸다. 반쯤은 일그러지고 반쯤은 딱딱하게 굳어 있는 얼굴. 이들은 아직도 비정상이다. “천둥벌거숭이군. 잘 왔어. 그러잖아도 부르려던 참인데.” 갈천상이 눈으로 웃으며 말했다. ‘맑다……!’ 조자경은 갈천상의 눈빛이 참으로 맑다고 느꼈다. 눈빛이 맑아서일까? 그의 얼굴도 음성도 밝고 환하게 보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인 건강한 인간의 육신이라고 했던가? 갈천상이 그랬다. 지금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갈천상이라는 인간에게는 성질을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언제나 지금처럼 맑은 눈빛만 띄워준다면. “영접 준비는?” “그래도 신경은 쓰고 있었네요?”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말은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퉁명스럽게 나갔다. “백 명을 구해. 앞으로 백문장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들로.” “뭐라고요?” “하인장(下人長)은 방삼을 시켜. 그 사람, 사람 보는 눈이 있어.” “그 사람 눈에는……” “……?” ‘당신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예요.’ 또 습관적인 말이 나갈 뻔했다. “아녜요. 계속 말해 보세요.” “백문장에 있는 모든 병기를 치워.” “넷?” 이번에는 정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갈천상이 하는 일은 하나같이 기상천외하기 때문에 종잡을 수 없지만 이번만은…… “병기뿐만 아니라 무림에 관한 모든 것을 치워.” “그, 그럼……?” “그들과 싸울 것이 아니라면 그런 건 필요없지.” “그럼 비무대는……?” “다 치워.” “휴우! 알았어요.” 조자경은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에 와서는 달리 선택할 길이 없으니까. 쫦 3 쫦 보통 사람의 허리밖에 닿지 않는 키에 땅에까지 닿는 긴 팔, 눈은 사팔뜨기고, 코는 뭉툭하며, 입은 메기처럼 옆으로 쭉 째져 놀림깨나 받고 살았을 법한 사람. 대도 마임호다. “제길!” 그는 중얼거렸다. 눈은 그저 아무 곳이나 보려 하는데 계속 하늘로만 향한다. 마치 하늘밖에 볼 곳이 없다는 듯이. 하루 종일 하늘만 쳐다보고 살았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지난날이 이토록 철저하게 묻혀버릴 수 있단 말인가. 동냥질로 얻어먹었다. 어린애가 돌팔매질을 하고 발로 차도 실실 웃고만 있었다. 어떤 때는 아무것도 아닌 일 가지고 살인이라도 할 듯이 광분해서 날뛰었다. 하나같이 믿을 수 없는 말들뿐이다. 그렇게 살았었나? 하나 그것은 아무렇지도 않다. 맑은 정신으로 돌아온 지금 영원히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아득한 혼돈 저편에서 슬금슬금 살아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마임호는 어렸을 때부터 또래의 아이들보다 훨씬 작은 것에 익숙했다. 그들은 당연히 컸고, 자신은 당연히 작았다. 그들은 욕할 권리가 있고, 자신은 온갖 모진 욕이나 매질도 참아야 하는 의무가 있다. 의무를 소홀히 했을 때는 당연히 대가가 지불된다. 전신에 피멍이 들도록 늘씬하게 얻어맞아도 누구 한 명 동정의 눈길을 보내주지 않는다. 가족도 마찬가지다. 형제라는 이름으로 한 집안에서 북적대는 사람이 거의 열 명에 육박했지만 그들과 자신은 사는 방법이 달랐다. 그들은 또래의 아이들처럼 지배하고 욕할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마임호는 길거리에 내다버리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으로 여기고 살아야 한다. “저 새끼, 저거…… 밥값이나 하겠어? 병신들은 일찍 뒈진다던데 뒈지지도 않고……” 떡시루만한 얼굴에 거친 수염이 하나 가득인 아버지는 마임호를 볼 때마다 입에 거품을 물었다. 아버지의 손은 웬만한 어른의 얼굴만하다.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가득해서 못질을 해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다. 그 손으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으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눈 앞에서 별이 반짝였다가는 텅 빈 암흑이 찾아온다. 어느 날, 손님 두 명이 찾아왔다. 일 년 열두 달이 지나가도 손님이라고는 그림자도 볼 수 없는 허름한 산골 마을에 얼굴에 기름기가 반지르하게 도는 손님이 찾아왔으니 수많은 눈동자가 한곳으로 집중될 수밖에 없다. 손님은 뜻밖에도 마임호를 찾았다. “어느 아이가 마임호냐?” “네, 네. 저 아인뎁쇼.” 세상에서 거칠 것이 없어 보이던 아버지가 머리를 조아렸다. “저…… 아니?” “네, 네.” “저건 병신 아냐?” “그래서 동전 스무 문에……” “지금 장난하는 건 아니겠지?” 손님들의 인상이 험악하게 변했다. “아, 아니…… 저, 그게……” 아버지는 연신 말을 더듬거렸다. 그게 이상했다. 왜 욕을 하지 않는 것일까? 욕이라면 유창하게 술술 나오는 아버지인데. “스무 문을 받아갔으니 육십 문을 내놓든가, 아니면…… 그래, 저 아이를 내놔.” 손님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아이는 덩치가 제일 큰 둘째형이었다. “아, 알겠습니다.” 아버지는 한 마디도 대꾸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날로 둘째형은 손님들을 따라 대처(大處)로 나갔다. 그날 밤, 마임호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얻어맞았다. 유창하게 줄줄 흘러나오는 욕을 얻어먹으면서. “병신새끼가 스무 문 값도 못해! 에잇! 밥이나 축내느니 차라리 뒈져라!” 아버지에게 맞은 다음에는 형제들에게 시달렸다. “병신, 너 때문에 둘째형이 팔려갔잖아!” “둘째형이 나무를 제일 많이 해오는데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앞으로는 네가 해와. 알았어!” 밥벌레를 면치 못할 것 같던 마임호에게 가족들을 즐겁게 해줄 기회가 생겼다. “이 아이인가?” “네, 네.” “바지 벗겨봐.” 마임호는 손님이 생각을 바꾸면 어쩌나 싶어 재빨리 바지를 벗었다. “튼튼하군.” 손님의 인상이 활짝 펴졌다. “헤헤. 병신이지만 소인을 닮아서……” “됐어. 이 아이로 하지.” 마임호는 한껏 애를 졸이고 있다가 ‘됐다’는 말을 듣는 순간, 방귀를 뀌고 말았다. 긴장이 한꺼번에 풀린 탓이다. 다행히 손님은 개의치 않았고, 마임호는 자신도 가족들을 기쁘게 해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마임호는 전혀 딴 세상 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이도 없었고, 벼룩도 없었다. 마임호를 보는 사람들도 인상을 구길지언정 욕지거리는 내뱉지 않았다. 기루(妓樓)…… 이상한 세상이다. 낮에는 온갖 쓰레기를 다 모아놓은 듯 지저분하게 쾌쾌한 냄새로 가득하던 곳이 밤만 되면 향기로운 지분 냄새와 주향(酒香)으로 바뀌었다. 마임호는 낮에 생활했다. 온갖 더러운 것을 치우고 닦고, 방 안 공기를 환기시키고, 기녀(妓女)들의 속곳 빨래까지…… 숨 한 번 돌릴 시간이 없었다. 밤에는 전혀 반대의 상황이 된다.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모를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올 때면 마임호는 알아서 제 방으로 찾아 들어갔다. 낮에 치울 것을 치우지 않으면 혼이 나듯이 밤에 사람들 사이에 모습을 드러내면 혼이 났으니까. 오히려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으니 다행이랄까? 불도 켜지 못하고 어둠 속에 웅크려 있어야만 하는 생활이지만 마임호는 만족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으랴 싶었다. 먹을 것 마음껏 먹고`─`집에서는 생각도 못하는 기름진 음식들`─`잠 실컷 자고…… 생애 최초로 맞아보는 안락함…… 그런 점에 비하면 잠시도 허리를 펴지 못할 만큼 고된 중노동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런 생활이 변하지 않았으면……’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좋은 일에는 마가 낀다고, 마임호는 지금의 생활에 변화가 생길까 봐 두려웠다. 술 취한 손님들은 뭔가를 흘리고 가기 마련이다. 어떤 손님은 전낭(錢囊)을 흘리기도 하고, 어떤 손님은 서적을 놓고 가기도 하고…… 정신없는 손님은 속곳을 흘리고 가기도 한다. 마임호는 흘린 물건을 줍는 대로 타소장(打掃長`:`청소부장)인 국중(國仲)에게 가져다 바쳤다. “쓸개 빠진 놈들. 이런 걸 흘리고 다녀? 총관에게 갖다줘. 이런 건 꼭 찾으러 온다니까.” “이게 뭐지? 처음 보는 건데…… 총관에게 갖다 줘.” “이리 줘봐. 음……! 됐어. 그만 가봐.” 국중은 물건을 보는 눈이 탁월했다. 총관에게 갖다주라고 한 습득물은 어김없이 임자가 나타났고, 국중이 챙긴 물건은 그때 그 손님이 다시 들르더라도 찾는 법이 없었다. “총관이 물건 하나는 잘 찾아왔단 말야. 어디서 요렇게 귀여운 놈이 나타났는지. 너, 앞으로도 줍는 물건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가져 와야 돼. 혹여 따로 숨길 생각일랑 애시당초 하지도 마.” 귀엽다는 말을 처음으로 들었다. 폭력이 아닌 진짜 귀여워하는 마음으로 볼을 꼬집혀 보기도 처음이다. 그런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은근히 희열이 솟구치며 세상을 살아가는 보람마저 느껴졌다. ‘전혀요. 전혀 그럴 생각 없어요. 앞으로도 줍는 물건이 있으면 전부 갖다 드릴게요.’ 다른 사람에게 귀여움을 받을 수 있다니. 꿈에서조차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는가. 국중의 애정은 감격스러울 정도로 깊었다. 음식에는 으레 고기 두어 점이 들어 있었고`─`손님들이 먹다 남긴 고기지만`─`어떤 때는 이름도 알 수 없는 음식을 접시째로 먹어보기도 했다. “미친놈들! 술이나 곱게 처먹을 것이지, 접시에다 술을 쏟아부으면 어떻게 해! 야, 난쟁이! 너 이거 먹어.” 딱딱하게 굳어버린 음식인지라 볼품은 없었지만 맛은 기막혔다. 마임호는 산골에 처박혀 있는 형제들을 떠올렸다. 그들도 이런 음식을 먹을 수 있다면…… 옷도 얻어입었다. 촌에서는 구경도 하기 힘든 비단옷이었다. “더러운 새끼. 이런 데다 일처리를 하고 있어. 야! 난쟁이! 이거 너 입어.” 국중이 말한 일처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것은 아니다. 기루에서 생활하다 보니 여인들의 교태 섞인 비음 소리는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들었다. 국중이 건네준 옷은 끈적끈적한 것이 말라붙어 잘 떨어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기녀들이 뒷처리한 헝겊 조각까지 도맡아서 빨래를 했던 마임호에게는 크게 대수롭지 않았다. 깨끗이 빤 옷은 입기가 아까울 정도로 윤이 반지르하게 돌았다. “괜찮은데? 근데 좀 줄여입어야겠다.” “줄여주기로 했어요.” “하하하!” 국중은 즐거운 듯 허리를 잡고 웃어젖혔다. 마임호는 또 한 가지 사실을 알았다. 사람을 즐겁게 해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뙤약볕이 쨍쨍 내리쬐는 한여름 한낮이었다. 계란을 깨트리면 바로 익어버릴 정도로 무척 더웠다. 길에는 마른 먼지만 피어오르고, 대지를 익혀버린 열기가 부글부글 끓어올라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오가는 사람도 없다. 저녁이 되어 산들바람이라도 불면 휘청이는 발걸음으로 기어나올 사람들이지만 한여름 한낮에는 어디로 숨었는지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국중이 인상을 험악하게 일그러트리며 다그쳐 온 것은 그 무렵이다. “너 요즘 왜 이렇게 수확이 적어. 어디다 빼돌리는 것 아냐?” “줍는 것은 모두 가져다 드렸는데요.” “아닌 것 같은데?” “맹세해요. 정말로 저는……” “정말이야?” “네.” 국중은 이상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믿지. 어디로 빼돌렸다가는 죽는 줄 알아. 그건 그렇고…… 네가 보기에는 오늘 저녁에 말야. 매향(梅香)이가 누굴 맞을 것 같아?” “성(成) 대감님 둘째 자제분.” 마임호는 생각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전직(前職)이 대감이었다는 성 대감은 낙향하여 조그만 장원을 짓고 풍류(風流)를 벗삼아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장성한 아들이 네 명이나 있는데, 그 중에 둘째 자제와 매향이와의 관계는 보통이 넘었다. 하기 좋은 말로 손님과 기녀 사이에 정분이 났다고나 할까? 조만간 측실로 들어갈 것이라는 소문도 있고, 죽네 사네 하며 붙어다니다가도 언제 그랬냐 싶게 떨어지는 것이 이 세계라며 닳고 닳은 매향이 년에게 무슨 꿍꿍이속이 있을 거라는 소문도 무성했다. 좌우지간 성 대감 둘째 자제는 하루가 멀다 하게 기루에 들렀다. “그렇지?” “틀림없어요. 어제 안 왔잖아요. 오늘은 틀림없이 와요.” “좋아, 그럼 너는……” 국중은 마임호가 할 일을 지시했다. 기루에 온 이후 처음으로 밤에 돌아다닐 수 있는 일이었지만 가슴이 마구 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저, 저는……” “못 한다는 소리는 하지 마. 죽여버릴 테니까.” “하지만……” “난 상벌(賞罰)이 엄한 사람이야. 일만 잘되면 축설루(蓄雪樓)를 구경시켜 줄게. 여기 온 지 오래된 것 같은데…… 축설루 구경했어?” “아뇨.” “쯧쯧! 일이나 잘해. 네 앞날은 내가 돌봐줄게.” 마임호는 국중이 지시하는 대로 매향이 거처하는 방으로 들어갔다. “눈치껏 알아서 해.” 매향은 방긋 볼우물을 지어주었다. 숨을 곳은 미리 정해져 있었다. 침상 밑. 성 대감 둘째 자제는 뜻밖에도 술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두어 잔도 들이키지 않고 바로 매향의 허리에 팔을 둘러갔다. 헉헉거리는 신음 소리, 삐걱거리는 침상 소리…… 마임호는 침상 밑으로 굴러떨어진 성 대감 둘째 자제의 옷에서 전낭을 꺼냈다. 도둑질은 재미있다. 적성에 맞기도 하려니와 물건을 훔칠 때 느끼는 짜릿한 전율은 무엇으로 표현할 길이 없다. 또한 그것은 여러 사람을 즐겁게 해준다. 물론 즐겁지 않은 사람도 있다. 하나 그 사람은 자신과 상관없는 사람이며, 전낭이 없어졌다고 길길이 날뛰는 사람도 없다. “팔수(手`:`소매치기)당했나? 집에 가서 보내줄게.” 대부분은 그렇게 넘어갔다. 또 하나…… 침상 밑에 숨어서 이상야릇한 비음을 듣는 동안, 마임호의 잠자고 있던 성에 대한 본능이 일깨워지기 시작했다. “으음…… 아……! 어서……!” ‘귀찮아하고 있군.’ “학학! 아…… 나 죽어……” ‘화대(花代)를 많이 받았어.’ “아…… 으…… 하아……” ‘진짜로 즐기고 있어.’ 마임호는 기녀들이 내뱉는 비음만 듣고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꿰뚫었다. 손님이 워낙 많이 취해 여체도 마음껏 탐하지 못하고 곯아떨어지면, 마임호는 침상 밑에서 슬그머니 기어나와 옷을 벗었다. “미쳤어! 빨리 나가, 말 안 들려! 빨리 나가란 말야!” 어느 기녀든 처음에는 그런 소리를 속삭인다. 그러나…… “헉! 이, 이거……” “조용히 해. 손님 깨.” “아, 알았어.” 마임호는 기녀가 어떤 관계를 원하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살짝 달궈진 여체를 활활 불사르기에 그의 육체는 충분히 젊었다. 비록 난쟁이라 할지라도. 술과 여자와 도박은 사람을 패가망신(敗家亡身)으로 이끈다. ‘적당히’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술과 여자와 도박은 끝이 없는 무저갱(無低坑)처럼 사람을 한없이 끌어당긴다. 도벽(盜癖)도 그렇다. 마임호는 점점 대담해져 갔다. 기술도 늘어서 손님과 슬쩍 부딪치는 정도로도 품 속에 숨어 있는 전낭쯤은 쉽게 가로챌 경지가 되었다. 문제는 소문이 퍼진다는 점이다. 아무리 돈에 연연하지 않는 부잣집 손님들이라 할지라도 한 명, 두 명 도둑맞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기루에 팔수가 있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위험해졌어. 한 명은 걸려들어야 돼.’ 마임호는 국중이 생각하는 바를 알 수 없었다. “야, 난쟁이. 오늘 저녁에……” “히히! 알았어요.” “누가 오는지 알아?” “그까짓 것 몰라도 돼요.” “알아서 해. 걸리면…… 알지?” “염려 붙들어 매둬요.” 알았어야만 했다. 그날 저녁에 누가 오는지. 마임호는 유삼(儒衫)을 입고 들어선 대포두(大捕頭)의 전낭에 손을 댔고, 육신이 허공에 들려진다 싶은 순간 반질반질하게 닦아놓은 청석바닥으로 메다꽂히며 정신을 잃었다. 금옥(禁獄)은 세상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가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는 사람들에게는 특히 그렇다. 금옥은 정신을 맑게 해주고, 특이한 재능을 선물해 주며, 좀더 성숙한 인간이 되게끔 도와준다. 마임호가 성인이 되었을 때, 정확히 금옥을 여섯 번 들어갔다 나왔을 때 그의 이름 앞에는 ‘악질’이라는 말이 붙어다녔다. 여자만 밝히지 않았어도 ‘악질’이라는 소리는 듣지 않았을 텐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밤늦게 침입한 괴한을 대하면 오금부터 저리게 된다. 굳이 흉기를 꺼내들 필요도 없다. 나직한, 약간 위협적인 어투로 돈을 내놓으라고 하면 돈을 내놓고, 옷을 벗으라고 하면 옷을 벗는다. 더러는 반항하는 사람도 있다. 그때는 몽둥이가 약이다. 금옥에서 배운 투술(鬪術)로 몇 대 쥐어박으면 오뉴월에 패대기쳐진 개구리처럼 쭉 뻗기 마련이다. 마임호는 점점 변해 갔다. ‘즐거움을 줄 수 있다면’에서 ‘사람을 마음껏 희롱하는 자의 위치’로. ‘사람들에게 욕을 얻어먹는 병신’에서 ‘사람을 욕하고 두들겨 패는 자의 위치’로. 그것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달콤한 길이었다. 금옥에서 일 년이 아니라 십 년, 백 년을 썩고 나온다 할지라도 결코 버릴 수 없는 최고의 유혹이었다. “또 들어왔수?” “흐흐! 또 보는구나. 이번엔 어디서 걸렸냐?” “재수가 없어서…… 계집 속살 맛에 흠뻑 빠졌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날이 밝았지 뭐유. 그러는 사람은 어쩌다 걸렸슈?” “제길! 재수 옴 붙어서 걸렸지 뭐. 나중에라도 무인들과는 상종을 하지 마.” “왜?” “그놈들, 여간 독종이 아냐. 아, 끝까지 쫓아오더라니까.” “무인을 털었수? 간도 크네.” “아, 무인은 마빡에다 무인이라고 써붙이고 다니냐? 계집처럼 양순한 놈이라서 잘 걸렸다 싶었지.” “키키! 정말 잘 걸렸네.” “신법만 익혔어도 잡히지 않는 건데. 짜식, 더럽게 빠르더라구.” “신법?” “도둑놈은 발이 생명인 것 몰라?” 일곱 번째 금옥에 들어가서 나눈 간단한 대화…… 그 대화가 마임호의 인생을 또 한 번 비틀었다. 마임호는 출옥(出獄) 즉시 신법의 명문가(名文家)를 찾았다. 섬서성(陝西省)에 있는 적가(赤家). 가주(家主)는 비천섬월(飛天閃月)이라는 자로 무공은 보잘것없어도 신법 하나만은 탁월한 자였다. 마임호는 그 동안 도둑질, 강도질을 해서 모아두었던 재산 중 일부를 털어서 비천섬월의 환심을 샀다. 사람들은 묘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희여멀건한 사람이라면 알게 모르게 경계심을 품고 대한다. 하나 마임호처럼 정상이 아닌 사람일 경우에는 자신도 모르게 경멸감을 품기 마련이고, 그것은 방심으로 통한다. 비천섬월을 주색(酒色)에 빠트리는 일은 너무 쉬웠다. 인간 됨됨이가 원래 그랬는지 예쁘장한 동녀(童女)를 붙여주자 하루가 멀다 하게 채근했다. 비천섬월이 기루에 가 있는 동안 마임호는 적가에 들어가 기회를 엿보았다. 지성이면 감천인가? 드디어 그토록 고대하던 기회가 찾아왔다. 비천섬월의 시녀가 홀로 잠들어 있는 모습을 발견했으니. “헉! 누, 누구……!” “이년아, 가만히 있어! 짹소리라도 내면 죽을 줄 알아.” “제, 제발 목숨만……” 일은 일사천리(一瀉千里)로 진행되었다. 시녀는 비천섬월의 전 재산이랄 수 있는 비천신법(飛天身法)을 필사(筆寫)해 주었다. 마임호는 정식으로 매파를 보내 시녀와 혼인했다. “허허허! 자네 여간 엉큼스러운 것 아냐. 언제 점찍었나?” “헤헤, 부끄럽습니다.” ‘염병할 새끼…… 지가 먼저 건드려놓고는……’ 시녀는 처녀가 아니었다. 그리고 관계가 깊어진 다음 스스로 가주와 동침했다고 털어놓았다. 은근히 털어놓게끔 유도는 했지만. 그래도 상관하지 않고 혼인하자는 말을 꺼냈을 때 감격하는 표정이라니. 마임호는 적가를 떠나지 않고 암암리에 비천신법을 연마했다. 싸움이라면 금옥에서 배운 것으로 충분했지만 난생처음 익혀보는 무공인지라 불안했던 탓이다. 간혹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비천섬월이 연마하는 모습을 몰래 훔쳐보면서 풀어갔다. 이윽고 비천신법을 능숙하게 펼칠 수 있다고 자신할 즈음에는 무공이 무엇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것이다. 무림이라는 신세계에. 아내가 목매달았다는 소문은 풍문으로 들었다. 비천섬월이 이를 갈면서 쫓아다닌다는 소문도 들었다. 개의치 않았다. 마임호는 좀더 높은 무공이 필요했고, 자신이라면 얻을 수 있다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아마도 비천섬월이 자신을 찾을 무렵에는 오히려 꽁지가 빠지게 도주하지 않으면 다행이리라. 적가에서 가까운 화산파(華山派)를 목표로 삼았다. 지나는 길에 비천신법을 시험해 본 결과 마임호에게 늘 따라다니던 ‘악질’이란 말 대신 대도(大盜)라는 말이 붙었다. 소리없이 나타났다가 아무 흔적 없이 사라지는 대도. 화산파의 무공은 어떨까? 중원을 쩌렁 울리는 무공이니만치 적가의 무공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으리라. 그리고 그것은 조만간 손아귀에 들어온다. 지나오면서 들렀던 많은 장원, 무림세가들처럼 그들도 어쩔 수 없을 테니까. 큰 오산이었다. 화산파에 침입하여 이십사수(二十四手) 매화검보(梅花劍譜)를 훔치는 데까지는 무난했으나 빠져 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상궁(上宮)을 빠져 나와 옥녀지(玉女池)에 이르렀을 때, 마임호는 어둠 속에서 그림자처럼 솟구치는 여섯 명의 젊은이를 보았다. ‘비천신법을 믿어야 돼. 선기(先機)를 놓치면 끝……’ 마임호는 비천신법을 펼쳤다. 전신(全身)을 방송(放)하고, 마음으로써 기(氣)를 행하며[이심행기(以心行氣)], 기로써 몸을 움직인다[이기운신(以氣運身)]. 한 번 움직일 때 전신도 따라 움직여야 하며, 한 번 안정할 때 육신과 마음은 고요한 바다처럼 가라앉아야 한다. 쉬익! 비호(飛虎)를 능가하는 몸놀림이었다. 하나 앞을 가로막은 젊은이들도 만만치 않았다. 아니, 그들에게는 마임호가 익히고 있는 비천신법 따위는 어린애 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육합검진(六合劍陣). 처음으로 하늘 밖에 하늘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뛰는 자 위에 나는 자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왜 무공은 끝이 없으며, 제일인자가 있을 수 없다는지도 알았다. 마임호는 눈 앞을 스쳐 가는 검기에 길을 가로막혔고, 두 번째 다가오는 검기에는 점혈(點穴)을 당했다. 놀라운 일이다. 검으로 사람을 베지 않고 혈도만 찍을 수 있다니…… 마임호는 화산파까지 찾아온 비천섬월에게 넘겨졌다.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고문(拷問)의 끝이 어딘지 알고 있냐고. 사람의 인성이 얼마나 악독해질 수 있으며, 사람이 얼마나 망가질 수 있는지 아느냐고. 보름 남짓에 불과했다. 극히 짧은 기간에 불과했는데…… 금옥에 갇혔을 때와 비교하면 턱도 없이 부족한 기간인데…… 마임호는 가마니에 실려서 나왔다. 다행히 목숨은 부지했지만, 글쎄 그게 다행일까? 비천섬월 같은 무인이 죽지도 않은 사람을 죽었다고 오인할 리는 만무하다. 그는 살려서 내보냈다. 마임호가 제대로 살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기에. 그리고 지금까지는 비천섬월이 생각한 대로 되었다. 천화신의라는 기연(奇緣)을 만나기 전까지는. 광량이란 사람? 그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를 만났을 당시에는 거의 모든 정신을 강 건너 저편에 두고 육신만 떠돌아 다녔으니까. “육합검진은 최고의 절진이 아니다.” 갈천상은 또 다른 말도 했다. “비천섬월은 삼류무인에 불과하지. 비천신법? 하하하!” 박우, 운단서…… 무극전에서 얼굴을 맞댄 여섯 명이 모두 광인이었다니. 모두 만만치 않은 사연을 지녔으리라. 그들은 어떤 사연을 지녔고, 어떤 고민을 할까? 분명한 것은 그들도 자신과 똑같은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 있다는 점이다. “제길!” 마임호는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 무공을 몰랐다면 모르겠거니와 맛을 들인 이상 그가 갈 길은 정해져 있다. 백문장을 나서면…… 아마 이름깨나 나 있는 무가로 찾아가리라. 잘하면 무공을 연마할 수 있을 것이고, 잘못하면 적가에서 당한 고문, 아니 그 이상을 겪게 되겠지. 마임호는 가랑이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양물(陽物)이 없다. 비천섬월이 갈지도 않은 녹슨 부엌칼로 잘라버렸으니 뿌리인들 온전할 리가 없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인가…… 세상에 어떤 인간도 믿지 않으려고 했지만…… 믿을 수밖에 없군.” 결국 그런 결정을 내렸다. 고민을 하기 전부터 내려진 결론이지만. ─`비천섬월 정도는 눈 아래로 깔아볼 수 있는 고수로 만들어주지. 백문장에 충성을 바친다면. ─`그래서 네가 얻는 것은 뭔데? ─`나? 있지. 한 인간의 목숨. 그리고…… 크크크! 내 말을 따르기로 작정했다면, 다음부터는 총관님이라고 불러. 너라는 말을 한 번만 더 하면 죽일 테니까. 깍듯이 받들란 말야. 그날, 마임호는 ‘총관님’이라는 말을 입에 담았다. 第六章 소생(甦生) 쫦 1 쫦 대체로 정월 초하루는 날씨가 많이 풀려 바람도 심하게 불지 않고 따뜻한 양지도 많은 법인데 이번 정월 초하루는 그렇지 않았다. 특히 날씨가 따뜻하여 눈을 거의 볼 수 없는 절강성임을 감안하면 올 겨울은 이변(異變)에 속한다고 할 수 있었다.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눈보라가 밤새도록 몰아쳤다. 세상은 하얀 백설로 가득했지만 하늘은 희뿌옇기만 했다. “제길! 이거 쓸어도 쓸어도 끝이 없으니.” “그렇다고 안 쓸 거야?” “누가 안 쓴데? 지랄맞게 추우니까 그렇지.” 관도(官道)에서 꺾어져 백문장으로 들어오는 길은 사오 리에 달한다. 몇백 년을 이어온 고목이 길가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길 폭도 넓어 평소에는 운치있는 길이다. 그것이 지금은 큰 골칫거리였다. 백여 명으로 불어난 백문장 하인들이 새벽이 밝아오기 전부터 쓸어대고 있는데도 눈은 계속 쌓여만 갔다. “길은 이제 그만 쓸고 들어가서 아침요기들을 하게. 손님이 들이닥치기 전에 한술 떠야 돼.” 방삼이 말을 마치자마자 하인들은 우르르 달려 들어갔다. 배가 고파서라기보다는 살을 에는 추위 때문에 견딜 수 없었다. 절강성 사람들은 추위에 익숙하지 못하다. 한겨울이라 할지라도 봄이나 다름없는 푸근한 날씨가 이어지는 관계로 겨울옷조차 제대로 구비하지 않은 집이 많았다. 백문장 사람들도 울며 겨자 먹기로 일을 하고 있지만 따뜻한 방 안이 그립기는 마찬가지였다.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날에 대문을 활짝 열어놓은 모습은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수문(守門) 무인이 따로 있을 리 없었다. 손님을 영접하기 위해 정문에 배치된 사람들도 절도있게 서 있기보다는 화톳불을 둘러싸고 언 몸을 녹이기에 바빴다. “마(魔)가 낀 것 아냐? 취임식날 날씨가 이러니.” “쉿! 이 사람아, 말조심해. 듣자 하니 갈 총관은 미친 인간이었다더라. 미친개에게 물리고 싶어?” “흐흐흐! 그러고 보면 출세하는 일도 그렇게 어려운 일만은 아냐. 그렇지? 내 여기 온 지는 며칠 되지 않았지만 눈치로 딱 때려잡아 보건데, 조 소저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 아냐? 그러니까 당연하지 뭘. 좌우지간 계집 하나만 딱 휘어잡으면 되는데.” 하인들은 누가 오는 것보다 농담 나누기에 바빴다. 다가닥, 다가닥……! 눈보라를 뚫고 다가오는 일단의 무리. 그들의 모습을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을 때에서야 하인들은 그들이 기다란 봉(棒) 하나씩을 소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일음마봉이다. 안내해라.” 젊고 낭랑한, 그러나 어쩐지 도도해 보이는 음성이었다. 화톳불에 모여 있던 하인들 중 한 명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그대로 안으로 쭉 들어가시오. 정문 오른쪽에 마방이 있으니 말은 거기 매어놓고, 마방에서 가장 가까운 건물로 들어가면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거요.” 일단의 무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처음 말을 꺼낸 젊은이가 목봉을 들어 말을 한 하인을 가리켰다. “너!” “왜 그러쇼?” “너, 이리 와.” 그때서야 하인들은 오금을 저렸다. 젊은이가 내뱉는 싸늘한 말투에서 심상치 않은 예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사람이 아닐 테니까. 이들은 이제야 자신들이 무인을 상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사실 백문장의 하인으로 뽑힐 때는 긴장했지만 며칠 일하다 보니 일반 장원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지 않는가. 백문장 같은 장원에서는 긴장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이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왜, 왜 그러시는지……” 하인은 쭈뼛거리며 다가섰다. 날씨가 워낙 추운 탓에 불 곁에서 떨어지기 싫어 그랬을 뿐이지 일부러 건방지게 굴지는 않았다. 그럴 배포도 없고. “내가 누구라고 했지?” 젊은이의 음성은 매서운 바람보다도 더욱 차가웠다. “일음마봉님……” “너는?” “예?” “너는 누구냐?” “저, 정구(鄭九)라고……” “무공이 출중한가 보지? 감히 턱 끝으로 말하는 것을 보면.” “저…… 그, 그게 아니라……” 쉬익! 정구라는 하인이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무언가가 번개처럼 날아들었다. 무공을 전혀 모르는 정구로서는 날아드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았다 해도 항거하지 못했으리라. 따악! “으악!” 이마에서 별똥이 일었다 싶은 순간, 붉은 안개가 눈 앞을 가렸다. 이마가 깨지면서 흘러나온 피. 하나 정구는 머리가 깨졌다는 사실조차 느낄 수 없었다. 비명을 질렀는가? 그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정구는 피범벅이 된 머리를 부둥켜안고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연신 신음을 토해 냈지만 그 소리는 점차 낮게 잦아들었다. “건방진 자식! 감히 뒈지려고 턱 끝으로 말을 해? 가자. 조 소저의 거처라면 이놈보다 내가 더 잘 알지. 하하하!” 백문장을 찾아온 첫 손님이었다. 일음마봉 무기 일행이 굽이를 돌아 연화각 쪽으로 사라지자마자 무기가 섰던 자리에 난쟁이가 나타났다. 표홀한 신법이었다. 도둑괭이처럼 가볍고 날랜 몸놀림이라고 할까. “목숨에는 지장없다. 빨리 데려가 치료해 주고, 앞으로는 누가 나타나더라도 앞을 가로막지 마라. 목숨이 두세 개라면 몰라도.” 난쟁이 마임호가 하인들에게 지시했다. 그는 급히 지혈부터 시키며, 겁먹은 표정으로 슬금슬금 몰려든 하인들을 한심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이들을 나무랄 필요는 없다. 방삼은 자신의 잣대에 따라 일 잘하는 하인들을 구해 왔다. 날씨만 이토록 춥지 않았다면 맡은 일을 충실히 했을 터였다. ‘으음……! 예상보다 빨리 왔어.’ 마임호는 갈천상이 해준 말을 떠올렸다. ─`백문장은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잡았다. 금화부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백문장부터 손에 거머쥐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지. 백문장이 과연 몰락한 채로 방치되어 있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백문장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사대 패강의 감시하에 놓여 있다고 봐야 해. 탁자 하나를 옮겨놓아도 촌각(寸刻)이 되지 않아 알려질 만큼 삼엄한 감시하에. 광량의 선택은 탁월했다. 절곡의 존재 자체가 허(虛)를 찌른 셈이지만, 그곳에 광인들을 은거시킨 행동도 좋았다. 치료도 비밀리에 받았다. 절곡에서 암굴을 통해 백문장 후원으로 들어왔고, 후원에서 무극전까지 가는 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무극전에 들어서서는 지하 연공실로 들어갔고, 거기서 정신병이 완치될`─`아직도 완전하지는 않지만`─`때까지 기거했다. 이치대로라면 절곡 광인들의 존재는 완벽한 보안하에 가려져 있어야 한다. ‘곧 알게 되겠지.’ 마임호는 눈보라를 뚫고 나타나는 일단의 무리를 보자마자 유일하게 알고 있는 무공, 비천신법을 펼쳐 신형을 감췄다. 일음마봉과 그가 데려온 십삼봉은 연화각을 제 집처럼 점거했다. 천력문에서 달려온 거산파장과 십이력은 천화신의의 거처인 취운각을 차지했으며, 철응방의 비조탈명과 사귀는 장주의 집무실인 무극전을 접수했다. “장주의 집무실을 사용하겠다는 것은 무림인의 예의가 아니오.” “호오! 연화각은 건곤방에 주고, 취운각은 천력문에 준 줄 알고 있는데…… 그럼 우리 철응방에는 어떤 전각을 내줄 심산이지? 설마 냄새나는 객방(客房)에서 쪼그려 앉아 있으란 말은 아니겠지?” “전각은 많이 있소이다만.” “아니지. 사람이 살고 있던 전각을 내주는 것하고 훈기가 끊겨 냉골이 뼛속까지 시려오는 전각하고는 차원이 다르지. 우선 먼저 들어볼까? 어떤 전각을 내준다고 하는지? 섭섭한 마음이 안 들었으면 좋겠군. 그래야 서로 편할 것 아닌가?” “휴우! 쓰시지요.” “응?” “무극전을 쓰시라고 했소이다.” “아! 그 말이군. 그래야지. 사람 훈기가 끊긴 전각이긴 하지만 아쉬운 대로 쓰지.” 비조탈명의 성명 병기는 계집애처럼 가느다랗고 곱상한 열 손가락이다. 하나 검도 제대로 들지 못할 것 같은 연약한 손가락이 성질을 내기 시작하면 강철도 두부처럼 으깨버린다는 소문이 있다. 그 손가락이 신필 박우의 이마를 노렸다. 아마도 잠시만 말을 늦게 했다면 머리뼈가 으스러지는 참변을 당했으리라. 이들은 사람을 정말 죽인다. 장주의 취임식에 참석한 인사들이니만치 차려야 할 예의가 있으련만 이들에게서는 그런 점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마치 네까짓 것들이 무슨 수작을 벌이는지 보자는 심산처럼 보인다. 아니, 노골적으로 그렇게 행동한다. 주객전도(主客顚倒). 지금이 그렇다. 백문장을 방문한 자들이 주인 행세를 하고 백문장 식솔들은 그들의 수발이나 드는 하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거기에는 예외가 없다. 백문장의 금지옥엽(金枝玉葉)인 조자경도, 장주로 취임하게 될 천화신의도…… 모두 무시당하고 있다. 쾅! 조자경은 부서질 듯이 문을 닫아버리고 밖으로 나왔다. 찬바람이 뼛골을 얼려버릴 듯이 달려든다. 그러나 마음 속처럼 차갑고 황량하지는 않았다. ‘일음마봉! 네가 감히……!’ 입술을 짓깨물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적에는 백문장 쪽을 향해 똑바로 서지도 못하던 위인이지 않은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어렸을 적 일이지만 한시도 뇌리에서 지우지 않고 있는 광경 중에 하나가 바로 그때의 광경이다. 봄볕이 참으로 따스했다. 아지랑이가 하늘하늘 피어오르고, 푸릇푸릇한 풀들이며 봄나물들이 들판을 아름답게 물들였다. 조자경은 마음껏 뛰어놀았다. 오랫동안 연공실에만 틀어박혀 힘에 겨운 검을 휘두르다가 따스한 날, 마음이 활짝 열릴 것 같은 들판에 서자 어떻게 무엇부터 하며 놀아야 할지…… 어떤 것도 그 순간의 기쁨을 만끽하기에는 부족할 것 같았다. 그래서 마음내키는 대로 뛰어다니기만 했다. 어머니는 봄나물을 뜯어 국을 만드셨고, 아버지는 들판에 누워 망중한(忙中閑)을 즐기셨다. 지난 겨울에도 아버지는 바쁘셨다. 백학검법을 절정으로 익힌 고수가 아버지밖에 없다는 사실은 늘 아버지를 쫓기게 만들었다. “열 명은 되어야 해. 백문십검(白門十劍)이 탄생할 때까지는 한시도 쉴 짬이 없어. 백문장은 사상누각(沙上樓閣)이야. 내일이라도 내가 어떻게 되면……” 왜 그토록 백학검법을 익히지 못하는 것일까?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도 전반부를 거의 익혀가고 있는데 다 큰 어른들이…… 지금은 더욱 이해할 수 없다. 중반부와 후반부가 사라져 어떤 내용인지조차 모르니. 아버지는 연무장에서 사시다시피 했고, 문인들은 피곤해 하면서도 아버지의 수련방침을 잘 따라주었다. 자신들이 강해지는 길이기에. 하루 단 두 시진만 수면을 청하면서 일로 매진하시던 아버지가 오랜만에 망중한을 즐기게 된 것도 광량 총관 덕분이었다. “봄입니다. 하루쯤 나들이를……” “그럴 시간이……” “문도들도 쉴 틈을 주어야지요. 무조건 채찍만 든다고 말이 빨리 달리지는 않습니다.” 조자경의 기억으로는 처음이었다. 일가족이 나란히 들판에 앉아 봄볕을 즐기는 것이. 불행히도 고요한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봄나물로 만든 국이 구수한 냄새를 풍길 즈음, 술에 잔뜩 취한 젊은이가 비틀거리며 나타났다. “허허! 대낮부터 술이 과했구먼.” 젊은이는 아버지의 좋은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의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다소곳이 앉아 국을 끓이고 있는 어머니만 뚫어지게 응시했다. “끄응……!” 병을 앓는 소리와 같은…… 묘한 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나오고…… 젊은이의 눈은 광기로 번들거렸다. 술에 취해서 벌게진 눈이 더욱 빨갛게 충혈되어 갔다. 위기였다. 어린 나이였지만 조자경도 분명히 느낄 수 있는, 여자들만 느낄 수 있는 본능적인 위기였다. 젊은이는 아버지가 옆에 있다는 사실을 무시해 버리고 어머니에게 다가섰다. “예뻐.” 첫마디였다. “금화부에…… 이런 미인이 있다니. 나이 차는 나지만, 너를 가져야겠어.” 어머니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빙그레 웃으셨다. 그 모습이 승낙으로 보였나? 아니면 너무 고혹적인 자태라 이성을 망각했나. 젊은이는 다짜고짜 어머니의 어깨를 감싸안아 갔다. 순간, 쉬익! 아버지의 손이 허공을 가로젓는다 싶었는데, 젊은이의 몸뚱이는 허공을 날고 있었다. 젊은이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허공에서 빙그레 몸을 뒤틀더니 추한 꼴을 보이지 않고 두 발로 내려섰다. 어디서 났는지 손에는 키보다 훨씬 큰 봉을 쥐고서. 마치 마술 같았다. 그는 분명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맨손으로 술에 취해서 휘적휘적 걸어왔다. 그런데 허공을 나는 동안 키보다 훨씬 큰 철봉(鐵棒)이 생긴 것이다. “만취한 상태에서도 정확히 투로(套路)를 밟는군. 쓸 만한 재목이야. 개망나니 같은 성격만 뜯어고친다면 괜찮겠어.” 아버지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 정작 놀란 사람은 젊은이다. 그는 그제야 아버지라는 사람을 의식한 것 같다. “누, 누구냐!” 목소리는 술에 절었지만 발음만은 맑은 정신을 찾아가고 있었다. “아녀자를 희롱했으니 사과부터 해야지?” “네놈부터 죽이고 나서.” “허허! 나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은가, 일음마봉?” “나, 나를 알고 있어?” “아직 멀었네. 나는 자네를 알고 있는데 자네는 나를 모르고 있지 않는가? 나는 자네의 심장에 검을 틀어박았는데 그것도 모르고.” “쓰, 쓸데없는…… 언제 검을……” “보게. 지금도 틀어박고 있지 않는가?” 젊은이의 얼굴이 시뻘겋게 상기되었다. 아마도 놀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허허허! 아무래도 쓴맛을 보아야 정신을 차릴 모양이군. 반혼봉(返魂棒)을 생각해서 훈계만 하고 보내려 했건만.” “아, 아버님을 어, 어떻게……?” “안광(眼光)이 곧 살광(殺光)이며, 살광이 곧 검광(劍光)이니.” “백문장주 조항!” 젊은이는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싸움이 되지 않는다. 조자경이 보기에도 그랬다. 아버지가 거대한 태산이라면 일음마봉 무기는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하는 작은 나무일 뿐이다. “죄, 죄송…… 죄송합니다.” 무인이라면 죽을지언정 사과를 하지 않는다는 오기도 없는 것일까? “앞으로 금화부에는 발길을 들여놓지 말게.” “예, 예.” “이 길로 곧장 금화부를 떠나게. 어느 한 사람도 건드리지 말고.” “……아, 알겠……” 일음마봉은 누구 한 사람도 건드릴 용기가 없었다. 사지(死地)에 들어선 것은 용기이거나 만용이었으되, 적의 수장인 백문장주를 만난 것은 마음의 뿌리까지 뽑히고도 남을 충격이었다. 아마 목숨을 잃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싶었을 게다. 조자경이 그때의 광경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일음마봉이 마술처럼 꺼내는 철봉도 신기했지만, 아버지의 위용이 너무 거대했기 때문이다. 그토록 커다란 아버지는 없었다. ‘갈천상, 이 인간은 도대체 어디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조자경의 원망은 자연스럽게 갈천상에게로 향했다. 손님이 아녀자의 침상(寢牀)을 빼앗았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하물며 여자손님도 아닌 일음마봉이. 그는 자신의 머리칼 내음이 밴 베개를 벨 것이고, 체취가 밴 이불을 덮고 자리라. 그런데도 갈천상으로부터는 아무런 연락이 없다. 도대체 이 인간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조자경은 그가 거처하는 무극전으로 부지런히 걸었다. 하나 중간에서 취운각을 빼앗기고 쫓겨나오는 어머니와 시녀들을 보게 되자 기가 막혀 할말을 잃어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신필 박우마저 철응방이 무극전을 차지했다고 말하지 않는가. “갈…… 총관은 어디 있죠?” 조자경은 힘없이 물었다. 더 이상은 물을 힘도, 걸을 힘도 없었다. 쫦 2 쫦 “모두 몇 명이나 왔지?” “사대 패강에서 서른두 명, 천룡사에서 한 명, 보타문에서 한 명……” “예의만 차렸군.” “천룡사와 보타문은 원래 그런 곳이니까. 고가촌에서 네 명이 왔고, 형주 한가에서는 두 명.” “딱 마흔 명이군.” “잡다한 사람들까지 합하면 삼백열일곱 명이야.” “그 중 무인은?” “백팔십구 명.” 대도 마임호는 특이한 재능이 있다. 천부적인 기억력이다. 그는 한 번 본 사람의 얼굴이나 특이한 습관 같은 것은 좀처럼 잊어버리지 않는다. 또한 어떤 사실을 머리 속에 기억해 두고자 작심하면 몸에 검흔(劍痕)을 새겨놓은 듯 생생히 기억된다. 그런 기억력이 비천신법이라는 절기를 익히게 했고, 광인으로 몰아가기도 했지만. “취임식 준비는?” “완벽해.” 이번에는 약초상이었던 홍문성이 대답했다. 그는 천화신의에게 치료를 받고 난 다음부터 늘 잔잔한 웃음을 입가에 달고 사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러나 눈은 웃지 않는다. 아무리 재미난 이야기를 해줘도 눈만은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 있다. 그가 무엇 때문에 세상에 정을 주지 않는지는 모르지만 절곡에 있던 사람들치고 홍문성만한 사연이 없는 사람들이 없기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좋아. 그럼 정오까지 기다리면 되겠군.” 갈천상은 태연했다. “추운데 불 좀 피우지.” 점쟁이 전인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던 하인 중 건장한 젊은이 한 명이 일어서더니 마른 장작을 가져 왔다. 그는 이번에 새로 들어온 하인이다. 정문에서 무인들을 맞이하던 정구가 일음마봉에게 당한 뒤 접객을 맡은 하인들 사이에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많은 사람이 도주를 했고…… 그는 도망가지 않은 스무 명 남짓한 하인들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젊은 하인은 마른 장작으로 꺼져 가는 불길을 활활 되살려놨다. 백문장 식솔은 앉을 자리조차 찾지 못해 부엌으로들 몰려들었다. 하나 부엌에서는 음식을 만들고 있지 않는가. 기름 냄새, 매캐한 연기…… 삼백여 명에 달하던 무인들의 식사를 제공하던 곳이라 백문장 식솔이 앉을 자리를 마련하기는 어렵지 않았지만 문을 꼭꼭 닫아놓을 수는 없었다. 반쯤 열어놓은 문틈으로 매서운 칼바람이 들이쳤다. 여기저기 듬성듬성 앉아 있던 사람들은 부엌 한가운데에 피워놓은 화톳불로 모여들었다. “휴우!” 조자경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든든한 방수를 얻어 백문장을 개문(開門)했어도 사대 패강은 오늘과 같은 수모를 안겨주었으리라. 과연 그들과 맞서싸울 방수가 어디 있을까. 어쩌면 오늘 당한 수모는 무림에 다시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정해진 결과였는지 모른다. 약간은 생각했다. 조롱과 멸시를 받을 각오도 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이게 뭔가? 손님들은 전각을 끼고 앉아 있는데, 오늘의 주인공들은 의복 하나 갈아입을 데가 없는 부엌 한구석에서 기름 냄새나 맡고 있으니. 홍첩을 보낸 것부터 잘못이다. 그런 것은 힘을 비축하고 난 다음에나 저지를 일이다. 아무리 광인이라지만 이렇듯 무모하게 일을 벌일 줄이야. 무엇보다 갈천상에게 실망한 점은 절곡에서 보았던 토우와 같은 절기(絶技)가 펼쳐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조자경의 생각으로는 무공을 모르는 사람일망정 근골(筋骨)이 뛰어난 사람부터 고를 줄 알았다. 그런 다음 급하나마 몇 가지 무공을 가르쳐 준 다음 서른여섯 개의 토우처럼 서른여섯 명이 펼치는 절진을 형성할 줄 알았다. 그랬다면 이토록 속수무책으로 모욕을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들이 사대 패강 무인들을 상대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사대 패강은 고사하고 이제 갓 검을 잡은 무인조차 상대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가. ‘아! 이런 것이 있어서 백문장을 개문하는구나’ 하는 인식만이라도 심어줄 수 있지 않는가 말이다. 그런데 이건 도대체……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손님을 맞이하는 태도이다.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건 간에 이쪽에서는 마치 바보라도 된 양 온갖 정성을 다하고 있다. 다도로 일가를 이룬 운단서와 방삼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면 더욱 속에서 불길이 솟는다. “중원 대륙에는 차(茶)를 끓이는 데 아주 좋은 물이 열아홉 군데 있다. 절강성은 불행하게도 단 한 군데밖에 없지. 천태산(天台山) 서남쪽 봉우리에 있는 천길 폭포수. 열아홉 군데의 물 중에서 열일곱 번째로 친다. 그 물이라도 길어오면 한결 맛이 날 텐데.” “그럼 천태산까지 갔다 와야 한단 말이오? 물 길으러?”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이지. 눈을 녹여서 쓰게.” “눈을 녹여요?” “눈물[雪水]은 차를 끓이는 데 스무 번째로 좋은 물이라네.” 이게 말이 되는가. 무뢰배나 다름없는 인간들에게 무슨 물로 차를 끓여주라고? 운단서는 차뿐이 아니라 손님들이 먹을 음식도 갖은 정성을 다하게 했다. “음식이란 먹어서 즐거워야 되는 거지. 보는 맛, 맡는 향기, 입 안에 감도는 감촉이 모두 즐거워야 돼.” 갓서른이 넘은 나이에 다정(茶丁)이라 불릴 만큼 다도에 능한 운단서이니 사람을 대하는 예법 또한 남다를 터이다. 하나 지금은 그럴 계제가 아니지 않은가. 아무리 제정신을 잃었다가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지만 지금 하는 행태는 무엇이란 말인가. “육질이 뻣뻣하지 않은가? 갓잡은 송아지 고기를 구해 왔어야지.” 쇠고기를 보면서 한 말이다. “이것 봐. 털이 꺼칠하잖아. 좋은 것은 죽었을망정 털이 낭창낭창 휘어지는 법이야.” 돼지고기 껍질에 붙은 잔털을 두고 한 말이다. 이건 도저히 옆에서 들을 수 없다. 자신들이 누구 덕에 제정신을 찾았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는단 말인가. 백문장 식솔들이 거처를 빼앗기고 주방에 몰려든 것이 보이지도 않는단 말인가. 그러나 봉아, 취아가 그런 이유로 씨근덕거리고 있을 때 조자경은 마지막 희망에 매달렸다. 그녀는 몇 사람을 유심히 관찰했다. 마른 장작을 가져 와 불을 피운 사내. 나이도 젊고 체격도 건장한 사람이 왜 하인 노릇을 할까. 하인 노릇을 하기에는 이목구비도 반듯하지 않은가. 이상한 사람들은 또 있다. 운단서의 꼬장꼬장한 잔소리를 귓전으로 흘리며 부지런히 칼질을 하고 있는 여인. 너무 젊고 예쁘다. 그것뿐이라면 특별히 관심을 기울일 것도 없지만, 무를 베고 있을망정 칼 솜씨가 예사롭게 보아넘길 수 없을 만큼 정교하다. 빠르기는 보통이지만 칼 끝이 살아서 움직인다. 부엌칼을 버리고 장검을 움켜쥔다면 어떨까? 가히 한몫을 할 만하지 않은가. 텁석부리 장한도 눈에 들어온다. 보기 좋게 기른 구레나룻을 보면 여간 깔끔한 성격이 아닌 듯한데 용모에 어울리지 않게 허름한 의복을 입고 있다. 하기야 허드렛일을 하면서 좋은 의복을 입을 필요는 없겠지만. 그는 몸이 좋다. 마치 무예를 익힌 듯 바늘도 들어가지 않을 만큼 단단해 보인다. 이 사람들은 모두 갈천상이 하인과 하녀를 백 명이나 뽑으라고 지시한 다음에 들어온 사람들이다. 그리고 정구가 죽은 다음에도 동요하지 않고 맡은 일을 묵묵히 해내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속에 포함된다. 백문장 하인들은 아버지가 생존해 계셨을 적부터 몸을 담고 있었으니 무림이란 곳, 무림인들의 성격이 어떻다는 것쯤은 짐작하고 있다. 그들은 반은 무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무공은 모르지만 마음가짐은 어떤 무인에도 뒤지지 않는다. 하나 새로 들어온 하인들은 그렇지 못하다. 그들은 무림이 어떻다는 것을 모른다. 세상풍파를 겪은 사람들이니 무림인에 대해서 모르지야 않겠지만, 그것이 자신의 생명과 직결될 때에는 행동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대부분은 그랬다. 정구가 죽은 직후 몸을 빼 도주한 자도 있었고, 조금 양심있는 자들은 눈치를 봐가면서 도주했다. 도주하지 않은 자들은 스무 명 남짓. 그들 중 조자경이 관심을 둔 사람은 서너 명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는 모두 비루먹은 망아지처럼 볼품이 없어, 맡은 일도 청소 같은 하잘것없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괜한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인가. 이백여 명 가까이 몰려든 무인들. 그들 중 사십여 명은 좋은 마음으로 온 것이 아니다. 백문장을 개문하겠다는 홍첩이 사대 패강으로 하여금 금화부의 노른자위인 적성현에 발을 들여놓는 계기를 만들어준 것이다. 그러잖아도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는 늑대들에게 떳떳한 명분을 준 격이니. ‘방비를 해야 되는데……’ ─`혹여 예기치 못한 불상사가 벌어진다면 몸을 빼내거라. 살아 있어야 후일도 기약할 수 있는 거란다. 불길함을 느꼈다면 예기치 못한 불상사라고도 할 수 없다. 예견된 불행을 막지 못한 것뿐이다. 어머니의 예감대로 사대 패강은 백문장을 조롱하고 멸시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아예 집어삼키려고 들리라. 어떤 수를 준비했는지는 추측도 할 수 없지만. “휴우!” 조자경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역시 일개 하인, 하녀에 불과한 사람들을 갈천상이 데려온 조력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다. 설혹 그렇다 할지라도 몇 사람 되지 않는 인원으로는 어떤 대항도 할 수 없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어머니가 손을 꼭 잡아주었다.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 “이건 뭐죠?” 조자경은 갑작스럽게 떠안겨진 보퉁이를 받아들며 물었다. “옷.” 갈천상이 짤막하게 말했다. “옷요?” “형식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백문장 문인들은 두 가지 옷만 입는다. 백의(白衣)와 갈의(葛衣). 백의는 의식을 치를 때 입고, 베옷은 싸움을 할 때 입는다.” “왜요?” “망자(亡者)에게는 베옷이 어울리니까.” 갈천상은 나지막하지만 뱃속에서 우러나오는 듯 힘이 들어 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주정중독증이 치유되면서 소름 끼치는 웃음 소리를 흘리지 않았다. 광적으로`─`광인에게 광(狂)적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은 모순된 면이 있지만`─`사람을 멸시하는 말투나 행동도 사라졌다. 자조(自嘲)라고나 할까, 자괴(自愧)라고 할까. 처절하게 인생을 비웃고 사는 듯한 모습도 씻은듯이 사라졌다. 대신 중후하고 깊은 맛이 곁들여졌다. 그에게서는 농담조차도 함부로 던질 수 없을 만큼 묵직한 기도(氣度)가 풍겨나왔다. 무공을 익혔느냐 하는 면에서는 아직도 회의적이다. 무인에게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경계심이 전혀 보이지 않으니까. “비단옷이군요.” 조자경이 보퉁이를 풀어헤치자 백설처럼 하얀 비단무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자경이 관심있게 본 부분은 가슴 부위에 새겨진 문양(紋樣)이다. 자그마한 화로(火爐)가 검은색으로 새겨져 있고, 화로에서는 횃불을 형상화시켜 놓은 듯한 불길 다섯 가닥이 피어오르고 있다. 숫자도 흥미롭다. 화로 한가운데 비단무복 바탕이 깨끗하게 드러나 있다. 일(一)이라는 숫자로. 비단무복에 화로를 수놓으면서 ‘일’이라는 글자 부분은 바늘 한 가닥 집어넣지 않았으니 대단한 수예(手藝) 솜씨다. 갈천상은 이런 옷을 언제 준비했단 말인가. 아무리 갈천상이 총관이라고는 하지만 옷을 준비하는 일 정도는 방삼이 처리할 일이거늘, 방삼에게서는 한 마디도 언질을 받지 못했다. 방삼뿐만이 아니라 그 누구에게서도. 갈천상이 직접 준비했다는 결론이다. “오늘은 장주의 취임식이니 주인공은 당연히 백의를 입어야겠지.” “그럼 갈의를 입는 사람도 있나요?” “두고 보면 알 일……” 갈천상은 말끝을 흐렸다. “이 옷은 어디서 준비했죠? 적성현에도 뛰어난 침모(針母)가 많지만 이만한 바느질 솜씨라면……” “옷은 동보점(東寶店)에서, 수는 내가 놓았다.” “네에?” “입고 나와.” 조자경은 등을 돌려 나가는 갈천상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갈천상이 직접 수를 놓았단다. 섬세한 손길을 가진 여인도 이토록 깨끗한 바느질을 하기는 힘든 노릇인데 사내가 직접 바느질을 하다니. “풋!” 조자경은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문득 호롱불을 벗삼아 바느질을 하고 있는 갈천상을 생각하자 웃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쫦 3 쫦 백의를 입은 사람은 모두 스무 명이었다. 백문장 옛 식솔들은 모두 백의를 입었다. 천화신의와 조자경을 비롯하여 시녀, 찬모, 하인 모두 비단으로 지은 순백의 무복을 입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가슴에 새겨진 문양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활활 타오르는 불꽃 문양은 똑같으나 검은 화로 한가운데에 적힌 숫자가 각기 달랐다. 여인 중에는 조자경이 제일 빠른 일(一) 자(字)를 가졌고, 봉아와 소화(小花)가 육(六), 취아가 팔(八), 소국(小菊)이 구(九) 자(字)를 가졌다. 어머니이자 백문장 장주인 천화신의는 아무런 숫자도 가지지 않았다. 그저 화로 문양이 있을 뿐이다. 찬모 두 명도 아무런 숫자가 음각되지 않은 화로 문양이다. 무슨 기준으로 숫자를 새겨놓은 것일까? 천화신의는 장주이니 제외한다 치고, 나머지는…… 무공을 익힌 사람만 숫자를 새겨놓은 것인가? 꼭 그렇지만도 않다. 하인들 여덟 명은 모두 무공을 익히지 않았건만 그들 가슴에도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다. 숫자는 각기 다르다. 또 어떤 사람은 숫자가 새겨져 있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찬모들처럼 아무 숫자도 적혀 있지 않는 문양만 새겨져 있다. 여기에 절곡에서 나온 인물들 중 네 명이 백의를 입었다. 갈천상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신필 박우가 외총관(外總管)을 맡게 되고 운단서는 내총관(內總管)을 맡았다. 그게 운단서가 주방에서 찻물을 가지고 꼬장꼬장하게 잔소리를 늘어놓아도 싫은 인상조차 쓸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들이 백의를 입고 산뜻한 모습으로 나섰다. 복자(卜者) 전인수도 백의를 입었고, 악공이었던 오경도 백의를 입었다. 그들 모습은 너무 보기 좋아서 한 달 전만 해도 미쳐서 광란을 벌인 사람들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숫자? 광인들은 숫자가 없다. 대신 박우의 옷에는 동그라미가, 운단서의 옷에는 금강석(金剛石`:`다이아몬드) 형태가 음각되어 있다. 그리고 보니 하인들이나 시녀들의 가슴에 새겨진 문양도 두 종류다. 동그라미와 금강석 문양. 이것은 무슨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모두들 값비싼 비단 옷을 걸치고 있는지라 모양은 좋아 보였지만 문양 형태가 각기 달라 산만해 보이기도 했다. 절곡에서 나온 사람들 중 백의를 입지 않은 사람은 갈천상과 대도 마임호, 약초상 홍문성이었지만 그들은 이 자리에 없었다. 대도 마임호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수문장(守門將) 역할을 수행하느라 정문을 지켰고, 홍문성은 갈천상으로부터 무엇인가 귓속말을 듣더니 온다 간다 말 한 마디 없이 슬그머니 사라졌다. 새로 들어온 하인들과 갈천상만이 백의를 입지 않았다.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야 미처 준비할 틈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갈천상은 무엇 때문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백의를 입지 않는가.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신체가 건장해서 보기 좋을 텐데. 백의는 고사하고 절곡에서부터 입고 있던 넝마를 걸치고 있는 것은 무슨 심보인가. 그래도 백문장의 모든 대소사를 주관하는 총관이면서. “무림 동도 여러분! 날씨도 궂은데 불원천리 먼 길을 달려와 주셔서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송구스럽기만 합니다.” 박우가 조용하면서도 힘있게 말하는 한마디 한마디에 그의 높은 학문이 절로 우러나왔다. 정월 초하루. 백문장 개문식은 박우가 입을 열면서 시작되었다. 무극전은 시끌벅적했다. 너무 소란스러워서 취임식을 진행하는 박우의 음성이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박우가 처음 일성(一聲)을 내뱉을 때만 해도 그런대로 조용했다. 하나 그 다음 말이 이어지는 순간부터 여기저기서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고, 취임식이 진행 중인데도 불구하고 음식을 먹는 사람, 옆 사람과 이야기하는 사람, 무극전을 돌아다니는 사람들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제 와서 무슨 취임식이야?” “무림이 그리운가? 목숨이 아까운 줄 알면 죽었습네 하고 가만있을 일이지.” “그건 그렇고…… 소문은 익히 들어왔지만, 여기 계집들이 왜 이렇게 예뻐. 특히 저기 저 계집이 예쁘단 말야. 절강제일미라는 조자경인가? 불두덩이 근질거리게 만드는구먼.” “자네야말로 목숨이 아까우면 눈요기로 만족해. 괜히 찝쩍거렸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목숨 날아가지 말고. 얼굴 하나로 사지육신을 노곤하게 만드는 계집이니 사대 패강 젊은것들이 가만있을 리 있어?” “제길! 그럼 나는 꿩 대신 닭이라고 조자경 대신 하문화나 어떻게 해봐? 나이는 들었지만 꽤나 미인이잖아? 사내 맛을 못 본 지도 꽤 오래됐으니 아랫도리가 근질거릴 테고. 고거…… 톡 건드리면 넘어올 텐데.” 모욕이었다. 모욕도 이런 모욕이 또 있을까 싶었다. 그래도 언성조차 높이지 못했다. 백문장 식솔들은 갈천상의 지시대로 흔하디흔한 단검 한 자루 소지하지 않은 상태였다. 설령 천하명검을 소지했다 할지라도 어쩔 수 없었겠지만. 고기는 노는 물에 따라서 크기가 다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조그만 봉놋방에서 뒹굴던 자와 중원 무림을 질타하는 자는 그릇의 크기가 다른 법이다. 함부로 입방아를 찧고 있는 뭇 군웅들과 남의 집에 들어와 함부로 침상을 점거해 버린 사대 패강 무인들 모두 한결같이 잡놈들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그릇의 크기가 달랐다. 취임식을 진행하는 동안 사대 패강 무인들은 예의를 지켰다. 경하(敬賀)는 바라지도 않는다. 침묵하면서 구경이나 해주는 것. 백문장 식솔들은 그 정도로도 최대한 만족했고, 절강무인들이 지킬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였다. “입대(入臺)!” 박우가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평생을 학문과 벗해 온 사람답게 음성에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고고함마저 깃들여 있었다. 하나 그 음성은 군웅들의 잡담 소리에 묻혀 멀리까지 퍼져 나가지 못했다. 천화신의 하문화가 고운 자태를 유지하며 일어서서 무극전 정중앙에 마련된 대(臺)로 올라갔다. 광동 하가가 몰락할 당시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조자경의 기억 속에 들어 있는 어머니는 늘 조용하고 고귀했다. 의술을 익힌 것도, 멸문한 광동 하가의 유일한 후손이란 사실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어머니가 무공을 익히는 광경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버님 것이었던 백문장 장주직을 이어받는 순간에도 어머니는 흔들림이 없었다. 뭇 군웅들의 야유도 귓전으로 흘려버리고 강가를 산책하는 듯이 하늘거리는 걸음으로 걸었다. “봉향(奉香)!” 박우가 다음 순서를 소리쳤다. 무극전 가장 안쪽에는 각기 사람 몸뚱이만한 크기로 ‘무극(無極)’이란 글자가 쓰여 있었다. 지금은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백문장주의 위패(位牌)가 초라하게 놓여져 있다. 얼기설기 엮어놓은 탁자에 위패를 올려놓은 형상이니. 무극전을 차지하고 있던 철응방의 비조탈명과 사귀가 재수가 없다는 이유로 한낮이 되어서야 위패를 들이게 한 까닭이다. 제대로 옮겨놓을 시간도 없었지만, 비조탈명은 위패 하나만 들여놓게 했다. 아무래도 께름칙했던 모양이다. 하문화는 망부(亡夫)이자 전임 백문장주의 신위(神位)에 반례(半禮)를 표한 후 향불을 살랐다. 그런 다음 큰절을 세 번 올렸다. 망부에 대한 예(禮)가 아니다. 현임 장주의 신분으로 전임 장주에게 올리는 예다. “성의(聖衣)!” 이번에는 소화와 소국이 나설 차례다. 그녀들은 평소부터 하문화의 시중을 들었으니만치 맡은 일을 하기에는 더없이 적합했다. 소국이 범상치 않아 보이는 금색 요대(腰帶)를 받쳐 들고 대 위로 올라가 천화신의의 허리에 둘러주었다. 소화는 곱게 접힌 갈색 장삼(長衫)을 들고 올라섰다. 전임 장주가 입던 장삼이다. 하문화에게는 결코 낯설지 않은 옷이리라. 아침마다 그녀가 직접 챙겨주었을 옷이지 않은가. 하문화는 소화가 입혀주는 대로 백의 무복 위에 갈색장삼을 걸쳐입었다. “접(接)! 신검(神劍)!” 이번에는 복자 전인수가 나섰다. 전인수의 풍모는 절곡에서 나온 광인들 중 가장 나았다. 큰 키에 후덕한 몸집, 항상 웃음기를 간직한 얼굴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편안한 마음을 갖게 만들고…… 특히 조리있는 말솜씨와 아픈 곳을 정확하게 꼬집어내는 직감력에서는 따를 자가 없으리라. 전인수는 두 손으로 장검을 받쳐 들었다. 독명검. 장주가 운명하는 순간까지 손아귀에 꼭 움켜잡고 있던 애검(愛劍)이다. 조자경은 갈천상을 흘깃 쳐다보았다. 갈천상은 백문장에 대한 모든 권한을 요구하면서 장주의 신물인 독명검까지 차지했다. 실질적인 권한과 형식적인 권한을 모두 갖겠다는 의도였지 않은가. 실제로 부엌에서 기름냄새를 덮어쓰며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리는 순간까지도 독명검은 갈천상의 허리춤에 꽂혀 있었다. 그것이 어느새 전인수의 손에 들어가 있단 말인가. 박우가 신검을 논했으니, 적어도 박우와 전인수는 갈천상이 신물을 양도한다는 사실을 사전에 알았던 듯하다. 군웅들 틈에 섞여 조는 듯 꾸벅이고 있는 갈천상. 그래도 장주를 대신해서 백문장의 대소사를 총괄한다는 총관이 군웅들 틈에 섞여서 졸고 있다니. 전인수가 독명검을 전달하고 뒷걸음질로 물러섰다. “선(先)! 예(禮)!” 박우가 다시 고함쳤다. 이제는 하문화가 군웅들에게 인사를 하는 순서다. 장주로 취임하는 소감이 될 수도 있고, 백문장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야심 찬 일성이 될 수도 있고, 군웅들의 협조를 구하는 말을 할 수도 있다. 한 마디…… 하문화가 한 마디를 던지는 순간부터 그녀는 백문장 장주가 된다. “군웅 여러분,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자세히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은 음성이었다. 백문장 장주로 취임했다고는 하지만 딱히 할말도 없었을 게고, 예상외로 소란스러운 행태에 환멸을 느꼈을 수도 있다. 아니면 평소처럼 부담없이 말을 꺼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군웅들은 하문화의 그런 내심을 이해해 주지 않았다. “아, 그 말은 아까 들었으니까…… 이제 그만 하고 음식이나 먹읍시다. 아침부터 굶었더니 배가 고파 죽겠네. 원래 잔치 인사는 짤막할수록 좋은 것 아뇨?” 얼굴이 혹투성이라 얼굴만으로도 한몫을 하는 구음(仇)이란 자였다. 그는 무인 축에도 끼지 못하고 주먹질이나 일삼는 파락호(破落戶)에 불과했지만 목소리만큼은 우렁찼다. “음식도 음식이지만 무공이나 한 수 견식했으면 좋으련만…… 펼칠 수 있거든 백문장의 절학이라는 백학검법이나 한 수 보여주쇼. 상대가 필요하다면 이 멸절신장(滅絶神掌) 홍학(洪壑)이 받아주리다. 먼 길을 왔는데 눈요깃감이라도 있어야지.” 본인이 스스로 밝혔듯이 멸절신장 홍학이라는 자다. 그의 장법(掌法)은 독특한 면이 있다. 신화성(新和城)에서는 상대하기 어려운 존재로도 통한다. 하나 불행하게도 절강성에는 천력문이라는 장법의 대호(大虎)가 웅크리고 있다. 절강성에서 그가 설 땅은 없는 셈인데…… 그는 호기가 하늘을 찌를 듯 거침없었다. “흐흐흐! 눈요기야 실컷 했지. 백문장이라…… 기방(妓房)이라면 썩 어울렸을 텐데. 요즘은 개나 소나 검만 들었다 하면 무인이라고 설치는 바람에 눈꼴시려서 못 보겠어.” 애꾸에 외팔이, 전신에서는 송곳 같은 예기(銳氣)가 풀풀 피어나는 자. 독목섬전(獨目閃電) 추량(秋亮)이다. 그는 진정한 검호(劍豪)이나 성격이 편협하고 아집(我執)이 유달리 강한 자인지라 유독 적이 많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것. “거 그만들 하쇼. 여인에게 그렇게 무안을 주다니…… 쯧! 꼭 얼굴이 빨개지는 모습을 보아야만 직성이 풀리겠소?” 세인(世人)들은 여자라면 회로 집어먹으려 든다고 해서 구지자(狗之子`:`개새끼)라 부르며, 본인 스스로는 낙화선인(洛花仙人)이라고 자부하는 자다. 그는 조자경과 하문화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때, “넷이군. 좋아, 시작해.” 기둥에 등을 기대고 조는 듯이 서 있던 갈천상이 의미 모를 소리를 중얼거렸다. 그를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백문장 무인들처럼 백의를 입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인상에 깊이 새겨질 만한 모습도 아니었다. 당연히 그가 하는 말에 신경 쓰는 사람도 없었다. 조자경만이 알아들었을 뿐. 사실 그는 작은 소리로 말한 것도 아니다. 조용한 분위기였다면 무극전에 있는 군웅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소리였다. 아무런 의미도 없고, 자신과 상관없는 말인지라 귓전으로 흘려들었을 뿐. 그러나…… 사악! 스으윽……! 조용한 움직임이 시작됐다. 군웅들이 요란하게 떠들고 있지 않다 할지라도 움직임을 감지하기 힘들 만큼 미미한 움직임에 불과했다. 주의력이 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지금 이 상황에서 누가 움직였다는 것을 파악하기는 힘들리라. “그자의 이름은 구음. 사(死) 가(可).” 어디선가 들려온 음성. 구음은 기분 나쁜 듯 고개를 돌려 말한 자를 찾았다. 누가 자신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죽여도 된다’고 말하지 않는가. “어떤 빌어먹을 호로자식이…… 컥!” 구음은 말을 마치지 못하고 단말마를 토해 냈다. 그는 잠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생각하는 듯하더니, 믿기 어려운 듯 자신의 가슴에 깊숙이 틀어박힌 비수를 바라보았다. 심장을 정확히 꿰뚫은 비수, 그리고 흘러나오는 피. “이, 이……” 구음은 부들부들 떨면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것뿐이다. 구음의 가슴에 비수를 틀어박은 사내는 힘들이지 않고 둥글게 원을 그렸다. “아악! 아아아악……!” 비명은 처절했다. 생으로 심장이 도려지는 아픔은 그 무엇으로도 비견할 수 없으리라. 하나 정작 심장을 도려낸 자는 일말의 감정도 떠올리지 않았다. 무극전은 빈집처럼 조용해졌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살인이 벌어졌는데도 상관없다는 듯 잡담이나 읊어댈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장주님의 명(命)이 떨어지지 않았다. 손님으로 온 주제에 음식을 채근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 갈천상이 조금 전보다 훨씬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하나 이번에는 군웅들 모두가 확실하게 들었다. 군웅들은 말이 터져 나온 곳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보고 들었다. 봉두난발을 한 사내가 또 입을 여는 것을. “늦다.” 늦어? 무엇이 늦다는 말인가? 봉두난발 사내의 말에 응답하는 듯 무극전 입구에서 다른 음성이 들려왔다. “그자의 이름은 멸절신장 홍학. 지닌 바 장법은 일절(一絶)이나,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성격. 사(死) 가(可).” ‘대도 마임호!’ 조자경은 가슴이 마구 뛰어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갈천상의 한마디에 사람이 죽었다. 아니, 죽였다. 구음을 죽인 자는 주방에서부터 주목했던 자다. 혹시 무인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가 곧 지워버린…… 마른 장작을 가져 와 불길을 되살리던 젊은 하인이지 않은가. 갈천상의 말에 응답한 사람은 대도 마임호다. 그는 무극전 입구에서 싸늘한 눈초리로 군웅들을 바라보고 있다. 취임식이 시작될 때까지만 해도 정문에서 수문장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언제 무극전에 왔단 말인가. 확실해졌다. 갈천상은 살겁을 계획했다. 무공을 익힌 사람만 여든 명이 넘는데…… 적성현뿐만 아니라 금화부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만도 백여 명이 넘는데…… ‘넷이라고 했어. 넷…… 맙소사!’ 조자경은 작게 진저리를 쳤다. ‘말려야 돼. 사대 패강 무인들도 와 있는 자리에서…… 승산이 없어. 말려야 돼.’ 그러나 돌아가는 상황은 조자경이 나서고 말고 할 틈을 주지 않았다. “컥! 커억!” 멸절신장 홍학이 내지른 비명. 그는 무엇에 거센 충격을 받은 듯 펄쩍 뛰어올랐다. 그리고 허리를 뒤로 꺾으며 무너져 버렸다. 홍학은 척추가 베어졌다. 등에 일검을 당했으니 암습(暗襲)이되, 정면에서 승부를 나눈다 할지라도 감히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만큼 깨끗한 검공이었다. 단 일 검에 허리를 무 베듯이 잘라버렸으니. 미처 눈도 감지 못하고 숨을 거둔 홍학의 몸에서는 비릿한 선혈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멸절신장 홍학을 죽인 사람은 몸이 좋은 텁석부리 장한이다. 그의 손에는 매미날개보다도 가늘 것 같은 면도(面刀) 한 자루가 들려 있는데, 핏방울조차 묻어 있지 않았다. “쾌도(快刀)군. 좋은 도법이야.” 건곤방의 일음마봉 무기. 그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는 멸절신장 홍학이 죽어가는 광경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고, 번갯불보다 빠른 도공(刀功)을 보았다. 그는 태연하게 미소까지 띄우며 박수를 두어 번 쳤다. 또 한 번의 비명 소리에 생각이 어지럽던 군웅들은 일음마봉 무기의 한 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비로소 무슨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건방지게…… 절강성 무인들을 초빙해 놓고 살겁을 펼쳐 위용을 과시하려 들다니. 사파(邪派)의 개문식에서조차 일어나지 않을 일을 감히 누구 앞에서 벌인단 말인가. 군웅들은 분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살겁을 주도한 갈천상은 또다시 입을 열었다. “무인의 목숨은 파리 목숨보다도 가볍지. 그렇기에 싸움은 되도록 피해야만 돼. 그런 것도 모르고 무림에 몸을 담다니…… 죽어도 싸. 일음마봉, 제대로 봤는지 모르겠군.” “……” 일음마봉 무기는 인상을 찡그렸다. “거산파장, 봤나?” “봤다.” 천력문 황우당 당주인 거산파장은 짧게 응답했다. 입가에는 비웃음을 매단 채. “그럼 철응방 차례인가? 비조탈명, 똑똑히 봐. 기회는 한 번뿐이니까.” 갈천상이 말을 마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낙화선인은 눈치가 빠르다. 그는 구음과 홍학을 죽인 자가 각기 다른 인물이라는 점을 제일 먼저 떠올렸다. ─`넷이군. 좋아, 시작해. ‘제길! 이번에는 독목섬전이다. 내가 네 번째로 말했으니 다음은 나. 빌어먹을!’ 그는 감각을 최대한으로 열었다. 전후좌후를 둘러싼 군웅들 어느 누구도 믿지 않았다. ‘빠져 나가야 돼.’ 마음이 조급해졌다. 백문장이 개문한다기에 코웃음을 치며 달려왔건만. 절강제일미라는 조자경이 있고, 실제로 그녀의 얼굴을 보니 사지가 무력해지는 기분…… 야심한 밤에 겁간(劫姦)이라도 하고 말겠다고 음심(淫心)을 부추기고 있는 판인데. 낙화선인은 진기(眞氣)를 최대한 이끌어 언제라도 발출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면서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섰다. 독목섬전 추량의 무공도 정평이 나 있지만 등 뒤에서 찔러오는 비수를 감당한다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더군다나 살수를 펼치고 있는 인물들이 누구인지, 몇 명인지도 모르는 바에야. 세상은 낙화선인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아무도 믿지 않고, 살도 닿지 않는 상태로 무극전을 빠져 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값싼 마의를 입은 뚱뚱한 노인 옆으로 바싹 붙었다. 몸이 뚱뚱한 만큼 그를 등 뒤에 두면 적어도 암습은 걱정할 필요가 없으리라. 그때, “그자의 이름은 구지자. 색업(色業)이 하늘에 닿았으니…… 사(死) 가(可)!” 무극전 입구에 있던 마임호가 낙화선인을 거론했다. ‘이런 빌어먹을! 독목섬전이 아니고 나?’ “헉!” 낙화선인은 등에서 부지깽이가 파고드는 듯한 충격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내지르고 말았다.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창으로 꿰뚫리는 듯한 고통은 금방 사라졌다. 대신 사지가 무력해지며 세상이 캄캄한 암흑으로 변했다. ‘당했어. 당했……’ 낙화선인은 직감했다. 자신 역시 홍학과 마찬가지로 척추가 잘려나갔다는 사실을. “난봉자식은 낳지를 말라고 했으니…… 비조탈명, 봤나?” 갈천상은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음……! 봤다.” 비조탈명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극전은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한 냉기에 휩싸였다. 갈천상이 사대 패강에서 파견한 무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는 단지 ‘봤냐’는 말만 물었고, 사대 패강에서 파견한 사람들은 ‘봤다’고 말했다. 무엇을 봤다는 말인가. 암습에 또 다른 무엇이 숨어 있다는 말인가. 군웅들은 세 명의 죽음이 단순한 살인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 함부로 나서지 못했다. 사대 패강에서 파견한 사람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판이기에. “비살문만 남았군. 비살문 소문주. 경고는 한 번뿐이다. 오늘은 개문식이라 무단 침입한 죄를 용서하되, 다음에는 결코 용서하지 않을지니…… 잘 봐라.” 군웅들은 갈천상의 말에 몸을 떨었다. 비살문…… 갈천상은 ‘죽음의 신’이라는 비살문 소문주에게 경고를 하고 있다. 이게…… 있을 법한 일인가, 절강성에서……? 차앙! 경쾌한 검음(劍音)이 조용함을 일깨웠다. 독목섬전은 세 명의 죽음을 보면서도 얼굴에 띄운 비웃음을 버리지 않았다. “백문장에 한 수가 준비되어 있었군. 일벌백계(一罰百戒)라 이건가? 이번에는 내 차례겠지? 목숨을 줄 용의가 있다. 백문장의 위세를 세우고 싶으면 정정당당하게 검을 섞어보는 것이 어떤가? 치졸하게 암습이나 일삼아서야…… 컥!” 추량은 진정한 검호로 인정받는 사람인 만큼 지닌 바 본신 무공도 녹록치 않다. 그런데도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누구 손에 죽는지도 모르고 하나뿐인 눈을 부릅떴다.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라면 뒷목에 일격을 당해 머리가 가슴에 매달려 대롱거리고 있다는 것. 그런 모습은 군웅들에게 공포감을 최대한 심어주기에 충분했고, 또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불신하게 만들었다. 추량에게 일검을 던진 사람은…… 검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어여쁜 여자이지 않은가. 여인은 검에 묻은 피를 닦으며 생글거렸다. “시간이 너무 걸렸어. 넷밖에 안 되는데. 소문주, 봤으리라 믿는다. 원래 귀신과 더불어 사는 인간이니 대답은 들은 것으로 하고……” 갈천상이 무극전 중앙으로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第七章 광풍(狂風) 쫦 1 쫦 “이놈에 대한 소개는 나중에 하겠소. 지금 이 순간은…… 본장에 최대한의 예의를 갖춰주시오. 경고를 무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본장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겠소.” 도전이나 진배없었다. 백문장 개문식에 모여든 이백여 명의 군웅들뿐 아니라 절강 무림 전체에 선전포고(宣戰布告)를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상한 것은 사대 패강에서 파견한 사람들의 태도다. 비살문 소문주는 어디 숨어 있는지 모르니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상좌(上座)에 오만하게 앉아 있던 삼대 패강 무인들은 한결같이 소태 씹은 표정이었다. 그들은 갈천상이 도전에 가까운 말을 하고 있어도 누구 하나 나서서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로 인해 벌어지는 모든 일은 전적으로 문제를 일으킨 사람의 몫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아두시오.” 갈천상은 이미 고혼(孤魂)이 되어버린 네 사람에 대해서는 언급도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는 점을 명백히 했다. “무섭군. 무서워서 오한이 돋아. 백문장이 언제부터 야비한 수단을 일삼게 되었지? 하하하! 조항이 살아 있다면 땅을 치며 통곡을 하겠군. 하하하!” 군웅들 중 한 명이 분기를 토해 냈다. 나이는 사십 정도? 걸음걸이가 안정되고, 눈빛이 맑아 정종무공(正宗武功)을 다년간 수련한 사람임이 분명했다. “난주일검(蘭州一劍) 장상부(張霜芙)란 자입니다.” 대도 마임호의 기억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점을 알지 못하는 군웅들은 백문장이 사전에 자신들의 면면을 모두 파악해 놓았다고 생각했다. 자신들의 신분은 물론이고 무공내력까지. 또한 독목섬전 추량이 속절없이 당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자신들을 언제든지 죽일 수 있는 살수가 옆에 붙어 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아무도 떠들 수 없었다.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는 눕다시피 의자에 걸터앉아 있던 사람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긴장했다. “하하하! 나에 대해서 소상히 파악했군. 그럼 내 무공도 알 테고, 내 성격도 알겠군. 도깨비 장난 같은 이런 짓거리는 도저히 참아넘기지 못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 난주일검 장상부. 소림 속가제자(俗家弟子). 감원(監院) 원주(院主)인 공무(空無) 화상(和尙)의 제자로 달마삼검(達摩三劍)에 능숙하지. 무공만 가지고 논한다면 절강성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겠지만 앞에 나서는 것을 싫어해서 진가(眞價)를 제대로 알아보는 사람이 없지.” 이번에 말한 사람은 뜻밖에도 내총관으로 내정된 운단서였다. 그는 백문장의 고유 무복이 되어버린 백색 무복을 입고 있으며, 풍채 또한 고고하여 책사(策士)로서의 면모를 물씬 풍겨냈다. “그렇게 잘 안다면 한 수 지도를 부탁해도……” “얌마!” 난주일검 장상부는 느닷없이 터져 나온 욕지거리에 고개를 돌렸다. “넌 마, 뒷골이 근지럽지도 않니? 어디서 주둥이를 나불대고 있는 거야! 자식아, 아직 행사가 끝나지 않았다고 하잖아!” 여인이었다. 독목섬전 추량을 간단히 암살해 버린 여인. 생글거리며 웃는 모습을 보면 도저히 미워할 수 없을 것 같은 여인인데,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한결같이 험악했다. “이런……” 난주일검 장상부는 말문이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가 비록 앞에 나서기를 싫어해서 명성이 드높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하는 사람도 없다. 그의 면전에서 이토록 험한 욕을 하는 사람은 더 더욱 없고. “달마삼검이 뭐 그토록 대수롭다고 지랄을 하는 거야, 지랄은! 너 이따가 뒷골을 잘라줄 테니까 입 닥치고 있어. 알았어!” 난주일검의 얼굴이 분노로 새빨갛게 물들었다. 나이로 봐서도 딸뻘밖에 되지 않는 여인이다. 나이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많은 무림 동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개망신을 당했다는 것이 문제다. 그는 검을 뽑아들었다. 살심(殺心)을 품었는지 처음부터 뻗어나오는 예기가 심상치 않았다. “정말 지랄하고 있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놈이 어떤 놈인 줄 알아? 쥐뿔도 모르면서 아는 체하는 놈, 지지리도 못났으면서 잘난 체하는 놈, 꺼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으면서 괜히 있는 체하는 놈이야. 너는 어떤 놈일 것 같애?” “계집…… 죽어야 말버릇을 고칠 것 같구나. 내 손속을 원망하지 마라.” “꼴갑 떨고 있네. 모두 비키지 못해! 모난 놈 옆에 있으면 같이 정 맞는다는 것 몰라!” 여인은 정면 대결을 할 생각인 것 같았다. 난주일검의 명호를 듣고, 그에 대한 자세한 말을 듣고도 정면 대결을 생각했다면 독문섬전을 죽인 것이 단순히 암살수법이 뛰어나서만은 아니라는 결론이지 않은가. 특히 달마삼검이란 검공은 무시할 수 없다. 말 그대로 단 삼 초식밖에 되지 않는 검공이지만 제대로 오의(奧義)를 깨닫는다면 어떤 검호에게도 지지 않을 검공이 바로 달마삼검이다. “너를 죽여 열한지옥(熱汗地獄)에 떨어진다 해도…… 음!” 난주일검 장상부는 검을 전개하려다 말고 갑자기 깊은 신음을 토해 냈다. 개망나니 같던 여인이 검을 들어 기수식(起手式)을 취하는 모습을 본 다음이었다. “병신…… 왜? 싸우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어?” 난주일검은 여인과 입씨름할 정신이 없었다. 여인이 취하고 있는 기수식은 묘했다. 번신벽검(身劈劍`:`몸을 돌리며 검을 휘두른다)을 취할 수 있는 자세다. 전두전척(纏頭箭`:`검을 머리 위로 회전시키며 날아오는 화살을 찬다)에 이은 부보안검(步按劍`:`부보의 자세로 검을 눌러 찌른다)을 펼칠 수 있는 자세이기도 하다. 아니다. 제슬평참(提膝平斬`:`무릎을 들어올리며 수평으로 벤다)에 이은 회신하자(回身下刺`:`몸을 돌리며 아래를 찌른다)를 펼칠 수 있는 자세이기도 한데…… 무슨 무공이 기수식 하나로 사방을 차단한단 말인가. 도대체 변화가 얼마나 많으며, 공격이 시작되면 몇 초식이나 연이어 펼쳐지는 것인가. 환검(幻劍)인가? 난주일검은 달마삼검을 펼칠 수 없었다. 여인은 검공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실전경험까지도 풍부하다. 검을 사용할 때는 몸으로 펼치는 신법도 중요하지만 검을 쥔 손목 관절의 활용도 중요하다. 손목 관절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쾌(快)는 나올 수 없다. 여인은 순풍에 흔들리는 버들가지처럼 부드럽다. 실전경험이 많다는 증거다. 여인 정도의 부드러움을 가지려면 적어도 스무 번 이상의 생사비무(生死比武)를 치렀을 것이다. 여인은 살아 있다. 반대로 그녀와 상대했던 스무 명 가까이 되는 고수는 죽었다. ‘일 초밖에 기회를 주지 않는다. 이 초를 생각하면 죽는다. 일 초……’ 난주일검은 평상심(平常心)을 되찾았다. 여인을 죽이고자 하는 분노도 잊었다. 그 동안 분신처럼 숙달되어 온 달마삼검의 초식도 잊었다. 모든 것을 잊었다. ─`검을 잡고 나를 잊으며, 마음을 잡고 검을 잊는다. 내가 검이요, 검이 마음이요, 마음이 곧 나이니, 심검(心劍)은 평상심(平常心)이다. 달마삼검의 마지막 검결(劍訣)이 뇌리를 스쳐 갔지만 곧 검결조차 잊어버렸다. 난주일검 본인조차도 의식하지 못한 일순간에 다가온 깨달음이었다. 그때, “그만!” 갈천상이 벼락같이 고함쳤다. 동시에 여인은 뒤로 두 걸음 물러섰고, 난주일검은 검을 쳐내려다 멈칫하며 몸이 굳어졌다. “동사(同死). 이의가 있으면 말하시오.” “……” 난주일검 장상부는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그가 본 것은 여인의 오른쪽 어깨에서부터 유방을 지나 복부에 이르는 사선(斜線)이다. 뼈를 갈라버리고, 심장을 비스듬히 베어버리며, 내장까지 잘라버리는 죽음의 선. 이쪽에서 내놓은 것은 목이다. 여인이 취하고 있는 기수식은 머리 위로 호선(弧線)을 그리기에 적당하다. 아니,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승부는 누가 빠르냐에서 갈라지는데, 달마삼검의 마지막 검결을 따른다면 당연히 자신이 빨랐다. 심검이란 것은 죽음조차도 망각하고 펼치는 죽음의 검이기에. 봉두난발 사내의 말에 승복할 수 없었다. 설마 여인이 심검의 경지까지 검공을 익혔단 말인가. 아니면 여인이 위태롭게 되니까 사전에 결전을 막은 것일까. 그렇다면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꿰뚫어본 봉두난발의 사내는 얼마나 지고한 무공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실제로 그랬다. 갈천상이 ‘그만! 동사’라는 말을 하자 구경을 하고 있던 뭇 군웅들은 한결같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일부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런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누가 보아도 여인의 우세가 뚜렷했다. 달마삼검의 진수를 펼쳤다면 생각이 달라졌겠지만, 난주일검은 기수식조차 취하지 않았으니. 군웅들이 지닌 무공으로는 여인의 기수식을 파해할 무공이 생각나지 않았으리라. 그리고 난주일검 역시 자신들처럼 파해식을 몰라 고민한다고 생각했겠지. “승복할 수 없나 보군. 천(天), 다음 수를 보여주지.” 갈천상의 말에 뒤로 물러섰던 여인이 다시 검을 들어올렸다. 그녀는 진기(眞氣)를 싣지 않은 상태로 가볍게 약보상도(躍步上挑`:`도약하며 찔러올린다)를 전개했다. “음……!” 신음성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여인이 약보상도를 전개했다면 동사가 될 수밖에 없다. 누구도 죽음을 피하지 못한다. 여인은 몸을 후려치는 일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은 찔러올리는 검을 피하지 못한다. 만약 피하려고 하거나 물러선다면 상대를 죽이지도 못할 뿐더러 자신만 죽는 결과를 낳고 만다. 약보상도…… 여인은 죽음의 초식을 준비했으면서도 얼굴에 일말의 아쉬움조차 떠올리지 않았다. 생에 미련이 없는 것일까? 아니다.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난 진정한 무인만이 펼칠 수 있는 검공을 지닌 탓이다. “그만 해. 사실 너를 죽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서운하면 행사가 끝난 다음에 다시 하고.” 난주일검은 검을 늘어트린 채 망연자실했다. 앞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절강성에서는 자신과 겨룰 무인이 손꼽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송두리째 무너져 버렸다. 그것도 백문장주도 아니고 백문장에 몸담고 있는 듯한 일개 아녀자에게. ‘마의(麻衣)야. 마의……’ 조자경은 무극전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부지런히 훑어 내려갔다. 갈천상이 일거에 백문장의 위엄을 곧추세워 줄 줄이야. 놀랍기만 했다. 반갑고 고마웠다. 이대로만 취임식이 끝난다면 앞으로 백문장을 홀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실례로 자신을 핍박하고 겁간하려 했던 고가촌 사람들의 얼굴에서 핏기를 찾아볼 수 없지 않는가. 고가촌장이나 냉혈검 고패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아마 그들 역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어려웠으리라. 그런데…… 저 사람들…… 무공이 절정에 이른 사람들은 어디서 나타났단 말인가. 모두 부엌에 있던 사람들이다. 일부는 부엌에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허드렛일을 하며 백문장 곳곳에 숨어 있었다. 갈천상이 데려온 사람들이 분명하다. 언제 데려왔는가. 어디서 데려왔는가. 몇 명이나 되는가. 어머니가 취임 훈시를 하고 있지만 않았어도 단숨에 뛰어 내려가 갈천상에게 물어보았으리라. 그때, 그녀의 머리 속을 스쳐 가는 생각이 있었다. ─`형식에 불과하지만…… 백문장 문인들은 두 가지 옷만 입는다. 백의(白衣)와 갈의(葛衣). 백의는 의식을 치를 때 입고, 베옷은 싸움을 할 때 입는다. ─`망자(亡者)에게는 베옷이 어울리니까. 네 사람을 죽인 사람들은 모두 거친 갈의를 입었다. 색깔은 조금씩 다르지만 삼베옷이 분명했다. 조자경은 부지런히 갈의를 입고 있는 사람들을 헤아렸다. ‘하나, 둘, 셋…… 여덟, 아홉…… 또 있다! 열하나, 열둘……’ 열네 명이다. 밖에 또 있는지는 모르지만 무극전에 있는 사람들 중 갈의를 입고 있는 사람은 열네 명이 전부였다. ‘이 정도만 돼도 충분해. 모두 하나같이 고수들인걸.’ 이름도 모르는 여인만 해도 그렇다. 난주일검의 명호는 조자경도 들어봤지 않는가. 문도를 키우고 하다못해 표국(局) 정도만 열더라도 감히 무시하지 못할 거력(巨力)을 형성시킬 수 있는 고수라지 않던가. 여인은 그런 사람과 동수를 이루었다. 조자경도 갈천상의 말에는 승복할 수 없었다. 난주일검과는 다른 의미에서. 그녀가 보기에는 난주일검의 달마삼검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여인의 검공을 능가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갈천상이 ‘동사’라고 외친 것은…… 난주일검의 체면을 생각했기 때문이지 않겠는가. 갈천상이 ‘천’이라고 했으니 이름 대신 ‘천’이라는 말로 통하고 있는 여인. 어쨌거나 여인의 무공은 절강 무림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수 있을 만큼 강하다. 조자경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무극전에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밉게 보이던 갈천상이 왜 이렇게 사랑스럽게 느껴지는지. 천화신의 하문화가 취임인사를 마쳤다. 그녀가 말을 하는 동안 장내는 쥐죽은듯이 조용했다. 이제 농담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부드러움이 풀어지고 긴장감이 팽배했다. 운단서가 그토록 정성을 기울인 음식이건만 거들떠보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 병장기에 손을 얹고 언제든지 병장기를 뽑아들 태세였다. 사파의 개문식이 이러할 건가? 군웅들은 절체절명의 사지(死地)에라도 빠져 든 듯 눈을 부릅뜨고 사태의 추이를 예의 주시했다. 쫦 2 쫦 “그럼 지금부터 본장의 구성을 말씀드린 연후에 중요직책을 감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소개하겠소이다.” 박우는 전이나 지금이나 흔들림이 없었다. “본장의 기구(機構)는 무림의 상리(常理)를 조금 벗어납니다. 몰락 직전에 이르렀다가 다시 일어서는 문파인 만큼 과히 큰 허물로 여겨주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올시다.” 사대 패강에서 참석한 사람들은 박우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 고개를 파묻고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천력문의 거산파장은 엄동(嚴冬)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땀까지 흘리고 있지 않는가. “어느 문파나 내당(內堂)과 외당(外堂)이 있듯이 본장에도 내당과 외당이 있소이다. 명칭은 외각(外閣), 내각(內閣)이라 일컫고…… 외각주는 여러분에게 인사드린 바 있는 갈천상이 맡았소이다.” 한쪽에 물러나 있던 갈천상이 한 쪽 손을 들어 보였다. 건방진 태도 아닌가? 이런 자리에서는 깊숙이 포권지례(抱拳之禮)를 취해야 도리이거늘. 하나 군웅들은 그런 무례까지 뭐라고 할 계제가 아니었다. 그들도 난주일검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다. 그가 검을 들면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문파 정도는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릴 절정고수. 설혹 그렇게까지 비관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것은 자명했다. 그런 사람이 일개 여인에게 검조차 뻗어내지 못했다. 외각주라고 소개한 갈천상이란 인물이 ‘그만’이라는 소리를 외침과 동시에 손을 멈춰버렸다. 기(氣)가 눌렸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좋다. 그런 점은 덮어두고 넘어가기로 하자. 그럼 사대 패강에서 파견된 사람들은 왜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침묵만 지킨단 말인가. 평소 절강성을 독패(獨覇)하려고 머리가 터지게 싸우던 그들이 말이다. “내각주는 여기 이 사람, 운단서가 맡기로 했소이다.” 운단서가 나서서 포권지례를 취했다. “다정 운단서!” 누군가 운단서를 알아보고 탄성을 터트렸다. “다정 운단서? 그럼 미쳐서 날뛰다가 실종됐다는……” “쉬잇!” 여기저기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다정 운단서의 명성은 무림인들 사이에도 자자했다. 단순히 차(茶)에 대한 식견이 높아서가 아니라 다도(茶道)를 생활화하여 성품 또한 차에서 우러나는 그윽한 향기처럼 포근하며 세상을 감싸줄 만한 넓은 도량을 지녔기 때문이다. 한때는 그에게 다도를 배우고자 중원 각지에서 모여든 유생(儒生)의 숫자가 근 천여 명에 육박했다고 한다. 그 정도면 계명구도(鷄鳴狗盜)의 고사(故事)를 만들어낸 제(齊)나라의 공족(公族) 맹상군(孟嘗君)에 버금가는 인물이지 않은가. “내각부터 소개하겠소이다. 내각주 운단서는 휘하에 삼처(三處)를 둡니다. 일처(一處) 처장(處長)은 홍문성.” 취임식이 시작될 때까지만 해도 어디론가 사라져 보이지 않던 홍문성이 군웅들 틈에서 걸어나와 포권지례를 했다. 그는 하얀 백의를 입었는데, 이마에서는 구슬 같은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백의 무복도 땀으로 흠뻑 젖은 모습이 멀리서 부지런히 달려온 모습이 역력했다. “홍문성? 창화성의 홍문성?” 이번에도 아는 사람이 나왔다. 하기야 절강성 사람치고 창화성의 홍문성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으리라. 그는 누거만(累巨萬)의 부자다. 단지 부자였다면 그렇게 명성이 나지도 않았으리라. 그는 자신이 벌어들인 돈의 절반은 빈곤한 사람들을 위해 썼다. 아무나 도와주지는 않았다. 사지육신이 멀쩡한 자는 도와주지 않았고, 부모에게 불효한 자는 도와주지 않았다. 부부간의 금슬이 나쁜 자도 도와주지 않았고, 이웃에게 해(害)를 입힌 자도 도와주지 않았다.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한 것은 서로가 도와주고 도움받으며 사는 세상이었다. 당연히 명성이 드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미쳤다고 들었는데…… 약재창고를 불살라 버리고는 사라졌잖아?” “그 소문은 나도 들었어.” 군웅들은 다시 술렁거렸다. 미친 사람이 두 명이나 선보였다. 그것도 최근 몇 년 동안은 소식조차 알 수 없던 사람들이다. 우연이 연속으로 겹치게 되면 우연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사람은 백문장이 오랜 세월 동안 오늘을 기약하고 치밀한 준비를 해왔다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이 왜 미친 짓을 했는지, 무공도 모르는 사람이 백문장에서 무엇을 하는지는 짐작도 할 수 없지만. “이처 처장을 소개하겠소이다. 이처 처장의 이름은 오경이라 하오이다.” 오경이 앞으로 나서며 포권지례를 취했다. 사내로서는 조금 작은 키에 계집처럼 예쁘장한 얼굴을 가진 사내. 나이는 서른 중반쯤 되어 보이지만 얼굴이 동안(童顔)이라 실제나이보다 두어 살은 덜 들어 보인다. 특히 가는 눈으로 살살 눈웃음을 치는 모습은 역겹다기보다는 귀엽게 보이는 인상이다. 사내에게 ‘예쁘다, 귀엽다’는 말을 하면 모욕으로 들리겠지만 오경에게는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아…… 악공…… 오경? 서, 설마……? 미, 미쳤잖아? 그렇게 들었는데……” 오경은 금(金), 석(石), 토(土), 목(木), 죽(竹), 사(絲), 혁(革), 포(匏)로 나누어지는 악기 재료 여덟 종을 완벽하게 조율해 낸다. 오경만의 특징이라면 단선율적(單旋律的)이며 강약법이 독특하고, 들끓는 기운과 폭넓은 표현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 그가 즐겨 다루는 악기는 갈고(鞨鼓), 대고(大鼓), 계루고(奚樓鼓), 답랍고(答臘鼓) 등 고(鼓) 종류와 적(笛)이다. 그가 만든 악기를 소유하는 것은 음률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꿈이며, 그의 연주를 듣는 것은 영초(靈草)를 얻는 것만큼이나 귀히 여긴다. 그가 여기에 있다. 이처 처장으로. 미쳤다는 사람이. 중인들은 백문장이 복마전(伏魔殿)처럼 여겨졌다. 백문장은 알면 알수록 더욱 모르겠지 않은가. 만약 여기서 부질없이 목숨을 잃는다면 그건 순전히 백문장이 개문한다는 홍첩을 받고 코웃음을 친 대가이리라. “그럼 내각 마지막 처장인 삼처 처장을 소개하겠소이다. 방삼.” 방삼은 하인으로서 백의 무복을 입고 개문식에 참석한 것만도 영광이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지 않는가. 삼처 처장? 방삼은 전혀 뜻밖의 호명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갈천상은 물론이고 박우조차 사전에 한마디 언질도 던져 주지 않은 것이다. “뭐 하는가! 빨리 군웅들께 인사드리지 않고.” 박우가 채근하자 방삼은 얼떨결에 앞으로 나와 앞선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포권지례를 취해 보였다. “저자는 하인 아냐?” “무공의 무(武) 자(字)도 모르는 사람 같은데?” 뜻밖이기는 군웅들도 마찬가지였다. 백문장에서 말하는 내각이라는 것이 타문파의 내당이라면 굳이 무공을 익힌 사람을 등용할 필요는 없다. 계산이 빠르고, 성실하고, 백문장 일을 내 집 일처럼 성심성의껏 돌봐줄 사람이면 충분하다. 하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하인을 등용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미쳤다고는 하지만 한때는 명성이 중원에 쩌렁 울렸던 홍문성, 오경 등과 같은 위치에 서게 하다니. 그리고 또 무슨 놈의 내당에 삼처씩이나 필요하단 말인가. 다른 문파로 말하자면 내총관 밑에 삼당(三堂)을 둔 격인데, 그토록 많은 일손이 필요하다는 것인가? 놀라기는 천화신의 하문화와 조자경도 마찬가지였다. 정작 당사자인 방삼보다는 조금 덜할지 모르지만 그녀들의 생각도 군웅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이로써 내각 소개를 마쳤소이다. 내각은 백문장의 살림을 도맡아 하게 될 것이외다. 앞으로 무궁무진한 발전이 있을 수 있도록 모쪼록 격려의 말씀을 아끼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다음은 외각을 소개해 드리겠소이다.” 군웅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드디어 백문장의 실세(實勢)를 파악해 볼 수 있는 순간이다. 이 순간만은 고민을 거듭하던 사대 패강 사람들도 주의를 기울였다. “외각주는 아까 소개했으니 생략하고…… 외각주는 십전(十戰)을 거느립니다. 십전은 다시 휴전(休戰)과 실전(實戰)으로 나뉘며, 휴전주는 본인 박우가 맡게 되었소이다.” 박우가 포권지례를 취했다. “가만…… 박우라면? 모두가 미친 사람들이니 광인 박우? 신필로 유명한 박우인가?” “……” 이번에는 놀라지도 않았다. 백문장에 몸담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명성이 자자했던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긴장할 필요는 없다. 미쳤던 사람들이 멀쩡한 정신으로 백문장을 떠받치는 기둥이 되어 있다는 점은 놀랍지만, 그들은 결정적으로 무공을 모르는 사람들이지 않은가. 중인들의 관심을 외각 중에서도 실전이라 부르는 곳에 머물렀다. 박우가 말을 이었다. “본인이 맡은 휴전 외에 다른 구전(九戰)은 모두 실전에 속합니다. 실전에 속한 각(各) 전(戰)의 전주는 소개시켜 드릴 수 없습니다. 각 전은 최소 두 명부터 최대 이백여 명까지 무공이 출중한 문도들로 구성되며, 전주를 비롯한 모든 전원(戰員)은 검을 들었을 때만 모습을 나타낼 겁니다. 이들이 어떠한 역량을 지녔는지는…… 감히 말씀드리건대 시험해 보는 일이 없으시길 바랍니다.” 박우가 말을 마쳤다. 쫦 3 쫦 “백문장의 독문 무공은 뭡니까?” 군웅들 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대체로 문파를 창건하거나 재건할 경우에는 두 가지 선례가 있다. 무림에서 명망을 쌓은 후, 자신의 명망의 기반으로 문파를 설립한다. 이런 경우에는 굳이 독문무공이 무엇인지 물을 필요가 없다. 궁금증도 치밀 까닭이 없다. 또 하나의 경우는 백문장처럼 몰락 직전에 이르렀다가 다시 문파를 재건하는 경우이거나, 무공을 익혔으되 무림에서 명성을 인증받지 못한 무인이 문파를 창건하는 경우 등이다. 이런 경우 군웅들은 어떤 무공을 선보일지 궁금해 한다. 과연 옛 무공이 제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지, 어떤 종류의 무공을 선보일지…… 명망있는 문파의 지원이라도 받는 경우에는 한결 수월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무공이 뛰어나야만 한다. 무림인들의 냉대를 받지 않으려면. 그리고 창건한 지역에서 타문파와 충돌을 피하려면. 그래서 개문식을 하며 무공의 일부를 선보이는 것이 상례였다. 군웅 중 한 사람이 물어온 것은 모든 군웅의 당연한 의문. 백문장이 절강 무림의 일부가 되려면 군웅들의 궁금증을 해소시켜 주어야 한다. 절강 무림을 무시하지 않는다면. 무시한다면? 그럴 필요조차 없겠지. 홍첩을 돌려 유명인사를 초청할 필요도 없었을 게고. 부딪쳐 오는 무인이 있다면 맞받으면 그만이다. 무림인은 은원(恩怨)에 미련하리만치 집착을 보이는 부류이니, 복수라는 명분으로 끊임없이 도전해 올 게다. 절강 무림을 무시한다면 선혈로 얼룩진 혈보(血步)를 걷게 된다. 그러다가 멸문을 당하든가, 사대 패강처럼 굳건한 반석 위에 올라서게 되리라. 박우는 갈천상을 쳐다보았다. 하문화와 조자경은 가슴을 졸였다. 낯선 여자와 난주일검이 부딪쳐 승부를 내지 못한 것은 행운이랄 수 있다. 생각이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고 했던가? 군웅들의 생각이 백문장의 현실보다 훨씬 앞서 나간 것도 행운이다. 도도함과 오만함으로 똘똘 뭉쳤던 사대 패강 무인들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도 행운이다. 더 이상의 요행은 바랄 수 없다. 결례를 했다는 이유로`─`말을 지나치게는 했지만, 사실 하문화나 조자경도 군웅들이 비웃음을 던질 적에는 모멸감에 치를 떨었지만 막상 그들이 죽음을 당하고 나자 너무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살인마저 한 마당이니 그에 합당한 무공을 선보여야 되리라. 어쩌면…… 선보이는 무공이 군웅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움츠러든 군웅들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날지도 모른다. 위험! 일 대 일의 승부라면 낯선 고수들이 있으니 혹 승산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군웅들이 한꺼번에 분노를 터트린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이전주가 한 수 보여주지.” 갈천상이 구음을 죽인 젊은 하인에게 말했다. 이전주…… 이전주라면 외각 실전인 구전 중 이전의 전주라는 말이 아닌가. 구음은 무인이 아니다. 그저 약한 자에게 주먹질이나 일삼으면서 잔돈푼이나 뜯어 술 한 잔 걸치는 것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파락호에 불과하다. 이전주라 불린 사내가 구음을 죽인 것은 아무 명예도 되지 못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똑같다. 오직 추량을 암살하고, 난주일검과 동수(同手)를 이룬 여인만이 무공을 입증받은 셈이다. 그런데 왜 그들마저 고수라는 생각이 들었을까? 죽음이 거의 동시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네 사람이 목표가 되었고, 그 중에는 고수인 추량이 포함되었다. 추량이 죽는 순간, 다른 세 사람도 추량을 죽인 여인과 엇비슷한 무공을 지녔다고 오판해 버린 것이다. 군웅들은 이전주가 앞으로 나설 때까지 자신들이 착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이것이야말로 고도의 군중심리인 것을. 이전주는 혼자 나오지 않았다. 너무 앙상하게 말라 해골이 걸어다니는 듯한 자와 함께 나왔다. 같이 나온 사내의 인상이 워낙 특이하고 강렬하여 처음 이들을 대면한 사람이라면 이전주보다 그와 같이 있는 자를 더 강한 고수로 볼 것 같다. 스르릉……! 검을 뽑는 소리만이 무극전에서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소리였다. 이전주와 해골 사내는 포권지례는 고사하고 고개조차 까딱이지 않았다. 검으로 취하는 검례(劍禮)조차 생략했다. 얼굴은 냉막하게 굳어 있고, 눈동자는 굶주린 매처럼 살기로 번뜩였다. 이전주의 용모가 미남에서 약간이라도 모자랐다면 피에 굶주린 혈귀(血鬼)로 오인받았으리라. 타악! 이전주가 바닥을 박차고 허공으로 도약했다. 동시에 해골 사내는 허리춤에 둘둘 감겨 있던 구절편(九節鞭)을 풀어 땅을 훑어냈다. 쉬링! 구절편이 지상으로 솟구친다. 허공으로 솟구쳤던 이전주는 두 손으로 검자루를 움켜쥐고 곧장 아래로 찔러내린다. 서로 상잔(相殘)하자는 겐가? 촤라락……! 쒜에엑……! 구절편과 검광이 간발의 차이로 스쳐 지나갔다. 해골 사내는 몸을 일으킨 상태. 그런데 이전주는…… 아! 해골 사내의 어깨를 발판으로 삼아 다시 허공으로 도약하고 있다. 해골 사내도 발판 역할을 충실히 해낸 다음에는 처음처럼 허리를 숙이고 땅을 훑어나간다. “뭐, 뭐야! 양의검진(兩儀劍陣)……?” “아냐, 틀린 것 같애. 천지음마(天地淫魔)의 천지합격(天地合擊)이 아닌가?” 군웅들은 무당파(武當派)의 절학인 양의검진과 사파(邪派)의 거두(巨頭)였던 천지음마의 합격술(合擊術)을 동시에 떠올렸다. 이전주와 해골 사내가 펼치는 합격술은 정종무공의 성격을 띠면서도 살기가 지독하게 강하고 수법이 잔혹하여 사파의 무공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자연스럽게 불러일으켰다. 그렇다. 중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만약 자신이 이들의 합격술을 받는다면? 모르긴 몰라도 검과 구절편 사이에서 어육이 되지 않았을까? 기묘하게도 이전주와 해골 사내는 물러설 방위를 주지 않는다. 맞부딪치는 길과 좌우로 물러서는 길은 생각할 여유가 없고, 유일한 퇴로라면 뒤로 물러서는 길인데 그것도 용이치 않다. 구절편의 길이는 두 자에 육박한다. 허공으로 도약한 이전주가 신법을 펼쳐 날아오는 거리도 이 장 정도는 생각해야 한다. 결국 보법으로 물러서는 거리는 허공을 단숨에 좁히며 날아오는 이전주와 장병의 효용을 살린 해골 사내의 구절편 속에 갇힌다는 결론이 나온다. 마지막 결론은 정면으로 승부를 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합격술은 초식을 펼칠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지닌 바 무공을 최대한으로 이끌어 올리기 위해서는 진기의 유통이 필요하다. 장강의 앞 물결이 뒷 물결을 밀어내는 것처럼 첫 초식을 전개하며 유통시킨 진기는 뒷 초식을 이어주는 가교(架橋) 역할을 한다. 기수식만 해도 그렇다. 무공을 모르는 사람들은 목숨을 건 싸움에서 기수식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하겠지만, 기수식을 펼침으로써 진기를 활성화시켜 정작 초식을 전개할 때는 최고의 위력을 뿜어내게 된다. 이들은 그 흐름을 차단하고 있다. 분명히 정종무공은 아니다. 그렇다고 사파무공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초식의 흐름이 일거에 목숨을 뺏겠다는 듯 살기로 가득 차 있지만 전개하는 수법이 음독(陰毒)하지는 않다. 종잡을 수 없는 무공이다. 적어도 절강성에서는 처음으로 나타난 무공이다. 피륫! 싸아악……! 검과 구절편이 물 흐르듯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검은 광자(光字) 베기를, 구절편은 미자(米字) 찍기를 하고 있는데, 양 병기가 서로의 허점을 기묘하게 보충하면서 위력을 배가시키고 있다. 광자 베기와 미자 베기는 검의 정교함을 수련하는 데 자주 응용된다. 여기에 필자(必字) 베기와 목자(木字) 베기를 더하여 사자(四字) 베기는 검을 수련하는 무인치고 수련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이전주와 해골 사내는 광자 베기와 미자 찍기를 마지막으로 병기를 거뒀다. 정식 입문을 허락받지 못한 수련문도(修練文道`:`문파에 입문하고자 하는 사람은 삼사 개월간 기본적인 공부(功夫)를 수련한다. 그런 후, 자질과 성품을 인정받으면 정식으로 입문이 허락된다)도 수련하는 기본 공부를 마지막으로 시연(試演)을 끝낸 것이다. 기본수(基本手)에 능숙하면 변화수(變化手)는 절로 보이는 법. 군웅들은 이들의 진실한 무공은 보지 못했지만 간단히 선보인 무공만으로도 이들의 실력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으음……!” 신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군웅들은 인정해야만 했다. 백문장에 숨은 저력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실구전의 문도가 얼마나 되느냐는 것인데, 작게는 두 명에서 최대 이백 명까지 있다는 말을 들었으니 함부로 상대할 세력이 아니다. 아니, 이 정도면 능히 과거의 백문장과 위세가 같지 않은가. “이것으로 장주님의 취임식을 마치겠습니다. 무림동도 여러분, 불미스러운 일은 모두 잊어버리고 이제 마음껏 마시고 즐깁시다. 본장의 개문식 겸 장주님의 취임식에 불원천리 먼 길을 달려와 주신 동도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박우가 취임식을 정리했다. 운단서는 오늘을 위해서 소흥현(紹興縣)까지 사람을 보내 절강성 최고의 특산이라는 소흥주(紹興酒)를 사왔다. 소흥현의 노주(老酒)는 북송(北宋) 시대(時代) 사람인 주익중(朱翼中)이 북산주경(北山酒經)이란 책에 소개했듯이, 시간이 오래 걸리고 사람 손이 많이 가는 술이다. 숙성하는 데 백 일이 걸린다는 임반주(淋飯酒)를 손도 대지 못할 만큼 팔팔 끓인 연후에 다시 밀봉하여 저장해서 만든 술이 소흥주이니. 값도 비쌀 뿐더러 양이 많지 않아서 평시에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술이다. 술과 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술을 마시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행위라 해서 입에도 대지 않는 무인들도 많지만, 사람을 죽인 연후에 혹은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본 후에 술을 찾지 않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박우가 취임식을 정리하는 것으로 긴장은 풀렸다. 하나 군웅들은 조그맣게 속삭이고 있을 뿐 누구 한 사람 허리띠를 풀어놓고 마음껏 취하는 사람이 없었다. 더러는 아예 입에도 대지 않았다. 군웅들이 험악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잊혀져 버린 백문장 개문식에 참석한 것은 사대 패강 때문이었다. 절강 무림에서 사대 패강의 입김을 무시할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룡사와 보타문에서 일개 문파 개문식에 사람을 보내온 것도 전례에 없던 일이다. 모두 절강 무림의 향방에 이목을 집중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사대 패강은 한결같이 금화부 적성현을 장악하고자 암투를 벌여왔고, 백문장이 개문한다고 공포한 것은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격이라고 우려한 것도 사실이다. 사대 패강에서 파견한 무인들이 백문장의 중지(重地)를 틀어쥐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도 별반 놀라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음마봉이 건곤십삼봉을 데리고 오고, 천력문 황우당 당주가 휘하의 향주를 모두 데리고 온 것도 당연하다. 철응방에서는 비조탈명이라는 미지의 인물을 보내왔지만 그의 휘하에 있는 사람이 철응방주가 가장 신뢰한다는 사귀이고 보면 비조탈명의 가치 또한 적지 않다. 비살문도 소문주가 직접 왔으리라. 암중에 숨어 있어 확언할 수는 없지만. 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개문식을 기화로 백문장을 손에 넣겠다고 작심했으리라. 사대 패강이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벌인다면 누가 이길까? 그것이 최대 관심사였다. 군웅들은 비살문과 천력문 쪽에 높은 비중을 두었다. 혼인(婚姻). 비살문 소문주는 일찍부터 ‘조자경은 자신의 여자’라는 인식을 심어주었고, 건곤방 일음마봉도 ‘가문은 보잘것없지만 절강제일미를 누구에게 양보하겠는가’라고 맞불을 붙여왔다. 정식으로 혼담이 오갔는지는 모르지만, 조자경이 혼인을 한다면 비살문이나 건곤방과 하게 되지 않을까? 무림인 중 절반은 그렇게 생각했다. 나머지 절반은 조자경은 더러운 탐욕의 제물이 될 것이며, 그 누구와도 혼인하지 못하고 죽을 거라는 의견이었다. 다른 두 문파가 가만히 있겠냐는 의견인데 설득력이 꽤 높았다. 그래서들 달려왔다. 네 마리 늑대에게 백문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모습은 상관할 바 아닌데`─`약자멸(弱子滅)은 모든 무림인의 운명이니까`─`백문장이 누구에게 넘어가느냐는 향후 절강 무림과 자신들의 입지에 큰 영향을 주게 되니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사대 패강 무인들은 기침 소리도 내지 못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어버렸고, 토끼로 생각했던 백문장이 거대한 호랑이가 되어서 나타난 격이니. 군웅들은 그 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사대 패강 무인들이 왜 숨죽이고 가만히 있었는지. 비살문은 하루의 시간만 주면 그 누구도 죽일 수 있다고 공언한 사람들인데 왜 기습 한 번 하지 않고 어둠 속에 몸을 묻고 있는지. 쫦 쫦 쫦 쾅! 거세게 내리친 주먹에 탁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이건 말도 안 돼!” 일음마봉 무기는 아랫입술을 짓깨물었다. 구음이란 자가 죽은 것은 그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 그런 자는 백이 죽든 천이 죽든 눈썹 한 올 까딱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이전주란 놈에게 죽는단 말인가. 이전주란 놈은 왜 그 무공을 사용한단 말인가. 일음마봉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는 구음이 죽는 광경과 멸절신장 홍학이 죽는 광경을 정면에서 지켜보았다. 무슨 수법에 어떻게 죽는지까지. 지금도 눈을 감고 당시의 상황을 그려보면 손에 잡힐 듯이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이전주라는 자는 단순히 비수로 심장을 쑤신 게 아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세히 보지도 못했겠지만 무기는 분명히 보았다. 이전주가 비수로 심장을 찌른 동작은 변형된 괘검직자(掛劍直刺`:`검을 떠올리듯이 들어올려 곧바로 찌른다)였다. 괘검직자라면 왼발을 들어올려 무릎을 굽히고, 검은 가슴 앞에서 수평을 이루어야 한다. 목표를 측면에 둔 상태다. 들어올린 발을 내리며 몸의 방향을 틀면서 검을 찔러간다. 중간에 우궁보(右弓步)를 취하는 과정이 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괘검직자를 연마하는 데는 세 가지를 유념해야 한다. 검을 떠올리듯이 들어올리는 것, 검 끝이 아래로 향하게 하는 것, 똑바로 찌르는 것. 이 세 가지 동작과 발을 내딛고, 무릎을 들어올리고, 몸을 돌리고, 궁보가 되는 보법, 신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거기에 하나 더, 호흡을 잡아야 되겠지만. 이전주는 단순히 비수를 심장에 틀어박는 간단한 행동 하나에서 자신이 지닌 무공의 진수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굳이 논한다면 평수(平手)다. 갈천상이라는 자는 예외로 하고 그 밑에 수하로 있는 이전주와 대결을 해도 승산을 점칠 수 없다. 이전주와의 승패는 그날의 지형, 기후, 기분 등이 크게 좌우할 게다. 텁석부리가 멸절신장 홍학을 죽인 것도 이전주라는 자와 비슷한 경우다. 무공이 얕은 자들은 비겁하게 뒤에서 암습을 펼쳤다고 비웃겠지만, 무기는 똑바로 보았다. 그자는 멸절신장 홍학과 정면에서 승부를 결했어도 단칼에 목을 베어버릴 절정고수다. 그가 왜 척추를 베었는가? 그것은 짐작만 할 따름이다. 심장은 건곤방 독문절학인 이십육초(二十六招) 건곤봉법(乾坤棒法)의 유일한 조문(門)이다. 조문은 치명적인 약점을 말한다. 원래 봉법이야 거리가 없으면 없을수록 약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거리가 있을 때에 비해서 약간 약하다는 것뿐이지 무능력해진다는 소리는 아니다. 봉법은 창법하고 달라서 가운데를 양 손으로 움켜잡고 양쪽 봉 끝을 이용하여 짧게 끊어치는 수법에 담겨 있다. 그런 수법은 지근전(至近戰)을 하더라도 검공이나 도법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 건곤봉법은 하늘과 땅을 완전히 가리는 봉법이라 해서 건곤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수비를 할 적에는 바람 한 점 새지 않으며, 공격을 할 때에는 스며들지 못하는 곳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아무리 미녀라도 뜯어보면 못난 구석이 있다고,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봉법이라고 자부하는 건곤봉법에도 못난 구석이 있으니 심장을 완벽하게 가릴 수 없다는 점이다. 그것은 손목과 팔꿈치, 어깨의 조화를 유난히 강조한 데서 기인한다. 봉법의 생명은 거리에 있다고도 할 수 있으니만치 신법과 보법의 중요성도 강조되지만, 무엇보다 실질적으로 봉을 들고 있는 것은 팔이지 않은가. 어떻게 하면 양 팔의 활용도를 극성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까. 여기에 주안점을 두고 연구하여 창안한 봉법이 건곤봉법이다. 변화가 많고 난해하며 수련하기가 어렵지만 그만큼 위력이 강하다. 양 팔의 사용…… 그리고 조화. 인간의 신체는 결코 완벽할 수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완벽한 조화를 추구하다 보니 양 팔의 사용은 극대화되었으나 몸의 일부분에서 이그러짐이 나타난다. 바로 늑골 쪽에서 쳐 받쳐 올라와 심장을 찌르는 경우에는 방비하는 시간을 놓쳐 버리는 현상이 바로 그렇다. 물론 상대가 절정 무공을 지녔고, 건곤봉법을 잘 안다고 가정했을 때. “어떻게 알았을까요?” 건곤십삼봉의 수뇌라 할 수 있는 천목봉인(天目棒人) 왕국용(王菊蓉)이 물었다. “보았습니까?” “허허!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습니다.” “으음……! 말도 안 돼. 시험해 봐야겠어.” “그만두시지요. 갈천상이라는 그자…… 그자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이 선결문제입니다. 그자는 건곤봉법을 알고 있어요. 확신합니다. 허허! 얻은 것은 있잖습니까? 우리 건곤방 조문이 가슴이라고 밝혀졌듯이 천력문은 척추…… 음! 철응방도 척추군요. 비살문은 뒷목이라…… 생각해 봐야겠지만 그들 무공을 파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이번은 그 정도로 만족하고……” “으으……!” 일음마봉 무기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옛날…… 백문장주 조항에게 등을 보인 후, 앞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등을 보이지 않겠다고 맹세했는데. 천목봉인 왕국용의 말을 믿지 않을 수도 없다. 사실 자신도 마음 속으로는 갈천상이라는 자와 이전주라는 자가 건곤봉법의 파해법(破解法)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심증을 굳혀가는 중이지 않던가. 그렇지 않고서야 그토록 완벽하게 파해법을 선보일 수 없다. 괘검직자라는 초식은 단지 파해법을 선보인 데 지나지 않는다. 괘검직자는 파해법을 알고 있다는 시위에 불과하다. 그들은 다른 무공으로도 얼마든지 파해할 수 있으리라. 천목봉인 왕국용은 아버지와 함께 오늘의 건곤방을 일으킨 산 주역이다. 생사실전만 오십여 합이 넘지만 몸에 긁힘 하나 당하지 않았다. 건곤방의 원로(元老)로 편히 지낼 수 있지만 무인이 몸을 쓰지 않으면 녹이 슨다 하여 분쟁이 있는 곳이면 언제든지 항상 앞서 달려나가는 사람. 용맹도 있고 무공도 뛰어나지만 지혜도 남다른 사람이다. “갈천상이라는 자…… 누구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천목봉인 왕국용은 관우처럼 멋들어지게 자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짐작 가는 사람이 있죠.” “그게 누구입니까?” “포영매란 자입니다.” “누, 누구요! 포영매! 그자가 실존인물입니까?” “아직은 모릅니다. 단지 그런 자만이 건곤봉법을 익히지 않은 상태에서 파해법을 창안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봤죠.” “으음……!” “실(失)은 있어도 득(得)이 없는 자립니다. 이런 자리는 빨리 뜨는 게 골치를 썩히지 않는 방편이죠. 출발 준비를 시키겠습니다.” 천목봉인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지금 떠나자는 말씀입니까?” “갈천상이라는 자…… 우리에게 떠날 기회조차 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생각했어요. 백문장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었으니. 허허! 취임식을 한다고 했을 때 얼마간이라도 조사해 두는 건데.” 천목봉인은 미련없이 걸어나갔다. “갈천상…… 포영매…… 갈천상……” 일음마봉 무기는 끝없이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같은 말이 한 마디씩 새어나올 때마다 그의 눈빛은 활활 불살라졌다. 그것은 본인도 어찌할 수 없는 강렬한 투지였다. 포영매라는 말만 듣지 않았어도 이런 투지는 생기지 않았으리라. “좋아. 물러가 주지. 조항에 이어 두 번째 너, 갈천상. 네놈에게 등을 보여주지. 사천성에 있다는 놈이 절강성에는 어떻게 흘러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네놈은 다시 돌아가지 못해.” 으스러질 듯 말아쥔 주먹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들어간 게다. 하나 주먹에서 흘러내린 선혈도 눈에서 발산되는 광망(光芒)보다는 붉지 않았다. “간다.” “예?” “내 능력 밖이다. 이건 문주님이 결정하실 문제야.” “당주님! 겨우 어린아이들 장난 가지고……” 거산파장은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고 있는 향주를 바라보았다. 신력(神力)이 남달리 뛰어나지 않았다면 향주 자리도 오르지 못할 위인이다. ─`네놈은 힘만 믿다가 뒈지고 말 거야. ─`제발, 그런 놈이 나타났으면 원이 없겠습니다. 전에 향주들과 술자리를 하며 오간 대화가 머리 속을 스쳐 갔다. ‘병신…… 그런 놈이 눈 앞에 나타났는데도 알아보지조차 못하다니. 휴우…… 지나가는 말이었지만, 정말 네놈은 제 명에 못 죽겠구나.’ “뭣들 하는 거야! 빨리 짐을 꾸리지 않고!” 거산파장은 심중에 있는 말 대신 호통을 내질렀다. 한 달 정도는 머무를 생각에 꾸려온 짐도 적지 않았다. 백문장주로 취임 예정인 하문화의 거처를 차지한 것도 사대 패강과의 암투에서 기선을 제압하고자 한 행동이었다. 지금은 전부 부담이 되어 돌아온다. 그렇지야 않겠지만 갈천상이 사대 패강을 적으로 돌릴 생각을 했다면 자신은 물론 황우당 십이력 또한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멸절신장 홍학을 죽인 텁석부리는 천력문의 조문을 정확이 베어버렸다. 천력문의 비전비공(秘傳秘功)은 무당파(武當派)의 철포삼(鐵布衫)에 뿌리를 둔다. 처음 입문한 자가 익히게 되는 하단공(下丹功)에서 시작하여 중단공(中丹功), 요배항타공(腰背抗打功), 사지공(四肢功), 명공(命功), 철두공(鐵頭功), 철조공(鐵爪功) 등 십삼 개 공법(功法)을 두루 익히면 머리로 바위를 깨고, 배 위로 황소가 지나가도 끄떡없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장사들만 입문할 자격이 주어진 데다가 익히는 무공 또한 철포삼이니 육신이 강철처럼 강해질 수밖에 없다. 거기에다가 향주급부터는 소림사(少林寺)에서 파생된 금강대력(金剛大力)을 익히게 된다. 솔법(率法)을 수련함으로써 선전력(旋轉力)을 높여 무공의 강도를 한층 강화시킨다는 발상이다. 의도는 맞았다. 강철 같은 신체조건에 강력한 발경(發勁)을 자랑하는 금강대력이 합해지자 천력문은 일약 사대 패강의 한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하나 거기에 조문이 있는 줄은 몰랐다. 금강대력은 그 어디에도 척추를 방비하는 초식이 없다. 평형능력을 증대시키며 상대를 끌어당기는 기락법(起落法), 허리를 비틀어 반호를 그리면서 상대를 아래에서 위로 쳐올리는 료삽법(揷法), 신체의 회전능력을 키워주며 상대를 일거에 쓰러트리는 전요법(轉腰法)…… 어디를 둘러봐도 뒤에서 척추를 베어오는 데는 대책이 없다. 물론 상대가 번갯불보다도 빠른 신법을 지녔다는 전제하에서. 아직까지는 그런 자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멸절신장 홍학을 죽인 자는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빨랐다. 그와 자신이 맞부친다면…… 모른다. 실제로 싸워봐야 안다. 거산파장은 금방이라도 갈천상이 멸절신장을 죽인 텁석부리 놈과 같이 문을 박차고 들어설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간단히 행장만 수습해!” 거산파장은 다시 한 번 채근했다. 그런 그의 눈에 황급히 빠져 나가는 일단의 무리가 창문 너머로 비춰졌다. 자신의 키보다도 더 큰 장봉을 지닌 무인들. 건곤방 무인들이 빠져 나가고 있다. 거산파장은 더욱더 조급해졌다. “그만! 이제 그만 간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第八章 충천(衝天) 쫦 1 쫦 한편, 그 시각. 일단의 사람들이 전(前) 백룡당 당주의 거처였던 동각(冬閣)에 소리없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서로 인사 한 마디 나누지 않고 동각에 들어서기 무섭게 약속이나 한 듯이 자기 위치를 찾아가 밖을 살폈다. 동각에는 낯선 인물이 대기하고 있었다. “갈천상이오.” “크크크! 미쳤다가 제정신을 찾았다고?” 노인은 몇 개 남지 않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실실 웃었다. 곱게 늙었다는 표현이 옳을까? 작은 키지만 몸집이 좋아 작다는 느낌은 주지 않는 노인이었다. 얼굴에 검버섯이 군데군데 피어 있는 것만 제외하면 주름살도 별로 없는 깨끗한 인상. “백문장에 그대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고 들었소만.” “그대? 키키키! 나이를 먹다 보니 별 시러배 잡놈을 다 보겠군. 네놈 눈에는 내가 그대처럼 보이나?” “하대(下待)가 귀에 거슬리나 본데…… 나는 내가 모시는 상관이나 존경할 만한 인물이 아니고는 존칭을 쓰지 않소.” “호오! 그러셔?” “나는…… 백문장에 설치된 모든 기관을 파해할 수 있소. 하나 지금 내가 바라는 것은 파해가 아니고 운용.” “건방진 놈, 광량이 살아 있다면 그런 소리를 하지 못할걸?” “당신이 살아 있잖소.” “……” “……” 잠시 눈과 눈이 마주쳤다. 쫦 쫦 쫦 갈천상이 백문장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주정중독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보름 전이다. “기관이 설치되어 있는데……” “기관? 백문장에 기관이 설치되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네만……” “각 전각의 위치는 기관의 중심점 역할을 하고 있소. 만약 기관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면…… 백문장을 건축한 인물은 천하에 다시없는 사기꾼이지. 백문장주를 상대로 사기쳤으니까.” 하문화는 정말 금시초문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자경도 같은 입장이었다. 평생을 백문장에서 살아왔지만 기관이 설치되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갈천상은 두 모녀에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들은 정말 모른다. 알면서도 모른다고 할 필요가 없으니까. “기관이라니, 무슨 기관 말인가요?” 조자경이 물었다. 갈천상은 물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백문장을 건축한 사람이 누구지?” “광 총관이요.” “맞네. 광 총관이네. 망부는 건축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지. 그래서 백문장을 건축하는 일은 광 총관이 도맡아서 했네.” “광 총관을 약간 알죠. 이름난 사람이니까. 하나 그는 기관건축의 달인이 아닙니다. 훗! 세상은 참 공평한 겁니다. 어느 한 부분에 뛰어나면 다른 부분에 무지하고, 모든 부분에 뛰어나면 깊지 못하고…… 광 총관과 같이 일한 사람이 있을 텐데, 누굽니까?” 갈천상은 단정적으로 말했다. “글쎄…… 전혀 기억이 나지 않네. 내 기억으로는 광 총관이 모든 일을 주관한 것 같았는데…… 혹, 망부께서 다른 사람을 등용했다면 이름이라도 말했을 텐데 들은 기억이 없네.” 하문화는 곤혹스럽게 말했다. 장주 조항이 백문장의 터를 마련할 때부터 곁에서 보아왔지만 광 총관 외에 다른 사람이 건축을 주관한 기억은 없었다. 물론 광 총관 혼자 하지는 않았다. 석수(石手)들 책임자가 따로 있고, 미장이 책임자가 따로 있다. 재료를 구하는 총책임자가 따로 있고, 현장을 도맡은 사람이 따로 있다. 그 사람들을 일일이 기억할 수는 없지 않는가. 이십 년 전의 일인데. 갈천상은 그런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광량과 함께 백문장 건축 도안(圖案)을 한 사람이 누구냐는 것인데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 정도 인물이라면 세월이 아무리 지났다 할지라도 기억에 선명할 텐데. “홍문성, 찾아라.” 갈천상은 대수롭지 않은 일을 시킨 듯 툭 내뱉었다. 바다에 빠진 바늘을 찾는 것과 같다. 백문장 건축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찾으라면 그것은 쉽다. 몸뚱이 하나로 밥을 벌어먹고 사는 사람은 대체로 사는 고장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일거리를 찾아 먼 곳으로 가는 일이 다반사지만 일이 끝나면 반드시 돌아온다. 가족들과 함께 움직일 금전적 여력이 없는 것이다. 머리로 건물을 짓는 사람은 찾기가 더욱 쉽다. 머리로 건물을 짓는 사람이나 몸으로 짓는 사람이나 부평초처럼 이리저리 떠도는 것은 매한가지이지만 몸뚱이 하나만 믿는 사람들보다는 풍족하게 살기 때문에 움직일 필요가 거의 없다. 특히 백문장 같은 무가에 기관을 설치할 정도라면 보통 뛰어난 사람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중원 천지에도 몇 사람 되지 않는다. 홍문성은 자신이 건물을 짓는다 생각하고 사람들을 수소문했다. 누구를 시킬 수도 없었다. 현재 백문장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취임식 준비로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랄 판이다. 그리고 갈천상이 말한 사람을 찾는 일은 많은 사람들이 나선다고 해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홍문성은 찾아나선 지 하루도 되지 않아 몇 사람을 알게 되었다. 동종(同種)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만나지 않고도 서로의 이름을 알게 되어 있고, 뛰어난 사람일 경우에는 이름이 더욱 널리 퍼져 있다. “대장원(大莊園)만 전문적으로 손대는 사람이라면……” “기관도 설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관? 무가요?” “그렇습니다.” “무가를 손댈 사람은 흔치 않지. 그냥 장원만 짓는 거라면 수십 명이라도 말해 줄 수 있지만…… 기관까지 설치한다면…… 쉽게 생각나지 않는구먼. 요즘은 누가 그런 일을 해야 말이지. 말로는 들었지만 그런 주문을 해오는 사람도 없고.” “그래도 생각나는 사람이 있으시면……” “없네. 다른 데 가서 알아보시게.” 기관. 그것이 골칫거리였다. 모두들 기관이라는 말에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어떤 사람은 밀실(密室)이 아니냐고 반문해 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에게는 기관이라는 말 자체가 생소했던 것이다. 홍문성은 방향을 달리했다. 기관 전문가를 찾는 것보다 잊혀진 일이지만 백문장 건축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찾아 밑에서부터 위로 역추적하는 것이 한결 수월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너무 오래된 일이라 쉽지 않을 테지만 사람들이란 자신이 관여했던 일은 늙어 죽을 때까지 잊는 법이 없으니 거기에 한 가닥 실마리를 걸었다. 백문장 건축에 관여했던 사람들은 쉽게 찾았다. 몸뚱이 하나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백문장 건축에 일조를 했다고 말했다. 너무 많았다. 하다못해 돌멩이 하나를 나른 사람도 당시의 활기 찼던 광경을 생생하게 이야기하곤 했다. “아까운 사람이 죽었어요. 광 총관…… 대단한 사람이었죠.” “광 총관과 같이 일한 사람이 있을 텐데……” “에이…… 광 총관 같은 사람이 무엇 때문에 다른 사람 머리를 빌립니까요.” 금화부 적성현 사람들에게는 광량이 신적인 존재였다. 죽은 조항 장주도 그랬다. 사람들은 조항 장주와 광 총관이 손발을 맞춰 같이 움직였을 때가 적성현의 전성기라고 말하곤 했다. 앞으로도 그런 사람들은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이라면서. 무공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도 사대 패강이 적성현을 눈독들인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큰일이에요. 조만간 적성현을 두고 피바람이 불 거라는 소문이 자자한데.” 어느 문파가 적성현을 차지하느냐에 따라 자신들의 생활에도 직, 간접으로 영향을 미치니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으리라. 사람들은 몰락 직전인 백문장이 개문한다는 사실에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민심을 얻고 있어. 조항 장주와 광 총관의 음덕(陰德)이 살아 움직이는 거야.’ 무척 고무적인 일이었지만 정작 홍문성이 알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듣지 못했다. 홍문성은 다시 방향을 돌렸다. 기인이사(奇人異士) 쪽에서 찾는 편이 훨씬 빠를 것 같았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광량 혼자서 백문장 건축을 주도했다고 말한다. 갈천상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백문장에 기관요? 잘못 알고 있는 것 아닙니까? 저는 땅을 다질 때부터 일했지만 사람을 죽일 만한 쇠붙이 하나 들어오는 것을 못 봤는데……” 의심이 생기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리라. 갈천상이 무엇인가 잘못 알고 있으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직접 돌을 쌓고, 나무를 잇댄 사람들이 이렇게도 다른 건축과 다르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까? 그리고 광량과 같이 건축을 주도한 사람이 있다면 광량 못지않은 비중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을 텐데, 그 많은 사람들이 한 명도 본 적이 없다고 하니. 실체도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백문장 건축을 주도한 사람. 기인이사다. 홍문성은 단순하게 생각했던 일이 점점 꼬여간다고 생각했다. 드넓은 중원천지에서 기인이사를 찾는 일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지 않은가. 기인이사를 찾는 데는 노력뿐만 아니라 행운도 따라야 한다. 기연(奇緣)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어려운 일이다. “……” 말을 들은 갈천상은 한동안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취임식 전까지는 백문장의 모든 비밀을 손에 쥐고 싶었으리라. 취임식이 평탄치 못하리라는 것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고, 기관을 만든 사람이 깊게 숨으면 숨을수록 호기심은 더욱 강렬해지는 법이니까.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동원해서 찾아. 많은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야.” “……?” 언뜻 갈천상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많은 사람의 목숨이라면……? 갈천상은 취임식 때 일장 격돌을 피하지 않을 생각이란 말인가? 그런 터무니없는 일을.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 홍문성은 약초상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전국 각지를 떠돌아 다니는 만큼 듣고 보는 것이 많다. 혹자는 현금 강호무림에서 가장 소식이 정통한 문파로 개방을 꼽는다. 옳은 말이다. 사람 사는 마을치고 거지 없는 마을이 없으니, 그들이 한 뜻으로 뭉쳐서 일구어낸 개방(幇)이란 문파야말로 가장 소식이 빠르고 정확할 수밖에 없다. 정말 그럴까? 세상은 넓은 법이다. 거지들이 밥을 빌어먹을 수 없는 심신산골까지 퍼져 있지는 않다. 개방문도는 사람이 모여사는 세상에서만 소식을 주워들을 수 있다. 확인할 수는 있다. 무림문파이니만치 자신들의 촉각을 건드리는 소식을 접하게 되면 문도를 파견하여 진위여부를 알아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홍문성이 찾는 사람처럼 세상과 인연을 끊은 사람의 경우에는 개방문도라 할지라도 찾기가 힘들다. 사람이 모여사는 곳에 개방문도가 있다면 사람이 모여살지 않는 곳에는 또 다른 것이 있지 않을까? 약초꾼들은 적어도 산에 대해서만은 정통하다. 엽사(獵師)도 산에 대해 정통하고, 땅꾼이나 심마니도 산을 잘 알지만 약초꾼들보다는 못하다. 그들은 특정 목표만 찾아다니기 때문에 아무래도 관심에서 벗어난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마련이다. 약초꾼들은 특정한 목표가 없다. 어떤 때는 들에서 자생하는 들풀도 목표가 되고, 어떤 때는 세상에 있지도 않은 영약(靈藥)을 찾아 중원 천지를 헤매고 다니기도 한다. 그들이 보고 들은 모든 일은 약초상에게 집결된다. 약초꾼들이 캐낸 약초를 팔고 사는 곳. 그곳처럼 너스레를 떨기 적당한 곳이 또 있을까? 며칠 몇 날을 산 속에서만 지내다가 동종의 인물들이 모여 있는 곳에 섞여들었을 때 마음이 풀어지고 없는 이야기라도 하고 싶은 것은 인간이 지닌 속성 중 하나이리라. 홍문성은 약방문을 두드렸다. “산에 살면서 하는 일이 없고, 생활은 곤궁해 뵈지 않는 사람이라…… 허허! 그런 사람이 있나? 산에 사는 사람들이래야 화전민(火田民)이 전부인데 그런 사람들 생활이야 불을 보듯 뻔한 게지.” “약밀(藥密)을 통해 알아봐주시오.” “하하하! 이 사람이 어디서 헛소문을 듣고 왔구먼. 그런 것은 없네.” “내가 홍문성이오.” “……” 금화부 제일의 약초상인 명재옥(明材玉)은 움찔거렸다. 약초상들은 약초꾼들이 늘어놓는 헛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처음에는 단순히 약초(藥草)의 시세(時勢)를 가늠해 보고자 한 의도였고, 한 해 약초의 시가(時價)를 결정하는 결정적 기준이 되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한 집 두 집 서로가 얻은 정보를 교환하게 되고, 부(府)에서 가장 큰 약초상에 모여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정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또 있다. 약초는 각 성(省)에 따라 값이 다르다. 약초의 보고(寶庫)라는 사천성(四川省)에서는 길거리에 흔히 굴러다니는 약재도 절강성에서는 금값에 거래되는 경우가 흔하다. 대약상(大藥商)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각 지방에서 산출되는 약초의 작황(作況)을 정확히 파악하고 시세를 맞추고자 해서 탄생한 것이 밀약(密藥). 그러나 밀약은 처음의 뜻과는 다르게 중원 정세나 인물 동정까지 수집하게 되었다. 일을 하다 보면 곁가지가 따라붙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물론 조정이나 시중에는 철저히 비밀로 부쳐야 한다. 상인들이 단합했다는 소식이 돌면 감당하기 어려운 철퇴가 떨어진다. 조정에서 가해지는 압박도 감당하기 힘들지만, 서로의 신뢰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반인들과의 관계, 약초꾼들과의 관계에도 치명적인 해(害)가 된다. 그러나 밀약에 대한 소문은 돌았다. 대약상들이 모였다는 자체만으로 소문을 만들어내기는 충분했다. 조정에서는 감찰(監察)을 파견하여 진상을 조사했고, 한때에 불과하지만 약초꾼들이 약초상을 통하지 않고 일반인과 직거래하는 풍조까지 만연했다. 밀약은 드러나지 않았다. “창화성의 홍문성이 바로 당신?” “적염(赤髥) 옹(翁)과는 안면이 있는 사이요.” 적염은 명재옥의 부친으로 수염이 붉은색이라고 해서 붙여진 작호(綽號)다. “말은 많이 들었소만, 미쳐서 행방불명됐다고 하던데……?” “내가 미친 것 같소?” “……” 명재옥은 눈을 반짝였다. ‘의심하고 있군. 산전수전 다 겪은 적염에 비하면 한 수 아래.’ 홍문성은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홍문성은 걸음마를 배울 때부터 약초상에서 일했다. 그는 유독 눈썰미가 예리했고, 수많은 약초를 한눈에 식별할 만큼 총명했다. 약초의 종류뿐만이 아니라 품질까지 판별해 냈다. 열두 살…… 여느 아이 같으면 서당에나 갈 나이에 그는 장부(帳簿)를 잡았다. 약초상의 전권을 거머쥐게 되고, 분가(分家)하여 독립하고, 창화성 제일의 약초상으로 키우기까지…… 홍문성은 순풍에 돛 단 배처럼 매끄럽게 나갔다. 총명함만으로 이룰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을 대하는 노련함이 묻어 있지 않고는 대약상으로 발돋움하기 힘들다. 약초상들의 세계야말로 단단하게 정체되어 있어서 좀처럼 위계질서가 무너지는 법이 없으니까. 혈로(血路)라고 하면 혈로라고 할 수도 있는 길을 젊은 나이에 뚫고 지나온 홍문성에게 명재옥은 나이는 많지만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그의 부친 적염이라면 또 모르겠으되. “밀약이 나의 죽음을 확인하지 않고 창화성 대약상을 선정한 것은 대실수라고 생각하오만. 아마…… 대약상께서도 동조를 하셨겠지요?” “선친 때의 일이라……” 명재옥은 얼버무렸다. “이쪽으로 다시 돌아올 생각은 추호도 없소이다. 밀약에 대한 기억도 사라진 지 오래요.” “밀약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옛날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런 수가 통하지 않는 세상이죠.” 명재옥의 말투가 어느새 바뀌었다. 창화성의 홍문성이라면 그도 무시할 수 없었으리라. “이곳이었죠? 칠 년 전에 대약상들이 모인 곳이? 호심정(湖心亭)에서 감상하는 서호(西湖)의 야경(夜景)은 가히 일품이었죠. 그때도 세상 사람들은 대약상들이 모였다는 사실조차 몰랐죠. 하하하! 그렇게 감쪽같이 움직이니까 모두를 속일 수 있는 겁니다.” “단 하나, 백문장을 건축한 인물이 누구인가만 알아주시오. 어디에 사는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홍문성은 망설이는 명재옥에게 일침을 가했다. 공갈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대약상으로 밀약에 참여했던 홍문성이고 보면 밀약의 움직임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알고 있다. 그런 사람이 딴마음을 품는다면 파장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지리라. ‘망설이겠지. 죽여서 입을 막을 것인지, 소식을 알아봐줄 것인지. 이번 한 번으로 족할 놈이라 생각되면 알아봐줄 것이고, 진드기라 생각되면 살인멸구(殺人滅口)를 택하겠지. 이놈의 목숨…… 오늘이 고비군.’ 홍문성은 물러나왔다. 기관건축(機關建築)의 달인(達人) 마부영(馬富榮). 그의 존재는 드러났다. 그가 동양강(東陽江)의 지류(支流)인 화계(畵溪)에 살고 있는 것도 다행이었다. 백문장에서 과히 멀지 않은 곳이라는 점은 천운(天運)이었다. 홍문성은 눈보라가 빗발치는 궂은 날씨를 뚫고 화계로 달려갔고, 마부영을 데려왔다. 그를 설득하는 일은 간단했다. “백문장에 기관이 설치되어 있다는 것을 압니다.” “크크! 백문장 사람이 백문장에 설치된 기관을 모른다면 말이 안 되지. 그래서 어쨌다는 말인가?” “만약 광 총관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죽었다면, 백문장 식솔들 중에 기관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낯선 외인이 백문장을 흘끗 쳐다보고 기관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알아냈다면…… 아무 문제도 안 된다는 겁니까?” 홍문성이 말을 하는 중간중간 마부영의 안색은 검은 갈색 빛을 띠기 시작했다.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현임 총관으로 있는 갈천상이라는 사람입니다.” “한눈에 기관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알았단 말이지.” “이런 말도 했습니다. 기관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면 희대의 사기꾼이라고.” “사기꾼? 어허허! 허허허허허!” 마부영이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일다경(一茶頃)이면 충분했다. 쫦 쫦 쫦 “나보고 백문장 기관을 운용하라 이건가?” 마부영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갈천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하리라 생각하나?” “여기까지 왔으니 둘 중 하나를 보게 되겠지. 이십여 년 전에 완성한 일대의 걸작이 실없이 무너지는 꼴을 보든가, 아니면 얼마나 잔인하고 무서운 일을 했는가 깨닫게 되든가.” “건방진 노옴……!” “나는 느꼈소. 이 백문장…… 들어올 수는 있어도 나갈 수는 없는 용담호혈이오. 그건 기관을 알고 있다 해도 변함이 없소. 당신은 기관도해(機關圖解)가 유출될 것까지 가정하고 기관을 설치했소. 그렇지 않소?” “크크크!” “백문장의 중심은 취운각. 조 장주는 상당히 애처가(愛妻家)였던 것 같은데, 무인에게는 흔치 않는 감상이지. 앞으로 사흘이 지나고 난 뒤, 내가 무극전에 들어가겠소.” “기관을 뚫겠단 말이냐?” “사람이 왜 사람인 줄 아시오?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이오. 완벽하다고 자부할 뿐이지.” “……” “분명히 말했소. 나는 기관을 파해할 수 있다고. 기관이란 것은 소모품도 들어가게 되어 있는 것. 재설치하는 데 사흘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우허허허허! 재미있는 말이군. 좋아. 해주지. 취운각이 백문장의 중심이란 것을 알아본 것만으로도 상당한 눈이야. 눈썰미가 보통 예리하지 않아. 기관을 움직여주겠어. 허허허! 오늘 피를 뿌릴 대상은 누군가?” “사대 패강.” “잡종들이군. 갑자기 흥미가 가셔.” “후후! 당신은 사대 패강을 상대할 수 있고, 나는 당신을 상대할 수 있소. 그런데 사대 패강이 나를 누르고 있으니, 세상은 이래서 물리고 무는 것이오.” “네 말이 빈말이 아니기를 바란다. 만약 빈말이라면 내 손으로 내 흔적을 모두 지워버리겠어.” 마부영은 실실 웃었다. 쫦 2 쫦 “이건가?” “급히 그렸지만…… 검토해 봤는데 한 치의 틀림도 없습니다. 백문장이 이 정도라면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홍문성은 자랑스럽게 지도 십여 장을 내놓았다. “마부영은 어디 있나?” “기관을 움직이러 갔습니다. 발동시간은 오늘밤 자시(子時). 자시부터 사흘 동안 죽음의 장원이 될 것이라는 말만 남겼습니다.” “후후! 결국 나보고 기관을 해제하라는 말이군. 재설치조차 필요없다는 말인데……” 갈천상은 쉽게 떠올리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감탄이었다. “지금 군웅들하고는 누가 있소?” “장주와 조 소저, 이처장 오경과 삼처장 방삼이 있소이다.” “음……! 백문장에서 기관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곳은 정문 옆에 있는 취휴각. 휴전주, 군웅들을 취휴각으로 인도하시오.” “술자리가 깨지겠군. 이제야 흥이 돋는 모양이던데.” 박우가 못마땅한 듯 말했다. 그는 평생을 붓과 더불어 살아온 사람인 만큼 무림인들의 피비린내나는 싸움과는 천성이 맞지 않았다. 무극전에서 위엄있게 말한 것은 그의 본성이었지만, 지금처럼 명령을 주고받는 것에는 익숙하지 못했다. 또한 움직이는 시기를 판단하는 것도 늦었다. 그는 지금 움직여야 한다. 군웅에게 취휴각으로 자리를 옮기자고 하면 틀림없이 반발이 나오리라. 이미 술에 취해 엎드려 자는 사람도 있으리라. 박우는 그런 자리를 모른다. “지금 가시오. 혹,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이 있다면 한 마디만 하시오. 백문장에게 검을 들 용기가 있으면 남아 있으라고. 틀림없이 움직일 거요.” 박우가 고개를 끄덕인 후, 동각을 빠져 나갔다. “내각주는 백문장 사람들을 빼내시오. 여자는 취운각에, 사내는 연화각으로. 사흘 치 식량도 준비시키고, 사흘 동안 한 걸음도 나오지 못하도록 단단히 주의를 주시오.” “알았습니다.” 운단서 역시 평생 다도에만 일념한 만큼 무림이란 곳이 몸에 맞을 리 없었다. 그래도 명령을 듣자마자 경쾌한 걸음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젊다는 이유 때문이리라. 남은 네 사람은 마부영이 그려놓고 간 지도(地圖) 십여 장을 앞에 놓고 머리를 맞댔다. 갈천상, 홍문성, 마임호, 전인수. “흠! 재미있는데. 기가 막힌 건축술이야. 마부영, 그 노인…… 대단해. 광량이라는 자도 보지는 못했지만…… 아니군, 미쳐 있을 때 봤겠군. 대단한 지략을 지녔던 자인 것 같아. 백문장 이거…… 안에서 틀어막으면 백만대군도 막아낼 철벽 요새야. 아까웠겠군. 이렇게까지 만들어놓고 써먹지도 못하고 죽어서……” 마임호였다. 그는 백문장 전체가 그려진 지도 한 장을 들여다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딘가?” 갈천상도 다른 지도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아무리 철벽 같은 곳이라도 틈은 있게 마련이죠. 히히! 나 같으면…… 이리로 들어오겠소.” 마임호가 대문과 취휴각 사이를 손으로 짚었다. 정문과 가히 멀지 않은 곳이다. 정문에 사람이 항상 있다고 가정하면…… 그래도 담을 넘기가 수월하다. 그곳은 큰 나무들이 그림자를 가려주니까. “함정이란 게 한눈에 보이는데, 그리로 들어온단 말이오?” 홍문성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히히! 함정이란 것은 상황에 따라 바뀌는 거지. 지금 백문장 실정으로는 사방이 열려 있지만, 그래도 부자 몸조심하는 격으로 조심을 기한다면 역시 이곳이야.” “자세히 설명을 좀……” “그럴 시간 없어.” 갈천상이 홍문성과 마임호의 이야기를 끊었다. 마임호가 홍문성을 한번 흘깃 쳐다본 다음 다시 말을 이어갔다. “담을 넘어서 제일 먼저 생각되는 것이 지붕을 타는 것인데 그러면 함정에 걸리고…… 취휴각에 몸을 붙일 수도 있는데 광량이 그 정도 생각 못 할 사람이 아니고…… 그렇다고 담벼락에 붙어서 이동하는 것도 함정에 걸릴 것 같고…… 이런 거지. 함정이라 생각되는 곳은 사방이 막혀 있게 마련이야. 기관(機關)을 설치해 두었다면 어디로 움직이든 걸려들게 되어 있어.” 마임호는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런 곳에서는 정중동(靜中動). 움직이지 않는 게 상책이지. 가만히 있으면 돼. 다른 사람이 지나갈 때까지. 사람이란 동물은 요물이어서 함정을 만들기도 하지만 풀어주는 역할도 하거든.” “사람이 움직이면 틈이 생긴다?” “뒤만 따르면 문제없습죠. 사람이 움직인다는 것은 기관이 해제되었다는 증거니까.” “음……! 다음은?” “취휴각을 벗어나면 사방이 구멍입니다요. 그야말로 내 세상입죠.” 마임호는 도둑 입장에서 백문장을 하나하나 풀어나갔다. 무극전으로 침입하기 용이한 경로. 취운각으로 접근하려면? 연화각에 있는 물건을 훔치려면? 각 전각마다 중요한 보물이 있다고 산정하고, 도둑이라면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에 모든 초점을 맞춰 행보를 그려냈다. 광량은 정말 뛰어난 책사다. 마임호가 움직이려 하는 곳에는 어김없이 함정이 설치되어 있고, 마임호 역시 함정이 설치되어 있다는 것을 예측해 냈다. 마임호가 그려낸 행로는 한마디로 막는 자와 뚫는 자의 싸움이었다. “……천지인(天地人). 하늘을 나는 신선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한정되어 있는 것입죠.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보물을 훔칠 수 있는지?” “정말 대단하군, 대단해.” 복자 전인수가 감탄을 터트렸다. 마임호는 지도 한 장밖에 보지 못했다. 도둑이 물건을 훔치려고 작정했다면 백문장에 관한 지도 한 장쯤은 준비하는 게 기본이리라. 그것이 마임호의 손에 들려진 지도다. 다른 사람이 보고 있는 지도에는 기관(機關)까지 상세하게 그려져 있지만, 마임호가 보고 있는 지도에는 단지 건축만이 그려져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마임호는 광량과 마부영이 설계한 모든 기관을 파해하고 전각에 접근했다. “결국은…… 광량이 한 수 위군.” 갈천상이 엉뚱한 소리를 했다. 마임호는 그런 갈천상을 힐끗 쳐다본 후, 쓰디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제길!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서 무가(武家)는 터는 게 아닙죠. 무인들을 상대하려고 만든 기관에 좀도둑이 덤빌 수야 있는감요?” 복자 전인수도, 홍문성도 지도만 들여다볼 뿐 입을 열지 않았다. 마임호의 한계는 보물을 훔치는 데까지다. 광량이 보물을 훔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기관을 발동시킨다면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 꼴이 되고 만다. 빠져 나갈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이 움직이면 틈이 생긴다? 그 말도 무용지물이다. 광량이 작심하고 기관을 발동시킬 적에는 그에 대한 방비도 되어 있을 테니까. 거기에 오백여 명에 이르는 문도가 요소요소를 지킨다면 용담호혈(龍潭虎穴)이지 않은가. 전임 백문장주 조항이 죽기 전에 백문장의 위세가 어떠했는지 여실히 알 수 있었다. “움직인다. 이전주, 중문(中門)이다. 움직일 수 있는 반경은 이(二) 장(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이 장을 벗어나면 죽는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합니다.” 이전주의 음성은 쌀쌀했다. 그는 깡마른 해골 사내와 함께 동각을 벗어났다. “삼전주, 후원(後園)이다. 움직여라.” 독목섬전 추량을 죽인 여인이 일어섰다. 그녀가 일어서자 밖을 경계하고 있던 사람들 중에 여인 두 명이 따라 일어섰다. 그녀와 함께 부엌에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주목을 받지 못한 여인들이다. 우선 생김새가 주목을 받지 못할 만큼 평범하다. 무인들 틈에 섞여 있다면 모든 사람의 이목을 한 몸에 끌었으리라. 하나 부엌에서는 다르다. 그녀들은 무림인들보다는 찬모들과 더 잘 어울렸다. 평생 들일만 하면서 살아온 시골 아낙처럼 햇볕에 검게 그을리고 거친 피부. 입고 있는 갈의가 썩 잘 어울리며, 여느 시골 아낙들이 그렇듯이 모양새를 꾸미고 살아본 적이 없는 듯하다. 여인이라면 당연히 관심을 가질 몸매도 관리를 하지 않았는지 볼품없이 뚱뚱했다. 그런 여인들이 허리에 검을 차고 일어섰다. 무공 실력은 어떤지 몰라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사전주, 송림(松林)으로 들어가라. 살아…… 오기 바란다.” 낙화선인, 일명 구지자라 불린 사람의 척추를 베어버린 사내가 일어섰다. 그는 파안대소(破顔大笑)부터 터트렸다. “파하하하핫! 살아오기 바란다고? 그거야말로 그대답지 않은 말이군. 그대가 언제 사람이 살고 죽는 것에 신경이나 썼던가? 술에 찌들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세상이 달라 보인다는 소리 따위는 아니겠지? 앞으로 길게 얼굴을 보아야 할 것 같은데…… 서로 마음에 없는 소리는 하지 말자고. 서로 피곤하니까.” 말을 하지 않았을 때는 몰랐는데 막상 말을 하기 시작하자 유창한 달변이었다. 말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고수의 기개가 뭉실뭉실 피어올랐다. 강직한 사내였다. “가자.” 사내를 따라나선 무인은 모두 세 명. 모두 뚱뚱한 사내보다 나이는 적지만 크게 차이는 나지 않는 것 같았다. 어찌 보면 생김새도 비슷하고…… 한 형제 간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닮은 점이 많았다. “다음은 내 차례군. 나는 어디지?” 멸절신장 홍학을 죽인 텁석부리 사내가 나섰다. 체격은 사전주와 비슷했다. 약간 튀어나온 배, 단단해 보이는 몸. 하나 뚱뚱한 사내가 지혜롭게 강직하다면 텁석부리 사내는 무식하게 우직해 보인다는 편이 옳을 것 같았다. “연당(蓮塘`:`연못).”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곳인가?” “운이 좋으면.” “지미럴! 보아하니 파리만 날리면서 밤이슬을 맞게 생겼군. 거기서 사흘 동안이나 죽치고 있으라?” “사공진(四空陣)을 꺾을 자신이 있나?” “풋!” 텁석부리 사내는 비웃었다. “다행이군. 만약 적을 만나게 된다면 사공진을 뚫고 나온 인물, 목숨을 내놓아야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사내의 눈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호쾌한 싸움을 생각했는데…… 더러운 싸움을 하게 생겼군. 퇘엣! 가자!” 텁석부리 사내는 누런 가래침을 내뱉은 뒤 뒤도 안 돌아보고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사내 네 명이 뒤따랐다. 역시 하인들 속에 섞여 있던 인물들이다. 조자경도 그들은 보지 못했다. 그들의 얼굴은 한결같이 도검(刀劍)에 찔리고 베인 상처로 가득했다. 가장 성한 자가 왼쪽 미간(眉間)에서 시작해 코뼈를 가르고 오른쪽 입술 위까지 그어진 상처를 지니고 있는 것. 웬만한 사람이라면 그들의 눈빛만 보고도 싸울 의욕을 잃고 말리라. 무공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그들이 말만 걸어도 지레 겁을 집어먹으리라. 사나운 자들이었다. 그래서 방삼은 그들을 고용하면서도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마방(馬房)의 일거리를 맡겼다. 어지간하면 고용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반쪽짜리 동전을 내미는 사람은 무조건 고용하라는 갈천상의 지시가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고용한 사람들이다. 백문장 식솔들이 모두 부엌에 모여 있을 때, 그들은 말똥 냄새가 진동하는 마방에서 하객(賀客)들이 타고 온 말들에게 건초(乾草)를 주고 있었다. 그러니 보지 못할 수밖에. 그들이 빠져 나가자 동각은 텅 빈 곳간처럼 썰렁했다. 갈천상, 홍문성, 마임호, 전인수…… 네 사람만이 먹물이 마르지도 않은 지도 십여 장을 가운데 놓고 마주앉았다. “모두 십전주라고 들었소만……” 복자 전인수가 말끝을 흐렸다. 갈천상은 마임호에게 그랬듯이 제정신을 찾은 모두에게 백문장을 도와 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그러면서도 철저한 상명하복(上命下服)을 요구했다. 도와줄 것 같으면 과거를 깨끗이 잊어버리고 백의종군(白衣從軍)한다는 심정으로 도와줄 것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가고 싶은 대로 가도 좋다는 배짱 좋은 부탁이었다. 모두 부탁을 들어주었다. 갈천상이 내건 조건은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들었다. 하나 평생 입어온 옷을 쉽게 벗어던질 수는 없는 일. 상명하복 관계까지는 어떻게 해보겠는데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 존댓말을 하는 것은 너무 어색했다. “마임호가 팔전주, 그대가 구전주요.” “음……! 적게는 두 명에서 많게는 이백 명이라고……” 전인수가 무극전에서 들은 말을 그대로 읊었다. “봤겠지만…… 이전은 두 명이오. 삼전은 세 명, 사전은 네 명, 오전은 다섯 명. 현재는 이것이 전부요.” “맙소사!” 마임호가 기가 막힌 듯 입을 쩍 벌렸다. 군웅들을 비롯한 모두가 감쪽같이 속았다. 갈천상은 장주뿐만이 아니라 절곡에 있던 사람들에게까지도 일의 전모를 말해 주지 않았다. 모든 것은 휴전주 박우의 입을 통해 밝혀졌지만, 박우가 입을 열기까지는 모두가 총관, 내총관, 외총관 하는 식으로 그렇게 백문장 직위가 구성되는 줄 알았다. ─`적게는 두 명에서 많게는 이백 명…… 자신을 얻을 수밖에 없다. 낯선 사람들이 나타나 소란을 일거에 잠재우고 난주일검까지 무능력하게 만들고, 사대 패강에서 파견된 무인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으니, 실제로 그만한 인원이 있다고 믿었다. 그들이 언제 나타났으며, 어디에 있는지는 추측조차 하지 못하면서. 현재, 무극전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군웅들도 그렇게 알고 있지 않는가. “칠전주는 마부영이 될 것이고, 육전주는 나중에 소개하겠소.” 실질적으로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은 이전주부터 오전주까지 열네 명에 불과하다는 소리다. 아니, 갈천상까지 열다섯, 장주와 조자경, 시녀 네 명과 마임호까지 모두 통틀어 봐야 스물두 명에 불과하다. “낄낄! 정말 다행이군. 건곤방과 천력문이 그런 줄도 모르고 꼬리를 말았으니. 그놈들이 데리고 온 놈들만 해도 우리 쪽보다 훨씬 많은데. 낄낄! 나중에 이 소식을 들으면 배가 뒤틀려 뒈지겠군.” 마임호의 얼굴빛은 어두웠다. 그는 건곤방과 천력문이 물러갔지만 철응방에서 파견된 다섯 무인이 있고, 암중에 숨어 있는 비살문 고수들이 있는 한 싸움은 쉽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살아…… 오기 바란다. 갈천상이 사전주에게 했던 말이 귓가에 빙빙 돌았다. 갈천상이 일어나 동각을 나서는 것도 모르고. 쫦 3 쫦 “추풍검(追風劍) 고도(高到)를 죽였다고 했나?” “네.” “냉혈검 고표의 팔을 자르고?” “네.” “조자경이 겁간을 당하기 직전이었다고?” “네.” “그게 한 달 전이란 말이지?” “……” “하하하!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한 달 전만 해도 고가촌에 찾아가 힘을 보태 달라고 애걸하던 백문장인데 오늘은 우리를 숨도 못 쉬게 하고 있다? 믿고 싶나?” “믿어야 합니다.” “나는 믿고 싶지 않은데 어쩌지?” “……” “뒷골은 살수들에게 가장 좋은 표적이고 또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하지. 갈천상이란 놈! 감히 내게 경고했어. 뒤통수를 조심하라고. 하하하!” “그뿐만이 아닙니다. 난주일검을 상대하던 계집도 뛰어났지만 갈천상이란 자는 더욱 무섭습니다. 놈은 제 사(四) 검(劍)을 모두 막아냈습니다.” “그래?” “소문주님께 무례를 저지른 놈은 살려둘 수 없다. 이게 제 생각입니다.” “그런데 왜 살려뒀지? 갈천상이란 놈이 죽었나?” “……” 큰 키에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검은 사내, 일흑이다. 그와 이야기하는 사람은 역시 큰 키에 대단한 미장부(美丈夫)다. 일흑은 최대한 공경스런 자세로 말하고, 미장부는 거만하면서도 당당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농담이야. 너무 맘에 두지 마. 그러나저러나 대단하군. 그대의 암습을 네 번이나 막아낼 정도라면. 무극전이었나?” “추량이 죽은 직후였습니다.” “암습을 가할 생각도 안 났다 이거지?” “가했으면…… 제가 죽었습니다.” “음……!”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갈천상이란 자는 노리는 부위까지 정확히 읽어냈다는 겁니다.” “……” “인영혈(人迎穴`:`턱밑 목에 있는 경혈)을 노리자 우수(右手)를 가슴 위까지 끌어올렸습니다. 노리는 점을 약간 위로 올려 화료혈(禾穴`:`인중 옆)로 정하자 팔짱을 꼈습니다. 등을 노리기로 했습니다. 대추혈(大椎穴`:`척추 제일골)을 노리자 기둥 옆으로 몸을 틀었고, 근축혈(筋縮穴`:`척추 제구골)을 노릴 때는 검을 등 뒤로 돌려 막았습니다. 그 뒤…… 암습을 포기했습니다.” “그 말을 믿으란 말야?” “저는 거짓말을 모릅니다.” “꿈꿔 본 적 없어?” “……?” “꿈이라고 생각해. 그럼 해볼까?” 미장부는 길게 기지개를 켰다. “작정하셨습니까?” “네가 하라고 시켰잖아.” “……?” “일흑, 너는 너무 자세히 말했어. 단순히 ‘살기를 감지하고 몸을 움츠리더라’ 이 정도로 끝냈어야지. 살기로 노리는 혈도까지 읽어내는 인물이라면…… 후후후! 연공 결과를 시험하는 상대로는 적당하잖아?” “좋습니다. 저희들이 앞서겠습니다.” 일흑은 미장부의 말을 거역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일흑, 넌 언제나 건방져.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내 대신 죽겠다는 건가? 후후후! 건방 떨지 말고 뒤로 빠져.” 일흑의 검은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음성도 굳은 얼굴만큼이나 경직되었다. “철없는 소문주.” “뭐?” “이래봬도 백 번에 걸친 살업(殺業) 중 단 한 번의 실수도 하지 않은 몸이오. 내가 죽이고자 해서 죽이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소.” “하하하! 상대가 약한 탓이지. 안 그래? 건곤방주, 철응방주, 천력문주…… 죽일 생각이나 해봤나?” “말을 끝까지 들엇!” 미장부는 말해 보라는 듯 입을 다물었다. 입가에 머물러 있는 웃음은 지워지지 않았다. 일흑이 처음으로 하극상(下剋上)을 하고 있어도 나무라지 않았다. 비살문 문규로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내가 처음으로 물러섰어! 강호상에서 살기를 감지하는 자는 많지만 살기만으로 노리는 부위까지 판단할 수 있는 자는…… 소문주, 명심하십시오. 선봉에 서서 목숨을 돌보지 않고 싸우는 장수가 있는가 하면 뒤에서 뛰어난 맹장(猛將)들을 부리는 장수가 있는 법입니다. 좀더 큰 사람이 되십시오.” “하하하! 유언처럼 들리는데? 너무 걱정하지 마. 백문장에 들어와서 그런 소리를 한다면 정작 건곤방이나 천력문에 들어가서는 무슨 소리를 할 거지? 뒤로 물러서라. 이건 명령이다.” 일흑이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았다. 미장부도 물러서지 않고 마주보았다. “내가 죽으면 너도 죽어. 그럼 네 임무는 다하는 거야.” 미장부의 마지막 말이 효과적이었는지 일흑이 물러섰다. “이건 너무 위험해.” 비영(飛影)이 말했다. “건곤방도 갔고, 천력문도 갔어. 우리가 물러선다고 해도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철곤(鐵棍)도 같은 의견이었다. “소문주는 너무 호승심이 강해. 물러설 때와 싸울 때를 구분하지 못해서 탈이야. 이번에는 물러설 때야. 갈천상이라는 자도 그렇지만 무극전에서 네 명을 죽인 연놈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알지 못하는 상대와 싸운다? 미련한 짓이지.” 칠살수(殺手)도 반대의견이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생기면 문주님께 면목이 안 선다. 건곤방과 천력문이 물러섰는데 비살문만 당했다면……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사대 패강의 입지가 달라질 수도 있는 큰 문제야. 반대다.” 화검(火劍)의 말. 모두가 반대의견이다. “소문주와 일음마봉 무기와 얼마나 차이가 나지?” 일흑이 화제에 어울리지 않는 엉뚱한 소리를 했다. “응? 무슨 차이?” “나이 말야.” “일음마봉이 스물일곱일걸? 소문주보다 두 살 많을 거야. 그건 왜?” 비영이 무슨 엉뚱한 소리냐는 듯 질책 섞인 음성으로 물었다. “두 살 차이라…… 일음마봉은 물러섰는데 소문주는 부딪치려 하고 있어. 비슷한 연배에 어쩌면 이렇게 차이가 나는지.” “일음마봉의 심계(心計)는 알아주잖아? 늙은 구렁이 못지않다고 소문이 자자해. 그런 자이니 물러설 수밖에. 득이 되지 않는 싸움은 죽어도 하지 않는 인간이야.” 칠살수가 일흑의 심정을 이해한 듯 말했다. “바로 그거야. 소문주의 심계 또한 만만치 않아. 그건 모두 겪어봐서 아는 일이고. 그런데도 여기서는 부딪치려고 해. 일음마봉과는 가는 길이 다른 거야.” “음……!” “우리 모두의 의견이 똑같아. 이 싸움은 해서는 안 돼. 백문장이 겁나는 것은 아니지만 길(吉)보다는 흉(凶)이 많아. 나는…… 해보자는 의견이야. 해보자.” “뭐?” “우리 모두가 백문장에 뼈를 묻는 한이 있더라도 이 싸움은 해야 돼. 철응방이 뒤통수를 후려칠 테니 이겨도 득이 안 되고, 지면 개망신당하는 싸움이지만…… 한 가지 얻는 게 있어.” “그게 뭔데?” “소문주. 소문주를 얻을 수 있어. 이기든 지든 이번 싸움으로 소문주는 크게 성장할 거야. 일음마봉 따위는 상대가 안 되는. 치열한 싸움, 득이 되지 않는 싸움을 해본 사람하고 안 해본 사람하고는 상대가 안 돼.” “음……! 우리의 예감이 맞다면 우리 중…… 최소한 두세 명은 죽어. 그만한 가치가 있나?” “있지. 문주님 대(代)에서는 사대 패강의 균형을 무너트리지 못했지만 소문주가 비살문을 이어받으면 절강성 패권을 차지할 테니까. 문주님보다 더 큰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야.” “장담해?” “소문주는 갈천상이라는 인간을 보고 난 다음 투지를 불태우고 있어. 무인 대 무인으로 겨루어보고 싶은 투지지. 아무 이해관계가 섞여 있지 않는 순수한 투혼이야. 이번 싸움의 결과에 상관없이 소문주는 큰 사람이 될 거야. 장담해.” “좋아. 그럼 하자.” 비살문 십대고수 중 다섯 사람의 의견이 합쳐졌다. 비살문 고수들은 백문장이 봉쇄된다는 시간, 자정까지 무극전에 남아 있기로 했다. 휴전주 박우는 말했다. 백문장을 시험해 보고 싶은 사람만 무극전에 남아 있으라고. 소림에 가서는 불법(佛法)을, 무당에 가서는 도법(道法)을 따라야 한다. 각 문파에는 문파마다 지닌 법규가 있고, 손님들은 법규를 따라줘야 한다. 갈천상과 싸우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군웅들과 함께 취휴각으로 물러나 갈천상과 직대면하는 일이고, 또 하나는 백문장의 경고를 무시하는 것이다. 소문주는 좌정(坐定)을 하고 운공조식(運功調息)으로 진기를 가다듬고 있다. 백문장 인물들만 상대하려는 것이 아니라 백문장 전체와 결전을 벌일 각오다. 만약 소문주가 갈천상에게만 집요하게 집착했다면 일흑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막았으리라. 그건 인간에 대한 애증(愛憎)이지, 큰 사람으로 도약하는 씨앗이 될 수 없으니까. 백문장에는 기관이 설치되어 있다. 어디서 어떤 공격이 펼쳐지리라는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하지만 백문장에 미증유의 압력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진작에 깨달았다. 그들은 이런 종류의 압력에 대해서는 잘 안다. 기관. 살수업을 하면서 종종 겪은 일이기 때문에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백문장에 잠입할 때부터 전각 배치를 보고 짐작했으니까. 알 수 없는 기관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뭉쳐 있는 백문장. 소문주는 죽음의 신이라고 불리고, 소문주와 동행한 고수들도 비살문 십대고수에 속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몸 하나 빠져 나가는 것만도 천운이리라. 다섯 사람은 소문주처럼 좌정을 하고 운기조식으로 진기를 가다듬었다. 자정까지는 아직도 한 시진 정도가 남았으니 몸의 상태를 최극상으로 끌어올리기에는 충분하다. 파앗! 파파파파팟! 첫 번째 공격은 담벼락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중문과 느티나무가 서 있는 곳, 살수들이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곳에서 하늘을 가득 덮은 은비늘이 가공할 속도로 폭사되었다. 파라라락……! 비살문 고수들의 반응도 신속했다. 다섯 고수가 피풍의(避風衣)를 활짝 펼쳐 내자 물샐틈없는 방어막이 형성되었다. 비살문 문도는 항시 피풍의를 지니고 다닌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에는 물론이고, 폭양이 이글거리는 한여름에도 걸치지는 못할망정 지니고는 다닌다. 피풍의는 다용도로 쓰인다. 밤에는 밤이슬을 피할 수 있는 이부자리로, 피풍의 양 끝에 나무를 묶어 강을 건널 수 있는 뗏목 대용으로, 은신이 필요할 때는 위장막으로, 그리고 지금과 같을 때는 호신용으로 아주 유용하게 쓰인다. 슈욱! 은비늘 공격이 끝나기 무섭게 땅이 불쑥 솟구쳐 올라왔다. 아니다, 땅이 아니라 창날들이다. 날이 시퍼런 창날은 마치 비살문 고수들이 그 자리에서 피풍의를 휘두를 줄 알았다는 듯 정확히 서 있는 자리에서만 솟구쳤다. “상상 이상이군!” 비영이 제일 먼저 허공으로 솟구치며 말했다. 예상했던 공격이다. “맞아. 이 정도면 철응방보다 한 수 위야.” 철곤이 신형을 띄우며 맞받았다. 패앵! 패애앵……! 귀를 간질이는 소리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비살문 무인들이 허공으로 몸을 솟구치기가 무섭게 매화표(梅花　)가 한 무더기나 쏟아졌다. 파라라락……! 칠살수가 몸을 한 바퀴 뒤틀자 몸에 걸치고 있던 피풍의가 활짝 펼쳐지며 매화표를 감싸안는 듯했다. 비록 의표를 찌르는 기습이었지만 암기(暗器) 몇 개로는 비살문 고수들을 어찌할 수 없어 보였다. 칠살수가 매화표를 떨구어냈을 때 칠살수를 제외한 다른 비살문 고수들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은형술(隱形術)이다. 주변 지형을 이용해 감쪽같이 몸을 숨기는 방법으로, 비살문에서는 은형술을 익히는 데만 사 년의 세월을 소모한다. 칠살수는 중문 앞에 내려섰다. 그는 표적이다. 암기가 계속 발사될 것인가. 한 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다. 지금과 똑같은 형태로 암기가 발사된다면 기관을 작동하는 사람이 없다는 증거다. 그런 종류의 기관들은 일종의 함정과 같아서 건드리지 않으면 작동하지 않는다. 암기가 발사되더라도 한 사람을 곤혹스럽게 만들 정도의 양이거나, 암기가 발사되지 않는다면 사람이 있다는 증거다. 누군가가 암중에 숨어서 기관을 작동시키고 있다. 그럴 경우…… 그가 어디에 숨어 있느냐를 파악해 내는 것이 관건이다. 괴수는 머리를 쳐야 한다. 기관을 작동시키는 인물이 있다면 그를 죽이면 그만이다. 암기는 날아오지 않았다. “여기서 한 명만 죽어주지 않겠나? 한 명만 죽어주면 돼.” 칠살수는 씹어뱉듯이 말하며 다가서는 인형을 주시했다. 잘생긴, 그러나 어쩐지 정이 쉽게 가지 않을 것 같은 무인. 낯익다. 무극전에서 구음의 심장에 비수를 틀어박았고, 해골 같은 놈과 함께 백문장의 무공이라며 합격술(合擊術)을 선보인 놈이다. 뭐라고 했더라? 이전주라고 했나? 외인(外人)이 나타났는데도 암기는 발사되지 않는다. 기관을 조정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고, 적아(敵我)를 판별해 내고 있다. 이럴 경우…… 비살문 고수들은 싸움에 끼여들지 않는다. 설혹 칠살수가 죽는 경우가 발생해도. 대신 그들은 암중에 숨어서 기관을 작동하는 인물을 찾아낼 것이고, 죽이리라. “나를 죽여봐.” 칠살수는 자신에게 칠살수(殺手)라는 작호를 안겨준 곡도(曲刀)를 꺼내들었다. 제1권 요화요야전(燎火燎野田) 요원의 불길이 들판을 사르니 2권에서 계속… 第九章 증허희(曾`:`거듭 흐느껴 운다) 쫦 1 쫦 이전주와 해골 사내, 그리고 칠살수. 찬바람만 쓸쓸하게 몰아치는 중문 앞에서 세 사람은 차분하게 마주섰다. 길을 가다 무심히 마주선 듯한, 서로에게 아무런 적의(敵意)가 없는 듯한 대치였다. 그들 손에 병장기가 들려 있지 않다면 곧 싸움이 일어나리라고는 짐작조차 못 할 고요함이었다. 달빛은 비치지 않았다. 밤은 자정을 넘어섰다. 칠흑 같은 어둠이 사위를 물들였지만 어둡지는 않았다. 하루 종일 펑펑 쏟아진 눈이 희미한 밝음을 선물해 주었다. 여기저기…… 땅에서 솟구친 창날이며, 세우침(細雨針), 매화표가 횅댕그렁하게 널려 있다. 칠살수는 곡도에 진기를 가득 주입했다. 곡도를 잡은 손에서 넘쳐 나는 힘이 느껴진다. 곡도는 금방이라도 피를 부를 듯이 요동치고, 전신은 솜털도 곤두설 만큼 짜릿한 흥분으로 가득했다. 칠살수는 이런 느낌이 좋았다. 사람을 죽이기 직전에 느껴지는 이러한 흥분은 세상에서 다시없을 쾌락을 안겨주었다. 술이나 계집에서 얻는 쾌락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곡도가 사람 살을 파고드는 느낌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지만 죽이기 직전에 느끼는 흥분에 비하면 한 수 떨어진다. 이런 종류의 흥분은 적이 강할수록 더욱 강렬해진다. 죽음은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추호도 해보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어떻게 검을 든단 말인가.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반드시 적을 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해야만 검을 들 수 있다. “혹자는…… 양의검진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놈들은 천지합격이라고도 하더군. 두 놈이 펼치는 합격술은 많지만, 그대들이 펼치는 합격술은 처음 봤어. 그대들이 창안한 무공인가?” 칠살수의 안법(眼法)은 허법(虛法)으로 바뀌었다. 눈의 초점이 흐릿해져, 마주서 있는 사람에게 이지(理智)가 상실되지 않았나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허법 속에는 명법(明法)이 숨어 있다. 이전주와 해골 사내뿐만 아니라 주변 사물을 모두 한눈에 잡아들이기 때문에, 사람이 움직일 경우 풍경이 움직이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사람을 사물 중 하나로 두고 전체 속에서 부분의 허점을 파악해내는 안법이다. 일 대 일의 비무였다면 사람에게서 직접 허점을 찾아내는 암법(暗法)을 사용할 일이되, 이들의 합격술이 뛰어난 만큼 허법에 명법을 가미했다. 반면에 이전주와 해골 사내는 암법을 사용하는지 눈이 터져 나올 듯 부릅떠진 채 활활 타오른다. “후후! 우리가 이런 무공을 창안할 정도라고 생각하나? 영광이군. 우리가 그 정도라면 지금 백문장에 있지도 않겠지. 병기를 보아하니 칠살수 같은데…… 너 정도는 송사리로 간주할 테고. 그런데 지금 내 꼬락서니는…… 너를 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어.” “백문장의 무공이란 말인가?” “지금은.” “이해할 수 없군. 그 정도의 무공에 무명인(無名人)이라니.” 지금 자신이 나누고 있는 말은 은신술을 펼친 동료무인, 그리고 소문주의 귀에 알알이 새겨지고 있으리라. 아무런 해도 당하지 않는다면 더욱 좋지만 설혹 예상했던 대로 몇 사람이 목숨을 잃는다 해도 차후 백문장을 상대하는 데 한결 도움이 되리라. “밑에서 치받아 올라오는 인간은 항상 무명인이지.” “그 중 대부분은 싹도 트기 전에 죽지.” “그럼 됐어. 죽일 자신만 있으면 말도 필요없어.” 칠살수는 곡도가 으스러져라 힘껏 부여잡았다. 그는 자신의 생애에서 다시 만날 수 없는 최강의 적수를 만났다는 것을 직감했다. 지금까지 자신보다 뛰어난 고수는 많았다. 비살문 십대고수만 해도 감히 승부를 논할 수 없다. 하나 그들에게 목숨을 잃을 염려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최강 고수의 반열에 두지 않아도 된다. 이자는…… 목숨을 빼앗을 수 있다. 죽음을 안겨줄 수 있다는 말이다. 최강 고수로 간주해야 한다. 칠살수가 판별하는 고수의 기준이었다. 촤르륵……! 구절편이 다리를 휘어 감아왔다. 무극전에서 보았던 공격방식 그대로였다. 구절편을 사용하는 해골 사내는 하반신을 공격하고, 이전주라는 사내는 영활한 신법을 십분 활용하여 상반신을 공격한다. 이전주가 땅으로 삼는 곳은 해골 사내의 어깨다. 해골 사내는 장작개비 마냥 비쩍 말랐지만 키가 큰 관계로 폭 넓은 공격범위를 확보해 준다. 칠살수는 구절편에 얽매여 자유롭지 못했다. 마디가 낭창낭창 꺾여지는 구절편의 특성을 아는 이상 검으로 막을 수는 없다. 검으로 막으면 눈 깜짝할 순간에 구절편의 마디가 툭 꺾여지며 손목을 후려치거나 팔굽을 강타한다. 구절편은 보법으로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또한 그것이 구절편을 병기로 사용하는 자를 상대하는 최상의 방책이다. 구절편은 공격기세가 신랄하지만 발출과 회수가 아무래도 느리다. 칠살수 같은 고수라면 구절편이 다리를 스쳐 지나가는 짧은 순간에 해골 사내의 턱 밑까지 바싹 다가설 수 있고, 성명병기 곡도는 사내의 가슴이나 배의 감촉을 즐기리라. 그런데 그게 안 된다. 구절편을 피하고 반격을 가하려는 순간, 이전주라는 자의 검공이 코 끝에 다가선다. 해골 사내의 신법도 이전주 못지않아서 정확히 약간 구부러진 구절편의 거리만큼만 떨어지는 것을 허용할 뿐이다. 그 정도의 거리…… 이전주가 공격하기에 가장 좋은 거리다. “치잇!” 칠살수는 이를 악물었다. 좋게 끝나기는 틀린 것 같다. 그의 오른쪽 볼은 스쳐 지나간 검날에 베여 피가 흘러내렸다. 어깨도 쓰라렸고, 귀 밑도 따끔거린다. 단지 살짝 스쳐 지나간 것에 불과하지만 검날이 스쳐 지나가는 기분은 꼭 목이 잘리는 기분처럼 등골을 시리게 만든다. 칠살수는 곡도를 가슴 높이까지 들어올렸다. 비살문에 입문하던 날, 사부의 허리에 걸려 있는 곡도를 보았다. 반월(半月)처럼 부드럽게 휘어져 있는 소도(小刀). ─`이놈 이름은 곡도라고 한다. 기운찬 놈이지. 이놈을 쓰고 싶으면 두어 번쯤 저승에 갔다 와. 사부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곡도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곡도는 근접전(近接戰)에 유용한 병기로 내공(內功)이나 심법(心法)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곡도술은 단순한 격투기법에 불과하다. 무공을 통해 도(道)를 깨달을 생각이라면 곡도술은 배우지 말아야 한다. 배워봤자 무공진전에 방해만 될 테니까. 근접전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적과 가까이 붙어야 한다. 손과 발의 현란한 움직임은 그래서 필요하다. 칠살수는 묘보(猫步)를 밟았다. 고양이처럼 땅을 살짝 딛고, 몸은 최대한 가볍게…… 허리가 상하좌우 어디로든 꺾어질 수 있도록 단전(丹田)을 항상 의념(意念)하여 중심을 붙들고…… 촤라락……! 구절편이 방향을 잃고 엉뚱한 곳을 가격했다. 원래는 칠살수가 서 있던 자리였으나 구절편이 뻗어오는 순간, 칠살수는 미끄러지듯 옆으로 움직여 버렸다. 찰나의 순간이다. 일 대 일의 상황이었다면 칠살수는 고양이처럼 날렵한 보법을 펼쳐 해골 사내의 지척에 붙었을 테고, 곡도는 둥그런 반원을 그려냈으리라. 그러나 칠살수는 가까이 다가갈 수조차 없었다. 쒜에엑……! 먹이를 발견한 독수리가 달려들 듯이 날아드는 이전주의 검공. 어느 무공을 익혔든 간에 공격시 요령은 상상하(上上下)이거나 상중중(上中中)이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틀림없다. 이전주는 상상을 담당하고 있다. 해골 사내는 하를 맡고. 이들은 한 몸이 펼치면 세 단계로 나눠져야 할 공격을 동시에 몰아치고 있다. 합공(合攻)이란 이래서 좋은 것이고, 그에 대한 반격수(反擊手)도 지니고 있지만…… 둘의 합격은 지극히 절묘해서 둘 중에 한 사람이 실수를 했다 할지라도 나머지 사람이 금방 균형을 맞추어준다. ‘완벽한 합격진……’ 칠살수는 곡도로 둥근 원을 그려 이전주의 검공을 막아내며 뒤로 물러섰다. 차앙! 창! 창! 창……! 곡도와 검이 부딪치며 파란 불똥을 튕겨냈다. 상대가 공격해 올 때는 보법을 펼쳐 반좌(半左), 반우(半右)로 물러서며 공격 기회를 엿봐야 한다. 칠살수는 보법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이전주의 검과 해골 사내의 구절편은 칠살수에게 뒤로 물러서는 것만 허락했다. ─`곡도를 배우고 싶단 말이지? 희한한 놈이군. 많은 놈들이 들어왔지만 곡도를 배우고 싶다는 놈은 네놈이 다섯 번째야. ─`다른 사람은 누굽니까? ─`알 것 없어. 모두 죽었으니까. 그래도 배우고 싶나? ─`약합니까? ─`강하지. 강하니까 모두 죽는 거야. 무림에서 살아남는 법은 두 가지다. 최고로 강하든가 아니면 싸우지 않는 거야. ─`최고로 강하면 되겠군요. ─`푸하하핫! 무림 역사상 그런 놈은 없어. 가장 강한 놈? 푸하핫! 자신이 가장 강하다고 자부하는 놈에게는 곁눈질을 줄 필요도 없어. 그런 놈은 얼마 살지도 못할 테니까. ─`그럼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현 무림에서 가장 강한 무인은 누굽니까? ─`귀찮으니까 더 묻지 마라. 곡도를 배우고 싶다? 소질이 있나 시험해 보지. 사부는 팔을 앞으로 나란히 펴 올리라고 명령했다. 양쪽 손에는 양 손으로 들어도 버거운 거도(巨刀)를 한 자루씩 잡게 했다. 어깨와 팔을 고정시키고 손목으로만 거도를 움직인다. 첫 번째 시험은 도와 도가 맞부딪치게 만드는 것. 왼손에 든 도는 왼쪽으로 움직인다. 오른손에 든 도는 오른쪽으로 움직인다. 위에서 맞부딪친 도가 둥근 반원을 그리며 손 아래에서 맞부딪쳐야 한다. 칠살수는 하지 못했다. 양 손 모두 수평으로 뉘는 데까지는 수월했지만 아래로 더 틀어내리지는 못했다. 시험…… 그것이 곡도술의 처음이자 끝이다. 보법은 특이할 것이 없지만 수법(手法)은 극히 현란해야 한다. 만약 누군가가 곡도를 든 손을 잡는다면 그 순간 곡도는 둥근 반원을 그리며 그자의 손목을 잘라버리리라. ─`암습을 하지 않는다면 곡도로 대도(大刀)나 검(劍)을 상대할 생각은 버려라. 무공이 비슷하다면 다음은 병장기 싸움. 짧은 곡도로는 대도나 검을 이기지 못한다. ─`방법이 전혀 없습니까? 그럼 강하다는 말은 버려야겠군요. ─`흐흐! 전혀 없지는 않지. 네놈이 얼마나 빠르냐에 달려 있지. 곡도와 여타 병장기의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일단 적의 병장기를 막아야 한다. 그 다음, 즉시 적의 병장기 길이 안으로 뛰어들어 격살하는 방법이지. 또 하나는 흡착(吸着)이다. 곡도와 적의 병장기가 밀착된 상태에서 병장기의 몸통을 타고 들어가 격살하는 방법이다. 곡도와 같은 단병(短兵)이 장병을 이기는 방법은 이 두 가지뿐이다. 다른 방법이 있다 해도 이 두 가지에서 파생된 줄기에 불과할 뿐…… 칠살수는 서둘지 않고 기회를 노렸다. 이전주는 제공권(制空權)을 장악하고 있지만 해골 사내의 어깨를 발판으로 삼는 만큼 도약하는 데 한계가 있다. ‘반드시’라는 원칙이 아니기 때문에 결정적인 시기에는 땅바닥을 뒹굴면서까지 공격을 가해 올 이전주지만 완벽한 기회를 잡기 전까지는 합공에서 벗어나지 않으리라. 구절편이다. 구절편의 길이 안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다행스러운 점은 구절편은 길이가 너무 길어 회수에 시간이 걸린다는 점. 그렇다면 이전주가 공격을 끝내고 돌아가는 순간과 해골 사내가 구절편을 회수하는 시간의 배합이 이루어질 때만 공격이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전주와 해골 사내는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다. 최르르륵……! 구절편이 무릎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동시에 이전주도 해골 사내의 어깨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구절편이 무릎을 놓치고 회수되는 찰나, 이전주의 검이 날카롭게 미간을 파고들리라. 또 이전주가 일검을 끝낼 때쯤이면 이미 구절편을 회수한 해골 사내는 이전주가 비약(飛躍)한 거리만큼 다가와 어깨를 내밀면서 구절편을 쏟아내리라. 칠살수는 다시 몇 걸음 물러섰을 테고.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구절편이 무릎에서 일 푼 차이로 비껴가는 순간, 칠살수는 구절편의 거리 안으로 뛰어들었다. 쒜에엑……! 여지없이 이전주가 검을 날려왔다. 굶주린 맹수가 발광하는 듯한 흉폭한 기세였다. 파라락……! 칠살수는 피풍의로 허공을 가렸다. ‘촤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피풍의가 잘라져 나갔다. 그리고 잘려진 피풍의 사이로 불쑥 들이민 이전주의 냉막한 얼굴이 보였다. 칠살수는 곡도를 들어올려 번개같이 빠른 이전주의 검공을 받아냈다. 차앙!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다시 파란 불똥이 튀었다. 그리고 곡도가 둥글게 반원을 그렸다. 노리는 곳은 이전주의 복부. 허공에서 전개하는 검공에는 한계가 있다.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한다는 한계다. 체공하는 동안에는 몸을 자유롭게 틀 수 없다. 그렇기에 일검필살(一劍必殺)의 확고한 자신이 없으면 몸을 허공에 띄우는 미련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 차앙! 결과는 칠살수의 기대를 벗어났다. 이전주는 검을 사용하면서도 곡도술 못지않게 현란한 변화를 자랑했다. 칠살수가 손목만을 사용해서 곡도로 원을 그릴 수 있다면 이전주 역시 그와 비슷한 검공을 알고 있는 듯했다. 칠살수의 곡도로 복부를 베어내는 환도(幻刀)도 빨랐지만 이전주의 변검(變劍)도 기가 막히게 빨랐다. 칠살수는 이전주를 무시하고 해골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이전주가 그를 놓치지 않고 검을 비껴왔지만 일일이 받아줄 여력이 없다. 그를 상대한다면 해골 사내 역시 반격을 시도해 올 것이고, 칠살수는 물러서야 할 곳에서 물러서지 않는 이상, 죽든가 살든가 결판을 내야 한다. 그는 해골 사내를 택했다. 이전주는…… 까짓 것, 몸에 칼질 한 번 당한다고 생각하면 되지. 어차피 예측했던 일. 손짓 한 번에 이전주가 나가떨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고, 해골 사내에게 달려드는 동안 손 놓고 지켜보리란 생각은 더 더욱 하지 않았다. 해골 사내는 그가 예측했던 대로 달려들고 있다. 이전주에게 발판을 마련해 줘야 하기 때문에 구절편을 회수함과 동시에 신형을 앞으로 내친 것이리라. 칠살수가 물러서지 않고 이전주의 검공을 맞받아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겠지. 지금까지 계속 물러서기만 했으니까. 서로가 손을 뻗으면 어깨를 붙잡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잡았어!’ 칠살수는 곡도를 휘둘렀다. 해골 사내는 구절편을 회수했지만 다시 전개하기에는 시간이 늦다. 구절편이란 놈은 거리만 있으면 무엇보다도 강한 병기가 되지만 거리가 없으면 적수공권(赤手空拳)보다도 못할 경우가 왕왕 있다. 지금이 그렇다. 그는 당황할 것이고, 당할 것이다. 노리는 곳은 목젖. 단 일 격에 목숨을 뺏어야 한다. 잔숨이 남아 있지 않아야 한다. 손가락 하나 꼼지락거리지 못해야 한다. 그래야 등을 돌릴 수 있고, 요행으로라도 이전주의 공격을 감당할 수 있다. 칠살수는 해골 사내의 뼈만 남은 목이 돼지 목처럼 크게 보였다. 그런데…… 칠살수의 눈 앞에 불쑥 거대한 기둥이 나타났다. 거대? 그것은 착각이다. 눈 앞에 가로 세워진 것이 구절편이라는 것은 찰나간에 깨달았다. 하기는…… 구절편을 사용하는 인물치고 병기에 약간의 손장난을 하지 않는 인간이 어디 있으랴. 상관없다. 이미 곡도는 전개됐고…… 밀고 들어간다. 타악……! 쇠붙이와 나무가 부딪치는 듯한, 약한 둔탁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칠살수는 사부에게 전수받은 곡도술을 전개했다. ─`곡도와 병기가 부딪치는 순간이 곡도술의 정점(頂點)이다. 순간을 잡아야 한다. 부딪친 상태에서 곡도를 밀고 들어가 몸까지 갈라버려야 한다. 잊지 마라. 팔을 사용해서는 늦는다. 단지 손목만으로 모든 변화를 일으키고 끝내야 한다. 진정한 칠살(殺)이다. 취릭……! 현란한 도공이 해골 사내의 몸에 작렬했다. 그리고…… 무엇이 어떻게 되었을까? 칠살수는 무딘 톱에 몸이 썰려나가는 충격을 느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팔팔 끓는 기름 솥에 들어가면 이런 충격이 느껴질까? 그는 너무 심한 고통에 곡도가 살을 가를 때 울리는 짜릿한 감촉을 느끼지 못했다. ─`사부님께 비무를 청합니다. ─`나를 이길 수 있다는 자신이 생겼냐? 크흐흐! 애송이 놈…… ─`아닙니다. 곡도가 탐이 나서 그렇습니다. ─`이 곡도를 가지고 싶단 말이지? 푸하하핫! 사부는 말했다. 곡도를 가지려면 자신의 목숨을 끊어야 하는데 그럴 수 있냐고. 너 역시 곡도를 집는 순간 목숨이 끊어지기 전까지는 곡도를 놓지 않겠다고 맹세해야 하는데 그럴 수 있냐고. 칠살수는 비무를 하지 못했다. 곡도에 그런 처절한 맹세가 붙어다닐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사부는 또 말했다. 너는 곡도를 만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적어도 스무 명을 죽이기 전까지는 ‘곡도’를 만질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곡도를 가질 기회는 뜻밖에도 빨리 왔다. 어느 날…… 문주의 밀명(密命)을 받고 출타한 사부가 죽어서 돌아왔고, 곡도는 그의 손에 들어왔다. 그런데 지금 자신은…… 곡도를 놓고 있지 않는가. 쫦 2 쫦 “……” 소문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붉게 달아오른, 활활 타는 눈으로 빈사상태에 빠진 칠살수를 바라볼 뿐이다. “응급조치는 했지만…… 모르겠습니다.” 일흑이 칠살수의 등에 금창약(金瘡藥)을 바르면서 말했다. “치잇! 완벽한 합공이야. 완벽해.” 그들은 칠살수와 이전주, 해골 사내의 격전을 생생히 지켜보았다. 한마디로 놀라웠다. 칠살수의 무공이라면 절강성에서도 알아주는 터인데 그런 그가 무기력하게 밀린 끝에 치명적인 일격을 당하고 말았다. 충격이었다. 그나마도 소문주가 적시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칠살수는 속절없이 죽임을 당하고 말았으리라. 더욱 큰 충격은 칠살수가 시간을 버는 동안 암중에 숨어 있는 기관 조정자를 파악해 내려던 의도가 보기 좋게 무너졌다는 것이다. 매화표 몇 개 날아오고, 창 몇 자루 솟구친 것으로는 기관이라고 말할 수조차 없다. 비살문 고수들은 진정한 기관의 냄새를 맡았다. 절강 무림을 종횡하면서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지독한 살기. 진짜 싸움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기선을 제압당하고 말았다.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 백문장은 용담호혈이다. 사대 패강 못지않은 거력을 지녔고, 그 힘이 비살문 고수들에게 집중된다면 누구도 살아서 빠져 나갈 수 없다. 이전주라는 자와 해골 사내가 취한 행동만 해도 그렇다. 그들은 칠살수에게 결정적인 일격을 가하지 않았다. 소문주가 적시에 뛰어들었다고는 하지만 만약 그들이 살수를 전개하려고 마음먹었다면 죽일 시간 정도는 충분했다. 이전주가 바로 등 뒤에 붙어 있었고, 해골 사내도 구절편으로 곡도를 막아낸 후 몸과 몸이 밀착할 만큼 가까이 다가섰다. 소문주가 귀신이 아닌 한 살수를 저지할 능력이 없다. 그런데 그들은 물러섰다. 마치 소문주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위장막을 벗어던지고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훌쩍 뒤로 물러서 버렸다. 그들로서는 아쉬울 것이 없는 싸움이다. 선전포고(宣戰布告)도 없는 싸움이다. 아무런 명분도 이득도 없는 싸움이다. 백문장 고수와는 얼굴을 맞대면한 것도 칠살수와 이전주가 처음이니 원한이란 것이 있을 리 없다. 그런데도 이들은 자연스럽게 검을 뽑아 상대를 겨눴다. 자정까지 취휴각으로 이동하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하겠다는 통보를 했지만 그렇다고 서로 보자마자 죽기 살기로 싸울 만큼 절대적인 율법은 아니다. 서로가 의도를 파악하고 있다. 백문장은 비살문 고수를 상대로 백문장의 위엄을 만천하에 보여주면 그만이다. 그렇다면 소문주가 걸려든 셈인가? 그렇지 않다. 소문주는 백문장 전체를 상대로 일전을 겨뤄보고자 한다. 건곤방이 빠지고 천력문이 물러선 이상 백문장을 제압하기만 하면 금화부 적성현으로 진출할 명분을 얻는다. 처음부터 그럴 목적으로 백문장에 들어서지 않았는가. 이건 금상첨화(錦上添花)다. 약체인 백문장을 비살문이 일방적으로 몰아친 것도 아니고, 백문장 고수들이 먼저 비살문 고수들을 치기 시작한 싸움이니까. 서로가 상대의 의중을 알고 있는 이상 백문장이 설득력없는 율법을 선포한 자체만으로도, 고성(高聲) 한 마디 오가지 않고도 싸움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강할 줄이야…… “소문주, 한 마디만 묻겠소. 적명검법은 몇 성까지나 연성했소?” 비영이 물었다. “다시 한 번 묻지. 소문주, 적명검법은……” “크크크! 크하하핫……!” 소문주가 기이한 웃음을 터트렸다. 잠시 웃고 만 것도 아닌, 비살문 고수들이 지루하다고 느껴질 만큼 긴 시간을 웃어젖혔다. 그러던 그가 어느 순간 웃음을 뚝 그쳤다. 그는 냉정해져 있었다. 붉게 달아오르던 눈동자도 안정을 찾았다. 겉보기에는 아무런 충격도 동요도 받지 않은 듯했다. 비살문에서 보았던 일상의 모습 그대로였다. “의리가 가상하군.” “……?”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는 건가? 내 무공이 백문장을 벗어날 정도인지 알고 싶어? 까부는 게 아냐. 칠살수는 놓고 간다. 백문장 놈들…… 죽이지는 않겠지.” “……” 모두들 침통한 표정이었지만 이의를 제기하지는 못했다. 비살문 살수는 다른 문파의 문도들과 달라서 개별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그들은 위험한 순간과 위험하지 않은 순간을 동물적으로 감지해 낼 수 있다. 지금은 위험한 순간이다. 온 정신을 한 군데 몰입시켜도 죽을지 살지 모를 판이다. 의식을 잃어버린 칠살수까지 대동한다면 그만큼 죽음은 가까이 다가온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헛된 과욕은 버린다. 백문장을 뭉갠다는 생각이 잘못이었어. 일흑! 넌, 각오해! 항상 조자경을 따라다니라고 말했건만…… 최소한 갈천상이 뭐 하던 놈인지는 알고 있었어야지. 돌아가서 보자구. 내가 백문장주라면…… 송림과 연당을 놓치지 않겠어. 화검, 다른 길이 어디야?” 소문주는 일사천리로 풀어나갔다. 자신의 생각에 연연하지도 않았다. ‘안 된다’는 사실을 안 순간, 모든 것을 접고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자존심까지도. “이곳은 호로병 같은 요새요. 송림과 연당을 피하자면…… 후원 쪽으로 가서 천루를 넘는 수밖에 없소.” 대답을 하는 화검은 목이 잠겨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격동하고 있다. 소문주가 이렇게 빨리 냉정을 회복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은 적어도 두어 명쯤은 죽은 다음에야 소문주의 타고난 호승심이 가라앉으리라 생각했다. 소문주가 어렸을 적부터 지켜보고, 때로는 무공도 가르치며 지내온 사람들이라 자신들의 생각에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두어 명쯤은 죽어야 할 거라고 생각했지 않는가. 격정이 치밀었다. 소문주는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성숙해 있었다. “천루?” “옛날, 조항이 살아 있을 적에 경계무인을 배치하던 곳입니다. 저곳이죠.” 화검은 어둠 속에 거인처럼 버티고 서 있는 곳을 가리켰다. “절벽이군. 경계무인을 배치했다면 올라갈 길이 있겠지.” “그게…… 좀 곤란합니다.” “……?” “조항은 저곳을 천루라고 일컬었습니다. 저곳에 무인 두어 명만 배치하면 급습을 당할 염려는 없다고 호언장담했죠. 절강무인들은 모두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올라가는 길을 모른다, 이거 아냐? 그럼 할 수 없군. 눈이 얼어 빙벽이나 다름없는 곳을 기어 올라갈 수는 없고…… 뚫고 나가자. 자, 시작해 볼까?” 소문주는 검을 뽑아들고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소문주.” 갑자기 일흑이 소문주를 불러세웠다. “……?” “장담합니다. 여기서 빠져 나간다면 소문주는 절강성을 일통할 겁니다.” “그래? 나도 장담하지. 문(門)에 돌아가면 넌 암굴에 갇힐 거야. 백 일 동안.” “각오하겠습니다.” 비영, 철곤, 화검은 웃었다. 칠살수를 놓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칠살수도 소문주를 지켜보고 있다면 웃어주리라. 쫦 쫦 쫦 “큰놈이야. 앞으로 십 년만 지나면…… 아니, 더 앞당겨질 수도 있겠지.” “뭐가요?” 조자경은 급하게 물었다. 궁금하기도 하고, 가슴이 뛰기도 하고…… 지금 상태를 뭐라고 단적으로 말할 수 없었다. 칠살수에게 치명상을 입히다니. 이전주가 그토록 대단했단 말인가. 무극전에서 무공시범을 보일 때, 누구보다 관심있게 지켜보았지만 그때는 단지 편협된 무공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는데. 칠살수를 꺾음으로써 백문장의 위세는 한껏 높아졌다. 취휴각에 모인 군웅들이 달라진 위상을 확실하게 말해 준다. 그들은 취휴각으로 이동하라는 소리를 들을 때까지만 해도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지만 지금은 그런 사람이 아무도 없다. 모두들 경이에 가득 찬 눈으로 백문장 식솔을 대하고 있다. 사실 걱정이 되기도 했었다. 기껏해야 스무 명 안쪽인 사람들로 과연 죽음의 신이라는 소문주와 비살문 십대고수 중 다섯 명을 막아낼 수 있을까? 그런데 지금 그들은 도망가기에 급급하다지 않은가. 갈천상은 기적을 일구어내고 있다. ‘토우야. 토우였어. 이전(二戰)이 펼친 무공은 서른여섯 명이 만들어낸 토우를 축약한 거야. 단 두 명이지만 내가 꼼짝할 수 없었던 것처럼 칠살수도 꼼짝하지 못하다가 당했을 거야. 저 사람은…… 무공을 익히고 있을까? 그렇겠지? 그럴 거야. 그것도 아주 높은 무공을 익히고 있을 거야.’ 조자경은 갈천상만 보면 가슴이 뛰었다. 이상한 일이다. 어제 낮에만 해도 밉상으로 보이던 얼굴이 이토록 밝게 보이다니.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인가? 좋게 보일 때는 한없이 좋게 보이고, 또 밉게 보일 때는 세상 누구보다 밉게 보이고. “길을 열어줘. 막지 마라.” 갈천상의 입에서 뜻밖의 소리가 나왔다. 단 두 명이 나서서 칠살수를 꺾었다. 아직 절정고수로 짐작되는 사람만 해도 삼전, 사전, 오전이 남아 있고, 백문장에는 기관도 설치되어 있다. 비살문 고수들은 독 안에 든 쥐가 분명한데 놓아주라니? 팔전주 대도 마임호도 갈천상의 명령에 이해가 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부영이 기관을 발동시킨 다음, 백문장을 마음껏 활개치고 다니는 사람은 오직 마임호와 갈천상뿐이다. 기관이 완벽하게 발동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기관이란 쇠붙이로 움직이는 거야. 그 동안 근 이십여 년이 흘렀다. 누구도 손보지 않은 상태에서. 후후후! 지금쯤 마부영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거야. 녹슨 것을 닦아내는 일만도 족히 하루가 걸릴 터…… 마부영이 기관을 발동시킨다 해도 완벽하게 가동되기까지는 최소한 하루 정도는 필요할 거야. 오늘은 조심해서 돌아다니면 돼.” 마임호는 솔직히 갈천상의 말을 반신반의(半信半疑)했다. 지도에 그려진 대로라면 백문장은 개미 한 마리 움직이지 못한다. 뱀을 잡는 올가미 틀과도 같다. 기어 들어갈 수는 있지만 빠져 나올 수는 없는. 하지만 그가 움직이고 있는 이상 마임호도 움직이지 않을 도리가 없다. 팔전은 절강성에서 발생하는 모든 정보를 취합하는 역할을 맡았으니까.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서는 간자(間者)가 필요하다. 사람…… 쉽게 구할 수 없다. 또한 훈련이 잘된 전서구(傳書鳩)도 필요하다. 정보를 분석하는 지자(智者)도 필요하다. 모두 준비된 것은 하나도 없고 필요한 것들뿐이다. 천천히…… 오늘이 지나면 천천히 준비해야 한다. 백문장에서 정보에 관련된 부처(部處)는 두 곳이다. 일전 휴전(休戰)과 팔전. 일전은 정보를 정리하고 분석하고 계획을 창출해 내는 부처이고, 팔전은 발로 뛰며 수집하는 부처다. 두 부처는 공생(共生)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대도 마임호는 신필 박우와 누구보다도 가까워야 하며, 믿어야 한다. 박우는 일전주가 될 것을 언제 알았는지 모르지만, 마임호는 무극전에서 박우가 발표하기 전까지만 해도 까마득히 몰랐다. 팔전주로 부임하고 첫 밤을 맞이한 셈이다. 그는 자정이 되기까지 박우와 함께 앞으로 일전과 팔전을 어떻게 꾸려나갈지에 대해 논의했고, 계획까지 수립했다. 그러나 정작 오늘 할 일이 없다. 기관이 발동된 삼 일 동안 그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때 갈천상이 그를 불렀다. 오늘 하루 동안은 기관이 완전히 발동되지 않을 테니, 비살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싸움이 어떻게 벌어지고 무슨 말을 주고받는지 상세히 파악해 오라고. 그는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갈천상보다도 현실을 더 세밀하게 아는 사람이다. 그러니 갈천상의 길을 막지 말라는 명령을 이해하지 못할 수밖에. “사전과 비살문이 부딪치면 양패(兩敗)야. 특히, 소문주가 백문장에서 참변을 당했다고 하면 정말로 비살문과 전면전을 벌여야 해. 타격이 크다.” 갈천상은 단호했다. 쫦 3 쫦 비살문 고수들이 송림(松林)에 이를 동안 기관은 발동되지 않았다. 어려운 길을 많이 지나쳤다. “나라면 여기쯤에 기관을 설치하겠어. 모두 조심해.” 늙었으면 노파심이라고나 말해 줄 텐데. 소문주의 예상은 늘 빗나갔다. 담과 나무, 바위의 조화를 보면 기관이 설치되었음 직한데 화살 하나 날아오지 않았다. “여기는 아주 좋군. 적어도 우리 중 한 명은 여기서 죽겠어. 누가 죽겠나?” 소문주는 농담까지 흘렸다. 하나 그의 전신은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살수가 익혀야 할 가장 기본적인 공부 중의 하나가 적을 감지해 내는 능력이다. 적을 탐지하는 능력은 몸을 숨기는 은신술만큼이나 비중이 크다. 그래서 비살문 살수들은 탐적술(探敵術)과 은신술에 달통한 후에야 권각 수련에 들어간다. 병장기를 수련하는 것은 훨씬 뒤의 일이고. 소문주를 비롯한 고수들은 송림에 도착하자마자 끈끈한 냄새를 맡았다. 느낌으로 직감하는 살기가 아니다. 하얀 눈은 상큼한 냄새를 풍긴다. 솔잎은 색깔로 비유하자면 푸른색, 상큼한 향기를 뿜어낸다. 그 속에…… 인간만이 흘려내는 인내가 묻어나온다. “죽을 필요까지는 없지. 그대들이 원하지 않는다면.” 송림에서 걸쭉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예상했던 장소에서 검은 그림자가 불쑥 솟구쳤다. 그들은 무공은 어떤지 몰라도 은신술에는 소질이 없다. “누구냐!” “사전주라고만 알아두쇼.” “실전(實戰)인가 하는 엉뚱한 놈들이군.” “그렇게 막말하면 곤란하지. 벌써 매운맛을 보았을 텐데.” 설전(舌戰)은 엇비슷했다. “그렇군. 네…… 놈이군.” 소문주는 사전주의 정체를 알아냈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모두 네 명이다. 그들은 동서남북(東西南北) 네 방향에서 나타났고, 서로 간에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걸어오고 있다. 묘한 느낌이 들었다. 네 명은 소문주를 비롯한 비살문 고수 네 명까지 한 울타리에 가둔 듯하고, 또 어찌 보면 자신만을 노리고 다가오는 듯하기도 하다. 네 명이 전체를 상대로 싸울 수 있는 모습과 무리 속에서 한 사람만 떼어놓고 싸울 수 있는 모습을 갖추고 있다. ‘진(陣)……?’ 처음으로 든 생각이다. 이전주가 무공을 선보이고, 칠살수가 합공을 당할 적만 해도 단순한 합공이라고만 생각했지 진법(陣法)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이들이 진법을 익히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합공은 오랜 수련을 통한 끝에 서로 마음을 연결한 것이지만 진법이라면 거기에 무학(武學)의 문리(文理)까지 포함되어 있다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되 쉽지 않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소문주는 극도로 진기를 끌어올리며 진의 주축이 누구인가를 유심히 살폈다. 누구나가 진의 중심은 사전주라는 뚱뚱한 사내라고 생각하겠지만 합공이라면 몰라도 진이라면 생각을 달리해야 한다. 진은 늘 의외의 곳에서 의외의 수(手)가 튀어나오니까. “아직도 싸울 생각이라면 빨리 싸우고 그렇지 않을 거라면 오래 시간 끌지 맙시다.” 뚱뚱한 사내가 쌍구(雙句)를 부딪쳐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쌍구는 검과 도의 특징 중 장점만을 뽑아낸 병기이기 때문에 무척 실전적이다. 용법(用法) 역시 검과 도의 장점을 고루 겸비하고 있다. ‘……?’ 소문주를 비롯한 비살문 고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쌍구가 특별한 병기는 아니지만…… 절강성 무인들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쌍구는 강북(江北`:`장강 이북) 무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병기로 웅장하고 호쾌한 신법과 어울려야만 제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그럼 사전주라는 자는 강북에서 건너온 무인이란 말인가? “싸우지 않겠다면 물러서겠다는 말인가?” 소문주가 침착한 음성으로 물었다. “우리는 이 자리. 당신들은 그냥 지나가면 되고.” “좋아. 가지.” 소문주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송림을 충돌없이 빠져 나온 소문주는 검을 던져 버렸다. “소문주, 이게 뭐 하는……” “가!” “……?” “가서 칠살수를 데리고 와!” 급변하는 성격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침착하기 이를 데 없었건만 지금은 성난 들소처럼 씩씩거린다. 이러다가도 어느 틈엔가는 다시 한풍이 몰아치는 듯한 냉음(冷音)을 토해 내리라. “지금 칠살수를……” “아직도 몰라! 볼일 다 봤어! 칠살수를 베고, 비영, 철곤, 화검, 일흑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쩔쩔매면서 꼬리를 말고, 나! 절강사신(浙江死神)이라는 나! 푸하하핫! 일흑, 죽여야 할 놈이 있는데 놈이 겁에 질려서 바지에 똥오줌을 질질 싸고 있다면 죽일 맛이 나나?” “……” “가서 칠살수를 데려와라. 아무도 막는 자가 없을 거야.” 소문주의 마지막 말은 자조에 가까웠다. 비영과 철곤이 몸을 날려 칠살수에게 간 사이 남은 세 사람은 백문장의 요모조모를 살펴보았다. 강적이다. 온 세상을 뒤덮고 있는 어둠처럼 머리부터 꼬리까지 온통 검은 장막에 둘러싸여 있다. 언젠가는 다시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철벽처럼 거대한 좌절을 안겨준 이곳에 통쾌한 일격을 가해야 한다. “아까 비영이 물었지? 나보고 적명검법을 얼마나 익혔느냐고.” 소문주는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일흑은 귀를 곤두세웠다. 그 부분이야말로 비살문의 모든 문도가 궁금해 하는 점이지 않은가. 죽음의 사신…… 그는 참 많은 사람을 죽였다. 비살문에서 고수급에 거론되는 사람치고 사람을 많이 죽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들에 비하면 소문주는 오히려 적게 죽인 셈이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들은 십대고수, 혹은 귀살대로 통칭해 부르는 반면 소문주는 ‘죽음의 사신’, ‘절강사신’이라는 절대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명호에서만 본다면 일음마봉 무기도 소문주에게 뒤지리라. 같은 사람을 죽이더라도 방법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소문주는 사전통보라는 방식을 택했다. 상대는 겁을 먹기도 하고 비웃기도 했지만 약속한 날이 되면 어김없이 죽었다. 한 명, 두 명…… 죽는 사람이 늘어나자 비웃는 사람보다는 겁을 먹고 도피하거나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 사람이 많아졌고, 그만큼 절강사신의 명성은 높아졌다. 사람의 입이 얼마나 무섭냐 하면 입에서 입으로 전달된 말이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불어나 비살문에서 최고로 강한 무인은 소문주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런데 한심하게도 정작 비살문 십대고수라는 무인들은 소문주의 진실한 무공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적명검법을 때려치웠어.” “넷!” “네엣……? 그게 무슨 말씀?” 무관심한 척하던 화검도 소문주의 말에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놀랐나?” “당연한 말씀.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죠.” 화검이 대답했다. “그래도 난 후회하지 않아.” 세상에! 비살문 최고의 검공을 익히지 않고도 후회하지 않는다니! 일흑과 화검은 소문주라는 사람 자체를 모르게 되어버렸다. 그때, 짝짝짝! 어둠 속에서 가볍게 박수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차앙! 창! 일흑이 ‘누구’라고 외치는 소리와 일흑과 화검이 검을 뽑아드는 소리가 같이 터져 나왔다. 너무 가까운 곳에서 박수 소리가 터졌다. 인기척이라도 감지했다면 이토록 놀라지도 않았으리라. 아무리 소문주의 돌발적인 말에 경악해 있었다고는 하지만 유달리 예민한 그들의 감각을 속이고 지척까지 다가왔다는 것은 보통 고수가 아니다. 그들은 놀랍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긴장했다. “잘했어.” 어둠 속에서 박수를 친 인물이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다. “갈…… 천상……” 뜻밖이다. 그가 단신으로 모습을 드러내다니. “적명검법은 최고가 아니지. 그러면서도 위험해. 천하에 쓸모없는 무공이니 가전무공(家傳武功)이라 할지라도 응당 버려야 돼. 그런 검법을 익히다 살기가 짙어지면 사람마저 버리지. 그때는 아무리 후회를 해도 늦어. 후회란 원래 그런 거지만.” 갈천상이 태연히 다가왔다. 일흑과 화검은 극도로 긴장해서 한 치의 틈도 내주지 않으려 했지만 그게 오히려 우스운 꼴이 되고 말았다. 갈천상은 병기를 소지하지 않았다. 권각의 달인? 그렇게 볼 수도 없었다. 무극전에서도 그 점이 가장 골치를 아프게 했지만 갈천상에게서는 무인다운 냄새가 전혀 풍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유생(儒生)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적당히 큰 키에 적당히 단단한 몸을 보면 글만 접해 온 유생은 아니었다. 그렇다. 농사꾼! 유생보다는 농사꾼에 가까운 몸이다. 무인들처럼 살기에 노출되지도 않고 순박하게 땅만 일구어온 사람. 하나 농사를 지으며 다져진 힘은 있어 불의를 보면 한 마디 정도는 하고 넘어갈 사람. 일흑과 화검은 소문주에게 눈길을 돌렸다. 갈천상이 악의로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러자 소문주가 그를 어떻게 대할지 염려스러웠던 것이다. 어쨌든 현재 입장에서 칼자루는 갈천상이 쥐고 있지 않는가. “그런가? 하하하! 대담하군. 비살문을 적으로 돌렸으니 폄하(貶下)하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대담하군. 비살문 무공을 그토록 깎아내리다니. 아마 절강성에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갈(葛) 형(兄)이 유일할걸?” 소문주는 일흑이나 화검의 염려와는 달리 마치 친한 친구라도 만난 듯 가까이 다가섰다. 암습에 대비한다거나 경계하는 빛이 전혀 없었다. 옆에 술이라도 있으면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밤을 새울 것 같은 그런 분위기였다. “귀에 거슬렸다면 미안하군. 하지만…… 소화남(蘇和嵐), 좋은 약은 입에 써.” “뭣!” “앗!” 일흑과 화검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태연자약하던 소문주도 이번에는 충격을 받은 듯 얼굴빛이 창백해졌다. 중원천지에서 소문주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단 몇 사람에 불과하다. 신상에 대해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위험한 사람이 살수들이니, 문주와 소문주의 신상내력이 철저한 보안 속에 감춰진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갈천상은 소문주의 이름을 정확히 불렀다. 소문주의 이름뿐만이 아니라 문주의 이름도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고, 어떤 무공을 익혔으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고 있지 말란 법이 없다. “놀…… 랍군. 내 이름을 알고 있다니.” “쯧! 겨우 그 정도를 가지고.” 눈과 눈이 마주쳤다. 용(龍)과 용이 마주쳐 으르렁대는 듯하다. 둘이 용과 용이라면…… 소화남은 깨끗한 얼굴에 의젓한 풍모를 지녀 청룡(靑龍)일 테고, 갈천상은 걸인처럼 풀어헤쳐진 머리에 거친 수염을 지녀 정체를 종잡을 수 없는 묵룡(墨龍)에 비견될 것 같은데…… “신세를 졌군. 이 신세는 반드시 갚지.” 소화남은 경직되어 있었다. “말로만 그럴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갚아주었으면 좋겠군.” “하하하! 바라는 것이 있다는 투인데?” “있지. 길을 열어줘.” “호오! 길을 열어 달라?” “물건을 가져 와야겠는데 대분산을 지나쳐야 돼. 열어줄 수 있나?” “그렇다면 남쪽에서 들여오는 물건이겠군.” “……” “좋아. 열어주지. 날짜만 통보해.” “정월 날씨치고는 너무 춥군. 가다가 술이라도 한 잔 하고 가. 겨울날 밤길을 걸으려면 술기운을 빌리는 것도 괜찮지.” “고맙군. 꼭 술 한 잔 걸치고 가지.” 소화남이 응답을 했을 때, 갈천상은 이미 등을 돌려 걸어가고 있었다. 마치 산책이라도 하듯이 여유있게 밤바람을 음미하면서. 갈천상이 돌아가고 난 후, 소화남은 멍하니 연당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옆에서 헛기침을 하기도 미안스러울 만큼 깊은 사색이었다. 그러나 비영과 철곤이 칠살수를 데려왔을 때는 말을 건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그럼 가야지. 주인장 생각이 바뀌기 전에 부지런히 도망가야지. 하하하!” 칠살수가 들고 가기 꼭 알맞은 들것에 눕혀 있었다는 말을 듣고도 소화남은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싸움에서 진 것보다 더 큰 상처를 받은 듯했다. 백문장을 나와 별빛 한 점 없는 밤길을 걸으면서도 그는 넋을 잃은 듯 휘적휘적 걸었다. “갈천상이 술상을 차려놨군. 성의를 무시할 수 없지. 목이나 축이고 가자고.” 밤이 짧은 한여름 같았으면 벌써 동이 터올 무렵이다. 하나 지금은 칠흑같이 어둡다. 아낙네는 침상에서 일어나 아침밥을 지을 게고, 남정네는 잃어나기가 싫어 ‘조금만 더’ 하며 꼼지락거릴 시간이다. 아무래도 점방(店房) 문을 열기는 이르다. 그런데 어둠을 밀어내며 환한 불빛이 일행을 맞이한다. 백문장으로부터 채 일 마장[십 리가 조금 못 되는 거리]도 걷지 않았을 때였다. 겉에서 보기에도 동전 몇 푼을 보고 싸디싼 화주(火酒)나 팔아대는 그런 곳이었다. 백문장에서 가까운 곳이지만 오가는 길손이 많지 않은 길가이니 천상 인근의 농사꾼이나 상대하는 주점(酒店)이다. 그런 곳이 이른 새벽에 문은 연다는 것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비정상이다. 소화남은 갈천상의 성의라고 했다. 정말 그랬다. 비살문 무인들이 주점에 들어서기 무섭게 늙은 노인 부부가 정갈한 옷차림으로 맞이했다. 술상도 이미 차려져 있었다. 탁자 네 개에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엉덩이를 붙일 수 있는 길쭉한 의자가 고작이지만, 탁자 위에 차려진 술상은 보통 고급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진흙으로 감싸서 하루 동안 구워야 제 맛이 난다는 오리구이, 요리하자마자 먹어야 한다는 마고초사이두(磨炒四李豆`:`콩과 양송이 볶음), 센 불과 약한 불의 조화로 맛을 낸다는 고로육(肉`:`돼지고기 초볶음)…… 술도 백문장에서 군웅들을 대접했던 소흥주(紹興酒)다. “기분 참 더럽네.” 화검이 중얼거렸다. “걸려들었어. 보기 좋게…… 갈천상이란 자는 홍첩을 돌릴 때부터 우릴 목표로 삼았어. 목표가 된 인간은 또 있지. 날건달 구음, 멸절신장 홍학, 독목섬전 추량…… 이해가 안 되는 구지자 낙화선인. 모두 불쌍한 존재들이야. 하하! 거미줄이 쳐진 줄도 모르고 왱왱거리고 날아다녔으니.” 소화남이 술병째로 들이부으며 말했다. “일음마봉 무기 그 자식…… 운 좋은 놈이야. 어떻게 생각해? 무기와 거산파장이 꽁지 빠지게 도망간 것 말야.” 비영, 철곤 등은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고 술만 들이켰다. 그들은 명령을 받고 사람을 죽이는 일에는 익숙하다. 하나 지금처럼 머리로 생각해야 하는 일은 어렵기만 하다. 그것이 생사의 갈림길이라고 하면 누구보다도 빠르게 움직일 머리가 있지만, 지금과 같은 기분에서는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소문주가 중얼거리듯이 하는 말을 듣기만 했다. “무극전에서도 그래. 거산파장, 그놈은 성질이 개 같은 놈이야. 그런 놈이 도를 깨우친 고승 마냥 가만히 있었어. 이상하지 않아? 무인 같지도 않은 놈들 네놈이 죽었다고? 아니지. 내가 잘못 말했어. 거산파장 그놈은 성질이 불 같지만 뱃속에는 능구렁이가 열댓 마리는 들어 있지. 그리고 독목섬전 추량도 예사로운 무인이 아니고. 하하! 빈속에 술 몇 잔 들어갔다고 취기가 도네.” “일어나시죠.” 화검이 기분 나쁜 듯 말했다. 그는 도무지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치 한바탕 악몽을 꾸고 난 느낌이었다. 하나 칠살수가 버젓이 누워 있지 않는가. 아직도 의식불명인 채로. 소화남은 화검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그들이 왜 도망치듯 빠져 나갔을까? 그 점이 못내 궁금했지. 이제 알겠어.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심각하게 백문장의 저력을 받아들였어. 이전주가 죽인 구음. 갈천상이 무기에게 뭐라고 말했지?” 소화남의 눈은 반짝거렸다. “봤…… 냐고.” 일흑도 무엇인가 깨달은 듯 긴장하며 대답했다. “그래. ‘봤냐’였어. 다음 멸절신장 홍학이 죽었을 때는?” “봤냐. 거산파장에게 물었죠.” 이번에는 철곤이 대답했다. “구음이 죽은 원인은 가슴을 찔렸기 때문이야. 건곤방 이십육초 건곤봉법의 조문은 심장이다. 비영, 건곤봉법을 연구해. 심장을 유념하고.” “존명(尊命)!” 비영의 말투가 바뀌었다. 소문주는 취한 듯이 말하고 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명철한 두뇌회전을 하고 있다. 그는 잡담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분석하고 명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 당장 태백산으로 가라. 건곤봉법의 조문을 확실하게 알아내기 전에는 돌아오지 마.” “존명!” 비영이 검을 챙기고 일어섰다. “이 잔…… 받고 가라. 조문이 심장과 연관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서둘 필요는 없어. 서둘기보다는 목숨을 아껴라.” 소화남은 술을 따라주었고, 비영은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소화남을 잠시 쳐다보더니 그대로 한풍(寒風)이 몰아치는 밖으로 걸어나갔다. “멸절신장 홍학은 어떻게 죽었지?” “……”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소문주의 다음 명령을 알고 있다. 단지 그 일을 누구에게 시키는지가 궁금할 뿐이고, 될 수 있으면 자신에게 시키기를 바랐다. “철곤, 네가 가.” 술잔에 술이 채워졌다. 철곤은 환한 표정으로 술잔을 들이켰고, 다른 사람들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문(門)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적진이랄 수 있는 곳에서 올빼미처럼 활동하는 것이 적성에 맞는 사람들이다. 철곤이 떠나자, 소화남은 다시 술잔을 채웠다. “이 잔은…… 일흑, 너에게 주지. 백 일 동안 암굴에 가둬놓기 싫으니까.” “소문주……” 일흑이 떨리는 손으로 술잔을 받아들었다. 소화남이 내릴 다음 명령…… 일흑은 너무 잘 알고 있다. 철응방…… 철응방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아직 백문장에 있지 않는가. 구지자 낙화선인은 척추가 갈라져 죽었는데…… 척추는 철응방의 조문이 아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비살문 무인들처럼 백문장의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백문장으로 다시 가야 한다. 그들이 어떻게 되는지 지켜봐야 한다. “백문장으로 가라.” 소화남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일흑이 생각한 것과 똑같았다. “우리가 나올 때…… 백문장은 기관을 발동시키지 않았다. 잠입은 불가능해. 귀빈으로 가라. 취휴각에 가서 군웅들과 섞여 있어. 후훗! 모욕을 감수해야 할 거야. 무지렁이들이 틀림없이 입을 나불댈 테니까.” “한 가지…… 우리를 살려준 이유가……” 일흑은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그것은 또 백문장에 돌아가서 활동하는 데 많은 참조가 될 것이다. “들었잖아? 길을 열어 달라고. 그거야. 놈은 그걸 노리고 우리를 잡았어. 독목섬전의 뒷목을 쳐서 나를 끌어들인 연후, 요구를 한 거야. 하하하! 놈은 나를 읽고 있어. 그렇지 않다면 그런 짓을 할 리 없지.” 일흑은 자신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소문주는 은원(恩怨)이 분명하다. 백문장은 원한도 만들었지만 분명히 은혜도 베풀었다. 소문주는 거절하지 못하리라.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도 타고난 호승심 때문에 그러지 못하리라. 호승심…… 그게 문제다. 소문주는 호승심 때문에 언젠가 한 번은 큰 곤욕을 치를 것이고, 기왕이면 지금 치르는 것이 낫다. 문주가 건재해 있을 때. 일흑은 마음 속으로 지금이 그 기회라고 생각했었다. 백문장에서 큰 곤욕을 치르면 소문주는 분명히 달라지리라. 자신들 중 몇 명이 죽는 한이 있어도. 그런데 칠살수만 중상을 입고 포로가 풀려나듯 쫓겨나왔다. 그래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괜히 개망신만 당한 꼴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게 아닌 줄도 모르고. 소문주는 예상외로 큰 충격을 받았고, 사람이 달라지고 있다. 그러나 그가 정작 진저리를 친 이유는 갈천상 때문이다. 백문장 총관이었던 광량은 지모가 뛰어난 자다. 그런 그도 소문주의 심성까지 이용할 계획은 세우지 못했다. 소문주의 말이 사실이라면, 소문주가 지금보다 한층 강해진다 해도…… 강적을 만났다. ‘기회가 생기면…… 죽여야 돼. 소문주의 앞길을 가로막는 자라면……’ 일흑은 다짐했다. 第十章 환린기(渙鱗起`:`파문이 일다) 쫦 1 쫦 단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백문장의 위세는 크게 달라졌다.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다. 무림이란 한시도 피가 마를 날이 없는 곳이지 않은가. 무도(武道)에 정진하기 위해, 혹은 세(勢)를 넓히기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또 싸우는 곳이 무림이다. 싸움에도 큰 싸움이 있고 작은 싸움이 있다. 무도에 정진하기 위해 진검승부를 하는 것이 작은 싸움이고, 세를 넓히기 위해 혹은 보존하기 위해 문파 간에 벌이는 살육전이 큰 싸움이다. 작은 싸움은 수시로 일어나되, 큰 싸움은 쉽게 발발하지 않는다. 어느 문파이건 간에 생사존망(生死存亡)을 걸고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서기를 즐기는 문파는 없다. 그래도 묘한 것이, 문파 간의 큰 싸움은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것도 십 년 주기로. 조항이 죽은 후 십여 년이 흘렀다. 당시 절강무인들은 팽팽하던 균형이 흔들릴 경우에 어떠한 사태가 벌어지는가 뼈저리게 보고 들었다. 구심점이 무너진 백문장. 사대 패강은 벌떼처럼 달려들었고, 백문장은 무인공성(無人空城)이나 다름없는 꼴로 처분만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백문장에도 다른 문파들 못지않은 전력이 있었다. 백호당, 백룡당, 백표당, 백응당. 각기 사대 패강 중 한 문파를 상대해 온 전력이 있는 만큼 장주가 죽었다고 해도 만만히 무너질 백문장이 아니었다. 특히 백문장에는 절강제일지자(浙江第一智者)로 거론되는 광량이 건재했다. 사대 패강은 각개격파(各個擊破)를 노렸다. 어느 문파건 간에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람이지 않은가. 무공은 그 다음이다. 견실한 사람들이 모인 문파는 무너지는 법이 없어도, 무공이 강한 문파는 종종 무너진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이란 것을 사대 패강이라고 모를 리 없고, 광량이라고 간과할 리 없다. 사대 패강은 그 동안 수집해 놓은 자료를 토대로 백문장 무인들과 연관있는 모든 사람을 총동원했다. 가족이나 친지는 물론이고 쌀 한 톨 나눠먹은 이웃까지도 백문장 무인과 안면이 있는 사람들은 돈 몇 푼씩을 거머쥐었다. 이럴 경우 사람들은 흔들린다. 의리(義理)와 금전 사이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가 힘들어진다. 거기에 사대 패강이 연합하여 백문장을 치려 한다는 소문까지 나돌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한 명, 두 명…… 백문장에 등을 돌리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했고, 동요는 더욱 거세졌다. 구심점을 잃은 문파가 겪어야 하는 당연한 절차다. 다른 성(省)이라면 사문(師門)을 등진 문도는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겠지만, 절강성같이 문파 간의 알력이 정리되지 않은 지역에서는 사도(師徒) 간의 신의(信義)만 내세우기 어렵다. 특히 오대 패강은 모두 금화부라는 일개 부(府)에 몰려 있다는 특성이 있다. 나는 백문장에 몸담고 있지만 내 사촌은 건곤방 문도이고, 나는 비살문이지만 처남은 철응방에 있는 경우가 다반사다. 혈육이 먼저냐 문파가 먼저냐 하는 문제는 오대 패강 무인들의 오랜 과제였다. 문파를 떠날 여건은 충분하지 않은가. 광량은 절반을 예상했다. 남은 절반으로 어떻게 사대 패강의 예봉을 막을 것인가? 광량은 여기에 골몰했다. 문제는 안에서 터져 나왔다. 천화신의가 무림인인 줄 까마득히 모르는 당주들은 각기 자신이 백문장을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주들 간의 알력은 도를 지나쳤다. 백문장 내에서, 엊그제까지만 해도 서로들 한 탁자에서 밥을 먹던 문도들이 서로에게 검을 겨루는 사태로까지 진전되었으니. 더욱 한심한 것은 당주나 향주가 말릴 생각은 하지 않고 그에 동참해 버렸으니. 그들은 자신이 이끌고 있는 당을 철저하게 단속했다. 자신의 허락을 얻지 않고 문파를 이탈하는 무인을 참살하면서까지 당의 결속을 다졌다. 더욱 가관인 것은 뜻이 맞는 문도들끼리 세를 형성한 다음 향주나 당주에게 협상을 벌이려 들었으니 말해 무엇 하랴. 광량은 손을 놓아버렸다. 무기력한 노인네나 다름없는 인상으로 취휴각에 도움을 청하러 온 민중들을 상대하면서 노닥거렸다. 밖에서도 살육전이 벌어졌다. 백문장 문도를 많이 흡수하는 문파가 그만큼 강해지지 않겠는가. 대낮에 혹은 암중으로 백문장 문도를 사이에 두고 사대 패강 무인들 간에 치러진 싸움은 한 폭의 지옥도(地獄圖)를 연출해 냈다. 적성현은 공성이 되었다. 사대 패강은 서로의 균형이 팽팽하다는 것을 절감했고, 적성현을 중립으로 하여 서로를 견제하는 것으로 협상을 마무리했다. 그러기까지 꼭 일 년이다. 사대 패강은 백문장 문도를 거의 대부분 흡수했지만 그 수보다 더 많은 무인을 잃었다. 모두가 알고 시작한 싸움이다. 백문장 문도를 흡수해 봐야 기존 문도들과 호흡이 맞을 리도 없고, 한 번 배신한 놈은 두 번 배신할 수 있다고 언젠가는 능력이 극히 뛰어난 몇몇만을 남기고 모두 제거해야 될 골칫거리에 불과하지만 적성현을 마음에 두고 있는 이상 싫어도 건드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멸문시키려면 뿌리까지 잘라버려야 뒤탈이 없다. 문파를 창건할 때나 멸문당할 때나 피를 부르는 것이 무림의 생리인 것을. 그 사건 이후로 무림은 평온했다. 사대 패강은 서로를 간섭하지 않았고, 다툼이 있어도 크게 번지지 않았다. 그들은 전력을 회복할 기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제는 그런 기간이 필요없다. 물이 차면 넘치는 법이지 않은가. 그들은 포화상태에 이른 전력을 구비했고, 자신감도 갖췄다. 십 년 동안 오로지 상대를 어떻게 무너트릴지만 연구해 왔는지라 일단 행동에 들어가면 질풍노도(疾風怒濤)처럼 움직이리라. 그러잖아도 모두들 불안해 하고 있는 터. 마침 그때 백문장이 개문을 했다. 이게 과연 커다란 싸움의 불씨는 되지 않을지. 쫦 쫦 쫦 비조탈명(飛鳥奪命)은 수투(水套`:`장갑) 형태로 된 철골조(鐵骨爪)를 끼웠다. 무극전. 백문장주의 집무실이다. 어제는 이곳에서 백문장주 취임식을 가졌고, 이백여 명에 이르는 군웅들로 흥청거렸다. 지금은 아무도 없다. 고요한 정적이 소리없이 들창에 가라앉는다. 비조탈명은 고요함 속에서 묵묵히 채비를 갖췄다. 철응방의 무공은 조공(爪功)이다. 사람들은 철응방 하면 철골조를 제일 먼저 떠올리지만 천만의 말씀, 철골조는 조공을 익힐 시간이 없는 초급 문도를 위해 만든 병장기에 불과할 뿐이다. 철응조련(鐵鷹爪練) 구십구조(九十九爪)를 모두 연성한 무인은 철골조 따위에 의지할 필요가 없는 철인(鐵人)이 된다. 구십구조까지도 필요없다. 이십조를 연성하면 철골조를 벗어도 되고, 오십조를 연성하면 철골조를 끼고 있는 것과 똑같은 위력을 발휘한다. 일부 몰지각한 자들은 고된 수련을 싫어해서 조공 수련을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철골조에게 의지하려 들지만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철응조법의 위력은 후반부에서 나온다. 오십조를 수련할 때까지는 수련의 효과가 크게 나타나지 않지만 오십조를 넘어서는 순간부터 위력이 천양지차(天壤之差)로 달라진다. 감히 자부할 수 있다. 철응조련 구십구조를 익히면 천하무적으로 군림할 수 있다고. 구지자 낙화선인 정도는 눈길을 줄 가치도 없다. 하나 그의 죽음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척추…… 기분이 나쁘다. 남들에게는 절대 비밀로 하는 일이지만 사실 비조탈명에게는 잊으려야 결코 잊을 수 없는 과거가 있다. 치욕스런 패배. 앙금처럼 가슴 깊이 가라앉아 문득문득 떠오르곤 하는 수치…… 철응방 무공교두(武功敎頭)로 있을 때의 일이다. 당시 비조탈명은 철응조련 오십조를 수련하여 철골조를 벗은 상태였고, 상당한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었다. “철응조련을 수련하면 어떤 위력을 지니게 되는지 가르쳐 주겠다. 누구든 자신있는 자는 나서라.” 문도 중에 한 명이 나섰다. 그는 권각(拳脚)의 위력은 철골조를 착용함으로써 충분하다며 오로지 보법(步法)과 신법(身法)만 수련하는,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내쫓고 싶은 자였다. ‘네놈인가? 잘 걸렸어.’ 비조탈명은 속으로 웃었다. “요즘 무얼 연마하고 있지?” “매화로(梅花路)입니다.” “빠르군.” 입으로는 칭찬했지만 속으로는 비웃었다. 철응방에서는 스물일곱 가지의 투로(套路)가 있다. 제일투로(第一套路) 선퇴십일로(禪腿十一路)에서부터 제이십칠투로(第二十七套路) 철응조(鐵鷹爪)까지. 그 중 매화로는 여섯 번째 투로다. 동문들보다 빠른 진척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다른 자들은 철응조련 구십구조를 연마하면서 투로를 익히는 반면 이자는 오로지 투로에만 몰두하고 있으니까. 파락호들에게 비유한다면 몸이 빠르고 싸움기술은 뛰어나지만 주먹이 약한 자라 할 수 있다. 그는 철골조가 있으니 상관없다고 한다. 비조탈명은 그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할 의무를 느꼈다. “매화로로 국한하지. 좋아. 시작해 봐.” 매화로 대 매화로. 같은 투로로 겨루자고 했으나 수련기간으로 보나 숙련도로 보나 비조탈명이 이득을 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비조탈명은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자신에게 무공을 지도받는 문도들이야 한 수 아래이지 않은가. 그가 끼고 있는 철골조와 자신이 수련한 철조(鐵爪)가 부딪쳤을 때 어떤 위력이 나오는지만 보여주면 된다. 쇠로 만든 수투와 육장이 부딪쳤는데도 비등한 결과만 나온다면 누가 무거운 철골조를 끼려 하겠는가. 그자는 신법이 영활했다. 분명히 매화로를 사용하고 있는데 영활한 신법과 어울려 전혀 색다른 투로처럼 보였다. 서너 수만 나누면 되리라 생각했던 것이 열 수를 넘기고 스무 수가 지나갔다. 점차 비조탈명의 안색이 경직되어 갔다. 전신 진기를 모두 끌어올려 철조에 집중하고도 좀처럼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매화로에는 모두 열세 초식이 있다. 그자는 초식들을 해석하는 방법이 달랐고, 각 초식의 연관성도 깊이 연구한 듯하다. 응용도(應用度)에서 조금도 뒤지지 않았으니까. 철골조와 매의 주둥이처럼 다섯 손가락을 하나로 모은 철조도 여러 번 부딪쳤다. 구경하던 문도들은 탄성을 내질렀다. 철응조련 오십조를 수련한 결과가 어떻다는 것을 명확히 보았으니 부러울 만하지 않은가. 그자는 달랐다. “하하하! 동의할 수 없습니다. 철응조련을 수련한 결과가 병기 한 자루 휴대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차라리 동전 몇 닢 주고 철검(鐵劍)을 사는 게 나을 겁니다. 동전 몇 닢이면 될 것을 뭐 하러 그 고생을 합니까?” 그자의 말이 일면 타당해 보이기도 하다. 하나 틀렸다. 철응조련 오십조는 구십구조로 나아가는 단계이지 끝이 아니다. 그 점을 분명히 말해 주었다. 오십조를 연성하면 철골조를 벗을 수 있을 뿐이라고. 그 이상 수련하면 위력이 하늘에 닿게 될 것이라고. 그런데도 그따위 말을 늘어놓다니. 비조탈명은 살기가 치솟았다. 죽이지는 않더라도 따끔하게 혼구녕을 내주리라. 철조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인간의 손이되 쇠로 만든 것처럼 펴고 오무리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진기를 하나 가득 끌어올렸다는 증거다. 놈도 긴장했다. 놈은 자신이 알고 있는 신법 중 가장 적절하고 빠른 신법을 펼쳤고, 한 치의 틈도 주지 않으려고 애썼다. 놈이 그러면 그럴수록 비조탈명은 싸우기가 힘들었다. 차라리 몇 대 맞고 가만히 있었으면. 퍼억! 둔탁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쇠처럼 굳강한 다섯 손가락이 놈의 어깨를 파들어가면서 만들어낸 기음이다. 놈의 얼굴이 이지러졌다. 조공으로 뚫린 상처는 창으로 찔린 것보다 범위가 넓다. 무엇보다 신경을 많이 건드리기 때문에…… 대체로 조공에 어깨 부위를 가격당하면 팔병신이 된다고 보아야 옳다. 비조탈명은 미안했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런 감정보다는 상처를 치유해 주는 게 급했다. 자칫하면 정말 한 팔을 못쓰게 될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는 상처를 보기 위해 바싹 다가섰다. 순간 놈의 눈이 악독하게 변했다. 그리고 신속하게 가격당하지 않은 오른팔을 돌려 비조탈명의 허리를 부여잡았다. 퍼억! 놈의 어깨에서 났던 소리와 똑같은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탈골조가 등 뒤 척추로 파고드는 소리. 놈이 득의에 가득 찬 미소를 지었다. “나만 팔병신이 될 수 없지. 당신도 허리 병신이 되어야 해. 하하하! 나만 쫓겨나기는 억울하잖아?” 비조탈명은 철조를 들어 놈의 머리를 가격했다. 비조탈명은 탈골조를 움직였다. 당시 놈이 사용하던 탈골조다. 다행히 허리 상처가 깊지 않아 병신이 되는 것은 모면했다. 그 후로, 비조탈명은 신법을 깊이 수련하여 명호에 ‘비조(飛鳥)’란 글자를 집어넣었다. 철응조련은 칠십육 단계에 이르러 철응방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인물이 되었다. 그런 그가 무림에 전혀 소문이 나지 않은 것은 방주의 그림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총호법(總護法). 지난 십여 년 간 그의 정식 직함이었다. 하나 철응방 사람들조차도 그가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이번에 철응방주가 그를 밝은 세상으로 꺼내놓지 않았다면 지금도 모르고 있을 터였다. “개미 한 마리 움직이지 않습니다.” 천장에서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사귀 중 한 명이다. 그들은 비살문만큼이나 어둠을 좋아하는 인간들이다. 밝은 세상, 푹신한 침상에 드러누우면 뜬눈으로 밤을 새워도 천장이나 마루 밑에 숨어서는 단꿈을 자는 습성이 몸에 배었다. “비살문 소식은?” “전혀.” “자네가 파악하지 못했다면 철저하게 봉쇄됐군. 전서(傳書)는?” “보냈습니다만, 잡혔습니다.” “전서구가 잡혀? 음……!” 비조탈명은 신음을 터트렸다. 비살문 칠살수가 이전주라는 자에게 당한 사실은 알고 있다. 이전주와 칠살수가 싸우는 현장에는 사귀 중 동귀(冬鬼)도 있었다. 비살문 고수들처럼 어둠 속에 웅크리고. 비조탈명은 다시 철골조를 만지작거렸다. 어떻게 해야 하나? 사귀의 무공이 칠살수보다 뒤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칠살수가 간단하게 무너졌다면 자신들 역시 맥 못 추고 무너질 수 있다. 특히 백문장에 설치된 기관은…… 어떻게 돌파한단 말인가.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하나 이 사실을 방주에게 알려야 하는데…… 전서구가 잡혔다……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사귀를 떠올려봤다. 백문장의 저력을 확실하게 전해야 한다. 처음 백문장에 들어설 적에는 거산파장이나 일음마봉, 비살문 소문주 같은 거물(巨物)들만 생각했다. 그들과 싸울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취임식이 치러진다면 싸움은 장기전으로 흐를 공산이 크니까. 건곤방이나 천력문, 비살문이 기선을 잡으려는 속셈이었다면 천응방은 관전이나 하면서 정세를 판단하려는 의도가 깊었다. 그런데 이게 뭔가? 다른 문파는 모두 떠났는데 오직 천응방만이 무극전에 갇혀 오도 가도 못 하는 신세가 되어버렸으니. “구지자…… 척추…… 갈천상…… 나를 알고 있어. ‘봤냐’는 물음이 나를 자극했어. 그게 실수야. 실수…… 일음마봉, 거산파장…… 그들이 떠날 때 같이 떠났어야 돼.” 비조탈명은 자신이 척추를 공격당한 다음부터 척추를 공격하는 자만 보면 왠지 모르게 살심(殺心)이 솟구쳤다. 그렇다고 척추를 공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방주를 호법하면서부터는 싸울 기회가 드물어 사람을 죽여본 지가 상당히 오래됐지만 싸웠다 하면 척추만 으스러트렸다. 그런데 척추를 공격했다. 그것도 두 명이나. 선보인 무공도 대단한 것이 아니다. 물론 뛰어난 절기이기는 하지만 거의 완벽에 가까운 자신의 철조에 부딪치면 배겨내지 못하리라. 여러모로 그는 남기로 작정했다. 일음마봉과 거산파장이 떠나는 것을 봤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정작 심각하게 생각한 것은 칠살수가 당하면서부터이다. 그때는 ‘아차!’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인 것을…… “아닙니다. 총호법께서는 당연한 생각을 하셨습니다.” 천장 한구석에서 하귀(夏鬼)가 말을 받았다. 이들은 늘 이런 식이다. 비조탈명과 사귀는 늘 붙어 있으면서도 마주앉아 대화를 나눈 적은 거의 없다. 방주(幇主)가 공식석상에 나설 때는 사귀가 모습을 드러낸다. 반면에 비조탈명은 그림자가 되어 혹여 있을지도 모를 살수의 마지막 공격에 대비한다. 사귀에게 ‘방주가 가장 믿는 자들’이란 말은 그래서 생겼다. 방주가 한적한 곳에 혼자 있을 적에는 비조탈명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사귀가 그림자가 되어 사방을 감시한다. 살아 있는 귀신들이랄까? 방주는 그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 춘하추동(春夏秋冬)에서 한 글자씩 딴 다음 뒤에 ‘귀(鬼)’ 자를 붙였고, 넷을 한꺼번에 통칭할 때는 사귀(四鬼)라고 장난삼아 불렀다. 그것이 이들 네 명에게는 죽는 날까지 짊어지고 갈 멍에가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하고. “난 이제 호법이 아냐.” “저희에게는 호법이십니다. 비조대주(飛鳥隊主)라면 몰라도 비마대주(飛馬隊主)는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비조탈명은 사귀의 말을 일축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비살문은 어떻게 되었을까? 몰살했을까? 빠져 나갔을까? 너무 조용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백문장이 타격을 받았다면 하인들 나부랭이라도 웅성거리며 돌아다녀야 옳을 텐데. 몰살? 비살문 십대고수 중 다섯 명이 왔고, 죽음의 신이라는 소문주도 왔는데 몰살이라…… 그건 생각하기 어렵다. “추귀(秋鬼), 이건 내 마지막 명령으로 생각해라. 너는 꼭 살아서 돌아가야 한다. 우리가 당한다면 당하는 모습을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았다가 방주님께 전해 드려라.” “……” 어둠 속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가자!” 비조탈명은 언제나 지니고 다니던 철골조를 던져 버렸다. 쫦 2 쫦 끼이익……! 문을 밀치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려퍼졌다. 대낮이라 웬만한 소리는 감춰줄 법도 하건만 주위가 너무 조용하여 소름이 오싹 돋도록 크게 들렸다. 쉬익! 제일 먼저 동귀가 움직였다. 사귀는 철골조를 사용하지 않아도 될 만큼 철응조련을 깊이 수련했지만 지금은 모두 철골조를 끼고 있었다. 철골조는 단지 쇠로 만든 수투라는 것 외에 또 다른 묘용이 숨어 있다. 손등 쪽에 세우침(細雨針)이 설치되어 있다. 입구만 얼마나 열어놓느냐에 따라 세우침 이백 개가 한꺼번에 날아갈 수도 있고, 서너 개씩만 날아갈 수도 있다. 그것이 무공을 펼침과 동시에 전개된다는 점에서 더욱 무섭지만. 십여 년 전, 막대한 출혈을 당한 끝에 고안한 비책(秘策)이다. 죽고 죽이는 싸움에서는 강호상의 도의가 무시되기 일쑤였고, 오히려 도의 운운하면 미친놈 취급을 받는다. 어떻게든 적을 죽이는 것이 급선무다. 무공수련을 강화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무공이란 것은 개인차가 심해서 어떤 자는 얼마간의 수련으로도 큰 성과를 얻는 반면, 어떤 자는 몇 년 세월을 소비하고도 진척이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내칠 것인가. 철응방은 철골조에 세우침을 가미함으로써 개인 능력을 한층 강화시켰다. 동귀 다음으로 하귀가 빠져 나갔다. 제일 가운데 비조탈명이 섰고, 뒤로는 춘귀가, 제일 마지막으로 추귀가 따랐다. 춘귀가 문을 빠져 나오고 추귀가 막 들어설 때였다. 위이잉……! 어디선가 벌떼가 날아오는 듯한 기음(奇音)이 들려왔다. “기관이다. 조심해.” 비조탈명은 사방을 둘러보며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그 말도 너무 늦게 토해 낸 말이다. 담장 위를 쭉 둘러보던 비조탈명의 귀에 ‘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린 비조탈명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몸이 굳어지고 말았다. 추귀……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 돌아가 방주님에게 사실을 전하라고 말한 것이 일다경(一茶頃)도 지나지 않았는데…… 추귀도 어처구니가 없는지 쓰게 웃었다. 그게 그의 마지막이다. 그는 전신을 피로 물들인 채 스르륵 무너져 내렸다. “추…… 귀……” 한참 만에야 비조탈명의 입이 열렸다. 춘귀가 조심스럽게 추귀에게 다가가 그의 몸에서 조그만 원반을 뽑아들었다. 손바닥만한 원반이다. 매미날개처럼 얇고 들어도 들지 않은 듯 가볍다. 가장자리는 칼날보다도 예리하게 깎여 있어 살짝만 대어도 피가 주르륵 흘러내릴 것 같다. 그게 문설주에서 튀어나왔다. 수십 개나 한꺼번에, 소리도 없이 튀어나왔다. 양 팔을 옆으로 벌리면 닿을 만한 소문(小門)이다. 추귀가 피하지 못한 것은 당연하겠지. 아니, 그 누가 공격을 받았더라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으리라. 몸이 금강불괴(金剛不壞)가 아닌 이상은. 하인들이 들락거리는 소문을 택한 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다. “백문장 놈들! 뼈를 갈아먹겠습니다.” 춘귀가 이를 부드득 갈았다. 무려 이십여 년이나 붙어다닌 동문이다. 절강무인들 중 삼 할이 죽었다는 십여 년 전의 대란(大亂)에서도 상처 하나 없이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그 동안 쌓인 정이 혈육보다 깊으면 깊었지 못하지는 않으리라. 그런 동문이 눈 앞에서 죽어갔다. 철골조 한 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춘귀의 얼굴은 악귀나 다름없이 험악하게 변했다. 춘귀뿐만이 아니다. 하귀, 동귀의 얼굴도 보기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특히 하귀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볼 근육을 실룩거렸다. 추귀는…… 하귀의 친동생이다. 비조탈명은 그 점을 염려했다. 한 장소에서 형제를 몰살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추귀에게 가장 우선적으로 삶을 도모하라고 말한 것이다. 또한 그 말은 하귀에게 한 말이기도 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동생을 보살피라는. 가장 아끼고 싶은 사람이 가장 먼저 죽었다. “여…… 엽(曄)…… 아, 엽아……” 하귀의 입이 벌려지고 비조탈명과 춘귀, 동귀가 처음 듣는 이름자가 새어나왔다. 추귀의 이름이 엽이었구나. “……끄윽!” 하귀의 목구멍이 그렁거린다 싶더니 이상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리고 그런 소리가 계속될수록 하귀의 볼 근육은 끝없이 경련했다. “호법, 갑시다.” 한참 만에 하귀가 먼저 재촉했다. 분노라거나 슬픔 같은 감정이 모두 죽었다. 기쁨도 놀람도 고통도 모두 죽었다. 하귀는 죽었다. 몸과 마음이 다 죽었다.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하얗게 변해 귀광(鬼光)을 발산하는 두 눈동자뿐이다. 무극전에서 하인들이 사용하는 소문을 지나면 바로 내원(內院)으로 이어진다. 내원에는 천화신의 하문화의 거처인 취운각과 조자경의 거처인 연화각이 있다. 비조탈명은 역공(逆功)을 생각한 것이다. 그는 한 가지만 생각했다. 비살문 고수들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그들이 몰살했다면 자신들 역시 몰살당하고 말 것이다. 방(幇)에 연락을 취할 방도도 끊겼다. 자신들이 돌아가지 않으면, 군웅들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번지면 방에서도 알고 사람을 보내거나 복수를 하겠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을 수 있다. 취임식 같은 경사스러운 날에 불경하다는 이유로 하객(賀客) 네 명을 쳐죽이고, 비살문 고수를 몰살한 자가 갈천상이다. 그런 위인이니 앞일인들 오죽 잘 대비해 놨으랴.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백문장에서 죽이지 않았다고 오리발을 내밀 수도 있다. 비살문 고수들까지 죽었으니 서로 상잔(相殘)했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보는 눈이 하나도 없다. 군웅들은 전부 대문 바로 옆에 있는 취휴각으로 쓸려갔으니, 그들이 상상을 더해 만든 이야기만 믿고 백문장에 죄과를 물을 수는 없다. 비조탈명은 백문장 장주를 죽이기로 작정했다. 자신들이 백문장주를 죽인다면 사태는 상상 밖으로 커질 것이고, 철응방에서는 백문장을 의심하게 되리라. 자신과 사귀의 무공을 잘 알고 있는 방주이니 백문장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알게 될 테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천만에 말씀이다. 죽은 자도 말을 할 수 있다. 비조탈명은 죽음으로써 말을 하기로 작심했다. 지금의 처지로써는 그것이 유일한 타개책이다. 죽기까지 하면서 말조차 못 한다면 그야말로 개죽음이다. 개죽음을 당할 수야 없지 않는가. 백문장주를 기필코 죽여야 한다. 기필코! 제일 앞서 길을 열던 춘귀가 철골조를 달그락거렸다. 그들만의 신호. ‘위험!’ 비조탈명을 비롯하여 춘귀를 따르던 이귀는 춘귀가 신호를 보내주기 전에 이미 위험을 감지했다. 후원(後園)에 누군가 있다. 후원 전체가 도검(刀劍)으로 휩싸인 듯 날카로운 예기가 피부를 찔러온다. ‘백문장이 이렇게 되도록 까마득히 몰랐다니…… 광량, 그 늙은이 수작이야. 늙은이가 어수룩한 척하면서 속으로 이런 일을 꾸미고 있었다니……’ 비조탈명은 착각을 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갈천상이 들어옴으로써 본격적으로 시작된 일이라고는 털끝만치도 생각하지 못했다. 모든 게 광량의 수작이라고 생각했다. 늙은 생강…… 광량은 그런 늙은이니 자격이 충분하다. 반면에 갈천상은 이런 일을 저지르기에는 나이가 너무 젊다. 춘귀가 다시 철골조를 달그락거렸다. 이번에도 철응방 무인들은 춘귀가 철골조를 달그락거리기 전에 전면에 나타난 여인들을 보았다. ‘계집……? 독목섬전 추량을 죽인 계집이군. 다른 계집들은……? 무림이 완전히 썩었군. 저런 계집들이 암내를 풍기고 다니다니. 쯧!’ 비조탈명은 손가락 관절을 소리나게 꺾었다. “저에게.” 하귀가 짤막하게 말했다. 비조탈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후원을 가득 덮던 살기는 세 여인이 나타남과 동시에 한 군데로 모여들었다. 세 여인이 나타난 곳으로. 다른 장원보다도 훨씬 넓은 후원이지만, 다른 곳에서는 훈기(薰氣)가 일절 느껴지지 않는다. 하귀가 세 여인을 향해 걸어갔다. 천천히. 그는 걸음걸음에 동생을 잃은 한(恨)을 담았고, 자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백문장을 요절내고야 말겠다는 집념을 담았다. 겉에서 보기에도 확연히 느껴진다. 이런 사람과는 싸우기가 곤란하다. 아무리 생사를 도외시한 무인이라 할지라도 목숨에 대한 일말의 미련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찰나에 불과한 허점은 그곳에서 비롯된다. 하귀와 같은 자는 목숨에 미련이 없다. 육신에 대한 미련은 더 더욱 없다. 살을 주고 뼈를 깎는 정도는 각오도 아니고, 동사(同死)라도 마다하지 않을 게다. 지닌 바 본신 무공보다 두어 배는 더 강해진 셈이랄까? 세 여인은 싸울 의사가 없는 듯 검도 뽑지 않은 채 서 있다. 육신을 난자하는 살기만 발산하지 않는다면 싸우려고 나타난 사람들 같지 않았다. “물러섯!” 비조탈명이 느닷없이 고함을 질렀다. 그는 풀숲을 거닐다가 독사를 만난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허공으로 솟구쳤다. 하귀는 반사적으로 위기를 느꼈다. 그는 잘 안다. 비조탈명은 어지간해서는 싸움판에서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상대가 주절주절 나불대면 묵묵히 듣기만 하다가 척추를 으스러트리는 사람이다. 수하에게 도움도 주지 않는다. 싸움판에서 죽는 놈은 무공이 약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정신상태가 글러먹어서 죽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데 그까짓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전장에서 죽기는 왜 죽느냐는 것이다.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도 어쩌지 못할 고수를 만나 죽는다면 무인으로서 가장 큰 행운이다. 그런 죽음은 감수해야 한다. 이래저래 비조탈명은 도움을 주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다급하게 고함을 질렀다면…… 하귀는 생각할 것도 없이 허공에 몸을 띄웠다. 하나 그의 행동도 빨랐지만 근본적으로 비조탈명이 고함을 질렀을 때는 이미 사태가 벌어진 후였다. 쒜에엑! 쉐엑……! 너무 빠른 속도…… 육안으로 식별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허공에 은비늘이 반짝거린다고만 느껴지는 은비늘…… 추귀를 죽였던 것과 똑같은 원반이 하귀의 몸통을 향해 짓쳐 들었다. 은빛 비늘은 곧 붉디붉은 혈화(血花)와 조화를 이루었다. “컥!” 하귀는 짧은 단말마를 토해 냈다. 그의 전신에서 혈화가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개잡놈들……!” 하귀는 쓰러지지 않았다. 핏방울을 분수처럼 쏟아내면서 신형을 날렸다. 그가 가는 곳은 세 여인이 있는 곳. 하나 당도하지는 못했다. 언제부터인가 그의 발 밑으로 물이 질펀하게 흘렀고, 두 발이 물에 닿는 순간 그는 또 한 번 비명을 내질렀다. “헉! 비, 빌어먹을!” 제일 먼저 육신이 깨달은 느낌은 고통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원반에 격중당한 상처에서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다. 전신이 난도질당한 것과 진배없는데도 전혀 아프지 않다. 고통이 사라졌으니 한결 쉽게 싸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는 움직이지 못했다. 두 번째 느낌 때문이다. 마비. 하반신부터 짜르르한 느낌이 들더니 다리가 마비되었다. 마비는 순식간에 위로 치솟아 두 팔을 마비시키고, 몸통까지, 그리고 혓바닥까지…… 그야말로 완벽하게 전신을 마비시켰다. 하귀는 눈알을 굴릴 힘도 없었다.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동생의 복수는커녕 철골조 한 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무의미하게. 어느 장원이나 후원은 아름답게 꾸민다. 여인네들이 기거하는 곳이기도 하려니와 장원의 기둥인 장주가 편히 쉬는 곳이기 때문이다. 전각을 세우고, 전각 주변에 연못을 만들기도 한다. 연못에는 팔뚝만한 잉어가 형형색색의 모습을 자랑하고…… 백문장 후원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크고 작은 나무들이 아름다운 운치를 자아내고 있지만, 곳곳에 기이한 모습을 가진 수석(壽石)이 나름대로 교태를 뽐내지만 다른 장원들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나무에, 바위에, 후원 가득히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지 않았다면 연무장(練武場)에 들어선 것이 아닌가 의아해 할 만큼 넓고 황량한 후원이다. 비조탈명은 깨달았다. 후원에 산재한 모든 것이 적이다. 하귀를 죽인 바위만 해도 초절정 고수에 못지않은 완벽한 적이다. 참! 바위가 아니지. 바위로 위장한 기관이지. 원반을 날리고, 독액(毒液)을 흘려내고…… 비조탈명은 후원에 가득 쌓인 눈들 중 일부가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모습을 발견했고, 고함을 질렀다. 하귀는 눈길을 세 여인에게 고정시켰다. 그는 분노로 가득 찼고, 살기로 뒤덮였다. 그런 사람의 눈에 소리없이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가 보일 리 없다. 여름이라면 풀이 타들어가며 풍기는 노린내라도 맡았을 터인데. 눈으로 보아야 알 수 있는 곳에서 그는 눈을 다른 데로 고정시켰다. 후원에 산재한 모든 기물(器物)이 적이다. “병신들! 엉거주춤한 꼴이라니. 빨리 와. 손이 근지러워 죽겠어.” 비조탈명은 속이 뒤집히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발걸음을 떼어놓지 못했다. 세 여인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녀들이 움직인다면 위험이 없는 것이고, 움직이지 않으면 위험이 상존한다. 하귀는 잠시 푸들거리더니 잠잠해졌다. 맥을 짚어보지는 않았지만 죽은 것이 확실하다. 얼굴색이 검게 변색되었고, 입에서 하얀 거품을 흘려내고 있으니…… “동귀.” “……” “길을 뚫어라. 하나를 확인해야 한다. 그게 무엇인지 알겠지?” 동귀는 고개를 끄덕였다. 빙그르……! 동귀는 팽이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그가 제자리에서 돈다고 생각한 것은 그의 처음 모습이 그랬기 때문이다. 동귀의 모습은 눈보라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눈보라는 더욱더 거세져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 않았다. 동귀가 만들어낸 작품이다. 그는 맴을 돌자마자 그물을 꺼내 양 손에 움켜잡았다. 그물 끝에 날카로운 추가 달려 있어 혼자서 다수를 상대할 수 있는 병기이며, 자신보다 무공이 높은 고수도 쉽게 사로잡을 수 있는 기병(奇兵)이다. 동귀는 그것으로 땅바닥을 후려쳐 켜켜이 쌓인 눈을 흩날렸다. 바위나 나무는 일절 건드리지 않았다. 휘날리는 눈보라로 인해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가자.” 비조탈명은 허리를 낮게 구부리고 눈보라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 뒤를 춘귀가 바짝 따랐다. 전에도 이런 경험이 있다. 만수방(萬手幇)이라고…… 강북(江北) 섬서성(陝西省) 출신으로 알려진 무인 두 명이 철응방 세력권에서 철응방에 아무런 통보도 하지 않고 개방(開幇)을 했다. 동산에서 십 리도 떨어지지 않는 현락현(賢樂縣)에 버젓이. 약간이라도 성의를 표시했다면 오히려 감싸줄 수도 있는 처지건만 그들은 자신들이 지닌 무공을 단단히 믿었는지 오히려 자신들에게 무공을 배우면 철응방 문도 정도는 간단히 제압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고 다녔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도발을 일삼았다. 그들에게는 져도 이기고, 이기면 더욱 좋은 싸움이니 사양할 리가 없다. 문도 두어 명이 분기로 인해 비무에 응했고, 잔재주는 약간 지녔는지 아니면 운이 좋았는지 그들이 이겼다. 그들은 기고만장했다. 봐라. 종이호랑이이지 않느냐. 문도가 망신을 당했는데도 철응방에서는 조용하지 않느냐. 천수여래(千手如來)가 부럽지 않은 천 개의 팔을 줄 테니 와서 무공을 배워라. 사실 철응방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두 명쯤에 기둥뿌리가 흔들릴 철응방이었다면 아직껏 생존하지도 못했다. 철응방주가 생각했던 대로 몇몇 군소문파가 철응방에 동조했다. 그들은 문파를 이끌 자격도 없다. 대세를 그렇게 읽지 못한 데서야 지금의 고비는 넘기더라도 앞날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모두 여섯 개 문파. 철응방은 하루아침에 그들 모두를 잿더미 속에 묻어버렸다.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급공(急攻)이었다. 효과는 탁월해서 약간 부풀려진 문세(門勢)에 힘입어 꿈틀거리려던 기타 문파들이 일거에 숨죽이며 땅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당시 사귀가 맡은 곳이 만수방이다. 놈들은 자신의 처지조차 모르는 우둔한 바보들이지만 무공은 큰소리칠 만했다. 암기 수십 개를 한 손으로 날리는 암기술(暗器術)은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다. 그때도 지금처럼 동귀가 길을 뚫었다. 아니, 공격을 봉쇄하여 거리를 좁혀주었다. 마무리는 춘귀와 하귀가 했다. 놈들의 암기술은 뛰어난 편이지만 거리를 잃은 다음부터는 오합지졸(烏合之卒)에 불과해서 이런 놈에게 고전했나 싶을 만큼 간단히 죽였다. 세상사 모든 것이 그렇다. 길을 모를 때는 모든 게 막막해 보이지만 일단 실마리만 잡으면 앞길이 환히 내다보이는. ‘역시……’ 원반이 숨어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바위를 스쳐 가며 비조탈명은 알고자 했던 부분을 알았다. 기관을 조정하는 자가 있다.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 터이고, 기관이나 암기의 사정거리에 들어서면 여지없이 작동을 시키리라. 눈보라가 그의 시야마저 가려버렸다. 그는 선택해야 한다. 후원에 설치된 모든 기관을 작동시킬 것인지 아니면 그냥 참고 기다릴 것인지. ‘후후! 노옴……! 동귀의 내력(內力)은 가히 나와 맞먹지. 천망(天網)을 한 시진 정도 휘두르는 것은 일도 아냐. 그 전에 저 계집들은 죽는다.’ 비조탈명의 양 손은 진기가 가득 운집되어 검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쫦 3 쫦 페에에엑……! 비조탈명이 전개한 선제공격은 맞받을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날카로운 경기(勁氣)가 내포되었다. “돌대가리들인 줄 알았는데 제법 잔머리도 굴리네?” 독목섬전을 죽인 여인은 조롱을 던지며 뒤로 물러섰다. 대신 그의 양 옆에 있던 여인들이 앞으로 쭉 나섰다. 비조탈명과 권각을 섞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와 상당한 거리를 두고 옆으로 비켜나갔으니까. 비조탈명은 철응조공(鐵鷹爪功) 제이초(第二招)를 전개하지 못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뒤를 바짝 따라오던 춘귀도 철골조만 만지작거릴 뿐 쉽사리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비조탈명은 현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긴단 말인가. 여자 셋이, 한 명은 뒤로 두 명은 좌우로 움직였을 뿐이다. 여자라고 해봐야 무인다운 여자들은 아니다. 뒤로 빠진 한 명은 독목섬전을 죽이고 난주일검과 비등한 경지를 보였으니 무공이 입증된 셈이지만 아직도 비조탈명에게는 기방(妓房)에서 화장이나 예쁘게 하고 술이나 따를 그런 여자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다른 두 명은 더욱 눈뜨고 봐줄 수 없다. 농사나 짓던 아낙네가 검을 들어도 좋단 말인가. 무인을 모독해도 분수가 있지,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녀들이 움직이자 상황이 돌변했다. 숨막힐 듯한 압박감에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평생을 긴장 속에서 살아온 비조탈명에게는 뜻밖이었다. “이, 이게……!” 뒤따라온 동귀도 아연실색하며 중얼거렸다. 이런 종류의 압박감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관망하는 자에게는 전달되지 않는다. 바로 목숨을 놓고 대치하는 자에게만 전달된다. 세 여인이 움직였으니 적어도 그 공간 안에서는 기관에 대한 염려를 떨쳐도 좋으리라. 동귀는 더 이상 눈보라를 휘날릴 필요가 없다. 그는 자칫하다가는 피맛을 못 볼 수도 있고, 하귀와 추귀의 원한을 구경만 하는 꼴이 되는지라 황급히 달려왔지만 이런 경우는 추호도 예측하지 못했으리라. 움직이지 않고 있는 비조탈명과 춘귀가 고맙기만 했을 테지. “화산파(華山派)에 삼재진(三才陣)이 있다고 들었다. 그것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조심해라.” 비조탈명은 삼방(三方)에 있는 세 여인을 둘러보았지만 누구를 공격해야 할지 구분되지 않았다. 삼(三)이라는 숫자는 참으로 묘하다. 제일 위 일(一)은 천(天)을, 가운데 일(一)은 인(人)을, 제일 밑에 있는 일(一)은 땅을 가리킨다. 천지인이 모여 삼(三)이라는 자를 형성한다. 무인에게도 삼이라는 자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과제다. 기(氣)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기를 원기(元氣)라고 한다. 원기는 다시 세 가지로 나눠지는데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근원정기(根源精氣), 음식물로부터 얻는 수곡지기(水穀之氣), 호흡을 통해 양성하는 호흡지기(呼吸之氣)가 있다. 근원정기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았으니 인(人), 수곡지기는 땅에서 자라는 음식물에서 얻었으니 음(陰), 호흡지기는 하늘로부터 얻는 것이니 양(陽)이다. 이 세 가지 원기를 잘 조화해야 상승무공을 익힐 수 있는 체질이 된다. 화산파에서는 이러한 이치를 바탕으로 삼재검진(三才劍陣)이라는 독특함 검진을 만들어냈다지만 진위를 확인한 사람은 없다. 강북 무림을 영도하는 문파 중 하나인 화산파가 직접 나서서 권각을 휘두를 일이 무에 있으랴. ‘이건 기(氣)야. 기로 기를 누르고 있어.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 음……!’ 세 여인의 진기가 이 정도라면 정작 검공을 펼쳤을 때, 그 위력은 가히 노도(怒濤)와 같으리라. “각기…… 하나씩 맡아서 친다. 셋이…… 연합검진을 펼치지 못하도록 일격에 끝내.” 비조탈명은 속전속결을 택했다. 세 여인이 아무리 가공한 살기를 쏟아낸다 해도 그에 눌리지 않을 자신이 있지만 잠시나마 마음이 움츠러들었다는 것이 자존심 상했다. “타앗!” 비조탈명은 뱃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고함을 내뱉으며 앞으로 치달렸다. 비조탈명과 동시에 춘귀와 동귀도 농사꾼 같은 두 여인에게 급공을 가했다. “어멋! 저, 저 무, 문에서……” 봉아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보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무인 한 명을 순식간에 해치운 문. 그 문은 봉아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드나들던 문이지 않은가. 봉아뿐만이 아니다. 조자경도 취아도 입이 쩍 벌어지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아! 저, 저 바위……” 이번에는 취아가 놀라서 소리쳤다. 놀라기는 누구나 마찬가지다. 그녀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는 곳에, 여름이면 꽃이 만발하는 곳에 이토록 무서운 기관장치가 되어 있다는 것은 놀랍기에 앞서 두려웠다. “으……” 조자경은 신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어지간해서는 놀라지 않을 그녀였지만 하귀가 무엇 때문에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왜 살색이 변해 죽는지 가까이 다가가서 보지는 않았지만 익히 알았다. 백문장에 사도(邪道)나 다름없는 기관장치가 되어 있을 줄이야. 아버지께서 이런 장치를 허락하셨단 말인가. 무인은 모름지기 본신 무공으로 승부를 가늠해야 한다고 누누이 말씀하셨는데. 병기의 우세나 기관, 독 등에 의지해서는 상승무공을 익힐 수 없다며 항상 경계하라고 하셨는데. 그녀는 입술을 악물며 갈천상을 바라보았다. 한 점 동요 없이 후원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지켜보는 그가 얄밉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했다. 부우욱……! 비조탈명은 허공을 찢어발기며 여인의 머리를 짓눌러갔다. 지금껏 손속을 부딪쳐 본 것은 서너 합에 불과하지만 그는 여인들의 무공 정도를 짐작해 냈다. 여인들의 검공은 두려울 게 못 된다. 하나 신법만은 유독 조심해야 한다. 빠르기가 벌과 같아서 좌측에 있는가 싶으면 오른쪽으로 돌아서고, 오른쪽을 겨냥하면 등 뒤로 돌아가 있기 일쑤다. 신법이라면 이쪽도 만만치 않다. 이귀는 철응방 최고보법인 칠성보(七星步)를 밟기 시작했다. 사대 패강 중에서 신법이 가장 빠른 문파는 비살문이다. 철응방은 비살문을 상대하기 위해서라도 빠른 신법이 필요했다. 건곤방은 봉을 사용한다. 건곤방 무인과 겨루기 위해서는 두 자가 넘는 공간을 한 번에 압축하는 신법이 필요하다. 천력문은 패력(覇力)을 기본으로 하는 무공이다. 다른 문파와 싸울 적에는 일격필살(一擊必殺)을 염두에 두지 않아도 되지만 천력문도와는 다르다. 일격에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빠른 신법이 필요했다. 철응방주는 절강성에서 가장 빠른 무인, 비성객(飛星客)을 문도로 영입했다. 그가 무려 칠 년에 걸쳐 철응조공에 맞는 보법을 창안한 것이 칠성보다. 현묘하다는 면에서는 자신의 절기인 비성유혼(飛星遊魂)보다 떨어지지만 빠르기에서는 훨씬 낫다고 자신했다. 칠성보는 모래밭에서 익힌다. 몸을 최대한 가볍게 하여 모래밭을 걸어도 발자국이 남지 않아야 삼성(三成)을 넘은 것으로 간주한다. 꾸준히 수련하여 젖은 한지(韓紙)를 밟아도 종이가 찢어지지 않으면 육성(六成)이다. 그 이상은 정해진 것이 없다. 신법 자체가 무궁한 발전을 기대할 수 있고, 궁극에 도달해 본 무인이 없기에 잠정적으로 그렇게 정했을 뿐이다. 칠성보라고 하면 북두칠성(北斗七星)을 떠올리기 쉽지만 그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칠(七)이라는 글자는 일곱 걸음이 한 호흡에 이루어진다는 데서 비롯되었고, 성(星)은 칠성보의 창안자인 비성객을 기념하는 의미로 붙여졌다. 그는 지금 철응보에서 원로대접을 받으며 또 다른 신법을 창안하고 있다. 까앙! 깡! 깡! 깡……! 철골조와 검이 부딪치며 귀에 거슬린 소리를 토해 냈다. ‘아직도 뒤져. 도대체 무슨 놈의 신법이……’ 비조탈명은 이번 싸움이 쉽지 않으리라는 불길한 예감을 떨치지 못했다. 자신과 이귀가 칠성보까지 밟으며 공격을 가했지만 겨우 세 여인과 동수(同手)를 이루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만족? 싸움에 만족이 어디 있는가. 싸움에서 만족했을 때는 상대가 죽었을 때뿐이지 않은가. 그러나 죽일 수 없는 것을. 겨우 평수에 그치는 것을. 그나마 동귀와 춘귀는 철골조라도 부딪쳐 봤지만 정작 비조탈명은 그렇게 자랑하던 철수(鐵手)를 한 번도 써먹지 못했다. 독목섬전을 죽인 여인이 뒤로 빠져 있는 관계로 그녀에게 접근할 수 없다. 그녀에게 공격을 가하려고 하면 양 옆으로 물러나 있던 두 여인이 어느새 코 앞으로 바싹 다가와 검을 휘두른다. 기세도 다르다. 한 명은 여인답지 않게 강하고 난폭한 반면, 다른 한 명은 뚱뚱한 몸인데도 불구하고 버들가지처럼 부드럽고 유연하다. 그때, 퍼뜩 머리 속을 스쳐 가는 생각이 있었다. ‘오른쪽이 양(陽)…… 천(天)이다. 왼쪽이 음(陰), 지(地). 양과 음이 화합하고, 가운데는 인(人)이다. 저 여자…… 저 여자를 중심으로 양과 음이 화합하고 있어!’ 그러고 보니 검도 다르다. 오른쪽에 있는 여인은 사내도 들기 힘들 것 같은 거검(巨劍)을 위맹하게 흔들고, 왼쪽 여인은 폭이 좁은 협봉검(峽封劍)을 사용한다. 위력적이고 파괴적인 공격과 재빠르게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검공, 거기에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상승검공이 뒤를 받치고 있다가 느닷없이 파고든다. 뚱뚱하고 소박해 보이는 여인 두 명은 가운데 여인의 양 손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하귀, 추귀가 살아 있었다면……’ 아쉬움이 컸다. 사귀 역시 연수(聯手)에는 달통했다. 서로 마음도 맞아 눈빛만으로도 상대의 의중을 알아챌 정도다. 그들이 살아 있었다면 세 여인과 좋은 호적수(好敵手)가 되었으련만…… 아무래도 이귀로는 무리다. “동귀, 춘귀! 단 한 번이닷! 기회를 놓치지 맛!” 비조탈명은 고함을 지름과 동시에 허공으로 솟구쳤다. 슈아앙……! 예측했던 대로 양검이 날아온다. 머리를 통째로 갈라버릴 듯이. 음검은 이귀를 막아선다. 음검은 가볍고 변화가 많기 때문에 순간적인 틈을 막아낼 수 있다. 그것뿐이면 상대가 되지 않겠지만 뒤에 받치고 있는 여인이 문제다. 그 여인은 양과 음의 조화가 무너진 곳을 정확히 받쳐 준다. 두 여인이 지닌 무공보다 훨씬 고절하지 않으면 생각할 수 없는 행위다. 파앙! 비조탈명은 육장으로 거검을 받아쳤다. 여인의 눈에 놀람이 스쳐 갔다. 그럴 것이다. 육장과 거검이 부딪치고도 거검이 튕겨나갔다면 당연히 놀라야 한다. 아직 멀었다. 어린것들! 이것이 바로 철응조공의 진실한 위력이다. 비조탈명은 양검을 쫓지 않고 가운데 여인, 독목섬전을 죽인 여인에게 짓쳐 들었다. 등 뒤에 붙다시피 쫓아오던 동귀가 양검을 맡았다. 그는 여인이 튕겨나간 거검을 회수하기도 전에 전권(戰圈)으로 뛰어 들어와 목젖에 철골조를 들이밀었다. 춘귀는 음검을 막았다. 단 한 번의 기회. 비조탈명이 말한 기회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비조탈명과 함께 지난 세월을 같이했다고 말할 수 없으리라. 음검의 가볍고 신랄한 검세는 극히 잠깐 동안이나마 동귀, 춘귀를 주춤거리게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비조탈명이 틈바귀를 열어주었으니. 이제 마지막 남은 하나, 가운데 있는 여인의 검공만 막아내면 된다. 여인은 틀림없이 양귀와 음귀의 고전을 한꺼번에 해소할 특이한 검공을 전개할 테고, 그것 때문에 번번이 물러났었다. 단 한 번의 기회는 비조탈명이 만든다. 검공을 막겠다는 뜻이다. 단 한 번만. “위험햇!” 조자경은 자신도 모르게 목이 찢어져라 고함쳤다. 그녀가 보기에는 제법 호흡을 잘 맞추던 세 여인이 돌연 난조를 보이더니 크나큰 위기에 직면하고 말았다. 누가 실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뚱뚱한 여인이 막아내기에는 비조탈명의 공격이 워낙 신속하고 묵직했다. 조자경은 차라리 눈을 감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세 여인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무엇 때문에 백문장에 들어와 목숨을 걸고 싸우는지……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지만 그녀들이 철응방 고수에게 죽는 모습은 차마 볼 수 없었다. 특히 철응방 고수들은 철골조를 사용하기 때문에 잔인한 죽음을 선사하지 않던가. 그녀는 갈천상에게 구원의 눈길을 보냈다. 제발 가만히 구경만 하지 말고 어떻게 좀 해보라고. 하나 갈천상은 무심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의 표정은 무심하기만 했다. 그렇게 그는 팔짱을 풀 생각도 하지 않고 후원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지켜보았다. 바람개비가 돈다. 어린아이 손에 들린 바람개비는 솔솔 불어오는 솔바람에도 끈기있게 돌아간다. 그러다가 약간이라도 바람이 강해지면 제 세상이라도 만난 듯이 활기차게 돌아간다. 비조탈명은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재미있는 것은 세 여인이 펼치는 합격진이 꼭 바람개비 같다고 느껴진 것이다. 바람개비는 구심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수수깡으로 만든 대를 벗어나는 순간 바람개비는 생명력을 잃는다. 양음 역할을 맡은 두 여인이 그랬다. 실제로 본인도 아는지 모르지만 춘귀는 두 번이나 치명적인 살검(殺劍)을 맞을 뻔했다. 춘귀가 살검을 맞지 않은 것은 오로지 실낱 같은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인들은 행동에 어떤 제약을 느끼고 있는지 자신의 영역을 절대로 벗어나지 않았다. 그것이 진법이다. 살기를 느끼고, 허점이 드러났다고 제멋대로 살검을 뿌려댔다가는 다른 두 사람이 위험에 처한다. 반대로 목숨이 경각에 처했어도 당황하지 않는다. 뒤에서 검날이 목을 베어와도 쳐다보지도 않는다. 남은 자들이 해결해 주지 못하면 죽을 것이고, 해결해 준다면 살 것이다. 진(陣)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다. 또 하나, 진의 큰 효용이 있다. 무공의 급증이다. 상식적으로 무공이 하루아침에 급진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하나 진 속에 하나가 된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겨우 난주일검과 평수를 이루었던 여인이지 않은가. 동귀는 춘귀보다 내력이 강하니 열외로 치고, 춘귀만 하더라도 난주일검쯤은 상대할 수 있다. 그런데 쩔쩔매고 있다. 세 여인 중 무공이 가장 강한 여인과 세 명 중 가장 약한 무인이 겨루어도 이길 것을 삼 대 삼으로 겨루니 고전하는 현상이 벌어진다. 이것이 진이다. 비조탈명은 인(人)의 역할을 맡은 여인을 공격해 들어가면서 바람개비 중심점으로 들어선 느낌을 받았다. 패애액……! 눈 앞에 있던 여인이 환상처럼 사라졌다. 대신 그를 막아선 여인은 음검을 든 여인이다. ‘잘못됐어!’ 비조탈명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역시 바람개비다. 중심이 돌면 곁가지까지 같이 돈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슈각! 슈욱! 쒜에엑……! 인(人)이 비조탈명을 향해 일검, 동귀를 향해 일검. 양(陽)이 동귀를 향해 일검, 춘귀를 향해 일검. 음(陰)이 춘귀를 향해 일검, 비조탈명을 향해 일검. 신법뿐이 아니다. 이들은 놀라운 쾌검(快劍)을 지녔다. “컥!” 상황이 급변하자 무의식적으로 천망을 꺼내들던 동귀의 팔 하나가 싹둑 잘려 허공에 떠올랐다. 춘귀는 허벅지에 검상을 입었고, 비조탈명은 날아오는 음검을 철수로 잡아챘지만 손바닥을 베이고 말았다. 제길! 검까지 명검(名劍)이라니! 비조탈명과 이귀는 크게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이 여인들은 결코 그들보다 무공이 낮지 않다. 일 대 일로 부딪쳐도 결코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만큼 깊이를 추측할 수 없다. 거기에 진리 하나를 더 보탰으니 패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싸움을 하면서도 상대의 본신 실력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점은 백 번 죽어도 지당하다. 변변히……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철응방 총호법이었던 자가…… 이래도 되는 것인가…… 비조탈명은 거검이 번쩍이는 것을 보고 철수를 들어올렸다. 적어도 한 명만이라도 죽여야 체면이 서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의 등 뒤로부터 가슴을 뚫고 튀어나온 검날은 음검이었다. 第十一章 방여택(芳與澤`:`향기와 악취) 쫦 1 쫦 인간처럼 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는 동물도 드물다. 인간처럼 쉽게 변화하는 동물도 없을 게고, 인간처럼 적응을 잘하는 동물도 없으리라. 조자경은 갈천상이 새롭게 보였다. 그는 늘 변하는 사람이다.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르다. 어쩌지 못할 근심걱정이 생겨도 그는 쾌도난마로 풀어간다. 그는 신(神)이다. 그가 있는 한 백문장의 앞날은 걱정없다. 일개 주정중독자였던 갈천상의 영상은 지워진 지 오래였다. 아니, 어제 무극전에서…… 그것도 아니다. 방금 전이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세 여인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도 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아마도 싸움의 결과를 짐작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 이길 것이라고 확신하지 않는 한 그토록 오만하게 버티고 서 있을 수는 없다. 오만하다고 해서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그녀가 살아오면서 보아왔던 어느 남자보다도 매력있고, 능력있는 남자였다. 조자경에게 갈천상은 의미있는 사내로 부각되었다. 그녀는 가타부타 말 한 마디 없이 걸음을 떼어놓는 갈천상의 뒤를 부지런히 쫓았다. 연화각 문을 밀치고 나설 때, “죽고 싶으냐?” 갈천상이 얼음처럼 차디찬 음성으로 말해 왔다. 그러나 그런 음성조차도 조자경은 감미롭게 들렸다. “아뇨. 살고 싶어요. 오래.” 조자경은 농담으로 받았다. “살고 싶으면 따라오지 마라.” 이번에는 농담이 아니다. 갈천상은 무엇인가 위험을 말하고 있고, 그가 말한 이상 정말로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리라. 그가 생각한 일은 하나도 틀린 게 없으니까. 그녀는 갈천상의 말을 쫓아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그녀도 한마디했다. “조심하세요.” “……” 갈천상은 아무런 대꾸도 해주지 않았다. 그래도 섭섭한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을. 원래 그의 성격이 그런 것을. “어멋! 저, 저……!” 오늘은 놀라는 일투성이다. 처음 춘귀가 소문(小門)으로 모습을 보였을 때도 기절하지 않은 것이 다행일 만큼 놀랐다. 그들이 중문(中門)으로 가지 않고 왜 후원으로 들어선단 말인가. 추귀가 비명횡사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모든 게 놀라움투성이다. 그러나 여태까지 놀란 것을 모두 합쳐도 지금보다 더 놀랍지는 않으리라. 휘리릭……! 휘릭! 갈천상은 한 마리 붕새였다. 신법이 뛰어나다는 사람이 어디 한둘일까마는 절강제일족(絶江第一足)이라는 철응방의 비영객도 갈천상에 비하면 한 수 뒤지리라. 빠르지는 않다. 현란하지도 않고, 뛰어나 보이지도 않는다. 그는 필요한 만큼만 신법을 펼친다. 꼭 필요한 경우만. 무리하게 몸을 트는 것 같지도 않다. 유연하고 절도가 있으며 경쾌해 보인다. 그러나 그런 신법으로 그는 사귀 중 이귀를 죽인 원반공격을 모두 피해 내고 있다. 캉캉캉캉캉……! 한겨울의 차가움마저 찢어발기는 금속음도 간간이 들렸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갈천상의 손에서 무엇인가가 반짝였다. 튕겨나간 것은 은색 원반이었다. ‘역시 고수였어. 나 같은 사람은 열, 스물이 덤벼도 안 되는……’ 봉아나 취아에게는 놀라운 일일 것이되 조자경에게는 감격이었다. 왠지 모르지만 그가 뛰어난 능력을 보이면 보일수록 자신이 칭찬을 받은 것처럼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갈천상은 연화각에서 삼전주가 있는 곳까지 무려 여덟 개의 기관을 뚫었다. 기관을 모른다면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으리라. 그는 백문장에 설치된 기관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환히 꿰뚫었다. 그런 그에게 파해(破解)를 논하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렇다고 기관을 운용할 수 있냐면 그건 아니다. 갈천상이 백문장에 설치된 기관을 알게 된 것은 단지 기관진학(機關陣學)을 깊이 이해한 덕이다. 그도 사실 기관에 암습이 숨어 있는지까지는 몰랐다. 추귀와 하귀가 기관에 당한 다음에서야 백문장에 설치된 진실한 기관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기관진학은 뛰어나면서도 믿을 수 없다. 모든 학문이 그렇듯이 기관진학 또한 모르는 자에게는 신기하기만 하지만 아는 자에게는 더없이 간단하다. 기관진학 자체가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학문이기에 그렇지, 만약 날마다 접할 수 있는 학문이었다면 그렇게 신기해 하지도 않았으리라. 비조탈명이 죽었다. 동귀도 죽었다. 비조탈명의 죽음이 동귀에게 치명적인 방심을 불렀다. 비조탈명이 죽는 순간 동귀는 양검의 턱 밑까지 손을 뻗어내고 있었다. 그랬으면 완벽하게 마무리를 지어 양검의 목숨이라도 빼앗았어야 옳았다. 합격술을 펼치는 것도 아니고, 행동이 얽매인 것도 아닌 바에야 수중에 걸려든 먹이를 놓쳐서는 안 된다. 하나 그는 천망을 펼쳤다. 비조탈명에게 일검을 쳐내고 이검을 쳐가는 여인을 향해. 비조탈명이 죽는 순간, 그의 눈길은 돌아갔고, 단지 위험에서 구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하나 가득 자리했다. 그 정도면 죽기에는 충분한 방심이다. 뚱뚱한 여인은 패력이 담긴 거검으로 동귀의 허리를 쳐냈다. 산 사람은 춘귀뿐이다. “삼전주, 실망이 크다.” 갈천상은 춘귀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독목섬전을 죽인 여인에게 말했다. 삼전주…… 여인이 바로 무극전에서 말한 아홉 실전 중 삼전주라는 사실은 춘귀의 머리 속에 단단히 각인되었다. “죽였잖아!” 삼전주는 앙칼지게 대답했다. “삼유진(三幽陣)이 삼강진(三剛陣)을 따르지 못한다. 두 개가 하나로 섞이지 못하는 한 삼유강진(三幽剛陣)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쳇! 그렇게밖에 말 못 해?” “지금쯤이면 완벽해졌어야지. 지난 세월 동안…… 정신을 집중하지 않았어.” 갈천상의 음성은 처음보다 많이 부드러워졌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해. 과히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니까. 그런 소리를 할 처지도 아니잖아?” 삼전주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픔 같기도 하고, 갈망 같기도 한 반짝임이 그녀의 눈가에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취운각으로 가 있어. 기관은 작동하지 않을 테니까 안심하고.” 갈천상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삼전주가 맞받아쳤다. “아니. 연화각으로 가야겠어. 네가 나를 버리고 취한 계집이 어떤 계집인지 봐야겠거든. 그만한 가치가 없다면 내 손으로 죽여버릴 거야.” 순간 갈천상의 얼굴에 얼음이 찾아들었다. “만약…… 그녀를 조금만 건드려도……” “죽이겠다?” “……” “죽일 거야?” “……” “호호호! 걱정하지 마, 자식아. 이제 너 같은 놈에게는 조금도 미련 없으니까. 하지만 연화각으로 가야겠어. 어떤 년인지 알고 싶거든.” 삼전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등을 돌려 연화각으로 걸음을 떼어놓았다. 양검과 음검 여인도 삼전주의 뒤를 따랐다. 과연 갈천상이 말한 대로 기관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다. 춘귀는 소도(小刀)를 꺼내 비조탈명의 머리칼을 잘랐다. 동귀의 머리칼도 잘랐다. “그런 행동은…… 죽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겐가?” “……” 춘귀는 무서운 눈으로 갈천상을 노려보며 한 자 한 자 씹어뱉듯이 말했다. “네가 무인이라면…… 무인을 모욕하지 마라.” “사귀가 어떤 자들인지 궁금했지. 비조탈명에 대해서는 약간이나마 단서가 잡혔는데, 수하라는 사귀는 좀처럼 꼬리를 잡아낼 수 없었어. 빙낙강(珞鋼)과는 어떤 사이지?” 춘귀의 눈에 놀람이 가득 담겼다. 그는 진정으로 놀란 듯 머리 속이 텅 빈 사람처럼 갈천상의 물음에 대답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철응조공 속에 빙낙강의 엽저장화(葉底藏花)가 묻어 있더군. 어느 무공으로 대성(大成)하든 간에 뿌리는 버리지 못하는 법이지. 이 친구는…… 동귀인가?” 갈천상은 허리가 반쯤이나 잘려서 죽은 동귀를 가리키며 물었다. 동귀는 춘귀의 발 밑에 널브러져 있었다. “천망은 위수노인(胃水老人)의 독문병기(獨門兵器)지. 위수노인은 제자를 세 명 두었는데 두 명은 이미 죽었으니 둘째 금위동(金偉童)이겠군.” 춘귀는 전신의 모든 기력이 썰물 빠지듯 빠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손발에 힘이 빠져 몸을 가누고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출혈이 심해서는 아니다. 갈천상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너무 충격이었다. 동귀는 위수노인의 제자였고, 이름이 금위동인지는 춘귀조차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추귀는 내력을 모르겠고, 하귀는 움직임에 발(撥`:`걷어차내는 기법)이 녹아 있더군. 산동성(山東成) 경현(景縣) 사람이야. 그렇다면 어려서부터 이름을 떨친 윤철(尹喆), 윤사(尹飼) 형제인데……”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들이다. 산동성에는 가본 적도 없고, 촌구석에서 이름을 떨친 무인까지 일일이 머리 속에 담아두었다가는 미쳐 버리고 말리라. 그러나 윤철, 윤사 형제라면…… 하귀와 추귀도 형제이지 않은가. 자신의 내력을 알아내고, 동귀까지 위수노인의 제자라는 점을 밝혀낸 이상, 아마도 하귀와 추귀는 윤철, 윤사 형제이리라. “철응방이 아까운 사람들을 잃었군. 좋아, 여기서 끝내지. 재수없었다고 생각해. 취임식을 할 때는 무공을 선보여야 하는데 실전처럼 군웅들에게 먹혀드는 건 없지. 그래서 금족령(禁足令)을 내린 건데 비살문과 철응방이 걸려들었어. 비조탈명이 우둔한 건가?” ‘네놈이 충동질을 하지만 않았어도……’ 춘귀는 목구멍까지 기어 올라오는 소리를 꿀꺽 삼켜버렸다. 패자(敗者)는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이 없다. 그런 문제는 죽고 사는 일일수록 더욱 냉정하다. ‘후환을 감당해야 할 거야. 백문장을 널리 알리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성공했다고 인정하지. 하지만 철응방을 건드린 것은…… 이걸 알아둬야 해. 철응방에는 우리 같은 놈들이 부지기수로 있어.’ “시신은 수습해서 보내줄 테니, 돌아가. 앞을 가로막는 건 없을 거야.” 갈천상은 등을 돌렸다. 쫦 2 쫦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이건 말도 안 돼. 꼭 귀신에 홀린 기분인데?” “귀신에 홀렸건 홀리지 않았건 비살문과 철응방이 패퇴한 것은 사실이잖아. 이럴 때는 몸조심하는 게 상책이야.” 군웅들은 슬금슬금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백문장이 어떤 방식으로 비살문과 철응방을 대적했는지는 모른다. 그들은 정문 옆에 위치한 취휴각에 기거하면서 금족령이 떨어진 다음 움직이리라 확신한 비살문, 철응방 고수들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느냐만 볼 수 있었다. 비살문 고수들이 칠살수를 들것에 실어서 나가는 모습은 충격이었다. 하나 하루가 지나기도 전, 철응방주가 가장 믿는다고 공공연히 말하던 사귀가 한 명만 살아서, 그것도 한 팔이 잘린 채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충격을 벗어나 기절초풍할 만하지 않은가. 비조탈명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사귀가 그의 말에 복종하는 것으로 봐서 그의 무공은 절정고수의 반열에 올라 있으리라. 그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군웅들은 십중팔구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오래지 않아 눈 앞에 현실로 나타났다. 목관(木棺) 네 개를 실은 우마차(牛馬車)가 덜그렁덜그렁 지나갈 때는 숨소리마저 죽였다. 이게 현실 맞나? 꿈이 아니고? “앉아서 불똥 맞을 일 있어? 빨리 일어서자구.” “가다가 뒤통수 맞는 것 아냐?” “설마…… 하기사 철응방이나 비살문도 당했으니. 하지만 그렇게 되면 공공연히 사파(邪派)라고 공포하는 것과 다를 바 없잖아? 뒤통수 얻어맞는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앉아 있어도 죽고, 가도 죽는다면 어서 가세나.” 군웅들은 비살문과 철응방의 분노를 두려워했다. 또한 백문장도 두려웠다. ‘비조탈명…… 상당한 고수였어. 그런데 죽었단 말이지. 사귀도 처참히 당하고. 우리는 양호한 편이군.’ 변장을 하고 군웅들 틈에 섞여 있던 일흑은 다른 군웅들보다 더욱 큰 충격을 받았다. 직접 검을 섞어보았으니 백문장 무공이 어떻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잘 안다. 하나 철응방의 비조탈명과 사귀가 반나절 만에 도륙당할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일흑은 길게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목관을 실은 우마차가 정문을 나가는 것을 필두로 군웅들이 우르르 몰려나갔다. 취임식이고 뭐고 생각할 여유가 없으리라. 취휴각은 곧 절반도 채 되지 않는 군웅들만 남아 작은 소리로 소곤거렸다. 이들도 다른 군웅들처럼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으리라. 비겁한 자들…… 이들은 혹여 있을지도 모를 백문장의 질책이 두려워 발길을 떼어놓지 못하고 있다. 이미 떠나버린 자들보다 훨씬 비굴한 자들이다. 이런 자들이 무인이랍시고 검을 패용하다니. 일흑은 갈증을 느꼈다. 문(門)으로 돌아가야 하나? 아니면 생각했던 대로 남아서 갈천상의 목숨을 노려야 하나? “무림 동도 여러분, 갈 길이 멀지 않으시다면 허리띠를 풀어놓고 마음껏……” 운단서가 군웅들을 추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는 거야. 남아서 놈을……’ 그는 내각 삼처장으로 소개한 하인 방삼에게 걸어갔다. “저……” “예? 예예.” 방삼은 아직 하인 때의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한심했다. 이런 자에게까지 허리를 굽혀야 하다니. “사경현(祠慶縣)에서 온 혈염검(血染劍) 손옥상(孫玉尙)이란 자입니다.” “아! 예에……” “백문장의 위용을 보고 나니…… 사람이 필요하시다면 기꺼이……” “물론입니다. 백문장에 입도(入徒)하신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합니다. 그런데 바라는 직위라도 있으신지?” “사경현에서는 그래도 괜찮은 무인이라는 평을 들었습니다만 백문장에서야 어린아이 장난 같은 무공입니다. 앞으로 입문할 문도도 많을 터인데, 직위야 그때 사정 봐가면서 천천히 책정해 주셔도……” 방삼의 입이 활짝 벌어졌다. 어제 아침만 같아서도 허리를 조아리며 시중을 들어줘야 했을 사람인데 오히려 허리를 깍듯이 굽혀가며 입문을 청하고 있지 않는가. 이처럼 신나는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꽉 짜인 몸, 단단한 어깨…… 일신에 지닌 무공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데. “그렇게만 생각해 주신다면 반드시 천거하겠습니다.” 방삼은 어색하게 포권지례를 취했다. ‘됐어. 들어왔어.’ 일흑은 마냥 좋아하기만 하는 방삼이 한심했다. 그런 사람을 내각 삼처장이라는 중책에 임명한 백문장도 한심했다. 적어도 비살문은 이렇지 않으니까. 무공은 높은지 몰라도 인사(人事)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은 없으니, 앞으로 무슨 번창을 기대하랴. ‘어쩌면 기회를 쉽게 잡을지도……’ 그는 앞서가는 방삼의 뒤를 따르며, 백문장 식솔들을 눈여겨 살폈다. 내각주 운단서와 무슨 말인가를 주고받던 방삼이 머리를 긁적이며 다가왔다. “저……” “곤란한 문제가 생겼습니까?” “아직 문도를 받기는 이르다고…… 문도를 받는 일은 외각주 소임인지라……” “외각주라면……?” 일흑은 짐짓 모른 척했다. “무극전에서 봤지 않나요? 갈천상이라고 갈의를 입고 머리는 산발한…… 괴인같이 생긴……” “아!” 일흑은 이제야 생각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이 외각주군요. 젊은 나이에 대단하던데, 백문장 무공을 몇 년이나 익히면 그 정도가 되는지요?” “저 그게……” 대답하기 곤란할 게다. 한 달 전만 해도 조자경이 고가촌에 가서 수모를 당하던 마당이니 무슨 문도인들 있었겠는가. 하물며 갈천상 같은 고수가 있었다면 조자경이 그런 지경에까지 이르렀겠는가. 외부에서 들어온 작자다. 하인 주제에 윗사람이 하는 일을 알 수는 없을 테고…… 대답이 궁색하겠지. “아이구! 바쁘신 분을 붙잡고…… 차차 알게 되겠죠. 그럼 입문은 외각주님을 뵙고 난 다음에 하기로 하고, 우선 거처할 곳이나……” ‘차차 알게 되겠지. 이자를 잘 이용하면……’ 일흑은 방삼을 곤란하게 하지 않았다. “하하! 그렇게까지 양보해 주신다면 정말 백골난망입니다. 제가…… 더, 덕진이란 자가 거처로 안내해 드릴 겁니다.” 방삼은 뒤늦게야 자신의 격상된 신분이 생각난 모양이다. 일흑은 사방을 둘러본 것으로 취휴각에 있는 사람들의 면모를 모두 읽어냈다. 단 한 사람, 무극전에서 죽일 사람의 신상명세를 읊어대던 자만 제외하면 무공을 익힌 자는 없는 듯했다. 그런데 그자가…… 쳐다보고 있지 않는가. 뚫어지게. ‘죽어야 할 놈이군. 네놈은.’ 일흑은 그자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등을 돌렸다. 그러나 정작 그의 신경은 곤두설 대로 곤두서 있었다. 여차하면 마임호를 베어버릴 생각이다. 백문장은 또 들어오면 된다. 인피면구는 또 있으니까. 마임호는 방삼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청년을 유심히 살폈다. 누렇게 뜬 얼굴과 다부진 체격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얼굴에도 감정이란 것이 일절 묻어 있지 않다. ‘인피면구(人皮面具)야.’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대도 마임호의 눈은 속이지 못한다. 사기, 협잡, 농간…… 시중에서 나쁜 놈들이라고 일컬어지는 자들이 행하는 모든 수법을 한눈에 꿰고 있는 마임호다. 그가 보기에 병자(病者)처럼 초췌한 청년은 인피면구를 쓰고 있다. 무엇보다 그는 마임호의 기억 속에 담겨 있지 않다. 정문을 지키면서 하객들의 면모를 세세히 기억한 장본인 마임호의 기억에 없다는 것은 청년이 뒤늦게 백문장에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빨라도 군웅들이 취휴각으로 물러선 다음에 들어선 자, 어제 저녁 술시(戌時) 이후에 들어온 자다. 마임호는 자신의 기억력을 믿었다. ‘어쩐다? 말을 걸어봐? 아냐. 저자는 솜털까지 긴장해 있어. 특히 이곳은……’ 취휴각은 정문에서 가깝다. 좁은 걸음으로도 스무 발짝 안쪽에 있다. 그런 거리로는 치고 빠지는 자를 잡을 수 없다. 청년이 좋지 않은 목적으로 들어왔다면, 정체가 발각났을 경우 검을 뽑아들 것은 자명하다. 기관이 설치된 곳이라면 또 몰라도 취휴각에서는 앞을 가로막을 자도 없겠지. 괜히 죽는 자만 억울하다. ‘알고만 있으면 돼. 어차피 오늘 저녁이면 모두들 떠날 테니, 별일이야 없겠지.’ 마임호는 지금 자신의 결정이 하나뿐인 목숨을 살렸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쫦 쫦 쫦 마부영은 부서지기 일보 직전인 허름한 의자에 앉아서 자홍색으로 물든 태양이 너른 들판 너머로 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전 같았으면 투지가 팔팔 끓어올랐을 텐데, 비참한 기분이라니…… 늙었나?’ 기관은 마부영을 지탱해 준 정신적 지주(支柱)였다. 기관이 없었던들 그의 일생 또한 덧없이 흘렀을 터였다. 기관이 있었기에 평생 동안 가족도 없이 홀로 지내올 수 있었고, 기관이 있었기에 삶 자체가 행복하고 충만하게 느껴졌다. 하늘에서 눈송이가 휘날리기 시작했다. 그는 잠시 생각을 접고 하늘거리며 떨어지는 눈송이를 바라보다가 따뜻하게 데워진 주담자를 들어 차를 따랐다. 다시 의자에 와서 앉았다. 향긋한 차내음이 코 끝을 간질인다. 손으로 전달되는 찻잔의 따뜻한 온기도 기분을 좋게 만든다. 하나 눈송이가 날리고, 차 향기가 감미롭고, 찻잔의 온기가 아무리 기분 좋게 전달된다 하더라도 일단 꺼지기 시작한 마음의 불씨를 되살리기에는 버거웠다. ‘광량……’ 그는 이미 죽어 썩기 시작했을 노우(老友)를 떠올렸다. 마부영은 일생 동안 꼭 한 번,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열정의 꽃을 불사른 적이 있었다. 그는 백문장에 미쳤다. 백문장주 조항은 그가 필요하다고 하는 물건은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구해 주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무심히 지나칠 작은 일에 천금(千金)을 들여도 싫은 표정조차 짓지 않았다. 광량은 한 술 더 떴다. 마부영이 생각에 몰두할 수 있도록 밀실(密室)을 마련해 주었고, 본인이 직접 시중을 들어주었다. 일의 진척을 세밀히 관찰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것은 물론이다. 준공기한도 문제삼지 않았다. 사대 패강의 등쌀에 한시도 마음을 편히 가질 날이 없었을 터인데도, 안락한 보금자리가 무엇보다 간절했을 텐데도 아무 소리 하지 않았다. 언제쯤 완공될 것이냐고 물어온 적도 없다. 통쾌하게 일했다. 자신의 손을 빌려 세상에 태어난 장원이 이십여 개가 넘지만 백문장처럼 마음내키는 대로 머리 속에 담긴 지식을 올올이 풀어낸 곳은 없다. 완성된 백문장은 아름다웠다. 사람들은 이 정도 장원을 짓는 데 그렇게 오래 걸렸고, 그토록 많은 은자를 소비했냐고 말하지만…… 미관(美觀)이 다른 장원보다 못하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나 내면에 숨어 흐르는 강렬한 맛은 직접 조형(造形)한 마부영조차도 입으로 옮기기 힘들었다. ‘내 일생에 이런 장원을 또 지을 수 있을까?’ ‘넌 내 자식이야. 내 분신이야.’ ‘무가(武家)를 지은 것이 잘못이었어. 백문장이 소림사나 무당파처럼 천하제일가문으로 성장하지 못한다면…… 아! 백 년이 지나기 전에 폐허로 변하고 말겠지. 내 자식이…… 내 후손이 끊기는 거야. 무가를 짓는 게 아니었어.’ ‘사랑한다. 네 앞날을 예측하지는 못하지만…… 어떻게 되든 간에 사랑한다. 내가 죽기 전에 무너지지 않기만 바랄 뿐. 그래, 그래야 한다. 무너지더라도 내가 죽은 다음에 무너져야 해.’ 백문장주 조항이 죽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그는 백문장에 불을 질러버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남의 손에 짓밟히는 신세라면 차라리 자신의 손으로 명줄을 끊어놓고 싶었다. 인간을 사랑한 적은 없다. 그러나 돌과 나무로 엮은 장원은 뼛속에서 우러나는 진심으로 사랑한다. 광량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가장 안심을 한 사람도 마부영이다. 그가 죽었으니 이제 백문장은 전화(戰火)를 피해 갈 수 있지 않겠는가. 계책을 짜내는 머리가 없고, 장주가 무공을 전수하지 못하고 죽었으니 움직일 몸도 없다. 백문장주에게는 대를 이어줄 사내자식도 없다. 백문장은 최소한 백 년을 버티리라. 즐거운 바람도 잠깐, 갈천상이란 자가 홍첩을 돌렸다는 말을 듣고 마부영은 한걸음에 달려왔다. 홍문성이란 자가 좋은 말로 꼬드기지 않았어도 달려올 참이었다. 갈천상이란 자를 훈계하고 훈계를 듣지 않으면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백문장에 불을 놓을 마음으로. “마(馬) 노인(老人).” 등 뒤에서 탁한 음성이 들렸다. ‘갈천상?’ 마부영은 찻잔을 떨어트릴 뻔했다. 갈천상은 옛날에는 천루(天樓)라고 불린 동혈(洞穴)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 마부영이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보, 보지 못했어.” 그는 갈천상이 기관을 뚫고 천루까지 다가오는 동안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안력(眼力)이 많이 약해질 나이죠.” “어, 어떻게 그 많은 기관을……” “남경(南京)에 생금호(生金湖)라는 호수가 있죠.” 마부영의 전신에 미미한 경련이 일었다. “아흔을 훌쩍 넘긴 노인 한 분이 고귀한 죽책(竹冊)을 가지고 있더군요. 육능(陸陵)이란 노인이었는데…… 살아 계시다면 백 살쯤 되실 겁니다.” 마부영은 눈을 감아버렸다. “대대로 물려받았다는 죽책인데…… 재미있는 내용이 담겨 있었죠.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내용인지라 탐닉하다시피 매달린 덕분에 세상 살아가는 방법을 하나 더 배웠습니다.” 마부영은 눈초리가 파르르 떨렸다. 찻잔을 들고 있는 손도 달달 떨렸다. 애써 냉정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짙은 주름살 사이로 감당하지 못할 격동이 묻어나왔다. “주유(周瑜)의 적벽대전과 함께 오(吳)나라에 가장 큰 승리로 남은 이릉전투의 영웅(英雄)이 육손(陸孫)일 겁니다. 일국의 재상(宰相)까지 지낸 사람이지만…… 자신의 후손이 호수에서 고기나 잡고 있다면…… 세월이 덧없음을 느끼겠죠.” 세월을 말하고 있는가? 새파란 젊은 놈이? “육손은 병법(兵法)의 대가(大家)입니다. 역사에 길이 남는 명장(名將)이죠. 하나 그가 진법(陣法), 기관에도 정통했다는 것은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겁니다. 비록 제갈량(諸葛亮)이 펼친 팔석진(八石陣)에 걸려 고전(苦戰)을 하기는 했지만……” “그만!” 마부영은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이놈의 눈송이는 왜 이렇게 애처롭게 흩날린단 말인가. 마부영의 모든 지식은 근 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 삼국시대(三國時代) 오(吳) 나라의 재상인 육손에게서 물려받았다고 해도 과히 틀리지 않다. 육손의 후인인 육능. 노인은 일자무식(一字無識)인지라 죽책에 얼마나 소중한 내용이 담겨 있는지 몰랐다. 그러나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가보(家寶)라서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한다는 고리타분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눈 앞에서 읽는 것만 허락했다. 이 년. 노인과 같이 낮에는 고기를 잡고, 밤에는 죽책을 연구하기 꼬박 이 년이다. 마부영은 이름도 적혀 있지 않는 죽책에 담긴 내용을 건축에 활용했다. 결과가 오늘날의 그를 만들었다. 사부(師父)나 다름없는 노인…… 해마다 생각이 났지만 발길을 뚝 끊어버린 것은 애틋한 눈길로 연모(戀慕)를 불태우던 노인의 딸 때문이다. 그는 여인의 정이 부담스러웠다. 그는 여인보다 장원을 짓는 일이 더 좋았다. 미치도록. “그래서…… 기관을 알고 있었군.” “그래서 삼 일이란 기한을 자신있게 말한 겁니다. 여기까지 오는 데는 하루지만 정문까지 가려면 삼 일은 족히 걸릴 겁니다.” “허허허!” ‘늙었어.’ 마부영은 자신에게 말했다. “내기는 끝난 것으로 하세. 자네가 내 목을 베고 기관을 멈춘다면 어차피 끝난 내기이니까.” “탐닉은 했지만 관심분야가 달라서 마 노인처럼 깊이 파들어가지는 않았죠. 파해는 할 수 있어도 운용은 못 합니다. 멈출 수가 없어요.” “됐네. 끝난 이야기로 하세.” 마부영은 자신의 생각이 기우(杞憂)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았다. 갈천상이란 젊은이는 지닌 바 학문이 어느 정도인지 깊이를 잴 수 없을 만큼 심오하다. 육손이 남긴 죽책을 읽고 이해한 것만으로도 자신있게 말해 줄 수 있다. 이런 자가 백문장에 일조(一助)한다면 옛날 백문장주 조항이 이끌 때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는 않으리라. ‘백문장은 전화에 휩쓸리지 않아.’ 마부영은 생각을 굳혔다. 실은 갈천상이 기관을 파해하고 철응방 고수에게 다가갈 때부터 예견한 생각이지만. “조건대로…… 제 부탁은 외각 칠전주를 맡아 달라는 겁니다.” “허허허!” 마부영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칠전주는 검을 잡지 않습니다. 백문장을 한층 강화시키는 일만 합니다. 적이 침범하면 오늘처럼……” “죽이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리고…… 춘귀가 물러갈 때, 시신을 운반할 때 기관을 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부영은 심기(心機)에서까지 밀리는 자신을 보았다. 갈천상은 사람의 마음까지 꿰뚫어보고 있지 않는가. 그런 자신이 없고서야 춘귀를 내보낼 수 없을 테고, 사람을 불러 시신을 수습하라고 말할 수도 없으리라. “여기는 처음 올라와봅니다만, 전망이 참 좋군요.” 갈천상은 옷깃을 파고드는 매서운 바람이 무척 시원한 듯 고개를 쳐들고 음미했다. “낮에는 사람 움직임이 낱낱이 보이니까 기관을 작동시킬 수 있지만 밤에는 어떻게 움직입니까?” “인(燐)이네.” “아!” 갈천상은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감탄을 터트렸다. 개똥벌레처럼 풀풀 날아다니던 푸른 기(氣), 그게 인이다. 인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마부영은 기관을 발동시켰다. 비조탈명이 확인한 것처럼 마부영은 천루에서 백문장을 지켜보며 일일이 기관을 작동시킨 것이다. 적이 몇 명 되지 않으니 혼자서도 가능했다. 만약 백 명, 이백여 명의 적들이 몰려온다면 기관을 작동시키는 데만도 십여 명이 필요하리라.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백문장에 들어가면 저는 외각주, 마 노인은 칠전주라는 새로운 질서 속에서 움직여야 할 겁니다.” “허허허……!” 마부영은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손자뻘밖에 되지 않는 젊은이가 상관이라…… 하지만 결국 받아들이게 되리라. 갈천상 같은 사람은 칼을 빼들면 썩은 무라도 베는 성격이고, 현재 백문장은 긴급 정비를 요하는 상황이니까. 쫦 3 쫦 삼전주의 이름은 유건지(柳建池)였다. 올해 스물여섯 살이고, 사천성(四川省)에서는 이름난 무가(武家)에서 태어났다. 발랄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유건지는 많은 청년 무인들에게 호감을 받았고, 청혼도 줄을 이었다. 그녀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망설였다. 자신의 선택 여하에 따라 전혀 다른 운명이 펼쳐질 것이다. 그 어느쪽이나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인 것은 틀림없지만. 가난이 골수에 맺힌 사람들에게는 어느 한쪽만 줘도 덥석 물어버릴 조건들이 그녀 앞에서 선택받기를 기다렸다. 그 중에서 그녀는 최악의 조건을 선택했다. 떠돌이 낭인(浪人)이 되어 정처없이 중원을 헤매고 다니는 처지가 되었으니까. “왜……?” 조자경은 그녀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새끼가 내 알몸을 보았거든.” “아…… 알몸……” “순진한 처녀가 옷을 벗을 때는 몸과 마음을 다 준 것 아냐? 그런데 그 새끼는 그게 아냐. 옷을 벗겨놓고는 건드리지도 않았어. 개자식! 지가 뭐 그렇게 잘났다고……” ‘아직…… 사랑하고 있어.’ 조자경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유건지의 나이가 예상 밖으로 젊다. 다듬지 않은 얼굴, 허름한 갈의를 입고 있어서 실제 나이보다 더 많이 들어 보였는지도 모른다. 뛰어난 미인이기도 하다. 절강제일미녀라는 자신과 견주어도 조금도 처지는 구석이 없다. 다듬지 않은 얼굴만으로도 뭇사내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 정도니 막상 화장을 하고 예쁜 옷을 입으면 날아갈 듯한 자태가 유감없이 드러나리라. 그런 여자가 마음 속에 갈천상을 두고 있다. “너, 그 새끼 좋아하니?” “……” “꿈 깨. 나도 한때는 그 새끼 좋아했어. 미치도록.” ‘정말일 거야. 이런 성격에 좋아했으면…… 고백도 했을 거야. 사랑한다고.’ “그 새끼, 고자야. 알아? 여자한테는 관심없다고. 너도 발가벗었니?” “……” “호호호! 얼굴 빨개지는 것을 보니까 벗었구나?” “시, 심한 말은 삼가해 줘요.” “심하다고? 혼인도 하지 않은 계집이 외간남자 앞에서 발가벗은 것은 심하지 않고? 호호호! 알몸뚱이 보여줬다고 책임지라 어쩌라 하는 소리는 집어치워. 저 새끼한테는 소귀에 경 읽기야.” “그만…… 나가줄래요?” “너를 위해서 하는 충고야. 정 듣기 싫으면 미친년 헛소리 정도로 들어둬.” “알았으니까 그만 나가줘요.” 조자경은 유건지라는 여인과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의 말이 사실일 거라는 의심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해 견딜 수 없었다. 알몸을 보여줬다고 책임지라는 소리 따위는 할 생각이 없다. 갈천상이 구애(求愛)를 해온다면 몰라도 자신이 나서서 구애를 할 생각도 없다. 그런데…… 그만 보면 솟구치는 안타까운 마음은 뭐란 말인가. 잘난 구석이 하나도 없는데. 남들처럼 미남도 아니고, 산뜻한 교양(敎養)을 지닌 것도 아니고, 말을 달콤하게 하지도 않는데. 유건지의 말이 사실이라면…… 절곡에서 알몸을 보여주었는데…… 그는 아마도 지금쯤 알몸을 보았다는 사실조차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을지도. 그는 색마(色魔)인가? 이 여자 저 여자 알몸뚱이나 보고 다니고. 조자경은 불길처럼 일어나는 질투심과 그를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좌절감과 그가 대체 무엇인데 마음을 이토록 졸이나 하는 의혹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혼자 있고 싶었다. 유건지라는 여인이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 목숨을 개미처럼 여기는 기관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유건지가 귀가 번쩍 뜨이는 소리를 했다. “내가 왜 백문장에 왔는지 알아? 갈천상…… 그놈을 죽이기 위해서야. 호호호! 그 자식이 부탁했거든. ‘나를 죽여 달라’고.” 이게 무슨 소린가? “이전주 이름이 뭔지 알아? 전종대(全鍾岱)야, 전종대.” “혹시…… 만검진천(萬劍震天)……?” “맞아. 만검진천 전종대. 이름이 제법 알려졌지? 건방지게도 후기지수(後起之秀) 중 제일이라는 칭송까지 받았을걸?” “그, 그 사람이 왜……?” 조자경은 곤혹스러웠다. 만검진천 전종대의 이름자는 중원에 널리 알려졌다. 검가(劍家)인 만검가(萬劍家)의 적손(嫡孫)으로 가문의 비전절공(秘傳絶功)을 십분 터득해 십 년 세월만 더 지난다면 검왕(劍王)의 칭호까지 들을 거라고 칭송이 자자했던 자였다.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그리고 백문장에 이전주라는 신분으로 나타났다. 백문장에서 거두기에는 너무 큰 그릇이다. 만검가는 역사로 보나 전통으로 보나 현재의 세력으로 보나 오대 패강 어느 문파라 할지라도 눈 아래로 굽어볼 수 있는 위치다. 그런 가문의 적손을 수하로 거느리고 있다니. “갈천상을 죽이려고 왔지. 너무 그렇게 놀라지 마. 전종대 이름을 듣고 그렇게 놀라는 것을 보니 사전주 이름을 들으면 까무러치겠네?” “사, 사전주는 누구……?” “일심향불(一心向佛) 백무(白無).” “백무 화상(和尙)!” “지금은 파계승(破戒僧)에 불과해. 보기에 화상 같아 보여?” “……” 조자경은 할말을 잃어버렸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사람들이 한결같이 극강한 고수들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대단한 사람들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 그러고 보니 생각난다. 언젠가 유건지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다. 사천성에서는 무시하지 못할 무가, 운학문(雲鶴門)의 천금이 유건지라고 들었다. “혹시…… 운학문……” “운학문이 뭐 어쨌다고? 계집애, 귓구멍까지 막혔니? 내가 아까 말해 줬잖아? 사천성에서 제법 난다 하는 무가에서 태어났다고.” ‘빙정신소(氷晶神簫) 유건지……’ 조자경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인을 새삼스럽게 쳐다보았다. 전종대도 그렇고 유건지, 일심향불 백무…… 모두가 백 년에 한 번 태어날까말까 한다는 천골(天骨)들이다. 그들은 조자경의 나이쯤에는 이미 중원 전역에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그것이 가문의 후광(後光)을 입었다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릴 이름에 불과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진신무공을 선보임으로써`─`실전비무를 통해`─`명호를 스스로 얻었다는 데 가치가 있다. “오전주는 벽산개부(碧山開斧) 고규철(高槻徹)이야.” 이제는 놀라지도 않았다. 이전주, 삼전주, 사전주가 범상치 않은 인물인 이상 오전주 역시 심상치 않은 내력을 지녔으리라고 짐작했다. 벽산개부 고규철 역시 이들에게 전혀 뒤처지지 않는다. 중원 무림 전체로 볼 때 절강무인들 중 이름난 무인이 몇 명이나 될까? 절강성에서는 사대 패강이 절대적인 위치에 있으니 그들 문파명 정도는 알려져 있으리라. 그럼 그 다음은? 천력문만 해도 뛰어난 고수라면 오당(五堂) 당주(堂主)를 비롯하여 십봉객(十奉客), 구원로(九元老) 등 서른 명이 넘는다. 그들 중에 몇 달이 걸려야 갈 수 있는 사천성이나 광서성(廣西省)에 가서 명호를 들먹거려 대우를 받을 수 있는 무인이 몇 명이나 될까? 아마도 서너 명에 불과하리라. 이들은 전부 그만한 대우를 받는다. 중원 전역에 명호와 이름이 알려진 무인들이다. “모두 왜 여기 왔는지 알아?” “갈 총관…… 갈 외각주를 죽이려고……?” “호호호! 그래. 그 자식을 죽이려고 왔어. 그 자식을 죽여야 우리가 살 수 있거든.” “왜? 왜, 그 사람을?” “가치가 충분하지. 그 자식은 이 세상에서 제일 잘났다는 포영매니까.” “포, 포영매!” 유건지는 일어섰다. “계집……! 충고하는데 그놈에게 마음 주지 마. 그럴수록 상처를 받는 것은 너야. 어때? 포영매가 실존한다는 것을 안 기분이? 이젠 한곳에 붙잡아둘 수 없는 놈이란 것도 알았겠지? 호호호!” 조자경은 유건지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잠깐에 불과한 시간이었지만 유건지와 나눈 대화는 그녀가 일생 동안 받을 충격을 한꺼번에 쏟아부은 듯했다. ‘그래도 난 잡을 수 있어.’ ─`죽고 싶으냐? 살고 싶으면 따라오지 마라. 냉랭한 말투였지만 조자경은 그 속에서 따뜻함을 읽었다. 그는 겉보기와는 다르게 속이 따뜻한 사람이다. 무림이란 곳이 그를 차갑게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내심은 그렇지 않으리라. 그것이면 충분하다. 마음만 살아 있으면. 쫦 쫦 쫦 갈천상은 운단서에게 광동(廣東), 광서(廣西) 특산이라는 육보차(六堡茶)를 끓여 달라고 부탁했다. 무극전에 아침이슬같이 상큼한 냄새가 가득 퍼져 나갔다. 생차(生茶)가 아니라 발효시켜 정제한 차인지라 끓이는 방법이 사뭇 달랐다. 난주일검 장상부가 도착했을 때는 차가 먹기 좋을 만큼 따뜻하게 달여져 있었다. 갈천상이 일어서서 맞이했다. “왔군.” “왜 불렀소?” 난주일검 장상부는 투박하게 말했다. 비살문과 철응방 고수들이 패퇴한 것은 그의 자존심을 살려주었다. 갈천상이 동수(同手)라고 말하는 바람에 일 검도 내치지 못하고 풋내기 여인과 같은 등급으로 떨어지고 말았지만, 그 여인에 의해 철응방 고수들이 몰살하다시피 했으니 장상부는 오히려 득을 본 셈이다. “나는 부를 가치가 있는 사람만 부르지. 당신을 백문장 문도로 받아들이지.” “뭐요?” 난주일검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백문장이라면 당신과 격(格)이 맞을 텐데?” “내가 백문장에 의탁해야만 하는 이유라도 있소?” “당신을 조사해 봤지. 난주일검 장상부…… 명호는 난주일검이나 진실한 무공은 통비권(通臂拳`:`중국 북방에 전해지는 전통 무술. 전국시대 백원(白猿)이 원숭이의 동작을 응용하여 창시했다 함). 하나 이십사식(二十四式) 통비 중 전팔수(前八手)와 중팔수(中八手)밖에 익히지 못해 권법을 버리고 통비십삼도(通臂十三刀)를 검에 응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는 경력(勁力) 구단계(九段階)를 모두 익히지 못했기 때문인데…… 내 말이 틀렸으면 틀렸다고 말하고.” “……” 장상부는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장상부의 무공내력을 소림에서 찾는다. 소림 속가제자. 감원 원주인 공무화상의 제자라는 말이 꼬리를 쫓아다닌다. 달마삼검(達摩三劍)도 빠지지 않고 거론된다. 그러나 공무화상과의 인연은 한참 뒤에 시작된다. 그에게 뼈대를 세워준 무공은 통비권이다. “통비권 경력 구단계는 급(急), 경(硬), 냉(冷), 두(), 함(涵), 허(虛), 도(搗), 축(縮), 취(脆). 이 중 못 배운 것은?” “으음……!” 저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장상부는 경력 구단계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하나 갈천상은 모두 알고 있지 않는가. 통비권을 아는 사람이…… 진정으로 있었단 말인가. “이것이 첫 번째 이유지. 백문장이 아니면 통비권을 완성할 수 없을 테니까.” “그 말뜻은……?” “중원 천지에 통비권을 완벽하게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다는 말. 그 사람은 백문장에 있지.” “그 사람이 누구요?” “나.” “으음……! 이유가 또 있소?” “당신은 혼자 살아서인지 먹는 것이 형편없더군. 백문장에 있으면 잘 먹을 수 있지.” “하하! 잘 먹을 수 있다?” “백원곤(白猿棍), 백원단도(白猿單刀), 쌍도(雙刀), 화창(花槍). 무엇이든 먹을 수 있지.” “그…… 그것이 내가 백문장에 의탁해야 하는 이유요?” 장상부는 흔들렸다. 통비권의 시조(始祖)는 백원이다. 성(性)이 백(白)이고, 이름은 사구(士口)였지만 사람들은 백원이라고 불렀다. 백원사조는 왕도(王道), 이의(李義), 한성(韓成)에게 무공을 전수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맥이 끊겨 통비권을 아는 사람도 없다. 장상부는 이의 일맥(一脈)으로 전수되어 온 통비권을 전해 받았다. 사부는 통비권을 온전히 전수하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일맥으로만 전수되어 온 무공인지라 비급(秘)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었다. ─`통비권…… 맥이 끊겨서는 안 된다. 아직도 전수할 것이…… 많은데…… 이 한(恨)을 어찌할꼬. 사부의 유명(遺命)이다. 그는 왕도, 한성 계보로 전수되는 통비권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중원 각지를 떠돌아 다녔지만 통비권과 비슷한 무공도 보지 못했다. 소득은 있다. 떠돌아 다니면서 강하다 싶은 무인이 있으면 한수 비무를 청했고, 그렇게 해서 얻은 무명(武名)이 난주일검이다. 처음에는 통비권을 사용했지만 완벽하지 못한 통비권은 곧 한계가 드러났다. 그 후로는 통비권을 사용할 엄두도 내지 못했는데. 갈천상은 통비권뿐만이 아니라 백원사조가 창안한 것으로 알려진 무기술까지 전수할 의사를 비쳤다. 갈등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백문장은 당신에게 날개를 달아줄 수 있어. 내 조건만 수용한다면.” “조건이…… 무엇이오?” 장상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입이 바짝 마르고 타들어갔다. “통비권을 익히되 백문장 문도로 검을 들 때는 통비권을 사용하지 말 것.” “그, 그건 또 왜……?” “통비권을 익히는 것은 그대 개인의 일. 난 외각주로서 문도를 최강으로 키울 의무가 있기 때문이지.” “통비권이 약…… 하단 말이오?” “아니, 강해. 다른 문파에 들어가면 단숨에 십대고수 반열에 올라설 수 있는 무공이야. 이렇게 말하면 이해가 될지 모르겠군. 내가 싫어서라구.” “……” 장상부는 갈천상이란 젊은이를 보며 빨려 들어가는 착각이 들었다. 처음에 ‘문도로 받아들이겠다’고 말할 때만 해도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었는데. “내, 내가 백문장에서 할 일은 무엇……” “육전(六戰)을 맡아주시오.” “십전(十戰)이라는?” “전원(戰員)은 당신까지 여섯 명이오.” 갈천상은 태어나면서부터 명령만 내리고 살아온 듯 명령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이러한 현상은 나이 사십이 넘은 장상부로 하여금 하대(下待)를 편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장상부는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다. 무극전에서 듣기로 실전(實戰)은 모두 십전(十戰)이라고 들었다. 문도는 두 명부터 이백여 명까지. 그런데 장상부에게 맡겨진 문도는 겨우 여섯 명이다. 백문장의 처지로 보면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비살문과 철응방을 적으로 돌렸으니 나가서 싸울 일이 태산 같은데 겨우 여섯 명으로 무얼 하란 말인가. “그, 그들 무공은 어느 정도인지……” “무공을 아는 사람도, 전혀 모르는 사람도 있지. 그들을 훌륭한 무인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당신을 문도로 받아들이는 목적.” “그, 그럼 처음부터 시작하라는……” “……” “세상에!” 장상부는 처음 문도로 받아들이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더욱 기가 막혔다. 第十二章 미유애(未有艾`:`아직도 미숙하다) 쫦 1 쫦 백문장은 조용했다. 겉보기에는 취임식을 하기 전이나 하고 난 후나 다름이 없어 보였다. 때가 되면 밥짓는 연기가 솟구치고, 저녁이 되면 등불이 켜졌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대문이 닫혀 있다는 거다. 취임식을 하기 전에는 낮이나 밤이나 활짝 열려 있던 대문이 취임식 후에는 오히려 굳게 닫혀 있으니 타문파와 비교하면 정반대다. 덕분에 쌀 닷말이나 꾸어먹던 농민들만 백문장 정문을 서성이다가 돌아가는 일이 반복됐다. 오늘도 백문장 정문에서 농민 서너 명이 서성거렸다. 먼 곳에서 백문장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이다. 가까우면 십 리, 멀게는 오십여 리를 쌀 몇 말 얻어가자고 걸어온 사람들이니 궁핍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요즘은 문을 안 연다던데……” “두들겨볼까?” “그러다가 경이나 치려고? 듣자 하니 난다 긴다 하는 무인들도 떼죽음당했다던데.” “안 돼! 난, 난…… 다섯 식구가 이틀을 굶고 있단 말야. 흑!” 모여 있던 사람들 중 한 명이 기어이 울음을 터트렸다. 그들도 소문을 들어 알고 있다. 백문장이 비살문과 철응방 고수들을 개 패듯 두들겨 내쫓았다는. 그래도 혹시나 하며 서성일 수밖에 없다. 오늘 문을 열지 않으면, 한데에서 잠을 자고 내일 다시 오고…… 어디서 쌀 한 톨 융통할 데가 없는 사람들이라 어쩔 수 없다. “닥치지 못해! 여기 당신만한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사람들 중 한 명이 역정을 냈다. 조금은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사내가 울음을 터트리자 그들도 굶고 있을 처자식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건 고통이었다. 하늘이 보살폈음인가. 끼이익……! 평생 열릴 것 같지 않던 육중한 대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인 차림의 사내 한 명이 나와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취휴각으로 가면 쌀을 나눠줄 거요. 한 사람당 닷말이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던 사람들의 안색이 활짝 피어났다. “저, 정말입니까? 나리!” “생불(生佛)이십니다. 감사합니다, 나리.” 사람들은 울다가 웃고, 웃다가 울면서 쌀을 받아갔다. 백문장이 다시 문을 열었다는 소문은 날개를 달고 멀리 퍼져 갔다. 아마도 정월 초하루에 있었던 사건 이상으로 빨리 퍼져 나간 것 같다. 문을 다시 연 지 며칠이 되지 않아서 절강성 사람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으니까. 무인들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백문장이 문을 닫은 것은 잠룡(潛龍)과 비유할 수 있다. 백문장이 문을 열었을 때는 하늘을 훨훨 나는 창룡(蒼龍)이 되어 있으리라. 그 시기가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또한 비살문이나 철응방이 백문장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입장정리를 끝낸 시점과도 맞아떨어진다. 여러모로 무인들은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 쫦 쫦 쫦 대분산(大盆山)은 높고 큰 데 비하여 산행로(山行路)는 단조로운 편이다. 산행의 기점(起點)이 모두 정상 동쪽인 관도(官道)에서 시작되며, 이쪽 일대가 대부분 무시무시한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산행을 할 수 있는 길이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눈이 오거나 비가 많이 오는 날에는 산행을 하지 않는 것이 대분산 산행 요령이다. 산행 기점이 되는 곳에는 불순한 날씨를 대비하여 다루(茶樓), 주루(酒樓), 객잔(客棧)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산 아래에 있는 마을보다 배는 비싼 값을 주고 차 한 잔을 마신 다음 산을 오르면 곧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른다. 그때쯤 시야가 확 트이며 절벽을 굽어볼 수 있는 정자(亭子)가 나타나는데 그게 바로 반월정(半月亭)이다. 반월정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어느쪽으로 산을 타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길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으니까. 한 쪽 길은 층층으로 굽이진 절벽으로 가는 길이고, 짐승이나 다닐 수 있을 만큼 협소한 길을 타고 오르다 보면 극락동(極樂洞)이 나타난다. 다른 쪽 길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 걷기가 수월하다. 그렇다고 정상까지가 가깝다는 말은 아니다. 정상을 오르려면 거의 두 시진은 걸어야 한다. 정상까지 오를 수는 없다. 정상에서 약간 못 미친 곳에 사 층 전각 높이의 루(樓)가 있는데, 이름하여 비살루(秘殺樓)라고 한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거기서 발길을 멈춰야 한다. 그 너머는 비살문의 영역이기 때문에. 소화남은 비살루에 올라서서 멀리 작은 점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저건가?” “네.” “뭐지?” “개입니다.” “개?” “신분을 추적해 봤는데 개장사들이 틀림없습니다.” 소화남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는 갈천상의 의도를 읽었다고 자부했다. 백문장에서 당한 패배가 무척 아팠을 터인데 비교적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도 거기서 나왔다. 갈천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아는 이상은 대처할 방도가 있으니까. 다음에 다시 만날 때는 목숨을 끊을 자신이. 그런데 개라…… “어디 산(産)이지?” “그런 것도 없습니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똥개들입니다.” “길을 막아.” “넷?” 수하가 잘못 듣지 않았나 싶어 되물었을 때 소화남은 이미 등을 돌려 걸어가는 중이었다. “이미 지나간 개가 백여 마리. 잡아둔 개가 이백여 마리. 아무리 개고기를 좋아한다 할지라도 이건 이상해. 자, 의견들 말해 봐.” 소화남은 살인방법만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두뇌들을 불러놓고 의견을 말하도록 지시했다. “……” 모두들 꿀 먹은 벙어리다. 가진 것이라고는 머리 하나밖에 없다고 자부하는 두뇌들이건만 백문장에서 개를 대량으로 사들이는 까닭을 도무지 추측할 수 없었다. “갈천상은 기관을 발동시켜서 두 가지를 얻고자 했다. 하나는 나에게서 길을 빌리는 것. 또 하나는 백문장을 일약 오대 패강으로 끌어올리는 것. 두 가지 모두 성공했다. 무슨 말인 줄 알아? 결론부터 말하자면 철응방 고수를 죽인 것과 개를 사들이는 것이 같은 비중이라는 거야. 왜 개를 사들이느냐……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 모두 해답을 얻기 전에는 이곳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갈 줄 알아.” “……” 그래도 모두 입이 얼어붙었다.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경비견(警備犬)이다. 하나 경비견으로 쓰는 개는 혈통(血統)이 다르다. 촌구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황구(黃狗)는 식육(食肉)으로 소용될 뿐 경비견으로는 사용하지 못한다. 똥개를 애완견(愛玩犬)으로 기를 리도 없고, 더군다나 이백 마리가 넘는 숫자라면…… 철응방 고수를 죽인 것과 같은 비중을 지닌 일이 무엇일까? 두뇌들은 개를 이용한 살인수법을 생각했다. 없다. 개는 하나의 도구로 활용할 수는 있어도 직접적인 살인과는 연관이 없다. 간혹가다 무인을 상대한다는 명견(名犬)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경우도 갓 입문한 무인을 상대하는 선에서 그친다. 명견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고. “……” 고요한 침묵만 흘렀다. 소화남은 이들을 아무리 쥐어짜봐야 뾰족한 해답이 나오지 않으리란 것을 알았다. 갈천상이 무슨 짓을 벌이는지는 모르지만 의표(意表)를 정확히 찔렀다. 길을 빌려 달라기에 무슨 물건을 옮기나 했더니 개라…… 개장수 다섯 명이 소화남 앞에 끌려왔다. 그들은 개에게는 제왕으로 군림할지 모르지만 소화남 앞에서는 벌레만도 못한 존재였다. 소화남이 고개만 까딱거려도 인간의 목숨이 참으로 덧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처지가 되리라. 개장수들은 빳빳이 굳은 채 소화남이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 “백문장에 가는 이유가 뭐지?” “나리, 저희는 그저 개를 팔러 가는 것뿐인뎁쇼.” “넌 몇 마리야?” “스, 스물일곱 마리.” “어디서 왔어?” “영하진(零遐鎭)인뎁쇼.” 소화남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영하진이라면 태주부(台州府)다. 태주부에서 백문장으로 가는 길은 대분산을 넘어가는 것이 제일 빠르다. 대분산을 넘지 않으려면 장장 오십 리 길을 돌아가야 한다. “개를 멀리도 팔러다니는구만.” “그, 그게 이미 돈을 받아서……” “계속 말해 봐.” “두 살이 넘은 개를 팔라고 사람이 왔습죠. 다른 데보다 값도 후하고 운반비도 넉넉해서 후딱 팔아치웠습죠.” “뭐라고 하면서 개를 팔라고 했나?” “다른 말은 없었고…… 그냥 개 값을 후하게 쳐줄 테니 백문장까지 갖다 달라고……” 소화남은 다른 개장수들에게도 몇 마디 물어보았지만 똑같은 대답만을 얻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그들에게 개를 팔라고 했다는 사람이 각기 다른 사람이라는 점이다. 키가 작고 못생긴 늙은이가 와서 흥정했다는 사람도 있고, 기골이 장대한 젊은이, 눈알이 팽 돌 정도의 절색미녀…… 등등. 소화남은 개장수들을 돌려보냈다. 더 이상 억류도 하지 않았다. 순순히 백문장으로 갈 수 있게끔 길을 열어주었다. 한 시진 후, 소화남은 비살루에 앉아 술을 마셨다. 흠뻑 취하고자 마시는 술이 아니라 풍광을 감상하면서 두어 잔 걸치는 기분 좋은 술이었다. 소화남의 주위에는 무인 세 명이 손에 술잔을 들고 서성거렸다. 편한 자세로 앉아 있는 사람도 있고, 서 있기도 하면서. “어떻게 생각하나?” 소화남이 물었다. “태주부와 금화부에 있는 개들을 온통 쓸어갔다? 하하! 갈천상이라는 자, 개고기를 무척 좋아하더군요.” 비영이었다. “농담할 기분 아냐.” 소화남이 못마땅한 듯 말하자 비영은 즉시 얼굴 표정을 고치고 말하기 시작했다. “박우, 운단서, 칠살수에게 일검을 먹인 이전주라는 놈, 삼전주라는 계집…… 모두 나서서 개를 사들였습니다. 백문장에 있는 모든 놈들이 개를 사려고 절강성을 뛰어다닌 꼴이죠. 소문주, 개를 들여보내서는 안 됩니다.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는 몰라도 느낌이 더러워요.” “느낌은 나도 더러워. 내 기분이 더러운 것은 개를 가지고 무엇을 하려는지 몰라서가 아니라 갈천상 그자의 머리 속에 들어갈 수 없어서야. 생각을 읽을 수 없다…… 정말 기분 더러워.” 소화남은 손에 힘을 주어 들고 있던 동잔(銅盞)을 종잇장처럼 구겨버렸다. 술잔에 남아 있던 술이 손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금 소화남의 기분이 씁쓸한 것은 엄밀히 따지면 비살문주인 아버지 때문이었다. 칠살수가 의식불명인 상태로 돌아왔는데도 아무런 대처를 하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별도의 명이 있을 때까지 무공수련에만 전념하라는 기가 막힌 명(命)도 받았다. 금족령을 내린 이유는 더 기가 막혔다. 자기 사람을 아무런 대가도 없이 다치게 하는 일은 주인 된 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소화남에게 십대고수가 있듯이, 아버지에게는 칠혼(七魂)이라는 귀신들이 있다. 그들은 지금도 절강성 어디에선가 아버지를 위해 부지런히 일하고 있을 게다. 넘을 수 없는 높은 벽. 소화남은 아버지가 태산처럼 높게 보였다. 의지하고 기댈 태산이 아니라 반드시 넘어서야 할 장애로써. 그는 사대 패강 간의 싸움보다 갈천상과의 싸움을 더 중히 여겼다. 소화남이 가지고 있는 전력은 십대고수와 귀살대가 전부다. 사람들은 ‘비살문’ 하면 귀살대부터 떠올리지만 그건 지엽(枝葉)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 정예(精銳)는 아버지가 움켜쥐고 놓지 않는다. 비살문의 모든 것을 움직일 수 없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력만으로 싸우면 어떨까? 겉으로 드러난 백문장의 전력은 십대고수와 비등하다. 나머지는 백문장에 설치된 기관과 귀살대의 싸움인데…… 소화남은 ‘안 된다’는 쪽으로 생각을 굳혔다. 소화남이 넘어야 할 벽이 또 하나 생겼다. ‘일음마봉 무기…… 네놈은 두 다리 쭉 뻗고 자도 되겠군. 네놈을 치기 위해서는 갈천상이란 놈을 딛고 가야 할 테니까.’ 소화남은 산길을 바라보았다. 개장수들이 꾸역꾸역 밀려가고 있었다. 쫦 2 쫦 컹컹컹! 컹컹……! 천여 마리의 개떼가 짖어대는 소리는 조용하던 백문장을 장터로 만들고 말았다. 개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짖어댔다. 짖어대는 소리뿐이라면 그럭저럭 견딜 만한데 개에게서 풍기는 노린내와 분비물 냄새가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 사방에서 사들인 개의 숫자는 근 천여 마리에 이른다. 똥개라고는 하지만 한 마리를 잡으면 장정 십여 명이 포식을 할 만큼 커다란 개들이다. “거참, 미치겠네.” 방삼은 인상을 구기며 연신 코를 움켜쥐었다. 내각주 삼처 처장이라는 직분을 얻어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맡은 일이 고작 개들을 관리하는 일이라니. 똥오줌을 치우고, 먹이를 주는 일로만 하루 해를 꼬박 넘기고 마니 이게 어디 사람이 할 일인가. “이놈들아! 빨리빨리 움직엿!” 방삼은 들끓어 오르는 울화를 애꿎은 하인들에게 풀었다. 문을 걸어닫았던 지난 두 달 동안 백문장은 속을 살찌웠다. 외각은 외각주가 총괄하고 있고, 모든 일이 비밀스럽게 진행되고 있으니 같은 백문장 식솔이라 할지라도 내막을 전혀 알 수 없다. 하나 내각은 표면에 드러나 있으니 달라진 점을 확연히 알 수 있다. 사람이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불어났다는 것이 가장 뚜렷한 증거다. 하인들의 수만 해도 거의 백오십 명에 육박한다. 일처장인 홍문성은 어디서 그 많은 사람들을 데려온 것일까? 홍문성의 인맥(人脈)은 끝을 알 수 없었다. 열 명이 필요하다면 열 명, 스무 명이 필요하다면 스무 명을 데려왔다. 요소요소에 꼭 필요한 사람들로. 소속감없이 돈만 밝히는 하인들과는 다르다. 홍문성이 데려온 자들은 마치 백문장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처럼 궂은 일 좋은 일 가리지 않고 일을 한다. 불평 한 마디 없다. 천여 마리 개가 퍼질러놓은 분비물을 치우면서도 인상 한 번 구기지 않는다. 홍문성이 넓은 인맥으로 사람을 끌어들인다면 이처장 오경은 각양각색의 사람을 백문장 사람으로 변화시켰다. 거처할 곳을 배정해 주고 직급(職級)을 부여하고,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관리하는 일이 오경의 몫이다. 방삼에게는 하인 서른 명과 개 천여 마리가 맡겨졌다. 말이 좋아 삼처장이지, 개 담당이나 다름없으니. 주어진 하인이 서른 명이라 할지라도 그 중에 방삼이 마음껏 부려먹을 수 있는 하인은 열 명밖에 되지 않는다. 다른 스무 명은 배속(配屬)이 약정된 상태이지, 오경에게서 완전히 넘어온 것이 아니다. “맡겨진 일이니 어쩝니까? 다 속이 있어서 하는 일일 테니 따르는 수밖에요.” 홍문성은 예의 친근한 말투로 위로해 주었다. “개도 개 나름이죠. 한두 마리라면 모욕일지 몰라도 천 마리라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중원 천지에 누가 그 많은 개들을 데리고 있습니까? 이름이 널리 알려질 겁니다.” 오경의 말대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이제는 무가라기보다도 ‘백문장’ 하면 개가 떠오르고 ‘개’ 하면 방삼을 떠올리고 있으니. “날도 많이 풀렸잖아! 물로 깨끗이 닦아. 이거야 원 냄새나서 살겠나. 바닥도 박박 좀 문지르란 말야!” 방삼은 앞으로 평생 개라면 이가 갈릴 것 같았다. “삼처장님.” 시녀가 다가와 그를 불렀다. 삼처장이 되고 나서 좋아진 점이 있다면 시녀가 생겼다는 것이다. 시녀도 일처장인 홍문성이 데려왔다. 그는 다른 점은 모르지만 정말 인맥 하나만은 마르지 않는 우물이다. 인정해 줘야 한다. 사람을 많이 안다는 방삼이지만 지금 있는 시녀들처럼 싹싹하고 부지런한 시녀들은 구하려면 진땀깨나 흘렸을 테니까. “왜?” 방삼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물었다. “회합이 있으시다고 무극전으로 오시랍니다.” “무극전? 천화전(天火殿)이 아니고?” “네.” 방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각주 운단서의 집무실은 천화전이다. 그는 천화전에서 떠난 적이 드물고, 당연히 모든 회합은 천화전에서 열었다. 무극전…… 무극전이라면 갈천상의 집무실이지 않은가. 왜 거기서 회합을 열지? “오줌 자국이 남아 있으면 알아서 해!” 방삼은 다시 한 번 잔소리를 늘어놓은 다음 무극전으로 향했다. 난주일검 장상부는 처음, 자신에게 맡겨진 다섯 명을 보고 한숨부터 내쉬었다. 이들과 무엇을 하라는 것인지. 그나마 봉아나 소화는 기본적인 무공을 지니고 있으니 쓸 만한 편이었지만 덕진을 비롯한 하인 출신 세 명은 검을 잡을 줄조차 모르는 문외한들이었다. 하녀 두 명과 하인 세 명. 이들이 육전의 모든 것이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났건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내들은 몸 만들기가 끝나지 않았고, 봉아와 소화는 각기 장주와 조자경을 모시는 시녀 신분을 유지하고 있다. 무복에 새겨진 문양은 각 소속을 의미했다. 문양으로 외각과 내각을 구분하고`─`외각에는 숫자가 적혀 있지만 내각에는 숫자가 없다`─`숫자로 자신이 속한 전(戰)을 나타낸다. 외각에 속한 사람들은 곧 갈의를 입어야 한다. 그때는 누가 어느 소속인지 알 길이 없다. 외각 무인들 중 순백의 무복을 입을 사람은 숫자가 적혀 있지 않는 휴전 소속과 팔(八), 구(九)가 적힌 팔전, 구전 소속 무인들뿐이다. 일전부터 칠전까지는 무복을 입지 못한다는 지침이 있었다. 그들이 언제 갈의로 갈아입을 것인가. 싸울 준비가 되었을 때다. 일전부터 오전까지의 무인들은 갈의를 입고 있으니 싸울 준비가 되었다고 봐야 하며, 육전과 칠전은 백색 무복을 입고 있으니 싸울 준비가 되지 않았다. 장상부는 육전에 관심이 없었다. 단 여섯 명에 불과하더라도 마음을 잡아끄는 사람들이라면 육전을 키우려고 애를 썼을지도 모른다. 하나 이건 아니다. 무공을 가르치는 데도 한계가 있지, 이미 뼈마디가 굵어버린 사람들을 무슨 수로 하루아침에 절정고수로 만든단 말인가. 이들을 데리고 사대 패강 고수들과 싸운다면 일합(一合)도 겨뤄보지 못하고 죽게 되리라. 장상부는 갈천상이 적어준 비급(秘)을 탐구하면서 하루 해를 보냈다. 거기에는 완벽한 통비공이 들어 있었다. 자신이 배우고 익힌 통비공뿐만이 아니라 사부가 미처 전수해 주지 못한 통비공까지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어 수련하기가 수월했다. “육전주님.” 새로 들어온 시녀가 그를 불렀지만 그는 듣지 못했다. 통비권의 통비(通臂)는 통견(通肩), 통비(通臂)의 발력(發力)에서 따온 명칭이다. 특징으로는 섬(閃), 전(展), 등(騰), 나()로 기복전절(起伏轉折)이 심하다. 가슴과 등을 굽혔다 폈다 하고 어깨와 팔목을 많이 사용하며 양 팔을 교대로 내리치고[벽(劈)], 허리를 비트는 동작이 많다. 장상부는 경력의 마지막 구단계인 취(脆)를 소화해 내는 중이었다. “육전주님.” 시녀가 조금 높은 소리로 불렀다. “응. 응? 왜?” “회합(會合)이 있으시다고 무극전으로 오시라는 분부이십니다.” “회합? 누가 주관하는 회합이지?” “외전주님이 주관하신답니다.” “외전주가 직접?” 장상부는 비급을 품에 갈무리하며 일어섰다. 지난 두 달간 갈천상은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회합을 주관한 적도 없고, 앞으로 백문장이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지도 말해 주지 않았다. 취임식이 끝난 후에 각자 맡아야 할 일을 말해 준 것이 고작이다. 장상부는 부지런히 무극전으로 발길을 옮겼다. 갈천상은 무극전을 다시 한 번 깨끗이 청소시킨 후, 세상에서 가장 편할 것 같은 의자를 사람 수대로 준비시켰다. 또 의자에는 비싸기 이를 데 없는 호피(虎皮)를 깔게 했다. 자신의 의자뿐만이 아니라 모든 의자에. 장주가 앉을 의자는 차별화해서 백호피(白虎皮)를 깔았다. 그러자 무극전의 분위기가 한결 호화스러워졌다. 단지 의자만 바꾼 것인데도 안락하고 품위가 있어 보였다. 장상부가 무극전에 들어섰을 때, 갈천상은 부지런히 글을 쓰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장상부는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갈천상을 바라보았다. “앉으셔서 차 한 잔 들고 계세요. 잠시면 끝납니다.” 장상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먼저 와 있던 방삼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방삼은 자신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갈천상은 혀가 반 토막이라 존대를 할 줄 모르는 위인인데…… 장상부는 시녀가 내온 차를 마셨다. 방삼도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두 사람은 무슨 일인가 궁금해서 이야기라도 나눠보고 싶었지만 입도 벙긋거리지 못했다. 갈천상이 풍겨내는 묵중한 위엄은 늘 사람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이런 사람이 황소처럼 일로매진(一路邁進)한다면 강철을 연상시키는 패도적인 무인이 될 것이다. 만약 얼굴에 화사한 미소를 머금고 모든 사람을 친구로 받아들인다면 ‘대인(大人)’ 소리를 듣게 되리라. 이 밖에도 그가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에 따라 그의 인상은 완전히 달라진다. 장상부와 방삼은 갈천상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강철 같은 면모를 보여서 그런 사람이구나 생각하면 어느 틈에 전혀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으니. 일다경(一茶頃)쯤, 부지런히 무엇인가를 적던 갈천상이 입김을 불어 아직 마르지 않은 먹물을 말렸다. 장삼부와 방삼은 긴장했다. 갈천상은 서책(書冊) 두 권을 들고 걸어와 한 권씩 나눠주었다. 얼떨결에 책 한 권씩을 받아든 장삼부와 방삼은 책명(冊名)을 힐끗 쳐다본 후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아!” 장상부가 먼저 탄성을 터트렸다. 육합검진(六合劍陣). 장상부가 들고 있는 책이다. 장상부가 놀라 부릅뜬 눈으로 책장을 넘기고 있는 동안 방삼은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싱겁게 책장을 넘겨댔다. 아직 책의 중요성을 파악하지 못한 듯했다. “삼처장, 앞으로 백문장의 수비는 삼처장 손에 달렸습니다. 아시겠습니까?” 방삼은 눈을 말똥거렸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백문장 수비가 자신에게 달려 있다니? “천 마리에 이르는 개라면 일 개 문파 정도는 능히 감당할 수 있어요. 지금은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차차 아시게 될 겁니다.” 갈천상이 입을 열자 장상부도 귀를 기울였다. 갈천상이 포영매라는 사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백문장 식솔들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무(武)에 관한 한 타고난 천재다. 세상에 천재는 많지만 그처럼 자신의 소질을 잘 활용하는 사람도 없으리라. 그가 어떤 말을 하건 그것은 하나의 진리였다. 설령 무리(武理)에서 크게 벗어나 주화입마(走火入魔)의 가능성이 농후한 심공(心功)일지라도 말한 사람이 갈천상이라면 안심하고 수련해도 된다. 설령 혼자 몸으로 사대 패강 중 일 방을 상대하겠다고 해도 그 사람이 포영매라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백문장 사람들이 갈천상에게 의지하는 바는 컸다. 그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개 천 마리로 일 개 문파를 상대할 수 있다고 했는가? 해답은 방삼이 들고 있는 책자 속에 들어 있으리라. 그리고 그 말은 사실이리라. “모든 동물에게는 지능이 있습니다. 인간보다는 훨씬 뒤지지만…… 단순 반복 행동을 가르치면 훌륭히 써먹을 수 있죠. 조련법(調練法)을 적어놨습니다. 오늘부터 이처장이 관리하던 조련사(調練師) 이십 명을 삼처장께 전속(轉屬)하라고 일러뒀습니다. 그들과 같이 책을 연구하시면 조만간 훌륭한 명견들이 탄생할 겁니다.” “그, 그럼 그 사람들이 하인이 아니라 조련사……?” “일처장이 구해 온 사람들이니 동물을 조련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죠. 그 사람들은 이미 개들의 성질을 파악했고 오십 마리씩 스무 부류로 분류해 놓았습니다. 각기 특성에 맞춰서 조련을 시킬 겁니다. 하나 궁극적으로 개를 관리하는 사람은 삼처장. 수하 이십 명을 데리고, 하하! 아니죠. 수하 천이십 명을 데리고 훌륭한 당(堂)을 만들어보십시오.” “아, 알겠습니다.” 방삼은 흥분했다. 개를 사들인 목적이 이것이었구나! 개 천 마리를 명견으로 조련해서 전장에 내보내면…… 그야말로 희귀한 일 개 당이 탄생한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는 찜찜한 구석도 없지 않았다. 조련에 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똥개를 명견으로 훈련시킨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개에게도 자질이란 것이 있는 것을. “무인 천 명을 양성하기는 힘듭니다. 사람도 없고 시간도 오래 걸립니다. 하나 개 네 마리면 무인 한 명에 버금갈 수 있는 것. 천 마리를 온전히 양성할 경우, 이백오십 명의 무인을 얻는 셈이니…… 잘될 겁니다. 기간은 반 년입니다. 반 년 안에 성과를 보여주기 바랍니다.” 반말을 할 때보다 존댓말을 할 때가 더 무서웠다. 갈천상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목적한 바를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는 무언의 다짐을 촉구했다. 반말을 할 때보다 존댓말을 할 때가 한결 친근했다. 반말을 할 때는 한 사람의 상관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존댓말을 듣고 있자니 동생과 이야기를 나누는 듯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었다. 갈천상이라는 사내는 종잡을 수 없는 사내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 때문에 사는지. “명심하십시오. 개 한 마리가 죽을 때마다 친자식이 죽는 것 같은 아픔이 가슴 속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단검으로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이 진정으로 느껴져야 합니다.” 갈천상은 다짐하듯 일침을 놓았다. 갈천상이 방삼과의 이야기를 끝내고 장상부에게 고개를 돌렸을 때, 장상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갈천상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내용을 짐작했다. “기한을 얼마나 주겠소?” 장상부가 물었다. “통비공은 완성하셨습니까?” 동문서답(東問西答), 갈천상은 장상부의 긴장을 풀어주고 있다. “워낙 둔재(鈍才)라서…… 이제 간신히 연결만 시키고 있는 중이오.” “하하! 제 눈이 정확했군요. 난주일검 장상부라는 말을 들었을 때, 혹시 했는데…… 남들이 전혀 생각지도 않은 통비공을 찾아 중원 전역을 떠돌았다면 범상하진 않죠. 통비공은 최고는 아니지만 열 손가락 안에는 꼽을 수 있는 절학입니다.” “열 손가락……” 장상부는 신음하듯이 중얼거렸다. 그러다 문득 눈빛을 요요(寥寥)히 빛내며 말했다. “통비공을 완성했을 때…… 자네에게 도전하고 싶네.” “그러고 싶습니까?” “허락하겠나?” “통비공은 제가 적어 드렸습니다.” “가부(可否)만 말해 주게.” “……” 갈천상은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장상부를 쳐다보았다. 눈과 눈이 마주쳤지만 불똥은 튀지 않았다. 장상부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길로 투지를 실어보냈지만 갈천상은 잔잔하고 심오한 눈빛으로 모든 도전을 비켜냈다. “그 말씀은 석 달 뒤에 다시 듣겠습니다.” “여보시게!” 장상부는 쉽게 물러설 기미가 아니었다. “만약.” “……” “석 달 뒤에도 똑같은 말씀을 하신다면 응해 드리겠습니다. 하나 분명히 확언하건대 석 달 뒤에는 말씀이 달라지실 겁니다.” “어떻게 달라진다는 말인가? 그럴 리 없네. 나는 지금 확답을 듣고 싶네.” 그때였다. “자식! 정말 말귀를 못 알아듣네. 요즘은 저 잘났다는 놈들 때문에 시끄러워서 살겠나. 귀를 잘라버리든지 해야지.” 한바탕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삼전주 유건지가 들어섰다. 여전히 화장 안 한 얼굴에 빛 바랜 갈의를 입은 채였다. “만검진천이 너만 못해서 이전주로 있는 줄 알아? 일심향불은 어때? 이길 자신 있어? 벽산개부는? 호호홋! 네 대답은 뻔해.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안다. 이따위 말이나 씨부렁거리겠지? 외각주가 한 말은 나도 장담할게. 우리 내기할까? 석 달 뒤에 말야, 네가 외각주와 비무를 하겠다고 하면 내 손가락 다섯 개를 잘라버릴게. 어때?” “……” 장상부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건방진 계집! 좋다. 내기를 하지.’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너무도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니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대답 안 해? 이제 보니 배알도 없는 인간이었잖아? 불알은 차고 있어?” “말을…… 삼가라.” 장상부는 언제든지 통비공을 뿜어낼 준비를 갖췄다. 여차하면 삼전주의 망나니 같은 말버릇을 고쳐 줄 심산이었다. “어쭈! 배알은 있네?” “계집……” “계집이고 나발이고 잘 들어! 무공은 익히는 사람에 따라서 깊이가 달라진다. 어때? 이걸 믿고 까부는 거지? 비록 외각주가 통비공을 적어줬어도 수련의 깊이만은 못 미친다. 틀렸어? 무공이란 익히기 나름. 절정(絶頂)에 이르면 초식이란 단순한 몸동작에 지나지 않는다.” “……” 장상부는 식은땀을 흘렸다. 삼전주의 어투는 경망스럽기 이를 데 없지만, 내용은 폐부를 찌르고 있다. 삼전주의 말이 옳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본인뿐만이 아니라 중원에 있는 모든 무인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그럼 아니란 말인가. “일무(一武)에 통(通)하면 만무(萬武)에 통하는 것이 무공. 호호호홋! 그런데 어쩌지? 네가 무공도 모르는 놈들과도 석 달 동안 그 책에 적힌 대로 씨름하다 보면 자신이 없어지니 말이야. 호호호!” 유건지는 간드러지게 웃으며 장상부가 들고 있는 책을 가리켰다. 장상부의 손에 작은 떨림이 일었다. 그도 육합검진이라는 책을 들여다보는 순간 범상치 않은 무공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쉽게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현묘했다. 통비권과 같은 경우 원숭이의 몸짓에서 무공을 창안한 것이니만큼 현묘한 무리(武理)가 가미되었다기보다는 발경(發勁)의 유효적절한 묘(妙)에 중점을 두었다. 육갑검진은 언뜻 보기에 십이간지(十二干支)에 중점을 둔 듯하다. 자(子)와 축(丑)이 합화(合化)하여 토(土)가 되고, 인해(寅亥)가 합화(合化)하여 목(木)이 된다. 묘술(卯戌)이 합화(合化)하여 화(火)가 되며, 진유(辰酉)가 합화(合化)하여 금(金)이다. 사신(巳申) 합화(合化)하여 수(水). 여기까지는 오행(五行)이다. 십이간지가 합화(合化)하는 순서는 크게 다르지만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가 생성되는 과정을 말하자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육합은 불변(不變)이 가미된다. 오미(午未)가 합화(合化)하여 불변이라. 오행에서는 토(土)를 가운데로 놓고 앞에는 수(水), 뒤에는 화(火)를 놓는다. 왼쪽에는 금(金), 오른쪽에는 목(木)이다. 섬서성(陝西省) 종남산(終南山)에 위치한 종남파(終南派)의 오행검진(五行劍陣)이 오행(五行)의 전형적인 합격진(合擊陣)이다. 갈천상이 적어준 비급에는 그와는 전혀 다른 배치가 나열되었다. 자와 축은 바로 붙어 있으며, 위치가 십이간지 중 처음이니 제일 앞에 놓는다. 오행에서의 중심이 육합에서는 선두에 서는 셈이다. 인해(寅亥)는 서로 마주보고 있다. 인의 다음인 묘(卯)와 해의 아래인 술(戌)도 서로 마주보고 있다. 진유가 마주보며, 사신이 마주본다. 그리고 종국, 불변에 이르러서는 오미가 자축처럼 마주선다. 토목화금수, 그리고 불변의 순서다. 육합검진은 일렬로 쭉 늘어선 검진이며 제일 선두와 제일 후미는 고정, 목화금수에 위치한 무인은 유동(流動)의 묘를 지녀야 한다. 유동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목의 경우에는 인방(寅方)과 해방(亥方)만 가로질러 다녀야 한다. 그렇게 여섯 명이 하나로 뭉쳐진 검진은 원을 형성하게 되고, 강력한 공격력을 갖게 된다. 불변에는 누가 서야 할까? 사태를 냉철하게 분석할 수 있는 빙심(氷心)의 소유자다. 장상부는 한 여자를 떠올리기에 어렵지 않았다. 장주의 시녀였으며, 시녀답지 않게 얼음처럼 차가운 냉심의 소유자 소화. 그녀다. 그녀가 불변의 위치에서 진을 조정해야 한다. 토의 위치에는? 토는 불변만큼이나 중요하며, 적의 예봉을 견뎌내야 한다. 대지처럼 넉넉한 자세로. 가장 무공이 강한 자…… 자신이다. 통비권이라면 적의 제일격을 흘려버릴 수 있으리라. 제일격을 놓친 자는 당황하게 된다. 따라서 목의 위치에 선 자는 당황한 적을 베어낼 수 있어야 한다. 연화각 조자경의 시녀였던 봉아다. 봉아는 성격이 활달해서 거침없이 적을 베어갈 것이다. 활동범위는 작아야 한다. 정교함을 요하는 탓이다. 원과도 같다. 토와 불변은 양극단에 위치하고 양극단을 일직선으로 쭉 그은 다음, 나머지 사람들이 가운데 선다. 그리고 좌우로 움직인다. 당연히 토와 불변은 움직일 공간이 없으며, 다른 사람들은 원이 그려지는 크기에 따라 움직이는 공간이 형성된다. 화와 금은 굳강해야 한다. 활동범위도 가장 넓을 뿐 아니라 뒤를 감싸안는 역할도 수행해야 한다. 화는 불길처럼 현란하면서도 강해야 하고, 금은 쇠처럼 단단한 강함을 지녀야 한다. 덕진과 충소(忠遡)다. 둘 다 하인들이었고, 무공을 전혀 모르지만 체력만큼은 타고났다. 수의 역할은 목과도 같다. 다만 성질이 다를 뿐이다. 목이 정교하면서도 거침이 없어야 한다면, 수는 물처럼 냉철하면서도 유연한 정교함이어야 한다. 목지형(穆誌瑩)…… 그자가 적임이다. 목지형은 소심한 듯하면서도 상황을 냉철히 판별해 낸다. 검을 익힌다면 조용하면서도 끊김이 없는 검을 지닐 것이다. 장상부는 생각을 하는 과정에 연신 감탄을 터트렸다. 갈천상이 적어준 비급과 자신에게 맡긴 수하들의 성격이 딱 맞아떨어진다. 검만을 고집할 필요도 없다. 각기 맡은 바 위치에 따라 가장 유효 적절한 병기를 선택해 주면 된다. ‘통비권…… 일각(一角)이야. 빙산의 일각……’ 장상부는 유건지가 말한 뜻을 이해하고 말았다. 그것은 난주일검 장상부라는 개인에게는 절망이었다. 통비권으로는 갈천상을 꺾지 못한다는 절망. 희망이기도 했다. 육합검진을 완성하면 누가 그 앞에 서 있을 수 있을지. 유건지가 말을 계속했다. “또 하나 착각하는 게 있어. 멍청해서 아직 깨닫지 못했는지 모르지만…… 이전은 음양(陰陽), 삼전은 삼재(三才), 사전은 사상(四象), 오전은 오행(五行)으로 이루어졌어. 딱 고만큼의 인원이지.” 장상부의 얼굴은 더 이상 구겨질 수 없을 만큼 찡그려졌다. 그렇다. 정말 그렇다. 그렇다면 육합검진 또한 무적이 될 수 없다. 뛰어난 절학은 될 수 있어도 불패(不敗)를 장담할 수는 없다. “그게 외각주가 죽어야 될 이유야. 우리에게 비급을 남겨줄 때는 최고라고 말했거든. 외각주, 저 자식…… 거짓말에는 아주 달통한 놈이야.” 장상부와 함께 꿈이 깨지는 또 한 사람은 방삼이었다. 그는 개 천 마리로 무림을 종횡하는 꿈 속에 사로잡혔었다. 비록 아주 잠깐이지만. 그 꿈도 산산조각이 났다. “저 자식 수작이 뭔지 알아? 자기가 만든 검진을 익히게 해서 우리끼리 싸움을 붙이려는 거야. 알아보려는 거지. 누가 최고로 강한지. 난주일검, 축하해. 우리 싸움에 끼여들게 돼서. 호호호! 조심해야 할걸? 우리는 거의 검진을 완성시켜 가고 있거든. 이제 시작해서 언제 따라오나?” “그만 하지.” 갈천상의 얼굴에 아픔이 스쳐 갔다. “인면수심(人面獸心)…… 좋아. 어디까지 거짓말을 늘어놓는지 볼까? 조가 계집애 옷도 벗겼다며? 왜 여자 옷만 벗기는 거야, 변태야?” “……” 갈천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가 계집애는 일전주야. 말해 봐. 조가 계집애는 혼자 무공을 익히는 건가? 지난 두 달 동안 그 계집애가 보이지 않았어. 말해 줄래?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혼자니까…… 태극(太極)이나 무극(無極)쯤 되겠군. 안 그래?” “……” “그럼 모두 여섯이네? 여섯이 싸워서 제일 강한 자가 너와 싸우는 거야? 호호호! 웃기지 마. 검진이 완성되면 우리는 차례로 너에게 도전할 거야. 우리가 왜 우리끼리 싸우니? 각오해 둬.” “그건…… 이미 약속했다.” “알앗! ……충고 하나 해줄게. 더 이상 적을 만들지 마. 우리도 신경 쓰기 귀찮거든. 육전까지는 봐주지만 더 이상은 안 돼. 만약 진법인지 개나발인지 또 만들어내면 약속이고 뭐고 네놈 목부터 베어낼 거야.” “……” 유건지는 갈천상의 얼굴을 매섭게 응시하다가 찬바람나게 돌아갔다. “난주일검, 좋습니다. 언제든지…… 삼 개월 후에도 좋고, 육 개월 후도 좋고…… 비무를 청한다면 받아주겠습니다. 그러나…… 백문장을 먼저 지키고……” “정말이오? 저 계집애 말이?” “……” “좋소. 어차피 나는 통비공이 목적이었으니까. 저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검진을 익히게 되었는지 사연을 알 수 없지만…… 나는 이것이 조건이었으니까. 하지만 검진끼리 싸우게 한다면 간과하지 않겠소.” “……” 난주일검 장상부가 일어섰다. 장상부가 일어서자 혼자 앉아 있기 머쓱해진 방삼도 엉거주춤 따라 일어섰다. 그들이 무극전을 빠져 나갈 때까지 갈천상은 고개를 수그린 채 들지 않았다. 쫦 3 쫦 “그 말이 사실인가요?” “……” “사실이군요.” “……” “이제 이해가 될 것 같아요. 저 사람들이 왜 백문장을 도와주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었거든요. 당신이 아무리 하늘을 놓았다 풀었다 하는 포영매라도 저 사람들같이 엄청난 고수들을 단 한 달 만에 끌어들일 수 있다는 게 말예요.” “아무 생각 하지 말고…… 무공수련이나 해.” “그래서 저 사람들과 싸워보란 말인가요? 어느 무공이 가장 강한지 확인해 보고 싶어서요?” “……” “호호호! 당신이란 사람이 참 불쌍하게 느껴지는군요. 그렇게 최고를 추구하고 싶어요? 직접 익혀보는 건 어때요? 그건 목숨을 거는 일이라 싫은가요?” 조자경은 자신의 말투가 삼전주 유건지를 닮아간다고 생각했다. 유건지도 이런 과정을 거쳤을까? 가슴 속에 들끓는 감정이 사랑이란 것을 깨닫고, 또 사랑 중에서도 가장 서글픈 짝사랑이란 것도 알게 되고…… 사랑이 미움으로 변하고, 미움이 원수로 변하는 것일까. 그래서 유건지는 명가(名家)의 금지옥엽(金枝玉葉)답지 않게 막말과 상스런 행동을 서슴없이 하는 것일까. “……” 갈천상은 푹신한 호피의자에 앉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 생각도 하지 않았다. 유건지와 장상부 등이 무극전을 떠날 때의 모습에서 한 치도 미동하지 않았다. “호호호! 포영매는 최고를 추구한다고 들었어요. 그럼 제가 익히고 있는 무극진결(無極眞訣)도 최고인가요? 그 말을 듣지 못했군요.” “최고다.” 갈천상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호호호!” 조자경은 웃었다. 웃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유건지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했고, 자신도 이전주, 삼전주 등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신세인 것이다. 그게 서글펐다. 마음 속으로는 못난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한편으로는 몸을 보여준 사내와 혼인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도 떨치지 못했으니까. “저만 공평하지 못하군요. 다른 사람은 두 명, 세 명씩인데 저는 혼자이니. 무극에 음양에 삼재, 사상, 오행, 육합…… 일곱 개가 나왔군요. 여기서 끝나는 건가요?” “……” “칠성(七星), 팔괘(八卦), 구궁(九宮)도 있을 법한데, 그건 아직 만들지 않았나요? 아님, 이미 익히고 있는 사람이 있는 건가요?” “무극전으로 통하는 암로(暗路)를 봉쇄해야겠군.” “그럴 필요 없어요. 앞으로는 연공실에서 나오지 않을 생각이니까. 삼전주 말대로 저들은 이미 완성단계에 이르렀는데 육전주와 저는 이제 시작이잖아요? 죽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수련해야죠. 목숨이 걸린 문제인데 엉터리로 배울 수는 없죠.” “……” “당신은 참 넉넉한 사람 같아요.” 조자경은 비꼬는 투로 계속 쏘아붙였다. “베풀 것이 아주 많은 사람. 광인들을 설득하면서도 조건을 걸었다죠? 쉬쉬하고 있지만 다들 알고 있어요. 이제 갓 들어온 사람들까지 모두. 그건 무슨 조건이죠? 무인들이 아니니까 무공은 아닐 테고. 있군요, 무인이? 마임호. 좋아요. 마임호는 무공을 전수해 준다고 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뭘 준다고 했죠? 모두 한 분야에서는 일가를 이룬 사람들인데 대단하네요. 그런 사람들에게 줄 것이 있다니.” 조자경은 숨쉴 틈도 주지 않고 쏘아붙였다. 이런 기분은 정말 이상하다. 원래는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한번 섭섭한 마음이 들고, 화가 나기 시작하자 화가 화를 불러와 처음부터 몹시 화난 사람처럼 대들었다. 조자경은 갈천상을 몰아붙이고 있지만 자신이 왜 그러는지조차 몰랐다. “하기는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죠. 하지만 물어볼 게 있어요. 그 사람들이 비록 미쳤었다고는 하지만 대단한 사람들이니 줄 것도 대단하겠죠. 또 이전주, 삼전주, 사전주…… 그 사람들에게도 대단한 걸 줘야 될 거예요. 그렇게까지 하면서 왜 백문장을 돕는 거죠?” 언제나 궁금하던 부분이었다. 갈천상이 왜 백문장을 돕는 것일까? 물론 약속을 했다. 하나 그 정도로는 너무 거대한 움직임을 설명할 수 없다. 광인들을 설득하여 일조(一助)케 한 점까지는 납득할 수 있지만, 실전을 움직이는 무인들은 설명할 수 없다. 그들의 면모는 하나같이 놀라운 사람들이다. 출신 가문만 놓고 비교해 봐도 백문장보다 나으면 낫지 못하지는 않는다. 그런 사람들이…… 보아하니 예전에 수하도 아니었던 듯한데, 그렇다면 목숨까지 걸면서 무엇 때문에 싸운단 말인가. 사대 패강과 싸우는 일이다. 자신의 목숨은 물론 자신들의 가문에까지 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 그런 점을 모두 감안하고 백문장에 와서 전주직을 맡고 있다면 그들이 바라는 바도 엄청나다는 이야기다. 절곡에서 한 약속 한 마디로는 모든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 물론 그 약속조차 어머니는 모르고 있어 더욱 답답하겠지만. “약속했으니까.” 갈천상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것뿐인가요?” “……” “원하는 것이 내 몸인가요?” 조자경은 부끄럽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갈천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새 잊어버렸나? 네 몸과 마음…… 전부 내 것이라고 말했는데?” “잊지 않았죠.” “그럼 됐어.” “잊지 않은 게 또 있죠. 반드시 죽을 거라고.” “맞아.” “저들과 싸워야 하나요? 백문장을 도와준 사람들하고?” “약속은 백문장이 오대 패강으로 올라설 때까지다. 저들은 한시적으로 도와주는 것뿐. 걱정하지 마라. 네가 백문장을 떠나도 백문장은 오대 패강으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있을 테니까.” “호호호! 자신하나요?” “물론.” “영광이군요. 제 가치가 그렇게 높다니.” “잊지 않은 게 있다고 했지. 반드시 죽을 거라고 한 말. 그 말은 진심이다. 저들과 싸울 필요는 없다. 저들이 바라는 사람은 네가 아니고 나니까. 아니지. 좀더 엄밀히 말하면 자신들이 익히고 있는 무공이 최고라는 말을 듣고 싶은 거야, 내 입에서. 그게 저 사람들의 목적이다. 저 사람들은 죽을 염려가 없지만…… 너는 죽는다.” 갈천상이 고개를 들었다. 느낌뿐일까? 그의 눈은 촉촉이 젖은 듯했다. ‘이 사람…… 진심이야. 나는…… 죽을지도 몰라.’ 조자경은 등골에 냉기가 흘렀다.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기는…… 처음이었다. 갈천상이 무엇을 획책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아마 갈천상에게 그 일은 자신이 백문장을 일으키려는 생각에 버금갈 것이고, 이전주를 비롯한 무인들, 박우를 비롯한 광인들을 모두 잃어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리라. 그렇다면 그 일은 얼마나 큰 것일까. 조자경은 음울한 눈빛을 보면서 등을 돌리고 말았다. 쫦 쫦 쫦 방삼은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갈천상에게서 받은 책자를 탐독했다. 난주일검 장상부는 어쩐지 모르지만 자신은 갈천상의 뜻을 충실히 따를 생각이었다. 평생 남의 집에서 하인 노릇이나 하던 처지에 또 그런 생활만 하다가 늙어죽으려니 생각했다가 삼처장이라는 중임(重任)을 맡았으니 그만하면 세상에 태어난 보람은 있지 않는가. 무인이 아니라 개를 기르는 일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백문장에 막대한 힘이 된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해야 하지 않는가. 책을 가까이 했던 게 언제였던지…… 이십여 년 전이다. 백문장이 건립할 당시 유난히 부지런했던 방삼은 광량의 눈에 들었다. 큰 행운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비록 하인에 불과했지만 광량이 대민(對民) 구호(救護)에 열중하는 동안 방삼은 실질적인 하인장 역할을 했다. 대우도 섭섭하지 않았다. 자신은 비록 하인 노릇을 하고 있지만 두 아들은 모두 훌륭히 장성해서 금화부에 버젓한 포목점을 운영하고 있으니 그만하면 됐지 않는가. 품삯을 넉넉히 주지 않았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더군다나 자식놈들이 포목점을 낸다고 할 때, 장주도 안 계시고 문도도 모두 떠난 마당에 선뜻 거금을 지원해 주었으니, 그 은혜…… 아니다. 의리는 두고두고 잊지 못하리라. 이십여 년 전, 광량을 도우며 책을 옆구리에 끼고 다닌 것이 글을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로도 짬짬이 모르는 글자가 생길 때마다 호기심을 늦추지 않아 글은 제법 많이 알지만 문장(文章)을 읊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 정도의 글재주라도 도움이 많이 되었다. 개를 조련하는 방법이라 글보다 그림이 더 많아 이해도 한결 수월했다. 그러나 사그러드는 심지를 돋워가며 책을 탐독했지만 전혀 낯선 분야라 생소하기만 했다. <일반적으로 개를 좁은 견장(犬場)에 계속 가두어놓는데 그렇게 해서는 육체적, 정신적 압박감을 풀어주지 못한다. 첫째, 아침에는 산책을 시켜주고 둘째, 낮에는 넓은 울타리에 수용하고 셋째, 밤에는 넓은 견장에 들여보낸다.> <개를 묶어놓거나 가두면 훈련을 할 수 없다.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풀어줘야 한다.> <개가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 한참 있다가 징계를 하면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을 왜 징계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단순히 자기를 공격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므로 징계는 실수하자마자 해야 한다.> 훈련방법을 다룬 일장(一章)이다. <피부에 병이 생겼는지 구석구석 살핀다. 눈이 맑은지, 눈곱이 많이 끼어 있는지 확인한다. 항문에 설사 흔적이 있는지, 항문에서 악취가 나지 않는지 확인한다.> <귀를 긁는지, 귀에서 악취가 나지 않는지 확인한다. 개의 귓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벌레가 기생하며 심한 가려움증을 일으키고 또한 그 벌레의 분비물로 인해 귓속이 불결해져서 염증과 함께 역겨운 냄새가 나므로 최소 칠주야(七晝夜) 간격으로 귓속을 닦아준다.> <콧물을 흘리거나 지나치게 건조하지는 않은지 확인한다. 구토 혹은 기침은 하지 않는지 확인한다. 배가 너무 불러 있지 않는지 확인한다. 식욕과 활동상태가 양호한지 확인한다. 겁이 많은지, 집중력은 어떤지 확인한다.> 관리를 요하는 사항들이다. 도무지 끝이 없었다. 가장 기본적인 훈련인 복종훈련을 읽기도 전에 머리 속이 터지는 것 같았다. 개한테 이렇게 신경을 쓸 바에는 차라리 망나니 자식을 뒷수발하는 게 훨씬 편하지……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개한테 인공호흡까지 시켜줘야 하는 대목이 있다. <넷을 셀 동안 한 번씩 개의 입에 입을 대고 공기를 힘껏 불어넣어 준다. 가슴이 가라앉는 것이 보이면 다시 반복 실시한다. 숨을 불어넣는 중간중간에 맥을 점검할 것이며, 만약 심장과 맥이 멈추면 두 손을 모아서 하나를 셀 만한 시간에 한 번 꼴로 심장을 압박해 준다.> 이쯤 되면 개팔자도 상팔자가 된다. 목욕을 시키는 방법에서부터 더럽기 이를 데 없는 항문을 짜주라는 등`─`개의 항문 속 입구 양쪽에 낭이 있는데 분비물 때문에 악취를 풍긴다. 분비물이 항문 밖으로 배출되지 않거나 병에 감염되면 염증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목욕시킬 때마다 엄지와 검지손가락으로 항문을 살짝 짜준다`─`서 있는 자세가 불안정하거나 발목이 굽어질 수 있으니 발톱을 깎아주라는 등…… 방삼은 잠시 책을 덮고 생각에 잠겼다. 그 동안 야속하기만 했던, 자신의 휘하에 들어오지 않던 하인 스무 명이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생각해 봤다. 이런 일들이다. 그들은 개를 훈련시키기에 앞서 인간에게 의지하는, 믿고 순종하는 동물로 탈바꿈시키는 과정을 진행하고 있었다. 개도 사랑이 있어야 말을 듣는다.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분별할 줄 안다. 그들은 사랑을 주었다. 따뜻한 보살핌으로. ‘사람이 턱없이 부족해.’ 그런 생각을 이제야 하게 됐다. 갈천상이 준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똥개 오십 마리를 관리하는 데 무슨 사람이 한 명씩 매달릴 필요가 있냐고 생각했는데. 책에 적힌 대로 관리하고 있다면…… 그들은 그야말로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일하고 있지 않는가. 방삼은 자신이 할 일을 찾았다. 개를 조련하는 일은 그들에게 맡기면 된다. 자신은 그들을 통제하고 지원하고, 그들이 개에게 애정을 쏟아붓듯이 자신은 그들에게 애정을 쏟아주면 된다. 갈천상은 방삼에게 개들을 조련하라고 책을 건네준 것이 아니라 그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으라고 건네준 것에 불과하다. 자세히 알면 알수록 그들을 좀더 깊이 이해하겠지만. 밤이 지나기 전에 갈천상의 뜻을 헤아렸으니 다행이지. 방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개들을 모아놓은 견장으로 걸어갔다. 계절이 초봄 문턱에 들어섰건만 옷깃을 파고드는 찬바람이 매섭게 느껴진다. 그래도 기분 좋았다. 칼날바람이 산들바람처럼 기분 좋게 느껴졌다. 견장은…… 언제나처럼 조용했다. 그리고 보았다. 견장 앞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는 조련사들을. 방삼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들은 똥개에 불과한 것들을 친자식처럼 아끼고 있다. 이것이 진정한 조련사의 길…… ‘그래. 무인에게 무인의 길이 있다면, 내가 갈 길은…… 이제야 외각주의 말뜻을 알겠어. 개 한 마리가 죽을 때마다 친자식이 죽는 것 같은 아픔이 느껴져야 한다고 했지. 외각주…… 당신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나에게 좋은 길을 열어주었소. 기꺼이…… 이 길을 가리다. 이 길은 피가 난무하는 혈로(血路)가 아니라 사랑을 주는 마음의 길이니까. 내가 이 길을 갈 자격이 있을지…… 고맙소. 외각주.’ 방삼은 칼바람을 맞으며 조련사들이 잠자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쫦 쫦 쫦 ‘진신서(盡信書)면 칙불여무서(則不如無書)’라는 말이 있다. 서경(書經)의 내용을 그대로 다 믿는다면 서경이 없느니만 못하다는 말로, 책이란 책을 쓰는 사람의 주관이나 과장이 섞여 있기 때문에 냉철히 판단해서 읽어야 한다는 말이다. 장상부는 육합검진을 변형시키기로 작정했다. 봉아와 소화는 무공을 알지만 다른 사람은 모른다. 여섯 명이 검진 하나를 형성하는 데 셋은 무공을 알고, 셋은 모르고 있으니. 무공을 익히는 데는 대체로 여섯 단계로 구분한다. 초심자(初心者)가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기본공(基本功)이다. 다음은 투로(套路)을 익히며, 그 다음으로는 내공(內功)의 틀을 잡는다. 투로와 내공을 꾸준히 익히면서 무기술(武器術)을 배우고, 다섯 번째로 산타(散打), 실전비무(實戰比武)를 접하게 된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에서 익힌 투로와 내공을 상승경지까지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인체의 비밀을 알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침구술(鍼灸術)을 익히는 과정 또한 피할 수 없다. 그럼 무인이 명호(名號)를 얻게 되는 것은 어느 과정에서일까? 사문(師門)이 뛰어난 사람은 네 번째 무기술을 익히면서 작호(綽號)를 얻기도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다섯 번째 산타를 치르면서 얻게 된다. 작호를 얻었다고 끝난 것도 아니다. 소수의 인원으로`─`육합검진처럼 여섯 명이`─`사대 패강에게 서슴없이 검을 들이댈 정도라면 무림에 명성이 자자할 정도는 되어야 한다. 침구학까지 달통해서 투로와 내공을 상승경지까지 이끌어놓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난주일검 자신도 부적합한 인물이다. 완전한 통비공을 얻었다지만 수련기간이 턱없이 부족해서 의식이 완전히 집중되어 입정(入靜)상태에 들어갈 수가 없다. 진기(眞氣)를 최대한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래서야 어디 싸우겠는가. 하물며 다른 사람들은…… 투로만 해도 그렇다. 일일(一日) 백련(百練)하여 일수(一手) 만련(萬練)을 해야 투로가 살아나는 법이다. 침식(寢食)조차 잊고 부단히 백일연공(百日練功)을 해야 일식(一式)이 살아난다. 십이식을 익힌다고 생각해 보자. 무려 사 년이 필요하다. 수련이 높아갈수록 초식을 이해하는 시간도 빨라지지만 각 초식마다의 연관성을 수련해야 하기 때문에 대체로 기간에는 변동이 없다. 지금 백문장에 그만한 시간이 있는가? 사대 패강…… 특히 철응방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판에. 구십구(九十九) 계단 오르내리기 십(十) 회(回). 덕진, 충소, 목지형은 그것만으로도 숨이 턱에 차 헉헉거린다. 그러나 그 중에도 우열은 있다. 충소가 가장 덜 피로해 보인다. 셋 중 가장 떨어지는 사람은 목지형이다. 목지형은 얼굴까지 하얗게 변한 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 분명 속이 매슥거리고 입에 단물이 고여 있을 게다. ‘목지형은 곤란한데……’ 갈천상은 왜 그에게 육(六) 자(字)가 새겨진 무복을 입혔을까. 목지형의 진가는 돌멩이 던지기에서 나타났다. 덕진과 충소는 십여 장 안팎에서 머물렀는데 목지형은 십여 장에서 절반 정도는 더 나갔다. 어른 주먹만한 돌멩이로, 장상부 자신이 직접 고른 돌멩이이니만큼 무게를 의심할 수는 없다. ‘팔 힘이 강하다? 낭아추(狼牙鎚)가 어울리겠군.’ 대나무숲을 빠져 나오기. 대나무가 빽빽히 밀집되어 있는 숲을 빠져 나오기 위해서는 보통 몸이 민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장상부는 반각(半刻)을 예상했다. 반각 정도에만 빠져 나와도 훌륭하다. 무공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걷다시피 해야 하고, 그러면…… 반각에서 일다경(一茶頃) 정도는 추가해야 한다. 그런데 뜻밖의 결과가 벌어졌다. 반각을 조금 앞둔 시간, 대숲이 벌어지며 충소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공을 익히지는 않았지만 선천적으로, 아니면 하인으로 일하는 동안 몸이 민첩해진 모양이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하지만 반각 전에 빠져 나올 줄이야…… ‘충소…… 너는 금이었어. 움직이는 반경이 가장 넓고 쇠로 만든 방패처럼 철저하게 공격을 차단해야 해. 민첩한 몸, 강한 힘, 넓은 방어막…… 괴인창(拐刃槍)이 좋겠군. 그래, 괴인창이야.’ 무장(武將)들이 전장(戰場)에서나 쓰는 병기인 괴인창. 장상부는 충소에게 가장 적합한 병기로 괴인창 외에 다른 병기가 생각나지 않았다. 생각할 필요도 없었고. 덕진은 좀처럼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는 평범한 하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오래 달리면 숨을 헐떡거렸고, 산비탈을 오를 때면 발에 납을 달아놓은 듯 쩔쩔맸다. 징검다리를 건너게도 해봤고, 모래밭을 달리게도 해봤지만 그에게는 합당한 병기가 생각나지 않았다. ‘외각주가 덕진을 생각했을 때는 이유가 있었을 게다. 포영매니까. 무얼까? 외각주는 무얼 생각하고 덕진을……!’ 장상부는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육합검진. 하하! 덕진은 성격상 화(火)의 위치에 놓여져야 한다. 불길처럼 활활 타오르면서, 현란한…… 그런 병기 쪽으로 먼저 생각해 보면 확인하는 방법이 좀더 쉬웠을 텐데. 이것저것 생각하던 장상부는 호수구(護手鉤)를 떠올렸다. 검과 도와 겸(鎌)의 장점을 고루 구비해서 만든 호수구라면 불처럼 현란하게 피어오를 수 있으리라. 양 손에 하나씩, 한 쌍의 호수구가 진정으로 현란하게 불을 뿜어낸다면 막강하기도 이를 데 없을 테고. 충소는 괴인창을 들었다. 그러나 충소가 한 팔로 괴인창을 잡고 양 손을 쭉 폈을 때와 덕진이 호수구 한 쌍을 잡고 양 손을 쭉 폈을 때의 길이를 비교하면 엇비슷하다. 괴인창은 하나지만 호수구는 두 개이니까. ‘호수구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덕진, 허리를 뒤로 눕혀봐. 양 발을 고정시키고. 그렇지. 그런 식으로 뒤로 눕힐 수 있을 때까지…… 이, 이……!” 장상부는 놀랐다. 덕진의 허리는 문어처럼 야들야들해서 머리가 뒷무릎에 닿을 정도까지 굽혀지니…… 됐다. 이 정도면 충분히 호수구를 배울 수 있다. 기본공…… 이들은 무공을 익히지는 않았지만 충실히 기본공을 연마한 사람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물론 아니다. 똑같을 수는 없다. 기본공을 익힌 사람은 신체의 모든 부분이 발달하지만 이들은 극히 일부분만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 장상부는 지옥에서 연화(蓮花)를 본 것처럼 기쁘기 이를 데 없었다. “허리가 약한지 잘 휘어집니다요. 이런 짓을 하면 사람이 놀라기도 하고 감탄하기도 해서 시간 날 때마다 연습했는데…… 더 약해진 것 같습니다.” 덕진이 허리를 편 다음 송구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웃을 수도 없었다. 허리의 유연성이 탁월한 것을 약한 것으로 알고 있는 무지…… 하지만 됐다. 지금은 무리(武理)를 설명할 시간이 없다. 그가 호수구를 익히기에 적합한 체질이란 것만 확인했으면 됐다. 다음은 봉아와 소화 차례다. 그녀들은 비록 무공을 익혔지만 어디 내세울 만한 무공은 아니다. 실제로 지금 당장 덕진이나 목지형이 병기의 이점을 살려 싸운다면 거의 평수를 이루거나 조금 더 나은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불변의 위치를 차지할 소화는 두말할 것도 없이 비검(飛劍)이다. 만약에 대비해서 선표(線)까지 익히게 할 참이다. 봉아는 무슨 병기가 좋을까? 목(木)의 위치…… 발랄한 성격…… 새생명이 탄생할 때의 상쾌함을 느끼는 병기라면…… 장상부는 삼절곤(三節棍)을 떠올렸다. 어른 팔 길이만한 목봉 세 개를 이어놓는다면 포근하면서도 아늑하게 적을 맞이하리라. 하하! 문득…… 장상부는 치를 떨었다. 갈천상은 자신이 육합검진을 변형시키리라 생각했단 말인가. 그래서 그에 적합한 사람들을 배치해 주었고? 자신이 무슨 병기를 선택할 것이란 것도 꿰뚫어봤단 말이지? 소름이 끼쳤다. ‘포영매는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다.’라고까지 소문날 정도로`─`갈천상을 직접 보기 전까지는 장상부도 그렇게 생각했지만`─`뛰어난 사람이지만…… 이건 너무하다. ‘삼전주…… 그 계집 말이 맞을지도…… 어쩌면 이전주를 비롯해 실전 모두가 무공을 완성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어. 갈천상이란 사람…… 끝없이 튀어나오는 무공…… 자신들이 익힌 무공이 최고가 아니라고 판명되면…… 두려운 게지. 지금까지 쌓아왔던 모든 공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리니까. 두렵지 않을 리 없지. 하하! 그래도 그 사람들은 조금 나은 셈이군. 나는 시작도 하기 전에 눌리고 들어가니까. 하지만 무리(武理)는 하나로 통하는 것…… 얼마나 깊이 수련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라지겠지. 앞으로 육 개월…… 그 동안 죽지 않는다면, 갈천상…… 외각주…… 통비공이든 육합검진이든 그때 가서 가장 자신있는 무공으로 그대와 겨뤄보겠소. 하하! 나도 무인…… 최고라는 소리는 나도 듣고 싶소. 그래서 통비공을 지켜왔고.’ 장상부는 푸른 하늘에 눈길을 주었다. 第十三章 유소사(遺所思`:`그리운 사람에게 바치다) 쫦 1 쫦 여섯 살이 채 못 되었을 때부터 일음마봉 무기는 도관(道觀)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북릉(北稜) 쪽에 있는 도관도 찾았고, 싸리나무숲 속에 있는 도관도 잘 다녔지만 일음마봉이 가장 즐겨찾던 도관은 시커먼 암봉(岩峰)이 서너 개 줄지어 있는, 남서(南西) 천음령(天陰嶺) 쪽 도관이었다. 도관에 이르면 산 아래에 넓은 호수가 보이는데, 실은 호수가 아니라 가뭄을 대비해서 만들어놓은 치리현(淄吏縣) 저수지였다. 어떤 때는 푸른빛으로, 어떤 때는 검은빛으로 하늘과 대지와 조화를 이룬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건곤방은 태백산 중턱에 위치해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세상이 눈 아래로 굽어보였다. 세상을 굽어보는 위치. 일음마봉은 절대로 내려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언제나 남의 위에 군림하며 세상을 오시(傲視)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남의 위에 군림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았다. 오형제 중 삼남(三男)이란 것도 큰 장애였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 했거늘 건곤방에서조차 입지를 굳히지 못하는 처지에 세상을 오시하기란 요원한 일이다. 특히 형들의 자질이 그보다 뛰어날 경우 절망은 더욱 커진다. 대형(大兄)을 무릎 꿇리기는 쉬웠다. 대형은 아버지로부터 뼈대를 물려받았지만 아쉽게도 피는 어머니 쪽이 더 강했다. 낭만을 찾는 사람은 무림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일음마봉은 형과 함께 무리(武理)를 토론하며 태상노군(太上老君)과 원시천존(元始天尊)이 모셔져 있는 북릉 도관까지 걸었다. 거기서 형은 일생의 반려자를 맞았다. 형수는 절색(絶色)이었다. 화사한 면보다는 청초한 모습이 돋보이고, 재치있으면서도 사근사근한 말솜씨는 평생 봉법만 수련해 온 젊은 협객(俠客)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묘하게도 형수는 체형(體形)이나 얼굴 모습이 어머니와 닮았다. 형은 급속히 흐트러졌다. 이십육초 건곤봉법을 완전히 연성할 때까지 일체 외출을 금한다는 아버지의 엄명도 형을 옭아매지는 못했다. 형은 밤만 되면 월장(越牆)하여 북릉 도관을 찾았고, 형수와 밀애(密愛)를 즐겼다. 대로(大怒)한 아버지가 건곤방 주위에 물샐틈없는 경계를 세웠지만 형수는 천하무적(天下無敵) 고수라도 되는 양 유유히 경계망을 뚫고 그들만의 둥지로 찾아들었다. 그럴 때마다 형은 말했다. “고맙다. 하지만 조심해라. 나야 이미 눈 밖에 났으니 그렇다 해도 너까지 눈 밖에 나면 안 되잖니.” 그럴 때마다 일음마봉은 말했다. “형이 좋아하는 여자잖아. 난 형이 이처럼 활기 찬 모습을 본 적이 없어. 눈치껏 알아서 하고 있으니까 걱정 마.” 형의 종말은 빨리 다가왔다. 더 이상 뜸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저…… 이번 달…… 걸렀어요.” “……?” “그게…… 나오지 않았단 말예욧!” “무슨 소리야?” “아이……! 달마다 나오는 게 안 나왔다니까요.” “그럼!” “저 어떡해요? 혼인도 하지 않은 처녀가……” “걱정하지 마. 그건 걱정하지 마.” 형은 뛸 듯이 기뻐했다. 그리고 그날 밤, 어머니의 눈물 젖은 눈을 뒤로하고 태백산을 떠나갔다. 화영(花穎)은 오래 살지 않을 것이다. 형이 아무리 정성을 다해도 기방(妓房)에서 자유분방하게 살던 여인은 한곳에 정착하기 힘들다. 아이를 가졌다는 거짓말이 들통날 즈음, 일음마봉이 준 금(金)과 어머니가 형에게 준 패물까지 모두 챙긴 다음 흔적없이 사라지는 것이 그녀들의 습성이다. 그래도 형은 돌아오지 못한다. 무슨 낯으로 돌아오랴.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만한 형도 되지 못한다. 둘째 형은 조금 곤란했다. 둘째 형은 말 그대로 무귀(武鬼)였다. 눈을 뜨면서부터 봉을 휘두르기 시작하여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한시도 쉬지 않았다. 그래서 여름이나 겨울이나 둘째 형의 근처에만 가면 진한 땀내음이 코를 찔렀다. 둘째 형은 무취미(無趣味)가 취미다. 술도, 여자도, 도박도 모두 관심 밖이다. 오로지 관심있는 것이라고는 무공, 무공, 무공…… 일음마봉도 무공에 집착하는 바가 남달랐지만 둘째 형만은 못했다. 큰형은 오성(悟性) 면에서, 둘째 형은 노력(勞力) 면에서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산이었다. 사람은 가장 자신있는 부분에 가장 큰 결함이 있다. 둘째 형의 가장 큰 장점은 무공이었지만 역시 무공에 가장 큰 결함이 있다. 일음마봉은 거기에 착안했다. 장장 일 년 동안을 준비했다. 모사(模寫)의 대가(大家)인 겸선(兼善)이지만 바위에 글씨를 새겨넣는 작업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주문이 까다로워 글씨는 구경한 적도 없는 과두문(文)이어야 한다니…… 과두문이 어떻게 생겼는지 누가 안단 말인가. 태곳적에 존재했었다는 말이야 많이 들었지만 천하 석학(碩學)이 아닌 다음에야 구경이나 했겠는가. 겸선은 백 년을 들여다봐도 한 가닥 실마리조차 풀리지 않는 문양(紋樣)을 새겨놓았다. 전혀 알아볼 수 없다면 아무 가치가 없다. 그래서 그림을 그려놓았다. 선이 굵고, 그림 자체로 보면 단순하기 짝이 없는 그림이라 심오한 면은 찾아볼 수 없다. 누가 봐도 어린아이 장난으로 치부하고 스쳐 지나가 버릴 그런 그림. 올챙이가 기어가는 듯한 글씨와 그림에 전혀 소질이 없는 듯한 자가 그린 듯한 그림을 그리는 데 일 년이나 소비했다면 믿겠는가? 그러나 그것도 빨리 서둘러서 끝냈기에 그만큼밖에 걸리지 않았다. 겸선의 말을 따랐다면…… 삼사 년으로도 부족했으리라. 억겁의 세월을 묵묵히 참아온 듯한 맛을 내려면 삼사 년 정도는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일음마봉은 마음이 급했다. 하루가 다르게 쭉쭉 뻗어나가는 형의 기세가 두려웠다. 성심의(聖心醫)도 만났다. 사는 곳이라고는 파리 떼가 극성을 부리고 퀴퀴한 냄새로 가득 차 역겨웠지만`─`사람 몰골도 꼴사납게 생겨 마주앉아 있기가 몹시 고역스러웠다`─`악처(惡妻), 악부(惡夫)들에게 무색무취(無色無臭)의 독약을 제공해 주기로 유명한 놈이니 만나볼 가치는 있었다. 놈은 참으로 마음에 쏙 드는 제란병(祭蘭甁) 하나를 내밀었다. ─`이놈은 정말로 무색무취한 놈입죠. 손으로 만져도 보통 물을 만지는 것처럼 축축한 느낌밖에 들지 않굽쇼. 아! 그렇다고 만지지는 마십쇼. 이놈이 피부에 닿으면…… 흐흐흐! 소인더러 책임지라는 말씀은 아예 하실 생각일랑 마시고…… 흐흐! 해약(解藥)이 없으니 어쩔 도리도 없지만 말입죠. 천음수(天陰水). 병 속에 든 물은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보통 물에 불과하다. 문제는 그 속에 살고 있는 벌레다. 육안(肉眼)으로 식별할 수 없을 만큼 작은 놈이니 겉으로 보기에는 무색무취하다고 할 수밖에. 성심의의 말을 빌리자면 남만(南蠻)에서 죽음의 질병으로 알려진 흑갈병(黑渴病)을 일으킨다는 놈이다.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 단지 흑갈병이라는 병명(病名)처럼 끝없이 물을 찾는 희귀한 질병에 걸릴 뿐이다. 폭양이 내리쬐는 사막 한가운데 서 있는 사람처럼 마셔도 마셔도 풀리지 않는 갈증에 허덕일 뿐이다. 피골(皮骨)이 상접(相接)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갈증에 허덕이는 사람이 무공에 전념하기를 어찌 바라겠는가. 병이나 고칠 수 있으면 다행이지. 일음마봉은 둘째 형과 함께 싸리나무가 가득한 곳을 걸었다. 풍광은 아름답지만 건곤방이 들어선 이후, 도인(道人)들이 쫓겨나 거미줄만 가득한 도관이 두 형제를 맞았다. “한심한 놈!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무공에 진척이 없는 거야!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있거든 땀 한 방울이라도 더 흘려!” 둘째 형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둘째 형은 이성(理性)에 대한 고민을 제대로 상담해 줄 위인이 못 된다. 여인은 욕정을 해소할 대상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연심(戀心)이라 부르는 부분을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더군다나 대형이 여자 때문에 그 소란을 피웠는데 네가 또 여자에게 정신팔겠다는 게냐! 도대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나도…… 나도 그건 알지만……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일음마봉은 몹시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도관 입구에 놓여진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둘째 형은 동생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다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곁에 앉았다. 아마도 설득을 하면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듯했다. “응?” 바위에 주저앉던 형이 다시 일어섰다. 엉덩이가 축축하게 젖어드니 일어설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게 왜 젖었…… 바위가 땀을 흘리잖아?” 형은 신기한 듯 바위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었다. “형, 나도 괴로워 죽겠어. 이런 걸 누구에게 말하겠어. 형이니까 털어놓는……” 일음마봉은 자신의 말이 덧없이 허공만 때린다는 것을 알았다. 형은 이미 그에게 정신을 주지 않았다. 형의 정신은 오로지 바위에만 집중되었다. 스쳐 지나치기 십상인 바위…… 거기에 평범하지 않은 과두문과 누가 봐도 무공초식이라고 생각되는 사람 모습이 그려져 있으니 무공광인 형이 정신을 빼앗기는 것은 당연하다. 형은 세월에 퇴색되어 뚜렷이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이 못내 안타까운 듯 손바닥으로 닦아내고 또 닦아냈다. 사대 패강의 무공은 각기 장단점이 있다. 특히 적대관계에 있는 문파들이니만치 상대방의 무공에 대해서 호기심이 없을 수 없다. 바위에 새겨진 무공은 기이하게도 천력문의 무공과 흡사했다. 사람의 모습도 거인 형상이다. 그림만 보고 거인인지 소인인지 알기는 어렵지만 언뜻 보기에 그런 느낌을 준다. 초식도 비슷해 보인다. 일장(一掌)에 산악을 무너트릴 것 같은 기세가 물씬 풍겨나온다. 이 부분은 일음마봉의 역작이다. 무공에 어느 정도 자신이 붙은 다음 절강성을 두루 살펴본 적이 있다. 백문장주에게 꽁무니를 만 적도 있지만, 보고 배운 것에 비하면 하잘것없는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슴에 멍울이 되어 남은 상처이긴 하지만. 천력문의 무공도 견식했다. 직접 무공을 겨뤄보지는 않았지만 천력문 고수가 비무하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덕분에 겉모양새는 비슷하게 그려놓을 수 있다. 형은 동생의 고민을 상담해 주러 왔다가 네 시진…… 거의 한 나절을 바위와 씨름했다. “어떤 놈이 이런 장난을…… 기가 막힌 솜씨군.” 형이 바위에 그려진 그림이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실소를 터트렸을 때는 이미 해가 거웃거웃 넘어가는 황혼 녘이었다. 성심의…… 놈은 말을 하지 않은 게 있다. 엄청난 고통. 옆에서 보고 있자니 너무 딱해 차라리 죽여버렸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생길 정도로 형은 지독한 고통을 받았다. “개미 좀 잡아줘. 이놈들이 내 몸을 갉아먹고 있어.” 피골이 상접한 몸으로, 붉게 충혈된 눈으로 사지를 뒤틀며 고통에 울부짖을 때는 정말로 죽여버리고 싶었다. 그것이 형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더는 길일 것 같기에. “학…… 학…… 무, 물 좀……” 형이 고통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을 때는 건곤방 무인들 모두가 형의 죽음을 예감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온몸을 쥐어뜯어 온몸이 피딱지로 범벅이 되었다. 할 수 없이…… 형을 옭아맸다. 굵은 철삭(鐵索)으로. “넌…… 빚졌어. 목숨 빚. 왜…… 이런 짓을……” 농아(聾啞)처럼 말조차 더듬거리던 형이 어느 날 제대로 된 말을 했다. “이유…… 를 들어봤자 소용없을 테고…… 말하지도 않겠지. 하나 분명히 네 짓이야. 그 바위…… 그날 저녁부터 몸이 근질…… 거렸어. 목숨 빚…… 어떻게 갚을래.” “형, 무, 무슨 소리를……” “내, 내 꿈은…… 절강성을 일통하고…… 건곤방을…… 중원 제일의 봉가(棒家)로 만드는 것…… 구파일방의 무공이 뛰어나지만…… 건곤방의 봉술도 절학…… 증명…… 하고 싶…… 네가…… 해.” 형의 마지막 말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쫦 쫦 쫦 “철응방의 동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건곤십삼봉(乾坤十三棒)의 수뇌인 천목봉인(天目棒人) 왕국용(王菊蓉)이 등 뒤에서 말을 건네왔다. “비조탈명과 사귀의 복수를 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잠자코 넘어갈 수 없겠죠. 죽은 사람들이 무명소졸(無名小卒)도 아닌 바에야.” “철응방이 그까짓 일 때문에 움직인단 말입니까?” 일음마봉은 놀라서 황급히 몸을 돌리며 물었다. 비조탈명과 사귀 중 삼귀의 죽음은 그까짓 일로 치부할 수 없는 중대사안이다. 하나 아무도 움직이지 못한다. 철응방이 백문장을 치기 위해 문도를 동원하면 곁에 있는 천력문이나 비살문 고수들이 뒤통수를 때린다. 북에 위치한 건곤방이 움직이면 동의 비살문과 서의 천력문이, 비살문이 움직이면 건곤방과 철응방이…… 모두 동서남북(東西南北) 네 귀퉁이를 받치고 서서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다. 이게 현재 절강성의 무림정세다. 전체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비조탈명이나 사귀같이 문도 개개인의 죽음은 그까짓 일로 치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철응방이 움직인다? 놀라운 소식이지 않은가. “……” 천목봉인의 입가에 기분 나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제길! 이놈의 늙은이를……’ 그는 시험하고 있다. 늘 그렇다. 하고 싶은 말은 뱃속 깊숙이 감춰두고, 장난삼아 툭툭 던진 말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살펴보면서 쾌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 그를 나무랄 수도 없다. 그는 사실만 말한다. 먼저 추측을 하고 비웃음을 당한 쪽은 이쪽이다. 그러나 천목봉인 왕국용의 말투는 꼭 비웃음을 살 만한 소리를 이끌어내니. 또 하나, 천목봉인의 그런 장난을 받으며 일음마봉은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무림정세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그런 장난을 받지 않는 길은 하루빨리 대기(大器)가 되는 길뿐이다. 비살문주가 소문주에게 십대고수 중 다섯 명을 붙여주었듯이 건곤십삼봉은 일음마봉의 곁을 떠나지 않는 인물들이다. 대기가 되었다고 판단했을 때, 대기임을 몸소 증명해 보였을 때, 이들은 고개를 수그릴 게다. “비조탈명과 사귀는 철응방주의 호법이었죠. 대체로……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사람을 오랫동안 곁에 두고 있으면 친형제같이 느껴지는 법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죽었어요. 철응방주의 분노가 예상됩니다.” 일음마봉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럼 진짜 철응방이 움직인단 말입니까?’라는 말이 입에서 튀어나올 뻔했다. 그렇게 당하고도…… “허허허! 생각할수록 갈천상이란 자…… 뛰어납니다. 광량도 뛰어난 인물이지만…… 갈천상이 봉황(鳳凰)이라면 광량은 닭에 불과해요. 차이가 많이 납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 말이 또 튀어나올 뻔했다. 은근과 끈기로 참고 버텨야 한다.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무슨 말을 해주는지 듣고만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게 이토록 힘들다니. “어쩌면…… 비조탈명과 사귀는 우리 대신 죽었는지도 모르죠. 갈천상은 사대 패강 중 하나를 먹잇감으로 노렸고…… 재수없게 철응방이 걸려들었죠. 허허! 비살문이나 우리는 모두 소문주가 참석했으니 건드리면 이유 불문하고 싸움이 벌어질 게고, 천력문주는 우직한 자로 수하의 복수는 꼭 하고야 말죠. 철응방주는…… 글쎄요. 수하의 복수를 하자고 평생 동안 쌓아온 무업(武業)을 걸고 도박을 할까요? 안 할 겝니다. 갈천상이라는 자는 모든 것을 계산한 다음 일을 벌였단 말이 되지요. 허허허! 비조탈명은 문주를 잘못 만났어요.” 일음마봉은 고개를 돌려 산 아래 펼쳐진 광활한 대지를 바라보았다. 천목봉인과 눈을 마주치고 있다가는 부지불식간에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조금 전에 철응방이 움직인다고 했지 않는가. 또 지금은 철응방주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상반된 두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 안에 내재된 음계(陰計)를 짐작해 낼 수 없었다. 일음마봉으로서는 그런 방면으로는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중원을 눈 아래로 굽어보려면 사소한 일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 생각을 깊이 하는 사람은 모래알처럼 많고, 그들을 수하로 거느리면 된다. 자신은 결단만 내리면 된다. 책사들이 내놓은 수많은 계책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계책을 골라 실행에 옮기면 된다. 천목봉인의 시건방진 태도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절대자의 자리에 앉는 순간 모든 게 달라지리라. “백문장은 사대 패강 중 어느 한 곳도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겁니다. 어쩌면…… 비조탈명과 손속을 겨룬 자들이 백문장의 모든 것이었을 수도……” 일음마봉은 눈을 부릅떴다. 허장성세(虛張聲勢)에 놀라 지레 꼬리를 사렸단 말인가? 아니다. 그때, 천목봉인도 물러서자고 말했다. 그럼 천목봉인도 오판을 했단 말인가? 천목봉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당시 백문장에 모였던 사대 패강 고수들이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면 백문장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란 말이 되는데…… “철응방주는 목숨값을 요구할 게고, 갈천상이란 자는 대가를 지불할 겁니다. 일이 그렇게 돌아가는 게지요. 천력문이나 비살문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공성(空城)이 되어버린 철응방을 치지 않을 리 없고, 그런 점을 잘 알고 있는 철응방주는 전력을 동원할 리가 없고…… 비조탈명과 사귀가 당했다면 고수 한두 명으로는 어림도 없다고 생각할 테고…… 백문장은 옛날 오대 패강의 명성을 이어갈 겝니다. 약간의 대가를 지불하고.” 일음마봉은 으스러져라 주먹을 움켜쥐었다. 절강성의 패주…… 이리도 힘들단 말인가. 결국 다른 문파의 합공을 한자리에서 막아낼 거력이 있어야만 절강성을 움켜쥘 수 있단 말인가. 그런 힘을 어디서 얻는단 말인가. 어디서…… 형까지 제쳐 가면서 아버지의 신임을 얻었는데, 산 넘어 산이라니…… 쥐새끼 같은 놈들…… 사대 패강이 움직일 수 없다는 약점을 움켜쥐고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다니. 일음마봉은 한 번 본 갈천상의 얼굴이 떠올랐다. 조자경의 얼굴도 떠올랐다. 백문장에서는 무시했지만 사실 그의 마음 속에서는 조자경에 대한 소유욕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연적(戀敵)은 오직 한 명, 비살문 소문주. 하나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연배가 자신과 비슷한 놈이 백문장에서 그녀 곁에 머물러 있다. 간사스런 지략을 펼치면서. ‘죽여야 할 놈……’ 일음마봉의 머리가 활발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런 경우…… 강적이 눈 앞에 있을 경우, 유독 활발하게 돌아가는 머리이지 않은가. 그의 머리 속에서는 태백산에 있는 도관들과 같이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도관이 떠올랐다. 그곳은 금화부에 있다. 백문장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리고 사대 패강의 중심부이기도 하다. ‘준비를 해야겠지? 후후후!’ 일음마봉은 하얗게 웃었다. 쫦 2 쫦 삼비박룡(三臂博龍) 음선풍(陰鮮風)이 백문장 정문을 들어서면서 제일 먼저 맡은 냄새는 비린내였다. 소들을 키우는 외양간이나 말들이 있는 마구간에서나 맡을 수 있는 악취에 자연히 미간이 찡그려졌다. “개를 수백 마리나 들여왔다던데 개냄새 같습니다.” 오른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반혼조수(返魂爪手) 검성도(瞼誠度)가 불편한 심기를 눈치채고 말을 건네왔다. 과연 검성도의 말대로 백문장은 개 짖는 소리로 가득했다. 컹컹컹! 우르릉……! 컹컹……! 무인들이 내지르는 고함 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고 들리는 소리라고는 온통 개 짖는 소리뿐이었다. “왕복(王馥), 마달(馬達)! 알아봐!” 음선풍은 짧게 지시했다. 백문장에서 왜 개를 수백 마리나 들여왔는가. 음선풍이 철응방주로부터 지시받은, 알아봐야 될 사항 세 가지 중 하나였다. 쉬익! 음선풍은 우아하게 날갯짓을 하는 한 마리 학처럼 옷자락조차 펄럭이지 않고 유유하게 내려서는 인형을 보면서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왕복과 마달이 하마(下馬)도 하기 전이었다. 음선풍이 명령을 내림과 거의 동시에 꾀죄죄하고 볼품없어 보이는 자가 몰골에 걸맞게 놀라운 신법으로 앞을 가로막아 선 것이다. “영접이 늦었소이다. 이 몸, 백문장에서 팔전주라는 과분한 직책을 맡고 있는 마임호라고 합니다.” 마임호는 정중하게 포권지례를 취했다. 맞지 않는다. 마임호의 몰골이라면 실실거리면서 몸을 배배 꼬아야 어울린다. “팔전주라면 외각인가 뭔가 하는 곳이로군. 무명(武名)은 어찌 되는가?” 음선풍은 자연스럽게 경시하는 마음이 생겼다. 하대(下待)도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비루먹은 망아지처럼 형편없이 보이는 자가 뛰어난 신법을 지녔다는 사실만은 잊지 않았다. “무명이랄 것도 없습죠. 무림에는 초출(初出)이나 마찬가지니.” “늦은 나이에 출도했군.” 음선풍은 비웃음을 던졌다. 그러나 마임호는 멸시에 가까운 말을 듣고도 표정 한 올 바뀌지 않았다. “본의 아니게…… 한데 어디서 오신 뉘시온지?” ‘무시할 자가 아니다.’ 음선풍은 경솔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자신과 손속을 겨루어도 하등 밀리지 않을 비조탈명이 백문장에서 목숨을 잃지 않았는가. 또 그는 자신이 백문장에서 유명을 달리하면 개죽음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철응방에서 온 삼비박룡이네.” “아! 조공(爪功)이 워낙 현란하여 팔이 셋 있는 것 같다는 삼비박룡……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음선풍은 다시 한 번 포권지례를 취하는 마임호를 보면서 씁쓸한 고소를 지었다. 절강성에서는 내로라 하는 무인이건만 겨우 사자(使者) 노릇이나 하다니. 본인 스스로에게 내뱉는 고소였다. 반혼조수 검성도가 품에서 배첩(拜帖)을 꺼내 디미는 모습을 볼 때는 울화마저 치밀었다. ‘이게 무슨 꼴인가. 비조탈명이 죽었는데, 배첩까지 디밀면서 정중하게 방문을 하다니. 그놈 탓이야.’ 음선풍은 항시 유생(儒生) 차림을 하고 다니는 책사 간화(干和)를 떠올렸다. 자신은 극력 강공(强攻)을 주장했지만 철응방주는 간화의 조언을 받아들여 온공(溫功)을 취하기로 했다. 그러면 사자도 간화가 와야 하지 않는가. 일을 벌인 놈은 뒤로 나자빠지고 꼭 전면에 나서야 하는 사람은 무인들이니.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장문인은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난 다음에야 건너는 성격이니. “하마를 하시지요. 말은 잘 돌봐 드릴 겁니다. 저희 백문장에는 몇 가지 장규(莊規)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말을 탄 채로 정문을 넘어서면 적으로 간주한다는 것이죠. 아직 모든 것이 정비되지 않은 상태인지라……” 음선풍은 말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울화를 참으면서. ‘용담호혈(龍潭虎穴)……’ 음선풍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방주에게 밀명받은 세 가지 중 하나, 춘귀가 말한 대로 백문장 요소요소에 기관이 설치되어 있는지 파악해 본 결과 사실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백문장에는 전에도 와본 적이 있다. 백문장주의 장례식에는 철응방주와 함께 참석하기도 했다. 하나 당시에는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했다. 오히려 막대한 재화(財貨)를 뿌려서 지은 장원이 고작 이 정도인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건물과 건물의 조화도 어설프고, 사람이 활동하기에도 불편해 보였으며, 무엇보다 풍수(風水)에도 맞지 않는다. 이제 와서 기관에 초점을 맞춰 살펴보니 그게 아니다. 보보(步步)마다 죽음이요, 굽이마다 살기(殺氣)로 가득 차 있다. 음선풍과 그가 데려온 수하 여섯 명은 한 걸음씩 걸어 들어갈 때마다 그만큼 헤어나기 힘든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격이 된다. ‘비조탈명, 하귀, 추귀, 동귀…… 당할 만해.’ 음선풍은 비조탈명의 죽음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철응방에서는 그래도 기관에 대해 가장 정통하다는 자신이지 않은가. 만약 자신보고 이곳을 빠져 나가라면…… 제일 먼저 하늘을 올려다봤으리라.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보는 하늘이 어떤 색인가 살펴보기 위해서. 기관을 모르는 비조탈명으로서는 속수무책이었으리라. 더욱 무서운 점은 기관이 아니다. 비조탈명은 기관에 죽은 게 아니지 않은가. 사람들. 백문장 사람들이 가장 무섭다. 음선풍은 그 중에 문지기처럼 대문에서 어슬렁거리는 팔전주 한 명을 만나보았을 뿐이지만, 기관을 느끼고 나니 기가 위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개에 대한 진상도 어렵지 않게 파악했다. 왕복과 마달을 시켜 파악해 볼 필요도 없었다. 그들이 걷는 길가에, 담 모퉁이에, 전각 주변에…… 곳곳에 개들이 묶여 있었다. 정확히 다섯 마리씩. 음선풍은 개들을 보면서 마치 굶주린 늑대들 틈을 걸어가는 착각에 빠졌다. 누구라도 광기(狂氣)로 번들거리는 개들의 눈을 보고 있자면 그런 착각에 빠지게 되리라. 명견(名犬)도 아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잡종개들이다. 크기도 각기 다르고, 종자(種子)도 가지각색이다. 그런데 어떻게 한결같이 갈기를 곧추세우고 이빨을 드러낸단 말인가. 아무리 사나운 맹수라 할지라도 한낱 미물에 불과하다. 맹수 정도를 두려워할 무인은 세상천지에 아무도 없다. 하나…… 기관과 어우러진 맹수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동물은 생존본능이 탁월하지만 기관을 감지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맹목적이 될 수 있다. 실제가 어떤지는 직접 겪어봐야 알겠지만. ‘기관에 개…… 백문장 중심부에 들어가려면 절반의 희생이 필요하다. 방주의 선택이 옳았어.’ 음선풍은 힘이 빠졌다. 백문장에 찾아온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철응방이 절반의 희생을 무릅쓰고 백문장을 공격한다면 몰살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서운 사람들. 그들을 죽이는 데는 또 얼마의 희생이 필요할까. 하나 그들이 죽는 데는 변함이 없으리라. 그것으로 끝이다. 철응방은 더 이상 사대 패강으로 존속하지 못한다. 배고픈 늑대 무리 속에 상처 입은 토끼 한 마리가 오도 가도 못 하는 처지와 다를 바 없다. 방주의 전갈을 무시하더라도…… 제지할 방법이 없다. ‘빌어먹을! 백문장이…… 하잘것없던 백문장이……’ 무극전에 다가갈수록 음선풍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갔다. “하하핫! 하하하하핫!” 갈천상은 거침없이 웃어젖혔다. 무례하다. 당금 절강 무림에서 철응방주의 서신을 접하고 저리 무례하게 웃어젖히는 인간은 몇 사람 되지 않는다. 갈천상이 그 몇 사람 중 한 명이란 말인가. 갈천상은 음선풍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극전이 떠나가라 한바탕 웃었다. “철응방주께서 이 몸을 너무 귀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 음선풍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될밖에. 그는 서신에 무슨 글이 적혀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것이 철응방의 율법이다. 설혹 ‘이 서신을 가지고 가는 자를 죽여라’ 하는, 옛 고사에나 나오는 내용이 현실로 부활할지라도 당해야 하는 것이 철응방 문도다. 철응방에서 요구하는 것은 의문을 갖지 않는 철저한 충성심이니까. 새파란 애송이. 음선풍이 도검(刀劍) 속을 뛰어다닐 때, 갈천상이란 자는 분명히 어머니 젖이나 빨고 있었으리라. 애송이도 한참 뒤진 애송이다. 명색이 총관이라지만 허름한 마의에 머리를 귀신처럼 풀어헤치고 있어 더욱 보기 사나웠다. 하지만 음선풍은 그런 애송이, 그런 보기 사나운 사내에게 주눅이 들어버렸다. 음선풍이 보기에 갈천상이라는 사내는 무공을 익혔는지 익히지 않았는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전문적으로 내가무공만 익힌 사내라 할지라도 무공을 익혔다면 약간의 흔적이라도 노출되는 법인데 갈천상은 그런 흔적이 전혀 없었다. 방주의 밀명 세 가지 중 마지막 하나, 갈천상이 소문대로 포영매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자신있게 말할 수 없는 부분이 되어버렸다. 그는 행동해야 한다. 갈천상이 포영매라면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어야 하고, 포영매가 아니라면 일격에 숨통을 끊어놓아야 한다. 행동하지 못했다. 갈천상이 포영매인가 아닌가 판단하지 못한 점도 컸지만 그보다는 한 사내에게 위축되었기 때문에. 아마도 백문장을 지나오는 동안 느낀 기관의 공포가 뇌리를 떠나지 않은 모양이다. 음선풍은 그렇게 자위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무인으로서 상대를 앞에 두고 싸울 의욕조차 생기지 않는다는 것은 수치다. 음선풍은 진기를 끌어올려 양 손에 운집했다. 쳐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는 갈등에 휩싸였고, 그의 전신은 굵은 땀으로 촉촉이 젖어갔다. 검성도, 왕복, 마달 등 그가 데려온 수하 여섯 명은 크고 작은 싸움에서 손발을 맞춰온 자들. 그들은 음선풍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한눈에 파악했다. 그들은 사귀가 그랬던 것처럼 목숨을 버릴 각오를 했다. 진기를 끌어올리고 일장 싸움에 대비했다. 그들은 오히려 상태가 나은 편이다. 길을 오면서 음선풍으로부터 기관에 대한 설명을 누누이 들은 터라, 살아 돌아갈 생각은 버렸다. 백문장에 설치된 기관은 알아보지 못했지만, 음선풍이 긴장하고 있다는 말은 그가 했던 말들이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으니까. 긴장도 한결 덜했다. 갈천상에 대해서 주눅이 들지도 않았다. 그들은 생각을 해야 할 입장이 아니다. 싸우라면 싸우고, 죽으라면 죽으면 그만이다. 음선풍이 어떤 명을 내릴지 모르지만…… 음선풍의 행동으로 봐서는 힘든 싸움이 되리라. ‘그래 봤자 고작 한 명……’ 여섯 명 모두의 생각이었다. 어찌 보면 무공을 익힌 것 같고, 또 어찌 보면 무공을 익히지 않은 것 같은 사내 한 명 죽이는 것은 너무 간단해 보였다. 그 다음이 문제다. 비조탈명을 죽인 자들과 음선풍이 말해 주었던 가공할 기관을 어떻게 빠져 나가야 되는지. 하나 철응방주가 기필코 모든 사건을 주도했던 갈천상의 목숨을 원한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다. “담소(談笑)나 나누자. 좋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과연 담소를 나눈 후에도 이놈의 목이 붙어 있을지…… 좋습니다. 권주(勸酒)를 마다하고 벌주(罰酒)를 자청할 필요는 없으니까. 길을 떠나려면 준비할 것이 있는데, 그 동안 편히 쉬고 계시지요.” 음선풍은 갈천상이 자신들에게 미소를 보내고, 또 무극전을 빠져 나갈 때까지 행동을 결정하지 못했다. “휴우!” 그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갈천상이 사라진 무극전…… 텅 빈 것 같았다. 전신을 태산(泰山)처럼 짓누르던 거대한 압박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정말 포영매인가……?’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포영매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믿지 않았지만, 꼭 도깨비에게 홀린 기분이니까. 쫦 3 쫦 오랜만에 백문장 수뇌들이 한자리에 모여앉았다. 수뇌라고 해봐야 수하들도 거의 없는 혼자 몸들이 대부분이지만 멀쩡한 직책이 있으니 수뇌라고 봐야 하리라. 회합(會合)은 백문장주 하문화가 보고를 받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제일 먼저 내각주 운단서가 내각에 관해 보고했다. 내각에 소속된 하인, 시녀들의 수가 총 백칠십육 명이란 사실은 처음 밝혀졌다. 백오십여 명에 이를 것이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정확히 백칠십육 명이란 것은 아는 사람이 몇 명 되지 않았다. 재정(財政) 문제도 논의되었다. 백문장이 천석꾼이라고 하지만 소작을 주는 관계로 일 년에 거둬들이는 수확은 이백 석을 간신히 넘겼다. 다른 곳은 지주(地主)가 삼 할을 거둬들이지만 백문장은 이 할을 유지하고 있으니까. 재정 문제는 긴급을 요하는 사안이다. 그 동안은 비축해 둔 것이 있어서 유지해 나갈 수 있었지만 근래에 들어 지출이 많아지면서 곳간이 바닥을 드러낸 상태다. 일처장 홍문성은 달리 보고할 것이 없었다. 이처장 오경은 내각주가 안건으로 제시한 재정 문제는 듣지 못했다는 듯 백문장에 있는 연못 네 곳을 관리할 하인 네 명이 더 필요하다고 보고했다. 그는 백문장을 가장 무가다운 무가로 유지 관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일처리를 하는 사람이다. 오경의 말에 홍문성은 간단히 ‘가능하다’고 대답했다. 이제 사람을 더 고용할 것인가 아닌가는 장주인 하문화와 내각주 운단서, 외각주 갈천상이 서로 논의하여 결정할 문제로 넘어갔다. 다른 때 같으면 논의할 필요도 없는 문제이지만, 백문장 재정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상태인지라 재정 문제와 함께 논의되어야 할 주요 사안이 되어버렸다. 방삼은 자신이 개 때문에 얼마나 골치를 앓고 있는지 푸념까지 섞어가며 말했다. 하나 그의 말 속에는 강한 긍지가 묻어나왔다. 무인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잘 알고 있는 그가 ‘백문장은 철벽(鐵壁)’이란 말을 세 번씩이나 언급한 점으로 봐서도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방삼은 맡은 직책상 외각 칠전주 마부영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기관을 조정하는 법도 일부 전수받은 모양인데…… 어쩌면 칠전은 외각보다도 내각에 편성되는 것이 타당한지도 모른다. 그것이 한결 모양새가 좋아 보이니까. 이제 외각주 차례다. 사람들은 숨소리까지 죽이며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귀기울였다. 그는 외각주 직분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총관이다. 아니, 장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일이 그의 머리 속에서 나오고 진행되고 있지 않는가. “준비가 대충 끝났습니다. 이제 진행만 남았죠.” 무슨 소린가? 무슨 준비가 끝났고, 무슨 진행이 남았다는 것인가. “내각은 백문장 살림뿐만이 아니라 백문장 방비(防備)까지 담당합니다. 됐습니까?” 내각주 운단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홍문성, 오경도 고개를 끄덕였다. 방삼은 자신있다는 표정을 지었고, 마부영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내각이 떨어져 나가기까지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올 여름은 지나야 될 것 같소.” “지원이 필요합니까?” “여름까지는…… 지탱할 수 있소. 하나 여름이 지나면……” “가을입니다. 곡물을 거둬들일 시기, 무슨 일이 있어도 현재 남은 것으로 그때까지 버텨야 합니다.” 자리에 합석한 사람들은 백문장이 얼마나 곤궁에 처해 있는지 절감했다. 재정이 바닥났다. 만약 흉년(凶年)이라도 든다면…… 이백 석으로는 백문장 전 식솔이 일 년을 버티기란 힘들다. 다른 지주들처럼 소작을 삼 할로 올려도 삼백 석. 그것으로도 안 된다. 이백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거기에 사람보다 먹성이 좋은 개가 천여 마리나 있는데 겨우 삼백 석이라니.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긴축을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올 한 해만 백문장을 유지하고 말 것이라면 그런대로 참아넘길 일이지만. “이처장이 말한 인원보충건은 시행하세요. 백문장에서 하인 네 명을 고용하지 못한다면 말이 안 됩니다.” “하나 외각주……” “다른 문제는 철응방에 다녀온 후에 논의합시다.” 모두 박달나무 몽둥이처럼 딱딱한 표정을 지었지만 달리 할말이 없었다. “육전이 활성화되기까지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난주일검 장상부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갈천상의 말은 언제 싸움이 투입될 수 있느냐 하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이제 갓 검을 잡기 시작했는데…… “올…… 한 해는 불가능합니다.” 대답하기 쉽지 않았다. 이제 갓 검을 잡기 시작해서 단 일 년 만에 싸움에 투입된다고 말하면 누구나 비웃으리라. 너무도 상식 밖의 말이 되니까. 그런 말을 장상부는 했다. “늦습니다. 그렇게 기다릴 수 없어요. 올 가을까지 목숨을 지킬 정도는 되어야 할 겁니다.” 갈천상은 한 술 더 떴다. “누구와…… 싸워서 말…… 입니까?” “천력문주.” 장상부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장상부뿐만이 아니라 좌중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방금 천력문주라고 했는가? 갈천상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단 말인가. “알…… 겠소.” 장상부가 대답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회합이 끝난 후에도 갈천상은 근 한 시진 동안 하문화와 독대(獨對)했다.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는 오직 두 사람밖에 모른다. 단지 좋지 않은 이야기가 오고 갔다는 사실만 짐작할 뿐. 그것도 하문화의 아미가 오랜 지병을 앓고 있는 사람처럼 깊게 찌푸려져 펴지지 않고 있기에 짐작한 것이지, 무슨 언질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패앵! 파라락……! 쒜에엑……! 사나운 검기가 일렁거렸다. 깊은 침묵은 물결처럼 파동쳤고, 유일하게 사방을 밝히고 있는 유등(油燈)의 불꽃도 금방이라도 꺼질 듯이 펄럭였다. 조자경은 연검(軟劍)을 사용했다. 그래서 펄럭이는 강도가 특히 강했다. 짝짝짝! 어둠 저편에서 들린 박수 소리가 모든 움직임을 정지시켰다. “이제야 백학검법에서 벗어났군.” 박수를 친 사람이 좀처럼 하지 않는 칭찬을 건네왔다. “그렇게 보이나요?” 조자경은 싱긋 웃어주었다. 일렁이는 불빛 속에서 아름다운 미녀가 미소를 짓는 모습은 참기 힘든 마력으로 다가섰다. “자령검보다 편해 보이는데?” “그건 그래요.” 조자경은 수긍했다. 조자경의 자령검에 대한 애착은 남달랐다. 선친이 물려주신 검이어서이기보다는 평생 동안 오직 한 자루의 검만을 사용해 왔기 때문이다. 그때 그 일…… 여자로서 차마 인내하여 넘기기 힘든 일을 당하지만 않았더라도 자령검은 아직 그녀의 수중에 있을 터였다. 갈천상이 건네준 연검은 자령검보다 훨씬 가벼웠다. 검신도 낭창낭창 휘어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동적(動的)인 면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정적(靜的)인 면에서는 어떻게 할지를 모르게 만드는 병기다. 백학검법은 정적인 무공이다. 정중동(靜中動)을 근간으로 하여 이루어진 무공이다. 연검으로는 정중동은 표현하기가 어렵다. 조자경은 무공의 상충(相衝)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정검(靜劍)도 아니고 동검(動劍)도 아닌 혼란 상태에서 극도로 상실감을 느끼고 있을 때, 갈천상은 너무 쉽게 그녀의 고민을 풀어주었다. 연검은 어느 병기보다도 내력(內力)과 초식(招式)의 조화를 요구한다. 집중된 진기가 조금이라도 모자란다거나 초식의 정교함이 내력을 뒷받침하지 못한다면 아무 위력 없는 허리띠를 휘두르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어버린다. 갈천상은 하루에 한 번씩 연공실에 들렀다. 그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조자경이 쥐고 있는 연검과 똑같은 연검을 쥐고, 조자경이 연공하는 무극진결을 시전해 보였다. 특이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 갓 무공을 연마하기 시작한 무인들이 검을 휘두르는 것처럼 어설프게 보이기까지 했다. 하나 조자경이 연검으로 똑같은 초식을 펼치기까지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했다. 드디어 연검이 손에 붙었을 때, 그녀는 무극진결의 묘미(妙味)를 깨달았다. 세상에서 가장 단순해 보이는 초식 속에 삼라만상(森羅萬象)을 담을 수 있는 변화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검에는 검의 길이 있다. 검로(劍路)는 일정한 틀을 갖추고 있으며, 나아가는 방향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속성을 지닌다. 둥글게 원을 그려보자. 검은 둥근 호선(弧線)을 그리며 나아가고자 한다. 역행(逆行)을 하자면 중도에서 검을 꺾어 반대로 호선을 그리거나 곧장 찔러가는 것, 끌어당기는 것 등 온갖 변화를 창출해 낼 수 있다. 하나 그 어느것에나 무리가 따른다. 무극진결은 무리가 없다. 검을 찌르는 것도 아니고, 베는 것도 아니다. 어느 각도로 뻗어나갈지 모르며 어느 정도의 내력이 깃들여 있는지 종잡을 수 없다. 완전한 허허실실(虛虛實實)이다. 허(虛)는 곧 실(實)이며, 실(實)이 곧 허(虛)다. 이런 검법은 자칫하면 엉거주춤한 모양새만 만들어낸다. 초심자가 이런 무공을 펼친다면 사부나 사형으로부터 욕을 얻어먹기 십상이다. 검공은 시작과 끝이 깨끗해야 한다. 뻗으려면 완전히 뻗고, 거두려면 확실하게 거둬라. 무수히 들어왔던 소리들이지 않은가. 무극진결을 처음 대하는 순간에는 ‘이것도 무공인가’ 하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했다. 단지 포영매 갈천상이 건네준 비급이기에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을 뿐이다. 진심으로 무극진결을 익히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는 편이 옳을 게다. 그러던 가운데도 조자경은 점차 무극진결 속에 휩쓸려 들어갔고, 병기의 상이점이라기보다는 그녀의 몸에 밴 백학검법과 무극진결의 상이점에 혼란스러웠다고 봐야 한다. 갈천상은 직접 시연을 해보임으로써 모든 의혹을 말끔히 해소시켜 주었다. 그가 시연한 무공은 무극진결 속에 그려진 초식들과 한 치도 틀림이 없었고, 적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공격할 틈이 전혀 없었으니까. 그때부터 온갖 열의를 다해 무극진결에 매달렸다. 침식(寢食)도 잊고, 하루 해가 뜨고 지는 것도 잊었다. 어두컴컴한 지하 연공실에 틀어박혀 초식이 몸의 일부처럼 여겨질 때까지 수련하고 또 수련했다. 무공을 배워서 어찌한다는 생각도 잊어버렸다. 처음에는 백문장을 일으킨다는 생각이 간절했고, 나중에는 아버지의 복수도 떠올랐지만 근래에 들어와서는 무극진결 자체에 흠뻑 빠져 들고 말았다. 갈천상은 그 후에도 하루에 한 번씩 들러 무공의 진척을 살폈다. 오늘도 그는 들어왔다. 그리고 전에 없이 칭찬을 해주었다. “앞으로 일 년 정도만 더 수련하면 어느 정도 숙달되겠어요.” 조자경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반 년.” “네?” “일 년에 어느 정도 숙달될 정도라면 너를 선택하지도 않았다. 앞으로 반 년 안에 십이성(十二成)까지 수련을 마쳐라.” 갈천상의 말은 못이 되어 가슴에 박혔다. 유건지로부터 들은 말은 있지만 믿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비조탈명이 죽던 그날부터, 갈천상이 죽기 싫으면 나오지 말라고 냉정하게 잘라말하던 그 순간부터 조자경은 자신이 갈천상으로부터 헤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멋대가리없는 인간…… 하나 그는 이미 가슴 깊이 들어와 버렸다. 허락도 받지 않고. 유건지에게서 몇 마디를 듣기는 했지만, 그리고 갈천상이 다른 목적으로 자신을 대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만 그를 사랑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때로는 질투로, 때로는 서글픔으로, 때로는 원망으로 색깔을 달리했지만 근본 뿌리는 사랑이었고, 믿었다. 갈천상은 이런 사람이다. 그와 깊이 대화를 나눌수록 아픔만 가중시키는 사람이다. 오늘도 또…… 아픔을 주고 있구나. “너를 믿는다.” ‘저도 믿어요.’ “너는 진흙 속에 감춰진 진주였어.” ‘그러는 당신은요?’ “훌륭한 무골이야. 사내들도 따르지 못할 만큼.” ‘그런 말씀은 그만 하세요.’ “그런 점을 믿었기에 사대 패강을 상대로 귀찮은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고맙게 생각해요. 제발 그런 말은 여기서 그만……’ “쓸모없는 편린(片鱗)도 끌어들였지. 만약 네가 실망을 안겨준다면……” ‘저도 쓸모없어지는 건가요?’ “쓸모없어질 거야. 다른 편린들이 그렇듯이 너도 약속한 대로 어딘가에 소용될 게다.” 조자경은 연검을 들고 서 있을 힘조차 잃어버렸다. 예상은 했지만 갈천상의 말은 너무 잔혹했다. “철응방에 다녀온다. 그때까지 무극진결을 마흔아홉 초식으로 축약해라.” 조자경은 심드렁한 몸짓으로 등을 돌렸다. 사실은 방울져 떨어지는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연공실은 어두컴컴해서 표정의 변화까지는 읽히지 않으리라. ‘하죠. 아흔아홉 초식이 하나로 귀일(歸一)했다는 느낌이 들 때까지 당신은 끝없이 질책할 테니까요. 당신에게 실망을 주지 않을 거예요. 그건…… 제가 오히려 괴롭거든요.’ 조자경은 멀어져 가는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그제야 억눌려 있던 눈물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第十四章 기력지(紀曆志`:`연대를 기록하는 달력) 쫦 1 쫦 동산(東山)에는 이전부터 와룡문(臥龍門)이라는 문파가 건재했으나 점차 거세져 가는 비살문과 천력문의 억압을 견디지 못하고 몰락해 버렸다. 그 터에 폐허가 되어버린 전각을 수선하고 자리잡은 사람이 현 철응방주인 도후무(都厚鵡)다. 당시만 해도 그가 절강성 일각을 나눠 가질 효웅(梟雄)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집도 절도 없이 구름을 벗삼아 떠도는 낭인(浪人)이 잠시 머무르고 있다고만 여겼다. 도후무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조공(爪功)으로 이름난 무인들을 연달아 격파해 나갔다. 철응조공은 매의 발톱처럼 날카로워, 일격을 당하면 치명상을 입지 않을 도리가 없다. 더군다나 천력문이 도(刀)에 치중하고, 건곤방이 봉(棒)이라는 병기를 사용하는 반면 도후무는 맨손으로 고수들을 격파해 나가기에 매력은 더욱 컸다. 무공을 흠모하는 젊은이들이 하나둘 그에게 모여들고…… 한때는 동산 깊숙이 숨어들기도 했지만 지금은 당당히 어깨를 마주하고 있는 철응방을 일구어냈다. 동산은 대분산(大盆山)과 선도산(仙都山)을 등 뒤에 짊어지고 있어 풍광이 수려하며, 금화부주(金華府州)가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여 사람들의 출입도 많았다. ‘병법을 제대로 알고 있군.’ 동산을 오르면서부터 갈천상은 잔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철응방이 절강성을 사 등분 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물론 철응조공이 뛰어났기 때문이지만, 무공을 뒷받침해 줄 지략가가 뒤에서 받쳐 주었기 때문이리라. 일문을 세우려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뛰어난 책사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한다. 제갈량(諸葛亮)이나 방통(龐統)에 버금간다는 책사라도 있으면 불원천리(不遠千里) 달려가 일조를 얻으려고 한다. 백문장주 조항은 광량을 얻었다. 철응방주는 간화를 얻었고, 건공방주는 무공도 뛰어난 천목봉인 왕국용을 얻었다. 비살문주 소상원(蘇相援)은 본인의 지략이 워낙 뛰어나 따로 책사를 두지 않았고, 천력문주는 곰 같은 체격에 겉보기에는 굼뜨기 이를 데 없어 보이는 태웅(太熊)을 얻었다. 모두 한결같이 병법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다. 사대 패강은 그들의 지략을 바탕으로 마음껏 세(勢)를 불릴 수 있었다. 동산의 맥(脈)이라 할 수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무인이 배치되어 있다. 무공도 맥에 맞게 음습한 곳에는 무공이 강한 자로, 그렇지 않은 곳은 조금 약해 보이는 자로 배치해서 인력낭비를 극도로 줄였다. 인재를 적재적소(適材適所)에 활용해야 한다는 점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되 실제로 그렇게 행하는 사람은 무척 드물다. 간화는 드문 사람들 중 한 명이다. 아마도 갈천상을 동산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지략 또한 간화의 머리 속에서 나왔으리라. 갈천상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하나는 지금처럼 음선풍을 따라서 동산에 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음선풍과 그의 수하들을 비조탈명처럼 제거해 버리는 것이다. 어차피 철응방은 움직이지 못하는 처지이지 않은가. 철응방의 영역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일에 불과하지만 금화부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막강한 실세를 가지고 있는 철응방이라 할지라도 움직이는 데는 상당한 고민을 해야 한다. 간화라면…… 움직이지 않는 쪽으로 방향을 정하리라. 책사라는 사람들은 남에게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제공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니까. 신경을 쓰지 않으려면 후자(後者)를 선택해야 옳았다. 그러나 갈천상은 전자를 선택했다. “아버지도 없는 호로자식이!” “아버지가 없긴 누가 없어! 우리 아버지는 철응방 무인이란 말야!” “하하하! 이게 이제는 거짓말까지 하고 있어. 네 아버지가 철응방 무인이야? 하하하! 얘들아, 얘 아버지가 철응방 무인이래.” “하하하! 우리 아버지는 건곤방 무인인데.” “그럼 우리 아버지는 비살문 무인이다. 하하하!” “정말이란 말야! 철응방에서도 가장 강한 무인이란 말야! 너희들, 우리 아버지 오면……” 그 무엇인가가 쉽게 발길을 떼어놓지 못하게 만들었다. 단순히 아이들 싸움이라고 흘려버리기에는 놀림을 받는 아이의 표정이 절박하고 진실되어 보였다. 무엇보다도 당황해서 뛰어나온 아이 에미가 개 끌 듯이 끌고 들어가는 모습에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확신을 굳히게 했다. 거의 한 달. 갈천상은 산하촌(山下村)이란 조그만 마을에서 거지가 되어 한 달을 묵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삼경(三更)도 훨씬 지난 늦은 시각에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찾아들었다. 그리고 미처 동이 트기도 전에 떠나갔다. 사람들은 철응방 하면 비조대(飛鳥隊)를 떠올린다. 말 그대로 ‘무적의 비조대’는 불패(不敗)의 신화를 가지고 있다. 그들에게 지는 싸움이란 있을 수 없다. 마지막 한 명이 죽을 때까지 악마 같은 투혼을 불사르는 인간들이니까. 그들이 몰살하고 나면 또 다른 비조대가 뒤를 잇는다. 절강무인들은 뼈저리게 느꼈다. 비조대와 싸우려면 마지막 한 명까지 확실하게 죽여야 한다는 것을. 생포란 있을 수 없으며, 팔다리 하나쯤 잘랐다고 투혼이 사그러드는 일은 없다는 것을. 뱀은 머리를 잘라야 한다고, 우두머리를 죽이면 끝이라 생각하겠지만 비조대에게는 그런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나 갈천상이 염려하는 것은 비조대가 아니라 학음(鶴陰)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아이의 아버지다. 철응방주가 숨겨놓은 비장의 밀병(密兵)이며, 개개인의 무공이 능히 절강십대고수 반열에 올라섰다는 열일곱 명의 고수 중 하나다. 절맥단(切脈斷)이라고 부르는 그들이야말로 비조대와 함께 철응방을 지탱하는 양대 기둥 중 하나다. 사대 패강들조차도 절맥단을 알지 못한다. 무림인이 아닌 사람들은 더 더욱 그렇다. 그들은 일체 가족들과 인연을 끊고 지내며, 혼자만의 수련을 거듭할 뿐이다. 철응방주는 그들을 아끼고 있으며 결정적인 순간을 위해 드러내놓기를 꺼리고 있다. 그러나…… 갈천상이 강수(强手)만 두어 나간다면 절맥단 중 일부가 백문장을 들이칠 수 있고, 막대한 피해를 받으리라. 갈천상이 판단한 학음의 아버지는 그런 능력이 있는 고수였다. 그런 사람들이 열일곱 명이나 있다면…… 철응방주가 비조탈명의 전례에도 불구하고 음선풍을 다시 보낸 것은 절맥단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여기서 기다려라.” 철응방에 도착하자 음선풍이 하대로 말했다. 다시 기가 살아났다. 이상한 일이다. 누구나 그런 느낌을 받지만 처음 갈천상을 대하는 사람은 극도의 경계심을 느끼게 된다. 마치 천적(天敵)을 만난 듯이 무서운 투혼을 불태우기도 하고, 음선풍처럼 주눅이 들어 오금을 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느낌이 달라진다. 내력을 끌어올릴 것도 없이 주먹질 한 번에 나가떨어질 것 같은 무기력함이 느껴진다. 말을 하지 않는 것도 처음에는 거북하게 느껴지지만 나중에는 허세로밖에 보이지 않게 된다. 음선풍은 그런 느낌을 철응방에 도착해서야 받았다. ‘수치……’ 음선풍은 그렇게 생각했다. 백문장에서는 오금도 못 펴고 있다가 철응방에 도착한 다음에야 상대방이 가볍게 느껴진다는 것은 무인으로서 수치가 아닌가. 그렇다고 말이 가볍게 나오는 것 역시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갈천상은 묵묵히 하마하여 행서(行書)로 쓰인 철응방 현판 글씨를 감상하고 있다. 신필 박우가 쓴 글씨다. 원(元) 시기의 대표적인 문인이라는 조자앙(趙子昻)의 글씨체를 본받은 것으로 보아 젊었을 적에 쓴 글씨인 듯하다. 필법이 강하고 맑으며, 조화가 잘 이루어져 아름답다는 느낌을 풍겨준다. ‘그러고 보니 신필 박우도 백문장에 몸담고 있지. 악연(惡緣)인가.’ 음선풍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안으로 들어갔다. 철응방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로 술렁거렸다. “개를 많이 키운다니 개처럼 기어서 들어오라.” 염라대왕, 옥황상제, 황제나 다름없는 절대자의 명이었다. “영영청승(營營靑蠅`:`윙윙 쉬파리 떼) 지간번(止干樊`:`울타리에 앉았네) 개제군자(豈弟君子`:`즐거워하는 군자여) 무신참언(無信讒言`:`참언을 믿지 마소).” 갈천상은 시경(詩經)에 나오는 글귀로 응답한 뒤 개처럼 기어갈 생각을 하지 않고 망부석(望夫石)처럼 서 있었다. 즐거운 대치였다. 철응방 사람들은 갈천상이 어떤 행동을 취할지 궁금했다. 사실 철응방 정문에 와 있다면 목숨을 끊어놓는 일은 여반장이지 않은가. 그건 서둘 필요가 없었다. 또한 철응방주가 얼마나 속시원하게 비조탈명의 복수를 할지도 궁금했다. 하급무인들 입장에서는 단숨에 백문장을 초토화하지 않는 것이 못내 불만이었다. 비조탈명 같은 고수가 죽었는데도 복수하지 않는다면 무슨 낯으로 강호를 횡행하랴. 그러던 차, 갈천상이 방주의 명을 어기고 버텨주자 분노보다는 즐거움이 앞섰다. 이 인간을 어떻게 요리할 것인가. 방주의 명에 따라 개처럼 엉금엉금 기어가 죽음을 당했더라면 오히려 섭섭했으리라. 아무도 말을 건네는 사람이 없이 한 시진이 흘렀다. 철응방 정문에 도착했을 때는 날이 훤한 신시(申時) 무렵이었지만 지금은 땅거미가 어둑어둑 깔리는 유시(酉時)가 되었다. 날도 궂었다.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하던 빗방울이 점차 굵어지기 시작하더니 장대비가 되어 쏟아붓기 시작했다. 겨울비치고는 좀처럼 보기 힘든 폭우였다. 철응방 무인들은 명을 받았는지 갈천상 주위로는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정문을 지키는 수문(守門) 무인들도 빗방울이 거세지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자취를 감춰버렸다. 텅빈 공간에서 갈천상 혼자 비를 맞았다. 정문 앞에 서 있는 철응방의 상징인 수리매 석상과 함께. 한두 시진쯤이면 결말이 나리라 생각했던 고집 싸움이 밤을 넘기고 있다. 철응방 무인들은 갈천상보다도 방주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 정도 했으면 이제 그만 목을 베어야 옳지 않은가. 무엇 때문에 아까운 시간을 허비한단 말인가. 갈천상이야 철응방까지 따라왔을 때는 죽을 각오를 했을 테니 무슨 짓인들 못하랴마는 철응방주의 입장은 다르지 않은가. 이런 시간은 오래 지속될수록 일종의 모욕이 될 수도 있다. “방주님은 괜히 입방아에 오르내릴 일을 사서 하고 계신 거야.” 철응방 무인들의 심정은 대부분 같았다. 어쨌든…… 긴 침묵은 이어지고…… 철응방 무인들은 잠자리에 들기 시작했다. 툭! 투툭! 툭……!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면서. 쫦 2 쫦 철응방을 이끌어가는 수뇌들이 두 줄로 늘어서 있다. 거의 삼십여 명에 육박하는 인원이다. 갈천상은 빗방울을 뚝뚝 떨어트리며 사납게 눈을 부라리고 있는 무인들 틈을 걸었다. 정중앙에는 철응방주로 짐작되는 인물이 앉아 있다. 예상외로 작은 키다. 하나 사지가 곧게 뻗었고, 체형이 단단하여 조금의 경화(硬化)도 보이지 않는다. 실제 나이는 환갑을 훌쩍 넘긴 예순셋이라고 하지만 머리카락이 검고 얼굴에 주름이 없어 마흔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들리는 말로 철응방주는 부인을 일곱 명이나 두었단다. 그들 사이에 낳은 자식이 모두 서른한 명이라니, 대단한 식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 서른한 명의 자식 중에 철응방 대소사에 간여하는 자식은 단 한 명도 없다. 철응방주는 여타의 문주들과는 크게 다른 방책을 채용해서 자신의 자식들은 무공을 익힐지언정 무림사에는 절대 간여하지 못하게 조처를 취했다. 언젠가는 철응방주의 명을 어기고 무림에 뛰어든 자식이 있었다. 철응조공을 제대로 익혀서 열한 번에 걸친 비무를 모두 승리로 이끌어 동산신응(東山神鷹)이라는 무명도 얻었다. 자랑스럽게 돌아왔다. 아버지를 마주보면서 자신이 없으면 무림에 나서지도 않았다고 거칠게 대들었다. 왜 무림에 나설 수 없는지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해달라고. 그에게 돌아간 것은 죽음이다. 철응방주는 자신의 자식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였다. 그 후로는 무림에 나서는 자식이 없다. 가업을 잇고자 하는 자식도 없다. 자식들은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고, 하루가 지나면 오늘도 살아남았구나 하는 느낌으로 안도의 한숨을 불어쉬는 처지가 되었다. 반면에 철응방 무인들에게는 터무니없을 만큼 관대했다. 독한 화주(火酒)를 즐겨마셨고, 문도와 어울려 춤추는 것을 좋아했다. 그가 정중앙에 앉아 있다. 절강성 거성(巨星)이. “춥지 않았나?” 철응방주가 꺼낸 첫마디였다. “나는 괜찮지만 쥐새끼 네 마리는 어떤지 모르겠소.” 갈천상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절맥단 고수들은 무공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그들은 철응방이 불타올라도 방주의 명이 없으면 간여하지 말라는 밀명을 받고 있으며, 오로지 무공에만 전념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그들이 필요하다는 병장기는 아무리 귀해도 구해다주었고, 귀한 비급(秘)이나 영단(靈丹)이 생기면 제일 먼저 그들 차지가 되었다. 그들 중 네 명이 밤새도록 갈천상을 지켰다. 단순히 지킨 것만은 아니다. 그들은 허점이 생기면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불쾌한 안색을 지었지만, 곧 경악으로, 그리고 침통으로 바뀌고 말았다. “공격할 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한 마디뿐이었다. “자네들 넷이라면 나도 공격할 텐데?” “갈천상은…… 고수입니다. 터무니없이 강한 고수.” 철응방주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절맥단 네 명이 모이면 자신 역시 승산을 점칠 수 없다. 처음에는 철응방을 강력하게 키우고 싶은 욕심에서 시작한 일이었으되 이제 그들이 딴생각을 품으면 방주인 자신조차도 어쩔 수 없는 거인들로 성장해 버렸다. 그런데 갈천상을 공격하지 못했다. 어설픈 자들 같으면 반 각도 지나지 않아 선공(先攻)을 펼쳤겠지만 궁극이 무엇인지를 깨달아가는 무인들이기에 오히려 틈을 찾아내지 못했다. 터무니없이 강한 고수라는 표현이 맞는다. “정말 포영매란 말인가……” “……” 철응방주는 간화를 쳐다보았고, 간화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절맥단 무인들이 일부러 사정을 봐주지 않은 이상 지금과 같은 상황은 벌어질 수 없다. 이건 안 된다. 상대가 포영매이고 초절정고수라면 섣불리 건드릴 수 없는 상대다. 굳이 그를 죽이고자 한다면 철응방이 전력을 기울여서 백문장을 공격한 것과 비슷한 결과를 불러오리라. 비살문이나 천력문 어느 한 곳이 공격해 와도 맞받을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인 피해를 당하리라. 철응방주와 간화 역시 갈천상이 포영매일 것이라는 풍문을 들었다. 하나 사실이랴 싶었다. 그것이 사실로 밝혀진 이상…… 비조탈명의 목숨값은 받아낼 수 없다. 백문장을 다시 일어서게끔 획책한 자가 갈천상이고, 갈천상만 제거하면 손쉽게 백문장을 접수하리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호출을 거역하고 음선풍을 죽인다면 절맥단 고수를 파견하여 일거에 쓸어버리려고 했는데. 철응방주는 그를 불러들일 수밖에 없었다. “무릎을 꿇지 못할까!” 도열해 있는 무인들 중 한 명이 고함을 내질렀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방주에게 거침없이 대하는 갈천상이 무례하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아니, 무례하다. 그는 감히 평대를 할 뿐만 아니라 포권지례조차 취하지 않았으니까. “그만!” 철응방주가 제지하고 나섰다. 절맥단 무인들로부터 보고를 받았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었다. 누가 믿겠는가. 절맥단 무인 네 명이 밤새도록 공격할 틈조차 찾지 못했다면. 직접 눈으로 보고 나니 그들 말을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철응방을 이끌어가는 절정고수 삼십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를 유유히 걸어오는 갈천상. 그에게서는 어떠한 허점도 비쳐지지 않았다. 무공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온몸을 드러내고 걸어오지만 막상 공격할 생각을 굳히고 다시 보면 공격할 곳이 없었다. 이런 문제는 공격자의 입장에서 상대를 보아야만 깨달을 수 있다. 나중에라도 이 자리에 모인 무인들에게 물어볼 일이다. 갈천상에게 어떠한 틈이 있었냐고. 자신있게 나서는 무인일수록 무공이 낮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리라. 철응방주는 갈천상을 인정했다. ‘더 이상 충돌을 일으킬 필요가 없어. 이런 자는 회유(懷柔)……’ 그는 갈천상이 욕심났다. “모두 물러가고…… 차를 준비하라.” 철응방주는 단단한 얼굴 근육을 일그러트려 웃음을 지었다. “백문장같이 좁은 곳에 머물기가 답답하지 않으신지……” 간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는 생각이다. “비조탈명 건은 미안합니다.” “비조탈명이 아마도 호승심이 생겼나 봅니다. 하하!” 철응방주가 대수롭지 않은 듯 받아넘겼다. “양해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천만의 말씀을……” “차가 참 향기롭군요.” “차라면 백문장만 하겠습니까. 듣자하니 백문장에는 다정으로 불리던 운단서가 내각주를 맡았다고 하던데.” “불민한 사람을 도와주고 있죠.” “인복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들이 모여서 한가롭게 한담을 즐기는 분위기였다. 철응방주도 갈천상도 밤새 있었던 일은 언급도 하지 않았다. “한때 휴전주…… 신필 박우가 이곳 봉공(奉公)으로 머무른 적이 있죠?” “신필 말입니까? 신필이라면 한동안 머물렀죠.” “박우에게는 여식이 있다던데요.” “방주님의 부인 되십니다.” 곁에서 듣고 있던 간화가 불쑥 끼여들었다. 이런 말들은 당사자가 이야기하기 곤란한 부분이라 생각한 듯하다. “제가 방주님의 초대를 받았다고 했더니 휴전주가 부탁을 하더군요. 딸의 모습을 본 적도 오래됐는데 잠시 볼 수 없냐고. 친정나들이하는 셈치고 부탁드립니다.” 철응방주의 안색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신필 박우는 연로한 노인이다. 그가 환갑이 다되어서 유일하게 얻은 혈육이 현재 철응방주의 일곱째 부인인 자서(子西)부인이다. 철응방주는 아들보다도 나이가 어린 박련(朴蓮)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 연심(戀心)에 사로잡혔다. 그는 문장(文章)에는 관심이 없다. 박우가 신필로 칭송받지만 철응방주에게는 삼류무공을 익힌 무인보다도 가치가 없었다. 그런데도 붙잡았다. 봉공으로 대접하며 불편한 점이 없도록 세심하게 보살폈다. 박련에게 향한 마음도 거세게 쏟아부었다. 지나친 환대는 부담을 안겨주기 십상이다. 하물며 평생 학문만 벗해 온 박우나 보고 배운 것이 글밖에 없는 박련으로서는 철응방주의 환대가 썩 기분 좋게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 박우는 떠나고자 했고, 철응방주는 혼인을 청했다. 자식의 혼사가 아닌 바로 자신의 혼담을. 철응방주는 신필 박우가 영광스럽게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박련 역시 여자의 몸인지라 내색하지는 않지만 ‘아버지의 뜻에 따른다’며 고개를 수그릴 줄 알았다. 박우는 오히려 대로(大怒)했다. 일각의 패자인 철응방주에게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는 말까지 사용했다. 박우와는 악연이다. 철응방주는 부녀를 떼어놓았고…… 박련을 겁간(劫姦)하고 말았다. 유학(儒學)에 물든 사람들이 좋을 때도 있다는 사실은 그때서야 알았다. 박련은 여필종부(女必從夫)라는 말을 사용했고, 앙칼지게 반항할 때와는 전혀 다르게 순순히 일곱 번째 첩이 되었다. 박우는 광란했다. 그가 터트린 분노는 걷잡을 수 없었다. 세상에 철응방주의 인면수심을 널리 알리겠다고 공갈도 했다. 울부짖기도 했고, 실실 웃기도 했다. 그는 미쳐서 철응방을 나갔다. 아니다. 내침을 당했다. 철응방주의 불편한 심기를 미루어 짐작한 간화가 야밤을 틈타 내치고 말았다. 그 신필 박우가 현재 백문장에서 휴전주로 있다. 껄끄러운 부분…… 갈천상이 먼저 짚고 나왔다.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휴전주에게 언제든지 자서부인을 보러 오시라고 전해 주시지요.” 간화가 둘러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자서부인을 데려가야겠습니다.” 신필 박우…… 그가 광란에서 깨어나 갈천상에게 부탁했던 부분이다. 사대 패강과 싸우는 것도 좋고, 죽고 죽이는 것도 좋지만 자신의 여식만은 솜털 한 올 건드리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다. 또한 인면수심 철응방주로부터 여식을 빼내 달라는 조건이다. 갈천상으로서는 철응방주가 서신을 보내오지 않았어도 한 번쯤은 방문했어야 한다. “보자보자 하니까……” 철응방주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애써서 미소를 지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다섯 명을 죽여주겠소. 대가로는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갈천상은 변함없었다. 그는 느긋하게 찻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다섯 명이라면 누구를 말씀하시는지?” 간화의 눈빛이 반짝였다. 이 부분에서는 철응방주도 움찔하고 어깨를 떨었다. “철응방 문도.” “……” “……” 깊은 침묵이 흘렀다. 갈천상은 자서부인으로 불리며 존경을 받고 있는 박련을 데려가는 대가로 철응방 문도 다섯 명을 죽여주겠단다. 다른 사람이 있어 대화를 들었다면 탄성을 터트릴 만큼 놀라운 발언이다. 하나 정작 철응방주나 간화는 깊은 침묵에 잠겨 있을 뿐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더 죽여줄 수도 있소. 한 명당 은(銀) 백 정(錠`:`은덩이)이라면.” “……” “몇 명을 원하시오?” 철응방주의 미간에 아픔이 스쳐 갔다. 그는 무엇을 아파하는가. “다섯 명이라면……” 간화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며 철응방주를 쳐다보았다. 이윽고 철응방주도 결심을 굳혔는지 입을 열었다. “자서를…… 데려가시오. 그리고 다섯 명으로…… 합시다.” “대가는 선불이오.” “떠날 때…… 까지 준비하겠소.” 갈천상은 철응방주의 안색이 깊게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사내의 고뇌를 읽었다. 그는 자서부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 부인이 일곱이나 있다고 하지만 그가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여인은 자서부인일 게다. 또한 그는 수하가 죽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하나 어쩔 수 없이 죽여야 한다. 나무가 열매를 많이 맺게 하려면 가지를 쳐주어야 하듯이 철응방도 일대 개혁이 필요하다. 그는 자신의 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느끼고 있으리라. “아버님께 전해 주세요. 저는 이미 한 사내의 지어미. 따라갈 수 없는 처지라고. 불효막급한 여식을 용서해 주십사고.” 자서부인은 이제 갓서른을 넘은 것 같은데 지어미로 살아온 세월이 있어서인지 훨씬 현숙하고 차분했다. 과연 철응방주가 성심을 다할 만한 미모다. 말을 할 때마다 살짝 파이는 볼우물도 앙증맞고, 서늘하고 깊은 눈은 그녀의 가슴에 안기고픈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철응방주를……” ‘사랑합니까?’라는 말은 차마 묻지 못했다. 하나 뜻은 충분히 전달되었다. “지아비십니다.” 갈천상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박우에게 들은 바로는 분명히 겁간을 당했다고 했고, 여식 또한 철응방주의 혼인 제안을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분노했다고 들었다. 그는 아버지가 백문장에 있다고 하면 당연히 따라나설 줄 알았는데. 그리고 자신을 겁간한 철응방주에게 독아(毒牙)를 뿜어낼 줄 알았는데. 살을 섞고 살다 보면 정이 든다고 했다. 아무리 예쁜 미인도 평범해 보이고, 아무리 호박 같은 추녀라 할지라도 예쁜 구석이 보인다고 했다. 그래서인가, 거절하는 이유가? “아버님께서는 옥체 건강하시지요?” 자서부인이 눈물을 머금으며 물어왔다. 갈천상은 신필 박우의 근황에 대해 소상히 말해 주었다. 지금 현재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며 자서부인을 얼마나 깊게 사랑하고 있는지까지. 자서부인은 말을 들을 때마다 옷섶으로 눈물을 찍어발랐다. 그러나 끝내…… 따라나서지는 않았다. 쫦 3 쫦 갈천상이 호법 한 명 대동하지 않고 철응방에 방문했다가 무사히 돌아오고 있다는 소문은 발이라도 달린 듯 하룻밤 새에 천 리를 퍼져 나갔다. 모두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갈천상이 죽음의 길인 줄 번연히 알면서 철응방에 간 것도 그렇고, 철응방주가 비조탈명의 복수를 하기는커녕 은덩이까지 내주었다는 말을 듣고 어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세상 사람들은 무림이란 곳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갈천상은 산정(山丁)을 지나 덕붕(德鵬)에 이르렀다. 철응방에 도착했을 때부터 쏟아붓기 시작한 빗줄기가 연 이틀 동안 내리 퍼부어대고 있었다. 갈천상은 편안하게 마차에 앉아 비 오는 야경(野景)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가져 보는 휴식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그의 영혼은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 백문장 개문식을 할 때는 그때대로, 사대 패강을 상대할 때는 또 그때대로, 그도저도 아니고 혼자 있는 시간이 되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환영(幻影)에 사로잡혀서. 이상하게도 자서부인을 만나고 난 다음부터 마음에 평화가 깃들이기 시작했다. 자서부인을 연모하는가? 그건 아니다. 자서부인이 비록 뛰어난 절색이지만 갈천상의 마음은 여인을 받아들일 만큼 풍요롭지 못했다. 또한 다른 사람의 부인을 탐낼 만큼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람도 아니다. 자서부인은 한 여인의 삶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자서부인과 같은 삶은 현재 중원에서 태어난 대부분의 여인들이 숙명처럼 걸머져야 하는 삶이기도 했다. 여인들에게 사랑이란 사치에 지나지 않는다. 여인들 거의 대부분은 물건처럼 약간의 은자에 사기도 팔리기도 하고,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사내에게 부모가 정해 줬다는 이유만으로 일생을 맡기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무림에 몸을 담은 여인들은 한껏 사치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적어도 자신의 마음에 닿는 사내를 고를 기회가 있고, 적극적으로 사랑을 고백할 기회도 있으며, 혼자 살 권리도 있으니까. 그런데 왜 이럴까. 갈천상은 자서부인의 삶이 조금도 고단해 보이지 않았다.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기 때문만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편안해 보였다. 갈천상으로 하여금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게 한 부분이었다. 포근함이었다. 갈천상이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건대 치열하다고 표현할 수는 있을지언정 포근함을 맛봤다고는 할 수 없었다. 자서부인처럼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진 듯한 절망감을 맛보기는 했다. 하나 자서부인은 나락 속에서 평안을 되찾았고, 자신은 주정중독자가 되어 천하를 떠돌았다. 하늘이 자서부인과 갈천상을 지상에 내려보내 경쟁을 시킨 것이라면 분명히 자서부인의 승리다. ‘삶…… 삶……’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갈천상은 자신의 인생이 크게 어긋나고 있다는 사실은 깨달았지만 어디서부터 어긋났으며 무엇이 어긋났다는 점은 파악하지 못했다. 그래도 어긋났다는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했다. 이상하지 않은가. 다른 것도 아니고 인생 향로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는데 조바심이 나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다니. 압박감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잠을 청할 때조차도 가위가 되어 무겁게 짓누르던 압박감. 재미있게 시작한 무공수련이었으나 포영매라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최고의 무공을 창출해 내야 한다고 자신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가해야 했던 압박감. 갈천상은 쏟아지는 빗줄기를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았다. 그러고 싶었다. 언제까지 이런 평화가 이어질지는 모르지만 몸과 마음이 완전히 이완되어 새처럼 하늘을 훨훨 나는 자유로움을 음미하고 싶었다. 쒜에엑……! 대기를 찢어발기는 파공음이 갈천상에게 이제 그만 이완을 깨고 긴장 속으로 들어가라고 재촉했다. 갈천상은 움직이지 않았다. 무서운 속도로 날아오는 예기(銳氣)지만 방향이 어긋났다. 비록 실낱 같은 차이에 불과하지만 예기에는 살기가 담겨 있지 않다. 타악! 날카로운 예기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마차 문에 박혔다. 강궁(强弓)으로 쏘아낸 화살이다. 화살대가 보통 화살보다 한 뼘은 더 길고 굵기도 검지 손가락만큼이나 굵다. 화살은 달리는 마차 문에 박혀 사력을 다하겠다는 듯 파르르 떨었다. 갈천상은 화살이 날아온 쪽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고목 아래 한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이 빗줄기 사이로 비쳐들었다. 화살은 분명히 그가 날렸을 게다. “세워라.” “워! 워……!” 갈천상은 짤막하게 말했고, 그러잖아도 난데없이 날아온 화살에 겁을 집어먹고 있던 마부(馬夫)는 황급히 고삐를 잡아당겼다. 하늘은 구멍이라도 뚫린 듯 폭우를 쏟아부었다. 갈천상이 본 고목도 폭우 속에서는 안개에 가려진 듯 희미하게 보일 뿐이다. 갈천상은 문을 밀치고 폭우 속으로 발을 내딛었다. 저벅! 저벅……! 갈천상은 논둑길을 걸었다. 마차가 세워져 있는 관도(官道)와 화살을 날린 자가 서 있는 고목 사이에는 벼 꼬투리만 남아 있는 논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촌각도 되지 않아 갈천상의 전신은 빗물로 흠뻑 젖었고,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논에서 튀어오른 흙탕물이 바지를 갈색으로 물들였다. 신발도 흙으로 범벅이었다. 비가 오는 날 논둑길을 걷는 모습은 아름답게 보일지 몰라도 막상 걷는 당사자는 고역이었다. 고목 아래 서 있는 사내는 더 이상 화살을 쏘아오지 않았다. 아마도 처음 화살을 날린 것은 갈천상의 관심을 끌기 위한 방편이었던 듯하다. 갈천상과 낯선 사내 간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마침내는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거리에 도달했다. “자네군.” 철컥! 철컥! 사내는 갈천상의 말에 짧은 금속성으로 대답했다. 철응방의 독문병기인 철골조를 양 손에 채우는 소리다. “돌아갔으면 좋겠어. 자네를 죽이고 싶지 않으니까.” 낯선 사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단지 우수(右手)를 들어 손가락을 까딱거렸을 뿐. 오라는 손짓이었다. “좋은 자리야. 싸우기에 아주 좋은 자리를 골랐어.” 갈천상이 사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자네는 거의 비에 젖지 않았군. 몸이 자유롭다는 겐가? 그렇지. 아무래도 비에 젖은 옷을 입고 있으면 몸이 무겁지. 실낱 같은 차이라도 득을 보겠다는 생각이었다면 적중했어.” 낯선 사내가 움찔거렸다. “내 신발에는 흙이 잔뜩 묻어 있어서 신법을 펼치는 데 약간의 장애가 되지. 반면에 자네는…… 말짱하군.” 갈천상은 사내에게 다가서기 시작했다. “절강무인들은 기백이 살아 있어. 그런 점이 좋아서 이곳 절강성에 들어섰지. 쓸 만한 사람이 있을까 하고. 한데…… 뜻밖에도 쓸 만한 무골은 흔치 않더군.” 낯선 사내는 양 손을 가슴 높이까지 들어올렸다. 양 손에 낀 철골조가 요요(夭夭)롭게 빛났다. “돌아가라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겠지? 그게 절강무인들의 기백이지. 큰 단점이기도 하고.” 철골조를 낀 사내는 공격할 수 있는 거리를 미리 잡아놓은 듯 갈천상이 일 장 앞까지 다가왔어도 움직이지 않았다. “술이 있으면 좋겠군. 이런 날씨에는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는 게 제격이지.” 쒜에엑! 드디어 사내가 움직였다. 공격초식은 철응방의 독문무공인 철응조공이다. 갈천상을 비켜 지나갈 듯 옆으로 치달리면서 양 손으로는 엇비슷하게 쳐올려 얼굴을 할퀴어왔다. 갈천상은 고개를 숙여 일격을 피했다. 하나 사내는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 무릎을 들어올려 안면을 가격했고, 얼굴을 할퀴려던 철골조로 뒷머리를 가격했다. 유연하면서도 무척 빠른 변화. 휘익……! 갈천상은 앞으로 내딛은 왼발을 축으로 빙글 돌았다. 사내의 무릎이 간발의 차이로 옆머리를 스쳐 갔다. 그러나 위험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뒷머리에서 느껴지던 칼날 같은 예기가 방향을 틀어 양 옆구리를 찍어왔다. 순간 빙그르 돌던 갈천상의 신형이 우뚝 멈춰지는가 싶더니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앞으로 튀어나왔다. 퍼억! 꽈앙! 사내는 철퇴로 가슴을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끼며 뒤로 두 걸음이나 물러서고 말았다. 사내의 앞가슴과 갈천상의 어깨가 부딪친 결과였다. 사내는 당황해서 황급히 철골조를 들어올렸지만…… 갈천상은 후속공격을 펼치지 않았다. “춘귀, 성격이 급하군. 아니면 무공이 그렇게 약했나?” 사내…… 춘귀다. 사귀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춘귀는 방주가 비조탈명과 삼귀의 복수를 하지 않자, 개인적으로 갈천상에게 도전해 온 것이다. “철응…… 조공을 환히 꿰뚫고 있군.” 춘귀는 놀란 듯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다. 춘귀가 갈천상을 공격한 것은 단지 삼합(三合). 갈천상은 정확히 철응조공의 약점을 파고들었고, 전혀 생각하지 못한 공격으로 절강 무림에 일절로 자리매김한 철응조공을 파훼했다. 너무 간단히. “장소는 잘 잡았는데 날은 잘 잡지 못했어. 비가 오는 날은 마음이 가라앉지. 살인을 하기에는 적합한 날씨가 아냐.” 동문서답(東問西答)…… 춘귀는 자신이 도저히 갈천상의 적수가 아님을 인정해야 했다. “한 마디만 묻자. 무엇 때문에 사나?” “……?” “무공의 궁극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일파(一派)를 세우고자 하는 뜻도 없고…… 무엇 때문에 무공을 배웠고, 무엇 때문에 살고 있나?” “……” “대답하고 싶지 않나?” 춘귀는 갈천상의 고요한 눈빛 속에서 실없이 말장난이나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갈천상은 담담한 낯빛이었으나 진심이 역력히 묻어나왔다.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뿐이었으니까.” “빙낙강의 무공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을 텐데?” “좀더 높은 무공을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철응조공을 배운 대가가 방주의 그림자라면…… 너무 비참하지 않나?” “정작 비참한 것은 신뢰를 배신당한 거겠지.” “신뢰를 배신당했다…… 옳은 말이야. 살아가면서 그게 가장 비참하지.” 갈천상은 자조 섞인 음성으로 내뱉었다. 그리고는 춘귀를 버려두고 미련없이 발길을 돌려버렸다. “섯!” 춘귀는 다급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갈천상에게 상흔(傷痕)을 입혀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지금 갈천상을 놓친다면…… 그나마 비조탈명과 삼귀의 복수는 요원해진다. 갈천상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봤다. “아까 말했잖아. 날씨를 잘못 택했다고. 그리고 철응조공으로는 나를 어쩌지 못해. 차라리 빙낙강의 엽조수(獵鳥手)가 더 낫지. 알았나? 철응조공을 배우지 말고 엽조수를 꾸준히 익혔다면 지금쯤 이름이 나 있을 거야. 아니면 죽어 있든가. 생과 사를 모두 버리고 몽(夢)을 택했어. 내가 한 말뜻을 깨달았을 때 다시 찾아와. 그때는 싸워줄 테니까. 무공이 무엇인지조차 깨닫지 못한 사람과 수족(手足)을 섞는 것은 내키지 않아.” 춘귀도 철응방에서는 내로라 하는 고수다. 그런 사람이 마치 어린아이나 들을 소리를 들었다. 춘귀는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갈천상의 말대로라면 철응조공보다 사부의 엽조수가 훨씬 뛰어나다는 말 같은데…… 아니다. 그건 아니다. 엽조수와 철응조공을 한 몸에 지녔지만 싸움이 벌어질 때는 언제나 철응조공을 사용하게 된다. 그만큼 파괴력이 뛰어난 무공이니까. 그럼 무슨 말이란 말인가. 춘귀는 결국 비조탈명과 삼귀의 복수를 하지 못했다. 그는 갈천상이 마차에 올라타 멀리 사라질 때까지 꼼짝하지 못하고 서 있었다. 강궁(强弓)도 있었다. 하다못해 화살을 날려 마부라도 떨어트렸다면 다시 한 번 손속을 겨룰 기회가 생겼으리라. 죽는 자는 분명 자신이었겠지만. ─`무엇 때문에 사나? 춘귀의 귓가에 갈천상의 물음이 빙빙 돌았다. 쓸데없는 짓을 했지만 마음은 후련했다. 선행을 베푼 후에 느끼는 뿌듯함 같은 것이 밀려들어 기분 좋았다. 어제만 같았어도 죽였으리라. 어렸을 적을 제외하고는 눈 앞에 검을 들이댄 사람치고 살려준 사람이 없으니까. 오늘은 살려주었다. 뿐만 아니라 조언(助言)까지 해주었다. 춘귀는 무골이다. 그는 무공에 대한 집착도 강하고, 근골(筋骨)도 뛰어나게 좋다. “후후!” 갈천상은 잘게 웃었다. 지금쯤 춘귀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으리라. 철응조공을 버리고 엽조수를 상승경지까지 끌어올리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을 테니. 그런 뜻으로 받아들이라고 말을 했지만. 철응조공은 뛰어난 무공이다. 또한 초야(草野)에 묻혀사는 야인(野人)에 불과하지만 빙낙강의 엽조수도 뛰어난 무공이다. 그리고 두 무공 전부 수공(手功)이다. 춘귀가 철응조공과 엽조수를 분석하고 연구하여 그만의 무공을 창출해 낸다면 절강성을 떨쳐 울릴 새로운 절학이 탄생하리라. 춘귀는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 그래서 말해 주었다. 왜 그랬을까? 전 같으면 죽여버리고 말았을 텐데…… 무엇 때문에 사나. 춘귀에게 던진 질문이다. 그러나 정작 그 질문을 받을 사람은 자신이지 않은가. ‘무엇 때문에 사나……’ 삶의 목적? 없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 내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 모두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술이나 처먹다 죽게 내버려둬. 재기? 크크크! 개새끼도 처먹지 않을 재기를 하라고? 사상진(四象陣)이 깨지고 천골(天骨)들이 죽었는데 무엇으로? 할 수 있지. 일어설 수 있지. 계집 한 명만 줘. 내 맘에 쏙 드는……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투혼(鬪魂)이라나 개지랄이라나…… 좌우지간 싸우지 않고는 하루도 견디지 못하는 계집 한 명만 줘. 그럼 일어설게. 크크크! 주정중독자가 되어 세상을 떠돌던 일이 주마등(走馬燈)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런 여자를 만났다. ‘조자경…… 그래, 난 너 때문에 살고 있어.’ 갈천상은 가볍게 진기를 운행시켰다. 기분이 한결 상쾌해졌다. 자서부인을 만나고 난 후 느꼈던 감상이 말끔히 사라지고 다시 투혼이 들끓어 오르는 것 같았다. 조자경은 자신을 모르고 있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그녀를 낳은 천화신의 하문화도 딸의 진가를 모르고 있다. 강해서 이기는 자는 진정한 강자가 아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 무림에서는 강해서 이기는 가짜 강자들만이 판치고 있다. 조자경은 약해도 이길 수 있는 강자다. 그녀의 마음 속 깊이 숨겨져 있는 투혼이란 기름에 불이 당겨지는 날, 세상은 조자경이란 진정한 강자를 만나게 되리라. ‘자서부인의 삶은 여자로서의 운명이다. 그녀는 순종(順從), 결백(潔白), 애(愛)라는 삶을 택했다. 내 삶은…… 도전이다. 이미 정해진 운명인 것을……’ 갈천상의 눈빛은 점차 예전의 그의 눈빛으로 돌아갔다. 차고 무심해 보이고 냉정한 눈길로. 第十五章 엄회수(淹回水`:`굽이굽이 험한 물길에 갈 길이 막히다) 쫦 1 쫦 저수지의 제방이 무너지는 것은 작은 구멍에서부터 비롯된다. 갈천상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사대 패강에서 파견한 무인들을 친 것은 작은 구멍을 만들고자 함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치더라도 사대 패강에서는 아무런 제재도 가할 수 없을 것이란 철저한 계산이 밑받침되었기 때문이다.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 하나 갈천상은 그런 짓을 했다. 그는 사대 패강에서 파견한 무인들을 충동질했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취휴각으로 자리를 옮기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하겠다고 통보했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럴 경우, 갈천상은 매도당해야 한다. 갈천상뿐만이 아니라 백문장을 비롯하여 백문장 문도 모두가 절강 무림인의 공적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번만은 그렇지 않았다. 사대 패강을 제외한 절강 무림인들은 뒷짐을 지고 관망하는 태도를 보였다. 무림과 직간접으로 연관이 있는 사람들도 한 발을 뒤로 뺀 채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사대 패강의 암투(暗鬪)가 오래 지속된 탓이다. 절강 무림에서는 이미 정도(正道)와 사도(邪道)의 구분이 혼미해진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사대 패강은 서로 허(虛)만 보이면 찔러댔다. 윤리와 도덕을 상관하지 않았고, 어제까지만 해도 으르렁거리던 사이가 하룻밤을 지새고 나니 친우로 돌아서는 일이 반복되었다. 갈천상이 철응방을 방문하고도 상흔 한 점 입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들을 했다. 철응방이 백문장에서 무엇인가 얻을 것이 있고, 이용하는 것이라고. “이거 정말 미치겠네.” 마임호가 지친 듯 투덜거렸다. “없는 것보다는 낫지. 부지런히 접견이나 하시게.” 박우가 즐거운 빛으로 말했다. 박우는 갈천상이 철응방으로 떠난 후부터 연신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이유는 함구(緘口)하고 있어 그와 갈천상만이 알고 있지만. “내 일만 해도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는 판인데 이건……” 마임호는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 그는 모든 정신이 풍뢰구류흔(風雷九流痕)이라는 신법(身法)에 가 있었다. 갈천상이 마임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기술해 준 신법이다. 풍뢰구류흔은 육신의 골절을 극도로 활용한다. 약간 과장하여 말한다면 인간이 문어처럼 흐느적거리게 만들 수 있다고나 할까? 수련방법은 지난(至難)하다. 나이가 들어 이미 뼈가 굳어버린 어른의 골절을 유연하게 만드는 일이 어디 쉬우랴. 추궁과혈(追宮過穴)로 굳어버린 근육과 경략(經略)을 풀어주는 타개편(打開篇)에서 시작하여, 다시 근골을 강화하는 절강편(絶强篇), 한 번 들이쉰 숨으로 오(五) 장(丈)을 나아가는 지속편(至速篇)…… 이미 비천신법에 통달해 있는 마임호는 풍뢰구류흔을 접하는 순간 비천섬월 정도는 눈 아래로 두고도 남을 절학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갈천상은 약속을 지킨 것이다. 양물을 잘라 사내구실을 못 하게 만들어 버린 비천섬월…… 그자와는 언젠가 한 번은 만나야 한다. 풍뢰구류흔이라면 그 시기가 최단시기로 좁혀질 수도 있다. 마임호는 풍뢰구류흔에 무섭게 빨려들었다. 시험도 해보았다. 철응방에서 음선풍이라는 고수가 찾아왔을 때, 수련만 하고 실전에 응용해 본 적이 없는 풍뢰구류흔을 펼쳐 보았다. 놀라는 표정이라니…… 마임호는 풍뢰구류흔을 수련하는 시간 외는 모두 아까웠다. “허허! 내각주만도 못하는가? 내각주는 새벽부터 접견하고 있다네. 쉬는 것을 보지 못했어.” 박우도 한가롭게 한담(閑談)이나 나누고 있을 처지가 못 되었다. 맞은편 의자에 앉는 청년을 접견해야 했으니까. 사정은 마임호도 똑같았다. 마음 속으로는 부화가 치밀지만 몸을 빼낼 시간이 도저히 나지 않았다. “이름이 무언가?” 그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선음현(蟬吟縣)에서 온 화포(華暴)라고 합니다.” “화포?” 마임호는 책자에 청년의 이름을 적다 말고 놀란 눈으로 다시 쳐다보았다. “자네가 천개유룡(天開游龍) 화포인가?” “어쭙잖은 무명을 얻었습니다.” “……” 마임호는 말문이 막혔다. 천개유룡 화포는 마임호 정도의 좀도둑이 상대할 수 없는 거인이다. 후기지수(後起之秀) 중 단연 돋보인다는 그이지 않은가. “배, 백문장에 입문하려고……?” “네. 자격이 된다면.” “원하는 직책이라도 있는가?” 수많은 청년들을 접견하면서 처음 묻는 말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야 ‘삼 개월 동안 수련기간을 두어 인성(人性)이 적합하다고 판단되면 입문을 허락한다’, ‘수련기간 중 백문장 규율을 위반할 시에는 축출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입문 후에 규율을 어기면 참형에 처해질 수도 있다’는 등 협박 비슷한 말을 할 수도 있지만 천개유룡에게는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삼 개월 동안 수련기간을 두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그거야 그렇지만……” “똑같이 대우해 주십시오.” “아, 알겠네. 들어가게.” 마임호는 책자에 천개유룡이라는 무명을 적으면서도 흥분되어 붓 끝이 가늘게 떨렸다. 천개유룡 같은 거물이 백문장에 입문하다니. 똑같은 상황이 접견을 담당하고 있는 박우, 운단서, 홍문성, 오경에게도 벌어졌다. 다른 사람들이야 무림에 적을 둔 적이 없으니 그들이 알고 있는 무인들이래야 근래에 갈천상이 적은 이름들뿐이라 놀람이 적었지만 홍문성은 달랐다. 약초상을 하려면 무림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고, 그가 미치기 전부터 알고 있는 무인들도 상당수였다. “음린삼도(陰燐三刀)……” “홍…… 문성?” “자네가 여기는 어쩐 일로?” “하하! 미치지 않았군그래. 미쳐서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풍문을 들었는데.” “한때 미쳤었지.” “그래? 그럼 소문이 사실이었군. 그러나저러나 세상 참 넓고도 좁구만. 자네를 여기서 만날 줄이야.” “정말 여기는 어쩐 일로 왔는가?” “어쩐 일로 오긴…… 백문장에 투신하러 왔다네.” “자네가?” “왜? 안 되나?” “안 되긴……” 홍문성은 음린삼도란 무명을 책자에 기록했다. 주목을 받은 무인은 아니지만 한 자루 도(刀)가 세 자루처럼 보일 만큼 현란한 도법을 지녀 음린삼도란 무명을 얻은 무인이다. 그가 백문장에 투신한다면 적지 않은 힘이 되리라. 하나 백문장에 투신한 무인들은 모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을…… 홍문성은 그것이 염려스러웠다. 어떻게 음린삼도에게 기본공부터 다시 배우라고 말한단 말인가. 백문장에 적(籍)을 두고자 찾아오는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십 명에 이르렀다. 그들을 받아들이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백문장은 원래 삼백여 명에 이르던 무인들이 거처하던 곳이니 침상만 새것으로 교체하면 머물 공간은 충분했다. 또한 그들이 입문함으로써 재정적으로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나중에는 부담이 될지 몰라도 당장은 입문례(入門禮)로 작게는 은자 몇 냥에서부터 많게는 은덩이 몇십 개를 내놓는 사람도 있으니 기갈이 풀린 셈이다. 문제는 그들을 어떻게 대우하며, 어떤 무공을 전수하냐는 것이다. “외각주가 돌아오고 있으니 그 문제는 나중으로 미루고 우선 받아들이세요.” 천화신의 하문화도 뾰족한 대안(代案)이 없었다. 폭우가 그쳐 하늘도 맑고 공기도 시원한 미시(未時), 갈천상이 돌아왔다. 그는 백문장에 늘어서 있는 청년들을 보면서 마치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듯 당연한 표정을 지었다. “저분이 포영매야?” “그런 것 같은데.” “얼굴 자세히 봤어?” “아니, 휘장에 가려서……” “어떤 무공을 가르쳐 줄까?” “다른 건 몰라도 최고일 것은 틀림없어.” “그렇지?” “그럼.” 절강성 청년들에게 포영매 갈천상이라는 이름은 살아 있는 신화로 떠오르고 있었다. 나이가 엇비슷하다는 점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래 전부터 전설처럼 구전(口傳)되어 오던 포영매의 신화가 현실로 드러났으니 야망을 가진 청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게다. 회합은 밤이 이슥하도록 계속되었다. 갈천상은 그 동안 입문을 신청해 온 청년들, 혹은 무인들의 신상기록을 훑어보고 있는 중이었고, 좌중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그가 입을 열기만 기다리며 침묵을 지켰다. 잠깐이면 훑어보리라던 중인들의 생각은 빗나갔다. 갈천상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그들의 신상명세를 꼼꼼히 훑어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이윽고 가장 마지막으로 오경이 건네준 책자를 덮었다. “모두 사백삼 명. 그 중에 고수가 서른두 명이군요.” 운단서는 입을 열려다 다시 다물고 말았다. 그가 하고자 했던 말이 바로 ‘사백삼 명’이라는 말이었다. 하나 고수라고 칭한 부분은 숫자가 달랐다. 운단서는 ‘고수가 일흔네 명’이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가 집계한 무인의 숫자는 일흔네 명이었으니까. “이들을 넷으로 가릅니다. 고수 서른두 명은 여덟 명씩 가르면 되고…… 천개유룡, 수혼신수(搜魂神手), 흑사도(黑砂刀), 야조비공(夜鳥飛空)을 장(長)으로 합니다. 이 사람들은 제가 따로 만나죠. 앞으로는 입문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이 사람들에게 맡기세요. 입문여부부터 무공수련까지 모두.” 뜻밖이었다. 갈천상의 말은 새로운 당(堂)을 만들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생각 밖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였으니 우리도 달라져야 할 겁니다. 내각은 앞으로 장주님의 뜻만을 따르기 바랍니다. 이 사람들도 장주님의 뜻을 따르게 될 겁니다. 제 관할이 아니라는 뜻이죠.” 갈천상은 두툼한 책자 위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외각도 모습을 바꿉니다. 육전주는 장주님의 호법을 맡습니다.” 난주일검 장상부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갈천상의 충격적인 발언은 계속됐다. “칠전주와 구전주께서는 원로(元老)가 되세요. 장주님께 좋은 자문(諮問)을 해주십시오.” “아니!” 복자 전인수가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외각주, 지금 외각주가 한 말은……” “책사가 돼달란 겁니다.” “……” 갑자기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고요한 침묵이 깔렸다. 놀란 사람은 거명받은 마부영과 전인수뿐만이 아니다. 앉아 있는 모든 사람이 놀랐다. 갈천상이 하고 있는 행동은 백문장 전권에서 손을 떼겠다는 의사표시다. 그것만 놀란 것이 아니라 마부영과 전인수를 책사로 지목한 것에도 놀랐다. 마부영은 기관학의 대가이니 그렇다 치고 전인수에게 그만한 지략이 있었던가? 놀랄 일이 또 있다. 전인수가 눈빛 한 점 흩트리지 않고 갈천상과 눈싸움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분명 새로운 면모였다. “내게 그 말을 할 때는……” “현천마금(玄天魔琴)은 복건성(福建省) 무이산(武夷山) 천심암(天心岩)에 초막을 짓고 삽니다.” “복건성 무이산 천심암…… 하하! 우하핫! 가까이 있었군. 가까이 있었어. 가까이…… 하하핫!” 전인수는 미친병이 도진 듯 마구 웃어댔다. 그러더니 웃음을 뚝 그치고 이를 갈면서 물었다. “계집은?” “같이. 둘 사이에 아들 하나, 딸 둘을 두었습니다.” “……” 전인수는 노려보기만 했다. 벌겋게 충혈된 눈, 실룩거리는 볼 언저리…… 뚱뚱하고 후덕한 몸집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고 있고…… 곁에서 지켜보기가 무서울 만큼 전인수는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현천마금! 그럼 혹시 귀호구혼(鬼呼拘魂)!” 소리를 지른 사람은 백문장에 들어온 이후 언제나 굳은 표정으로 일관하던 오전주 벽산개부 고규철이었다. 오전주의 고함에 중인들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귀호구혼…… 귀신이 호곡(號哭)을 하니 혼이 잡힌다. 복자로 널리 알려진 전인수가 암계(暗計)로 널리 알려졌으되 실제로 본 사람은 없는 귀호구혼이었단 말인가! “현천마금과 내 관계를 어떻게 알고 있나!” 전인수는 오전주를 노려보았다. 눈에서 귀광이 뻗치는 듯 새파란 눈빛이 쏟아져 나왔다. 눈빛으로 살인을 할 수 있다면 오전주는 오마분시(五馬分屍)를 당한 것보다 더욱 처참하게 죽을 것 같았다. 오전주는 살광이 번뜩이는 눈빛을 담담히 받으며 말했다. “내 고향이 석주현(石州縣)이오. 지난 이 년간 석주현에 머물렀지.” 비로소 전인수의 표정이 풀렸다. 현천마금의 고향이 바로 석주현이지 않은가. 다른 곳은 몰라도 석주현에서는 그에 관한 소문이 살을 보태 퍼졌을 게다. 귀호구혼 전인수에게 독약을 먹이고, 전인수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마저 무참하게 죽이고 현천마금과 눈이 맞아 달아난 악부(惡婦)에 관한 소문까지. 전인수는 질문의 화살을 갈천상에게 던졌다. “나에게…… 말할 때부터 알고 있었나?” “그렇소.” “그런데 지금 말해 준단 말이지? 지금까지는 내 머리를 빌릴 필요가 없었다?” “맞소.” “……” “하하하! 맡지. 맡아주지. 백문장 책사…… 맡아주지.” 자신을 미치게까지 만든 간부의 소식을 알게 된 전인수는 오히려 허탈해 보였다. “내 소식은 모두 개방(幇)에서 나오고 있소. 앞으로 연락은…… 육전주께서 맡으시오. 절강분타주를 소개해 주리다.” “개방!” “오! 개방!” 중인들은 다시 놀랐다. 오늘은 놀라는 날인가? 갈천상이 한 마디씩 할 때마다 중인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갈천상이 포영매라는 사실을 잠시 망각했다. 그가 무림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개방문도에 의해서였으니, 지속적인 관계를 맺지 말란 보장도 없다. 세상은 또 한 번 속았다. 모두들 개방에서조차 포영매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고 있다고 알고 있지 않는가. “호호호! 갈천상, 보면 볼수록 놀라운 사람이야. 호호호!” 삼전주 유건지가 웃어젖혔다. 그들조차도 갈천상이 어디서 그 많은 정보를 얻어듣는지 몰랐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건 뭔가. 마치 세상을 정리하는 모습과 다를 바 없지 않는가. “휴전주께서는 무엇을 했으면 좋겠습니까?” 갈천상이 전인수에게 물었다. “취휴각을 맡아야지. 광량 그 친구…… 제법 음흉했어. 평소에 덕(德)을 쌓다 보면 인심을 얻게 되고 사소한 실수는 눈감아주게 되어 있지. 사대 패강보다는 행동반경이 넓어져. 중요한 일이야.” 전인수는 평상심을 되찾았다. 놀라운 변화였다. 그는 언제 간부의 소식을 들었냐 싶게 옅은 미소까지 떠올리며 대답했다. “그럼 모두 끝났군요. 백문장 총력을 사당에 두고, 장주님을 보필할 사람까지 모두 선정되었으니.” “자네는 무엇을 할 텐가? 일전부터 오전까지는 무엇을 하고?” 이번에는 전인수가 갈천상에게 물었다. “일전부터 오전까지는 제가 직접 관리합니다. 백문장에 포함시키지 마십시오. 하하하!” 갈천상은 처음으로 맑은 웃음을 보여주었다. 쫦 2 쫦 전인수는 예전과 다름없이 행동했다.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백문장을 한 바퀴 돌아보는 것도 똑같았고, 식사를 소식(小食)으로 하면서 하루 여섯 번에 걸쳐 먹는 것도 변함없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거처를 장주의 거처인 취운각 근처로 옮겼다는 것이고, 언제나 장주가 모습을 드러내는 곳에 그의 모습도 보인다는 것뿐이다. 말은 별로 없었지만 천화신의가 자문을 구할 때마다 상중하(上中下) 세 가지의 의견을 말했고, 결정을 유도하지 않았다. 단지 천화신의가 하책(下策)을 결정했을 경우, 그에 따른 대비책을 따로 말해 준다는 것뿐. 백문장의 전권은 자연스럽게 천화신의가 거머쥐게 되었고, 전인수는 착실하게 책사 역할을 했다. 장주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붙는 그림자도 생겼다. 난주일검 장상부와 하인, 시녀였던 봉아, 소화, 덕진, 충소, 목지형이었다. 그들은 각기 다른 병기를 휴대했고 언제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움직였다. 갈천상으로부터 여식의 소식을 전해 들은 박우는 삶의 의욕을 상실한 것처럼 보였으나, 이내 훌훌 떨치고 일어나 취휴각에서 가난에 쪼들린 사람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그는 거기에서 새로운 인생을 찾으려는 듯이 보였다. 대도 마임호는 풍뢰구류흔을 익힐 기회가 많이 생겼다며 부지런히 개방 거지들을 쫓아다녔고, 백문장 내에 개방과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전방(傳房)을 만들기도 했다. 전방에는 전서구가 백여 마리나 있어, 비둘기를 관리하는 사람, 전서를 받고 분류하는 사람을 따로 고용해야 했다. 물론 그 일에 적합한 사람들은 홍문성과 오경이 조달해 주었지만. 방삼은 점점 조련(調練)이 능숙해졌다. 일갈 한 마디로 수십 마리의 개들을 움직이게 할 수 있을 만큼. 처음에는 똥개라고 비웃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백문장에 처음 들어선 사람들도 요소요소에 묶여 있는 개들을 보면서 사람보다 훨씬 나은 놈들이라는 칭찬이 나오게끔 되었다. 개들은 훈련시키기 나름인가? 방삼이 맡은 삼처는 전인수의 의견에 따라 외각으로 이동했고, 백문장을 구성하는 다섯 개의 당(堂) 중에 하나가 되었다. 당명(堂名)은 방삼이 직접 지은 천견당(天犬堂)으로 정해졌다. 천개유룡, 수혼신수, 흑사도, 야조비공은 각기 일개 당을 관할했다. 수하들에게 가르치는 무공도 각 당마다 달랐다. 천개유룡이 맡은 화창당(火槍堂)에서는 창법(槍法)을 가르쳤다. 일반 문도는 십이단혼창법(十二斷魂槍法)을, 향주(香主) 일곱 명은 한살신비창법(寒殺神飛槍法)을, 그리고 당주인 천개유룡은 검을 버리고 단 삼 초식으로 된 철창대연(鐵槍大衍)을 수련했다. 수혼신수가 맡은 적수당(赤手堂)도 구성이 같았다. 일반 문도는 진악신수공(鎭嶽神手功), 일곱 향주는 분화둔혈수(粉花遁穴手)를 익혔다. 수혼신수는 자신의 절학을 이어가는 셈이다. 현현쇄혈수(玄玄鎖穴手)를 수련하고 있으니. 흑사도가 맡은 흑사당(黑砂堂)은 흑사도의 무명에서 당명을 따왔다. 당명을 모두 당주가 짓게 했기 때문이다. 흑사당에서는 도법을 수련했다. 육살도법(戮殺刀法), 팔극도세(八極刀勢), 그리고 십이잔혼도(十二殘魂刀). 오당 중 마지막인 야조비공의 반심당(盤心堂)은 특이하게도 신법에 치중했다. 십육섬(十六閃), 암향부동(暗香不動), 귀변팔법(鬼變八法). 모두 갈천상이 건네준 무공들이다. 천개유룡만 제외하고는 당주들이 가장 잘 아는 무공을 넘겨주었다. 사대 패강을 의식한 무공전수였다. 천견당은 백문장을 수비하고, 화창단은 건곤방의 봉법을 상대하며, 적수당은 철응방의 철응조공을, 흑사당은 천력문을, 그리고 반심당은 신법으로 비살문의 암습과 맞서겠다는 발상이었다. 연무장에는 고함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갈천상이 전수해 준 무공은 무림상에 처음으로 등장한 무공들이었고, 포영매의 신화를 익히 아는 문도들은 한 점 의심없이 수련에 열중했다. 백문장은 이미 거대한 세력이었다. 쫦 쫦 쫦 조자경은 지난 몇 달간이 꿈만 같았다. 갈천상과 함께 있는 시간이라면 지하 연공실이 아니라 아귀지옥(餓鬼地獄)에 머물러 있다 할지라도 행복할 것이다. 지난 넉 달간 갈천상은 지하 연공실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다. 조자경의 무공을 세심하게 다듬어주었을 뿐 아니라 그녀에게 필요한 모든 수발을 들어주었다. 한 가지 불편한 점이 있었다면 음식 대신 벽곡단(穀丹)으로 끼니를 해결해야 했던 점이다. 화식(火食)은 기혈(氣血)을 혼탁하게 한다는 이유였지만, 조자경은 그게 오히려 불편하다기보다는 행복했다. 벽곡단 한 알 한 알에 갈천상의 손길이 닿아 있으니까. 무공을 전수해 주는 것에 불과하지만 간혹 손 끝이 부딪칠 때는 짜르르한 전율이 일기도 했다. 바람이나 쐬고 오자는 말도 마냥 기쁘기만 했다. 갈천상의 말뜻이 단순한 산책이 아니라는 것은 백문장을 벗어난 다음에야 알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와 함께라면 어디를 가도 즐겁지 않겠는가. 하루, 이틀…… 그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사내와 단둘이 여행해 본 적은 없지만 부담스럽다거나 불편한 점은 조금도 없었다. 그와 마주앉아 식사를 하는 것도 즐거웠고, 들에 핀 꽃이며 파릇파릇 자라는 벼이삭을 보는 것도 즐거웠다. 밤은 싫었다. 그와 떨어져 있어야 하는 시간이니까. 백문장을 나와 나흘째 되는 날, 갈천상과 조자경은 하남현(河南縣)을 들어섰다. “배고파요.” 조자경은 길가에서 파는 만두며 떡들을 보자 시장기가 심하게 밀려왔다. 점심을 먹은 게 한 시진 전이다. 길을 바삐 달려온 것도 아니다. 구름도 보고, 들도 보고, 개울물에서는 얼굴도 씻고 발도 씻으면서 유유자적하며 걸어온 길이다. 그래도 시장했다. 백문장을 나서면서부터 갈천상은 벙어리가 된 듯 말이 없었고, 조자경이 말을 걸어도 무응답으로 일관하기 일쑤였다. 그가 유일하게 반응을 나타내는 대목은 ‘배고프다’, ‘피곤하다’, ‘졸립다’ 등등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말할 때뿐이었다. 지금은 졸립거나 피곤할 때가 아니니 배고플 때다. 갈천상은 묵묵히 전낭을 꺼내 만두를 사주었다. “같이 안 먹을래요?” “배고프지 않아.” “아주 맛있어요.” “적당히 먹어.” 조자경은 반항이라도 하듯이 볼이 미어지도록 먹어댔다. “그만.” “……?” 조자경은 놀란 눈으로 갈천상을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까지 ‘그만’이라는 말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구운 오리를 혼자서 다 먹어치우고, 소면(素麵)을 또 시켜도 제지한 적이 없다. 못 먹는 술을 먹고 일어서지도 못할 만큼 취해 추태를 부려도 묵묵히 뒤치다꺼리만 해주었다. “지금…… 그만 먹으라고 했나요?” “저자가 누구인지 아나?” 갈천상은 논 한가운데 만들어진 작은 저수지에서 그물로 고기를 잡고 있는 중년인을 가리키며 물었다. “모르겠는데요.” “이름은 송강(宋江)이라고 하지. 무명은 없고. 무림인이야.” “그래요.” 조자경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갈천상이 개방을 통해 소식을 전해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그가 무인들을 많이 아는 것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갈천상은 안목(眼目)을 넓혀주자는 의미에서 무인을 소개해 주는 모양인데…… 솔직히 조자경은 관심없었다. “가서 죽여.” “넷?” “……” “……가, 가서…… 죽이라고 했나요?” 갈천상은 길가 한쪽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둠벙이 잘 보이는 곳이다. 그는 아마도 거기 앉아서 조자경과 송강이라는 무인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볼 요량인 것 같다. “정말이군요.” “……” “저 사람을 정말 죽일 생각이에요.” “……” “왜죠? 저 사람이 무슨 죽을 짓을 했나요?” “네 몸과 마음, 모두 내 것이라고 했다. 시키는 대로 해.” 조자경은 방금 먹은 만두가 얹히는 것 같았다. 명치 끝이 아파오고 속이 더부룩했다. 그리고…… 또 눈물이 핑 돌았다. “알았어요. 죽이죠. 또 다른 말은요? 다른 조건은 없나요?” “죽이기만 해.” 지난 나흘간의 즐거움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말도 하지 않고 냉담하게 대하지만 원래 천성이 그러려니 했는데. 조자경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떼어놓았다. 심장이 거세게 뛰어 견딜 수 없었다. 송강이라는 사내를 죽여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갈천상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는 절박감을 느낄 때마다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그녀의 등 뒤로 여전히 차디찬 갈천상의 음성이 들렸다. “조심해야 할 거야. 사대 패강 방주들도 방심하지 못하는 자이니까.” 쫦 3 쫦 사내는 신중한 성격이었다. 뿐만 아니라 무공도 갈천상의 말대로 뛰어났다. 그는 조자경이 논둑길을 들어설 때부터 투망(投網)을 던지지 않았다. 조자경이 쉽게 공격할 수 없도록 둠벙 저쪽으로 있는 듯 없는 듯 움직여 버렸다. 살의(殺意)를 느꼈든 느끼지 않았든 경계심이 대단한 자다. “당신이 송강인가요?” 조자경은 둠벙을 사이에 두고 물었다. “그렇소만.” “미안해요. 죽어줘야겠어요.” 중년인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나 그의 예리한 눈썰미는 조자경의 전신을 서너 번도 더 훑어내렸다. 체형과 몸에서 풍기는 기도(氣度), 손 끝, 발 끝의 움직임으로 무공 정도를 추측해 냈으리라. “속담에 마작수소(麻雀雖小`:`참새는 작지만) 오장구전(五臟俱全`:`오장육부를 다 갖추고 있다)라는 말이 있지. 낭자는 여자의 몸이지만 무시할 수 없는 무공을 지니고 있군. 어디에서 왔소?” “당신을 죽이라는 말만 들었어요. 그것만 알고 가세요.” “……비살문인가?” 최르륵……! 조자경은 연검을 뽑아들었다. 진기를 주입하지 않은 연검이 채찍처럼 축 늘어져 흐늘거렸다. ‘숨을 잡아야 한다.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정확히 호흡을 잡아내야 해.’ 아마도 조자경으로서는 첫 싸움이리라. 갈천상은 온실에서 자란 화초를 강풍(强風)이 몰아치는 들판에 내놓은 심정이었다. 온실에서 키운 화초를 들판에 이식(移植)하기 위해서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무가에서는 문도를 출도시키기에 앞서 충분한 대비를 시킨다. 가내(家內) 문도를 이용하여 실전수련을 시키기도 하고, 호법(護法)을 딸려 내보내기도 한다. 처음 비무를 하는 상대는 무공이 낮은 무인을 택하는 것도 상용수법이다. 실전비무에 맛을 들이게 하고, 숙달을 시키고, 좌절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온실에서 자란 화초가 제 몫을 해내기까지는 헤아릴 수 없는 관심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조자경은 불행하다. 관심을 가져 줄 사람도 없을 뿐 아니라 첫 상대가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검객(劍客)이니까. 아니, 실전 경험을 고려한다면 패배가 분명한 상대를 골랐으니까. ‘죽는다면 그것으로 끝이다. 이것뿐인 운명이야……’ 갈천상은 진기를 일주천(一周天)시켜 마음을 가라앉혔다. 팟! 파팟! 파아악……! 송강은 각법(脚法)이 무척 뛰어났다. 얼굴을 노리고 날아들던 발이 어느 틈에 가슴을, 다시 옆구리를 찍어왔다. 발이 바뀐 것도 아니다. 왼발을 고정시키고 오른발만으로 현란한 공격을 가해 왔다. 취릭! 촤라락……! 조자경은 연검을 부지런히 휘둘렀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연검으로는 송강의 각법을 막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피육(皮肉)으로 이루어진 다리를 날카로운 연검으로 맞부딪쳐 간다면 조금이라도 공세가 위축되리라던 생각도 곧 수정해야 했다. 송강은 빨랐고, 초식이 다양했다. 그나마 일격을 당하지 않은 것은 무극진결 속에 포함되어 있는 신법 덕분이다. “헉헉!” 뒤로 일 장이나 물러선 조자경은 심하게 헐떡였다. 송강과 접전을 벌인 것이 단지 십여 합에 지나지 않는다. 시간으로 계산하면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다. 그러나 조자경은 천리 길을 한달음에 달려온 사람처럼 숨이 가빴다. “초출(初出)인가?” 송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비살문이 아니군. 소상원이라면 이렇게 무모한 짓을 하지 않는데. 나를 알 리도 없고. 어딘가?” 조자경은 진기를 순행(順行)시켜 숨을 가다듬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지금까지 버틴 것만 해도 놀라운 변화다. 몇 달 전만 같았어도 벌써 검을 떨어트리고 처분만 바라는 신세가 되었을 게다. 그녀가 처음 검을 맞부딪쳤던 고가촌장의 아들에게는 단 일 초밖에 버티지 못했다. 형보다 더 무공이 강하다는 냉혈검 고표는 손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송강은 그들보다 훨씬 강하다. 그런데도 십여 합이 지나도록 버티고 있다. 무극진결을 수련한 효과가 아닌가. 조자경은 자신감을 얻었다. “말하지 않는군. 하기는 살수가 청부자(請負者)를 밝히는 법은 없지. 하지만 내게는 입을 열게 하는 방법이 있지.” 송강은 조자경을 다 잡아놓은 고기로 여겼다. 그 생각이 맞을 것이다. 송강 같은 무인에게 조자경 같은 화초는 어린아이로 보일 테니까. ─`무극진결은 상승공법(上昇功法)이다. 수련을 마치면 동공(動功)과 정공(靜功)을 함께 수련한 효과가 나타나니까. 특징 중에 하나라면 의수입정(意守入靜)을 강조하지 않지만 득기(得氣)가 빠르고 기감(氣感)이 강하다는 것이다…… ‘기감……’ 조자경은 허보(虛步)를 취했다. 극도로 이완(弛緩)시킨 양 손은 어깨 높이로 들어올렸다. 연검을 쥔 오른손에는 진기가 주입되지 않았다. 송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보는 낯선 기수식(起手式)이지 않은가. 하나 이내 웃음을 머금고 다가서려고 했다. 낯선 기수식이기는 해도 틈이 너무 많이 보여 제대로 초식을 뻗어내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 그는 멈칫거렸다. 쉽게 다가서지 못했다. 한 걸음도 옮기지 않아서 조자경의 기수식에 숨어 있는 현묘한 변화를 읽어버렸다. 조자경은 호흡을 노리고 있다. 단 한 순간, 숨결이 막히는 순간이면 모든 게 끝난다. 대치상태는 지속되었고, 조자경이나 송강의 이마에서는 구슬 같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내력 싸움이 됐다. 먼저 마음이 조급해지거나 정신이 분산되는 쪽이 진다. 내력이라면 송강 쪽이 우세하다. 위험해.’ 역시 경험부족인가? 갈천상은 말아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이라도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된다. 조자경과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조자경 같은 천골을 어디서 다시 만난단 말인가. 백문장이 비록 세를 갖췄지만 제대로 일파의 모습을 구비하려면 십 년 세월이 걸린다. 그만한 세월이 흘러야 자체적으로 양성한 무인들이 백문장을 받쳐 준다. 무인에게도 시간이 필요하다. 뛰어난 무공을 익혔다고 금방 절세고수로 둔갑하는 게 아니다. 천기(天機)를 읽어야 하고, 유리한 지리(地理)를 택할 줄 알아야 하며, 싸움에 임해서는 부동심(不動心)을 유지해야 한다. 똑같은 이형환위(移形換位) 초식을 펼치더라도 모래밭에서 펼치는 것과 풀밭에서 펼치는 것은 천양지차(天壤之差)가 난다. 폭양이 내리쬐는 한여름에 펼치는 것과 설원(雪原)에서 펼치는 것도 차이가 난다. 진정한 고수라면 미세한 차이를 알아야 한다. 또한 그러한 차이는 말로 가르쳐 줄 성질이 아니다. 본인이 직접 몸으로 겪고 체득해야 한다. ‘무극진결은 최고다. 최고의 무공을 지니고 있어.’ 갈천상은 주먹에서 힘을 뺐다. 파앗! 신형을 먼저 띄운 사람은 조자경이었다. 그녀의 내력이 송강보다 뒤졌다는 게 증명되는 순간이다. 휘익! 여지없이 발이 날아왔다. 노리는 부위는 머리…… 아니, 어깨다. 아니다. 안면을 차온다. 조자경은 공격을 시도하기는 했으나 위맹한 반격에 당황했다. 퍼억! 뜻밖으로 고통이 전해진 곳은 복부였다. 쇠망치로 복부를 얻어맞은 듯 세상이 새까맣게 변하고 숨이 탁 막히며 번갯불이 튀었다. 조자경은 자신이 논바닥에 나뒹굴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빨리 일어나지 않으면 죽는다는 생각에 벌떡 일어나기는 했지만 몸의 균형이 흐트러져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녀는 송강을 찾았다. 하나 송강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노랗게 변한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땅이 불쑥 솟구치는가 하면 하늘이 주저앉기도 했다. 있다. 송강을 찾았다. 하나 그에게 연검을 겨누려고 하면 다시 땅이 솟구쳐 올랐다. 탁! 무엇인가가 손목을 세차게 후려쳤다. 조자경은 연검을 쥐고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불행중다행으로 손목에서 전달된 거센 충격이 복부에서 이는 충격을 다소나마 감소시켜 주어 정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컥!” 다시 숨이 막혀왔다. 송강에게 목이 잡혀 있다. 억센 돌조각 같은 송강의 손아귀가 금방이라도 목뼈를 부러트릴 듯이 목을 졸라왔다. “어디서 왔느냐!” 송강의 음성은 나직했으나 듣는 사람에게는 소름이 오싹 끼칠 만큼 냉혹했다. ─`구루수(鉤手)…… 왼팔을 굽혀 가슴 앞까지 들어올린다. 손이 가슴 앞에 이르면 팔굽을 축으로, 안에서 밖으로, 측면 전상방(前上方)으로 호(弧)를 그리면서 급속하게 번장(掌`:`손바닥을 뒤집는다)한다. 구완(拘腕`:`팔목을 안으로 굽힘)으로 힘을 가해 밖으로 움켜쥐어[접(接)] 구수(拘手)가 되며 높이는 어깨 높이로 한다. 복장(伏掌)…… 장심(掌心)은 위로, 밖에서 안으로 휘두르며 허리의 힘을 이용하여 힘있게 쳐나간다. 조자경은 송강의 모습이 흐릿해 보였다. 정신이 마비되어 송강이 묻는 말만 염라대왕의 질책처럼 호되게 들려왔다. 그녀는 왼손으로는 구루수를, 오른손으로는 복장을 떨쳐 냈다. 무슨 정신으로, 상대를 보고 쳐낸 것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쳐낸 일련의 몸동작에 지나지 않았다. 퍼억! 손바닥에 둔탁한 느낌이 전달되고, 목을 옥죄어오던 힘이 썰물처럼 사라졌다. ‘살았어.’ 조자경은 송강이 어떤 상태인지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연검을 찾았다. 다행스럽게도 연검은 발 밑에 있었고, 그녀는 땅바닥을 구르며 연검을 움켜잡았다. 오월의 논에는 물이 가득했다. 그 와중에도 옷 속으로 스며드는 논물이 불쾌하게 느껴지다니. 송강은 별로 타격을 크게 받은 것 같지 않았다. 목을 움켜잡은 손을 떼어낼 정도는 되었지만 조자경처럼 속이 뒤집힐 만큼은 아닌 듯 가슴을 몇 번 쓸어내리는 것으로 끝났다. 조자경은 갈천상을 찾았다. 그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갈천상의 모습은 쉽게 눈에 띄었다. 그는 처음 앉았던 자리에 계속 앉아 있었다. 그도 보았을 텐데…… 누구보다도 무공이 뛰어난 사람이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간다는 것을 짐작했을 텐데. 그녀는 이 싸움에서 그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갑자기 두려워졌다. 송강이 죽음의 사신처럼 느껴지고, 그가 한 발씩 떼어놓을 때마다 두려움이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살아야 해.’ 조자경은 생각이 하나로 정리되었다. 이 순간만큼은 갈천상에 대한 애모(愛慕)도, 백문장을 굳건한 반석 위에 올려놓아야 한다는 생각도, 아버지의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一念)도 모두 머리 속을 떠나버렸다. 이 세상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늘도 없고, 땅도 없고, 사람도 없고, 종알종알 지저귀는 새들도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자신과 송강뿐이었다. ─`권법(拳法)은 크게 내가권(內家拳)과 외가권(外家拳)으로 나뉜다. 요즘은 내가권과 외가권에 대한 해석이 변질되어 내가권은 내기(內氣)를 단련하는 권법, 외가권은 근골(筋骨)을 단련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원래 내가(內家)는 속세(俗世)란 뜻이고, 외가(外家)란 출가한 화상들이 수련하던 무공을 일컬었다. 특징이라면 내가권은 몸이 먼저 나가고 수족(手足)이 뒤따르며, 외가는 수족으로 먼저 공격을 가한 후, 몸이 뒤따른다. 송강의 각법은 외가권이었다. 각법이 신랄하게 터져 나온 직후, 신법이 전개되니까. ─`내가권과 외가권 중 어느것이 더 강한가? 우문(愚問)이다. 글씨를 보면 해서(楷書), 전서(篆書), 행서(行書), 초서(草書)가 있지만 어느것이 낫다고 할 수 없다.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질 때, 무인으로서 완성됐다고 할 수 있다. 내가권과 외가권은 일종의 구분에 불과할 뿐…… ‘싸워서 이기는 것이 무공……’ 조자경은 송강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무극진결은 하나의 비급 속에 모든 변화를 담고 있다. 무극진결 속에 있는 권법을 익히면 내가권, 외가권을 모두 섭렵하게 된다. 내가권과 외가권처럼 구분지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때는 몸이 먼저 나가고, 어떤 때는 수족이 먼저 나간다. 혼합된 형태다. 조자경은 외가권에 익숙하지 않았다. 알고 있고, 수련도 했지만 막상 자신에게 걸어오는 상대의 무공에 대해서는 생소하게만 느껴졌었다. 쉬이익……! 송강이 각법을 날려왔다. 그도 이번 공격에는 심상치 않은 힘을 실었다.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리가 달랐고, 피부로 느껴지는 경기(勁氣)가 달랐다. 가슴에 일장을 얻어맞은 다음, 심문하기를 포기하고 죽음을 내리기로 작정한 것 같다. 촤라락……! 조자경은 차분한 마음으로 연검을 떨쳤다. 연검의 특성에 따라 채찍을 휘두르듯이 빙글 돌리기도 하고, 일순간 강한 진기를 주입하여 찔러가기도 하고. 송강의 행동 하나하나가 환히 드러나 보이는 이상 당황할 필요가 없었다. 일 합, 이 합, 삼 합…… 십 합…… 이십 합…… 조자경과 송강은 팽팽한 균형을 이루며 교합(交合)을 늘려갔다. ‘여기서 잡아야 한다. 송강의 절학은 각법이 아니라 검법이다. 그가 검을 뽑으면 위험해. 빨리…… 빨리 끝내라.’ 조자경은 일차 위기를 벗어났다. 수련만 했던 무공들도 점차 그녀가 입고 있는 의복처럼 착 달라붙어 자연스러워졌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와중에도 무공을 깨닫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 이런 싸움은 백련(百練)을 한 것보다 더 효과가 있어서 일차 위기만 벗어나면 본래 지닌 바 무공을 수월하게 풀어낼 수 있는 경지에 오를 수 있다. 하나 갈천상이 걱정하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자만해서는 안 돼. 무공에 자신이 붙었다고 똑같은 수법을 반복해서 사용하면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로 들어선 것…… 끝내라, 제발.’ 갈천상은 간절했다. 조자경 같은 천골이 불상사를 당한다면…… 그가 살아가는 의미가 없어진다. 조자경은 이겨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여인이 되어주어야 한다. 그래야 인생의 목표라고 할 수 있는 일에 도전할 수 있다. 그것만이 삶의 의미이지 않은가. 차앙! 송강이 검을 뽑아들었다. 조자경은 역시 경험 미숙으로 약간의 틈을 내주었고, 송강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검을 뽑았다. “대단하군. 나를 죽이겠다고 말할 만해.” 송강이 진심으로 경탄했다. “후웁……!” 조자경은 대답 대신 숨을 깊게 들이마셔 내기(內氣)를 고르게 골랐다. 전처럼 숨이 가쁘지 않았다. 힘들기는 했지만 평소 수련한 대로 진기를 부단(不斷)하게 이어가면서 무공을 펼칠 만큼 싸움에 능숙해졌다. 그녀에 비하면 송강은 떨어지자마자 말을 건네왔으니 역시 그녀보다 한 수 위라고 말할 만하다. “죽여야겠다. 용서하기를.” 송강은 자신만만했다. “감사하군요. 그 말뜻…… 이제는 쉽게 상대하지 못할 상대로 인정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겠죠?” 송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시간이 없는 것 같네요. 이제 그만 끝내야겠어요.” 조자경도 여유가 생겼다. 이제 세상에는 그녀와 송강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갈천상도 보이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만두 장수와 떡 장수도 눈에 들어왔다. 이 싸움이 끝난 후…… 갈천상과 자신이 떠난 후…… 그들은 말할 것이다. 송강과 자신의 싸움을. 어떤 식으로 말할까? 여협(女俠)이 탄생했다고 말할까, 아니면 송강이 운이 없었다고 말할까? 쉬익! 송강의 검법은 매서웠다. 검을 사용하고 있으되 창을 사용하는 것처럼, 일검을 찔렀을 뿐인데 십검을 찌르는 것처럼 보였다. ‘일검십화(一劍十花)?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 화산파(華山派)!’ 송강의 검법은 화산파의 이십사수매화검법과 흡사했다. 창, 창, 창……! 검과 연검이 부딪치며 요란한 금속성을 터트렸다. 그리고 송강의 검은 조자경의 어깨 부위에서 살점을 한 움큼이나 잘라갔다. “으음……!” 조자경은 신음을 터트렸지만 상처를 돌아볼 틈도 없었다. 송강은 베기는 모르고 찌르기만 아는 사람처럼 일검십화를 다시 전개했다. 전과 똑같은 초식이다. ‘이번에는!’ 조자경은 무극진결상의 검법을 전개했다. 신법으로 몸을 틀어 피함과 동시에 연검을 찔러오는 검과 검 사이에 쑤셔넣었다. 검과 검? 그렇게 말해야 한다. 송강은 단지 한 자루의 검만 소지하고 있으되 열 자루의 검이 동시에 찔러오는 환영(幻影)을 만들어냈으니까. 차앙! 강한 금속성이 터져 나왔다. ‘아!’ 일순간 조자경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금속성 대신 파육음(破肉音)이 들렸어야 한다. 그것도 아니면 허공을 찢어발기는 소리가 들리거나. 금속성은…… 아니다. 잘못됐다. 크게. 파라락……!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조자경의 귀에는 수천 마리의 벌떼가 날아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송강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경기가 피부를 저미며 만들어낸 환청(幻聽)이다. 조자경은 신법을 전개하여 피하려고 했다. 늦었다는 것은 알지만. “너는 졌어.” 갈천상이 냉담하게 말했다. “네가 진 것은 네 초식이 읽혔기 때문이야.” “……” 조자경은 허탈한 심정으로 둠벙 속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송강을 바라보았다. “열 가지를 알아도 아무 소용이 없다. 한 가지밖에 몰라도 무의식중에 전개할 수 있을 만큼 능숙하게 펼친다면 그가 이기는 거야.” 조자경은 송강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라 부르르 치를 떨었다. 눈이 부릅떠지고,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이 쩍 벌어지고…… 무슨 말인가 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뱃속에서 역류한 핏덩이가 말문을 막아버리고…… 송강 대신 누워 있어야 할 사람은 조자경 자신이었다. 송강은 결정적인 기회를 잡았는데…… ‘이건 불공평해.’ 송강은 그 말이 하고 싶었을 게다. “송강의 검법은 철응조공에서 비롯된다. 아마도 화산파의 이십사수매화검법을 떠올렸겠지만…… 한 순간의 판단착오가 삶과 죽음을 가른다. 명심해라.” 갈천상은…… 송강이 일검십화를 전개할 때부터 위험을 알아차리고 달려온 듯하다. 그렇지 않으면 절체절명의 순간에 자신을 구하고 송강을 죽이지 못했으리라. “가자.” 갈천상은 지나가는 길손이 길을 묻는 것처럼 툭 하니 한 마디 던지고는 먼저 걸어가기 시작했다. 조자경은 붉은 핏물로 가득한 둠벙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송강은 등을 보이고 있다. 그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예상치 못한 적에게 일격을 당하고 목숨을 잃었으니. ─`풋! 정말 어처구니없게 당했어. 항시 깨어 있으라. 그토록 간단한 이치를 망각하고 있었다니. 아니지. 결국 깨어 있지 못하고 감각을 닫아버린 것은 나이니 내 잘못이 크지. 조자경은 옛날 고가촌의 고표가 일흑에게 당한 다음 한 말의 뜻을 이해했다. 송강도 같은 심정이리라. 그리고 송강 대신 자신이 죽었다면 자신도 똑같은 말을 했으리라. ‘깨어 있으라…… 이제부터는 깨어 있을 거야. 죽지 않으려면.’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이미 멀리 걸어가 버린 갈천상의 뒤를 쫓아 걸음을 떼어놓았다. 第十六章 송장귀(送將歸`:`저무는 한 해를 보내다) 쫦 1 쫦 올 여름은 무척 덥다. 하늘에서 불비를 퍼붓는 것 같다. 이따금씩 산들바람이 불기도 했지만 화롯불에 부채질하는 것처럼 불길만 더 살라놓는다. 불에 달군 듯 바싹 말라 단김을 뿜어내는 관도는 걸음을 옮길 적마다 풀풀 먼지를 피워낸다. 도대체가 숨이 콱 막힌다. 객잔(客棧)에도 발길이 끊겨 파리만 윙윙거렸다. 문이란 문은 모두 활짝 열어놨지만 시원해지는 기미는 전혀 없고, 길에서 불어오는 먼지만 가득 쌓여갔다. 문원(文元)은 연신 밀려오는 졸음을 참아내기가 힘들었다. 이런 날은 손님도 귀찮은데…… 그는 꾸벅꾸벅 졸다가는 화들짝 놀라서 깨어나곤 했다. 아무래도 구석 탁자를 차지하고 앉은 남녀가 신경 쓰였다. 남녀 모두 비렁뱅이나 되는 듯이 허름한 옷을 입었고, 먼지를 가득 뒤집어쓴 꼴이 음식값이나 제대로 치를지 의문스러웠다. ‘선금을 받았어야 하는데……’ 문원은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먹이를 노리는 독사처럼 살기로 번뜩이는 매서운 눈길만 접하지 않았어도 선금 이야기를 꺼냈을 게다. 무슨 놈의 여자가 얼굴은 천하절색인데 성격은 빙녀(氷女)보다 더 차니. 하기는 덕분에 등골이 오싹해져 잠시나마 더위를 잊었으니 고맙다고 해야 하나? 아무리 그래도 그런 경험은 한 번으로 족했다.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다. 신경이 쓰이는 것은 남녀가 시킨 술과 음식값이다. 이글거리는 열기로 가만히 앉아 있어도 밭에 나가 일을 한 것처럼 땀이 줄줄 흐르는 판인데 속에서 불길이 확확 일게 만드는 독한 화주를 시키다니. 이런 날씨에 화주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나? 음식으로는 만들기도 귀찮은 고로육(肉`:`돼지고기 초볶음) 한 접시와 잡여탕(雜湯`:`버섯탕) 두 그릇을 시켰다. 술은 값싼 것으로 마시더라도 음식은 질 좋은 것으로 먹어야 되는 성품인가? 하고 다니는 모양새로 보아서는 소면(素麵) 두 그릇도 계산하기 벅찰 것 같은데…… 기괴한 분위기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두 남녀는 같이 음식을 먹고, 서로 술잔을 채워주면서도 일체 말은 하지 않았다. 어쩌면 저토록 한 마디도 하지 않을 수 있는지. 그들이 들어온 지 한 시진이 지났건만 그들은 엉덩이 한 번 들썩이지 않고 앉아서 술과 음식을 먹고 있다. 신경 쓰이지 않을 리 있겠는가. 그렇다고 그만 먹고 나가라는 말도 할 수 없고…… 문원은 다시 밀려오는 졸음 속으로 꾸벅꾸벅 빠져 들었다. “지겹게 덥네.” 거센 소리로 문원을 졸음으로부터 끄집어낸 사람은 건곤방 향주인 염왕봉(閻王棒) 백승(伯昇)이었다. “아이구! 나리, 덥습죠.” 문원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사람 이거 완전히 꿈나라에 갔다 왔군그래. 거 입가에 침이나 닦게.” 문원은 옷소매로 입가를 훔치면서 간살스런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리, 저쪽으로 앉읍쇼. 그늘이 져서 그래도 괜찮을 겁니다요.” 그는 부지런히 객잔 안쪽에 있는 탁자로 안내했다. 남녀가 앉아 있는 창가 쪽은 폭양이 한 점 거르지 않고 비쳐 들어 찜질을 하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요즘 같은 날씨에 폭양을 정면으로 쬐면서 술잔을 들이키고 있으니 남녀도 어지간한 인내심을 소유한 모양이다. 그러나저러나 다행이지 않은가. 그들이 그늘진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으면…… “우선 시원한 물이나 한 대접 가져 와.” “헤헤! 그럽죠.” 문원은 부지런히 심부름을 했다. 염왕봉 백승은 문원을 먹여살린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씀씀이가 헤펐다. 무인치고 술과 계집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없다고, 그는 마치 술 귀신이라도 씌웠는지 하루도 거름없이 술을 찾았고, 해가 서산으로 넘어간 뒤에는 야화(夜花)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 시원하다.” 물 한 대접을 단숨에 들이킨 백승은 더부룩한 수염에 묻은 물기를 닦으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소소(素素)는 아직도 자?” “아직 일어날 시간이……” “무슨 놈의 계집이 그렇게 잠이 많아!” “오늘 새벽에야 잠이 들었잖습니까요. 나리께서 한숨도 자지 못하게 하시고는.” “나는 이렇게 팔팔하잖아! 에잉! 술 가져 오고, 소소 깨면 세면도 하지 말고 빨리 내려오라고 해.” “헤헤! 알겠습니다요.” 문원에게 진정한 하루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때, “염왕봉 백승이란 자다. 건곤방 향주직을 맡고 있지만 건곤십삼봉도 따르지 못할 고수지.” 여태껏 침묵으로만 일관하던 남녀 중에 남자의 음성이 들렸다. 문원은 긴장했다. 사내의 입에서 염왕봉 백승이란 말이 나오지 않았는가. 하나 문원보다 더 긴장한 사람은 당사자인 염왕봉 백승이다. 그는 낯선 남녀가 자신을 지칭했다는 점보다도 건곤십삼봉도 따르지 못할 고수라는 말에 신경이 곤두섰다. “뭐 하는 연놈들이냐!” 염왕봉은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그는 경솔한 사람이 아니다. 술과 여자에 파묻혀 살지만 싸움에 임하면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남녀를 저울질했고, 여태껏 만난 고수들 중에 가장 강한 고수라고 확신했다. ‘남녀…… 엄청난 고수…… 그럼 이들이 요즘 절강 무림을 뒤집고 있는 낙성살녀(落星殺女)?’ 백승은 생각을 굳히자 세 개로 나눠진 봉을 하나로 잇기 시작했다. 낙성살녀는 근래에 들어 절강 무림을 벌컥 뒤집어놓았다. 남녀가 같이 다니며 남자는 낙성, 여자는 살녀라 부른다. 남자가 거명을 하면 여자가 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자의 검보다도 남자의 입을 더 무서워한다. 백승은 눈 앞에 있는 초라한 몰골의 남녀가 항간에 소문이 무성한 낙성살녀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죽여라.” 낙성. 사내의 입에서 별을 떨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나다를까, 여자가 일어섰다. “맞군. 낙성살녀. 그러잖아도 소문은 많이 들었다. 잠시 기다려라. 술 가져 왓!” 염왕봉 백승은 진탕하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가슴은 흥분으로 가득 차 걷잡을 수 없이 뛰놀았다. 여자는 기다렸다. 문원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더니 평소 백승이 즐겨마시던 향설주(香雪酒) 한 항아리를 가져 왔고, 백승은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켰다. 술항아리가 점점 쳐들려 속을 비워갈 즈음, 허름한 사내의 입이 다시 열렸다. “염왕봉 백승, 충고하는데…… 봉을 버리고 철권(鐵拳)을 사용해라. 목숨은 하나뿐이니까.” 술항아리를 들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상대는 자신의 진신무공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지 않는가. 백승은 술항아리를 신경질적으로 내팽개치고 일어섰다. 그는 두 번 놀랐다. 한 번은 허름한 마의를 입은 여인이 뜻밖에도 천하절색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만큼 아름답다는 것이고, 또 한 번은 그녀가 오뉴월에 늘어진 개꼬리처럼 축 늘어진 연검을 들고 있다는 점이다. 갈천상과 조자경이다. 그들은 이월 초, 백문장을 떠나온 이래 아직까지 절강 무림을 떠돌고 있는 것이다. “왜 나냐?” 백승은 봉을 굳게 움켜잡으며 물었다. “불경일사(不經一事`:`일을 당하지 않으면) 부장일지(不長一智`:`지혜가 늘지 않는다).” 조자경이 얼음장같이 차가운 음성으로 한 말이다. “……?” “이유는 죽은 연후에.” “오냐! 젖비린내나는 계집년! 와랏!” 백승은 번신륜벽봉{身劈棒`:`다리는 양 무릎을 굽혀 마보(馬步), 오른손은 봉 아래[파단(把段)]를 잡아 옆구리 부근에 고정시키고, 왼손은 봉의 중간부분[중단(中段)]을 잡아 가슴 높이까지 들어올린다. 봉 끝[봉두(棒頭)]은 상대의 안면을 겨냥한다}의 기수식을 취하며 힘있게 일갈했다. 그는 한 순간 철권을 사용할까 하다가 포기해 버렸다. 이곳은 건곤방 영역이다. 또 자신의 신분은 염왕봉 백승이다. 설혹 죽는 한이 있더라도 염왕봉 백승으로 죽어야 한다. 또한 건곤방에서 익힌 이십육초 건곤봉법도 고수를 상대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절학이다. 그리고 자신은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건곤봉법을 십성(十成) 익혔다고 자부한다. 자신있었다. 휘익! 조자경의 신형이 허공을 날아오는 듯했다. ‘미친년!’ 백승은 한 순간 실소를 짓고 말았다. 봉이나 창과 겨루면서 허공으로 신형을 띄우는 것은 ‘나 죽여주쇼’ 하는 말이나 다름없다. 싸우는 와중이라면 또 모른다. 지금처럼 완벽하게 기수식을 잡고 있는 상태에서는 죽여주지 않을 도리가 없다. 특히 봉 끝이 허공으로 들려져 있지 않는가. 파앗! 백승의 신형이 위로 솟구치는가 싶었다. 마보에서 상보(上步)로 신형을 바꾼 탓이다. 왼손은 봉을 놓은 상태였고, 허리 부근에 붙어 있던 오른손은 파단을 잡은 채 곧장 찔러갔다. 봉은 찌르고, 후리고, 감아치고…… 형태는 단순하지만 사용하는데는 고도의 수법을 요구하는 병기다. 일순 조자경은 봉 끝에 걸려 객잔 밖으로 나가떨어지는 듯했다. 하나 백승은 평생 저질러서는 안 될 불문율을 깨고 말았다. 상대를 경시하는 것. 조자경이 허공으로 신형을 띄웠을 때 좀더 신중하게 대처했어야 옳았다. 차르륵……! 봉의 전단(前段)을 무엇인가가 휘감았다. ‘여, 연검……’ 결정적인 실수다. 강호상에 수많은 병기가 있지만 연검을 사용하는 자가 많지 않았고, 상대가 너무 경솔하게 공격해 오는지라 잠시 상대의 병기가 연검이라는 사실을 잊었다. 백승의 봉은 뱀이 똬리를 틀 듯이 전단을 휘어감은 연검 때문에 무용지물이나 다름없게 되어버렸다. 백승은 잠시도 지체할 틈이 없었다. 연검은 마치 뱀과 같은 요술을 부렸다. 봉을 타고 주르륵 훑어 내려온 것이다. 파앗! 백승은 봉을 놓아버리고 옆으로 한 걸음 비켜섰다. 동시에 왼손이 품 속을 뒤졌고, 주먹을 단단히 감싸는 철권이 들려졌다. “끼어. 처음부터 철권을 사용했어야지.” 조자경은 여전히 냉혹했다. 백승은 조자경에게서 틈을 찾으며 양 손에 철권을 끼었다. 주먹을 말아쥐었다 펴보기를 몇 차례, 오랜만에 끼어보는 철권이지만 든든한 자신감을 안겨주기에는 충분했다. “됐어?” “건방진 년……” “훗! 곧 죽을 놈이 큰소리는.” “누가 죽고 누가 살지는……” “시끄럿! 자신있으면 죽엿!” 쒜에엑……! 연검이 날아오는 기세는 조금 전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밖에는 폭양이 내리쬐고 있지만 객잔 안은 차갑고 등골 시린 살풍(殺風)이 몰아쳤다. 백승은 연검이 날아오는 부위를 감지하고 허리를 낮게 수그리며 조자경의 옆구리에 일권을 내질렀다. 촤르륵……! 머리를 갈라오던 연검이 방향을 바꿔 손목을 낚아채온다. 백승은 내질렀던 오른손을 황급히 거둬들이며 여자의 안면을 향해 왼손을 내질렀다. 촤르륵! 촤르륵……! 연검은 팔랑개비가 돌아가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 소리가 의미하는 바는 백승의 양 손목을 잘라버리겠다는 뜻이었다. 백승은 다시 옆으로 한 걸음 이동했다. 여자가 자신을 향해 돌아설 즈음, 백승은 다시 한 번 옆으로 움직였다. 그리고는 재빨리 전권(戰圈)으로 뛰어들며 안면과 복부를 향해 연타(連打)를 날렸다. 촤르……! 소리가 들리다 말았다. ‘제길! 어떻게 된 거야?’ 백승은 여인이 무슨 초식을 사용했는지 보지도 못했다. 단지 이상하게도 몸이 후끈 달아오른다는 것밖에는. “이 초를 낭비했다.” 갈천상은 냉담했다. “죽였잖아.” 조자경도 냉담했다. “싸워서 이기는 게 무공이다. 헛되이 힘을 낭비할 필요가 없어.” “죽이면 그만 아냐!” “아니. 가장 힘을 덜 들이면서 죽일 수 있어야 돼. 백승과 겨루면서는 얻은 게 없었다. 단순한 살인이었어.” “어떻게 죽이든지 그건 내 맘이야.” “아니. 분명히 말하는데…… 내가 요구하는 것은 가장 힘을 덜 들이면서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죽이는 거다. 명심해 둬.” “명심해 두지. 할말 다했으면 가.” 얼음과 얼음이 부딪친들 이보다 더 차가울까. 예전의 부드럽고 상냥하며 웃음 많던 조자경은 분명 아니었다. 빙정신소 유건지도 차디찬 여인이지만 지금의 조자경은 한결 더했다. 갈천상은 할말을 다했는지 전낭을 꺼내 은덩이 한 개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조자경은 갈천상보다 한 발 앞서 객잔을 나서는 중이었다. 그때까지 문원은 한쪽 구석에 숨어서 나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낙성살녀야. 낙성살녀. 낙성살녀였어.” 그는 목을 부여잡고 끝없이 같은 말만 중얼거렸다. 쫦 2 쫦 사람 모습이 개미처럼 조그맣게 보인다. 그들은 자신들이 펼칠 수 있는 최상의 신법을 발휘하여 달려가고 있지만 위에서 보기에는 굼벵이가 기어가는 것처럼 느리게 보인다. 그들이 달려가고 있는 곳이 광활한 초원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틀림없이 석산(石山)이오?” 일음마봉 무기는 말 위에 앉아 초원 저쪽에 서 있는 야트막한 야산을 바라보며 물었다.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천목봉인 왕국용은 미간까지 찌푸리며 말했다. “향주가 죽었소. 그것도 건곤방이 위치한 태백산 아래에서. 그래도 참아야 한단 말이오! 건곤방이!” 일음마봉은 솟구치는 부화를 간신히 억누르는 표정이 역력했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지요. 하지만 일단 장주님께 보고한 다음에……” “그러다 흉수가 도주하면?” 일음마봉의 말투가 거칠어졌다. “석산을 포위하고 있으니 쉽게 도주하지는 못할 겁니다.” “쉽게라고 했소? 그러면 어렵게는 도주할 수 있겠군.” “……” “선참후계(先斬後戒). 할말있소?” “저희…… 건곤십삼봉은 빠지겠습니다.” “응? 빠지겠다? 우하하핫! 누구 맘대로?” “소방주, 말씀이 지나칩니다.” “하하하! 천목봉인, 편한 생활에 맛들렸소?” “제가 겁을 먹었단 말입니까?” “아니오?” “물러갑니다.” 천목봉인 왕국용은 등을 돌렸다. 일음마봉은 잡지 않았다. 뛰어난 지혜의 소유자가 곁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만은 변할 수 없다. 음모와 귀계가 난무하는 무림이니만치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다. 천인(天人)의 지혜를 지니고 있더라도. 감당할 수 있는 부분은 감당하겠지만 그래도 아차하고 놓친 부분을 막아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이 일음마봉의 아버지에게는 천목봉인 왕국용이었다. 아버지가 건곤십삼봉을 그에게 딸려준 것도 천목봉인의 지혜를 아들에게 대물림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나 아버지가 간과한 것이 있다. 건곤방주와 일음마봉은 성격상 큰 차이가 있다. 그릇도 다르다. 인간사(人間事)는 변화난측(變化難測)한 만큼 어느것이 좋다 나쁘다 말할 수는 없지만 어느 한쪽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는 다른 한쪽이 못마땅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아버지가 건곤방을 이룩할 때와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아버지 대에서는 절강 무림을 비집고 들어가 건곤방을 세우고, 든든한 반석 위에 올려놓으면 그만이었겠지만, 그런 가업을 물려받은 자식은 좀더 확장하고 세를 불릴 필요가 있다. 그래도 본전이다. 결코 아버지보다 나은 아들이라는 평(評)을 들을 수 없다. 절강 무림을 일통한다면 모르지만. 그런 의미에서 겁없이 건곤방의 심장부에서 향주를 살해한 낙성살녀는 살려둘 수 없다. 그들을 살려둔다면 틀림없이 아버지보다 못한 자식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아버지 때는 태백산을 지나치는 사람들이 하마(下馬)까지 했는데, 자식이 설치고 다니니까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하면서. 천목봉인은 그런 부담감을 이해하지 못한다. 천목봉인처럼 머리 좋은 사람이 그런 점은 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일음마봉은 말채찍을 휘둘러 한달음에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다. “헤헤! 오늘은 일찍 들어오십니다.” 성심의가 히죽거리며 맞았다. 겸선도 다급히 맞이했지만 취기로 얼굴이 벌게진 상태였고, 걸음걸이도 불안정해 보였다. “요즘 낙성살녀가 절강을 휘젓고 있다.” 일음마봉은 자리에 앉자마자 본론부터 꺼냈다. “들었습죠. 염왕봉이 당했다는 말도 말입죠.” “그 연놈을 죽여야겠어.” “헤헤헤.” 성심의는 비굴할 만큼 허리를 조아리며 실실 웃었다. “왜 웃나?” “소인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건곤방의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죽일 방법이 없나 이거 아닌갑쇼?” “말해 봐.” “수는 벌써 났습죠.” “무슨 소리야?” 일음마봉은 깊숙이 뉘었던 상체를 바싹 끌어당겼다. “대인께서 소인들에게 오신 것만 봐도 짐작이 갑니다요. 옆에 항상 붙어다니던 꼬리가 떨어졌으니…… 아마도 천목봉인이 장주님께 먼저 보고하자는 말씀을 드렸나 본데…… 기분이 많이 상하셨습니까?” “늙은 구렁이 같으니라구.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핵심이나 말해. 수가 벌써 났다니?” “천목봉인은 장주님께 가지 않았을 겁니다요.” “응?” “그자들은 충성심이 대단합죠.” “그래서?” “그자들은 낙성살녀를 죽이러 갔을 겁니다요.” “뭐라구!” 일음마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아! 그렇게 놀라실 필요는 없습죠. 모두 대인 좋자고 하는 일인데. 고정하십쇼.” 성심의는 겸선이 마시던 술병을 들어 한 잔 가득히 따랐다. 그리고 일음마봉에게 건네주었다. “술은 나중에.” “그러시겠습니까? 그럼 소인이.” 성심의는 감로주(甘露酒)라도 마시는 듯 달게 술잔을 들이켰다. “커어! 술맛 좋고…… 그럼 말씀드립죠. 요즘 무림을 뒤흔들고 있는 낙성살녀는 대단한 무인들입죠. 그건 그들에게 죽은 사람들의 면면만 살펴봐도 분명해지고…… 대인께서 낙성살녀를 죽이고자 싸움에 가담한다면 대인 성격상 틀림없이 전장에 뛰어들 겁니다. 그러다 혹시 좋지 않은 일이라도 생기면…… 헤헤! 나이가 들면 워낙 노파심이 많아서.” “으음……!” 일음마봉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성심의의 말은 틀리지 않을 게다. 둘째 형을 눌러앉히고자 했을 때, 그의 계획을 세세하게 다듬은 사람이 성심의이니, 그의 지모는 간특하지만 믿을 만하다. “결과는 어찌 되겠나?” 일음마봉은 차후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문제를 노골적으로 물어보기는 체면이 상해서 빙 둘러 물었다. “두어 시진쯤 있다가 어슬렁어슬렁 가보십쇼. 이미 결판이 나 있을 겁니다요.” 과연 성심의는 일음마봉의 생각을 읽고 마음에 드는 답변을 했다. “으음……! 한 잔 따라.” 일음마봉은 비로소 술 생각이 났다. 성심의의 말은 옳았다. 일음마봉이 술잔을 기울일 시각, 천목봉인 왕국용은 건곤십삼봉을 이끌고 석산에 도착했다. 객잔 주인인 문원이 후환을 두려워한 나머지 태백산을 기어 올라가 염왕봉의 죽음을 알린 까닭에 봉을 움켜쥐고 뛰쳐 나온 무인이 뜻밖에도 많았다. 특히 석산은 건곤방에서 멀지 않은 곳이니, 중간에서 만난 건곤방 무인들까지 합세하여 그야말로 건곤방의 총력이 집결해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모두 돌아가라.” 천목봉인은 문도들에게 엄한 명령을 내렸다. 문도들은 승복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 “낙성살녀는 우리가 맡는다. 만약 우리가 패한다면…… 막지 마라. 너희들 무공으로는 개죽음만 당할 뿐이니까.” “연놈은 단 두 명뿐입니다.” 문도 중 한 명이 항변했다. “좋다. 낙성살녀가 치명상을 당했다면 공격해도 좋다. 하나 사지가 멀쩡하다면 절대 건드리지 마라.” 천목봉인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신의 말이 속절없는 말임을 알고 있다. 건곤방 문도는 죽기살기로 달려들리라. 이들의 분노를 달래는 방법은 염왕봉이 철응방의 간세(奸細)라는 것을 밝히는 것뿐인데 그렇다고 절강 무림에 퍼지는 소문까지 달라질 수는 없다. ‘걸려들었어. 전란(戰亂)으로…… 방법은 우리가 죽이는 것뿐인데…… 아!’ 왕국용은 탄식했다. 대공자가 화영이라는 기녀에게 홀리지만 않았어도 마음놓고 싸움에 임할 텐데. 둘째 공자만 죽지 않고 살아 있어 꾸준히 무공수련을 했다면 능히 낙성살녀를 감당할 수 있을 텐데. ‘늙었군.’ 그는 건곤십삼봉을 돌아보았다. 그들 중에는 처음부터 손발을 맞춘 자도 있고,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고 사부 자리를 꿰차고 올라선 자도 있지만 대부분이 중년을 넘어섰다. 왕국용은 그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태을건천봉(太乙乾天棒) 왕동예(王董霓). 왕국용은 하얀 머리가 나기 시작한 아들과 마주섰다. 왕동예는 석산을 둘러싼 건곤방 무인들과 마찬가지로 목봉 한 자루를 들고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내가 죽는다면 복수하겠느냐?” “하지 않는다면 섭섭하십니까?” “강호인은 은원(恩怨)이 분명해야 돼.” “잊지 않겠습니다. 하면 누구를 위해 싸우시려 하십니까?” 왕국용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자신은 건곤방을 위해 싸우러 간다. 만약 그가 죽는다면 그의 복수는 건곤방이 해줘야 한다. 그게 은과 원이다. 왕동예와 낙성살녀 사이에는 살부지자(殺父之者) 불구대천지수(不俱戴天之)라는 관계만 남는다. 의협(義俠)을 가진 자라면 한시도 잊지 못할 대원(大怨)이지만 왕국용은 자신의 아들이 대원에 연연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왕국용은 아들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건곤십삼봉도 각기 자신의 아들 혹은 제자에게 무엇인가 당부하고는 왕국용에게 돌아왔다. 쫦 3 쫦 갈천상과 조자경은 나무그늘 아래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아 운공조식(運功調息)을 취했다. 짹짹! 째짹……! 뽀로롱……! 새들은 더위를 타지 않는지, 아니면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벌레를 잡으러 다녀야 하는지 불볕 더위 속에서도 부지런히 노래를 불렀다. “후우!” 조자경이 먼저 운공조식을 끝내면서 탁기(濁氣)를 뱉어냈다. 그녀는 두 무릎 사이에 고개를 깊숙이 파묻었다. 단순한 산책인 줄 알고 따라나섰다가 무림을 방황한 것이 벌써 반 년을 넘어선다. 그녀가 나서 자란 절강성이지만 구석구석 가보지 않은 곳이 없다 할 만큼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그 동안 죽인 사람은 딱 열 명. 갈천상은 그들의 이름밖에 알려주지 않았다. 이번에는 개방문도를 어디서 만날까? 갈천상이 거지와 무엇인가를 주고받거나 이야기를 나눈 다음에는 그녀의 차례가 돌아오곤 했다.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정대문파(正大門派)인 개방이 왜 갈천상에게 도움을 주고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럼 자신이 죽인 사람들이 모두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란 말인가. 아니면 갈천상이 백문장에 그랬듯이 무엇인가 대가를 주고 정보를 얻는 것이란 말인가. 동행(同行)이라고는 하지만 말하는 시간이 거의 없으니 생각할 시간은 많았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봐도 그 부분에 대한 해답은 건질 수 없었다. ‘응……?’ 조자경은 생각을 중단했다. 그들을 중심으로 사방에서 조여오는 압박은…… “죽여야 돼?” 조자경은 감정이 묻어 있지 않은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야 될 거야. 물러서지 않는 사람들이니까.” 갈천상도 조여오는 압박감을 느낀 것 같다. 그랬을 게다. 그의 무공은 조자경이 생각할 수 없는 높은 곳에 올라서 있으니까. 특히 어떤 무공이든 일견(一見)한 것만으로 허실(虛失)을 파악해 내는 데는 감탄이 절로 나오니까. 포영매, 포영매…… 포영매에 관한 소문은 사실이었다. 조자경은 일어서서 나무에 등을 기댔다. 손에는 연검이 들려 있었다. 그녀가 갈천상을 따라다니며 배운 것이 있다면 사람을 죽여야 할 때는 망설임없이 죽여야 한다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에 직면하게 되니까. 대화는 없고, 사람은 죽여야 되고…… 끝없이 반복되는 침묵과 살생 속에 조자경은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도 갈천상은 냉담하기만 했다. 너의 육체와 마음은 내 것이니,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듯이. 성격이 변할 수밖에 없다. 사람이 죽어가며 흘린 비명도, 눈을 부릅뜨며 쳐다보던 눈길도, 죽은 사람에게도 처자식이 있겠지 하던 연민도 망각해 버렸다. 그렇다고 갈천상에 대한 애모가 식은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남이 이해하지 못하는 서글픈 구석이 있다. 내면에 깊숙이 틀어박혀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본성이 따뜻하고 부드러워도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고, 표현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간혹 맑은 얼굴로 부드럽게 이야기하는 것. 그게 갈천상이 세상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부드러움이다. 백문장에서는 최대한의 공경을 표한 셈이다. 안쓰럽고 불쌍했다. 무엇이 그를 억누르고 있는가. 처음에는 그에게 의지하고 기대고픈 사랑이었으나, 지금은 따뜻하게 감싸안고 싶은 사랑이었다. 모성애(母性愛)라고나 할까? 하나 그녀도 갈천상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의 행동, 사고에 물들어 사랑을 표시하는 방법을 점차 잊어가고 있었다. “사람이 많아.” “해봐.” “……?” 조자경은 갈천상을 쳐다보았다. 그는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있다. 맨 처음 그랬듯이 먼산 구경하듯이 구경할 요량이다. “나…… 혼자?” “잘됐어. 이런 기회가 있었으면 했는데…… 방법을 마련하지 않아도 되겠군.” “나 혼자!” “무극진결은 최고야.” 조자경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절대 도와주지 않는다. 무인 열 명을 죽이면서 몸에 새겨진 잔흔(殘痕)도 늘었다. 송강에게 어깨 살을 떼인 것을 필두로 등, 옆구리, 허벅지, 팔…… 전신이 상흔으로 얼룩졌다. 아름답고 부드럽고, 만지면 묻어날 것 같던 뽀얀 살은 사라져 버렸다. 이제 그녀의 육신은 상처투성이였다. 갈천상은 그녀가 죽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목숨이 경각에 달릴 정도로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을 적에는 잠도 자지 않으면서 치료에 열중했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그는 혼절에서 깨어나게 하기 위해 자신의 손까지 물어뜯어 피를 먹여주었다.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 입가에 묻어 있던 비릿한 선혈의 맛이. 그러면서도 싸움이 벌어졌을 때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송강과 겨뤘을 때 목숨을 구해 준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사방에서 숨통을 조여오는 사람들도 혼자 막아내야 한다. 그는 그래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 그렇게 될 것이다. “내가 당할 것 같아?” “무극진결은 최고다.” 갈천상은 똑같은 소리를 반복했다. “만약 내가 당한다면?” “……” “지겨워. 이제는 모든 걸 버리고 싶어. 사람을 죽이는 것도 지겹고, 싸우는 것도 지겨워.”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것도 아니다. 이렇게 사는 것보다 차라리 눈을 질끔 감고 검을 맞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떠오른 것이 갈천상의 간절한 눈빛이다. 남들에게는 냉담하게만 느껴지는 눈빛이지만 조자경은 그 눈빛 속에서 간절한 갈망을 읽었다. 그는 말하고 있다. 빨리 강해지라고, 빨리 무극진결을 최상으로 깨우치라고. 그런 다음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일까? 만검진천 전종대, 빙정신소 유건지, 일심향불 백무, 벽산개부 고규철…… 그들도 자신과 같은 전철을 밟았을까? 아마도 그랬을 게다. 그들은 갈천상의 욕구를 채워주지 못했고, 그래서…… 버림을 받은 게다. 갈천상은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 무엇 때문인가. 조자경은 죽고 싶다는 생각에서 빨리 무극진결을 최상으로 깨우쳐 갈천상이 하고자 하는 일을 알자는 쪽으로 생각을 바꿨다. 지금 죽고 싶다는 말은 일종의 푸념에 지나지 않는다. “대답하지 않을 거야?” “……” “재미있다. 전에 나는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 어떻게 하면 여자가 저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 빙정신소 유건지를 보고 느낀 생각이야. 한데, 지금 내가 그렇게 됐잖아?” “……” “나중에 이야기하자. 싸움부터 끝내고.” 나무 사이로 십여 명에 이르는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낙성살녀가 자네들이라니!” 천목봉인이 경탄을 터트렸다. “부탁이니…… 빨리 끝내. 시원한 물에 목욕하고 싶거든.” “으음……!” 천목봉인은 조자경의 도발적인 말에 놀란 듯했다. 하기는 그가 알고 있는 조자경은 미색(美色)이 뛰어난 여염집 아낙 수준이니. “부득이…… 합공을 하겠소.” “그게 좋아. 빨리 끝나니까.” “허허허! 절강 무림이 또 한 번 뒤집어지겠군.” 왕국용은 말을 하면서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무공을 아무리 빨리 배운다 해도 그렇지 반 년밖에 안 되는 사이에 조자경의 무공이 이토록 급성장할 수 있단 말인가. 건곤십삼봉 앞에서 뻣뻣하게 검을 들이댈 정도로. “그럼…… 봉이 제법 딱딱하니 조심하시오.” 왕국용이 목봉을 치켜들었다. 건곤십삼봉은 합공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열세 명이 한 몸처럼 움직였고, 봉 끝이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생각을 짐작했다. 페에엑……! 퍼억! 봉 끝이 살아서 움직였다. 조자경을 격중하지 못한 봉은 나무 몸통을 뚫고 들어갔다. 촤르륵……! 조자경도 반격을 시도했다. 하나 미처 초식으로 이어지기도 전에 몸의 안전부터 고려해야 되는 지경에 처했다. 다리를 때려오는가 하면, 허공에서 머리를 내리쳐 오고, 파단을 전단으로 바꿔 돌려쳐 오는가 하면, 서너 개의 봉이 사방에서 동시에 찔러오기도 했다. 도무지 정신이 없었다. ‘이러다가는 당한다.’ 시간을 오래 끌수록 불리해지는 쪽은 자신이리라. 더군다나 건곤십삼봉은 개개인의 무공이 지금껏 조자경이 죽여온 자들과 비교해도 하등 떨어지지 않는다. 처음…… 송강과 겨룰 때와 상황이 비슷했다. 그때도 지금처럼 어쩔 줄 몰라 피하기에 급급했다. 조자경은 숨이 가빠왔다. 무극진결에서는 역복식호흡(逆腹式呼吸)을 한다. 호기(呼氣) 시에는 복부를 긴장시키고, 흡기(吸氣) 시에는 복부에 힘을 빼고 복부의 양 측면을 확장한다. 호흡의 속도는 빠른 편이며 역복식호흡과 운기(運氣)를 배합하여 흡기시 단전(丹田)에 기를 모으고, 호기시 단전에 모인 기를 끌어올려 공격 부위에 집중한다. 유연한 듯하면서도 강한 타격력은 거기서 기인한다. 지금은 호흡마저 흐트러졌다. 단전에 기를 모으기는 하지만 공격 부위에 집중할 틈이 없었다. ‘한 번에 끝낸다. 죽든 살든……’ 조자경은 이를 악물었다. 쉬익! 첫 번째 날아온 봉…… 연검을 휘둘러 봉의 전단을 감아갔다. 이 수법은 염왕봉과의 싸움에서도 써본 적이 있지만 아주 효과적이었다. 일 대 일의 승부라면, 상대가 연검을 경시한다면. 이번에도 상대는 피하지 않고 찔러왔다. 같은 행동이었지만 염왕봉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염왕봉은 경시하는 마음에서 연검을 잊었지만 건곤십삼봉은 열세 명이 합공을 취하면서도 누구 한 사람 진중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알면서도 찔러온 것이다. 조자경이 연검으로 목봉을 휘감는다면 걸려든 사람은 조자경이 된다. 그녀는 병기를 묶였을 뿐만 아니라 한 쪽 팔도 묶였고, 몸의 방향도 한 방향으로 고정시켜야 하니까. 촤르륵……! 연검이 목봉을 휘감았다. ‘승부!’ 조자경은 손목을 힘껏 비틀어 목봉의 방향을 틀었다. 이것으로 적어도 서너 개의 목봉은 막아내야 한다. 탕! 탕탕! 목봉과 목봉이 부딪쳤는데 쇠와 쇠가 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간닷!” 조자경은 자신도 모르게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그녀가 노리는 자는 처음 목봉을 휘감긴 자다. 그는 목봉이 비틀려 측면을 드러내놓고 있다. 휘익! 번개같이 목봉 밑을 파고들며 연검을 휘둘렀다. 싸아악……! 이제는 익숙해진 느낌이 손 끝으로 전달되었다. 조자경도 무사하지 못했다. 뒤에서 짓쳐 온 목봉 한 개가 등을 강타했다. 옆에서 날아온 목봉도 옆구리를 찍어놓았다. 반신이 자르르 마비되었다. 아마도 갈비뼈가 서너 개는 부서진 것 같았다. ‘틀렸어. 겨우 한 명 죽였는데……’ 그때였다. “강(剛), 유(柔), 동(動), 정(靜), 박(迫), 흡(吸), 탄(呑), 토(吐)!” 전장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나무 위에 올라가 있던 갈천상이 무극진결 팔자(八字) 진법(眞法)을 읊조렸다. “아!’ 조자경은 무의식중에 탄성을 토해 냈다. 이미 머리 속에 각인(刻印)되어 있고, 팔자진법에 포함된 오묘한 의미도 깨닫고 있었지만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들은 팔자진법은 또 다른 의미에서 그녀를 일깨웠다. 무극진결상의 무공과 팔자진법이 하나로 녹아서 떠오른 것이다. 보였다. 건곤십삼봉의 움직임이 손에 잡힐 듯이 뚜렷하게 보였다. ‘박(迫)!’ 조자경은 가슴 한가운데를 노리고 짓쳐 오는 목봉을 몸을 틀어 피하며 상대에게 최대한으로 근접했다. 건곤십삼봉 중 한 명을 지근거리에 놓고 보니 공격받는 범위가 절반으로 줄었다. 사내의 육체가 한쪽 방향을 막아버린 것이다. ‘강(剛)!’ 조자경은 산을 베어버릴 기세로 연검을 휘둘렀다. 발을 내려딛는 것도 땅 속에 파묻힐 듯 강하게 내려딛었다. 마음을 안정시켜 불안을 없애야 한다. 어떤 공격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신형은 잠시도 멈춤이 없이 움직이고 있어야 하며, 멈추는 순간이 있을지라도 다시 튀어나가기 위한 멈춤이어야 한다. 파앗! 사내가 목봉을 들어올려 연검을 막았지만, 강력한 진기를 수반한 연검은 목봉을 가르고 들어가 사내의 머리를 허공에 띄워버렸다. 목봉은 나무로 만들어져 있지만 수직으로 맞받으면 절대 잘라지지 않는다. 또한 건곤십삼봉쯤 되는 사람들은 언제 어떤 경황하에서도 목봉을 수직으로 맞받을 만한 무공을 쌓고 있다. 사내가 죽었다는 것보다 목봉이 잘라졌다는 것이 살아남은 건곤십삼봉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목봉과 연검이 부딪치는 순간에 연검의 방향이 틀어져 사선(斜線)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조자경의 검공이 놀라울 정도로 빠르고, 순간의 변화를 일으킬 만큼 초식을 깊이 깨우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흡(吸)!’ 조자경은 조금도 멈추지 않았다. 사내의 목을 베고 지나간 연검으로 다른 목봉 한 개를 감싸안아 머리 위로 흘려버렸다. 이어서 사내의 가슴팍으로 파고들며 빙글 신형을 돌려세웠다. 연검도 그녀의 신형과 함께 빙글 돌았고, 불행히도 연검 끝에 사내의 가슴이 걸려버렸다. 이번에는 조자경도 대가를 치렀다. 어느 틈에 후려쳐 온 목봉에 어깨를 맞아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단지 맞았다는 느낌만 있을 뿐 아픔은 없지만 어깨뼈가 으스러진 것 같았다. 쉬익! 쉬익……! 살아서 꿈틀거리는 목봉들이 먹이를 노리는 독사 떼마냥 달려들었다. 그리고 조자경은 더 이상 공격하거나 수비할 만한 기력이 없었다. 기력이 남아 있다 해도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육신이 움직이기를 거부했겠지만. “그만!” 조자경은 갈천상이 나무 위에서 뛰어내리는 모습을 보며 주저앉고 말았다. “이제는 본인이.” 갈천상은 품 속에서 묘하게 생긴 병기를 꺼내들었다. 길이는 손목에서 손가락 끝만하고 두께는 손가락 두 개를 합쳐 놓은 정도다. 끝은 뾰족하고 어찌 보면 붓의 형태를 띠기도 했다. 갈천상은 자루 쪽에서 실을 풀어냈다. ‘천잠사(天蠶絲)……’ 조자경은 천잠사를 본 적이 없다. 하나 회색 빛을 띠고 물결에 햇볕이 비칠 때처럼 반짝반짝 빛을 내는 실이라면 천잠사밖에 없다. “비추(飛錘)!” 왕국용은 갈천상의 병기를 알아보았다. “살 사람은 살고 죽을 사람은 죽어야지. 살 사람의 상처가 심하니 빨리 끝냅시다.” 갈천상은 ‘비추’라고 밝혀진 병기를 머리 위로 빙빙 돌렸다. ‘살 사람의 상처가 심하니 빨리 끝냅시다.’ 조자경은 갈천상의 말을 곱씹었다. 갈천상은 분명히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다. 그것도 몹시. 전과는 다르다. 중상을 입고 쓰러졌을 때는…… 모른다, 그때도 지금과 비슷한 말을 했는지. 그렇다면 진심으로 자신의 안위를 걱정한 지가 꽤 되었다는 말이 되는데…… 조자경은 손 끝 하나라도 움직일 기력이 된다면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싶었다.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 사람…… 나를 사랑하고 있어. 맞아. 맞을 거야. 가혹하게 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사랑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조자경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갈천상이 비추를 날리는 모습은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었다. 조자경은 갈천상이 싸우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다. 전에도 그녀 앞에서 싸운 적이 있지만, 그때는 경황이 없어 어떻게 싸우는지 관찰할 틈도 없었다. 무공의 진수(眞髓). 갈천상은 그걸 보여주었다. 취리릭……! 비추가 날았다. 그리고 건곤십삼봉 중 한 명의 이마에 구멍이 뚫리며 뒤로 넘어가 버렸다. 건곤십삼봉은 공격다운 공격을 하지 못했다. 허공에서 빙빙 도는 비추의 사정거리는 목봉보다 길었고, 여러 개의 목봉이 한꺼번에 들이치는 것도 허공을 맴도는 비추를 매단 천잠사에 막혀 허(虛)만 드러냈다. 한 명이 목봉을 찔러왔다. 그는 비추 역시 실로 묶여진 병기이니만치 한 사람이 희생을 각오하고 천잠사의 움직임을 막는다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결과는 오판(誤判)이다. 갈천상은 천잠사를 빙빙 돌리는 것뿐 아니라 일정 목표를 향해 일직선으로 던지는 것에도 능숙했다. 그것만이 아닐 것이다. 그가 비추를 꺼내든 이상 비추로써 할 수 있는 모든 공격과 수비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게다. 갈천상은 비추로 목봉 전단부를 정확히 가격했다. 목봉은 허공으로 튕겨올랐고, 연이어 날아간 비추가 사내의 목을 뚫어버렸다. 또 하나 신기한 점이 있다. 일반적으로 어떤 병기든 인간을 찔렀을 경우 다시 빼내는 데 힘이 필요하다. 인간의 살이 병기를 이로 깨물 듯이 물어버리기 때문이다. 그 힘은 의외로 강해서 잘못 찔렀을 경우에는 병기를 놓아버려야 하는 경우까지 발생한다. 충분히 주의를 하지만 실제 싸움에서는 왕왕 벌어지는 불상사다. 비추는 그런 점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허공을 찔렀을 때처럼 자유자재로 찔러들었고, 빠져 나왔다. “이제는 내가 말하리다. 그만.” 천목봉인 왕국용이 싸움을 중단했다. 건곤십삼봉 중 살아남은 사람은 그 혼자였다. “무의미한 싸움이오. 더 이상 수고를 끼친다면 무신(武神)에 대한 모욕이라 생각해서 그만 끝내겠소. 인생 막바지에서 이런 무공을 보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하오. 진심으로.” 왕국용은 포권지례까지 취해 보였다. 갈천상은 비추를 거둬들였다. 퍼억! 갈천상은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왕국용은 결코 비겁한 무인이 아니다. 그는 진심으로 갈천상의 무공에 반했고, 그의 수고를 끼치지 않기 위해 자진(自盡)을 택했다. 조자경은 갈천상에게 안겨 있었기에 왕국용이 죽는 모습을 지켜보게 되었다. 보기는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웃었어.” “……” “웃으면서 죽었어.” “……” “행복한 사람이야. 웃으면서 죽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아.” 갈천상은 조자경을 안고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산 밑에 건곤방 무인들이, 방금 유명을 달리한 건곤십삼봉의 자식과 제자들이 산을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2권 운귀산독립(雲歸山獨立) 구름이 걷히고 산들이 우뚝 솟아 있으니 3권에서 계속… 第十七章 유월번상(六月繁霜:유월에 날치는 서릿발) 쫦 1 쫦 건곤방 무인들은 봉을 꼬나쥐었다. 그들은 광신도(狂信徒)들처럼 오직 갈천상과 조자경을 죽이겠다는, 죽이지 못한다면 차라리 서 있는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죽겠다는 일념이 가득 찬 듯했다. 갈천상은 혼절해 버린 조자경을 왼쪽 어깨 위로 들쳐 멨다. 아무리 고절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한 팔을 사용하지 못하는 현실은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특히 비추는 한 손으로 사용할 수 없는 병기다. 굳이 사용하려 들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절반의 위력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갈천상의 얼굴에는 한 점의 동요도 비치지 않았다. 건곤방 무인들이 주위를 빙 둘러싸고, 다른 곳을 포위하고 있던 무인들도 속속 모여드는 판인데도 그는 마치 유람이나 나온 듯이 태연자약했다. “어른들은?” 건곤방 무인 중 한 명이 물었다. 그가 말짱하게 걸어나오고 있으니 건곤십삼봉이 당했음은 불문가지다. 두 사람 모두 걸어나오고 있다면 싸움이 없었다고 위안이라도 할 텐데, 여인이 어깨에 둘러메져 있으니 격투가 없었다고 위안 삼을 수도 없다. 특히 여인의 몸에 난 상처는 봉에 가격당한 상처이지 않은가. “먼 길을 갔지.” 앞을 가로막은 무인은 단 몇 마디 말로 건곤방 무인들의 흥분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려 하고 있었다. 건곤십삼봉이 죽을지언정 패배를 자인하고 물러서지는 않을 사람들이라는 것은 건곤방 무인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으리라. 그런데도 불구하고 굳이 자신의 입에서 ‘죽음’이라는 말을 꺼내게 하려는 의도가 무엇인가. 또 그런 말을 들은 건곤방 무인들은 어떤 행동을 하겠는가. 반응은 즉각 나타났다. “이런 죽일 놈!” “이놈을 당장 때려죽여야……” 건곤방 무인들의 봉 끝에서 살기가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건곤방 무인 중 한 명이 흥분하는 건곤방 무인들을 제지하고 앞으로 나섰다. 제일 먼저 갈천상에게 물음을 던진 무인이다. “당신 혼자?” “일부는.” “일부라면 몇 분이오?” “그게 중요한가?” “말해 주시오.” ‘심계(心計)가 깊다.’ 갈천상은 흥분하는 기색이 전혀 비치지 않는 무인을 보면서 한 사람을 떠올렸다. 금표노봉(金豹露棒) 왕동예(王董霓). 갈천상이 인정하는 몇 되지 않는 사람들 중 한 명이 왕동예다. 능력이 있으면서도 죽은 듯이 숨어살 줄 알기에. 이미 이름을 널리 떨치고도 남을 나이다. 그런데도 그는 욕심이 전혀 없는 듯 ‘건곤방 일각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눈 앞의 무인이 금표노봉 왕동예라면 스스로 자진한 천목봉인 왕국용과는 부자간. 아비가 죽었는데도 태연할 수 있는 자식은 세상천지에 흔치 않다. 그런 자식이 있다면 둘 중에 하나다. 어려서부터 학대만 받고 자라 오히려 아비가 빨리 죽었으면 하는 부류와 아니면 왕동예처럼 심계가 지독히 깊은 사람. 갈천상은 확신했다. 눈 앞의 무인이 금표노봉 왕동예라고. 왕동예는 건곤방 무인들을 격동시켰고, 또 이제는 안정시키려고 한다. 자신이 죽인 사람들의 숫자를 말해 주고 나면 몇 합 만에 죽였느냐고 물어올 게다. 지독히 차분한 음성으로. “이 사람이 셋, 내가 아홉.” “몇 합 만이오?” 지극히 차분한 음성이리라고는 짐작했지만 눈 앞에 있는 무인이 내뱉은 음성은 갈천상마저 마음이 낮게 가라앉을 정도로 조용하고 나직했다. 살기만이 팽팽하게 흐르던 장내에는 어느새 깊은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고, 모두들 건곤방 무인과 갈천상의 대화에 귀기울이는 상황이 되었다. “구 합.” “일 합에 한 명! 그게…… 가능하오?” 심기가 깊은 무인도 이번에는 놀란 모양이다. 또한 그가 놀라는 모습은 다른 무인들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살기가 흉험할 때 들어도 사기를 꺾기에 충분한 말이다. 일 합에 건곤십삼봉이 한 명씩 거꾸러졌다니. 아니다. 다른 상황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면 거짓말로 여기고 더욱 사나운 기세로 달려들었으리라. 그러면 피를 보게 되고, 피를 본 무인들은 이성을 망각하게 되고…… 어느쪽이 몰살하든지 종국으로 치닫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지금 건곤방 무인들은 주춤거리고 있다. 왕동예로 생각되는 무인이 크게 놀라자 갈천상의 말은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자신들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착각 속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천목봉인께서 남긴 말씀이 있소. 건곤십삼봉이 무너진다면 물러서라고. 모두 물러섯!” 무인은 나직나직하게 말하다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건곤방 무인들은 전염병에 감염이라도 되듯이 길을 열었다. “가시오.” 갈천상은 조자경을 들쳐 멘 채 걸었다. 일부는 봉 끝을 바르르 떨기도 했지만 무시했다. 왕동예가 건곤방 무인들을 통솔한다면 섣불리 공격해 올 사람은 없다. “선친의 빚은 잊지 않지.” 갈천상이 왕동예의 곁을 스쳐 지날 때 왕동예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렇군.” “……?” “오직 한 사람…… 천목봉인 왕국용은 자진했지. 무인의 협기(俠氣)려니 생각했는데, 자네 금표노봉 왕동예를 살리려는 속셈이었어. 나와 맞서면 죽음뿐이라고 여긴 게지. 적어도 복수라는 명분에서 자유롭게 풀어주고 싶었던 거야. 선친의 유훈을 잊지 마.” “그럴까?” “그럼.” 갈천상은 왕동예의 봉 끝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감지했다. 너무 미미해서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보지 못할 움직임이었지만 갈천상은 찰나간에 일었던 변화를 감지했다. ‘격동…… 호승심…… 심기가 깊고 야망이 있으니…… 위험한 자군.’ 왕동예도 같은 생각이었다. ‘부동심(不動心)! 도대체 어떤 심공(心功)을 익히고 있기에 이토록 흔들리지 않는단 말인가! 나이도 나보다 훨씬 아래거늘. 세상이 넓은 줄은 알지만…… 반드시 넘어서야 할 태산이다.’ 어깨를 스쳐 지나자 두 사람은 함구했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지도 않았다. 쫦 쫦 쫦 성심의의 말대로 느지막하게 도착한 일음마봉은 말 등에 축 늘어져 있는 열세 구의 시신을 접하면서 말을 잃었다. “뭐, 뭐야! 이, 이게 도대체…… 거, 건곤십삼봉이 당했어?” 천지가 무너지는 느낌. 바로 그랬다. 일음마봉에게 건곤십삼봉이라는 존재가 껄끄러운 존재인 것만은 틀림없지만 건곤방을 지탱하는 큰 기둥이었던 것도 틀림이 없다. 그들이 모두, 한꺼번에 낙성살녀에게 당했다는 사실은 정녕 믿을 수 없었다. “그, 그 연놈의 시체는……?” “보냈습니다.” “뭐, 뭐……? 지금 그걸 말이라고……” “제 아비가 죽었습니다. 이들 중에는 아비가 사부가 죽어 분루(忿淚)를 뿜어내는 자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보냈습니다.” “……” 일음마봉은 눈을 부릅뜬 채 이를 악물었다. 낙성살녀가 그토록 강했단 말인가. 하기는 건곤십삼봉이 몰살했으니 강한 것이야 틀림없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건곤방 무인들이 얌전히 길을 비켜줄 정도로 강하단 말인가. “소방주, 복수를 해주시겠습니까?” 일음마봉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옛날…… 조항을 만났을 때와 기분이 비슷했다. 전력을 다하면 상대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목숨이 위태로울 것 같기도 하고…… “건곤방 휘하에 들어서 아직껏 아무 요청도 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 이번에는 요청합니다. 소방주, 복수를 부탁합니다.” 왕동예는 공경스럽게, 하나 단호하게 말했다. ‘이런, 제길!’ 후회가 막급했다. 성심의의 말을 듣는 게 아니었다. 건곤십삼봉이 낙성살녀를 치고자 달려갔다는 말을 들었을 때 바로 달려왔어야 옳았다. 그랬다면 설혹 건곤십삼봉이 무너진다 할지라도 낙성살녀의 무공은 볼 수 있었을 테고, 행동도 그에 맞게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과 이것은 전혀 다르다.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지 않는가. 더군다나 왕동예의 요청대로 하면 건곤방 무인들의 지원 없이 혼자서 낙성살녀를 상대해야 하지 않는가. 그렇다고 차마 아버지에게 말할 수도 없다. 그렇게 하면 건곤방 무인을 동원할 수는 있겠지만 차후 건곤방을 통솔하는 데 장애가 된다. 수하의 복수조차 제 손으로 하지 못한 방주를 누가 따르겠는가. 일음마봉은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선 기분이었다. “좋다. 모두 돌아간다. 낙성살녀는 어느쪽으로 갔나?” 왕동예는 갈천상이 걸어간 방향을 가리켰다. ‘성심의라면 무슨 수가 있을 수도……’ 일음마봉은 부지런히 건곤방으로 돌아왔다. 신법이 날랜 무인 두 명으로 하여금 낙성살녀의 뒤를 쫓게 했으니 그들을 놓칠 우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 그보다는 낙성살녀를 무슨 방법으로 죽이느냐는 문제가 급했다. 무공에는 자신있지만 건곤십삼봉을 한꺼번에 상대할 정도가 아닌 것은 분명하니까. “성심의!” 방문을 왈칵 열어제치며 성심의를 부르던 일음마봉은 딱딱한 박달나무처럼 굳었다. 방 안에서 짙게 풍기는 혈향(血香)! 입술이 말라왔다. 석산을 다녀오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인 일음마봉은 전신의 모든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조심스럽게 향촉(香燭)이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창을 꺼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만 조립은 하지 않았다. 좁은 방 안에서는 장봉(長棒)보다는 단봉(短棒)이 유리하니까. 화섭자를 꺼내 향촉에 불을 붙이자 어둠이 스르륵 물러가며 방 안 정경을 골고루 비춰주었다. ‘음……!’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간신히 억눌러 참았다. 둘째 형 사건 후로 건곤방에 들어와 호의호식하던 겸선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술에 취해 널브러져 있다. 다른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등에 새겨진 매화문양(梅花紋樣). ‘와…… 완벽한 일봉오공(一棒五空)!’ 일음마봉은 재빨리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만약 주위에 누군가가 있다면 일음마봉이 상대할 수 없는 거인(巨人)임에 틀림없다. 겸선의 시신이 그걸 말해 준다. 일반적으로 건곤방에 투신한 문도는 일 년 동안 기본공만 수련한다. 이 년째는 권각(拳脚)을 단련하고, 정작 봉을 잡게 되는 것은 삼 년째에 들어서면서부터다. 그로부터 또 일 년 동안은 봉을 몸에 붙이는 수련만 한다. 식사를 할 때에도 봉을 놓는 법이 없어, 한 손으로는 봉을 잡고, 다른 한 손만으로 식사를 한다. 잠을 잘 때에도 봉을 놓아서는 안 된다. 측간을 갈 때에도, 목욕을 할 때에도…… 자나깨나 언제나 봉을 잡고 있는 문도는 틀림없이 입문 삼 년 차이다. 초식을 수련하는 것은 사 년째부터. 그때쯤이면 봉이 몸에 붙을 대로 붙어 초식을 빨리 숙성시킨다. 입문할 때부터 봉술에 자질이 있는 자를 골랐다지만 문일지십(聞一知十)이니 하는 천재들도 따르지 못할 만큼 수련 진척이 빠르다. 입문 사 년째가 끝나갈 무렵이면 봉을 내질러 판자 하나쯤은 꿰뚫을 경지가 된다. 그 다음부터는 본인의 자질 여부에 따라 수련도가 엄청나게 달라진다. 어떤 자는 오 년째 되는 해부터 직책을 부여받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육 년이 되는 해에 직책을 부여받는다. 일봉오공…… 이것은 모든 봉인(棒人)들의 꿈이다. 단 한 번의 손짓으로 정확히 다섯 구멍을 꿰뚫어야 한다. 구멍의 깊고 낮음은 상관없지만 깊이가 일정해야 하며, 일봉오공 역시 사람이 만든 흔적인 만큼 처음과 나중의 순서는 있지만 처음과 나중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처럼 찰나간에 이루어져야 한다. 가격하고 회수하는 것이 신의 경지에 이르러야만 가능하다고 해서 신봉(神棒)의 경지라고 불리는 수법. 누가 이런 무공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등에 식은땀이 촉촉이 배었다. 더욱 큰 문제는 그런 무공을 지닌 자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겸선을 죽일 리 없으니까. 단봉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자신의 거처에까지 침입하여 겸선을 죽일 정도라면 자신 역시 죽일 마음을 굳혔을 테니까. 낙성살녀에 대한 생각은 이미 천리 밖으로 달아난 후였다. “으음! 일봉오단(一棒五段)!” 이번에는 기어이 신음을 토해 내고 말았다. 역시 신봉의 솜씨다. 겸선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성심의의 시신이 침상 앞에서 발견되었다. 사지를 큰 대(大) 자로 벌리고 눈을 부릅뜬 채로 굳어져 있는. 성심의는 이마에 큰 구멍이 뚫렸다. 뚫린 구멍에서 흘러나온 피와 뇌수가 아직 응고되지 않은 점으로 봐서 죽은 지 오래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일음마봉의 관심을 끌어당긴 것은 이마에 뚫린 구멍이다. 언뜻 보면 봉질을 한 번 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 아니다. 성심의를 죽인 자는 정확히 봉질을 다섯 번 했고, 정확히 한 구멍에 집중시켰다. 한 점에 연속된 다섯 번의 공격, 한 치의 틈도 없이 정확히 꿰뚫고 들어갔다. 이러한 공격은 어떠한 외문기공(外門氣功)을 익힌 고수라도 죽일 수 있다. 성심의는 첫 번째 공격에서 유명을 달리했으리라. 봉이 이마를 뚫고 들어가 머리뼈를 으스러트렸을 테니까. 그는 움직인다. 하나 상대는 움직임을 용납하지 않고 두 번째 공격을 가해 온다. 너무 빠른 속도다. 두 번째 공격에서는 머리의 중간 부분까지 관통당했으리라. 피와 뇌수가 뿜어져 나오겠지. 이번에도 상대는 용납하지 않고 세 번째 봉질을 해댄다. 머리 관통…… 끝이다. 상대는 세 번 만에 성심의를 죽였다. 그럴 필요까지도 없었다. 제일 처음 내지른 봉에 성심의는 혼을 띄워보냈으니까. 그런데도 상대는 남은 두 번의 공격을 더 했다. 완벽한 일봉오단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버지…… 아버지밖에 없어. 이런 봉술을 지닌 사람은…… 아버지가 나섰어!’ 일음마봉은 등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쫦 2 쫦 조자경은 낯선 감촉을 느끼며 서서히 깨어났다. 뼛골이 아리도록 아픈 느낌은 낯설지 않았다. 지난 반 년 동안 당한 상처는 깊고 낮음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한결같이 극심한 두통과 이를 악물게 하는 아픔을 수반했다. 이번이라고 별다를 게 없다. 상처에 금창약(金瘡藥)을 덕지덕지 처바르고, 준비해 둔 헝겊으로 둘둘 감싸면 모든 치료가 끝난다. 상처가 너무 깊으면 아픔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환단(丸丹)을 복용하기도 하지만. 그녀가 정신을 수습하면서 느낀 것은 아프다는 동통(疼痛)과 숨이 막힐 듯한 답답함, 그리고 당장이라도 옷을 벗어던지고 계류(溪流)에 몸을 던지고 싶은 더위였다. 답답함은 낯선 느낌이었다. 지난 반 년 동안 마음이 답답한 적은 많았지만 육신이 갑갑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좁은 암굴(暗窟)에 갇힌 듯 갑갑하다. 더위는 낯설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갈천상은 극도의 인내를 요구했다. 바람이 뼛골을 아리는 혹한 속에서도 한뎃잠을 자기가 일쑤였다. 그가 여기서 잔다고 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구더기가 스멀거리는 곳이라도 그가 여기서 쉰다고 하면 쉬어야 한다. 그는 조자경이 고통을 받으면 받을수록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처럼, 혹은 심술이 덕지덕지 붙어 오장칠부(五臟七腑)를 지니고 있는 사람처럼 역경을 선물했고 이겨내기를 강요했다. 더위라고 다를 게 없다. 그는 계절이 여름으로 들어서면서부터 더위가 한풀꺾이는 저녁 무렵에는 잠을 자고, 뙤약볕이 살갗을 익히는 정오 무렵에는 길을 걸었다. 햇볕을 정면으로 받으면서. 그런 면에서는 더위도 익숙하다. 하나 지금 느끼는 더위는 그런 정도가 아니다. 찜통 속에 들어간 듯 숨이 막힌다. 물 한 모금이라도 먹을 수 있으면…… 후끈한 열기를 동반한 바람이라도 쐴 수 있다면……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눈을 떴다. 짙은 어둠이 제일 먼저 반겼다. “음…… 음……!” 조자경은 신음을 토해 냈다. 아프고, 덥고, 답답하고…… 그때 그녀의 귀에 무슨 소린가 들렸다. ‘움직이지 마라’라는 소리 같은데…… 부욱! 옷이 찢어지는 소린가? 어쨌든 무엇인가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린 다음부터 갑갑함과 더움이 한결 가셨다. 아니, 살갗에 스치는 바람이 시원하기까지 했다. “이레 만이다. 오랫동안 잤지.” 음성이 분명하게 들렸다. 지금은 밤인가 보다. 세상이 시커멓게 보였던 것은 눈이 어둠에 적응하지 못한 탓이고…… 한밤이지만 밝은 달과 총총한 별빛이 있어서 그렇게 어둡지 않은 밤이었다. 달, 별, 검은 하늘, 나무…… 세상이 뚜렷하게 보였다. 그 속에 낯익은 사내 얼굴도 섞여 있었다. ‘이레……’ 조자경은 ‘이레’가 얼마 동안인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이레라는 말이 어제처럼도 들리고 그제처럼도 들렸다. 몸을 움직거리려던 조자경은 신음을 토해 내며 눈을 감았다. 등, 어깨, 복부…… 전신에서 극심한 통증이 엄습했다. 육신이 조각조각 끊어지는 느낌이라면 올바른 표현일까? 갈천상을 따라다니며 어지간한 일에는 눈썹 한 올 까딱하지 않는 독심(毒心)을 키웠다고 자부했건만 이번 고통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잖아! 움직이지 마라. 고통만 심해져.” 조자경은 어렴풋이 들리는 소리를 기억에 간직한 채 다시 혼미한 상태로 빠져 들었다. 조자경이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발갛게 달아오른 햇살에 눈이 부신 한낮이었다. 이번에는 전처럼 갑갑하다거나 덥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초록으로 빛나는 나뭇잎이 눈부신 햇살을 가려주는 것으로 보아 나무 그늘에 누워 있는 것 같았다. 몸이 흔들거렸다. 참으로 묘한 기분이었다. 허공에 걸려 있는 기분이랄까? “깼구나.” 갈천상의 음성이 지금처럼 포근하고 다정하게 들리기도 처음이다. 전에도 부상을 입은 적이 많고, 지금처럼 중상(重傷)을 입어 혼수상태를 들락거린 적도 여러 번이지만, 그리고 그럴 때마다 갈천상이 성심성의껏 병구완을 해주었지만 음성은 항상 냉막하게 들렸는데. “며칠이나 지났어?” 조자경은 바짝 말라버린 입술을 달싹거렸다. 갈천상이 물 묻은 나뭇잎으로 입술을 축여주었다. 가슴팍 위밖에 보이지 않는다. 역시 허공에 누워 있다. 전에도 이렇게 잔 적이 많다. 그물 양 끝을 나뭇가지에 묶어놓고 그 사이에 몸을 뉘면 푹신한 침상이 따로 없다. 바람이 불지 않는 곳, 햇볕을 직접 받지 않는 적당한 장소만 고르면 노숙(露宿)도 그리 나쁜 편은 아니다. “이번에는 오래 자더군. 모두 한 열흘 잤을 거야.” “상처는?” “아물려면 앞으로도 보름은 더 있어야 될걸?” “건곤십삼봉은…… 죽었겠지?” 건곤십삼봉과 싸우던 광경이 먼 옛날 일처럼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래.” “용케도 살아나왔네. 건곤방 무인들이 벌 떼처럼 모여들었을 텐데.”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삶이 있지.” “풋! 멋있는 말이네. 누가 한 말이야?” “내가.” 확실히 다정다감하다. 아닐지도 모른다. 몸을 훌훌 털고 일어서면 언제 그랬냐 싶게 전처럼 냉혈한(冷血漢)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하나 조자경에게는 짧은 순간이나마 지금처럼 오붓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짬이 그리웠다. 절실하게. 지난 반 년 동안 절실하게. “일어나고 싶어.” “아직은 안 돼. 조금 더 누워 있어.” “얼마나?” “하루나 이틀쯤.” “여긴 어디야?” “산 속.” “그건 알겠는데……” “다른 건 몰라도 돼.” 조자경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목구멍 속에서부터 기어나온 ‘이제 어디로 갈 거야?’ 하는 말을 도로 삼키기 위해서. 괜히 딱딱한 말을 꺼내 달콤하기만 한 시간을 축내기 싫었다. 문득…… 조자경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바람이 불어오는데…… 살갗에 닿는 느낌이 색다르다. 이건 마치 알몸으로 맞는 바람 같다. 그러고 보니 살갗에 부딪치는 햇살도 여느 때와 다르다. 조자경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을 보았다. “학……!” 이상한 탄성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자신은…… 알몸으로 누워 있지 않는가. 그물 위에 누워,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알몸…… 이게 도대체…… “말흉(抹胸`:`가슴가리개)은 어쩔 수 없이 벗겼다. 상처가 심했어.” 갈천상도 조자경의 마음을 읽었는지 어색하게 말했다. 조자경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차마 갈천상의 얼굴을 마주볼 수 없었다. 알몸을 처음 보인 것도 아닌데……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빨간색 고의(袴衣) 한쪽이 그녀의 비밀을 감싸고 있다는 것. ‘두 번째야. 이번이……’ 삭막하게 변한 그녀의 마음에 다시 부드러운 바람이 스며들었다. 타닥! 타탁……! 모닥불에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는 꿩고기에서 제법 구미를 당기게 하는 냄새가 풍겨나왔다. “어디로 갈 거야?” 조자경은 무심한 표정으로 물었다. “백문장으로.” “……?” “네게는 강한 상대가 필요해. 정작 강한 상대는 백문장에 있지.” 조자경은 웃음을 함빡 지으려다 이어지는 말을 듣고는 고개를 숙여버렸다. 일그러진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 표정을 보이면 갈천상이 ‘봐, 내가 이겼지?’ 하며 즐거워할 것 같았다. 하루나 이틀이면 일어날 수 있으리라던 조자경은 닷새가 지나서야 간신히 몸을 추슬렀다. 그로부터 제 발로 걸어다니기까지가 또 보름, 검을 수련하기까지는 또 열흘 가까이 지나야 했다. 갈천상은 조자경이 두 발로 땅을 딛는 순간부터 옛날로 돌아가 버렸다. 묻는 말 이외에는 입을 열지 않았고, 훈훈한 미소도 지어주지 않았다. 입을 열었다 하면 송곳으로 가슴을 찌르는 듯한 아픔을 주었다. 그런 사람에게는 도저히 연정(戀情)을 품을 수 없다. 갈천상이 사내로 보이기 시작할 즈음, 그는 다시 멀찌감치 떨어져 나간 것이다. “실연(失戀)당한 적 있어?” “……” 갈천상이 입을 다물었다. “꼭 그런 사람 같아. 여자를 사랑해 본 적도 없지? 그랬을 것 같아. 빙정신소가 충고해 줄 때만 해도…… 나는 절대로 내 사랑을 놓치지 않겠다고 생각했거든. 훗! 이제는 이해할 수 있어. 아마 빙정신소도 나와 같은 과정을 겪었겠지?” “……” “혼자서 애를 끓다 ‘그래, 내가 정리하자’ 이렇게 마음을 돌리고, 그러다가는 또 보고 싶고…… 미워지는 건가? 이상한 것은…… 미운 사람은 바로 옆에 있는데 애꿎게 다른 사내들에게 화풀이를 하게 된단 말야.” “……” 갈천상이 나뭇가지로 모닥불을 휘저었다. 약해진 불길이 다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난 한 번 더 기회를 가지고 싶어. 좋아. 자존심이고 수치심이고 날아간 지 오래니까…… 나…… 사랑하면 안 돼?” “……” 갈천상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원수진 듯 모닥불만 노려보았다. 갈천상이 조자경의 물음에 대답한 것은 다시 이틀이 지나 조자경의 상세가 완쾌되었을 때였다. “죽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나?” “……?” “너는 죽을 여자야.” “그 소리는 귀가 따갑게 들었어.” “살아라. 살 수만 있다면…… 사랑이란 것…… 해보자.” 조자경의 얼굴이 더 이상 환해질 수 없을 만큼 밝아졌다. “정말! 지금 그 말……” “지금보다 배는 강해져야 살 수 있어.” “알았어. 알았다구!” 조자경은 웃어야 좋을지 울어야 좋을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크게 웃고도 싶고, 울고도 싶었다. “배 정도 가지고는 안 될지도 모르지. 세 배, 네 배…… 천하무적이 되어야만 살 수 있어.” 조자경의 얼굴이 굳어졌다. 갈천상은 농담을 하고 있지 않다. 그는 진심을 말하고 있다. 전부터 ‘너는 죽어야 할 여자’라는 소리는 많이 들었지만 귓가로 흘려듣곤 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토우를 기억해?” 조자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난생처음 접한 완벽한 무공이었다. 그 당시는 이런 무공을 지닌 사람 서른여섯 명만 있으면 백문장이 일약 오대 패강으로 발돋움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래서 갈천상 앞에서 옷까지 벗지 않았는가. 갈천상은 그때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백문장을 일으켜 세웠지만 지금도 토우와 같은 무공을 지닌 서른여섯 명이면 누구와 싸워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짬이 생길 때마다 옛 기억을 되새겨 연구하고 있거늘. “그건 내 무공이 아냐.” “그, 그럼!” 조자경은 크게 놀랐다. 포영매 갈천상…… 무에 관한 한 귀신이라는 그마저 곤궁으로 빠트린 무공, 아니 조자경이 지금도 아쉽게 생각하고 있는 무공이 갈천상 것이 아니라니! “네가 싸워야 할 진(陣)이 바로 그거야.” 조자경은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누, 누가 그런 무공을……” 한참 만에 입을 뗀 조자경은 고작 그런 물음밖에 던질 수 없었다. “훗! 자신이 없어졌나?” 자신이 없다. 예전에 비하면 상대도 되지 않을 만큼 강해졌지만 단지 흙 조각으로 엮어놓아도 그토록 위맹해 보이는 진법을 몸소 상대하기에는 아무래도 역부족이다. 그래, 자신이 없다. “무, 무극진결로…… 상대할 수 있어?” 확인해 보고 싶었다. “몰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밖에는……” 갈천상은 잔인하게 불확실만 이야기한다. “이제 죽어야 한다는 말이 실감나나? 그럼 사랑 타령은 그만 해.” 갈천상은 먼저 걸음을 떼어놓았다. 그때, “하겠어!” 조자경은 거의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갈천상이 걸음을 멈췄다. “토우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진이라도 상대하겠어. 나는…… 강해질 거야. 그래서 꼭 너와 사랑을 맺고 말겠어!” 마지막 말은 거의 울음에 가까웠다. “전부터 생각했는데…… 너는 미련한 여자야.” “도와줘. 강해질 수 있도록 도와만 줘.” “한 가지 더 충고할까? 만검진천 전종대, 빙정신소 유건지, 일심향불 백무, 벽산개부 고규철. 모두…… 포기했어. 그들이 똑똑한 거지.” 조자경은 이제야 알았다. 갈천상이 그들을 떠난 게 아니다. 그들이 발을 뒤로 뺐다. 그들은 그게 수치스러웠고, 그래서 갈천상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게다.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도 스스로 제 갈 길을 가지 못하고. 갈천상을 죽이겠다? 갈천상이 ‘나를 죽여 달라’고 했다? 갈천상을 죽여야 자신들이 살 수 있다? 모두 자괴심의 발로에 지나지 않는다. 갈천상은 죽여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고, 서로 죽고 죽일 만한 원수지간도 아니다. 자신들에게 그만한 모욕을 주었으니 토우진을 깨지 못한다면, 그런 무인을 발견해 내지 못한다면 죽여버리고 말겠다는 광증(狂症)에 지나지 않는다. 무극전에서 유건지가 한 말도 이해가 된다. 그들은 토우진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은 게다. 실제로 존재하는 줄 번연히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포영매 갈천상이 최고만을 추구하는 무인으로 남아주기를 기대하고 있는 게다. 그러니…… 그렇게 말하는 그들 자신들의 마음은 얼마나 쓰리고 아팠을까. 그들이 왜 백문장에 왔는지도 분명해졌다. 그들은 갈천상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자경이라는 여자를 보기 위해서 왔다. 갈천상이 백문장을 일으켜 세우는 대가가 무엇인지는 자명하지 않은가. 조자경이 토우진을 깰 만한 인재인가? 그것이 그들의 관심사였다. 아마도 그들은 지금도 백문장에서 기다리고 있을 게다. 갈천상과 조자경이 말 한 마디 없이 사라진 순간부터 무공수련을 위해 고행(苦行)을 떠났구나 생각했을 테고, 조자경이 돌아온 다음에는 어느 정도의 진척이 있었는지 가늠하려 들 게다. 백문장으로 돌아간다. 풋! 돌아가면 바빠지는 사람은 조자경이다. 갈천상은 강적이 백문장에 있다고 했지만, 그들을 찾아나설 필요도 없이 그들 스스로 다가올 게다. 조자경마저 뒤로 발을 뺐다면…… 그래서 그런 말을 했는가? 네 몸과 마음은 모두 자기 것이라고? 뒤로 물러서지 못하도록 미리부터 쐐기를 박아왔단 말인가? 난주일검 장상부는? 그도 절진을 전수받았는데…… 그는 아직 토우진의 존재를 모른다. 어쩌면…… 조자경이 토우진을 깰 만한 인재가 아니라고 판단되면, 난주일검 장상부에게 토우진의 존재를 알려줄지도 모른다. 이것도 저것도 안 된다면…… 여태껏 그래 왔듯이 미련없이 떠나갈까? “나는 할 거야!” 조자경은 갈천상이 불쌍했다. 사랑스러웠고, 알 듯하면서도 모르던 부분, 갈천상의 내면에 숨겨진 부분이 무엇인지도 알았다. 그는 일생을 걸고 추구하는 목표가 있기에 사랑마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사내다. 그녀는 갈천상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품에 몸을 던졌다. 갈천상은 내치지 않고 그녀의 작은 동체를 꼭 껴안았다. “이 산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다시 강해지는 거야.” “이 산에 머무르는 동안은 마음의 짐을 떨쳐 버리고 사랑해 줘.” 허리를 휘어감은 갈천상의 손에서 힘이 느껴졌다. 갈천상은 이름도 모르는 야산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예전의 그로 돌아왔다. 무심했고, 말이 없었고, 눈빛이 독수리처럼 빛났다. 조자경도 낙성살녀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명백한 목표가 생겼기에 더욱더 강한 모습으로 탈바꿈하고자 스스로 다짐했다. 그것만이 사랑하는 사람의 짐을 덜어주는 길이고, 자신의 사랑을 완성하는 길이니까. 설혹 토우진을 깨지 못하고 죽는다 하더라도 후회는 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산 속에서 나눈 사랑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니까. 이십여 리 길을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걸어왔지만 전처럼 삭막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갈천상의 몸짓 하나하나에서 따스한 정이 읽혀질 때마다 자신의 수련에 방해가 될까 가슴을 졸였다. 갈천상의 행동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조자경의 심정은 정반대의 상황이 된 것이다. 쫦 3 쫦 다각! 다각……! 겉보기에도 윤기가 자르르 흘러 명마(名馬)로 보이는 말이 노쇠한 말처럼 힘없이 말발굽을 떼어놓았다. “긴장하지 마.” 갈천상이 말했다. 조자경은 진기를 가득 모으고 금방이라도 면검을 뽑을 태세였다. “……” “백문장이 이십 리도 안 남았다. 싸울 필요가 없어.” “싸우고 싶어.” 조자경은 한곳을 노려보며 갈기를 곤두세운 맹수처럼 쏘아댔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맺힌다더니…… 조자경이 그랬다. 그녀는 본인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는 생각을 다짐한 후부터 강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만 보면 무예를 시험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조자경이 노려보는 곳, 그곳에는 무인인 듯한 사람 다섯 명이 육포(肉脯)로 점심을 해결하고 있었다. 행색은 남루하기 이를 데 없다. 갈천상과 조자경도 해질 대로 해어진 의복을 입고 있지만, 그들은 한결 더 했다. 거지와 다름없다면 과히 틀린 말이 아닐 게다. 씻은 지도 오래됐는지 헝클어진 머리와 때에 전 손, 얼굴…… 처음에 봤을 때에는 개방문도로 오인할 정도였으니 말하면 무엇 하랴. 그러나 그들이 내뿜는 기도(氣度)는 송곳과 다름없었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배고픈 맹수가 노려보고 있는 것 같은 날카로움이 배어나왔다. 조금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논둑길로 우회하고픈 마음이 생기게 만드는 무인들. 조자경이 투지를 일으킨 건 당연하다. “내가 만난 상대 중…… 가장 강한 것 같아.” 조자경은 반드시 싸우고 말겠다는 태도였다. “맞아. 가장 강해.” “그러면 싸워야지.” “……” “나서지 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겠는데…… 나 그렇게 약하지 않아. 그리고 약속할게. 토우진과 상대할 때까지 죽지 않겠다고. 됐어?” “아니. 죽고 사는 것은 본인 뜻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그런 말은 처음 듣네? 건곤십삼봉과 싸울 때에도 그런 소리는 하지 않았잖아? 그럼 저들이 건곤십삼봉보다 강하다는 거야?” “비슷해.” 조자경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갈천상이 강하다면 강한 게다. 하나 절강 무림에 건곤십삼봉과 비슷한 무공을 지닌 사람들이 어디 있을까? 있다면 역시 사대 패강 사람들뿐인데…… 설혹 그렇다 해도 토우진을 상대하려는 마당에 강적이 있다고 해서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조자경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사람에게는 으레 버릇이란 것이 있는데, 조자경의 버릇이라면 살기를 불태우기 전에 얼굴이 굳어진다는 점이다. “그나마…… 건곤십삼봉은 정종무공을 사용했다. 하나 저들은…… 살공(殺功)을 쓴다. 무공의 목적이 이기는 것이라면 저들의 무공은 죽이는 것이 목적이다.” “그렇다면……” “……” “비살문!” “불필요한 싸움이지만 싸우고 싶다 했으니 가봐라. 내가 말해 줄 것은 다 말해 줬으니까.” 갈천상은 말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멈춰세웠다. “당신이군요. 비살문 소문주 소화남.” “자경?” 양쪽이 서로 놀랐다. 조자경은 상대가 비살문 소문주와 백문장에서 일패도지(一敗塗地)한 십대고수 중 네 명이란 사실에 놀랐고, 그들은 조자경이 자신들과 비슷한 몰골을 한 데 놀랐다. 아니다. 그들이 놀란 점은 따로 있다. 그들은 멀리서부터 폭풍과 같은 예기를 느꼈다. 일남일녀가 말을 타고 오는 모습을 보았을 때부터. 살을 저미는 예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절강 무림에 이런 무인이 있었던가? 육포를 먹고는 있었지만 그들의 신경은 말을 탄 인형 두 점에 집중되었다. 병기를 바싹 움켜쥐는 것은 당연했다. 두 명…… 요즘 절강 무림을 휘젓고 있는 낙성살녀가 아닐까? 그런데 조자경이라니? 조자경이 언제 이토록 높은 무공을 익혔단 말인가. “그렇군요. 누가 오직 사람을 죽이는 데 목적을 둔 검공을 전개할까 궁금했는데 비살문이라면 전혀 이상할 게 없어요.” 조자경이 이 장 거리를 두고 말에서 내렸다. “괄목상대(刮目相對)라더니…… 놀라운 성취군.” “그만한 고생을 했으니까요.” “낙성살녀 중 살녀가 자경…… 이인 모양이군.” “자경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괜히 친한 것 같잖아요. 일면식도 없는 처지에.” “일흑으로부터 말을 들었을 텐데?” “호호호! 그랬나요? 제가 듣기론 출관을 하면 혼인신청을 하겠다던데? 그랬나요? 도주하기 바쁘지 않았어요? 아직도 제가 마음만 먹으면 마음대로 혼인할 수 있는 여자로 보여요?” “으음……!” 소화남은 신음을 내뱉었다. 조자경의 말대로 그녀는 과거의 조자경이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백문장이 아닐 뿐더러 조자경의 무공도 과거와는 전혀 다르다. 태어나면서부터 오로지 검만을 숭배하고 검을 위해 목숨까지 걸어온 자신과 비교해도 하등 손색이 없다. 무공을 보지는 않았지만…… 느낌만으로 충분하다. 그녀는 자신이 손댈 수 없는 곳으로 건너가 버렸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한 수 보여주지 않을래요?” “비무를 하겠다는 건가?” “비살문 소문주의 무공이 극히 뛰어나다는 소문은 전부터 들었어요. 한데 지금 보니 한층 더 강해진 것 같군요. 호기심이 생겨요. 얼마나 강한지.” “내가 이기면…… 혼인을 승낙할 텐가?” “그러죠. 당신이 이겼을 때면 나는 죽어 있을 테니 죽은 시신이야 구워먹든 삶아먹든 마음대로 하세요.” 소화남은 다시 한 번 느껴야만 했다. 조자경이 무섭게 변했다는 사실을. 그녀는 예전의 티없이 맑던 소녀가 아니다. 피를 알고, 무림을 알고, 죽음을 아는 여자가 되었다. “그러지. 구워먹든 삶아먹든 마음대로…… 하지.” 스르릉……! 소화남은 검을 뽑아들었다. ‘인재임은 알아봤지만…… 놀라운 성취다.’ 갈천상은 소화남을 보며 마음 속으로 경탄을 터트렸다. 자신이 조자경과 함께 절강 무림을 떠도는 동안 소화남 역시 가만히 앉아 있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행색이 말해 준다. 거지와 다름없는 몰골로 길바닥에 주저앉아 육포를 어적거리고 있을 정도라면 그 동안의 수행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알 수 있다. 비살문 소문주의 위치로는 쉽지 않은 수행이다. 일반적으로 온실에서 곱게 자란 화초들은 낭인들이나 하는 행동을 쉽게 따라하지 못한다. 마음의 준비도 그렇지만 주변 여건이 그런 행동을 하게끔 내버려두지 않는다. 소화남은 비영, 철곤, 칠살수, 화검과 함께 절강 무림을 떠돌았다. 비살문 지원을 조금도 받지 않고. 이들 다섯 명이 뭉쳐 다닌다면 가히 적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면 그들은 어디서 무슨 무공을 수련했고, 어떤 수행을 했는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지금 조자경이 그렇듯이 그들은 강하다고 생각되는 무인이 있으면 무작정 비무를 청했으리라. 상대가 되지 않는 적수라 해도 강하다는 이면에는 색다른 장점이 있을 게고, 그것이 무엇인지 탐구해왔으리라. 초심자(初心者)의 심정에서 무공을 다시 수련했다. 아버지의 영역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무공을 창안해 나가는 과정. ‘어려운 싸움이 되겠군.’ 갈천상은 조자경이 염려스러웠다. 파팟! 쒜에엑! 창창창창……! 비무는 쾌검을 비교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일체의 변식(變式)이 없는 쾌검. 조자경은 면검을 사용했고, 소화남은 협봉검(峽封劍)을 사용했다. 누가 언제 무슨 초식을 사용했는가? 검과 검이 부딪치며 날카로운 금속성을 연신 토해 냈지만 두 사람이 무슨 초식을 전개하는지는 분별해 낼 수 없었다. ‘첨(尖)! 첨을 연구하고 있다. 병기를 협봉검으로 바꾼 것도 첨을 극대화하기 위한 방편…… 첨에 관한 한 가히 절강 제일이다.’ 갈천상의 극찬은 마땅했다. 첨이라면 검보다는 창과 같은 병기에서 연구되는 심결(心訣)이다. 소화남은 검에는 다소 낯선 부분을 검공에 받아들였고, 나름대로 형식을 고정시켰다. 현재 맹공을 퍼붓고 있는 쪽은 조자경이다. 그녀는 호흡조차 가다듬을 시간을 주지 않고 맹공을 퍼붓고 있다. 소화남은 막기만 한다. 하나 막는 방법이 다르다. 조자경처럼 빠른 검식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신법으로 피할 수 있는 부분은 신법으로 피하고,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협봉검을 들어 막는다. 싸울 생각을 하지 않고 주변만 맴도는 형상이다. 하나 찰나의 틈이라도 벌어진다면 여지없이 허점을 찔러들어 목숨을 끊어놓으리라. 이런 검법은 신법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안법(眼法)이 뛰어나야 함은 물론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부동심(不動心)을 잃지 않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심법(心法)도 일대종사(一代宗師)의 수준까지 익혀야 한다. 장점으로는 진기 소모가 극히 적고, 가장 효율적이면서도 치명적인 공격을 할 수 있다는 점. 단점이라면 내력이나 속도가 월등히 강한 상대와 부딪치면 검 한 번 제대로 휘둘러보지 못하고 당할 수 있다는 것. 촤르륵……! 쒜에엑……! 후리고, 베고, 낚아채고…… 조자경은 한시도 쉴 틈을 주지 않고 바싹 따라붙으며 검공을 쏟아냈다. 면검은 이미 그녀의 일부분이 되었다.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움직이는 것처럼 마음으로 검공을 쏟아내는 경지가 되었다. 분명히 손에 쥐어야만 사용할 수 있는 병기이되, 그녀의 손에 착 달라붙은 듯한 치의 허점도 허용하지 않는 검공을 쏟아냈다. 팟! 팟……! 소화남은 유연한 신법으로 피해 내기에 급급했다. 간혹 가다 한 번씩 검을 내지르기는 했지만 곁에서 보기에는 무기력하게만 보였다. 하나 그 점…… 무기력하게 보이는 그 공격이 조자경을 얼마나 당황하게 만드는가는 갈천상만이 알아보았다. ‘무공은 비슷하다. 남은 것은 심력(心力)……’ 엇비슷한 무공을 가진 두 사람이 싸운다면 승부를 예측할 수 없다. 또한 일정 수준 이상의 무공을 지닌 사람은 모두 엇비슷한 무공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을 초절정고수와 절정고수로 구분지어 주는 것은 모순되게도 무공이 아니라 마음이다. 고수들 간의 싸움은 간발의 차이가 승부를 결정짓는다. 천(天)의 머리로도 예측할 수 없는 수많은 변화가 있어서 어제 이겼던 상대, 이겼던 무공이라 할지라도 오늘은 질 수 있다. 그것은 모두 마음의 조화에 따른다. 그래서 어느 문파이거나 무공 뒤에는 반드시 심공(心功)을 둔다. 칼을 먼저 날카롭게 갈고, 날카롭게 갈아진 칼을 유감없이 휘두를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갖는다는 의미에서 선후(先後)를 두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무공과 심공 사이에 선후란 있을 수 없다. 갈천상은 무극진결 속에 필생(必生)의 부동심(不動心), 평상심(平常心)을 깃들여놓았다고 자부했지만 조자경이 어느 정도 익히고 있는지는 전혀 모른다. 그것은 양(量)으로 측정할 수 없거니와 매 싸움마다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종잡을 수 없다. 알고 있다면 오직 싸우는 당사자뿐이리라. 한 치의 틈도 주지 않고 달려드는 조자경, 신법으로 사나운 공세를 피하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소화남. ‘이번 싸움은 누가 이기든 간에 큰 성과를 가져 온다. 죽지만 않는다면.’ 갈천상은 두 사람이 싸우는 모습에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조자경은 면검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알지 못할 거력이 내부 깊숙한 곳에서 솟구침을 느꼈다. 신이 난다고 말하면 적합할까? 진기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전신에 활력이 넘쳐 흘렀다. 소화남의 움직임이 명확하게 잡혔고, 그가 뻗어내는 검공도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소화남의 협봉검은 예측하지 못하는 부위에서 상상하지 못한 속도로 달려든다. 하나 전부 보였다. 문제는 전부 보면서도 따라잡지 못하는 신법인데…… 닭을 잡으려고 쫓아다니는 기분이랄까? 종종걸음으로 도망가는 놈이라 잡기가 까다롭기는 하지만 마음만 독하게 먹으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는 게 닭이다. 조자경은 소화남이 그렇게 보였다. 그녀는 정말 신이 났다. 불과 반 년 전만 해도 어땠는가? 고가촌의 망나니에게 겁탈을 당할 뻔하기도 했고, 비살문 십대고수라는 일흑의 무공이 하늘처럼 높아 보이기도 했는데, 비살문 소문주를 가지고 놀 정도로 강해지다니. 파르륵! 페에엑……! 조자경은 도도하게 무극진결을 풀어냈다. 그때, “잔심(殘心)!” 멀찍이 떨어져 구경하고 있던 갈천상이 천둥 같은 고함을 토해 냈다. ‘잔심?’ 존심(存心)과 방심(放心)은 상극되는 말이다. 무인이라면 언제 여느 때나 존심을 유지하고 있어야 하고, 적어도 상대를 앞에 두고는 물잔에 물을 가득 채우듯이 존심을 유지해야 한다. 상대를 베고 나는 순간, 극히 짧은 순간이지만 누구나 존심이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상대를 베었다는, 이겼다는 희열이 적과 나의 모든 존재를 망각해 버리기 때문이다. 물잔에 가득 찬 물을 모두 버리고 나면 빈 물잔만 남는다. 그러나 빈 것이 아니다. 아직도 물이 남아 있다. 빈 물잔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잠시 놔뒀다가 다시 기울여보면 한두 방울의 물방울이 떨어진다. 그것이 잔심이다. 무인은 상대를 베고 난 다음에도 마지막 물방울이 사라질 때까지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 갈천상은 지금 마음이 흐트러졌다고 질책하고 있다. ‘이겼어. 진 싸움이 아냐.’ 조자경은 갈천상의 일갈을 귓가로 흘려보내고 상반신을 우측으로 틀어내는 소화문에게 일격을 가했다. 그때, 파아앗! 조그만 점 같은데…… 너무나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라 갈피를 잡을 수 없지만 조자경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느꼈다. 그녀는 쏘아나가던 신형을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치달렸다. 그러나 방향만은 틀었다. 소화남이 우측으로 몸을 틀었으니, 그녀의 몸은 반사적으로 좌측을 향해 틀어졌다. 쩌억……! 좌측 어깨에서 끔찍한 고통이 전달되었다. 건곤십삼봉에게 봉으로 당할 때보다 한결 더 아팠다. 그녀도 당하지만은 않았다. 마음 일각에서는 몸을 뒤로 빼라고 권하지만 마지막 기회이니 이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속삭임이 더 강했다. 그녀는 어깨의 상처를 무릅쓰고 앞으로 치달렸다. 동시에 그녀의 우수(右手)가 아래에서 위로 쳐들렸다. 파아앗……! 붉은 피보라가 눈 앞을 가렸다. “흑!”이라고 짧은 단말마를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조자경은 신형을 뒤로 빼냈다. 소화남도 신형을 뒤로 물렸다. 조자경은 조갯살처럼 벌어진 어깨 부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녀는 소화남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소화남의 상처도 가볍지 않았다. 그도 왼쪽 부위에 상처를 입었는데…… 턱 밑에서 볼을 지나 눈을 가르고 이마까지…… 그의 얼굴은 피범벅이었다. 하나 그도 상처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하나 남은 눈을 귀신처럼 뜨고 노려보았다. 눈은 마음[意]을 움직이고, 마음은 기운(氣運)를 일으키며, 기운은 굳건한 움직임[動]으로 나타난다. 내삼최(內三最)다. 힘은 허리에서 시작된다. 허리[腰]에서 어깨로, 어깨에서 손으로 퍼져 나간다. 하반신으로는 허리에서 무릎, 무릎에서 발로 이어져 나간다. 단, 힘의 원천은 단전에 두고. 외삼최(外三最)다. 조자경과 소화남은 무공의 숙련은 물론이고 진기의 운행까지 자연과 조화를 이룬 내삼최, 외삼최의 경지에 도달해 있다. 보면 뜻이 일고, 뜻이 일면 무공으로 이어지는…… 第十八章 아심우상(我心憂傷:내 마음 쓰리고 아프다) 쫦 1 쫦 소화남은 충격을 크게 받은 듯 협봉검을 잡고 있는 손이 부르르 떨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하나 그의 몸에서 풍기는 좌절감, 처절함은 극에 달해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답답하게 만들었다. “소문주……” 비영이 답답한 신음을 터트리며 다가서려고 했다. “오지 마라!” 소화남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는 비영의 걸음을 제지한 후, 혼자말처럼 말을 이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아직…… 내 검이 땅바닥에 떨어지지 않았으니 아직 끝나지 않았어.” “끝났어.” 소화남의 말을 이은 사람은 갈천상이었다. 그가 말을 천천히 몰아 다가왔다. 비영, 철곤, 칠살수, 화검이 잔뜩 긴장하고 있는 사이를 유유히. “기본적인 무리(武理)이지만 수파리(守破離)란 게 있지. 초식을 배우고 몸에 익히는 수(守), 초식을 벗어나 자신의 무공을 만들어가는 파(破), 모든 초식을 벗어나 일가(一家)를 이루는 이(離). 소화남, 자네는 이를 이루려는 단계이지만 조 소저는 이미 일가를 이루었어.” “믿을 수 없어.” “검을 부딪쳐 보고도?” “아직 증명하지 못했어.” “하하하! 억지.” “상잔(相殘)이야. 아직 끝나지……” “우리는 가지.” 갈천상이 소화남을 무시하고 조자경에게 말하며, 그녀의 말고삐를 내밀었다. “휴우……!” 조자경은 긴 한숨을 내쉬며 면검을 거뒀다. 소화남과는 사생결단을 내야 할 만큼 철천지원수지간이 아니다. 오히려 소화남 쪽에서 원한이 있으면 있지 조자경 쪽에서 원한이 있지는 않다. 또한 소화남과 겨뤄보고 싶었던 근본적인 목적, 강자를 상대하고 싶은 소기의 목적은 이루었다. “어딜!” “그렇게 쉽게는……” 비영, 철곤, 칠살수, 화검이 병장기를 치켜들고 갈천상과 조자경을 에워쌌다. 그들은 이대로 보낼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때, “물러서.” 아직도 부들부들 떨고 있던 소화남이 나직한, 하나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소문주!” “저희에게도 기회를……” “물러섯!” 조자경은 말에 올라탔고, 천천히…… 천천히 장내를 떠나갔다. “죽일 자신 있었나?” 소화남은 멀어져 가는 두 필의 말을 보며 물었다. “……”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적명검법은 아주 고요하게, 죽는 사람이 죽는지도 모르고 평안하게 잠이 든다 해서 적명검법이지. 양무(陽武)가 아니라 음무(陰武)야. 그대들이 익히고 있는 무공은 음무란 게지. 그럼 다시 묻지. 암습을 가할 자신은 있었나?” “……” 이번에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갈천상과 조자경은 굽이를 돌아가는 중이었다. 조자경이 당한 상처도 뼈가 드러날 정도로 중한 상처인데 금창약조차 바르지 않고 떠나가고 있다. 상처를 치료하지 않는 것은 소화남도 마찬가지였다. 얼굴에서 흘러내린 피가 상의를 붉게 물들이고, 어깨를 타고 내려온 피가 땅바닥에 뚝뚝 떨어져도 눈살 한 번 찌푸리지 않고 떠나가는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무공은 거리의 미학(美學)이지. 정당하게 비무를 하든, 암습을 하든 거리가 맞아야 돼. 아무리 기(氣)·체(體)·검(劍) 일체(一體)를 부르짖어도 거리가 맞지 않으면 도루묵. 너무 멀어서 칠 수 없는 원간(遠間), 너무 가까워서 칠 수 없는 근간(近間)…… 포영매 갈천상 저놈은…… 거리를 주지 않아.” 그렇다. 정작 소화남이 두려워하는 사람은 조자경이 아니라 갈천상이다. 조자경의 무공도 놀랍지만 경이로운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투지가 불타오른다고 해야 할까? 하나 갈천상에게만은 검을 들이댈 용기조차 낼 수가 없다. “거리가 맞아도 틈이 없으면 칠 수 없지. 몸이 비는 신허(身虛), 마음이 비는 심허(心虛)……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어. 틈을…… 자! 자신있게 말해 볼 사람 있나?” 비살문에서는 십대고수로 불리는 비영 등이지만 연속되는 물음에 단 한 마디도 응대하지 못했다. 그들은 살수들이다. 때문에 사람을 만나게 되면 습관적으로 빈틈을 찾게 된다. 꼭 치겠다는 뜻이나 암습을 가하겠다는 목적이 없이도. 하나 갈천상에게는 적의(敵意)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빈틈을 찾지 못했다. 모른다. 일 년 열두 달 그의 뒤를 따라다니다 보면 어떤 틈이 보일지도. 지금은…… 전혀 찾을 수 없다. “신허와 심허를 찾을 수 없으니 무공은 구경조차 못 해보고…… 무공에서 틈을 찾으려면 이미 황천에 명단을 올려놓은 다음이겠지. 하하하! 과연 포영매야.” 소화남은 그제야 협봉검을 화검에게 내밀었다. “자경은 반드시 내 사람이 된다. 내 사람을 찌르는 맛도 남다르군. 내 여인에게 검을 맞는 맛도 남다르고. 내 여인의 피가 묻은 검…… 잘 간직해라. 피가 지워지지 않도록.” 소화남은 앞으로 협봉검을 쓰지 않을 태도였다. “소문주, 상처를……” “그래. 치료해.” 소화남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철곤이 다급히 다가와 상처를 살펴보았다. “한 쪽 눈은…… 실명했습니다.” “괜찮아.” “상처도 깊습니다. 평생……” “괜찮아.” 철곤은 부지런히 혈도를 눌러 지혈(止血)을 하고 금창약을 발랐다. “하하하! 나도 멍청하지만 너희들도 멍청해. 그 동안 수련한 결과가 고작 이것이라니. 내 목표는 유랑 일 년이다. 중간에 약간의 좌절을 겪었다 해서 목표가 달라질 수는 없지. 딱 절반 만에 겪는 좌절인가? 포영매 갈천상이 그토록 큰 인물인가? 거리가 한 치도 좁혀지지 않았어. 좁혀진 게 뭐야? 너희들과 일합(一合)도 마주하지 못하던 여인이 내 몸에 검상을 입혔잖아? 하하하! 더욱 정진해야 돼. 더욱……” 철곤이 치료를 하는 동안 쉴새없이 중얼거리던 소화남은 결국 혼절하고 말았다. “소문주! 흑!” “엉엉! 소문주!” 비살문 사대고수는 그제야 가슴 속에 맺힌 울음을 토해 냈다. 자신들이 진정으로 심복(心腹)하고 따르는 사내가 겪는 좌절은 수십 배의 고통이 되어 가슴을 찔러왔으니까. 조자경은 어깨뿐만이 아니라 한 쪽 가슴을 환히 드러내고 있지만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현숙하지 못한 행동……’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하나 그의 손길이 닿을 적마다 짜릿하게 다가오는 흥분과 설레임은 이를 악문다고 달래질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토우진을 깰 때까지는 그에 대한 생각을 잠시 접어두려고 했는데. 그것이 영원한 사랑을 얻는 길인데…… “이미 일가를 이루었단 말, 진심으로 한 말이야?” 조자경은 애써 마음과는 다른 말을 꺼냈다. 그래야만 확 안기고픈 마음을 달랠 수 있을 것 같기에. ‘내가 언제부터 반말을 했지? 그래, 이 사람 마음이 다른 곳에 있다고 느낀 다음부터야. 한 석 달 된 것 같은데…… 혼인을 하면 다시 존대를 해야겠지? 어색할 거야. 지금도 어색한데……’ 그녀의 마음 속은 여전히 갈천상에 대한 그리움뿐이었다. “무극진결 팔자(八字) 진법(眞法)이 완벽했어. 그 정도면 일가를 이뤘다고 봐야겠지.” ‘이 사람…… 눈빛이 굉장히 맑아. 주정중독자? 후훗! 한때나마 주정중독자였다면 누가 믿을까? 하지만 말할 거야. 놀려줘야지. 두고두고……’ “검상을 당한 것은 뭐라고 설명할 거야?” “일가를 이뤘다고 패배를 당하지 말란 법은 없어. 소화남의 무공이 강한 탓으로 돌려야지. 그는 뛰어난 걸물이야. 좌절을 모르지. 비살문을 단단한 반석 위에 올려놓을 인물이지.” ‘청증해선(淸蒸海鮮`:`흰살생선찜)을 좋아하지. 사천성 사람치고는 유별난 식성이야. 사천 사람들은 매운 음식을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담백한 음식을 좋아하니…… 생선은 내가 직접 사올 거야. 싱싱한 것으로 골라서.’ “그럼 앞으로 비살문이 가장 강해진다는 거야?” “아니. 아버지가 온갖 간난을 무릅쓰고 일궈낸 가업이 자식에게 올바로 이어진다는 거지. 소화남은 걸출한 인재야. 만약 그가 문파를 새로 만들겠다는 결심을 했다면 가능할 거야. 하지만 자신만한 자식을 낳으리란 보장은 없어. 수성(守成)은 공격보다 훨씬 어려운 법이니까.” 아무래도 좋았다. 비살문이 어쩌고 건곤방이 어쩌고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이만하면 굳건한 면은 장담할 수 없지만 백문장이 일어섰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으리라. 실제로 갈천상이 백문장을 떠나 있는 반 년 동안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으니까. 남은 문제는 아버지의 복수인데…… 사대 패강의 진신무공을 보기 전에는 동사(同死)를 생각했다. 백문장이 오대 패강으로 군림할 만큼 성장한다면 사대 패강 중 어느 일각과 싸움을 하는 게다. 그리고는 싸움을 절강성 전체로 확산시키고…… 공멸(共滅)할 수밖에 없다. 하나 지금 생각은 크게 다르다. 사대 패강이 그런 속수(俗手)에 걸려들 만큼 만만한 문파들도 아니고, 그들 중 어느 한 문파와 싸운다 해도 공멸을 확신하지 못한다. 그나마 건곤방은 건곤십삼봉을 무너트려 세력을 조금 약화시켰다고 하지만 다른 문파는 여전히 건재하지 않은가. 아버지가 어느 문파에게 당했는지 확실히 알아야 한다. 그래서 그 문파만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숨통을 끊어놓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하다못해 공멸을 선택하더라도. 하나 십여 년이 지나도록 그림자조차 찾지 못한 흉적을 무슨 수로 찾는단 말인가. 복수는 요원하기만 했다. “지난 반 년 동안 네가 죽인 사람들은 철응방 무인들이야.” “뭐, 뭐!” 느닷없는 말에 조자경은 딴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것이 그녀가 바라는 바였지만 조자경은 그녀가 바라던 대화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생각하지 못한 채 대화에 빨려 들어갔다. 어쩐지…… 절강 무림에 무슨 놈의 고수들이 이렇게 많은가 싶었다. 명성이 나 있는 사람들은 대충 알고 있지만 갈천상이 찾아간 사람들은 한결같이 무명인(無名人)들뿐이었다. 무공이 지독히 사나운 무명인들. 철응방에 그런 무인들이 있었다니…… 그들이 사용한 무공은 철응조공이 아닌데…… “철응방에는 멸절단이라는 무인집단이 있지. 모두 열일곱 명. 나는 그들 중 열 명을 죽여주기로 약속했어. 철응방에서 받아온 은덩이가 그 대가야.” “세상에! 어느 방주가 자기 문도를! 아얏!” 조자경은 대경실색하다가 무인답지 않게 비명을 내질렀다. 너무 놀란 나머지 상처를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던 것이다. “수중에 장악할 수 없는 수하는 이미 수하가 아니지. 그게 어떤 세력이고, 어떤 목적에서 만들어졌다 할지라도 주객전도(主客顚倒)가 되어서는 곤란해.” “그들이 그랬나요?” “한 명과 싸우기도 힘들었지? 그들 네 명이면 철응방주도 곤란해. 그런 무인들이 열일곱 명이나 마음을 같이하고 있다면, 이미 자체로 한 세력이지. 철응방 속에 또 다른 철응방이 숨어 있다고나 할까?” “세상에!” 조자경은 마치 옛날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다. “철응방주가 자식에게 철응방을 물려주지 못하는 이면에는 그런 고충이 숨어 있었지. 하나 일곱 명이라면 달라. 충분히 처리할 수 있어. 두고 보면 알겠지만 철응방은 자식을 전면에 내세울 거야.” 조자경에게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무림에서 맺은 인간관계가 비정하다는 사실은 이미 겪어보아서 알 수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 당주들의 힘 겨루기, 그리고 등 돌림…… 잘 알고 있지 않는가. 파문(破門)을 죽음보다 더 두려워했던 협객(俠客)들의 이야기는 먼 옛날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그게 현실이다. 지금은 이해타산에 따라 얼마든지 사문(師門)을 버릴 수도 있고, 적이었던 사람과 손발을 맞출 수도 있다. 그러나 수하를 암살하는 현실은 어떻게 생각해야 옳단 말인가. “그럼…… 건곤방만 제일 취약하겠네? 건곤십삼봉이 죽었으니.” 갈천상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건곤방주는 오래 전부터 칩거했어. 방 내의 일은 일음마봉에게, 방 외의 일은 천목봉인을 통해 조율해 왔지. 건곤십삼봉이 죽었다는 것은 건곤방을 추스를 좋은 계기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두고 보면 알게 돼.” 갈천상은 몸을 일으켰다. 상처치료가 다 끝난 것이다. 쫦 2 쫦 갈천상과 조자경이 백문장에 도착했을 때에는 밤이 깊어진 해시(亥時) 무렵이었다. 쥐죽은듯이 조용했다. 밤이 깊은지라 모두들 잠자리에 들었겠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숨소리 한 올 들리지 않는 적막만이 두 사람을 반겼다. “왜…… 개 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지?” 조자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려 천여 마리에 이르는 개들이 있다. 낮이고 밤이고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짜증마저 치밀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은 개는커녕 모기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깊은 밤, 고요한 적막…… 조용함이 지나쳐 괴괴함마저 풍기고 있으니. “들어가봐.” “응……?” “많이 변했군.” 갈천상은 이해할 수 없는 소리만 중얼거렸다. 조자경은 면검을 움켜잡은 채 언제라도 발출할 마음의 준비를 한 후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다각! 다각……! 말발굽 소리가 어둠을 일깨웠다. 정문은 활짝 열려져 있었다. 이것은 백문장의 전통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백문장을 건립한 후부터 백문장 정문은 닫힌 적이 없다. 낮이고, 밤이고…… 갈천상이 총관을 맡은 이후 잠시 닫은 적이 있지만 그것은 내부를 정리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해서이고 근본적인 방침에는 변함이 없었다. 곤궁하고 빈핍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조자경은 말을 몰아 정문 안으로 들어섰다. 불빛 한 점 비치지 않는다. 아버지가 타계하신 후에는 무인이 없어 정문을 지키지 못했다. 그때와 똑같은 분위기였다. 활짝 열려진 정문에 사람 그림자 하나 볼 수 없는 것은. 하지만 그때는 그래도 유등(油燈)이라도 걸어놓았지, 지금처럼 칠흑 같은 어둠을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생존해 계시고, 무인들이 북적거릴 때에는 말할 나위도 없다. 밝은 불빛이 정문을 환히 비추고, 경계를 서는 무인이 항시 네 명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움직임은 천루에서 경계를 서는 무인들에게 세밀히 파악되었다. 지금 백문장은 옛날에 버금가는 무인들이 있는데도 수문 무인 한 명 배치되어 있지 않다니. 조자경은 광량이 거처하던 취휴각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항시 불이 켜져 있는 곳이다. 빈핍한 사람들이 찾아오면 제일 먼저 발길을 들여놓는 곳이 취휴각이기 때문에 그곳에 불을 밝혀놓지 않는다면 정문을 열어놓은 의미가 퇴색된다. 현임 취휴각주는 휴전주였던 신필 박우다. 그는 평생 학문만 벗삼아 살아온 사람이기에 누구보다도 취휴각이 지닌 뜻을 잘 살필 사람이다. 하나 그렇지 못하다. 취휴각에도 불이 밝혀져 있지 않다. 조자경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백문장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닌지…… 하지만 소문이 전혀 나지 않았는데…… 다각! 다각……! 조자경은 말을 몰아 삼 장 정도를 더 나아갔다. 순간, 휘익! 쉬익……! 미미한 경풍(勁風)이 일면서 무엇인가가 면전으로 휙 날아들었다. 조자경은 반사적으로 면검을 휘둘렀다. “그만!” 모든 동작을 일거에 중지시키는 고함이 터져 나온 것은 그때다. 조자경은 면검의 각도를 날아오는 물체의 밑 부분으로 흘려버리고, 상반신을 숙여 말 등에 납작 엎드렸다. ‘그만!’이라고 소리를 지른 사람이 어둠 깊은 곳에서 걸어나왔다. 조자경이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는 한여름인데도 가죽으로 된 수투(手套)를 끼고 있었고, 허리춤에도 묵직해 보이는 가죽푸대를 매달고 있었다. 조자경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눈길들이 험악하기 이를 데 없다. 귀신처럼 살기 어린 인광(燐光)을 발산하고 있는 모습이 소름을 돋게 만들었다. 한두 개가 아니다. 공동묘지 한가운데에 서 있는 듯 사방에서 푸른 인광이 풀풀 날아다닌다. 조자경은 면검을 굳게 움켜잡은 채 갈천상을 바라보았다. 백문장에 심상치 않은 자가 나타났다는 것은 변괴가 발생했다는 말과도 상통한다. 그의 뜻을 물었다. “수고했다.” 갈천상은 뜻밖의 말을 했다. “이제 오십니까?” 어둠 속에서 나타난 자는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예를 표했다. “이게 도대체……?” “하하! 잊은 모양이군. 백문장 수비는……” “천견당!” “하하! 이제야 생각났나? 여행을 다니기는 오래 다녔군. 그새 천견당을 잊어버린 걸 보면.” 조자경은 황급히 푸른 인광을 발산하고 있는 물체를 주시했다. 개다. 개들이 노려보고 있다. 일체의 짖음도 없고, 두려움도 없어 보인다. 한낱 잡종개들이…… 이렇게까지 변했는가! 이건 맹수와 다름없지 않은가. 자신이 검을 뽑아낼 정도로 빠른 공격을 할 수 있다면 백문장 수비는 가히 철벽이라고 장담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는가. “들어가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 터……” 갈천상은 무극전으로 향했다. 누가 지켜보았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최소한 소화남과 격전을 벌인 곳부터 백문장까지 오는 동안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누가 숨어서 지켜본다는 기척 같은 것은 전혀 찾아내지 못했다. 갈천상이 연락을 취한 것도 아니다. 그와는 늘 붙어다녔으니 확신할 수 있다. 그런데 백문장 사람들은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자경이 갈천상을 따라 무극전으로 들어섰을 때, 그녀는 무극전의 모습이 약간 바뀌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어디가 바뀌었을까? 모습은 똑같았다. 탁자는 그녀가 떠나기 전에 있었던 곳에 어김없이 있었고, 의자도, 화병도…… 모두 제자리에 있었다. 하나 무엇인가 낯선 곳에 들어왔다는 느낌은…… 창문이었다. 창문을 비롯하여 빛이 새어나갈 수 있는 모든 곳에 두툼한 가죽염자(簾子`:`커튼)가 둘러쳐져 있다. 당연히 무극전 안은 찜통같이 더웠다. 조자경은 그 속에서 가장 반가운 얼굴을 찾아냈다. 천화신의 하문화. 어머니는 여전했다. 당장 눈 앞에서 난리가 난다 해도 전혀 흐트러질 것 같지 않은 단정하고 현숙한 모습, 입가에 띄운 은은한 미소, 깊이 파인 보조개. 순간, 조자경은 지난 반 년 동안의 고초가 주마등처럼 머리 속을 스쳐 갔다.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어머니가 반갑기 이를 데 없었고, 한달음에 달려가 어머니의 품 속에 안겨들고 싶었다. 그녀는 뛰다시피 두어 걸음을 내딛었다. 하나 어머니에게는 다가서지도 못했다. 무극전 입구에서 어머니가 앉아 있는 좌대(座臺)까지는 촌각도 필요치 않을 거리지만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계집애, 살아 돌아왔구나. 하기는 저놈이 찍었으니 초반이야 넘기겠지. 끝까지 잘해 봐. 하나라도 끝장을 보는 인간이 있어야지.” ‘역시 사랑하고 있어.’ 조자경은 유건지의 말에서 갈천상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읽었다. 그녀는 자신이 못 한 일을 조자경이 해주기 바라고 있다. 그래서 갈천상이 더 이상 방황하지 않기를…… 그것이 설령 다른 여자에게 사랑하는 님을 빼앗기는 결과가 될지라도 사랑하는 님이 방황하는 모습만은 차마 보지 못하겠다는 심정이리라. “제일 먼저 나를 찾아와줬으면 좋겠어. 시간을 정할까?” 만검진천 전종대는 웃지도 않고 말했다. “토우진을 들었나? 그래도 내가 토우진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다고 말하고 싶군. 허허! 때가 됐다 싶으면 찾아와.” 일심향불 백무는 호탕하게 말했다. 벽산개부 고규철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폐부를 꿰뚫어볼 듯한 눈빛으로 매섭게 노려보기만 할 뿐. 하나 그 눈빛 속에서 거부하지 못할 도전을 읽었다. 채 열 걸음도 걷지 않았는데…… 그녀는 벌써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강적 넷과 비무 약속을 한 셈이다. 응낙은 하지 않았다. 하나 그런 절차는 필요가 없다. 갈천상은 싸우게 할 게고, 설혹 그가 한 걸음 물러선다 해도 이제는 조자경 자신이 싸우고 싶다. 토우진을 깨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강적이라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싸워볼 가치가 있다. 조자경은 그들을 가볍게 지나쳐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고생했다.” 어머니는 한마디 말로 수만 마디를 대신했다. “재미있었어요.” 조자경도 간단하게 대답했다. 서신 한 장 남기지 않고 떠난 길이다. 목숨을 잃을 뻔한 적은 몇 번이고, 혼수상태에 빠져 죽은 듯이 지낸 날은 또 몇 날인지…… 조자경도 그렇지만 소식을 전해 듣는 어머니의 심정도 결코 편안하지는 않았으리라. 백문장에서는 낙성살녀가 갈천상과 조자경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테고, 그들은 절강 무림에 공포를 안겨다 주었으니까. “요기는?” “먹었어요.” “오늘은 푹 쉬거라.” “예.”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 그러나 대화는 옛날처럼 스스럼없게 풀리지 않았다. 마치 하룻밤 새에 훌쩍 커버린 느낌이었다. 조자경은 자신의 침소인 연화각으로 들어섰다. 낯설었다. 연화각도 무극전과 마찬가지로 창문이란 창문은 모조리 두꺼운 가죽염자로 가리워져 있었다. “목욕물이 알맞게 데워졌어요.” 낯선 시녀가 와서 말했다. 봉아가 난주일검 휘하에 들어가 어머니의 호법을 맡게 되자 새로 들어온 시녀다. 물론 백문장을 떠나기 전에 얼굴을 본 적이 있고, 잠시나마 시중도 받아봤다. 하나 여전히 낯설었다. 아무래도 평생 동안 곁에 있던 봉아와 취아만큼은 정이 가지 않았다.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물을 좋아하신다고 들었어요.” “봉아가 말했나?” “네.” 봉아가 데운 목욕물은 항상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곤 했다. “무극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침소에 들었나?” 그녀가 나올 적에는 움직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갈천상은 그들과 일일이 담소를 나누었고, 그러자면 꽤 긴 시간이 지나야 되리라. “잘 모르겠는데요.” 조자경은 울컥 기분이 상했다. 봉아와 취아라면 자신들이 할 일을 깔끔히 하면서도 온갖 소문을 주워들어 왔다. 오히려 귀찮을 정도로. 한데 이 아이는 스스로 찾아서 할 줄을 모른다. 불필요한 부분은 물론이고 필요한 부분까지. “알아보고 와.” “지금 시간에요?” 시녀는 자정이 넘은 시간에 시중을 드는 것도 못마땅한 눈치다. 하물며 무극전에 가서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나 동향을 파악해 오는 일은 귀찮기만 하리라. 조자경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욕탕으로 향했다. “몇 분이 남아서 회의를 하시는 것 같아요.” ‘회의?’ 조자경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창문마다 가죽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도 그렇고 삼엄한 경계도 그렇고……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은데. “어머님은?” “장주님도 계셨어요.” 갈천상은 묻지 않았다. 그는 분명히 있으리라. 지략 면에서는 귀호구혼 전인수가 한 수 앞서겠지만 사람을 이끄는 힘은 그가 뛰어나니. 무슨 일인가? 무슨 일이 있기에 반 년 만에 돌아온 갈천상이 손도 씻지 않은 상태에서 회의를 하고 있을까? 몸을 일으키자 물방울이 구슬처럼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드러난 몸은 물방울 소리처럼 청아하지 못했다. 여기저기 검에 할퀴고 긁힌 자국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약간 스친 정도의 상처라면 세월이 지나면서 흔적도 퇴색할 터인데 조자경의 몸에 난 상처는 죽을 때까지 지녀야 할 문신으로 남았다. 양쪽으로 쭉 갈라진 상처가 아물면서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한 흔적이 되어 그녀의 육신을 가득 덮었다. 소화남에게 당한 어깨 상처만 해도 벌건 살점을 드러내고 있으니. 시녀는 조자경의 몸을 차마 마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녀는 생각하고 있으리라. ‘나는 무인은 되지 않을 거야’라고. 차라리 시녀로 살지언정 무인이 되어 죽을지 살지 모르는 고비를 건너고 싶지는 않다고. 조자경은 이번에도 기분이 상했다. 잠옷을 가져 오다니. 물론 잠자리에 들기에도 늦은 시각이지만 아직까지 회의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다면 하다못해 무슨 일로 회의를 하는지 정도는 알아왔어야 되지 않는가. “마의를 가져 와.” 조자경의 음성은 서릿발처럼 날카롭게 변했다. 당장이라도 무극전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치밀었지만 꾹 눌러참았다. 대신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틀고 앉아 운공조식(運功調息)에 몰두했다. 반 년 만에 집이라고 돌아왔어도 모녀간에 이야기 보따리조차 끌러놓지 못했다. 분위기가 그렇게 만들었다. 백문장 무인들은 건드리기만 하면 터져 버릴 것처럼 신경이 날카로워 보였고, 다정다감하시던 어머니는 오랜만에 돌아온 딸을 보고도 반갑다는 내색조차 비추지 못하고 회의를 주관하신다. 조자경도 무림을 보는 눈이 생겼다. 그녀는 지금은 자신이 나설 때가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궁금증이 치밀어도 참아야 한다. 나서고 싶어도 잠자코 있어야 한다. 누가 말을 먼저 해주기 전까지는 그렇게 있어야 한다. 문득 조자경은 반개(半開)하고 있던 눈을 부릅떴다. 소리없는 움직임이 감지된다. 적이 침입한 것이 아니라 백문장 무인들이 소리없이 움직이면서 흘려낸 기척들이다. ‘무슨 일……?’ 그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쫦 3 쫦 조자경은 천개유룡과 수혼신수가 각기 화창당과 적수당을 이끌고 어둠 속으로 총총히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백문장을 떠난 사람들은 그들만이 아니다. 진정한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종잡을 수 없는 이전주 만검진천 전종대, 삼전주 빙정신소 유건지, 사전주 일심향불 백무도 자신들이 데려온 사람들을 이끌고 떠났다. 이백여 명이 훨씬 넘는 무인들이 발걸음 소리조차 죽이고 떠나는 모습은 일촉즉발의 긴장감을 불러왔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하필이면 왜 자신이 돌아온 날 떠나는 것일까? 문득 조자경은 갈천상이 이 일의 핵심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오자마자 입이라도 맞춘 듯이 떠나갈 리가 없다.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무극전으로 발길을 돌렸다. 새벽이 밝아오려면 아직 한 시진은 더 있어야 하는 인시정(寅時正)이었다. “……저녁에 떠난다.” 조자경이 들은 말은 그것이 고작이었다. 밤새도록 회의를 한 결과가 나왔는지 갈천상은 ‘저녁에 떠난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말문을 닫았다. “그만 일어나세요. 준비가 미흡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세요.” 어머니도 예전의 어머니 모습이 아니었다. 밤을 꼬박 밝혔는데도 얼굴에 발그레한 홍조를 띠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긴장하고 있다는 증거이지 않은가. 왠지 모르게 몸이 굳어져 있는 듯한 느낌도 지울 수 없고…… 어머니를 이만큼 긴장시키는 일이 도대체 무엇일까? 조자경은 피곤한 몸짓으로 물러나는 박우, 운단서 등을 옆으로 흘려보냈다. 그들은 가벼운 눈인사만 건넨 후 물러났다. 갈천상은 그대로 보낼 수 없었다. 그가 옆으로 스쳐 지나갈 때, “할말없어?” 갈천상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한 가지만 일러두겠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간에 죽어서는 안 된다. 너는 선택할 권리가 없어. 네 몸도 마음도 모두 내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마라.” “알고 있는 말이잖아. 그런 말 말고……” 조자경은 더 깊이 물을 수 없었다. 그가 이미 걸음을 떼어놓았기 때문에. “난주일검이 호법을 서줄 게다.” “어머니!” 조자경은 언성을 높였다. 다짜고짜 천루에 가서 꼼짝 말고 있으라는 분부는 받아들일 수 없다. 사정을 안다면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 문제지만 무슨 내막인지조차도 모른 채 천루에서 백문장을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 더군다나 난주일검과 육합검진은 어머니를 호휘하는 호법들이지 않은가. 그들이 호법을 서준다면……? “강호(江湖)는 한시도 바람 잘 날이 없는 게란다. 이번 일도 그런 일들 중에 하나에 불과해. 너무 염려 말고……” “어머니, 그러니까 말해 줘요. 무슨 일인지……” “무림에서 생기는 일이라는 게 싸움밖에 더 있겠니? 당분간은 조용하지 않을 게다. 휴우! 그게 무림에서 살아남는 길이지.” “누구와 싸우죠? 누가 쳐들어오기라도 하나요?” 조자경은 바짝 다가섰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백문장에서 네 궁금증을 풀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이 에미조차도. 알겠니?” “그 사람…… 갈 총관 때문인가요? 제게 말하지 말라고 했나요?” 천화신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말고 또 있나요? 말하지 말란 사람이?” 이번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머니는 말하지 않을 거야.’ 조자경은 확신했다. 이런 어머니가 아니었다. 모녀지간에 숨김이나 비밀 같은 것은 일절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에는 서로 의지하는 사이가 되어 지내왔다. 그런 어머니이기에 입을 다물기로 작정했다면 무슨 말을 하더라도 입을 열지 않으실 게다. ‘내 스스로 알아내야 돼. 무슨 일인지…… 백문장 무인 중 절반이 장을 나선 일이라면 존망(存亡)이 걸린 일이야. 그런 일을 나만 모른데서야……’ “호호! 알았어요. 더 이상 여쭙지 않을 게요. 걱정 많으셨죠?” 그제야 어머니는 환한 미소를 띄워 보였다. “자식이 바깥에 나가 있는데 걱정하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니. 갈 총관이 계속 서신을 보내줘서 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네 생각만 하면 억장이 무너지곤 했지.” 그러고 보니 갈천상은 끊임없이 연락을 주고받았나 보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객사다운 객사는 한 번도 들른 일이 없고, 편히 발 뻗고 누울 만한 공간에 몸을 기댄 적도 없는데…… 그리고 갈천상 곁에는 늘 자신이 있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서신을 주고받을 수 있다니…… 조자경은 피식 웃고 말았다. 원래가 비밀이 많은 사내다 보니, 하는 행동 모두가 비밀투성이다. 언제부터였더라? 갈천상의 모든 것을 알기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때가……? 조자경은 현재 백문장에서 벌어지는 일은 모른 체하고 지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천화신의는 때론 기쁜 표정을 지었지만 거의 대부분 그늘진 빛을 감추지 못했다. 또 건곤십삼봉과 부딪쳐 생사지경에 처했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기어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지난 반 년간의 일을 이야기하느라고 동녘이 밝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시녀가 아침을 가져 온 후에야 두 모녀는 시간이 꽤 흘렀다는 것을 깨달았고, 기나긴 이야기를 접었다. 조자경은 안심이 되는 듯 편한 모습을 취하는 어머니를 뒤로하고 부지런히 걸었다. 무극전에서 연화각으로 가기 위해서는 소문(小門) 두 개를 지나쳐야 한다. 첫 번째 문은 외청(外廳)과 내청(內廳)을 구분하는 문이며, 두 번째 문은 내청에서도 가장 중지(重地)인 후원으로 들어서는 문이다. 조자경은 첫 번째 문을 들어서자 연화각으로 가는 청석(靑石) 대신 연못으로 향하는 청석을 밟았다. 연못 주변은 깨끗하고 조용했다. “봉아, 나와.” 조자경이 연못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응답은 없었다. 사위는 쥐죽은듯이 적막했고, 뜨거운 태양빛만이 서서히 대지를 달궈갔다. “봉아. 많이 늘었구나. 숨소리조차 죽이고 숨어 있을 경지라면 일류야. 난주일검께 제대로 배운 모양이구나. 하지만 좀더 수련해야겠어. 진정한 은신술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의기(意氣)조차 숨겨야 돼.” 조자경은 말을 하면서 비살문 소문주를 떠올렸다. 그와 그를 따라다니는 십대고수 네 명은 그 정도의 은신술은 넘어선 지 오래다. 정작 그들이 몸을 숨기고 암습을 가한다면 몇 명이나 몸을 보전할 수 있을까. “셋 셀 동안 나오지 않으면 비무를 요청한 것으로 간주하겠다. 소문을 들었으면 알겠지만 내 검은 피가 묻어야만 성질이 죽어.” 조자경의 음성에는 싸늘한 서리가 묻어나왔다. 그녀가 한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닌 듯했다. 눈 깜짝할 사이보다 더 짧은 순간에 그녀의 전신은 송곳으로 뒤덮인 듯 날카롭게 변했다. 금방이라도 살검을 전개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치를 떨게 만들었다. “하나!” 조자경이 수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더불어서 그녀의 전신을 뒤덮은 살기는 더욱 날카로워졌다. 일촉즉발(一觸卽發)…… 그렇게밖에는 달리 표현할 방도가 없었다. “둘!” 수가 더해졌다. 봉아를 비롯하여 과거 백문장에서 시녀, 하인으로 있던 다섯 명은 뜻밖의 사태에 난감할 것이다. 조자경의 모습이 달라져도 너무 달라져 있으니까. “셋!” 조자경은 망설임없이 나머지 수를 세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연못가에 있던 석탑 뒤에서 봉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씨……” 봉아는 쭈빗거렸다. 그녀도 조자경이 무엇 때문에 자신을 불러냈는지 짐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냐!” 조자경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그녀의 전신에서 풍겨나는 날카로운 예기는 조금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꼭 알고 싶소?” 난주일검 장상부가 관상용으로 들여놓은 바위 뒤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봉아, 덕진 등이 과거에는 백문장 시녀, 하인으로 있었지만 지금은 그의 직계수하들이다. 아니, 수하라는 개념조차도 떠나서 친혈육 같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여섯 명은 한 몸이 되어 돌아가야 한다. 어느 한 명이라도 마음이 분산된다면 육합검진의 진정한 효용은 창출해 내기 어렵다. 세상의 어느 관계보다도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할 것이다. 하나 그런 관계와는 또 다른 관계가 있다. 조자경과의 친자매 같은 관계는 세상이 끝날 때까지 변질되지 않을 공고한 관계다. 난주일검은 갈천상이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한 이유를 알고 있기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봉아는 조자경의 말을 거역할 수 없을 테니까. 하나…… 그도 적당한 핑계를 대기에는 난감했다. “봉아,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조자경은 난주일검의 짐작대로 난주일검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봉아만을 다그쳤다. “여산(麗山), 여산에 가보세요.” 봉아가 초롱한 눈빛으로 말했다. 난주일검이 말을 가로막을 틈도 주지 않고 재빨리. 여산은 백문장에서 이십여 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말을 타지 않고도 반 시진이면 충분히 도달할 수 있는 거리다. 조자경은 급하게 산을 올랐다. 여산은 정상 일대가 돌병풍을 둘러세운 듯 깎아지른 암벽이 멋진 위용을 자랑하지만 암릉이 너무 험하고 위압감을 불러와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진 산이다. 산을 올라가는 길도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아서인지 희미하게 남아 주의 깊게 살피면서 올라가야 한다.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조자경은 나는 듯이 치달려 올라갔다. 그녀보다 여산을 많이 오른 사람도 드물 것이다. 여산은 백문장의 뿌리가 있는 곳이다. 조가(趙家)의 선조들이 살았고, 백문장 초대장주인 조항이 묻혀 있다. 조자경은 정상 부근까지 치달려 올라갔다. 덤불이 앞을 가로막는가 싶었는데, 덤불을 헤치고 두어 발짝을 내딛자 천하가 한눈에 들어온다. 여산의 정상이다. 멀리서 보면 돌병풍이 아름다운 위용을 뽐내지만 막상 정상에 올라선 사람은 금방이라도 실족할 것 같은 위기감에 오금이 저리기 마련이다. 조자경은 암벽을 타고 좀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마침내 여산에서는 더 오를 수 없는 곳까지 올랐을 때, 그녀는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아버지의 무덤. 모습은 그대로인데 어쩐지 낯설다. 해마다 몇 번씩 찾아온 무덤이건만 마치 처음 대하는 무덤처럼 생소하다. 이유는 금방 알았다. 누군가 석묘(石墓)를 파헤쳤다. 처음처럼 원상복구를 시켜놓기는 했지만 돌 틈바귀에 갈린 흔적이 있다. 돌에 붙어 자라는 이끼도 곳곳이 떨어져 나갔다. 누군가 틀림없이 석묘를 만졌다. ‘복수야!’ 조자경은 흥분했다. 아버지의 무덤에 손을 댈 사람은 흔치 않다. 아니, 없다. 사대 패강은 그럴 만한 이유가 없고, 그들이 아니라면 십 년이나 지나 이미 뼈만 남았을 유체에 손을 댈 사람이 누가 있으랴. 봉아가 여산에 가보라는 말을 했을 때부터 짐작은 했지만…… 조자경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버지……” 십 년 전에 돌아가신 분이지만 얼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당시에는 어린아이에 불과했지만 까칠한 턱수염을 마구 비비시던 모습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아버지…… 급하게 오느라고 술 한 병 준비하지 못했어요. 이해하시죠?” 반은 울음이 섞인 음성이지만 또렷하게 울려나왔다. 비록 눈물로 얼룩진 눈이지만 새파랗게 타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한참 동안 울먹이던 조자경은 수파(手:`손수건)를 꺼내 무릎 앞에 펼쳤다. 그리고 연검을 꺼내 왼손 위에 올려놓았다. 스윽……! 연검이 살짝 움직이자 그녀의 왼손이 쭉 갈라지며 붉은 핏방울을 뚝뚝 흘려냈다. 피는 흘러 수파 위에 고였다. “아버지, 제 피를 드세요. 전과는 다른 피거든요. 연약한 계집의 피가 아니라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피예요. 아세요? 많은 무인들이 이 피를 보지 못한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는 것을? 아시겠네요. 다 보고 계실 테니까.” 조자경은 수파 위에 고인 피를 석묘 위에 골고루 뿌렸다. “다음에 와서도 피를 드릴게요. 그때 맛은 지금과 또 다를 거예요. 아버지를 해(害)한 사람들…… 그 사람들도 제 피를 보지 못해 목숨으로 대신할 거거든요.” 조자경은 춤을 추었다. 백문장 정통무공인 백학검법…… 갈천상에게 배우고 생사를 넘나들며 익힌 무극진결…… 종내에는 흥에 겨운 인간들이 너울대는 춤사위를 추었다. 第十九章 궁시사장(弓矢斯張: 활과 화살을 어깨에 메고) 쫦 1 쫦 팔월 십일일 이른 새벽. 조자경은 천루에서 백문장을 지켜보았다. 날이 일찍 밝고 사방이 환히 트인 관계로 조망(眺望)을 하기에는 더없이 적합했다. “누가 왔지?” 조자경은 거의 감정이 묻어 있지 않는 냉랭한 말투로 물었다. “오천로(五天老)가 선두에 섰답니다.” 봉아가 대답했다. “휘하는?” “황우당과 거천당(巨天堂)이에요.” 이번에는 소화가 대답했다. 천력문 무인들이 천천히 걸어왔다. 몸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고, 야습을 기도하지도 않았다. 속담에 쾌도참난마(快刀斬亂麻)라는 말이 있다. 잘 드는 칼로 엉켜진 마를 단번에 잘라버린다는 뜻으로, 복잡한 일을 과감하게 처리할 때 쓰곤 한다. 천력문 무인들이 그런 식이다. 복잡하게 이리저리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식이다. 단번에 밀어붙여 숨통을 옭죄겠다는 듯이, 감히 앞을 가로막을 수 있겠냐는 듯이 여유만만하게 걸어온다. 조자경의 눈빛이 새파랗게 빛났다. 천력문이 공격을 해올 줄이야……! 갈천상이 자신에 대한 배려로 마지막 일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안 순간 코 끝이 찡하게 저려왔다. 아버지의 복수야말로 마지막이자 유일한 비원(悲願)이지 않은가. 아버지의 무덤을 연 것은 정확한 사인(死因)을 알기 위해서이리라.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무림인들이 죽으면 무덤조차도 아무 곳에나 세울 수 없다. 백문장처럼 일거에 몰락할 경우에는 더 더욱 그렇다. 보검이나 비급(秘) 같은 것을 부장품으로 넣었으리라 짐작한 무림인들이 혹여 무덤을 도굴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그런 점을 잘 알고 있는 광 총관이 아무 곳에나 장주의 시신을 모셨을 리 없다. 여산에 장주의 무덤이 있다는 사실은 극히 몇 명만이 아는 극비(極秘)다. 어머니의 재가가 떨어지지 않고는 파헤칠 수 없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갈천상이 부탁하지 않았다면 세상 그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아버지의 무덤을 열겠다는 데 응낙할 리가 있겠는가. 백문장을 나선 무인들이 어디로 갔는가는 모른다. 하나 그들이 무슨 목적으로 백문장을 나섰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화창당과 적수당이 모두 나섰고, 이전주, 삼전주, 사전주가 동참했다면 상대도 상당한 세력을 쌓고 있다는 말이 된다. 적어도 사대 패강 정도이거나 그 정도에 버금가는 세력을. 아니다. 사대 패강은 아니다. 사대 패강이라면 그들만으로는 역부족이다. 무림세가가 강성할 수 있는 조건은 얼마나 많은 무인이 있느냐가 아니라 고절한 무공을 익힌 무인이 몇 명이나 있느냐로 판가름난다. 천개유룡은 믿을 만하다. 수혼신수도 강하다. 그들 밑에 있는 팔향주도 독특한 절기를 뽐낸다. 이전주, 삼전주, 사전주는 말할 것도 없이 최절정고수들이다. 쉽게 무너지지 않을 전력이지만 쉽게 이길 수도 없는 전력이다. 문제는 추측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는 짐작뿐,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 사대 패강 장문인들의 무공인데…… 갈천상이 승산이 불확실한 싸움에 수하들을 내보냈을 리 없다. 아마도 그들만으로 충분한 싸움에 내보냈으리라. 그곳이 어디인가? 알 수가 없었다. 그곳만은 봉아도 소화도 난주일검도 알지 못했다. 오전주도 흑사당주도 반심당주도 알지 못했다. 박우, 운단서, 마임호, 전인수는 알아도 말해 주지 않을 사람들이다. 그들이야말로 갈천상과 마음을 엮은 사람들이니까. 그런데 아닌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천력문이 급습을 가해 올 줄이야. 황우당과 거천당이라면 천력문에서도 ‘불굴의 투지’를 지닌 무인들로 유명하다. 거기에 오천로라…… 천력문에서는 백 개의 공훈을 쌓고, 십 년 동안 강호를 활보하며 단 한 번의 패배도 없는 무인에게 천로라는 호칭을 부여한다. 현재 천력문에는 오천로가 있다. 일천로는 문주이고 이천로는 책사이자 무인인 태웅이다. 삼천로는 문주의 장자인 구음고(具吟攷)이고 사천로는 문주의 넷째 아들인 구자광(具恣光)이다. 그들은 모두 십여 년 전에 천로라는 명예를 얻었다. 근래에 와서는 좀처럼 천로라 불리는 사람이 나오지 않다가 드디어 사 년 전에 오천로가 탄생했다. 천력문 거천당(巨天堂)의 당주이자 문주의 막내딸인 구임화(具林花). 그녀는 말이 여자이지 육 척을 훌쩍 넘긴 장신에 장사들만 입문할 수 있다는 천력문 문도 두어 명쯤은 내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집어던질 괴력을 소유했다고 한다. 그녀가 백문장 괴멸의 선두에 서 있다. “나이가 몇이지?” “예?” 봉아가 무슨 말이냐는 듯 되물었다. “역발천주(力拔天柱) 구임화 말야. 나이가 얼마나 됐지?” “아! 예…… 천력문에서 서른 초반에 천로를 얻은 사람은 없었다면서 떠들썩했는데…… 금년에 아마 서른여덟일걸요?” 조자경은 투지가 들끓어 올랐다. 같은 여자와 싸워본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천력문에서 최고로 강하다고 인정해 준 여자다. 또 다른 이유 하나를 더 들라면 건곤방, 비살문, 철응방 무공은 견식해 봤지만 천력문 무공은 소문만 들었을 뿐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없다. 진정 싸워보고 싶었다. 그러잖아도 아버지의 복수길에 동참하지 못해 울화가 치솟던 참이지 않던가. ‘넌 내 거야……’ 조자경은 우람한 사내 네 명이 메고 오는 가마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쫦 쫦 쫦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백문장 정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정문이 열려 있으면 하다못해 수문무인이라도 지켜서 있을 법한데 사람 그림자는 고사하고 짐승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멈춰!” 가마 속에서 고막을 뒤흔드는 굉음이 울려나왔다. “당주님, 어떻게 하시겠어요? 황우당이 먼저 가시겠어요? 아니면 거천당이 먼저 들어갈까요?” “허허허! 소저가 계신데 먼저 나서면 실례지요.” 응답을 한 거산파장 역시 가마를 타고 있었다. 입으로는 말을 하고 있으되 두 눈은 뚫어지게 백문장 정문을 노려보면서. 그는 자신의 직감을 믿었다. 백문장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활짝 열려진 정문…… 저 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아비규환의 지옥도가 펼쳐지리라. 갈천상이라는 자는 천력문의 조문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그가 만일 소문대로 포영매라면…… 조문을 파악한 것도 그리 이상하지만은 않다.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기 싫은 싸움이다. “거산파장답지 않군요.” 여전히 쩌렁쩌렁 울리는 음성이었다. 여인의 음성? 여인의 음성이기는 하지만 장한이 고함을 치는 것보다 더욱 컸다. 백문장 안에 있는 사람도 모두 들을 수 있을 만큼. “……” 거산파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떠한 이유로도 싸움에서 선봉을 사양한 것은 수치스러우니까. “예정대로 양두진(兩頭陣)으로 공격해요. 호호호……!” 오천로 구임화는 범종이 울리는 듯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아직 미혼이다. 무공에 혼이 빠져 곁을 돌아보지 않은 탓도 있지만, 남녀간의 결합 또한 음양의 조화 속에 포함된다고 볼 때 그녀의 우람한 몸을 포용할 만한 그릇이 없었다는 편이 더 정확하다. “뒤를 받치겠소.” 거산파장은 망설임없이 후미를 자처했다. 양두진이란 이름은 꼬리가 없는 대신 머리가 둘인 뱀의 형상에서 따왔다. 몸통은 하나이되 양쪽 끝에 머리가 있는 뱀. 머리가 있는 쪽에 쥐를 각기 놓으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서로 먹으려고 달려들까? 아니다. 양두사(兩頭蛇)는 어느 한쪽이 먹이를 먹어도 같이 허기를 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머리는 둘이지만 몸통이 하나인 만큼 서로의 욕구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고, 조율도 쉽게 한다. 한쪽 머리가 쥐를 잡아먹을 때까지 다른쪽 머리는 먹이를 노려보면서 꼼짝달짝못하게 만든다. 머리 한쪽이 먹이를 먹는 순간, 다른 머리는 그제야 자신이 견제하고 있던 먹이를 먹는다. 결국 양쪽 머리가 모두 쥐를 잡아먹는다. 거천당은 뒤를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앞으로만 치달린다. 뒤는 황우당이 맡으며 양당의 거리는 무복의 색깔만 다르지 않다면 같은 무리라고 생각할 정도로 가깝게 밀착한다. 거천당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꽈앙! 정문이 부서지며 요란스런 소리를 냈다. 거천당 역사들이 신위를 뽐낼 요량으로 정문과 현판부터 부숴버린 것이다. “흥! 기관! 눈에 보이는 대로 모두 부셧!” 앞에 나선 자들은 한결같이 위력이 강맹한 무기를 들었다. 부(斧) 종류로는 대부(大斧), 좌자부(子斧). 봉(棒)으로는 저봉(杵棒), 백봉(白棒), 고자봉(子棒), 낭아봉(狼牙棒). 동추(銅鎚), 팔각추(八角鎚)에 월아산(月牙), 장파추(長把錘)…… 그야말로 다양한 병기를 들었다. 무기는 각기 다르지만 공통된 점이라면 불가(佛家)의 사천왕(四天王)처럼 두려움을 주는 거한들이라는 점이다. 툭 불거져 부릅뜬 눈, 잔뜩 치켜올린 검은 눈썹, 크게 벌린 빨간 입 등 인상에서 풍기는 두려움도 두려움이지만 근육으로만 꼭꼭 채워진 듯한 몸을 보면 바늘 하나 들어갈 곳이 없어 보였다. 이들이 거천당의 십이력이다. 황우당의 십이력과 같은 배분이기는 하지만 무공은 한 수 위로 정평이 나 있는 무인들이다. 그들 뒤로는 그들에 비해 신체적인 면으로 조금도 뒤지지 않을 것 같은 거한들이 줄줄이 들어섰다. 십이력은 다른 문파의 향주급이다. 일 대 십이의 비율을 가지고 있으니 일당(一堂)은 백오십이 명으로 구성된 셈이다. 그들이 줄을 이어 백문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암습이나 기관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어찌 보면 무모하다 싶을 만큼 당당하게 들어선다. 마치 싸움을 이기고 개선하는 무리들처럼. 꽈앙! 퍽! 퍼어억……! 담이며, 나무며, 석탑이며…… 손을 뻗어 닿을 만한 곳에 있는 모든 기물이 부서져 나갔다. 초토화 작전이다. 부서진 기관은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으니 그나마 발악이라도 하려면 선제공격을 가할 수밖에 없다. 공격을 하라는 배포다. 이들은 기관이란 전후좌우에서 완벽한 포위망을 구축한 상태가 아니면 기대할 만한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은 사실이기도 하다. 광량의 거처였으며 빈곤한 민초들의 희망으로 대변되던 취휴각이 무너졌다. 외곽 담장이 무너지고 그늘을 제공해 주던 나무들도 잘려나갔다. 백문장은 철저히 초토화되는 중이었다. 전진 속도는 더딜 수밖에 없었다. 정문에서 중문까지의 거리는 신법을 펼치면 숨 한 모금 들이킬 사이, 천천히 걸어도 삼백여 보에 불과한 거리이지만 그들은 반나절이 지나도록 중문을 들어서지 않았다. 아니, 오늘은 중문을 들어서지 않을 요량인지 전혀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우르릉……! 꽝! 털썩……! 천력문 무인들은 전각을 부수기에 여념이 없었다. 처음에는 긴장이라도 하는 것 같더니 이제는 그런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웃고 떠드는 자가 있는가 하면 서로 힘자랑을 하는 무인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기분 나빠. 상대는 포영매야. 포영매가 이토록 속수무책으로 당해? 아니야. 뭔가 있어. 기분 나쁠 만큼 고요한 정적…… 백문장이 텅 비지 않고서야…… 텅 비어? 그럴 수도 있지.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다면 내일을 기약하고 물러섰을 수도 있지. 아냐. 포영매는 그럴 작자가 아냐.’ 거산파장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지금 눈 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거천당 무인들이 무인지경으로 날뛰고 다녀도 조용하기만 하니…… 백문장은 빈집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빈집이라야 옳다. 빈집이라면 이런 현상이 가능하다. 포영매가 물러섰다면. 그랬을까? 과연 그랬을까? 혼란스러웠다. 그렇다면 거산파장은 빈집도 공격하지 못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다. 오천로는 공적 하나를 더 세우게 되고…… 그래도 그는 앞으로 나설 계획이 전혀 없었다. 불만스러운 듯한 수하들의 따가운 눈총도 개의치 않았다. 단지 포영매가 대항 한 번 하지 않고 물러선 진의가 무엇인지 궁금할 뿐이다. 비살문 소문주와 십대고수라는 자들을 곤궁에 몰아넣었고, 철응방 비조탈명과 사귀를 죽이기까지 한 자가…… 그리고도 철응방주를 당당히 찾아간 자가…… “쥐새끼…… 꿍꿍이가 있군.” 구임화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그녀는 크고 작은 싸움에 길들여져 있다. 백 번의 공적을 쌓았다는 것은 그만큼 싸움을 많이 했다는 말이지 않은가. 모두 시시했다. 싸움 횟수로는 백 번을 넘어서고 있지만 등골을 짜릿하게 울려주는 싸움을 해본 적은 없다.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을 했기 때문에. 십여 년 전, 절강성 전역은 싸움의 회오리에 말려들었다. 그때가 그리웠다. 건곤방, 철응방, 비살문, 천력문. 누가 어떻게 될지 누구도 점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차’ 하고 실족(失足)이라도 하는 날에는 돌이킬 수 없는 구천지옥으로 빨려 들어가는 상황. 세력이 팽팽한 문파 간의 싸움도 신이 났지만 그것은 아버지와 이천로인 태웅의 싸움이었고, 그녀가 신이 난 것은 기라성 같은 무인들이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이길지 질지 모르는 승부를 숱하게 겪었다. 사대 패강에서 이름난 무인들은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강했다. 진정 손속을 섞어보기 전에는 승부를 장담하지 못했다. 누구를 치라는 명령을 받을 때마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싸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처음 격돌할 때의 흥분과 승리를 예감하는 순간의 짜릿한 전율이라니. 사대 패강이 휴전을 하면서부터는 재미가 없었다. 절강성은 넓디넓은 땅 덩어리인데 어찌 무인이 그렇게도 없을까. 제법 이름깨나 난 인물이라고 해서 찾아가보면 싱겁기 이를 데 없었다. 십 년의 세월이 흐른 만큼 무공이 강해진 탓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상대들의 무공이 너무 약했다. 이번 싸움도 마찬가지다. 백문장이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성장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녀가 보기에는 철없는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었다. 저항을 해온다면 하루, 저항을 하지 않는다면 이틀…… 그렇게 생각하고 왔다. 백문장 정도를 치는 데 수하들을 개죽음시킬 필요가 없으니까. 한데 이건 저항이 없어도 너무 없다. 하다못해 기관이라도 발동시켜 철침 몇 조각이라도 흘려야 정상인데, 외장(外莊)이 폐허가 되도록 숨소리 하나 흘리지 않는다. 기관에 의지하는 문파는 방어 범위가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손해이지 않은가. 구임화는 오랜만에 흥이 나기 시작했다. 쫦 2 쫦 이튿날, 하루 종일 폭염이 내리쬘 요량인지 아침부터 후텁지근한 열기가 숨통을 조여왔다. “당주께서는 아직도 생각이 없나요?” 구임화는 구운 오리고기에 손을 뻗으며 비웃듯이 물었다. 그녀의 식성은 대단했다. 오리고기로 아침식사를 할 경우 세 마리는 먹어치워야 식탁에서 물러나곤 했다. 오늘 아침은 급조한 식탁에 양념이 깃들여 있지 않는 구운 오리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보는 사람이 질릴 만큼 많은 양을 먹어치웠다. “소저의 위용을 지켜보겠소이다.” 거산파장도 식사량이 대단했다. 그도 구임화와 마찬가지로 세 마리째 오리고기를 뜯어먹으며 대답했다. “우리가 이곳을 선점하면 놈들이 지랄하겠죠? 호호호!” “총관의 말씀대로라면 더 심한 공격이 있을 것이오.” “그까짓 놈들!” 구임화는 냉소했다. 총관인 태웅은 천력문에서 무인들이 출발하는 것과 동시에 천응방에서도 일단의 무리들이 출발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들은 두더지처럼 어둠 속에 숨어서 지켜볼 것이라고. 총관의 말대로라면 철응방 무인들이 주변 어디엔가 숨어서 지켜보고 있으리라. 구임화와 백문장이 승패를 겨뤘을 경우 승산은 구임화에게 있다. 하나 피해도 감수해야 된다. 예상되는 피해는 오 할. 거천당과 황우당 중 일개 당은 완전히 몰살하는 대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태웅은 말했다. 철응방주는 포영매 갈천상을 만난 적이 있기 때문에 백문장의 실력을 가장 잘 가늠하고 있을 것이라고. 천력문이 어느 정도 피해를 입을지 예상하고 있을 것이라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철응방 책사인 간화는 결코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전날 소흥주(紹興酒)를 마셨다고 들었어요. 맛있었나요?” 거산파장은 얼굴이 발개졌다. 백문장 장주의 취임식을 두고 하는 말이다. 어찌 생각하면 ‘너는 꼬리 만 강아지처럼 도망쳤지 않느냐’는 비웃음으로 들릴 수도 있다. “……” “오늘 저녁에는 그 맛을 보게 되겠군요. 아직 남아 있다면.” 거산파장은 입맛을 잃어버렸다. “철저하게 부수는군.” 백문장 요소요소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조자경은 백문장이 힘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자탄(自歎)했다. “흐흐! 작은 것을 아깝게 생각하면 큰일을 못 하지. 사소취대(捨小就大)라는 말도 못 들어봤는가?” 마부영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는 지난 반 년 동안 백문장 기관을 정상화하는 데 모든 심혈을 기울였다. 조자경이 마부영을 보았을 때 처음 물은 말이 ‘잘 돼가요?’라는 말이었고, 마부영은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데…… 모든 게 그녀의 예상을 벗어나고 있다. 그녀가 알기로는 취휴각을 제외한 모든 곳에 기관이 설치되어 있다. 비살문 고수들이 전멸 위기에 처했던 그런 기관장치가, 철응방 무인들을 눈 깜짝할 순간에 무릎 꿇렸던 기관장치가. 천력문 무인들이 외장을 통과하려면 적어도 이 할 내지 삼 할 정도는 피를 흘렸어야 한다. 마부영은 침묵했다. 조자경과 똑같이 무릎을 포개고 앉아 외장이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조자경은 고개를 들어 마부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갈 총관이 지시를 내렸다는 것은 알겠는데, 남은 기관으로 천력문을 물리칠 수 있나요? 이제 중원(中園)과 후원(後園)밖에 남아 있지 않은데……” “흐흐흐……!” 마부영은 웃었다. 조자경은 동요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백문장이 무너진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갈 총관은 어디 있지?” “무극전에요.” 그것으로 족하다. 갈천상이 무극전에 있다면 백문장은 무너지지 않는다. 단지 자신을 천루에 올려보낸 이유와 구축하기 힘든 외장을 허물도록 내버려둔 이유가 궁금할 뿐. “오늘은 눈물깨나 흘리겠군.” 마부영이 긴 한숨과 함께 말했다. “눈물뿐인가요?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어야죠.” “응? 피눈물? 흐흐흐! 천견당주 방삼이 들으면 몹시 섭섭해 하겠군.” 조자경은 놀란 얼굴로 마부영을 바라보았다. 쫦 쫦 쫦 꽈앙! 천력문 무인들은 일제히 중원 담을 허물기 시작했다. 그들은 철저히 문을 피했다. 사람이 들락거리는 곳은 통행하기 쉽지만 죽기도 쉽다.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곳, 그리고 철저한 파괴만이 희생을 막아준다. “야 이놈아, 그것도 한 번에 못 부수냐? 이 형님이 시범을 보일 테니까 잘 봐.” 꽈앙! 말을 한 자가 철추를 휘두르자 담벼락이 심하게 요동쳤다. 하나 무너지지는 않았다. 중벽은 외벽보다도 훨씬 두꺼웠고,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화강석을 쌓아올린 것이라 신력을 자랑하는 천력문 무인들도 쉽게 허물지 못했다. “이런!” “하하하! 뭐가 어쩌고 어째? 보기는 잘 봤는데 어찌 신통치 않네?” “이런 빌어먹을!” 꽝! 꽈앙……! 천력문 무인은 약이 오르는지 미친 듯이 철추를 휘둘러댔다. 다른 곳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천력문 무인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누가 먼저 중문을 허무는지 내기까지 걸어가며 병장기를 휘두르기도 하고 신력을 자랑하기도 했다. “문을 부숩시다.” 십이력 중 한 명이 제안했다. 힘 한 번만 쓰면 수수깡처럼 으스러질 것 같은 중문을 앞에 놓고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석담을 허물고 있다는 게 영 내키지 않는다는 투다. “큰애가 몇 살이지?” 구임화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말을 꺼냈다. “열두 살입죠. 소인을 닮아서 힘이 장삽니다. 벌써부터 절구통 정도는 가볍게 듭죠.” “그래? 그럼 제사를 지내줄 사람은 있군. 좋아. 중문을 부숴봐.” 구임화가 손가락 관절을 꺾으며 말했다. 말을 했던 십이력은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하나 언제나 무표정하기만 한 구임화에게서 호감이 가는 혹은 마음이 풀릴 수 있는 대답을 읽어내기는 불가능했다. 그는 병기를 들고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병기는 대부(大斧)였다. 쒸익……! 퍼억……! 십이력이 내리친 대부는 정확히 중문 한가운데에 틀어박혔다. “끄응!” 십이력은 가볍게 힘을 쓰며 대부를 뽑아들었다. 그리고 다시 내리치려는 자세를 취했을 때, 퍽퍽퍽퍽……! 대부로 중문을 가격했을 때와 비슷한 소리가 그의 몸에서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끅! 끄으윽……!” 십이력은 비명도 토해 내지 못했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와 허공을 물들인다. 거한의 육신은 새빨간 피로 목욕을 한 듯하다. 머리 위로 치켜올려진 손은 연신 부들부들 떨고 있고…… “아!” “저, 저런!” 십이력 중 몇 명이 돌연한 사태에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들은 곧 자신들의 실태(失態)를 깨닫고 구임화를 바라보았다. 구임화는 여전히 손가락 관절을 꺾었다. “괜찮군. 괜찮은 기관장치야.” 자신의 수하가 처참한 죽음을 당했는데도 그녀의 표정에는 일말의 흔들림이 없었다. 거천당 무인들은 숨소리조차 죽였다. 그들은 비로소 깨달았다. 방심은 곧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그리고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투지를 불태워주는 인간이 아니라 감정없는 기관이란 것을. 꽝! 꽈앙! 꽝……! 천력문 무인들은 있는 힘껏 석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농담을 주고받지 않았다. 내기를 한답시고 돌아가며 석벽을 허무는 짓도 하지 않았다. 모두가 일제히 달려들어 석벽을 밀어붙였다. 퍼엉! 죽음처럼 침묵하던 백문장이 반응을 보였다. 무극전이라 짐작되는 곳에서 폭죽이 솟구친 것이다. 빨간색과 파란색이 섞여 있으며 허공 십 장 높이에서 사방으로 비산하는 아름다운 폭죽이었다. “이건 도살(屠殺)이야.” 마부영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나 그는 폭죽이 시사하는 명령을 받아들여 쇠막대가 줄지어 있는 곳으로 다가섰다. 조자경은 알았다. 지금부터 백문장의 반격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마부영이 쇠막대를 움직이는 순간부터 참혹한 도살이 시작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는 또 보았다. 백문장 안쪽에서 새까맣게 달려나가는 조그만 점들을. 쒜에엑……! 피융……! 퍽퍽! “으악!” “컥!” 거천당 무인들 중 거의 절반에 가까운 무인들이 석벽에 매달려 있었다. 그들 뒤로는 나머지 거천당 무인들이 석벽이 무너지기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었고, 그들 뒤로는 황우당 무인들이 느긋하게 팔짱을 끼고 지켜보았다. 살상은 갑자기 벌어졌다. 기와 사이로, 석벽 틈바귀에서…… 화살, 비창(飛槍), 은표(銀) 등 헤아릴 수 없는 암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거천당 무인들은 속수무책이었다. 방심하지는 않았지만 거리가 너무 가까웠고, 공격이 신랄하고도 신속했다. “물러섯!” 십이력 중 한 명이 고함을 질렀지만 때는 늦었다. 거천당 무인들 중 절반이 석벽 아래로 쓰러져 아비규환을 연출했다. 어떤 자는 경련조차 하지 않는다. 그런 자는 그래도 보기에 낫다. 눈에 화살이 꽂혀 살려 달라고 발버둥치는 자에 비하면. 톱니 달린 원반에 한 팔이 떨어져 나간 자에 비하면. 적게는 한두 개, 많게는 수십 개의 암기에 벌집이 되어 쓰러진 무인들. 이어지는 공격은 더욱 가관이었다. 컹컹! 컹컹컹……! 석벽 위에 새까맣게 모습을 드러낸 개 떼들이 천력문 무인들을 향해 일제히 날아들었다. 장정에게도 성난 개는 위협적인 존재다. 하나 몽둥이라도 하나 들고 있다면 귀찮은 상대에 불과하다. 한 술 더 나아가 무공을 익힌 무인에게 달려드는 개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과 진배없다. 그러나…… 백문장에서 나타난 개 떼들은 여느 개들과 달랐다. 모습은 마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잡종개들에 불과한데 성질은 이미 개가 아니라 성난 이리 떼라고 표현해도 무방했다. 석벽에서 몸을 던진 개 떼들은 제일 먼저 아비규환을 연출하고 있는 천력문 무인들의 남은 숨통을 끊어놓았다. 부상자를 죽이는 법은 없다. 마도(魔道)나 사도(邪道)를 지향하는 자들이 아니면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개 떼는 서슴없이 부상자들의 명을 끊었다. 그리고 엉거주춤 뒤로 물러선 거천당 무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달려드는 모습도 무작정 달려드는 것이 아니다. 부상자들의 목을 물어 단숨에 명을 끊어놓았듯이 국부(局部)와 같은 치명적인 요혈만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이런, 개새끼들이!” 휘익! 깽……! 허공을 가른 대부에 몸뚱이가 갈라졌다. 철추는 머리를 으스러트리고 낭아봉, 월아산, 장파추 등이 일제히 허공에서 춤을 춘다. 역시 그들에게 개 떼들이란 한낱 미물에 불과한 것인가. “휘익……!” “휘이익……!” 석벽 너머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개 떼들이 일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물러나는 방법도 달랐다. 여느 개 떼들처럼 꽁지가 빠지게 도주하는 것이 아니라 천력문 무인들을 노려보면서, 훈련을 받은 병사들처럼 대오를 갖추고, 후미가 물러나면 선두가 물러나는 방식으로 질서정연하게 물러났다. “이, 이게……!” “이건 말도 안 돼!” 천력문 무인들은 활짝 열린 중문으로 개 떼들이 한 마리, 두 마리……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무려 천여 마리에 이르던 개들이 중문 너머로 사라지는 데는 촌각도 소요되지 않았다. 정적이 휘몰아쳤다. 그야말로 폭풍처럼 다가왔다가 폭풍처럼 사라진 급습. 어둠이 내린 대지처럼 백문장은 다시 고요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수백 마리의 개가 들어갔는데도 움직임은 물론이고 짖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조용하기는 천력문 쪽도 마찬가지다. 살려 달라고 아우성치던 소리가 뚝 그치고 나니 드넓은 세상에 홀로 서 있는 듯한 적막감이 회오리쳤다. 역하게 비위를 자극하는 피냄새와 시신만 없다면 처음 백문장을 들어섰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대, 대단하군!” 십이력 중 한 명이 신음을 토해 냈다. 잠깐에 불과한 공격이었지만 개 떼의 급습은 일흔 명에 가까운 천력문 무인을 확실하게 죽였고, 서너 명 정도는 물기까지 했다. 물론 근 오십여 마리가 죽었지만 워낙 많은 개 떼인지라 죽인 것 같은 기분도 들지 않았다. “이거였군.” 구임화의 표정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기관과 살아 있는 동물의 조화. 좋은 방어야. 저 석벽을 넘기 위해서는 틀림없이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할걸? 총관이 백문장을 너무 과하게 본다 싶었는데…… 맞군. 어때요? 아직도 생각없나요?” 구임화가 거산파장을 보며 물었다. 거산파장은 대답이 곤궁했다. 거천당은 절반에 가까운 인명을 잃었다. 그들에게 공격을 계속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는가. 그렇다고 피해가 뚜렷한 공격을 감행하기도 그렇고. 사람을 상대하는 공격이라면 아무리 피해가 많이 난다 할지라도 해보겠는데 이건 무의미한 죽음이지 않은가. 단지 백문장 안쪽으로 몇 걸음 더 걸어 들어가자고 공격을 하는 꼴이라니. “호호호! 마무리짓죠. 중문이 뚫리면 지체없이 앞으로 나가세요.” 구임화는 자신만만하게 말했고, 거산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양두진은 이미 의미를 잃어버렸다. 매복, 포위, 급습.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후미를 맡았지만 백문장에서는 매복도 없고 포위도 없었다. 급습은 있었지만. “석벽을 넘엇!” 구임화는 남의 일처럼 명령을 내렸다. 중문에서 죽은 일력을 제외한 십일력이 가타부타 말 한마디 없이 수하들에게 다가가 명령을 내렸다. “셋이다. 셋을 세면 일제히 넘는다. 한 명이라도 머뭇거린다면 내가 용서하지 않는다.” 그들이 한 말은 각기 달랐지만 내용은 비슷했다. 아니 똑같았다. ‘모두 죽어.’ 거산파장은 말리고 싶었다. 틀림없이 암기가 발사될 테고, 석벽을 넘자면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암기를 제치고 날아들어야 한다. 안에는 틀림없이 개 떼가 있을 터이고…… 그가 판단한 결과는 무의미한 죽음이었다. 석벽을 무너트릴 방법이 그렇게 없는가? 있다. 투석(投石)을 하면 된다. 투석기를 구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사나흘의 말미만 있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단 한 명의 희생도 없이 공격할 방법이 있는데 왜 서두른단 말인가. 하나 그는 그의 의중을 밝히지 못했다. 거천당은 구임화가 이끄는 당이고, 거산파장은 구임화처럼 천로라는 명성을 얻지 못했으니까. 그래도 그는 중얼거렸다. “이건 전멸이야.” 쫦 3 쫦 거산파장은 합리적인 생각을 했다. 상황판단이 올발랐다고 할 수도 있다. “커억!” “크윽!” 석벽을 넘던 거천당 무인들은 추풍낙엽(秋風落葉)처럼 떨어졌다. 암기에 대비하여 기본적인 공부는 마친 무인들이지만 끝도 없이 쏟아지는 암기공세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으음……!” 거산파장은 신음을 토해 내고 말았다. ‘이건 미친 짓이야!’ 하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무인 한 명을 길러내기 위해서는 십 년 세월로도 부족하다. 천력문 무공을 익히기에 적합한 무골도 흔치 않다. 무엇보다 이들은 같이 울고 같이 웃던 한 가족들이다. 석벽 하나 넘는데 이토록 허망하게 죽어가려고 그 많은 세월 동안 무공을 수련했는가. “빨리 넘엇! 뒤를 바짝 따라라. 그래야 목숨을 건질 수 있어!” 구임화가 미쳤다면 거천당 십일력 또한 미쳤다. 그들은 아침녘만 해도 같이 식사를 했던 수하들이 죽어가고 있건만 차가운 뱀처럼 냉정을 유지했다. 그러던 한 순간, “간닷!” 십일력 중 한 명이 수하들의 뒤를 받치며 석벽을 타고 넘었다. “됐어!” 다른 한 명도 곧바로 신형을 띄웠다. 남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구임화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머무는 순간 십일력은 한 명도 남김없이 석벽을 넘어 들어갔다. 인해전술(人海戰術)이 따로 없다. 죽은 무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천력문에 충성했다. 그들은 이미 숨이 끊어져 자신들의 육신이 기관의 작동을 저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리라. 일부분이지만 시신이 빨랫줄에 널린 빨래처럼 석벽 위에 널브러진 곳에서는 암기가 발사되지 않았다. 십일력이 그 틈을 놓칠 리 없다. 퍼억! 중문도 부서져 나갔다. 석벽을 타고 안으로 넘어 들어간 천력문도 중 한 명이 죽음을 각오하고 중문을 부숴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가 예상했던 기관은 작동되지 않았다. 십이력 중 한 명이 배부를 내리쳤을 때에는 손바닥만한 원반이 가공할 속도로 날아들었는데 이번에는 수리검 한 자루 날아들지 않았다. “……!” 느긋하게 가마에 앉아 중문을 넘어선 구임화는 중원에 들어서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도 없다. 텅 비었다. 구임화는 물론이고 천력문 무인 모두는 개 떼의 공격을 예상했다. 물론 개 떼들 정도야 얼마든지 죽여줄 자신이 있지만 그놈들을 상대하자면 잠깐의 틈이라도 벌어지게 된다. 그 틈을 노리고 백문장 무인들이 공격을 가해 온다면…… 그런 상황을 예상했는데 중원은 터무니없을 만큼 고요했다. “저희까지 모두 스물한 명입니다.” 피해가 너무 컸다. 석벽 하나를 넘는 데 거천당 무인 대부분이 희생됐다. ‘불굴의 투지’를 지녔다는 거천당 무인들치고는 허무한 종말이 아닐 수 없다. 말이 스물한 명이지 십일력을 제외하면 열 명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이지 않은가. “됐어. 물러서.” 구임화는 여전히 손가락 관절을 툭툭 꺾어댔다. “이제는 황우당 차례죠?” “알…… 겠소.” 거산파장도 이쯤에서는 물러설 명분이 없었다. 정녕 싸우기 싫은 싸움인데…… “한 가지…… 총관은 백문장을 멸(滅)하는 데 절반 정도의 희생이면 족하다고 했소. 그런데 지금은……” “아마도 여기 이후에는 저항다운 저항이 없을 거라고 예상했나 보죠? 아니면 백문장을 잘못 알고 있거나.”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소. 총관이 백문장을 잘못 파악했을 수도 있으니까. 내가 궁금한 점은…… 백문장을 멸한 다음, 철응방이 공격해 올 것이라고 했는데 대비책이 무엇인지……” “알아서 하겠죠.” “……?” “총관은 신계(神計)를 지녔어요. 몰라요? 자, 이제 구경해도 될 것 같은데요?” 구임화는 거천당 대부분이 몰살했어도 태연하기만 했다. 하기는 문주의 딸이라는 배경에다가 천로의 위명을 차지하고 있는 그녀에게 거천당 당주라는 직함은 별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 동안 심혈을 기울여온 거천당이지만 이제 와서는 좀더 높은 곳으로 도약하기 위한 발판에 불과할지도 모르고. 황우당이 백문장을 멸한다 해도 공로는 구임화에게 돌아가기 십상이다. 백문장 장주 하문화를 베기 전에는. 아름다운 여자라 베기 아깝지만 명색이 장문인인 이상 그녀를 베는 사람이 모든 공적을 차지하게 되어 있으니. 그런 행운이 자신에게 돌아오기는 어렵다고 봐야 한다. 갈천상은 아직도 비장의 수를 남겨놓고 있으리라. 멀리까지 생각하지 않더라도 개 떼…… 개 떼만 하더라도 무엇인가 있다는 증거이지 않은가. 황우당 역시 거천당과 마찬가지로 몰살 위기를 맞는다면? 요행히 백문장을 멸한다 해도 이어지는 철응방의 급습에는 속수무책이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으로 수많은 희생을 치러 백문장을 멸해 놓고 터전은 철응방에게 내주는 꼴이 되고 만다. 다음 수가 있다. 총관 태웅은 철응방 급습을 물리칠 다음 수를 준비해 놓았으리라. 그 수는 예상보다 빨리 드러날 수도 있다. 황우당이 백문장을 무너트리지 못할 경우, 태웅의 다음 수는 곧바로 나타난다. 거산파장은 확신했다. “십이력! 일보첨(一步尖)!” 거산파장은 황우당 십이력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밀어(密語)를 발했다. 첨(尖)이란 날카롭다는 뜻이다. 일보첨에는 보보(步步)마다 날카로움이 있으니 극히 조심해서 움직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목적보다 목숨을 중히 여기고 매 걸음을 떼어놓을 적마다 위험을 살피라는 뜻이. 하나 내용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매 걸음마다 날카로움을 담고 적을 응징하라는 소리로 들리리라. 어떤 때는 적보다 안이 무서울 경우가 있다. 지금이 그렇다. 백문장 무인들이 명령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구임화는 분명히 들었다. 겉으로나마 최선을 다한다는 표시는 해두어야 한다. “존명(尊命)!” 십이력이 힘차게 대답했다. 백문장 외장은 너른 공간에 불과하다. 취휴각과 무인들이 거주하는 전각, 그리고 연무장이 있다. 그 외에 몇 개를 더한다면 쌀가마니를 쌓아놓은 곳간과 주방이 있을 뿐이다. 조형미를 맞추기 위해 석탑 같은 기물이 있고, 화초가 약간 심어져 있으며, 무공을 수련하는 데 필요한 기둥 몇 개가 전부라 할 수 있다. 하나 중원에 들어서면 경관이 사뭇 달라진다. 연못이 있고 수림이 있다. 백문장 대소사를 관장하는 전각 대부분이 있고, 모습도 외장에 있는 전각과 다르게 운치가 있다. 백문장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다. 연무장은 어디에서도 구경할 수 없다. 대연무장이야 외장에 있지만…… 여느 장원들 같으면 소연무장이라도 만들어놓는데 이곳은 산책을 하기에는 적당해도 무공을 익힐 만한 공간은 보이지 않는다. 길 양쪽에는 가지각색의 꽃들이 활짝 피어 있다. 해바라기, 장미, 해당화, 작약, 옥잠화, 목화…… 분꽃까지, 각양각색의 꽃들이 화려한 자태와 향기를 뽐내고 있다. 길에는 청석이 깔려 있어 운치를 한결 더해 준다. 황우당 무인들은 이동하기 전에 전각 위부터 살폈다. 하나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많던 개 떼도 흔적없이 사라졌고,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모두 후원으로 숨어들었단 말인가. 그렇게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중원은 조용했다. “가자!” 십이력 중 한 명이 명령을 발함과 동시에 선두에 나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발걸음이 극히 조심스러웠다. 거천당 무인들처럼 닥치는 대로 두들겨 부수지는 않았지만 기관이 작동될 만한 곳은 남김없이 훑어나갔다. 자연히 이동하는 속도가 더딜 수밖에 없다. 길만 따라갈 수도 없다.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화원이 이처럼 거추장스러울 수가 없었다. 거산파장도 움직였다. 그는 황우당 무인들 중 가장 늦게 움직였음에도 어느새 가장 선두에 서서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청석을 밟는 데도 신경을 팽팽하게 곤두세웠다. 바위를 지나칠 때에는 더 조심했다. 바위를 들어보기 전에는 절대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황우당 무인들은 거산파장이 수색을 마칠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나무도 조심스런 대상 중 하나다. 청석이나 바위 못지않게 암기를 설치하기에 좋은 장소니까. “햇볕이 따갑다.” 구임화가 비웃는 듯한 말투를 던졌다. 물론 거산파장에게 한 말은 아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수하가 즉시 가마 뒤쪽으로 밀쳐 놓은 휘장을 들어올려 머리 위로 씌웠다. 한여름의 태양빛은 살갗을 익혀버린다. 하나 거산파장이 비 오듯 땀을 흘리는 것은 덥기 때문이 아니다. 구임화가 비웃어서도 아니다. 그는 포영매에 대한 전설을 믿었고, 거천당이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았기에 세상에 태어난 이후 처음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긴장했다. 중원 중앙에는 연못이 있다. 아름다운 연못이다. 한가운데에는 청룡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조각상이 세워져 있고, 희고 붉은 수련(水蓮)이 연못 가득히 퍼져 있다. 거산파장은 손짓으로 황우당 무인들을 나눴다. 연못은 가로질러 갈 수 없기 때문에. 퍼엉……! 붉은색과 푸른색이 어우러진 죽음의 전주곡, 폭죽이 솟구쳤다. “조심햇!” 거산파장은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확실히 무극전이다. 중원에 들어와 직접 눈으로 확인했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다. 더군다나 거산파장은 무극전에서 취임식을 본 적이 있지 않는가. 그곳에서 폭죽이 솟구쳐 올랐다. 패애앵……! 강궁(强弓)에서 쏘아진 듯한 활시위 소리는 거산파장의 음성과 거의 비슷한 순간에 터져 나왔다. “크윽!” 백문장에 천력문 무인들만큼이나 신력을 지녔거나 내력(內力)이 추측할 수 없을 만큼 강한 무인이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시중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하디흔한 화살로 황우당 무인의 몸통을 관통시키기는 어렵다. 철포삼으로 강철 같이 단련된 몸이니까. 거산파장은 어깨에 기대오는 수하를 안아들었다. 정확히 심장을 관통당한 수하는 이미 절명한 상태였다. “황우노진(黃牛怒進)!” 거산파장이 쩌렁 외쳤다. 죽은 수하를 돌볼 시간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죽은 수하를 내팽개쳤다는 사실도, 수하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로 상반신이 물들었다는 사실도 몰랐다. 황우당 무인들 중 대도(大刀)를 든 무인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대도를 풍차처럼 빙글빙글 돌리면서 앞으로 전진했다. 다른 무인들은 병장기를 바짝 움켜잡고 뒤를 쫓았다. 패애앵……! 쒜에엑……! 벌집을 건드렸는가. 사방에서 무수한 암기가 쏟아져 나왔다. 무슨 암기인가? 황우당 무인들은 날아드는 것이 무엇인지 구분할 틈이 없었다. 위기를 직감하면 병기를 휘둘러 막아낼 뿐이다. 몸을 숙여 피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그럴 경우, 자신은 성할지 몰라도 다른 사람이 치명적인 해를 당하게 된다. 무조건 막아야 한다. 병기로 막지 못하면 육신을 던져서라도 막아야 한다. 창창창……! 쩡! 쩡그렁……!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시간이 흐르자 하늘을 새까맣게 메웠던 암기 세례도 주춤해졌다. 그제야 황우당 무인들은 잠시 숨을 돌려 암기가 발사된 곳을 쳐다보았다. 기가 막히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연못 한가운데에 세워진 청룡상(靑龍像)이 알몸뚱이로 변했다. 자신들의 목숨을 노리고 날아들던 암기의 정체는 청룡상을 뒤덮고 있던 비늘이었고, 무인 한 명의 목숨을 앗아간 화살은 여의주를 물고 있는 청룡의 눈에서 발사되었다. 발 밑에 수북이 쌓인 철편(鐵片)들. 끝 부분이 날카롭게 갈려 있는 철편들은 햇빛에 반사되어 은비늘처럼 반짝거렸다. “희생은?” 거산파장은 제일 먼저 수하들의 안위부터 물었다. “없습니다.” “없습니다.” “한 명입니다.” 십이력들이 수하들의 모습을 확인한 다음 보고했다. 청룡상은 연못을 축으로 이쪽과 저쪽을 동시에 공격했고, 상당히 위협적인 공격이었지만 죽은 사람은 단 두 명뿐이었다. 중상자가 두 명, 경상자가 여섯 명. 거천당에 비하면 하늘과 땅의 차이랄 수 있었다. 세상천지가 적이라고 생각되면 미쳐 버리고 말리라.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던 황우당 무인들이지만 솔직히 백문장을 공격하는 것은 두려웠다. 상대가 없는 싸움처럼 지겨운 싸움이 또 있을까? 그렇다. 황우당 무인들은 두렵기도 하고 지겹기도 했다. 백문장에 산재한 모든 기물과 자연이 적이다. 전각으로 들어가는 청석도 적이고 돌계단도 적이고 난간도 적이다. 기와는 말할 것도 없고, 전각기둥에 새겨진 문양도 예사롭게 보아넘길 수 없다. 몸집이 황소만한 장정 백사십여 명이라면 아무리 넓은 정원도 꽉 들어차는 느낌이 들 텐데…… 지금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이 왜소해진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마지막 도살이군.” 마부영은 아직 눕혀지지 않은 쇠막대에 손을 얹었다. “전각에 들어서는 순간 저들 중 절반은 죽을 거야. 나머지 절반도 곧 뒤따라 저승 문턱을 넘을 게고……” 조자경은 묵묵히 장원을 내려다보았다. 삶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인 것을 잘 알고 있는 조자경은 백문장에 뿌려지는 선혈이 새삼스럽지 않았다. 하나 봉아나 덕진 등은 다르다. 이 부분은 난주일검이 가장 우려하는 부분이기도 했지만, 실전 경험이 전무한 다섯 명은 눈 앞에서 사람이 무더기로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봉아, 소화는 얼굴빛이 새하얗게 변해서 부들부들 떨었다. 덕진, 충소, 목지형은 냉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역시 큰 충격을 받은 듯 입술이 새파랗다. 백문장에서는 거산파장을 선두로 한 무인들이 전각문을 밀치고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그그긍……! 마부영은 시기를 놓치지 않고 쇠막대를 힘껏 잡아당겼다. 第二十章 여피행매(如彼行邁: 마치 막다른 길을 치닫듯) 쫦 1 쫦 오천로 구임화는 평상심(平常心)을 잃고 벌떡 일어섰다. 처음부터 황우당의 고전(苦戰)은 예상했다. 잘 하면 절반 정도의 희생에 그칠지도 모르지만 자칫하면 몰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다. 그건 구임화의 생각이 아니라 총관 태웅의 생각이었다. 백문장 공격을 선포하기 전날, 천력문주와 차를 마시고 있던 자리에 총관 태웅이 찾아왔다. 그는 전격적인 공격을 요구했다. 장황한 설명이 이어지고…… 문주, 아버지는 총관의 생각에 동의했다. “희생이 너무 커요. 황우당은……” “포영매라는 자는 무공이 추측불가(推測不可). 한마디로 성이 날 대로 난 호랑이지. 엽사(獵師)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그놈만한 호랑이를 잡으려면 희생이 필요해.” “가치가 있어요?” “있지. 지금 백문장을 치는 것은 예전과는 상황이 달라. 이미 오대 패강의 위치로 올라선 백문장. 최소한 금화부를 차지하는 것이고 욕심을 부린다면 절강성 패주(覇主)도 되겠지. 두 번이야. 두 번의 고비만 넘긴다면……” 아버지도 포영매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를 한 것 같았다. 천력문 문도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아버지와 총관은 끊임없이 주변정세를 살폈고, 결정적인 기회를 노린 듯하다. 황우당은…… 불쌍하게도 미끼로 던져졌다. 하나 이건 너무 고전이다. 사방팔방에서 쏟아지는 암기공세, 그리고 전각 안에서 뛰쳐 나온 맹견(猛犬)들. 암기가 수리검이나 표창 정도라면 어느 정도 막을 수 있겠는데 그놈의 톱니가 달린 원반은 도무지 막을 방도가 없었다. 하기는 저것에 철응방 비조탈명과 사귀가 목숨을 잃었다고 하니. 맹견들도 문제다. 맹견들은 암기가 폭우처럼 쏟아지는데도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물론 암기에 격중당해 죽어간 맹견도 한두 마리가 아니다. 자신들의 암기에 자신들의 맹수가 죽어가는 꼴이다. 하나 효과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고 하지만 맹견에게 물리기라도 하면 신경이 분산될 수밖에 없다. 근본적으로 맹견이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신경이 분산된다. 평소 같으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암기도 막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으니. “후퇴! 물러섯!” 거산파장은 일생 동안 한 번도 입에 담지 않은 말을 꺼냈다. 서른일곱 명. 처참한 결과다. 거산파장까지 백사십오 명이 와서 서른일곱 명이 남았다. 백문장 중원은 피가 고여 피웅덩이를 만들었고, 내를 이루며 흘렀다. 넓디넓은 장원이지만 시신이 없는 곳이 없고 피가 튀지 않은 곳이 없다. 전부 천력문 황우당 무인들의 피와 시신, 개들의 피와 몸뚱어리들이다. 발 디딜 곳이 없었다. 엄청난 양의 암기공세였다. 잔해가 너무 많아 전쟁터가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백문장……!” 거산파장은 이를 악물었다. 백문장 무인들은 아직 만나보지도 못했다. 그들은 어디에 숨어 있는가. 지금 마음 같아서는 그 누가 되었든 눈 앞에 나타나기만 하면 단 일(一) 장(掌)에 요절을 내버리고 싶었다. 저벅! 저벅……! 그의 뒤쪽에서 묵중한 발소리가 들렸다.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거천당 당주 구임화다. 발걸음 소리는 그녀의 가마를 들고 있는 문도들이 내는 소리다. “여기는 내가 맡죠. 조금 있으면 철응방이 공격해 올 거예요. 막아보세요.” “……” 거산파장은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거천당 역시 전멸에 가까운 상처를 받았다. 그런데 무엇으로 백문장과 싸우겠단 말인가. 그리고 또, 철응방이 공격해 온다면 그만한 전력을 구비했을 터. 서른일곱 명에 불과한 황우당 무인들로는 막아내기 어렵다는 것은 삼척동자(三尺童子)도 짐작할 수 있다. “호호호! 그래도 귀신하고 싸우지는 않잖아요? 병기를 맞댈 수 있고, 형체가 있으니 싸우는 맛은 날 거예요.” 싸우다가 죽으라는 소리다. 거산파장은 살아남은 수하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의 시뻘게진 눈에 비분의 눈물이 그렁거린다. 황우당이 언제 이런 패배를 겪어보았는가? 거력을 지닌 사람들인 만큼 태어나면서부터 남을 짓누르고만 살았지 핍박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 “싸우다 죽읍시다.” 십이력 중 한 명이 주먹을 움켜쥐며 말했다. “황우당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럴 바에야 마지막까지……” 십이력 중 다른 한 명은 현실적인 입장에서 싸울 것을 주장했다. 명맥을 이어갈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경우, 문주는 문조를 보강해 주지 않는다. 전과(戰果)는 상관없이 재개편(再改編)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대부분 다른 당에 부속되지만. “좋지. 이렇게 돌아갈 바에는 그것도 좋겠지.” 거산파장은 뚜벅뚜벅 걸어서 중원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살아남은 문도들이 힘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저, 저들은!” 마부영이 놀라서 외쳤다. “아!” 조자경도 신음 비슷한 비음을 토해 냈다. 천루에서는 백문장을 환히 내려다볼 수 있기에 현재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누구보다도 정확히 알 수 있다. 천력문 무인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다.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공격은 막아냈다고 생각했는데…… 백문장 좌우측에서 나타나 날렵하게 달려오는 일단의 무리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저들이 적이라면…… 마부영은 더 이상 작동시킬 기관이 없다. 꼿꼿이 서 있는 쇠막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후원에 설치된 기관들이다. 방삼이 맡고 있는 천견당도 와해되었다는 편이 옳다. 피해가 얼마나 큰지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중원에 하나 가득 널브러져 있는 개들만 봐도 거의 오륙백 마리는 죽은 것 같다. “흑사당과 반심당은 어디 있죠?” 조자경은 자신도 모르게 불쑥 물었다. 상황이 급하게 돌아간다. 좌측과 우측에서 나타난 무인들은 생각 몇 번 하는 사이에 백문장 지척까지 다가섰다. 이제 믿을 사람은 야조비공과 흑사도뿐이다. 어처구니없다. 이제 무공에 입문한 지 반 년밖에 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백문장의 사활(死活)을 걸어야 하다니. 흑사도와 야조비공, 그리고 팔향주(八香主)는 입문할 당시부터 무공을 지니고 있었으니 그럭저럭 싸울 수 있다고 하지만 다른 문도들은 수만 많을 뿐 무공은 보잘것없다. 실전경험이 없는 것도 싸울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이겠지만. 그래도 지금 처지에서는 생각나는 사람이 그들밖에 없었다. “총관께서 후원으로 물리셨습니다.” 난주일검이 대답했다. “으음……!” 조자경은 자신도 모르게 검자루를 움켜잡았다. 도대체가…… 마임호는 어디서 소식을 주워왔기에 새로 나타난 무인들의 정체를 몰랐단 말인가. 소식통이라는 홍문성은 무엇을 하고 있었고, 중원에서 가장 넓은 발을 지녔다는 개방과 연분을 지니고 있는 갈천상은 또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절체절명의 상황이 아닌가. 이럴 때 천루에서 지켜만 보고 있어야 하다니. “내려가야겠어!” 조자경은 더 이상 천루에 숨어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는 안 됩니다. 이번 싸움에서는 소저의 몫이 없습니다.” 난주일검이 앞을 가로막았다. 친자매 같은 봉아와 소화도 은근히 긴장하며 앞을 막아섰고, 덕진, 목지형, 충소는 육합검진의 위치를 점하며 병기에 손을 얹었다. 고집을 부리면 일전불사도 감수하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조자경은 싸움에 임하면 늘 그렇듯이 얼음처럼 차디찬 표정으로 돌아갔다. 상대를 무시하지 마라. 숱한 싸움을 치르면서 몸소 체득한 진리다. 패배가 확실해진 상대라 할지라도 마지막 숨통이 끊기기 전까지는 방심할 수 없다. 이들은 무시하려면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는 상대들이다. 난주일검은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무공을 익힌 기간이 너무 짧다. 흑사당이나 반심당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그래도 무시하지 않았다. 갈천상이 직접 건네준 비급을 익힌 사람들이기에. “전불파촌(前不巴村), 후불파점(後不巴店).” 앞에는 마을이 없고, 뒤에는 상점이 없다. 난주일검은 외딴 곳에 있다는 말로 자신의 심정을 표현했다. 명령을 받은 이상 어쩔 도리가 없다는 뜻일 게다. 하기는 그의 처지로는 승패를 떠나 조자경을 묶어두어야 한다. 호법(護法)? 명색이 호법이지 감시자의 역할을 맡았다는 사실은 어머니가 말씀을 던진 순간부터 짐작했다. “그만 하지. 끌끌! 장주님과 갈 총관이 특별히 내린 명령인데 어길 만한 배짱은 누구에게도 없지. 괜히 핍박하지 않는 게 좋아. 흐흐!” 마부영이 남의 일처럼 참견했다. “그렇군요. 어머님과 갈 총관이 내린 명령인데 누가 거역하겠어요.” 조자경은 말을 하면서도 마음 속에서 구름처럼 일어나는 의혹을 떨칠 수 없었다. 갈천상은 강대한 상대들을 찾아 결전을 벌이게 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결정이 칼 끝 하나에 결정되는 순간들이 연속되어 일어났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싸움을 못 하게 말린단 말인가.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떠난 사람들을 쫓아갈까 봐? 그건 더욱 말이 안 된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는 바에야 어디를 갈 수 있단 말인가. 현재 백문장에서 자신의 무공은 큰 도움이 된다. 자신처럼 실전경험이 풍부한 무인도 없을 게다. 그런데 제쳐 놓다니…… ‘가야 돼.’ 조자경은 뜻을 포기한 듯이 검병(劍柄)에서 손을 떼고 동혈 앞으로 다가가 밑을 내려다보았다. “다 수가 있을 거네. 너무 걱정하지…… 엇!” 느긋하게 말을 잇던 마부영은 너무 놀라 헛바람을 내질렀다. 조자경이 천루에서 몸을 날린 것이다. 천루는 벽호공(壁虎功)을 전개할 수 없을 만큼 가파른 절벽에 위치한다. 백문장 무인들뿐 아니라 사대 패강에서도 천루의 위치를 짐작하고 있지만 제일 먼저 천루부터 치지 않는 것은 천루에 근접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려갈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조자경은 몸을 날린 즉시 허리를 틀어 미리 점찍어두었던 칡넝쿨을 잡아챘다. 후드둑……! 칡넝쿨이 흙 부스러기를 떨구며 뜯겨져 나왔다. 후두두두둑……! 칡넝쿨을 잡아채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몸이 밑으로 떨어지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칡넝쿨이 너무 약했던 탓이다. 조자경은 연신 양 손을 움직이며 돌출한 바위며 칡넝쿨이며 나무줄기를 잡아챘지만 여간해서 걸려들지 않았다. ─`구(拘)는 조수(手)이며 허수(虛手)다. 세 손가락을 사용하여 안에서 밖으로 움켜잡는다. 루()는 실수(實手)다. 다섯 손가락을 사용하며 밖에서 안으로 움켜잡는다. 구와 루는 구를 먼저 사용하고 루를 사용하며 연속수의 형태를 띤다. 무극진결 수공편(手功篇)에 나오는 십이자결(十二字訣)이다. 조자경은 정신을 수습하고 오른손으로 구를, 거의 동시에 왼손으로는 루를 펼쳤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손가락이 아릿하게 아파왔다. 출렁하는 느낌이 든다. 몸이 절벽에 세차게 부딪치는 느낌도 들고, 전신의 모든 체중이 왼손에 몰리는 충격도 받았다. “휴우!” 자연스럽게 한숨이 터져 나왔다. 잠깐에 불과한데…… 조자경은 절반 이상을 내려와 있었다. 쫦 2 쫦 “이제 끝났지?” 구임화는 십이력을 돌아보며 가볍게 웃었다. 새로 나타난 무인들…… 그들은 천력문 오당 중 하나인 화웅당(火熊堂) 무인들이었다. 천력문은 백문장을 치는 데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삼당(三堂)을 투입한 것이다. “거산파장이 이를 갈겠군. 하하! 피해가 큰데.” 대웅십장(大熊十掌) 홍잔도(洪刀)가 피냄새를 맡는 듯 코를 벌름거리며 말했다. “정리하세요. 아! 포영매라는 자, 그자는 죽이지 말아요. 어떤 자인지 낯짝이라도 봐야 되니까.” “하하하! 소저, 혹시 신랑감으로 점찍은 건 아니오?” “호호! 그건 양물(陽物)을 보고 난 다음 결정할 문제죠.” “그럼 양물도 온전히 보전해서 식탁 위에 올려놓으리다.” “밥맛이 떨어지지 않을까요?” “하하핫! 도깨비를 먹는 맛도 괜찮을 게요.” 구임화와 홍잔도는 수하들이 듣건 말건 음담(淫談)을 주고받았다.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점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총관 태웅은 철응방의 비조탈명이 어떻게 죽었는지, 갈천상이 개를 들여오는 까닭이 무엇인지 세세하게 조사했다. 그는 마부영의 존재도 파악해 냈다. “공성(空城)이되 철옹성(鐵甕城)이군.” 태웅이 한 말이다. “황우당이 몰살하겠지만 그만한 대가는 가져다 줄 겁니다. 황우당의 몰살과 백문장을 교환하는 것인데…… 손해가 없다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문주 앞에서 한 말이다. 오직 거산파장만이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총관의 예측대로라면 백문장은 발톱 빠진 호랑이에 불과하다. 무인들의 수가 급격하게 늘었지만 모두 수수깡 같은 존재들. 정작 무서운 것은 기관이었지만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걱정할 일이 없다. “호호! 그럼 기대하죠. 가자!” 구임화는 가마를 돌렸다. 그녀가 가는 곳은 정문이었다. 꽈앙! 굉음과 함께 문이 부서져 나갔다. 그리고 화웅당 무인들이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그들은 앞을 가로막은 다섯 명을 보았다. 덩치가 우람하지만 자신들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거한은 대부를 들었고, 다른 두 명은 창을, 또 다른 두 명은 만자탈(卍字奪)을 든. 대부를 든 자가 말했다. “오전주다. 염라지옥에 든 것을 환영한다.” “이,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대웅십장 홍잔도는 경악했다. 다섯 명에 불과한데…… 이들은 양 떼 무리를 휘젓는 호랑이들이다. 다섯 명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서로 간의 거리를 떼어놓지 않는다. 쌍창과 만자탈이 든든한 보호막을 형성해 주기에, 대부가 마음놓고 앞에 있는 사람을 격살한다. 언뜻 보면 수십 명 대 다섯 명의 싸움 같지만 실제는 일 대 일의 싸움 구도다. 뚫고 들어갈 틈이 전혀 없는가? 없다. 흔히 부부(夫婦)를 일컬어 일심동체(一心同體)라고들 하는데 이들이야말로 완벽한 일심동체다. 거리를 벌어주는 창과 창의 허점을 보완해 주는 만자탈의 절묘한 조화. ‘저놈…… 저놈을 죽이지 않으면 승산이 없어……’ 홍잔도는 끊임없이 수하들을 격살하고 있는 한 인물에게 초점을 맞췄다. “내가 바로 천력문 화웅당주 홍잔도다.” 수하들을 뒤로 물린 홍잔도는 대부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있는 상대를 앞에 두고 마주섰다. “홍잔도…… 대웅십장이라는 위인이군.” “많이 죽였나?” “……?” “피맛을 많이 봤냐고 물었다.” “아! 유희(遊戱)를 즐길 줄 아는군. 적당히 봤지.” “그럼 이제 대가를 치러.” “좀더 멋있는 말은 없나? 다른 건 좋은데 마지막 말은 품위가 없어. 삭막하기도 하고.” 홍잔도는 금강대력(金剛大力)을 끌어올렸다. 장법(掌法)으로는 거산파장과 함께 천력문 이대장(二大掌)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철포삼을 익히고 철사장(鐵砂掌)을 수련했다. 금강대력을 힘의 원천으로 삼고, 강화된 선전력(旋轉力)을 초식의 골간(骨幹)으로 했다. 거기까지는 여느 천력문 무인들과 다를 바 없다. 홍잔도가 천력문 무인들 중 단연 두각을 드러내고, 당주의 직위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기형적으로 발달한 손 때문이다. 그의 손은 놀라울 만치 커서 웬만한 장정의 넓적다리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손가락을 활짝 펴면 장정들 얼굴도 한 손에 잡을 수 있다. 장법을 익히기에는 더없이 적합한 손이다. 거기에 홍잔도는 기연(奇緣)까지 얻었다. 금강대력은 소림 무공에서 파생된 만큼 소림사와 관계가 없을 수 없다. 소림사와 무슨 관계인지는 모든 절강무인들의 관심거리다. 분명한 것은 소림승들이 매년 정기적으로 천력문을 방문한다는 것. 그리고 천력문에서는 조그만 문파를 세우고도 남을 만큼 많은 시주를 한다는 것이다. 소림사 장로인 정명대사(精明大師)가 정기적인 방문과 상관없이 천력문을 들른 적이 있다. 수행차 중원 전역을 떠돌다가 절강성에 들른 김에 천력문을 방문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홍잔도는 거천당 십이력 중 한 명에 불과했다. 정명대사는 홍잔도의 기형적인 손을 보고 대뜸 장법(掌法)을 전수해 주었다. 천력문 무공과는 상이하게까지 느껴지고, 소림사 정종무공과도 판이하게 다른 장법. 부드럽기 이를 데 없는 특징을 가졌지만 격중당하면 오장육부(五臟六腑)가 으스러지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장법. 어찌 보면 무당파의 장공(掌功)과도 흡사해 보이고…… 초식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위력은 마음에 들었다. 홍잔도는 정명대사가 전수한 장법을 부지런히 익혔다. 무공보다는 불공으로 법명이 높은 정명대사였지만, 그래도 소림사 장로인데 평범한 무공을 전수해 주었겠느냐는 심정에서. 기이하게도 정명대사가 전수해 준 장법은 몸에 착 달라붙었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익히고 있던 무공인데 지난 세월 동안 잊어버리고 있다가 다시 찾은 무공 같았다. 몸은 가벼워지고 힘은 넘쳐 흘렀다. 누구보다 빠른 신법과 날카로운 안력을 지니게 되었고, 금강대력의 진수를 깨닫게 되어 타고난 신력과는 또 다른 힘을 장법에 싣게 되었다. 정명대사는 천력문을 떠나기 직전, 대연장(大衍掌)을 꾸준히 익히면 큰 성과를 보게 되리라고 말해 주었다. 소림 칠십이종(七十二種) 절예(絶藝)는 아니다. 칠십이종 절예 속에는 대연장이라는 무공이 없다. 하기는 소림 절학이 아니기에 마음놓고 전수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홍잔도는 대연장을 전수받은 이듬해, 당주직을 부여받았고 화웅당을 물려받았다. 전임 화웅당주가 대전(大戰) 중 비살문에게 암살당하는 행운도 곁들였지만. 빠악! 파앙! 오전주와 홍잔도는 거한들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빨랐다. 오전주는 대부를 치켜올린다 싶은 순간 내리찍고 휘두르고…… 십여 번에 걸친 공격을 가했고, 홍잔도 역시 신법으로 공격을 피하며 십여 차례에 이르는 공격을 가했다. ‘세상에! 이렇게 강한 놈이!’ 홍잔도는 긴장했다. 대연장은 일장(一掌)부터 십장(十掌)까지가 연속수로 이루어진다. 처음 일초식을 방관했다가는 어떻게 손써볼 틈도 없이 십 장 모두를 허용해야 한다. 오전주라는 사내는 다르다. 십 장 모두를 허용하기는 했지만 모두 피해 냈고, 일방적으로 몰린 것도 아니다. 그 역시 십(十) 부(斧)를 휘둘렀으니까. 강맹하기 이를 데 없는 대부를 신체의 일부분인 냥 이토록 자유자재로 휘두를 수 있는 인물이라면…… ‘벽산개부 고규철?’ 무공이 강한 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하나 대부를 병기로 사용하는 자는 극히 드물다. 대부는 신력(神力)을 바탕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중병(重兵)을 사용하는 자들 중 명망이 높은 사람은 천력문의 눈길을 피할 수 없다. 홍잔도는 대부의 달인을 떠올렸지만 상대가 정말 벽산개부 고규철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페에엑! 파앗! 대부가 옆구리를 짓쳐 왔다. 홍잔도는 급히 몸을 틀며 우장으로는 얼굴을, 좌장으로는 손목을 쳐갔다. 다음은 다시 몸을 바짝 밀착시키면서 오른 팔굽으로 가슴을 쳐가고 좌장은 미끄러지듯 밑으로 흘러 겨드랑이 밑을 쳐야 한다. 그래야 완벽한 초식이 된다. 하나 상대는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홍잔도 역시 연속수를 쳐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페에엑! 옆으로 흘러들던 대부가 방향을 꺾어 위로 쳐올려졌다. 홍잔도는 신속하게 뒤로 몸을 물려 대부의 공격권에서 벗어났다. 잠시 대치상태가 이어졌다. “놀라운 무공이군. 혹시 벽산개부 고규철인가?” “옛날에는 그렇게 불린 적도 있지.” “으음……!” 홍잔도는 이를 악물었다. 최대의 난적(亂賊)이다. 벽산개부 고규철의 명성은 중원 전역에 알려져 있다. 그가 팔뚝만한 잉어라면 자신은 송사리인 셈이다. 불가피하게 생사를 판가름해야 할 처지가 아니라면 싸울 마음조차 들지 않았을 상대임이 분명하다. 이미 손속을 겨루고 있는 처지이니 피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이기는 사람과 지는 사람은 반드시 구분지어진다. 행동은 정해졌고 결과만 남았는데…… 이자가 벽산개부라면 이겼을 경우 상당한 대가가 기다린다. 천력문 일개 당주에서 중원 전역에 이름을 날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셈이다. 해볼 만한 상대라는 점도 그의 이를 악물게 만들었다. 막상 싸움을 시작해 보니 소문만큼 강한 것 같지가 않다. 해볼 만한 상대…… 벽산개부의 진신 무공이 이 정도에 불과하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그는 자신감을 얻었다. “벽산개부…… 당신은 큰 실수를 했어.” “실수라……” “절강성에 발을 들여놓는 게 아니었어.” “하하하! 괜찮은 자인 줄 알았더니 영 아니군. 장법을 보니 대연장인데, 정명스님에게서 전수받았나?” “……!” 놀랐다. 너무 놀랐다. 대연장을 알아보는 것도 놀라웠지만 정명대사에게서 전수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것도 놀라웠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두려운 것은, 그런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면 무공의 허실(虛實) 또한 세세히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들어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 했거늘, 적은 자신을 알고 있는데 자신은 전혀 모르고 있으니. “후후! 놀랄 것 없어. 놀랄 일은 태산같이 많으니까. 대연장이 이미 이류무공으로 전락한 사실은 알고 있나? 모르고 있나 보군. 강맹한 소림무공에 부드러움을 접목시켰다는 정명스님이지만…… 포영매에게 꺾였어. ‘최고가 아냐’라는 말, 알고 있지? 후후후!” 벽산개부는 여유만만했다. 반면에 홍잔도는 개미굴 속에 들어간 것처럼 조급해졌다. ‘너만 죽이면 네 명성이 고스란히 나에게 옮겨오지. 너만 죽이면.’ “타앗!” 홍잔도는 급하게 달려들었다. 상대가 벽산개부임을 알았으니 약간의 만족은 쥐여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져 급하게 달려들 용기가 생겼다. 팔을 떼어주고 목숨을 취한다. 벽산개부와 싸워서 팔 하나를 잃었다면 아무런 흉이 되지 않는다. 흉은커녕 벽산개부를 죽였다는 영광이 그의 미래를 환히 밝혀주리라. 쉬이잉……! 벽산개부는 조그만 틈도 놓치지 않았다. 홍잔도가 급하게 달려드는 바람에 옆구리에 틈이 생긴 것을 파악하고 득달같이 달려들어 옆구리를 팼다. ‘이겼어!’ 홍잔도는 왼손으로 대부를 막아갔다. 다른 때처럼 손목을 쳐내는 것이 아니라 대부의 날을 움켜잡아 갔다. 물론 손이 성할 리 없다. 철포삼을 익히고, 철조공(鐵爪功)을 익히고, 철사장을 익히고, 대연장을 익혀 쇠토막처럼 단단해진 손이지만 벽산개부의 대부에 걸리면 걸레 조각처럼 너덜너덜 찢어지리라. 하나 촌각의 여유는 벌어준다. 벽산개부의 대부는 왼손에 걸려 있고, 그의 가슴은 활짝 열리게 되리라. 신법을 전개하기도 늦다. 몸과 몸이 밀착되듯 바싹 붙어 있는 상태에서는 죽기 아니면 살기로 부딪치는 수밖에 없다. 홍잔도는 우장을 들어 회심의 일격을 가했다. 심장만 노릴 필요는 없다. 대연장은 내장을 가닥가닥 끊어놓는 특성을 지니고 있으니 피와 살로 된 육신이라면 어느 곳을 맞아도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그가 노리는 부위는 가장 격중하기 쉬운 복부였다. 퍼억! 좌장과 대부가 먼저 부딪쳤다. 홍잔도는 비명을 토해 내고 싶었다. 아니다. 그럴 정신조차 들지 않았다. 왼손에서 시작되어 발 끝까지 저려울리는 고통은 필설로 형언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닥 남은 의지는 끝까지 우장을 펼쳐 냈다. 퍼어억……! 퍼억! 우장에 묵중한 탄력이 전달되었다.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이겼다는 것을. 우장에 전달되는 감촉은 수십 번에 걸친 싸움을 치르는 동안 너무도 익숙해진 감촉이지 않은가. 왼손이 뭉개진 충격 때문에 전신 기력을 모두 쏟아내지는 못했지만 손가락 하나 꿈틀거리지 못할 만큼의 충격을 가하기에는 충분하다. ‘이겼어!’ 마무리는 어떻게 할까? 역시 대연장으로 시작했으니 대연장으로 끝내는 게 속 편하다. 벽산개부 같은 인물과 상대하면서 여유를 부린다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행위다. 기회가 생겼을 때 끝장을 내야 한다. 홍잔도는 금강대력을 끌어올렸다. 한데…… 앗! 진기가 모이지 않는다. ‘이, 이게……?’ 순간, 홍잔도는 당황했지만 역전(力戰)을 치른 무인답게 평상심을 유지했다. 다시 한 번 진기를 끌어올렸다. 하나 역시 모이지 않는다. 내력을 끌어올리지 않고도 황소 한 마리쯤은 뉘어버릴 수 있는 거력을 지녔지만, 지금은 속이 텅 빈 허수아비처럼 살가죽만 남은 느낌이다. 이런 현상은 어째서 일어나는 것일까? 대연장을 익힌 지 십여 년이 지났지만 이렇게 기이한 현상을 겪어보기는 처음인지라 수습할 방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도 오래 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육신이 힘없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곧 깊디깊은 영면 속으로 빠져 들었다. “당주!” 십이력 중 한 명이 처절하게 외쳤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상대가 벽산개부라는 사실을 알았으면서도 어째서 당주는 그토록 무모한 공격을 가했는지. 벽산개부가 전개한 대부는 번갯불에 비유할 만큼 빨랐다. 왼손을 잘라버리고 내처 옆구리까지 파고들어 몸통을 절반이나 갈라버렸다. 그나마 완전히 절단하지 않은 것은 손속에 인정을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시신이나마 온전히 보존하라는. 홍잔도가 우장으로 공격했지만 힘없는 어린아이의 장난스런 손장난에 지나지 않을 만큼 힘이 빠진 상태였다. “쳐랏!” 십이력 중 한 명이 울분을 참지 못해 고함을 질렀다. “죽엿!” “살점을 오독오독 씹어먹고 말겠어!” 화웅당 무인들은 악에 받쳐 분별없이 달려들었다. 벽산개부는 이미 쌍창과 원반의 보호하에 들어간 상태였다. 창창! 퍼억……! 상황은 조금도 호전되지 않았다. 오히려 악화됐다. 쌍창과 원반을 든 무인들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강력한 보호막을 형성했고, 벽산개부는 대부를 마음껏 휘둘렀다. “놀랄 만큼 정확해. 놀랄 만큼!” 방삼은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하나 그의 눈동자는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사대 패강에 뛰어난 책사들이 있지만 귀호구혼(鬼呼拘魂) 전인수만은 못하지. 삼국시대(三國時代), 유비(劉備)에게는 전략가(戰略家)가 없었지. 제일 처음 얻은 군사(軍師)가 서서(徐庶)인데, 조조(曹操)에게 잡혀 있는 모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위(魏) 나라로 가게 되지만…… 그가 가면서 천거한 사람이 제갈공명(諸葛孔明)이야. 떠나면서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을 천거한 거지. 백문장의 복(福)이라면 광량을 얻었다는 거야. 그는 죽었지만 갈천상을 묶어놨고, 귀호구혼 전인수를 묶어놨으니까.” 홍문성이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당신도 묶였잖아.’ 방삼은 곧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소리를 꿀꺽 삼켰다. 절곡에 있던 광인들, 그들의 능력은 하나같이 놀라웠다. 비록 무공은 모르지만 백문장이 탄탄하게 자리잡을 수 있었던 이면에는 그들의 지혜와 경험이 십분 발휘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진가를 모를지 모른다. 그들이 하는 일이라야 겉으로 드러나는 일이 거의 없으니까. 하지만 백문장에서 자잘한 살림살이를 도맡아 하다시피 한 방삼은 그들이 얼마나 놀라운 사람들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 말을 하고 있는 홍문성이나 그 옆에 얌전히 서 있는 오경만 해도 그렇다. 그들이 하는 일은 전혀 내세울 것이 없지만 실은 백문장에서 필요한 모든 인력은 그들이 구해 온다. 최상의 인간들만 선별해서. 그보다 더 값진 일이 어디 있을까. “지금이 시기인 것 같소만.” 방삼도 때를 읽었다. 장(莊)에 당(堂)이 있고, 당에 향(香)이 있다면, 천견당에서 향주(香主)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스무 명의 조련사들이다. 그들 중 몇 명은 허탈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조련할 개가 없으니…… 다른 조련사들도 상황이 비슷하다. 많게는 서른 마리 가까이 남아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십여 마리 안짝의 개들만 남았을 뿐이다. 조련사에게 개는 자식과 같다. 방삼도 그런 심정으로 조련사와 개들을 대했고, 자식 같은 개들이 무참하게 죽어갈 때에는 눈물이 솟구쳐 참을 수 없었다. 이제 남아 있는 개들조차 모두 죽음의 길로 몰아넣어야 한다. “진(進)!” 방삼은 무극전이 쩌렁 울리도록 고함을 내질렀다. 그리고 또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컹컹컹……! 죽을지 살지 모르고 주인의 명을 쫓아 달려나가는 개들의 짖음이 귓전을 아릿하게 울렸다. 쫦 3 쫦 “기분이 어떤가?” 거산파장이 물었다. “백문장이 재기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토록 강할 줄은 몰랐습니다. 이 정도라면…… 예전에 비해 전혀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자네 수하들에 비하면 어떤가?” “후후!” 한병(韓秉)은 잘게 웃었다. 백문장 백응당(白鷹堂)이라고 하면 눈뜬 사람의 코도 베어갈 만큼 신출귀몰했다. 그들은 ‘전원몰사(全員沒死), 후퇴불가(後退不可)’를 정신적 지주로 하였기 때문에 가장 맞서기 싫은 무인들을 꼽을 때에는 으레 거론되기도 했다. 한병은 백응당 무인들을 이끌고 천력문으로 들어왔다. 천력문은 날개를 달았다. 싸움의 최선봉에 내세울 사람들이 생겼으니까. 아무리 많은 문도가 죽더라도 아까울 것이 전혀 없으니까. 공짜란 원래 그런 것이지 않은가. 백응당이 아무리 충성을 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천력문의 무공을 익히고 있지 않다. 백문장의 무공은 기(技)와 교(巧)를 중시하는 관계로, 천력문 무인들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결국 쓸모있는 곳은 소모품 역할밖에 없다. 백응당 무인들은 긍지를 잃었다. 투지도 잃어갔다. 회의(懷疑)는 무럭무럭 커졌고, 불신은 뼛속 깊이 뿌리박혔다. 결국 한병은 몇 사람밖에 남지 않은 수하들을 이끌고 같은 당주였던 거산파장의 휘하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무림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무림인으로 인증받은 자가 무림을 떠날 때는 죽을 때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입에도 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사문(師門)인 백문장을 치러 왔고, 패퇴했다.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지 않는가. “길게 이야기를 나눌 짬도 없군.” 거산파장은 눈을 부릅떴다. 거의 이백여 명에 육박하는 흑의인들…… 그들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천력문 무인들을 둥글게 에워쌌다. “두 놈씩만 죽이고 죽어라. 그러면 손해가 아냐.” “두 놈쯤이야 자신있습니다.” 십이력 중 한 명이 대답했다. 언젠가 이자에게 한 말이 있다. ─`네놈은 힘만 믿다가 뒈지고 말 거야. ─`제발, 그런 놈이 나타났으면 원이 없겠습니다. “먼저 죽을 줄 알았는데 같이 죽는구나.” “영광입니다.” “별 시러배 잡놈을 다 보겠군.” “하하! 이제야 우리 황우당 당주님 같습니다. 솔직히 요 근래 며칠 동안은 도저히 당주님 같지 않았거든요.” “그랬나?” “통쾌하게 싸우다 죽겠습니다. 두 놈이라고 했습니까?” “그래. 두 놈만……” 거산파장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경솔한 행동이 늘 마음에 걸리던 십이력이 벌써 달려나간 것이다. 퍼엉! 둔탁한 소리…… 십이력은 너무도 무기력하게 떨어져 나갔다. 천력문 무공이 철벽이라면 철응방의 조공은 철벽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 어찌 보면 창과 방패 사이라고도 할 수 있는 두 문파가 동서로 갈려져 있는 점도 이색적이다. 백문장은 두 문파의 완충지대 역할을 해주었고, 그래서 두 문파간의 직접적인 격돌은 쉽게 볼 수 없었다. 창과 방패. 상대가 되지 않는다. 일 대 일의 격돌이라면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무인들이지만 수십 대 일의 싸움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나 다름없다. 거산파장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뛰쳐 나간 십이력은 사방에서 벌 떼처럼 달려드는 무인들에게 휩싸인다 싶은 순간 전신에 수십 개의 구멍을 만들어놓고 무너져 버렸다. 두 명? 두 명은커녕 단 한 명도 어쩌지 못한 채. “젊었을 때는 야망도 있었는데…… 아마 천력문도 이것으로 끝인가 봅니다. 이 싸움은 그럭저럭 끝나겠지만 이후로는 철응방이 주도권을 잡겠죠?” 한병이 자조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아니야.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수가 있어. 태웅 총관이 이토록 무기력하게 무너질 리가 없어. 세상사를 손바닥 안에 놓고 보는 양반인데……” “어쨌든 이 몸은 이제 그만……” “그러시게.” 한병은 서른네 명의 무인들 중 세 명을 불렀다. 백문장 출신으로 끝까지 한병 곁에 머문 무인들이다. “다른 친구들에 비하면 우리는 그래도 나은 편이지. 우리가 땀을 흘린 곳에서 죽으니.” 한병의 말대로 완전히 허물어진 외벽 너머로 백문장 연무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곳이야말로 꿈과 야망에 들떴던 곳이고, 난생처음 접하는 무공에 힘들어하던 곳이며, 있는 기개를 마음껏 펼치며 고함을 쩌렁쩌렁 지르던 곳이지 않은가. “늘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는데 잘됐습니다. 가십시다.” 무인 세 명은 병기를 곧추잡았다. 거산파장은 속절없이 죽어가는 수하들을 우두커니 지켜보았다. 대세가 기울어진 싸움이란 걸 번연히 알면서도 포기하지 못하고 말려드는 꼴이라니…… 구임화가 끼여든 싸움은 늘 피해가 컸다. 하나 피해보다도 더 큰 승리를 안겨주었기에 그녀의 승리는 항상 빛났다. 오죽하면 천로라는 명예를 얻었을까. ‘마음에 안 들어. 이렇게 싸우는 방식은……’ 그녀는 이번 싸움에 무슨 수단을 준비했을까? 분명한 것은 그녀는 승리할 것이고, 이번 싸움의 희생양은 황우당이라는 점이다. 너무 늦게 알았다. 그녀가 자신의 당(堂)을 모두 희생시켰기에 어쩔 수 없이 나섰지만…… 그러고 보니 거천당이 너무 약하게 무너졌다. 그런 사람들이 아닌데…… 거산파장은 철응방 무인들 뒤로 또 한 무리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죽은 줄 알았던 거천당 무인들…… 그들이 철응방 무인들 배후를 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하하하……! 하하하하핫!” 거산파장은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댔다. 구임화와 총관은 이제 갓 입문한 문도를 활용했다. 하기는 천력문이 흥하느냐 망하느냐 하는 싸움이니 이제 갓 입문한 문도라 할지라도 최대한 활용해야 되리라. 그리고 그들을 활용하는 방법은 몸뚱이를 쓰는 수밖에 없으리라. 왜 몰랐을까? 이제 갓 입문한 문도와 거천당 무인이 바꿔치기된 사실을. 그랬으니까 암기 따위에 그렇게 속절없이 무너졌겠지. 싸움의 기본도 모르고 달려들었겠지. ‘너무 왕래가 뜸했어……’ 거산파장은 일어섰다. 몸에 지닌 모든 것을 버렸다. 몸뚱이 하나에 입고 있는 옷 한 벌이면 족하지 않은가. 같은 천력문도지간에도 서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왕래가 뜸했다면 사문에 남은 미련도 버릴 만하지 않은가. 모든 것을 버렸다. 가족에 대한 애착도, 그들을 남기고 간다는 아쉬움도…… “야아앗……!” 거산파장은 쩌렁 고함을 지르며 뒤로 밀리기 시작한 철응방 무인들 틈으로 파고들었다. “대웅십장, 거산파장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뭣!” 구임화는 무엇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우당은 재물이다. 그러니 거산파장이 죽었다는 말은 그럴 수도 있겠다 하고 흘려버릴 수 있다. 하나 대웅십장이 어떻게 죽을 수 있단 말인가. 백문장에 무엇이 남아 있다고……? 총관의 계책대로라면 화웅당이 백문장을 뿌리뽑아 놓았어야 한다. 자신의 거천당 무인들은 철응방이 거산파장을 미끼로 무는 틈을 노려 배후를 치게 될 것이고…… 백문장 일은 깨끗이 마무리짓게 된다. 총관이 말한 두 번의 고비 중 첫 번째 고비다. 첫 번째 고비는 천력문에게도 큰 타격을 주지만 철응방도 만만치 않은 타격을 받게 된다. 총관 태웅은 철응방에서 가장 주력인 ‘무적의 비조대’를 이번 싸움에 투입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금화부를 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에 무적의 비조대 정도가 아니면 불가능하다면서. 무적의 비조대를 잃는다면 철응방은 세력의 절반이 삭감된다. 철응방은 움직이지 못한다. 천력문에서는 백문장을 치는 데 황우당을 희생하기로 했다. 손실도 크지만 금화부를 얻는 효과도 크다. 무적의 비조대와 거천당은 동사(同死)로 보고 있다. 천력문도 중에서도 최고의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거천당이지만 무적의 비조대 또한 만만치 않으니까. 두 번째 고비는 비살문과 건곤방에서 비롯된다. 천력문이 금화부를 선점하면 그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터이고, 금화부를 지키고 있는 무인들은 한 팔로 양 팔을 상대해야 한다. 본문을 비워놓을 수도 없다. 아무리 급한 경우라도 본문을 지킬 만한 무인은 남겨두어야 하고, 오 당 중 삼 당을 내준 만큼 더 기대할 수도 없다. 두 번째 고비다. 두 번째 고비를 넘기기 위해서는 화웅당 무인들을 최대한 아껴야 한다. 거천당, 화웅당 무인들까지 아낄 수 있으면 금상첨화련만…… 수하의 보고는 황우당뿐만이 아니라 화웅당까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슨 말이냐! 자세히 보고해라!” “거산파장께서는……” “대웅십장이 어떻게 죽었는지 말하란 말얏!” “놀라운 고수가 있습니다. 듣기로는 벽산개부라고……” “벽산개부! 벽산개부 고규철?” “예.” “으음……!” 태웅의 계책에 구멍이 뚫렸다. 백문장에 벽산개부 같은 자가 있다니. 미련한 대웅십장은 정면승부를 감행했을 테고, 죽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철수다. 최대한 빨리 물러간다. 너는 지금 빨리 정문으로 거천당 무인들을 이끌고 물러서. 청화진(靑和鎭)에서 보자.” 구임화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다. 백문장을 선점하더라도 이 상태에서는 비살문과 건곤방의 합공을 막을 수 없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철응방에 물려주는 게 낫다. “거천당에는……” “왜……? 무슨 소리냐!” “철응방에도 가공할 고수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무위는 놀라워서…… 거산파장께서도 그들에게 당했습니다.” “으음……! 절맥단!” 철응방을 지탱하는 양대 기둥, 무적의 비조대와 절맥단. 그들이 같이 왔다. 그렇다면 지금 철응방은 방주를 제외한 몇몇 고수로 지탱하고 있다는 말인데…… 약간의 틈이라도 벌어지면 여지없이 치고 들어오는 절강 무림의 속성을 역이용한 수. 철응방주가 예상외로 강수를 두었다. 철응방주의 계책이라기보다는 간화의 계책이라는 편이 옳겠지만. “거천 무인의 상황은?” “거의 전멸입니다.” “철응방도는?” 구임화가 있는 곳에서는 정문 쪽 상황을 살펴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화웅당 쪽을 살펴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총관 태웅이 말한 대로 화웅당 무인들에게 백문장을 맡기고 정문으로 발길을 돌렸다면 한 쪽이나마 자세한 상황을 파악했을 텐데. 한 가닥 동정심이 중대한 실수를 불러왔다. 인명(人命)보다는 목적(目的)을 중시하는 구임화이지만 그녀도 아끼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면에서 거천당 무인들은 아끼는 사람들 축에 속한다. 그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자신이 나서면 몇 명의 희생이라도 막을 수 있겠지만 처절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만은 피할 수 없다. 그녀는 차라리 보지 않는 쪽을 택했다. 싸움이 끝난 다음에도 보지 않을 심산이었다. 죽은 사람을 관에 넣고, 싸움의 흔적을 모두 지운 다음에나 볼 생각이었다. 그래서 한적한 나무그늘을 찾아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고 있었거늘. “절반 정도가 무너졌습니다.” “으음……!” 그녀는 다시 신음을 터트렸다. 천력문 삼 당이 몰락한 대가치고는 너무 허무하다. 백문장을 접수한 것도 아니고, 철응방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지도 못했다. 앞으로…… 천력문은 험한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것도 차후의 일이다. 지금 당장은 백문장에서 살아 돌아가는 일이 급선무다. 한 쪽에는 포영매와 벽산개부, 다른 한 쪽은 철응방 무인들이 포위하고 있으니 몸 하나 빼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다. 그녀는 가마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럴 때일수록 흩어지면 죽는다. 마지막 순간까지 흩어지지 마라. 죽어도 같이 붙어서 죽어라. 정히 따라붙을 수 없으면 알아서 몸을 숨겨라. 나중에라도 청화진으로 찾아올 수 있으면 찾아오고.” 구임화는 좌측 능선을 바라보았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간다. 저 해가 완전히 서녘으로 넘어가고, 자신들이 서쪽 능선만 탈 수 있다면 몸 하나 빼내는 것은 일도 아닌데…… “가자!” 구임화가 먼저 신형을 띄웠다. 第二十一章 고슬취생(鼓瑟吹笙:비파를 타고 생황을 불어라). 쫦 1 쫦 ‘백문장이 이 정도라니!’ 검은 옷을 입고, 미첨도(眉尖刀)를 들고 있는 일단의 무리 중 한 명은 마음 속으로 크게 놀랐다. 유난히 키가 크고, 비쩍 말랐으며, 밀랍(蜜蠟)처럼 창백한 안색을 지닌 자…… 비살문 십대고수 중 한 명이며, 포영매를 암살하고자 백문장에 투신한 일흑이다. 사실 그는 백문장의 전력을 과소평가했다. 백문장에서 공식적으로 인증한 오 당, 천견당, 화창단, 적수당, 흑사당, 반심당은 두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포영매의 능력은 아직 미지수이고, 다른 자들 또한 두려울 게 없었다. 단지 마음에 걸리는 무인이 있다면 음양(陰陽), 삼재(三才), 사상(四象), 오행(五行)을 본뜬 무인들인데`─`물론 육합(六合)도 있지만 그들은 무시해도 좋을 성싶고`─`, 그들의 무공은 그에게도 심히 부담스러울 정도로 지고해서 선뜻 움직일 수 없었다. 비살문 인물이니 암습을 가한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 아니, 얼마나 확실하게, 정확히 죽일 수 있느냐가 문제일 뿐이지 도덕이라든가 무인의 도리라는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흑사당 향주로 분신(分身)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암습을 가할 기회가 없었다. 포영매와 조자경이 방랑을 떠난 탓에. 그가 돌아왔을 때 얼마나 기뻐했는가. 드디어 죽일 기회가 왔다고. 서둘지 않았다. 반 년을 꾹 눌러 참아왔는데 하루이틀을 기다리지 못할까. 먼저 적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뱀의 머리를 자르는 것도 좋지만 자칫 하다가는 외려 물리고 만다. 그것뿐이면 좋은데 뱀 무리를 집 안에 끌어들이는 화(禍)까지 불러들인다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포영매란 어떤 자인가. 무공은 어느 정도이고, 즐겨쓰는 초식은 무엇인가. 술은 어느 때 마시고, 주량은 어느 정도이며, 즐겨마시는 술은 무엇인가. 여색(女色)은 어느 정도 밝히고…… 고정적인 습관에서 이용할 만한 점은 무엇이고, 성격에서 이용할 부분은 없는가.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그는 기다리기로 작정했다. 한데 상황이 급변해 천력문이 공격을 가해 왔고, 괴멸되었다. 그는 지금까지 백문장의 껍데기만 보아왔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력문 이(二) 당(堂)이 단 이틀 만에 몰살당한 것도 기가 막히는데 철응방이 때맞추어 나타난 것은 더 기가 막히다. 절묘한 안배다. 그것으로 사실상 무적의 비조대와 천력문 제일당(第一堂)인 거천당은 서로 상잔한 결과가 되어버렸다. 철응방에 정보를 흘리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결과다. ‘그자야. 그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포영매는 책사의 위치를 낯선 늙은이에게 물려줬다.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늙은이…… 복자 전인수라고 했나? 하나 일개 점쟁이의 머리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절묘한 공수(攻守)이지 않은가. ‘그 늙은이는 포영매와 같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이건 큰일이다. 사대 패강에서는 아무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해. 음……!’ 그는 눈살을 좁혔다. 그때, “이제 우리 차례다. 가자!” 흑사당주인 흑사도가 나직하지만 강인한 음성으로 명령을 내렸다. “추(追)!” 그는 다른 일곱 향주와 똑같이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백문장 오 당 중 흑사당을 맡고 있는 흑사도라 하오이다. 무명이 자자한 오천로를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구임화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작달막한 사내에게 눈길을 주었다. “흑사도라 하면 송양(松陽)의 흑사도?” “졸명을 기억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흑사도는 공손했다. 구임화는 지겹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는 이런 자들까지 상대해야 하는가? 흑사도라면 송양에서는 제법 이름난 무인이다. 하나 천력문 오천로인 자신에게 검을 들이댈 만큼 뛰어난 자는 아니다. 다른 곳, 다른 시기에 만났다면 발바닥을 핥기에도 모자라는 자가 감히 앞을 가로막다니. “흥! 개천에서 용 났군. 길을 가로막은 것은 나를 잡을 목적인 것 같은데 가능하다고 생각해?” “거천당, 황우당, 화웅당이 백문장을 치고자 했을 때, 괴멸당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니……” “호호호……!” 구임화는 신경질이 났다. 그녀도 백문장에 오 당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신경 쓸 가치도 없는 자들이다. 흑사도와 같은 인물 몇몇을 제외하고는 이제 갓 무공에 입문한 풋내기들이니 검이나 제대로 들 수 있을까? 그런 자들은 백 명이 아니라 이백 명, 삼백 명이 몰려들어도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귀찮아.’ 구임화는 뒤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패에엥……! 거천당 십이력 중 십일력이 살아 있다. 그들의 숫자는 단 열한 명에 불과하지만 진실된 힘은 거천당 절반에 해당한다. 난폭한 호랑이는 수십 마리의 양들을 물어죽일 수 있으니까. 그들은 구임화에게 손수 지도받았고, 실전경험도 풍부하며, 차기 당주에 대한 꿈도 간직하고 있는 자들이다. 그들이 일제히 짓쳐 나갔다. 살아남은 천력문 무인들 모두가 공격에 가세했다. 그들은 백문장 무인들이 나타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상당한 압박감을 받고 있었다. 백문장 무인들을 크게 평가하지는 않지만, 천력문 무인 대다수가 죽고 없는 지금, 또 다른 어떤 함정이 도사리고 있지는 않나 하는 불안감이 이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 싶은 그들의 간절한 바람을 부추겼다. 다급한 마음은 종종 실수를 불러온다. 그들은 흑사당 무인들이 중병(重兵)에 속하는 미첨도를 들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죽엇!” 거천당 십이력 중에서는 대형(大兄)인 기세춘(奇世椿)은 성명병기인 운두대도(雲頭大刀)를 떨쳐 냈다. 상대가 미첨도를 들고 있으니 같은 중병이다. 칼날의 길이가 하나는 길고 반원형이며, 하나는 둥글고 넓적하다는 차이가 있지만 초식 운용 면에서는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 “하하! 이 나이에? 조금 더 살게 봐주지 그래?” 상대, 흑사당 무인은 몸을 숙여 운두대도를 피한 다음 미첨도로 올려쳐 왔다. “입만 살아 있는 놈!” “고맙군. 입이 살아 있으면 육신도 살아 있는 법이지. 이 싸움은 내가 이길 것 같지 않나?” 기세춘은 만만치 않은 상대가 걸렸다는 것을 직감했다. 입심이 세다는 이유가 아니라 상대의 전신에서 풍겨나오는 기세가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은 백전노장(百戰老將)에게서나 볼 수 있는 여유로움이기 때문이다. 강인하기도 하고 정교함도 깃들여 있다. 종잡을 수 없는 자다. ‘오래 씨름할 여유가 없다. 속전속결(速戰速決)!’ 강한 상대임을 번연히 알면서도 속전속결을 결심한 것은 주변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양 떼 무리에 불과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백문장 무인들이 예상외로 강했다. 아니, 터무니없이 강했다. 더군다나 그들은 숫자도 거의 세 배에 육박한다. 삼 대 일의 싸움과 진배없다. 당할 수밖에 없다. 천력문 무인들은 여기저기서 맥없이 허물어졌다. 어떤 자는 피땀을 흘리며 수련한 무공을 단 한 초식도 써보지 못하고 벌집이 되어 죽었고, 어떤 자는 척추가 꺾여 흉물스런 모습으로 땅바닥에 누웠다. 무공이 똑같다고 가정했을 때, 인원수는 어떤 효과를 가져 올까? 일 대 일이라면 동수(同手)다. 하나 이 대 일의 경우부터는 필패(必敗)로 이어진다. 이 대 일은 단지 두 명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무공보다 네 배는 높은 무인과 싸운다고 생각해야 된다. 그러면 삼 대 일은? 아홉 배다. 도저히 싸움이 안 된다. 같은 이치로 이 대 사의 싸움은 어떨까? 이쪽은 네 배의 상승효과가 있지만 저쪽은 열여섯 배의 상승효과가 있다. 넷과 열여섯을 가감(加減)해 보면 열둘이 남는다. 이쪽 두 명이 죽었을 경우 상대는 겨우 한 명이 죽는다는 결론이다. 동귀어진(同歸於盡)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지금이 그렇다. 천력문 무인들은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데 반해서 흑사당 무인들은 가벼운 상처조차 입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죽는 순간에는 단 한 놈이라도 잡아끌고서 저승길 동반자로 삼겠다던 천력문 무인들의 평소 생각은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길어야 반 년이 조금 넘은 놈들인데, 어디서 이런 무공을……’ 기세춘 역시 남을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 눈 앞에 있는 강적도 버거운 판인데 싸움을 끝낸 흑사당 무인들이 속속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 ‘속전속결도 늦었다. 이렇게 빨리…… 이건 필패다, 필패…… 백문장이 이렇게 강하다니. 이들은 적어도 거천당 못지않은 자들이야. 어떻게 이런 일이…… 도깨비 농간이 아니고서야 무지렁이들이 반 년 만에…… 도깨비 농간…… 포영매!’ 기세춘은 운두대도에 집약된 금강대력이 산산이 흩어지는 느낌이었다. 싸울 기분도, 흥분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는,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왔다는 후회만이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하나 그러면 그럴수록 운두대도를 굳게 움켜잡았다. 무인의 명예를 걸고 물러설 수 없다. 목숨에 미련이 남아 있지도 않다. 무엇보다 여기서 몸을 물린다면 먼저 간 수하들을 볼 낯이 없다. “물러서.” 등 뒤에서 냉담하기 이를 데 없는 음성이 들렸다. ‘물러서라…… 후후! 당주, 어쩌면 당주도 이 자리에서 유명을 달리해야 할 것 같소. 하물며 지금 내가 물러선들 어디로 물러서겠소.’ 기세춘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구임화의 명을 듣지 않았다. “물러서라는 명이 떨어진 것 같은데? 어때?” 상대는 비웃었다. 물러서고 싶으면 물러서라는 비웃음. “이름이 뭐냐?” “나? 이름은 알아서 뭐 하게?” “무공을 배우기 전에 사람 됨됨이부터 배워라.” “하하하! 공격을 먼저 한 쪽은 우리가 아닐 텐데? 만약 우리가 당했으면 어떤 말을 했을까? 주제도 모르는 놈들이 어설프게 설쳐 댔다고 하지 않았을까?” 기세춘은 할말이 없었다. 이래서 무인들 간에는 긴말이 필요없다. 문답무용(問答無用)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기세춘은 마지막 남은 한 방울의 기력까지 모두 짜내 운두대도에 집약시켰다. 앞으로 언제 또 쓰겠다고 남기겠는가. 초식은 일도양단(一刀兩斷)에 이은 횡소천군(橫掃千軍)으로 결정했다. 일도양단을 전개하면 상대는 어떤 방법으로든 막게 되어 있다. 대부분은 병기를 들어 가로막는 방법을 택하는데 상대의 허점을 유도해 내는 효과가 있어 가장 타당한 수비다. 그때, 도를 비껴 횡소천군을 전개한다면 옆구리를 벨 수 있다. 설혹 신법이 빠르거나 초식을 읽고 있어 병기를 들어막는다 해도 사향격두(斜向擊頭)를 비롯한 수많은 일격필살(一擊必殺)의 수법이 잠재되어 있다. 거리만 좁혀진다면, 상대와 붙어 있기만 하다면. “타앗!” 기세춘은 있는 힘껏 땅을 박차올랐다. 구임화는 가마에 앉아 있었다. 그녀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마를 들던 사 인의 문도도 싸움다운 싸움 한 번 못 해보고 죽었다. 십이력 중 대형인 기세춘 역시 지닌 바 무공을 제대로 펼쳐 보지도 못하고 난자당해 죽었다. 삼류와 이류, 이류와 일류의 무공 차이는 말 그대로 천양지차다. 두 명이 모여 네 배의 힘을 얻고, 네 명이 모여 열여섯 배의 힘을 얻는다지만 일류고수는 이류고수 십여 명을 단칼에 베어넘길 수 있다. 지닌 바 무공의 백 배를 넘어서야만 이류에서 일류로 탈바꿈된다는 게 정설(定說)이다. 기세춘을 맞상대했던 무인은 물론이고, 난자에 가담한 다른 두 명도 일류고수다. 그렇기에 기세춘이 맥도 못 쓰고 무너진 것이다. “대단하군.” 탄성이 절로 새어나왔다. 모두가 잘못 알고 있다. 기관만 파해하면 무너질 것이라고 예상한 백문장에 이렇듯 많은 고수들이 득실거리고 있다니. 이들은 잔인하고 섬뜩하지만 가장 실전적이고 효율적인 도법을 구사한다. 천력문의 무공이 강맹하고 사납지만 사람을 죽인다는 측면에서는 이들의 무공에 한 수 뒤진다. “저희 흑사당 문도가 전개한 무공은 육살도법(戮殺刀法)입니다. 팔향주가 전개한 무공은 팔극도세(八極刀勢), 그리고 제가 사용한 무공은 십이잔혼도(十二殘魂刀)올시다.” 흑사도가 포권지례를 취하며 말했다. “호호호! 왜 내게 무공내력을 말하지?” “궁금할 테니 싸움이 끝나면 말씀드리라는 분부를 받들 뿐입니다.” “그래? 누가 그런 분부를 내렸지? 포영매인가?” “전 총관입니다.” “전 총관? 갈 총관이 아니고 전 총관?” 구임화는 진정으로 놀랐다. 백문장에 또 다른 인물이 있단 말인가? 포영매 갈천상을 누르고 총관을 차지할 수 있는 인물이? “장으로 모실까 합니다.” 여전히 공손하지만 의사가 분명한 말이었다. “나를? 호호호! 건방지다고 생각하지 않아?” “글쎄요. 전 총관님 말씀을 따르게 되면 오천로께서는 장으로 모셔지게 되어 있습니다.” 말을 듣지 않으면 무력이라도 사용하겠다는 뜻이다. 구임화가 언제 이런 협박을 받아봤던가. 그녀의 얼굴은 더욱 싸늘하게 굳어졌다. “전 총관이라는 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글쎄? 내가 인질이 될지 안 될지는 금방 알게 되겠지.” 구임화는 오랜만에 가마에서 내려와 땅을 디뎠다. 그때, “전 총관이 뭐라고 했는지는 나도 모르지만 구임화 너는 인질이 안 돼. 감히 백문장을 공격하다니. 그러고도 몸 성히 목숨을 부지한다면 체면이 안 서.” 구임화의 뒤쪽에서 맑은 음성이 터져 나왔다. “소저!” “몰랐네요. 흑사당이 이토록 강하다니. 진정으로 갈 총관이 하는 일은 종잡을 수 없어요. 육살도법, 팔극도세, 십이잔혼도. 모두 인상 깊어요.” “소저.” “흑사당이 이렇게 강한 줄 알았으면 정말 갈 총관 말대로 구경이나 할 걸 그랬어요. 목숨 걸고 천루에서 내려오지 않았어도 되었을 거고.” “……” 흑사당주 흑사도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조자경의 등장은 뜻밖이었다. 조자경이 이 시점에 구임화 앞에 나타나리라고는 갈천상도 전 총관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니 흑사도가 들은 말 또한 아무것도 없을 터. “흑사당주, 나는 강해져야 해요.” “물론입니다.” 흑사도는 조자경이 갑작스럽게 던진 말의 진의를 몰라 곤혹스러워했다. “지난 반 년간 갈 총관과 함께 절강 무림을 떠돈 것도 강해지기 위해서였죠.” “알고 있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러면 오천로처럼 강한 사람과 손속을 겨뤄보고 싶은 마음도 알겠네요?” “소저!” 흑사도는 당황했다. 오천로는 반드시 생포하라는 밀명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는 별다른 변수가 없는 한 약간의 희생은 피할 수 없겠지만 구임화를 생포할 자신이 있었다. 구임화를 생포해야 하는 이유는 모르지만 갈천상과 귀호구혼 전인수가 숙의 끝에 내린 결정이라면 반드시 따라야 하리라. “물러서세요. 오천로 같은 무인을 생포한다는 것은 무인에게 수치를 안겨주는 행위예요.” 조자경은 단호했다. 구임화가 성난 들소라면 조자경은 허공을 나는 나비였다. 우선 두 여인은 체격에서부터 뚜렷한 차이가 나타난다. 구임화는 육 척을 훌쩍 넘긴 장신에 사내도 질려버릴 만한 체격을 지녔다. 우람한 팔근육에서는 장정 두어 명을 들었다 놓을 힘이 느껴지고, 마보(馬步)를 취하고 있는 두 다리는 하늘도 떠받들 듯 굳건하다. 반면에 조자경은 구임화에 비하니 어린아이다. 가냘픈 몸에 잘록한 허리는 바람에 날려갈 듯 휘청거린다. 거기에 백학검법으로 무공의 기초를 닦은 탓에 신법이 비할 나위 없이 영활하니 더욱 가벼워 보인다. 병기도 전혀 다르다. 구임화는 사내도 쉽사리 선택하기 힘든 낭아봉(狼牙棒)을 들고 있는 반면 조자경은 버들가지처럼 휘청이는 연검을 들었다. “타앗!” 천지를 쩌렁 울리는 고함과 함께 구임화가 선공을 가했다. 팔방풍우(八方風雨), 경뢰분전(驚雷分電), 노룡양파(怒龍揚派)…… 하나같이 앞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 부숴버리겠다는 강공(强功)이 도도하게 풀려나왔다. 조자경은 맞받지 않고 신법을 유효 적절하게 활용하여 공세를 피해 냈다. 어찌 보면 소림사의 백보신권(百步神拳)과 무당파(武當派)의 면장(綿掌)이 부딪친 싸움과도 흡사했다. 백보신권은 일권(一拳)에 백 보 밖에 있는 암석도 가루로 만드는 거력을 튕겨낸다. 면장은 나비가 꽃밭을 날 듯 부드러움의 연속이다. 서로 상반된 형태를 지닌 무공이다. 강함이 이기는가, 부드러움이 이기는가. 무림인이라면 한 번씩 고민했을 화두(話頭)이고, 풀고 싶은 숙제이리라. 소림사와 무당파에서는 정기적으로 내력(內力)이 비슷한 무인을 골라 비무(比武)를 시켰다. 그래서 얻은 결론이 시간싸움이라는 것이다. 백보신권은 속전속결로 싸움을 끝내야 한다. 스치기만 해도 뼛골을 저려울리는 백보신권이니 무당 도인은 감히 맞받지 못하고 피하기에 급급하다. 그때, 끝내야 한다. 싸움이 길어지면 면장이 유리하다. 면장은 신법을 사용하는 데에만 내력을 소모했을 뿐이니 내력소모가 극히 적다. 반면에 백보신권은 막대한 위력을 뿜어내는 권력을 무수하게 쏟아냈으니 내력소모가 극심하다. 시간이 흐른 다음에는 권법 비무가 아니라 굼벵이와 원숭이의 비무가 되는 것이다. 구임화와 조자경의 싸움이 꼭 소림과 무당의 비무를 연상시켰다. 구임화의 낭아곤에서는 허공을 찢어발기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조자경은 피하기에 급급했다. 흑사당 무인들은 조급해 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강공과 유공(柔功)의 장단점을 잘 알기에. 일다경(一茶頃), 반(半) 각(刻), 일(一) 각(刻)…… 시간이 지루하게 흘렀다. 사위는 깜깜했다. 서녘 해가 기울어진 지는 오래되었고, 조자경이 싸움을 시작한 지도 한 시진을 넘겼다. “헉헉……!” 지칠 것 같지 않던 구임화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전에…… 헉헉! 거산파장이 백문장을…… 휴우! 들른 적이 있었지. 꽁지 만 개처럼 쫓겨왔을 때 말야. 호호홋! 거산파장은 천력문 무공에 조문이 있다고 말했어. 척추. 왜 척추를 노리지 않는 거냐?” 구임화는 시뻘게진 눈동자를 부릅뜨며 물었다. 숨을 고르고 있지만 내력소모가 극심한 관계로 여간해서는 정상을 되찾기 어려울 듯싶었다. “그건 포영매의 무공이야. 나는 내 무공을 만들고 싶거든.” 조자경에게서는 숨 가쁜 기색이 조금도 엿보이지 않았다. 승패는 끝났다. 구임화도, 조자경도, 지켜보고 있는 흑사당 무인들도 모두 같은 결론을 생각했다. “이제 공격할 때가 되지 않았나?” “그럴 생각이야.” “일 검에.” “그래 줄게.” 조자경은 연검을 치켜올렸다. 낭창낭창 휘어지던 연검…… 하나 지금은 어느 보검보다도 강맹한 검기를 뿌려냈다. 휘익! 조자경이 신형을 띄웠다. 마지막 일격. 그녀는 단 일 검에 목을 베어낼 생각이었다. 그것만이 구임화의 명성과 명예와 무인의 바람을 지켜주는 길이니까. 한데, 피윳! 연검이 구임화의 목을 베어낼 찰나, 젓가락 하나 들 힘이 없어 보이던 구임화의 신형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낭아곤이 허공을 가른 것도 그 순간이었다. 썩! 퍼억……! 기이한 음향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피분수도 솟구쳤다. 구임화의 목에서 솟구친 피분수는 무너진 제방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줄기처럼 거세게 솟구쳐 올랐다. 조자경은 공격할 때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되튕겼다. 쫦 2 쫦 “이 싸움은 네 싸움이 아녔어. 이 싸움에 끼여들지 말라고 한 것은 네 싸움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야. 네 싸움은 따로 있었어. 하나 네가 끼여든 이상, 다음 싸움은 내가 해야 할 것 같다.” 갈천상은 조자경의 옆구리에 금창약을 바른 다음 부목(副木)을 대고 꽁꽁 묶었다. “아……!” 조자경은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지만 새어나오는 신음을 다 막지는 못했다. “이것으로 하나는 분명해졌군. 사람은 잘 골랐다는 것. 너는 타고난 무인이야.” “흡족해?” 조자경은 아픔을 이겨내느라 아미를 찡그리며 말했다. “무공은 아직 멀었지만 다른 것은 괜찮은 편이지.” ‘흑사당이 왜 이렇게 강한 거지? 철응방은? 철응방이 공격해 왔는데 그들은 어떻게……?’ 조자경은 궁금한 점이 무척 많았다. 하나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조자경이 비록 구임화가 펼친 마지막 동귀어진 수법을 파악하여 신법을 뒤로 물렸지만 수법이 너무 잔혹하고 시기 적절했다. 낭아곤은 옆구리 살을 찢어버렸고, 갈비뼈를 으스러트렸다. 갈비뼈가 부러졌다면 그런 대로 버틸 만하지만 산산조각으로 으스러졌다면 상당한 중상(重傷)이다. 그녀는 멀어지려는 의식을 억지로 부여잡았다. 머리 속을 휘젓는 생각은 오직 하나 ‘정신을 잃으면 안 된다’는 것뿐이었다. 그때 갈천상이 나타났고,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이상하다. 다른 사람들은 그 누구도 믿지 않게 되었는데, 모두들 무공이 얼마나 강할까만 생각하게 만드는데…… 갈천상을 보면 아버지를 보는 것처럼 포근하고 편안하다. 그의 품에서는 마음껏 쉬어도 될 것 같다. 천지가 무너져도 그라면 지켜줄 것 같다. 이런 마음이 드는 것도 사랑의 일부분인가? 그녀는 마침내 혼절했다. 두두두두……! 힘차게 들리는 말발굽 소리…… 조자경은 잠결에 잘못 듣지 않았나 싶었다. “으음……!” 몸을 뒤틀자 신음이 절로 새어나왔다. 꿈이 아니다. 자신은 부상당했고, 귀에 들리는 말발굽 소리도 환청이 아니다. ‘어디로……?’ 제일 먼저 든 생각이었다. 자신의 상처가 어떤지, 곁에는 누가 있는지조차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문득 갈천상이 생각났다. 혼절하기 직전, 자신 곁에 있었는데…… 눈을 뜨고 조금 지나자 사물의 윤곽이 뚜렷하게 잡혔다. 마차 안이다. 서너 사람이 발을 쭉 뻗어도 될 만큼 넓은 마차다. 창문 너머로 산이며 들이며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빨리 달리고 있다. 하나 마차 안은 요동이 심하지 않다. 그녀는 사물을 알아볼 수 있게 되자 한 사람을 찾았다. 그 사람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발 밑에 앉아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역시 그는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깨어났군.” “오래 잤어?” “별로.” “한 사나흘 잤나 보네?” “괜찮아?” “괜찮아 보여? 옆구리가 욱신거려서 죽겠어.” 상처는 무척 심한 편이다. 비살문의 소문주에게 상처를 입은 게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또다시 당한 부상이고,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중상이라 회복된다 해도 다시 검을 잡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래도 편안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 늘 편안하다. 그와 같이 있으면. “어디로 가는지 안 물어보나?” “말해 줄 것 아니었어?” “힘든 모양이군.” “알고 싶으면 갈비뼈 으스러져 봐.” 조자경은 말을 하면서 방긋 웃었다. 오랜만에 지어보는 웃음이다. 갈천상을 만나기 전에는 늘 입에 달고 다니던 웃음이었는데 그를 만나면서부터는 웃는다는 게 어색해졌다. 지금은 웃음이 나온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백문장이 굳건해졌고, 화창당과 적수당이 아버지의 복수를 하러 간 것이 분명하니…… 아무 여한이 없다. 정말 여한이 없을까? 있다. 전과 비교할 성질이 아니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전보다 더 큰 갈망이 남아 있다. 이 사람…… 이 사람과 사람이 살지 않는 절곡에 숨어 한평생 편안히 살고 싶다. 가능성이 없는 바람…… 그래서 갈망에 불과하겠지만. “심요산으로 가는 중이다.” “뭣!” 조자경은 깜짝 놀랐다. 할 수만 있다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앉고 싶었다. 실제로 그녀는 그렇게 시도했고, 부목을 댄 옆구리가 끊어질 듯 아파오는 바람에 다시 눕고 말았다. “심, 심요산은 왜……?” “천력문이 괜히 선공을 가해 왔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갈천상은 찬 물수건으로 조자경의 이마를 닦아주며 말했다. “그, 그럼?” “여산에 누가 있지?” “그, 그럼!” 조자경은 너무 큰 충격에 말문조차 막혀버렸다.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오직 하나 ‘그럼’이라는 말뿐이었다. “금강대력은 큰 단점이 있어. 바로 뼈를 으스러트린다는 거야. 네가 당한 것처럼.” “그럼……?” “하하하하! 차라리 그냥 듣고 있는 게 어때?” “……” “장주의 석묘를 파봤지.” “그럼 역시 아버지의 묘를 파헤친 사람이……” “뼈가 이상했어. 완전히 으스러진 것도 아니고 성한 것도 아니고…… 절묘하게 강약을 조절해서 뼈가 으스러지지 않게 타격을 가한 거야. 금강대력으로. 천력문에서는 흉수가 자신들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겠지. 백문장과 전력으로 부딪치면 손해가 클 테니까. 성공했잖아? 백문장은 장주의 시신을 손상시키지 않을 것이 뻔하고, 외상만으로 정확한 사인을 추측할 수 없을 테니까.” “……” “뼛조각 몇 개를 추려서 천력문에 보냈다. 반응을 보려고. 마임호가 다녀왔지.” 천력문이었다. 천력문에서 아버지를 암살하고 십 년 전의 대란을 일으켰다. ‘그랬어. 그래서 어머니가 전력을 다하신 거야. 잠도 주무시지 않고. 내가 알면 가만있지 않을 건 뻔하고…… 그랬어.’ 흉수를 알았지만 조자경의 마음은 의외로 편했다. “내 싸움은 뭐였어?” “구태안(具泰顔).” 조자경은 눈을 감아버렸다. 눈썹이 파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갈천상, 이 사내는…… 너무 얄밉다. 그는 가장 큰 싸움을 자신에게 맡겼다. 자신에 대한 배려였고, 자신을 믿고 있다는 증거다. 천력문주 폭우사해(暴雨四海) 구태안. 그보다 더 큰 상대가 어디 있으랴. “진작 말하지 않고……” “말했다면 네가 죽었겠지.” “……?” “지금 너는…… 네 무공이 얼마나 강한지 모르고 있어. 아직도 약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그래서 소화남과 비겼고, 구임화와 상잔(相殘)했어. 하하! 말이 돼?” 갈천상은 조자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마에 찬 물수건을 얹어주면서.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무극진결은 내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무공이야. 너는 그걸 익혔고. 한데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허명(虛名)에 눌려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해. 오천로가 그렇게 대단한가? 비살문 소문주는 영원히 꺾지 못할 상대야?” “나는……” “쉿! 계속 듣는 게 좋아. 물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겠지. 너는 최선을 다했다고. 천만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어. 그들의 위명에 눌려 전전긍긍하다가 간신히 승기를 잡았을 뿐이야. 그런데 천력문주와 싸우면 어떻게 될까? 죽었을 거야, 틀림없이. 그래서…… 나는 도박을 하기로 했지.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싸우는 거지. 네가 상대했던 철응방 절맥단들처럼. 그럼…… 장담하지. 이겼을 거야.” 조자경은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갈천상이 정확히 짚어냈다. 절맥단 무인들과 싸울 때에는 그들이 누구인지 몰랐다. 단지 엄청나게 강한 무인들이라는 것뿐. 그래서 죽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비살문주와 구임화…… 그들과 싸울 때는 달랐다. 자칫 한 수라도 잘못 공격하면 큰 화를 당할 것 같은 예감에 사용하고 싶은 초식을 마음껏 사용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런 초식을 쉽게 파해하고 역습할 것 같아서. 갈천상의 말이 맞다. 이 상태로 천력문주와 겨뤘다면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졌을 게다. 천력문주는 아버지와 동시대의 인물로 영원히 꺾을 수 없는 상대처럼 각인되어 있으니까. 희한하지 않은가. 세상 그 누구라도 상대할 자신이 있고, 상대해야 한다고 다짐했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꺾을 수 없는 상대를 골라놓고 있었다니. 조자경은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한숨 더 자둬. 심요산에 도착하려면 반 나절은 더 걸릴 것 같으니까. 직접 싸우게 하고 싶었지만…… 불구대천지수(不俱戴天之)가 죽는 모습을 봐야지?” 조자경은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쫦 쫦 쫦 그림자 하나가 다급하게 대청으로 들어섰다. 순간 그는 당황한 듯 잠시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는 것일까? 너무 캄캄하다. 시간이 삼경(三更)을 넘어섰으니 캄캄한 것이야 당연하지만, 지금은 촉(燭)이 밝혀져 있어야 하고 적어도 서너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는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눈을 끔벅거리다가 돌아섰다. 아무도 없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말하라.” 어둠 깊은 곳에서 극히 가는 음성이 들려왔다. 사내는 음성의 주인공을 대번에 알아봤다. “아! 총관님! 계셨군요.” “말하라.” 두 번째 말을 듣고서야 사내는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보고했다. “인림(人林)에 이어 지림(地林)도 무너졌습니다.” “……” 어둠 속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인림, 지림이 무너졌으니 남은 것은 천림(天林)뿐이다. 천림마저 무너진다면 죽책(竹柵) 하나 없는 본채(本寨)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무슨 말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총관님…… 천림주에게는 뭐라고……” “물러가라.” “옛?” 사내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물러가라. 아니다. 천림주에게 이렇게 전해라. 남은 것은 무책(無策)밖에 없다고.” “알겠습니다!” 전할 것이 생긴 사내는 부리나케 뛰어나갔다. “신력당(神力堂)에 이어 역주당(力宙堂)까지 무너졌다면…… 끝입니다.” 사내가 나간 후 한참이 지나서야 어둠 속에서 다시 음성이 새어나왔다. 총관이라고 불렸던 자의 음성이다. 여자처럼 가늘고, 차분히 정돈된 음성. “……” 총관이란 자가 말했으니 또 다른 자가 있을 터인데 어둠 속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하다못해 숨소리조차. “제가…… 큰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죽은 공명(孔明)이 산 중달(仲達)을 물리쳤다더니…… 제가 그 꼴입니다. 조항의 뼈다귀를 보고 경고망동했으니.” “……” “마지막 조언(助言)을 바라십니까?” “……” “아직 십봉객(十奉客)과 구원로(九元老), 그리고 다섯 공자님이 남아 계십니다. 충분히 싸울 수는 있지만 감히 후일을 도모하십사……” “자네는.” “……?” “자네는 왜 말하지 않는가.” 우렁차지만 요란스럽지 않고, 대청을 쩌렁 울리지만 마음을 든든하게 해주는 음성이었다. “결국…… 그렇게 결정하셨습니까?” “포영매…… 뛰어난 자군. 무공도 지략만큼이나 강했으면 좋겠어.” “뛰어날 겁니다.” “아내를 넷 얻었고, 아이를 열두 명 봤지. 그 중에 누구를 가장 사랑한 줄 아나?” “……” “임화, 그 아이야. 목이 잘려 죽었다고 했나?” “네.” “하하하! 옛말치고 그른 게 하나도 없어. 피는 피를 부른다 했는데 정말 그렇군. 조항이 죽고 백문장이 와해되면서 끝난 일인 줄 알았는데…… 확실히 발본색원(拔本塞源)했어야 해. 뿌리를 남겨두면 언젠가는 고역을 치르지. 다음 세상에서는 잊지 말게.” “그럼 미력하나마…… 천림에 힘을 보태겠습니다.” 천력문 총관 태웅이었다. 그가 일어서자 어둠의 물결이 출렁이는 듯했다. “하하하핫! 천력문 이천로보고 미력하다고 할 사람이 누가 있나?” 태웅은 무릎을 꿇고 깊은 예를 올렸다. “부탁을 들어줘야겠어. 안 되겠다 싶으면…… 아니야, 오군(五君)까지 끝내주게. 그 동안 고마웠네.” 태웅은 대답하지 않았다. 죽은 자에게만 올리는 재배(再拜)를 할 뿐이다. 쫦 3 쫦 ‘저거였군. 아니야, 근본적으로 잘못됐어. 적은 나를 알고 있는데 나는 적을 전혀 몰라. 일생에서 단 한 번의 실수…… 역시 무림에서 실수는 죽음과 통한다더니……’ 이천로 태웅은 산 밑에서 개미처럼 기어오르는 백문장 무인들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신력당과 역주당은 문도만 삼백여 명에 달한다. 그들이 몰살당하는 동안 백문장 무인은 오십여 명만 죽었을 뿐이다. 이런 차이가 어디서 벌어졌는가. 백문장 무인들은 철저히 수련했다. 천력문만을 상대하기 위해 무공을 익힌 듯 천력문 무공의 허실을 명확히 꿰뚫었다. 더군다나 백문장 무인들은 사전에 상대까지 정해 놓은 듯 이쪽에서 무인이 나서기 무섭게 상대자가 나타났다. 태웅은 신력당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이 싸움은 자신이 나서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쪽 무인들의 무공내력이며 성격까지 환히 꿰뚫고 있는 상대를 무슨 수로 막아낸단 말인가. 그것보다 필승을 생각했던 백문장 공격이 와해되고 삼 당이 몰살 당했을 뿐만 아니라 본채 안마당까지 내주게 되어서는 싸움이 되지 않는다. 그가 문주를 찾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심요산을 내주고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서. 하나 천여 명에 가까운 문도를 잃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 문파를 재건할 힘은 있지만 누가 문도로 들어올까. 십봉객, 구원로만 있어도 천력문의 현판을 유지할 수 있기는 하다. 자신이 있고, 문주가 있고, 천력문에서는 오군으로 존칭하는 다섯 공자가 있다. 재기를 노려도 충분한데…… 문주는 제자들을 버리고 도망칠 수 없는 게다. 절강 무림의 패권을 차지하겠다고 나선 인물치고는 감상적이지만 호쾌함과 의리를 강조해 온 문주인 만큼 자신의 신조(信條)를 스스로 깰 수 없는 게다. 그렇다고 태웅 자신이 천력문에 등을 돌릴 생각도 없었다. 천력문에서 힘을 얻었고 날개를 단 이상, 천력문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자신 또한 감상적이다. “이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날뛰느냐!” “양극건곤수(兩極乾坤手)로군. 십봉객의 명성은 오래 전부터 들어왔지. 이 몸은 수혼신수라고 하는데 그대에 비하면 반딧불에 불과해. 나와 손속을 겨룬다는 게 자존심 상하지 않나?” “피래미 같은 놈이!” “하하! 수공의 달인이니 보는 눈도 있겠지. 우리 적수당이 피래미로 보이나?” “오냐! 죽여주마!” “알고나 죽어라. 이것이 적수당 당주가 익히는 현현쇄혈수(玄玄鎖穴手)닷!” 평소 천력문은 인림, 지림, 천림이라는 삼림(三林)으로 본채를 방어한다. 인림은 신력당으로 심요산 산자락에 넓게 퍼져 말 그대로 경비에 치중한다. 그런 일도 없었지만 지금처럼 공격자가 있을 경우, 제일 먼저 손속을 부딪치게 되는 것이다. 인림은 심요산 구석구석에 퍼져 있는 만큼 비살문 같은 암습의 대가들에게 걸리면 치명적인 피해를 당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지림을 준비했다. 지림은 산 중턱에 위치하며 인림에 구멍이 뚫리면 즉각 보완한다. 지림이 인림과 합류하여 적과 싸우는 동안 다른 곳에 흩어져 있던 인림 문도가 모여들게 된다. 천력문 문도는 심요산 지리에 해밝다. 한 명이 능히 열 명을 상대할 수 있는 요처를 알고 있으며, 목이 어딘지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알고 있다. 어디서 기습을 해야 성공할 가능성이 높으며,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절대 불가항력적인 고수를 만났을 경우에는 어디서 어떻게 몇 명이 합공을 해야 하는지도 수없이 수련했다. 인림과 지림이 손을 잡고 있는 한 심요산은 난공불락이다. 그래도 뚫리게 될 경우, 천림이 나선다. 개개인이 당주를 능가하는 무공의 고수 서른 명. 그들이야말로 무적이지 않은가. 그러나 태웅은 인림과 지림이 무너진다면 천림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인림과 지림의 존재를`─`그들이 사용하는 전술을`─`모르는 사람은 결코 그들을 무너트릴 수 없고, 그들을 무너트리고 본채를 향해 다가오는 인물들이라면 천림의 존재도 알고 있을 터이고, 대비책도 충분히 세워놨을 터이니까. 양극건곤수도 금강대력을 내공의 기초로 삼았다. 그는 힘에도 종류가 다양하다는 데 착안하여 무공을 연구했고, 크게 음양(陰陽)으로 분류했다. 양력(陽力)은 강맹하여 일격필살(一擊必殺)을 노릴 수 있으나 시종여일(始終如一) 같은 힘을 구사할 수 없다는 단점을 지닌다. 음력(陰力)은 부드러우면서도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닌 반면 초식이 극히 정교하고 변초(變招)가 많아야 한다는 단점도 아울러 지닌다. 그는 양력과 음력의 조화를 연구했고, 성공하여 양극건곤수라는 무명을 얻었다. 그가 보기에 수혼신수가 전개하는 수공은 음공(陰功)에 해당된다. 신법이 영활하고 변초가 많으며, 허초(虛招)와 실초(實招)를 구분하기 힘들다. 전형적인 음공이다. 하나 그는 양극건곤수가 무기력하다고 느꼈다. 그가 연구한 적이 있는 음공인데도 맞받기가 부담스러웠다. 가벼운 손놀림 속에 포함된 수많은 변초가 정확히 사혈(死穴)만 노리는 까닭이다. 현현쇄혈수(玄玄鎖穴手). 깊고 깊은 바다처럼 무궁무진한 초식으로 혈도를 봉쇄하겠다는 뜻이지 않은가. 과연 현현쇄혈수라는 명칭에 걸맞는 무공이다. ‘한 놈과 오래 신경전을 벌일 여유가 없다. 적수당 당주라 했나? 네놈만 꺼꾸러진다면 적수당 구심점이 사라질 터!’ 파앗! 생각과 동시에 왼손이 짓쳐 나갔다. 수혼신수는 예리한 각도로 양계혈(陽鷄穴`:`손목 부근, 엄지와 검지의 뿌리가 만나는 곳)을 찍어오는 중이었다. 상식에 어긋나는 변초다. 양계혈은 팔을 저리게 하고 온몸을 움츠리게 하는 혈도지만 가격하는 혈도가 아니라 잡아누르는 혈도다. 또한 가격한다 하더라도 격중시키기가 쉽지 않아 일반적으로 무공수련 시에는 배제되는 혈도다. ‘양계혈이라. 좋아! 내주지!’ 그는 왼손을 계속 짓쳐 내며 오른손에 금강대력을 가득 끌어모았다. 파앗! 왼손이 끊어져 나갈 듯 아팠다. 당연하다. 뼈가 으스러지는 것까지 각오했으니까. 파앙! 오른손에 집약되어 있던 양공이 터져 나갔다. 노리는 부위는 가슴 중앙에 있는 화개혈(華蓋穴). 설혹 화개혈이 격중되지 않더라도, 엇비슷하게만 맞아도 가슴뼈가 함몰되어 즉사하리라. 타격에 심장이 손상되는 것은 물론이고, 부서진 뼛조각에 찔리는 고통도 상당할 게고…… 하나 일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피윳! 전개하여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는 수공이 허공을 때리고 말았다. 수혼신수는 양계혈을 가격함과 동시에 신형을 비틀었고, 왼손으로 오른쪽 기문혈(期門穴), 복부 중앙 중완혈(中脘穴), 왼쪽 갈비뼈 밑 장문혈(章門穴)을 연타했다. 퍽퍽퍽……! ‘알고 있었어! 내 무공을 환히 알고 있었어. 이자는 내가 어떻게 공격할 줄 알았어. 조문이 어딘지도…… 아아!’ 양극건곤수는 두 눈을 부릅떠 수혼신수를 노려보았다. 죽는 순간까지도 질 수 없다는 투지를 불태우고 싶어서…… ‘확실해. 준비했어. 포영매라고 했던가? 하하하! 천하의 모든 무공을 환히 들여다보고 있다더니만…… 문주, 아마도 문주께서는 힘든 싸움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태웅은 암울한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빛 한 점 없는 어두운 날씨다. 긴긴 가뭄에 나뭇잎조차 바짝 타들어갔는데 아마도 폭우가 쏟아질 모양이다. 폭우가 쏟아지면 심요산 계곡물이 콸콸 넘쳐 흐르겠지. 어린아이들은 감히 들어갈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거센 기운을 품고서. 떠내려갈까 봐 겁이 더럭 나는 계곡물에 몸을 담그는 맛도 일품이다. 특히 폭우가 기승을 부리는 날에는 그놈의 모기가 달라붙지 않아서 좋다. “준비하시지요.” 태웅은 산 아래를 주시하고 있는 오군에게 말했다. “아버님께서는 뭐라십니까?” 오공자 구공무(具恭武)가 물었다. 태웅은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어쩌면 타고난 천성을 이렇게 버리지 못하는지…… 오공자 구공무는 오군 중에서는 제일 대가 약한 편이었고, 모친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탓인지 남에게 의지하는 습성이 있었다. “막내야, 아버님께서는…… 이번 싸움에 공을 세우면 횟수에 관계없이 천로로 임명하실 게다. 그러니 힘껏 분투해라.” “하지만 저들은……” “형을 믿지?” “네.” “네 뒤에는 내가 있으마.” 태웅과 삼천로 구음고의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눈빛 속에서 입으로 주고받을 말을 모두 나누었다. ‘하하! 얼마나 기다려야겠소?’ ‘잠시 뒤에 따라가겠소. 너무 빨리 가지는 마시오.’ ‘저승길에도 주루가 있을까?’ ‘하하! 그곳도 사람이 다니는 길인데 주루인들 없겠소.’ ‘빨리 오시오. 주루에 있는 술, 모두 동내기 전에.’ 십봉객, 구원로…… 모두 속절없이 죽었다. 젊은 놈 두 놈, 계집 세 명, 그리고 중년인 셋. 그들의 무공은 터무니없이 강했다. 일대를 풍미한 십봉객, 구원로이건만 그들이 펼친 무공 앞에서는 폭풍에 휘말린 가랑잎 꼴이었다. 더군다나 사람 다니는 길목이라면 어김없이 들어차 있는 백문장 무인들도 신경 써야 했을 테고. “대형, 먼저 갑니다.” 사천로 구자광이 먼저 신형을 날렸다. “이 개자식들이!” 그가 맡은 산길은 폭이 좁아 한 사람이 간신히 걸어갈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 한중앙에 그가 떡 버티고 서자 광목천왕(廣目天王)이 현신한 듯 위용스러웠다. “미련한 곰인가, 귀여운 애송이인가.” 그 앞에 마주선 사람은 화창당 당주 천개유룡이었다. “에라이! 쥐 불알태기 같은 놈, 주둥아리만 나불대지 말고 빨리 목이나 디밀엇!” “불쌍한 놈……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 쓰는 것 봤어? 재주껏 놀아봐. 구경은 해줄 테니.” “이, 이런 개새끼!” 구공무는 흥분했다. 천개유룡이 그를 피해 뒤로 물러서고, 쌍창(雙槍`:`양쪽 끝에 창날이 있음)을 든 일곱 명이 앞으로 나섰다. “오냐! 이놈들, 내 개떡을 만들어주맛!” 구공무는 미친 듯이 이랑도(二郞刀)를 휘두르며 앞으로 치달렸다. “한살신비창법(寒殺神飛槍法)은 칠인합격도 되지. 합격술을 연마하는 게 불만이었는데 곰을 잡으려고 그랬군.” 뒤로 빠진 천개유룡이 느물느물하게 조롱했다. 구공무는 그와 말씨름할 정신이 없었다. 그가 비웃든 말든…… 그는 앞뒤로 정신없이 몰아치는 쌍창을 막아내기에 급급했다. 합격술이 특이했다. 상대의 어깨를 발판 삼아 뛰어오르는 놈이 있는가 하면, 유독 발등만 노리는 놈도 있었다. 좁은 산길도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혼자서 다수를 막아내기에 좋은 지형이지만 머리를 건너뛰어 등 뒤로 돌아간 놈이 세 놈이나 생긴 다음에는 앞뒤로 협공을 받는 격이 되어버렸다. 평소 그렇게 자랑하던 금강대력도 무용지물이었다. 이랑도에 금강대력을 실어 바위를 내리치면 두 조각으로 쩍 갈라지곤 했건만 쌍창은 무엇으로 주조되었는지 이랑도와 부딪치면 잘라지기는커녕 휘청 꺾여서 공격해 오는 바람에 정신없었다. 마치 봉을 상대하는 것처럼. 그러던 어느 한 순간, 앞에서 찔러오는 쌍창을 막아내고, 그 기세를 빌려 뒤에서 공격하는 자를 휘둘러친 다음, 다시 앞으로 신형을 돌렸을 때, 피윳! 무엇인가가 번개같이 날아왔다. “이런 비열한 놈들! 암기까…… 컥!” 구공무는 이랑도를 놓아버리고 두 손으로 목을 움켜잡았다. “암기라니, 무슨 섭섭한 말을. 이것이 화창당주가 익히는 철창대연(鐵槍大衍)이야. 세상은 넓지만 모두 미세한 점으로 이루어졌다는 진리를 깨달아야 되지. 바늘구멍이라도 꿰뚫을 수 있는 정확함. 암습을 해서 미안하지만…… 약속하지. 철창대연으로 암습을 가하는 일은 다시는 없을 거라고.” “끄…… 윽! 혀, 형……” 구공무는 마침내 숨을 떨궜다. 그의 인상은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구음고는 동생을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동생을 지키기는커녕 자신의 육신조차 지키기 힘들었다. 오른손에는 외월아(外月牙)를, 왼손에는 내월아(內月牙)를 들고 신력을 과시했지만 부드럽고, 급하고, 포근하고, 강한 네 가지 기운을 동시에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백 번에 걸친 공적을 쌓아 천로라는 명성을 얻었으니 그 동안 싸운 무인들도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어떤 때는 지옥 문턱까지 갔다 온 적도 있고, 어떤 때는 수십 명을 상대로 혈투를 벌이기도 했다. 처음 이들 네 명이 주위를 둘러쌀 때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들을 업신여긴 것은 아니다. 이들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혁혁한 무명(武名)을 떨치던 구 원로 중 네 명을 죽인 가공할 고수들이다. 그들이 자신의 주위를 둘러쌌을 때 느껴지는 압박감이 너무 가벼워서 상대를 중히 여길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한데 초식을 거듭할수록 항거할 수 없는 거력으로 압박해 온다. 승려처럼 머리를 반지르르하게 민 배불뚝이 사내는 선장(禪杖)과 일체를 이루었다. 그 혼자만으로도 능히 초절정고수라고 단언할 수 있다. 다른 세 명도 절정에 이른 무공을 구사하나 민대머리 사내만은 못하다. 분명히 똑같은 수준은 아니다. 한데도 이 네 사내가 퍼붓는 공격은 어느것이 우선이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치열하다. 이들의 무공에서는 음양의 구분이 없다. 음 중에 양이 만들어지고 양 중에 음이 만들어지면서 대립도 하고 상생도 한다. 동방(東方)을 점유한 중년인이 쌍철편(雙鐵鞭)으로 다리를 휘어쳐 왔다. 쌍철편은 양병(陽兵)에 속하는 병기인데도 파공음조차 들리지 않는 음유공격(陰柔攻擊)이다. 내월아를 내쳐 막아봤지만 역시 맞받지 않고 방향을 꺾어 무릎을 찍어온다. 음체(陰體)…… 음의 기운이 쌍철편과 중년인의 전체를 감싸고 있다. 그야말로 음중지음(陰中之陰)이라 할 수 있다. 서방(西方)을 점하고 있는 중년인은 조금 거리를 두고 매화수전(梅花袖箭)을 쏘아대는 통에 방심할 수 없다. 그러던 그가 매화수통(梅花袖筒)을 단봉(短棒) 삼아 거세게 짓쳐 온다. 요란하지는 않지만 강맹한 기운을 담고. 양체(陽體)다. 완전한 양체가 아니라 음중지양(陰中之陽), 음에서 양으로 변환하고 있다. 남방(南方)에서 거세게 밀어치는 중년인은 공격할 때마다 요란한 소리를 내는 구환도(九環刀)를 사용하지만, 지금은 쌍수도(雙手刀)를 사용하는 자처럼 호흡을 고르고 있다. 음체(陰體)다. 이것도 완전한 음체가 아니라 양중지음(陽中之陰), 양체에서 음체로 변환하고 있다. 가운데에는 역시 선장을 든 민대머리 사내다. 그는 강맹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은, 어찌 보면 아무런 특징도 없는 무공을 구사한다. 하나 그 무공이 바로 네 사람의 중심이며 합격술의 모든 조화를 주관한다. 중간(中間). 음양중화(陰陽中和)로 양과 음의 균형을 이루어 어떤 공격이든 자연스럽게 만들어준다. 종잡을 수 없는 공격…… 이들이 사상진법(四象陣法)을 구사하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변화가 너무 자연스럽고 무궁대해(無窮大海)와 같아 겉잡을 수 없이 휘말려 들어갔다. 피륭……! 선장이 파공음을 내며 머리를 찍어왔다. 구음고는 머리를 트는 것으로 선장의 공격을 피하고, 외월아로 다시 양체로 변해 거센 공격을 준비하고 있는 쌍철편을 후려쳤다. 어느 공격이든 한 곳의 맥을 끊어놓지 않고는 연속되는 공격에서 헤어날 수 없다는 절박감에서 취한 행동이었다. 촤라락……! 등 뒤에서 구환도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구환도도 음체에서 양체로 변해 강맹한 공격을 뿜어낸다. 구음고는 쌍철편을 포기하고 외월아로 구환도를, 내월아로 상대의 몸을 찍어갔다. 갑작스럽게 사방에서 몰아치는 강맹한 공격들…… 선장, 구환도, 쌍철편…… 순간, ‘앗차!’ 구음고는 다급히 몸을 빼내기 위해 신형을 돌렸다. 구환도가 음체에서 양체로 변하고, 쌍철편이 그렇고, 선장이 중화를 이뤄 연속수를 쳐내고…… 그러면 매화수전은 양체에서 음체로 변화할 것이다. 매화수전이다! 많이도 바라지 않고 허리를 굽힐 수 있는 공간, 딱 그만큼의 공간이 필요하다. 패앵! 구환도가 머리털 몇 가닥을 베어내며 스쳐 갔다. 선장은 등 뒤로 바짝 따라붙고, 쌍철편은 전면에서 현란하게 회오리친다. 병장기를 부딪치지 않고는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없다. 예측했던 일이지 않은가. 그리고 병장기를 부딪치는 일이라면 천력문 무인들의 장기 중 장기이지 않은가. 얼마든지! 결코 사양할 수 없는 싸움방식이다. 하나 지금은 다르다. 그랬다가는 여지없이 목숨을 잃고 만다. 구음고는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고 신형을 허공으로 쭉 뽑아올렸다. 외월아와 내월아를 풍차처럼 휘둘러 쫓아오는 것을 방지하는 것은 기본이다. 한데, 푸욱! 구음고는 등 어름에서 심한 통증을 느꼈다. 마치 불에 달군 송곳이 쑤셔박힐 때와 비슷한, 화끈 하는 순간 세상을 까맣게 물들이는 아찔한 충격이었다. ‘걸렸어. 놈들은 나를 묶을 목적이 아녔어. 허공으로 띄울 목적…… 걸렸어.’ 땅으로 떨어지는 그의 눈에 목에서 붉은 피를 콸콸 쏟아내는 막내동생이 보였다. “이천로 태웅은 싸우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던데, 맞아?” 태웅은 거침없이 반말을 해대는 당돌한 아가씨를 보며 한 여인을 생각해 냈다. 이미 기억 속에서 멀어진, 주목할 만한 후기지수(後起之秀)였으나 행방이 묘연해 무림인들로부터 잊혀진 여인이었다. “사천성 운학문(雲鶴門)의 천금 빙정신소(氷晶神簫) 유건지?” “풋! 눈깔은 제대로 달렸네? 바쁘니까 빨리 말해. 싸울 거야, 비킬 거야?” 태웅은 길을 열어주었다. 싸우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천력문 무공에 확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천로 구자광이 이 여인과 여인 뒤에 시녀처럼 시립해 있는 두 여인의 합공하에 죽었지만 자신은 그렇게 만만히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나 싸운들 무엇하랴. 이미 대세가 기울어졌다. 천력문이 멸문하는 것은 시간문제가 아니라 이미 멸문했다. 먹이를 잡으려다가 외려 먹히고 만 꼴이다. 다시 일어설 수 없을 만큼 철저히, 완벽하게. 그 충격은 그에게서 모든 의욕을 앗아갔다. 유건지와 두 여인이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은 채 그의 곁을 태연히 스쳐 지나갔다. 문득 그는 기이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싸우지 않을 것이라고 했는데…… 누가 말했나? 포영매 갈천상인가?” “호호호! 그 늙은이 생각은 정말 족집게라니까. 귀호구혼(鬼呼拘魂) 전인수라고 들어봤어?” “귀, 귀호구혼!” “실패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지만 그 이치가 통하지 않는 곳이 있으니 무림. 백 년 세월 동안 천불탑을 쌓았으나 찰주(擦柱`:`탑의 제일 위)를 잘못 올리니 만사휴의(萬事休矣). 그 늙은이가 전하라는 말이야.” “찰주를 잘못 올리니 만사휴의…… 하하하하!” 태웅은 앙천광소를 터트렸다. 모르고 있어도 너무 몰랐다. 이 여인이 빙정신소 유건지라면…… 백 년에 한 명 날까말까 한 천골이었으나 행방이 묘연했던 여인 유건지라면…… 대공자 구음고를 죽인 사람은 틀림없이 일심향불 백무이리라. 그 역시 불가에서는 천골이라는 소리를 들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막 삼공자 사천로를 죽인 저 사내는…… 만검진천 전종대가 아닐까? 이러한 고수들이 있는지조차 몰랐으니 필패(必敗)는 당연하다. 무엇보다 백문장에 귀호구혼이 있는 줄 알았으면…… 그런 공격을 감행하지 않았을 텐데. 아니, 그가 있는 줄 알았으면 조항의 뼈다귀가 전해져 왔을 때에도 무시하고 말았을 텐데. 심요산에 오당이 전부 있었다면 이리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을 게다. 귀호구혼의 간계에 말려들어 세력을 분산시킨 결과가 이런 결과를 가져 왔으니 누구를 원망하랴. “문주와는 누가……” “매듭은 묶은 자가 풀어야지. 조자경이라는 계집이 오고 있어. 아마 천력문주도 꽤나 고생할걸?” ‘그렇겠지. 고생하겠지……’ 태웅은 어서 날이 밝아오기를 기다렸다.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보는 태양이기에. 第二十二章 수위하광(誰謂河廣: 누가 말했나. 황하는 넓다고) 쫦 1 쫦 백문장이 천력문의 본채를 급습할 즈음, 비살문주는 비살문의 전력을 이끌고 동산 산기슭으로 스며드는 데 성공했다. 여느 때 같으면 어림없었으리라. 동산까지 도달하는 동안 적어도 네다섯 번의 싸움은 있었을 테고, 암습의 달인들이라고 하지만 지리적 이점을 취하고 있는 철응방과의 싸움에는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 했으리라. ‘무적의 비조대’가 백문장 급습에 실패했다는 소문이 떠돈 다음부터 철응방 무인들의 정신상태가 급속하게 공황상태에 빠져 들었다. 몸은 철응방에 있지만 마음은 철응방을 떠나버렸다. 그렇다고 갈 곳도 없을 뿐 아니라 사문(師門)을 등졌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싫어서 머물러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십 년 전 백문장의 전례는 많은 참고가 되었다. 사문을 버린 사람치고 잘된 사람이 한 명도 없으니까. 아니 근근이 목숨을 연명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처지들이니까. 그들은 경계보다는 삼삼오오 짝을 이뤄 앞날을 의논하기에 급급했다. 의견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철응방주 도후무가 누구인가.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절강 무림에 뛰어들어 당당히 사대 패강의 위치에 올라선 입지전적(立志傳的) 인물이지 않은가. 그가 아직 건재하다. 무적의 비조대 또한 그가 만든 것이니만큼 그만 건재하고 시간만 넉넉히 주어진다면 옛날의 철응방 정도는 금방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 시간도 크게 염려스러울 것 없다. 천력문에 태웅이 있고 비살문 문주가 뛰어난 전략가라지만 간화만 할까. 간화는 충분히 시간을 벌어줄 것이다. 건곤방의 천목봉인 왕국용이 죽었으니 건곤방은 당분간 움직이지 못할 것이고, 천력문은 철응방 못지않은 피해를 당했으니 그 또한 쉽게 움직이지 못한다. 그럼 남은 문파는 비살문뿐인데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난 다음에야 건너는 비살문주가 천력문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을 각오까지 하면서 움직이겠는가. 철응방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문도들은 무적의 비조대가 무너진 것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비관적인 문도들은 급변하는 정세를 꼽았다. 절강 무림은 옛부터 십 년에 한 번씩 대란을 치르곤 했는데 이번 싸움이 대란의 징후라는 것이다. 그리고 초반에 강자들을 잃은 철응방이 어떻게 견디겠냐는 주장이었다. 비관적인 이유는 구구하니 많았지만 결국은 무적의 비조대 영향 탓이었다. 비살문주 소상원은 그런 철응방의 동태를 낱낱이 읽었다. ‘지금이 바로 적기(適期).’ 웬만해서는 움직이지 않는 소상원이지만 이번만은 전력을 모두 모았다. 먹잇감이 너무 많아도 걱정이다. 소상원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천력문도 상처를 입었고, 백문장도 그렇고, 철응방도 그렇고, 건곤방도 건곤십삼봉이 몰사했으니…… 소상원이 그 중 먹잇감으로 철응방을 고른 것은 과거의 원한이 크게 작용했다. 십 년 전, 비살문은 천력문의 본채를 급습했는데, 기묘한 먹이사슬 탓인지 철응방이 대뜸 뒤통수를 후려쳤다. 철응방과 천력문의 합공은 소상원에게 지옥의 아수라도(阿修羅圖)를 보여주었다. 그때 한 발만 잘못 디뎠어도 오늘날의 비살문은 존재하지 못했으리라. 이번에는 역으로 친다. 소상원은 오른팔을 머리 위로 올렸다가 둥근 호선을 그리며 내렸다. 스스스슥……! 부드러운 미풍이 스쳐 가는 것 같다. 소상원이 가장 믿는 귀살대원들의 움직임이다. 그리고 잠시 후, “크윽!” “컥!” 산 속 여기저기에서 극히 짧고 미미한, 귀를 기울여도 알아듣기 힘든 신음이 터져 나왔다. “생각 밖입니다.” 간화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 철응방주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하루 중 가장 어두울 때가 삼경 무렵이라고 말한다. 밤이 가장 깊어서 그런 생각을 했을 게다. 하나 정작 가장 어두운 무렵은 동이 트기 직전이다. 밤과 낮이 서로의 위치를 바꾸는 지금이야말로 사람들의 시력이 가장 어두워질 때다. 비살문주 소상원은 공격시기는 물론 시점까지 정확하게 읽었다. 철응방은 크게 삼(三) 대(隊)로 구성되어 있다. 비조대가 그 중 하나다. 다른 둘은 사귀와 함께 백문장에서 참변을 당한 비조탈명이 이끌던 비마대와 십 년 전의 대란 이후에 입문한 무인들로 구성된 비철대(飛鐵隊)가 있다. 현재 비철대는 삼비박룡 음선풍이 맡고 있으며, 비마대는 철조화(鐵爪花) 빙의천(意天)이 대주로 있다. 철조화 빙의천은 춘귀의 분신이다. 그는 포영매 갈천상이 철응방을 다녀간 후부터 무공에 걸신이 들린 사람처럼 달려들었다. 입도 열지 않았다. 먹지도 자지도 않았다. 인간인 이상 먹고 자지 않고서 어찌 버티겠는가. 하나 아무도 춘귀가 먹고 자는 모습을 본 사람이 없었다. 결국 그는 철응조공과는 전혀 다른 그만의 조공을 창출해 냈다. 단지 빠름에 치중한 듯한, 일체의 변식을 배제한 조공. 초식이 너무 단순해서 ‘나라면 피할 것 같은데’ 하는 마음이 들게 하는 조공. 스물다섯 번에 걸친 비무를 치르면서 그는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냈다. 상대가 누구든 단 오(五) 합(合)을 넘기지 않고 승부를 결정지은 것이다. 물론 승자는 그이지만. 철응방 사람들은 그를 더 이상 춘귀라고 부르지 않았다. 철조화. 그를 부르는 무명이다. 그의 본명은 무엇일까? 모른다. 단지 누군가의 입에서 빙의천이라는 이름이 새어나왔고, 한두 명의 입에서 입으로 옮긴 것이 지금은 이름으로 굳어져 버렸다. 방주는 그를 공석이었던 비마대주로 임명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또 한 사람, 크게 달라진 사람이 있다. 삼비박룡 음선풍이다. 그도 갈천상과는 전생에서부터 인연이 있었던 게 틀림없다. 백문장까지 가서 그를 데리고 왔으니까. 그때부터다. 춘귀처럼 음선풍도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다. 토굴을 파고 혼자 기거하며 오로지 무공수련에만 전념했다.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예전의 음선풍으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맹수처럼 활활 타는 눈, 피를 그리워하는 듯 바짝 마른 입술…… 그의 직속수하였으며 음선풍에 대해서는 자신처럼 알고 있다던 반혼조수 검성도도 그의 곁에 다가서지 못했다. 그는 철조화 빙의천과는 전혀 다른 조공을 선보였다. 그의 장기라 할 수 있는 현란한 변화를 더욱 세세하게 갈라 천수여래(千手如來)의 재림(再臨)을 보는 듯했다. 삼비박룡 음선풍과 철조화 빙의천이 겨루면 누가 이길까? 모든 철응방 무인들의 관심사였다. 하나 철응방주는 두 사람의 비무를 허락하지 않았다. 비무를 하면 승패가 갈릴 테고, 두 사람의 지금 상태로 봐서 패배는 곧 재기불능을 초래한다는 이유였다. 두 사람이 어떤 상태인지, 방주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몇몇 사람만이 이해했지만. 그 두 사람이 이끄는 비마대와 비철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희생이 커지고 있습니다.” 간화가 재촉했다. “발등의 불부터 꺼야겠지. 웬일인지…… 요즘은 부쩍 늙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구먼. 공격하라고 하게. 비조대원까지 모두.” “비조대원까지 말입니까?” “그들은 화를 풀 데가 없어. 불을 당기지 않아도 터질 화약들이지. 화풀이할 곳을 마련해 줘야 하지 않는가?” “방주님의 뜻이 정 그러시다면……” 간화가 허리를 굽힌 다음 물러갔다. 백문장 공격에서 살아남은 비조대원은 모두 스물여섯 명이다. 그들도 백문장 반심당이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면 천력문 거천당처럼 몰사했을 운명들. 간화는 지리적 이점을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살문과의 싸움을 회의적으로 봤다. 역시 무적의 비조대가 무너진 것은 엄청난 타격이다. 만일의 경우…… 책사들은 늘 만일의 경우를 생각한다. 무림인에게는 그놈의 만일의 경우가 통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습관적인 발상일까? 만일의 경우라는 것이 실제로 발생하면 그것은 곧 사형선고다. 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들처럼 밝게 반짝였다가도 흔적없이 스러져 간 수많은 무림 명문세가들도 그놈의 만일의 경우라는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철응방주는 일곱 부인을 거뒀으되 대부인(大夫人)과 다섯째 부인이 죽어 다섯 부인이 남아 있다. 자식은 서른한 명을 낳았으나 세 명이 죽어 스물여덟 명이 있다. 스물여덟 명 중 사내가 열여섯, 여자가 열둘. 철응방주가 딸에게는 무공을 전수하지 않은 관계로 철응조공을 이어받은 자식은 열여섯 명이다. 간화는 그들과 살아남은 비조대원을 묶어 차기를 위해 준비시키자고 했다. 어느 부모가 자식이 죽는 모습을 보고 싶을까. 하나 철응방주의 생각은 달랐다. 철응조공의 진수를 물려받은 자식이 열여섯 명이나 있으나, 철응방을 물려받을 만한 인재는 단 한 명도 없다는 판단이다. 그들 중 한 명이 철응방을 물려받는다면 독수리 무리 속에 뛰어든 병아리 꼴로 어느 틈에 죽어 자빠질지 모른다. 뛰어난 자식이 있기는 있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격살(擊殺)한, 동산신응이라고 불리던 자식…… 그 아이는 뛰어나도 너무 뛰어난 게 탈이었다. 절맥단을 제어할 힘을 잃은 상태에서 뛰어난 자식이 두각을 나타낸 것은 불행이다. 그래서 더욱 절맥단을 용서할 수 없는지도 모르지만. 사태가 이렇게 급변할 줄 알았다면 포영매의 손을 빌려 그들을 제거하지도 않았으리라. 그들의 안위를 돌볼 생각이 없다면 최선봉에 세워 싸우게 해도 무방했을 테니까. 모두가 지난 일이다. 철응방주는 지금 이 싸움에서 사생결단(死生決斷)을 내지 않으면 힘들어진다고 판단했다. “고맙습니다.” 그는 등 뒤에 서 있는 노인에게 말했다. 노인은 싸움에는 관심이 없는 듯 터오는 동녘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모습이 노인답지 않게 강직해 보였다. “사람과 금수(禽獸)가 다른 점을 아나?” 노인은 철응방주에게 거침없이 하대를 했다. “은혜를 모르는 것이겠지요. 이놈이 무식하기는 해도 그 정도의 의리는 알고 있습니다.” “지킬 텐가?” “지키겠습니다. 기회가 있다면.” “허허! 인간사 앞일을 누가 알꼬. 기회는 늘 오건만 깨닫지를 못하는 것뿐이겠지. 이 늙은이…… 청 하나 함세.” “말씀하시지요.” 철응방주는 노인을 등 뒤에 세워두고 있지만 말만은 허리를 숙이고 있는 것처럼 깍듯했다. “철응방을 박창(朴昌)에게 주게.” 철응방주는 눈을 번쩍였다. “……박창…… 이 아니라 설창(泄昌)이올시다.” “내게는 박창일세.” 철응방주는 고개를 내둘렀다. 설창은 아니다. 설창은 어미 자서부인을 닮아 무공보다는 학문에 더 어울리는 샌님이다. 아니, 자서부인이라기보다는 등 뒤에 서 있는 노인 박우의 피를 물려받았기 때문이겠지. 피를 보기 두려워하는 자가 어찌 철응방을 물려받을 수 있을까. 물론 지금 나누는 이야기는 비살문과의 싸움에서 살아남는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지는 공염불에 불과하지만…… 아무래도 아니다. “좋습니다.” 철응방주는 승낙했다. 비살문과 싸워서 공멸(共滅)하면 행운이다. 십중팔구는…… 진다. 절맥단과 비조대가 무너진 지금 몇몇 뛰어난 무인이 있다고 해서 이길 싸움이 아니다. “서신으로 공약(公約)해 주게. 방주의 직인(職印)도 찍고.” “꼭 그래야겠습니까?” “그래야지. 그래야 반심당을 움직일 것 아닌가.” “뭐, 뭣!” 철응방주는 깜짝 놀라 황급히 돌아섰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의 추태를 깨달았고, 침착을 유지했다. “백문장 반심당이 와 있단 말입니까?” “자네는 백문장을 쳤지만 장주께서는 자네에게 반심당을 보내줬네. 원수를 은혜로 갚은 거지. 금수가 아니라면 잊지 말게.” 철응방주는 너무도 나약해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노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는 알고 있다. 무림이란 의협(義俠)을 중시하는 만큼 원수도 철저히 가린다. 현재 절강 무림은 의협은 사라지고 살육만이 남아 있는 상태이지 않은가. 쉽게 도와줬을 리 없다. 분명 눈 앞에 서 있는 초라한 늙은이가 구걸하다시피 해서 얻어온 무인들일 게다. 비살문이 급습한다는 비밀도 노인이 물어온 소식이니, 틀림없을 게다. 딸을 빼앗기고 미치기까지 했던 노인…… 노인이야말로 원수를 은혜로 갚고 있다. “박…… 창에게 철응방을 주겠습니다.” 철응방주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철응방주는 무슨 말인가 할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마침내 입 안에서 맴돌던 말을 내뱉었다. “악부(岳父`:`장인)…… 박창에게 철응방을 물려주겠습니다. 설창이 아닌 박창에게……” 박우였다. 절곡에서 한 많은 세월을 삭이던 박우가 원수나 다름없는 사위를 용서했다. “당주, 들으셨소? 수고를 해주실 수 있겠소?” 박우가 허공에 대고 물었다. 허공에서 다정다감한 음성이 들려왔다. “수고라니 당치 않으십니다. 우선 내각주님의 화평(和平)을 앙축(仰祝)드립니다. 그럼.” 음성은 짧았다. 허공에서 대답한 인물은 어느새 이들의 곁을 떠나고 없었다. “뛰어난 신법이군요. 절강 무림에서 비성객이 제일 뛰어난 줄 알았더니……” “허허! 귀변팔법(鬼變八法)이란 신법일세. 포영매가 전수한 무공이라면 이해가 쉽겠지. 십육섬(十六閃), 암향부동(暗香不動)…… 반심당에서 익힌 무공은 비살문과 천적(天敵)일세. 비살문주도 쉽지 않을 거야. 허허!” 박우는 심모원려(深謀遠慮)라는 말을 떠올렸다. 당시는 갈천상이 하는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에 와서 보니 틀이 딱딱 들어맞지 않는가. ─`천견당은 백문장을 수비하고, 화창단은 건곤방의 봉법을, 적수당은 철응방의 철응조공을, 흑사당은 천력문을, 그리고 반심당은 신법으로 비살문의 암습과 맞설 수 있죠. 솔직히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았는가. 혼자서 사대 패강 전체와 싸우기라도 할 양인지. 하기는 모두들 미친 사람들었으니 누구를 탓할 것도 없지만…… “백문장 내각주이십니까?” 철응방주가 물었다. “취휴각주였네만…… 일을 조금 더 맡았지.” 박우는 그 선에서 말을 마쳤다. 철응방주가 사위이지만 백문장을 위협하고 있는 사람인데…… 더 이상 이야기한다는 것은 장주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백문장은 갈천상이 돌아오는 것을 시점으로 종합적인 개편을 했다. 박우가 내각주를 맡고, 내각주 밑에 일처장 홍문성과 이처장 오경을 두었다. 내각주를 맡고 있던 운단서는 신설된 천문각주(天文閣主)로 이동했다. 천문각주 밑에는 방삼이 이끄는 천견당, 기관을 조정하는 마부영, 전서구(傳書鳩)를 비롯하여 온갖 정보를 수집하는 전창(傳倉)의 창주(倉主)인 마임호가 배치되었다. 외각주는 책사인 전인수가 겸직했고, 외각주 밑에 화창단, 적수당, 흑사당, 반심당을 두었다. 갈천상을 비롯하여 만검진천 전종대 등은 봉공(奉公)으로 분류되어 독자적인 행동을 보장받았고, 그 외에는 난주일검 장상부만이 장주로부터 직접 명을 받는 위치에 있었다. 작은 보직 변경…… 재건하는 문파로서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며, 한 번씩 변경될 때마다 그만큼씩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저 글은 내가 썼어. 지켜야지……” 박우가 작은 말로 중얼거렸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철응방 현판이었다. 한참 붓에 맛을 들인 나이에 조자앙의 필법을 본따서 쓴 현판…… 철응방…… 쫦 2 쫦 소리없는 싸움은 지루하고도 지겹다. 더욱이 은신술만 전문적으로 수련한 무인들이라면 더욱 고달픈 싸움이 된다. 그들은 하루, 이틀은 물론이고 사나흘도 숨을 죽이고 있을 만큼 인내심이 강하다. 반심당 무인들이 익히고 있는 십육섬(十六閃)이라는 신법은 가장 빠른 신법이 아니라 가장 움직임이 적은 신법이다. 적의 공격을 피하는 데는 간발의 차이로 피하나 넉넉한 거리를 두고 피하나 매한가지다. 적의 공격을 무산시켰다는 점에서는 모두 똑같다. 크게 다른 점도 있다. 간발의 차이로 피할 경우에는 적과 근접한 상태가 된다. 적은 마주 달려오고 있고, 이쪽은 흐트러진 몸을 가누는 찰나이기도 하다. 아주 가벼운 공격으로도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수 있게 된다. 정확히 가격할 수만 있다면. 적이 변초(變招)하기 전에 흐트러진 몸을 가누기만 한다면. 이것은 감각의 문제다. 오감으로 느끼는 감각이 아니라 육감으로 느끼는 감각이 탁월해야 한다. 백문장 무인들은 갈천상이 직접 분류했다. 사 당이 구성되기까지 문도가 되고자 찾아온 젊은이들은 수를 헤아릴 수 없다. 갈천상은 그들 중 각 당의 특성을 고려하여 가장 적합한 무골을 골랐다. 아마 그 시기부터 사 당의 탄생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절강성에서 입문하기 가장 까다로운 문파라면 천력문을 들 수 있다. 천력문은 선천적인 신력이 없으면 입문할 수 없는 문파이니 태어날 때부터 선택받은 사람들만 입문할 수 있는 문파다. 거기에 백문장이 추가되었다. 이미 일정 수준의 무공을 익히고 있는 무인도 백문장 무공과는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거절하는 문파는 백문장밖에 없으리라. 반심당 무인들은 한결같이 감각이 탁월했다. 그들은 모두 빛 한 점 들지 않는 밀폐된 방으로 들어선 경험이 있다. 무공을 익힌 자든 익히지 않은 자든 본능적으로 위험한 곳이라는 판단을 한 경험도 있고, 그러면서도 당황하지 않았다는 공통점도 있다. 무엇인가가 날아와 몸에 부딪혔을 때에도 약간…… 아주 약간 움직였을 뿐 크게 움직이지 않은 사람들이다. 어찌 보면 행동이 굼뜨다고 볼 수도 있다. 하나 전혀 움직이지 않은 사람은 감각이 없는 사람이고, 크게 움직인 사람은 전형적인 신법에 길들여진 사람이다. 갈천상은 새로운 감각을 지닌 무인들이 필요했고, 그래서 반심당 무인들이 추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심당 무인들의 성과는 다른 당보다 훨씬 뒤졌다. 기본공부터 착실히 다진 후 차츰 고도의 무공을 익혀가는 다른 당에 비해 반심당은 처음부터 고도의 감각활용을 요구한 탓이다. 하루에 한 명, 어떤 때는 이삼 일에 한 명씩 문도가 입문했지만 또 그만큼의 문도가 탈락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반심당 무인들은 일 장 거리를 일다경(一茶頃)에 걸쳐 이동할 만큼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전신 감각을 활짝 열고, 서로 간의 거리는 반 장 간격을 유지해 서로가 상응할 수 있도록 하면서. 철조화 빙의천은 비마대를 맡은 이후 문도를 한시도 편히 쉬지 못하게 했다. 잠을 잘 때에도 철골조(鐵骨爪)를 끼고 자야 했고, 밥도 철골조를 낀 사람만 먹을 수 있었다. 처음으로 돌아간 것이다. 처음 철응방에 입문한 문도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당연히 문도들의 반발도 거셌다. 그럴 때마다 그는 말없이 철골조를 내밀었다. 비마대 전임 대주였던 비조탈명의 철골조. 임자 잃은 철골조가 의미하는 바는 해석하기에 따라 다양했다. 비조탈명의 죽음을 잊지 말라는 의미가 되기도 하고, 그분의 복수를 하기 위해 산다는 뜻으로도 해석되었다. 그래도 반발을 하는 무인이 있으면 대주의 전권으로 파문조치를 강행했다. 다른 당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파문이다. 비마대 무인들은 불만이 팽배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한 상태였다. 빙의천이 비마대의 불만을 모를 리 없다. 그러나 해명 따위는 일절 하지 않았다. 그는 조만간 목숨을 건 싸움이 있을 것이고, 그때는 자신의 마음을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리라고 믿었다. 단결은 중요하다. 전시(戰時)의 단결, 일상시(日常時)의 단결, 모두 중요하다. 혼자 몸이 아니라 집단을 이루고 있다면 개개인의 무공보다도 어쩌면 단결이 더 중요할지 모른다. 비마대는 단결과는 거리가 멀다. 내부적인 불만이 쌓이면 쌓일수록 단결과는 더욱 거리가 멀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내부적인 불만이란 것이 빙의천 자신이 눈만 한 번 찔끔 감아버리면 금방 해소될 성질의 것이다. 과연 그럴까? 무인의 혼이 죽어버린 단결이 필요한 것일까? 겉으로는 화기애애하지만 정작 싸움에 돌입하면 공포에 질려버리는 무인들이 필요한가? 이들을 과연 백문장 기관 속에 들이밀 수 있을까? 빙의천은 모두 아니다라는 결론을 얻었다. 지금이다. 지금 비마대는 사지(死地)에 들어섰고, 평소 철골조를 항시 몸에 붙이고 다니던 습관이 어떤 효과가 있는지 똑똑히 깨닫게 되리라. “귀살대의 암습은 천하제일이다. 공격이 있으면 피하려고 하지 마라. 사형사제(師兄師弟)를 믿고 태연히 맞닥트려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싸움은 믿으면 살고 믿지 못하면 죽는 싸움이다.” 사귀는 결코 이 순간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백문장에서 비조탈명과 사귀는 철저히 믿었다. 하나 단 한 순간의 흐트러짐이 죽음을 불러왔다. 초반에 추귀만 기관에 당하지 않았어도 사태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 싸움이 끝난 후 과연 몇 명이나 살아남아 있을까? 그들은…… 싸움이 끝난 후에도 살아남은 문도는 무적의 비조대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오히려 그보다 한 단계 더 성숙한 무인으로 탈바꿈되어 있으리라. 사형사제를 부모형제처럼 진실로 믿는 마음이 생길 테니까. “선(先)에 삼(三), 선중(先中)에 사(四), 중(中)에 오(五), 후중(後中)에 사(四), 후(後)에 삼(三)이다. 대열이 흩어지면 모두 죽는다. 자기 한 몸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자신의 몸에 다른 열여덟의 목숨까지 걸려 있다는 점을 명심해라.” 빙의천은 열아홉 명을 일(一) 조(組)로 해서 모두 열 개 조로 나눴다. 정중앙에는 향주(香主)를 심었다. 다른 당의 경우 향주는 네 명에 불과하지만 빙의천의 비마대를 맡는 즉시 열 명으로 늘렸다. 백문장 기관을 생각하고 한 행동이다. 백문장의 원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단결된 힘이 필요하다. 뭉쳐 있으니 죽는 자가 태반이겠지만, 열 개 조가 순차적으로 뚫고 들어간다면 기관은 파해될 수밖에 없다. “각 조의 거리는 이 장. 가자!” 빙의천은 앞서 네 개 조를 떠나보낸 후에야 움직였다. 삼비박룡 음선풍은 공격 명령을 받고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혹은 망부석(望夫石)처럼 멍하니 앉아 허공을 뚫고 들려오는 비명 소리만 들었다. “아아악!” “컥!” 처음에는 바람 소리인가 싶을 정도로 낮은 비명에 불과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비명 소리는 높아지고 뚜렷해졌다. 종적이 발각되었다고 여긴 귀살대가 은밀한 죽음을 버리고 가장 빠르게 가장 많이 죽일 수 있는 방법을 택한 까닭이다. “대, 대주…… 공격하라는……” 사향주(四香主) 중 적향주(赤香主)가 음선풍의 주의를 돌리려고 했지만 말을 끝내지 못했다. 음선풍의 눈동자는 굶주린 맹수에 버금갔다. “저…… 공격할까요?” 음선풍의 오른팔인 반혼조수 검성도가 나섰다. 그는 음선풍이 비철대주가 된 이후, 자청해서 비마대 향주에서 비철대 향주로 자리를 옮긴 사람이다. 음선풍이 검성도를 바라보았다. 찌릿! 하는 전율이 인다. 귀신처럼 안광이 시퍼렇게 번들거리는 음선풍의 눈길을 맞받을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리라. 더욱이 음선풍은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무심히, 뚫어지게 노려보기만 하니 더욱 미칠 지경이었다. 청향주(靑香主) 검성도가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장주의 명을 전한 후 돌아가지 않고 있던 간화가 나서며 말했다. “뒤편에 절벽이 있지.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는 곳이네만…… 내려갈 수만 있다면 아운촌(雅蕓村)까지는 반 각 거리네.” 간화의 말이 끝나는 순간 영원히 움직일 것 같지 않던 음선풍이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간화가 말한 절벽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대, 대주!” “대주, 설마 그 절벽으로……” 향주들은 너무 놀라 얼굴이 노랗게 물든 채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 표정 속에는 어처구니없다는 빛이 역력했다. 말이 좋아 절벽이지 산양도 기어오를 수 없다는 백장단애(百丈斷崖)이지 않은가. 그곳으로 내려가겠다는 말인가? “어서들 쫓아가시게. 음 대주는 비살문의 뒤를 막고 싶은 거야. 단 한 명도 살려서 보내지 않겠다는 의지지. 향주라는 사람들이 그만한 뜻도 읽지 못했나? 가보게. 이럴 때를 대비해서 줄사다리를 준비해 놓았으니.” 그제야 향주들은 벌써 멀찍이 걸어가고 있는 음 대주의 뒤를 부지런히 쫓아갔다. “쯧! 비철대에서 진정한 싸움꾼은 음 대주뿐이군. 그러니 음 대주가 정면승부를 피할 수밖에. 못난 사람들……” 간화는 꾸지람 비슷한 말을 쏟아내고 있지만 심정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비마대는 너무 정면승부를 하고 있고, 비철대는 너무 나약하다. 과연 싸움이 끝난 다음에 몇 명이나 살아 있을지…… 상대가 암습의 제일인자들인 귀살대인데…… 그는 서둘지 않고 천천히…… 주변을 여유롭게 감상하면서 걷기 시작했다. 상처 입은 호랑이들, 비조대원이 있는 곳으로. “네놈들이 무적의 비조대라니 이해가 안 돼.” “말조심하시지.” “기분 나쁘다는 투인데…… 배알은 살아 있었나? 놀랍군. 썩은 송장이 말을 하는 것보다 더욱 놀라워.” “그렇게 죽고 싶다면 원을 들어주지.” 스물여섯 명, 그들 중 한 명이 일어섰다. “병신들…… 눈깔이 삐어도 단단히 삐었구나. 이제는 싸울 상대도 분간하지 못하나?” “알아. 하나 우선 네놈 아가리부터 찢어놔야겠어.” 비조대원은 용타(龍`:`용의 발톱처럼 생겼으며 줄로 연결하여 사용)를 꺼내 허공에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내가 무식해서 그런가? 네놈이 들고 있는 병기가 뭐지?” 비조대원의 얼굴은 분노로 시뻘겋게 물들었다. 그는 사내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에는 무리가 없었다. 무인치고 용타를 모르는 무인이 어디 있던가. “용타 아닌가?” 정말 모르고 있는가? “맞다.” 비조대원은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보 같은 놈들! 아직도 모르겠는가! 무적의 비조대라는 말이 왜 생겼는가!” 사내의 질타에는 조금 전까지 희롱이나 하던 태도와는 천지 차이로 위엄이 가득 배어나왔다. “새는 하늘을 날게 마련이다. 그런데 너희는 평지에서 싸웠어. 아직도 모르겠나! 비마대는 야전(野戰)에 능하고, 비철대는 지전(地戰`:`지형의 이점을 안고 싸우는 것)에 능하다. 그래서 비마대는 공격, 비철대는 수비로 분류했다. 그러면 너희는? 너희는 무엇인가!” 비조대원은 공격하지 못했다. 용타를 들고는 있지만 빙빙 돌리던 것도 멈췄다. 사내가 질타하고 있는 내용은 충격이었다. “산전(山戰)이다. 산이 있어야만 훨훨 날 수 있어. 철응조공이라고 모두 똑같은 철응조공이 아니다. 그런데 너희는 평지나 다름없는 백문장으로 갔다. 이제 알겠나? 방주는 큰 실수를 했어. 비조대를 백문장에 보낸 것은 큰 실수였어.” 사내는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비조대를 백문장에 보낸 것이 실수 중 하나요, 절맥단을 멸절시킨 것이 두 번째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무적의 비조대만큼이나 절맥단은 철응방을 지탱하는 힘이었다. 만약 그들 열일곱 명이 모두 살아 있다면 귀살대가 아무리 날고 뛰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만만하게 공격하지는 못했으리라. 절맥단은 힘을 가졌다. 그런 그들에게 방주의 아들이랍시고 거들먹거리고 다니는 자식들은 한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들 중 누구 하나 철응방을 이어갈 인재가 있어야 말이지. 어느 조직이나 강경파(强硬派)와 온건파(穩健派)가 있기 마련이지만 절맥단도 그랬다. 절맥단은 방주에게 압력을 가해 절맥단에서 차기 철응방주를 내정하게 해야 한다는 강경파와 사부에게 검을 들이대는 패륜(悖倫)은 저지를 수 없다는 온건파로 나누어졌다. 그러던 차에 동산신응이 일을 저질렀고, 방주는 일격에 참살해 버렸다. 그것은 절맥단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그때 자숙했어야 했다. 방주의 비통한 심정을 헤아렸어야 한다. 곧이곧대로 밀고 나간 강경파의 주장은 방주에게도 심각한 압박으로 작용했으리라. 그러니까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를 펼쳤겠지. 갈천상의 힘을 빌려서. 절맥단은 패륜을 저지를 생각이 아니었다. 철응방의 장래를 생각했을 뿐이다. 갈천상이 절맥단을 요절내기 시작했을 때, 방주의 의도를 알았지만 항거하지 않았다. 여느 무인들처럼 자신들을 찾아오면 실전비무를 치렀고, 최선을 다한 끝에 죽음을 맞이했다. 무공이 모자라 죽는 것은 무인의 수치가 아니니까. 학무(鶴舞). 사내의 이름이었다. 절맥단 중 살아남은 유일한 무인이기도 했다. 그가 비조대원들 앞에서 죽은 정신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동산은 용타를 사용하기에 아주 적합한 곳이다. 무적의 비조대가 신화라면…… 신화가 거짓이 아니었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바란다. 절강 무림에. 중원 무림에.” 비조대원 개개인은 고수였다. 입문한 문도들 중에 가장 무공 성취가 높은 무인들만 추려놓은 것이 비조대였다. 그들은 사내가 한 말의 뜻을 알아들었다. “당신…… 못 보던 사람인데. 혹시 절맥단 아닌가?” “……” “그렇군. 비조대와 함께 철응방을 지탱한다던 신비의 인물들. 만나서 반가웠지만, 이 싸움이 끝난 후 그대의 실력을 봐야겠어. 싸움에 참가할 생각이라면 죽지 않길 바래.” “하하! 얼마든지. 너희 역시 살아 있길 바란다.” 학무는 얼굴도 몇 번 보지 않은 아들, 학음을 생각했다. 집이라고 찾아가면 아들은 언제나 낯선 사람 대하듯이 어려워했다. 아들뿐만이 아니다. 결혼한 지 십 년이 훌쩍 지나갔건만 아내는 지금도 이부자리 속에서는 낯선 사내를 대하는 듯 쭈빗거린다. 절맥단에 몸을 담지 않았다면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도 있었건만. ‘여보, 음아…… 다시 태어난다면 무공을 익히지 않겠어. 약속하지. 손가락을 걸고.’ 학무는 비조대원이 앉았던 빈자리를 쳐다보았다. 아직도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자리…… 그 사람들은 살아서 돌아올까…… 쫦 3 쫦 비살문주는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즉각 깨달았다. 비명 소리가 산 중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지금쯤 산 중턱은 고요에 묻혀 있어야 한다.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처럼 쓸쓸함만이 가득한 채 죽은 자의 넋들만 허공을 맴돌고 있어야 한다. 비명 소리는 끊임없이 울려퍼지고 있다. 이건 틀림없이 철응방 무인들의 비명 소리다. 귀살대원들은 죽는 순간에도 비명을 지르지 않게끔 혹독한 훈련을 받았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다. 철응방 무인들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비살문주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드는 것은 비명과 비명 사이의 끊김이다. 귀살대원 역시 죽어가고 있는가. 철응방에 아직 그만한 고수가 남아 있던가? 생각 같아서는 문도를 보내 상황을 알아오게 하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다. 귀살대는 암습이 전문인지라 공격명령과 함께 독자적인 행동으로 들어간다. 그들이 어느 길로 공격하든, 어느 곳에 은신하든 그것은 순전히 그들 개개인의 뜻에 맡긴다. 동산에 풀어놓기는 했으되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는 모른다는 말이다. 결과는 싸움이 끝난 후에나 알 수 있다. 이겼다면 철응방 정문 앞에서 불을 피울 것이고, 졌다면 지금처럼 오리무중(五里霧中) 궁금함만 던져 줄 것이다. 졌다는 단서는 있다. 비명 소리가 끊어지는 것. 불을 피우는 연기가 솟아오르지도 않고 비명 소리마저 끊겼다면 진 게다. 지금은 자신이 직접 나서도 귀살대원들의 생사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철응방에 직접 들어가기 전에는. “여적(呂滴)을 불러와.” 비살문주 소상원은 궁금증을 해결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여적은 마지막 전서구를 띄웠다. 이로써 홍문성에게 받은 은혜는 모두 갚았다. 아니, 받은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갚았다. 홍문성이 도와준 것은 굶주림에 지친 노부부를 구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가 갚은 것은 천금을 주고도 얻지 못할 정보였으니까. “누구에게 보내는 전서구인가!” 등 뒤에서 야멸찬 소리가 들렸다. 들킬 줄 알았다. 비살문 고수들이 쫙 깔려 있는 곳에서 전서구를 띄운 이상 들키지 않는다면 비정상이다. “본문에 보내는 전서구입니다. 통상적인 것입죠.” 여적은 당황하지 않고 응대했다. “전서구를 띄울 일이 없을 텐데?” “일단은 상황이 순조롭다는 소식을 전했습죠. 본문에서도 궁금해 하고 있을 테니……” “몇 마리나 남았나?” “……?” “전서구 말이야.” “모두 열 마리를 가져 왔습죠. 이제 아홉 마리……” “문주께서 부르신다. 가자.” 무인은 더 이상 의심하지 않는 듯했다. “비조대가 몰사했다고 했었지?” “스물여섯 명이 살아 돌아갔다고 보고드렸습니다.” “그게 그거지. 백문장의 동태는?” “고요합니다.” “천력문은?” “정신없습니다. 삼 당이 몰사당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대책회의로 부산하더라는 전갈이 있었습니다.” “귀살대가 산 중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짐작되는 이유라도 있는가?” “소인으로서는……” 지금까지 비살문주는 여적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문주의 신경은 오로지 산 중턱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민둥산이라면 문도의 모습이라도 볼 수 있으련만 수림이 울울창창 우거진 산 속인지라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긴 침묵이 흘렀다. 비살문주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산 중턱만 노려보았다. 무인 한 명이 쾌속한 신법으로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조금 전 여적이 날린 전서구가 들려 있었다. 무엇을 맞았는지 피투성이가 된 채. ‘틀렸어. 역시 비살문……’ 여적은 단념했다. 비살문주는 여전히 여적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전서를 읽어 내려갔다. “비살문 인시(寅時) 공격감행이라…… 이 말뜻은 알겠는데 전(轉)은 뭘 의미하는 거지?” “……” “말하지 않는 건가, 말할 수 없는 건가?” “비살문에 입문하여 큰 덕을 입었습니다. 무공을 배웠으면 더 큰 힘이 되어 드렸을 텐데, 우둔하게 태어난 탓으로 다리품밖에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 “……” “데리고 가라.” 문주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무인 두 명이 달려들어 여적의 양 팔을 움켜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들이 막 여적을 끌고 가려고 할 때, “잠깐! 하나만 묻자. 백문장이 고요하다는 말은 믿기 어렵고……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지. 어딘가 치기는 칠 텐데…… 어딘가? 건곤방인가, 천력문인가?” “천력문입니다.” “……이곳에는?” “백문장 무인들이 와 있는 것으로 압니다.” 비살문주는 눈을 살며시 내리감았다. 하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있어 내심의 격동이 겉에까지 여실히 드러났다. “섭섭하게 대한 적이 있던가?” “아닙니다. 분에 넘친 은덕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제게도 혈족이 있습니다. 피……! 피를 나눈 가족에게 줄 것은 다 주었습니다. 이제 비살문에 육신에 남은 피를 드립니다.” “……” 비살문주가 아무 소리도 하지 않자, 무인 두 명이 여적을 끌고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져 갔다. ‘홍문성…… 홍문성을 간과했어. 약초꾼이었던 여적이 홍문성의 그늘을 벗어나기는 힘들었을 터…… 내 실수였군. 백문장을 너무 가볍게 봤어. 너무 가볍게……’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로 인해 비살문의 앞날이 어두워졌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거짓보고를 하지 않은 천목대(天目隊)였기에 보고내용을 그대로 믿은 것이 실수다. 이것이다. 비살문주가 안심하고 철응방을 치게 된 배경은. 돌아가는 길로 천목대에서 홍문성과 연관있는 자들은 연통(連通) 여부에 관계없이 모두 정리해야 되리라. 어떻게 이런 실수를 저질렀던가. 신중하기로는 중원 전역에서 찾더라도 철응방주와 비살문주를 제일로 치는 터인데, 신중하기는커녕 경솔하기 이를 데 없는 행동을 저질렀으니. ‘그래도 천력문보다는 낫군. 천력문이라…… 무엇 때문에 백문장을 쳐서……’ 그는 차라리 천력문주가 원망스러웠다. 철응방주도 원망스러웠다. 왜 삼 당을 백문장에 보냈고, 철응방은 또 무엇 하러 비조대를 보내서 탐욕이 일어나게끔 유도해 냈는지…… 천력문이 무엇 때문에 백문장을 쳐서 싸움의 불씨를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천력문은 멸문하리라. 그 와중에 백문장은 철응방과 비살문에서 손을 뻗쳐 가만있지 못하게 만들었다. 상잔(相殘)! 백문장도 천력문을 멸문시키기 위해서는 무인들을 잃어야 한다. 그냥 잃기만 해서는 안 된다. 백문장을 둘러싸고 있는 철응방, 건곤방, 비살문의 무인들도 같이 감소시켜야 한다. 그래야 천력문을 친 보람이 나타난다. 다른 문파는 백문장을 칠 여유가 없을 테고, 백문장은 천력문의 영역까지 집어삼켰으니까. 목표로 한 문파 외 다른 두 문파를 상잔시킬 수 있는 계략은 영원한 숙제였다. 그래서 완전히 몰락해 버린 백문장조차 치지 못하고 방관했던 게 아닌가. 백문장은 멋지게 해치웠다. 누가 있는가! 누가 있어서 이런 계략을 꾸몄는가! 비살문주는 여적에게 아직 묻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 이미 늦었다. 지금쯤 여적은 목이 베여졌을 테니까.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다. 한시라도 빨리 결정을 내려야 한다. 결단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불리해진다. 비조대가 빠진 철응방을 비살문이 전력으로 칠 것을 예상하고도 고수들을 파견했다면 충분한 승산이 있다는 이야기…… 그러나, ‘믿을 수 없어. 백문장은 무인을 받아들인 지 일 년도 되지 않았어. 그사이에 귀살대를 상대할 수 있는 고수를 양성했다는 것은…… 어쩌면 허장성세(虛張聲勢)?’ 어찌해야 하는가! “염라전(閻羅箭), 귀왕인(鬼王刃), 양수(揚手), 금황(金皇), 혈면(血面)!” “존(尊)!” “너희는 지금 바로 본문으로 돌아가라!” “……”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화남이에게 즉시 문주직을 계승시키고, 자숙하라 일러라. 복수는 용납하지 않는다. 귀살대가 온전한 모습을 찾을 때까지,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냄새도 맡지 말고, 숨도 쉬지 말라고 일러라.” “문주님!” “무슨 그런 말씀을……” “명심해라. 비살문 십대고수가 있는 한 비살문은 몰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너희들이 다치면 화남이는 이빨 빠지고, 발톱 빠진 호랑이에 불과하다. 비영, 철곤, 칠살수, 화검, 일흑에게도 단단히 일러라.” “문주님!” “가랏! 비살문 십대고수 중 문주와 한시도 떨어지지 않던 오 인. 그들은 한동안 문주의 등만을 바라보았다. 문주는 이 싸움을 회의적으로 보고 있다. 단지 비명이 산 중턱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무공은 사대 패강의 장문인들보다 높고, 지략으로는 여느 책사들보다 뛰어나다고 믿은 문주. 그러한 문주가 유언이나 다름없는 말을 하면서 분신이나 다름없는 자신들은 내칠 때에는 숙고에 숙고를 거듭했으리라. “존…… 명!” 십대고수 중 제일 맏형인 염라전이 나오지 않는 말을 했다. 휘익! 그가 몸을 돌려 사라지면서 거센 경풍(勁風)을 일으켰다. “존명!” 휘익! 휘익! 휘익……! 다른 사 인도 염라전처럼 거센 경풍을 흘리며 사라져 갔다. 그들은 물처럼 유유하고 바람처럼 고요한 사람들이다. 싸울 때는 물론이고 걸어다닐 때에도 발걸음 소리조차 흘리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문주에게 마지막 하직인사를 그런 식으로 표시했다. 비살문주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단 일(一) 대(隊), 귀살대로만 형성된 비살문이다. 그들이 모두 동산 깊이 들어갔으니 문주 주위에 남아 있는 무인들이라고 변변히 있을 리 없다. 십일(十一) 호법(護法), 그들이 전부다. 소상원은 그들의 얼굴을 일일이 쳐다본 후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철응방으로. 누구 할 것 없이 사대 패강, 백문장까지 오대 패강 전부가 다치는 싸움이다. 전란은 시작되었고, 절강 무림인이라면 누구 하나 빠져 나갈 수 없다. 어차피 시작된 싸움…… 이제는 그가 도박을 할 차례다. 第二十三章 차하인재(此何人哉:이 모두가 누구 탓인가) 쫦 1 쫦 비살문 귀살대는 무형인(無形人)들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바로 곁을 스쳐 지나도 깨닫지 못할 만큼 완벽한 은신술을 구사했다. 정면승부도 걸지 않았다. 뒤에서 소리없이 나타나 살검을 펼친 후, 흔적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것을 보고 귀신이 곡을 할 노릇이라고 하는가? “흩어지면 죽는다고 했다. 철저하게 믿으라고 했다. 알겠나? 열아홉 명 중 단 한 명이라도 마음이 흩어지면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 마음을 단단히 부여잡아라.” 빙의천은 나무를 등지고 서 있는 문도를 보면서 말했다. 문도는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등 뒤에서 심장을 뚫고 솟아나온 검날을. 심장에서 흘러내린 피가 상의를 적시고, 하의까지 흥건하게 물들이는 중이었다. 그는 눕지도 못하고 서서 죽었다. 죽은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무를 하든 실전을 벌이든 반드시 철골조에 피를 묻혀야만 싸움을 끝낸다는 혈조마랑(血爪魔郞) 염수규(廉修槻). 잔인함에도 종류가 많지만 염수규처럼 인간성 자체가 사악한 잔인함이 으뜸일 것이다. 그가 왜 그렇게 잔인하게, 혹독하게 행동했는지는 모르지만 무공만으로 놓고 볼 때에는 당주들에 버금갈 만큼 뛰어난 향주였다. 그래서 늘 당주들과 불화가 심했지만. 그가 죽었다. 눈을 부릅뜨고 눕지도 못한 채. 그는 아홉 번째 조를 이끌었고, 그가 죽었다는 것은 열아홉 명이 일 조를 이룬 대형 네 개가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향주는 가장 중심에 있었으니까. 팔십여 명에 이르는 사형사제가 죽은 모습은 각기 달랐지만 정면에서 검을 받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옆에서, 뒤에서 공격을 당한 흔적이 뚜렷했다. 그에 비해 비살문 문도의 특징인 피풍의를 두른 무인들은 삼십여 명만 죽었을 뿐이다. “여기는 육태안(陸泰雁)이 지킨다. 죽음으로 지켜라.” “존명!” 이제 빙의천을 경원(敬遠)하는 무인은 한 명도 없다. 삶과 죽음이 바로 발 밑에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절감했고, 평소 철골조 사용을 생활화하게 하여 손의 일부분처럼 만들어준 것이 감사할 뿐이다. 빙의천은 철응방으로 올라가는 길목 다섯 곳을 점거했다. 앞서 네 개 조를 출발시킨 것은 길을 뚫으라는 의미. 그들은 죽었고, 남은 다섯 개 조가 수비를 할 차례다. 죽음으로 뚫어놓은 목 중에 목이니 반드시 지켜야 할 곳이다. 쉬익! 느닷없이 찬바람이 일었다. 돌아보지 않아도 귀살대의 급습이 직감된다. 검풍은 날카롭기 짝이 없어 소름이 오싹 돋게 만들고…… 이럴 때 피와 살로 만들어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반응을 하게 된다. 철응방 무인들 중 일부가 꿈틀거렸다. “믿엇!” “움직이지 맛!” 고함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먼저는 빙의천이 한 말이고, 나중은 빙의천의 의도와 대형(隊形)의 묘의(妙意)를 완전히 깨달은 향주가 터트린 말이다. 꿈틀거리려던 무인들이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래서는 안 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바라보고 있어야 할 곳을 주시해야 한다. 열아홉 명이 한 조를 이룬 대형은 시선의 교차를 최대한 이용한 진법(陣法)이라고 할 수 있다. 열아홉 명이 각기 다른 방향을 보고 있으니 사위(四圍) 중 어느 한 군데 빠트리는 곳이 있을 리 없다. 시선이 닿는 방향에서 쳐오는 검은 바라보고 있는 무인이 맞이한다. 당연히 정반대를 바라보고 있는 무인은 등을 내주는 꼴이지만 ‘믿으라’는 말은 사형사제를 믿고 자신이 주시하는 방향에서 시선을 떼지 말라는 말이다. 얽힘을 당하면 일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린다. 그때는 서로 자기 한 목숨 살리기에 바쁠 것이고, 한 명씩 한 명씩 사냥을 당하게 된다. “타앗!” 한 명이 신속하게 철응조공을 펼쳐 냈다. 눈을 질끈 감아버린 문도의 뒤를 향해서. 비성객이 만든 칠성보도 위력을 나타냈다. 과거에 비성객은 칠성보를 두고 이런 말을 했다. 현묘한 점에서는 뒤지지만 빠름에서는 훨씬 뛰어나다고. 차앙! 철골조와 장검이 얽혀들었다. 순간 정중앙에 있던 향주가 역시 칠성보를 밟아 바짝 다가서며 철골조를 뿜어냈다. 빠악! 둔탁한 소리는 급습을 가했던 귀살대원의 이마에서 터졌다. 귀살대원의 얼굴은 곧 피로 물들었고, 눈동자가 풀어지면서 스르륵 무너지고 말았다. 향주는 마무리를 끝내야 한다. 그사이 일검을 막은 무인은 제 자리로 돌아가 다시 자신이 바라보고 있어야 할 곳을 경계한다. 완벽한 조화가 이루어져야만 등을 내준 무인이 살 수 있다. 지금은 살았다. “좋아.” 빙의천은 간단한 한마디 말로 치하했다. 그 시간, 비철대주 음선풍은 아운촌에 도착해서 산 밑부터 훑어 올라갔다. 비마대가 위에서 아래로 훑어 내려오고 있으니 자신은 반대로 밑에서부터 훑어 올라가야 적들이 당황한다는 계산이었다. 계산이 적중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대원을 넓게 퍼트린 후 극히 조금씩 이동해 올라갔다. 쉬익! “컥!” “앗! 공격이닷! 타앗!” “죽일 놈! 탓!” 창창창……! 똑같은 현상이 수차례 반복되었다. 급습은 귀살대에서 시작되었고, 어김없이 비철대 문도가 죽었다. 그러나 옆에 있던 문도들은 곧 합격을 시작했고, 치열한 접전 끝에 한두 명이 죽은 후`─`운이 좋을 때에는 한 명도 죽지 않고`─`귀살대원을 죽였다. ─`죽지 않으려면 죽어라. 음선풍은 잔인해졌다. ‘수치……’ 백문장에 다녀올 때부터 주눅이 들었던 자신을 원망하며 ‘수치’라는 말을 뇌리에 담고 살았다. 현재 하는 행동이 만용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그는 무림은 철저한 ‘강자존(强者存)’의 세계라는 것을 재인식했고, 수하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칠 참이었다. 싸움이 벌어졌다고 예외는 아니다. 나약한 문도는 도태되어야 한다. 그런 자는 차라리 검에 맞아죽어라. 죽고 싶지 않다면 죽여라. 물러서는 자는 용납하지 않는다. 아운촌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음선풍의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던 비철대원들은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말의 진의를 몸으로 깨달아야 했다. 죽음은, 피는 사람을 흥분시킨다. 이성을 마비시키고, 비위를 강하게 하며, 인성(人性)을 죽여버린다. 거기에 음선풍은 독한 화주(火酒)를 네 사발씩 먹게 했다. 몸 속에 흐르는 피도 뜨겁다. 몸동작은 조금 둔해졌을지 모르지만 투혼은 불타오르고 있다. 철응방 삼 당 중 가장 약하다는 비철대가 뜻밖으로 제 몫을 다해주고 있었다. 비조대원들은 스물여섯 명밖에 남지 않았고 명령을 내릴 구심점도 없는 상태인지라 자신들의 행동을 자신들이 알아서 했다. 쉬익! 쉬익! 쉬이익……! 비조대원들은 현란하게 움직였다. 용타를 던져 용의 발톱 같은 끝 부분으로 나무줄기를 휘어감은 후 몸을 이동시킨다. 몸이 이동하는 동안 다른 손에 들린 용타로 다른 나무줄기를 휘어감고 신형을 틀며 먼저 던진 용타를 풀어 쥔다. 용타 두 개로 나무와 나무 사이를 이동하는 비조대원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원숭이를 방불케 했다. 그러던 비조대원의 눈에 낯선 광경이 잡혔다. 산길에는 두 종류가 있다. 인간이 걸어다니며 만들어놓은 길과 동물들만이 다니는 길이다. 언뜻 보기에는 아무런 차이도 나지 않는다. 단지 동물들이 다니는 길은 조금 걷기 불편하다는 느낌이 든다. 하나 자세히 관찰하면 허리 이상의 높이에서 자라는 풀이나 나뭇가지가 꺾이지 않고 자라는 점을 볼 수 있다. 비조대원은 산길을 주목했다. 다른 곳의 풀들은 모두 곧추 자라고 있는데, 유독 한 곳만 움푹 꺼져 있다. 나무 위에서 살펴봤기에 발견할 수 있었으리라. 그곳에 귀살대원이 숨어 있다면…… 놈은 틀림없이 무공수련 중에 계집 생각이나 한 놈이 틀림없다. 살수들에게는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주변환경과의 조화조차 제대로 익히지 못했으니. 쒜에엑! 비조대원은 쾌속하게 용타를 뿜어냈다. 푸악……! 종적이 발각되었다고 여긴 귀살대원도 몸을 숨기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는 재빨리 뒤로 물러서며 무엇인가를 던졌다. 쒜에엑! 쒜엑! 파파파파팟……! 한 쪽은 끊임없이 용타를 던져 내고 다른 한 쪽도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던지고…… 그러면서 두 사람은 조금씩 거리를 좁혔다. 동시에 두 사람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불어쉬었다. 양쪽 모두 상대에게 다른 방조자가 없는가를 살폈고, 상대가 오직 한 명뿐이라는 사실을 안 다음 흘려낸 한숨이었다. 비조대원과 귀살대원은 일 장 거리를 격하고 마주섰다. 비조대원은 용타 두 개를 양쪽 손에 감아쥔 상태였고, 귀살대원은 양 손을 허리춤에 올려놓은 모습이었다. 그가 던진 것…… 비수였다. 그는 비도술(飛刀術)을 익혔는지 가슴은 물론이고 허리, 허벅지, 종아리까지 비도가 빽빽히 꽂혀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다시 한 번 긴 숨을 들이쉬었다. 마주선 이상 승부가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비조대원은 용타 두 개를 한 번에 던져 낼 것이고, 귀살대원은 몇 개나 던질지 모르지만 틀림없이 던져 내리라. 활달하게 신법을 전개하며 싸운다면 양쪽 모두 긴 싸움이 된다. 하나 두 사람은 짧은 싸움을 원했다. 현재 동산에서 일어나는 싸움은 모두 짧아야 한다. 긴 싸움을 하게 되면 다른 방조자가 나타날 경우가 있으니까. 방조자가 이쪽 편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일이지만 저쪽 편이라면 무척 피곤해진다. 두 사람은 무언 중에 합의했다. 공격 후 시간이 나면 피한다. 눈빛이 얽혀들었다. 하나, 둘, 셋! 쒜에엑! 페엑……! 퍼퍼퍽! 퍽! 귀살대원은 옆으로 두 걸음을 이동했다. 하나 그의 몸에 연결된 줄은 끊어지지 않고 따라왔다. 연결된 줄을 떼어버리려면 가슴에 틀어박힌 용타와 복부에 틀어박힌 용타를 제거해야 되리라. 비조대원은 우측으로 세 걸음 이동해, 장정 서넛이 둘러싸도 에워쌀 수 없을 것 같은 고목에 팔을 얹었다. 그리고 귀살대원을 바라보았다. “쳇! 계집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는 놈인 줄 알았더니.” 그는 귀살대원이 ‘주변과의 조화’를 제대로 익히지 못한 것이 아니라 너무 잘 익혀 유인까지 할 경지라는 것을 인정했다. “비조대가 백문장에서 참패했다고 하기에 쓰레기들인 줄 알았더니…… 괜찮군.” “귀살대원도 말을 하나?” “인간이니까.” “말하는 귀살대원이라…… 후훗! 비살문주가 통곡을 하겠군.” “죽는 마당까지 원한을 안고 가려나? 저승길…… 즐거운 마음으로 가려면 이승에서 보는 마지막 얼굴은 웃는 얼굴이 좋아.” “반대로 됐군. 그런 말은 내가 해야 되는 것 아닌가?” “하하! 내 비수 잘 챙겨서 가져 와. 가면서 다시 한 번 싸워보려면 병기가 있어야지.” “내 용타…… 도 잘 챙겨. 가슴…… 것은 괜찮지만…… 복부…… 것은 내장이 묻어나지 않…… 도록 조심해서 뽑…… 아.” “그러지. 조심해서 뽑지.” 비조대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목에 팔을 얹고 깊은 생각에 잠긴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전신에 박힌 비수 여덟 개만이 요요롭게 빛났다. 귀살대원은 복부를 쳐다보았다. 용타는 육신을 파고드는 순간 줄의 작용에 의해서 손가락이 오므라들 듯이 오그라들게 되어 있다. 그의 내장은 쇠손가락에 단단히 움켜쥐여진 꼴이었다. “빌어먹을! 이걸 어떻게 조심해서 뽑으라구…… 따져 봐야겠군.” 그도 더 이상 숨을 고르지 않았다. 귀살대원들에게 가장 곤란한 적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일단의 무리였다. 그들은 사전에 이러한 무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자신들이 연구했던 철응방 무공과는 전혀 다른 무공을 구사하기에 당황했다. 분명히 허가 보여 공격을 감행하는데, 결과는 좋지 않게 끝나니. 결과가 좋을 경우도 있다. 놈이 방향을 약간 트는 바람에 제이공격을 감행해야 했지만 처음에 본 허가 죽임으로 통하는 경우가 그렇다. 하나 그러한 경우는 상대를 죽였기 때문에 곧 잊어버렸다. ‘신당혈(神堂穴), 지실혈(志室穴), 천종혈(天宗穴), 명문혈(命門穴)…… 허! 거참!’ 공격할 곳이 너무 많다. 싸움이 벌어진 것을 알고 있고, 검을 들고 있으니 싸움을 하러 나온 놈 같은데 이토록 전신 혈도 모두를 드러내놓고도 태연자약하게 걸어다니다니. 죽으려고 작정한 인간이란 말인가. 탁! 페에엑……! 경쾌한 소리와 허공을 찢어발기는 소리가 어우러졌다. 바위 속에서 터져 나온 소리였다. 바위와 똑같은 색의 피풍의를 뒤집어써 바위와 동체를 이루고 있던 비살무인이 참다참다 못해 기어이 솔수전(手箭)을 쳐내고 만 것이다. 그는 이전에도 지금처럼 무방비 상태로 걸어가는 무인 두 명을 그냥 지나 보냈다. 너무 태연자약한 행동에 께름칙한 무엇인가를 느꼈기 때문이다. 평소 틈을 만나면 놓치지 말라는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행동이었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을 때에는 공격하지 말라는 살수들의 체험을 따랐기 때문에 후회는 없었다. 그런데 또 그런 자를 보게 되니…… 공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도 마음이 내키지는 않지만. 피윳! 솔수전은 그야말로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무인의 곁을 스쳐 갔다. ‘긴장했나……?’ 그는 아주 잠깐 망설였다. 솔수전을 던진 것은 무인의 등 뒤에서였다. 따라서 무인이 등을 돌려본다 해도 바위와 일체를 이루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계속 은신하고 있어야 하나, 재차 공격을 감행할까? 공격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솔수전을 격중시키지 못했다는 것이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었다. 그것보다는 전신이 무방비 상태인 적을 놓고 긴장했다는 것이 더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쉬익! 귀살대원은 피풍의를 들치고 도약하며 비살문 독문검법인 적명검법을 펼쳤다. 적명검법은 태곳적부터 인간세상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살인기법 중에 검을 사용하는 부분만을 다듬은 것이다. 가장 효과적으로 빨리 찌를 수 있는 방법도 있고, 가장 확실하게 죽일 수 있는 방법도 있으며, 잔인 무도하게 죽이는 검법까지 총망라했다. 귀살대원은 검병(劍柄)을 두 손으로 잡고 일직선으로 찔러갔다. 적과 나의 거리가 지척지간이고, 적은 등을 돌리고 있는데 나는 최선을 다할 수 있을 때 가장 효과적인 살인검법이다. 검에 집약된 내력도 강해서, 적이 위험을 깨닫고 병장기를 휘둘러온다 할지라도 천력문 고수들같이 신력을 바탕으로 펼치는 무공이 아니면 몸 어딘가는 찔리게 되어 있다. 휘청! 재수가 좋은 놈인가? 놈의 몸이 휘청거리는 찰나는 그야말로 절묘해서 일격필살의 검이 한 치 가량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재수가 좋은 놈이 아니다. 놈은 신법이 무척 탁월하다. 얼굴과 얼굴이 부딪칠 만큼 서로 간의 몸이 밀착 상태에 들어섰을 때에서야 귀살대원은 놈에게 빨려 들어갔다는 것을 직감했다. 씨익! 웃는 얼굴…… 그것으로 모든 진실이 드러나기에는 충분했다. ‘위험!’ 귀살대원은 반사적으로 손을 놀려 머리를 후려쳤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복부에 화끈한 통증이 전해졌다. 일순간 눈 앞이 노래지고 뱃속에서 무엇인가 역겨운 것이 솟구쳤다. “우웩!” 죽는 순간까지 비명조차 토해 내지 않는 귀살대지만 뱃속에서 솟구치는 핏덩이를 뱉어내면서까지 아무 소리도 흘리지 않을 수는 없었다. 전신의 기력이 썰물처럼 빠져 나갔다. ‘이대로 있으면 당한다. 움직여야 해……’ 생각은 간절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걸음은 술에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고, 정신은 여간해서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나에게 죽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라. 반심당 칠향주 중에서도 암향부동(暗香不動) 신법(身法)은 내가 제일 나아.” 퍽! 머리에서 멍한 울림이 전해졌다. ‘반심당? 백문장이 어떻게 여기에……’ 그는 해답을 풀지 못했다. 생각할 머리도 없으니까. 쫦 2 쫦 쉬익! 싸아악……! 검날이 여지없이 목젖을 베고 지나갔다. 무인은 놀란 표정이었다. 이렇게 빠른 검이 있었나 하고 놀랄 수도 있고, 자신이 죽는다는 것에 놀랐을 수도 있었다. 그런 그의 앞으로 검은 수염을 가슴까지 늘어트린 중년인이 태연히 지나갔다. ‘비살문주……’ 무인은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를 알았다. 십육섬이 아무리 감각적이라 해도 비살문주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겉으로는 중년인으로 보이나 실은 초로(初老)을 넘긴 사람…… 칠흑같이 검은 수염을 기르고 있는 무인이라면 절강성에서는 비살문주밖에 없다. 영광인지도 모른다. 무인으로 검을 잡아 비살문주와 같은 당대의 거인에게 죽는다는 것은. 쿵! 무인의 신형은 비살문주가 앞을 스쳐 가고도 서너 발짝을 더 옮긴 다음에야 쓰러졌다. 그의 얼굴에는 놀란 표정보다 만족스런 표정이 가득했다. ‘비살문주!’ 나무 위에서 부지런히 몸을 달리던 비조대원은 유람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동산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다가오는 중년인을 보면서 눈을 빛냈다. 그는 다른 나무 위를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다른 비조대원이 있었고, 그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도 운인가? 혼자였다면 한참을 망설였을 일이지만 각기 따로 흩어졌던 비조대원 세 명이 때마침 한자리에서 만났기에 망설임이 작아졌다. 비조대원 세 명은 서로 간에 고개를 끄덕여 의사결정을 내렸다. 일순, 쒜웨엑……! 피윳! 삼방에서 일제히 용타가 날아올랐다. 비조대원들은 자신들의 공격에 비살문주가 나가떨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상처만 입힐 수 있다면, 방주를 믿고 있지만 그래도 상대하기 쉬운 상대로 만들 수 있다면…… 오직 그것만 바랐다. 그런데, 휘릭! 휘이익! 적어도 일곱 걸음 정도 뒤떨어져 오던 일단의 무인들이 쾌속하게 날아올랐다. 암습의 달인이라면 신법, 보법, 검공, 은신술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자들이다. 이들이 그랬다. 일곱 걸음은 단숨에 좁혀지고 그들이 쳐낸 검에 의해 용타의 줄이 엉켜버렸다. 철컹! 콱! 줄이 엉켰어도 용의 발톱은 살아 움직였고, 무인 중 한 명이 목을 움켜쥐고 쓰러졌다. 정확히 목젖을 파고들었으니 손을 쓰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다. 그는 즉사다. 하나 나머지 다섯 용의 발톱은 힘의 원천이 끊겼고, 허공에서 맥없이 축 늘어져 버렸다. 싸움을 하다 보면 이런 경우가 종종 생긴다. 무인이라면 누구나 용타와 같은 병기와 맞닥트렸을 때 제일 먼저 줄을 휘감을 방책부터 생각하게 되니까. 그러나 줄을 휘감았다고 득의의 미소를 짓기는 이르다. 비조대원들은 용타를 던짐과 동시에 신형을 날리고, 팽팽하게 당겨졌던 줄은 느슨하게 풀어진다. 거기에 수공이든 검공이든 한 번만 더 공격이 이어지면 상대는 물러서거나 맞받을 수밖에 없고, 용타는 다시 날아오르게 된다. 파앗! 퍼억……! 둔탁하기도 하고 섬뜩하기도 한 음향이 울려나왔다. “큭!” “커억!” 비살문주를 뒤따르는 인물들이니 무공이 범상치 않으리라. 예상은 했다. 운이 나쁘면 비살문 십대고수라는 자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정도로 강할 줄은 정말 몰랐다. 비조대원 세 명은 착지도 하기 전에 검기의 폭풍에 휘말리고 말았다. 전신에서는 구멍 뚫린 가죽부대처럼 피분수가 쏟아져 나왔다. 그 중 두 명은 사혈(死穴)을 맞아 땅에 떨어짐과 동시에 부들부들 떨다가 잠잠해졌고, 다른 한 명은 다리 신경이 끊어져 일어서지도 못했다. “조용히……” 비살문주가 말했다. 비조대원에게 검을 날렸던 무인들은 일제히 뒤로 물러서 정숙을 유지했다. “이…… 이…… 차라리 죽여라!” “시끄럽군. 조용히 시켜.” 무인들 중 한 명이 다가섰다. 그의 눈과 비조대원의 눈이 허공에서 엉켰다. 그리고 극히 짧은 순간, 무인의 손이 허공에서 번뜩인 순간 비조대원은 비명조차 토해 내지 못하고 풀썩 꼬꾸라졌다. “들리지 않는군.” 이어지는 비살문주의 말이었다. 째짹! 째째짹……! 산새 소리가 청아하게 들리는 산 속…… 그밖에는 기분 나쁠 정도로 조용했다. “허!” 비살문주는 감탄인지 탄식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소리를 토했다. “오늘이 며칠이지?” “팔월 이십칠일입니다.” “그렇군. 언젠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지. 나는 몇 살까지나 살까. 사람 목숨은 하늘에 달렸다고 했는데, 하늘은 나에게 얼마간의 수명을 주었을까? 죽는 날은 여름일까, 겨울일까? 침상에 누워서 죽게 된다면 가을이 괜찮을 텐데.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선선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눈을 감는다면……” “……” 십호법은 아무 응대도 하지 않았다. 먼저 죽어간 사제의 시신을 수습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잠자코 듣기만 했다. “오늘이군. 장소는 이곳이고…… 또 궁금증이 치미는군. 내가 죽으면 내 시신은 어떻게 될까? 산짐승이 뜯어먹을까? 뼈다귀는 사방에 흩어지겠지? 허허허!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그래도 한평생 잘 살았지?” “잘 사셨습니다.” 십호법 중 한 명이 대답했다. “다행이야. 소화남 그 아이는 나보다 뛰어나지. 비살문은 언제 넘겨줄까 고심했는데…… 세상일이란 게 모두 자연스럽게 풀리는구먼. 때로는 인간이 생각할 필요가 없는 문제도 많아. 괜히 사서들 고심하지.” 비살문주는 걷기 시작했다. 평생 동안 공들여 쌓은 탑이 일거에 함몰되었는데도 그는 태연했다. “탄력이 강하군. 눈빛도 살아 있고…… 길을 막겠나, 비켜주겠나.” 비살문주가 야수처럼 긴장감으로 똘똘 뭉쳐 있는 무인들을 보며 말했다. 그들의 몰골은 처참했다. 각종 암기가 그들을 훑고 지나갔고, 그 위에 용권풍(龍捲風)과 천둥번개가 몰아친 듯했다. 땅에 쓰러져 있는 자들 중 일부는 이미 숨이 끊긴 듯했고, 일부는 심각한 부상을 당한 채 억지로 신음을 참아내는 중이었다. “문주께는 길을 열어 드리지요. 하지만 저자들은……” 비마대주 빙의천은 말을 마치지 않고 비살문주의 뒤에 서 있는 여덟 무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덟 무인…… 철응방에 도달하는 동안 십호법에게도 피해가 있어 두 명이 숨을 거뒀다. 비살문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들하고도 이별이구먼.” “사부님이라 부르겠습니다. 사부님 은혜, 감사히 받았습니다.” 총호법이 포권지례를 취했다. “보지 않겠네.” “저희도 그러길 바랍니다. 어서 올라가십시오.” 비살문주 소상원은 등을 돌려 ‘철응방’이라고 쓰여진 현판을 바라보았다. 가볍게…… 짓눌러 버릴 줄 알고 쳐들어왔던 길인데…… 이럴 줄 알았다면 퇴각신호라도 만들어두는 것인데. 그랬다면 비살문 전력은 온전할 것이고, 차후를 기약할 수도 있었을 텐데…… 소상원은 고개를 흔들었다. 절강 무림의 판도는 백문장으로 기울어졌다. 비살문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귀살대가 들이치고도 반병신에 불과한 철응방을 무너트리지 못했다. 겨우 백문장 일 개 당이 거들었을 뿐인데도. 십대고수와 아들이 가세했다면…… 철응방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을 수 있었으리라. 눈 앞에 있는 야수 같은 자들도 단숨에 몰아쳤을 게고…… 하나 그렇게 해서 철응방을 접수한다 해도 무슨 소용이 있을까. 백문장에서 일 개 당만 보내면 꼬리 만 강아지처럼 끙끙대며 절강 무림에서 쫓겨나야 할 팔자가 될 것을. 마지막 도박…… 혹시나 했던 도박이 실패로 끝났다. 비살문주는 천천히 걸었다. 눈빛이 야수처럼 번들거리는 무인들은 양쪽으로 갈라서 길을 열어주었고, 오른손에 끼고 있는 철골조를 빼들어 예의를 표시했다. 뚜벅! 뚜벅! 비살문주는 팔호법이 뒤에서 재배를 올리고 있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 그림이 현실이지만. “마무리는 철응방에서.” 반심당주 야조비공은 뒤로 물러섰다. 이번 싸움으로 반심당은 거의 절반에 가까운 무인을 잃었다. 정확히 백육 명이 와서 부상당한 사람까지 살아남은 사람이 모두 쉰두 명이다. 쉰네 명이 차디찬 시신이 되어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들 중에는 향주 급도 두 명이나 끼어 있으니 피해가 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철응방 무인들 앞에서는 피해가 크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철응방은 이번 싸움으로 와해되었다고 말해도 할말이 없을 정도로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백구십일 명으로 구성된 비마대는 이 개 조도 되지 못하는 서른한 명만이 살아남았다. 비철대는 더욱 피해가 커서 열일곱 명뿐이다. 그 밖에는 비조대원 열세 명, 절맥단원 한 명이 살아 있다. 그들 앞에 비살문 팔호법이 서 있다. 호법 한 명 당 여덟 명만 상대하면 되고 비살문 호법들은 그만한 무공을 지녔다. 한데도 야조비공은 물러섰다. 반심당이 검을 빼들면 승리가 확실해지지만 그래서는 철응방이 재기하지 못한다.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마지막 난관을 벗어나야 한다. 그것은 야조비공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다. 백문장을 떠나올 당시 총관 귀호구혼은 귀살대의 궤멸을 예견했다. 반심당도 오 할의 죽음을 말했으니 그의 예견은 하늘이 놀랄 만큼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하나 마지막 회의에 참석했던 야조비공은 놀라지 않았다. 여적에게서 받은 귀살대의 전력, 절강 무림에서 귀살대에게 죽은 고수들의 무공 등을 세밀히 분석하고, 철응방 및 반심당의 전력을 분석해 본 결과 그런 결과가 나온다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철응방의 전력을 분석하는 데에는 곤란한 점이 있었다. 야조비공이 생각하기에는 비마대와 비철대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는데도 갈천상과 귀호구혼 전인수는 전력을 오 할이나 높게 평가했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는데…… ─`비살문주와 생사를 같이할 사람은 십대고수가 아니지. 비살문주는 결코 대를 끊을 사람이 아냐. 소화남을 남겨두겠지. 그 곁에 십대고수가 남아 있다면 명맥은 유지하는 셈인가? 십호법…… 그들이 생사를 같이할 거야. 그 싸움은 철응방에게 넘기게.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이라면 강자들 중에 강자들일 테고, 설혹 일반 문도라 해도 지닌 무공보다 열 배는 높은 위력을 뿜어내지. 정신력이란 그렇게 무서운 거야. 허허! 우리 내총관의 손자가 철응방을 이어받는다는데 재기할 여력은 남겨둬야지 않겠나. 승리를 얻지 못한 싸움은 사람이 아무리 많이 남아 있어도 재기할 기력을 잃게 돼. 하나 승리를 쟁취하면 단 몇 명만 살아 있어도 재기할 수 있어. “백문장과 적이 된다면 당신 목숨…… 한 번은 살려주지.” 빙의천이 야조비공을 쳐다보며 말했다. 야조비공은 싱긋 웃고 물러섰다. “무인답게 일 대 일 승부를 가리겠소. 패자는 죽고 승자는 떠나는 것으로 합시다.” 간화가 철응방이 유리한지 비살문 팔호법이 유리한지 모를 제안을 했다. 그는 비살문주가 철응방에 들어간 후 바로 나왔다. 박우도 따라 나와 야조비공의 손을 잡았다. 아마도 철응방주와 비살문주가 단둘만 남아 있기를 바랐던 모양이다. “철응방에 우리를 일 대 일로 상대할 무인들이 남아 있던가? 무리는 하지 않아도 좋소.” 비살문 총호법은 정중하게 사양했다.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아는 법…… 합시다.” 간화가 다시 제안했다. 한참 동안 생각에 젖어 있던 비살문 총호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저자와 싸우겠소.” 총호법이 지정한 상대는 절맥단 학무였다. 그는 이 자리에 있는 철응방 고수들 중 가장 강한 자로 그를 지목한 것이다. 대주도 아니고,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용정차(龍井茶)라…… 좋습니다.” “풍황령(風篁嶺`:`절강성 항주 소재)에서 직접 따온 차입니다.” “허허! 다도(茶道)에는 구난(九難)이 있으니, 조(造`:`만들기), 별(別`:`감별), 기(器`:`그릇), 화(火), 수(水), 자(炙`:`굽기), 말(末`:`가루내기), 자(煮`:`달이기), 음(飮`:`마시기)이 아닙니까. 주인께서 팔난을 해소하셨는데 객(客) 때문에 구난을 넘기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하하! 무슨 말씀을. 천하의 비살문주께서 다도를 모른다면 누가 다도를 말하겠습니까. 도에서 벗어나더라도 너무 질책이나 마십시오.” “그러고 보니 주변에 다성(茶聖)이 있는데도 찾아보지 못했군요.” “운단서 말씀입니까?” “그 사람이야말로 이 시대에 가장 뛰어난 다성이지요.” “하하! 다성이 지금은 백문장 수비를 맡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요? 다성이 백문장을 수비한다…… 이해가 됩니다. 다도를 수련한 사람은 결코 약하지 않죠. 다(茶) 역시 물[水]. 물은 가장 약한 듯하나 바위도 뚫을 수 있는 힘을 지녔죠. 그 힘의 원천은 덕(德). 덕이 많은 사람이 수비를 맡았으니…… 천력문은 좀더 일찍 공격을 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모두가 늦었지요.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비살문주와 철응방주…… 두 사람은 차를 사이에 두고 백년지기(百年知己)처럼 편히 마주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눈빛에 진기를 실어 쏘아낸다거나 상대의 허를 노리는 따위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백문장은 참 많은 인재를 얻었어요.” “동감입니다.” “무인이 아닌 사람을 끌어안기로는 백문장이 중원 제일일 겁니다.” “하나같이 걸출한 사람들이죠.” “무림에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들이 강하다…… 허허허!” 두 사람은 웃었다. 두 사람뿐만 아니라 중원에 산재한 모든 무림세가의 주인들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들을 중요시하지 않았다. 표국(局)에서는 사정이 조금 다르지만 대부분의 무림세가는 책사나 하인장 정도를 두면 모두인 줄 알고 있다. 마주앉은 두 사람은 생각을 달리했다. 전에는 다른 장문인들과 똑같은 생각을 했지만 백문장을 알게 된 후에는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무공을 모르는 자가 힘이 있다. 사실이다. 예로부터 살인 중에 가장 무서운 살인이 촌철살인(寸鐵殺人)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세 치 혓바닥…… 그것보다 무서운 것은 없다. 아니, 있다. 비록 말로 살인을 하지는 않지만 머리로 살인을 하는 사람들…… 절강을 휘어잡은 사대 패강의 장문인들이 백문장에게 철저히 당한 꼴이다. 건곤방이 조용한 것도 이상하다. 아마도 건곤방 역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때였다. “방주님, 끝났습니다.” 조심스럽게 대청으로 들어온 간화가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그런가.” 그뿐이었다. 철응방주는 더 묻지 않았다. “말씀하신 대로 처리했습니다.” 간화가 이번에는 비살문주에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고맙소. 어려운 부탁을 들어줘서.” “아닙니다. ……궁금하실 것 같아서…… 동산을 떠난…… 무인이 없습니다.” “허허! 그렇소? 방주, 문도를 제대로 가르쳤구려.” 비살문주가 철응방주를 보며 말했다. 비살문주는 여덟 호법이 모두 죽었다는데도, 그리고 한 사람이라도 살려보내고 싶은 마음이 허망하게 스러졌는데도 담담했다. 간화는 이야기하고 싶었다. 싸움이 이상하게 전개되었다는 것을. 총호법과 멸절단 학무와의 싸움은 승패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팽팽했으나 갑자기 총호법이 수를 거두는 바람에 목숨을 잃었다고. 다른 호법들도 총호법의 의지를 따라, 우세한 싸움인데도 교묘하게 수를 물려 목숨을 바쳤다고. 어쩌면 비살문주는 이런 결과가 나오리라 예상했는지도 모른다. 잠을 잘 때에나 식사를 할 때나 피붙이처럼 붙어다니던 사이이니 마음인들 읽지 못할까. 그러면서 왜 그런 부탁을 했단 말인가. 차라리 적이라도 한 명 더 죽이고 죽도록 내버려둘 것이지. 문득 간화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것은 음모다. 엄청난 음모다. 철응방의 완벽한 승리는 철응방에게 기운을 북돋워주지만 비살문의 기운도 살려준다. 호법 몇 명이 살아 돌아간다 해서 패배가 승리로 전환되는 것은 아니다. 여덟 호법이 마지막까지 전력을 다했을 경우, 철응방은 상당한 타격을 받았을 게다. 그나마 살아남은 예순두 명 중 절반 가까이는 죽었겠지. 서른 명과 예순 명은 큰 차이다. 비살문주는 그것까지 생각한 다음 수를 두었다. 완벽한 몰살, 그리고 철응방의 재기…… 그것은 대분산 본문을 지키고 있는 소화남에게 강력한 삶의 발판을 제공해 줄 것이다. 허무하게 쓰러져서는 안 된다는.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는. 소화남은 분노를 기름 삼아 열정이라는 불꽃을 살라내리라. 동시에 신중함도 더해 준다. 남을 공격할 때에는 두 번, 세 번 숙고하라고. 죽은 자는 여덟 호법에 불과하지만 이로써 비살문은 살아났다. ‘책사가 따로 없다더니……’ 간화는 두 장문인에게 허리를 숙여 보인 후 대청을 물러났다. “좋은 차…… 잘 마셨습니다.” 비살문주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동산에 좋은 장소가 있습니다. 일몰(日沒)이 장관이지요.” “허허허! 아무리 일몰이 좋다고 하지만 대분산에서 보는 일몰만 하겠습니까?” “무슨 말씀을! 그것만은 도저히 양보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허허! 그럼 가보십시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고 직접 보는 게 제일 빠르겠지요.” 두 사람은 일어섰다. “과연 장관입니다. 대분산 일몰보다는 못하지만.” “하하! 양보하지 못한다니까요.”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비살문주와 단단한 체격을 가진 철응방주. 두 사람이 나란히 서자 철응방주가 머리 하나 정도는 작았다. 그래도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일몰을 감상했다. “반 각만 더 기다릴까요?” 비살문주가 말했다. “그러지요.” 철응방주가 대답했다. 반 각이면 일몰이 완벽하게 이루어지리라. 낮이 죽고 밤의 세계가 시작되리라. 두 사람은 무공이 절정에 도달해 있어 긴 싸움이 필요치 않았다. 단 한 번의 가름, 그것으로 승부가 난다고 보았다. 낮과 밤이 교차하는 시점에 한 시대의 종지부를 찍고 싶다는 생각이 두 사람의 겨룸을 미루게 했다. “통천(通天)이라는 초식입니다. 철응조공을 염두에 두고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허허!” 비살문주가 검을 뽑아들었다. “저도 적명검법을 많이 생각했죠. 실효성이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아 아직 초식명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통천이라는 초식명을 들으니 이 무공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군요.” 철응방주는 손가락을 가볍게 풀었다. 비살문주의 눈빛은 부처의 심안(心眼)처럼 그윽했다. 반면에 철응방주의 눈빛은 사천왕처럼 활활 타올랐다. 두 사람이 지닌 무공의 성질이 얼마나 다른가를 단적으로 대변해 주는 부분이다. 쉬익……! 비살문주의 신형이 유운(流雲)처럼 부드럽게 흘렀다. 통천! 아래에서 위로 비껴올리는 검이다. 상반신에는 팔이 달려 있으니 방어막 또한 엄밀하다. 반대로 하반신은 상반신보다 취약하다. 무공이 절정에 달했다는 무인들이 갓 입문한 문도나 착안하는 공격법을 사용해도 되는가?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원(圓)이다. 비살문주의 검공은 지고(至高)를 벗어나 일상사(日常事)로 돌아오는 경지에 접어들었다. 파앗! 철응방주는 허공에 몸을 띄웠다. 그리고 송골매가 병아리를 노리고 달려들 듯이 일직선으로 쏘아내렸다. 밑에서 쳐올리는 검에 맞서 허공으로 신형을 띄운다는 것은 자살행위다. 철응방주는 자살행위라고 부르는 수법을 과감하게 사용했다. 피윳! 검날이 번뜩이며 붉은 피보라가 허공을 수놓았다. 동시에 철응방주의 몸뚱이가 절반으로 갈라지며 허공으로 다시 튕겨올랐다. 그 순간, 퍼억! 비살문주의 두개골에서 섬뜩한 기음이 터지며 붉은 피와 누런 뇌수가 섞여서 흘러내렸다. 비살문주는 두어 걸음 휘청거리며 물러섰다. 정신을 수습한 것은 아니다. 충격을 받은 몸이 물결치는 대로 흔들거렸다. 휘청거린 것도 잠시에 불과했다. 비살문주는 전신 기력이 모두 빠져 나간 사람처럼 두 무릎을 털썩 꿇었고, 이어서 상반신을 땅에 처박았다. 비살문주는 철응방주를 죽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다섯 손가락에 밀집된 조공을 무산시키지는 못했다. 어쩌면…… 비살문주나 철응방주나 싸우기 전부터 동사(同死)를 생각했는지 모른다. 두 거인이 부딪쳤을 경우 누구도 무사할 수 없으리란 점을. 쫦 3 쫦 심요산에 도착하여 더 이상 마차가 나갈 수 없게 되자 갈천상은 사인교(四人轎)를 준비했다. 조자경의 상처는 많이 호전된 상태이지만 아직 걸을 형편은 못 되었다. 갈천상은 시종(侍從)처럼 사인교 옆을 따랐다. 절강 무림에서는 최강자인 천력문주와 싸우러 가는 사람치고는 너무도 태연했다. 절정무인이란 이런 것인가. 조자경도 적지 않은 싸움을 치렀지만 그때마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순간은 싸우러 가는 순간이었다. 전장에 도달했다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심장의 고동이 빨라지기 시작하고 맥박이 거세게 뛰놀았다. 흥분이 최고조로 오르는 순간은 싸우기 직전이다. 막상 싸움이 시작되면 흥분이고 뭐고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무슨 초식을 펼쳐야 한다는 생각도 없어지고, 그저 본능적으로 검을 휘두를 뿐이다. 무인이나 무공을 모르는 범인(凡人)이나 싸우는 마음가짐은 똑같지 않을까? 다른 점이 있다면 무인은 본능적으로 휘두르는 몸동작이 평소 피땀 흘려 수련했던 무공의 일부분이란 점이고, 범인은 말 그대로 본능적인 행동이라는 차이뿐일 것이다. 갈천상은 전혀 흥분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그러고 보니 그가 흥분한 모습을 본 지도 오래되었다. 절곡에서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몇 번 하고, 백문장에서 주정중독을 치료받을 때 몇 번 흥분한 것 외에는 돌부처처럼 감정의 변화가 없다. 조자경은 사인교에 눕다시피 편히 앉아서 말로만 들었던 심요산의 풍광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아름다움은 사라졌다. 피, 피, 피……! 붉은 계곡물이 흐르고, 나뭇잎조차 붉은색으로 얼룩졌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처참한 몰골로 숨져 있는 시신들이 놓여 있었다. 한결같이 유혈이 낭자하고, 흙빛으로 변한 얼굴빛에 흰창으로 덮인 눈을 위로 치켜뜬 모습들이었다. “이 모두가 누구 탓이지?” 조자경은 참을 수 없는 구역질을 느꼈다. “네 탓.” “뭐라구!” “백문장을 일으킬 생각만 하지 않았어도 이런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지. 사대 패강은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있어서 선뜻 움직일 방파가 없었어. 그대로 뒀으면 절강 무림은 넷으로 갈라진 채 고착화되었을 거야. 적어도 앞으로 십 년간은.” “그래. 맞아. 결국 내 탓이군.” “……” “앞으로 얼마나 더 흘려야 돼?” “피 말인가?” “……” “너. 너야.” “……?” “전에 말했지. 너는 반드시 죽을 거라고. 네가 죽을 때 이 싸움은 끝나.” “내가 죽을 때……” 조자경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갈천상은 잊으면 안 된다는 듯이 틈만 나면 죽음을 강조했다. 싸움에서 이겨도, 사랑하는 마음을 드러낼 때에도…… 조금이라도 마음이 풀린다 싶으면 어김없이 죽음을 말했다. 죽음을 말한 사람은 갈천상뿐만이 아니다. 빙정신소 유건지도 죽음을 말했고, 다른 사람들도 말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표정으로는 늘 죽음을 말했다. 토우진과 상대해야 한다는 사실은 잊지 않고 있다. 이 싸움…… 누구의 싸움인가. 자신의 싸움인가, 갈천상의 싸움인가. 절강 무림의 일이 매듭지어지는 대로 토우진을 상대하러 떠난다는 말도 되고, 토우진과 절강 무림의 일이 맞물려 있다는 뜻도 된다. 어느쪽인가. ‘결국 내 사랑은……’ 전에는 이런 마음을 가져 본 적이 없다. 건곤방의 건곤십삼봉과 싸움을 끝낸 직후에는 갈천상 역시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참고 기다리기로 작심했으며, 그가 바라는 대로 강해지려고 노력했다. 갈천상은 늘 죽음을 말하고 있지만 토우진 역시 사람이 펼치는 진인 이상 허점은 있을 게 아닌가. 절대적인 강자가 된다면 어찌 죽음만 있을까. 힘들고, 고되고, 이를 악물어야 하는 시간들이었지만 꿋꿋이 견뎌냈다. 마차를 타고 오는 동안에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갈천상이 찬 물수건을 갈아줄 때에는 마차가 멈추지 말고 계속 달려줬으면 하는 바람까지 들었다. 그의 말은 늘 포근했고, 그와 같이 있으면 지옥불 속이라도 행복했다. 이제는 죽음이 확실히 느껴진다. 많은 죽음을 본 탓도 있지만 갈천상의 입에서 ‘네가 죽어야……’ 이 싸움이 끝난다는 말을 듣는 순간 죽음의 향기가 물씬 맡아졌다. “천력문주가 아버지를 죽였어?” 조자경은 화제를 바꿨다. “모르지, 누가 살공을 퍼부었는지는. 분명한 것은 혼자가 아니었어. 오대패주의 무공은 엇비슷해서 누구든 쉽게 승기를 잡지 못해. ……쉽게 당한 모습이던데, 그런 상태라면 적어도 세 명 이상이 합공을 펼친 거야.” “……” 조자경은 더 묻지 않았다. 아버지가 합공을 받았다는 것은 무공이 강해지면서 자연적으로 알게 되었다. 이제는 백문장의 독문검공이던 백학검법이 어느 정도의 무공인지도 알게 되었으니까. 아버지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초일류고수 서너 명이 합공해야 했으리라.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그녀는 갈천상이 화제를 바꾼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의 입에서 죽음이란 말이 나오는 것은 정말 싫었다. 전같이 죽음이란 말이 피부에 와닿지 않을 때에는 무심히 넘겨들을 수도 있는 말이지만 지금처럼 절절이 느껴질 때에는 싫다. “……” 조자경이 입을 다물자 갈천상도 침묵을 지켰다. 그는 그런 사내다. 묻는 말에는 대답을 해주지만 묻지 않으면 백년이고 천년이고 입을 다물고 살 사내다. 전에는 그것이 답답했는데 오늘 이 순간만큼은 고맙기 이를 데 없었다. 그녀는 가능하다면 혼자 있고 싶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에서, 아무 풍경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마음 속으로부터 통곡이 터져 나왔다. ‘검을 들었으니, 사람을 많이 죽였으니 내가 죽는 것은 당연해. 하지만 사랑은 이루고 싶어. 갈천상, 난 너를 사랑한단 말야. 이 바보야!’ “……내가 총관 태웅이오.” 태웅은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내 정보가 틀림없다면…… 문주와 그대, 그리고 구음고는 영락(永樂) 육년(六年`:`1408년) 산음계(山蔭溪)에 모습을 보였어. 맞나?” “정보가 상당히 정확하군.” 태웅은 시인했다. “백문장을 칠 것도 아니면서 장주는 왜 죽였지?” “이만큼 왔으면 그 이유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총관 태웅은 저런 몸으로 움직일 수나 있을까 싶을 만큼 뚱뚱했다. 키가 육 척을 훌쩍 넘긴 터라 웬만하면 뚱뚱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텐데, 태웅은 굴러가면 굴러갔지 걸어갈 것 같지 않은 몸을 지녔다. 얼굴에도 살이 가득 붙어 눈동자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대 입을 통해 듣고 싶을 뿐이야. 들어야 할 사람이 있으니까.” “흐흐흐! 나는 내가 제법 똑똑하다고 생각했지. 아니야. 아주 조금 똑똑할 뿐이야. 미련한 놈은 미련한 줄이나 알고 있으니 잔꾀 따위는 쓸 생각도 안 하지만, 나 같은 놈은 미련한 줄도 모르기 때문에 잔꾀를 부리지. 제 꾀에 제가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조자경은 사인교에서 일어서고 싶었다. 이 싸움은 자신이 해야 한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이지 않은가. 몰랐다. 천력문주, 이천로 태웅, 삼천로 구음고가 원수인 줄은. 갈천상은 전부 알고 있었다. 하기는 홍문성이 거둬들이는 정보와 개방의 협조를 받는 사람이 모를 정보가 어디 있으랴. 자신이 상처를 입지 않았다면 갈천상은 심요산으로 데려오지도 않았을 게다. 이름도 모르는 곳에서 눈 앞에 있는 뚱뚱한 자를 만났을 게고, 무조건 죽이라는 말만 들었을 게다. 그들이 불구대천지수라는 사실은 천력문주까지 전부 상대한 다음에야 말해 주었겠지. 조자경은 일어서지 못했다. 일어서려고 꿈틀거리는 찰나, 창자가 비비꼬이는 듯 아팠다. “십 년 전에 확고한 계략을 바탕으로 일을 벌였지. 백문장주의 죽음이 시초였어. 양 떼를 지키는 자가 없어져야 승냥이들이 달려들지. 그런데…… 후후! 다른 문파에도 머리깨나 굴린다는 자들이 있어서 쉽게 먹이를 먹지 않더군. 그랬다면 십 년 전에 승부가 끝났을 텐데. 백문장주…… 금화부 가장 중심에 문파를 창건한 것이 그 사람의 실수지.” 갈천상은 조자경을 쳐다보았다. 조자경은 파리해진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지 않는가. 손가락 하나 꼼지락거릴 힘도 남아 있지 않는데. 원수가 죽는 모습을 눈으로 보는 것만도 다행이지. “소저, 영존에게 해를 가한 것은 미안하오. 하나 영존 역시 무림인인 이상 이해하리라 믿소. 그리고…… 귀호구혼과 여기 이 사람, 포영매 갈천상을 얻은 것…… 축하하오.” 태웅이 정중하게 말했다. ‘영존 역시 무림인……’ 태웅의 말이 조자경의 귓가에 빙빙 맴돌았다. 그렇다. 피가 튀고 살이 찢어진다고 해서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처음부터 검을 든 사람이 잘못이지. 무림이란 원래 그런 것을…… 기나긴 영광도 오늘의 천력문처럼 일순간에 물거품으로 화할 수 있는 것을. “포영매, 진정으로 묻겠는데…… 천력문 무공이 최고가 아닌가?” “아냐.” “그럼 말해 보게. 어느 무공이 최고인가?” 그 물음에 조자경도 생각을 멈추고 귀를 솔깃 세웠다. 만약 유건지, 전종대 등이 이 자리에 있다면 그들도 청각을 곤두세웠으리라. “최고…… 아직 보지 못했어.” “후후! 나도 미련하지만 그대도 미련하군. 무공에 최고란 있을 수 없어. 무지개 봤나? 아름답기 이를 데 없지만 손으로는 잡을 수 없어. 무공이란 그런 거야.” “……” 갈천상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태웅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무극진결을 익혀 상승경지에 도달한 조자경도 태웅의 생각이 틀렸다고 반박할 수 없다. 그녀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오직 갈천상만이 절정의 경지에 이르렀으면서도 최고를 추구하고 있다. 손으로 잡을 수 없는 무지개를 잡고자. 스르릉……! 갈천상이 검을 뽑아들었다. 아래턱을 주억거리는 것으로 보아 그만 끝내자는 촉구였다. “빙정신소 유건지에게 길을 열어줬지. 싸우고 싶지 않아서. 싸울 기력이 없었다는 편이 맞겠군. 하지만 상대가 포영매라면……” 태웅은 거마목(拒馬木`:`쪺형태의 병기, 각 끝 부분에는 창날이 달려 있고 중간 부분에 쇠사슬 두 개를 연결한 병기)을 꺼냈다. 거마목은 보통 다섯 근[3㎏] 정도의 무게를 지녔으나 태웅이 꺼낸 거마목은 족히 서른 근은 나가 보였다. 거마목은 여섯 개의 창날을 사용하기 때문에 초식이 강렬하다. 더군다나 신력을 자랑하는 천력문에서도 이천로인 태웅이 사용하는 병기이고, 무게가 서른 근에 이르니 회전력 또한 필설로 표현할 수 없으리라. ‘태웅은 둔해 보이지만 무척 빠른 신법을 구사할 것이다. 병기가 거마목이니…… 거리를 주면 당한다. 세 번. 첫 번째 회전공격은 신법으로 피하고, 두 번째 내리찍는 공격은 전퇴(剪腿`:`쓰러지면서 발로 참)로 역공을 취해 피한다. 세 번째는 휘두르는 공격이 분명한데, 그 전에 신형을 띄워 가슴 부위를 공격한다면……’ 조자경은 거마목을 보는 순간 자신이 상대했다면 펼쳤을 연속수를 생각했다. 휙! 휙……! 머리 위에서 휘둘려지는 거마목의 경풍(勁風)을 조자경도 느낄 수 있었다. 전장에서 떨어져 있는 사람이 느낀 경풍이 이 정도인데 맞대면하고 있는 갈천상은 얼마나 강렬한 경풍을 느끼고 있을까. 바람도 없는데 갈천상의 옷자락이 펄럭거린다. 태웅의 가공한 신위를 능히 짐작할 수 있지 않는가. 쒜에엑! 태웅의 첫 번째 공격은 조자경의 예상을 벗어났다. 태웅은 거마목을 머리 위에서 휘두르다가 회전력을 이용하여 위에서 아래로 비껴 쳐왔다. 갈천상이 가볍게 뛰어올라 일차공격을 피했다. 하나 태웅의 거마목은 지면을 쓸 듯이 스쳐 지나가는가 싶더니 허공에서 급전직하하여 우측 어깨 부위를 내리쳤다. 갈천상은 상체를 뒤로 누이며 왼발을 축으로 빙글 돌았다. 거마목은 갈천상의 가슴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고, 갈천상이 상반신을 일으켜 세우기 전에 허공으로 솟구치다가 다시 꺾여 내려왔다. 거마목은 회전력을 이용한다. 엄청난 신력으로 쇠사슬을 내두르기 때문에 풍차가 돌아가는 회전력 정도는 상대가 안 된다. 거기에 거마목은 자체 회전력을 지닌다. 거마목 전체가 회전하는 것과는 별도로 여섯 개의 창날이 또 한 번 회전력을 구사한다. 쇠로 된 갑옷을 입고 있다 해도 걸려들기만 하면 걸레 조각처럼 찢어놓을 병기였다. 스…… 윽! 갈천상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앗!” 조자경은 자신도 모르게 놀란 외침을 토해 내고 말았다. 갈천상의 행동은 거마목에 정통으로 맞지 않는다 해도 거마목을 연결하고 있는 쇠사슬에 얽혀들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아니, 꼭 얽혀든 듯싶었다. 갈천상은 상체를 앞으로 굽히면서 왼쪽으로 반 보 정도 이동했다. 꼭 그만큼이다. 거마목은 맞힐 듯 맞힐 듯하면서도 좀처럼 격중시키지 못한 채 간발의 차이로 빗나갔다. 조자경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창자가 끊어질 듯 아팠었다는 것도 잊어버렸다. 몸 상태가 일어날 수 없는 지경이란 것도 이 순간에는 망각했다. 그녀는 알지 못할 힘에 이끌려 일어났고 싸움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눈동자는 부릅떠진다. 초점이 오직 한 군데 갈천상의 움직임만을 쫓게 된다. 쉬이잉……! 거마목이 무서운 기세로 가슴 부위를 찍었다. 갈천상은 슬쩍 상반신을 틀고, 반심당 일반 문도가 익히고 있는 십육섬을 펼쳐 옆으로 두 걸음 정도 물러섰다. 갈천상이 펼치고 있는 몸동작은 무공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속도만 조금 줄여 느리게 움직인다면 보통 사람들도 충분히 펼칠 수 있는 행동들이었다. 갈천상이 무공을 펼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은 십육섬뿐이다. 반심당 향주들이 익히고 있는 암향부동도, 당주만이 익힐 수 있는 귀변팔법도, 대도 마임호의 날개인 풍뢰구류흔도 아닌 십육섬. ‘처음에는 십육섬도 펼치지 않았어. 말 그대로 보통 사람들의 행동을 조금 빨리 전개했을 뿐인데…… 십육섬이 첨가되자 하늘을 마음껏 나는 것 같아. 거마목은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해.’ 조자경의 생각대로 갈천상은 시종 여유로웠다. 반면에 태웅은 이마에서 굵은 땀을 흘려냈다. 뚱뚱한 사람은 땀도 많다지만 태웅은 얼마나 버거운지 의복이 물에 젖은 듯 흠뻑 젖어 있었다. 공격은 그가 하고 있으면서도. ‘무공전수야. 무공을 전수해 주고 있어. 내가 배울 것은 도(道). 도를 가르쳐 주고 있어.’ ─`무(武)는 지(止)와 과(戈)를 합한 말로, 싸움을 그치게 한다는 뜻이다. 어떻게 싸움을 그치게 할 것인가. 무를 익히면 싸움에 휘말리게 되고 사람을 상하게 하는데 그것이 과연 싸움을 그치게 하는 것인가. 무(武)는 승자와 패자를 낳고, 원한을 낳으며, 끝없는 싸움을 부른다. 과연 싸움을 그치게 하는 것인가. 모순이다. 무에는 기(技)와 술(術)과 도(道)가 있다. 기는 공격과 방어의 근간(根幹)이 되는 초식이며, 술은 초식에서 발달된 응용기법에 불과하다. 도는 자신을 발견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무기와 무술을 버린 무인은 내면에 잠재된 자기 자신, 소우주(小宇宙)를 만나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적이다. 자신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자…… 그는 능히 무도를 깨우쳤다 할 것이고, 무의 진정한 목적인 싸움을 그치게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할 것이다. 무도를 추구하는 자는 강(剛)을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주의 진리가 강함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과 같이 강(强), 유(柔)를 겸비하게 되면, 천기(天氣)와 합일(合一)하여 정(精)·기(氣)·신(神)이 자연처럼 움직이게 된다. 기와 술은 도로 나가는 길을 지켜주는 하나의 방편일 뿐 살생과는 무관하니, 그 이치를 깨닫는다면 무(武)의 근본진리에 도달했음이라. ‘불생불멸(不生不滅`:`생기지 않았으니 멸함이 없다), 불구부정(不垢不淨`:`아무것도 없으니 더러워질 것도 깨끗해질 것도 없다), 부증불감(不增不減`:`아무것도 없으니 더해질 것도 덜어질 것도 없다)!’ 조자경은 갈천상의 싸우는 모습에서 단지 무리(武理)로만 생각했던 무극진결 마지막 장(章)을 깨우쳤다. 대부분 비급(秘)을 만들 때에는 제일 마지막 장에 심법(心法)을 적어놓기 마련인데, 갈천상이 적어준 무극진결에는 심법 다음으로 또 한 장이 있었다. 도(道)! 태웅은 천지를 붕괴시킬 듯한 강(剛)을 휘두르고 있으되, 갈천상은 무도를 펼치고 있지 않는가. 갈천상이 십육섬에 이어 이번에는 적수당 일반 문도들이 익히는 진악신수공(鎭嶽神手功)을 더했다. 진악신수공은 큰 산을 눌러버린다는 뜻이다. 일수에 전신 모든 진력(眞力)을 담아서 터트리기에 엄청난 위력이 나올 수밖에 없다. 요결(要訣)은 전신 진력을 일시간에 일수에 집중할 수 있는 데 모아졌으며, 당연히 적수당 무인들은 집중력이 탁월하고 기감(氣感)이 유독 발달한 무인들로 구성되었다. 인간은 누구나 기(氣)를 가지고 있다. 기감이 둔한 사람은 지니고 있는 기도 느끼지 못하고, 기감이 발달한 사람은 약간의 기만으로도 발경(發勁)을 시도할 수 있다. 적수당 무인들의 무공성취가 빠른 것은 당연하다. 일반 문도의 경우 진기운행법(眞氣運行法)과 진기의 진퇴(進退)만 가르치면 나머지는 수월하니까. 약점도 있다. 일시에 전신 진력을 모두 쏟아내기 때문에 위력은 크지만 진기소모가 막대하다. 그래서 적수당 무인들은 차륜전(車輪戰)을 필수적으로 익힌다. 갈천상은 진악신수공을 느리게 뿜어냈다. 퍼엉! 살과 뼈로 이루어진 육장과 거마목이 부딪치자 뜻밖에도 북소리와 같은 둔탁한 울림을 토해져 나왔다. 쉬익! 이번에는 검이 날았다. ‘끝났어.’ 조자경은 눈이 아파옴을 느꼈다. 싸움을 자세히 지켜보느라고 너무 눈을 부릅떴다. 그것보다 창자가 다시 끊어질 듯 아파오고, 옆구리에서도 송곳으로 쑤시는 듯한 통증이 전달되었다. 싸움을 지켜보고 있을 때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갈천상은 검을 거뒀다. 그는 태웅을 죽이지 않았다. 단지 턱 밑에 가는 혈흔(血痕)을 살짝 그어놓았다. “과연 포영매……” 태웅은 할말을 잃은 듯했다. 충격이 매우 커보였다. 그 역시 포영매의 무공이 이 정도일 줄은 예상하지 못한 듯하다. 갈천상이 손을 움직여 따라오라는 시늉을 하자 한쪽에서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무인들이 신속하게 달려들어 사인교를 들었다. 갈천상은 태웅을 남겨놓고 본채로 걸어갔다. 퍼억! 움직이는 사인교 뒤로 둔탁한 소리가 들렸지만 조자경은 돌아보지 않았다. 태웅…… 그는 거마목을 들어 자신의 천령개(天靈蓋)를 후려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책사의 위치라면 지략에서 밀렸고, 무인의 위치라면 너무도 간단하게 제압당했다. 양쪽 모두 그의 입장에서 보면 살아온 생이 허무하지 않겠는가. 그는 과연 그런 생각을 했을까? 천력문주는 대청에서 나오지 않았다. 수하들과 자식들이 죽어가는데도 꼼짝하지 않았다. 대청 주위에는 전종대, 유건지, 백무가 한가롭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여기에도 평화가 있다. 천력문주가 살아숨쉬고 있는 곳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꽃도, 나무도 평화로웠다. “혼자 들어가.” 조자경은 천력문주의 죽음까지 보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의 원수이기는 하지만 이미 끝난 싸움인 것을. 천력문주의 병기는 철권(鐵拳)이었다. 쇠로 만든 수투(手套)에 쇠구슬을 박아넣어 단단한 팔근육과 함께 상당한 위압감으로 다가왔다. “총관은…… 죽었나?” “죽었소.” “그럼 모두 끝났군.” 무엇이 끝났다는 말일까? 천력문주는 철권을 낀 주먹으로 탁자를 힘차게 치며 일어섰다. 우지끈! 단단한 자단목(紫檀木) 탁자가 힘없이 부서졌다. “맞은 놈은 두 발을 뻗고 자도 때린 놈은 편히 못 잔다는 말이 있지. 지난 십 년 동안은 내가 편하지 못했지만, 이제부터는 자네가 편히 자지 못할 게야.” “그런 일은 없을 거요.” “그럴까?” 쩡! 천력문주가 두 주먹을 마주치자 꽹과리가 울리는 듯한 소리가 퍼져 나왔다. “포영매라고 들었는데…… 최고의 무공을 익히고 있나?” “아니오.” “뜻밖이군.” “나 역시…… 최고의 무공을 보지 못했소.” “……포영매는 일견(一見)에 무공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촌각(寸刻)만에 파해무공을 창안한다고 들었는데…… 최고의 무공을 창안했을 줄 알았는데 아직 보지 못했다? 뜻밖이군, 포영매가 최고의 무공을 창안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최고의 무공을 창안했으리라 생각하고 있다니 정말 뜻밖이야.” “인간의 무공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자연의 순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법. 결국 인간이 만든 무공은 자연의 힘을 훔쳐 온 것에 지나지 않소. 나 또한…… 자연에서 본 힘만을 재현할 수 있을 뿐. 뜻밖이오. 천력문주가 그만한 이치를 모르고 있다니.” “그렇군. 그대가 보지 못한 것은 무공이 아니라 자연의 힘이군. 그렇다면 더욱 가관이네. 자연의 힘은 항거할 수 없는 거력이나 종류가 무척 많아. 또한 늘 천적이 있지. 물과 불 중에 어느것이 강하냐를 찾는 격이지 않은가.” “그렇소. 내가 찾는 것은 그것이오.” “광인(狂人)이군.” “그 소리도 많이 들었소. 주정중독자 소리만큼이나.” “진실한 구도(求道)가 그것이라면 들을 만한 소리지.” “천력문을 이 땅에서 지우는 소감이 어떤가?” “미안하오. 최고의 무공을 찾지 못한 탓이라 여겨주시오. 무도를 알았다면 싸움도 없을 것이나, 아직은 미숙하기 짝이 없소.” “하하하! 통쾌하군. 싸울 만한 상대를 만났어.” 꽈앙! 천력문주가 내뻗은 일격이 석주(石柱)에 틀어박혔다. 전각이 요동치고 천장에서는 부서진 기왓장도 떨어져 내렸다. 엄청난 권력이다. 휙! 휙……! 꽈앙! 천력문주는 무척 빨랐다. 나는 새도 잡을 수 있을 만큼 빠른 신법, 빠른 초식을 지녔다. 하나 갈천상을 잡지는 못했다. 그가 내뻗은 권력은 항상 간발의 차이로 비껴갔다. 천력문주는 눈 깜짝할 사이에 무려 삼십여 초나 쏟아냈다. “내 무공이 어떤가?” “등퇴충권(腿衝拳)1), 마보충권(馬步衝拳)2), 궁보추장(弓步推掌)3)으로 이어지는 일초식은 강맹한 힘을 쏟아내기에 충분하오. 하나 내가 번운복우수(雲覆雨手)4)를 익히고 있다면 장문혈(章門穴`:`제십일 늑골 끝 바로 아래)을 다쳤을 것이오.” “번운복우수라…… 해보지 그랬나?” “번운복우수로는 추장(推掌)을 밀어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갈천상은 왼손가락을 한데 모아 조수(鳥手)로 만든 다음 번운복우수를 시전했다. “조수로 수삼리혈(手三里穴`:`팔굽 부근)은 칠 수 있을 것이오.” 결국 번운복우수의 변형이다. 천력문주는 믿었다. 자신이 펼친 무공도 그렇고 갈천상이 말한 파해법도 그렇고 강호무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초식들이다. 문제는 힘과 속도에 있다. 금강대력을 싣고 있는 추장을 밀어낼 수 있을까? 갈천상은 혈도를 가격하여 내력 공급의 연결선을 끊고자 한다. 힘과 속도…… 갈천상은 구비하고 있으리라. 유약한 물이 단단한 바위를 뚫는다지만, 철벽으로 여겼던 금강대력이 가벼운 일격에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다니. “여기는…… 내 집일세. 그만 나가주겠나?” 갈천상은 천력문주를 잠시 지켜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났다. 第二十四章 중심요요(中心遙遙:내 마음 둘 곳 없네) 쫦 1 쫦 절강 무림은 발칵 뒤집혔다. “천력문이 멸문했다고?” “이제 들었나?” “그게 말이 돼? 어떻게 천력문이 무너질 수 있어?” “말이 되잖아. 무너졌으니까.” “비살문이 쫄딱 망했다던데?” “철응방을 치려다 외려 당한 모양이야.” “불쌍한 사람들. 무림인들이란 좌우지간 서로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라니까.” “그런 소리 하다가 경을 치려고 그러나?” “경을 치긴 누가 쳐. 큰소리치던 놈들이 모두 죽어 자빠졌는데.” “하기는…… 허망하겠어. 그렇게들 죽으면.” “철응방주도 죽었다며?” “방주뿐이 아니라 철응방도 망한 것 같던데?” “이런! 쯧쯧!” “포영매가 대단하긴 대단한 모양이지? 사대 패강을 단숨에 몰아쳤으니. 누구도 못 한 일이잖아?” “포영매가 아니고 귀…… 뭣이냐…… 귀 뭐라고 하던데? 좌우지간 귀 뭐시기가 일을 꾸몄다고 하던데?” “백문장에 쟁쟁한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잖아. 신필 박우, 다성 운단서, 홍문성도 있고, 오경도 있고.” 범인(凡人)들에게는 무림인들보다 박우와 같은 사람들이 더 널리 알려졌고, 존경을 받았다. 신망(信望)을 얻는 것이 목적이라면 범인들이 주고받는 말처럼 백문장에는 당대에 내로라 하는 문사(文士)가 대거 포진(布陣)했으니 절강 제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백문장이 언제 그렇게 강해진 거야?” “듣기로는 개문할 때부터라고 하던데? 개문할 때 철응방 사귀인가 귀신인가 하는 사람들이 손도 못 써보고 죽었대.”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 하물며 사대 패강의 몰락 같은 거대한 사건이 잠잠할 리 없다. 천력문이 멸문하고, 비살문, 철응방이 현판만 유지하고 있다는 소문은 들불 번지듯이 번져 절강 무림은 물론이고 중원 무림 전체를 놀라게 했다. 심요산에서 돌아온 조자경은 날이 갈수록 웃음과 말을 잊어갔다. 갈천상은 잠시 그녀를 놓아두었다. 그녀가 무엇을 하든 간섭하지 않았고, 전처럼 무공수련을 게을리 한다고 해서 질책을 가하는 일도 없었다. 긴 여정을 걸어왔으니 잠시 쉬라는 것일까? 그가 어떤 생각으로 방임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모든 것이 허탈했다. 복수를 하면 원이 없을 것 같았는데, 복수만 할 수 있다면 애써 일군 백문장이, 백문장 문도들이 피바다에 드러누워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막상 싸움을 끝내놓고 보니 머리 속이 텅 빈 듯 허탈했다. 정신적 공황(恐慌). 그녀는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 조만간 토우진의 실체가 드러나겠지만 갈천상이 절곡에 만들어놓았던 토우들과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토우진이 있다면…… 죽음은 기정사실일지도 모른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아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복잡한 것일까. 어머니 천화신의 하문화도 허탈한 것 같다. 싸움이 벌어지는 기간 동안은 무극전에서 나오지 않고 밤을 꼬박 밝히고는 했는데 이제는 취운각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으신다. 문도들은 많은 사람이 죽었어도 사기가 앙양하다. 이번 싸움에서 백문장 사당 중 타격을 제일 적게 받은 당은 흑사당이다. 흑사당은 단지 십여 명만 목숨을 잃었다. 그 외 다른 당들은 어느 당이 더 낫다고 할 수 없을 만큼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거의 절반 가까운 문도가 죽어갔으니. 그래도 살아남은 문도들은 사대 패강을 일거에 숨죽여놓았다는 승리감에 들떠서 무용담을 늘어놓는 것으로 하루 해를 보내고 있다. 당주들 중에 가장 풀이 죽어 있는 사람은 천견당주 방삼이다. 방삼은 개들을 정말 친자식처럼 돌봤고 정도 많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모두 죽고 십여 마리만 남아,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겠으니…… “갈 총관은 어디 있어?” 조자경은 하늘하늘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물었다. 갈천상은 총관직을 버리고 행동이 자유로운 봉공으로 있지만 그녀는 총관이란 말이 입에 붙어서 지금까지도 총관이라고 불렀다. “출타하셨어요.” 취아가 대답했다. 취아는 싸움이 끝난 직후부터 연화각으로 돌아와 다시 그녀의 시중을 들어주고 있었다. 활달한 봉아는 무공에 적합한 재질을 지녀 육합검진의 일원으로 뽑혔지만, 성격이 침착하고 소심한 편인 취아는 무공 대신 다리로 톡톡히 한몫을 했다. 취아는 대도 마임호와 같이 일을 했다. 정보 분야. 정보를 얻어오는 일이야 홍문성과 갈천상이 했지만 정보를 취합·정리하고 귀호구혼 전인수의 계략을 전달하는 일은 그녀와 마임호가 했다. 홍문성과 갈천상은 밖에 나가 있는 시간이 많았으니 어쩔 수 없이 발 역할을 할 사람이 필요했다. 특히 이 일이 중요했던 것은 정보가 중간에 누설되면 백문장의 존망과도 직결되는 일인지라 그럴 지경에 처해지면 스스로 자진할 정도의 용기가 필요했다. 백문장과 갈천상, 홍문성이 끊임없이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와 마임호 덕분이다. 그녀가 연화각으로 다시 온 것은 갈천상의 권유 때문이다. ─`소저가 편히 쉴 수 없는 것 같던데…… 그 한마디로 취아는 다시 돌아왔다. “목욕물 좀 데워줄래?” “데워놨어요. 장미를 띄워 드릴까요?” “장미가 있어?” “따서 말려놨죠.” “그래. 띄워줘.” “아씨 곧 오세요. 더운물 좀 더 부어놓을게요.” 어려서부터 조자경과 같이 자란 취아는 조자경의 성격이며 취향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다. 그녀의 지금 기분이 어떤 상태인지, 이럴 때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쫦 쫦 쫦 벗이란 무엇인가. 진정으로 마음이 통해야 벗이란 말을 사용할 수 있지 않는가. 삼십 년 세월은 얼마나 길까? 미운 사람과는 촌각도 삼십 년 세월같이 여겨지겠지만 벗과 함께라면 촌각에도 미치지 못하는 짧은 세월이지 않은가. 그대가 있어서 행복했고, 그대와 함께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 그대는 왜 기쁨으로 들뜬 가슴에 비수를 꽂아넣었는가. 세상에는 수천 가지에 이르는 살인방법이 있건만 그대는 왜 가장 잔인한 방법을 선택했는가. 백문장에서 창화성까지는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더없이 가까운 삼백 리 길에 불과한데, 그대는 어쩌자고 아직까지 이 모습으로 있는 것인가. “히힛! 풍뢰구류흔을 어느 정도 익혔는지 알고 싶었는데 오늘 제대로 걸렸구만.” 마임호가 낄낄거렸다. “나서지 마시오. 나선다면…… 죽이겠소.” 홍문성의 음성은 덜덜 떨려나왔다. “뭐야! 그럼 혼자 들어가겠다는 거야?” “……” 홍문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둠이 깃들이기 시작한 대저택은 흑과 백, 그리고 저물어가는 황혼 빛을 받아 금색 자태까지 뿜어냈다. 대저택에는 전각이 서른세 개나 있다. 백제각(白堤閣), 소제각(蕭堤閣), 고산각(孤山閣), 오운각(五雲閣) 등이다. 항주(杭州) 서호(西湖)의 명물인 삼십삼 비경을 본따서 전각 이름을 지었다. 전각마다 용마루에는 십장생(十長生)이 장식되었고, 기둥에는 난(蘭)을 조각해 놓았다. 삼리호(三里湖)라 이름지은 연못 주변에는 철마다 각기 다른 꽃들이 향기를 뿜어낸다. 봄에는 영란(鈴蘭)이라고도 부르는 은방울꽃이, 여름에는 장미, 가을에는 국화, 겨울에는 수선화가 분주한 마음에 여유를 안겨준다. 어느것 하나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다. 홍문성은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 그냥 들어가는 거야?” 마임호가 홍문성의 옷자락을 잡아채려다가 그만두고 말았다. 눈물. 홍문성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본 까닭이다. “어떻게 오셨소?” 문지기가 물었다. “대약상을 만나러 왔소.” 홍문성은 속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겉으로는 침착해 보였다. “약속은 돼 있는 거요?” “홍문성이 왔다고 전해 주시오.” 순간 문지기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호, 홍…… 홍문성이라고 하셨소?” “대약상에게 전해 주시오. 홍문성이 찾아왔다고.” 홍문성은 말을 한 자 한 자 끊어 또박또박 말했다. 문지기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들어간 지도 한참 되어, 대약상에게 말을 건네고도 남을 시간인데도 굳게 닫힌 대문은 열릴 기색이 없었다. “그것 봐. 그런 식으로는 안 된다니까.” 정문 옆에 쭈그려앉아 있던 마임호가 신발을 털며 투덜거렸다. “아! 뭐라고 입 좀 열어보슈. 여기까지 와서 한 마디도 뻥긋하지 않을 참이오?” 마임호는 화살을 갈천상에게 돌렸다. 갈천상은 눈을 감은 채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겠군. 이 문 안에 있는 사람을 모두 죽이든가, 아니면 평생 쫓기는 신세가 되든가.” “뭐요? 그건 또 무슨 말……? 약초상 한 놈 죽이는 데 평생 쫓…… 겨다녀?” “질서정연한 발걸음 소리…… 관군(官軍)이 있소.” “뭐, 뭣!” 마임호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날이 저문 지 오래되었는지라 보이는 게 있을 리 없었다. “내가 들어가볼까?” “담장을 넘는 즉시 쫓기는 신세가 될 텐데? 국용범(國溶範)은 우리가 담을 넘어주기를 바라고 있소.” “끙!” 풍뢰구류흔을 익혀 신법으로는 천하제일인이라고 큰소리치던 마임호지만 관군이라는 말에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래서 과거는 떨쳐 버릴 수 없는 게다. 죄지은 것이 없으면서도 관군이라면 무조건 주눅부터 드는 것은 관군에게 잡힌 경험이 있고, 모진 고문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적수도 되지 않는 사람들이고, 평생 쫓겨다닌다 해도 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지만 괜히 관군이라고 하니 몸부터 움츠러들었다. “문을 부숴주겠습니까?” 홍문성이 웃으며 말했다. 늘 웃는 얼굴 그대로 웃으며…… 입은 웃고 있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번뜩이는 웃음. “관군이 있다는 말 못 들……” 꽝! 마임호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갈천상이 대문을 향해 일장을 휘둘렀다. 대문은 쉽게 부서져 나갔다.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 갈천상의 말대로 관군도 있고, 무림고수로 보이는 자들도 다수 있었다. “야밤에 문을 부수고 들어오다니 도둑이 틀림없구나! 이놈들을 당장 포박하랏!” 관군을 이끄는 자는 어둠 저편에서 쩌렁 고함을 질렀다. 그때, “하하하! 도둑이라니요. 주인이 제 집에 들어왔는데 도둑이라니 무슨 말입니까? 또 관에서 나오신 것 같은데 저의 장원에는 어쩐 일이신지요?” 갈천상과 마임호는 병장기에 손을 얹었지만 홍문성은 당당하고 태연했다. 무림에서는 그보다 갈천상과 마임호가 뛰어날지 모르지만 세상사에서는 홍문성이 한 수 앞섰다. “제 집이라고! 어디서 발칙한……” 홍문성은 앞을 가로막는 관졸을 거침없이 밀쳐 버리고 어둠 속의 인물을 향해 걸었다.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하기로 했소.” “……!”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이 자리에 있는 관원들은 국용범에게 은자깨나 받은 자들일 텐데. “죽이려고 하면 그때나 나서주시오. 아무래도 무림인들은……” “걱정 마시오.” “이 말은 꼭 하고 싶었는데, 고맙소.” 갈천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이런 말을 하기에는 이르지 않은가. 오운각에 모두 모여앉았다. 국용범은 얼굴이 둥글고 눈이 크며 수염을 깔끔하게 다듬어서 귀태(貴態)가 절로 흘렀다. 조금 나른한 걸음걸이, 유쾌해 보이는 웃음, 탄력있게 허리를 펴고 있는 모습 등이 귀한 가문에서 태어나 자란 명가의 후손다웠다. 이런 사람이 친구의 부인을 친구와 자식이 보는 앞에서 강간한 다음 목 졸라 죽였고, 세 아이도 무참히 살해했으며, 친구의 몸에 비수를 열두 개나 꽂은 사람이란 말인가. 점포를 빼앗고, 장원을 뺏고, 그것도 모자라 숨이 끊어지기 일보 직전인 사람을 분뇨 통에 처박아 버린 것이 삼십 년 우정이란 말인가. 그는 자신의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아서인지 불안하기도 하고 못마땅하기도 한 인상을 지었다. “약속대로 밀약에 대해서 말해 보지.” 관원이 다그쳤다. 그제야 국용범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나라에서는 밀약에 대한 꼬리를 잡고자 틈만 나면 대들었다. 하나 아무런 단서도 잡을 수 없었다. 누가 되었든 밀약에 대한 단서만 제공한다면, 관원이 밀약에 대한 단서만 찾아낸다면 승차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밀약이라니 무슨 당치 않은……” 국용범도 밀약에 대한 것만은 알려주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그렇게 되면 친구를 죽이면서까지 빼앗은 모든 기반이 일거에 물거품으로 변할 테니까. “총관, 대들보를 살펴봐주시겠습니까?” 홍문성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체 모를 무인들 중 몇 명이 대들보 위로 솟구쳤다. 순간, 홍문성은 재빨리 탁자 밑으로 기어 들어갔고, 그가 나왔을 때에는 서책 몇 권을 들고 있었다. “밀약에 대한 모든 것이오.” 관원도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여겼는지 한쪽 구석으로 재빨리 물러선 후였다. 그는 홍문성이 서책을 내밀고 있는데도 쉽게 받아들 생각을 하지 못했다. 국용범을 에워싸고 있는 무인들이 껄끄러운 듯했다. “총관……” 쉬익! 홍문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갈천상이 신형을 날렸다. “모두 가주시겠습니까?” 홍문성이 국용범을 마주보며 말했다. 갈천상과 마임호는 조용히 전각을 빠져 나왔다. 수십 명에 이르던 관원들은 어디로 갔는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밀약에 대한 서책을 건네주는 조건은 한 가지뿐이었다. 장원에서 관군을 물리는 것. 관원도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짐작했던 터이고, 밀약에 관한 사건을 터트리면 국용범 또한 불가피하게 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 그에게서는 은자를 받았으니. 물러가 달라는 말은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었으리라. 갈천상과 마임호는 오운각 난관에 팔을 기대고 야경을 바라보았다. “풍뢰구류흔, 어떻소?” “잘 익혔소.” “……그러면 총관, 난 이 길로 떠날까 하오만……” “비천섬월에게 갈 생각이오?” “크크크! 양물을 잘라버린 놈인데 대가는 치러줘야지.” “몸조심하시오.” “엉? 그건 말이 틀린데? 비천섬월 정도는 눈 아래 깔고 볼 수 있게 해준다 해서 불알에 방울 소리 나도록 뛰어다녔는데 이제 와서…… 아! 실수! 방울 소리는 빼고. 어쨌든 뛰어다녔는데……” “비천섬월 정도는 눈 아래 깔고 봐도 되겠소. 하지만 비천섬월을 죽인 후에는 무림을 뜨는 게 좋겠소.” “히히! 그럴 생각이오. 하던 도둑질이나 계속해야지. 풍뢰구류흔을 사용하면 잡히지도 않을 테고. 히히!” 대도 마임호…… 그는 그 말만을 남기고 섬서성으로 떠났다. 그는 백문장을 나설 때부터 섬서성으로 달려가고 싶었을 게다. 창화성이 섬서성으로 가는 길목이 아니라 남쪽으로 내려가야 되었다면 따라나서지도 않았을 게다. “크윽!” “아악!” 답답한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갈천상은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즉시 뛰쳐 들어갔다. 홍문성은 발가벗은 상태로 붉은 피를 뚝뚝 흘려냈다. 그의 손에 들린 녹슨 비수는 국용범의 가슴에 자루 밑까지 깊이 틀어박혔다. “배, 백문장…… 무가만 아니었어도 네놈 목숨은……” 국용범은 이를 갈았다. “요독(尿毒)이 상처를 파고들면 어떻게 되는지 아나? 약초상이니 알겠지. 살이 썩어 들어가. 잘 봐. 이게 그 상처들이니까.” 홍문성은 자신의 몸에 난 상처를 들이밀었다. 홍문성은 절대 옷을 벗지 않기로 유명했다. 시종이 보는 앞에서도 벗지 않았고, 아무리 더운 날에도 물조차 끼얹지 않았다. 그게 움푹움푹 파인 상처를 가리기 위해서였다니. “대약상이 되기 위해서는 의원 못지않게 약초에 밝아야 돼. 알겠나? 너는 그게 잘못됐어.” 홍문성은 탁자 위에 올려진 열한 개의 녹슨 비수 중 하나를 집어들어 국용범의 몸에 찔러넣었다. 자신의 몸에 난 상처와 똑같은 곳에. “컥! 너, 너도 죽어.” 국용범도 지지 않았다. 홍문성이 비수를 찔러넣을 때 그도 비수를 찔렀다. 하나 그는 비수가 한 개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비수를 빙글 돌려대기 시작했다. “크윽!” 목불인견(目不忍見)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한 명은 잘 들어가지도 않는 녹슨 비수를 찔러넣고, 다른 한 명은 비수를 비틀어대고. 갈천상은 오운각을 물러나왔다. 전각 바닥에 흥건히 고인 피의 양으로 볼 때, 두 사람은 이미 삶의 저편으로 건너가는 중이었다. 말릴까도 생각했다. 명문혈에 진기를 주입하고 혈도를 막는다면 목숨을 구할 수 있을 텐데. ─`나는 신의를 먹고 사는 사람이오. 한데 어느 날부터인가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됐소. 아내를 얻는다 해도 믿지 않소. 신의를 먹고 사는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니…… 내 삶은 그때 끝났소. 왜 그 말이 떠오른 것일까. 쫦 쫦 쫦 그 시각, 오경은 바다를 연하고 있는 대주부(臺州府)로 들어섰다. 금화부에서 대분산을 넘으면 선거(仙居)가 지척이고, 선거에서 사십 리만 가면 괄암산(括菴山)이 나온다. 그리고 그곳에는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석계곡(石溪谷)은 찾기 쉬웠다. 계곡 전체가 하얀 암석으로 이루어졌는지라 멀리서도 흰 뱀이 기어가는 것처럼 뚜렷하게 보였다. 석계곡에 도착한 오경은 품 속에서 지도를 꺼내 슬쩍 쳐다보고는 망설이지 않고 발길을 옮겼다. 길을 오는 동안 보고 또 본 지도인지라 머리 속에 각인되다시피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다시 한 번 본 것이다. 석계곡에 흐르는 물은 또 다른 운치를 더해 주었다. 하얀 암석 위를 흐르는 물…… 투명하고 맑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지 않은가. “폭포가 나올 거라고 했는데……” 오경은 귀를 기울였다. 구르르릉……! 과연 우렁찬 폭포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오경은 산삼을 발견한 심마니처럼 두 손까지 이용하며 부지런히 석계곡을 거슬러 올라갔다. 여인은 장님이다. 하나 결코 잊을 수 없는 여인이다. 그의 아내도, 딸도, 혈연으로 이어진 사이도 아니지만 잊을 수 없다. 자신을 광인이 되어 떠돌게 했던 여인인데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누구세요?” 폭포 소리가 발걸음 소리를 숨겨주었을 텐데, 여인은 낯선 사람이 다가온 것을 알아챘다. “지나가는 과객이오.” 여인은 쉽게 믿지 않는 눈치였다. 과객이 지나가기에는 험한 길이다.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계곡인지라 찾는 사람도 드물다. 그런 곳에서 사는 사람은 사람이 그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할 게다. “제 서방님께서 곧 오실 거예요. 괜히 곤욕 치르지 마시고……” “하하! 정말 지나가는 과객이오. 이런 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니, 나도 놀랐소.” 여인은 귀를 쫑긋 세웠다. 보지는 못하지만 오경의 말이 진심인지 파악하려는 듯. “여기서 물 좀 마시고 좀 쉬었다 가려고 하는데 불편하다면 다른 곳에서 쉬겠소.” “아, 아니에요.” 여인은 경계심을 완전히 풀지 않았으면서도 거절을 하지 못했다. 오경은 석계곡의 물로 갈증을 풀고 행낭에 싸온 건포(乾脯)를 물에 불려 먹었다. 그러나 일상적인 행동을 하고는 있지만 그의 신경은 오로지 여인에게 쏟아졌다. 여인이 사는 동굴은 자연 그대로였다. 서방이라는 자가 동굴을 발견하고, 살림살이 몇 개를 가져다 놓은 듯했다. “보통 적(笛)이 아닌데 사연이 있는 적이오?” 건포를 다 먹은 오경이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사부님이 물려주신 거예요.” 여인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지만 자랑스럽게 말했다. “초면에 실례지만 불 줄 아신다면 청해도 괜찮을지……” ‘불 줄 아느냐고? 오경. 이게 무슨 짓이냐. 이렇게 못난 인간이었더냐!’ “미숙한 솜씨인지라……” “하하! 괜찮소. 부실 수 있는 것 같은데 내 이 못난 귀에게 세상이 넓다는 것을 알게 해주시오. 하하!” 여인은 잠시 망설였다. 하나 이내 결심을 굳혔는지 적을 입에 대고 아름다운 선율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삘리리 삘리리리……! 오경은 눈을 감았다. 그의 귀는 오로지 적음(笛音)에 고정되어 우렁찬 폭포 소리는 방해가 되지 못했다. 이 음률이었다. 바람처럼 가늘면서도 상쾌하고, 천둥처럼 우렁차면서도 시원하고, 초원처럼 드넓으면서도 포근한…… 천지자연 속에 발가벗은 알몸이 되어 하나가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음률…… 삘리 삘리리 삘리리리…… “아!” 탄식이 토해졌다. 눈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손발이 부르르 떨리고, 몸에서 가는 경련이 인다. 이 여인이야말로 천하제일의 악성(樂聖)이다. “보통 분이 아니군요. 폭포 앞에서 불었는데도 알아들으시니.” 그의 탄식 소리는 적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곡명(曲名)을 알 수 있겠소?” “없어요. 이 곡에 붙일 곡명이 없다고 하셨어요.” “사부님 함자를 여쭤봐도 되겠소?” “육신이 없는 이름이 무슨 소용이냐며 누가 물으면 그냥 무명인(無名人)이라고……” “그분은 오(吳) 자(字), 훈(薰) 자(字)라는 함자를 쓰셨소.” “넷?” 오경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언젠가 창 밖으로 무심히 들려오던 음률의 모든 것을 알았지 않는가. 그 음률은 그를 좌절케 만들었고, 악(樂)에 관한 한 천하제일이라는 자부심을 여지없이 짓밟았다. 광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누가 불었는지도 모르는 적음보다 더 뛰어난 곡을 만들고야 말겠다는 집념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갈천상은 약속을 지켰다. 이 여인을 알아내줬으니. 사실 백문장 일이야 어찌 되든 모두 내팽개쳐 버리고 빨리 석계곡으로 달려가고픈 충동을 이겨내느라 얼마나 힘들었던지. ‘……누가 물으면 그냥 무명인(無名人)이라고……’ 그분 말이 옳다. 모든 욕념을 떨치고 발가벗은 알몸으로 자연 앞에 섰을 때에만 진정한 악이 흘러나올 수 있는 것을. 수염이 텁수룩하게 자란 산적 같은 사내가 장님여인에게 달려왔다. “저, 저놈이 무슨 짓을 한 거야!” “아니에요. 아니에요.” 장님여인은 사내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런데 왜 울어? 저놈이 무슨 짓을 한 거지!” “아니에요. 저분은…… 저분은…… 제 사형이에요. 사부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말씀하셨어요. 천하제일의 사형이 있다고. 저분이에요. 저분…… 흑!” “아! 그 피리쟁이. 난 또……” ‘저분이 내 피리 소리를 듣고 우셨어요. 제 피리 소리를 듣고.’ 여인은 목이 메어 쏟아져 나오는 말을 풀어내지 못했다. 쫦 2 쫦 어머니로부터 무극전으로 오라는 말을 듣고 무극전을 들어선 조자경은 낯선 중년인들을 보고 눈빛을 빛냈다. “인사드려라. 이분은 백표당 당주이셨던 고명이시고, 이분은 백호당 당주이셨던 여송, 그리고 백룡당 당주이셨던 정항이시다.” 조자경은 인사를 하지 않았다. 백문장을 버리고 건곤방과 손을 맞잡은 인간들이 무엇 하러 왔단 말인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게 인간이라지만 낯짝이 뻔뻔해도 너무 뻔뻔하지 않은가. 그녀는 검병(劍柄)을 만지작거렸다. 여차직하면 자기가 장주가 되겠다고 발광했던 세 사람의 무공실력을 가늠해 볼 생각이었다. 그녀는 주변을 정리했다. 애초 생각대로 백문장을 일으키고, 아버지의 복수를 했으니 이승에 남은 미련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이제부터 검을 들이대면 검으로 받아줄 생각이다. 상대가 그 누구든…… 설혹 갈천상이라 할지라도. 첫 번째 상대로 이들이 걸려든 것은 우연일까? “인사를 드리래도!” 어머니가 다그쳤지만 조자경은 꼼짝하지 않고 노려보기만 했다. “하하! 자경이가 많이 컸구나.” “이 사람, 실수하는군. 자경이가 뭔가? 자경이가…… 말만하게 컸는데.” “그런가? 하하! 하지만 어쩌겠나. 내게는 여전히 깜찍한 자경이로 보이는걸.” “맞아. 실수했어.” 조자경의 음성에는 살기가 물씬 묻어나왔다. “자경아!” 천화신의가 언성을 높였다. 여간해서는 있지 않는 일이다. “너는 백문장 문도들이 단지 포영매 때문에 무공이 높아졌다고 생각하는 거냐! 용서하세요. 아직은 철없는 아이라.” “허허! 그럴만하죠. 너무 개의치 마십시오.” 조자경은 혼란스러웠다. 발단은 백응당 당주 한병에게서 시작되었다. 그는 차기 장주가 될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백룡, 백표, 백호당 당주는 어느모로 보나 자신의 밑이라고 여겼다. 또 그는 자신이 나서기만 하면 삼당 당주들이 적극적으로 밀어줄 줄 알았다. 총관 광량은 백응당주의 야심을 이용했다. 그러잖아도 구심점을 잃은 백문장과 사대 패강과의 싸움을 우려했는데, 싸움이 벌어지지 않더라도 백문장은 몰락의 수순을 밟아나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절망하던 참인데. 그가 마지막으로 백문장에 심어둔 계략은 이들 삼 인이었다. 세 사람은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벌였고, 사대 패강의 싸움을 부채질했다. 결과는 광량의 생각대로 되었다. 사대 패강은 잃어버린 문도를 보충하기에 급급했고, 광량이 생각했던 대로 십 년 세월을 벌었다. 손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주의 뜻을 곡해한 문도들이 등을 돌리는`─`본인들은 사문을 배신하지 못한다는 충성심의 발로였지만`─`사태가 벌어졌다.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이 섣불리 객기(客氣)를 부리지 않기만을 간절히 기원할 뿐. 그들 중 젊은 혈기를 이기지 못해 전란에 뛰어들었다가 죽은 문도도 많았고, 그럴 때마다 당주들과 광량은 속앓이를 했다. 삼당 당주는 건곤방에 둥지를 틀고 문도들의 무공수련에만 전념했다. 어차피 중간에서 끊겨버린 백학검법으로는 상승경지를 이룩할 수 없다는 판단이었고, 건곤방의 봉술로 보충하면 될 것 같다는 심산이었다. 이 생각은 어느 정도 들어맞아서 화창당 문도로 선발되어 창술을 배울 때 크게 소용되었다. 중도에서 빠져 나간 문도와도 연락을 끊지 않았다. 그들 중 일부는 정말로 무림을 떠난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혼자 고심하며 십 년 세월을 숨어살았다. 아무도 몰랐다.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조자경은 물론이고 백문장 안주인이었던 천화신의 하문화도 몰랐다. 이러한 사실은 오직 광량과 삼당 당주들만의 밀약이었다. 그들은 백문장을 지켜보았다. 광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남몰래 외진 구석에서 피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러다가는 영원히 건곤방 그늘에 숨어서 살아야 한다는 위기감을 느끼기도 했다. 백문장은 소생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에서 기적이 베풀어졌다. 백문장이 재건한다니. 하나 삼당 당주는 그때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백문장이 어떻게 소생하는지를 지켜보았고, 자신들의 힘이 합쳐졌을 경우 얼마만한 힘으로 성장하게 될지, 사대 패강을 상대할 수 있는지도 가늠해야 했다. 절강성 제일지자(第一智者)였던 광량. 그는 제일지자라는 말을 내놓아야 한다. 지략으로 광량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태웅, 간화, 소상원은 속일 수 있었지만 귀호구혼은 속이지 못했으니까. 귀호구혼 전인수는 갑자기 몰려드는 문도들을 예의 주시했고, 포영매에게 그들의 특성을 말했다. 갈천상도 그들을 주시했다. 그 결과 문도 중 일부에게서 남들이 갖지 않은 특징을 발견해 냈다. 백문장에 대한 애착이다. 잃어버린 백학검법을 부활시키고자 하는 노력이다. 귀호구혼은 확신했다. 그때부터 삼당 당주는 백문장과 밀통(密通)했고, 절강성 판도를 바꿔놓을 싸움이 계획되었다. 그랬다. 그래서 백문장 문도들의 무공이 채 일 년도 되지 않은 사이에 그토록 놀랍게 급성장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랴. 조자경이 갈천상과 함께 절강 무림을 떠돌기 시작할 때부터 전운(戰雲)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죄송해요. 너무너무 죄송해요.” 조자경은 이 말밖에 달리 할 수 없었다. “하하하! 자경아, 너무 그러면 이 못난 놈들이 더 미안하지. 어려울 때 돌봐주지도 못했는데.” “죄송해요.” 이상하다. 미안한 마음은 가득한데, 삼당 당주들의 노심초사가 뼛속 깊이 파고드는데 눈물은 나오지 않는다. 단지 돌아가신 아버지도 지금쯤은 웃고 계실 거라는 생각만 들 뿐. “하하! 백문장 골격이 잘 짜여졌는데 애석하게도 원로(元老)라는 직책이 없어졌더구나. 그래서 장주님께 건의드렸다. 이 불쌍한 놈들을 생각해서 꼭 만들어주십사 하고. 하하! 신임당주들을 만나봤는데 하나같이 물건들이야. 백문장은 번창할 게다.” 조자경은 잡아오는 손을 마주잡았다. 건곤방 휘하에서 건곤방을 위해 다른 문파와 싸웠을 때가 가장 힘들었다는 삼당 당주들. 문도들이 아무 의미 없이 죽어갈 때에는 통곡이라도 하고 싶었다는 당주들. 아버지는 참 좋은 사람들을 얻었다. “고가촌을 찾아갔다고?” “예.” “하하! 볼 만했겠다. 내 집안이지만 고가촌은 언젠가 한 번 크게 당할 거야. 아니 이미 당했지. 절강 무림을 백문장이 일통했으니 이제 누구에게 붙을까. 휴우!” “일통요? 아직 건곤방이……” “건곤방은 무너졌단다.” 일음마봉 무기…… 그는 건곤방주를 은거시키고 말았다. 자식이 자기 형제를 죽이는 데 태연할 부모가 어디 있으랴. 그나마 자식의 야망을 알고 있기에 숨죽여 눌러참았다. 야망이 있는 효웅(梟雄)답게 제대로 야망을 펼칠 수만 있다면…… 용서해 줄 생각으로. 지난 십 년 동안 건곤방주를 본 사람이 극히 드문 까닭이다. 건곤방에 머물고 있어 은거만 하지 않았지, 실질적으로는 은거를 한 셈이다. 그러나 일음마봉 무기는 그만한 그릇이 되지 못했다. 건곤십삼봉이 죽었을 때, 천목봉인 왕국용이 죽었을 때 확실히 알았다. 그러나 한 가닥 미련을 떨치지 못했다. 그래서 그러잖아도 죽여버릴 생각이었던 성심의와 겸선을 건곤방 최고의 무공으로 척살하여 경종을 울렸다. 일봉오공을 잘 봐라. 일봉오단을 익혀야 절강 무림의 패주가 될 수 있다. 또 건곤방주는 천목봉인의 아들인 왕동예를 불러 일음마봉을 부탁했다. 건곤방주는 왕동예야말로 천목봉인을 능가하는 책사라는 걸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왕동예는 거절했다. 진실한 건곤방의 면모를 갖추려면 일음마봉으로는 부족하다면서. 그러면 누가 좋을까? 건곤방주의 물음에 왕동예는 서슴없이 자신을 추천했다. 그제야 건곤방주는 왕동예야말로 진실한 효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 늦은 후였다. 성심의와 겸선이 건곤방 최고의 무공에 죽은 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힌 일음마봉은 건곤방을 몰래 빠져 나가려다 건곤십삼봉의 후인들에게 죽음을 맞이했다. 건곤방주는 마지막으로 봉을 들었다. 그는 평생 동안 수련하고 전수해 온 건곤봉법을 자신의 제자들에게 퍼부었다. 제자들도 똑같다. 사부에게 배운 건곤봉법을 사부의 목숨을 빼앗는 데 사용했다. 건곤방 대 건곤방주. 상황은 절대적으로 왕동예에게 유리했다. 건곤방주가 일봉오공과 일봉오단을 익히고 있다 해도 그가 삼비육두(三臂六頭)의 괴물이 아닌 이상 중과부족(衆寡不足)은 어쩔 수 없다. 더군다나 제자들의 무공 또한 절정을 치닫고 있으니. 하나 왕동예도 착각한 것이 있다. 고명, 여송, 정항이 문도들을 이끌고 빠져 버린 것이다. 그들이 데리고 있던 문도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건곤방도들에게 이렇게 나가다가는 건곤방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조성케 하는 데는 충분했다. 또 사부를 시해한 제자들이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닌단 말인가. 물론 왕동예가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지만 세상에는 비밀이 존재하지 않는 법…… 한 명, 두 명 싸움을 멈추기 시작해서 결국은 건곤십삼봉의 후인과 건곤방주의 싸움이 되고 말았다. 싸움이 끝났을 때 땅바닥에 널브러진 사람은 왕동예를 비롯한 건곤십삼봉의 후인들이었다. 건곤방주는 탄식했다. 특히 애석한 것은 싸움 과정에서 넷째 아들마저 변을 당하고 말았으니. 방주는 건곤십삼봉과 연관이 있는 가족, 친지, 형제들을 모두 내보냈고, 건곤방을 다섯째 아들인 무태(茂泰)에게 물려줬다. 그 후로 건곤방주를 본 사람은 없다. 절강 무림을 넷으로 분할하여 일각을 호령했던 건곤방은 이제 봉술의 명가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 건곤방이 싸움에 끼여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쫦 쫦 쫦 “계집애, 이리 와.” 조자경은 아미를 찡그렸다. 장원에서 그녀를 ‘계집애’라고 부를 사람은 오직 한 명밖에 없다. 조자경은 고개를 돌려 빙정신소 유건지를 노려보다가 태연히 다가섰다.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다. 배신자로 낙인찍었던 삼당 당주를 만났고, 십 년 세월 동안 숨겨졌던`─`어쩌면 영원히 비밀이 되었을 수도 있는`─`비사(秘事)를 알았다. 오늘은 검을 들고 싶지 않다. “경고하겠는데 앞으로 계집애라고 부르지 마.” “호호호! 괜찮아졌는데? 그놈이 잘 가르쳐 줬어?” “떠날 건가?” 굳이 물을 필요도 없었다. 빙정신소 유건지와 두 여인, 만검진천 전종대와 다른 한 명…… 일심향불 백무 일행도, 벽산개부 고규철 일행도 행낭을 짊어진 것이 떠날 사람들 같았다. “떠나야지. 여기 꿀단지를 숨겨놓은 것도 아닌데. 하나 그 전에…… 우리 할 일이 남아 있지 않아?” “……” “그놈은 우리를 버리고 너를 택했어. 최고, 최고, 최고! 네가 익힌 무공이 최고라는 말인데 눈요기 좀 시켜줘야 되지 않아?” “얼마든지.” “호호호! 계집애, 이제는 말도 잘 통하네.” 유건지가 말을 하는 동안 다른 두 여인은 어느새 행낭을 벗어던졌다. 그리고 한 여인은 유건지의 오른쪽으로, 다른 여인은 왼쪽으로 붙어섰다. 이들의 무공은 전에도 본 적이 있다. 비조탈명과 사귀를 죽일 때. ‘싸우자’는 말이 시작되면 두 여인이 먼저 검을 날려오리라. 양검과 음검이지 아마? 그때, “빙정신소, 미안하지만 이 몸이 제일 먼 길을 가야 할 것 같은데 이 일전을 빈승에게 양보해 주시는 게……” “닥쳐! 돌중!” “어허! 허허허! 말 한 번 잘못했다가 본전도 못 뽑았군. 잘 싸워보시게. 어디 그 이름난 삼유강진과 무극진결이 부딪치는 모습이나 볼까?” “돌중, 잊지 마. 너와도 언젠가는 승부를 나눠야 할 거야.” “허허허!” 유건지는 말을 하는 동안에도 조자경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시작할까?” 조자경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검을 사용하고 싶지 않은 날이지만 상대가 이들이라면…… 이들은 사대 패강 장문인들에 버금가는 무공을 지니고 있다. 갈천상도 원하지 않았던가. 천력문주와 싸우기를. “계집……” “그만!” 일촉즉발(一觸卽發)! 조자경은 연검을 뽑아드는 중이었고, 유건지는 검병에 손을 올려놓았다. 다른 두 여인은 이미 검을 뽑아든 상태였다. 이때, 이들의 싸움을 대번에 갈라버리는 호통이 터졌다. ‘그만!’이라고. “네놈……!” 유건지가 버들잎 같은 눈썹을 곧추세웠다. 고함을 지른 사람은 다름 아닌 갈천상이었다. 그는 홍문성과 함께 창화성에 갔다가 지금 막 돌아오는 길이었다. “모두 떠나지 마라. 나흘 후에 보자.” 갈천상은 그 말만을 남긴 채 뒤도 안 돌아보고 걸어갔다. 답답하다. 숨이 막힐 듯이 답답하다. 폭우라도 쫙쫙 쏟아지면 마음이라도 후련하련만. 갈천상은 자신의 거처에 틀어박혀 꼼짝을 하지 않았다. 방문도 걸어잠갔기 때문에 방 안에서 그가 무엇을 하는지는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식사도 마다하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루에 한 번은 들러야 하는 측간에도 가지 않는다. 방 안에 있기는 있다. 낮에는 불이 꺼지고 밤에는 불이 밝혀지는 것으로 봐서 잠도 자지 않고 무엇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번 일이 절곡에서 본 토우진과 연관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전종대 등을 떠나지 못하게 할 까닭이 없다. 그 말은 조자경에게는 죽음이 다가온다는 말과도 상통한다. 갈천상과 한 약조는 아무도 모른다. 곧 죽음의 길로 떠날 것 같은데…… 어머니에게라도 말해야 될 것 같은데…… 이제 그만 불초여식 먼저 가겠다고. 하나 어머니만 보면 입이 다물어진다. 도저히 그 말만은 할 수 없다. 어머니는 백문장이 재건되는 모습에 맛을 들인 것 같다. 얼마 되지 않는 재정에서도 방삼을 생각해 개를 사들이고, 조련사에게 조련을 시킨다. 연무장에서는 문도들의 고함 소리가 끊이지 않고…… 옛날에 이랬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적에. 마부영은 아예 대장간에서 살고 있다. 이번 싸움에서 소용된 기관장치를 다시 설치하는 데 무려 일 년은 족히 걸린다니, 노인네에게 일 년 동안은 할 일이 생긴 셈인가? 백문장은 활기차게 돌아가는데 조자경의 마음은 숨이 막힐 듯 답답했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제법 쌀쌀해진 바람이 짓쳐 들어왔다. 조금 있으면 겨울인데…… 광량이 죽은 작년 겨울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변화. 이번 겨울은 모처럼 따뜻할 것이다. “아씨, 포영매께서 오시래요.” “응. 응?” 조자경은 화들짝 놀라 돌아섰다. “포영매께서 모셔오래요.” 벌써 나흘이나 지났나? 그러고 보니 나흘째였다. “이, 이…… 이게 무슨 수작!” 여간해서는 표정변화가 없는 전종대건만 이번만은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말…… 도 안 돼.” 유건지도 놀랐다. 그녀는 너무 놀라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후 일어서지 못했다. “아미…… 타불! 아미타불! 아아!” 일심향불 백무도 불호만 외울 뿐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믿을 수 없어. 이건 정말…… 믿, 믿을 수 없어!” 벽산개부 고규철의 음성은 차라리 절규였다. “죽…… 음이네.” 조자경……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이건 도저히 어쩔 수 없다. 무극진결이 아니라 전종대의 음양, 유건지의 삼재, 백무의 사상, 고규철의 오행, 장상부의 육합까지 전부 합쳐도 돌아오는 건 죽음밖에 없다. 도공(陶工)이 빚어놓은 듯 정밀하게 빚어놓은 흙인형 일흔두 개. 각기 다른 초식을 전개하고 있으며 사용하는 병기도 각기 다르다. 상대를 가둘 수도 있고, 풀어놓고 공격할 수도 있으니 싸움은 대면하면서부터 시작된다고 봐도 좋다.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공격하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다. 산양이나 다니는 산길에서는 일 대 일의 싸움밖에 할 수 없고, 좁은 골목길에서는 많아도 두어 명이 한 번에 공격할 수 있는 최대 인원이다. 장소가 툭 트인 초지에서 싸운다 해도 인간의 크기가 있는 이상 공격할 수 있는 인원은 제한되게 마련이다. 하나 이 토우들은…… 일흔두 명이 모두 공격하고 있다. 어느 누구든 언제라도 중앙으로 들어갈 수 있고, 위치이동이 수월하고, 그러면서도 상대는 신법, 보법을 제약한다. 천하제일진(天下第一陣)이다. 갈천상은 다섯 명의 기를 완전히 꺾으려는 듯 입을 열었다. “이들이 공격한다. 수비는 만들지 못했다. 나도 본 적이 없으니까.” “뭐, 뭐라구!” “수비에 다가서지도 못했다는 말이 정확하겠군.” “마, 말도 안 돼.” 유건지는 말도 안 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것이 내가 본 최고다. 아쉽게도 그대들 표정을 보니 최고를 익히지 못했군.” “아아!” “이제 알겠나? 내가 말했지. 너의 육신과 영혼 모두 내 거라구. 이제…… 이해하겠나?” “……” 조자경은 아무 대답도 못 했다. 갈천상이 ‘죽음’을 강조하면서부터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았는데, 막상 죽음을 피부로 느끼게 되니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이, 이건 무리야! 미친 짓이야! 가면 안 돼! 가지 맛! 갈천상! 너 이런 놈이야! 이런 걸 왜 동생에게 시키는 거야! 네가 직접 싸워. 너는 손이 없어 발이 없어! 왜 동생에게 시키는 거야!” 유건지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그녀는 조자경을 동생이라고 불렀다. 입이 거칠어서 그렇지 마음으로는 포근히 감싸왔다는 반증이다. 조자경과 싸우자던 것도 무공을 비교하기 위해서였지 그녀에게 악감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포…… 영매. 이런 게 있으니 그토록 처절하게 살아온 것은 이해하겠는데…… 조 소저의 무공으로는 자살행위라고 생각해. 조 소저에게는 미안하지만 조 소저의 무공은 우리 수준밖에 안 돼. 조 소저, 말해 보시오. 우리와 싸워서 이길 자신이 있소?” 전종대는 말이 없는 사내다. 기껏 입을 열어도 두서너 마디가 고작이다. 그런 그가 오늘은 많은 말을 하고 있다. “자신있어요.” 조자경은 의외의 대답을 했다. 하나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말에 기분 상한 사람도 없었다. 조자경의 말투에서 삶의 포기가 묻어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지 못한 사람도 없다. “나도 가겠어. 내 눈으로 직접 봐야 믿겠어. 이런 진이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돼.” 벽산개부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말은 모두의 생각과 일치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조자경을 제외하고는 모두 최고의 무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가문, 사문, 불문도 등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무공을 버리고 포영매가 건네준 무학을 익혔으며, 무림인에게 약한 자의 것으로 치부되는 합격술을 당당하게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최고를 추구하다가 죽는다 해도 웃으며 죽어갈 수 있다. 벽산개부의 혼자말은 모두의 행동에 하나의 지표가 되었다. “나도 가야겠군. 보기만 한다는데 말릴 이유가 없겠지. 포영매, 미안하지만 자네는 우리들의 인생을 망친 주범이야. 우리도 한때는 촉망받던 사람들이고, 그대로 나갔다면 지금쯤 이름깨나 떨치고 있겠지. 우리를 이런 길로 접어들게 했으니까 말릴 생각은 하지 마.” 전종대는 정말 말을 많이 했다. 갈천상 일행이 백문장을 출발한 것은 십일월(十一月) 초나흘이었다. 전종대 등은 갈천상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동고동락을 같이하던 무인들을 백문장에 남겨놓고 출발했다. 같이 갈 경우, 조자경에 앞서 토우진에 도전할 수도 있다는 이유였다. 백문장은 염려할 것이 없었다. 사대 패강이 무너지면서 절강성 젊은이들은 너나할것없이 백문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절강무인들이 절강제일문파로 백문장을 손꼽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거기에 귀호구혼이 있다. 그는 복건성 무이산 천심암에 숨어살던 현천마금과 그의 아내를 용서했다. 죽이려고 찾아가기는 했지만 두 연놈의 아들딸을 보니 차마 죽일 수 없더란다. 이유는 그렇지만 귀호구혼이 정작 그들을 죽일 수 없었던 이유는 아직도 그의 마음 속에 아내가 살아 있기 때문이리라. 독약을 먹이고, 자신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마저 무참하게 죽이고 현천마금과 눈이 맞아 달아난 악부(惡婦)인데도 사랑이란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했던 게다. 죽은 자식들이 밤마다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는데 미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는 용서하고 돌아왔다. “백문장은 걱정 말게. 여기서 내 여생을 보내려고 하니까. 솔직히 복자로 떠돌아 다니는 데도 지쳤거든.” 그가 있고 사당이 있는 한 백문장은 반석 위에 올려졌다. 신필 박우와 악성 오경이 돌아와 장을 돌보고 있으니 더욱 든든하지 않은가. 운단서도 믿을 만하다. 다성 운단서는 절곡에 있던 광인들 중 유일하게 사연없이 광인이 된 사람이다. 천화신의의 진맥에 의하면 선천적으로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질병 때문에 광인이 되었지만 치료할 수는 있단다. 그는 미친병이 재발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백문장에 있어야 한다. 그는 문사지만 수비는 무공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에 방삼, 마부영과 호흡을 맞춰 잘 이끌어 나갈 것이다. 일행이 떠나는 것을 가장 아쉬워하는 사람은 난주일검 장상부다. 그는 자신과 수하들이 익히고 있는 육합검진을 증명받고 싶어했다. 전종대 등과 겨뤄서 육합검진이 어느 정도인지 확실히 알고 싶은 마음…… 당연하다. 그러나 그도 토우진을 본 다음에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반응은 똑같았다. “이건 미친 짓이야. 이 진은 상대할 수 없어.” 백문장에 남은 사람들은 갈천상 일행이 향하는 곳을 모르지만 장상부는 알고 있다. 하나 무덤 속까지 가져 갈 비밀이다.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못한다. 장주가 딸자식 걱정에 애간장이 끓어도 말해 줄 수 없다. 미친 짓……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토우진을 상대하러 갔다고 어떻게 말해 줄 수 있겠는가. 조자경은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고. 십일월 보름이 되어서야 여섯 명은 절강성을 벗어나 남경(南京)으로 접어들었다. 느린 행보였다. 갈천상은 팔두마차를 준비했고, 마차도 직접 골라왔다. 길을 가는 동안 가장 편히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한 배려였다. 숙소도 최상위 객점만 골라 들었고, 음식도 조자경이 즐겨먹는 음식만 시켰다. 또한 갈천상은 틈이 나는 대로 무공을 교정해 주었다. 전종대, 유건지 등도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어떤 때는 직접 비무 상대가 되어주어서 새롭게 교정된 초식이 몸에 붙도록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더딜 수밖에 없는 여정(旅程)이다. 십이월(十二月) 초하루. 일행이 장강(長江)을 넘을 때쯤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 강바람이 매섭게 몰아쳤다. 강을 건널 때에는 겨울 한가운데에 들어선 느낌마저 들었다. 밤은 물론이고 낮에도 날씨가 쌀쌀해서 두툼한 옷을 입었다. “움직이기에 가장 편안한 옷을 골라서 입도록 해. 모양새는 상관없어. 가장 편안한 옷이 최고야.” “알았어.” 조자경은 마음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그것도 수련이 필요했다. 눈으로 보는 모든 것, 귀로 듣는 모든 것에 무심해야 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사람은 왜 죽기 싫어하는가. 이유야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많겠지만 조자경의 경우에는 애착이었다. 어머니를 만날 수 없다는 애착, 갈천상과는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다는 애착, 양반두부(凉拌豆腐`:`두부무침)를 다시는 먹을 수 없다는 애착, 맑은 하늘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애착…… 세상에 대한 애착을 끊기가 힘들었다. 애착을 끊기 위해서는 마음이 죽어야 한다. 모든 것에 관심이 없어야 하고, 의미가 없어야 한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에게 마지막 여물을 풍족히 먹이듯이 갈천상의 모든 배려가 어찌 보면 기분 나쁘게도 보이지만 모든 것을 초월했다. 유건지가 갈천상을 연모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제오늘에 깨달은 게 아니다. 그녀는 끊임없이 욕을 해대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평생 그의 곁에만 있어도 좋다고 생각할 만큼 절실한 사랑을 하고 있다. 너무도 절실한 사랑이라 부럽다. 그런 사랑을 하고 있기에 연적(戀敵)인 자신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게다. 그가 갈천상과 잘 이루어졌으면…… 모든 것을 버렸다. 갈천상을 사랑하는 마음도, 유건지를 부러워하는 마음도, 모든 것을 전부…… 아니, 버리려고 노력하는데 그게 잘 되지 않는다. 장강을 넘은 일행은 동성(桐城), 삼각산(三角山), 곽산(山)을 거쳐 하남성(河南省)으로 향했다. “어디로 가는 거야?” “……” “어차피 알게 될 건데 미리 알려주면 안 돼?” “……” “마임호가 섬서성에 있지? 비천섬월을 죽였을까? 호호호! 양물을 잘라버리다니. 호호!” “……” “가는 길에 섬서성에 들르면 마임호를 만나보자.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지만 밉지 않은 사람이야.” “……” 갈천상은 말이 없어졌다. 그는 하루 종일 생각만 했다. 처음에는 무극진결에서 허점을 찾아내려고 그러는 줄 알았는데 날이 갈수록 사람이 멍청해지는 것 같고, 어떤 때는 바로 옆에서 말을 걸어도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갈천상의 얼굴은 날이 갈수록 초췌해졌다. 쫦 3 쫦 “여, 여기는!”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으면 무심히 지나쳤을 작은 비석. 거기에는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라고 적혀 있었다. 꼭 비석을 봐서가 아니다. 하남성에 접어들어 숭산으로 방향을 정할 때까지만 해도 긴가민가했지만, 숭산 입구에 도착해서까지 의구심을 품을 이유가 없었다. “아미타불! 토우진이 소림사에 있소?” 수양이 깊은 일심향불 백무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서, 설마 백팔나한진(百八羅漢陣)!” 처음으로 갈천상이 반응을 보였다. 고개를 끄떡이는 것으로. “아!” 유건지는 좌절하는 사람처럼 무너져 내렸다. 백팔나한진의 실체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 백팔나한진이 무적이라는 것은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말만 무적이 아니라 실제로 무적이다. 수십, 수백 명의 절정무인들이 도전했지만 파해된 적이 한 번도 없는 천하의 절진. 왜 백팔나한진을 생각하지 못했단 말인가. 그럼 토우는 다름 아닌 나한승(羅漢僧)들일 게다. 나한승…… 나한승들이 토우와 같은 공격을 취한다면…… 살 길이 없다. 갈천상의 말도 이해가 된다. 토우 일흔두 개는 공격만 한다고 했다. 그 밖에 수비가 또 있다고. 서른여섯 명이 수비를 한다. 그러면 꼭 백팔 명. “못됐어. 진작에 가르쳐 주었으면 궁금하지나 않지.” 조자경은 의외로 담담했다. 그녀는 싱긋 웃기까지 했는데, 그 웃음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서글픔을 자아내게 하는 웃음이었다. “여기서 이틀을 쉴 거야. 소림사 방문은 사흘 후에 할 거고.” “왜?” “너 혼자 싸우면 무극진결을 뿜어낼 틈도 없어.” “그건 맞아.” “나랑 같이 간다.” “뭣!”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으니까.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너는 죽고, 나는 백팔나한진을 깬다.” 이상한 배신감이 꿈틀거렸다. 백문장을 일으켜 달라는 조건으로 육신을 내맡겼지만 죽음의 진인 줄 번연히 알면서도 태연히 따라온 것은 갈천상이라는 사람의 염원을 들어주기 위해서였다. 일생 동안…… 매달려 왔을 궁극의 목표를 이루라고. 하나 이건 인격적으로 뒤떨어지는 행동이지 않은가. 이런 사람이었나, 갈천상이? 조자경뿐만이 아니라 유건지도 심한 배신감을 느낀 듯 입술을 악물었다. 전종대 등은 차라리 입을 다물어 버렸다. “어차피 싸움 구경이나 하자고 쫓아온 거니까…… 누가 죽고 누가 깨든 알아서들 해.” 전종대는 일어나 나가버렸다. “잘 들어. 백팔나한진의 일격은 감당할 수 없는 거력을 지닌다. 공격이 시작되면 철벽으로 만들어진 뇌옥에 갇힌 기분이 될 거야. 그때 나는 여기를 친다.” 갈천상은 일흔두 개의 토우 중 하나를 가리켰다. 조자경은 멀거니 갈천상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가 불쌍했다. 이런 인간이든 저런 인간이든 별것도 아닌 것에 목을 메고 사는 인간처럼 보였다. 측은하기 이를 데 없었다. 토우로 만든 백팔나한진을 앞에 놓고 열심히 설명하는 모습도 가련하기만 했다. “약간 틈이 벌어질 거야. 뇌옥에 빛이 들어오는 정도. 그 틈을 뚫어야 돼. 잊지 마. 시간도 놓치지 말고. 똑똑히 들어둬. 네가 시간을 놓치면 나까지 죽는다. 네가 약간 벌어진 틈으로 빠져 나가면 백팔나한진이 즉각 변형하면서 모든 공격이 네게로 밀집될 거야. 그것으로 편안해지는 거야. 마지막 공격을 해도 좋고. 명심할 점은 반드시 뚫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 알았어?” “……” “내가 어떻게 파해하는지 들을 필요는 없겠지?” “갖고 싶지 않아?” 조자경이 느닷없이 물었다. “……?” “내 몸. 갖고 싶다는 생각 한 번도 없었어?” “……” “갖고 싶으면 가져. 줄게. 죽으면 썩을 육신이잖아?” “자라.” “병신. 세상에서 가장 나쁜 놈이 여자를 울리는 놈이야. 너는 나쁜 놈 중에서도 가장 나쁜 놈이야. 앞으로는 여자 울리지 마. 이런 식으로 이용하지도 말고.” “나는…… 약속대로 할 뿐이다.” 갈천상이 나간 후, 조자경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마음을 죽였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계속 눈물이 쏟아지니. 유건지가 들어와 그녀의 어깨를 보듬어안았다. “잘했어. 저런 놈은…… 약속할게. 저 새끼가 백팔나한진을 깨면 나는 저 새끼를 깨겠어.” 세상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치고는 무정한 밤이었다. 쫦 쫦 쫦 둥둥둥……! 대북 소리가 조용한 경내를 일깨웠다. 좀처럼 울리지 않는 북소리. 소림사에 급변이 생기거나 백팔나한진에 도전하는 무인이 있을 경우에만 울리는 북소리가 숭산 곳곳을 파고들었다. 소림사에서는 중원 무림인에게 두 관문을 열어놓고 있다. 하나는 백팔나한승이 펼치는 백팔나한진이요, 다른 하나는 간가통문(看家通門)이다. 간가통문은 순차적으로 열세 관문을 통과하는 것으로, 각 관문에는 간가권(看家拳)에 능통한 소림승이 두 명씩 지키고 있다. 간가통문을 통과한 무인들은 상당수 있다. 소림승 중에서도 간가통문을 통과하여 무림에서 활보할 자격을 얻은 승려들이 꽤 많다. 하나 백팔나한진은 통과한 사람이 없다. 무적의 절진. 백팔나한승은 손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몸의 일부 같은 병기를 들고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오로지 무공에만 전념하는 무승(武僧)들로 하루 아홉 시진 이상을 무공에만 쏟아붓는다고 한다. 백팔나한승이 되기 위해서는 자질도 뛰어나야 한다. 소림 장로들이 직접 시험해 보고 모든 장로들로부터 낙점을 받은 사람만이 백팔나한승이 될 수 있다고 하니. 그들은 태초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 유건지 등은 뒤로 물러섰다. 백팔나한승 앞에 선 사람은 갈천상과 조자경이다. “잊지 마라. 네가 시간을 놓치면 나까지 죽어. 네 심정은 이해하지만…… 나는…… 이것만은 꼭 깨고 싶었다.” “깨. 시간 놓치지 않을 테니까.” 둥둥둥……! 북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백팔나한진의 발동을 알리는 북소리다. “지금! 갓!” 갈천상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조자경은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죽는다는 생각도 없었다. 갈천상이란 인간에 대해 회의도 들지 않았다. 그녀는 눈 앞에 있는 소림승들을 보았고, 자신이 할 일만을 생각했다. ‘그래. 깨. 꼭 깨야 돼. 깨지 않으면 죽여버릴 거야!’ 쒜에엑……! 조자경은 갈천상이 일러준 대로 진의 정중앙으로 파고들었다. 과연 백팔나한진은 파고드는 적에게는 길을 터주었다. 안으로 끌어들여 몰아치면 그것으로 끝이다. “헉!” 정중앙에 들어선 조자경은 너무 놀라 헛바람을 내지르고 말았다. 철벽으로 둘러싸인 뇌옥이란 말은 너무 약한 표현이다. 이건 뭔가? 밝음을 차단한 완벽한 어둠은……? 휘류룽! 쒜에엑……! 어둠은 이동했다. 고정된 것이 아니었다. 어둠은 힘이 있었다. 항거할 수 없는 패력이 전신을 짓눌렀다. 정작 공격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엄청난 압박감에 손발을 놀리기도 자유롭지 않다. ‘이건 무덤이야. 무덤 속이야. 무덤.’ “간닷!” 쩌렁한 일갈이 귀에 들렸다. 보통의 외침이 아니라 내력을 깃들여 힘껏 내뱉은 외침이다. 분명 조자경에게 들으라고 한 소리다. ‘밝은 빛. 뚫어야 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건 상대가 보여야 싸울 것이 아닌가. 시커먼 먹물 속에서 어떻게 누구와 싸운단 말인가. 가가가각……! 터엉! 차앙! 꽈아앙……! 갖은 병장기 소리가 들리더니 끝내는 화약이 터지는 것 같은 굉음이 터졌다. 그리고…… 밝아졌다. 먹장구름의 일각이 걷히면서 잠깐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푸른 하늘이 보였다. ‘마지막! 깨야 돼! 반드시!’ 조자경은 신형을 날렸다. 사람이 보인다. 소림승들이 보인다. 그들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돌아서 있다. 이건…… 토우진에서 본 것과 다르다. 차앙! 연검을 떨쳐 내자 소림승 한 명이 황급히 맞받아왔다. 쇠로 만든 선장이다. 조자경은 땅에 바짝 붙으며 소림승의 다리를 향해 일검을 뻗어냈다. 쓰윽……! 손에 익숙한 촉감이 전해지며 붉은 혈화(血花)가 피어났다. 시작이다. 목숨을 하늘에 던졌으니 두려울 것도 없다. 천지간에 이 한 몸 둘 곳이 없으니 죽음인들 어디 있는가. 이것이야말로 갈천상이 심요산에서 몸으로 가르쳐 준 불생불멸(不生不滅)이지 않은가. 죽음조차 생각하지 않으니 검을 휘두르기가 아주 편했다. 상대가 어떤 초식을 전개해 오든 대응책이 스스로 떠올랐다. 마치 검이 살아서 스스로 움직이는 것처럼. 불구부정(不垢不淨)이다. 아무것도 없으니 더러워질 것도 깨끗해질 것도 없다. 얼마나 검을 휘둘렀는지 모른다. 그녀는 무아경(無我境)에 빠져 직감대로 움직였다. 눈으로 볼 필요도 없었다. 검기가 다가오면 자연히 느껴지고, 병기가 대부라면 대부가 공격해 온다는 것까지 느껴진다. 부증불감(不增不減). 아무것도 없으니 더해질 것도 덜어질 것도 없다. 느낌은 곧 현실이 되고 현실은 곧 느낌으로 다가온다. 둥둥둥둥……! 대북 소리가 다시 들렸을 때에서야 조자경은 정신을 차렸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쓰러진 사람들이다. 그 다음은 피다. 심요산에서 지겹게 보았던 피가 여기서도 재현되고 있다. 피! 피! 피……! 그 다음으로 그녀가 본 것은…… 유건지의 품에 등을 기대고 자신을 바라보는 갈천상이다. 그는 왼팔이 잘렸다. 다리도 정강이 아래 부근에서 잘렸다. 누가 급히 지혈을 한 듯한데 붉은 피는 끊임없이 흘러내린다. 조자경은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걸어갔다. 다시 세상이 깜깜해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오직 갈천상만이 보였다. “깼…… 구나. 역시…… 무극진결이…… 최고야.” “바보.” 조자경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왜 몰랐을까?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봤다면 갈천상의 말 속에서 이상한 기미를 읽을 수 있었을 텐데. 아니, 백팔나한진을 조금만 연구했어도 갈천상의 계획에 허점이 있다는 것을 파악했을 텐데. 죽음만 생각했다. 오직 죽음만. 그래서 갈천상이 거대한 철벽에 스스로 몸을 던지려 한다는 것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토록 야멸차게 대했으니…… 어쩌란 말인가. “모두…… 에게 미안……” 갈천상은 맑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가 본 것은 무엇일까. 조자경의 얼굴일까, 유건지의 얼굴일까. 아니면 정말 맑은 하늘일까. “바보!” “병신!” “어쩌란 말야! 어쩌라고 이런 짓을 한 거야! 흑흑!” 조자경은 백팔나한진을 파해한 최초의 무인으로 무림사에 기록된다는 것 따위는 의미가 없었다. 소림 장문인이 곁에 왔건만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열했다. 갈천상의 시신을 부여잡고. 終 조자경은 불가에 귀의했다. 남해 보타암 해월신니(海月神尼)가 바로 그녀이며, 무림 십대고수 중 일니(一尼)는 바로 그녀를 지칭한다. 하나 그녀는 무림에 나서는 일이 없고 오직 불도에만 전념한다. 비살문 소문주 소화남은 십대고수를 이끌고 비살문을 재건했다. 일흑은 갈천상이 소림사에서 사망하는 관계로 암살을 포기했다. 그는 비살문으로 돌아가 소화남과 함께 비살문을 재건했다. 만검진천 전종대는 만검가로 돌아가 가주직을 이어받았다. 그는 검왕(劍王)으로 불린다. 빙정신소 유건지는 계속 중원을 떠돌다가 중년이 넘은 후에야 운학문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운학문의 검공에 자신의 검공을 접목하여, 운학문을 사천 제일의 검가(劍家)로 끌어올렸다. 그녀는 사천제일미(四川第一美)로 불렸으나 혼인을 하지 않았다. 일심향불 백무는 강서성(江西省) 우민사(佑民寺)에 자리를 잡았다. 백무화상으로 불리며, 무림에서 완전히 은거했다. 건곤방은 봉가로서 명색을 유지하고 있다. 벽산개부 고규철은 네 무인과 함께 강호를 떠돌았다. 그는 최고의 무공을 추구했다. 백팔나한진이 파해된 칠 년 후, 그는 백팔나한진에 도전했으나 패퇴, 사망했다. 난주일검 장상부는 백문장에서 총호법으로 있다. 봉아와 덕진은 혼인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천화신의 하문화는 광동 하가를 멸문시킨 흉수를 찾아 복수했다. 마임호는 풍뢰구류흔으로 무림에서 활약, 섬전비붕(閃電飛鵬)이란 무명을 얻었다. 오경은 천하제일곡에 무심곡(無心曲)이라는 곡명을 지었으며 석계곡에 있는 사매 부부를 데려와 보살펴주었다. 철응방은 박우의 손자인 박창이 이어받았다. 패도적이던 과거와는 달리 심신수련을 목적으로 무도의 길을 열었다. 고가촌은 냉혈검 고표가 이어받았다. 그가 촌장이 된 다음부터 고가촌은 돈에 무공을 파는 매판(買辦) 행위를 하지 않았다. 백문장은 여전히 절강제일문파로 추앙받고 있다. 젊은 무인들은 절강 무림을 벗어나 대문파로 도약하자고 보채지만 귀호구혼이 강력하게 제지하고 있다. 제3권 이보명기신(以保明其身) 이 몸을 보우하사 깨우쳐 주소서 大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