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천무] - 권천 序 章 강호무림(江湖武林)은 살육과 피[血]의 세계이며 음모와 암투가 끊임없이 소용돌이치는 난세 천하(亂世天下)이다. 그 피의 소용돌이 안으로 사라져 간 영웅호걸들이 얼마이던가! 참혹한 혈겁을 일삼아 한 시대를 혈겁으로 몰아넣던 마두(魔頭)들이며, 이에 대항해 목숨 조차 아끼지 않았던 뜨거운 심장의 열혈남아(熱血男兒)들…… 정(正)과 사(邪). 그들은 결코 같은 하늘 아래에서 공존할 수 없는 숙명적 대결 관계였다. 무림 천년 역사는 그들 간의 전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혈사(血史)의 수레바퀴 안으로 명멸해 들어간 영웅들은 수를 헤아릴 수 없지만, 그들은 각기 한 시대를 풍미하고 사라졌을 뿐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흘러도 강호인들의 뇌리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 대사건이 있었으 니…… 천하를 휩쓸었던 그의 선풍(旋風)은 백년 전의 일이었다. 염라천존(閻羅天尊)! 경천동지할 혈겁의 장본인으로, 비록 다시 천년이 지난다 한들 강호인들의 뇌리에서 결코 잊혀지지 않을 대악명(大惡名)이었다. 백년 전 그는 혜성과 같이 강호인들 앞에 나타났었고,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홀연 신비 롭게 실종되고 말았다. 그가 강호를 휩쓴 기간은 불과 삼 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그에게 목숨 을 잃은 강호 유명고수의 수는 무려 수천을 헤아렸다고 전해진다. 그의 등장으로 천하는 숨을 죽였고, 사마(邪魔)의 무리들은 자진해서 그의 밑으로 모여들었 다. 순식간에 그 수는 천여 명을 헤아렸고, 그들은 하나같이 각 지역을 대표할 만한 대흉마들이 었다. 염라궁(閻羅宮)이라 이름지어진 그 초강마세(超强魔勢)의 태동으로 천하는 폭풍 전야의 긴 장감 속으로 빠져 들었다. 이제 염라천존의 일성(一聲)이면 천하는 피로 씻길 형국이었다. 그러나 염라천존은 섣불리 천하일통의 칼을 뽑아 들지 않았고, 그렇게 일 년이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천하인이 경악할 일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염라궁의 멸망이었다. 뇌성벽력(雷聲霹靂)이 광란하고 천하를 쓸어 버릴 듯 폭우가 몰아치던 밤이었다. 염라궁이 위치한 태악산(太岳山)의 정상. 뇌성을 뚫고 맑은 금음(琴音)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띵! 띠디딩…… 마치 선계(仙界)의 음률인 듯 신비로운 그 소리는 정상을 가로지르는 뇌성을 압도하며 염라 궁을 휘감았다. 그리고…… 염라궁을 가득 메웠던 흉마들은 모두 칠공에서 피를 쏟은 채 죽어 갔다. 다음날 군웅들이 산에 올랐을 때, 그들은 지옥으로 화한 염라궁을 볼 수 있었다. 일천여 마두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는 가축 한 마리 남아 있지 않은 참상을…… 하지만 염라천존의 시신은 그 어디에도 없었고, 이 엄청난 혈사를 주관한 인물 또한 알 수 없었다. 몇몇 기인들이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노력해 보았으나 모두가 허사였다. 구구한 억측만 남겨 놓은 채 천하를 공포에 떨게 했던 염라천존은 강호에 영원히 그 모습 을 나타내지 않았다. 第 一 章 소년(少年)과 영금(靈禽) 1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갠 하늘, 작열하는 태양. 울울창창한 녹음(綠陰)마저 축 늘어뜨리게 만드는 성하(盛夏)의 계절이었다. 감숙(甘肅), 섬서(陝西), 이 양성(兩省) 사이에 위치한 장군산(將軍山)은 그 경관이 수려하 고 시릴 듯한 계곡수(溪谷水)가 있어 더위를 피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하지만 계곡이 깊어 좀처럼 찾는 이는 드물었는데…… 포르릉…… 굽이굽이 바위에 부딪혀 물방울을 튀기는 옥류(玉流) 소리가 청아한 계곡에, 난데없이 사 람들의 목소리가 왁자지껄하게 울려 퍼졌다. 간간이 늘어져 있는 관목의 가지를 젖히며 나타난 사람들은 차려입은 의복이며 면모의 준미 함으로 보아 부근에 사는 명가의 자제들이 분명했다. 그들의 뒤로 노소(老少)가 뒤섞인 또 다른 한 무리의 사람들이 따랐다. 젊은 공자들의 시중을 드는 시복들이었다. 그들까지 합한다면 일행은 거의 오십여 명에 이르렀다. 떼를 지어 적당한 장소를 찾다가 드디어 우거진 숲 조금 뒤로 옥류(玉流)가 흐르는 그럴듯 한 자리를 발견했다. 종복들이 자리를 마련하고 미리 준비했던 술과 음식들을 펼쳐 놓았다. 상전의 자리를 마련해 준 종복들이 멀찌감치 물러나자, 젊은 공자들은 둥그렇게 둘러앉았 다. 옥류의 청음과 계곡의 서늘한 기운…… 폭염에 시달리며 책과 싸우던 유생들에게 무릉도원이 따로 있겠는가? 절로 돋는 흥취에 누군가 옛 성현의 시(時) 한 수를 읊조리니 일행이 즉시 후창으로 화답 했다. “인생이 본래 뿌리 없으니, 표현하여 무상하지 길 위의 티끌 같도다[人生無根帶 表如陌上 塵].” “흩어져 바람따라 정처없이 날으니, 이 인생이 본시 정처없는 것이다[分散送風轉 比亡非掌 身].” 한 수의 낭송이 끝나자 잇따라 또 다른 공자가 선창했다. 역시 중인이 모두 화답하고…… 시간이 흐르자 좌중의 흥은 더욱 도도히 무르익어 갔다. 벽계(碧溪) 옥류(玉流)는 청아한 음색을 쏟아 내어 그들의 시흥을 더욱 돋우고, 우거진 녹 음방초(綠陰芳草)는 염천(炎天)의 양광을 가려 심신을 청량하게 하니 빈 술병은 자꾸만 늘 어 갔다. 이윽고 준비했던 술이 거의 바닥날 즈음이 되자, 좌중은 자연 떠들썩하게 변모했다. 그때, 절경과 명주에 취해 주흥(酒興) 도도한 좌중으로부터 슬그머니 빠져 나오는 한 소년 이 있었다. 눈부시게 흰 백의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그 소년은 대략 십이삼 세 가량으로, 일행에 비해 유난히 어려 보였다. 소년의 관옥 같은 살결은 흡사 소녀의 얼굴을 연상케 했고, 크고 맑은 봉안(鳳眼)은 보는 이 의 혼백을 사로잡을 듯 깊고 맑은 정광이 어려 있었다. 하지만 유유히 걷고 있는 그의 모습에선 왠지 범상치 않은 기운이 풍겨 나왔다. 어쨌든 그는 천천히 걸어나와 어느덧 일행들에게서 멀리 벗어났다. 얼마쯤 걸어가니 잔잔히 흐르던 옥류가 갑자기 굽이쳐 격랑을 이루며 작은 폭포가 되어 십 여 장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쿠르르릉…… 물보라가 시원하게 피어오르고 흰 거품이 가슴속까지 씻어 주는 듯하였다. 정녕 선경(仙境)을 방불케 하는 아름다운 경관이었다. 백의소년은 걸음을 멈추며 경이에 찬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실로 선경이로군……” 마침 나무 그늘이 드리운 반석(盤石) 하나가 눈에 띄었다. 소년은 조용히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절로 시 한 수가 흘러나왔다. 맑은 눈빛에 목소리마저 한 점 티없이 청아하니, 틀림없는 천하기재(天下奇才)였다. 그의 이름은 사검평(史劍平)으로, 나이는 올해 십이 세였고 장안(長安)의 명문귀족인 사상 서부(史尙書府)의 둘째 공자였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주위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더니, 과연 나이 아홉 살에 이미 향시(鄕試) 에 장원하여 장래가 촉망되었다. 그 이후에도 불철주야(不撤晝夜) 오로지 학문에만 열중하니, 일 년 후의 어시(御試)에서 대 과급제는 맡아 놓은 당상이라는 칭송이 자자했다. 이렇듯 책만 파고드는 사검평이었지만 찌는 듯한 무더위가 계속되니 심신을 잠시 가다듬을 요량으로 형(兄) 사진평(史眞平)이 친구들과 야외로 나가는 길에 함께 따라 나서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검평은 더위를 식히고 싶었을 뿐, 취흥이 무르익어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달갑지 않았다. 해서 시회(詩會)가 파하고 주연이 벌어지자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 나와 홀로 절곡의 경치 를 감상하며 명시(名詩)를 읊조리는 것이었다. 사검평은 맑은 눈빛으로 주위의 경관을 감상하다가 이윽고 조용히 명상에 잠겼다. 서늘한 청풍(靑風)이 불어와 더위를 몰아갔다. 문득 명상에서 깨어나 우거진 녹음 사이를 바라보니 여전히 하늘은 청명하기 그지없었다. 표표히 흐르는 한 줄기 구름 또한 한가롭기 마찬가지였다. 사검평이 다시 시구를 떠올려 읊조리기 시작할 때였다. “호호호……” 옥류 청아한 음색 사이로 일성(一聲) 요염한 웃음 소리가 들려 오지 않는가! 사검평은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 낭자께서……?” 그러나 분명 머리 위에서 소리가 났음에도 사검평의 시야에는 그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 았다. 묘령의 소녀는커녕 사람의 그림자 비슷한 것도 찾아볼 수 없었 사검평의 고개가 갸웃 기울었다. “환청이었나?” 그러나 사검평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너무도 생생한 현실 속의 웃음 소리였기 때문이다. “대체 누구였지?” 사검평이 잔뜩 궁금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포르릉…… 한 마리 작은 새가 날아와 부근의 나뭇가지에 사뿐 내려앉았 순간, 사검평의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전신은 새하얀 깃털로 싸여 스스로 빛을 발하는 듯 찬연한데, 유독 눈동자만 타는 듯 새빨 간 작은 새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아……!” 너무나도 황홀한 한 마리 작은 새의 자태에 사검평은 넋을 잃었다. 그때였다. “아이야, 너는 나이도 어리면서 제법 선비 티를 내는구나!” 새가 말을 하지 않겠는가! 사검평의 그 맑았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새가 말을 하는 것도 신기한데, 그 목소리마저 은쟁반에 명주 구르듯 영롱한 옥음(玉音)이 었기에 사검평은 넋을 놓은 채 그 새에게 말을 붙여 보았다. “백우조(白羽鳥)야, 너는 영금(靈禽)임에 틀림없구나!”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작은 새는 갑자기 앙칼지게 쏘아붙였 “바보, 내 이름은 설아(雪兒)야! 영금이 아니란 말이야!” 사검평은 마침내 멍청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럴…… 수가!’ 비록 나이는 어리나 이미 향시에 장원하고 어시에조차 대과급제가 기대되는 그였다. 천문(天文), 지리(地里), 육예(六藝)와 잡학(雜學)에 이르기까지 이미 통달한 그가 아닌가! 하지만 그 어느 책에서도 이런 영금의 존재에 대해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사검평은 신기함에 넋을 잃었고, 설아의 영롱한 음성에 도취되었다. 그는 매료된 표정으로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그래, 내가 미처 몰랐구나. 그렇다면 설아야, 너는 어디서 왔니? 본시 이곳에서 살고 있던 것이냐?” 설아는 까르르 소리내어 웃었다. “무슨 바보 같은 소리, 나는 본시 하늘 위를 떠돌며 옥로(玉露)만을 마시고 사는 신선인데 어찌 이런 속계(俗界)에서 살 수 있었겠니?” “그렇다면 너는 선계(仙界)에서 잠시 내려온 하늘나라의 사자(使者)겠구나?” 천진난만하게 묻는 그의 눈에서는 맑은 정광이 반짝였다. 그 태도가 어찌나 순진무구했던지 설아는 다시 한 번 까르르 웃었다. “너는 역시 일개 어린아이에 불과하여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바보! 바보!” 백우조(白羽鳥)는 사검평을 실컷 놀려대더니 갑자기 허공으로 포르릉 날아올랐다. “엇!” 사검평은 소중히 간직하던 품안의 보물을 놓친 듯 매우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설아야! 어딜 가는 게냐? 나와 더 얘기하자꾸나! 제발……” 그러나 스스로 설아라고 밝힌 신비한 영금은 들은 척도 않고 허공 높이 솟구쳐 어디론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사검평의 얼굴은 삽시간에 울상으로 변하였다. “설아, 설아야……” 눈 깜박할 사이에 사라진 설아가 너무도 아쉽고 야속했다. 사검평이 멍하니 설아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서 있을 때였. “아악……!” 갑자기 자지러질 듯한 날카로운 비명이 귓전을 찢었다. 이어서 애절한 호소가 들려 오지 않는가! “살려 줘…… 제발…… 아아, 제발…… 살려 줘!” 분명 조금 전 사라졌던 설아의 음성이었다. “앗! 설아에게 무슨 일이……” 사검평은 자리를 박차며 전력을 다해 소리나는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울창한 수풀과 무성한 가시덤불이 그를 가로막았지만 이미 설아에게 매료되어 있던 그에게 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넘어지고 뒹굴며 뛰어가길 얼마나 했을까? 사검평은 숲속의 자그마한 공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순간, 그는 우뚝 멈춰 서 바위처럼 그 자리에 굳어져 버렸다. 방원 삼 장여의 공지, 그곳에 한 마리 괴사(怪蛇)와 설아가 대치하고 있지 않는가! 말없이 쏘아보는 쌍방의 눈길에서 불꽃이 튀겼다. 이미 한차례 격전이 있었던 듯 설아는 날개를 다쳐 백설 같은 깃에 선혈이 낭자했고 전혀 날지를 못했다. 설아와 마주한 괴사를 바라보는 순간, 사검평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 흙빛이 되었다. 세상에 이처럼 무서운 괴사가 또 어디 있겠는가? 호시탐탐 기회만을 노리는 듯 팽팽히 긴장된 자세로 붉은 혀를 날름거리는 괴사! 마치 기다란 보자기같이 넓은 몸매에 피라도 묻어 나올 듯한 선홍빛 신색(身色)은 오싹한 요기(妖氣)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일견하기에 설아의 위기가 분명했지만 괴사 또한 무서운 눈초리로 호시탐탐 기회만 엿볼 뿐 함부로 덤벼들지 못하는 형국이었. 사검평은 설아를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뿐, 몸은 전혀 움직여 주지 않았다. 괴사의 흉물스러운 모습에 오금마저 저릴 정도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에게는 글 읽는 재주밖에 없었으니…… 사검평은 달리 뾰족한 방도가 생각나지 않아 섣불리 덤비지 못하고 안타까움에 속이 탈 지 경이었다. 그때였다. 괴사가 마침내 설아의 허점을 발견한 듯 쉿, 소리와 함께 빛살보다 빠른 속도로 쇄도해 갔 다. 설아 또한 재빨리 한 자쯤 몸을 솟구치며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으로 필사적인 반격을 시도 했다. 파파팟! 징그러운 괴사의 몸뚱이와 설아가 뒤엉켜 뒹굴었다. 단지 두 금수(禽獸)가 싸울 뿐이건만 부엽토(腐葉土)와 작은 돌조각들이 사방으로 비산하 니 사검평은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두 금수가 파닥거리며 뒤엉켜 싸우길 얼마나 됐을까? 꺄아악! 찢어지는 비명 소리와 함께 눈부신 설아의 깃털이 허공 가득 휘날렸다. 양 옆으로 갈라서 있는 설아와 괴사. 이번 싸움으로 설아는 더욱 중한 상처를 입었음이 분명했다. 날개를 파닥거리며 외발로 주변을 뛰어다니는 설아의 모습은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괴사라고 온전한 것은 아니었다. 놈 또한 설아의 날카로운 발톱에 의해 한 쪽 눈 부위가 찢겨 선혈이 낭자했다. 사검평은 듣도 보도 못 했던 두 영금의 치열한 혈전에 오싹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괴사는 비록 한 쪽 눈을 잃었지만 전혀 위축되지 않고 나머지 한 쪽 눈으로 설아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붉고 번쩍이는 긴 몸체를 꿈틀거릴 때마다 쉬이익, 하고 모골 송연한 괴음이 발출됐다.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설아는 부르르 몸을 떨며 연신 눈망울을 굴리더니 애절하게 호소하기 시작했다. “아아…… 살려 줘! 제발 부탁이야……” 그러나 이런 나약한 모습은 오히려 괴사를 더욱 흉맹스럽게 만들 뿐이었다. 괴사의 외눈에서 흉측한 살기가 쏘아지는가 싶더니 징그러운 아가리를 쩌억 벌렸다. 순간, 괴사의 입으로부터 한 줄기 붉은 기류가 쏟아져 나와 빠른 속도로 설아를 휘감아 가 는 것이 아닌가! 슉! 슉! 한 가닥 붉은 기류는 마치 혈광(血光)인 듯 날카롭게 뻗어 갔 “앗!” 사검평은 이번에야말로 설아가 무사하지 못하리라 짐작하고 아연 긴장했다. 설아도 마침내 최후의 각오가 선 모양이었다. 혼신의 힘을 다하는 듯 부르르 몸을 떠니, 설아의 입에서도 한 줄기 백색 기류가 뻗쳐 나와 마주쳐 가는 것이었다. 허공에서 맞닥뜨린 두 줄기의 홍(紅), 백(白) 기류! 그 신비로움을 어찌 필설로 형용할 수 있으랴! 실로 혼백마저 압도하는 일막(一幕)의 광경에 사검평은 경악하고 말았다. 홍백의 두 줄기 기류는 허공에서 팽팽히 뒤엉켰다. 그러나 얼마의 시각이 흐르자 설아가 쏘아 낸 기류의 흰 빛이 서서히 퇴색하며 그 기운이 현저히 약화되기 시작했다. 설아의 형세가 불리함을 짐작할 수 있었다. 승기를 잡은 괴사의 붉은 기류는 점점 짙어져 갔다. 혈색 기류는 서서히 백색 기류의 세력을 압도하며 설아 쪽으로 밀려가기 시작했다. “아아…… 설아, 설아야……” 설아의 명백한 위기를 보며 사검평은 안타까워 어쩔 줄 몰랐 그러나 도대체 위기를 구할 만한 방도가 없지 않는가? 사검평이 안타까움으로 발을 동동 구를 때였다. 발에 걸리는 무엇이 있었다. 반사적으로 내려다보니 한 개의 주먹만한 돌이었다. ‘옳지!’ 그는 생각해 볼 겨를조차 없이 돌을 집어 있는 힘껏 던졌다. 휙! 한 줄기 파공음과 함께 주먹만한 돌은 괴사를 향해 정확히 날아갔다. 사검평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옳지, 이제 되었…… 어엇!’ 그러나 내심의 환희는 일순 사라지고 크나큰 낭패감이 그의 작은 가슴 가득 밀려들었다. 괴사가 고개를 약간 앞으로 숙이자, 그가 던진 돌은 헛되이 허공만을 스치고 날아갔기 때문 이었다. 희대의 영금인 설아를 제압할 정도라면 괴사 또한 대단한 영물임에 틀림없을 것. 사검평의 이런 행위는 오히려 화를 자초한 셈이었다. 예기치 않았던 새로운 적의 출현에 화가 난 듯 괴사는 고개를 빳빳이 세운 채 남은 한 쪽 눈으로 사검평을 날카롭게 노려보았 칼날 같은 괴사의 눈초리에 직면하자 사검평은 형언할 수 없는 공포감에 사로잡히고 말았 다. “아아……” 바짝 약이 오른 괴사가 쉬익, 하는 괴성을 발출하는 순간, 핏빛 기류가 사검평을 향해 날카 롭게 덮쳐 갔다. “앗!” 경악과 공포로 인해 사검평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두 눈을 감고 말았다. 무서운 절망감이 전신으로 엄습해 왔다. 어린 사검평으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위기였다. 순간,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다 죽어 가던 설아가 돌연 몸을 떨치고 일어나 비호같이 날아올랐던 것이다. 동시에 한 줄기 백색 섬광이 뇌전처럼 허공에서 번뜩였다. 꽤악! 괴사는 갑자기 미친 듯이 발광하며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설아는 재빨리 괴사에게 덮쳐 들어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으 로 필사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생사를 건 필사의 공격이었다. 괴사의 몸뚱어리는 순식간에 피투성이로 변하고 말았다. 사검평은 감고 있던 눈을 슬그머니 떠보았다. 설아의 무서운 공격으로 인해 거죽이 너덜너덜해진 괴사가 마지막 숨을 거두며 꾸물거리더 니 이윽고 축 늘어지고 말았다. 사검평은 비로소 제정신으로 돌아와 크게 기뻐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괴사를 물리친 설아 역시 비틀비틀하지 않는가! 사검평은 대경 실색했다. “설아야…… 안 돼……” 소리치며 다급히 달려가 설아를 안아 들었다. “아, 아……” 설아는 가녀린 신음을 토하며 애처로이 몸을 떨었다. 맹렬히 괴사를 공격하던 조금 전의 기세는 그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쩌면 좋단 말인가……” 잠시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던 사검평은 일행에게 도움을 얻을 요량으로 설아를 안은 채 혼 신의 힘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한참을 달려 작은 구릉을 넘어섰을 때였다. “멈춰라!” 분노에 찬 한 줄기 교성이 화살처럼 사검평의 고막을 파고들었 2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등뒤로부터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들려 왔다.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던 사검평은 웬 청의소녀(靑依少女)가 살기 등등한 기색으로 노려 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왠지 모르게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사검평이었다. “누, 누구요? 그대는……” 청의소녀가 차갑게 냉소했다. “흥! 곰팡내 나는 일개 서생(書生) 주제에 감히 우리 설아를 납치하다니…… 네가 정녕 죽고 싶어 환장한 모양이구나!” 실로 오만 무례한 언동이 아닌가! 사검평은 검미를 치켜 올리며 소리쳤다. “닥치시오! 나는 설아가 독사와 싸워 부상을 입었기에 일각이라도 빨리 치료코자 걸음을 재촉했을 뿐이오.” 소녀는 그의 말을 들은 척도 않은 채 더욱 싸늘하게 냉소를 흘렸다. “흥! 그따위 감언이설에 누가 속을 줄 아느냐? 설아는 만고(萬古)에 드문 천향신조(天香 神鳥)라서 흉맹 독랄한 철응(鐵鷹)일지라도 적수가 될 수 없는데, 일개 독사 따위에게 상처를 입다니…… 젖비린내 나는 서생 놈아, 거짓말을 하려거 든 그럴듯하게 하여라!” 정녕 참을 수 없는 모욕적인 언사였다. 사검평은 불 같은 노기가 끓어올랐지만 여인에게 험한 말로 맞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 다. “당신이 믿지 않겠다면 더 이상 해명치 않겠소. 한데, 당신이 이 새의 주인이라는 사실은 어떻게 증명할 참이오?”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이었다. 철썩! 갑자기 두 눈에 불꽃이 번쩍하더니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듯 정신이 아득해지지 않는가? 사검평은 신형을 휘청이며 서너 걸음이나 뒤로 물러나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 다. 코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제껏 누군가에게 뺨을 얻어맞아 본 적이 없는 사검평이었다. 더구나 그 상대가 한낱 어린 소녀였으니…… 그는 너무도 분하여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느새 설아를 품에 안은 청의소녀는 냉소를 흘리며 싸늘하게 일갈했다. “흥! 닭 한 마리 잡을 힘도 없는 백면서생 주제에 감히 본 낭자에게 반항하려 들다니…… 실로 가소롭구나!” 사검평은 분노하여 안색마저 파리하게 변하였다. “어찌 이토록 무도(無道)할 수가……” “흥! 그래도 아직 정신을 덜 차렸느냐?” 청의소녀가 또다시 한 손을 휘둘러 사검평의 뺨을 후려치려는 순간이었다. “멈춰라!” 일성 청아한 음성과 함께 한 인영이 그들 곁에 내려섰다. “청아(靑兒)야! 네 말과 행동이 너무도 지나치구나! 어서 젊은 공자께 사과치 못하겠느 냐?” 옥반(玉盤)에 명주(明珠)가 구르듯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사검평은 청의소녀의 오만 무도한 행동으로 울분을 느끼던 중이었다. 그러나 홀연히 나타나 청의소녀를 꾸짖는 소녀를 대하는 순간, 그는 넋을 잃고 말았다. 나이 십사오 세쯤으로 보이는 소녀는 화사한 궁장(宮裝) 차림이었는데, 그 아름다움은 천계 의 선녀(仙女)에게 비견할 만큼 황홀무비한 자태였다. 한 점 티 없이 맑아 백설이 무색한 피부, 신비한 광채를 내뿜으니 호수와 같이 맑은 봉안 (鳳眼), 선계의 장인이 다듬어 놓은 듯 섬세한 콧날, 붉은 꽃잎과도 같은 입술…… 한마디로 모든 아름다움의 정화(精華)를 모아 놓은 듯했다. 사검평은 넋이 나가다 못해 숨까지 막힐 지경이었다. ‘저 모습이 정녕 인간의 아름다움이란 말인가?’ 분명 눈앞의 현실이었건만 그는 좀체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한 눈길을 그녀에게 고정시켰 다. 궁장소녀는 사검평의 눈길을 의식하고는 홍조 띤 얼굴로 가볍게 웃었다. “공자, 어찌 그토록 뚫어지게 소녀의 얼굴을 보시나요?” 그제서야 비로소 제정신으로 돌아온 사검평은 자신의 무례를 깨닫고는 화들짝 놀라며 황 급히 사과했다. “아! 소생이…… 실례를……” 떠듬떠듬 말하고 있는 그는 끝내 본심을 감추지 못하였다. “너무도 뛰어난 소저의 미모에…… 나도 모르게 그만……” 궁장소녀는 가볍게 웃음지었다. “과분하신 칭찬에 감사드립니다. 더구나 설아의 목숨까지 구해 주셨으니 어떻게 감사드려 야 할지……” 그 말에 청의소녀가 홀연 미간을 찌푸렸다. 역력히 못마땅한 어조로…… “공주님! 설아가 독사에게 당했다는 허무맹랑한 말을 정말로 믿으시는 것은 아니시겠지 요?” 궁장소녀는 서늘한 눈빛으로 청의소녀를 바라보며 낮지만 위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백면서생이라니…… 너는 설아를 구해 주신 은인께 말이 너무 지나치구나. 어서 사과하 지 못하겠느냐?” 청의소녀는 입을 삐죽이고 있을 뿐 선뜻 사죄할 마음이 없는 듯했다. 궁장소녀는 가볍게 한숨쉬며 말을 계속했다. “나는 여기로 오던 도중 십 장쯤 떨어진 곳에서 한 마리의 비천혈홍사(飛天血紅蛇)가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상세로 보아 설아에게 당한 것이 틀림없는데, 누군가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찌 설아가 비천혈홍사를 죽일 수 있었겠느냐?” 그녀는 다시 사검평을 바라보았다. 순간, 사검평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부르르 몸을 떨었다.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의 눈길을 궁장소녀라 해서 모를 리 없었 하지만 사검평의 눈길에는 결코 사련(邪戀)의 뜻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애써 모른 척 담담히 굴었다. 그녀는 여전히 옥구슬 구르듯 낭랑하고 청아한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공자, 어쩌다가 우리 설아를 구해 주시게 되었는지 그 경위를 말씀해 주실 수 없을까 요?” 사검평은 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약간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설아가 그의 앞에 나타난 뒤부터 벌어진 모든 일에 대하여…… 그의 말이 끝나자, 궁장소녀는 크게 감탄해 마지않았다. “공자의 말씀을 듣건대 진정으로 용기있으신 분임에 틀림없습니다.” 사검평은 그 말에 크게 얼굴을 붉히며 겸양해 마지않았다. “아니오! 사실 나는 별로 한 일이 없소이다.” 궁장소녀가 신비로운 미소와 함께 그의 말을 막았다. “공자께서는 너무 겸양하지 마십시오. 사실 설아와 싸웠던 비천혈홍사는 오륙 장의 허공을 순식간에 날아 상대를 공격하는 무서운 요물입니다.” 그녀는 그 말을 듣고 경악하는 사검평을 미소로 달래며 계속 말했다. “더구나 비천혈홍사는 수백년 묵은 영물이기 때문에 웬만한 무림의 고수라 할지라도 녀석의 단독(丹毒)에 당하면 순식간에 한줌 혈수로 변하고 말지요. 무공을 모르는 공자께서 설아를 도와 주신 일은 무모하리만치 용기있는 행동이었어요.” 그녀의 말은 그를 칭찬하는 듯하기도 하고 어찌 들으면 경솔했음을 탓하는 것도 같았다. 사검평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그때 궁장소녀는 가벼운 몸짓으로 소맷자락에서 하나의 옥합을 꺼냈다. 이어 그녀가 섬섬옥수로 옥합 뚜껑을 여니 삽시간에 주위 가득 일진(一陣) 청아한 향기가 진동했다. 궁장소녀는 옥합 안에서 노란빛이 감도는 환단 하나를 꺼내 청의소녀에게 건네 주었다. “청아야, 너는 속히 이것을 설아에게 복용시켜라!” 청의소녀가 공손히 받아 설아에게 복용시키는 동안, 궁장소녀는 사검평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을 걸어 왔다. “공자의 존함은 어찌 되시나요?” 사검평 역시 공손히 대답했다. “소생은 사검평이라 합니다. 소저께서는……” “아! 본시 사 공자이셨군요. 소녀는 유벽선(劉碧禪)이라고 해요.” “아! 유 소저……” 사검평도 역시 고개를 끄덕이는데 유벽선이 웬일인지 뚫어지게 그를 주시했다. 초롱초롱 맑은 눈빛이 온통 자신에게 쏠림을 의식하자 그는 크게 얼굴을 붉혔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유벽선이 신비롭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소녀에게 관상 보는 재주가 약간 있어 잠시 공자의 관상을 보았을 뿐이에요.” “관상을?” 사검평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던 유벽선의 얼굴에 경이의 빛이 스쳤다. “공자의 관상은 큰 인물이 될 대길상(大吉相)이군요. 단지……” 사검평은 일말의 호기심이 솟구쳤다. “단지…… 혹 무엇이 마음에 걸리기라도 하신지요? 유 소저께서는 부디 솔직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유벽선이 갑자기 뜻 모를 한숨을 흘렸다. “공자의 관상은 후일 큰 인물이 되실 상이나 미구(未久)에 큰 재난을 당할 것이니 소녀는 이 점이 염려스럽군요. 그러나 이 고비만 무사히 넘긴다면 화(禍)가 오히려 복(福)이 되어 커다란 기우(奇遇)를 만날 것입니다.” 사검평이 그 말뜻을 나름대로 뇌리 속에서 되새기고 있을 때였 유벽선은 돌연 작별을 고하였다. “소녀는 이만 가봐야겠군요. 설아를 구해 주신 오늘의 은혜는 후일 반드시 갚도록 하지 요.”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흡사 한 줄기 연기처럼 홀연히 사검평 눈앞에서 사라졌다. 사검평이 미처 무어라 말을 꺼낼 사이도 없었다. 청의소녀 역시 유벽선의 뒤를 따라 훌쩍 신형을 솟구치며 말했 “허약한 서생, 다음에 또 만나요.” “자, 잠깐!” 사검평은 뭔가 할말이 있는 듯한 눈치였지만 두 소녀의 신형은 이미 까마득히 멀어진 후였 다. 그는 망연히 넋잃은 표정으로 그녀들이 사라져 간 방향을 바라보았다. 잠깐의 만남이었지만 사검평의 가슴에는 궁장소녀 유벽선의 모습이 너무도 뚜렷하게 각인되 고 만 것이었다. 그 아름다운 자태, 부드러운 몸짓, 옥반에 구슬이 구르듯 맑고 청아했던 음성…… 사검평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유…… 벽…… 선…… 그리고 설아……” 새삼 입 속으로 되뇌어 보는 사검평이었다. 우연히도 설아를 만난 일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이 모두 꿈만 같았다. 그가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 할 때였다. “잠시 섰거라!” 느닷없이 일성 창노한 폭갈이 울려 오는 것이었다. 꿈결 같았던 망상에 사로잡혔던 사검평이었는지라 의외의 소리에 크게 놀라며 뒤를 돌아보 았다. 언제 나타났는지 일 장쯤 뒤에 한 노인이 서 있는 것이었다. 홍안백발(紅顔白髮)이 너무도 웅위(雄偉)하여 정녕 신선을 방불케 하는 선풍도골(仙風道骨) 의 노인이었다. 사검평은 의아하여 주춤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노인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얘야, 노부가 지나치게 큰 소리를 질렀나 보구나. 그러나 너무 겁내지 말아라. 사 실 노부는 너에게 한 가지 물어 볼 것이 있어 잠시 걸음을 멈추게 했을 뿐이란다.” 처음과 달리 부드러워진 노인의 언동에 사검평은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노인께서 물어 보실 것이 있으시다면 무엇이든지 물어 주십시오.” 백발노인은 묘한 눈초리를 빛내며 물었다. “이곳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비천혈홍사가 죽어 있던데, 혹시 누가 죽였는지 알고 있느냐?” 노인이 비천혈홍사에 대해 물어 보는 것은 정말 뜻밖이었는지라 사검평은 흠칫 놀라며 되 물었다. “노백백(老伯伯)은 혹시 그 괴사와 어떤 연관이 있으십니까?” 백발노인은 움찔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본시 비천혈홍사는 만고(萬古)에 드문 영물인지라, 그 사혈(蛇血)은 능히 백독(百毒)을 제압하는 효과가 있단다.” 사검평은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노인을 주시했다. 노인이 말을 이었다. “노부는 오래 전부터 한 가지 해독영단을 만들기 위해 고심하던 중이었다. 때문에 수륙만 리 머나먼 남만(南蠻)까지 가서야 비천혈홍사를 잡을 수 있었지. 한데 자칫 잠깐의 실수로 비천혈홍사가 도망쳤지 않겠느냐? 그 행방을 쫓다 보니 이곳 장군산까지 온 것이다.” 그 말에 사검평은 알았다는 듯 크게 탄성을 발했다. “아, 본시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그는 조금 전 설아와 비천혈홍사가 생사 결판을 벌여 마침내 비천혈홍사가 설아에게 죽었 던 상황을 그리듯 설명해 주었다. 그 말에 노인은 크게 놀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말하는 새였다니……! 너는 그 새의 생김새를 다시 한 번 상세하게 말해 줄 수 있겠느 냐?” 사검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온몸이 모두 백설처럼 흰 깃으로 덮였고…… 그 음성은 옥반에 명주 구르듯 하여 정녕 신 비……”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노인이 부르짖었다. “천향신조!” 이어서 그는 부드득 이를 갈았다. “벽혈궁(碧血宮), 그 무리들이 기어이 노부의 대업을 망쳐 놓다니……” 돌연 백발노인의 전신에서 진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사검평은 그 살기로 인해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 기미를 눈치챈 백발노인은 얼른 표정을 바꾸어 처음과 같이 인자하고 온후한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사검평은 한번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그는 백발노인에 대해 불현듯 경계의 마음이 솟았다. 그때, 백발노인은 푸르고 기이한 안광을 발산하며 사검평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한 순간 그의 얼굴 가득 경이의 빛이 떠올랐다. ‘이제 보니 이 아이는 진정 절세기재의 자질을 갖추지 않았는가! 노부가 평생 수많은 강호 의 인재를 접해 보았지만 이처럼 뛰어난 자질의 아이는 정녕 처음이다!’ 내심 이런 생각을 떠올리는 백발노인의 눈에선 형용할 수 없이 음흉한 빛이 흘러나왔다. ‘흐흐흐…… 노부가 비록 비천홍혈사를 잃었다 해도 이 아이만 전인(傳人)으로 거둔다면…… 전화위복(轉禍爲福)이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했던 말이렷다.’ 암연(暗然)히 생각을 굴리고 난 그는 짐짓 온후한 음성으로 사검평에게 물었다. “얘야, 네 이름이 무엇이냐?” 사검평이 또렷이 대답했다. “성(性)은 사(史), 이름은 검평(劍平)이라 합니다.” 그러자 백발노인이 은근한 어조로 속삭였다. “아이야, 너는 혹 천하제일의 무학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없느냐?” 사검평은 흠칫 놀라는 표정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평소 많은 책을 접해 왔던 사검평은 강호기협들에 관한 고서를 읽었던 일도 있었는지라 은 근히 그들에 대해 흠모하던 바도 없지 않았다. 이런저런 아는 바가 있던 터에 홀연 이런 제의를 받고 보니, 자신도 그와 같은 무학을 배 우고 싶은 생각이 문득 치솟았다. 그의 변화를 유심히 살피고 있던 노인의 두 눈에서 더욱 음산한 광채가 뻗어 나왔다. 순간, 사검평의 충동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 싸늘히 식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겉으로는 짐짓 태연하고 공손하게 대꾸했다. “노백백의 말씀은 실로 큰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라 소생 감격해마지않습니다. 그러나 ……” “그러나……?” 백발노인이 탐욕에 가득 찬 시선을 번뜩이며 초조한 듯 따라 되뇌었다. 사검평은 더욱 정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소생은 어려서부터 뜻을 세운 바 있습니다. 수기치인(修己治人)과 겸제(兼濟)만이 소생의 뜻인즉, 부득이 노백백의 호의를 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말을 듣던 백발노인은 음산한 괴소를 흘려 냈다. “흐흐흐…… 만일 노부가 너를 납치한다면 어찌하겠느냐?” 사검평은 자신을 쳐다보는 백발노인의 눈초리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고 여겼다. 본능적으로 섬뜩하여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흐흐흐…… 일단 천독마동(千毒魔洞)으로 끌고 가기만 하면 네놈이 어찌하겠느냐?’ 그가 단단히 각오한 표정으로 사검평에게 다가설 때였다. 띠딩! 띵! 어디선가 한 줄기 신비롭기 그지없는 금음(琴音)이 들려 오지 않는가! 백발노인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소스라치게 놀라는 표정이었 창백하게 가라앉은 안색으로 주변을 살피던 그는 갑자기 독랄한 눈빛으로 사검평을 쏘아보 았다. ‘기왕 노부가 얻지 못할 기재라면 누구도 넘볼 수 없도록 죽여 버리는 것이……!’ 그는 사검평을 향해 빠르게 소맷자락을 떨쳤다. 그러자 한 줄기 한풍(寒風)이 갑자기 몰아쳐 사검평을 휘감아 버렸다. “앗!” 사검평은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로 인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대, 대체 무엇 때문에……” “흐흐흐…… 미래의 우환을 미리 제거하려는 것이니, 조용히 눈을 감거라, 애송이!” 백발노인은 비틀거리는 사검평을 놓아 둔 채 태연히 신형을 솟구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第 二 章 거대한 석총(石塚) 1 전신으로 엄습해 오는 한기로 인해 사검평은 사시나무 떨듯 부르르 떨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그는 옆에 있는 나무에 몸을 의지하기 위해 비틀비틀 다가갔 그러나 더욱 몽롱해지는 의식을 끝내 가눌 수 없었다. “아아……” 마침내 그는 완전히 혼절하여 지면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때 한 줄기 인영이 흡사 유령인 듯 소리도 없이 나타나 사검평 곁에 내려섰다. 그는 청색 장포를 입고 고색 창연한 고금(古琴)을 옆구리에 낀 중년문사였다. “쯧쯧…… 나이도 어린 소년이 어쩌다가 이처럼 한적한 곳에서 정신을 잃었는가……” 그는 측은한 듯 혀를 차더니 사검평을 부축해 일으켰다. 어느새 사검평의 얼굴은 마치 숯덩이처럼 검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의 상세를 살피던 중년인의 눈가에 경악의 빛이 스쳤다. “으음…… 이것은 한음현살공(寒陰玄煞功)에 당한 것이 분명하군.” 홀로 중얼거리던 중년문사는 사검평을 지면에 편안히 눕힌 뒤 품 안에서 하나의 푸르스름 한 옥병을 꺼내더니 그곳에서 환약 하나를 집어 그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런 후, 사검평의 단전에 손을 얹고 천천히 진기를 주입하였 이런 일련의 조치들은 전광석화와 같은 순간에 이루어졌다. 잠시 후, 검푸르던 사검평의 얼굴에 불그레한 혈색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뜨거운 차 한잔을 마실 정도가 지나자 거의 정상에 가까워졌다. 중년문사는 이제야 겨우 안도한 듯 한 줄기 탄식을 내뿜으며 나직이 뇌까렸다. “악독한 마두 같으니…… 아직 무공도 익히지 않은 어린아이에게 이처럼 독랄한 살수를 펼치다니……” 새삼 연민 가득한 표정으로 사검평을 바라보던 중년인의 눈가에 이채가 스쳤다. 그는 갑자기 눈빛을 강렬히 빛내며 사검평의 면면을 유심히 살폈다. “이렇게 완벽한 근골을 가진 아이가 존재하고 있었다니……” 좀더 면밀히 사검평을 살펴보던 그는 뭔가 짚이는 바가 있는 듯 사검평의 머리를 세밀히 더듬어 보았다. 한 순간 그의 안색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럴…… 수가…… 이 아이는 천령혈(天靈穴)과 영개혈(靈蓋穴) 사이가 이미 열려 있지 않는가!” 중년인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것은 불문의 성자(聖者), 고인(高人)들이 득도(得道)하여 열반(涅槃), 또는 우화등선(羽化 登仙)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나 비로소 타통(打通)된다는 천지합교(天地合交)의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중년인 그 자신도 이런 경지에 이르지 못했음은 물론이고, 태어날 때부터 이처럼 절세적 자질을 지니고 난 기재는 실로 난생처음 보는 것이었다. 경악에 물든 채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던 중년인은 혼자말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노부는 이제야 비로소 백년 전에 읽었던 기서(奇書)의 내용을 깨달을 수 있겠구나…… 그 책에서 이르기를…… 천하가 어지러워져서 마도(魔道)가 창궐하매 하늘이 이윽고 한 사람의 절륜기재를 나게 하시어 그 마화(魔火)를 끄게 하신다 하지 않았던가? 아아, 그때 노부는 단지 요설(妖說)이라고 흘려 버렸는데 오늘 이처럼 그 기재를 직접 만나게 될 줄이야……” 잠시 말을 끊은 중년인은 얼굴 가득 침통한 빛을 띠며 하늘을 우러러 장탄식을 토해 냈다. “그렇다면 미구에 다시 온 무림이 살겁의 도가니로 화한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아…… 만일 일 년의 시간만 주어진다면 이 아이에게 노부의 모든 절예를 전수할 수 있었으련 만…… 하늘은 어찌하여 이러한 때에 노부의 시간을 빼앗아 천추의 한(恨)을 남기게 하시는가!” 정녕 안타까운 모습으로 사검평을 내려다보던 중년인의 눈에서 갑자기 한 가닥 광채가 번뜩 였다. ‘아! 전혀 방법이 없는 것만은 아니구나…… 노부가 비록 이 아이에게 절학을 전할 시간 은 없으나, 지난 세월 노부의 모든 심혈을 기울여 만든 주천금단(株天金丹)이 있지 않는 가…… 주천금단! 그것만 복용시킨다면 이 아이의 몸 안에는 무려 삼(三) 갑자(甲子)에 달하 는 엄청난 공력이 잠재하게 될 것이다.’ 스스로의 생각에 만족한 듯 그의 얼굴에는 한 가닥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비록 그 효과가 즉시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나, 언젠가 이 아이가 천하를 구하려 나섰을 때 정녕 큰 도움이 되리라!” 중년인은 즉시 품속에서 오리알 크기의 납환을 꺼냈다. 그가 납환을 쪼개자 홀연 금빛 찬란한 광채가 쏟아져 나오지 않는가! 그 광채는 호도알 크기의 금단(金丹)에서 뿜어지고 있었다. 중년인은 새삼 감개가 무량한 듯 수중의 금단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노부는 이 한 알의 주천금단을 정련하기 위해 실로 필생의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주천금단의 약재를 구하기 위해 서역(西域), 묘강(苗疆), 남해(南海) 등, 수륙만리 천 하의 온 구석을 헤매던 일을 떠올렸 길고 길었던 고난의 순간들…… 문득 그는 땅이 꺼질 듯 장탄식을 뿜었다. “휴우……” 주천금단이 아까워서 내뱉는 탄식은 아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이 한 알의 주천금단이야말로 정녕 천하의 기약(寄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아이 가 깨어날 때쯤이면 노부는 이미 약속했던 장소에 가 있고 결코 이 자리에 없을 것이니, 정작 깨어난 이 아이는 기약을 복용한 사실은 물론 노부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다시 그의 얼굴에 깊은 우수가 서렸다. “아…… 노부는 지난 백년간 나의 모든 절예를 전수해 줄 만한 인재를 찾아 헤매지 않았 던가…… 그러다 마침내 오늘 이처럼 무상의 기재를 드디어 만났건만 시각이 촉박하여 헤어 져야 하다니……” 문득 그의 시선은 망연히 허공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더할 나위 없이 쓸쓸하게 뇌까렸다. “만일 오늘의 결투에서 노부가 살아날 수만 있다면…… 노부는 이 아이로 하여금 고금제 일(古今第一)의 기학(寄學)을 익히게 하련만…… 아아……” 그는 미처 말을 끝맺지도 못한 채 장탄식을 터뜨렸다. “오늘 나와 생사지투를 약속한 이원패(李元覇)! 그가 그 동안 얼마나 절륜한 무공을 닦았 는지 전혀 짐작조차 가지 않으니, 정녕 노부의 앞날을 기약할 수 없음이 한(恨)이로다. 그렇다고 그와의 대결을 피할 수도 없는 상황이니…… 만약 내가 이 아이를 데리고 그냥 사라진다면 그 마두는 전무림을 상대로 어떤 흉악한 일을 벌일지 모르니……” 그는 아타까워 못 견디겠다는 듯 측은한 시선으로 사검평을 바라보았다. “나 사마등(司馬鄧)에게 이런 사정만 없었다면…… 정녕 네가 훗날 천하를 평정하는 데 큰 힘을 보태 주었으련만…… 아이야, 미구에 휘몰아칠 공전절후(空前絶後)의 혈풍! 천하대란을 네 어찌 막으려느냐……” 스스로를 사마등이라 지칭한 중년문사! 그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미처 오십도 안 돼 보이는 그가 스스로 노부라 자칭하며 백년(百年) 운운하다니…… 내력을 알 수 없는 그 중년인은 사검평에게 한 알의 주천금단을 복용시킨 후, 뇌리 속에 깊이 새기기라도 하듯 새삼 사검평의 면모를 보고 또 보았다. 그러나 그도 잠시뿐, 홀연 몸을 솟구치니 마치 한 줄기 연기인 듯 해연히 사라져 버리는 것 이었다. 신비의 중년문사가 떠나자 사위는 깊은 정적에 묻혔다. 이따금 염천(炎天)을 식히는 한 줄기 청량한 바람이 불어와 풀 잎을 흩뜨리고 지날 뿐, 사검 평은 여전히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그러나 비록 혼절하여 있었어도 얼굴에는 화색이 돌고 평화롭기 이를 데 없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으음……” 몸을 뒤척이던 사검평은 시야 가득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에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뭐가 뭔지 영문을 알 수 없었고 오직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다만 체내에 무엇인가 기이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마치 물에 씻은 듯 맑은 정신, 전신을 감싸고 있는 듯한 청량한 기운…… 왜 자신의 몸에 이런 변화가 일어났는지 사검평은 좀체 이해하기 어려웠다. 혼절하기 전 사정을 곰곰이 떠올려 보았다. 백발노인의 소맷바람을 맞은 뒤 한기가 엄습해 혼절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 누군가 백발노인과는 다른 사람을 본 것 같은 기분도 들었. 그러나 그것은 꿈결인지 현실인지 확연히 구분이 안 가는 기억이었다. 깊은 상념에 젖어 든 사검평의 몸에서는 은은한 정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본래의 영준한 면모에 수정빛과도 같이 은은하고 청아한 광채까지 서리니, 그는 실로 선동 (仙童)과 같은 모습이었다. 물론 그 자신은 이런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한동안 뇌리를 굴리던 사검평은 도저히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정말 이상한 일들만 연거푸 일어났는걸…… 내가 어려서부터 많은 책을 보아 왔 지만 그 어느 책에서도 듣도 보도 못 하던 일들뿐이었으니……” 홀로 중얼거리며 서 있던 그는 문뜩 태양이 서녘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음을 발견했다. 아직 황혼은 아니었지만 어둡기 전에 산을 내려가려면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이런! 내가 너무 오래 지체하였구나. 형님이 얼마나 걱정하실까!” 그는 일각이라도 바삐 일행에게 돌아가기 위해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한동안 걸어서야 우거진 숲속을 빠져 나온 사검평이 일행이 모여 있는 장소 가까이에 다다 랐을 때였다. 그는 갑자기 몰려드는 불길한 예감을 느껴야 했다. 지금쯤 주흥이 도도하여 고성방가(高聲妨歌)가 난무해야 할 놀이터였다. 그런데 고성방가는커녕 사위가 온통 쥐죽은듯 조용하지 않는 사검평은 거의 본능 같은 예감에 사로잡혀 얼굴을 굳히며 작은 구릉 위로 달려 올라갔다. 일행의 모습이 한눈에 보이는 구릉 위에 당도한 순간, 그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아악!” 그가 빠져 나올 때까지만 해도 흥겨웠던 유흥의 장이 너무도 처참한 살육의 현장으로 화해 있었기 때문이다. 피투성이인 채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는 수십 구의 시체…… 대체 그 누가 이다지도 전율할 만행을 저질렀단 말인가? 죽어서도 감지 못한 채 부릅뜬 그들의 눈에는 공포의 빛이 역력했다. 부스스 나뭇잎을 휘저으며 스치는 바람결에 진한 혈향이 물씬 묻어났다. “형님!” 사검평은 미친 듯 장중을 누비기 시작했다. 비록 시신(屍身)이나마 형 사진평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사진평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혹시 천행으로 형님만은 살아나기라도……’ 하나 그는 이내 스스로 고개를 저어야 했다. 너무도 처참히 죽은 모습들로 보아 유독 사진평만 무사할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혀, 형님……!” 사검평은 무서운 절망감에 휩싸였다. 그때 소맷바람을 일으켜 자신을 혼절시켰던 백발노인의 모습이 문뜩 떠오른 것은 우연이었 을까? 사검평은 눈매를 가늘게 하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죽이려 했던 자였다. 더구나 일반인은 스치기만 해도 한줌 혈수로 화한다는 독무를 뿜어 내는 비천혈홍사를 잡았던 무공의 고수가 아니던가? 어쩌면 이 처참 한 살겁도 그가 저지른……”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사검평은 부드득 이를 갈았다. “악적(惡賊)! 나 사검평은 비록 구천지옥에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이 원수를 갚 고 말리라!” 그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륵 쏟아졌다. 누구보다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 주던 형 사진평을 죽인 원수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는 피눈 물이었다. 두 주먹을 꽉 움켜쥔 채 굳은 복수를 다짐하던 그는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영혼을 잃은 시신들은 산짐승들에게 좋은 먹이감이 될 터였다. 자신의 친인들이었던 그들을 들짐승의 먹이감이 되도록 방치할 수는 없었다. 사검평은 맨손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바위와 자갈이 섞인 굳은 땅, 이처럼 힘든 일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열두 살 소년의 여린 손이 견뎌 낼 리 만무했다. 열 개의 손가락 모두가 순식간에 터지고 긁혀 피투성이가 되었 그러나 사검평은 이를 악물고 계속 흙을 파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돌연 사검평의 등뒤에서 들려 오는 장탄식이 있었다. “아! 참으로 굴강(屈强)한 아이로다……!” 오직 땅 파는 일에만 열중해 있던 사검평이었으나 웬일인지 이 소리만은 역력히 들었다. 막막산중(寞寞山中)에서 들려 온 사람의 목소리. 사검평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 다. 일 장쯤 뒤에 한 괴인이 소리없이 나타나 있었다. 긴 백발과 백염(白髥)은 부숭하게 뒤엉켜 있어 어느것이 모발이고, 어느것이 수염인지 구분 할 수가 없었다. 본래 검정색이었던 듯한 의복은 낡고 바래어 구멍이 숭숭 뚫린 회의로 변해 있었다. 거기에 더해 두 눈으로는 타는 듯한 광채를 쏟아 내고 있었으니…… 갑자기 나타난 괴인의 모습은 어린 사검평이 감당해 내기에는 너무도 섬뜩한 몰골이었다. 타는 듯한 안광에 압도되어 굳어 있는 사검평에게 괴인이 먼저 말을 걸어 왔다. “아이야…… 너무 놀라지 마라. 먼저 노부가 한마디 묻겠는데, 이 처참한 형국의 시체들이 너와 어떤 관계인지 말해 줄 수 있겠느냐?” 나름대로는 부드러운 음색을 내느라 노력하고 있음이 분명했지만, 착 가라앉은 그의 음성은 모래를 씹어 뱉는 듯 메마르게 울려 나왔다. 그러나 사검평은 왠지 모르게 괴인의 음성에서 말할 수 없이 따스함을 느꼈다. 놀라고 두려웠던 마음마저 씻은듯이 사라진 그는 태연히 대답했다. “불초 소생의 이름은 사검평(史劍平)이라 하며……” 말문을 연 사검평은 오늘 하루 동안 겪었던 모든 일을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이윽고 사검평의 말이 끝나자 괴인이 형형한 안광을 빛내며 우수를 쭉 뻗어 한차례 휘돌리 는 것이었다. 그러자 삼 장 밖에 누워 있던 시신이 저절로 날아와 괴인의 앞에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사검평은 놀란 입을 쩍 벌리고 있을 뿐, 탄성을 토해 내는 것조차 잊은 듯했다. 장발괴인은 예의 불타는 시선으로 순식간에 시신을 훑어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역시 음살지기(陰煞之氣)에 격중되어 목숨을 잃었음에 틀림없구나.” 그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사검평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노선배님! 그렇다면 그 악적 백발노괴가 누구인지 짐작이 되십니까?” 장발괴인이 공허하게 웃었다. “허허허…… 유감이다만, 노부는 네가 말한 것만 듣고 그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없구 나!” 사검평은 실망해 마지않는 표정이었다. 장발괴인은 사검평의 실망한 안색을 대하고는 변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얘야, 정말 미안하구나. 노부는 사실 지난 백년간 한 번도 강호에 나오지 않았던 까닭으로 백년 이내의 무림 인물들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구나. 허허허……” ‘백년 전의 기인이라니……’ 사검평은 놀란 눈으로 장발괴인을 바라보았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그에게 장발괴인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들을 묻는 것은 노부가 도와 주겠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장발괴인은 소매를 가볍게 떨쳤다. 순간, 소리없이 뻗쳐 나간 진력이 수장 밖에 이르러 섬광처럼 작렬했다. 콰쾅! 순식간에 사방 일 장에 달하는 커다란 구덩이가 생겨났다. 그러나 숨마저 죽이게 하는 놀라운 정경은 거기에서 멈춰지지 않았다. 괴인이 두 손을 기묘하게 움직이자, 이번에는 시신들이 둥실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것들은 일제히 저절로 날아와 구덩이 속에 나란히 눕는 것이었다. 사검평은 비통함도 잊은 채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 괴인은 다시 두 손을 휘둘러 무엇인가 끌어들이는 자세를 취했 그러자 정녕 놀라운 일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우르릉…… 일진의 우렁찬 진동이 울리더니 사방에 널려 있던 거암괴석(巨岩怪石)들이 마치 소나기처럼 괴인의 장중으로 빨려 오는 것이었 그리고 이것들은 순식간에 시신들 위에 쌓여 거대한 석총을 만들어 냈다. 사검평은 너무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2 장발괴인은 마지막으로 커다란 바위를 석총 앞에 세운 뒤 지력으로 비문을 새기고 있었다.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놀라운 광경에 사검평은 오직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사검평은 눈앞의 장발괴인이 마치 신선처럼 느껴졌다. ‘어찌 사람의 손으로 돌을 파내어 글을 새길 수 있단 말인가!’ 그때 문뜩 사검평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만일 이분을 사부로 모신다면 형님의 복수도 문제없을 것이다!’ 결심을 굳힌 사검평은 괴인 앞에 꿇어 엎드렸다. “부디 저를 제자로 거두어 주십시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괴인은 움찔했다. 사검평은 행여라도 거절당할까 봐 거듭 애원했다. “소생의 청을 거절하지 말아 주십시오.” 잠시 괴인의 안면에 곤혹의 표정이 스쳐 갔다. ‘내가 만일 이 아이의 간청을 받아 준다면…… 지난 백년 동안 일편단심 기다려 왔던 복 수를 포기해야 하지 않는가? 하지만 앞으로 또다시 백년이 흐른다 해도 이런 기재는 만나기 어려울 텐데……’ 사검평은 꿇어 엎드린 채 일어날 줄 몰랐다.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던 괴인의 얼굴에 결심의 빛이 서렸다. ‘비록 내가 복수를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이 아이로 하여금 나의 전인(傳人)이 되게 한다 면…… 앞으로 십 년 후 나의 분신(分身)인 이 아이가 강호에 혜성처럼 출현하여 노부가 왕년에 이루지 못했던 포부를 깨끗이 성취해 줄 수 있지 않겠는가! 그것이야말로 노부의 진정한 복수가 될 것이 다. 사마등(司馬鄧)! 앞으로 십 년만 더 목숨을 부지하거라! 그리하여 노부의 제자가 강호 천하를 손아귀에 넣고 호령하는 모습을 네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아라!’ 속내를 굳힌 그는 갑자기 앙천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웅후한 내력이 실린 소성(笑聲), 사검평은 고막이 터져 나갈 듯한 고통으로 괴로워했다. “앗! 으으…… 으……” 사검평이 신음하며 지면 위를 뒹굴자 그제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장발괴인은 얼른 웃 음을 멈추며 사검평의 신색을 살폈다. “이런! 노부가 실수를 저질렀구나.” 그는 재빨리 자신의 내력을 사검평에게 주입시켜 진탕된 기혈을 다스리려 했다. 한데, 사검평의 명문혈에 장심을 밀착시키고 진기를 주입하려던 그는 크게 놀라며 얼른 손 을 떼어 내는 것이었다. ‘이럴 수가! 이 아이의 몸에는 무형의 잠력이 충만되어 있지 않는가! 더구나 잠력의 정체 가 무엇인지 노부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으니……’ 그때 더욱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괴인의 장소성에 크게 내상을 입은 듯했던 사검평이 점차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던 것이 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일이었다. 간단한 내공심법조차 모르는 백면서생 사검평에게 자가 치유능력이 있다니…… 노인이 어리둥절하여 당황한 사이, 사검평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 섰다. 더구나 그의 눈에서는 전에 없이 맑고 청아한 정광이 형형히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노인은 잔잔히 떨리는 음색으로 물었다. “평아(平兒)야, 너는 혹시 지난날 기약(奇藥)을 복용한 적이 있느냐?” 잠시 곰곰이 생각해 보던 사검평은 고개를 저었다. “소생이 알기로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 “으음……” 장발괴인은 알 수 없다는 듯 기괴한 신음을 삼켰다. ‘정녕 괴이한 일이다…… 절세적 신단을 복용하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현상이……’ 깊은 상념에 잠겨 있는 괴인에게 사검평은 다시 머리를 조아렸 “소생의 청을 응낙해 주십시오.” 그제서야 언뜻 정신을 차린 괴인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오냐, 승낙하마. 노부는 지금 이 순간 이후부터 너를 나의 유일한 후계자로 삼을 것을 결 심했다. 노부가 맹세컨대 너는 앞으로 십 년 안에 천하제일의 고수가 될 것이다.” “예엣? 그…… 그 말씀이 정녕 사실입니까?” “노부에겐 천하제일이라 자부할 만한 무공이 있고, 네게는 보기 드문 재질이 있으니 이 말이 어찌 공언(空言)으로 끝나겠느냐? 노부는 기필코 너를 천하제일고수로 키워 주겠 다.” 사검평은 그 자리에 무릎 꿇고 구배지례(九拜之禮)를 올리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소생은 분골쇄신하여 사부님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괴인은 잔잔한 미소로 사검평을 바라보다가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이제 노부의 거처로 가자꾸나.” 괴인이 한 손에 사검평을 잡은 채 발을 구르니 그들의 모습은 곧 멀어져 갔다. 이제 참상의 자리에는 거대한 석총만이 외롭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사검평이 장발괴인과 사라진 지 반 각이 지났을 때였다. 한 줄기 인영이 표연히 석총 앞에 내려섰다. 그는 바로 사검평에게 주천금단을 복용시켰던 신비의 중년인, 사마등이었다. 장중으로 내려서기 바쁘게 사방을 휘둘러보던 그의 시선이 갓 만들어진 석총과 그 앞에 우 뚝 세워져 있는 비석에 강렬하게 꽂혔다. 그는 황급히 비석으로 다가가 돌 위에 새겨진 비문을 손으로 더듬으며 자세히 살폈다. 한동안 그러고 있던 사마등의 입에서 침중한 음성이 흘러나왔 “염라천존의 작품이 틀림없군.” 그는 의구심이 가득 담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알 수 없는 일이로군. 이 부근에서 울려 나왔던 그 광소성은 분명 염라천존 이원패의 목 소리가 분명했다. 한데, 그의 모습은 왜 보이지 않는 것일까? 이미 약속한 시간이 지났는데 이런 곳에 석총만 남겨 두고 사라지다니…… 백년 전의 혈원을 두고 그대로 물러설 위인은 결단 코 아닌데……”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던 사마등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크게 낭패한 표정을 지 었다. “노부가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던가…… 얼마 전 바로 이 부근 숲속에서 노부가 구했던 아이를 염라천존, 그 흉심막측한 늙은이가 보았다면 어찌 탐욕에 광분하지 않겠는 가!” 그는 생각하기조차 두렵다는 듯 전신을 한차례 부르르 떨었다. “아아…… 천하를 구할 인재가 오히려 혼세마왕(混世魔王)의 품 안에 들어갔으니 대체 이 일을 어찌하랴! 더욱이 그 아이는 노부가 심혈을 기울여 연단했던 주천금단까지 복용하였으니, 앞으로 그 아이가 염라천존의 절세마공까지 이어받는다면 천하의 그 누가 감히 그 아이를 대적한단 말인 가!” 후회가 아무리 빨라도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는 법. 사마등은 후회막급한 표정으로 한 숨을 토해 냈다. “휴우…… 이것이 정녕 하늘의 뜻이라면 천하 창생(蒼生)이 너무도 불쌍하지 않은가! 이번 일만 잘 마무리되면 멀리 남해(南海)로 떠나 영원히 속세를 등지려 하였는데…… 하늘 이 허락하지 않으시니 할 수 없는 일이로군. 노부가 뿌린 씨앗은 노부 스스로 거두는 수밖 에……” 그는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어디론가 표연히 사라져 갔다. 인적 끊긴 장군산의 이름없는 계곡에는 오직 기괴로운 적막만이 감돌 뿐이었다. * * * 십만대산(十萬大山). 광동(廣東), 운남(雲南), 이 양성(兩省) 사이에 걸쳐 수백 리 준령을 자랑하는 대산악이었다. 광활한 대지를 줄달음치다가 용틀임하듯 불쑥불쑥 치솟은 수백의 고봉(高峯). 그 거침없이 솟은 웅장한 산세가 실로 야수(野獸)와 같은 사나움을 지녔다. 산세가 웅후하니 삼림(森林) 또한 울창한지라, 인적의 범접을 허용치 않고 오늘도 고스란 히 태고(太古)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었다. 수백 험산고봉 중의 하나인 반석봉(盤石峯)은 천지창조의 신(神) 반고(盤古)가 하늘을 받 들고 서 있는 모습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봉우리 전체가 온통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이 석봉(石峯)은 까마득히 깎아지른 듯 치솟 은 단애(斷崖)와 날카로운 암면(岩面)으로, 명실상부 세외(世外)의 절지(絶地)였다. 뿐만 아니라 산봉의 주위는 온통 장독( 毒)을 내뿜는 흑삼림(黑森林)으로 둘러싸여 인간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었다. 빛과 그늘이 엇갈리는 여명의 시작. 부드러운 비단처럼 뿌우연 새벽 안개가 사위를 자욱이 뒤덮고 있었다. 안개 사이로 오래된, 옛날 태고적에 자연히 생성된 천연의 동굴 하나가 마치 괴물처럼 입 을 벌리고 있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이곳은 반석봉 중턱 동녘 부근. 그 동굴 입구에 지금 한 소년이 앉아 운기행공(運氣行功) 중이었다. 그는 석상인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여명의 빛은 점점 밝아 오고 어둠은 장막처럼 걷혀져 갔다. 마침내 커다란 해가 불쑥 솟아 소년의 얼굴을 맑게 비추었다. 밝은 햇살에 드러나는 절세의 미소년(美少年), 그는 다름 아닌 사검평이었다. 염라천존을 따라 이곳 십만대산의 절봉에서 기거하기 시작한 지 어느덧 삼 년. 그 역시 하늘의 뜻이었는가는 모르되 우연히 복용하였던 주천금단의 신효로 인해, 아직 십오 세의 소년인 그는 십칠팔 세의 성숙한 청년의 모습으로 변모해 있었다. 이윽고 태양이 산정으로 불끈 솟아오르자 사검평은 꽃잎처럼 붉은 입술을 가볍게 벌리며 동시에 두 손을 한껏 뻗쳤다. 그러자 이 무슨 신비의 현상인가! 그의 얼굴 전체가 순식간에 마치 달아오르는 쇳덩이인 양 붉디붉게 변하며 이윽고는 몸 전 체마저 눈부신 홍광에 휩싸이는 것이 아닌가! 다음 순간, 그의 몸은 한 점 백운(白雲)처럼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이어서 그는 가부좌를 튼 채 십여 장을 단숨에 날며 두 손을 번개처럼 휘둘렀다. 순간, 그의 손으로부터 찬란한 홍광이 연거푸 폭사되었다. 슉! 슉! 예리한 파공음이 실같이 흐르던 아침 안개를 휘감으며 쾌속히 뻗어 나갔다. 팍! 파팍! 팍! 굉음과 함께 수십 장 거리의 맞은편 석벽에 윤곽도 선명한 열세 개의 시뻘건 장인(掌印)이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장인의 주변은 마치 용암이 흐르듯 녹아 내렸던 흔적이 역력했 순식간에 연이어 십삼 장이나 발출했던 사검평은 어느 사이엔가 허공을 가로질러 처음 앉 았던 암동 입구에 태연히 앉아 있었 느닷없이 광소성이 터져 나온 것은 그때였다. “으하하! 적양신공(赤陽紳功)과 불영환인십삼장(佛影幻印十三掌)을 벌써 사부에 못지않게 성취해 내다니, 정말 장하구나!” 사검평의 준미한 얼굴에 햇살처럼 환한 기쁨의 빛이 떠올랐다. “사부님!” 그는 반색하여 외치며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느 사이에 나타났는지 염라천존 이원패가 긴 머리칼을 휘날리며 우뚝 서 있었다. 그는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는 어투로 말했다. “네가 이 정도의 성취를 얻으려면 능히 십 년은 걸려야 하리라 예상했었다. 한데 너의 뛰 어난 오성(悟性)과 체내에 흐르는 신비한 진력 덕에 불과 삼 년 만에 이 놀라운 성취를 이루었구나!” “모두가 사부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염라천존은 정색하며 말했다. “평아야, 지금 네 일신에 지닌 무공만 해도 천하에서 감히 대적할 자가 몇 명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이 사부는 네게서 청출어람(靑出於藍)의 기쁨을 맛보고 싶을 뿐이다.” 사검평은 그 말에 새삼 다짐하듯 공손히 고개 숙였다. 염라천존은 대견한 듯 정망이 번뜩이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이어 말했다. “사부는 평생 단 일 초의 패도수법(覇道手法)만으로 일생에 적수를 만나지 못했었다.” 염라천존은 회상에 잠기는 듯 아련한 표정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그 필승의 수법으로 인해 노부는 염라천존이라는 명호를 얻게 되었지…… 그것 은 마음대로 펼칠 수는 있으나 거둘 수는 없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살초(殺招)였기 때문이다.” 사검평은 만면 가득 경이의 표정인 채로 귀를 기울였다. 그는 지난 삼 년래, 사부가 그 자신의 과거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처음으로 듣는 것이다. 억누를 수 없는 충동과 강력한 호기심이 그의 가슴속에서 들끓었다. 염라천존이 사검평의 내심을 알겠다는 듯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네가 마침내 신공을 성취하였으니 이제 말해 줄 때가 된 것 같구나.” 찬란한 태양빛 아래에서 패도적 마두 염라천존의 음성은 장강의 탁류처럼 도도히 이어지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사문내력에 관한 것이니 잘 들어 두도록 하여라.” 실로 먼나먼 과거, 백년도 더 전(前)의 일이었다. 멀리 만리장성(萬里長城)이 끝도 없이 펼쳐져 꿈틀대는 맹룡의 웅자인 듯 지평선까지 휘감 은 곳. 그곳은 바로 감숙성(甘肅省) 북방(北方)에 위치한 대초원 지대였다. 대체 끝이 어디인가! 숨막히도록 광활한 초원 위에 수천 마리의 양떼들이 흩어져 여기저기에서 풀을 뜯고 있는 이곳은 중원(中原)의 일부이되 그 주민들은 결코 완전한 중원인(中原人)이라 할 수 없었다. 새외 이족(異族)인 달단족(達但族)이 주민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염라천존 이원패는 바로 그곳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태어날 때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으니, 그는 한 순간 정염의 불길이 잉태 한 사생아였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한족(漢族)의 장군(將軍)으로 서로천자군(西路天子軍)의 총병(總兵)인 이양위 (李良偉)였다. 서역 정벌을 위해 행군해 가던 중 이곳을 지나게 된 그는 원주민 족장(族長)의 딸과 일순간 불꽃 같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이원패였던 것이다. 장군 이양위는 하룻밤의 정염만을 남겨 놓고 곧 머나먼 서역을 정벌키 위해 떠났다. 물론 빠른 시일 내에 족장의 딸을 데리러 오겠다는 약속은 남겨 두었지만…… 그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았다. 들리는 풍문으로 이양위는 서역 정벌에서 큰 공을 세운 덕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고 크게 출 세까지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족장의 딸을 부르지 않았고, 외지인과의 사랑으로 불륜의 씨앗을 잉태한 여인 은 실의에 잠겨 비탄으로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래도 그녀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기다렸다. 언젠가 그가 다시 돌아와 자신과 아들을 데리고 떠나 주리라 믿으며…… 그러나 몇 년의 세월이 덧없이 흐르자 비탄한 나머지 마음에 병이 들어 죽고 말았던 것이 다. 그녀가 죽자 불륜의 사생아를 돌봐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 소년 이원패. 이민족 간의 한 남녀 사이에 태어난 그는 정녕 천애고아로서 한낱 천덕꾸러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자신의 피가 흐르는지라 매정하게 내몰지 못하고 은밀히 그를 돌봐 주던 외조부 마 지상(馬志上)마저 죽자, 소년 이원패의 신세는 더욱 고달파졌다. 외조부의 뒤를 이어 족장에 오른 어머니의 이복오빠 마동조(馬同祖)의 핍박이 심해졌기 때 문이었다. 북경에 있는 아버지를 만난다면 이 회한의 세월도 끝나리라는 생각으로 중원행을 결심했 다. 그러나 마동조의 마수에 걸려 이루 말못할 고초만 겪어야 했 채찍으로 죽도록 얻어맞고 서럽게 울고 있을 때 그의 앞에 나타난 사람이 있었다. 이원패를 따뜻하게 대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던 그는 다름 아닌 마동조의 아들 마도해(馬 道海)였다. 그는 본시 이원패와 동갑으로 부족원의 눈을 피해 은밀한 우정을 나누는 사이였다. 마도해는 채찍에 맞은 이원패의 상처에 말없이 약을 발라 준 뒤 밖으로 끌고 나왔다. 바깥에는 마도해가 부친에게 생일 선물로 받았던 애마(愛馬)가 있었다. 개처럼 사느니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도 다시 도망치라는 것이었다. 이원패는 마도해의 선물에 더할 나위 없이 고마워했다. 눈물로써 작별하고 그가 준 애마와 더불어 동쪽으로 필사의 탈출을 감행했다. 대초원은 자꾸만 멀어져 갔다. 말도둑은 극형에 처하는 것이 달단족의 풍습이었다. 비록 그가 지금 타고 질주하는 말은 마도해로부터 선물받은 것이라 하나 어찌 성난 마동조 가 이를 믿어 주겠는가? 마동조는 자신의 탈출을 알게 되는 즉시 필사적으로 추격해 올 것이 분명했다. 일단 추격이 시작되면 이 부근 일대에 대해서 손바닥처럼 잘 아는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 었다. 이원패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탈출이 발각되기 전에 오직 한 발짝이라도 멀리 가 는 것뿐이었다. 그는 정녕 미친 듯이 말을 몰았다. 그러나 방향을 잘못 잡아 생사의 기로에서 헤매는 신세가 되었으니…… 중원으로의 지름길, 백토파(白土坡)로 가려던 것이 그만 엉뚱하게도 아랑곡(餓狼谷)으로 접 어들고 말았던 것이다. 아랑곡! 이름 그대로 굶주림에 광란하는 이리들의 소굴이 아닌가? 대초원의 유목민들조차 지옥처럼 두려워하는 사신(死神)의 계곡이었다. 이원패 역시 아랑곡 깊숙이 들어가서야 이곳이 죽음의 계곡임을 깨달았다. 혼비백산 경악하여 급급히 말을 휘몰아 도망치려 했으나 이미 수천 마리가 넘는 이리떼에 게 발각된 후였다. 전력으로 질주하는 것만이 유일한 살길이라고 생각한 이원패는 미친 듯 말을 몰았다. 그렇게 무작정 달리기를 얼마였을까? 이리떼에게 잡혀 먹히기 직전이었다. 히히힝! 갑작스러운 말의 몸부림과 함께 이원패는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져 내렸다. 지반이 갈라지며 생긴 깊은 협곡을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말을 달렸던 것이다. 휘르릉`……` 이원패는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아득히 정신을 잃었다. 마치 억겁의 세월이 흐른 듯 대체 얼마나 지났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원패는 마치 전신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 문득 정신을 차렸다. 천지가 뒤바뀐 듯 혼란스럽기만 한 그의 의식 사이로 갑자기 한 줄기 괴소가 날아들었다. “흐흐흐…… 이제야 정신이 드느냐?” 이원패가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나니 그의 목전에 웬 봉두난발의 괴인 하나가 흡사 유 령인 듯 서 있지 않는가! 제멋대로 헝클어진 머리와 수염이 온몸을 뒤덮고 있어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것은 물론, 도대체 사람인지 짐승인지조차 분간 못 할 몰골이었다. 그래도 이원패가 경악중에 자세히 보니 괴인의 전신을 덮은 머리와 수염 사이로 은은히 회 색 법의(法衣)의 자태가 보였다. 더구나 늘어진 백발 사이로 눈부시게 빛나는 두 줄기 안광에는 무한한 위력이 깃들여 있었 으니, 그는 필시 보통 괴인이 아니었 이원패는 속마음을 꿰뚫는 그 안광에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 속마음을 간파한 듯 괴인은 나지막이 말했다. “노납은 너를 해치려는 것이 아니니 두려워 말거라!” 동시에 그 괴인의 손길이 뻗쳐 왔다. “흑!” 이원패는 두려워 숨을 들이켰다. 하나 이미 괴인의 손길은 이원패의 전신 곳곳을 누비는 중이었 괴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이원패는 마치 불덩이가 온몸을 누비듯 무서운 고통에 몸부림쳐 야 했다. 그러나 일단 손길이 스치고 지나가면 통증은 씻은듯이 사라지고 허공에라도 날아오를 만큼 상쾌해지는 것이었다. 이윽고 괴인의 손길이 일주천한 후 이원패는 전에 없이 상쾌한 기분이 되어 벌떡 일어나 앉 았다. 괴인은 몹시 힘든 표정으로 운기조식 중이었다. 이원패는 감동과 경이에 찬 눈빛으로 말없이 괴인을 지켜보았 얼마 후, 괴인의 머리 위에서 한 가닥 기류가 마치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기 시작 했다. 피어오르는 신비 기류는 이윽고 코를 통하여 그의 체내로 다시 흡입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삼화취정(三花聚頂), 오기조원(五氣朝元)의 현상으로 일신 무공의 경지가 신화경에 이른 고인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이었으나, 아직 어린 소년에 불과했던 이원패로서는 이처럼 오묘 신비한 현상에 대해 알 리 없었다. 단지 너무도 신기하여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더 흐르자 괴승은 운기조식을 끝내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후유…… 육십 년 만에야 사람의 그림자를 보게 되다니…… 노승의 목숨도 며칠 남지 않 았기에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제 와서 하늘이 너 같은 인재를 보내 주실 줄이야 누가 알았겠느냐?” 무슨 말이지 혼자서 중얼거린 후 망연히 서편 하늘을 바라보았 “연화존자(蓮花尊子)시여! 이제야 당신께서 내리신 사명을 완수할 서광이 비치나이다!” 이어서 그는 이원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이야…… 네가 여기까지 온 것 또한 크나큰 인연이니 노납은 네게 천하 무상의 절예를 전수하여 주겠다.” “천하 무상(無上)의 절예……” 이원패는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조차 얼른 깨닫지 못했다. 그러자 괴승은 미처 그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형형한 안광을 뿜으며 다시 이렇게 물 었다. “그러나…… 노납이 네게 천하 무상의 절예를 전수해 주는 데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 이원패는 다만 어리벙벙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괴승은 굳이 이원패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어떠냐? 만일 네게 무상의 비학을 전수하여 준다면 노납을 위해 한 가지 일을 기필코 이루어 주겠다고 맹세할 수 있겠느냐?” 이원패는 여전히 괴승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긍정도 부정도 못 한 채 다만 넋나간 아이처럼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하하하, 노납이 이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하하하, 도대체 네가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혼자서만 지껄였으니……” 혼자 실소를 거듭하던 괴승은 정색하며 말했다. “노납을 따라오도록 하거라!” 말을 마치자마자 괴승의 신형은 허공으로 떠올랐고 순식간에 십여 장을 날아 끝없이 솟아 있는 절벽에 이르렀다. 한데 이때 그의 모습은 실로 신비의 극치에 이를 정도였으니…… 놀랍게도 앉은 자세 그대로 떠올라 마치 한 줄기 섬전인 듯 쏘아져 날아갔던 것이다. 이원패는 너무도 경악하여 그저 멍하니 넋을 잃고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주위를 돌아보니…… 한 마리 말이 죽어 있고 그 곁에 수십 마리의 이리떼가 죽은 채 널려 있었다. 죽은 말의 모습을 보니 이원패는 새삼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워졌다. 스스로의 살을 꼬집어 보려는데 괴승이 호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아이야! 무엇을 의심하는 거냐? 너는 분명 살아 있는 몸이니 구태여 네 자신 의 살을 꼬집어 볼 것도 없다!” 그래도 이원패는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괴승이 다시 말했다. “하하하…… 이 녀석아, 그래도 믿지 못하겠느냐? 그렇다면 노납이 말해 주마. 너는 이곳 으로 떨어졌을 때 마침 말 위에 떨어져, 실로 천행으로 분골쇄신의 참상을 면할 수 있었느니라…… 만일 그렇 지 않았다면 추호의 무공도 익히지 않은 몸으로 어찌 백여 장 위에서 떨어지고도 이처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겠느냐?” 이원패는 그 말에 놀라 급히 허공을 바라보았다. 과연, 까마득한 만장절벽이 둘러쳐진 사이로 단지 손바닥만한 하늘이 보일 뿐이었다. 이원패는 새삼 공포에 질려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러자 괴승이 부드럽게 위로했다. “아이야, 너무 놀라지는 말거라. 이곳은 구천지옥도 아무 곳도 아니다. 단지 땅이 균열되어 생긴 하나의 거대한 단층(斷層)일 뿐…… 하나, 너는 이곳에 떨어짐으로써 굶주린 이리떼의 먹이를 면할 수 있었고 또 노납을 만났으니, 이 어찌 하늘이 정하신 운명이라 하지 않으랴!” 이원패는 여전히 어리벙벙한 표정이었다. 그때였다. “얏!” 괴승이 갑자기 일성 기합과 함께 두 손을 내뻗었다. 순간, 한 줄기 홍광이 섬전인 듯 발출되어 곧장 날아갔다. 쿠웅! 묵직한 진동음이 울렸다 싶은 순간, 괴승의 일장에 가격당한 거대한 괴석(怪石)이 순식간 에 한줌 가루로 화해 버리는 것이었. ‘이, 이럴 수가……!’ 어린 소년의 눈에 이는 정녕 경천동지할 대변고였다. 너무도 놀란 나머지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자니 괴승이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아이야, 너는 이런 재간을 배우고 싶지 않느냐?” 순간, 이원패의 눈앞에 대초원에서 학대받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동시에 이런 재간만 있다면 자신을 학대하던 마동조에게 앙갚음도 할 수 있으리라 여겨졌 다. 희열이 전류처럼 온몸을 휘돌았다. 이원패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사부님! 제자의 절을 받아 주십시오!” 괴승이 인자하게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야! 너는 섣불리 결정하지 말아라. 네가 노납을 사부로 모시는 그 순간부터 상상할 수도 없는 고행을 각오해야 하는데, 그래도 괜찮겠느냐?” 이원패는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비록 이 몸이 가루가 된다 해도 기꺼이 사부님을 받들겠나이다!” 괴승이 빙그레 웃었다. “역시 너는 남다른 의기를 지닌 소년이구나…… 오냐, 네가 굳은 신념만 가진다면 무엇 이 어렵겠느냐?” 第 三 章 괴승(怪僧) 망아(妄我) 1 괴승은 정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아까 네게 말했던 조건을 제시하겠다.” “말씀하십시오.” “네게 제시하는 조건은 노납의 과거와 관련이 있으니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도록 하여라.” 괴승(怪僧)의 입에서 자신의 과거에 관한 말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본시 중원인(中原人)으로 소림사 출신이었다. 그의 법명(法名)은 망아(妄我). 하나 이 이름은 후일 기연을 얻어 부르게 된 것이며 본시 사문(沙門)의 법호(法號)로는 백 우라 불렸다. 백우, 그는 타고난 재주가 출중하여 구름과도 같은 소림제자들 중에서도 군계일학과 같은 면모를 보이더니 급기야 소림제일의 청년고수가 되었다. 그는 나이 이십오 세에 처음으로 강호에 출도하였다. 천하를 주유하며 수행(修行)을 쌓기 삼 년간. 본시 피 끓는 의협심에 출중한 재주를 지닌 그였던지라 악을 보고는 결코 참지 못하였다. 하여 그의 손 아래 징벌을 받아 죽어 간 강호 흉마(兇魔)의 수효가 무려 수백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불굴의 의협심이 오히려 그를 사문에서 파문당하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 니…… 어느 날, 소림제일의 청년고수 백우는 어느 부녀자가 강간 끝에 살해된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부녀자는 이미 죽어 있었고 현장에는 한 청년이 있었는데, 그는 백우를 보자 기절초풍하며 놀라는 것이었다. 백우는 그 청년을 범인으로 속단하여 그 자리에서 단 일 검으로 베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 청년은 무당파의 속가제자(俗家第子)로 범인이 아니었다. 결국 이 사실은 나중에야 가서 밝혀지고, 백우는 끝내 진범을 잡아 죽였지만 억울한 생명 을 죽인 죄는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었다. 마침내 소림사에서는 백우를 소환하여 그 죄를 묻게 되었다. 결과, 백우는 면벽 이십 년의 엄벌에 처해지게 되었다. 햇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암흑의 공간에서 외부와 일체 단절된 채 오직 벽만을 바라봐야 하 는 고행(苦行)을 무려 이십 년 동안 계속해야 한다니…… 한창 끓어오르는 혈기의 백우로서는 면벽 이십 년은 정녕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백우는 차라리 탈출하리라 결심했다. 본시 뛰어난 무공의 소유자였으니 스스로 마음먹은 이상 탈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 었다. 그는 탈출에 성공하여 유유히 강호로 잠적하였다. 벌을 명받은 제자가 야반에 은밀히 도주한 사건! 이는 정녕 소림사 천년의 역사 중에서 일찍이 그 유례조차 없었던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소림사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즉시 백우를 사문에서 영원히 파문(波門)하고, 모든 제자를 동원하여 백우를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백우를 잡을 수 없었다. 그는 추적의 손길을 피해 서역(西域)으로 숨어 들었던 것이다. 서역은 본시 불가의 요람지였다. 도처에 산재한 성지(聖地)를 순례하다 보니 잊고 있었던 본연의 불심(佛心)이 되살아난 백 우는 우연히 만나게 된 서역제일의 성자(聖子), 연화존자(蓮花尊子)로부터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백우는 연화존자를 만난 이래 법명마저 망아라고 새로 받고 그 동안의 죄과를 깊이 뉘우치 게 되었다. 그러나 지난날의 죄과는 쉽사리 잊혀지지 않고 그를 끝없는 번민에 사로잡히게 하였다. 이를 보다못한 연화존자는 그에게 한 가지 사명을 주어 속세로 내보내게 되었다. 백만공덕(百萬功德)을 쌓아 악업(惡業)에서 헤어나라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사명이었다. 이에 망아는 십 년간 정들었던 연화존자의 곁을 떠나 다시 중원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십 년간 불심을 닦은 뒤 중원으로 돌아오게 된 망아는 지난날의 악업을 씻기 위해 천하를 주유하며 공덕을 쌓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감숙성 부근을 지날 때였다. 그는 근방 수백 리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절세마두 흡혈도후(吸血刀侯)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 흉마는 단지 음식 맛이 나쁘다는 이유로 한 음식점 안에 있던 십여 명의 사람들을 도륙 하고 나오던 중이었다. 망아는 그의 흉성으로 인해 마을 주민 전체가 화를 당할까 두려워 그를 백골애(白骨崖)로 유인해 냈다. 둘은 곧 접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의외로 승패는 빨리 나고 말았다. 망아가 자신의 한 쪽 다리를 내어 주며 흡혈도후의 사혈 세 곳을 찍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망아는 마지막에 힘을 거두어 흡혈도후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도록 하였다. 비록 흉명이 자자한 흡혈도후였지만, 자신의 패배를 모를 만치 파렴치한 성격은 아니었다. 그는 마도를 던진 후 자신을 죽이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망아는 그를 죽이지 않았다. 불가에 귀의시키고자 온갖 노력으로 설득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수십 년에 걸쳐 흉폭한 마성(魔性)에 물들었던 흡혈도후가 어찌 순순히 불리(佛理) 를 깨닫겠는가! 그는 설득하는 망아를 오히려 조롱하듯 일성 광소하며 말했다. “만일 그대가 나의 마도(魔刀)로써 내리침을 세 차례만 견딜 수 있다면 내 능히 그대의 말대로 불도에 귀의(歸依)하리라!” 수천의 목숨을 앗아 갔던 무자비한 마도. 세 차례는 고사하고 어찌 단 한 차례인들 스스로 맞겠노라 하겠는가! 그러나 망아는 쾌히 수락하고 합장과 함께 조용히 눈을 감고 잠시 후 내리쳐질 칼날을 기 다렸다. 아수라일망정 이 높은 뜻에 감복하련만…… 흡혈도후, 그는 정녕 냉혈한이었다. 한마디 냉혹한 웃음을 날리는 순간, 칼날은 양광(陽光) 아래 섬전보다 더 푸르게 작렬하 니…… 자욱한 핏물이 천공을 물들이며 하나밖에 남지 않았던 망아의 다리가 베어졌다. 망아는 썩은 고목처럼 쓰러졌다. 그러나 그는 곧 쓰러진 몸을 일으켰다. 몸은 핏물로 뒤범벅이 되었건만 낭랑한 불호를 외는 그의 얼굴에는 추호의 동요도 없었다. 일세에 걸쳐 그 흉명도 드높았던 흡혈도후였지만 생불(生佛)과도 같은 망아의 모습 앞에서 는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곧 발작하듯 광분하며 또다시 도를 휘둘렀다. “미친 작자야! 네 정녕 목숨조차 돌보지 않으려느냐? 믿을 수 없다. 나 흡혈도후는 결코 불도 따위에는 귀의치 않으리라!” 이번에는 망아의 왼쪽 귀가 땅위에 나뒹굴었다. 망아는 그래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잘려 나간 두 다리에서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피의 양이 너무 많았던 탓에 점점 흐릿 해지는 의식은 어쩔 수 없었다. 흡혈도후의 마지막 일도를 기다리던 망아는 그만 정신이 아득해지고 말았다. 어디선가 아련히 굶주린 야수들의 울부짖음이 들리는 듯했다. 그리고 그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나 긴 시간이 지났을까? 망아는 서서히 의식을 회복하고는 눈을 떴다. 전신을 피로 물들인 흡혈도후가 우두커니 서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전신은 걸레처럼 찢기고 할퀸 상처투성이였다. 그 상처들에서 흘러내린 피가 그의 발치에 엉겨 붙어 있었다. 씨익! 그는 웃고 있었다. 생애 단 한 번도 웃지 않았던 절세의 마두가 망아에게 멋쩍은 미소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망아 역시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하며 물었다. “여기는 어디요?” 흡혈도후가 어색하게 대답했다. “백골애의 저면(底面)이오. 당신의 피 냄새를 맡고 굶주린 이리떼가 몰려왔었소. 놈들을 물리치다가 나도 중한 부상을 입었소. 이 상태로는 당신을 더 이상 보호할 수 없을 것 같아 이곳으로 피신해 왔소.” 천하의 마두 흡혈도후가 누군가를 보호해 주었다는 사실은 이미 심성이 바뀌었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망아는 잔잔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흡혈도후는 그의 시선을 외면하며 한마디 툭 던졌다. “나처럼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자도 불가에 귀의할 수 있는 길이 있겠소?” 비록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하는 것이었으나 망아는 커다란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드디어 절세마두를 제도(濟度)하는 순간이었으니…… “아미타불! 석가세존의 대자대비하심은 하찮은 돌 하나, 풀 한 포기에도 미치거늘 어찌 시주 같은 분을 받아들이지 않으시겠소?” 그의 말이 끝나자 흡혈도후는 돌연 앙천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하!” 그 한 번의 웃음은 흡혈도후가 가지고 있던 모든 집착을 털어 버리는 것이었다. 이윽고 웃음을 그친 흡혈도후는 품에서 한 장의 낡은 비급을 꺼내 망아에게 주었다. 낡은 양피지의 고색 창연한 비급이었는데, 그 표지에는 ‘무적신초(無敵神招)’라고 쓰여 있 었다. 무려 일(一) 갑자(甲子)에 걸쳐 그가 배우고 익혔던 온갖 무학의 정화가 기재된 비급이었다. “비록 생명보다 더 소중히 여겼던 것이나, 천하에는 그보다 더욱 소중한 것이 있음을 오 늘에야 깨달았소. 예리한 칼날의 푸르른 섬광 아래에서도 대사가 초연할 수 있게 해준 불법에 대해 알고 싶소. 대사…… 노부는 내외상이 너무 심하여 잠시 후면 목숨이 다할 것이오. 대 사는 부디 이 꺼져 가는 늙은 목숨에게 마지막으로 불문의 선리(禪理)를 설법해 주시오!” 간절히 말하는 흡혈도후의 얼굴에는 두 줄기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비록 평생에 걸쳐 피와 죽음과 죄업 속에서 살았으나 최후의 순간에 이르러 이토록 애절히 불심을 갈구하니, 과연 자신의 정성이 헛되지 않았음에 망아는 일말의 희열을 느꼈다. 망아는 심혼을 다하여 흡혈도후에게 오묘 무변한 불리를 설법했다. 흡혈도후는 넋을 잃고 그의 말에 귀기울였다. 설법하는 망아도, 듣는 흡혈도후도 일체 동심이 되어 진리의 희열에 돌입해 갔다. 망아의 설법이 옥류처럼 낭랑히 이어지는 와중에서 흡혈도후는 점차로 얼굴에 평온한 빛을 띠더니 마침내 조용히 절명하고 말았. 그는 비록 죽었으나 설법의 영원한 진리 속에서 평안히 죽어 갔다. 망아는 드디어 자신이 그를 제도하였음에 만족하고 공손히 합장하여 그의 명복을 빌었다. 그러나…… 비록 십만공덕과 버금가는 공덕을 쌓는 데는 성공했지만 두 다리를 잃은 그로서는 도저히 빠져 나갈 수 없는 백골애에 빠져 있는 상태였으니…… 마치 함정과도 같이 사방이 엄밀하게 막힌 데다, 지상(地上)까지는 그 높이가 무려 백여 장 에 달하였다. 다행인 것은 이곳에 조그만 샘이 있고, 그 주변에 능히 음식물 대신으로 먹을 수 있는 풀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후 육십 년이란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망아는 소림사의 반야신공(般若神功)과 밀종(密 宗)의 내가기공(內家氣功)을 혼합하여 대승반야바라신공(大乘般若波羅神功)을 창안해 내기에 이르렀다. 또한 자신이 하체를 쓰지 못함을 감안하여 하나의 특이한 경공신법(輕功身法)을 창안해 내 었으니, 이름하여 연대비공(連臺飛功)이었다. 앉은 채 허공을 부유하여 수십 장 거리까지 날아갈 수 있는 경공의 극치! 연대비공이야말로 이원패가 보고서 경악하여 넋을 잃었던 그 신법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하늘의 섭리는 너무도 오묘하고 인연의 얽히고설킴 또한 무궁무진하매, 그에게 이 원패라는 전인을 보내 주신 것이었다. 괴승 망아는 회고에서 깨어나 이원패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의 수명이 이제 불과 며칠밖에 남지 않았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입가에 한 줄기 신비로운 미소를 떠올렸다. “육십 년이라는 긴 기다림 끝에 너를 만났건만 노납은 앞으로 며칠 사이에 열반에 입적하 여 성불(成佛)케 될 것 같구나.” 이원패는 크게 당황했다. “그렇다면 저는 어찌……” 괴승 망아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인 채로 말하였다. “염려하지 말아라.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네게 노납의 일신 무공을 전수하기엔 결코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도 네게 당부하려는 말은……” 그는 정색하며 말을 이었다. “후일 강호에 나가거든 일신에 지닌 절학을 결코 악용하지 말아야 하며, 오직 천하의 마두를 제도하는 데 써야 한다는 것이다.” “각골명심(刻骨銘心)하겠습니다.” “좋다. 그러면 이제 사제의 예를 갖추도록 하라.” 이원패는 바닥에 꿇어 엎드려 아홉 번 이마를 찧으며 절을 올렸다. 사제지례가 끝나자 망아는 엄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 사부가 네게 전수해 줄 무공은 바로 대승반야바라신공과 흡혈도후가 유품으로 남겼던 비급, 단 두 가지뿐이다. 하지만 너는 결코 경시하지 마라. 비록 단 두 가지의 절학일망정 이로써 너는 충분히 강호를 독보할 수 있을 것이다. 노납은 이미 오래 전에 소림에서 파문당했으니 소림의 절예는 네게 전수해 줄 수 없구나. 그러나 너는 명심하라. 후일 강호에 나가더라도 소림과의 분쟁이 생긴다면 너는 이 사부와 소림사와의 인연을 생각하여 결코 모질게 해서는 안 된다.” “제자, 사부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이로부터 며칠이 지나는 동안 괴승 망아는 육십 년에 걸쳐 연성했던 필생의 무공 정화의 구결을 남김없이 이원패에게 전수시켰다. 구결을 외우는 데만도 꼬박 사흘이 걸렸다. 그리고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망아는 이원패에게 대승반야바라신공의 구결대로 진기를 운용하라 이른 후 갑자기 그의 명 문혈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순간, 뜨거운 열기가 이원패의 체내로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왔 생사현관이 타통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원패는 충격을 이기지 못해 혼절하고 말았다. 얼마 동안인가…… 혼수 상태에서 헤매다가 이윽고 제정신이 들었을 때, 사부는 이미 싸 늘한 시신으로 변해 있었다. 괴승 망아는 불문의 독문비법으로 자신의 모든 진기를 제자에게 주입시킨 후, 진력이 고갈 되어 최후를 마치고 만 것이었다. 이원패가 비록 나이 어리다 하나 어찌 이 사정을 짐작치 못했겠는가! 그는 하늘보다 높은 사부의 은혜에 새삼 뜨거운 눈물을 쏟았 그러나 언제까지고 슬퍼할 수만은 없는 일. 그는 우선 사부 망아의 시신을 육십 년 전 흡혈 도후가 묻혔던 바로 그 옆자리에 묻었다. 이로부터 일 년에 걸쳐 이원패는 이곳 함정과도 같은 단층 속에서 외로운 나날을 보내며 대승반야바라신공과 무적신초를 연성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그곳에는 흡혈도후가 남겼던 한 자루 보도가 있었기에 비급 속의 도법(刀法)을 연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적신초의 최고 경지는 전혀 터득할 수 없었다. 이 일로 하여 부심(腐心)하던 이원패는 한 가지 결론에 달했다. 비급에 기재된 최후의 경지를 터득키 위해서는 강호고수들과의 비무가 필수적이란 사실 을…… 이원패는 지난 일 년 동안 외롭게 지내 왔던 백골애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무적신초의 비급 과 흡혈마도를 지닌 채 강호로 향했 백 장 높이의 절벽도 사부 망아로부터 전수받은 연대비공 신법을 펼치니 초옥의 울타리를 넘듯 간단하였다. 일 년, 결코 길지 않은 세월이었으나 이원패는 이미 달단족의 부락을 탈출했던 때의 그가 아니었다. 명실상부, 일신에 절세기학을 지닌 소년기협(少年奇俠)이었다. 그는 중원을 향하여 질풍처럼 달렸다. 아버지, 꿈에도 그리던 아버지를 불러 보기 위해 중원의 북경으로 향하는 이원패의 가슴은 온갖 상상으로 부풀어올랐다. 그러나 막상 북경에 당도하니 환대는 고사하고 오직 모멸과 조소가 그에게 던져졌을 뿐이 었다. 이미 연로하여 은퇴한 그의 부친 이양위는 변방을 지나다 잠시 즐겼던 하룻밤 춘정(春情)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듯했다. 장성한 자식과 가복들 보기가 민망했는지 그는 이원패를 광인(狂人) 취급하며 가복들을 시 켜 내쫓게 하였다. 얼마나 오매불망 그리워하던 부친인가! 따뜻이 맞아 주길 바란 것은 아니지만 이렇듯 문전 박대당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이원패는 실로 뜻밖의 사태에 망연자실하였다. 수없는 매질이 가해졌어도 그저 개처럼 맞아 주었을 뿐이다. 그렇게 멍하게 당하고만 있는 그의 귓전에 누군가의 욕설이 들려 왔다. “북적(北狄) 오랑캐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행패냐? 네 어미가 누구와 붙어 놀아났는지는 몰라도 다른 데 가서 알아봐라, 이놈!” 오랑캐라는 말과 어미가 놀아났다는 말이 송곳이 되어 그의 심장을 후벼 팠다. 그는 머리 끝까지 치솟는 분노를 느꼈다. 그의 뇌리에 너무도 선명히 각인된 어머니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네 부친은…… 이양위 장군…… 너는…… 장군가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겨 야 한다…… 어머니는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도 아버지 이양위를 자랑스럽게 여겼었다. 한데, 부친은 변경의 차디찬 땅에서 외로이 죽어 가야 했던 어머니의 일 따위는 기억조차 않고 있었다니…… 그것도 모자라 그의 가복들은 자신을 오랑캐의 사생아로 취급하니 어찌 분노하지 않겠는 가! “이것이 중원의 법도요, 천륜이란 말인가!” 그의 분노가 폭발하는 순간 한 가닥 눈부신 섬광이 작렬했고, 이제까지 그를 개 패듯 하던 자들이 모조리 목 없는 시체로 화하였다. 이원패는 초원의 성난 사자처럼 부르짖었다. “이것으로 나와 아버지 간의 부자지연(父子之緣)은 영원히 끝났소. 저승에서 통곡하고 계실 내 어머니의 영령을 위한다면 피로써 이 썩은 집을 쓸어 버려야 마땅하나, 그래도 차마 천륜을 어길 수 없으니…… 한 가닥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시오.” 분노와 저주에 찬 사자후(獅子吼)를 토한 후 그는 질풍처럼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로부터 몇 달 후, 강호는 대살성(大殺星)의 출현으로 공포에 휩싸였다. 무슨 이유로 살겁을 자행하는지 몰라도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여지없이 목 없는 시체가 놓 여 있었다. 더구나 그 피해자들은 대부분 내로라 하는 강호의 고수와 대마두들뿐이었으니 그에 대한 소 문은 점점 증폭되어 갔다. ─`불세출의 살성이 나타나 강남북을 피로 물들인다! ─`그 희대의 살인마에게 당한 정사의 고수가 벌써 수천을 헤아린다! 그에 대한 과장된 소문이 끊이지 않더니 결국은 염라천존이란 무시무시한 별호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그의 광세절학을 흠모한 사마의 무리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해 종내에는 염라궁이란 거대 마도방파를 이루게 되었다. 이후 염라궁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천하인들은 희대의 살성에게 거대방파마저 생겼으니 범이 날개를 단 격이라며 매우 두려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염라궁이 하룻밤 새에 멸문당하고 염라천존은 모습을 감춰 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2 실로 파란만장했던 일련의 대서사시. 염라천존은 백년 전의 회상에서 깨어났다. 사검평 역시 일막의 꿈에서 깨어나듯 홀연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준미수려한 얼굴에 경이로운 기색을 가득 담은 채 물었 “그처럼 대단했던 염라궁의 일천여 고수들을 하룻밤 사이에 몰살시켰던 장본인이 대체 누구입니까?” 염라천존의 안색이 침중히 가라앉았다. “오직 하나의 고색 창연한 고금(古琴)으로 단 하룻밤 사이에 일천여 고수를 몰살시킨 흉 수는 사마등이란 자였다.” 새삼 백여 년 전 그날의 통한이 되살아나는 듯, 염라천존의 두 눈에서는 돌연 시뻘건 불길 이 이글거렸다. “어리석은 자…… 그는 자신이 천하의 모든 마두들을 한꺼번에 몰살시킴으로써 천하를 도 탄에서 구했다고 자처했을 것이나, 이는 정녕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할 뿐이다. 염라궁의 고수들이 비록 지난날에는 흉폭무비했던 마도 무리들에 틀림없었으나 죽기 전에 이미 노부의 자비세수대법(慈悲洗髓大法)에 의해 인성(人性)을 되찾고 마도(魔道)에서 정도(正道)로 돌아오던 중이었다…… 그러한 그들을 무참히 몰 살시키다니……!” 분노에 찬 염라천존의 말에 사검평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검(劍)이나 도(刀), 그 밖의 다른 병장기 라면 몰라도…… 겨우 낡아빠진 고금 하나로 염라궁 일천여 고수들을 한꺼번에 몰살시켰다 니……” 염라천존이 여전히 침중한 표정인 채 깊이 한숨을 쉬었다. “그가 그날 밤 구사했던 것은 천살멸음(天殺滅音)으로, 능히 십리 안의 모든 생명을 죽일 수 있는 가공할 위력의 음공이었다. 천살멸음은 특히나 심성이 흉폭한 자들에게 강한 위력 을 발휘하기 때문에 아직 마성이 가시지 않았던 염라궁 내의 마두들은 쉽사리 그 음공에 압도되었고, 결국 주화입마(走火入魔)의 상태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검평이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으로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물었다. “그때 사부님은 대체 무엇을 하고 계셨기에 그처럼 엄청난 일이 일어날 수 있도록 수수방 관하셨습니까?” 염라천존은 그 말에 땅이 꺼지도록 한숨쉬었다. “내 어찌 수수방관하였겠느냐? 사실 이 사부 역시 자칫했다면 천살멸음에 의해 영문도 모 른 채 이 세상을 하직할 뻔하였다. 그러나 천행으로, 사부가 익혔던 내가공부(內家功夫)는 불문의 내가정종심법(內家正宗心法)이었다. 하여 최후의 순간에 정력(定力)을 발휘하여 가까 스로 위기를 모면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 사부님은 어찌 그 흉살스러운 자를 내버려두었단 말씀입니까?” 염라천존의 두 눈에서 타오르던 불길은 더욱 새파란 광휘로 이글거렸다. “내 어찌 가만히 있었겠느냐? 비록 지옥에 떨어져서도 그 간과 심장을 씹지 않고서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불구대천의 원수를…… 간신히 주화입마의 고비에서 벗어난 나는 전신 공력을 끌어올려 천살멸음에 대 항하는 한편, 전력으로 소리나는 곳을 향해 치달렸다. 드디어 노부는 염라궁이 마주보이는 낙안애(落雁崖) 위에서 한 명의 중년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눈앞에 펼쳐 보이듯 분노와 증오 서린 음성으로 생생히 말하는 탓에 사검평은 아연 긴장하 기까지 하였다. 회상하는 듯한 염라천존의 말이 이어졌다. 태악산 낙안애! 높이 수백 장에 달하는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 위의 한 바위 위에 고금을 탄주(彈奏)하고 있는 한 사람의 중년서생이 있었다. 고금의 음률은 허공을 가르는 뇌성벽력을 압도하며 울려퍼지고 있었다. 염라천존이 도착하자 고금의 음률 또한 멈추었다. 중년서생은 담담히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귀하가 반드시 나를 찾으리라 믿고 이처럼 기다리던 터…… 과연 그대는 내가 연주한 천 살멸음에서 벗어나 이렇듯 여기까지 왔구려.” 증오와 혈한으로 인해 복수의 화신처럼 불타 오르고 있는 흑의청년, 염라천존은 성난 야수 처럼 부르짖었다. “대체 네놈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이처럼 하늘도 진노할 잔혹무도한 만행을 서슴지 않았단 말인가?” 그의 기세는 정녕 살기 등등하였으나 중년서생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날카로운 목 소리로 말했다. “염라천존, 귀하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비록 나지막한 음성이었으나 감히 범할 수 없는 위엄이 배어 있었다. 염라천존은 더욱 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닥쳐라! 네놈이 감히 내가 온갖 심혈을 기울였던 일생일대의 대업을 한낱 수포로 돌아가 게 하고서도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다니……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분노와 증오에 충만하여 아수라보다 흉살스런 모습으로 그는 서서히 중년인을 향해 다가 갔다. 한걸음…… 한걸음…… 그가 발을 옮길 때마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지는 분노의 살기가 낙안애 전체를 뒤덮었고, 이 윽고는 구천에까지 사무쳐 하늘마저 싸늘히 식는 듯했다. 그러나 중년인은 한 가닥 담담한 미소를 지은 채 한가로운 풍류객처럼 여유 만만한 모습이 었다. 여유 만만한 그의 모습에 염라천존은 더욱 살기가 치솟았다. 스르릉! 염라천존의 오른손에 흡혈마도(吸血魔刀)가 들려졌다. 그 전율하도록 붉고 예리한 도신(刀神)이 사신(死神)의 손길인 듯 무섭게 번뜩였다. 염라천존의 얼굴도 유례없이 차갑고 냉혹하게 굳어져 갔다. 감정을 일절 드러내지 않는 무심지경(無心之境)! 그러나 그의 두 눈에서 타오르는 불길만은 더욱 무섭게 이글거렸으니, 그 빛나는 분노의 광 휘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피맺힌 증오에 사로잡혀 있는가 능히 짐작하리라. 마침내 중년인 역시 만면에 띄우고 있던 미소를 싹 거두고 침중한 낯빛으로 일변하였다. 그의 두 눈 역시 예리한 광휘로 폭발하듯 불타고 있었다. 그 칼날 같은 눈빛으로 그는 꿰뚫듯 염라천존을 노려보며 싸늘히 말했다. “그대 염라천존의 손 아래 죽어 간 강호인의 수효가 대체 그 얼마인가! 내 오늘밤 그들의 넋을 위로하려 하니, 결코 그대를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는 안고 있던 고색 창연한 고금을 가볍게 내려놓고 소매 속에서 한 자루의 소검(小劍)을 꺼냈는데, 검의 길이가 불과 한 자[尺]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감히 범할 수 없는 위엄으로 태산같이 버티고 선 채 예리하게 염라천존을 노려보았다. 중년서생의 손에 들린 단검의 검신(劍神)에는 콩알 정도의 작은 보주(寶珠) 다섯 개가 박 혀 오색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더구나 검신에서는 서늘하도록 푸른 광망이 번뜩이니, 그 빛깔은 밝은 불빛을 연상시켰다. 서늘하도록 푸른 빛이 감도는 한 자루 단검. 그것은 겉보기에도 정녕 보통 물건이 아니었다. 보검을 대하는 순간, 염라천존은 한 기인(奇人)이 퍼뜩 떠올랐 “구공신검(九孔神劍)! 그렇다면 너는 바로 황산신니(黃山神尼)의 전인(傳人)이란 말인가?” 경악과 충격으로 인해 안색마저 대변하여 부르짖었다. 중년인은 낭랑히 웃으며 염라천존의 말을 수긍했다. “하하하…… 염라천존, 네가 설마 구공신검까지 알아볼 줄이야…… 그러나 황산신니는 나 의 사저(師姐)일 뿐 결코 사부가 아니다.” “무, 무엇이라고……?” 염라천존은 믿을 수 없었다. 황산신니! 그녀도 당금 무림에 전설처럼 전해지는 절세적 기인이었다. 백년 전, 한 자루의 단검으로 천하를 주유하며 일세를 풍미했던 전설의 기인. 그녀가 당시에 구사했던 한 자루 단검이 바로 구공신검이었으니…… 당시의 경세마두 백골마군(白骨魔君)을 이로써 처치했던 일은 당시의 강호를 진동시키고도 남았고, 바로 오늘에까지 그녀가 전설적 인물로 전해지는 까닭이었다. 구공신검에는 아주 미세한 아홉 개의 구멍이 있어, 적과 마주 싸울 때는 그 아홉 개의 구 멍을 통하여 울려 퍼지는 괴음이 상대의 혼백(魂魄)을 빼앗는다는 말이 전해져 온다. 또한 검신에 박힌 다섯 개의 보주는 각각 피독(避毒), 피화(避, 분수(分水), 미신(迷神), 요 상(療傷)이라 했고, 각각의 그 이름들이 말해 주듯 천하의 기보인 동시에 그 효과도 저마다 달랐 황산신니는 당시 또 한 명의 기인과 함께 우내쌍성(宇內雙聖)이라 불렸었다. 그러나 이 일은 이미 백여 년 전의 일이어서 이제는 무림에서 그들의 이름조차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목전의 중년인이 황산신니를 사저라 칭하다니…… 염라천존은 싸늘한 냉소를 날렸다. “흥! 가증스러운 자…… 네놈이 어쩌다 황산신니 노선배의 유품을 얻었는지는 모르나, 감 히 그것만을 믿고 말도 되지 않는 허튼수작을 부리려 하다니……!” 그는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허공을 향해 흡혈마도를 한차례 휘둘러 냈다. 우르르…… 붉은 도광이 허공을 가득 메웠다. “네놈의 말은 실력으로 증명해야 할 것!” 일성 폭갈과 함께 염라천존은 전광석화와도 같이 중년인을 향해 쏘아져 갔다. 중년인도 경시하지 못하고 전력을 다해 맞쏘아 갔다. “차아앗!” 일성 사자후(獅子吼)와 같은 포효와 함께 구공신검을 휘두르니 찬란무비한 광채가 마치 섬 광이 폭발하듯 작렬하였다. 뿐만 아니라 천지를 진동시키는 괴음이 울려 퍼지니 실로 상대의 혼백을 빼앗을 만했다. 우우웅…… 쌍방의 검과 도에서 발출된 가공할 광망이 허공에서 맞부딪쳤 꽈르릉…… 굉음이 귓전을 찢었고 작렬하는 광망은 마치 거대한 그물처럼 두 사람을 동시에 뒤덮었다. “으음……” 두어 마디 가벼운 신음이 쌍방에서 터져 나오며 도광(刀光)과 검기(劍氣)가 일시에 사라졌 다. 서서히 드러나는 쌍방의 모습…… 중년인의 우아하던 얼굴은 어느 사이엔가 경악과 충격에 물들어 파리하게 변해 있었다. 다만 눈초리만이 이글이글 화염을 뿜은 채 공포스러운 살기를 띠고 노려볼 뿐이었다. 염라천존도 놀라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가 강호에 출도한 이래 자신이 펼쳤던 무적패도(無敵覇刀) 아래 목숨을 부지했던 자, 과 연 그 누가 있었던가? 그는 실로 이 일초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었다. 한데 그 필생의 일초가 실패로 끝났으니…… 비록 동수를 이루기는 했지만 염라천존은 일초의 실패를 곧 패배로 받아들였다. 쨍그랑! 염라천존이 스스로 수중의 흡혈마도를 부러뜨리고 말았다. 절세의 마도로서, 숱한 무림인들의 피를 머금었던 혈색 도신(刀身)이 두 동강으로 부러져 광채마저 잃는 순간이었다. ‘무슨 속셈인가?’ 비록 어렵게 동수를 이루기는 했지만 또다시 공격해 들어온다면 막아 낼 자신이 없었던 중 년인의 얼굴에 곤혹의 빛이 떠올랐 염라천존은 부러진 흡혈마도를 갈무리했다. 중년인의 표정에서는 여전히 곤혹한 빛이 지워질 줄 몰랐다. 염라천존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 필생의 일초를 의연히 받아 낸 당신의 이름을 알고 싶소!” 중년인이 담담한 어조로 대꾸했다. “본인의 이름은 사마등(司馬鄧)이오.” “사마등……” 조용히 그의 이름을 뇌까리던 염라천존은 서늘한 눈빛으로 사마등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졌음을 시인하겠소. 하지만 이로써 우리의 승부가 끝난 것은 아니오. 내가 이 부러진 흡혈마도로 단 일 초에 당신을 제압할 자신이 생기는 날, 나는 반드시 그대를 다시 찾아 염라궁에서 숨져 간 수많은 원혼들의 빚을 받아 내고야 말겠소!” 중년인은 석상처럼 굳어 버린 표정으로 침묵하며 서 있었다. 염라천존도 구태여 그의 대답 같은 것을 기다리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할말을 모두 마치자 묵묵히 자리를 떴다. 백년 전, 염라궁이 궤멸됐던 경위에 대해 설명하고 난 염라천존은 만면 가득 씁쓰레한 표 정을 지었다. 그러자 사검평이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사부님께서는 왜 그 당시 사마등에게 더 이상 살수를 펼치지 않았습니까?” 염라천존은 담담한 어투로 대답했다. “그의 천라항마검법(天羅降魔劍法)은 아직 미숙했었기 때문에 노부가 만일 더 이상 살수를 펼쳤다면 그를 죽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노부가 그보다 실력이 고강했던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가 천라항마검법으로 대결치 않고 천상신음(天上神音)으로 대항했다면 노부는 패하고 말았을 것이다.” 사검평은 크게 놀랐다. “천상신음! 그것이 그토록 놀라운 위력을 지녔단 말입니까?” “그것은 천룡자(天龍子)의 최상승 음공이다. 그보다 한 단계 아래인 천살멸음도 어렵게 버 텨 낸 노부로서는 분명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천룡자는 어떤 인물이었기에 사부님마저도……” “이백 년 전 서역의 마승(魔僧)들이 중원을 침범했을 때, 고색 창연한 고금(古琴) 하나와 한 자루 단검으로써 피에 굶주린 그들을 궤멸시켰던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천룡자였 다.” 사검평이 문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그 마승들은……?” 염라천존은 씁쓸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당시 서역의 대법종(大法宗)은 법화존자(法華尊子)였고, 그분은 나의 사부 망아대사(妄我 大師)의 사숙조(師叔祖) 되시는 분이었다. 바로 연화존자(蓮花尊子)의 사숙이셨지.” 사부인 염라천존의 사조 되는 분이었으니 결국 사검평에게는 사고조(師高祖)가 되어 그 인연의 한 가닥은 자신과도 이어져 있는 것이다. 자신마저도 인연이 있다 하니 사검평은 새삼 정색하고 귀를 기울였다. 염라천존의 말이 흐르는 물결처럼 도도히 이어졌다. “법화존자 그분은 연화존자와는 전혀 다른 분이었다. 연화존자가 생불(生佛) 같은 분인 반 면 법화존자는 유난히 야심이 크신 분이었지. 마침내 그분은 제자들을 이끌고 대거 중원으 로 몰려왔던 것이다. 그때 천룡자가 나타나 한 가지 내기를 제의해 왔다. 그 내기인 즉, 천룡자의 금음(琴音)을 법화존자가 단 일 각만 견디어 낸다면 더 이상 서역 밀종의 고승들 일에 참견하지 않겠노라는 것이었다. 이에 법화존자는 쾌히 승낙했다. 법화존자는 불문 밀종의 고수였으니 금음의 위세쯤이야 추호도 동요치 않고 견디어 낼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룡자가 금음을 퉁기기 시작하자, 채 일각이 지나기도 전에 법화존자는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말았지. 서역 밀종의 마승들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서역으로 물러가고 말았다.” 그는 제자 사검평을 새삼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천룡자의 전인인 사마등의 장기는 역시 천상신음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약점인 검법으로써 나와 맞섰다. 노부가 만일 나의 장점으로써 그의 단점을 제압하고 그보다 낫다고 자부한다면 이 어찌 떳떳한 일이겠느냐? 그것이야말로 자신을 속이는 것이니, 이보다 비굴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 끝까지 오직 정당한 방법으로만 복수하겠다는 사부의 말뜻, 이미 그 뜻을 헤아리고 있던 사 검평은 사부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더욱 커졌다. 염라천존은 사검평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강호인들은 이 사부를 절세적 마두로 여기고 있으니, 앞으로 네 강호 행보에 많은 위험이 따르지 않을까 심히 걱정되는구나.” “사부님에 대한 강호의 소문은 왜 그리 과장된 것입니까?” “노부가 익힌 도법은 단 일 초뿐이었으되 절세적 살초여서, 일단 펼치면 나 자신조차 거두어들일 수가 없었다. 자연 노부와 대결을 벌였던 자들은 모두 죽게 됐고, 강호인들은 이를 무서워해 노부를 살인마로 규정 지은 것이다. 그러나 노부의 손에 죽은 자 들 중 대부분은 죽어 마땅한 마두이거나, 분수를 모르고 일신의 재주만 믿고 천하를 어지럽히던 무리였다. 그들은 감히 제 분수를 모 르고 주제넘게 덤볐다가 모두 노부의 단 일 초만에 헛되이 죽어 가고 만 것이었다. 세상일이란 우스워서, 그렇게 일 년이 지나자 노부는 스스로 경계하여 더 이상 살생을 계속하지 않았는데도 날로 악명은 높아 갔다. 그리고 마침내 염라천존이라 부르며 무슨 생사여탈권을 쥔 구천지옥의 염라대왕처럼 생각하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 말하고 난 그는 어이없다는 듯 공허한 웃음을 날렸. “이 어찌 정녕 우스운 일이 아니겠느냐? 더 이상 도를 휘두르지 않아도 저들 스스로 공포 에 질려 나를 무슨 절세마왕 같은 존재로 부르는 것이었다. 하하하…… 그렇게 해서 노부는 고금제일의 악인이 된 것이다.” 사검평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왜 사부님은 스스로의 억울함을 주장하지 않으셨습니까?” “천하의 흉신악살들을 굴복시켜 망아 사부님의 유훈을 따르려면 그들보다 더욱 무서운 존 재가 되어야만 했다.” 사검평은 비로소 깨닫는 바가 있었다. “아…… 결국 사부님께서는 사조께서 유훈으로 남기신 숙원을 풀기 위해 스스로 악명(惡 名)을 개의치 않으셨군요.” “그러나 숙원을 풀기 위해 구태여 거절하지 않았던 악명이 너에게 크나큰 짐이 될 줄이 야……” 그의 얼굴은 크게 어두워졌다. 사검평은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사부님, 어찌 하찮은 걱정을 하십니까? 불초 제자는 이제 전후의 모든 사정을 알고 있으 니 악마의 전인이라는 오명 따위는 개의치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불초 제자는 누가 뭐라고 해 도 사부님께 대한 존경심은 변치 않을 것입니다. 또한 제자는 사부님의 못다 이루신 숙원을 기필코 풀고야 말 것입니다.” 염라천존은 크게 기뻐했다. “고맙구나, 평아야. 네가 아직 나이 어림에도 이토록 깊이 사부의 뜻을 헤아려 주니……” 사검평은 새삼 머리 숙여 사부에 대한 존경의 뜻을 표했다. 그리고 문득 생각나는 바가 있어 물었다. “한데 그 후, 사부님께 철천지 통한을 심어 준 숙적 사마등과의 관계는 어찌 되었습니 까?” “노부는 곧바로 이곳에 은거하고 오로지 무공 연마에만 전력을 다하였다. 하지만 망아 사 부님과 흡혈도후가 남긴 두 권의 비급을 완전히 연마할 수 없었다. 이렇게 긴 세월을 연마 하고도 대성하지 못한 것은 아마도 노부의 자질이 떨어지는 탓도 있겠지만 뭔가 노부와는 맞지 않는 무엇이 있다고 생각해 스스로 두 가지 도법을 창안하기에 이르렀다. 노부는 그 두 가지 도법을 천륜(天輪)과 멸정(滅情)이라 이름지었다.” 염라천존의 노안에는 감회의 빛이 어렸다. “두 가지 도법을 대성한 노부는 드디어 사마등을 찾아 나섰다. 오랜 수소문 끝에 그가 백 천산(百千山)에 은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내고 곧바로 찾아갔지만, 마침 그는 출타 중이었기에 장군산에서 만나자는 서찰을 남겨 놓고 올 수밖에 없었다.” 사검평은 경이에 찬 눈빛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비록 입을 열어 말하지는 않았으나 그 눈빛은 그 후 어찌 되었냐고 묻고 있었다. 염라천존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얘야, 그 후의 일은 이미 너도 알고 있는 것이란다.” 사검평이 흠칫했다. “제자도 알고 있다니요?” “노부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정해진 날 어김없이 장군산으로 갔었다. 그러나 마침 그곳에 서 너를 본 순간 노부는 백년에 걸쳐 단 한시도 꺼질 줄 몰랐던 복수의 일념을 포기하고 이 곳으로 와야만 했다.” 사검평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아연 긴장된 안색이었다. 염라천존은 제자의 안색을 살피며 이어 말했다. “그렇게 했던 까닭은, 백년간 불태웠던 복수의 일념이 아무리 포기할 수 없는 것이라 해도 사문의 숙원을 이루어 줄 전인(傳人)의 발견보다는 결코 중요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염라천존은 도중 한차례 깊이 탄식한 후에 다시 말을 이었다. “만일 노부가 장군산에서 사마등과 최후의 일전(一戰) 끝에 패배했다면 나의 사부이셨던 망아대사의 숙원도 결국 나의 목숨과 함께 영영 사라져 버렸을 게 아니냐? 노부는 눈물을 머금고 스스로의 약속을 저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 말에 이제까지 침묵하고 있던 사검평은 크게 격동되었다. “사부님, 제자 평아는 비록 죽는 한이 있을지언정 결코 사부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염라천존은 크게 만족하여 사검평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치하했다. “고맙구나. 이 사부 역시 네가 기대에 어긋나리라고는 추호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이어 그는 무슨 생각에선가 빙그레 웃었다. “너는 지금 왜 사문의 절예인 도법을 전수해 주지 않는지 몹시 궁금할 것이다. 그렇지 않 느냐?” 사검평도 내심 품고 있었던 궁금증인지라 이내 고개를 끄덕였 염라천존은 여전히 웃음띤 얼굴로 차분하게 설명하기 시작했 “그 까닭은 과거의 이 사부와 같은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지금껏 노부가 네게 전수한 무공은 적양신공(赤陽神功)과 대승반야바라신공으로, 각각 현문(玄門)과 불문(佛門)의 양대절세무상신공이었다. 특히 적양신공은 이백여 년 전 우내쌍성(宇內雙聖) 중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던 적양신군(赤陽神君)의 무상절학으로, 노부는 지난날 우연히 복우산(伏 牛山) 근처에서 이 한 권의 비급을 얻어 익혔기에 너에게 전수해 주었다. 그러나 굳이 이 현문의 신공을 네게 전수해 주었던 것은 현문과 불문의, 서로 비슷하면서도 상반된 내가신공을 익혀야만 비로소 천륜과 멸정 두 가지 도식을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염라천존은 약간 고조된 음성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이제 네가 도(道) 불(佛) 양가(兩家)의 절학을 거의 십 성까지 익혔으니 마침내 네게 천륜, 멸정 두 가지 도식(刀式)을 전수해 줄 때가 되었구나.” 그 말에 사검평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사부의 입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염라천존의 말이 이어졌다. “먼저, 적양신공은 본시 그 위력이 패도적(覇道的)인지라 그 위에 멸정을 익혔을 경우 한 번 도강(刀 )을 뻗치면 무려 삼 장여에까지 미쳐 그 누구도 그 살초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네가 만일 적양신공만을 익혔다면 천륜 초식은 영원히 펼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잠시 쉬었다가 더욱 자세히 설명하였다. “네가 적양신공만을 익힌 채 천륜을 펼친다면 그 상태로도 능히 상대를 혈우겁화(血雨劫 火)에 빠뜨려 절명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상대를 위압하는 중에도 상대로 하여금 스스로 굴복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지존(至尊)의 위력이 없다면, 그것은 살생을 하지 않았을 뿐 어찌 멸정과 다르다 할 수 있겠 느냐? 하나 적양신공과 함께 대승반야바라신공을 주입하여 천륜을 전개한다면…… 천지를 메울 듯하던 살기도 부드러 운 자비의 기운으로 바뀌어지고 지옥의 겁화 속에서도 살길을 찾았다는 안도감을 누리게 된다. 하여 그는 진심으로 굴복하니…… 바로 대승반야바라신공이 천륜에 깃들인 살 기를 씻어 주어 활인구도(活人救道)의 경지를 이루어 주기 때문이다.” 염라천존은 회한 어린 눈빛으로 창공을 우러르며 말을 이었다. “노부가 백년 만에 사마등을 다시 찾아 승부를 논하려 했던 것도 바로 천륜 초식을 창안 하여 믿는 바 있었기 때문이다.” 멸정(滅情), 그것은 상대를 무참히 죽여야 거두어지는 살초였다. 하여 그것을 펼치면 도식 을 전개하는 칼은 마왕의 수라도(修羅刀)일 것이었다. 하나 천륜(天輪), 그것은 상대가 스스로 굴복하니 천륜의 경우에는 미륵불의 계도(戒刀)가 되는 것이다. 이 어찌 경이의 도법이 아니랴! 第 四 章 강호제일보(江湖弟一步) 1 염라천존은 엄숙한 신색으로 입을 열었다. “평아야, 너는 즉시 석실 안으로 들어가서 흡혈마도를 이리 가지고 나오너라!” 사검평은 지난 삼 년 동안 석실 벽에 걸려 있던 한 자루 붉은 도신(刀身)의 칼을 보아 왔으 나 한 번도 유심히 보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것이 이토록 깊은 내력이 깃들여 있는 절세의 마도일 줄이야…… 어쨌든, 그는 바람처럼 석실로 들어갔다가 이윽고 부러진 마도를 가져 와 공손히 바쳤다. 염라천존은 그것을 받아 들자 마치 깨진 유리를 만지듯 조심스레 쓰다듬더니 천천히 제자를 돌아보았다. “얘야, 너는 이 사부를 따라오너라!” 그는 표연히 신형을 솟구쳐 깎아지른 듯한 산비탈을 오르기 시작했다. 사검평은 그 모습을 그윽이 바라보며 한차례 빙그레 웃고는 그 역시 염라천존 못지않은 신 법으로 따라 올라갔다. 질주하는 그들의 신형은 실로 바람보다 빨랐다. 마치 두 줄기의 빛살인 양 허공을 가르니 순식간에 반석봉 정상에 당도하는 것이었다. 본시 반석봉 정상은 날카로운 암벽으로, 밑에서 보면 바늘처럼 가팔랐다. 그러나 막상 올라와서 보니 의외로 사방 십 장여는 실히 됨직한 공지였다. 두 사람은 꽃잎이 수면에 떨어지듯 가볍게 그 공지로 내려섰. 공지에 도착하자마자 염라천존은 단애 끝에 우뚝 버티고 섰다. 등뒤에 선 사검평이 의아해 하는 것도 아랑곳없이 염라천존은 발 아래 먼 허공을 주시했 다. 한 점 뜬구름만이 표표히 흐르는 허공. 한동안 호흡을 가다듬던 그는 두 눈으로 이상스런 광채를 폭사 해 내며 사검평을 향해 돌아 섰다. ‘흡……!’ 사검평은 그 기이한 눈빛에 이유 모를 전율을 느꼈다. 전에 없이 두렵고도 엄숙한 사부의 신색…… 마침내 염라천존이 입을 열었다. “똑똑히 보아 두어라! 이제부터 노부가 천륜과 멸정 두 초식을 펼쳐 보이겠다.” 전에 없이 엄숙하게 이르더니 다시 한 가지 당부를 잊지 않았. “너는 여기에 앉아 지금 즉시 대승반야바라신공을 발동하여 심신을 가다듬어라. 그리고 이제부터 펼쳐지는 두 가지 초식의 구석구석까지 면밀히 관찰토록 하여라! 또한 명심할 것은, 앞으로 너 자신이 이 두 가지 초식을 절정에 달할 만큼 성취하기 전에는 결코 이 두 초식이 지닌 바 무서운 위력을 네 눈으로 볼 기회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결코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많은 깨달음을 얻기 바란다.”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사부의 명령. 사검평은 곧 가부좌를 틀고 대승반야바라신공을 끌어올렸다. 눈에 거의 보이지 않을 듯한 백기(白氣)가 서리며 마치 엄밀한 그물처럼 그의 몸을 둘러쌌 다. 사검평은 형형히 빛나는 시선으로 사부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다. 염라천존은 서서히 흡혈마도를 뽑아 들더니 갑자기 신형을 솟구쳤다. “천륜!” 천지를 진동시킬 듯 포효하며 흡혈마도를 움직였다 싶은 순간, 쑤악! 수백 줄기의 도광이 불꽃처럼 작렬하며 허공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온 천지를 집어삼킬 듯 사면팔방으로 폭사해 나가는 것이었다. 시뻘건 불꽃과 같은 광채, 그것은 마치 혈우(血雨)의 폭풍이 휘몰아치는 것만 같았다. 사검평은 마치 자기 자신이 혈우 속에 갇힌 듯한 착각에 빠져 들었다. 붉디붉은 피의 도광이 그의 전신을 휘감아, 오직 속절없는 죽음만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듯 한 환상에 사로잡히는 것이었다. 혈우는 이내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한 가닥 알 수 없는 엄청난 기운이 자신을 누르는 듯하여 그는 감히 거역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이윽고 염라천존이 표연히 땅으로 내려서니 사부의 자태야말로 새삼 태산같이 높고 위대하 게만 보일 뿐이었다. 사검평은 아예 넋을 잃었다. 염라천존이 성난 듯 소리쳤다. “어찌 얼빠진 멍한 표정으로 있는가! 다음에 펼치는 초식이 멸정이니 너는 단 한 가지의 변화도 놓치지 말고 기억토록 해라!” 사부의 말은 넋을 잃고 있던 사검평의 귀에 마치 범종의 진동인 양 크게 울려 퍼졌다. 사검평은 비로소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급급히 대승반야바라신공을 더욱 심후한 경지에까지 끌어올리니 그의 눈은 어둠 속에서 바 늘이라도 찾아 낼 듯 번쩍번쩍 빛났. 염라천존은 부러진 마도를 들어 중천(中天)을 겨누었다. 그러자 그의 주위로 붉디붉은 기운이 뻗치더니 삽시간에 수십 개의 적환(赤環)을 이루었다. 그것은 순식간에 부풀어 허공 가득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환영과도 같은 핏빛의 고리는 폭발하듯 순식간에 퍼져 나가 반석봉 정상을 온통 핏빛 으로 물들이지 않는가! 순간, 사검평은 거대한 적환이 자신을 향하여 뻗쳐 온다는 환상에 빠져 들고 말았다. “앗!” 자신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그가 익힌 무공 중 가장 위력적이라 할 만한 불영환 인(佛影幻印)의 수법을 최상승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려 방어하려 했다. 십삼 장의 초식이 숨돌릴 사이도 없이 연거푸 시전되었다. 그러나…… 그가 발휘한 불영환인 십삼 장은 한낱 물거품처럼 헛되이 스러지고 마는 것이었다. 사검평의 안색은 창백하게 변하였다. 삽시간에 죽음의 공포가 밀려들며 견딜 수 없는 전율에 사로잡히는 순간이었다. 천지를 온통 붉게 물들이며 목을 죄듯 덮쳐 오던 공포의 핏빛 적환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사검평이 비로소 공포와 전율로부터 깨어나 제정신으로 돌아와보니, 뜻밖에도 염라천존이 만면에 경련을 일으키며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것이었다. “앗! 사부님……” 사검평은 크게 놀라 즉시 다가가 염라천존을 부축했다. 납덩이처럼 창백한 안색, 전신의 혈관이 뒤틀리는 듯 고통스러운 표정, 이 모든 것은 필시 주화입마의 현상이었다. 사검평은 아연 긴장하여 즉시 일련의 조치를 취했다. 즉시 사부의 전신 요혈 중 열다섯 군데를 찍은 후, 손바닥을 명문혈에 대고 진기를 주입 시켰다. 그러자 창백하였던 염라천존의 안색에 서서히 화색이 감돌기 시작했다. 다시 반 시진쯤 초조히 지켜보려니 마침내 염라천존은 긴 한숨과 함께 깨어났다. 사검평이 반색하며 외쳤다. “사…… 사부님, 어찌 된 일이십니까?” 염라천존은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휴우…… 본시 멸정은 펼칠 수는 있으되 도중에서 거둘 수는 없으니, 죽지 않은 것만 해 도 크나큰 다행이다. 너는 조금 전 대승반야바라신공을 극성까지 끌어올리지 못하고 있었던 듯하구나. 그러니 환각에 빠져 노 부에게 반격을 펼쳤겠지. 본시 멸정을 펼치는 중에 누군가에게 공격을 받게 되면 반사적으로 반격을 가하게 되어 있 단다. 하니 네게 공격을 퍼붓지 않기 위해 노부는 전신의 공력을 집중하여 멸정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전신의 기혈이 한꺼번에 뒤틀려 주화입마의 액난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란다. 다행히 네가 일련의 조치를 빠르게 취했기에 회생할 수 있었다.” “우둔한 제자의 어리석은 실수로 말미암아 사부님께 누가 되었습니다.” 사검평의 자책에 염라천존이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미 지난 일이니 너는 더 이상 마음쓸 것 없다! 다만 오늘의 일을 큰 교훈으로 삼아 강 호에 나가거든 꼭 손을 써야 할 상대 이외에는 섣불리 멸정을 펼치지 말도록 해라. 만일 이 말을 명심하지 않다가는 자칫 천추의 한(恨)을 남기게 될 것 이다.” 사검평은 사부의 이 말을 정녕 뼛속까지 깊이 아로새겼다. 그 다음날부터 사검평은 뼈를 깎는 고행의 세월을 보냈다. 그 동안, 사검평이 겪었던 고행이야말로 타인으로서는 정녕 상상치도 못할 만한 것이었다. 천륜, 멸정의 두 절초를 이루는 데는 반드시 강인한 성정(性情)이 밑바탕이 되어야 했기 때 문이다. 그는 먼저 지심한천(地深寒泉)에서 삼 주야를 견뎌야 했다. 내공으로 몸을 보호하지도 않은 채 그는 지하로부터 끊임없이 솟구치는 가공할 한기와 싸 워야 했다. 비록 온몸이 얼어붙어 의식마저 잃을 지경이었나, 그래도 처음 하루 동안은 그런대로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이틀째 되던 날, 마침내 전신의 혈관마저 얼어붙고 급기야는 심장마저 멈추는 듯하 여 그는 정녕 견딜 수 없었다. 벌거벗은 전신이 얼어붙은 나머지 하얗게 서리가 내렸다. 사검평은 이를 악물고 견디었다. ‘내 반드시 두 가지 절예를 익혀 사부, 사조의 이 대에 걸친 숙원을 해결코야 말리라!’ 인간의 의지는 실로 무서운 것이었다. 사검평은 지심한천에서의 사흘을 마침내 견뎌 냈다. 그러나 그의 고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음날부터 그는 남만 특유의 태양 아래에서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며 수많은 날을 좌선 으로 보내야 했다. 이 모든 고행은 사검평으로 하여금 백절불굴(白折不屈)의 강인한 성격을 지니게 하였다. 그것은 무쇠를 단련하여 강철로 만드는 과정과 같았다. 상상할 수도 없는 고행의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 어느덧 일 년이 지나고 있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사검평의 천륜, 멸정, 두 절예에 대한 성취는 자연 더욱 깊어 갔다. 바야흐로 무림사(武林史)에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불세출의 영웅이 태어나려던 그 전야(前 夜)였다. 기다려라 강호여! * * * 노염(怒炎)이 기승을 부리는 늦여름 한낮…… 중원제일의 대로(大路), 호남성 관도 위를 한 백의서생이 표표히 걷고 있었다. 옥봉(玉峯)인 듯 청수 단아한 얼굴은 절세미녀를 방불케 하는 아름다운 면모였으되, 그 어 딘가 숨어 있는 날카롭고 냉엄한 기상이 엿보였다. 언뜻 보면 소년의 티를 아직 벗지 못한 것도 같은 백의미서생, 그는 다름 아닌 사검평이었 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인중룡(人中龍)과도 같은 진면목을 첫눈에 알아차릴 사람은 별로 없으 리라. 왜냐하면 그는 겉보기에 허술한 백면서생(白面書生)처럼 꾸미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별한 관심을 갖고 보지 않고는 영락없이 낙방한 서생의 자태였다. 마치 한 마리의 맹룡이 짙은 구름 사이로 그 모습을 감추고 있듯, 짐짓 진정한 면모를 숨긴 채 표연히 폭염 아래 관도 위를 걷는 사검평이었다. 퍼붓는 폭양(暴陽)이 너무도 뜨거워서인지, 넓은 대로에는 오가는 행인이 뜸해서 일말의 정 적마저 감돌고 있었다. 각고의 고행 끝에 드디어 천륜, 멸정 두 절예를 성취한 그는 사부 염라천존으로부터 드디어 강호출도(江湖出道)를 허락받고 장안(長安)으로 가는 중이었다. 작별인사도 없이 떠나와 무려 사 년 동안 뵙지 못했던 부모님을 만나 뵙기 위해서였다. ‘부모님은 그 동안 얼마나 고심하셨을까? 이제 나를 보면 매우 기뻐하시겠지……’ 사검평은 마치 일진의 청풍과도 같이 넓은 관도 위를 거침없이 달렸다. 그는 옆구리에 긴 보퉁이 하나를 끼고 있었다. 그 붉은 비단보퉁이 안에는 지난날 강호를 피로 물들였던 공포의 병기 흡혈마도(吸血魔刀) 가 들어 있었으니, 겉보기에 일개 백면서생에 불과한 그가 이런 절세마도를 지니고 있을 줄이야 그 누가 짐작할 수 있으랴! 한동안 길을 걷던 사검평은 한 주점 앞을 지나다가 문득 갈증을 느끼고는 그 주점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귀공자 같은 면모를 발견한 사환이 즉시 달려나와 반갑게 맞이하였다. “오서 오십시오, 손님……” 사검평은 묵묵히 자리에 앉아 차 한잔과 간단한 음식을 주문했 사환은 연신 굽실거리고 서둘러 물러났다. 잠시 후, 한잔의 차가 사검평 앞에 놓여졌다. 사검평은 음미하듯 천천히 마시며 감개 어린 표정을 지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맛보는 차로구나. 아버님께서도 용정차를 즐겨 드셨지.’ 그가 부모님의 모습을 아련히 떠올릴 때였다. 두두두두! 관도 위로 말 한 필이 미친 듯 질주해 지나갔다. 그러자 말굽에서 피어오른 먼지가 구름처럼 노천주루를 뒤덮어 버렸다. “이런 육시랄……” “에이, 퉤…… 툇! 야, 이 고약한 놈아!” 느닷없이 먼지를 뒤집어쓴 손님들이 너나없이 욕설을 퍼부었 그러나 자욱한 먼지를 일으킨 말은 이미 멀리 사라지고 난 뒤였고, 마상(馬上)의 인물이 누 구인지조차 보지 못했으므로 중인들은 투덜거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사검평은 마상의 인물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바로 홍의경장(紅衣輕裝) 차림의 소녀였는데, 그 몸매가 매우 날렵해 보였다. 사검평의 눈가에는 언뜻 호기심이 스치고 있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강호에는 고절한 무공을 지닌 여협(女俠)들이 많다고 하시더 니…… 저 여인도 그 중 하나인 모양이군. 한데, 무슨 급한 일로 양민들에게 피해를 준다 지?’ 그가 내심으로 의아해 하고 있는데…… 우두두두두! 또다시 벼락치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관도 위로 네 필의 말이 역시 질풍처럼 달려오는 것이었다. 휙! 휙! 마치 돌풍이 휩쓸고 지나가듯 네 필의 말은 소녀가 사라져 간 방향으로 순식간에 사라졌 다. 두말할 것도 없이 또다시 자욱한 먼지가 피어올랐다. 주루 안의 손님들은 이번에도 속절없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말았다. 한데 그들 중 누구 하나 입 밖으로 욕설을 내뱉는 자가 없었. 그들은 단지 얼굴을 굳힌 채 통분한 표정으로 깊이 탄식할 뿐이었다. 사검평은 그들의 행태가 몹시 괴이쩍게 생각되었다. ‘이상한 일이군?’ 마침 사환이 옆에 있었기에 그는 나직이 물었다. “이보시오. 저들은 이런 무례를 당하고서도 오히려 스스로 탄식하여 애써 참으려 하니, 그 까닭이 무엇이오?” 사환은 크게 당황하는 표정을 지으며 낮게 대답했다. “타향 분이시군요? 나중에 말을 타고 달려간 네 분은 백마산장(白馬山莊)의 나으리들이십 니다요. 함부로 입에 올렸다가는 치도곤을 면치 못할 테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공자.” “백마산장?” “그렇습죠! 반경 삼백여 리 내에서는 감히 그들을 건드릴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요.” 사검평의 얼굴이 의혹으로 물들었다. “백마산장의 주인이 누구인데, 그처럼 막강한 세력을 누린단 말이오?” 사환은 어이없다는 투로 반문했다. “공자께서는 무림에 관해 전혀 모르십니까?” 사검평이 시인하는 뜻으로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사환은 주변을 한차례 살핀 뒤 목소리를 죽여 속삭였다. “백마산장의 주인은 경천검마(驚天劍魔) 조지릉(趙志凌)이란 분으로, 강호삼마(江湖三魔) 중의 일인이지요. 그분의 손속은 잔인하기로 소문이 나 있는 데다가 휘하에는 수많은 흑도고수들이 구름처럼 운집하여 있으니 누구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답니다. 이곳 호남 일대의 패주(覇主)나 다름없지요.” “흐음……” 사검평은 고개를 끄덕이며 품속에서 은자 하나를 꺼내 사환에게 주었다. 사환은 크게 감격하였다. “이렇게 큰 돈을……” 사검평은 너무 감격한 나머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 사환을 뒤로한 채 천천히 노천주루를 나섰다. 그는 비록 한가로운 사람처럼 무심한 자태였으나 마음속에서는 한 가지 단호한 결심이 다져 지고 있었다. ‘나 사검평은 강호에 나서며 결심했던 일을 실행에 옮기는 첫 목표로 백마산장을 선택하리 라!’ 천천히 걸어 주점에서 얼마쯤 멀어지자 홀연 지면을 박찼다. 순간, 그의 신형은 마치 승천하는 한 마리 비룡과도 같이 표연히 허공 위로 솟구쳤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십여 장을 날아가는, 실로 눈부신 경공신법이었다. 그는 조금 전에 말들이 사라졌던 방향을 향하여 달려나갔다. 그렇게 달리기를 일 각여. 사검평은 아련히 들려 오는 비명과 고함, 그리고 어지럽게 병장 기 부딪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사검평은 전신의 공력을 모아 귀를 기울여 보았다. 필시 그 누군가가 싸우는 것임에 분명한 그 소리의 진원지는 동쪽으로 멀리 보이는 숲속이 었다. 사검평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신형을 솟구쳤다. 마치 암야(暗夜)를 꿰뚫는 유성처럼 한 줄기 백선(白線)이 동쪽을 향하여 곧장 쾌속하게 쏘아져 갔다. 2 얼마 후, 사검평은 격전의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이 십칠팔 세쯤 되어 보이는 홍의경장 소녀를 세 명의 중년인이 흉살스럽게 포위 공격하 고 있었는데, 그들 옆으로 장한 한 명이 눈알을 부릅뜨고 죽어 있었다. 예리한 검상으로 보아 소녀의 손에 당한 모양이었다. 소녀도 가볍지 않은 부상을 입은 듯 어깨로부터 붉은 피가 계속 솟구치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굴하지 않고 연신 장검을 번뜩이며 필사적으로 대항했다. 악전고투(惡戰苦鬪), 그 모습이 실로 애처로울 정도였다. 더구나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열세에 처해 중년인들의 세찬 공세 앞에서 허덕이기 시작했 다. 중년인들은 득의하여 음흉한 괴소를 날렸다. “흐흐흐…… 나찰옥녀(羅刹玉女) 번빙아(藩氷娥), 네년이 예(禮)로 권하는 잔을 마다했으 니 어디 벌주를 마셔 보려무나! 흐흐흐…… 그래도 본 산장의 소장주께서 네년을 산 채로 끌고 오라 하셨음을 큰 다행으로 알아라.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네년의 목숨은 벌써 황천의 고혼이 되었을 테니까.” “닥쳐라, 악적! 나 나찰옥녀 번빙아는 그 색마(色魔)의 제물이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할 것이다. 흥, 그렇게 되면 이 사실을 아신 나의 사부 고죽파파(古竹婆婆)께서 너희들 석문이흉(石門 二兇)을 살려 두실 것 같으냐!” 중년인 중 하나가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멀리 있는 물로는 결코 가까이의 불을 끄지 못하는 것! 비록 고죽파파가 사 이(四異) 중 하나에 속하는 고인이라 할지라도 오늘의 이 일을 어찌 알 수 있겠느냐? 우리 입으로 직 접 말하지 않는 한 그 할망구는 추호도 우리를 의심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정곡을 찌르는 말이어서 소녀는 안색이 변했다. 본시 강호무림에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십대고인(十大高人)이 珦릿? 그들은 즉 일군(一君), 쌍기(雙奇), 삼마(三魔), 사이(四異)였다. 그 중 고죽파파는 십대고인 중 사이(四異)의 일인(一人)이었다. 그런 절정고수의 제자를 겁없이 핍박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그들 세 명의 중년인이야말로 호남성 일대에서는 그 흉명이 너무도 쟁쟁한 일대 흉적들이었 으니, 그들 중에서도 석문이흉은 실로 무서운 자들이었다. 그들은 본래 석문 일대를 주름잡던 자들이었다. 닥치는 대로 살육을 일삼다 보니 억울하게 죽어 간 자의 수효가 부지기수였다. 그러자 정파의 고수들이 이를 결코 좌시할 수 없어 분연히 그들을 응징하려 했다. 석문이흉은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다. 도리없이 석문에서 도망쳐 백마산장에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이런 내력을 지닌 자들이었으나 그 무공 실력은 강호의 일류급에 속하는 고수들이었다. 조금 전에만 해도 그들이 합세하기 전까지는 나찰옥녀 번빙아의 우세였다. 그녀는 백마신장의 수하 한 명을 처치할 때까지만 해도 여유 만만했다. 하나 그때까지 뒷전에서 수수방관하던 석문이흉이 홀연히 뛰어들자 결국 그녀는 열세를 면 치 못했던 것이다. 이것으로만 보아도 석문이흉의 무공 실력을 능히 알 수 있었 한데, 나찰옥녀 번빙아는 어쩌다 이들과 다투게 되었는가? 본시 그녀는 볼일이 있어 안북현 근처를 지나던 중이었다. 그러다 때마침 백마산장의 수하들이 부당하게 양민을 괴롭히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번빙아는 이를 결코 좌시할 수 없어 감연히 그들을 징벌코자 했다. 무림십대고인 중 사이의 일인인 고죽파파의 제자였으니 그녀의 무공 또한 범상치 않았다. 마치 오색 구름 사이로 한 마리 나비가 춤추듯, 흉적들을 주살하는 그녀의 솜씨는 신묘의 경지였다. 십여 명의 백마산장 수하들이 그녀의 손 아래 죽어 갔다. 나찰옥녀 번빙아는 비로소 검을 거두었다. “흥! 스스로 저지른 죄의 대가일 뿐이니 결코 본 낭자를 원망하지 마라!” 그러나 이때 나찰옥녀 번빙아의 일거수일투족을 아낌없이 노려보고 있는 암중의 눈길이 있 었으니…… 그는 바로 백마산장의 소장주 분면랑군(粉面郞君) 조태명(趙太明)이었다. 그는 자신의 수하들이 속절없이 쓰러지는 것 따위는 개의치 않았다. 오직 구름을 헤치고 빛나는 여의주와도 같이 아름다운 그녀의 미색에 혹해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나찰옥녀 번빙아가 피 묻은 장검을 거두고 떠나려 할 때, 조태명은 모습을 드러내 고 노골적으로 그녀를 유혹하려 했다. 그녀는 격노한 나머지 앙칼진 일검을 펼쳐 냈다. 이에 분면랑군 조태명도 크게 분노하였다. “본 공자께서 어여삐 여겨서 귀여워해 주려 하였더니, 앙탈이 심하구나!” 그는 즉시 초식을 펼쳐 냈다. 과연 호남 일대를 주름잡는 백마산장의 소장주답게 그의 무공은 고절 예리하기 짝이 없었 다. 번빙아로서는 속수무책, 크게 낭패를 면할 수 없었다. “흐흐흐…… 네가 앙탈을 부리니 본 공자께서는 강제로라도 납치하여 네년의 사지 육신 을 녹여 줄 테다!” “닥쳐라, 흉적!” 극도로 분노한 번빙아가 쾌속 무비하게 우수를 떨쳐 냈다. 순간, 마치 폭죽이 작렬하듯 수십 가닥의 백광이 허공에 번뜩였다. “앗!” 득의하여 방심하던 분면랑군 조태명은 이 의외의 암습에 기절초풍했다. 파팟! 불꽃과 같은 파공음이 일었다. “으음……” 조태명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사실 방금 그녀가 펼친 일초 암기수법이야말로 그녀 사문의 독문비학으로, 강호에서도 명망 이 드높은 절세암기 고죽자(古竹刺)였다. 분면랑군 조태명이 흠칫하는 사이, 나찰옥녀 번빙아는 이 틈을 놓칠세라 비호처럼 몸을 날 려 간신히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 그러나 순순히 그녀를 놓아 줄 분면랑군 조태명이 아니었다. 더한층 분노한 그는 즉시 수하들을 풀어 그녀의 뒤를 쫓게 하였다. 하여 나찰옥녀 번빙아는 불과 오십여 리도 못 가서 그들에게 따라잡혔던 것이다. 번빙아와 석문이흉 등의 대결은 어느덧 사십여 초를 경과하고 있었다. 본시 처음부터 열세를 면치 못했던 번빙아였는지라 지금에 이르러서는 패색이 더욱 짙어졌 다. 그에 비해 석문이흉은 온갖 음탕한 말로써 조롱하며 유유히 핍박했다. “헤헤헤…… 계집애야, 그 좋은 몸매를 가지고 왜 운우지락(雲雨之樂)을 마다한단 말이 냐?” 그들은 마치 쥐를 희롱하는 고양이와도 같았다. 나찰옥녀 번빙아는 솟구치는 분노를 억누를 길이 없었다. “닥쳐라!” 젖 먹던 힘까지 다하여 필사의 반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는 정녕 위험 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무공을 겨룸에 있어 잔잔한 마음가짐이야말로 승패를 결정짓는 첫째 요결이었으니, 이성을 잃음은 바로 패배를 자초함과 다름이 없었다. 사실 석문이흉은 음흉하게도 이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어찌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랴! “계집애야, 어리석게도 너 스스로 묘혈(墓穴)을 파는구나!” 그들이 휘두른 검은 전광석화처럼 번빙아에게 쏘아 갔다. 쨍그랑! 일성 날카로운 금속을 울리며 번빙아는 수중의 장검을 떨어뜨렸다. 동시에 석문이흉의 검은 천 근 무게로 그녀의 어깨를 내리쳤 “앗!” 번빙아는 비로소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혼비백산했으나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휘익! 마치 회오리와 같이 파고든 공세 앞에서 그녀의 운명도 풍전등화 격이었다. 실로 헤어날 길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 돌연, 석문이흉의 눈앞으로 섬광이 어른거리는 듯했다. 다음 순간, “우웩!” 그들은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지르며 일 장 밖으로 나가떨어졌. 갑자기 휘몰아친 무형의 잠력에 의해 격타당한 그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바닥을 뒹굴 고 있었다. “어이구구……” 코가 으깨지고 입술이 터진 채 피를 흘리며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모습이었다. 이 뜻밖의 사태에 번빙아가 너무도 놀라 멍하니 서 있을 때였. “하하하…… 낭자께서는 너무 놀라실 것 없소.” 그녀 앞에 사검평이 홀연히 모습을 나타냈다. 순간, “아!” 그녀의 입은 얼어붙은 듯 한번 열려진 채 닫혀질 줄 몰랐다. 흡사 거대한 쇠망치로 맞은 듯, 작은 가슴에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아, 세상에 이다지도 잘생긴 미장부가 있었다니……’ 나찰옥녀 번빙아는 사검평의 자태에 넋을 잃고 있었다. 천하에 그 어떤 아름다움이 있어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백의서생의 청수 준려한 면모와 비 교할 수 있으랴! 본시 나찰옥녀 번빙아 자신도 면모의 아름다움에 있어서는 결코 그 누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던 터였다. 사문을 떠나 행도하기 일 년. 그녀의 뛰어난 미모를 흠모하여 목숨조차 돌보지 않고 구애 하던 젊은이의 수효가 그 얼마였던가? 또한 가는 곳마다 천상의 선녀를 보듯 선망하던 눈초리를 그 얼마나 수없이 받아 왔던가? 그러했던 자신의 미모조차도 지금 눈앞에 선 백의서생의 면모에 비하자니 오히려 추하게 여겨질 뿐이었다. 특히, 혼백마저 빨아들일 듯한 두 눈은 도저히 시선을 돌릴 수 없게 하는 마력이 깃들여 있 었다. 그때 엉거주춤 일어나고 있는 석문이흉을 발견한 사검평의 얼굴에는 얼음과도 같이 차가운 냉기가 떠올랐다. 코가 깨지고 입술이 터진 채 아직도 아픔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일어서던 석문이흉은 사 검평의 눈길을 대하고는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흉명이 자자한 만큼 강호 경험도 풍부했던 석문이흉은 비록 목전의 백의서생이 겉보기에는 유약한 듯싶으나 사실 고절 심후한 내가고수임을 첫눈에 간파할 수 있었다. 그들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 당신은 누구기에…… 감히 백마산장이 하는 일에 나서는 거요?” 백마산장의 이름을 빌려서 겁을 주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게 어디 될 말인가? 사검평의 입에서 싸늘하면서도 날카로운 일갈이 터져 나왔다. “어리석은 놈들! 일개 백마산장 따위를 믿고 이다지도 행패막심하다니…… 오냐, 내 그렇 지 않아도 벌써부터 백마산장의 행패가 극심함을 알고 필히 징벌하려던 중이었으니 마침 잘되었다. 네놈들의 목을 베어 백마산장에 보냄으로써 나의 초혼패(招魂牌)로 삼아야겠구나!” 너무도 뜻밖의 소리! 비록 나직한 음성이었으나 석문이흉에게는 실로 천둥보다 더 크게 들려 심신을 뒤흔들었 다. ‘앗! 저자가 기어이 우리를 죽일 결심이구나…… 그렇다면……!’ 그들은 재빨리 상대의 의중을 간파하고 급급히 이에 대비했다. 결코 순순히 당하지는 않으리란 생각이었다. 그들은 전신 공력을 끌어올리며 장검을 뽑아 들었다. 삽시간에 장중은 싸늘한 살기로 뒤덮였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석문이흉이었던지라 그 기세가 제법 엄중하고 살기 등등했다. 그러나 사검평은 그들의 엄중한 자태마저 암중에 두지 않는 듯싶었다. 다만 서릿발처럼 차가운 시선을 던질 뿐. 사검평은 그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 유유자적한 태도였다. 그러나 그가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석문이흉은 사신(死神)이 목을 죄어 오듯 식은땀을 흘렸다.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는 그들의 얼굴이 공포에 물들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일순 석문이흉의 눈길이 마주쳤다. “죽어랏!” 그들은 동시에 사검평을 향해 필살의 살초를 전개했다. 우르르…… 천지개벽의 순간인 듯 휘몰아치는 장력과 검풍, 자욱한 암운이 햇빛마저 가렸다. 그러나 사검평의 신형은 이 개세적 살초가 몰아쳐 옴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석문이흉은 필생의 공력을 다하여 덮쳐 갔다. 질풍노도처럼 덮쳐 가던 석문이흉은 사검평의 얼굴에 한 가닥 신비로운 미소가 지나감을 똑똑히 목격하였다. 일순간 그들의 망막에서 사검평의 모습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이어서…… “으아악!” “아악!” 두 줄기 처절한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불꽃보다 붉고 화려한 선홍의 핏물이 허공으로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핏물이 소나기처럼 땅으로 쏟아졌을 때, 먼 허공을 응시하며 선 사검평의 양 옆 에는 목 없는 두 구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다. 석문이흉, 그들은 죄 많은 이승을 하직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번빙아는 눈앞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에 아연 경악한 채 말을 잊었다. “어찌 이럴 수가……?” 정녕 믿을 수 없었다. 분명 자신의 두 눈으로 목격하였건만 그녀는 마치 일막(一幕)의 춘몽에라도 취한 듯한 기 분이었다. 번빙아는 조금 전의 일들을 다시 한 번 망막에 떠올렸다. 석문이흉이 질풍노도처럼 덮치는 순간, 그녀는 사검평이 도저히 피할 수 없으리라 여겨 눈 길을 외면하고 말았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사검평은 두 흉적의 공격 사이를 교묘하게 빠져 나오지 않았던가? 그 신법은 너무도 괴이하여 마치 유령의 움직임 같았다. 이어서 사검평은 허공을 격해 두 흉살에게 소매를 떨쳤다. 그러자 일점 소리조차 없이 석문이흉의 머리가 칼로 벤 듯 예리하게 잘려져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그것은 이미 실전된 지 오래됐다는 무형도기(無形刀氣)가 분명했다. 나찰옥녀 번빙아가 무형도기의 전설을 뇌리 속에 떠올린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만일 그 전설의 무학이 아니라면 그 무엇이 이토록 신묘한 조화를 보일 수 있단 말인가? 나찰옥녀 번빙아는 창백한 안색인 채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고, 공자…… 당신의 방금 그 일초는 혹시 무형도기가 아닌가요?” 사검평이 천천히 그녀에게로 돌아서며 빙그레 신비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렇소! 비록 그 이름은 다르나 무형도기의 일종임에는 틀림이 없소!” “아아!” 탄성을 토해 내는 그녀의 얼굴이 희열의 빛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번빙아는 결코 무형도기 때문에 가슴 벅찬 감동을 느꼈던 것은 아니었다. 사검평의 얼굴에 떠오른 은은한 미소. 그것이야말로 심혼을 모두 앗아 가는 듯한 느낌이어 서 번빙아는 주체못할 희열의 감정에 빠졌던 것이다. 그것은 정녕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난생처음으로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사검평의 얼굴에 떠올랐던 미소는 이내 사라졌고, 대신 그는 얼굴을 싸늘하게 굳히며 뒤 로 돌아섰다. 장내 한쪽 구석에는 번빙아를 핍박하던 세 명 중 나머지 한 명의 중년인이 공포에 질려 오 들오들 떨고 있었다. 사검평이 꿰뚫을 듯 그를 주시하며 싸늘히 내뱉었다. “떨지 마라! 내, 너만은 살려 주마. 하니 너는 즉시 백마산장으로 돌아가 내 말을 전하라! 본인이 빠른 시일 안에 백마산장을 방문할 것인즉 마중 준비를 하라고 말이다. 알았느냐?” 일갈을 내뱉기 무섭게 그는 갑자기 두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동천(凍天)의 삭풍인 듯 한 줄기 바람이 스치며, 땅위에서 뒹굴던 석문이흉의 목이 해연히 날아와 중년인의 품에 안겼다. 중년인은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들고서 혼비백산했다. 사검평이 다시 냉엄하게 내뱉었다. “그것이 바로 본인의 초혼패인즉 경천검마 조지릉이란 자에게 틀림없이 전하도록 하라!” 중년인은 비로소 자신이 살아나게 되었다고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얼른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몇 번 두 눈만을 껌벅였다. 그러자 사검평이 재차 다그쳤다. “무엇을 꾸물거리는가? 정녕 살고 싶지 않단 말인가?” 그가 나직이 일갈하자 중년인은 그때서야 제정신이 들었다. “처, 천만의 말씀……” 중년인은 황급히 손을 휘저으며 사검평의 마음이 변하기라도 할세라 재빨리 말 등에 올라 탄 후 사라졌다. “후후후……” 사검평은 나직이 웃으며 ‘걸음아, 나 살려라!’ 하며 도망치는 중년인의 뒷모습을 그윽이 바라보았다. 사실 이때 그는 내심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중이었다. 그것은 숱한 고난 끝에 익혔던 수라다엽도(修羅多葉刀)가 과연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가공 할 위력을 발휘해 주었기 때문이다. 수라다엽도(修羅多葉刀)! 그것은 본시 밀종(密宗)의 절기로 사조 망아대사가 서역으로부터 전수받아 어느덧 사검평에 게까지 이어진 것이었으니, 사검평은 이 비전초식을 처음으로 시전해 보고 나서 그 가공할 위력에 못내 탄복했던 것이다. 이때였다. 한 줄기 낭랑한 음성이 가벼운 흥분에 상기되었던 사검평의 얼굴을 바꿔 놓았다. “소녀의 천한 이름은 번빙아라 하옵니다. 공자께서 저를 구해 주신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 드리며 은인의 고귀하신 이름 석 자라도 알고 싶나이다.” 사검평이 흥분에서 깨어나 힐끔 돌아보니 나찰옥녀 번빙아가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숙이 고 있었다. “아…… 본시 번 낭자이셨군요. 불초의 이름은 사검평이라 합니다만 아직 무명(無名)에 불 과할 뿐입니다. 한데 낭자께서 이들 무도한 자들에게 핍박받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찰옥녀 번빙아가 즉시 모든 얘기를 털어놓았다. 이윽고 그녀의 말이 끝나자 사검평은 안면에서 비분강개의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찢어죽일 놈들! 오냐, 내가 처음에 결심했던 대로 내 너희들을 강호출도를 기념하 는 첫 재물로 삼으리라!” 새삼 단호한 결의를 다지며 그는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나찰옥녀 번빙아가 다시 말했다. “소녀가 듣기에 무형도기는 비록 지고무상의 절기이나 실전된 지 이미 수백년이 지났다고 했습니다. 한데 공자께서 이 같은 희세의 절기를 펼치시니 소녀로서는 공자의 사문내력을 도무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군요.” 이 말에 사검평이 담담한 어조로 대꾸했다. “낭자, 양해하시오. 불초의 사문내력에 대해서만은 본 문의 엄명에 의해 도저히 밝힐 수 없 소이다.” 그는 그렇게 단호히 잘라 말한 후 곧 작별을 고했다. “인연이 있다면 훗날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고, 그럼 이만……”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표연히 신형을 솟구쳤다. 한 줄기 광채가 번뜩였다 싶었는데 그는 어느 사이엔가 까마득히 멀리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 빠르고 날랜 모습이 흡사 한 줄기의 바람인 듯 정녕 붙잡을 길이 없었다. 번빙아는 그가 이처럼 갑자기 자신의 앞에서 떠날 줄은 몰랐는지라 한마디의 말도 못 한 채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넋잃은 듯한 그녀의 표정. 그러나 그녀의 가슴속엔 어느 사이엔가 사검평의 영상이 깊이깊이 아로새겨지고 있었다. “사검평……” 그녀는 나직이 그의 이름을 입 속에서 되뇌어 보았다. 마치 전생(前生)의 인연이라도 있었던 듯 뇌리에서 떠날 줄 모르는 그의 생각. ‘내가 강호를 행도한 지 일 년. 그러나 모래알처럼 많은 강호 영웅들 중에 일찍이 저 같은 기재(奇才)를 본 적이 없었다. 오늘 내가 저런 기재를 만날 수 있었음은 역시 전생의 인연이거나 하늘의 뜻이 없고서야 어림도 없지 않았겠는가! 나는 그를 놓칠 수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사람으로 만들고야 말리라.’ 비록 처음 만났으되 그녀는 마치 숙명과도 같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단단히 결심하고 표연히 마상에 오르니 한 필의 준마는 즉시 힘차게 지 축을 박찼다. 이윽고 말굽 소리마저 아득히 사라지고, 남은 것은 단지 목 없는 두 구의 시체뿐.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덧없이 살다 죽어 간 두 인간의 어리석은 주검을 쓸어 주었다. 바로 그때였다. 모두가 떠나 버린 곳, 한 줄기 바람마저 스치듯 머물렀다 사라진 곳에 한 인영이 유령처럼 자태를 드러냈다. 비록 걸레 조각처럼 다 떨어졌으나 때 한 점 묻지 않은 청결한 의복을 단정히 입은 그는 덕 망 높은 학자처럼 맑고 고아한 용모였다. 거지임이 분명하건만 그 풍기는 기도는 선인과도 같으니 그의 풍모와 차림새는 전혀 어울 리지 않았다. 이처럼 기이한 행색의 늙은 거지는 장중을 둘러보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괴이한 일이로다. 조금 전 백의서생이 펼쳤던 일초 무형도기야말로 분명 삼백 년 전 그 옛날에 서역 밀종의 고수들이 펼쳤던 수라다엽도가 틀림없었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 아이는 바로 서역 밀종에서 보낸 자란 말인가?” 갑자기 그는 전율하듯 전신을 세차게 한번 부르르 떨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중원무림에는 또 한 차례 감당할 수 없는 피의 선풍이 휘몰아치 리라!” 노인은 이어 결연한 의지의 표정을 떠올렸다. “노부는 비록 목숨을 걸더라도 이 일에 관해 철저히 규명해야겠다.” 그는 다시 한 차례 크게 탄식한 후, 신형을 번뜩 움직였다. 순간, 그는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마치 유령과도 같이 그 자리에서 홀연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서편에 지는 낙조(落照)마저 어느덧 암흑으로 묻혀 가고 있는 시각이었다. 第 五 章 천왕도(天王刀)의 자결(自決) 1 호남성(湖南省) 서쪽에 준령을 자랑하는 명산(名山)이 있어, 세인들은 이를 일러 백마산(白 馬山)이라 불렀다. 본시 그 산세가 기기절묘하여 예로부터 이 산을 두고 수많은 전설과 일화가 전해지고 있었 으니, 가히 호남제일의 명산이었다. 한 마리 백설 같은 준마가 질주하는 듯 거침없는 산세 속에 웅혼 심려한 경관을 포용하고 있었으니 정녕 천하 유수(有數)의 명승지로서 손색이 없었다. 그 아름다운 산세에 겹쳐 때마침 폭염이 작열하는 성하의 계절인지라, 그 우거진 녹음방초 로 더한층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굽이굽이 녹음따라 감춰진 듯 이어지는 산길 곳곳에서 마주치는 벽계 옥류와 폭포를 지나 기 몇 차례. 이윽고 산 중턱에 이르면 한 채의 웅장 미려한 장원을 발견할 수 있으니 이곳이 바로 백마 산장이었다. 세인(世人)을 압도하듯 높이 솟은 담장과 그것으로도 감출 수 없이 더욱 치솟은 고루거각. 신선의 거처인 듯, 화려하고 웅장하기 비할 바 없었다. 어디 그 외양의 화려 웅대함뿐이랴! 이곳이야말로 호남, 호북의 양호(兩湖) 일대를 떨쳐 울리는 대세력의 본거지였으니, 명실상 부 당대 무림의 패주 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경천검마 조지릉의 거처였다. 경천검마(驚天劍魔) 조지릉(趙志凌). 당금 무림 십대고인 중의 일인인 그는 실로 놀라운 위세를 떨치고 있어서 근래에 이르러 구파일방에 못지않은 성세를 구가하는 중이었다. 대지를 녹일 듯 강렬히 타오르던 폭양도 어느덧 서편 너머로 기울고 있었다. 천공을 물들인 석양의 낙조가 핏빛처럼 물드는 시각. 장대 웅려한 백마산장의 앞으로 한 필의 말이 미친 듯 달려들었다. 그 기세가 어찌나 흉험했던지, 장원 문을 지키던 수하들이 대경 실색하며 외쳤다. “웬 놈이냐!” 외치며 살기 등등 달려 들어오는 말을 제지시키려는 순간, 마상의 중년인이 다급히 부르짖 었다. “병신 같은 놈들아! 눈깔마저 썩었느냐? 어서 문을 열지 못하고 무슨 헛소리냐?” 그제야 장원 앞의 수하들은 마상의 인물이 외인이 아닌 백마산장의 총집사 귀면인두(鬼面人 兜) 장후(張候)라는 사실을 알아채고 황급히 예를 갖추었다. “모…… 몰라뵈었습니다. 총집사 어른!” 귀면인두 장후는 인사받을 겨를도 없이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는 말을 타고 삼십여 장이나 됨직한 장원 안을 곧장 가로질러 달렸다. 내택으로 쓰이는 한 채의 화려한 전각 앞에는 이미 통고를 받은 듯 십여 명의 인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중 우두머리는 나이 이십여 세 정도의 미청년이었다. 그는 허겁지겁 달려오는 장후의 태도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게 여겨진 모양이었다. “장 집사,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토록 경황이 없는가? 더구나 그 애송이 계집애는 어찌 하고 이렇게 혼자서 왔단 말인가?” 귀면인두 장후가 황급히 말을 멈추고 단숨에 뛰어내렸다. 그는 턱까지 차 오른 숨을 가누지도 못한 채 허겁지겁 포권과 함께 부르짖었다. “소, 소장주님…… 크, 큰일났습니다.” “내가 본시 장 집사를 경망한 인물로 보지 않았거늘…… 오늘의 꼴불견은 대체 웬일이 오?” 그러나 그의 힐책조차 장후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크, 큰일이……” “장 집사! 조리있게 분명히 말하시오.” 분면랑군 조태명의 불쾌한 듯한 일갈에 귀면인두 장후는 즉시 사정을 늘어놓았다. “수하는 석문이흉 형제와 왕칠(王七)을 대동하고 분부대로 나찰옥녀를 뒤쫓았습니다. 한데 나찰옥녀 그 계집애의 손속이 생각보다 매서워 왕칠은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이미 예상했던 듯 조태명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겨우 그 정도의 일로 호들갑을 떨었단 말인가?” “아…… 아닙니다. 계집애의 손속이 매서워도 석문이흉의 적수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하여 그들이 나찰옥녀를 제압하려는 순간, 느닷없이 백의를 입은 애송이 하나가 나타나 석문이흉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고 겨우 수하만이 간신 히……” 이어 장후는 사검평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옮겨 놓았 동시에 옆구리에 찼던 보퉁이를 끄르니 석문이흉의 잘려진 두 개의 머리가 흉측한 모습으 로 그 속에 있지 않는가! 부릅떠진 눈알이 원망스럽다는 듯 쳐다보자 장중의 십여 명은 일제히 안색이 창백하게 변 했다. 그러나 백마산장의 소장주 분면랑군 조태명은 안색을 변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빠드득 이를 갈았다. “흥! 어느 놈이냐?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한 애송이 주제에 감히 우리 백마산장을 상대로 도전해 오다니…… 오냐, 내 그자가 이곳에 나타나기만 하면 결코 살려 두지 않으리라!” 살기에 찬 그의 어조는 흉험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때 그의 옆에 서 있던 청의노인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소장주, 그자가 만약 장 집사의 말 그대로 무형도기류의 무공을 지닌 자라면 사태는 심 각하네. 이는 반드시 신중하게 대처해야 할 문제가 아닐까?” 잠시 조태명의 눈치를 살피고 나서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더구나 지금은 장주께서 출타 중이시지 않은가? 만일 이때 그자가 나타난다면 상대하기 쉽지 않으리라 여겨지네.” 그러자 분면랑군 조태명은 의연히 광소로 응답한다. “으하하하…… 황 숙부님께서는 언제부터 그렇게 겁이 많으셨던가요? 아시겠지만 소질은 이미 부친의 경천십삼식(驚天十三式)을 팔 성 가량이나 연성하였으니 그 누구도 겁날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숙부님의 천왕도법(天王刀法)은 호남 일대에서는 물론 강호 천지에서 적수 를 찾기 어려울 정도인데 대체 무엇이 걱정이란 말씀입니까?” 사실 그의 이 말은 결코 헛된 소리만은 아니었다. 그가 황 숙부라 불렀던 청의노인이야말로 호남 일대를 주름잡는 유명한 고수 천왕도(天王 刀) 황승국(黃承國)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칠십이로천왕도법(七十二路天王刀法)은 가히 무림일절이라 이를 만큼 고절한 경지였 다. 본래 그는 정파 협의도의 인물이었으나, 이십여 년 전 경천검마 조지릉으로부터 구명지은 (求命之恩)을 입은 바 있어 보은의 뜻으로 그의 수하 되기를 자청했던 것이다. 한데, 근자에 들어 경천검마가 세력을 넓히기 위해서 극악무도한 만행을 서슴지 않자 내심 회의를 느끼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나 이십여 년 전 목숨을 구원받았던 은혜와 그 동안의 의리로 인해 막상 조지릉의 곁 을 떠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지금의 그로서는 분면랑군 조태명의 의기 탱천하는 호언장담에 애써 안도감을 가지 려는 입장이었다. 하나 천왕도 황승국은 본능처럼 휘감겨 드는 위기감을 아무래도 떨칠 수가 없었다. 그가 우울한 기색을 보이자 분면랑군 조태명은 그 기미를 느낀 것일까? 홀연 일성 장소(長笑)로써 자신을 과시하려 했다. “으하하하…… 만일 그자가 당장이라도 내 앞에 나타난다면 내 친히 이 검으로써 그자의 목을 쳐 비명에 죽어 간 석문이흉의 넋을 위로하겠습니다.” 그는 옆구리에 찬 보검을 손바닥으로 탁탁 치며 거침없이 호언장담했다. 바로 그때였다. “흥!” 한마디 냉혹한 코웃음이 마치 목줄기를 겨루는 비수처럼 예리하게 날아듦과 동시에 그들 면전에 백의서생 사검평이 표연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장중에는 싸늘한 긴장이 내리덮였다. “……!” 모두가 경악하여 말을 잃었다. 그토록 호언장담하던 분면랑군 조태명마저 아연 긴장할 뿐, 말이 없었다. 마치 한 줄기 연기처럼, 언제 어느 사이에 나타났는지도 모르게 홀연히 출현하여 목전에 선 사검평의 기도는 좌중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비록 그 자태만은 남장여인인 듯 아름다워 처연함을 느끼게 하였으나 그 얼굴에 감도는 냉 혹함은 뼛속까지 파고들 정도였다. 분면랑군 조태명은 자신의 조금 전 호언장담을 그가 들었으리라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실로 납덩이처럼 무거운 긴장만이 흐르는 살벌한 침묵의 순간이었다. 사검평은 장중의 모든 사람들이 긴장하는 모습을 싸늘한 시선으로 훑어보다가 싸늘히 말했 다. “조금 전 귀하께서는 분명 나의 목을 단 일 검으로 내리치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제 소 원대로 내가 나타났으니 어서 손을 써보시지!” 그 차가운 비웃음은 비록 나직하였으나 마치 굉음처럼 꽝꽝 울리며 조태명의 심사를 뒤흔들 어 놓았다. 오만하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성격의 조태명이 아니었던? 그는 돌연 앙천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어리석은 놈, 정녕 죽고 싶어 환장한 모양이구나. 네가 본 장의 수하들을 살 육한 주제에 도망치기는커녕 오히려 이렇듯 제 발로 기어들다니…… 스스로 지옥 길을 택한 줄 알아라!” 그는 흉광을 번뜩이며 서서히 왼쪽 허리의 검자루로 손을 가져 갔다. 그때, 천왕도 황승국이 갑자기 그들 사이에 끼여들며 외쳤다. “소장주, 잠시만 참으시오!” 이어 그는 사검평에게 돌아서 포권의 예를 취하며 정중히 말했. “노부는 본 백마산장의 총호법 천왕도 황승국이라 하오. 귀하의 존성대명은 어찌 되시 오?” 그의 예의를 다한 정중함에 비해 사검평의 대답은 매정하리만큼 싸늘했다. “흥! 그대들 중 그 누구도 나의 이름을 알 자격이 없소.” 본시 이 자리에 있던 십여 명은 모두가 내로라 하는 고수급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사검평의 안하무인 격인 이 말에 분노를 금치 못했다. 하나 천왕도 황승국은 얼굴색 하나 변치 않고 태연히 응수했. “좋소. 귀하가 이름을 밝히기 꺼려 하신다면 구태여 알려고 들지 않겠소. 그러나 귀하가 본 산장과 뚜렷한 원한 관계도 없으면서 먼저 시비를 걸려 하니 이것은 분명 그대의 잘못임 을 지적하고자 하오. 그러나 귀하가 본 장에 더 이상의 적대적 행위를 보이지 않는다면 본 장에서도 석문이흉의 살해 건에 대 해서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겠소!” 그 말에 사검평이 가볍게 웃었다. “하하하…… 과연 강호의 노고수다운 제안이오. 그러나 그대들 백마산장의 무리들이 힘없 는 양민을 괴롭힐 때도 그런 명분을 세웠는지 먼저 묻고 싶소.” 사검평의 추궁에 천왕도 황승국도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사실 백마산장은 근래에 이르러 그 세력을 더욱 확장키 위해 수많은 흑도고수들을 거의 무 차별적으로 영입하는 중이었다. 하여 그들이 저지른 수많은 죄악과 만행에 대해 그 누구보다 천왕도 황승국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사검평은 최후의 선고를 내리듯 싸늘히 외쳤다. “오늘 이후 백마산장의 이름은 강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될 것. 모든 것은 자업자득 이니 본인을 원망치 말라!” 그 자리의 모든 사람들은 사검평이 내뱉은 이 한마디에 아연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경악은 곧 분노로 바뀌었고 그 중에서도 분면랑군 조태명의 분심(忿心)은 하늘을 찌를 정도 였다. 그는 인상을 크게 일그러뜨리며 이를 갈았다. “닥쳐라! 네놈이 무엇을 믿기에 감히 그 같은 헛소리를 지껄이는지 본 공자께서 손수 시 험해 보리라!” 분노에 찬 일갈과 함께 앞으로 나서는 그를 천왕도 황승국이 급히 만류했다. 하지만 이미 분심에 사로잡힌 조태명은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비키시오!” 거듭 간곡히 만류하던 황승국으로서도 마침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체념하는 대신 조태명에게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 “소장주, 정 그렇다면 먼저 노부가 그와 겨루도록 해주시오. 이로써 그의 허실을 살핀 후 에 상대해도 결코 늦지는 않을 것이오.” 그렇게까지 하는데 분면랑군 조태명으로서도 더 이상 거역할 수 없었다. 또한 그는 황승국의 심후한 무공에 일말의 기대하는 바도 없지 않았다. 사실 천왕도 황승국이야말로 자신은 물론 장주이자 부친인 경천검마 조지릉에 비해서도 결 코 큰 차이가 없음을 그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 황승국은 말이 총호법이지, 기실 경천검마 조지릉조차 형제처럼 대하고 자신은 깍듯이 숙부라고 호칭하는 처지가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언제나 본분을 잊지 않고 자신에게마저 수하로서 받들던 황승국. 그는 지금도 분면랑군 조태명이 젊은 혈기와 격정에 넘쳐 도발적 행동을 취하자 스스로 위 험을 가로막고 나섰던 것이다. “그럼……” 분면랑군 조태명은 더 이상 거역할 수 없어 서너 걸음 뒤로 물러났다. 사검평은 첫눈에 천왕도 황승국의 인물 됨됨이를 간파하고 있었다. 이는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먼저 그의 의연한 태도와 두 눈에 비치는 정광만 보아도 그가 다른 자들과는 달리 공명정 대한 협의지심의 소유자임을 꿰뚫어볼 수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사검평은 그로 인해 일시적이나마 작은 혼란에 빠졌다. 본시 그가 이곳에 왔을 때의 처음 생각은 강호의 암적 존재인 이곳 백마산장을 아예 흔적 조차 남기지 않고 초토화시킬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 천왕도 황승국의 사람됨을 보자니 과연 자신의 생각이 옳은 것인지 확신이 서 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쉽사리 포기할 수도 없는 일. 사검평은 한 가지 결심한 바가 있어 차갑 게 한마디 내뱉었다. “귀하가 감히 나의 상대를 자청하다니, 이는 정녕 스스로 죽음의 불길 속에 뛰어드는 격 이오. 그러나 그대의 행위만은 정녕 탄복할 만하오. 하여 한 가지 약속을 해주겠소. 만일 그대가 능히 나 의 일초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나는 더 이상 백마산장에 대해 살심을 품지 않을 것이오.” 그 말에 천왕도 황승국은 만면에 역력히 놀라는 빛을 떠올렸 그러나 이내 무시당했다는 수치심으로 인해 붉게 얼굴을 상기시켰다. 그가 비록 십대고인 중의 일인은 못 될지언정 그들과 비하면 별로 큰 차이가 없다고 자부 해 오던 터였다. 그런 자신으로 하여금 감히 일초지적도 안 되리라 서슴없이 내뱉다니…… 이보다 더한 치욕과 모멸의 조롱이 천하 어디에 또 있단 말인 분노와 적개심이 불길처럼 끓어올랐다. 하나 천왕도 황승국은 과연 노련한 노고수다웠다. 이내 냉정을 되찾은 그는 담담히 응수했다. “귀하가 그처럼 자신의 무공에 자신을 갖는다니 노부 또한 기꺼이 귀하에게 한 수 가르침 을 청하겠소. 다만 노부는 귀하가 스스로 한 언약을 지켜 주기 바라오.” “물론이오!” 천왕도 황승국은 가볍게 몸을 날려 사검평 앞으로 나섰다. 우뚝 버티고 선 그의 태도는 침착하기 이를 데 없어 은연중 크나큰 위엄을 풍기고 있었다. 사검평은 이처럼 침착 담대한 황승국의 태도를 보고 ‘과연 명가(名家)의 도량은 다르구 나!’ 하여 크게 감탄했다. 그는 본시 처음부터 멸정을 펼쳐 일거에 목적을 달성함으므로써 천하에 스스로 이름을 떨 칠 생각이었다. 하나, 천왕도 황승국의 기개를 보자 차마 그 같은 사람에게 어찌 살수를 쓰랴 하는 망설임 이 생겨났다. 그러나 그는 곧 마음을 굳게 다지며 낮고도 의연히 소리쳤다. “그럼 조심하시오!” 동시에 그는 재빠른 손길로 들고 있던 보퉁이를 풀어헤쳤다. 어느 사이엔가 그의 수중에는 한 자루 괴도(怪刀)가 들려 있었 천왕도 황승국 역시 자신의 병기를 뽑았다. 자신과 더불어 반평생을 함께했던 대도(大刀), 천왕도(天王刀)였다. 이미 어둠이 깃들인 장중의 사위로 도광이 시퍼런 불을 뿜었 황승국은 칼자루를 단단히 움켜잡으며 수비 자세를 취했다. 비록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마철 소나기일지언정 한 방울조차도 튀기지 못할 듯싶은 엄밀한 자세였다. 그러나 사검평이 흡혈마도의 칼자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싶은 순간, 그것은 너무도 허무 하게 무너지고 있었으니…… 천왕도 황승국은 전신을 짓누르며 휘감겨 오는 살기에 절로 몸이 굳어짐을 느꼈다. 그는 내심 경악해 마지않았다. 지금 자신에게 휘감겨 오는 살기야말로 자신이 지난 사십 년에 결쳐 무수히 겪었던, 어느 격전에서도 느껴 보지 못했던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포에 전율케 하는 이런 느낌조차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았 홀연, 흡혈마도에서 한 가닥 검붉은 기류가 안개처럼 피어올라 전신을 휘감는다 싶더니 수 백 줄기의 핏빛 도광이 마치 불꽃이 피어오르듯 무서운 기세로 쏟아졌다. “앗!” 황승국이 혼비백산하여 비명을 지르는 찰나, 그것은 어느 사이엔가 또다시 변하여 피의 소 나기인 양 거세게 쏟아지는 것이었 “아아……” 천지를 송두리째 집어삼킬 듯 쏟아지는 거세난망(巨勢亂罔)의 혈우(血雨). 황승국은 주위의 모든 빛이 차단된 채 오직 붉은 도강 속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길의 한가운데에 앉은 듯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그 는 오직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 “아아……” 절망과 체념 끝에 속절없이 비탄에 찬 신음만이 흘러나왔다. 이는 실로 무서운 고통이었다. 시시각각 죽음이 닥쳐 옴을 번연히 알면서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바로 그때였다. 엄밀히 그를 가두었던 핏빛 도기가 거짓말처럼 깨끗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천왕도 황승국은 여전히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 경세의 핏빛 도광 대신 한 가닥 이해할 수 없이 엄청난 힘이 그를 억눌렀기 때문이다. 사검평은 처음 그대로 무심한 듯 한가로이 서 있을 뿐이었다. 다만 아직 수중에서 거두지 않은 칼자루를 장난하듯 천천히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아……’ 황승국은 내심 절망의 탄식을 뿜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태산처럼 믿었던 스스로의 자부심이 얼마나 어리석었던 것인가를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나는 결코 살아날 수 없었다.’ 참담한 패배감이 그의 가슴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스스로 무림고수 중 일인으로 자처했던 내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인간이었나……’ 그러나 주위에 서 있던 분면랑군 조태명과 나머지 백마산장의 고수들은 영문을 몰라 다만 얼얼해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이 본 것은 단지 백의서생의 몸이 번뜩하며 홀연히 사라지던 것과, 한 가닥 붉은 기류가 황승국의 주위를 감쌌다가 이내 사라진 것뿐이었다. 더구나 이것은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았고 장중의 상황은 곧 본래대로 돌아왔다. 한 순간 사라졌던 백의서생도 어느덧 다시 나타나 유유히 서 있었다. 다만 천왕도 황승국만이 우뚝 선 채 얼굴에 무상하기 이를 데 없는 희로애락의 표정을 반 복하는 것이었다. 중인들은 대체 그 이유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천왕도 황승국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노부는 공자의 적수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하오. 다만 공자께서 손끝에 인정을 남기기만 원할 뿐이오.” 갑자기 십 년은 더 늙은 듯, 그의 얼굴에는 짙은 주름살이 새겨졌다. 이어서 그는 분면랑군 조태명을 향해 포권의 예를 취했다. “소장주, 노부는 지난 이십 년간 이곳 산장에 머물며 너무도 많은 신세를 졌소이다. 그러 나 이제 힘이 없어 더 이상 백마산장을 위해 일할 수 없으니 심히 죄송스런 마음이외다.” 분면랑군 조태명을 위시하여 모든 중인들이 안색을 변하였다. “황 숙부…… 갑자기…… 왜?” 황승국의 표정은 너무나 진지했다. “소장주, 노부가 이십 년간의 정리(情理)로 마지막 충고를 간하겠소. 만일 오늘의 위기를 넘기려 한다면 스스로 본 장을 해체하고 그 동안 끌어들였던 흑도의 고수들을 모조리 돌려 보내는 방법밖에는 없을 것이오이다. 이것은 노부의 마지막 충절이니 소장주는 부디 귀담아 들어 주시기를……” 그는 갑자기 신형을 크게 휘청했다. “황 숙부!” 분면랑군 조태명이 깜짝 놀라 황급히 부축했다. 하나 이때 이미 황승국의 입에서는 한 줄기 선혈이 울컥 솟구치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 안간힘을 다하여 입을 열었다. “노부는 이미…… 스스로 심맥을 끊은지라…… 대라금단(大羅金丹)이라도…… 회생시킬 수 없소…… 소장주께서…… 노부의 마지막 충고를 받아들여…… 부친이 삼십여 년의…… 각 고 끝에 쌓아 올린 가업을……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만들지 않기를…… 크윽……” 그는 말을 맺지 못한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 광경을 주시하던 사검평은 내심 감동을 금할 수 없었다. 어리석은 젊은 주인을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스스로 죽음으로써 간한 천왕도 황승국의 충정에 그는 절로 머리가 숙여졌던 것이다. 2 분명낭군 조태명은 느닷없이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그의 광소가 어찌나 흉살스러운지 주위에 있던 백마산장의 고수들마저 몸을 떨 지경이었 다. 조태명의 눈에서는 시퍼런 불꽃이 이글거렸다. “으하하하…… 네놈이 석문이흉을 살해하더니 이번에는 황 숙부의 목숨마저 앗아 갔구나! 분명낭군 조태명은 피로써 맹세하나니, 기필코 네놈과는 같은 하늘 아래에서 숨쉬지 않을 것이다.” 이어 그는 성난 야수처럼 부르짖었다. “뭣들 하고 있는가? 저자는 본 장과 불구대천의 원수이니 모두 덤벼 사정없이 주살하라!” 이는 정녕 뜻밖의 말이어서 장중에 있는 백마산장의 고수 십여 명은 아연 실색하였다. 사실 무림에서 정예급의 고수 십여 명이 한 사람을 상대로 한꺼번에 덤빈다는 것은 범할 수 없는 금기(禁己)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소장주의 신분인 분면랑군 조태명의 추상같은 엄명이었던지라 감히 거역할 수 없었 다. 그들은 소리없이 각자의 병기를 뽑아 든 채 백의서생 주위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흉흉한 살기 속에서 일촉즉발의 위기만이 엄습해 왔다. 하나 사검평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들 십여 명의 고수들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여전히 싸늘하고 냉막한 표정이었다. 긴장은 더욱 고조되어 갔다. 백마산장의 고수들은 사검평을 에워싸기만 했을 뿐, 그 누구 하나 선뜻 덤비려는 자가 없 었다. 무형중에 사검평의 전신으로부터 발산되는 극도의 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쭈뼛쭈뼛 서로의 눈치만을 살필 뿐이었다. 평소 존경했던 황승국의 죽음으로 인해 완전히 이성을 잃고 있던 조태명은 수하들이 즉시 주살하라는 자신의 명을 이행치 않고 쭈뼛쭈뼛 서로의 눈치만을 보자 눈이 뒤집혔다. “네놈들이 감히……!” 그는 벼락같이 소리치며 몸을 솟구쳤다. 순간, 허공으로 한 줄기 예리한 검광이 은빛 무지개를 그렸다. “아악!” “으악!” 순식간에 두 명의 수하가 일도양단(一刀兩斷)되어 바닥을 뒹굴었다. 피구름이 회오리처럼 피어올랐다. 뜻밖의 사태에 모든 사람들이 경악하여 숨을 들이켰다. 분면랑군 조태명은 핏발이 곤두선 눈길로 수하들을 노려보며 발악하듯 소리쳤다. “그 누구든 본인의 명을 거역한다면 이자들의 꼴을 면치 못할 것! 죽고 싶은 자는 언제든 말하라!” 그 기세가 실로 흉험했는지라, 십여 명의 고수들은 한차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어 이를 악물고 일제히 덮쳐 가니 장중에는 삽시간에 광풍노도가 휘몰아치는 듯하였다. 검(劍), 도(刀), 삭(索), 과(戈), 편(鞭) 등의 갖가지 무기가 한번 에 어지러이 부딪쳐 갔다. 도저히 빠져 달아날 틈이 없는 듯했는데…… 돌연, 그들의 눈앞에서 백의서생의 자태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대신, 검붉은 적환이 거대하게 일어나며…… 우르릉! 그들 모두는 지옥의 억겁 불길 속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으아악……” “아아악……”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 소리들…… 그리고 그것은 이내 잠잠해졌다. 순간, 괴기 서린 공포의 적막이 장중을 지배했다. 죽음의 장중, 살아남은 자는 오직 백의서생과 아연 넋을 잃고 있는 분면랑군 조태명뿐이었 다. 그토록 흉흉히, 기세도 당당하게 덮쳐 오던 백마산장의 고수들이었건만 지금은 형체조차 찾 기 어려운 시체로 나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십여 명 그 하나하나가 모두 단칼에 전신이 두 동강난 채 처참한 몰골로 핏물 속에 잠겨 있 었으니, 지옥인들 이보다 더 참혹스럽지 않을 것이었다. 분면랑군 조태명이 얼빠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단 말인가?” 공포에 질린 그에게 사검평이 냉랭히 말했다. “분면랑군 조태명, 너는 황승국이 목숨을 걸고 간했던 충고를 들었어야 옳았다. 정녕 어리석게도 한때의 격분을 이기지 못해 이들의 아까운 생명만 속절없이 쓰러지지 않았더냐? 이제 너를 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각오하라!” 뼛속까지 에어 들 만큼 차디찬 어조에 조태명은 비로소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제 와서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떨리는 와중에도 인상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크게 외쳤다. “좋다! 네놈이 끝까지 본 장과 맞서려 한다면 나 분면랑군 조태명도 결코 순순히 당하지만 은 않을 것이다.” 그는 피가 흐르도록 부드득 이를 갈았다. “본 장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해주마!” 말을 끝맺는 순간, 휘익! 그는 날카로운 휘파람을 날렸다. 그러자 사방에서 강전(鋼箭)이 소나기처럼 쏘아져 오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그 화살은 추궁노(追弓努)라는 기계에 의해 발사된 것이었다. 그 위세야말로 자연 강맹하기 이를 데 없었고 철포삼 정도의 호신강기 따위는 그 앞에 한 낱 물거품에 지나지 않은 무서운 위력이다. 하늘이 온통 추궁노의 화살로 뒤덮였다. 이는 실로 피할 수 없는 위기의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사검평은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차디찬 냉소를 내뿜었을 뿐…… 전신이 강전에 꿰뚫릴 순간, 그는 가볍게 소맷자락을 휘둘렀다. 그러자…… 대체 이 어찌 된 조화인가? 그토록 새까맣게 하늘을 메우며 날아들던 화살이 모두 그의 소매속으로 빨려 들지 않는가. 다음 순간, 그는 다시 한 차례 소매를 펄럭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화살이 일제히 방향을 바꿔 반대 반향으로 유성처럼 날아갔다. 수천 수만의 꽃잎이 춘풍에 휘날리는 듯 눈부시게 날아가는 장관이 펼쳐지는 순간, “으아악……” “끄아악……” 사면팔방으로부터 처절한 비명이 연거푸 터져 나왔다. “하하하……” 사검평은 득의하여 싸늘히 웃었다. 분면랑군 조태명은 마지막 혼백마저 빼앗긴 듯하였다. 연이어 터지는 비명 소리야말로 그의 심장을 갈가리 찢는 소리였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망연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분면랑군 조태명은 발악하듯 소리쳤다. “본 장의 고수들은 모두 나와 이자를 주살하라!”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면팔방으로부터 수백 명의 고수들이 벌떼처럼 몰려나왔다. 그들의 손에 들린 갖가지 병장기로 하여 장중은 삽시간에 도검(刀劍)의 숲을 이루었다. 흉흉한 살기를 돋운 채 그들은 사검평을 숨쉴 틈 없이 에워쌌 그러나 사검평은 여전히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더 냉막하게 안색을 굳혔다. 극도의 긴장이 흘렀다. 마침내 잠시 후면 공전절후(空前絶後)의 대혈겁이 벌어지려는 찰나였는데…… “잠깐만 멈추어라!” 뇌성벽력인 듯 크고 우렁찬 외침이 터져 나오지 않는가! 장중의 그 누구도 예기치 않았던 일이어서 흠칫 손을 멈추고 일제히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 았다. 사검평 역시 의외의 일이어서 무심히 소리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 사이에 나타났는가? 그의 눈에 한 사람의 거지가 기이한 모습으로 서 있는 게 보였 더구나 그는 어느 틈엔가 분면랑군의 완맥을 낚아채 제압한 채로 서 있지 않는가? 사검평의 눈이 일순 기이한 신광을 발했다. 정체불명의 늙은 거지는 빙그레 웃으며 조태명에게 말했다. “애송아, 너는 저기 소형제의 주위를 에워싼 무리들에게 속히 물러나라고 말하여라!” 분면랑군은 크게 낭패한 표정으로 주춤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늙은 거지가 나직이 웃으며 움켜쥐고 있던 손에 가볍게 힘을 주었다. 순간, “아악……” 분면랑군 조태명은 자지러지듯 비명을 질러댔다. 자신의 피가 일시에 역류하듯 무서운 고통이 엄습해 왔기 때문이다. “으으으……”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의 얼굴에서는 땀이 샘솟듯 흘렀다. 마침내 그는 고통에 못 이겨 수하들을 향하여 황급히 소리쳤 “무…… 물러나라!”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백마산장의 수하들은 썰물이 빠지듯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늙은 거지가 침중한 어조로 덧붙였다. “단순히 몇 발짝 뒤로 물러서서는 안 되지…… 애송이, 너는 어서 속히 저들을 아예 눈에 안 띄게 꺼져 버리라고 말하렴!” 분면랑군은 주춤하였다. 그러나 말을 듣지 않으면 또다시 무서운 고통에 시달릴 것이므로 황급히 소리쳤다. “귀가 먹었는냐? 속히 이 자리에서 사라져 버려라!” 신경질적으로 소리치자 백마산장의 수하들은 순식간에 흔적조차 없이 물러나고 말았다. 이때까지 말없이 지켜보던 사검평은 그제서야 냉랭히 입을 열었다. “당신이 이들을 물러가게 한 것은 내가 행여라도 그들 손에 다칠까 봐서요?” 그러자 늙은 거지는 갑자기 앙천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천만에! 자네는 속단하지 말게. 노부야말로 그들이 모두 한꺼번에 덤빈다 해도 자네의 옷깃 하나 스치지 못할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네.” 이것은 정녕 뜻밖의 말이어서 사검평으로서는 아연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곧 본래의 냉막한 표정으로 되돌아와 싸늘한 어투로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들이 나의 손에 몰살당할 것을 염려해서요?” 늙은 거지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네, 노부는 진정 그들 모두가 자네의 손에 처참하게 떼죽음 당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던 것이네.” 사검평의 얼굴에 싸늘한 한기가 감돌았다. “당신이 그것을 가로막고 나섰으니 필경 나를 상대할 자신이 있기 때문이겠구려!” 늙은 거지는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천만에! 나 무영마개(無影魔 ) 유단(兪丹)이 무슨 배짱으로 염라천존의 전인에게 대항할 생각을 하겠는가?” 사검평이 그 말에 흠칫 놀랐다. “당신은……?”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가장 소스라치게 놀란 자는 분면랑군 조태명 바로 그였다. 여전히 늙은 거지에게 완맥을 잡힌 채로 그의 얼굴은 경악에 질려 무섭게 일그러졌다. 무영마개(無影魔 ) 유단(兪丹)! 바로 자신의 부친 경천검마와 더불어 무림삼마(武林三魔) 중의 일인이 아니던가! 비록 무림삼마란 동렬로 불려진다 할지언정 삼마 중 말석의 지위인 경천검마는 결코 비교조 차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것은 무영마개가 강호제일의 성세를 자랑하는 개방( 幇)에서도 방주의 사숙(師叔)이었으 니, 어찌 그 배분에 있어 경천검마 조지릉 따위와 비교하랴! 더구나 그는 나이마저 백여 세에 이르러 모든 무림인으로부터 추앙받는 강호제일의 절세고 인이 아니던가? 그의 별호에 마(魔) 자가 붙게 된 연유는 오직 그의 무공이 입신(入神)의 경지에까지 이르 렀기 때문이다. 이미 등봉조극, 노화순청의 경지에 달한 그의 경공조예는 언제 어디서나 상대를 단 일 격에 죽이고도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고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었다. 무영마개라는 색다른 별호는 바로 이런 까닭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이런 내력을 알고 보면 별호에서 풍기듯 그가 결코 악한 인간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었 다. 아니, 오히려 그는 악을 원수처럼 미워하는 강호제일의 협의기인이었다. 분면랑군, 아비의 위세를 믿고 천방지축 날뛰던 이 철부지 애송이는 자신의 완맥을 쥔 장 본인이 스스로 무영마개라 밝힘에 실로 경천동지할 만큼 자지러졌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경악한 이유가 단순히 이것만은 아니었다. 바로 목전에 선 백의서생, 그가 바로 백년 전 전설과 같은 대마두 염라천존의 제자라 니…… 분면랑군 조태명은 눈앞이 아찔하고 전신의 힘이 쭉 빠졌다. 만일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의 부친인 경천검마가 이 자리에 나타난다 하여도 백마산장은 결코 궤멸의 운명을 면치 못할 것이 아니겠는가! “아아……” 분면랑군 조태명은 헤어날 길 없는 절망에 사로잡혀 탄식을 토해 냈다. 사검평은 입가에 한 가닥 신비스러운 미소를 떠올리며 무영마개에게 말했다. “당신이 단번에 나의 내력을 밝힌 것으로 보아 귀하의 견문이 넓음을 인정하오. 그러나 일 단 내 마음이 결정된 이상 그 누구도 막을수 없다는 사실은 생각해 보지 않았소?” 무영마개가 침중히 반문했다. “그렇다면 그대는 기어이 이 애송이 분면랑군에게 살수(殺手)를 펼칠 셈인가?” 사검평은 차갑게 대꾸했다. “나는 본시 같은 말을 두 번 뱉는 성격이 아니오. 이렇게까지 경고한 이상 만일 귀하가 끝까지 나의 일에 참견하려 한다면……” 그는 말끝을 흐리며 대신 얼굴에 예의 신비로운 미소를 다시 떠올렸다. 그러나 그 웃는 얼굴과는 달리 그의 아름답기조차 한 두 눈에서는 너무도 차가운 한광이 흘렀다. 무영마개 유단은 얼굴을 크게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그대의 뜻이 정 그렇다면 노부로서도 할 수 없는 일이겠지. 좋네. 노부는 더 이상 개의치 않고 이 자리에서 물러나겠네.”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흡사 유령과도 같이 홀연 사라지고 말았 분면랑군 조태명은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에 망연자실할 뿐이었 그러나 어찌 이대로 순순히 죽을 수 있겠는가! 일순, 그의 얼굴이 비장한 결심으로 시퍼렇게 빛났다. “오냐, 나는 네놈의 소원대로 이미 죽음을 각오하였다…… 그러나 너는 명심하라! 나는 비 록 지금 네놈의 손에 죽을지언정 천하무림의 동도들은 살인마왕의 후예인 네놈을 결코 용서 치 않으리라!”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는 들고 있던 검을 전력으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경천검마의 독문절학 경천검법이 그 위세를 떨치기 시작한 것이다. 일순, 조태명은 찬란한 검광에 둘러싸인 채 사검평을 향해 쏘아 갔다. 하나, 이것은 흡사 계란으로 바위를 치듯 지극히 무모한 일이었다. 사검평은 무심한 표정으로 주시하다가 한 가닥 싸늘한 미소를 머금으며 가볍게 피하는 것 이었다. 전력으로 덮쳐 가던 위세였건만 조태명의 검은 헛되이 허공만 스쳤을 뿐이었다. 그는 크게 낭패한 모습이었다. 일시에 숨이 턱에까지 차 올랐다. 그러나 결코 이대로 순순히 죽음을 기다릴 수는 없는 일. “죽어랏!” 정신없이 외치며 미친 듯이 검을 휘둘러 눈 깜짝할 사이에 십삼 식의 검초를 모조리 쏟아 냈다. 그러나 그의 검은 사검평의 옷자락도 건드리지 못하고 허공을 스칠 뿐이었다. 기혈을 다스리지 못한 채 무모하게 검법을 구사한 조태명은 마침내 지쳐 버렸고, 울화가 뻗 친 나머지 발악하기 시작했다. “천하에 악독한 놈아, 네가 한시라도 속히 나를 죽이지 않고 이렇듯 희롱만 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냐?” 사검평은 싸늘한 어조로 비웃었다. “네놈은 눈 하나 까딱 않고 수하들을 죽음 속으로 몰아넣었으면서 자신이 죽음의 공포 앞 에 직면하자 그 누구보다 겁내는구나.” 정곡을 찔린 조태명은 더욱 크게 외치며 검을 휘둘러댔다. “닥쳐라! 이미 죽음을 각오한 몸, 어찌 죽음이 두려워 네놈 앞에서 추태를 보이겠느 냐?” 정녕 생사를 도외시한 걷잡을 수 없는 공세였다. 하지만 사검평을 어떻게 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한동안 헛된 힘을 쏟아 붓던 조태명은 갑자기 뒤로 일 장쯤 물러섰다. 사검평은 여전히 차가운 냉소를 머금은 채 싸늘한 시선으로 조태명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 다. 분면랑군 조태명이 느닷없이 광소를 터뜨렸다. “으핫핫핫…… 네놈이 바라는 바가 무엇이냐? 나 분면랑군 조태명이 무릎 꿇고 혀로써 네 발바닥을 핥으며 목숨을 구걸하길 기다리는 것이냐? 으핫핫핫…… 오냐, 내 저승에 한걸음 먼저 가서 네놈이 올 때를 목놓아 기다리마.” 그는 진정 미쳐 버린 것 같았는데…… 한동안 광기 어린 눈초리로 사검평을 노려보던 그는 들고 있던 검으로 자신의 목을 관통시 켜 버리고 말았다. 최후로 그는 입술을 달싹이며 몇 마디 저주를 퍼붓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입에서만 맴돌았을 뿐이었다. 콰당! 분면랑군 조태명은 마침내 쓰러지고 말았다. 진정 비참한 최후였다. 사검평은 일말의 동요도 보이지 않은 채 조태명의 주검을 바라보다가 허공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나의 이 처사에 대해 귀하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의 주위 사방 십 장 이내에는 그 누구도 없는 것 같았다. 한데 사검평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하하하…… 역시 자네의 눈을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군.” 일성 낭랑한 웃음과 함께 어느 사이엔가 그 앞으로 한 인영이 표표히 내려섰다. 그는 조금 전에 사라졌던 무영마개가 아닌가? 무영마개는 장중에 내려서기 무섭게 정색하며 말했다. “노부는 자네가 이 정도로 살생을 그만두길 바라네.” 사검평은 아무런 대꾸 없이 몸을 움직여 걷기 시작했다. 신농의 미주 한 말에 십관문 함양의 유협엔 소년이 많도다 서로 만나 의기를 존중하여 그대를 위해 마시노라 하는데 말은 높은 누각 앞의 수양버들에 매여 있네 新豊美酒斗十于 咸陽遊俠多少年 相逢意氣爲君飮 擊馬高樓垂柳邊 홀연, 사검평의 입으로부터 시 한 구절이 낭랑히 흘러나왔다. 동시에 그는 천천히 걸어 아름다운 정원 사이를 거닐었다. 낭랑한 음성, 처연한 표정…… 그의 면모 어디에서 조금 전 희대의 살인마처럼 피에 굶주렸던 모습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 는가? 사위는 이제 칠흑 같은 어둠에 묻혀 장원 곳곳의 궁등(宮燈)만이 붉게 타오를 뿐이었다. 그 빛 아래 한가로이 거니는 사검평은 정녕 유가(儒家)의 한 서생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이를 주시하는 무영마개는 더욱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것은 일견하여 유유자적한 듯한 사검평의 태도에서 은연중 태산이라도 들어 누르듯 엄 청난 압박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무영마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짐짓 한가로이 시구를 읊조리는 저 준미한 용모의 미장부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이곳 백마 산장 안의 모든 생명을 몰살시킬 수도 있음을…… 사검평은 나직이 한 수의 시구를 읊조리고 나서 해연히 걸음을 멈추었다. “나 염라서생(閻羅書生)은 오늘 기필코 백마산장을 피로써 씻으려 하였으나 무림의 노선배 께서 극구 만류하니 한줌의 인정을 베풀겠소. 그러나 경천검마 조지릉이 오늘의 일로 인하여 본인에게 복수를 원한다면 언제라도 기꺼이 맞아 줄 것이오.” 돌아보지 않은 채 독백하듯 중얼거린 그는 마치 한 가닥 연기인 양 나는 듯 산장 밖으로 사라졌다. 무영마개는 그가 이처럼 홀연히 사라질 줄은 몰랐는지 당황한 표정이었다. “엇!” 당황한 신음을 토하더니 자신도 지체하지 않고 신형을 날려 어디론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백마산장은 잠시 기괴한 침묵에 빠졌다. 약 일 각쯤 지나서야 두려움에 떨던 수하들이 쭈뼛쭈뼛 나타났 그들은 정녕 악몽을 꾼 듯 두렵고 어이없는 표정이었다. 대체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성세를 구가하는 백마산장에 난데없이 나타난 한 명의 살성(殺星)으로 인해 소주를 잃었으 니…… 그러나 누구 하나 입을 벌려 말하는 자가 없었다. 이번에 나타난 백의서생이 백년 전 강호에서 신비와 의혹 속에 실종되었던 염라천존의 전인 임을 그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 염라천존! 비록 백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지났건만 여전히 죽음과 공포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이름. 사실 그 이름이 이들 백마산장 고수들에게 준 충격과 공포야말로 상상을 절할 만큼 크고 강 렬했다. 어찌 두렵지 않으랴! 백년이 지나면서 이제는 어느 정도 서서히 잊혀져 가던 공포의 화신 염라천존이었는데, 이 렇듯 난데없이 그 전인인 염라서생이 출현하다니…… 그들은 마치 염라천존의 망령이라도 되살아난 듯 언제까지나 충격과 공포에서 헤어날 줄 몰랐다. 어찌 그들만이 경악하고 그들만이 공포에 짓눌리랴! 오늘 이 일말의 사건이야말로 미구에 강호 천지에 퍼져 나가 삽시간에 전강호를 공포와 전 율 속으로 휘몰아넣을 것이었다. 第 六 章 십대고인(十大高人) 1 멀리 동녘으로 타는 듯 붉은 태양이 불쑥 솟아오르는 시각. 이곳은 백마산, 길게 뻗친 준령 칠십이(七十二) 봉(峯) 중의 주봉(主峯) 옥석봉(玉石峯)의 정 상(頂上)이었다. 금빛 양광을 온몸으로 받으며 장승처럼 서 있는 한 명의 백의인(白衣人)이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은 결심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나 사검평은 어제의 일에 관해 더 이상 후회하지 않으리…… 조태명, 그자는 정녕 죽어 마땅한 자였다…… 그같이 부친의 위세를 믿고 온갖 행패를 저지른 자가 만일 지고무상한 절기라도 갖추게 된다면 그 훗날 그 누가 있어 그따위 만행을 저지할 것인가?” 그는 어젯밤 분면랑군 조태명을 죽인 일에 대해 내심 갈등과 번민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분면랑군이 비록 극악무도한 자라 하나, 그 역시 인간이었다. 아무리 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나 그것은 사검평의 핍박을 이기지 못해서였으니, 결국 사검평이 살생을 한 결과였다. 일말의 자책과 번민이 없을 수 없었다. “악인을 제도(濟度)하기 위해서는 그들보다 더욱 무서워져야 한다고 사부님께서 말씀하시 지 않으셨던가. 어제의 일은 이제 잊기로 하자.” 멀리 솟아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자위의 말을 흘리던 그의 눈빛이 갑자기 싸늘하게 빛났 다. 그는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낮게 외쳤다. “무영마개, 당신이 이렇듯 끝까지 나의 뒤를 따름은 기어이 나와 일전을 겨루고 싶어서 요, 아니면 혹 무슨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거요?” 그러자 일성 청아한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하하하…… 기어이 들키고 말았군. 그러나 노부는 개방 전체의 운명마저 좌우할 불장난에 선뜻 뛰어들 바보는 아니라네.” 때마침 솟아오르는 황금빛 아침 햇살 사이로 무영마개가 번뜩 모습을 나타냈다. 사검평이 비로소 뒤돌아섰다. 황금빛 햇살이 후광처럼 그의 등뒤에서 찬란히 빛났다. 그는 담담한 눈빛으로 무영마개를 주시하며 말했다. “당신은 아직 내 뒤를 밟는 데 대한 해명을 하지 않았소!” 무영마개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것은 사 소협이 염라서생이기 때문일세.” “당신의 말뜻이 무엇인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소!” 무영마개가 빙그레 웃었다. “앞으로 강호에서 염라서생이라는 이름은 경천동지의 위세로 떨쳐 울릴 것일세.” 그는 의미 심장한 시선으로 사검평을 주시하며 이어 말했다. “그러나 염라서생이 제아무리 경세무적의 신공을 지닌 무림고수라고 할지라도, 만일 천도 (天道)를 어기고 천하를 도탄에 몰아넣는 만행을 자행한다면 모든 무림인의 지탄을 받아 필경 자멸하고 말 것일세.” 무영마개의 노안에서는 범할 수 없는 위엄이 흘러나왔다. “다행히 소협은 왕년의 염라천존과는 달리 무자비한 살수를 펼치지 않을 것 같아 일말의 안도감을 가질 수 있었네. 그러나 소협의 성품을 모르는 채 출신사문만 따지고 드 는 사람이라면 소협을 살귀로 몰아붙일 것이 뻔하네. 노부는 그런 오해로 인한 불상사를 막 아 보려는 것일세.” 사검평은 싸늘한 안색으로 말했다. “사부님께서 강호를 횡행하실 때 많은 사람을 상대로 손속에 인정을 두시지 않았다는 사 실은 나도 잘 알고 있소. 만약 그들이 그 일로 인하여 나를 찾는다면 언제든 응할 것이오. 하지만 그 결과는 이 흡혈마도가 말할 것이오!” 그는 금색 비단보자기로 감싼 흡혈마도를 가볍게 건드렸다. 순간, 무영마개는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찬물을 뒤집어쓴 듯 싸늘한 한기에 사로잡혔다. 아득한 절망감이 노도처럼 눈앞으로 밀려들었다. 사검평은 자리를 뜰 듯 신형을 돌려 세우며 말했다. “어쨌든 노선배의 충고는 잘 들었소. 더 이상 할말이 없다면 나는 이만 떠나야겠소!” 그가 발끝에 힘을 실으려는 순간이었다. “잠깐!” 사검평은 우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무영마개의 목소리가 어깨를 넘어왔다. “소협은 진정 사부의 전철을 그대로 답습(踏襲)할 생각인가?” 사검평이 차분한 어조로 대꾸했다. “천하인들의 생각이 어떤지는 몰라도 내가 알고 있는 사부님은 훌륭한 분이시오. 나는 그 분께서 못다 하신 일을 마무리 지을 참이오.” 말을 마치는 순간 그의 신형은 이미 산비탈을 쏘아 내려가고 있었다. 그의 몸은 한 가닥의 섬광인 양 아침 안개를 뚫고 산 아래로 까마득히 사라졌다. 무영마개는 아연 넋을 잃고 바라볼 뿐이다. 두려움과 절망의 기색이 역력한 눈빛으로…… “백년간 조용하던 무림에 또 한바탕 피의 선풍(旋風)이 휘몰아치려는가? 저 젊은이가 왕 년의 염라천존이 갔던 길을 답습한다면 과연 그 누가 있어 그를 제지하겠는가! 당금 강호의 제일고수라 일컬어지는 벽혈신군(碧血神君) 유천화(劉天華)라 할지라도 이 일만은 결코 막지 못할 것이다.” 산봉을 뒤엎은 자욱한 아침 안개만큼이나 그의 심경은 어둡고 침침했다.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던 그는 사검평이 사라졌던 방향으로 훌쩍 몸을 날렸다. * * * 섬서성(俠西省)과 경계하여 제법 번화한 성세를 자랑하는 성도(城都) 진전(鎭田). 성내(城內)를 동서로 양분하여 가로지르는 가로(街路)의 양 연변에 화려함을 자랑하는 이층 누각들이 처마를 맞대고 들어서 있었다. 대로에도 역시 많은 노점들이 늘어서서 갖가지 물건을 팔고 있었으니 비록 작은 성도이나 그 번성함을 알 수 있었다. 진전에서도 가장 번화한 이곳 동쪽의 가로(街路)에는 찌는 듯 무더운 날씨도 아랑곳없이 많은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갖가지 물건을 사고 파느라 사람들은 저마다 떠들썩했는데…… 구름처럼 운집해 있는 인파 속에서 사검평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수많은 사람들 중에 묻혀 있어도 그의 모습은 뚜렷하게 돋보였다. 군계일학(群鷄一鶴). 헌앙한 모습에 매료된 뭇 사람들의 눈길이 끊임없이 그에게 쏟아졌다. 그러나…… 정작 장본인인 사검평은 주위의 시선을 전혀 의식 못 하는 듯 태평하고 무심한 모습이었 다. 그는 부모님을 뵙기 위해 장안(長安)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폭양(曝陽)도 마침 중천을 지나는 중이라서 약간의 시장기가 들었다. 하여 간단히 요기도 할 겸, 또한 전부터 들어 왔던 진전 일대의 풍물도 살피기 위해서 이 곳 복잡한 거리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 이곳 진전이 아무리 번화하다 해도 그가 태어나고 자란 장안에는 미치지 못했다. 장안은 누대에 걸쳐 왕조(王朝)의 성도였고, 진전은 비록 문물의 집산지이나 변방의 일개 성에 지나지 않았으니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더 이상 구경할 것도 없고 하여 요기를 할 만한 마땅한 음식점을 찾고 있을 때였다. 길 옆에서 갑자기 왁자지껄 일대 소동이 벌어지지 않는가. 사검평은 무심결에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눈앞 십여 장쯤에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크게 웃기도 하고 박수를 치기도 하여 심히 소란스러웠다. 사검평은 의아심이 솟구쳤다. 그는 소동이 벌어진 곳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선 곳은 ‘영승루(永勝樓)’라는 현판이 붙은, 제법 화려하고 그럴듯한 음식점 앞이었다. 나이 십사오 세쯤의 남루한 옷차림에 왜소한 체구의 거지소년 하나가 그보다 서너 살 위의 점원과 시비를 벌이는 중이었다. 한데 거지소년은 그 몰골부터 가관이었다. 세상에, 아무리 거지라 해도 이처럼 남루한 자가 그 어디에 또 있을 것인가? 염천(炎天)의 이 더위 속에서도 엄동설한에나 입을 두꺼운 솜옷 차림이었는데, 그나마도 낡 고 더러워 옷이라 할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한술 더 뜨는 것은 그의 얼굴이었다. 이목구비조차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때에 절어 있었고 손발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 정녕 까마귀같이 까맣고 더러운 위에 체구마저 작고 볼품없어 우스꽝스러운 몰골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거지소년은 그 겉모습과는 달리 제법 위풍도 당당했다. 그것도 저보다 배나 커보이는 점원의 면전에서 허리에 척 손을 얹고 생사판관이나 되는 듯 준열(峻烈)하게 호통치고 있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던 걸음을 멈추고 환호와 박수를 보낸 것은 필시 이 거지소년의 겉모양 과 다른 당당한 태도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사검평 역시 이러한 거지소년의 모습에 한 가닥 호기심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사람들 틈에 섞여 소년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이때에도 역시 거지소년은 준열한 음성으로 눈앞의 점원를 꾸짖는 중이었다. “네가 겉모습만을 보고 사람을 평가하여 본 공자를 괄시하구나! 그러나 이는 너의 크나큰 잘못이다. 본 공자가 비록 행색은 남루하다 하나 일신(一身)에 만금(萬金)을 지녔으니 오늘 은 이곳 영승루에서 꼭 맛있는 음식을 즐겨야겠다!” 점원의 태도는 완강했다. “어림 반푼 어치도 없는 소리 말아라! 흥, 본 나으리가 강호에서 눈칫밥을 한두 해 먹은 줄 아느냐? 너 같은 비렁뱅이는 하루에도 수십 명이나 보아 와서 이젠 아예 꼴도 보기 싫단 말이다!” 그는 잠시 말을 끊고 거지소년의 아래위를 한번 쭈욱 훑어보았 그리고 이내 어이없다는 듯 냉소를 날렸다. “흥, 한데 너같이 뻔뻔스러운 자는 역시 처음이다. 만일 이곳 진전이 천자(天子)의 국법 (國法) 아래 있지 않았다면 너는 벌써 이 나으리의 손에 박살이 났을 것이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며 퉤퉤, 침을 내뱉었다. 이에 거지소년도 기어이 울화통을 터뜨렸다. “곰보다도 미련한 자식! 그렇게 타일렀건만 감히 깨닫지 못하고 본 공자를 비렁뱅이라 부 르다니…… 이는 본 공자에 대한 크나큰 모욕이니 정녕 참을 수 없다!” 사납게 내뱉기 무섭게 다짜고짜 점원의 뺨을 후려갈겼다. 찰싹! 순간, 점원은 뒤로 벌렁 자빠졌다. “어이쿠!” 그의 입에서는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하하하……” “으하하하……” 주위의 구경꾼들이 배꼽을 잡고 박장대소했다. 어찌 우스꽝스럽지 않으랴! 자신을 비렁뱅이로 불렀다고 화를 내는 거지도 우습거니와, 왜소하기 짝이 없는 소년에게 겨우 뺨 한 대를 얻어맞은 것으로 나가떨어지는 점원의 모습도 진정 배꼽을 잡을 일이었다. 점원은 나가떨어졌다가 시근벌떡 황소처럼 숨을 몰아쉬며 벌떡 일어섰다. 다행히 다친 데는 별로 없는 듯 뺨에 벌건 손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다치고 안 다쳤음이 문제랴! 극도의 수치감과 누를 수 없는 분노에 본시 검게 탔던 점원의 얼굴이 더욱 검붉게 변하였 다. “이 대대로 거지질이나 할 놈아! 내 네놈을 묵사발로 만들어 놓지 않는다면 정녕 사람의 자식이 아니다!” 그는 흉흉한 기색으로 이를 악물었다. 그 기세가 당장이라도 거지소년을 때려죽일 듯했다. 그러나 거지소년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흥!” 오히려 오만하게 코방귀를 날릴 뿐이었다. 이에 점원은 더욱 분노했다. “각오해라! 형편없는 거지새끼!” 성난 황소처럼 달려들려는 찰나, 나직한 호통성이 터져 나왔다. “멈추어라!” 그를 제지하고 나선 것은 바로 사검평이었다. 금방이라도 거지소년을 때려죽일 듯하던 점원이었으나 난데없이 출현한 백의서생의 제지에 움찔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못내 분을 삭일 수 없던 모양으로 여전히 숨을 몰아쉬었다. 하나 역시 점원의 신분이었던지라 함부로 불손하게 굴 수는 없었던지, “공자께서는 뉘신데 이 언쟁에 간섭하시오?” 하고 불만이 그득한 음성으로 물어 왔다. 사검평이 담담히 대꾸했다. “여기 있는 이분 소형제는 나의 귀빈이시니 이 영승루에 못 들어갈 이유가 없네.” 이에 점원은 크게 놀랐다. “하, 하지만……” 사검평은 짐짓 안색을 싸늘히 하며 말했다. “설마 본 공자마저 영승루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는 것은 아니겠지?” 순간 점원은 태도를 돌변시키며 굽실거렸다. “헤헤헤……” 얼굴에 한 가닥 미소마저 떠올리고 지극히 정중하게 사검평을 맞았다. “무슨 말씀을…… 공자께서 본 영승루를 찾아 주셨음은 오히려 크나큰 영광입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역시 강호의 주루에서 잔뼈가 굵은 자다웠다. 사검평은 내심 고소를 금치 못하며 거지소년에게 말했다. “하하…… 소형제, 그만 잊어버리고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 그러자 거지소년은 사검평의 전신을 탐색하듯 자세히 훑어보았. 그러다 이내 밝게 웃으며 쾌속하게 대꾸했다. “하하하, 공자께서 이렇듯 정중히 존대해 주시니 정녕 감사합니다.” 사검평은 수정처럼 곱고 백설같이 흰 거지소년의 깨끗한 치아에 시선을 못박았다. 그 더럽고 추한 얼굴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돋보이는 치아였 일순, 사검평은 내심으로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때 점원이 서둘러 그들을 안내했으므로 사검평은 더 이상 개의치 않았다. 그들은 처음 일층의 구석진 자리로 안내되었다. 그러자 조용했던 수면에 파문이 일듯 왁자지껄한 소동이 일어났다. 거지소년의 몸으로부터 퀴퀴한 냄새가 풍기니 어찌 조용하랴! 가득했던 손님들 중 누구 하나 불쾌감을 드러내지 않는 자가 없었다. 점원이 크게 당황하여 다급히 말했다. “헤헤…… 이곳은 약간 곤란하겠군요. 이…… 이층으로 오르시지요.” 사검평도 구태여 거절하지 않았다. 곧 점원을 따라 이층으로 올라가니 아래층과 달리 조용한 분위기였다. 아래층과는 달리 겨우 몇 명의 손님만이 널찍한 공간의 군데군데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사검평과 거지소년이 이층에 당도하자 이층의 손님들이라고 해서 괜찮을 리 없었다. 모든 손님들이 경이의 시선으로 그들 두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거지소년은 놀랄 만큼 태연자약했다. 자신을 주시하는 모두의 시선은 아랑곳없이 스스로 점원을 앞질러 창가에 면한 가장 좋은 좌석으로 달려가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사검평을 바라보며 염치도 좋게 파안대소했다. “하하하…… 이거 초면에 너무 폐를 끼칩니다그려……” 사검평은 오히려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어 빙그레 웃는다. “하하하…… 길 떠나면 사해(四海)의 동포가 모두 형제인데, 이 정도의 일로 어찌 폐 운 운할 수 있겠소?” 그러자 거지소년이 다시금 청아하게 웃었다. “고맙소.” 비록 악의없는 천진한 모습이라 하나 대단한 염치와 배짱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한데 문제는 그때까지 옆에서 줄곧 지켜보던 점원이었다. 그러잖아도 아까의 감정이 남아 있는 터에 거지소년이 이처럼 염치없이 굴자 그 뻔뻔한 면 상을 한 대 쥐어박지 못해 속이 부글부글 끓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사검평은 빙그레 다정한 웃음마저 지어 보이며 천천히 말했다. “소형제, 어서 들고 싶은 음식을 시키시오!” 거지소년은 쾌활하게 웃으며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하하하…… 사실, 나 주천혜(朱天惠)는 실로 천하의 미식가를 자처할 만한 처지라오. 한데, 이렇게 작은 주루에서 내 입맛에 맞는 요리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 의심스럽소.” 사검평은 갈수록 태산인 거지소년의 하는 양을 여전히 빙그레 웃으면서 지켜보았다. 거지소년은 한참 허풍을 떤 후에야 마지못한 듯 덧붙여 말했 “그렇다고 기왕에 들어온 집의 음식 맛을 안 볼 수도 없고…… 좋소! 어디 주문이나 시켜 봅시다.”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는 자는 바로 점원이었다. ‘히야! 내 원 오래 살다 보니 별놈을 다 보겠구나. 아무리 분수를 모른다고 이 어린 거지 새끼 같아서야…… 이놈아! 네가 기껏해야 식은 밥 한 덩이와 소금에 절인 마른 콩 따위라도 거르지 않았으면 다행이다. 흥! 그 주제에 천하의 미식가라니, 정녕 웃기지 말아라!’ 거지소년은 못마땅해 하는 점원의 눈길을 아랑곳하지 않고 연이어 떠들어댔다. “비록 한 촌의 이름없는 반점이나 그래도 음식점 간판을 내걸었으니 요리라 할 만한 것쯤 은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겠지……” 점원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흥! 거지 입에 맞는 음식조차 만들지 못할 정도라면 벌써 문을 닫았겠지. 그런 재주로 어 떻게 음식점을 운영하겠어? 뭐든지 시켜만 보라지? 이육 요리 빼고는 다해 줄 테니까.” 혼자 중얼거리는 듯하는 말이었지만 그 표적은 분명히 있는 독백이었다. 순간 스스로를 주천혜라 칭한 거지소년의 눈빛이 기묘하게 빛났다. ‘놈, 어디 한번 당해 봐라!’ 내심 단단히 벼르는 그의 입에서는 실로 기절초풍할 요리의 이름이 줄줄 쏟아져 나오기 시 작했다. “우선 연소(燕巢) 한 접시에 어시전병(魚翅前餠`:`상어 지느러미를 얇게 썰어 부친 것), 웅장(熊掌)과 앵무설(鸚鵡舌) 볶은 것 각 한 접시에……” 애당초 거지소년을 무시하고 무엇이든 갖다 놓겠다고 큰소리쳤던 점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지금 거지소년이 주문한 요리들은 천하에 진미를 자랑하는 최고급 요리들임에 틀림없다. 제비집, 상어 지느러미, 곰 발바닥, 앵무새 혀…… 한데 그것들은 모두 영승루에서 마련할 수 없는 것뿐이었다. 점원은 새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쩔쩔맸다. 그 모습에 사검평은 웃음을 금치 못했다. ‘무슨 요리든 다된다고 호들갑을 떨더니 된통 걸렸군. 평생 한 가지 맛보기도 힘든 요리 의 이름이 줄줄 쏟아져 나오니 말이야.’ 점원에 대한 거지소년의 반격은 실로 통렬한 바여서 그는 일면 상쾌함을 느낄 정도였다. 사실 그도 이미 거지소년이 점원을 곯리려고 단단히 마음먹고 있음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점원은 여전히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매는 중이었다. “그…… 그런 것은……” 그러자 주천혜가 지극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처럼 기본적인 요리조차 장만하지 못한단 말이냐? 역시 이곳 영승루는 나의 입맛을 채워 주기엔 너무 형편없는 집이었군.” 잠시 불평을 털어놓은 후 마지못한 듯 다시 말했다. “정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없는 것을 내놓으라 할 수도 없고, 굶을 수도 없는 일이니 ……” 뒤이어 쏟아져 나오는 요리의 이름들이 또 가관이었다. “할 수 없다. 그럼 이어어란탕과 백련자중탕(白蓮子重蕩), 삼매오향육(三昧五香肉)으로 허 기나 메울 밖에.” 비록 어시전병 등과 같이 희귀하지는 않아도 이 역시 지극히 귀한 일류 요리들뿐이었다. 점원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다물 줄 몰랐다. 더구나 이 거지소년이 시킨 요리는 굉장히 많은 양이어서 모두 가져 오면 넓은 식탁을 가득 채울 정도였다. 도대체 이처럼 왜소한 체구를 지닌 거지소년이 그것을 모두 먹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점원은 선뜻 믿어지지 않아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궁금하기는 사검평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 먹을 수 있겠소?” 거지소년이 태연히 대꾸했다. “식도락(食道樂)이란 본시 양이 위주가 아니고 미각에 맞느냐 안 맞느냐가 첫째라오. 만일 공자께서 금전 때문에 불초가 주문한 것을 걱정하신다면 기꺼이 취소하겠소.” 이에 사검평은 크게 웃었다. “하하하…… 몇 푼의 음식값이 걱정되어 한 말은 아니었소. 더 시킬 것이 있다면 시켜도 무방하오.” “하하하…… 고맙소이다.” 점원이 오히려 안타까워 발을 굴렀다. ‘이 순진해 보이는 젊은 공자가 이따위 거지자식에게 아까운 음식값만 손해보는구나.’ 일면 연민의 염(念)과 함께 거지소년에 대해 새삼 부화가 끓어올랐다. ‘저 공자도 정신나갔지. 이렇듯 낭비할 은자가 있다면 우리처럼 열심히 일하면서도 가난한 사람에게나 나누어 주면 고맙다는 인사나 받을 것이 아닌가! 쳇, 저따위 비렁뱅이 자식의 입에 처넣으면 무슨 소용이람……’ 그러나 어찌 그런 속마음을 겉으로까지 내색할 수 있으랴! “그럼 즉시 대령하겠습니다!” 어디까지나 점원으로서 공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 더러워서……’ 속으로는 부글부글 울화가 끓는 일이었지만…… 2 이윽고 요리가 날라져 왔다. 과연, 그 넓은 상을 꽉채우고도 남음이 있었다. 사검평이 부드럽게 권했다. “소형제, 어서 드시오!” 주천혜는 그때서야 비로소 약간 미안한 듯 반문했다. “그렇다면 공자께서는……” 사검평은 쾌활하게 웃었다. “하하하…… 나는 여기 있는 온춘면(溫春緬) 한 가지로도 능히 시장기를 메우고 남으니 소형제나 어서 사양 말고 드시오!” 그러자 주천혜는 또다시 너스레를 떨었다. “하하하…… 나 주천혜는 공자가 마음에 들었소. 본시 나 주천혜는 나이는 어리나, 고금 (古今)의 모든 지식과 학문을 터득한 사람이오. 더구나 그 배포는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을 정도인데, 다만 의리(義理)와 인정(人情)에 약한 것이 흠이란 말이오. 그러나 눈이 높아 평소에는 어느 누구도 나의 눈에 들었던 사람이 없었소.” 낭랑한 음성에 막힘없는 언변, 실로 청산유수였다. 그는 물끄러미 사검평을 쳐다보며 물었다. “한데, 공자의 이름은 어찌 되시오? 그리고 연배는 어찌 되시는지……?” 짐짓 노인네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주천혜의 모습에 사검평은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가까 스로 참으며 응대했다. “소생의 이름은 사검평(史劍平)이라 하오. 나이는 당년 십육 세로 정월(正月) 이십일(二十 日)생……” 그러자 주천혜는 뜻밖이라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알고 보니 사 공자이셨구려. 그건 그렇고…… 소제는 사 공자가 십팔구 세는 족히 되었을 것으로 보았는데, 알고 본즉 나와 동갑이 아니오? 하지만 생일이 나보다 빠르 니 이제부터 형님으로 부르겠소!” 제멋대로 지껄인 그는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더니 이어 말했. “형님께서는 지금까지 소제의 말을 단순한 허풍으로 여길지 모르나 결단코 내 말에는 거 짓이 없소. 그래도 만일 의심이 난다면 강호에 관하여 무엇이든 물어 보시오. 만일 내가 막 히는 것이 있다면 부모로부터 받은 이 주씨 성을 갈겠소!” 그러다가 사검평을 보며 나직이 혀를 찼다. “하기야…… 형님이 본시 무림인이 아닌즉, 이런 일에 무슨 흥미나 느끼겠소?” 사검평은 새삼 주천혜에 대해 강렬한 호기심이 솟구쳤다. “하하…… 소제는 속단하지 말게. 내가 비록 무림인이 아니라 해도 강호기협들에 관해 크 나큰 호기심을 느끼고 있던 중이었네. 만일 주 소제가 말해 준다면 기꺼이 재미있게 경청하 겠네!” 그러자 주천혜는 득의 양양하여 자신의 배를 두들겼다. “하하하…… 그것 참 잘됐군요! 좋소이다. 그럼 지금부터 내가 알고 있던 강호기담(江湖寄 談)들을 말씀드리지요. 하지만…… 우선 뱃속의 밥벌레들이 아우성 치니 그것부터 해결합시다.” 그는 익살맞게 웃으며 서둘러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이윽고 이것저것 골고루 음식을 드는데, 처음 그가 말했던 대로 여러가지 음식을 맛만 볼 뿐이었다. 그리고 금방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실컷 먹었다는 듯 배를 두드렸다. “하하하…… 형님 덕에 진정 오랜만에 실컷 포식하였소이다!” 사검평도 먹던 국수가락을 내려놓으며 빙그레 웃음으로 대꾸했 “동생, 생각보다 양이 적군그래…… 겨우 그것만 들고 만단 말인가?” 주천혜가 얼굴을 찡그리며 익살을 부렸다. “하하하…… 알고 보니 형님은 이 동생을 돼지로 생각하셨구려? 소제는 본시 식도락을 즐 기는 터라 여러 가지 음식을 시킬지언정 많이 먹지는 않소이다.” 그리고 이내 또다시 장황스럽게 덧붙였다. “하하하…… 사실 소제는 천하의 온갖 진미를 맛보았다고 자부할 수 있지요. 사실 거기에 비한다면 이곳 영승루 따위의 요리쯤이야 한낱 쓰레기나 진배없소이다.” 때마침 그 옆을 지나던 점원은 그의 말에 울화가 치밀어 올랐 하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못하고 속으로 온갖 욕설을 퍼부을 뿐이었다. ‘이 우라질 거지자식…… 간이 부어도 단단히 부었구나! 고작 남이 먹던 음식 찌꺼기나 간 신히 빌어 처먹던 주제에 감히 그 입으로 진미 운운하며 찧고 까불다니…… 이 벼락맞을 놈! 다 먹지도 못할 이 비싼 요리를 시키기는 왜 이리도 많이 시켰단 말이냐? 그러니 너 같은 놈은 죽었다 깨어나도 거지 신세 를 면치 못한다 말이다.’ 이러한 점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천혜는 여전히 익살을 섞어 가며 떠들어댔다. “하하하…… 사실 이따위 이름없는 영승루쯤에 앉아 진미를 논함이 어리석지요. 사실 음 식 맛을 논하려면 적어도 낙양(落陽)의 황학루(黃鶴樓)나 항두(抗斗)의 태백거(太白居), 북경(北京)의 매죽원(梅竹院) 정도는 돼야 하는 것인데……” 비록 허풍일지언정 과연 그 주워들은 바는 굉장했다. 사검평은 연신 주절대는 주천혜의 익살과 허풍에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는 내심 감탄해 마지않았다. ‘비록 겉보기에는 더럽고 남루한 차림이나 주 소제의 지닌 바 견문은 너무도 해박하여 진 정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구나!’ 순간, 사검평은 주천혜의 본색에 관해 강렬한 의혹을 느꼈다. ‘주천혜는 본래 내가 짐작했던 대로 짐짓 정체를 숨긴 강호기협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사검평은 추호도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 오히려 유쾌한 듯 크게 웃었다. “하하하…… 주 소제의 견문은 해박하네. 이 형도 정녕 탄복을 금할 수 없네. 그건 그렇 고…… 이제 어느 정도 시장기를 면했다면 어서 주 소제가 말하던 강호기협들에 관한 얘길 해주게.” 주천혜는 의기 양양하여 가가대소했다. “하하하…… 물론이지요. 모처럼 맛좋은 음식을 얻어먹었는데 어찌 그만한 답례쯤 못 하리 까?” 그는 한차례 마른침을 삼키고 나서 다시 청산유수처럼 말을 이어나갔다. “형님이 만일 강호기협들에 관해 들으려 한다면, 먼저 현금 강호에서 가장 뛰어난 열 명 의 고수에 대해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이오. 즉, 강호십대고인(江湖十大高人)을 말하지요. 그들 열 명의 고인들에 대해서는 강호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오. 그러나 정작 그 자세한 내력에 대해서 소제만큼 아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없지요.” 그가 다시 말을 끊었는데, 이때 그의 얼굴에서는 조금 전까지의 장난기가 거짓말처럼 사라 지고 목소리마저 진지해졌다. “그들을 일컬어 강호인들은 일군(一君), 쌍기(雙奇), 삼마(三魔), 사이(四異)라고 부르지 요. 당연히 그들의 실력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어 그 우열이 있으나, 저마다 독특한 절학을 지닌지라 열 명 모두 천하에 드높은 명성을 날리는 중이오!” 주천혜는 강호십대고인들의 자세한 내력을 소상히 말해 나가기 시작했다. 일군(一君)! 그는 바로 종남산(終南山) 중에 위치한 벽혈궁(碧血宮)의 주인인 벽혈신군(碧血神君) 유천화 (劉天華)를 말한다. 본시 그의 명성은 십대고인 중에서도 으뜸이요, 자타가 공인하는 명실상부한 천하제일의 고 수였다. 그러나 그는 강호에 모습을 나타내는 일이 지극히 드물어 근 이십 년래 그를 본 사람은 겨 우 몇 명에 지나지 않았다. 쌍기(雙奇)! 천사(天邪)와 지절(地絶), 두 기인(奇人)을 일컫는 명호였다. 천사(天邪)란 바로 남해(南海) 천종도주(天鍾島主) 주가청(朱家靑)을 일컬으며 그 일신절예 는 능히 벽혈신군과도 겨룰 만했다. 그러나 그 역시 수십 년간 강호에 모습을 나타낸 적이 겨우 몇 번에 불과하여 벽혈신군과 마주친다는 일은 벽해가 상전(桑田)으로 변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단, 그의 명호(名號)에 사(邪)가 붙었음은 결코 그가 사도(邪道)여서는 아니었다. 오직 남과 사귀기 싫어하고 지극히 오만해 보이는 그의 성격으로 인해서였다. 지절(地絶) 역시 천하에서 가장 신비스러운 한 기인을 일컫는 말이었다. 천면환영인(千面幻影人), 천하 그 누구도 그의 진정한 진면목을 본 사람이 없었기에 그는 천 면환영인이라고도 불렀다. 누구도 그의 진면목을 보지 못했으니 그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어쨌든 역용(易容)에 있어서는 그가 천하제일의 대가(大家)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천하에서 가장 빠른 살수(殺手)를 구사하는 무서운 인물이었다. 그가 이렇듯 천(千)의 얼굴을 가진 자인 이상, 그 누가 지절을 알아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천하인들은 타는 듯 붉은 단풍잎 초혼혈풍(招魂血楓) 한 장이 놓인 것으로 그가 다녀갔음을 알 수 있었다. 그에게 죽임을 당한 자의 옆에는 언제나 타는 듯 붉은 단풍잎이 남겨져 있었으므로…… 그에 의해 죽는 자는 모두 평소 강호인들이 증오하던 흉신악살(兇神惡煞)들뿐이었다. 하여 모든 강호인들은 내심 이 무서운 인물에게 공포와 동시에 경외지심(敬畏之心)을 느꼈 다. 몇 번인가 천면환영인의 초혼혈풍을 모방하여 살인을 저질렀던 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불과 며칠 못 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아야 했 물론, 그 옆에는 모든 진상을 밝힌 서찰과 초혼혈풍이 어김없이 남겨져 있었다. 이에 강호에서는 한 가지 노래마저 널리 불려졌을 정도였다. ─`그 누가 천면환영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으랴! 차라리 죄를 지으려거든 염라대왕에게 지으렴! 천면환영인, 그에게는 천(千) 개의 눈이 있어 언제나 강호에서 죄지은 자를 찾는다네! 삼마(三魔)! 묘강(苗疆) 패주(覇主)인 천독마수(千毒魔 ) 우문관(宇文冠)과 무영마개(無影魔 ) 유단(兪丹), 그리고 경천검마(驚天劍魔) 조지릉(趙志凌)을 가리키는 말이다. 천독마수 우문관은 천하제일의 용독성수(用毒聖 )였다. 그가 일단 마음만 먹으면 그 누구라도 단숨에 목숨을 빼앗을 수 있으니 정녕 무서운 절기 를 지녔다 말할 수 있었다. 그의 얼굴은 마치 남극선옹(南極仙翁)인 양 인자하나, 마음은 독악하기 그지없어 실로 웃 음 속에 비수를 감춘 무서운 인물이었 그 위에 그의 한음현살공(寒陰玄煞功)은 절정의 호신강기(護身 氣)를 익히지 않고서는 막기 가 전혀 불가능한 가공할 음공(陰功)이었다. 특히 그는 천독마동(天毒魔洞) 개문조사(開門祖師)인 백독마수(百毒魔 ) 이래의 가장 뛰어난 독술(毒術)을 십분 발휘하여 내심 천하제일고수의 보좌(寶座)까지 노린 야심찬 자였다. 그러나…… 이런 그의 야심을 눈치챈 어느 선배고인이 있어 그의 한음현살공을 와해시켰으니, 현살강기 가 상실됨으로써 다시는 절정의 경지까지 익힐 수 없는 치명적 약점도 있었다. 본시 현살강기란 도가(道家)의 태을강기(太乙 氣)나 마찬가지여서 천지간의 음유지기(陰柔之 氣)를 모아 연성하는 사도(邪道)의 무상절예였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천독마수 우문관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은 현살강기가 가진 본래 위력 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하여 그는 절정의 내가고수에게는 결코 이것을 구사할 수 없는 처지였다. 하나 그가 지닌 일신상의 독중절예만 하여도 능히 가공할 위력이어서, 천하의 모든 고수들 이 감히 그를 경시치 못하는 입장이었다. 삼마 중 두 번째로 일컬어지는 무영마개(無影魔 ) 유단(兪丹). 그는 현개방의 방주인 철담호개(鐵膽豪 ) 악무연(岳武淵)의 사숙(師叔)이었다. 그의 별호 중 첫머리 ‘무영(無影)’이라는 두 글자가 말해 주듯, 그의 경공조예야말로 강호 상에서 능히 독보적 존재라 할 만했다. 비록 그의 별호 중에 마(魔) 자가 붙어 있으나, 유단이야말로 강호에서 가장 의협심이 뛰어 난 인물이었다. 하여 그는 개방 방주의 사숙이라는 일신상의 신분보다 그 뛰어난 의협심으로 강호인의 존경 을 한 몸에 받는 처지였다. 특히, 그는 이미 나이 백여 세에 이르러 십대고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연배였다. 이미 전대(前代)에 속하는 고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강호인들은 지금도 결코 그를 잊지 못한다. 과거의 수많은 협의지행(俠義之行) 때문이었다. 하나, 근 이십 년래 그는 강호에서 잠적하여 그 누구의 눈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마지막으로 경천검마(驚天劍魔) 조지릉(趙志凌). 비록 같은 삼마라 하나 그의 무공은 앞의 두 인물보다는 확실히 뒤떨어졌다. 또한 그는 근자에 수많은 녹림사파의 고수들을 백마산장으로 끌어 모아 그 자신뿐 아니라 십대고인 전체의 명성에까지 누를 끼치는 자였다. 사이(四異)!제세성의(濟世聖醫), 생사신복(生死神卜), 광검수재(狂劍秀才), 고죽파파(古竹婆婆) 이 네 명의 이인기사를 일컫는 말이었다. 제세성의(濟世聖醫) 양소린(陽紹麟), 현세화타(現世華陀)라 부를 만큼 그는 뛰어난 의술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성격이 괴팍해서 자신의 의술을 일체 남에게 베풀지 않고, 오직 백초곡(百草谷)에 숨 어 지낼 뿐이었다. 그러나 그가 일단 손을 썼다 하면, 심장의 맥이 끊어지지 않은 이상 반드시 회생시킬 수 있 다는 신묘한 경지였다. 생사신복(生死神卜) 주방우(周方雨), 일명(一名) 신산자(神算子)로 불리는 사이 중 두 번째 이사(異士). 그의 특징은 사람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귀신같이 알아맞힘에 있었다. 지금까지 그가 말한 것 중 빗나간 점괘는 단 한 번도 없었으니, 정녕 하늘도 탄복할 신복 지학(神卜之學)이었다. 더구나 그는 천하무림의 어떠한 비밀도 알고 있었다. 하여 천하의 모든 인물들이 그를 만나 저마다 지닌 바 의문을 풀어 보려 하였지만 강호상 에서 그를 만난다는 것이 도대체 쉽지 않았다. 본시 의문을 가진 자가 있다면 한사코 밝힐 수 없는 비밀을 지닌 자도 있는 법. 자신이 지닌 바 비밀을 지키려는 강호인들이 시시각각 그의 목숨을 노릴 테니 어찌 그가 쉽 사리 강호상에 횡행하겠는가! 비록 그가 신복지술 외에도 일신상에 고절한 무공을 지녔다 하나 만일 미래를 꿰뚫는 선견 지명이 없었다면 그는 이미 오래 전에 황천의 고혼이 되었을 것이다. 고죽파파(古竹婆婆) 두미경(杜美京). 강호인들은 그녀가 십대고인에 낀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이는 그녀가 강호인들이 쓰기를 꺼리는 암기수법으로 명성을 드날리는 위인이었기 때문이 다. 고죽자(古竹刺)가 그녀의 독문암기였다. 이 고죽자의 암기수법은 사천당문(四川唐門)의 암기수법과도 쌍벽을 이룰 만큼 고절했다. 하지만 그녀에 관해서는 강호인들이 모르는 점 한 가지가 있었. 그녀의 드높은 명성이 강호에서 알고 있듯 고죽자로 인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진정한 독문절학은 실로 묘한 경지의 진법(陣法) 조예였다. 또한 그 수법도 갖가지여서 고금(古今) 이래의 모든 진법을 구사하니 어떠한 절세고수로부 터도 자신을 보호함은 물론, 상대를 가두어 놓을 수 있었다. 하여 그녀의 진재절학을 아는 자라면 그 누구도 감히 섣불리 그녀를 얕볼 수 없었다. 광검수재(狂劍秀才) 척금송(戚金松), 이자야말로 사이(四異) 중 가장 특이한 인물이었다. 먼저 그의 나이가 이제 겨우 이십오륙 세에 불과하며 그의 출신내력과 사문을 알고 있는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의 일신절학이 너무도 고절하여 비록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사이(四異) 중 일인으 로 십대고수의 반열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명성은 그 무공 외에도 그의 기괴한 행각 때문에 더욱 드높았다. 해마다 일 년 중 절반은 진추하(秦推河)의 주선(晝船)에서 기녀(妓女)들과 더불어 풍류로 소일함이 그의 첫째 기행(奇行)이었 하여 그는 과연 천하제일의 풍류아로 소문이 났다. 하나 이것이 결코 그의 기행의 전부는 아니었다. 나머지 반년간, 그는 강호를 종횡하며 천하 각처의 고수들과 닥치는 대로 대결했다. 그것도 목숨을 건 필사의 대결이었다. 이것은 자신의 삼 초 공격을 받아 내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의 목숨을 가져 가도 좋다고 공 언한 것을 실제로 입증해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진정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천방지축 날뛰는 한 애송이의 만용이었다. 하나 어찌 된 일인지 넓은 천하 수많은 고수들 중에서도 아직까지 그의 삼 초를 벗어난 사 람이 없었다. 때문에 강호에서는 그를 벽혈신군 유천화와 비교하는 사람마저 있었다. 주천혜의 청산유수와 같은 설명이 끝나자 사검평은 내심 격동을 금키 어려웠다. 그러나 애써 자제하며 겉으로는 추호도 그런 빛을 드러내지 않았다. 주천혜는 그러한 사검평을 마주 바라보며 은연중 신비로운 미소를 지었다. “하하하…… 지금까지 소제는 형님께 강호 고인들의 상세한 내력을 말씀드렸소. 하지만 아직 한 가지 더욱 흥미있는 일화가 남아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강호에서도 아는 이가 거의 없는 비화(秘 話)이지요!” 이어, 그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이 일을 내가 얘기해도 형님은 일체 외인(外人)에게는 발설치 않는다고 약속해 주시오. 만일 이 일이 강호사대세가의 귀에 들어가면 나 주천혜는 그들로부터 치도곤을 면치 못할 것이기 때 문이오.” 사검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주천혜는 만족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한차례 주위를 둘러본 후 속삭이듯 말했다. 그것은 바로 광검수재 척금송의 자세한 내력이었다. 척금송은 본래 중원 명문세가(名門勢家)의 자제였다.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여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기재로서, 이미 나이 십육 세 때 어전거시(御前擧試)에서 장원급제하는 영광을 얻었다. 위세도 당당한 명문세가의 자제이며 또한 이처럼 뛰어난 문재(文才)를 지녔으니, 그는 신의 축복을 한 몸에 받은 듯 장래가 촉망되는 존재였다. 그러나 불과 이 년 후에 한 여인으로 인하여 인생(人生)의 행로가 완전히 뒤바뀌게 될 줄 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하였다. 그의 나이 십팔 세 되던 해 어느 날, 그는 낙양지부(落陽知府)에 있는 종형(從兄)을 만나러 길을 가던 중이었다. 그때 우연히도 길가에서 한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 여인은 바로 벽혈신군 유천화의 딸인 벽혈옥봉(碧血玉鳳) 유옥선(劉玉嬋)이었다. 무림제일의 미인으로 꼽히는 유옥선과 길에서 마주치게 된 척금송은 첫눈에 그녀에게 반하 고 말았다. 벽혈옥봉 유옥선 역시 지금까지 보아 왔던 뭇 강호의 인물들과는 너무도 다른 척금송의 탈 속한 듯한 자태에 첫눈에 정을 느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첫눈에 호감을 느낀 두 남녀. 그들은 삽시간에 친숙해져서 낙양의 유적 등을 함께 둘러보며 끝없는 정감을 나누었다. 그러나 벽혈옥봉 유옥선에게는 본시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부친에 의해 맺어진 약혼자 가 있었다. 그는 강호사대세가 중 가장 세력이 강한 남궁세가의 소가주인 옥면룡검(玉面龍劍) 남궁학 (南宮鶴)이었다. 출신세가의 위세를 빌리지 않더라도 그의 재주는 비범하여 후기지수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로 손꼽히는 자였다. 바로 그가 유옥선과 척금송의 정다운 순간을 목격하였으니…… 그의 눈에서는 광기 어린 불꽃이 타올랐다. 척금송과 유옥선이 다정히 정담을 나누고 있는 자리로 그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었 다. 그리고 한 초식의 무공도 익힌 바 없는 척금송을 구타하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정인(情人) 앞에서 발로 걷어채이고 얻어맞는 것은 정녕 죽음보다 더한 모욕이 었다. 옥면룡검 남궁학은 만일 다시 한 번 유옥선과 가까이한다면 결코 가만 놔두지 않겠노라 협 박한 후, 하염없이 우는 유옥선을 강제로 잡아 끌고 홀연히 사라졌다. 척금송에게 남은 것은 오직 치욕과 모욕감뿐이었다. 사실 일개 백면서생에 불과했던 그로서는 강호절정고수의 하나인 옥면룡검 남궁학을 상대할 재간이 없었다. 그는 언제까지나 망연자실하여 굴욕을 되씹고 있었다. “내 언젠가는 오늘의 이 모욕을 반드시 갚고야 말리라.” 그 이후, 척금송은 십팔 년 동안 갈고 닦았던 학문의 길을 미련없이 포기하고 복수의 일념 으로 무공을 수련키 위해 사부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그가 찾았던 곳마다 남궁세가와 원수지는 것을 꺼려 그의 입문(入門)을 허락치 않았 다. 사부를 구하기 위해 천하를 주유하다 그는 그대로 지쳐 쓰러질 것 같았다. 하나, 하늘은 인걸을 내시매 그 길도 정하신다 하셨다. 하여 이 희대의 기재(奇才)는 정체조차 알 수 없는 한 기인(奇人)의 문하(門下)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로써 그는 불과 삼 년 만에 그 깊이조차 알 수 없는 절학을 터득했다. 삼 년 후, 그는 다시 강호로 나왔다. 하지만 어찌하랴! 그가 사랑하던 여인은 이미 옥면룡검의 아내가 되어 있었으니…… 비록 원한은 골수에까지 사무쳐 있었건만 사랑하는 정인의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면 옥면룡검에 대한 복수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애써 닦았던 필생의 학문조차 버리고 스스로 뛰어들어 익혔던 절세무공도 아무런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는 깊은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그 이후 그는 주색(酒色)과 비무(比武)에 일생을 걸고 살아 왔으며, 광검(狂劍)이라는 그의 별호 또한 이런 연유로 생겨난 것이었다. 사검평은 숨소리까지 죽여 가며 주천혜의 얘기에 귀기울였던지라 모든 얘기가 끝나자 나직 이 한숨까지 내쉬었다. 사검평은 주천혜의 얘기를 듣는 동안 내내 신비로운 감정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들 십대고인 열 명의 얘기야말로 자신이 지금껏 알려고 애쓰던 모든 사건과 연관되어 있 지 않는가? 사검평은 문득 사 년 전의 어느 날 일을 뇌리에 떠올렸다. 형 진평과 그의 친구들 무리에 섞여 하루의 유람을 즐기던 장군산. 주천혜의 얘기로 미루어 보건대 자신이 장군산에서 처음으로 만났던 백발노인은 바로 천 독마수 우문관임에 틀림이 없다. 사검평은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시퍼런 복수의 마음을 가다듬었다. 바로 지난날 장군산에서 벌어진 혈겁이 그 백발노인, 즉 천독마수 우문관의 소행으로 짐작 했기 때문이다. 하여 그는 주천혜가 말하는 천독마수에 관한 모든 것을 가슴속에 깊이 아로새겼다. 그 외에도 오늘 주천혜로부터 들었던 모든 얘기를 뇌리 속에 깊이 아로새겼다. 십대고인의 모든 내력이 자신이 앞으로 강호에서 행도함에 크나큰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 문이다. 깊은 상념(想念)에 잠겨 묵묵히 앉아 있는 사검평의 정신을 일깨운 것은 주천혜의 목소리였 다. “형님,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십니까?” 사검평이 흠칫 놀라 상념에서 깨어났다. “주 소제의 얘기가 너무 재미있어 잠시 넋을 잃었던 모양이네.” 그리고 다시 일말의 의혹을 감추지 못하겠다는 듯 천천히 물었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있네. 천하절정의 고수가 그들 열 명 외에 또 없단 말인가? 내가 알기로는 강호에 본시 구파일방(九派一幇)이라는 열 개의 문파가 있어 그 강대한 세력을 자랑한다는데…… 주 소제의 말대로라면, 구파일방의 사람으로서는 겨우 개방의 무 영마개만이 십대고인에 포함되어 있지 않는가?” 주천혜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 소제가 그 의문에 대해 자세히 설명드리지요.” 다시 청산유수와 같은 그의 말이 시작되었다. “물론 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강호에서 구파일방의 세력을 당할 자가 실로 없었습니다. 하나 삼십 년 전부터 개방을 제외한 구대문파는 어찌 된 일인지 강호의 출입을 지극히 삼 가고 있습니다. 자연 현금 강호에서 그들 구대문파는 거의 잊혀져 가는 존재가 되고 있지요. 그러다 보니 무림의 절정고수를 말하라면 누구나 십대고인을 꼽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 십대고인 중 그 어느 누구도 스스로 천하제일을 자랑할 수는 없습 니다.” 사검평은 크게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혹시 그들보다 더 뛰어난 세외고인(世外高人)이 또 있기 때문인 가?” 주천혜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천외삼성(天外三聖) 중 단 한 명만 나타난다면 그들 중의 누구도 적수가 될 수 없기 때문이죠.” “대체 그들이 누구이기에 그토록 가공할 위력을 지녔단 말인가?” 주천혜는 갑자기 움찔하는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형님이 물으시니 소제 어쩔 수 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들 천외삼성이란 바로 천공금성 (天空琴聖)과 염라천존(閻羅天尊), 그리고 남해천룡(南海天龍)을 일컫는 것입니다.” “그들에 대해 자세히 말해 줄 수 없겠나?” 그러자 주천혜는 정색하며 말했다. “형님, 명심하십시오. 본시 강호에서 이들에 관해 얘기함은 크나큰 금기(禁忌)로 여기고 있 는 바입니다.” 사검평은 적이 실망해 마지않았다. 그러자 주천혜가 곧 말했다. “그러나 형님께서 꼭 듣고 싶으시다면 나중에 반드시 자세하게 말씀드리지요. 다만 여기 서는 곤란합니다.” 그런 후 갑자기 목청을 높여 크게 웃었다. “하하하…… 오랜만에 형님 덕분으로 실컷 포식하였구려…… 그건 그렇고, 소제가 보아하 니 형님께선 천하유람을 나선 명문의 유생(儒生)인 듯싶으신데, 만일 형님께서 진정 이곳 일 대의 명소를 구경하실 의향이시라면 소제가 기꺼이 안내하지요.” 사검평이 입가에 한 가닥 신비로운 미소를 떠올리며 의미 심장하게 대꾸했다. “하하하…… 그것만은 소제의 말이 틀렸네. 나는 한가로이 유람길에 나선 것이 아니라 오 히려 오랫동안 타처에서 수업하다 이제야 겨우 고향으로 가는 길일세!” 주천혜는 짐작이 틀려 머쓱해지고 말았다. “이것 참, 그렇다면 고향이 어디신지요?” “장안(長安)일세!” 주천혜가 손뼉까지 치며 깔깔대고 웃었다. “하하하…… 그렇다면 그건 오히려 더욱 잘되었군요. 소제는 평소부터 장안이 본시 한실(漢室) 이래로부터의 황도(皇都)인지라, 풍경이 유려하고 유적 또한 도처에 산재해 있다 는 말을 듣고 꼭 한 번 가보려던 참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형님? 저와 함께 동행해 주시겠습니까?” 사검평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주천혜를 바라보았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왜소하고 추레하여 볼품없는 일개 거지소년이었으나 강호의 견문은 너무도 해박한 신비로운 소년. 사검평은 어느 사이엔가 주천혜에 관해 깊은 흥미를 느끼는 중이었다. 이에 그는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수락하고 말았다. “좋네, 나는 소제와 기꺼이 동행하겠네!” “하하하…… 고맙습니다, 형님.” 주천혜가 더할 나위 없이 기뻐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사검평은 담담히 말했다. “자, 그렇다면 음식도 다 들었고 여기 할 일 없이 앉아 있을 필요도 없겠지. 이만 나가기 로 하세.” “물론이지요!” 주천혜는 벌떡 일어나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윽고 계산대 앞에 이르자 호기롭게 물었다. “점원, 여기 음식값이 얼마인가?” 계산대에는 그와 처음 실랑이를 벌였던 점원이 앉아 있었다. 그는 아니꼬워 밸이 뒤틀릴 지경이었다. ‘이 우라질 자식! 끝까지 속을 뒤집어 놓는구나. 털어 봐야 먼지밖에 안 나올 놈이 감히 계산을 요구하다니……’ 그러나 어찌하랴! 아무리 아니꼬워도 손님이 음식을 먹고 계산을 요구하는 데야…… “은자 이십 냥이오!” 그가 무뚝뚝하게 대답하자, 주천혜는 짐짓 거들먹거리는 자세로 꾸짖었다. “네 태도가 심히 불손하구나. 앞으로는 손님을 알아보는 안목과 보다 친절히 대하는 습성 을 배워야겠구나. 그렇지 않았다가는 점원 노릇도 못 해먹고 쫓겨날 테니 말이야.” “무, 무엇이……!” 점원이 참고 참았던 울화를 마침내 터뜨리려는 순간이었다. 사검평은 얼른 은자를 꺼내 음식값을 지불했다. 그리고 점원에게도 은자 한 냥을 따로 주며 점잖게 말했다. “내 아우가 본시 약간 짓궂으니 더 이상 탓하지 말게.” “예예……” 점원은 그때서야 비로서 얼굴을 펴고 수없이 허리를 굽실거렸 그 앞으로 주천혜가 거만하게 거드름을 피우며 휘적휘적 걸어나갔다. 사검평은 웃음으로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따라 나섰다. 第 七 章 불영옥패(佛影玉) 의 비밀 1 주루를 나온 그들이 동쪽 가로로 접어들 때였다. 갑자기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 왔다. 수많은 사람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며 있는 것으로 보아 필시 무슨 소동이 난 모양이 었다. “형님, 무슨 일이 있는 모양입니다.” 주천혜가 사검평을 이끌었다. 사검평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내키지 않았으나 할 수 없이 이끌려 갔다. 인파가 모인 곳에서는 박수 갈채 소리가 요란했다. 필시 무슨 구경거리가 있는 모양이었는데 사검평은 적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눈으로 보지는 않았지만 이미 그곳이 떠돌이 곡예인들의 곡예장임을 알아차렸던 것이 다. 그는 씁쓸한 고소를 금치 못했다. 그러나 주천혜는 무척 호기심이 동했던 모양으로, 말릴 사이도 없이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왁자지껄한 군중들 틈새로 마치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파고들어 어느 사이엔가 가장 앞줄 에까지 들어간 그는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사검평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형님, 어서 이리로 와서 함께 구경합시다.” 사검평은 다시 한 번 쓴웃음을 떠올리며 말했다. “나는 이곳에서 보아도 되니 자네나 그곳에 있게.” 순간,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에게로 쏠렸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가 보아도 명문대가의 귀공자 차림인 사검평과 거지 중의 상거지 차림 인 주천혜가 호형호제하니 너무도 괴이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호기심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장내에서 한 늙은이가 나와 어른 키 정도의 죽마(竹馬)를 탄 채 십여 개의 접시를 돌리자, 모두 시선을 돌리며 왁자지껄 경탄의 박수를 보내는 것이었다. 주천혜 역시 매우 재미있다는 듯 깔깔거리며 손뼉을 마주쳤다. 사검평은 이러한 주천혜의 모습에 웃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천하의 견식을 한 몸에 갖추고 있는 듯이 허풍을 떨던 그였지 않은가? 그러나 지금은 한낱 어린애와도 같이 고작 접시 돌리기의 묘기 따위나 보며 깔깔거리며 좋 아하고 있으니……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상반된 그의 이런 태도에 어찌 한 가닥 웃음을 금할 수가 있겠는 가? 그때 십여 개의 접시를 맹렬히 돌리던 노인이 이윽고 그 재간을 거두며 죽마에서 내려섰 다. 그 멈추는 재간마저 매우 능숙하니 구경꾼들 사이에서는 한차례의 요란한 박수가 일어났 다. 노인이 환호하는 군웅을 향해 사방으로 돌아가며 포권의 예를 취했다. “늙은이의 보잘것없는 재주를 보아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그럼 잠시 후에는 이 늙 은이의 손녀아이가 쌍검무(雙劍舞)를 보여 드리겠소. 이곳에 계신 제현들께서는 익숙치 못한 솜씨를 너무 탓하지 마시고 격려의 의미로 많은 박수를 보 내 주시면 감사하겠소이다.” 장황스레 늘어놓은 후에 한 쪽 손을 쳐들었다. 그러자 노인의 옆에 섰던 한 청년이 재빨리 들고 있던 북을 울렸다. 둥! 둥! 둥! 높지도 낮지도 않은 북소리가 갑자기 멈췄을 때, 노인의 뒤에 드리워져 있던 휘장이 쫙 갈 라졌다. 그 안에선 화려한 화복 차림을 한 소녀가 양손으로 두 개의 검을 받쳐 들고 날듯이 걸어나 왔다. 소녀는 장내의 중심에 이르러 군중을 향해 화사하게 절했다. 잠시 자세를 가다듬던 그녀가 두 손을 휘두르기 시작하자 삼삼한 검기가 사방으로 뻗쳐 나 갔다. 소녀가 날듯 섬세한 몸을 움직이니 마치 선녀가 하강하여 검무를 선보이듯 화사하고 아름답 기 이를 데 없었다. 때마침 석양이 아직 저물지 않은 저녁 무렵이었다. 황혼 노을을 만들어 내는 태양의 붉은빛이 검날에 부서질 때마다 신비로운 광채가 일어 뭇 중인을 황홀경으로 이끌었다. 불과 오래지 않아 사검평마저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일개 떠돌이 곡예인으로만 여겼던 소녀가 쌍고검(雙股劍)을 다루는 솜씨가 예상을 뛰어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검평이 실로 의외인 듯 장중을 주시할 때였다. 소녀의 입에서 아름다운 기합성이 터져 나오는가 싶더니 허공으로 풀쩍 솟아오르는 것이었 다. 동시에 두 자루 쌍고검을 눈부시게 휘두르니 삽시간에 그녀의 신형 전체가 검망에 휩싸여 버렸다. 정녕 일말의 환상을 보듯 황홀경에 사로잡히는 순간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나비가 꽃송이에 내려앉듯 사뿐히 바닥에 내려섰다. 그리고 다시 우아하게 중인을 향해 인사하니 황홀하여 소리 하나 없던 인파 속에 일제히 우 레와 같은 찬사가 터져 나왔다. “참으로 선녀와 같은 자태, 어찌 저리도 아름다울 수가 있는가?” “정말이다. 마치 월궁 항아를 보는 것 같구나.” 함성과 박수 갈채가 드높이 메아리 치는 가운데 소녀를 향하여 수많은 은자가 쏟아져 갔다. 북을 치던 청년이 연신 허리를 굽실거리며 들고 있던 주머니에 땅에 떨어진 은자를 담기에 여념이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번쩍이는 물체 하나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와 청년의 앞에 떨어졌다. 땅에 떨어진 물체를 보는 순간, 은자를 줍던 청년은 대경 실색하며 외쳤다. “그…… 금원보(金元寶)!” 그는 어찌나 놀랐던지 아예 금원보를 주울 생각조차 못 했다. 그는 다만 아연 경악하여 멍청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 금원보는 열 냥짜리였다. 열 냥의 황금이면 커다란 주루에서 한 달 꼬박 음식과 술을 팔아야 겨우 벌 수 있는 거금인 데, 이런 액수를 한낱 떠돌이 곡예인에게 던져 주다니…… 대체 어느 누가 이처럼 손이 크단 말인가? 주위에 있던 다른 구경꾼들도 놀라운 듯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때 죽마를 타고 접시를 돌리던 노인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금원보를 집어 들며 중인들을 향해 외쳤다. “어느 분이 이런 거금을 주셨는지 이 늙은이가 우선 심심한 감사를 금치 못합니다.” 이어서 그가 예리한 눈빛을 번뜩이며 사방을 향해 두루 포권의 예를 올리고 있을 때였다. “으하하…… 본 공자가 내놓은 거금 황금 열 냥은 결코 귀하들이 펼친 그따위 어린애 장 난 같은 재주를 구경한 대가가 아닐세.” 우렁찬 소리와 함께 한 명의 금의공자(錦衣公子)가 거만하게 나타났다.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쏠렸다. 노인은 움찔 놀라는 듯하더니 이내 평정을 되찾으며 공손하게 말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는 진의를 늙은이로서는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금의공자가 거만하게 웃었다. “간단한 말일세.” “무엇이……” “어리석은 늙은이, 그처럼 귀가 어두운가? 본 공자는 바로 저 계집이 마음에 들어 본인의 희첩으로 삼고자 그 대가를 지불한 것이네.” 일순, 노인의 두 눈에서 번쩍 분노의 빛이 번뜩였다. 그러나 그는 애써 자제하며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노부의 손녀는 비록 거리에서 재주를 팔지언정 몸을 팔지는 않으니, 공자의 그 같은 제 안은 꿈에서라도 받아들일 수 없소이다.” 순간, 금의공자의 두 눈에서 흉흉한 살광이 폭사되었다. “흥! 이미 본 공자가 마음먹은 이상 그 누가 감히 내 뜻을 거역할 수 있단 말이냐?” 이어서 그는 쌍검무를 추던 소녀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 분노에 찬 시선으로 금의공자를 노려보고 있던 소녀는 그가 탐욕으로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훑어보며 다가오자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번쩍 검을 치켜 들더니 그대로 지면을 향해 내리꽂았. 그녀의 쌍검은 순식간에 자루만 남은 모습으로 땅속 깊숙이 꽂혔다.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던 사검평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하였. 그러나 금의공자는 앙천 광소를 터뜨릴 뿐이었다. “으하하하…… 좋구나, 좋아…… 스스로 무기마저 버리는 것을 보니 네가 정녕 본 공자의 품에 안김을 원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닥쳐라!” 화복소녀가 앙칼지게 소리치며 섬섬옥수 고운 손을 예리하게 휘둘렀다. 살기 띤 한 가닥 장력이 곧장 금의공자를 향하여 날아갔다. 그러나 금의공자는 여전히 태연 자약한 미소를 잃지 않은 채 가볍게 그녀의 공격을 피하며 음산한 희롱의 말을 던졌다. “어림없는 짓! 그따위 어린애 같은 솜씨로는 본 공자의 옷자락도 스칠 수 없다. 하지만 네 앙탈이 보기 싫지만은 않구나. 본시 여인이란 얼마쯤의 앙탈을 부려야 더 귀여운 법이니 말이야. 하하하하!” 소녀는 얼굴을 붉히며 더욱더 분노하였다. “금수만도 못한 놈! 본 낭자가 기필코 네놈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마!” 일순, 그녀의 신형이 풍차처럼 쾌속히 회전하였다. 동시에 일신에 지닌 절초를 모조리 쏟아 내니……청룡전신(靑龍轉身), 흑호출동(黑虎出洞), 사신하세(蛇身下勢), 백사복초(白蛇伏草), 백원헌과(白猿獻菓)…… 팔괘장(八卦掌)의 정수를 이루는 절초가 숨돌릴 사이도 없이 몰 아쳐 갔다. 일개 소녀의 솜씨로는 실로 비범한 경지였다. 그러나 그 많은 절초 중의 어느 한 가지도 금의공자의 옷깃 하나 스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금의공자는 일체의 반격도 하지 않은 채 유유자적하게 피해 다닐 뿐이었다. 그 위에 한술 더 떠 음탕한 말로 소녀를 희롱하기까지 하였으니 그 행태가 실로 가관이었 다. 이리저리 신형을 움직이며 소녀의 엉덩이를 쓰다듬는가 하면 이내 가슴을 손가락으로 찌 르기도 하였다. 비록 석양 무렵이기는 하나 아직 태양이 저물지 않은 백주(白晝)였다. 이처럼 밝은 백주에 수많은 눈길이 쏠린 곳에서 처녀를 희롱하다니…… “하하하…… 계집애야, 네가 지금은 제법 앙탈을 부린다만 내 품에 안기기만 하면 애간장 이 녹고 정신이 아득해져 콧소리를 뿜을 것이다.” 이처럼 야비한 그의 언동에 어느 누구도 분노치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금의공자가 무서운 내력을 지닌 강호의 고수임을 짐작하고 누구 하나 감히 나서려 들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금의공자의 철면피한 행태는 여전히 계속되었 “계집애야, 그쯤 날뛰었으면 이제 순순히 말을 들어라!” 갑자기 그가 손을 내뻗었다. “앗!” 소녀는 황급히 피하려 했으나 음탕한 마수에 걸려들고 말았다. 금의공자의 억센 손길이 여지없이 소녀의 볼록한 가슴을 움켜쥐고 만 것이다. 여자로서 이보다 더 큰 수치가 어디 있겠는가! 실로 죽음보다 더한 치욕이었다. 이때 갑자기 휙, 하고 예리한 파공음이 작렬하며 노인이 두 손을 괴이하게 휘저어 공격해 들어왔다. 그러나 금의공자는 이번에도 반격하지 않았다. 단지 가볍게 일 장 뒤로 물러선 후 대소를 터뜨리는 것이었다. “으하하하…… 과연 그대는 본 공자의 짐작대로 팔괘신도(八卦神刀) 두상은(杜相殷)이었 구나. 그대를 찾아 헤맨 지 십 년, 이제 정체가 밝혀졌으니 무슨 잔꾀를 부려 또다시 본 보 의 손아귀에서 벗어날지 어디 한번 두고 봐야겠다!” 그 말을 듣자 두상은이라 불린 노인은 부르르 전율했다. “그…… 그렇다면 너는 천학보(天鶴堡)의……” 금의공자가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다. 나는 천학보의 소보주 옥면금선(玉面金煽) 진가락(陳家落)이다.” 순간, 두상은의 얼굴에 착찹한 감회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나직한 신음성을 발하며 천천히 말했다. “으음…… 왕년의 혈안(血案)에는 전대(前代)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복잡한 내막이 있 으니, 이를 결코 단시일 안에 규명할 수 없는 것. 그대는 돌아가 전하게. 노부가 근일 내에 스스로 찾아가 모든 사실을 백일하에 소상히 규명하겠다고 말일세.” 옥면금선 진가락은 냉랭한 어투로 응대했다. “팔괘신도 두상은, 그대는 내가 세 살 먹은 어린애인 줄 아는가? 십 년이나 그대를 찾아 헤매다 겨우 그대를 찾았거늘 나에게 빈손으로 돌아가라는 말인가? 어림없는 소리! 그대는 당장 나를 따라 본 보로 가야만 할 것이다.” 진가락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두 손을 도끼처럼 휘두르니 천군만마가 지축을 울리듯 엄청난 기세의 권풍이 휘몰아쳤다. 우르르…… 실로 무섭고도 흉흉한 기세였다. 팔괘신도 두상은도 흠칫하며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지령뇌부신장(地靈雷斧神掌)! 어린 나이에 그 절기를 갖추다니 놀라운 일이군. 하나, 화후 가 아직 칠(七) 성(成) 정도에 불과한지라 결코 노부를 제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신형을 갑자기 풍차처럼 돌렸다. 휙! 휙! 예리한 파공음이 작렬하는 가운데 그가 돌연 두 손을 앞으로 맹렬히 내뻗었다. 순간, 한 줄기 음유(陰柔)하기 이를 데 없는 암경(暗勁)이 쏟아져 나와 진가락의 권풍에 쾌 속하게 부딪쳐 갔다. 그러자 그토록 광폭하던 권풍의 기세가 소리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옥면금선 진가락은 무서운 반탄지력(返彈之力)으로 인해 서너 걸음이나 뒤로 밀려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흉광을 폭사하며 소리쳤다. “흥! 네놈이 태을비급(太乙秘 ) 속의 무공을 익혀 제법 자부하는 바가 있는 모양이구나.” 노인은 다만 싸늘한 표정인 채 대꾸하지 않았다. 옥면금선 진가락은 노기를 다스리지 못해 은은히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외쳤다. “좋다. 본 공자는 너의 적수가 되지 못함을 인정한다. 흥! 그러나 너는 본 보의 손아귀에 서 결코 벗어나진 못할 것이다.” 말을 내뱉기 무섭게 그는 한 줄기 빛살처럼 신형을 솟구쳤다. 한 마리 백학이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자세, 일학중천(一鶴中天)의 경공신법으로 진가락은 순식간에 군중들의 머리 너머로 까마득히 사라져 갔다. 노인이 청년과 소녀를 향해 다급히 소리쳤다. “무얼 멍청히 서 있는 거냐? 속히 물건을 치워라!” 그때야 비로소 청년과 소녀는 화들짝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서둘러 벌여 놓았던 물건들을 챙겼다. 그들은 매우 재빠르게 움직였음에도 노인은 역정을 냈다. “더 서두르거라!” 노인의 재촉에 따라 소녀와 청년은 쉴새없이 움직였다. 이윽고 벌여 놓았던 물건들을 모두 챙기자 호기심으로 가득한 군중들을 헤치며 그들은 서 둘러 자리를 떠났다. 멀어져 가는 그들을 보며 사검평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는 철면피하게 구는 금의공자를 보자 치솟는 살기를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내 노인야말로 정체를 숨긴 고수급 인물임을 간파하고 관여치 않았던 것이다. 사검평은 이 일말의 상황이 어찌 된 영문인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이때였다. 주천혜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슬그머니 옷깃을 잡아 끌었다. 사검평은 움찔하였으나 곧 무심한 표정으로 이끌려 갔다. 주천혜는 그를 데리고 그 자리에서 벗어나 어느 으슥한 곳으로 갔다. 사방에 높은 담이 솟아 있는 좁은 골목이었다. “잠시 기다려 봅시다. 아마 형님은 근래에 볼 수 없던 재미있는 구경을 하게 될 겁니다.” 사검평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가 다시 말했다. “나는 이곳에 처음 왔을 때부터 이런 작은 진전현 따위에 왜 수 많은 강호고수들이 들끓 나 의아해 했습니다.” 사검평은 깜짝 놀랐다. “이곳에 많은 고수들이 있더란 말인가?” “천하의 모든 고수들이 다 모여들었나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으음……” 사검평은 신음을 삼켰다. 그처럼 많은 고수들이 들끓고 있었는데 자신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니, 자신이 강 호 사정에 얼마나 어두운가 새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주 소제는 그 까닭을 알고 있는가?” 주천혜는 또 한 차례 씨익 웃었다. “십 년 전, 강호를 혈풍 속에 몰아넣었던 불영옥패(佛影玉 )가 다시 강호에 모습을 나타냈 기 때문입니다.” “불영옥패라니?” 사검평으로서는 처음으로 듣는 소리였다. 주천혜는 그의 귀에 입을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형님,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만일 이곳에서 함부로 입을 놀리다가는 살신지화를 초래 할 염려가 있습니다.” 사검평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자 주천혜가 다시 말했다.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소제는 어디 조용한 곳으로 가서 이 일에 관해 자세한 내력을 말 씀드리리다.” 주천혜는 사검평의 귀에 대고 소곤거리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거의 닿을 듯 바짝 붙어 있 는 상태였다. 사검평은 불현듯 주천혜의 몸으로부터 야릇한 체취를 맡을 수 있었다. 그는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 일이로군. 주 소제의 옷차림은 이렇듯 남루하기 짝이 없는데 막상 그 몸에서는 일 진의 청아한 향기가 풍기다니……?’ 그때 주천혜가 옷깃을 잡아 끌었으므로 그의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갑시다, 형님.” 주천혜의 태도로 보아 이 일은 필경 강호에서 극비로 하고 있는 일임을 알 수 있었으므로, 사검평은 아무 말 않고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기 시작했다. 2 주천혜는 사검평을 데리고 성밖의 교외 쪽으로 향했다. 어느덧 해가 저물어 사위는 어둠으로 충만했는데 뜨겁던 낮과는 달리 제법 으스스하였다. 더구나 제멋대로 자란 풀들이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니 귀기마저 느낄 정도였다. 얼마 후 주천혜와 사검평은 낡고 허물어져 인적이 끊긴 지 오래된 공자묘(孔子廟) 앞에 이 르렀다. 사방은 다만 칠흑 같은 어둠뿐인데도 주천혜는 조심스럽게 사위를 살폈다. 주변에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한 주천혜는 그 동안과는 달리 안색을 엄중히 가라앉히며 사검 평의 눈을 똑바로 주시했다. “솔직히 말해 주십시오. 형님은 필시 일신에 절학을 지닌 강호의 고수가 틀림없지요?” 사검평은 주천혜의 돌연한 질문에 깜짝 놀랐으나 이내 빙그레 웃으며 솔직히 털어놓았다. “하하하…… 견식이 하늘까지 닿은 동생에게 무얼 속일 수 있겠나? 솔직히 인정하네. 그러 나 고수라고 할 것까지는 없고 겨우 일신의 안위 정도나 지킬 수 있는 무공쯤에 지나지 않 네.” 주천혜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 무슨 겸손의 말씀을 하십니까? 만일 형님이 고인이 아니라면 천하의 그 누가 감히 고인을 자처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는 밤하늘에 가득 메아리 치도록 크게 웃더니 정색하며 말을 이었다. “사실, 소제는 첫눈에 형님이 무상의 절예를 지닌 고인임을 알아 보았습니다.” 사검평은 그저 아무렇지 않은 듯 빙그레 웃으며 말머리를 돌렸. “하하하…… 자네가 무얼 보고 그리 봐주었는지 궁금하군. 그건 그렇고, 이제 불영옥패에 대해서나 자세히 말해 주게.” 그러자 주천혜가 쾌히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어쨌든 불영옥패가 다시 나타났으니 한동안 잠잠하였던 강호는 또다시 피로 물들고 말 것이 틀림없습니다.” 불영옥패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자 주천혜의 얼굴은 긴장으로 서서히 굳어 갔다. 주천혜의 진지해진 모습으로 인해 사검평마저 숙연함을 금치 못할 지경이었다. “소제가 불영옥패에 관하여 말하기 전에, 우선 사대세가에 관하여 먼저 말씀드리겠습니 다.” 사검평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의 말에 귀기울였다. 어둠으로 충만한 사위에는 오직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이따금 바람에 스쳐 부딪치는 억새풀의 소리뿐, 풀벌레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적막한 밤이 었다. 다만 주천혜의 목소리만이 낮고 그윽하게 이어져 나갈 뿐이었 “사대세가를 논하건대, 먼저 그 하나는 벽혈신군 유천화가 이끄는 벽혈궁(碧血宮)을 일컬음 이오. 나머지 세 가문을 차례로 열거하면, 흔히 강남제일가(江南第一家)로 불리는 남궁세가(南宮世家), 그리고 천학보(天鶴堡)와 마지막으로 천마문(天馬門)을 일컫는 것이외 다. 이들 사대세가들은 이백 년 이래 강호에서 혁혁한 명성을 떨쳐왔으며 비록 약간의 영고성쇠(榮枯盛衰)가 있었다 해도 그 명맥만은 긴 세월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이어져 왔지요.” 잠시 잠잠했던 바람이 다시 일어나 길게 자란 억새풀들이 다시 우수수 울부짖었다. 주천혜의 나직한 음성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영고성쇠가 무상한 강호에서 이처럼 긴 세월 동안 변함없이 그 세력을 유지하는 것은 구 파일방을 제외한다면 지극히 드문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야말로 그 신화(神話)와 같던 위세도 퇴색하게 되었으니……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에 천마문이 멸망되어 사라졌고 천학보마저 당시 보주이던 창천일학(蒼天一鶴) 진청운(陣靑雲)이 스스로 강호에서의 은퇴를 선언한 후 두 번 다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천혜의 얘기가 여기까지 이르자 사검평은 내심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필시 어떤 복잡한 곡절이 있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도 소제는 알고 있는가?” 주천혜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은 본래 강호삼대불가사의(江湖三大不可思議) 중의 하나여서 아직까지 그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하나 소제는 이제 대강 그 윤곽을 알아 냈습니다.” 사검평은 자신도 모르게 적이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주천혜는 웬일인지 의혹 가득한 시선으로 사검평을 바라보았 사검평이 의아하여 흠칫하자 그는 더욱 목소리를 낮춰 엄숙히 물었다. “형님께선 소제로부터 이 비밀의 내막을 들은 후에 절대 남에게 발설치 않겠다고 맹세하실 수 있는지요?” 그 말에 사검평의 검미가 꿈틀하고 일어섰다. “주 소제가 그토록 나를 믿지 못하겠다면 나는 차라리 안 듣고 말겠네.” 주천혜는 사검평이 이토록 언짢아 하자 크게 놀라며 다급히 말했다. “형님,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는 결코 내가 형님을 못 믿어서가 아닙니다. 다만 지금부터 소제가 말하려는 내용이 너무도 극비를 요(要)하는 것인지라…… 더구나 이 일에 관련된 당사자들은 한결같이 당금 강호의 최절정고수들뿐입니다. 만일 이 일이 잘못 발설된다면 형님의 일신은 물론 강호 전체에 실로 상상할 수 없이 크나큰 파문이 일어날 것을 염려해서입니다.” 그 말에 사검평도 움찔하였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다지도 전전긍긍하는 것인가?’ 그는 입가에 한 가닥 씁쓸한 미소를 떠올리며 천천히 말하였 “알겠네. 나 사검평은 나의 명예를 걸고 이제부터 동생이 하는 말을 함부로 누설치 않겠 노라 맹세하겠네.” 비로소 주천혜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감돌았다. 그는 한껏 미안한 기색으로 침중히 하였다. “정말 미안합니다. 그러나 형님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만일 이 비밀이 누설된다면 진정 강호는 핏빛 회오리에서 헤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는 사검평을 또다시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중대한 사안을 형님께 말씀드리는 까닭은 형님만이 이 일을 처리할 만한 능력이 있으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사검평은 씁쓸히 웃었다. “하하하…… 그 무슨 당치도 않은 말인가? 동생은 나를 너무도 과대 평가하는군……” 그러나 주천혜는 어떤 확신이 서 있는 듯 두 눈을 빛냈다. “형님이 아무리 완강하게 부인하셔도 형님의 일신절학이 이미 반박귀진(返璞歸眞)의 경지 에까지 달한 것을 소제는 잘 알고 있습니다.” 행여 사검평이 다시 부인할세라 그는 더욱 힘주어 말했다. “정녕 이것은 하늘에 맹세코 틀림이 없습니다. 소제는 다른 것은 몰라도 사람을 보는 안 목 하나는 틀림없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너무도 확신에 찬 어조인지라 사검평으로서도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간, 사검평은 한 줄기 싸늘한 안광을 뿜어 내며 날카롭게 추궁했다. “도대체 주 소제의 진정한 정체가 무엇인가? 왜 나에게 접근했지?” 실로 상상할 수도 없이 돌변한 언동이었다. 이처럼, 딴사람같이 변화된 그의 태도에 주천혜는 약간 두려운 눈치였다. 더욱이 사검평의 싸늘한 안광을 맞대하자 정수리에 냉수를 맞듯 온몸이 싸늘히 얼어붙는 주천혜였다. 그는 체념한 듯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형님께서 이미 눈치채셨으니 할 수 없군요. 좋습니다. 모두 말씀 드리지요.” 사검평은 여전히 싸늘한 안광을 발하여 그를 주시했다. 주천혜의 말이 이어졌다. “소제는 본시 처음부터 조금 전에 보았던 유랑 곡예인들의 뒤를 쫓을 목적으로 이곳까지 왔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형님을 발견하고 내심 생각되는 바가 있어 접근할 기회를 노렸던 것입니다.” 주천혜가 이처럼 스스로 솔직히 털어놓자 사검평은 뜻밖이라는 듯 두 눈에 곤혹의 표정이 어렸다. ‘그는 왜 나에게 이처럼 모든 것을 선선히 솔직하게 털어놓는가?’ 잠시 주춤하던 사검평은 짐짓 냉혹한 표정을 지으며 잘라 말했 “흥! 어쨌든 이제 모든 사실이 밝혀진 이상 나는 소제와 더불어 더 이상의 우의를 나누지 않겠다. 이제까지의 일은 없던 것으로 하고 이만 헤어지도록 하자!” 그러자 갑자기 주천혜의 두 눈에 그렁한 이슬이 고여 드는 것이 아닌가! 그가 커다란 눈을 한 번 껌뻑이자 고여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비록 허공에는 어둠이 충만해 있었으나 그의 하얗게 빛나는 이슬 자국은 또렷이 보였다. 주천혜의 흑백이 뚜렷한 두 눈에 이슬이 맺혀짐을 보는 순간, 사검평은 갑자기 마음이 약 해지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주천혜는 물기 어린 음성으로 말하였다. “소제는 비록 처음에는 다른 목적을 지니고 의식적으로 접근하였으나 형님과 대화를 가진 이후부터 지금까지 맹세코 추호의 가식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제 형님이 정말로 좋아졌단 말입니다. 한 데…… 한데……” 그는 못내 가슴이 격동되는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리고 스스로 진정하려는 듯 애써 침묵을 지켰다. 사검평 역시 침묵한 채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바람마저 잠든 듯 풀잎 소리조차 들려 오지 않았다. 주천혜는 고개를 숙인 채 눈물만 떨구고 있을 뿐이었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검평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으며 말했다. “주 소제, 내게 말해 주겠다던 비밀은 대체 무엇인가?”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시선을 땅에 떨구고 흐느끼던 주천혜는 번쩍 고개를 치켜 들 었다. 그는 아직도 눈물이 가시지 않은 눈망울로 사검평을 쳐다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 다. “아…… 방금 무엇이라 하셨습니까?” 사검평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빙긋 웃었다. “나는 이미 주 소제가 시킨 대로 비밀을 지키겠다 약속했거늘 그래도 아직 비밀에 대해 들 을 자격이 없단 말인가?” 주천혜는 와락 사검평에게 달려들며 오히려 더 큰 울음을 터뜨렸다. “혀…… 형님, 진정 형님은 매우 좋은 사람이셨군요…… 이런 분을 내가 오해하였으니 진 정 용서하여 주십시오. 사실 나는 형님을 처음 보았을 때와 조금 전의 태도로 미루어 짐작하기를 형님이 무척이나 무정하고 목적을 위해서는 인정조차 두지 않는 냉혈한이라 생각했었습니 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던가를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형님, 제발 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격앙된 감정이었던지라 그는 체면도 잊고 사검평의 품을 파고들며 하염없이 흐느껴 울었 다. 사검평은 주천혜의 너무도 돌연하고 의외의 태도에 내심 곤혹을 금치 못하였다. 그러나 가슴으로 파고들며 그칠 줄 모르고 흐느끼는 그를 밀쳐 낼 수는 없었다. “하하하…… 나는 본시 주 소제가 비록 나이는 어리나 일신에 드높은 견식과 호기를 지닌 소영웅으로 알았는데, 이제 보니 아녀자 같이 연약한 일면도 지니고 있었군.” 그는 다정하게 주천혜를 안으며 등을 두드려 주었다. 순간, 사검평은 흠칫 놀라며 손을 떼었다. 품안에 안겨 흐느끼는 주천혜의 몸이 너무도 부드럽고 따스하여 마치 여인을 안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검평이 어색하게 서 있자 주천혜는 살며시 그의 품에서 빠져 나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만일 형님이 소제를 진정으로 믿어 주신다면 저는 형님을 의형(義兄)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형님께선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사검평은 주천혜의 돌연한 제안에 어안이 벙벙하여 무어라 대답치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 다. 주천혜는 사검평이 자신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없이 오직 묵묵히 서 있기만 하자 금세 풀이 죽었다. 깊이 고개마저 떨구고 다시금 울먹이는 음성으로 땅이 꺼져라 탄식하며 말했다. “제가 분수도 모르고 실례를 범했군요. 형님은 강호의 절세적 기협이고 나는 이런 거지꼴 인데…… 어찌 감히 의형제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형님께서 베풀어 주신 호의로 인해 잠시 눈이 뒤집혔던 모양입니다.” 유난히도 크고 흑백이 뚜렷한 그의 눈망울에 또다시 눈물이 가득 고였다. 때에 잔뜩 찌든 얼굴에 흐르는 맑은 이슬방울. 그것은 곧 구정물처럼 변했고, 그의 볼에는 하얀 줄무늬가 그어졌다. 눈물에 닦인 그의 피부는 백설같이 뽀얗게 빛나고 있었다. 사검평은 혼자서 울고 웃기를 반복하는 주천혜를 바라보며 고소를 금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천진난만함이 오히려 마음에 드는 사검평이었다. 그는 갑자기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누가 너의 제안을 거절했단 말인가? 다만 의(義)로써 맺어지는 형제간이니 약 간의 의식 정도라도 필요한데, 지금은 아무런 준비도 없지 않는가? 우선 하던 얘기나 마친 후에 결의연(結義宴)을 갖춰도 되지 않겠느냐? 하지만 네가 계속 계집애들처럼 눈물이나 흘 리고 있다면 어찌 나의 동생 될 자격이 있다 하겠느냐?” “혀, 형님…… 방금의 그 말씀 정녕 거짓은 아니겠지요?” “물론이다!” 주천혜는 어느 사이에 울음을 멈추었다. 더불어 두 눈에 맺혔던 눈물을 더러운 소매로나마 쓱쓱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는 언제 애달프게 울었냐는 듯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소제는 우선 지금부터 십 년 전에 발생하였던 과거의 혈안 한 가지부터 말씀드 리겠습니다.” 사검평은 주천혜의 얼굴을 바라보며 내심 실소를 금치 못하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다시 닦아 냈던 탓에 흑백이 기묘히 대조를 이루어 실로 가관이었던 것이다. 사검평은 자칫 폭소가 터지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야 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주천혜의 말을 듣는 순간 그의 안색은 엄중히 가라앉았다. 주천혜의 입에서는 한 가지 강호비사(江湖秘事)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십 년 전의 일이었다. 창업된 지 이백 년 이래로 강호사대세가는 각기 뛰어난 절학을 바탕으로 구파일방에 못지않 은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강호사대세가(江湖四大世家)! 그들은 세력을 떨치기 위해 서로 단합과 결별을 반복하였다. 이렇듯 그들은 서로의 이해 관계가 상충되어 이합집산을 거듭하였어도 언제나 정파무림의 대들보로서는 변함이 없었다. 하여 강호사대세가는 수대에 걸쳐 강호인의 존경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천마문과 천학보는 지난 십 년 이래로 한집안처럼 가깝게 지내 오고 있었다. 그것은 십 년 전, 천마문 문주 천마비상(天馬飛翔) 용태린(龍太鱗)과 천학보주 창천일학 진 청운이 결의형제를 맺고부터였다. 비록 의형제라 하나 그들의 우의는 친혈육보다 깊었다. 더구나 그들에게는 서로 비슷한 연배의 아들과 딸이 각각 하나씩 있었다. 하여 두 집안은 이들 아들과 딸을 일찍부터 한 쌍의 부부로 정해 두었다. 한데 이토록 철석 같던 두 집안의 우의가 한 개의 무림기보의 출현으로 하루아침에 산산이 부서지고 말 줄이야 그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불영옥패(佛影玉 )! 한쪽 면에 석가세존의 좌상이 섬세히 아로새겨졌을 뿐, 겉으로 보아서는 정녕 평범하기 이 를 데 없는 그 옥패에 대체 어떤 비밀이 숨어 있기에 십 년에 걸친 피의 결의조차 산산이 깨지고 말았던가! 불영옥패는 이백 년 전, 강호제일고수로 추앙받던 황산신니(黃山神尼)의 신물(信物)이었는데, 그 속에 황산신니의 절세무공비급을 찾을 수 있는 장보도가 숨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황산신니! 그녀는 일찍이 불문제일의 절학 항마보제신공(降魔菩提神功)을 익혔음으로 해서, 희대의 기 인 적양신군과 더불어 우내쌍성(宇內雙聖)으로 추앙받던 인물이었다. 만일 누군가 불영옥패를 얻어 황산신니의 유학(遺學)을 얻게 된다면, 그는 필경 강호제일 고수의 보좌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 명예! 권력! 이는 모든 강호인들이 노리는 바였다. 일신에 약간이라도 무공을 지닌 자치고 누구 하나 이것에 탐욕을 부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불영옥패! 단지 강호에 풍문으로만 떠돌던 이 무림기보가 어느 날 갑자기 사실로 나타났다. 천마문의 문주 천마비상 용태린이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문제의 불영옥패를 입수하였는다 는 것이었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전무림을 진동시켰다. 천하가 온통 들끓었다. 흥분과 열기에 넘친 수많은 고수들이 이 일로 천마문으로 모여들었다. 천마문이 제아무리 구파일방과 버금가는 위세를 떨친다 해도 이들 수백 명의 절정고수들 과 정면으로 맞서 싸울 수는 없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탐욕에 광분한 무리들은 정녕 노도와 같이 천마문을 향해 몰려들었으니…… 천마문으로서는 실로 풍전등화의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하나 하늘이 무심치 않았던 탓인가! 홀연히 한 인물이 출현하여 천마문의 위기를 극적으로 구해 주었다. 그는 바로 벽혈신군 유천화였다. 그는 본시 벽혈궁 궁주의 신분이었으니 그도 역시 강호사대세가 중의 일문(一門)이었다. 그러나 벽혈궁과 천마문 사이에는 그다지 깊은 친분도 없었다. 이런 그가 천마문의 위기를 구해 준 것이다. 탐욕에 눈이 어두워 벌떼처럼 모여들던 군웅들도 벽혈신군이 출현하니 차마 어쩔 수가 없 었다. 벽혈신군의 고절한 위명은 당시에도 여전히 강호를 떨쳐 울리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군웅들은 십대고인 중에서도 가장 고절한 벽혈신군의 위명에 억눌려 감히 어쩌지는 못했 으나 여전히 불영옥패에 대한 미련만은 떨쳐 버리지 못했다. 한데 이때 천마비상 용태린이 뜻밖의 사실을 선언하였다. 그 자신은 결단코 불영옥패를 소지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심지어 본 일조차 없다는 것이다. 비록 믿기는 어려웠지만 강호사대세가의 일문인 천마문의 문주가 스스로 천지신명께 맹세코 말하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그가 잠시의 재난을 피하기 위해 거짓으로 말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스스로 묘혈을 파는 격이어서 언젠가 무림 전체의 공적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될 경우 용태린이 비록 황산신니의 유학을 얻었다 해도 결코 살아남을 길은 없었다. 더구나 벽혈신군마저 천마비상 용태린의 말을 적극 보증해 줌으로써 구름처럼 천마문으로 모여들었던 군웅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이처럼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다고 믿을 즈음, 정녕 강호를 진동시키고도 남을 일대 괴사건 이 발생했다. 천학보주 창천일학 진청운의 부인이 처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었다. 第 八 章 강호비사(江湖秘事) 1 강호사대세가 중의 일문인 천학보 보주의 부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보 통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더구나 창천일학 진청운의 부인 장채봉(長彩鳳)의 유서에는 한 가지 수수께끼 같은 내용이 있어 그녀의 죽음은 더욱 세인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여인의 몸으로 정절(貞節)을 더럽힌 이상 어찌 하늘을 바라보며 살 수 있으랴! 오욕을 참 을 길 없어 스스로 사바세계(娑婆世界)를 하직하노니 다만 한 가지, 통한(痛恨)이 남을 뿐이다. 이 모든 것은 정랑(情郞)께서 잘못 사귀신 한 사람 때 문이니, 그 씻을 수 없는 오욕을 참을 수 없어 나는 죽음으로써 그 짐승에게 경종을 울리려 한다.> 그 기괴한 사연과 더불어 그녀의 유품에서 황산신니의 신물인 불영옥패가 나왔던 것이다. 이 같은 사실에 창천일학 진청운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녀가 죽으면서, 자신이 죽는 까닭은 오직 남편이 친구를 잘못 사귄 데 그 까닭이 있다 했던 것은 대체 무엇을 말함인가? 창천일학 진청운은 본시 오만한 성격이어서 절친한 친구라고는 오직 천마비상 용태린밖에 없었다. 창천일학 진청운은 설마 용태린이 자신의 아내를 범하였으리라고는 꿈에서조차 생각할 수 없었다. 한데 이러한 사실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인지 하나도 남김없이 강호에 전파되고 말았다. 한술 더 떠 강호에 떠도는 풍문에는 한 가지 사실마저 더 첨가되었다. 본시 천마비상 용태린과 창천일학 진청운은 서로 의형제 사이이면서도 의형인 용태린이 위 기에 처했을 때 진청운이 돕지 않았던 것에는 나름대로의 까닭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다. 그 이유인즉, 진청운이 용태린에 대해 본래 평소부터 시기심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여 천마비상 용태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진청운의 부인을 범하였고 급기야 스스로 자 결케 하였다는 것이다. 소문은 너무도 빠르게 돌고 도는 법이어서 마침내 창천일학 진청운의 귀에까지 들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소문은 전혀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나온 것이었 기실 창천일학 진청운은 천마문이 바람 앞에 등불처럼 멸문의 위기를 맞았을 때, 우연히 습득한 전대의 절예 한 가지를 터득하기위해 폐관(閉關)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이런 속사정을 누가 알랴! 이미 그릇된 사실이 강호에 널리 전파된 이상, 스스로 아무리 변명해 보아야 부질없는 짓 에 불과했다. 항간에 떠도는 풍문의 진상도 밝힐 겸 진청운은 마침내 천마문으로 향했다. 다만 모든 진상을 백일하에 철저히 밝혀 내기 위해서 그는 정체를 숨기고 비밀리에 행도했 다. 만일 일이 이대로만 진행되었어도 정녕 천하를 위해서 큰 다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무슨 운명의 얄궂은 장난인가? 창천일학 진청운이 태산 천마문에 당도하려 했을 때, 우연히도 평소 알고 지내던 팔괘신도 두상은을 만났다. 진청운이 비록 역용(易容) 수법으로 변장하여 있었으나 팔괘신도 두상은은 단번에 그를 알 아봤다. 두상은은 진청운이 천마문으로 가는 이유에 대해 다그치듯 물었다. 물론 그로서는 만에 하나 창천일학 진청운이 강호의 소문에만 현혹되어 이성을 잃고 행동 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해서였다. 하나 창천일학 진청운이 냉정하게 사리를 판단하고 있음에 그를 위로하며 옹호하였다. 창천일학 진청운도 그의 염려에 새삼 고마워했다. 그러나 좋은 말로 창천일학 진청운을 방심시킨 팔괘신도 두상은은 돌연 그에게 암습을 가 하였다. 실로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격으로, 창전일학 진청운은 혼혈(昏穴)을 제압당하여 혼절하 고 말았다. 그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하루가 지난 후였다. 그리고 그가 소중히 품속에 간직하였던 아내의 유서와 불영옥패도 이미 없어진 후였다. 뿐만 아니라, 그가 근래 우연히 습득했던 도가(道家)의 무상지보, 태을비급(太乙秘 )마저 없 어져 버린 것이다. 이럴 수가…… 진청운은 팔괘신도 두상은의 파렴치한 행동에 치를 떨었다. 그를 믿었던 것이 이처럼 씻을 수 없는 통한의 배신만을 안게 될 줄이야…… 하나 이미 때는 늦었으니, 창천일학 진청운은 빈 몸으로 천마문에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가 천마문에 당도하였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직 시산혈해(屍山血海)의 대참상뿐이었다. 거의 수백을 헤아리던 천마문 제자들이 단 한 명도 남지 않고 모조리 몰살당해 있었던 것 이다. 또한 천마비상 용태린조차 전신에 수십 개의 검상을 입은 채 무참히 살해되어 있었다. 창천일학 진청운이 눈앞의 이 엄청난 참상에 전율하고 있을 때였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이 그 앞에 들이닥친 것이다.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은 당연히 자신들보다 한 발 앞서 이곳에 왔던 창천일학 진청운을 의 심하였다. 이미 천마문과 천학보의 미묘한 관계를 알고 있던 그들이었는지라 그 의심은 너무나도 당 연한 것이었다. 그들은 창천일학 진청운을 혈겁의 흉수로 단정하였다. 다행히도 소림장문인 오성대사(悟性大師)가 적극적으로 변호하여 끝내 원흉(元兇)의 혐의에 서만은 벗어날 수 있었다. 하나 이로 인한 진청운의 충격은 말할 수 없다. 부인은 치욕 끝에 스스로 자결하였고, 이백 년을 이어 온 일문(一門)의 명예는 땅에 떨어졌 으며, 의형마저 원인 모르게 참살당하였다. 이처럼 엄청난 비극 앞에서 그가 입었던 마음의 상처는 결코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것이 었다. 천마문의 혈겁이 있은 지도 한 달쯤 됐을 무렵, 고뇌와 번민에 몸부림치던 창천일학 진청운 은 천학보를 이끌고 무림에서 물러나 영원히 강호의 일에 상관치 않겠노라 선언했다. 그후 십 년, 몰락한 천학보와 천마문은 지난 이백 년간의 성세가 무색하게 강호인들의 뇌리 에서 잊혀져 가는 중이었다. 강호비사(江湖秘事)에 대한 주천혜의 말이 끝나자 사검평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모든 것이 동생의 말대로라면, 이 사건의 열쇠는 팔괘신도 두상은에게 있지 않는가? 이 제 그가 강호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그를 잡아 자백을 받아 낸다면 모든 의혹은 백일하에 밝혀지지 않겠나?” 주천혜는 그 말에 깊이 탄식하였다. “이 일은 형님의 말처럼 간단치 않습니다. 우선 이 일에는 당금 무림의 십대고인 중 적어도 네 명과 관련이 있으며, 어쩌면 그 이상의 인물까지 연루되어 있을지 모릅니다.” “그 이상의 인물이라면……” “이미 오래 전에 은거하였거나 혹은 천하인이 모두 죽은 줄 알았던 전대노마(前代老魔) 중의 누군가가 뜻밖에도 배후에서 일을 꾸몄을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여 이 일이야말로 천하의 운명을 좌우할지도 모를 강호제일의 중대사이지요!” 그 말에 사검평은 주천혜를 뚫어져라 쏘아보았다. “이처럼 중대한 강호의 비밀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동생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가? 바라건 대 속이지 말고 솔직히 말해 주게.” 잠시 당황하는 듯하던 주천혜는 일성 탄식을 토해 내며 나직이 말하였다. “좋습니다. 형님께 사실대로 고백하지요. 나의 부친은 무림쌍기(武林雙奇) 중의 한 분으로, 강호에서 천사(天邪)라 일컫는 남해(南海) 천종도주(天鐘島主) 주가청(朱家靑)이십니다!” 사검평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주천혜, 그는 역시 자신의 짐작대로 강호 명가의 자제였기 때문이다. 그는 새삼스런 눈길로 주천혜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명문의 후예인 동생이 이렇듯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 행색을 하고 있는 까닭은 대체 무엇 인가?” 주천혜가 갑자기 익살스럽게 웃으며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었 “사실 저는 아버지의 눈을 피해 이처럼 거지 행색으로 변장한 것이랍니다.” “그건 또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왜 구태여 자네 부친의 눈을 피해야만 하는가?” “하하하…… 그것 역시 대수롭지 않은 이유 때문이랍니다. 본시 저의 아버님은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식의 오만한 기질이 있어, 당신의 자식인 내가 섣불 리 강호에 나가 다른 사람들에게 좌절당할까 봐 저의 강호 행도를 적극 제지하셨답니다. 제 가 가전절예(家轉絶藝)를 팔(八) 성(成) 이상 연성해야 강호에 내보내 주신다고 말씀하셨죠.” 그는 다시 익살스럽게 웃었다. “하나, 이는 아버님께서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과 모순이 있었어요. 강호에서 행동하려면 일 푼의 만용과 이 푼의 기지, 그리고 칠 푼의 강호 경험을 지니면 된다고 항상 말씀하셨거 든요. 해서 소제는 실상 가전절예를 아직 절반 정도밖에는 성취하지 못하였으나 기지와 재 치만은 누구 못지않다고 자부하여 아버님 말씀대로 일 푼의 만용을 다하여 몰래 강호로 나왔던 것입니다.” 길게 말하던 그의 표정이 갑자기 시무룩해졌다. “사실 나의 이런 내력을 처음부터 밝히지 않았던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저 의 부친을 일러 강호에서 천사라 일컫듯 강호인들은 아버님을 공포와 질시가 함께 담긴 눈으로 보기 때문이 었습니다. 사실 제 아버님의 심성은 공명정대하기 그지없으나, 다만 남과 사귀기를 싫어하는 성격 때문에 겉으로는 한없이 거만하고 차갑게 보이지요. 그러나 알고 보면 다시없이 인자하고 너그러운 분입니다.” 그의 눈에 어느 사이엔가 옥 같은 눈물이 글썽였다. “그분은 어머님께서 나를 낳은 직후 산고(産苦)로 돌아가시자 나를 장중보옥(掌中寶玉)같 이 대하셨습니다. 사실 아버님이 짐짓 저를 엄격하게 대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오직 소제를 너무나 아끼고 귀여워하시기 때 문입니다.” 주천혜는 또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검평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짐짓 크게 웃었다. “하하하…… 명문 출신, 해박한 지식, 넓은 견문…… 이렇듯 주 소제는 모든 것이 다 좋 은데 다만 그 계집처럼 훌쩍이는 버릇이 옥에 티란 말이야! 바로 그 점이 인중룡(人中龍)과 같은 소제의 기상을 깎아먹는단 말이야.” 놀리듯 호쾌한 웃음에 주천혜는 쑥스러워 씨익 웃고 말았다. 그때 사검평이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한데, 동생은 조금 전 나에게 이 혈안에는 강호십대고인 중 최소한 네 명의 고인이 관련되어 있다 했는데, 그들 네 명이란 대체 누구누구인가?” 주천혜는 갑자기 긴장의 빛을 떠올렸다. 그는 새삼스레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들 네 명의 고인은 첫째 일군(一君), 다음 쌍기(雙奇), 다음으로 삼마 중의 일인인 천독마수 우문관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 일에 관련되었음을 아는 사람은 무림 전체에서도 거의 없어, 만일 소제의 부친을 제외하고 그 누군가 이 일의 내막을 안다면 그가 바로 해결의 열쇠를 지닌 자라고 단정할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에 사검평은 더욱 미궁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그건 또 무슨 얘기인가? 어찌하여 동생의 얘기는 갈수록 종잡을 수 없는가? 어서 나머지 자세한 내막까지 말해 보게.” 주천혜는 별로 망설이지도 않고 모두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 일은 당시 천마문 혈겁의 현장을 자세히 살핀 소림장문인 오성대사가 직접 밝힌 것입 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천마비상 용태린의 치명적 사인(死因)은 아버님의 독문절학 일양지(一陽指)였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가……” 사감평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주천혜의 말이 이어졌다. “더욱 놀라운 것은, 천마비상 용태린의 미심(眉心)에서 일점의 홍흔(紅痕)이 발견됐다는 사 실입니다.” 사검평은 어리둥절했다. “그건 또 무슨 뜻인가?” 주천혜가 말했다. “마치 핏자국을 연상케 하는 일점 홍흔, 그것은 벽혈신군 유천화가 절정의 검강신초(劍 神招)를 펼쳐 상대를 처치하였을 때만 나타나는 독문의 상흔이기 때문이지요. 또한 현금 무림에서 검강을 자유자재로 펼칠 수 있는 고인은 벽혈신 군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사검평의 안색이 변했다. “그렇다면 천마비상 용태린의 죽음은 자네 아버지와 벽혈신군에 의해서라는 것인가?” 주천혜는 사검평의 이 물음에 선뜻 대답하지 않은 채 또 다른 얘기를 꺼냈다. “의혹은 그뿐이 아닙니다. 죽은 천마비상 용태린의 움켜쥔 왼손에는 강호인들이 초혼혈풍(招魂血楓)이라 부르며 두려워하는 천면환영인의 신표가 쥐여져 있었던 것입니 다.” 사검평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사건에서 무엇인가 조그마한 실마리라도 잡으려는 듯 오직 주천혜의 얼굴만을 주시하였다. 주천혜가 천천히 말했다. “그밖에도 몇 가지 의문점이 있었습니다.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은 이미 죽어 있는 천마문 제자들의 시체를 살폈는데, 그들이 모두 모종의 극독에 중독되어 무공이 상실된 상태에서 처참하게 도륙당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천마문의 인물들은 변변히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처참한 최후를 마쳐야 했던 것이지요!” 갈수록 놀라운 사실이었다. 주천혜가 한마디 덧붙였다. “더구나 그 독술을 시전한 솜씨는 정순하기 이를 데 없어 범인의 눈으로는 도저히 알아차 릴 수 없을 정도였답니다. 만일 당시 개방방주 철담호개 악무연에게 정심한 독술지학(毒術之學)이 없었더라면 그들 수백 명의 수하들이 어떻게 몰살당하였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검평이 약간의 생각을 정리하여 비로소 물었다. “그렇다면 그 독상이 굳이 천독마수에 의한 것이라고 단정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본시 천 하에서 독을 쓰는 고수가 어찌 천독마수 우문관뿐이겠는가?” “물론 천하에는 용독(用毒)의 대가(大家)들이 무수히 많지요. 하나 무형지독(無形之毒)으 로써 순식간에 그토록 많은 인명(人命)을 빼앗을 수 있는 자는 오직 천독마수뿐입니다.” 그 말에 사검평은 갑자기 깊은 상념에 젖어 들었다. 주천혜는 이러한 사검평의 상념에 혹시 방해가 될까 하여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한 순간, 사검평의 눈에서 섬전 같은 광채가 번뜩였다. “이제까지의 동생 말을 모두 종합해 보건대, 과연 이 일의 중대성을 뼈저리게 알겠네.” 사검평은 이렇게 서두를 꺼낸 후 한마디 덧붙였다. “한데 이 사건이 있은 후, 구파일방에서는 그 일에 관해 과연 어떤 조치들을 취했던가?” 주천혜가 대답했다. “그분들은 서로 숙의를 거듭했던 끝에 마침내 한 가지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것은 이들이 당시에 보고 느꼈던 모든 것을 영원히 남에게 발설치 않는다는 맹약의 결정이었습니다.” “그것은 또 무슨 까닭인가?” “만일 이 같은 사실이 외부로 새어나간다면 필시 강호에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일어나 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자네는 이러한 사실을 어찌 알고 있는 것인가?” “사실 소제의 돌아가신 어머님은 오성대사의 친누이셨습니다. 또한 본시 오성대사와 부친 은 둘도 없는 죽마고우(竹馬故友) 사이였기에 특별히 귀띔해 주셨던 것입니다.” 사검평이 신중한 어조로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자네의 아버님은 이 일과 과연 어떤 관계가 있는지 소제는 물어 본 적이 있는 가?” “물론이지요. 그러나 아버님은 자신은 그 일과 전혀 무관하다는 한 마디 말뿐이셨습니다.” 사검평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부친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니 나 역시 그 말씀을 믿겠네.” 주천혜가 갑자기 신기하다는 듯 사검평을 물끄러미 바라보았. 그러자 사검평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별로 놀랄 일도 아니네. 나는 비록 자네의 부친을 한 번도 뵌 적은 없으나 그분의 성품 을 능히 짐작할 수 있네. 내가 생각하기에 그분은 모종의 단서를 잡았을 것으로 추정되네. 그러나 그 어떤 이유로 더 이상 이 일에 간여치 않으려 하실 뿐일 거야.” 마치 직접 목격한 듯 한마디로 잘라 단정하는 사검평의 말에 주천혜는 경악성을 터뜨렸다. “형님이 그걸 어떻게?” 사검평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 정도로 무얼 그리 놀라는가? 나는 다만 동생의 말을 종합하여 나름대로 추 리해 보았을 뿐이네. 자네 부친 같은 절세적 고수께서 왜 이 일에 직접 나서지 않고 침묵을 지키고 있겠나? 이로 보아 이 일에는 필시 그 배후에 자네 아버님 같은 분으로서도 감히 건 드릴 수 없는 무서운 인물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일세. 그러나 나 역시 한 가지 알 수 없는 것은, 자네 아 버님이 독문절학으로 구사하고 있는 일양지(一陽指)를 흉수가 어떻게 하여 터득하게 되었는 지, 그 내력에 관해서일세.” 주천혜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형님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시다니 과연 놀랍습니다. 소제가 말씀드리지요. 지금으로부 터 이십 년 전 부친께서는 우연히 황산(黃山) 근처를 지나시던 중 어느 폐허가 된 장원에서 하룻밤 기거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뜻밖에도 한 권의 비급을 얻었습니다. 일양지는 바로 그 비급에 기재되어 있던 무공이지요.” 사검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나의 짐작대로였군. 만일 내 짐작이 틀림없다면, 자네 아버님은 누군가에 의해 치 밀하게 짜여진 음모의 한 희생자일 뿐일 걸세. 그러나 마지막으로 또 하나 알 수 없는 것이…… 암중의 흉수는 자신의 계획이 완벽하게 시행되었는데 왜 마지막 순간에 포기하고 더 이상 손을 쓰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네.” 그 말에 주천혜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렇다면 형님의 말은……” 사검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나는 감히 단언하건대, 이 일이 본래 천학보와 천마문을 목표로 했다기보다는 바로 네 명의 고수들을 유인하기 위한 하나의 계략이라 장담하네.” “그렇듯 확신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나 역시 확신하는 이유는 밝힐 수 없네. 하지만 나의 짐작이 십중팔구 틀림없을 걸세. 다 만 이 일의 전모를 확실히 가리자면 자네 부친을 제외한 나머지 세 고인을 모두 만나 봐야만 할 것이 네.” 사검평은 갑자기 빙그레 웃었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머지않아 이 일을 해결할 만한 중요한 단서를 찾아 내게 될 것일 세.” “헤헤…… 형님의 그 단서라는 것은 바로 팔괘신도 두상은에게서 얻어 내려는 것이지 요?” 사검평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주천혜가 가볍게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데 정녕 알 수 없는 것은 바로 팔괘신도 두상은의 행동입니다. 그는 십 년 전의 혈 안 이래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었는데 이토록 갑자기 모습을 나타낸 이유에 대해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나타난 지 불과 얼마 되지 않아 이곳 진전 일대에 이토록 많은 강호고수들이 속속 그 모습을 나타내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내 생각도 역시 마찬가지일세. 하나 팔괘신도 두상은이 십 년 동안의 잠적에서 스스로 모습을 나타낸 것이 그 자신의 결정에 의해서라면, 무슨 꿍꿍이속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는 갑자기 안색을 싸늘히 하며 한마디 덧붙였다. “어쨌든 그들 일행의 종적을 찾아 내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네. 종적만 찾아 낸다면 그 후의 일은 내가 알아서 깨끗이 처리하겠네.” 그러자 주천혜는 가슴을 치며 호언장담했다. “하하하…… 그 정도야 누워서 식은죽 먹기입니다. 형님은 아무 염려 말고 그 일을 제게 맡겨 주십시오. 소제 기필코 빠른 시일 내에 그들이 어디에 묵고 있는지 알아 내어 알려 드리겠습니다.” 사검평은 빙긋이 웃으며 주천혜를 바라보았다. < 제1권 끝 > 第 九 章 심야(深夜)의 난전(亂戰) 1 야밤 삼경(三更), 진전의 남쪽 거리. 화려한 동쪽 거리와는 달리 이곳은 음울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 진전에서 가장 하류의 계층민들이 밀집되어 살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 거리 한 모퉁이에 허물어질 듯 낡은 객잔 하나가 있었다. 찢어지고 빛바랜 천에 손씨객잔(孫氏客棧)이라고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깃발이 음울한 공 기 아래 역시 청승맞은 모습으로 펄럭이고 있었다. 본시 이곳은 진전 부근을 지나는 마부와 떠돌이 장사꾼들이 이용하는 허름한 곳이었다. 낡고 꾀죄죄해 그 값이 놀랄 만큼 쌌기 때문에 항상 많은 손님들로 붐볐다. 밤이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랑인들의 숙소인 이곳 손씨객잔은 왁자지껄 떠들썩했다. 그러나 객잔 전체가 소란스러운 중에도 후원에 자리잡은 독채만은 유난히도 조용했다. 후원의 독채는 이틀 전 이곳 진전에 나타난 유랑곡예인들이 송두리째 세내고 있었다. 독채의 객실 안에서는 한 노인이 걸상에 앉아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 노인은 팔괘신도 두상은이었다. 그는 왜 이처럼 늦게까지 잠 못 이루며 고뇌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일까? 그는 땅이 꺼져라 장탄식을 뿜어 내며 중얼거렸다. “그럴 수는 없어. 지난 십 년간 노부는 이 한 가지의 일로 얼마나 고심해 왔던가? 한데 이 제 와서 단 한 순간을 참지 못하여 십 년간의 고초를 헛되게 하다니…… 안 돼. 결코 그럴 수는 없어.” 그때 밖으로부터 나직한 인기척이 들려 왔다. 두상은의 안색이 이내 돌처럼 굳어졌다. “누구냐?” 암암리에 방비하며 근심스레 묻는 순간, 방문이 소리없이 열렸. 청의소녀 하나가 들어서며 나지막이 말했다. “사부님께서 밤이 늦도록 주무시지 않기에 차 한잔을 끓여 왔습니다.” 그녀는 바로 오늘 낮에 쌍검무를 추었던 소녀였다. 한데 당시에는 분명 조손간(組孫間)이라 했건만 지금은 사부라 부르지 않는가? 두상은은 소녀를 보자 새삼 탄식해 마지않았다. “우리가 저녁 무렵에 만났던 옥면금선 진가락의 말은 절대 허언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하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노부는 불영옥패를 이용하여 강호를 격동시킴으로써 어느덧 강호인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가는 과거의 한 가지 혈안을 밝히고자 이렇듯 다시 강 호로 나왔건만…… 뜻하지 않은 천학보의 고수들이 이처럼 빨리 찾아올 줄이야……” 그 말에 소녀의 얼굴에는 분노의 빛이 가득 떠올랐다. “옥면금선, 그 파렴치한 자를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만일 사부님께서 선부(先父)의 원 수를 밝히기 전까지는 결코 태을비급의 절예를 펼치지 말라고 분부하시지 않았다면 벌써 나의 손에 황천 고혼이 되었을 것입니다.” 두상은은 다시금 탄식하며 나지막이 말했다. “선아(禪兒)야, 너는 그를 너무 나쁘게 보지 마라. 어쨌든 그는 부모가 정해 주신 너의 정 혼자이지 않느냐?” “그의 파렴치한 소행은 어느 누구에게도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비록 부모가 정해 주신 정혼자라 해도 나는 그를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두상은이 전에 없이 엄숙하게 말하였다. “얘야, 너는 그를 오해하지 마라. 그는 본시 그런 사람이 아니다. 다만 노부의 정체를 밝히 기 위해 그런 행동을 했을 것이다. 더구나 그는 노부의 과거 행적에 대해 너무도 큰 오해를 하고 있다.” 그의 얼굴에 드리운 고뇌의 표정이 더욱 짙어졌다. “후유…… 만일 이번에 노부가 과거의 모든 비밀에 대해 그 진상을 밝혀 내지 못한다 면…… 십 년간이나 고심했던 노부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감은 물론, 너의 부모와 천학 보 사이의 피맺힌 원한도 영원히 풀 길이 없으리라!” 청의소녀, 그녀는 바로 천마문주 천마비상 용태린의 무남독녀 용군선(龍君禪)이었다. 전원 몰살당한 천마문에서 홀홀단신 살아남은 그녀는 두상은과 함께 당시의 혈겁에 대해 은 밀히 조사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부모가 정해 주신 정혼자인 옥면금선 진가락을 만나게 된 것인데, 첫 대면에서 그런 치욕을 당했으니 어찌 마음이 편할 수 있겠는가? 진가락에 대한 증오심이 솟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내심 울분을 삭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두상은이 다시 한 번 그녀의 마 음을 다독여 주려 할 때였다. 돌연 암울한 야색을 휘저으며 괴소성이 울려 퍼지는 것이 아닌 “으하하하하하……” 순간, 팔괘신도 두상은과 용군선은 아연 경악했다. “누구냐?” 팔괘신도 두상은은 용수철처럼 창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그러나 암야(暗夜)의 공간에는 희미한 월색만이 교교할 뿐, 그 어느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두상은은 긴장된 표정으로 사위를 둘러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 고인이시기에 이렇듯 심야에 노부를 방문하셨소?” 이내 싸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흐흐흐…… 팔괘신도 두상은…… 십 년 동안 많이 늙었군. 너는 오늘 본인을 따라 본 보의 보주께 가주어야겠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팔괘신도 두상은은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었다. “그…… 그대는 무적금편(無敵金鞭) 광자릉(廣字凌)!” “으하하하…… 아직도 노부를 잊지 않았다니 정녕 다행이군.” 말과 함께 한 줄기의 인영이 유령인 듯 그의 앞에 불쑥 솟아났 청의를 입은 육십 가량의 노인이었는데, 그의 어깨 위로는 독문병기인 금편(金鞭)의 손잡이 가 형형히 빛나며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때 용군선도 사부를 뒤쫓아 방에서 뛰쳐나왔다. 팔괘신도 두상은이 침중한 어조로 물었다. “광 대협, 이처럼 야심한 시각에 노부를 찾아 주신 이유가 무엇이오?” 광자릉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뻔뻔스러운 놈, 정녕 몰라서 묻는가? 네가 과거 본 보의 보주께 저질렀던 일을 벌써 잊 었단 말이냐!” 팔괘신도 두상은은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내 어찌 잊을 수 있겠소? 하나 과거 노부가 저질렀던 일은 정녕 불가피했소. 비록 지금 밝힐 수는 없으나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사정을 알아주시기 바라오. 때가 되면 진 형 을 직접 만나 전후 사정에 대해 상세히 털어놓을 테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시기 바라오.” “닥쳐라! 그따위 간지(奸智)에 속아넘어갈 나 광자릉이 아니다. 흥! 네가 순순히 말을 듣 지 않겠다면……” 그는 금편을 끌러 내어 바닥을 한차례 철썩 때리며 성난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마침 잘되었다. 노부는 오늘 그대가 강호에 자랑하던 칠채배금도(七彩背金刀)의 위력을 구 경해 봐야겠다.” 바로 그때, 객실 안으로부터 한 무리의 인영이 긴 곡선을 그리며 쏘아 나왔다. 두상은의 일행인 칠팔 명의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장중으로 뛰어들기 무섭게 광자릉의 주위를 삼엄히 에워쌌다. 무적금편 광자릉은 분기 탱천하여 광소성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너희 젖비린내나는 애송이들이 감히 노부와 대적하겠다는 말이냐?” 흉살스런 살기가 짙은 운무처럼 사위를 뒤덮었다. 팔괘신도 두상은이 다급히 소리쳤다. “너희들은 속히 물러나라. 감히 제 자신의 역량도 모르는 채 광 대협과 같은 분께 실례를 범하다니……” 이어 그는 광자릉을 향해 급히 말했다. “광 대협, 이 아이들은 아직 나이 어려 철없이 나섰던 것뿐이오. 너무 나무라지 마시기를 바라겠소.” “흥, 어리석은 소리! 때는 이미 늦었다. 비록 노부가 용서한다 하여도 진작부터 이곳에 도 착해 있는 본 보의 정예들이 결코 용서치 않으리라.” 그는 말을 끝맺기 무섭게 한 가닥의 휘파람을 날렸다. 그러자 어둠 속으로부터 이십여 명의 흑의경장인들이 마치 유령처럼 솟아나왔다. 장중은 일촉즉발의 팽팽한 기운으로 휩싸였고, 사위는 더욱 싸늘한 적막만이 흘렀다. 이십여 명의 흑의경장인들이 두상은 일행을 에워싸자 무적금편 광자릉은 돌연 앙천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 이곳은 이미 천라지망(天羅之網) 속에 갇혔으니 노부의 허락 없이는 그 누구 도 감히 도망치지 못하리라.” 이어 그는 두상은을 향해 호쾌히 소리쳤다. “하하하…… 팔괘신도, 그 동안 숨어 있으면서 얼마나 실력이 늘었는지 어디 구경이나 해 보자.” 그는 어느새 광풍노도와 같이 공세를 펼쳐 가는 중이었다. 팔괘신도 두상은은 황급히 그의 공격을 피해 내며 사정조로 말했다. “광 형, 제발 이러지 마시오. 그대는 지금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오.” “변명을 하고 싶으면 본 본주의 면전에서나 하라. 노부는 그대의 말을 듣지 않겠다.” 무적금편 광자릉이 싸늘하게 쏘아붙이며 본격적으로 공세를 펼치기 시작하자 만공(滿空) 가 득 금빛 찬란한 편영이 소용돌이쳤 금빛 광망은 폭염이 휘몰아치듯 일제히 두상은을 노리고 쏘아 갔다. 절초 설화개정(雪花蓋頂)의 수법이었다. 두상은은 아연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드디어 그도 신법만으로는 더 이상 광폭 무비한 공세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 신형을 바꾸며 가볍게 반격을 시도했다. 즉, 전광석화와 같은 몸놀림으로 두 다리를 정(丁) 자와 유사하게 기묘한 자세를 취하는 한 편, 두 손은 가볍게 휘둘렀다. 슉! 슈욱! 두 줄기 무형의 암경(暗勁)이 거의 소리조차 없이 칼날처럼 쏘아졌다. 순간, 무적금편 광자릉의 설화개정 일초는 속절없이 무산되고 말지 않겠는가? “흑!” 그의 고절한 솜씨에 광자릉은 흠칫 놀라는 듯하더니 이내 광소성을 터뜨리며 크게 외쳤다. “으하하…… 네놈이 보주님에게서 훔친 태을비급으로 이미 태을무상현공(太乙無相玄功)을 익혔을 줄이야…… 그러나 어떤 수단을 부리더라도 노부의 손길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하리라.” 다음 순간, 광자릉은 성난 사자처럼 포효하며 금편을 위맹하게 쓸어 냈다. 우르르…… 팟! 파팟! 꽈르릉! 마치 천지 개벽의 순간인 듯 일련의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오며 필설로는 이루 표현할 수 도 없는 경세의 장관이 펼쳐지기 시작했다다. 수천 마리의 영사(靈蛇)가 서로 뒤엉켜 맹렬히 몸부림치는가 하면, 암야의 허공이 갈라지 는 듯 수십 수백의 금광이 쾌속 무비하게 너울거렸다. 그러다가 또다시 폭풍처럼 한데 휘몰아치기도 하고, 실로 걷잡을 수 없는 경세적 신공이 전 개되었다. 이것이 바로 영사신편칠십이식(靈蛇神鞭七十二式)이라 이름붙여진 그의 성명절학(聲名絶 學)이었다. 팔괘신도 두상은은 비록 내키지 않았으나 사태가 이처럼 급박해지자 그로서도 어쩔 수 없 었다. 시시각각 숨돌릴 사이도 없이 몰아쳐 오는 금편환영을 가까스로 피하며 즉시 두 손을 휘저 었다. 슈욱! 슈욱! 이번에야말로 예리한 파공음이 거침없이 쏟아지며 반경 십 장 이내를 완전히 휩쓰는 폭풍 과 같은 기세가 펼쳐졌다. 대망번신(大 蒜身)! 계자세천(鷄子勢天)! 사자포구(獅子抱球)! 비록 그 위세는 경천동지할 지경이었어도 일련의 초식들은 강호의 고수급 인물이라면 누구 나 알고 있을 팔괘장(八卦掌) 중의 평범한 초식들이었다. 다만 그 속에 깃들인 태을무상현공으로 인하여 그 위력이 경천동지할 정도로 증진되었던 것 이다. 경악할 만했던 광자릉의 대공세는 그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흑!” 무적금편 광자릉은 아연 숨을 들이켰다. 상대인 팔괘신도 두상은이 한낱 평범한 초식으로 자신의 공세를 여지없이 무산시켰음을 보 고서야 비로소 경악의 염(念)을 지녔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이내 분노로 인하여 불덩이처럼 달아올랐. “십 년 전, 너는 한 자루 칠채배금도로 대강남북을 휩쓸더니 이제는 한술 더 떠 적수공권(赤手空拳)만으로도 그때의 위세에 뒤지지 않겠구나. 겨우 십 년이라는 짧은 세 월에 네가 그토록 향상되었을 줄이야…… 노부는 진정 놀랐도다. 하나……” 격분에 찬 포효가 끝나기도 전에 그는 다시금 광란하는 야수처럼 공세를 전개했다. 우우우…… 마치 수많은 원혼들이 일제히 허공에서 울부짖듯, 모골 송연한 괴음이 진동하며 금빛 광채 가 파도치듯 일렁였다. 이 일련의 초식들은 영사신편칠십이식 중에서도 정수에 속하는 가공할 초식들이었다. 영사탈혼(靈蛇奪魂)! 쌍수경혼(雙手驚魂)! 비천혈망(飛天血 )! 과연, 수십 년간 강호를 진동했던 그의 무적금편이란 별호는 허명이 아니었다. 수만 가닥의 금빛 광채가 저마다 예리한 칼날처럼 번뜩이며 무서운 기세로 몰아쳐 갔다. 귀신도 놀랄 가공할 위력에 팔괘신도 두상은의 얼굴에도 한 가닥 비장한 기운이 떠올랐다. 그로서도 이제 단 한 치도 양보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섣불리 아량을 배풀다간 필시 낭패를 면치 못할 처지였으니 어찌하겠는가! 금빛 편영에 둘러싸인 그의 입에서 암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광자릉, 이는 본시 노부의 진의가 아니오만 할 수 없는 일. 부디 그대는 노부를 박정한 사람이라고 원망치 마시오.” 광자릉의 노갈이 즉시 그의 말을 끊어 버렸다. “흐하하하…… 본시 무림인의 대결에는 말이 필요없는 법! 오직 실력만이 생사를 구별지을 뿐이다.” “지당한 말씀!” 일순, 팔괘신도 두상은의 신형이 질주하는 수레바퀴처럼 바람을 일으켰다. 동시에, 그가 태을비급 중의 또 다른 절예 태을대번장(太乙大蒜掌)을 시전하니, 한 순간에 그의 신형이 거대한 불기둥처럼 중천으로 솟구쳤다. 일순, 그의 두 손은 두 마리 뱀이 서로 뒤엉키듯 기묘하게 허공을 휘저었다. 팟! 두 개의 유성이 구만 리 장천에서 서로 부딪치듯 심혼을 뒤흔드는 일성 괴음이 발출되었 다. 찰나, 그토록 무시무시하게 맹위를 떨치던 광자릉의 절초가 허무하게 스러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으으우……” 무적금편 광자릉은 경악한 나머지 짐승 같은 신음만을 내뿜었 그로서는 정녕 믿기 어려운 눈앞의 현실이었다. 하나, 어찌 이 정도에서 손을 멈출 수 있으랴! “두가 성의 늙은 도적아, 내 오늘 네놈의 목을 취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성(性)을 갈리라!” 최후의 몸부림인 듯 그는 다시 한 번 금편을 맹렬히 휘둘렀다. 독사토신(毒蛇吐信)! 선주후참(先奏後斬)! 망혼세사(亡魂勢蛇)! 분노한 위세는 열화와 같았고, 격탕치는 기류는 해일을 방불케 했다. 누대에 걸쳐 천학보의 명성을 지탱하여 왔던 거세난망의 절초였다. 하지만 이 맹렬한 절초마저 두상은의 몸을 감싸고 있는 투명한 기류에 부딪히자 속절없이 튕겨 나오고 마는 것이었다. 무적금편 광자릉은 실로 눈알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그, 그것은 태을무상현공의 호신강기……” 광자릉은 분노한 나머지 울컥 한 모금의 핏덩이를 토해야 했 팔괘신도 두상은은 십 년 전만 해도 결코 그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한데 이제는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하여도 머리카락 한 올 다치게 할 수 없으니…… 크게 자존심을 상한 두상은이 목숨을 돌보지 않고 재차 공격을 감행하려는 순간이었다. 팔괘신도 두상은의 두 손이 허공에 번뜩 날카로운 곡선을 그었 찰나, 어느 사이엔가 광자릉의 금편을 들었던 두 손이 스르르 풀어져 내렸다. 동시에 그는 전신의 기혈이 있는 대로 들끓어 다시금 한 사발의 선혈을 토해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두상은은 손을 거두며 처연한 음성으로 말하였다. “광 형, 내가 손을 썼음을 용서하시오. 이는 정녕 불가피하여 나로서도 어쩔 수 없었소. 그러니 제발 이 자리에서 약간의 양보를 베푸시오.” 광자릉은 냉막한 표정으로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흥! 잔재주를 조금 부릴 줄 안다고 기고만장하지 말라! 나 광자릉이 비록 이곳에서 죽 는다 해도 너는 결코 이 자리를 벗어나지 못할 것!” 그는 입가에 묻은 선혈을 소매로 쓰윽 닦아 낸 뒤 크게 외쳤 “쳐라!”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천학보의 고수 이십여 명이 일제히 앞으 로 나섰다. 두상은의 제자들 역시 분연히 나서니 실로 일촉즉발의 흉흉한 행세였다. 누군가 한 명만 움직이면 곧 피바람이 휘몰아칠 순간이었다. “으흐흐흐흐……” 어디선가 한 가닥 음침한 괴소가 흘러나왔다. 한데, 그 괴소에 얼마나 심후한 내공이 담겨져 있었던지 장중에 있던 모든 이의 얼굴이 경 악으로 일그러졌다. 무적금편 광자릉이 다급히 외쳤다. “구원을 해결하려는 장(場)에 이렇듯 왕림하신 분은 어느 고인이시오?” 그 말에 화답하듯 음산한 광소가 터져 나왔다. “으하하…… 십 년 전 강호에서 사라졌던 불영옥패가 다시금 그 모습을 나타낸 이상, 노 부가 이 자리에 나타남을 그 누가 탓할 수 있겠는가?” 실로 전신의 모발이 곤두설 만큼 싸늘한 음성이었다. 찰나 광자릉과 두상은, 두 사람의 앞에 어느 사이엔가 한 인영이 나타나는데 실로 유령인 듯 소리마저 없었다. 문제의 장본인은 육순 가량의 금포인(錦袍人)이었다. 그는 송충이처럼 짙은 눈썹에 위엄이 있는 호목(虎目)을 갖췄고 묵직한 코가 가히 비범한 일면을 엿보이게 했다. 그러나 얇은 입술이 잔혹한 인상을 풍겨 그 전체적인 인상은 일대 효웅(梟雄)의 풍모임을 느끼게 하였다. 그의 옆구리에는 한 자루 고색 창연한 보검이 걸려 있었는데, 보통 장검보다 족히 한 자는 더 긴 듯했다. 이런 검을 구사하는 인물이라면 필경 범상한 고수는 아니었다. 한편, 그의 얼굴을 일별한 무적금편 광자릉의 얼굴은 한 가닥 핏기마저 사라져 핼쑥하게 변해 버렸다. “다, 당신은 경천검마 조지릉!” 2 중인들은 아연 전율한 채 두려움의 시선으로 일제히 금포인을 주시했다. 경천검마(驚天劍魔) 조지릉(趙志凌)! 당금 무림에 태양과 같이 군림하는 십대고인 중의 일인(一人)인 그가 어찌 이 자리에 나타 났는가? 중인들은 실로 경악과 함께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무적금편 광자릉은 이내 안색을 싸늘하게 굳히며 힐난하는 듯한 어조로 결연히 따 졌다. “경천검마, 조금 전 당신의 그 말은 대체 무슨 뜻이오?” 금포인이 음산하게 대꾸했다. “흐흐흐…… 예로부터 좋은 일에는 옆에서 구경하던 자에게도 한 몫을 주었음이 인정(人 情)이었네. 더욱이 천하지보(天下之寶)는 본시 주인이 따로 없으니 노부가 이 자리에 왔음을 탓하지 말 게.” 경천검마 조지릉은 두상은과 광자릉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만일 우리 두 사람이 합작하여 저 작자 팔괘신도 두상은으로부터 불영옥패를 취한다면 능 히 어느 누구에게도 두 번 다시 빼앗기지 않고 이 무상의 천하지보를 무사히 지킬 수 있지 않겠나?” 무적금편 광자릉의 얼굴에 살기가 떠올랐다. “경천검마, 그대가 그 같은 말로 감히 노부를 현혹하려 들다니…… 명색이 십대고인의 일 인으로 어찌 이토록 염치없을 수 있는가! 만일 강호인들이 오늘의 이 말을 들었다면 세 살 먹은 어린 아이일지라도 경천검마의 위명에 침을 뱉으리라!” 그 말에 경천검마 조지릉은 앙천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무적금편, 네놈이 약간의 재주를 지녔다 하여 감히 분수도 모르고 노부에 게 대항할 심산인가? 오냐, 정히 그렇다면 구태여 거절하지 않겠다. 노부는 오늘 천학보가 지난 십 년간 강호에서 잠적하였던 사이에 얼마나 놀라운 재간을 익혔는지 친히 확인해 보아야겠다!” 스르릉…… 그의 손에는 네 자 일곱 치의 고색 창연한 보검이 쥐여져 비정하리만치 차가운 청색 광망을 뿜어 냈다. 그것은 오늘의 경천검마를 있게 한 경천보검(驚天寶劍)이었다. 이 같은 조지릉의 무언적 협박에 광자릉은 더욱 안색을 굳혔 그는 들고 있던 금편을 비스듬히 옆으로 뉘어 조만간에 있을 경천검마의 기습으로부터 대 비했다. 내상당한 몸으로 경천검마에게 정면으로 맞서겠다는 생각은 누가 보아도 무모한 일이었다. 하나, 그는 천학보 총호법의 신분으로서 비록 목숨을 잃을지언정 싸우지도 않고 스스로 패 배를 자인하는 수치를 감수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곧 수대로 이어 온 천학보의 명성에마저 손상이 가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는 이를 악물었다. 경천검마 조지릉은 무적금편 광자릉과 너무도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그는 입가에 한 가닥 조소를 담은 채 독사 같은 눈초리로 광자릉을 노려보았다. 한 순간, 소리조차 없이 검을 떨치니 마치 독사가 맹렬히 상대에게 뻗쳐 가듯 푸르른 한 가 닥 검기가 솟구쳤다. 하나 무적금편 광자릉 또한 벌써부터 경천검마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던지라 결코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차앗!” 늙은 사자가 광야(廣野)를 질주하듯 안간힘을 다하여 영사신편칠십이식을 발출했다. 순간, 그의 몸 주위로는 무수한 편영(鞭影)이 회오리쳤다. 그때 경천검마의 잔혹한 광소가 흘러나오는가 싶더니 예리하게 쏘아 가던 한 가닥 푸르른 검기가 돌변하며 무수한 조화를 일으켰다. 찰나, 춘풍(春風)에 지는 도원(桃院)의 낙화(落花)인 듯 수십 개의 검화가 소용돌이치며 편영의 주위로 쏟아져 갔다. “으하하하…… 어리석은 자야, 어찌 미망(迷妄)에서 깨어날 줄 모르느냐? 만일 네가 노부의 경천십삼식 중 단 십 초의 공격만 막아 낸다 해도 노부가 이 자리에서 패배를 인정하리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검세는 더욱 날카로워졌다. 파파팍! 파팟! 검신이 금편에 부딪힐 때마다 무적금편 광자릉은 금편을 쥐고 있던 손아귀가 찢어질 듯했 다. ‘크윽! 이자의 공력이 설마 이 정도로까지 정순 고강할 줄이야……’ 그는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악물었다. 경천검마의 공격은 기세를 더해 갔다. 그의 네 자 일곱 치에 달하는 보검은 실로 사신(死神)의 손길과도 같았다. 보검에서 내뿜는 무서운 검기는 삽시간에 무적금편의 전신을 휘감아 그로 하여금 추호도 반격의 기회를 용납치 않았다. 숨돌릴 사이도 없이 쇄도해 오는 무서운 살초, 경천십삼식의 매초가 숨 가쁘게 펼쳐질 때 마다 무적금편은 헤어날 길 없는 수세에 몰려 허덕여야만 했다. 반격은 아예 엄두도 못 냈고, 경천검마 스스로 공언했듯 어서 십초가 지나가기만을 고대할 뿐이었다. 팔 초가 지날 무렵, 갑자기 경천검마의 신형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싶은 순간이었다. 꽈르르…… 마치 거대한 신응(神鷹)이 허공에서 나래를 펴듯 경천검마는 무적금편을 향해 곧장 쏘아 내려왔고, 그가 휘두른 경천보검에서는 무수한 한광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윽!” 한마디 나직한 신음을 흘려 내며 무적금편의 눈이 무섭게 불타 올랐다. 그로서는 이제 비장한 최후의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차앗!” 무적금편 광자릉은 일성 포효를 터뜨리며, 자신의 최후 절초 영사비류(靈蛇飛流)를 떨쳐 냈다. 한 줄기 금망이 한 마리 금사(金蛇)가 쾌속 무비하게 덮쳐 가듯 쏘아졌다. 이는 무적금편 광자릉의 양패구상(兩敗具傷)을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그런데…… “윽!” 고통에 찬 신음이 터져 나오며 무적금편 광자릉은 비틀 뒤로 물러났다. 그의 오른쪽 어깨에서는 검붉은 선혈이 샘솟듯 솟구치고 있었고, 그의 금편 역시 땅에 떨 어져 핏물 속에 잠겼다. 이를 악문 광자릉은 재빨리 손을 내밀어 한 가닥 흡인력으로써 금편을 취한 후, 싸늘한 어 조로 말했다. “경천검마 조지릉, 오늘의 일전에서 노부는 솔직히 참패를 인정하오. 하나 오늘의 이 빚을 노부와 천학보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오!” 그는 팔괘신도 두상은을 차가운 눈길로 일견한 뒤 천학보 고수들을 향해 내뱉듯 말했다. “돌아가자!” 순간, 그는 한 줄기 긴 휘파람만 남긴 채 어둠 속으로 표연히 사라져 갔다. 나머지 흑의인들 역시 그 뒤를 따라 어둠의 그늘 속으로 사라졌다. 언제 필살의 혈투가 있었냐는 듯 장중은 삽시간에 깊은 적막으로 둘러싸였다. 잠시 침묵하던 경천검마 조지릉이 적막을 깨뜨리며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흐…… 팔괘신도 두상은, 당신이 스스로 분수를 아는 자라면 더 이상 지체할 것 없이 불영옥패를 내놓으시오. 만일 쓸데없는 고집을 피운다면 스스로 살신지화를 자초하는 것이 니, 당신 따위는 결코 지금 이곳에 모인 정사 양파의 군웅들을 상대할 수 없기 때문이오.” 그 말에 팔괘신도 두상은은 싸늘한 미소를 떠올렸다. “경천검마 조지릉, 당신이 비록 경세적 무공을 지녔음은 인정하나 결코 노부로 하여금 스 스로 패배를 자인케 할 정도는 되지 못하오. 노부가 경고하거니와 당신이야말로 스스로 이곳에서 물러나 백마산으로 돌아감이 좋을 게요!” 경천검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분노로 일그러졌다. “네놈이 지난 십 년간 얼마나 비상한 재주를 익혔기에 그리도 당당한지 노부가 손수 시험 해 보리라!” 팔괘신도 두상은 역시 그와 일전을 피할 수 없다고 각오하여 암암리에 진력을 끌어올렸다. 동시에 옆에 서 있는 용군선을 향해 나직이 일렀다. “선아야, 들어가 사부의 칠채배금도를 가지고 오너라!” 용군선이 즉시 안으로 들어갔다. 사실 팔괘신도 두상은에게 있어 경천검마는 일생일대의 강적이 아닐 수 없었다. 하여 자신이 비록 태을비급상의 절예를 익혔다고는 하나 결코 적수공권으로는 승산이 없다 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윽고 용군선이 두상은의 독문병기 칠채배금도를 들고 왔다. 두상은은 그것을 받아 들자 가벼운 동작으로 가슴 앞에 세웠 이어 주위의 제자들에게 엄숙히 일렀다. “너희들은 물러나 결코 이 일에 끼여들지 마라! 만일 명을 어기고 감히 나서는 자가 있다 면 조사 능멸의 죄를 물어 사문에서 파문시키리라!” 비장한 선언이었다. 이토록 엄중한 사부의 명에 그의 제자들은 시무룩해졌다. 이때 경천검마 조지릉은 이들의 행동을 시종 냉혹한 미소로써 바라보고 있었다. “으하하하…… 너는 제자들에게 그런 명을 내리기보다 차라리 한마디의 유언을 남김이 좋 겠구나. 명심하라! 노부가 일단 손을 쓰면 두 번 다시 그런 기회조차 없을 것이다!” 그때였다. “하하하…… 경천검마 조지릉, 당신이 한낱 얄팍한 재주만을 믿고 그처럼 함부로 떠들어 대다니…… 실로 분수를 모르는 어리석은 광태구려!” 난데없이 한 줄기 청아한 음성이 그를 비웃지 않는가! 순간 주위는 아연 경악으로 뒤덮였다. 현금 강호에서 십대고인의 일인(一人)인 경천검마 조지릉을 이토록 비웃다니, 대체 그 누가 이처럼 간이 크단 말인가? 더구나 그 음성의 청아한 느낌으로 보아 불과 약관의 나이일 것 같은데…… 경천검마 조지릉의 얼굴은 흉흉히 일그러졌고 감히 직시할 수 없는 살기로 가득 찼다.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주변의 인기척을 탐지해 가며 싸늘히 말했다. “어느 놈이기에 감히 겁도 없이 노부를 향해 그따위 망발을 퍼붓는 것이냐?” 그의 성난 외침이 미처 끝나기도 전…… “헉!” 조지릉은 아연 숨이 막히는 듯싶었다. 어느 사이엔가 면전에 백의서생 한 사람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 때마침 교교한 달빛을 받으며 홀연히 나타난 신비의 미청년. 대체 그가 언제 어떻게 나타났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던 듯 태연하고 조용한 자태였는데, 신비로운 미소를 머 금고 있는 백의서생은 다름 아닌 사검평이었다. 장중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신비로운 출현과 아름다운 자태에 넋을 잃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가 이 목전의 신비인물이 백년 전 강호를 공포로 휩쓸었던 염라천존의 전 인인 줄 알겠는가! 사검평은 홀연히 나타나서는 태연 자약하게 사방을 훑어보았 이때, 경천검마 조지릉은 난데없이 나타난 인물이 뜻밖에도 나이 어린 일개 미소년임을 깨 닫자 아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그는 역시 산전수전 다 겪은 노강호인이었다. 홀연 신비롭게 출현한 이 백의서생이 비록 나이는 어리나 일신에 초절한 절학과 깊은 내력 을 지닌 인물임을 첫눈에 직감했다. 하여 그는 치솟는 분노를 애써 억누르며 짐짓 너그럽게 웃었 “하하하…… 소협, 자네는 노부와 아무런 이해 관계도 없을 터인데 이처럼 난데없이 뛰 어들어 시비를 일삼으려 하는가?” 그의 어투에서는 조금 전 무적금편 광자릉에게나 팔괘신도 두상은에게 보였던 억양과 거만 의 표정이 추호도 없었다. 명실상부 위엄이 깃들인 강호고인의 풍모를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검평은 그러한 그의 모습에 오히려 싸늘한 비웃음을 날렸다. “본인은 터무니없이 자신을 높이는 자를 보면 배알이 뒤틀려 참을 수 없는 성격이오. 더 구나 그런 자들은 약자에게는 포악하고 강자에게는 필요 이상으로 굽실거리는 비굴한 자들이니 더 더 욱 그 꼴을 볼 수 없단 말이오!” 경천검마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경천검마 조지릉, 대체 그가 어떤 인물인가! 일찍이 희세의 마도검법 경천십삼식으로 대강남북(大江南北) 삼십삼(三十三) 주(州)에 걸 쳐 그 위명을 진동시켜 왔던 인물이 아니던가! 하여 강호십대고인의 한자리를 차지하였고, 근래에는 그 수하에 구름처럼 많은 흑도고수들 을 거느린 채 위엄과 기세를 천하 구석구석에까지 떨치는 절정고수가 아니던가! 그러한 그가 어찌 이 같은 모욕을 받고 참을 수 있으랴! “닥쳐라! 감히 네놈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그러한 망발을 지껄이다니…… 오 냐, 너는 오늘 나의 검 아래 황천의 고혼으로 스러져 줘야겠다!” 다음 순간, 그의 검이 한 줄기 빛살인 양 예리하고 쾌속하게 사검평을 노리고 쏘아 갔다. 독랄하게도 그 일초의 검세는 치명적 요혈 미심혈(眉心穴)을 노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가! 사검평은 오직 한 가닥 냉소만을 머금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을 뿐, 미동도 않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 자리의 모든 사람들은 경악하고 말았다. 마침내 예리한 검기가 폭풍처럼 휘몰아쳐 그의 목을 일도양단하려던 찰나, “헉!” 공포에 찬 외마디 괴성이 울렸다. 모든 사람들은 차마 볼 수 없어 눈을 돌렸다가 마침내 사검평이 최후를 마쳤으리라 생각하 였다. 한데 막상 눈을 들어 보니 백의인은 여전히 태연한 자태로 그림처럼 서 있었고, 오히려 경 천검마가 뒤로 칠팔 보나 물러섰지 않은가! 더구나 그의 얼굴은 경악과 분노, 그리고 당혹으로 인하여 참혹할 만큼 무섭게 일그러져 있엇다. “도…… 도대체 네놈의 출신내력이 무엇이냐?” 떨리는 그 목소리에 사검평은 한 줄기 냉혹한 미소로써 답하였 “너 따위는 감히 본 공자의 사문내력을 알 자격이 없다!” 어느 누가 경악하지 않으랴! 당금 무림에서 십대고인 중의 일인을 향하여 이토록 오만 무례할 수 있는 인물이 과연 누가 있겠는가! 주위에 있던 모든 이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조금 전 경천검마는 분명 단 일 검으로 상대를 베어 버릴 수 있었는데 왜 구태여 그 결정 적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말았는지…… 더구나 칠팔 보나 뒤로 밀려나 거의 공포에 질린 모습이니 이 무슨 귀신이 곡할 노릇인가 이해할 수 없었다. 하나, 주위의 사람들 중 오직 팔괘신도 두상은만은 이 경이의 광경을 똑똑히 목격할 수 있 었다. 그만은 경천검마가 펼쳤던 날카로운 일검이 상대의 허점을 유발하려는 허초에 불과했음을 분명히 알았다. 또한 그와 함께 백의서생의 몸에서 나오는 무서운 살기에 경천검마가 추호의 허도 발견치 못하고 스스로 황급히 뒤로 물러섰음을 똑똑히 알았다. 하여 팔괘신도 역시 백의서생의 정체에 관해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동했다. 그러나 만일 이 백의서생도 역시 자신이 지닌 불영옥패를 탈취할 목적으로 나타난 자라 면……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팔괘신도 두상은의 심장은 싸늘히 얼어붙었다. 그 또한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백의서생의 일신절예가 헤아릴 수 없이 깊고 심오함을 거의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때 장내의 상황은 또다시 일변되는 중이었다. 경천검마 조지릉은 마침내 분노를 폭발시켜 일성 날카로운 장소와 함께 드디어 그의 가공 할 절학 경천십삼식을 숨돌릴 사이도 없이 펼쳐 냈던 것이다. 삽시간에 허공도 땅도 그가 전개하는 검광으로 물들었다. 그러자 사검평은 한 순간 표연히 허공으로 솟아올라 마치 형체없는 유령인 듯 허공을 부유 했다. 비록 날카로운 검광이 그물처럼 수없이 교차하였어도 사검평은 유유히 그 사이를 날아가는 것이었다. 경천검마 조지릉의 살초는 비록 경세적이었으나 허공을 부유하는 그의 옷깃 하나 스치지 못 했다. 사검평은 비웃듯 싸늘한 냉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너의 일신절예는 너의 아들인 분면랑군 조태명과 비교하여도 하등 더 뛰어 남을 느낄 수 없으니 본 공자는 정녕 실망을 감추지 못하겠구나!” 일성 낭랑한 비웃음 소리에 경천검마는 혼백마저 달아날 만큼 경악했다. “무엇이?” 사검평의 입에서 뜻밖에도 아들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경천검마는 말할 수 없이 불길한 예감 에 사로잡혔다. 그는 사검평을 향해 짓쳐 가던 살수를 즉시 거두며 굳은 표정으로 황급히 소리쳤다. “네놈이 내 아들과 겨루어 보았다는 말이냐?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지?” 난데없이 한 줄기 창노한 음성이 장내로 날아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조 대협이 그 이유를 안다 해도 이미 때는 늦었소!” 경천검마는 섬뜩 놀라며 빠르게 사위를 둘러보았다. “어느 고인이 이곳에 왕림하셨소이까?” 그는 이내 어둠 속으로부터 스며들듯 나타난 한 낯선 방문객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객실의 지붕 위에 불쑥 모습을 나타낸 한 사람의 늙은 거지를 보는 순간 경천검마는 신음 하듯 경악성을 토해 냈다. “무영마개 유단!” 第 十 章 거대한 음모(陰謀) 1 무영마개(無影魔 ) 유단(兪端)이 비록 경천검마와 더불어 무림삼마(武林三魔) 중 일인이었 으나, 당대 개방 방주의 사숙으로서 그가 무림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성망은 결코 경천검마 따위에 비할 정도가 아니었다. 그러한 그가 이렇듯 이 자리에 나타날 줄이야…… “하하하……” 무영마개 유단은 한 줄기 창노한 장소와 함께 마치 한 잎의 낙엽이 바람에 날리듯 표표히 장중으로 내려섰다. 실로 극치에 이른 경공조예에 중인들 모두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무영(無影)이라는 그의 명호가 말해 주듯 경공에 있어서 강호제일이라는 명성이 결 코 허언이 아님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일점 백운인 듯, 무영마개 유단이 소리없이 장내에 내려서는 순간, 사검평의 얼굴에 한 가 닥 차가운 빛이 서렸다. “무영마개 유단! 본 공자는 이미 당신에게 경고하였거늘, 이처럼 또다시 나의 일에 참견 하려 들다니…… 당신은 이런 행동이 스스로의 죽음을 자초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오?” 그 말에 중인들 모두 경악하였다. ‘이, 이럴 수가…… 대체 저 젊은 백의인이 누구이기에 감히 무영마개를 핍박할 수 있는 가?’ 그들은 필시 분노한 무영마개의 일초 살수가 펼쳐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중인의 이런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무영마개 유단은 의외로 지극히 정중하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오해하지 마시오. 노부 따위가 어찌 소협의 일에 끼여들 수 있겠소? 다만 한 가닥 소망 이 있어 왔으니, 바라건대 소협이 잠시 호생지덕을 베풀어 경천검마 조 대협을 놓아 주기를 간곡히 부탁하고 싶소.” 사검평이 냉혹한 어조로 대꾸했다. “경천검마의 목숨은 그가 처신하기에 달린 것. 당신이 이래라저래라 할 사안이 아니오. 그 가 참회하고 그 동안 끌어 모은 흑도고수들을 모두 돌려보낸다면 모를까, 그러지 않으면 오늘 이 자리를 살아서 빠져 나갈 수 없을 것이오.” 너무도 광오한 사검평의 말에 경천검마 조지릉은 부드득 이를 갈았다. “유 선배, 저 애송이가 대체 누구기에 그러한 어불성설의 추태로 선배와 이 후배마저 욕 되게 하오?” 무영마개 유단은 침중히 가라앉은 안색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 “자네가 단 하루라도 더 햇빛을 보고 싶다면 더 이상 함부로 말하지 말게. 저 공자는 비록 나이는 어리나 백년 전 강호에서 의문과 함께 사라졌던 염라천존의 유일무이한 전인 일세.” “그…… 그럴 리가……!” 경천검마의 얼굴은 순식간에 사색으로 물들었다. 염라천존! 죽음과 공포의 대명사! 비록 백년이 흘렀으나 강호인 중 그 누가 과거의 이 무서운 인물을 잊었겠는가? 한데 목전에 선 약관의 이 젊은이가 바로 염라천존의 전인이라니…… 그때 돌연 사검평이 앙천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 나 염라서생이 한번 입 밖으로 뱉은 말은 그 누구도 거두게 할 수 없으리 라!” 이어 그는 한광이 폭사되는 눈빛으로 조지릉을 쏘아보며 물었 “경천검마 조지릉, 백마산장의 졸개들을 포기하지 않겠다면 이 자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든지, 아니면 나의 손에 처참한 최후를 마칠 것인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 경천검마 조지릉의 얼굴은 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질렸다. 보다못해 무영마개가 의연하게 나섰다. “경천검마 조지릉은 비록 근자에 이르러 강호의 흑도세력을 긁어모아 은연중 강호 패권 을 노릴 만큼 야욕에 불타는 일대 효웅(梟雄)이나, 아직까지는 이렇다 하게 뚜렷한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네. 얼마 전에는 그의 아들이 당신의 핍박을 받아 비명 에 갔는데, 이에 더하여 또다시 그의 목숨마저 빼앗으려는 것은 정녕 너무 지나치지 않겠소?” 경천검마는 그의 말을 듣는 순간 크게 놀라며 황급히 되물었 “유 선배께서는 지금 무어라 하셨소? 도대체 내 자식 놈에게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이오?” 무영마개가 아차 싶어 한 가닥 후회의 빛을 떠올리는데 사검평의 낭랑한 음성이 그를 대신 하여 울려 퍼졌다. “흥! 스스로 분면랑군을 자처하던 당신의 어리석은 자식 조태명은 그가 저질렀던 악행의 죄과로 황천의 고혼이 되었다!” 그 한마디에 경천검마 조지릉은 마치 정수리에서부터 찬물을 뒤집어쓴 느낌이었다. “그…… 그럴 리가……” 그는 넋 나간 듯 중얼거리며 재차 확인이라도 하듯 무영마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무영마개는 암울한 표정만 지을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경천검마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에 사로잡혔다. 잠시 넋 나간 듯 서 있던 그는 갑자기 충천하는 살기를 내뿜으며 미친 듯 웃어 젖혔다. “으하하하…… 명아, 명아가 죽다니…… 흐흐흐…… 젖비린내나는 애송이 놈아! 네가 누구 이건 간에 사지 육신을 갈가리 찢어 내 아들의 원혼을 위로하리라!” 그는 광란하듯 울부짖더니 대뜸 사검평을 향하여 무시무시한 기세로 덮쳐 갔다. 실로 한 마리 광란한 야수와도 같았다. 사실 그는 이미 생사를 도외시하는 심정이었다. 사검평은 그의 미친 듯한 공세를 여유있게 피해 내며 싸늘하게 외쳤다. “경천검마 조지릉! 그대의 이름은 이제 강호에서 영원히 사라지리라!” 말을 마침과 동시에 사검평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순간, 한 줄기 눈부신 홍광이 허공을 가로질러 곧장 조지릉에게로 날아가지 않는가! “아앗!” 경천검마 조지릉은 다급성을 토해 내며 그가 자랑하던 희세의 보검을 들어 황급히 막으려 했다. 하지만…… “으아악!” 처절한 비명이 허공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뒤이어 벌어진 광경에 중인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경천검마 조지릉의 온몸은 시뻘건 화염에 휩싸여 마치 지옥의 겁화(劫火)에 빠진 양 극도 의 괴로움으로 몸부림치고 있지 않는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의 몸은 이내 한줌의 잿더미로 화하였 “적양신공(赤陽神功)! 저…… 저것은 이백 년 전 황산신니와 더불어 우내쌍성(宇內雙聖)으 로 불리던 적양신군(赤陽神君)의 절학이 아닌가!” 무영마개 유단의 입으로부터 터져 나온 경악의 부르짖음에 팔괘신도 두상은 역시 공포에 짓눌려 전율하였다. 사검평은 장중에 충만한 공포의 전율에도 아랑곳없이 이미 한줌의 재로 화한 조지릉의 시 신을 싸늘히 내려다보았다. 이어, 얼음장 같은 그의 눈길은 사색이 된 중인들을 한차례 훑어보았다. 그 눈길에 부딪치자 누구 하나 몸서리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숨막힐 듯 초조한 긴장을 깨뜨리며 사검평이 태연히 웃었다. “하하하하…… 이제 거추장스럽던 자도 지옥으로 보냈으니 본 공자가 이곳에 온 목적을 솔 직히 털어놓겠소.” 그의 차디찬 시선이 팔괘신도의 얼굴에 꽂혔다. “팔괘신도 두상은, 당신은 어서 품에 지니고 있는 불영옥패를 내게 주시오.” 가공할 무공의 소유자, 염라서생의 입에서 불영옥패에 대한 말이 터져 나오자 두상은의 얼 굴은 납덩이인 양 창백하게 굳어졌 무영마개 유단이 의혹에 찬 음성으로 물었다. “소협의 무공 수준을 보건대 이미 불영옥패 따위에 연연할 정도가 아니거늘 굳이 그것을 탈취해야만 하겠소?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라도 있으시오?” “흥! 본 공자에게 무슨 이유가 있든 그대는 개의치 마시오.” 팔괘신도 두상은은 암담한 기분이었다. 속수무책의 절망감…… 자신이 비록 태을비급의 절학을 익혔다고 하나 염라천존의 전인에게는 결코 적수가 될 수 없었다. 그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그였기에 속내만 끓고 있는 것이 만일 불영옥패를 이대로 빼앗긴다면 지난 십 년간 가슴속에 새겨 온 천마문의 혈안은 영원 히 해결될 길이 없지 않는가! 뒤쪽에 있던 용군선이 돌연 두상은의 앞으로 뛰쳐나오며 앙칼지게 소리친 것은 바로 그때 였다. “공자, 만일 그대가 스스로 강호의 영웅이라 자처하는 처지라면 어찌 이렇듯 한 가닥 강호 도의마저 저버리고 마치 녹림의 무리인 양 강제로 남의 물건을 빼앗으려 하지요?” 실로 너무도 당돌한 행동이었다. 팔괘신도 두상은은 경악해 마지않았다. 그는 대경 실색하여 황급히 소리쳤다. “선아야, 이 무슨 경거망동이냐! 어서 물러서지 못할까!” 그때 사검평이 나직이 미소 띤 얼굴로 용군선을 주시하며 말했 “나는 이미 소저의 신상내력을 자세히 알고 있는 몸. 내가 불영옥패를 얻고자 함은 소저를 돕기 위해서이니 그대는 부디 오해치 마시오.” 정녕 뜻밖의 말이었다. 용군선은 오히려 어안이 벙벙하였다. 더욱이 그가 이처럼 부드럽게 말하니 그 얼굴의 잔잔한 미소가 마치 화살처럼 날아와 그녀 의 가슴에 새겨지지 않는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사검평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순간 용군선은 야릇하게 가슴에 일렁이는 파문을 느낄 수 있었.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더듬더듬 물었다. “고, 공자의 그 말뜻은……?” 그러나 사검평은 이내 정색하며 입을 다물었다. 대신 그는 전음입밀의 수법으로 그녀와 두상은에게 말을 건넸. “자세한 것은 말해 줄 수 없소. 다만 한 가지, 과거 천학보와 천마문 사이의 일이 그대들 의 힘으로는 도저히 밝힐 수 없는 무서운 음모에 의해서였다는 사실을 알려 주겠소.” 그 말에 팔괘신도 두상은과 용군선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 “다, 당신이 그걸 어찌……?” 어찌 놀라지 않으랴! 그들은 사검평을 난생처음 보았건만, 그에게서 오직 그들의 가슴속에만 깊이 간직하였던 비 밀이 흘러나오고 있으니…… 사검평의 전음이 이어졌다. “두 분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지 마시오. 이곳은 이미 시시각각 죽음의 손길이 뻗쳐 와 이미 용담호혈의 사지(死地)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오. 아시겠소? 이곳 주위에는 무영 마개 정도의 무공 수준을 지닌 고인이 적어도 세 명 이상 매복하고 있단 말이오.” 그는 차분히 말을 이었으나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심해 같은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두 분이 끝내 나에게 불영옥패를 넘기지 않을 경우 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은 물론 불영옥패도 빼앗기고 말 것이오. 또 한 가지 내가 불영옥패를 얻고자 하는 이유는, 그 엄청 난 음모를 백일하에 밝혀 내기 위함이오. 모든 비밀의 진상이 밝혀지는 날 불영옥패를 반드시 그대들에게 돌려줄 것을 약속하겠소.” 팔괘신도 두상은과 용군선은 귓전으로 전해져 오는 사검평의 전음에 갈수록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한 순간, 사검평은 광소를 터뜨리며 짐짓 싸늘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으하하…… 그래도 더 이상 당신들이 나의 호의를 무시하겠다면 나 염라서생이 너무 무 정타 원망하지 마시오!” 팔괘신도는 사검평의 이러한 행동은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뭇 강호인들을 기만하기 위한 계교임을 간파하고 능청스럽게 대응했. “비록 당신에게 불영옥패를 내준다 해도 다른 사람들이 그걸 어찌 알겠소? 그들은 여전히 노부가 불영옥패를 지니고 있는 줄 믿고 악착같이 추궁할 것이 아니겠소?” 역시 그의 말속에 숨은 뜻을 간파한 사검평은 호기롭게 웃으며 허공에 대고 공언하듯 외쳤 다. “으하하하…… 만일 당신들이 본 공자에게 불영옥패를 건네 준 후에 그 누구라도 이 일 을 구실 삼아 그대들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그자는 즉시 나 염라서생의 무서운 보복 을 받고야 말 것이오.” 그러자 팔괘신도는 할 수 없다는 듯 용군선을 바라보며 길게 탄식하였다. “선아야, 도리없는 일이다. 어서 불영옥패를 저분에게 내드려라. 이미 우리들의 힘으로는 불영옥패를 지킬 수 없으니, 그의 힘을 빌려서 우리들의 안전이나마 도모함이 현명하겠다.” 용군선 역시 사부와 염라서생의 진의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짐짓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사검평을 노려보며 품속에서 옥패를 꺼내 휙 던져 주었 다. 사검평은 소맷자락을 슬쩍 날려 가볍게 받아 쥐었다. 그는 한차례 세밀히 옥패를 살펴보았다. 취옥(聚玉)으로 만든 장방형(長方形)의 형태에 불타의 좌정한 모습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 을 뿐, 결코 대수로울 것도 없는 평범한 옥패였다. 사검평은 한차례 살펴본 후 이내 품안에 깊이 간직하였다. 그리고 엄숙한 어조로 선언하였다. “이제 본 공자가 불영옥패를 거두어들인 이상, 누구라도 이를 탐내는 자가 있다면 언제든 지 내게로 오라! 그러나 본 공자는 일단 손을 쓰면 결단코 인정을 베풀지 않는 성격이니 내 앞에 나타나는 자는 필히 죽음을 각오해야만 할 것이다. 으하하하하……” 암야를 뒤흔드는 광소를 터뜨린 사검평은 갑자기 신형을 솟구쳐 한 가닥 연기같이 사라지 고 말았다. 미망의 어둠 속으로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장중에 있던 모든 사람이 탄성을 발했다. “아……” 홀연히 나타났다가 모두의 가슴에 전율과 공포를 남겨 준 채 신비롭게 사라진 염라서생. 그의 신위는 백년 전 무림을 격동시켰던 염라천존에 비견해 손색이 없지 않는가! 이 자리에 있던 모든 인물들은 비록 저마다의 눈으로 똑똑히 본 현신이건만 지금까지의 모 든 일들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어찌 이들뿐이랴. 객잔 주변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수많은 고수들 역시 믿기지 않는 듯 넋을 놓은 채 그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무영마개 유단은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으음…… 아까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 같던데…… 어떤 내용이었을까?’ 아는 듯 모르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는 홀연 신형을 날려 사검평이 사라진 방향으로 달려나갔다. 잠시 후 주변 곳곳에 몸을 숨기고 있던 뭇 군웅들도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심야의 불청객이 모두 물러가자 팔괘신도 두상은은 나직이 탄식했다. “노부는 정녕 스스로의 역량도 모르고 너무 일을 크게 벌였었구나! 만일 염라서생이 이렇 듯 제때에 나타나 주지 않았다면, 또 노부가 잠시 그릇 판단하여 그에게 불영옥패를 건네 주지 않았다면, 당년의 원한을 밝히기는커녕 지금쯤 황천을 떠도는 고혼이 되었을 것이다.” 문득 그의 시선 속에 사검평이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용군선의 모습이 들어 왔다.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위로하듯 말했다. “용아야, 너는 결코 걱정하지 말아라. 그는 반드시 언약을 지킬 것이다.” 용군선은 납득한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팔괘신도 두상은이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녀가 사검평이 사라진 방향을 언제까지나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불영옥패에 연연해서가 아니라, 어느 사이엔가 그 마음 깊이 아로새겨진 사검평의 영상 때문인 것을…… 2 낡고 허물어져 가는 한 채의 공자묘(孔子廟)가 어둠 속에서 마치 괴물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진전 서남방에 위치한 이곳은 대낮에도 인적이 드문 곳이다. 더구나 괴괴한 적막 속에는 월색만이 처연히 흐르고 있으니, 그 분위기가 더한층 기괴로 웠다. 그때, 한 가닥 백선이 월야의 허공에 번뜩이는가 싶더니 사검평이 모습을 나타냈다. 지면에 내려서자마자 사위를 살펴 나가는 그의 눈에는 언뜻 의아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주 소제는 분명 여기서 나를 기다리겠다고 했는데 아무리 보아도 눈에 띄지 않으니 대체 어찌 된 일일까?” 그가 나직이 중얼거리며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펴보려는 순간이었다. 사검평은 등뒤에서부터 소리없이 쏘아져 오는 암경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의 입가에 싸늘한 조소가 피어올랐다. 암경이 여지없이 그의 등을 격중시키려는 찰나, 팟! 그는 마치 폭발하는 화산의 불기둥처럼 허공 높이 치솟아올랐 동시에, 재빨리 회풍비룡(廻風飛龍)의 신법으로 암경이 쏘아져 왔던 배후로 몸을 날렸다. 한데 어찌 된 일인가! 그곳에는 오직 기괴한 적막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비록 태산이 무너진다 한들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을 사검평이었건만 일이 이쯤에 이르자 한 가닥 미미한 동요의 빛을 금치 못했 ‘암기를 쏘아 내고도 내 눈을 피할 수 있을 정도라면 상당한 고수다!’ 사검평은 자신을 향해 날아왔던 암기를 흘끗 살피다가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의 앞에 놓여 있는 커다란 토신상(土神像)의 가슴 부근에 타는 듯 붉은 단풍잎 하나가 깊 숙이 박혀 있지 않는가? 이는 비화적엽의 절예로, 이 같은 수법은 내공수위가 절정에 이르지 않는 한 결코 펼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더라도 이 정도의 절예가 결코 사검평을 놀라게 할 수는 없었다. 다만 이때, 토신상에 박힌 일엽 단풍잎이야말로 순간적으로 그에게 한 명의 절세고인을 연 상토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사검평은 안색을 싸늘히 굳히며 허공에 대고 나직이 외쳤다. “초혼혈풍(招魂血楓), 천하에 대명이 쟁쟁한 천면환영인이 본 공자를 손수 찾아 주시다 니…… 본인은 실로 영광으로 생각하오. 하나 본인이 본시 이런 투의 인사를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다면 그대는 감히 이런 짓을 저지르지 않았어야 했소.” 순간, “으하하하…… 과연 염라천존의 전인답게 비범한 안력이로구나!” 공자묘가 송두리째 떠나갈 듯 커다란 장소성과 함께 사검평의 앞으로 청의중년인 한 명이 표연히 나타났다. 창백한 안색에 길게 찢어진 눈매, 날카로운 매부리코가 그의 괴팍한 성격을 보여 주고 있 었다. 기괴한 풍모의 청의중년인은 음침한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흐…… 네 사부가 아무리 과거에 강호를 진동시켰던 자라 해도 결코 이 자리의 너를 구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사검평의 두 눈으로부터 짙은 살기가 뻗쳐 나왔다. “만일 그대가 내 사부의 과거 행적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감히 이처럼 본 공자 를 모독하여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지는 않았을 것이오.” 말을 마치는 그의 입가에 한 가닥 잔혹한 미소가 감돌았다. 동시에 그는 한 손에 들고 있던 길다란 보퉁이를 슬쩍 쳐들었 그러자 검은 칼자루 하나가 가슴 섬뜩하게 그 속으로부터 모습을 드러내 보였다. 순간, 청의중년인은 그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백년 전 염라천존이 일초의 도법으로 천하를 피로 씻으며 그 적수가 없었다 하더니…… 노부는 세상에 늦게 나와 견식할 기회가 없었기로 못내 아쉬워하던 참이었다. 한데 오늘 이렇듯 다시금 염라천존의 절학이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어 노부가 상대케 되니 기쁘기 한량없구나. 하나 네가 펼칠 수법이 과연 전설로 내려오는 것처럼 기대할 만한 정도인지 노부는 심히 의심스럽구나. 만일 너의 솜씨가 별로 보잘것없는 것이라면 노 부의 손에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죽음의 선포인 듯 싸늘한 어조였다. 사검평은 이토록 냉혹한 위협에 직면하여서도 결코 입가의 한 줄기 미소를 잃지 않았다. 보일 듯 말 듯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인 후 사검평은 오른손을 가볍게 검자루에 얹었다. 그러자 그의 두 눈에 떠올랐던 살기가 서서히 짙어지기 시작했 이윽고 시종 그의 입가에 감돌던 미소마저 점차 신비롭게 변해 가더니, 잠시 후에는 마치 지옥의 아수라가 웃듯 기괴한 마소(魔笑)로 변하였다. 이는 실로 보는 이를 소름 끼치는 공포 속으로 휘몰아 가는 것이었다. 비록 천면환영인이 천하에 대명을 떨치는 자이나 어찌 이런 경우에서까지 무심할 수 있겠는 가? 그는 전신을 짓눌러 오는 살기를 감당할 수 없었던지 갑자기 소매를 휘두르며 공격해 왔 다. 팟! 칼날을 방불케 하는 예리 무비한 지풍과 경세의 장력이 사검평을 향하여 한꺼번에 휘몰아쳐 왔다. 그러나 사검평은 상대의 이 일초가 허초임을 직감했다. 하여 그는 여전히 입가에 한 가닥 공포스러운 미소를 떠올린 채 묵묵부동(默默不動)이었다. 바로 그 순간, 청의중년인의 가슴으로부터 소리도 없이 수십 개의 은망(銀網)이 폭사되어 나왔다. 그것은 삽시간에 사검평의 전신을 고슴도치처럼 꿰뚫을 기세였 더욱 놀라운 것은, 사검평이 허초로 생각했던 지(指)와 장(掌)의 공격이 급격히 돌변하여 매서운 강기( 氣)를 동반하지 않는 실로 사검평을 단숨에 격살시킬 듯 흉험무비한 기세였다. 이는 정녕 뜻밖의 사태여서 사검평은 대경 실색하였다. 그는 적양신공과 대승반야바라신공을 본능적으로 끌어올려 몸을 보호하는 한편, 한 줄기 소성(嘯聲)을 터뜨리며 흡혈마도를 떨쳐 냈다. 순간, 수백 줄기의 핏빛 도광이 사검평의 온몸을 휘감았다. 그러자 빗발치듯 날아오는 수많은 은광은 도광에 부딪쳐 삽시간에 한낱 가루로 흩어져 무 산되고 마는 것이었다. 동시에 사검평의 몸을 에워쌌던 도광의 막이 마치 파문처럼 번져 가더니 천지를 뒤엎는 혈 우인 양, 순식간에 청의중년인을 향해 걷잡을 수 없이 폭사되어 가는 것이었다. 순간, 청의중년인은 천지가 온통 붉은빛으로 아롱거림을 보았. 야릇하게도 그는 처절한 아름다움을 느껴야 했다. 온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는 듯 황홀의 극치를 맛보는 순간, 그는 이승에서의 마지막 숨을 토해 내야 했다. 수십 줄기의 도신강기가 그의 몸에 소리없이 격중되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핏물만 홍수처럼 쏟아질 뿐 비명조차 없는 죽음이었다. 사검평은 일성 장탄식과 함께 도신을 거두었다. “무림쌍기 중 일인이었던 천면환영인이 설마 이토록 비열할 줄이야…… 나는 정녕 꿈에 서도 생각지 못했구나. 만일 그가 이 정도로까지 비겁하게 행동하지만 않았어도 돌이킬 수 없는 절대살초인 멸정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텐데……” 일말의 회한이 남는 듯 그가 나직이 중얼거리고 있을 때였다. “형님의 그 생각은 전혀 오해에 지나지 않습니다. 천면환영인은 본시 그토록 염치없는 사 람이 아니지요. 또한 그분의 일신 무공은 형님의 생각만큼 결코 그렇게 약하지도 않습니 다.” 사검평의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 찼다. 어둠을 헤치고 그의 귓가에 속삭이듯 들려 온 전음의 목소리, 이는 필시 주천혜의 음성이 아닌가? 만나기로 했던 주천혜가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전음만 보내 오는가? 사검평은 주천혜의 전음이 어디에서부터 들려 오는지 헤아리기 위해 사문의 육합신이통(六 合神耳通)을 운공하였다. 그러나 도무지 그 행방을 찾을 길이 없었다. 사검평은 마침내 포기하고 허공을 향하여 물었다. “주 소제, 자네는 대체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선가 주천혜의 응답이 들려 왔다. “그것은 지금 어떤 사정으로 인해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소제가 이렇듯 말할 수 있는 것 은 어떤 고인(高人)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처지에서 제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방금 형님께서 제거한 인물이 절대로 천면환영인이 아니라는 것입 니다.” 사검평은 경이와 의혹에 싸여 멍하니 넋을 잃고 있었다. 주천혜의 전음이 계속해서 귓전으로 속삭이듯 들려 왔다. “만일 그가 진정한 천면환영인이었다면 결코 그처럼 암수 따위를 쓰지는 않았을 겁니다. 더구나 그의 일신절예는 상상할 수도 없이 고절하여 형님이라도 흡혈마도를 쓰기 전에는 결코 승리를 장 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말에 사검평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하나 그가 미처 무엇이라 입을 열기도 전에 주천혜의 음성이 다시금 다급하게 울려 왔다. “저는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형님께 제 사정을 약간만 귀띔한다면, 저는 지금 한 선배기인 의 눈에 들어 그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하여 지금 급히 떠나거니와 소제는 가급적 빨리 그분의 절예를 익힌 후 다시금 형님과 해후할 것입니다. 그때까지 저를 잊지 말아 주십시 오.” “아! 주 소제, 잠깐만……” 사검평은 다급히 그를 불렀다. 하나 그는 이미 떠나갔는지 두 번 다시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침내 소용없음을 깨닫고 나자 그는 무안하고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도대체 주 소제가 사부로 모셨다는 선배기인이란 누구를 말함일까?’ 더구나 그가 운용했던 육합신이통은 사문절예 중의 하나로, 밀교 독문의 신묘한 도법이었다. 한데 주천혜의 행적을 전혀 찾아 낼 수 없었다는 것은 문제의 전대기인이 실로 상상할 수 도 없이 고절한 인물임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것이었다. 사검평은 문득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물론 주천혜와 그는 이미 형제지교를 언약했던지라 의제인 주천혜가 기연을 얻어 고절한 전대기인의 문하에 들어갔음은 당연히 기쁜 일이었다. 하나 한편으로 자신의 일신무공이 그 선배기인보다 한 수 아래라고 생각하니 못내 언짢은 기분이기도 했다. 그를 우울하게 만드는 이유는 또 있었다. 주천혜의 말에 의하면 자신이 격패시켰던 자가 가짜이며, 만일 진정한 천면환영인이라면 결 코 그리 만만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순간, 사검평의 검기가 꿈틀했다. “만일 언제고 진정한 천면환영인을 다시 만난다면 결코 흡혈마도를 사용하지 않은 채 반 드시 이 두 손만으로 보기 좋게 격패시키고야 말리라.” 바로 이때였다. “으하하하하…… 진정 너는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애송이로구나. 하나 그 호기야말로 이십 년 전의 노부와 조금도 다름없으니, 노부로 하여금 실로 감개무량케 하는구나.” 어디선가 한 줄기 청아한 음성이 들려 오는 것이었다. 사검평이 크게 놀라 황급히 뒤돌아서는데, 어느 사이엔가 그의 등뒤 삼 장여에 한 인영이 기이한 자세로 서 있는 것이었다. 칠흑빛 유삼을 입은 중년인이었다. 이처럼 돌연한 흑의중년인의 출현에 사검평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비록 자신이 깊은 상념 중이었다 하나 이토록 가까이 접근했을 때까지 전혀 그 기척을 느끼 지 못했다니…… 이로 미루어 목전에 선 흑의중년인의 내가공력은 이미 신화경에 달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 다. 이에 사검평은 상대의 폐부까지 꿰뚫을 듯 날카롭게 그를 주시했다. 만공에 찬 교교한 월색, 그 달빛 아래 조용히 선 상대는 육척장신(六尺長身)의 자태가 실로 탄성을 자아내게 할 만큼 준수한 용모였다. 이미 중년에 접어든 지금의 풍모가 저러하거늘 한창 젊었을 때에야 어느 정도였겠는가? 그는 필경 수많은 여인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을 것이다. 사검평도 내심 일말의 감탄하는 바가 있어 더욱 유심히 상대를 살폈다. 시커먼 먹물을 듬뿍 찍어 망설임없이 그은 명필의 휘호(揮毫)처럼 검고 강렬한 검미, 그 아 래 형형한 안광을 뿜는 혜성과 같은 눈…… 만일 턱밑에 우아하게 기른 미염(美髥)만 아니었다면 삼십 세가 넘어 보이지 않았을 정도 였다. 더욱이 그의 전신에서는 보이지 않는 위엄이 풍겨 나와 태산이라도 누를 듯하였다. 그때, 흑의중년인 역시 사검평의 전신을 탐색하듯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의 얼굴에 한 가닥 경이의 빛이 떠올랐다. 사실 그는 지금까지 숱한 강호인들을 만나 보았다. 하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바로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젊은이와 견줄 자는 없었다. ‘정녕 절세적 기재임에 틀림없다!’ 그는 첫눈에 이렇게 단정 지었다. 사검평은 비록 나이는 어렸으나 이미 정광이 안으로 갈무리되어 있어 반박귀진(返璞歸眞) 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여실히 알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근골은 조화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흑의중년인은 사검평의 얼굴에 시선이 멎는 순간, 그의 두 눈으로부터 뿜어져 나오 는 매서운 한광(寒光)으로 인해 아연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자신이 강호를 종횡한 지 수십 년이 넘었건만 지금 이 순간의 사검평과 같은 무서운 눈 빛을 지닌 자는 처음이었다. 하나 그 또한 천하를 굽어볼 정도로 드높은 기개를 지닌 강호의 고인이었다. 하여 이내 위엄이 깃들인 어조로 나직이 말했다. “조금 전의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백마산장에서 천왕도 황승국을 자결케 하고 분면랑군 조태명마저 죽음에 이르게 했던 염라서생이 바로 그대 같은데……” 사검평이 흠칫하였다. ‘흠! 이 눈앞의 흑의중년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필경 강호의 절정인물 중의 하나임에 는 틀림없겠구나!’ 그는 정중한 어투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한데 선배께서 그 일을 묻는 까닭은 무엇인지요?” 일말의 경계심이 그 말 중에 번뜩였다. 그러자 흑의중년인이 그 말의 진의를 알아채고 크게 웃었다. “으하하하…… 분명히 말해 두거니와 노부는 백마산장과 아무런 인연도 없다. 다만 노부가 백마산장에서의 일을 거론했던 것은 백년 전 의문 속에 실종됐던 염라천존의 전인임을 자칭하는 자가 그곳에 들렀었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내심 만나기를 고대하고는 있었지만, 이처럼 빨리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군.” 그는 형형한 안광을 뿜어 내며 말을 이었다. “노부는 백년 전, 염라천존 노선배께서 일초의 절세도식으로 강호를 휩쓸어 마침내 천하 무적의 제왕과 같은 존재로 군림했었음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대가 비록 그분의 후대 전인이라 할지언정 감히 사문의 무적신초를 사용치 않고 적수공권만으로 천면환영인을 격패시키겠다고 장담하니…… 이는 천면환영인 같은 절정고인을 너무 업신여기는 것이 아닌가?” 사검평은 정중히 포권지례를 취하며 답했다. “선배님의 충고에 불초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한데 선배님의 고명은 어찌 되시는지 요?” 갑자기 흑의중년인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소협의 배분으로 보아 노부에게 선배라 부르는 것은 결코 타당치 않다. 노 부는 기껏해야 소협과 평배 정도나 될 수 있을는지……” 잠시 말끝을 흐리던 그는 의미 심장한 눈빛으로 사검평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본시 무림인들이 천면환영인과 나를 가리켜 무림쌍기(武林雙奇)라 일컬어 왔네.” “옛?” 남해(南海) 천종도주(天鐘島主) 주가청(朱家靑), 바로 자신과 의형제를 맺었던 주천혜의 부친이자 무림쌍기 중의 일인 천사(天邪)였다. 사검평의 안면이 순식간에 경이의 빛으로 물들었다. “주천혜의 아버님이셨군요. 고명하신 분을 이렇듯 만나 뵙고 보니……” 그때 천종도주 주가청이 껄껄 웃으며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소협, 그대는 부디 나를 선배라 칭하지 말게. 만일 그대가 노부와 계속 사귀고 싶다면 선 배라는 칭호 대신에 노형님이라 불러 주면 족할 것이네.” 홀연 사검평이 신비롭게 웃었다. “주 선배님의 제안에 불초는 실로 송구스러움과 아울러 감격할 따름입니다. 하나 후배에 게는 주 선배님을 결코 평교(平交)로 대하지 못할 이유가 있으니……” 주가청이 의아한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사검평의 얼굴에서 추호의 가식도 발견할 수 없자 그의 말에 다른 저의가 있으리라 생각지 않았다. “하하하…… 자네에게 꼭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면 어쩔 수 없겠지……” 그로서는 적이 서운한 표정이었다. 그때 사검평이 돌연 정색하며 물었다. “선배님께 꼭 묻고 싶은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주가청이 흠칫하며 반문했다. “무엇인가?” “과거 천마문의 혈안에 관하여 후배는 주 선배님이 왜 갑자기 손을 떼셨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그 말에 주가청의 얼굴이 핼쑥하게 변하였다. “대체…… 누가 그런 소리를 하던가?” 사검평이 다시금 신비롭게 웃으며 천천히 말했다.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불초는 이미 그 일에 대해 대략의 윤곽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과거 그 혈안을 해결함에 유일한 단서가 될 수 있는 불영옥패를 이미 입수하였고, 천마문의 유일한 일점혈육 용군선 낭자에게 반드시 후배가 책임지고 그 혈안의 비밀을 밝히겠다고 다짐해 두었습니다.” 그 말에 주가청의 얼굴이 수없이 격변하였다. 이윽고 그는 땅이 꺼져라 일성 장탄식을 뿜었다. “후유…… 그래, 자네라면 혹시 그 일에 관해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려 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그것은 결코 장담할 수 없네. 행여 자네의 사부가 다시 강호에 모습을 나 타낸다면 모를까…… 자네의 힘만으로는 아무래도 어려울 걸세.”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사검평이 돌연 앙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사부께서 후배에게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기를 늘 웅심천추(雄心千秋), 독보천 하(獨步天下)하라 하셨습니다. 한데, 제가 어찌 사부의 위명에만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이 일만큼은 꼭 제 손으로 해결해 내고야 말겠습니다.” 그 말에 천종도주 주가청도 앙천 광소했다. “으하하하…… 자네는 과연 염라천존 노선배의 전인으로서 추호도 손색이 없군. 자네의 뜻이 확고하니 노부는 그 일에 대해 말해 주겠네.” 그리고 대략 간추려 말하는데, 그 요점은 사검평이 이미 주천혜로부터 들었던 바와 거의 차이가 없었다. “하여 노부는 은밀히 강호로 나와 천마문에서 있었던 혈겁의 진상을 규명키 위해 동분서 주했다네. 그러나 꽤 많은 시일을 소비했음에도 일말의 단서조차 잡지 못했지.” 달빛이 주가청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의 청수한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굳어 있었으나 여전히 고아한 풍모를 잃지 않았다. 그는 문득 그때의 허탈감이 되살아 오르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모든 노력이 허사였을 뿐 아니라 도리어 이 일에 연루된 십대고인 중 네 명의 혐의만 더 욱 짙어졌네. 만일 내 자신이 그 네 명 중에 끼여 있지 않았다면 노부 또한 인정할 수밖에 없을 만큼 혐의가 분명했네. 그러나 나 자신이 결백한 만큼 나머지 세 명도 결백할지 모른 다고 생각하여 끝까지 노력했네. 그러던 어느 날, 노부는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되었지.” 사검평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는 단 한 마디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더욱 신중히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아주 뜻밖의 단서였고,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면서도 너무 소홀히 생각하여 그냥 흘려 버렸던 것이었네. 그것은 바로 천마문의 시신들에 남아 있던 흔적들이었네. 천마비상 용태린에게 치명상을 입혔던 일양지(一陽指), 그것은 분명 노부보다 한 수 뛰어난 솜씨였었지. 사실 노부는 이 일식의 절예를 우연히 얻은 한 권의 절대비급으로부터 얻었던 것이네. 그 비급은 노부의 손에 입수되었을 때 이미 심하게 훼손되어 있어 그 중 몇 장은 이미 떨어져 나가 볼 수 없을 지경이었네. 따라서 극치의 경지에 이를 수 없었지. 즉, 노부의 일양지는 비록 극 양패도(極陽覇道)적인 위력은 있으나 더불어 조화를 이루어야 할 음유지기(陰柔之氣)가 부족하다는 점에 흠이 있었네. 그러나 천마비상 용태린의 시신에 남아 있던 일양지의 흔적은 극치에 이른 솜씨였 지.” 그의 음성이 달빛과 뒤섞여 점점 열기를 띠어 갔다. “그러고 보니 노부는 과거 일양지를 얻게 되었던 경위에 의심이 갔다네. 하여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 그러나 그 자체에서는 어떤 단서를 잡지 못했네. 다만 이 과정 중에서 다시 한 번 이 혈안에 대해서 돌이켜 생각해 보았는데, 얼마쯤 미심쩍은 바가 있었네. 알고 보니 이 일에 관련된 다른 세 명의 고인 역시 나와 거의 같은 무렵에 이 일의 내막을 조사하고 나 선 것이었네. 비록 그들이 각자 개별적으로 행동하였지만, 바로 이 점에 대해 노부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네.” 그는 생각을 가다듬는 듯 천공 높이 외로이 떠 있는 만월을 바라보았다. “사실 노부가 이 일에 대해 비교적 소상히 알 수 있었던 것은 특별한 인간 관계가 있었기 때문일세. 하나 그들 세 명이 그러한 예외적 처지가 아님에도 이 일의 비교적 자세한 진상 을 아는 것은 진정 이상한 일이 아니겠나?” 그 말에 사검평은 전적으로 동감이었다. “이에 노부는 단정하였네. 이 일은 필시 거대한 음모의 한 부분이라고…… 그렇다면 누구 일지 모를 암중의 음모자가 나를 포함한 네 명의 강호고수를 이 일과 연관시키는 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그 의문은 어렵지 않게 풀렸네.” 사검평은 더욱 긴장하여 귀기울였다. “노부는 이 일의 진상에 대해 친우인 소림장문인 오성대사와 의논코자 숭산으로 향하던 중이었네. 그날 밤 노부는 한 백포복면인의 방문을 맞아 생사지투를 벌이게 되었지. 그는 노부와 삼십 초의 대결을 벌여, 만일 노부가 삼십 초를 넘긴다면 자신의 생사를 노부에게 맡기겠다 하였네. 반면에 자신이 이기면 나의 생사여탈권을 자신에게 달라는 것이었지.” 점점 더 점입가경으로 치닫는 얘기에 사검평은 숨을 죽였다. “노부는 첫눈에 상대의 내력이 범상치 않음을 간파했으나 그의 제의를 거절하기에는 자존 심이 하락치 않았네.” “그래서 결과가 어찌 되었습니까?” “처음에는 막상막하의 형세였지. 그러나 십여 초가 지나자 돌연 상대가 무서운 공세로 전 환하는 것이었네. 노부는 오직 수비에만 급급하여 반격의 기회조차 얻지 못했네.” 그때의 곤경이 새삼 떠오르는 듯 주가청은 씁쓸히 웃었다. “삼십 초는커녕 겨우 이십 초를 버티기도 힘들 지경이었네. 바로 이때…… 은은히 한 가닥 금음(琴音)이 들려 오지 않았겠나? 순간 상대의 두 눈에 놀람의 빛이 역력히 떠올랐네. 이윽고 그가 다급히 말하기를…… ‘오늘의 이 일전은 없었던 것으 로 하자. 하나 경고해 두겠는데, 그대가 더 이상 천마문의 일에 깊이 개입하려 든다면 이것이야말로 스스로 죽음을 재촉하는 길이니 명심하라!’ 그리고는 감쪽같이 사라졌네. 노부는 깜짝 놀랐네. 지금까지 그 같은 절세고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 이네. 사실 그가 나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이십 초는 고사하고 불과 십 초만 가지고도 능히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네.” 주가청은 다시금 깊이 한숨쉬었다. “사실 노부는 그에 대해 일말의 두려움마저 느끼지 않을 수 없었네. 하나 이것이 노부가 손을 떼게 된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네. 진정한 이유는 어느 날 암암리에 날아든 한 통의 서찰 때문일세.” 주가청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짐을 사검평은 똑똑히 보았다. “그 서찰의 내용은, 먼저 노부에게 이 일에서 손을 떼라는 것이었네. 그리고 천마문의 혈겁은 과연 노부의 짐작대로 노부를 비롯한 몇몇 중요한 강호고수들을 유인하기 위한 하 나의 계략이었다는 것이네. 하나 이미 그 목적이 실패로 끝났다는 것이네. 다만 이 일이 확대되면 그 결과야말로 걷잡을 수 없이 엄청날 것이니 자신과 천하의 운명을 위해서 영원히 손을 떼라는 경고였네.” 그의 말이 끝나자 사검평은 무엇인가 느낀 바가 있는 듯 아연 날카로운 긴장의 빛을 띠었 다. “그렇다면 그 서찰을 보낸 장본인이 대체 누구였습니까?” “그 서찰에는 고색 창연한 고금(古琴)이 하나 그려져 있을 뿐이었네.”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사검평은 크게 부르짖었다. “사, 사마등……!” 第 十一 章 만겁혈풍(萬劫血風)의 전야(前夜) 1 남해 천종도주 주가청은 사검평의 돌연한 태도에 크게 놀랐다. “사마등이 대체 누구이기에 그러는가?” 사검평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달빛에 비친 그의 모습은 실로 전율을 몰아올 정도였다. 무림쌍기 중의 일인인 주가청조차도 움찔했을 정도였다. 사검평은 두 주먹을 와락 움켜쥐며 부르르 떨었다. “사마등! 그자는 불구대천의 원수이니, 백년 전 천살멸음(天殺滅音)으로 염라궁을 혈해로 만들었던 원흉입니다!” 그의 말에 주가청은 크게 놀라며 말했다. “그렇다면 사마등이란 인물은 바로 천공금성(天空琴聖)의 본명이란 말이냐?” 사검평이 싸늘히 코웃음치며 말했다. “흥! 이미 흉수의 배후가 그자라는 것을 확인한 이상 나는 이 일의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 고야 말겠습니다.” 주가청의 얼굴에 근심의 그늘이 드리웠다. “소협, 이 일에 대해 결코 경솔히 생각지 말게. 천공금성 사마 선배가 진정 그 일과 연관이 있는지 지금으로선 단정할 수 없네.” 그러나 사검평의 안색은 여전히 얼음장처럼 싸늘한 채 추호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주가청은 사검평의 성격이 본시 굳강하기 이를 데 없어 쉽사리 뜻을 꺾지 않으리라 짐작하 고는 넌지시 말머리를 돌렸다. “하하하…… 그 문제야 어쨌든…… 노부가 한 가지 묻겠는데, 자네는 사문의 절세기학을 어느 정도나 익혔다고 자부하는가?” 사검평이 비로소 안색을 누그러뜨리고 쑥스러운 듯 대답했다. “불초는 재주가 없어 단지 수박 겉 핥기 식으로 사부의 절예를 이어받았을 뿐입니다.” 의외의 겸손한 태도에 주가청은 크게 웃었다. “하하하…… 무슨 겸사의 언행인가? 자네의 뛰어난 재질로 보아 필시 염라천존 선배의 모 든 절예를 이어받았을 것이네. 하여, 하하하…… 노부는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몇 초 장식(掌式)으로나마 자네와 비무(比 武)하여 한 수 가르침을 얻고자 하네.” 사검평은 흠칫하였다. 그러나 이내 그가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시험해 볼 심산에서 이런 제안을 하는 것 이라 짐작했다. 사검평은 잔잔한 미소로 응답했다. “하하하…… 고명하신 선배께서 손수 가르침을 주시겠다니 후배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 니까? 감사히 응하지요.” 그러자 주가청 역시 빙그레 웃었다. “노부가 창안한 산화낙영장법(散花落英掌法)은 무림 각파의 절학 중 그 정수(精粹)를 망 라했다 할 만하니 그대의 절학과 한 수 비교할 정도의 가치는 있으리라 생각하네. 그럼 노부가 먼저 손을 펼쳐 그 허실을 보여 주겠네.” 순간, 주가청이 번쩍 신형을 날렸다. 이어 그의 신형은 유령과 같이 쾌속 유연하게 움직이며 사검평에게로 덮쳐 갔다. 동시에 삼 초의 공격을 전광석화처럼 잇따라 펼쳐 내는데 그 형세가 자못 기괴막측하였다. 사검평은 약간 의외였다. 설마 그가 기습적인 공격을 가할 줄은 미처 몰랐었기 때문이 미처 피할 여유마저 없었던 그는 대승반야바라신공을 끌어올려 일신을 방비하는 한편 다급 히 오른손으로 일초 장식을 떨쳐 내니, 불영환인십삼장 중의 좌불등천(坐佛登天) 초식이었다. 경세(驚世)의 장영이 소리없이 뻗쳐 갔다. 그러나 주가청은 유감없이 그 일초에서 벗어나며 숨돌릴 사이 없이 사검평의 전신 요혈을 향하여 또다시 공격해 오는 것이었 사검평은 이처럼 숨가쁘게 몰려오는 주가청의 공격을 받고 크게 놀랐다. 하여 거듭 손을 떨쳐 불영환인십삼장을 연이어 발출함으로써 이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주가청의 장세는 과연 신묘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조화와 섬전같이 쾌속한 빠름은 불영환인장법을 능가하고도 남 았다. 아니나다를까? 사검평의 장세는 산화낙영장법의 기세에 휘말려 거듭 허공을 헛되이 맴돌 뿐이었다. 물론 이 같은 결과 하나만을 두고 사검평의 실력이 주가청에 미치지 못한다고 할 수는 없 었다. 사실 사검평은 이 대결이 생사를 건 일전이 아니었던 만큼, 대승반야바라신공만을 끌어올려 수세를 취했을 뿐이었다. 만일 그가 장세에 적양신공마저 주입하였다면 그 형세는 전혀 판이했을 것이다. 더구나 그는 왼손으로 흡혈마도를 감싼 보퉁이를 들고 있어, 결국 오른손 하나만으로 주 가청과 대결하는 셈이었다. 그러나 이때, 사검평은 일말의 의혹을 금치 못하였다. 사실 그는 주가청의 일장에 격중된다 해도 대승반야바라신공으로 일신을 감싸고 있기 때문 에 치명상을 입지는 않을 것이었다. 한데 주가청은 자신의 몸에 장력이 닿을 듯하면 이내 스스로 공격을 거두는 느낌이었다. 이에 사검평은 자못 어리둥절하였다. 그는 주의 깊게 주가청의 공격을 살폈다. 그러다 문득 “아!” 하고 탄성을 발했다. 이때, 주가청은 일종의 기묘한 보법에 의지하여 사검평 주위를 빠르게 감돌았다. 동시에 연신 두 손을 기기묘묘하게 전개하며 차례로 절초를 펼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분명 단순한 공격의 형태가 아니었다. 사검평은 비로소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렇구나……’ 주가청은 바로 비무(比武)를 구실로 하여 사검평에게 그의 절학을 전수하려는 것이었다. 사검평은 그 진의를 알아차리고 크게 감격하였다. 이에 그는 자신도 잇따라 불영환인십삼장을 펼쳐 공격에 대항하는 한편, 주가청이 연거푸 펼치는 초식을 유심히 살피기에 주력했다. 그것은 마치 만개했던 꽃잎이 광풍에 흩날리듯, 혹은 폭설이 허공을 가득 뒤덮듯 화려하 고도 지극히 엄밀했다. 또한 사방에 추호의 틈도 내주지 않으며 날카롭게 상대에게 쏘아져 감으로써 무수한 환영 (幻影)을 동반하기도 하였다. 과연 찍고, 때리고, 내뻗는 일련의 공격 속에는 말할 수 없이 현묘한 기예가 깃들여 있는 것이었다. 사검평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사실, 주가청의 이 산화낙영장법이야말로 그 자신이 오랫동안 천하를 주유하며 섭렵했던 절학들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즉 소림(少林)의 달마신장(達磨神掌), 무당(武當)의 태청권법(太靑拳法), 화산(華山)의 매화오 지(梅花五指), 아미(峨嵋)의 항마복호권(降魔伏虎拳) 등의 무수한 절예들 중 오직 그 장점만을 취하여, 여 기에 다시 그 스스로 일신에 지닌 무학의 모든 정수를 합하여 창안한 것이었다. 때문에 그 절묘한 변화는 실로 극치의 경지였다. 물론 허점이 발견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절묘함이 부분적 결함을 능히 보충하고도 남아 사검평으로 하여금 탄 복, 또 탄복케 하였다. 이에 사검평은 주가청에 대한 평가를 새삼 새롭게 하게 되었. 뿐만 아니라 주가청은 일신의 보법마저 무수한 변화를 내포하여 신비로운 경지에 달했으 니, 나아가 보는 이로 하여금 진퇴조차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사검평은 역시 명실상부 천하제일의 기재였다. 그는 이미 주가청의 진의를 파악하였던지라 그의 한 동작 한 동작을 낱낱이 살폈다. 이들은 말없는 중에 이심전심 각자의 진의를 파악하였지만, 겉으로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 는 듯하였다. 만일 이때 누군가가 이 광경을 목격하였다면 정녕 생사를 건 일전으로 알 수밖에 없었으리 라! 어느덧 이들의 대결도 백여 초를 지났다. 돌연 주가청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노부의 산화낙영장법과 현천칠성보(玄天七星步)를 어느 정도 익혔는가?” 사검평 역시 신비로운 미소를 떠올렸다. “비록 선배님의 가르침에 완벽히 따르지는 못했으나 그 오묘한 변화만은 어느 정도 깨달 은 바 있습니다.” 주가청의 안색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과연 그대의 재질은 노부가 짐작하던 것보다 월등히 뛰어나구나. 노부가 비록 그대의 뜻 을 직접적으로 도와 주지는 못하나 마음으로나마 그대의 바라는 바 뜻이 성취되기를 간절히 염원하겠네.” 순간 그는 훌쩍 몸을 날려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앗, 주 선배님!” 설마 그가 이토록 급작스럽게 몸을 감출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는가! 그는 아쉽고 허전한 마음에서 암야의 허공에 대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 천사 주가청 선배야말로 무림의 진정한 풍진괴걸이라 할 만하다. 오늘 처음으로 만난 나에게 자신의 일신절예를 숨김없이 전수해 주고도 군소리 한마디 없이 훌쩍 떠나가다 니……” 그는 망연히 어둠의 허공을 응시한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쨌든 주 선배의 말대로라면 지난날의 천마문 사건에 사마등이 연루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과연 그는 이 일과 어떠한 관계일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의 두 눈이 갑자기 형형히 빛나기 시작했다. “좋다. 나 사검평은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일을 철저히 규명해 내고야 말리라! 또한 사마등 이 이 일에 관련되었다면 그 역시 기어이 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그는 한차례 주위를 쓸어본 후 표연히 몸을 솟구쳐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낡고 허물어진 공자묘를 교교한 월색만이 비추고 있었다. 쏟아지는 달빛 아래, 조금 전 사검평에 의해 비참하게 죽어 갔던 청의중년인의 시신만이 외 롭게 나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한데, 바로 이때였다. 조금 전까지 사검평과 주가청이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에 언제 나타났는지 한 줄기 백영(白 影)이 싸늘한 자태로 서 있었다. 전신을 백면백의(白面百衣)로 감싼 신비의 복면인이었다. 달빛 아래 전신이 백설처럼 눈부신 가운데 오직 눈빛만이 비수처럼 날카로웠다. 그는 사검평이 사라진 방향을 주시하다가 이윽고 싸늘한 괴소를 울려 냈다. “으흐흐흐…… 염라서생 사검평, 네가 감히 본좌의 일에 끼여들다니…… 하지만 아직은 너 를 방치해 두리라. 너야말로 본좌를 대신하여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흐흐흐…… 기다려라! 본좌는 이제부터 너를 강호의 공적(公敵)으로 만들어 결국 너로 하여금 강호를 피로 물들이게 할 것이다. 그 후, 네가 강호에 발 디딜 곳이 없게 되면 너는 도리없이 본좌의 품으로 스스로 기어들 테니…… 그때 나의 영원한 수족이 되는 것이다.” 말을 마치자 그는 스스로의 생각에 도취되어 앙천 대소하였다. “으하하하하……” 웅후한 광소의 진동에 달빛마저 움츠러 드는 듯하였다. 그러나 그의 웃음은 이내 멈추어졌다. 대신 그의 두 눈에서는 싸늘한 살기가 폭사되었다. “천사 주가청, 네가 감히 본좌의 경고를 무시하고 염라서생에게 모든 사실을 폭로하다 니…… 흐흐흐…… 오냐, 그 대가가 어떠한지 똑바로 보여 주마!” 이어 그는 땅위에 처참한 형국으로 나뒹굴고 있는 청의중년인을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다 가 중얼거렸다. “은령사호(銀令四號), 너는 과연 본좌의 명을 충실히 수행하였구나. 덕분에 본좌는 백년 전, 강호를 위진(威震)시켰던 염라천존의 절세도식을 비로소 견식할 수 있었다.” 그 차가운 말투의 내용으로 보아 천면환영인을 사칭했던 자는 그의 수하였음에 틀림없었 다. 백포백면인은 시신을 향해 가볍게 소매를 떨쳐 냈다. 일순, 한 가닥 푸르른 기류가 그의 소매에서 뻗쳐 나와 시신을 휘감았다. 다음 순간, 청의중년인의 시신은 삽시간에 한줌의 독수(毒水)로 화하였다. 실로 가공할 위력,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독공(毒功)이었다. 한 구의 시체를 이처럼 순식간에 한줌 독수로 용해시키는 독공이 천하 그 어디에 또 있겠는 가? 백포백면인은 문득 허공의 만월을 바라보며 혼자말인 듯 나직이 뇌까렸다. “하늘이 본좌의 뜻을 막지 않는 이상 반드시 일 년 안에 천하를 나의 품안에 안으리라! 하 하하…… 정녕 길고도 오랜 세월 동안 본좌는 공들여 모든 안배를 꾸며 놓았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하늘의 뜻뿐.” 달빛 아래 그의 눈빛이 천하의 그 누구와도 비할 수 없이 기이한 흉광을 발했다. “이제 그 누구도 나의 깊고 치밀한 안배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으하하하……” 갑자기 어디선가 일진 광풍이 불어 닥쳤다. 그것은 머지않아 천하를 휩쓸 피의 폭풍을 예고하는 것 같았 * * * 장안(長安). 섬서성(陝西省)의 성도(省都)이자 중원의 심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천년 이래의 고도 (古都). 일찍이 전한(前漢), 수(隨), 당(唐) 등 숱한 전조(前朝)의 수도로서 역사의 부침(浮沈)과 그 영욕이 함께하였던 유서 깊은 곳이었다. 하여 그 이끼 낀 성벽의 돌 하나에도 고색 창연한 역사의 숨결이 어렸으니 오랜 영화(榮華) 의 잔영이 아직도 곳곳에 서려 있었 비록 왕조는 망하였고 영고성쇠 또한 무수히 되풀이되었어도 예나 지금이나 번화하기는 마지찬가지였다. 그것은 이곳 장안이 천하 각처에서 생산되는 온갖 산물의 집산지였기 때문이다. 거미줄처럼 연결된 양쪽 가로변에 처마를 맞대고 늘어선 고루거각(高樓巨閣)과 천하 각처 의 온갖 산물이 그득히 쌓인 상가(商街). 더불어 화사한 이곳 주민들의 옷차림에서도 장안의 번성이 충분히 엿보였다. 일찍이 시성(時聖) 이백(李白)은 장안(長安)의 수려함을 이렇게 글로 남겼다. ─`三月咸陽城 千花書如錦 춘삼월을 맞은 함양성은, 백화 만발하여 아름답기 영롱한 비단 같구나 비록 지금은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렀고 계절 또한 춘삼월이 아니지만, 고색 창연하고 미 려한 장안의 풍물이야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양광(陽光)이 중천(中天)에 솟은 정오 무렵. 번화한 장안성 내, 대로(大路) 위로 백마를 탄 사검평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주가청과 헤어진 이래, 일신에 지닌 절정의 경공을 이용하여 순식간에 진전을 벗어났 다. 그리고 불과 수일 만에 천여 리를 질주하여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장안에 들어서게 된 것 이다. 대낮에 경공을 시전하기가 무엇하여 백마를 타고 유유히 장안성 내로 들어서자 그 백설 같 은 천리준마와 더불어 그의 풍모는 모든 이의 시선을 한 몸에 끌어들이고 말았다. 어느 누가 그의 일신 풍모에 가슴 설레지 않으랴. 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여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것은 물론, 같은 남자들마저 황홀한 듯 도취되어 시선을 거둘 줄 몰랐다. 곳곳에서 한숨과 탄성, 그리고 질시에 찬 기성이 터져 나왔다. 어느덧 사검평을 태운 천리준마는 뭇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장안의 서쪽 대로로 접어 들고 있었다. 이곳은 본시 행인들의 발길이 뜸한 지역이었다. 장안에서도 가장 명망있는 인사들만이 모여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대로 일족의 번영을 자랑하는 명문거족(名門巨族)들의 화려 웅장한 대저택들이 그 규모 라도 겨루는 듯 빈틈없이 들어차 있었 이처럼 유서 깊은 호족(豪族)과 공경대부(公卿大夫)들의 거택(巨宅)들만 들어선 곳인지라 대낮에도 인적이 드물어 마치 깊은 유곡(幽谷)에 들어선 듯 조용하기만 하였다. 구불구불한 골목길, 청석(靑石)이 깔린 노면(路面) 위를 지나는 한 필 백마의 말굽 소리만이 적막을 조용히 흔들어 놓았다. 한참을 걸은 뒤에야 사검평은 사상서부(史尙書府)에 당도할 수 있었다. 웅장한 저택은 비록 사 년 만에 다시 대했으나 전과 비해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붉은색의 고색 창연한 현판 위에 봉황이 날듯 황금빛으로 아로 새겨진 ‘사상서부(史尙書 府)’ 네 글자의 부명(府名)이며, 하늘을 날아오르듯 치솟은 지붕 등이 이곳 장안에서도 가장 유서 깊은 사상서부의 영화와 번성을 웅변적으로 말해 주고 있었다. 사검평은 그 앞에 서니 갑자기 만감이 교차하였다. “아아! 아버님, 어머님……” 문을 들어서기에 앞서 너무도 반가운 해후의 장면이 떠올랐다. 당대의 대유학자로서 추상같이 엄한 일면과 부드러운 자상함을 함께 지니신 부친 사장천(史 長天)과 생각만 하여도 포근한 따뜻함을 느끼게 하는 어머님의 모습이 번갈아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조급한 마음과 달리 선뜻 대문 안으로 들어서지 못했다. 가장 기뻐해야 할 이 시간에 새삼 떠오르는 비통과 회한. 자신은 비록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으나 이렇듯 다시금 생가(生家)에 되돌아왔는데…… 사 년 전 그때 자신과 더불어 장군산에 갔었던 형(兄) 진평(眞平)은 생사 여부도 모르는 채 행적이 묘연하지 않은가! 갑자기 떠오른 회한에 사검평은 갑자기 가슴이 미어지듯 침울하였다. 잠시 마음을 진정시킨 사검평은 조용히 마상(馬上)에서 내려 굳건히 닫친 사상서부의 대 문을 두드렸다. 웬일인지 안으로부터 아무런 기척도 들려 오지 않았다. 사검평은 괜스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는 더욱 세차게 문을 두드렸다. 2 안으로부터 누군가 부리나케 뛰어나오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윽고 대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털북숭이 대한 하나가 튀어나오며 대뜸 고함을 지른다. “어떤 놈이 감히 사상서부의 대문 앞에서 지랄발광을 떠는 것이냐?” 커다란 주먹을 불끈 쥐고 떠들어대던 그는 사검평을 발견하고는 움찔하는 기색이었다. 그에게서 풍겨나는 위압감에 내심 심상치 않은 인물임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는 즉시 태도를 바꾸어 공손하게 물었다. “어느 공자이시기에 본 사상서부의 문을 두드리셨소이까?” 사검평 또한 눈앞의 털보대한이 낯설었던지라 의아한 마음이었. “그대야말로 누구인가? 이곳 사상서부에는 언제부터 있었나?” “소인은 이곳 사상서부의 집사 황(黃) 노인(老人) 밑에서 잡일을 거드는 손소이(孫小二)인 바, 이곳 주인 나리께서 경사(京師)로 올라가신 후부터는 죽 이곳에 있었소이다.” 사검평은 크게 놀랐다. “아버님께서 지금 이곳에 계시지 않는단 말인가?” 이번에는 손소이가 대경 실색하는 표정이었다. “아버님이라니…… 그, 그렇다면 공자께서 바로 사 년 전에 실종되었던……” 사검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내가 바로 사상서부의 둘째 공자 사검평일세.” 순간, 손소이는 불에 덴 듯 안쪽으로 달려가며 소리소리 고함쳤다. “황(黃) 노야(老爺)! 고, 공자께서…… 돌아가신 줄 알았던 두, 둘째 공자께서 다시 돌아오 셨소!” 이때 사검평은 삐죽 열린 대문 안으로 한걸음 들어섰다. 조부께서 심으셨다는 아름드리 백양목은 여전히 빽빽해 녹음도 무성했다. 또한 내택으로 이르는 소로에는 청석이 가지런히 깔려 있었다. 그 어느것 하나 바뀐 것이 없었다. 그는 감개 어린 표정으로 연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소로를 지나 내택으로 들어가는 월형문 (月形門) 앞에 이르렀다. 그때 나이 칠순 가량의 노인이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휘적휘적 걸어나오고 있었다. “황(黃) 노백(老伯)!” 사검평은 저도 모르게 외치며 와락 달려들었다. 황의노인은 눈앞의 사검평을 발견하고는 너무도 기쁜 나머지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이…… 공자……”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사검평의 전신을 아래위로 보고 또 보았다. 이윽고 그의 노안(老眼)에 그렁하게 눈물이 고였다. “진정…… 두, 둘째 공자님이 틀림없으시군요.” 사검평은 늙고 야윈 황 노인을 덥석 안았다. 두 사람 사이에선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조손간의 상봉 장면과도 같은 찡한 감동이 일어났 다. 사실 겉으로는 주종간이었으나 그 정만은 친조손간과 다름이 없었다. 황 노인은 누대에 걸친 사상서부의 가복으로, 벌써 삼 대째 집사직을 맡고 있다. 특히 어려서부터 영민하였던 사검평을 끔찍이도 아껴 주었던 황 노인이었다. 쭈글거리는 황 노인의 얼굴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사검평은 황 노인의 격동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나지막이 물었 “황 노백, 아버님은 관계에 다시는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하셨었는데, 무슨 일로 경사 에 가시었소?” “사정을 말씀드리자면 길지요. 우선 안으로 드시지요. 들어가면서 말씀 올리겠습니다, 도 련님.” 사검평은 황 노인의 손에 이끌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황 노인은 연신 눈물을 닦아 내며 그간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검평의 운명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았던 바로 그날부터의 이야기였다. 그때, 장안 성내의 명문자제들이 무리지어 유람을 떠난 지 며칠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자 그 부모들은 크게 걱정하여 함께 장군산으로 그들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이윽고 장군산에 당도한 부모들은 일대를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일말의 단서도 잡지 못하던 중, 이틀째 되던 저녁 무렵에야 한 개의 괴이한 석총을 발견하게 되었다. 처음 이 석총이 무엇인지 몰랐으나 아무래도 미심쩍어 인부들을 시켜 파보았더니, 실종되 었던 자제들과 노복들의 시신(屍身)이 나오지 않는가! 어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지 않으랴. 삽시간에 이들이 터뜨린 통곡 소리로 하여 장군산 일대가 슬픔에 휩싸였다. 사장천의 비통함은 누구보다 더하였으니…… 모든 이들은 자제의 시신이라도 찾았건만 진평, 검평 두 형제는 끝내 찾을 수 없었기 때문 이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 혈육의 시체를 거두어 돌아간 후에도, 사장천은 가복들을 풀어 일대를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그 어느 곳에서도 형제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사장천의 비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그래도 두 자식의 최후를 직접 보지 않았던 것 만으로 돌이켜 위안을 삼으며 사상서부로 돌아왔다. 그는 언젠가 두 아들이 살아 돌아오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 하나 부인 왕소연(王素娟)은 두 아들의 실종에 식음마저 전폐한 끝내 큰 병을 얻었다. 그 병세가 날이 갈수록 악화되자 사장천은 평소 우의가 깊던 성내제일의 명의(名義), 간(簡) 노대선생(老大先生)을 청하여서 겨우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 비록 병세에서는 회복되었어도 두 자식을 한꺼번에 잃은 어머니 왕소연은 오직 눈물로만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자식을 잃은 수많은 장안의 명사들은 거금(巨金)을 내걸고 흉수를 밝혀 내려 하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감히 밝혀 내지 못했고, 그 사건은 세월이 흐르면서 흐지부지 잊혀지고 말았다. 어느덧 삼 년의 세월이 흘렀을 때, 경사(京師)의 천자(天子)께서 낙향한 지 십수년이 지난 사장천의 덕망을 끝내 잊지 못하시어 이부상서(吏部尙書)로서 재등용, 상경하라는 어명을 내리셨다. 본시 사장천은 십수년 전 스스로 병(病)을 칭하여 낙향한 후 뒤늦게야 얻은 자식들의 장 성함을 낙으로 살던 중이었다. 그러나 이제 노년에 이르러 두 자식을 졸지에 잃고 노처(老妻)마저 눈물로 세월을 보내니 마음의 상처를 잊기 위해서라도 어명을 받들어 경사로 올라갔다. 그 동안 집은 늙은 가복 황 집사에게 맡겨 만에 하나 돌아올지도 모를 두 아들을 기다리게 하였던 것이다. 말을 마친 황 노인의 노안(老眼)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넘쳐 흘렀다. “노대인(老大人)과 노부인께서 이렇듯 몰라보게 성장하여 돌아오신 둘째 공자님을 보신다 면 그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아아……” 비록 본의는 아니었으나 노부모께 끼친 불효를 생각하니 사검평은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듯하였다. 그의 볼에도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때만은 그의 면모 어디에서도 천하무림을 피로 휩쓸던 염라천존의 전인다움을 추호도 느 낄 수 없었다. 사모지정(思母之情)! 어느 누가 그 깊고 숭고한 어버이의 사랑을 잊을 수 있으랴. 어느새 그들은 내택에 이르러 있었다. 그때 황 노인은 큰 실수라도 저지른 듯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쿠, 내 정신 좀 봐라! 공자께서 필시 식전(食前)이실 텐데 늙은이가 이렇듯 수다만 떨고 있다니…… 둘째 공자님, 어서 들어가십시오. 곧 진짓상을 마련하겠습니다.” 그러나 사검평은 고개를 저었다. “황 노백, 그럴 시간이 없소. 나는 이 길로 곧장 북경으로 가서 부모님을 뵙고 그간의 사정을 말씀드려야겠소. 그대는 나에 대해 너무 신경 쓰지 마시오!” 그러자 황 노인이 간곡히 말했다. “공자, 이곳 장안에서 북경까지 얼마나 먼 길인데 한끼 식사조차 마다하시고 떠나신단 말 입니까? 우선 안으로 드시면 노부가 일각이라도 속히 노대인께 소식을 전할 방법을 강구하 여 올리겠습니다. 그러니 어서……” 너무나 간곡히 만류하는지라 사검평은 난처한 기색이었다. 사실 멋모르는 황 노인으로서야 그가 일신에 절세기학을 익혔을 줄이야 짐작이나 하겠는 가? 황 노인은 사검평이 묵묵히 서 있자 자신의 말에 순응하는 줄 알고 크게 신명이 나서 한 옆에 서 있던 손소이를 향해 버럭 노성을 질렀다. “이 게으른 놈아, 뭘 그리 서 있기만 하는 게냐? 어서 왕(王) 마파(馬婆)에게로 달려가 공 자께서 드실 음식이나 장만토록 전하지 못하고……” 황 노인의 호통에 손소이는 질겁을 했다. “예? 아…… 예예……” 굽실거리며 득달같이 안으로 달려갔다. “손소이, 너는 구태여 왕 마파에게 갈 것 없다. 대신 밖으로 나가 내가 타고 왔던 말이나 안으로 끌고 오라!” 사검평이 그의 등에 대고 급히 말한 후 황 노인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황 노백이 아직 이토록 정정한 걸 보니 왕 마파께서도 여전하겠구려!” 황 노인의 늙은 얼굴이 활짝 펴졌다. “하하…… 이 늙은 몸이 앞으로 천수를 마저 못 채운다면 그건 전적으로 그 할망구 탓이 지요. 그 할망구는 고희(古稀)를 넘긴 지 오래건만, 무슨 조화인지 해가 갈수록 근력이 더욱 좋아진답니다.” 사검평은 빙그레 미소를 떠올렸다. 그토록 답답하던 마음이 활짝 개는 듯했다. 본래 황 노인과 왕 마파는 그의 조부께서 맺어 준 부부였다. 조부의 서동(書童)이었던 황 노인은 조모의 시녀였던 왕 마파를 아내로 맞아들였던 것이다. 황 노인이 말은 그렇게 했어도 그들 노부부의 금슬이 한 쌍의 원앙임은 누구보다 사검평 자신이 너무도 잘 알았다. 이윽고 그들 노소 두 사람은 앞서거니뒤서거니 사상서부 내실로 들어갔다. 사검평의 출현을 전해 들은 왕 마파가 허둥지둥 달려나왔다. “고, 공자님……” 눈물 젖은 부르짖음에 사검평은 가슴이 뭉클하였다. “고…… 공자님, 그 동안 어디에 계셨기에 이제야……” 목이 메어 말이 안 나오는지, 왕 마파는 사검평의 얼굴을 연신 더듬었다. “이, 이럴 수가…… 사 년 전, 영악하기 그지없던 공자께서 이토록 신수가 달라지셨으니 지 난 사 년간 필시 무슨 일이 있었군요?” 황 노인도 동감이라는 듯 궁금한 시선을 보냈다. 이에 사검평은 크게 난처하였다. 비록 그들의 궁금함이 자신을 위하는 지극한 정성의 일환이라 하나, 어찌 자신의 지난날 행적을 이들 노부부에게 털어놓을 수 있겠는가? 이때 황 노인이 이내 사검평에게 모종의 말못할 사정이 있음을 눈치채었다. “할망구, 이제 그만 하세. 그간의 일이야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지 않는가? 그보 다 공자께서 사장하실 텐데 어서 음식이나 장만하게.” 왕 마파가 그제서야 생각났다는 듯 두 손을 딱 부딪치며 말했. “그렇지! 노망이 들어 그만 잊었다오…… 둘째 공자님께서 본시 노신이 만든 오채선미면 (五菜仙味緬)을 꽤나 좋아하셨으니, 내 부리나케 장만을 하리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그녀는 곁의 시녀를 재촉하여 황망히 안으로 사라졌다. 사검평이 그녀의 등뒤에 대고 짓궂게 소리쳤다. “왕 마파의 괄괄한 성미는 여전히 예전 그대로구려!” 그 말에 황 노인이 씁쓸히 미소 지었다. “원, 공자님도 별말씀을…… 이제 저 할망구도 예전과는 턱도 없다오. 두 분 공자의 실종 이후 상심지환(傷心之患)에 걸려 몸이 쇠약해진 요즘은 정말 근력이 전에 비해 형편없어졌 습니다.” 사검평은 이 말을 듣고 황 노인 내외의 부부애가 얼마나 지극한지 새삼 깨달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건강에 대해 허풍스럽게 호언하던 그였는데 문득 애처에 대한 수심으로 노안이 벌겋게 충혈되지 않는가. 사검평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짐짓 쾌활한 척 떠들어댔다. “하하하…… 사 년 만에 집에 돌아오니 내가 좋아하던 오채선미면을 먹을 수 있겠구려. 아 아, 정녕 감회가 새롭소.” 그 말에 황 노인이 비로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감회가 새로운 것이야 어찌 공자님뿐이겠소이까? 할망구도 죽기 전에 자신이 손수 만든 오채선미면을 과연 공자님께 다시 대접할 수 있을까 걱정하였는데, 뜻밖에 그것이 이루어졌으니 이제야 평생의 소원을 풀었을 겁니다. 하하하……” 비록 입으로는 웃고 있었으나 그 눈에는 이슬이 맺혀 정녕 감회를 억누르지 못하는 표정이 었다. 사검평 또한 이들 두 노부의 뜨거운 충의에 새삼 가슴이 저려 왔다. 비록 사 년 만에 다시 돌아와 그토록 뵙고 싶던 부모님을 만나지는 못했으나 이들 노부부의 눈물겨운 환대에 집으로 돌아온 보람이 있었다. 사검평, 그는 지금 염라천존의 전인으로서의 자신 따위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오직 사 년 전의 그 자신으로 돌아가 인정과 가족애에 취해 있는 것이었다. 만일 더 이상 그가 강호의 풍파에 휩쓸리지 않고 이대로 사상서부의 둘째 공자로 내일을 보낼 수 있다면…… 그러나 그는 곧 살육과 음모가 소용돌이치는 강호무림으로 되돌아가야 할 운명이었다. * * * 작열하는 태양, 여름도 저물어 가는 계절의 길목. 마지막 노염(老炎)이 대지를 불태우고 있는 하남 관도(官道)였. 무더운 날씨 때문에 오가는 행인조차 별로 없었다. 이따금 있는 행인이라야 땀으로 뒤범벅된 떠돌이 장사꾼뿐. 그때, 이 염천의 관도 위를 지나는 일필(一匹) 기마(騎馬)가 있었다. 한 올의 잡모(雜毛)도 섞이지 않은 순백의 눈부신 준마. 더구나 마상의 기수 또한 눈부신 백의(白衣)를 입고 있었으니 인마(人馬)가 한데 어울려 실로 청수한 풍모였다. 다만 그의 허리에 꿰찬 검은 보퉁이만이 설원(雪原)의 일점 흑암(黑岩)인 듯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는 장안의 사상서부를 떠나 일로(一路) 북경으로 향하는 사검평의 모습이었다. 사검평! 그는 이미 수중의 불영옥패로 인하여 정사를 막론하고 모든 강호 군웅들의 목표가 되어 있 음을 모르는 바 아닐 텐데…… 그런 일 따위는 아예 염두에도 없다는 듯 유유히 길을 가고 있었다. 기승을 부리는 무더위에는 그의 백마도 견디지 못하겠는지 연신 뜨거운 김을 내뿜고 있었 다. 말조차 허덕거리는 극열의 태양 아래, 그러나 사검평만은 그 무더위마저 느끼지 않는 듯 백옥처럼 흰 얼굴에 단 한 방울의 땀방울도 흘러내리지 않았다. 그는 마치 한가로이 유람을 떠난 풍류객의 자태였다. 폭양에 이글거리는 사방의 정경일망정 색다른 취미로서 감상하는가? 서서히 백마를 몰며 무심한 눈길로 연신 사방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하나 이 순간, 그의 뇌리에는 무수한 상념이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의 뇌리 속에는 자신이 강호로 나오자마자 부딪치게 되었던 천마문의 혈안이 언제나 떠 나지 않고 있었다. 지금도 역시 그의 뇌리 속에는 이 문제로 하여 가득 찼다. 만일 천사 주가청의 말이 사실이라면…… 하여 그 혈안의 배후에 숨은 정체불명의 흉수가 그토록 엄청난 자라면…… 정녕 자신의 힘만으로는 상대키 어려울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검평은 문득 먼 하늘에 뜬 일점 구름을 바라보았다. “아! 사검평아, 너는 지난 사 년 전에만 해도 겨우 동서남북의 방향이나 분별하던 일개 어린아이였는데, 태산 같은 사문의 은혜를 받아 오늘날 일신에 신기절예(神技絶藝)를 지닌 강호의 기협으로 성장하였다.” 이때, 그가 타고 있는 한 필의 백마도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푸르륵, 짧게 울었다. 그의 회한이 어린 음성이 작열하는 태양 밑에서 은은히 부서져 나갔다. “또한 지난 세월 동안 불철주야 절학을 연마하였던 이유 중의 하나는 장군산에서 실종되어 생사조차 모르는 진평 형님과 그곳에서 원통하게 죽어 간 여러 사람들의 복수를 위해서였다.” 그의 표정은 정녕 회한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막상 강호에 들어서자마자 이렇듯 예기치 않게 과거의 혈안에 연루되었으니…… 지난 사 년간 한시도 잊은 일이 없던 그 일을 늦출 수밖에 없어 정녕 안타깝구나.” 사실 사검평은 사 년 전 장군산의 겁란이야말로 필시 천독마수 우문관의 소행이 아닐까 짐 작하는 터였다. 그러나 이것은 막연한 추측일 뿐 확실한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 하여 그의 안타까움만이 도를 더해 가는 것이었다. “어쨌든 나는 북경으로 가 부모님을 만나 뵙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하다. 그런 후 본격적 으로 강호에 나서리라!” 그때 그의 백마가 문득 앞발을 쳐들고 한차례 길게 울었다. 언뜻 놀라 앞을 보니 멀리 먼지구름이 자욱이 일고 있었다. 콰두두두두…… 관도 저편으로부터 뽀오얀 황진을 일으키며 한 대의 사두마차(四頭馬車)가 미친 듯이 달려 오고 있었다. 마차의 외장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달려오는 기세가 자못 흉험하였다. ‘누구의 마차이기에 이렇듯 난폭하게 질주하는가?’ 그 서슬에 놀라 몇몇 행인들이 지레 질겁하여 황급히 길 옆으로 물러섰다. 사검평도 이처럼 횡폭한 사두마차의 폭주에 절로 낯이 찌푸려졌다. 그러나…… ‘지금은 갈 길이 바쁜 몸, 어찌 사소한 일 따위로 시비를 벌여 귀한 시간만 낭비한단 말 인가!’ 그는 치솟는 불쾌감을 억누르고 짐짓 한쪽 길 옆으로 물러났 第 十二 章 사두마차(四頭馬車)의 비밀 1 쿠르르르…… 마치 뇌성벽력이 코앞을 스치듯 요란한 굉음이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주위로 가득 피어오른 황진에 눈을 못 뜰 지경이었다. “야, 이 우라질 자식들아! 에이, 퉤! 퉤!” “가다가 바퀴라도 빠져 버려라!” 지나던 행인들은 일제히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사두마차는 욕설 따위에는 아랑곳없이 여전히 미친 듯 폭주하여 순식간에 사라져 거의 보이지 않았다. 자욱한 황진만이 구름처럼 피어올라 그렇지 않아도 더위에 지친 여러 사람들을 분통 터지 게 하였다. 사검평 역시 한 가닥 씁쓰레한 미소를 흘리며 구름 같은 먼지 속에서 멀리 사라져 간 마차 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어 그는 혼자말처럼 나직이 뇌까렸다. “조금 전 마부석의 그자는 태양혈이 불룩 솟아 있던 것으로 보아 필시 뛰어난 내가고수였 는데…… 어찌 무림인으로서 이렇듯 흉폭히 마차를 몰아 선량한 양민들에게 피해를 주는 가?” 가볍게 탄식한 후 옷을 털며 걸음을 재촉하는데, 또다시 관도 앞쪽이 마치 먹구름 몰려오 듯 자욱한 황진으로 가려졌다. 우두두두두…… 이번에는 수십 필의 건마(建馬)들이 미친 듯 질주해 오고 있었 이들 또한 조금 전 사두마차가 간 방향을 향해 파죽지세(破竹之勢)로 폭주해 갔다. 예외없이 황진이 피어올라 열사의 폭양마저 가렸다. “어, 어이쿠…… 오늘은 웬 미친놈투성이란 말인가?” 또다시 먼지 세례를 받은 행인들이 욕설을 퍼부었다. 사검평은 일찌감치 대승반야바라신공을 끌어올려 나름대로 방비하였던지라 한줌의 먼지도 뒤집어쓰지 않았다. 하나 그는 가슴속 깊이 피어오른 의혹을 지울 수 없었다. 이번에 스치듯 지나간 수십 필의 말 위에는 승(僧), 속(俗), 도인(道人) 등, 각양각색의 사 람들이 어지러이 뒤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첫눈에 무림인임을 알아차릴 수 있는 차림새들이었다. 그들이 이렇듯 무리지어 백주에 대로를 폭주함은 대체 무슨 까닭일까? 사검평은 치미는 호기심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어디 한번 이들을 뒤쫓아가 그 이유를 알아 낼 것인가, 아니면 가던 길이나 재촉할 것인 가…… 짧은 순간, 그는 자못 망설여졌다. 그러나 이내 쓴웃음과 함께 마음을 정했다. “나도 모르게 깜박 부질없는 생각을 하였군…… 저들이야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 무리지어 급박하게 가는 것일 테고, 나는 나대로 사정이 있으니 더 이상 공연한 일에 휩쓸 릴 것 없이 가던 길이나 재촉하자!” 조용히 고삐를 낚아채니 백마는 다시금 말굽을 옮겼다. 그러나 겨우 십여 장도 못 갔을 때, 또다시 앞쪽으로부터 두 필의 말이 미친 듯 달려오지 않는가! 그는 절로 낯이 찌푸려졌다. 하나 이왕지사 한번 참기로 했던 것, 한 번쯤 더 참아 주지 못할 바도 없고 하여 조용히 길 옆으로 물러났다. 한데, 자욱이 황진을 일으키며 지나치던 그들은 갑자기 멈추더니 말 머리를 되돌려 오는 것 이 아닌가? 사검평의 앞으로 곧장 다가오는 두 필의 준마는 한 올의 잡모도 섞이지 않은 흑마였다. 그 검은 윤기가 너무도 윤택하여 사검평이 타고 있던 백마와 기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이 두 필의 마상에는 몸에 달라붙는 청의경장을 산뜻하게 차려입은 일남일녀(一男一女)가 타고 있었다. 십칠팔 세쯤 되어 보이는 미소녀와 그보다 두어 살 위로 보이는 미청년이었다. 그들의 어깨 너머로 금빛 창연한 검병(劍柄:손잡이)이 비쭉 드러나 있었는데, 일견하기에도 범상치 않은 명검(名劍)으로 보였 사검평에게 다가온 소녀는 앙칼진 눈초리로 쏘아보며 대뜸 묻는 것이었다. “이봐요! 조금 전 이곳으로 사두마차가 지나쳐 갔을 텐데 어느쪽으로 사라졌는지 빨리 말 해 봐요.” 마치 명령하듯 앙칼지게 쏘아붙이는 소녀의 한마디에 사검평은 불쾌한 감정이 울컥 치솟았 다. 그는 그녀의 질문을 못 들은 척 백운(白雲)이 흐르는 허공을 바라보며 묵묵히 그들 사이 를 지나쳤다. 그렇게 두어 발짝쯤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섯거라! 감히 네놈이 사매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가긴 어딜 간다는 것이냐!” 성난 외침과 함께 한 줄기의 편영이 느닷없이 허공을 갈랐다. 휘잉! 쾌속무비한 살초였다. 사검평으로서는 정녕 뜻밖이었다. 천돌, 선기, 화개의 삼대요혈을 한꺼번에 노리고 날카롭게 날아오는 편영. 비록 강호의 일류고수라 해도 미처 피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사검평의 검미가 꿈틀 일그러졌다.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다짜고짜 살수를 전개해 오다니, 실로 흉악한 자로군.’ 그는 인상을 살짝 일그러뜨리며 허리를 뒤틀어 가볍게 상대의 공세를 무산시킴과 동시에 슬쩍 손을 휘둘러 상대의 채찍을 낚아챘다. 파팟! 마상의 미청년이 휘두른 일편 채찍은 사검평의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여 꼼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사검평의 두 눈으로부터 한 줄기 소름 끼치는 한광(寒光)이 예리하게 뿜어졌다. 그는 얼음장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는 아무런 원한 진 일도 없건만, 그대는 무슨 일로 본 공자에게 이리도 독랄한 살 수를 서슴없이 전개하는가?” 그의 분노는 너무도 당연했다. 만일 청의미청년이 가격했던 대로 천돌, 선기, 화개의 세 요혈을 고스란히 맞았으면 어찌 되었겠는가? 본시 그 세 개의 요혈이야말로 사람의 몸 중 가장 중요한 사혈(死穴)들로, 언뜻 스치기만 해 도 중상을 면키 어려운 곳이었다. 더구나 한마디의 경고도 없이 다짜고짜 가격해 왔으니 강호 도의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실로 그의 분노는 화산의 분출처럼 폭발할 지경이었다. 청의미청년은 자신의 공격이 무위로 끝났음은 물론, 수중의 채찍마저 상대의 두 손가락에 끼여 꼼짝달싹 않으니 순식간에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였다. “크으음……” 그는 침중한 신음성을 흘려 내며 전신의 공력을 끌어올려 채찍을 빼내려 애썼다. 그러나 고작해야 손가락 두 개에 의해 잡혔을 뿐인데도 채찍은 마치 뿌리라도 내린 듯 요지 부동이었다. 청의미청년은 이를 악물며 다시 한 번 당겨 보았으나 역시 뜻대로 되지 않았다. 크게 자존심이 상한 청의미청년이 나머지 한 손으로 다급히 등뒤의 장검을 뽑으려 할 때였 다. 히히히힝! 긴 말울음 소리와 함께 청의미청년의 입에서 침통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흐으읍!” 청의미청년은 타고 있던 흑마와 더불어 여지없이 땅으로 나뒹굴고 말았다. 어느 사이엔가 흑마는 칠공(七空)에서 피를 토하며 숨을 거두고 말았다. 청의미청년 또한 얼굴이 밀랍같이 창백하게 변하였다. 그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도리어 살심을 품고 끝내 독수를 쓰려 하자, 마침내 분노 가 폭발한 사검평이 채찍을 통해 칠 성의 대승반야바라신공을 주입시킨 결과였다. 그러니 마상의 인물 따위가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채찍을 잡고 끙끙거리던 중 돌연 불덩이처럼 전해져 온 절세적 암경술법에 걸려 애꿎은 애 마만 죽이게 하였던 것이다. 방심하다가 엄중한 내상을 입기는 하였으나 청의미청년 역시 결코 흔치 않은 무림의 절정 고수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미간을 바짝 모으며 용수철처럼 튀어올랐다. “하찮은 백면서생인 줄 알았는데 제법 뛰어난 절학을 지니고 있었구나. 그러나 네가 감히 나 금검옥랑(金劍玉郞) 냉한추(冷寒秋)를 건드린 것은 스스로 묘혈(墓穴)을 판 격이다.” 한 줄기 금광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그는 어느새 한 자루의 금검을 뽑아 왼손에 꼬나 쥐고 있었다. 정녕 섬전보다 빠른 발검술(拔劍術)이었다. 사검평마저도 그가 검을 뽑은 동작을 자세히 볼 수 없었을 정도였다. 사검평의 차디찬 옥안(玉顔)에 미미한 놀라움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 검을 뽑은 동작의 빠름뿐 아니라 검을 쥐고 선 자세 또한 결코 평범하지 않았기 때문 이다. 눈앞의 청의미청년이 취한 자세. 이는 아무리 보아도 정종검술지학(正宗劍術之學)의 상도(常道)와는 전혀 달랐다. 좌수(左手)를 곧장 뻗었으되 검자루를 앞으로 내밀고 검봉(劍峯)을 가슴으로 향한 기괴한 검식이었다. 이는 마치 자신의 목숨을 끊으려는 듯이 보일 만큼 기괴한 자세였다. 청의미청년의 전신에서는 무서운 살기가 뿜어졌다. 주위를 온통 얼려 버릴 듯 극도의 요기마저 서려 괴이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좌수검법(左手劍法)! 이는 같은 검법을 펼쳐도 그 운용이 전혀 상반되게 전개되는 역(逆)의 검법이었다. 천지가 뒤바뀌고 산해가 엇갈리듯 그 운용의 묘가 감히 헤아릴 수 없어 우수검법만 상대해 보았던 사람들에게는 매우 까다로운 검법임에 틀림없었다. 사검평은 마치 명경지수처럼 미동도 않는 잔잔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다. 그는 눈앞의 상대가 비록 난생처음으로 대하는 기괴한 검법의 자세를 취했음에도 눈썹 하 나 까딱하지 않는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 그는 모발이 곤두설 만큼 싸늘한 냉소마저 흘려 냈다. “흥! 금검옥랑 냉한추, 네놈이 정녕 분수를 모르고 날뛰고 있으니 스스로 황천길을 재촉하 는구나.” 비록 나지막이 말하기는 하였으나 그 음성에는 실로 측량할 수 없이 무한한 진력이 깃들여 있었기 때문에 금검옥랑 냉한추의 귀에는 마치 뇌성벽력처럼 들려 왔다. 그러나 금검옥랑 냉한추 역시 범상한 인물은 아니었다. 짧은 순간, 한 가닥 미미한 놀람의 빛을 떠올렸으나 이내 그 빛을 지우며 안색을 싸늘히 가라앉혔다. “흐흐흐…… 네놈이 비록 일신에 뛰어난 절예를 지닌 듯하지만 금린탈혼검(金鱗奪魂劍)의 칼날을 막을 수는 없을 것! 이제 곧 바닥에 눕게 해주겠다.” 금방이라도 공격을 펼칠 듯 그의 눈빛이 강렬히 빛나고 있을 때였다. 한옆에서 이들의 상황을 주시하던 청의소녀가 문득 관도 쪽으로 시선을 날리더니 초조한 듯 소리쳤다. “냉 사형, 우리는 지금 한시가 급하니 이런 곳에서 우물거릴 시간이 없어요. 만일 소저에 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냉 사형과 소매는 어찌 주인님의 얼굴을 뵙겠어요?” 그 말에 금검옥랑 냉한추의 얼굴이 삽시간에 창백하게 변하였 그는 격분으로 인해 잠시 잊었던 자신의 소임을 떠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금검옥랑 냉한추는 사검평을 날카롭게 쏘아보며 원독에 찬 어조로 말했다. “흥! 오늘 정녕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라. 만일 나에게 시급을 다투는 일이 없었다면 지금 쯤 너는 나의 지극강살혈마오식(地極 煞血魔五式) 아래 황천의 고혼이 되어 있었을 테니 말이다.” 다음 순간, 그는 뽑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섬전같이, 금검을 등뒤의 검집에 꽂았다. 이어서 그는 거품을 문 채 죽어 있는 흑마를 흘깃 바라보더니 행인들의 시선도 아랑곳없이 절정의 경공신법을 펼쳐 달려가기 시작했다. 청의소녀 역시 싸늘한 눈초리로 사검평을 한차례 쏘아본 후, 말고삐를 힘차게 낚아채 바 람같이 그 자리를 떠났다. 사검평은 멀리 사라져 가고 있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노라니 의구심이 뭉게구름처럼 일 어났다. ‘도대체 저들의 신분이 무엇인가? 조금 전 그가 펼치려던 검식은 나에게 치명상을 입히기 는 어려웠을 것이나 분명 강호에서 쉽사리 볼 수 없는 무서운 것이었다. 그렇다면 저들이 말하던 주인이란 대체 누구 일까?’ 이제 두 사람의 모습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보이지 않았 그러나 사검평의 의혹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내가 짐작컨대 그의 실력은 경천검마 조지릉에 비해서도 결코 손색이 없었다. 저렇듯 젊 은 나이에 강호십대고인 중 하나인 조지릉보다 오히려 우위의 절예를 익힐 수 있었다니…… 저들의 주인은 정녕 대단한 인물이리라.’ 이처럼 중얼거리던 사검평의 두 눈에서 돌연 한 줄기 광채가 번쩍 빛났다. “그들이 말하던 소저란 바로 그 마차 속의 누군가를 말함이겠군. 한데 그들은 무슨 이유로 승, 도, 속을 망라한 뭇 군웅들에게 쫓기고 있었던 것일까?” 숱한 의문이 끊이지 않고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이 모든 의혹들은 그가 직접 마차 뒤를 쫓아가 보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사검평은 결심이 선 듯 백마의 배를 가볍게 박찼다. 히히히힝! 백마는 한 줄기 커다란 울부짖음과 함께 두 다리를 번쩍 치켜 들었다. 콰두두두…… 사검평을 태운 백마는 지금껏 그들이 지나왔던 관도를 되돌아 힘차게 질주해 가기 시작했 다. * * * 광야(廣野), 지나다니는 이가 없어 길조차 나 있지 않은 황량한 벌판이었다. 무성한 갈대와 잡초만이 제멋대로 우거져 음산한 귀기만이 드리워졌던 이곳에 언제부터인 가 일진 풍운이 일고 있었다. 우거진 잡초 속에 한 대의 화려한 사두마차가 우뚝 서 있었고, 그 주변을 수십 명의 무림인 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무림인들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듯 핏발이 곤두선 표정이었 또한 무림인들로 둘러싸인 마차 곁에서는 지금 한창 치열한 격전이 불꽃을 튀기고 있었다. 싸움의 당사자는 한 명의 황포노인과 마부석에 앉아 있던 흑의노인이었다. 황포노인이 돌연 앙천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독안마권(獨眼魔拳) 진강(秦剛)! 수십 년 동안이나 모습을 감추고 있더니 오늘 이렇듯 중원무림을 배반하고 한낱 남해문의 어자(馭者`:`마부)로 전락했다니…… 정녕 삼척동자라도 비웃을 일이다!” 황포노인은 싸늘히 비웃는 와중에서도 잠시도 멈추지 않고 연거푸 두 손을 교묘히 운용하 여 질풍노도의 공세를 휩쓸어 갔다. 흑의노인 역시 추호도 피하는 기색 없이 맞받아 치니 대결의 양상은 실로 막상막하였다. 황포노인의 비웃음에 흑의노인은 일성 고함과 함께 무서운 권격(拳擊)을 잇달아 퍼부어 황 포노인을 대여섯 걸음 물러나게 한 후 싸늘히 말했다. “흐흥, 공동(山空山同)의 당나귀야, 네놈의 통천복마장(通天伏魔掌) 따위로는 감히 노부에게 맞설 자격조차 없으니 더 이상 노부를 귀찮게 하지 마라!” 위이잉! 그는 재차 막강한 기세로 권격을 발출해 내며 천둥 같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너 혼자만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으니, 앞서 저승에 가 있는 너의 삼형제가 다시 살아 오 기 전에는 노부 앞에 나설 생각도 말라는 것이다.” 그 말에 황포노인의 얼굴은 분노의 불길에 사로잡혀 달궈진 쇳물처럼 이글거렸다. “닥쳐라! 중원무림의 변절자, 네놈 따위가 무슨 면목으로 아직도 허튼 주둥이를 놀린단 말이냐? 빈도가 비록 넓은 아량으로 너를 용서한다 해도 천하무림의 동도(同道)들이 결코 너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흥! 삼십 년 전의 무적괴걸이 오늘날 이렇듯 치욕스러운 꼬 락서니로 나타나다니, 너는 수치심도 없단 말이냐? 정말 뻔뻔스러운……” 장황하게 떠들어대던 황포노인은 미처 말을 끝맺지 못한 채 갑자기 가슴을 부여잡은 채 비 틀거렸다. “으으…… 네놈이 이, 이런 비열한…… 크윽!” 황포노인은 한 사발이나 되는 검은 피를 토해 내더니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독안마권 진강은 싸늘한 음소를 흘려 냈다. “하하하…… 오공자(蜈蚣子), 이미 노부의 무형마독(無形魔毒)에 격중된 이상 떠벌리지 말고 요양이나 하거라. 만약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한다면 대라금단으로서도 네 한목숨 부지 하기 어려우리라!” 독안마권 진강이라 불렸던 흑의노인, 그의 얼굴은 그 외호(外號)가 말해 주듯 흉험하기 이 루 말할 수 없었다. 하나밖에 없는 눈알은 그나마 핏발이 곤두서서 흉흉히 빛났고, 깊은 검상(劍傷)을 입은 그의 왼쪽 눈은 마치 지렁이가 기어가듯 흉살스러운 모습이었다. 중인들은 갑작스러운 사태의 변화에 놀라움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장중의 형세는 막상막하의 지경이었고 황포노인의 기세 또한 태산이라도 무너뜨릴 듯하였 다. 그러나 독안마권 진강의 무형마독에 그가 맥없이 당해 버렸으니…… 주위의 군웅들은 상상을 절할 정도로 강해진 진강의 신위에 놀라고 있었던 것이다. 독안마권 진강, 그는 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단신으로 강호를 횡행하며 이름을 떨치던 무 림괴걸의 하나였다. 한데, 그는 삼십 년 전 우연히 공동사자(山空山同四子)와 시비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가 공동의 독문절예인 통천검진(通天劍陣)과 대결을 벌였던 일은 당시 강호고수급 인물 치고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때 독안마권 진강은 중상을 입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었다. 하지만 그로 인하여 그의 명성은 더욱 천하를 진동시켰다. 당시 공동파의 통천검진은 무당의 오행검진(五行劍陣), 소림의 백팔나한진(百八羅漢陣)에 비해서도 결코 손색없는 명성을 누리고 있던 중이었다. 한데 진강이 그러한 통천검진과 맞서 능히 백여 초를 견뎌 냈을 뿐 아니라, 목숨마저 살아 남을 수 있었음은 실로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이는 결국 독안마권 진강의 무공이 그만큼 뛰어났다는 명백한 증거여서 그 명성이 한층 높 아졌던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토록 명성을 떨치던 공동파의 통천검진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남해의 한 기인에 의해서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강호인들이 전혀 모르고 있는 사실 한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독안마권 진강이 어찌 삼십 년의 침묵을 깨뜨리고 한낱 마부의 신분으로 전락한 채 나타났는가 하는 의문의 해답이기도 했다. 사실 삼십 년 전, 독안마권 진강은 비록 통천검진에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보존하여 빠져 나올 수는 있었으나 내상이 깊어 생사기로에 놓여졌었다. 그때 홀연히 나타나 그를 구해 준 것이 바로 정체불명의 남해기인이었다. 독안마권 진강은 그 구명지은(救命之恩)에 보답하기 위해서 그 남해기인을 주인으로 섬기게 된 것이다. 하나 지금 그를 둘러싸고 있는 군웅들은 이러한 내막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사두마차를 둘러싸고 있는 군웅들 중에는 오랫동안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구파일방 의 고수들은 물론 사파의 고수들마저 여럿 있었으니, 실로 정사양파(正邪兩派)의 고수들이 망라되었다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독안마권 진강의 놀라운 신기에 감히 누구 하나 섣불리 덤벼들지 못하고 있 었다. 다만 이들 역시 이미 펼쳐 놓은 천라지망만큼은 추호도 거둘 의사가 없다는 듯 촌보도 물 러서지 않았다. 침묵과 함께 무거운 긴장감이 태산처럼 쌍방을 짓눌렀다. 독안마권 진강 역시 선뜻 나설 수는 없었다. 섣불리 싸움을 걸어 군웅들이 일시에 협공이라도 펼쳐 온다면 그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몰아온 사두마차 안의 인물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야 할 소주였기에 그의 내심은 더욱 초조하였다. 그가 초조한 심경으로 독안을 괴이하게 번뜩이며 사방을 훑어보고 있을 때였다. “으하하하…… 스스로 중원무림의 정영(精英)임을 자부하고 있는 그대들이 수치조차 모 르고 떼를 지어 본 문 소저가 타신 마차를 에워싸고 있다니…… 정녕 뜻밖이구려.” 싸늘한 냉소성과 함께 군웅들의 머리 위로 한 마리 비조(飛鳥)인 양 쾌속 무비하게 날아드 는 인영이 있었다. 청의를 입은 미청년, 그는 바로 금검옥랑 냉한추였다. 그가 나타나기 무섭게, 잇따라 요란한 말굽 소리가 지축을 뒤흔들었다. “앗!” 군웅들이 놀라는 사이, 한 필의 흑마가 노도처럼 장중으로 쇄도해 왔다. 흑마 위에는 한 청의소녀가 타고 있었다. 군웅들은 그 서슬 퍼런 기세에 눌려 부지불식간에 길을 내주었. 독안마권 진강은 그들의 출현을 보자 희색이 만면한 표정이 되었다. “하하하…… 비록 약간 늦기는 하였어도 너희들이 기어이 와주었구나! 잘 왔다, 잘 왔어! 노부가 이번에 남해에 돌아가면 필히 너희 사부 금룡마수(金龍魔 ) 금당(金堂) 늙은이에게 말해 너희에게 상을 주도록 하리라.” 그는 정녕 다행스럽다는 표정이었다. “하하하…… 만일 너희들이 조금만 늦게 왔으면 노부는 아마 조바심에 애간장이 녹았을 것이다.” 일순,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군웅들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금룡마수 금당이 대체 누구이기에 그 본인도 아닌 한낱 제자가 나타남으로 해서 군웅들의 표정이 돌변하는 것일까? 2 금검옥랑 냉한추는 군웅들을 싸늘하게 노려본 뒤 진강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하하하…… 진 사숙께서는 별말씀을 다하시는군요. 설혹 소질들이 오지 않았어도 이렇듯 진 사숙이 계시는데 어찌 이들 오합지졸들 따위가 우리 남해문의 앞길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잇따라 그는 주위의 군웅들에게 다시 시선을 돌리며 광폭 무비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핫…… 나의 사부님께서는 한 가지 절학으로 천하무림을 공포에 떨게 하였으니, 과연 지금의 당신들 중 어느 누가 감히 내 사부의 지극강살혈마오식과 대적해 보시겠소?” 너무도 오만방자한 그의 말에 격분한 군웅들 속에서 한 인물이 튀어나오며 소리쳤다. “나 탈명은검(奪命銀劍) 주형(周衡)이 비록 재주는 없으나 감히 삼십 년 전 강호를 휩쓸었 던 남해문에 얼마나 무서운 절학이 있는가 한번 시험해 보기를 원하오.” 기세도 당당히 냉한추의 앞으로 나서는 사십 중반의 인물을 일견한 군웅들은 정파인, 사파 인 할 것 없이 크게 놀라는 표정이었 탈명은검 주형, 전신을 날렵하게 흑의경장으로 갖추었고, 머리에는 칠흑의 영웅건(英雄巾) 을 쓴 품새가 여간 호탕해 보이는 풍모가 아니었다. 더구나 위엄있는 얼굴에 상대를 위압하는 듯한 호목(虎目), 우뚝 솟은 콧날과 한 일 자로 굳게 다문 입술이 일국을 지키는 장수의 용자(勇姿)와 같았다. 그의 등뒤로 비쭉 드러나 하얗게 빛나는 검자루와 더불어, 그의 허리와 가슴 부위에 빽빽 히 꽂혀 있는 십여 개의 신리검(神裡劍)이야말로 대소를 막론하고 강호 모든 표국의 인물들 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강북녹림(江北綠林) 육(六) 개(個) 성(省)의 총두령. 이것이 바로 그의 신분이었던 것이다. 강북 육 성 십팔 로(路)의 수만 명 녹림인들이 모두 그의 휘하인지라 이 정도면 능히 호기 도 부릴 만하리라. 그러나 그가 지금 상대하려는 인물들은 이제까지 상대해 왔던 일반 강호의 표두( 頭)나 관 (官)의 위사(衛士)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수였다. 그는 바로 삼십 년 전 강호를 종횡으로 누비며 무림 전체를 송두리째 초토화시키다시피 한 남해문(南海門)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한데 오랜 세월 동안 강호에 출입을 금하던 구파일방의 고수들은 물론 나머지 정사양파의 일류고수들도 선뜻 나서지 못할 때, 의연히 나서서 남해문의 기세와 대항하려고 하는 자가 바로 이 녹림의 인물이었으니…… 사실 이 자리의 군웅들은 평소 속으로 그들 녹림 인물들을 능멸해 마지않았기에 정녕 의외 의 빛을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 군웅들의 얼굴에는 이내 실망과 함께 심지어 탈명은검 주형에 대하여 한껏 비 웃는 기색마저 역력히 드러났다. 하나, 정작 당사자인 탈명은검 주형은 추호도 위축됨이 없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본인은 남해문의 그대가 중원에는 마치 인물이 없는 듯 함부로 지껄임을 결 코 용납할 수 없소. 비록 나 녹림 출신의 주형이 한낱 무명지배에 지나지 않으나 중원무림 의 한 사람임에는 틀림없는, 즉 내가 그대의 절학을 상대할 것이니 중원에는 이렇듯 당신들과 일전을 겨룰 만한 인물이 있었음을 똑바로 알아야 할 것이오.” 금검옥랑 냉한추는 싸늘히 비웃음이 깃들인 시선으로 주형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 다가, 앙천 광소와 함께 소리쳤다. “하하하…… 좋소, 좋아! 중원에도 아직 그대처럼 기개있는 인물이 남아 있을 줄은 미처 몰랐구려. 하나 실력이 따르지 않는 만용은 곧 죽음이라는 것을 알게 될 거요.” 금검옥랑 냉한추의 야유에 찬 냉소가 울려 퍼지자 탈명은검 주형은 안면 가득 노기를 띠었 다. “본시 길고 짧은 것은 대보아야 아는 일…… 나 탈명은검 주형 또한 스스로 목숨을 상대 에게 희생시킬 만큼 바보는 아니니, 그대 역시 죽을 각오로 임해야 할 것!” 말을 마침과 동시에 탈명은검 주형은 순백의 정광이 번뜩이는 보검을 뽑아 들었다. 은망보검(銀芒寶劍)! 그것은 탈명은검 주형과 더불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격전을 거치면서 그로 하여금 사해에 명성을 떨치게 했던 성명병기(聲名兵器)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왼손에는 여섯 개의 신리검이 쥐여져 있었 일명(一名) 탈명비검(奪命飛劍)이라고도 불리는 그의 또 다른 외호는 신리검에서 연유되었 던 터였다. 정녕 그의 신리검은 천하에서 가장 빠른 암기수법으로 그 명성이 자자했다. 본시 그는 항상 열여덟 개의 신리검을 지니고 다녔으되 단 한 번도 세 개 이상을 써본 적 이 없었다. 하나 이번만은 예외로 그 배인 여섯 개를 뽑아 들었으니, 이것만으로도 그가 이 일전에 얼 마나 신중을 기하는지 능히 알 만하였다. 하나 금검옥랑 냉한추는 그의 이러한 내력 따위는 심중에 두지 않는지 입가에 싸늘한 조소 를 떠올리며 어깨 위로부터 번개같이 검을 뽑아 들었다. 이어 예의 그 기쾌 무비한 좌수기형검식(左手奇形劍式)을 펼치니, 삽시간에 일촉즉발의 위기 감이 고조되었다. 주위의 군웅들도 숨을 죽이고 이들의 대결을 주시하였다. 그러나 이들 중 그 누구도 이 대결에서 탈명은검이 승리하리라고 생각하는 자는 없었다. 그들은 다만 삼십 년 전에 무림을 종횡으로 누볐던 절세검법의 위력을 다시 한 번 그들의 눈으로 지켜볼 생각뿐이었다. 팽팽한 긴장을 깨뜨리는 낭랑한 음성이 터져 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으하하하…… 이번 대결은 아무래도 이쯤에서 그치는 것이 좋겠소. 본 공자가 감히 선 언하건대 이 대결의 승패는 무승부였소.” “누…… 누구인가?” 군웅들은 아연 경악하여 저마다 소리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어느 사이엔가 그들로부터 사오 장 떨어진 곳에 백마를 몰고 온 백의서생이 우뚝 버티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바로 사검평이었다. 그러나 군웅들 중 그 누구도 사검평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조금 전 그와 시비를 벌였던 금검옥랑 냉한추와 그의 사매만이 안색을 굳힌 채 싸늘히 노 려볼 뿐이었다. 금검옥랑 냉한추가 이를 부드득 갈며 말했다. “네놈이 이곳까지 따라왔구나. 흥! 네가 이렇게까지 죽기를 바란다면 소원대로 해주마!” 모발이 곤두서도록 싸늘한 어조였다. 그러나 사검평은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낭랑히 웃었다. “하하하…… 네게 그런 능력이 있다면 얼마든지 죽어 주마. 하지만 그렇지 못할 시에는 네놈의 목이 날아가야 할 것!” 군웅들은 대경 실색하여 일제히 사검평을 응시했다. 대체 이 준미 수려한 백의공자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감히 금룡마수 금당의 전인을 향해 도 전한단 말인가? 그러나 사검평은 경이와 의혹에 가득 찬 주위의 시선 따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유 유히 백마를 몰아 나아가지 않는가? 무형중에 그의 전신으로부터 헤아리기 어려운 위엄이 풍겨 나왔다. “으으……” 그의 태산 같은 분위기에 눌린 중인들은 부지불식간에 신음을 흘리며 길을 터주고 있었다. 사검평이 그들을 스쳐 지나가자 사방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도대체 저 백의공자의 정체가 무엇인가?” “모르겠구려…… 노부가 수십 년 동안 강호를 종횡하였으나 이처럼 상대에게 압도되기는 처음이오.” 독안마권 진강 또한 서서히 다가오는 사검평의 기도에 위축된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독안을 번뜩거리며 사검평을 바라보다가 청의소녀에게 전음을 보냈다. “정(瀞)아야, 대체 저자의 정체가 무엇이냐?” 청의소녀는 약간 긴장된 안색이었다가 이 질문을 받자 즉시 전음수법으로 대답하는 것이었 다. “본시 저희들이 소주의 뒤를 쫓아 하남 관도상을 달리다가 우연히 마주쳤던 자인데, 아무 리 보아도 심상치 않습니다.” 독안마권 진강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 역시 그렇게 보았느냐? 이 진 사숙의 생각도 그렇다.” 마상의 청의소녀, 두말할 것도 없이 그녀 역시 남해문의 문하였다. 그 이름은 금검나찰(金劍羅刹) 난옥정(蘭玉瀞)! 본시 남해문 금검이수 중 하나로 그 실력이 강호 일류고수에 못지않았다. 난옥정은 사검평과 있었던 일을 독안마권 진강에게 간략히 설명하였다. 그녀의 말을 다 들은 독안마권 진강의 안색이 침중히 가라앉았. 사실 그 역시 수십 년 동안 강호의 온갖 풍상을 겪어 왔던 인물이었던지라 결코 예사롭지 않은 직감을 느꼈다. 동시에, 만일 이 자리에서 금검옥랑 냉한추와 사검평이 진짜 대결을 벌인다면 그 결과는 아무래도 자신들에게 불리한 쪽으로 종결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렇게 된다면 마차 안의 소주를 보호해야 할 막중한 책무를 다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지 지 않겠는가? 일순, 독안마권 진강은 신형을 뽑아 올려 금검옥랑 냉한추의 앞을 가로막았다. “냉 사질, 자네는 즉시 검을 거두게.” 냉한추의 움직임을 제지한 그는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다가서고 있는 사검평을 향하여 정중 히 포권의 예를 취했다. “노부가 한마디 묻겠소. 그대가 이 자리에 나타나 굳이 시시비비를 가리려 함은 소협 역 시 본 문의 소주인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오?” 사검평의 입가에 한 줄기 신비로운 미소가 떠올랐다. “이건 뜻밖이구려. 귀하의 뒤에 숨은 저자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온갖 광언(狂言)으로 중 원무림을 매도하지 않았소? 한데 귀하는 이렇듯 겸손하게 나오니 본 공자로서는 그대들의 속셈이 무엇인지 정녕 이해하기 어렵소.” 돌연, 그는 싸늘히 안색을 굳히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귀하의 질문에 본 공자가 분명히 대답해 두겠소. 본시 본 공자는 단순히 일말의 호기심만 으로 이 자리에 끼여들었던 것이오. 그러나 저자가 이미 본 공자의 위엄을 범한 이상 결코 호기심만으로는 좌시하지 않을 것이오. 이미 본 공자가 공언한 대로 그대 뒤에 있는 철부지 애송이 금검옥랑 냉한추는 기필코 오늘 이곳에서 그의 목숨을 바쳐야 할 것이오.” 그 최후의 한마디야말로 너무도 싸늘하여 심장까지 얼어붙는 듯했다. 독안마권 진강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였다. 그때 금검옥랑 냉한추가 앞으로 나서며 일갈했다. “진 사숙께서는 더 이상 저자와 쓸데없는 입씨름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저자가 어떻게 소질의 지극강살혈마오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기필코 시험해 보아야겠습니다.” 사실 금검옥랑 냉한추는 진강의 제지로 마지못해 분노를 삭이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듣자 하니, 사검평이 자신을 마치 도마 위에 올려놓은 생선쯤으로 생각하지 않는 가? 마침내 그의 분노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활화산처럼 폭발하였던 것이다. 그의 부르짖음은 청량한 벌판의 야색을 쩌렁쩌렁 뒤흔들었다. 주위의 군웅들 역시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백의공자가 대체 누구이기에 감히 남해문의 고수들 앞에서 이토록 안하무인 의 방자한 언동을 취하는가? 그들 역시 파란만장한 강호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몸인지라 거의 본능적으로 이 백의공자의 내력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그때, 장중에는 지극히 어색한 입장의 장본인이 있었다. 그는 바로 조금 전까지 금검옥랑 냉한추와 더불어 생사를 건 일전(一戰)을 벌이려던 탈명 은검 주형이었다. 그는 예기치 않은 급변한 상황으로 인해 정녕 어정쩡한 상태였. 그러나 그 또한 수백 차례의 악전고투를 거듭했던 끝에야 지금의 녹림 맹주의 자리를 차지 한 인물이 아닌가? 이런 관록(貫祿)이 그를 결코 사리판단에 어둡게 할 리는 없었 사실, 의분을 이기지 못해 감연히 떨치고 나왔으나 이 일전에서 승리를 보장할 수는 없었 다. 자칫 황천의 고혼이 될지도 모를 판국에 의외의 인물이 나섰으니, 이것이야말로 하늘의 도 우심이 아니고 무엇이랴! 다만 그는 스스로의 강호 위명에 흠을 내지 않고 적당히 물러설 수 있다면 그것이 최선의 길이었다. 하여 기회만을 찾고 있는 그의 귓전에 사검평의 낭랑한 음성이 들려 왔다. “탈명은검 주형, 그대는 비록 강호인들이 천시하는 녹림도상(綠林道上)의 인물이라 하 나…… 스스로 협의지사를 자처하는 자들보다 오히려 떳떳하였소. 그대가 비록 남해문의 고 수 금검옥랑 냉한추보다는 약간 떨어지는 실력을 지녔다 해도 이는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 니니, 그 의기(義氣)가 능히 중원무림을 떨쳐 울릴 만했소.” 사검평의 말에 마차를 둘러싸고 있던 군웅들의 표정은 일제히 급변하고 말았다. 그들은 정곡을 찌르는 사검평의 말에 일면 부끄러움을 느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일 개 녹림인물을 부추겨 자신들을 비웃는 그의 언동에서 정녕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던 것 이다. 군웅들 틈에서 한 인영이 용수철처럼 튀어나왔다. 그는 일신에 황색 가사를 걸친 칠순 가량의 노승이었다. 노승은 앞으로 나서기 무섭게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소시주는 대체 누구이기에 감히 그러한 망발로써 이 자리의 뭇 군웅대협들 을 모욕하는가?” 사검평의 시선이 느릿하게 노승에게로 돌아갔다. “대사의 법명(法名)이 무엇이오?” 황색 가사의 노승이 서릿발 같은 위엄을 발하며 침중하게 외쳤 “빈승은 소림사 계시원(戒施院) 주지(住持)로서, 법명은 오인(悟忍)이라 하오.” 오인대사는 한차례 사검평을 훑어보고 나서 다시 한마디 덧붙였다. “빈승이 충고하건대 만일 소시주께서 한마디 허언(虛言)으로 군웅들을 희롱한 이유를 밝 히지 않는다면, 소시주는 필경 이 자리에 모인 뭇 군웅들의 광분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오.” 그러나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사검평은 칼날보다 예리한 두 줄기 안광을 뿜어 내 었다. 그는 폐부를 꿰뚫을 듯한 시선으로 노승을 주시하며 차갑게 한마디 던졌다. “흥! 그 누가 감히 나 염라서생 사검평의 말에 불만이 있는지 어디 한번 직접 나서 보시 오.” 순간, 주위에는 때아닌 북풍한설이 휘몰아치며 싸늘한 한기와 함께 감싸듯 깊은 적막이 내 리덮였다. 염라서생 사검평! 이 자리의 군중들 중 대다수는 이미 그 이름을 들어 알고 있었 며칠 사이에 홀연 강호 천지를 뒤흔들어 놓은 백년래의 대위 군웅들의 간담을 얼려 버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 누가 감히 이 이름 앞에서 전율하는 공포를 느끼지 않으랴! 그 앞에 서서 날카로운 어조로 힐책하던 오인대사는 안색을 창백히 가라앉히며 나직하게 불 호를 외웠다. “아미타불……그렇다면 시주가 바로 진전에서 팔괘신도로부터 불영옥패를 취한 후, 이내 사라졌던 염라서생이란 말이오?” 그 말에 사검평은 입가에 한 줄기 신비로운 미소를 떠올렸다. “대사도 역시 본 공자가 지니고 있는 불영옥패가 탐나시오?” 그 말에 오인대사의 얼굴이 핼쑥하게 변하였다. “아미타불…… 빈승은 본시 불문의 제자인데 어찌 그런 욕심을…… 빈승에게는 추호도 그 런 마음이 없소.” 그때 독안마권 진강이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 젖혔다. “으하하하…… 오인대사! 당신의 말은 실로 우습기 짝이 없구려. 만일 당신이 그토록 욕심 없는 인물이었다면 어찌하여 본 문의 마차를 뒤쫓아오셨소?” 빈정거림이 역력한 그의 말에 오인대사의 얼굴에 노기가 치솟았다. “아미타불…… 진 시주! 빈승이 그대들 남해문의 마차를 뒤쫓은 것은 분명 사실이오. 하나 그대는 알아 두시오. 그 목적은 강호의 평화를 도모하려 함이었지 결코 사사로운 욕심 때문이 아니었소.” “흥! 구차한 변명!” 독안마권 진강은 싸늘히 비웃었으나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오인대사의 말을 비웃는 기색이 너무도 역력했다. 그때, 이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사검평이 돌연 탈명은검 주형을 바라보며 무한한 위엄이 깃들인 어조로 말했다. “탈명은검 주형, 그대는 본인과 어떤 관계인지 알지 못하는가?” 갑작스러운 사검평의 질문에 탈명은검 주형은 적이 당황한 표정이었다. 사검평의 말이 이어졌다. “백년 전 좌도방문(左道傍門)의 인물들은 스스로 본인의 사부님께 충성을 맹세하고 염라궁을 세웠었다. 이제 나 염라서생이 사부님의 유일한 의발전인으로서, 또한 염라궁 제 이대(第二代) 궁주로서 강호에 나왔으니 그대는 본 궁주에게 어떻게 대해야 옳겠는가?” 탈명은검 주형은 마치 정수리에서부터 냉수를 뒤집어쓴 것처럼 부르르 전율했다. 이어 그는 더 이상 망설일 것도 없이 즉시 그 자리에 엎드려 세 번 절하며 크게 외쳤다. “수하 탈명은검 주형이 삼가 염라궁주님을 뵙습니다. 이로써 수하는 물론 수하 휘하의 강 북 육 개 성의 형제들 모두는 죽는 날까지 궁주님께 영원토록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 다.” 그의 우렁찬 외침이 야색을 뒤흔들자 군웅들의 얼굴에는 격동과 우려의 기색이 번갈아 명 멸하였다. 마침내 그토록 우려하던 일이 현실로 나타나는가? 마도가 창궐하여 천하무림이 암운(暗雲)으로 뒤덮이는 조짐을 역력히 느꼈던 것이다. 그들의 우려를 아는지 모르는지, 사검평의 낭랑한 외침이 다시 터져 나왔다. “탈명은검 주형, 이제부터 그대를 본 궁 강북 분타주에 임명하노라! 추후 본 궁이 강호에 정식으로 출범할 때 본좌는 가장 먼저 충성을 맹세했던 대가로 그대에게 몇 가지의 신공절예를 전수해 줄 것이다. 그때까지 그대는 본 궁의 명예를 실추시킬 어떠한 행동도 해 서는 안 될 것이다.” 탈명은검 주형은 감격해 마지않았다. “하해(河海)와 같으신 은혜, 수하는 죽음으로써 보은하오리다.” 사검평은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는 망연자실하여 우두커니 서 있는 오인대사를 바라보았다. “대사, 조금 전 당신은 남해문의 마차를 뒤쫓았음이 결코 사리사욕 때문이 아니라고 하였소. 그렇다면 여기에서 그 이유를 떳떳이 밝혀 보시오.” 그 말에 오인대사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염라천존의 후인으로 인하여 근래 비교적 조용하던 강호에 다시 겁란 이 불어닥칠 일을 생각하고 적이 심란하던 차였다. 한데, 사검평이 돌연 물으니 격동되는 심정을 가누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는 이내 마음을 진정하고 침중히 대꾸하였다. “그 이유를 밝히기 전에 먼저 전제해야 할 얘기가 있소. 그것은 바로 삼십 년 전 강호를 뒤흔들어 놓았던 한 절세기인에 관해서요. 또한 이 일은 시주의 사부이신 염라천존과도 관 련이 있소. 물론 강호인이라면 그 누구라도 알고 있는 일이오만 그 아무도 결코 빈승만큼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오.” 이 말에 사검평은 뇌리를 스치는 한 가지 생각이 있었다. 그가 주천혜에게서 들었던 천외삼성(天外三聖)이 문득 떠올랐던 것이다. 사검평의 두 눈에서 형형한 광채가 쏟아졌다. “대사, 당신이 말하려는 삼십 년 전의 기인이란 혹시 남해천룡(南海天龍)이 아니오?” 오인대사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검평은 눈빛을 더욱 형형히 빛내며 재촉하듯 물었다. “어서 말씀해 주시오.” 그러자 오인대사가 침중히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第 十三 章 남해천무기서(南海天武奇書) 1 삼십 년 전, 오랫동안 평온하던 강호에 실로 경천동지의 대사건이 터진 적이 있었다. 그것은 정녕 헤아릴 수 없는 심후한 무공을 지닌 한 절세고수의 출현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 남해문(南海門)의 주인임을 자처하는 청년기협 남해천룡(南海天龍)이었다. 그가 모습을 나타내는 곳마다 충격적인 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 사건 사건마다 모두 강호를 발칵 뒤집어 놓았으니, 그는 정녕 넓고도 넓은 대강남북(大 江南北)을 종횡으로 휩쓸고 다녔다. 그가 강호에 출도한 지 불과 한 달도 안 되어 제압당한 강호의 고수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 도였다. 그때만 해도 강호 정세가 지극히 평온하던 중이었는지라 이렇듯 질풍처럼 천하를 휩쓰는 그와 능히 어깨를 견줄 만한 자가 없었다. 당금 무림의 십대고인으로 추앙받는 인물들마저 삼십 년 전 그 당시에는 지극히 미미한 존 재였다. 단 무영마개 유단만큼은 그 당시에도 크게 두각을 나타내었으나 그조차도 남해천룡에게는 필적하지 못했다. 남해천룡의 위세가 이렇듯 기세 등등하였으니 그 피해 또한 막심하였다. 당시 구파일방을 제외하고 가장 세력을 떨치고 있던 사대세가의 주인들까지도 남해천룡의 도전에 맞섰으되 모두 오 초를 버티지 못하고 무참히 패배하였다. 그들 중에는 당대제일의 검술명가(劍術名家)로 지칭되던 벽혈궁의 전대궁주(前代宮主)인 벽혈검왕(壁血劍王) 유대우(劉大宇)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그는 남해천룡에 의해 세 개의 손가락을 잘려 다시는 검을 쥘 수 없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그가 후손에게 남긴 유언은 결단코 남해문에 대한 원한을 잊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사대세가마저 휩쓸어 버린 남해천룡의 기세 앞에서 구파일방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마치 진가를 자랑하던 아홉 개의 구슬이 차례로 깨어지듯, 그들마저 차례로 패배의 쓰라림 을 맛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먼저 무당파…… 당시만 하여도 그들은 스스로가 천하검장(天下劍掌)의 정종(正宗)이라고 자처하던 터였다. 그러나 남해천룡 앞에서는 진정 속수무책이었다. 먼저 그들이 자랑하던 해검파(解劍派)의 해검암이 산산조각났고 이어 무당오로(武當五老) 가 펼쳤던 오행검진 또한 여지없이 파해당했으니, 그 비참한 심경은 마치 무당파 최후의 날을 맞은 듯하였다. 이어 화산(華山), 아미(峨嵋), 곤륜(崑崙) 등도 예외없이 무너졌. 특히 그 중에서도 가장 막심한 피해를 입었던 것은 공동파였.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 공동파에서는 남해천룡을 맞아 강호에서 사용이 금지되었던 암독절기 오독추풍노(五毒 追風怒)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이에 남해천룡은 크게 살심을 일으켜 장문인 잔오자(殘蜈子)를 비롯하여 공동파의 유명고수 대부분이 포함된 백여 명의 제자를 무참히 살육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은 정녕 오백 년 공동파에 있어 일찍이 없던 비운의 참상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강호에서 그 세력을 자랑하던 공동파였건만 그로 인해 하루아침에 쇠락 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달마조사 이래 숭산 소실봉에 자리한 지 천년. 숱한 명승고사를 배출하여 무학의 본산으로 서도 천년을 하루같이 일관했던 소림사 또한 일세의 절세기협 남해천룡 앞에서는 결코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기둥 하나, 기왓장 하나에도 천년의 고색 창연한 숨결이 깃들여 있거늘…… 무림천년사(武林千年史)에 그렇게도 창연히 빛나던 소림사 대웅전은 송두리째 불타 버렸고, 천하의 그 누구도 깰 수 없다던 백팔나한대진(百八羅漢大陣)마저 삼십 초를 넘기지 못하고 남해천룡에게 궤멸되고 말았으니…… 정녕 천년 이래 일찍이 없었던 통한의 비운이었다. 이 같은 일련의 사태는 염라천존의 준동으로 인해 입었던 피해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물론 염라천존에게 희생된 강호고수들의 숫자가 적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는 천하의 모든 문파를 차례로 궤멸시키려 하지는 않았었다. 한데 남해천룡은 천하 각 문파를 돌아다니며 차례로 붕괴시켰으니, 그의 이러한 행동은 천하무림을 완전히 멸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절세기학을 과시하려는 것인지 그 의 도마저 분명치 않았다. 당시 그에게는 언제나 그림자처럼 뒤를 따르는 두 명의 수하가 있었다. 금룡마수 금당과 혈영신로(血影神老) 송영걸(宋英傑)이 그들이었는데, 그들의 일신무학 또한 비범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하여 그들마저도 강호에서 상대할 수 있는 인물이 없을 정도였 정녕 천하에 적수가 없는 절륜의 남해문 무학, 그것은 지극강살혈마오식을 비롯하여 혈영 귀무(血影鬼霧), 마환신공(魔幻神功) 등이었다. 이 지고무상의 절예는 정녕코 강호인들의 넋을 빼앗고도 남음이 있었다. 강호 무림인들도 필사의 반격을 시도했다. 그 주도적 인물이 당시 소림파의 장문인이었던 혜공대사(慧空大師)였다. 그는 이들 남해문의 삼(三) 인(人)에게 대항코자 천하의 모든 유명고수들을 초청하여 숭산 소실봉에서 비밀 성회를 열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 목적이 남해문에 대항코자 하는 것이었던만큼 그 자리의 군웅들은 이 문제를 놓고 장시간 숙의했다. 그 결과, 무림맹주를 선출하여 그를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남해문의 횡포에서 무림을 구하 고자 결론짓게 되었다. 그러나 어찌 알았는지, 이 비밀 성회에 남해천룡 일행이 나타났던 것이다. 성회에 모였던 모든 군웅들은 경악해 마지않았다. 남해천룡은 모든 군웅들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듯 오만한 언동으로 이렇게 선언하였다. “중원(中原)의 무학(武學)이 천하무공(天下武功)의 정종(正宗)이라 칭하던 시대는 이미 지 나갔다. 명문대파(名門大派)를 자처하던 천하무림의 각파들은 오래 전에 전래(傳來)의 사문절예(師門絶藝)를 잃어버려, 남아 있는 것이라곤 화권수퇴(花拳繡退)의 잡기(雜技)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반하여 나 남해천룡은 이미 천하무 학을 집대성하여 만류귀일(萬流歸一)의 대업(大業)을 이루었으니 어찌 남해일문(南海一門)만이 천하무문(天下武門)의 정종(正宗)이라 칭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어서 그는 품에서 두툼한 양피지로 된 한 권의 비급을 꺼내었다. <남해천무기서(南海天武奇書)> 남해천룡, 그는 이 비급을 오만스레 군웅들 앞에 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이 한 권의 기서 안에는 정녕 천하무학의 온갖 정수(精粹)가 기재되어 있도다. 누구라도 이 기서를 얻어 그 십 분의 일만 성취한다 하더라도 능히 천하 일류를 자처할 수 있다. 나아가 만약 그 반을 얻게 된다면 기필코 천하를 눈 아래로 굽어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만일 이 자리의 그 누구라도 본 문주의 오 초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이 기서를 얻을 수 있음은 물론 남해문이 다시는 중원을 범치 않 겠노라 맹세하겠다.” 그 오만무례한 말에 그 자리의 모든 사람들이 치욕감에 몸을 떨었다. 그러나 감히 그 누구도 선뜻 나서지는 못했다. 사실 그 자리에는 이미 강호에서 은거한 지 오래였던 전대(前代)의 고인(高人)들마저 상당 수 참석했던 터였다. 그러나 비록 그들이라도 남해천룡의 오 초는커녕 삼 초를 대하기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러니 어느 누가 선뜻 나서랴! 길고 긴 침묵이 흘렀다. 정녕 이때 이 순간처럼 길고도 지루했던 시간은 일찍이 없었 아무도 나서지 않자 남해천룡은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하…… 이제 중원무림에서 더 이상 나를 앞지를 인물은 없구나. 그렇다면 그대 들은 이제 나 남해천룡을 천하무림의 유일무이한 무학대종사(武學大宗師)로 추앙해야 마땅 하리라.” 일순, 주위는 찬물을 끼얹은 듯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침묵에 잠겼다. 사실 그 자리의 어느 누구도 남해천룡의 말에 결코 승복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선뜻 나서는 이 또한 없었다. 치욕과 능멸의 자조감 속에 무거운 침묵만이 흐를 때였다. 소림장문인 혜공대사가 목숨을 버릴 각오로 나서며 말했다. “좋소. 남해의 무공이 천하를 굽어볼 정도임은 인정하겠소. 그러나 천하제일이라 단정 지을 수는 없소.” 남해천룡은 극도로 자존심이 상했는지 싸늘한 어조로 응대했 “늙은 중, 그 말에 책임을 지고 증명할 수 있다면 모르거니와 만에 하나…… 전혀 사실무 근이라면 이 자리의 모든 군웅들은 하나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실로 서슬 퍼른 일갈에 그 자리의 모든 군웅들이 경악하였다. 그들이야말로 남해천룡의 이 한마디가 공연한 엄포가 아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 이었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곳 소실봉을 시산혈해로 뒤덮는 것쯤은 결코 어려운 일도 아니었 다. 그러나 혜공대사는 의외로 낯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의연히 말했다. “빈승 혜공이 감히 목숨을 걸고 말하겠소.” 격동하는 심경에 비하여 그의 어조는 지극히 차분했다. “물론 당금 강호에서 그대 남해천룡과 대적할 만한 고인이 없다는 사실은 빈승도 인정하 오. 하나, 무림의 천년 역사 중 수많은 기인이사들이 배출되었거늘, 그대가 어찌 그분들보다 낫다고 단정 지을 수 있겠소? 하여 빈승이 단언하건대 지금까지 강호 동도들에 게 존경받았던 수많은 기인들 중 그 어느 한 분이라도 그대보다 뒤떨어진다고는 생각할 수 없소.” 혜공대사는 결연한 어조로 말을 이어 갔다. “이백 년 전, 서역의 법화존자로부터 강호를 구했던 천룡자(天龍子)는 비록 천하인에 의해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으로 추앙받았으나 그 스스로는 단 한 번도 강하다 자부하지 않았었소. 우내쌍성(宇內雙聖)으로 추앙받던 황산신니와 적양신군 또한 남해문에 못지않은 성취를 이루었건만 그들 역시 단 한 번도 그대같이 오만하지는 않았소.” 청죽(靑竹)은 북풍한설 눈보라 앞에 처하여서도 결코 그 푸른 기개를 잃는 법이 없다더 니…… 무림천년의 태산북두 소림장문인 또한 강호 무림의 청죽 같은 위세를 잃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칠십여 년 전 강호를 뒤흔들었던 염라천존도 그대와는 비할 수 없을 정도이고, 비 록 단 한 번도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일성 금음(琴音)으로 단숨에 염라궁을 궤멸시켰던 천공금성 또한 절대 그대 남해천룡보다 약하지 않았소. 결론을 말하건대, 만일 빈승이 이제까지 열거했던 중원의 기인이사 중 단 한 명이라도 출현한다면 남해문은 결코 무림에서 독보할 수 없으리라 확신하는 바이외다.” 가슴속에 응어리 진 울분을 다 풀어 냈다는 듯, 혜공대사는 죽음을 각오한 채 가만히 남해 천룡을 바라보았다. 남해천룡의 얼굴은 극도의 분노로 인하여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에게서 뿜어지는 무서운 살기와 태산처럼 짓누르는 긴장감으로 인해 군웅들은 마치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죄수의 심정이 되었다. 한데 남해천룡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천지가 무너져라 앙천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이윽고 웃음을 멈춘 그는 싸늘히 한기가 감도는 시선으로 거만하게 사방을 훑어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소. 본 문주는 나의 선언을 취소하고 앞으로 오십 년을 기다리겠소. 그 이유는, 만일 내 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대들을 주살한다면 후대의 인물들이 나를 가리켜 그대들의 입이 두 려워 한낱 살인멸구(殺人滅口)의 수단을 취했다고 할 것이기 때문이오. 하지만 조금 전 소림 장문인이 열거했던 전대기인(前代奇人) 중의 누구이거나, 혹 그 전인 중 누구라도 강호에 모습을 드러낸다면 본 문주는 구태여 오십 년의 약속에 얽매이지 않고 다시 중원으로 돌아올 것이오. 그때 과연 그들이 지닌 바 일신절학이 본 문 주를 능가할 수 있을지 보겠소.” 장중에는 기침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오직 야욕에 불타는 남해천룡의 싸늘한 어조만이 장강의 격랑처럼 굽이칠 따름이었다. “그 결과, 만일 그들이 소림장문인의 말과는 달리 일고의 가치도 없는 실력을 지녔거나 또는 앞으로 오십 년래에 그들이 영영 나타나지 않는다면 본 남해문은 일거에 강호에 다시 나타나 천하무문의 정종일문(正宗一門)으로서 만천하에 군림할 것이 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두려움에 찬 군웅들의 시선을 등뒤로 받으며 유유히 모습을 감추 었다. 그러나 그가 사라지고 나서도 얼마 동안 군웅들은 두려움에서 깨어날 줄 몰랐다. 남해천룡이 남긴 선언 때문이었다. 만일 오십 년 동안 그들 전대이인이나 전인이 영영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후의 결과는 명 약관화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들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들의 절예가 남해천룡과 능히 대결할 정도가 되지 못한 다면 그 결과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 장중의 모든 군웅들은 낙담하여 심연처럼 깊은 절망에 사로잡혔다. 그 후 하루하루가 덧없이 지나가, 어느덧 세월이 흘러 삼십 년이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강호에 한 대의 신비로운 사두마차(四頭馬車)가 출현하였다. 더불어 누구의 입에서 나왔는지는 모르되 모든 이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한 가지 풍문이 떠 돌았다. ─`사두마차의 안에는 남해문주의 금지옥엽 무남독녀 외동딸이 타고 있으며, 만일 그녀를 사로잡을 수 있다면 능히 남해문주로부터 천하무적의 남해천무기서를 얻어 낼 수 있으리라. 남해천무기서(南海天武奇書)! 그 누가 익혀도 능히 천하를 굽어볼 수 있다고 하는 탐욕의 대상이 아니겠는가! 일순간에 온 강호가 들끓었다. 그리고 뜻있는 자는 모조리 외쳤다. ─`사두마차를 쫓아라! 그 안의 소녀를 사로잡는 자, 천하의 기서를 얻어 천하제일의 보좌를 차지하리라! 마치 지진이 강타한 듯 강호를 뒤흔든 이 한마디는 삽시간에 강호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하여 한 대의 사두마차를 탈취키 위해 피 어린 사투가 벌어지게 된 것이었다. 마차가 처음으로 발견된 것은 파양호( 陽湖) 인근이었는데, 불과 하루 사이에 그 뒤를 쫓는 군웅들이 서로 저마다 죽고 죽이는 사투를 벌여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마차는 오히려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차 뒤를 쫓던 정사양파의 고수들은 이래서는 안 되겠다 생각하였다. 이심전심으로 일종의 묵계가 성립되었고, 그들은 더 이상의 충돌을 자제하며 마차 뒤를 쫓 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사두마차로서는 마침내 최후의 절박한 상황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소림사 계시원 주지 오인대사는 말을 마치고 긴 한숨을 내쉬었. 삼십 년 전의 그 무서운 예언이 되살아난 때문일까? 그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어둡고 무거웠다. 그러나 웬일인지 사검평은 이 모든 얘기를 듣고도 얼굴에 한 점의 감정도 비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냉막한 어조로 엄중히 물었다. “대사의 조금 전 설명으로 이 사두마차에 얽힌 내력은 자세히 알았소. 한데, 대사는 조금 전 내게 이 사두마차를 뒤쫓은 이유가 결코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서가 아니라고 했소. 그렇 다면 남해문의 소녀를 뒤쫓는 진정한 까닭은 무엇이오?” 오인대사의 얼굴에 미묘한 빛이 엇갈렸다. “어찌 불문제자로서 세속의 욕념 따위에 연연하겠소이까? 단지 빈승은 이 일이 잘못 처리 될 경우 남해문이 다시 강호에 침입하는 구실이 되지 않을까 크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 소.” “그렇다면 대사께서는 남해문의 소녀를 군웅들로부터 지켜 주려 했다는 것이오?” 오인대사는 크게 얼굴을 붉혔다. “솔직히 말해서 그렇지는 않소…… 다만 우리 구파일방의 인물들은 남해문의 소녀를 보호 하여 만에 하나라도 이 일로 인하여 발생될지 모를 피해를 미연에 방지코자 했을 뿐이오.” 사검평은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걸었다. “대사의 말은 아주 재미있구려. 겉으로는 솔직한 것 같으면서도 정작 그 뒤에는 번지르르 한 거짓말뿐이니, 누가 그런 말을 섣불리 믿을 수 있겠소?” 사검평의 이 말은 노골적으로 오인대사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오인대사는 격양된 음성으로 단호히 말했다. “분명히 말하건대 이 자리의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빈승을 비롯한 구파일방의 고수들은 맹 세코 일말의 사심도 없었소! 우리의 진정한 목적은 이 사두마차에 타고 있는 소녀를 이용해 남해천룡의 선언을 거두게 하려는 일념(一念)뿐이오. 그대의 의심처럼 남해천무기서를 취하려는 비루한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소.” 그 말을 들은 사검평은 앙천 대소를 터뜨렸다. “으핫핫핫……” 청량한 벌판 위에 그의 거칠 것 없는 광소가 멀리까지 메아리쳤다. 이에 오인대사는 그가 자신을 비웃는 줄 알고 만면 가득 분노의 빛을 떠올렸다. 동시에 입을 열어 무어라 항변하려 하는데, 사검평이 이내 웃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싸늘한 시선으로 군웅들을 쓸어보며 냉혹히 말하였 “좋소. 대사의 진심이 그렇다면 나는 더 이상 그 말을 의심하지 않겠소. 하나, 당신들은 남 해문의 소녀를 더 이상 쫓을 필요가 없소. 분명히 경고하건대, 만일 본 공자의 이 말을 거역 하고 또다시 이 마차 뒤를 쫓는 자가 있다면 그가 누구이건 간에 본 공자의 흡혈마도를 받 아 내야 할 거요.” 오인대사는 창황(蒼惶)히 안색을 굳히며 다급히 말했다. “시주께서는 중원무림을 배반할 생각이오?” 사검평은 다시금 앙천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본 공자가 이미 강호에 모습을 드러낸 이상 모든 일에 책임을 질 것이오. 그대들은 추호도 괘념치 마시오. 만일 남해천룡이 또다시 강호를 넘보려 든다면 나 염라서 생의 흡혈마도가 맹세코 그의 목숨을 거두고 말 것이오.” 실로 결의에 차 가슴 섬뜩하도록 냉연한 어조였다. 그 말에 주위의 군웅들은 물론 오인대사 또한 움찔하였다. 비록 호언장담일망정 그렇게만 되면 오죽 좋으랴! 그러나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들은 모두 반신반의하였다. 비록 눈앞의 백의서생이 염라천존의 진전을 물려받은 장본인이라 하나 아직 약관도 되지 않은 일개 소년일 뿐이었다. 그런 그가 삼십 년 전 무림을 추풍낙엽처럼 휩쓸던 남해천룡에게 대적해 과연 이길 수 있을 까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그때 한 줄기 창노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네가 감히 본 문의 문주에게 도전하다니,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놈이로구 나!” 지금까지 묵묵히 좌시하고만 있던 금검옥랑 냉한추가 가소롭다는 듯 싸늘하게 비웃는 것이 었다. 순간, 사검평의 얼굴에 한 줄기 싸늘한 미소가 감돌았다. “금검옥랑, 너는 곧 자신이 왜 이토록 죽음을 자초했던가를 뼈저리게 깨닫게 될 것이 다.” 사검평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은 보퉁이를 슬쩍 건드리자 칠흑같은 칼자루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찰나, 금검옥랑 냉한추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었던 경이로운 느낌에 사 로잡혔다. 죽음! 그 무섭고도 두려운 공포가 전율과 함께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약해진 자신의 마음을 애써 누르듯 광폭하게 웃었다. “으하하하핫…… 좋다, 좋아! 본 공자 역시 백년 전 천하를 공포 속에 휘몰아넣었다는 염라천존의 절학이 과연 어떤 것인가 똑똑히 이 두 눈으로 보아야겠다.” 그는 이내 한 자루의 절세신검을 틀어쥐고는 좌수기형의 괴이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그의 주위로 싸늘한 한기가 어렸다. 그때 독안마권 진강은 사검평의 기세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리고 금검옥랑 냉한추를 제 지하려 하였다. 한데 한 줄기 전음이 나직이 그의 귓가로 전해져 오지 않는가? “진강, 그대는 그들의 대결을 제지치 마라.” 진강의 안색이 핼쑥하게 변하며 무어라 말하려는데 전음이 다시 전해 왔다. “나 또한 백년 전 강호를 위진시켰던 염라천존의 절기가 도대체 얼마나 뛰어난 것인가 이 기회에 똑똑히 보아 두고 싶다.” 그 전음은 마차에 타고 있는 남해문의 소주가 보내 온 것이었 독안마권 진강은 즉시 그 본의를 알아차렸다. 그것은 그녀가 이 대결을 직접 눈으로 봄으로써, 장차 벌어질 남해문과 염라서생의 일전 에 대비코자 한다는 생각이었다. 진강은 이 대결이 시작되면 금검옥랑이 결코 사검평의 손에서 살아날 수 없으리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결국 진강은 냉한추의 죽음을 뻔히 눈앞에 두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냉한추…… 내 명색이 사숙으로서 네 죽음을 눈앞에서 보아야 하니 대체 이 일을 어찌 하랴!’ 그때, 금검옥랑 냉한추의 귀에도 역시 마차 안의 신비소녀로부터 한 줄기 전음이 날아들고 있었다. “냉한추, 그대는 지극강살혈마오식 중의 일식과 오식을 이용하여 한판 모험을 벌인다면 이 일전에서 승리를 쟁취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그 말에 냉한추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치 목말라 애태우다가 한 모금 달디단 감로가 적셔지는 기분이었다. 사실 그는 심중으로 매우 두려워하던 중이었다. 비록 일순간의 분노를 이기지 못해 일전을 벌이기로 하였지만, 자신의 절학으로는 사검평 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의 위신과 사문의 명예를 생각하여 진퇴양난에 처해 있던 중이었다. 한데 이때 마침 태산처럼 믿고 있던 소주가 나직이 전음을 보내 왔으니 어찌 더 이상 두 려워하겠는가? 그는 꺼져 가던 불꽃이 다시 타오르듯 맹렬한 투혼에 사로잡혔다. 금검옥랑 냉한추가 이렇듯 천지신명처럼 소주를 믿는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 본시 그녀는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이를 데 없이 뛰어난 지혜의 소유자여서, 그 슬기롭기 가 천인(天人)에 달할 정도였다. 소문으로는, 지혜에 있어서만은 오히려 그 부친인 남해천룡마저도 능가한다는 것이었다. 금검옥랑 냉한추는 용기 백배하여 서서히 사검평의 앞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사검평은 무섭게 굳었던 상대가 돌연 안색을 바꾸어 한 줄기 야릇한 미소를 머금으며 자 신에게 다가오자 적이 의아하였다. 그는 무엇인가를 느낀 듯 힐끔 마차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이내 눈길을 거두고 서서히 우수를 들어 칼자루 위에 얹었다. 순간, 그의 전신으로부터 소름 끼치는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적대 관계의 당사자인 금검옥랑 냉한추는 물론 주위의 다른 군웅들까지도 몸서리를 칠 만 큼 짙은 살기였다. 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2 먼저 움직인 것은 금검옥랑 냉한추였다. 그는 왼손을 섬전같이 앞으로 뻗어 내는 듯싶더니 갑자기 앞으로 향하였던 검자루를 뒤집어 검광도 눈부신 금린탈혼검을 기묘하게 반전(反轉)시켰다. 좌수검법(左手劍法) 특유의 예기치 못할 변화가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금린탈혼검의 그 날카로운 검날은 숨돌릴 사이도 없이 정반(正反)의 변초를 일으키며 눈부 신 검광과 함께 질풍노도처럼 덮쳐 가는 것이었다. 실로 빛살보다 빠른 쾌검 일초였다. 한데 사검평은 추호도 피할 생각을 않는 것이었다. 그는 여전히 한 필의 백설 같은 마상에 올라앉은 채 다만 조용히 상대를 주시하고 있을 뿐 이었다. 마침내 금검옥랑 냉한추의 일검이 사검평의 숨통을 관통하려는 찰나였다. 냉한추는 들어갈 때보다 오히려 더욱 빠르게 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닌가? 순간, 마상에 앉아 있던 사검평의 신형이 번뜩 허공으로 치솟아올랐다. 동시에 금검옥랑을 향하여 번개처럼 쏘아 가지 않는가? 그때, 나는 듯 뒤로 물러서던 금검옥랑 냉한추도 갑자기 걸음을 멈추며 재차 공격을 시도 하였다. 자신을 향해 쏘아져 오는 사검평을 노리고 한 줄기 눈부신 금빛 광망을 폭사시킨 것이었 다. “아뿔싸!” 주위의 군웅들은 부지불식간에 경악성을 토해 냈다. 그들이 관전하는 바로는, 사검평이 너무도 무모한 공격을 시도하다가 그만 금검옥랑의 눈 부신 쾌검살초에 의하여 목숨을 잃게 생긴 상황이었다. 한데 금검옥랑의 검극이 몸을 꿰뚫을 듯하는 순간, 사검평의 신형이 마치 봄날의 아지랑 이인 양 돌연 사라지는 것이었다. 쉬익! 그토록 빠르고 예리하며 기세당당하던 금린탈혼검은 헛되이 허공을 갈랐을 뿐이었다. 금검옥랑 냉한추가 안색을 흙빛으로 물들이며 검을 거두려 할 때였다. 우웅! 붉디붉은 적환(赤環)이 눈앞에서 갑자기 피어나지 않는가! “헉!” 다급성을 내뱉는 금검옥랑 냉한추의 몸 전체를 적환이 감싸는 듯하더니 핏물이 소나기인 양 거세게 쏟아졌다. 진동하는 피 냄새, 일시에 전신의 기혈이 모조리 거꾸로 치솟는 듯한 압박감…… 냉한추 는 눈앞이 캄캄하였다. 마치 죽음의 세계가 목전에 임박한 듯, 헤아릴 길 없는 절망감만이 엄습해 오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결코 이대로 헛되이 죽을 수는 없는 일. 그는 동귀어진(同歸於盡)할 결심으로 숨통을 죄듯 날아오는 도기(刀氣)를 구태여 피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일검 방비조차 하지 않은 채 전신을 상대의 공격에 드러내 놓고 오직 자신의 전공력을 수중의 금린탈혼검에 주입시켰다. 다음 순간, 그는 지극강살혈마오식 중에서도 최강의 초식인 쇄혼파천무(碎魂破天舞)를 펼쳐 내었다. 순간, 빠지직! 천지가 무너지듯 날카로운 굉음이 작렬하더니, 금검옥랑 냉한추의 애검(愛劍) 금린탈혼검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며 촌각의 여유도 없이 붉은 도망의 한곳을 향해 폭사되어 갔다. 수천 개에 달하는 금속 조각이 마치 폭포수처럼 변하여 눈부시게 휘몰아쳐 간 것이었다. 파파팟! 폭죽이 터지듯 붉은 도막(刀幕)으로부터 숱한 불똥이 튀었다. 찰나, 금검옥랑 냉한추의 일신 주위를 뒤덮고 있던 붉은 도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대신 냉한추의 시야에는 사검평의 자태가 선명히 드러났다. 냉한추의 입가에는 한 줄기 득의의 미소가 떠올랐다. 사검평은 마치 핏물처럼 시뻘건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그가 서서히 쓰러져 가고 있는 모습이 냉한추의 시선에 들어왔. 분명 자신의 공세에 의해 피를 뿌리며 죽어 가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내가 이겼다!’ 이런 외침이 강렬히 터져 나왔다. 한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의 외침은 오직 입 안에서만 맴돌았을 뿐, 결코 소리가 되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순간, 냉한추는 마치 안개 속으로 떨어진 듯 시야가 자욱이 흐려짐을 느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몸이 천길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극심한 고통이 폐부를 찌르듯 그의 온몸을 감쌌다. 한데 기묘하게도 그는 고통의 절정인 순간에 이르러 잠시나마 맑은 정신을 되찾을 수 있 었다. 그로 인해 냉한추는 비록 짧은 순간이었으나 눈앞의 현실을 똑바로 인식할 수 있었다. 피를 뿌리며 서서히 쓰러져 가던 사검평의 모습은 단지 환상에 불과하였다. 정작 현실의 그는 이미 흡혈마도마저 거두고 한 점 동요의 빛도 없이 차가운 시선으로 자 신을 노려보고 있지 않는가? 그의 눈길, 그의 자태는 분수를 헤아리지 못하고 죽음을 향해 몸을 던졌던 자신의 어리석 음을 비웃는 듯하였다. 그는 도대체 이 모든 사실들을 믿을 수도, 인정할 수도 없었다. ‘나는 죽을 수 없어. 왜 내가 죽어야 하는가? 소주는 나에게 분명히 말하지 않았던가? 이 일전에서 나는 기필코 승리를 얻으리라고…… 한데 내가 왜 죽어야 하는가? 안 돼, 나는 죽을 수 없어. 죽을 수 없어. 죽을 수 없어……!’ 그러나 그의 너무도 안타까운 삶에의 갈구는 이미 때가 늦은 뒤였다. 그의 전신 십여 개의 요혈에 깊이 박힌 금린탈혼검의 편린들이 살고 싶은 그의 욕망을 빼 앗아 갔던 것이다. 그의 회심에 찼던 최후의 일초 쇄혼파천무는 사검평의 도법, 멸정이 이루어 낸 도막을 뚫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반탄지력에 의해 금속 파편이 모조리 튕겨져 나와 거꾸로 냉한추 의 전신 요혈로 파고들었던 것이다. 사검평은 최후의 순간에 흡혈마도를 거두어들여 냉한추가 단숨에 숨통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였다. 하나 이것은 사실 냉한추가 펼친 쇄혼파천무의 위력이 그만큼 강하기도 하였던 때문이었 다. 만일 쇄혼파천무에 의해 멸정의 기세가 조금이나마 약화되지 않았다면 사검평이 제아무 리 멸정을 거두어들이려 하였더라도 결코 뜻대로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금검옥랑 냉한추는 서서히 죽어 갔고 사검평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의 모습을 바라 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염라천존의 절학은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군요.” 옥반에 구슬이 구르듯 청아하고도 낭랑한 옥음이 들려 왔다. 사검평은 옥음이 들려 온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바로 한 대의 사두마차였다. 그때 굳게 닫혔던 마차 문이 사르르 열렸다. 이어 길게 드리워져 있던 주렴이 헤쳐지며 안개 속에서 피어나는 한 송이 꽃봉오리인 듯 모습을 나타내는 자의(紫衣)의 궁장미소녀(宮裝美少女)가 있었다. 천상선녀(天上仙女)의 하강인가…… 그 눈부신 자태가 실로 보는 이의 눈을 황홀케 했다. 나이 십칠팔 세로 보이는 그녀는 입고 있는 자의궁장과 백옥 같은 피부빛이 실로 신비로 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흑단 같은 머리는 물결처럼 굽이쳤고, 그 머리 왼편에는 비취로 만든, 금방이라도 살아 움 직일 듯한 칠채호접(七彩胡蝶)이 사뿐 앉아 있었다. 더불어 학처럼 희고 매끈한 목덜미에는 은색 영롱한 목걸이가 빛을 뿜었고, 넓은 소맷자 락 아래 드러난 희고 가는 손목에는 백옥의 보석이 휘감겨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휘영청 늘씬한 키에 느슨히 맨 허리는 한줌도 안 될 듯했고, 때마침 부는 산들바람에 자 의궁장이 휘날려 쭉 뻗은 그녀의 각선미를 짐작케 했다. 아아, 정녕 그 아름다움을 무엇으로 표현하랴! 진정 인간의 몸으로 빚어 낼 수 있는 조화의 극치였고 아름다움의 절정이었다. 사검평은 잠시 넋을 잃은 듯했다.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그의 코끝을 스쳤다. 그때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린 사검평은 스스로를 엄하게 책망했다. ‘내 이 무슨 꼴인가? 한낱 여인의 미모에 현혹되어 이토록 넋이 빠져 있었다니…… 더구 나 그녀는 중원무림을 지배하려는 남해천룡의 딸이 아닌가? 만일 그녀가 나에게 살심(殺心)을 품었고 일신에 절학을 지녔다면 지금쯤 나는 황천의 고혼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즉시 자의궁장소녀로부터 시선을 옮겨 머나먼 창공을 응시했다. 이 모습은 눈앞의 자의궁장소녀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듯 보였다. 이때, 자의궁장소녀의 출현에 넋을 잃었던 것은 비단 사검평뿐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중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자의궁장소녀의 관심은 오직 사검평에게만 있었다. 그녀는 사검평이 자신을 무시하는 양 시선을 허공에 두고 아예 쳐다보지도 않자 자존심이 뭉개지는 느낌이었다. 순간, 그녀의 안색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사실, 처음 사검평이 자신을 향해 꿰뚫는 듯한 뜨거운 시선을 보내자 그녀 또한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었다. 백설처럼 흰 백의장포에 위풍도 당당한 자태, 봉황의 눈을 방불케 하는 성목(星目)으로부 터 쏟아지는 안광이며 높은 콧날과 꽉 다문 입술…… 정녕 절세기재의 천품이 너무도 뚜렷하게 드러나는 용모였다. 자의궁장소녀는 이제까지 자신이 보아 오던 그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검평의 장부다 운 용모에 마음이 끌리고 말았던 것이다. 한데 사검평이 갑자기 자신을 외면해 버렸으니…… 그러나 그녀 또한 무림의 일대 기화(奇花)였다. 심중으로 무슨 생각을 했음인지 그녀의 얼굴에서 싸늘한 기색이 사라지며 활짝 피는 꽃인 양 화사한 미소가 떠오르지 않는가! “호호호…… 신화로만 듣던 백년 전의 절세고인, 염라천존의 절학마저 견식하게 되었으니, 비로소 중원으로 나들이한 보람을 찾을 수 있었군요!” 마치 수천 수만의 매화 꽃송이가 눈앞에서 활짝 피어났다가 사라지는 듯한 그녀의 음성에 군웅들은 정녕 황홀경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자의궁장소녀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나 한 가지 유감스러운 점은, 염라천존의 절학이 그 위력에 있어 결코 소문에 미치 지 못했다는 점이에요. 만일 사 공자께서 소녀의 부친과 대결하게 된다면 조금 전의 일초로는 결코 부친의 옷깃 하나 스치지 못할 것이라 장담해요.” 그 말에 허공으로 향했던 사검평의 얼굴이 핼쑥하게 변하였다. 이어 그의 입에서는 일말의 감정도 없듯 억양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결과가 어찌 되든 소생은 기어이 그대의 부친과 맞서 일전을 벌여야 할 것이오. 그 승부는 오직 하늘만이 알 터. 설혹 소생이 목숨을 잃는다 할지라도 결코 후회는 없을 것이오. 패배는 나의 실력이 모자란 탓임을 알기 때문이오. 하지만 소생은 확신할 수 있소. 내가 스스로 목숨을 버릴 각오로 싸우는 한 천하의 그 누구라 할지라도 흡혈마도의 일초를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오.” 억양없는 어조였기에 그의 말은 한층 괴기로운 분위기를 풍기며 황량한 벌판 위에 메아리 쳤다. 그러나 자의궁장소녀는 입가에 한 줄기 신비로운 미소를 떠올렸다. “소녀가 그 점을 인정한다 해도 사 공자 역시 조금 전에 저질렀던 큰 실수 한 가지를 시 인해야 할 거예요.” 사검평은 일순 흠칫하였다. 그녀는 꿰뚫을 듯 쏘는 눈초리로 그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소녀는 조금 전 공자께서 전개했던 일초를 머릿속에 빠짐없이 기억해 놓았어요. 짧은 시일 내에 그 일초의 허점을 찾아 내어 다시는 그 살인도식을 사용할 수 없는 무용지물로 만들고야 말겠어요.” 사검평은 예의 냉막한 표정으로 침중히 물었다. “소저의 그러한 심중의 의향을 구태여 내게 말해 주심은 무슨 까닭이오?” 일순, 자의궁장소녀의 얼굴에 미묘한 표정이 어리었다. “소녀는 어떠한 경우라도 절대 불공평한 대결은 원하지 않아요.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훗 날 소녀와 다시 만나게 된다면 반드시 공자를 격패시키고 말 것입니다. 소녀의 생각이 이럴진대 나중에 공자께서 영문도 모르는 채 패한다면 소녀가 사술(詐術) 따위로 승 리했다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 우수경(宇水鏡)은 남해문의 작은 주인으로서 그런 오해 따위는 결코 바라지 않습니다.” 사검평도 필경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었다. 그러나 쉽사리 납득하기 어려운 것도 진심이었다. 자신도 이 일초를 익히는 데 일 년이란 세월을 보내야 했거늘, 우수경은 단 한 번 보고 그 파해식을 창안해 내겠다고 호언장담하고 있으니, 과연 그럴 수 있을지 의문이 가는 것이었다. 하나, 그녀의 말이 만에 하나라도 사실로 나타난다면 이제까지 천하무적이라 믿었던 멸정은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앞으로 맞서야 할 남해천룡과의 대결에서는 과연 어떤 절학을 익혀야 승리를 쟁 취할 수 있단 말인가? 우수경이 던진 이 한마디는 사검평의 가슴에 실로 크나큰 파문을 일으켰다. 마치 태산고봉처럼 요지부동인 것 같은 그의 얼굴에 격동의 표정이 나타나며 그의 마음 또 한 뒤흔들려 갈등 속으로 휘말렸다. 이때, 주위의 군웅들도 우수경이 던진 한마디에 가슴이 철렁하였다. 그들은 일제히 전율해 마지않았다. 만약 진실로 그녀의 말대로라면 염라서생의 출현은 남해천룡에게 중원으로 되돌아올 명분 만 제공하는 셈이었다. 만약 남해천룡이 다시금 중원으로 돌아와 염라서생을 격패시킨다면…… 그 결과는 정녕 상상만 하여도 몸서리쳐지는 것이었다. 오인대사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시주, 중원무림의 이름으로 충고하겠소! 그대는 여하한 일이 있어도 절대 남해문의 딸을 이대로 놓아 주면 안 되오!” 동시에 옆에 서 있던 탈명은검 주형도 강경한 어투로 간했다. “오인대사의 말은 사태를 정확히 꿰뚫은 것입니다. 궁주님께서는 절대로 그녀를 놓아 주 어서는 안 됩니다.” 나머지 군웅들도 비록 입을 벌려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들 두 명의 마음과 추호도 다를 바 없는 눈빛이었다. 장중에 있던 모든 군웅은 물론, 남해문의 인물들마저도 일제히 사검평을 주시했다. 한동안 굳게 닫혀져 있던 사검평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우 소저, 본인은 이 자리에서 결코 그대에게 손을 쓰지 않겠소. 다만 우리 두 사람이 다시 만날 때, 지금의 장담대로 소생의 멸정 일초를 완벽하게 와해시킬 수 있기 바라오. 만일 그때, 소저가 지금의 장담을 현실로 보여 준다면 소생의 운(運)이 다하였다 체념하고 스스로 담담히 죽음을 맞을 것이오. 하나 오늘의 이 호언이 한낱 호언으로서만 그치고 만다면 남해 일문은 강호무림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 것이오.”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탈명은검 주형과 오인대사가 황급히 외쳤다. “궁주, 안 됩니다. 화근은 자라기 전에 뿌리뽑아야 합니다.” “시주!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시오. 오늘의 이 결정이 훗날 과연 어떤 참화를 불러올 것이 지……” 그러나 사검평의 태도는 요지부동이었다. “본인은 한번 내린 결정을 번복할 의사가 없소.” 탈명은검 주형은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속하는 궁주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그는 두려움에 찬 어조로 복명하고 말았다. 그러나 오인대사는 달랐다. “비록 시주가 그녀를 놓아 준다 해도 그녀는 절대 중원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오! 애당초 빈승 등은 그녀를 사로잡아 남해천룡으로부터 두 번 다시 중원무림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 아 낼 생각이었소. 한데 이제 와서 그 계획을 포기할 수는 없소. 또한 빈승은 이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서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 을 것이오.” 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 사검평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사의 그 말은 사태를 전혀 잘못 판단했기 때문이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고수들 중, 본인을 제외하고 우 소저의 적수가 될 만한 자는 결코 없으리라 장담할 수 있소.” 이어 그는 예의 형형한 안광으로 군웅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우 소저가 짐짓 이제까지 당신들의 추격에 쫓긴 듯이 행동하였으나, 알고 보면 내심으로 당신들을 조롱했던 것이 분명하오.” 장중의 군웅들은 그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때였다. “호호호…… 공자의 그 말은 소녀를 너무도 모독하는군요. 소녀는 맹세코 중원의 영웅들 을 비웃고자 하는 뜻은 없었어요. 다만 삼십 년 전 부친의 전철을 다시 되풀이하기 싫었을 뿐이에요. 다시 말 해, 결국 피를 흘려 가며 길을 뚫으려 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 말에 군웅들은 비로소 사검평의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우수경의 자신에 찬 언동은 남해문의 모든 절학을 이미 이어받았음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사검평은 철판이라도 꿰뚫을 듯한 강렬한 시선으로 우수경을 쏘아보았다. “우 소저에게 엄중히 경고하겠소! 만약 오늘 이후 남해문의 제자가 두 번 다시 중원무 림에 나타나 제멋대로 휘젓고 다닌다면 나의 흡혈마도가 용서치 않을 것이오. 물론 그대도 포함해서 말이오!” 일순, 우수경의 아름다운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였다. 그녀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뭔가 말하려 할 때, 지금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독안마권 진강 이 분노에 찬 일성을 토해 냈다. “염라서생, 보아하니 너는 너무 자만심이 지나쳐 물불을 가리지 못하고 날뛰는구나! 네가 감히 본 문의 소주에게 이렇듯 오만 무례하게 대하다니…… 네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 노부 가 시험해 보리라!” 그 말에 사검평이 차갑게 대꾸했다. “독안마권 진강, 아직까지 목이 붙어 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알라! 이후 한마디라도 더 헛소리를 지껄인다면 다시는 세치 혀를 놀릴 수 없게 해주겠다.” 순간, 독안마권 진강의 얼굴이 검붉게 변했다. 이어 그가 뭔가 대꾸하려 하는데, 그를 제지하듯 우수경의 낭랑한 일성이 먼저 흘러나왔 다. 이어 그녀는 주위의 군웅들과 사검평을 향하여 우아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그 동안 본의 아니게 폐를 끼쳐 미안했어요. 하지만 이번 소녀의 강호 출도는 결코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평소부터 흠모해 마지않던 중원의 풍모를 직접 보고 싶어 유람길에 나섰던 것뿐입니다. 한데 소녀의 본의와는 달리 이렇듯 폐를 끼쳤으니 거듭 사과드리겠어요.” 말을 마치자 그녀는 우아한 자태로 다시 마차에 올라탔다. 금검나찰 난옥정 또한 최후를 마친 금검옥랑 냉한추의 시체를 자신의 흑마 위에 실은 후, 소름 끼치도록 살기 띤 눈초리로 사검평을 쏘아보았다. 이윽고 그들 일행은 표연히 그 자리를 떠났다. 군웅들은 멀리 사라져 가는 남해문 일행의 모습을 언제까지나 착잡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의 모습이 까마득히 멀어지자, 군웅들의 시선은 다시 사검평에게로 모아졌다. 그들의 눈에 비친 사검평의 모습은 태산과도 같았다. 염라천존의 전인일 뿐더러, 이백 년간이나 실전되어 오던 적양신군의 유학마저 이은 유일한 계승자. 그야말로 명실상부, 일신에 천하무림의 장래를 짊어진 젊은 영웅이 아닌가? 다만 그를 보는 눈에 우려하는 그늘이 스치는 것은 군웅들의 마음속에 혈세마두로 자리잡 고 있는 염라천존의 무게 때문이었 염라천존을 끔찍한 살인광으로 알고 있는 그들로서는 사검평이 사부의 길을 되풀이할까 걱 정하는 것이었다. 하나 지금의 무림에 있어서 그 누가 염라서생 사검평을 대신할 수 있겠는가? 오직 그만이 남해천룡과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무림의 구성(救星)이었다. 그때, 사검평이 오인대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사, 본인은 강호의 장래를 의논키 위하여 근일 중으로 소림사를 방문할 생각이오!” “아미타불…… 본 사의 장문인을 위시하여 일천(一千) 제자가 진심으로 기다리고 있겠소이 다.” 그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사검평의 신형이 번뜩하더니 어느 사이엔가 백마 위에 올라타 있었다. 이어 그는 소리 높여 외쳤다. “탈명은검 주형, 너는 즉시 본좌의 뒤를 따르라!”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남해문 일행이 사라졌던 방향과 정반대로 질풍과 같이 달려갔다. 이에 탈명은검 주형도 소리 높여 대답했다. “속하는 삼가 궁주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는 마상에 높이 앉아 우렁차게 외쳤다. “금일 이후 강북녹림 육 개 성은 염라궁의 강북 분타가 될 것이다. 궁주의 분부가 계셨으 니 속히 마상에 올라 뒤를 따르라!” 장중에 있던 십수명의 녹림인들은 탈명은검 주형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일제히 마상에 올라 환호했다. “와아!” 다음 순간, 그들은 일제히 지축을 박차며 사검평을 뒤쫓아 질풍과 같이 사라졌다. 황량한 벌판 위에 말굽 소리의 여운만이 짙게 남았다. 장중에 남은 군웅들의 안색은 침중히 가라앉았다. 아직도 귓전에 울리는 녹림 수하들의 함성 소리! 그것이야말로 백년 전의 염라궁이 다시 이 땅위에 재출현하는 예고성이 아니겠는가? 염라천존과 염라궁에 대해 공포스럽게만 알고 있는 그들로서는 걱정하는 것이 당연했다. 무심한 바람이 불어와 황량한 벌판을 휩쓸고 지나갔다. 第 十四 章 천면환영인(千面幻影人) 1 하남(河南)으로부터 북으로 뻗은 관도. 작열하던 태양도 황혼과 함께 저물어 대지(大地)는 짙은 어둠에 잠긴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토록 숨막힐 듯하던 열기도 식고 야적 속에서 이따금 불어오는 미풍이 더할 나위 없이 청량한 느낌이었다. 명월화성(明月華星)! 달은 밝고 별빛은 화려하여라! 문자 그대로, 하늘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수많은 성진(星辰)이 마치 수놓은 듯 은빛으로 빛 나고 있었다. 이미 인적이 끊겨 사위는 깊은 적막에 잠긴 채 오직 풀벌레 소리만이 간간이 밤의 야적을 휘저을 뿐이었다. 그때 아스라이 지축을 울리는 말굽 소리가 들려 왔다. 이윽고 월하(月下)의 관도를 따라 한 필의 기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눈부시도록 흰 백마 위에 역시 산뜻이 백의장포를 차려입은 청년서생, 그는 바로 사검평이 었다. 백마와 백의의 기수. 달빛이 그 위에 어리니 이는 실로 한 폭의 그림인 듯 운치있는 정경이었다. 그는 남해문 일행을 돌려보낸 후 탈명은검 주형과 더불어 얼마쯤 가서 그에게 한 가지 명 (命)을 내렸다. 자신은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니 탈명은검 주형을 비롯한 수하들은 왕년의 염라궁이 있던 태악산(太岳山)으로 가서 주형의 책임하에 궁을 재건하라는 것이었다. 주형은 그 길로 즉시 떠났고, 사검평은 일로(一路) 북경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이때, 사검평은 타고 있는 백마가 달리는 대로 내버려둔 채 호젓한 경관에 취하여 어느덧 감상 어린 생각이 되었다. 그는 문득 중천(中天)에 뜬 명월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한 수 시구를 읊조리게 되 었다. 오늘날의 사람은 옛적의 달을 보지 못하였으나 달은 옛사람을 다 보았으리` 예나 지금이나 인생은 흐르는 물과 같고 명월을 보는 마음 또한 한결같아라…… 今人不見古時月 今月胃經照古人 古人今人苦流水 共看明月如此皆 달리는 말 위에 몸을 실은 채, 눈부신 백삼(白衫)을 부드러운 밤바람에 휘날리면서 아련히 중천의 달을 바라보니…… 그의 두 눈이 별도 달도 빨아들일 듯 신비로운 광채로 빛났다. 더불어 월광에 비치는 그 수려한 용모야말로 아무리 정절이 깊은 여인이라도 한번 대하면 마음이 흔들릴 정도였다. 하나 한가롭고 고아한 그의 겉모습과는 달리, 내심은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천 갈래 만 갈 래 뒤엉키고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무공을 익히고자 했던 이유가 어디에 있었던가? 이는 오직 장군산에서 실종된 그의 형, 사진평을 위한 복수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는 사부의 커다란 기대를 짊어지게 되었다. 그것이야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그가 강호에 모습을 나타내기 무섭게 실로 생각지도 않던 수많은 사건들에 부딪히고 말았다. 먼저 주천혜를 만나 부지불식간에 천마문의 혈안에 휘말리게 되었고, 그로 인해 역시 생 각지도 않았던 불영옥패를 얻었다. 그런데 돌연 주천혜는 기연을 얻어 어디론가 사라졌고, 또한 이제는 남해문의 일에까지 연루되었다. 그러한 모든 일들이야말로 그가 강호에 나오기 전까지는 전혀 상관도 없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모든 일들에 직면하여 처신했던 자신의 행동이 결코 사명(師命)에 크게 위배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비록 방법이야 다르고 길이야 틀릴망정 이 모든 일들도 결국은 무림의 평화를 위한 것이었 고,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억조 창생을 구제하는 일이 아니던가. 어쨌든 지금 그의 마음을 무엇보다 괴롭히는 문제는 형, 사진평에 관한 문제였다. 지금 이 길 역시 북경으로 뻗은 길이었으니, 이윽고 그곳에 당도하여 부모님을 만났을 때 그분들은 필시 가장 먼저 형의 행방을 물으리라! 하나 자신과 형은 분명 함께 장군산으로 갔었으되, 형은 행방불명이고 자신은 살아 돌아왔 다. 그러니 두 분 부모님께 무엇이라 대답할 것인가? 순간, 사검평의 뇌리에 떠오른 한 인물이 있었다. 내심 장군산의 혈겁을 일으킨 흉수로서 단정한 바 있던 천독마수 우문관이었다. 그를 생각하자 사검평은 갑자기 치솟는 살기를 억누르기 어려웠다. “천독마수, 만일 진정으로 그자가 장군산 혈겁의 흉수임에 틀림없다면 반드시 처절한 보 복을 받고야 말리라!” 그는 이를 악물고 이처럼 무시무시하게 중얼거렸다. 사실 그는 장군산에서 벌어졌던 혈안을 생각할 때마다 당장이라도 묘강으로 달려가 복수 의 철퇴를 내리고 싶었다. 그러나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장군산 혈안의 복수는 언제라도 가능한 것이었다. 하나, 남해문의 일이나 불영옥패에 얽힌 음모는 시각을 다투어 해결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이는 실로 강호 전체의 안위가 좌우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일은 사문의 은혜에 보답하여 사조의 숙원을 이루어 성사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도 생각했다. 비록 사부, 염라천존 이원패는 천하마도의 뭇 고수들을 감화시키려다 불행히도 천운이 닿지 않아 실패하고, 그나마 천공금성 사마등으로 인해 낭패를 면치 못했으나, 자신은 기필코 미구에 불어 닥칠 무서운 혈겁으로부터 강호를 구하고야 말 리라 굳게 결심했다. 만일 자신의 뜻마저 실패하고 만다면 사조께서는 필경 지하에서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사검평의 두 눈에서 갑자기 무서운 광염이 폭사되었다. “비록 이 일이 나에게 뼈를 깎고 살을 찢는 고통을 강요할지라도 나는 기필코 성사시키 고야 말리라!”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비장한 각오야말로 천공의 달빛마저 잠시 흐려지게 했을 정도였 다. 돌연 그는 허리에 차고 있던 흡혈마도를 끌러 내어 그것을 감싸고 있는 천을 헤쳐 멀찌감 치 던져 버렸다. 그리고는 하늘을 우러러 크게 소리쳤다. “이제는 흡혈마도를 감출 이유가 없다. 나 염라서생 사검평은 염라천존의 전인임을 떳떳 이 자부하며 결연히 천하를 구할 것이로다!” 달빛이 화답하듯 잠시 구름 속에 잠겼던 자태를 밝고 환하게 드러내었다. 차앗! 모든 미망을 떨쳐 버리기라도 하듯 그의 입으로부터 한 줄기 장소가 터져 나왔다. 순간, 백마는 나는 듯 질주하여 멀리 월하의 관도 위로 아득히 사라져 갔다. * * * 삼라만상이 모두 깊은 잠에 들었다. 오직 고요한 정적만이 감돌 뿐, 이따금씩 자지러지게 울리는 풀벌레 소리가 간간이 야적 을 휘젓는 유일한 밤의 소리였다. 교교한 월색이 대지에 어려 인자한 손길인 듯 쓰다듬고 있었다. 돌연, 야적을 송두리째 뒤흔들며 심야를 질주하는 말굽 소리가 거칠게 울려 퍼졌다. 그것은 마치 태산이라도 붕괴되는 듯 요란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야심한 시각도 아랑곳없이 미친 듯 질주하는 한 필의 백마. 마상의 기수는 백의장포의 서생이었으니, 필경 그는 사검평임에 틀림없었다. 사검평, 그는 심중에 차 오르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여 이처럼 미친 듯 말을 몰아 질주 하는 중이었다. 말굽에서 피어오르는 먼지가 마치 안개인 양 자욱했다. 한데 사검평의 두 소매가 기묘히 휘둘려졌다 싶은 순간, 그는 급작스럽게 말고삐를 낚아 챘다. 휘이잉! 백마는 너무도 빨리 달리던 중이었음으로 이 갑작스러운 제지에 미처 따르지 못했다. 앞발을 높이 쳐들고 하늘을 향하여 길게 울부짖었다. 백마가 어렵게 멈추어 서자, 사검평은 소매를 떨치며 갑자기 말등을 박찼다. 팟! 마치 한 덩어리의 불기둥이 쾌속히 쏘아져 야공(夜空)을 가르듯 그는 곧장 허공으로 솟구 쳤다. 이어 표연히 지면 위에 내려선 그는 예리한 시선으로 사방을 훑어보며 낮게 외쳤다. “어느 고인이시기에 나 염라서생의 길을 막으시오?” 그의 음성은 비록 낮았으나 천둥벽력처럼 우렁우렁하게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는 자는 없었다. 사방은 오직 교교하여 적막만이 흐를 뿐이었다. 순간, “흥!” 사검평은 한 줄기 냉소를 터뜨렸다. 동시에 좌우의 소매를 가볍게 휘저었다. 찰나, 그의 소매 끝으로부터 십여 개의 푸른 광채가 쏘아져 나오더니 파초잎처럼 크게 확 대되며 우측 방향을 휩쓸어 갔다. 한데, 쏘아져 나가던 푸른 광망이 허공에 헛되이 무산되는 것이 아닌가! “흑!” 사검평은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사실, 조금 전 그는 미친 듯 질주하던 와중에 마상의 자신을 향하여 소리없이 날아오던 십여 개의 암경(眼勁)을 느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대승반야바라신공 중의 흡자결(吸字訣)을 끌어올려 몸을 보호했다. 그러자 그를 향해 쏘아져 오던 암기는 오히려 거꾸로 튕겨 나갔던 것이다. 그를 향해 쏘아져 온 암기는 알고 본즉 별것도 아닌 풀잎이었다. 이에 사검평은 경악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더구나 조금 전 자신을 향해 날아왔던 풀잎에는 그가 강호에 나온 이래 단 한 번도 대해 본 적이 없는 무서운 내가진력이 깃들여 있었던 것이다. 사검평은 이곳 어딘가에 그가 지금껏 상대했던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고인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사문의 절예 육합천이공(六合千耳功)을 펼쳐 상대가 어디에 있는가 찾아보았다. 자신으로부터 오른쪽 삼 장쯤에서 미세한 기척이 느껴졌다. 해서 사검평은 회심의 미소를 날리며 일초 공세를 가했던 것이다. 한데 그것은 한낱 물거품처럼 무산되었지 않는가? 이 같은 일련의 상황은 모두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때문에 사검평은 더욱 고조되는 긴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실로 전신의 모발이 있는 대로 곤두설 만큼 그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여전히 쥐죽은듯이 괴괴하던 적막을 뚫고 나직한 웃음 소리가 들려 온 것은 그때였다. “후후후훗!” 동시에 사검평의 앞에는 한 명의 황포노인(黃袍老人)이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내었다. 노인의 풍모는 신비롭기 이를 데 없었다. 부리부리한 눈에 날카롭게 선 콧날, 꽉 다문 입술에 새하얀 미염이 기묘한 조화를 이루어 진정 선풍도골의 자태였다.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으로 잠시 움찔했던 사검평은 이내 안색을 싸늘히 굳히며 나지막이 말했다. “노인장께서는 일면식도 없는 소생에게 무슨 이유로 암습을 가하셨소?” 그의 질문은 너무도 차가워 준열(峻烈)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황포노인은 태연 자약, 여전히 입가의 미소를 잃지 않으며 대답했다. “하하하…… 노여워 말게. 노부는 단지 소협의 실력을 시험해 보고 싶었을 뿐 결코 악의 (惡意)는 없었다네.” 사검평은 검미를 잔뜩 찌푸렸다. “대체 노인장은 뉘신데 소생을 시험하려 하셨소?” 황포노인은 신비로운 미소와 함께 의미 모를 소리를 주욱 늘어놓기 시작했다. “천지간에 가득 찬 것이 본시 실(實)인가, 허(虛)인가? 그러나 그 모두가 무(無)이고 환 (幻)이니 진(眞)은 결국 아(我)뿐이라!” 순간 사검평의 뇌리를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천면환영인(千面幻影人)!”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노인이 가가 대소했다. “하하하! 단숨에 노부의 정체를 알아 내는 것을 보니 과연 염라천존의 전인으로서 손색이 없군.” 노인은 사검평을 똑바로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노부는 자네에게 한 가지 경고를 해주기 위해 왔을 뿐이니, 너무 경계할 필요는 없네.” 사검평은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말했다. “말씀하시오.” 천면환영인은 얼굴색을 바꾸며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소협이 지닌 일신절학은 이미 강호에 그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더군. 하지만 자네를 노리 는 암중의 화살은 자네의 무공 실력만으로 피하기 어려울지도 모르네. 정면으로 날아오는 화살은 피하기 쉬워 도 어둠 속에서 불쑥 솟아나오는 화살은 피하기 어려운 법이니까 말일세. 당금 강호에 커다 란 음모가 태동 중이라는 사실은 소협도 이미 알고 있을 줄 아네. 그 음모의 주관자는 이미 소협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며 제거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네. 한 데 자네는 아무것도 모른 채 강호를 활보하니 어찌 걱정이 되지 않겠는가?” 천면환영인의 말에 사검평은 내심 놀라고 있었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은 채 담담한 어조 로 물었다. “대협께선 소생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어찌 그리 잘 알고 계시며, 그런 충고를 해주시는 진정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천면환영인은 여전히 미소 지은 얼굴로 말했다. “지금 당장 밝힐 수는 없으나 노부와 소협은 깊은 인연을 지닌 사이일세. 또한 노부는 소협이 진전에서 불영옥패를 얻었을 때부터 암중으로 뒤를 쫓았던지라 그 동안의 일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다네.” 그는 두 눈에서 형형한 섬광을 뿜어 내며 이어 말했다. “지난 십 년간 노부는 강호인의 안위를 위협하는 한 음모의 태동을 눈치채고 이를 밝히 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였네. 그 결과 대략 윤곽만은 밝혀 낼 수 있었네. 하나 워낙 사실이 중대하여 섣불리 이 사실을 발설할 수 없었다네. 뿐만 아니라 만일 노부가 끝내 이 일을 완 전히 밝혀 내어 그 진상을 증명치 못한다면 필경 노부야말로 강호에서 가장 존경받는 선배 기인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오명을 면키 어려운 처지라네!” 순간, 사검평이 눈빛을 반짝 빛내며 물었다. “대협이 말씀하시는 그 선배기인이란 바로 천공금성을 일컫는 것이 아닙니까?” “소협이 그걸 어찌 알았는가?” 천면환영인은 경악해 마지않았다. “역시 소생의 짐작대로였군요.” 이때, 천면환영인이 침중히 말하였다. “소협, 경솔한 판단은 대단히 위험한 일일세. 과거 천마문 혈안의 암중 원흉과 그 배후가 천공금성이 틀림없는가는 아직 확실히 단언할 단계가 아니네. 다만 한 가지, 천공금성이 어 떤 식으로든지 간에 원흉과 모종의 관련이 있다는 것만 확실할 뿐이네.”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묵묵히 듣고 있던 사검평이 갑자기 두 손을 뻗어 낸 것은 바로 그때였 다. 슈슈슛! 눈부신 홍광이 십여 갈래나 뻗쳐 나와 곧장 천면환영인에게로 날아간다. “앗!” 너무도 기습적인 공격이었던지라 천면환영인은 기절초풍했다. “대체 이 무슨 무도한 짓인가?” 그는 대갈일성하며 두 손을 펼치더니 가슴 정면에 커다란 태극을 그려 냈다. 순간, 담담한 홍운(紅雲)이 그의 몸 전체를 휘감았다. 두 가닥 홍색 기운은 서로 부딪쳐 뇌성벽력처럼 작렬했다. 우르르…… 꽈꽝! 굉음이 천지를 진동하고 두 사람은 서로 두 걸음씩 물러섰다. 자욱한 황진이 천지를 뒤덮어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었다. 이윽고 황진이 가라앉고 그들 쌍방의 모습을 각각 알아보게 되 “아!” 사검평의 얼굴에 은은히 놀라움에 찬 빛이 흘렀다. “소협! 이처럼 비열하게 노부를 향해 느닷없는 공격을 퍼붓다니, 대체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천면환영인은 안면 가득 노기를 띠고 냉엄히 질타했다. 사검평은 천면환영인을 꿰뚫듯 날카롭게 주시하며 담담히 말했다. “소생은 대협이 과연 진정한 천면환영인인지 잠시 시험해 보았을 뿐이외다.” 그는 입가에 한 줄기 신비로운 미소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만일 소생이 이런 식으로라도 시험해 보지 않는다면, 어찌 대협이 적양신군의 유학을 이어받은 전인임을 알 수 있겠습니까?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그의 말에 천면환영인은 크게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이윽고 일성 장탄식을 뿜어 냈다. “후유…… 역시 그대는 하늘이 내리신 인재일세. 지금까지 노부가 적양궁(赤陽宮)의 후예 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짐작치 못했거늘, 자네에게 첫눈에 발각될 줄이야…… 소협, 노부가 간곡히 청컨대 자네는 부디 이 일을 비밀에 붙여 주게. 만일 노부가 적양궁의 후인이라는 사실이 천하에 알려진다면 노부는 사문의 규율 때문에 두 번 다시 강호에 나올 수 없을 것이네.” 이때서야 사검평은 한 가지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것은 천면환영인이 왜 강호에서 공공연히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가 하는 까닭이었다. 동시에 그는 지난날 사부로부터 들었던 한 가지 일을 뇌리에 떠올렸다. 그 얘기란 바로 적양궁의 후예들이 강호에서 물러나게 된 사연이었다. 이백 년 전, 금릉 땅에 한 명문세가(名門世家)가 있었다. 이곳의 공자(公子) 이지영(李志英)은 그의 외사촌 누이 금미연(琴美娟)과 어려서 부모가 맺 어 준 정혼한 사이였다. 그러나 금미연의 부모가 괴질로 죽고 그녀가 이지영의 집에 의탁하여 살게 되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당시 세도가이던 구문제독(九門提督) 동천화(董泉和)가 이지영의 출중한 인품에 혹했던 나 머지 자신의 무남독녀 외동딸을 그에게 출가시키려 했던 것이다. 매파가 찾아와 구문제독의 청혼 의사를 밝히자 이지영의 부모도 마음이 흔들렸다. 어려서부터 그 부모에 의해 맺어진 정혼녀라 하나 금미연의 가세는 이미 몰락해 버리지 않 았는가? 반면 구문제독은 당대의 세도가였으니, 권세와 재물이 탐났던 나머지 그 부모들은 마음이 기울어졌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이지영은 절대로 그 같은 혼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마음속 정인은 오직 금미연뿐…… 그러나 그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혼사 준비 는 착착 진행되어 갔다. 이때 금미연은 이 같은 사태에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고 절망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 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그 같은 행동은 실패하고, 오히려 이것이 인연이 되어 한 전대기인(前代奇 人)의 기명제자(記名弟子)가 되었다. 천룡자(天龍子)! 그 전대기인이 바로 이 사람 천룡자였으니, 고금제일인(古今弟一人)이란 칭호가 말해 주듯 광세적 기인이었다. 자신의 정녀(情女)가 천룡자에 의해 구함을 받아 일대(一大)의 무림기화(武林奇花)가 되고 있을 동안, 그 정인 이지영은 그녀의 돌연한 실종에 하늘이 무너지듯 절망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제 손으로 정녀를 찾아 내기 위해 가출하여 유랑길에 나서게 되었다. 정녀 금미연을 찾아 정처없이 강호를 주유하기 삼 년. 처음 집을 나섰을 때는 누가 보아도 번듯한 명문 공자의 차림새였으나 어느 사이엔가 그 옷차림마저 남루해져 강호의 파락호인 양 변모하였다. 그러나 그의 일심은 변하지 않고 오직 정녀 금미연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 동안 이지영이 겪었던 고행은 실로 눈물겨운 것이었다. 이에 하늘도 마침내 탄복하였던가? 집을 나선 지 삼 년여가 지난 그 어느 날 마침내 금미연과 해후하게 되었다. 하나 그때 금미연은 이미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고금제일인 천룡자의 기명제자였을 뿐 아니라 남해(南海) 보타산(菩陀山) 금선사(金禪寺)의 금정신니(金頂神尼)로부터 계(戒)를 받아 불문에 귀의한 처지였다. 금미연이라는 이름마저도 이미 절연(絶緣)이란 법명(法名)으로 바뀌어 있었다. 가문의 몰락과 그로 인한 이지영과의 실연에 깊은 상처를 받은 그녀는 이런 모든 삶의 번뇌 에서 벗어나고자 법명을 절연(絶緣)이라 하였던 것이다. 한데, 이미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으리라 믿었던 이지영이 천하를 헤매던 끝에 기어이 자신에게까지 찾아왔다니…… 더구나 이때 이지영의 몰골은 너무도 비참하여 말이 아니었다. 금미연은 가슴이 메었다. 하나 자신은 이미 불문에 귀의한 몸. 이지영에게 조용히 타일러 다시 집으로 돌아가라 말했다. 그러나 이지영은 삼 년의 고행 끝에 겨우 만난 정인을 순순히 놓아 줄 수 없었다. 금미연에게 기필코 자신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기를 강요하는 것이었다. 이에 금미연도 더 이상 그를 설득하기를 단념하고 최후의 방법을 썼다. 그것은 바로 이지영을 극도로 모욕하는 것이었다. 자신은 이부(李府)에서 밥이나 빌어먹던 지난날의 금미연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무림 최고의 기인으로, 고금제일인으로 추앙받는 사부의 문하로서 무림절정고수가 되었는 데 어찌 일개 낙락공자 따위가 함부로 구느냐고 크게 힐책했다. 이 같은 그녀의 생각은 과연 적중했다. 이지영은 극도의 모욕에 피눈물을 뿌리며 돌아갔다. 그러나 고육지계(苦肉之計)로 어쩔 수 없이 그를 모욕했던 한마디가 영원히 이지영의 가 슴에 못박여 남아 있게 될 줄은 그녀로서도 알지 못했다. 금미연에 대한 이지영의 사랑은 급기야 증오로 변하였다. 하여 그는 보복의 일념을 가꿔 나가기 시작했다. 그 서릿발 같은 일념은 하늘에까지 닿아 드디어 천재일우의 기연을 얻었으니…… 복우산 어느 암동에서 상고(上古) 시대의 무상기서, 적양파천무서(赤陽破天武書)를 얻게 되 었던 것이다. 적양파천무서는 현문(玄門)의 무상신공(無上神功)을 수록한 절세비급이었다. 그 수록된 바 내용은 크게 두 가지였으니, 그 하나가 적양신공이요 나머지는 천하에서 가 장 패도적인 절학 적양파천오식(赤陽破天五式)이었다. 뼈를 깎는 수련 십 년 만에 이지영은 두 가지 무학을 대성할 수 있었다. 이윽고 그가 다시 강호로 나오니, 옛 여인이었던 금미연은 강호에서 황산신니로 추앙받는 절세고인이 되어 있었다. 이지영은 그녀가 은거하고 있는 황산 망정암(妄情庵)으로 찾아가 그녀에게 결투를 신청했 다. 황산신니는 십 년 만에 이지영이 다시 찾아왔을 뿐더러 위풍도 당당해졌음을 보고 크게 기 뻐하였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진심을 오해하여 대결을 청하니 정녕 난처하였다. 그녀는 간곡히 대결을 피하려 하였으나 이지영은 좀체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마지못해 대결에 응하였고,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이지영은 천하를 떨쳐 울리던 황산신니에 맞서서도 결코 손색없는 대결을 이백여 초 이상 겨루었으니, 적양파천무서는 과연 희대의 비급임이 확실하였다. 그러나 황산신니가 심중에 살심만 품었다면 삼십 초를 넘기지 못하고 이지영의 패배로 끝 났을 것이다. 그것은 이지영이 내공수위에서 황산신니보다 훨씬 못하였기 때문이다. 본시 황산신니는 사부 천룡자로부터 한 알의 천룡보원단(天龍輔元丹)을 받아 복용한 일이 있었다. 그 뒤에 다시 금정신니의 문하로 들어가 금정신단(金頂神丹)마저 복용하니, 당시 그녀의 내 공수위는 이미 이(二) 갑자(甲子) 이상에 달해 있었던 것이다. 그에 비하면 이지영의 내공수위는 일천한 것이었다. 이윽고 싸움이 이백여 초에 달했을 때, 이지영은 비로소 자신이 그녀의 상대도 되지 않음 을 통감하기 시작했다. 이지영은 황산신니가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라 생각했고, 그들의 오해는 더욱 깊어지게 되 었다. 이지영은 스스로의 패배를 자인하였다. 그리고 십 년 후 오늘 다시 보자는 한마디를 남긴 후에 홀연 사라졌다. 십 년 후, 이지영은 다시 황산 망정암에 나타났다. 한데 정작 황산신니는 어디론가 떠나고 없지 않는가? 그녀는 이지영을 피하여 이미 오래 전에 그곳을 떠나 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이지영은 단념치 않았다. 그는 황산신니를 찾아 천하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하나, 황산신니의 종적은 오리무중이었다. 이지영은 황산신니가 의식적으로 자신을 피함을 알게 되었다. 그는 더 이상 황산신니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복우산(伏牛山)에 적양궁을 세운 후 스스로 를 적양신군이라 칭하여 천하에 그 위세를 과시했다.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렀다. 어느덧 적양신군의 명성은 사해(四海)를 떨쳐 울릴 정도였다. 적양신군, 그의 성격은 세월따라 변해 있었다. 그는 그 동안 실연과 좌절을 거듭하여, 냉혹 오만한 독선적인 성품으로 바뀌어져 갔던 것 이다. 하여 그 명성이 사해에 떨쳐지고 천하 패주적인 위치에 달하게 되자 자신의 비위에 거슬리 는 자는 누구도 용서치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인간사는 무상하게 느껴지는 법. 다시 삼십 년이 흐르자 그의 머리는 백설이 내린듯 희게 변하였고, 그 또한 자신의 마음이 차츰 누그러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새삼 황산신니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또한, 지난 세월 자신의 독선적인 행동으로 인해 많은 강호인들에게 고통이 있었으리라 생각하니 스스로 회한에 사로잡혔다. 결국 그는 천하에 커다란 세력을 과시하며 구름처럼 운집하였던 수하들을 해산시킨 후, 스스로 적양궁을 폐쇄시켰다. 이어 그는 어디론가 종적을 감춰 강호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중원무림에 전대미문의 혈풍이 몰아닥쳤다. 서역의 마도 백골마교(白骨魔敎)가 중원에 진출하여 일거에 강호 전역을 휩쓸었던 것이다. 이는 백여 년 전 서역 라마승들의 침입 이래 처음 겪는 큰 겁란이었다. 백여 년 전에는 천룡자 같은 절세적 기인이 무림을 구하였으나 이때의 강호에는 백골마교 와 대항하여 싸울 만한 인물이 아무도 없었다. 죽음의 대혈풍! 그래도 강호인들은 수수방관할 수 없었던지라, 구파일방과 한 덩어리가 됨으로써 그들에 맞섰다. 처음에는 그래도 막상막하의 대치 상태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패색이 짙어져 수많은 희생자만 늘어갈 뿐이었다. 이때 홀연, 혜성처럼 출현한 네 명의 젊은 고수가 있었으니…… 옥면금검(玉面金劍) 남궁도(南宮道). 천마행공(天馬行空) 용일추(龍一秋). 경혼검객(驚魂劍客) 유일민(柳一民). 유운천학(遊雲天鶴) 진한상(陳翰祥). 후일 강호사대세가의 주인이 되는 이들이 가세함으로, 패색 짙던 강호 세력은 겨우 기사회 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은 애타게 무림의 구성을 찾았다. 그때 백골마교는 중원무림에 대하여 마침내 최후 통첩을 보냈 중원무림의 패권을 놓고 최후로 일전을 결하자는 것이었다. 화산(華山) 은암파(銀岩坡). 깎아지른 듯한 산세에서 유일하게 드넓은 공지였다. 마침내 운명의 날이 밝자 처참한 살육의 서막(序幕)이 올랐다. 군웅들이 흘린 피로 인해 은암파의 백색 암반은 모조리 검붉은 피로 물들었다. 백골마교의 거센 공격으로 인해 마침내 중원무림이 최후의 숨결을 가쁘게 내쉴 때였다. 돌연 나타나 중원무림을 위기에서 구하고 일거에 백골마교 삼십 육 명의 고수들을 주살한 천신(天神)과 같은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적양신군이었다. 예기치 않은 그의 출현으로 뜻밖의 낭패를 면치 못한 백골마교의 교주, 백골마군(白骨魔君) 위소천(魏簫天)은 마침내 최후의 수단을 구사하였다. 사십구 명의 고수로서 구성되는 백골구음유명망혼진(白骨九陰幽冥亡魂陳)을 발동시켰던 것이다. 백골구음유명망혼진! 그것 역시 서역 마교가 자랑하는 사도 최고의 절예로, 그 위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적양신군은 그 속에 갇힌 채 수백여 초의 격전을 벌였으나 승세는커녕 오히려 십여 차례나 위기를 맞아야 했다. 그의 위기는 곧 전 중원무림의 위기나 다름없었다. 아아, 이렇게 하여 다시 정파무림의 운명은 그 종말을 구해야 하는가? 그러나 하늘은 과연 정의를 버리지 않으셨다. 황산신니, 지난 수십 년간 강호에서 완전히 종적을 감췄던 그녀가 모습을 나타내었던 것이 다. 한 자루 절세적 위력의 신검(神劍). 정녕 폭풍처럼 검망을 쏟아 내는 가공할 위력을 지닌 구공신검(九孔神劍)을 치켜 들고 그녀 가 나타나자, 겨우 십여 차례의 공격을 펼쳤을 뿐인데 전세는 급기야 역전되었다. 그때까지 적양신군의 주위를 감싸고 핍박하던 백골마교의 마도 사십구 명은 태반이 죽거나 중상을 면치 못했던 것이었다. 검망 속에서 그녀의 자태는 실로 눈부셨다. 그 누가 이 눈부신 신위 앞에 대적하랴! 구공신검(九孔神劍)! 이 한 자루 신검이 지닌 바 위력은 실로 가공할 정도여서, 은암파에 모인 숱한 군웅들의 가슴속 깊이까지 아로새겨졌다. 그녀가 한번 검식을 펼칠 때마다 눈부신 광채가 전신을 휘감고 동시에 혼백을 얼어붙게 하 는 굉음이 울려 나왔다. 그 위세는 정녕 산천초목까지 떨게 하였고 그 앞에 맞선 자는 어김없이 추풍낙엽처럼 쓰 러져 갔다. 더구나 이 절세의 신검에는 피독(避毒), 피화(避火) 등 외부의 기운으로부터 보호하는 다 섯 개의 보주가 박혀 있었다. 하여 백골마교의 독물 공세도 황산신니에게는 하등의 위력도 발휘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백골구음유명망혼진이 와해되자 일대 마두 백골마군은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황산신니가 그를 향하여 가차없이 일검을 날렸다. 그토록 파죽의 기세로 강호천지를 휩쓸었던 백골마군이었으나 그녀의 일검 아래 이슬로 화하였다. 중원무림 정파의 고수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일거에 백골마교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였 다. 화산 주위는 함성으로 진동했다. 그러나 군웅들이 천하의 은인이라 할 황산신니와 적양신군을 찾았을 때, 그들은 이미 사 라진 지 오래여서 찾을 길이 없었다. 이후, 그들 두 사람의 모습은 영원히 강호상에서 사라져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강호인들은 그들의 공덕을 추앙하여 우내쌍성(宇內雙聖)으로 추앙하며 언제까지나 잊지 않았다. 군웅들 앞에서 홀연히 사라졌던 두 기인은 화산 제일봉인 화운봉(華雲峯) 정상에 마주서 있었다. 적양신군은 황산신니에게 사십 년 전의 약속대로 재차 비무(比武)할 것을 종용했다. 하나 황산신니는 응하지 않았다. 이미 세월이 흘러 자신은 명리(名利)의 욕념(慾念) 따위에서 초월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승부를 가려야겠다면 자신이 시전하는 일초를 풀어 보라고 제안하였다. 이로써 승패를 가름짓자는 것이었다. 이어 그녀는 구공신검을 들어 백여 장 밖에 있는 무게 삼백 근의 거암(巨岩)을 가리켰다. 순간 신검이 번뜩 한 줄기 빛살로 화하여 날아가자 거암이 여지없이 두 쪽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신검은 다시 날아와 그녀의 수중에 쥐여졌다. 이는 정녕 신화(神化)의 경지에 이른 솜씨였다. 적양신군은 절망해 마지않았다. 지난 세월 그토록 각고의 노력 끝에 절학을 성취하였건만 그녀 에게 비하니 한낱 어린애 장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황산신니! 그녀는 이미 검선(劍仙)의 경지에 이르지 않았는가? 적양신군은 자신의 살아생전에는 도저히 그녀와 더불어 승부를 논할 수 없다고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기에 의연히 선언했다. ─`나 적양신군은 기필코 당신의 어검지학(馭劍之學)에 대항할 수 있는 무상절학을 창안해 내고야 말 것이니, 만일 노부의 생전에 이를 이루지 못한다면 나의 전인이라도 기필코 이루 게 할 것이다. 다만 노부는 물론 노부의 후대에 이르러서도 그대의 절학에 대항할 자신이 없는 한은 영원히 강호에 나오지 않을 것이다. 피를 토하듯 일성 절규를 남겨 놓은 후 그는 해연히 사라졌다. 홀로 남은 황산신니는 크게 낙담해 마지않았다. 사실 자신은 그와의 분쟁을 피하기 위해 일초 어검지학을 펼쳤던 것인데 오히려 그에게 깊 은 마음의 상처만 주었던 것이다. 상심한 나머지 크게 한숨쉬던 그녀도 이윽고 사라졌다. 이렇게 하여 그들 두 사람의 모습은 이후 두 번 다시 강호에 그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던 것이다. 사검평은 문득 회상에서 깨어났다. 아직도 월색은 교교히 뿌려지고 있었다. 사검평은 눈을 들어 망연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실 이 일은 후일 염라천존이 복우산 고동(古洞)에서 우연히 적양파천무서를 얻게 됨으 로써 사검평까지 전해져 알게 되었던 것이다. 즉, 적양신군은 자신의 이런 내력을 상세히 적어 적양파천무서와 함께 후세에 전해지도록 일부러 안배하였던 것이다. 홀연 사검평은 회상의 마지막 잔영까지 털어 버리듯 문득 입을 열었다. “한데 소생에게 한 가지 의문이 있군요.” 천면환영인이 그윽이 그를 바라보았다. 사검평이 말을 이었다. “소생이 알기로 당시 적양신군께서는 그 후 삼십 년간 고심참담(苦心慘憺)하던 끝에 기어 이 한 가지 절학을 창안해 내셨으나 그 무공을 익히기 위해서는 만년화구(萬年火龜)의 내단(內丹)이 꼭 필요한지라 이를 구하기 위해 멀리 남해로 떠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후 적양신군께서는 과연 그 뜻을 성취하셨소이까?” 천면환영인은 달빛 아래 한 줄기 탄식을 내뿜으며 대답했다. “그렇다네. 선사(先師)께서는 멀리 남해의 고도에서 마침내 만년화구를 잡아 그 내단을 취 하는 데까지는 성공하셨다네. 그러나 애석하게도 결국 그분은 스스로 심혈을 기울여 창안한 태양광휘신공(太陽光煇神功)을 끝내 익히실 수 없었다네.” 사검평은 크게 의혹의 빛을 품었다. 천면환영인이 곧 말을 이었다. “물론 까닭이 있네. 본시 선사의 태양광휘신공은 평생 다른 무공을 조금도 익힌 적이 없는 사람만이 연성할 수 있기 때문이었네. 이는 태양광휘신공이 순양지기(純陽之氣)를 위주로 하는 신공절예이되 만년화구 의 내단 속에는 극양의 기운 외에도 한 줄기 지음지기(至陰之氣)가 내포되었는지라, 일단 내 단을 복용하고 이를 연성하면 천지간에 가장 뛰어난 절학을 구사할 수 있는 것이라네. 그러나 그 천하제일의 절학은 절대로 다른 성질의 무공은 용납치 않는 것이었네. 만일 다른 무공을 익힌 자가 만년화구의 내단을 복용하게 되면 그것은 결국 일신에 서로 다른 두 가지 성질의 내력이 잠재하게 되는 것이네. 이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어서 단숨에 주화입마의 액난을 초래한다네. 하여 전신이 불덩어리로 화 하거나 얼음으로 변하는 비참한 최후를 피할 수 없는 것이라네.” 천면환영인은 설명을 끝내고 다시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이에 선사께서는 스스로 창안한 태양광휘신공의 대성을 포기한 채 대신 이를 전수해 줄 전인을 찾기 위해 품속에 만년화구의 내단을 지니고 다시 중원으로 돌아오셨다네. 그리고 먼저 태양광휘신공의 비급과 만년화구의 내단을 어느 은밀한 장소에 깊숙이 숨겨 놓고 전인으로 삼을 인재를 찾기 위해 천하를 주유하셨네. 그러나 십 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아무 소득이 없었네. 비록 천하에 는 많은 기재들이 있었으나 그분의 절학을 이어받을 만한 천부의 기재는 결코 보이지 않았 던 것이라네…… 이에 적양신군 선사께서는 낙담을 금치 못하셨네.” 이백 년 전 한 고인의 과거를 더듬는 천면환영인의 어조에는 특별한 감회가 서려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무렵…… 강호에는 돌연 한 사람의 신비한 무영살수(無影殺手)가 등장 하였네. 출현한 지 불과 두 달 사이에 곳곳에서 강호절정고수들이 그의 손 아래 처참히 죽어 갔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곳곳에서 자행된 이 살인 사건은 강호를 온통 들끓게 했네. 이때 마침 선사께서는 안휘성 일대를 지나던 중이었는데 이 소식을 접하고 즉시 그 뒤를 쫓기 시작하셨네. 결국 그분은 잠산(潛山)의 한 절봉 꼭대기에서 한 흑의괴인과 마주쳤네.” 천면환영인은 자신의 과거사를 말하는 듯 아련한 표정으로 적양신군에 대한 비사를 털어 놓기 시작했다. 적양신군이 잠산 절봉 위에서 그와 마주친 것은 그를 뒤쫓은 지 칠 일 만이었다. 그 동안 적양신군은 상대가 그 칠 일 동안 거의 십여 차례나 역용하는 것을 보아 왔던 것이다. 하여 이번에 놓친다면 두 번 다시 잡기 어려우리라 판단하고 처음부터 무서운 살수를 펼쳤 다. 그러나 적양신군의 초절한 신공으로도 흑의복면인을 쉽사리 제압할 수 없었다. 적양신군은 수백여 초의 격전을 치르고야 비로소 상대에게 중상을 입힐 수 있었다. 환영야차(幻影夜叉)! 그것은 바로 중원 천하를 발칵 뒤집어 놓은 이 흑의괴인의 별호였다. 더구나 그의 진면목을 보니 이제 겨우 나이 이십 세를 갓 넘은 절세의 미녀였다. 적양신군의 놀라움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환영야차는 바로 부상국(浮桑國)의 제일검객(第一劍客) 송전지광(松田知光)의 의발전인이었 는데, 이 또한 적양신군과 깊은 인과 관계가 있었다. 즉, 송전지광은 사십 년 전 강호에 돌연히 모습을 나타내어 혈겁을 일으키다가 적양신군의 손에 패해 사라졌던 자였다. 그제야 환영야차는 그로부터 사십 년이 지난 오늘 사부의 원한을 갚고자 강호에 나왔던 것 이다. 그녀가 아무 원한도 없이 무수한 고수를 살해했던 이유도 행방이 묘연한 적양신군을 유인키 위한 하나의 미끼였던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알고 난 적양신군은 크게 노했다. 사십 년 전 한 번의 싸움에서 그 사부가 격패당해 한(恨)이 남았기로, 이렇듯 무고한 인명 을 수도 없이 해칠 수 있단 말인가? 적양신군으로서는 정녕코 그녀의 죄를 용서키 어려웠다. 그러나 일개 여인의 몸으로 일신에 지닌 절학이 너무도 뛰어나니 특별히 호생지덕을 베풀 어 용서했다. 이에 환영야차는 그 관용에 눈물로써 크게 감사했다. 하여 그 관용에 보답하고 자신의 죄를 속죄하는 의미에서 스스로 적양신군의 종이 되겠노 라 자청했다. 적양신군이 그 뜻을 거절하려 하자 그녀는 스스로 자결하려 했다. 그리하여 적양신군은 할 수 없이 그녀의 뜻을 받아들이되 종이 아닌 제자로서 입문하도록 했다. 한데, 이것이 바로 돌이킬 수 없는 화근의 시발이 될 줄이야…… 물론 적양신군도 처음부터 그녀를 믿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가 너무도 정성으로 대하자 차츰 마음의 벽을 헐었다. 마침내 적양신군이 의심을 풀었다고 느끼자 환영야차는 실로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말았 다. 강력한 최음약을 써서 적양신군의 음욕을 동하게 만든 후 자신과 동침하도록 만들었던 것이 다. 그리하여 채양보음대법(採陽輔陰大法)으로 적양신군의 전공력을 흡입하고 말았던 것이다. 적양신군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환영야차는 득의하여 적양신군을 크게 비웃으며 말했다. “나는 적양신군의 전인으로 강호에 출도하여 천하의 패권을 장악한 후 무림사상 전무후 무했던 여인천하(女人天下)의 대업(大業)을 이룩하고야 말겠소.” 이어, 그녀는 적양신군에게 지닌 바 절학을 모두 구전토록 핍박하였다. 적양신군은 못 이기는 척 일신의 절학을 하나씩 구술해 주었 환영야차는 실로 득의 양양했다. 그러나 간교한 여우 같은 그녀에게도 한 가지 실수가 있었으니…… 적양신군이 비록 채양보음대법에 의해 진력이 고갈되기는 하였지만 그는 고원환정의 비법 (秘法)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적양신군은 서서히 공력을 회복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환영야차는 이미 적양신군의 공력을 흡수하여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으므로 정면 으로 맞서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다. 하여 적양신군은 호시탐탐 기회만을 엿보았다. 드디어 그는 적양파천무서의 마지막 구결을 전수해 주던 중 들떠 있는 환영야차에게서 일 말의 허점을 발견했다. 순간, 적양신군은 섬전과 같이 덮쳐 들어 기습을 가했다. 이것은 과연 보기 좋게 성공할 수 있었다. 하나, 그 또한 환영야차의 호신강기에 튕겨져 치유될 수 없는 내상을 입고 말았다. 적양신군은 이윽고 자신의 최후가 임박했음을 느꼈다. 그는 곧 최후의 기력을 다해 자신이 겪었던 모든 사연과 자신의 모든 절학을 석벽에 새겨 두었다. 지력으로써 새겨진 그 석벽의 내용은 이러했다. <……후일 인연이 있어 이를 보는 자, 노부가 남긴 태양광휘신공을 얻어 노부의 원을 풀어 주기 바란다.> 그는 기어이 천추의 한(恨)을 남긴 채 파란만장한 그 생애에 종지부를 찍었다. 적양신군에 대한 천면환영인의 얘기는 이렇게 끝을 맺었다. 어디선가 풀벌레가 갑자기 자지러지게 울었다. 사검평은 나름대로 눈앞에 그려 보던 회상으로부터 문득 깨어났다. 第 十五 章 월하기담(月下奇談) 1 만월이 잠시 구름 속으로 숨어 들자 으스름한 어둠이 짙게 드리웠다. 풀벌레 소리가 더욱 요란스러워졌다. 사검평은 천면환영인에게로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그렇다면 대협께선 어떤 경위로 적양신군의 유학을 얻을 수 있었습니까?” “노부가 선사의 유학을 얻게 된 경위야말로 천재일우(千載一遇)라 할 수 있다네.” 알고 보니 천면환영인 역시 본래는 유문(儒門) 출신이었다. 그러나 그의 가문은 어느 날 갑자기 녹림의 마두에게 몰살당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십사 세였다. 일가족 몰살의 참변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오직 자신만이 살아남자 그는 복수를 결심하였 다. 이리하여 그는 강호를 주유하며 무문(武門)에 입문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의 원수가 천남인마(天南人魔)임을 알자 그 누구도 그를 문하로 받아들이지 않 았다. 비애와 좌절을 씹으며 천하 곳곳을 헤매기를 이 년, 어느덧 그의 발걸음은 잠산에까지 닿 았다. 때마침 짙은 어둠과 함께 억수 같은 폭우가 퍼부었다. “하룻밤 보낼 곳을 찾다가 노부는 우연히 한 절곡에까지 이르게 되었네. 그곳에서 선사께 서 남기신 글을 발견했지. 하여 노부는 절학을 얻게 되었네. 더구나 그곳에는 환영야차가 남긴 환영마술(幻影魔術)의 비급까지 있어 실로 뜻밖의 기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네.” 이 말에 사검평은 크게 감탄하며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선배께서는 적양신군의 또 다른 유학, 태양광휘신공도 얻으셨습니까?” 천면환영인은 고개를 저었다. “불행히도 그렇지 못했네. 당시 노부가 그곳에 당도하였을 땐 때마침 한 줄기 낙뢰가 떨 어져 한 석벽을 때렸는데 그 떨어진 부분이 선사께서 남기신 또 하나의 유학, 태양광휘신공의 숨겨진 장소를 적은 곳이었다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노부는 크게 안타까워했으나 하늘을 원망치는 않았다네.” 잠시 구름 속에 가려졌던 만월이 다시 살포시 고개를 내밀었다. “그것은 노부가 태양광휘신공과는 인연이 없다고 깨달았기 때문일세. 노부가 얻은 절학만 으로도 지금껏 강호에서 커다란 좌절을 겪었던 적이 없었으니 어찌 과욕하여 하늘을 욕되게 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이미 말했듯 노부는 선사의 유학 외에도 환영마술을 얻었으니 이로써 소위 천면환영인이라 하여 천하인들이 모두 두려워하는 명성을 얻지 않았는가?” 그때 사검평의 얼굴에 짙은 의혹이 생겨났다. “그렇다면 과거 천마문의 혈겁 당시 암중의 그 신비인이 대협에게만은 찾아가지 않았단 말인가요?” 천면환영인은 빙그레 웃었다. “아닐세, 암중 흉수는 분명 노부를 찾아왔네. 하나 그는 노부의 진면목을 모르는지라 오히려 노부가 파놓은 함정에 빠졌고, 그로 인해 스스로 마각의 일부를 드러내고야 말았다 네!” 사검평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대협의 그 말씀, 소생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렵군요!” 그러자 천면환영인은 자못 통쾌한 듯 앙천 광소를 떠뜨렸다. “으하하하…… 비록 강호 천지가 넓다 하나 천하에서 노부와 직접 대면해 본 인물은 고 작 네 명뿐일세. 벽혈신군 유천화, 천사 주가청, 그리고 천독마수 우문관과 무영마개 유단뿐 이네. 그나마 그들이 본 노부의 모습 또한 각기 다른 것이었고, 그 중의 어느것도 노부의 진면목이 아니었네. 다시 말해 그 흉수는 노부에게 손을 뻗치고 싶어도 노부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네!” 그는 또 한 차례 크게 웃었다. 때아닌 웃음 소리에 달빛마저 흠칫하여 잠시 흐트러지는 듯싶었다. 이어 그는 다시 말했다. “그러나 당시 노부는 그의 흉계에 말려드는 것처럼 가장하여 스스로 목숨을 내던진 척하 였으니, 그는 노부가 이미 그의 손 아래 죽은 것으로만 확신하고 있을 것이네.” 그의 설명은 명쾌했다. 뿐만 아니라 일말의 가식도 없는 듯했다. 하나 사검평은 왠지 일말의 의구심을 버릴 수 없었다. 그러자 천면환영인도 사검평의 의중을 간파했는지 홍안백발의 안면에 한 가닥 신비로운 미소를 떠올렸다. 이어 그는 다시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의아하게 여길 필요 없네. 자네의 의혹을 풀어 주기 위해 상세히 설명해 줄 테니.” 그의 목소리가 더욱 낮게 가라앉았다. “그 암중의 흉수는 정녕 뛰어난 절학을 지녔었다네. 더구나 그는 다른 사람과 달리 노부 에게만은 처음부터 치명적 살수로 공격해 왔네. 물론 노부가 진정으로 그에게 대항했다면 아무리 그가 고절한 무공을 지녔어도 능히 수백여 초는 겨루어야 결말이 났을 것이네!” “그렇다면……” “하하하…… 그러나 노부는 사전에 베풀어 놓았던 깊은 안배에 따라 수초가 지나지 않아 짐짓 깊은 내상을 입은 듯 가장하고 도주하였다네. 그러자 암중의 신비흉수는 기필코 노부의 목숨을 빼앗고 말겠다는 듯 추격해 왔네!” 사검평이 눈을 빛냈다. “그 결과가 어찌 되었습니까?” 천면환영인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추격을 견디지 못하여 까마득한 단애 아래로 떨어졌다네!” 마치 남의 일인 듯 너무 태연히 말하여 오히려 사검평은 흠칫했다. “그렇다면……!” “하하하…… 놀랄 것 없네. 그 역시 노부의 안배였으니까 말일세. 노부는 이미 그 밑에 모종의 안배를 해놓아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네. 하나 신비흉수는 깜쪽같이 노부가 죽은 줄로만 알고 표표히 그 자리를 떠나갔네!” 사검평은 새삼 천면환영인의 주도면밀한 지략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사검평의 머리를 스치는 다른 한 가지의 기이한 느낌이 있었다. 그것은 천면환영인의 말이 너무도 빈틈없이 앞뒤가 들어맞았기 때문이었다. 어찌 생각하면 잘 꾸며진 거짓말을 듣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나 사검평은 추호도 그런 내색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담담히 마지막 질문을 던졌을 뿐이다. “그렇다면 대협께서 알아 낸 신비흉수의 단서란 무엇이었소이까?” 그러자 천면환영인이 침중히 대꾸했다. “미안하네만 노부는 아직 그 사실을 확실히 밝힐 단계에 이르지 못했네. 다만 한 가지 확 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신비흉수가 이미 소협을 노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일세. 더구나 소협은 사부 염라천존의 과거 행적으로 인해 강호무림인들에게 경계의 대상이 되어 있네. 비록 지금은 남해문의 일로 하여 정파무림인들이 소협의 힘을 빌리려 하나 만약 그 일이 끝나면 공적(公敵)으로 몰릴 가능성이 다분히 있네.” 그의 어조가 갑자기 엄숙하게 바뀌었다. 그는 뚫어지게 사검평을 주시하며 이어 말했다. “소협의 지금 처지야말로 사면초가라 해도 과언이 아닐세. 부디 이런 때일수록 침착하고 신중하게 처신하여 난국을 타개해야만 할 것이네.” 말을 마치기 무섭게 그는 번뜩 신형을 날렸다. 순간 그의 신형은 삽시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사검평은 천면환영인이 이렇듯 돌연히 떠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지라 놀라움을 금 치 못했다. 사검평은 홀연히 탄식해 마지않았다. “아! 그의 말을 모두 믿을 수는 없지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은 정녕 진실이었다. 이런 상 황에서 만에 하나라도 일을 잘못 처리한다면 실로 사면초가의 곤궁에 빠지리라!” 곧 이어 그는 천면환영인이 사라진 방향을 주시하며 중얼거렸다. “천면환영인은 내가 알고 있었던 것보다 더욱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의 일신무학은 능히 천사 주가청을 능가할 정도이니 진정한 그의 실력이 과연 어느 정도인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구나! 한데 그는 심계마저 측량할 수 없이 깊은 듯하니……” 사검평은 가슴이 답답했다. 그의 머리를 어지럽히는 무수한 상념이 마치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제멋대로 뒤엉킨 기분 이었다. 그는 한차례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별빛이 무수히 빛나는 중천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본시 하늘의 뜻은 그 누구도 거역치 못하는 법. 나는 하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리라. 만일 나 사검평이 하는 일이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면 비록 어떠한 결과를 맞 는다 할지라도 결코 후회하지는 않으리라!” 마치 석벽에 한 자 한 자 새겨 넣듯 나직이 내뱉는 그의 말속에는 실로 비장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그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각오를 새롭게 하고 있을 때였다. 때마침 부는 야풍을 타고 어디선가 한 줄기 은은한 소리가 들려 왔다. 순간, 사검평은 흠칫 놀라는 표정이었다. “이 소리는 바로……” 그것은 분명 한 줄기 금음(琴音)이었다. 밤하늘을 누비고 있는 그 신비로운 음률은 애조 띤 여인의 흐느낌인 듯하더니 이내 별유 천지의 환락이 펼져지는 듯 변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황홀경에 도취케 했다. 그것은 진정 천상(天上)의 음률이었다. 순간, 사검평의 뇌리를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천상신음(天上神音)!” 사검평은 예리하게 안광을 번뜩이며 주위를 일별하여 금음의 진원지가 어디인가 살피려 했다. 그러나 금음이 들려 온 방향을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사검평의 얼굴에는 이내 당혹의 빛이 떠올랐다. 사문의 독문신공 육합천이공으로도 주위를 온통 감싸듯 울려 퍼지는 금음의 행방을 헤아 릴 수 없다니…… 바로 그때, 자신이 타고 온 백마에게로 시선을 돌린 사검평은 크게 놀라고 말았다. “앗!” 백마는 무형의 힘에 이끌리는 듯 어디론가 가고 있었던 것이다. 사검평의 뇌리를 번개처럼 스쳐 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는 이내 백마의 뒤를 쫓았다. 이때 금음은 끊어질 듯 이어지고 다시 끊어질 듯 이어지기를 반복하여 마치 누군가를 부 르는 듯하였다. 이윽고 백마와 사검평은 관도에서 멀리 벗어나 황량한 벌판으로 이끌려 갔다. 그리고 또다시 얼마나 달렸는지 모른다. 돌연 금음이 씻은듯이 사라지며 갑자기 사위가 온통 깊은 적막에 젖어들었다. 마치 태고 이래의 정적인 양 너무도 교교하여 한 가닥 괴기로움마저 느낄 정도였다. 사검평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사위를 둘러보았다. 멀리 달빛이 드리운 한 장방형 바위 위에 앉아 있는 인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거암 위에 반듯이 앉아 은은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한 청의중년인, 그의 무릎에 고색 창연한 고금(古琴)이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조금 전 금음을 탄주했던 장본인임에 틀림이 없었다. 순간, 사검평의 얼굴은 싸늘히 굳어졌다. “천공금성 사마등!” 사검평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청의중년인은 한 가닥 미소를 머금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 덕였다. “네가 염라천존 이원패의 전인인 사검평이 틀림없는가?” 사검평은 아연 흠칫하였다. 그러나 이내 의연한 자태를 되찾으며 늠름히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선배께서는 바로 천공금성 사마등이 아니십니까?” 청의중년인은 청아한 웃음을 지었다. “하하하…… 과연 사 년 전 노부가 처음 보았던 그대로 일세의 기재임에 틀림없구나 ……” 사검평은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로서는 사마등이 대체 언제 자신을 보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검평으로서는 꿈에도 모르는 일이 또 한 가지 있었다. 바로 눈앞의 절세기인 사마등이 천하제일의 신효를 자랑하는 주천금단을 자신에게 복용 시킨 장본인임을…… 뿐만 아니라 그가 강호에 출도하여 진전에서 한바탕 바람을 일으켰던 이래, 마치 유령과도 같이 자신의 뒤를 따라다녔음을 사검평은 정녕 꿈에서도 알지 못했다. 사검평은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선배께서 금음으로 후배를 이곳까지 부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마등은 사검평의 어투에 싸늘한 적의가 깃들여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내심 씁쓸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신비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담담히 말했다. “네 사부 염라천존과 노부는 과거 염라궁의 참사 이래 씻을 수 없는 원한 관계임이 분명 하나, 그것은 오직 네 영사와 노부와의 일일 뿐 너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다!” 그 말에 사검평은 돌연 앙천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선배님의 그 말씀, 후배의 둔한 머리로는 정녕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본시 원한은 대를 잇는 법, 불초 후배가 이미 염라궁의 이대 주인을 자처하는 바이니 당연히 선 배님과는 씻을 수 없는 원한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후배가 오늘 이렇듯 손을 쓰지 않고 있음은 나의 사부님께서 사마 선배와 직접 일을 해결하길 원하고 계시기에 제자 된 도 리로서 양보하는 것뿐입니다.” 어느새 그의 입가에는 싸늘한 냉소가 감돌고 있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후배는 오늘 이렇듯 사마 선배를 만나 한가로이 얘기만 하고 있지 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마등의 미간에는 한 가닥 그늘이 스쳤다. ‘저 아이의 자만심이 지나쳐서 자칫 화를 초래하기 쉽겠구나.’ 그는 형형한 안광을 뿜어 내며 태산 같은 위엄이 깃들인 어조로 엄숙히 말했다. “너는 네 사문의 절학이 천하제일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나 이는 정녕 어리석은 생각이 다. 비록 그 재주가 천의무봉(天衣無縫)한 자라 해도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는 이치를 깨닫지 못하는 한 결코 천하제일인은 될 수 없는 것이다.” 준열한 어조, 정녕 무림의 대선배로서 나이 어린 후배에게 베푸는 충고의 진심이 속속들 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사문의 원수인 사마등 앞에서 위축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는 사검평이었다. 그는 더욱 기세 등등하게 외쳤다. “하하하…… 후배의 지닌 바 절학이 천하제일이라고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다 만 한 가지, 천하의 그 누구라도 감히 천하제일을 자부하려면 능히 후배가 베푸는 흡혈마도의 일식을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마등의 안색은 더욱 어둡게 물들었다. ‘정녕 큰일이로구나. 미구에 닥칠 혈겁을 막아 내야 할 막대한 사명을 짊어지고 있는 아 이의 생각이 교만으로 가득 차 있으니……’ 그는 정녕 눈앞이 캄캄해지는 듯하였다. 순간, 사마등은 내심 비장한 결의를 굳혔다. “내 오늘 구태여 너를 만나려 했음은 미구에 네게 닥칠 위험과 한 가지 무서운 음모를 밝혀 알려 주려던 것이었다. 하나 네가 이렇듯 오만하니 그 교만함을 깨뜨리는 것이 더욱 시급한 문제인 듯싶구나.” 천공금성 사마등은 안색을 침중히 굳히며 말을 이었다. “너는 지금부터 흡혈마도를 펼쳐 노부를 공격하라. 만일 너의 공격이 노부의 옷깃 하나라 도 스친다면, 노부는 이후 두 번 다시 강호에 발걸음을 들여놓지 않으리라!” 순간, 흠칫 놀라는 듯했던 사검평은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선배님께서 천상신음을 구사하지 않는 한 그런 장담은 결코 믿을 수 없습니다. 만일 선 배님께서 천상신음을 사용치 않으신다면 후배 또한 흡혈마도를 쓰지 않고 오직 이 두 손만 으로 선배님과의 일전을 결할 것입니다.” 천공금성 사마등의 입가에 한 가닥 미묘한 미소가 감돌았다. ‘흐음…… 이 아이는 백년 전 노부가 그의 사부 염라천존과 대결했을 때 구공신검을 펼 쳤으나 이윽고 그에게 패배했던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로구나.’ 사마등이 이내 담담히 말하였다. “과연 염라천존의 후인답게 그 기개가 가상하구나. 좋다! 노부는 너의 뜻에 따르마. 다만 노부는 선배 된 입장이니 너에게 십 초를 양보하겠다.” 사마등은 이번 기회를 빌려 사검평의 오만방자함을 뿌리째 고쳐 줄 생각이었다. 하여 짐짓 거만한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이에 치솟는 분노를 누를 길 없어 사검평의 얼굴은 서릿발처럼 굳어졌다. 그러나 이내 이성을 되찾아 안색을 바로하며 말했다. “선배께서 이 버릇없는 후배를 위하여 양보해 주신다니…… 좋습니다. 그렇다면 많은 가 르침을 받겠습니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그는 한 줄기 칼날처럼 예리하기 이를 데 없이 사마등을 향해 덮쳐 가 며 수십 가닥의 암경을 뻗어 냈다. 쏴악! 마치 장마철 장대비 같은 공세가 사마등의 전신 요혈을 노리고 뻗쳐 갔다. 암운 속에서 섬전이 번뜩이듯 그 형세가 실로 눈부실 정도였다. 그의 이 일초는 세 개의 절학이 한꺼번에 펼쳐진 것이었다. 천사 주가청으로 하여금 천하를 풍미케 했던 산화낙영장법과 현천칠성보, 그리고 이 두 절초에 대승반야바라신공을 주입했던 것이다. 그러니 그 기세가 과연 어떠하겠는가? 강맹 무비함은 태산을 무너뜨릴 정도였고, 빠르기는 실로 전광석화였다. 파팟! 팟! 팍! 극치의 절예가 눈부시게 작렬하였다. 한데 분명 눈앞에 서 있어야 할 사마등의 신형이 어느 사이엔가 번뜩하더니 자취조차 없 지 않는가! 이제까지 그가 그림인 듯 앉아 있던 장방형 거암 위에는 오직 고색 창연한 고금만이 덩그 렇게 놓여 있을 뿐이었다. 슉! 슈욱! 그처럼 강렬 무비했던 기세였건만 사검평의 공세는 한낱 허공에 스러지는 이슬처럼 허무하 게 무산되고 말았다. 그때 등뒤에서 천공금성의 웃음 소리가 들려 오는 것이 아닌 “하하하…… 과연 뛰어난 절초로다. 하나 비록 쾌(快)와 속(速)을 겸하였으되 아직 변환 (變幻)이 부족하니 상대가 이미 허실(虛實)을 살필 수 있음이 흠이로다!” 사검평은 검미를 하늘 높이 치켜 올리며 파르르 떨었다. “선배, 너무 자만하지 마십시오. 아직 시작에 불과할 뿐이니……” 일성 낭랑한 소성과 함께 그의 몸은 허공 사오 장이나 위로 쾌속히 치솟았다. 그는 허공에 뜬 채로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자세를 취했다. 순간, 사검평의 몸 전체가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휩싸이는 듯 눈부신 홍광으로 둘러싸이 는 것이었다. 적양신공! 사검평 그는 마침내 이백 년 전의 절세기인 적양신군의 가공할 절학을 펼쳐 낸 것이었다. 그는 절세의 경공, 연대비공에 의하여 허공에 떠 있는 채 그대로 하늘이 무너질 듯한 사자 후를 터뜨렸다. “우아압!” 동시에 그는 두 손을 번개같이 내뻗었다. 일순 천공금성 사마등을 향해 수십 가닥의 눈부신 홍광이 쏘아져 나갔다. 우우우웅! 이는 천고의 절학 불영환인십삼장(佛影幻印十三掌)이었다. 한데 그의 장세는 약간 이질적인 면이 있었다. 만일 장세에 대승반야바라신공이 깃들였다면 필경 은은한 금광과 함께 불타의 환영이 창출 되어 일대 기이한 장관을 연출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검평은 대승반야바라신공 대신 패도절륜한 적양신공을 운용하고 있었다. 하여 그 본래의 장엄 무비한 면모는 나타나지 않았으되 그 위력만은 대승반야바라신공을 운용했을 때보다 오히려 더욱 강맹했 쿠르릉! 마치 한 마리 맹룡이 드높은 허공을 유영(遊泳)하듯, 그의 신형이 허공을 자유자재로 누비며 무서운 홍광을 폭사시켰다. 허공에서 공격하는 그 모습은 천신이 하강한 듯 일대 장관을 연출해 냈다. 그러나 사마등이 누구인가? 무림 천외삼성 중의 일인이요, 이미 백년 전 염라궁을 단 하룻밤 사이에 궤멸시켰던 절대기 인이었다. 사검평이 갑자기 허공으로 솟구쳐 천하무적의 살초를 퍼부었으되 그는 추호도 당황하지 않 았다. 오직 두 손을 기묘히 흩뿌렸을 뿐이다. 일순, 두 개의 크고 작은 원이 형성되며 거의 동시에 푸른 빛의 기류가 그의 몸 전체를 휘감았다. 다음 순간, 팟! 파팟! 팟! 천지를 가를 듯 괴성이 작렬했다. 한데 사검평이 발출한 회심의 홍색 광망은 사마등의 남빛 기류에 막혀 자취도 없이 스러지 지 않는가? “흑!” 허공 중에 떠 있는 사검평은 불영환인십삼장마저 헛되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알고 아연 경 악했다.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였다. 숨돌릴 사이도 없이 펼친 불영환인십삼장의 연환공격을 이처럼 쉽사리 벗어나는 고수가 있 을 줄 그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 어느새 사마등이 그에게 약속했던 십 초는 이미 훨씬 지나 있었다. ‘이토록 허무하게 패할 수는 없다!’ 사검평의 얼굴 전체가 마치 이글거리는 불덩이인 듯 빛을 뿜었다. 그는 심중에 최후의 행동을 취하기로 결심하며 다시 한 번 사자후를 토해 냈다. “으아아압!” 온 천지를 휘말아 올릴 듯한 기합성이 터져 나왔다. 찰나, 허공으로부터 한 줄기 섬광이 마치 떨어지는 혜성처럼 무서운 속도로 내리꽂혔다. 사검평은 대지를 향하여 무섭게 곤두박질 치며 두 손을 벽력치듯 내뻗었다. 순간, 제각기 다른 두 종류의 절세기공이 동시에 천공금성 사마등을 향해 휘몰아 닥쳤다. 그의 우수에서는 감히 눈뜨고는 직시할 수 없는 무서운 홍광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기인 적양신군이 이백 년 전 천하를 떨쳐 울렸던 광세의 기학 적양신공이었다. 또 한 줄기, 그의 좌수로부터 폭사되는 눈부신 금광은 두말할 것도 없이 대승반야바라신 공이었다. 쏴악! 마치 명암이 엇갈리듯 핏빛과 금빛, 두 가지의 광망이 절묘히 뒤섞여 흉맹스럽게 휘몰아쳤 다. 이처럼 도(道), 불(佛) 양가의 절학을 한 번에 펼치는 것은 사검평으로서는 처음으로 시도 해 보는 바였다. 두 가지 기류가 동시에 쏘아져 오자 사마등의 청수하던 얼굴에도 한 가닥 경악의 빛이 떠 올랐다. 그러나 놀라움도 잠시, 그는 두 손을 합장하듯 모았다가 쾌속 무비하게 홱 뿌려 냈다. 슈욱! 두 줄기 남빛 기류가 화살처럼 날아갔다. 사검평의 손으로부터 파초처럼 뻗어 나간 금, 홍, 두 가닥의 기류와 사마등의 남색 기류가 허공에서 격렬히 부딪쳤다. 한데 이번에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사검평은 자신의 절학이 한낱 물거품처럼 와해됨을 역력히 느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천 근 무게의 무서운 기운이 압도하듯 전신을 휘감아 오는 것이 아닌가! 다음 순간, 사검평의 몸은 천 근 무게의 바위인 양 지상으로 곤두박질 쳤다. “앗!” 천공금성 사마등은 대경 실색했다. 그가 비록 극고의 강기절예를 펼쳐 내기는 하였으나 이는 오직 사검평의 무서운 공세를 막 아 내기 위한 것이었을 뿐, 중상을 입힐 의도는 추호도 없었다. 만약 이대로 떨어진다면 필경 목숨을 보장할 수 없었다. 순간, 사마등의 신형이 나는 듯 쏘아졌다. 이윽고 그는 진광석화와 같이 사검평을 낚아채어 두 손으로 받쳐 안으려 했다. 한데 천 근 바위인 양 무겁던 사검평의 신형이 돌연 한 점의 구름처럼 가뿐해지는 것이 었다. 순간, 팟! 사검평은 순식간에 삼여 장을 날아 지면 위로 표연히 내려서지 않는가? “엇!” 사마등의 얼굴이 경악에 물들었다. 사검평의 안색으로 보아 전혀 부상당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이럴 수가……! 저 아이는 분명 노부의 천상옥청강기(天上玉靑 氣)의 반탄지기(返 彈之氣)에 의해 극도의 내상을 입었음이 분명한데 어찌 저렇듯 멀쩡할 수 있단 말인가?’ 사마등은 곤혹에 가득 찬 시선으로 사검평을 바라보았다. 사검평 역시 겉으로는 태연자약하였으나 내심으로는 크게 경악하고 있었다. 그는 분명히 사마등의 반탄지기에 의해 엄중한 내상을 입었었 그런데 갑자기 단전으로부터 자신도 알 수 없는 신비의 내력이 솟구쳐 단숨에 사지혈맥으로 퍼져 나간 것이었다. 하여 즉시 들끓던 기혈을 바로잡고 회복 불능일 것 같았던 내상마저 씻은듯이 사라지게 한 것이었다. 지금도 사검평의 몸에서는 신비로운 현상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의 단전에서는 여전히 화산의 폭발인 듯 뜨거운 열류가 끊어지지 않고 용솟음치며 그의 전신으로 급속히 퍼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 이유를 알 수 없는 신비의 현상으로 인해 사검평은 구름 위를 나는 듯 상쾌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사검평은 사마등을 힐끔 바라보며 엄숙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역시 사마 선배님의 일신절예는 천하에 당적할 자가 없을 무상한 위력입니다. 그러나 이 후배는 아직 패배를 자인하고픈 마음이 없습니다. 다시 한 번 후배의 공격을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말을 끝내기 무섭게 신형을 번뜩여 한 가지 기이한 자세를 취했다. 사마등 또한 아연 긴장의 빛을 띠며 두 손을 합장하듯 앞으로 모았다. 사검평의 양손이 쾌속 무비하게 허공을 갈랐다. 일순, 그것은 기이한 변화를 보이며 사마등에게로 덮쳐 들더니 그의 일 장쯤 앞에 이르렀 을 때 돌연 변하여 금, 홍 두 가지 찬란한 빛깔의 기류가 되어 마치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은은한 금광과 핏빛의 혈광, 두 가지 장영(掌影) 속에는 불타(佛陀)의 모습이 환영처럼 나 타나 있었다. 아른거리며 나타났던 불타의 모습은 삽시간에 수백 수천으로 불어나며 사위를 가득 메웠 다. 불영환인십삼장! 일찍이 망아대사가 서역의 연화존자로부터 전수받은 석존항마환인수(釋尊降魔幻印手)에 소 림 금강선장(金剛禪掌)의 장점만을 취하여 창안해 낸 신기막측한 장공이었다. 다만 석존항마환인수 중에서 가장 위력적이라 할 만한 후반 삼 절초가 망아대사에게는 전수 되지 않았기에 옥(玉)의 티라 할 만하였으나 역시 불영환인십삼장은 당대 최고의 장법절학이었다. 더구나 지금 사검평이 전개하는 불영환인장에는 사문의 무상신공인 대승반야바라신공마저 깃들여 있었으니 실로 가공할 위력이었다. 천공금성 사마등은 아연 탄식해 마지않았다. ‘이 아이의 일신절예가 설마 이런 경지에까지 이르렀을 줄이야……!’ 그때 사검평의 좌수에서 불덩어리인 듯 무서운 홍광이 만들어지더니 불타의 환영 사이를 비집고 곧장 사마등에게로 쏘아져 갔다. 화르륵! 상대를 단숨에 한줌의 재로 만들고 말 무서운 기세, 이 광란의 홍염이야말로 적양신군의 유 학 적양파천오식(赤陽破天五式) 중에서도 절정으로 일컬어지는 파천혈류(破天血流)였다. 적양파천오식! 천하에서 가장 극양(極陽)하고 가장 패도(覇道)적인 절학이었. 바로 이 오 초의 절학으로써 적양신군의 명호는 이백 년 전 강호에 떨쳐 울렸고, 그로 인해 강호의 무수한 절정고수들이 양광 아래 이슬처럼 스러져 가지 않았던가? 이백 년 전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황산신니를 제외하고는 이 절학을 받아 낸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 그 위력이야말로 능히 짐작할 만한 것이었다. 이 같은 상황은 실로 두 명의 사검평이 사마등을 공격하는 것과 같은 효과였다. 순간, 천지가 온통 금빛과 핏빛으로 물들어 비록 천공금성 사마등일지언정 속수무책으로 한줌 가루가 될 듯만 싶었다. 그러나 사마등 또한 결코 좌시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자신을 향해 쏘아 오는 두 줄기 무섭고도 독랄한 신공을 똑바로 주시하더니 소맷자 락을 폭풍우처럼 휘둘러 쌍장을 기묘하게 전개했다. 순간, 천공금성 사마등의 신형 주위로 삼삼(森森)한 남청색 기류가 생성되더니 그를 둘러 싸 버렸다. 이것이 바로 천상옥청강기(天上玉靑 氣)였으니, 이 상고절학은 사마등이 백년 전 염라천존 이원패로부터 좌절의 수모를 겪은 후 설욕을 위해 피나는 수련을 거듭하다가 우연히 은거하 던 절곡의 황량한 고동(古洞) 속에서 얻은 것이었다. 어쨌거나 그 뛰어난 위력은 경세(驚世)적이라 일컫기에 추호도 손색이 없었다. 천하무림에서 다시 찾아볼 수 없는 세 가지 신공이 맞부딪치는 순간, 마치 뜨거운 불덩어리 가 물속으로 곤두박질 치듯 실로 형언키 어려운 일대 장관이 연출됐다. 꽈르르…… 콰쾅! 하늘도 땅도 일시에 무너지듯, 실로 엄청난 굉음이 작렬했다. 순간, 사검평은 아차 싶었다. 혼신의 힘을 다했던 이 일초이식(一招二式)의 공격마저 허사로 끝났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나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더욱이 그의 단전에서는 마치 용암이 분출되듯 열기가 솟구치고 있어서 어차피 손을 멈출 수 없는 처지였다. “차아앗!” 사검평은 천지를 무너뜨릴 듯한 대갈일성과 함께 잇달아 다음 공격을 퍼부었다. 파팟! 팟! 파천비광(破天秘光)! 꽈르르…… 환불금영(幻佛金影)! 적양파천오식 중의 제이식 파천비광은 그 빠르기가 섬전 같아, 만일 보검을 들고 시전한다 면 실로 천하제일의 쾌검살식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지금은 검이 아닌 장(掌)으로 시전해 내고 있었지만 이것 역시 천하제일의 쾌장살초(快掌殺 招)였다. 환불금영은 불영환인십삼장 중에서도 최절정의 초식이었으니, 순식간에 찬란한 금광이 사 위에 가득 찼다. 이 일련의 공격은 필설로 미처 표현할 수도 없을 만큼 빠르게 이루어졌다. 하여 무위로 돌아갔던 최초 일식에서부터 다음 초식까지 걸린 시간은 실로 찰나지간에 불 과하였다. 파팟! 팟! 팍! 폭죽 터지듯 날카로운 파공음이 연거푸 작렬하며 사마등의 주의를 둘러싸던 남청색 기류가 흩어지듯 희미해졌다. 그때, 오직 방어만 하던 천공금성 사마등의 입에서 충천하는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우아아……!” 동시에 태산을 압도할 듯 두 손을 무겁게 뻗어 냈다. 우웅…… 웅! 실로 듣는 이의 넋을 빼앗을 듯한 굉음이 만공에 가득하였다. 그가 휘두르는 두 손에서는 무서운 강기가 부챗살처럼 퍼져 나왔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비장했던 최고의 절학이라 할 수 있는 천룡광무진천신장(天龍廣武震天神 掌)이었다. 꽈르르…… 폭풍과 같은 기세,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 실로 위용도 당당한 천고의 절학이었으니, 그 가공할 위력을 어찌 이루 필설로 형용할 수 있으랴! 천룡광무진천신장(天龍廣武震天神掌)은 삼백 년 전, 고금제일인으로 칭송받던 천룡자(天龍 子)가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절학이었다. 만일 천공금성 사마등이 백년 전에 이 천룡광무진천신장이나 천라항마검법 중의 어느 한 가지라도 완벽하게 익히고 있었더라면 염라천존 이원패와의 결과도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었다. 어쨌든 천공금성 사마등이 절학을 펼쳐 내기 시작하자 상황은 완전히 급변하고 말았다. 사검평의 공격은 눈에 띄게 약화되었고, 반면 사마등은 천양지차의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 다. 그는 여유있게 천룡광무진천신장을 전개하는 일면, 사검평이 전개하는 절학을 세밀히 관 찰하였다. 사실 그의 진심은 결코 사검평을 해침에 있지 않았다. 하여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천룡광무진천신장을 극도로 발휘시킴으로써 단숨에 사검평을 격패시킬 수 있었건만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 이로써 겉으로 보면 절세의 한 전대기인과 인중룡(人中龍)의 자질을 지닌 천부기재의 대 결은 명실상부의 팽팽한 국면을 이루었다. 한데 사마등은 지금 사 년 전 자신이 손수 사검평에게 복용시켰던 주천금단에 대해 깜박 잊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검평의 체내에서 가공할 신효(神效)를 발하는 영단의 위력, 어찌 사마 등 같은 절세의 고인이 이런 중대사를 까마득히 잊었단 말인가? 천공금성 사마등은 이미 조금 전에 그 사실을 깨달았어야 했다. 자신이 발한 천상옥청강기의 반탄지력에 의해 치유 불능의 중상을 입은 사검평이 순식간 에 회복되었을 때 말이다. 어쨌든, 사검평의 체내에서는 바야흐로 주천금단의 신효가 최고조에 달하고 있었다. 그의 단전에서는 화산이 불을 뿜듯 쉴새없이 온몸의 진기가 폭발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사검평 자신은 이러한 변화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천공금성 사마등의 신비절학에 의해 자신이 공격이 무력하게 저지당한 데 격분하여 연거푸 절초를 쏟아 내기에만 바빴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한 손으로 적양파천오식을 펼치는 일면 나머지 한 손으로는 불영환인십삼장을 역시 쾌속하게 뿌려 내고 있었다. 불조현신(佛祖現身), 천불군림(天佛君臨)…… 그 불가사의한 초식이 펼쳐질 때마다 천지를 진동시키는 굉음이 울려 나왔다. 쿠우우우! 그때 사검평의 얼굴에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의 미간을 중심으로 얼굴색이 둘로 나뉘는 것이었다. 한쪽은 달아오른 불덩이인 양 핏빛으로 붉었고, 나머지 한 쪽은 은은히 금빛으로 물들었 다. 그 같은 현상은 시간이 흐를수록 확산되어 급기야는 그의 몸 전체가 서로 다른 두 개의 광 망에 휩싸이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실로 형언할 수 없이 신비로운 현상이었다. 대체 사람으로서 어찌 이토록 뚜렷하게 일신이 둘로 나뉘어질 수 있는가? 더불어 그의 공세 역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드세어졌다. “차압!” 천지를 뒤흔드는 기합성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홍수에 불어나는 급류처럼 폭발적인 공세가 쏟아져 나왔다. “으음……” 사마등은 나직한 신음을 흘리는 한편 가일층 공력을 끌어올렸 그 정도면 사검평을 상대하기 충분하리라 생각하는 사마등이었 한데 사마등의 기대는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꽈르릉! 쌍방의 절학이 격돌하며 굉음과 불꽃을 튀겼으나 쉽사리 만회하리라던 승세는 전혀 이루어 지지 않았다. 그제서야 사마등은 사검평에게 일어나고 있는 기이한 변화가 바로 자신이 손수 복용시켰 던 주천금단의 약효 때문이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잠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던 그는 내심 단단히 각오한 듯 안색을 싸늘히 굳혔다. 그는 얼음판 위를 미끄러지듯 갑자기 뒤로 삼 장여나 물러났다. 동시에 창노한 일성을 토해 냈다. “너는 이 일초에 특히 유념해야 할 것이니라!” 그는 말을 마치기 무섭게 한 줄기 아지랑이인 양 해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곧 수십 명의 모습으로 되살아나며 천룡광무진천신장을 시전하는 것이 아닌가! “앗!” 사검평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의 일초야말로 자신의 생사가 판가름날 최후의 공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즉시 전신의 모든 공력을 끌어올려 적양파천오식과 불영환인십삼장 중 최고의 살초 를 동시에 시전했다. 파천멸혼(破天滅魂)! 만천불영(滿天佛影)!惠? 그의 양손으로부터 뿜어져 나온 금(金), 홍(紅) 두 줄기의 광망이 순 식간에 수십 가닥으로 나누어지며 사마등의 환영에 맞부딪쳐 갔다. 팟! 파팟! 폭죽이 터지듯 허공에서 작렬하는 파공음, 이는 분명 사마등의 환상에 격중되어 터지는 소 리였다. 그는 분명 눈에 보이는 사마등의 환상을 모조리 부숴 버리고 있었다. 한데…… “하하하……” 사검평의 머리 위로부터 낭랑한 웃음 소리가 들려 오지 않는 “앗!” 사검평은 대경 실색하여 잇따라 펼쳐질 사마등의 일격에 대비하려 했다. 한데 남색 기류가 태산 같은 무게로 전신을 휘감아 오지 않는 “아차!” 사검평은 거의 동물적인 본능으로 위기를 직감했다. 그는 대승반야바라신공과 적양신공을 극도로 끌어올려 황급히 일신을 보호했다. 파팟! 천공금성의 남빛 기류와 그가 급급히 내뿜은 두 줄기 광망이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꽈르르…… “우우욱!” 경천동지의 대굉음과 처절한 비명이 비단폭처럼 야공(夜空)을 가른 것은 거의 동시였다. 사검평은 실 끊어진 연처럼 허공으로 튀어올랐다가 이내 썩은 고목처럼 땅에 쓰러져 나뒹 굴었다. 허공에 떠 있던 천공금성 사마등이 지면 위로 표연히 내려섰다. 그의 안색은 침중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죽은 듯 쓰러져 있는 사검평을 쳐다보며 길게 탄식해 마지않았다. “아! 노부가 염라천존 이원패와 대결코자 창안해 낸 천상인환마영신법(天上引幻魔影神法) 이 절세기재의 목숨을 빼앗게 되다니…… 하나 어쩔 수 없었다. 이 아이의 몸에서 주천금단이 효력이 갑 자기 발현되는 바람에 손을 늦췄다가는 노부가 당할 상황이었으니……” 아무리 스스로의 행동을 합리화시키려 해도 그의 가슴은 천근 무게의 바위에 눌리듯 무겁 고 답답할 뿐이었다. 월색도 그의 슬픔을 아는가? 슬그머니 구름 속으로 젖어들어 사위를 암야(暗夜)로 변모시켰다. 第 十六 章 대협혼(大俠魂) 1 슬픔으로 가득했던 사마등의 얼굴은 서서히 경악으로 물들어 갔다. “이럴 수가……” 정녕 믿을 수 없는 일이 그의 목전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죽은 듯 쓰러져 있던 사검평이 천천히 일어서는 것이 아닌가? 천공금성 사마등은 믿을 수 없었다. 아직 비틀거리기는 하였으나 사검평은 소름 끼치는 살기를 뿜어 내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 다. 전율하리만큼 흉험한 모습이었다. 코와 입에서는 쉴새없이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고, 그의 얼굴은 방금 관 속에서 나온 시신(屍身)인 양 푸르뎅뎅하여 평소의 그 관옥 같던 피부는 간곳조차 없었다. 하지만 두 눈에서 폭사해 내는 살광(殺光)은 사마등의 혼백을 얼어붙게 하고도 능히 남음 이 있었다. “어찌 천룡광무진천신장에 격중되고서도 살아날 수 있단 말인가?” 사검평은 안색을 싸늘히 가라앉힌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후배는 이 대결에서 완전히 패배했음을 인정합니다. 하나 후배는 다시 한 번 선배님과 대 결하기를 원하되 흡혈마도로써 임하고 싶습니다.” 전신을 피로 물든인 채, 얼음장처럼 차갑게 뱉어 내는 사검평의 목소리는 소름이 오싹 끼 칠 지경이었다. 천공금성 사마등, 천외삼성 중 일인으로서 백년 전 염라궁을 단 하룻밤 사이에 궤멸시켰 던 절정고인이건만 한 순간 오한을 금치 못했다. 진정 난생처음으로 느껴 보는 두려움의 감정이었다. 그때, 사검평의 전신은 소름 끼치는 살기로 완전히 뒤덮여 있었다. 더구나 그가 오른손에 움켜쥐고 있는 검은 바로 그 옛날 자신에게 회한의 일패를 안겨 주 었던 흡혈마도가 아닌가! 사마등은 감히 방심할 수 없었다. 그는 소매 속에서 길이 한 자 정도의 소검을 꺼내 든 채 묵묵히 사검평을 주시하였다. 사검평도 상대의 수중에 쥐여진 작은 검을 보자 흠칫하였다. “구공신검!” 절세적 위력을 자랑하는 천하제일의 신검, 하나 사검평의 얼굴에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의 뇌리 속은 오직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었으니, 이제 곧 펼쳐질 일초에 생사가 좌우되리라는 것이었다. 천공금성 사마등의 뇌리는 의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천룡광무진천신장은 진정 광세의 기학으로, 일단 격중되면 십만 근이 넘는 거암(巨岩)일지 라도 단숨에 가루로 만드는 위력이 있는데 사검평이 어찌 그 일장을 맞고도 살아날 수 있었단 말인? 정녕 기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 경이로운 일은 주천금단의 힘 때문이었다. 조금 전 천룡광무진천신장이 사검평의 몸에 격중되었을 때, 그는 심맥이 끊어지고 오장육부가 뒤틀렸던지라 대라신선(大羅神仙)이 하계한다 해도 구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한데 사검평의 육신이 허공을 날아 지상에 추락하는 순간, 그 충격으로 인해 그의 단전으 로부터 막강한 열기가 솟구쳐 거의 끊어졌던 심맥이 저절로 이어지고 이탈했던 오장육부도 되돌아와 제 기능을 되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주천금단! 천공금성 사마등이 수십 년간 천하 각처를 오가며 수집한 천고(千古)의 기약영초(奇藥靈草) 는 정녕 전무후무한 기적을 창출한 것이다. 더구나 그 신효는 사검평을 되살려 놓은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시각이 흐를수록 믿을 수 없을 만큼 빨리 그를 정상으로 회복시켰으니…… 막 관에서 나온 듯하던 그의 기괴스러웠던 얼굴은 어느새 은은한 홍조로 물들어 있었다. 천공금성 사마등은 흡혈마도의 살초가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를 능히 격퇴시킬 자신이 있었다. 다만 그렇게 되면 사검평의 목숨 또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니, 앞으로 닥칠 무림의 겁 란은 과연 그 누가 막아 낸단 말인가? 사 년 전 그가 사검평을 처음 보았을 때, 그 골상에 나타난 천지합교의 현상을 보고 앞으로 무림을 혈겁에서 구할 유일한 기재가 바로 이 아이임을 지목하였다. 한데 어찌 사검평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만일 이러한 사실을 이유로 사마등이 전력으로 싸우지 않는다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할 처지였다. 사검평의 죽음인가, 사마등의 죽음인가? 이는 실로 어떻게도 할 수 없는 난경(難境)이었다. 일세의 기인이라는 칭호를 받는 천공금성 사마등이었으나 온몸이 조여 드는 긴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한동안 고민스러워하던 천공금성 사마등의 두 눈에서 돌연 무서운 광망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사검평의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윽고 사마등이 들고 있던 구공신검으로부터 그 검신(劍身)에 박힌 다섯 개의 보주로 인 해 오색 영롱한 광휘가 뻗쳐 나왔다. 그것은 마치 오색의 무지개처럼 사마등의 전신을 휘감기 시작했다. ?紅), 백(白), 청(靑), 황(黃), 녹(綠)의 오색 빛은 마치 회오리 처럼 뒤섞였다. 천공금성 사마등의 모습은 그 안에서 환영인 듯 희미하게 사라지고, 사검평에게는 오직 출렁이는 오색 빛의 물결만이 보였을 뿐이다. 휘르릉…… 한 줄기 괴음이 허공에 작렬했다. 싸늘한 금속성! 사검평이 도저히 사람의 행동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흡혈마도를 뽑아 곧장 사 마등에게로 쏘아 가며 내는 소리였다. 순간, 사검평의 전신을 적환(赤環)으로 에워싸는 핏빛의 붉은 도기(刀氣)! 그것은 순식간에 파문처럼 터져 나가며 사마등을 향하여 폭우처럼 퍼부어졌다. 사마등의 신형은 온통 선혈과도 같은 적홍색 도막(刀幕)으로 엄밀하게 둘러쳐졌다. 그때 사마등의 입에서 일진 사자후가 토해졌다. “천라파황(天羅破荒)!” 찰나, 그의 구공신검으로부터 오색 빛의 검화가 뿜어지듯 확산되어 나왔다. 그것은 사마등을 한차례 휘감아 도는 듯하더니 사검평의 절세살초 멸정에 정면으로 부딪 혀 갔다. 꽈르르릉! 눈부신 불꽃이 휘날리며 예리한 금속성이 천지를 갈랐다. 파팟! 두 절초가 부딪는 순간, 사마등에게로 엄습하던 붉은 도망은 그 기세가 주춤하는 듯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사마등의 입에서 재차 기합성이 터져 나왔다. “천라멸멸(天羅滅滅)!” 돌연, 무수한 검화를 일으키던 구공신검이 눈부시게 푸르른 검기로 화하였다. 꽝! 그것은 마치 용암의 분출인 듯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한 순간, 금방이라도 사마등을 난자할 듯만 싶었던 핏빛 도기는 씻은듯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순간, 사검평의 신형이 비틀거리며 백마에게로 쏘아 갔다. 그가 떼는 발짝에는 선혈이 흥건히 고여 있었다. 히히힝! 두두두두…… 백마는 자신의 등에 엎어져 있는 주인을 태운 채 빠르게 멀어져 갔다. “으음……” 사마등은 나직한 신음을 흘리며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즉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운공조식에 들어갔다. 마지막 일초에 전신의 모든 공력을 주입했던 그는 거의 탈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미 사검평의 모습은 간곳없고 불타의 좌사처럼 운공조식하는 사마공의 머리 위로 어둠만 이 소리없이 내리덮였을 뿐이다. 잠시 후…… 굳게 감겼던 천공금성 사마등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그 눈에는 이내 깊은 회한의 빛이 서렸다. 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장차 그 아이가 오늘의 오해로 인하여 노부에게 흑심을 품는다 하여도, 노부는 결코 그 아이의 목숨을 빼앗지는 않으리라……” 그는 한차례 달빛마저 스러진 암야의 허공을 바라보며 깊이 한숨쉬었다. “그 아이가 오늘은 노부에게 패했을지언정 이미 그 아이의 몸에서 주천금단이 효력을 발 휘하기 시작한 이상, 얼마 안 가 그 아이의 성취는 능히 노부를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다만 한 가지, 노부가 근심하는 것은 그 아이의 성격 이 지나치게 강직하여 오히려 속인의 계략에 넘아가기 쉬우니, 그로 인해 천하에 해를 끼치지 않을까 하는 점이로다……” 그는 암야의 허공에 무수히 빛나는 성군을 바라보며 독백을 계속했다. “만일 그 아이의 오해가 너무도 깊어 노부의 힘으로 도저히 돌이킬 수 없다면, 나는 스스 로 염라천존 이원패 앞에 목숨을 바쳐 그로하여금 어린 제자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리라!” 이는 정녕 비장한 결의였다. 사검평, 그로 하여금 무림의 평화를 지키게 하기 위해 숙적 염라천존에게 스스로 목숨을 던지려는 비장한 결의. 정녕 이는 숭고한 희생의 정신이었으니…… 그 누가 감히 천공금성 사마등의 이러한 대협혼을 따질 수 있으랴! 지금 사마등은 착잡한 마음을 달랠 길 없었다. 오늘 자신이 처했던 상황이 너무나 안타까웠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는 백년 전 염라천존 이원패에게 당했던 통한의 좌절을 보복키 위해 백년간이나 고 심하여 두 가지 절초를 창안했었다. 한데 엉뚱하게도 그 두 절초를 사검평에게 써야 했으니…… 정녕 이러한 상황은 꿈에서조차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천공금성 사마등은 우두커니 서서 새삼 자신이 백년간 수련 끝에 성취한 두 절초를 돌이켜 봤다. 천라파황! 그의 선사(先師) 천룡자의 유학인 천라항마검법 중에서도 가장 엄밀한 수비를 자랑하는 희 세의 절초였다. 두 번째 초식 천라멸멸. 이 역시 천라항마검법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살초였으니, 실로 최상승어검지학(最上乘馭劍 之學)으로 불려도 추호의 손색이 없었다. 천공금성 사마등은 조금 전 사검평과 격돌할 당시, 최상의 수비절초 천라파황에 천상옥청 강기를 십 성이나 주입시켰다. 그러니 염라천존의 절학이라 할지라도 주춤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절세어검지학 천라멸멸을 발하니 과연 일거에 승세를 얻을 수 있었다. 이로써 그는 절세살초 멸정을 격패시키는 데는 일단 성공하였다. 그러나 사마등은 최후의 순간에 구공신검의 천상옥천강기를 거의 오(五) 성(成)이나 감퇴 시켰다. 이는 사검평으로 하여금 일말의 활로를 찾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하나 이것은 정녕 목숨을 건 도박이라 아니 할 수 없었다. 그의 계산이 약간이라도 빗나간다면 그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 다행히도 결과는 사마등의 뜻대로 되었다. 사검평은 비록 중상을 면치 못했으나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백마에 올라타 그것에 의지 하여 이곳을 빠져 나갈 수 있었다. 조금 전의 상황을 돌이키며 묵묵히 서 있던 사마등은 갑자기 흠칫 놀라는 표정이었다. “흑!” 그의 손에 구공신검이 들려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천공금성 사마등의 뇌리를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가 천라멸멸을 시전하던 중간에 진력을 회수하는 바람에 쏘아 냈던 구공신검을 회수하 지 못했던 것이다. ‘나의 보검은 그 아이의 몸에 격중된 채 그대로 꽂혀 있단 말인가?’ 순간 그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어렸다. 그것은 자신의 보검을 잃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신검을 꽂은 채 그대로 떠난 사검 평에 대한 염려 때문이었다. 순간, 그의 시야에 잡혀 드는 물체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흡혈마도였다. 천공금성 사마등의 안색은 더욱 침중히 가라앉았다. 사검평, 그가 사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이 흡혈마도마저 거두지 못하고 떠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의 상태가 얼마나 다급했던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일순, 천공금성 사마등의 왼손이 소리없이 앞으로 내뻗어졌다. 강력한 흡인력이 발출되어 흡혈마도를 끌어당겼다. 다음 순간, 천공금성 사마등은 수중의 흡혈마도를 격동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깊이 탄 식했다. ‘아! 노부 사문의 보물인 구공신검은 그 아이의 몸에 박힌 채 없어지고 내 손에는 마도가 쥐여졌으니, 이 무슨 얄궂은 하늘의 계시인가?’ 그의 눈길은 다시 암야로 덮인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어 그는 회환에 어린 독백을 흘렸다. “아아! 노부는 오늘 그 아이의 주위를 둘러싼 위험과 강호에 닥쳐 올 암운의 진상을 알려 주려고 그를 만났던 것이다. 하나 이런 결과를 빚을 줄이야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하나 그 아이가 진정 무림의 위기를 구하고자 하늘이 보내신 기재라 면 그를 버리지는 않으시리……” 이때, 사마등의 소매가 슬쩍 한 줄기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가 처음 앉아 있던 장방형 거암 위에 있던 고금이 소리없이 그에게로 날아왔다. 다음 순간, 무림의 절세기협 천공금성 사마등의 모습은 씻은듯이 사라지고 이곳에는 다시 무심한 밤바람만이 스쳐 갈 뿐이었. * * * 아련히 미명(未明)이 밝아 오는 시각. 사위를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울창한 수림 속을 한 필의 백마가 미친 듯 헤매고 있었다. 이미 동녘은 움터 오고 있었건만 숲이 너무도 울창하니 이곳은 아직 칠흑 같은 어둠이었 다. 길도 없는 깊은 산중에서 미친 듯 헤매고 있는 백마의 등 위에는 전신이 피로 물든 사검평 이 엎드려 있었다. 그는 사마등의 천라멸멸 일검에 치명적 일격을 당하였으나 혼신의 힘으로 말등에 올라탄 후 미친 듯 그 자리에서 빠져 나왔. 이것은 미처 생각할 사이도 없이 행한 본능적 반사 작용이었다. 그는 마상에 올라타기 무섭게 미친 듯 달렸다. 그러나 그의 가슴에는 절세보검인 구공신검이 깊숙이 박혀 있으니, 그곳에서 흘러내리는 선혈로 인하여 순식간에 그의 전신은 핏물로 물들고 말았던 것이다. 과다한 출혈로 인해 그는 정신이 아득해져 지금 자신이 가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판단할 수 없었다. 하여 백마에 모든 운명을 의지하고 이렇듯 정신없이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백마도 두 시진 동안이나 어둠에 덮인 수백 리 산야(山野)를 미친 듯 달렸던지라 극도의 탈진 상태였다. 다만 무의식중에도 본능처럼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일진의 청아한 소리가 들려 왔다. 때마침 움트는 여명의 빛처럼 가슴까지 씻어 내리는 옥음(玉音). 이는 분명 물소리임에 틀림없었다. 백마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홀연히 질주하던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곧 그 물소리를 따라 유인되듯 걸어갔다. 얼마를 걸어가니 드디어 백마 앞에 수려한 계곡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정처럼 맑은 물이 계곡 사이로 흐르고 있었다. 백마는 지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길게 고개를 드리워 차디찬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순간, 백마의 등뒤에 죽은 듯 엎드려 있던 사검평이 미끄러져 내려와 첨벙, 물속에 잠겼 다. 하얀 물보라가 튀겼다. 차디찬 계곡 물이 사검평의 몽롱했던 정신을 순간이나마 맑게 해주었다. “아……” 그의 입에서 한 줄기 신음이 뿜어져 나왔다. 어렴풋이 정신을 차린 그가 억지로 몸을 주체코자 했으나, 그것은 그의 마음뿐, 몸이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사검평의 가슴에 박힌 구공신검이 차디찬 물에 닿자 그는 전신이 산산이 부서지는 듯한 고 통에 사로잡혔다. “으으윽……” 수정같이 맑던 계곡 물이 순식간에 붉은 피로 물들었다. 백마도 주인의 고통에 공감하듯 애절히 울부짖었다. 히히힝…… 무서운 고통으로 인해 사검평은 다시금 서서히 의식을 잃어 갔다. 아련히 귓속에 메아리쳤던 백마의 울부짖음마저 그의 귓가에서 멀어져 갔다. 어디선가 꿈결처럼 여인의 교성과 웃음 소리가 한데 뒤섞여 들려 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곧 영원한 침묵의 심연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것은 너무도 깊은 어둠의 세계였다. * * * 실로 헤아릴 수 없는 심연의 어둠. 그 깊고도 깊은 암흑의 바다에서 사검평은 거듭 고통에 몸부림쳤다. 전신이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돌연, 그의 눈앞에 형언할 수 없이 흉흉한 망령(亡靈)들이 출현했다. 산발한 채 피를 흘리는 그들은 아우성치며 사검평의 사위를 에워쌌다. “호호호…… 애송아, 네놈이 우리를 이렇듯 황천으로 보내더니 네놈도 기어이 우리 뒤를 따라오는구나! 오냐, 어서 오너라! 우리는 네놈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흐 흐……” “흐흐흐……” 사방에서 소름 끼치는 괴소가 혼백을 뒤흔들었다. “흐흐흐…… 어서 오너라! 이놈, 불구대천의 원수 사검평아!” 사검평은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혔다. “아…… 안 돼! 나는 너희들을 따라 황천으로 갈 수 없다! 내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았 어……” 소름 끼치는 악몽 속에서 그는 피맺히게 절규했다. 금방이라도 자신의 숨통을 조일 듯 달려드는 망령들을 향해 필사적으로 두 손을 내뻗었다. 하나 그의 두 손에 잡히는 것은 짙은 어둠뿐. “아아……” 사검평은 미친 듯 허우적거렸다. 그때 그는 문득 한 줄기 빛을 본 것 같았다. 그렇다! 그것은 분명 빛이었다. 순간, 사검평은 그제서야 비로소 자신이 지금껏 보았던 모든 것이 환상임을 깨달았다. “아아……” 그는 번쩍 눈을 떴다. 순간 자신이 전혀 알 수 없는 곳에 누워 있음을 깨달았다. “앗!”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황급히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옆으로 하나의 창이 있었고 그로부터 은은한 햇빛이 비쳐 들고 있었다. 햇빛에 비친 실내는 무척이나 정갈했다. 자신이 누워 있는 침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둥근 나무탁자가 있었고, 그 옆으로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한쪽 벽에 걸린 산수화 한 폭…… 실내에 가구라고는 이것이 전부였다. 비록 간소하나 깨끗한 내부. 하여 사검평은 이곳이 누구의 처소인지 좀체 짐작할 수 없었다. 사검평은 침상에서 내려오려 했다. 그러나 한 줄기 신음을 뿜으며 괴로운 듯 다시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왼쪽 가슴으로부터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이 전신으로 퍼져 나왔기 때문이다. 사검평은 본능적으로 가슴을 더듬었다. 가슴을 동여맨 부드러운 천의 감촉이 전해졌다. “으음……” 그는 가까스로 고통을 참으며 자신의 가슴을 살폈다. 백설처럼 흰 천이 정성껏 그의 가슴에 동여매어져 있었다. 또한 그가 입고 있던 백의도 어느 사이엔가 깨끗한 황의로 갈아입혀져 있었다. 사검평은 자세를 편히 하고 자리에 누운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정신을 잃기 전까지의 상황이 주마등처럼 뇌리에 떠올랐다. 먼저 자신의 회심의 일초 멸정이 천공금성 사마등에 의해 와해되던 일이 떠올랐다. 이어 그에 의해 중상을 입은 채 마지막 혼신의 힘으로 백마를 타고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 어났던 것까지 생각해 낸 그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제까지 천하무적이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문의 절학 멸정이 천공금성 사마등 에 의해 참혹하게 격패당했음을 상기해 낸 것이었다. 형언할 수 없도록 깊은 좌절감이 그의 전신을 엄습해 왔다. ‘아아…… 그 옛날 흡혈도후가 수십 년간 천하를 피로 휩쓸던 무적의 도법에 사부의 백년 에 걸친 노력이 깃들여 있는 절세초식 멸정이 그토록 참담한 패배를 겪을 줄이야…… 이는 정녕 나의 어리석음 탓이 아닌가?” 그는 정녕 견딜 수 없는 파멸감에 사로잡혔다. ‘천공금성 사마등, 그의 일신절학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고절하였다. 아아…… 나는 정녕 그에게 미치지 못함을 자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는 이내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나 사검평은 기어이 이 패배의 수치를 갚고야 말리라!’ 두 눈으로 무서운 광망을 뿜어 내며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던 그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생 각해 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그때에야 비로소 사문의 보물 흡혈마도에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사검평은 다급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하나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낭패하여 크게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흡혈마도를 잃어버리다니……’ 그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혹시 내가 천공금성 사마등과 겨룰 때 그곳에 버려 두고 왔던 것은 아닐까?’ 생각이 이에 미치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곰곰이 되새겨 보았다. 그러고 보니 펼쳤던 흡혈마도를 거두지도 않은 채 다급히 백마에 의지하여 그곳에서 빠져 나왔던 생각이 꿈결처럼 아련히 떠올랐다. 순간, 사검평은 크나큰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흡혈마도! 그것은 사부 염라천존이 사조에게서 전해 받아 다시 자신에게 물려준 사문 최대의 보물이 아닌가? 그것을 잃어버리다니…… 망연자실해 있던 사검평은 서서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우선 몸부터 회복하자. 그리고 차후 흡혈마도를 되찾을 방도를 찾음이 현명하리라. 나는 앞으로 천공금성 사마등에게 설욕(雪辱)하는 것 외에도 남해문의 일과 천마문의 혈겁 을 일으킨 신비인물을 밝혀 내야 할 사명이 있지 않은가? 이 모든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회복하여 지금보다 몇 배 뛰어난 무학의 성취를 이루어야 하리라!’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는다던가! 사검평은 절망과 좌절 속에서도 강인한 투혼을 찾아 내어 불꽃처럼 태웠다. 새삼 굳은 결의를 다진 그는 누운 채 운기요상(運氣療傷)에 들어갔다. 다행히도 그가 익혔던 대승반야바라신공의 운기 자세에는 입식(立式)과 가부좌 방식 외에도 와식(臥式), 측와식(側臥式)이 있는지라 그는 누운 채 그대로 진기를 운행할 수 있었던 것이 다. 그렇게 진기를 운공한 지 일 각쯤 지나자 그의 단전으로부터 한 가닥 단아한 기운이 솟구 쳐 순식간에 관원(關元), 석문(石門), 냘?陰交穴)을 거치더니, 신궐(神闕), 수분(水分), 건리(建里), 중완(中完), 거궐(巨闕), 구미혈(鳩尾穴) 등으로 내뻗는 것이었다. 그의 단전에서 일어난 기운은 단숨에 임독경맥(任督經脈)의 유주(流注)를 따라 완전히 일 주천한 뒤, 서서히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었다. 그의 심경은 옥류처럼 맑게 화해 있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돌연 그의 단전으로부터 전신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것 같은 극심한 열기가 치솟기 시작 했다. 그것은 마치 활화산이 폭발하듯 순식간에 사지백혈로 뻗쳐 나갔다. 흠칫 당황하는 듯하던 사검평은 이 신비의 현상을 이미 체험했던 사실을 떠올리며 대처해 나가기 시작했다. 바로 천공금성 사마등과 대결할 당시에도 이와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었던 것이다. 그는 즉시 일어나 가부좌의 자세를 취한 후 솟아나는 열기를 대승반야바라신공의 구결에 따라 인도하기 시작했다. 순간, 활화산이 폭발하듯 솟구친 열기는 단숨에 사검평의 전신 경락 주위를 따라 무섭게 치닫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정녕 그것은 무서운 기세로 경락을 돌아 눈 깜짝할 사이에 삼 주천(周天)하고 있었다. 사검평은 전신이 터져 나가는 듯했다. 열기는 멈추지 않고 계속 전신을 질주했다. 이윽고 사검평의 얼굴은 지옥의 겁화(劫火) 속에 빠진 쇳덩이인 양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는 정녕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아아……” 그는 실로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러 있었다. 전신은 산산이 찢겨질 듯했고, 가슴은 치미는 불길로 인해 한줌의 재로 화할 듯싶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고통에 대응했다. 순간, 그의 전신을 한 줄기 빛이 관통하듯 예리하게 꿰뚫는 그 무엇이 있었다. “아앗!” 그 순간, 이제까지 전신을 찢던 고통이 거짓말처럼 해연히 사라졌다. 전신을 질주하던 열기는 몸 구석구석을 자유롭게 흘러 다니고 있었다. 생사현관의 타통! 인간의 체내에 흐르는 혈맥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전면의 맥을 임맥, 후면의 맥을 독맥 이라 부르거니와, 이 두 혈맥은 발바닥 용천혈기에서 막혀 서로 통하지 않는다. 하나 무공이 극치에 이르거나 절세의 영단을 복용하면 이 두 혈맥이 서로 통하게 되니, 이를 생사현관의 타통이라고 부른다. 사검평, 그는 정녕 예기치 않게 생사현관이 타통되었던 것이다. 천하의 무림인치고 그 어느 누구도 바라 마지않는 소원, 생사현관의 타통을 그는 드디어 성취한 것이다. 이 순간, 사검평은 자신의 마음이 마치 천지간에 통하고 몸이 환허경(幻號境)에 이르른 듯, 무한한 영지(英知)가 끊임없이 샘솟았다. 동시에 지금껏 자신이 깨닫지 못했던 무수한 무학극의(武學極意)들이 불현듯 뇌리를 스치 는 것이었다. 또한 그 모든 것들은 너무도 쉽게 그에게 이해되었다. 이는 생사현관의 타통과 더불어 그의 오성(悟性)이 크게 증진되어 본시 천고의 기재였던 그를 더욱 걸출하게 만드는 바였다. 그러나 이 순간, 그가 이렇듯 무아지경인 상태에서 겪는 신비로운 체험은 단지 생사현관 의 타통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그가 본시 천지합교(天地合交)의 골상을 천부적으로 타고난, 진정 하늘이 내신 기재였기 때 문이다. 무릇 천지합교의 골상을 타고 태어난 자는 천령혈과 염개혈 사이에 새끼손가락이 들어갈 만한 틈이 있으니…… 그 영지(英知)로써 능히 천지간의 모든 정령과 교감(交感)할 수 있으며 우주 내의 모든 섭리를 이해할 수 있다 하였다. 본시 이러한 현상은 불문의 성자(聖者)나 우화등선(羽化登仙)하는 선인에게만 나타나는 것인데…… 사검평, 그는 천성적으로 이를 타고 태어났으니 정녕 천고의 기재라 아니 할 수 없었다. 어쨌든, 지금까지는 사검평의 천부적 천지합교 현상이 그가 접한 속세의 탁기(濁氣)에 의해 가려져 그 효능을 발휘치 못하였다. 그러나 주천금단에는 본래 천년설연실(千年雪連實)이 들어 있었으니, 그 청량지기가 사검평의 탁기를 밀어 내어 이제야말로 천지합교의 영험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사검평의 뇌리로 한 가지 상황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것은 천공금성 사마등과 대결했을 당시의 상황이었다. 그는 천하무적이라 믿었던 멸정이 어찌하여 그토록 산산이 와해 되었는가 생각해 보았다. 당시 사마등은 두 가지 절초를 거의 같은 시각에 펼쳐 내었다. 하여 먼저 자신의 살초를 무산시키더니 곧 이어 푸르른 섬광과 함께 구공신검이 자신에게 로 쏘아져 왔었다. “으음……” 사검평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발했다. 정녕 그때의 상황은 지금 생각해도 모골이 송연하던 바이다. 그러나 사검평은 곧 안색을 굳히고 자신이 일신에 지닌 모든 절초를 머릿속에 떠올려 보 았다. 그로써 사마등이 펼쳤던 공격을 깨뜨릴 방도를 취해 보고자 했던 것이다. 하나, 그 어느것도 사마등의 절학에는 대응할 수 없었다. 천하무적의 절초라고 믿던 멸정은 물론, 사부 염라천존 이원패가 백여 년 간의 각고 끝에 완성하였던 최후의 절초, 천륜으로써도…… 도저히 천공금성 사마등의 마지막 일격에서는 벗어날 수 없었다. 다만 사마등의 공격을 방비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천륜에는 본시 하나의 결정적 약점이 있지 않던가? 즉, 일차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을 때 재차 상대를 일거에 격살시킬 또 다른 변화가 없다는 것. 하여 이로써는 사마등의 잇달은 연환적 살초에 대응할 만한 방도가 전혀 없는 것이었다. 한 순간, 그의 얼굴에 희색이 만면해졌다. 그는 기어이 사마등의 두 절초에서 허점을 찾아 낸 것이다. ‘만일 멸정의 살초와 천륜의 장엄 무비한 신위(神威)를 합친다면……’ 사검평은 전신으로 엄습해 오는 전율과 희열을 동시에 느꼈다. ‘그렇다! 내 어찌 이토록 간단한 사실을 이제까지 깨닫지 못했단 말인가?’ 다음 순간, 그는 사마등이 자신에게 펼치던 두 개의 검초가 연거푸 쏘아져 오는 환영을 보 았다. 그에 맞서 신비의 도식을 펼쳐 내는 자신의 모습이 마치 눈앞의 현실인 듯 너무도 생생히 펼쳐져 보이는 것이었다. 그가 신비도식을 허공에 뿌려 내자 선혈이 창공을 물들이고 이내 폭우가 되어 대지 위로 뿌려지듯 한 점 빛살도 투시치 못할 완전무결한 살인도법이 가공할 위력을 발하는 것이었 다. 이는 흡혈도후가 평생을 추구하고도 끝내 완성치 못했던 비원(悲願)이 아니었던가? 사검평은 환상 속에서 펼쳐지는 자신의 도식에 스스로 도취되어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 다. 그때였다. “앗!” 한 여인의 자지러지는 듯한 탄성이 그의 고막 속으로 파고들었 순간 사검평의 명경지수처럼 맑고 평정했던 심정은 산산이 깨어졌고, 뇌리 속에 환상처럼 펼쳐졌던 신비도식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2 사검평은 굳게 감고 있던 두 눈을 번쩍 치켜 떴다. 한 청의소녀가 잔뜩 놀란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비록 차려입은 옷은 소박하였으나 뛰어난 옥안(玉顔)을 소유한 절세의 미녀였다. 마치 비에 젖은 이화(梨花)인 양 청조하고 순결무구해 보이는 십칠팔 세 가량의 지순한 소녀…… 사검평은 내심 눈이 부신 기분이었다. 문득 그는 지난날 하남 관도상에서 보았던 남해문의 소주를 뇌리 속에 떠올렸다. 이 눈앞의 소녀가 비록 그녀와 같이 화려하고 눈부신 자태는 아닐지언정 아름답고 청초하 기로는 오히려 그녀를 능가할 것만 같았다. 정녕 한 떨기의 수선화와도 같이 차분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미소녀였다. 한동안 망연한 표정으로 사검평을 바라보던 소녀는 이윽고 놀라움에서 깨어나 밖을 내다 보며 소리쳤다. “언니! 언니, 빨리 들어와 보셔요. 언니가 구해 주신 그 공자께서 벌써 깨어나셨어요!” “어찌 그럴 수가…… 혜매(惠妹), 그 말이 분병 진정이렷다!” 놀라움에 찬 또 다른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 오며 이윽고 실내에 백의여인이 모습을 드러냈 다. 순간, 사검평은 부지불식간에 탄성을 발하고 말았다. “아……!” 방금 들어선 백의의 여인, 그녀의 모습은 사검평의 상상력을 총동원해도 만들어 낼 수 없는 미의 결정체였던 것이다. 사검평은 첫눈에 그 모습에 매료되어 시선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녀의 나이는 이제 이십 세를 갓 넘었을까? 도화빛 붉은 뺨에 천하의 그 어느 보석보다 아름다운 눈망울. 건드리기만 하여도 부서질 것 같은 콧날과 꽃잎 같은 입술이야말로 정녕 아름다움의 극치였 으니…… 그것은 비록 입이 있어도 말할 수 없고 오직 가슴으로밖에 느낄 수 없는 그런 지고한 경지 였다. 사검평의 가슴에선 어느새 강렬한 불덩이가 타오르고 있었다. 천하에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이 존재하고 있다니…… 그가 처음으로 아름답다 느꼈던 남해문의 소녀가 지녔던 아름다움도, 한걸음 앞서 들어왔 던 청의소녀의 순결무구함도 이 눈앞의 백의소녀에 비하면 정녕 그 빛을 잃을 정도였다. 더욱이 그녀의 두 눈은 꿈속에서나 그리는 이상향(理想鄕)인 듯 한없이 신비로워 사검평 으로 하여금 끝내 시선을 거둘 수 없게 하였다. 자신을 송두리째 빨아들이듯 강렬히 주시하는 사검평의 뜨거운 시선을 의식한 백의여인은 섬전에 감전된 듯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녀는 그 감정을 황급히 감추려는 듯 가녀린 목을 얼른 떨구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사검평은 자신의 실태를 깨달았다. 하여 그녀를 주시하던 시선을 이내 거두며 스스로 자책해 마지않았다. ‘사검평아, 이 무슨 꼴불견이란 말이냐? 그녀는 생면부지의 처지이거늘, 그 얼굴을 이렇 듯 무례하게 주시하였으니……’ 그는 격동되던 마음을 애써 자제했다. 곁에 있던 청의소녀는 너무도 순진하여 불꽃 튀던 두 사람의 감정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곧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아! 공자께서 너무나 피를 많이 흘려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기력이 탈진되셨기에 소매, 할 수 없이 가친의 독문비방(獨門秘方)인 천몽환원단(千夢還元丹)을 복용시켜 드리기는 하였지만 설마 이토록 빨리 회복되실 줄이야 꿈에도 짐작치 못했어요!” 그녀는 의혹과 경이가 뒤섞인 음성으로 두어 번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여전히 표정은 밝았 다. “본시 천몽환원단을 복용하면 그 약효로 인해 십 일간은 깊은 잠에 빠지게 되는데, 공자 께서는 불과 삼 일 만에 깨어나셨으니 정녕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군요!” 그녀는 끝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경이의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이때, 사검평 또한 청의소녀의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자신이 삼 일간이나 깊은 잠속에 빠져 있었다니…… 이는 정녕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가 느끼기에는 겨우 한두 시진 정도밖에 흐르지 않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청의소녀는 신비로운 미소를 머금으며 장난기 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어쨌든 이제 정신이 드셨으니 공자께서는 생명의 은인인 유 언니께 감사를 드려야 할 거 예요!” 그 말에 사검평은 낮은 탄성과 함께 새삼 백의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때 백의여인은 그 옥같이 아름다운 얼굴에 홍조를 떠올리며 다급히 말했다. “혜매, 너는 어찌 모든 공을 내게 돌리려 하느냐?” 힐책하듯 가볍게 말하고 나서 곧 사검평을 돌아보았다. “사실 소첩이 공자를 먼저 발견했던 것은 사실이나 혼수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심을 구 한 것은 오직 혜매의 뛰어난 의술과 그녀의 가전영단 천몽환원단 때문이었습니다. 그러하니 은혜를 표해야 할 상대방은 소첩이 아닌 바로 나의 혜매임을 공자께서는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제야 사검평은 문득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자신이 정신을 잃기 전, 마치 꿈결에서인 듯 아련히 들렸던 여인의 음성. 그 목소리의 장본 인이 바로 이 눈앞의 백의미녀임을 그는 해연히 깨달았던 것이다. 사검평은 즉시 침상에서 일어나 정중히 읍하였다. “두 분 소저께서 이렇듯 소생에게 구명지은(救命之恩)을 베풀어 주셨으니 소생, 죽는 날까지 기필코 이 은혜를 잊지 않겠소!” 사검평의 정중한 예에 백의미녀 또한 공손히 예로써 대꾸했다. “공자께서는 새삼스러운 말씀을 하십니다. 어려움에 처한 환자를 구한 것이 어찌 큰 은 혜라 할 수 있겠습니까? 소첩과 동생의 행동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으니, 공자께서는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이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얼른 청의소녀가 나섰다. “공자의 차림새로 보아 강호인은 아닌 듯한데 대체 어쩌다 그토록 심한 상처를 입고 이곳 백초곡(百草谷)에까지 오시게 되었는지요?” 사실 그녀는 오래 전부터 이 점이 궁금하여 참을 수 없었다. 돌연한 그녀의 질문에 사검평은 잠시 난처함을 느꼈다. 그러나 이내 솔직담백하게 대답하였다. “소생의 이름 석 자는 본시 사검평이라 하는 바, 일신에 약간의 무학을 익혔소이다.” “아……” 두 소녀는 의외라는 듯, 동시에 낮은 탄성을 발했다. 사검평이 말을 이었다. “한데 소생은 사문과 적대 관계였던 한 고인과 일전을 겨루다가 패하여 여기까지 오게 되 었소이다. 다만 이곳이 백초곡이라는 것은 소저께서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소이 다.” 사검평은 말을 마치자 두 여인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하였다. 두 소녀의 표정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사검평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로 보아 그녀들은 자신의 이름에 대해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음이 틀림없기 때문이 다. 다만 자신에게 부상을 입혔던 자가 사문의 원수라는 말을 들은 백의미녀의 얼굴에 한 가닥 의혹의 빛이 어렸을 뿐이었다. 청의소녀가 만면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 알고 보니 본시 사 공자이셨군요!” 이어 그녀는 두 눈을 반짝이며 한 점의 티도 묻지 않은 청아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 공자께서 이렇듯 회생하셨음은 정녕 하늘의 뜻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어요. 그 까닭 인즉 사 공자의 가슴에 박힌 소검(小劍)이 만일 반 치만 어긋났다 해도 영영 불귀의 혼이 되셨을 것이기 때문이에요!” 이어 그녀는 돌연 영롱한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만일 소녀의 천몽환원단이 수없이 많았다 해도, 유 언니가 이곳 백초곡에 계시지 않았더라면 사 공자의 가슴에 박혔던 소검을 뽑아 내지 못했을 것이니 역시 돌이킬 수 없는 결과뿐이었을 거예요!” 그녀의 말에 백의미녀가 다시금 타는 듯 붉은 홍조를 떠올렸다. 그녀가 급히 청의소녀의 말을 제지했다. “혜매, 너는 이 언니로 하여금 너무도 몸둘 바를 모르게 하는구나. 이제 정녕 그만둘 수 없 겠니?” 그녀는 아직도 홍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사검평을 바라보았다. “사 공자께서는 혜매의 말을 믿지 마십시오. 사실 소첩같이 연약한 아녀자가 무슨 힘이 있어 공자를 구해 드리겠습니까?” 그러자 청의소녀가 춘풍에 휘날리는 도화처럼 발랄한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언니의 겸손은 너무 지나쳐요. 사실 말이야 바른말이지, 당금 천하의 그 어느 명가(名家)가 언니보다 빠르게 발검(拔劍)할 수 있겠어요?” 이어 그녀는 자신에 말이 추호도 거짓이 없음을 확인시키려는 듯, 사검평을 돌아보며 자랑 스럽게 말하였다. “당시 사 공자의 상태는 지극히 위태하여 천하의 어떤 명의도 회생을 장담할 수 없었던 처지였어요. 왜냐하면 공자께서는 너무도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이지요! 만일 그 상태에서 조금만 더 피를 흘린다면 즉시 숨을 거두셨을 거예요. 더구나 공자의 가슴에 박힌 소검은 비록 심장에서 반 치쯤 벗어났다고 해도 워낙 깊숙이 박 혔던지라, 검을 뽑으며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심장을 건드려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왔을 거예요. 또한 그 검을 뽑는 동작이 조금만 느려도 그 즉시 솟구치는 출혈을 감당치 못해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니, 만일 사 공자께서 유 언니 같은 천하제일의 검인명가(劍 人名家)를 만나지 못했다면 정녕 화타나 편작이 소생하여 치료한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 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진정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장황히 설명했다. 사검평은 그녀의 말을 듣는 동안 자신이 얼마나 절박한 위기에 처했던가 새삼 통렬히 깨달 았다. 동시에, 그토록 위험했던 처지에서 자신을 구해 준 눈앞의 두 소녀에게 무한한 감사의 염 (念)을 느꼈다. 더구나 이 아름다운 백의미녀가 그토록 고결한 검술지학을 지닌 무림의 일대 기녀라니…… 그는 즉시 포권의 예를 취하며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사를 표했. “두 분 소저께서 이렇듯 힘을 합해 미천한 소생을 구해 주셨으니 이 은혜, 죽는 날까지 정녕 잊지 않으오리다.” 그 말에 백의미녀는 오히려 굳은 안색이 되었다. “무림동도의 입장으로서 어찌 남의 위기를 보고도 모른 척할 수 있었겠습니까? 공자께 삼가 바라노니, 그만한 일로 부디 더 이상 마음쓰지 마십시오.” 말하는 도중 그녀는 얼굴에 잠시 망설임의 빛을 떠올리더니, 이내 신중히 입을 열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사 공자께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어요.” 사검평은 흔쾌히 대답했다. “소생이 알고 있는 바라면 무엇이든 대답해 드리리다.” 이에 백의미녀는 뚫어져라 사검평을 주시하며 한참을 망설인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만일 소첩의 짐작이 틀림없다면 사 공자의 가슴에 박혔던 소검은 구공신검이 틀림없습니 다. 한데 그런 절세적 내력의 보검이 대체 어떤 경위로 사 공자의 가슴에 그토록 깊이 박히 게 되었는지요?” 사검평은 뜻밖의 질문이라는 듯 움찔 놀랐다. 그러나 그는 이내 안색을 바로하며 담담히 말했다. “유 소저의 말씀을 소생이 헤아려 보니 구공신검에 의해 이렇듯 엄중한 중상을 입은 자라 면 필시 강호의 흉인(兇人)임이 틀림없을 것인즉, 소저는 공연한 활인지덕을 베풀지 않았는 가 근심하시는 뜻이 아니시오?” “소첩은 결코 사 공자를 흉악한 인물이라 믿지는 않아요. 다만 공자의 몸에 구공신검이 박혔을 뿐더러 옷을 갈아입혀 드렸을 때 본즉 한 가지 옥패가 나왔기에 공자의 일신내력이 결코 범상한 것 같지 않아 흥미를 느꼈던 것입니다.” 그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담담한 어조로 말하였다. “하나 이 같은 소첩의 질문이 만일 사 공자의 마음을 거슬렀다면 원컨대 소첩의 질문은 없었던 것으로 해주시지요!” 사검평은 안색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아닙니다. 소생이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사실 소생은 소저의 짐작대로 황산신니와 관련 이 있는 인물로부터 부상을 입은 것이 틀림 없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결코 두 분께 누를 끼칠 만한 것이 아니니 부디 개념 치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두 분께서 만일 추호라도 부담을 느끼신다면 소생은 지금 이라도 당장 이곳을 떠나겠습니다.” 그는 정말로 금방이라도 떠날 듯 침상에서 걸어나왔다. 그러자 청의소녀가 크게 당황해 마지않았다. “공자께서는 아직 완쾌되지 않으신 처지인데 그 몸으로 어디로 가시려 한단 말입니까?” 이어 그녀는 백의미녀를 한번 힐끔 바라본 후에 다시 말하였 “유 언니의 말은, 다만 한 가닥 의혹을 풀고자 했을 뿐 결코 다른 뜻은 없었어요. 공자께 서 만일 이러한 일로 인해 오해하신다면 오히려 저희들이 섭섭하니 부디 마음을 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사검평은 이미 떠나기로 마음을 굳힌 듯한 표정을 거두지 않았다. 청의소녀는 연신 백의미녀에게 안타까운 시선을 보냈다. 그녀로 하여금 만류하라는 부탁의 염원이 너무도 간절했다. 이때, 백의미녀는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다. 청의소녀의 이러한 태도야말로 같은 여자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의 발로였기 때문이다. 이 순결무구한 소녀는 이미 사검평에게 지울 수 없는 애모의 정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이 같은 감정이야말로 이미 자신도 지난날 겪은 바 있지 않았던가! 비록 자신의 그 사연은 가슴이 찢어지는 비련으로 종말을 내고 말았지만…… 일순, 그녀는 청의소녀에게 말할 수 없이 뜨거운 연민의 정을 느꼈다. 그녀는 문득 사검평을 바라보며 정중히 말하였다. “사 공자, 소녀가 지나친 질문을 하였습니다. 부디 혜매의 만류를 뿌리치지 마시고 상처 가 완쾌된 후에 떠나도록 하시지요!” 그 말에 사검평은 오히려 더욱 난처해졌다. 사실 그의 상처는 이미 완전히 회복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번 일로 인하여 그는 무림인들이 꿈속에서나 그리던 생사현관의 타통을 맞 았으니 전화위복이라 해야 옳았다. 그러나 이러한 전말을 두 소녀에게 어찌 밝힐 수 있겠는가? 또한 이처럼 그녀들이 간절히 만류하는데 끝내 이를 뿌리치고 떠난다면 태산 같은 그녀들 의 은혜를 짓밟는 처사이기도 하였다. 비록 태산 같은 짐을 지고 있기는 하지만 잠시 백초곡에 머무르며 작으나마 그녀들의 성의 에 보답하는 것이 인간 된 도리라고 사검평은 생각했다. “두 분 소저의 호의가 이토록 극진하니 소생 정녕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소생 금수가 아닌 다음에야 어찌 배은망덕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마음을 돌리자 청의소녀의 얼굴이 비로소 활짝 피었다. 백의미녀 역시 만면 가득 온화한 미소를 떠올렸다. 사검평도 부드럽게 웃으며 이어 물었다. “한데 소생에게도 한 가지 여쭐 말이 있소이다.” 청의소녀가 방글거리며 반문했다. “무슨 말씀이온지…… 어서 물어 보세요!” 빙긋 웃은 사검평이 이윽고 의문점을 말했다. “조금 전 두 분 소저께서는 이곳의 이름을 백초곡이라 하셨는데, 그렇다면 이곳은 대체 어 디쯤이오?” 사실 사검평은 하남 관도 근처에서 천공금성 사마등에 의해 패배당하여 중상을 입은 채 백 마에 의지하여 미친 듯 달려왔기에 여기가 어디쯤 되는지 전혀 짐작조차 할 길이 없었다. 더구나 그는 백초곡이라는 이름에 대해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 물음에 청의소녀가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사 공자께서 무림의 일인(一人)임을 자처한다면 어찌 백초곡을 모른다고 하 시나요? 천하에서 소녀의 부친과 더불어 백초곡을 모르는 사람은 사 공자밖에 없을 거예 요!” 이처럼 확고한 말에 사검평은 부지불식간에 움찔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백초곡에 대해서는 전혀 들은 바가 없었기에 할 수 없이 미 안한 표정을 지었다. “실례하오만 소저 부친의 명호는 어찌 되시오?” 그때 백의미녀가 그윽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첩이 말씀드리지요. 혜매의 부친은 당금 강호의 십대고인들 중 사이(四異) 중 한 분이 신 제세성의 양소린 대협이세요. 사실 그 분은 그 뛰어난 의술로 인해 그 명성이 일군(一君) 쌍기(雙奇)에 비해서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지요. 그리고 혜매는 그분의 무남독녀 양소혜(梁素惠)라고 하니, 동생 역시 일신에 뛰어난 의술을 지녀 많은 사람들을 구출하였던 바, 강호에서는 그녀에게 옥수선자(玉手仙子)라는 아름다운 아호 까지 붙여 주었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사검평은 청의소녀 양소혜가 지닌 뛰어난 의술의 내력을 이해할 수 있 었다. 제세성의 양소린이야말로 천하제일의 신의라 칭송받던 장본인이니, 그의 천금 같은 외동 딸이 일신에 뛰어난 의술을 지녔음은 추호도 이상할 바 없는 것이었다. 사검평은 곧 탄사를 보냈다. “아…… 알고 보니 제세성의 양소린 대협의 천금 같은 영애이셨군요!” 그는 새삼 경이에 찬 빛으로 양소혜를 바라보았다. 양소혜는 조금 전부터 약간 서운한 표정이었다가 사검평이 가친의 명호를 듣고 놀라자 비 로소 만족한 듯 그윽한 미소를 떠올렸다. 사검평은 백의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다면, 외람되오나 소저께서는 또한 누구신지요?” 이번에는 옥수선자 양소혜가 입가에 신비로운 미소를 떠올렸다. “호호호…… 이분 언니의 내력이야말로 굉장한 터이니, 사 공자께서도 아신다면 필경 더 욱 놀라움을 금치 못하실 거예요!” 그녀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백의미녀를 바라보며 곧 덧붙였 “사실 이분 언니야말로 벽혈궁 대공주(大公主)의 신분이시니, 칠팔 년 전까지만 해도 강호 제일의 미인으로 추앙받았고 천하 모든 젊은 기협들의 선망의 대상……”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백의미녀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녀는 비록 낮지만 날카롭게 소리쳤다. “혜매! 어째서 그런 얘기를 이런 자리에서 경솔히 꺼내느냐?”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사검평에게 알려지는 것을 몹시 꺼리는 듯 다급히 제지했다. 그러나 사검평은 이미 백의미녀의 신분을 알아차리고 난 뒤였 이 절세의 미인이야말로 벽혈옥봉 유옥선이었던 것이다. 지난날 사검평은 의제(義弟) 주천혜로부터 그 이름에 대해 들어 익히 알고 있던 터였다. 바로 광검수재 척금송의 정인으로서, 부친의 엄명에 따라 무림사대세가 중 하나인 남궁세가에 출가하였다는 비련의 주인공이 아닌가! 순간, 사검평은 가슴속 깊숙이 예리한 비수가 날아와 박히듯 서늘한 아픔을 느꼈다. 동시에 그의 안색은 창백하게 변하고 있었다. 벽혈옥봉 유옥선은 그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고, 그가 이미 자신의 내력에 대해 알고 있 음을 깨달았다. 사검평은 안색을 굳히며 정중히 말하였다. “아! 알고 보니 남궁 부인이셨군요. 조금 전 소생이 미처 알지 못하여 실례를 범했으니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의 음성은 은연중 떨리고 있음이 확연했다. 순간, 벽혈옥봉 유옥선 또한 그의 말을 들으며 마치 날카로운 비수로 심장을 후벼 파듯 상 처받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문득 처음 그가 자신을 바라보던 뜨거운 시선이 떠올랐던 것이다. 또한 지금 그의 말에서도 자신에게 한 가닥 뜨거운 감정을 지녔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 으니…… 일순, 그녀의 가슴은 마치 거친 풍랑을 만난 선박처럼 더없이 흔들렸다. < 제2권 끝 > 第 十七 章 여심만정(女心萬情) 1 유옥선은 사검평을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 “사 공자께서 이렇듯 빨리 쾌차하실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혜매의 정성 덕이었어요. 공자 께선 이 점을 간과하지 않으시기 바래요.” 그녀의 의미 심장한 말에 곁에 있던 옥수선자 양소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힐책하듯 말했다. “유 언니는 정말 별말씀을 다 하시는군요!” 그러나 유옥선은 만면 가득 미소를 떠올린 채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사실 혜매는 지난 삼 일간 단 한시도 사 공자의 곁을 떠나지 않고 정성껏 간호하였어요. 그 정성이 어찌나 갸륵한지……” 이어 그녀는 장난기 어린 눈길로 양소혜를 바라보았다. “호호…… 혜매, 어디 사실대로 말해 보렴! 이 언니가 틀린 말을 했는가?” 그 말을 듣자 사검평은 즉시 양소혜를 향하여 정중히 인사하였. “양 소저의 보살핌에 진정으로 감사드리오.” 사검평이 비록 겉으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 내심은 유옥선에 대한 생각으로 인 해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뒤엉켜 있었. 벽혈옥봉 유옥선은 사검평의 얼굴에 떠오른 미묘한 갈등의 빛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자신이 이 자리에 더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사검평에게 미소 지어 보이며 말했다. “소첩은 잠시 할 일이 있으니 그만 나가 봐야겠어요. 공자께서는 혜매와 더 이야기를 나 누시지요.” 유옥선은 말을 마치자마자 만류할 사이도 없이 미끄러지듯 밖으로 나갔다. 순간, 사검평은 갑자기 가슴속이 텅 비는 듯 한없이 쓸쓸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는 자신의 이런 마음을 스스로 자책해 마지않았다. 남궁세가에 출가하여 이미 남의 아내가 된 지 오래인 그녀. 더구나 무림의 일대 기재인 광 검수재 척금송이 그녀로 인해 실연의 상처를 안고 폐인처럼 전락한 사실마저 자신은 잘 알 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인간의 심성(心性)이란 실로 미묘한 것. 그 모든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사검평은 처음 그녀를 보는 순간 느꼈던 뜨거운 열정을 끝내 잊을 수가 없었다. 비록 그녀는 지금 눈앞에 없지만, 한번 가슴 깊이 아로새겨진 유옥선에 대한 영상은 언제 까지나 그의 뇌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었다. 긴 침묵이 실내를 지배했다. 옥수선자 양소혜는 마치 넋 나간 듯 뚫어지게 문만을 응시하고 있는 사검평에게 의아한 듯 한 어조로 말을 붙였다. “공자께서는 대체 무슨 생각을 그처럼 깊이 하고 계시나요?” 그제서야 사검평은 자신의 실수를 눈치채고 황망히 자세를 바로하며 대답했다. “아…… 아무것도 아니오.” 매우 당황해 하는 그를 양소혜는 더욱 의아한 눈길로 주시했. 그녀의 눈길을 부담스러워하던 사검평은 문득 생각난 듯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물었다. “한데 남궁 부인께서는 어찌하여 남궁세가에 계시지 않고 이곳에 머무르고 계시오? 또한 양 소저와는 어떤 관계이시오?” 옥수선자 양소혜는 밝게 웃으며 답했다. “호호호…… 유 언니와 소녀는 내외종 사촌간이에요!” 사검평은 흠칫 놀라는 표정이었다. “내외종 사촌간이라면……” “돌아가신 유 언니의 선모(先母)께서 소녀의 고모뻘이 되시는 거지요. 이런 인척 관계로 인 해 제 아버님께서는 언니를 어릴 때부터 각별히 총애하셨다고 해요. 더구나 유 언니는 어려서부터 병약하여 언제나 일 년 중 한 달쯤은 이곳 백초곡에 머물며 요양하였지요.” 그 말에 사검평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남궁 부인 같은 무림의 기녀가 병약하여 요양을 하다니, 이해하기 힘든 일이구려.” 옥수선자 양소혜는 얼굴에 한 가닥 우수의 빛을 떠올렸다. “유 언니는 어려서부터 일찍 돌아가신 선모를 생각하며 항상 슬픔에 잠기는 일이 많았어 요. 언니는 그 일로 인해 심환(心患)을 앓고 있는 것이라고 아버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또한 출가하여 세월이 흐르면 자연히 나으리라 하셨지요. 그러나 출가한 뒤에도 언니의 병세는 여전히 가실 줄 몰랐어요.” “그렇다면 남궁 부인께서는 앞으로 며칠 더 이곳 백초곡에 머물게 되오?” “아! 그 말씀을 듣고 보니 유 언니가 떠나야 할 날이 어느덧 사흘밖에 남지 않았군요. 소 녀는 본시 무남독녀로 태어났고, 언제나 아버지와 함께 이곳 백초곡에서만 외로이 지내는지라 일 년 내내 유 언니가 이곳에 오는 날만을 기다리는 처지예요. 언니가 여기 머무는 한 달간이야말로 소녀에게는 가장 즐거운 시간이기 때문이지요.”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의 눈가에 언뜻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이어 그녀는 묘한 미소를 베어물며 말을 이었다. “만일 사 공자께서 소녀의 짐작대로 이레 후에나 회복하셨더라면 유 언니는 끝내 보지 못 하였을 거예요. 만일 그렇게 됐다면 사 공자의 관심을 소녀가 독차지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에요.” 그녀는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다. 순간, 사검평은 가슴이 섬뜩하였다. 벽혈옥봉 유옥선에 대한 자신의 태도가 양소혜처럼 순진한 소녀의 눈에마저 확연히 드러났 으니…… 잠시 당황스러워하던 그는 얼른 안색을 바꾸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소생이 비록 양 소저에게 구명지은을 입어 처음 대하게 되었으나, 만일 다른 곳에서 소저 와 만났다고 하여도 그 수선화같이 순결해 보이는 모습에는 감탄을 금치 못했을 것이오. 하하하…… 소 생이 진심으로 말하건대 만일 그 누군가가 양 소저를 보고도 호감을 품지 않은 자가 있다면 그자야말로 정녕 목석(木石)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오.” 그 말을 듣는 순간, 양소혜의 얼굴이 마치 익을 대로 익은 홍시인 양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끝내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고개를 숙인 채 살며시 사검평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녀는 사검평의 얼굴에서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한 가닥 쓸쓸함을 보고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검평의 태도가 유옥선에 대한 생각 때문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양소혜였 다. 다만 사검평이 중상에서 회복된 지 얼마 안 되어 피로를 느끼기 때문인 것만으로 짐작하였 다. 양소혜는 마치 큰 실수라도 저지른 듯 송구스러운 어조로 공손히 말하였다. “소녀가 공연히 사 공자를 너무 피곤하게 해드렸던 모양이에요. 그럼 이만 물러갈 테니 편안히 쉬도록 하세요.” 그녀는 곧 조용히 나가려 했다. “잠깐!” 사검평이 서둘러 그녀를 제지했다. 양소혜는 흠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무엇인가 갈구하는 듯 기대에 가득 찬 시선으로 사검평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한참이나 머뭇거리다가 겨우 던진 사검평의 말은 실로 의외였다. “이곳은 누구의 처소인지요?” 그 말에 양소혜의 두 볼에 아련히 홍조가 떠올랐다. “공자께서는 별걸 다 물으시는군요. 이곳은 소녀의 처소인즉 조금도 부담스럽게 생각지 마시고 편히 쉬도록 하세요.” 그 말을 끝으로 사검평과 양소혜 사이에는 갑자기 침묵이 가로놓였다. “……” “……” 그것은 마치 허물어질 줄 모르는 장벽처럼 언제까지나 깨어질 줄 몰랐다. 길고도 긴 침묵, 그러나 이 침묵 사이에는 실로 기묘하고 야릇한 남녀간의 정감이 교차되고 있었다. 비록 서로 간에 그 생각하는 바는 다를지언정…… 마침내 사검평이 먼저 그 길고 지루한 침묵을 깨뜨렸다. “그런데 소생이 지녔던 물건은 모두 어디에 있소?” 양소혜가 방긋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공자께서 입고 계시던 의복 이외에는 모두 이 방안에 고스란히 있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실내 왼편에 있는 서탁을 가리켰다. “공자의 물건은 모두 저 목갑 안에 있어요. 다만 공자께서 입고 계시던 백의유삼만은 선혈로 얼룩지고 갈기갈기 찢어졌기에 제가 불태워 없애 버렸어요.” “그럼……” 그녀는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지금 입고 계시는 그 의복은 본시 부친께서 입으시던 것이에요. 다행히도 아버님의 체형 이 공자와 비슷한지라, 아쉽지만 그런대로 입을 만하실 거예요. 사 공자께서 완전히 회복하실 때까지 소녀가 의복을 새로 지어 놓겠어요.” 그녀는 홍조 띤 얼굴로 편히 쉬라는 말을 남기며 수줍은 태도로 서둘러 나갔다. “아아……” 사검평은 나직이 한숨쉬었다. 그가 처음 보았을 때 양소혜는 순진무구하여 발랄한 생동감이 가득했거늘, 어느 사이엔가 자신에게 연정을 느끼고 있지 않는 아니, 그녀는 처음 사검평을 구할 때부터 그에게서 깊은 정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검평은 그녀의 애정을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었 갓 피어난 이화(梨花)인 양 순결한 그녀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없어 꾸며 내야 했던 부 드러운 말. 어쩌면 그것이 후일 그녀의 가슴에 더 큰 상처를 남기게 될지도…… 양소혜가 나간 후, 사검평은 잠시 실내를 서성이다 서탁으로 다가가 그 위에 놓인 목갑을 열었다. 과연 거기엔 은자가 든 금낭과 황산신니가 남긴 신물인 불영옥패, 그리고 옥색 영롱한 구공 신검 등, 그가 지녔던 모든 물건이 보관되어 있었다. 사검평은 조심스레 손을 뻗쳐 구공신검을 집어 들었다. 검신에 박힌 보주에서 발하는 광채가 너무 강렬하여 눈이 부셨 천고에 드문 보검답게 도도한 위용을 과시하는 구공신검. 바로 이 소검이 사문의 절세무적의 절학, 멸정을 무산시키고 자신을 죽음 직전으로 몰아 넣었었다. 믿고 싶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것은 염연한 사실이었다. 더구나 사문의 기보라 할 수 있는 흡혈마도마저 잃지 않았는 가슴이 저미는 듯 아팠다. 갑자기 걷잡을 수 없는 죄책감이 솟아났다. ‘아…… 사부께서 내게 걸고 계신 기대에 부응하진 못할망정 이런 치욕을 당하여 사문의 명성에 먹칠을 하고 말다니…… 사부님을 뵐 면목이 없구나!’ 수중의 구공신검을 산산조각으로 부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일시의 격정을 못 이겨 천하의 보검에 해를 가하는 것은 무림인의 도의를 어기는 옹졸한 처사였기에 움켜쥐었던 손아귀의 힘을 풀고 마는 사검평이었다. 그는 두 눈에서 무서운 안광을 폭사시키며 내심으로 다짐했다. ‘천공금성 사마등, 내 기필코 너를 격패시켜 실추된 사문의 명예를 회복하고야 말리 라!’ 속으로 부르짖으며 자신도 모르게 구공신검을 쥔 오른손을 불끈 쥐었다. 그러자 예리한 검날이 소름 끼칠 만큼 푸르스름한 한광을 내뿜었다. 순간 사검평은 갑자기 검미를 꿈틀하며 예리하게 눈을 빛냈다. 찰나적으로 혜성처럼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생사혈관이 타통되는 순간 기묘하게 살아나는 환각 속에서 보았던 그 신비한 도식(圖式). 천하에 다시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완결 무비한 조화의 극치를 이룬 것처럼 보였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환각일 뿐이었다. 다시 기억해 떠올리려 애썼으나 그 도식은 아련한 꿈결에 잠긴 듯 머릿속에서 맴돌기만 하 였다. 그는 침상 끝에 걸터앉은 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두뇌가 명석하고 뛰어난 것을 의심할 사람이 없는 터인데, 이상하게도 한 가지도 기 억해 낼 수가 없었다. 이는 그가 명경지수(明鏡止水)인 양 맑은 명상 속에서 깨달을 뻔했던 이 도식의 가장 중요 한 시기에 양소혜의 출현으로 방해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약 한식경 가량을 깊은 상념(想念) 속에서 헤매던 그는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이마에 땀이 주르르 흘렀다. ‘아, 내가 비록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이었을지라도 그 일초식만 깨우칠 수 있었더라면 사마등을 격패시키는 건 문제가 아니었을 텐데……’ 아쉬움에 아랫입술을 짓깨물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것도 하늘의 뜻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언젠가는 그 환각 이 내게 다시 살아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위로하며 구공신검과 불영옥패를 품속에 갈무리했다. 그리고 약간 피곤한 기색을 보이며 다시 침상 위에 누워 눈을 지그시 감았다. 순간, 유옥선의 고운 영상이 소리없이 되살아나 그의 뇌리를 가득 메워 버리는 것이었다. 그는 괴로운 듯 입술을 깨물며 눈을 감은 채 머리를 저었다. 그녀의 영상이 슬픈 빛을 띠며 물러갔다. 사검평의 얼굴에는 쓸쓸하고 처연한 빛이 우수처럼 내리덮였. 처음 그녀를 본 순간, 그의 가슴은 불꽃을 일으키며 뜨겁게 타올랐었다. 유옥선, 그녀는 그가 지금껏 꿈꾸어 온 동경의 여신과도 같았. 그러나 어찌하랴! 그녀는 이미 그의 손이 미칠 수 없는 곳에 있었다. 그의 힘이 태산을 무너뜨릴 수 있다 해도, 그의 팔이 백 리는 뻗쳐 나갈 수 있다 해도, 결코 그의 손이 미칠 수 없는 곳…… 남의 아내인 것이다. 그가 평생을 잊지 않고 사랑한대도 이루어질 수 없는 열정일 뿐이었다. ‘잊어야 한다…… 잊자……’ 이렇게 수백 번을 부르짖었지만,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는 여전히 남아 그를 괴롭혔다. 머리를 더욱 세차게 흔들자 그녀의 모습 위로 양소혜의 모습이 겹쳐 떠올랐다. 촉촉한 단비에 조금씩 봉오리 지기 시작한 한 송이 도화인 양 상큼하고 귀여운 소녀. 사검평은 자신을 응시하는 그녀의 눈길에서 순결한 애정이 쏠려 오고 있는 걸 읽을 수 있 었다. 그러나 넓고 깊은 그의 가슴은 온통 유옥선에 대한 일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열정이 너무 열렬하여 양소혜의 순결한 애정조차 헤집고 들어올 틈이 없는 것이다. 유옥선에 대한 사랑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음을 너무나 절실이 느끼고 있으면서도 사검평은 열정을 간직한 채 순결한 애정을 거부했다. 갑자기 남해문의 소녀 우수경의 눈부신 자태가 떠올랐다. 그의 가슴에 오랫동안 간직되었던 탓일 것이다. 그녀의 용모며 자태는 아름답고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는 듯했 그러나 그녀 역시 유옥선에 대한 열망을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사검평은 어느 곳으로도 마음을 돌려 볼 수 없을 만큼 그녀에게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이 순간 그는 사랑에 눈멀고 귀먹어 아무것도 생각지 못한 채 뜨겁게 가슴을 앓고 혼자 고 통에 신음하고 있었다. 머릿속에 오가는 온갖 정념의 미로(迷路)를 부정하려는 듯 그는 속으로 사납게 부르짖었다. ‘나 사검평은 결코 여인의 정에 얽매여 내 일신에 걸린 엄청난 사명을 저버릴 수 없다!’ 괴로운 듯 머리를 흔들다 지그시 어금니를 물고 검미를 날카롭게 세웠다. 잠시 그런 상태로 있던 그의 얼굴에 결연한 표정이 떠올랐다. ‘여길 떠나야 한다!’ 그는 눈을 뜨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는 그녀 앞에 나타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잠깐 사이에 그의 얼굴은 몹시도 수척해 보였다. ‘그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 아닌가? 그것만이 나를 이기고 그녀를 불행하게 하지 않는 길 이다.’ 이곳을 떠난다 해도 쉽게 그녀를 잊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였지만, 자신이 겪을 괴로움보다 그녀의 행복을 염려하는 마음이 더욱 컸다. ‘만일 내가 떠난다면……’ 노여워하고 안타까워할 양소혜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오해하며 자신을 증오할지도 모른다. 은혜를 모르는 철면피! 여인의 진정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무시하며 짓밟아 버리는 소인배…… ‘하지만 후일 그녀가 나의 진정한 신분을 알게 되면 그녀 스스로 나를 잊고자 할 것이 다.’ 사검평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천천히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남궁 부인, 당신이 내 정체를 알게 된다면…… 이 가슴에 있는 사랑조차도 사련(邪戀)이라 하여 노여워하고 거부할 것이오.’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다. 그녀의 얼굴에 나타날 공포의 표정이 눈에 선명히 보이는 듯했 갑자기 무한한 외로움이 몸을 감쌌다. 비록 상상이요, 찰나적인 것일지라도 그녀가 자신을 경멸할 것이라는 생각만으로도 이렇게 마음이 아팠다. 열린 창 밖에는 서서히 땅거미가 밀려오고 있었다. 처음엔 그늘이 지던 것이 차츰 검푸레한 안개처럼 뜰을 덮어 왔다. 한낮엔 열기를 품어 무덥던 바람조차도 이제는 가을날처럼 서늘하다. 아직 여름이 가지 않고 있는데 정원의 수목들이 잎을 떨구고 있었다. 사검평은 창에 팔을 댄 채, 어둠으로 물들어 가는 정원을 내다보고 물끄러미 있었다. 외로움이 그의 어깨 위로 산그늘처럼 내려앉았다. ‘보고 싶다……!’ 저도 모르게 노부모의 곁을 떠나오게 되었던 것이 벌써 사 년이 흐르고 있었다. 생사를 알 수 없는 형, 사진평의 모습도 아련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전대기인에 의해 제자로 거둬들여졌다는 주천혜의 장난기 섞인 얼굴. 그립고 아쉬운 것들이 눈앞에 구름처럼 피어오르니 가슴이 소리없이 파문을 일으켰다. 고개를 치켜 드니 백초곡의 뒤쪽 산등성이로 구름 속에 잠긴 달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산곡의 수목들은 모두 그 의식(儀式)을 지키기 위해 침묵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갑자기 사검평은 창가에서 몸을 돌렸다. ‘떠나는 것은 빠를수록 좋다!’ 자신의 마음이 흔들릴 것을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사라지려면 밤이 깊어야 했다. 그는 애써 홀가분하게 마음을 정리하며 침상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몸은 거의 완치 상태에 가까웠으나 다시 강호로 나서려면 정순하게 잘 다스려진 내공이 필 요했기 때문이다. 지그시 눈을 감으니, 그 수려한 이목구비와 반듯한 가부좌의 모습이 높은 단(壇) 위에 올 려진 불상처럼 숭고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운공이 절정에 이르니 정수리 위로 피어오른 희뿌연 안개 같은 것이 원을 이루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대로 굳어져 조상(彫像)이 된 듯 미동도 않던 그가 눈을 뜨자 맑은 정광이 그의 동공 속 에서 부서지는 별빛처럼 빛났다. 짙은 어둠으로 물든 실내를 창에서 비쳐 든 달빛이 은은히 비추고 있었다. 정작 떠나려 마음먹으니 자신의 이런 행동으로 상심해 할 양소혜의 얼굴이 떠올랐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가볍게 침상에서 내려와 실내를 천천히 둘러보던 그는 서탁 앞에서 우뚝 멈추어 섰다. 그 위에는 소담스럽게 담긴 음식이 놓여 있었다. 이미 식어 버린 음식들…… 양소혜가 들고 왔다가 그가 운공조식 중임을 알고 조용히 물러간 모양이었다. 사검평의 얼굴 가득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내가 정말 큰 죄를 짓게 되는군.’ 사검평은 창을 향해 쓸쓸히 돌아섰다.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이라면 한시라도 빨리 잊게 해주는 것이 죄를 덜 짓는 길이겠 지……’ 그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창 밖으로 신형을 날렸다. 밖으로 나오니 밤바람이 제법 서늘했다. 주위는 울창한 죽림이었다. 대숲에 바람이 일자 가지가 휩쓸리며 쏴아아, 파도 소리를 낸 그 가지 사이로 달빛이 산산이 부서졌다. 사검평은 자신이 머물던 모옥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고별을 전했다. ‘양 소저와 남궁 부인의 구명지은은 절대로 잊지 않으리다.’ 이윽고 그가 신형을 돌려 세워 발끝을 찍으려는 순간이었다. 딩…… 디딩…… 어디선가 끊길 듯 애절한 비파(琵琶)의 선율이 바람결에 실려 오고 있었다. 교교한 달빛 아래 은은히 울리는 이 선율은 진정 듣는 이의 애간장을 녹이는 듯했다. 우뚝 멈춰 선 채 가늘게 이어지는 그 선율에 귀를 기울이던 사검평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꿈결인 듯 선율에 취하여 걸음을 옮기는 사이 그는 죽림을 벗어나게 되었다. 죽림이 끝나는 곳에 이르니, 갑자기 눈앞에 별유천지(別有天地)가 나타난 듯 처처에 백화가 만발하여 제각기 향기를 발하고, 사방에 늘어선 화수림(花樹林)과 묘한 배치를 이룬 기암괴석들 사이로 아름다움을 다투는 듯 기화방초(奇花芳草)가 만발하였다. 이 모든 것들은 심야의 정적 속에 깊이 잠들어 있으나 향기는 밤에 더 짙은 법. 녹염의 싱 그러움과 정신을 아뜩하게 하는 화초의 향기가 신비로움을 더했다. 사검평은 이 넓고 아름다운 화원 앞에 우뚝 선 채 마치 선계(仙界)에 들어온 듯한 착각을 일으키고 있었다. 맑고 부드러운 비파음은 계속 들려 왔다. 홀린 듯이 소리의 종적을 더듬던 사검평이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넓은 화원의 중앙에 아담한 죽정(竹亭)이 한 채 있었다. 달빛은 교교한데 죽정 난간에 가볍게 몸을 기댄 채 비파를 퉁겨내고 있는 한 여인…… 얼굴은 눈이 부시도록 맑은 천공(天空)의 달빛을 우러른 채 우수를 그늘처럼 드리우고 있다. 가늘고 긴 목의 섬세한 곡선이 애처롭게 흐르고 가냘픈 몸을 감싼 백의는 서럽게 느껴진 다. 여인은 비파의 현을 퉁기며 움직일 줄 모르고, 사검평은 여기 이렇게 우뚝 선 채 움직이지 못했다. 바람에 가볍게 옷자락을 나부끼며, 섬섬옥수로 한 많은 자신의 가슴을 쓰다듬는 듯 비파를 탄주(彈奏)하는 여인……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알게 된 순간 사검평은 숨이 멎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유옥선이었다. 불행히도 이제는 남궁 부인이라 불리는…… 그의 가슴은 사나운 고동과 함께 격랑치기 시작했다. 두 눈은 여인에게로 향한 채 그의 발은 무형의 힘에 이끌리듯 죽정을 향해 옮겨 갔다. 가슴의 충격이 큰 탓으로 월광에 비친 그의 모습은 비틀거리는 듯하다. 그의 혼백은 벌써 죽정 난간에 따라붙고 빈 껍데기의 육신만이 뒤에 처져 비틀거리며 가는 듯하다. 그때였다. 비파의 선율이 갑자기 날카롭게 변하는 듯하더니 뚝 멎어 버렸 인기척을 느낀 유옥선이 크게 경악하여 선율을 잃는 바람에 일어난 일이었다. 청량한 달빛 속에 두 남녀의 시선이 부딪쳤다. 말하는 법을 잊은 듯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다. 그렇게 억겁 동안이라도 멎어 있을 듯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2 명월이 구름 속으로 숨는다. 무거운 정적이 사위를 휘감았다. 구름에 가린 어스름한 달빛이 내리비치는 정자의 난간을 사이에 두고 눈길을 마주한 두 남 녀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하지만 사검평의 눈빛은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자신이 이곳을 떠난다 해도 한시도 못 잊을 여인…… 비파의 현을 움켜쥔 유옥선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한 손가락이 현을 놓치며 따앙, 하는 비파음을 토해 냈다. 그 소리는 비록 작은 것이었지만 두 남녀는 쇠망치로 가슴을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아야 했 다. 비로소 정신을 차린 사검평은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는 황망히 안색을 바꾸었다. 당황하기는 유옥선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이미 그가 자신에게 심상치 않은 감정을 품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이런 장소에 그가 홀연히 모습을 나타내자 가슴이 두근거리고 왠지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주춤하고 반 걸음 물러선 사검평은 미미하게 떨려 나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남궁 부인께서 탄주하시는 선율이 너무 신묘하여 소생이 무의식중에 이곳까지 오게 되었 습니다. 소생이 부인의 흥취를 방해했다면 용서하십시오.” 유옥선은 한 손으로 지그시 가슴을 누르며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황공한 말씀이십니다. 소첩은 달빛이 너무 밝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곳 탄금정(彈琴亭) 에 나와 비파를 타며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사옵니다.” 이때 구름 속에 가려졌던 달이 다시 고개를 내미니 사위가 대낮같이 밝아진다. 달빛 아래 드러난 유옥선의 옥용(玉容)은 주위에 만발한 어떤 꽃에도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사검평은 자신의 넋이 그녀의 맑은 동공 속으로 빨려 드는 듯한 아뜩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눈앞에 있으되 손을 뻗어 잡을 수 없는 꿈속의 사랑일 뿐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사 검평은 또 한 번 깊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고통을 맛봐야 했다. 그는 산산이 흩어지는 가슴을 억지로 가다듬으며 유옥선을 향해 정중히 포권하고 굳건한 소리로 말했다. “그 동안 남궁 부인께서 소생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유옥선의 아름다운 눈이 놀람으로 크게 떠졌다. 그의 말은 이별을 앞둔 작별 인사였기 때문이다. 유옥선은 안색을 굳히며 말했다. “사 대가께선 이곳 백초곡을 떠나기로 결심하신 모양이군요.” 사검평이 그녀를 외면한 채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아무 말도 없이 떠나려 했는데, 비파의 선율이 소생을 불러 부인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 게 됐습니다.” 유옥선은 그가 이렇게 떠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던 듯 약간 불안정한 기색을 보였다. 손끝으로 비파를 내리쓸고 입술은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 움찔거리더니, 낮은 음성으로 말 했다. “혜매는 순진무구한 소녀예요. 혜매는 처음 사 공자를 본 순간부터 깊은 관심을 기울이며 지극한 정성으로 간호했어요. 소첩이 느끼기로…… 혜매는 이미 사 공자를 마음속으로 연모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사검평은 말없이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러한 혜매에게 만일 공자께서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나신다면 그녀의 마음에 깊은 상처 를 남기게 될 거예요.” 순진한 소녀의 방심이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해 달라는 완곡한 부탁이었다. 순간 사검평은 가볍게 몸을 떨었다. 양소혜가 자신에게 깊은 애정을 쏟고 있다는 건 자신도 알고 있는 터였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유옥선의 입을 통해 듣게 되자, 왠지 가슴이 크게 뛰었다.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알고 일부러 이런 소리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드는 것이다. 그러나 사검평은 지금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기에도 벅찬 상태였다. 그는 유옥선의 부탁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남궁 부인의 뜻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소생의 가슴속에는 이미 한 여인이 깊숙이 자리하 고 있어 양 소저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으니, 이 점 양해 바랍니다.”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흑……” 돌연 여인이 흐느끼는 듯한 소리와 함께 탄금정에서 약간 떨어진 화수림 그늘 속에서 청의 인영 하나가 달려가는 게 보였다. 나는 듯이 곡 안으로 사라지는 청의인영을 발견한 유옥선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현기증을 일으킨 듯 비틀거리다 간신히 탄금정 기둥에 의지해 신형을 바로했다. 그러나 사검평은 그녀를 마주 향한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딱딱히 굳어 있었다. 유옥선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원망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공자의 그 한마디가 한 소녀의 티없이 맑은 가슴에 못을 박았어요. 아시나요?” 그녀는 괴로운 듯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혜매는…… 오늘 이 슬픔과 충격을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마치 양소혜의 충격이 자신의 슬픔인 양 아름다운 눈매에 그렁그렁하게 눈물이 고여 돌았 다. 비록 차갑게 굳어진 얼굴을 하고 있는 사검평이었으나, 그 또한 내심으로는 현 상황에 대 해 매우 가슴 아파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십여 장 밖에 양소혜가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방금 그가 유옥선에게 말한 것은 실상 양소혜가 들을 것을 염두에 두고 한 소리였다. 물론 그 말이 그녀처럼 순진한 소녀에게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 모르지 않았다. 하나 그것만이 양소혜로 하여금 자신을 단념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말없이 서 있는 그에게 유옥선은 간절한 소망이 담긴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공자,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혜매의 마음을 위로해 주세요. 지금 혜매의 아픈 가슴을 달 래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사 공자이십니다. 만일 공자께서 소첩의 이러한 간청을 물 리치신다면 소첩은 두고두고 사 공자를 원망할 거예요.” 달을 우러르고 있던 사검평은 그녀의 말에 비로소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리에 맞는 그녀의 간곡한 청에 그는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 더구나 그의 결심을 촉구하듯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애절한 시선이 더욱 그의 마음을 흔들 리게 했다. 어느새 그녀는 탄금정에서 내려와 선녀와 같은 자태로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옥같이 희고 작은 손을 그에게 내밀 듯하다. 아니, 사검평은 지금 그녀를 와락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힘겹게 자제하고 있는 중이었다. 손만 뻗으면 안을 수 있는 여인……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는 현실이 증오스러웠다. 입김이 닿을 듯 가까이 서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사검평이 뭐라 말을 하려 할 때였다. “으하하하……!” 느닷없이 뒤쪽에서 요란한 웃음 소리와 함께 성난 노갈이 터지지 않는가! “월하의 두 정인(情人)이라…… 진정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선남선녀로군.” 순간, 유옥선의 얼굴이 핏기없이 하얗게 질려 갔다. “당신이 어떻게……?” 그녀의 다급한 음성이 끝나기도 전에 찬바람을 몰고 한 명의 금의공자(錦衣公子)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그의 안면은 분노의 빛으로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다. 나이는 이십오륙 세 가량 되었을까? 훤칠한 키와 반듯한 체모, 굵직굵직한 이목구비의 윤곽에 서리는 정광으로 보아 당금 강호 의 젊은 고수 중에 제법 인물로 꼽힐 듯하다. 그러나 준미한 얼굴은 무섭게 굳어 있어 당장이라도 두 사람을 씹어 삼킬 듯한 기세였다. 사검평은 하얗게 질리는 유옥선의 태도에서 그 금의공자가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는 즉시 표권의 예를 갖추었다. “소생은 사검평이라 하오. 형장의 존함을 물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시겠소?” 사검평이란 이름에 금의공자는 눈가에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더니, 이내 일진광소를 터뜨렸 다. “흐하하…… 천하에서 그 누가 감히 나 옥면룡검 남궁학의 아내와 밀회를 즐기는가 했더니, 근자에 들어 강호를 경동시키고 있는 염라서생이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 군.” 옥면룡검 남궁학은 냉소를 머금고 다가들었다. “하나 아무리 염라천존의 전인이 천하무적의 절예를 지녔다 해도 나 옥면룡검의 용서를 받을 수는 없다!” 그 소리에 유옥선이 소스라치게 놀라 다급히 소리쳤다. “다, 당신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그녀는 말을 마치지도 못하고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나 남궁학은 고개를 홱 돌려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버럭 소리쳤다. “닥쳐라! 천하의 탕부(蕩婦) 같으니…… 난 네년이 남궁세가로 출가해 오기 전에 광검수 재와의 사이에 있었던 일도 알고 있었다. 하나 그것은 혼인하기 전의 일이니 장부의 아량으로 덮어 줄 수 있었다. 그런데 네가 본 가로 혼인하여 온 후에 나 남궁학을 한 번이라도 낭군으로 대해 준 적이 있었느냐?” “당신……” 유옥선은 핏기를 잃은 채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그러나 남궁학은 고개를 벌떡 뒤로 젖히고 하늘을 우러러 미친 듯이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 나 옥면룡검 남궁학과 벽혈옥봉 유옥선은 겉으로만 금슬 좋은 정려(情麗)일 뿐, 사실은 결혼한 지 육 년이 지나도록 단 한 번도 실질적인 부부지연은 맺지 않았다면 천 하에 그 누가 믿겠는가?” 그는 돌연 광소를 뚝 끊고 유옥선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네년이 낭군인 나와의 동침을 완강히 거부하고 신병을 핑계 삼아 백초곡에 숨어 들어오 더니, 외간남자와 밀통을 하고 있었구나. 네년의 추악한 면모가 백일하에 드러났는 데도 시치미를 뗄 작정이냐?” “다, 당신의 그 말은……” 유옥선은 충격에 질려 혼절 직전에 이르렀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오해에 할말을 잃은 것이다. 옥면룡검 남궁학은 완전히 이성을 잃은 듯 미친 듯이 부르짖었 “네년이 그러고도 하늘 아래 낯을 들고 살아남길 바란단 말이냐?” “여보……” “어서 그 더러운 목을 늘여라! 네 수급을 보면 그 위대한 장인께선 어떤 변명을 하실지 들어 봐야겠다!” 그는 두 눈에 핏발을 세우고 산곡이 떠나가도록 고함쳤다. 잘 가꾸어져 향기를 뿜던 화수림이 그의 발 밑에, 휘두르는 손끝에 부러지고 짓밟혀 갔다. 멍하니 남궁학의 광태를 바라보던 유옥선은 끝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혼절해 쓰러졌다. 사검평은 재빨리 그녀의 허리를 안아 부축했다. 그는 분노가 치밀었으나 자신으로 인해 오해가 빚어진 것이므로 애써 침착을 유지했다. “남궁 대협의 방금 그 말은 오해요. 대협이 자신의 입으로 부인의 정절을 의심하는 것은 자신을 모욕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오?” 그러나 남궁학은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닥쳐라! 네가 감히 입을 열어 그 계집애 대신 변명하려 들다니, 이 남궁학이 밀통의 현장 을 목격하고도 두 간남간부(姦男姦婦)를 용서해야 한단 말이냐?” 그는 치미는 격분을 이기지 못해 미친 듯이 양손을 내휘둘렀. 그러자 무시무시한 장력이 폭풍처럼 일어나며 사검평을 후려쳐 갔다. 사검평의 얼굴이 서서히 노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인내심으로 유옥선과 함께 피하며 소리쳤. “남궁 대협, 제발 이성을 지키시오!” “닥쳐라! 내 오늘 더러운 두 연놈을 주살하지 못하면 더 이상 하늘을 보고 살지 않겠다!” 그는 양손을 가슴 앞에서 교차시켜 다시 뻗어 냈다. 이성을 잃고 격분한 그가 체내의 진기를 있는 대로 끌어올리니 사방으로 울려 나가는 굉음 이 천둥 소리 같다. 쿠르릉! 초목이 뿌리째 뽑혀 날고 처처에 박힌 기암괴석들이 가루로 화해 사방으로 튀어올랐다. 탄금정이 기둥부터 뽑혀 나갈 듯 기우뚱거리니, 실로 그의 장력은 대단한 것이다. 당금 천하에서 결코 그 세력이 뒤지지 않는 남궁세가가 천하에 뛰어난 절예를 자랑해 온 현 천무극일원장법(玄天無極一元掌法). “이 더러운 간부!” 남궁학은 저주 어린 일갈을 지르며 접었던 우장을 옆으로 힘껏 떨쳐 냈다. 우르릉! 그의 커다란 장심이 먹물에 담가 두었던 것처럼 시커멓게 물들어 가며 은은한 흑광(黑光)을 발했다. 이어서 그 흑광은 눈부신 광채를 발하며 날카로운 변화를 일으켰다. 이때 사검평은 한 팔로 유옥선을 안은 채 반격을 자제하며 계속 절정의 신법을 펼쳐 그의 무서운 공격을 피하고만 있었다. 그러자 남궁학의 분노는 갈수록 더욱 격화되어 마침내는 미친 야수와 같이 날뛰었다. 전신의 진력을 모조리 일으켜 지닌 바 절세비공으로 계속 잔인한 살초를 펴왔다. 마침내 사검평은 더 참지 못하고 지그시 어금니를 깨물었다. “옥면룡검, 그대가 계속 이렇게 핍박한다면 나 염라서생도 더는 참을 수 없소!” 그의 고함 소리가 산곡을 뒤흔들었다. 그러자 미친 듯이 살수를 펼치던 남궁학이 냉소했다. “하하하…… 네가 어떤 말로 본 공자를 설득하려 들어도 소용없다! 나 남궁학은 절대 염라 서생과 같은 하늘을 두고 양립할 수 없으니, 오로지 둘 중 하나의 죽음만이 이 사태를 종결 지을 수 있을 것! 헛소리는 집어치우고 알량한 재주를 부려 보아라!” 도저히 말로는 사태를 수습할 수 없다고 판단한 사검평은 이 광자(狂者)를 벌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의 준수한 눈매가 가늘게 좁혀 들며 파란 광망을 뿜어 냈다. “흥!” 그는 싸늘한 냉소와 함께 우수를 가볍게 뻗어 냈다. 순간, 눈부신 홍광이 허공을 가르며 남궁학에게로 날아갔다. 번쩍! 슈우욱! 일단 사검평이 손을 쓰기 시작하자 남궁학의 공격은 허공을 헤집는 헛된 몸부림에 불과했 다. 퍼펑! 사검평이 쏘아 낸 홍광은 그대로 남궁학의 가슴에 격중되었다. “크윽……” 남궁학은 답답한 신음성과 함께 비틀거리며 칠팔 보나 밀려나갔다. 그는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억지로 버티고 선 채 뭔가 욕설을 퍼부으려는 듯했다. 하지만 벌어진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한 사발이 넘는 응혈이었다. “우억……!” 남궁학은 광망으로 일렁이는 눈빛으로 사검평을 쏘아보더니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크하하핫! 아하하하핫!” 연신 터져 나오는 핏줄기를 분수처럼 뿜어 내며 남궁학은 미친 듯이 웃어댔다. 얼굴도, 가슴 자락도 온통 피로 물들어 버렸다. 이윽고 웃음을 뚝 멈춘 남궁학은 또다시 사검평을 향해 달려들었다. “나를 죽이기 전에는 끝나지 않을 것!” 그의 행위는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끝내 불속으로 날아드는 부나방 같았다. 사검평은 날뛰는 그를 진압하기 위해 적양파천오식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쌍장을 후려쳐 오는 남궁학을 향해 오 성의 진력으로 제일식을 떨쳐 냈다. 패애액! “크윽……!” 사검평에게 일격을 당한 남궁학은 다시 주르르 밀려나가다 더 버티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 았다. 그가 아무리 당금 무림에서 유능한 고수라 하나 사검평의 상대는 아니었다. 더욱이 사검평은 천공금성 사마등과의 일전 이후 그의 체내에서 새로이 효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주천금단의 신효로 일신의 내공이 더욱 강해진 데다가 생사현관마저 타통되지 않았 는가?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 공격을 무리하게 감행했던 남궁학은 깊은 내상을 입은 채 바닥에 주저앉아 들끓는 기혈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턱밑으로 아직 마르지 않은 선혈이 뚝뚝 떨어졌다. 사검평은 그를 내려다보며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나와 남궁 부인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결백한 사이요. 그대는 전후 사정 도 모른 채 부인의 정절을 의심하니, 그것은 졸장부나 하는 행위가 아니겠소?” 두 눈을 감고 들끓는 기혈을 진정시키던 옥면룡검 남궁학이 그의 말에 도저히 참을 수 없다 는 듯 돌연 벌떡 고개를 젖히고 앙천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핫!” 그러나 그것은 웃음이라기보다 차라리 처절한 통곡인 것. 뉘라서 그의 비애를 알 것인가. 사납게 들썩이는 어깨, 미친 듯이 광소하는 남궁학의 꺼칠꺼칠한 얼굴에 눈물이 주르르 흘 렀다. 장부의 단단한 가슴을 찢고 흐르는 것은 혈루(血淚)였다. 그는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을 주체할 수 없어 미칠 듯한 심정인 것이다. 그 고통으로 내장이 뒤집히고 숨이 넘어가는 것 같았다. 광기가 끓어오르는 그의 눈에 비친 것은 분명 아내와 외간남자가 나누는 달콤한 밀애의 장 면이었다. 그런데 그걸 목도하고도 힘이 모자라 이렇게 간부(姦夫) 손에 처절한 참패를 맛봐야 했으 니…… 치솟는 굴욕과 암울한 좌절감은 강호에서 가장 촉망받던 이 젊은 기협의 가슴을 처참하게 난도질해 버렸다. 게다가 강경하게 유옥선을 변호하고 나서는 사검평의 행동은 질투의 불길이 타오르는 남 궁학의 가슴에 기름을 퍼부은 격이었 그는 이미 이성을 잃고 있었기 때문이다. 계집처럼 미끈하고 잘생긴 간부(姦夫), 사검평의 말은 자신에 대한 조소와 비웃음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차라리 칼을 물고 죽을지언정, 결코 귀를 열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하하…… 크하핫……” 머리를, 두 어깨를, 상체를 마구 흔들어대며 미친 듯이 광소하던 남궁학이 돌연 광소를 뚝 멈추었다. 그는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눈빛을 화살처럼 쏘아 내며 입을 열었다. “나 옥면룡검 남궁학이 익힌 바 재주가 모자라 오늘 천하의 음악(淫惡)한 간부에게 수모 를 당하는구나. 하나 이 빚은 기필코 갚겠다. 이 남궁학이 살아 있는 한, 오늘의 이 치욕은 백배 천배로 갚아 너희 두 간부의 몸뚱이를 계곡의 짐승 먹이로 던져 주겠다!” 미친 듯이 악을 쓰는 그는 이빨이 살기로 날카롭게 곤두서고, 두 눈은 광기로 번들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사검평의 얼굴이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옥면룡검 남궁학, 더 이상 망발을 내뱉는다면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 옹졸한 마음으로 부인의 정절을 모독하는 행위를 중단하라!” “하하하…… 염라서생, 네놈이 후환이 두렵다면 이 자리에서 내게 손을 쓰는 게 현명하리 라. 네놈이 쓸데없이 만용을 부리다간 오늘 이후 한시도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계속되는 남궁학의 광기에 분노한 사검평은 자신도 모르게 우장을 번쩍 들어올렸다가 어금 니를 지그시 깨물며 손을 내렸다. “너를 죽여 살인멸구(殺人滅口)의 혐의를 뒤집어쓰는 것은 조금도 두렵지 않으나, 남궁 부인의 정절에 누가 끼칠 걸 우려해 네 겁없는 목숨을 잠시 살려 두겠다.” “크흐흐…… 크하하……” 남궁학은 울음인지 웃음인지 모를 괴성을 지르며 제 머리를 움켜쥐고 미친 듯이 고개를 휘 저어댔다. 야윈 얼굴은 자줏빛으로 변했고 격한 몸부림과 괴성은 광인(狂人)의 모습이었다. 그러다 제 몸을 주체하지 못해 앞으로 고꾸라질 듯이 휘청하더니, 핏줄기가 뚝뚝 흐를 것 같은 충혈된 눈으로 집어삼킬 듯이 두 사람을 노려봤다. “흐흐…… 염라서생, 네놈이 지금은 이 옥면룡검을 제압하고 득의해 있으나, 두고 보아라. 네놈 또한 나와 같은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니…… 흐흐, 그 창부(娼婦) 같은 계집은 늘 마음속에 다른 남자를 품고 있으니, 네 운명도 길지 않다!” 그는 분노와 절망을 이기지 못해 제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 계집은 나와 혼인하기 전에 광검수재 척금송이란 자와 연인 관계였다. 그럼에도 내가 그 계집을 받아들인 건 오로지 사랑의 일념에서였던 것! 그런데, 그런데……” 심장이 두방망이질쳐 숨이 턱 끝에 차는지 그는 거칠게 숨을 토해 냈다. “그런데도 그 계집은 내 진심을 받아 주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외간남자에게만 마음을 기울 여 왔다. 흥! 나는 항시 증거를 잡고자 기도했으나 실패했었다.” 그는 흐트러져 산발이 된 머리를 흔들며 주먹으로 제 가슴을 쳤다. “크흐흐…… 그런데 드디어 오늘 덜미를 잡았다. 염라서생, 내가 장담하겠다. 머지않아 저 계집은 또다시 요기를 부려 너를 무참하게 내동댕이칠 것이다!” 그는 자줏빛으로 얼룩진 얼굴로 휘청거리며 미친 듯이 고함쳤 “닥쳐라!” 그의 광언을 듣다못해 사검평은 날카롭게 일갈하며 남궁학을 향해 일퇴(一腿)를 날렸다. “크억!” 남궁학은 처철한 비명을 지르며 삼 장이나 날아가 떨어졌다. 사검평은 마음속으로 깊이 사모하고 있는 유옥선을 일개 창부로 비하시키는 남궁학의 언동 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남궁학은 코와 입에서 피를 뿜으며 꿈틀거리더니, 이를 악물며 일어났다. 허물어질 듯 기력없이 몸을 떨면서도 그는 사력을 다해 버티고 섰다. “이 더러운 간적(姦敵), 차라리 나를 죽여라! 나를 죽여야 네 뜻대로 그 창부를 얻을 것이 며, 후환도 없어질 게 아니냐?” 흐트러져 산발한 머리, 풀어지고 찢겨져 너풀거리는 의복, 피투성이 얼굴, 가슴…… 혈인이요, 광인의 모습이었다. “이 파렴치한 음적! 네 아무리 나를 죽여 살인멸구의 수단을 쓴다 해도 무림 동도들의 입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언젠가 이 모든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나 너희 두 패륜남녀는 천하에 발붙일 곳이 없게 될 것이다!” 남궁학이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자 사검평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그의 부릅뜬 눈에서 차가운 살광이 뿜어졌다. “그처럼 인간의 본성을 잃고 사리를 모르는 인간이라면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다.” 사검평은 냉혹한 얼굴로 성큼 다가섰다. “비록 이 염라서생이 천하에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뒤집어쓰는 한이 있더라도 더 이상 남궁 부인의 정절을 욕되게 하는 것은 두고 볼 수 없다!” 그가 왼손을 번쩍 치켜 들자 장심에서 핏발이 뻗치는 듯 번쩍하더니, 손 전체가 불에 달궈진 듯 은은히 붉은 혈광을 내뿜기 시작했다. 적양신공(赤陽神功)…… 드디어 그는 잔혹한 살심을 일으켜 절세적인 적양신공을 펼치려는 것이었다. 죽음을 눈앞에 둔 남궁학은 안색을 흙빛으로 물들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두려움 때문은 아니었다. 간적의 손에 죽는다는 지독한 모멸감 때문이었다. 사검평이 예리한 살광을 흔들림없이 뿜어 내며 왼손을 내리치려는 순간이었다. “멈추시오!” 갑자기 창노한 음성이 달빛을 가르고 울렸다. 사검평이 검미를 꿈틀했을 때, 장내에 갈포장삼을 입은 육순 가량의 청수한 노인이 내려 섰다. 그림자처럼 그 뒤를 따라 사뿐히 나타난 건 양소혜였다. 第 十八 章 영웅상심(英雄傷心) 1 갈포장삼의 노인은 격동으로 일렁이는 눈으로 장내의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남궁학을 향해 물었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남궁학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괴이한 소리로 웃어 젖혔다. “으하하…… 처외숙(妻外叔)께선 제게 묻지 마시고 저자 품에 안겨 있는 창부 같은 계집에 게 들어 보시오.” 노인의 청수한 노안(老顔)에 짧게 경련이 스쳤다. 그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급히 시선을 돌려 사검평을 보았고, 그의 품속에서 혼절해 있는 유옥선을 보았다. 대경(大驚)한 빛이 미간으로 빛살처럼 스치더니 노인은 정색한 얼굴로 사검평을 쳐다보았다. “노부는 양소린이라 하는 늙은이요. 대체 그대는 누구기에 이 백초곡에 나타나 이렇듯 소 요를 일으킨단 말이오?” 높은 언성에 은은히 노기를 띠고 있으나, 예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사검평은 면전의 이 노인이 바로 백초곡의 주인인 제세성의 양소린인 것을 깨달았다. 하여 그도 정중히 포권지례를 취한 뒤 내막을 설명하려 할 때였다. “형부께선 지금 오해를 하고 계신 거예요.” 한눈에 사태를 알아차린 양소혜가 반울상이 되어 하는 말이었. “사 공자와 유 언니는 절대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요!” 그녀는 몹시 다급해져 열심히 설명했으나, 그것 또한 남궁학에겐 모략으로밖에 여겨지지 않 았다. “하하하…… 이젠 너까지 이 남궁학을 속이려 한단 말이냐?” 피를 토하듯 웃어대는 그 광소에는 가슴이 터질 듯한 울분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분노의 좌절감이 폭풍처럼 그의 가슴을 휘어잡았다. 장래가 촉망되는 후기지수요, 온 무림인들의 선망과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기협이 여인 하 나로 인하여 분별력을 잃고 부리는 광태를 제세성의 양소린은 말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남궁학은 살기 띤 모습으로 사검평을 노려봤다. “나 남궁학은 절대 오늘의 한(恨)을 잊지 않겠다. 기억해라, 염라서생! 나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이 원한을 갚을 것이며, 네 품의 그 계집도 요절을 내리라!” 부러질 듯 이를 갈며 저주의 말을 퍼붓던 그는 미친 듯이 광소하며 곡 밖으로 질주해 갔다. 그의 신형은 일시에 짙은 어둠 속에 잠겨 버리고 말았다. 제세성의가 당황해 뒤쫓으려다, 이것이 남녀간의 깊은 정리(情理)에서 빚어진 것임을 알고 뒤쫓기를 단념했다. 밤바람 속에 갈포 자락을 날리며 홀로 장탄식을 하더니, 고개를 떨군 채 말없이 서 있는 양소혜에게 물었다. “혜아야, 대체 어찌 된 일이냐?” 그 물음에 갑자기 양소혜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흐느꼈다. “흑…… 이 모든 게 소녀 때문에 일어난 거예요.” 본시 티없이 맑고 명랑하게만 자라난 그녀였다. 백초곡은 언제나 까르르 터져 나오는 그녀의 귀여운 웃음 소리로 가득했었다. 세상 사람들과 접해 보지 않은 탓으로 그녀의 가슴은 한치도 구김이 없었는데, 그런 그녀 가 갑자기 슬픔과 울음을 배운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제세성의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 의식을 잃고 사검평의 품에 안겨 있는 유옥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혜아야, 언니를 안고 안으로 들어가거라.” 침착하게 가라앉은 음성이었다. 그 소리에 양소혜는 얼른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뭔가 급히 설명하려는 듯 입을 벙긋거렸으나, 제세성의의 얼굴이 어둡게 굳어 있는 걸 보고 는 감히 입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잠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섰다가 볼을 훔치며 사검평에게로 다가섰다. 말없이 섰던 사검평은 유옥선을 그녀에게 안겨 주었다. 그도 말이 없다. 양소혜는 그의 시선이 잠시 자신의 얼굴에 머무는 걸 의식하면서도 눈길을 들지 못했다. ‘이 모든 불상사가 나 때문에 일어난 거야. 나 때문에……’ 그녀는 다시 소리없이 울먹였다. 도대체 이렇게 큰일을 그녀는 겪어 본 적이 없었다. 긴 머리카락 몇 올이 눈물에 젖어 볼을 가렸다. 그녀는 사검평 앞을 떠나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리다 유옥선을 내려다봤다. 아름답다. 한 사람이 이성을 잃고 미친 야수처럼 떠나가고, 한 사람이 이렇게 눈물을 흘리고, 또 한 사 람이 한숨을 내쉬며 지켜보고 섰는데…… 꿈결에 오색 영롱한 빛을 보는가. 혼절한 그녀의 입술은 보일 듯 말 듯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윤기 흐르는 긴 머리채는 늘어지고, 색채 고운 긴 옷자락은 양소혜의 팔 밑으로 흘러내린 채…… 잠든 듯한 얼굴이 약간 창백해도 옥을 가다듬어 빚은 듯 티없이 곱고 아름답다. “가거라.” 제세성의의 짧은 한소리에 양소혜는 소리없이 곡 안으로 사라졌다. 사검평은 한숨을 삼키며 제세성의 앞에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선배님, 이 모든 불화의 근원은 소생에게 있습니다.” 그 정중한 말에 비로소 제세성의는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 “그대는 누군가?” 제세성의는 낮은 소리로 짧게 물었다. “소생은 사검평이라 합니다.” 제세성의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검평은 방금 전에 일어난 일의 내막을 짧게 설명했다. 자신이 심한 부상을 입고 혼절한 상태에서 두 소녀의 구함을 받았던 일부터, 신비한 금음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이곳까지 오게 된 사실까지…… 그러나 그 다음을 어찌 말하랴! 순진무구한 양소혜가 마음의 상처를 입은 것을…… 그녀는 제세성의에게 있어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금지옥엽인 것이다. 장중보옥처럼 아끼기에 오늘에 이르도록 세상에 드러내 놓지 않고 있는 애녀(愛女)인 것 이다. 그러나 제세성의 양소린이 누군가?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딸이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사실은 더욱 확연히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림에서 다시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출중해 뵈는 면전의 젊은이, 사검평의 가슴에 유옥선을 연모하는 마음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게 바로 연륜(年輪)이 아니랴. “음……” 제세성의는 신음 같은 짧은 탄식을 토했다. 가슴 한편이 천근 바위에 짓눌린 듯 무거웠다. 그러나 그는 결코 심중을 내색하지 않았다. “음…… 남궁 소협이 깊은 오해를 품고 나갔으니 일은 쉽게 풀릴 것 같지 않군.” 사검평은 민망하여 잠시 고개를 숙이다 책임을 느끼고 얼굴을 굳혔다. “소생의 목숨을 구해 준 남궁 부인께 도리어 이런 폐를 끼치게 됐으니, 소생의 죄가 큽니 다. 이 일은 소생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니, 소생이 남궁세가를 방문하여 책임지고 그의 오해를 풀도록 힘써 보겠습니다.” 그로선 크게 마음을 결정한 것인데 제세성의 양소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대가 끼여든다면 오해는 더욱 깊어질 뿐이네. 노부 생각엔 앞으로 그대는 옥선이의 눈 에 띄지 않도록 노력해 주면 고맙겠네.” 제세성의의 말은 어서 이곳을 떠나 달라는 정중한 축객령(逐客令)이었다. 이미 떠나기로 마음먹었던 사검평이었지만 막상 축객령을 받고 보니 가슴 한편이 무너져 내 리는 것 같았다. 그는 지그시 어금니를 물었다. 핼쑥해진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더 이상 그녀 앞에 나타나지 말아야 한다. 그 생각이 그를 견딜 수 없게 했지만, 드러낼 수 없는 상처는 속으로 삭여야 하는 법이다. 그는 묵묵히 포권지례를 취하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소생을 구해 주신 두 분 소저의 은혜, 평생 잊지 않을 것이라 전해 주십시오. 그럼 이 만……” 그는 재빨리 신형을 돌려 날쌘 야조(夜鳥)처럼 허공을 차고 어둠 속으로 쏘아져 나갔다. 염라서생 사검평! 염라천존의 전인은 이렇게 상처받고 떠났다. “아……” 제세성의의 탄식 소리가 은은한 달빛을 흔들었다. ‘그 젊은이는 당금 강호에 출몰하고 있다는 염라천존의 후예가 분명한데, 만일 그가 남궁 세가와 원한을 맺게 된다면……’ 달빛을 우러르는 처연한 노안은 수심으로 빛을 잃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이 충돌은 막아야 한다. 우선 옥선이를 치료한 후에 남궁세가를 찾아 옥면금검 남궁 대협을 만나 오해를 풀도록 해야겠다.’ 달빛 속에 안개가 스러지듯 그의 자취가 홀연히 사라졌다. 인적이 없자 풀벌레 소리가 더욱 자지러진다. 달빛은 교교하고 숲은 야수의 울음 속에 어우러졌다. 그러나 먹빛 구름은 기어이 달빛을 가리려 드니, 달이 일그러진다. 어둠 속에 바람만 몰려 숲을 쓸고 둥지에서 졸던 새가 후두둑 날개를 턴다. * * * 개봉 번화가에서 동편으로 약 오 리(里) 가량 떨어져 있는 그리 크지 않은 객잔. 이미 술시(戌時)를 넘어선 시각이라 주위는 고요했다. 낮은 처마끝에 내건 야등(夜燈)이 바람에 흔들리고, 거뭇거뭇하게 턱수염이 솟기 시작한 점 원 하나가 그 야등 밑에 앉아서 졸고 있었다. 이 허름한 객잔 뒤편의 한 객실 안. 객실은 제법 널찍한 편인데 사면 벽은 오랫동안 청소를 하지 않았는지 거미줄까지 얽혀 있 다. 낡고 빛 바랜 휘장이 창을 가렸는데 반쯤 열어제친 창 사이로 바람이 불 때마다 휘장이 펄럭였고, 그때마다 방안의 먼지들이 풀풀 날렸다. 가구라곤 한쪽 벽면에 접해 있는 침상과 객실 한가운데 있는 낡은 탁자뿐이었다. 며칠간 방을 치우지 않았는지 안주가 말라붙어 있는 접시들과 술병들이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었다. 자시(子時)가 가까워지고 엷은 달빛이 사선으로 비쳐 들자 침상 위에 아무렇게나 누워 잠 든 백의인의 모습이 어렴풋이 드러났. 몸에 걸친 백의유삼은 오랫동안 갈아입지 않은 듯 얼룩져 있었. 머리는 제멋대로 헝클어졌고 수염은 얼굴을 덮을 듯 꺼칠하게 자라 매우 초췌한 모습이었 다. 그러나 그 초췌한 모습에서도 타인을 압도할 듯한 검고 짙은 눈썹이며 한 일 자로 꽉 다물 어진 입술, 반듯한 이마며 뚜렷하게 윤곽이 선 이목구비를 대하면 그가 타락한 일개 파락호(破落戶)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는 백의인은 다름 아닌 사검평이었다. 그는 독주(毒酒)를 물처럼 퍼마시며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과거 광검수재 척금송이 그랬던 것처럼 그 또한 사랑의 열정을 이기지 못해 폐인이 되려는 것인가…… 그는 잊고 있단 말인가! 두 어깨에 걸머진 강호의 깊은 은원(恩怨)과 사문의 무거운 사명을…… 그처럼 호기롭고 자신감에 차 있던 오만한 얼굴은 윤기를 잃고 핼쑥했다. 그런데 마치 숨이 멎은 것처럼, 가슴의 기복도 없이 누워 있던 그가 눈을 번쩍 떴다. 우묵하게 파인 눈이 번쩍 섬광을 발했다. 그런데 미동도 않고 천장을 응시하고 있던 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어떤 고인이 나를 찾으시오?” 고요한 객실 안에 무겁게 가라앉은 그의 음성이 울리는 순간이었다. “하하하…… 아직 폐인이 된 것은 아니었군.” 창노한 웃음 소리와 함께 휘장이 찢어질 듯 펄럭이더니 그림자처럼 스며드는 인영이 있었 다. 사검평이 튕겨나듯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천면환영인!” 황포장삼(黃袍長衫)을 걸친 선풍도골의 헌칠한 체구의 출현인은 하남성 북방 관도에서 본 바 있었던 천면환영인이었던 것이. 창으로 비쳐 드는 은은한 달빛을 등지고 선 그에게선 뭔가 알 수 없는 신비한 기운이 느껴 졌다. 그러나 그의 두 눈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었. 사검평은 흐트러져 산발이 된 머리를 천천히 쓸어 올리며 물었. “대협께서 어떻게 이곳을 찾으셨소?”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었다. 그러나 천면환영인은 그 말엔 대꾸도 않고 뒷짐을 진 채 실내를 둘러보며 가볍게 낯을 찌 푸렸다. “유감천만이로군.” 무엇을 두고 하는 소린지 사검평은 모르지 않으면서도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자 천면환영인은 홀로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염라서생이 한낱 여인과의 정에 얽매여 이처럼 몸을 돌보지 않고 쓸데없이 자신을 학대 하고 있다니, 노부는 실망을 금치 못하겠네.” 그래도 대꾸가 없다. 사검평은 침상 끝에 걸터앉은 채 거만하게 침묵하고 있었다. 그러나 눈여겨보면, 그것이 결코 거만한 자세가 아니요 멍하니 천장을 우러른 채 넋을 잃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천면환영인은 그에게 따끔한 일침을 가하려는 듯 정색하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만일 지금 그대의 모습을 자네 사부가 본다면 뭐라 하시겠는가?” 그 소리에 사검평은 고개를 홱 돌려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쏘아봤다. “대협께선 어찌 소생에 관한 일을 그처럼 소상히 아시오?” 천면환영인의 입가에 엷은 웃음이 도는 것이 보일 듯 말 듯하 “그대는 모르겠는가? 진전에서 상면한 후로 노부가 한시도 그대 곁을 떠난 적이 없다는 걸……” 그 소리에 사검평은 갑자기 가슴이 싸늘하게 식어 가는 듯했 일신의 신경이 모조리 곤두서고 두 눈은 날카롭게 빛났다. 그는 침착하려 애쓰면서도 조급한 빛을 감추지 못하고 재빨리 물었다. “그럼 소생이 천공금성 사마등과 대결하는 것도 보셨겠구려.” “하하…… 물론.” 천면환영인은 주저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천공금성에게 패해 백마에 몸을 의지한 채 백초곡으로 들어가고, 거기서 구함을 받은 것도 알고 있네.” 갑자기 사검평이 고개를 번쩍 치켜 드는데 짙은 검미가 꿈틀했 두 눈은 당혹감을 감추려는 듯 날카롭게 빛났다. 소리없이 미소가 피어오르는 데도 볼따구니가 일그러지는 걸 보면 어금니를 깨무는 것이 리라. ‘내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그의 시계(視界) 속에서 감시받고 있었단 소리가 아닌가! 놀라 운 일이군……’ 사검평의 눈빛이 날카로운 데도 천면환영인은 태연하다. 조금도 경계하고 조심하는 빛이 없다. 머리칼이 설 정도로 신경이 곤두선 사검평은 여전히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쓸어보았다. ‘저 느물느물한 늙은이가 무슨 속셈으로 내게 접근해 오는 것인가?’ 먼저 적인지 아닌지를 가려 내야겠는데, 백년 묵은 여우가 둔갑한 것처럼 도무지 꼬리를 움켜쥘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바싹 경계심을 세우는데 갑자기 머릿속으로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진정으로 내게 호의를 가진 인물이라면 내가 백마에 실려 사경을 헤맬 때 어째서 돌봐 주 지 않았는가?’ 짙은 의혹이 그 뒤로 꼬리를 물고 구름같이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 떠오르는 의혹의 빛을 감지한 듯 천면환영인은 잔잔한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 다. “혹시 그대는 노부가 어째서 그대의 위기를 돌보지 않았는가 하고 의심스러워하고 있는 게 아닌가?” 사검평은 가슴이 섬뜩해져 그를 마주 쳐다봤다. ‘도대체 이 늙은이의 예리한 신경은 어디까지 미쳐 있단 말인가?’ 그러나 사검평은 조금도 내색하지 않은 채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천면환영인이 나직이 탄식하며 말했다. “만일 그대가 술로 자신을 학대하고 세월을 낭비하지만 않았다면 노부는 절대 모습을 드 러내지 않았을 것이네.” 사검평은 말없이 그를 쳐다봤다. “노부는 이미 신비흉수의 손에 죽은 것으로 알려진 지 오래일세. 그러니 지금 노부가 천면 환영인이란 이름으로 공공연히 나타나는 건 그 동안의 치밀한 안배를 모두 헛되게 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러더니 그는 달빛 속에서 실내의 어둠 속으로 물러서며 엄숙히 말을 이었다. “그대는 결코 노부가 그대의 위기를 그대로 좌시했다고만 생각진 말게.” 사검평이 무슨 소리냐는 듯이 그를 마주 쏘아봤다. 천면환영인의 음성이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대는 싸움에 놀란 말이 우연히 백초곡으로 향했다고 생각하는가? 또한 백초곡의 소녀 들에 의해 발견된 것도 우연이라고 믿는 건가?” 사검평이 차가운 눈길을 거두지 않은 채 냉정한 어조로 되물었 “그 모든 게 대협의 안배였단 말씀이시오?” “그렇다네.” 사검평은 침상 끝으로 눈길을 떨어뜨렸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의 말대로 나는 암중에 그의 은혜를 입었는지도 모른다.’ 하나 그의 가슴엔 여전히 이 면전의 노인에 대한 의혹이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소생의 태도를 용서하시오. 은혜를 입은 자의 도리가 아니었던 것 같소.” 여전히 거만한 태도였지만, 천면환영인은 흡족한 듯 웃었다. “하하하…… 어찌 노부가 그대의 인사를 받을 자격이 있겠는가?” 이어서 그는 정색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당금 무림에 무서운 음모가 싹트고 있다는 것은 이미 그대도 알고 있으리라 믿네. 하지만 지금 더 큰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네.” 사검평이 무슨 소리냐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삼십 년 전에 한차례 강호를 경동시켰던 남해문이 또다시 정식으로 중원무림에 난입할 조 짐을 보이고 있단 말일세.” 사검평의 안면 근육이 소리없이 일그러졌다. “이것은 그대가 스스로 염라천존의 전인임을 남해문의 소녀 앞에서 밝히고, 남해천룡과 일전을 결할 의사를 표명했기 때문일세.” 사검평은 지그시 어금니를 깨문 채 움직이지 않았다. 바위에 짓눌린 가슴이 다시 태산에 눌리는 것처럼 무거웠다. 그의 얼굴에 긴장한 빛이 감돌기 시작하자 천면환영인은 더욱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강호에선 염라서생이란 명호를 모르는 사람이 없네. 이것은 그대가 미구에 닥쳐 올 남해문의 침입 속에서 강호를 지킬 유일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다는 증표일세.” 그 소리에 사검평의 얼굴은 침중히 가라앉았다. 천면환영인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생각해 보게. 이렇게 중대한 시기에 그대가 한낱 여인의 사랑에 연연하여 이렇게 자포자 기의 세월을 보내야 한단 말인가? 그대는 온 무림인들의 염원을 저버릴 셈인가? 진정 노부는 그대의 이런 작태에 노여움을 금할 수 없네.” 그 소리가 갑자기 벼락처럼 사검평의 가슴을 쳤다. 그것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지금 천면환영인이 한 말은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사실인 것이 만일 남해문이 재차 강호에 모습을 드러낸다면 천하에 그 누가 있어 그들을 막을 것인가! 더구나 그들의 움직임은 자신의 강호 출도로 인하여 야기된 것이 아닌가. 그는 전강호의 안위를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걸머진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다. 사검평의 눈빛이 서서히 강렬한 빛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일어서야 한다.’ 천면환영인은 그의 얼굴에 결의에 찬 빛이 살아나자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하하…… 그대가 스스로 막중한 사명을 깨닫고 이에 대처해 준다면 노부는 더 바랄 것이 없네. 노부가 비록 사규(師規)에 묶여 적극적으로 그대를 도울 수는 없으나, 필요하다면 암중에서나마 힘이 되어 주겠네.” 이어서 그는 푸른빛을 띤 의미 심장한 눈길로 사검평의 얼굴을 쓸어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 했다. “그대는 여기를 나가거든 개봉에 있는 영빈원(迎賓院)을 찾아 설향(雪香)이란 기녀를 만나 게. 그곳에서 그대는 매우 뜻밖의 사실을 접하게 될 걸세.” 그 말을 끝으로 그는 홀연 몸을 날렸다. 휘장이 한차례 흔들리는가 싶더니 그의 형체는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진정 천면환영인다운 귀신 같은 신법이었다. 이제 다시 홀로 남게 된 사검평은 침상에 걸터앉아 벽에 몸을 기댄 채 객실 바닥을 내려다 봤다. 제멋대로 나뒹구는 술호로들, 깨어져 조각난 접시며 흐트러진 안주…… 그의 움직임없던 눈길은 자신이 입고 있는 의복으로 향했다. 백초곡을 나온 이후 한 번도 갈아입은 적이 없으니 지저분하기 그지없었다. 흩어져 어깨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이며 꺼칠한 수염…… ‘광태를 보이던 남궁학과 다를 바 없는 몰골이군.’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지난 며칠 동안 그는 열병을 앓은 듯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괴로움 속에서 폭음을 했다. 그럴수록 유옥선에 대한 연모의 정은 더욱 절실해졌고, 미어지는 가슴은 이대로 장이 끊겨 죽는가 싶었다. 그러던 그가 천면환영인의 충고로 인해 이제야 조금씩 정신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사검평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이제야 그녀로 인해 타락의 길로 접어든 광검수재의 심중을 알겠군.” 그는 침상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낮지만 힘이 실린 목소리로 다짐하듯 독백했다. “그렇다고 광검수재와 같은 꼴이 될 수는 없겠지.” 이어서 그는 두 눈을 빛내며 이를 악물었다. “내 일신에 강호의 안위가 걸려 있다.” 그 동안 초췌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우뚝 선 신위는 무너지는 태산도 맞받을 듯 강인해 보 였다. 약간 야위긴 했어도 핼쑥하던 얼굴엔 예전과 같은 기백이 칼날처럼 다시 일어섰다. 유옥선에 대한 연정을 떨쳐 버리기 위해 내심을 다잡던 그는 문뜩 문밖을 서성이는 인기척 을 느꼈다. 그는 고개를 홱 돌리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누구냐?” 외침이 떨어지는 순간 그는 어느새 사납게 문을 열어제치고 있었다. “고, 공자……” 몸을 떨며 놀라 부르짖는 건 객잔의 점소이였다. “웬일인가?” “고, 공자께서 오랫동안 바깥 출입을 않으셔서……” 아직도 놀람이 가시지 않았는지 말을 더듬는다. 사검평은 씁쓸한 미소를 베어물었다. 그는 문을 걸어 잠근 채 지난 닷새 동안이나 바깥 출입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 벌써 날이 밝았군. 염려 말게. 오늘은 나가서 식사를 하고 세면도 할 것이니……” 그러더니 사검평은 품속에서 열 냥의 은자를 그에게 내주었다. “내 몸에 맞을 만한 옷을 한 벌 구해다 주게. 나머지는 수고비로 넣어 두고.” 점소이의 입이 딱 벌어졌다가 천천히 다물어졌다. ‘옷이 아무리 비싸다 해도 두세 냥에 불과한데, 열 냥씩이나 주다니…… 하핫, 횡재했군. 그런데 오늘은 웬 바람이 불어 외출을 다 하시나? 지난 닷새 동안 방안에만 틀어박혀 술만 무섭게 퍼마시더니 말이야.’ 신명이 난 점소이는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혹시 다른 것은 시키실 일이 없으십니까요?” “개봉에 영빈원이 있다던데, 혹시 알고 있는가?” 그 말에 점소이의 얼굴이 히죽히죽 웃음으로 일그러졌다. “아…… 알고말곱쇼. 개봉 서가로(西街路) 끝에 이르면 제일 크고 화려한 저택이 눈에 들 어오는데 바로 그 집입죠. 아, 개봉 사람들치고 영빈원을 모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요? 천하제일의 미인들이 모두 거기 모였고……” 영빈원이란 소리만 들어도 괜히 기분이 들뜨는지 점소이는 물어보지 않은 말까지 지껄여대 기 시작했다. 사검평은 그의 조잘거림을 멈추게 할 작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알았으니 그만 되었네.” “헤헤…… 저 같은 놈은 문턱에 발도 들여 보지 못했지만 말씀입니다요. 들리는 말로는 꽃 같은 기녀들이……” “가보게.” 그 한마디에 점소이는 움찔해서 입을 꾹 다물고는 내빼듯이 사라졌다. 사검평은 한 손으로 기둥을 짚고 선 채 아침 햇살이 막 뜰에 퍼져 내리는 걸 바라보았다. “설향이라……” 나직이 중얼거렸으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의 얼굴은 다시 어둡게 가라앉았다. 강철은 단련될수록 더욱 강해지는 법이어서, 한차례 열병이 지나간 그는 더욱 굳은 의지로 일어설 수 있었다. 하지만 유옥선 그녀를 완전히 잊을 수는 없었다. 그가 이렇게 떨치고 일어서는 것은 그녀를 잊고 단념하기 위해서가 아니요, 오히려 그녀 앞 에 다시 나타나기 위한 시도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처연하게 가라앉은 그의 얼굴엔 더 이상 미소가 피어나지 않을 듯싶었다. 새벽 공기는 뼈가 시리도록 신선하고, 화초의 녹엽 위로 퍼져 내리는 햇살은 저렇게 영롱 한데…… 2 영빈원(迎賓院). 개봉 서가로(西街路)에 자리한, 화려하고 거대한 기원(妓院)이었다. 천하의 명소를 유람하는 풍류공자나 일대의 거부호족(巨富豪族)들이 몰려들어 물쓰듯 천금(千金)을 뿌리는 곳이니, 향락(香樂)을 찾는 그들에겐 세상에 다시 찾아보기 어려운 현 세(現世)의 무릉도원(武陵桃源)이었다. 불야성(不夜城)…… 칠흑 같은 어둠이 사위를 덮었으나 영빈원은 이 깊은 심야에 더욱 화려 한 위용을 자랑했다. 곳곳에 높이 내걸린 야등으로 주위는 대낮같이 밝았다. 기녀들의 교소와 주객들의 질탕한 웃음 소리가 높은 담장을 넘어나왔다. 그와 함께 녹아들 듯한 부드러운 선율이 가락에 어우러져 흐른 구름을 헤집고 나온 달은 중천으로 노 저어 가고 영빈원의 흥은 더욱 고조를 이루어 가는 때였다. 백의서생 한 명이 그림자처럼 영빈원 앞에 나타났다. 그는 천면환영인의 말뜻을 알아 내기 위해 모습을 나타낸 사검평 이었다. 지금 그의 모습은 허술한 객잔에서 초췌한 모습으로 술병과 함께 나뒹굴던 사검평이 아니었 다. 백삼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그의 출중한 용모는 예의 수려한 자태를 되찾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두 눈만큼은 아직도 우울하고 어둡게 가라앉아 있어 야윈 듯한 느낌을 벗어날 수 없 었다. 그는 이 거대하고 화려한 영빈원 앞에 서서 잠시 난처한 기색을 지었다. 지금껏 한 번도 이런 기원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으니, 천하에 다시 찾기 어려운 전대기 재로 인정받고 있는 그라 할지라도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헤헤…… 어서 오십쇼, 공자님.” 십이삼 세 가량 되어 보이는 청의소동(靑衣小童) 하나가 기세 좋게 달려나와 넙죽 허리를 굽혀 절하는 것이었다. 아직 앳된 기가 가시지 않은 맑은 얼굴에 초롱한 눈망울을 빛내는 소년이었다. “아주 잘 오셨습니다, 공자님. 본 영빈원은 개봉 일대에서 명성이 자자합지요. 어디 명성뿐이겠습니까? 천하의 빼어난 미희(美嬉)들이 모두 본 원에 모였으니 공자께선 필시 흡족한 마음으로 돌아가시게 될 것입니다.” 한바탕 늘어놓는 데도 사검평은 아무 대꾸가 없다. “어서 안내하게.”라든지, “아름다운 미희들이 몇쯤이나 되는가.”라든지, 능청스런 웃음을 지으며 선뜻 나서는 게 아니었다. 고개를 반쯤 외로 꼬고 슬금슬금 사검평의 눈치를 살피던 소동은 비로소 씨익 웃었다. 기원 출입이 생소한 서생임을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청의소동은 비로소 제 역량을 발휘할 상대를 찾았다고 생각했는지 본격적으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아마 공자께선 유명한 진회하에 대해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만, 그곳도 본 영빈 원의 미희들에게 비교될 바가 아닙지요.” 청의소동은 입에서 침을 튀기면서 이곳 미희들의 이름을 대고 그들의 뛰어난 자태에 대해 늘어놓았다. “소생 소호아(小狐兒)가 이곳에서 잔뼈가 굵어 왔지만……” 은근히 제 이름과 경력을 늘어놓는데, 어린 소동답지 않게 말솜씨가 장황하다. 사검평은 이 능청맞은 어린 뚜쟁이의 달변에 내심 실소를 금치 못했다. 하나 내색치 않고 귀를 기울이다 정색을 하고 물었다. “이곳 영빈원에 설향이란 기녀가 있다던데, 그게 사실인가?” 그 물음에 어린 소동, 소호아의 두 눈이 크게 벌어지고 놀람에 어깨를 움찔 떨더니, 계면쩍 은 건지 맥이 풀리는 건지 허리를 틀며 괴상하게 웃는다. “에…… 헤헤…… 헤헤헤헤!” 한동안 실없이 웃던 소호아는 큰 비밀이라도 일러주는 듯 짐짓 소리를 낮춰 가며 다시 장황 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공자께선 이미 설향 누님의 뛰어난 명성을 듣고 납신 손님이시군요. 헤, 그렇 다면 제가 더 이상 여러 누님들의 이름을 입에 올린다 해도 소용없겠군요. 사실 설향 누님의 뛰어난 미모에 대해선 이곳 개봉 땅뿐 아니라 하남(河南) 일대의 풍류공자들치 고 모르는 이가 없습지요. 누님의 아름다움을 흠모한 명문귀족의 공자들이 구름같이 몰려들 고 한 번이라도 인연을 맺어 보기 위해 천금을 아깝다 않고 뿌린답니다. 하나 아무리 접근해도 뜻을 이루기는 어렵지요.” 흥미가 동한 듯 사검평 역시 소리를 낮춰 물어 보았다. “어째서 그런가?” “설향 누님의 지조가 굳건하여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것이지요.” 소호아는 눈을 깜박이고 연신 입술을 축이며 혼자 히히덕거렸 “사실 설향 누님이 손님을 받는 조건은 몹시 까다로워, 매우 뛰어난 문재(文才)를 지녔거 나 절세무학을 익힌 강호기협이 아니고는 감히 마음도 품어 보지 못한답니다. 헤…… 돈을 제외하고 무엇이든 한 가지 남보다 특출난 구석이 있어야 만나 주는 것이지요. 단지 넉넉한 주머니만 자랑하는 부류들은 누님이 상대조차 해주지 않으니 많은 이들이 허탕을 치고 돌아서지요.” 듣고 있던 사검평이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 “일개 기녀의 신분으로 감히 손님을 가려 택하다니, 놀라운 일이로군. 그래, 그 멍청이 같은 풍류객들은 그녀가 그토록 까다로운 조건을 요구하는 걸 용납하고 있단 말인가?” 잠깐 노기가 치밀어 한 말인데 소호아는 묘한 웃음기를 머금었 “헤헤…… 그건 공자께서 모르시는 말씀입지요. 설향 누님의 그런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오히려 많은 이들이 짐짓 호기를 부리며 이곳을 찾게 되는 것이지요.” 소호아는 우습다는 듯 주먹으로 제 머리를 툭툭 치며 말을 이었다. “하나 그들 대부분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이곳에서 다른 미희들과 어울리다가 돌아가게 됩니다요.” 이어서 소호아는 노련한 눈길로 그의 아래위를 쓸어 살피더니 히죽 미소 지었다. “히히…… 하나 이 소호아가 보기엔 공자께선 아무 염려 없이 설향 누님을 만날 수 있을 것 같군요.” 사검평이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어째서 그런가?” “공자의 뛰어난 용모 하나만으로도 설향 누님의 조건에 부합되고도 남을 것입니다.” 그 소리에 사검평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소호아는 갑자기 뒷짐을 진 채 어슬렁거리며 그의 주위를 빙빙 도는 것이다. 사검평이 의아해 하자 어린것이 두 눈에 기이한 빛을 띠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한데 말씀입니다요. 본시 설향 누님을 만나려면 조건에도 부합되어야 하지만 몇 가지 까다로운 절차가 있어서 말입니다…… 공자께선 아무래도 오랫동안 지체하셔야 차례가 돌아올 것 같은데……” 그러면서도 그게 할말의 전부가 아닌 듯 입을 우물거리다 마는 것이다. 사검평은 이 능청맞은 소동의 속셈을 알고 품속에서 열 냥 가량의 은자를 꺼냈다. “하하…… 소형제가 나를 위해 힘써 주겠다는데 내 어찌 무심한 척하겠는가? 만약 일이 성 사되면 별도의 사례를 하겠네.” 은자를 보자 소호아의 입은 금방 벙실거리며 반색을 드러냈다. 그러나 소호아는 곧바로 입맛을 쩍 다시며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공자께서 주시는 것이니 고맙게 받아 두기는 하겠습니다만…… 만일 이걸 받는다 해 도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이 영빈원에 계신 여러 누님과 아주머니께 나눠 주고 나면 소생의 손에 떨어지는 건 불과 몇 푼에 불과할 것이고……” 마음에 차지 않는지 길게 말꼬리를 끌며 사검평의 눈치를 살피던 소호아는 그에게서 더 이 상의 은자가 나올 것 같지 않자 이내 두 손을 탁탁 털더니 냉큼 은자를 받아 쥐며 다시 씨 익 웃었다. “하지만 소생이 어찌 은자 몇 푼에 연연하여 공자의 대사를 그르칠 수 있겠습니까? 이 호의를 받은 이상, 사내 대장부로서 공자와 설향 누님이 인연을 맺을 수 있도록 힘써 보겠습니다요.” 도리질 치며 입맛을 쩍 다시고는 금방 능글맞은 소리까지 해대는 걸 보고 사검평은 ‘참으 로 능청맞은 놈이다.’ 라고 생각한. 그러면서도 짐짓 웃음을 잃지 않은 채 “부탁하네.” 하고 어깨를 두드려 주자, 소호아는 그 작은 몸집에 배를 내밀고 주먹으로 제 가슴을 치며 호기롭게 말했다. “공자께선 이 소호아만 믿으십시오.” 그러더니 나는 듯이 커다란 대문을 열고 달려들며 크게 소리쳤. “장고모, 장고모……” 그 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안쪽에서 여인 하나가 달려나오는데, 둔해 보일 만큼 육중한 몸집 을 화려한 의복과 덕지덕지 처바른 화장기로 치장한 사십 가량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먼발치서 사검평을 보고 눈을 크게 뜨더니 치맛자락을 흔들며 달려나왔다. “아이고, 보기 드물게 출중하신 공자께서 본 원을 찾아 주셨군요. 영광이옵니다.” 넙쭉 허릴 굽히고는 입을 놀리는 품이 체구에 걸맞지 않게 간드러졌다. 그리고 다시 은근한 곁눈질로 사검평을 살피는데, 소호아는 그를 모셔 온 것이 자랑스러운 지 큰소리를 쳤다. “장고모, 이분 공자께선 북경에서 개봉으로 유람차 나오신 귀빈이신데, 우리 영빈원의 뛰어난 미희에 대해 들으시고 특별히 행차하셨으니 장고모는 특별히 유념해 모셔야 해 요.” 그는 괜히 제 어깨를 으쓱해대며 단번에 주워 삼켰다. 그러잖아도 이 준미한 백의서생의 내력을 심상찮게 느끼고 있던 여인은 녹아들 듯 달콤한 미소를 머금고 교태마저 부렸다. “호호…… 공자께서 찾아 주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특별히 뛰어난 미모와 주효 로 대접해 올리겠습니다. 반드시 만족하실 거예요.” 그녀는 고개를 돌리더니 안쪽을 향해 수선스럽게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어서 죽향(竹香)과 난향(蘭香)을 불러 이분 공자를 대접케 해라.” “예예, 고모님……” 곧 이어 간드러진 음성과 함께 두 명의 기녀가 나는 듯이 사뿐 다다르는데, 화려하고 호화 로운 치장이 잘 어울리는 기막힌 미색이었다. 분을 발라 뽀얀 얼굴에 애교가 흐르는 달콤한 미소를 머금은 기녀들은 홀린 듯이 사검평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사검평은 그녀들의 등장을 알지 못하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 고 섰다. 두 미희와 장고모란 여인은 어리둥절했으나 시종 그의 눈치를 살피던 소호아만이 그 뜻을 알고 괴이한 웃음을 띠었다. 그는 장고모란 여인의 옆구리를 찔러 고개 숙이게 한 뒤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이분 공자께선 이미 설향 누님의 영명을 듣고 멀리서 찾아오신 분이니 장고모는 특별히 설향 누님의 거처로 모셔야 할 거요.” 이에 장고모란 여인이 몹시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아이고, 이를 어쩌나. 설향의 자죽헌(紫竹軒)은 이미 예약이 되어 있어 손님을 모실 수 없는 처지인데……” 그러자 소호아는 은근히 압력을 넣는 소리를 했다. “하나 이분 공자께선 북경의 막대한 권문세가(權門勢家)의 자제로, 만일 이 공자의 뜻을 이 루어 드리지 못하면 우리 영빈원에 어떤 화가 닥칠지도 모른다구요.” “그렇다면 정말 큰일이로군.” 장고모란 여인은 몹시 놀라고 당황한 빛을 보이면서도 노련하게 곁눈질을 했다. 이런 기원에선 대개 미희들을 미끼로 부호나 권문세가들과 줄을 잇고 있는 것. 그녀는 온 갖 풍상(風霜)을 다 겪은 여인답게 짐짓 안절부절못하는 척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공자께선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소첩이 나는 듯이 달려가 설향을 달래 보겠습니다.” 그녀는 사검평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불길을 잡으러 내달리는 듯이 안채 쪽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죽향과 난향 두 여인은 사검평의 수려한 용모를 홀린 듯 바라보다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역시 설향은 복받은 아이로구나.” 저희들끼리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천하의 거부며 권세가, 풍류공자에서 한량배에 이르기까지 이곳 영빈원을 찾은 남아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건만, 이 젊은이처럼 보는 이를 홀리는 마력을 가진 듯한 빼어난 인물은 없었던 것이다. ‘이런 훌륭한 사내라면……’ 단 하룻밤이라도 만리장성을 쌓을 수 있다면 더 이상 여한이 없겠다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 는 두 기녀였다. 얼마 되지 않아 장고모라는 여인은 숨이 턱 끝까지 차도록 내달려왔다. “아휴…… 공자, 이제 됐어요. 설향에게 예약되었던 손님을 억지로 간청해서 취소시켰지 뭡 니까? 설향이가 특별히 공자를 맞을 거예요.” “하하…… 고맙소.” “어서 소첩의 뒤를 따르셔요.” 사검평이 뒤따르려는데 소호아가 능청맞게 눈을 찡긋했다. 사검평은 왠지 마음이 설레고 기분이 좋아진 느낌이어서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 나갈 때 사례를 잊지 않겠네.” 사검평이 이 화원에서 모습을 감추자 두 기녀는 아쉬운 듯 머리를 흔들며 사라졌다. 소호아는 혼자 사검평의 뒤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팔짱을 낀 채 그대로 웅크려 앉는다. 앉은 모습이 꼭 늙은 원숭이 같았는데, 순간 그의 두 눈이 기이하게 번쩍이더니, “이히히히……” 갑자기 입을 삐죽이며 턱을 치켜 들고 기괴하게 웃었다. 이때 화원을 어른거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검평은 잘 다듬어진 몇 개의 화원을 지나치고 있었다. 기암괴석(奇岩怪石)과 어우러진 수목들이 곳곳에서 가산(假山)을 이루고, 화초는 헝클어져 밤공기에 더욱 풋풋한 향기를 뿜었 달 그림자가 수풀 속에 흔들리고 풀벌레 울음 소리가 잔잔히 들렸다. 우아한 화원과 화원을 잇는 곳은 반월형(半月形) 석교(石橋)로 이어져 있다. 숲 그림자는 숲을 에워싸고 도는 맑은 물위로 드리워졌다. 얼마를 지나자 갑자기 지금껏 지나쳐 온 곳보다 더욱 화려하게 꾸며진 정원이 모습을 드러 냈다. 절로 시심(詩心)이 우러나게 하는 그윽한 정취에 사검평은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거대한 연못이 나타나고 그 중앙에는 대나무숲으로 둘러싸인 고아한 소축 한 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칠(七) 채(彩)로 채색된 구름다리가 물과 소축 사이를 연결시키고 있었다. 연꽃잎으로 덮인 수면 사이로 맑은 달빛이 고요히 일렁인다. 연신 감탄하며 여인의 뒤를 따르던 사검평은 뒤늦게서야 칠운교 위에 한 백의여인이 서 있 는 것을 보았다. 한데 월하(月下)에 고고히 서 있는 그녀를 보는 순간, 사검평은 그만 숨이 멎는 듯한 충격을 느끼며 우뚝 멈추어 섰다. ‘이, 이럴 수가……?’ 그는 넋 나간 눈길로 멍하니 백의여인을 바라보았다. ‘남궁 부인……’ 그는 오랫동안 열병을 앓아 온 사람처럼 신형을 휘청하며 속으로 부르짖었다. 여인은 칠운교 난간에 기대어 말없이 서 있는데, 허공을 우러르는 듯도 하고 이편을 응시 하고 있는 듯도 했다. 백초곡에서 그윽한 자태로 비파를 켜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녀가…… 그녀가 어찌 이곳에……?’ 아직도 충격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사검평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 모습을 본 장고모란 여인이 의미 심장한 웃음기를 머금었 “호호…… 공자 같은 분께서 설향의 자태를 먼발치에서 보시고도 이렇게 넋을 잃으시는 것을 보니 설향의 미모가 천하일색임은 확실 하군요.” 여인은 간드러진 소리를 하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럼 소첩은 이만 물러갑니다. 공자께선 부디 즐거운 시간을 보내십시오.” 이어서 그녀는 눈치를 살피며 재빨리 물러났다. 사검평은 여인이 물러나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뚫어져라 설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드러운 백의나삼은 감미로운 밤바람에 하늘거리고, 긴 머리채는 검은 비단처럼 그녀의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여인은 그의 시선을 의식하고 시선을 돌리더니 눈이 부신 듯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미소 지어 보였다. “공자께선 그만 자죽헌으로 건너오시지요.” 귀청이 간지러울 정도로 맑고 영롱한 음성도 그대로였다. 第 十九 章 다정유한(多情有恨) 1 사검평은 움직일 줄 모른 채 칠운교에 서 있는 설향을 올려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 다. “소저가…… 진정 설향이란 말이오?” 여인은 다시 가볍게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첩의 기명(妓名)은 분명 설향이옵니다.” 그녀는 우아한 미소를 머금은 채 천천히 칠운교를 내려왔다. 점점 가까워지는 그녀를 뚫어질 듯 바라보던 사검평은 그녀를 지척에서 대하고서야 아, 하 는 탄성을 터뜨렸다. 설향의 모습이 유옥선을 판에 박은 듯이 닮기는 하였으나 그녀의 옥용이 좀더 앳되어 보였 던 것이다. 왠지 모르게 가슴 한편에서는 다행이라 안도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 유옥선에 대한 정열 이 무섭게 되살아나는 사검평이었다. 그는 유옥선의 얼굴이 떠오르자 버릇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살갗이 투둑 터지며 찝찔한 핏물이 혀끝에 닿았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사검평은 자신이 이곳을 찾은 이유가 천면환영인의 말 때문이었음 을 상기했다. ‘그가 나로 하여금 이곳을 찾게 한 것이 남궁 부인을 꼭 빼닮은 기녀가 있어서는 아닐 터. 그 연유를 알아봐야겠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깨닫자 사검평은 머릿속이 조금 맑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 었다. 그는 설향을 따라 칠운교를 건너 소축으로 향했다. 그녀의 얼굴이 뭇 기녀들과 달리 화장기 한 점 없이 맑은 것처럼, 그녀가 거처하는 소축도 정갈하고 품위있게 꾸며져 있었다. 장식품이라고는 대나무로 엮어 만든 몇 개의 가구와 벽면을 가리고 있는 산수화(山水畵) 몇 점, 그리고 고운 화병 몇 개가 꾸밈새 좋게 놓여 있을 뿐이었다. 명문대가의 규방 같은 고아한 꾸밈이었다. 기녀의 처소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은 한쪽 벽면에 걸려 있는 낡은 비파뿐이었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사검평에게 설향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나지 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공자께선 소첩을 보시고 마치 아는 이를 대하듯이 놀라시던데, 혹시 소첩을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사검평은 당황해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요.” 그러나 설향은 그 대답만으로는 의혹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그윽한 눈길로 그를 응시했다. 사검평이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소저의 모습이 내가 알던 한 여인과 흡사하게 닮아 잠시 실례를 범한 것 같소.” 설향은 반짝 눈빛을 발하더니 담담히 미소 지었다. “필시 그분은 공자의 정인이었던 모양이군요.” 사검평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녀는 출가하여 남의 부인이 된 여인이었소. 자, 이제 소저는 더 이상 그녀에 대 한 얘기를 하지 않는 게 좋겠소.” 아픈 상처를 다시 자극받은 그의 얼굴은 괴로운 빛으로 물들어 갔다. “소첩이 그만 큰 실수를 범했군요. 용서하셔요, 공자.” 설향은 몹시 당황한 듯 미안한 표정으로 사죄한 뒤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실례가 아니 된다면 소첩이 공자의 성함을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사검평은 그녀의 얼굴을 외면한 채 낮게 말했다. “사검평이라 하오.” “아, 사 공자이셨군요. 공자께서 이렇게 천한 소첩의 이름을 듣고 찾아 주시다니 영광이 옵니다.” 살포시 눈길을 내리는데, 길고 가지런한 검은 눈썹이 호수에 드리운 버들과도 같다. “외람된 말이나 소첩이 보기에 공자께선 마음에 슬픈 사연을 간직하고 계신 듯하나 이곳 에 계신 동안만은 시름을 잊고 즐겨 주시면 소첩에겐 더 큰 바람이 없겠나이다.” 사검평은 그녀를 주시한 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코 천한 기녀로 볼 수 없었다. 그 우아한 자태를 보면 볼수록, 그녀의 음성을 들을수록…… 그리고 눈빛이며 작은 손 놀림까지, 그녀는 유옥선을 그대로 빼박았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감탄할 만큼…… 사검평은 어느새 그녀에게 깊은 호감을 느끼게 되었다. 마치 오랜 방황 끝에 다정다감한 정인 곁에 돌아온 것처럼 평온하고 아늑한 느낌이었다. 설향은 비파를 꺼내 다소곳이 그의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소첩이 거느린 시비에게 주효(酒肴)를 장만하라 일렀으나 아직 당도하지 않으니, 보잘것없는 음성이나마 소첩의 노래로 그 동안의 무료함을 달랠까 하옵니다. 하오니 공자 께선 귀를 더럽힌다 생각지 마시고 들어 주십시오.” 그녀는 소촉의 뜰 한가운데 서 있는 사검평 곁에 다소곳이 앉아 비파를 켜기 시작했다. 옥 같은 얼굴에 적막한 눈물 하염없이 흐르니 배꽃 가지에 봄비를 두른 듯하구나 오직 한마음 황금자개같이 굳어 변치 않는다면 하늘과 땅에 나누어진 우리 두 사람도 만날 날이 있으리 玉容寂寞淚欄干 梨花一枝春帶雨 但敎心似金鈿堅 天上人間會相見 처연한 장한가(長恨歌)였다. 희고 매끈한 손가락이 비파 위에 노닐고, 소리없이 어두운 천공(天空)을 우러르는 옥같이 희고 아름다운 얼굴. 옥반 위에 구슬이 구르는 듯한 맑은 음성이 솟으면 천산(千山)의 백화(百花)가 만개하여 향 기를 뿜는 듯하고, 낮은 가락으로 가라앉으면 흰 배꽃이 비를 맞고 가련하게 떠는 듯하다. 사방은 이경을 넘어 달빛이 은은하고, 소축을 둘러싸고 있는 대나무숲은 한 줄기 바람에 무너질듯 쏴아, 소리를 낸다. 어둠 속을 우러르던 사검평은 몸을 돌려 설향을 바라보았다. 그의 가슴은 천 갈래로 찢겨 나가는 듯 아팠다. 두 눈은 홀린 듯이 그녀의 자태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그는 고개를 저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남궁 부인……’ 유옥선의 영상이 설향의 얼굴 위로 겹쳐지는 것이다. 장한가는 이미 끝났는데, 그는 꿈결을 헤매는 듯 멍하니 그녀를 보고 섰다. 설향은 그의 뜨거운 정감이 어린 시선을 받자 금방 볼이 달아올랐다. 그때 어린 시비 하나가 멀찌감치 선 채 조심스레 말했다. “안에 주효를 준비했사옵니다.” “알았다.” 설향이 비파를 안고 일어서려는데 사검평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월하의 풍취가 좋은데 여기서 술을 들면 어떻겠소?” 설향은 희고 가지런한 치아를 살짝 드러내며 웃었다. “공자의 뜻대로 하지요.” 소축 앞의 넓은 뜰 한가운데엔 매끈한 대나무로 엮어 만든 탁자와 의자가 이미 준비되어 있는 터였다. 그리로 자리를 옮기니 밤바람이 부드럽게 얼굴을 감싸고 잔잔한 물결 소리도 들려 온다. “소첩이 술 한잔 올리지요.” 술이 찰랑거리도록 잔에 부어졌다. 차 오르는 술잔을 내려다보면서 사검평은 한 가닥 기이한 느낌이 솟는 걸 느꼈다. 천면환영인에게서 영빈원이란 소리를 들었을 때도, 설향이란 기녀를 찾아 영빈원 앞에 섰 을 때도 이 같은 상황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다만 천면환영인, 그 신비인에 대한 의혹을 푸는 데 뭔가 얻어질 것이 있을지 모른다고만 여겼을 뿐인데…… 지금 자신은 천면환영인 같은 것은 염두에도 없는 것이다. 벽옥색으로 찰랑거리는 술잔과 아직도 등 저편에 남아 울리는 듯한 비파 소리, 은은한 월 광 속에서 그 자신은 상처받은 한 마리 짐승에 불과했다. 염라천존의 전인이 품었던 강철 같은 의지는 간데없이 사라지고, 깊은 정한(情恨)으로 상처 입은 가슴을 쓰다듬어 줄 따스한 손길이 필요한 것이다. 설향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타는 듯한 열정을 품고 있었다. 설향도 그의 수려하고 빼어난 모습에 눈이 부신 듯, 별빛 같은 눈을 스르르 감았다. 사검평은 상심하여 수척한 모습에 처연한 쓴웃음을 피어 냈다. 상심한 그의 모습을 보고 있는 설향은 금방이라도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부둥켜안아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사검평의 눈에 비치는 것은 유옥선이었다. 그의 가슴에 뜨거운 불길을 지폈던 여인, 남궁 부인. 그녀의 아름다운 영상은 이미 그의 가슴에 깊고 깊게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열정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깨닫게 된 순간, 사검평의 가슴은 산산이 깨어지고 부서져 아픈 상처만 남았 긴 자학 끝에 그가 간신히 지난날의 웅지(雄志)를 되찾았으나…… 오늘밤 마주앉은 설향 앞에서 그 동안 잠들었던 유옥선에 대한 정염(情炎)은 다시 뜨겁게 타오르는 것이다. 사검평은 그것을 이겨 내려는 듯 연거푸 술잔을 비워댔다. “공자! 취기가 이미 심하신 듯합니다.” 설향은 근심스런 빛을 보이면서도 낭실낭실 술을 따른다. 잔이 비워지기가 무섭게 술이 채워졌고, 그 술이 사검평의 입 속으로 부어질 때마다 그녀 의 입가엔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취기가 오른 사검평은 탁자 위에 팔을 괸 채 점점 고개를 수그렸다. 하늘과 별을 우러르던 미끈한 목덜미, 신선한 밤공기에 아름다운 눈을 감던 청수한 젊은이 의 모습은 이미 남아 있지 않았다. 미어지는 가슴이 끝내 무너져 이렇게 취기를 빌려 오열을 터뜨릴 수밖에 없는 그였다. 백옥같이 맑은, 차라리 투명하던 얼굴은 독한 술기운으로 상기되었으나 가슴을 저미는 괴로 움으로 인해 핼쑥함이 더했다. 갑자기 그가 술잔을 움켜쥔 채 고개를 들고 설향을 바라보았 “설향, 그대는 나를 위해 비파를 한 곡 켜주겠소?” 설향이 말없이 잔잔히 우수 진 눈으로 바라보더니, 품에 비파를 안았다. 디딩…… 딩…… 가늘고 긴 손가락이 파르르 떨 때마다 애절한 선율이 흐른다. 설향은 부드러운 순백의 흰 나삼을 길게 늘어뜨린 채, 아름다운 자태로 비파를 켜는데…… 사검평의 두 눈에 왜 눈물이 고이는가? 천하인들이 사갈(蛇蝎)같이 두려워하던 염라천존의 전인. 말 한마디로 천하군웅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던 그의 눈에서 피눈물이 흐른다. 정녕 이 영웅의 간담을 이토록 갈갈이 찢어 놓는 것은 무엇인 사검평은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은 채 허공을 향해 취한 듯 흥얼거렸다. 곡강의 서쪽 언덕에 봄바람이 다시 불새 술 마시며 꽃 바라보며 얼큰히 취했노라 슬픈 사연 끝없거늘 새삼 논해 무엇하리 曲江西岸又春風 遇酒逢花還耳醉 若論恨悲事何窮 장부의 가슴이 운다. 미친 듯이 웃어 젖혔다. 설향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공자, 과음하신 듯합니다.” 은근히 술잔을 밀어 놓는다. 그러나 사검평은 호기롭게 웃는다. “하하…… 이 사검평이 천하의 미인을 두고 어찌 맨송맨송한 얼굴로 앉아 있는단 말이 오?” 웃음기있는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염려 마오. 내 오늘은 마음껏 취해 보리다.” 그러나 그는 다시 잔을 높이 치켜 들다 기우뚱하더니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앗! 공자, 공자……” 설향의 외침 소리만 어둠 속에 높이 울렸다. 그러나 사검평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은근한 눈길로 내려다보던 설향의 입가에 사기(邪氣)어린 미소가 씨익 감돌았 다. 또한 그녀의 동공에서는 요기(妖氣)가 물씬 풍겨나기 시작했다. 이어 그녀는 튕겨나듯 벌떡 일어나며 요사스러운 교성을 터뜨렸다. “오호호호! 염라서생 사검평, 천하를 제 발 밑에 군림시킬 것처럼 용맹을 떨더니, 결국은 이 설향의 치마폭에 무릎을 꿇고 마는군.” 그녀의 날카로운 웃음 소리가 잠든 숲을 흔들어 깨운다. 졸던 바람이 소스라친다. * * * 화려한 침실. 여인의 규방(閨房)인 듯 은은한 향기가 진동했다. 넓은 실내, 창이 있는 벽면 쪽에는 호화롭게 꾸며진 침상이 있었다. 북쪽 벽면에는 산수화 한 폭과 웅휘한 필체의 족자가 길게 놓여져 있고, 침상 옆에는 거대 하고 화려한 동경(銅鏡)이 걸려 있. 실내 중앙에는 은은한 흑광(黑光)이 도는 탁자와 의자가 있었. 침상과 탁자 사이를 길게 가리고 있는 것은 엷게 비치는 진홍빛 휘장. 바닥엔 붉은 융단이 깔려 있었다. 침실은 고요했다. 그런데 이 화려한 침실의 침상에 사검평이 죽은 듯이 누워 있지 않는가? 그는 미동도 않은 채 누워 있었다. 잠시 후, 밖의 구슬주렴이 걷히며 다부진 몸매의 백의여인 하나가 그림자처럼 모습을 드러 냈다. 그녀는 바로 설향이었다. 그녀는 잠시 실내 한가운데에 선 채 말없이 실내의 동정을 살피는 것 같더니 미끄러지듯 침상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침상 끝에 사뿐 몸을 얹으며 홀연 신비한 미소를 머금더니 사검평의 얼굴을 쓰다듬 었다. “후후…… 사검평, 그대는 강호에 출도한 지 일 년도 안 되어 천하를 경동시키는 재간을 보였지만 이제는 이렇게 내 손아귀에 들어왔으니 도마 위의 생선 같은 신세가 아닌가?” 그녀의 붉은 입술에 윤기가 돌고 두 눈에 흡족한 빛이 어렸다. “비록 그대가 천하에 따를 자 없는 절학을 지닌 일대 기재라 하나 강호 경험이 없으니 이 만변선희(萬變仙姬) 모용상(慕容霜)에게 걸린 이상 빠져 나갈 수가 없었겠지. 술에 천일취 (千日醉)를 탄 것도 모르고 물 마시듯 통음(痛飮)했으니 앞으로 십여 일 간은 깨어나지 못할 게다.” 그녀의 매끄러운 손은 뱀의 혀처럼 사검평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떨어질 줄을 몰랐다. “호오, 보면 볼수록 기막히고 가슴이 뛰는구나. 천하에 이런 미골(美骨)이 있을 수 있다 니……!” 음성이 점차 눅눅하게 가라앉으면서 그녀의 눈에 한 가닥 욕념이 피어올랐다. 그녀는 한참이나 그의 얼굴에서 목덜미까지 쓰다듬으며 시선을 떼지 못하더니, 짧게 탄식하 며 손을 떼어 제 얼굴을 스쳐 머리를 쓸어 올리는데…… 놀랍게도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이 변해 버리지 않겠는가! 뛰어난 미태는 조금도 다를 바 없으나 조금 전처럼 고아하고 순결해 보이던 모습은 간데없 었다. 다만 두 눈이 윤기로 반짝이고 붉은 입술이 더욱 붉게 오무라드는 것이, 천하의 어떤 남자 라도 첫눈에 뇌쇄시켜 버릴 듯한 농염한 미태였다. 두 눈이 타는 듯하고 얼굴엔 홀린 듯 감미로운 미소가 감돈다. 진정 경국지색(傾國之色)이요, 일대 우물(尤物)이었다. “호호……” 갑자기 그녀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자지러지는 듯이 웃는데 그녀의 손아귀에 매미껍질처럼 얇은 인피면구가 쥐여져 있었다. “천면환영인, 그 늙은이의 인피면구가 이렇게 편리한 점도 있었군. 하지만 그 늙은이는 나의 이런 수단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테지. 귀찮은 늙은이, 나의 미색으로 이런 애송이 쯤은 능히 내 치마폭에 굴복시킬 수 있다는 걸 믿지 않으니……”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흐흐…… 만변선희, 당신의 그 장담은 실로 가소롭기 짝이 없군. 만일 노부의 도움이 없 었다면 당신 혼자의 힘으로는 절대 그 아이를 제압할 수 없었을 것이오.” 침중하고 싸늘한 음성과 함께 귀신같이 실내 한가운데에 모습을 드러낸 건 영빈원의 청의 소동, 소호아였다. 고개를 홱 돌려 그를 본 백의미부 만변선희는 손 안에 있던 인피면구를 슬쩍 소매 속에 감 추고 차갑게 그를 쏘아봤다. “천면환영인, 당신이 감히 이 만변선희를 비방하다니……! 내가 당신에게 앙심을 품으면 그 결과가 어찌 되는지 생각이나 해본 적이 있는 게요?” 그러자 청의소동이 갑자기 앙천 광소를 터뜨렸다. “핫핫핫…… 만변선희 모용상, 당신이 주군(主君)의 신임을 받고 있다 하여 그처럼 자만한 다면 실로 가소로운 일이오. 지금 당신은 노부의 관할하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걸 절대 잊지 마시오.” 결코 십이삼 세 소동의 음성이 아니었다. 청노한 늙은이의 음성이었으며, 천만 가지 야심을 품어 핏발이 서린 교활한 눈이었다. 그가 눈을 부릅뜨고 파란 정광을 뿜어 내는 순간, 뚝…… 뚝…… 우두둑…… 갑자기 괴이한 소리와 함께 이 청의소동의 몸에 변괴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만변선희 모용상이 가볍게 낯을 찌푸리고 섰는데, 청의소동은 어느새 육 척의 장한이 되어 버린 것이다. 뼈마디가 모조리 부서지는 듯 몸서리쳐지던 괴음이 뚝 멎었을 때, 놀랍게도 그는 사검평이 하북 관도 위에서 본 천면환영인의 모습으로 회복되어 있었다. 아직도 혈기 충만하고 기개가 굴강해 보이는 한편, 지모가 뛰어나 보이는 노인이었다. 웃음을 머금을 때 두 눈에 신비한 기운이 서리고 얄팍해지는 입술이 핏기를 잃은 모습은 그대로였다. 만변선희 모용상이 냉소를 머금으며 그를 쳐다봤다. “천면환영인, 주군께서 당신에게 중원무림의 모든 동태를 살핀 후 총괄하여 행동할 수 있 는 권한을 준 것은 사실이나, 나 모용상으로 하여금 당신을 견제케 했다는 사실도 명심해 둬야 할 거예요.” 그녀는 야무진 얼굴에 날카로운 빛을 보였다. “당신이 주군을 대신해 본 문의 대업(大業)을 수행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지만, 당신 스스 로를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권위자로 자부하고 행동하려는 작태는 용납 할 수 없어요.” 그 말에 천면환영인의 얼굴이 얼음 덩이처럼 냉막하고 무표정하게 굳어져 갔다. “노부는 그대와 더 이상 얘기할 필요가 없겠군.” 그렇게 말은 했지만 그는 물러날 생각을 않는 것이다. 모용상이 두 눈을 사납게 치켜 뜨며 차갑게 물었다. “당신은 내게 더 볼일이 있나요?” 천면환영인이 침상 쪽으로 힐끔 시선을 던졌다. “노부는 저 애송이를 넘겨받기 원하오.” “저 애송이를? 호호호……” 갑자기 모용상은 버들가지 같은 제 허리를 움켜쥐고 미친 듯이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그러더니 돌연 교소를 멈추며 눈초리를 사납게 치켜 올렸다. “당신은 이 일을 당신의 공로로만 돌리기 위해 그를 필요로 하고 있군요.” 그 소리에 순간적으로 천면환영인의 얼굴에 분노의 빛이 스쳐 갔다. 그러나 이내 낯빛을 거두며 침중히 말했다. “어찌 노부가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하겠소? 노부는 그를 이용해 주군의 오랜 숙원을 막고 있는 두 명의 전대기인(前代奇人)을 제거하려 할 뿐이오.” 그 말에 모용상이 비웃듯 입술을 삐쭉이며 웃었다. “호호……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말하고 있지만 당신의 내심은 아직 그 욕심을 버리지 않았 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어쨌든 좋아요. 이 모용상은 당신의 뜻을 거스를 마음이 없으니까 요.” 천면환영인이 재빠르게 물었다. “그럼 저자를 넘겨주겠단 말이오?” 그녀의 순순한 응낙에 미심쩍은 듯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모용상은 요염한 미소를 머금으며 도리질 쳤다. “호호…… 물론 넘겨주지요.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에요.” 천면환영인의 백미가 꿈틀했다. “당신은 끝내 채양보음술(採陽補陰術)로써 그의 정혈(精血)을 흡수한 후에야 노부에게 넘 겨주겠단 말이오?” 모용상은 미묘한 눈빛을 발하며 말했다. “호호…… 그것이야말로 서로가 좋은 게 아닌가요? 나는 처음 저 애송이를 본 순간부터 내 가슴에 품을 결심을 했어요. 그러니 내가 뜻을 이룬 후에 당신에게 넘겨준다면 피차간에 불 평이 없을 게 아닌가요?” 그녀는 작심대로 뜻을 이루지 않고서는 절대 내놓지 않을 기세였다. 천면환영인의 낯빛이 일변하며 노기를 드러냈다. “만일 당신이 채양보음술로 그의 정혈을 모조리 흡수해 버린다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허 깨비가 되고 말 것! 썩은 고목으로는 두 절세기인의 눈을 속이려는 노부의 안배를 실현시킬 수 없소!” 그러나 모용상은 양손으로 허리를 짚고 선 채 차갑게 미소 지었다. “천면환영인, 만일 당신이 내 뜻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우리 사이엔 더 이상 협상의 여지 가 없군요.” 그녀는 사검평이 누운 침상 곁으로 다가가며 요기 서린 미소를 지었다. “자, 이제 난 할 일이 있으니 당신은 내 일을 방해하지 말고 썩 나가 주는 게 우리 두 사 람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 좋을 거예요.” 천면환영인은 부르르 몸을 떨며 안면에 노기가 등등했다. “당신이 그처럼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으려 하니, 이 일로 하여 파생되는 모든 일에 대한 결과도 당신이 책임질 수 있겠구려?” 그 물음에 모용상이 다시 날카롭게 눈을 치켜 떴다. “노부는 이 일을 즉시 주군께 보고하겠소!” 천면환영인은 버럭 노성을 지르며 사라졌다. 모용상은 시종 냉소를 머금고 있더니 그의 마지막 소리가 마음에 걸리는지 가볍게 아미를 찌푸렸다. 그러나 이내 세차게 도리질했다. “하지만 난 절대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이 애송이의 체내에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사납게 용솟음치는 무한한 진력이 있지 않는가?” 2 사검평을 내려다보는 만변선희의 얼굴에는 서서히 홍조가 돌기 시작했다. 그녀는 옥으로 깎아 다듬은 듯이 준수한 사검평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옥수는 예민한 감각을 가진 것처럼 파르르 떨며 그의 입술을 더듬다 목줄기로 미끄 러져 내렸다. “이 애송이는…… 지금껏 내가 겪어 온 수많은 사내들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로 뛰어 난 무학을 성취했으니 그것으로 나를 만족시켜 줄 것이다.” 그녀의 희고 가는 옥수는 길고 반듯한 목덜미를 지나 서서히 사검평의 가슴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아, 만일 내 나이가 이십여 세만 되었다 해도 절대 이 절세미장부를 놓치지 않으련 만……” 안타까움으로 그녀의 입에서 뜨거운 탄식이 흘렀다. 만변선희 모용상, 겉으로 보기엔 이십을 갓 넘은 요염한 미모의 여인이나 실상은 육십이 넘은 노파였다. 그러나 그녀는 깊은 내공과 젊은 시절 기연을 얻어 복용한 주안선과(朱顔仙果)의 힘으로 지금껏 청춘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타는 듯 뜨거운 정염을 뿜는 눈이 사검평의 준미한 이목 위에서 흔들렸다. 그러나 그녀는 아쉬운 듯 머리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이 애송이는 본 문과 양립할 수 없는 강적(强敵)인 것. 어차피 살려 둘 수는 없다.” 마침내 그녀의 얼굴에는 음탕한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만일 내가 이 애송이의 정혈을 흡수한다면 적어도 내공수위가 일 갑자는 증진될 것. 그 리 되면…… 천하에 주군 외에는 내 적수가 없을 것이다.” 그녀는 걸터앉았던 침상 끝에서 스르르 미끄러져 내리더니 실내 중앙의 검은 탁자 위에 놓 인 작은 금종(金鍾)을 흔들었다. 그러자 솜털이 보송보송한 어린 시비 하나가 소리없이 주렴 밖에서 나타났다. “내가 부르기 전에는 누구도 이 부근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해라.” “예.” 어린 시비가 물러가자 모용상은 붉은 입술을 오무리며 소리없이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는 품속에서 두 개의 작은 옥병을 꺼냈다. “호호…… 내 뜻을 이루기 위해선 이제 이 애송이를 깨어나게 해야 할 게 아닌가? 그러나 그 전에 나의 독문비제(獨門秘製)인 장춘선단(長春仙丹)을 복용시켜야 큰 효험을 볼 수 있을 테지.” 그녀는 두 개의 옥병에서 각기 붉고 흰 두 개의 알약을 꺼내더니 사검평의 입에 넣었다. 투명할 만큼 흰 빛이 도는 알약은 천일취에서 깨어나는 해약(解藥)이었고, 붉은 것은 그녀 의 독문비제인 장춘선단으로 대라신선이 당장 손을 쓴다 해도 솟구치는 그 음욕(淫慾)을 억제시킬 수 없는 강력한 춘약이었다. 마침내 모용상은 익숙한 솜씨로 사검평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 그때, 그녀는 그의 품속에서 뭔가 딱딱한 것이 손끝에 잡히는 것을 느꼈다. 급히 풀어 보니 바로 구공신검과 불영옥패였다. “후후…… 이것이 바로 그 황산신니의 이름을 천하에 떨치게 한 구공신검이로구나. 호오, 과연 천고에 드문 보물인걸. 하나 내겐 이 애송이가 더 큰 보화라 할 수 있지. 먼저 운우지 락을 즐긴 후에 쇠붙이를 탐하리라.” 그녀는 구공신검과 불영옥패를 옷가지와 함께 바닥에 내려놓았. 그리고 정염이 타오르는 뜨거운 눈길로 사검평의 나신(裸身)을 내려다보았다. 도무지 약관도 채 안 된 소년의 몸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균형잡힌 반듯한 체격이었다. 희고 긴 목줄기 위의 단아한 얼굴은 여인이 무색할 지경으로 아름다웠고, 근골은 천하에 드문 장부다운 기개로 충만했다. 반듯한 두 어깨는 완강해 보였고, 넓은 가슴은 거칠고 험한 망망대해라도 포용해 낼 것처럼 보였다. 근육이 툭툭 불거진 몸이 강철로 만들어진 것처럼 무한한 힘을 느끼게 했다. 만변선희 모용상은 매미가 허물을 벗듯 유연하고 빠른 동작으로 자신의 옷을 벗어 내렸다. 눈부시게 희고 탄력있는 살결이 드러났다. 손을 올려 머리를 쓸자 물결치며 출렁이는 검은 머리가 가냘픈 곡선의 어깨를 내리덮었다. 어깨에서 허리를 지나 둔부에 이르기까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완벽하고 아름다운 육체의 선. 두 개의 젖꼭지는 수줍은 듯 봉긋 솟아 장미빛으로 붉었다. 희미하게 새어 드는 빛이 여체의 곡선을 더욱 아름답게 했다. 모용상은 커다란 동경에 자신의 나신을 비춰 보았다. 그 속에 비치는 자신의 백옥 같은 몸을 바라보며 그녀는 만족한 듯 웃었다. 이윽고 그녀는 사검평에게 다가가 입술, 이마, 목덜미를 거쳐 가슴까지 자신의 입술로 더 듬어 갔다. 부드러우면서도 천천히, 열풍처럼 뜨거운 기운이 온몸을 휘감자 그녀는 황홀감에 파르르 몸을 떨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자신의 몸을 사검평의 가슴에 얹으려 하니 그의 가슴이 타는 듯이 뜨거웠다. 젊은 육체의 특징이리라. 그때 사검평의 몸이 꿈틀거렸다. 그는 두어 번 몸을 틀더니 눈을 번쩍 떴다. 붉게 충혈된 안광이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모용상은 이미 설향의 인피면구를 쓰고 있었다. 사검평은 일순 낯선 실내에 몹시 당혹한 듯 움직이지 않더니 천천히 눈길을 돌렸다. 그의 눈길이 모용상의 나신에 머무는 순간, “아……!” 그는 탄성을 내지르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의 두 눈은 격동의 빛을 띠면서도 일면 미묘한 갈등을 드러냈다. 순간, 그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불덩이 같은 욕정이 치밀어 올랐다. 하체에 불끈 힘이 들어가며 몸이 가늘게 떨렸다. 그는 목이 타는 듯 마른침을 삼키더니 떨리는 음성을 토해 냈 “남궁 부인!” 격동에 찬 부르짖음이 울려 나왔다. 끓어오르는 듯한 열정에 그는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무서운 욕정의 빛이 그의 가슴과 몸을 태우고, 눈으로 불을 뿜는 듯했다. 그는 전신을 태울 듯이 강렬한 욕념과 흐려지는 이성(理性) 사이에서 억지로 정신을 가누려 이를 악물고 버텨 보았다. 그러나…… “아! 사 공자……” 나직하게 비음이 섞인 간절하고 애잔한 음성이 귓속으로 파고들자, 그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버렸다. “남궁 부인……” 그는 품속으로 파고드는 모용상을 무섭게 끌어안았다. 모용상은 그의 가슴속으로 스며들 것처럼 깊숙이 파고들었다. 백옥같이 희고 매끈한 사지가 꽃뱀처럼 사검평의 몸을 휘감았 “으음……” 그녀는 제 욕념을 견디지 못하고 타는 듯한 신음을 그의 목덜미에 토해 놓았다. 사검평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한 가닥 남아 잠재하던 이성마저 십리 밖으로 내동댕이쳐진 그에겐 오직 남궁 부인의 영상 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처럼 강직하던 그의 가슴을 갈갈이 찢어 놓고 상심 속에 열병을 앓게 하던 여인. 오직 그 여인을 품에 안고자 하는 광적인 욕념뿐이었다. 그의 강철 같은 두 팔이 그녀의 몸을 으스러뜨릴 듯 끌어안으니 모용상은 눈을 감은 채 낮 은 신음을 토해 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사검평이 더 견디기 어려운 듯 그녀를 안은 채 침상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거칠게 애무하기 시작했다. 모용상은 그의 거친 애무에 야릇한 신음을 터뜨리면서도 그의 뜨거운 몸에 자신의 동체를 밀착시켜 갔다. “아……” 사검평은 목줄기에 느껴지는 그녀의 뜨거운 교성에 수성(獸性)이 격발된 듯 더욱 거칠게 애 무했다. 이성이 마비된 이 순간, 그는 무림천하의 안위를 걱정하던 젊은 협웅이 아닌 한 마리 수컷 에 불과했다. 침실은 곧 열락(悅樂)의 도가니로 변했고, 거친 파도가 물결치듯 고조된 신음과 뜨거운 숨 결로 가득했다. 아아…… 두 육체는 환락의 열정에 사로잡히고 영혼은 그 욕망에 물들어 아무것도 생각지 못했다. 온몸이 활활 타오르는 듯한 열락의 쾌감에 그들은 전율하듯 몸을 떨었다. 불덩이처럼 달아오르는 육체의 본능. 아…… 광란의 순간들은 절정을 향해 치달아 침실 안의 공기는 형언할 수 없이 뜨거웠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 드는 것 같은 무아지경(無我之境)의 황홀한 도취가 그들을 지 배했다. 침상 위로 비쳐 드는 한 가닥 빛이 뒤얽혀 꿈틀거리는 육체를 신비하게 감쌌다. 그들의 격렬한 움직임은 어떤 귀결(歸結)을 향해 줄달음질치고 있는 것이다. 온몸이 더운 땀으로 흥건히 젖은 모용상은 격렬한 신음을 토하며 익숙한 솜씨로 최후의 목 적을 이루기 위해 사검평의 허리를 억세게 감싸안았다. 바로 그때였다. “흥!” 어디선가 한 줄기 여인의 싸늘한 냉소가 울렸다. 순간 소스라치게 놀란 모용상은 번뜩 정신을 차리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보았 다. 이어서 재빨리 몸을 날리려 했으나 사검평의 두 팔이 그녀의 몸을 꽉 죄고 있으니 움직일 재간이 없었다. 춘약의 기운으로 인해 미친 듯 여체만을 탐하는 사검평은 이미 극에 다다라 있었다. 만변선희 모용상이 가볍게 아미를 찌푸리더니 갑자기 뱀처럼 몸을 비틀며 그의 단단한 결 박 속에서 상체를 빼냈다. 다음 순간, 그녀는 성난 듯이 덮쳐 드는 사검평의 연마혈(軟麻穴)을 찍었다. 사검평은 무기력하게 침상으로 쓰러졌다. 모용상은 재빨리 옷을 걸쳐 입더니 살기 띤 눈으로 날카롭게 사방을 쓸어봤다. “어느 고인께서 오셨는지 모습을 나타내시오!” 나지막하나 싸늘한 외침이다. 그 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창노한 노인의 음성이 들려 왔다. “흐흐흐…… 수치도 모르는 계집 같으니! 겨우 손자뻘밖에 안 되는 애송이를 끌어안고 침 상에서 희희낙락하고 있다니…… 차라리 노부와 더불어 운우지락을 나누는 게 어떻겠느 냐?” 창 밖 우측 십여 장 밖에서 들려 오는 소리였다. 모용상의 얼굴에 날카로운 살기가 드러났다. “흥!” 냉소를 흘려 내는 순간, 그녀의 신형은 한 줄기 그림자처럼 밖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때 사검평은 전신을 감싸 오는 욕정의 불꽃 속에서 지옥의 겁화보다 더욱 괴로운 고통을 겪고 있었다. 마혈을 제압당하는 바람에 발산하지 못한 욕정이 혈관을 팽창시켜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듯 괴로웠다. 힘줄이 툭툭 불거진 그의 나신은 진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번들거렸다. 그때, 왜소한 체격의 흑의인영 하나가 유령같이 실내로 날아들었다. 날렵한 흑의경장 차림에 검은 복면을 하고 있었다. 재빨리 침상 쪽으로 다가서던 복면인은 앗, 하고 터져 나오려는 경악성을 어렵게 삼키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잠시 주춤하던 복면인은 이내 침상 위의 비단이불로 사검평의 몸을 둘둘 감았다. 이어서 바닥에 떨어져 있는 백의유삼을 집어 들었다. 매우 당혹한 듯 주춤거리던 복면인은 이불로 둘러싼 사검평을 옆구리에 낀 채 창 밖으로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복면인이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만변선희 모용상이 잔뜩 일그러진 안색으로 돌 아왔다. 한데, 그녀는 텅 빈 침상을 발견한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앗!” 텅 빈 침상 위엔 뜨거운 열락의 열기만 남아 있었다. 그녀는 날카롭게 눈을 치켜 뜨며 이를 갈았다. “내가 그들의 조호이산지계(調虎離山之計)에 말려들었구나. 흥, 감히 나 만변선희의 성 미를 건드리다니…… 반드시 찾아 내어 찢어 죽이고 말 테다!” 그녀는 빈 침상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 * * 개봉 시가에서 교외로 십여 리 벗어난 곳. 휘익…… 휙! 어두운 밤길을 유령처럼 달리는 흑의복면인이 있었다. 그는 바로 사검평을 구해 낸 복면인이었는데, 어둠을 가르고 나는 모습이 한 마리 날쌘 흑조(黑鳥) 같다. 관도를 벗어나 벌판을 가로지르더니 이윽고 숲으로 날아들었 울울창창한 수림 속을 날쌘 들짐승처럼 가르는 흑의복면인은 절정의 내공을 지닌 듯 거암 괴석을 훌쩍훌쩍 넘어 다녔다. 거친 숲을 뚫고 나가자 다시 밋밋한 등성이가 나타났는데, 그 중턱에는 시커먼 건물이 음 산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것은 낡은 토신묘(土神廟)였다. 진흙으로 빚은 크고 작은 불상들이 곳곳에 놓여 있고, 낡은 목조건물 하나가 폐옥(廢屋)처럼 기우뚱하게 서 있었다. 괴영은 빠르게 주위를 살피더니 그 속으로 날아들었다. 훅, 하고 일어나는 먼지와 곰팡이의 퀴퀴한 냄새. 오랫동안 향화(香火)가 끊긴 듯 사람이 다녀간 자취를 느낄 수 없었다. 굵은 기둥엔 마른 버섯이 창궐해 있고, 진흙벽은 금방이라도 허물어져 내릴 기세였다. 그래도 유객(遊客)이 하룻밤 쉬어 간 듯, 한쪽 구석에 마른 덤불이 깔려 있었다. 흑의복면인은 옆구리에 끼었던 사검평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불 자락이 미끄러져 내리며 사검평의 나신이 그대로 드러났. 보름이 가까운 때여서 가장자리가 약간 일그러진 명월이 엷은 달무리를 거느리고 중천에 떠 있었다. 토신묘 처마 밑으로 비스듬히 비쳐 든 달빛이 부끄러움에 주춤했다. 흑의복면인은 사검평의 나신을 감히 직시하지 못하고 몹시 당황해 하는 기색이었다. “으…… 으……” 사검평은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며 괴로운 신음을 흘려 냈다. 흑의복면인이 놀라 들여다보니 그의 얼굴은 이미 짙은 자줏빛으로 물들었고 두 눈은 충혈 되어 부릅뜬 채였다. 빼어나게 준수하고 맑던 모습은 추호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살갗에 닿지 않아도 그의 몸에서 뜨거운 열기가 발산되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아…… 어서 유 선배께서 오셔야 할 텐데……” 뜻밖에도 초조히 내뱉는 음성은 가녀린 여인의 음성이었다. 흑의복면인은 밖을 살피다 얼굴을 가린 복면을 벗어 내렸다. 그러자 청순한 여인의 모습이 밝은 달빛 아래 드러났다. 한데, 그 모습은 진정 여신(女神)의 섬세한 손끝으로 조심스레 빚어진 천고 이래의 보물이 라 해야 옳았다. 경국지색이라 일컬음도 오히려 그녀를 모독함이리라…… 비록 비단결같이 부드러운 머리를 틀어 사내처럼 묶어 올렸어도, 그리고 몸에는 검은 야행 복(夜行服)을 걸쳤어도…… 그 아름다운 자태는 어둠과 월광(月光)이 교차하는 이 공간에서 선율과 함께 떠도는 환상 처럼 아름다운 것이었다. 한데 그녀의 모습은 사검평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으니…… 만일 이 순간 사검평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다면 금방 떠오르는 영상이 있을 것이다. 그와 의형제(義兄弟)를 맺었던 주천혜의 맑은 눈과 너무나 흡사하게 닮았다는 사실을 말이 다. 비록 땟물이 흐르던 주천혜의 얼굴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해도 순진무구하면서도 별빛 같은 고결함이 함께 깃들인 이 신비한 눈만은 조금도 틀리지 않는 것이다. 그녀는 근심과 안타까움으로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몸을 비틀며 고통에 신음을 토해 내는 사검평, 그는 독성(毒性)이 강한 최음약(催淫藥)에 중 독되어 얼른 여인과 더불어 운우지락을 나누지 못하면 전신의 순양지기(純陽之氣)가 고갈될 때까지 겁화 에 싸여 큰 고통을 겪다가 결국 죽게 될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그녀는 이처럼 애가 타고 초조했다. 여기서 그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인 것이다. 이성을 잃고 오직 육욕에만 눈이 어두워 있는 그를 구하기 위해선 십육 년간 고이 지켜 온 순결을 버려야 했다. 어찌 순결한 소녀의 몸으로 야수처럼 몸부림치는 그의 품에 안겨 들 수 있겠는가! 그녀가 이렇게 안타까움에 입술만 깨물고 있는 동안에도 사검평은 숨이 넘어갈 듯 헐떡거 렸다. “아……” 그녀는 초조감에 제 손을 꼭 쥐더니 제 가슴을 끌어안았다. 빠른 시간 안에 그녀 혼자 매우 어렵고 힘든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사검평의 체내에 잠재한 음약의 효력은 최고조에 달해 있어서 촌각만 늦춘다 해도 그의 혈 맥은 모조리 터져 버리고 말 것이었. 그녀는 지그시 눈을 내리감았다. 그녀의 백옥 같은 뺨으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아…… 주혜군(朱惠君), 너는 이미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연모해 오고 있지 않았느냐!” 실낱처럼 가늘고 처연한 음성이 그녀의 입술 끝에서 흘러나왔 “사 대가께서 저리 고통을 겪고 있는데 네 어찌 명분에 얽매여 일신의 순결만을 고집한단 말이냐?” 투명한 옥구슬처럼 맑은 눈물 방울이 턱 끝에 매달렸다가 후두두 떨어졌다. “만일…… 사 대가께서 깨어나 너를 염치없는 여인이라고 거들떠보지 않는다 해도 그분의 고통을 외면할 수는 없지 않느냐, 주혜군?” 주혜군, 이것이 진전에서 사검평을 만나 의형제를 맺자고 졸라대던 주천혜의 본명이었다. 당금 무림의 쌍기(雙奇) 중 천사로 일컬어지는 남해 천종도주 주가청의 아들이라 자처하던 주천혜의 본색은 이렇게 뛰어난 여인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더 이상 시각을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한 주혜군은 격공해혈로써 사검평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그러자 사검평은 음, 하는 신음 소리를 토하며 부르르 몸을 떨더니 다음 순간 벌떡 튕겨 일 어났다. 혈도가 풀리자 억제되었던 욕념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던 것이 그는 야수 같은 괴성을 토해 내며 눈을 번뜩였다. 한켠에 움츠리고 있던 주혜군을 본 순간, 사검평은 야수처럼 덮쳐 들었다. 억센 팔로 그녀를 낚아채듯 끌어안더니 뜨겁게 달구어진 혀로 그녀의 얼굴과 목덜미를 닥 치는 대로 애무하기 시작했다. 성난 야수처럼 거친 그의 행위에 가만히 몸을 맡기고 있는 주혜군의 모습은 폭풍에 시달리 는 작은 나무와도 같았다. 그녀의 두 눈에 소리없이 눈물이 고여 돌더니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녀는 행여라도 신음성이 흘러나올까 봐 입술을 깨물었다. ‘이것이 그의 진정이라면……’ 지금 이 순간이 사검평의 진실이라면 더없이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그녀였지만, 현실 의 그는 광란에 몸부림치는 야수일 뿐이었다. 마침내 사검평의 거친 손길이 그녀의 옷을 찢어 내기 시작했 찌이익…… 찌직! 옷자락이 찢겨 나갈 때마다 주혜군은 살갗이 터져 나갈 것 같은 고통에 몸서리쳐야 했다. 놀란 손이 반사적으로 그것을 막으려 사검평의 손을 움켜쥐었다가는 다시 이를 악물며 놓 아 주기를 십여 차례…… 그러면서도 그녀는 일절 신음성을 흘리지 않은 채 움찔움찔 몸을 떨 뿐이었다. 옷이 찢기는 소리는 가련한 여인의 비명 소리처럼 토신묘 밖으로 퍼져 나갔다. 사검평의 가슴에 불붙은 정염의 불꽃은 더욱 사나워졌고, 주혜군의 앵두 같은 입술에서는 급기야 선혈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흑의 자락이 찢겨 나갈 때마다 백옥같이 흰 피부에 붉은 줄무늬가 선명하게 생겨났다. “으음……” 마침내 사검평이 뜨거운 신음을 토하며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을 때, 주혜군은 파르 르 몸을 떨었다. 전라의 몸, 발 밑에 찢겨 떨구어진 옷자락……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다. 마치 자신의 몸이 갈기갈기 찢겨 내던져진 것 같은 참담한 마음이었다. 길고 유려한 목선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갑자기 사검평이 고개를 쳐들더니 뜨거운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 타는 듯한 눈, 간절하고 강렬한 욕망이 어려 있는 눈, 무엇이든지 삼켜 버릴 것 같은 그 탐 욕스런 눈길에 주혜군은 주춤 한걸음 물러섰다. 기울어 가는 달빛이 그녀의 가는 허리를 사선으로 갈랐다. 눈부신 나신이었다. 목을 타고 흘러내린 여체의 곡선은 가슴에 이르러 크게 융기하여 두 개의 구릉(丘陵)을 이 루었다. 그 아름다운 두 옥봉(玉峯)의 정상에는 앙증맞은 유실이 수줍은 듯 붉게 물들었다. 그 밑으로 급격히 가늘어지는 허리를 지나 불룩 솟아 있는 풍만한 둔부가 자리했고…… 보는 이의 시선을 돌리지 못하게 하는 것은 방초(芳草) 무성한 흑삼림(黑森林)이었다. 그리고 상아로 빚은 듯 미끈한 두 다리가 살며시 교차되는 비경(秘境)…… 아! 진정 황홀하리만큼 신비하고 아름다운 여체였다. 사검평의 타는 듯한 시선은 그녀의 나신을 천천히 훑어 가는데 그의 입이 가볍게 벌어졌다. 이성을 잃은 중에도 이 여체의 아름다움에는 감탄하는 것인가? 주혜군은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의 시선이 결코 광자(狂者)의 것이 아니길 그녀는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바람일 뿐이었다. “으…… 으……” 갑자기 그의 두 눈이 번쩍 빛나고 입에서 야수의 괴성 같은 신음이 터지는 순간, 사검평은 먹이를 덮치듯 달려들어 그녀의 한줌 허리를 움켜쥔 채 바닥으로 쓰러뜨렸다. 주혜군은 저항하지 않았다. 자신의 몸 위로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덤벼드는 그를 증오하지도 않았다. 단지 가슴이 아플 뿐이었다. 사검평은 그녀의 나신 위에 온몸을 휘감아 갔다. 그녀는 고통으로 몸을 뒤틀었다. 전신을 활활 태워 올리는 사검평의 욕망이 그녀의 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은 나약한 그녀의 몸을 부숴 버릴 것처럼 난폭하였다. 마침내 사검평은 온몸에 팽창해 오는 기운을 참지 못하고 묵직한 신음을 터뜨렸다. 하늘이 태초에 인간에게 부여한 본능적인 행위…… 사검평의 몸이 천천히, 그러나 거대한 힘으로 주혜군의 몸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 동안 꾹 참아 오던 주혜군이었건만, 이 순간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듯 자지러지는 비명을 토해 냈다. “아아악!” 이내 토신묘 안에선 폭발하듯 토해 내는 거친 숨소리와 고통에 몸부림치는 여인의 신음이 기괴하게 어우러졌다. 뜨거운 열기가 밀려나오는, 밖에서 들여다보이는 안쪽 풍경은 허연 물체가 뒤엉켜 움직이 는 희미함뿐이었다. 시각은 이미 삼경을 넘었고 천라만상은 깊은 잠 속에서 고른 숨소리를 내쉬고 있었다. 토신묘의 그림자가 뒤로 기울고 수목들은 고개 숙인 채 잠잠했 그때 어둠 속 어디선가 아, 하는 여인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토신묘 안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성과 거친 숨소리에 이내 묻혀 버리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끝없이 계속될 듯하던 거친 신음이 사라지고 사방이 고요해졌 그런데 토신묘 앞에 사람의 그림자 하나가 기울어 가는 달빛에 길게 늘어져 있으니 웬일인 가? 헌칠한 키, 어깨 뒤로 늘어진 백발, 핏기없어 백랍같이 흰 얼굴, 날카롭게 선 콧날, 괴이한 웃음기와 살기를 머금은 신비한 눈…… 그는 바로 천면환영인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서 있었는가? 이 으슥한 토신묘 앞에…… 第 二十 章 활인(活人)의 묘(妙) 1 소름 끼치는 싸늘한 미소를 머금은 채, 천면환영인은 죽은 듯 잠에 빠진 두 남녀의 나신을 소리없이 쏘아봤다. 그러다 갑자기 흠칫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갈갈이 찢어진 흑의 속에서 찬란한 빛을 발하는 물체, 구공신검과 불영옥패를 발견한 것이 다. 순간, 천면환영인의 얼굴에 한 가닥 잔인한 미소가 번져 갔다. 그가 가볍게 손을 들어 손끝으로 구공신검과 불영옥패를 가리키는 순간, 두 개의 물체는 소리도 없이 스스로 허공을 미끄러져 그의 수중으로 빨려 들어왔다. “흐흐…… 드디어 이것이 노부의 손아귀에 들어오다니……” 그러자 탐욕으로 번쩍번쩍 빛나던 눈이 거만한 빛을 띠었다. “이 구공신검이 아무리 절세신검이라 해도 노부는 필요치 않다. 때에 따라서는 보물을 손 에 쥐는 것보다 버려 두는 것이 득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니까 말이야.” 모깃소리처럼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던 그는 토신묘 안쪽을 향해 다시 한 번 소매를 펄럭였 다. 엄청난 내공이 깃들인 무형의 흡인력에 사검평의 몸이 소리도 없이 이끌려 왔다. 아직 스러지지 않은 달빛에 드러난 그의 나신은 탄복할 만큼 아름다워 눈이 부실 지경이었 다. 그 나신을 받아 옆구리에 끼는 순간, 천면환영인은 한 손을 토신묘 안쪽으로 다시 휘둘렀다. 그의 손끝에서 한 줄기 백광이 쏘아 나가더니, 백옥같이 희고 아름다운 주혜군의 등에 구 공신검이 자루만 남긴 채 깊숙이 박혀 드는 것이 아닌가! “크하하핫……” 천면환영인은 어둠을 뒤흔들며 앙천 대소를 터뜨렸다. 뭔가 날카로운 것이 가슴을 쥐어뜯고 쪼아대는 것처럼 몸서리쳐지는 그 광소는 선혈이 뚝 뚝 흐르는 고기 맛을 본 악귀의 울음처럼 공포스러웠다. “크흐흐흐…… 이 일검이 장차 무림의 운명을 좌우할 기묘한 묘계(妙計)임을 그 누가 상 상이나 하겠는가?” 장대한 체격, 날카로운 눈은 벌써 천하가 제 수중에 들어온 것처럼 거만함의 극치를 이루었 다. 바로 그때였다. 휘이익…… 어둠 속 어디선가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산곡에 길게 울려 퍼졌다. “헉! 무영마개 그 늙은이가 벌써 왔는가?” 천면환영인의 얼굴이 경악으로 차갑게 일그러졌다. 칼날처럼 예리한 눈이 사위를 빠르게 훑어 갔다. 다음 순간 파다닥, 옷자락이 나부끼는 소리가 울리더니,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어둠 속으 로 사라져 버렸다. 진정 기막힌 경공술이었다. 그런데 그가 떠남과 거의 동시에, 하나의 인영이 구부정한 모습으로 토신묘 앞에 나타났다. 지저분한 몰골에 누더기 차림, 옆구리엔 술호로 하나를 꿰찬 노개(老 ). 무영마개 유단이었다. 그는 본시 번듯한 체격이었을 성싶은데 습관인 듯 구부정한 모습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코를 벌름벌름하는 것이 냄새를 쫓는 듯했다. 코를 따라 볼따구니도 실룩실룩했다. 그는 토신묘 안으로 허리를 내밀고 고개를 길게 빼냈다. “아이쿠!” 그는 간덩이가 떨어진 것처럼 자지러지는 소리를 지르며 무너지듯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소경 지팡이 잃고 더듬듯, 몸을 떨며 양손으로 바닥을 쓸었다. 바로 옆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전라의 소녀, 그 등에 깊숙이 박혀 있는 검자루. 그것이 무영마개 유단을 이처럼 놀라게 한 것이다. 곁눈질로 흘끔흘끔 소녀 쪽을 보더니 용기를 내어 엉거주춤 일어섰다. 무영마개가 허리를 구부리고 궁둥이를 하늘로 치켜 든 채 소녀의 상세를 살피려 할 때였다. “그대는 잠시 손을 거두시오.” 침착한 여인의 음성과 함께 어느새 황색 가사의 여승 하나가 바로 뒤에 모습을 나타냈다. 갓을 길게 내려쓰고 가사장삼이 몹시 잘 어울리는 고운 자태였. “으잉?” 무영마개가 놀라 뒷걸음질 쳐 그녀를 돌아봤을 때, 여승은 조용히 갓을 어깨 뒤로 넘긴 채 양손을 모아 합장했다. 지그시 내리감은 눈, 고운 아미, 부드럽게 솟은 콧날, 윤곽이 선 입술, 단아한 이목구비가 고운 피부와 더불어 조화를 이루니 그 자태가 진정 고아하고 훌륭하다. 그런데 멀거니 여승을 바라보던 무영마개가 다시 자지러지듯 놀라며 허리를 굽히고 마주 합장하는 것이다. “후배 무영마개가 황산신니 노선배를 뵙습니다.” 황산신니라니…… 겨우 삼십을 넘겼을까 싶은 이 고운 자태의 여승에게 황산신니란 이름을 쓰다니……? 무림 에서 사라진 지 이미 이백여 년이 지난 황산신니를…… 여승이 조용한 시선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검은 눈이 수정같이 맑다. 그러나 정색한 얼굴은 그 누구도 직시하기조차 어려운 근엄함을 지녔다. 깊은 불심으로 심신이 가다듬어진 황산신니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유 시주는 예를 거두시오. 우선 빈도 제자의 상세를 살피는 것이 시급한 일이오.” 무영마개 유단이 다급히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주 소저가 어쩌다 이런 변을 당했습니까?” 황산신니가 먼저 소맷자락으로 이마의 식은땀을 씻으며 조용히 말했다. “군아에게 손을 쓴 건 바로 그자였소.” 무영마개 유단이 몹시 놀란 얼굴을 하고 두 사도를 번갈아 보았다. “그럼 선배께선 어찌하여 주 소저가 그자에게 당하는 것을 보고도 손을 쓰지 않았소이 까?” 황산신니가 가볍게 탄식했다. “빈니가 어찌 그자의 손에 상하는 제자를 두고 보고만 싶었겠소? 하지만 빈니가 강호에 모습을 나타냄으로써 일어날 사태를 생각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소.” 그녀는 은은히 비애가 깃들인 시선으로 죽은 듯 누워 있는 주혜군의 나신을 바라보았다. “빈니가 할 수 있는 건 무형(無形)의 암경(暗勁)을 발휘해 그자의 살수가 빗나가도록 하여 제자의 생명을 보존하는 방도뿐이었소.” 그렇다면 주혜군을 거두어 전인으로 삼은 것이 황산신니였단 말인가? 무영마개 유단은 백미를 꿈틀하더니, 짐짓 그녀를 쏘아볼 듯하면서 분노에 찬 음성으로 소 리쳤다. “도대체 선배께선 언제까지 그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악마를 그대로 내버려둘 생각이십니 까? 이 무영마개는 그 악마가 정체를 숨긴 채 무림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백주대로(白晝大路)를 활보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내장이 뒤틀려……” 분기 탱천해서 떠들어대던 무영마개는 아차했다. 황산신니의 말없는 눈이 그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대고인에게 주책없이 흥분해서 따지고 대들었으니…… “후, 후배가 그만 실수를…… 용서하십시오.” 그러나 뜻밖에도 황산신니는 조금도 나무라는 기색이 없었다. “빈니가 유 시주의 그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오. 하나, 그자의 배후에는 빈니로서도 경시 못 할 거마(巨魔)가 도사리고 있다는 건 유 시주께서도 잘 아시는 처지요. 한데 우리가 어찌 노여 움을 참지 못하여 타초경사(打草驚蛇)의 우를 범할 수 있단 말이오?” 천면환영인의 뒤에 도사린 거마…… 대체 천면환영인의 진정한 정체가 무엇인가? 주위는 잠시 침묵에 잠겼다. 황산신니는 몸을 구부린 채 몇 가닥 지풍을 전개해 주혜군의 몸의 몇 개의 혈도를 점했다. 그런 후 슬쩍 옥장(玉掌)을 내밀자 깊숙이 박혔던 구공신검이 소리도 없이 스르르 뽑혀 그 녀의 수중에 들어왔다. 그것을 내려다보며 황산신니가 나직이 탄식했다. “아, 빈니가 구공신검을 사마 사제에게 줄 때는 그의 손을 빌려 천하의 군마(群魔)를 제거하고 정의를 수호하려는 뜻이었거늘……” 그녀는 지그시 눈을 내리감으며 고개를 저었다. “백년이 흐른 오늘, 나의 애검(愛劍)이 내 제자의 목숨을 앗으려 날아들다니……” 황산신니의 탄식을 들으며 그녀의 등 너머로 시선을 던지던 무영마개 유단은 눈이 동그래졌 다. 그녀의 손에 있는 구공신검엔 피 한 방울 묻지 않았거니와, 주혜군의 몸에도 피의 흔적조차 없는 것이다. 무영마개는 황산신니의 다소곳하고 가녀린 어깨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주 소저는 괜찮겠습니까?” “이 아이는 빈니가 전개한 본 문의 비전요상절기(秘傳療傷絶技)인 쇄혈봉맥최혼수(鎖穴封 脈催魂手)에 의해 가사(假死) 상태에 빠져 있소.” 무영마개는 그녀의 가사 장삼과 자신의 낡은 누더기를 번갈아 보았다. “당분간은 상처가 악화되진 않을 게요. 빈니가 여길 벗어나 몇 가지 영약을 쓰면 금방 치유될 수 있을 것이오.” 무영마개는 안심했다는 듯 그녀의 등뒤에 대고 고개를 끄덕였 그리고 눈을 깜박깜박하더니, 비로소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런데 사 소협은 이제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황산신니는 검이 박혔던 주혜군의 등을 살피며 무심한 듯 말했 “그자에겐 사 시주가 무엇보다 큰 수확이었을 게요.” “아니! 그럼 큰일이 아닙니까?” 황산신니가 일어서며 나직이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유 시주는 매사에 성급하더니, 근심하는 것도 남보다 앞서는구려. 안심하시 오.” 무영마개는 안심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마음을 놓을 수 있단 말인가. 놓고 말은 하지 않지만, 그래도 암중에 모두들 믿고 기대하고 있는 게 사검평인데…… 그의 숨결이 높아지는 걸 느꼈는지 황산신니가 말을 덧붙였다. “빈니가 사 시주의 얼굴에 나타난 운(運)을 본 바 있소. 그에게 충격은 있을 것이나 장차 그로 인해 다른 기연을 얻을 것이오. 천운(天運)을 타고났소.” 무림대고인의 한마디가 무영마개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황산신니의 말을 그는 한치도 비틀어 생각지 않았다. 벌써 그의 얼굴엔 엷은 웃음기가 돌고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난 벌써 첫눈에 알아봤다고. 대단한 인물이었지.’ 그러나 그가 사검평의 재질에 대해 혼자 흡족해 있을 때, 황산신니는 주혜군을 내려다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가장 큰 문제는 빈니의 제자아이가 받을 마음의 상처요. 이 아이는 그를 구하기 위해 제 순결을 바쳤으나, 그는 알지 못하고 있을 것이오.” “이 두 남녀의 앞날이 결코 순탄치는 않겠군요.” 무영마개는 눈을 깜박이며 혀를 찼다. 황산신니가 중얼거렸다. “사실 빈니는 이 아이에게 빈니의 의발(衣鉢)을 물려줄 생각이었으나, 얼굴을 보니 갈수록 정연(情緣)의 상이 짙어 불문과 인연이 없음을 알았소.” 그녀는 무영마개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유 시주께서 이 아이와 사 시주의 사이가 원만히 이루어지도록 힘써 주시면 고맙 겠소. 부탁하오.” 황산신니에게서 부탁한다는 말을 들은 무영마개는 황송해서 얼른 포권하고 허리를 굽혔다. 그런데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황산신니는 어느새 십리 밖을 날고 있었다. 한 마리 황학(黃鶴)처럼 옷자락을 펄럭이며…… 물론 주혜군은 토신묘 속에 없었다. 그들이 사라지자, 주위는 다시 깊은 적막으로 감싸였다. 텅 빈 토신묘 앞엔 무영마개 유단이 멀거니 서 있었다. “아, 오늘의 일이 이렇게 결말이 날 줄은 미처 몰랐군……” 혼자 중얼거리며 고개를 홰홰 내저었다. 그도 처음엔 기필코 사검평의 마음을 돌려 놓으리라 작정하고 그의 뒤를 끈질기게 쫓았던 것. 그러다 그는 천만 뜻밖에도 강호에서 사라진 지 오래인 전대기인(前代奇人)을 만나 자지러 지게 놀랐는데, 그녀가 바로 황산신니였다. 무영마개는 그녀에게서 엄청난 강호의 음모를 들었다. 지금껏 강호인들이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던 기상천외의 일. 당금의 강호인들은 울울창창한 수림을 뚫고 헤매느라 나무의 기둥만 보아 온 것인데, 희 세의 고인으로 꼽히는 황산신니는 이들의 시계(視界) 밖에 있는 저 울창한 숲을 뿌리에서 줄기 끝까지 다 헤아려 보는 것이다. 무영마개의 충격은 컸다. 하여 나이 이미 백 세에 가까우나, 경골협담(硬骨俠膽)으로 유명한 그는 기필코 강호정의를 지켜 내리라 맹세했다. 그리고 황산신니의 명에 따라 행동하기로 결심했다. 황산신니는 자신은 모종의 규제에 걸려 있어 정식으로 강호에 나설 수 없는 처지라 했다. 이어서 그녀는 현강호에서 진행되고 있는 음모를 막아 강호를 구할 인재는 염라천존의 전 인, 사검평뿐이라고 말했다. 하니 이 같은 자신의 뜻을 그에게 전하라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전 자신이 거두어들인 주혜군을 그에게 딸려 강호로 내보냈다. 그때 주혜군은 이미 높은 무공을 소유하고 있었다. 황산신니가 백여 년 간 천하의 명승대산(名勝大山)을 떠돌아다니며 채취한 갖가지 약초로 제조한 사문의 영약, 금정신단(金頂神丹)을 복용한 것이다. 그것으로 일 갑자에 달하는 내공수위를 얻었고, 몸에 익힌 내공은 더욱 정순해져 위력이 증강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다시 사검평을 찾아 나섰을 때, 사검평은 하남 관도에서 남해문과의 충돌 이후 신비하게 그 종적을 감춰 버린 것이다. 강호 구석구석을 다 뒤져도 그의 모습을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러나 무영마개는 낙담하지 않았다. 그는 현개방 방주인 철담호개 악무연의 사숙이었으니 천하각지에 퍼져 있는 개방 방도들을 움직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명이 내려진 지 불과 하루 만에 염라서생 사검평에 대한 보고가 올려졌다. 개봉 땅에 사검평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 무영마개와 주혜군이 개봉에 당도했을 땐 이미 염라서생이 묵던 객잔을 버리고 다시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뒤였다. 그들이 당혹해 하고 있을 때, 발신인을 알 수 없는 서찰 하나가 날아들었다. 놀랍게도 거기엔 사검평의 행적이 적혀 있었다. 대경 실색한 그들이 사검평을 찾아 냈을 때, 기막히게도 그는 화려한 침상에서 환각에 눈 이 멀어 있었다. 무엇보다 놀란 건 주혜군이었다. 말할 수 없는 노여움과 안타까움에 그녀는 혼절할 것 같은 충격을 간신히 이겨 내고 있었 다. 그때 무영마개가 침착하게 묘안을 짜냈다. 그가 만변선희 모용상을 유인해 가는 사이, 주혜군이 사검평을 구해 내는 것이었다. 모든 건 그들의 계획대로 실행되었다. 그런데 모험 끝에 구해 낸 사검평은 결국 천면환영인의 수중에 들어가고, 주혜군은 상처 입 은 몸이 된 것이다. 비록 황산신니는 주혜군의 상처가 대단치 않다 하고, 사검평이 이번 일로 하여 더 큰 복연 을 얻으리라 했으나…… 무영마개 유단은 여전히 마음이 아프다. 우울한 심사에 괜히 콧등이 시큰해지더니, 콧속이 간질간질하. 에에엣…… 취…… 산곡이 떠나가도록 요란하게 재채기를 해대고서 그는 훌쩍훌쩍 콧물을 닦았다. 이미 백여 세가 가까운 나이에 강호에선 날카로운 성미의 협의인으로 이름이 높지만, 가끔 이렇게 마음 약한 모습을 보이곤 했. 왠지 비감해져 침울해 있다가 천면환영인의 진면목을 생각하자 견딜 수 없이 분노가 끓어올 랐다. “에잇! 주리를 틀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사납게 중얼거리다 고개를 홱홱 내저었.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지그시 이를 악물고 어둠 속을 내다보다 토신묘를 등지고 사라졌다. 어둠이 그 뒤를 따라 몰려가니 동녘이 어슴푸레해지는 것이, 곧 날이 밝아 올 듯도 하다. * * * 미명(未明), 어둠이 걷혀 가는 게 순식간이더니 날이 밝는 것도 어느새 잠깐이다. 어느새 어슴푸레하게 날이 밝아 오고 있는 것이다. 빽빽히 깔린 잿빛 구름을 뚫고 햇살이 비쳐 들기 시작한 동녘. 언뜻 그 찬연한 광채를 홀로 독차지하고 있는 것이 멀리 동녘에 보이는 아련한 미공산(米 功山)이었다. 그 미공산 삼십육 개 봉우리 중에 단연 우뚝 솟은 것이 불수봉(佛手峯). 여명의 빛은 그 불수봉으로 먼저 쏟아지는 것 같다. 그러나 정작 당도해 보면 불수봉의 하늘은 온통 새털구름으로 덮여 있었다. 깎아지른 듯한 천인단애(千 斷崖)와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남북 백여 리에 걸쳐 장중히 펼쳐진 미공산. 불수봉은 그 중 최북단에 위치한 봉우리다. 멀리 감숙성(甘肅省)에서 발원(發源)하여 섬서(陝西), 산서(山西)에 걸쳐 하북(河北)과 산 동(山東), 양성(兩省)을 지나 발해(勃海)로 흘러 드는 거대한 물줄기. 바로 황하(黃河)의 물줄기와 면해 있었다. 북녘 멀리서 보노라면 마치 황하의 하면(河面)에 뜬 성같이 보였다. 여명이 터 오는 시각의 불수봉 정상. 드높은 절봉 허리에 뱀처럼 휘감긴 구름이 발 밑에 감기는 듯하니 아찔함이 더하다. 그런데 이때, 휘이익……! 미공산 삼십육 봉을 휘감아 올리는 듯 웅후한 내력의 휘파람 소리가 아득한 산곡 속에서 울렸다. 그러더니 다음 순간, 한 줄기 청영(靑影)이 허공을 가르고 가볍게 이 불수봉 정상에 올라섰 다. 천면환영인이었다. 이 높은 산봉을 날아올랐는데 얼굴엔 땀 한 방울 찾아볼 수 없 그의 옆구리엔 사검평이 전라의 모습으로 의식을 잃고 있었다. 천면환영인은 그의 몸을 바닥에 내던졌다. 그리고 예리한 눈으로 사방 허공을 노려보더니 갑자기 어깨를 흔들며 앙천 광소를 터뜨렸 다. “크하하하…… 염라서생, 염라천존의 전인인 내가 오늘날 이렇게 비참한 지경으로 노부 손에 이를 줄은 천하인들이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아마 염라천존이 알면 분개하여 네 몸을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 죽이려 들 것이다. 하핫……” 천면환영인은 의기 양양했다. “노부에겐 네 죽음이 필요하니 죽이긴 하겠다만 그냥 죽여 줄 순 없다. 그래서는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너의 죽음이 의미가 없지 않느냐?” 그의 얇은 입술이 만족감에 붉게 물들었다. “네 죽음으로 노부는 그 동안 꿈꾸어 온 모든 야망을 이룰 것이다. 일 년, 그 안에 노부는 중원무림의 주인이 되어 천하를 지배하게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갑자기 그는 지그시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날이 올 때까지 노부는 온갖 수모와 멸시를 참고 견딜 것이다. 노부를 무림의 배신자 (背信者)라 손가락질하던 자들도, 천하 패권을 노리는 효웅(梟雄)이라 경외시하던 무리도 그날 이후에는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갑자기 그는 두 눈에 칼날 같은 노기를 드러내며 이를 갈았다. “만변선희 모용상, 네년 같은 천비(賤婢)가 감히 노부를 능멸하다니! 그러나 네년의 최후 도 결코 멀지 않았다.”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노부가 특별히 입수한 천독마수 우문관의 독문비제인 무형산공단(無形散功丹)을 이 애송 이에게 복용시키고 노부의 독문절기인 잔혈쇄심지(殘血碎心指)로 비경(秘經) 칠 개 경락(經絡)을 점하면, 흐흐흐…… 그 누가 보더라도 이 애송이는 채양보음의 사법(邪法)에 의해 누구에겐가 전신 공력이 흡수당한 채 비참한 최후 를 맞은 것으로 알 것이다.” 신비한 마력을 가졌던 눈이 이젠 은은히 살기를 품고 사검평을 내려다보았다. “흐흐흐…… 이제 노부의 약간의 수고로 이 모든 혐의는 그 계집에게 돌아갈 것이고, 노 부는 지금껏 그 계집에게 당해 온 수모에 대한 앙갚음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주군의 감시에서도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게 아닌가! 하하핫……” 황하의 물결을 타고 밀려온 북녘 바람이 그의 백발을 얼굴 쪽으로 휘감아 왔다. 어지러운 백발 사이로 그의 괴소가 흩어져 갔다. “흐흐…… 남해천룡(南海天龍) 우검학(宇劍鶴), 네가 노부를 이용해 중원을 손아귀에 넣 은 후에 다시 노부를 제거하려는 그 야심을 노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네 아무리 천하를 손바닥 들 여다보듯 하는 귀물(鬼物)이라 하나 노부의 마음속은 헤아리지 못하였으리라.” 그는 제 심계에 만족한 듯 흡족함에 지그시 눈을 감았다. “노부 또한 네 계책에 대한 암계를 세웠으니 네가 암중에 꺼리는 황산신니와 천공금성, 염라천존은 노부의 안배에 따라 너와 운명을 함께할 터. 일 년 후 천하에 그 누구도 노부를 능가할 인물이 없을 것이다.” 천면환영인을 내세워 암중에 천하패권을 노려 온 자가 바로 남해천룡이었단 말인가? 삼십 년 전 강호를 온통 뒤집어 놓을 듯하더니 이제 다시 강호를……? 더욱 놀라운 건 천면환영인의 야심이었다. 이제 장차 일 년 내에 두 마리 흑룡이 각지 중원에서 제 야심을 펴느라 황하를 피로 물들일 것이다. 천면환영인은 돌연 차디차게 웃으며 의식없는 사검평을 향해 지풍을 날렸다. 그러자 소리도 없이 사검평의 전신에 일곱 군데 선명한 자색 지흔(指痕)이 나타났다. 천면환영인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품속으로 손을 디밀더니 작은 옥합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는 십여 개의 금침(金針)과 한 개의 붉은 옥병이 들어 있었다. 그는 옥병 속에서 붉은 알약 하나를 꺼내 들고 사검평의 아혈(啞穴)을 점했다. 그러자 사검평의 입이 절로 벌어졌고 천면환영인은 몸을 구부린 채 그의 입 속으로 알약을 밀어넣었다. 붉은 알약은 침에 스르르 녹아 목줄기를 타고 넘어갔다. 천면환영인은 무형산공단이 완전히 녹아 목구멍으로 넘어간 것을 확인하고야 사검평의 입을 닫았다. 그리고 사검평의 전신에 선명히 남아 있는 지흔을 지웠다. 그리고는 한 쪽 무릎을 굽힌 채로 그 부위를 뚫어져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사검평은 여전히 의식이 없는데 그는 무엇을 기대하는지 지흔이 있었던 부위만 꼼짝 않고 응시했다. 이렇게 약 뜨거운 차 한잔 마실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그의 두 눈이 번쩍 빛을 발하며 입가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독기 서린 미소…… 뭔가 바라던 것이 이루어진 것처럼 흡족해 하면서도 사악한 심중인 것 이다. 한데 지워졌던 지흔이 신비할 정도로 뚜렷하게 살아나지 않는 “하하핫……” 천면환영인이 벌떡 일어서며 앙천 대소하더니 품속에서 불영옥패를 꺼내 사검평의 손아귀에 쥐여 주었다. 의식이 없으면서도 사검평은 그의 뜻에 순종하듯 단단히 그것을 거머쥐었다. “흐흐…… 이 불영옥패는 네가 염라서생 사검평임을 증명해 줄 것이다. 그 후에 남는 건 모두 노부의 안배대로 노부의 강적들이 서로 죽이고 죽는 일뿐이다.” 그는 살기 띤 눈으로 사검평의 나신을 내려다봤다. “이제 너는 황하의 고혼(孤魂)이 될 것이나 짧은 세월에 네 명성이 천하를 떨쳐 울렸으 니 더 여한이 없을 것이다.” 그는 돌연 사검평의 몸을 번쩍 안아 들었다. “후일 노부가 천하무림의 주인이 되어 보좌(寶座)에 오를 때 네 공이 많았던 것을 기억하고 저 황하에 한잔의 미주(美酒)를 부어 주리라.” 그는 노송 쪽으로 다가가 장정의 팔뚝 굵기만한 단단한 등(藤) 줄기로 사검평을 노송에 친 친 감아 묶었다. 이어서 그는 대갈일성과 함께 노송 밑동을 향해 일장을 날렸 꾸르릉…… 쾅! 우지직…… 아름드리 노송이 뿌리째 뽑혀 천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갔 그러더니 마침내는 성난 듯이 흐르는 황하의 누런 물보라에 휘말려 들어갔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노송과 사검평을 삼켜 버린 황하의 황톳물은 더욱 붉어지고 물결은 성난 듯이 굽이쳤다. “크하하하…… 이것이 시작이다. 그 누가 감히 노부의 앞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 하하 핫……” 미공산을 흔들어 황하를 진동케 하고 마침내는 천공까지 뒤흔들어 내릴 듯 우렁찬 광소였 다. 2 도도히 굽이쳐 흐르는 강줄기, 황하(黃河). 하류(下流)에 이르면 그 흐름이 완만하여 수면이 잔잔하다. 넓은 강변에 한 척의 화려한 화방(畵舫)이 유유히 강줄기를 거슬러 오르고 있었다. 언뜻 보아선 그저 수면 위에 한가로이 머물러 있는 듯하나 배 밑으로 이는 물거품이 세찬 걸 보면 그 빠름이 놀라운 것을 알 수 있었다. 드넓은 황하엔 몇 척의 작은 어선들이 한가로이 그물을 내리고 있어 평화로운 정경을 이루 고 있었다. 또한 한쪽 강변에는 푸른 산세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으니 진정 이 풍취는 한 폭의 그림이었 다. 멀리 보이는 산악이 유난히 푸른 걸 보니 녹영이 짙푸른 성하(盛夏)의 계절이 가려면 아직 먼 듯하다. 하늘은 푸른 물감을 풀어 놓은 듯 맑고 청명했으며 흰 뭉게구름이 떼지어 몰려다녔다. 강물과 물이 잇닿는 곳에는 갈대숲이 무성하고, 그 숲에서 파다닥, 새떼가 날아올랐다. 황하의 누런 하면(河面)조차 눈부신 햇살에 반사되어 황금으로 물든 듯 번쩍인다. 그 찬란한 황금의 강줄기를 화려함의 극을 다한 화방 한 척이 유유히 가르고 미끄러져 간 다. 이 호화로운 화방의 뱃머리에는 두 명의 소녀가 나란히 강바람에 옷자락을 날리고 있었다. 백설이 내린 듯 희디흰 궁장 차림의 절세소녀와 시녀로 보이는 청의소녀였다. 그들은 드넓은 강물과 함께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경관에 연신 감탄을 발하며 낮은 소 리로 담소를 나누고 있는 듯했다. 멀리서 언뜻 보기로도 그 뛰어난 자태가 돋보이는 백의소녀, 마치 선계의 천녀(天女)가 황 하의 물위를 밟고 선 듯하다. 한 점 티 없이 맑아 백설이 무색한 흰 살결, 신비한 광채를 발하는 보석 같은 봉안(鳳眼). 천하의 명장이 다듬어 놓은 듯 높지도 낮지도 않은 섬세한 콧날이 햇살에 유난히 도도하게 보였다. 붉은 석류를 연상시키는 도톰한 입술이야말로 그 빼어난 이목구비 중에서도 가장 빼어났 다. 강바람에 하늘거리는 백의 나삼을 휘날리고 선 그 고귀하고 은은한 자태는 진정 비할 데 없 이 아름다웠다. 청의시녀의 용모 또한 단정하나 그녀는 이따금 눈이 부신 듯이 백의소녀의 자태를 바라보곤 했다. 백의궁장소녀가 이마로 흘러내리는 머릿결을 쓸어 올리며 미소를 머금고 소리쳤다. “아, 이렇듯 오랜만에 궁을 떠나 천하의 풍물을 다시 접하게 되니 진정 기쁘기 그지없구 나!” 청의소녀도 매우 기쁜지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공주님이 주모(主母)의 허락을 얻어 강호로 나온 덕에 백초곡으로 양 노선배 님을 방문할 수 있게 되어서 소녀 또한 기뻐요.” 청의소녀는 나부끼는 옷자락을 추스르느라 애쓰면서도 연신 웃었고, 물결 소리 탓에 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만일 공주님께서 벽혈십이식(碧血十二式)의 절세검초를 완벽하게 연성하지 못하셨 다면 아마 주모께서도 절대 이번 강호행도를 허락하지 않으셨을 거예요.” 그 말에 백의소녀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미소가 도는 얼굴에 이내 엷은 그늘이 졌다. “하지만 이번에 백초곡에 간다 해도 내가 어릴 때 언니와 함께 방문했을 때처럼 즐겁지는 않을 거야.” 그 말에 청의소녀도 밝던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러나 위로하려는 듯 애써 밝은 음성으로 소리쳤다. “대공주께선 이미 남궁세가에 출가하시어 행복하게 지내신다고 주모님과 궁주님께서 항시 말씀하셨으니, 공주께선 너무 근심하지 마세요.” 궁장소녀는 쓸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 말은 주모님께서 나를 안심시키려고 하신 말씀일 뿐 사실은 그렇지 않을 거 야.” 그녀는 이내 시무룩해져 강물로 눈길을 떨어뜨리는데, 크고 검은 눈에 이슬이 고였다. 물끄러미 수면을 응시하던 그녀는 중얼거리듯 낮은 소리로 말했다. “사실 내가 태산에 계시는 외조부(外祖父)께 서찰을 전하는 일을 맡겠다고 어머니께 떼 를 쓴 것은…… 남은 시간을 이용해 백초곡을 찾아가 실제로 언니가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지 알아보려는 것이야.” “소녀도 공주님의 마음을 이미 짐작했어요.” 청의소녀가 그녀의 곁으로 바싹 다가섰다. 백의소녀는 푸른 하늘에 떠도는 뭉게구름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흔들리는 배 난간에 몸을 기 대고 있더니 갑자기 목이 메는지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언니는 출가하기 며칠 전 나를 붙잡고 말없이 눈물을 흘린 적이 있었어. 그때는 내 나이 가 어려 언니의 마음을 다 이해하지 못했으나 이젠 알 수 있을 것 같다.” 청의소녀는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해 그늘진 얼굴로 강물만 바라보며 서 있었다. “우리는 비록 이복(異腹)의 자매였지만 난 언니를 좋아했어.” “소녀가 괜한 말을 해서 공주님의 심기를 흐리게 했나 봐요. 용서하세요.” 청의소녀가 울상을 짓자 백의소녀는 미소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네 잘못은 없다. 청아(靑兒), 너는 마음쓰지 마라.” 백의궁장소녀, 그녀는 바로 벽혈궁주의 천금인 유벽선이었다. 사 년 전 사검평이 장군산에서 우연히 만나 한동안 그 영상을 잊지 못하던 소녀였던 것이 다. 새벽 풀잎에 맺혀 구르는 영롱한 구슬처럼 티없이 맑고 귀엽기만 하던 그녀는 이제 제법 우 아한 자태를 보이고 있었다. 그녀가 말하는 언니란 여인은 사검평으로 하여금 깊은 상사지정(想思之情)에 시달리게 하 던 벽혈옥봉 유옥선이었다. 참으로 기묘한 인연이다. 유벽선은 벽혈신군이 상처(喪妻) 후 새로 맞은 매화여협(梅花女俠) 여운교(呂雲嬌)가 낳은 딸이었고, 유옥선은 전처의 소생이었다. 매화여협 여운교는 강호기인으로 통하는 매화신로(梅花神老) 여자량(呂子良)의 여식(女息) 으로, 그 미모와 재지가 뛰어나 한때 강호에서 대단한 명성을 얻었었다. 그런데 그녀 또한 벽혈신군을 위해 벽선 하나밖에 낳지 못하여 내심 대(代)를 이을 아들을 원하던 벽혈신군을 실망시켰다. 그래서 벽혈신군은 일 년 중 한 달도 벽혈궁에 머물지 않았다. 이에 매화여협 여운교는 외로움을 이기려 온갖 정성을 자신의 딸에게 기울였다. 그러나 본시 심성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그녀도 옥선에게만은 냉랭했다. 벽혈신군이 이처럼 자신에게 서운하게 대하는 것이 그가 아직도 죽은 전처를 못 잊은 까닭 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옥선과 벽선의 사이는 매우 따뜻하여 서로간의 정이 깊었다. 하기에 옥선이 누구에게도 말못할 광검수재 척금송에 대한 사연을 벽선에게 말했던 게 아 닌가. 그런데 어린 나이로 언니의 슬픈 사연을 들었던 벽선은 이제 그것을 완전히 이해할 나이가 되어 언니의 불행을 예감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큰일났어요! 큰일났어요!” 돌연 허공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유벽선이 놀라 고개를 쳐드니 전신이 백설 같은 털로 뒤덮인 백우조가 소리치고 있는 것이 다. 청의소녀 청아가 낯을 찌푸리며 나무랐다. “설아야, 공주님 앞에서 웬 소란이냐?” 그러자 백우조는 빨간 눈을 굴리며 오히려 화를 냈다. “내 말이 거짓인 줄 알아? 배 앞에 사람이 보이잖아!” 그 말에 뱃머리로 다가서던 청아는 “앗!” 하는 비명을 질렀 그들이 탄 배로부터 십여 장 밖, 넘실거리는 물결 사이로 한 그루 거대한 노송이 떠내려 오고 있었는데, 그 위에 무엇인가 희끗한 물체가 보였던 것이다. 언뜻 보아도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유벽선은 뱃전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이어 그녀는 물 찬 제비처럼 날렵하고도 빠르게 물위를 미끄러져 날아 거목 위에 내려섰다. 한데 그 위에 묶여 있는 사람을 발견한 순간, 그녀의 얼굴이 불덩이처럼 새빨갛게 달아올 랐다. 그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裸身)의 남자였기 때문이다. 유벽선은 순결한 처녀의 몸이 아닌가. 이렇듯 벌거벗은 남자의 나신을 대함은 실로 난생처음이었다. 그녀는 크게 당황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입장이 난처하여도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 이대로 버려 둘 수는 없었다. 우선 사람은 살리고 봐야 되지 않는가? 유벽선은 이내 곤혹의 표정을 지우고 단호히 얼굴을 가라앉히며 재빨리 나신의 남자를 묶 어 놓은 끈을 풀어 냈다. 이어서 그녀는 그를 옆구리에 안고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팟! 그녀의 발끝에 스친 수면으로부터 한 줄기 흰 물보라가 하얗게 피어올랐다. 그녀는 순식간에 뱃전에 닿았다. 한데 그녀의 옆구리에는 벌거벗은 웬 남자가 안겨 있었으니, 청아의 놀라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처럼 망측한 일이……!” 시녀 청아가 자지러지게 놀란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었다. 유벽선은 비록 얼굴의 홍조는 가시지 않은 채 굳어 있었으나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어서 옷 한 벌을 가져 오고 황 노인도 빨리 오시도록 해라.” 그녀는 곧 나신의 남자를 뱃전에 내려놓고 민망하여 외면하였 청아는 그녀의 지시에 따라 이미 선실 쪽으로 다급히 내려가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설아가 호들갑스럽게 떠들었다. “이 아이는 바로 장군산에서 나를 구해 주었던 그 꼬마가 틀림없다. 호호호…… 설아는 기억력 하나만은 아주 좋지.” 이에 크게 놀란 유벽선이 급히 고개 돌려 자세히 바라보니 과연 설아의 말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커다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녀의 아련한 기억 속에도 사검평에 대한 생각은 뚜렷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청아가 육순 가량의 사공 하나와 함께 헐레벌떡 달려왔 유벽선이 노인을 향해 급히 말했다. “황 노인은 어서 그에게 옷을 입혀 줘요.” 황 노인이라 불린 육순 가량의 사공은 일별하여 사검평을 훑어보더니 의혹 어린 음성으로 말하였다. “벌써 죽은 것이 아닐까요?” 유벽선이 급히 말했다. “아직 죽지는 않았으니 어서 옷부터 입힌 후 나의 선실로 데려가도록 해요.” 황 노인은 미심쩍은 표정이었으나 곧 지시대로 시행했다. 옷을 입히려고 사검평의 몸을 뒤척이던 황 노인이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분 공자가 손에 쥐고 있는 물건은……?” 얼른 고개를 돌리던 유벽선은 자신이 미처 발견치 못했던 사검평의 수중의 물건을 보고 아 연 경악해 마지않았다. “이것은?” 그것은 분명 불영옥패였다. 유벽선의 안색이 기묘하게 변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냉정을 되찾고 힐책하듯 소리쳤다. “뭘 꾸물거리는 건가요? 어서 그를 선실로 옮기지 않고……” “아! 예, 예예……” 황 노인이 그제야 다급히 그를 안고 선실로 내려갔다. 그때 청아가 의아한 듯 볼멘소리로 말했다. “공주님께선 처음 보는 강상(江上)의 조난자 따위에게 어찌 그토록 관심이 크신가요?” 유벽선은 가볍게 탄식하였다. “청아, 네 어찌 그런 말을 하느냐? 저분 공자는 결코 나와 초면의 사이가 아니란다.” 그녀는 곧 장군산에서 만났던 소년의 얘기를 했다. “사 년 전 그때, 너 역시 그를 보지 않았느냐?” 이에 흠칫하여 청아가 그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비록 성숙한 모습으로 변모해 있었으나 분명 사 년 전 장군산에서 보았던 그 소년임에 틀 림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역시 사실이었군요. 그가 어찌 여기서 이런 모습으로 우리 눈에 띄게 되 었을까요?” 유벽선이 탄식하듯 나직이 말했다. “그것은 나로서도 알 수가 없다. 지난 사 년간 그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그 자신이 정 신을 차려 말하기 전까지는 너나 나나 어찌 감히 짐작이나 하겠느냐?” 그녀는 황 노인을 따라 선실로 내려갔다. 설아도 방금 청아의 어깨에 내려앉은 후 더불어 안으로 들어갔. 선실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방의 벽면은 붉은색으로 치장되어 있었고, 곳곳에 상아조각품이 걸려 있었다. 얇은 휘장 안의 침상 또한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다. 봉황의 조각이 장식된 침상 위로 사검평은 사뿐히 내려졌다. 유벽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됐어요, 황 노인! 이제 그대는 그만 나가 보도록 하세요.” 황 노인은 한번 허리를 굽실해 보인 후 즉시 선실 밖으로 나갔. 잠시 선실 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유벽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사검평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사검평은 마치 시체처럼 창백한 안색인 채 죽은 듯 누워 있었. 하나 정신을 잃었어도 그의 절세적 용모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 반듯한 이마, 우뚝한 콧날, 꽉 다문 입술…… 유벽선은 묵묵히 그를 내려다보다가 미미한 격동의 빛을 떠올렸다. 사검평, 그는 과연 예나 지금이나 천하기재로서의 풍모가 훤칠했기 때문이다. 한데 그가 어째서 이러한 몰골로 강상을 표류하고 있었단 말인? 그녀의 얼굴에 서렸던 격동의 빛은 이내 연민의 표정으로 바뀌었다. 사실 그녀는 이 수려한 풍모의 남자를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애틋한 정감에 사로 잡히는 것이었다. 그녀는 넋을 잃은 듯 언제까지나 움직일 줄 몰랐다. 그때 청아가 더 이상 궁금증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나직이 물었다. “공주님, 대체 그는 살아 있을까요, 벌써 죽었을까요?” 유벽선은 불현듯 상념에서 깨어났다. 섬섬옥수를 놀려 그의 진맥을 짚어 보던 그녀의 얼굴이 침중히 변하였다. 청아가 눈치채고 더욱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는 듯 다급히 물었다. “혹시 숨을 거두기라도 하였나요?” 그러나 유벽선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청아가 더욱 의아했다. “그렇다면 왜……?” 유벽선은 깊이 탄식했다. “이분 공자는 다행히 아직 절명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히려 내게 큰 실망을 안겨 주었 으니……” 청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하였다. 그러자 유벽선이 다시 말했다. “나는 사 년 전에 이미 이분 공자가 장차 크나큰 무공의 성취를 이룰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 그 짐작이 완전히 어긋나고 말았구나.” 청아가 새삼 사검평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과연……” 유벽선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렇다. 이분 공자는 무공을 익힌 흔적이 일신 중 그 어느 곳에도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불가사의한 일이 있으니…… 이분 공자의 이런 상태로 보아 이미 오랜 시간 강상에서 표류하였음이 틀 림없다. 그런데도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으니…… 이것은 정녕 기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구나.” 청아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어찌 그럴 수가……?” “다만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는데…… 비록 이 공자의 몸 어느 곳에서도 무공을 익혔던 흔적은 없으나 기이하게도 단전 부근으로부터 한 가닥 신비로운 열기가 솟구치니, 이것이 그의 속을 감싸고 보호하는 것을 역력히 느낄 수 있겠구나.” 청아가 눈빛을 반짝이며 말하였다. “그렇다면 이분 공자께서 그 동안 혹시 어떤 절대 영약을 복용했던 것은 아닐까요?” 유벽선이 신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다. 자세한 것을 알려면 먼저 이분의 정신을 차리게 해야겠구나.” 말을 끝내며 그녀는 가볍게 아미를 찌푸렸다. 이어 나직이 중얼거렸다. “한데 이분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겨우 탈진 상태에 빠졌을 뿐더러 너무나 오랫동안 강물에 잠긴 채 표류하였던지라 극도로 기진한 상태이다. 진정 지금까지 절명치 않고 생명을 유지한 것만도 기적이라 할 수 있다.” 그녀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선실 내에는 다시 무거운 침묵이 드리워졌다. 청아도, 설아도 감히 입을 벌려 말하지 못했다. 잠시 후 유벽선은 심중의 결단을 내린 듯 단호한 표정으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분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오직 천년한매선과(千年寒梅仙果)를 복용시키는 수밖에 달 리 길이 없겠구나.” 그 말에 청아가 경악해 마지않았다. “지금 무슨 말씀을…… 안 됩니다, 공주님! 그 귀한 것을 어찌……” 그녀는 극구 만류하였다. 천년한매선과는 유벽선의 어머니가 딸의 내공수위를 높이기 위한 일념에서 매화신로에게 간 절히 청하여 겨우 얻었던 영과가 아닌가? 정녕 이것은 둘도 없이 신비로운 영과여서, 그 효능은 능히 천년하수오나 천년삼왕에 비교 될 정도였다. 때문에, 만일 이를 복용하면 그 내공수위가 단숨에 이 갑자(甲子) 이상이나 증진될 수 있었 다. 그토록 귀한 영과를 사 년 전 단 한 번 보았던 자에게 복용시킨다 하니, 청아의 만류도 실 인즉 온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번 결단을 내린 유벽선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녀가 선언하듯 말하였다. “사 년 전 그가 우리 설아를 구해 주었을 당시 나는 후일 다시 만난다면 기필코 은혜를 갚 으리라 약속한 바 있었다. 그런데 청아 네가 나를 이토록 만류하니 너는 내가 허언(虛言)이나 일삼는 쓸개 빠진 아녀자가 되기를 바라느냐? 더구나 이분의 생명은 경각을 다투는 판인데 어찌 사람으 로서 목전에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 무심히 지나칠 수 있겠느냐?” 그녀는 곧 청아에게 단호히 명하였다. “어서 천년한매선과를 가져 오도록 해라.” 청아로서는 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못내 애석하다는 듯 긴 한숨을 내쉬며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푸른빛을 띤 수정옥합 하나를 소중히 받쳐 든 채 청아가 돌아왔다. 유벽선은 잠시 옥합을 바라보았다. 사실 천년한매선과는 좀처럼 구하기 어려운 영과였던지라 그녀 역시 아까운 생각이 들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한 가닥 미련을 떨쳐 버리려는 듯 고개를 저었 그리고 이내 옥합을 향해 섬섬옥수 가녀린 손길을 뻗었다. 이윽고 유벽선은 옥합으로부터 묵주처럼 까만 열매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어 사검평의 굳게 다물려진 입을 벌리고 열매를 대자 열매에 금이 살짝 생겨났다. 그 금이 간 부분에서 맑은 액체가 방울져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유벽선이 일신의 상승내력으로 껍질 속 과육(果肉)을 약화시켜 이처럼 그의 입 속에 떨어지 게 한 것이었다. 잠시 후 천년한매선과는 껍질만이 남았다. 어느덧 유벽선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손길을 멈추려 하지 않았다. 유벽선은 사검평의 상체를 세워 침상 위에 앉은 자세가 되도록 했다. 그런 후 그의 명문혈에 섬섬옥수 가녀린 손을 얹고 진기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한 줄기 뜨거운 기운이 그녀의 체내에서 생성되어 마치 용암의 분출인 듯 치달려 사검평의 체내로 스며들었다. 유벽선의 얼굴은 점점 더 붉게 상기되어 마침내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그리고 전신이 땀으로 얼룩져 가기 시작했다. 뜨거운 차 한잔을 다 마실 만한 시간이 흘렀다. 그녀의 얼굴은 더욱 상기되었고, 마침내 전신은 땀으로 목욕한 듯 기진한 모습이었다. 문득 유벽선이 손을 거두었다. 동시에 그녀는 땅이 꺼져라 깊이 탄식해 마지않았다. “후유…… 정녕 알 수 없는 노릇이로군. 이분의 몸에 아무리 공력을 주입하여도 마치 모 래밭에 물이 스며들듯 아무 소용이 없으니…… 대체 이분은 어떤 일을 당하신 것인지……” 바로 그때였다. 청아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설아가 자지러지게 놀라며 소리쳤 “앗! 공자의 눈을 보세요.” 유벽선이 무의식중에 돌아보았다. 앗! 이게 웬일인가? 과연 죽은 듯 미동도 하지 않던 사검평의 눈꺼풀이 꿈틀거리며 미미하게 움직여지려 하지 않는가? 유벽선은 일각을 허비할세라 황급히 다시 손을 얹고 공력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시체처럼 창백했던 사검평의 안색에 한 줄기 홍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사검평은 지금 비몽사몽간의 몽롱한 상태였다. 아득하게만 느껴졌던 눈앞의 어둠은 서서히 물러나고 한 줄기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빛은 자욱한 안개에 가려 아직 밝게 비추지 않았다. 마침내 썰물이 빠져 나가는 듯 어둠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너무도 밝은 빛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그는 너무도 눈이 부셔 제대로 뜰 수 없었다. 그러나 서서히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완전히 눈을 떴다. 사검평은 눈앞의 광경에 흠칫 놀랐다. 이때 청아가 크게 반가워했다. “공자, 이제 정신이 드셨나요?” 그녀의 반색하는 목소리에 사검평은 완전히 정신을 되찾았다. 동시에 그는 경악해 마지않았다. “이곳은……?” 그는 개봉의 영빈원에서 정신을 잃었었다. 그 외에는 머릿속이 혼돈되어 뭐가 뭔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 그 중에서 꿈결처럼 아련히 밀려오는 기억은 모두 얼굴이 붉어지는 사건뿐이었다. “공자, 정신이 드셨나요?” 또 다른 청아한 음성에 고개를 돌리던 사검평은 부지불식간에 탄성을 발하고 말았다. “아……” 지척에 한 명의 궁장소녀가 있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실로 황홀할 지경이었 으니…… 정갈하게 빗어 올린 머릿결은 삼단처럼 윤기가 흘렀으며, 반듯한 이마, 백옥처럼 희고 투명 한 살결, 그 위에 박아 놓은 듯 빛나는 두 눈에 그린 듯 매끄러운 눈썹, 타는 듯 붉은 입술에 만정(萬情)이 어린 절세의 미녀였다. 한데 어디선가 본 적이 있던 얼굴같이 생각되지 않는가! 곰곰이 기억을 더듬던 그의 얼굴에 희색이 피어올랐다. 그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소저는 지난날 소생이 장군산에서 대했던 유벽선 낭자가 아니신지……?” 유벽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과연……” 사검평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뜻밖에도 이렇듯 유벽선을 만나게 될 줄이야 미처 상상도 못 했었기 때문이었다. 사검평의 눈길이 설아에게 돌아갔다. 그는 반색해 마지않았다. “아! 설아……” “호호호…… 바보, 이제야 나를 알아보니?” 설아는 예전처럼 장난기 어린 음성으로 역시 반가움을 표했다. 사검평은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아아, 설아를 이렇듯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사 년 전, 장군산에서의 일이 불현듯 그의 머리에 떠올랐다. 설아를 처음 만나 무척이나 신기해 하던 자신. 그러나 우연히 그를 구해 주게 되고, 이어 사부를 만났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그러나 문득, 회상에 젖었던 그의 안색은 크게 흐려졌다. 아직까지 생사를 알 수 없는 형 진평에 대한 생각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때를 생각할 때마다 예리한 비수로 심장을 후벼 파듯 사검평은 통한의 울분을 느끼지 않 으면 안 되었다. 잠시 후 사검평은 끓어오르는 울분을 애써 억제하고 조심스레 물었다. “한데 소생이 어떻게 이곳에 있게 되었습니까?” 유벽선이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 그럴 리가……” 사검평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자신이 정신을 잃었던 동안, 도대체 자신에게 어떤 일이 있었더란 말인가? 그는 희미한 기억을 애써 더듬었다. 꿈결인 듯 아련히 한 가닥 기억이 떠올랐다. 먼저 천면환영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영빈원에서 설향과 만나 뜻밖에도 그녀가 벽혈옥봉 유옥선과 비슷한 용모이자 삽시간에 마음이 심란해져 미친 듯 독주한 것까지 생각이 났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정신을 잃었다. 아무것도 기억해 낼 수 없었다. 다만 누군가와 뜨거운 정염을 불태웠던 일이 꿈결처럼 희미하게 되살아났는데, 그 상대가 누구인지는 모르고 오직 유옥선과 비슷했다는 것뿐. 과연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 못 할 희미한 기억의 편린들이 어찌 된 연유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그때 사검평은 문득 자기 자신이 이상할 정도로 무력해졌음을 깨달았다. “이럴 수가……!” 그는 경악해 마지않았다. 창백히 안색이 변하며 급급히 운공해 보았다. 하나 전혀 내력이 운용되지 않았다. 이제야 비로소 사검평은 자신의 공력이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이, 이럴 수가……” 이것은 정녕 죽음보다 더한 절망이었다. “소…… 소저, 대체 이 어찌 된 일이오?” 하나 유벽선인들 어찌 알겠는가? 그녀는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소녀 역시 불가사의한 일이라 여기고 있던 중이랍니다. 뿐만 아니라 소녀는 공자께 천년 한매선과까지 복용시켰으나 이상하게도 그마저 효험이 없으니……” 사검평의 뇌리를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다! 이는 필시 그 누군가의 암계(暗計)에 걸린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에 지나지 않을 뿐, 그 동안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무런 기억도 못 하고 있으니…… 第 二十一 章 독마흉심(毒魔凶心) 1 사검평은 참담한 절망의 심정이 되어 스스로 어찌할 줄 몰랐 유벽선이 문득 입을 열었다. “지난 사 년간 공자는 필시 범상치 않은 사연을 겪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대략 어떤 것이었는지요?” 부드럽고 온화함 위에 한 줄기 청량제처럼 청아한 음성에 사검평의 시름마저 일시 씻기는 듯했다. 그러나 사검평은 그녀의 이 질문에 선뜻 대답하기 어려웠다. 그는 잠시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망설였다. 하나 그는 곧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다만 그 중 한 가지, 자신이 벽혈옥봉 유옥선에게 정감을 느꼈던 나머지 일어났던 일에 대 해서만은 끝내 밝히지 않았다. 어쨌든, 사검평의 얘기가 이어지는 동안 유벽선은 시종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동시에 그녀의 수정조각처럼 아름다운 얼굴에는 희비(喜悲)가 수시로 교차됐다. 더구나 사검평이 자신의 언니인 유옥선을 만났다는 것을 알고는 더욱 놀랐다. 이윽고 사검평의 얘기가 모두 끝났다. 그러나 유벽선은 너무도 놀라운 일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 잠시 침묵이 흘렀다. 유벽선은 한참 후에야 열에 들뜬 듯한 탄성을 발했다. “아! 그렇다면 사 공자는 백년 전에 천하무림을 위진시켰던 바로 염라천존 노선배님의 전인이 되었단 말입니까?” 그녀는 눈빛마저 감탄에 젖어 그윽이 사검평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그렇다면 사 공자께서는 개봉 영빈원에서 정신을 잃은 후 그간 무슨 일을 겪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단 말인가요?” 사검평이 무색한 표정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소생은 전혀 기억치 못하고 있소이다. 다만 꿈결인 듯 한 줄기 희미하게 기억 나는 것은 영빈원에서 술을 폭음하였다는 것뿐, 만취되어 정신을 잃은 후 어떻게 하여 이곳까지 왔는지 전혀 생각이 나 지 않는군요.” 유벽선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짙은 의혹의 빛을 떠올렸다. 그녀는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사검평에게 말했다. “소녀가 보기엔 공자의 몸 어디에서도 무공을 익혔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하여 공자께서 전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줄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공자의 말을 듣고 보니 나름대로 짐작되는 바가 있습니다.” 사검평은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으로 황급히 물었다. “소저, 그대는 어떤 짐작을 하시었소?” 유벽선이 한차례 고개를 끄덕인 후 말을 이었다. “이 같은 현상은 공자께서 어떤 사도마공(邪道魔功)에 의해 일신의 공력을 제압당하여 소멸된 것이라 짐작됩니다. 혹 그렇지 않다면 산공지독(散功之毒) 같은 일종의 약술에 중독되었거나…… 어쨌든 원인은 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일 것입니다.” “아……!” 그녀의 말에 사검평은 새삼 깊은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겉으로는 추호도 그런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의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소생의 생각도 소저와 다름이 없소. 다만 누가 소생에게 그따위 소행을 저질렀는 가 하는 점이 알고 싶을 뿐이오.” 유벽선이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공자께선 혹 짐작하시는 자라도……?” 사검평은 썩 자신이 서지 않는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현재로서는 영빈원의 기녀 설향이 유일한 혐의자라 할 수 있겠으나, 그것 또한 확고히 단정 지을 것은 아니외다.” 유벽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설향이 흉수라 단정 지을 수는 없어도 모든 단서를 그녀가 쥐고 있다 생각해 도 큰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그녀는 소매 속으로부터 불영옥패를 꺼냈다. “소녀가 공자를 구했을 때, 손에 이 불영옥패가 단단히 쥐여져 있었는데 이것 또한 무슨 단서가 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사검평은 깜짝 놀랐다. 사실 그는 이때까지 불영옥패에 대해서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 그리고 이때서야 비로소 그것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그가 다급히 물었다. “그렇다면 소생이 이 불영옥패를 지니고 있었소?” 그러나 문득 또 한 가지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조금 전 유벽선이 말했던 바를 돌이키건대, 자신은 그녀에게 구함을 받았을 당시 실오라 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전라의 상태였다고 들었던 것이다. 사검평은 새삼 얼굴을 붉혔다. 동시에 짙은 의혹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이 순간, 그는 자신이 지니고 있던 것 중 구공신검은 어디론가 없어지고 왜 불영옥패만 남 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가슴이 답답한 중에도 문득 자신이 어떤 처지가 되어 있는가 돌이켜 생각되었다. 그는 이미 무공을 상실한 상태였다. 이를 생각하니 실로 깊은 절망감에서 헤어나기 어려웠다. 정녕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하였다. ‘아아…… 어찌해야 좋으랴!’ 이때 유벽선은 사검평의 급변한 얼굴을 보고 흠칫했다. 그러나 이내 처연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 역시 사검평의 마음을 능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 무림인으로서 내공을 상실한다는 것은 차라리 죽는 것보다 못한 일이었다. 더구나 절세기학을 지녔던 인물이 하루아침에 무공을 상실했으니…… 그것은 천지의 종말을 맞는 것과 같이 크나큰 절망일 터였다. 유벽선도 일신에 절학을 지니고 있기에 그 비애에 대해서는 능히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벽선은 무어라 위로할 말이 없었다. 그 큰 상심을 어찌 한두 마디의 말로 위로할 수 있단 말인가? 돌연 한 가지 생각이 번뜩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 공자, 너무 낙심치 마세요. 어쩌면 한 가지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요.” 사검평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유벽선은 곧 숨가쁘게 말했다. “공자도 익히 알고 있는 제세성의 양소린, 그분이라면 혹 공자의 상실한 공력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만일 뜻을 이루지 못한다 해도 최소한 그 원인만은 분명히 알아 낼 수 있을 거예요. 원인만 알아 낸다면 또 다른 대책도 세울 수 있지 않겠어요?” 사검평은 처음에는 일루(一縷)의 기대를 걸었으나 곧 씁쓸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일로 인해 결코 제세성의 양소린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는 않았다. 하나 그는 정면으로 유벽선의 제의를 거절하지 못했다. 그녀가 너무도 깊은 정성으로 자신을 대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지금처럼 암담한 상태에서는 제세성의 양소린에게 한 가닥 기대를 거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때 유벽선은 그가 자신의 제안에 침묵을 지키자 비록 무언(無言)중이나마 그 제의를 수 락하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밝게 웃었다. “호호호…… 됐어요. 더구나 소녀는 마침 백초곡으로 향하던 중이었으니 더욱 잘됐지 뭐 예요?” 이어 그녀는 한껏 정감 넘치는 어조로 그를 위로했다. “사 공자, 너무 걱정 마세요. 백초곡에 당도하여 제세성의 양소린 선배님만 만나면 기필코 공자의 잃었던 공력을 회복할 수 있을 거예요.” 사검평은 씁쓸히 미소 지었다. 밖으로부터 왁자지껄한 고함 소리가 들려 온 것은 그때였다. 유벽선이 성큼 아미를 찌푸렸다. “청아, 이 무슨 소란이란 말이냐? 어서 밖으로 나가 보아라!” 청아가 곧 밖으로 나갔다. 유벽선은 여전히 가볍게 낯을 찌푸리던 중 아무래도 미심쩍은 모양으로, “공자께서는 잠시 기다리고 계셔요.” 하고는 곧 가볍게 몸을 날려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배 앞으로는 한 척의 커다란 쾌속선이 다가오고 있었. 부서지는 파도에 물방울이 뱃전까지 튀어올랐다. 한 척의 쾌속선은 순식간에 지척에까지 닿았다. 순간, 두 줄기의 인영이 쾌속선으로부터 섬전같이 쏘아져 어느 사이엔가 표연히 뱃전으로 내려섰다. 뜻밖에도 그들은 백의장포에 선풍도골의 풍모를 지닌 홍안백발노인과 흑의를 입은 나이 이 십여 세쯤의 준미한 청년이었다. 그의 용모는 실로 준수하여 한 마리 봉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만 그 얼굴 한구석에 서릿발처럼 싸늘한 잔인함과 오만한 빛이 엿보이는 것이 옥의 티일 뿐이었다. 흑의미청년은 냉막한 표정인 채 이쪽을 싸늘히 노려보고 있었. 한데 유벽선이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다가 끝난 모양이었다. 황 노인이 이미 흑의미청년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고, 오륙 명의 사공들이 복날의 개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유벽선의 아름다운 얼굴에도 싸늘한 한기가 흘렀다. “흥! 대체 당신들이 누구이기에 이처럼 남의 배에 무단으로 올라 함부로 횡포를 자행하 는 건가요?” “으하하하……” 홍안노인이 앙천 광소를 터뜨렸다. 동시에 그의 인자해 보이던 얼굴에 살기가 감돌았다. 이윽고 그는 대소를 멈추고 뚫어지게 유벽선을 바라보더니 음침한 괴소를 흘려 냈다. “흐흐흐…… 네가 바로 벽혈신군 유천화의 딸이냐?” “흑!” 유벽선은 내심 경악해 마지않았다. 그녀는 강호에 좀체로 나타나지 않던 처지인데 첫눈에 자신을 알아보다니…… 더구나 십대고인 중에서도 으뜸인 벽혈신군의 딸임을 알고도 이처럼 거만하게 나오다니, 대체 이 노인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유벽선은 더욱 싸늘히 안색을 굳혔다. 아무래도 이 노인이 심상치 않은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 그녀는 이내 차가운 미소와 함께 야멸찬 어조로 말했다. “흥! 선배님께선 저의 부친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면서도 이토록 소녀에게 모욕을 주다 니…… 당신은 감히 벽혈궁에 적대 행위를 하겠다는 의도인가요? 그렇다면 선배의 명호나 알아 두지요.” “크하하하……” 그녀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홍안노인은 또다시 앙천 대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순간, 씻은듯이 웃음을 멈추며 말했다. “흥!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노부에게는 벽혈궁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흐흐…… 나 천독마수 우문관에게 벽혈궁 따위가 감히 무엇이란 말이냐?” 순간 유벽선은 창백하게 안색을 급변시키며 경악해 마지않았. 천독마수(千毒魔 ) 우문관(宇文冠)! 무림삼마(武林三魔)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명성을 지닌 흉마. 그런 자가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다니…… 유벽선은 천독마수 우문관이 천하제일의 용독대가(用毒大家)일 뿐 아니라 그 무공은 실로 가공할 정도로 무서워서 자신의 부친조차 꺼림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싸늘한 두려움이 그녀의 전신을 휩쌌다. 그러나 그녀는 역시 천하제일 벽혈궁의 소궁주였다. 자신의 경악하는 마음을 추호도 내색하지 않은 채 태연한 어조로 대꾸했다. “알고 보니 천독마수 우문관 선배이셨군요. 후배 유벽선이 미처 몰라뵈었어요. 늦게나마 인사드리지요. 한데, 고명하신 우문 선배께서 한낱 소녀의 작은 배까지 몸소 납신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적이 궁금하군요.” 그 말에 천독마수 우문관은 또다시 앙천 대소를 터뜨렸다. “아하하하…… 과연 벽혈궁의 후예는 남달리 뛰어난 바 있구나. 하나 노부가 기왕 여기까 지 온 이상, 비록 이 자리에 벽혈신군이 있다 해도 감히 노부의 하고자 하는 일을 막지는 못하리라!” 이어 그는 서릿발처럼 차가운 어조로 쏘아붙였다. “벽혈궁의 후예는 명심하기 바란다. 노부는 이미 그대가 황하(黃河)에서 염라천존의 전인을 구한 것을 알고 왔으니 군소리 말고 속히 내놓아라!” 순간, 유벽선의 얼굴이 경악으로 인해 새파랗게 변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냉정을 되찾고 싸늘히 대꾸했다. “선배께서 이토록 무단히 배에 올라 죄없는 사공들을 상하게 한 뒤에 소녀마저 핍박하니, 이는 진실로 무림의 선배 된 도리가 아닌 듯싶습니다.” 이어 그녀는 더욱 야릇한 어조로 말했다. “흥! 선배가 먼저 이처럼 무례하게 행동한 이상 소녀의 대항이 있다 해도 결코 이를 선배 에 대한 능멸이라 할 수는 없을 겁니다.” “무엇이? 으하하하……” 한차례 앙천 대소한 후, 천독마수 우문관은 싸늘한 비웃음을 날렸다. “흐흐흐…… 한낱 어린 계집아이의 신분으로 이렇듯 분수를 모르고 날뛰다니…… 노부는 과연 벽혈궁에 어떤 절학이 있어 이토록 분수를 모르는지 진정 궁금하기 짝이 없구나.” 그는 곧 뒤에 있던 흑의미청년에게로 말머리를 돌렸다. “흐흐흐…… 냉아(冷兒)야, 네가 노부 대신 이 벽혈궁의 소궁주를 상대하여 과연 어떤 절 학을 지녔는지 시험해 보려무나!” 흑의미청년은 망설임도 없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러더니 불문곡직하고 두 손을 내뻗는 것이었다. 소리도 없이 한 줄기 암경이 발출되어 쾌속 무비하게 유벽선에게로 쏘아 갔다. “흥!” 유벽선도 이미 암중으로 경계하고 있던 중이었는지라 추호도 당황하지 않았다. 한 줄기 싸늘한 냉소를 날리며 신속 무비하게 양손을 기이하게 뒤집었다. 팟! 일진의 위맹한 경풍이 쏟아져 나가 흑의미청년의 암경과 맹렬히 부딪쳤다. 순간, “음!” 한 줄기 나직한 신음과 함께 흑의청년이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유벽선은 득의하여 더욱 싸늘한 냉소를 날렸다. “호호호…… 비록 선배의 독문절학 한음현살공(寒陰玄煞功)이 강호상에서 무한한 위맹을 떨친다 해도 본 벽혈궁의 무상신공 벽옥무영강기(碧玉無影 氣) 또한 그에 못지않을 것이니 오늘은 기필코 자웅을 결해 보아야겠어요!”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뒤로 물러섰던 흑의미청년의 얼굴에 돌연 한 줄기 악독한 기운이 감돌았다. “닥쳐라!” 노호성과 함께 그가 두 손을 기이하게 흔들며 마치 유령처럼 미끄러져 다가들었다. 팟! 팟! 팟! 파팟! 순식간에 쾌속한 연환살초가 거의 십여 초나 격출되었다. 그 모습은 실로 흉흉 무비했다. 마치 십여 마리의 독사가 먹이를 찾아 일제히 덤벼들듯, 그 여세가 악랄한 위에 기괴막측하 기 이를 데 없었다. 허공은 십여 초의 연환 살초에 의해 순식간에 뿌옇게 흐려졌 그러나…… “흥, 어림없는 수작!” 유벽선의 싸늘한 냉소가 터짐과 동시, 십여 줄기의 무형경력이 흑의미청년을 향해 싸늘히 쏘아져 갔다. 천독마수 우문관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비호처럼 몸을 솟구치며 나는 듯이 앞으로 덮쳐 갔다. “냉아야, 어서 피해라! 매화신로의 독문절학 천선회풍지(天旋廻風指)이니라!” 그러나 이미 때가 늦은 뒤였다. “앗? 크윽! 으음……” 흑의미청년은 신음과 함께 칠팔 보나 뒤로 물러섰다. 천독마수 우문관이 표연히 내려서서 앞을 막은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흑의미청년의 어깨에서는 이미 시뻘건 핏물이 용암처럼 분출되고 있었다. 천독마수 우문관은 통분을 참지 못하고 싸늘한 괴소를 날렸다. “흐흐흐…… 나이 어린 계집이 일신에 벽혈궁의 절학과 매화신로 여자량의 절학을 동시에 익히고 있을 줄이야…… 노부 진정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구나.” 그는 전신에서 풍기는 흉흉한 살기로 인해 실로 악독한 모습이었다. “흐흐흐…… 어린 계집애야, 네가 노부의 제자를 상하게 한 이상, 후일 벽혈궁과 씻을 수 없는 원한을 맺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 기어이 너의 죄를 따지고야 말 것이다.” 음소와 함께 그는 서서히 앞으로 다가왔다. 스르릉…… 일성 경쾌한 소리와 함께 유벽선의 손에는 어느 사이엔가 푸른 섬광을 발하는 날카로운 연 검 한 자루가 쥐여져 있었다. 찰나, 천독마수 우문관은 눈알이 튀어나오는 듯 대경하여 소리쳤다. “벽혈추상검(碧血秋霜劍)!” 그는 전율하듯 몸서리쳤다. “벽혈신군 유천화가 설마 너에게 벽혈추상검마저 물려주었을 줄이야…… 내 미처 짐작치 못했었구나.” 이윽고 그는 두 눈을 한번 감았다가 무섭게 치켜 떴다. “그렇다면 벽혈신군 유천화가 천하를 위진시켰던 벽혈십이식(碧血十二式)도 완전히 연성 하였단 말이냐?” 유벽선이 담담히 대꾸하였다. “지나치신 말씀! 소녀가 어찌 감히 가친의 절학을 고스란히 이어 받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수박 겉핥기 식으로 약간의 조예를 얻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감히 자신하건대 선배와 맞서서 벽혈궁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을 정도는 됩니다.” 천독마수가 광분하여 부르짖었다.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 어린 계집애야! 노부는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으니 비록 벽혈궁 과 불구대천의 원한 관계를 맺는다 해도 기어이 너를 용서치 않으리라!” 바람도 없는데 그의 소매가 미친 듯 펄럭였다. 동시에 그의 두 눈으로부터는 전율의 푸르른 흉광이 폭사되었 이것을 보자 유벽선은 아연 긴장해 마지않았다. ‘흥! 저 노마가 살심을 불러일으켜 강호에 그 유명했던 천독마혈신공(千毒魔血神功)을 펼 치려는 게 틀림없구나!’ 그녀 또한 수중의 벽혈추상검을 들어 엄밀한 수비 자세를 취하였다. 다음 순간, 천독마수 우문관이 흉흉하게 웃었다. “흐흐흐…… 노부가 기왕 선배 된 입장이니 어린 너에게 삼 초를 양보하겠다. 자! 젖비린내나는 계집애야, 어서 덤벼 보아라!” 이에 유벽선이 낭랑히 맞섰다. “소녀 그럼 기꺼이……” 말을 내뱉기 무섭게 그녀의 검이 쏘아 나갔다. 꽈르릉! 일진의 경쾌한 검풍(劍風)이 마치 태풍에 밀리는 바닷바람처럼 펼쳐져 나간다. 동시에 한 줄기 인영이 유성인 양 검풍 사이를 가르며 곧장 천독마수를 향해 쏘아 가지 않 는가? 하나, 천독마수 우문관은 의외로 태연자약했다. 그는 자신에게로 쏘아져 오는 벽혈추상검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이윽고 한차례 광소를 터 뜨렸다. “크하하하……” 이어서 그는 온몸을 일진의 삭풍처럼 날려 다가오는 검세를 표표히 피하려 했다. 그러나 이때, 유벽선의 검끝이 돌연 무서운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가! 팟! 기괴한 파공음과 함께 싸늘한 검막이 삽시간에 천독마수의 주위를 뒤덮어 마치 천라지망처 럼 삼엄한 형세를 이루는 것이었다. 이는 실로 예기치 못했던 변화인지라 천독마수조차도 아연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앗!”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매를 떨치며 유벽선에게 대항코자 했다. 그때 스스로 뱉었던 말이 번뜩 떠올랐다. 그는 분명 자신이 먼저 삼 초를 양보하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무림의 선배 된 입장에서 이를 어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여 공세를 포기하고 할 수 없이 허공으로 신속히 치솟아 피하려 했다. 그러나 벽혈추상검은 추호의 기회도 주지 않았다. 휘르릉…… 서늘한 검풍 소리가 귓전을 울리는 가운데, 서릿발 같은 검기가 천지 사방을 가로막아 꼼 짝도 할 수 없었다. 날카로운 검끝에서는 무수한 검화가 피어나 광풍에 휘날리는 설화(雪花)인 듯 눈부시게 휘몰아쳐 왔다. “이, 이럴 수가……!” 천독마수 우문관은 크게 경악하여 신형을 맹렬히 솟구쳤다. 꽈르르…… 천지개벽의 소리인 듯 굉음이 작렬하며 잇따라 다급성이 터져 나왔다. “어엇!” 뒤이어 천독마수가 표표히 땅으로 내려서는데…… 그 모습은 실로 형언할 수 없이 참담한 지경이었다. 때마침 잠잠했던 바람이 다시 소생하여 찬 물기를 담고 뱃전을 스쳐 갔다. 천독마수 우문관의 옷자락은 찢어진 깃발처럼 미친 듯 펄럭였. 천독마수 우문관은 나이 어린 유벽선에게 이처럼 뛰어난 검법조예가 있을 줄은 미처 꿈에 도 상상치 못했었다. 비록 결정적 위기는 모면하였으나 지금 생각해도 모골이 송연할 지경이었으니…… 만일 자신의 신형이 조금만 느리게 움직였더라면 옷자락이 찢어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천독마수보다 더 놀란 쪽은 오히려 유벽선이었다. 그녀는 본래 천독마수 우문관의 무학이 부친에게는 미치지 못하여도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하여 자신이 만약 그가 양보한 삼 초 이내에 그를 격패치 못한다면 이 대전에서는 오히려 득보다 실이 많을 것임을 통감하고 있었다. 때문에 처음부터 벽혈십이식 중에서도 최상의 검초 벽혈유혼, 벽혈마혼, 벽혈파황의 삼 절 초를 숨돌릴 사이도 없이 단숨에 퍼부었던 것인데…… 비록 천독마수를 압도하지는 못할지언정 어딘가 결정적 상세라도 입히려는 속셈이었다. 한데 결과는 무엇인가? 벽혈십이식 중에서 가장 빠르고 예리한 유혼과 마혼 두 쾌초가 무위로 끝났음은 물론, 최상의 절초 벽혈파황마저도 겨우 그의 옷자락을 찢는 데 그쳤을 뿐이니…… 유벽선은 실로 암담한 마음이었다. 그때였다. “크하하핫…… 계집애야, 노부가 약속한 삼 초가 지난 이상 너는 마땅히 죽음을 각오해 야 하리라!” 천독마수는 노갈을 터뜨리며 강맹한 공격을 펼쳐 오기 시작했 유벽선도 감히 경시할 수 없어 일신에 지닌 절학을 모조리 뿌려 냈다. 벽혈광소, 벽혈충소, 벽혈천광…… 실로 경천동지의 대절초들이 숨돌릴 사이도 없이 잇따라 펼쳐졌다. 천독마수 역시 강호를 위진시켰던 천독마혈신공을 최상승의 경지에까지 극도로 펼쳐 내니, 순간 그의 몸은 온통 푸른 일광에 휩싸여 마치 아수라의 모습을 방불케 했다. 한데 그 손에서는 야릇하고도 역한 비린내가 피어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가 독공을 시전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만약 그 장력에 약간이라도 스친다면 실로 목숨이 위험했다. 유벽선은 더욱 경각하여 호흡을 중단하며 필사적으로 검식을 시전했다. 휭! 휘르릉…… 꽈르르…… 장력과 검화가 맞부딪쳐 돌풍처럼 회오리치는 가운데 지축을 흔드는 굉음이 진동했다. 쌍방의 형세는 실로 막상막하였다. 천군만마가 쇄도하듯 한 쪽이 밀고 들어가면 썰물처럼 뒤로 빠졌다가 이내 해일 같은 기세 로 반격해 오는 것이었다. 천룡(天龍)과 호신(虎神)이 서로 뒤엉켜 필사의 난전을 벌이듯, 그 광경은 실로 경천동지할 지경이었다. 한데 선실 안으로부터 경악에 찬 여인의 비명이 자지러지게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아아악!” 청아의 비명임에 틀림없었다. 유벽선은 흠칫하였다.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냉아라 불리던 흑의미청년이 주위에 없음을 알아차렸다. “아차!” 그녀는 황망히 선실 쪽으로 몸을 날리려 했다. 하나 천독마수 우문관이 이를 용납할 리 없었다. “계집애야! 어딜 가려 하느냐? 어림도 없는 수작 마라!” 휙! 휙! 그는 더욱 독랄한 살초를 휘몰아왔다. 유벽선은 분노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다. “비겁한 늙은이! 이러고도 감히 무림의 선배로 자처할 수 있는가?” 그녀 역시 악에 받쳐 미친 듯이 신검을 휘둘러댔다. 천지가 개벽하듯, 그들의 싸움은 실로 격렬하기 이를 데 없었 한편 흑의미청년은 사부 천독마수와 유벽선이 격렬히 싸우는 와중을 틈타 마치 유령인 양 표연히 선실 속으로 잠입했었다. 조금 전 유벽선에게 입었던 어깨의 상처는 이미 혈도를 짚어 지혈한 후인지라 운신하는 데 별로 불편하지 않았다. 한데 선실문을 막 들어서려는 순간, 팟! 갑자기 자신을 향해 성난 암표범처럼 공격해 오는 한 청의소녀가 있지 않는가! 흑의미청년은 즉시 유령처럼 피하였다. 동시에 두 손을 재빠르고도 괴이하게 전개하였다. 파르륵…… 무형의 장력이 불꽃처럼 쏟아져 갔다. “으윽!” 청의소녀는 신음과 함께 뒤로 칠팔 보나 물러섰다. 그녀의 입가로부터는 어느 사이엔가 한 모금의 선혈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때 경악에 찬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앗! 당신은……” 흑의미청년은 흠칫하여 눈을 들어 바라보았다. 선실의 한쪽 침상 앞에는 사공 차림의 허름한 복장을 한 미소년 하나가 넋이 빠진 듯 경악 한 시선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흑의미청년은 그를 발견하는 순간, 입가에 한 줄기 미소를 떠올리며 성큼 앞으로 나섰다. “앗! 안 돼!” 청아가 날카롭게 부르짖으며 그 앞을 가로막았다. 2 청아는 서릿발처럼 준열히 꾸짖었다. “대체 당신이 누구이기에 감히 여기까지 뛰어들어 난동을 부리나요?” 그러자 흑의미청년은 한 줄기 싸늘한 냉소와 함께 예의 기괴한 손짓으로 그녀를 후려쳤다. “앗!” 청아는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그에 의해 마혈을 제압당하고 말았다. 흑의미청년은 꼼짝도 못하고 있는 청아의 천령개를 노리며 재차 살수를 전개해 나갔다. 실로 독랄한 악심(惡心)에 청아의 목숨이 황천의 고혼으로 스러지려는 급박한 순간, “멈추시오!” 준열히 외치는 소리가 있었다. 흑의미청년은 흠칫 손길을 멈추었다. 이윽고 눈을 들어 바라보니 소리친 장본인은 바로 황색 사공 차림의 허름한 옷을 입은 미 소년이 아닌가! 흑의미청년의 살수를 제지시킨 사검평은 말할 수 없이 격동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너무도 이상해 오히려 흑의미청년이 이상해질 지경이었다. 사검평은 엉거주춤 일어서며 은은히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형님…… 정녕 형님임에 틀림없을진대 설마 꿈은 아니겠지요? 아아, 소제는 형님이 장 군산에서 실종된 이래, 지난 사 년간 단 한 번도 형님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진정 오매불망 애태웠는데 이렇듯 엉뚱한 곳에서 해후하게 될 줄이야…… 형님, 그 동안 어찌 지내셨습니까?” 형님이라니…… 그렇다면 이 흑의미청년이 사 년 전 장군산에서 헤어졌던 사진평이란 말인 가? 과연 그는 사진평임에 틀림없었다. 과연 그는 지난날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사진평임에 틀 림없었다. 하나 어찌 된 일인가? 한없이 격동에 사로잡힌 사검평을 보면서도 진평 그의 얼굴에서는 한 점의 감정조차 찾아볼 수 없지 않는가! 뿐만 아니라 돌연 크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이 미친놈아! 어디서 감히 헛소리를 하느냐? 누가 네 형이란 말이냐?” 듣기에도 소름 끼칠 만큼 차갑게 소리치더니 다짜고짜 손을 뻗어 사검평의 마혈(魔穴)을 제 압해 버리지 않는가? “윽!” 사검평은 너무도 의외의 일이었던지라 아연 경악하여 넋 나간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흑의미청년은 그의 경악한 표정 따위는 아랑곳없이 오히려 득의하여 통쾌하게 웃지 않는가! “으핫핫핫…… 염라서생 사검평, 너의 명성이 너무도 강호에 쟁쟁하였기로 나는 분명 네 가 뛰어난 인물일 줄 알았다. 한데 이렇듯 허명만을 날리는 보잘것없는 자일 줄이야! 으하 하……” 다음 순간, 그는 재빨리 사검평을 낚아채어 자신의 옆구리에 안았다. 하여 몸을 솟구치려 는데, 돌연 설아가 날카롭게 부르짖었 “당신이 감히 사 공자를 납치하려 하다니…… 정녕 천륜마저 모르는 파렴치한이 아닌 가!” 마치 한 소녀의 외침인 듯 날카로우면서도 낭랑한 음성이었다. “이럴 수가……” 흑의미청년이 경악하고 있을 때였다. 그를 향해 유성처럼 덮쳐 드는 조그만 백영(白影)이 있었다. “앗!” 흑의미청년은 다급성을 터뜨리며 재빨리 뒤로 피했다. 동시에 예의 그 기묘한 장력을 쾌속하게 내뻗었다. 그러나 설아는 스칠 듯 아슬아슬하게 피해 버리고 마는 것이었 이어서 설아는 쾌속하게 날아들어 조금 전 유벽선에게 다쳤던 흑의미청년의 부상 부위를 부리로 맹렬히 쪼아 버렸다. 겨우 멈추었던 선혈이 다시금 분수처럼 솟구쳤다. 또다시 휙, 소리와 함께 설아가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그러나 흑의미청년도 이번에는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흐흐흐……” 그는 냉혹한 괴소와 함께 부드득, 이를 갈았다. “감히 금수 따위가 나에게 부상을 입히다니…… 오냐, 내 기어이 너를 살려 두지 않으리 라!” 흑의미청년이 두 손을 쾌속하게 휘저었다. 그러자 그의 양손으로부터 두 줄기 무형강기가 폭사되어 흉맹한 기세로 날아갔다. “아악!”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설아는 마치 무형의 강철벽에라도 부딪친 듯 우수수 깃털을 나부끼며 멈칫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하나 설아는 결코 공격을 포기하지 않았다. 흡사 유성인 양 빠르게 주위를 선회하며 호시 탐탐 공격의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이미 가볍지 않은 부상을 입은 듯 섣불리 덤비지 못하였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흑의미청년은 재빨리 밖으로 몸을 날렸다. 설아도 즉시 그를 향해 쾌 속하게 날아갔다. 하나 간발의 차이로 흑의미청년은 이미 문밖으로 사라진 후였다. 흑의미청년은 선실 밖으 로 나오자 득의하여 웃음지었다. “흐흐흐……” 그때였다. “이 무슨 만행이냐?” 유벽선이 어느 틈엔가 그를 발견하고 분노에 찬 일검을 내리쳤다. 하나 천독마수가 비호처럼 덮치며 가로막았다. “어림도 없는 수작!” 동시에 그는 재빨리 소리쳤다. “냉아야, 너는 어서 그 애송이를 안고 여기에서 떠나라! 이 계집애는 노부가 맡으마!” 냉아라 불린 흑의미청년은 지체없이 쾌속선 위로 몸을 날렸다. “안 돼!” 유벽선이 날카롭게 부르짖었으나 그녀로서는 정녕 속수무책이었다. “흐흐흐……” 천독마수가 흉험한 괴소와 함께 숨돌릴 사이도 없이 살초를 펼쳐 왔기 때문이다. 유벽선은 안타까움에 가슴이 터질 지경이었으나 속절없이 대여섯 걸음이나 뒤로 물러나야 했다. 이 틈을 이용해 천독마수 우문관은 재빨리 손을 뻗었다. 순간, 꽝! 우르르…… 한차례 굉음과 함께 배의 돛대가 부러져 천천히 쓰러졌다. 그 틈을 노려 천독마수는 나는 듯 쾌속선 위로 몸을 옮기며 유벽선의 배를 향해 재차 태산과 같은 장력을 쏘아 냈다. 우르르…… 꽝! 뱃면이 산산조각나며 노도처럼 물살이 덮쳐 들었다. “크하하핫…… 노부는 시간이 없어 이만 실례하노라. 그러나 계집애야, 너는 똑똑히 명심 해 두어라. 후일에 다시 만난다면 노부가 반드시 오늘의 죄를 다시 물을 것임을……” 그 말을 끝으로 쾌속선은 물살을 가르며 까마득히 사라져 갔. 유벽선은 발을 굴렀다. 예기치도 않게 천독마수가 출현하여 사검평이 그들에게 납치당하고 자신은 배가 파손당해 뒤쫓을 수도 없으니…… 그녀는 갑자기 안색이 급변했다. “아차! 조금 전 선실에 있던 청아와 설아는 어찌 되었을까?” 그녀는 허겁지겁 선실로 뛰어들었다. 다행히도 그 둘 중 어느 누구도 목숨을 잃지는 않았 다. 유벽선은 급히 청아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잠시도 우물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일단 청아도 설아도 무사한 것을 보자 그녀는 재차 선실 밖으로 뛰쳐나왔다. 천독마수 우문관의 쾌속선은 이미 까마득히 멀어져 가고 있어 오직 하나의 점으로 보일 뿐이었다. 유벽선이 황망히 소리쳤다. “청아, 너는 나중에 다시 배를 구해 나를 따라오라!” 말을 마치자 그녀는 뱃전에 떨어진 나뭇조각을 주워 소맷자락을 찢어 낸 후 그것으로 나뭇 조각과 발을 친친 동여매었다. 그러더니 숨돌릴 사이도 없이 수면 위로 몸을 날렸다. 팟! 한 줄기 하얀 물기둥이 솟구치는 찰나, 그녀는 이미 한 마리의 백조인 양 수면 위를 쾌속 히 질주하고 있었다. “앗, 소궁주님!” 청아가 놀라 불렀으나 그녀는 이미 수면 위를 미끄러져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청아는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굴렀다. 하나 배가 이미 부서졌으니 속수무책인 걸 어찌하랴! “설아야, 뭐 하고 있는 거냐? 너라도 어서 공주님의 뒤를 쫓아야 할 게 아니냐? 만일 공주님께 추호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즉시 알려라. 설아야, 어서 가라!” 설아가 즉시 그 백설같이 눈부신 자태를 허공 높이 떠올렸다. 다음 순간, 설아는 일직선을 그리며 유벽선을 뒤쫓았다. 한편, 공력이 극도로 소모되는 것조차 무릅쓰고 필사적으로 추격하던 유벽선은 돌연 쾌속 선이 한쪽 강기슭 가까이로 다가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저들이 땅위로 내리기만 한다면……’ 사실 그녀는 오직 사검평을 구하려는 일념에서 일위도강(一韋渡江)의 절세경공을 펼쳤던 것이나, 이것은 내공이 극도로 소모되어 설령 천독마수를 따라잡는다 해도 대결하는 데 문제가 있었 다. 이윽고 그녀는 쾌속선에 당도하였다. “차앗!” 일성 청아한 기합과 함께 싱싱한 연어처럼 물살을 박차고 튀어오르는데, 마치 기다리고 있 었던 듯 뱃전으로부터 화살이 무수히 날아왔다. 쉭! 쉬쉭! “흥!” 유벽선은 냉랭한 코웃음과 함께 신속히 소매를 휘둘러 이를 막았다. 다음 순간, 그녀는 표연 히 뱃전 위로 내려섰다. 그러자 “와아!” 하는 일진 함성이 일며 이삼십 명의 장정들이 손에 병장기를 꼬나 쥐고 일제히 덮쳐 들었다. 팟! 파팟! 유벽선은 한꺼번에 무수한 지력을 튕겨 내어 재빨리 그들의 혈도를 제압했다. 그녀는 그 중 한 명의 멱살을 왁살스럽게 움켜쥐고 추궁하기 시작했다. “천독마수 우문관, 그자는 어디에 있느냐?” 장정이 부들부들 떨며 손으로 한곳을 가리켰다. 하나 그가 가리키는 쪽에는 아무것도 보이 지 않았다. 이에 유벽선은 대강 짐작가는 바가 있었다. 그녀는 바드득 이를 갈았다. “만일 이실직고하지 않는다면 네놈을 산 채로 물속에 수장시켜 버리겠다!” 장정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실토했다. “여협께서 이 배에 오르기도 전에 두 분은 이미 절정경공의 수법으로 물을 건너 반대편 동쪽 강변으로 피하셨습니다. 하여 이쪽 강변 어디에서도 이미 그분들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유벽선이 아차 하는 한편, 분하고 안타까워 다시금 부드득 이를 갈았다. “대체 네놈들은 누구냐?” 잡아먹을 듯 눈알을 부라리고 묻자 장한이 더듬더듬 대답했다. “소인들은 이곳 동해어방(東海魚幇)의 무리들인데, 천독마수가 갑자기 나타나 방주를 제압 하고 핍박하는 바람에 강요를 이기지 못해 여기까지 왔으니 우리에게는 정녕 아무런 죄도 없소이다.” 유벽선은 전신의 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하나 어찌하랴! 그녀는 장한을 놓아 주고 마주 보이는 강의 해안을 바라보았다. 동시에 그녀는 결연히 중얼거렸다. “반드시 사 공자를 노독마의 손에서 구해 내리라!” * * * 태산(太山)…… 중원오악(中原五嶽) 중의 하나로 동악(東嶽)이라고도 불리는 태고 이래의 명산(名山). 그 웅혼장대한 자태가 거대한 용틀임인 듯 수백 리 대지에 펼쳐진 고봉준령이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른다 하여 이름마저 마천령(摩天領)이라 했다. 그처럼 높은 산봉들이 마치 끝도 없는 듯 한없이 펼쳐져 있었다. 마천령은 태산의 오지를 넘어가는 관문과 같은 곳이었다. 하여 태산이 아무리 산세가 수려 한 명산이라 할지언정 일반 유람객들은 그 중에서도 비교적 낮은 등선봉(登仙峯)이나 옥로봉(玉露峯), 낙조대(落照臺) 등이나 두루 구경하였을 뿐, 마천령 너머 첩첩이 싸인 태고의 비경에는 결코 단 한 걸음도 들여놓지 못했다. 마천령 안으로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대삼림(大森林)이 빽빽히 들어차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안에는 온갖 맹수가 들끓었고, 깎아지른 듯한 천 길 단애(斷崖)와 험악한 산세가 연이어 줄을 달았다.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신비에 싸인 이곳. 하여 수렵으로 생계를 잇는 사냥꾼들이나 간혹 출몰할까, 그 아무도 감히 들어서려 하지 않는 곳이다. 하나 이곳에서도 천지일월성진(天地日月星辰)의 운행은 어김없이 지켜지고 있었다. 밤이 지 나면 어김없이 태양은 움터 오르고 대밀림도 약동에 넘쳐 흐른다. 그것은 먼 태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단 하루도 빠짐없이 지켜져 왔다. 여명의 시각, 오늘도 새벽 안개는 뿌옇게 대수림을 덮고 있었다. 천독마수 우문관과 흑의미청년은 곧장 마천령을 넘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태산 깊숙이 사라져 가는 것이었다. 그들의 신법은 가히 신화경에 달한 듯 사람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두 마리 비조였다. 그 상승의 신법으로 천장단애와 길마저 끊긴 조로(鳥路)를 눈 깜박할 사이에 나는 듯 지났다. 그리고 불과 한식경도 안 되는 사이에 태산의 가장 깊숙한 오지(奧地), 백룡봉(白龍峯)에 이르렀다. 이름 그대로 승천하는 백룡의 모습인 양 웅혼한 자태에, 산허리로 백운이 휘감아 도니 더 욱 신비로운 경관이었다. 그들은 지체없이 정상을 향해 치달아 올라갔다. 이윽고 아침 햇살이 선녀의 옷자락인 듯 태산을 휘감고 있던 안개의 장막을 걷어 냈다. 안개가 걷히자 태산도 완연히 그 웅자를 드러냈다. 모든 것이 양광 앞에서 눈부시게 드러났다. 잠시 후, 그들은 백운을 꿰뚫고 우뚝 선 백룡봉 정상에 당도하였다. 잔잔한 황금빛 태양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듯 그들을 맞았다. 백룡봉 정상에 석상처럼 우뚝 선 두 사람, 그들이 왜 이곳 백룡봉 정상에 모습을 나타낸 것일까? 천독마수의 옆구리에는 사검평이 혼혈(昏穴)을 제압당한 채 축 늘어져 있었다. 흑의미청년이 주위를 한차례 돌아본 후 가볍게 말하였다. “사부님, 아무래도 우리가 너무 빨리 온 듯싶습니다. 복마령주(伏魔令主)라는 자는 아직 그 어디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군요.” 천독마수 우문관 또한 사방으로 날카로운 시선을 던진 후 침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자와 노부가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던 시각은 앞으로 일(一) 각(刻) 정도 더 지나야 하니, 그때까지 너는 여기 앉아 운기조식이나 하거라.” 그는 옆구리의 사검평을 가볍게 자기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신도 그 옆의 널찍한 바위 에 앉아 운공조식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내 무아의 경지로 빠져 들었다. 그러나 흑의미청년은 웬일인지 선뜻 자리에 앉지 않고 사검평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사검평은 죽은 듯 고요히 누워 있었다. 흑의미청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사검평을 처음 보았을 때 자신을 형님이라 불렀던 일 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우문냉(宇文冷)! 이것이 바로 내 이름이 아닌가? 한데, 단 한 번도 만났던 기억이 없는 저자가 나를 보자 형님이라 불렀고, 나 또한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마음속 깊은 곳에서 기이한 느낌이 일어나지 않았던가!’ 당시는 이런 일이 당치도 않은 것 같아 아무렇지 않게 사검평을 제압했던 흑의미청년이었 다. 그러나 그 후 시간이 흐를수록 사검평의 행동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비록 사검평에 대 해서는 어떠한 기억도 뇌리에 떠오르지 않았으나 왠지 모르게 마음이 이끌리는 것 또한 부 정할 수 없었다. 어쩐지 옛날부터 그를 알고 있었던 것 같은 본능적 친숙감이 들었다. 스스로를 우문냉이라고 생각하는 그가 이런 생각을 완전히 떨쳐 버리지 못하는 데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사실 그의 뇌리 속에 간직된 기억은 지금으로부터 겨우 사 년을 거슬러 올라갈 뿐, 그 이 전의 일에 대해서는 추호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런 자신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부에게 물어 보았으나 사부 천독마수의 대답은 언제나 판에 박은 것이었다. 우문냉은 본시 천애고아의 신세라는 것이다. 그런 것을 천독마수가 젖먹이 어린 시절부터 거두어 우문냉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제자로 삼아 모든 무학을 전수해 주었다는 것이다. 한데 사문의 절예를 익히다가 부작용을 일으켜 그 여파로 과거의 일을 모두 기억하지 못하 게 되었으니 사부는 이 점에 마음이 아프고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사부의 말로는 이 불행한 일이 있은 직후, 거의 백치와 같은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다 행히도 하늘이 무심치 않아 차츰 차도를 보여 이토록 회복되었으니 그나마 정녕 천행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부의 이처럼 자상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자신의 과거를 알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곤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사부의 말을 추호라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는 시시때때로 이상한 악몽에 시달리기 일쑤여서 왠지 가슴속의 한 가닥 의혹을 지울 수 없었다. 되풀이되는 악몽은 언제나 같은 내용이었는데, 그것은 사부 천독마수가 수많은 사람들을 미친 듯이 살육하는 장면이었다. 자신은 언제나 그 옆에서 공포에 질려 얼어붙은 듯 사부를 쳐다보았다. 그러면 사부는 언제나 만면에 소름 끼치도록 징그러운 흉소를 띠고 서서히 다가오는 것이었다. 이처럼 똑같은 내용의 악몽이 매번 되풀이되었다. 밤은 그에게 있어 실로 끔찍한 시간이었 다. 하여 그는 잠을 잔다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런 사실을 차마 사부에게 털어놓고 밝힐 수가 없었다. 자신을 친혈육처럼 대해 주는 사부였기에 이 같은 사 실을 말함이 잔인한 배신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하여 말로 표현하지도 못한 채 혼자 가슴만 태우고 살아 오던 지난 세월이었다. 우문냉은 문득 한 가지 기이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사검평이야말로 어쩌면 잃어버 린 과거 속의 자신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바로 그때 천독마수가 운공조식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그는 제자 우문냉을 힐끔 바라보 다가 그의 안색이 창백함에 대뜸 의아함을 느꼈다. “냉아야, 안색이 몹시 창백하니 웬일이냐?” 우문냉은 흠칫 놀라 안색을 굳히며 말머리를 돌렸다. “제자는 아무래도 우리들이 복마령주라는 자의 음모에 빠져 든 듯 왠지 불길한 예감을 떨쳐 버리기 어렵습니다.” 그 말에 천독마수도 흠칫하였다. 그러나 이내 눈을 가늘게 뜨고 냉엄히 물었다. “너는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 우문냉이 대꾸했다. “제자가 돌이켜보건대 복마령주 그자는 처음 사부님께 말하기를 사검평이 몸에 중상을 입 고 황하에 투신하여 도주하였다고 했습니다.” 천독마수가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그 말이 어쨌다는 것이냐? 우리가 직접 보았던 대로 그의 말은 모두 사실이 아니었더 냐?” 우문냉은 완강히 부인하였다. “제자는 바로 그 점이 수상쩍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의 말대로 염라서생 사검평은 추호의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너무나 간단히 제자에게 제압당했습니다. 하나 그를 제압하기가 처음부터 이토록 손쉬웠다면 복마 령주 그자는 왜 자신이 직접 손을 쓰지 않고 사부님께 이 일을 대신 시켰던 것일까요? 더구나 그자는 사검평의 생사를 불문하고 이 번 일을 성사시키는 조건으로 사부님을 억압하던 과거의 맹약에서 풀어 준다고까지 하였으니, 구태여 그런 조건까지 내걸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그 말은 너무나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다. 천독마수는 그제서야 뭔가 의심스러운 듯 크게 놀 라는 표정이었다. “그…… 그렇다! 네 말이 정녕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구나!” 그는 깊이 탄식해 마지않았다. “아아……” 지난날의 통한이 다시금 되살아났기 때문이었다. “뭔가 짚이는 바라도 있으십니까, 사부님?” 제자 우문냉의 물음에 천독마수는 우울한 눈빛으로 말했다. “지난날에 있었던 한 가지 비사가 떠올라서 그랬을 뿐이다.” “무슨 일이었는지 제자가 알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까?” 천독마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우문냉을 바라보았다. “들어 보려느냐?” “말씀해 주십시오.” 천독마수는 지난날의 통한을 비분에 잠긴 어조로 털어놓기 시작했다. “십 년 전 천마문이 정체 모를 흉수에 의해 궤멸되었을 당시, 그 숱한 살육에 사용되었던 독이 마침 노부의 천독마동에서 감쪽같이 분실되었던 소혼무형지독(消魂無形之毒)에 의했던 것임을 알게 된 노부는 즉시 이곳 태산으로 달려왔 었다.” 우문냉은 엄숙한 신색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때 노부는 한 사람의 신비백의복면인을 만나 그의 도전적인 말에 자극받았던 나머지 어리석게도 그와 한 가지 약속을 하고야 말았으니…… 만일 노부가 삼 초 내에 격패될 경우 그가 내세우는 세 가지 명령을 이행하기로 한 것이었다.” 일단 점화된 통한의 불길은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천독마수 우문관은 새삼 타오르는 분 노의 불길을 이기지 못해 부드득 이를 갈았다. “그는 노부가 난생처음 대해 보는 강적이었다. 노부는 실로 처참한 패배를 면치 못하였 다.” 우문냉이 면구스러워 애써 위로하려 했다. “만일 사부님이 지금처럼 천독마혈신공을 지니고 계셨다면 그렇듯 처참한 패배를 당하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그 말에 천독마수는 문득 씁쓸한 미소를 떠올렸다. 이어 고개마저 저으며 말했다. “만일 당시에 천독마혈신공을 지녔다 해도 역시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사실 그자 는 상상을 초월하는 절정의 호신강기를 익혀 지니고 있었던지라 근본적으로 노부가 펼치는 독술 따위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 노부가 만일 동정(童貞)을 잃지 않고 본 문 최상의 절예 천잔독성마혈신공(天殘毒聖魔血神功)을 연성하였더라면 기필코 그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는 제자 우문냉을 바라보며 깊이 탄식해 마지않았다. “정녕 안타까운 일이다. 만일 그자가 요구한 천절광심단혼지독(天絶狂心斷魂之毒)을 만들 기 위해 노부가 지난 사십 년간 천하 각처에서 수집했던 각종 기독만 허비하지 않았더라도…… 노부는 이미 너에게 천독화혈독인대법(天毒化血毒人大法)을 펼쳐 천하무적의 독중지성(毒中之聖)으로 만들 수 있었을 텐데……” 그는 못내 아쉬운 듯 말끝을 흐렸다. 그 말에 우문냉이 다시금 위로의 말을 건넸다. “사부님,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비록 유구한 세월이 흐를지언정 제자는 신공을 성취하여 반드시 숙원을 해결하고야 말겠습니다. 믿으십시오. 제자는 반드시 사문의 원수 복마령주를 주살하여 사부님의 치욕을 설욕하고야 말 것입니다.” 그 말에 천독마수는 크게 격동된 듯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 노부는 너의 기백이 정녕 마음에 드는구나. 좋다! 이 사부 또한 너의 말을 들으니 진정 절로 용기가 샘솟는구나. 오냐, 노부 역시 천하 구석구석을 뒤져서라도 천독화혈독인대법을 시전할 기독을 반드시 손에 넣고야 말리라!” 정녕 비원의 혈세처럼 그의 어조는 섬뜩한 비장함마저 실려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으하하하…… 우문 형이 이 같은 장소에서 제자와 더불어 정담(情談)을 나누고 있을 줄이 야…… 이거 방해가 되었다면 정녕 미안하구려!” 난데없는 일성 웃음 소리와 함께 한 줄기 인영이 번뜩였다. 순간,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한 사람의 청의중년인이었다. 그를 발견한 천독마수 우문관은 크게 놀라며 외쳤다. “남해(南海) 천종도주(天鍾島主)!” 第 二十二 章 살신성인(殺身成仁) 1 천종도주 주가청의 출현은 실로 뜻밖이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가? 기다리던 복마령주는 오지 않고 난데없이 실로 의외의 인물이 나타나다니…… 천사 주가청의 입가에는 은은히 신비로운 미소가 감돌았다. “우문 형이 이런 곳에서 강호의 제일금기 중 하나인 천독화혈독인대법 같은 사도대법(邪 道大法)에 관하여 제자와 더불어 의논하다니…… 이는 정말 뜻밖의 일이구려. 우문 형의 이 같은 소행을 강호의 무림동도들이 알게 된다면 과연 어떻게 행동하겠소?” 그 말에 천독마수의 얼굴이 핼쑥하게 변하였다. 그러나 그 안색은 이내 흉흉한 살기로 바 뀌었다. “으하하하…… 주가청, 네가 노부를 뒤쫓아 이곳 백룡봉까지 온 이유가 대체 무엇이냐?” “오해하지 마시오. 이곳 백룡봉에는 비단 노부 혼자 온 것이 아니니…… 자세히 보면 수 십 명의 정사양파고수들이 왔음을 곧 깨닫게 될 것이오.” “그, 그럴 리가……!” 천독마수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채고 황급히 변명하였 “당신들이 혹시 이 애송이 때문에 노부를 미행하였다면, 분명히 말하건대 이 애송이는 아 직 살아 있소. 하나 이미 그 누군가에 의해 무공이 상실되어 산송장이나 다름없은즉, 당신들은 헛걸음을 한 것이오.” 사검평이 아직 살아 있다는 말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주가청이 뭐라고 말하려는 순 간이었다. “으하하…… 우문 형, 당신은 이미 이곳 주위에 매복한 수많은 군웅들의 노리는 바 목표 가 되었으니, 비록 그 일신의 용독지술이 천하무상이라 해도 결국 이 자리에 뼈를 묻어야 할 것이오!” 웅혼한 내공이 깃들인 일성이 터져 나오며 한 금포중년인(錦袍中年人)이 나타났다. 형형한 안광, 붉은 혈색, 감히 범할 수 없는 위엄으로 뭇 중인들을 압도하는 자태…… 실로 영웅의 기개를 전신으로 풍기는 절세의 고인이었다. “다, 당신……?” 모두가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금포중년인은 바로 벽혈신군(碧血神君) 유천화(劉天華)였으니 정녕 중인들을 놀라게 하기 에 충분한 일이었다. 무적십대고인 중에서 그 첫째로 손꼽히는 일군(一君)이 아니던 뜻밖의 인물이 나타난 데 대한 흥분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천독마수 우문관은 조금 전 벽 혈신군의 말을 상기하고 창황히 물었다. “유 대협, 당신의 조금 전 그 말은 대체 무슨 뜻이오?” 벽혈신군 유천화는 신비롭기 이를 데 없이 빙그레 웃었다. “이틀 전 본 군은 염라천존의 전인 염라서생 사검평이 그 누군가에 의해 중상을 입고 황 하에 던져졌다는 소문을 들었소이다. 사실 이 소문은 노부 혼자만이 아니라 전강호인들이 들었던 바요.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불영옥패에 관해서였소. 황산신니의 모든 절학이 소장된 장보도가 들어 있는 그것을 사검평이란 애송이가 지니고 있던 이상……” 천독마수는 그때야 비로소 벽혈신군의 말 속에 포함된 진정한 의미를 알아차리고는 안색이 핼쑥하게 변하였다. “자, 잠깐! 노부가 그를 제압한 것은 사실이오. 그러나 분명히 말하건대 노부는 결코 그로 부터 불영옥패를 취하지 않았소.” 그러자 벽혈신군 유천화가 싸늘히 말했다. “우문 형, 어리석게 굴지 마시오. 당신의 그런 말은 아마 강호의 삼척동자라도 믿지 못할 것이오.” 천독마수의 얼굴에 파르르 경련이 일어났다. “벽혈신군, 함부로 단정하지 마시오. 진정 하늘을 두고 맹세하건대 노부의 이 말은 틀림없 는 사실이오. 노부는 다만 저 애송이를 당신의 딸아이 수중에서 빼앗아 왔을 뿐이오. 만일 진정으로 그가 처음부터 불영옥패를 지니고 있었다면 그것은 필시 당신 딸아 이 수중에 들어갔을 것이오. 더구나 노부가 이 자리에 오리라는 것이 이토록 발설된 것을 보면 노부는 필경 그 누군가의 음모에 빠졌음 이 분명하오. 그러니 더 이상 나를 추궁하지 마시오.” 그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벽혈신군 유천화는 온 태산이 진동할 만큼 일진 광소를 터뜨렸 다. “으하하하…… 우문 형, 당신이 이제 와서 모든 죄를 본 신군에게 덮어씌우자는 수작이오? 당신이 만일 계속해서 그따위 엉큼한 수작을 부린다면 끝내 본 신군의 손에 봉변을 당하고 야 말 것이오!” 벽혈신군의 태도는 실로 강압적이었다. 이에 천독마수는 분노한 나머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실로 장관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벽혈신군의 무서운 위력을 너무나 잘 알 고 있는지라 발작치 못하였다. 그때 사부를 모욕함에 참지 못한 우문냉이 분연히 나섰다. “신군, 당신의 말은 너무나 지나치시오. 당신의 여식으로부터 사검평을 제압 탈취했던 장 본인은 바로 소생이었소만, 하늘을 맹세코 그의 몸 어디에도 불영옥패는 있지 않았소!” “닥쳐라!” 분노에 찬 벽혈신군의 일갈이 터짐과 거의 동시에, 천지 개벽의 소리인 듯 굉음이 작렬했 다. 꽈르릉! “으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우문냉은 피를 토하며 칠팔 보나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천독마수가 황급히 일장을 전개하여 벽혈신군의 장력에 의한 충격을 많이 감소시켰기에 다행히 생명은 부지할 수 있었다. 하나 이로 인해 천독마수도 적지 않은 충격을 입은 듯했다. 그때 조용히 선 채 이들 세 명의 일장 대결을 지켜보던 천종도주 주가청이 앞으로 나섰다. “유 형, 무림의 선배 된 몸으로서 한낱 철부지 어린 후배를 향하여 이렇듯 독랄한 살수 를 펼치다니…… 조금 지나치신 것 같소.” 이 말에 벽혈신군의 두 눈에는 한 가닥 짙은 살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는 이내 멋 쩍은 미소로 안색을 바꾸며 말했다. “하하하…… 우문 형, 오해하지 마시오. 본 신군이 어찌 저 아이를 추호라도 해칠 리 있겠 소? 다만 그 혈기가 지나치게 방자하니 후배로서의 예의를 갖추도록 잠시 훈계한 것에 지나지 않소. 그러나 너무 지나쳤다면 용서하시오.” 주가청은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때 천독마수가 갑자기 소리쳤다. “노부는 이 자리에서 반드시 진실을 증명해 보이고야 말겠소!” 이어 그는 즉시 제압했던 사검평의 혈도를 해혈하였다. 그때 벽혈신군은 한 가닥 낭패의 빛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처럼 미묘한 그의 표정을 아무 도 눈치채지 못했다. 사검평은 혼혈이 풀린 즉시 깨어났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자 일별하여 주위를 쓸어보고 는 뜻밖의 정세에 크게 놀랐다. 더욱이 자신을 둘러싼 사람 중에 천사 주가청이 있음을 보 자 그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그때 사검평의 귓전에 한 가닥 근심스러운 전음이 스며들었다. “잠시 후 이곳에 백무(白霧)가 번지면 그대는 아무 소리 말고 자네를 납치해 가는 사람의 말을 듣도록 하게. 그리고 특히…… 벽혈신군을 조심하도록……” 이는 분명 천사 주가청의 음성이었다. 이에 사검평은 영문을 몰라 흠칫하였다. 그러나 겉 으로는 순식간에 평정을 되찾았다. 이때 천독마수 우문관이 사검평을 향해 급히 다그쳤다. “애송아, 너는 네가 겪은 전후사정에 대하여 추호의 거짓도 없이 이 자리에서 소상히 말 해 보아라.” 사검평은 힐끔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에는 완강히 거절하는 빛이 역력하였다. 이어서 그는 거부의 의미로 두 눈을 감아 버렸다. 이에 격분한 천독마수는 금방이라도 독수를 쓸 듯한 태세였다. 그때 천사 주가청이 낭랑히 말하였다. “당신의 그런 수단은 실로 오해하기 십상이니 알아서 처신하기 바라오.” 벽혈신군은 뚫어져라 사검평을 바라보다가 문득 말하였다. “본 신군이 이곳까지 몸소 달려온 것은 사 소협이 지닌 불영옥패에 욕념을 품었기 때문은 결코 아닐세. 오직 한 가지 진상을 밝히고자 하는 이유뿐이네.” 벽혈신군은 전혀 욕심이 없다는 듯 말하고 있었지만 이미 주가청의 전음을 전해 들은 바 있 었던 사검평은 은연중 의아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내색도 하지 않고 태연히 말했다. “소생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영빈원에서 폭음 끝에 혼절하였다가 깨어 보니 유벽선 소저 에게 구함을 받았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 말에 벽혈신군의 두 눈에는 한 가닥 기이한 빛이 섬광처럼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이어 그는 침중한 태도로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사 소협은 누군가에 의해 무공을 폐쇄당했는지 전혀 모른단 말인가?” 사검평은 침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벽혈신군이 다시 물었 “그렇다면 소협이 지니고 있던 불영옥패는 대체 어찌 되었단 말인가?” 벽혈신군의 질문이 떨어지는 순간, 천사 주가청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의 눈에서는 모두 탐욕의 불길이 이글거렸다. 한데 사검평은 주가청 외에 또 하나의 눈빛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바로 자신의 형이 틀림없는 우문냉이었다. 그의 두 눈에서는 탐욕의 빛 대신 미묘한 갈등의 빛이 뒤섞이고 있었다. 사검평은 흑의청년을 처음 대한 순간부터, 그가 자신의 친형 진평이 틀림없음을 믿어 의 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전혀 아우인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니, 이 일의 내막에는 필시 천독마수의 안배가 있으리라 짐작했다. 하여 사검평은 더 이상 그를 아는 체 하려 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꽝! 지축을 흔드는 일성 굉음이 울려 퍼지며 짙은 백무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찰나, 그 누군가의 손길이 재빨리 사검평을 낚아채더니 바람처럼 밑으로 질주하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사검평이 서 있던 자리에는 강맹한 장력이 휘몰아쳤다. 꽈르르릉! 거대한 바위가 삽시간에 산산조각이 되어 분분히 허공으로 휘날렸다. 이 일진의 경풍은 누 가 펼쳤는지는 모르되, 만일 사검평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면 결코 목숨을 부지치 못했을 것이었다. 그때 모든 중인들은 사검평이 누군가에 의해 납치당했음을 눈치 채고는 일제히 신형을 솟 구쳤다. 한편 사검평은 자신을 안고 가는 자가 대체 어떤 인물일까 궁금하여 애써 눈을 떠보았다. 준미한 얼굴에 남의를 입은 이십오륙 세쯤의 청년이었다. 그는 전신의 공력을 있는 대로 펼 쳐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었다. 휙! 휙! 사검평의 귓전으로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순식간에 그들은 두 개의 봉우리를 지나 깊은 계곡을 지났다. 사검평을 안고 있는 자가 어 찌나 빨리 달리는지, 그 기세에 울창한 수림마저 양편으로 갈라져 빠르게 물러나는 듯하였 다. 처음에는 추격하는 무리들이 집요하게 따라붙었으나 어느덧 점점 멀어져 갔다. 이윽고 추격하는 자들의 소리는 완전히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남의청년은 추호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그는 계속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의 전 신은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때 남의청년 앞에 울창한 수림이 나타났다. 그제서야 남의청년의 얼굴에는 한 줄기 안도 의 빛이 감돌았다. 그는 서슴없이 수림 속으로 뛰어들었다. 실로 너무도 울창한 수림 속이어서 방향조차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남의청년은 이곳 지리에 익숙한 듯 좌우로 번갈아 규칙적으로 움직여 순식간에 깊이 사라졌다. 그가 숲속 깊이 들어갔을 때였다. 그 앞에 두 명의 인영이 유령인 듯 불쑥 나타났다. 한 사람은 죽장을 짚은 흑의노파였고, 다른 한 사람은 점쟁이 차림을 한 육순 가량의 노 인이었다. 노인이 먼저 남의청년을 보자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척 소제, 과연 성공하였군그래.” 남의청년이 씩 웃으며 맞받았다. “실로 다행이었습니다. 하나 지금 소생의 뒤를 따르고 있는 인물들이 누구인지 안다면 노형님께서는 결코 태평하게 웃고 있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그 말에 노인이 가가 대소했다. “으하하하…… 노부가 그 정도의 일쯤 미리 짐작치 못하고서 어찌 생사신복(生死神卜) 주 방우(周方雨)라는 명호를 강호에 떨쳤겠는가? 후후후…… 벽혈신군 유천화와 천독마수 우문관 등이 비록 절세적 고수임에는 틀림없으나 이 할망구가 펼친 진법을 벗어나는 데는 제법 시 간이 걸릴 게야. 그 동안 우리들은 멀리 도망쳐 버릴 테니 그들이 우리의 종적을 찾으려면 쉽지 않을 걸세.” 그는 유쾌한 듯 껄껄 웃었다. 이때 사검평은 아직 남의청년 품에 안긴 채였으나 대화를 듣 고 이들의 정체를 알아챌 수 있었다. 그들은 바로 생사신복 주방우와 고죽파파(古竹婆婆) 두 미경(杜美京), 그리고 광검수재(狂劍秀才) 척금송(戚金松)이었다. 그 중 사검평을 구한 장본인이 바로 강호사이(江湖四異) 중에서도 가장 젊은 광검수재 척 금송이었던 것이다. 고죽파파가 침중히 말하였다. “점쟁이, 너무 자신하지 말구려. 만일 천종도주 주가청이 만천철수대진(滿天鐵樹大陣)의 파 해(破解)에 한몫 거든다면 단숨에 돌파할 것이오.” 그 말에 광검수재 척금송이 곧 부인하였다. “주 선배께서는 절대 그럴 리 없습니다. 우리들 또한 그분의 명에 따라 행동하는 터인데 어찌 주 선배라 해서 그분의 명을 어길 리 있겠습니까?” 사검평은 척금송의 품에서 가만히 귀담아듣고 있다가 끝내 의혹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당신들이 말하는 그분이란 대체 누구입니까?” 광검수재 척금송이 의미 심장한 눈길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바로 황산신니를 말함일세.” “예엣?” 사검평은 대경 실색하고 있을 때였다. “으하하하…… 강호사이 중 세 명이 작당하여 감히 노부의 앞을 가로막을 줄이야…… 으 하하, 정녕 짐작도 못 하였구나.” 일성 광소와 함께 그들 앞으로 한 인영이 번뜩 나타났다. 혈혈한 위엄의 금포중년인, 그는 바로 벽혈신군 유천화가 아닌가? 일행은 모두 자지러질 듯 놀라며 경악성을 토해 냈다. “아앗!” 한데 이 자리에 나타난 자가 비단 벽혈신군 유천화뿐만이 아니었다. 천독마수 우문관과 그 의 제자 우문냉, 그리고 천종도주 주가청마저 속속 모습을 나타냈다. 벽혈신군은 광검수재 척금송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더니 이윽고 만면 가득 분노의 빛을 떠 올렸다. “척금송, 그대가 감히 이들과 작당하여 본 신군에게 적대적 행위를 하다니…… 진정 용 서할 수 없구나!” 그가 벽력처럼 호통치며 한 발 앞으로 성큼 나설 때였다. “잠깐!” 천종도주 천사 주가청이 의연히 부르짖으며 그 앞을 가로막았다. “척 소제, 무엇을 망설이는가? 그대는 어서 사 소협을 데리고 황산으로 가라! 천하 무림의 안위가 자네의 손에 달려 있은즉, 기필코 사명을 완수하라!” 순간, 벽혈신군 유천화의 얼굴이 핼쑥하게 변하였다. “주 형, 방금 당신의 그 말은 대체 무슨 뜻이오?” 천사 주가청은 냉랭하게 대꾸했다. “흥! 정녕 몰라서 물으시오? 그 까닭은 유 형이 더 잘 알고 있을텐데…… 하나 정녕 몰 라서 묻는다면 말해 드리리다. 당신이 척 소제에게 손을 쓰려 함은 과거 유 형의 여식과 척 소제 사이에 있었던 일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소. 지금 당신이 노리는 것은 척 소제가 아니라 사검평의 목숨임에 틀림없지 않 소!” 순간, 벽혈신군 유천화의 얼굴에 짙은 살기가 드리워졌다. “닥쳐라! 주가청, 네가 감히 본 신군을 모욕하다니…… 정녕 용서할 수 없다!” 바람도 없는데 그의 소맷자락이 서서히 펄럭이기 시작했다. 천종도주 주가청은 천독마수를 바라보며 빠르게 말했다. “우문 형, 당신은 아직도 모르겠소? 당신이 오늘 백룡봉에서 중인의 오해를 받고 도륙당 할 뻔했던 것도, 실인즉 누군가의 치밀한 사전 안배에 의하여 계획된 함정이었으니, 바로 여기 있는 벽혈신군 유천화의 걸작인 것이오.” 이어 그는 싸늘히 유천화를 쏘아보았다. “이자야말로 인면수심의 더러운 인간이니…… 겉으로는 강호인들의 무한한 존경을 받으면 서도 속으로는 진정 무서운 흉계를 꾸민 장본인이오. 십 년 전 천마문을 피로 씻었던 원흉(元兇)도 바로 이자요. 물론 그 배후에는 더욱 무서운 인물이 도 사리고 있소. 하나 따지고 보면 이자 벽혈신군이야말로 진정 가증스러운 악마이니, 오직 자신의 야욕을 달성키 위해 강호동도를 주살했던 것이오. 실로 이자의 죄는 천번 죽어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오!” 천독마수 우문관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렇다면 십 년 전 노부가 태산에서 만났던 자도, 그리고 복마령주를 자처하는 자도 바 로…… 가증스러운 놈!” 벽혈신군 유천화는 주가청에 의해 모든 비밀의 전말이 상세히 폭로되자 두 눈에서 무서운 살기를 내뿜었다. “으하하하…… 주가청, 네가 스스로 죽기를 결심하였구나. 오냐! 노부가 네 소원을 들어주 겠다!” 이어 그는 주위 전체를 돌아보며 싸늘히 내뱉었다. “흐흐흐…… 네놈들도 마찬가지다! 이미 본 신군의 비밀을 안 이상 단 한 놈도 이곳에서 살아 떠날 생각은 아예 하지 말거라!” 천사 주가청은 그 틈에 재빨리 광검수재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대는 어서 떠나지 않고 무엇 하고 있는가? 강호의 존망이 오직 사검평의 양 어깨에 달 려 있음을 설사 모르고 있지는 않겠지?” 그 말에 광검수재 척금송은 재빨리 신형을 솟구쳤다. 순간 벽혈신군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어림도 없는 수작 마라!” 그가 광검수재를 제지하려 하자 주가청이 신속히 가로막았다. “흥, 그렇게 호락호락 마음대로 되지만은 않을걸!” 주가청은 두 손을 쾌속 무비하게 펼쳐 냈다. 그러자 무수한 변화가 눈앞에 펼쳐졌다. 도원의 꽃잎이 광풍에 휘날리듯, 환상과도 같은 장 (掌)과 지풍이 물샐틈없이 휘몰아치는 것이었다. 천종도주 천사 주가청의 필생에 걸친 독문절학인 산화낙영장법이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가 전개하는 신법 또한 현묘하기 이를 데 없어서 그 진퇴를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흥!” 벽혈신군 유천화는 이런 절세의 무학은 안중에 없다는 듯 싸늘한 냉소를 날렸다. 그가 두 팔을 힘차게 내뻗었다. 그러자 그의 두 소매가 순식간에 두 자루의 장검처럼 빳빳이 곤두서며 날카롭게 쏘아져 가는 것이었다. 그 기세가 어찌나 맹렬한지, 예리한 파공음이 연속적으로 작렬하는 가운데 산화낙영장법은 허무하게 스러졌고 주가청은 위기에 몰리고 말았다. 순간, “죽어 구천지옥에 떨어져서라도 그 죄를 씻지 못할 가증스러운 자야! 그 더러운 마수로 감히 누구를 해치려 하느냐?” 날카로운 일갈과 함께 두 줄기 인영이 덮쳐 들었다. 그들은 바로 고죽파파 두미경과 생사신복 주방우였다. 하나 그들은 불과 일초도 전개하지 못하고 벽혈신군의 내가강기에 격중당하여 극심한 부상을 입고 말았다. “아악!” “으윽!” 이번에는 천독마수 우문관이 부드득 이를 갈았다. “흥! 네놈이 감히 복마령주를 가장하고 노부를 우롱하려 했다니…… 십 년 전의 일을 생각 하면 지금도 치가 떨린다!” 그는 천독마혈신공을 폭풍과 같이 휩쓸어 갔다. 벽혈신군은 싸늘한 비웃음을 흘렸다. “흐흐흐…… 그렇지 않아도 한 놈 한 놈 죽이기에 귀찮던 판국이니 오히려 잘되었다. 한 꺼번에 지옥으로 보내 주마!” 땅! 땅! 마치 쇳덩어리가 부딪치듯 날카로운 금속성이 허공 가득 메아리쳤다. 우르릉…… 잇따라 암운처럼 자욱한 경기가 피어올라 피아를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쌍방의 절초가 격동하는 사이 처음 이삼 초는 막상막하의 백중지세를 이루었다. 난무하는 장력과 암경으로 인해 나무가 뿌리째 뽑혀지고 돌들이 휘말려 들었다. 벽혈신군은 불현듯 광검수재가 사라져 보이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러자 그의 살기는 하 늘 끝까지 솟구쳤다. ‘사검평이 살아나 황산신니를 만나는 순간, 본좌의 수십 년에 걸친 안배는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그는 벽력처럼 소리질렀다. “네놈들이 감히 노부 필생의 야망을 방해하려 하다니…… 모조리 죽음을 각오하랏!” 갑자기 그의 몸 주위를 자색(紫色) 운무가 감싸기 시작했다. “으하하…… 모조리 지옥으로 가거라!” 광소와 함께 자줏빛 운무가 폭풍처럼 몰아치기 시작했다. 순간, “으악!” “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그 비명 소리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벽혈신군 유천화는 신형을 솟구쳐 광검수재 척금송이 사라졌던 방향으로 섬전처럼 쏘아져 갔다. 2 한차례 난전이 휩쓸고 지나간 장중은 마치 폭풍이 지나간 자리 같았다. 여기저기 아름드리 거목(巨木)이 뿌리째 뽑혀져 참혹한 형상으로 나뒹굴었고, 그 위로 몇 사람이 죽은 듯 쓰러져 있었다. 어디선가 피 냄새를 맡고 사나운 산짐승들이 사납게 울부짖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폐허와 같이 참담하게 변한 장중으로부터 한 인영이 꿈틀대며 일어섰다. 그는 바로 천사 주가청이었다. 몇 번인가 일어서다 쓰러지고, 또다시 일어서다 쓰러진 후에야…… 간신히 그는 두 다리 를 의지하여 일어설 수 있었다. 그의 모습은 실로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머리는 산발하여 분분히 휘날렸고 옷자락도 갈가 리 찢겨져 펄럭이는 위에, 전신은 온통 피로 물들어 끔찍할 정도였다. “아…… 벽혈신군 유천화, 그자가 남해천룡의 태허귀진자무신강(太虛歸眞紫霧神 )을 연성 했을 줄이야 정녕 꿈에서도 상상치 못하였다!” 그때 망연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의 두 눈에 한 가닥 광망이 스치고 지나갔다. 참혹하게 쓰러진 네 구의 시체 중에서 아직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천사 주가청의 참담했던 얼굴에 한 가닥 경이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꿈틀거 리는 장본인은 바로 천독마수의 제자인 우문냉이었다. 주가청은 황급히 달려가 그를 진맥해 보았다. 비록 가녀리나마 맥박이 살아 있었다. 주가청은 우문냉을 안아 들고는 훌쩍 몸을 날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 * * 광검수재 척금송은 품에 사검평을 부둥켜안은 채 험준한 산세도 아랑곳없이 나는 듯이 달 려가고 있었다. 물론 길을 찾아가려면 얼마든지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벽혈신군의 추적을 피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으므로 계속하여 태산의 험악한 산세를 가로질러 점점 깊숙이 들어갔다. 사검평은 귓가로 스치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치미는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했다. 그는 광 검수재 척금송에게 물어 알고 싶은 바가 태산처럼 많았다. 하나 그는 감히 입을 열어 직접 물어 볼 수 없었다. 그로 서는 황산신니가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것부터 실로 의외의 일이었다. 더구나 천사 주가청 이 말했던 바에 따르면, 오직 자신만이 무림의 안위를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지 않는가! 사검평으로서는 이 또한 이해하기 어려웠다. 사실 그 자신도 지난날에는 오직 자신 만이 천하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인물이라 자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천공금성 사마등에게 비참하게 패하였을 뿐더러, 이 제는 자신이 지녔던 일신절학조차 발휘할 길이 막막한 무기력한 존재가 되었으니, 대체 무 슨 자격이 있어 천하의 안위를 좌우할 수 있단 말인가? 사검평의 가슴에는 이토록 억만 가지 회한이 교차하건만, 그러한 마음을 광검수재 척금송 은 알 길이 없으니 오직 나는 듯 질주할 뿐이었다. 이윽고 그들이 어느 이름 모를 절 앞에 까지 이르렀을 때였다. 천공(天空)을 휘저으며 한 줄기 싸늘한 냉소가 터져 나오지 않는가! “흐흐흐…… 애송아, 네 녀석이 가면 대체 어디까지 가겠다는 것이냐?” “앗!” 광검수재 척금송은 경악해 마지않았다. 찰나, 그의 앞에 한 줄기 인영이 번뜩하더니 벽혈신 군 유천화가 문득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광검수재 척금송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으나 태도를 가다듬으며 의연히 말했다. “벽혈신군 유 선배, 이 후배가 감히 당신께 한마디 충고하겠소. 당신이 남해천룡에게 어떠 한 보장을 받았는지는 모르나 당신은 필경 그에게 속고 있는 것이오. 생각해 보시오. 남해천 룡 같은 간악한 효웅(梟雄)이 일단 중원웅패라는 자신의 야심이 달성되면 어찌 당신을 제거 하지 않고 그대로 놔두려 하겠소?” “애송아, 본 신군이 그만한 것조차 생각지 못할 어리석은 자로 비치는가? 흥! 남해천룡이 본 신군을 이용하여 중원무림을 손아귀에 넣으려 한다 하나 본 신군 또한 남해천룡을 이용 하여 천하무림을 내 손아귀에 넣으려 하니 따지고 보면 피장파장이 아니겠느냐? 흐흐흐흐…… 지 금은 천면환영인이란 신분으로 그의 명을 수행하는 처지이지만, 두고 봐라! 웅대한 노부의 모든 목적이 달성되면 남해천룡, 그자 는 필경 본 신군에 의하여 자연스레 제거되고 말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광검수재 척금송의 얼굴은 창백히 변했다. ‘천면환영인이 바로 저자의 또 다른 신분이란 말인가?’ 벽혈신군이 마지막으로 냉담히 말했다. “척금송아, 너는 이제 더 이상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 그나마 네가 조금이라도 고통없이 죽기를 원한다면 본 신군이 특별히 인정을 베풀 것인즉,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하라!” 정녕 최후의 선언답게 차고도 살기 띤 음성이었다. 순간, 광검수재 척금송의 얼굴이 싸늘히 경직되었다. 동시에 그는 한차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뿐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등뒤의, 끝조차 보이지 않는 절애 밑으로 몸을 던지는 것이었고, 또 다른 방법은 전신의 일신절학에 의지하여 벽혈신군과 생사지투를 벌이는 것이었다. 순간, 광검수재의 뇌리를 번개처럼 스치는 한 가지 영감이 있었다. ‘벽혈신군, 저자는 어찌하여 냉혹히 바라보기만 할 뿐 선뜻 살수를 전개치 않는단 말인 가? 흥! 저자는 필경 내가 목적이 아니다. 그는 야욕의 달성을 위해 앞날의 화근이 될지도 모를 사검평을 오히려 자신의 꼭두각시로 삼으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록 자신은 죽을지언정 사검평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의 손에 넘겨주어서는 안 되었다. 그는 사검평을 부둥켜안은 채 등뒤의 천 길 절애 밑으로 갑자기 몸을 날렸다. 이는 벽혈신군으로선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의외의 사태였다. “네놈이 감히……” 벽혈신군은 즉시 광검수재를 향하여 섬전과 같이 몸을 날리며 강맹한 장력을 내뻗었다. 꽝! 꽈릉! 가공할 위력의 장력이 작렬했다. “으아악!”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하나, 그것은 결코 정면으로 척금송을 격중시키지 못하였다. 단지 스치듯 아슬아슬하게 지나갔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광검수재 척금송은 깊은 내상을 입었다. “으아악……!” 긴 비명과 함께 광검수재는 절애 아래로 까마득히 떨어져 갔다. 벽혈신군은 단애 끝에 표연히 내려섰다. 그곳에서 밑을 내려다 보니 까마득히 아스라한 벼 랑 아래로는 다만 운무만이 무심히 흐를 뿐, 그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벽혈신군은 자위하듯 나직이 중얼거렸다. “흐흐흐…… 광검수재 척금송, 그가 비록 본 신군의 일장에 정통으로 격중되지는 않았을 지언정, 결코 가볍지 않은 내상을 입은 것만은 확실하다. 거기에 더하여 이처럼 만장 깊이의 절애 아래로 떨어졌으니 절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이어서 그는 일성 광소와 함께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한데, 벽혈신군이 사라지고 불과 얼마 안 되어서였다. 백의유삼을 입은 중년인이 홀연히 나타났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릿결, 화사한 홍조를 띠 고 고아한 광채에 빛나는 안면, 맑은 눈빛, 특히 길게 자란 검은 수염이 유난히도 아름답고 탐스러웠다. 이처럼 청수한 면모가 때마침 바람에 나부끼는 백의유삼의 옷자락과 더불어 신선을 연상케 하는 풍모였 다. 그러나 백의중년인의 얼굴에는 은은한 노기가 감돌고 있었다. “벽혈신군 유천화, 그자가 감히 본좌에게 반심을 품고 있었을 줄이야…… 본좌는 이런 줄 도 모르고 만변선희 모용상이 그를 의심하여 보고했어도 반신반의하지 않았던가? 그만큼 그 를 신임하였기 때문이었는데, 그러한 본좌의 기대를 산산이 저버리고 이처럼 헛된 망상에 사로 잡히다니……” 돌연 그가 싸늘히 비웃었다. “흥! 그러나 벽혈신군, 너는 이제 곧 본좌를 배신한 대가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로 네 앞 에 돌아올 것인지 깨닫게 되리라!” 그는 벽혈신군이 사라진 방향을 향하여 소름 끼치는 살광을 뻗어 냈다. 이어, 그 또한 광검 수재 척금송과 사검평이 떨어졌던 절벽 밑을 살펴보았다. “으음…… 염라서생 사검평, 본좌는 염라천존의 전인이라는 그 아이가 경아의 말대로 정녕 뛰어난 기재였던가 보고자 하였거늘…… 이토록 아득한 절벽에서 떨어진 이상 필시 죽음을 면치 못하였을 테니 이제 그 생각도 잊어야 하리라.” 그는 한 줄기 깊은 탄식을 뿜어 내었다. 백의유삼을 바람에 펄럭이며 단애 끝에 선 중년인, 그는 바로 남해천룡(南海天龍)이었다. 그가 이렇듯 중원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벽혈신군 때문이었다. 그는 본시 경천동지할 절세 기인답게 이미 오래 전부터 벽혈신군을 암중 수하로 삼고 있었다. 한데, 강호 진출을 위해 충성을 맹세했던 그가 오히려 자신의 필생에 걸친 대업을 가로채고자 암중 음모를 획책하고 있었 다. 사실 그는 만변선희 모용상으로부터 이 제보를 받고 나서도 선뜻 믿으려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의 눈으로 이렇듯 직접 배신의 현장을 확인한 이상, 오직 철저한 응징만이 있을 뿐이었다. “흐흐흐…… 벽혈신군, 이제 너는 곧 배신의 대가를 치를 테니 각오하라!” * * * 사검평을 안은 채 스스로 만장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던 광검수재 척금송은 어찌 되었는 가? 끝없이 떨어져 내리던 그는 무엇인가에 부딪히는 충격과 함께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그 순간, 척금송은 혼절하고 말았다. 억겁인 양 영원히 걷힐 줄 모르는 칠흑 의 어둠, 그 속에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이윽고 해선에 밀려오는 파도처럼 그의 의식이 서서히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어렵게 눈을 뜬 그는 아직 살아 있는 자신을 보며 의구심을 금할 수 없었다. “내가 아직 죽지 않았단 말인가?” 실로 믿어지지 않았다. 만장절벽 아래로 떨어지고서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니…… 그러나 그는 전신의 공력이 흩어졌고 온몸이 마비된 듯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는 사검평의 생사여부를 먼저 확인하려 했다. 움직이지 않는 사검평의 몸을 가까스로 들어 바라보니, 혼절해 있기는 하지만 가슴이 기복을 보이는 것으로 보아 사검평도 아직 살아 있음이 틀림없었다. 척금송은 비로소 안도하며 일말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데 여기는 어디인가?’ 광검수재 척금송은 이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주위를 돌아볼 만한 여유를 가졌다. “아!” 알고 보니 그들이 있는 곳은 수백년도 족히 되었음 직한 노송의 가지 위였다. 노송은 절벽의 중간에 마치 학이 날개를 치듯 널찍하게 펼쳐져 있었다. 자신들은 바로 그 나뭇가지 위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이를 어찌 하늘의 도우심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광검수재 척금송은 문득 시선을 들 어 그들이 떨어졌던 절벽 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머리 위에는 짙은 운무가 가득 흐르고 있어 하늘조차 보이지 않았 다. 다시 고송으로 시선을 돌리던 그는 창백히 안색을 굳히고 말았다. 두 사람이 떨어진 충격 을 이기지 못한 고송은 허리 부근에서부터 꺾여 흔들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이 상태로라면 얼마 버티지 못해 완전히 꺾어지고 말 것이다. 광검수재 척금송은 거의 본능적으로 불현듯 밑을 내려다보았다. 그 아래는 아직도 까마득하여 밑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아아,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이곳에서 최후를 마쳐야 한단 말인가?” 그때였다. 광검수재 척금송의 두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마치 어둠 속에서 한 줄기 광명을 찾은 사 람처럼 그의 얼굴에는 한 가닥 환희의 빛마저 떠오르지 않는가? 그것은 그가 노송으로부터 이십여 장쯤 밑에 하나의 검은 구멍이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있 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 동혈(洞穴)의 입구가 틀림없었다. “아아! 하늘이 그래도 끝내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시는구나!”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곧 암담한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곳까지 뛰어내린다는 것은 거의 불 가능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이 부상만 입지 않았더라면 이 정도야 문제도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극도의 내상을 입은 터이고, 그 위에 사검평마저 안고 단숨에 이십여 장을 뛰어넘는 것은 실로 불가능했다. 시시각각 그들을 받치고 있던 노송의 나뭇가지는 부러져 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불과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 틀림없었다. 광검수재 척금송은 단호한 결단을 내렸다. 비록 자신은 죽는 한이 있을지언정 사검평은 기필코 살려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것만이 사문으로부터 자신이 받은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 라고 그는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더구나 자신의 사부와 황산신니까지도 앞으로 닥칠 강호의 겁란에서 무림을 구할 자는 오직 사검평밖에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광검수재 척금송은 자신의 옷을 벗어 적당히 찢어 낸 후,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血書)를 쓰 기 시작하였다. 거침없이 글을 써내리는 그의 얼굴은 비장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윽고 그는 한 장의 혈 서를 사검평의 옷 속 깊이 넣어 주었다. 이어 그는 사검평을 양팔에 안은 후 힘껏 신형을 솟구쳤다. 바로 아래, 까마득히 보이는 동혈의 입구를 향해서였다. 우지끈, 뚝! 이제까지 그들이 의지하였던 노송의 나뭇가지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부러져 떨어졌다. 실 로 간발의 차이였다. 광검수재 척금송은 밑으로 뛰어내리다 동혈의 입구와 삼 장 거리쯤 도달하였을 때, 안고 있던 사검평을 전력으로 던져 내었다. 그리고…… “으아아악……!” 광검수재 척금송은 긴 비명과 함께 까마득한 벼랑 아래로 추락해갔다. 하늘도 그 높은 뜻에 감읍하신 것일까? 조용하던 주위에 갑자기 일진 광풍을 보내어 구슬피 울어댔다. 후일 강호인들은 그의 숭고한 죽음을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 * * * 이곳은 바로 동굴 안이었다. 사검평은 이곳에 죽은 듯 누워 있었다. 영원히 끝날 줄 모르는 억겁의 시간인 양 좀체 깨어날 줄 모르고 있던 사검평은 마침내 길 고 길었던 무의식의 세계에서 깨어났다. 깨어나는 순간, 그는 흠칫 놀랐다. ‘대체 여기가 어디인가?’ 그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주마등처럼 펼쳐지는 기억…… 광검수재 척금송의 품에 안겨 필사적으로 도주하던 일이 먼저 뇌리에 떠올랐다. 그러다 만장절벽에 이르러 기어이 벽혈신 군 유천화의 마수에 걸렸던 일. 하여 척금송과 더불어 절벽 위에서 떨어지던 것까지는 분명 히 기억이 났다. 그러나 그 후의 일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사검평은 더 이상 기억을 되살리기를 포기하고 다시 최초의 의문으로 돌아갔다. “대체 여기는 어디이며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힐끔 바라보니 삼 장쯤 앞이 동혈의 입구였기에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순간, “앗!”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야말로 까마득한 만장절벽의 중간이었기 때문이다. 불식간에 간담이 서늘해졌고 등으로 한 줄기 식은땀마저 흘렀다. “이처럼 위도 아래도 깎아지른 듯한 절벽의 중턱에 어찌 내가 있게 되었는가?” 그때 그는 자신의 가슴이 불룩 솟아 있음을 느꼈다. 흠칫하며 품 속을 더듬으니 한 조각의 찢겨진 옷자락이 나왔다. 진한 피 냄새가 풍겨 왔다. 그것은 한 장의 혈서였다. 사검평은 의아하여 즉시 그 내용을 훑어보았다. <나 광검수재 척금송은 일찍이 사랑에 실패하였으니, 그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무공을 모 르는 백면서생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여 좌절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였다. 한데 그 인연으로 천공금성 사마등 사부님의 눈에 들게 되었고, 그 문하(門下)에 들어가 절세무학을 익힐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강호에 다시 나왔 을 때 정인(情人)은 이미 다른 사람의 품에 안겨 있었다. 나는 또 한 번 극도의 좌절감을 맛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여 사문의 태산 같은 은혜마저 배반하고 타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일 년의 절반을 살행으로 보낸 것은 미칠 듯 허전했던 나의 마음을 메우기 위해서였다. 그 상대가 극악한 흉마(兇魔)들이기는 하였어도 결코 용서받지 못할 짓이었다. 왜냐하면 그 목적이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순수함에 있지 않았고 단순히 살인의 쾌감을 얻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자학과 타락의 길을 걷던 나에게 사부님께서 찾아오셨다. 그분은 나의 잘 못을 준열히 문책하셨다. 그분의 앞에 선 나는 커다란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사검평은 읽기를 중단하고 경이의 빛을 떠올렸다. 알고 보니 광검수재 척금송은 바로 천 공금성 사마등의 문하가 아니었던가? 지난날 자신은 사마등에게 일패를 당하였고 오늘은 다시 그 제자의 손에 의해 구명받다니…… 실로 야릇한 인연이었다. 그는 착잡한 심경으로 혈서를 다시 읽어 내려갔다. <사부는 극도의 자책감에 빠진 나에게 그간의 모든 죄를 갚고도 남을 유일한 방법을 알려 주셨다. 앞으로 강호에는 피할 수 없는 겁란이 닥쳐 올 텐데, 그 겁란을 막을 자는 오직 사검평뿐이니 그를 보호함에 나의 몸과 마음을 다하라 하셨다. 한데 사검평 은 사부께 깊은 원한을 지니고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결코 이 사사로운 원한 따위에 연연 하지 말라는 당부이셨다. 이어 사부님께서는 무림에 밀어닥친 위기에 관해 나에게 말씀해 주셨다. 당금 강호에 불어 닥치는 위기는 남해문과 그의 주구(走狗)인 벽혈신군에 의해 저질러지 고 있다. 그러나 역시 가장 무서운 인물은 남해문의 문주 남해천룡인 바, 당금 무림에서 그와 맞서 격패시킬 수 있는 고인은 오직 황산신니 한 분이시다. 사실 삼십 년 전 남해천룡이 강호에서 사라졌던 것도 표면적 으로는 천하에 적수가 없음을 구실로 내세웠으나 실인즉, 황산신니와 격돌하여 그분의 절학에 굴복했던 것이 진정한 속사정이었다. 남해천룡이 이제 다시금 중원에 그 모습을 나타낸 것은 암중 황산신 니와 대적하여 승산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 짐작이 사실이라면 중원무림은 실로 걷잡을 수 없는 공전절후의 혈겁에 싸이리라! 이 전율 의 공포에서 천하를 구할 사람은 오직 사검평뿐이니, 이는 그가 천지합교(天地合交)의 현상을 지니고 있는 외에도 노부가 그에게 주천금단을 복용시켰기 때문이다.> 광검수재 척금송의 혈서 내용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사검평은 격동을 금 치 못하여 도저히 더 이상 읽어 내려갈 수 없었다. 천공금성 사마등이 자신에게 주천금단을 복용시켰다니, 대체 그런 일이 언제 있었는지 믿지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다음으로 이어지는 혈서의 내용 중에는 천공금 성 사마등이 말했다는 사 년 전의 상황이 너무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과연 그때의 상황은 혈서의 내용과 일치했다. 동시 에 그 내용 중에는 얼마 전 사마등과 자신이 격돌하였던 일마저 있었다. 하여 사검평은 이 내용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었다. 그의 가슴에 만가지 감회가 착잡하게 어리었다. <사검평의 체내에서는 이제야 주천금단의 신효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하여 만일 사검평 이 황산신니의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이미 체내에 잠복되어 있는 모든 신효를 능히 격발 시킬 수 있을 것이니, 그 위에 황산신니의 일신절학을 물려받는다면 실로 천하대란을 구할 유일 한 인재로서 능히 대성하리라. 너는 목숨을 바쳐 그를 보호하라. 이 일만 이룬다면 네가 지은 사문에 대한 죄과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실패도 능히 회복하 고 남음이 있으리라…… 나 광검수재 척금송은 사부 앞에서 기필코 이 사명을 완수하리라 맹세하였다. 하나, 나의 정성이 부족하였음인가! 나는 이제 더 이상 사명을 완수하기 어려운 입장이 되었다. 나는 벽혈신군에게 쫓긴 나머지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고, 불행중다행으로 중턱의 노송에 걸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기는 하였으나,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이것마저 부러지려 함에 실로 죽음을 목전에 두었다. 죽음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이곳은 만길 벼랑의 중턱, 천행으로 여기에서 수십 장쯤에 있는 동혈 하나를 발견하였다. 상처 입은 몸인지라 두 생명 이 모두 살아날 길은 없다. 하여 나는 최후로 내 생명을 바쳐 기꺼이 그대 사검평을 살리려 하니 이 뜻을 헤아려 무림의 혈겁을 반드시 해결해 주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부탁하니, 그대 사검평이 후일 천하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대업을 성취한다면 벽혈옥봉 유옥선을 만나 진정으로 그녀가 행복해지길 빌었다고 전해 주기 바란다.> 아아! 알고 보니 이것은 광검수재 척금송이 사검평을 살리고자 자신을 희생하기 직전, 최후 의 당부를 남겨 놓은 피의 기록이 아닌가? 이 모든 사실을 읽고 났을 때, 사검평은 가슴이 찢어지도록 비탄에 젖었다. 그는 이제야 모든 진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광검수재 척금송…… 나는 그의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잃었던 무공을 되찾 아 기필코 천하겁란을 구하리라!” 사검평은 굳게 맹세하였다. “척 형! 우리 둘이 비록 살아생전에는 깊은 우의를 갖지 못했으나 이 은혜는 영원히 잊지 않겠소!” 그때 사검평은 자신의 출현으로 인해 옥면룡검 남궁학과 유옥선 사이에 오해가 일어났음을 상기했다. “척 형의 마지막 유언을 생각해서라도 나는 그녀의 행복을 끝까지 지켜 주리라!” 사검평은 비원의 혈서를 품속 깊이 갈무리하며 이곳에서 벗어날 방도에 대해 궁리하기 시 작했다. 하나 무공을 잃은 지금, 깎아지른 듯한 절애의 중간에서 무슨 수로 빠져 나갈 수 있단 말인? “아아, 실로 낭패로다!” 사검평은 깊이 탄식해 마지않았다. 그때 그는 심한 배고픔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이미 며칠이나 굶주리고 있었던 것이다. 소용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본능적으로 사방을 둘러보던 그는 문득 한 가지 의혹을 품었 다. 본시 이곳은 자연적으로 생성된 동굴인 것 같은데 우연히도 기이한 점을 발견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끼 덮인 암석의 한쪽 벽면에 선명한 연꽃 문양이 있었던 것이. “이러한 절동에 정교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니…… 그렇다면 이전에도 그 누군가의 발길 이 닿았었단 말인가?” 정녕 의아한 일이었다. 하여 사검평은 가볍게 한번 벽면을 두들겨 보았다. 순간 석벽이 물러나며 그 안에 또 하나의 석실이 나타나지 않겠는가! 사검평은 자신도 모르게 그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석벽은 다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사 검평은 흠칫했지만 이내 석실 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자연히 생성되었던 동부에 누군가가 인공을 가미한 듯 돌 침상과 석탁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천장에는 오리알만한 야명주가 박혀 석실 안을 밝히고 있을 뿐, 그 외에는 별다른 것이 없었다. 사검평은 다시 석실 벽면을 살피기 시작했다. 하나 이곳에도 역시 밖으로 통할 만한 출 구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석탁 한 귀퉁이가 우뚝 솟아 있는 것을 보았다. 문득 사검평은 뇌리 속에 한 가지 생각을 굴렸다. “조금 전 이 연꽃 문양을 만졌더니 석벽이 열렸다. 그렇다면 이것 역시……” 사검평이 앞으로 다가가 우뚝한 부분을 이리저리 만졌을 때였다. 석탁이 돌연 빙그르르 돌아가며 옆으로 물러나고 그곳에는 하나의 옥갑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검평은 그 옥갑을 꺼내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 속에서는 낡은 양피지 책자가 들어 있었는데…… “앗!” 사검평은 경악해 마지않았다. 第 二十三 章 태양광휘비급(太陽光輝秘 ) 1 옥갑에서 꺼낸 양피지의 표지에는 용봉이 날아가는 듯한 필체로 ‘태양광휘비급(太陽光輝 秘 )’이라 쓰여 있었다. ‘그렇다면 이것이 바로 적양신군이 남겼던 그 희세의 비급이란 말인가?’ 그는 지난번 하남성 북방 관도에서 만났던 천면환영인의 얘기를 떠올렸다. 그러나 절벽에 서 떨어지기 직전 천면환영인이 벽혈신군의 또 다른 분신이란 사실을 듣게 되었던 사검평으 로서는 그의 말을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그 얘기 그대로였으니 믿지 않을 도리도 없지 않는가? 급히 비급을 꺼내던 사검평은 그 아래 또 다른 양피지 한 장이 있음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글을 읽는 자는 나 적양신군과 인연이 있는 자임을 명심하라! 나 적양신군은……> 이후 이어지는 내용은 사검평이 벽혈신군의 화신인 천면환영인으로부터 들었던 얘기와 대략 동일했다. 다만 그 후의 내용은 벽혈신군도 미처 몰랐던 것이었다. 하여 사검평은 강렬한 호 기심과 함께 급히 읽어 내려갔다. <그 후 본 신군은 나의 절학을 전수해 줄 전인을 찾았으나 끝내 만나지 못하였다. 하여 여기 글을 남기니 이 글을 처음으로 보는 자가 바로 본 신군의 진전을 이어받을 전인의 인 연이 있는 자이다. 본 신군은 나의 전인이 나와 같은 좌절을 당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하여 경고하노니, 이 글을 읽는 자여! 네가 만일 스스로 절세의 기재라고 자부하거나 천하제일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면 절대 태양광휘비급을 익히지 마라. 만일 나의 전인이 위의 자격을 갖춘 자라 할지라도 그가 비급을 익히고자 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제껏 지녔던 모든 무공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결심이 선 자라면 즉시 옥갑에 아홉 번 절하여 본 신군을 사부로서 모 시는 예를 올려라. 그러면 그대는 나의 모든 진전을 이어받을 자격이 생긴다. 하나 만일 그 렇지 않은 자는 아예 옥갑을 취할 생각을 포기하고 즉시 이곳 태양성부(太陽聖府)에서 떠나라.> 마지막에 ‘적양신군 유필’이라 서명이 쓰여 있었다. 사검평은 격동했다. 결국 자신이 무공을 상실했던 것이 전화위복이 되어 적양신군이 남긴 바대로 태양광휘신공을 익힐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조건을 경비한 셈이 되는 것이다. 적양신군이 남긴 글대로 태양광휘비급상의 절학이 그토록 비할 데 없이 고절한 것 이라면, 자신이 그것을 익힌 후 남해천룡과 당당히 일전을 겨루어 천하무림을 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무한한 갈등 속에 휘말려 있었다. 자신에겐 이미 사부 염라천존이 있지 않는가. 그런데 만일 자신이 사문의 은혜를 배반하고 다른 사부를 모신다 면…… ‘아니 될 일……’ 사검평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도리가 아 닌 것이다. “내 비록 이곳에서 젊은 생애를 마치는 한이 있더라도 눈앞의 이(利)에 눈이 어두워 사문 의 은혜는 저버리는 행동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사검평은 태양광휘비급과 양피지를 옥갑 속에 넣고 뚜껑을 덮었다. “후배에겐 선배님의 인연이 닿지 않아 선배께서 남기신 절학을 이을 수 없음을 용서하십 시오. 만일 하늘이 선배님의 유학을 진정으로 강호를 위해 쓰려 한다면 훗날 다른 인재를 보내어 선배님의 유훈을 대하게 할 것입니다.” 그가 애써 처연한 심중을 누르고 몸을 돌리려 할 때였다. 꾸르릉! 돌연한 굉음에 사검평은 흠칫 놀라 홱 몸을 돌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옥합이 얹혔던 석상이 소리도 없이 반 장 가량 물러나 있지 않겠는가! 석상이 있던 바닥엔 지력(指力)으로 쓴 필체가 뚜렷이 드러났다. 사검평은 그 글 씨를 읽어 내려갔다. <그대의 심성이 의(義)를 중히 여기고 사문을 지키려는 마음이 지극하여 화를 면했도다. 만 일 그대가 살 길에 눈이 어두워 옥합을 향해 구배지례를 올렸거나 욕심을 내어 옥합을 들고 나가려 했다면, 이곳 태양성부는 붕괴하여 그대를 가두었을 것이다. 이것 은 본 신군의 절학이 이대로 유실(流失)되는 한이 있더라도 의롭지 못한 인물의 손에 들어 가 천하를 어지럽히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 그대는 본 신군의 유지(遺志)에 부합되는 인물이어서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본 신군은 구태여 사도지연(師徒之緣)을 고집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오직 본 신 군의 유학으로 강호정의를 일으킬 것을 맹세하고 그것을 행함에 어긋남이 없으면 될 것이다. 사실 이 석실에 있는 비급은 태양광휘비급의 사본에 불과할 뿐, 진본(眞 本)과 본 신군이 목숨을 걸고 얻은 만년화구(萬年火龜)의 내단은 이 석실 후면에 있는 본 신군의 연공선부(練功仙府)에 있도다. 이제 그대는 본 신군의 모든 것을 취하라.> 사검평은 감격했다. ‘후배 사검평은 선배님의 높은 뜻을 강호에 펼칠 것입니다.’ 그가 감동에 몸을 떠는 사이 맞은편 석벽이 열리고, 그 안에서 눈부신 광채가 뻗쳐 나왔다. 거대한 석실의 사면엔 눈부신 보석을 박아 놓은 듯 야광주(夜光珠)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사검평은 격동이 이는 가슴으로 그 앞에 섰다. 이것이 바로 일세의 괴걸(怪傑)이었던 적양신군이 이룩해 놓은 별유선부(別有仙府)요, 천하를 다스릴 절세의 무학이 소장되어 있는 곳이다. 사검평은 갑자기 끓어오르는 강물처럼 일어나는 격동을 자제할 수 없었다. “보아라! 염라서생이 다시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는 날, 악의 무리는 강호에서 사라질 것 이며 사불침정(邪不侵正)의 이상만이 광명(光明)처럼 천하에 가득할 것이다.” 그는 감격의 외침을 등뒤로 남긴 채 빨려들듯 선부 안으로 사라졌다. 하늘이 내린 기재라 일컬어지던 사검평, 그는 의(義)와 신(信)을 지켜 이렇게 적양신군과 인연을 맺었다. 이제 이곳 태양선부의 석문이 다시 열리는 날, 강호엔 일진풍운이 몰아칠 것이다. * * * 하늘은 푸르고 햇살은 부드러웠으며 대지에 뿌리는 비는 적당하였다. 이만하면 평화롭다 해도 좋지 않은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무림대사에 뜻있는 몇몇 고인들은 이것이 폭풍전야의 고요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염라서생과 시비를 가린다는 명목으로 남해문이 다시 강호에 진출하려 한다는 사실을 그 들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데 염라서생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는 지금 그 누가 있어 남해문을 막 을 것인가. 이러한 때에 강호를 진동시키는 또 다른 소식이 있었으니, 지난 십 년간 좀처럼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천학보가 정식으로 강호에 나선 것이다. 천학보의 출현과 함께 더욱 강호인들을 놀라게 한 것은 천학보의 보주인 창천일학 진청운의 선포였다. 그것은 다가오는 중추절에 십 년 전 자신에게서 불영옥패와 한 권의 비급을 훔쳐 사라졌던 팔괘신도 두상은을 처벌한다는 것인데, 전무림인들의 좌시하에 천학보에서 오마분시(五馬分屍)의 참형에 처한다는 거였다. 무림사대세가 중의 하나로 지난 이백여 년간 뛰어난 명성을 떨치다 홀연 사라진 천학보가 다시 강호에 모습을 나타내니 강호는 크게 술렁거렸다. 왕년에 뛰어난 명망으로 강호의 신망을 얻었던 천학보. 그것을 아직도 염두에 두고 있는 강호인들은 그들의 등장으로 정파세력이 한층 든든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천학보에서 공개 처형하겠다고 발표한 팔 괘신도 두상은은 얼마 전 염라서생 사검평이 그 누구도 그에게 손댈 수 없다고 선포했던 인 물이 아닌가. 그렇다면 어찌 되는가? 천학보의 이러한 발표는 염라서생 사검평의 선포에 대한 도전적 의 미를 가지는 게 아닌가? 천학보는 염라서생의 노여움 같은 건 염두에도 없단 말인가? 강호에 이런 의혹들이 장강의 물결처럼 휘도는데도 염라서생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자 드디어 강호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기 시작했다. 사검평은 이미 고혼이 되었을 것이 라는 소문이 점차 신빙성을 얻는 것이었다. 드디어 중추절은 왔다. 푸르던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더욱 짙푸르고 높아졌다. 바람은 적당히 서늘했고, 짙푸르던 녹엽의 싱그러운 내음은 가시고 없었다. 그러나 아직 황금의 들판은 아니었다. 울긋불긋한 단풍잎 속에도 아직 녹색(綠色)은 남아 있었고 엽맥(葉脈)은 싱싱하였다. 그런데 강호인들은 이 가을에 한 사람의 처참한 죽음을 기대하고 있었다. 항산(恒山), 녹우평(綠雨坪)의 넓은 분지에는 수많은 무림인들이 몰려 있었다. 천학보가 선포한 그 끔찍한 처벌의 날이 바로 오늘인 것이다. 그들은 왕년의 세력가(勢力家)인 천학보가 과거의 그 위용으로 팔괘신도 두상은을 오마분시 의 참형에 처하는 것을 보려는 것이다. 녹우평 전면에는 천학보의 웅후한 건물이 서 있었다. 드높이 달린 현판이 번쩍이니 그 위용이 바로 천학보의 위세였다. 천학보에선 그들이 벌이는 팔괘신도의 처형을 보려 몰려든 무림인들을 위해 수백여 장에 이르는 넓은 녹우평 분지를 개방했다. 녹우평 사방에는 수많은 좌석이 마련되어 있었고 천학보의 많은 제자들이 나와 직접 안내를 맡았다. 이로 보아 천학보는 오늘의 이 자리를 빌려 십 년 전의 명성과 광명을 다시 과시하려는 것 같았 다. 둥둥둥! 드디어 정오(正午). 녹우평에 모인 강호인들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구파일방의 수뇌들을 비롯해 강호에 명성 높은 명숙(名宿)들의 모습도 있었다. 이로써 이번 일을 빌미로 지난 십여 년 간의 공백을 뛰어넘어 옛 명성을 되찾으려는 천학 보의 기도(企圖)는 일단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드디어 녹우평의 넓은 공지에 마련된 형장(刑場)에 전신이 겹겹으로 포박된 팔괘신도 두 상은의 모습이 나타났다. 과거의 위엄있던 뛰어난 자태는 찾을 수 없었다. 얼굴은 깡마른 채 핏기없이 창백했고 머리는 풀어져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야윈 체격에 눈빛마저 생기없이 빛을 잃으니 매우 초췌한 모습이었다. 조금도 분노하거나 저항하는 빛은 없었고 모든 걸 체념한 듯 비틀거리면서도 때때로 눈을 감았다. 천학보 제자들에 의해 그는 형장 한가운데 눕혀졌다. 녹우평 구석에 매여져 있던 다섯 필의 말이 이끌려 왔다. 윤기 흐르는 털과 탄탄한 근육, 보기 드문 준마들이었다. 천학보 제자들은 빠른 손 놀림으로 말에 연결된 줄을 팔괘신도의 사지(四肢)와 목에 묶었다. 군웅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한때 뛰어난 실력으로 강호를 누비던 팔괘신도를 저렇게 처형해야 한다니…… 그의 처형 방법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빛들이 역력했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천학보 제자들은 일을 마치고 들어갔다. 이제 남은 건 보주인 창천일학 진청운이 나타나 그의 죄를 이 많은 군웅들 앞에 낱낱이 열거하고 고개 끄덕임 한 번으로 명령을 내리는 일뿐이었다. 한데 한 시진이 지나도록 보주는 나타나지 않았다. 군웅들의 불평이 고조되어 갔다. 창천 일학뿐 아니라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옥면금선 진가락까지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군웅들이 곳곳에서 술렁이기 시작할 때였다. 주위에 시립해 있던 천학보의 고수들이 힘찬 함성을 질러 냈다. 그와 동시, 천학보의 보주와 옥면금선 진가락이 모습을 나타냈다. 군웅들은 불평을 잊고 그들 부자의 모습을 보려고 고개를 쳐들고 안광을 돋우었다. 변함없 이 늠름한 자태, 거만하리만큼 전면만 직시하는 눈매. 그런데 그들 뒤를 한 명의 절세미소녀가 뒤따르는 것이었다. 십칠팔 세 가량 됐을까? 보기 드물게 아름다움 용모인데 앞에 선 창천일학 부자와 달리 약간 상기된 얼굴이었다. 그들 세 사람은 이곳 녹우평에 마련된 높은 좌대로 가지 않고 나는 듯이 형장으로 향하는 게 아닌가. 군웅들은 놀라 일제히 눈이 크게 벌어졌다. 화려한 금포를 날리며 형장에 내려선 창천일학 진청운은 격동에 찬 얼굴로 팔괘신도를 내 려다보았다. 팔괘신도는 초조한 모습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살고자 하는 버둥거림 같은 건 없었다. 다섯 필의 말들은 명령이 떨어질 시기라고 느꼈는지 푸르릉, 울어대며 말갈기를 세웠다. 그런데 팔괘신도를 내려다보던 창천일학이 갑자기 격동에 찬 목 소리로 부르짖는 것이었다. “두 형!” 그 소리에 팔괘신도가 눈을 번쩍 떴다. 그러나 아무런 감정도 깃들이지 않은 시선으로 그 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내게 더 무슨 볼일이 있느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창천일학은 갑자기 그를 향해 소매를 떨쳤다. 그러자 팔괘신도의 몸을 묶었던 단단한 가죽 끈이 모조리 잘려 나가지 않는가? 이 돌연한 사태에 군웅들뿐 아니라 천학보 제자들까지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팔괘신도도 영문을 몰라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찌 된 일인가?” “두 형, 노부의 잘못을 용서하시오.” 그 소리에 팔괘신도의 눈이 번쩍 빛났다. 비로소 그는 뭔가 일이 다르게 돌아가고 있음을 느끼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뒤에 서 있는 소녀에게 눈길이 닿았다. “너는 선아가 아니냐?” 창천일학 뒤에 무한한 감회에 젖어 상기된 얼굴로 서 있던 소녀는 천마문의 유일한 혈육이 던 용군선이었던 것이다. 용군선은 그의 앞으로 다가오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비로소 팔괘신도 는 그녀로 인해 자신이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지게 된 것을 깨달았다. “두 형, 모든 것이 오해였소. 과거 두 형이 노부에게 행했던 것이 모두 본 보와 천마문을 구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용 소저에게서 듣고서야 알았소.” “허허……” 팔괘신도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옷을 툭툭 털었다. “하마터면 시체도 온전히 남기지 못할 뻔했구려.” 조금도 노엽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창천일학은 더욱 감동하여 목청이 떨렸 다. “두 형, 우선 자리를 옮겨 얘기합시다.” 그는 팔괘신도를 형장의 맞은편에 마련된 높은 주빈석으로 인도했다. 군웅들의 술렁임은 말할 수 없었다. 창천일학은 해명을 하기 위해 높은 단 위에 올라섰다. 그의 입에선 팔괘신도를 오마분시에 처한다는 것만큼이나 충격적인 말들이 흘러나왔다. 십 년 전, 천마문에서 일어난 혈겁은 남 해문의 사주를 받은 한 인물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그 이름을 밝힐 수 없으나, 미구에 그 정체가 천하에 공포될 것이오.” 그러더니 창천일학은 갑자기 만면에 밝은 빛을 띠며 말을 이었다. “본 보주에게 이러한 사실을 말해 준 사람은 바로 강호에서 신비하게 실종되어 여러분들 을 실망시켰던 염라서생이었소.” 아! 염라서생이라니…… 군웅들이 크게 놀라 탄성을 지르며 일시에 밝은 웃음을 머금고 서로 마주보았다. “염라서생은 자신이 다시 강호에 나타난 이상 악의 무리는 뿌리째 제거될 것이며, 남해문의 흉도들은 절대 중원무림을 넘볼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는 떠나갔소.” 이어지는 창천일학의 말에 군웅들은 요란한 환호성을 터뜨렸 녹우평에 모인 군웅들은 갑자기 활기를 되찾았다. 이제 강호는 다시 생기를 되찾아 처처에서 염라서생을 부르짖는 소리가 높을 것이다. * * * 진회하(秦淮河). 아름다운 이 강은 동백산(東白山)에서 발원하여 홍택호(洪澤湖)에 머물렀다 강소성(江蘇 省)의 소주(蘇州)로 그 긴 행렬을 마무리 짓는다. 소주는 예로부터 항도로서 크게 이름을 날렸고 갖가지 문물들이 번성하기로도 유명했다. 풍류를 즐기는 천하의 한량객들이 한 번쯤은 이곳을 거쳐 갔으며 그들은 다시 한 번 찾기를 열망하였다. 진회하의 밤은 오색 찬란한 등불로 불야성(不夜城)을 이룬다. 요란한 유람선들의 행렬 때 문이었다. 이 호화로운 유람선들은 모두 강상기생(江上妓生)들의 희망이었다. 수중의 기루(妓樓)이자 환락가인 것이다. 그 그림처럼 아름답고 화려한 화방들은 천하각지에서 몰려든 풍류객들을 싣고 수중의 무 릉도원을 향해 강상으로 미끄러져 간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온갖 미주(美酒), 천하각지의 기막힌 요리들만 올려지는 산해진미, 거 기에 선계의 여인인 양 화려하게 치장한 절세여인들의 교소가 있으니 어찌 천하의 풍류객들이 이곳을 동경하지 않겠는가? 꿈의 요람인 진회하에 밤이 왔다. 하늘은 검푸르게 보였고 삼경무렵의 달은 중천에서 구름 을 허리에 감은 채 고고히 빛났다. 무수한 별들이 영롱한 빛을 발했다. 강변의 바람은 서늘했고 때로 강 저편 기슭의 갈대숲에서 풀 냄새를 싣고 오기도 했다. 강변에 준미한 백의서생이 모습을 나타내었다. 눈부신 백포 자락을 가볍게 나부끼며 강변을 따라 유유히 걷고 있는 그는 사검평이었다. 태양성부에서 적양신군의 유학을 익히고 강호에 나왔을 때, 그가 제일 먼저 들은 소식은 천학보주가 팔괘신도 두상은을 오마분시 참형에 처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그는 비밀리에 천학보주를 찾아가 과거의 천마문 혈겁의 진상을 밝히고 현강호에 닥친 위기 를 설파했다. 천학보주는 처음엔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십여 년 동안 증오하고 저주해 온 상대가 오히려 자신의 은인이었다니, 기가 막힐 일이 아닌가? 그러나 염라서생이 동반해 온 용군선을 본 순간, 철벽 같던 그의 의심은 일시에 무너져 내렸다. 용군선은 천마문주였던 천마비상 용태린의 일점 혈육으로 그들 사이엔 일찍이 진가락과 그녀를 맺어 주기로 언약이 있었던 것이다. 용군선은 천학보의 고수들에 의해 잡혀간 팔괘신도가 처형당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를 구출하기 위해 암중에 천학보의 포위망을 뚫으려 했다. 그때 사검평의 도움을 얻어 함께 천학보주를 만나게 된 것이다. 본시 팔괘신도는 암중의 흉수인 벽혈신군 유천화의 수하로, 그의 야심을 알고는 이를 막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릴 결심을 했다. 그래서 그는 친구인 천마문주와 천학보주를 위해 계교를 꾸몄던 것인데, 천학보주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도 늦으나마 오해를 풀어 냄으로써 죽음 직전에 팔괘신도를 구할 수 있었으니 다행이 었다. ‘이제 남은 건 벽혈신군으로부터 천마문 혈겁에 대한 보상을 받아 내는 것이다!’ 하나,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내던진 척금송, 그가 남 긴 유언을 행해야 하는 것이다. 광검수재는 자신으로 인해 유옥선이 불행해지는 것을 가슴 아파하고 있었다. 사검평은 쓴 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불행을 재촉한 것이 어디 광검수재뿐이었던가? 비록 오해였다 해도 자신으로 인해 남궁학이 더욱 그녀에 대한 불신을 품지 않았던가…… ‘이제 나는 남궁 대협을 일깨워 그녀의 행복을 되찾아 주어야 한다!’ 소식을 들으니 남궁학은 절망하여 이 진회하의 환락 속에 스스로 몸을 던져 폐인이 되기를 자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검평은 진회하에 떠 있는 화방들을 묵묵한 눈길로 응시하더니 홀연 한 가닥 백선으로 화해 수면 위로 치솟았다. 진회하에서 가장 크고 호화로운 화방. 진회하의 풍류공자라면 이 화방의 주인이 일대 가화(佳花)인 청란(靑蘭)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녀는 이곳 진회하 제일의 명기였다. 그녀의 배에는 손님을 부르는 채홍등(彩紅燈)이 꺼져 있으니 이미 손님이 있는 것이다. 화려한 화방 안에는 젊은 금의공자가 커다란 잔에 따른 벽옥주를 물 마시듯 들이키고 있었 다. 그 옆에서 요염한 미소를 머금은 여인…… 수정 같은 커다란 눈망울엔 애절함과 그리움이 깃들여 보는 이의 간장을 녹이는 듯했다. 그녀가 바로 청란이었다. 언뜻 보아선 고아한 자태를 느끼게 하나 붉은 입술을 오므리고 눈웃음을 살짝 머금으면 그녀의 미색은 양귀비같이 요염해진다. 때로는 명가의 규수 같고, 때로는 빙설의 여왕처럼 싸늘한 미색을 발휘하고, 때로는 음란함에 길들여져 몸을 비트는 탕녀와 같으니…… 한번 그녀의 미색에 빠져 버린 풍류객은 헤어나기 어렵고, 떠나서도 일평생 그녀를 열망 하게 되는 것이다. 청란은 금의공자를 바라보며 천상의 옥음(玉音) 같은 맑은 소리로 웃었다. “호호…… 상공, 이렇게 독한 벽옥주를 폭음하시다간, 이 청란의 화방에서 고혼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걸 잊으셨나요?” 금의공자가 취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핫…… 나 옥면룡검 남궁학이 진회하의 명기 청란의 무릎에서 고꾸라질 수도 있단 말이지?” 그는 주위가 떠나가도록 요란하게 웃더니 처연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게 차라리 내게 어울리는 죽음일지도 모르지. 하핫……” 미친 듯이 웃다가 그는 갑자기 술을 따르고 있는 청란의 옥수를 홱 낚아챘다. “이 남궁학의 주량이 망망대해는 이르지 못하나 도도히 흐르는 장강과는 겨룰 만하니, 이 까짓 벽옥주 몇 말에 내가 죽는대서야 말이 되겠느냐?” 눈의 초점은 흐리고 취기가 오른 탓으로 그의 음성은 벌써 힘을 잃고 있었다. 교태로운 미 소를 머금던 청란이 녹아들듯 그의 품속으로 안겨 들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상공께서 소첩을 그렇게 겁주시다니…… 싫어요! 소첩은 상공께서 제 곁을 떠나시게 되 는 것이 두렵단 말이에요.” “이 남궁학이 죽으면…… 청란, 너는 슬퍼할 테지만 미친 듯이 기뻐할 계집이 하나 있다. 그 계집은……” 옥면룡검 남궁학, 그는 유옥선을 말하려는 것이었다. 그가 아무리 증오와 저주의 말을 그녀 에게 퍼붓는다 해도 여전히 가슴은 무너지는 듯이 아플 것이다. 그녀에 대한 수모를 갚는다 해도 애처인 유옥선으로 하여 입은 마음의 상처는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것이다. 이에 그는 스스로를 학대하고 저주하며 방황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그가 청란을 찾은 지 이미 보름이 지났다. 본래는 한 여인과 사흘 이상을 지내지 않는 타락공자인 그가 그녀의 매혹적인 교태에 이끌려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와 더불어 보낼수록 주량은 미친듯이 늘어, 그는 지금도 혀끝에서는 달콤하나 속으로 들어가면 내장이 뒤틀릴 만큼 독한 벽옥주를 한도 끝도 없이 들이키고 있는 것이다. 이곳 진회하에서 그는 여인을 다루는 태도가 몹시 거칠고 난폭했지만, 그의 뛰어난 용모와 드높은 명성을 흠모한 기녀들은 그를 유혹하려 애썼다. 그러나 청란은 그를 놓아 주지 않았고, 하루 중에 정신을 차릴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 남 궁학은 그녀의 미태에 홀린 채 꿈결 같은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분위기 무르익어 가는 화방 속으로 청천 벽력 같은 고함이 들려 왔다. “옥면룡검 남궁학! 그대가 이렇듯 술과 계집에 미쳐 세월을 허비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구려. 그대는 진정 백초곡에서 있었던 그 치욕의 혈투를 잊었단 말이오?” 순간 남궁학의 얼굴이 경악으로 하얗게 일그러졌다. 2 술에 만취되어 붉게 물들었던 옥면룡검 남궁학은 안색을 하얗게 가라앉히며 피를 토하듯 부르짖었다. “염라서생 사검평! 네, 네가 지금껏 살아 있었다니……” 그는 주안상을 걷어차며 벌떡 일어섰다. “놈! 죽여 버리겠……” 그러나 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사검평이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대는 언제부터 두 발을 딛고 서 있지도 못할 만큼 가련한 신세로 전락하였는가?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 사검평의 목을 기필코 취하겠노라 선언했을 만큼 기백이 당당하지 않았던가? 그 당당했던 기백은 어디로 가고 술에 찌든 폐인으로 전락했는가!” “그…… 그만! 제발 닥치지 못하겠느냐?” 남궁학은 크게 부르짖으며 나는 듯 솟구쳐 사검평을 덮쳐 갔다. 그러나 사검평의 모습이 유령처럼 사라져 버리지 않는가! 남궁학의 공격은 헛되이 허공에서 무산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완맥은 사검평의 손아귀에 쥐여져 있는 것이었다. “남궁학! 그대가 자신을 학대한 나머지 술로써 스스로를 폐인으로 만드니, 대체 이것이 누구를 위함이오? 당신은 그럼으로써 가슴속의 한을 풀 수 있으리라 믿는 모양인데, 천만의 말씀! 아무리 술로 나날을 지새워도 과거 백초곡에서 있었던 일을 여전히 잊지 못할 것이오. 또한 자신의 능력이 가슴을 찢는 과거의 혈안조차 갚을 수 없음 에 스스로 자학하고 있으나 이것이야말로 남아로서 가장 비열한 것이오. 남궁학, 당신은 어 찌하여 그럴수록 더욱 자신의 힘을 길러 기어이 제 손으로 혈안을 갚을 생각을 하지 않소?” 그 말에 남궁학이 마치 벼락을 맞은 듯 부르르 떨었다. “염라서생 사검평, 더 이상 치욕스럽게 하지 말고 어서 나를 죽여라! 다만 죽어서도 이 원한은 잊지 않고 기어이 갚고야 말리라!” “으하하하……” 사검평이 앙천 대소로써 응수했다. 이어 그는 더욱 싸늘히 비웃었다. “정녕 한심하도다! 그러고 보니 당신은 스스로 죽을 용기조차 없는 졸렬한 자가 아닌가?” 사검평은 실로 잔인하리만큼 그를 공박했다. “흥! 당신은 스스로 벽혈옥봉 유옥선이 당신을 배반하고 외간남자와 통정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나, 이는 정녕 그녀를 모독한 것이었소! 당신이 만일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하여 믿고 있었다면 감히 그런 일을 당신 입에 올릴 수나 있었겠소?” 이 말에 남궁학의 얼굴이 푸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염라서생 사검평! 나는 네가 나 남궁학보다 확실히 뛰어난 인물임을 솔직하게 인정한 다. 하나 네가 남의 부부지정까지 왈가왈부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 대체 네가 무엇을 알고 있느냐? 지난날 그녀가 나와 혼인하기 전에 이미 광검수재 척금송과 정분이 있었음을 나는 확실히 알면서도 눈감아 혼인하였다. 왜냐하면 그녀를 너무도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도 그녀의 마음이 나에게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꼬박 지난 육 년간의 세월을 보냈었다. 그러나 결과는 어쨌느냐? 혼인한 지 육 년 동안 단 한 번도 남편의 동침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아내를 둔 자의 비애가 어떤 것인지 너 는 아느냐? 또한 사랑하는 부인을 옆에 두고 그녀를 뜻대로 할 수 없는 남편의 처지가 어떠 한 것인지 너는 짐작할 수 있단 말이냐?” 사검평은 한 가닥 가벼운 탄식과 함께 말투를 바꿔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그대의 마음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소. 하지만 당신이 만약 부인을 진정으로 사랑 했다면 끝까지 그녀의 결백을 믿었어야 했소.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복하는 길은 바로 용서뿐이오. 당신이 진정 부인을 사랑했다면 바로 지금 이때야말로 당신이 먼저 그녀에게 사랑을 베풀어 야 할 진정한 기회라고 생각되오.” “염라서생, 더 이상 나를 조롱치 마라. 나는 결코 더 이상 치욕을 감수하지 않겠다!” 사검평은 움켜쥐었던 남궁학의 완맥을 놓아 주며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남궁학! 소생이 당신에게 강호의 커다란 음모 한 가지를 알려 주겠소!” 남궁학은 의혹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사검평을 바라보았다. 사검평은 안색을 엄숙하게 굳히며 광검수재 척금송이 자신에게 남겼던 혈서를 남궁학에게 건네 주었다. 남궁학은 짙은 의혹의 빛을 띠며 그것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 혈서를 읽어 내려가던 남궁학의 두 눈은 점점 커졌다. “그, 그럴 수가……?” 정녕 혈서에 담긴 내용은 엄청난 비밀의 진상이어서 남궁학으로 하여금 분노를 금치 못하 게 하였다. 점점 더 읽어 내려갈수록 그는 금방이라도 눈알이 튀어나올 듯한 형상이었다. 마 침내 그는 혈서의 모든 내용을 읽고는 부르르 전율해 마지않았다. “사…… 사검평, 그대가 나에게 이처럼 엄청난 비밀을 알려 주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 냐?” 사검평은 담담한 어조로 말하였다. “남궁학! 그 이유를 몰라서 물으시오? 당신이 방금 이 한 장의 혈서에서 보았던 대로 벽 혈신군 유천화야말로 구천지옥에 떨어져도 그 죄를 씻지 못할 강호의 공적(公敵)이오. 하여 그의 최후가 극도로 참혹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오. 그러니 그 아비의 죄로 인해 당신의 부인은 얼마나 깊은 상처를 입겠소? 천하에서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위로해 줄 사람은 오직 남편인 당신뿐이오. 가장 괴롭고 고통스러울 때 곁에 있어 주며 그 고통을 함께 나누는 거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지 않으시 오?” 남궁학은 갑자기 앙천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사실 나와 유옥선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정혼한 사이였소.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두 가문의 번창을 위한 정략적 안배에 따라 이루어졌을 뿐, 결코 우리들 자신의 뜻으로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었소. 그러나 나 남궁학은 진심으로 그녀를 생 각해 왔소. 정녕 나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단 한시일망정 가슴속에서 그녀의 생각을 잊어 본 적이 없소. 만일 내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고통 또한 이토록 크지는 않았을 것이오.” 갑자기 그는 정색하며 다짐하듯 말했다. “좋소! 나 남궁학은 지금까지 사 형이 말했던 사실을 확고히 믿겠소. 또한 사 형 앞에서 분명히 약속하겠소. 미구에 그녀가 부친의 잘못으로 인해 죄없이 강호인들로부터 손가락질 을 받을 때, 그림자처럼 그녀 곁에 있으면서 그녀를 보호하겠노라고……” “남궁 형, 당신은 진정으로 벽혈옥봉의 마음을 독차지할 만한 자격이 있소!” “사 형,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해 주겠소? 솔직히 당신은 나의 애처에 대해 어 떤 생각을 지니셨소?” 그 말을 듣는 순간, 사검평의 얼굴에는 실로 감출 길 없는 격동의 빛이 미미하게나마 스쳤 다. 하나, 그는 곧 정면으로 남궁학을 주시하며 담담히 말하였다. “좋소! 솔직히 대답하리다. 소생이 처음 남궁 부인을 본 순간, 난생처음으로 뜨거운 연정을 느꼈던 것은 사실이었소. 이는 정녕 가누기 힘든 격정이었소. 그러나 당시 나는 그분이 남궁 형의 아내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소. 어쨌든 부인은 나의 격정을 분명히 잘라 거절하시었소. 그리고 나와 양 소저 사이에 가교를 놓아 주려고 애썼을 뿐, 하늘에 맹세컨대 추호도 부덕(婦德)을 저지르지 않으셨소.” 남궁학의 얼굴에 착잡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 짐작대로 그녀는 오직 광검수재 척금송에 대한 연정일념(戀情一念)뿐 사 형과 같은 천하 절세기재까지도 그 일념을 깨뜨릴 수 없었구나……’ 그는 곧 가볍게 탄식하였다. “사실 나는 광검수재 척 형을 단 한 번 보았었는데, 그와 마치 오랫동안 우의를 다진 지 기와 같은 느낌이었소. 그것은 아마 그와 내가 모두 아내 유옥선으로 인해 정(情)과 아픔을 함께하였기 때문일 것이오. 돌이켜보면 그는 아내로부터 버림 받았다고 생각한 나머지 비탄에 잠겼으나, 나 또한 비록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이기는 하였어도 알고 보면 타인과 마찬가지였으니……” 사검평도 씁쓸히 웃었다. 사실, 그 또한 벽혈옥봉 유옥선으로 하여 그 얼마나 마음의 고통을 겪었던가! 하나 이제 모두 지난 일. 그 모든 사연일랑 과거라는 여울 속에 묻고 새 롭게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 사검평이 남궁학을 찾아온 뜻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았던가! 광검수재 척금송의 부탁에 따라 그녀의 행복을 지켜 주기 위해 남궁학의 마음을 돌려 놓았 으니 그도 이제 한숨 놓을 수 있는 것이다. 사검평의 검미가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것은 그때였다. “어느 고인이시오?” 그가 문밖을 향해 싸늘히 외치자 커다란 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하하하핫…… 노부는 이미 사 소협의 이목을 속일 수 없으리라 짐작은 하였지만 이토록 빨리 들킬 줄이야……” 말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표연히 실내로 들어섰다. 그는 바로 무영마개 유단이었다. 무영마개 유단의 출현은 실로 의외의 일이었다. “유 대협께서 어찌 이곳에……?” 무영마개 유단이 빙그레 신비로운 미소를 떠올렸다. “하하하하…… 사 소협이 비록 천하 끝까지 간다 하더라도 노부가 어찌 뒤따르지 못하겠 소?” 그 말에 사검평이 실소를 금치 못했다. “원, 유 대협께서도 별말씀을……” 그가 농담처럼 받아들이자 유단이 갑자기 정색하였다. “아니오. 노부의 이 말은 진정이니, 노부는 우연히 황산신니 노선배를 만나 그분으로부터 사 소협에 대한 말을 듣고는 항상 염두에 두어 왔소.” “황산신니? 그분이 소생에 관하여 무엇이라 하셨기에……” “그분의 말에 따르면, 사 소협이 비록 일시적으로 커다란 재난을 당할 것이나 그로 인해 복연을 얻어 반드시 그 일신의 힘으로 강호를 위난으로부터 구할 것이라 하셨소. 또한 사 소협이 재차 강호에 나온다면 틀림없이 이분 옥면룡검, 남궁학 공자부터 가장 먼저 만날 것이라고 하셨소. 하여 사실 노 부는 오래 전부터 여기에 숨어 소협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소. 하하하……” 그는 호쾌하게 웃었으나 사검평과 남궁학은 망연한 표정이었 그때였다. 돌연, 유단의 신형이 한 줄기 섬광처럼 번뜩이더니 청란의 완맥을 움켜쥐었다. 동시에 그는 창노한 음성으로 꾸짖었다. “감히 어디로 꽁무니를 빼려 하느냐?” 청란은 안색이 창백히 변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다만 귀인을 위하여 새 주화를 마련코자……” “하하…… 네가 제법 그럴듯하게 꾸며대는구나. 그러나 노부가 이미 너의 정체를 알고 있 는 이상 그따위 간계는 결코 통하지 않는다!” 남궁학은 흠칫 놀라는 표정이었다. “무영마개 선배, 대체 무슨 말씀이시오?” 유단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그대는 아직 모르고 있었던가? 청란 이 아이야말로 유천화가 암암리에 이곳에 파견시켰던 첩자라네.” “그, 그럴 리가……” 무영마개 유단이 갑자기 신색을 엄숙하게 바꾸었다. “의심할 것 없네. 노부는 이미 지난 한 달 전부터 자네의 모든 거동을 살피고 있던 중이 었네. 그러던 도중, 자네를 대하고 있는 이 아이 청란의 태도가 아무래도 이상하여 세밀하게 관찰했었네. 결과, 과연 벽혈신군의 첩자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 낼 수가 있었네.” 남궁학은 그래도 못 믿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러자 무영마개 유단이 벌컥 화를 냈다. “자네가 정 못 믿겠다면 이곳 화방 후면에 있는, 검은 취장으로 덮인 곳을 열어 보게. 그 안에는 필시 십여 마리의 전서구(傳書鳩)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네. 그녀는 이 전서구를 통하여 일일이 벽혈신군의 지시대로 자네를 상대해 왔었던 것이네.” 남궁학이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그러나 그는 오래지 않아 창백한 얼굴인 채 돌아왔다. 그의 눈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청란, 네년이 나에게 접근한 진정한 목적이 무엇이냐?” 청란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하나 그녀는 웬일인지 입만은 굳게 다물고 열지 않았다. 그때, “하하하…… 자네는 구태여 물을 필요 없네. 벽혈신군 또한 노부와 마찬가지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주변의 모든 인물들을 낱낱이 조사하고 있었던 것임이 분명하니 말일세.” 옥면룡검 남궁학은 착잡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내 주위에서 이처럼 엄청난 음모가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도 모르고 나는 매일같이 주색에 빠져서 자학이나 일삼고 있었으니…… 실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구나……’ 그때 사검평이 말하였다. “유 대협께 한 가지 여쭙겠소이다. 대협은 어떤 경위로 황산신니 노선배와 만나 소생을 찾게 되었는지요?” 유단은 청란의 요혈을 찍어 바닥에 눕힌 후 침중한 음성으로 말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지난날 백마산장에서 사검평을 처음 만났다가 헤어진 후 그를 뒤쫓기 위해 무진 애쓰다가 우연히 황산신니를 만났던 일, 천종도주 주가청의 딸 주혜군과 더불어 사검평의 행방을 찾던 일, 그리고 한 신 비인물로부터 서찰을 받아 영빈원에서 사검평을 구출했던 일, 그러나 사검평이 이미 만변선희 모용상의 음약에 의해 이성을 잃었던 일, 그로 말미암아 주혜군의 순결을 바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일 등을 상세히 털어놓았다. 이 모든 사연을 듣고 난 사검평은 아연 경악해 마지않았다. 정신을 잃었던 사이, 그토록 많은 일이 발생되었었다니…… 그는 실로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이었는지라 말조차 잊었다. 그 중에서도 사검평이 가장 경악한 것은 주천혜와의 일이었다. 의제로만 생각했던 주천혜가 여인의 신분이었을 뿐만 아니라 음약에 중독된 자신을 구하 기 위해 순결마저 희생했음은 실로 청천 벽력과 같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그 후의 일들은 무영마개 유단이 구태여 말하지 않더라도 그 자신이 능히 짐작할 수 있었 다. 그 모든 상황을 미루어 보건대 무공의 상실도 오직 벽혈신군의 음모에 의한 것임이 자명했 다. 그때 자신의 얘기를 모두 마친 유단이 궁금한 듯 물었다. “천독마수에 의해 납치된 후 소협은 어떻게 지냈소? 또한 광검수재 척 소제의 안위가 몹 시 궁금하구려.” 사검평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무영마개가 이를 보고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였다. “그에게 혹 무슨 일이라도……?” 사검평이 처연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소생이 그간에 있었던 일을 간추려 소상히 말씀드리겠소이다.” 이어 그는 자신이 무공을 잃었던 당시에 겪어야만 했던 모든 일들을 상세하게 얘기해 주었 다. 무영마개 유단은 크나큰 격동을 금치 못하였다. 이어 사검평은 통한에 서린 음성으로 말하였다. “사실 소생이 아직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광검수재 척 대형의 살신성인의 은혜가 있었으므로 가능했습니다. 만일 척 대형의 그 뜨겁고도 고귀한 희생이 없었다면 정녕 사검평은 오늘날 이렇듯 살아 숨쉬지 못했을 것 입니다.” 격앙된 어조로 말한 후,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태양성부에서 겪었던 일들을 아스라이 기억 속에 되살렸다. 당시, 사검평이 눈부신 광휘의 별유선부로 들어서자 등뒤의 석벽은 즉시 소리없이 닫혔다. 그는 그곳이 전의 석실과는 달리 매우 화려한 경관임을 깨달았다. 사검평은 바로 이곳에서 태양광휘신공의 진본비급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적양신군이 목숨 을 걸고 구해 놓았던 만년화구(萬年火龜)의 내단과 한 알의 선공단까지 얻었다. 선공단은 후인이 태양광휘신공을 익히려다가 십중팔구 주화입마를 면키 어렵다고 예견한 적양신군이 사전에 안배해 놓은 것이었다. 그러나 사검평은 이미 공력을 상실하였던지라 구태여 선공단을 복용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그는 실로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겪었으며 무수히 생사의 고비를 넘겼으나, 또한 이로 인해 무림사상 공전절후의 뛰어난 무학의 성취를 이루게 된 것이다. 어쨌든 사검평은 별유선부에 들어선 즉시, 비급상의 모든 절예를 익히기 시작했다. 태양광휘신공, 이는 정녕 경세의 무학이어서 비록 동일한 인물의 절학이나 적양신공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강했다. 사검평은 비급상의 모든 절학을 암기한 뒤 적양신군의 유지대로 옥합에 담겨 있던 오리알 크기의 내단을 복용하고 신공의 구결을 암송해 나갔다. 그러자 곧 그의 단전으로부터 신비로운 기운이 솟구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극음, 극양의 두 가지가 적절히 뒤섞인 신령한 기운이었다. 이것은 그의 몸 전체를 질풍노도처럼 순식간에 일주천하였다. 이와 동시, 사검평은 온몸으로부터 눈부신 금광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태양광휘신공이 운용되기 시작한 증거였다. 그러나 바로 그때, 그의 단전에서 한 가닥 차가운 기운이 생성되었다. 그것이 그의 전신을 감싸고 돌던 만년화구의 신령한 기운과 뒤섞이기 시작하자 무서운 고 통이 엄습해 왔다. 주화입마의 현상이 분명하였다. 이는 그가 황하에서 유벽선에 의해 구출되었을 당시 그녀가 희세의 영과 천년한매선과를 복용시켰던 일과 관계가 있었다. 사실 사검평 그 자신은 미처 모르고 있었지만 그는 이미 무형산공단에 중독되어 있었고 또한 한 가지 절세의 금제수법을 당하고 있었던지라 이 희세의 선과조차 아무 효험도 없던 상태였다. 그러나 그 효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체내에 잠재되어 있었는데, 이것이 만년화구의 내 단이 발휘하기 시작한 신령한 기운의 영향을 받아 마침내 봇물 터지듯 신효를 발하기 시작 한 것이다. 하나 태양광휘신공은 본시 만년화구의 내단이 지닌 오묘한 음양의 조화에 바탕을 두고 창 안된 것이었기에 절대로 체내의 음양조화가 깨지면 안 되었다. 한데 그 동안 잠재되었던 천년한매선과가 불현듯 신효를 발했으니 어찌 사검평이 무사하겠 는가? 두 가닥 기운이 서로 뒤엉켜 소용돌이치기 시작하자, 그는 지옥의 겁화 속에 빠진 듯한 무 서운 고통을 겪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사검평을 끝내 저버리지 않았다. 사검평이 체내의 두 상극 기운 때문에 생사기로를 헤매고 있을 때, 돌연 그의 단전으로부 터 또 하나의 신비로운 열류가 솟구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 신비한 열류는 솟구치기 무섭게 지극히 빠르고 유연하게 그의 전신을 일주천하였다. 실로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그토록 격탕 치던 체내 두 개의 상극된 기운이 이윽고 진정되더니 어느 사이엔가 하나로 모아지는 것이었다. 순간, 사검평의 전신은 감히 직시할 수 없을 만큼 신비롭게 변하였다. 처음에는 은은한 금광이 발산되더니 그것은 이내 찬란한 광휘를 발하며 그의 전신을 에워 쌌다. 정녕 주화입마로 몸부림치던 고통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이렇게 기사회생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체내에 잠재되어 있던 주천금단이 최후의 순 간에 이르러 효력을 발생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사검평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지고무상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었 다. 만년화구를 복용하고 주화입마를 당한 후 다시 지금 회복되기까지는 지극히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짧은 시각, 사검평 그는 실로 무림사상 두 번 다시 찾아볼 수 없는 절대무적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었다. 주천금단, 천년한매선과, 만년화구내단,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무림인들이 꿈속에서 조차 갈망 않는 것이 없었다. 한데 사검평은 오늘의 일에 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이 모두를 이전에 복용하고 있었으니, 이를 어찌 우연으로만 돌릴 수 있으 정녕 하늘의 오묘하고도 치밀한 안배가 아니라면 결코 이루어질 수가 없었던 일이 아니겠 는가? 하늘의 그 오묘한 섭리는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사검평이 절대무적의 경지에 이른 순간 마침내 천지합교의 신통력을 발휘하게 되었으니, 바야흐로 그는 천지의 조화에 통하고 정령(精靈)과 교감하는 경지에 이르른 것이다. 가장 먼저 그 신비의 조화를 직감할 수 있었던 것은 지난날 백초곡에서 어렴풋이 경험했던 똑같은 상황이 또렷이 재현되면서부터였다. 그는 뇌리 속이 명경지수처럼 맑아지며 깊은 명상(瞑想)의 세계로 잠겨 들었다. 이어 천고에 드문 무학진경이 그 눈앞에 그려지듯 펼쳐졌다. 만일 평소의 상태라면 제아무리 절세기재라 한들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도 얻지 못할 만한 것이었다. 한데 이 짧은 순간, 그토록 절륜 무비한 무학진경이 손에 잡힐 듯 떠오르지 않는가? 그것은 지난날 백초곡에서 잠시 떠올랐다가 안타깝게 끊어진 바로 그 신비의 무학이었다. 한데 이번에는 그때보다 더욱 완벽하게 떠올라 뇌리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실로 천하의 그 누구도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신비도식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하늘이 그에게 주신 신비의 능력은 결코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조금 전에 보았던 태양광휘비급상의 모든 절기들이 이 순간 사검평의 눈앞에서 그린 듯 펼 쳐졌고 너무도 선명히 뇌리 속에 기억되는 것이었다. 사검평은 말을 마치며 회상에서 깨어나듯 눈을 떴다. 무영마개 유단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듯 그의 얘기가 끝나고도 한동안 입을 벌려 말하지 못했다. 실내에는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유단이 긴 한숨을 토해 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사 소협은 이미 적양신군의 모든 절학을 성취하였단 말이오?” 사검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소생은 그 즉시 강호로 나올 수 있었으나 모든 절학을 좀 더 완벽히 내 것으로 소 화하기 위해 태양성부에서 한 달쯤 머물렀다가 이제야 겨우 강호에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 다.” 무영마개 유단은 비로소 제정신이 되어 감탄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눈빛으로 사검평을 바 라보았다. 옥면룡검 남궁학 또한 존경과 선망의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영마개 유단이 말했다. “황산신니께서는 남해천룡이 삼십 년 전에 스스로 강호에서 물러났던 것은 바로 자신과 대결해서 패했기 때문이라 하셨소. 당시 황산신니께서는 남해천룡에게 그가 다시 나타나지 않는 한 자신도 출현하지 않겠노라 약속하셨다고 하더이다. 그리고 과연 황산신니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으셨소. 물론 남해천룡도 그분을 두려워하여 공식적으로는 나타나지 않았소. 하나 그는 암중에 벽혈 신군으로 하여금 음모를 꾸미게 하여 호시탐탐 강호제패를 노렸던 것이오.” 이는 물론 사검평도 이미 알고 있는 바였다. 유단의 말이 이어졌다. “만일 남해문이 본격적으로 강호에 진출하면 사 소협 혼자서는 그들을 저지하기가 힘드 리라 하셨소. 하여 그분은 자신의 신표를 사 소협에게 주어 구파일방의 장문을 비롯 정사무림의 모든 군웅을 규합하여 대항하라고 하셨소.” 하며 그는 소맷속으로부터 무엇인가를 꺼냈다. 순간, 실내가 삽시간에 찬란한 광휘로 충만되었다. 그것은 바로 구공신검이었다. 일순, 사검평은 크게 격동하였다. 지난날 자신의 심장 부근에 박혀 생사기로를 헤매게 했던 일이 새삼 떠올랐다. 그것이 다시 자신의 손에 들어오다니…… “나 사검평은 황산신니 노선배의 기대에 추호도 어긋남없이, 반드시 남해문의 마수로부터 중원의 안위를 지키고야 말겠소!” 그는 불을 토하듯 힘주어 말하며 구공신검을 받아 들었다. 第 二十四 章 남해문(南海門)의 출현(出現) 1 폭풍의 전야처럼 무서운 적막만이 감돌던 강호무림이 왈칵 뒤집혔다. 그것은 바로 염라천존의 후인이 또다시 출현하였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처음엔 반신반의하였다. 그러나 염라서생 사검평이 천학보에 출현하였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강호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정중동(瀞中動)의 형세를 유지하던 무림인들이 아연 들끓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마치 일진의 평지풍파(平地風波)와도 같았다. 그에 더해 더욱 놀라운 사실이 강호 전역으로 파다하게 퍼져 나갔으니 그 소문의 내용은 이러했다.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이 비밀리에 모여 염라서생 사검평을 전무림의 맹주로 추대하였다는 것이 그 하나요, 그런 후 그들 구파일방의 정예급 고수들이 염라서생 사검평의 휘하로서 종 남산 등선곡의 벽혈궁을 기습하였다는 것이 그 두 번째였다. 그러나 천하제일궁의 위명을 떨치던 벽혈궁에는 단 한 명의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것 이었다. 이는 진정 천하를 들끓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태가 일어났다. 드디어 강호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사태가 현실로 나타나고 만 것이다. 남해문(南海門)의 출현(出現)! 이것은 정녕 두렵고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는 바로 구파일방을 비롯한 천하무림에 한 통의 괴서찰이 날아들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돌아오는 중양절(重陽節) 본(本) 문(門)은 화산(華山) 은암파(銀岩坡)에서 천하무림의 장 래를 결정할 운명의 일전(一戰)을 벌이기로 선포하노라.> 이백 년 전, 백골마교에 의해 피로 물들었던 은암파의 그 혈전장에서 오늘날 다시 남해문에 의하여 공전절후의 혈풍이 일어나려 하다니, 천하는 삽시간에 공포와 전율에 사로잡혔다. 이백 년 전에는 황산신니와 적양신군이 있어 진정 회복치 못할 혈겁에서 회생될 수 있었으 나 오늘날에는 과연 그 누가 있어 천하를 겁란으로부터 구한단 말인가? 염라서생(閻羅書生) 사검평(史劍平)! 당금 강호에서 일루(一縷)의 희망을 걸 만한 인물은 오직 그밖에 없었으니…… 염라천존의 전인이자 적양신군의 절학을 이어받은 절세의 기 오직 그만이 무림 최후의 보루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수많은 무림인들은 내심으로 과연 그가 남해천룡을 당해낼 수 있을는지 실로 못 미더워했다. 하지만 중원무림의 군웅들에게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불과 삼십 년 전에 그들이 직접 겪었던 탓으로 남해문의 무서운 힘을 너무나 잘 알고 있 으면서도, 오직 중원무림을 혈겁의 마수로부터 구하기 위해 천하인은 스스로 병기를 뽑아 들어 천하의 구석구석에는 중원무림을 지키기 위하여 의분의 불꽃이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 었다. ─`중양절이 오면 나는 싸우리라! 나의 피가 은암파의 백설 같은 암벽에 뿌려지고, 나의 뼈가 광량한 산속에 구를지언정 나 는 일신을 중원 강토를 지키기 위해 아낌없이 바치겠노라! * * * 중양절! 마침내 그 운명의 날은 밝았다. 여명이 움트는 시각! 중원오악(中原五嶽) 중에서도 가장 험준한 서악(西嶽) 화산(華山)에도 이제 막 움트는 햇빛 은 어김없이 그 밝은 빛을 비추었다. 운명의 결전장 은암파(銀岩坡)! 오악 중 가장 험준한 화산의 일부이면서도 날카로운 칼날 같은 주위의 천인단애와는 달리 이곳만은 유일하게도 드넓은 평지가 존재했다. 또한 이곳은 십여 개의 봉우리로 둘러싸인 분지이기도 하여 그 사방의 면적이 거의 천여 장에 달하였다. 그러나 평소 드넓던 천여 장의 은암파는 오늘따라 천하 각처에서 몰려든 군웅들로 하여 인 산인해를 이루어 실로 발 들여놓을 틈도 없을 정도였다. 물론 이들 중에는 오직 중원무림을 지키려는 의기 일념에서 필마단기(匹馬單騎)로 단숨에 달려왔던 의인기협(義人奇俠)들이 적지 않았다. 하나 대다수는 평생을 두고 다시 못 볼 이 희대의 무림성회를 관전코자 불원천리 온 자들 이었다. 하지만 정작 구파일방과 남해문의 고수들은 아직까지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이윽고 양광이 중천 높이 떠올랐을 때였다. “와아!” 동쪽을 가득 메우고 있던 군웅들로부터 일진 함성이 일어났다. “구파일방의 고수들이다. 그들이 마침내 출현하는구나.” 군중이 좌우로 갈라지며 사오백 명에 달하는 구파일방의 정예고수들이 의연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백의유삼에 백마를 탄 사검평이 위풍도 당당히 들어섰고, 소림장문인 오료대사(悟了大師)를 비롯하여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이 나란히 뒤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일행 중에는 대강남북 (大江南北)의 녹림고수들도 상당수 합세해 있었다. 장중의 군웅들이 저마다 탄성을 발하였 다. “아, 저 마상의 청년영웅은 바로 염라서생 사검평이 아닌가? 그리고 오료대사, 아니 대강남북을 질타하는 녹림의 고수들까지……” 본시 구대문파와 녹림 간에는 서로 경원하는 마음이 있어 좀체 자리를 같이하는 일이 없었 다. 하여 군웅들은 실로 기이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녹림도들이 합류한 것은 단지 탈명은검 주형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 녹림고수들 은 비록 평소에 강호인들로부터 멸시받는 입장이었으나 천하가 풍운에 직면한 이상, 녹림에 속한 군웅이라 해서 결코 수수방관할 수 없었기에 분연히 일어난 것이었다. 어쨌든 사검평이 이끄는 강호 구파일방의 세력은 그 신위가 하늘을 찌를 만큼 대단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 구파일방의 고수들 중에는 각파에서 오랫동안 강호의 출입을 삼가던 선배고인들까지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이번 결전의 의의는 더욱 막중했다. 이들은 천하무림의 최고 정예라 할 수 있으니 만일 이들이 패한다면 중원에는 이제 남해 문을 막을 만한 세력이 어느 곳에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염라서생 사검평은 물론, 그 휘하 모든 군웅들은 패배에 대한 일말의 두려움도 없 었다. 모든 군웅의 가슴속에는 죽음 아니면 승리만이 각인되어 있을 뿐이었다. 중원의 군웅들이 한쪽에 자리를 잡았을 때였다. “앗! 남해문의 고수들이다!” 누군가 외치는 순간, 장내의 웅성거림이 가라앉으며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싸늘 한 적막이 내리덮였다. 그러는 사이 서쪽의 인파가 좌우로 갈라졌다. 은암파, 운명의 격전장에는 이백여 명의 새로운 인물들이 나타나 장중을 압도하였다. 남해의 푸른 바닷물을 상징하는가? 그들은 모두 남의경장 차림에 영웅건을 동여맨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또한 얼마나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지 이백여 명의 인원이 움직이는데 소리 하나 나지 않 았다. 어느 사이엔가 그들은 장(場) 중앙에 이르러 멈춰 섰다. 이어서 그들이 만들어 낸 넓은 통로를 통해 한 대의 사두마차가 그 모습을 나타냈다. 히히힝! 긴 말 울음 소리와 함께 사두마차가 멈춰 서는 순간, 마부석에 앉은 자의 무습이 분명히 보 였다. 그는 바로 중원무림을 배반하고 남해문에 투신한 독안마권 진강, 그자였다. 사두마차의 양 옆에는 세 필의 흑마가 따르고 있었는데 그들 역시 마차와 말 머리를 나란 히 하며 멈춰 섰다. 흑마 위의 세 인물을 주시하던 군웅들 중의 누군가가 돌연 경악하여 부르짖었다. “벽혈신군이다!” 그리고 그 경악의 외침은 은암파 장중으로 퍼져 갔다.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원무림의 존경을 받던 벽혈신군 유천화가 오늘날에는 남해문의 선 봉이 되어 얼굴도 뻔뻔하게 나타났으니…… 장중은 실로 벌집을 쑤신 듯 요란하였다. 더구나 지금까지도 그의 변절에 대한 한 가닥 의아심을 품고 있던 수많은 군웅들마저 이제 눈으로 직접 보니 분노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저 철면피를 오늘 반드시 주살하고야 말리라!” 장중은 온통 가마솥처럼 들끓었다. 그러나 이때, 그 누군가가 벽혈신군과 말 머리를 나란 히 하고 있는 두 노인의 내력에 관해 소리치자 군웅들은 다시 물을 뿌린 듯 조용해졌다. 금룡(金龍)이 눈부시게 아로새겨진 금포의 백발노인과 타는 듯 붉은 홍포로 전신을 감싼 적면괴로(赤面怪老), 그들이야말로 삼십년 전 남해천룡과 함께 강호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던 남해문의 이대영걸, 금룡마수 금당과 혈영신로 송영걸이 아닌가? 그들의 일신절학 지극강살혈마오식과 혈영귀무, 마환신공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여 강호 인들의 가슴을 싸늘히 얼어붙게 만들었다. 군웅들이 은은한 두려움을 내포한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금룡마수 금당이 사검평을 쏘아보며 싸늘하게 외쳤다. “네놈이 바로 추아의 원수인 사가 성의 애송이냐?” 순간, 사검평의 얼굴에 한 가닥 분노의 빛이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귀하가 바로 남해문의 이대시위 중 하나인 금룡마수 금당이오?” 그 말에 금포노인의 얼굴에는 더욱 짙은 살기가 떠올랐다. “으핫핫핫…… 과연 소문대로 분수를 모르는 애송이로구나. 좋다! 네놈의 무학이 어느 정도이기에 노부의 제자를 무참히 죽였는지 그것부터 알아보아야겠다.” 말을 끝내기 무섭게 금룡마수 금당은 단숨에 이십여 장의 거리를 날아 맹렬히 두 손을 내뻗 었다. 일순 태산 같은 금빛 장영이 휘몰아쳤다. 삼십 년 전 강호를 공포에 떨게 했던 지극강살혈마오식이었다. 그의 움직임을 싸늘히 바라보고 있던 사검평은 냉기 어린 호통을 터뜨리며 우수를 가볍게 휘저었다. “물러가라!” 동시에 고막을 찢는 굉음이 작렬하였다. 꽈르릉! 그러자 금빛 장영이 물거품처럼 스러졌고, 금룡마수 금당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쏘아 가 던 속도보다 더 빠르게 튕겨 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는 피를 분수처럼 뿜어 내며 연이어 일곱 걸음이나 물러서고 나서야 겨우 멈추어 설 수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장중의 모든 군웅들이 경악하였다. 그때 마차 안에서 교소가 터져 나왔다. “호호호…… 공자의 절학이 그사이 이토록 뛰어난 성취를 이뤘을 줄이야 정녕 꿈에도 생 각지 못했군요.” 마차의 주렴이 걷히며 한 명의 절세여인이 표현히 나타났다. 그녀는 바로 남해문주의 딸 우수경이었다. 한데 그녀의 뒤를 이어 마차 안에서 또 다른 두 명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사검평은 경악하고 말았다. 그들 두 여인 중 하나는 바로 유벽선 소녀가 아닌가? 그녀의 완맥을 움켜쥔 채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사검평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백의미부는 지난날 영빈원의 기녀 설향으로 분장하여 사검평을 함정 속에 몰아넣었던 만변선희 모용상이었으나 사검평은 미처 알아보지 못하였다. 어쨌든 유벽선은 창백한 얼굴로 속절없이 사검평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사검평은 그녀를 보는 순간 왠지 가슴이 메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때 우수경은 입가에 신비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한껏 고혹적인 시선으로 사검평을 주시 하였다. “공자…… 지난번 소녀와 만났을 때 약속했던 말은 아직 기억하고 계시겠지요?” 사검평은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수경은 마치 정인에게 속삭이듯 낭랑한 옥음을 굴렸다. “그때 소녀는 훗날 반드시 흡혈마도가 펼치는 절세의 살초를 와해시키리라 약속했었지 요.” 사검평이 비로소 담담한 미소로써 응수했다. “소생 또한 잘 알고 있소. 그러나 와해식을 창안했다 하더라도 과연 그로써 소생을 격패 시킬는지는 정녕 쉽사리 믿을 수 없구려.” “호호호…… 여러 소리 할 것 없어요. 어차피 성공 여부는 손을 써보아야 알 수 있으니, 공 자가 자부하는 대로 어서 예의 그 살초나 펼쳐 보시지요.” 사검평의 얼굴에 은은히 격동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윽고 그가 움직임을 보이려 할 때였다. “사 맹주, 그것은 안 돼오!” 소림의 오료대사가 우렁차게 외치며 앞으로 나섰다. “만일 저 남해문 소녀가 간교한 암계로써 맹주를 제압하려 획책하는 것이라면 어찌할 것 이오? 만에 하나 맹주 일신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결코 그 누구도 천하무림의 안위에 대해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니 맹주는 부디 신중히 처신해 주시오!” 우수경이 비웃듯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호…… 저는 공자를 겁쟁이라 생각하지 않아요.” 사검평이 낭랑히 웃었다. “하하하…… 오료대사, 걱정 마시오. 나 염라서생 사검평이 한낱 남해문 소문주의 검식에 걸려 위기를 맞을 만큼 나약하다면 어찌 강호의 안위를 지키려 스스로 나설 수 있었겠소?” 우수경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호호호…… 강호에 영웅호걸들이 구름처럼 많다 하나 과연 사 공자, 당신만이 강호의 진정한 용자(勇者)라 할 수 있겠군요.” 사검평이 냉소로써 맞받았다. “흥! 우 소저의 그 말을 소생은 받아들일 수 없구려. 오늘 이 자리에는 보는 바와 같이 강호의 모든 군웅들이 불원천리하고 달려오시었소. 정녕 이분들 모두는 천하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질 각오를 하고 오신 분들이니 어찌 나만이 용자라 할 수 있겠소. 그 말은 이분들을 모욕하는 것이오!” “호호호…… 공자, 일부러 그들을 부추길 건 없어요. 그들 역시 당신만이 지닌 천하 영웅 의 기개를 부인하지 않을 것이니 말이에요. 하지만 내가 창안한 검식에서는 벗어나지 못하리라 단언할 수 있어요.” 우수경은 한 손을 번쩍 치켜 들었다. 순간, 남해문도들 중 일곱 명의 검수가 앞으로 나왔다. 이어 우수경은 벽혈신군 유천화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벽혈신군께서 천라십방복마멸혼검진(天羅十方伏魔滅魂劍陣)의 정남위(正南位)를 맡아 주 시기 바래요. 당신의 도움으로 이 일전에서 염라서생 사검평을 제압하여 본 문 대업의 성취에 공을 세운다면 모반의 죄를 사면해 주겠어요. 하나 만일 패배한다면 당신은 물론, 부인과 딸마저도 극악한 수법에 의해 최후를 맞을 것이에요!” 벽혈신군 유천화는 참담한 얼굴인 채 두 눈으로부터 걷잡을 수 없는 분노의 불길을 내뿜었 다. “선친의 유명을 어기고 천훈을 거스르면서까지 중원무림을 배반했던 죄의 앙갚음인가? 오 늘날 이처럼 비참한 말로를 맞게 될 줄이야…… 좋다! 내가 무슨 할말이 있으랴……”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는 신형을 날려 남해문 일곱 검수들의 중앙에 섰다. 우수경이 싸늘 한 미소로 바라보다가 가볍게 두 손을 마주쳤다. 순간, 그녀의 뒤에 시립해 있던 혈영신로 송영걸이 조금 전 내상을 입었던 금룡마수 금당과 더불어 신속히 벽혈신군의 좌우에 섰다. 천상의 별들이 무리지어 하계(下界)한 듯 한눈에 그 기이한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진법은 일반 구궁팔괘진법의 상리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우수경은 문득 교소를 지었다. “호호호호…… 만일 사 공자가 소녀의 이 검진을 와해시킬 수 있다면 오늘의 이 일전은 소 녀의 패배임을 스스로 자인하겠어요. 물론, 이로써 남해문으로 돌아가 두 번 다시 중원에 나 오지 않을 것도 약속드리겠어요.” 이에 만장(滿場)의 군웅들은 아연 긴장하였다. 실로 천하의 안위가 이 일전에 달렸으니 어 찌 긴장하지 않으랴! 모든 시선이 사검평을 주시하였다. 그러나 정작 사검평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다만 그는 깊은 눈초리로 검진을 주시하고 있 을 뿐이었다. 스르릉…… 한 줄기 맑은 금속성을 내며 벽혈신군이 한 자루 장검을 뽑아 들었다. 찬란히 빛나는 광 망, 그것은 그 자신이 지난 수십 년간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던 애검(愛劍)이었다. 바로 유벽선의 벽혈 추상검과 더불어 한 쌍의 자웅을 이룬 벽혈마운검(碧血魔雲劍)이었다. 그가 검을 뽑아 가슴에 대는 즉시 검진은 삼엄한 기세를 발동하기 시작하였다. 우웅! 장중한 음향과 함께 실로 오묘한 진세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즉시 거대한 해일처럼 강맹한 기세로 변하여 사검평을 덮쳐 갔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가? 사검평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비록 태산인 듯 무거운 자세로 겉보기에 미동도 하지 않는듯하였으나 기실 이미 손 을 쓰고 있었다. 사실 그가 일단 심중의 일초를 펼친다면 이 정도의 검진쯤 속절없이 와해될 것임에 틀림 없었다. 사검평은 사문 본래의 절학 수라다엽도의 무형도기로써 단숨에 이 진세를 격퇴시키고자 내 심 결정하였다. 한데 그는 마치 죽기를 자청한 사람처럼 두 팔을 힘없이 늘어뜨리고 무방비 태세에 들어 가지 않는가? 이 모습에 장중의 군웅들은 아연 경악하였다. 실로 등줄기가 서늘할 만큼 모든 사람이 놀라고 있는데…… 우우웅! 검진의 기세는 절정의 형태를 보이고 있었다. 대해의 수면에 반사되는 눈부신 햇살처럼 실로 형언할 수 없이 신비로운 검기가 휘몰아쳤 다. 그것은 실로 파죽의 기세였다. 한데 검진의 가장 중앙에서 사검평을 향하여 쾌속히 쏘아 가던 벽혈신군이 돌연 방향을 바 꿔 혈영신로 송영걸과 금룡마수 금당을 공격하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이 일초식에는 남해문의 독문신공마저 깃들여 있어 실로 무서운 위세였다. 그러나 남해문의 이대시위는 광소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던 듯 즉시 반격해 오는 것이었 다. “하하하…… 유가 어리석은 놈아, 우리는 이미 이런 사태가 올 줄 눈치채고 있었다.” “앗!” 오히려 벽혈신군이 당황하였다. 송영걸과 금당의 협공은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아……” 벽혈신군은 마침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죽음이 임박한 순간, 파팟! 사검평의 두 소매로부터 눈부신 광채가 발출되었다. 순간 천지를 뒤덮는 그 광채 사이로 혈화가 피어났다. “아아악……!” 길게 울리는 비명! 순간, 군웅들은 스스로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송영걸과 금당은 물론, 일곱 명의 남해문도마저 순식간에 몰살당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럴 수가……?” 사검평은 실로 믿을 수 없는 엄청난 일을 치른 사람답지 않게 담담히 서 있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벽혈신군이 일진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사검평, 그대야말로 진정 강호제일의 영웅이로다. 아아, 그러나 나는…… 이 큰 죄를 어찌 다 갚으랴!” 돌연 그가 한 모금의 피를 울컥 토해 냈다. 스스로 심맥을 끊어 자결을 도모하는 듯했다. 순간 사검평의 몸이 번뜩하더니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어서 찢어지는 듯한 여인의 비명성이 울려 퍼졌다. “아악!” 사검평이 눈 깜짝할 사이에 만변선희 모용상을 처치하고 유벽선을 구해 낸 것이었다. “아버지!” 유벽선은 곧장 벽혈신군에게 달려갔다. “오냐! 벽아야, 이 아비는 실로 너 보기가 민망하구나…… 아아, 어찌 오늘의 치욕을 일찍 깨닫지 못했던가…… 벼, 벽아야…… 너는 부디 이 아비를 용서 하……” 그는 말을 끝맺지도 못한 채 쓰러져 눈을 감았다. “아버지……!” 유벽선은 통곡하며 몸부림쳤다. 벽혈신군! 천하를 위진시켰던 일세의 효웅은 이렇듯 초라하게 죽어 갔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유벽선의 통곡뿐이었다. 사검평은 차마 한마디 말도 건네지 못한 채 묵묵히 서 있었다. 그때였다. “흥! 사 공자, 당신은 아직 자만해서는 안 돼요. 소녀의 검진이 깨진 것은 유천화의 예기치 않았던 배신 때문이었으니까요. 그렇지 않았다면 당신은 결코 이기지 못 했을 것이에요!” 분한 듯한 우수경의 외침에 사검평은 싸늘한 눈초리를 보냈다. 그때 남해천룡 우검학이 마차에서 나오며 말했다. “하하하…… 경아야, 너의 그 말은 온당치 않다. 유천화가 배신하지 않았더라도 그는 능히 너의 검진을 파해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이어서 그는 사검평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설마 중원에 그대 같은 일대 기재가 있었을 줄이야…… 일찍이 본 문주는 중원의 적수로 서는 오직 황산신니밖에 없는 줄 알았더니, 실로 크나큰 오산이었다. 사검평, 노부는 그대와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숙명의 사이인지라 강호의 장래를 놓고 기어이 일전을 피할 수는 없지 않는가?” 사검평은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좋소! 소생 역시 기다리던 바였소!” 그때 두 줄기 청아한 웃음 소리와 함께 장중에 두 사람이 모습을 나타냈다. 사검평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 사부님…… 그리고 천공금성 노선배!” 그들은 염라천존 이원패와 천공금성 사마등이었다. 장중의 모든 군웅은 물론, 남해천룡마저 아연 경악해 마지않았다. “사부님!” 사검평이 목메어 부르짖었다. 염라천존이 온화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평아! 너는 불과 두 달 사이에 몰라보게 성장하였구나.” 사검평은 즉시 꿇어 엎드려 세 번 절하였다. 염라천존은 손을 휘저었다. “평아야, 지금 같은 시기에 너는 어찌 사사로운 예의 따위에 연연하느냐?” 이어 그는 엄숙히 말하였다. “천하 영웅 여러분! 오늘 사마 형과 노부 두 사람이 이렇듯 나란히 나타났음에 놀랐을 것이오. 하나 우리는 이미 백년 전의 일에 대해 모든 오해를 풀었으니 그리 알아주시오.” 장중은 물을 끼얹은 듯 숙연하였다. 천공금성 사마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협, 오늘의 이 일전에서 그대가 지닌 책임이야말로 정녕 막중하니 부디 필승을 거두 어 주게.” “사마 노선배님!” 그때 남해천룡이 앙천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본인이 그 동안 찾아 헤매던 무림의 전대기인들이 이처럼 한자리에 모이시 니 본좌는 반갑기 그지없소이다. 특히 염라천존의 명성은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바, 오늘 그 일초 절학을 받아 보고 싶소!” 그는 노골적으로 도발적인 의사를 보냈다. 그러나 염라천존 이원패는 격동치 않고 오히려 가볍게 웃었다. “하하하…… 좋소! 하나 당신은 먼저 노부의 제자와 일초를 겨뤄 보시오.” “나를 모욕하려는 거요?” “천만에, 두고 보면 알겠거니와 내 제자는 오히려 노부 자신보다 뛰어나니 그가 만일 패 배한다면 노부 역시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오!” 이어 그는 시선을 상대에게 둔 채 은은히 전음으로써 사검평에게 말하였다. “평아야, 이 일전이야말로 천하의 향방을 결정짓는 운명의 결전이니 너는 부디 소홀히 마 라!” 동시에 그는 들고 있던 검은 보퉁이를 풀었다. 그 안에는 흡혈마도가 들어 있었는데, 그것은 끊어진 것이 아니라 온전한 그대로였다. 염라천존이 역시 전음으로써 말하였다. “놀라지 마라. 이 사부는 이미 황산신니의 중재로 사마등과 화해하였으니 어찌 이 보도 를 부러진 채 버려 두겠느냐? 나의 삼매지화로써 다시 이어 놓았으니 너는 마음껏 기량을 발휘하라!” 사검평이 공손히 그것을 받아 들었다. 염라천존이 다시 말했다. “사실 이 흡혈마도는 그간 너무나 많은 사람의 생혈을 빨아 흡인하였기에 너무도 짙은 사기(邪氣)가 깃들여 있었다. 이는 사문의 종지(宗旨)에 어긋나는 바, 계제에 이 사부는 그 사기마저 모두 제거하였다.” 이에 사검평이 뽑아 보니 과연 소름 끼치던 혈광은 간곳없고 단지 은은한 홍광만이 빛을 발할 뿐이었다. 사검평은 결연한 표정으로 남해천룡을 바라보았다. “당신과 나의 일전은 어차피 피할 수 없겠구려!” “좋다, 각오하라!” 남해천룡의 대답이 터져 나오는 순간 한 가닥 광망이 허공에 번뜩였다. 마치 태양이 폭발하듯 무섭게 작렬하는 광망이었다. 그러나 사검평은 추호도 동요치 않고 얼굴에 한 가닥 싸늘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의 신형도 빛의 폭발인 듯 표연히 움직였는데, 중인은 다만 한 가닥 홍광이 일직선으로 쏘아져 갔음을 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남해천룡에게는 이것이 마치 지옥의 검화인 듯 보였다. 이글거리는 불길, 천지가 온통 불꽃에 휩싸인 듯 그는 추호도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으음……!” 그는 나직한 신음을 뿜었다. 지옥의 검화인 듯 이글거리는 불길속에서 그는 비 오듯 땀을 흘렸다. 정녕 속수무책이었다. 마치 억겁의 세월인 듯 무섭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계속되었다. 마침내…… “졌다! 나 남해천룡은 패배를 자인한다……!” 그가 창노히 부르짖었다. 순간 장중의 형세는 본래의 모습대로 되돌아갔다. 사검평도, 남해천룡도 처음처럼 의연히 마주선 상태였다. 그러나 이미 한 사람은 승자였고 상대방은 비참한 패자의 입장이었다. 하나 남해천룡 우검학, 그는 과연 불세출의 괴걸이었다. 일단 패배하자 깨끗이 그 결과에 승복하였다. “나 남해천룡 우검학은 이제야 무학의 길은 깊고도 오묘하며 그 경지는 끝이 없어, 절학 을 익힐수록 겸손하여야만 진정한 무인(武人)이라 할 수 있음을 깨달았소.” 그는 사방을 차례로 돌며 모든 군웅에게 깊이 허리 숙여 속죄하였다. “나 남해천룡과 남해문은 이날 이후 영원히 중원무림에 나오지 않을 것이니 여러분은 노부와 본 문의 죄를 부디 용서하시오!” 이어 그는 사검평에게 말머리를 돌렸다. “사 공자, 그대는 진정 천하제일의 영웅이오. 그 일신의 무학이 뛰어날 뿐 아니라 심정 또 한 영웅의 기개로서 영원한 귀감이 될 것이니, 이후 중원무림은 그대와 더불어 무궁히 번창할 것이오. 나 남해천룡은 후일 그대가 반드시 남해문을 방문해 줄 것을 기대하 며 이만 떠나겠소!” 사검평은 구태여 말리려 하지 않았다. “잘 가시오.” “그럼……” 남해천룡은 수하의 문도를 이끌고 즉시 떠났다. 와아아……! 일제히 지르는 군웅들의 함성에 은암파는 물론, 화산 전체까지 떠나갈 듯하였다. 그러나 여 기 모든 사람이 기쁨의 함성을 지르는데 오직 홀로 눈물 짓는 여인이 있었으니 그녀는 유벽선이었다. 이미 싸늘히 식어 가는 아버지 벽혈신군을 부둥켜안고 그녀는 언제까지나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사검평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기만 할 뿐 마땅히 건넬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하였다. 그때 등뒤에서 불호성이 들려 왔다. “아미타불……” 흠칫 놀라 돌아서는 사검평의 눈에 황색 가사의 노신니와 천사 주가청, 그리고 한 흑의청년 의 모습이 들어왔다. “황산신니 노선배, 주 선배, 그리고…… 혀, 형님……” 주가청이 말하였다. “소협, 참으로 장하네. 이제 모든 것은 끝났네.” 황산신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이제 모든 것은 끝났다. 결국 이 모든 것은 하늘의 뜻이었으니…… 인간이 비록 아무리 그 재주가 뛰어나도 하늘을 거스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황산신니의 말이 끝나자 사검평은 감동을 금치 못하였다. 주가청이 말하였다. “소협, 자네에게 옥면룡검 남궁학의 한 가지 말을 전하네……” “무슨……?” “그는 유옥선과 더불어 새로운 마음으로 백년해로를 기약하고 멀리 떠나가며, 자네의 은혜 를 평생 잊지 않겠노라 하였네!” “그들은 백초곡을 떠났습니까?” “그렇네.” 사검평의 얼굴에 만 가지 감회가 어리고 있을 때였다. “하하하…… 소협, 그러나 그대는 금명간 반드시 백초곡을 방문해야 할 것이오. 학수고대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이 거기에 있으니 말이오.” 말한 사람은 무영마개 유단이었다. “유 대협의 그 말씀은……?” 유단이 장난기 어린 시선으로 주가청을 흘긋 바라보았다. “바로 주 소저가 거기에서 오매불망 그대를 기다리니……” 사검평의 얼굴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그는 유벽선과, 한편으로 주가청의 안색을 살피기 에 바빴다. 그러나 주가청은 안면에 웃음을 떠올린 채였다. 그의 눈빛에는 이미 사검평을 사위로 맞은 듯한 정감이 넘쳐흘렀다. 이때 유벽선은 한없이 처량한 자태였다. 사검평이 돌연 그녀를 위로해 마지않았다. “소저…… 그대 아버님의 부탁대로 나는 영원히 그대를 보호해 드릴 것이오. 그분은 비록 오명을 남겼으나 그 죽음과 함께 모든 죄를 씻고 갔으니 이제 모든 암운은 걷히었 소.” “아아, 소협……” 유벽선은 감동을 이기지 못하여 와락 그의 품에 안겨 하염없이 눈물을 뿌렸다. 그것은 아비 를 잃은 슬픔의 눈물이자, 또한 사랑을 얻은 여인만이 흘릴 수 있는 기쁨의 눈물이기도 하였다. 무영마개 유단이 우렁차게 외쳤다. “하하하…… 머지않아 강호무림은 큰 경사를 맞을 것이오. 맹주의 혼례가 있을 것이니 천하인들은 모두 축복해 주기 바라오!” 와아! 장중의 모든 군웅들이 화답의 환호를 올렸다. 그리고 그 장쾌한 함성은 강호를 덮었던 암 운을 일시에 거둬 버렸다. 어느덧 태양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석양은 유난히도 눈부시고 아름다웠다. 황금빛 햇살이 모든 사람의 가슴에 터질 듯 충만되었다. 암운은 걷히고 죽음의 세월 또한 영원히 끝났으니, 강호는 언제까지나 평화와 번영을 누 리리라! 저무는 석양은 찬란한 내일을 기약하는 또 하나의 새로운 희망이리라! 웅장한 낙조 아래 모든 사람의 얼굴에는 희망과 희열의 황금빛 햇살이 가득했다. < 大 尾 >