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불행 오늘은 새로 입사하게 될 광고회사의 입사 연수가 있는 날이었다. 벌써 몇 번째 회사인지 몰랐다. 나는 한 회사에 오래 정착하지 못하고 반복적으로 사표를 내었다. 그래도 저번 회사에는 오래 남아 있었다. 대리까지 승진했으니, 꽤나 괜찮은 편이었다. 이번에 내가 입사하게 될 회사는 TBG라는 광고회사였다. 대학시절부터 내가 꼭 입사하고 싶던 회사였는데, 드디어 이번에 입사를 하게 되었다. 내가 원해서 들어가는 회사였지만, 이 회사에서도 얼마나 오랫동안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저번 회사처럼 오래 있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일주일도 있지 못하고 나올 수도 있었다.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리였던 나는, 또 회사의 가장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했다. “신입 사원 분들은 어서 이 버스에 타세요!” 회사 앞에 짐을 놓아두고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직원으로 보이는 여자가 소리쳤다. 그 말에 회사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몇몇 사람들이 버스 앞으로 몰려들었다. 나는 담뱃불을 끄고 짐이 든 가방을 들었다. 버스로 천천히 향하면서, 이번에 입사하게 된 동기들의 얼굴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대개는 이십대 중후반의 사람들이었으나, 간간히 나이가 제법 들어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여자와 남자가 절반 정도씩 섞여있었고, 다들 입사할 회사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 것 같았다. 나는 가장 마지막으로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의 앞 쪽에 자리를 잡고, 가방을 내려놓았다. 버스 안의 공기는 왠지 모르게 무겁고, 답답했다. 나는 창문을 살짝 열고, 차가운 바깥 공기를 마셨다. 우리를 인솔하는 회사의 직원은 버스에 올라탄 사람의 수를 세었다. 두 번이나 수를 세어보더니 수가 맞지 않는 듯, 직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직원은 자신의 손목에 채워진 손목시계를 쳐다보았다. 연수원으로 출발을 할 시간이 다 된 것 같았다. 직원은 명단을 한 손에 쥐고 한 명씩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이 마치 학교 다닐 때, 출석체크를 하는 것 같아서 묘한 느낌을 주었다. “강채린씨.” “네.” “이준민씨?” “네.” 나는 내 이름이 불리자, 짧게 대답을 하였다. 직원은 나와 시선을 한 번 맞추더니, 이내 명단을 보고 다른 이름을 불렀다. 나는 직원에게 두던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바람이 불어 밖이 춥기는 했지만, 날씨가 맑아서 햇살이 들었다. “서해정씨. 서해정씨 아직 안 왔나요?” 한 명씩 이름을 부르던 회사 직원이 한 사람의 이름을 반복적으로 불렀다. 하지만 버스 안에서는 어느 누구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는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보았다. 모이기로 한 시각보다 벌써 이십 여분이 넘어있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인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서로 불만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나는 무관심하게 창밖을 쳐다보았다. 많은 회사들을 거치면서 이런 일은 자주 있는 일이었다. 불만을 내뱉는 것조차도 무의미해보여서, 나는 그저 조용히 창밖만 보고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버스 안의 사람들의 불만이 최고조에 다를 무렵에, 지각생이 버스에 올라탔다. 숨을 헉헉 몰아쉬면서, 큰 목소리로 죄송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였다. 직원은 가시 박힌 말투로 지각생을 쏘아 붙이더니, 이내 내 옆자리에 지각생을 앉히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려, 내 옆에 앉은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숨이 찬 듯 헉헉 대고 있었다. “어?” 나는 내 옆자리에 앉은 여자를 보고, 나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 소리에 여자가 나를 슥 쳐다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여자는, 좀 전의 나와 마찬가지로 놀란 듯이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우리는 서로를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그런 우리와는 무관하게 버스는 시동이 걸리고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오페라?” 나는 작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내 말에 내 옆에 앉은 여자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얼마나 뛰어왔는지 여자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어젯밤, 현정의 연주회장 앞에서 만났던 여자가 신입사원으로 내 옆에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자꾸만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여자는 숨을 좀 고르더니, 내게 자신의 손을 내밀며 악수를 권했다. 나는 그 손을 빤히 쳐다보다가, 여자를 한 번 보았다. 여자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같은 신입 사원인데, 잘 지내 봐요. 서해정이예요.” 나는 여자가 내민 손을 잡고 가볍게 악수를 하였다. “이준민입니다.” 나는 간략하게 내 이름을 말하였다. 여자는 나와 마주했던 손을 떼더니, 고개를 살짝 갸웃 거렸다. 나는 무표정하게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 같이 표정을 짓더니 내 얼굴을 보았다. 생글생글 웃던 모습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어제, 스물다섯 살이라고 했죠? 그럼 나랑 동갑 맞는데…….”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요?” “이상해서요.” “뭐가요?” “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여자는 고개를 저으면서 말하더니, 이내 다시 눈웃음을 지었다. 나는 여자의 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창가 쪽으로 돌려버렸다. 차는 벌써 회사를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4박 5일 간의 긴 연수였다. 나는 회사를 옮길 때마다 이런 연수를 반복적으로 받아왔다. 이제는 연수라는 말만 들어도 치가 떨렸다. 신입사원이라는 꼬리표도 몇 번째인지 세기도 힘겨웠다. 이제 그만 하고 싶었다. 한 곳에 오래 정착하지 못하고, 반복적으로 회사를 옮겨 다니는 일도 지겨웠다. “저 이번이 첫 회사인데, 무지 떨려요! 그 쪽도 스물다섯 이니까, 처음이겠다. 그렇죠?” 여자는 약간 상기된 목소리로 말을 하였다. 나는 여자를 슬쩍 보고는, 네, 하고 짧게 대답을 했다. 나에게는 이게 셀 수도 없이 많이 스쳐간 회사들 중 하나예요. 차마 그 말은 할 수가 없었다. 나조차 믿기지 않는 일을, 남이 어떻게 믿을 수가 있을까. “그런데 스물다섯이면, 군대도 안 다녀온 건가?” “고등학교를 일찍 졸업했어요.” “와, 대단하다! 조기졸업?” “네.” 나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여자는 신기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면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난 밤, 속이 답답해서 술을 조금 마셨더니,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팠다. 조금 열린 창틈으로 시원한 바람이 내 뺨을 훑고 지났다. 차가운 바람을 조금 쐬니, 훨씬 나은 것 같았다. “이것 좀 먹을래요? 내가 좋아하는 건데, 우린 좀 특별한 인연 같으니까 하나 줄게요.” 여자가 내게 무언가를 내밀면서 말했다. 나는 여자가 내민 것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장미 모양의 초콜릿이었다. 단 것을 즐겨 먹지 않았기에, 받지 않으려고 했는데, 여자는 계속해서 초콜릿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초콜릿을 받아서 입 안에 넣었다. 특이한 맛이었다. 장미향과 초콜릿향이 묘하게 섞여서 입 안에 퍼졌다. 카카오가 아닌 다른 향이 첨가된 초콜릿은 언제나 거북한 맛이었는데, 여자가 건네준 이 초콜릿은 고급스러운 맛이 풍겼다. “어때요? 맛있죠?” “네.” “그럴 줄 알았어요. 이거 사실 내가 만든 거예요.” 여자는 해맑게 웃으면서 말했다. 지난 밤,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 했던 그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밝았다. 어젯밤의 인물과 동일한 사람이 맞는 것인지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어제는 그렇게 슬퍼 보이더니, 오늘은 그런 것은 다 잊은 듯 해맑았다. “초콜릿은 참 신기한 거예요.” 여자는 자신도 초콜릿을 입 안에 하나 넣더니 말하였다. “기분을 좋게 해주기도 하지만, 잊고 싶은 사실들을 잊게 할 수도 있거든요.”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잊고 싶은 사실들을 잊게 해준다. 이 초콜릿 하나가 잊고 싶은 그 사실을 지워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서 잊힐 수 있는 사실이었다면, 진작 잊었을 터였다. 그랬다면, 난 조금 더 행복했을 것이었다. “평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여자는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생글거리던 미소는 어느새 숨어버렸다. 감정 기복도 심하고, 표정 변화도 심한 사람 같았다. 어느 것이 진짜 이 사람의 모습인지 조금은 헷갈렸다. 어젯밤 눈물을 참으려 애쓰던 그 모습이 진짜인지, 아니면 방금 전까지 내 옆에서 생글거리며 웃던 모습이 진짜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지금 나를 진지한 표정으로 보고 있는 것이 진짜인지 알기 힘들었다. “비가 쏟아져요.” 나는 여자의 말에 창밖을 슬쩍 보았다. 비가 오기는커녕, 하늘은 맑기만 했다. 나는 어이없다는 듯이 여자를 보았지만, 여자는 여전히 진지한 표정이었다. “당신에게서 비바람이 불어요. 어둡고, 뭔가 슬퍼요.” “무슨 소리예요.” “그냥, 그렇다고요.” 여자는 그렇게 실없이 말을 하고는 다시 눈웃음을 지었다. 나는 여자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어서 고개를 갸웃했다. 내게서 비가 쏟아진다, 라니. 그 말이 어느 정도는 맞는 것도 같아서 왠지 웃겼다. 내 인생은 지금 비가 쏟아질 뿐 아니라, 천둥번개도 요란스럽게 치고 있었다. “이준민씨, 재밌는 사람 같아요.” 재밌는 사람이라. 그런 말은 내 오랜 삶 중에 처음 듣는 말이었다.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을 본 아이마냥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여자의 시선이 거북해서, 고개를 창밖으로 돌려버렸다. “진짜로 친하게 지내요. 준민씨랑 친해지고 싶어요.” 나는 여자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까부터 귀찮을 정도로 말을 걸어대는 여자가 귀찮기도 했다. 본래의 나는 사람들에게 살갑고, 다정한 편이었다. 하지만 나의 불행을 알고 난 후, 나에게는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 뒤로 나는 이기적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내 위주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행동했다. 그렇게 변해버린 나에게, 이 여자는 귀찮고, 조금은 짜증나는 존재였다. “좀 이상하죠, 나?” 여자는 소탈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여자를 쓱 보고는, 알긴 아나 보네요, 라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나의 그 말을 들은 여자는 웃음을 터트렸다. 여자의 웃음 포인트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특이한 사람이었다. 과도하게 밝고, 과도하게 붙임성이 좋았다. “친구들이 그러더라고요. 나 너무 쉽다고.” “쉽다고요?” “네. 친해지기도 쉽고, 내 속을 알기도 너무 쉽대요.” “그런 것 같네요.” “근데 애들은 그걸 몰라요.” 여자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자기들의 속을 아는 것은 더 쉽다는 걸.”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또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여자의 말과 행동이 이해되지 않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상한 여자였다. 선뜻 내게 먼저 말을 걸고, 친해지자고 하는 것을 보면, 쉽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여자가 무척이나 복잡하게 느껴졌다. 알 수 없는 말을 내뱉고, 알 수 없는 묘한 느낌을 풍겼다. “잠시 후면, 군포에 있는 연수원에 도착할 거예요. 내리면 인원 파악 다시 할 테니까, 이동하지 마시고 줄 서주세요.” 신입사원들을 인솔하는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말했다. 직원의 말에 여자는 들뜬 표정을 지었다. 첫 회사에 대한 기대감에 잔뜩 신이 난 것 같았다. 나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다는 걸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났다. 불행에 찌들어 사소한 것에서 오는 행복 같은 건 전혀 느끼지 못하는 지금과 달랐던 예전의 모습이었다. “신난다. 재밌을 거 같지 않아요?” 그때의 나는, 지금 내 옆에서 들뜬 표정으로 있는 이 여자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불행, 그것은 나의 행복한 기억마저도 점점 잠식하고 있었다. ★ 제 글이 늘 그렇듯이, 글의 초반부는 전개 속도가 조금 느릴 거예요. 비축이 없어 연재 속도도 진주처럼 빠르진 않을 거예요. 다른 말 하지 않겠습니다. 제 글이 '저만의 글'이라는 것을 반드시 보여 드리겠습니다. ^^* 02. 비밀 어디서나 월등한 사람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 월등하다는 것의 기준은 달라질 수가 있는데, 갑이라는 곳에서 월등하던 사람이 을이라는 곳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갑에서 월등하지 않던 사람이 을에서는 월등할 수도 있다. 처음에는 월등하지 않던 사람도 경험이 쌓이고, 노련해짐으로써 월등한 것처럼 보일 수 있는데, 그것이 나의 경우이다. 내가 첫 회사에 입사를 하였을 때, 나는 분위기를 맞추지 못하며 눈치조차 없는 사원이었다. 나는 내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지만, 언제나 다른 사원들에게 치이고, 상사에게 잔소리를 들었었다. 하지만 많은 회사를 다니면서 그러한 경험이 쌓이게 되고, 그로인해 나는 어느 정도 노련해졌으며, 다른 이의 눈에서는 내가 월등해 보일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지금부터 연수가 끝날 때까지, 최대의 창의력을 발휘하여 각 조에 주어진 노트북으로 광고 한 편을 만들어서 마지막 날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연수원의 강당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들렸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연수를 맡은 직원을 바라보았다. 광고 회사라고 하니, 연수 과정에 이런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하였지만, 광고 한 편을 만드는 것이 연수의 전체적인 골격이라고는 생각지 못해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단, 4박 5일간의 빡빡한 일정 속에서 각자의 능력을 발휘하여 광고를 만들어야 합니다. 광고 제작을 맡은 조원들에게는 조 배정이 난 후 삼십 분, 그리고 광고를 발표하기 전 삼십 분만이 주어질 뿐이며, 부족한 시간은 연수 기간 동안 각 조의 재량에 따라서 잘 활용하시기를 바랍니다.” 강당 안의 웅성거림은 더욱 커졌다. 제대로 조원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한 시간, 나머지 시간은 각자의 재량으로 만들어 내어야 한다. 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창의력을 요하는 광고회사에서 그렇게 간단한 과제를 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오래 전부터 내가 입사하고 싶었던 회사다운 어려운 과제였다. “그럼, 먼저 광고를 위한 조 배정 발표부터 하겠습니다. 조 배정은 컴퓨터를 이용한 추첨이 될 것입니다. 조 발표가 난 후부터 정확히 30분 동안 시간을 부여할 것이며, 30분 후에는 다음 일정을 위해 자리를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조별 과제가 본사 배정이나, 부서 배정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것을 알려 드립니다. 이번에 각 조가 광고해야 할 상품은 핸드폰입니다. 그럼 조 배정을 시작하겠습니다.” 직원의 말이 끝나자, 강당 무대 쪽에서 스크린이 내려왔다. 강당 안의 웅성거림은 점점 더 커져가고 있었다. 다들 회사에서 준 과제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에 반해서, 나는 좀 더 여유로운 편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 회사에 목숨을 걸었지만, 나는 이번 회사에서 제대로 못하면, 다른 회사로 가면 되는 것이었기에 큰 부담은 없었다. 어차피 오래있지 못할 회사였기에, 그다지 많은 애착도 없었다. 다니고 싶던 회사이긴 하였지만, 오래 남을 수는 없는 회사였다. 스물다섯에 멈춰진 내 시계는, 나를 한 곳에 오래 정착하도록 만들지 않았다. 스크린이 완벽하게 내려오고, 빔 프로젝트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스크린에 컴퓨터 화면이 뜨고, 직원이 Start라고 적힌 버튼을 누르자, 신입사원들의 이름이 섞이면서 하나씩 나열 되었다. 나는 스크린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A, B, C, D, E로 나누어진 다섯 개의 조. 그리고 E조의 가장 위에 내 이름이 떴다. 우리 조에서는 내가 가장 먼저 배정된 셈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나머지 조원들도 내 이름 뒤로 정렬되었다. 나는 우리 조에 배정된 한 이름에 시선이 멎었다. ‘서해정’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은 때로 무섭기까지 했다. 어젯밤, 오늘, 그리고 지금. 그 여자와 나와의 관계는 묘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장난처럼. 나는 누군가와 엮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과 엮이게 되면, 그로 인해 고통 받는 것은 나뿐만 아니라 그 사람까지였다. 내 저주 받은 인생에는 모두가 스쳐가는 사람이어야 했다. 나는 그래서 사람에게 정을 잘 주지 않았다. 내가 주는 정으로 그 사람이 다치지 않기를 바랐기에. “E조 모여주세요! 시간이 얼마 없어요!” 멍하니 넋을 놓고 있다가, 가까이서 들리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내가 그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에는 그 여자가 있었다. 서해정, 그 묘한 사람이 우리 조원들을 모으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 여자의 곁으로 갔다. 내가 옆에 멀뚱히 서서 가만히 있자, 여자는 나의 옆구리를 찔렀다. “뭐예요.” “남은 이렇게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는데, 그 쪽은 그렇게 있을 거예요? 벌써 4분이나 지났다고요.” “알았어요.” 난 여자의 성화에 못 이겨 목을 가다듬었다. 여자는 계속해서 우리 조원들을 불러 모았다. 다른 조들의 목소리와 웅성거리는 소리에 여자의 목소리는 자꾸만 묻혔다. 나는 그런 여자의 모습이 왠지 안쓰러워 보여서 큰 목소리로 우리 조원들을 불러 모았다. “E조는 이쪽으로 와주세요! E조는 모여주세요!” 나의 목소리와 그 여자의 목소리가 합해지자, 힘이 실렸다. 그리고 우리의 목소리에 조원들이 하나 둘 씩 모이기 시작했다. 그 여자와 나를 포함해 총 여덟 명이 다 모이기까지, 7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조원들이 모두 모여 둥그렇게 빙 둘러서 서고, 우리는 조원들을 얼굴을 익히기 위해 통성명을 하고, 서로를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를 포함하여 남자는 셋, 여자가 다섯이었다. “주어진 시간이 한 시간 밖에 없다니,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분명, 연수 중간 중간에 비는 시간이 있을 거예요. 그때 모일 수 있지 않을까요?” “하긴 그렇겠죠? 4박 5일 정도면, 비는 시간이 충분히 많을 거예요.” 조원들은 서로 그러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나서서 무언가를 하고 싶지 않아서 잠자코 있으려고 했으나, 조원들은 이번 과제를 너무 만만하게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들이 입사하려는 이 회사가 얼마나 대단한 회사인지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신들이 입사한 회사가 그렇게 만만하게 느껴지나요?” “네?” 내가 입을 열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 되었다. 나의 말이 좀 비꼬는 듯이 들렸는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쉽지 않을 거예요. 우리 여덟 명이 함께 모이는 기회는 지금을 제외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없을지도 몰라요. 물론 한두 명씩 마주치거나, 이야기할 기회는 생길지도 모르죠. 하지만 조원 전체가 모이지 않으면, 정상적인 토의를 하는 것은 불가능해요.” 나는 그렇게 말을 내뱉었다. 내 말을 듣고 조원들은 수긍을 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중간에서 매개체 역할을 해 줄 사람이 필요해요. 틈틈이 조원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다른 조원들과 연결해 줄 사람이 필요해요. 그런 사람을 정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컴퓨터를 잘 다루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디자인을 맡는 것도 좋겠죠.” 내 말에 모두가 숙연해졌다. 서로를 살피면서,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어떤 여자 한 명이 가볍게 손을 들었다. 그 여자는 캠코더를 손에 쥐고 있었는데, 아까부터 우리 조원의 모습을 계속 카메라에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디자인은 내가 맡을 게요. 컴퓨터는 조금 자신 있어요.” “좋아요. 그럼 매개체 역할을 해줄 사람을 정하는 것이 좋겠어요. 누가 하는 게 좋을 까요?” 나의 말에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나는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일을 피하는 것은 당연했다. 가장 힘들고, 가장 피곤한 일이었다. 어디에 있건 조원들을 찾아다니고, 의견을 수렴해야 하는 일이었다. “당신이 하는 건 어때요?” 나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해정, 그 여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생글생글, 버스에서처럼 살짝 웃으면서 나를 보았다. 여자의 말에, 모두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묘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하. 좋아요. 제가 고생 좀 할게요.” 내가 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암묵적으로 모두 동의를 한 결과에 반대를 던져봐야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럼 내가 정보원을 할게요.” “정보원이라뇨?” 서해정, 그 여자가 말을 꺼내었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무언가 자신에 찬 표정으로 조원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그리고 여자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내게 와서 닿았다. 나는 여자와 마주한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여자는 생긋 웃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 조가 아무리 잘 해도, 다른 조가 더 잘 하면 소용없잖아요. 다른 조보다 월등할 수 있도록, 정보를 수집해 올게요. 그런 건 자신 있어요.” “좋아요. 그러기로 해요.” “아참, 우리 아직 얼굴을 다 못 익혀서 서로를 잘 못 알아 볼 수 있으니까, 손등에 이걸 붙여 놓기로 해요.” 여자는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그 속에서 빨간 스티커 하나를 꺼내었다. 손등에 스티커를 붙이고 다닌다는 것이 조금 웃기기는 하였지만, 조원들을 알아보는 데에 그보다 좋은 방법은 없을 것 같아서 수용하기로 했다. 우리는 여자에게서 스티커를 하나씩 받아서 손등에 붙였다. 거기까지 끝내자, 무대 위에서 시끄러운 종소리가 들렸다. 주어진 삼십 분이 지났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마지막으로 파이팅이나 한 번 하죠?” 여자는 조원들을 보면서 말했다. 우리는 그 말에 동의를 하고, 동그란 원 안으로 손을 모았다. 차곡차곡 쌓인 손의 가장 위에 나의 손을 얹었다. 그리고는 내가 하나, 둘, 셋이라고 번호를 붙이자, 조원들은 다 같이 파이팅을 외쳤다. 짧은 파이팅을 마치고, 한 데 모여있던 우리의 손이 흩어지자, 나는 조원들을 쳐다보았다. 모두 자신감에 넘친 표정이었다. 하지만 단 한사람, 서해정, 그 여자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뭔가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금세 살짝 미소를 지으며, 생글생글하던 모습으로 돌아갔다. 나는 여자의 밝은 표정을 보고는 고개를 돌리었다. 그렇게 주어진 삼십 분이 끝나고, 우리는 다음 일정을 위해 이동하였다. 역시나 나의 추측이 맞았다. 연수가 진행되는 동안, 같은 조원들이 뭉칠 수 없도록, 각 활동마다 새로이 조를 짜서 시간차를 두고 일정을 진행하였다. 나는 노트와 펜을 항상 들고 다니며 조원들이 보일 때마다 다가가서 의견을 수렴하였다. “이준민씨.” 연수 첫 날, 도미노 게임을 위해 준비를 하고 있는데, 서해정, 그 여자가 내게로 다가왔다. 다행히 나와 일정이 맞았던 모양이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안주머니 속에서 작은 수첩과 펜을 꺼내었다. 그 속에는 그동안 조원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눈 것이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일단 이거 읽어볼래요? 아직 서너 명 밖에 만나지 못해서 자료가 많이 쌓이지는 않았어요. 대략의 콘셉트도 정해야 하는데, 아직 아무 것도 정해진 것이 없어요.” “그것 보다요.” “네?” “그것 보다, 뭐 하나 알려주고 싶은 게 있어요.” “알려주고 싶은 거라뇨?”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약간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주변을 슬쩍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조심스럽게 내게 말을 하였다. 나는 소란스러운 가운데, 여자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집중했다. “조심해요. 파란색 뿔테 안경을 끼고 있던 여자, 회사 직원이에요.” “네?” “아직 모든 조들을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여태까지 살펴본 조들을 볼 때, 각 조에 한 명씩은 이 회사의 직원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아요. 각 조의 조원들이 어떻게 활동을 하는지 지켜보기 위해서 심어놓은 것 같아요. 그러니 조심하라고요.” “그런 걸 어떻게 알았어요?” “난 정보원이잖아요.” 여자는 진지한 표정을 지우고, 생글생글 웃으면서 나를 보았다. 나는 의아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러한 정보는 쉽게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알아내려 한다고 알아낼 수 있을만한 정보도 아니었다. 이 정보가 진실이 맞는지, 사실 의심스럽기도 했다. “믿어도 괜찮을 거예요. 난 누구를 해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요.” “그런 정보를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이에요?” “누군가의 기억을 더듬거리다 보면 알 수 있어요.” 여자는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누군가의 기억을 더듬거린다.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내가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고 할 때, 여자는 이미 누군가의 부름을 받고 내 앞에서 사라져 있었다. 나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묘한 사람이었다. 과도하게 밝고, 과도하게 붙임성이 좋았지만, 그 속은 복잡해서 쉽게 알 수가 없었다. 뭔가 아주 큰 비밀을 안고 있는 것만 같았다. 출처 : 프레쥬얼라인 신비한개구리케이크 03. 시간을 되돌린다면. 기다란 해안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오직 두 대의 차만이 해안 도로에서 나란히 질주 하고 있을 뿐이었다. 여름의 뜨거운 햇살, 그 아래로 신나는 음악과 함께 차는 질주했다. 앞서 달리는 차에 타고 있던 사람이 창문을 내리고 팔을 뻗어 손을 흔들었다. 그러면 마치 대답을 하듯이, 뒤따라 질주하던 차에서도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들었다. 앞차에는 세 명의 남자가 타고 있었고, 뒤차에는 두 명의 남자가 타고 있었다. 뒤따르는 차를 운전하고 있는 사람, 그건 나였다. 나는 신나는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면서 앞서가는 차를 따랐다. “무슨 바람이냐? 네가 여행 가자는 소릴 다하고?” “문성현, 너 유학가기 전에 추억이라도 하나 만들어 줘야 할 것 같아서.” “이준민, 좀 감동이다?” “시끄러, 인마.” 나는 그렇게 툴툴거리며 말하면서, 살짝 미소를 지었다. 유학을 떠나는 친구를 위한 여행이었다. 뜨거운 여름, 우리는 시원한 바다가 보이는 해안도로를 신나게 질주했다. 미리 예약해 두었던 펜션에 도착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었다. “야. 노래가 너무 쳐져. 다른 노래 없냐?” “다른 노래? 잠깐만.” 나는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보조석에 있는 대쉬보드를 열었다. 손으로 더듬거리며 씨디를 찾았지만, 정신없이 헝클어진 대쉬보드 안에서 씨디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결국 고개를 돌려 대쉬보드 안에서 씨디를 꺼내었다. 꺼낸 씨디를 친구에게 건네주고 운전을 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때부터가 나의 불행의 시작이었다. 차에 이상이 생겼는지, 내가 씨디를 찾을 동안 앞차는 잠시 멈추어 섰다. 그리고 운전을 하던 호영이는 담배를 입에 물고 차 밖으로 나와 있었다. 씨디를 찾느라 운전에 집중하지 않았던 나는 그것을 미처 보지 못했고, 내 차는 그대로 앞차를 들이받아 버렸다. 빠른 속도로 달리던 까닭에 내 차와 앞차는 완전하게 으그러졌다. 신나게 흘러나오던 음악은 그대로 멈추어 버렸고, 나는 나를 덮쳐오는 유리 조각들과 으그러진 차체에 다치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무의미 했다. 머리와 팔 쪽에서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고통은 그 뒤에 찾아왔다. 차에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잠식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난 뜨거운 태양보다 더 뜨거운 것을 보았다. “아악!!” 호영이가 피고 있던 담뱃불이 새어나온 기름에 옮겨 붙은 모양이었다. 앞차는 뜨거운 화염에 뒤덮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은 내 차까지 잠식하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순간 나에게는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그 생각뿐이었다. 엉망으로 으그러진 차 문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살아야 한다는 그 생각에 고통 따위는 잊은 채, 뒷좌석으로 몸을 움직였다. 부서지고, 구겨진 차 때문에 몸을 움직일 때 마다 상처가 나고, 뜨거운 피가 흘렀지만 긴박한 그 상황에서 고통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나는 차문을 열고 차에서 빠져나왔다. 필사적으로 차에서 빠져나온 나는 차에서 멀어지기 위해 정신없이 기었다. 활활 불타오르고 있는 앞차와 본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도 없을 만큼 으그러진 내 차. 나는 그 두 차를 보았다. 그리고 내 차 안에서 죽어가고 있는 성현이를 보았다. “성현아!!” 나는 성현이를 불렀지만, 내 목소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앞차에 있던 불은 결국 내 차로 옮겨 붙었고, 굉음과 함께 차는 폭발해 버렸다. 그리고 점점 내 시야는 불투명해졌다. “이봐요! 이준민씨!” 나는 나를 부르는 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내 몸이 축축했다. 나는 내 이마에 흐르는 액체를 손으로 닦았다. 땀…? 피가 아니라 땀이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해안도로는 사라지고, 내 눈 앞에 있는 것은 연수원이었다. “레크리에이션 중에 자는 사람은 또 처음이네요. 벌써 다 끝났어요. 이제 숙소로 돌아가야 한다고요.” 악몽을 꾸었나보다. 그 날의 사고는 잊을만하면, 이렇게 나를 찾아와 괴롭혔다. 스물다섯, 나의 불행이 시작되었던 그 날의 사고. 모두가 떠났으나, 나 혼자만 살아남은 악몽 같은 기억은 반복적으로 나를 찾아왔다. “어서 가요. 우리가 마지막이라고요.” 나는 내 앞에 있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서해정, 나를 깨운 것은 그 여자였다. 나는 계속해서 재촉하는 여자의 성화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온 몸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 아찔한 사고는 나의 불행을 다시금 되새겨주었다. 스물다섯, 그 시간에 멈추어진 나의 시간. “많이 피곤했나 봐요? 레크리에이션, 엄청 시끄러웠는데 잠을 다 자고.” “그러게요. 잠이 든 줄도 몰랐어요.” “뭐 안 좋은 꿈이라도 꿨어요? 식은땀 잔뜩 이네요.”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나는 무뚝뚝하게 대답을 하고 강당에서 빠져나왔다.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대체 언제 잠이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레크리에이션이 시작하고, 내 옆 자리에 서해정, 그 여자가 앉았다. 그 여자에게 현재까지의 진행상황을 알려주려고 작은 수첩을 꺼내었고, 여자는 그것을 받았다. 그러면서 우리의 손가락이 맞부딪혔는데, 그 뒤부터는 기억이 없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서, 이마에 손을 대었다. 나는 이렇게 빈틈을 보이는 사람이 아닌데, 대체 언제 잠이 든 것인지 알 수 없어서 답답했다. “있잖아요.” “네?” “누군가의 삶에는 참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잘 일어나는 것 같아요.” “네?” “믿을 수 없는 일들, 차마 다른 이에게 말할 수 없는 세상의 비밀.”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Unbelievable(믿을 수 없는), 이거 어때요? 우리 핸드폰 광고의 주제로요.” Unbelievable, 내 삶에 딱 맞는 단어였다. 믿을 수 없는 일, 스물다섯에 멈춰진 나의 시간.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내 가슴이 찌르르하게 아파왔다. 내 삶을 축약한 단어 같이 느껴졌다. “…좋겠네요.” “네?” “Unbelievable, 그게 좋겠어요.” 나는 안주머니 속에서 수첩을 꺼내었다. 그리고 Unbelievable이라고 뚜렷이 써 내렸다. 숙소로 돌아와서 서해정, 그 여자와 나는 헤어졌다. 여자는 숙소 안으로 들어가기 전 내 손에 초콜릿을 쥐어주었다. 나는 초콜릿을 받고 여자를 빤히 보았다. 여자는 생긋 웃고는 숙소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여자가 사라진 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남자 숙소로 들어온 나는 양치와 세수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레크리에이션 도중 잠을 자서 그런지,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이 들면, 그 끔찍했던 기억이 나를 찾아 올 것만 같았다. 그 날 사고의 기억은 때때로 나를 찾아와 괴롭혔다. 마치 그 날을 잊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와 같았다. ‘준민아, 너를 이해하지 못하는 내가 잘못된 것일까?’ 문득 내 귓전으로 현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혼 후, 카페에서 마주한 우리는 오랜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현정은 그렇게 말을 내뱉었다. 눈물과 함께였다. 내 앞에서 쉽게 눈물을 보이지 않는 현정이었는데, 그 날만은 참으려는 노력도 없이 눈물을 흘려보내었다. 현정의 그러한 모습을 보고 있던 나는, 현정보다 더 힘들었다. 현정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나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삶을 현정이 이해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현정을 떠나온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내 삶을 견딜만한 용기가 없었다. 나의 아내였던 현정은 시간이 갈수록 늙어 가는데, 나는 영원히 스물다섯이라는 자리에 멈춰있을 것이었다. 내 귀여운 딸 채은이는 한 살 한 살 커갈 것이고, 그러다 스물다섯에 멈춰진 아빠의 시간을 넘어서 버릴 지도 몰랐다. 난 차마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없었다. 나의 가족들에게 그 고통을 안겨줄 수 없었다. ‘아빠?’ 내 귓가에 채은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너무나 보고 싶은, 너무나 안아보고 싶은 내 사랑스러운 딸, 이채은. 내 인생의 시간이 멈추지 않았다면, 난 지금쯤 사랑하는 딸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 채은이도 아빠의 사랑을 받으며 밝고, 명랑하게 클 것이었다. 남편의 빈자리로 힘들어 할 현정도 없었을 것이었다. 나는 못난 남편이자, 못난 아빠였다. 나는 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던 초콜릿을 입 안에 넣었다. 잊고 싶은 기억을 잊게 할 수 있다는 그 여자의 말이 사실이기를 바라면서. 시간을 새기다(Engrave the Time). 연수는 순탄하게 흘러갔다. 4박 5일의 연수는 참 길다고 느껴졌는데, 생각보다 시간은 빨리 갔다. 어느덧 연수는 절반 이상이 끝나가고 있었다. 우리 조의 광고는 서해정씨의 아이디어인 ‘Unbelievable’이라는 주제로 만들어졌다. 조원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유쾌하고 신나는 분위기로 광고 제작에 들어섰다. “다른 조보다 우리 조 진행이 월등하게 빨라요. 잘 될 것 같아요!” “그래요?” “네! 다른 조는 아직 구상 단계에서 못 벗어났어요. 다른 조들은 여유 시간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었나 봐요. 우리가 현명했어요.” “다행이네요. 잘 해서 우리 조원들 모두 꼭 본사로 입사 해야죠.” 내 말에 서해정, 그 여자가 밝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그 여자와 내가 만날 기회가 잦았다. 다른 조원들과 같은 활동을 하는 것은 하루에 고작해야 한 개정도 인데, 이 여자와는 거의 대부분의 활동을 함께 했다. 그 여자와 자꾸 얽히는 것이 그다지 나쁘지 만은 않았다. “이준민씨! 초콜릿 먹을래요? 이거 이제 몇 개 안 남았어요. 으아, 슬프다.” “몇 개 없으면 그냥 혼자 먹어요.” “에이, 그래도 나눠 먹어야 맛있죠! 먹어요.” 서해정, 그 여자는 우리가 버스 안에서 다시 만났던 그 날처럼 초콜릿을 내밀었다. 단 것을 싫어하는 나였지만, 그 여자가 건네주는 초콜릿은 왠지 맛있어서 부담 없이 먹게 되었다. 게다가 그 여자가 처음 내게 초콜릿을 주면 했던 말이 떠올라서 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초콜릿은 참 신기한 거예요. 기분을 좋게 해주기도 하지만, 잊고 싶은 사실들을 잊게 할 수도 있거든요.’ 잊고 싶은 사실, 내 시간이 스물다섯에 멈춰있다는 그 사실. 이 초콜릿이 그 사실을 어떻게 잊게 할 수 있겠냐마는 왠지 모르게 그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날의 사고와 그 이후 내게 주어진 불행을 잊게 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서해정씨.” “네?” “있잖아요.” “네. 말해 봐요. 뭔데요?” 여자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나를 보았다. 항상 밝게 웃는 모습이 내 삶과는 정 반대의 모습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늘 이 여자를 보고 있으면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와는 다른 삶, 나와는 다른 밝은 삶인 것같이 느껴져 가끔은 질투도 났다. 어둠 속에 가려져 웃음마저 잃어버린 내 삶과는 정말로 많이 달랐다. “잊고 싶은 사실을 잊게 할 수 있다, 라고 했잖아요.” “네? 아, 그랬죠! 왜요?” “당신에게도 잊고 싶은 사실이 있을까, 싶어서요.” 언제나 밝게 웃는 서해정, 그 여자에게는 잊고 싶은 사실도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화창한 것 같아 보이는 그 여자의 삶에서도 과연 잊고 싶은 사실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해요.” “…….”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고요.” “네?” “자기에게 닥친 불행은 언제나 남에게 닥친 그것보다 크게 느껴지는 법이에요.” 여자는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좀 전의 생글거리던 미소는 사라져 버렸다. 여자는 씁쓸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내 눈을 직시했다. 마치 무언가를 알려주고 싶다는 무언의 표현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 여자가 내게 말하려고 하는 바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시간은 참 무서운 것이에요.” “네?”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아무 것도 바꿀 수 있는 게 없어요. 한 번 지나가 버리면, 그걸로 끝이에요.” 여자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여자는 생긋 한 번 웃고는 뒤돌아섰다. 그리고는 오른 손을 들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는 한 발씩 내게서 멀어져 갔다. “다음 일정 시작하네요. 나중에 봐요, 이준민씨.”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여자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아무 것도 바꿀 수 있는 게 없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나는 언제나 그렇게 생각했다. 스물다섯, 사고가 일어났던 그 시간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많은 것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음악을 바꾸기 위해 대쉬보드를 열지 않았더라면, 대쉬보드 안이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더라면, 호영이가 담배를 피우지 않았었더라면, 그것이 아니라면 내 차가 호영이의 차보다 앞서 달리고 있었더라면 많은 것을 바꾸지 않았을까, 하는. ★ 늦어지는 연재에 죄송합니다. 글을 쓰면서 참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댓글을 달아주시는 분들 때문에 힘을 내고, 늦었지만 글을 가져 오게되었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04. 당신은 대체 어떤 사람이죠? 연수원에 거의 적응하고 나니, 벌써 연수는 마지막에 다다라 있었다. 4박 5일간의 연수가 참 길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저런 활동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금세 마지막이었다. 이 세상의 시간은 무섭게 흐르는데, 나의 시간은 그 자리에 멈추어서 움직일 생각을 않았다. 사실 처음에는 내 시간이 멈추었다는 사실을 나조차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남들보다 그저 동안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중에 나는 내 시간이 남들보다 조금 더디게 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정과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낳았지만 늙지 않는 내 모습을 보며, 내 시간이 멈추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사실 처음에 시간이 멈추어진 것은 내게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영원한 삶을 살 수 있으며, 영원한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축복받은 삶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것이 행복이 아니라는 것은 얼마지 않아 깨달을 수 있었다. 불행이 내 삶을 잠식했음을 깨닫는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멈춰진 시간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사람들이 내 곁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잠시 후에 회사의 경영실장님으로 계신, 정은결 실장님께서 신입사원분들을 위해 특별한 말씀을 하시겠습니다. 그런 후에는 곧장 30분 동안 조별로 토의할 시간을 드리겠고요. 30분이 지나면, A조부터 차례로 제작한 광고를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연수 첫 날 모습을 보이고는 보이지 않던 직원이 마이크를 잡고 그렇게 말하였다. 강당에 모인 신입사원들은 무대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잠시 후, 무대 왼쪽으로부터 회사의 경영실장이 모습을 보였다. 실장이라고 해서 나이가 제법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젊은 사람이었다. 검은 슈트를 말끔히 차려 입고 올라오는 그 사람은 단상 앞에 서서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마이크를 잡았다. “안녕하십니까. 열정이 가득한 신입사원 분들을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경영실장인 정은결입니다.” 낮고, 신뢰감 있는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하는 남자에게 박수가 나왔다. 나는 박수를 치며 강당 안을 둘러보았다. 디자인을 맡은 우리 조의 조원인 민정씨는 캠코더를 한 손에 들고 무대를 찍고 있었다. 그 여자는 4박 5일 간의 일정 내내 거의 캠코더를 손에서 놓지 않았었다. 나는 시선을 그 여자에게 잠시 두었다가 이내 다른 곳으로 돌렸다. 시선을 조금 돌리자, 내 눈에는 서해정, 그 여자가 들어왔다. 그 여자는 우리 조원이 아닌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자의 얼굴에는 미소가 한 가득이었다. ‘언제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해요.’ ‘…….’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고요.’ ‘네?’ ‘자기에게 닥친 불행은 언제나 남에게 닥친 그것보다 크게 느껴지는 법이에요.’ 불행 따위는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행복하고, 좋은 일들만 가득했을 화사한 웃음이었다. 그래서 조금은 화가 나기도 했다. 그 여자는 아파본 적 없으면서, 힘들어서 죽고 싶었던 적도 없으면서, 남의 아픔을 과소평과 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멍하니 서해정, 그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 여자는 옆에 앉은 동기와 신나게 이야기를 하다가, 돌연 내 쪽으로 돌아보았다. 나는 고개를 돌릴 새도 없이, 여자와 시선이 마주쳐 버렸다. 서해정, 그 여자는 나를 보며 씩 웃고는 살짝 손을 흔들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시선을 다시 무대 쪽으로 두었다. 왠지 서해정, 그 여자가 나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시선을 무대에 고정시킨 채 움직이지 않았다. “이렇게 열정으로 가득 찬 신입사원 분들을 만날 수 있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저는 지금부터 저희 회사가 추구하는 이념에 대해서 간략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루한 연설이 이어졌다. 나는 멍하니 무대를 바라보았다. 깔끔한 복장의 경영 실장은 무대 아래에 앉아 있는 신입사원들을 한 명씩 훑듯이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연설을 이었다. “점점 가속을 더해가는 세상에서, 광고 역시 남들보다 빨라야 하며, 남들보다 창의적이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기발하고, 참신한 광고는 박수를 받지만, 진부하고, 뒤떨어진 광고는 외면당하기 마련입니다.” 나는 지루한 연설에 다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강당 안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뜯어보았다. 4박 5일 동안 많은 활동을 함께하면서 익숙한 얼굴도 있었지만, 처음 보는 것같이 낯선 얼굴도 제법 있었다. 강당을 둘러보던 내 시선이 나도 모르는 새에 서해정, 그 여자에게로 닿아있었다. 환하게 웃는 그 여자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시선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나는 또 시선이 마주칠까 두려워 고개를 돌려버렸다.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이 세상에 창조적인 시선과 카메라만을 더함으로서 우리는 진보한 광고를 창조해낼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단순히 지나치는 일상의 일들을 신선한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그것은 믿을 수 없이 획기적인 광고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저희 회사가 추구하는 인재는 바로 그러한 시각을 가진 사람입니다.” 나는 따분하게 이어지는 연설을 멍하니 듣고 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지루한 연설이었다. 많은 회사를 지나오며 이와 비슷한 연설은 수없이 들어왔었다. 나는 연설을 귀로 흘려보내며, 머릿속으로 거의 완성되어가는 우리의 광고를 떠올렸다. Unbelievable, 믿을 수 없는, 그것을 주제로 하여, 유쾌한 분위기의 광고였다. 마지막으로 몇 가지 어색한 부분만 수정하면, 당장 TV에 내놓아도 괜찮을 만한 광고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우리는 조원들의 놀란 표정을 개성 있게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는 미적 감각이 뛰어난 연정씨가 화면에 귀여운 낙서를 더했다. 그리고 조원들의 영상이 끝나면, 딱 한마디 ‘Unbelievable’이라는 문구를 남겼다. 그리고는 반드시 사용하라고 회사에서 제시한 2초짜리 핸드폰 영상을 이었다. 15초짜리 광고는 아주 간단히 만들어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끊임없이 의견을 나누고, 보기 좋은 화면을 만들어내기 위해 오랜 시간을 투자하였다. 서해정, 그 여자의 정보가 확실하다면, 우리는 다른 조에 뒤지지 않는 훌륭한 광고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나는 만족에 찬 미소를 지었다. 이 회사는 다른 회사와 달리 재미있는 연수과정이 많아서,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역시나 내가 오래전부터 입사하고자 했던 이유가 있었다. 4박 5일 간의 긴 연수는 조금 힘들긴 했으나, 흥미롭고, 신선했다. “연수의 마지막을 앞둔 여러분, 반갑습니다. 당신이 밟고 있는 이 자리에서 믿을 수 없는 상상력이 시작됩니다. 새로운 세계, 창조적인 미래를 향하고 있는 당신을 환영합니다. 지금 여기서부터 더 큰 세상을 향해, 창조의 나래를 펼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경영실장, 정은결이었습니다.” 잠시 정신을 놓고 있던 나는, 연설을 마치는 박수소리에 깜짝 놀라하며 정신을 차렸다. 나는 박수를 치며, 무대 아래로 내려가는 경영 실장을 쳐다보았다. 그 사람이 무대에서 사라지자, 강당 내부는 소란스러웠다. 이제 마지막으로 30분이 주어질 것이고, A조부터 차례에 따라서 광고를 발표하게 될 것이었다. 아직 마무리를 제대로 끝내지 않은 다른 조들은 급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시 후, 별다른 안내 없이 무대 위에서 스크린이 내려오고, 삼십 분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나는 강당 안을 둘러보았다. 언제 모인 것인지, 민정씨가 있던 자리에 우리 조원들이 벌써 다 모여 있었다. 나는 바삐 그 쪽으로 다가갔다. “이건 말도 안 돼요! 다시 해야 해요. 절대로 이걸 그대로 발표해선 안 돼요!” 내가 조원들의 곁으로 다가가자, 서해정, 그 여자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 여자는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조원들을 한 명씩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여,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죠? 서해정씨?” “광고를 다시 만들어야 해요.”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서해정, 그 여자는 뜬금없이 그렇게 말을 했다. 무대 위 스크린에서는 시간이 쉼 없이 줄어들고 있는데, 그 여자는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다른 조원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조원들은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똑같아요.” “네?” “B조, D조가 우리 조의 광고와 똑같다고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서해정, 그 여자의 말에 모두들 깜짝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의 시선은 모두 그 여자에게 집중되었다. 여자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말했죠? 저기 저 분.” 그 여자는 돌연 조원 중 한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자가 가리킨 사람은, 파란색 뿔테 안경을 끼고 있는 사람이었다. ‘조심해요. 파란색 뿔테 안경을 끼고 있던 여자, 회사 직원이에요.’ 연수가 시작할 즈음, 여자가 내게 말해주었던 것이 기억이 났다. 회사의 직원이라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동안 그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다른 일정과 더불어 광고제작까지 하느라 정신없이 바빠서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조원들의 표정을 광고에 담자던 아이디어를 낸 것은 바로 저 사람이었다. 나는 둔탁한 것으로 머리를 두드려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말했잖아요. 각 조에는 회사의 직원인 스파이들이 한 명씩 있다고요. 그 사람이 원인이에요. 각 조에 비슷한 아이디어를 내놓았고, 다른 조들과 우리의 광고가 같아지게 된 거예요. 지금이라도 당장 대책을 세워야 해요. 결국 Unbelievable, 그 문구만 다를 뿐, 다른 조와 거의 똑같다고 할 수 있어요.” 여자의 말에 조원들은 다들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만만치 않은 회사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런 것까지 미리 계획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회사의 직원임이 탄로 난 여자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무대 위의 스크린을 쳐다보았다. 우리에게 남겨진 시간은 23분, 그 안에 새로운 광고 한 편을 만들어 내야 했다. 나는 조원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리고 내 시선이 멈춘 것은, 민정씨가 들고 있는 캠코더였다. “민정씨.” “네?” “방금, 연설 있죠?” “무슨 말이에요?” “방금 연설한 거, 캠코더에 있죠?” 내 물음에 민정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민정씨의 손에 들려있는 캠코더를 뺏듯이 가져왔다. 그리고는 그 안에 담긴 영상을 빠르게 되돌려 보였다. 캠코더 안에는 우리가 연수를 하며 있었던 모든 일정들이 다 담겨있었다. 작은 캠코더 이었음에도 화면이 많이 흔들리지 않고, 화질이 깨끗한 편이었다. “Unbelievable, 주제는 그대로 가요. 그리고 이 영상들을 연결 시켜요.”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는 거예요?” “지금 상황으로서는, 이게 가장 좋은 방도인 것 같아요. 민정씨, 도와줄래요?” 나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민정씨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노트북을 펼쳤다. 그리고 캠코더와 노트북을 연결시키고, 그 안의 영상을 컴퓨터로 옮겼다. 스크린 속 시간은 자꾸만 줄어들었고, 조원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았다. 민정씨는 나의 지시에 따라서 영상들을 잘라내고, 새로 편집하였다. 우리가 4박 5일 동안 만들었던 광고는 한 번에 지워지고, 새로운 광고가 단 23분 안에 만들어지고 있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동안 우리 조원들과 함께 노력했던 것들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다른 조와 똑같은 광고를 발표할 순 없었다. 나는 민정씨를 비롯한 조원들과 빠르게 의견을 교환하며 영상을 재편집했다. 그리고 마지막은 똑같았다. Unbelievable, 그리고 핸드폰 영상. “많이 어설플 거예요. 하나도 다듬지 않았으니까요.” “괜찮아요, 민정씨. 수고했어요. 우리 조는 이걸로 최선을 다했으니 된 거예요.” 내 말에 조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서해정, 그 여자를 쳐다보았다. 여자는 아까의 불안한 표정을 지우고, 조금은 안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여자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삼십분이 마감되었음을 알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각 조의 광고는 2분 이내로 제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완성된 광고를 파란 뿔테 안경을 낀, 회사 직원에게 넘겨주었다. 직원은 우리 조원들을 보며 수고했다는 말을 남기고 무대 앞 쪽으로 나갔다. 나는 조원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긴장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모든 조들의 광고가 제출되고, 순서에 따라 A조의 광고가 먼저 발표되었다. 우리는 모두 긴장된 표정으로 스크린을 보았다. A조의 광고는 진지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광고였다. A조의 광고가 발표될 때, 다른 C조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것이 어떤 의미의 웅성거림인지 대충 눈치를 챌 수 있었다. C조 역시 A조와 거의 동일한 광고를 제작했음에 틀림없었다. 웅성거림에 묻혀 A조의 광고가 끝나고, C조를 제외한 우리는 조촐한 박수를 보냈다. 그 다음으로 B조의 광고가 스크린에 비춰졌다. “진짜다.” “정말로, 똑같았네요.” B조의 짧은 광고를 보며 조원들은 하나같이 그 말을 내뱉으며 서해정, 그 여자를 쳐다보았다. 여자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대체 그러한 정보를 어디서 얻었는지 궁금할 뿐이었다. B조의 광고가 나오는 동안, D조에서는 소란스러움이 일었다. 강당 안은 순식간에 어수선해졌다. 나는 무대 위에 있는 직원을 쳐다보았다. 직원은 살짝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미소의 의미가 왠지 무섭게만 느껴졌다. 강당 안은 소란스러웠지만, 그것과 관계없이 C조의 광고가 스크린에 비춰졌다. C조는 자신들의 광고를 보며, 이미 자포자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히려 C조의 광고를 본 A조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D조의 광고가 발표될 때에도 똑같은 현상이 일었다. D조는 자포자기한 채로 광고를 보았고, B조는 그 광고를 보며 당혹스러워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조의 순서였다. 우리 조원들은 모두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방금 전까지 무대 위에서 연설을 하던 경영실장의 모습이 화면에 나타났다. ‘당신이 밟고 있는 이 자리에서 믿을 수 없는 상상력이 시작됩니다.’ 그러고 나서는 화면이 바뀌고, 연수 과정 중 도미노 쌓기를 하는 신입사원들의 모습이 흑백 화면으로 나왔다. 도미노가 쓰러지자 절망하고, 도미노를 완성시키고는 기뻐하는 모습이 이어져 나왔다. 그리고는 다시 화면이 바뀌었다. ‘새로운 세계, 창조적인 미래를 향하고 있는 당신을 환영합니다.’ 그 다음으로는 체육대회 중 릴레이를 하는 영상이 흑백으로 흘러나왔다. 얼굴에 한가득 미소를 짓고서는 앞을 향해 마구 달리는 모습, 그리고 그를 응원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화면에 나왔다. 그리고 또다시 연설 화면으로 바뀌었다. ‘지금 여기서부터 더 큰 세상을 향해, 창조의 나래를 펼치시길 바랍니다.’ 화면 위로 Unbelievable 이라는 글자가 내려앉았다. 그리고 화면은 점점 어두워지고, 회사에서 주어진 핸드폰 영상이 짧게 흘렀다. 조원들과 나는 넋 놓고 우리의 광고를 쳐다보았다. 짧은 시간에 급히 만든 것치고는 제법 완성도가 있었다. 비록 시간이 부족해 영상의 세련미는 떨어지고, 조잡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다른 조와 동일한 광고를 발표하는 것보다는 훨씬 훌륭했다. 우리의 광고가 끝나고, 나는 자축의 박수를 크게 보내었다. 그리고 조원들을 보았다. 광고를 본 조원들은 만족스러운 듯 밝게 웃고 있었다. 특히나, 서해정, 그 여자는 더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와, 다행이다! 성공이다, 그렇죠?” 내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는지, 여자는 돌연 내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자는 아주 해맑게 웃고 있었다. 나는 살짝 미소를 짓고는, 여자와 가볍게 하이파이브를 하였다. 다른 조와 달리 우리 조는 축제 분위기였다. 나는 그런 가운데서 서해정, 그 여자만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알았을까. 우리 조의 광고가 다른 조와 같다는 그 사실을 대체 어떻게 해서 알게 되었을까. 나는 그 의문이 가시질 않았다. 나의 눈길은 자꾸만 그 여자에게서 멎었다. 밝게 웃는 여자의 미소는 보는 사람마저도 기분 좋게 하였다. 한없이 맑은 그 여자를 보고 있을수록, 또 다른 의문은 나를 계속해서 잠식했다. 서해정, 당신은 대체 어떤 사람이죠? ★ 요즘만큼 글을 쓰는 것이 버거울 때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땡스투 생략합니다. 30일 재생기간 만료 가사 뮤비 05. 진실은 쓰다. 출처 : 프레쥬얼라인 신비한개구리케이크 한 번 생겨버린 인연의 끈은 결코 쉽게 놓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각 조의 스파이로 인해 혼란스러웠던 연수의 마지막 단계, 그 단계를 멋지게 뛰어넘은 우리 조는 회사의 직원들에게 극찬을 받았고, 훌륭한 성적으로 본사 입사가 확정되었다. 회사의 계열사에서 일하며 웨이팅 기간을 갖는 다른 동기들에 비하면, 우리 조의 조원들은 다른 동기들보다 훨씬 앞서나가는 셈이 되었다. 연수가 끝나고 3일 후에 나는 본사의 기획부로 배정되었다는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전화를 한 직원은 연수기간 동안 우리 조의 스파이로 있었던 파란 뿔테 안경의 송은경씨였다. 기획부의 입사 선배로 있는 은경씨는 입사를 축하한다고 말하며, 한 가지 소식을 더 전해주었다. 서해정, 그 여자와 내가 함께 기획부로 입사하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그 여자와 나의 인연은 끈은 묘하게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나를 긴장토록 했다. 내 삶에 인연이라는 것은 나를 가슴 아프게 하는 한 가지에 불과했다. “어? 이준민씨!” 회사의 정식 입사 일이 되어 회사 앞에 도착했는데,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 나를 보며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는 서해정, 그 여자가 보였다. 그 여자는 반갑게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해사하게 웃으며 내게로 다가왔다. 맑은 날씨와 해사한 그 여자의 웃음이 너무나 잘 어울렸다. “이준민씨! 그 얘기 들었어요? 우리 같이 기획부에 배정되었다는 거!” “네, 들었어요.” “우와, 신난다! 그죠? 난 나 혼자서 다른 부서에 배정받을까봐 얼마나 떨렸다고요.” “그래요?” “네! 준민씨 있어서 다행이에요. 우리 어서 들어가요.” 그 여자는 살짝 내 등을 떠밀었다. 등에 닿은 그 여자의 촉감이 그대로 남아있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기획부가 있는 9층에 도착하자, 은경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은경씨에게 간단한 업무 소개를 받았다. 당분간은 인턴사원으로 생활하면서 일을 배워갈 것이라고 했다. 인턴의 기간은 회사 일에 어느 정도 적응할 때까지 이며, 구체적인 기간은 없다고 했다. 우리는 대략의 업무를 둘러본 후에, 기획부의 부장을 만나기로 했다. 은경씨는 부장실 앞까지 우리를 데려다 주고, 다른 일이 있어 자리를 떴다. 서해정, 그 여자는 부장실 앞에서 조금 긴장한 것 같았다.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있지만, 그 입 꼬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왠지 귀여워 보여서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런 것을 많이 겪어본 나로서는 아무 것도 아닌 일인데, 사회생활이 처음인 그 여자에게는 모든 것이 두려운 것 같았다. “들어가요.” 마음의 준비가 되었는지, 그 여자는 나를 보며 말했다. 나는 가볍게 노크를 했다. 그리고 안에서 들어오라는 대답소리가 들리자 문고리를 살짝 돌려서 문을 열었다. 나는 서해정, 그 여자를 먼저 안으로 들여보내고, 뒤이어 부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책상이 있는 곳으로 걸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서류를 보고 있던 부장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헉, 하는 소리를 내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반가워요. 우리 회사에 입사하게 된 걸 축하드려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두 사람이 연수 기간 동안 조에 아주 큰 역할을 했다더군요. 훌륭한 인재가 들어온 것 같아 기분이 좋네요.” 부장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였지만, 나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런 내 모습이 답답했는지, 서해정, 그 여자는 팔꿈치로 살짝 나를 쳤다. 하지만 나는 잠시 움찔할 뿐,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믿을 순 없지만, KBG 기획부 부장은 나의 대학교 동기인 강채성이었다. 나이가 많이 들었고, 겉모습이 변해버렸지만, 채성이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누군지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채성이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하였지만, 나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 나를 채성이가 알아보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스물다섯에 멈춰있는 나의 모습을 보면 채성이는 어떤 생각을 할까. “서해정씨, 그리고 이준민씨라고 했나요?” 채성이는 내 쪽을 보며 물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네, 라고 말했다. “아까부터 고개를 푹 숙이고 있네요. 고개 좀 들어봐 주시겠어요?” 나는 채성이의 말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채성이는 어느덧 한 회사의 부장이 될 만큼 나이가 들었다. 하지만 나는 스물다섯에서 멈춰있었다. 나조차 믿을 수 없는 이 현실을 채성이는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었다. 떠나야 했다. 참 오랫동안 다니고 싶어 했던 회사였지만, 난 또 이렇게 이 회사를 떠나야 했다. 시작도 해보기 전에 끝내야 했다. 이게 빌어먹을 내 운명이 가져다 준 불행이었다. “준민씨?” 내가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자, 서해정, 그 여자가 나를 툭툭 쳤다. 하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속이 복잡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머리속에서는 그 날의 사고가 자꾸만 반복되었다. 뜨거운 화염 속으로 사라지던 성현이, 호영이, 민성이, 경민이. 모두가 세상을 떠났는데, 나만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 잔인한 시간 속에서 나는 멈추어버리고 말았다. “이준민씨?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채성이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당장이라도 지금 이 자리를 벗어나고픈 마음 밖에 없었다. 어차피 이곳은 내가 머무를 수 없는 곳이었다. “이준민씨, 왜 그래요?” “…잠시만 나가 있어 줄래요?” “네?” “부장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서해정씨, 잠시만 밖에 있어 주겠어요?” 나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말했다. 서해정, 그 여자는 잠시 망설이더니 문 쪽으로 다가섰다. 그리고는 조용히 부장실을 빠져나왔다. 나의 이상한 행동에 채성이는 당황한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내 곁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이준민씨, 무슨 일이죠?” 에라, 모르겠다, 라는 심정이었다. 어차피 나는 이곳에 남을 수 없었고, 채성이는 내 이야기를 믿을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럴 바에는 내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고라도 싶었다. 나를 미친놈 취급하더라도, 내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었다. 단 한 번도, 어느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이야기였다. 내 시간이 스물다섯에 멈춰있다는 그 잔인한 사실을 나는 나의 아내였던 현정에게조차 털어놓지 않았다. 너무 오랫동안 혼자서 간직했던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이제는 누구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었다. 그것이 나와 함께 대학생활을 했던 친구인 채성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나을 것 같았다. 나의 옛 모습을 기억하고 있을, 잔인했던 그때의 시간을 함께했던 채성이라면 조금 나을 것 같았다. 채성이는 내 앞에 멈추어 섰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채성이를 마주했다. 예전의 얼굴이 남아있기는 하였지만, 주름살도 늘고, 흰머리도 많이 생겼다. 이젠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을 채성이었다. 나를 마주한 채성이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한동안 말없이 나를 계속 쳐다보았다. “…준민이?” 이준민, 저주받은 그 이름이었다. 어째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내 시간이 스물다섯에 멈추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인 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시간은 뒤엉켜버렸다. 그리고 그 속에 내가 남아있었다. 모두가 이 세상을 떠났는데, 나만 이 세상에 존재한 벌이었다. 나만 살아남은 벌이었다. “어…어떻게! 준민이, 내가 아는 그 준민이 아니지?” “채성아.” “말도 안 돼!” “믿기 힘들겠지. 나도 아직 믿지 못하니까.” 나는 이 비참한 현실을 받아들이는데 힘겨워하는 채성이를 바라보았다. 나는 방 한가운데 놓여있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현실에 가장 괴로운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다. 이 현실 속에서 나는 늘 혼자일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사랑하는 내 딸마저 떠나보내야 하는 비참한 현실을 안고서 내가 가장 힘들었다. “오랜만이다, 채성아.” “말…이 안 돼.” “대학 졸업하고 처음 보는 것 같네. 넌 많이 변했구나, 난 그대로 인데.” 나는 그대로라는 그 말이 너무나 비참했다. 내 흐르지 않는 시간을 원망했다. 채성이는 여전히 현실에 얼떨떨해하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서 채성이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그 사고에서 나 혼자 살아남았었던 거, 기억하니?” “뭐?” “호영이, 경민이, 민성이, 그리고 성현이까지 모두 사고로 죽었는데, 나만 살아남았었던 것 기억 하니?” “…기억해.” “확실하진 않지만, 그날부터였던 것 같아. 나도 왜 이런지 이해할 수 없어. 그저 혼자 살아남은 벌이라고 생각하고만 있어. 그 시간 속에서 살아가면서, 그 날의 사고를 기억하라는 벌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지독한 현실이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지독하고도 지독한 현실이었다. “채성아, 부탁이 있어.” “…….” “나 좀 도와주라.” 간절함이 묻어나오는 내 목소리였다. “나도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게 좀 도와주라.” “…이준민.” “매일매일, 하루하루가 위태롭게 외줄타기를 하는 기분이야. 받아들일 수 없는 이 현실 때문에,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두고 이혼을 했고, 그들을 몰래 훔쳐보는 것밖에 할 수가 없어. 이 회사, 저 회사를 옮겨 다니며 겨우겨우 하루를 살아가고, 오늘과 같이 나의 과거를 마주하는 날이면, 나는 절망에 빠져서 오랫동안 힘들어해.”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터놓아 보았다. 단 한 번도,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불운한 나의 인생이었다. 어느 누구도 믿어 주리라고 생각지 않았기에,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었다. “채성아. 정말 나 좀 도와주라.” 나는 소파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간절한 목소리로 채성이에게 말했다. 채성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믿을 수 없는 현실임을 알고 있었다. 그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나는 채성이에게 믿으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신입사원 이준민.” “…….” “일단은 그렇게 지내도록 해. 나도 너도, 회사 안에서는 직장 상사와 부하직원이야.” “…고맙다, 채성아.” “솔직히 아직도 못 믿겠어. 그러니 날 너무 채근하진 마. 일어나.” 채성이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참한 내 인생에 한탄했다. 이렇게 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내 인생이 밉기만 했다. 그래도 속은 후련했다.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터놓을 수 있어서 속이 후련했다. 너무나 오랜 시간동안 나 혼자서 끙끙 앓고 있었다. 나는 채성이에게 인사를 건네고 부장실을 빠져나왔다. 부장실 앞에서는 서해정, 그 여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여자는 나를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마음이 힘들었다. 누군가에게라도 위로받고 싶은 하루였다. 내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괜찮았다. “커피 한 잔 하고 시작할래요?” 나는 어설프게 웃으면서 그 여자에게 말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사하게 웃던 얼굴이 어느새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웃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서해정, 그 여자가 예쁘게 웃는 모습을 보면 왠지 기분이 좋아질 것만 같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 벚꽃처럼 예쁘게 웃는 그 여자의 웃음이 보고 싶었다. “서해정씨.” “네, 준민씨.” “부장님께서, 우리 예쁘게 봐주시고 계세요. 그러니까 우리 잘 해봐요.” 나는 살짝 웃으면서 그 여자에게 말했다. 여자는 내 말에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뺨에 예쁘게 들어가는 보조개가 보기 좋았다. 그 여자의 해사한 미소가 나를 위로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커피 마시러 가요, 준민씨!” 서해정, 그 여자의 웃음은 굳어있던 내 심장을 다독이는 것 같았다. ★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근 한달 동안의 저의 무책임함에 사과드립니다. 참 오랜만에 다시 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글을 쓰면서 저도 기뻤습니다. 30일 재생기간 만료 가사 뮤비 06. 악몽 출처 : 프레쥬얼라인 신비한개구리케이크 조용한 카페 안에서 현정과 내가 마주하고 있었다. 현정은 이렇게 밖에서 내가 만나자고 한 것이 이상했는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무거운 표정으로 현정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저릿해졌다. “준민아, 집에서 보면 되지 왜 여기서 보자고 했어?” 현정의 물음에 나는 한동안 아무런 답을 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냉수를 들이켰다. 심각한 분위기를 눈치 챘는지 현정은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차마 현정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어서 테이블 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채은…이는?” “엄마한테 잠시 맡기고 나왔어.” “그랬구나.” “준민아.” 현정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혹시 무슨 일 있어?” 걱정스레 내게 묻는 현정의 목소리에 나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어디부터 말해야 할까, 말한다고 믿어주기는 할까? 나도 믿기지 않는 이 일을 어떻게 현정에게 믿으라고 강요할 수 있을까. 그래서 선택한 것이 이혼이었다. 이대로 이 가정을 그대로 유지할 순 없었다. 나는 계속 이 시간에 멈춰있을 것이고, 현정은 점점 늙어갈 것이다. 채은이도 자라서 어느 순간에는 나보다 훨씬 더 많이 자라있을지도 몰랐다. “이혼하자, 현정아.” 그 말을 하는 내 가슴이 아팠다. 그 말을 들은 현정보다, 그 말을 내뱉는 내 가슴이 더 찢어지듯이 아팠다. 현정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어떠한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나는 이혼을 고하였다. 행복에 겨워 살던 삶이었다. 소중한 가정을 꾸리고, 이제 채은이라는 예쁜 딸도 얻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혼을 고했다. 그렇게 모든 것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 “…뭐?” “미안하다, 현정아. 이혼…하자.” 괴로웠다. 현정의 눈도 똑바로 보지 못한 채 그런 말을 내뱉었다.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사랑하는 가정이었다. 이제야 한 가족이 되었는데, 내 빌어먹을 인생은 그 행복을 깨트려 버렸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가슴이 시렸다. “준민씨!”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었다. “이준민씨!!” 나는 갑자기 들려오는 서해정, 그 여자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번쩍 눈을 떴다. 꿈을 꾼 모양이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는 휴게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겨우 정신을 차렸다. “피곤했나 봐요? 회사에서 잠들고.” “…그랬나 봐요.” 점심을 먹고 잠시 쉬기 위해 휴게실에 들어왔었다. 서해정, 그 여자가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서 내게 건네주었었는데, 그 뒤로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피곤했었던 건지, 그렇게 그대로 잠이 든 것 같았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서해정, 그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 여자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내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일하러 가죠.” “그래요. 일이 산더미 같아요!” 서해정, 그 여자는 괴로운 듯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는 다시 웃었다. 그리고는 나보다 먼저 휴게실에서 빠져나갔다. 나는 힘없이 그 여자의 뒤를 따랐다. 오랜만에 마주한 나의 과거는 내 가슴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시간을 새기다(Engrave the Time). 회사에 정식 입사 한 지 첫 날, 우리는 열 시가 되어서야 겨우 퇴근할 수 있었다. 나는 회사에서 연수기간 중 같은 조원이었던 연정씨와 민정씨를 만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디자인부서에 입사했다고 하였다. 또 다른 조원들도 회사에서 마주치기는 하였지만, 가볍게 인사만 하고 서로를 지나쳤다. 서해정, 그 여자는 우리 조였던 모든 사람들에게 살가운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것이 두려워 그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지 못했다. 회사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서해정, 그 여자와 함께 보내었다. 일이 힘들만도 한데, 늦은 밤까지 그 여자는 얼굴에 늘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나는 회사를 빠져나오면서 크게 기지개를 켰다. 입사 첫 날이라 차를 가져오지 않아서, 오늘은 버스를 타고 집으로 들어가야 했다. “준민씨, 버스타고 가요?” “네. 오늘은 차 안 가져왔거든요.” “아, 그렇구나.” 나와 함께 회사를 빠져나온 서해정, 그 여자가 나에게 묻고는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돌연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 여자의 환한 웃음에 나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준민씨!” “네?” “닭똥집 먹고 싶다. 우리 닭똥집 먹으러 안 갈래요?” 나는 그 여자의 말에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뜬금없이 닭똥집을 먹으러 가자는 그 여자의 말이 왠지 웃기게만 느껴졌다. 내가 웃음을 터트리자, 그 여자는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살짝 노려보았다. 어렸다. 그 여자를 보고 있으면, 마치 내가 진짜 스물다섯인 것 마냥 느껴졌다. 아내와 딸까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잊히는 기분이었다. “미안해요, 서해정씨.” “치.” “오늘은 좀 곤란하고, 다음에 같이 가요.” “어쩔 수 없죠, 뭐. 들어가요. 내일 봬요!” 서해정, 그 여자는 내게서 손을 흔들며 멀어져 갔다. 아마도 지하철을 타고 가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 여자가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그 자리에서 보고 있었다. 나는 여자가 사라지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버스가 아닌 택시에 올라탔다. 문득, 행복했던 나의 지난 삶이 그리워졌다. “자유아파트로 가주세요.” 자유아파트, 그 말을 하면서 왠지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고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목이 메고 답답했다. 자유아파트, 그것은 현정과 내가 함께 살던 집이었다. 현정에게 이별을 고하면서 현정에게 유일하게 남길 수 있었던 것이었다. 바보 같은 남편이 아내를 떠나면서 유일하게 해줄 수 있었던 것이 그 집을 남기는 것이었다. 아직도 현정과 채은이는 그곳에서 살고 있었다. 나의 흔적이 남아있는 그 집에서, 나의 존재에 괴로워하면서 살고 있었다. 현정은 우리가 이혼한 뒤로도 줄곧 내게 묻곤 했었다. 우리가 이혼해야 했던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대체 왜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이혼을 고한 것이었는지. 하지만 나는 오늘 이 순간까지 아무 것도 알려줄 수 없었다. 아무 것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진실을 피하기만 했다. 채성이에게 오늘 나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전까지 이 모든 것은 나 혼자만의 비밀이었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서 나는 모든 것을 비밀에 부쳤다. 이렇게 해서도 살아야 했다. 빌어먹을 인생이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살아남아서 채은이가 예쁘게 자라는 모습을 보아야 했고, 현정이 잘 살고 있는지 지켜보아야 했다. 그게 보잘것없는 남편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다 왔습니다.” 택시 기사님의 말에 돈을 내고 차에서 내렸다. 103동, 우리가 살았던 그 아파트 단지 앞에 섰다. 그리고 아래서부터 1층, 2층, 3층, ……, 그리고 우리가 살았던 13층까지 세어 올랐다. 나는 13층, 우리가 살았던 그 집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자지 않고 있는지, 환하게 거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나의 아내와 나의 딸이 그 집 안에서 있겠구나, 그것만이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집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나는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 이러한 내 인생에 한탄했다. 이렇게 스물다섯에 멈춰있는 내 인생을 원망했다. “어? 준민씨!” 멍하니 아파트를 올려다보다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이런 것도 우연이라 할 수 있는 건가, 이런 것을 인연이라 불러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부른 것은, 다름 아닌 서해정, 그 여자였다. “…해정씨?” 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 여자 역시 살짝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니, 여기에서 나를 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 여자는 빠른 걸음으로 내 옆 까지 다가왔다. “여긴, 웬일이에요?” 나는 여전히 얼떨떨하게 그 여자를 보며 물었다. “에?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에요. 여기가 우리 집이거든요!” “자유아파트에 사는 거예요?” “네! 준민씨도 여기에 살아요?” “아니오. 오늘 잠시 볼 일이 있어서 왔어요.” “아, 그렇구나. 와, 신기하다! 이런 데서 또 보네요.” 서해정, 그 여자는 반가운 낯빛으로 나를 보았다. 하지만 나는 마냥 반가울 수는 없었다. 괜시리 머리가 복잡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어서 이 자리를 피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전 이만 가 볼게요. 내일 봐요.” “네, 준민씨. 내일 회사에서 뵐게요!” 서해정, 그 여자는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뒤를 돌아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갔다. 괴로운 순간들은 언제나 내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렇게 악몽을 마주하게 되는 날이 오면,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진짜로 그 사고 이후로 내 인생이, 내 시간들이 이렇게 뒤엉켜버린 것일까. 어떠한 의문도 풀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이런 일이 내게서 일어나는 것인지 화가 났다. “얘들아, 날 그만 놓아주라.” 그렇게 작게 중얼거렸다. 불길로 사라졌던 그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간절히 말했다. ★ 날씨가 너무 좋아요. 산책하고 싶은 날이네요 ^^* 07. 그 여자가 알고 있다. 출처 : 프레쥬얼라인 신비한개구리케이크 새로 시작한 회사 일은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이런 저런 회사를 많이 옮겨 다니며 경험을 쌓은 덕분에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고, 일처리도 뛰어난 편에 속했다. 긴 시간 스물다섯에 머무른 유일한 장점이었다. “준민씨?” 은경씨가 부탁한 복사를 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나는 복사기를 등지고 섰다. 나를 부른 것은 채성이었다. 채성이는 진정 나를 회사의 신입사원처럼 부르고 있었다. 나는 짧게 네, 라고 대답을 하였다. 채성이는 나를 보던 시선을 거두고 뒤를 돌아 자신의 방 쪽으로 향하면서 말했다. “그 일 다 끝나면, 잠깐 내 방으로 올래요?” 나는 채성이의 말에 다시 한 번 네, 라고 대답하고는 다시 복사기 쪽을 보았다. 마침 복사가 끝나 있었다. 나는 복사물을 들고 임시로 만들어진 내 자리로 갔다. 복사물을 정갈하게 정리하여 클립으로 고정시킨 후, 은경씨의 빈 책상 위에 얹어 놓았다. 그리고 나는 채성이가 있는 부장실을 보았다. 채성이가 내게 무슨 말을 할 것인지 궁금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부장실 쪽으로 향했다. 똑똑, 두 번의 노크를 하고서는 문을 열었다. 채성이는 방의 한 가운데에 놓인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내가 들어오자 반대편에 앉으라는 모션을 취하였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소파에 앉았다. “…무슨 용무이십니까?” 나는 채성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그렇게 말을 꺼내었다. 내 말에 채성이는 약한 실소를 뱉어내었다. 그러고는 내 눈을 똑바로 직시하였다. “준민아.” 채성이는 대학시절의 나를 부르듯이 불렀다. 좀 전 방으로 나를 부를 때와는 다른 어감이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제는 나보다 훨씬 어른이 된 채성이가, 마치 스물다섯의 느낌으로 나를 부르고 있었다. 이런 현실은 부딪힐 때마다 가슴시리도록 두려웠다. “…궁금한 게 있어.” “뭔데?” “언제부터 알았어?” “뭐?” “네 시간이 멈췄다는 걸 언제부터 알았는지 궁금해.” 채성이의 말에 생각에 잠겼다. 현정과 결혼을 하고 채은이를 낳았다. 채은이가 채 걸음마도 하기 전, 하물며 뒤집기도 하기 전이었으니 정상적인 내 나이었더라면 스물아홉이나 서른쯤 되었을 때였다. “한 십년 쯤 되었나.” 사실 채성이가 묻지 않았으면, 이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나도 깨닫지 못했을 것이었다. 문득 생각해보니 벌써 십년 정도였다. 채은이가 이제 아홉 살이니, 정확히 말하자면 구년정도 된 것이었다. “…네 안사람은?” “전에 말했잖아. 이혼했어.” “그 사실 때문에?” “응.” “어…째서?” “내 시간이 멈췄다는 그 사실 알고 참 많이 고민했어.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내 아이를 품에 안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 사실을 알았어. 그 방법 밖에 없었어. 내 불행이 우리 가족의 불행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말이야.” 채성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너는 그 자리에 있는데, 네 아내가 늙어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너는 어떨까? 너는 그대로 인데, 네 아이가 너보다 더 커버린다면 어떨까?” “…아.” “그런 불행을 피하기 위해서 나는 이혼했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그들의 앞에 내 모습을 보인 적이 없어. 내가 스물다섯에 있다는 사실을 차마 현정이에게도 말할 수 없었어.” 나는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채성이에게 말했다. 채성이는 이제야 나를 이해하는 듯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누군가에게 내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후련했다. 절망스러운 듯 말을 꺼내었지만,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에 속이 후련하고,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알았어. 말 해줘서 고맙다. 일 해. 힘든 거 있으면 말하고.” 채성이가 나를 위로하듯 그렇게 말했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문고리를 손으로 잡고 채성이를 보면서 말하였다. “채성아, 네가 내 말을 믿던 믿지 않던, 네가 말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채성이는 말없이 나를 보았다. 나는 부장실을 빠져나왔다. 나로 인해 내 친구들을 잃은 이후, 나는 더 이상 내 친구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나와 함께 있던 모든 아이들이 죽었는데, 나만 살아남아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것이 죄인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내가 결혼했다는 사실도 한참 후에야 친구들에게 알렸다. “준민씨!” 내가 부장실에서 나오자 서해정, 그 여자가 헉헉대며 달려와 나를 불렀다. 나는 의아한 눈으로 그 여자를 보았다. 그 여자는 얼마나 뛰었는지 숨을 몰아쉬고 있으면서도 얼굴에는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 방금 엄청난 사실을 알았어요!” 나는 그 여자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 여자는 내 손목을 끌더니 갑자기 바쁘게 어디론가 가기 시작했다. 빠른 걸음으로 가던 그 여자가 결국에는 뛰기 시작했다. 무슨 이유인지도 모르고, 나는 그 여자에게 끌려서 함께 뛰고 있었다. 복도를 다니던 직원들이 우리를 의아한 시선으로 보았다. 나는 괜히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이봐요, 서해정씨!” 나는 막무가내로 나를 끌고 가는 서해정, 그 여자를 불렀다. 하지만, 그 여자는 대답도 없이 뒤로 나를 살짝 돌아보고는 이내 다시 앞을 보고 달렸다. 나는 팔에 힘을 주어 그 여자의 손에서 내 손목을 빼내었다. “서해정씨! 이게 뭐하는 거예요!” 나는 언성을 조금 높여 그 여자를 보며 말했다. 숨을 헉헉 대면서도 그 여자는 얼굴에 옅게 떠오른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진지하게 말을 하면 들을만도 한데, 그 여자는 내 이야기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가보면 분명 준민씨도 좋아할 거예요. 어서 가요. 다와 가요.” 서해정, 그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계단 쪽으로 갔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표정을 짓고 그 여자의 뒤를 따랐다. 그 여자는 이미 많이 지친 것인지 걸음이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그 여자는 계단을 한 칸씩 힘겹게 오르더니 9층에 도착해서는 뒤를 돌아서 나를 보았다. “여기에요.” “대체 뭐가요?” “여기가 기획부 면접 실 이래요.” “그런데요?” “이 안에 누가 있는지 좀 봐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 여자는 어서 안을 보라는 듯이 살짝 턱으로 면접 실 안을 가리켰다. 나는 반투명으로 된 유리벽 위로 투명한 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채…은아.” 나는 유리창 너머로 면접 실을 보다가 얼어붙고 말았다. “이번 광고 모델로 이채은 어린이가 될 것 같대요. 피아노를 굉장히 잘 쳐서 회사 직원의 눈에 들어왔나 봐요.” “…채은이.” “준민씨 딸이잖아요. 품에 안아주진 못해도,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으면 좋을 거라 생각했어요.” 나는 여전히 창 안 쪽에 있는 채은이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채은이는 회사 직원으로 보이는 한 여직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긴장한 낯빛도 없이 생글생글 웃고 있는 것이 참 보기 좋았다. 너무 앙증맞고 귀여워 보였다. 그런 채은이를 보면서, 이 회사 어딘가에 현정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같은 공간에, 이 회사 안에 채은이와 현정이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도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내가 창 너머를 보던 시선을 서해정, 그 여자에게 돌렸다. “…당신 뭐예요.” “준민씨라면 내 이야기를 믿어줄 것만 같았어요. 그래서 도와주고 싶었고요.” “무슨 소리예요. 저 아이가 나의 딸이라는 건…” “스물다섯 살, 당신은 친구들이랑 여행을 가다가 사고가 났어요. 그 사고에서 혼자 살아남았고, 그 이후로 당신의 시간은 멈췄어요. 그 사실을 알게 된 후,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두고 이혼을 해야했죠. 당신이 사랑하는 그 딸은 바로 이 유리벽 너머에 있고요.” 서해정, 그 여자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내 눈을 보면서 그렇게 말하였다. 나는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알 수 없었다. 채성이에게 처음으로 나는 내 비밀을 말했었고, 채성이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믿을 수 없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여자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뒷걸음질을 쳤다. “당신…뭐야.” “차차 이야기 해주고 싶어요. 나도 이야기 할 사람이 정말로 필요했으니까요.” “무슨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알게 됐는지, 다 이야기 해줄게요.” “…….” “그러니까, 오늘 마치고 나랑 같이 맥주 한 잔 할래요?” 나는 소름이 끼쳤다. 내 이야기를 다른 누군가가 알아냈다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졌다. 내가 말하지 않은 사실을 어떻게 이 여자가 알 수 있을까. 무서워졌다. 그 여자의 눈을 보면 알 수가 있었다. 그 여자는 정말로 내 모든 비밀을 알고 있었다. “준민씨를 해칠 생각 같은 건 추호도 없어요. 그냥 나도 준민씨의 이야기를 듣고 싶고, 준민씨도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면 해요.” “…하.” “마치고 회사 앞에 있을 게요. 부탁이에요.” 서해정, 그 여자는 그렇게 말을 남기고 내게서 뒤돌아섰다. 내게 부탁이라는 말을 하는 그 여자의 표정이 왠지 모르게 슬퍼보였다. 나는 혼란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서해정, 그 여자는 점점 내게서 멀어져 갔다. 나는 한참을 그 여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유리벽 너머에 있는 나의 딸 채은이를 한 번 보았다. “젠장.” 뭐가 어떻게 되는지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어 머릿속이 복잡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서해정, 그 여자에 대한 의문이 자꾸만 커져갔다. ★ 원래 긴 글로 계획했었는데, 이 소재는 제가 쓰는 것이 버거워 조금 짧게 수정합니다. 아주 많이 짧아질지도 모르겠어요. 저번 편 땡스투 쪽지 생략할게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30일 재생기간 만료 가사 뮤비 08. 시간을 되돌리다. 출처 : 프레쥬얼라인 신비한개구리케이크 내게 시간이 멈추었다는 것은 언제나 치명적 약점이었다. 그 약점은 내가 살아가는 시간마다 나를 날카롭게 겨냥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차마 죽지 못했다. 내가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두고 이 세상을 떠날 수가 없어서 나는 죽지 못했다. “왔네요. 그럴 줄 알았어요.” 나는 퇴근 시간이 지나서까지 회사 밖을 벗어나지 못하고 한참을 고민을 했다. 하지만 결국 나는 서해정, 그 여자를 찾아왔다. 알아야만 했다. 어떻게 내 비밀을 알았는지, 대체 어떻게 내 아내와 딸, 멈춰진 나의 시간을 알고 있는 건지. “요 앞에 괜찮은 호프가 있대요. 거기로 갈래요?” “마음대로 해요.” 늘 웃음을 얼굴에 담고 있던 그 여자도, 오늘은 얼굴에 웃음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왠지 모르게 더 불안해졌다. 서해정, 그 여자의 무표정한 모습도 익숙하지 않았다. 나는 그 여자와 함께 회사 근처의 가까운 호프로 갔다. 맥주잔을 각각 앞에 두고, 나는 그 여자를 쳐다보았다. 여자는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그 여자를 보니 머릿속이 복잡했다. “처음엔,” 먼저 입을 연 것은 서해정, 그 여자였다. 맥주를 한 모금 마시더니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긴장한 채로 그 여자를 보았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맞았다. 스물다섯에 시간이 멈춘다는 것은 누구라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것도 현실인데, 시간이 멈추는 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법은 없잖아요.” 나는 그 여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여 고개를 갸웃했다. 여자는 힘없이 픽, 하고 웃음을 내뱉었다. 생글생글 웃던 모습이 아닌, 허탈한 웃음이었다. 나는 여자의 말을 곱씹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것도 현실인데, 시간이 멈추는 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법은 없잖아요. 그 말이 대체 무슨 뜻일까. 나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놀란 눈으로 그 여자를 보았다. “혹시…,” “맞을 거예요. 준민씨가 생각하는 거.”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거예요?” 내 말에 서해정, 그 여자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시간을 되돌린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시간은 앞으로 흐르지 절대로 거꾸로 흐르지 않았다. “기억나요?” “뭐가요.” “연수원에서, 그리고 회사에서 지난날의 악몽을 꾼 적이 있죠? 내가 깨우는 바람에 잠에서 깨었고요.” 그 여자의 말이 맞았다. 연수원 레크리에이션 시간에, 그리고 회사에서도 악몽을 꾸었고, 늘 잠에서 깬 이유는 그 여자가나를 불러서였다. 소름이 온 몸에 돋았다. 단순히 우연일 거라 생각을 했는데, 그저 피곤해서라고 생각했는데, 그 여자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여자는 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그 여자가 어떤 말을 할지 집중하였다. 여자는 작게 한숨을 쉬다가 입을 열었다. “믿기지 않는 삶을 살고 있으니, 준민씨도 내 이야기를 믿어줄 거라 생각했어요.” “대체 무슨 소리예요.” “나는 어떤 사람과 신체적으로 접촉을 하면서, 그 사람의 시간을 돌려서 그 시간 속으로 갈 수 있는 능력을 지녔어요.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나는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어떤 사람의 과거 속으로 내가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에요.” “기억을 읽는다는 거예요?” “좀 달라요. 난 그 과거를 변화 시킬 수도 있으니까요.” 도무지 현실 같지 않은 이야기에 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서해정, 그 여자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입을 축였다. “어렸을 때, 난 내가 굉장한 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했어요. 원더우먼 같은 능력을 말이에요. 그래서 자신의 지난 과거를 후회하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친구들의 과거를 조금씩 바꾸어놓자, 현재는 꼬여버리기 시작했어요.” 나는 잠자코 그 여자의 말을 들었다. 얼떨떨하게 믿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조용히 그 여자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나는 내 앞에 놓인 맥주잔을 들었다. 그리고 한 모금 맥주를 목으로 넘기었다. 여자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과거를 바꿀 순 있지만, 현재를 바꿀 순 없었던 거예요. 나는 내 능력을 저주했어요. 이런 능력 차라리 없어져 버렸으면, 하고 생각했어요. 근데 없어지지 않았어요. 오히려 더 예민해져서, 누군가와 스치기만 해도 그 사람의 과거로 내가 흘러들어 갔어요.” 서해정, 그 여자의 슬픈 표정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눈에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것이 사실임을 알려주었다. 서해정, 그 여자가 내게 말하는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눈에 고인 눈물이 내게 알려주고 있었다. “그걸 막고 싶었어요. 그걸 막을 방법을 우연히 찾았어요. 초콜릿, 그게 내가 다른 사람의 과거로 흘러들어가는 걸 막아주더라고요.” 연수원에서부터 초콜릿을 많이 먹었던 그 여자의 모습이 생각이 났다. 그저 단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것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자신의 능력을 잠재우기 위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초콜릿은 참 신기한 거예요. 기분을 좋게 해주기도 하지만, 잊고 싶은 사실들을 잊게 할 수도 있거든요.’ 스쳐가듯 했던 그 여자의 말도 생각이 났다. 모든 조각이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소름이 끼쳤다. “내 과거를 본 거예요?” “연수원 가는 버스에서 내가 했던 말 기억나요?” “무슨 말이요?” “준민씨에게서는 비바람이 친다고요.” ‘비가 쏟아져요. 당신에게서 비바람이 불어요. 어둡고, 뭔가 슬퍼요.’ 잊고 있던 그 말이 생각났다. 내게서 비바람이 분다고 말했던 그 여자의 말이 생각났다. “준민씨랑 악수를 했던 그 순간에 어둡고 슬픈 것이 보였어요. 다른 사람들의 과거를 잘 읽지 않았는데, 그게 뭔지 궁금해서 준민씨의 과거를 보았어요.” 서해정, 그 여자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다. 아직 내 시간이 스물다섯에 멈춰있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든데, 다른 사람의 과거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는 그 여자의 능력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준민씨의 과거를 보고나서 나도 놀랐어요. 시간이 멈춘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생각을 했어요. 그러다가 웃기더라고요. 시간을 되돌리는 내 능력도 현실인데, 시간이 멈추는 것이 현실인 게 왜 이상한가 싶더라고요.” 여자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여자의 말이 맞았다. 스물다섯에 시간이 멈춘 내가 현실인데,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그 여자가 현실이 아니라는 법은 없었다. 모든 것이 현실이었다. 다만 조금 비정상적일 뿐이었다. 조금 어긋났을 뿐이었다. 째깍째깍 흐르는 시간이, 우리 두 사람에게서 잠시 엉켜버린 것뿐이었다. “믿을게요.” “정말, 믿어주는 거예요?” “당신 말이 맞아요. 나도 현실인데, 서해정씨가 현실이 아니란 법은 없잖아요.” 나는 내 앞에 놓인 맥주를 마시었다. “아무한테도 말할 수가 없어서 답답했거든요. 말해도 믿어주지 않고, 믿어도 날 이용하려고만 했었으니까요.” “그 맘 알 것 같아요.” “준민씨라면, 나와 조금은 비슷한 준민씨라면 나를 이용하지 않고 내 이야기를 들어줄 것 같았어요.” 서해정, 그 여자는 모든 말을 다 하고나서야 얼굴에 살짝 미소를 띠었다. 다시 그 여자의 얼굴에 웃음이 얹어지자, 괜히 나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우리, 건배할래요?” 그 여자가 맥주잔을 들면서 말했다. 나는 살짝 웃으면서 내 앞에 놓인 맥주잔을 들었다. 그리고 짠하고 잔을 마주했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내 이야기를 앞으로 공감하며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뭔가 기쁘게 느껴졌다. 혼자 하던 속앓이를 이제 조금 덜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 이야기를 알지만 공감하지 못하는 채성이와 내 이야기를 믿고 신뢰하는 이 여자는 확연하게 달랐다. “…고마워요.” 나는 넌지시 이렇게 말했다. “뭐가요?” “그냥요. 내게 먼저 서해정씨 이야기를 해줘서 고마워요.” “아니에요. 나도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뿐이에요.” 살짝 웃으며 말하는 그 여자의 말에, 왠지 마음 한 구석이 차분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 시험끝나고 돌아올게요 ^^^* 어울리는 BGM이 없어서 생략합니다... 09. 가슴이 뛰다. 출처 : 프레쥬얼라인 신비한개구리케이크 생각지도 못한 사실은 내 심장과 머리를 두드렸다. 이 세상에 얽힌 시간 속에 살아가는 것은 나 하나뿐이라고 생각했었다. 스물다섯에 시간이 멈춘 나, 과거라는 시간을 움직일 수 있는 그 여자. 그 여자의 존재가 왠지 모르게 지친 내 삶에 위안이 되었다. “준민씨.” “네.” “이제 우리 이런 복잡한 얘기 말고 다른 이야기해요.” 서해정, 그 여자가 돌연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여자는 앞에 놓인 오징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입 안으로 넣고는 잘근잘근 오징어를 씹었다. 나는 맥주를 마시며 그 모습을 빤히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 여자는 내 눈을 피하지도 않고 쳐다보았다. 그러다 여자는 먼저 시선을 피하고 맥주를 한 모금 마시었다. “비록 지금은 아니지만, 마음속으로는 한 가정의 가장이고,” “……?” “나보다 훨씬 오래 산 사람이니까 그런 거 없겠네요.” “무슨 말 하는 거예요?” “난 있잖아요.” 서해정, 그 여자는 답지 않게 뜸을 들이면서 말하였다. 나는 그 여자의 그런 행동에 괜히 궁금증이 커졌다. 나는 여자를 빤히 바라보면서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렸다. 여자와 잠깐 눈이 마주쳤지만, 이번에 여자는 내 시선을 금방 피해 버렸다. 서해정, 그 여자의 그런 모습이 낯설었다. 여자는 한참이나 뜸을 들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조금 설레요.” “……?” “준민씨랑 함께 있으면 왠지 모르게 조금 설렌다고요.” 서해정, 그 여자는 그렇게 말을 하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멍해져 버렸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얼떨떨하고 멍했다. 그리고 느낄 수가 있었다. 심장이, 뛰었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내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되었다. “어차피 안 되는 관계라는 거 알아요. 그러니까 크게 신경 쓰지 말아요.” “서해정씨…” “나는요. 습관적으로 누군가를 좋아해요.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금방 질려서 또 다른 사람을 찾아요. 그게 나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서해정, 그 여자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을 하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한 가정의 가장이고, 그 여자보다도 훨씬 더 오래 살았다. 몸은 이십대지만, 사실 나는 사십대의 남자였다. 이십대의 몸으로 살아가면서, 나의 정신도 이십대에 머물러버렸지만, 내가 그 여자보다 훨씬 더 많은 날들을 살아왔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마치 현정을 처음 만났을 때, 그때와 같이 가슴이 뛰었다. “준민씨의 시간으로 들어가서 준민씨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다 봤어요.” “…….”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동정이나 연민, 혹은 동질감 같은 것일지도 몰라요.” 서해정, 그 여자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앞에 높인 맥주잔을 들어 남은 맥주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 여자의 웃음을 보면 기분이 좋아졌다. 그 여자가 웃으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마음 한켠에 있는 현정과 채은이가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떠나왔지만, 내가 현정의 남편이며, 채은이의 아빠라는 사실은 지울 수 없는 사실이었다. “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 “네?” “준민씨의 과거 중에 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 확인해보고 싶은 것이 하나 있어요. 잠시만 내가 준민씨의 과거로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서해정, 그 여자가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확인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 라니. 나는 의문을 가득 담은 표정으로 그 여자를 보았다. 그 여자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나와 준민씨가 이 회사에서 처음 만난 것이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무슨 말이에요?” “내가 어렸을 적에, 준민씨를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아요. 확인해보게 해줄 수 있어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가 이 회사에서 만난 것이 처음이 아니라면 또 어디서 만났단 말일까. 사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스물다섯에서 오랜 시간을 살았고, 그 동안 스쳐가듯 그 여자를 만났을 지도 몰랐다. 서해정, 그 여자는 내 눈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나는 그 여자의 그 시선에 별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여자가 내 과거 속에 들어오는 것이 내게 불쾌감을 주는 것은 아니기에, 그것을 허락하기로 하였다. “고마워요.” 서해정, 그 여자는 나를 보며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하여 잠시 그 손을 보다가, 이내 의미를 깨닫고 내 손을 내밀어 그 여자와 손을 맞잡았다. 잠이 쏟아졌다. 그 여자와 손을 잡자마자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잠이 쏟아졌다. 나는 그 잠을 이기려고 하지 않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시간을 새기다(Engrave the Time). 약속시간인 8시가 다 되었는데, 대극장 앞에서 만나기로 했던 진혁이는 연락이 없었다. 나는 반복적으로 시계를 쳐다보았다. 연주회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내게 연주회 표를 주면서 함께 가자고 먼저 권유한 것은 진혁이었다. 그곳에서 꼭 소개시켜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며 나를 이곳에 오게 하더니, 정작 본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어 진혁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통화음 끝에 진혁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 여보세요? “박진혁, 너 어디야?” - 준민아, 진짜 미안. 갑자기 회의가 길어져서 지금 못 갈 거 같아. 알잖아, 나 신입이라서 힘없는 거. 미안한데, 먼저 들어가서 보고 있어. 끝나기 전에는 꼭 갈게. “아유, 너 진짜!” - 진짜 미안. 나 끊어야겠다. 절대로 집에 가면 안 돼, 알았지? 보고 있어! 그렇게 진혁이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한숨을 크게 내어쉬었다. 나는 연주회 같은 것에는 전혀 취미가 없었다. 진혁이가 아니었으면 절대로 오지 않았을 자리였다. 재미없고 따분한 피아노 연주는 내 취향이 아니었다. 나는 진혁이가 내게 주었던 연주회 표를 만졌다. 그냥 집에 갈까 했지만, 꼭 연주회를 보고 있으라는 진혁이의 말 때문에 결국 연주회 장 안으로 들어갔다. 연주회가 막 시작하려고 했던 참이었는지, 연주회장 내는 매우 엄숙하고, 조용했다. 무대 위에는 피아노 한 대가 놓여 있고, 조명은 그 피아노를 비추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서 무대를 바라보았다. 진혁이가 오면 한 소리 해주려고 했다. 이런 따분한 연주회에 왜 꼭 오라고 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잠시 후, 무대 위로 붉은 드레스를 입고 있는 한 여자가 올라왔다. 나는 그 여자를 쳐다보았다. 붉은 드레스가 아주 잘 어울리는 여자였다. 내 나이 또래쯤 되어 보이는 젊은 여자였다. 여자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보는 내 심장이 나도 모르게 떨렸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내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마치 내가 환상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이 현실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현기증이 일어날 만큼 혼란스러웠다. 심장이 멈추지 않고 쿵쾅거렸다. 나는 연주회장 입구에서 받은 팜플렛을 보았다. 그리고 그곳에 크게 적혀있는 그 여자의 이름을 보았다. ‘이현정.’ 그리고 그 여자의 이름은 내 가슴 속에 들어와 박혀버렸다. 곧 연주회가 시작되었다. 피아노 앞에 앉은 그 여자는 두 손을 피아노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건반을 하나씩 눌렀다. 아름다운 선율이 이어졌다. 환상적인 피아노 선율과 아름다운 그 여자의 모습을 보니 자꾸 현기증이 일어났다. 내가 지금 어떠한 표정으로, 어떠한 모습으로 이 자리에 앉아있는지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나의 시선이 그 여자에게 멎어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여자의 연주를 듣고 있다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연주회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연주회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찬바람을 맞으며 심호흡을 하였다. 그 여자의 연주를 더 오래 듣고 있으면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은 기분에 더 이상 연주를 듣고 있을 수 없었다. 연주회장 밖에서 바람을 쐬고 있는데, 어디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소리를 따라서 고개를 돌렸다. 훌쩍이는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은 아주 작은 꼬마였다. 기껏해야 초등학생처럼 보이는 그 아이가 연주회장 입구에 쪼그리고 앉아서 눈물을 훌쩍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괜히 측은해보여서 꼬마아이에게로 다가갔다. “얘야. 왜 여기서 울고 있어? 엄마 잃어 버렸어?” “나도… 나도, 피아노 치고 싶어요! 으앙!” 꼬마아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목청을 높여 눈물을 토해내었다. 이 작은 몸에서 어떻게 그런 목소리가 나올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로 큰 목소리로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꼬마아이의 갑작스러운 행동 때문에 당황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가볍게 꼬마아이를 토닥여주었다. 꼬마아이는 갑자기 내 품에 안기더니, 내 품에서 눈물을 쏟아내었다. 나는 당황스러웠지만, 그 아이를 달래주기 위해 별 수 없이 그 상태로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 꼬마는 눈물을 멈추었다. 나는 한참을 울어서 숨을 쉬기조차 불편해 보이는 그 아이를 보았다. “꼬마야. 이름이 뭐야?” “…해정.” “응? 뭐라고?” “서해정이예요.” 서해정. 그 꼬마아이의 이름은 서해정이었다. 이번에는 그 여자가 깨우기도 전에 잠에서 깨버렸다. 깜짝 놀라서 식은땀과 함께 잠에서 깼다. 순간적으로 놀란 탓에 번쩍 눈이 뜨였다. 나는 놀란 눈으로 그 여자를 보았다. 의도치 않게 갑작스레 현재로 돌아온 그 여자 또한 놀란 것 같았다. ‘서해정이예요.’ 그 여자였다. 내 잊혀져있던 과거 속에 어린 그 여자가 있었다. 내가 현정을 처음 보게된 날, 현정에게 첫 눈에 반했던 날, 뒤늦게 온 진혁에게 현정을 소개 받았던 날, 바로 그 날 아이러니하게도 서해정, 그 여자를 만났었다. ★ 무사히 시험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요즘 시새에 대한 고민이 많아요ㅠ_ㅠ 새 글을 쓸까, 생각도 들고요. 그래도 무책임하게 연중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 중입니다! 30일 재생기간 만료 가사 뮤비 10. 사고 출처 : 프레쥬얼라인 신비한개구리케이크 놀란 눈으로 서해정, 그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스물다섯에 멈춰진 내 삶은 어린 시절의 그 여자를 만날 수 있게 하였다. 잊고 있었다. 그 날, 나는 진혁이에게 현정을 소개 받았었다. 현정에게 첫 눈에 반한 나는 ‘현정이 아름다웠다’는 그 사실만 기억할 뿐, 그 날의 일들을 세세히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었다. 그런데 내가 미처 기억하지 못한 그 시간에 어린 그 여자가 있었다. “역시, 맞네요.” “…생각도 못했어요.” 정말로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그 여자가 나의 과거 속에서 숨 쉬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충분히 가능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생각은 전혀 해보지 못했다. “이현정 연주회가 열리는 곳에서 우리 처음 만났잖아요. 나는 어릴 적부터 이현정 연주회가 열리는 곳에 많이 갔었거든요. 혹시나 우리가 만난 적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어요. 내가 안겨서 울었던 그 아저씨가, 준민씨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요.” 서해정, 그 여자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씁쓸해 보이기도 했고, 반가운 듯도 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슬퍼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여자는 자신의 가방을 뒤지더니 무언가를 꺼내었다. 나는 그 여자가 꺼낸 것이 무엇인지 쳐다보았다. 여자가 꺼낸 것은 초콜릿이었다. 연수 첫 날, 내게 주었던 것과 같은 초콜릿이었다. 장미향이 깊게 나는 고급스러운 맛의 초콜릿. 여자는 잠시 인상을 찌푸리더니 얼른 초콜릿을 입 안에 넣어버렸다. “미안해요. 이렇게 다른 사람의 과거 속에 들어갔다 오면, 심한 두통에 시달리거든요. 그럴 땐 이렇게 초콜릿을 먹으면 조금 나아요.” 여자는 별 일 아니라는 듯 생긋 웃었다. 그런 그 여자의 모습이 왠지 안쓰럽게 느껴졌다. 시간이 멈추었다는 그 사실에 괴로워하며, 웃음 같은 건 잊고 지냈던 내 모습이 비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똑같이 힘든 삶에서, 그 여자는 웃으면서 잘 지내고 있는데, 나만 혼자 내 틀 안에 갇혀서 괴로워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 이제 그만 가요. 조금 쉬고 싶네요.” “그래요. 그러죠.”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계산을 하고 먼저 가게 밖으로 나왔다. 조금 지쳐 보이는 그 여자는 서둘러 택시를 타고 사라졌다. 나는 덩그러니 그 자리에 남아서 그 여자가 사라진 그 자리를 보고 있었다. 참 묘한 인연이었다. 시간이 엉켜버린 우리 두 사람이 만난 것도, 우리가 오래 전에 만난 적이 있다는 그 사실도, 현정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 그 여자가 살고 있다는 그러한 아이러니함도, 정말로 묘한 인연이었다. 나는 한참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집 쪽을 걸음을 옮겼다. 걸어가기에는 제법 먼 거리였지만, 아주 조금이지만 술을 마셔서 운전을 할 수도 없었기에 그냥 걷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수많은 고민을 안고 묵직해져있었다. 오늘따라 밤하늘이 더 어두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별 한 점 쉴 곳 없는 깜깜한 하늘이었다. 까만 어둠과 달리, 길거리는 요란했다. 적막함이 어울릴 것 같은 어둠인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소란스러운 큰 도로에 갑자기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나는 도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디서 불이라도 난 것인지, 소방차가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내며 빠르게 달려갔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소방차로 집중 되었다. “불이 났나 보네.” 나는 무심하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왠지 소방차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는 멀어져갔는데, 계속해서 내 귓가에 울리는 느낌이었다. 대체 왜 그런 느낌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갑작스레 불안감이 내 뺨을 스쳤다. 나는 아예 몸을 돌려 소방차가 사라지는 쪽을 쳐다보았다. 항상 이런 갑작스런 불길함은 적중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소방차가 사라지는 쪽을 계속해서 쳐다보았다. 소방차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자, 불길함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나는 갑자기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유아파트.” 소방차가 가는 길은, 자유아파트로 가는 길이었다. 내 아내와 내 딸, 현정과 채은이 살고 있는 자유아파트로 가는 길이었다. 더 이상 불안감에 떨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소방차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제발 이번만은 불길한 예감이 틀렸기를 바랐다. 바라고 또 바라면서 미친 듯이 달렸다. 차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서 달렸다. 현정과 채은이가 있는 자유아파트를 향해 달렸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적중하기 마련이었다. 자유아파트에 다가갈수록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가 다시 가까워져 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새까만 연기가 하늘로 피어오르는 것도 볼 수 있었다. 마음속으로 수십 번, 수백 번을 외쳤다. 제발 아니길, 내가 생각하는 최악의 상황이 내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은 아니길 바랐다. “……아.” 숨을 헐떡이며 자유아파트까지 도착한 나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자유아파트에서 새빨간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그것도 채은이와 현정이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였다. 사람들은 아파트 단지 밖에서 불이 퍼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길 바랐다. 제발 그것만은 아니길 바랐다.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다른 집도 아닌, 우리 집이었다. 나와 현정, 그리고 갓난아기였던 채은이가 함께 살았던 집이었다. 그 집에서 불길이 시작되었다. 불길은 거세게 피어올랐다. 사그러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머, 갑자기 가스가 폭발 했대.” “정말? 웬일이래.” “어유, 안됐네, 안됐어. 이게 무슨 일이래, 정말.” “그 집 사람들 아까 집으로 들어가는 걸 경비 아저씨가 봤대. 어이구, 안됐네, 정말.” 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단 한 번도 채은이를 따뜻하게 안아보지 못했었다. 나는 단 한 번도 채은이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본 적이 없었다. 나는 현정에게 행복을 주지도 못했다. 영원히 행복하게 해주겠다던 결혼 전의 약속을 나는 조금도 지키지 못했다. “…말도 안 돼.” 정말로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내 아내와 내 딸이 저 불길 안에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멍해질 뿐이었다. 내 불행을 알고 난 후, 나는 현정에게 사랑한다고 단 한 번도 말 해줄 수 가 없었다. 여전히 현정을 사랑하고 있음에도 현정에게 난 늘 차가운 존재였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의 딸 채은이를 떠나야 했다. 아빠 없이 자란 채은이에게 언제나 미안했다. 당당히 아빠라고 나설 수 없는 내가 미웠다. “안 돼!!” 나는 주저앉은 그 상태로 오열했다. 숨이 턱턱 막혔다. 이렇게 잃을 수는 없었다. 9년 이었다. 내 가족을 떠난 것이 벌써 9년 째였다. 멈춘 시간 속에서 내 가족을 지켜줄 수 없어서 나는 내 소중한 가정을 떠나왔다. 그런데 그들이 행복 하는 모습을 보지도 못한 채 이렇게 잃을 수는 없었다. 정말로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내 딸, 채은아. 채은아!!” 불길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불길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잡아먹었다. 새빨간 불길이 내 딸 채은이와 내가 사랑하는 현정을 잡아먹어버렸다. 나는 이 현실이 믿기 힘들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럴 순 없었다.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 떠나왔는데, 내 가족이 모두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일은 있을 수가 없었다. “어유, 딱해서 어쩌나…….” 아파트 사람들이 바닥에 주저앉은 나를 보며 안타깝다는 말을 던졌다. 하지만 그 말들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이었다. 내 딸과 내 아내를 지켜보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인생이었다. 이미 오래 전에 죽어도 되었을 인생을 살아오고 있었다. 오직 내 딸과 내 아내의 행복을 주기 위해서 이 빌어먹을 인생을 살아왔다. 그런데 이런 비극적인 일은 내게 있을 수 없었다. 속이 좋지 않았다. 속이 더부룩하고 답답했다. 나는 계속해서 울부짖었다. 땅을 치며 눈물을 토해내었다. 이런 비극적인 인생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아, 아악!!” 현기증이 핑 돌았다. 빌어먹을 인생이었다. 저주받은 인생이었다. 어떻게 이런 삶이 존재할까 싶었다. 신이 원망스러웠다.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어두운 건지,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잔인해야 하는 건지 묻고 싶었다. 내 인생은 왜 남들처럼 평범할 수 없는 건지, 왜 내가 사랑하는 사람까지 이렇게 잃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준, 민씨.” 눈물로 내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렀다. 서해정, 그 여자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손으로 거칠게 눈물을 닦았다. 하지만 터져 나오는 울음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잠시 맑아진 시야는 다시 눈물로 흐려졌다. “…설마, 아니죠?”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아니어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아파트를 올려보았다. 어느새 아파트 단지의 불은 사라지고 까만 연기만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때, 응급차가 도착하고 아파트 단지 안에서 소방대원이 누군가를 엎고 나왔다. 나는 힘이 풀린 다리였지만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야를 흐리는 눈물을 손으로 거칠게 닦아 내었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앞으로 나아갔다. 응급차에서 들것이 내려오고, 그 위로 소방대원이 엎고 나온 사람이 눕혀졌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누군지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새까맣게 타버렸다.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분간하기 힘들었다. 나는 불길에 잡혀 새까맣게 탄 그 사람을 자세히 보았다. 그리고 자리에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현정아.” 너무나 예쁜 손이었다. 피아노 위에서 아름다운 음률을 꾸미던 아름다운 손이었다. 유일하게 알아볼 수 있는 그 손이었다. 온 몸이 다 타버렸는데, 그 손만은 그리 많이 타지 않았다. 그래서 알아 볼 수 있었다. 그 아름다운 손과 그 손에 끼워진 우리의 결혼반지를. 주저앉은 나는 더 이상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슬프고, 허탈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숨이 턱턱 막혀왔다.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타버린 현정이 하얀 천으로 덮이었다. 그것이 말해주고 있었다. 현정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준민씨!” 서해정, 그 여자가 나를 따라왔다. 내 바로 앞에 쪼그려 앉아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나는 실소에 가까운 웃음을 내뱉었다. 너무 허탈해서 눈물이 사라지고 웃음이 나왔다. 나의 아내가 새까맣게 불에 타서 내 눈 앞에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뒤, 소방대원은 체구가 작은 사람을 들쳐 엎고 나왔다. 가까이 다가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나의 딸, 채은이였다. 현정을 닮아 피아노를 아주 잘 친던, 작고 예쁜 나의 딸이었다. 괴로웠다. 내 아내와 내 딸이 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다. 내가 이 삶을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가 사라졌다. 나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할 이유가 없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서해정, 그 여자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 여자를 빤히 보았다. ‘어떤 사람의 과거 속으로 내가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에요.’ ‘기억을 읽는다는 거예요?’ ‘좀 달라요. 난 그 과거를 변화 시킬 수도 있으니까요.’ 문득 그 여자와 나의 대화가 머릿속을 스쳤다. 과거를 변화시킬 수 있다. 그 여자는 나의 과거를 변화시킬 수 있었다. 내가 만일, 오늘 그 여자와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그러지 않고 현정과 채은이를 만나러 갔었다면, 이 불행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일 그들을 집 밖으로 불러내었다면, 지금 이런 상황은 막을 수 있었을 지도 몰랐다. “…서해정씨.” “준민씨, 괜찮아요? 설마… 아니죠? 준민씨 아내랑 딸, 아니죠?” 서해정, 그 여자는 내게 물었다. 나는 그 여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메인 목소리로 말했다. “…과거를 바꿔줘요. 내가 내 딸과 아내를 구할 수 있도록 과거를 바꿔줘요.” ★ 앞으로 시간을 새기다의 땡스투 쪽지는 없을 것 같아요. 대신 댓글로 달아드리도록 할게요 ^^* 30일 재생기간 만료 가사 뮤비 11. 시간 출처 : 프레쥬얼라인 신비한개구리케이크 “…과거를 바꿔줘요. 내가 내 딸과 아내를 구할 수 있도록 과거를 바꿔줘요.”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마치 그 여자와 내 사이에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주변에서는 아직도 사이렌 소리가 요동을 치는데, 그게 갑자기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서해정, 그 여자는 안쓰러운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시간을 되돌려야 했다. 시간을 돌려서 사랑하는 내 아내와 내 딸을 구해야 했다. 과거를 변화시킬 수 있는 그 여자의 힘을 빌려야 했다. “…그럴 수, 없어요.” 여자는 여전히 안쓰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지만, 그 목소리만큼은 매우 단호했다. 나는 그 여자에게 고정된 시선을 움직이지 않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시간을 되돌려 과거를 움직여야 했다. “부탁이에요. 과거를… 바꿔줘요.” 메인 목소리로 간절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여자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럴 수 없다는 뜻이었다. 나는 숨이 턱턱 막히는 것이 느껴졌다. 속이 답답하고, 화가 났다. 내 사랑하는 아내와 딸이 새까맣게 타버려서 내 눈 앞에 있었다.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내 가족이 이렇게 세상을 떠나는데,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었다. 내 가족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내가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이렇게 내 가족을 보낼 수는 없었다. 구해야 했다. 과거를 바꿔서 모든 것을 변화시켜야 했다. 오늘 밤 회사를 마친 나는 호프집이 아닌 자유아파트로 가야 했고, 현정에게 전화를 걸어 집 밖에서 만나자고 해야 했다. 꼭 9년 만에 내 가족을 마주해야 했다. 아니, 반드시 그들을 만나지 않아도 괜찮았다. 나의 목적은 오직 그들을 집 밖으로 유인하는 데에 있었다. 현정과 채은이 집 안에 있지 않도록, 가스가 폭발하는 그 시간에 집 안에 있지 않도록 해야 했다. “…미안하지만, 그럴 순 없어요.” 내 가족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는 서해정, 그 여자였다. 내 눈을 똑바로 직시하며, 그럴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바로 이 여자가 유일한 열쇠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여자를 설득해야 했다. 내 과거를 변화시키게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 그래야 내가 조금이라도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살아갈 이유가 존재하게 되었다. 나는 다리에 힘을 주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보다 키가 작은 서해정, 그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그 여자의 눈에 맺힌 눈물이 보였다. 진짜 울고 싶은 사람은 나인데, 그 여자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정말로, 난 그럴 수가 없어요.” “어째서, 어째서요.” “난, 할 수 없어요. 준민씨에겐 미안하지만, 과거를 변화시키는 것 따위, 난 해줄 수 없어요!” 난 서해정, 그 여자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해줄 수 없다는 것인지, 나의 과거를 조금만 변화시키면, 나는 내 딸과 아내의 소중한 생명을 구할 수가 있었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조금 더 숨을 쉬고 살 수 있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안 된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서해정, 그 여자는 고개를 떨어뜨린 후, 내게서 뒤돌아섰다. 사이렌 소리가 커졌다. 현정과 채은이를 실은 앰뷸런스가 떠났다. 하지만 나는 그 앰뷸런스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마지막을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시간을 되돌려 과거를 변화시킨다면, 앞으로 좀 더 오래도록 그들을 볼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당신도 봤잖아요! 새까맣게 타버린 내 아내와 딸을 봤잖아요! 조금만, 아주 조금만 바꿔줘요. 부탁…이에요.” “…미안해요, 준민씨.” “내 가족이, 내 사랑하는 가족이 저렇게 죽어요. 난 근데 아무 것도 못 했어요. 난 이렇게 보고만 있었어요. 제발… 내가 조금이라도 노력할 수 있게 도와줘요. 내 가족을 살리기 위해 조금이라도 노력을 해야 맞는 거잖아요.” 내 간절한 목소리에 서해정, 그 여자가 다시 뒤를 돌아서 나를 보았다. 나는 절망적인 시선으로 그 여자를 보았다. 그리고 그 여자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내가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였다. 현정과 채은이가 내 삶의 유일한 이유였다. 오래 전에 내 친구들과 함께 죽었어야 마땅한 운명이었다. 그 운명을 짊어지고 여태까지 살아온 이유는 내 가족뿐이었다. 그래서 난 가족을 떠나왔다. 현정이 내가 떠난 후 많이 힘들어 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곁에 남을 수 없었다. 그렇게 난 행복을 주지도 못한 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삶의 유일한 이유가 내 가족이었는데, 그들이 이렇게 세상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그럴 수는, 정말로 그럴 수는 없었다. “…부탁해요, 서해정씨.” 무릎을 꿇고 고개를 떨어트렸다. 내 눈이 다시 뜨거워졌다. 눈물이 내 무릎 위로 내려앉았다. 잠시 멎었던 내 눈물이 다시 흘렀다. 감당할 수 없이 많은 눈물이 흘러 내렸다.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새까맣게 타버린 현정과 채은이가 계속 내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피아노 건반을 넘나들었던 아름다운 현정의 손과 그 손에 끼워진 우리의 결혼반지가 눈에 생생했다. 이렇게 잃을 수는 없었다. 내 가족을 이렇게 잃을 수는 없었다. “…난, 할 수 없어요.” “해정씨.” “말했잖아요! 나는 과거를 바꿀 순 있지만, 현재는 바꿀 수가 없어요.” ‘친구들의 과거를 조금씩 바꾸어놓자, 현재는 꼬여버리기 시작했어요. 나는 과거를 바꿀 순 있지만, 현재를 바꿀 순 없었던 거예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과거는 바꿀 수 있으나, 현재는 바꿀 수 없다는 그 여자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과거가 변하면, 현재가 바뀔 수밖에 없었다. 아주 사소한 변화는 나비효과처럼 현재에서도 큰 힘을 발휘하기 마련이었다. 나는 늘 생각을 했다. 스물다섯, 사고가 일어났던 그 시간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많은 것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음악을 바꾸기 위해 대쉬보드를 열지 않았더라면, 혹은 대쉬보드 안이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더라면, 그것이 아니라면 내 차가 호영이의 차보다 앞서 달리고 있었더라면 많은 것을 바꾸지 않았을까, 하는. 이번에도 똑같았다. 시간을 아주 잠시만 돌려서 과거를 조금만 바꾼다면 많은 것을 바꿀 수 있을 거 같았다. 현정과 채은이 회사에서 오랫동안 남아서 광고에 대한 회의를 계속 했더라면, 혹은 그들을 내가 집 밖으로 나오게 할 수 있었다면, 그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마지막 순간을 나와 함께 할 수 있었다면 많은 것을 바꾸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시간을 돌려서 과거를 바꾸면 더 불행해 질 거예요. 더 끔찍한 결과를 얻을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난 현재를 바꿀 순 없다고요! 내가 과거를 바꿔서 지금 이 사고를 막았다고 해도, 준민씨의 아내와 딸은 어쩔 수 없이 똑같은 사고를 당할 거예요. 그들이 지금 이 순간을 모면해서 살아남는다고 해도, 금방 또 똑같은 사고가 발생해서 똑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떠나게 될 거라고요! 오히려 더 끔찍한 사고로 죽을지도 몰라요.” 나는 고개를 들어 서해정, 그 여자를 보았다. 그 여자는 어느새 눈물을 두 뺨 위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이해해달라는 듯 나를 보고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눈물이 섞인 그 여자의 목소리가 안쓰럽게만 들렸다. “그리고… 나는 그걸 모두 지켜봐야 한단 말이에요. 당신의 그 끔찍한 시간을 내가 다 지켜봐야 한다고요.”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해정, 그 여자는 이제 목청을 놓아 울고 있었다. 그 여자도, 나도 펑펑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이 저주스러운 상황에서 우리는 눈물을 흘리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나는… 나는, 이미 한 번 겪은 적이 있단 말이에요. 내가 사랑하는 내 친구가, 나로 인해… 더 끔찍하게 떠났다고요.” 이번에는 서해정, 그 여자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눈물을 토해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우리를 보고 있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 비현실적인, 비극적인 지금의 상황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지금 속이 울렁거리는 이 불운한 현실만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었다. 시간을 새기다(Engrave the Time). 겨우 진정된 우리는 나의 집에서 마주 앉았다. 진정이 되었다고 하지만 이제야 겨우 눈물을 멈출 수 있는 정도였다. 나는 뜨거운 커피를 나와 그 여자 앞에 두었다. 내 아내와 딸이 죽었는데 이렇게 커피를 마시고 있는 상황이 웃기게만 느껴졌다. “지금 준민씨의 간절한 그 마음 이해해요. 어떤 마음인지, 이해해요. 내가, 왜 과거를 바꿔줄 수 없는 지 이야기 해줄게요.” “…….” “…나를 믿어준 사람이니까, 이야기 해, 줄게요.” 서해정, 그 여자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말없이 그 여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머릿속에는 현정과 채은이가 가득 차있었다. 하지만 그 여자 앞에서 내색할 수는 없었다. 과거를 변화시킬 열쇠는 그 여자가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 여자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했다. “친구가 있었어요.” 서해정, 그 여자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는, 예술 고등학교를 나왔어요. 어려서부터 나는 피아노를 좋아했고, 그래서 예술 고등학교로 진학했어요. 그리고 그 친구는 성악을 전공하는 친구였어요. 오페라 가수를 꿈꾸는 정말로 예쁜 친구였어요. ……나를, 과거를 읽을 수 있는 나를 믿어주는 유일한 친구였어요.” 그 여자는 자신의 친구를 떠올리는 듯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나는 이 상황이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그 여자의 이야기를 최대한 열심히 들으려고 하고 있지만,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현정과 채은이의 모습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시간을 되돌려 그들을 되살려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나는 피아니스트가, 그리고 그 친구는 오페라 가수가 될 거라고 의심치 않았어요. 근데 그 꿈은 산산조각 났어요. 고등학교에서 열리는 발표회가 있던 날, 발표회를 보러오던 친구의 부모님들이 사고로 돌아가시게 되었어요.” 이제 그 여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급격히 표정이 어두워지고 목소리가 떨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 이후로 내 친구는 다시는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되었어요. 부모님을 잃고, 자신이 행복을 느끼던 그 노래도 할 수 없어진 친구는… 학교 옥상에서 몸을 던졌어요. 자신의 삶을 그렇게 포기하고 말았어요.” 그 여자는 그 말을 하고 다시 눈물을 토해냈다. 하지만 나는 그저 그 여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내 가족이 죽었다. 내 가족이 뜨거운 화염 속에서 괴로워하다가 숨을 거두었다. 이 상황에서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그 여자의 친구는 내게 어떠한 감흥도 주지 못했다. 현정과 채은이를 어쩌면 두 번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만 내 머리 속을 잠식했다. “…과거를 바꾸었어요.” “…….” “시간을 되돌려 그 아이의 과거를 바꾸었어요. 내게 둘도 없는 친구를 그런 식으로 잃고 싶지 않아서 시간을 되돌렸어요. 나는 옥상으로 올라간 그 아이의 곁으로 가서, 자살을 막았어요. 그 아이가 뛰어내리지 못하도록 내가 과거를 바꾸었어요.” 거기까지 말을 한 후, 여자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에 젖은 눈으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여자는 괴로워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 이야기에 스며들 수가 없었다. 마치 그 여자는 나의 그런 마음까지 꿰뚫고 있다는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현실은 끔찍했어요.” “…….” “현실로 돌아오자, 세상을 떠났던 그 친구가 내 곁에 있었어요. 기뻐했어요. 시간을 돌려서 친구를 살렸다고 나는 진심으로 기뻐했어요. 하지만, 친구는 그렇지 않았어요. 과거는 바꾸었지만, 현실은 바꿀 수가 없었어요. 친구는 빈 껍데기였어요. 생각도, 감정도, 표정도 없었어요. 그렇게 죽은 몸으로 내 곁에 있었어요.” 그 여자의 그 말을 듣자 소름이 끼쳤다. 그리고 믿어지지가 않았다. “…생각할 수도 없을 거예요. 빈껍데기만 남은 사람의 모습을. 끔찍했어요. 숨통이 조여 오는 느낌을 받았어요. 죽은 시체와 함께 있는 기분이 들었어요. 그리고 현재로 돌아온 후 그 아이는 갖은 수단으로 자신의 목숨을 끊어내려고 했어요. 어떠한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렇게 반복적으로 자살을 시도 했어요.” “…….” “필사적으로 막았어요. 한 번 잃었던 친구를 또 다시 잃을 수 없어서 그 아이의 자살을 필사적으로 막았어요. 하지만, 꼭 3일 뒤에 더 끔찍한 방법으로 친구는 세상을 떠났어요.” “…더 끔찍한 방법이요?” 여자는 내 물음에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리고는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마치 그 영상이 자신의 머릿속에서 흘러가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한참이나 후에야 여자는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신의 몸을 불태웠어요. 그리고 난 그걸 모두 지켜보고 있었어요.” 30일 재생기간 만료 가사 뮤비 12. 시간 출처 : 프레쥬얼라인 신비한개구리케이크 나는 서해정, 그 여자의 이야기를 듣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끼던 친구가 자신의 앞에서 분신을 했다. 그 충격을 이루 말 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러한 일을 잊기까지 참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었다. “사소한 일들을 바꾸려고 시간을 되돌린 적이 많아요. 아무리 시간을 되돌려 과거를 바꾸어도 3일 후면 모든 것이 다 제자리로 돌아가요. 그걸 알았어요. 수없는 시행착오를 통해서 예전부터 그걸 알고 있었는데도, 절실한 심정으로 그 아이를 살렸던 거예요. 그 아이만은 죽지 않게 하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결국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어요. 3일 후 모든 것이 그대로 되었다고요.” 서해정, 그 여자는 자신의 뺨에 흐르고 있는 눈물을 닦아 내었다. 그리고 내 눈을 똑바로 보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여자를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당신이 얼마나 절실한지 알아요. 하지만 그러지 말아요. 당신만 더 슬퍼질 거예요.” “…….” “…시간을 돌리면, 난 당신의 아내와 딸이 죽는 것을 다시 한 번 봐야 해요. 당신은 바뀐 기억을 갖고 살겠지만, 난 그것을 다 보고 있어야 해요.” 여자는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시간만 되돌리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다. 시간을 되돌려 현정과 채은이를 살려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을 이 세상에서 다시 숨 쉬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서해정, 그 여자의 슬픈 눈을 보니 알 수 있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한 번 정해진 운명을 바꿀 수는 없는 것이었다. 슬픈 운명의 굴레는 반복해서 굴러갔다. 아무리 되돌려도 계속해서 굴러갔다. “그러니, 포기해요. 난 누군가가 내 눈 앞에서 죽는 것을 다시 볼 자신이 없어요.” 서해정, 그 여자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자리에 멍하니 앉아서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하여 정상적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서해정, 그 여자가 우리 집을 나서는 문소리가 들렸다. 나는 닫히는 문소리를 들으면서도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금방이라도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세상을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가 사라졌다. 내 두 눈으로 그것을 지켜보았다. 새까만 주검이 된 현정과 채은이를 내 두 눈으로 보았다. 그들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그들을 떠나왔는데, 그들은 행복을 느끼기도 전해 세상을 떠나버렸다. 지난 9년 동안, 내가 자신들을 떠나왔다는 생각에 괴로워하기만 했던 나의 가족들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안…돼, 안 돼!!” 이럴 수는 없었다.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현정에게 미안하다는 말도 해주지 못했는데, 채은이를 따스하게 안아주며 내가 아빠라고 말해주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끝낼 수는 없었다. 비참했다. 나의 인생이, 이 현실이 너무나 비참했다. 이럴 수는 없는 것이었다. 내 가족을 결국 지켜내지 못했다. 그런 죄책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아빠?’ ‘아저씨, 우리 아빠 닮았다.’ ‘우리 엄마가 매일 아빠 사진 보여줬거든요. 근데 아저씨랑 정말 닮았어요.’ 품에 안아보고 싶은 귀여운 나의 딸 채은이가 아른거렸다. 그리고 새까만 주검이 된 그 모습도 함께 내 머릿속을 지났다. 괴로웠다. 멈추었던 눈물이 다시 내 눈을 적셨다. 속이 답답하고 먹먹했다. 이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했다. 나의 시간이 멈춰진 것도, 내가 현정과 이혼을 한 것도, 내 가족이 뜨거운 불길에 싸여 이 세상을 떠난 것마저도. 모두 다 꿈이었으면 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그 시간으로 다시 되돌리고 싶었다. 내 시간이 멈추지 않았다면, 내가 그 사실을 알고 현정과 헤어지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나는 내 가족에서 조금의 행복이라도 전해줄 수 있지는 않았을까. 만약 그랬다면, 이처럼 억울하고 가슴 아프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해주지 못한 내 인생이 원망스러웠다. 한 번 흐른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나는 고개를 파묻고 엉엉 눈물을 토해내었다. 아무도 없는 그 허전한 집에서 끝없이 눈물을 퍼부었다. 가슴이 쓰라려서 어떠한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정녕 이렇게 세상을 떠나야 한다면, 나와 함께해야 했다. 참 긴 시간을 함께 있어주지 못했는데, 마지막까지 외롭게 보낼 수는 없었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내가 해주었던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는 현실이 나를 너무나 괴롭게 했다. 눈물을 거칠게 닦았다. 다시 한 번 현정과 채은이를 보고 싶었다. 그것이 비록 새까만 주검이라 할지라도 마지막 가는 길이 외롭지 않게 해주어야 했다. 식탁에서 일어섰다. 얼마나 눈물을 흘려낸 것인지 머리가 윙윙거리며 아팠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거실 벽에 걸린 액자가 바로 보였다. 유일한 가족사진이었다. 내가 가족을 떠나오기 전에 찍었던 마지막 사진이었다. 이것이라도 없으면 떠나서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마지막으로 찍었던 것이었다. 젊은 시절의 현정과 갓난아기인 채은이가 있었다. 그리고 비극적이게도 사진 속의 이준민은 지금의 이준민과 다를 바가 없었다. 세월이 흘러 현정이 늙었고, 채은이가 자랐음에도 나는 바로 이 시간 속에서 그들과 멀어져 갔다. “…한 번만 안아 볼 수 있으면, 그랬으면 조금 덜 억울했을까, 채은아.” 나는 사진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자그마한 손과 발을 가진 그 아이가 마치 나를 보고 웃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가슴이 쓰렸다. 나는 다시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기분에 사진에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집을 벗어났다. 시간을 새기다(Engrave the Time). 현정과 채은이가 실려 간 병원에 도착했을 때, 나는 잊고 있던 사실을 망각했다. 현정이 대한민국과 세계에서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다는 사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현정을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병원은 기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많은 기자들이 현정의 소식을 얻기 위해 병원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이현정씨가 약 두 시간 전, 아파트 가스폭발 사고로 인해 사망하였다는 소식입니다. 고 이현정씨의 집에서 가스가 폭발하였으며, 그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번 가스폭발 사고로 인해 이현정씨와 딸 이채은 양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귓가에 리포터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현정과 채은이의 사망 소식을 직접 다시 확인하자 온 몸에 힘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흔들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기자들 틈을 파고들었다. 내 가족이 한 줌 가루가 되기 전에, 나는 그들을 마지막으로 꼭 봐야 했다. 듣지 못하는 그들이라도 사랑한다고, 사랑하고 있었다고 말해주어야 했다. 나는 사람들을 밀쳐내며 병원 입구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입구에는 병원 관계자들이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리고 병원 문 유리벽 너머로 현정의 부모님이 보였다. 입구를 향해 무작정 걸었던 내 걸음이 멈추었다. 유리벽 너머로 보이는 그들은 나의 장인, 장모였다. 나는 더 이상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현정아, 채은아.” 이것이 나의 한계였다.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나의 한계였다. 나는 내 가족뿐만 아니라, 나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 앞에 당당히 나설 수 없는 사람이었다. 현정이 보고 싶었다. 채은이가 외롭지 않게 그 마지막을 지켜주고도 싶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앞으로 걸어갈 수가 없었다. 나는 당당하게 현정의 남편이라고 채은이의 아빠라고 말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으며, 나는 감히 현정의 부모님 앞에 나설 수가 없었다. 스물다섯에 멈춰진 나의 모습으로는 나는 어느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내 아내가, 내 딸이 죽었는데, 그런 것들이 중요할 리가 없었다. 사랑한다고 말해줘야 했다. 꼭 사랑한다고 말을 해야만 했다. 사랑한다는 말 한 번 못하고 그들을 떠나야 했던 내 시간을 사과해야 했다. 미안했었다고, 외롭게 해서, 힘들게 해서 정말로 많이 미안했었다고 이야기를 했어야 했다. 이럴 수는 없는 것이었다. 정말로 이럴 수는 없는 것이었다. “아…아악!!” 고통스러웠다. 이 현실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내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쓰라린 고통을 견뎌내는 것이 너무나 버거웠다. 세상이 무너지고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 어떤 고통보다 더 한 고통이었다. 어디서부터 어긋났는지 모를 빌어먹을 인생이었다. 하늘에서 비가 투둑투둑 떨어졌다. 갑작스런 소나기에 기자들은 비를 피하려 다들 바삐 움직였다. 하지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날 줄을 몰랐다. 아니,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한 방울, 두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이 거세졌다. 나는 비와 함께 눈물을 흘려보냈다. 어느 것이 눈물이고 어느 것이 빗방울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 감정을, 이 쓰린 고통을 버티는 것이 너무나 힘겨웠다. 내 아내가, 내 딸이 죽었는데 나는 그들의 마지막도 지켜줄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이런 현실은 조금 더 빨리 깨달았더라면, 앰뷸런스에 실려 가는 그들을 그렇게 놓아주지 않았을 것이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는 확신에 그들을 그렇게 보내었던 것이 잘못이었다. 내게 주어졌던 짧은 시간을 나는 바보처럼 그렇게 버렸다. 다시는 그들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외롭게 앰뷸런스에 실려 가는 그들을 그렇게 놓아두었다. 나의 불찰이었다. 스물다섯에 멈춰진 내 시간을 자각하지 못한 나의 불찰이었다. “…이, 이럴 수는 없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럴 수는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금방이라도 다시 주저앉을 것 같았지만, 쓰러지지 않고 버텨냈다. 그리고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딛었다. 서해정, 그 여자에게로 가야했다. 내가 내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그 뿐이었다. 서해정, 그 여자가 내 과거를 바꾸어 놓게 해야 했다. 내 가족을 구할 수 있도록 나의 과거를 바꾸게 해야 했다. 이기적이란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내 가족을 보내는 것은 너무나 괴로웠다. 단 3일이라도 시간을 벌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3일이면 충분했다. 내가 현정과 채은이에게 사랑한다는, 미안하다는 그 말을 전하기에는 3일이면 충분했다. 운명을 바꿀 수 없어서 그들이 어차피 세상을 뜨게 된다면, 나도 함께 가면 되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였으니, 미안하다는 말을 하였으니 더 이상 미련 같은 것은 없었다. 꼭 그 말만을 하고, 그들과 함께 이 세상을 떠나면 되는 것이었다. 어차피 살고 싶지 않았던 삶이었다. 스물다섯에 멈춰진 이 삶에 더 이상 미련은 없었다. 그들에게 내 진심을 전한 후, 그들과 함께 죽는다면, 내 가족과 함께 죽는다면 이 삶에 미련이 없었다. 오히려 더 행복했다. 힘겹게 발을 내딛었다. 자유아파트로 가야했다. 서해정, 그 여자가 있는 자유아파트로 가야했다. 현정과 채은이가 죽었던 그 장소, 그리고 서해정, 그 여자가 살고 있는 그 장소. 참으로 아이러니한 그 곳으로 가야 했다. 서해정, 그 여자를 설득시켜야 했다. 비는 점점 더 거세졌다. 나는 그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 비를 맞으면서 몸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앞으로 내딛는 걸음은 늦추지 않았다. 자유아파트가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파트에서는 아직도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가스 폭발 사고의 잔해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의 가족이 살았던 집은 흉한 모습으로 아직 정리가 되고 있지 않았다. 아파트에도 역시 기자들이 잔뜩 몰려와 있었다. 아파트 앞에 도착한 나는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었다. 그리고 서해정, 그 여자의 변호를 눌렀다. 통화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귓가에 갖다 대었다. 지금 이 모든 것이 현실같이 느껴지지 않아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전화가 꺼져있었다. 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비를 맞아 무거워진 몸이 한층 나를 힘겹게 했다. 머리가 아파왔다. 서해정, 그 여자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 나는 그 여자가 자유아파트에 산다는 것만 알 뿐, 그 여자의 집이 정확히 어디인지 알지는 못했다. 그 여자를 찾아야 했다. 그래서 꼭 한 번만 과거를 바꿔달라며 부탁해야 했다. 나는 주변을 한 바퀴 빙 둘러보았다. 아파트 밖은 기자들과 아파트 주민들로 정신이 없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있어서 그 여자가 가까이 있더라도 찾기가 힘들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부터 한 사람씩 얼굴을 확인하며 앞으로 걸었다. 비로 인해 무거워진 몸으로 힘겹게 한 걸음씩 옮겼다. 아파트 주민들이 나를 미친놈처럼 보고, 기자들이 몸을 밀쳐도 굴하지 않았다. 한 걸음씩 앞으로 걸어 나가면서 그 여자를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자리에 주저앉고 싶어질 때쯤, 나와 같은 모습으로 비를 맞으며 서서 까맣게 타버린 아파트를 올려다보고 있는 그 여자를 찾았다. 30일 재생기간 만료 가사 뮤비 출처 : 프레쥬얼라인 신비한개구리케이크 13. 멈춰진 시간 서해정, 그 여자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섰다. 내가 다가오는 것도 모른 채, 그 여자는 비를 맞으며 그렇게 서있었다. 나는 그 여자의 앞에 섰다. 그제야 내가 다가온 것을 눈치 챈 것인지 천천히 고개를 아래로 내려 나와 눈을 마주했다. 나는 그 여자를 눈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차가운 빗줄기가 내 몸을 적셨다. 나는 그 여자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내가 3일이라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3일 동안만이라도, 현정에게 웃음을 되찾게 해주고 싶고, 채은이에게 내가 아빠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3일 후에 모든 것이 다 제자리로 돌아간다고 해도 괜찮았다. “이러지 말아요.” 내가 어떠한 말을 내뱉기 전에, 그 여자가 먼저 내게 말을 했다. 그 여자의 말에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갈기갈기 찢겨져 버린 내 인생을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늘 뒤에서 내 가족을 지켜보며 쓰린 속을 삭히며 살아왔는데, 마지막까지 이럴 수는 없는 법이었다. “난, 솔직히 무서워요.” “…부탁이에요.” “세상에는 어찌할 수 없는 이치 같은 것이 있어요. 어느 날 갑자기 사고로 내가 죽는다 해도, 어느 날 갑자기 내가 큰 병이 걸린다 해도,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내 가족들을 잃는다 해도,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은 어찌할 수가 없는 거잖아요.” “…….” “난 이 엉켜버린 시간 속에서 살면서 많은 것을 기대했어요. 내가 무언가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늘 가지고 살았어요. 하지만 이제는 알아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요.” 서해정, 그 여자가 착잡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그리고 그 여자는 천천히 앉아서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나는 그 여자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그 여자의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 차 있었다. 이러한 현실을 마주한 자신의 삶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이기적이었다. 내 행복을 위해 이 여자에게 과거를 바꾸어 달라는 것은 너무나 이기적이었다. “…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 “이미 흘러간 시간을 바꾸려 한 죄 값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내 능력 밖의 일을 하려고 노력한 죄 값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삶은 어차피 영원할 수 없는 거잖아요. 준민씨의 경우에는, 조금 다르겠지만요.” 서해정, 그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 빙긋이 웃었다. 눈빛에는 두려움이 가득하면서도, 평소처럼 장난기 넘치게 웃었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여자는 갑자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살짝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 내민 손바닥 위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이미 오래전에 떠났어야 했는데, 너무 오랫동안 뜸을 들이고 있었어요.” “…….” “가기 전에, 죄 한 번 더 짓고 갈게요. 그러니까, 일어서요.” 나는 잠시 동안 멍하게 그 여자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자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닫고 놀란 눈으로 그 여자를 보았다. 이 세상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몇 시간 전까지 절대로 안 된다던 그 여자가 왜 갑자기 마음을 고쳐먹은 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놀란 눈으로 그 여자를 보고 있자, 여자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마치 내 마음을 다 꿰뚫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래 전부터 그런 생각은 하고 있었어요. 내가 짊어지고 살기에는 너무 큰 짐이라고 생각했어요. 이 짐을 떨쳐버릴 수 있는 건, 내가 이 세상을 떠나는 것 밖에 없잖아요. 옛날부터 그런 생각을 늘 갖고 있었는데, 무서웠나 봐요. 이런 삶이 벅차고, 힘들지만, 그것보다 죽음이 두려운 것이 먼저였나 봐요.” 그 여자의 표정이 너무나 슬퍼 보였다. 비를 오랫동안 맞아 창백하게 질린 그 여자의 얼굴에는 슬픔이 가득 차 있었다. 하늘에서 툭툭 비가 쏟아졌다. 마치 나와 그 여자의 마음을 대변해 주기라도 하듯이 비가 쏟아져 내렸다. “오늘 준민씨로 인해 그 친구를 다시 떠올리면서 마음을 먹었어요. 죄 값을 치러야죠. 과거를 흩트려 놓은 그 죄 값을 치러야죠.” “…서해정씨.” “조용한 곳으로 가요. 마지막으로 준민씨 부탁을 들어줄게요.” 서해정, 그 여자는 내밀고 있던 손을 조금 더 앞으로 밀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여자의 그 손을 잡았다. 그 여자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여자의 손을 잡고서 나 역시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간을 돌려 과거를 바꿀 수 있었다. 고작 3일이지만, 현정과 채은이를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들에게 내가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많은 말들을 전해줄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다시 한 번 내 가족들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한 편으로 마음이 쓰렸다. 서해정, 그 여자가 죽음을 선택하려 했다. 시간을 돌려 과거를 바꾸고 싶었지만, 그 여자의 죽음도 막고 싶었다. 아직 창창한 그 여자의 인생을 여기서 마감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야 그 여자의 인생은 시작이었다. 나는 살만큼 살았다. 스물다섯이라는 시간에 멈춰서 난 참 오랜 인생을 살았다. 그래서 나는 미련이 없었다. 하지만 서해정, 그 여자는 아니었다. 이제야 고작 스물다섯이었다. 처음으로 맞는 스물다섯이었다. 긴 인생의 절반도 살지 못하였다. 그런 그 여자가 자신의 인생을 그런 식으로 포기하도록 그냥 둘 수는 없었다. “…꼭 그래야 해요?” “뭐가요?” “꼭 서해정씨가 죽는 걸 선택해야 하느냐고요.” 내 말에 서해정, 그 여자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 여자를 보았다. 내 욕심 때문에, 내 가족을 다시 만나고 싶은 내 욕심 때문에, 그 여자가 죽음을 선택한 것만 같았다. 죄책감이 들었다. 모두 내 탓인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죄를 지었으면, 그 죄 값을 치러야죠. 누군가의 삶을 뒤흔들어 놓고, 나만 잘 살라는 법은 없잖아요.” “아직, 아직 당신은 다 살지 못했어요.” “아니요. 난 만족해요.” “내가 그걸 보고 있을 수가 없어요!!” 나는 모두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말하는 그 여자를 보며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그냥 왠지 모르게 화가 났다. 그 여자가 죽으려고 하는 것도 내 탓인 것 같았고, 그렇게 늘 밝게 웃던 그 여자가 죽으려 한다는 것도 모순인 것 같았다. “…준민씨.”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게 당신의 인생이었어요? 이제 고작 스물다섯인데, 그렇게 서해정씨 인생을 포기할 수 있냐고요!” 빗물이 차갑게 내 얼굴을 때렸다. 서해정, 그 여자의 얼굴에선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이 자꾸만 흘러내렸다. 그 여자는 나를 올려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떨어트렸다. “…고마워요.” 아이러니했다. 내 가족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는 서해정, 그 여자의 힘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여자는 과거를 바꾸게 되면,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죄책감을 느꼈다. 그리고 죽음으로 다가가려 했다. 그 모든 시작은 나였다. 내 가족을 다시 만나서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은 이기적인 나였다. “일단, 조용한 곳으로 가요.” 서해정, 그 여자가 다시 고개를 들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여자는 내 팔목을 잡았다. 그리고 아직까지 화재의 잔해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자유아파트에서 점점 멀어질수록, 사람들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한산한 골목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좁은 골목길에서 서해정, 그 여자는 내 손을 놓고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나는 가만히 서서 그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말 해 줘요.” “네?” “어떤 식으로 준민씨의 과거를 바꿨으면 좋겠는지, 내게 말을 해줘요.”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서해정, 그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진정으로 내 과거를 바꿔줄 생각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과거를 바꾼 후에 죽음을 선택한다는 결정에 변함이 없는 것 같았다. 가슴이 쓰렸다. 내 이기적인 생각 때문에, 밝고, 예쁘게 웃던 서해정, 그 여자를 망쳐놓은 것 같았다. “…퇴근을 하면, 서해정씨와 맥주를 마시지 않고 자유아파트로 가요. 집으로 전화를 해서 채은이와 현정이를 집 밖으로 불러내요. 사고가 일어날 시간에 집에 있지 않도록 해줘요.” 나는 서해정, 그 여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 여자는 내 말을 듣고 난 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내 눈을 똑바로 보았다. 나는 그 여자의 시선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과거를 바꾸면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하지 못할 거예요. 그래도 그 마음만 가지고 있으면 돼요. 당신이 가족에게 전하려고 했던 말을 꼭 전해야 한다는 그 마음만 가지고 있으면, 후회 하지 않을 수 있을 거예요.” 서해정, 그 여자가 내 눈을 보면서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한다는 말, 그 말을 꼭 전해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채은이와 현정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야 했다.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어서 참 미안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꼭 해야 했다. 나는 그 말만 머릿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시간을 되돌려 과거를 바꿀 것이었다. 절대로 후회는 없어야 했다. 지금과 같은 후회를 남겨서는 안 되었다. 서해정, 그 여자를 힘들게 하면서까지 바꾼 과거에서는 절대로 후회는 없어야 했다. “내 손을 잡아요. 마음의 준비가 되면 말해줘요.” 서해정, 그 여자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여자의 손을 잡았다. 마음을 가다듬었다. 머릿속에서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야 한다는 그 생각만 반복했다. 빗물이 내 얼굴을 타고 흘렀다. 과거의 시간을 바꾼다. 내게 남겨진 시간은 고작 3일 이었다. 채은이와 현정에게 사랑한다고,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3일 이었다. 그 3일 안에 나는 못다 전했던 내 마음을 전해야 했다. 나는 심호흡을 두어 번 한 후, 그 여자와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여자는 나를 보더니 이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나는 그 여자의 그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잠이 몰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 순간까지도 머릿속으로 채은이와 현정에게 전해야 할 말을 반복해서 새겼다. 잊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사랑한다고, 보잘 것 없는 남편이고, 해준 것 없는 아빠라서 미안하다고 그 말을 전해야 했다. 꼭, 반드시, 전해야만 했다. 시간을 새기다(Engrave the Time). 유리벽 바깥쪽에서 서해정, 그 여자와 내가 서있었다. 유리벽 안쪽에는 채은이가 회사의 여직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채은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채은이.” “준민씨 딸이잖아요. 품에 안아주진 못해도,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으면 좋을 거라 생각했어요.” 생글생글 예쁘게 웃으면서 앉아있는 채은이의 모습을 보자, 왠지 마음이 쓰렸다. 이 회사 어딘가에 현정 역시 있을 거라는 생각에 긴장이 되기도 했다. 나와 같은 공간에 내 딸과 내 아내가 있다는 것이 믿기 힘들었다. 그러다 나는 창 너머에 두던 시선을 돌려 서해정, 그 여자를 보았다. “…당신 뭐예요.” “준민씨라면 내 이야기를 믿어줄 것만 같았어요. 그래서 도와주고 싶었고요.” “무슨 소리예요. 저 아이가 나의 딸이라는 건…” “스물다섯 살, 당신은 친구들이랑 여행을 가다가 사고가 났어요. 그 사고에서 혼자 살아남았고, 그 이후로 당신의 시간은 멈췄어요. 그 사실을 알게 된 후,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두고 이혼을 해야 했죠. 당신이 사랑하는 그 딸은 바로 이 유리벽 너머에 있고요.” 서해정, 그 여자가 내 눈을 직시하면서 말하였다. 나는 놀란 표정으로 그 여자를 보았다. 채성이에게 밖에 털어놓지 않았던 나의 비밀을 서해정, 그 여자가 알고 있었다. 나는 믿을 수가 없어 뒷걸음질을 쳤다. 그 여자가 위험하게 느껴졌다. “당신…뭐야.” “차차 이야기 해주고 싶어요. 나도 이야기 할 사람이 정말로 필요했으니까요.” “무슨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알게 됐는지, 다 이야기 해줄게요.” “…….” “그러니까, 오늘 마치고 나랑 같이 맥주 한 잔 할래요?” 소름이 끼치고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마치 이것이 꿈인 양 느껴졌다. 내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서해정, 그 여자가 두려웠다. 어떻게 알았는지, 대체 어디서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더욱 두려웠다. “준민씨를 해칠 생각 같은 건 추호도 없어요. 그냥 나도 준민씨의 이야기를 듣고 싶고, 준민씨도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면 해요.” “…하.” “마치고 회사 앞에 있을 게요. 부탁이에요.” 서해정, 그 여자는 그렇게 말을 남기고 내게서 뒤돌아섰다. 나는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한동안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있었다. 그 여자가 완전히 내 눈에서 멀어지고 나서도 한참동안이나 지금 현실을 이해할 수가 없어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유리벽 안쪽을 보았다. 여전히 채은이는 밝게 웃으면서 여직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젠장.” 머릿속이 복잡했다. 채은이를 한참이나 보고 있다가, 나는 그 자리를 벗어났다. 회사에서 일을 하는 내내 머리가 아팠다. 서해정, 그 여자는 퇴근 시간까지 내게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공적으로 일을 처리할 뿐이었다. 나는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퇴근 시간이 되고, 그 여자는 나보다 먼저 회사를 빠져나갔다. 나는 퇴근 시간이 지나고까지 망설이면서 쉽게 회사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왔네요. 그럴 줄 알았어요.” 하지만 결국 나는 서해정, 그 여자를 찾아왔다. 알아야만 했다. 어떻게 내 비밀을 알았는지, 대체 어떻게 내 아내와 딸, 멈춰진 나의 시간을 알고 있는 건지. “요 앞에 괜찮은 호프가 있대요. 거기로 갈래요?” “마음대로 해요.”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머리가 복잡하고, 두통이 심했다. 하지만 나는 서해정, 그 여자와 함께 회사에서 가까운 호프로 갔다. 맥주잔을 각각 앞에 두었다. 뭔가가 어긋났다는 기분이 자꾸 들었다. “처음엔,” 그 여자가 말을 시작했다. 나는 긴장한 채로 그 여자를 보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두통이 점점 심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뭔가가 이상했다. 갑자기 세상이 핑핑 도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두통이 상상을 초월했다. 정신이 없었다. 속이 좋지 않았다. 서해정, 그 여자가 무엇이라 말을 하고 있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두통을 참지 못하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귀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다 그 소리가 점점 분명해졌다. 웅웅거리는 소리는 말소리로 변했다. ‘정신 차려요! 일어나요!’ 지금 내 앞에 있는 서해정, 그 여자는 변함없이 무엇이라 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귀에 들리는 소리는 그 여자의 말이 아닌 것 같았다. 그 여자의 목소리인 것은 같았지만, 지금 이 공간에서 하고 있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심한 두통이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세상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갈수록 심해지는 두통을 참기가 힘들었다.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땀이 내 몸을 축축이 적셨다. 두통을 어떻게든 참아내기 위해 온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두통은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 “아아악!!” 결국 나는 두통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러버렸다. 그 순간 세상의 공기가 바뀌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공기의 흐름이 바뀌어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천천히 두통도 가라앉았다. 나는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빗물이 떨어졌다. 내 몸이 젖고 있었다. 땀과 비가 뒤엉켜서 내 몸에 흘렀다. 나는 숨을 몰아쉬면서 천천히 눈을 떴다. “괜찮아요? 정신이 좀 들어요?” 서해정, 그 여자가 불안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여자는 한 손으로는 벽을 짚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자신의 이마를 짚고 있었다. 그 여자 역시 나와 같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무척이나 힘들어보였다. 나는 그런 그 여자의 모습을 보면서 필연적으로 무언가를 느낄 수가 있었다. 무언가 어긋났다. 과거가 변하지 않았다. ★ 너무 늦게 글을 가져오게 되서 죄송합니다. 그동안 저에게 많은 일이 있어서 글을 올려야 한다는 생각은 있으면서도, 많이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시간을 새기다는 이제 끝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무리 하게 드라마와 시새를 동시에 연재하기 보다는, 시새를 먼저 다 끝낸 후에 드라마를 연재 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으니, 끝까지 함께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완결편까지 땡스투는 없을 것 같습니다. 더 좋은 모습 보여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30일 재생기간 만료 가사 뮤비 출처 : 프레쥬얼라인 신비한개구리케이크 14. 불행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나는 내 앞에서 힘들어하고 있는 서해정, 그 여자를 보았다. 그 여자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두통이 몰려오는 모양이었다. 과거를 들여다 본 후면 두통에 시달린다고 했던 그 여자의 그 말이 기억이 났다. 나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당혹스러웠다. 과거를 바꾸려고 시도했는데, 과거가 바뀌지 않았다. 나와 그 여자는 비가 오는 골목길에서 서있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개를 돌려 자유아파트 쪽을 보았다. 하지만 실망만 커질 뿐이었다. 자유아파트 쪽에서는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서해정, 그 여자는 두통을 견디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멀뚱히 그 여자만을 보고 있었다. 내게 있던 두통은 차츰 사라졌다. 언제 아팠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마치 내 두통이 그 여자에게 전이된 것처럼 그 여자는 괴로워하고 있었다. 나는 그 여자의 어깨를 양 손으로 감싸 쥐었다. “서해정씨! 괜찮아요? 괜찮은 거예요?” 서해정, 그 여자는 괴로운 표정을 쉽게 지우지 못했다. 한동안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머리를 감싸 쥐던 그 여자가 점점 호흡을 바르게 했다. 조금씩 상태가 나아지고 있는 것 같았다. 두통이 차츰 가라앉자 그 여자는 몸을 곧게 세우고 나를 보았다. 나는 그 여자의 어깨를 감싸 쥐고 있던 손을 조심스럽게 놓았다. 그 여자는 이런 상황에 매우 당황한 것 같았다. 아무래도 여태껏 과거를 변화시키는데 실패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이상해요.” “어떻게 된 거예요?” “난… 준민씨의 과거를 바꿀 수가 없어요. 아니, 적어도 스물다섯 이후의 시간을 바꿀 수는 없는 거 같아요.”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 그 여자와 시선을 맞추며 물었다. 그 여자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무언가 혼란스럽다는 표정이었다. 빗방울이 사정없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이제 우리는 떨어지는 빗방울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 집중할 뿐이었다. “멈춰진 시간은… 내가 건드리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뭐랄까, 그런 느낌 같은 게 있어요. 내가 바꿀 수 있는 과거와 내가 바꿀 수 없는 과거에는 미묘한 느낌의 차이가 있어요. 뭐라고 딱히 설명할 수는 없는데, 그 사람의 과거를 보다보면 그게 느껴져요.” 나는 조용히 그 여자의 말에 집중했다. 그 여자의 말을 백 프로 다 이해할 순 없었지만,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그 여자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계속 이었다. “예전에 준민씨의 과거를 볼 때 그게 느껴졌어요. 그때의 그 사고가 일어나기 직전까지는 내가 바꿀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사고가 일어난 직후에 갑자기 흐름이 바뀌었어요. 그걸 잠시 잊고 있었어요.” “…그럼, 과거를 바꿀 수 없단 말이에요?” “아무래도 준민씨의 시간이 멈춰있기 때문에, 내가 그 시간에 손을 댈 수 없는 것 같아요. 몇 년의 시간 같아 보였지만, 준민씨에게는 그 시간들이 늘 현재였으니까요. 과거가 아닌 스물다섯이라는 현재이기 때문에 내가 과거를 바꾸는 데 실패한 것 같아요.” 서해정, 그 여자는 자신 스스로 그렇게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당혹스러웠다. 그 여자의 힘이면 나의 과거를 바꾸어 내 가족을 다시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멈춰진 시간에서 사는 빌어먹을 내 삶이 마지막 희망까지 사라져 버렸다. 나는 절망감에 휩싸였다.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힘들어 하는 서해정, 그 여자의 모습이 안쓰러웠지만, 이기적이게도 과거를 바꿀 수 없는 내 현실이 더 불쌍해보였다. 내가 생각해도 지금의 내 모습은 참으로 이기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절망감을 쉽게 지울 수가 없었다. 마지막 희망이었다. 내 가족에게 사랑한다고 말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마저 이제는 없었다. 후회스러웠다. 내 가족의 마지막조차 함께하지 못한 내가 너무나 불쌍했다. “…이젠 정말 끝인 거죠.” 의문의 투였지만, 서해정, 그 여자에게 묻는 것은 아니었다. 내 현실을 다시 한 번 각인시키는 일일 뿐이었다. 나는 괴로움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괴로움은 뜨거운 눈물이 되어서 내 눈가에 맺혔다. 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내 가족이 없는 이 세상에서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역겨웠다. “이젠 정말, 끝이에요.” 나는 그렇게 말을 토해내듯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끝이었다. 내 가족이 없는 삶은 이유가 없었다. 더 이상 내가 존재할 필요가 없었다.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해주지 못한 것이 죽어서도 후회로 남을 것 같았다. 내 가족의 곁에서 끝까지 있지 못한 것은 다시 태어난다 해도 갚을 수 없는 죄와 같았다. 나는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안 될 걸 알면서도 시도를 했어요. 내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시간인 것을 알면서도 바꿔보려고 했어요. 실패했지만요.” 나는 고개를 들었다. 서해정, 그 여자가 안쓰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동정하는 것 같기도 했고, 연민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으며, 내 빌어먹을 삶을 공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참 많은 것이 들어있는 눈빛이었다. “고마웠어요, 준민씨.” 별안간 그 여자가 내게 그렇게 말했다.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그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그 여자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복잡한 미소를 지었다.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저 복잡한 미소였다. “이제껏 내 능력을 이용하려는 사람은 많았어요. 과거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게 일방적으로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기를 바랐어요.” 서해정, 그 여자는 이제 쪼그려 앉아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나는 그 여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여자는 슬픈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 여자와 시선을 맞추고 조용히 그 여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럴 때마다 거절할 수 없는 갖가지 이유들로 난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어야만 했어요. 그러고 나서는 항상 후회했어요. 시간을 돌려 과거를 바꾸어도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고, 내게 남는 건 지독한 두통뿐이었으니까요.” “…미안, 해요.” 나는 그 말을 듣고선 그 여자에게 미안하다는 말부터 내뱉었다. 나도 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미안했다. 내 욕심을 채우자고 그 여자를 힘들게 했다. 내가 이기적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내가 이기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너무나 간절했기에 결국 그 여자에게 일방적인 부탁을 하고 말았다. 싫다고 여러 번이나 거절을 했었는데도, 나는 나만을 생각하며 그렇게 간절하게 부탁을 했다. “처음엔 준민씨도 똑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당신이 참 미웠어요.” “…….” “엉켜버린 시간 속에서 괴로운 건 준민씨나 나나 마찬가지인데, 나에게 그런 부탁을 하는 당신이 얄밉기도 했어요. 그런데 준민씨의 집에서 나와 아파트로 돌아와서 검은 연기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이런 끔찍한 상황에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당신이 나보다 조금 더 힘들고, 조금 더 괴롭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요.” “……서해정씨.” “그리고 말했다시피,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어요. 언젠가는 내가 지은 죄 값을 갚아야 한다는 그 생각을요. 미루고 있었을 뿐이었어요. 그런데, 준민씨가 그러지 말라고 말했잖아요.” 서해정, 그 여자의 눈에 눈물이 조금씩 맺혀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느새 빗줄기는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곧 비가 그칠 것처럼 보였다. 보슬보슬 내리는 비를 우리는 그대로 맞았다. 이미 다 젖어버린 몸과 이미 다 젖어버린 마음이었다. “…그래서 난 참 고마웠어요. 내 능력을 이용하려 내게 다가온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난 그렇게 느꼈어요. 내게 과거를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나는 존재할 가치가 없는 건 아닐까, 하고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나는 내 능력을 저주했어요. 그랬기에 나는 내 삶이 가치 없었어요. 그래서 여기서 내 인생을 포기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준민씨의 말을 듣고서는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직 내 인생의 반도 살지 못했는데, 여기서 쉽게 포기하는 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 “고마워요. 정말로, 고마워요.” 서해정, 그 여자는 내게 진심을 전하려는 듯 내 손을 잡았다. 비에 맞아 차가워진 그 여자의 손에서 그 진심이 느껴졌다. 눈물을 꾹 참아내려 하고 있는 그 여자의 모습이 너무 안타깝게 보였다. 그래서 왠지 모르게 마음이 쓰렸다. 참 아이러니했다. 나는 서해정, 그 여자에게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었는데, 이제 나는 이 삶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는 삶이라 생각해 내 삶을 끝내려하고 있었다.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누군가는 나로 인해 희망을 얻었는데, 결국 나는 이 삶에 절망하고 끝내려했다. “…그 마음 잊지 말고 끝까지 살아요.” 내가 서해정, 그 여자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의 말이었다. 나는 그 여자의 손을 마지막으로 꼭 한 번 잡아주고 다시 그 손을 놓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에 맞아 몸이 무거웠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 여자 역시 나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씁쓸한 미소를 그 여자에게 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그 여자에게서 몸을 돌렸다. 걸음이 무거웠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골목길을 벗어났다. 결국 나는 아무 것도 바꿀 수가 없었다. 결국에 내 아내와 내 딸이 세상을 떠났다는 현실도 바꿀 수가 없었으며, 내가 그들에게 마지막까지 사랑한단 말 한 번 해주지 못한 못난 남편이자 아빠라는 사실도 변함이 없었다. 절망스러운 이 현실은 조금의 변화도 가져오지 못했다. 이제 내 가족의 뒤를 내가 따라야 했다.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어두운 골목길을 빠져나가자 다시 자유아파트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짧은 현기증이 느껴졌다. 잠시 휘청거렸던 나는 다시 중심을 잡았다. 그리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절망스런 현실에 내 뺨을 스치니, 그 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준민씨!” 그때, 뒤에서 서해정, 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앞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곧이어 발소리가 들렸다. 비에 젖은 땅을 박차고 온 빠른 걸음이었다. 그 여자의 숨소리가 들렸다. “날 살려놓고, 자기는 죽으러 가는 건 뭐예요!! 나에게 살고 싶은 마음을 주고서, 자기는 인생을 포기하는 게 뭐예요!!” 서해정, 그 여자의 말이 모두 맞아서 나는 차마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내 등 뒤에서 그 여자의 애절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여자의 말을 뒤로 한 채 다시 한 발 앞으로 내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것은 말이 안 되었다. 그건 죄악이었다. 내 가족이 죽었는데,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죄악이었다. 이미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해버렸다. 이 저주스러운, 이 절망스러운 현실을 그만 받아들여버리고 말았다. “알아요. 과거를 바꾼다고 해도 준민씨는 가족과 함께 죽을 거라는 거.” 나는 서해정, 그 여자의 말을 듣고서도 또 한 발을 내밀었다. 나는 그 여자를 설득시켰지만, 내가 그 여자에게 설득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 혼자서 이 세상에 웃으면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가족도 보지 못하고 혼자서 죽는 건 너무 슬프잖아요.” 마치 자신의 일인 양, 그 여자는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절망스러운 현실을 다시 한 번 깨우치게 해준 그 여자의 말에 왠지 모르게 화가 났다. 이미 받아들인 현실이었음에도 그 여자의 입으로 다시 한 번 듣자 그 절망감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 뒤를 돌았다. 서해정, 그 여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래서 대체 어쩌자고요!! 방법이 없잖아요. 과거를 바꾸려고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잖아요!! 나보고 어쩌라는 거예요!!” 그만 감정이 폭발해버리고 말았다. 슬픈 얼굴로 나를 보고 서 있는 그 여자를 보자 억누르고 있었던 감정이 다시 한 번 폭발하고 말았다. 절망과 슬픔을 넘어 이제는 분노였다. 가슴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다시 깨우친 현실은 나의 가슴을 차갑게 눌렀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다. 나는 오른손으로 내 가슴팍을 내리치면서 다시 뒤돌아섰다. 어지러웠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비극적인 현실이 자꾸만 나를 눌렀다. 그때 뒤에서 다시 서해정, 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법이 있다면요.” 나는 그 자리에서 또 한 번 멈추어 섰다. “방법이 생각났어요, 준민씨.” 아찔한 현기증을 이겨내며, 나는 또 다시 뒤돌아서서 서해정, 그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 여자는 조금씩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마치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현기증과 가슴의 압박감을 이겨내며 똑바로 서 있으려고 애를 썼다. 그 여자는 내 바로 앞까지 걸어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확신은 없는 목소리였다. 마지막 한 가닥의 희망이라도 잡으려는, 그런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준민씨의 시간을 바꿀 수 없다면…, 내 시간을 바꾸면 되잖아요.” 30일 재생기간 만료 가사 뮤비 출처 : 프레쥬얼라인 신비한개구리케이크 15. 시간 속에서 헤매다. “준민씨의 시간을 바꿀 수 없다면…, 내 시간을 바꾸면 되잖아요.” 나는 서해정, 그 여자의 말에 멍하니 그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 여자의 말에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혼란스러워서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있었다. “스물다섯 이전의 시간을 돌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건 내 시간을 돌려놓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상황을 만들어낼 거예요. 내가 예측할 수 없이 복잡한 현재를 만들어 낼 거예요. 준민씨의 시간이 멈춰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말이에요.” 서해정, 그 여자의 말은 수긍할 만 했다. 이미 내 시간을 바꾸는 것을 실패하였으니, 내 시간을 다시 한 번 건드리는 것은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었다. 내 시간을 바꾸는 것보다 그 여자의 시간을 바꾸는 것이 훨씬 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서해정, 그 여자가 나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굳이 바꿔주려는 것을 납득하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그 방법조차도 실패하게 된다면, 나는 정말로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 것 같았다. “…어째서 나한테 이런 친절을 베푸는 거예요.” “이미 말했잖아요. 날 살고 싶게 했으니까요. 날 조금 더 이 세상에 남아있고 싶게 했으니까요.” “…….” “나를 살고 싶게 하고서, 준민씨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채 죽음을 택하는 걸 볼 수 없어요.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해봐요, 우리.” 서해정, 그 여자가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나보다 더 애절한 눈빛이었다. 어떻게 가족을 잃은 나보다 더 애절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그 여자는 그렇게 슬픈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혼란스러웠다. 실패하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시작을 하기가 싫었다. 이미 한 번, 과거를 돌려놓는 것을 실패했다. 또 어떤 알 수 없는 변수에 의해서 실패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것이 너무나 두려웠다. “…아직 난 잘 모르겠어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과거를 바꾸는 게 더 힘들어요. 현재에서 멀어질수록 더 많은 힘을 요구해요.” “이번에도… 실패하게 되면요?” “실패가 두려워 시도하지 않는 건 겁쟁이일 뿐이에요. 준민씨는 가족에게 전해야 할 말이 있잖아요.” 그 여자의 말이 맞았다. 나는 가족에게 꼭 전해야 할 말이 있었다. 그들의 체온이 따스할 때에 사랑한다는 말을 꼭 전해야 했다. 오직 그 하나를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여기까지 힘들게 왔는데, 결국 아무 것도 이룬 것 없이 뒤돌아서는 것은 조금 많이 서글펐다. 나는 서해정, 그 여자를 보았다. 그 여자는 이제 단호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 시도마저 실패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생각만이 들었다. “어떻…게, 서해정씨의 과거를 바꿀 건데요.” “…회사를 마치고 준민씨와 맥주를 마시지 않고 자유아파트로 갈게요. 그리고 광고 일로 뵈었으면 한다고 준민씨의 아내와 딸을 집 밖으로 유인할게요. 사고가 일어난 그 시각에 준민씨의 가족이 집에 있지 않도록 할게요.” 두려웠다. 한 번의 실패를 겪고 나니 다시 시도하는 것이 두려웠다. 나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 현실 같지 않은 지금의 시간이 자꾸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상상까지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내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현실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사실 난 내 시간을 한 번도 바꿔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내 시간을 바꾸면 어떤 일이 생길지 확신하지 못해요.” “위험한 도전이라면 하지 말아요.” “아니요. 하고 싶어요. 준민씨를 위해서 내가 뭐라도 해주고 싶어요.” “굳이 그러지 않아도 돼요.” “준민씨가 이 세상을 떠나건, 그렇지 않건 간에, 난 이 세상에서 계속 살아갈 거예요. 남들과는 조금 다른 삶을 살겠지만, 끝까지 살아갈 거예요. 이렇게 결심하게 해준 거, 준민씨에요. 그래서 뭐라도 해주고 싶어요.” 서해정, 그 여자의 결단은 이미 확고한 것 같았다. 나는 크게 숨을 한 번 내쉬었다. 그리고 그 여자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오직 내 가족에게 사랑한단 말을 전해야 한다는 것만 기억하기로 했다.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여자는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내 앞에 손을 내밀었다. 나는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그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다 잘 될 거예요. 조금만, 조금만 힘을 줘요.” 나는 말없이 그 여자를 보았다. 그 여자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나는 그 여자와 맞잡은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여자가 눈을 감은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또 졸음이 몰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 과거를 건들지 않음에도 내게 졸음이 쏟아지는 것은 마주잡고 있는 손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몰려오는 졸음을 억지로 참으려 하지는 않았다. 다만 머릿속으로 내 가족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야 한다는 그 생각을 수십 번 반복했다. 시간을 새기다(Engrave the Time). “준민씨를 해칠 생각 같은 건 추호도 없어요. 그냥 나도 준민씨의 이야기를 듣고 싶고, 준민씨도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면 해요.” “…하.” “마치고 회사 앞에 있을 게요. 부탁이에요.” 서해정, 그 여자가 내게 그렇게 말을 하고서는 뒤돌아섰다. 마치 이 장면이 어디선가 겪은 적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데자부, 그런 비슷한 느낌이었다. 나는 멀어져 가는 그 여자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떻게 내 인생에 대해서 알았는지 혼란스러웠다. 오직 채성이에게만 털어놓았던 그 이야기를, 채성이 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는 그 여자가 왠지 무서웠다. “젠장.” 나는 나지막이 그렇게 읊조리고는 고개를 돌려 유리벽 너머를 보았다. 채은이가 여전히 그 안에서 귀엽게 웃고 있었다. 안아주고 싶을 만큼 작고 귀여운 아이였다. 그렇게 나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서 채은이를 보고 있었다. 안아주지 못한 내 사랑스러운 딸을 그렇게 멀리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일을 하는 내내 채은이와 서해정, 그 여자의 모습이 머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일은 더 이상 내 머릿속에 들어올 자리가 없었다. 자꾸 유리벽 너머로 보았던 채은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채은이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질 않았다. 아니, 기억이 난다고 해도 나는 채은이에게 다가갈 수 없는 못난 아빠였다. 그리고 서해정, 그 여자의 그 말이 자꾸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나에 대해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식으로 말했던 그 여자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리면서 아파왔다. 퇴근 시간이 되어 서해정, 그 여자는 나보다 일찍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계속 망설이고 있었다. 그 여자가 내 삶을 어떻게 알았는지 알고 싶기도 하였지만, 두렵기도 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나는 회사를 빠져나왔다. “뭐야.” 회사 앞으로 나왔지만, 서해정, 그 여자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머리가 아파왔다. 지끈지끈, 두통이 나를 찾아와 괴롭혔다. 나는 그 여자의 모습을 찾으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 여자가 나를 놀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왔네요. 그럴 줄 알았어요.” 보이지 않던 그 여자가 갑자기 내 등 뒤에서 나타났다. 마치 내가 자신을 기다릴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투로 말했다. 나는 무표정으로 그 여자를 보았다. 머리가 아파왔다. 하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 여자의 말을 듣고 싶었다. 어떻게 내 비밀을 알았는지, 어떻게 내 멈춰진 시간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 듣고 싶었다. “요 앞에 괜찮은 호프가 있대요. 거기로 갈래요?” “마음대로 해요.”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서해정, 그 여자 역시 밝은 표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어두운 편에 가까웠고 어디가 아픈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이미 뒷전이었다. 내 머릿속에는 그 여자가 내 비밀을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한 의문만이 가득했다. 우리는 회사에서 멀리 떨어져있지 않은 호프로 갔다. 호프 안은 그리 많이 소란스럽지 않아서 이야기하기에 적합한 듯 보였다. 우리는 각각 앞에 맥주잔을 놓았다. 우리는 서로 말을 아꼈다. 사실 나는 쏟아지는 두통을 참아내느라 조금 버거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꾸 뭔가를 잊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이 장면을 언젠가 한 번 겪은 적이 있었던 것만 같은 느낌도 계속해서 들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분명한 것이 없었다. 지금 분명한 것은 그 여자와 내가 마주보고 앉아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그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여자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나는 그 여자를 보았다. 그 여자는 어딘가 불편한 듯 힘들어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딘가 좋지 않아 보였다. “…어디 아파요?” 나는 그 여자의 말을 끊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말을 하자 내 머리가 지끈거리며 머리가 더 아파왔다. 그 여자 못지않게 몸이 좋지 않았다. 먹은 것이 없는데도 속이 좋지 않았다. 속을 게워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아니요. 아니… 괜찮아요.” 그 여자는 괜찮다고 말을 하였지만, 그다지 괜찮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 여자는 급기야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가쁜 숨을 쉬었다. 그 여자의 그런 모습을 보니 내 두통도 더욱 심해지는 기분이었다. 누군가가 내 머릿속에 들어와서 마구 헤집어 놓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엔. 그래요, 처…음, 엔.” 그 여자의 말이 점점 느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의 두통도 더욱 심해져 갔다. 나는 두통을 이겨내려고 오른손을 머리에 갖다 대었다. 시야가 흐릿해졌다. 눈을 똑바로 뜨고 있는 것도 벅찼다. 나는 눈을 떠서 그 여자를 보려고 애썼다. 흐릿한 내 시야 속에서 그 여자는 테이블에 쓰러지듯 엎드려 있었다. 거친 숨을 내쉬면서 식은땀을 줄줄 흘려내고 있었다. 어떻게 도와주고 싶었지만, 도와줄 수가 없었다. 내 두통을 이겨내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겨웠다. 눈을 뜨고 있는 것 조차 버거웠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여자가 자신의 앞에 놓인 맥주잔을 바닥으로 떨어뜨린 듯 했다. 다리 쪽에서 따끔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맥주잔이 깨지면서 유리가 내 다리를 건드린 듯 했다. “…아, 아, 악!” 그 여자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더 이상 눈을 똑바로 뜨기가 힘들었다. 고개를 들고 버티고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나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머리를 누군가가 누르고 있는 것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무게였다.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엄청난 두통이었다. 머리가 찢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자연스레 내 숨도 가빠졌다. 내가 마치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귀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 앞에 있는 그 여자의 거친 숨소리와 신음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갑자기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무언가 어긋난 기분이었다. 지독한 현기증이 느껴졌다. 손을 더듬었지만 아무 것도 잡히는 것이 없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금방이라도 구토가 쏠릴 것 같았다. 갑작스런 충격에 나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속보입니다. 조금 전 목동의 모 아파트에서 가스폭발로 추정되는 불이 났다는 소식입니다. 폭발로 인한 인명피해는 아직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세기의 피아니스트인 이현정씨와 딸인 이채은양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아무 것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데,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들을 수가 있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하고 말았다. 내 아내가 죽었다고? 내 딸과 내 아내가 죽었다고?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절망감이 나를 덮쳤다. 나를 괴롭히는 두통 때문에 내가 잘못 들은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나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두통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아, 아악!!!” 그 여자가 엄청난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그때였다. 갑자기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머리가 깨질듯 한 엄청난 두통과 함께 세상이 돌아가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마치 시공을 초월한 어떤 장소에 와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서해정, 그 여자의 비명소리가 귓속에서 맴돌았다. 나는 마지막 힘을 내어 눈에 힘을 주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내가 눈을 떴을 때, 나는 모든 것을 다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새까맣게 불에 타고 있던 자유아파트와 주검이 되어서 그 속에서 나온 현정과 채은이. 시간을 되돌려 과거를 바꿔달라며 서해정, 그 여자에게 무릎 꿇고 부탁하던 나와 자신의 시간을 돌려주겠다고 하던 그 여자까지. 모든 것을 다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눈을 떴을 때, 나는 다시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인 회사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혼재되어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어떤 것이 과거이고, 어떤 것이 현재이며, 어떤 것이 진실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둘러 주위를 보았다. 내 옆에는 유리벽이 있고, 그 안에는 나의 딸인 채은이가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채은이를 보니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주검이 되어 앰뷸런스에 오르던 채은이의 모습과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모습이 겹쳐보였다. 다시 이렇게 살아있는 채은이를 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나는 채은이에게 두었던 시선을 잠시 돌려 앞을 보았다. 내 앞에는 서해정, 그 여자가 있었다. 모든 상황이 내가 겪었던 과거와 동일했는데, 서해정, 그 여자만은 달랐다. 그 여자는 어딘가 이상했다. “…서해정씨?” 나는 나지막이 그 여자를 불렀다. 그 여자는 갑자기 자리에 주저 앉아버렸다.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아서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그 여자는 온 몸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내 머릿속에 조금 전 호프에서 있었던 일이 스쳐 지났다. 그것이 꿈인지, 실패한 과거였는지, 아니면 나의 환상일 뿐이었는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한 가지 분명한 건, 그 기억 속의 그 여자의 모습은 지금 내 눈 앞에 주저 앉아있는 이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나는 몸을 낮추어 그 여자와 시선을 마주하려 했다. 어느새 내 머릿속에 남아있던 두통은 깨끗하게 사라진 뒤였다. “…서해정씨, 괜찮아요?” “괘, 괘… 괜찮, 아…요.” 그 여자는 힘겹게 말을 뱉어내었다. 나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 여자를 보았다. 그 여자는 마치 온 몸의 힘을 다 써버린 것처럼 보였다. 마지막 남은 악으로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여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이 그 여자를 적시고 있었다. 나는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할, 마…말이 있잖, 아…요. …어서, 해, 요. 시간…이 없…어, 요.” 그 여자는 내 눈을 보고 그렇게 말하였다. 나는 그 여자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해야 할 말이 있었다. 내 가족들에게 전해야 할 말이 있었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그 여자를 이곳에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 여자를 보았다. 그 여자는 힘겹게 내 눈을 맞추었다. 그 눈이 어서 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면접 실로 시선을 돌리었다. 채은이가 그 안에 있었다. 나는 천천히 발을 내딛어 면접 실의 문 쪽으로 향했다. 서해정, 그 여자를 두고 가는 것이 왠지 불편했다. 그래서 발걸음이 너무나 무거웠다. 나는 한 번 뒤를 돌아보고는 다시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때였다. 그 여자가 내게 했던 말이 다시 머릿속을 스쳐 지났다. ‘과거를 바꾸면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하지 못할 거예요.’ 그 여자는 과거를 바꾸면, 그때의 순간을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말했었다. 이상했다. 나는 모든 기억이 또렷했다. 그 여자가 했던 한 마디, 한 마디의 말들이, 그 여자의 행동들이 모두 기억이 났다. 나는 앞으로 향하던 걸음을 멈추었다. 무언가가 잘못 되었다는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30일 재생기간 만료 가사 뮤비 출처 : 프레쥬얼라인 신비한개구리케이크 16. 어긋나다. (完) 무언가가 어긋났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곧장 뒤를 돌았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서해정, 그 여자를 보았다. 그 여자는 점점 더 괴로워하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알지 못해 혼란스러웠다.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은데, 이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면접 실의 문이 열렸다. 나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꺼운 유리문이 묵직하게 열리고, 면접 실 안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긴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세련되게 옷을 입은 여자, 나의 아내였다. 나의 아내, 이현정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작고 사랑스러운 나의 딸, 채은이가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나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그 여자와 현정을 번갈아 가면서 보았다. 내가 어떻게 해야 옳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이것이 현실일까? 아니면, 꿈인 걸까? 그것도 아니면 나의 환상인 걸까? 분명한 답을 낼 수가 없었다. 면접 실에서 나온 현정과 내가 마주쳤다. 웃으면서 채은이를 보던 현정이 나를 보더니 굳어버린 것처럼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 것도 모르는 채은이는 천진한 표정으로 현정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만약 이것이 내가 바꾸려고 하는 과거라면, 나는 반드시 내 가족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야 했다. 반드시 후회 없이 그렇게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자 난 어떠한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랐다. 게다가 내 바로 뒤에서는 서해정, 그 여자가 점점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준민이?” 현정의 입에서 내 이름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그것이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점점 늙어가고 있는 현정과 스물다섯에 멈추어 아직도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 나. 그 사이에 무언가 뚜렷하지 않은 거리감이 느껴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내가 그렇게 마주하고 싶었던 내 가족인데, 나의 아내인데, 쉽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현정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현정과 내가 처음 만났던 그때의 모습과 나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세월에 부딪혀 변하지 않는 내 모습이 비참하게 느껴졌다. “준, 민이 맞…니?” 현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눈가에는 금세 눈물도 맺혔다. 가슴이 아팠다. 내가 없었던 시간 동안 나를 그리며 눈물로 지새웠을 현정의 삶이 그대로 보이는 것 같았다. 현정은 나를 보고 있었지만, 내가 자신의 남편이라는 것에 대한 확신은 없는 것 같아보였다. 스물다섯에 멈춰있는 내 모습을 인정할 수 없다는 듯이 보였다. 채은이는 여전히 철없이 나를 보고 있었다. “현정아.” 내겐 시간이 많이 없었다. 이것이 진정 내가 바꿔야 하는 과거라면 반드시 말해야 했다. 사랑한다고, 나는 내 가족을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다고. 내가 원해서 떠난 것이 아니라고, 함께하지 못한 삶을 사과해야 했다. 나는 현정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현정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만 같아 보였다. 나도 울컥하며 눈물이 치밀었지만, 눈물을 참으려 애썼다. 나는 아직 할 이야기가 많았다. “혼란스러울 거라는 거 알아. 현정아, 그래도 내 말을 잘 들…” “악!!” 나는 갑자기 내 뒤에서 들리는 서해정, 그 여자의 비명소리에 말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았다. 그 여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고통을 참아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고통은 그 여자가 버텨내기에는 벅찬 고통인 것 같았다. 그 여자는 바닥에 엎드려 몸을 뒤틀었다. 고통을 참기 위해 깨문 입술은 터져 새빨간 피를 내고 있었다. 나는 그 여자에게 가까이 달려갔다. 그 여자를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서해정씨! 해정씨! 정신 차려요!! 제발 정신 차려요!” 내가 아무리 소리를 쳐도 그 여자는 신음소리와 비명을 반복해서 질러댈 뿐이었다. 고통을 참아내기 위한 서해정, 그 여자의 발악은 참혹했다.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을 장면이었다. 그 여자는 마치 무언가를 쥐기라도 하듯이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온 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 여자를 이렇게까지 고통스럽게 한 것이 바로 나였다. 내가 원망스러웠다. 그 여자의 그런 모습을 보자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이기적인 나 때문에 그 여자가 죽어가고 있었다. 눈이 돌아가 흰자만 보였던 그 여자가 힘겹게 눈을 감았다 떴다. 이제 그 여자의 검은자가 보였다. 그 여자는 마치 마지막 힘을 끌어내듯이 신음 소리를 내었다. 그러더니 내 눈을 똑 바로 보았다. 나는 그 여자의 몸을 꼭 붙잡고 있었다. 그 여자는 나와 눈을 맞추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시, 시, 시간…이 얼, 마… 없어, 악!! 어, 서, 하아… 하, 하, 하지, 못한… 말, 을, 전…해요.” 서해정, 그 여자는 이 순간까지도 내게 해야 할 일을 다시 상기시켜주었다. 나는 그 여자의 손을 꼭 잡았다. 땀으로 젖은 그 여자의 손은 너무나도 뜨거웠다. 나는 고개를 들어 현정을 다시 보았다. 현정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그 여자와 나를 보고 있었다. 아무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서해정, 그 여자를 다시 보았다. 그 여자는 눈물을 뚝뚝 흘려내고 있었다. 그 여자의 뜨거운 눈물이 회사 복도에 떨어졌다. 서해정, 그 여자는 나와 잡고 있는 손을 놓아버렸다. 어서 현정에게 가보라는 것같이 느껴졌다. 나는 그 여자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금방이라도 숨을 거둘 것 같은 그 여자의 곁을 떠나는 것이 옳은 것인지 판단하기 힘들었다. 그 여자는 다시 한 번 검은 눈동자로 나를 보았다. 나는 입술을 한 번 깨물고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정아.”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이해하기 힘들 거야. 하지만 이해해야해. 시간이 많이 없어, 현정아. 오늘 밤 너의 집에서 가스 폭발 사고가 일어날 거야. 그러니 가스 꼭 잠갔는지를 확인하고, 오늘은 되도록 집 밖에 있어. 알았지?” “…무슨 말이야.” “꼭 기억해. 오늘 집에 있으면 안 돼. 알았지?”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제발, 제발 꼭 기억해.” 현정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나는 현정에게로 다가갔다. 지금, 모든 상황이 엉망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앞으로 어떤 상황이 펼쳐질 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는 것이었다. “늙지 않은 나의 모습이 이해되지 않을 거야. 이해할 수 없겠지만 들어줘. 꼭 들어줘, 현정아.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내 말을 들어. 알겠지?” 나는 현정을 타이르듯이 말했다. 현정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현정의 손을 잡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잡아보는 고운 손이었다. 피아노 건반을 아름답게 넘나들며 고운 선율을 만들어 내는 예쁜 손이었다. 그 손을 잡고서 현정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현정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지만, 나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스물다섯 살에 친구들과 여행을 가다가 사고가 났어. 그 사고로 내 친구들이 모두 죽었어. 나는 그 사고에서 혼자 살아남았어. 그리고 내 친구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모두 지켜보았어.” 그때의 기억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났다. 괴로운 기억이었다. 성현이가 차 안에서 괴로워하는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아주 오랜 전의 일인데도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했다. 그래서 내가 살아있는 동안 나는 늘 죄책감에 살았다. “그 벌이라고 나는 생각해. 확실하진 않지만 그때부터 이었을 거야, 내 시간이 멈춘 건. 시간이 멈추었다는 사실을 처음엔 몰랐어.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동안이라고 생각을 했었지. 그런데 너와 결혼을 하고 채은이까지 낳았는데도 나는 늙지 않았어. 그래서 깨달았어. 내 시간이 멈추어 있다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어. 이런 모습으로 너의 곁에서 남아있을 수가 없었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늙어가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생각해 봤어. 그리고 채은이가 나를 넘어서는 날이 다가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은 고민도 해봤어.” 현정의 눈에 차오른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채은이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나와 현정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목이 점점 메여왔다.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목에 무언가가 꽉 막힌 기분이 들었다. 눈물을 흘리는 현정을 보니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곁을 지켜주지 못한 것이 내 평생의 한이었다. “…늘 멀리서 너와 채은이를 볼 수밖에 없었던 나를 용서해. 너의 곁에서 함께 살아가며 삶의 짐을 나눠질 수 없었던 내가 미안해. 너를 떠난 후로 단 한 번도 너의 앞에 나타날 수 없었던 나를 원망해도 좋아. 그런데 현정아, 하나만 기억해줘. 제발 이거 딱 하나만 기억해줘.” 어느새 내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그리고 그 눈물은 이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얼마나 마주하고 싶었던 내 가족이었는지 몰랐다. 늘 이렇게 바로 앞에서 따스하게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남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일이 내겐 너무 힘든 일이었다. 새까만 주검이 된 현정과 채은이를 봤을 때, 나는 다시는 이런 기회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시 이렇게 내 가족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나는 현정의 손을 꼭 쥐었다. 그리고 내 모든 진심을 담아서 입을 열었다. “…사랑해, 사랑해, 현정아. 너를 만난 이후로, 널 사랑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어. 현정아, 미안해. 그리고 정말로 많이 사랑해.” 그 말을 내뱉고 나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감당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다시 못볼 줄만 알았던 나의 가족이었다. 이것이 어긋난 나의 과거라도 좋고, 꿈이라도 좋고, 환상이라도 좋았다. 이렇게 현정과 채은이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그 하나만으로 좋았다. 이 과거가 어긋나 모두가 파멸한대도 괜찮았다. 울음소리가 들렸다. 현정의 울음소리였다. 현정은 흐느낌과 함께 눈물을 흘려내고 있었다. 내 진심이 전해졌으면 했다. 참 오랫동안 참았던, 꼭 9년 동안 참았던 나의 진심이었다. 사랑한다 말을 전할 수 없이 주위에만 맴돌아야 했던 나의 9년 이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려내고 있는데, 내 뺨에 무언가가 닿았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내 눈 앞에는 채은이가 있었다. 작고 사랑스러운 내 딸 채은이가 내 눈 앞에 있었다. 채은이는 조막만한 손으로 내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그 순수한 아이가 내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다. 찢어지게 가슴이 아팠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아이를 품에 안았다. 내 품에 쏙 안겨 들어오는 그 작은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갓난 아이 일 때 안아보고 처음이었다. 그 작은 아이를 품에 안자 벅찬 감동이 밀려오고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채은이는 내 품에 말없이 안겨있었다. 마치 모든 것을 안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나는 눈물에 젖어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채, 은아.” “네?” “그, 동안 안아 주지도 못, 해서 미안해. 너에게 훌륭한 아빠가 되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아무 것도 모르는 널 두고 떠나와서 미안해. 사랑해, 내 딸아. 사랑한다, 채은아.” 나는 그렇게 말을 내뱉고 채은이를 꼭 끌어안은 채 거의 통곡을 했다. 현정의 흐느낌 소리와 내 울음소리가 회사복도를 가득 채웠다. 가슴이 먹먹했다. “…아빠?” 내 품에 안겨있던 채은이가 작은 소리로 그렇게 말을 내뱉었다. 나는 채은이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울음을 토해내며 채은이를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채은이의 아빠였다. 오랫동안 품에 한 번 안아 주지도 못하고, 사랑한단 말도 이제야 겨우 전한 못난 아빠였다. 채은이의 앞에 당당하게 나설 수도 없었고, 채은이를 떠나야만 했던 그런 나쁜 아빠였다. 채은이는 나를 똑바로 보더니 갑자기 울상을 지었다. 그러더니 바닥에 주저앉아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채은이의 커다란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 빠!! 아빠!! 기다렸단 말이야. 엄마가, 엄마가, 조금만 기다리면 올 거라고 해서, 그래서, 기다렸단 말이야!!” 그 아이는 큰 목청으로 그렇게 울어대었다. 못난 아빠였다. 내 소중한 딸아이에게 상처만 안겨준 못난 아빠였다. 그래서 자꾸 참을 수 없이 눈물이 났다.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났다. 나는 손을 들어 채은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무나도 곱게 자란 나의 딸이었다. 채은이를 이렇게 예쁘게 키우려고 현정이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저릿하게 아팠다.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한 내가 원망스러웠다. “아, 아, 악!! 아악!!” 그때, 서해정, 그 여자의 비명소리가 다시 들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 여자를 보았다. 눈물 때문에 시야가 뿌옇게 흐려 있었다. 나는 거칠게 눈물을 닦아 내었다. 그 여자의 주변은 어느새 새빨간 피로 가득했다. 피를 토해낸 것인지 입 주변과 복도가 온통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내 가족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는 동안 그 여자를 그렇게 방치해두었다. 나는 기듯이 그 여자의 쪽으로 다가갔다. 그 여자는 이제 모든 기운을 잃은 것 같았다. 계속해서 피를 토하려 하고 있었다. 사지는 뻣뻣하게 굳어서 더 이상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어보였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도움을 구할 곳도 없었다. 현정과 채은이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핸드폰을 찾으려고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어서 빨리 그 여자를 병원으로 옮겨야 할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상황을 악화시켜 놓은 장본인이 다 나라는 생각에 죄책감이 들었다. 나는 급하게 주머니를 뒤졌지만 핸드폰이 어디로 간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서해정, 그 여자는 점점 힘을 잃고 있었다. “서해정씨!! 정신 차려요! 눈을 좀 떠봐요!” 내가 그 여자를 붙잡고 소리를 질렀다. 그 여자는 내 목소리를 들은 것인지 천천히 눈을 떴다. 거친 숨을 내쉬면서 힘겹게 눈을 뜬 그 여자는 이내 다시 눈을 감았다. “서해정씨! 해정씨!” “…미, 안… 해요. 이, 게, 내 한…계 인가, 봐, 요.” 그 여자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그렇게 말하였다. 나는 서해정, 그 여자의 손을 붙잡았다. 축축이 젖어있는 그 손을 잡았다. 그 여자는 다시 한 번 눈을 힘겹게 떠서 나를 보더니 금세 눈을 감아버렸다. “서해정씨! 서해정씨!” 내가 아무리 불러도 그 여자는 대답이 없었다. 내 손에 있던 그 여자의 손이 힘없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거칠게 이어지던 그 여자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고개를 숙여 그 여자의 심장소리를 들으려 했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쿵쾅쿵쾅 뛰고 있어야 할 심장이, 뛰고 있지 않았다. 서해정, 그 여자를 붙잡고 흔들어보았지만 힘없이 축축 늘어지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 내가 이런 상황을 초래했다. 이기적인 내가, 이런 지독한 상황을 초래했다. 그 여자가 죽었다. 바로 내 앞에서, 나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바꾸려다가 죽었다. 시간이 어긋났다. 자신의 시간을 바꾸는 것은 어쩌면 처음부터 무리였는지도 몰랐다. “말도 안 돼. …안 돼!!” 나는 그 여자의 몸을 붙잡고 소리를 질렀다. 이 모든 것이 현실 같지 않았다. 시간과 공간이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두통이 몰려오는 것과 함께 갑자기 시야가 깜깜해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내가 잡고 있던 서해정, 그 여자의 촉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암흑의 세계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눈을 끔뻑여 보아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익숙해질 수 없는 어둠이었다. 숨통이 틀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대체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유일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은 내게 느껴지는 감당할 수 없는 두통이었다. 과거의 시간 속으로 빨려들어 갈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두통이었다. 단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 두통이 심해질수록 어둠이 나의 목을 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무 것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느낄 수 있는 것, 고통이었다. 고통을 표출할 방법이 없었다. 소리를 지르려고 해봐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고통을 표현할 다른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 고통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숨통이 조여와 점점 죽음에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머릿속으로 많은 것들이 스쳐 지났다. 내가 이때까지 살아온 긴 시간들이 압축되어 내 머릿속에 흘렀다. 잔인했던 사고의 현장, 현정을 처음 만났던 날, 현정과 결혼하게 되었던 날, 사랑스런 내 아이가 태어나던 날, 눈물을 참으며 가족을 떠나왔던 날, 여러 회사를 돌아다니며 방황하던 시절, 서해정, 그 여자를 만났던 회사, 불에 타던 자유아파트, 새까만 주검이 된 현정과 채은이, 과거를 바꾸려 했던 시도들, 다시 만난 나의 가족들,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을 전할 수 있었던 마지막. 이 모든 것이 꿈이었는지, 환상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무엇이었는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참을 수 없는 두통이 나를 짓누르고 있고, 어둠이 나의 숨통을 죄여오는데도 생각보다 많이 괴롭지가 않았다. 그 고통이 달게 느껴졌다. 내 가족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던 그것이 비록 현실이 아닐지라도 괜찮았다. 나의 진심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면, 그것이 모두 꿈이라도 상관없었다. 정신이 점점 혼미해졌다. 내 목을 조르고 있는 어둠은 나를 점점 죽음의 세계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나는 그것에 저항하지 않았다. 머리가 쪼개질 듯한 두통도 내 목을 조르는 어둠도 모두 받아들였다. 암흑이 점점 깊어졌다. 온 몸에 힘이 빠졌고,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렇게, 그렇게 나는 내 숨통을 죄는 어둠에 모든 것을 맡겼다. … …… …… … ……… …… … “지금부터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인 이현정씨의 연주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